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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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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강부임진도

 - 도성 수비의 교두보 임진강을 지켜라!!

 

엄기석(조선대학교 학술연구교수)

 


사진 : 임진강 전경(출처 : 파주시 문화관광포털)

 

 

임진강은 함경남도의 마식령 산맥에서 발원하여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를 휘돌아 황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조선시대 임진강은 한강 하류와 황해에 인접하여 포구무역과 물자교류가 활발히 이뤄지던 곳이었으나, 한편으로 도성 수비에 있어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서북지역 국경에 위치한 의주와 수도 한양을 잇는 간선 도로망인 의주로의 한양 방면 마지막 주요 하천인 임진강은 유사시 서북 방면에서 침입하는 외적에 대응해 도성 외곽을 방어하는 중요한 교두보로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임진강의 주요 나루터이자 도하처인 중류의 임진(臨津) 일대를 방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임진강의 상류는 강안(江岸)이 이른바 적벽(赤壁)이라고 하는 현무암 절벽지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임진강의 하류는 강폭이 넓고 물살이 거세서 큰 배가 없이는 건너기 쉽지 않았다. 대규모의 육상병력이 도성 방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실상 임진 방면을 도하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임진을 중심으로 임진강 일대에 대한 방어를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도성수비가 강화되어가던 18세기에 더욱 두드러졌다.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중인 동국여도(東國輿圖)(古大4790-50) 1권에 수록된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에서는 이러한 18세기 조선 조정의 노력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진 : 동국여도(東國輿圖)(古大 4790-50)

 

 

동국여도(東國輿圖)(古大 4790-50)19세기 초에 도성을 중심으로 전국의 관방시설과 도로망 등 방어체제의 실태를 정리하여 그린 군사지도로 116절의 채색도이다. 19세기 초에 제작된 만큼 동국여도(東國輿圖)(古大 4790-50)18세기 이른바 도성 수비체제의 정립과 맞물려 진행된 전국 방어체제 정비의 실상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사진 : 동국여도(東國輿圖)1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

 

 

특히, 동국여도(東國輿圖)(古大 4790-50)의 한 부분인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18세기 도성수비의 강화와 궤를 같이 하여 이뤄졌던 임진강 일대 방어체제 정비의 배경과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임진강을 중심으로 도성, 한강, 남한산성, 강화도 일대 등 주변지역의 형세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임진강 일대 방어체제 정비가 가지는 의미를 집약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18세기 임진강 일대 방어체제가 정비된 배경은 무엇이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조선 전기 임진강 일대 방어체제의 문제 및 17세기 전반에 발생했던 병자호란의 패배가 안겨주었던 충격과 교훈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병자호란의 충격과 임진강 방어의 필요성

 

 

조선 전기 국방 전략의 핵심은 왜구와 여진족 등 이민족의 침입을 남북 변방에서 막는 것이었다. 성곽과 진보 등 관방 시설도 도성 일대보다는 변방 지역을 중심으로 마련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 도성에 인접한 임진강 일대에는 별도의 성곽이 정비되지 못했다. 이에 16세기 후반 임진왜란 당시 임진강 일대는 일본군의 공격에 쉽사리 돌파되었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17세기 초 임진강 일대에 관방시설과 군사조직을 마련하는 등 방어체제를 정비하는 작업이 일부 진행되었다. 임진강의 요충지인 임진(臨津)의 북안(北岸)에 자리잡은 덕진산성(德津山城)을 수축하고 덕진산성이 소재한 장단 도호부에 경기 우방어영을 설치하고 장단 도호부사로 하여금 경기 우방어사를 겸하여 임진강 일대의 방어를 책임지게 하는 조치가 시행된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전반 후금/청의 위협이 점차 심화되면서 오히려 임진강 일대의 방어가 이완되는 결과가 빚어졌다.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후금/청의 공격에 대비해, 유사시 서북 지방의 민()과 군()은 주요 도로망에서 벗어난 산성(山城)으로 입보(入保)하고 왕실과 조정은 강화도와 남한산성 등 이른바 보장처(保障處)로 피한 뒤 삼남지역의 병력을 동원해 장기항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임진강을 비롯한 의주로 일대의 방어가 약화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오히려 병자호란의 패배를 불러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는 조선의 산성과 보장처 중심 방어 전략을 간파하고 정예 기병을 활용하여 산성을 피해 의주로를 따라 빠르게 도성으로 진격했다. 평안도와 황해도 및 임진강 일대의 병력들이 대부분 산성에 입보한 상태였기에 청나라 기병은 진격 과정에서 조선군의 저지를 거의 받지 않았고. 청나라군은 압록강을 넘은지 채 1주일도 되지 않아 도성을 함락했다.

왕실과 조정은 가까스로 남한산성으로 대피했으나, 이내 남한산성은 청 태종 홍타이지가 이끄는 청나라군 본대(本隊)에 의해 포위당했다. 조선군은 남한산성에서 40여일을 항전했으나, 군량의 부족 및 삼남에서 온 근왕군의 각개격파와 강화도 함락으로 인해 결국 청나라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실제 병자호란의 패배는 임진강을 비롯한 의주로 일대 방어의 약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임진강 일대 방어체제 정비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패배 이후 청나라는 이른바 정축약조를 통해 조선의 성곽 정비 및 군비 강화를 제한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임진강 지역 방어체제 정비의 필요성을 체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17세기 후반까지 임진강 일대의 방어체제 정비를 본격화 할 수 없었다.

 

 

 

임진진ㆍ장산진의 설치와 방어체제의 재편

 

 

17세기 후반 삼번의 난이 진압되는 등 청나라의 대륙지배가 비교적 안정됨에 따라 점차 조선에 대한 간섭이 약화 되었다. 이에 비로소 조선정부는 임진강을 비롯한 의주로 일대의 방어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다. 먼저, 18세기 전반까지는 국경에 인접한 평안도와 황해도 등 이른바 양서(兩西) 지역 및 경기 지역 최외곽인 개성의 관방 시설 및 군사조직에 대한 재편이 시행되었다.

이처럼 의주로 외곽의 방어 체제가 점차 정비됨에 따라 점차 방어전략의 중심이 강화도와 남한산성 등의 보장처에서 의주로의 종점이자 왕실과 조정이 자리잡은 도성 일대로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도성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도 본격화되었다. 먼저, 숙종대 후반인 18세기 초 도성 외곽에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축성하여 도성과 주변의 방어력을 강화하는 조치가 이뤄졌다.

이러한 추세는 영조대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영조대 중반 도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이 이뤄졌고 훈련도감ㆍ어영청ㆍ금위영 등 삼군문과 도성민이 함께 도성을 수비하는 방안을 다룬 수성책자(守城冊子)가 간행되었다. 같은 시기 총융청이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로써 도성ㆍ탕춘대성ㆍ북한산성을 아울러 방어하는 방어전략의 마련이 일단락되었다. 17세기 수도 방어 전략의 거점이 강화도와 남한산성 등 보장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과 달리 숙종과 영조대를 거치며 18세기에는 도성을 거점으로 하는 도성수비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이처럼 18세기 전반 의주로 방어가 강화되고 도성수비체제가 정립함에 따라 의주로의 주요 거점이자 도성 외곽 지역의 교두보인 임진강 일대의 방어체제 재편도 본격화 될 수 있었다. 이는 1754(영조 30) 9월 조정에서 임진(臨津) 지역을 정비하기 위해 재원을 획급한데서 비롯하였다. 정비방안에 대한 일련의 논의 끝에 임진 일대에 돈대와 관문 등의 관방시설을 설치하고 이를 담당할 군사조직을 정비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실제 관방시설 축성을 위한 답사가 이어진 끝에 1754(영조 30) 11월 임진과 더불어 그 주변인 장산(長山) 일대에 대해 문루(門樓)와 돈대 등의 관방시설을 설치하고 각기 2초 병력을 갖춘 군사 진보를 정비하게 되었다. 시설의 건설은 이듬해인 1755(영조 31) 8월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에서 볼 수 있듯이 임진진(臨津鎭)에는 문루와 더불어 양측의 산지를 잇는 익성(翼城)이 마련되었고, 장산진(長山鎭)에는 돈대가 마련되었다. 시설의 마련에 이어 같은 해에는 각 진보에 조총 등의 무기를 비치하는 작업도 이어졌다.

임진 지역에 임진진과 장산진 등 관방시설과 진보조직 및 무기가 마련된 데 이어 10여년이 지난 1760년대에는 임진강 일대 방어를 주관하는 경기 우방어영의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이 이뤄졌다. 기존에 임진의 북안(北岸)에 자리잡은 장단 도호부에 설치되었던 경기 우방어영을 임진진과 장산진이 소재한 파주로 이설하는 조치가 시행된 것이다.

이에 따라 경기 우방어사를 겸하는 파주목사는 장단, 파주, 삭녕, 마전, 연천, 고양, 교하, 적성 등 임진강 일대 8개읍의 병력을 총괄하여 유사시 임진진과 장산진을 거점으로 적의 임진강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파주를 비롯해 임진강 이남에 위치한 고양, 교하, 적성의 병력은 경기 우방어영의 직속 병력으로 유사시 임진진과 장산진에 집결하도록 규정하였다. 파주 방어영 직속 병력을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파주목에 거주하는 양인 남정(男丁)을 모두 경기 우방어영 소속으로 전속(專屬)하는 이른바 독진화(獨鎭化) 조치도 시행되었다.

한편, 파주 방어영 소속 중 임진강 이북에 자리잡은 장단, 삭녕, 마전, 연천의 4개읍은 영장(營將)을 겸하는 장단 도호부사의 관할 하에 소속시켰다. , 임진강 이북 4개 군현의 병력은 기본적으로 다른 4개 군현과 마찬가지로 경기 우방어영 소속이되, 1차적으로는 장단도호부사의 지휘 아래 임진강 이북 지역 요충지의 방어를 수행하다가, 필요에 따라 경기 우방어사의 지휘에 동참하여 임진강 방어 작전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끝으로 파주 방어영과 겸영장진인 장단 도호부의 휘하에 각기 정예 기병 병종인 별효사(別驍士) 2()씩을 창설하는 조치도 시행되었다. 별효사는 기존의 마병(馬兵)과 달리 주기적으로 무예 시험 등을 치르는 등 체계적인 훈련이 이뤄졌으며 그 반대급부로 일정한 급료와 출사(出仕) 기회를 제공받기도 하였다.

 

 

 

임진강 방어체제 재편의 의의

 

 

이상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1754(영조 30) 이후 10여년에 걸쳐 이뤄진 변화를 통해 임진강 방어체제가 대대적으로 재편될 수 있었다. 임진강의 요충지인 임진(臨津) 일대에 임진진과 장산진 등의 진보 조직과 관방시설이 마련되었고 임진강 이남과 이북에 따라 유기적인 방어전략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예 기병인 별효사의 마련은 병자호란 때와 같이 유사시 정예 기병을 활용한 청나라 군의 고속 진격이 이뤄질 경우 이를 저지하고 도성과의 통신 및 연락 등을 강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조치로 평가할 수 있다.

이상에서 설명한 일련의 조치들은 임진강 일대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의주로 방어 및 도성수비체제의 성립을 완성한 것이었다. 먼저, 이전 시기 평안도와 황해도 및 개성 등 의주로의 주요 거점에 대한 관방시설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도성 및 외곽의 수비를 강화한 데 이어서 임진강의 방어체제가 마련됨에 따라 압록강에서부터 도성에 이르기까지 의주로의 거점들에 대한 군사 정비가 완결될 수 있었다.

임진강 방어체제의 완성은 17세기 병자호란의 패배에 대한 반성 속에서 조선 정부가 1세기에 가까운 시간에 보장처 및 산성 중심에서 걸쳐 도성과 의주로 등 주요 교통로를 중심으로 전국의 방어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작업의 마무리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에 따라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전 시기 보장처로 활용되던 남한산성, 강화도 등은 도성과 도로로 연결되어 그 외곽을 방어하는 거점으로 그 위상이 변화하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정비된 임진강 지역 방어체제는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큰 틀에서 유지되며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비록 대규모 전란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경기 우방어영 및 임진진과 장산진의 병력들은 국왕이 인근 지역에 행차하는 등의 상황에서 임진진과 장산진의 시설에 바탕하여 호위나 외곽 경호 등의 임무를 실행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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