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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의궤총설

제목 조선시대 儀軌 편찬과 現存 儀軌 조사연구
저자 한 영 우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 교수)

조선시대 儀軌 편찬과 現存 儀軌 조사연구



목차
1. 조선시대 儀禮와 儀軌 편찬
2. 조선 전기의 의궤 편찬
3. 왜란 중 儀軌 유실과 왜란 이후 儀軌 편찬
4. 호란 후 御覽用 儀軌 편찬과 分上本의 증가
5. 정조 이후 御覽用 폐지와 活字本 儀軌 등장
6. 대한제국과 일제시대의 儀軌 편찬
7. 의궤의 형식과 자료적 가치
8. 현존 규장각 소장 의궤의 실태
9. 장서각, 파리국립도서관, 일본 궁내청 소장 의궤
10. 맺음말 ― 의궤자료 정리사업의 방향
凡例


1. 조선시대 儀禮와 儀軌 편찬



儀軌는 ‘儀禮의 軌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비슷한 儀禮가 반복적으로 시행될 때, 앞시기에 있었던 의례를 참고하면 의례집행이 원만해지고 시행착오를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의례의 궤범’이 되는 의궤를 만들 필요가 있다. 또, 의례의 결과를 상세하게 기록해두는 것은 國政을 투명하게 운영한다는 정신에도 부합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주요 儀禮를 吉禮, 凶禮, 嘉禮, 賓禮, 軍禮 등 다섯 범주로 나누어 이를 五禮라 했는데, 五禮에 포함되는 의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吉禮 ― 국가의 각종 제사를 말하는데 크게 大祀, 中祀, 小祀로 나뉜다. 大祀는 宗廟와 社稷, 그리고 永寧殿(태조의 4대조 및 代가 끊어진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곳으로, 현재 종묘 옆에 있다)의 제사를 말한다. 中祀는 風雲雷雨, 嶽海瀆, 先農(神農氏), 先蠶, 雩祀, 文宣王(성균관과 향교에 모신 공자), 歷代 始祖廟1)의 제사를 말한다. 小祀는 靈星, 老人星, 馬祖, 名山大川, 司寒, 先牧, 馬社, 馬步, 禡祭(蚩尤), 禜祭, 酺祭, 七祀, 纛祭, 厲祭를 말한다.
이밖에 文昭殿(태조와 신의왕후의 魂殿), 懿廟(懿敬王의 신주를 모신 곳), 여러 王陵, 眞殿(영정과 왕실족보를 모신 곳),2)그리고 大夫, 士庶人의 時享 등이 吉禮에 속한다.
2) 凶禮 ― 국가의 喪葬에 관련된 의식을 말한다. 장례식에 관련된 일체의 의식과 신위를 종묘에 모시는 祔廟의식 등이 여기에 속한다.
3) 嘉禮 ― 중국에 대한 望闕禮를 비롯하여 중국 사신으로부터 詔勅表를 받는 의식, 백관의 朝賀, 朝參, 冊妃, 冊王世子, 冊王世子嬪, 王子婚禮, 科擧殿試, 放榜(합격자 발표), 王世子入學, 養老宴, 鄕飮酒, 進饌, 進宴 등의 의식을 말한다.
4) 賓禮 ― 국가의 國賓 대접 宴會와 隣國使臣(일본과 여진)의 접대를 의미한다.
5) 軍禮 ― 射壇에서의 활쏘기, 大閱, 講武, 大儺(잡귀를 몰아내는 의식), 鄕射 등의 의식을 가리킨다.
위에 소개한 五禮는 일정한 격식에 의해 그 의식이 집행되었으며, 이를 위해 의례의 규범을 기록해놓은 것이 『國朝五禮儀』(8권 8책)이다. 이 책은 세종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하여 세조 때 오례를 그림으로 설명한 圖式이 탈고되고, 성종 5년(1474)에 이르러 편찬이 완료되었다.
『국조오례의』는 국가의례의 큰 골격을 설명해놓은 것으로, 의례가 있을 때마다 표준서로 참고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몇 가지 한계가 있었다. 첫째, 의례의 세밀한 施行節目이 결여되어 있고 둘째, 圖說도 극히 초보적인 것만을 수록하고,3)활자본이므로 圖說에 천연색을 넣을 수 없었다. 『의궤』에 보이는 거대한 천연색 班次圖 같은 것은 물론 담을 수 없었다. 셋째, 국가의례 중에는 五禮에 포함되지 않는 것도 적잖이 있었다. 예를 들면, 궁궐을 영건하고 수리하거나, 왕실족보인 璿源譜를 수정‧발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국가행사지만 五禮에 들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각종 의례를 원만하게 집행하기 위해서는 원론적인 『국조오례의』를 참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세밀한 시행절차를 담고 있으며, 상세한 천연색 圖說이 담겨 있고, 행사 비용과 참가자의 명단까지 수록하고 있는 실제행사의 기록 즉, 『의궤』가 한층 효용가치가 높았다. 『의궤』는 말하자면 畵報集을 곁들인 의례의 實行 報告書라고 할 수 있다.


2. 조선 전기의 의궤 편찬


의궤는 조선 건국 직후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일제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고려시대까지는 의궤가 편찬된 사실을 찾을 수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의궤 편찬이 나타난 것은 국정을 투명하게 운영하려는 유교정치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면에서 조선왕조는 기록문화의 수준이 높아진 시대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의궤는 유감스럽게도 임진왜란 중에 모두 유실되어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현존하는 의궤는 모두 왜란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도 의궤 편찬이 있었던 것을 알려주는 기사가 實錄에 무수히 보인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최초로 儀軌를 편찬한 것은 태조 때이다. 이때 두 종류의 의궤가 편찬된 것이 실록을 통해 확인된다. 하나는 鄭道傳, 閔霽, 權近, 韓尙敬 등이 찬수한 宗廟 제사 때의 춤에 관한 의궤다.4)이 책에는 文武의 두 가지 춤 즉, 佾舞(일무)에 관한 기록이 담겨 있다 한다. 吉禮에 속하는 종묘제사는 사직제사와 더불어 국가제사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이었으므로 『의궤』의 편찬은 시급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때는 『국조오례의』가 편찬되기 이전이므로 의례의 규범을 하나씩 정립해가는 시기였던 것이다.
또 하나는 태조 4년에 景福宮을 창건하면서 그 건설과정을 기록한 『景福宮造成儀軌』다.5)이는 정도전이 지은 경복궁의 전각이름을 포함해 경복궁 건설과정을 『의궤』라는 형식으로 편찬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때 의궤는 행사가 끝난 뒤에 제작한 것이 아니라 행사를 하기 전에 행사 계획서로서 간단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즉, 의궤는 원래 사전에 편찬한 책을 말하는데,6)행사가 끝난 뒤에 이를 수정‧보완하여 한층 완벽한 의궤를 만드는 것이 관행으로 되었다.
태조 때 시작된 의궤 편찬은 그 다음 태종 때에도 계속되었다. 태종 8년(1408)에 태조 이성계가 타계하자 그 장례식에 관한 보고서인 『太祖康獻大王喪葬依軌』가 편찬되었다.7)여기서 儀軌를 依軌라고 표현한 것이 이상하지만, 이는 儀軌의 오기로 보인다. 이태조의 喪葬은 조선 건국 후 처음 당하는 국상이라 미비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8)
태종 12년(1412) 8월 국가에서는 종친대신들의 國葬에 관한 格例를 정했는데, 이때 예조의 『의궤』를 비롯하여 여러 책들을 참고했으나 내용이 서로 달라 儀禮詳定所와 의논하여 새로운 격례를 만들었다고 한다.9)이때 참고했다는 국장에 관한 『의궤』는 필시 『태조강헌대왕상장의궤』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세종 원년(1419)에 定宗이 돌아가고 그 다음해 태종의 왕비 元敬王后 閔氏가 죽자 『定宗恭靖大王喪葬儀軌』와 『元敬王太后喪葬儀軌』를 잇달아 편찬했는데, 이 중에서 후자가 한층 자세하게 편찬되었다고 한다.10)그런데 두 國葬 사이에 期限, 服玩, 儀仗 등이 서로 같지 아니하여, 세종 4년 5월에 태종이 서거하면서 다시 이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1)그리하여 『太宗恭定大王喪葬儀軌』는 한층 다듬어진 형태로 편찬되었다.
태종과 세종 초에 편찬된 喪葬儀軌 중에서 태종과 원경왕후의 상장의궤는 각기 3벌을 만들어 세종 7년 11월에 禮曹와 忠州 史庫, 그리고 궁 안의 架閣庫에 나누어 보관케 했다.12)당시에는 지방사고가 충주밖에 없었다. 이 두 종류의 의궤는 후대의 귀감이 될 만큼 어느 정도 틀을 잡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의궤를 여러 벌 편찬하여 서울과 지방에 분산 보관하는 관례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의궤』를 어디에 보관하느냐는 『의궤』마다 사정이 달라서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대체로 예조가 가장 많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의정부, 예문관, 춘추관, 통례원, 혹은 시강원 등 소장처가 다양했다.
세종은 조선왕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 큰 업적을 세운 임금으로서 의궤에 관해서도 관심이 매우 컸다. 세종은 10년 9월 신하들과 喪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의궤는 비단 한때만 행하는 것이 아니고, 실로 만세에 통용하는 제도다. …… 옛 제도에 맞지 않는 것은 개정하여 追錄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의궤를 ‘만세의 제도’로 정의하고, 제도가 바뀔 때마다 의궤에 추록할 것을 명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국장에 관한 의궤 이외에도 山陵에 관한 의궤가 있었다. 국장이 있으면 반드시 山陵의 조성이 필요하므로 이에 관한 의궤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세종 7년 10월 辛巳條의 실록기사에 의하면, 왕릉 앞에 세우는 望柱石을 錢竹石이라고 여러 산릉의 의궤에 기록하고 있는데, 전죽석은 속칭이므로 중국의 예에 따라 망주석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13)이 『의궤』가 뒤에 『山陵都監儀軌』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국장이나 산릉 이외에도 국가의 여러 제도를 새로이 정비함에 따라 각종 의식에 관한 『의궤』가 편찬되고 있었다.
신하가 왕에게 집단적으로 인사를 드리는 朝會도 五禮 중 嘉禮의 하나로서 중요한 국가의식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하들이 무릎을 꿇는 방법이 『의궤』에 실려 있는데, 신하들이 이를 따르지 않는다는 기사가 보이고 있어14)朝會에 관한 『의궤』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왕세자나 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도 嘉禮의 하나다. 세종 8년 12월에는 왕세자빈을 책봉할 때 앞시기의 『의궤』를 참고하여 실행하기로 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15)『王世子嬪冊封儀軌』가 편찬되었음을 말해준다.
왕세자의 책봉에 관해서는 태종, 세종, 문종,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都監을 설치하고 『왕세자책봉의궤』를 편찬했음이 『중종실록』에 보인다.16)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都監의 설치다. 조선 후기에는 의례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都監이 설치되는 것이 관례였으나, 조선 전기에는 도감 설치가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嘉禮의 경우에는 주관기관으로 嘉禮廳을 설치했는데, 중종대 이후로는 가례청 대신 嘉禮都監이 설치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명종대에는 國葬都監과 造墓都監도 나타나고 있다.17)
따라서 행사를 주관하는 임시관청으로 都監을 모든 행사 때마다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중종-명종대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都監制度는 그후 더욱 발전하여 명종대에는 喪葬을 치를 때 殯殿都監, 國葬都監, 山陵都監의 이른바 3都監體制가 성립된 것을 볼 수 있다.18)이 3도감체제는 조선 후기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각 도감에서는 행사의 진행과정을 그때그때 기록하여 『謄錄』을 먼저 작성하고, 행사가 끝난 뒤에는 『謄錄』에 누락된 기록을 추가 보완하여 『儀軌』를 만드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이밖에도 문종 때에는 甲造船을 만드는 規式을 적어서 『의궤』로 만들자는 논의가 보이고 있으며,19)성종 때에는 懿敬王과 仁粹王大妃에게 올린 諡寶와 尊號印을 『의궤』에 의거하여 크기를 정했다는 기록이 보여20)寶印에 관한 『의궤』가 제작되었음도 알 수 있다.
왕이나 왕비가 죽은 뒤에 그 神位를 종묘에 祔廟하는 의식은 凶禮의 하나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성종 16년에는 세조비인 貞熹王后의 신주를 종묘에 祔廟하는 절차를 『의궤』의 常禮에 따라 했다는 기록이 보이고,21)睿宗과 安順王后의 부묘에 관한 『의궤』를 편찬했다는 기록도 있고,22)성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신 『成宗大王祔廟儀軌』의 편찬 기록도 보인다.23)이로써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그 신위를 종묘에 모시는 절차를 기록한 『祔廟儀軌』가 계속적으로 편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에 관한 嘉禮가 있으면 역시 『嘉禮儀軌』가 편찬되기도 했다는 사실이 『성종실록』과 『중종실록』 등에 보이고 있다.24)
임금이 신하들과 射壇에 나아가 활쏘기를 하는 의식을 大射禮라 하는데, 이는 五禮 중 軍禮의 하나다. 성종과 연산군이 이 의식을 치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大射禮儀軌』로 편찬되었음이 『연산군일기』에 보인다.25)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迎接儀式은 賓禮의 하나로서 매우 중요한 국가의례이다. 이에 관한 『迎接儀軌』를 편찬하였음이 『성종실록』과 『연산군일기』에 보인다.26)
임금의 왕릉 참배를 위한 거둥(행차)은 吉禮의 하나로서 매우 중요한 국가행사다. 중종 23년에 왕은 왕릉 참배를 위한 거둥을 하면서 성종 2년(1471)에 있었던 陵幸의 『儀軌』가 侍講院에 있어서 참고했다는 기사가 보인다.27)
이상 여러 기록을 통해 조선 전기에도 五禮에 관련되는 여러 행사와 그밖의 중요한 국가행사 때마다 의궤를 편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國朝五禮儀』의 기록과 『儀軌』의 기록이 서로 상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어느 것을 따르느냐가 자주 문젯거리로 등장했다. 그럴 경우 어떤 때는 『國朝五禮儀』를 존중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儀軌』를 존중하기도 하여 한결같지 않았다. 특히 이 문제는 禮學과 禮法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중종 때 이후로 논란이 많았으나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을 약한다.


3. 왜란 중 儀軌 유실과 왜란 이후 儀軌 편찬



임진왜란(1592~1598)을 겪으면서 그때까지 편찬된 조선 전기의 의궤들은 안타깝게도 거의 모두 遺失되었다. 화재로 인한 소실이 주원인이겠으나 왜병에 의한 약탈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선조 26년(1593) 10월에 예조는 “난리를 겪은 뒤로 본조 三司의 儀軌가 남김없이 유실되어 비록 심상한 恒式이라 하더라도 憑考할 데가 없다”고 왕에게 아뢰고 있다.28)
儀軌가 없어졌다는 기록은 또 있다. 선조 33년(1600) 7월 선조의 왕비인 懿仁王后의 죽음을 계기로 山陵工事를 할 때 병조는 “각 해의 儀軌가 남김없이 유실되어 그 役軍의 다소는 상고할 데가 없으나, 그 功役을 헤아려보고 들은 바를 참고해보면 투입된 숫자는 무려 6천여 명이나 됩니다 ”라고 왕에게 보고하고 있다.29)참고할 『의궤』가 없어서 山陵 工事에 동원될 役軍의 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역군만이 아니라 상복을 어떻게 입느냐도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예조는 『국조오례의』를 참고하고, 또 妙香山에 있는 『儀軌』를 등사해와 그 기록을 참고했다는 기사가 보인다.30)당시 서울에는 『의궤』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의인왕후의 喪葬은 이렇게 자료의 빈곤 속에서 치러지고, 일이 끝난 뒤 세 종류의 『의궤』를 편찬했다. 그 중에서 『懿仁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와 『懿仁王后山陵都監儀軌』는 지금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고,31)『懿仁王后國葬儀軌』는 앞서 소개한 『曝曬形止案』에만 보이고 실물은 없다. 이 책은 江華島 外奎章閣에 소장되어 있다가 1866년 丙寅洋擾 당시 소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위에 소개한 세 『의궤』는 국장이 끝난 다음해인 선조 34년(1601)에 편찬된 것으로, 왜란 이후 최초로 편찬된 것이면서 동시에 그 중 앞의 두 『의궤』는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의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선조대에는 그후 네 종류의 의궤를 더 편찬했다. 선조 37년(1604)에 편찬한 『再尊號都監儀軌』와 『扈聖宣武淸難三功臣都監儀軌』32)가 있으며, 1605년에 편찬한 『扈聖宣武原從三功臣都監儀軌』와 『社稷宗廟文廟祭器都監儀軌』가 그것이다. 이 의궤들도 지금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왜란 직후의 선조대에 편찬된 위 일곱 종류 『의궤』들은 조선 전기 의궤 편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지만, 전란 직후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편찬된 것이므로 그 수준은 그리 높지 못하다. 우선 의궤의 체재와 격식이 정비되지 못하여 신하가 올린 啓辭와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에 내린 甘結을 날짜순으로 기록하는 데 그치고 있다. 천연색 圖說이나 班次圖도 나타나고 있으나 세련됨이 떨어지고, 글씨도 정성이 부족하다. 책은 한 건(벌)을 만들어 議政府에 보관했다.
의궤 편찬은 전란의 후유증이 회복되어가는 과정과 병행하여 점차로 활기를 띠어갔다.
광해군대에는 30여 종(현존 19종)의 의궤가 편찬되었는데, 두 건 혹은 세 건씩 편찬하여 서울의 의정부와 지방의 사고에 분산 보관하는 관례가 이때부터 정착되기 시작했다. 왜란 때 忠州, 全州, 星州 등 지방 대도시에 두었던 史庫들이 모두 불타버린 데 대한 반성으로, 왜란 후에는 江陵(平昌) 五臺山, 경상도 奉化 太白山, 江華島 鼎足山, 전라도 茂朱 赤裳山 등 깊은 산골에 새로이 史庫를 설치하여 實錄, 璿源譜(왕실족보) 등의 전적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儀軌도 지방의 네 사고 중에서 두 곳을 선정하여 分上하는 관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광해군대에는 오대산과 태백산 사고에 분상했다.
광해군대에 편찬된 의궤들은 宣祖의 國葬과 祔廟에 관한 의궤, 명나라 사신의 영접에 관한 의궤, 궁궐 영건에 관한 의궤, 『동국삼강행실』 찬집에 관한 의궤, 왕실 조상의 추숭과 존호에 관한 의궤, 祭器 조성에 관한 의궤, 火器 제조에 관한 의궤 등이다. 특히 火器 제조에 관한 의궤는 이것이 유일한 의궤로서, 광해군시대에 火器에 관한 관심이 비상했음을 보여준다.


4. 호란 후 御覽用 儀軌 편찬과 分上本의 증가


광해군 다음의 인조대에는 50여 종(현존 40종)의 儀軌가 편찬되었는데,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다. 첫째, 儀軌의 分上本이 최고 4건으로 늘어나고, 儀軌의 분상처도 議政府보다는 儀禮의 실무관서인 禮曹에 분상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지방 史庫의 경우도 태백산이나 오대산뿐 아니라 강화도 등으로 분상처가 다양화되고 있다.
둘째로, 호란 이후 고급 御覽用 儀軌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획기적인 변화다. 이때부터 어람용 혹은 이에 준하는 고급의궤 편찬의 관습은 왕조 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조대에 편찬된 어람용 의궤는 지금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있어서 국내에는 실물이 없으나 그 서지학적 특징은 알 수 있다.33)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는 서지학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첫째, 어람용은 草注紙를 쓰고, 분상용은 楮注紙를 쓴다. 초주지의 원료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비단처럼 느껴지는 고급종이다.
둘째, 어람용은 인찰선(책 안에 두른 선)이 붉은색이고, 분상용은 검은색이다.
셋째, 어람용은 표지를 초록 혹은 청색 구름무늬비단[草綠雲紋大段絹]으로 싸고, 놋쇠[長錫]로 邊鐵(혹은 便鐵이라고도 함)을 대고, 5개의 박을못[朴乙釘]으로 변철을 묶었으며, 박을못 밑에 둥근 국화무늬판을 대어 못이 빠지지 않도록 했다. 책의 제목을 쓰는 재료는 백색 비단[白綾絹]을 썼다. 이에 비해 분상용은 홍포(紅布, 붉은 무명 혹은 삼베)로 표지를 싸고, 변철과 박을못과 고리를 모두 시우쇠[正鐵]로 만들었다.
넷째, 박을못의 수효다. 그동안 모든 의궤는 3개의 박을못을 사용해왔으나, 어람용은 박을못이 5개로 바뀌었다. 어람용의 박을못이 5개라는 것은 지금까지 박을못 3개를 쓰던 관례에 비추어 의궤의 제책이 한층 단단해졌을 뿐 아니라 그 격이 한 단계 높아진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 글씨체도 다르다. 어람용은 최고의 書寫者가 楷書體로 정성을 들여 썼으나, 분상용은 행서 혹은 반초서로 쓴 경우가 있고, 해서로 쓴 경우에도 글씨 수준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이상과 같은 차이로 인하여 어람용은 분상용에 비해 외관상 훨씬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아마 조선시대 도서 중에서 종이나 장정 면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예술적인 책은 어람용 의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인조대 이후로 어람용 의궤가 편찬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람용 의궤를 편찬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러나 어람용 의궤가 편찬된 시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어떤 암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최초의 어람용 의궤는 병자호란 다음해인 1637년(인조 15)에 편찬한 『宗廟修理都監儀軌』34)와 1638년(인조 16)에 있었던 仁祖와 莊烈王后의 재혼을 기록한 『仁祖莊烈后嘉禮都監儀軌』35)다.
왜 하필 호란 직후부터 고급스런 어람용 의궤를 편찬하기 시작했을까. 우리는 잠시 어람용 의궤의 외모가 갖는 상징성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어람용 의궤는 노란색의 놋쇠(장석)로 변철을 만들고, 5개의 박을못과 국화판으로 책을 결속시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란색과 다섯이라는 숫자는 전통적으로 天子를 상징하는 것이다. 五爪龍이나 五嶽이 천자를 상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호란 이후 反淸思想으로 표출된 조선=유일중화사상이 의궤 편찬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해석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을 길이 없다.
인조 다음 효종-숙종대에는 의궤의 분상처가 더욱 늘어났다. 의궤에 따라 분상처의 숫자가 일정하지 않지만 5~8건이 일반화되고, 많은 경우에는 9건까지 제작되고 있다. 9건이 제작되는 것은 왕실의 神主를 宗廟에 모시는 행사를 기록한 『祔廟都監儀軌』의 경우다. 이 책은 서울의 네 곳(어람용, 의정부, 춘추관, 예조)과 지방의 네 史庫 이외에 宗廟署에 한 건을 더 보관하는 까닭에 9건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만큼 祔廟는 비중이 가장 큰 행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8건을 만드는 경우는 『尊崇都監儀軌』와 『冊禮都監儀軌』다. 조상을 존숭하고, 왕비나 왕세자를 책봉하는 행사가 祔廟 다음으로 중요시되었다. 8건을 보관하는 곳은 서울의 大殿(어람용), 의정부, 예조, 춘추관, 그리고 지방의 네 사고(五臺山, 太白山, 赤裳山, 鼎足山)였다.
그러나 영조 33년 7월부터는 議政府에 대한 分上을 없애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는 좌의정 金尙魯의 다음과 같은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儀軌 한 건은 議政府에 분상하는데, 만약 참고할 일이 있으면 禮曹에서 가져가 보는 까닭에 의정부에 쌓아두고 살펴보지도 않다가 오래 되면 간혹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는 의정부에 보내는 의궤를 춘추관에 이송하여 포쇄관의 행차를 기다려 史庫에 저장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소서.36)
김상로의 건의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행사가 있을 때에는 행사를 주관하는 禮曹에서 『의궤』를 실제로 참고하게 마련인데, 쓸데없이 의정부에 보관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의정부에 가서 빌려 보는 것은 불편하고 또 분실의 우려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조 33년 7월 이후에 편찬된 의궤는 김상로의 건의대로 議政府에 분상된 것이 한동안 없어졌다가 순조-헌종-철종-고종대에 이르러 점차로 의정부본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37)
의궤는 9건을 편찬하는 『祔廟都監儀軌』를 제외하면 최고 8건을 편찬하는 것이 효종-숙종대 이후로 관례가 되었다.38)그러나 모든 의궤가 8건으로 편찬된 것은 아니고, 위에 든 의궤들을 제외한 나머지 의궤들은 3건에서 7건 이내로 제한되고 있다. 왕과 왕비의 嘉禮와 國葬에 관한 의궤는 대체로 5~7건으로 편찬되고 있으며, 그 다음 세자와 세자빈의 冊禮와 嬪의 喪葬에 관한 儀軌는 5건이 일반적이다. 그밖의 儀軌들은 3건에서 5건 이내로 분상되었다. 의궤의 복본과 분상에 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시기에 따라 융통성이 있었으며,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8건 이하로 편찬될 경우에는 지방의 네 史庫 중에서 한두 곳을 골라 분상했다.
의궤의 분상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의궤의 분상처가 의궤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왕실족보인 『璿源譜略』을 수정한 의궤를 만들 경우에는 반드시 『선원보략』을 관리하는 宗簿寺나 『선원보략』을 편찬하는 校正廳에 한 건을 비치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胎室儀軌』는 그 胎室을 안치한 지방에 한 건을 비치했다. 또 『影幀模寫都監儀軌』는 국왕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는 永禧殿(眞殿)에, 『永禧殿儀軌』는 永禧殿(서울)과 지방에서 영정을 모시고 있는 璿源殿(永興), 慶基殿(全州), 穆淸殿(開城), 華寧殿(水原)에 보관하게 했다.
이밖에 사도세자 사당과 관련된 『景慕宮儀軌』는 경모궁(지금 서울대 병원자리)에, 『親耕儀軌』는 東宮과 奉常寺에, 『大射禮儀軌』는 대사례를 시행한 成均館에, 『進宴儀軌』나 『樂器造成儀軌』는 進宴이나 樂器와 관련이 깊은 掌樂院에 각각 한 건을 비치했다.
한편 궁궐 조성과 관련된 『營建都監儀軌』는 영건사업을 관장하고 있는 戶曹에, 명나라 황제의 신위를 모신 皇壇(大報壇)에 관련된 『皇壇儀軌』는 皇壇(창덕궁 내)에 각각 한 건씩 비치했다. 이렇게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에 의궤를 한 건씩 비치하는 것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의궤를 참고하기 위함이었다.


5. 정조 이후 御覽用 폐지와 活字本 儀軌 등장


조선 후기 임금 중에서 儀軌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편찬을 지도한 임금은 正祖다. 이에 따라 儀軌의 제작과 보급에 있어서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正祖는 즉위하던 1776년 7월 어람용 의궤 편찬의 중단을 명하는 傳敎를 내렸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의궤는 비록 御覽件이 있으나, 궁 안의 休紙에 불과하다. 이를 보관해두려고 한다면 강화도에 옮겨 보관하는 것이 낫다. 강화도는 본래 史庫가 있으니 (궁중) 分上件은 긴급하지 않다. 차후에는 의궤 어람건을 마련하지 말 것을 각 都監에 분부하고, 定式으로 삼아 준행할 것을 戶曹에 분부한다.39)
御覽用 儀軌가 궁중의 休紙에 불과하므로 마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용하지 않는 儀軌는 만들지 말고, 오래 보관하려면 강화도에 두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을 定式으로 삼아 준행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1776년에 편찬된 『莊祖上諡封園都監儀軌』는 어람용이 편찬되지 않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莊獻’이란 尊號를 올리고, 그 무덤을 永祐園으로 승격시키는 행사를 기록한 이 의궤는 6건을 만들어 서울에는 春秋館과 禮曹, 지방에는 강화도,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사고에 분상케 했다.
그러나 임금에게 바치는 어람용 의궤는 형식상 없어졌지만 정조 즉위년에 창덕궁 안에 奎章閣이 설치되고, 이어 정조 6년에 강화도에 外奎章閣이 설치된 이후에는 어람용과 똑같이 고급스럽게 만들어 서울의 奎章閣이나 강화도의 外奎章閣 혹은 서울의 해당관청에 보관하도록 했다. 예를 들면 정조의 생부인 思悼世子의 追崇 및 정조의 아들인 文孝世子의 冊禮와 喪葬에 관련된 儀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40)
정조 이후로 왕조 말까지 ‘어람용 의궤’라는 말은 원칙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람용과 동등한 고급의궤의 편찬은 계속되었고, 이를 서울의 奎章閣이나 강화도의 外奎章閣 등에 보관하는 조치가 계속되었다.41)또 종전에 9건을 편찬하던 『祔廟都監儀軌』는 8건으로, 8건을 제작하던 『尊號(혹은 上號)都監儀軌』는 6~7건으로 줄어드는 등 전반적으로 儀軌의 件數가 줄고 있다. 정조 이후의 이러한 변화는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려는 정조의 방침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다음에, 정조시대 의궤 편찬의 또 하나의 획기적 변화는 活字本 儀軌의 편찬이다. 이는 筆寫本 儀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조치다. 필사본 의궤는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들면서도 대량으로 제작할 수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의궤의 내용이 갈수록 자세해지고 방대해지면서 필사본 의궤의 제작은 더욱 어려워지고 보급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정조 18년(1794)부터 신도시 華城 건설에 착수하고, 이를 주관하는 기관으로 整理所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華城은 개혁군주 정조의 꿈이 담긴 곳으로, 이를 대대적으로 신하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또 정조는 華城 건설이 거의 끝나가던 정조 19년(1795)에 아버지 思悼世子와 어머니 惠慶宮의 회갑을 기념하여 華城과 顯隆園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이 사실도 정조로서는 많은 臣民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정조는 整理所로 하여금 整理字라는 新式活字를 만들게 하고, 이 활자를 이용해 화성 행차에 관한 의궤를 먼저 만들었다. 정조 22년(1798)에 완성된 8책 1268쪽의 방대한 『園幸乙卯整理儀軌』가 바로 그것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58건 이상을 발행했는데,42)현재 남아 있는 것은 대략 20건이다. 이 책들을 왕명에 따라 惠慶宮, 奎章閣, 外奎章閣, 지방의 네 史庫, 華城行宮, 顯隆園, 整理所, 承政院, 弘文館, 侍講院, 備邊司, 壯勇營, 訓練都監, 禁衛營, 御營廳, 戶曹, 禮曹, 兵曹, 司僕寺, 京畿監營, 華城府, 廣州府, 始興縣, 果川縣 등의 여러 기관에 배포하고, 총리대신을 맡은 蔡濟恭을 비롯하여 행차에 참여했던 31명의 대신들에게도 한 건씩 하사되었다. 이 의궤는 역사상 처음으로 활자로 편찬된 의궤일 뿐 아니라 최초로 신하들에게도 하사된 의궤라는 점에서 획기적 의미를 지닌다.
활자본 의궤는 고급과 비고급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의궤의 평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圖說과 班次圖의 채색이 사라지고, 흑백으로 판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을 덜기 위해 행차의 주요장면을 천연색 屛風으로 제작하고, 두루마리로 된 彩色班次圖를 따로 제작했다.43)
정조는 『園幸乙卯整理儀軌』 편찬과 병행하여 자신의 꿈을 담은 華城 건설과정을 역시 방대한 活字儀軌로 편찬했다. 그것이 9책 1334쪽에 달하는 『華城城役儀軌』다. 이 책은 정조가 죽은 뒤인 순조 원년(1801)에 발간되었지만, 실제로 그 편찬작업은 정조시대에 완료되었다. 이 책 역시 활자본(정리자)이므로 대량으로 제작되었고, 국가의 여러 기관과 화성 건설에 참여한 여러 대신들에게 하사되었다.44)
정조는 왕실의 꿈을 담은 행사로서 온 국민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어야 할 경사스러운 일을 기록한 儀軌는 활자로 찍어 널리 반포한다는 선례를 남겼다. 이는 자신의 개혁정치에 대한 臣民의 동의와 참여를 유도하고, 자신의 聖人君主像을 만천하에 홍보한다는 정치이념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정조의 선례를 따라 순조 이후로 정리자를 이용한 활자본 의궤는 계속적으로 편찬되었다. 순조대에는 『進爵儀軌』(1827,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尊號를 올린 의식)와 순조의 40세 생일을 축하하는 『純祖己丑進饌儀軌』(1829)가, 헌종대에는 純祖妃의 6旬을 기념하는 『進饌儀軌』(1848)가, 고종대에는 趙大妃(익종비)의 7旬을 축하하는 『進饌儀軌』(1877)와 조대비의 8순을 축하하는 『進饌儀軌』(1887), 고종의 41세와 등극 30년을 축하하는 『進饌儀軌』(1892), 明憲太后(憲宗妃)의 進爵을 축하하는 『進饌儀軌』(1901), 고종의 望六(51세)을 축하하는 『進饌儀軌』(1902)가 모두 정리자를 이용한 의궤들이다. 이 모든 의궤들은 정조의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모델로 한 것이 공통적인 특징으로서, 왕실의 경사를 臣民과 함께 나누고 왕실의 권위를 높인다는 뜻으로 활자본을 만든 것이다.
물론 위에 열거한 의궤들이 아닌 것은 옛날처럼 필사본으로 만들었으며 필사본 의궤가 수치로 보면 훨씬 많았다. 그렇지만 활자본 의궤의 등장은 왕실문화가 그만큼 검소해지면서 국민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정조 이후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등장하고 있던 民國思想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국가의 성격이 士大夫=兩班國家에서 百姓의 國家로 변질되고 있던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다.45)


6. 대한제국과 일제시대의 儀軌 편찬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의궤 편찬의 형식은 크게 달라진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종전의 奎章閣(혹은 御覽用) 儀軌가 皇帝用으로 바뀌면서 종전의 녹색 혹은 푸른 비단 표지색이 황색 비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皇太子가 王과 동격으로 올라가면서 皇太子用 儀軌가 따로 제작되어 侍講院에 분상되었다. 황태자용 의궤는 붉은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표지색을 제외하면, 초주지를 쓰고, 붉은 인찰선을 두르고, 노란 놋쇠로 변철을 만들고, 5개의 박을못을 박는 형식은 황제용과 황태자용이 다르지 않았다.
한편 1907년 고종이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양위하고 太皇帝로 물러나면서 태황제가 거처하던 곳을 承寧府라고 호칭했는데, 이때부터 황색 비단으로 장정한 태황제용 의궤를 한 건 더 만들어 承寧府에 진상하고, 황제용은 宮內府에 진상했으며, 侍講院에 또 한 건의 고급의궤가 편찬되어 고급의궤가 모두 3건으로 늘어났다. 그 대신 奎章閣에 올린 의궤는 보통의궤로 격하되었다. 이때는 이미 奎章閣이 近侍機構의 의미를 상실하고 단순한 도서관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기 때문에 규장각 분상용은 어람용의 의미를 상실했다. 이 무렵 지방의 史庫에 있던 도서들도 모두 규장각에 이관되어 이른바 ‘帝室圖書’로 편입되었다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 대한제국 성립 이후 중앙의 분상처도 달라졌다. 禮曹 대신 掌禮院(혹은 禮式院), 春秋館 대신 秘書院(혹은 秘書監)이 새로운 분상처로 등장했다. 그리고 의궤 편찬 건수도 보통 8건 내지 12건으로 늘어났다. 지방의 4史庫에 분상하는 관례는 그대로 지켜졌다.
한편 대한제국기에는 圖說이나 班次圖 등에 쓰던 眞彩(천연색 그림물감)가 서양의 화학물감으로 바뀐 것이 적지 않다.
그러면 의궤 편찬은 언제 중단되었는가.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한 뒤에도 의궤 편찬은 계속되었다. 다만 의궤 편찬의 주체가 국가의 공식기관인 ‘都監’에서 李王職의 ‘主監’으로 전락하고, ‘國葬’이라는 표현이 ‘御葬’으로 격하되었다. 의궤의 용도도 李王室 후손의 사사로운 참고자료로 제한되었다. 그에 따라 의궤의 수량도 3건 이내로 줄어들었다. 分上의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편찬된 의궤는 현재 약 25종이 남아 있으며, 이들은 모두 李王職에서 관리하던 昌慶園 藏書閣에 소장되어 있다가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관되어 관리되고 있다.
일제시대에 편찬된 의궤는 嚴妃, 高宗, 純宗의 장례식과 관련된 의궤를 비롯하여 이왕직에서 실행하던 제사와 관련된 의궤들이다.


7. 의궤의 형식과 자료적 가치


의궤는 의례를 주관하는 임시관청인 都監이 주체가 되어 편찬했다. 행사가 결정되면 바로 도감이 설치되고, 여기에 都提調, 提調 등의 책임자가 임명되고, 그 밑에 여러 명의 郎廳이 소속하여 행사의 실무를 주관했다. 또 도감 밑에 一房, 二房, 三房, 別工作 등의 하부 집행기관을 두어 업무를 분장하는 경우도 있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행사의 청사진에 해당하는 臨時儀軌를 만들고,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업무일지를 작성하는데 이를 『謄錄』이라고 부른다. 행사가 끝나면 『등록』을 참고하여 임시 의궤를 다시 수정하여 정식 의궤를 편찬한다.
의궤를 편찬할 때는 따로 최고책임자로서 儀軌堂上을 임명하고, 당 밑에 실무책임자로서 몇 명의 郎廳을 두었으며, 낭청 밑에 필사자인 書寫官을 두어 필사를 맡게 했다.
의궤의 체재는 시대에 따라 혹은 의궤의 종류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있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앞부분에는 「座目」을 실어 都監의 관원명단을 기록하고, 다음에 「時日」을 실어 의례의 진행과정을 날짜순으로 기록한다. 그 다음에는 「圖式」 혹은 「圖說」을 넣어 의례의 주요장면과 의례에 쓰인 주요 도구들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이어서 왕의 「敎旨」나 신하들의 「上奏文」, 그리고 관청간 업무협조를 위해 오고간 문서들을 「照會」, 「來照」, 「來牒」, 「報告」, 「甘結」 등으로 나누어 기록한다. 다음에는 행사에 들어간 물품목록인 「稟目」과 「實入」을 적고, 물건비와 인건비를 종합한 「財用」을 기록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각종 물품을 제조한 각종 기술자의 명단인 「工匠」을 기록하고, 의례를 집행하는 데 공을 세운 官員과 工匠들에게 임금이 賞으로 말이나 벼슬이나 布를 지급한 내용을 「賞典」이라는 항목으로 기록한다.
이상 의궤의 체재를 다시 정리한다면, 의궤에 담는 내용은 크게 ① 행사에 참여한 관원과 기술자의 명단, ② 행사의 진행과정, ③ 행사의 모습을 담은 圖說, ④ 관청간의 업무 협조사항, ⑤ 행사에 들어간 물자와 비용, ⑥ 행사 공로자에 대한 施賞 등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의궤의 크기는 보통 세로 50cm 내외, 가로 32cm 내외로서 조선시대 서책 중에서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쪽수는 의궤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시대가 내려갈수록 부피가 커져서 책수가 많은 경우에는 9책에 이르는 것도 있다. 이는 의궤의 내용이 시대가 내려갈수록 정밀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궤의 기록은 워낙 자세하고 그림까지 곁들여져 있기 때문에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는 비할 데 없이 크다. 그 가치는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眞彩로 그려진 「圖式」과 「圖說」을 통해 행사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 궁중생활사와 각종 국가의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자료는 없다. 또 이 그림들을 통해 당시의 미술수준과 공예수준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둘째, 각 관청간의 업무협조를 위해 오고간 문서를 통해 당시의 행정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셋째, 행사에 쓰인 물자와 물건비 및 인건비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재정상황과 물가동향, 匠人의 품삯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넷째, 물품제조에 참여한 각종 匠人의 명단과 인건비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수공업 실태를 이해하고, 고임제도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일차적 자료가 된다.
다섯째, 행사에 쓰인 각종 물품과 도구들의 이름을 통해 이미 사라진 옛 어휘를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말하자면 국어어휘사 연구에도 필요한 자료이다.
끝으로, 의궤는 전세계에서 오직 조선왕조에서만 특이하게 발달한 기록문화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도 주요 궁중행사를 그림으로 설명한 자료가 적지 않지만, 행사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방대하게 정리한 의궤는 없다. 『의궤』라는 서적 자체가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의궤는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정수인 동시에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8. 현존 규장각 소장 의궤의 실태


그러면 현재 의궤는 얼마나 남아 있으며, 또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가. 또 보존상태는 어떠한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임란 이전의 의궤는 지금 없고, 임란 이후의 의궤가 남아 있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의궤도 지금 모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의궤에는 당시 몇 건의 의궤를 제작했는지를 기록한 경우가 많다. 이를 통해서 당시 제작한 件數와 지금 남아 있는 건수를 비교할 수 있는데, 결론부터 말한다면 원래 제작한 건수가 모두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몇 건씩 遺失되어 있다.
또 의궤 중에는 단 한 건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적지 않다. 1856~1857년(철종 7~8)에 작성한 외규장각 소장 도서의 「曝曬形止案」에는 약 211종의 의궤 목록이 보인다. 그런데 그 중에서 지금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약 90여 종에 이른다. 이것들은 아마도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소실되었거나 프랑스로 이관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174종의 어람용 의궤와는 물론 다른 의궤다. 그러면 지금 남아 있는 의궤는 어디에서 소장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의궤를 소장하고 있는 공공기관은 네 곳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그리고 일본 궁내청이 그곳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의궤를 소장하고 있는 곳은 서울대 규장각이다. 현재 위 네 곳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궤의 종류는 모두 합하여 654종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그 중에서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의궤는 546종 2,700여 건에 이른다. 전체 의궤의 약 83%를 소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왕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다른 기관에 소장되어 있는 의궤를 모두 합한 것이다.



선 조 대 ―― 5종(5)숙 종 대 ―― 60종(67)헌 종 대 ―― 29종(31)
광해군대 ―― 19종(19)경 종 대 ―― 11종(12)철 종 대 ―― 53종(54)
인 조 대 ―― 32종(40)영 조 대 ―― 115종(137)고 종 대 ―― 91종(102)
효 종 대 ―― 12종(14)정 조 대 ―― 41종(47)순 종 대 ―― 9종(26)
현 종 대 ―― 16종(20)순 조 대 ―― 63종(66)일제시대 ―― 0종(25)


현존 654종의 의궤를 편찬 왕대별로 살펴볼 때 전체 의궤의 73%에 해당하는 478종이 영조 이후에 편찬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전의 의궤가 더 많이 유실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18세기 중엽 이후 의궤 편찬이 더욱 활발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편 규장각 의궤 중에서 御覽用, 睿覽用, 혹은 奎章閣用으로 제작된 고급의궤의 종류를 살펴보면 1866년 병인양요 이전에 제작된 것이 51종이요, 병인양요 이후 제작된 것이 97종을 헤아린다. 이를 합하면 148종의 고급의궤를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에 규장각 소장 의궤를 분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전체 의궤의 수치다.



〈凶禮〉1.國葬都監儀軌40종(48)
2.殯殿魂殿都監儀軌45종(49)
3.山陵都監儀軌40종(50)
4.遷奉,遷陵,陵修改관련의궤31종(48)
5.祔廟(祔宮)都監儀軌32종(35)
〈吉禮〉1.宗廟,永寧殿,社稷,樂器등14종(31)
2.眞殿=永禧殿=南別殿7종(9)
3.景慕宮,大報壇,顯思宮등10종(35)
4.祀典別종(1)
〈嘉禮〉1.嘉禮都監儀軌21종(22)
2.冊封,冊禮,冠禮관련의궤31종(33)
3.親臨政府時儀軌1종(1)
4.大禮儀軌1종(1)
5.進宴儀軌2종(3)
6.進饌儀軌8종(9)
7.進爵儀軌4종(4)
8.園幸乙卯整理儀軌1종(1)
〈賓禮〉1.使臣관련의궤16종(16)
〈軍禮〉1.火器都監儀軌1종(1)
2.大射禮儀軌1종(1)
〈기타〉1.尊號,尊崇,追崇관련의궤67종(69)
2.廟號,諡號관련의궤9종(9)
3.璿源譜略관련의궤100종(106)
4.實錄纂修廳관련의궤15종(16)
5.宮闕營建관련의궤11종(16)
6.御眞,影幀模寫관련의궤10종(11)
7.胎室관련의궤9종(9)
8.國朝寶鑑,三綱行實간행의궤5종(5)
9.功臣녹훈관련의궤4종(6)
10.親耕儀軌2종(2)
11.親蠶儀軌2종(2)
12.金寶,玉印,寶印제조관련의궤3종(3)
13.華城城役관련의궤1종(2)
14.기타의궤2종(4)


위 표를 통해서 五禮 중 凶禮에 해당하는 葬禮와 祔廟 관련 의궤가 각각 156종(전체 195종)과 32종(전체 35종)으로 가장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장례행사는 國葬都監, 殯殿魂殿都監, 山陵都監 등으로 나누어 의궤를 편찬했기 때문에 더욱 종류가 많아진 것이다. 또 장례가 있으면, 신주를 종묘나 영녕전 등에 모시는 일이 따르므로 『祔廟(祔宮)都監儀軌』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五禮의 吉禮에 해당하는 祭祀 관련 의궤도 전체 76종으로 많은 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 방면의 의궤는 규장각이 31종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대부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에 五禮 중 嘉禮에 해당하는 의궤는 총 72종인데, 그 중에서 69종을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다. 가례에는 왕실의 혼례에 관한 의궤와 진찬, 진연의궤가 중심을 이룬다. 진연, 진찬, 진작은 특히 정조의 화성 행차를 모델로 하여 순조대 이후로 성행하고 고종대에 가장 활발했다는 것이 주목되는 사실이다. 그리고 임금과 신하의 朝會도 嘉禮의 일부인데, 이에 대한 의궤는 오직 고종대에만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親臨政府時儀軌』와 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기록한 『大禮儀軌』가 그것이다. 이는 고종의 왕권강화를 반영하는 사실로 이해된다.
五禮 중 賓禮에 해당하는 의궤는 모두 16종이고, 규장각에서는 16종 모두를 보유하고 있다. 특이한 사항은 使臣영접에 관한 의궤가 광해군과 인조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시기가 명청교체기로서 외교문제가 중요한 관심사였다는 것을 반영한다. 일본과 여진 사신을 접대하는 것도 빈례에 들어가는데, 이에 관한 의궤는 단 한 건도 없다. 이는 조선의 외교가 중국에 치우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五禮 중 軍禮에 관한 의궤는 광해군대의 『火器都監儀軌』와 영조대의 『大射禮儀軌』 2종뿐이다. 『大射禮儀軌』는 조선 전기에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 후기에 가서도 1종밖에 없다. 이는 국방에 대한 儀禮가 그다지 성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의 五禮에 들지 않는 의궤가 매우 많다는 것도 주목할 사실이다. 특히 왕실족보인 璿源譜略 修正에 관한 의궤가 106종이나 된다는 것은 얼마나 자주 선원보를 수정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100종을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다.
왕이나 왕비 혹은 先王에 대하여 尊號를 올리는 의궤도 69종으로 많은 편이다. 王室尊崇事業이 조선 후기에 매우 활발하게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중에서 규장각은 67종을 보유하고 있다. 한편 實錄을 찬수할 때마다 이에 관한 의궤를 15종이나 편찬했다는 것은 실록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끝으로 宮闕의 영건과 중건에 관한 의궤가 전체 16종이나 된다는 것도 건축사의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다만 이 방면의 의궤는 규장각이 11종을 보유하고 나머지 5종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파리에 있다. 참고로 祭祀와 관련된 의궤에도 宗廟나 永寧殿 혹은 永禧殿을 영건 혹은 수리한 사실을 기록한 의궤가 있으므로 건축사 연구자들이 함께 참고할 필요가 있다.


9. 장서각, 파리국립도서관, 일본 궁내청 소장 의궤


의궤 소장처 중에서 서울대 규장각 다음으로 의궤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이다. 이곳에는 294종, 369건의 의궤와 29종의 『謄錄』을 소장하고 있는데, 유일본이 대략 82종(『등록』 포함)이다. 장서각 소장 의궤는 赤裳山 史庫에 분상되었던 의궤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일제시대 이왕직에서 편찬한 의궤는 모두 이곳에만 있다.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적상산 실록과 의궤를 인수하여 李王家 圖書館인 창경원 장서각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이관했는데, 1918년과 1919년 양년에 걸쳐 표지를 改修하면서 紅布를 떼내고 그 대신 적갈색 紅紙로 바꾸었으며, 상하 2책을 1책으로 합본하기도 하여 원본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장서각 소장 의궤 중에서 11종은 지금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임시로 관리하고 있음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46)
장서각 소장 의궤 중에도 어람용 의궤가 10여 종이 있고 보관상태도 매우 양호하다.47)장서각 소장 의궤에 대해서는 최근 해제사업이 일단 완료되어 『藏書閣所藏儀軌解題』(2001)로 간행되었다.
다음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는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가져간 어람용 의궤 191종 297책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이 의궤들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은 仁祖와 莊烈王后의 혼인을 기록한 『嘉禮都監儀軌』(1638, 인조 16)이고, 가장 뒤늦은 것은 1849년(철종 즉위년)에 편찬된 『憲宗景陵山陵都監儀軌』다. 1849년 이후에 편찬된 어람용 의궤는 국내에 있다.
이 의궤들에 대해서는 그 도서관에서 司書로 근무하던 朴炳善 여사가 1985년에 『朝鮮朝의 儀軌』(정신문화연구원)를 간행하여 학계에 소개한 바 있어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곳의 유일본을 38종으로 본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48)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유일본이 31종이다.
파리국립도서관은 1978년을 전후하여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의궤를 改裝하여 원래의 초록색 혹은 푸른색 비단을 떼어내고 새 비단으로 바꾸면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게 되었다.49)
참고로, 최근 프랑스 소장 의궤의 반환문제로 국내학자 여러 명이 파리국립도서관을 방문하여 297건에 대한 實査를 하고 돌아왔다.50)그 실사결과 보고서가 나오면 보다 정확한 실태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프랑스에서 흘러나간 『己巳年進表裏進饌儀軌』(1809, 순조 9) 1종이 현재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일본 宮內廳에도 71종의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 최근 千惠鳳 교수, 朴相國 문화재전문위원 등의 현지조사로 밝혀졌다.51)이 의궤들은 1922년에 조선총독부가 규장각 소장 의궤의 일부를 ‘기증’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궁내청으로 이관한 것이다. 이 의궤들은 대부분 五臺山 史庫에 소장되어 있던 것들로서, 오대산 史庫 實錄을 가져갈 때 함께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궁내청 의궤는 대부분 고종대에 편찬된 것들인데, 유일본도 2종이 있다.


10. 맺음말 ― 의궤자료 정리사업의 방향


의궤는 조선 후기 정치사, 경제사, 생활사, 미술건축사, 수공업사, 국어사 등 여러 측면에서 비할 수 없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장정 면에서도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의궤를 보존하고 활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의궤를 연구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데이터 베이스화하는 작업과 아울러 영인복간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될 필요가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서는 1994년부터 의궤 영인복간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 현재 34종을 간행한 바 있다.52)이는 전체 의궤의 6%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의궤의 書誌的 정리사업은 더욱 시급하다. 의궤는 필사본이 대부분이므로 같은 複本이라도 쪽수와 크기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책에는 들어 있는 圖式이 다른 複本에는 빠진 경우가 있고, 글씨나 그림의 수준도 일정하지 않다. 더욱이 어람용 의궤는 종이와 글씨 수준, 그리고 장정이 고급스럽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의궤는 책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또 의궤의 보존상태가 천차만별하다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때 이용도가 가장 높았던 의궤는 의례를 집행하는 기관인 禮曹 소장본이었다. 따라서 예조 소장본이 상대적으로 보존상태가 가장 불량한 편이다. 그밖에 춘추관이나 의정부 등 서울의 여러 관청에 있던 의궤도 보존상태가 지방의 史庫에 있던 의궤에 비해 불량한 편이다. 즉, 사람의 손이 많이 간 의궤일수록 보존상태가 불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善本과 不良本을 가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의궤를 이용할 때 당하는 곤란한 경우가 또 한 가지 있다. 책의 제목에 ‘행사의 주인공’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서 책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책이름이 『어느 해 가례도감의궤』라고 되어 있으면, 누구의 혼인을 기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행사의 주인공’ 이름을 괄호 속에 넣어 目錄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밖에도 의궤의 제목이 똑같으나 내용이 다른 경우가 많다. 이런 책들은 후대에 재장정하면서 전혀 다른 책을 한 책으로 묶은 경우가 없지 않다.
이상 여러 문제점 때문에 의궤 하나하나에 대한 정밀한 조사와 해제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의궤들이 국내외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서 모든 복본을 비교하면서 조사할 수가 없다는 난점이 있다. 현재 간행된 프랑스 의궤와 장서각 의궤에 대한 解題는 미흡한 점이 있다. 책의 쪽수와 圖說의 쪽수가 파악되어 있지 않은 것이 첫째 흠이다.
서울대 규장각은 이상과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보다 정밀한 서지사항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조사사업을 2년 전부터 해오고 있다. 이 사업은 의궤의 일반적 서지사항 이외에 전체 張數와 圖說, 특히 班次圖의 쪽수까지도 일일이 파악했으며, 조선시대 分上處를 통해서 몇 건의 복본이 있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래야만 몇 건의 복본이 遺失되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래야만 다른 곳에 소장되어 있는 책들이 유일본인지 복본인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사업은 필자를 비롯하여 신병주 박사, 김지영‧장지연‧이광렬 연구원이 참여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규장각 소장 의궤 종합목록』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이 목록은 장서각, 프랑스, 궁내청에 소장된 의궤도 함께 수록하여 모든 복본을 일목요연하게 망라하고 있으며, 연대별 목록과 분야별 목록을 나누어 작성한 것도 새로운 시도이다. 다만, 규장각 이외 소장처의 의궤는 세밀한 서지사항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凡例


  • 1. 본 목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謄錄 포함),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일본 궁내청 소장 의궤를 모두 망라했다.
  • 2. 1856년(철종 7)과 1857년 11월에 작성한 江華府 外奎章閣奉安 冊寶 譜略 誌狀 御製御筆 及 藏置書籍 曝曬形止案에 들어 있는 儀軌와 謄錄도 포함시켰다.
  • 3. 배열은 편찬 연대순으로 하고, 이를 다시 분야별로 분류했다.
  • 4. 어람용 의궤 혹은 어람용에 준하는 고급의궤(초주지와 붉은 선으로 된 시강원용 혹은 태황제용)는 굵은 서체로 하여 구분했다.
  • 5. 영인본이 출간된 것은 제목 앞에 *표를 달았다.
  • 6. 편찬 연대는 의궤가 완성된 시기가 아니라, 의궤 편찬이 시작된 시기를 원칙으로 했다.
  • 7. 책이름 앞에 [ ]를 넣은 부분은 원래의 책이름이 아니고, 독자의 편의를 위해 의궤의 주인공 이름을 넣은 것이다. 예) [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
  • 8. 현 소장처는 다음과 같이 약자로 표시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 규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 [장]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 [파]일본 궁내청 → [궁]

  • 9. 조선시대 소장처는 다음과 같이 약자로 표시했다.
    御覽用 → 御承寧府 → 承寧
    奎章閣 → 奎圜丘壇 → 圜丘
    侍講院 → 侍禮式院 → 禮式
    議政府 → 議掌禮院 → 掌
    禮 曹 → 禮秘書監(院) → 秘
    春秋館 → 春藝文館 → 藝
    江華府 → 江戶 曹 → 戶
    鼎足山 史庫 → 鼎宗廟署 → 宗廟
    五臺山 史庫 → 五校書館 → 校
    赤裳山 史庫 → 赤宗簿寺 → 宗簿
    太白山 史庫 → 太校正廳 → 校正




한영우 선생님 이름과 직함(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