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정치·사회적 변화의 산물:
《續大典》
백승아(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 법에 의한 통치를 표방한 조선 |
조선은 건국 초부터 법의 중요성을 강조해왔고, 성문법전을 마련함으로써 법에 의한 통치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법제사 분야에서는 조선시대를 ‘통일법전시대’로 구분하여 그 특징을 파악하기도 한다. 조선은 1397년 《經濟六典》 편찬에서 출발하여 전시대에 걸쳐 법전을 편찬하고 증보함으로써 법에 의한 통치를 실현해 나갔다. 법이 모든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변화가 축적되어 하나의 제도나 법률로 성립되고, 이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대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법전의 지속적인 편찬과 개수 및 증보는 사회적 변화를 수렴한 정치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續大典》 이전의 법전 편찬 |
조선 초기 법전 편찬의 노력은 《경제육전》, 《經濟六典續錄》(1413년), 《新續六典謄錄》(1428년) , 《新撰經濟續六典》(1433년)을 거쳐 1485년 《經國大典》으로 완결되었다. 《경국대전》은 조선 통치의 법적 기초가 되었고, 만세토록 변치 않는 통일법전이라는 편찬 의도대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리는 기본법전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경국대전》 편찬 이후에도 사회는 계속 변화하였고 그 변화에 따라 법도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법령이 지속적으로 공포되면서 관리들의 법 집행에도 혼란이 야기되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법전 편찬이 필요하였다.
《경국대전》 시행 후 공포된 법령을 정리한 《大典續錄》(1492)이 편찬되었고, 중종대 대전속록 이후의 법령집인 《大典後續錄》(1543년)이 편찬되었다. 이와 같이 경국대전이 편찬된 이후에도 법이 재정비되는 과정에서 법이 서로 모순되거나 법 조항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이 생기자 해설서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經國大典註解》(1555년)가 편찬되었다. 인조대에는 《各司受敎》, 숙종대에는 《受敎輯錄》(1698년), 《典錄通考》(1707)가 편찬되었고, 영조대 《속대전》이 편찬되기 전에도 《新補受敎輯錄》(1740년), 《增補典錄通考》가 편찬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경국대전 이후 처음으로 ‘大典’의 지위를 획득한 《속대전》(1746년) 편찬으로 귀결되었다.

사진 1 : 《속대전》 (규1926,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법전의 위상과 ‘大典’ |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여러 법전이 편찬되는데 이러한 법전들은 위상과 체계가 다르고 이는 법전 이름에도 반영되어 있다. 조선시대 법전의 체계 속에서 《속대전》의 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법전 편찬의 과정과 원칙을 알 필요가 있다.
왕조사회에서 제정법의 궁극적 근원은 국왕의 명령이다. 사안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가진 국왕의 명령을 ‘敎’라고 하고, 이것이 형식화된 것을 ‘王旨’, ‘敎旨’하며 각 관청에 하달된 敎旨를 시행하는 의미에서 ‘受敎’라고 하였다.
법전 편찬은 다양한 수교를 통일하고 정리하는 과정이다. 이때 수집된 수교를 영구히 시행할 법령과 일시적인 필요에 의해서 제정한 법령으로 구별하고, 영구히 지켜야 할 법은 ‘典’에 수록하고, 일시적 필요로 시행할 법령은 ‘錄’에 수록한다는 ‘典과 錄’의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典’에 수록된 법령만이 자손 대대로 지켜야 할 祖宗成憲으로 인정받았다. ‘錄’은 수교와 달리 어느 정도 장기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는 영구히 지켜야 할 법인 ‘典’과는 달랐다. 그리고 이러한 ‘錄’ 중에서 영구히 준수해야 할 것은 후대의 법전편찬과정에서 ‘典’에 수록되어 조종성헌이 되기도 하였다.
‘전과 록’의 구별은 편찬되는 법전의 이름에도 적용되었다. 즉, 법전 명칭은 법전의 내용과 법전의 위상과도 관련 있다. 법전 이름에 ‘大典’이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이 수록되는 것으로 최고 지위를 가지게 된다.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통편》(1785년), 《대전회통》(1865년)이 바로 그것이다. 이 법전들은 법전 체계에서 최고 위상을 가지며 조선왕조의 永世不變의 成憲으로 받아들여졌다.
《대전속록》, 《대전후속록》, 《(신보)수교집록》 등의 법전에는 ‘록’이 수록된 것으로 대전류 보다 낮은 단계의 위상을 가진 법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대전속록》, 《대전후속록》과 같은 續錄류는 대전 반포 후에도 수교가 계속 제정되자, 수교 간의 모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시적인 법령을 刪削하고, 앞으로 계속 시행할만한 법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형식 면에서 대전체제를 따르고 내용 면에서 수교를 수집·산삭하고 조문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대전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대전을 보완하는 부차적인 법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 《수교집록》과 같은 輯錄류는 수교들을 해당 관서별로 묶거나 육전체제로 분류하여 정리한 것으로 수교의 원문을 그대로 싣거나 축약해서 모아놓은 법전이다. 법령의 단순 모음집으로 속록류보다는 덜 정비된 법전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전록통고》와 같은 通考류는 속록과 집록, 그리고 개별수교를 모아 일정한 체제로 편집한 법전이다. 이전의 법전을 종합하여 체제를 정비했지만 형식적인 차원에 머물러 대전과 같은 위상은 획득하지 못한 법전이라고 할 수 있다.
| 조선후기 사회변화를 담은 《속대전》 |
《속대전》은 《경국대전》을 잇는 것을 목표로 《대전속록》, 《대전후속록》, 《수교집록》과 그 밖의 수교들을 모아 재배치하여 편집하였다. 여러 수교들을 일관된 관점에서 정리하는 과정에서 유사한 수교를 종합하고, 법조문의 체계에 맞게 정비하였다. 그리고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수교나 규범적 의미가 희박해진 수교는 삭제하였다.
《속대전》은 조선후기 사회상을 종합 정리한 법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속대전》 편찬에는 동요하는 사회체제를 재정비하려는 지배층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영조는 《속대전》을 기준으로 모든 일을 처결하라고 하였다. 영조는 조선 후기 사회 변화에 직면하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함으로써 지배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확고한 권력 체계의 확립과 법질서의 운용에 힘썼는데, 《속대전》은 이와 같은 영조의 통치이념이 집약된 법전이라 할 수 있다.
《속대전》에는 영조대의 형정 운영 방식도 담겨있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가혹한 고문과 악형을 금지하고자 하였고, 각종 악형의 폐지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때 폐지된 악형으로는 정강이를 목봉으로 강하게 누르는 형벌인 압슬형, 단근질하는 낙형, 죄인의 얼굴이나 팔에 죄명을 문신하는 자자형, 전 가족을 변방 지역으로 보내는 전가사변형 등이다. 이처럼 신체형 폐지를 골자로 하는 남형의 폐지, 혹형의 금지 등의 흠휼적인 조치는 영조대 형벌제도의 특징으로 꼽히고, 이것이 《속대전》에도 반영되었다.
| 《경국대전》을 잇는 《속대전》 |
《속대전》은 《경국대전》 이후 260여 년 만에 편찬된 대전류 법전이다. 그사이에도 다양한 법전들이 편찬되었지만 대전의 위상을 획득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속대전》은 그 의미가 매우 큰 법전이라 할 수 있다. 《속대전》은 《경국대전》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후기의 법전으로, 《속대전》을 《경국대전》과 함께 二典이라 칭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다.
《속대전》에는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속대전》 이전에 편찬된 법전 중 《전록통고》와 《증보 전록통고》의 내용은 포함되지 않아 기본적으로 이전 법전 편찬 이후에 하달된 새로운 수교를 수록하는데 기본 방향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속록의 예를 따라 수교라는 표기를 하지 않고, 중요한 형정에 관계되는 특별한 수교에만 그 명령이 하달된 연월을 표기하여 전반적으로 속록류의 편집 방식을 취했다. 이처럼 《속대전》은 대전이라는 명칭하에 《경국대전》을 잇는 법전을 표방하여 차서와 조항의 구성도 《경국대전》을 따랐지만, 모든 법전을 종합 정리한 법전은 아니었기에 지향과 실제 사이의 괴리가 있는 속록류의 법전이라거나, 종합법전인 대전으로서의 한계가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사진 2 : 《경국대전》 (규귀186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속대전》의 정치적 의미 |
형식이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대전에 걸맞기엔 다소 한계가 있음에도 《속대전》이 대전의 명칭과 지위를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속대전》의 정치적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조선시대는 왕조사회의 특성상 왕권과 법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모든 법은 왕명에 따라 제정되고, 국왕은 국가의 통치자이자 주권자, 법의 제정자로 인식되었다. 법을 세우고 재판권, 형벌권을 행사하며 관료 임명과 같은 통치권의 행사나 풍속과 교화의 유지같은 윤리적 진흥에 관한 권한이 모두 왕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왕권의 바탕 위에서 성문법을 통해 제도를 완비하고 기능하게 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지향했다.
국왕은 천명과 민심을 기반으로 한 신성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왕권에 신성성이 부여되어 있음은 법에도 이념적으로 신성성이 부여되고 있음을 뜻한다. 결국 법은 왕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왕과 법의 관계가 이와 같기에 법전의 편찬 또한 편찬을 주도한 국왕과 관련 있을 수밖에 없다. 법전은 기본적으로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당대 지배집단이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기에 국왕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행사하려는 지향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법 자체가 기본적으로 국왕의 명령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기에 법전 편찬의 궁극적 주체 역시 국왕으로 귀결되고, 이에 법전 편찬은 국왕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은 시기에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시대 법의 근원은 국왕이었고, 법전 편찬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의 권위를 더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조선 초기 국왕들이 법전 편찬에 관심을 가진 이유였고, 세조가 《경국대전》을 편찬하고자 했던 것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속대전》 또한 탕평 정치로 일컬어지는 영조대 정치사의 기본적 성격과 관련 있다. 영조는 붕당간 대립이 격화되고, 그 균형이 깨지면서 정국이 급격하게 변하는 환국기를 거쳐 왕위에 올랐다. 이에 영조는 기존 정치문화의 폐단을 교정하고 방향을 재설정하고자 하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국왕의 주도하에 붕당 간 세력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탕평 정치를 시행하였다. 이때의 탕평 정치는 붕당 타파를 목적으로 각자의 당파적 입장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국왕에게 절대적으로 추종할 것을 요구하는 국왕 주도의 정치 운영 방식이었다.
이 시기 이루어진 법전 편찬은 국왕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행사하려는 지향과 일치한다. 《속대전》은 탕평정치를 추구했던 영조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여 편찬된 법전으로, 형식과 내용면에서 대전체제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대전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것은 탕평정치기의 강력한 왕권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속대전》은 탕평정치의 산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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