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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시대를 살아간 한 부부의

 

 기적적인 귀환서사, 최척전

 

(崔陟傳)

 

 

이주현(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사진 1 :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 중인 일사문고본 최척전114장의 한문 필사본이다. 고려대 소장본과 함께 대표적인 이본 중 하나이나, 양쪽 모두 부분적으로 결락(缺落)이 있어 두 이본을 교합(校合)해야 작품의 본래 면모에 접근할 수 있다. 책 안쪽을 보면 기우록(奇遇錄)’이라는 또 다른 제목이 행초서로 적혀 있다. 제목의 의미대로최척전16세기 말 17세기 초, 전란의 시대를 살아간 어느 남녀의 우연한 만남, 기적적인 재회를 주된 이야기로 다루고 있다.

 

 

 

전란시대의 도래와 문학의 향방

 

조선시대에는 자국민이 먼 바다로 나가는 일을 막는 해금령(海禁令)이 시행되었다. 고려말부터 잦았던 왜구의 침입과 그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이 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민인(民人)들은 외국·외국인과 좀처럼 접촉할 수 없는 제한된 환경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정유재란(1597)·심하전투(1619)·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등 이어진 전란은, 민인들을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상의 궤도로부터 이탈시키고 고향이 아닌 타지, 나아가 바다 건너, 국경 너머 외국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처지에 놓이게 하였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이어진 전란의 경험과 기억은 기록으로 옮겨지기도 하고, 이를 기반으로 창작되기도 하는 등 문학 전반에도 큰 영향를 끼쳤다. 최척전(崔陟傳)은 전란기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작품 중 하나이다.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 15591623)1621년에 지은 전기소설인 최척전, 최척과 이옥영 부부의 만남과 결연, 이산과 재회, 유랑과 귀향을 담은 이야기이다. 시간적으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심하전투를, 공간적으로는 조선·중국·일본·안남(安南, 베트남)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최척전의 주인공들은 만남부터 전쟁을 계기로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한양에 살던 옥영과 그의 모친 심 씨가 난리를 피해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 심 씨의 친척인 정 생원의 집이 있는 남원에 머물게 되었다. 마침 정 생원의 집에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던 최척을 옥영이 발견하고, 공부하는 그를 지켜보던 어느 날, 아직 시집 못 간 여인이 짝을 구하는 마음을 노래한 시인 시경(詩經)』 「표유매(摽有梅)의 마지막 장(), “떨어지는 매실을 광주리에 주워 담네. 내게 구혼할 선비께선 찾아와 말씀해 주시길[摽有梅, 頃筐塈之. 求我庶士, 迨其謂之].”을 쪽지에 적어 던져 그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다.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최척에게 여종인 춘생을 보내 답시를 요구하기도 한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최척과 옥영은 각각 부친과 모친에게 결혼을 허락받으려 하는데, 심 씨의 반대에 부딪힌다. 최척 집안의 가난 때문이었다. 옥영은 그런 모친에게 가난은 선비에게 늘 있는 것이잖아요. 의롭지 못하면서 부유한 삶을 저는 원치 않아요. 그러니 제가 그 집에 시집갈 수 있게 해주세요. …… 집에는 엄한 아버지가 안 계시고 도적 떼가 지척에 있으니, 진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우리 모녀의 몸을 의지할 수 있겠어요? 저는 시집가기를 청하면서 스스로 배필 고르는 일을 피하지 않으렵니다. 깊은 규방에 숨어 남의 입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제 몸을 위태로운 지경에 빠뜨릴 수는 없어요.”라고 굳은 의지를 내비치고 결국 결혼을 허락받는다.

 

한편 이들의 결연은 전쟁 때문에 위기를 맞는다. 겨우 혼약이 정해졌는데 최척이 의병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전쟁터로 끌려나가고, 이 틈을 엿본 이웃의 부유한 양 씨 집안이 정 생원 내외를 통해 옥영과의 혼사를 추진하려고 한 것이다. 모친을 비롯한 어른들이 정한 혼사를 받아들이지 못한 옥영이 결국 자결을 시도하자 집안 사람들이 놀라 혼사를 취소하고, 전쟁터에서 옥영에 대한 상사병이 깊어가던 최척이 이 소식을 듣고 병이 더 위독해지자 결국 의병장이 최척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비로소 두 남녀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전란이 계속되던 시기, 최척·옥영 부부의 위기 역시 끊이지를 않는다. 두 사람이 이룩한 사랑, 부부애·가족애는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실감에 빠져 어떠한 목적이나 의욕 없이 방황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막막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이어진 전란의 경험과 기억은 기록으로 옮겨지기도 하고, 이를 기반으로 창작되기도 하는 등 문학 전반에도 큰 영향를 끼쳤다. 『최척전(崔陟傳)』은 전란기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작품 중 하나이다.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 1559∼1623)이 1621년에 지은 전기소설인 『최척전』은, 최척과 이옥영 부부의 만남과 결연, 이산과 재회, 유랑과 귀향을 담은 이야기이다. 시간적으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심하전투를, 공간적으로는 조선·중국·일본·안남(安南, 베트남)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전란의 상처로 삶의 의지를 잃고 방황하는 이, 최척

 

15978, 재침한 왜군이 남원을 함락시켰다. 최척 일가는 지리산 연곡(燕谷)으로 피신했는데, 최척이 사람들과 식량을 구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왜군이 연곡을 침략하였다. 왜적이 물러간 뒤에야 연곡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시체가 쌓여 길에 널브러져 있고 흐르는 피가 강을 이루는 등 최척이 맞닥뜨린 광경은 참혹했다. 가족들을 찾아 허둥지둥 뛰어다니던 최척은 시체 더미 속에 쓰러져 있던 여종 춘생을 겨우 발견한다.

 

나리, 나리! 식구들은 다 적에게 잡혀갔어요. 저는 어린 몽석 도련님을 업고 있어서 도망치지 못하고 적병의 칼을 맞아 쓰러졌다가 반나절 만에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업혀 있던 도련님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끌려갔는지 남았는지 모르겠어요.”

최척은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가슴이 미어져 기절해버렸다. 이윽고 정신이 돌아왔으나 다른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켜 강을 따라 내려가니, 강가 언덕에는 칼을 맞아 쓰러진 노약자 수십 명이 모여 울고 있었다. 이들에게 가서 물으니 이렇게 알려줬다.

산속에 숨어 있던 우리는 왜적에게 붙잡혀 배가 있는 이곳까지 오게 되었소. 적들은 장정들만 뽑아 배에 태운 다음 우리 같이 늙고 연약한 사람은 끌어내려 이렇게 칼로 해했다오.”

너무 비통한 나머지 최척은 혼자 살 의욕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막는 바람에 죽지도 못했다. 홀로 강가를 걸었으나 갈 데가 없었다. 다시 가는 길을 더듬어 사흘 밤낮을 걸은 끝에 겨우 제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담장은 무너지고 깨진 기왓장은 뒹굴고 타다 남은 재가 아직 꺼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주변에 쌓인 시신은 언덕을 이뤄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가족들의 행방도, 생사도 알지 못한 채, 스스로 죽지도 못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온 가장家長 최척의 애통함과 고독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후 그는 끼니도 챙기지 않은 채 남원 일대를 배회한다. 사라진 식구들을 가만히 기다릴 수도, 그렇다고 딱히 찾아갈 곳도 모르기에 정신없이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러던 중 최척은 명나라 장수인 여유문(余有文)을 만난다. 의병대에 있을 때 명나라 군대와 접촉한 일이 있어 중국어를 조금 할 수 있었던 최척은 그에게 지난 일을 하소연하고 중국에 따라 들어갈 것을 청했다. 여유문은 그의 사정을 측은히 여겨 함께 명나라로 가 의형제를 맺고 살게 했다. 그런데 그해 겨울 여유문이 병으로 죽고 말았다. 또다시 주변 사람을 잃은 데다가, 외국 땅에 홀로 남은 최척은 다시 방황을 시작한다.

 

 

또다시 의탁할 곳이 없게 된 최척은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를 떠돌며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였다. 용문龍門과 우혈禹穴을 구경하며 원수元水와 상수相水에까지 이르렀고,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를 건너 악양루岳陽樓에 올랐고, 고소대姑蘇臺에도 올랐다. 호수와 산 위에서 노래 부르고 시를 읊조리며 구름과 물길 사이를 배회하다가 훌쩍 속세를 떠날 뜻을 두었다.

 

언급된 명승지는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산서성(山西省), 절강성(浙江省), 호남성(湖南省), 강소성(江蘇省) 등에 위치한다. 가혹하기만 한 현실을 등지고 방대한 자연 속에서 상황을 회피하고자 하는 최척의 모습은, 사실 소설의 저자인 조위한의 경험과 바람이 녹아있는 대목이다. 조위한의 문집인 현곡집(玄谷集)에 수록된 제망자의문(祭亡子倚文)을 보면 전쟁 중 자식과 아내를 잃어 세상이 달갑지 않게 여겨졌던 중, 명나라의 수군을 만나 절강 유람을 약속하였으나 형이 만류하여 이루지 못했다는 언급이 있다. 최척의 방황과 유람은 조위한, 나아가 전쟁 중 가족을 잃게 된 사람들의 상실감과 현실 회피에 대한 욕망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삶의 도중에는 뜻밖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속세를 떠나 촉땅에서 신선이 되는 술법을 배우겠다는 최척을 송우(宋佑)라는 중국인이 만류하고 함께 배를 타고 장사를 하며 남은 생을 즐기자고 권한다. 최척은 선뜻 마음을 바꿔 송우를 따라나서고 조선도 중국도 아닌 안남의 한 포구에서, 아내 옥영과 약 4년 만에 재회한다. 여러 나라 뱃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옥영과 함께하게 되자, 최척은 비로소 행복을 되찾는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극적으로 삶을 도모하는 이, 이옥영

 

한편, 이 소설은 최척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고 있으나, 최척의 부인 이옥영의 형상과 행적이 눈에 띈다. 앞의 결연 과정에서도 보았듯 옥영은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인물이고, 또 그만큼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여주인공이 결연 과정에서 적극성을 띠는 것은 여타 애정전기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세상의 질서가 무너진 전란기, 한반도를 넘어 외국을 활동 배경으로 하는 최척전의 옥영은 기지를 발휘에 위기를 극복해 나가고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결과를 성취한다는 점에서 애정전기소설 속 여주인공의 전형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옥영은 왜적 돈우라는 자에게 붙잡혀 있었다. 돈우(頓于)는 늙은 병사로, 살생을 하지 않는 불교도였다. 본래 장사꾼으로 항해에 능숙했으므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그를 선장으로 발탁하였다. 돈우는 명민한 옥영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혹 달아날까 싶어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주어 그 마음을 안심시키려 했다. 옥영은 물에 빠져 자살할 생각으로 몇 번이나 배에서 빠져나왔으나 그때마다 들켜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날 밤 옥영의 꿈에 장륙불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만복사의 부처다. 죽어서는 안 된다! 훗날 반드시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다.”

옥영이 꿈에서 깨어 그 꿈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일이 전혀 없으란 법도 없을 것 같았다. 이에 억지로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옥영은 피난 중 만일을 대비해 남복을 하고 있다가 왜병 돈우의 포로로 사로잡혔다. 가족에게서 홀로 떨어져 그들의 생사도 모른 채 포로가 되니, 옥영은 최척과 마찬가지로 삶의 의지를 잃고 여러 차례 자결을 시도한다. 그런데 최척과는 달리 옥영에게는 의지할 것이 생기니, 바로 꿈속에 등장한 남원 만복사 장륙불의 한 마디이다. 만복사는 부부가 결혼 후 아이가 생기기를 기도했던 절이고, 꾸준히 불공을 드리던 중 장륙불이 꿈에 나타나 사내아이를 낳을 것이라 말해준 적이 있다. 과연 꿈대로 첫째 아들 몽석을 낳았으니,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장륙불의 말을 믿고, 여성임을 숨긴 채 돈우의 밑에서 일하며 삶을 이어나간다. 그런 옥영을 돈우가 아껴 배를 타고 장사하러 갈 때마다 항해장 일을 맡겼고, 봄이면 중국의 복건성과 절강성 일대로, 가을에는 류큐[琉球]로 함께 돌아다녔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옥영의 귀향과 가족의 재회에 큰 밑거름으로 쓰인다.

 

  장륙불의 말대로 살아남은 옥영은 안남에서 최척과 재회하는 기쁨을 누린다. 둘째 아들 몽선을 낳고 며느리 홍도까지 얻으며 중국 항주에서 새로이 일가를 이루던 중, 전란은 다시 가족의 행복을 위협한다. 누르하치의 요양 침략으로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로 인해 최척이 명나라군 오세영(吳世英) 휘하의 서기로 발탁된 것이었다. 홀로 이국생활을 하다가 겨우 만난 남편이 전쟁터로 나가게 되어 다시 헤어져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옥영은 자결을 시도한다. 최척은 그녀의 자결을 막고 재회를 기약하며 길을 떠난다.

 

  최척은 이 전장에서 첫째아들 몽석과 재회하고 또 며느리 홍도의 아버지인 진위경을 만나 함께 고향 남원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항주의 옥영은,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후금군에게 섬멸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이 죽었을 것이라 여겨 다시 자결을 시도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장륙불이 꿈에 나와 옥영의 죽음을 막는다. 이번 꿈을 계기로 옥영은 삶의 의지를 되찾고 적극적으로 남편 찾기와 귀향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 네 아버지를 찾아봐야겠다. 만일 돌아가셨다면 직접 창주昌州에 가서 죽은 원혼이라도 위로한 뒤 선산에 장사 지내야겠다. 사막에서 굶주리며 떠도는 신세를 면하게 해드려야 내 책임을 다하는 거야. 더욱이 남쪽 지방의 새는 남쪽에 둥지를 틀고 북쪽 지방의 말은 북쪽을 향해 우는 법이거늘, 나도 죽을 날이 다가오니 고향 생각이 갈수록 간절하구나. 시아버지와 홀어머니, 어린 아들을 난리 통에 모두 잃고 그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처지 아니냐. 얼마 전에 일본 상인에게 듣자니,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 사람들이 속속 송환되고 있다더구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살아 돌아온 사람 중에 우리 가족이 없으리란 법도 없지 않겠니? …… 너는 배를 빌리고 양식을 준비해라. 여기서 조선까지는 뱃길로 근 2, 3천 리 되니, 하늘이 도와 순풍을 만난다면 열흘 남짓 만에 해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게다. 내 계획은 이미 섰다.”

 

  옥영은 몽선과 홍도에게 위와 같이 선언한 뒤, 즉시 조선으로 떠날 채비를 시작한다.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옷을 만들고 날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두 나라의 말을 가르쳤다. 견고한 배와 나침반을 구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 옥영은 아들 내외와 함께 항해에 나선다. 옥영은 돈우의 배를 타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명나라 경비선을 만나면 중국어로 둘러대고, 일본 배를 만나면 일본어로 둘러대며 위기를 모면한다. 그러나 바다는 예상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돌연 풍랑에 휩쓸리고, 해적을 만나 배를 빼앗기는 상황에 이르자 옥영은 또다시 삶의 의지를 잃는데, 이번에는 몽선 부부가 그녀를 지지하고 또 한 번 장륙불이 꿈에 나타나 그녀의 의지를 북돋운다. 결국 옥영 일행은 포기하지 않은 끝에 조선 배를 만나 순천에 도착할 수 있었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남원에 도착하게 된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뒤, 23년 만의 귀향이었다.

 

  작중에서 옥영은 최척과 마찬가지로 배우자·가족과의 분리에 큰 상실감을 느끼고, 현실 도피를 위해 여러 차례 자결을 시도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장륙불의 도움을 받아 꺾였던 의지를 금방 회복하고, 최척에 대한 사랑과 가족애를 동력 삼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옥영의 형상은 전란의 상처로 삶의 의지를 잃은 당대 조선의 독자들에게 회복에 대한 희망을 전했을 것이다.

 

 

 

『최척전』의 낭만적 결말과 당대인의 바람

 

옥영 일행이 그 집 문 앞에 이르렀다. 문밖에서 보니 최척이 마침 손님을 맞아 버드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옥영이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바로 자기 남편이 아닌가. 옥영 모자는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최척도 비로소 자기 아내와 이들이 온 것을 알고 큰소리로 외쳤다.

몽석 어미가 왔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귀신인가, 사람인가?”

몽석이 이 말을 듣고 맨발로 엎어질 듯 뛰어나왔다. 어머니와 아들이 상봉한 장면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모자는 서로 밀거니 당기거니 방으로 들어갔다. 심 씨는 병을 앓던 중에 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자빠지며 기가 막혀 산 사람의 얼굴빛이 아니었다. 옥영이 심 씨를 부둥켜안고 구호한 뒤에야 겨우 숨을 쉬더니 이윽고 상태가 좋아졌다.

최척이 진위경을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따님도 왔구려!”

최척은 홍도로 하여금 그동안 있었던 일을 부친에게 이야기하게 했다.

온 집안 사람이 저마다 자기 자식을 안고 부르짖으며 우니 그 소리가 사방에 진동했다. 이웃 사람들은 처음에는 모두 이상한 일로 여겼으나 옥영과 홍도가 겪은 일의 전말을 듣고 나서는 모두들 무릎을 치며 찬탄하더니 앞다투어 이 이야기를 퍼뜨렸다.

…… !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시아버지와 장모, 그리고 형제가 네 나라로 흩어져 서로를 애타게 그린 지 삼십여 년이었다. 적의 땅에서 삶을 도모하고 사지死地를 드나들다가 끝내 단란하게 다 모였으니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인가? 필시 옥황상제와 후토后土의 신이 이들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이런 기이한 일이 일어난 것이리라. 필부필부도 정성이 있으면 하늘이 이를 어기지 못하는 법이다. 정성은 가려 없어지지 않음이 이와 같다.

 

최척 가족의 결원 없는 재회뿐만 아니라, 며느리와 사돈 부녀의 재회까지 이루어지는 최척전의 결말은,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에서 이어진 이 시기 전란의 현실을 생각하면, 소설의 결말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최척전이외에도 조선의 민인이 전란으로 인해 의도치 않은 해외 생활을 하였다가, 고국으로 돌아와 가족 구성원 모두와 재회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지닌 이야기가 제법 있다. 허목(許穆, 1595~1682)기언(記言)22 동래할미[東萊嫗], 이수광(李睟光, 1563~1628)지봉집(芝峯集)23 조완벽전(趙完璧傳)등이 그러하다. 전란 이후에 이러한 결말의 이야기가 다수 기록되고 창작된 데에서, 우리는 당대 사람들의 바람 즉, 전란으로 잃어버린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가족들과의 재회를 바라는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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