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구상한 근대 교육의 첫걸음을 담아내다
-『육영공원등록(育英公院謄錄)』-
조은진(한국교원대 한국근대교육사연구센터 HK연구교수)
| 육영공원 설립과 미국인 세 교사 |

<사진 1> : 『育英公院謄錄』(奎337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886년 7월 4일, 세 명의 미국인 교사가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길모어(Gilmore, George W. 吉模), 벙커(Bunker, D. A, 房巨), 헐버트(Hulbert, Homer B., 轄甫)가 그들로, 셋 모두 뉴욕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출신이었다. 조선에서는 이미 1883년 보빙사 파견 직후부터 교사를 초빙하고자 하였으며, 초대 미국 공사 푸트(Foote, Lucius H., 福德)를 통하여 미국에 요청하였다. 마침내 1886년 미국 국무부의 추천서를 받아 세 교사가 조선으로 향했다. 이들 세 명의 교사는 입국 당시 2-30대의 젊은 선교사들로, 이들이 조선에 도착한 이후 조선에서는 학교 설립 움직임이 정부 주도 아래 본격화되었다.
고종은 육영공원 설치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학교 설립 및 운영에 따르는 전반적인 내용을 차례로 전교하여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중에서도 당장 시급한 것은 육영공원에 설치할 학과와 선발할 학도에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육영공원 설립을 담당한 부서는 내무부로, 그중에서도 수문사(修文司) 당상관이 관할하였다. 고종은 이들 수문사 당상관이 총리대신과 논의하여 육영공원절목(育英公院節目)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내무부 협판이자 홍문관 제학이었던 민종묵(閔種默)을 비롯한 관리들을 중심으로 13개 조항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이미 입국해있던 미국인 교사들도 협력했다. 대표적으로는 육영공원절목에 수록된 육영공원의 휴일 및 방학에 대한 규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육영공원에서는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 한식과 같은 전통적인 명절뿐만 아니라 서양식 휴일인 양력 1월 1일, 성탄절 휴가(12월 25일-30일)를 비롯하여 조지 워싱턴 탄생일인 2월 22일,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등도 휴일로 지정하였다. 이는 육영공원 운영 규정을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이미 미국인 교사들의 영향이 직·간접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2> : 『육영공원등록』 「育英公院節目」(奎337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육영공원에서 편찬한 『육영공원등록』(이하 『등록』)에도 「육영공원절목」(이하「절목」)이 수록되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절목」은 근대적 학교를 운영하기 위한 규정이자 학제에 해당하며, 교사와 학생 구성, 운영 재원, 학교 생활 및 교과목 등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등록』에는 민종묵이 올린 「육영공원규칙서(育英公院規則序)」도 더불어 실려있다. 이에 따르면 ‘언어를 익히고 사물의 이치를 익히는 것은 학자가 할 일이며, 옛것을 참고하고 시대에 맞게 인재를 길러내어 국가의 큰일에 기여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라고 하여, 언어 교육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재를 길러내는 데 그 뜻을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 육영공원-단순한 영어교육기관인가, 신식 교육의 전당인가 |
육영공원은 기본적으로 외국의 어학을 가르치는 학교, 그중에서도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영어를 교수하는 학교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육영공원을 단순히 어학교로 운영하는 것을 넘어서, 근대 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구상을 마련하였다. 「절목」에 따르면, 육영공원에서는 초학(初學) 단계에서 학생들이 독서, 습자, 해자법(解字法), 산학(算學), 산학 연습, 지리, 문법을 매일 학습하게 하였다. 학생들이 초학을 졸업한 이후의 교육과정으로는 각국의 언어를 비롯하여 대산법(大算法), 제반 학습법, 격치만물(의학·농리·지리·천문·기구), 각국 역사, 정치 및 국제조약, 부국용병술, 금수(禽獸)와 초목 등 신식 학문 전반에 해당하는 교과목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헐버트의 경우, 육영공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하여 1889년 한글본 세계지리지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한 육영공원은 교육과정을 엄격하게 운영하고자 하였다. 육영공원에서는 기본적으로 매일 6시간씩 강의를 편성하였고, 학생들은 오전에는 9시부터 12시, 오후에는 1시부터 4시까지 하루 두 차례 수업을 들어야 했다. 특히 학생들은 기상, 취침, 수업 시간 등 하루 일과를 종소리에 맞추어 지켜야 할 정도였다. 고종 또한 육영공원의 수업과 시험을 엄격히 하도록 지시하고, 직접 육영공원 학생들에게 시강(試講)을 하는 등 초기 육영공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 관심을 크게 보였다.
그러나 당초 구상과는 달리, 육영공원에서 신식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육영공원은 정부 차원에서 추진된 근대 교육기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에도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었다. 특히 교사 임금은 자주 체불되었다. 육영공원 운영비는 호조와 선혜청에서 절반씩 지급하기로 하였고, 그중에서 교사들의 월급은 해관(海關) 세금 수입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육영공원 교사 월급 지급과 관련된 규정이 관련 기관마다 확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교사 월급 지급이 지연되고 있는 점을 지적하는 공문이 『등록』에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월급 체불 문제는 당시 심심치 않게 거론되었다. 미국인 교사들은 월급 체불을 비롯한 교사 처우에 불만을 품고, 차례로 육영공원에서의 교육을 포기하는 데 이르렀다. 길모어는 계약 연장을 포기하고 2년 만인 1888년 5월 귀국하였고, 헐버트는 1891년 말, 벙커는 1894년 각각 사임하였다. 가장 오래 교사로 재직했던 벙커는 1892년 그동안의 교육 공로를 치하하여 호조참의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육영공원 개교 당시부터 깊이 관여하였던 미국인 세 교사는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모두 사임하였으며, 결국 육영공원은 점차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였다.
육영공원의 운영이 어려웠던 것은, 정부 내에서도 육영공원 설립을 비롯한 정부의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보수적 성향의 관리들이 다수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육영공원 운영에 깊이 개입하였던 수문사 당상관 중에서도 민응식(閔應植) 같은 인물은 교사들의 수업에 의구심을 품고, 하루 수업 시간을 6시간에서 4시간으로 줄이는 데 적극 개입하는 등 학교 운영에 비협조적이었다. 또한 1887년 지석영(池錫永)은 상황이 열악한 성균관과 비교했을 때 육영공원은 건물도 화려하고 교사와 학생들에게 대우도 후하다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이처럼 여러모로 육영공원을 보는 시각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운영 예산도 제대로 융통되지 않고, 이로 인한 교사 이탈 문제까지 겹치게 되면서 육영공원을 중심으로 정부가 지향했던 근대 교육 구상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 육영공원에 입원(入院)한 학원(學員)들 |
육영공원에서는 각각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나누어 학생을 선발하였다. 좌원에는 나이가 젊은 문무관리들을 특별히 선발하고, 우원에는 우수한 어린 학생을 선발하였다. 고종은 육영공원 설립 논의 당시, 각 아문의 당상관과 낭청(郎廳)의 친척들 중에서 학생을 추천하여 선발하도록 하교하였다. 『육영공원등록』에는 1886년 8월과 1887년 8월, 1889년 3월 선발된 학생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육영공원 설립 초기인 1886년 8월 시점의 학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사진 3> : 『육영공원등록』 「丙戌八月學員座目」(奎337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설립 당시 좌원에는 15명, 우원에는 20명으로 모두 35명의 학생 명단이 수록되었다. 또한 좌원 학생들은 입원 당시의 직책이, 우원 학생들은 입원을 추천한 이나 가족과 관련된 내용이 함께 기재되었다. 좌원에는 새로 과거에 급제하거나 벼슬길에 나선 경우부터, 정3품 사복정이나 종4품 부호군에 이르는 관원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이 중 눈에 띄는 이름은 종6품 부사과 직책으로 육영공원에 입원한 이완용이나, 이 해 문과에 막 급제하여 육영공원에 입원하였다가 후일 대한제국의 특명전권공사, 주차영국벨기에공사 등을 역임했던 민영돈 같은 거물급 인물이다. 이에 비하여 우원은 주로 당시 고위 관리의 직계 가족이나 혹은 추천을 받아서 입학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학생 본인보다는 오히려 추천인의 이름이 더욱 눈에 띄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한봉호는 한규설의 추천을 받았으며, 민영만은 민영환의 추천으로 육영공원에 입원하였다. 또한 육영공원 설립 과정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민종묵도 직접 민상현을 우원에 추천하였으며, 박승길은 박정양의 아들로 역시 육영공원에 추천받았다. 또한 우원으로 들어온 입원생들은 육영공원에서 수학하기 이전까지는 별다른 이력이 확인되지 않으며, 과거에 급제한 경우도 모두 육영공원에 들어온 이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입원 당시 이미 관직에 있었던 좌원 학생들뿐만 아니라, 관직에 아직 발을 들이지 않았던 우원 학생들 또한 결국 육영공원에서 수학한 내용과는 거리가 먼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관리로 진출하는 전통적인 관리임용방식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는 육영공원이 지향했던 혹은 정부에서 구상했던 근대적 교육제도가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던 한계에서 비롯되었다. 기존의 과거제도와 새로 도입된 교육기관이 내용적으로 연동되는 데 이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육영공원은 새로운 관리를 양성하는 기관이라기보다는, 특히 좌원의 경우 이미 과거에 합격한 관리의 재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육영공원에서의 수학 경험이 학생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영어를 비롯한 근대 학문을 가르치고자 했던 육영공원의 새로운 시도는, 단순히 역관을 길러내는 양성소가 아니라 근대적 외교 관계에서 역할을 담당하는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초기 좌원 학생 중에서 민영돈, 김승규, 민철훈 등은 육영공원에서의 수학을 바탕으로, 대한제국 수립 이후 특명전권공사 등 외교관으로도 활약하였다. 이완용 또한 육영공원에서 공부한 이후 미국으로 파견된 박정양을 따라 도미하여 주미 외교관으로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육영공원 학원들의 이후 행보는 각자의 입장과 위치에 따라 크게 달라졌으며, 육영공원 또한 운영이 오래 유지되지 못한 채로 갑오개혁 전후 정부 차원의 새로운 학제 구상이 등장하며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이행기이자 일종의 과도기였던 1880년대 등장했던 육영공원과 정부 차원의 새로운 교육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근대 교육사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영공원등록』은 육영공원을 둘러싼 당시 정부의 구상과 시도, 그리고 그 부침의 과정과 더불어 구성원의 면모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어, 일찍부터 육영공원 연구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 참고문헌 |
育英公院(朝鮮) 編, 『育英公院謄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育英公院敎師仁時德續合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高宗實錄』
『官報』
『公文編案』
G.W.길모어 저, 신복룡 역, 『서울풍물지』, 집문당, 1999
김권정, 『헐버트-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 역사공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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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정, 「육영공원(育英公院) 입원생의 사회적 배경과 입원 동기: 그들은 왜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가 」 『한국교육논총』 제43권 제3호, 충북대학교 교육개발연구소, 2022
최보영, 「育英公院의 설립과 운영실태 再考察」,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2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최보영, 「育英公院 교사 헐버트의 독립운동과 ‘學員’의 사회진출」 『역사민속학』 제52호, 한국역사민속학회, 2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