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일본 문화사 서술의 맨얼굴: 藤田元春의 『上代日支交通史の硏究』
김명재(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 후지타 모토하루(藤田元春)의 시대와 제국의 문화사 |
『상대 일본·중국 교통사 연구』(刀江書院, 1943)는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시대의 역사 지리학자인 후지타 모토하루(1879~1958)의 역사 지리서로, 고서에 기록된 일본과 주변국의 교통 및 외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후지타는 1916년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선과생으로 입학하여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근대 일본의 동양사학을 창시하였다고 할 수 있는 나이토 고난(内藤湖南)에게서 배웠다. 1925년에는 제3고등학교 교수 겸 오사카고등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수행하였다. 저서로는 『일본민가사』(刀江書院, 1927), 『국민세계지리』(冨山房, 1930~31), 『일본지리학사』(刀江書院, 1932), 『세계상업교통지리』(中文館書店, 1933), 『만주역사지리』(冨山房, 1936), 『일지 교통 연구, 중근세편)』(冨山房, 1938), 『대륙 중국의 현실』(冨山房 1939, 『일본·조선의 교통과 고대의 신앙』(官幣大社八坂神社, 1940), 『상대 일본·중국 교통사 연구』(刀江書院, 1943) 등이 있는데, 주로 민속, 지리, 교류사와 같은 문화사 분야에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
후지타가 주로 연구했던 문화사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인간사회 문화의 특수성과 그 문화가치를 주장했던 리케르트, 빈델반트 등 독일의 ‘문화과학’이 일본과 중국 등을 경유하여 수용된 것이었다. 독일의 신칸트학파 중 서남학파는 보편 원칙을 추구하는 자연과학의 연구방법론을 모델로 삼는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사회 문화의 특수성, 그 문화가치를 탐구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리케르트는 ‘문화가치’를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사회적 가치로서 종교, 민족, 법률, 경제, 과학, 예술 등을 포함했다.
이러한 민족을 단위로 한 문화사 서술은 지극히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일본의 문화사학은 나이토 고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 니시다 나오지로(西田直二郞) 등이 종래 일본사 연구의 정치사 편중을 비판하면서 경제·문화 방면으로 시야를 넓힐 것을 주장하면서 유행하였다. 이와 더불어 식민주의 역사학에서 조선 연구가 가속화되면서 근대 일본 역사학의 형성 과정과 궤를 같이하였다. 이때 중국과 조선을 포함한 동양 문화가 일본에 얼마나 종속되었고 정체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에 초점이 있었다는 점에서 전시기의 문화사 서술은 제국주의적 속성 또한 공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1930년대 이래 제국 혹은 국가사와의 관계 속에서 제국 일본의 문화사로의 압력이 강해지고 있던 과정에서 문화사 연구는 그러한 혐의가 짙어지는 측면이 있었다. 즉, 문화 간의 비교와 위계는 민족 문화뿐만 아니라 제국과 국민이라는 구심력과 맞물렸을 때 부정적 효과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었다. 후지타의 『상대 일본·중국 교통사 연구』 저서 또한 일본의 문화사 연구가 이웃나라였던 중국 혹은 조선이라는 타자를 비춰보면서 자신의 민족과 국가의 문화사 및 교류사를 완성하고자 했던 노력과 일본 제국주의적 지향이 맞물리며 나타난 저서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림 1> : 『상대 일본·중국 교통사 연구』(南雲寄託 69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저서의 특징과 동아시아 근현대 문화사 연구의 과제 |
후지타는 『상대 일본·중국 교통사 연구』의 자서(自序)에서 기존에 발간했던 1938년 『일본·중국의 교통 연구』에서 다수의 일본인이 남양 해상에 확장하여, 페르시아인, 흑인들 등과 교섭하였고, 새롭게 남만인과의 교류를 맺어, 천문년간(天文年間)에 포르투갈인 등을 인도하여 번성하게 동아 해상에서 활약했던 사정을 개설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고대 편을 낼 것을 예고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의 방대한 구상 중 하나로 고대 중국과 일본의 교류사를 내고자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후지타가 본 저서를 저술하던 시점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거쳐서 1941년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일본 제국주의 입장에서는 ‘대전쟁’의 와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지타는 서문에서 본 저서를 서술하여 제국주의와 그 이데올로기에 기여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황국 일본이 유원(悠遠)한 과거에 이미 그 독자의 문화를 만들었고 천조(天祖)가 출현하시어 大八洲의 나라를 생성해주신 이후 ... 대동아공영권 전역에 대한 유무 무역의 실질이 갖추어지기에 이른 역사의 흔적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1~2쪽)
우리들은 행복하게 생(生)을 이 국토에 향유하여 천자의 위광(稜威) 아래 동아해방을 위해 검을 들어 성전에 종사하는 오늘날 ... 천조조국(天祖肇國)의 감사함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학(學)으로 지리에 종사하는 것 또한 이 사실을 천명하여 다 같이 보국의 단심(丹心)을 탁마하는 것이다.(4쪽)
목차는 다음과 같다. 자서(自序), 제1장 서설, 八洲六島와 고대항로, 제2장 산해경에 기록된 왜국(倭國), 제3장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일본의 국명, 제4장 후한서의 왜노국(倭奴國), 제5장 위지 왜인전의 도리에 대해서, 제6장 수서 왜국전 비판, 제7장 이키노 하카토코(伊吉博德)의 책, 제8장 동아해로의 발전, 제9장 견당사의 항로와 해외지식, 제10장 송대의 교통, 제11장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선법도. 제12장 선법도와 그 무역품, 부편 일선(日鮮)교통과 고대의 신앙 순이다. 주로 고대 시기별 일본과 중국의 교류와 교통로, 과거 일본인 들의 활약과 기존의 사료를 재검토 하고 있다.
후지타에게서는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나이토 고난의 영향이 자주 엿보인다. 1907년 교토제국대학 문과대학 사학과 동양사학과 강좌의 강사에 취임하고 1909년 교수로 임용되어 활약한 나이토 고난은 일본 중심주의적 역사관을 기반으로 동양사, 특히 중국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는 일본 제국에 대한 환상과 이웃 국가였던 중국과 조선에 대한 강한 배타성을 가지면서, 일그러진 역사인식과 편협한 감각의 기반 위에서 근대 일본 동양사학의 기초를 세웠다. 특히 본래 저널리스트였던 나이토는 1894년 청일전쟁에 종군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일본 문화의 연구에서 중국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 후지타 또한 위 글의 서문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듯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대동아전쟁’을 칭송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의 이익에 복무하였다.

<그림 2> : 저서 내 입당구법순례행정도(入黨求法巡禮行程圖, 南雲寄託 69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일본인들이 뛰어놀고 발전하던 곳으로, 중국은 열등한 타자로서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나이토 고난의 중국사 관련 서술과 공통점이 발견된다. 즉, 일본과 중국의 교류와 외교 과정 속에서 드러난 중국은 과거 일본의 위대한 국민국가사를 바라보기 위한 거울이자 타자로 위치할 뿐이었다.
한국사와의 관련성 속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부록으로 일본과 조선 사이의 교통과 고대의 신앙에 대해서 다룬 부분이다. 다만 이 부분 또한 일본 중심으로 조선 설화를 해석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김광식의 연구에 따르면, 근대 초기 탈해설화와 함께 각광을 받은 한일 관련의 설화로는 연오·세오 설화가 있다. 그러나 두 설화는 일선동조를 보여주는 설화로서 자주 이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상의 차이가 확인된다. 일본인 우위를 보이는 탈해설화와 달리, 신라의 평민부부가 바다를 건너 일본의 왕·왕비가 되었다는 내용의 연오·세오 설화는 탈해일본인설 논자에게 적절한 소재가 아니었다. 따라서 탈해일본인설 논자의 대부분은 연오·세오 설화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거나 의미를 축소해서 해석했다. 이 글에서도 후지타는 연오·세오 설화를 언급하고 있긴하지만, 일월의 정기가 일본에 간 의미와 세오가 짠 비단으로 제천을 올렸음을 지적하면서, 연오·세오 설화는 일월의 정기를 상실한 신라가 일본의 비단을 받아 살아났다는 전설로 해석하였다. 후지타 또한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의 과거 설화를 해석하였고 노골적으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맞게 문화사, 역사 서술을 진행하고자 한 것이다.
일본의 패전 후 후지타는 야마나시(山梨)대학 교수와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 교수를 지내고 다시 나이토 고난에게서 가르침을 받던 교토대학에서 1947년 「일본·중국 교통 연구」로 문학 박사 논문을 제출하였다. 스승이자 근대 일본 동양학의 거두인 나이토 고난은 이미 1926년에 은퇴하여 1934년 사망한 상태였다. 현대 일본의 동양 연구와 한국 연구는 나이토 고난 등 근대 일본 동양사학의 기반 위에서 연속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민족·국가 중심주의적 역사학을 기반으로 한 현대 동아시아 역사학의 형성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국의 문화사 연구 또한 현대 시기 네이션 빌딩 과정과 함께 진행된 측면이 있다. 이 과정을 어떻게 돌아보고 비판적으로 사유할 것인지가 동아시아 근현대 사학사와 사상사 연구에 있어서 추후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 참고문헌 |
하인리히 리케르트, 이상엽 옮김,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책세상, 2004.
김광식, 「근대 일본의 신라 담론과 일본어 조선설화집에 실린 경주 신화 전설 고찰」, 『연민학지』 16, 2011.
신현승, 『제국 지식인의 패러독스와 역사철학: 나이토 고난과 근대 일본의 학지』, 태학사, 2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