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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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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지도로 보는 140년 전 조선의 이모저모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해남과 진도의 거북선, 천안의 관아 건물에 표시된 태극무늬, 양양의 설악산 아래 오색리 약수, 선산의 의구총(義狗冢), 남원의 방풍림, 주요 지역마다 표시된 사고(史庫), 태실(胎室), 척화비(斥和碑)와 사창(社倉). 이러한 모든 정보가 생생하게 표시된 자료가 있다. 바로 대원군 시대인 1872년에 그려진 459장의 지방 지도들로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지도는 1876년 개항을 맞이하기 직전 조선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기록 필름처럼 느껴진다. 

 

 

대원군의 야심작, 459장의 지도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 등 서양 열강과의 잇따른 전투에서 승리한 대원군은 국방 강화의 필요성을 다시금 인식하였다. 전국에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을 하는데 전쟁을 하지 않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척화비를 세우면서 항전의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진 것도 이러한 인식의 발로였다. 대원군은 서양의 동점(東漸)에 대하여 적극적인 대응책을 구상하였다. 관제와 군제의 개편, 군사 시설 확충과 함께 전국 각 지역, 특히 군사시설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읍지 편찬을 명하는가 하면 전국의 지도 제작을 지시하였다. 

 

1871년 전국에 읍지 편찬 작성을 명령한 대원군은 이듬해인 1872년 3월에서 6월에 걸쳐 전국 각 지방의 지도를 그려 올리게 했는데, 이들 지도 전체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459장의 지도에는 섬, 진 등 국방에 관한 내용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각 군현의 특징적 정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30여 년 전 조선 사회의 이모저모를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살펴볼 수가 있는 것이다. 1872년의 지방 지도는 오늘날 지도와는 달리 산수화풍으로 그려 있어 한눈에 아름다운 느낌이 들며 고을 전체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지도 제작에는 사물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전문 화원들의 역할이 컸다. 조선의 화원들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달리 개인적 작품보다 지도와 기록화 제작과 같은 국가의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화원들은 기록을 담는 사진사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풍속화는 화원들이 국가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고 남은 시간에 자신의 기량을 키우는 방편으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지도는 도별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중 가장 회화적으로 그려진 전라도의 지도들은 음양오행 사상에 입각하여 청, 백, 홍, 흑, 황의 색채를 적절하게 조화시켰으며, 예술적 가치도 뛰어나다. 오늘날 호남 지방이 예향(藝鄕)으로 불리는 데는 조선시대 화원들의 예술적 전통도 한몫했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경기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등의 일부 지도는 체제의 통일성을 갖추지 못한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물론 각 지방의 정서와 개성이 지도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몇 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 체제를 통일한 전라도 지도와는 달리 지방의 수령들이 중앙 정부의 명령에 의거하여 급하게 지도를 제작한 흔적이 역력하다. 어쩌면 중앙 정부의 지도 제작 의지와 신념이 각 지역마다 골고루 전달되지 못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872년 지도의 이모저모

 

1872년에 제작된 지방 지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도책이 아닌 낱장 지도로서, 전국 대부분의 지방을 포함하고 있는 대축척 대형지도라는 점이다. 각 지도의 크기는 가로 70~90센티미터, 세로 100~120센티미터 정도로, 지역마다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 오늘날의 측량 지도와 같이 정확한 지도는 아니지만, 지도의 내용은 매우 상세하고 정밀하며 회화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산과 하천, 도로, 고개, 성곽, 포구, 능원(陵園), 사찰, 서원, 향교, 누정(樓亭), 면리, 역, 점(店), 시장(市場)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모습을 다른 어느 지방 지도보다 상세하게 담았다.

 

 

대원군의 정책 반영

 

대원군 대의 국가정책을 반영하듯 사창(社倉)이 전국에 그려진 것이 흥미롭다. 대원군은 고리대금업으로 전락한 환곡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국에 사창을 설립할 것을 지시하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지 여부를 지도를 통해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대원군이 강력하게 추진한 해방(海防)정책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각 지방에 소속된 영(營), 진보(鎭堡), 목장, 산성 등 군사 시설을 별도로 그린 지도도 다수 포함하고 있다. 국경 방어와 관련된 진보 지도의 경우 경기도 2매, 전라도 28매, 경상도 41매, 황해도 19매, 평안도 45매, 강원도 2매 등 총 139매에 달한다. 전체 지도의 30퍼센트 정도가 국방 지도라는 점은, 전국에 그려진 척화비와 함께 대원군의 대외정책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도의 색채 또한 아름답다. 광물이나 식물에서 채취한 천연 물감으로 그려서 색채가 선명하고 변색이 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천연색으로 표현된 지도는 예술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동래부지도

 

오늘날 부산광역시를 포괄하는 동래부 지도에는 국방을 중시했던 당대의 분위기가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축조된 읍성이 그려 있는데 익성(翼城), 옹성(甕城)으로 이루어진 모습과 성을 둘러가면서 세워진 망루의 모습이 성내의 관아 건물과 함께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조선시대 동래부는 왜적 방어의 최전방 기지였다. 읍성을 중심으로 하여 해안 지역에 좌수영, 부산진, 다대진(多大鎭) 등의 진영을 그렸으며, 북쪽에는 금정산성의 모습도 나타난다. 남쪽의 절영도(絶影島) 근처에는 왜인들과 교역을 했던 왜관(倭館)이 그려 있다. 동래부 전체가 동남해안 방어의 중심지임이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그림1 : 『1872년 지방지도 동래부지도(규장각 소장)

 

 

 

읍성 안 관아배치

 

 

이외에도 각 지방의 지도에 담긴 내용은 다양하다. 우선 읍성 안의 관아 배치, 산과 하천, 도로, 시장, 고적, 봉수(烽燧), 조선시대 농협의 기능을 했던 사창(社倉) 등은 거의 모든 고을에 표시되었다. 왕이나 왕자, 공주의 태를 봉안한 태실, 실록과 의궤 등 기록물을 보관한 사고(史庫), 의로운 소와 개의 무덤인 의우총(義牛塚)과 의구총(義狗冢) 등은 연고 지역에 나타나 있다. 왕실, 기록물, 의리 등을 중시했던 선조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각 지역 관아 뒤편에는 둥근 형태 또는 가시나무로 둘러쳐진 형태 등 각기 다른 모습을 한 감옥이 거의 모든 지역에 그려진 것도 흥미롭다. 지도에 감옥을 그려 넣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천안지도

 

천안 지도에는 차령을 넘어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마다 둥근 원 안에 점(店)이 여러 곳에 표시된 것이 눈에 띈다. 점은 민간 숙박업소를 의미하는 곳으로 원래 관원들의 숙박업소인 역원(驛院)이 있었는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이처럼 민간 숙박업소가 교통의 요지에 등장하였다. 천안 지도에 보이는 ‘삼기리(三岐里)’는 지금도 유명한 ‘천안삼거리’를 표시한 것으로, 조선시대부터 이 명칭이 사용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림2 : 1872년 지방지도 천안군지도(10431)

 

 

무주지도

 

무주 지도에는 적상산사고의 모습이 부속건물까지 매우 상세히 그려 있는데, 이 한 장의 지도 덕에 사고 복원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강원도 양양의 지도에는 지금도 관광지로 유명한 설악산의 오색온천이 표시되어 있다. 전라도 해남과 진도, 순천 지도에 표시된 구선(龜船)은 당시에도 거북선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며, 개성의 지도에 표시된 선죽교는 정몽주를 후대에도 계속 기억하게 했을 것이다.

 

 

남원지도

 

오작교와 광한루가 과장되게 그려진 남원 지도는 당시에도 남원은 춘향의 고을이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459장의 지도 중 가장 아름다운 지도로 꼽힌다. 표시된 건물들을 빼면 산수화가 되고 다시 건물 표시를 넣으면 지도가 될 정도로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같다. 거기에 더하여 상세하고 풍부한 내용까지 담고 있다. 중앙에 크게 그려 놓은 남원 읍성은 마치 활짝 핀 꽃의 꽃술과 같다. 동서남북의 문과 각 문을 연결하는 성벽은 남원이 전형적인 읍성이었음을 보여준다. 읍성의 중심을 이루는 관아의 각 건물 모습도 다양하다. 백성들이 많이 드나들던 남문 가까이에 있는 보민청(補民廳:지방민의 구제 기관)과 연호청(烟戶廳:백성의 부역을 담당하고 관리하던 기관)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그림3 : 1872년 지방지도 남원부지도(10484)

 

 

 

태안지도

 

태안 지도에는 굴포(掘浦) 부근에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있는데 이 점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운하 공사 예정지다. 당시 호남의 세곡(稅穀)은 서해를 통해 한강을 거쳐 경창(京倉)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태안 앞 바다에서 세곡선이 자주 침몰하는 일이 발생하자 고려시대부터 운하 공사를 시작하였고, 이것이 조선시대에도 여러번 시도되었다. 태안과 서산을 잇는 운하(태안 지도에는 굴포와 흥인교를 연결하는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공사가 여전히 큰 숙제였음을 지도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초반 한반도 대운하 건설이 정치적 쟁점이 된 점을 상기하면 지도에 그려진 운하 건설 표시가 그저 옛 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459곳 지방의 모습이 담긴 1872년 지방지도는 각 지역의 130여 년 전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도시로 발전한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잃어버린 전통사회의 모습을 찾아보는 데 있어서, 1872년 지방지도와 같은 귀중한 자료가 적극 활용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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