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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의 허세를 꺾은 여중호걸’,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다

 

김민정(경상국립대학교 여성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시정의 유흥 세태와 탕자(蕩子)의 출현, 19세기 세태의 민낯

 

 

 

사진 1 : 이춘풍전(가람813.56-Y67,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후기는 상업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도시화의 진전 속에서 엄격했던 신분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소비적인 유흥 문화가 도시 전체로 급격히 확산되던 일종의 사회적 전환기였다. 이러한 시정(市井)의 유흥 열기를 주도한 핵심 세력은 이른바 왈짜라 불리던 중간계층이었다. 각 사의 서리와 역관, 군영 장교, 포교, 나장부터 시정 상인과 기부(妓夫)에 이르기까지, 권력과 부, 유흥이 어우러진 이들 왈짜 집단은 서울 곳곳의 청루(靑樓)와 주사(酒肆), 도박장을 주름잡으며 당시의 소비 문화를 주도했다.

 

19세기에 등장한 판소리계 세태소설 <이춘풍전(李春風傳)>은 바로 이 중세 해체기에 분출된 방탕한 시정 유흥 세태를 지극히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포착해 낸 문제작이다. 주인공 이춘풍은 장안의 손꼽히는 거부였던 부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향락의 세계에 빠져 가산을 한순간에 탕진하는 전형적인 상인 왈짜의 몰락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일상은 모화관에서의 활쏘기, 장악원 음악 감상, 바둑과 장기, 그리고 투전·골패·쌍륙·육자배기·사시랑이 등 온갖 도박으로 채워진다. 여기에 어른을 보면 술을 대접하고 아이들에게까지 선심 쓰듯 돈을 퍼주며, 벙거짓골 열구자탕과 너비할미 갈비찜 같은 고급 음식을 펼쳐놓고 매일같이 청루의 미색들과 장취(長醉)하니 아무리 천하의 부자라 한들 당해낼 리 없었다. 재물이 바닥나자 함께 어울리던 오입장이들과 기생들은 순식간에 그를 외면해 버린다.

 

더욱 한심한 것은 가산을 탕진한 이후 춘풍이 보여주는 가부장적 위선과 폭력성이다. 거지가 되어 돌아온 그에게 아내 김씨가 주색잡기로 패가망신한 장안 한량들의 이름을 들며 참된 삶을 살라 간곡히 충고하자, 춘풍은 일수·월수를 놓아 겨우 호구지책을 이어가던 아내에게 비굴하게 사정하여 다시는 주색에 참견하지 않겠다는 각서(수기)까지 써주며 가권을 이양한다. 그러나 아내가 밤낮으로 바느질과 길쌈을 하고 고리대금까지 놓아 사오 년 만에 수천 금의 가산을 다시 일구어놓자, 춘풍의 헛된 체면의식과 가부장적 허세가 또다시 고개를 든다.

 

춘풍은 과거의 반성은커녕 호조(戶曹)의 공금 이천 냥을 빚내어 평양으로 장사를 가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아내 김씨가 과거 수기를 상기시키며 평양 기생들의 음흉함과 사치스러움을 경계하자, 춘풍은 대노하여 착한 아내의 머리채를 뱃사공 닻줄 감듯 휘휘 칭칭 감아쥐고 집안이 떠나가라 폭행을 휘두른다. 경제적 자립 능력과 가장으로서의 실질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태백이도 주색을 즐기며 한림학사를 지냈다느니 나도 이리 놀다가 일품 벼슬을 하고 이름을 남기겠다느니 하는 허황된 변명과 출세욕으로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이처럼 실질은 없으면서 명분과 권위만을 내세우는 조선 후기 왜곡된 가부장제의 한심한 민낯과, 시정 유흥 문화에 중독되어 스스로 인간성을 파괴해 가는 한 탕자의 초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남장(男裝)속임수 권력’: 해결형 남장 화소의 서사적 작동

 

 

방탕함과 무능으로 파탄 직전에 도달한 가정을 구원하는 주체는 춘풍의 아내 김씨이다. 아내 김씨는 춘풍이 주색잡기로 집안의 모든 재산을 모조리 탕진했을 때, 신세 한탄에 그치지 않고 즉시 치산에 나선다. 그녀는 침재와 길쌈, 방직 등 밤낮없는 노동을 밑천 삼고, 나아가 장변과 월수·일수 같은 고리대금까지 놓으며 사오 년 만에 수천 금의 부를 다시 일구어내는 강인한 생활력과 합리적인 경제관념을 발휘한다.

 

그러나 춘풍은 아내의 피땀 어린 노동 덕분에 겨우 회생했음에도 가부장적 허세를 버리지 못한다. 과거 다시는 주색에 참견하지 않겠다며 아내에게 써준 각서까지 무시하고, 호조(戶曹)의 공금 이천 냥을 대돈변으로 얻어내어 아내가 번 돈 오백 냥과 함께 평양으로 장사를 떠난다. 평양에 도착한 춘풍은 기생 추월의 간사한 유혹과 교태에 빠져 장사는 뒷전인 채 이천오백 냥을 순식간에 탕진한다. 추월에게 모든 재물을 갈취당한 춘풍은 거적때기를 걸치고 이 빠진 헌 사발에 누른밥과 토장 덩이를 얻어먹으며, 물이나 긷고 공소를 비우는 추월 집의 사환(하인) 노릇을 하는 비참한 거지 신세로 전락한다.

 

남편이 기생집의 하인으로 전락해 생불여사의 고초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씨는, 닥쳐온 절망적 위기 앞에서 운명이라 여기며 수동적으로 인내하거나 체념하지 않는다. 그녀는 문제 해결을 위해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운다. 가세가 빈한한 참판댁 대부인에게 침재품을 팔아 정성껏 차담상을 내어주며 신임을 얻은 뒤, 참판이 평양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있지도 않은 오라버니를 핑계 대어 자신을 회계비장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김씨는 여자의 의복을 벗어놓고 망건과 관자를 갖춘 뒤 남복으로 개착하여, 당당하고 표연한 기남자의 형상으로 직접 남장(男裝)을 감행한다.

 

이 장면에서 작동하는 남장 모티프는 여성영웅소설의 활약형 남장과 명확히 구별되는 해결형 남장 화소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성영웅소설의 남장이 출장입상과 같은 공적 성취나 명예 추구, 혹은 신분 상승이라는 장기적 목적으로 수행되고 남장 해체에 따른 내적 긴장을 수반한다면, <이춘풍전>의 남장은 당면한 현실적 가정 위기와 소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적 권위를 잠시 빌려 연기하는 일시적 속임수 권력으로 작동한다. 김씨는 비장 직채에 머무를 의지가 없으며, 남장이 변성(變性)이라는 이유로 받게 될 사회적 지탄이나 두려움조차 느끼지 않는다.

 

비장으로 위장한 김씨는 관아로 춘풍을 불러들여 호조 공금을 탕진한 죄목으로 형틀에 매어 매질을 가하고, 매를 견디지 못한 춘풍이 추월에게 돈을 빼앗겼다고 자백하자 추월까지 바삐 잡아들여 별태장으로 서리같이 호령한다. 죽음의 공포에 질린 추월로부터 호조 돈 이천 냥에 자모지례(이자)를 더한 오천 냥을 몰수히 회수해 냄으로써 근본적인 문제 상황을 해결하고 가산까지 크게 확장해 낸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이 가문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한계를 넘어, 관권의 외피를 지혜롭게 빌려와 가장의 무능과 기생의 탐욕을 한꺼번에 치죄해 낸 정교한 서사적 사고실험이자 주체적인 문제 해결의 극적인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신랄한 풍자에서 해학적 포용과 화해로

 

<이춘풍전>의 서사는 결말 부근에 이르기 직전까지 오직 가부장의 위선과 허세를 향한 신랄한 풍자로 일관한다. 비장 덕분에 평양 기생 추월의 구박과 거지 신세에서 벗어나 돈을 받아 챙겨 서울 집으로 돌아온 춘풍은, 정작 자신을 목숨 바쳐 구원해 준 회계비장이 자신의 아내였다는 정체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 반성의 빛은커녕, 아내가 정성껏 차려온 술상과 안주를 젓가락으로 던져 박고 고기를 씹어 뱉어 버리며 오만방자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안주도 좋지 않고 술맛도 무미하다. 평양에서는 좋은 안주로 매일 장취하여 입맛이 높았는데, 집에 오니 온갖 것이 다 어설프다. 호조 돈이나 다집하고 약간 전량을 수쇄하여 평양으로 다시 내려가 작은 집과 한가지로 살리라라며 다시 뻔뻔스럽게 가부장적 권위와 허세를 부리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전형적인 극적 아이러니의 구조를 띤다. 서술자와 독자, 그리고 아내 김씨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반면, 정작 춘풍 자신만은 완벽한 무지의 상태에서 거짓과 오만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남편의 허세와 개과천선하지 않는 태도를 참지 못한 김씨는 마침내 극약 처방을 내린다. 방으로 들어간 김씨는 다시 비장의 복색으로 바꾸어 입고 나와 남편의 눈앞에 나타난다. 방금 전까지 아내에게 큰소리를 치며 호기를 부리던 춘풍은, 엄숙한 기운의 회계비장이 다시 나타나자 질겁하여 황송하게 굴고 갈분 죽을 쑤어 올리라는 명령에 허겁지겁 부엌으로 들어가는 비굴함을 보여준다. 이 비장의 2차 재출현과 희롱은 남편의 거짓 체면과 봉건적 가부장권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개탄스러운 허상인지를 처절하면서도 유쾌하게 폭로하고 조롱하는 신랄한 풍자의 절정이다.

 

그러나 <이춘풍전>은 춘풍을 사회적으로 철저히 파멸시키거나 비정한 파괴로 몰아넣는 선에서 풍자를 끝맺지 않는다. 남편이 부엌에서 지레 겁을 먹고 떨고 있을 때, 김씨는 관망과 탕건, 웃옷을 훨훨 벗어 던지고 원래 아내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뒤늦게 비장과 아내가 동일 인물이었음을 깨달은 춘풍은 이것이 생시인가 꿈인가, 평양 회계비장이 내 아내 될 줄 어찌 알았으리라며 멍하니 두 손을 마주 잡고 어이없어한다.

 

이 순간 아내 김씨는 남편을 비참하게 내팽개치지 않고 연민의 정으로 감싸안는다. “참판댁 대부인께 차담상을 대접하여 비장이 되었을 적엔 임자를 만나면 반만 죽이려 하였더니, 막상 만나 보니 차마 불쌍하여 더 치지 못하고 용서하였다. 사오 년 내 고생하던 생각을 하면 당신 맞던 매가 깨소금이라며 유쾌한 너스레와 농담을 던진다.

 

이처럼 부정적 대상에 대해 드러내는 아내의 연민과 동정의 마음은, 이 소설이 비정한 풍자를 뛰어넘어 포용적인 해학(諧謔)의 미학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대목이다. 풍자가 대상의 추악함과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공격하는 비판적 부정에 집중한다면, 해학은 그 부정을 거쳐 한 차원 높고 화목한 긍정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풍자의 목적은 춘풍을 온전히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그릇된 삶의 태도를 바로잡고 개선하여 가정의 회복을 이루는 데에 있다. 아내의 지혜롭고 재치 있는 강타를 맞고서야 자신의 부끄러움을 뼈저리게 각성한 춘풍은, 마침내 주색잡기를 전폐하고 치가(治家)에 힘쓰는 인물로 거듭난다.

 

결국 호조 돈을 모두 갚아 빚을 청산하고, 재산을 넉넉히 일구어 자녀를 낳고 백년해로(百年偕老)하는 화목한 가정을 되찾으며, 아내 김씨가 세상 사람들에게 여중호걸(女中豪傑)’이라 높이 평가받게 되는 결말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는 춘풍이 마침내 존재하는 실상에서 존재해야 할 바람직한 상태로 탈바꿈하고, 신랄하게 분출되던 풍자가 따뜻한 해학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결실을 맺는 미학적 승화를 극명하게 증명해 준다.

 

 

 

19세기 매체 전환과 근대적 가치관의 수용: 새로운 시대, 새로운 가정 윤리의 선언

 

소설사적·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때 <이춘풍전>은 중세의 최말단 혹은 근대 초기의 이행기에 출현한 대단히 독보적인 위치의 텍스트이다. 이 작품은 1860년대 시정에서 활발히 연행되던 판소리 <무숙이타령(왈짜타령)>1890년대 독서물 형태의 소설인 <게우사>로 정착되고, 1896년 근대 신문인 한성신보에 연재된 소설 <남준여걸(男蠢女傑)>과 필사본 <추월전>을 거쳐 개작·재창작된 다층적인 서사적 궤적을 지니고 있다. , 구비 전승과 근대 신문 매체, 그리고 전통적 필사본 향유 관습이 교차하는 미디어의 전환기적 시점에서 탄생한 작품인 셈이다.

 

이러한 특이한 형성 배경은 작품이 지닌 가치관의 급격한 전환과도 직결된다. 기존 고전소설이 남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인내와 순종을 뼈대로 하는 봉건적 이데올로기 속 정절()만을 강요했다면, <이춘풍전>은 근면·성실과 합리적 경제 관념을 바탕으로 주도적으로 가정을 이끄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다.

 

실질적인 생산 능력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고 방탕에 빠지는 가부장적 권위는 한낱 실소의 대상에 불과하며, 근면한 노동과 경제적 자립이야말로 가정을 지탱하는 진정한 힘이라는 근대적 사유가 작품의 저변에 깊이 깔려 있다.

 

결국 <이춘풍전>19세기 세태의 음울한 방탕함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내 김씨의 주체적인 위기 타개와 연민을 통한 해학적 화해를 그려낸다. 이를 통해 봉건적 가부장제의 허구성을 여실히 깨뜨리는 한편, 부부가 서로 상호 존중하며 대등하게 서는 평등하고 새로운 부부 윤리의 가능성을 당당히 선언한 근대전환기의 명작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준형, 「〈이춘풍전, 형성 시기 논란과 향유의 문제, 글로컬 어문학 문화 연구9, 글로컬 어문학 문화 연구소, 2021.

송철호, 「〈이춘풍전에 있어서 풍자와 해학의 문제, 한국문학논총65, 한국문학회, 2013.

유요문, 「〈이춘풍전속 해결형 남장 화소와 그 교육적 시사점: 남장 화소의 네 유형을 중심으로, 글로컬 어문학 문화 연구19, 글로컬 어문학 문화 연구소, 2025.

조은희, <이춘풍전>의 여성의식 변모 양상, 우리말글26, 우리말글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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