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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로 조선시대 사회상을 읽다, 대구서씨세보

 

유수지(한성대학교 박사과정)

 


사진 : 大邱徐氏世譜(5387-v.1-4)

 

 

나의 취미나 특기, 관심사부터 취향까지. 오늘날 자신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건 나로부터 비롯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로는 온전히 개인을 설명할 수 없다. 자신이 사는 지역이나 다녔던 학교, 직장부터 가족이나 친구 등 속했던 집단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집단 안에서의 나의 역할 혹은 위치도 곧 자신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족보가 그러한 역할을 맡았다. 어느 개인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분이나 관직으로만 설명될 수 없었다. 어떤 성씨의 어느 집안의 사람인지, 아버지는 누구이고 할아버지는 누구인지, 또 어떤 집안의 사람과 혼인을 올렸는지가 곧 그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주었다. 족보는 그러한 개인에 대한 정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책이었다.

동시에 족보에 실린 그러한 개인의 방대한 정보들은 동일한 성씨를 가진 이들, 즉 같은 부계 친족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특히 특출난 선조의 존재는 그 자체로 집안의 사회적 격을 높여주었다. 이에 후손들은 그러한 격을 유지하거나 더 드높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족보를 간행하였다.

1775(영조 51)에 만들어진 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이하 을미보, 5387)는 지금의 서울과 경기도 등지에 살며 중앙정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대구서씨들이 세 번째로 간행한 족보이다. 족보 간행 당시 대구서씨는 왕실과의 혼인과 지속적으로 현달한 관직자를 배출하여 명실상부한 거족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자신들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도록 족보의 기재방식을 더욱 공고히 하고, 목적이나 범례(凡例)에 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대구서씨의 성장과 18세기 족보의 간행

 

 

 

대구서씨는 고려조 군기소윤 서한(徐閈)을 시조로 둔 성씨이다. 그들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대대로 살며 조선 전시기에 걸쳐 중앙정부에서 활동하였는데, 특히 서거정(徐居正) 이후 서성(徐渻)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서성은 선조대부터 인조대까지 호조·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인물로, 그 후손들은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서성의 아들 서경주(徐景霌)는 선조의 딸 정신옹주와 혼인하여 사위가 되었으며, 서경수(徐景需)의 고손녀는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가 되었다. 꾸준한 관직자 배출도 이어져 대구서씨는 정조대에 이르러 중앙정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성씨 중 하나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 규장각 대제학을 지낸 서명응(徐命膺)과 직제학을 지낸 그 아들 서호수(徐浩修) 등이 있다.

16세기부터 대대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던 대구서씨는 18세기 초인 1702년 첫 족보를 만들었다. 가장 오래된 족보로 일컬어지는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1476)에 서거정이 권근의 외손자격으로 서를 작성했었던 것을 감안 한다면, 대구서씨의 족보 간행은 비교적 늦게 이루어진 것이다. 대구서씨는 이어 1736년에는 두 번째 족보를, 그리고 1775년에 세 번째로 대구서씨세보를 간행하였다. 34, 39년을 간격으로 18세기 전반에 걸쳐 첫 족보부터 세 번째 족보까지 완성된 셈이다.

대구서씨는 타성에 비해 늦게 족보를 간행했지만, 족보를 통해 드러내려는 의식이나 목적은 다른 성씨들과 같았다. 17세기 이후 족보의 간행은 부계 중심의 문중 발달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불안해진 사회를 유교적 사회질서를 통해 다시 안정적으로 바로 잡으려는 방편이었다. 부계친족을 중심으로 가족과 친척들이 하나로 결집하여 내부적으로 그 질서와 위계가 잡히고 이를 토대로 가문과 가계를 유지하고 발전해나가고자 한 것이다. 대구서씨 역시 지속적인 족보 간행으로 현달한 서성의 자손이라는 유대감을 통해 친족 간의 결집력을 다지고, 나아가 대외적으로 대구서씨 가문의 위상과 발전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특히 대구서씨는 이를 위해 서성과 그 이후 후손들의 현달함을 강조하였다. 1702대구서씨세보1736대구서씨세보그리고 1775대구서씨세보까지 세 족보의 발간사라 할 수 있는 서와 기재 규칙인 범례에는 이들에 대한 칭송이 반드시 언급되어 있다. 그중 1775대구서씨세보에는 다음과 같이 서성과 후손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하나, 소윤공 서한(少尹公 徐閈) 이하로 모두 한 두 파가 서로 전하여 왔으나 충숙공(忠肅公 徐渻)에 이르러 네 아드님을 두시어 파별이 더욱 번성한 까닭에 이제 소윤공으로부터 충숙공에 이르기까지 무릇 14세를 갑()편으로 하였고,

대구서씨세보(1775) 을미중간 대구서씨세보 범례

 

 

 

경파인 대구서씨와 향파인 달성서씨

 

 

 

본관이 대구인 대구서씨와 본관을 달성으로 한 달성서씨는 같은 성씨로 인식된다. 본관이 같은 지역인 대구(달성)이기 때문이다. 대구서씨와 달성서씨 역시 때때로 서로를 본관이 같은 동족으로 인식했다. 예컨대 현재 대구에 남아있는 구암서원(龜巖書院)에는 달성서씨인 서침(徐沈)과 함께 대구서씨인 서거정(徐居正)과 서성(徐渻)이 함께 배향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19세기 대구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달성서씨 서찬규(徐贊奎, 1825~1905)는 자신의 일기인 임재일기(臨齋日記)에서 서울에 올라가면 대구서씨인 판서 서희순(徐憙淳)과 승지 서대순(徐戴淳)에게 찾아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고 종종 기록해 두었다.

그러나 족보를 작성할 때 대구서씨는 달성서씨를 본관은 같지만 시조는 다른, 대구서씨와는 다른 존재로 인식하였다. 이는 대구서씨세보(1775)에서 잘 드러난다. 족보의 기재 규칙인 범례에서 달성서씨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유독 서씨의 하나는 판도공파(달성서씨)가 되고 하나는 전객공파(대구서씨)가 되었어도 성과 관이 같고 거주가 동부이니 한 파에서 나온 것을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판도공파(달성서씨)는 이미 족보가 있으니 이제 임오보(1702년에 간행된 최초의 대구서씨세보)에 기록된 구본에서 증손함이 없이 임편에 실어 그 대개를 보인다.

대구서씨세보(1775), 을미중간 대구서씨세보 범례

 
 
 

사진 : 大丘徐氏世譜119~20

 

 

위에서 언급된 임오보는 최초의 대구서씨 족보인 대구서씨세보(1702)를 말한다. 대구서씨는 임오보를 간행할 당시에도 달성서씨와의 구분을 위해 이들을 별보(別譜)에 따로 기재하여 그 차이를 나타내었다. 여기에 더해 1775년 간행된 대구서씨세보에서는 달성서씨가 이미 1755년에 달성서씨족보(達城徐氏族譜)를 간행하였다는 점을 들어 이번에도 기재상 차이를 두도록 하였다. 그 차이는 별도의 인원 추가 없이 임오보에 기재된 달성서씨 기재인물들을 그대로 가져와 작성하는 것이었다. 다만 1775대구서씨세보에는 달성서씨를 별보가 아닌 본보(本譜)에 기재하였다. 대구서씨와 달성서씨는 다르지만 또 같다는, 동족이라는 표현이 기재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대구서씨세보(1755)에는 서한을 시조로 두고, 서울과 경기도 인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서씨들로 그 기재인물들이 한정 지어졌다.

 

 

 

족보의 변천과 대구서씨세보(1775)의 형태

 

조선시대의 족보를 정의해본다면 한 가문의 친족 간 혈연관계를 일정한 원칙에 따라 정리한 가계기록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족보의 형태나 대구서씨 족보의 모습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서서히 완성된 것이지,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전기에는 가계기록을 가첩(家牒)이나 가승(家乘)으로 불렀다. 가첩과 가승의 가계기록 방식은 시조 혹은 중시조부터 자신까지의 직계 조상을 기록하는 형태로 친가와 외가가 모두 포함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 조선시대에는 자신을 나타내는데 어느 혈통인가가 중요했다. 따라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이들의 조부와 조모, 증조부와 증조모는 모두 어느 집안 출신인지가 상세히 적혀있었다. 이 때문에 가첩과 가승을 가계기록을 내외보(內外譜)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가문이 성장하며 후손들이 증가하고, 유교적 종법 질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측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며 족보의 형태 역시 영향을 받아 변화되기 시작했다. 가능한 많은 후손을 족보에 담기 시작했고, 족보의 간행을 통해 유교적 질서를 적용시킨 가문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자 하였다.

대구서씨세보(1775)는 부계혈연 중심의 종법 질서가 발달·확장하던 시기에 제작된 족보였으며, 족보를 제작하던 대구서씨들도 이를 중요시 여겼다. 특히나 제작자들 중 서명응은 족보의 제작이 유교적 종법 질서를 따르는 것으로 여겼고, 서종급(徐宗伋)은 타성의 족보들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대구서씨세보(1775)의 기재 규칙인 범례를 만들어내었다.

 

 

증수(增修)를 하자면 아름다운 점을 모두 취하여야 하고 이로부터 7~8년 동안 공(서종급)께서 청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타성 족보 10여 책을 열람하여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여 다시 의례를 세워

대구서씨세보(1775), 을미중간 대구서씨세보 서

 

 

대구서씨 족보의 범례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변화된 것은 부계 혈연 중심의 기재였다. 범례에는 내외(內外)의 구분을 확실히 하기 위해 기존에 외손의 기재 정도를 5대나 6대까지 기재하던 것을 외손 즉 2대에 한하여만 기재한다고 명시해놨다. 유교적 종법 질서에 따라 부계 친족을 더욱 중시하게 되면서 외손과의 구분을 기재방식 자체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 하나는 임오보(1702년 족보) 병진년(1736년 족보) 때는 본종(本宗)이 번성하지 아니하여 보책이 매우 간략한 까닭에 외손을 간혹 5~6대에 이르도록 기재하였으나 이제는 후손이 번성했을 뿐만 아니라 편집이 호대(浩大)하고 불가불 내외의 분별도 조금 두어야 하는 까닭에 단지 외손에 한하여 기재하고

대구서씨세보(1775), 을미중간 대구서씨세보 범례

 

 

같은 서씨 내에서도 이러한 구분은 이어졌다. 대구서씨세보(1775)에서는 이전 족보들과는 달리 남과 여의 구별이 이루어졌다. 남자 후손을 먼저 기록하고 여성 후손을 그 뒤에 기록하는 선남후녀의 기재방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외손에 있어 이 같은 기재방식이 적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직계와 외손 간의 구분을 위해서였다.

 

 

그 하나는 본종은 남을 먼저 쓰고 여는 뒤로 쓰되, 딸 아래에 차례를 적어서 그를 식별하게 하였고

대구서씨세보(1775), 을미중간 대구서씨세보 범례

 

 

서자에 대한 구분은 더욱 심화되기도 했다. 서자는 직계 남성과 첩 사이에서 태어나, 조선 전반에 걸쳐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존재들이었다. 이들과 직계손에 대한 구분은 종법 질서의 발달과 함께 더욱 엄격해졌는데 족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서자의 기재는 남녀를 포함한 대구서씨 직계손을 기재한 다음에야 기록되었다. 또한 관직이나 졸년의 표시 등 인물에 대한 정보 기록에 있어서도 직계와 차등을 두기도 했다.

 

 

 

참고문헌

 

 

대구서씨세보(1702)

대구서씨세보(1775)

대구서씨세보(2003)

임재일기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한국의 유교화 과정, 너머북스, 2013

권오영, 조선시대의 족보(族譜)기록에 보이는 유교이념(儒敎理念)의 양상과 의미, 한국계보연구, 1, 2010

유수지, 18~19세기 族譜를 통해 본 大丘徐氏 동족집단의 구성, 조선시대사학보10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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