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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숙종34천동상위고
(天東象緯考)

 

경석현(국립대구과학관 선임연구원)

 


사진 : 天東象緯考(4452-v.1-8)

 

 

 

천동상위고(天東象緯考)  

 

 

천동상위고(天東象緯考)1708(숙종 34) 천문학겸교수 최천벽(崔天璧, 1640~1713)이 쓴 고려시기의 재이 기록 문헌이다. 최천벽은 고려사(高麗史)천문오행지(天文五行志)에 수록된 재이 기사를 나름의 목차에 맞게 정리하고, 재이의 점성적(占星的) 의미와 이것이 초래한인사(人事)에서의 사건[=응험(應驗)]을 덧붙여 188책 분량으로 펴냈다. 천동상위고18세기 초 조선 지식인의 재이로 본 고려사라 할 수 있다.

천동상위고의 저자 최천벽에 대해 살펴보면, 그의 본관은 전주이다. 그의 부친은 최경헌(崔敬憲, 1602~1674), 조부는 최부(崔富, 1547~1606), 모친은 세종의 부마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 1415~1462)6세손 안국량(安國樑)의 딸, 부인은 윤존도(尹存道)의 딸 남원윤씨(南原尹氏)였다. 최천벽 가문의 당색은 서인 소론계라고 할 수 있다. 부친의 삼촌인 최안(崔安)은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문인이었고, 아들 최경행(崔敬行)은 성혼(成渾, 1535~1598)의 문인이었고, 이식(李植, 1584~1647)과도 친분이 깊었다. 이들은 성리설의 이론 탐구에만 몰두하는 학문 태도를 비판하고 익힌 바를 힘써 행하고 실천하는 무실(務實)의 학풍을 추구했다는 면에서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도학(道學)을 계승했다고 평가받는다. 성수침 성혼 부자의 실천 의리 강조는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들의 양란(兩亂) 시기 의병의 조직과 참전으로 나타났는데, 최안과 최경행 부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정유재란 때 의병을 조직하고 군량을 모아 명() 장수에게 보냈고,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난의 진압에 가담했다. 이 점에서 최안최경행 부자는 서인 우계학파 내에 위치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전라도 고부 출신의 사인(士人) 최천벽은 1684(숙종 10) 10월 그의 나이 45세에 천문학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관상감의 천문학겸교수에 제수되었다. 천문학겸교수는 중종 대에 천문학 업무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치된 관직이다. 사대부 출신의 생진(生進), 유학(幼學), 사인(士人) 중에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천문학 분야의 전문가를 겸교수로 선발해서 관직을 주고 관련 업무를 보게 하였다. 특히, 45개월만 근무하면 동반의 참상관으로 천전(遷轉)할 수가 있어서 청선(淸選)’으로 불리기도 했다. , 전라도 고부 출신의 사인 최천벽은 천문학에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아 천문학겸교수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천동상위고의 편찬과 관련해서는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영향이 컸다. 최석정은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인물인데, 최석정은 1687(숙종 13) 7월 이민철(李敏哲, 1631~1715)과 함께 혼천의(渾天儀)를 개수했고, 이를 제정각기(齊政閣記)로 정리했다. 또 중국에 사행 가는 관상감 관원에게 의상지(儀象志)를 구입해 오도록 했고, 이를 토대로 일영의(日影儀)반천의(半天儀) 등을 제작했다. 최석정이 이렇게 천문학 관련 활동을 할 무렵 최천벽은 이미 천문학겸교수에 제수되어 있었다. 최천벽과 최석정의 만남은 천문학 관련 활동을 하면서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전주최씨 출신의 최석정(崔錫鼎, 1646~1715)도 우계학풍을 계승한 서인 소론계 인물이었다. 최석정의 증조부 최기남(崔起南, 1559~1619)은 최경행과 함께 성혼에게서 수학했고, 최경행과 친분이 깊었던 이식은 최석정의 조부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과 학문정치적으로 친밀했다. 숙종대 천문역산학 활동시기가 겹치고, 가문적으로도 가까웠던 최석정과 최천벽의 만남은 자연스레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천동상위고(天東象緯考)를 펴낸 이듬해(1709) 3월 최석정은 천동상위고의 서문을 다시 지으면서 본래 천동상위고를 펴낼 뜻은 품고 있었지만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가 천문학겸교수 최천벽이 상위지학(象緯之學)’에 정밀하다고 하여 그에게 편찬을 맡긴 것이라 했다. 또 최석정은 최천벽의 만시(挽詩)에서 서운관[관상감] 영사 시절에 상위설을 밝히려고 했는데, 최천벽이 낭청에 소속되어 천동상위고의 편집에 정밀함과 자세함을 다했다고 했다. 관상감 영사 시절이란 영의정 재임 기간을 뜻한다. 최석정은 1701(숙종 27)부터 1709(숙종 35) 병으로 사임할 때까지 약 9년 간 영의정으로 있었다. , 이 기간 동안 천동상위고의 기획과 집필이 이뤄졌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천동상위고를 기획한 이는 최석정이고, 그 의도에 맞게 집필을 한 이가 최천벽이라고 할 수 있다.

천동상위고에 앞서 역대상위고(歷代象緯考)가 먼저 출간되었다. 역대상위고는 마단림(馬端臨, 1245~1323)이 지은 문헌통고(文獻通考)중에서 상위고(象緯考)(278~294)만을 별도로 엮은 문헌이다. 역대상위고는 중국의 역대 재이(災異)와 이에 따른 응험(應驗)을 일대일로 연결 지었다. 그래서 조선 초에는 문헌통고상위고가 어떤 별이 어떤 색이면 어떤 응험이 있고, 또 어떤 형태면 어떤 일이 있다[모사모응]’는 식으로 견강부회했으므로 강학(講學)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청도 있었다.

조선에서 자국(自國)의 재이를 이러한 모사모응의 방식으로 정리한 적은 없었다. 재이가 출현했을 때 간혹 고려사천문오행지를 참고했을 뿐 별도의 문헌으로 정리한 적은 없었고, 17세기 이후에 재이 관련 문헌이 적지 않게 편찬되었는데, 모두 경서(經書)나 중국의 정사(正史)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최석정은 천상(天象)을 살피는 것은 반드시 전사(前史)에서 증험해야 그것이 부른 감응(感應)을 밝힐 수가 있는데, 동방(東方)의 문헌에는 징험(徵驗)이 없고, 고려조(高麗朝) 이전 시대는 무릇 재이와 응험에 관계된 것을 뽑아 책으로 만든 적이 일찍이 없어서 식자(識者)가 그것을 근심했습니다.”라고 하여 천동상위고의 기획 의도를 밝혔다. , 역대상위고의 출간을 계기로, 자국(自國)의 역사 속에서 재이와 응험을 드러내 보일 목적으로 천동상위고의 편찬을 기획했던 것이다.

천동상위고188책 분량에 64개의 세부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천()(1), ()(2), ()(3 4), ()(5), 오성(五星)328(6~13), 혜성(彗星)(14), 유성(流星)(15~17), 잡변(雜變)(18)에 관한 재이가 있다. 재이 기사는 기본적으로 재이(災異)-점왈(占曰)-응험(應驗)의 구조로 실려 있다. “언제 어떤 재이가 있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였으며 이로 인해서 어떤 응험[사건]이 일어났다정도로 풀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사의 구조는 역대상위고에서 착안한 것이다. 재이의 대부분은 고려사천문오행지에서 뽑았고, 점왈 부분은 역대상위고와 함께 천변의 고험(考驗)에 널리 활용되었던 관상완점(觀象玩占)을 참고했다. 그리고 응험은 재이와 마찬가지로 고려사에서 뽑았다. 천동상위고에는 이와 같은 재이 기사가 1,456건이 실려 있다.

 

 

천동상위고재이 기사 예시

[재이] 인종 12년 갑인(1134) 5월 무인 광주(廣州)에 우혈이 내렸다. [점왈] 점에 말하길, 3년을 넘지 않아 병란(兵亂)이 일어난다고 한다. [응험] 이듬해 정월 승려 묘청 등이 서경을 점거하고 모반했다. 2년 후에 김부식이 서경을 평정했다

      (출처: 天東象緯考』 1, 天雨血占, 4)

 

 

천동상위고속 재이의 점성적 의미는 대부분 정치경제사회적 위기에 관한 것이다. 군주의 죽음이나 교체, 정치기강의 문란, 신하의 모반, 여주(女主)의 천권(擅權), 내란, 외침, 기근, 전염병, 가혹한 형벌, 과중한 토목공사 등 국가적 위기에 관한 내용이 많다. 동아시아의 전통천문학이 워낙에 국가점성학(國家占星學)으로 발달한 탓에 그 내용도 국가나 정치적 사건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물론 그에 대한 응험도 대부분이 국가적 위기에 관한 내용이다.

재이와 응험을 일대일로 연결 짓는 모사모응의 천인감응론적 재이 해석은 한 대에 등장한 것으로 북송 대에는 이미 널리 비판받았다.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성인은 천과 인을 단절시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천을 인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면서 천과 인이 끊어지면 천도가 폐해지고 천을 인에 참여시키면 인사가 미혹해진다고 했다. 이어서 춘추(春秋)에 비록 일식이나 성변과 같은 재이가 있지만 공자는 여기에 대해 말한 적이 없고 진한(秦漢) 이래의 학자들이 재이에 미혹되어 천문오행의 설이 번성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이(程頤, 1033~1107)는 동중서(董仲舒)의 천인상여론(天人相與論)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이후에 등장한 한 대의 유학자들이 이것을 지나치게 밀고 나갔으며 특히 모사에는 모응이 있다는 방식의 재이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최천벽이 이미 견강부회라고 비판받았던 전통적인 천인감응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은 아니다. 천동상위고의 재이 기사를 검토해 보면 서로 다른 재이와 점성적 의미에 대해 동일한 응험을 제시한 경우도 많고, 응험이 재이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되면 재이와 응험의 실질적인 감응 관계는 퇴색된다. () 대의 참위적 재이설은 재이와 응험의 관계가 매우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다. 재이와 응험이 광범위하게 연관되면 재이를 특정 사건의 예언이나 조짐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동상위고의 재이와 응험은 구체성도 떨어지고 개별적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 재이와 응험의 감응을 실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응험의 인사를 강조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최천벽은 다양한 재이를 통해 국가적 위기가 있었음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지 한 대의 천인감응론을 실증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천동상위고재이 기사의 재이와 응험의 감응은 최천벽의 문제의식 속에서 재해석된 것이지 천인감응에 대한 순수한 믿음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재이와 응험의 일대일 대응방식으로 재이 기사를 정리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힌트는 그의 서문에서 찾을 수가 있다. 최천벽은 재이와 응험의 유기적 사유를 전통적인 천인감응론이 아닌 주역(周易)관상완사(觀象玩辭)’에 입각해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을 살피고 사()를 완미(玩味)한다면 성조(聖朝)가 수성(修省)하고 격치(格致)하는 데에 만의 하나라도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것이다. 최천벽은 서문의 말미에서 관상완사를 통한 숙종의 수성과 격치를 언급했다. 관상완사란 상을 살피고 사를 완미한다는 뜻으로 주역에서 제시하는 군자의 수양론(修養論)이다. 주역에서는 군자가 거()할 때는 그 상()을 보고 사()를 완미하며, ()할 때는 그 변()을 보고 점()을 완미한다고 했다. 주역이 상과 사로 가득하지만 본의는 하나의 상과 사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말고 그것이 변화하는 이치를 살펴 매사에 알맞은 처신을 할 수 있게 끊임없이 궁리하라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관상완사의 의미였다.

16세기 중반 이래로 조선에서는 주역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고, 역학적(易學的) 자연인식 또한 널리 확산되었다. 천동상위고를 기획한 최석정은 그 대표적인 학자이며, 최천벽 또한 역리(易理)에 밝았다. 주역의 관상완사에 입각해 보면, 천동상위고의 재이는 괘상, 또 점성적 의미와 응험은 괘사가 될 것이다. 아마도 재이 보기를 주역의 괘상 보듯 하고 응험을 마치 괘사처럼 여겨, 재이와 응험의 역사적 변천을 통해 현실정치를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하라는 요청에서 재이와 응험을 일대일로 대응시켜 고려사의 재이를 재정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천동상위고속 재이 기사의 재이와 응험이 갖는 감응의 구조는 얼핏 한() 대의 참위적이며 예언적인 재이 해석과 유사해 보이지만 진의는 그와 다르다. 최천벽은 천동상위고를 통해 전통의 천인감응론을 실증하기 보다는 고려시기에 발생한 정치 사회적 위기를 당대의 재이와 함께 인식함으로써 군주인 숙종에게 재이를 맞아 위기의식을 갖고 경계와 수성을 하라는 공구수성(恐懼修省)의 메시지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재이와 응험의 일대일 대응이 마치 전통적인 천인감응론의 모사모응의 재이 해석과 유사하지만 그 안에는 18세기 초반의 현실인식에 맞게 새롭게 해석된 천인감응론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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