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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입양과 여성의 역할

 

김보람(가천대학교 강사)

 


사진 : 繼後謄錄(12869)

 

 

 

조선시대 입후법의 제정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유교적 가족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법과 제도들을 제정하고 재정비해 나갔다. 이 가운데 유교적 제사형태와 가계계승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시행된 대표적인 것이 가묘(家廟) 설립과 입양에 관한 제도였다. 고려 말부터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주자가례가 보급되면서, 사대부를 대상으로 적장자(嫡長子)의 집에 가묘를 설치하여 유교식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 제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확대, 강화되었다.

그런데 적장자 중심의 제사승계 형태에서는 아들이 없으면 제사를 행할 수 없게 된다. 이전에는 불교식 상제례의 영향으로 제사를 가계계승보다 사후봉사로 여기는 관념이 일반적이었으므로 누가 제사를 지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사를 통한 가계계승보다는 제사의 지속, 즉 사후봉양이 계속되는 것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아들이든 딸이든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자녀가 없는 경우에는 심지어 그 집안의 노비가 제사를 받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적장자 중심의 제사 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제사를 주관할 아들의 존재가 중요해졌고, 아들이 없다면 양자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1437(세종 19)의 입후(立後) 규정은 바로 이러한 유교적 가족질서 구축이라는 목표 아래 기존의 입양 관행을 정비하고 봉사자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그리고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이 경국대전입후조에서 법문화되었다.

 

 

적처와 첩에 모두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관에 고하여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를 세워 후사로 삼도록 한다. 양쪽 집안의 아버지가 함께 명하여 세우되,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면 어머니가 관에 고한다. 존속과 형제 및 손자는 후사로 삼지 못한다.

 

 

경국대전의 입후조에서는 입후의 조건, 대상, 절차 등이 규정되었다. 입후는 글자 그대로 후사를 세운다는 뜻이다. 먼저 입후의 대상은 아들 항렬의 동종 지자로 규정하였다. 동종은 동성(同姓)의 부계 친족집단을 의미하며, 지자는 장남을 제외한 둘째 이하의 아들들을 의미한다. 남편의 동종을 입양 대상으로 한 것은 부계 중심의 가족질서를 확립하기 위함이었고, 장남이 아닌 둘째 이하의 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은 장남은 스스로 자기 가문을 계승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후 절차에 있어서는 양쪽 부모가 동의하여 관청에 청원서를 올리면 입양을 관장하는 관청인 예조에서 입후 신청 내용의 적실성 여부를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국왕의 허가를 받은 후에 입양을 증명하는 문서인 계후입안(繼後立案)을 발급해 주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만 입양이 성립될 수 있었다. 당대인들의 인식에서는 부자(父子) 관계는 하늘이 정해준 관계이고, 오직 국왕만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임금의 명 없이 사사로이 부자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입후 조건에 있어서는 적처와 첩 모두에게 아들이 없는 자만이 입후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첩자가 있으면 양자를 들이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첩의 아들, 즉 서얼에 대한 제도적사회적 차별이 광범위하게 존재했기 때문에 가문들에서는 신분이 낮은 첩자에 의한 가계계승을 기피했다. 이에 첩자가 존재해도 동성 친족 중에 적자를 입양하여 가계를 이어가게 하려는 현상이 계속적으로 나타났고,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일들이 왕의 특별한 허가에 의해 용인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조선 정부는 유교적 제사형태에 부합하는 봉사자를 선정하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입후법을 제정하여 시행했고, 일련의 절차를 거쳐 입양된 양자를 계후자(繼後子)’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제도를 바탕으로 16세기 이후 조선시대의 입양은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성(異姓) 친족, 외손, 여성, 심지어는 혈연관계가 없는 타인까지 모두 입양 대상으로 삼았던 이전의 다채로운 입양 관행은 점차 가계계승을 위한 입후로 집중되어 갔던 것이다.

 

 

 

 

조선 후기 입양의 확산

 

 

 

조선 후기의 입양은 가계계승을 위한 계후자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며, 양반층을 중심으로 이러한 형태의 입양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17세기 중엽 이래 부계 중심의 가족친족 질서가 확립되어 나가면서 가계계승을 위한 입양은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면 대여섯 집마다 한 집씩 양자가 있다고 할 정도로 입양이 널리 보편화되었다.

조선 후기에 입양이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은 양반층 뿐 아니라 비양반층도 입양을 수용하여 실천하였음을 의미한다. 양반층의 가족 문화는 그 아래의 신분층에게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쳤다. 비양반층 일부에서는 신분 상승의 욕구를 표출하였고, 이를 위해 양반층의 문화를 모방하거나 수용하기도 하였다. 유교 질서에 기반을 둔 양반층의 가족 문화 역시 나머지 신분층에게로 서서히 확산되어 나갔다. 이 가운데 양반층과 혈연적인 친연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일정한 사회경제적 지위나 물적 토대를 확보하고 있었던 양반의 서자들은 그러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또 향리층 가운데서도 양반의 가족 문화를 받아들여 양자를 세운 인물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입양 수용은 안정적인 가계계승에 대한 욕망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가계계승을 위한 입양은 더 나아가 하층민 일부에도 영향을 주었다. 유교적 가족질서의 강화와 함께 가계계승을 위한 입양은 양반층에서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하층민들도 경제력 성장과 의식의 변화를 바탕으로 가계계승에 일정한 관심을 드러냈다. 다만 하층민 집단에서는 양반층과 달리 입양을 통한 가계계승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가계계승과 전혀 상관없는 노후 봉양이나 노동력 확보를 위한 이성 양자의 사례들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다. 조선시대 가계계승을 위한 입양은 신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입양과 여성의 역할

 

 

조선시대의 유교적 규범 속에서 여성들, 특히 양반층 여성들의 직접적인 청원 및 소송 활동에는 상당한 제약이 가해졌다. 조선 초부터 양반층 여성들에게 부덕(婦德)의 모범을 보일 것을 요구하는 일련의 규제 과정 속에서 이들에게는 대리 소송이 권장되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성리학적 이념과 가부장적 가족 질서에 기반한 사회 윤리가 더욱 강해지면서 양반층 여성들의 직접적인 청원 및 소송 활동은 일상적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입양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양반층 여성들의 청원은 상당히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 중 하나로 경국대전에 실린 입후법을 들 수 있다.

경국대전의 입후 절차에 따르면, 양쪽 집안의 아버지가 동의하여 관청에 소장을 올려 입양을 신청하되, 아버지가 사망하면 어머니가 대신하도록 하였다. 대부분의 경우에 양자를 들이는 쪽, 즉 양부모를 중심으로 입양 청원이 이루어졌다. 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 어머니가 대신 입양을 관청에 신고하도록 한 규정은 과부로 하여금 사망한 남편을 위해 후사를 세우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의무인 동시에 후사를 청원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했다. 해당 규정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입양과 관련된 권한을 일정 정도 보장해 주었다. 일례로 이 규정은 가문의 후사 선정을 두고 과부와 남편 문중이 대립할 때 과부의 입후권을 옹호하는 법적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과부가 직접 청원하지 않더라도 입양에 대한 동의 의사를 표시해야만 입양이 가능했던 사례들도 존재했다. 결국 입양의 주체는 일차적으로 부모가 되어야 했던 것으로, 남편이 사망하면 그 과부인 여성에게 우선권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유교적 가족질서가 강화되어 남편의 부계 문중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조선 후기에도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입양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은 조선 후기 입양의 확대와 함께 더욱 가시화되었다. 입양이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된 여성들이 입양에 관여할 수 있는 기회 혹은 의무도 증가했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아들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여성들 역시 아들의 어머니로서의 지위를 점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따라서 아들 없이 과부가 된 여성들은 양자를 통해서라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해 나가고자 했다. 여성들에게 있어 아들을 구하는 일은 자신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생존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아들 없이 과부가 된 많은 여성들은 입후 청원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조선 후기 여성들의 입후 청원 양상은 예조에서 입양 사실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한 계후등록(繼後謄錄)이라는 기록에서 살필 수 있다. 현전하는 규장각 소장 계후등록에 기록된 전체 12,000여건의 계후 입양 사례들 가운데 여성에 의한 청원은 절반 정도에 달하면서 높은 비율을 보인다. 계후등록사례들의 기재 양식은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동소이하다. 다음은 181410, 여성들에 의한 입양 청원을 기록한 3건의 기사들이다. 가운데 위치한 기사를 살펴보면, 서종옥이 후사 없이 사망하였고, 이에 서종옥의 처인 방씨가 남편의 동성 8촌 동생의 둘째 아들을 입양하고자 문장(門長) 서종인과 함께 의논하여 예조에 소장을 올렸다. 그리고 이를 예조가 국왕에게 아뢰어 허락을 받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사진 : 繼後謄錄(12869) 17036a

 

 

이때 방씨의 ()’라는 호칭으로 보아 방씨는 양반층 여성으로 파악된다. 당시 여성들의 성씨 뒤에 붙이는 칭호는 여성들의 신분을 구분하는 주요 근거로 사용된다. 대체로 양반 부녀자의 경우에는 , 중인층 부녀자는 ()’, 평민층 부녀자는 소사(召史)’를 붙였으며, 노비의 경우에는 이름을 그대로 기재하였다. 계후등록에 기록된 여성 청원자의 대다수는 라는 호칭이 붙은 양반층 여성들로, 가계계승을 위한 입양이 주로 양반 가문들의 주된 관심사였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여성들은 사망한 남편을 위해 입양을 청원했지만, 적지 않은 비율로 여성들은 어머니로서 사망한 아들 내외를 위해, 딸로서 돌아가신 친정 부모의 제사를 위해 입양을 청원하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는 친정을 위해 입양을 청원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친정의 가계계승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여성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자신들도 여전히 친정 가문의 구성원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조선 후기 시집살이가 확산하면서 여성들은 시집에 종속되어 친정과는 거의 단절된 삶을 살아갔을 것이라는 통념과 배치된다.

한편, 여성들은 입양을 둘러싸고 남편 문중과 심각한 갈등에 휘말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과부가 된 여성들이 입후 청원의 주체가 되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부계 친족집단이 발달하면서 여성들의 청원은 남편 문중과의 합의를 거치거나 그들의 공론을 따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 갈등은 불가피했다. 많은 경우에 분쟁의 원인이 된 것은 양자의 촌수였다. 촌수가 가까운 친족에서 후사를 세우려는 문중의 입장과 촌수가 멀더라도 정치적, 사회적으로 번성한 집안의 인물을 양자로 들이려는 과부의 입장이 충돌했다. 여성들은 더 나은 조건의 양자를 통해 시집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양자로 세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한 여성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입양이라는 조선시대 가문의 중요한 문제에서 부계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목소리와 행위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있다.

 

 

 

참고문헌

 

 

권내현, 조선 후기 입양의 확산 추이와 수용 양상」 『역사와 현실73, 2009

김보람, 별계후등록(別繼後謄錄)을 통해 본 1718세기 여성의 입후 청원과 가계계승 분쟁」 『여성과 역사38, 2023.

박경, 조선 전기의 입양과 가족제도, 혜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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