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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의 업무 일지 -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北道列邑關文及移文謄書)

 

이행묵(고려대학교 역사학과 박사수료)

 


사진 : 北道列邑關文及移文及移文謄書(4206-4-v.1-2)

 

 

조선시대에는 지방관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지방 백성들의 어려움을 파악해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그 역할에 따라 여러 직책의 어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암행어사는 국왕의 특명을 받아 비밀리에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감찰 업무를 수행한 어사였다. 조선시대 암행어사와 관련한 기록은 암행을 마친 뒤 국왕에게 올리는 보고서나 암행어사가 작성한 일기 등 여러 형태로 남아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암행어사의 모습도 이와 같은 기록을 토대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北道列邑關文及移文謄書)는 암행어사가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방관들에게 보낸 공문서를 모아 놓은 자료로 암행어사가 현지에서 어떤 방식으로 공무를 수행했는지 보여준다. 이 자료에서는 흔히 암행어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또 다른 암행어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 조병세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가 업무를 수행하면서 작성한 공문서의 모음이다. 암행어사가 함경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함경감사 및 수령에게 내린 지시사항이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업무 수행 과정을 살필 수 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고종이 직접 국정 운영에 나서면서 마주친 일차적인 과제는 바로 민생 안정이었다. 대원군 주도 아래 진행된 무리한 토목 공사와 궁궐 건축 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된 상태에서 고종은 각종 개혁책을 추진하고, 동시에 전국적인 암행어사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이때 전국 곳곳에 12명의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는데, 함경도 암행어사로는 지방관으로서 실무능력을 인정받은 관료이자 오랜 기간 승지로 재직하면서 고종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조병세가 임명되었다. 함경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조병세는 1874323일에 함경도로 출발하여 약 8개월간 함경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임무를 수행하고 같은 해 124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에는 그 사이에 함경도 암행어사 조병세가 감영과 병영, 각 군현에 보낸 문서가 날짜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다.

 

 


사진 : 咸鏡道全圖(12156-v.1-5)

 

 

 

2. 암행 경로와 업무 방식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의 기록을 토대로 암행 경로를 추적해 보면 당시 암행어사가 함경도 곳곳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각 공문서 마지막에는 암행어사가 문서를 작성한 날짜와 암행어사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암행어사는 경기 양주, 강원도 철원·회양 등을 거쳐 함경도 내로 이동했고, 이후 함경감영 소재지인 함흥에 이르렀다. 함흥에서부터는 동해안에 접한 고을을 따라 두만강 부근까지 나아갔으며, 돌아올 때는 내륙에 위치한 삼수, 갑산 지역을 거쳤다. 사실상 함경도 전 지역을 직접 돌아다니며 민생을 살핀 것이다.

암행 초기에는 한 고을에 2~3일 정도 머문 뒤 이동하였으나 후반부에는 함흥, 안변에 오래 머물면서 남아있는 업무를 처리하였다. 한번 거쳐 간 고을이라도 함경감사 및 수령에게 문서를 보내 자신의 지시사항이 이행되었는지 보고하도록 했으며, 사안이 지체될 경우 중간 관리자를 처벌하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암행어사가 끊임없이 현지의 지방관과 문서를 주고받았다는 점이다. 다음 고을에 도착하기 전에는 문서를 보내 해당 고을의 호구수, 전결수, 곡물수, 군병수가 얼마나 되는지 하나하나 나열해서 보고하도록 하기도 했다. 출도 전에 지역의 상황을 미리 파악해두기 위함이었다.

암행의 본래 의미는 비밀리에 잠입해서 지방관의 비리를 적발하고, 민생의 실태를 살피는 것이었으나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에 나타난 함경도 암행어사는 문서 교류를 통한 지방관의 협조를 토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암행어사의 파견 소식은 지방관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 소문이 퍼져있었다. 암행어사 파견의 소식을 접한 백성이 자신을 암행어사의 수행원이라고 속인 뒤 고을을 돌아다니며 감찰을 핑계로 돈을 뜯어내는 사례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 소식이 암행어사에게도 전달되어 즉각적으로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업무 처리 방식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암행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3. 1874년 함경도의 사정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에는 암행어사가 곳곳을 돌아다니며 파악한 함경도 지역의 현안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가 파견된 시점에 함경도 지역의 여러 문제는 1869~1870년에 연속적으로 발생한 흉년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 가뭄, 홍수 등의 재해가 이어지면서 토지가 유실되고 많은 백성이 고을을 떠나갔다. 4년이 지난 무렵에도 흉년의 여파는 가시지 않았는데, 백성들의 이탈이 이어졌으며 심지어는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 경내로 이주하기도 했다. 암행어사의 조사에 따르면 호적에 등재된 무산부의 호구는 5,800여 호였으나 흉년 이후 사망·도망자들이 늘어나 당시에 남아있는 수는 3,000호에 불과하였으며, 경원·경성·온성·회령·경흥·길주 등도 마찬가지였다. 사망·도망자의 증가로 인해 지방행정 운영은 어려워졌으며 이는 남아있는 백성들의 부담이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암행어사가 파견된 시점은 흉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면제된 세금을 다시 징수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음에도 고을을 떠난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묵은 땅도 개간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여러 고을에서는 갑자기 세금을 복구한다면 남아있는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며 암행어사에게 호소하였다.

당시 함경도 지역의 또 다른 문제는 녹용을 마련하는 부담이었다. 함경도에서는 왕실의 약재로 사용되는 녹용을 매년 진상하였는데, 19세기 중엽에 함경도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그 수를 줄였으나 녹용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암행어사가 파견되기 직전인 1873년에 녹용 진상을 복구하였다. 여러 고을에서는 녹용 진상의 복구를 우려하며 현지의 사정을 암행어사에게 전달하였다. 이전에는 사냥을 통해 녹용을 확보했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백두산을 둘러 목책을 쌓고 통행을 금지하면서 사냥터가 크게 줄었다는 것이었다. 사냥터가 제한되어 품질 좋은 녹용을 마련하기 어렵고, 그 수량을 채우기도 버겁다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세금 및 진상과 관련된 사안은 암행어사의 권한 밖의 일이었던 만큼 현장에서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기는 곤란했다. 다만 세금 징수와 녹용 마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소하고, 추가적인 재원을 마련함으로써 백성들의 호소에 응했다. 또한 암행을 마친 뒤 국왕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통해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중앙관서에 전달하여 조치가 취해지도록 하였다.

 

 


사진 : 北道列邑關文及移文謄書(4206-4-v.1-2) 1038a



사진 : 北道列邑關文及移文謄書(4206-4-v.1-2) 1007a

 

 

 

4. 암행어사의 활동 죄인의 처벌, 지방행정 개선책 마련

 

 

암행어사의 일차적인 업무는 지방관을 감시하고 지방사회의 현실을 살피는 것이었다. 흔히 암행어사가 부패한 지방관리를 옥에 가두거나 직접 처벌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지방관에 대해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암행어사가 직접 처벌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계·별단이라는 형태로 보고서를 작성해 국왕 및 중앙관서에 보고하였다. 중앙에서는 암행어사의 보고를 토대로 부정부패가 적발된 지방관의 경우에는 그 정도에 따라 의금부에서 조사하거나 곧바로 파직시켰다. 당시 함경도 암행어사의 보고로 인해 5명의 전현직 관리가 파직되고, 7명이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은 뒤 처벌을 받았다.

한편 각종 범죄를 저지른 죄인에 대한 조치는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에는 죄인 압송과 관련한 지시가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살인, 횡령, 민간 침탈 등으로 암행어사에게 적발된 자들이었다. 암행어사는 이름을 지목해서 해당 죄인을 어느 고을의 감옥으로 옮기도록 하거나 심문을 위해 자신이 지나갈 경로에 미리 대기시키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자주 나타나는 죄목은 공적인 재화를 훔친 죄였으며, 죄인의 대부분은 관청 소속의 서리·아전·장교들이었다. 암행어사는 죄질에 따라 구분하여 함경도 바깥으로 유배를 보내거나 함경도 내에 멀리 떨어진 고을로 유배를 보냈다. 또한 많은 액수의 돈을 훔친 죄인들에게는 돈을 징수하여 백성들에게 돌려주거나 공금으로 활용하였다.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에서 주목되는 기록은 암행어사가 각 고을에 보낸 구폐절목(救弊節目)이다. 구폐절목이란 용어 그대로 폐단을 바로잡는 조목이라는 뜻으로 암행어사가 작성한 일종의 개선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암행어사가 고을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암행어사가 돌아간 뒤에는 그 문제가 다시 발생할 수 있었다. 함경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조병세는 자신의 활동이 한시적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에 각종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큰 틀의 규정을 마련해 두었다. 암행어사가 만들어 놓은 절목이니 만큼 문제가 다시 발생하면 감사나 수령에게 절목의 내용을 근거로 항의하라는 의도였다.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에는 총 13개의 절목이 확인되는데, 구체적으로는 무산부환폐이정절목(茂山府還弊釐正節目), 북청영부환이정절목(北靑營府還釐正節目), 북청부이청구폐절목(北靑府吏廳救弊節目), 경성부환폐교구절목(鏡城府還弊矯捄節目), 명천부제반교폐절목(明川府諸般矯弊節目), 단천부교혁절목(端川府矯弊節目), 삼수부구폐절목(三水府救弊節目), 영흥부통인청절목(永興府通引廳節目), 덕원부오사구폐절목(德源府五社救弊節目), 덕원부원산방방축절목(德源府元山防防築節目), 안변부구폐절목(安邊府救弊節目), 길주구폐절목(吉州救弊節目), 각양구폐절목(各樣救弊節目)이다.

암행어사가 각 고을에 보낸 절목의 내용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 환곡 문제와 관련된 사안이었다. 환곡은 춘궁기에 종자와 식량을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와 함께 거두는 곡물이었다. 19세기에 이르면 환곡은 점차 부세로 변모하면서 각종 민폐의 원인이 되었다. 이른바 19세기 삼정의 문란 중에서 환곡의 문란이 가장 심각하다고 언급될 정도였다. 당시 함경도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환곡의 폐단이 문제가 되고 있었던 만큼 함경도 암행어사 역시 환곡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에 함경도 지역의 환곡 문제를 개선하고자 절목을 배포한 것이다.

  절목의 내용은 고을의 사정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대체로 규정 외 환곡 명색을 혁파하고, 아전이나 창고지기가 환곡을 훔쳐먹은 뒤 백성들에게 거두는 행위를 금단하는 것이었다. 또한 마을 단위로 환곡의 총수를 정해두어 환곡이 늘어나 부담이 커지는 것을 막고자 했으며, 일부 환곡의 경우에는 거두고 나눠주는 행위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암행어사로서 할 수 있는 환곡 운영의 개선안을 마련하여 고을에 배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암행어사가 단순한 감찰을 넘어서 현장에서 시행할 수 있는 개선책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진 : 咸鏡道各邑事錄(27547)



사진 : 咸鏡道諸邑事錄(27550)



사진 : 北道列邑罪人勘處冊(5125-104)



사진 : 北道列邑罪人勘處冊(5125-104) 1003a

 

 

 

6. 함께 볼 자료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외에도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와 관련한 여러 기록이 남아있다. 함경도각읍사록(咸鏡道各邑事錄), 함경도제읍사록(咸鏡道諸邑事錄), 자길주경흥지염기(自吉州慶興至廉記), 홍원이북수사록(洪原以北隨事錄)은 함경도 내 고을별로 전현직 수령에 대한 평판, 삼정 운영의 실태, 각종 민폐 양상 등 당시 함경도 지역의 문제가 정리되어 있다. 아마도 함경도 암행어사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정리한 자료로 짐작된다. 이 자료들에서는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에서 간략하게 언급되는 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나타나며, 사건의 경위도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북도열읍죄인감저책(北道列邑罪人勘處冊에는 앞서 암행어사에게 적발된 죄인들의 처분이 고을에 따라 정리되어 있다. 북도열읍관문급이문등서에서 암행어사가 죄인에게 내린 처분을 살필 수 있다면 이 자료에서는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특히 죄인에게서 거둔 돈을 어디에 사용했는지에 대한 내역이 나타나는데, 북도열읍죄인감저책(北道列邑罪人勘處冊의 내용과 비교하면 구체적인 사용처를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함경도 암행어사는 죄인들에게 3만냥이 넘는 돈과 5천석 가량의 곡물을 징수하였으며, 이는 다시 각 고을의 백성, 지방관아, 역참, 향교 등에 분배되었다.

 

 

 

참고문헌

 

 

한철호, 1998, 고종 친정 초(1874) 암행어사 파견과 그 활동-지방관 징치를 중심으로-, 사학지31, 단국사학회

강석화, 2016, 19세기 함경도 지역의 환폐(還弊)와 민의 동요, 역사학보232, 역사학회

이행묵, 2023,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 조병세의 활동과 환곡 대책, 역사와 현실128,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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