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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南終面分院里戶籍統記)의 자료적 성격과 분원리 지역 사회

 

이동규(아주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호적과 통기

 

조선시대 호적대장에 대해서는 그동안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반면 호적대장을 바탕으로 다시 정리된 통기(統記) 자료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 왔으며, 자료의 성격과 활용 가능성 또한 충분히 소개되지 못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南終面分院里戶籍統記)는 이러한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단순한 호구 집계 문서에 그치지 않고, 문서 후면에 작성의 배경과 집계의 경위를 설명하는 주기가 함께 남아 있어 통기가 어떠한 필요 속에서 작성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짐작하게 한다. 또한 현존하는 통기 자료 가운데에는 훼손과 누락이 심하여 시기와 지역을 분명히 알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은데,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그림 1>과 같이 道光二十年庚子式이라는 표기, 그리고 남종면 분원리라는 지명을 통해 그 작성 시기와 공간적 범위를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 :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南終面分院里戶籍統記)속 표지(4258-5,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의 편찬 배경과 자료적 성격

 

 

조선시대의 호적통기(戶籍統記))는 일정 지역의 호구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부담과 행정적 처리를 수행하기 위해 작성된 자료이다. 호적대장이 국가의 기본적인 인구 파악 장부로서 각 호의 구성원, 주호와의 관계, 연령, 신분, 직역 등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원자료라면, 호적통기는 이러한 호적대장을 기초로 하여 특정 목적에 맞게 재편 · 요약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호적통기는 호적대장의 축약본이면서도, 단순한 요약에 그치지 않고 실제 지역 운영과 부과 체계가 반영된 실무 문서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자료적 성격을 지닌다.

 

본고에서 다루는 남종면 분원리 호적통기는 표제에 나타난 시기에 대한 기록을 통해 1840년에 작성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곧 이 자료는 1840년 경자식 호적을 기준으로 정리된 남종면 분원리의 통기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통기가 특정 군현 전체가 아니라 남종면의 한 리()인 분원리를 대상으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본 자료가 단순한 행정 단위별 집계가 아니라, 보다 미시적인 지역 단위에서 호구와 부과 대상을 점검하기 위해 편찬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본 자료의 해제에서는 이를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자료로 소개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자료 작성 시점의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경기도 양근군에 속한다. 또한 1920세기에는 양평군에 속하기도 했지만, 19세기 전반의 행정 체계 안에서는 양근군 남종면이었다.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1789년 당시 양근군은 10개 면과 99개 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남종면은 수청리(水靑里), 사천리(沙川里), 귀여리(歸歟里), 우천리(牛川里), 내동리(內洞里), 분원리(分院里)6개 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본 통기는 양근군 남종면 분원리를 대상으로 한 자료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자료의 지역적 위치와 규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 시기 및 전후 시기의 관련 자료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18세기 중반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남종면은 3871,477구였고, 1789호구총수에서는 3951,749구로 집계된다. 1843경기지(京畿誌)양근군편에는 남종면이 325호로 기록되어 있으며, 1899양근군읍지(楊根郡邑誌)에는 4211,641구로 나타난다. 이러한 수치 속에서 본 통기는 주호 275호를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1789년 남종면 전체 395호의 약 70%, 1843경기지325호를 기준으로 하면 약 85%에 해당한다. 단일 리를 대상으로 한 통기임에도 이처럼 높은 비중을 보인다는 점은 분원리가 남종면 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인구와 호수를 가진 중심적 취락이었음을 시사한다.

 

이 점은 18세기 중반 여지도서의 기록과 비교할 때 더욱 흥미롭다. 여지도서에는 分院里自官門南距四十里編戶一百八十一男二百八十五口女三百七十九口라고 하여, 분원리가 181, 남자 285, 여자 379구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남종면 전체 규모와 비교하면 18세기 중반 기준으로 분원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46%에 불과했다. 그런데 1840년 통기와 1843경기지를 기준으로 보면 분원리의 비중은 남종면 전체의 약 85% 수준에 이른다. 물론 여지도서, 경기지, 호적통기는 각각 편찬 목적과 집계 방식이 다르므로 이를 동일 기준의 통계로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적어도 18세기 중반 이후 분원리의 위상이 남종면 내에서 한층 커졌으며, 개인과 가족이 이곳에 더욱 집중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림 2> : 경기지(京畿誌)4, 양근군 (12178,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러한 변화는 분원리의 지역적 성격과 깊은 관련이 있다. 경기지양근군 편의 토산조에는 이 지역의 특산물로 자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 주석에는 英祖壬申移設廣州燔造所于郡南五十里南終面每歲司饔院官監造進上이라 하여, 영조 임신년(1752)에 광주에 있던 번조소(燔造所)가 양근군 남쪽 50리 지점의 남종면으로 옮겨졌음을 적고 있으며 그 위치는 <그림 2>와 같다. 이러한 사실은 1752년 전후의 승정원일기의 기사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곧 분원리의 성장은 단순한 자연촌의 확대라기보다, 왕실용 자기 생산을 담당하는 번조소의 이설과 그에 따른 인구 및 경제 기능의 집중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경기지양근군편의 풍속조에 보이는 民藝黍栗以柴爲利라는 표현 역시 이러한 점을 뒷받침한다. 분원리와 같은 자기 생산 지역에서는 대량의 땔감이 필수적이었고, 주민들의 생업과 지역의 풍속 속에 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것은 이러한 생산 구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는 단순한 호구 집계 자료가 아니라, 18세기 중엽 이후 번조소의 이전과 함께 재편된 분원리 지역 사회의 성장과 구조를 보여주는 자료로 이해할 수 있다.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의 구성과 기록 방식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의 본문은 <그림 3>과 같은 방식으로 장부가 작성되어 총 55, 275, 770구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통기의 말미 집계에서는 총 구수를 769구로 적고 있어, 전체 인구 집계에서 1명의 차이가 확인된다. 이러한 차이는 조선시대 호적류 자료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것으로, 작성과 정리 과정에서 생긴 계산상의 착오이거나 일부 인물의 중복 · 누락 처리에서 비롯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통기가 단순히 각 호의 인적 구성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지막에 별도의 총계와 징수 관련 내용을 함께 적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 3> :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南終面分院里戶籍統記)본문(4258-5,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본 자료의 가장 흥미로운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인구 집계가 곧바로 일정한 부담의 산출과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통기에는 <그림 4>와 같이 사망자로 표시된 인물과 노비까지 포함한 총 구수를 기준으로 인당 2승씩을 거두어 총 1,538승을 마련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를 작석(作石)하면 1038승이 되며, 다시 이를 대전(代錢)하면 135전이 된다. 이 기록은 본 통기가 단순한 호구 파악용 문서가 아니라, 특정한 재정적 목적 아래 실제 징수 대상을 점검한 자료였음을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통기는 호적대장을 바탕으로 하되 지역 단위에서 부담 부과와 운영을 실행하기 위한 실무 장부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더욱 주목할 부분은 허호(虛戶)와 허구(虛口)에 대한 부기이다. 통기에는 분원리에 허호 40호에 80구가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 역시 별도의 부담 대상에 포함되었다. 즉 호적대장에 정식으로 기재되지 않았거나 통상적인 호역(戶役) 부담 구조 밖에 있던 인원들까지도 실제 지역 운영에서는 일정한 몫을 부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통기에 따르면 이들 허구를 통해서도 15두를 마련하여 대전 14전으로 환산하였고, 이를 앞선 135전과 합하여 총 149전을 조성하였다. 만일 허구 80명에게 일률적으로 인당 2승씩 부과했다면 총액은 160(대략 18)이 되어야 하나, 실제 기록은 15두로 나타난다. 따라서 허구에 대해서는 일반 호구와 동일하지 않은 별도의 부과 기준이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점은 통기가 호적대장에 포착되지 않는 지역 사회의 실질적 인구와 부담 구조를 보완적으로 드러내는 자료임을 보여준다.

 

기록 방식에서도 이 자료의 성격은 분명하다. 호적대장을 토대로 하였음에도 간지, 본관, 사조(四祖)와 같은 정보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이는 통기가 원호적처럼 개인의 계보와 신분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문서가 아니라, 호의 구성과 인적 자원, 부담 대상을 신속하게 파악하기 위한 실용적 문서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예외적으로 본관이 적힌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전체 770명 가운데 이미 사망한 여성 2명은 각각 봉화(奉化) 금씨(琴氏)와 안성(安城) 이씨(李氏)로 본관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를 제외하면, 통기는 기본적으로 본관과 사조를 삭제함으로써 호적대장보다 훨씬 간략한 인물 정보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통기에는 이미 사망한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전체적으로 36명이 로 표시되는데, 이 가운데 처가 32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며느리 3명과 제수 1명이다. 이러한 기록은 통기 작성 당시 이미 사망한 구성원이라 하더라도 가구 단위의 부담 산정 과정에서는 여전히 일정 부분 고려의 대상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65세 이상의 고령자도 54명이 확인되는데, 이들 역시 징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결국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는 생존 인구만을 기계적으로 집계한 문서가 아니라, 실제 지역 사회에서 부담을 분담하고 운영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범주를 폭넓게 포괄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를 통해 본 분원리 지역 사회

 

이 통기를 통해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분원리 지역 사회의 인구 및 가구 규모이다. 본 자료는 275, 770구를 수록하고 있으며, 이는 앞서 보았듯 남종면 전체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단일 리() 단위 차원의 자료임에도 남종면 전체 호수의 70~85%에 이르는 규모를 보인다는 점은, 분원리가 남종면 내의 일반적인 자연촌과는 다른 성격을 지녔음을 시사한다. 특히 번조소가 설치되어 왕실용 자기 생산이 이루어진 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분원리는 생산 시설을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된 특수한 지역 공동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직역 분포 역시 이러한 지역적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주호(主戶) 275호 가운데 한량(閑良) 115, 업무(業武) 58, 유학(幼學) 30, 서원(書員) 18, 가선대부(嘉善大夫) 9, 군관(軍官) 및 교련관(敎鍊官) 8, 동몽(童蒙) 8, 선략(宣略) · 절충(折衝) · 어모장군(禦侮將軍) 7, 감관(監官) 3, 무직역 3, 율학생도(律學生徒) · 충의위(忠義衛) · 파총(把摠) 2, 그리고 교생(校生) · 숭릉보(崇陵保) · 양인(良人) · 업유(業儒) · 역리(驛吏) · 장사랑(將仕郎) · 중군(中軍) 등이 각 1명씩 확인 된다. 이 가운데 한량은 전체의 41.8%, 업무는 21.1%를 차지하며, 두 범주를 합한 비중은 약 63%에 이른다. 이는 분원리 주호의 직역 구성이 군역 및 무임 관련 범주에 크게 편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한량이나 업무라는 직역이 실제 직업을 그대로 뜻하는 것은 아니며, 국가가 분류한 직역 및 신분 범주와 관련된 지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분원리의 지역 사회가 일반적인 농촌과는 다른 구조를 지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주호 이외의 구성원 가운데 직역이 명확히 표기된 사례도 확인된다. 19명이 이에 해당하며, 솔자 3명과 노비 16명으로 이루어진다. 솔자 가운데에는 한량 2명과 통정대부 1명이 보이며, 노비는 노 4명과 비 12명으로 나타난다. 노비의 경우 기존 해제에서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단순히 노 · 비로만 적힌 경우뿐 아니라 솔노(率奴), 솔비(率婢), 동비(同婢), 앙역비(仰役婢), 도비(逃婢) 등 세분화된 표기가 확인된다. 이런 점에서 본 통기는 주호 중심 자료이면서도 그 주변에 편입된 종속 인구의 존재를 일정 정도 드러내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연령 구조를 보면 주호의 평균 연령은 43세로 나타난다. 한편 사망자와 노비 등 연령 정보가 없는 인물을 제외하고 산출한 전체 평균 연령은 40.7세이다. 또한 65세 이상 고령자가 54명에 이른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수치는 분원리의 인구 구성이 단순히 청장년층 중심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며, 부담 부과의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이미 사망한 인물과 고령자까지 징수 대상에 포함시켰다는 점은, 통기가 실제 생존 노동력이나 연령이 16~65세에 해당하는 역의 부과 대상자 뿐만 아니라 가구 단위의 부담 능력 전체를 포괄적으로 산정하려 했음을 말해준다.

 

성씨 분포 또한 분원리 지역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주호의 성씨를 보면 이씨 58, 김씨 46, 박씨 31, 정씨 26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그 밖에 서씨와 함씨가 각각 12, 류씨 11, 변씨 10, 한씨 7명 등이 뒤를 잇는다. 상위 네 성씨인 이···정이 전체의 약 58.5%를 차지한다는 점은, 특정 성씨 집단의 집중도가 비교적 높았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것만으로 곧바로 동족촌의 성격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분원리 사회는 다수의 소규모 성씨가 균등하게 분포한 구조라기보다는, 상위 성씨들이 상대적으로 강한 존재감을 지닌 구조였다고 이해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림 4> : 통기의 마지막 부분(4258-5,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통기가 말해주는 것

 

종합하면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19세기 전반 양근군 남종면 분원리의 인구 규모와 가구 구조, 직역 구성, 성씨 분포, 부담 체계 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특히 이 자료는 번조소를 배경으로 형성 · 성장한 분원리의 지역적 특성과 함께 그 속에서 형성된 인구 집중 및 국역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 또한 호적대장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허호와 허구, 사망자와 노비까지 포괄하여 실제 부담 산정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호구 장부를 넘어 지역 운영의 실태를 보여주는 실무 문서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남종면분원리호적통기는 특정 지역인 분원리의 실상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통기라는 자료를 통해 조선후기 지방 사회와 지역 공동체의 구조 및 운영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자료에 대한 분석은 향후 다른 지역과 시기의 통기 자료를 본격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지방 사회 연구를 확장해 나가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참고문헌

 

여지도서(輿地圖書) 

호구총수(戶口總數) 

경기지(京畿誌)』(1843)

양근군읍지(楊根郡邑誌)』(1899)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손병규, 호적(1606-1923) :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2007.

이동규, 조선후기 호적상 무임직역의 계승과 변동 대구부 읍치와 외촌에 거주하는 몇몇 가계들을 사례로」 『대동문화연구, Vol.8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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