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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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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지 속의 군사정보, 진관(鎭管)

 

허태구(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관찬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55권 25책)에는 조선 8도 총 328개의 고을이 수록되어 있다. 1∼5권에는 이와 별도로 경도(京都), 한성부(漢城府), 개성부(開城府)가 독립되어 있다. 이 책에 각 행정구역별로 수록된 인문·지리 정보를 열람하다 보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항목이 바로 봉수(烽燧)이다. 조선후기에 간행된 각종 읍지에도 봉수대의 위치 정보가 고을마다 수록되어 있다.

 

사진 : 『신증동국여지승람』 〈奎貴 1932〉 

전라도 나주목(羅州牧)조의 봉수(烽燧)

 

봉수는 밤에는 횃불[烽], 낮에는 연기[燧]로 적의 동태나 침입 여부를 왕경(王京) 등에 신속히 알려주기 위한 군사통신 수단의 일종이었다. 봉화(烽火)라는 동의어는 흔히 쓰이기는 하지만, 낮에 연기로 신호하는 기능을 포함하지 않은 개념이다. 봉수는 인편과 말을 이용한 파발에 비교하면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역으로 통신원의 생포로 인한 정보 누출의 위험과 유지비용이 적었으며, 정보의 전달 속도라는 측면에서도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동서양에서 널리 애용된 통신 시스템 가운데 하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봉수와 물시계를 조합해서 구체적인 군사정보를 전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반영하듯, 기원전 458년 아테네에서 초연된 『아가멤논』(아이스킬로스 작)이란 비극 대사에는 트로이에서 미케네의 아르고스까지 수 백 Km에 달하는 봉수 중계망이 등장한다. 고대 중국에는 주(周) 나라 유왕(幽王: ?∼B.C. 771?)이 애첩 포사(褒姒)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거짓으로 봉수를 올리자 지방의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허겁지겁 왕경 근처로 왔다는 고사가 전한다. 이후에도 봉수 제도는 폐지되지 않았고 발전을 거듭하다가 당(唐) 나라 때 완전히 제도화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봉수 제도가 언제부터 기원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 간의 치열한 항쟁을 감안할 때 늦어도 삼국시대에는 봉수제가 시행되었으리라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봉현(烽峴), 봉산(烽山), 봉산성(烽山城) 등의 기록은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시대에는 1123년(인종1)과 1149년(의종3)에 봉수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각각 『고려도경(高麗圖經)』과 『고려사』에 전한다. 왜구의 침입으로 크게 시달리던 고려말에는 연변봉수를 증설하여 대처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조선 역시 고려의 봉수제를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조선전기 봉수제의 정비에 큰 획은 그은 인물이 바로 성군(聖君) 세종이다. 세종은 봉수의 거화수(擧火數), 봉수군의 정원, 연대(烟臺)의 축조 규정, 봉수망(烽燧網)의 획정 등 봉수제의 관련 규정과 체제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정비된 전국 각지의 봉수망은, 1454년(단종2)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한다. 세종 사후에도 조선 전기의 봉수제는 국방 체제의 변화와 당대의 실정에 따라 꾸준히 보완·수정되었는데, 1485년(성종16)에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에 관련 규정이 집약되어 수록되었다. 이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봉수제 운영의 실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봉수는 설치 지역에 따라 경봉수(京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되었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곳으로 한성부 목멱산(木覓山: 지금의 남산) 아래에 방향에 따라 5개소가 설치되었다. 연변봉수는 최전선인 해안과 변경의 전망 좋은 곳에 설치되었고, 연대(煙臺)라는 시설물을 축조하여 봉수대로 사용하였다. 연대는 높이 7.6m, 둘레 21.4m에 달하는 단층 시설물로 주변은 참호를 파고 목책을 쌓아 보호하였다. 내지봉수는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 가운데 연변봉수의 근무 환경이 가장 열악하였다. 시기별로 변동이 있지만 전국에 설치된 봉수대는 1808년을 기준으로 643개소에 달했다.

 

사진 : 『대동여지도』 〈奎 10333〉, 서울 근교의 봉수 

 

조선시대의 봉수망은 아래 표에 정리된 것처럼 크게 다섯 개의 기간(基幹) 중계망으로 구성되었고, 변경 지역에서 오후쯤에 올린 봉수 신호는 시속 100km의 속도로 전달되어 해질 무렵이면 한양 근교의 봉수대에 도달하였다. 

 

 

 

사진 :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

17세기말 전국의 봉수대를 표시한 지도

(보물 제1533호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봉수대에서 올리는 횃불이나 연기의 수량은 거炬)라는 단위로 표기하였다. 즉 봉수를 한 줄기 올리면 1거라 하였는데, 아무런 비상사태가 발생하지 아니한 평온한 상황을 의미하였다. 한양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1거의 봉홧불을 보면서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적이 해상이나 국경에 출몰하면 2거, 해안이나 국경으로 접근하면 3거, 해안이나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적과 전투가 벌어지면 5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악천후와 기상 이변 등으로 인해 봉수 신호의 전달이 어려울 때는 포성(砲聲)과 나팔 소리 등을 이용하였고, 이마저도 불가능할 때에는 봉수대에 근무하는 인원이 다음 봉수대로 뛰어가 전달하도록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봉수 신호가 목면산 봉수대에 도달하면, 병조 소속의 인원이 이것을 정리하여 다음날 새벽 승정원에 보고하였다. 변란의 징후가 있을 때에는 한밤중이라도 즉시 승정원에 보고하여 국왕에게 알렸다. 

 

봉수대에는 봉수군(烽燧軍)과 오장(伍長)이 배치되어 함께 기거하면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들은 모두 교대 근무를 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선발하였다. 봉수군은 봉화군·봉졸·봉군이라고도 하였는데,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봉수 신호를 올리는 힘든 일을 담당하였다. 오장은 이들을 감독하고 근무 상황을 수령(守令)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경봉수의 오장은 특별히 오원(五員)이라고도 하였다. 경봉수 5개소에는 매 봉수대마다 봉수군 4명과 오장 2명, 연변봉수에는 봉수군 10명과 오장 2명, 내지봉수에는 봉수군 6명과 오장 2명을 두었는데, 교대 인력도 함께 배치하였다. 연변봉수와 내지봉수의 경우, 교대 주기는 10일이었다. 

 

국가 안위와 직결되는 봉수제도의 특성상, 봉수군의 기강 해이와 오장 등의 관리 감독 소홀은 엄중히 처벌하였다. 예를 들어, 거짓으로 봉수 신호를 보내거나 적이 침입하였음에도 봉수를 올리지 아니한 자들은 모두 참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봉수대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오랜 평화의 지속은 봉수군의 태만과 기강 해이를 초래하여, 유사시 봉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채 변란을 맞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조선전기에 확립된 봉수제도는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파발 제도와 병행되면서 그 기능과 역할이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존속하다가 1894년(고종31) 갑오개혁으로 종말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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