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대전(經國大典)》과 《속대전(續大典)》의 집대성 - 《대전통편(大典通編)》
백승아(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 조선 후기 법전 편찬의 추이 속 《대전통편》 |
《대전통편》은 정조대 편찬된 대전류 법전으로, 전시대에 걸쳐 법전의 편찬·수정·증보 작업으로 법에 의한 통치를 이루어갔던 조선의 세 번째 종합법전이다. 《대전통편》의 편찬은 숙종대부터 본격화된 조선 후기 법전 편찬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 숙종대 기존의 수교와 법제를 집대성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 영조대에는 이전에 법제 정비의 당위성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법제 자체를 추상화하는 작업을 시도하여 《경국대전》 이후의 대전류 법제 편찬 작업이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경국대전》 이후 《대전속록》, 《대전후속록》, 《수교집록》, 《신보수교집록》 등 4개 속록류를 모두 반영한 《속대전》이 편찬되었고, 이후 정조대에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두 대전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제가 법제 정비의 현안이 되었다. 이처럼 숙종대부터 정조대까지 세 왕의 법제 정비 사업은 연속성을 가지면서 진행되었는데, 《대전통편》의 편찬과 기타 법제의 정비는 이와 같은 법제 정비과정을 종합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사진 1 : 《大典通編》(古5120-1,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대전통편》의 편찬과 구성 |
《대전통편》의 편찬은 정조 즉위 초부터 시작된 다양한 법제 정비 논의에서 출발하였다. 법제서의 증보 논의는 정조 원년부터 《흠휼전칙(欽恤典則)》 편찬으로 시작하였다. 《흠휼전칙》(1778)은 《속대전》의 〈형전〉 추단(推斷) 및 남형(濫刑)을 보완하는 내용으로, 적은 분량이긴 하지만 《경국대전》과 《속대전》 그리고 《대명률》을 합본하여 일원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향후 법제서 편찬의 일정한 지침을 마련하였다는 의의를 지닌다.
이후 본격적인 법제 정비의 논의가 시작된 것은 1784년(정조 8) 《수교집록》을 경연에서 다루며 이에 대한 속편의 찬집을 논의하는 과정에서였다. 처음에는 《수교집록》의 속편을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기존 법제와의 연관성을 고려해야 했기에 체제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수교의 집성만으로는 부족하고, 이전의 법제를 포괄하는 새로운 체계의 법전 편찬을 계획하면서 결국 《수교집록》의 속편과는 층위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대전통편》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상당히 심도 있게 고려되었고, 초고본이 만들어지면서 《대전통편》이란 명칭이 왕명으로 정해졌다. 이후 1년 이상 수정 과정을 거쳐 1786년(정조 9) 최종 완성되었다. 이전의 《경국대전》이나 《속대전》의 편찬 기간에 비하면 단시간 내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조가 《대전통편》 제사에서 밝힌 편찬목적은 다음과 같다.
《경제육전》·《경국대전》·《대전속록》·《후속록》·《수교집록》·《속대전》 은 조선의 법전들이다. 그러나 그 책들은 많은 종류로 나뉘어 있어 유사(有司)들이 그 양이 많은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므로 이에 임시 관청을 설치하고 법전들을 모아 편집해서 《대전통편》이라고 이름 하였다.
<당저어제대전통편제사(當宁御製大典通編題辭)>
《대전통편》의 법원으로 제시되는 법전은 다양한데, 그 중 《경제육전》은 이미 《경국대전》에 반영되었고, 《대전속록》과 《후속록》, 《수교집록》은 《속대전》에 흡수되어 새롭게 수교를 뽑을 필요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대전통편》은 《경국대전》과 《속대전》이 가장 큰 뼈대가 되는 구조였는데, 이전의 대부분 법제는 이미 두 대전에 녹아들었기 때문에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두 축으로 잡아도 모두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전통편》의 전반적인 골격을 대전으로 잡아나가면서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두 기둥으로 사용하고 여기에 당대 법제를 반영하면서 새롭게 뽑은 수교들도 함께 실었다. 그 과정에서 《경국대전》은 원(原), 《속대전》은 속(續), 새로 증보된 부분은 증(曾)으로 구분하였고, 이 방식은 이후 대전회통에도 그대로 채택되었다
이처럼 《대전통편》은 두 대전과 이후의 새로운 법조문이 누층적으로 결합된 구조였다. 사실상 3개의 대전이 병렬적으로 등장하는 구조가 되어 국초의 지침이 되는 《경국대전》을 축으로 하여 영조대 《속대전》을 그에 버금가는 위상으로 올렸을 뿐만 아니라 이후 새롭게 뽑은 수교들도 자연스럽게 대전으로 격상시켜 현재 왕의 법전 역시 같은 위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구현하였다.
| 《대전통편》의 성격 |
《대전통편》이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이은 대전류 법전이었음에도 편찬 과정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경국대전》이나 《속대전》은 이전의 수많은 법제들을 통합한 법전으로, 여러 왕대를 거쳐 오랜 시간 소요된 법제 정비과정의 결과물이었다. 반면 《대전통편》은 형태상 두 대전에 단순히 현재 왕의 수교를 담는 것에 주력했기 때문에 이전의 법전을 통합하는 과정 없이 단시간 내 만들어졌고 수교를 산삭하여 반영하는 정도였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전통편》의 대전류로서의 의미가 약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대전통편》이 법제 전반에 대한 검토를 거친 결과물이었음은 그 내용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대전통편》에서 추가된 내용은 증(曾)자로 표시되었는데, 증자는 본문과 세주에서 모두 등장한다. 본문의 증은 《속대전》 편찬 이후부터 정조 초년 사이 새롭게 생긴 수교를 대전에 반영한 것으로 변화된 법제를 대전의 체계 내에 편입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좀 더 주목할만한 것은 세주의 증자인데, 이는 조선 초부터 현재에 이르는 광범위한 시간에 걸쳐 변화된 조문들을 산삭하고 전반적인 체제를 조정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두 대전과 새로 보충된 내용 사이의 모순을 없애고 유기적인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는 이전의 법제 전반에 대한 검토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세주에 증자는 《대전통편》에 수록된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자주 보이는데, 이는 이전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부분적인 산삭을 통하여 《대전통편》까지 포함하여 세 대전의 통합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세 개의 대전은 세주를 통해 매우 유연하고 통일성 있게 연결될 수 있었다.

사진 2 : 《大典通編》(古5120-1,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대전통편》은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수정 보완하는 역할이 가장 컸는데, 두 대전에서 윤곽이 잡힌 체제를 산삭하여 조율함으로써 기존 법체계에 대한 집대성과 조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 《대전통편》의 내용 |
《대전통편》의 내용적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흠휼의 정신이 반영된 〈형전(刑典)〉이다. 흠휼은 죄인을 처벌할 때 법에 따라 엄격하게 처벌하지 않고 신중하게 심의하여 형벌을 내리는 것으로 왕이 죄수의 처형 여부를 신중히 결정하는 정책적 의미도 지닌다. 정조는 즉위 직후 영조의 관형주의를 계승·발전시켜 더욱 형벌 도구의 규격, 사용처 등을 법제화하여 형벌을 집행하는 사소한 문제까지 해결하고자 《흠휼전칙》을 간행할 정도로 흠휼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정조는 《대전통편》 편찬 과정 논의 중 《속대전》 이후 새로 증보한 조항은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중에서도 형전은 더욱 마음을 써야한다고 하였는데, 《대전통편》 〈형전〉에 본문 형식으로 증보된 조문에는 흠휼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영조와 정조 시기의 수교뿐만 아니라 이전의 수교 중에서도 흠휼과 관련된 내용을 새롭게 추가하여 수록하였다. ‘등을 때리는 것을 폐지한 것[除笞背]’과 ‘코나 발꿈치를 베는 형벌을 금지한 것[禁劓刖]’, 교수형(絞首刑)에 처할 사람을 방망이로 쳐죽이는 추살(椎殺)을 금지하는 것, 추국 죄수의 왼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을 폐지하는 등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정조는 《대전통편》 편찬과정에서 법률 조문의 명확한 규정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는데, 특히 정조가 명확성을 요구한 조문들은 백성들의 경제생활과 관련한 〈호전(戶典)〉 편찬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민생 안정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정조는 여러 조문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법전의 조문을 명확하게 수정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밝혔는데, 대표적으로 반호(班戶)의 민전(民田) 침탈과 토색(討索)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관찰사와 수령이 자의적으로 상진곡(常賑穀)을 환작(換作)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권(利權)과 결탁한 조치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을 위하여, 여러 궁방(宮房)과 각 아문(衙門)이 세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등을 언급하였다. 법조문이 꼼꼼하지 않고 거칠면 이를 이용하는 세력이 있을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였고, 처벌 대상과 처벌 규정을 정확하게 제시하였다. 정조는 《대전통편》 편찬과정에서 증보된 조문의 자구(字句)까지 꼼꼼하게 검토하면서 명확한 규정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형식적으로 법전에 기재될 조문의 격식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임과 동시에 실질적으로 소민 보호를 바탕으로 한 민생 안정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전통편》 편찬에서 〈병전(兵典)〉의 비중이 컸다는 점도 특징으로 지적된다. 정조는 집권 초반부터 대규모 군사훈련을 단행하였고, 이 시기 여러 신료가 무비(武備)에 대한 재인식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가 법제 정비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군 인사권과 관련하여 무신을 등용하는 시취(試取)에 관한 항목이 가장 많이 개정되고 보완되었고, 국왕의 숙위(宿衛) 문제와 궁궐 방위 관련 다양한 측면에서도 개정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왕권의 강화라는 큰 틀 속에서 국왕의 권위 회복과 국왕 주도의 군정이라는 방향성을 설정한 것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대전통편》은 이전의 대전류 법전과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의 육전체제로 이루어져 있는데, 육전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은 정조대 설치된 규장각(奎章閣) 관련 조문들이 각 전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우선 〈예전(禮典)〉에는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규장각에 안치할 때 규장각 각신 2명이 함께 봉심(奉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는 왕실의 상징을 규장각에 보관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규장각에 모신 임금의 초상화는 매년 봄·가을 첫 달에 왕세자가 현직 각신들을 거느리고 좋은 날을 택해 봉심하며 4계절의 첫 달 보름에는 전현진 각신이 봉심한다는 조문도 있는데, 이는 규장각의 본래 기능이 임금의 초상화와 임금의 글씨 보관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국왕의 존엄을 상징하는 행사를 규장각을 중심으로 차기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가 직접 주관하고 왕세자가 주관하지 않을 경우 각신이 대리한다는 점에서 각신의 위상이 드러나는 조문이기도 하다. 규장각에는 초계문신을 두었는데, 이들 관련 규정도 〈예전〉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규장각의 위상은 실제 등급보다 더 높게 자리매김되어 있었는데, 각신 및 규장각 자체의 위상은 〈형전〉의 조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각신에게는 전현직을 막론하고 형신(刑訊)할 수 없고, 각신은 임금의 전지 없이는 의금부에서 잡아 가둘 수도 없었다. 이러한 조치는 국왕권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친위세력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병전〉 규정을 통해서도 각신은 임금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는 내사복시의 말을 타는 것을 허락받을 정도로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기관에 대해서 육전이 상호 유기적으로 조정되었다는 점은 《대전통편》 편찬 시 육전의 조정이 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증보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참고문헌 |
김백철, 2008, 「朝鮮後期 正祖代 법제정비와 『大典通編』 체제의 구현」, 『대동문화연구』64.
이기봉 2022, 「朝鮮後期 正祖의 立法觀에 관한 考察 : 『大典通編』 편찬 과정을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122
김백철, 2010 「朝鮮後期 正祖代 『大典通編』 「兵典」 편찬의 성격」, 『군사』76.
연정열, 1988 「續大典과 大典通編에 관한 일연구」, 『한성대학 논문집』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