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시대를 살아온 남원 사람
조경남(趙慶男)의 야사서(野史書),
『난중잡록(亂中雜錄)』
이주현(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 중인 『난중잡록』은 본집 9권 9책, 속집 7권 7책, 총 16책의 필사본으로, 본집에서는 1592년(선조25)에서 1609년(광해2)까지, 속집에서는 1637년(인조15)까지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다른 이본과 비교했을 때,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이 빠져있고, 임진왜란 발발 이전의 기록이 없다. 규장각본 『난중잡록』이 언제 만들어진 필사본인지는 확인이 불가한데, 『선조수정실록』 찬수(撰修) 때에 바친 원본을 나라에서 필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전란으로 혼란했던 시기, 한 개인의 직접적 체험 및 시사(時事)에 대한 견문(見聞)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 조경남(趙慶男)과 『난중잡록』 |
『난중잡록(亂中雜錄)』의 저자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은 선조 때부터 인조 때까지, 16·17세기 조선을 산 남원(南原) 사람이다. 임진왜란기에는 남원부사의 서기(書記)로 있으면서 전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전쟁 관련 기록과 소식들을 관리하였고,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선조30) 9월, 남원의 불우치(佛隅峙)에서 왜적 5명을 사살한 것을 시작으로 의병이 되어 직접 참전하게 되었다. 10월에는 남원 산동촌(山洞村)의 전투에서 조경남의 재종(再從)이자 전 초계군수(草溪郡守) 정이길(鄭以吉)이 이끄는 의병부대의 출전장(出戰將)이 되어 전공을 세웠으며, 11월에는 섬진강 전투와 함양 음리(陰里) 전투에서, 12월에는 산음 사촌(蛇村)에서 왜군들을 물리쳤다. 이듬해 6월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의 막사(幕士)가 되었고, 또 그해 7월에는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의 막하에서 정예군 선봉이 되기도 했다. 왜란이 끝난 후에는 개인적인 기록이 드물어 구체적인 행적은 파악할 수 없다. 다만 1624년(인조2) 그의 나이 54세가 되던 해에 갑자시의 진사에 합격한 이력이 확인된다. 이후에는 중풍에 걸려 운신이 어려웠다고 하며, 1641년(인조19)에 72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사후 남원지방 사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1803년(순조3)에 지평, 1850년(철종1)에 좌승지, 1861년(철종12)에 호조참판직으로 증직되었다.
조경남의 생애 동안, 조선은 외부적으로는 왜란과 호란을 겪었고 내부적으로는 당쟁으로 혼란했다. 이에 조경남은 1582년(선조 15) 겨울, 3개의 해가 동쪽에서 솟아나고 쌍무지개가 그 3개의 해를 꿰뚫은 이변(異變)의 날, 열세 살의 나이로 시사(時事)에 느끼는 바가 있어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기록한 일록(日錄)을 쓰겠다는 뜻을 품었다. 1618년(광해군10)에 조경남 본인이 직접 쓴 『난중잡록』의 서문, 자서(自序)의 내용을 통해 이 글의 편찬 의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아! 국운이 막혀 재화와 난이 연달아 일어나 7년 동안이나 전쟁이 계속되었고, 황제의 군사가 세 차례나 출동했다. 싸우고 수비하기에 편할 날이 없었고 이기고 패하고 할 적마다 기쁘고 비통하였던 일은 한 마디로 다 말할 수 없다. 나는 때를 잘못 타고나서 이러한 난리를 만나고도 임금을 위해 죽지 못했으니, 신하되고 백성된 도리에 죄책을 면할 길이 없어 한밤중에 주먹을 불끈 쥐고 혼자서 눈물을 닦을 따름이다. 아! 비록 나랏일에 힘을 바치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은 늘 왕실에 있어서, 승전의 소식을 들으면 춤을 추면서 그 일을 기록했고 아군이 패전한 것을 보면 분함에 떨면서 그 일을 쓰고는 했으며, 애통한 말로 효유(曉諭)하는 교서(敎書)라던가 이첩(移牒)·공문·격서(檄書)에 이르기까지 본 일과 들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얻는 족족 기록하고, 간간이 개인의 의견을 넣어 글을 만들었다. 이 글이 후일 지사(志士)들이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고 칭찬할 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충신열사의 사적과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잊은 자의 죄상이 여기에 누락되지 않았다면, 직책 밖의 외람된 일이라는 책망을 나는 달게 받겠다. 아! 한 가닥 천성이 매우 강개하여, 옳지 않은 줄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책망을 당할 것인데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임오년(1582, 선조15) 왜란이 싹튼 초기부터 경술년(1610, 광해군2)에 겨우 안정되기 시작한 무렵까지 끝냈는데, 내가 정유년(1597, 선조30)에 피난하고 왜적을 토벌한 일을 그다음에 다 엮어 넣어 나눠서 네 편으로 만들고 ‘난중잡록’이라 이름 붙였다. 궁벽한 시골이라 견문이 고루하여 사실과 어긋난 기사도 없지 않을 것이나, 그 가운데는 또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하여 사람을 감응하게 하려는 뜻도 들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 잠을 안 자고 심심풀이로 읽는 데 그칠 뿐이랴. 공자가 이르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오직 『춘추(春秋)』를 통해서일 것이고, 나를 벌하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의 뜻을 가지고 외람되나마 후세의 군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자서 말미에 언급한 『춘추(春秋)』는 노나라 사관이 저작한 역사서에 공자가 자신의 글을 적어 다시 편찬한 역사서이다. 조선 후기 인물인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1856년(철종7)에 쓴 「난중잡록서(亂中雜錄序)」에도, “이 글은 자료를 널리 모아서 기록하고 할 말을 빠짐없이 다 갖추었으니, 좌씨(左氏)가 『춘추(春秋)』 경문(經文)에 대하여 전(傳)을 쓴 것과 같다. 이는 바로 역사가(歷史家)의 한 체제이며, 그 의(義)는 1천 년 전 불평의 나머지이니, 아! 참으로 흐느낄 만한 일이다.”라고 하여 『춘추』의 주석서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언급하였고, 『일성록』 정조 24년(1880) 경신 3월 22일 기사에 수록된 전라도 진사 김성구(金聖求) 등의 조경남 포상 관련 상언(上言)에서도 “『징비록(懲毖錄)』보다 훨씬 상세하여 엄연히 『남사(南史)』와 『북사(北史)』의 필법이 있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조경남의 『춘추』와도 같은 문적(文蹟)입니다.”라고 하여 『춘추』를 들어 『난중잡록』을 평한 바 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 말엽은 여러 나라가 전쟁과 정쟁을 치르는 난세(亂世)였다. 조경남은 올바른 정치가 쇠퇴하고 자국의 이익과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던, 예의(禮義)가 무너져 무질서했던 춘추시대 말과, 전쟁과 정쟁으로 어지러워진 조선의 현실이 비슷하다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춘추』·『춘추좌씨전』처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포폄(褒貶)을 통해 대의명분을 밝히는 필법(筆法)을 지향하며 16·17세기 조선시대에 대한 사론(史論)을 적고자 한 것이다. 조경남의 사론은 『난중잡록』의 일부 기사 중간이나 끝에 세주(細注)의 형식으로 적혀있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감상을 남기거나 나아가 시를 짓고, 짧게는 어떤 정보에 대해 오류를 고치거나 부연 설명을 한 것이 주된 내용이다.
당시에 유통된 각종 서적이나 정부에서 발령한 교서(敎書), 격문(檄文), 명에서 보내온 외교문서 등 구할 수 있는 여러 자료와 소식들을 모아 전재(轉載)했기 때문에, 『난중잡록』은 전란과 화재로 소실된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개수할 때에 보충을 위한 강령(綱領)으로 쓰였고,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후대 문인의 사서(史書) 편찬에도 바탕이 되었다. 또 현전하지 않는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의 내용을 다수 전재하여 왜란기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에 대해 소상한 자료를 남기고, 의병 활동을 통해 알게 된 전라도·경상도 지역 의병의 구성 과정과 전투 현황 등을 기술하고 있어 오늘날의 역사 연구 사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한편 『난중잡록』은 문학서로서도 의미가 있다. 『난중잡록』은 각종 보고문인 소·격문·장계·통문·교서 등을 다수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전재한 것이 아닌, 자료 선별과 재구성의 과정에서 작가가 고유의 기록 정신을 반영한 소산이다. 이순신(李舜臣)·원균(元均)·정인홍(鄭仁弘)·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 등 왜란기 인물에 대한 전문과 평가를 기록한 것은 인물전(人物傳)이나 필기(筆記)의 차원으로 읽어볼 수 있다. 또한 정유재란기에는 조경남의 의병 활동 기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라 전쟁실기(戰爭實記)로서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 『난중잡록』의 구성과 내용 |
‘일록’을 쓰겠다고 하였으나, 『난중잡록』은 매일의 사건을 실시간으로 기록한 것은 아니며, 훗날 얻게 된 정보를 덧붙인 경우도 많다. 기간 내 전쟁의 주요한 사건들을 발생 순서대로 연·월·일을 갖추어 적었는데, 날짜 없이 서술된 기록도 있고 어느 달의 일인지 밝히지 않은 채 실린 기사도 있다. 조경남 개인의 사사로운 기록은 드물며, 기록의 층위는 이미 있는 서적·문서의 내용을 재기록한 것,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 자신의 체험을 저술한 것으로 나누어진다.
『난중잡록』은 교서·이첩·공문·격서 외에도 여러 서적과 문서가 인용되었다.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경상순영록』을, 호남 관련 기록은 의병장 고경명과 그의 아들들이 남긴 기록을 엮은 『정기록(正氣錄)』을 참고했다.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와 관련해서는 어숙권(魚叔權)의 원찬(原撰)으로부터 거듭 개수(改修)된 『고사촬요(攷事撮要)』를, 일본과 관련해서는 피로인(被擄人)이었던 강항(姜杭)의 견문 기록을 인용했다. 이중 특기할 만한 것은 윤계선(尹繼善)의 한문소설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이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달천몽유록」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하여 전사한 충신들을 추모하여 지은 작품이다. 주인공 파담자(波潭子)는 꿈에서 임진왜란 참전장수 영령(英靈)들이 공과(功過)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특히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신립(申砬)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신립이 자신은 어쩔 수 없었고 결국 하늘이 시킨 일이라 말하니, 영령들도 화해하며 이미 운수가 정해져 있었으니 시비가 무용하다 하고 향연(饗宴)을 벌인다. 이후 파담자가 꿈에서 깨어서는 영령들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 이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조경남이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난중잡록』 중에 따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달천몽유록」을 『난중잡록』에 전재함으로써 그 또한 죽은 장수들의 충심과 전공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넋을 기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전쟁의 참화를 “운수가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윤계선의 운명론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난중잡록』은 전쟁과 관련된 기사의 비중이 가장 크고, 일본과 명나라와의 외교 관련 기사, 반란자의 처벌이나 관료의 임명·파면 등의 정치·행정 관련 기사가 많으며, 그 외로는 경제, 민간생활, 자연현상 등에 관한 기사들도 수록되어 있다. 전쟁 관련 기사 중에서는 의병에 관한 기사가 많은 것이 특징인데, 이는 조경남이 직접 의병 활동을 한 것, 그리고 그가 살았던 남원이 전라좌도와 경상우도의 접경지대에 있어 양도의 의병 활동 현황을 가까이에서 전해 듣고 확인할 수 있었던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기한 『난중잡록』의 구성과 특징을 고려하며 조경남이 남긴 사론(史論)과 의병 실기를 중심으로 내용을 직접 살펴보고자 한다.
| 의(義)의 기준으로 평가한 전란기의 인물들 |
우선 주목할만한 내용은 전쟁기 전문 기록과 인물에 대한 평가이다. 자서에서도 밝혔듯, 조경남은 『난중잡록』 중에 왜란기 인물의 공적 또는 죄상을 자세히 옮기고, 그것이 조경남이 정한 의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인물을 평가하였다. 이를테면 진주성전투·화왕산성전투에서 활약한 의병장 곽재우에 대해서는 경자년 2월 기사 말미에 “승전을 아뢰어 신하의 절개 바치고, 소를 올리어 충성을 다했네. 마침내 유후(留侯)의 뒤를 따르니, 당대의 으뜸가는 영웅이로다[奏捷輸臣節, 封疏盡巳忠. 終隨留侯跡, 當世一英雄].”라는 시를 지어 찬(讚)하였다. 한나라 명신(名臣)인 유후(留侯), 즉 책략가 장량(張良)에게 빗대어 곽재우의 능력과 충정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또 조선 수군을 지휘했던 명장 이순신의 순절에 대해서는 무술년 11월 19일 기사 말미에 “6년 동안 한산(閑山)에서 호랑이 위엄을 지녔으니, 거북선은 몇 번이나 적의 소굴을 섬멸했던가? 언성(偃城)의 금패(金牌)가 악비[鵬擧]를 부르고, 하상(河上)의 외로운 군사는 위공(魏公)을 돌아오게 했네. 해전에서 세 번이나 이겨 생애토록 절의를 다했는데, 하루아침에 바다에서 죽음과 충절을 바꾸었구나. 깃발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산을 두고 맹세한 말, 영웅에게 남겨 주니 눈물이 한없이 흐르네[六載閑山擁虎態, 幾時龜船剪孤叢. 偃城金牌招鵬擧, 河上單師返魏公. 三捷碧波生盡節, 一朝瓦海死輪忠. 揮旗鳴鼓盟山說, 留與英雄淚不窮].”라는 시를 지어 붙였다. 이순신의 시 중 “바다에 서약하니 어룡이 꿈틀대고, 산에 맹약하니 초목이 알아주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라는 구절을 인용하였고, 또 중국 송나라의 명장 악비(岳飛)와 그를 등용한 장 위공(張魏公), 그리고 간신 진회(秦檜)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였는데, 류성룡의 천거를 받아 명장으로 선전하였으나 모함에 의해 백의종군하게 된 이순신의 서사와 유사하기 때문에 이를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의리를 지켰다면 적국의 인물이라도 긍정적으로 찬한 경우가 있는데, 『난중잡록』 중 임진년 봄 “왜인 귤광련(橘光連)이 의를 위해 죽다[倭人橘光連死義].”로 시작되는 기사가 그러하다. 귤광련은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로 쓰시마[對馬] 도주의 가신이었으며 1590년(선조23)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인물이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그는 조선 조정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명나라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알리며,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주군인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을 죽여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또 히데요시가 조선에 출병할 때에 조선을 잘 안다는 이유로 그를 선봉에 세우려 했는데, 야스히로는 “조선으로 말하면 일본의 좋은 이웃이다. 2백 년 동안 조금도 틈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의 성심을 다해 왔는데, 어찌하여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땅을 범하려고 한단 말인가. 하물며 나는 상국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것을 살게 한 것도 뼈에 살을 붙여 준 것도 모두 그 은덕이 아닌 게 없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만은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의 해를 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차마 은덕을 잊고 감히 조선을 짓밟고 지나가겠는가?”라고 하며 출정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에 노한 히데요시가 그의 목을 베고 구족(九族)을 멸하였는데, 그의 아들 한 명이 살아남아 숨어 살다가 1606년(선조39) 파견된 통신사에게 그간의 전말을 전해왔고, 이 내용이 조정에 상주되어 부산에 야스히로의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다치바나 야스히로의 “행동거지가 오만한 것이 그전에 사신으로 온 왜인들과 달랐다”라고 평하였다. 상주목사 송응형(宋應泂)의 대접을 받으면서 “노래와 기생들 사이에 있으면서 아무 근심 없이 지냈을 터인데 백발이 된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어 송응형의 백발머리를 조롱했으며, 한양에 도착해서는 예조판서가 주최한 잔치 자리에 일부러 후추를 흩뿌려 놓고 기생과 악공들이 이를 앞다투어 취하는 것을 보고는 “조선의 기강이 이와 같이 무너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라 말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겠다는 조선의 의사를 야스히로가 전하자 히데요시가 홧김에 죽인 것이라고 되어 있다. 『징비록』의 일화와는 인물의 성격과 언사가 상반되어 『난중잡록』 속 다치바나 야스히로 관련 일화의 신빙성이 의심되지만, 조경남에게 전해진 소문에만 근거하였을 때, 야스히로는 왜인이면서 조선인보다 조선에 대한 의리를 더 잘 지키고, 교린국에 대한 의리 때문에 목숨을 잃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조경남은 “타고난 양성(良性)은 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난에 임하는 신의가 어찌 적다 하겠는가? 의관 갖춘 사람마저 나라 저버리고 부끄러움을 모르는데, 오랑캐 나라 사람이 이러하구나[秉彝良性非求至, 臨亂胡爲少信義. 衣冠負國尙不恥, 夷狄之人乃如此].”라고 시를 지어 찬하였다.
그렇다면 의리를 저버린 인물에 대한 서술은 어떠할까? 조경남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왜적과 맞서지 않고 도망친 경상좌병사 이각(李珏), 하양읍(河陽邑)의 대장과 군민들을 왜적의 앞잡이로 오인하여 그들을 몰살시키고서는 토적(土賊)을 잡았다고 보고한 용궁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 스스로 척후(斥候)가 밝지 못하면서 왜적의 동태를 알리는 이를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살해한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등에 대해서는 그들의 잘못을 자세히 적고 일부는 사론을 통해 한탄하기까지 하며 통렬히 비판하였다.
한편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장수 원균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난중잡록』 정유년 7월 16일자 원균의 전사를 알리는 기사를 보면,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물론 평소 행실을 이유로 원균은 그의 죽음마저 대중들에게 비웃음거리로 소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경남도 『난중잡록』에 원균이 우리나라 어선을 보고 왜적의 배로 오인하여 창황히 달아나 노량(露梁)으로 물러난 일(임진년 5월 5일),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한 죄로 권율(權慄)에게 곤장을 맞은 일(정유년 7월 11일) 등 그의 허물을 가감 없이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조경남은 원균이 전사한 날의 기사 말미에 “원균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불충불의한 무리는 아닌 듯한데, 그 뒤에 기롱하는 이가 심히 많고 달천(達川)의 기록에는 빼고 넣지를 않았다. 그 기록에 든 사람들은 과연 모두 충의를 다한 사람으로 원균이 그들의 1만분의 1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찌 취하고 버리는 것이 그리도 공정하지 못한가? 당시에 장수 된 자들이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가? 그 뒤에 논공(論功)할 때에 원균도 선무원훈(宣武元勳)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아! 왕법의 공정한 것을 볼 수 있도다.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 하여 적에게 죽은 사실을 죄준다면, 관망하고 퇴각하여 달아나서 목숨만을 위한 자에게는 장차 무슨 죄를 주어야 할까?”라고 말했다. 조경남의 말대로, 윤계선의 「달천몽유록」 속 원균은 영령의 무리에 들지 못하고 불룩한 배, 비뚤어진 입에 낯이 흙빛이 된 채로 다른 귀신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며 퇴짜를 맞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분명 비난받을만한 일을 다수 저지르기는 했으나, 여러 전투에 임하여 왜적과 맞서고 결국 전사한 원균에 대해, 신립에게 그러했듯 “어쩔 수 없는 하늘이 시킨 일”로 여기고 그 공을 인정해야 한다고, 조경남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처럼 『난중잡록』에는 저자 개인이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견문을 기록하여, 언급된 인물과 그 행위를 도덕적 준칙대로 평가한 기록이 있다. 의리를 지킨 인물을 찬하고 의리를 저버린 인물을 비판하는 작업은 “궁벽한 시골”에서 살아온 조경남이 자신의 충심·애국심의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자, 의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과 의병부대의 실상 |
『난중잡록』에서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내용은 조경남의 의병 활동 기록이다. 정유년 8월 11일 기사부터는 전쟁기의 전문뿐만 아니라 조경남 개인의 피란과 의병 활동에 대한 일기 기록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임진왜란기의 왜군은 서울을 목표로 경상도·충청도를 거쳐 진격하였으나, 정유재란기에는 전라도를 제1 공격대상으로 삼으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이 있어 이 일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남원과 전주가 함락되자 관군을 지휘해야 할 수령들이 달아나 전라도는 혼란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점차로 왜군의 침략을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움직임이 나타나서 도내 여러 지역에서 가족이나 친지, 이웃 단위의 소규모 의병들이 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했고 다른 집단과 제휴·연대하여 좀 더 큰 규모의 집단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조경남의 의병 활동도 이러한 흐름에서 시작되었다. 1592년부터 왜란이 계속되었으나 조경남은 그 이전까지 왜적을 직접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유년, 다시 전쟁이 시작되자 왜적들이 남원까지 오리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날 밤 본촌(本村) 사람들이 왜적에게 잡혔다 도망쳐 오는 것을 보고 비로소 병화의 참혹함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8월 16일 남원이 완전히 함락되기까지의 기록은 밀려오는 왜적에 대한 공포와 전투로 인한 참상, 닥친 상황을 극복할 수 없어 겪는 상실감과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다.
9월 22일, 왜적들이 매일 행군하는 가운데 몸을 숨긴 채로 지내던 조경남은 주변 사람들에게 “임금님의 수복(收復)하려는 바람을 생각하고 신민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면, 꼭 한 번 죽어야 할 처지인데 그대로 숲속에 매복하여 편안히 있으면서 자신만을 도모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으로 논하면 맨손, 맨주먹으로라도 나아가 적과 싸워 죽는 것이 마땅하니, 이 한 몸의 화복을 어찌 헤아릴 겨를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의병으로 나서 함께 대사를 도모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동조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몇몇 사람들은 “간신히 목숨을 지켜 오늘까지 살아왔는데, 그대는 또 남은 사람들을 죽이려 하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경남은 “붙들려서 죽는 것보다 순국(殉國)하여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한 뒤, 박언량(朴彦良)과 종 두 사람만을 데리고 성부(城府)로 향하던 중 불우치에서 왜병 5명을 사살하였다. 종이 죽은 왜적의 귀를 베려 하자 “적군을 죽인 것은 공을 챙기려는 것이 아니라 백성된 직책을 다하는 것”이라며 이를 제지한다.
다음날 23일, 조경남이 왜적을 무찔렀다는 소식을 듣고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 의병부대가 28명으로 늘어났다. 그들과 함께 남원 궁장현(弓藏峴)에서 36명의 왜적을 만나 접전을 벌이는데, 이날 기사에 전투의 치열함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날 기사의 말미에 조경남은 세주로 “난투할 때에 사람이 모두 상처를 입었는데, 나만 홀로 종 대손(大孫)이가 모난 몽둥이를 가지고 곁에 있으면서 타격하는 것에 힘입어서 마침내 완전하게 이겼다.”라고 적었다. 짧은 언급이지만, 낮은 신분임에도 의리를 잃지 않고 자신을 지켜준 이에 대한 칭찬과 감사를 표현한 것이다.
10월 9일, 구례 산동촌에서 계책을 발휘해 왜적 다섯 명을 물리친 뒤, 재종지간인 전 초계 군수 첨지(僉知) 정이길에게 사람을 보내 의병대로 함께할 의사를 물었다. 정이길이 이를 승낙하여 대장 정이길, 출전장(出戰將) 조경남, 종사(從事) 정사달(丁士澾), 참모 유지춘(柳知春), 병량유사(兵粮有司) 양덕해(梁德海)로 구성된 의병부대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23일,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군대가 이른다는 소식에 그들의 후방을 치려고 엿보고 있었는데, 마을 친구 박대호(朴大虎)와 그의 가족들이 왜적을 만나 위급한 형세에 처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구해주었다.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면서 조경남은 박대호에게 “자네가 아니었다면 뭐하러 여기에 왔겠는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뒤처지지 말게.”라고 말하는데, 내내 대의에 입각한 발화만 하던 조경남이 보통의 친근한 이웃 사람의 면모를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고향과 고향 사람들을 지켜내려는 그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는 기사이다.
이후 남원·옥과·순창·구례 등지의 산간을 오가면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11월 8일 구례 화정에서 조경남은 또 다른 재종인 선전관 김식(金軾)과 군사를 합하게 된다. 그런데 11일, 이날 조경남이 의병부대로부터 이탈하고 휘하의 의병들이 관군에 속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는 왜군의 권농(勸農) 유수복(劉守福)의 무리를 사로잡아 처벌하는 문제에서 김식과 의견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식은 유수복 등을 즉결처분하려 하였으나, 조경남이 그를 막아서며 “이놈들이 왜적에게 붙어서 심부름을 한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오. 그러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것은 다스리지 아니한다.’라고 옛사람이 경계하였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맹자의 교훈이 있었소. 비록 난리 속에 있다 하더라도 인명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니, 다시 살아나지 못할 형벌을 어찌 함부로 쓸 수 있겠소? 원수부(元帥府)로 붙잡아 보내어 죄상을 끝까지 심문한 뒤에 그를 죽여도 늦지 않소.”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식은 조경남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은밀히 그들을 베어 죽였고, 조경남은 결국 김식과 함께할 수 없다고 여겨 물러나게 된다.
고향 마을로 돌아온 조경남에게 노인 진사 유인옥(柳仁沃)이 동리 사람 60여 명을 모아 이들을 이끌기를 권하니, 조경남은 이를 승낙하고 다시 의병부대를 이끌게 된다. 12월 7일, 운봉현감(雲峯縣監) 남간(南侃)이 도움을 요청하여 세 개의 의병부대가 한 곳에 모이게 되는데 이때부터 의병부대 내부의 갈등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첫째로는 본부 북면(北面)의 자모장(自募將) 출신 구희로(具希老)와의 갈등이다. 구희로가 귀환하였다가 다시 출동하겠다고 하자 조경남은 왜적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알 수 없다며 이를 만류하는데, 이에 구희로가 “저는 비둔하기 때문에 왜군의 행보를 잘하지 못하고, 군사 역시 마구 긁어모은 것이라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니, 죽음을 각오하고 멀리 가 싸우는 데는 같이 따르기 어렵습니다.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 한번 죽음을 늦추려 합니다.”라고 하며 따르지 않았다. 조경남이 그를 크게 질책하니 구희로가 수긍한 척하다가 이날 밤에 군인들을 모두 도망가게 했다. 조경남은 구희로에게 “너의 심장은 개돼지와 다름이 없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너 같은 무리에게서 바랄 것이 못 된다.”라며 비난하였고 결국 구희로는 하직하고 물러났다. 두 번째는 서면(西面)의 자모장 박경춘(朴景春)과의 갈등이다. 전투 경험이 적었던 박경춘이 적진으로 다가갈수록 두려워하며 물러날 것을 청하니, 조경남은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본래 왜적을 토벌하기 위함이니 왜적을 탐지하여 힘껏 싸우다가 다행히 살아나면 살 뿐이지, 어찌하여 기가 꺾이고 또 군대를 철수할 뜻을 나타내느냐?”라고 질책했다. 박경춘도 하직하고 물러나려 했으나 도중에 적군을 만날까 두려워 밤이 되기를 기다렸는데, 결국 왜군을 만나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사이 정예를 자칭하며 선봉이 되길 원하던 김대호(金大好)라는 이가 군중에서 도망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김식과의 갈등이 일어난다. 적병의 세력이 강대하여 물러나 실상촌(實上村)에 이르렀는데, 김식이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 와 조경남에게 다시 진입할 것을 요구했다. 조경남이 이를 거절하였고 김식도 다른 방도가 없어 조경남의 부대와 함께하다가 헤어졌는데, 함께하는 동안 김식의 군대가 산막을 출입하며 민인들의 마소, 잡물을 노략질하여 해를 끼치는 것이 왜군들보다 심했다고 한다. 이상은 『난중잡록』이 참전한 의병이 직접 적은 실기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의병대 내부의 대립과 분열을 옮겨쓴 것이다. 전쟁과 죽음이라는 큰 난관 앞에서 개개인의 의식 차이로 벌어지는 불가피한 문제들과 그에 대한 갈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처럼 『난중잡록』 속 조경남의 의병 활동 기록은 단순히 어느 전투에 참여하여 왜적을 얼마나 물리치고 전공을 세웠다는 내용에서 나아가 의병부대의 실상과 전란의 고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다음 해인 무술년부터는 조경남이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의 막사(幕士)가 되고, 또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의 막하에서 정예군 선봉이 되어 참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관군에 속하게 되어서인지 조경남 개인의 목소리는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상세한 기록으로 속한 막사의 상황이나 행군의 어려움, 임진란에 임하는 명나라 군대의 태도 등을 전하고 있다.
한편 경자년(1600, 선조33) 8월 27일 기사에 다시 한번 조경남의 체험적인 기록이 실린다. 바로 조경남이 호랑이를 잡은 일화이다.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물어가는 일이 셀 수 없이 일어나자, 이 때문에 방어사(防禦使) 원신(元愼)은 체포되어 심문받기에 이르렀고 신임 방어사 이사명(李思命)은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전라 감사 이홍로(李弘老)가 여러 고을에 공문을 돌리니, 조경남이 나서서 쇠뇌를 설치해 호랑이를 잡았다. 『난중잡록』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당시 남원지방의 대학자였던 최시옹(崔是翁)이 쓴 「난중잡록서」에 따르면, 이때 방어사가 그의 공을 인정하고 상을 베풀려 했으나 조경남이 이를 사양하고 대신 백성들의 농지에 부과한 과세를 감해달라고 청하니, 이것이 받아들여지고 상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지역 민인들의 무사 안녕을 생각하는 그의 기조가 드러나는 일화이다.
| 『실록』·『승정원일기』의 일부가 된 개인문인사가의 기록 |
『난중잡록』은 1642년(인조20)에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편찬할 때에 기초 자료로 활용된 바 있다. 임진년 왜란이 발발하여 선조가 피란을 떠난 이후, 궁성에 난 불로 홍문관에 간직해둔 서적, 춘추관의 각조실록(各朝實錄),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의 사초,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이 남김없이 타버렸다. 왜란이 평정된 뒤 임진년의 사초를 행재소(行在所)에서 옮겨왔으나 정리되지 않은 채 세월이 흘러 좀먹고 못쓰게 된 것이 많으니 춘추관으로부터 이를 정리하자는 계(啓)가 지속적으로 올라왔는데, 결국 이 사업은 광해군 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광해군일기』 1년(1609) 7월 13일 기록을 보면, 평시(平時)의 사책(史冊) 중에 하나도 남아 있는 게 없어 전혀 근거할 바가 없으니, 사대부가 보고 들은 바를 모은 것 또는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는 일기를 거두어 사료를 보충할 것을 춘추관에서 청하는 내용이 있다. 이에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 윤선거(尹宣擧)의 『계갑록(癸甲錄)』 등과 함께, 『난중잡록』은 수정 실록의 강령이 되었다.
한편 1744년(영조20) 승정원에서 화재가 일어나 1592년(선조 25)부터 1722년(경종1)까지 130년 1,796권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소실되는 일이 있었다. 영조가 1746년(영조 22) 5월 일기청의 설치를 명하여 곧바로 『승정원일기』의 개수 작업에 들어가 이듬해 548권의 개수를 완료하였는데, 인조 8년조 31개 항의 기사가 『난중잡록』에서 인용되었다.
문학적인 면모도 분명 돋보이지만, 『난중잡록』은 기본적으로 역사서를 쓰고자 한 결과물이다. 소위 야사(野史)·야승(野乘)·패사(稗史)로 불리는 개인문인사가(個人文人史家)의 기록 중 일부가 나라에서 편찬한 역사서에 들어가게 된 데에는 치밀한 자료 수집과 성실한 기록의 영향이 크다. 사라진 역사 기록을 대체하거나 보완하고, 또 중앙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지방의 기록들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난중잡록』이 갖는 의미가 크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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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남, 「난중잡록」, 『대동야승』,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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