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 소설을 넘어: 조선 후기 사회
갈등과 영웅적 서사의 융합,
<성현공숙렬기(聖賢公淑烈記)>
김민정(경상국립대학교 여성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조선 후기, 가문의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과 개인적 욕망이 충돌하던 시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창작된 <성현공숙렬기>는 단순한 가문소설을 넘어, 당시 사회의 주요 문제를 문학적으로 풀어낸 걸작이다. 명나라 역사와 조선 후기의 유교적 질서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가문의 계후 갈등과 여성 주인공 주숙렬의 영웅적 여정, 악인의 새로운 서사, 하층 여성의 적극성과 같은 새로운 서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제공한다.

그림1: 셩현공슉렬긔(奎15402)
| <성현공숙렬기>의 창작 시기 및 서사 구조 |
<성현공숙렬기(聖賢公淑烈記)>는 성현공인 임희린과 그의 아내 주숙렬 그리고 임부(林府) 일가에 관한 일대기가 그려져 있는 25권 25책의 고전 대하소설이다. <성현공숙렬기>는 임희린과 주숙렬의 고난과 극복 과정 그리고 임희린과 이복형제(異腹兄弟)인 임유린 간의 계후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임희린의 양모(養母)인 여 부인은 자신의 친자인 임유린을 종통(宗統)으로 세우기 위해 임희린을 여러 수난에 빠트린다. 이러한 계후 갈등으로 인해 임희린의 아내인 주숙렬 역시 수난에 빠지게 된다. 특히 주숙렬이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여화위남(女化爲男)하여 전쟁에 출전하게 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서사는 여타의 고전대하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요소라 할 수 있다.
<성현공숙렬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쟁점은 무엇보다 계후 갈등이다. 여기서 계후(繼後)란 가문의 적장자를 선정하는 문제, 즉 종법제에 관한 이야기를 말한다. 이는 조선 후기 유교적 가부장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종법제는 주자학의 정통론이 확립되어 가는 것과 함께 정착하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 조선 성리학과 함께 가족제도의 일반적인 원칙으로 자리잡게 된다. 작품 속에서 임희린과 임유린, 임유린의 친모인 여 부인이 임희린과 갈등을 겪게 되는 이유 역시 이 ‘계후’ 문제 때문이다. 그러나 여 부인의 각종 계략은 임희린의 효성과 가문 수호 의지 앞에서 실패로 돌아가며, 여 부인은 최종적으로 임희린의 어머니로 처벌을 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유교적 가치가 중심이 되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 <성현공숙렬기>의 역사적 수용과 계후자 갈등의 서사적 의미 |
<성현공숙렬기>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임씨 집안이 계후자를 정하고 그 계후자가 임씨 집안을 창성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이에 따라 종통을 선정하는 문제, 그로 인한 갈등이 중심으로 전개된다. 작품은 명나라의 실제 역사인 정난지변(靖難之變)과 한왕의 역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락제와 한왕은 모두 형망제급(兄亡弟及)을 실현하려 한 인물로, 영락제는 성공하여 성군으로 묘사되고, 한왕은 실패하여 악인으로 간주된다. 영락제는 정난지변을 통해 왕위를 차지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동시에 형망제급을 노린 한왕을 용서하게 된다. 이에 반해 한왕은 역모에 실패한 인물이기에, 음탐하여 남의 아내를 탐하고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형제의 우애를 깨며 잔인하고 속임수를 쓰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성현공숙렬기>는 바로 이 두 인물을 대비적으로 묘사하며 종통의 자질, 가문의 화합을 중요하게 다루게 된다.
<성현공숙렬기>는 종통을 선정하는 문제를 통해 장자 상속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계후문제의 관점을 옹호하는 듯하면서도, 가문의 번영을 위한 종통의 책임과 자질을 부각한다. 특히 작품은 영락제와 한왕의 사례를 통해 가문을 잘 이끌어 가는 능력일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영락제는 성공하고 한왕은 실패하는데, 결국 이것은 대처의 방법과 인물됨의 차이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가문 내적 원칙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과 그 결과 집안의 창달 여부도 같이 보겠다는 논지를 중심으로, 가문의 안정성을 위해 계후자가 포용력과 관용을 갖추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임씨 집안에서 현재 가부장의 맏아들인 임희린이 다음의 가부장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임씨 가문이 지향하는 바가 왕가보다 윤리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피력하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가문의 화합과 윤리적 정당성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현공숙렬기>는 역사적 배경과 소설적 변용을 통해 계후자 선정의 정당성과 윤리적 우위를 논하며, 계후자는 관용과 포용력으로 집안 구성원을 이끌어서 집안을 융성시켜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가문의 질서와 안정, 구성원의 통합을 중시하는 조선 후기 가문소설의 특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요소 외에도 여성인물인 주숙렬, 반동인물인 임유린, 하층 여성인 시비(侍婢)와 같이 당대의 소설에서 곧잘 배제되곤 했던 ‘남성 주인공’이 아닌 인물들의 활약이 매우 두드러지고 있어 특징적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하나씩 살펴보며 글의 재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 여성 영웅으로서의 ‘주숙렬’을 찾는 재미 |
주숙렬의 역할은 전통적 여성 역할을 넘어서서 현대적 여성 독자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요소를 제공한다. 그녀는 가문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가부장제 속에서도 자기 주도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 임부에서 출거되기 이전과 임부에 복귀한 이후 그 사이에 위치에 있는 주숙렬의 ‘여화위남(女化爲男)과 참전(參戰)’ 서사는 여성영웅소설의 화소와 그 양상이 매우 유사하다. 특히 초월적 조력자인 태허법사에게 비서(秘書)를 받아 익히는 화소나 조력자가 나타나거나 남복을 하고 전쟁에 참전하는 화소는 여성영웅소설에서 흔히 활용되는 화소 중 하나이다. 주숙렬의 영웅화(英雄化)는 주숙렬이 승리하는 과정 내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전쟁을 치르는 도중 주숙렬에 의해 한왕의 음모가 드러나게 되고, 그를 밝히기 위해 황제는 국문(鞫問)을 진행하게 된다. 국문이 진행되면서 한왕의 음모뿐만 아니라 여 부인과 임유린의 죄 또한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주숙렬은 모든 반동인물의 악행을 해결하며 영웅화된다.
주숙렬의 영웅화는 여성의 독립성과 주체성 강화를 보여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주숙렬의 영웅화는 당시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사회적 갈등의 해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숙렬은 ‘선(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 반동 인물들의 악행을 폭로하고 그들을 법적, 도덕적으로 응징함으로써 가문의 질서를 바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 악인으로서의 ‘임유린’ 서사를 보는 재미 |
임유린은 임희린의 이복형제로 서사의 중요한 축을 이끄는 반동인물이다. 임유린의 악행 서사는 작품의 긴장감을 한껏 높인다. 임유린은 단순한 악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성이 짙은 캐릭터로 묘사된다. 임유린은 선비로서 수행하지 않고 현실적 욕망을 추구하는 범속(凡俗)한 인물로 형상화된다. 이것은 주동인물인 임희린이 태어나면서부터 어진 성품으로 수행하는 전형적인 대현군자로 형상화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유린의 행동은 유가적 가치를 신념화하고 있는 임희린의 관점에서는 임유린은 문제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임유린의 행동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임희린이 지적하는 임유린의 행동은 ‘조상의 제사 때 경건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맛있는 음식과 고기를 먹은 것’, ‘경전보다는 소설을 좋아한 것’, ‘벼슬과 미녀를 말한 것’ 등이다. 물론 임유린은 자신의 위치를 얻어 내고자 하는 그 과정에서 비열한 수단을 사용한다. 임유린의 행동 중 많은 부분은 악한 행동이라기보다는 현실적 욕망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엄격한 유가적 관점의 잣대로 본다면 임유린은 부정적인 인물이지만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을 가진 범속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임유린의 모습은 너그러운 시각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임유린이 임희린의 질책을 받고 땀을 흘리며 부끄러워하자 임희린은 이런 임유 린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한편으로 어여쁘게 본다는 서술은 독자가 현실적 욕망을 추구하는 임유린의 모습을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임유린은 좌절과 실패를 겪으며 독자들에게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 규방 여성의 한계를 넘어: 시비(侍婢)들이 완성한 주숙렬의 영웅성 |
또한 <성현공숙렬기>에서는 다양한 하층 여성인물이 적극적으로 등장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인물이 바로 열영, 상운, 매송이다. 주숙렬은 임희린의 아내로, 임희린 대신 친자(親子)인 임유린을 종통(宗統)에 세우려고 하는 여 부인의 계교로 인해 집안에서 쫓겨나게 된다. 열영, 상운, 매송은 주숙렬이 임부(林府)에서 쫓겨나 도로에 유리(流離)하는 과정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이때 세 명의 시비는 내부 조력자와 외부 조력자로 나누어져 주숙렬의 한계를 보완한다. 주숙렬은 여성 영웅으로 영웅화되었기는 했으나, 규방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시비들이다. 먼저 열영은 정신적 조력자이자 내부형 조력자로 아군 진영 내부에서 주숙렬을 보필한다. 이에 반해 상운과 매송은 태허 법사의 양녀이자 제자로 주숙렬의 외부형 조력자로 활약하게 된다. 이들은 적진에 직접 진입하거나 전략을 실행하는 등 물리적 조력을 행하게 된다.
주숙렬은 사대부 여성의 삶을 탈피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남복을 하고, 대원수로 전쟁에서 승리를 이뤄냈음에도 그에게 내려진 것은 효문공주라는 공주의 직첩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숙렬 또한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전쟁터에서 직접 구해낸 남편 임희린에 의해 강제로 부부 관계를 맺어야 했으며 결국은 다시 시가로 돌아와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낸다. 주숙렬이 뛰어난 인물임을 반론할 여지는 없다. 하지만 주숙렬의 ‘영웅성’은 주숙렬이 가진 능력과 관계없이 그의 타고난 능력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갈등 해결을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그렇기에 시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주숙렬을 사대부 여성으로 남게 함과 동시에, 이른바 ‘남성의 행위’인 영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대리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비들은 적극성을 부여받게 된다.
| <성현공숙렬기>의 현대적 의의와 결론 |
<성현공숙렬기>는 단순히 조선 후기, 한 가문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다양한 인물 군상을 탐구하여 사회적 갈등과 해결의 서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문학이 가진 힘이라 하겠다. 여성으로서 영웅화된 주숙렬의 활약, 반동인물인 임유린의 서사, 하층 여성인 시비들의 조력과 같은 요소는 독자로 하여금 작품의 몰입을 높이는 데에 큰 힘을 부여한다. 또한 당시 사회가 가진 다양한 욕망과 도덕적 갈등을 서사로써 보여주고 있다. <성현공숙렬기>는 조선 후기 사회적·윤리적 갈등을 생생하게 반영한 문학적 걸작으로, 가문소설이 가진 전통적인 역할을 뛰어넘는다. 복합적인 사회상이 담긴 이 소설은 오늘날까지도 새롭게 조명될 수 있을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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