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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애(朝鮮愛)와 친일 변호 사이의 독배


-최남선, 國民朝鮮歷史

 

김명재(서울대학교 역사학부 강사)

 

 

 

 

최남선과 국민조선역사

 

 

 

사진 1 : 최남선, 국민조선역사(서울대학교 농학도서관 소장본)

 

최남선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시기, 해방 이후까지 조선 역사학에 관한 다양한 저술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는 신문관을 통해 잡지 소년, 청춘등을 발행한 언론인이며, 1919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체계적인 한국사 통사를 계획하여 1930조선역사강화를 발표했고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고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던 1943년에는 고사통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해방된 역사를 위해 기존의 두 통사를 바탕으로 국민조선역사를 탈고하여 1947년에 발표했다. 저서 집필 자체는 광복 이후 분위기를 의식하면서 3개월의 노력 끝에 19451120일에 마쳤으나 해방 이후 물자가 극도로 부족한 상황 속에서 즉각적인 출간은 어려웠다. 따라서 출간이 미뤄지다가 이후 1947110일에야 간행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해방 이전 조선 문화사 연구와 친일 행적

 

 

최남선은 주지하다시피 조선학과 조선 민족의 문화사를 선구적으로 주창한 인물인데, 그에게 문화는 한 종족의 생활방식 전체, 즉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과 관련된 모든 힘들과 그 표현들을 가리키며 모든 종류의 사회집단과 제도, 기술, 예술, 문학, 학문 등이었다. 그는 잡지 동명에 연재한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에서 인류 문화의 서광은 사람이란 자각에서 시작되었으며 인격적 노력으로써 내적 연마와 외적 모습을 쌓은 곳에 발달과 생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조선 민족이 역사 있는 민족이 되는 것이 야만이 아닌 문화민족, 문화인이 되는 요체이며 문화라는 기준이 민족경쟁의 중심이 되었다.

 

비역사적 민족이란 말이 야만의 동의어이다, 역사, 역사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생각할 때, 아아! 몸에서 소름이 치지 않는가 ... 문화적 능력자 또 강자가 된 뒤에야 존재가 보장되고, 생활이 안정되고, 즐거움과 기쁨이 차례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성찰과 마음가짐과 노력이 우리는 얼마나 돈독한가? 조선의 문화는 진실로 전체 아시아 의식의 종합적 표현이요, 전체 아시아 정신의 혼일적 발로이다. 이 때문에 더욱 분발하고, 이 때문에 더욱 노력해서 파묻힌 영광을 파내고, 감추어진 광명을 끌어내고, 잠자는 심령을 깨우고, 감추어진 능력을 발휘해서, 세계 문화의 대조류에 조선인의 꽃배를 두둥실 띄울 수 있는 우리의 성의가 얼마나 되는가

 

최남선, 1922.9.17.~12.17,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 동명(류시현 옮김, 2013, 사론·종교론, 경인문화사)

  

최남선은 조선 문화 연구에서 일본인들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정신, 사상, 학술에서 독립하여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학을 세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 민족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서술하기도 하였는데, 조선역사(1931)역사를 통해서 본 조선인에서 조선인은 상당한 문화를 이룩한 문화의 주인이지만, “오히려 민족적 완성의 경지에 들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신라의 문화가 융성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나 당나라의 연장이고 고려의 문화가 높아다하여도 또한 송나라와 원나라의 모방이었고 겨우 조선에 이르러 세종의 성명을 시작으로 하여 민족 문화의 특색이 강렬히 표현되었으나 조선인의 문화적 업적이 세계 인류 문화의 전진에 얼마만한 추진력과 첨가량이 되었느냐 하는 것은 심히 말하기 거북할 정도라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그는 현실의 조선과 조선인이 불구자이며 미성년자임을 역사에서 알일종의 전환기에 우리가 섰음을 엄숙하게 각성하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최남선은 일제의 전시체제기 아래에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주 건국대학 교수 등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및 중국 침략을 지지하고, 조선인 학생에게 지원병이나 학병으로 참가할 것을 독려하는 강연 및 저술 활동을 펼치는 등 친일행적으로 규정될 만한 일련의 활동을 하였다. 이에 따라 1949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같은 해 5월 공판을 받았고, 감옥에서 자신의 생애와 친일 혐의를 고백하고 참회한 자열서(自列書)’를 쓰기도 하였다. 조선의 민족 문화와 조선학을 그렇게 사랑했던 인물의 친일 행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해방 이후 국민조선역사의 간행

 

 

 

사진 2 : 최남선, 국민조선역사』 「(서울대학교 농학도서관 소장본)

 

최남선은 해방 후 독립운동사와 조선 역사와 관련된 서적을 새롭게 쓰거나 일제 강점기 출판된 서적을 재출판하였고 이를 통해 해방 직후 설립될 신조선의 국민 소양과 자세를 함양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국민조선역사에서 국사는 신조선 국민이 가져야할 필수 소양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최남선은 국민조선역사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국민 행동의 훌륭한 귀감이요 국민 정신을 배양하는 토양으로, 국민 생활에서 거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8.15 해방은 무엇보다도 한국 국민의 역사를 일체의 훼손되고 가려지고 왜곡된 역사에서 건져내어 진정한 본모습으로 돌아오게 했다는 데에서 의의를 생각하고 가치를 발양하여야 할 것이다. 대개 정당한 역사를 소유하는 것이 국민 생활의 출발점이고 진행선이고 또 귀착할 목표이기 때문이다.

 

국민조선역사는 해방 후 쏟아진 최남선의 다른 단행본과 함께 널리 읽혔다. 당시는 일본사가 국사이던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였기에 마땅한 한국사 개설서가 없었고 독립된 조국에서 제대로 된 민족의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일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국민조선역사는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여 각 학교의 교재로 채택되었다. 또한 당시 한반도는 남북 분단과 찬탁/반탁의 분열의 시기였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최남선은 국민조선역사를 통해 조선 민족의 통사를 정리하고 민족의 단결과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 신조선의 상황을 변화시킬 것을 촉구하고자 하였다. 인기리에 판매되던 국민조선역사는 이후 1955년 동국문화사를 통해 우리나라역사로 재출간되기도 하였다. 아래에서 국민조선역사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국민조선역사의 특징과 그 의미

 

 

최남선은 시대구분에 많은 고심을 하여 1930조선역사강화이래 한국사를 상고(上古), 중고(中古), 근세(近世), 최근의 4시대로 구분하였다. 국민조선역사또한 상고는 단군 조선에서 후삼국시대까지, 중고는 고려 건국부터 멸망까지, 근세는 조선 건국에서 철종까지, 최근은 대원군 집권에서 한일병합과 일제의 패전 및 광복까지 다루었다.

 

국민조선역사는 일제시기에 검열로 인해 쓰지 못했거나 설령 쓴다고 해도 에둘러 써야 했던 내용들에 대해서 새롭게 장을 두어 서술하였다. 예를 들어 첫 장은 신시(神市)’인데, 삼국유사의 단군 관련 기록을 그대로 실어 신시 시대로부터 한국사를 서술했다. 기존 일제시기의 통사에는 단군 왕검만 거론했으나 국민조선역사에서는 단군이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의 아들이라는 단군 신화의 전반부가 그대로 실렸다. 고대사에서는 일본에 대한 조선 민족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강조했다. 예를 들어 고대 백제의 유이민의 자손이 일본 천왕이 되었다거나 일본의 산인(山陰)지방이 신라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한 것, 왜국의 신하가 되느니 차라리 신라의 개돼지가 되겠다면서 죽어간 박제상의 일화가 담겨 있다.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조선 민족의 주체적 극복을 강조하는 서술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중국 한나라의 침입과 한사군 설치 이후에 나타난 민족의 자각이라는 장에서는 낙랑과 같은 큰 군현이 우리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여 은근히 압박을 주어서 계통 다른 백성이 우리 땅에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절실히 깨달았으며 이에 그들을 몰아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이에 일어났다고 정리하였다. 한일병합 이후에 대해서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민족적 저항을 강조하였는데, 예를 들어 3.1운동의 전개과정, 만주에서의 조선인들이 반만 항일전의 중추로 활동하고 중국에서 별동대로 참가하였다는 설명, 태평양 전쟁 개전 이후에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국내에서도 합법적·비합법적으로 가능한 한도의 해방 투쟁을 꾸준히 진행하여 한국인의 불요불굴하는 반발력을 보였다고 평가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시대의 당쟁을 부정적으로 서술하였다는 점인데, 특히 임진왜란 이전에 당론장을 따로 두었으며 임진왜란 발단 부분에 동·서인 분당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선조 대는 동서 분당으로 인해 내부 분열이 점점 심해지고 국가의 모든 통제력이 이완되었고, 선조가 결국 시비의 변별에 헤매고 여색에 빠져 차차 정치에 권태를 느끼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전 정세 시찰을 겸하여 황윤길과 김성일을 보내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와 회견하도록 하였지만, 황윤길은 도요토미의 거동으로 보아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고 김성일은 일시적인 허세이고 실제로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동인이 권력을 잡자 서인인 황윤길의 의견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이렇듯 최남선은 조선시대의 조정 내 당쟁을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이로 인해 국가의 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러한 최남선의 서술은 해방 이후 한반도 상황과 연결시켜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는 남북 분단과 찬탁/반탁 분열의 시기였으며 이때 최남선은 민족의 단결을 주장할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인들이 우월한 독창력과 반발력 등이 장점이지만, 내부 분열이나 조직력이 취약하다는 비판을 아래의 총론에서도 서술하였다.

 

 

최근의 왜화(矮禍) 30여년도 결과적으로는 한국인의 강인 투철한 민족적 반발력을 증명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장구한 한국 역사의 과정에는 한국인이 장점과 함께 결점이 정직하게 드러나 있다. 우월한 독창력과 총명한 변통성 같은 자랑거리가 있는 일면에, 조직력이 취약하고 집단성이 느슨하여 가끔 의외의 손실을 부른 부끄럼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이따금 생겨나는 내부 분열의 관성적 작용이 그때마자 영락없이 국민적 재앙을 가져왔건만, 여기에 대한 반성과 징계가 결여하여 동일한 과오를 대고 되풀이하는 것은 거의 설명하기 어려운 어리석고 암울한 모습이다. 과거의 역사가 장래의 거울이라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모름지기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을 공평히 거기에 비춰 보아 사실의 교훈 앞에 엄숙히 공손하여야 할 것이다. 새로운 한국의 건설은 곧 세계의 앞에서 치르는 크나큰 국민적 시험이다. 얼마만큼 우리 미덕을 잘 키우고, 얼마만큼 우리 오점을 불식하며, 또 얼마만큼 창조하며, 얼마만큼 비약해서, 어떻게 세계 역사의 큰 장면에서 빛나는 월계관을 집어 쓰려는가. 한국의 역사는 영광의 새 책장을 우리에게 기대한다.

 

그렇지만 당시 친일파로 규정된 최남선이 민족 구성원의 일치단결을 내세우기에는 개인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 단합을 주장하는 것이 당시 한반도의 현실에서 좌·우익 사이의 분열에 대한 경고일 수 있지만, 반대로 일제 전시체제기 친일 행적을 감행한 자신에 대한 면죄부로도 읽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일제시기의 통사와 달리 해방 후의 국민조선역사에 대한 서술이 변경된 부분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일제의 탄압과 검열 때문에 최남선이 채 못 다한 말을 해방 후에 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와 반대로 최남선이 수립하고자 했던 조선 역사와 조선학의 내용은 대한민국과 민족주의 우파의 논리를 반영한 것이고, 그 개인에게는 일제하 친일 행위에 관한 면죄부를 삼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인 시각도 혼재한다.

 

 

 

 

참고문헌

 

류시현, 해방 후 최남선의 활동과 그에 관한 기억, 한국사학보27, 2007.

류시현, 최남선 연구, 역사비평사, 2009.

류충희, 해방 전후 최남선의 역사 인식과 불함문화론, 코기토103, 2024.

서영채, 단군과 만주, 아첨의 영웅주의: 최남선의 자열서읽기」 『한국현대문학연구32, 2010.

최남선 지음·이영화 옮김 국민조선역사경인문화사, 2013.

최남선 지음·류시현 옮김, 사론·종교론, 경인문화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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