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를 통해 5세기 고구려인의 생각 읽기
김수진(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강사)
| 양수경(楊守敬)의 『고려호태왕비(高麗好太王碑)』 간행 |

<사진 1> : 高麗好太王碑(想白古951.032-G689,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1909년 간행된 『고려호태왕비』(想白古951.032-G689-v.1-6)는 양수경(楊守敬, 1839~1915)이 고구려 광개토왕비의 탁본 자료를 수집하여 쌍구개판본(雙鉤開版本)으로 편찬한 것이다. 양수경은 청말 민국 초의 저명한 역사지리학자, 금석문자학자, 목록판본학자로서 지명 연혁, 금석, 서법, 고적판본, 목록 등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1865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금석문을 구하고 직접 탁본을 만들면서 금석학 연구를 하였는데, 특히 금석학의 고증에 있어서 매우 엄격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고려호태왕비』에도 나타나는데, 철저히 탁본 자체에 기반하여 석문(釋文)을 작성하고자 하여 추정이 가능한 부분이라도 탁본에서 글자가 판독되지 않으면 그대로 비워두었다. 『고려호태왕비』의 저본이 된 탁본은 1902년 친구 조이경(曺彝卿)으로부터 구한 것이었다. 조이경은 이것을 초탁본(初拓本)이라고 하였고 양수경도 이를 완선본(完善本)으로 평가하고 이에 근거하여 『고려호태왕비』를 출판하였으나 이 탁본 역시 석회로 글자를 보수한 석회보자(石灰補字) 탁본이었다.
1876년 청나라의 발상지에 대한 봉금(封禁)이 해제되고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되면서 1880년 무렵 광개토왕비가 비로소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탁본을 구했고 무분별하게 탁본이 계속되면서 비면 자체에 훼손이 가해졌다. 오랜 시간 비면을 덮고 있던 이끼를 빠르게 제거하기 위해 쇠똥을 칠하고 불을 지르면서 비면이 훼손되었다. 울퉁불퉁한 비면의 글자가 좀 더 판독이 잘되도록 석회를 무분별하게 도포하여 탁본을 하면서 훼손이 이어졌다.
1887년까지는 비면에 종이를 붙이고 가볍게 두드려 글자의 윤곽을 본뜬 다음에 틈이 생기거나 글자가 없는 자리에 먹을 칠해서 탁본처럼 보이게 하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유행하였다. 1887년에서 1889년 무렵에는 쌍구본(雙鉤本)과 원석 탁본이 병행되었으며 1889년에서 1902년까지는 정식의 원석 탁본이 유행하였고, 1902년에서 1937년 무렵까지는 석회를 도포한 후 재탁본을 하는 방법이 유행하였는데, 1902년 양수경이 입수한 탁본도 석회로 이용한 탁본으로, 아무런 수식(修飾) 없이 만든 원석 탁본보다는 글자가 선명하게 판독되었다.

<사진 2> : 광개토대왕비 탑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양수경은 『고려호태왕비』라고 책의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우리는 호태왕비보다는 광개토왕비라는 명칭이 훨씬 친숙하다. 중국 집안에 광개토왕비의 실물이 있는 비각의 현판도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쓰여있고, 일본의 연구자들도 호태왕비라는 명칭을 흔하게 사용한다. 광개토왕의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국강상’은 나라의 언덕으로 광개토왕의 능이 위치한 곳으로 장지(葬地)를 의미하고, ‘광개토경’은 영토를 널리 열었다는 것으로 재위 당시의 업적을 의미한다. 광개토왕(재위: 391~412)의 정복 군주로서의 위상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백성들을 평안하게 살도록 하였다는 ‘평안’, 마지막으로 ‘호태왕’은 왕을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호태왕은 존칭으로 여러 왕에게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하나의 대상을 특정하여 부르는 명칭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광개토왕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재위 당시의 업적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광개토경에서 비롯된 광개토왕이라는 명칭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 제국주의적 관념을 투영한 ‘신묘년조(辛卯年條)’의 판독과 해석 |
광개토왕비는 높이 6.39 미터, 너비 1.3~2.0 미터의 거대한 사면비(四面碑)다. 비석을 실견하면 누구나 비석의 크기와 위용에 압도된다. 414년 장수왕(長壽王, 재위: 412~490)은 아버지 광개토왕의 업적을 이 커다란 비석을 세워 기념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중국과는 구분되는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주변국을 고구려 중심의 국제 질서로 편입시키고자 하였는데, 그와 같은 고구려의 천하관과 고구려가 천하 사방의 중심이라는 인식은 광개토왕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물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광개토왕대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는 장수왕으로 대변되는 고구려의 최고 국가 권력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정리하고 선포한 당대(當代)의 기록이다.
광개토왕비는 네 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는데, 각 면에는 비문이 들어갈 윤곽을 긋고, 다시 그 안에 세로로 길게 선을 그어 각 행을 구분하였다. 동남쪽의 1면에 11행 449자, 서남쪽의 2면에 10행 387자, 서북쪽의 3면에 14행 574자, 동북쪽의 4면에 9행 369자로, 모두 44행 총 1,775자를 새겼으나 이중 150여 자는 훼손이 심하여 읽을 수가 없다. 이렇게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를 중심으로 여러 논쟁이 발생하였고, 이것은 광개토왕비 연구와 관련하여 근대 국민국가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적 관념이 투영된 해석이 나타나는 시발점이 되었다.
1880년 일본육군참모본부는 주구경신(酒勾景信, 사코 가게노부) 중위를 만주 일대에 파견하여 밀정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때는 마침 광개토왕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시기로, 1883년 사코는 131장으로 이루어진 쌍구가묵본의 광개토왕비 탁본을 제출하였다. 이를 토대로 일본육군참모본부는 광개토왕비 연구에 착수하였고 1889년 『회여록(會餘錄)』을 출간하였는데, 광개토왕비가 고구려인들이 남긴 고비(古碑)라는 점을 밝히면서 이른바 ‘신묘년조’를 다음과 같이 판독하고 해석하였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일제는 이 신묘년조를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신공황후 삼한정벌론과 연결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입증하는 기록으로 이해하였다. 위의 □□은 加羅로 추독하면서, 4세기 후반 이후 2세기 동안 왜가 임나(가야)를 정복하고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백제와 신라에도 영향력을 미쳤고, 그것이 고구려인이 남긴 광개토왕비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4세기에 이미 한반도 남부를 점유한 적이 있으므로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일제는 신묘년조를 임나일본부설을 합리화하고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일제의 신묘년조 해석에 대하여 정인보는 한문에서는 반복되는 주어나 목적어가 종종 생략되는데, 신묘년조의 주어는 고구려이고, 고구려가 생략된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끊어 읽고 해석하였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新羅以爲臣民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 백잔이 (왜와 통해) 신라를 (침략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이었으므로…
정인보는 광개토왕비는 고구려에 유리한 상황을 담고 있다고 보고, 위와 같은 해석을 한 것이다. 북한의 김석형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백제가) 왜를 동원해 신묘년에 (고구려에) 쳐들어왔으므로,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백잔을 격파하고,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정인보나 김석형의 해석은 문장 안에서 주어를 고구려로 상정하고 주어와 목적어가 생략되는 가정 아래 해석하여 자연스럽지 못한 면이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을 수 없었음을 전제한 것이다. 또한 앞서 살펴본 모든 해석은 판독문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1972년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는 ‘비문변조설’을 제기하였는데, 비문 변조 여부의 타당성을 떠나 이진희의 연구는 그간 의심하지 않았던 탁본 자료라는 텍스트 자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환기를 일으켰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 학자 왕건군(王健群, 왕젠췬)은 광개토왕비가 소재한 집안에 머물며 현지 조사를 하였는데, 주민들의 인터뷰를 통해 광개토왕비의 탁본 과정 등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이곳에서 탁본 작업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던 초천부, 초덕균 부자가 수월하게 탁본을 하기 위해 비면 일부에 석회를 발랐지만 비문의 글자를 조작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석회를 바르기 전의 원석탁본이 발견되면서 석회탁본과 비교를 통해 판독에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 광개토왕비를 건립한 고구려인의 목소리 |
다시, 414년 장수왕이 광개토왕비를 건립한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장수왕은, 고구려는 왜 광개토왕비를 세웠고, 이 거대한 사면비를 어떠한 내용으로 채우고자 했을까. 광개토왕비는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건국 신화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시조 추모왕(鄒牟王)으로부터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에 이르는 왕위계승, 17세손 광개토왕의 즉위와 훈적을 요약하고 비를 건립하는 경위 등을 밝혔다. 두 번째 부분은 광개토왕이 수행한 군사 활동의 내용과 성과를 연대기로 서술하였는데, 8개 기년 기사와 2개의 종합 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기록한 이 내용은 비문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중심이 되는 것으로 사실상 광개토왕비를 건립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 330가(家)의 출신지와 연호 수, 기존 수묘인 제도의 문제점과 새로운 수묘제 및 차출 방식, 수묘인 관리 법령 등 수묘와 관련된 일체의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앞서 살펴본 신묘년조에서 ‘백잔‧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는 구절의 해석 자체에는 이견이 없지만, 백잔, 즉 백제가 4세기에 고구려에 복속되어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4세기는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과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375~384)의 시기로, 이른바 백제의 최전성기로 일컬어진다. 광개토왕이 즉위한 391년 즉 신묘년 이전의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면, 371년 겨울,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하였는데,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377년 겨울 10월에는 군구수왕이 다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고, 390년 9월에도 백제가 고구려를 쳐서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200여 명의 포로를 잡았다. 이러한 가운데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하였다. 광개토왕이 즉위하기 전 고구려는 백제를 속민으로 삼기는커녕 백제의 공격으로 왕이 전사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한복판에서 고전을 겪고 있었다.
광개토왕비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기록한 부분이다. 이것이 광개토왕비를 훈적비를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어도 백제는 광개토왕 즉위 이전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는 백제와 신라를 ‘예로부터’ 고구려의 천하를 구성하는 하위 단위로 설정하면서, 광개토왕대의 정복 활동의 결과를 소급 적용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구려가 주관하는 세계를 어지럽히는 외부 세력으로 왜를 설정하고 실제보다 과장함으로써 그 왜를 격파한 더욱 강력한 고구려, 즉 광개토왕의 업적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물론 당시 왜의 실상이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조선시대 평안도 관찰사였던 성현(成俔)은 압록강 건너에서 광개토왕비를 보면서 ‘천 척의 비가 우뚝 서 있다.’라고 시를 썼을 정도로 광개토왕비의 크기는 압도적이었다. 고구려가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고 기록하기 위해 이렇게 커다란 비를 선택한 것은 광개토왕의 업적의 크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한 측면도 있는 것은 아닐까. 백성의 대다수는 한문을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문의 내용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광개토왕비를 보면서 백성들이 광개토왕비에 광개토왕을 투영하도록, 또는 광개토왕의 업적은 이만큼 위대한 것이었음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고, 후대에 광개토왕의 업적을 전달하고 기억을 재생산하는 장치로서 역할을 하도록 거대한 사면비를 세운 것이라 생각한다.

<사진 3>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사진(1913년 1월 13일 촬영 추정)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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