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지의 역사 |
지리지는 정사(正史)의 일부인 지(志)로 출발하여 독립된 지리지로 발전하였다. 중국에서 반고(班固)가 『한서(漢書)』를 지으면서 처음으로 지리지(地理志)를지(志)에 포함시켰다. 우리나라도 정사체로 쓰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는 각각 지리지를 갖추고 있다.

사진 : 『삼국사기』 지리지 <규 4354>
『삼국사기』 지리지와 『고려사』 지리지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당대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후대 역사서 편찬자의 관점에서 정리된 것으로서, 지역의 연혁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고려사』 지리지는 고려시대 군현의 연혁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여기에 중요한 산천이 부기된 정도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호구와 전결수 등 인문지리적 내용이 풍부한 것과 비교된다.

사진 : 『고려사』 지리지 <규귀 3539>
조선시대에 독립적인 지리지가 편찬되면서 본격적인 지리지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시대 지리지의 역사는 15세기~16세기 중반, 16세기 후반~17세기, 18세기~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 19세기 말의 면단계로 나눌 수 있다.
15세기~16세기 중반에는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던 시기로서 통치 기초 자료의 확보 차원에서 전국지리지 편찬이 이루어졌다. 세종은 문물제도를 정비하면서 각 지역의 통치 기초 자료를 수집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지리지 편찬을 지시하였다. 1432년(세종14) 『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으며, 『팔도지리지』의 편찬 작업 과정에서 만들어진 『경상도지리지』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사진 : 『세종실록』 지리지 <전주사고본, 규 12722 >
『세종실록』을 편찬하면서 『팔도지리지』를 약간보완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이것이 바로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경제, 사회, 군사 관련 사항 등 통치의 기초 자료를 확보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전국지리지이다.

사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규귀 193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가장 많이 이용된 전국지리지이다. 신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하여 편찬한 것이다. 세조 때부터 양성지의 주도로 전국지리지 편찬 사업이 지속되어 1481년(성종12)에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일단 완료하였다. 그런데 이즈음 명나라에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가 간행되자 다시 『대명일통지』체계에 맞추어 개편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1487년(성종18) 마침내 『동국여지승람』을 간행하였다. 이를 다시 1530년(중종 25)에 증보 간행한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목판본으로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널리 유포되어 조선 후기까지도 전국지리지로서 애용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형태적 측면에서는 처음으로 지리지에 지도를 첨부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전국 기사의 첫머리에 팔도총도(八道總圖)를 첨부하고, 각 도 기사의 첫머리에 도별 지도를 첨부하였다. 내용상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가 경제·사회·군사 관련 사항을 주로 기술한 데 비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역사와 문화 관련 항목을 대폭 늘렸다. 이는 무르익어가는 조선의 문화 역량을 표현하는 동시에 유교 문화적인 지역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작업이었다.
16세기 후반~17세기에는 각 지역의 정체성이 형성되면서 지역의 독자적인 읍지 편찬이 나타났다. 각 지역은 조선전기 전국지리지 편찬 과정에서 읍지를 편찬하여 도(道)와 중앙정부에 올려보내는 작업을 수행하여 읍지 편찬의 경험을 갖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6세기 후반부터 독자적인 읍지 편찬이 나타났다. 읍지 편찬에 관심을 가진 사림계 인사가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면서 고을의 사족과 협력하여 읍지를 편찬하는 예가 많았다. 사림의 주도 아래 지역의 통치질서를 확립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고 자신들의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해 고을의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사진 : 『가평읍지』 <규17373>
정구(鄭逑, 1543~1620)는 1580년 경상도 창녕현의 『창산지(昌山志)』를 시작으로 전라도 동복현의 『동복지』, 함안군의 『함주지』, 강원도 통천군의 『통천지』, 강원도 강릉부의 『임영지(臨瀛志)』, 강원도 전체를 다룬 『관동지』, 충청도 충주목의 『충원지』, 경상도 안동부의 『복주지(福州志)』 등을 해당 고을의 사족과 협력하여 편찬하였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가서는 자신이 사는 곳의 지리지인 『와룡지(臥龍志)』를 작성하였다. 윤두수는 1581년 황해도 연안부의 『연안읍지』, 1590년 평양의 『평양지』를 편찬하였다. 그밖에도 1618년 이수광이 전라도 순천부의 『승평지(昇平志)』, 1648년 김육이 개성부의 『송도지(松都志)』, 1653년 이원진이 전라도 제주 3읍의 『탐라지(耽羅志)』를 편찬하였다.
이 시기에 각 지역에서 많은 읍지가 편찬되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전하지 않고 있다. 이 때 작성된 읍지들의 체제는 대체로 연혁, 강계, 호구, 전결, 학교, 서원, 물산, 조세, 인물 등의 항목을 고루 갖추어 이후 전국지리지의 체제 구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19세기 중반에는 조선 후기 사회 변화에 발맞추어 중앙정부는 새로운 전국지리지를 편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각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읍지를 편찬하였다. 전국지리지로 여전히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통용되었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맞는 새로운 전국지리지 편찬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1659(숙종 5)년, 1699년(숙종25)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정 작업이 추진되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1757년(영조36), 1760년(영조36) 재차 전국지리지를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전국지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여지도서』는 책 이름에 맞게 ‘도(圖)’와 ‘서(書)’로 이루어져, 각 지역별 기사의 첫머리에 지도가 실렸다.

『여지도서』편찬 이후 읍지 첫머리에 지도를 수록하는 양식이 보편화되었다. 내용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하여 경제·사회 항목을 강화하여 조선 후기 사회제도의 변화를 담아내고자 노력하였다. 이전의 지리지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제언, 도로 항목 등이 들어있다. 하지만 『여지도서』역시 간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전국지리지를 새롭게 만들어 간행할 필요가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1789년(정조 13)부터 전국지리지 편찬을 독려하였다. 1796년(정조20)까지 『해동여지통재(海東輿地統裁)』라는 이름으로 60권 분량이 편찬되었지만 완결을 이루지 못하고 정보가 사망하였다. 현재 규장각에는 1789년경에 편찬된 읍지가 다량 소장되어 있다. 항목과 서술 양식이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동여지통재』편찬의 일환으로 작성된 읍지로 추정된다.
18세기~19세기 중반 중앙정부의 전국지리지 편찬 노력은 간행까지의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지만, 지역에서는 몇 번에 걸쳐 중앙정부의 요청에 따라 지역 읍지를 편찬하여 올림으로써 지역의 읍지 편찬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이시기 각 지역은 중앙정부의 요청에 따라, 또는 독자적으로 읍지를 편찬하여 현재까지 다량의 입지를 남기고 있다.
19세기 후반~19세기 말에는 국가적 위기에 당면하여 중앙정부가 통치 기초 자료수집과 제도 개혁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전국지리지를 몇 차례 편찬하였으며, 개인들도 전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사회적 필요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는 중앙정부의 요청에 따라, 각 지역의 읍지 편찬의 전통에 따라 읍지 편찬을 지속하였다.

사진 : 『호남읍지』 <규12175>
19세기 후반~19세기 말은 조선 사회가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던 때이다. 중앙정부는 지역의 실태를 파악하고 지방 제도, 조세 제도, 군사 제도 등의 개혁을 지역에 주지시키기 위해 전국적인 지리지 편찬을 시도하였다. 고종대인 1871년, 1895년, 1899년 세 차례에 걸쳐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각 읍에 읍지를 올리게 하여 이를 다시 베껴서 도별로 묶는 도지의 형태로 편찬하였다. 이 시기 편찬된 거질의 도지가 『호남읍지』, 『호서읍지』, 『영남읍지』, 『관북읍지』등의 이름으로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재정문제가 가장 큰 사회적 이슈였던 만큼 읍지에 지역의 재정 운영 원칙인 ‘사례(事例)’를 첨부한 것이 특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