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혐록』: 조선시대의 블랙리스트
윤민경(서던캘리포니아대 한국학연구소 방문학자)
1766년 2월, 30대 초반의 젊은 관료 김이소(金履素)는 국왕 영조에게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는 김이소가 사흘 전 임명된 정7품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 직에 나아갈 수 없는 사정을 아뢴 것이었다. 당시의 시강원은 훗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을 교육하던 곳으로 관원들에게 시강원 관직은 예비 국왕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영광된 자리였다. 그럼에도 김이소가 관직을 고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설서 김이소가 아뢰기를, “신은 지금 무릅쓰고 나아가기 어려운 의리가 있습니다. 사서(司書) 정창순(鄭昌順)과 겸문학(兼文學) 김노진(金魯鎭)은 신과 세상이 모두 아는 원수의 혐의가 있어 하루라도 동료가 될 수 없으니, 구구한 거취는 더 논할 것이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41년(1765) 12월 27일
김이소의 사직 상소에 따르면 그는 시강원의 정창순, 김노진이라는 인물과 원수의 혐의가 있어 관직을 거절하였다. 대체 어떤 원한이었기에 국왕이 내려준 벼슬마저 사양했을까? 사실 김이소는 두 사람과 직접적인 원한 관계가 없었다. 상소에서 말한 ‘원수의 혐의’란, 김이소 선대까지 올라가는 묵은 원한, 즉 ‘세혐(世嫌)’이었다.
이들의 세혐은 약 40여 년 전 영조의 형 경종 재위 시절, 노론, 소론이 왕세제 연잉군(영조)의 대리청정을 두고 충돌한 신임옥사(辛壬獄事, 1721~1722)에서 노론이었던 김이소의 증조 김창집(金昌集), 조부 김제겸(金濟謙)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형성된 것이었다. 김노진의 조부 김시환(金始煥)은 신임옥사에서 김창집을 탄핵한 뭇 소론의 하나였으며, 마찬가지로 소론이었던 정창순의 부친 정광은(鄭光殷)은 옥사 종료 후 역적 처단을 축하하는 과거에서 급제한 인물이었다. 즉 김이소는 증조부를 탄핵하여 죽게 만든 이의 손자와 이를 기념하는 과거를 통해 정계에 나온 이의 아들을 회피했던 것이다. 이러한 회피가 김이소만의 유난이었을까? 아니다. 18~19세기 초의 조선에는 수많은 김이소, 정창순, 김노진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 살펴볼 『수혐록(讎嫌錄)』이라는 책은 이들과 이들 조상에 관한 기록이다.
| 『수혐록』, 어떤 책인가 |

<사진 1> 『수혐록』(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표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수혐록』(청구기호 古4657-8-v.1-3)은 『이직록(以直錄)』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으며, 편저자 미상의 3책 필사본으로 19세기 중엽 노론 측에서 신임옥사의 가해 측 관련자와 그 후손 3,000여 명을 족보 형식으로 정리한 인명록이다. 신임옥사 이후 제작되어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증보된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롯하여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국학자료실, 조선대학교 고한적실 등에 『수혐록』의 이본이 소장되어 있다.
형식적인 면에서 『수혐록』이 단연 눈에 띄는 점은 신임옥사의 가해 측 관련자와 그 후손 명단을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족보 형식을 차용하여 수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 앞부분에는 먼저 후손을 제외한 신임옥사 가해 측 관련자 291명의 명단을 이 씨부터 시작하여 김 씨, 박 씨 등의 순서로 성씨별로 제시한 뒤, 족보처럼 본문을 가로로 나눠 인물 정보를 기록하였다. 아래 예시로 든 <사진 2>는 『수혐록』에 실린 291명의 신임옥사 가해 측 관련자 중 하나인 김시환(金始煥)과 후손 정보를 담은 부분으로, 우측 면 제3단에는 앞서 시강원 관직을 두고 김이소가 회피했던 김노진(金魯鎭)의 이름도 보인다. 그럼 <사진 2>를 함께 읽어보자.

<사진 2> 『수혐록』 형식 예시: 김시환(金始煥)과 그 후손(『수혐록』 제1책 029b~030b면)
<사진 2>에서 『수혐록』 본문은 가로 10단으로 나뉘어 있다. 제1단에는 신임옥사 가해 측 관련자의 성명과 정보를 기록하고 제2단부터 제10단까지는 후손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였는데, 단이 하나씩 내려갈수록 아들 대, 손자 대 등등 대수도 하나씩 추가되고 있다. 수록된 후손의 대수나 정보의 상세함은 인물 별로 각기 다르다.
① 성관 및 인명: 江陵 金始煥: 강릉김씨 김시환
② 출사로, 관직명, 부친명: 【文 判書 父弘柱】: 문과로 출사, 대표 관직은 판서, 부친명 홍주.
③ 『수혐록』 수록 사유: 신임옥사 당시 김시환이 참여한 노론에 대한 탄핵 행위(및 관련 직책 포함)와 관련된 6건의 사유를 요약.
④ 양아들로 입후한 경우: 系. 學人 【初名學仁 生啓潝】: 계자(系子) 학인 【초명은 학인, 생부는 계흡】
⑤ 사위 성명: 女. 尹光縡: (딸이름은 생략) 사위 윤광재.
⑥ 친아들을 출계시킨 경우: 子. 寅鎭 【出后尙迪】: 자(子) 인진 【상적에게 출계】 (*인진은 김시환이 아닌 김시혁(金始㷜)의 손자)
⑦ 서자의 경우: 庶. 尙斗 【蔭 縣監】: 서자(庶子) 상두 【음서로 출사, 대표 관직은 현감】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수혐록』은 당색으로는 대체로 소론, 남인에 해당하는 신임옥사 가해 측 관련자와 그 후손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수록하였다. 관련자들에 대한 정보도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그 후손에 대해서도 경우에 따라 서자나 사위까지 기록하였으며, 출계·입후를 구분하였고, 사환한 경우 벼슬 정보까지 담고 있음은 확인한 바와 같다. 본서가 일반적인 족보라면 몰라도 무려 3,000여 명에 달하는 특정한 정치적 사건의 가해자와 그 후손을 이렇게까지 방대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을까. (필자를 포함하여) 조부 혹은 증조부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문, 계보의식이 희미해진 현대인의 관점에서라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누가, 어떠한 목적에서 이렇게 상세한 인명록을 제작했던 것일까? 그리고 거기에서 읽어낼 수 있는 조선후기 사회의 면모는 무엇인가?
| 공통의 적 · 대대의 혐의를 기록한 블랙리스트 |
『수혐록』은 편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론계 인사가 제작·증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임옥사를 노론의 시각에서 총정리한 『신임기년제요(辛壬紀年提要)』라는 당론서에 『수혐록』의 이본이 함께 실리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수혐록』은 18~19세기 노론들이 신임옥사를 통해 형성·세전된 ‘공통의 적’을 기록한 블랙리스트였던 것이다.
관련하여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점이 조선 정치사의 전개에 있어서 신임옥사라는 사건이 지닌 위상이다. 신임옥사는 경종조 신축년(1721)과 임인년(1722)을 걸치며 마무리된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이후 조선 정치사의 전개에 미친 영향력은 막대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축년 환국 이후 임인년 옥사로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을 비롯한 60여 명의 노론이 사망한 데다 옥사에 왕세제였던 연잉군(영조)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영조 즉위 이후 신임옥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임옥사의 정당성 여부를 둘러싼 노론, 소론 간 충역 논쟁의 결과는 영조 연간 탕평정치의 향방에 영향을 미친 핵심 사안이었다.
경종조의 신임옥사 자체는 노론의 명백한 패배였고 영조조 전반에도 노론, 소론 간의 논쟁이 이어졌으나 영조조 후반부터 조선이 망하기까지 신임옥사에 대한 국가의 공식 평가는 노론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에 1755년(영조 31) 왕명으로 『천의소감(闡義昭鑑)』이 간행되고 신임의리가 확정된 뒤로는 신임옥사에서 사망한 노론 인사들의 ‘충절’에 대한 기념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민간에서도 노론의 시각에서 신임옥사를 정리한 각종 당론서들이 제작, 유포되었다. 이렇듯 18세기 후반~19세기 조선에서는 다방면에서 신임옥사의 역사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신임옥사의 가해자 명단을 확정하고 이들의 가해 행위를 총정리한 『수혐록』은 이와 같은 흐름의 한 결과물로, 노론의 입장에서 ‘공통의 적’을 기억함으로써 내부적 결속을 다지고 자당의 정치적 정당성을 공고히 하는 효과를 내었으리라 생각된다.

<사진 3> 「신임기년제요휘고(辛壬紀年提要彙考)」(『신임기년제요』에 수록, 연세대 고한적실 소장)
신임옥사 시 노론 피해자를 기록한 것으로, 노론 4대신을 비롯하여 문무 관원과 포의, 여성(女官·女士), 아동, 천민까지 정리하였다. 신임옥사 시 소론·남인 가해자를 기록한 『수혐록』과 짝하여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처럼 『수혐록』은 노론 전체의 ‘공통된 적’을 수록한 블랙리스트인 동시에 신임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개별 노론 집안에 있어서는 ‘대대의 혐의’를 기록한 블랙리스트이기도 했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김이소-정창순·김노진의 일화를 소개하였는데, 『수혐록』은 김이소 같은 인물들이 혐의해야 할 상대 집안과 그 후손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유용한 참고서로 활용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대수가 늘어나고 혐의해야 할 인원이 많아지면서 현실적으로 기록 없이는 이를 일일이 기억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혐록』은 축소판도 제작되었다. 실제로 노론 4대신의 한 명인 김창집 후손가에서는 『수혐록』과 유사한 성격이되 수록 인물을 대폭 축소하여 신임옥사에서 김창집을 공격한 인물과 그 후손들만을 추려 정리한 책자를 별도로 만들어 참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수혐록』과 같은 책자를 참고하여 상대와 혐의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이와 관련해서는 조선후기의 세혐(世嫌)에 대하여 잠깐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어떠한 형태로든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세대를 유전한 이래로 가족 구성원에게 해를 입힌 원수와 그 가족에 대한 미움의 감정은 늘 존재해 왔지만, 이러한 세혐을 표출하는 방식은 좁게는 개개인의 성정에 따라, 넓게는 시대와 지역이 규정하는 법적 문화적 틀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였다. 조선 후기의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세혐 집안과 통혼하지 않고 친교나 사제 관계도 맺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혐은 공적 영역에도 적용되어, 세혐 관계의 인사들 간에는 조정에서 동료로 대면하는 경우에도 한쪽이 사직을 한다거나 같이 관료 생활을 하더라도 동석(同席)하지 않는 식으로 되도록 피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물론 조선에서 이와 같은 회피는 어디까지나 규정이 아닌 관행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세혐의 원인이 된 사건의 경중, 개인적 성향, 구체적 상황에 따라 혐의하는 정도는 달라질 수 있었지만 말이다. 요컨대 『수혐록』은 조선 후기의 세혐 관행을 전제하고 읽어야 하는 텍스트인 것이다.
| 『수혐록』을 통해 보는 조선 후기 |
일견 『수혐록』은 정형화된 정보를 담은 단순 인명록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보다 깊이 있게 내용을 살펴보면 『수혐록』을 통하여 조선 후기의 중요한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앞 시기에도 신임옥사에 못지않은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이 발생해왔음에도 18세기 들어 『수혐록』과 같은 책이 제작될 수 있었던 이유로 부계 중심적 가문의 발달이라는 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동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이 중심이 되는 조선 전기의 양측적 친속 관념 하에서는 가문이 지속성을 갖고 장기간 유지되기 어려웠던 반면, 족보 편찬이 본격화되고 양자 제도가 일반화되는 등 부계 중심적 가문이 성립된 조선 후기에는 가문의 지속성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가문의 지속성은 혐의의 유전을 낳았다. 『수혐록』의 존재에서 우리는 조선 후기 친족 공동체의 형태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수혐록』은 조선 후기 들어 만성보(萬姓譜)와 대동보, 문중의 세보가 활발히 생산되었기에 제작·증보될 수 있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수혐록』의 수록 대상이 대체로 관료 가문의 인물들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집안의 후손을 대대로 망라하여 기록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수혐록』은 다른 여러 족보류를 참고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내용을 보면 인물 정보를 적으면서 ‘성보(姓譜)’, ‘세보(世譜)’, ‘자손록(子孫錄)’ 등의 자료와 정보를 교차 검증하고 있는 부분도 발견된다. 즉 『수혐록』의 제작과 증보는 조선 후기 부계 계보 의식의 강화와 그에 따른 보학(譜學)의 발달이라는 큰 흐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산물이다.
마지막으로 『수혐록』의 가치를 논함에 있어 반드시 거론해야 할 점은 『수혐록』에 깔려 있는 조선 사람들의 태도이다. 어떤 독자들은 본서의 존재를 두고 조선 사람들은 기록까지 남겨가며 서로 반목질시했다고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실로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조화와 화합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고, 그러한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수혐록』은 다소 불편한 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 사회는 잘못된 상대와 적당히 타협하여 조화하기보다는 사회 전체적인 화합을 저해할지언정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가리고 옳음을 추구하는 일에 가치를 두는 사회였다. 이에 세혐이 있는 상대와의 불화(不和)는 조선 사람들에게 종종 화합보다 더 가치 있게 평가받았다. 조상을 욕보인 자의 후손과는 상대하지 않음으로써 옳음을 지켜내는 일은 곧 조상에 대한 효를 다하는 한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수혐록』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조선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텍스트이다. 문득 누군가가 미워질 때, 미움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의 보편성과 시대성이 궁금하다면 『수혐록』을 들추어 보면 어떨까. 이내 책을 덮게 되겠지만 미움을 이렇게도 다룰 수 있다는 익숙한 생경함이 잠시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 참고문헌 |
권기석, 2020 「조선후기 족보 입록의 정치·사회적 의미: 족보가 갖는 ‘화이트리스트’ 또는 ‘블랙리스트’의 양면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92.
윤민경, 2018 「조선후기 ‘세혐보’ 제작과 세혐의 실제」 『조선시대사학보』 84.
윤민경, 2022 「『수혐록』 해제」 『규장각자료총서 계보편: 수혐록』,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윤민경, 2023 『18~19세기 붕당의식의 사회문화적 재생산과 확산』,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종서, 2009 『고려·조선의 친족용어와 혈연의식: 친족관계의 정형과 변동』, 신구문화사.
최성환, 2021 「경종대 신임옥사와 충역의리의 귀결」 『민족문화』 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