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으로의 길잡이, 『주자서절요』
최민규(연세대학교 사학과 강사)

사진 1 :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奎2270,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주자학으로 들어가는 첩경, 주자 편지 |
흔히 주자학을 조선의 국정 교학이라 한다. 주자학이 국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원리이자 인간 생각과 행동의 유일한 준거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관인, 유자, 혹은 더 큰 범주로 양반사대부라면 주자학이 안내하는 유교의 지식과 교양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이때 주자학은 종래의 유학과 달리 이기론(理氣論)·인성론(人性論)을 근간으로 우주와 인간을 통일적이고 완결적으로 설명하는 사상으로, 단순한 사회·정치론, 수양론의 수준에 머물렀던 종래의 유교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유교는 남송대 주자(1130∼1200)에 의해 집대성되었기 때문에 성리학, 이학 혹은 송학, 주자학이라 부른다. 따라서 주자학을 익히고자 하는 양반사대부라면 주자라는 인간과 학문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주자가 주석을 내고 편집한 글들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사서집주』, 『근사록』, 『소학』, 『주자대전』 등이 그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주자라는 인간과 학문의 전체 범위를 이해하고 그 특성을 소상히 알 수 있는 서적은 『주자대전』이었다. 주자는 남송대 밖으로는 여진족인 금의 침략과 내부적으로는 농민항쟁에 시달리는 상황 속에서 관직보다는 학문에 몰두하면서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하는 한편, 그를 통한 체제 안정을 희구했다. 그러한 그의 노력은 『주자대전』이라는 정집 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저술을 낳았다. 따라서 주자와 주자학의 세계에 들어서는 단초로 『주자대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에서는 『주자대전』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국초부터 『주자대전』에 수록된 글들을 인용한 저서들이 나왔지만, 『주자대전』을 직접 보고 작성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그러던 것이 1543년(중종 38)에 이르러서 『주자대전』이 간행되면서 『주자대전』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이루어지고, 그러한 탐구의 기반은 이황(1501∼1570)의 『주자서절요』를 통해 마련되었다.
그런데 『주자서절요』의 특징은 방대한 『주자대전』 중 편지를 선별한 서적이라는 점에 있다. 『주자대전』의 정집 권24∼64, 속집 권1∼11, 별집 권1∼6 도합 58권이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주자 편지는 주자의 평생 동안 이루어진 일상적인 삶과 학문·사상, 그리고 교우·벼슬살이 등이 소상하게 담겨 있었다. 따라서 주자라는 인물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로 이만한 입문서가 없었다. 이황 역시 이 점에 주목하면서 『주자서절요』를 편찬한 것이었다. 그리고 『주자서절요』는 이후 조선에서 『주자대전』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토대로 주자의 정론을 파악하는 연구 경향의 단초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주자학 문화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황이 『주자서절요』를 편찬하게 된 경위와 핵심 논란거리, 그리고 동아시아 유학사에서의 영향력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 이황의 주자 탐구와 『주자서절요』 편찬 |
이황은 1510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예안 지역은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반에 걸쳐 주변지역에서 새로운 사족들이 이주해오면서 발전한 지역이었다. 그의 집안 역시 조부가 터를 잡고 숙부 대에 이르러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면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재지사족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1534년(중종 29) 3월에 문과 시험에서 을과 제 1인으로 합격하고 49세인 1549년(명종 4)까지 15년에 걸쳐 벼슬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는 명종 즉위와 관련된 을사사화 등에 휘말리면서 순탄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그의 형인 이해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중앙 정치 활동을 단념했다. 대신에 그는 49세인 1549년(명종 4)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1551년(명종 6) 계상에 서당을 건립하여 강학 활동, 즉 교육에 헌신하여 제자들의 육성에 힘을 쏟았다.
이황의 교육 활동은 당시 재지사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향촌 사회 질서를 확립하려는 노력과 맞물려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향촌의 규약으로 「예안향립약조」를 짓고, 향촌의 선비들을 교육하기 위한 기관으로서 서원을 건립했다. 특히 그가 집중한 것은 후자였다. 그의 건의로 주세붕이 건립한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의 명칭이 소수 서원으로 변경되고, 왕이 내린 현판을 단 서원인 사액 서원이 등장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사립 학교인 서원을 국가적으로 공인받았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황의 활동은 자기 자신의 덕성을 닦고 남을 다스릴 줄 아는 이른바 수기치인의 원리에 충실한 재지사족을 육성하여 향촌 사회의 주도층으로서 제 역할을 기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황의 활동은 주자에 대한 탐구와 분리될 수 없었다. 그가 주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주자의 문집인 『주자대전』에 접한 이후였다. 그가 『주자대전』을 접하게 된 것은 1543년 왕명으로 『주자대전』을 출간하여 반포할 때 교감하는 일을 담당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주자대전』을 접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문을 걸어 닫고 조용히 머물면서 하루종일 온 정신을 집중해서 독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주자대전』가 학문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되는 것이고, 여기서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대학』, 『맹자』, 『논어』, 『중용』으로 이어지는 『사서』를 익히게 된다면 선현의 말씀이 가진 맛을 알아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에 따르면 『주자대전』은 유교 경전을 통해 착실하게 축적되어 온 성현의 말씀을 알 수 있는 길잡이이자 나침반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림 2> :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奎2270)
이때 이황은 『주자대전』을 독서하면서 주자의 편지에 마음이 이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주자의 편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힘을 떨쳐 일어나도록 하는 것(感發而興起)으로, 그것을 본다면 직접 대면하여 가르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리고 주자의 편지는 스승과 벗들 사이에서 그 핵심을 밝히고 공부 과정에 힘쓰도록 다그친 것으로, 『논어』와 마찬가지로 학자들로 하여금 참된 지식과 실천적인 행위(眞知實踐)에 종사하도록 할 때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황이 주자의 편지가 학문과 일상의 일체화를 추구하고, 이를 통해서 공동체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단초가 된다고 본 것이었다.
그런데 이황이 보기에 『주자대전』에 수록된 편지들은 그 분량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요점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학문에 관계되면서 일상에서 실천 가능한 내용들만을 선정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주자서절요』 편찬에 나섰다.
이황은 주변의 친족들과 제자 등을 동원해서 『주자서절요』 편찬에 나섰고 1556년(명종 11)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 후 1561년(명종 16) 15권 7책으로 구성된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가 성주에서 문인인 성주목사 황준량에 의해 편찬되었고(성주본), 이어서 유중영에 의해 해주에서 간행되었다(해주본). 그 후 평양본을 거쳐서 1567년 정주목사인 유중영에 의해 이황의 주해와 목록이 첨부된 20권 10책의 『주자서절요』가 간행되었다(정주본). 그리고 1575년 이황의 서문이 붙은 천곡서원본이 그의 사후에 간행되었다. 이후 1611년에 전라감사 정경세가 금산에서 간행했고, 1743년 도산서원본이 간행되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주자서절요』 중 그 연대가 확인되는 것은 정경세가 전라감사로 있을 때 간행한 금산본(錦山本)과 1743년 도산서원본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이황의 생전에 『주자서절요』가 여러 차례 간행되는 동안에 이황과 제자들은 필사와 강론, 교감을 되풀이하면서 주자의 편지에 대한 탐구를 지속해 나갔다. 이때 열기는 대단해서 한 글자라도 잘못되거나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밥도 거른 채로 진행되었고, 주자의 서간을 자기의 말을 하듯이 읊는 수준이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주자서절요』의 편찬은 중앙이 아니라 향촌 사회를 무대로 해서 특정한 스승을 중심으로 결속된 학파의 형성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자, 동시에 조선의 유학적 역량이 향촌 사회 곳곳에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된 『주자서절요』 속에는 주자의 생애와 인간관계, 학문관, 정치활동 등과 관련된 서간들이 요약 및 집대성되어 있다. 이황은 『주자대전』 속에서 465명에게 보낸 2,365편의 주자 편지 중 355명에게 보낸 총 1,234편을 선정해서 전체 편수 중 52%만을 선정했다. 그리고 그는 『주자대전』에 분류되어 있는 주자 편지 체제 자체를 존중했다. 『주자대전』에는 주제와 함께 편지를 받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고려해서 편지들이 「시사출처(時事出處)」, 「왕장여류문답(汪張呂劉問答)」, 「육진변답(陸陳辨答)」, 「문답논사(問答論事)」, 「문답(問答)」, 「지구문인문답(知舊門人問答)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중에서 이황은 주자와 학문적 뜻을 같이한 인물들과 관련된 「왕장여류문답」과 문인 혹은 지인들에게 보낸 「지구문인문답」에 수록된 편지글을 다른 부분들에 비해 높은 비중으로 수록했다고 한다. 이러한 부분들은 주자의 학문 형성 과정에서 학문적 동지로서 보이는 이견들을 토론과 문답을 통해 합치시켜 나가는 과정과 주자의 학문에 대한 언급과 스승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이황은 자신이 선정한 주자 편지의 요체가 성리학의 이치를 알고 일상 속에서 인륜 실현을 위한 양반사대부들의 수기, 수양에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때 주목할 점은 이황은 편지를 그대로 수록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내용을 뽑아서 재편집하는 방식인 절편(節編)의 방식을 취하면서, 서간에 대한 이해를 위한 주석들을 세심하게 달았다. 이는 편지글이 가지는 사적이고 구체적인 맥락을 다소간 약화시키고 글이 가진 본래의 취지, 의미를 살리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이황은 핵심 내용만을 살리고, 상투적인 인사말, 맺음말, 산만한 표현, 혹은 지나치게 세세한 내용들이 삭제되거나 핵심만이 간략하게 축약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편지의 주제와 수신자에 대해 다루는 분류주, 글자와 음과 뜻을 설명한 훈고주, 어구·전거·정황·개괄·부연 등으로 세분화된 해설주 등을 작성했다. 이와 같은 주석들만 해도 1,029건에 이른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석을 달기 위해 18종에 가까운 서적들을 수집하는 등 실증적인 측면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야말로 이황은 『주자서절요』를 통해서 주자학에 들어가는 단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작업은 『주자대전』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주자 사상의 정론과 핵심을 파악하는 방법론을 마련한 것이었다.
| 편지 선정에 대한 논란과 유학 실천의 일상성 |
그런데 이황이 선정한 주자의 편지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황이 선정한 서간들이 주변적인 것들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수록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서경덕의 문인이자 양명학자인 남언경은 이황이 수록한 주자의 편지 중에 “근래 매미소리가 더욱 맑아서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등은 지나치게 평범한 것들이어서 수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황은 주자의 편지 속에는 천리가 일상생활에 흘러넘쳐서 어느 곳이든 그렇지 않음이 없는 것이 눈앞에 분명히 드러나 있고, 조짐이 없는 신묘한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주자의 편지를 통해서는 리가 고원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구체성을 띤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만약에 의리가 아니라거나 몸과 마음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제거한다면 옛 사람들이 지켜나간 스승과 제자의 도리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요약하자면 주자의 편지는 천리로 대변되는 주자학적 원칙이 일상에서 실현된다는 점을 제시한 것이었다.
원래 주자학은 사람의 본성을 도덕·규범의 지향과 물질·욕망의 추구라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서 전자를 천리(天理)의 공정함과 선함으로, 그리고 후자를 인간 욕망(人欲)의 사사로움이나 악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모든 작용은 마음의 작용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사람은 전자를 버리고 후자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자학의 이론 중 이황은 천리를 중시한다고 해서 흔히 주리론(主理論)이라고 부르듯이, 천리로 대변되는 도덕적인 가치를 확고하게 정립하고 이를 일상에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규범을 제시하는 학풍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주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주자대전』 중 주자의 일상과 관련된 편지들을 수록했던 것이었다.
『주자서절요』와 관련된 논란 문제는 당시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황의 시대인 16세기에는 사화와 반정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사건, 훈척 정치, 그리고 광범위한 토지를 독점으로 인해서 농민들이 노비로 전락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에 그는 도덕적인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지배층들의 책무의식을 환기하고 그것을 일상 속에서 실현해 나가도록 독려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의 시도는 때로는 강한 거부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가 향약을 제정하면서 집회에서 좌석 순서를 벼슬이나 신분의 지위를 고려하지 않고 연령순으로 해야 한다고 하자 이에 대해 예안 지역의 사대부들이 신분의 원칙을 어긴다고 해서 반발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황이 내린 진단은 아직까지 조선에서 주자학의 사회적 실현을 위한 근거가 될만한 이론적 체계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말선초의 성리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김굉필, 조광조 역시 실천에는 독실했지만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여기에 더해서 그는 명종 대 문정왕후로 대변되는 불교 세력의 중흥, 명으로부터 양명학이 도입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그는 불교와 양명학이 객관적인 천리를 도외시하고 오로지 마음만을 중시하여 인간에게 부여된 떳떳한 인륜이 부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 했다. 다시 말해 천리로부터 부여되는 인륜에 대한 이해가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거나 자의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황은 성리학의 이론 중 주자의 이론을 정통으로 삼고, 그 실천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편지를 『주자서절요』에 수록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수록한 편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양명학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자각과 즉각적인 실천을 통해 도덕적인 주체로 올라설 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학문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는 양반사대부들의 수신, 실천적인 노력을 긍정하는 내용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곧 16세기 정치·사회적인 주도적인 세력으로 성장일로에 있는 양반사대부, 특히 재지사족들의 문화적인 역량을 긍정하는 속에서 주자의 편지를 근간으로 주자학적 정치사회론을 확립하고자 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 『주자서절요』의 확산과 동아시아 유학사 |
마지막으로 『주자서절요』는 그간 주자학 수용자의 입장이었던 조선 유학이 이제 동아시아사적인 차원에서 주자학 관련 지식의 생산자이자 전파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주자서절요』는 조선에서 주자학으로 들어가는 입문서의 역할을 했고, 그와 관련된 보완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영남학파에서 『주자서절요』의 어려운 지점에 대한 이황의 강의 내용들을 모아서 『주자서절요기의』, 『주자서절요강록』을 편찬되고 그 후속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경세가 『주자대전』 편지글 이외의 중요한 것들을 선별·정리한 『주문작해(朱文酌海)』(1622)가 간행되었다. 기호학파에서는 조익(1579∼1655)이 『주자서절요』 중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선별하여 재편집한 『주서요류』(1652), 송시열(1606∼1689)이 손자 송기석(1650∼1692) 등과 함께 『주자서절요』와 『주문작해』를 하나로 합하여 편찬한 『절작통편』, 그리고 송시열이 『주자대전』을 주석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및 이에 대한 일련의 저술들이 편찬되었다. 각 개별적인 학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자 편지에 대한 연구는 정조의 『주서백서(朱書百選)』을 통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돈되었다. 이와 같이 『주자서절요』 이후 조선 후기 동안에 이루어진 주자 편지에 대한 연구는 이른바 조선 후기 주자절대주의 노선을 형성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주자서절요』는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근세에도 유학을 이끄는 데에도 기여했다. 일본에 이황의 사상과 『주자서절요』가 전파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일본에 간 강항에게 후지와라 세이카가 배운 후부터였다. 그 뒤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1618∼1682), 구마모토(熊本)의 오오쯔카 타이노(大塚退野, 1677∼1750) 등이 본격적으로 주목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인간에 대한 탐구, 수양을 중시한 철학적, 실천적 학파의 특성을 지닌다고 한다. 다시말해 『주자서절요』는 일본에서 주자학이 확산되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었다. 특히 일본에서 이황을 존중한 학파들에서 메이지 유신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한 인물들이 배출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이 『주자서절요』는 조선과 일본에서 주자학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지식이 실천으로 이어지게 하는 지침서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는 동일하게 주자의 편지를 활용하면서도 주자학을 해체하는데 활용한 중국의 양명학과는 차별적이었다. 따라서 『주자서절요』의 확산은 한·중·일 삼국의 독특한 체제, 상황 등과 접합되어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지식과 실천의 문제에 대한 주자학적 해법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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