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禮治의 이정표, 『향례합편』
박사랑(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예(禮)를 통해 인간의 선한 본성을 배양하고 가족·지역 사회와 같은 각 단위에서의 올바른 관계를 가르치고 형성함으로써 풍속을 바로잡아 이상적인 사회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예치(禮治) 이념을 표방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앙의 조정과 지방 지식인들은 가족 단위에서는 가례(家禮)를, 국가 단위에서는 국가례(國家禮)를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지역[향촌] 단위에서는 향례(鄕禮)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지역에서 이와 같은 예교(禮敎)‧예치(禮治)를 구현하려는 노력과 그 노력이 향해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조선 후기 의례서가 바로 『향례합편(鄕禮合編)』이다.
| 향례란 무엇인가 _ 도덕 공동체로서 향(鄕) 만들기 |
향례란 지역 사회인 향(鄕)에서 행해지는 의례와 제도 규약을 말한다. 정치위 향음주례(正齒位 鄕飮酒禮), 빈흥 향음주례(賓興 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 향약(鄕約), 사상견례(士相見禮), 여수례(旅酬禮) 등이 여기에 속한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 의례의 의미를 알아보자.
향음주례는 지역 사람들이 모여 절차에 따라 함께 술을 마시는 의례인데, 정치위 향음주례(正齒位 鄕飮酒禮)는 이름 그대로 나이에 따른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여 연장자에 대한 존중과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의 올바른 상호 관계를 익히는 것이고 빈흥 향음주례(賓興 鄕飮酒禮)는 현능(賢能)한 인재를 예로써 대우하고 상위 단계의 학교나 조정에 천거하는 의례였다. 향사례는 함께 활을 쏘는 의례로 활 쏘는 자의 도덕성을 살폈다. 향음주례와 향사례는 단순히 먹고 마시며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은 주어진 역할과 정해진 절차에 따라 행동하고 관람자들은 엄숙하게 진행되는 의식을 감상하며 배려와 양보의 태도, 현능한 자를 존중하고 연장자를 연장자로 대하는 도덕성을 배워가는 과정이었다. 이는 모두 고대(古代) 의례서인 『주례(周禮)』에서부터 등장하는데, 사도(司徒)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륜을 가르치려는 성왕(聖王)의 정치를 향(鄕) 이하의 단위에서 실현하는 과정에서 수행되도록 한 것이었다.
향음주례와 향사례가 정기적으로 시행되더라도 일 년에 한 번 하루 동안 펼쳐지는 공연같은 의례였다면, 향약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德業相勸·過失相規·禮俗相交·患難相恤)이라는 덕목을 구체화한 조목과 구성원들이 모여 향약문을 읽고 그 뜻을 되새기는 독약례(讀約禮)가 일상에서 반복적·정기적으로 수행되도록 하여 도덕을 교육해 나가는 체계였다. 송나라 시대에 신유학이라는 새로운 이념 아래 탄생한 향약은 선한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사회개혁을 지향한 사(士)들이 적극적 행위자로서 이상적인 정치를 수행했다고 믿어지는 삼대(三代) 성왕(聖王)이 인륜을 가르쳐 변화시키고자 하는 정치를 향촌 단위에서 자발적으로 실천하고 시행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士)들은 새로운 향례를 통해 향촌 구성원이 평소에는 ‘나이’를 관계의 질서로 삼아 예로써 사귀고 어려운 상황에서는 서로 버려두지 않고 상호 연대하는 공동체로 향(鄕)을 재탄생시키고자 했다. 향약이라는 새로운 향례의 탄생은 신유학자들에게 향촌이 향례 실천을 통해 도덕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공간으로 재발견되면서 향과 향례에 적극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향(鄕)이 도덕 공동체로서 재발견되는 것과 함께 가-향-국(家-鄕-國)의 의례적 세계관도 새로운 의미로 다시 형성된다. 가-향-국의 의례적 세계관이 위로부터 진행되는 국가의 교속(矯俗)과 예교(禮敎) 활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풍속의 문제를 풀기 위해 그와 동시에 아래로부터, 즉 개인에서 시작해 가(家)와 향(鄕) 단위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교속(矯俗)과 예교(禮敎) 실천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이렇게 개인에서 시작해 가족-향촌-국가-천하로 점차 확대되는 동심원적인 의례 세계 속에서 향례는 가족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이웃에게 확대해 발휘할 수 있도록 교육해 나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림 1 : 『향례합편』 표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 59)
| 『향례합편』 편찬 의도 _ 어버이에 대한 사랑을 넓혀 타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삶 |
조선 역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단계부터 향촌에서 사람들이 선한 본성을 발휘하도록 하여 타인을 업신여기고 난폭하게 대하며 서로 반목하는 풍속에서 나이에 따른 질서를 존중하고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태도로 사귀는 풍속으로의 전환을 위해 향례 예제를 마련했다. 개국에 참여했던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향음주례의 의미를 강조했고, 세종대에는 「향음주의(鄕飮酒義)」와 「향사의(鄕射義)」 의주(儀註)를 마련했으며, 이는 성종대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어 반포되었다. 제도적 기틀이 마련되고 이후 향음주례·향사례뿐 아니라 향약으로 실천의 범주를 넓히고자 하는 논의가 계속되었으나 향촌마다의 사정으로 실천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부 사대부들은 향례 실천 확산을 위한 국가의 역할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냈는데, 그 요구에 화답하듯 18세기 후반 정조는 『향례합편』을 편찬했다.
정조가 향례 실천을 명하고 『향례합편』을 편찬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는 어머니 혜경궁의 환갑이었다. 1795년은 혜경궁이 환갑이 되는 해였다. 정조는 전교를 내려 어머니의 환갑을 맞이한 기쁨을 백성과 함께하고자 한다며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고 노인과 백성을 배불리 먹였다. 또한 환갑연에서 61세가 넘은 문·무·음관에게 ‘양로(養老)’의 의미를 담아 상을 차려주었다.
정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조정에서의 잔치가 백성과 기쁨을 베푸는 정치로 이어졌듯이 조정의 의례가 향촌에서의 의례로 이어지고, 어버이에 대한 사랑을 타인에게로 넓혀가는 마음을 백성들이 알기를 바랐다. 이에 동일한 전교에서 정조는 “효(孝)를 권면하고 사랑을 타인에게 넓히려는 뜻”을 담은 향음주례를 강습하고 밝히라는 명을 내렸다.(『일성록』 정조 19년 6월 18일(정유))

그림2: 『화성능행도』 중 6번째, 낙남헌양로연도”(국립중앙박물관, 덕수1042)
어버이에 대한 사랑을 타인에게로 넓혀가는 뜻을 담은 향례에 관한 책을 만드는 작업은 1797년 정월에 윤음(綸音)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노인을 봉양하고 농사에 힘쓰는 뜻을 담아 『소학』·『오륜행실도』·「향음의식」·「향약조례」를 반포하며 내린 윤음(御製養老務農頒行小學五倫行實鄕飮儀式鄕約條例綸音)」(『정조실록』 21년 1월 1일(임인))이 그것이다. 윤음에는 『소학』·『오륜행실도』와 함께 향례 관련 책자를 반포하면서 향례로 사람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과 이유 그리고 목표가 잘 드러난다. 아래 인용문을 통해 정조의 설명을 살펴보자.
“어려서는 올바르게 길러지지 못하고 자라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하늘이 정한 질서와 법도를 알지 못하니, 삼배읍양(三杯揖讓)은 물론이고 풍류(風流)를 도타워지게 하는 일도 한 번 변화시키기가 어렵게 되었다. … 대개 오늘날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오륜을 따르지 않는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맹자(孟子)》에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어버이를 친애하고 그 어른을 어른으로 받들면 천하가 편안해진다.”고 하였으므로 공경을 넓히고 근본을 따르도록 하는 책임을 지금 내가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다.”
정조는 풍속의 타락이 근본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으로 진단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이를 넓혀 이웃 노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풍속의 변화를 도모하고자 했고 그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이에 정치위 향음주례와 향약을 강구하고 따르도록 권면했는데, “그러면 모두가 곡식은 버릴 수 있어도 어버이를 친애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는 도리는 잠시도 버리지 않아야만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향례를 통해 이익보다 인간의 조건인 인륜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백성을 길러내고 이로부터 비롯되는 풍속의 변화를 희구하고 있었다. 향례 실천의 의도를 담은 윤음은 『향례합편』 첫머리에 수록되어 읽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그림3: 御製養老務農頒行小學五倫行實鄕飮儀式鄕約條例綸音(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 10059, 본문 1면)
| 『향례합편』의 구성과 내용_향례 실천의 역사 |
윤음과 함께 정조가 내린 「향음의식」·「향약조례」를 바탕으로 『향례합편』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다. 「향음의식」·「향약조례」를 교정하고 『국조오례의』뿐 아니라 역대 국가 전례서에 실린 향례 의주를 검토했다. 책에 수록될 향례 실천을 위한 노력의 사례도 살폈다. 수개월의 작업 끝에 1797년 6월, 향례로서는 향음주례‧향사례‧향약을 다루는 『향례합편』이 완성 및 반포되었다.
『향례합편』은 총 3권 2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권수(卷首)에 윤음과 함께 「총서(總敍)」가 수록되고 권1에서 향음주례, 권2에서 향사례와 향약, 권3에서는 부록으로 사관례(士冠禮)‧사혼례(士昏禮)를 다룬다. 각 권 본문에서는 『의례(儀禮)』와 같은 고대 의례서부터 시작해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의 중국 국가 전례서 그리고 조선의 『국조오례의』에 실린 역대 향례 의주, 향약의 경우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 등을 수록했다. 이로써 향음주례‧향사례‧향약을 실천하고자 하는 자들이 의례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구체적인 절차 등을 확정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향례합편』의 구성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것은 윤음과 더불어 권수에 실린 「총서」이다. 「총서」에는 향음주례와 향약을 중심으로 향례를 실천하기 위한 오랜 노력의 역사가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향음주례 부분에서는 신유학자들이 이상향으로 삼는 주나라 시대의 예제에서 시작해 한, 당, 송, 명을 거쳐 조선에서 세종대부터 영조대까지 향음주례를 실천하기 위해 시대마다 어떤 노력이 이행되었는지 보여 준다. 이러한 구성은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된다. 노인을 노인으로 제대로 대우하는 것으로부터 오륜이 바로잡힐 수 있다고 보았던 정조는 정치위 향음주례로써 사람들을 가르치고자 했던 유구한 시도를 자신이 이어가고자 하며, 자신의 정사에 함께 참여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었다.
향약 부분 역시 유사한 구성인데, 향음주례 부분이 이견 없는 일관된 실천을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향약은 조금 달랐다. 향약의 시초 여씨향약 고사에서 시작한 글은 16세기부터 조선의 역대 조정에서 있었던 향약의 전국적 시행 여부를 둘러싼 찬반 논의, 선현들의 시도와 실패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향약이 지닌 풍속 교화 효과를 확대하기 위해 전국적 시행을 시도하려는 입장과 도리어 그것이 일으킬 폐단을 염려하여 반대하는 의견 그리고 전국적 시행을 반대하는 한편 고을 어른으로서 또 지방관으로서 지역에서 향약을 실천한 이이(李珥)와 같은 사례 등을 다양하게 실었다.
향약이 『향례합편』에 실리는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하루 동안의 의례로 끝나는 향음주례나 향사례와 달리 향약은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약속이고 사람과 사람을 결속시키는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사회적 폐단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고, 이는 시행 논의 때마다 문제로 제기되어 왔다. 정조와 신하들 역시 향약으로 인해 유력자-유력자, 유력자-소민 등 관계망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 작은 향촌 공동체에서 시행하고자 만든 제도를 전국적 규모의 법령으로 적용했을 때 뒤따를 폐단 등을 두루 살폈다(예를 들면, 『승정원일기』 정조 21년 1월 22일(계해)).
하지만 폐단을 불러올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비롯한 신료들은 향약을 『향례합편』에 싣기로 결정했다. 대신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간략하고 이행하기 쉬운 방식을 제시하고 향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와 폐단을 우려하는 태도를 함께 보여주었다. 이 결정은 윤음에서 정조가 “오늘의 백성을 옛날의 풍속으로 변화시켜 인의(仁義)로 덮어주고 근본과 실질을 보여주는 효과가 향음주례보다 못하지 않다”라고 평가했듯이, 향약이 가지고 있는 교민(敎民)의 효과를 기대하며 실천의 준거를 마련하고 역대 선왕과 선현의 행적을 보여줌으로써 뜻을 가진 자들이 폐단을 경계하며 지역의 여건에 따라 실천할 수 있도록 길잡이를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 18세기,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방법 『향례합편』 |
『향례합편』을 편찬한 정조는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나. 18세기 후반, 정조는 이전부터 언급되어 오던 풍속의 문제에 천주학‧패관소품문‧고증학 등 사학(邪學)과 사설(邪說)의 유행이라는 문제가 더해지면서 사회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이 맞닥뜨린 시대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는 “사설(邪說)이 마구 번져 나가는 것은 정도(正道)가 어두워지고 막힌 데서 비롯된다. 만약 정도(正道)를 붙들어 세우고 강구하여 밝히고자 한다면 먼저 근본을 바로잡는 것이 가장 좋다(『弘齋全書』 권164 日得錄 文學4).”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근본을 바로잡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조는 바로 이어서 그 방법을 이야기한다. “공자는 향음주례를 보고 왕도(王道)의 쉬움을 알았다고 하였다. 작년에 경신(慶辰)을 맞이하여 향약에 관한 일을 윤음에서 대략 언급하였고, 며칠 전 전교에서 또 『삼강행실도』를 간행하는 일을 말하였다. 지금의 습속을 가지고 보면 비록 평성(平城)이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서 간척무(干戚舞)를 추는 것과 비슷한 격이지만 이것은 본원이고 왕도이다.” 향음주례, 향약, 삼강행실도의 가르침을 제시한 것이다.
평성에서의 간척무는 위급한 상황에서 요원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조는 향례를 통해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례가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향례를 통해 사람들에게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이를 넓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을 확장해 나가도록 인도하는 것에서부터 문제 해결은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것이 설령 우활하고 돌아가는 길일지라도 말이다. 『향례합편』의 이와 같은 시대적 고민과 과제를 안고 전국에 반포되었다.
| 참고문헌 |
고지마 쓰요시, 신현승 옮김,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Peter K. Bol, 김영민 옮김, 『역사 속의 성리학』, 예문서원, 2010
김지영, 『정조의 예치』, 후마니타스, 2020
박사랑, 『조선 시대 鄕禮 논의와 실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