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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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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고부인이 되찾은 고부군의 사화(史話)

 

김태웅(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고부군은 현재 행정구역상이나 지도상에서 보이지 않는다. 단지 정읍시 고부면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고부군은 고부면은 물론 영원면, 소성면, 덕천면, 이평면, 정우면, 부안군의 백산면, 고창군의 부안면 북부 일대를 다스릴 정도로 전라도에서 대표적인 큰 고을이었다. 그런데 고부군은 1914년 왜 행정구역상에서 그 이름을 상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까. 이후 고부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고부군읍지』 〈奎 17407〉: 1812년 경(순조 12) 편찬 

 

 

 

 

고부의 내력

고부(古阜)는 글자 그대로 ‘옛 언덕’, ‘첫 발상지’, ‘태고로부터 크게 융성하다’로 풀이될 수 있다. 그래서 고부는 백제 시기에 이미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으로 불렸으며, 통일신라 경덕왕대에는 고사부리군을 한자식으로 고쳐 고부라 불렸다.

 

 

영주(瀛州)로 불리다

이후 고부는 영주(瀛州)라고 불린다. 고려 시기 태조 19년(936)에 고부를 영주(瀛州)로 개명하고 안찰사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명은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라고 불리는 영주산(瀛州山)이 고을 남쪽 5리에 자리했다는 점과 밀접하다. 고을 이름이 먼저 정해졌는지 산이름이 먼저 정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지역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이름을 따서 행정구역 명칭을 정한다는 통상의 관례에 따른다면 영주산이라는 명칭이 세상에 먼저 나왔으리라 추정된다. 또 산의 생김새를 따서 두승산(斗升山)이라 불린다. 『고부읍지』(〈奎 12175〉, 1871년)에 따르면 영주산에는 9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제일 놓은 봉우리를 보면 도량형 기구인 석두(石斗)와 석승(石升)이 있어서 이를 줄여 두승산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또 도순산(都順山)으로도 불렀는데 읍성이 소재하여 그렇게 불린 게 아닌가 한다.

 

이러한 영주산은 중국 동방삭(東方朔)의 『십주기(十洲記)』, 조선시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서거정(徐居正) 등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따르면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의 삼신산(三神山)에는 불로초(不老草)가 나서 그것을 먹으면 영생불사(永生不死)한다.”고 하여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전라도에서 지칭하는 삼신산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이 아니라 봉래구곡(蓬萊九曲)을 이루는 변산(봉래산), 두승산(영주산), 방장산(일명 신선봉) 세 산이다.

 

광종 2년(951)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불렀다. 중앙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고부가 물산이나 군사상으로 매우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고려사』 권57, 지(志) 제11 지리 2에 따르면 속군이 1개, 속현이 6개였다. 강감찬이 거란군을 귀주에서 대파한 해인 현종 10년(1019) 다시 고부군으로 고치고 충렬왕 때 영광군에 병합되었으나, 곧 복구되어 1914년까지 존속하였다.

 

 

조선시대 고부군

고부는 『경국대전』 이전(吏典)에 따르면 익산, 김제, 금산, 진산, 여산과 더불어 종4품 군수(郡守)가 임명되는 군(郡)이다. 당시 전주는 종2품인 부윤이, 임피, 금구, 만경은 종5품인 현령이 정읍, 흥덕, 부안, 옥구, 용안, 함열, 고산, 태인은 종6품인 현감이 임명되었다.

 

방리(坊里)는 오금면(梧琴面), 달천면(達川面), 수금면(水金面), 벌미면(伐未面), 장순면(長順面), 우일면(雨日面), 우덕면(優德面), 소정면(所井面), 성포면(聲浦面), 부안면(富安面), 서부면(西部面), 남부면(南部面), 동부면(東部面), 북부면(北部面), 덕림면(德林面), 궁동면(宮洞面), 거마면(巨麻面), 백산면(白山面), 답내면(畓內面)의 19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부군의 규모

고부군의 호구는 1871년 읍지에 따르면, 원호(元戶) 6,526호, 인구는 28,651구였다. 이 중 남자는 11,777구, 여자는 16,888구(원문이 오류인 듯함)였다. 토지결수는 원장부에 따르면 8,819결 86부였다. 당시 부군 군현의 호구와 결수는 기준 시기가 군현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표 1>과 같다.

 

 

 대동여지도 17첩 5면 〈奎 10333〉

 

 

 

 

<표 1> 고부 부근 군현의 호구와 결수

출전 : 『호남읍지』(〈奎 12175〉

비고 : 고창의 결수는 1789년 호구총수에 근거

 

 

고부군과 인근 고을 6개의 결수를 비교하면 고부군이 제일 많다. 그리고 호구에서는 부안 다음으로 많다. 따라서 영조, 정조, 순조 연간에는 고부군수의 직급이 통훈대부로서 정3품인 당하관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895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고을의 경제적 규모에 따라 등급이 정해질 때, 고부는 전주관찰부가 관할하는 20개 군 중에서 1등군인 전주, 영광 다음으로 2등군으로 지정되었다.

 

 

근대의 격랑 속에서

물론 1894년 농민전쟁의 발원지라는 점에서 이전 시기 같았으면 읍호(邑號)가 강등당했을뿐더러 타군에 통폐합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갑오개혁에서는 이러한 강상죄(綱常罪), 반역죄에 따라 강등하는 제도가 사라지면서 고부군은 이러한 불이익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1898년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헛소문이 돌아 관인들과 식자층들을 놀라게 하였거나 1899년 영학당이 고부군에서 활동한다는 보고가 올라와도 고부군을 통폐합한다는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한편, 이 지역 부농이며 의금부 도사와 삼례찰방을 역임한 박만환((朴晩煥, 1849~1926)은  젊었을 적에 충청남도 아산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당대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송병선, 송병순, 전우 등과 동문 수학하였다. 이후 그는 1903년 고부면 소성면 흑암리에 영주정사를 세워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김진돈, 「편액의 숨결을 찾아서 <51> 정읍 영주정사」, 『새전북신문』 2014. 11. 10). 이 때 영주는 고부를 가리켰다. 그 결과 순창의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초대 대법원장), 근촌(芹村) 백관수(白寬洙, 독립운동가 국회의원), 구파(驅波) 백정기(白貞基, 독립운동가 의열사), 고재일(高在一, 유학자) 등이 여기서 동문 수학하면서 훗날 각각 독립운동가, 법률가, 유학자 등으로 성장해 갔다. 또 일설에는 그가 1894년 농민전쟁 당시 전봉준에게 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른바 을사늑약 후 면암 최익현에게 여러 차례 항일투쟁 자금을 지원했다. 이러한 노력은 농민전쟁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고부의 역사를 지키는 데 기여하였다.

 

고부가 일본의 주목을 받은 때는 1894년 농민전쟁 시기였다. 1894년 1월 고부 봉기가 일어나고 이어서 3월 기포로 발전하자 일본은 조선 정국을 흔들어 놓기 위해 전봉준에게 밀정을 보내 속내를 떠보기도 하였고 청일전쟁 기간에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보병을 이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특히 일본은 농민전쟁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고부와 악연을 맺었다고 하겠다. 당시 동학농민군 토벌을 전담했던 일본군 후비 보병 제19대대(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南小四郞)는 농민군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하달함으로써 일본군 스스로가 고부 농민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인 감정을 품도록 충동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박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 일본보병 제25연대를 고부에 주둔시키는 조치는 농민군의 봉기를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아울러 헌병분대를 비롯하여 우편국, 재판소, 은행, 경찰관서 등이 설치되었다. 이런 기관들은 고부를 중심으로 전북 일대를 감시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데 유용한 탄압기구였다.

 

 

1914년 고부군의 소멸

고부군은 1914년 일제의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 분할되어 주변 군에 통폐합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현에 불과했던 정읍이 1912년 12월 호남선이 통과하는 교통요지로 부상한 반면에 고부는 일제와 악연이 있는 데다가 철로와 멀어졌기 때문이다. 즉 1914년 『부군폐합에 관한 건(전라북도』에 따르면 정읍읍내는 호남철도선 정읍역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고부는 철로가 지나지 않아 교통이 불편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백산면(白山面), 거마면(巨麻面), 덕림면(德林面)은 부안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정읍군에 병합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고부군 농민의 위상을 추락시킴과 동시에 역사 속에서 망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울러 면단위와 함께 리단위도 통폐합함으로써 유사 이래 고부군 개개 면과 개개 마을의 전통과 공동체 의식이 점점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고부 역사 · 전통에 대한 주민의 기록

이에 고부 식자층을 비롯한 주민들은 고부의 역사와 전통을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장봉선(張奉善)을 들 수 있다. 그는 일제의 엄혹한 검열 속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정읍군지』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고부의 역사 유적을 발굴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중점을 두었다. 

 

『정읍군지』에는 말미이지만 당시 금기시되었던 1894년 농민전쟁 사실을 ‘전봉준실기(全琫準實記)’로 기술하고 있어 농민전쟁의 역사를 고부의 역사 속에서 재현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즉 1894년 음력 정월 농민봉기에서 1895년 1월(사실은 1894년 12월) 전봉준의 피체에 이르는 전쟁의 경과와 전개 과정, 관련 인물 기술은 이 책에서만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전봉준을 밀고한 김경천의 배신행위를 서술함으로써 역사의 의리 없는 자들을 훗날의 경계 대상으로 삼고자 하였다. 특히 제목 설명에서 “전봉준이 고부에 거주하였으며 동학란의 생지가 역시 고부이므로 이를 조사 기입함”에서 알 수 있듯이 농민전쟁의 발상지를 정읍이 아닌 고부로 규정하였다.

 

다음 고부면 이전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고려시기에 부안, 고창, 무장, 흥덕, 정읍, 태산, 인의 등 부근 군현을 지휘 감독했음을 밝힌 데 이어 조선시기에도 부안, 흥덕, 고창, 무장, 정읍 등의 현감을 지휘 감독했음을 덧붙이고 있다. 고부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정읍군 역사에 갇혀 있지만 여전히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또한 고부면을 ‘정읍의 개성’으로 부르며 한양에 가려진 개성에 빗대었다. 즉 고부야말로 옛날에는 영주관찰부, 안남도호부로 부근 각군현을 통할하였으며 현대 초에도 헌병대, 재판소, 재무소, 우편국, 농공은행 등이 배치되어 부근 각지의 중심지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군지는 여타 정읍군지와 달리 전봉준을 비롯하여 고부의 역사를 담고 있을지라도 어디까지나 정읍군이라는 행정구역을 울타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고부의 역사는 일제의 지방통치체제라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고부 역사의 온전한 서술은 해방 후를 기다려야 했다.

 

고부향교의 『영주지』 편찬

1945년 8월 해방을 거쳐 1950년대 지방자치제가 걸음마 단계이었지만 시행에 들어가면서 각군에 남아 있던 향교 중에 일부가 지방지 편찬에 앞장섰다. 그 가운데 고부향교도 포함되었다. 고부향교는 1958년 『영주지』를 편찬하였던 것이다.

 

이 읍지는 ‘서(序)’에서 영조 34년(1758)에 옛 고을의 이름을 딴 『영주지』가 편찬되었음을 상기하면서 고부의 역사와 지리, 문화를 전통적인 방식대로 서술하되 지지, 물산, 향교, 관해(官廨), 인사, 역사 순으로 기술하였다. 즉 군호(郡號), 연혁, 기지(基址), 정도(程途), 교량, 산천, 창고, 호구, 학교, 토산, 향사제현, 수재(守宰), 증시(贈諡), 봉군(封君), 문과, 무과, 정려(旌閭) 등 다양한 항목이 설정되었다. 그리하여 지리, 부세, 인물 등을 통해 중앙 정부가 파악하고자 했던 고을에 관한 지리적・재정적 정보와 함께 재지 사족들이 강상논리에 입각하여 선정한 인물의 행적 등이 풍부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고부 향교에서는 사라진 고부군의 역사를 왜 복원하려 했을까. 이는 ‘서(序)’에서 밝힌 대로 1910년 국망과 1914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고부군이 역사 속에 사라졌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가운데 구래의 질서에 근간하여 고부의 역사를 남기고자 한 취지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하여 고부향교는 이러한 편찬 취지를 살려 고부의 옛 영광을 역사로 남기고자 하였다.

 

첫째, 『영주지』는 내용이 기존의 어느 고부군지에 비해 풍부하고 상세하다. 편찬자들이 현존 읍지에서 누락되었던 항목과 기사들을 대거 발굴하거나 수집하여 편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현재 전해지지 않는 영조 연간 읍지를 비롯하여 이후 고부읍지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였다.   

 

둘째, 연혁 항목에서 1914년 일제의 지방제도 개편 때 고분군이 고부면으로 강등되는 가운데 고부, 소성, 덕천, 정우, 이평, 영원면이 정읍군에, 거마, 백산, 덕림이 부안군에, 부안이 고창군에 편입되었음을 밝혔지만, 방곡(坊曲) 항목에서 고부군에 원래 속했던 소속 면동의 연원과 폐합 현황을 상세히 기재하고 있다.

 

셋째, 일제강점 이래 1950년대 말까지 옛 읍지에서 기술하지 못했던 고부의 변동 사항을 추가로 기술하고 있다. 특히 ‘행정상황’ 항목을 설정하여 1950년대 후반 고부면은 물론 과거 고부군에 속했던 여타 면의 각급 학교, 면사무소, 주조장, 지서, 곡물가공소, 진료소 등을 기재하고 있다. 이런 기재 방식은 여타 정읍군지 고부면 기재 방식과 달리 과거 고부군의 영역을 되살려 고부군의 역사와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로 보인다.

 

넷째, 고부의 근대 인물들이 사회와 교육의 발전에 이바지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예컨대  고적(古蹟) 항목에서 황토현의 위치를 소개한 뒤, 1894년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 고부인 전봉준이 관군과 항전한 곳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 방식은 1894년 농민전쟁의 지도자인 전봉준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기의(起義)를 역사에 남기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원우(院宇) 항목에서 박만환이 세운 영양사와 영주정사를 언급함으로써 박만환을 비롯한 유림들의 학교 건립 운동과 유학 진흥 노력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그 밖에 고적 항목에서 증산도를 창시한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을 언급하며 그가 스스로 미륵화신이라고 지칭하며 많은 신도들을 모았음을 기술하고 있다. 비록 강일순의 종교 활동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취하더라도 그의 명망성을 감안하여 그가 고부 출신임을 밝히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이러한 기술 방식으로 편찬된 고부 읍지는 더 이상 출간되지 않았다. 2002년에 출간된 정읍문화원의 『고부향토지』에서 지리, 유적, 향토수호사, 지역 문화, 민속, 교육, 행정, 복지, 산업, 마을 유래, 종교, 인물 등이 기술되어 있지만 그 대상 영역은 옛 고부군이 아닌 현 고부면에 국한되었다. 물론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 출신의 인물이 집중 거론되었지만 이 역시 정읍의 인물로서 조명되었다. 이어서 2003년에 편찬된 『정읍시사』 역시 『고부향토지』와 마찬가지로 정읍 속 고부면의 역사, 문화, 인물 등을 다뤘을 뿐이다. 그 결과 전봉준을 비롯한 특정 인물을 제외하고는 박만환을 비롯한 고부의 많은 인물들이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특히 고부군을 구성하였던 여러 면들은 과거에는 인물, 역사와 문화 측면에서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된 역사문화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와서 그 연계성이 끊어지면서 지역적 특성에 바탕을 둔 역사문화적 맥락이 소실되기에 이르렀다. 왜소화되고 박제화된 개별 면의 자취로만 남았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현존의 행정 구역 범위에 갇혀 오늘날의 관점에서 지역의 역사를 정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역사주의적인 관점에서 과거에 살아 숨 쉬었던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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