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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문예의식의 산물-재총화(慵齋叢話)

 

 

백승아(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사진 1 : 용재총화(6906,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조선 전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문인인 성현(成俔, 1439~1504)이 저술한 필기(筆記)이자 잡기류(雜記類) 책이다. 용재는 성현의 호이다. 성현은 조선 초기의 문인으로 세종대 태어나 15세기 중후반 비교적 태평성대라고 할만한 시대에 활동하였다. 대대로 중앙에서 기반을 다졌던 문벌 출신으로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사간·대사성·동부승지·형조참판·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공조판서·홍문관 대제학 등 중요한 중앙 관직을 역임하며 문벌 가문의 위상을 이어 나갔다. 특히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 제조를 겸하였고, 당시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한 것으로 유명하다.

 

용재총화는 필기(筆記)라는 문학 양식으로 여러 부류의 이야기를 집록한 것이다. 책의 권수만 구별되어 있을 뿐 일정한 기준으로 편집된 것이 아니라 300여 편이 이야기가 섞여 있는 형태이기에 그 내용이나 성격을 쉽게 규정하기 어렵다. 필기는 문인 학자의 서재에서 형성되어 주로 사대부의 생활을 담은 것이다.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것을 패설(稗說)이라고 하는데, 필기와 패설은 성격이 다르지만 민간의 이야기를 듣고 문인이 관심을 가져 필기류 기록에 섞이기도 한다. 성현은 용재총화이외에 별도로 패설6권을 저술했는데 이는 성현이 필기와 패설을 구별하고자 했음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용재총화에도 패설의 범주에 속하는 성격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용재총화는 기본적으로 문인의 필기이지만 제목을 총화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용재총화는 성현이 어렸을 때 일을 회상한 기록부터 연산군 5(1599)까지의 일이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관청의 규모나 업무, 제도, 관례, 풍습, 지리,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성현이 살았던 당시의 모든 이야기가 총 망라되어 있다. 음악, 속언(俗言), 고담(古談)에도 관심이 많아 이에 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용재총화의 첫 간행은 중종 20(1525) 아들 성세창(成世昌)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현전하는 용재총화는 규장각 소장 33책의 필사본과 석판본, 10권으로 된 대동야승소재본, 연세대 소장 목판본 55책 등 4종류가 있다. 그중 연세대 소장 목판본은 대동야승소재본과 일치하고, 규장각에 소장된 두 자료도 판본이 다르지만 내용과 체제가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4종류의 용재총화는 실린 편수와 내용은 같으나 수록 체제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성리학 시대의 잡기류

 

 

주지하듯이 조선은 성리학을 학문적 근간으로 삼은 시대였다. 성리학 사회에서 성리학 경전인 사서육경(四書六經) 이외의 잡기류는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지 못하고 쓸모없는 글이라 여겨졌다. 역사 바깥의 기이하고 치우친 것을 기록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조선 전기의 경우 잡기류에 대한 관심이 융성하였는데, 특히 성리학이 정치적 학문적 규범으로 자리 잡아 비교적 안정된 시기라고 일컫는 성종조에 문인 관료층이 잡기류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여러 저술을 남겼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성조대에는 국왕과 신료들이 역사와 문화에 걸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며 각종 국조 문헌 편찬을 주관하던 시기였다. 성종은 학문을 좋아한 군주로 유명한데 성리학 경전뿐만 아니라 잡기류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성종에게 잡기류 서적을 바쳤다는 이유로 탄핵당한 신하가 있었는데 그때 성종은 어진이라면 선악과 관계없이 그런 류의 글을 보고도 권계 삼을 만하다고 하며 잡기류 서적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이러한 성종의 성향은 당시 문인 관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조정 내에도 잡기류 책이 많이 보관되었고 홍문관에서도 그런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여건도 갖추어져 있었다.

 

성현의 형인 성임(成任)과 성간(成侃)도 집현전에서 경전 외에 유학자들이 좋지 않게 보는 골계류와 패설류 글들을 읽을 정도로 경전만을 추종하는 도학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성간에게 서거정(徐居正)이 육경을 중심으로 독서해야 한다고 하자 성간은 널리 배우고 요약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독서가 필요하고 특히 긴장과 이완을 위해서는 잡기류의 글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박문약례(博文約禮)를 위한 폭넓은 독서와 이완에 해당하는 글이 필요하다는 긍정적인 인식은 서거정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잡기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성현 집안의 문화 전통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15세기 후반 중앙 기반 문인들의 주류적 경향이기도 하였다.

 

성현은 이러한 시대적 영향과 개인적인 영향으로 잡기류의 가치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였다. 성리학 경전 이외의 글은 쓸데없다는 인식은 경직된 사고라고 비판하면서 재야와 바깥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역사 서술에도 도움이 되고, 후대 사람들에 대한 권계, 야외(野外)의 일사(逸史), 파한(破閑)의 읽을거리이며 이런 글이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 노숙해야 한다고 여겼다. 즉 잡기류가 단순히 사실의 기록으로 취급될 것이 아니라 문예적 취미에서 나온 것이고 이는 문예의 한 범주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요컨대 15세기에 성리학이 난숙해지면서 관료층 문인들은 사서육경 외에도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쳐 풍부한 지식을 섭렵하고 잡기류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성현 또한 정사에 기록할 수 없었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나라의 역사를 보좌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권계 및 파한의 자료를 삼고자 용재총화를 저술하였다. 황필이 쓴 용재총화발문에서도 이러한 저술 목적이 드러난다.

 

무릇 우리나라 문장 각 세대의 높고 낮음, 도읍·산천과 민풍·시속의 아름다움과 추함, 성악(聲樂복축(卜祝서화(書畫여러 잡기에 이르기까지 조정과 민간 사이의 기쁘고, 놀랍고, 슬퍼함은 담소의 자산이 되어 심신을 온화하게 만들 수 있다. 국사에 갖추지 못한 것도 이 책에 모두 실려있다.”

 

이러한 의도하에 저술된 용재총화의 다양한 기록은 역사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민속학, 구비문학 등 한국학 연구의 사료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용재총화의 내용과 그 특징

 

 

용재총화에 수록된 이야기는 300여 편의 방대한 양과 다양성이 돋보인다. 그중 대부분이 성현 자신의 체험과 견문에서 비롯된 것들이고, 성현 개인의 신변과 내·외친척, 가문 등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들의 문학성이 뛰어나기에 용재총화는 성현의 문예적 취향이 드러나는 기록이기도 하다.

 

용재총화에서는 파적(破寂)의 방법과 관련하여 놀이로서의 파적, 지나간 일을 살피는 것으로서의 파적, 담소의 자료로서 파적 등이 제시되었는데 그중 지나간 일을 살피는 것으로서의 파적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지나간 일을 살피고 적적한 것을 깨는 것을 파적·파한(破閑)의 전통으로 이해하고 이전의 파적·파한의 서적인 파한집, 보한집, 역옹패설에서 시화(詩話)에 치우쳤던 아쉬움을 극복하면서 시사(時事)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로 인해 용재총화에서는 시화가 30여 편으로 전체 분량의 1% 정도만을 차지하는데, 이는 관료 문인 학자인 성현이 1천 여수의 시작품을 남긴 것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 편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외설적인 시와 이야기까지 채록한 것은 특징적이다.

 

용재총화에 실린 이야기는 기실(記實), 골계(滑稽), 기이(紀異), 잡론(雜論)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을 기록하는 기실이다. 기실의 비중이 6할을 넘고 있는 것은 용재총화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기실은 사회, 경제, 문화, 지리, 풍속, 제도, 불교, 정치, 행정, 인물 일화 등 성현 당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문장가·명필가·화가·음악가 등의 인물, 도읍지·전적·도자기·비문·활자 등의 문화, 예조·승정원·장악원·성균관·집현전·언문청 등 조선 초기의 관청과 제도, 궁중행사·세시풍속·불교의례 등 조선 초기 사회상 등이 기록되어 조선 초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 사신, 야인, 왜인의 풍속까지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기록들은 국사에서 취급하지 않은 것으로 나라의 역사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다.

 

용재총화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인물 관련 일화는 양적 비중뿐 아니라 그 대상 인물의 유형도 다른 저술에 비해 훨씬 다양하다. 특히 음악 관련 인물, 명사수, 독경사, 성대모사꾼 등 재예에 뛰어난 인물들이 각 방면에 걸쳐 망라하는데 이는 성현의 문예적 취향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현은 귀신 이야기, 꿈과 해몽, 점복 등 기이한 것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였다. 또한 집 안팎의 일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는데, 가문, 성임, 성간, 모친, 외숙 등에 관련한 이야기가 30여 편 있다. 잡론에서 특징적인 것은 민간의 속언과 고담인데, 새의 화생(化生), 조수(潮水), 꿩의 맛, 유사한 사물, 팥꽃의 색깔, 개구리 울음소리, 황새 꽁지의 색깔 등을 다룬 글에서는 성현의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골계에 해당하는 이야기로는 해학담, 애정담, 호색담 등이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제법 형상화되어 문학적인 요소를 지닌 것들이 많다. 해학담은 한 인물형이 지닌 양면적인 속성으로 인해 갈등이 구체화 되면서 긴장감을 끌고 가다가 결국엔 낭패하여 웃음 속의 가시를 남기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으로 다분히 문학적이다. 좀 더 구체적인 문학적 사상(事象)은 애정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내용뿐 아니라 구조 측면에서도 복합적인 구조 속에서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등 성현의 문학적 재질로 다듬어진 이야기를 통해 상당히 문학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애정담에는 순수한 애정담도 있지만 성종조 어우동이 외통하는 호색적 행각, 소경의 아내가 남편을 속이고 외통한 이야기, 양기가 뛰어난 이를 신랑감으로 택하는 처녀의 음담 등 호색적인 이야기도 있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감안하면 성현이 호색담을 수록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성()에 대한 성현의 개방적인 인식도 살펴볼 수 있다. 성현은 음식과 남녀관계는 인간의 큰 욕망으로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호색을 인간 본연의 진솔한 감정으로 여기고 그러한 본능을 숨기는 것을 오히려 위선적이라고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인간 본연의 내면적인 욕구로서 성욕에 대해 긍적적인 견해를 보이며 진솔한 인간성을 중시했던 것인데, 이는 폭넓은 시야에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 성현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용재총화에서는 객관적 사물에 대한 성현의 예리한 관찰력이 잘 드러난다. 성현은 객관적 사물에 대한 적확한 관찰과 인식, 나아가 세상의 모든 객관적 사물과 인간 사이에서 자신의 경직된 편견을 버리고 직시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예리한 관찰력은 당시 사회 현실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성현의 시각에 비추어진 현실은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나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보통 잡기류는 사회 각 분야에서 화제가 될만한 것을 골라 비평적인 안목에서 쓴 글이면서도 그 의도를 드러내기보다는 풍자, 골계, 우화의 수법으로 은근하게 풍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용재총화는 비평의식을 정면에서 드러내는 것이 적지 않다. 용재총화에서는 불교의 폐단, 지배층의 비리와 풍속의 퇴폐, 물질주의의 팽배와 지배층의 부패 등을 비판하는 인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중하류층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인식을 보인다. 그의 이러한 현실 인식으로 인해 성현은 관료이자 문학가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잃지 않는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성현·홍순석 옮김, 2014 용재총화, 지식을 만드는 지식.

최지남, 2017 성현과 그의 시대, 새문사.

강창규 2022, 용재총화와 관찬서 간의 교섭과 거리-조선왕조실록동국여지승람을 중심으로, 남명학연구75.

홍순석 1987, 용재총화 연구, 국어국문학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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