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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明代) 문단의 지남(指南) - 명문기상(明文奇賞)

 

이승연(서울대학교 중어중문과 박사과정)

 

 

 

사진 1 : 명문기상(明文奇賞)(奎中 356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과연 글다운 글이 있는가?” - 명대(明代) 문장에 대한 인식

 

 

후대의 문장은 언제나 선대의 그늘 아래에 놓인다. 선진(先秦)이 가장 뛰어나고, 양한(兩漢)이 그에 미치지 못하며, ()이 한()만 못하고, ()이 당()만 못하다는 인식은 중국 문학사를 관통하는 뿌리 깊은 통념이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명대(明代)의 문장은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하였다. () 하교원(何喬遠, 1558-1632)이 편찬한 명대 문장 선집인 황명문징(皇明文徵)에 근어중(靳於中, 1564-1644)이 붙인 서문에는 이러한 통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있다.

 

고문(古文)을 논하는 자들은 대체로 송()이 당()만 못하고, ()이 양한(兩漢)만 못하며, 양한(兩漢)이 선진(先進)만 못하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시대가 내려가면서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그러하지 아니한가? 더구나 우리 조대(朝代)의 인재는 실로 옛 조대보다 배나 많은데, 어째서인가?”

- 근어중(靳於中, 1564-1644), 황명문징서(皇明文徵序)

 

시대가 내려올수록 문장도 쇠퇴한다는 통념에 던지는 이 의문은, 후대를 살아가는 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볼 만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명대(明代)는 그 어느 시대보다 글을 짓는 이[作者]’가 넘쳐나고, 그 어느 시대보다 글을 담은 책[文集]’이 양산되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류 속에서 명대 문인들은 자신들의 시대와 문장에 대한 일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자부심이 컸던 만큼 방대한 문장이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채 흩어지고 사라지는 상황은 그들에게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고, 이는 곧 명대 문장 선집을 편찬해야 한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하교원(何喬遠)황명문징(皇明文徵)자서(自序)에서 명조(明朝)가 일어난 지 270여 년간 역대 제왕의 수훈(垂訓)과 현사대부(賢士大夫)의 언설이 모두 세상에 드날렸지만 흩어져서 수습되지 않았다.”고 하여 이 안타까운 상황을 토로하였다. 진인석(陳仁錫, 1581-1636) 역시 명문기상서(明文奇賞序)에서 그 자부심과 문제의식을 함께 드러냈다.

 

예로부터 문장의 성대함이 본조(本朝)를 넘어선 적이 없다. ……가정(嘉靖융경(隆慶) 연간 이래로 일가를 이룬 사람의 말(一家之言)’이 가장 성행하였으나, 거슬러 올라가면 성화(成化홍치(弘治홍무(洪武영락(永樂) 연간의 고문전책(高文典冊)’이 있는 듯 없는 듯 방치되고 있으니, 어찌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 진인석(陳仁錫), 명문기상서(明文奇賞序)

 

이와 같은 인식은 청대(淸代)에도 이어졌다. () 고무륜(顧茂倫, ?-?)이 편찬한 명대 문장 선집인 명문영화(明文英華)에 반뢰(潘耒, 1646-1708)가 붙인 서문은 명대 문장 선집의 필요성을 한층 체계적으로 논의하면서 명대 문장을 세 층위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송렴(宋濂방효유(方孝孺오원박(吳原博왕수인(王守仁당순지(唐順之귀유광(歸有光전겸익(錢謙益황순요(黄淳耀) 등과 같이, 문장 선집에 수록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후세에 전해질 명가(名家)의 문장이다. 두 번째는 문집의 간행이 널리 이루어지지 않아 문장 선집에 의지해야만 후대에 전해질 수 있는 홍무(洪武영락(永樂) 연간 이후, 성화(成化홍치(弘治) 연간 이전의 문장이다. 세 번째는 표절의 풍조가 성행하여 수많은 글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문장 선집으로 선별하지 않을 경우에 반드시 사라져 버릴 가정(嘉靖융경(隆慶) 연간 이후의 문장이다. 나아가 그는 명대 문장을 도외시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옛날만 알고 지금을 모르는 것, 먼 것만 보고 가까운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을 몽매하다 일컫는다. 배우는 자들이 진(()만 높이고 명대(明代)의 문장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면, 이는 마치 큰 강과 바다는 두루 찾아다니면서도 시냇물과 호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큰 솥[鼎彝]은 늘어놓으면서도 찻잔과 그릇은 빠뜨린 것과 같다.”

- 반뢰(潘耒), 수초당집(遂初堂集)』 「명문영화서(明文英華序)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방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만큼 방대한 명대 문장 가운데에서 옥석을 가려내어 후대로 전하려는 작업, 명문기상(明文奇賞)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탄생한 책이었다.

 

 

 

 

진인석(陳仁錫)기상(奇賞)’ 시리즈

 

 

방대한 명대 문장 가운데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을 자임한 인물인 진인석은 자()는 명경(明卿), ()는 지대(芝臺)이며, 소주(蘇州) 장주(長洲) 출신이다. 159719세의 나이로 향시(鄕試)에 급제한 그는 약 25년의 인고 끝에 1622년 전시(殿試)에서 3등으로 급제하여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에 제수되었다. 그의 학문적 면모에 대해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천성이 배우기를 좋아하고 저술을 즐겨하였으며, 당시 관각에서 박식하기로는 그와 견줄 자가 드물었다.”

- 명사(明史열전(列傳)

 

사료의 평가에 걸맞게 그가 남긴 저술은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넘나들며 다양하고도 방대한 규모를 이룬다. 경학 저술로는 희경이간록(羲經易簡錄)·역경송(易經頌)·사서고(四書考)·사서어록(四書語錄)등이, 역사·제도 관련 저술로는 국사일록(國史日錄)·팔편유찬(八編類纂)·황명법세록(皇明世法錄)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국어(國語)·사기(史記)·한서(漢書)등의 서적을 재편하거나 평열(評閱)한 서적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 업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명() 장대(張岱, 1597-1684?)가 찬술한 기전체 사서 석궤서(石匱書)의 다음 대목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가 편찬한 저술 중, 황명법세록(皇明世法錄)·경제팔편(經濟八編)·속대학연의(續大學衍義)·부역전서(賦役全書)·잠확유서(潛確類書)와 같은 것은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에 보탬이 되며, 후학에게 유익하다. 경학(經學) 저술로는 사서어록(四書語錄)·희경간이록(羲經易簡錄)·연천소역(淵天紹易)등이 있으며, 비평·교열하거나 편선(編選)한 책 가운데,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일찍이 황제에게 올려 열람하게 한 바가 있고, 삼사강목(三史綱目)·오경(五經)·주례(周禮)·성리(性理)·고문기상(古文奇賞)등은 걸핏하면 분량이 수백 권에 달하였다.”

 

그가 편찬한 일련의 저술을 살펴보면, 방대한 문헌을 선별하고 재편성하는 데 지속적으로 역량을 발휘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가 편찬한 일련의 문장 선집 중에 기상(奇賞)’이라는 표제어를 활용한 서적이 눈길을 끈다. 고문기상(古文奇賞)·명문기상(明文奇賞)·소문기상(蘇文奇賞)·척독기상(尺牘奇賞), ‘뛰어난 작품을 가려 감상한다는 동일한 표제를 공유하며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다.

  

이 가운데 명문기상은 명대 문장을 대상으로 한 선집으로서, 당대에 축적된 방대한 문장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선별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는 어떤 문장을 취하고 어떤 문장을 버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진인석 나름의 해답이 반영된 문장 선집이라 할 수 있다.

 

 

 

 

명대(明代) 문장의 정수(精髓)를 담다 - 명문기상(明文奇賞)의 구성과 수록 내용

 

 

진인석은 경세와 도학(道學)에 도움이 되는 글을 원칙으로 삼아, 명초(明初) 송렴(宋濂, 1310-1381)·양유정(楊維楨, 1296-1370)에서부터 명말(明末) 진훈(陳勳, 1560-1617)·왕형(王衡, 1562-1609)에 이르는 약 180여 명의 작가를 시대순으로 아우르고, 각 작가의 작품을 문체별로 배열한 뒤 자신의 평점(評點)을 더하여 총 40권의 문장 선집으로 완성하였다.


 

사진 2 : 명문기상(明文奇賞)본문(奎中 356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유자(儒者)들은 한() 동중서(董仲舒)를 계승하는 데 뜻을 두어야지, 어찌 단지 문채가 사마상여(司馬相如)에 미치는 데 그치는가. ……지금 세상의 문장은 두서가 없고 모호하며 내실이 없으니, 도개(陶凯여태소(茹太素)와 같은 자들이 적지 않다.”

- 진인석(陳仁錫), 명문기상서(明文奇賞序)

 

도개(陶凯, 1304-1376)는 자호(自號)로 황제의 미움을 사 처형당한 인물이고, 여태소(茹太素, ?-1389)17,000여 자에 이르는 장황한 상소문을 올렸다가 홍무제(洪武帝)로 하여금 상소문의 규격과 격식을 엄격히 제정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진인석은 이 두 사례를 통해 글자 하나도 신중히 가려 써야 하며, 내실 없이 장황하기만 한 글은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서문의 행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명문기상은 명대 문장을 전반적으로 정리하는 동시에 당대 문인들에게 글쓰기의 표준을 제시하려는 목적 아래 편찬된 문장 선집이었다.

  

명문기상에 수록된 작품을 살펴보면, 양신(楊愼, 143송렴(宋濂, 113방효유(方孝孺, 110해진(解縉, 61왕석작(王錫爵, 60유기(劉基, 39장거정(張居正, 30) 순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60편 이상이 수록된 인물들은 대체로 이학(理學)과 경세(經世)에 밀접한 인물들이다. 반면 당송고문파(唐宋古文派)의 귀유광(歸有光모곤(茅坤당순지(唐順之)의 글은 상대적으로 적게 수록되었고, 공안파(公安派) 및 경릉파(竟陵派) 역시 선별되기는 하였으나 그 비중은 매우 미미하다.

  

이러한 수록 경향은 명문기상이 주로 규범적이고 문교(文敎)의 가치를 담으면서도 전아하고 장중한 풍격을 지닌 글을 중시한 문장 선집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문기상과 마찬가지로 명문기상역시 분류 체계의 한계를 지적받았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취사선택함에 잘 살피지 못한 것이 많고, 대체로 널리 담는 데 힘쓰고 정밀하지 못하며, 품등을 나누기를 좋아하되 일정한 체계가 없어, 모두 번다하고 잡됨을 면치 못하였다(去取亦多未審. 蓋務博而不精, 好分流品而無緖, 悉不免冗雜之失)”고 평하였다. 넓게 담으려 할수록 짜임새를 갖추기 어렵다는 선집 편찬의 오래된 딜레마 앞에서, 명문기상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명대 문단을 읽는 창() - 조선 문인들의 명문기상(明文奇賞)수용

 

 

명대에 유례없이 수많은 작자가 출현하고 방대한 양의 문집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조선 문인들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은 명대에 간행된 방대한 문집에 대해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명나라 문집으로 세상에 간행된 것들이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방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로 너무 많아서 다 논할 수가 없다.”

- 이의현(李宜顯), 도곡집(陶谷集)28 도협총설(陶峽叢說)

 

그러나 수적인 우세함이 곧 질적 성취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명대 문장은 다른 조대에 비해 현저히 낮은 위상으로 인식되었으며, 심지어 글다운 글 자체가 없다는 혹평까지도 뒤따랐다.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기록에서 이러한 실정을 확인할 수 있다.

 

아아, 명나라의 문장은 진실로 삼대(三代서한(西漢(()의 성대함보다 못하지만, 그 작자의 수가 많음에 있어서는 혹 그들을 넘어서서 부족함이 없다.”

- 홍석주(洪奭周), 연천선생문집(淵泉先生文集)24 선황명문소지(選皇明文小識)

 

지금 문장을 짓는 자들은 대부분 명나라의 문장을 숭상한다. 그 중 심한 자들은 곧잘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도 버리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명나라의 문장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또 모두 말하기를 명나라에 무슨 문장이 있느냐라 말한다

- 홍석주(洪奭周), 연천선생문집(淵泉先生文集)24 선갑집소지(選甲集小識)

 

위 인용문은 명대 문장을 둘러싼 조선 문단의 엇갈린 시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명대 문장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한유·구양수·소식마저 등한시하는 이들이 있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명대에 글다운 글이 있느냐며 아예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교차하는 평가 속에서 명문기상은 명대 문단의 동향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주요한 자료로 역할하였다.

 

명나라 글을 추려 모아 한 책으로 만든 것으로는 진인석의 명문기상이 있는데, 이것이 가장 규모가 큰 책이다

- 이의현(李宜顯), 도곡집(陶谷集)28 도협총설(陶峽叢說)

 

명문기상은 명나라 태사 진인석이 가려 뽑은 것이다. 만력(萬曆) 연간 이전 여러 군자의 문장이 모두 들어 있다.”

- 이종휘(李種徽), 수산집(修山集)2 명문선기서(明文選奇叙)

 

……이 책은 진인석이 편찬한 것으로, 나는 친우 김석원(金奭源)에게서 얻었다. 그 중 더욱 아름다운 것을 가려 뽑고자 하였으나, 다만 종이가 없어 결국 그만두었다. 그 말미에 대충이나마 엮어서 김석원에게 돌려주었다.”

- 이상수(李象秀), 어당집(峿堂集)15 서명문기상후(書明文奇賞後)

 

이상의 기록들은 명문기상이 조선 문인들 사이에서 폭넓게 읽히고 활발하게 유통되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조선 문인들은 단순히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명대 문장을 선별하여 새로운 선집을 엮어내기도 하였다. 이종휘는 명문기상을 재가공하여 명문선기(明文選奇)2책을 편찬하였고, 홍석주는 명문선(皇明文選)20권을, 한장석은 명청삼십사가문초(明淸三十四家文抄)명문속선(明文續選)을 편찬하였다. 현전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 실물을 모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편찬 행위 자체가 명대 문장의 진면목을 스스로 가려내고자 한 조선 문인들의 적극적인 지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사진 3 : 명문기상(明文奇賞)에 수록된 최립(崔岦, 1539-1612)上宗伯書(奎中 4560,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편, 명문기상19에는 1581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사신을 갔던 김계휘(金繼輝, 1526-1582)의 이름으로 수록한 두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질정관(質正官) 최립(崔岦, 1539-1612)과 서장관(書狀官)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대찬(代撰)한 것이었다. 조선 문인의 글이 중국에서 편찬한 문장 선집에 수록되고, 진인석의 평점까지 더해진 사실에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다음과 같은 감회를 남겼다.

 

지금 이 두 편이 이 책에 실리고, 게다가 그 말이 고아하다는 평을 받고, 권점이 더해지게 되었다. 중화(中華)의 작자(作者)들에게 칭찬받는 것이 이와 같으니, 다행스럽다 하겠다. 우리 동쪽에서 태어난 선비들은 대부분 구차하고 간략하며 아둔하다. 간혹 문사(文辭)를 업으로 삼는 자들도 과장(科塲)의 부(()의 기교에 골몰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우연히 명문기상을 읽고 이 두 편을 손수 베껴 적었으며, 오늘날에는 이러한 글을 지을 수 있는 자가 다시 없음을 심히 개탄스러워 한다.”

- 강세황(姜世晃), 표암고(豹菴稿), 5 서수사명문기상권하(書手寫明文奇賞卷下)

 

강세황의 글에는 두 가지 감정이 나란히 담겨 있다. 자국의 문장이 중국 문인의 눈에 들었다는 안도감과, 이제 그러한 글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안타까움이 그것이다. 명대 문장 선집을 읽으며 자국 문장의 어제와 오늘을 함께 떠올린 조선 문인의 내면이 이 기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진인석이 명대 문단 삼백 년의 정수를 담아 완성한 명문기상은 조선 문단에 전해져 오래도록 읽혔다. 조선 문인들은 이 책을 길잡이 삼아 명대 문단의 전모를 파악하였고, 자신들의 문장관에 맞게 취사선택하여 새로운 선집을 엮어내기도 하면서 자신들이 지향해야 할 글쓰기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명대 문단을 읽는 창구로, 글쓰기의 전범으로, 자국 문장을 돌이켜보는 거울로. 명문기상의 다층적인 수용 양상은 이 한 권의 문장 선집이 조선 문단에 남긴 흔적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明史

四庫全書總目提要

陳煒舜, 陳仁錫及其楚辭眉批考探, 中國文化研究所學報No.54, 2012.

구슬아, 조선 후기 문인들이 明代 文壇 경향을 파악하는 한 방법: 明代 散文選集 明文奇賞을 중심으로, 관악어문연구No.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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