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전(朴氏傳)>: 허구 속 영웅,
역사와 상상의 경계를 넘다.
김민정(경상국립대학교 여성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박씨전(朴氏傳)>은 필사본과 활자본을 포함하여 140여 종이 넘는 이본 목록이 현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본의 수는 곧, 향유자의 수를 의미하는 것이니 당시의 사람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얻은 소설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박씨전>이 이렇듯 큰 인기를 얻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 소설에 담긴 어떠한 요소가 당대 사람들로 하여금 <박씨전>에 심취되게 만들었을까? 이 글에서는 이러한 요소를 몇 가지 살펴보며, <박씨전>의 재미와, 현대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림1 : 규장각 소장 <박씨전>(가람古813.53-B15)
| <박씨전>이란 무엇인가 |
<박씨전>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창작된 고전소설로, 허구적 인물인 박씨를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역사소설, 군담소설, 여성영웅소설 등으로 다채롭게 분류된다. 이 소설의 이러한 다채로운 성격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박씨는 주인공이자 주동인물로, 그의 활약은 남성 중심적 질서에 도전하며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처럼 <박씨전>은 여성의 잠재적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적 제약 속에서 희망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작품은 ‘추모현녀형(醜貌賢女形) 여성’과 ‘초월적 존재의 대리인’이라는 박씨의 형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예컨대, 추한 외모로 등장하는 박씨는 외모로 남편에게 업신여겨지면서도, 조복(朝服)을 짓고, 백옥연적(白玉硯滴)을 준비하며, 축지법을 사용하는 등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다. 이후 박씨의 능력은 개인의 한계를 넘어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박씨의 형상은 단순히 개인적 영웅성을 넘어, ‘현실의 패배에 대한 위안과 낙관적 역사 전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흥미롭게도, <박씨전>의 주인공 박씨는 완전히 허구적 인물로, 사실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 반면, 박씨를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들은 이시백, 임경업, 김자점, 용골대 등 병자호란 당시 실존했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허구와 실존의 인물들이 공존하는 구조는 <박씨전>만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작품의 구조 또한 독특하다. <박씨전>의 전반부는 설화적 상상력이 두드러지는 반면, 후반부는 전쟁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서는 가정사와 도교적 초월 세계가 주를 이루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국가적 사건과 사실적 세계로 전환된다. 이 같은 구도 속에서 주동인물 박씨는 남성과 여성, 허구와 사실, 개인과 국가를 연결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또한, <박씨전>은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통해 작품의 서사를 전개하며, 주요한 사건들은 박씨의 능력과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병자호란 중 박씨는 자신의 시비인 계화를 통해 적장 용골대를 굴복시키며, 남성들이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낸다. 이는 박씨가 단순한 여성 인물이 아니라, 허구 세계와 현실 세계를 매개하는 이인(異人)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처럼 <박씨전>은 전통적인 역사소설과는 차별화된 서사적 구조와 여성 중심의 서사적 의미를 통해 독창성을 획득한 작품으로, 시대를 초월해 현재에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 <박씨전>의 통속화와 변모 |
<박씨전>은 필사본과 활자본을 포함하여 140종 이상의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 이들 이본은 각각이 서로 다른 서사적 변모를 보여준다. 특히 활자본은 판매를 목적으로 간행되었으며, 상업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실존 인물과 관련된 서사를 대폭 확대하며 통속화되었다.
통속화는 대체적으로 작품 고유의 특성을 약화시키고, 다수의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반적인 성향을 부여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활자본 <박씨전> 계열에서는 실존 인물인 임경업과 이시백에 관련된 서사가 확장되면서, 박씨의 독창적 활약상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게 된다. 이는 당대의 독자층을 겨냥한 상업적 전략으로,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활자본은 두 계열로 나뉘는데, ‘박씨부인전’ 계열과 ‘박씨전’ 계열이다. 두 계열 모두 통속화 과정을 거쳤지만,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는 차이를 보였다. ‘박씨부인전’ 계열은 박씨의 능력을 충(忠)과 절(節)의 행위로 귀결시키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박씨전’ 계열은 임경업과 관련된 서사가 지나치게 확장되어 작품 고유의 특성이 약화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박씨전>의 이본 변모는 작품 결말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결말에서 임경업과 관련된 서사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박씨의 활약상은 축소되며, 작품의 고유한 문제의식은 점차 사라진다. 이는 임경업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임경업전의 전반부, 중반부, 후반부 서사가 차용된 흔적이 여러 이본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결말에서 임경업이 세자와 대군을 데려오는 내용, 임경업의 죽음과 김자점의 처형 등이 추가되면서 <박씨전>은 단순한 여성영웅소설의 틀을 넘어 역사소설적 성격을 더욱 강화했다.
활자본의 통속화는 대중성을 겨냥한 상업적 변화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박씨부인전’ 계열은 박씨의 행위를 국가를 위한 충과 절의 행위로 귀결시키며, 박씨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반면, ‘박씨전’ 계열은 당대 정치 체제에 순응하고 지배 질서를 강화하려는 보수적 시각이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박씨전>의 원본이 가진 독창적 특성과 문제의식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독자층 확대를 위한 통속화를 극대화한 결과로 볼 수 있다.
| 재미 요소: 초월적 능력과 박씨의 변신 |
<박씨전>에서 주인공 박씨의 비범한 능력은 독자들에게 흥미와 재미를 제공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이와 같은 박씨의 능력은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역할을 초월하여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박씨는 전형적인 여성 영웅의 모습과는 차별화된 캐릭터로, 남장을 하지 않고 본연의 여성적 모습을 유지한 채 영웅적 활약을 펼친다. 이는 당대 여성영웅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장 여성 주인공들과는 다른 독창적 설정으로, <박씨전>의 독자성의 강조한다. 더불어 박씨는 외부에 자신의 의견을 전달할 때도 여성인 계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여성의 능력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또한, 작품 후반부에서는 병자호란 중 박씨와 계화의 활약이 특히 돋보인다. 박씨는 용골대를 굴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실제로 적장을 물리치고 항복을 받아내는 인물은 시비 계화이다. 이는 박씨가 단독 영웅으로만 설정된 것이 아니라, 연대와 협력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임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러한 설정을 통해 전쟁이라는 큰 난관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다양한 여성 인물들의 활약상을 의도적으로 부각했다.
작품 전반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가 배치되어 있다. 전반부에서는 도교적 상상력과 허구적 화소가 주를 이루며, 박씨의 비범한 재능이 강조된다. 반면 후반부로 갈수록 역사적 상상력이 강화되면서 병자호란과 같은 실제 역사적 사건들이 서사에 포함된다. 이처럼 <박씨전>은 상상력과 현실성이 교차하는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흥미로움을 제공하면서도 역사적 사건을 상기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한편, 작품 속에서 박씨가 변신하는 과정 또한 독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다. 박씨는 외모와 능력 면에서 모두 변화하며,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초월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과정은 단순히 박씨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다. 특히, 박씨가 가정 내에서 천대받는 존재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거듭나는 모습은 대리만족을 통해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결론적으로, <박씨전>의 재미 요소는 박씨의 초월적 능력과 변신 과정, 그리고 상상력과 현실성을 조화롭게 결합한 서사적 구성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박씨전>은 단순한 오락적 재미를 넘어, 독자들에게 상상력의 자유와 사회적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하는 고전소설로 평가받는다.
| <박씨전>이 주는 메시지: <박씨전>의 현대성 |
<박씨전>은 단순히 과거의 고전소설로 머무르지 않고, 현대 독자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특히, 작품은 주인인 박씨, 그리고 시비(侍婢) 계화의 연대를 통해 계층, 신분, 나이를 초월한 협력을 강조하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집단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박씨는 계획을 수립하고 계화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맡으며, 두 사람의 협력은 전쟁이라는 큰 난관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된다.
<박씨전>의 서사는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굴욕과 패배를 극복하려는 서민적 영웅담으로도 볼 수 있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 박씨는 능력과 지혜를 활용해 굴욕적인 상황을 전복시키며, 독자들에게 대리만족과 희망을 제공한다. 특히, 박씨의 활약은 국가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성의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개인 영웅담을 넘어선, 사회적 메시지가 포함된 열린 서사로 이해될 수 있다.
<박씨전>은 당시의 전통적 여성상에서 벗어나, 여성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조명한 작품으로 현대적 가치를 지닌다. 박씨는 남장을 하지 않고 여성의 모습 그대로 활약하며, 이는 여성이 남성의 대리인이 되지 않고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설정은 오늘날 젠더 관점에서도 유의미하며, 여성의 주체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작품은 ‘현실의 패배에 대한 소극적 위안과 낙관적 역사 전망’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패배감을 경험했던 독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제공하는 서사적 장치로 작용한다. <박씨전>은 설화적 상상력과 역사적 사실을 융합하여, 현실과 이상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독자들에게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을 제공한다.
결말에서 박씨는 적군을 물리칠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론적 태도를 취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작품의 한계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당시 사회의 현실적 한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박씨전>은 완전한 해피엔딩 대신, 사회적 현실을 고려한 열린 서사로 독자들에게 여운을 남긴다.
결론적으로, <박씨전>은 단순히 과거의 전통적 가치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이다. 여성의 잠재적 능력과 연대를 강조하는 서사는 오늘날에도 공감대를 형성하며, 독자들에게 개인의 성장뿐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촉진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박씨전>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로서,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닌 소중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참고문헌 |
김혜정, 「<박씨전>의 여성 인물 형상과 그 영웅 서사적 가치」, 『한민족어문학』 90, 한민족어문학회, 2020.
서보영, 「고전소설 『박씨전』에서 ‘박씨’(朴氏)의 인물 형상과 서사적 의미」, 『인문사회 21』 8, 인문사회 21, 2017.
서혜은, 「<박씨전> 이본 계열의 양상과 상관관계」, 『고전문학연구』 34, 한국고전문학회, 2008.
서혜은, 「<박씨전>의 통속화 양상과 그 사회적 의미」,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20,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