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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의 규장각 시절

 

 

 

 

김대중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 서유구는 누구인가


   서유구徐有榘(1764~1845)는 ‘임원경제학林園經濟學’을 정립한 실학자이다. ‘임원경제학’은 사대부가 벼슬에 의지하지 않고 향촌에서 자립적으로 생활하기 위해 알아야 할 지식 전반을 체계화한 것이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책제목에서 착안하여 필자가 고안한 개념이다. 
   흔히 『임원경제지』는 방대한 분량의 생활 백과사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방대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 전체를 통관하는 문제의식이다. 서유구의 고심은 ‘사대부의 반성적 자기 정립’에 있다. 조선후기에 유식층遊食層의 증가는 심각한 문제였다. 서유구는 사대부의 기생적寄生的 존재 방식을 반성하여 그 ‘자립적 삶’의 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관련 연구를 수행했다. 그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 『임원경제지』이다. 다만 그 학문적 모색은 사족층 내부의 자기 경신을 지향한 것이므로 큰 틀 내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 

 

규장각 소장 『임원경제지』(奎 6565)


 

   임원경제학 연구의 계기가 된 것은 근 20년 되는 방폐기放廢期의 체험이다. 방폐기는 이른바 ‘김달순金達淳 옥사獄事’로 인해 서유구가 정계에서 축출된 기간을 말한다. 서유구의 방축은 아마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부상浮上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방폐기 동안에 서유구는 임진강과 남한강 인근 지역을 전전하면서 손수 농사짓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해결하는 한편, 향촌 생활에 필요한 각종 지식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한 셈이다. 



2. 달성 서씨 가문과 규장각


   기실 서유구 집안은 정조正祖 때 전성기를 구가한 명문가의 하나였다. 서유구의 조부祖父 서명응徐命膺(1716~1787)은 정조의 세손 시절에 시강원侍講院 우빈객右賓客으로 초빙되어 세손을 보도輔導한 바 있다. 그 동생 서명선徐命善(1728~1791)은 동덕회同德會의 일원으로 영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동덕회는 세손 시절 정조를 온갖 위험으로부터 지킨 심복의 모임으로, 그 구성원은 서명선, 정민시鄭民始, 김종수金鍾秀, 홍국영洪國榮 등이다. 서명선은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일파를 탄핵하여 세손의 대리청정을 가능케 했다. 그 탄핵한 날이 곧 동덕회가 열린 날이다. 서명응과 서명선은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서유구 일가는 정조 때에 번성하게 되었다. 

 

『홍재전서弘齋全書』(奎 3775) 권8에 수록된 「동덕회축서同德會軸序」. 

『동덕회축』은 일종의 공신회맹축功臣會盟軸이다.


 

   요컨대 서유구는 전도유망한 명문가 자제였다. 그는 1790년에 전강殿講을 치러 최고 등급인 순통純通을 받았다. 그 결과 직부전시直赴殿試의 명命을 받아 그는 증광시를 치러 급제한다. ‘직부전시’는 과거시험의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곧장 최종 시험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 급제한 서유구는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된다. 그와 같은 해에 초계문신이 된 인물로 정약전丁若銓, 김달순 등이 있다. 정약전은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중씨仲氏이고 김달순은 앞서 언급한 ‘김달순 옥사’의 주인공이다. 참고로 정약용은 서유구보다 한 해 먼저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다. 초계문신으로 뽑힌 뒤에 서유구는 1792년에 규장각 대교待敎로서 홍문관 정자正字를 겸했는데, 이렇게 각함閣啣을 겸한 것은 서유구가 처음이라 한다. 
   기실 서유구가 초계문신으로 뽑히기 전부터 달성 서씨 가문은 이미 규장각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서명응은 정조 때 각종 활자 주조 및 서적 간행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다. 규장각 설립에 큰 역할을 한 그는 정조 원년에 평안감사로 규장각 제학提學을 겸했다. 그 뒤로 정조는 1780년에 서명응의 아들 서호수徐浩修(1736~1799)를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에 임명했다. 부자父子 모두 규장각 각신閣臣이 된 것이다. 서호수는 서유구의 생부로, 1776년에 북경에 가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구입해온 바 있다. 1781년에 정조는 서명응에게 규장각 도서 목록을 정리하도록 명했는데, 그 뒤 서호수가 그 일을 수행하여 『규장총목奎章總目』을 편찬했다. 한편 서호수의 동생 서형수徐瀅修(1749~1824)는 1783년에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다. 서형수는 서유구에게 사서오경 및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 등을 가르친 인물이다. 서유구는 과거 급제 전에 이미 『풍석고협집楓石鼓篋集』이라는 자편自編 문집을 낸 바 있는데, 그 서문을 지어준 사람이 서형수이다. 



3. 서유구의 초계응제문抄啓應製文


   서유구 일가는 그 조부 때부터 이미 규장각 각신을 역임하면서 정조 때의 도서 수집・정리・간행 등을 맡아 왔다. 그렇다면 서유구는 규장각 시절에 어떤 활동을 했는가? 그 활동은 이후 그의 학문적 여정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규장각 시절 서유구의 활동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시험으로 부과된 각종 글들을 짓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왕명에 따라 서적 목록을 정리하거나 책을 교정・출간하는 것이 그 두 번째이다. 규장각은 젊은 문신에 대한 교육과 서적 출판 업무를 겸했는데, 규장각 시절 서유구의 활동은 규장각의 이 두 가지 기능에 대응된다. 
   규장각 초계문신은 정기적인 시험을 통해 경전 해석 능력 및 문장력을 평가받았다. 이 중 문장력을 시험하는 것을 ‘시제試製’라 하는데, 현재 서유구 문집에 남아 있는 초계응제문抄啓應製文은 다음과 같다.

 

 

「『팔자백선八子百選』서문[八子百選序]」 

「등등사登登舍기문[登登舍記]」 

「“악惡 또한 성性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에 대한 논설[惡亦不可不謂之性說]」 

「십삼경十三經에 대한 대책문[十三經對]」 

「농업에 대한 대책문[農對]」

 

 

 위의 글들은 비록 자발적인 창작물은 아니지만 규장각 시절 이후 서유구의 문학적・학문적 행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우선 「십삼경에 대한 대책문」과 「농업에 대한 대책문」은 서유구의 학문 지향에 부합하는 글이라 판단된다. 서유구는 명물도수학名物度數學에 밝고 농학農學에 조예가 깊은 고증적・실용적 지향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 두 글은 그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 다음으로 「『팔자백선』서문」과 「등등사기문」은 그의 산문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여기서 ‘문학가’라 하지 않고 굳이 ‘산문가’라 한 것은 서유구 자신이 시詩를 잘 못 짓는다고 밝힌 바 있거니와, 역시 그 문학 세계의 본령은 산문 쪽에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서유구는 과거 급제 전에 자편 문집을 낼 정도로 작품 창작에 몰두했는데, 『풍석고협집』에 수록된 작품은 모두 산문이다. 그 뒤로 관료 생활의 시작과 더불어 작품 창작이 다소 시들해졌지만, 「등등사기문」 같은 작품을 통해 『풍석고협집』 이후 산문 세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팔자백선』서문」은 제목 그대로 『팔자백선』에 부친 서문이다. 『팔자백선』은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 중에 모범이 될 만한 글 백 편을 뽑은 것으로, 이른바 ‘문체반정’의 일환으로 편찬되었다. 서유구는 『풍석고협집』의 자인自引에서 밝히기를, 자신이 서경西京의 문장을 좋아하고, 당송唐宋의 대가大家로부터 명말明末의 명가名家에 이르기까지 좋아하지 않는 게 없다고 한 바 있다. 요컨대 서유구는 당송파唐宋派를 중시했지만, 굳이 특정 시대 특정 유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팔자백선』서문」은 서유구의 문학관 중 유의미한 면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전모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기는 힘들다. 특히 서유구는 젊은 시절부터 ‘자연’의 근원적 중요성에 주목했으며 그런 그의 사유는 노년에 이르러 ‘자연경自然經 사상’으로 발전한다. ‘자연경’은 ‘자연이 곧 경서다’라는 뜻이다. 「『팔자백선』서문」에는 서유구의 이런 핵심적인 사상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아마 서유구는 신료로서 자신의 문예론과 사상 중 정조의 문예정책에 부합하는 면만을 밝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끝으로 「“악惡 또한 성性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에 대한 논설」은 서유구의 학문 세계 전체를 놓고 보면 매우 이례적인 글이다.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가 가장 치력한 학문 분야를 꼽자면 단연 경학經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사회에서는 성리학이 정통 사상으로 그 권위를 독점했으므로, 성리학적 논변이 매우 중시되었다. 이런 학문적 풍토에 비추어 보면, 서유구의 학문 세계는 이런 주류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자연과학・농학 같은 실용 학문에 치력했으며, 경학 저술은 상대적으로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의 방폐기 저서인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 경전 해석과 관련된 글이 몇 편 있지만 그나마 고증적 성격의 것이다. 서유구가 남긴 성리설性理說 관련 글은 「“악 또한 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에 대한 논설」 한 편이 유일하다.
   「“악 또한 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에 대한 논설」과 더불어 서유구는 규장각 시절에 또 하나의 이례적인 글을 남겼다. 『모시강의毛詩講義』가 그것이다. 『모시강의』는 현재 전하는 서유구의 저술 중에 유일한 경학 연구서이다. 정조는 규장각 문신과 초계문신 및 경연관을 대상으로 하여 경사강의經史講義를 행했다. 그 일환으로 정조는 1791년에 『시경』과 관련된 문제 590문항을 친히 적어서 초계문신들에게 내려 주고 그 답을 제출하게 했다. 이 때 정조가 제시한 문제 및 서유구의 답안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 『모시강의』이다. 



4. 목록 정리와 서적 출판


   서유구는 규장각 각신으로 제직할 때 도서 목록 정리 및 서적 출판 업무를 맡았다. 그의 생부 서호수가 『규장총목』을 편찬한 바 있는데, 그 뒤를 이어 서유구도 목록 정리를 한 것이다. 일찍이 정조는 1778년(정조 2)에 각 도에 명을 내려 공사公私 간에 소장하고 있는 책판을 모두 기록하여 올리게 하고 그 보존 관리를 규장각에서 하도록 했다. 그 뒤 1796년에 정조는 다시 서유구에게 명하여 전국의 책판 목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책판 목록이 『누판고鏤板考』이다. 

 

규장각 소장 『누판고』(古 0440-1)


 

   『누판고』의 편성체재는 이렇다. 우선 임금이 직접 지은 글이나 왕명에 의해 편찬된 책을 앞에 배치한다. 그런 다음에는 전통적인 사부분류법四部分類法에 따라 경사자집經史子集 순서로 목록을 정리한다. 각 판목 별 서술 방식은 이렇다. 우선 책제목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 권질卷帙의 수數를 밝힌다. 그런 다음에 행을 바꾸어 해당 책의 편찬자 성명 및 그 약전略傳, 의례義例의 대략 등을 기입하고, 판목 소장처, 판목의 완결刓缺 여부, 인쇄에 소용된 종이 매수 등의 정보를 제시한다. 
   이렇게 『누판고』는 그 당시 전국의 책판 소장 현황 및 그 관리 보존 실태, 책 인쇄에 소용되는 종이의 양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므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리고 그 분류 방법 및 목록 기술 방식 또한 서지학적으로 주목된다.



5. 자국 문헌에 대한 자각


   서유구가 『누판고』를 편찬하고 각종 서적 출판 관련 실무를 담당한 것은 훗날 그의 학문 세계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선 그의 규장각 시절 실무 경험은 자국 문헌의 수집・정리・보존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는 밑바탕이 되었다. 다음은 『금화경독기』에 수록된 글의 일부이다.

 

우리나라 서적은 씨가 말라 사부四部의 체제를 갖추지 못하니, 흔하게 일컬어지고 서가書架에 가득 찬 것은 오직 별집류別集類 하나뿐이다. 선조先朝 병진년(1796)에 나는 내각內閣에 있으면서 왕명을 받들어 『누판고鏤板考』를 지었다. 서울과 지방의 공가公家와 사가私家에 소장된 책판冊板을 조사하여 일일이 조목별로 기재하고, 그 찬자撰者의 성명을 함께 기록한 것이 그 대략적인 체제이다. 해당 서적의 판본이 어느 지역에 있는지, 판각이 완전한지 아니면 완결刓缺되었는지, 인쇄에 소요된 종이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이 책에 의거하여 살펴보면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만 현존하는 판각을 기록했을 뿐이다. 책판은 일실되었는데 책은 남아 있는 경우, 활자본인 경우, 원래 미처 판각되지 못해 필사본으로 세상에 유행하는 경우로 말하면, 또 마땅히 별도로 사들여야 할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근래에 활자본으로 세상에 전하는데 수장收藏한 사람이 대단히 드물다.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는 책판이 일실되고 책만 보존된 경우인데, 인본印本이 날마다 잔결殘缺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사正史는 오직 이 두 종種이 있을 뿐인데, 다시 수십 년에서 백 년이 지나 마침내 없어진다면 동방東方 수천 년의 문헌이 끊어지게 되니, 장서가라면 마땅히 맨 먼저 구입하여 수장해야 할 것이다. (하략)

 

  

이 글에서 서유구는 자국 문헌의 수집・보존 문제를 논한다. 이 글을 통해 규장각 시절의 실무 경험이 자국 문헌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유구는 무엇보다도 『삼국사기』와 『고려사』 같은 정사正史의 사료적 가치에 주목한다. 그는 이 중 『고려사』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지은 바 있다. 이 또한 『금화경독기』에 실려 있다. 그 일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을 통해, 적어도 정조 때까지 왕실 도서 중에도 『고려사』 같은 정사가 희소했다는 것, 그나마 규장각 소장본이 유일한 완질본이었다는 것, 서유구가 그 책의 보존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여 그 교정・출판을 정조에게 건의했다는 것, 그러나 결국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서유구는 규장각에서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자국 문헌의 정리・보존・출판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켰다. 더 나아가 서유구는 그 자신이 자국의 주요 문헌을 발굴하여 출판・보존하는 데 힘썼다. 일례로 그는 홍석주洪奭周(1774~1842)의 도움을 받아 1834년에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교정・간행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자국의 주요 문헌을 망라하여 총서 형태로 정리하고자 했다. 그가 기획한 총서는 『소화총서小華叢書』인데, 신라・고려・조선의 주요 문헌들을 총집叢集한 것이다. 비록 미완의 기획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그 일부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규장각에 소장된 『계원필경집』(奎 4249)



 

『계원필경집』 권두卷頭에 실려 있는 서유구徐有榘의 교인서校印序.



6. 규장각은 이른바 ‘문화 정치’의 산실인가


   이상으로 서유구의 규장각 시절 활동을 개관하고 그 활동이 그의 학문 세계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보았다. 규장각 시절의 활동 중에는 나중에 그의 문제의식을 심화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된 것도 있고, 반대로 나중에 그리 발전되지 않은 것도 있다. 서적의 목록 정리 및 출판과 관련된 실무 경험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초계문신 시절에 지은 경학 관련 글은 후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초계응제문을 통해 개진된 문학론은 서유구의 생각과 부합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중요한 면모를 온전히 담고 있다고 하기에는 미진한 점이 없지 않다. 
   기나긴 방폐기를 통과하면서 서유구의 학문 세계는 크게 변한다. 그는 결국 경학 대신 농학과 임원경제학 연구에 몰두한다. 그런 학문적 선택을 한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 천하에 학술을 연구하는 사람이 많다. 구류九流의 백가百家가 다투어 자기 학설을 세워, 전대前代를 계승하고 후대에 빛나기를 바라는 게 얼마나 많은가? 나는 유독 농가자류農家者流에 각별히 공을 들여 나이가 들고 기력이 다하도록 그치지 않았다. 이는 정말 어째서인가? 

나는 예전에 경학經學을 연구한 적이 있는데, 말할 만한 것은 예전 사람들이 이미 모두 말해 놓았다. 그러니 내가 또 두 번 말하고 세 번 말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나는 예전에 경세학經世學을 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처사處士가 머릿속으로 생각해본 말이라 흙으로 만든 국일 뿐이요 종이로 빚은 떡일 뿐이니, 아무리 공교로운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런 회의적인 생각이 들자 범승지范勝之와 가사협賈思勰의 농학에 매달렸으니, 오늘날 앉아서는 말할 수 있고 일어서서는 실용實用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며, 조금이나마 천지가 나를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는 길도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다고 내 딴에는 생각했다. 아! 그러니 내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하루도 늦춰서는 안 되는 급선무인데도 온 세상 사람들이 하찮게 여겨 달가워하지 않는 일로 되어 버려, 한 번 경작하면 백 사람이 먹을 수 있는데도 십 년 내에 구 년 간 흉년이 들었으니, 떠돌아다니다 굶어죽어 구학溝壑에 뒹구는 저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 책을 저술한 것이 어찌 또 다만 임하林下에서 자기 힘으로 노동하여 먹고 사는 선비를 위한 것일 뿐이겠는가? 세상의 대인선생大人先生들이여 비웃지 말라!


「『행포지』서문[杏浦志序]」의 일부이다. 만일 서유구가 방폐기에도 경학 연구에 침잠했다면 그의 학문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지금 알려진 것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서유구는 자신이 직면한 ‘생활의 문제’에 정직하게 대응하여 기존의 경학과는 다른 새로운 학문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다. 

   기실 정조가 초계문신을 선발하여 경학 공부를 시킨 것은 이른바 ‘문체반정’과 연계되어 있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꼭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을 듯하다. 국정운영자로서의 고심 속에서 문체반정 같은 것이 단행되었겠지만, 문학과 사상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사상 통제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역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규장각에 대해서도 이런 견지에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일각에서는 규장각을 두고 ‘문화 정치의 산실’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학문과 사상의 다양성을 억누르고, 전도유망한 신진 관료를 정통 학문의 테두리 내에 길들이는 부작용을 낳은 것은 아닌가? 서유구의 사례는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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