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지리지식의 융합: 『위사(緯史)』
오상학(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서명응(徐命膺)이 1783년에 완성한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에 수록된 『위사』는 독특한 체제를 지닌 세계지리지로 평가된다. 『위사』는 12권 7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명응이 제시한 범례를 따라 서유구가 편찬한 세계지리지이다. 『위사』는 선천역(先天易)과 『주비경(周髀經)』을 결합하고 『우공(禹貢)』의 지역 배치를 기초로 삼아 만들어진 독특한 지리서라 할 수 있다. 서명응은 복희의 선천도와 주비(周髀)의 수법(數法)이 천지를 측정하고 인사를 헤아리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지만, 진나라 한나라 이후로 선천은 선가(仙家)로만 전해지고 주비는 서양으로 갔다고 보았다. 이후 선천은 송대에 다시 나타났고 주비는 명나라 말기 서양에서 돌아왔지만 합쳐지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위사』에서 이를 합침으로써 옛 성인의 도를 회복시켰다고 자부했다.
서명응은 『우공』의 지역 구획인 구주(九州)와 오복(五服)에 기초하여 세계 지역을 구분하였는데, 구획의 기준은 위도인 북극고도이다. 서명응은 먼저 「우공」의 구주에 일정한 북극고도의 값을 부여하되 그 상(象)을 역리(易理)로 해설했다. 기주(冀州)는 제왕의 도시이며, 천체에서 북극이 있는 곳에 사상(四象)이 향하듯이 천하의 공부(貢賦)와 사신이 몰려드는 중심지이자 「우공」의 강(綱)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기주의 상(象)은 바로 역(易)의 태극에 배치했다. 청주(靑州), 옹주(雍州)를 기주 하단에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면서 역의 양의(兩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고, 기주 바로 아래에 위치한 서주(徐州)·연주(兗州)·예주(豫州)·양주(梁州)는 역의 사상(四象), 서주·연주·예주·양주 아래에 있는 양주(楊州)·형주(荊州) 역시 역의 사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우공」의 오복은 동서와 남북의 크기가 모두 500리이며, 내복(內服)인 전복(甸服), 후복(侯服), 수복(綏服)과 만이(蠻夷)인 요복(要服), 황복(荒服)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았다.

사진 : 『보만재총서』오복팔주북남도(五服八州北南圖) <古0270-11>
서명응은 지구의 남북을 5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10개 지역으로 세분했다. 또한 지구의 동서를 각 위도에 해당하는 역상의 숫자에 대응시켜 2개(동, 서), 4개(外東, 內東, 內西, 外西), 8개(偏東1~4, 偏西1~4) 지역으로 세분했다. 이처럼 경위선 체계로 지역을 구획한 다음 해당 구획에 국명과 읍명을 배치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해당 지역의 연혁과 극위(極緯), 황적경(黃赤經), 풍속, 산천, 토산 등을 수록하였다. 불랑기국(佛郞機國, 포루투갈)의 기술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본래 서양제국의 불랑찰(佛郞察)이다. 직방외기에서 말하기를 아라비아 사람들이 불랑기라 칭한다. 그 총 또한 이 명칭을 쓴다. 명나라 정덕 연간(1506-1521)에 만랄가(滿剌加, 말래카)로 들어가 왕을 몰아내고 사신을 보내 봉할 것을 청하니 중국에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1522-1566)에 초만(草灣)에 들어갔으나 관군에 패하여 돌아왔다. 우도어사(右都御使) 왕횡(汪鋐)이 상소문을 써서 불랑기포(佛郞機礮)를 올려 성보(城堡)를 축조하여 방어하도록 청했다. 중국에 불랑기포가 있게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후에 광동순무(廣東巡撫) 임부(林富)가 향산(香山) 오호경(澳壕鏡)에 시장 여는 것을 청하고 이로 인해 불랑기는 집을 짓고 성을 축조하여 여러 만상(蠻商)을 모으니 한 나라와 같았다.
『保晩齋叢書』, 「緯史」 권11, 方國偏東一, 佛郞機國
포르투갈에 대한 기술은 『지봉유설』처럼 불랑기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불랑기포가 들어오게 된 상세한 내력을 적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명사(明史)』에 수록된 내용을 축약한 것으로 국가별 기술에서 중국의 문헌을 많이 참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위사」의 저술에 참고한 자료로는 『일통지(一統志)』, 『명사』 「지리지」, 『직방외기(職方外紀)』, 『곤여통도(坤輿通圖)』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곤여통도』는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나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와 같은 서구식 세계지도를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최신의 자료를 활용하여 『위사』를 저술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명응은 정조 때 구입한 『고금도서집성』을 가장 먼저 열람했던 학자 가운데 하나였고, 북경 사행에서도 최신의 서적을 구입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위사』의 저술에서도 최신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했다고 보아진다.
『위사』에서의 세계지역의 구획 방식은 이전 시기 지리지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지구구체설을 바탕으로 세계지역의 구획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선천역과 주비경 등의 전통적인 사고와 서양에서 전래된 지구구체설을 결합하여 독특한 지역 구획을 만들어 냈다. 지구를 북극고도인 위도에 의해 나누고 이를 기후대에 배치함과 동시에 동서로도 구획하여 전 지구상의 영역을 포괄하도록 했다. 이러한 세계지역의 구획은 대륙별로 국가를 배치하여 기술한 알레니의 『직방외기』나 페르비스트의 『곤여도설』보다 진일보한 체제라 할 수 있다. 서양의 근대지리학이 태동 이후에도 세계지지의 기술체제가 대부분 대륙별로 이루어졌던 점을 감안한다면 세계지지학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세계지리지의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표 : 『위사』의 지역 구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