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이전

춘정집, 15세기 유학을 읽는 또 하나의 창

 

장래건(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원)

 

 

 

 

 

춘정집의 구성과 특징

 

 

 

사진 1 : 춘정집 표지(3428-358,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세종 12(1430) 430, 춘정(春亭) 변계량(1369~1430)이 숨을 거두었다. 그의 부고를 전하는 세종실록기사에는 변계량의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변계량은 문형(文衡)을 거의 20년 동안이나 맡아서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에 대한 외교 문서를 대부분 그가 작성하였고,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선비를 뽑을 때에는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하게 하여 고려조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급제자를 배출하던 풍습을 모두 혁파하였으며, 일을 논의하고 의문을 해결하는 데에 이따금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의견을 내놓곤 하였다. 그러나 문()을 주관하는 대신으로서 살기를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귀신을 섬기고 부처를 받들며 하늘에 배례(拜禮)하는 일까지 하여 못 하는 일이 없었으니, 식자들이 이를 나무랐다.

 

이 기록은 탁월한 문장가로서 변계량의 삶을 높이 사면서도 ()을 주관하는 대신으로서 불교와 도교를 숭상한 그의 행적을 비판했다. 변계량은 실제로 태종대에 예문관(藝文館)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국가 운영에 필요한 문서 작성을 주관했다. 그만큼 변계량은 문장 능력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유학자로서 문장을 관장하는 변계량은 불교와 도교에도 열린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런 두 가지 특징은 그의 문집인 춘정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춘정집은 변계량이 사망한 이후 세종의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처음에는 그의 문인 정척(鄭陟)이 변계량의 글을 수습해서 편집했고, 또 다른 문인인 권맹손(權孟孫)이 변계량의 문집을 간행하고자 세종에게 보고했다. 변계량의 글이 유실되는 것을 걱정한 세종은 집현전 직제학 유의손(柳義孫) 등에게 원고를 교정하게 한 뒤 경상도에 변계량의 문집을 목판에 새겨 간행하게 했다. 조선 후기와 달리 문집 간행이 대단히 특별한 일이었던 조선 전기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춘정집이 왕명으로 간행된 것은 그의 문장 능력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현전하는 춘정집에는 세종대에 간행된 춘정집과 차이가 있다. 세종대에 처음 간행된 춘정집은 순조 25(1825)에 중간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초간본에 실렸던 여러 글이 누락되었다. 이때 빠진 글은 주로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태종이 태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북두칠성에 기도하는 청사(靑詞), 원경왕후가 성녕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리게 한 비로자나불 화상에 쓴 명문(銘文), 세종이 원경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금서법화경(金書法華經)의 서문(序文) 등이 바로 그런 사례다. 춘정집을 중간한 이들이 변계량이 지은 글 중에서 이단의 혐의가 농후한 내용을 배제했음을 알 수 있다. 달리 생각하면, 변계량은 유교 문화를 배양해야 하는 문형의 책임을 오랫동안 담당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글을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변계량의 이 두 가지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진 2 : 1825춘정집중간 당시 새로 작성된 서문(3428-358,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장가 변계량과 사문(斯文)

 

 

변계량은 고려 우왕 11(1385)에 열일곱 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관직에 나아간 변계량은 마음속으로 반성하다라는 시에서 젊은 시절의 포부를 이렇게 밝혔다.

 

 

오로지 맹자가 남기신 교훈에 / 惟孟氏之垂訓兮

실행하기 위해서 배운다고 하였네 / 幼學所以壯行

이익은 안 따지고 의리만 행한다니 / 正其義不謀利兮

그래서 가언으로 드러난 것이었지 / 固嘉言之孔彰

선현의 가르침 속이지 않았으니 / 仰先訓之不我欺兮

마음속에 새기어 잊지를 않겠도다 / 羌佩服以不忘

 

 

변계량은 어려서 배우는 까닭은 장성하여 실천하기 위함이다라는 맹자의 말을 되새기고는 이익을 좇지 않고 옳은 이치에 따라 벼슬살이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관직 생활에서 유학의 도덕과 의리가 아주 중요한 요소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변계량에게 유학의 범주는 결코 도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변계량은 도덕만큼이나 문장 역시 사문’(斯文), 즉 유학의 중요한 요소였다. 문장을 진흥하는 일은 곧 유학을 진작시키는 데 기여하는 일이기도 했다. 변계량의 생각은 ()이 천지 사이에 존재하며 도[斯道]와 성쇠를 함께한다는 권근의 가치관과 공명하는 것이었다. 변계량은 일찍부터 고려 말에 유종’(儒宗)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들에게 사사했는데, 특히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는 깊은 인연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권근의 아우인 권우(權遇)와 함께 권근에게 사사했고, 열일곱 살 되던 우왕 11(1385)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포은 정몽주를 좌주(座主)로 모셨다. 변계량은 이색의 문인들에게 사사하면서 도덕과 문장을 중시했던 이색의 학문적 견해를 계승할 수 있었다.

 

도덕과 문장을 함께 중시했던 변계량의 입장은 세종 연간의 과거제 개편 논쟁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세종 1(1419) 2월에 식년과의 초장(初場)에서 강경(講經)과 제술(製述) 중에서 무엇을 시험할 것인지가 쟁점이 되었다. 대언들은 식년과 초장에서 강경을 시험하는 것이 태조와 태종이 마련한 규정임을 상기시켰지만, 변계량의 입장은 명확했다. 제술, 즉 문장 능력으로 선비를 선발함이 나라에서 학문을 진흥하고 선비를 선발하는 본래 취지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세종 10(1428)에 똑같은 논쟁이 다시 일어났을 때도 변계량은 본래의 생각을 고수했다. “정도전이 비록 강경을 시험하는 법을 시행했으나 우리 태조께서 권근의 논의를 채용하여 다시 제술을 시행하셨으니, 초장에서 제술을 시험하는 것이 어찌 태조만의 성헌(成憲)이겠습니까? 실로 태종께서 남기신 법이기도 하니 마땅히 준수해야 하고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보기에 강경을 시험하면 선비들이 경서의 의미를 깨닫지 않고 문장을 외우는 데만 집착하니 사문을 진흥시키는 방도가 아니었다. , 의미 없이 경서를 외우기만 하느니 문장을 시험하는 것이 사문을 진흥하는 더 유익한 방법이었다. 변계량은 사문의 진흥을 추구하는 유학자의 관점에서 문장의 가치를 옹호했던 것이다.

 

 

 

사진 3 : 변계량이 비문을 지은 태종 헌릉 신도비(국가문화유산포털)

 

 

 

 

 

유교적언어로 정당화된 원단 제천

 

 

변계량의 졸기에는 그가 살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여불교와 도교 의식을 실천했다는 비판이 담겼다. 죽은 이를 위한 명복을 빌고자, 혹은 산 사람의 복을 구하고 화를 피하고자 영험한 존재에 기도하는 관행은 이미 조선 건국 이전부터 이어지던 유구한 전통이었다. 사실 이런 관행은 인간 삶의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세계를 엄밀하게 계량화하고 통제하고 예측하려 한 근대 계몽주의의 기획에서조차 미신으로 규정한 관습을 완전하게 몰아내지 못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왕조가 바뀌고 지배 이념이 바뀐들 영험한 존재에 기도하는 유구한 전통이 벽이단’(闢異端)의 논리에 부딪혀 단숨에 사라진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변계량도 귀신을 섬기고 부처를 받들며 하늘에 배례(拜禮)하는 등그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사회·문화적 분위기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영험한 존재에 기도하는 행위를 어떻게 구성하고, 그 행위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는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졌다. ‘영험한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 존재에 기도하는 행위를 어떤 언어로 정당화하는지, 그 의미를 어떤 관념으로 설명하는지가 그래서 중요해진다. 과연 변계량은 영험한 존재에 복을 내리고 화를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이 사안과 관련해서 그가 조선의 제천의례 거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상소는 살펴볼 만하다.

 

변계량이 상소를 올린 시점은 태종 16(1416) 61일이었다. 당시 태종과 조정 관료들은 농번기에 극심한 가뭄이 길어지는 사태를 걱정하던 중이었다. 이미 종묘와 사직, 명산대천에 기우제를 지냈지만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하늘에 직접 기우제를 지내서 비를 기원했을 테지만 천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는 산천(山川)에 제사한다예기의 규정에 따라 이미 원단(圜壇) 제사를 폐지한 상황이었다. 극심한 가뭄에 대처할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에서 변계량은 원단 제사를 다시 복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나왔다. 그가 원단의 제천의례를 정당화하며 제시한 근거는 천인감응론, 역사적 전고, 예제의 정당성이었다.

 

천인감응론은 유교를 중심으로 국가 질서를 재편하려 했던 한대(漢代)의 동중서에 의해 정립된 재이론이다. 국가에 실정(失政)이 있으면 하늘은 천문 현상으로 조짐을 보여 군주에게 경고하고,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재앙을 내린다는 논리다. 군주는 천명을 받아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므로 재난이 닥치면 자신의 정치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변계량은 이 천인감응론을 활용해서 조선 국왕의 원단 제천을 정당화했다. 조선 국왕은 천명을 받아 조선 백성을 다스리는 존재이고, 가뭄이라는 재난 상황을 맞이했다면 국왕에게 경고를 내린 하늘에게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때 조선 국왕이 제사해야 하는 하늘은 곧 유교의 인격신인 호천상제(昊天上帝)로 신선 주술적인 의미의 천신(天神)인 태일(太一)과는 구분되었다. 한 마디로 변계량은 유교의 개념과 논리를 동원하여 조선의 원단 제천을 정당화하려 했다.


문제는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었다는 데 있었다. 제후국인 조선의 군주가 중국 황제처럼 천명을 받았다고 자처하며 하늘에 제사할 수 있는가. 변계량은 조선이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로서 중국 국내의 제후와 구분되는 해외제후’(海外諸侯)임을 강조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하늘에서 내려왔지 천자로부터 분봉(分封)을 받지 않았습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요 임금의 무진년이었으니, 지금까지 삼천여 년입니다. 하늘에 제사한 예법이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천여 년이 지나도록 아직 고친 적이 없습니다. 우리 태조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도 그것을 이어받아서 더욱더 부지런히 행했습니다. (춘정집7, 영락 14년 병신년 61일에 올린 봉사)

 

변계량은 유교 경전의 원론만을 고집하지 않고 경전의 원칙이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역사적 전고는 그에게 경전의 원칙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적 자원이었다.

 

조선의 원단 제천이 가능한 이유는 비단 조선의 역사적 사례만이 아니라 중국의 예제에서도 발견된다고 변계량은 주장했다. 그는 노나라의 전례를 눈여겨보았다. 주나라의 제후국인 노나라의 시조는 주공(周公)으로 주나라를 건국하고 왕실을 보호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주나라 성왕은 주공의 공을 기려서 노나라가 주공의 제사에 천자의 예법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변계량은 주나라와 노나라의 사례가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홍무제는 이전에 고려와 조선에 의례와 법도는 본국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라는 조서를 내린 적이 있다. 변계량의 관점에서 보면, 유교의 이상 사회로 간주되는 주나라가 제후국인 노나라에 천자의 예법을 허락했듯이, 천하를 통일한 명나라도 조선의 고유한 의례를 인정했다. 그러니 조선에서 원단제를 행하는 일은 중국의 전례와 명 황제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는 일이기도 했다.

 

비록 변계량은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기복(祈福)과 소재(消災)의 전통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전통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정당화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가에 가뭄이 닥쳤을 때 이전의 전통대로 하늘이라는 가장 영험한 존재에 비를 기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원단 제천을 정당화하는 방식은 유교의 언어와 관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변계량은 15세기만의 유학적 색채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참고문헌

 

춘정집(한국문집총간8), 민족문화추진회, 1990.

민족문화추진회국역 춘정변계량 문집, 한국학술정보, 2006.

김철웅, 변계량의 사상과 도교 인식」 『국학연구46, 2021.

박병련, 春亭 卞季良의 정치사상과 정치적 활동」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8-1, 2009.

오세현, 文章의 역할을 통해 본 15세기 斯文의 성격」 『사학연구127, 2017.

장래건, 조선 초기 圓壇祭 시행의 난제와 독자 왕조의 의례 모색」 『한국사론68, 202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