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격랑 속에서 기구한 풍덕의 운명
김태웅(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풍덕(豊德)은 현재 북한에 존재하지만 황해도 개풍군에 소속된 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부사가 고을 수령일 만큼 그 위세가 낮지 않았다. 그러나 근현대 격랑 속에서 어느날 풍덕은 개풍군의 이름 속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것은 신분과 강상에 입각하여 운영되는 읍호제가 근현대 정치 경제 변동 속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탈바꿈해야 하는 사정을 보여준다. 풍덕의 기나긴 내력은 고을의 위상이 우리 역사의 커다란 변동과 맞물려 어떻게 바뀌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동국여지도』의 풍덕 〈古 4709-96〉
풍덕군이 되다
풍덕은 본래 백제의 땅이었다가 고구려 때 정주(貞州)가 되었다. 그러나 풍덕의 위치가 개성부와 매우 가까운지라 고려 왕조가 개창되자 그 운명은 정치적 이유로 자주 바뀌었다. 고려 문종 때 개성부에 예속되었다가 예종 3년(1108)에는 개성부에서 분리되어 승천부(昇天府)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 충선왕 2년(1310)에는 해풍군(海豊郡)으로 강등되었다. 아울러 개성 남쪽의 해안지방에 위치하여 고려시대에는 백마산(白馬山)에 성이 있었고 이곳에 궁궐을 짓기도 하였다.
이어서 조선 왕조가 개창되고 태종 때 지방제도 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해풍군은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5년 뒤에는 다시 군이 되었고, 세종 24년(1442)에는 덕수현(德水縣)과 합쳐 종4품 군수가 다스리는 풍덕군으로 결정되었다. 오늘날 개풍군에 ‘풍’자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내력 때문이다.
풍덕부로 승격하다
그 뒤 풍덕군은 효종 1년(1650)에 부로 승격하였다. 그 이유는 호구나 결호(結數) 때문이 아니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 따르면 인근 군현인 장단부는 원호 5,332호, 인구 16,143명이고 파주목은 3,227호, 10,154명인 데 반해 풍덕부는 3,193호, 11,022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풍덕군의 규모는 파주목과 비슷하지만 장단부보다 규모가 작았던 것이다. 승격 이유는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張)씨의 본관이 덕수였기 때문이었다. 왕비로 책봉되면 연고가 있는 고을을 승격시키는 은전을 베풀었는데, 이러한 조치는 전대에서부터 계속된 관행이었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喜王后)의 경우 내향(內鄕 : 아버지의 고향)인 원평부(原平府)를 파주목(坡州牧)으로, 외향(外鄕 : 어머니의 고향)인 인천군(仁川郡)을 도호부로 각각 승격시켰다.
개성부를 도우려 통폐합하다
풍덕부는 결코 크지 않은 고을이었지만 왕비를 배출한 지역이어서 부(府)의 위상을 누렸다. 그러나 상업도시이자 군사 요충지인 개성 유수부가 18세기에 들어와 재정 운영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1824년 2월 풍덕부를 혁파하고 개성부에 편입시켰다. 풍덕부에서 수취하는 각종 세금으로 개성부 재정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결국 이러한 방침은 종전의 지방제도 운영 논리와 달리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셈이다.
풍덕 유생들의 실력행사
그런데 당시 고을의 소멸은 행정구역의 소멸만 의미하지 않았다.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풍덕부가 통폐합되면서 풍덕향교도 사라짐을 의미했다. 이에 순조 24년(1824) 풍덕부 유생들은 자신들의 향촌 교화 근거지가 사라졌음에 격분하여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당시 유생들은 풍덕부가 후릉(제2대 정종의 능)과 제릉(태조의 첫 번째 왕후 신의왕후 한씨) 두 능을 모시고 있으며 효종의 정비인 인선왕후의 성관임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향교 혁파의 부당성을 제기하며 여기 저기 통문을 돌렸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오히려 정부와 성균관 유생으로부터 국가를 염두에 두지 않는 난민(亂民)의 행위로 비난받았다. 중앙으로서는 예전의 정치적인 명분을 세우기보다는 개성부 재정 위기를 타개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840년대 초반에 편찬된 『경기지』에도, 1865년에 편찬된 『대전회통』에도 풍덕부가 수록되지 않았다. 이제 풍덕부는 역사 속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대동여지도』〈奎 10333〉 : 풍덕이 개성부에 소속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설치되다
풍덕부는 고종 3년(1866) 11월에 다시 설치되었다. 그것은 1866년 9월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를 겨우 막아내는 과정에서 강화부를 배후에서 지원해 줄 지방관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풍덕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다시 독자적인 지방행정구역으로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러한 복설이 조선 사회의 내부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외부 세력의 침략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전 조치와는 성격이 달랐다.

<그림 3> 1872년 지방지도의 풍덕부 〈奎 10731〉
: 풍덕부가 1866년 병인양요 이후 복설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 격랑 속에서
이후 1895년 갑오개혁기 지방제도 개혁 과정에서 풍덕군은 23부의 하나인 개성부에 소속되었고 곧이어 1896년에는 다시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풍덕부가 풍덕군으로 바뀌었지만 풍덕은 여전히 존속하였다. 그것은 풍덕군이 강화도를 비롯한 서해 도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방어진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고을의 규모가 작아 4등군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 이전과 같은 풍덕부의 위세는 사라져 갔던 것이다.

1899년 편찬 『풍덕군읍지』〈奎 10735〉
끝내 사라지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은 풍덕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가 1914년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군을 대폭 정리・축소하고 면・리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풍덕군을 개성군에 병합시켰다. 풍덕군의 인구가 적고 토지 면적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풍덕군은 각각 면리로 분리되어 개성군 광덕면, 대성면, 상도면, 흥교면으로 각각 존치하게 되었다. 이제 풍덕군은 영원히 역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개풍군으로 자취를 남기다
일제는 초창기에는 부로 규정하지 않았던 개성군이 점차 발전하면서 도시화되자 1931년 개성군을 개성부로 승격시켰다. 그리하여 개성군의 나머지 지역과 기존의 풍덕군 지역을 합쳐 개풍군으로 재편하였다. 풍덕의 ‘풍’은 살아났지만 옛날 풍덕은 대성면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그러나 풍덕은 월남한 개풍군 출신들의 노력으로 일부나마 『개풍군지』(1984)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다.
풍덕군은 바로 그 이웃이 개성부이기 때문에 그 그늘에 묻히어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순조 때에 개성부에 통합되었기 때문에 일반과 친근히 접할 기회가 없었다. 이 기회에 그 위치만이라도 소개하여 두기로 한다.
풍덕군은 동쪽으로는 장단부와 경계하고 남쪽으로는 통진현, 서쪽으로는 개성부, 북쪽으로는 같은 부(府)가 경계가 되어 있고 경도(京都)까지의 거리는 179리이다.
여도[여지도서]에 의하면 풍덕부는 장단진관으로 강화부 진무영 속읍이요, 관직은 부사로서 문관이나 무관의 종3품으로 보한다 하였다.
방리로는 덕북면이 6개리, 덕중면이 9개리, 덕남면이 7개리, 동면이 7개리, 군남면이 4개리, 군중면이 4개리, 서면이 4개리, 군북면이 6개리 도합 8개면 57개 리이다.
순조 23년(1823) 7월에 풍덕부를 혁파하여 개성부에 합속시켰다가 고종 3년(1866)에 복구되었고, 고종 32년(1895)에 개성부에 소속된 풍덕군이 되었다가 다음해에 경기도의 4등군이 되었고, 1930년 12월 지방제도 개정 읍면제 및 도제 공포에 따라 개성부 이외에 있는 지역으로 개풍군이 되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국토 분단으로 본군의 일부 지역이 이북에 들어갔고, 1953년 7월 27일 법률 제350호에 의하여 수복되지 못하고 있다.
풍덕부의 건치 연혁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지만 1914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개성군에 합속되었다는 사실이 누락되어 있으며 분단 직후 풍덕이 북한에 남아 있다고 잘못 기재하고 있다. 특히 풍덕군민이 살아온 자체의 고유 역사가 있음에도 근래에 들어와 설정된 개풍군의 역사 속에 편입됨으로써 풍덕의 역사, 문화, 민속 인물 등 제반 항목들은 오로지 개풍군 각 면 속에서만 잔존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