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한양의 복잡한 행정업무
-『경조부지(京兆府誌)』-
정다혜(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
조선시대 한양의 행정 사무는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조선시대 한양은 조선 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한양은 수도로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였고, 조선후기로 갈수록 점차 인구가 증가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현재도 그렇지만, 도시의 관리는 인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는 그만큼 관리해야 하는 일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한양은 궁궐과 관청들이 집중된 지역이었고, 그렇기에 도시의 관리·감독, 치안 및 사법과 관련한 사무도 함께 이루어져야 했다.

<사진 1> 京兆府誌(규6599,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경조부지』의 편찬 |
『경조부지(京兆府誌)』는 한양을 관리하는 관서인 한성부의 사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경조(京兆)’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현재 전해지는 『경조부지』는 19세기 중엽, 철종 대에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재임(在任)한 이승경(李承慶)이 작성한 것이다. 발문(跋文)에는 책을 편찬하게 된 경위가 설명되어 있다.
“옛 것이 불에 타 새롭게 책을 편찬하였다는 일의 전말이 공의 서문에 갖추어져 있다. (중략) 부지(府誌)란 그 규례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규례에는 상례(常例)가 될 수 있는 것이 있기도 하고, 상례가 될 수 없는 것이 있기도 하며, 혹은 변경되기도 하고, 혹은 새롭게 규정된 것도 있어 때때로 새롭게 편찬하지 않으면 부지는 거의 폐지될 것이다.”
발문에서 밝히고 있듯, 원래 한성부의 행정 체계를 설명한 부지(府誌)가 있었으나 19세기 중엽 이전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 소실된 책을 보완해 내는 것이 새롭게 『경조부지』를 편찬한 직접적인 이유였다. 기존의 부지 내용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면서 갱신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점도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발문에서 이야기하듯, 규례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상례(常例)]도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경되는 것도 있고, 새롭게 창설된 규례도 있었다. 기존의 부지에는 192개의 규례가 있었으나, 여기에 변경된 규례 77개를 더하여 총 269개의 규례를 정리하여 새로운 책으로 편찬하였다. 즉, 제도의 변경 사항을 갱신하고 19세기 중엽 한성부의 체계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목적에서 『경조부지』가 편찬되었다. 다만, 새롭게 편찬된 『경조부지』는 활자본으로 간행되지는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자료는 필사본(筆寫本)이다.
조선시대에 각 관서의 업무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경조부지』 외에도 다양한 자료가 현전하고 있다. 호조(戶曹)의 업무 체계와 사례를 정리한 『탁지지(度支志)』, 예조(禮曹)의 법례와 사례를 정리한 『춘관지(春官志)』와 같은 자료들이 남아있다. 『경조부지』도 한성부라는 관서에 대한 법례와 사례를 각 담당 부서별로 정리한 자료이다. 현재 한성부의 구체적인 업무 체계를 정리한 조선시대 당대의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경조부지』가 가지는 사료적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 『경조부지』 구성을 통해 본 한성부의 역할 |
그렇다면 한성부는 어떠한 업무들을 관장하고 있었을까? 『경조부지』의 목차를 통해 한성부의 업무 분담 체계를 유추할 수 있다.

<기지(基地)>에서는 한성부 관청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에 소재하며, 호조와 이조와 맞닿아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공해(公廨)>는 한성부 관청의 건물 구조와 규모에 대한 내용이다. <좌아(坐衙)>는 한성부 소속 관원 및 서리의 근무 규정과 입시(入侍)할 때의 예식(例式)을 설명한다. <직장(職掌)>에서는 한성부가 관할하는 업무 총론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해당 내용은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의 한성부(漢城府) 관련 조항과 동일하다. 한성부는 경도(京都)의 호적(戶籍), 시전(市廛), 가사(家舍), 전토(田土), 사산(四山), 도로(道路), 교량(橋梁), 도랑[溝渠], 포흠(逋欠), 부채(負債), 투구(鬪毆), 순찰[晝巡], 검시(檢屍), 거량(車輛), 죽거나 잃어버린 말과 소에 대한 낙인(烙印)과 문서발급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각 사무에 대한 구체적인 업무 분담 사항이 뒷부분에 상술되어 있다.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업무에 따라 이방(吏房)·호방(戶房)·예방(禮房)·병방(兵房)·형방(刑房)·공방(工房)으로 나누어진 한성부 내 담당 업무별 규례이다. 이 외에도 한성부에서 근무하던 실무직인 서리(書吏)가 관장하는 업무에 대한 규례, 시전(市廛)과 난전(亂廛)에 관한 규례, 행정체계인 오부방계(五部坊契), 한양을 둘러싼 산 경계인 사산(四山)에 대한 규정 등이 실려있다. 또한, 다른 관사에서 전해오는 문서인 관문(關文)을 보내오는 관서에 대한 담당 부서도 <이문각사(移文各司)에서 규례로 다루고 있다.
다음으로 각 부서의 담당 업무를 알아보자. 『경조부지』에는 방(房)으로 표현된 각 담당 부서별 업무가 기재되어 있다. 이방(吏房)은 한성부의 서윤(庶尹)이 업무를 관장하며 포폄(褒貶)과 관련한 업무를 맡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포폄은 관리 및 서리들의 인사 행정 전반을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호방(戶房)은 한성부의 판관(判官)이 관장하며 장부(帳簿), 즉 호적과 관련한 사무를 맡았다. 조선초기부터 한성부가 담당하던 업무 중 하나는 전국의 호적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경국대전』에서는 호적을 3년마다 개정하고 호조와 한성부, 각 군현과 도(道)에 보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성부에서는 3년에 한 번, 호적을 개정하는 식년(式年)마다 호적청(戶籍廳)을 만들어 호적 관련 사무를 보았는데 이와 관련한 세부 규정을 『경조부지』에 기록하였다. 이 외에도 한성부가 소유한 집터[基地]와 전토(田土)의 세(稅) 납부에 대한 규정 등이 정리되어 있다.
예방(禮房)은 한성부의 일주부(一主簿)가 관장하며 간택(揀擇)과 산송(山訟)과 관련한 업무를 보았다. 간택은 조선시대에 왕족의 배우자를 선택하기 위해 후보자를 가려 뽑는 과정이었다. 간택을 하라는 전교(傳敎)가 내려오면, 한성부의 낭청(郎廳)이 명을 받은 후 즉시 한성부에서 발패(發牌)하고 오부(五部)의 관원이 사대부 집에 가 성책을 만들어 바치게 규정되어 있었다. 즉, 한성부에서 간택 관련 성책을 만들게 되어 있었다. 산송은 조선후기에 들어 그 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조선시대의 소송 중 하나이다. 『경국대전』의 한성부 관련 내용에서 알 수 있듯, 본래 산송과 같은 소송은 한성부에서 관장하는 업무가 아니었다. 그러나 18~19세기 산송을 비롯한 소송 건수가 증가하면서 소송을 관장하는 관서의 업무 비중이 증가했고, 한성부에도 업무가 분담된 것으로 생각된다. 『경조부지』에는 산송은 예방이 주관하고 산송과 관련한 격쟁도 예방의 담당 서리가 관리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한성부가 사송아문으로서의 역할이 증가했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병방(兵房)도 예방과 마찬가지로 한성부의 일주부(一主簿)가 관장하며 좌경(座更)과 금화(禁火), 춘추관(春秋官)의 도성 순찰[巡審]과 관련한 업무를 맡았다. 좌경은 야간에 한양 내를 순찰하는 것으로, 규정상으로는 대군·왕자·대신을 제외한 정경(正卿) 이하의 한성부 주민은 모두 좌경하는 역(役)을 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좌경과 같은 부역에 동원되는 한성부 주민은 많지 않았고, 역을 지는 주민 구성이 고르지 않다는 문제는 조선시대 내내 대두하였다. 그럼에도 관리를 비롯한 한성부 주민을 역에 동원하는 규정은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고, 이와 관련한 행정 사무는 병방에서 관리하였다. 이 외에도 한양 내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한성부의 병방에서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규정하였다.
형방(刑房)은 한성부의 이주부(二主簿)가 담당하며 검험(檢驗)과 여가탈입(閭家奪入)을 금단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경조부지』에는 살옥(殺獄)과 관련한 사건의 경우 검시(檢屍), 즉 시체를 검사하는데 한성부에서 초검(初檢)을 한 후에 형조(刑曹)에 첩보(牒報)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해당 업무도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전에는 한성부의 업무로 기록되지 않았으나,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한성부의 업무로 배정된 것으로 추측된다. 여가탈입은 출입하는 인구가 많고 세(貰)를 내고 거주하는 주민이 많은 한양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주거 관련 문제였다. 영조대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는 “여염집을 강탈하여 들어간 자는 도(徒) 3년에 처하고 정배(定配)한다”고 하며 사대부가 일반 주민들의 집을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금지하였다. 이 외에도 유기아(遺棄兒), 즉 유기된 아이를 관리하는 등 법령이나 금제(禁制)와 관련한 총체적인 업무를 형방에서 맡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공방(工房)은 형방과 마찬가지로 이주부(二主簿)가 일을 맡으며 방역(坊役) 및 도로 수치(修治)와 관련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방역은 한양 내의 주민들이 의무적으로 부담하는 일을 총칭한다. 국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도로를 닦는 일, 교량 및 도랑[溝渠]를 관리하는 일, 각종 행사가 있을 때 행사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관리하는 일 등 각종 잡역을 한양 내 주민들에게 부담 지웠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방역을 직접 부담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방역을 각종 계(契)에 맡기고 주민들은 돈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이 직접 부담을 하든, 돈으로 납부하든 방식의 변화와는 관계 없이 방역의 총체적인 관리는 한성부의 공방에서 담당하는 업무였다.
이와 같이 한성부 내의 인사 관리부터 소송 업무, 주민의 방역 관리까지 한양뿐만 아니라 조선 전국의 다양한 일을 한성부에서 관장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난전과 같은 시전과 관련한 업무도 한양에서는 중요한 업무로 취급되며 한성부에서 일정 부분 관리를 담당하였다. 이와 같이 한성부라는 하나의 관서에서 행정뿐만 아니라 사법, 치안 등 다양한 일을 모두 관장하는 것은 현재 대한민국의 사무 분담에서는 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행정 업무는 서울특별시에서 담당하고 있으나, 서울특별시에서 사법과 관련한 업무를 맡고 있지는 않은 데에서 알 수 있다. 하나의 관서에서 다양한 종류의 업무를 종합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조선시대 관서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초기부터 한성부에서 행정 및 사법을 비롯한 모든 일을 담당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에는 한양의 인구가 증가하고 조선초기에 비해 인구 구성도 다양해졌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도로 청소, 교량과 하천 등 도시 정비, 금령 감시, 순찰과 같이 도시를 관리하는 업무가 중요해졌다. 여기에 더해 18~19세기에는 전국적으로 소송 건수가 증가하며 소송을 담당하는 관서들의 업무 비중이 증가하면서 주민과 호적을 관리하는 한성부의 담당 업무도 증가하였다. 한성부뿐만 아니라 본래는 한양 내의 주민을 관리하던 오부(五部)의 사법 및 행정 기능도 다양해졌다. 조선후기 한양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도시의 복잡성이 강화된 것이다. 『경조부지』를 통해 조선후기 한양의 복잡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
『경조부지(京兆府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노혜경(2021), 「조선 후기 한성부의 발전과 오부관의 목민관화」, 『서울과 역사』 109,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시사편찬위원회(1992), 『국역 경조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