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사방으로 뻗어나간 신라 영역 확장의 증거, 신라진흥왕순수비
김수진(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강사)

사진 1 : 신라진흥왕순수비(奎12533,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진흥왕의 친정과 영토 확장 |
6세기 신라는 가야 지역 정복과 한강 이북 지역 진출 등 전례 없는 영토적 확장을 경험하면서 한층 달라진 국력을 실감하였다.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은 새롭게 정복한 지역들을 순수(巡狩)하고 비를 세움으로써 자신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영원히 기억하고자 하였다. 일련의 순수비, 즉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가 바로 그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신라진흥왕순수비(新羅眞興王巡狩碑, 奎12533)는 진흥왕의 네 개의 순수비 중 ‘북한산비’의 탁본 자료다. 고구려의 광개토왕도 순수를 하였지만 순수비는 확인되지 않았고, 삼국시대 왕이 순수하고 비를 남긴 것은 현재로서 진흥왕이 유일하다.
진흥왕은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해갔는데, 진흥왕 12년(551) 백제 성왕(聖王)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면서 한반도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고,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진흥왕 14년(553) 신라는 백제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 하류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빼앗고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듬해 성왕은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했으나 성왕과 좌평, 3만 명에 가까운 군사가 전사하였다. 진흥왕 16년(555) 10월, 진흥왕은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넓히고 경계를 정하고 11월 왕경으로 돌아왔는데, 순행 과정에서 지나온 주(州)‧군(郡)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사형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면하라는 명을 내렸다. 차분히 군사적 팽창을 준비하여 숨 가쁘게 이어온 일련의 전투에서의 승리를 축하하고 그 결과물인 영역 확장을 진흥왕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행이었다.
진흥왕 22년(561) 정월 하주(下州)의 주치(州治)였던 비자벌(比子伐), 즉 창녕을 순행하고 2월 1일에 비를 건립하였다. 이것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 중 하나인 창녕비다. 진흥왕은 이렇게 확장된 영토를 장악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백제 지역이었던 한강 하류에는 신주, 고구려 지역이었던 한강 상류와 동해안 일대에는 비열홀주(比列忽州), 가야 지역에는 하주를 설치하고 원래 신라 지역의 상주(上州)까지 네 개의 주로 편제하였는데, 창녕비에는 비자벌군주, 한성군주(漢城軍主), 감문군주(甘文軍主),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를 사방군주(四方軍主)라 표현하였는데, 이로써 사방군주 체제가 갖추어졌다.
국호 신라에 ‘신’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 網羅四方)는 뜻을 부여한 것인데, 진흥왕대 신라의 영역을 사방으로 확장한 천하 의식이 사방군주로 나타났고,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는 ‘사방으로 국경을 넓혀 널리 백성과 영토를 얻었다(四方託境 廣獲民土).’고 기록하였다. 네 개의 진흥왕 순수비의 입지는 모두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세워졌다. 그 중에서도 북한산비는 해발고도 560m의 비봉(碑峯) 암반에 세워졌는데, 접근이 어렵지만 비봉에 오르면 사방의 시야가 멀리까지 한눈에 확보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진흥왕은 12년(551) 친정을 하면서 법흥왕대부터 써왔던 연호 건원(建元)을 개국(開國)으로 고쳤다. 29년(568)에는 태창(太昌)으로, 33년(572) 홍제(鴻濟)로 고쳤는데, 개원한 연호에는 진흥왕의 염원과 국정 운영의 방향이 함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10군을 공격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새롭게 열리는 신라, 그 결과 순수비를 세우며 크게 번창한 신라를 확인하고, 그렇게 확장된 신라의 영토와 새롭게 편제된 백성뿐만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면서 고생한 신라의 백성을 널리 구제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개원이었을 것이다. 연호는 원칙적으로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황초령비, 마운령비에 나타난 ‘짐(朕)’이라는 용어도 황제가 자신을 지칭할 때 쓰는 것이다. 진흥왕 23년(562) 신라는 대가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는데, 가야 지역을 완전히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하면서 사방을 통할한다는 자신감과 천하관을 갖고 외왕내제(外王內帝)를 표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북한산비의 첫 부분에 새겨진 ‘진흥태왕(眞興太王)’의 태왕 역시 천하 사방을 다스리는 대군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사진 2 : 서울 종로 북한산 비봉 신라진흥왕순수비 전경(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 북한산비의 판독과 내용 |
진흥왕 29년(568)부터 왕의 북방 순수가 본격화되었고,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도 이 시기에 세워졌다. 북한산비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진흥왕 16년(555) 10월에 왕이 북한산에 순행하였다고 전하는 기록을 근거로 이때 비석을 세웠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북한산비의 비문 내용이 568년에 세워진 것이 분명한 마운령비, 황초령비와 비슷한 점과 비문 중 ‘남천군주(南川軍主)’가 판독되는데, 진흥왕 29년(568) 10월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했다는 『삼국사기』 기사와 연결하여 북한산비는 568년 10월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다수의 견해다.
북한산비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재질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대리석과 비슷하다고 했지만 1,300년 이상 아무런 보호 시설 없이 비바람에 노출된 채로 비봉 정상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졌을 정도로 이미 마멸이 심하였다. 탁본을 통해서도 그러한 사정이 역력히 드러나는데, 판독하기 어려운 부분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의 높이는 155.1㎝, 폭 71.5㎝, 두께 16.6㎝이다.
후술할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등이 북한산을 방문하여 북한산비를 탁본하고 석문을 제시하였고, 김정희가 청의 유연정(劉燕庭)에게 탁본을 전달하여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도 수록되었다. 1916년 9월, 조선총독부가 금서룡(今西龍)에게 북한산비를 조사하라고 명령하여 『대정5년도 고적조사보고(大正5年度 古蹟調査報告)』에 조사한 내용을 보고하였다. 1919년 발간된 『조선금석총람 상(朝鮮金石總覽 上)』에도 ‘양주 신라진흥왕순수비(楊州 新羅眞興王巡狩碑)’라는 제목으로 석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정확한 판독을 위해 노력하였다.
북한산비는 상하로 절단되었고 완전히 마멸되었거나 모호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현재 남아있는 비문은 12행으로 각 행 21자 혹은 22자이다. 김정희가 발견했을 당시에 이미 마지막 12행은 한 글자도 판독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서체는 황초령비와 매우 유사하다. 표점을 포함한 판독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眞興太王及衆臣等, 巡狩▨▨之時記.
… ▨言▨令甲兵之仿▨▨▨▨▨▨, 霸主設於賞▨▨
… 之所用, 高祀西岺▨▨▨▨相戰之時, 新羅▨王▨
… 杷德不▨兵故▨▨▨▨▨狁建文, 大淂人民牧存彷
… 只是巡狩菅▨, ▨▨民心, 欲勞賚. 如有忠信, 精誠, 右
… ▨可加賞, ▨▨以▨▨▨▨▨▨▨, 路過漢城, 陟▨
… 見道人▨居石窟, ▨▨▨▨刻石誌辭.
… 尺干, 內夫智一尺干, 沙喙另力智迊干, 南川軍主沙
… 夫智及干, 未智大奈▨, ▨▨▨沙喙屈丁次奈
… ▨▨指▨, 空幽則水六▨▨▨劫. 初立耶造, 非茄
… 巡狩, 見▨▨▨▨▨▨▨▨歲記井▨▨▨.
▨: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
위와 같이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가 많은 상태로, 사실상 한 문장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해석문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해석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진흥태왕 및 중신들이 ▨▨을 순수(巡狩)할 때에 기록하였다.
… 군사력으로(▨言▨令甲兵之仿▨▨▨▨▨▨) 패주로서 상을 내리고
… 의 소용된 바 서▨(西▨에 제사를 지내고, 서로 싸울 때 신라의 태왕이 ▨
… 덕으로 하고 군대를 일으키지 않은 까닭에 … (▨德不▨兵故▨▨▨▨▨▨建文) 크게 백성을 얻어 ▨▨▨
… 이리하여 영역을 순수하면서 민심을 ▨▨하고 여러 노고를 위로하고자 한다. 만일 충성, 신의, 정성이 있고
… 상을 더하고 … 한성(漢城)을 지나는 길에 올라 ▨
… 도인(道人)이 석굴(石窟)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 돌에 새겨 문(辭)을 기록한다.
… 척간(尺干) 내부지(內夫智) 일척간(一尺干), 사훼(沙喙)의 무력지(另力智) 잡간(迊干)이다. 남천군주(南川軍主)는 사〈훼의〉
… 부지(夫智) 급간(及干), 미지(未智) 대내▨(大奈▨ ▨▨▨ 사훼의 굴정차(屈丁次) 내〈마〉(奈〈麻〉)이다.
… 谷▨指▨ 비 그윽한 즉 水▨▨▨▨劫 처음에 세워 만든 바는 비▨
… 순수하여 見▨▨▨▨▨▨▨▨歲記井(?)▨▨▨
진흥왕 순수비의 내용은 제목, 순수 배경과 경과, 왕을 수행한 사람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북한산비는 판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다른 순수비와 유사한 내용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판독한 내용과 해석을 통해 북한산비도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1행은 제목에 해당하는 제기(題記)이고, 제2행에서 제7행까지는 왕이 순수한 배경과 왕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순수하였는지, 그리고 돌에 새겨 기록한다는 기사(紀事)와 제8행에서 제11행까지는 왕을 수행한 사람의 인명을 열거(隨駕人名列記)한 내용이다.
북한산비는 내용이 소략하고 판독할 수 있는 부분이 매우 단편적이지만 진흥왕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몇몇의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남천군주는 진흥왕대의 주(州制)의 변화를 파악하는 근거가 되고, 도인은 진흥왕이 새로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에 대한 교화를 부탁한 존재로 로 추정하기도 한다. 내부지, 무력지 등 일부 인명은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도 보이는데, 이들의 활동과 관등 표기의 변화를 이해하는 자료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북한산비를 발견하고 진흥왕대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진 것은 김정희에 의해서였다.

사진 3 :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탑본(국립중앙박물관)
| 김정희의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연구 |
북한산비는 북한산 비봉에 있고 그 아래 승가사(僧伽寺)가 있어 신라의 고승 도선(道詵)이나 조선의 무학대사(無學大師)와 관계된 비, 또는 몰자비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10여 자를 판독하여 ‘진흥왕순수비’라 하였다. 1816년 7월 김정희가 김경연(金敬淵, 1778~1820)과 함께 이끼로 덮여있던 비를 발견하고, 비석의 왼쪽 측면에 ‘이것은 신라진흥대왕의 순수비로 병자년 7월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라고 비석을 발견한 시점을 새겼다. 이듬해인 1817년 6월 8일 김정희는 조인영(趙寅永, 1782~1850)과 북한산에 다시 와서 비를 살펴보고 ‘정축년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아 있는 글자 68자를 심정했다(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라고 새겼다.
김정희는 적어도 두 차례 현장에 가서 북한산비를 확인하고 연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은 황초령비와 북한산비, 이 두 비문을 판독하여 석문을 작성하고 고증한 내용이다. 북한산비에 대해서는 ‘승가진흥왕순수비(僧伽眞興王巡狩碑)’라는 제명(題名)에 이어서 모두 12행의 석문을 제시하였다. 12행이지만 글자가 모호하여 각 행에 몇 글자씩 새겨져 있는지 분별할 수 없으나 70자를 확인하였다고 하여 처음 68자에서 두 글자 정도 더 판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석문을 제시한 후에는 비의 소재와 크기, 현재 상태를 밝혔는데, 김정희가 직접 북한산에 가서 비를 실견하였기 때문에 당시 비의 실태를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마멸이 심하여 분별할 수 있는 글자가 많지 않아 내용이 영성하고 소략하지만 오늘날 연구자들이 금석문을 연구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실물의 실견과 탁본을 통한 석문의 판독, 문헌 사료를 통한 내용의 고증과 고찰을 통해 자신의 견해(按)를 밝혔다.
제1행 진흥태왕(眞興太王) 아래 순수관경(巡狩管境) 네 글자를 새롭게 판독하고 북한산비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제8행에 남천(南川)에 주목하여 남천주(南川州) 치폐에 대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기사를 근거로 진흥왕 29년(568)에서 37년(576) 사이로 추정하고, 황초령비에 보이는 인명, 문구 등이 북한산비에도 나타나므로 두 비가 동시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직관지에 나오는 실직주군주(悉直州軍主)가 총관, 도독으로 불리고 관등은 급찬(級飡)에서 이찬(伊飡)까지였다는 내용을 근거로 북한산비의 남천군주도 외관(外官)의 중요한 관직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김정희는 북한산비를 신라사를 밝힐 수 있는 중요 ‘사료(史料)’로서 인식하고 조사하였다. 김정희의 북한산비 판독과 해석은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 수정되어 다르게 판독되고 해석되지만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선구적 연구로서, 연구사에서 반드시 그 첫머리에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사진 4 : 祖서울 종로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측면(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유리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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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 DB 금석문‧문자자료 중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https://db.history.go.kr/id/gskh_003_0010_0090_0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