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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상속과 증여 사이 별급문기

 

윤광언(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중에는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한 김육(金堉)이 자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며 작성한 문서 수 건이 있다. 그중에는 1646년에 김육이 아들 김좌명(金佐明)의 대과(大科) 합격을 축하하며 연안(延安)과 선산(善山), 창원(昌原) 등에 살던 노비 7구를 물려준 문서도 있다. 이 사료에서 김육은 김좌명이 단기간에 몇 차례 나라의 큰 시험에 합격해 부모를 기쁘게 했음을 명시하는 한편, 임금의 은혜와 조상의 음덕을 잊지 말고 더욱 성실히 살 것을 당부했다.

 

  과거와 현재의 물가가 다르고, 어떤 재화가 얼마나 더 가치 있게 여겨졌는지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는 만큼 이렇게 부모가 자식에게 생전에 떼어준 재산의 가치가 오늘날로 치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환산하기는 어렵다. 김육이 김좌명에게 준 노비만 하더라도 나이가 6~35세로 편차가 있었으며, 성별도 섞여 있었다. 집집마다 별급으로 지급하는 재산의 양도 달랐고, 그 편차도 노비 1~2구를 지급하는 경우에서 집을 물려주거나 노비 10여 구와 논밭을 함께 물려주는 사례에 이를 정도로 컸다. 다만 거칠게 비유하면, 조선시대 별급으로 지급된 재산의 규모는 오늘날 대학 입학 혹은 졸업 축하, 취직 축하 등을 명목으로 부모로서 자식에게 큰마음을 먹고 주는 선물 수준 정도, 혹은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1 : 父資憲大夫前禮曹判書金別給文記(19088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별급문기란 

 

 

 

별급문기(別給文記)는 별급 내역을 기록한 문서이다. 다시 말하면, 재주(財主) 즉 재산의 주인이 전 재산을 자식 모두에게 남김 없이 나누어 주기 이전에, 생전에 자신의 재산을 일부 떼어 특정 자식에게 주며 작성한 분재기(分財記)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현대 개념의 상속과 구분하기 위해 조선시대 재주가 자신의 재산을 물려준 행위인 분재(分財)를 재산상속이라고 총칭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별급문기는 재산상속문서의 일종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오늘날 상속 집행 전후로 몇 차례 증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과 유사하게, 조선시대 재산상속은 재주 생전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연구자마다 구체적인 용어를 조금씩 다르게 하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재산상속은 대체로 세 가지 행위로 구분되고 있다. 재주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전 재산을 모든 자식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 재주 사후에 자식들이 전에 미처 나누지 못한 망자의 재산을 분할하는 행위, 상술한 두 분배가 수 차례에 걸쳐 집행되기 전에, 혹은 비슷한 시기에 재주가 생전에 특정 자손에게만 재산 일부를 지급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별급은 세 번째 부류, 재주가 어떤 자손에게 미리 재산 일부를 떼어주고 싶을 때 지급하는 행위를 의미했다. 다만, 별급으로 재산을 지급한 시점과 지급을 증빙하는 문서가 작성된 시점은 다를 수 있었다. 별급문기는 수혜자가 재산을 물려받고 수년이 지난 이후에 작성될 수도 있었으며, 때로는 모든 자식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주려고 문서를 작성할 때에도 이전에 집행된 별급 내역을 기록하거나 새로이 별급을 집행하기도 했다.

 

  현전하는 분재기에서 별급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늦어도 15세기로 간주되고 있다. 여말선초에도 봉제사(奉祭祀), 정표(情表), 효도(孝道) 등을 명목으로 부모나 친척 어른이 자손에게 재산을 지급하는 행위는 있었다. 하지만, 현전하는 문서 원본을 기준으로 이와 같은 행위가 별급이라는 표현으로 확인되는 시기적 상한은 15세기 이후였다. 일례로, 1390년대에 남은(南誾) 부부가 작성한 유서를 후대에 모사했다고 전해지는 문서에는 조부모에게 받은 별급문기 외에 봉사조를 셈하여 고르게 분배해 나누어 가지라는 당부가 실려 있다. 하지만, 현재 공간된 고문서 중 가장 오래된 별급문기는 1447년에 금혜(琴慧)가 사위 하소지(河紹地)의 생원시 합격을 축하하며 작성한 별급문기로 알려져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 중인 별급문기 가운데에는 1492년에 작성된 외조모 천녕교도 안겸 처 김씨 별급문기(外祖母川寧敎導安謙妻金氏別給文記)가 가장 오래된 문서이다.

 

 

 

사진 2 : 外祖母川寧敎導安謙妻金氏別給文記(199670,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별급문기의 구성

 

 

별급문기는 다른 분재기와 마찬가지로 재주와 수혜자의 관계, 문서를 작성하며 별급하게 된 배경과 이유를 밝힌 서문(序文)’, 지급하는 내역을 기록한 본문(本文)’, 재주와 증인, 문서작성자 등의 성명과 수결(手決) 등이 위치하는 서명(署名)’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서의 첫 줄에서는 일반적으로 연월일을 쓰고 수혜자의 성명을 명시한 다음, 줄을 바꾸어 지급 사유와 재산 목록을 기록한다. 그 뒤에야 서명이 이어지는데, 이는 <그림 1><그림 2>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김육은 첫 줄에서 병술년(丙戌年, 1646) 1018일에 장자인 전() 부수찬(副修撰) 김좌명에게 별급문기를 써준다고 명시했다. 이어서, 당시 66세였던 김육은 1616년생인 김좌명이 늦게 엊은 자식이라서 장성할 것을 못 보고 자신이 죽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김좌명이 짧은 기간에 여러 차례 시험에 합격했으니 부모로서 기쁜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별급하는 배경과 이유를 밝혔다. 지급된 노비는 상술했듯이 7구였으며, 이 문서의 경우에는 재주인 김육이 직접 문서를 작성했다. 증인으로는 당시 김육이 교유하고 있던 인물들이 대거 확인되는데, 그 중에는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 예조판서 정태화(鄭太和) 등이 있었다.

 

  안겸의 아내 김씨 또한 홍치 5(弘治五年) 임자년(壬子年, 1492) 46일에 손자에게(성명 부분은 규장각에서 보관하기 이전에 문서가 손상되어 판독되지 않는다) 별급문기를 준다고 기록했다. 이어서 김씨는 손자가 장손이며, 사마시에 합격해 집안을 빛냈으므로 별급한다고 사유를 분명하게 제시했다. 이어서 김씨는 이 별급이 자신의 의도로 집행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묵인(墨印)을 찍었으며, 증인으로는 김씨의 외손녀사위가 참석해 수결을 남겼다. 문서를 작성한 인물은 진사였던 김씨의 조카였다.

 

  이처럼 별급문기가 재산을 주고받는 당사자, 재산 분배의 사유, 구체적인 재산 물목, 증인과 문서 작성자의 명단까지 갖추어 작성된 이유는 해당 재산상속이 재주의 분명한 의지에 따라 집행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상속인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이유로 재산 분쟁이 발생할 수 있었다. 상속이 고르게(均分相續) 이루어지지 않았다거나 재주의 인지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혹은 재주가 모르는 사이에 문서를 꾸며내어 재산을 빼돌렸다는 이유로 재주의 자식들, 손자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특이하거나 돌발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재산상속문서를 작성할 때 상속인의 아버지, 할아버지처럼 필적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친척 중 현달한 사람을 문서작성자나 증인으로 두고, 외조부모, 방계 혈족 등에게 재산을 물려받을 경우 관에 증빙을 신청하도록 하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분재기의 형식이 정형화되어 간단하게 넘기기 쉽지만,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문서에 배치한 구절 하나하나가 모두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남겨둔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별급 사유

 

조선시대 별급은 수혜자의 탄생, 과거 시험 합격, 혼인, 출산, 재주에 대한 각별한 효행, 봉제사 등을 이유로 이루어졌다. 현전하는 별급문기 중에서는 대·소과 합격을 축하한다는 이유로 작성된 사례가 가장 많이 남아있다. 여타 문서 중 구체적으로 사유를 밝혀둔 사료 가운데에는 평소의 효행이나 병들어 자리보전 중인 재주를 각별히 모셨다는 이유, 앞으로 집안의 제사를 담당하는 자손이라는 이유 등으로 작성된 문서가 다수 전한다. 요컨대, 특별한 공헌을 세우거나 뛰어난 능력을 보인 자손에게 축하, 고마움 등을 표하며 재산을 떼어준 내역을 작성한 별급문기가 오늘날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다만, 공로를 표창한다는 목적을 차치하더라도 재주는 수혜자에게 각별한 감정을 표하며 별급할 수 있었다. 재주 자신이 연로하여 죽음이 멀지 않았으므로 수혜자에 대한 애틋한 정을 생각해 재산을 지급한다고 별급 사유를 제시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위험을 넘겼다거나, 어린 나이에 전염병을 앓다가 회복된 것을 축하하며 작성한 별급 사례도 이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폐질(廢疾)을 앓거나 젊은 나이에 배우자를 잃어 앞으로의 생계가 염려된다거나 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별급이 집행될 수 있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 중인 이진백(李震白, 1622~1707)의 별급문기는 조선시대 별급이 공을 세운 특정 자손에게 재산을 지급하는 경로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목적으로 집행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진백은 강희(康熙) 26(1687) 24일에 손자 이의천(李倚天), 이의상(李倚相), 이의장(李倚杖)에게 각각 별급문기 1건씩 작성해주었는데, 지급한 노비는 각 1구씩이었다. 이때 이진백은 이의천과 이의상에게 별급한 이유를 작년(1686)에 자신을 병구환한 것에 대한 고마움이라고 밝혔다(231982, 231999). 반면, 이의장에게 별급한 이유는 장손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폐질을 앓아 실명한 병손(病孫)이므로, 앞으로 살아갈 것이 염려되기에 생계에 보태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231988). 손자들에 대한 별급의 직접적인 계기 중 무엇이 우선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의장은 어려서부터 앓았다고 밝힌 만큼 오래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이진백이 손자들에게 별급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의천과 이의상의 각별한 효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진백은 이의천과 이의상에게 별급하던 날, 병손 이의장에게도 별급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별급문기의 서문에 남긴 절절한 서술은 단순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별급문기 서문에 기록된 사유는 별급문기의 특징, 별급 관행의 변천 과정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진 3 : 祖父折衝將軍行僉知中樞府事李別給文記(231999,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별급문기의 특징

 

별급문기는 남아있는 수량, 작성 시기 등의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어 학계에서도 여타 재산상속문서와 구분하여 분류하고 있다. 별급문기는 현전하는 분재기 중 절반에 달할 정도로 남아있는 수량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정작 개별 별급으로 지급하는 재산은 여타 재산상속 방식으로 분배하는 재산의 총량과 비교하면 적다. , 별급문기는 균분상속 원칙에 민감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이 특정 자식에게 재산을 먼저 떼어 줄 법한 특별한 사유가 된다고 여겼던 때가 언제인지, 이때 재주가 재산을 얼마나 나누어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료이다. 학계에서는 이 점이 일찍이 부각되어 그동안 주목받아 왔다.

 

  더하여, 별급은 균분상속 원칙이 강하게 의식되었던 여타 재산상속 방식에 비해 재주가 자신의 뜻대로 재산을 처분할 여지가 컸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식 전체를 대상으로 전 재산을 나누어주는 문서, 혹은 부모 사망 후 자식들이 재산을 나누어 가질 때 작성하는 문서에는 서문에서 각자의 위치와 역할에 따른 균분, 혹은 평분(平分)이 지속적으로 기록되었던 반면, 별급문기에서는 균분에 대한 의식을 적시한 기록이 거의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재주는 자신의 전 재산을 분배하기 전에 별급으로 첩이 낳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미리 지급했는데, 이러한 별급이 재주 사후에 균분상속 원칙을 어긴다는 이유로 문제시된 사례는 전하지 않는다.

 

  물론, 재주가 실제로 별급하는 과정에서 다른 자식들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이전에 별급했던 양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수혜자에 대한 재주의 각별한 정을 드러내는 문서에서 다른 자손에 대한 언급이 거론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늘날에도 자식을 여럿 둔 부모라면 공감할 법하지만, 재산을 떼어 주는 각별함을 부각하면서도 다른 자식들을 고려하지 않은 듯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시대 재주의 별급은 별급 관행의 변천을 함께 고려하면 재주가 마주했던 그 미묘함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별급 관행의 변천

 

조선전기에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재산을 균분상속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식이 보편적이었다. 동시에, 자식은 부모가 자신의 재산을 처분한 결과에 거스를 수 없다는 의식, 자식으로서 진정한 효도는 부모가 모든 자식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고르게 남겼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부모 사후에 가서라도 부모의 전 재산을 고르게 재조정해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 재산 분쟁이 일어난다면 부모의 생전 재산 처분을 존중하는 가운데, 균분상속을 어떻게, 어느 정도로 실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초점이 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각별하게 아꼈던 자손에게, 혹은 과거 합격이나 제사 수행 같은 특별한 사유가 있어서 재주가 생전에 나누어주었던 재산이 재주 사후에 분쟁 거리로 비화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등제를 축하한다는 이유로 홀어머니가 생전에 별급한 집이 문제가 되었던 성종대 이세정(李世靖) 남매의 분쟁이 있었다. 이러한 분쟁 때문이었는지, 복수의 자식이 과거시험에 합격할 경우, 자식들에게 별급한 재산의 양을 같이 했던 사례들이 오늘날 전한다. 16세기 중반 박영기(朴榮基)의 아내였던 신씨(申氏), 김진(金璡) 등이 자식들에게 주었던 별급이 대표적이다. 별급으로 물려받을 재산을 똑같이 나누지는 않더라도, 지급을 마친 후 재조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선조대 박희수(朴希壽)는 그 자신이 재주가 아니었음에도, 자식들의 재산 분배를 위해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들 박선(朴瑄)에게 별급한 집을 논밭으로 바꾸어주고, 환수한 집은 다른 아들(朴璡)에게 바꾸어주었다.

  17세기 이후의 별급 관행은 조선전기와는 다른 모습이 두드러진다. 남성 후손, 장자 부부에 대한 별급문기 비중이 크게 증가했으며, 별도의 증인과 필집 없이 재주가 직접 문서를 작성해 수혜자에게 지급한 사례도 급증했다. 효행, 제사 담당뿐만 아니라 장손이라는 이유, 혹은 별도의 이유 없이 별급하는 비중이 늘어난 것도 조선전기와 대비되는 현상이었다. 같은 시기 별급문기의 서문에는 기쁜 일이 있을 때, 혹은 과거 시험에 합격한 자손에게는 별급하여 자신의 기쁨을 표하는 것이 예()라는 서술이 쓰였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재산상속 과정에서 별급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위로 조선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가운데, 17세기 이후 조선에서 발생한 경제·사회·사상적 변화의 영향으로 설명되고 있다. 18세기 이후 작성된 분재기의 수가 감소하고, 별급문기가 급감한 이유 또한 더 이상 문서로 증빙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남성 후손 중심의 재산상속이 보편화하며 적장손에게 주는 별급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이 없었던 사실과는 무관하게, 조선시대에도 자식들은 부모, 조부모의 재산 분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도 부모의 재산은 부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인지상정은 시대를 막론하고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재산을 나누어주는 부모로서는 특정 자손에게 재산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동시에 이 때문에 혹여 자손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까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물려받는 자손으로서는 자신이 적게 분배받는 고르지 않은 재산상속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물론,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없다면 분배에 차이가 없기를 바랐다. 물려받는 입장에서는 전 재산을 분배할 때 성별과 나이, 이로 인한 역할 수행에 기인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경제·사회·사상적 분위기가 바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납득하더라도, 균분상속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 적은 개별 지급마저 재주가 차등을 두어 자신이 손해를 보는 상황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후기가 재산이 남성 후손들에게 집중하여 물려주는 시대였음은 분명하지만,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같지만 재산을 다르게 줄 수밖에 없는 이유로 타고난 이치()는 달라도 정()은 같다는 표현이 쓰이던 시대이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별급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간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와병한 자신을 간호한 손자들 외에 폐인으로 지내는 손자의 생계가 염려된다는 이유를 제시하며 이진백이 이의장에게 별급문기를 써주었던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별급문기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수시로 작성하며 일상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자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고르게 분배하는 방향에 대한 고민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점이 두드러지는 문서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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