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지 속의 군사정보, 진관(鎭管)
허태구(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성종,연산군,중종대에 걸쳐 편찬·수정·증보된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관찬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55권 25책)을 보면이전 시기에 작성된 지리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항목이 눈에 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진관(鎭管)이다. 모든 고을마다 기재된 항목은 아니었고각 도에서 거진(巨鎭)으로 편성된 몇 개의 큰 고을에만 진관이란 항목이 설정되어 있었다. 조선후기에 간행된 각종 읍지에도 진관이란 항목은 자주 등장한다. 대체이 진관이란 항목은 어떻게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후 조선의 지리지에 기재되기 시작한 것일까?
고려말 이후 왜구와 홍건적의 빈번한 침입 속에 성립된 방어체제는 외적의 침공 예상 지역에 주요 병력과 방어 시설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남쪽의 연해안에는 수소(戍所)라는 간이 방어 시설을 설치하였고중앙에서 파견한 지휘관이 통솔하는 방어군이 배치되었다. 아울러수군이 대폭 증원되었고 수군 주둔 시설도 해안을 따라 촘촘하게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북쪽 압록강과 두만강가의 요충지에는 구자(口子)라는 간이 요새가 설치되었고 방어군이 상주하였다.

사진 : 『대동여지도』 <규 10333> 1책의 지도표,
성지·진보·봉수·고진보·고산성 등의 군사정보를 기호로 표시한 것이 보인다.
고려말의 지역방어체제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구체적인 요소들은 변화를 거듭했지만그 기본적인 구조는 계승·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남쪽의 연해안과 북쪽 변경의 요충지만 집중 방어하는 방식의 조선초의 지역방어체제는 아래 기사에서 보이는 것처럼 내륙 지역 방어에 커다란 약점을 갖고 있었다.
예문관 제학 이선제가 글을 올렸다.읍성은 견고하지 아니하며, 산성은 무너지고, 내지(內地)의 익군(翼軍)은 모두 연변에 소속하고, 변경 고을의 나머지 백성들은 드문드문 초야에 흩어져 있는데, 만약 (고려) 현종 때 거란병이나 고종 때 몽고인과 같이 대거 내침하면 부인과 어린아이들은 어디에다 두겠습니까?
『문종실록』 권4, 문종 즉위년 10월 10일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장(呈狀)에 의하여 양계(兩界)의 방어책을 조목별로 진술하였다. 국가에서 강변에 요해처를 골라 성을 쌓고 군사를 두고서 큰 성(城)과 작은 보(堡)로 하여금 스스로 서로 원조하도록 했지만, 그러나 내지가 텅 비어 있고 또 관문의 방비하는 곳도 없으니, 혹시 저 도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입해 온다면 강변의 각 진이 진실로 방어할 수가 없으므로 바로 중심부에까지 이르게 되면 파죽지세가 될 것이니, 누가 능히 저지시켜 막아내겠습니까? 이것은 곧 옛날에 이미 증험한 일이고 지금 마땅히 근심해야 할 일이니, 어찌 미리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문종실록』 권5, 문종 1년 1월 8일
진관체제는 조선전기에 성립된 지역방어체제이다. 이에 따르면전국 8도에 11개의 주진(主鎭)을 두고주진 아래 중요한 군현에 거진(巨鎭)을 두며거진 아래 중소 군현은 모두 제진(諸鎭)으로 편성되었다. 충청<전라<경상도에만 2개의 주진을 두었다. 주진거진제진은 각 급의 행정단위를 군사적 중요도에 따라 군사조직인 각 급의 진(鎭)으로 다시 편성한 것이다. 유사시에는 각급 행정단위의 지방관도 그대로 군사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였다.
주진으로 편성된 곳은 수도 한성(漢城)을 비롯하여 도내 육군의 최고책임자인 병마절도사가 지휘하는 병영과 관찰사가 병마절도사를 겸하는 감영의 소재지였다. 거진으로 편성된 곳의 지방관인 부윤<목사<부사는 군 지휘관인 절제사나 첨절제사를 겸하면서지역 방어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제진은 거진 인근의 중소 군현이었는데해당 지방관인 군수<현령<현감 등은 군 지휘관인 동첨절제사나 절제도위를 겸하였다. 특수 지역에는 만호를 두었다. 유사시 거진과 제진은 주진의 명령에 따랐다. 그러나거진부터는 독자적 군사작전권도 보유하여 작은 규모의 변란일 경우는 휘하의 제진을 동원하여 진압하는 것도 가능하였다. 수군도 육군의 진관체제에 따라 유사한 조직을 갖추었다.

사진 : 『신증동국여지승람』〈奎貴 1932〉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조의 진관(鎭管) 항목
위의 사진에 보이는 광주목(廣州牧)은 경기도 한성(漢城) 주진에 속하는 5개의 거진 가운데 하나였다. 서두에는 고을의 유래와 역사를 설명한 건치연혁(建置沿革)이란 항목이 있다. 그 다음에 세조대에 진(鎭)을 두었다는 설명이 나오고바로 다음에 진관 항목이 보인다. 이 항목에서 차례로 나오는 여주목이천도호부양근군지평현음죽현양지현죽산현과천현이 바로 거진 광주목에 속한 제진 8개였다. 이들 제진은 평시에는 광주목과는 독립된 행정단위로서 기능하였지만유사시에는 군사조직인 진으로 전환되어 병마첨절제사를 겸하는 정3품 광주 목사의 지휘를 받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고을을 배치한 순서는 바로 이 진관체제를 따랐다. 광주목 설명 다음에는 여주목이천도호부양근군지평현음죽현양지현죽산현과천현이 차례로 나오는 방식이다.
진관체제의 장점 중 하나는 각 행정단위가 유사시에 군사조직으로 전환되어 결과적으로 민사행정과 군사행정이 통합되는 효과를 가져와 방어 병력을 해당 지역의 지방관이 직접 관리<통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 진관이 무너져도 인접한 다른 진관이 방어의 공백을 메우며 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전문성이 부족한 문관 수령이 군 지휘관을 겸함으로써 군사 조련의 밀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더불어자영농의 점진적 몰락과 병역 자원의 허술한 관리는 각 진이 동원할 수 있는 방어 병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따라서임진왜란 이전 조선 정부는 유사시 각 진관의 병력을 약속된 장소에 집결시켜 중앙에서 파견 또는 지정한 군사 지휘관의 통솔을 받으며 대적하게 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의 체제를 고안하여 보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