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법학 교육과 사법관 양성, 두 마리 토끼를 좇다
-『법관양성소세칙(法官養成所細則)』을 통해 본 법관양성소 운영과 현실
조은진(한국교원대 한국근대교육사연구센터 HK연구교수)
| 근대적 사법제도의 도입과 법학교육기관 설립 구상 |
근대 이전 조선에서는 재판관을 비롯한 사법관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율과(律科)를 통해 율관(律官)을 선발하였으나, 이들은 형조(刑曹)에 속하는 하급 기술관료에 불과하였다. 특히 지방에서는 관찰사나 수령이 수사 및 재판을 담당하는 사법관의 역할까지 맡아,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은 구조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사법제도는 1876년 개항 이후 변화를 맞는다. 특히 서양을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 등 외국의 사법제도가 소개되면서, 조선에서도 기존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점차 논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박영효(朴泳孝)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1888년 『건백서(建白書)』로 잘 알려진 상소문을 작성하여, 법률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거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사법제도 개혁 논의가 정책에 반영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당시부터였다.
1894년 11월 법무대신으로 임명된 서광범(徐光範)은 고종에게 법률학교를 설치할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당시 서광범이 구상한 법률학교는 법률을 익힐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으로, 이미 재판관 역할을 하고 있던 지방 관리들의 교육까지도 담당하는 교육기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근대 법률을 익혀 새로운 사법제도를 운영할 사법관을 배출하기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사진 1> : 『奏本』에 수록된 법무대신 서광범의 상주(규1770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법관양성소의 출범과 초기 입학생 모집 |
1895년 3월 25일 칙령 제45호로 「법부관제(法部官制)」가 공포되었다. 법부관제 제12조에 따르면, 법부에는 대신이 직할하는 법관양성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이는 학부에서 관장하는 학제 내 ‘학교’의 성격보다는, 법부에 속하는 관리양성기관으로서의 성격에 더 무게가 실렸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공포된 칙령 제49조는 「법관양성소규정」으로, 법관양성소 설립 및 운영 전반에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었다.
법관양성소 규정에 따르면, 법관양성소 생도 자격이 주어지는 사람은 연령 20세 이상으로, 입학시험에 급제하거나, 혹은 현재 관서에 재직 중인 경우에 한하였다. 이는 앞서 법률학교 구상에서부터 이어지는, 새로운 인재 양성과 기존 관리 교육이라는 두 가지 역할이 모두 부여된 복합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제1조에서는 ‘널리 생도를 모집한다’는 조항이 있으나, 실제로는 생도들에게 규정된 학과 교육을 속성으로 하여 졸업 후 사법관으로 채용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여야 했기 때문에 연령과 응시 자격에 제한을 두었다. 법관양성소의 입학시험 과목은 한문 작문, 국문 작문, 조선역사 및 지략대요(地略大要)였으며, 입학 후에는 법학통론을 비롯하여 민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기타 현행법률 및 연습 과목을 교수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당시 관보(官報)에 처음으로 수록된 법관양성소 입학생 모집 광고는 다음과 같다.
법관후보생 모집
이번 법관후보생 50명을 모집할 터이니, 입학지망자는 다음 사항을 보고
이 달 10일까지 본 양성소 사무실로 와서 신청서를 제출하여야 한다.
제1항 연령 20세 이상
제2항 입학시험 과목
제1 한문(漢文)
제2 작문(作文)
제3 역사(歷史)
제4 지지(地志)
개국 504년(1895년) 6월 2일 법부 법관양성소
법관양성소의 첫 입학생 모집 광고에서는 학생이 아니라 ‘법관후보생’을 모집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후, 새로운 법제 하의 사법관으로 바로 임용할 ‘후보생’을 교육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법관양성소세칙』에 나타난 법관양성소의 운영과 교육과정 |
실제 법관양성소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세부적인 조항과 규칙은 『법관양성소세칙(法官養成所細則)』에 수록되었다. 법관양성소세칙은 총 7개 장, 42조로 구성되었으며 각 장은 다시 각각 소장과 교수의 직무권한, 후보생 모집, 교육과정 및 평의회, 후보생 회지, 시험, 벌칙 등의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세칙 자료에는 법관양성소 학과목 시간표와 제1회, 제2회 후보생 졸업 명단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 초기 법관양성소 운영 방침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 2> : 法部 편, 법관양성소세칙(法官養成所細則)』(규21683,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초기 법관양성소에서 운영하였던 학과목 시간표는 다음과 같다.

<사진 3> : 법관양성소 학과 시간표(『법관양성소세칙(法官養成所細則)』, 규21683,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법관양성소는 매주 월-토 6일간 교수하였으며, 토요일을 제외한 5일은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수업하였다. 학과목 중 현행법률은 법부 참서관(參書官)이자 초대 법관양성소장인 피상범(皮相範)이 교수하였으나, 다른 법률 과목은 일본에서 초빙된 일본인 교수가 가르쳤다. 현행법률의 경우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었던 대명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초대 법관양성소장인 피상범은 1882년 증광율과(增廣律科)에 장원급제한 인물로, 율학 즉 전통 법학에 조예가 깊은 율관 출신이었다. 또한 초기 일본인 교수로는 高田富藏, 堀口, 日下部三九郞가 임명되어 각각 민법 및 민사소송법, 형법 및 형사소송법, 법학통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교수 구성은 초기 법관양성소의 설립과 운영, 그리고 근대 법학 도입 과정에 일본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법관양성소세칙은 후보생, 즉 생도의 생활 또한 세밀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후보생은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했으며, 특히 소장을 비롯한 법관양성소 교수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후보생이 규칙을 어길 시에는 소장과 교수가 처벌할 수 있었으며, 그 경중에 따라 훈계나 퇴학에 이를 수도 있었다. 후보생의 수업 출석이나 수업 태도 또한 학과 점수에 반영될 수 있다는 조항이 세칙으로 규정되어 있을 정도로, 후보생은 수업 안팎으로 예비 사법관으로서의 태도를 갖춰야 했다. 또한 이는 법관양성소가 규율과 규칙을 통하여 학생들을 통제하는 근대적인 학교의 역할까지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 법관양성소의 졸업생 진로와 운영상의 부침 |
6개월간의 속성 교육과정을 거치고, 1895년 11월 10일 제1회 법관양성소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졸업시험에서 통과한 47명이 첫 졸업의 영예를 안았다. 법관양성소세칙 뒤에는 이들의 졸업시험 성적이 개인별로 수록되어 있다. 제1회 졸업시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인물은 함태영(咸台永)이었다. 또한 47명의 졸업생 중에서 함태영을 비롯하여 이인상(李麟相), 이용성(李容成), 서인수(徐寅洙) 4명이 우등 졸업의 영예를 안았다. 이들 중 함태영은 졸업 이듬해인 1896년 3월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용되었고, 다음해인 1897년 경기재판소 판사로 임용되었다. 함태영의 경우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바로 검사시보를 거쳐 일찍 판사로 임용될 수 있었다. 또한 이인상·이용성·서인수는 졸업 후 법부 주사(판임관 6등)로 임용되었다가 인상은 재판소 서기를 거쳐 1908년 판사로, 이용성은 1906년 평리원(平理院) 판사로 임용되었다. 이들 외에도 졸업생 중에서 추가로 주사 7명, 군수 1명, 검사시보 1명이 졸업 직후 배출되었다.
이와 같은 1회 졸업생의 초기 임용 상황을 두고, 기존에는 초기 법관양성소 졸업생을 바로 사법관으로 임용하고자 하는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당시 독립신문에서도 이러한 점을 지적할 정도였다.
인천 이경익의 편지에 말하기를, “법부 법관양성소 1, 2와 법률학원 80여 명이 이왕 법률을 힘써 배워 졸업까지 하는 뜻은, 문명 진보하는 때를 당하여 졸업한 후에 법관으로 쓰겠다고 내리신 칙령에 의지하여 법관이 되어서 민사와 형사에 재판을 명백히 하려고 한 것이나, 지금 보니 법관을 내더라도 법률을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로만 낸즉, 여기저기 불복된 송사가 많다 하였다. 우리 생각에는 법률 졸업한 사람들이 외국의 법률학자와 꼭 같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아주 법률을 모르는 사람보다는 어느 정도 나을 터이니, 서울이나 지방 모두 법관 자리 비는대로 법률 졸업생들에게 법관을 시키기를 바라노라.”고 하였더라. (『獨立新聞』 1896년 6월 20일 기사)
그러나 실제 관보에 수록된 관리 임면 기록을 통하여 이들 1회 졸업생의 이력을 추적해보면, 졸업 후 사법관에 임용되거나 적어도 관직으로 진출한 경우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1896년에서 1898년까지 2년 동안 관직에 임용되었던 경우는 적어도 17명 이상이었으며, 그중 13명이 검사 시보(試補)나 재판소 및 법부 주사(主事) 등 법관 혹은 법원 관리직으로 임명되었다. 특히 이들의 이력을 1910년 병합 이전까지의 시기로 확대하면 47명 중 10명이 판사 및 검사로 진출했으며, 어떤 형태로든 관직에 진출했던 인원이 42명에 달할 정도로 근대 법제가 도입되던 시기 사법관을 비롯한 관리로 임용되었던 비율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초기 법관양성소는 불완전하나마 사법관 양성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896년 말 아관파천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법관양성소는 사실상 운영이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법관양성소는 1896년 4월 제2회 졸업생 38명이 배출된 이후 한동안은 운영 상황이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인 1903년 법관양성소 규정이 개정되면서 다시금 법관양성소가 근대 법학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재개하게 된다. 하지만 법관양성소가 다시 문을 연 이후로도 교육 기간을 비롯한 규정이 계속해서 변경되는 가운데 불안정한 운영 양상을 보였다. 특히 을사조약 강제 체결 이후로는 법관양성소의 관리양성기관의 성격이 점점 약화되어갔으며, 1909년 사법권이 박탈되면서 법부가 폐지되고, 법부 소속으로 운영되던 법관양성소가 학부 소속의 법학교로 재편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이처럼 법관양성소는 근대 법학 교육의 출발점이자, 근대적 사법관을 양성하는 최초의 관립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부여되었다. 비록 짧은 운영 기간과 불안정한 제도적 기반으로 인하여 법관양성소에 부여된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간과되기도 하나,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조선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간주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法部 편, 『법관양성소세칙(法官養成所細則)』,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法部 편, 『奏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고종실록』
『관보』
김효전, 『법관양성소와 근대 한국』, 소명출판, 2014.
김효전, 「법관양성소의 실제 운용」 『동아대학교 대학원논문집』 제24집, 1999.
최기영, 「한말 法官養成所의 운영과 교육」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6집, 2001.
심재우, 「조선후기 관찰사의 사법권 행사와 검률(檢律)의 역할」 『규장각』 66, 2025
조은진, 「식민지 조선의 관립전문학교와 內鮮共學 : 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