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양잡록』: 15세기의 농업 지식과 사대부의 가치관
장래건(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원)

사진1 : 강희맹의 문집 『사숙재집』(奎15380)
『금양잡록(衿陽雜錄)』이라는 책이 있다. 15세기 조선의 유력한 관료였던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지은 문헌이다. 책의 이름을 풀이하면 대략 ‘금양(衿陽)에 관한 잡된 기록’ 정도가 될 것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특별한 것이 없는 기록으로 보이지만, 이 문헌은 조선시대부터 이미 일종의 ‘농서(農書)’로 여겨졌다. 『금양잡록』이 선조 때 인쇄한 『농사직설(農事直說)』에, 또 17세기에 저술된 『농가집성(農家集成)』에 수록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금양잡록』은 현대의 독자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현대의 독자들은 이 책이 농서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 성격을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해왔다. 때로는 조선의 합리적 농업 발달을 보여주는 지표로, 때로는 국가의 농업 정책을 보완하는 문헌으로, 때로는 ‘유교 인본주의’ 실현에 대한 열망을 담아낸 텍스트로. 그렇다면 과연 이 책은 어떤 책일까? 강희맹은 이 문헌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 『금양잡록』과 『사숙재집』 |
『금양잡록』은 비록 후대에 강희맹의 대표적인 저술로 여겨졌지만, 그의 동시대인들이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1483년(성종 14)에 강희맹이 사망하자 국왕 성종은 그의 시와 글을 모아 문집을 간행하도록 명령했고, 그렇게 간행된 책이 바로 강희맹의 호를 따서 이름 붙여진 『사숙재집(私淑齋集)』이다. 그런데 오늘날 강희맹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금양잡록』은 초창기에 간행된 강희맹의 문집에 들지 못했다. 『금양잡록』은 강희맹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한참 떨어진 19세기 초에야 『사숙재집』에 실릴 수 있었다. 1805년(순조 5)에 강희맹의 후손들이 『사숙재집』을 중간(重刊)하면서 책의 구성도 17권 4책에서 12권 5책으로 변화했는데, 『금양잡록』이 문집에 포함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금양잡록』은 중간된 『사숙재집』에 실린 것이다.
강희맹의 동시대인들은 왜 『금양잡록』을 강희맹의 문집에 싣지 않았을까. 조선 후기와 달리 전기에는 문집 간행이 대단히 특별한 일이었고, 그만큼 엄선된 작품만을 수록했다. 15세기의 조선 지식인들은 강희맹이 대단히 뛰어난 문장가임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 중에서 『금양잡록』이 각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강희맹과 함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서거정은 강희맹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조차 『금양잡록』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금양잡록』은 후대에 ‘농서’로 재인식되면서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선조 때 이 책이 『농사직설』(규장각 소장, 古貴9100-8)과 함께 인쇄된 것도, 17세기의 농서 『농가집성』에 『금양잡록』이 들어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과연 『금양잡록』은 어떤 면에서 농서로 인식되었을까

사진2 : 『사숙재집』(奎15380)에 수록된 『금양잡록』
| 『금양잡록』의 농업사적 가치 |
『금양잡록』이 오랫동안 농서로 읽혀온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우선 농업에 관한 강희맹 본인의 관심이 이 문헌에 뚜렷하게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강희맹은 가학(家學)을 통해 농학적 소양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희맹의 증조부 강시(姜蓍, 1339~1400)는 고려에서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간행했고, 생부 강석덕(姜碩德, 1395~1459)은 누에치기에 관심을 기울인 이행(李行, 1352~1432)에게 수학했으며, 형 강희안(姜希顔, 1418~1465)은 화훼 재배법을 다룬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지었다. 강희맹 자신도 공무를 마치면 농촌을 다니며 마을 사람들과 농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아들 강구손이 쓴 『금양잡록』의 발문은 강희맹의 농학적 관심을 잘 보여준다.
선친께서 퇴청하신 뒤에 농부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왔다 갔다 노닐면서 마을 노인들과 농사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파종하고 밭 갈고 김매는 방법에서부터 알맞은 파종 시기와 토질에 이르기까지 그 오묘한 이치를 탐구하여 밝히셨다. (…) 아, 선친께서 일찍이 재상의 반열에 올라 묘당(廟堂)에 계셨으나 마음을 논밭[畎畝]에 두지 않은 적이 없으셔서 농사일을 잘 아셨으니 책을 저술한 취지가 심오하지 않은가.
강희맹의 농학적 관심은 『금양잡록』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문헌을 구성하는 각 장은 농사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금양잡록』의 본문을 살펴보면, ①농가[農家], ②곡식의 품종[穀品], ③농사 이야기[農談], ④농부와의 대화[農者對], ⑤여러 바람의 분별[諸風辨], ⑥곡식을 심는 올바른 방법[種穀宜], ⑥선별한 농요[選農謳]로 구성되어있다. 각 장의 제목은 『금양잡록』의 관심사가 농사 지식에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각 장에는 농업사적으로 매우 유용한 정보가 담겨있다. 예컨대, 「곡식의 품종」에는 당시에 재배된 곡식 61종의 목록이 들어있다. 여기에는 이른벼 3종, 중생벼 5종, 늦벼 20종, 보리 6종, 기장 4종, 조 15종, 콩 8종의 작물 특성과 재배 조건이 함께 기록되었다. 작물마다의 특징과 재배법을 하나하나 기록한 것은 『금양잡록』만의 특징인데, 이 기록을 통해 15세기 조선에서 재배한 작물의 종류와 숫자, 재배법을 파악할 수 있다. 이 특징은 조선 후기 농서인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편, 작물의 조선식 이름을 한자 이름과 함께 표기한 점도 『금양잡록』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이 문헌을 통해서 우리는 15세기 조선 사람들이 각각의 작물을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를 확인할 수도 있다.

사진3 : 『농사직설』(古貴9100-8) 수록 『금양잡록』 중 「곡식의 품종」
무엇보다도 『금양잡록』은 금양 지역의 농업 현실을 구체적으로 전달해준다. 「농사 이야기」는 금양현 농민의 농작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논갈이는 너무 이르지 않게 3월 보름경에 비로소 흙을 갈아엎는다. 소가 없는 사람은 아홉 사람을 고용하여 논을 갈면 소 한 마리의 노력을 대신할 수 있어서 하루 20~30두의 씨를 파종할 수 있다. 내가 농장에 이르러 문 앞의 메마른 농지를 가꾸어서 2월 보름 전에 땅이 풀리는 대로 물을 대고 논을 갈아 파종했다. 마을 사람들이 다들 말하기를 파종이 너무 이르니 모가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이를 두려워하여 나이 많은 농부를 불러다 물었다. 농부가 말했다. “나쁠 것이 없습니다. 논을 갈고 씨를 뿌리는 방법 중에 아주 이르게 한다고 나쁠 것이 없습니다. 이르게 파종하면 바람을 견뎌내고 이른 가을에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은 벼 재배 방법이다. 흥미롭게도 『농사직설』의 벼 재배 방법은 금양 농민에게 공감을 얻지 못했다. 『농사직설』은 올벼를 수경으로 재배할 때는 정월에 거름을 내고 2월 상순에 논갈이하도록 소개했는데, 강희맹도 “2월 보름 전에 땅이 풀리는 대로 물을 대고 논을 갈아 파종했다.” 하지만 금양 농민들은 대체로 2월 보름 전에 파종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금양 농민들의 벼 재배법은 『농사직설』의 내용과 차이를 보였다. 이처럼 『금양잡록』은 지역적 차이로부터 생겨나는 농법의 차이를 보여준다. 『금양잡록』은 좁게는 금양 지역, 넓게는 중부 지역의 농업 수준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의미 있는 텍스트다.
| 사대부의 정체성과 농업 지식 |
『금양잡록』은 오랫동안 농서로 여겨지며 전승되었지만, 이 책에는 농사와 무관한 서술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강구손은 발문에 이렇게 썼다. “「농부와의 대화」와 「곡식을 심는 올바른 방법」 같은 편은 은연중에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이치를 살피는 기미가 있으니 비단 농가의 지침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농서로 여겨진 텍스트에 왜 출처에 관한 이야기들이 들어있는 것일까? 이 서술들은 강희맹의 어떤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농업 지식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금양잡록』이 농서라는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전체 문맥을 고려하면서 강희맹 본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강희맹은 농사에 관심을 두기는 했지만, 그것을 자신의 본업으로 여긴 적은 없다. 『금양잡록』에 실린 「농부와의 대화」는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강희맹은 나이 40이 되어서도 재주와 언변이 부족하고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데 자괴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의 자괴감은 금양으로 가서 낡은 별업(別業)을 수리하고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내가 젊을 때 스승과 벗을 따라 성현(聖賢)의 도를 배우고 이 세상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시운(時運)이 맞지 않고 마음과 일이 어긋나서 벼슬을 한 지 10년이 되도록 백성이 덕을 입지 못했고, 벼슬을 맡아 시행한 일 중에 백성을 조금이라도 넉넉하게 한 것을 찾을 수 없다. (…) 내가 세상에 바라는 것이 없으니 세상이 어찌 나를 써주겠는가? 내가 장차 벼슬을 그만두고 농사나 짓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강희맹의 결론은 본인의 업에 힘쓰겠다는 것이었다. “농사를 지어도 굶주릴 수 있으나 학문을 하다 보면 녹이 그 가운데 있으니, 차라리 내가 배운 것을 따라서 내 업을 끝마쳐야겠다.” 여기서 그가 배웠다는 것은 바로 성현의 도를 가리킨다. 강희맹은 벼슬에 나아가 그 도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일을 자신의 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강희맹은 철저히 사대부의 정체성을 고수했다.
농사를 바라보는 강희맹의 시선도 어디까지나 사대부의 정체성을 전제한 것이었다. 『금양잡록』의 「농가」는 강희맹이 생각한 사대부의 본업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무릇 선비는 뜻을 얻으면 만종(萬鍾)의 녹을 향유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자신의 힘으로 먹고살 뿐이다. 자신의 힘으로 먹고사는 자는 농사를 버려두고서는 자급할 수 없다. 사람이 만약 자급하지 못하면 예의염치(禮義廉恥)가 확장될 수 없으니, 농사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막중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라의 녹을 먹는 자는 이것에 의지하지 않아서 농사를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근본에 힘쓰는 뜻이 아니다. 옛날에 소계자(蘇季子)가 “내가 만약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 이랑만 있었던들 어찌 여섯 나라의 인장을 찰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는데, 소견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강희맹의 시선에서 보면 선비가 농사를 짓는 경우는 관직에 나아가 선비의 본분을 다할 수 없어서 자급자족해야 할 때다. 여기서 자급자족은 어디까지나 본인에게 주어진 예의염치, 즉 인간다움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 관직에 나아갔다면 선비의 본분에 충실할 뿐이다. 다만 ‘나라의 녹을 먹는다’는 것이 반드시 국가의 녹봉으로만 생계를 지탱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가를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농사를 짓는 일과 동시에 할 수 없다’는 맹자의 취지에 훨씬 가깝다. 낙양성 부근에 밭이 있었으면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될 수 없었다는 소진의 말도 바로 그런 인식을 전제로 인용한 것이다. 강희맹은 어디까지나 사대부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농사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강희맹은 어떤 이유로 농사에 관심을 두었을까? 그는 농사로부터 사대부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이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희맹은 『금양잡록』에 이렇게 썼다. “선비·농민·장인·상인[士農工賈] 네 부류의 백성 중에서 농민이 가장 고생스럽지만, 옛 군자들이 농업에 많이들 종사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근본이 그것에 있기 때문이었다.” 선비에게 적용될 수 있는 삶의 근본적인 이치를 농사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강희맹에게 농사는 선비에게도 공히 적용될 수 있는 한에서 의미 있는 것이었다.
과연 농사는 선비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강희맹은 이렇게 생각했다. 곡식을 심을 때 조생종은 습하고 비옥한 땅에, 만생종은 건조하고 척박한 땅에 심어야 한다. 작물의 특성에 따라 적절한 토양에 심어야만 수확량이 많아져서다. 이것은 사대부에게도 마찬가지다. 비유하자면 농지는 시대와 마찬가지고, 풍속은 토질과 같다. 적절한 때 알맞은 토양에 곡식을 심어야 수확량이 늘어나듯이, 사대부도 적절할 때 벼슬에 나아가 풍속에 알맞게 일해야 많은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강희맹의 생각은 「곡식을 심는 올바른 방법」에 잘 드러난다.
사대부의 본분으로 ‘성공(成功)’을 중요시한 강희맹의 생각은 ‘바람직한 관료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농부와의 대화」에서 강희맹은 관료의 유형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었다. 가장 훌륭한 관료는 자신의 도덕을 바탕으로 처지에 따라 세상을 잘 다스리면서 때에 맞게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존재다. 그다음으로 훌륭한 관료는 문장으로 정치를 보완하고 무비로 외침을 막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키는 존재다. 자기 자신의 몸가짐만 바르게 하고 하루하루 주어진 일만 계산하며 하는 관료는 하류일 뿐이었다. 나랏일을 위해 지혜를 짜내고 공을 세울 생각이 없는 관료는 아예 벼슬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강희맹이 벼슬에 나간 사대부에게 요구한 덕목이 무엇인지가 잘 드러난다. 강희맹에게 바람직한 관료는 본인의 몸가짐만 바른 사람이 아니라 도덕을 바탕으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는 존재였다.
벼슬에 나아간 사대부의 덕목으로 ‘성공’을 강조한 강희맹의 모습은 조선 전기 지배층의 일반적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조선 전기의 지식인들은 후기의 지식인보다 비교적 더 현실주의적이고 공리적인 성격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시대와 풍속에 따라 알맞게 벼슬에 나아가 공명(功名)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강희맹의 생각은 바로 그런 측면과 맞닿아있다. 그런 면에서 『금양잡록』은 15세기 금양 농업의 특성을 보여주는 텍스트인 동시에 당대 관인들이 지녔던 가치관과 정체성, 그들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문헌이기도 하다.
| 참고문헌 |
김용섭, 1988, 「『衿陽雜錄』과 『四時纂要抄』의 農業論」, 『조선후기 농학사연구』, 일조각
신승운, 1995, 「成宗朝 文士養成과 文集編刊」, 『한국문헌정보학회지』 28
이종봉, 2010, 「『衿陽雜錄』의 농업기술과 농학」, 『한국민족문화』 36
장래건, 2023, 「姜希孟의 『衿陽雜錄』 저술 의도와 ‘士’로서의 정체성」, 『규장각』 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