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마추어 식민사학자의 역사서술
-菊池謙讓, 『근대조선사』
김명재(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 기쿠치 겐조의 행적과 역사서술 |
기쿠치 겐조(1870~1953)는 도쿄전문학교를 졸업하여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가 경영하는 민유샤에 입사하였다. 1893년에는 『국민신문』의 특파원으로 인천항을 통해 조선에 건너왔으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하였다. 1895년에는 한성신보사를 창간하는 데 힘썼다.
기쿠치 겐조가 유명해진 것은 1895년 10월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楼)의 지휘 아래 일본군 수비대 병력 600명과 훈련대 800명, 낭인 56명이 경복궁으로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가담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을미사변에 관여한 혐의로 일본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이때 『조선왕국』이라는 책을 썼다. 또한 기쿠치 겐조는 ‘낭인’이기도 했다. 근대 시기 중국과 조선 등에서 대륙 낭인, 조선 낭인 등으로 불렸던 이들은 주로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번(薩摩藩)이나 조슈번(長州藩) 출신이 아닌 지역의 사무라이들이자 막부 체제를 떠받친 식자층이기도 했다.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은 기쿠치는 1897년 조선에 재입국하여 한성신보 주필로 활동하다가 1900년에 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기쿠치는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조선왕국』(1896), 『대원군전』(1910), 『조선제국기( 朝鮮諸國記)』(1925), 『조선잡기 1, 2』(1931), 『근대조선이면사』(1936), 『근대조선사 상』(1937), 『근대조선사 하』(1939) 등 한국사와 관련된 여러 책을 집필했다. 그는 언론인 출신이기 때문에 보다 대중적인 글쓰기를 했으며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있고 직접 인터뷰를 하는 등 현장성을 가진 점 또한 인기의 포인트였다. 특히 『조선왕국』에서 기쿠치 겐조는 총론에서 기존 한반도 일곱 왕조의 역사는 오욕과 암흑을 거쳐왔고, 세계의 대세는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고 우등한 자가 열등한 자를 침략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중 조선은 평화와 광영, 발달과 진보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한국사는 사회의 추락을 의미한다고 평가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진화론을 활용한 논의로, 한국사를 타율적이고 정체적인 것으로 평가한 전형적인 서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떠돌고 있었던 임나일본부설을 언급하고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전형적인 ‘식민사관’을 대표로 하는 글이었다. 이 당시 일본의 조선 연구가 막 이뤄지기 시작한 지점에서 아마추어 학자이자 언론인의 이 글은 오히려 영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메이지 시기 일본인들의 조선관 또는 조선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어서 기쿠치는 『대원군전』(1910)에서 일본의 강제 한일병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치적 대결과 고종의 정치적 무능력, 이들의 당쟁에 초점을 맞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흥선대원군과 망명 중인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과의 서신 왕래를 담당했고, 그 친분을 이용해 대원군을 인터뷰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간 자기가 한국에서 직접 겪은 사건들과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대원군의 생애를 다룬 전기를 편찬하게 된 것이다. 기쿠치는 한국 근대의 역사를 대원군과 명성황후 양자가 벌인 대결구도로 파악했고, 이 상황에서 고종을 나약한 군주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조선이라는 나라의 망국의 필연성이 강조되었다. 그는 조선은 3000년 역사를 지녔지만 단 한번도 영웅이 등장하지 않았으며, 정치권은 붕당 투쟁에 골몰하여 국민과 국가의 흥망을 돌보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한편 『근대조선이면사』(1936)는 근대사 자료를 열람하는 동안에 흥미있고 중요한 장면과 등장인물을 묘사해 1933년 5월부터 100여회에 걸쳐 『경성일보』에 연재한 것을 모은 것이다. 비교적 당대의 중요한 사건을 시간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동학농민운동 부분을 매우 상세하게 정리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선망국론과 자멸론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이후의 저서와 서술은 기존의 『조선왕국』과 『대원군전』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식민사학’으로서 『근대조선사』와 그 특징 |

<사진 1> : 『근대조선사』하(奎古 111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실제로 기쿠치의 한국사 서술은 『근대조선사』에서 마무리되었다. 기쿠치는 기존의 『대원군전』과 『조선왕국』의 내용과 비교하여 『근대조선사』 상하의 내용을 크게 수정하지 않고, 사실 오류 등을 바로잡았다고 적었다. 그는 서문에서 1926년경부터 『근대조선사』 편술에 뜻을 두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전 총독과 조선사편수회의 회원이자 경성제국대학의 교수 이마니시류(今西龍)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마침 일제시기 이왕가와 관련한 사무를 담당하던 이왕직으로부터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의 실록편찬위원으로 촉탁받아 1930~1935년까지 사료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1935년 3월부터 당초 계획했던 『근대조선사』 집필 작업에 들어가 1937년 10월에 669페이지의 상권, 1939년에 584페이지의 하권을 완성했다. 『근대조선사』는 근대 시기 조선을 총 3시기로 구분하였는데, 제1기는 대원군 섭정부터 강화회의까지, 제2기는 고종친정부터 청일전쟁까지, 제3기는 을미사변부터 러일전쟁까지로 구분하였다. 기쿠치는 서문에서 근대 조선의 사료와 그 이면을 검토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 단지 내가 깨달은 것은 근대 조선 70년간에 있어서 우리 황국(皇國)이 바야흐로 현대와 같이 옛날에도 지금도 정의의 큰 길(大軌)을 밟아, 光輝燦爛하게 ... 정정당당하게 천명과 천운에 맡기며 유유히 걸어왔다는 것을 통감하였다(2쪽)

<사진 2> : 『근대조선사』하(奎古 111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림 하권 앞장에 있는 사진에는 ‘을미사변 전날 밤 오카모토 류노스케, 아다치 겐조, 이주회 등의 일한유지 30여명이 회합한 대원군 별저 아소정의 전경(사진 중 오른쪽은 須永元, 왼쪽은 저자(기쿠치))’이라는 정보도 함께 실려 있다. 오카모토와 아다치 등은 기쿠치와 같은 낭인 출신으로 미우라 고로와 함께 을미사변을 주도하였다.
그는 일본사를 보기 위한 일그러진 거울로 ‘조선사’를 활용하였고, 더 나아가 제국 혹은 국민사의 인식까지 이뤄졌다. 이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특징이자, 더 나아가 식민주의 역사학을 이면에 둔 근대 역사 서술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근대사』 상·하권에 기쿠치의 흥선대원군에 대한 비뚤어진 애정(?)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기쿠치는 흥선대원군을 ‘영웅’이라고 하면서 임오군란 이후 재집권하려다가 청국에 납치되어 중국 보정부(保定府)에 연금되었던 3년간에 그린 그림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전날 밤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이주회(李周會) 등 을미사변에 가담한 주요 인사들이 모였던 대원군 별저 아소정(我笑亭) 사진을 올려두는 등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정보와 사진을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었다. 이는 자신의 경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인터뷰 상대였던 흥선대원군을 통해서 자신의 글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와도 맞물린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을미사변을 중심으로 내용을 자세히 정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을미사변 전기, 본기, 후기로 자세히 정리하였다. 이 글에서도 기쿠치는 자신의 서술 경향을 반복하였다. 즉, 을미사변은 대원군이 주도하였고 그 배경에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양자의 정치적 당쟁과 대립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정치적 이익과 당쟁에만 매몰되어 국민과 국가의 경영과 흥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이들이 당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그리고 고종이었기에 그들로 인해 조선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일본은 그러한 후진적이고 비문명적인 조선과 조선인을 구할 선진적이고 시혜적인 권력구도 속에서 배치하였다. 즉, 제국주의 팽창이라는 제국 일본의 국가적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이자 이에 가담한 자신의 정치적, 폭력적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식민사학 혹은 일본 역사학에서의 기쿠치 겐조의 위치 |
기쿠치는 해방 후 일본으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한반도에 머물며 언론인·역사 저술가로 활동했다. 1893년 23세로 한국으로 이주한 후 을미사변 이후 감옥에 잠시 있을 때를 제외하고 1945년 제국 일본이 패망으로 귀국할 때까지 한국에서 52년간 언론인, 사학자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쿠치는 전문적인 역사학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정통 역사학계에서는 이류사학자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주로 일본인들을 독자로 하는 조선 인식과 조선관을 만들어낸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근대조선사 상』(1937), 『근대조선사 하』(1939)는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 일본이 광폭한 행보를 보이는 시기에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당시는 전시체제를 주도하는 제국의 차원에서 국가와 관을 중심으로 일본(內)과 조선(鮮)이 일체라는 의미에서 내선일체(内鮮一体)와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은 조상에서 나온 동족이라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 강조되는 시기였다. 기쿠치의 본 저서는 이러한 제국, 국가 중심의 역사서술에 어느 정도 기여하면서도, 조선 및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조선망국론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국가 주도의 역사학과 괴리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국가 중심적 역사학과 민간 재야사학자의 식민사학이 바라보는 역사관이 합류하면서도 경합하는 지점을 기쿠치의 본 저서가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하지연, 『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 서해문집, 2015
장신, 「‘재야 역사학(자)’의 과도한 평가 하지연, 『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서해문집, 2015), 『이화사학연구』 51, 2015
김종준, 「일제 시기 주류 역사학과 비주류 역사학의 주고받음 - 다보하시 기요시와 기쿠치 겐조 역사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 『한국학논집』 86, 2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