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문인관료가 관찰한 메이지
[明治] 일본, 『일동기유(日東記遊)』
이주현(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그림: 『日東記游』(想白古915.3-G418i)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 중인 상백문고본 『일동기유』는 권1만 남아 있는 영본(零本)이다. 저자 김기수(金綺秀)의 후손이 가지고 있던 수필 원본 4권 2책의 완본(이선근李瑄根 소장본)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본은 완본의 권1 전체와 권2 연음(燕飮)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수록된 내용을 통해 1876년 당시의 일본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상황과 당시 조선인의 일본 인식 및 일본·근대화에 대한 감상을 확인할 수 있다.
| 65년만에 재개된 조선과 일본의 교류 |
조선시대에는 해금령(海禁令)이 시행되어, 임금의 명을 받아 중국·일본으로 파견되는 사행원 정도에게만 공식적인 외국행이 허락되었다. 사행원들은 사행의 절차와 외국 정보를 보고서와 견문록, 일기 등으로 작성하였고, 외국·외국인과의 접촉이 어려웠던 만큼 이러한 사행 기록들은 여러 세대를 걸쳐 읽히고 필사되었다. 사행록(使行錄)은 대체로 공적인 목적에서 작성되었고 현재에도 조선시대의 외교와 국제교류 양상을 확인하는 사료로써 활용되고 있는 한편, 외국의 낯선 문물과 문화를 체험하는 당대 조선인의 감정과 인식,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개개인의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으로서도 주목을 요한다.
1876년(고종 13) 조선 정부는 일본과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 조약)를 맺은 이후, 일본의 요청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외교 사절단인 제1차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게 된다. 일본에 파견하는 사행단의 명칭이 통신사(通信使)에서 수신사로 바뀐 이유는, 이전까지는 막부(幕府) 장군의 습직을 축하하는 명목으로 사행단이 파견되었으나,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에 일본에서 막부 체제가 폐지되고 덴노[天皇] 중심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바, 사행의 성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일본에서 먼저 사신을 파견해 우호를 다졌으므로 조선도 선린(善隣)의 뜻에서 전권사신(全權使臣)을 파견하여 신의를 강조해야 한다고 여겼고, 이러한 취지에서 사행단의 명칭을 수신사로 정했다. 일본으로의 사행은 1811년 쓰시마 섬[對馬島]에서 이루어진 역지통신(易地通信)을 기준으로는 65년, 에도[江戸, 지금의 도쿄東京]에 방문했던 1763년 계미통신사 기준으로는 113년 만의 재개였다.
『일동기유(日東記遊)』는 1차 수신사의 정사(正使)인 창산(蒼山) 김기수(金綺秀, 1832~?)가 남긴 사행 기록이다. 그는 발탁 당시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홍문관(弘文館)의 정4품 응교(應敎)로 일하고 있었다. 일본이나 외교와는 무관해 보이는 직책의 그가 수신사의 정사로 발탁된 배경은 알 수 없다. 단 『일동기유』의 본문 중,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가 김기수에게 “내 나이와 지위가 여기에 이르러 결국 이번 사행을 내 벗에게 양보하게 되었네[吾年位之公然到此, 此游遂讓與吾友也].”라고 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박규수의 추천으로 인사가 결정된 것은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박규수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에 외교문서를 전담하였으며, 강화도 조약 때도 조정 중론을 모으고, 일본을 상대로 한 외교문서 다수의 자문과 감수, 교열에 참여한 바 있다.
『일동기유』에는 1876년 5월 22일부터 6월 28일까지의 약 한 달간 이루어진 사행의 경위와 견문이 사회(事會, 일본과 교섭하게 된 경위를 기록)·차견(差遣, 수신사 파견 결정과 자신의 발탁에 대한 기록)·수솔(隨率, 사행원의 명단)·행구(行具, 행장에 관련된 사항 및 물목)·상략(商略, 일본 사행과 관련하여 들은 조언들)·별리(別離, 친지·지인들과 이별을 나눈 기록)·음청(陰晴, 사행 과정 중의 날씨)·헐숙(歇宿, 사행 도중 쉬고 묵었던 곳에 대한 기록)·승선(乘船, 부산에서 배가 출발한 과정, 배의 원리 등을 기록)·정박(停泊, 사행 중 들른 항구 관련 기록)·유관(留館, 도쿄에서 묵은 서양식 숙소의 제도와 접대를 기록)·행례(行禮, 예와 의복에 대한 기록)·완상(玩賞, 일본에서 제공한 유람에 대한 기록)·결식(結識, 사행 중 만난 일본인에 대한 기록)·연음(燕飮, 연회의 방식과 참석한 인물, 음식에 대한 기록) 등의 항목 아래 정리되어 있다. 서양적·근대적으로 변모한 일본을 최초로 접한 19세기의 조선인은 일본의 ‘무엇’에 주목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 거대한 근대화 전시관, 메이지 일본 |
근대화된 신문물은 미처 조선을 떠나기 전부터 김기수 일행 앞에 나타난다. 승선을 위해 부산 초량진에 나가니, “협판(夾板)과 쌍돛이 있고, 그 사이에는 굴뚝이 있으니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모습[夾板雙帆, 帆間煙筒, 可謂夢想之所不到也]”의 화륜선(火輪船) 고류마루[黃龍丸]가 사행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일본 측에서 준비한 이번 사행의 목적은 단순히 양국이 옛 우호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일본에 내항하여 미·일간 불평등 조약을 맺고, 일본인들을 미국으로 초대해 문물을 시찰하게 하여 근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이어서 무역에 관한 규약을 맺게 한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훗날 있을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의 교섭을 유리하게 하고, 조선 내 일본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조선 측에 사행단 파견을 요청한 것이었다, 강화도 조약의 일본 측 전권대신이었던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조선에 사신단 파견을 요청하면서, 문물을 견문하고 배울만한 사람을 보내 달라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즉, 일본이 수신사를 요청한 가장 큰 목적은 조선인에게 ‘근대적인’ 일본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 측 이동수단으로 화륜선을 임대해주기도 하고, 사행단의 노정 중 화륜차를 타게 하기도 하였다. 사행단을 돕는 일본 측 영접관과 사행 중 만난 일본인 관리들은 김기수를 비롯한 사행단들에게 조폐국(造幣局)·조선소(造船所) 등의 근대화 시설과 제도에 대한 시찰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사행원들이 숙소 밖으로 출입하는 데에 제한이 없도록 하는 나무패를 전달하기도 하고, 그들의 더 많은 유람을 위해 일부러 길을 돌아가기도 했다.
한편 김기수는 이 사행이 국가 간 관계 회복에 대한 회례(回禮)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고, 유람과 정탐은 부수적인 사안이라고 여겼다. 또 수신사로 발탁되었을 때, 주변인들로부터 사신으로서 몸가짐을 조심하고. 일본인의 말을 의심하며, 유람을 일삼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기에, 그는 일본 측의 요구에 함부로 응하지 못했다. 출입 허가를 위한 나무패에 먼지가 쌓여 그 위에 적힌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해진 일정 외에는 따로 출입하지 않았고, 길을 돌아가는 것을 항의하려고 일부러 소통사(小通事)를 혼내는 모습을 일본 측에 보이기도 했으며, 일본 측에서 요청한 시찰 일정 중 일부는 칭병(稱病)하며 거절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김기수가 메이지 일본 시찰 자체에 불성실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낯선 문물에 순수하게 경탄하기도 하고, 이는 곧 관심이 투영된 다각도의 관찰과 면밀한 기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김기수는 화륜선에 대해 “칼로 물건을 베는 것처럼 되어 있으니, 여기서 배는 칼이요 물은 물건이 되는 셈이다[直如以刀割物, 船爲刀而水爲物也].”, “선체는 항상 흔들려서 순풍이 돛에 가득할 때일지라도 붓을 쥐고 종이에 쓰려면 점을 몇 번이나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다[船軆則常搖搖不止, 雖順風飽帆之時, 操毫臨紙, 不由不多作幾點也].”라고 그 움직임에 관해 서술하였고, 연통 옆의 풍대(風袋)에서 나는 소리를 “깊은 산 속에서 한밤중에 나는 귀신소리를 듣는 듯하였다[如深山半夜, 聞鬼嘯聲].”라고 묘사하기도 하였으며, 선내 객실에 장식된 거울·시계 등에 대해서는 “화려하게 빛나 눈길을 빼앗기고 현란하여 어지러울 정도여서, 금세 오감이 피곤해지고 칠정이 흐트러질 것만 같았다[金碧奪目, 纈皇眩轉, 直欲勞五官而迷七性也].”라는 감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생경한 문물에 대한 정보를 시각·청각·촉각 등의 감각으로 포착하여 이해하고 자기 나름대로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김기수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서양식 기계 문물인 화륜차(火輪車), 전신(電信), 등간(燈杆)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특히 등간(가스등)에 대해서는 땅에 박혀있는 모양새나 심지 주변에 기름이 없는 것으로 유추하여 지고(地膏, 땅의 기름)를 써서 작동되는 것이라 서술하였는데, 이는 김기수가 획득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착인(錯認)이었다.
요코하마에서 신바시[新橋]까지 화륜차를 탔다. 잠시 역루에서 쉬었다. 일행의 짐은 배에 실어 곧바로 에도 근처 항구까지 보내고, 몸에 당장 필요한 옷과 기물을 차에 실었는데, 차가 이미 역루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역루 밖에서 또 복도를 따라 수십 칸을 지났다. 복도가 다 끝났는데도 차가 보이지 않고, 4·5십 칸쯤 되는 긴 행랑이 길가에 있었다. 차가 어디에 있냐고 내가 묻자, 이것이 바로 화륜차라고 하였다. 방금 긴 행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보니 행랑이 아니라 바로 화륜차였던 것이다. (……) 차량마다 모두 바퀴가 있고 앞 차량의 화륜이 한 번 돌면 차량들의 바퀴가 따라서 회전하는데,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하여 1시각에 3·4백리를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차체는 평온하여 조금도 요동치지 않는다. 다만 좌우로 보이는 산천과 초목, 주택과 인물이 앞에서 번쩍하더니 뒤로 사라져 버려 구경할 수 없었다.
내가 공부성(工部省)에서 전선(戰線)을 살펴보았다. 전신선(電信線) 끝이 집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마치 우리나라의 설렁줄[舌鈴索]이 집 안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았다. 평상까지 늘어졌고 평상 위에는 기계를 설치하였으며, 기계 옆에는 궤(櫃) 같은 기구가 있고, 그 속에는 전기가 있다. 손으로 그 기계를 두드리니 전기가 궤에서 발생하여 번쩍번쩍하고 빛이 나면서 바로 선을 타고 올라갔다. 옆에는 기구 하나가 더 있는데 우리나라 목수의 먹통과 비슷했다. 통 속에 막대가 있어 이것이 돌고 있는데, 옆에는 또 종이 두루마리가 있어, 한쪽 끝이 곧게 막대 위로 올라가서 둘러싸면 종이 위에 글자가 나타났다. 또 옆의 종이를 펼치면 역시 글자가 나타나서, 이쪽이 저쪽에 알리는 편지가 되었다. (중략) 이것은 모두가 내가 보고 들은 것이므로, 들은 것도 상세히 듣고 본 것도 똑똑히 보았으니, 감히 그것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가로(街路) 위에는 5간(間)과 10간 거리에 이따금 한 개의 등간(燈杆)를 세워 위에는 유리등(琉璃燈)을 켰으니, 꿰맨 곳도 없고 틈도 없이 원래 그런 것처럼 만들어졌다. 그 속에는 잔(盞)도 있고 심지도 있었는데, 심지만 곧게 서 있고 기름은 없었다. 날이 어두워져 등불을 켤 때, 사람이 한 번 기계를 움직이면【기계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등불이 알아서 켜져 있고 날이 샐 때까지 꺼지지 않으며, 사람이 또 기계를 움직이면 등불이 저절로 꺼진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밤중에 길을 가더라도 사람들이 등을 들지 않았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집에서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와 이야기할 때, 그는 나에게 이 방법을 쓰도록 권하였는데, 이것은 아마 땅의 기름을 뽑아 쓰는 방법일 것이다. 아무리 취하여도 금하지 않고 아무리 쓰더라도 없어지지 않으니, 또한 인력을 더는 한 가지 묘방(妙方)이었지만, 나는 우리나라에 기름이 넉넉하고 사람들 또한 재주가 없다고 여겨, 이러한 술외(術外)의 기술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이것을 사절하였다.
| 변화한 일본과 근대화에 대한 조선인 문인관료의 시선 |
서양화·근대화된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조선 측에 각인시키기 위해 사행 전반을 기획한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수신사 김기수는 『일동기유』를 비롯한 그 외 사행 기록에 가치 판단적인 내용은 가급적 배제하거나 단편적으로 남기고, 객관적인 혹은 피상적인 기록만을 주로 남겼다. 근대식 문물과 제도 등 시찰 대상에 대한 판단은 사행 보고를 받을 왕이 하는 것이고, 이를 보조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자세히 기록해 전달하는 것이 수신사 정사로서의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그럼에도 김기수의 기록은 주목을 요한다. 일본에 대해 왜양일체(倭洋一體)와 구호회복(舊好回復) 입장으로 대립하는 조선 조정, 메이지 일본을 면밀히 시찰하라는 고종의 어명, 유람을 강요하는 일본 측 인사들과 이전 사행록에서 보았던 익숙함과 꿈에도 본 적 없는 낯섦이 공존하는 메이지 일본의 풍경 등, 여러 부담이 중첩된 상황 속에서 김기수라는 개인은, 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기존 인식과 사행을 통한 경험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고, 외적으로는 조선을 대표하는 사신으로서 그 태도를 매사 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타인의 의도로 보게 된 것,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간 것, 의식적으로 찾아본 것, 보지 않으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발현된 메이지 일본에 대한 기록이 치밀한 묘사로 『일동기유』에 나타난다.
65년 혹은 113년간의 공백을 메우는, 변화한 일본과 근대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김기수의 『일동기유』와 그 외 사행기록은, 수신사와 조사시찰단 기록 중 가장 많은 이본이 현전한다. 이 점은 그의 견문 기록이 당시 조선 사회에 미친 반향을 짐작하게 한다.
| 참고문헌 |
『고종실록』
김기수, 『日東記遊』,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국역 해행총재 11: 일동기유·사화기략·동사만록』, 민족문화추진회, 1977
김기수, 구지현 역, 『일동기유』, 보고사, 2018
구지현, 「통신사의 전통에서 본 수신사 기록의 특성: 제1차 수신사 기록을 중심으로」, 『열상고전연구』 59, 열상고전연구회, 2017
김선영, 「제1차 수신사 사행의 성격: 일본 외무성 자료를 중심으로」, 『한국사론』 63,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2017
황호덕, 「간문화적 화용과 타자의 형상: 일동기유의 문사와 수사 배치」, 『근대네이션과 그 표상들』, 소명출판,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