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성군은 고성군 간성읍, 현내면, 거진읍, 죽왕면, 토성면과 속초시내 영랑호 주변에 해당하며 읍치는 간성읍 하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의 白頭大幹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사이사이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홍수 때 작은 하천을 통해 운반된 土砂가 만들어 놓은 潟湖가 해안가에 많이 보이고있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花津浦는 지도에는 이름만 표시되어 있지만 이 지역의 석호 중 가장 크다. 해안가의 경치 좋은 곳에는 여러 개의 정자가 만들어져 있는데 廣湖 근처의 淸澗亭은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유명했던 곳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공간에 비해 확대·과장되어 있다. 고을의 북쪽으로 縣內面은 熱山廢縣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의 왼쪽에는 신라 때 창건되고 1358년(고려 공민왕 7)에 나옹화상에 의해 중수되어 지도 속 이름으로 고쳐진 乾鳳寺가 표시되어 있다. 이 절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기타 지도 왼쪽 백두대간 위에 인제로 넘어가는진부령, 미시령 등의 고개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간성군은 고성군 간성읍, 현내면, 거진읍, 죽왕면, 토성면과 속초시내 영랑호 주변에 해당하며 읍치는 간성읍 하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의 白頭大幹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사이사이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홍수 때 작은 하천을 통해 운반된 土砂가 만들어 놓은 潟湖가 해안가에 많이 보이고있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花津浦는 지도에는 이름만 표시되어 있지만 이 지역의 석호 중 가장 크다. 해안가의 경치 좋은 곳에는 여러 개의 정자가 만들어져 있는데 廣湖 근처의 淸澗亭은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유명했던 곳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공간에 비해 확대·과장되어 있다. 고을의 북쪽으로 縣內面은 熱山廢縣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의 왼쪽에는 신라 때 창건되고 1358년(고려 공민왕 7)에 나옹화상에 의해 중수되어 지도 속 이름으로 고쳐진 乾鳳寺가 표시되어 있다. 이 절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기타 지도 왼쪽 백두대간 위에 인제로 넘어가는진부령, 미시령 등의 고개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강릉부는 강릉시와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읍·미탄면을 제외한 평창군, 홍천군의 내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강릉 시내 성내동과 용강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백두대간이 지나가며 동서를 넘나드는 고개로는 大關嶺이 있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영동·영서로 나누며 지금은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동쪽의 작은 하천들은 동해로 들어가고 서쪽의 물들은 한강 상류에 해당한다. 서쪽 위쪽에 있는 內面은 지금의 홍천군에 속해 있으며 북한강 지류 홍천강의 상류이다. 동해안에는 潟湖에 해당하는 香湖·鏡湖·楓湖가 보이고 있다. 풍호는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던 둘레 2.5km의 호수였지만 지금은 모두 논으로 개간되어 사라졌다. 향호는 주문진읍 향호리에 있고 경호는 강릉시내에 있는 경포호이다. 읍치에는 土築의 읍성이 있었으며 客舍와 衙(舍) 등으로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읍치 왼쪽에 있는 五峯書院은 1556년(명종 11)에 세워졌고 孔子, 朱子, 宋子(송시열)을 배향하였지만 賜額받지는 못했다. 그 아래쪽의 松潭書院은 李珥(1536-1584)를 봉안하여 1666년(현종 7)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조선 5대 史庫의 하나인 오대산사고가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쪽으로는 신라 선덕여왕 때 慈藏法師에 의해 지어졌고, 고려 때 만들어진 국보 48호 9층석탑으로 유명한 月精寺가 그려져 있다. 기타 驛과 面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강릉부는 강릉시와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읍·미탄면을 제외한 평창군, 홍천군의 내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강릉 시내 성내동과 용강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백두대간이 지나가며 동서를 넘나드는 고개로는 大關嶺이 있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영동·영서로 나누며 지금은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동쪽의 작은 하천들은 동해로 들어가고 서쪽의 물들은 한강 상류에 해당한다. 서쪽 위쪽에 있는 內面은 지금의 홍천군에 속해 있으며 북한강 지류 홍천강의 상류이다. 동해안에는 潟湖에 해당하는 香湖·鏡湖·楓湖가 보이고 있다. 풍호는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던 둘레 2.5km의 호수였지만 지금은 모두 논으로 개간되어 사라졌다. 향호는 주문진읍 향호리에 있고 경호는 강릉시내에 있는 경포호이다. 읍치에는 土築의 읍성이 있었으며 客舍와 衙(舍) 등으로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읍치 왼쪽에 있는 五峯書院은 1556년(명종 11)에 세워졌고 孔子, 朱子, 宋子(송시열)을 배향하였지만 賜額받지는 못했다. 그 아래쪽의 松潭書院은 李珥(1536-1584)를 봉안하여 1666년(현종 7)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조선 5대 史庫의 하나인 오대산사고가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쪽으로는 신라 선덕여왕 때 慈藏法師에 의해 지어졌고, 고려 때 만들어진 국보 48호 9층석탑으로 유명한 月精寺가 그려져 있다. 기타 驛과 面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고성군은 일제시대의 고성군 고성면,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 수동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북쪽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 고성군이다. 고을의 서쪽에는 金剛山이 있다. 금강산의 楡店寺 근처에서 발원한 南江은 지도에서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남쪽까지 흐르며 다시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동해와 만난다. 東流하는 작은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는 潟湖가 많이 나타난다. 고을의 바닷가 쪽은 지금 海金剛이라 불리며, 금강산 쪽은 外金剛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다른 공간에 비해 매우 확대·강조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三日浦는 주위 약 5.8km의 호수로서 關東八景의 하나였다. 호수 가운데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위의 정자가 四仙亭이다. 호수와 정자의 이름 모두 이곳의 절경에 끌려 삼일 동안 머물렀다는 述郞, 南郞, 永郞, 安祥 등 신라의 유명한 네 화랑과 관련이 깊다. 금강산 쪽으로는 금강산의 4대 사찰에 해당하는 楡店寺와 新溪寺 등이 표시되어 있다. 두 사찰 모두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여러 번의 화재 속에서도 계속 번창해지만 한국전쟁 때 불탄 후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읍치 주변에는 화려한 경치만큼 아름다웠던 海山亭과 帶湖亭이 표시되어 있다. 유점사 밑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고성군은 일제시대의 고성군 고성면,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 수동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북쪽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 고성군이다. 고을의 서쪽에는 金剛山이 있다. 금강산의 楡店寺 근처에서 발원한 南江은 지도에서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남쪽까지 흐르며 다시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동해와 만난다. 東流하는 작은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는 潟湖가 많이 나타난다. 고을의 바닷가 쪽은 지금 海金剛이라 불리며, 금강산 쪽은 外金剛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다른 공간에 비해 매우 확대·강조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三日浦는 주위 약 5.8km의 호수로서 關東八景의 하나였다. 호수 가운데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위의 정자가 四仙亭이다. 호수와 정자의 이름 모두 이곳의 절경에 끌려 삼일 동안 머물렀다는 述郞, 南郞, 永郞, 安祥 등 신라의 유명한 네 화랑과 관련이 깊다. 금강산 쪽으로는 금강산의 4대 사찰에 해당하는 楡店寺와 新溪寺 등이 표시되어 있다. 두 사찰 모두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여러 번의 화재 속에서도 계속 번창해지만 한국전쟁 때 불탄 후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읍치 주변에는 화려한 경치만큼 아름다웠던 海山亭과 帶湖亭이 표시되어 있다. 유점사 밑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關東은 조선시대에 강원도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지금은 남한의 강원도 전체와 경상도 울진군 그리고 북한의 법동군·문천시·원산시·법동군·고산군·안변군·통천군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에 해당한다. 강원도는 총 26개의 고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찰사 소재지는 원주였다. 지도에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縣''으로 표시된 것은 고려와 조선 초에 다른 고을에 來屬된 廢縣들이다. 지도에는 驛의 표시가 자세한데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察訪驛인 춘천의 保安驛과 양양의 祥雲驛은 직사각형 안에 특별히표시하였다. 군사 시설로는 평해의 越松浦鎭과 북쪽 회양 부근의 烽燧 표시가 유일하다.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이 지나가고 있으며, 서쪽으로 수많은 산줄기가 뻗어나가고 있는데 산줄기 위에는 산과 고개의 표시도 자세하다. 백두대간 서쪽의 가장 북쪽으로는 臨津上流라 표시된 임진강이, 중간에는 龍津上流라 표시된 북한강이, 남쪽으로는 漢江上流라 표시된 남한강이 흐르며, 백두대간 동쪽으로는 작은 하천들이 東流하여 동해로 빠져나가고 있다. 동해안쪽으로는 潟湖에 해당하는 수많은 호수들이 표시되어 있다. 강릉 서쪽에는 5대 史庫의 하나였던 오대산사고가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이 지도에서 유일한 사찰표시인 月精寺가 보이고 있다. 기타 영월에 있었던 단종의 무덤인 莊陵이 표시되어 있으며, 지금 백암온천으로 개발된 평해의 溫井과 서북쪽 伊川의 溫井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關東은 조선시대에 강원도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지금은 남한의 강원도 전체와 경상도 울진군 그리고 북한의 법동군·문천시·원산시·법동군·고산군·안변군·통천군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에 해당한다. 강원도는 총 26개의 고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찰사 소재지는 원주였다. 지도에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縣''으로 표시된 것은 고려와 조선 초에 다른 고을에 來屬된 廢縣들이다. 지도에는 驛의 표시가 자세한데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察訪驛인 춘천의 保安驛과 양양의 祥雲驛은 직사각형 안에 특별히표시하였다. 군사 시설로는 평해의 越松浦鎭과 북쪽 회양 부근의 烽燧 표시가 유일하다.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이 지나가고 있으며, 서쪽으로 수많은 산줄기가 뻗어나가고 있는데 산줄기 위에는 산과 고개의 표시도 자세하다. 백두대간 서쪽의 가장 북쪽으로는 臨津上流라 표시된 임진강이, 중간에는 龍津上流라 표시된 북한강이, 남쪽으로는 漢江上流라 표시된 남한강이 흐르며, 백두대간 동쪽으로는 작은 하천들이 東流하여 동해로 빠져나가고 있다. 동해안쪽으로는 潟湖에 해당하는 수많은 호수들이 표시되어 있다. 강릉 서쪽에는 5대 史庫의 하나였던 오대산사고가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이 지도에서 유일한 사찰표시인 月精寺가 보이고 있다. 기타 영월에 있었던 단종의 무덤인 莊陵이 표시되어 있으며, 지금 백암온천으로 개발된 평해의 溫井과 서북쪽 伊川의 溫井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금성현은 일제시대의 김화군 원동면, 원남면, 원북면, 금성면, 창도면, 통구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 금화군과 창도군 일대이다. 북쪽 회양에서 들어온 북한강의 상류가 고을 동쪽을 지나 남쪽 낭천으로 흘러간다. 南大川(지금의 금성천)이 고을 서북쪽의 물을 받아 동남쪽으로 흘러 錢浦에서 북한강 본류에 합쳐진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북쪽의 白亦山으로부터 고을의 鎭山 慶坡山을 거쳐 읍치에 이르는 산줄기의 모습이다. 南大川이 고을의 앞쪽을 휘감아 돌아가고, 강 건너에 자리잡은 南山의 형세로 보아 풍수적 관념이 매우 강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다른 지도와 달리 樓閣과 亭子를 비롯하여 작은 섬과 다리까지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고을의 북쪽에 있는 岐城面과 동쪽에 있는 通口面은 고려때 병합된 廢縣의 이름이 그대로 面으로 된 경우이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와 驛의 표시가 자세하고, 지도 오른쪽의 金剛路를 통해 멀지 않은 곳에 金剛山이 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금성현은 일제시대의 김화군 원동면, 원남면, 원북면, 금성면, 창도면, 통구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 금화군과 창도군 일대이다. 북쪽 회양에서 들어온 북한강의 상류가 고을 동쪽을 지나 남쪽 낭천으로 흘러간다. 南大川(지금의 금성천)이 고을 서북쪽의 물을 받아 동남쪽으로 흘러 錢浦에서 북한강 본류에 합쳐진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북쪽의 白亦山으로부터 고을의 鎭山 慶坡山을 거쳐 읍치에 이르는 산줄기의 모습이다. 南大川이 고을의 앞쪽을 휘감아 돌아가고, 강 건너에 자리잡은 南山의 형세로 보아 풍수적 관념이 매우 강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다른 지도와 달리 樓閣과 亭子를 비롯하여 작은 섬과 다리까지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고을의 북쪽에 있는 岐城面과 동쪽에 있는 通口面은 고려때 병합된 廢縣의 이름이 그대로 面으로 된 경우이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와 驛의 표시가 자세하고, 지도 오른쪽의 金剛路를 통해 멀지 않은 곳에 金剛山이 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김화현은 일제시대의 김화읍, 서면, 근남면, 근동면, 근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김화읍 읍내리에 있었다. 고을 동·남쪽의 물을 받은 남대천이 고을 서쪽으로흐르는 한탄강과 합류한다. 지도에는 동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읍치를 둘러싸고, 사이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겹겹이 감싼 전형적인 풍수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 있는 柳琳大捷碑는 병자호란 때 平壤兵使로서 이 고을에서 승리를 거둔 柳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忠烈祠도 이 고을에서 平壤監司로 있었던 洪命耉를 배향하여 세운 것이다. 또한 고개의 표시를 ''古介''와 ''峴''으로 표시하여 두 가지가 당시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충열사 아래쪽에 있는 郵?은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종6품의 銀溪察訪이 머무는 곳으로서 生昌驛과는 구별짓고 있다.(이기봉)
김화현은 일제시대의 김화읍, 서면, 근남면, 근동면, 근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김화읍 읍내리에 있었다. 고을 동·남쪽의 물을 받은 남대천이 고을 서쪽으로흐르는 한탄강과 합류한다. 지도에는 동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읍치를 둘러싸고, 사이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겹겹이 감싼 전형적인 풍수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 있는 柳琳大捷碑는 병자호란 때 平壤兵使로서 이 고을에서 승리를 거둔 柳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忠烈祠도 이 고을에서 平壤監司로 있었던 洪命耉를 배향하여 세운 것이다. 또한 고개의 표시를 ''古介''와 ''峴''으로 표시하여 두 가지가 당시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충열사 아래쪽에 있는 郵?은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종6품의 銀溪察訪이 머무는 곳으로서 生昌驛과는 구별짓고 있다.(이기봉)
낭천현은 지금의 사내면을 제외한 화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천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다. 동북쪽 金城縣에서 들어온 북한강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지나 서남쪽의 춘천으로 빠져나가는데 이곳에서는 북한강이 母津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지금 화천댐이 만들어져 파로호라 불리고 있으며, 水洞里 부근에는 평화의 댐이 만들어지다 중단된 곳이다. 고을의 鎭山은 향교 아래쪽에 있는 牲山이다. 읍치는 서쪽에서 들어온 산줄기와 동쪽의 두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南向의 일반적 입지와는 다르다. 읍치 주변에 龍首와 龍池 등 龍과 관련된 지명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음이 재미있다. 지도에는 面의 이름과 함께 중요한 마을의 이름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읍치 위쪽의 新邑里는 1570년(선조 3)과 1605년에 대 홍수가 발생하여 읍치를 잠시 옮긴 곳이며, 1633년(인조 11)에 지도에 나오는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기타 읍치 오른쪽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낭천현은 지금의 사내면을 제외한 화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천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다. 동북쪽 金城縣에서 들어온 북한강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지나 서남쪽의 춘천으로 빠져나가는데 이곳에서는 북한강이 母津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지금 화천댐이 만들어져 파로호라 불리고 있으며, 水洞里 부근에는 평화의 댐이 만들어지다 중단된 곳이다. 고을의 鎭山은 향교 아래쪽에 있는 牲山이다. 읍치는 서쪽에서 들어온 산줄기와 동쪽의 두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南向의 일반적 입지와는 다르다. 읍치 주변에 龍首와 龍池 등 龍과 관련된 지명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음이 재미있다. 지도에는 面의 이름과 함께 중요한 마을의 이름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읍치 위쪽의 新邑里는 1570년(선조 3)과 1605년에 대 홍수가 발생하여 읍치를 잠시 옮긴 곳이며, 1633년(인조 11)에 지도에 나오는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기타 읍치 오른쪽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삼척부는 삼척시, 동해시의 옛 북평읍 지역과 태백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삼척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서쪽으로 지나가는 白頭大幹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葛夜山 밑에 石築의 성곽을 두르고 있으며, 읍성 안에는 客舍 건물의 표시가 실제 모습과 비슷하여 인상적이다. 읍성 왼쪽에 있는 竹西樓는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많은 詩人·墨客들이 다녀간 곳이다. 五十川 가의 절벽 위에 지어져 있어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지금도 보물 21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위쪽의 鎭營은 三陟浦鎭으로서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다. 鎭營 왼쪽의 平陵驛은 종6품관인 察訪이 파견되어 15개의 屬驛을 관리하던 察訪驛이었다. 한편 삼척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 조상 穆祖가 함경도 덕원으로 옮기기 전에 살았던 곳으로서 목조의 외가고을이라고 하여 1393년(태조 2)에 府로 승격되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 있는 東山陵이 목조의 부모 무덤인 皇考陵과皇 陵으로서 목조가 이 고을에 살았던 터가 그 밑에 있었다 한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낙동강의 發源地로 알려진 黃池가 표시되어 있다. 작은 연못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표시되어 있어 당시 중요한 장소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옆에는 신라 때五岳의 하나인 北岳으로 여겨져 中祀에 기재되었던 太白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삼척부는 삼척시, 동해시의 옛 북평읍 지역과 태백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삼척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서쪽으로 지나가는 白頭大幹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葛夜山 밑에 石築의 성곽을 두르고 있으며, 읍성 안에는 客舍 건물의 표시가 실제 모습과 비슷하여 인상적이다. 읍성 왼쪽에 있는 竹西樓는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많은 詩人·墨客들이 다녀간 곳이다. 五十川 가의 절벽 위에 지어져 있어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지금도 보물 21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위쪽의 鎭營은 三陟浦鎭으로서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다. 鎭營 왼쪽의 平陵驛은 종6품관인 察訪이 파견되어 15개의 屬驛을 관리하던 察訪驛이었다. 한편 삼척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 조상 穆祖가 함경도 덕원으로 옮기기 전에 살았던 곳으로서 목조의 외가고을이라고 하여 1393년(태조 2)에 府로 승격되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 있는 東山陵이 목조의 부모 무덤인 皇考陵과皇 陵으로서 목조가 이 고을에 살았던 터가 그 밑에 있었다 한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낙동강의 發源地로 알려진 黃池가 표시되어 있다. 작은 연못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표시되어 있어 당시 중요한 장소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옆에는 신라 때五岳의 하나인 北岳으로 여겨져 中祀에 기재되었던 太白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이천군 안협면, 동면, 서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이다. 북쪽의 이천에서 들어온 임진강 본류가 고을의 서쪽을 흐르며, 西流하는 작은 하천들을 합해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고을의 鎭山은 동북쪽의 평강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읍치 뒤쪽에서 솟아난 晩景山이다. 읍치는 鎭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있고, 안쪽의 작은 하천이 읍치를 감싸며 바깥쪽의 큰하천에 합류하는 등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왼쪽 祭堂山 앞의 임진강 이름은 祭堂淵이며, 강가 바위 위에는 祭堂의 터가 당시까지 남아 있었다 한다. 고려말에 北元 잔당인 ??(타타르) 부대가 침입하였는데 이곳에 이르러 바라보니 만여 명의 기병이 앞쪽에 진을 치고 있는 것 같아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고을에서는 이후 이곳에 祭堂을 만들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날이 가물 때 특히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미 祭堂이 사라진 것을 보아 제사 자체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기타 지도 아래쪽에 보이는 ''去京路'', ''鐵原去路''는 ''서울가는 길'', ''철원가는 길''이란 뜻이다.(이기봉)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이천군 안협면, 동면, 서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이다. 북쪽의 이천에서 들어온 임진강 본류가 고을의 서쪽을 흐르며, 西流하는 작은 하천들을 합해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고을의 鎭山은 동북쪽의 평강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읍치 뒤쪽에서 솟아난 晩景山이다. 읍치는 鎭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있고, 안쪽의 작은 하천이 읍치를 감싸며 바깥쪽의 큰하천에 합류하는 등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왼쪽 祭堂山 앞의 임진강 이름은 祭堂淵이며, 강가 바위 위에는 祭堂의 터가 당시까지 남아 있었다 한다. 고려말에 北元 잔당인 ??(타타르) 부대가 침입하였는데 이곳에 이르러 바라보니 만여 명의 기병이 앞쪽에 진을 치고 있는 것 같아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고을에서는 이후 이곳에 祭堂을 만들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날이 가물 때 특히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미 祭堂이 사라진 것을 보아 제사 자체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기타 지도 아래쪽에 보이는 ''去京路'', ''鐵原去路''는 ''서울가는 길'', ''철원가는 길''이란 뜻이다.(이기봉)
양구현은 지금의 양구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 동북쪽에서 발원한 서천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수입천이 합류하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두 하천의 합류점은 지금의 화천댐 파로호 위쪽에 해당한다. 지도에는 읍치가 매우 과장·확대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동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겹겹이 쌓여 있고 하천이 읍치를 돌아나가며, 하천너머 남쪽으로 산줄기가 다시 겹겹이 이어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투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위쪽의 方山面은 조선 초에 병합된 方山廢縣이다. 그 옆에 있는 禁山은 나라에서 특별히 나무의 伐採를 금한 곳으로서 만약 벌채한 것이 적발될 경우에는 이 고을의 관리가 罷職까지 당했다. 그 오른쪽의 亥安面 역시 조선 초에 춘천으로부터 옮겨온 亥安所이다. 이곳의 물줄기는 실제로는 동남쪽의 인제로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양구 西川의 상류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 또한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모습을 하고 있어 한국전쟁 때 미군들에 의해 펀치볼로 이름 붙여진 곳이기도 하다. 한 때는 운석이 떨어진 곳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지만 하천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전형적인 盆地로 판명되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분지 지형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으로서 지도화되어 나온다.(이기봉)
양구현은 지금의 양구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 동북쪽에서 발원한 서천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수입천이 합류하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두 하천의 합류점은 지금의 화천댐 파로호 위쪽에 해당한다. 지도에는 읍치가 매우 과장·확대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동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겹겹이 쌓여 있고 하천이 읍치를 돌아나가며, 하천너머 남쪽으로 산줄기가 다시 겹겹이 이어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투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위쪽의 方山面은 조선 초에 병합된 方山廢縣이다. 그 옆에 있는 禁山은 나라에서 특별히 나무의 伐採를 금한 곳으로서 만약 벌채한 것이 적발될 경우에는 이 고을의 관리가 罷職까지 당했다. 그 오른쪽의 亥安面 역시 조선 초에 춘천으로부터 옮겨온 亥安所이다. 이곳의 물줄기는 실제로는 동남쪽의 인제로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양구 西川의 상류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 또한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모습을 하고 있어 한국전쟁 때 미군들에 의해 펀치볼로 이름 붙여진 곳이기도 하다. 한 때는 운석이 떨어진 곳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지만 하천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전형적인 盆地로 판명되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분지 지형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으로서 지도화되어 나온다.(이기봉)
양양부는 양양군과 영랑호 남쪽의 속초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었던 雪嶽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색약수로 유명한 五色嶺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읍치에는 土築과 石築이 섞여 있었던 읍성이 있었음이 지도에도 보인다. 읍성의 오른쪽에는 東海廟가 표시되어 있는데 동해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서 祀典에는 中祀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위쪽에는 신라의 義湘(625-702)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洛山寺와 150m 절벽 위에 지어졌다는 義相臺 등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서쪽의 백두대간 부근에도 689년(신라 문무왕 9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靈穴寺를 비롯한 사찰의 표시가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祥雲驛은 15개의 屬驛을 거느린 찰방역이며 해안가에는 潟湖에 해당하는 靑草湖·雙湖·浦麻湖 등이 보이고 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洞山縣은 고려 초에 병합된 폐현을 가리킨다.(이기봉)
양양부는 양양군과 영랑호 남쪽의 속초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었던 雪嶽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색약수로 유명한 五色嶺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읍치에는 土築과 石築이 섞여 있었던 읍성이 있었음이 지도에도 보인다. 읍성의 오른쪽에는 東海廟가 표시되어 있는데 동해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서 祀典에는 中祀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위쪽에는 신라의 義湘(625-702)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洛山寺와 150m 절벽 위에 지어졌다는 義相臺 등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서쪽의 백두대간 부근에도 689년(신라 문무왕 9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靈穴寺를 비롯한 사찰의 표시가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祥雲驛은 15개의 屬驛을 거느린 찰방역이며 해안가에는 潟湖에 해당하는 靑草湖·雙湖·浦麻湖 등이 보이고 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洞山縣은 고려 초에 병합된 폐현을 가리킨다.(이기봉)
영월부는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영월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월읍 영흥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조선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인 莊陵이다. 단종이 세조에 의해 廢位된 후 유폐된 곳은 지도 왼쪽 아래에 있는 淸 浦이다. 청령포는 뒤로는 기암절벽에 의해 막혀 있고 앞으로는 남한강이 휘감아 돌아 ''육지 속의 섬''과 같은 곳이다. 17세에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후영월 戶長 嚴興道에 의해 시체가 거두어져 魯山墓라 칭해졌다. 이후 1698년(숙종 24)에 단종으로 복위되고 莊陵으로 개칭되었으며, 고을도 郡에서 府로 승격되었다. 장릉 앞쪽의 彰節祠는 단종에 대한 충신으로 이름난 死六臣과 生六臣 및 엄흥도를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졌다. 무덤 앞쪽의 報德寺는 신라 문무왕 때 義湘(625-702)에 의해 智德寺란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1726년(영조2)에 장릉의 陵寺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고을의 서쪽에는 주천강이, 동쪽에는동강댐으로 유명한 동강이 읍치앞에서 만나 옥동천을 합류시키며 동남쪽 永春으로 빠져나간다.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錦江亭은 40m 위의 절벽 위에 만들어져 주변을 조망하기에 알맞은 곳으로서 지금도 영월읍 영흥 2리에 남아 있다.(이기봉)
영월부는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영월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월읍 영흥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조선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인 莊陵이다. 단종이 세조에 의해 廢位된 후 유폐된 곳은 지도 왼쪽 아래에 있는 淸 浦이다. 청령포는 뒤로는 기암절벽에 의해 막혀 있고 앞으로는 남한강이 휘감아 돌아 ''육지 속의 섬''과 같은 곳이다. 17세에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후영월 戶長 嚴興道에 의해 시체가 거두어져 魯山墓라 칭해졌다. 이후 1698년(숙종 24)에 단종으로 복위되고 莊陵으로 개칭되었으며, 고을도 郡에서 府로 승격되었다. 장릉 앞쪽의 彰節祠는 단종에 대한 충신으로 이름난 死六臣과 生六臣 및 엄흥도를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졌다. 무덤 앞쪽의 報德寺는 신라 문무왕 때 義湘(625-702)에 의해 智德寺란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1726년(영조2)에 장릉의 陵寺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고을의 서쪽에는 주천강이, 동쪽에는동강댐으로 유명한 동강이 읍치앞에서 만나 옥동천을 합류시키며 동남쪽 永春으로 빠져나간다.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錦江亭은 40m 위의 절벽 위에 만들어져 주변을 조망하기에 알맞은 곳으로서 지금도 영월읍 영흥 2리에 남아 있다.(이기봉)
울릉도는 강원도 삼척부에서 관장하였으며, 지금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해당한다. 이 섬은 본래 于山國으로 512년(신라 지증왕 13) 신라의 異斯夫가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게 한 것이 역사에 나오는 첫 기록이다. 1438년(세종 20)에 萬戶 南顥를 파견하여 70여명을 잡아오게 한 후 공식적으로는 빈 섬으로 남게 되었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갔던 동래의 水軍 安龍福이 일본 어부에게 납치되어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이후 1697년(숙종 23) 일본이 쓰시마주를 통하여 울릉도의 조선 영토권을 인정하고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킨다는 것을 통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1702년(숙종 28) 이준명, 최재홍 등이 울릉도를 답사하여 圖形과 특산물을 임금에게 헌납하였지만 이후에도 계속 空島 정책을 폈다. 19세기 후반에 일본인에 의한 채벌과어업이 성행하자 조선에서는 이민을장려하고 1895년에 島監을 설치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倭船倉이 있었던 곳이 표시되어 있어 일본 어부의 출입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지도 왼쪽의 ''刻板立標''와 오른쪽의 ''刻石立標''는 일본과의 소유권 분쟁 후 조선의 영토라는 내용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船泊可居라 표시된 곳은 지금 울릉도 군청소재지인 도동항 부근으로 보인다. 곳곳에 옛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基地가 표시되어 있으며, 돌무덤으로 여겨지는 石葬도 써넣었다. 그리고 위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영향을 받아 난대성 식물이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竹田이 표시되어 있다. 기타 坤·巽·艮·乾 등은 각각 서남·남동·동북·서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이기봉)
울릉도는 강원도 삼척부에서 관장하였으며, 지금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해당한다. 이 섬은 본래 于山國으로 512년(신라 지증왕 13) 신라의 異斯夫가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게 한 것이 역사에 나오는 첫 기록이다. 1438년(세종 20)에 萬戶 南顥를 파견하여 70여명을 잡아오게 한 후 공식적으로는 빈 섬으로 남게 되었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갔던 동래의 水軍 安龍福이 일본 어부에게 납치되어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이후 1697년(숙종 23) 일본이 쓰시마주를 통하여 울릉도의 조선 영토권을 인정하고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킨다는 것을 통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1702년(숙종 28) 이준명, 최재홍 등이 울릉도를 답사하여 圖形과 특산물을 임금에게 헌납하였지만 이후에도 계속 空島 정책을 폈다. 19세기 후반에 일본인에 의한 채벌과어업이 성행하자 조선에서는 이민을장려하고 1895년에 島監을 설치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倭船倉이 있었던 곳이 표시되어 있어 일본 어부의 출입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지도 왼쪽의 ''刻板立標''와 오른쪽의 ''刻石立標''는 일본과의 소유권 분쟁 후 조선의 영토라는 내용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船泊可居라 표시된 곳은 지금 울릉도 군청소재지인 도동항 부근으로 보인다. 곳곳에 옛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基地가 표시되어 있으며, 돌무덤으로 여겨지는 石葬도 써넣었다. 그리고 위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영향을 받아 난대성 식물이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竹田이 표시되어 있다. 기타 坤·巽·艮·乾 등은 각각 서남·남동·동북·서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이기봉)
울진현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근남면, 원남면, 서면, 죽변면, 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울진읍 읍내리에 있었다. 읍치주변의 평지가 확대·과장되어 있고서쪽의 산지 지역은 극히 소략하게 처리되었다. 고을 앞쪽을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두천천, 불영천, 왕피천으로 나누어지는데 지도에서는 구별하기가 어렵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보이는 安逸王山이며, 읍치는 작은 둔덕에 의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왼쪽에 보이는 佛影寺는 651년(신라 진덕왕 5)에 의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無影塔이라는 3층석탑이 신라 때의 유일한 문화재로 남아 있다. 그 외에 보물 703호 응진전 등이 보전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聖留窟은 석회암 동굴로서 지금도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에도 이 동굴이 이미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위쪽의 興富庫는 興富驛이 잘못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울진현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근남면, 원남면, 서면, 죽변면, 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울진읍 읍내리에 있었다. 읍치주변의 평지가 확대·과장되어 있고서쪽의 산지 지역은 극히 소략하게 처리되었다. 고을 앞쪽을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두천천, 불영천, 왕피천으로 나누어지는데 지도에서는 구별하기가 어렵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보이는 安逸王山이며, 읍치는 작은 둔덕에 의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왼쪽에 보이는 佛影寺는 651년(신라 진덕왕 5)에 의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無影塔이라는 3층석탑이 신라 때의 유일한 문화재로 남아 있다. 그 외에 보물 703호 응진전 등이 보전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聖留窟은 석회암 동굴로서 지금도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에도 이 동굴이 이미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위쪽의 興富庫는 興富驛이 잘못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원주목은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의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북내면 동쪽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원주 시내 일산동 일대에 있었다. 신라 때 北原小京이었으며 下代 혼란기에는 궁예가 부하로 있었던 양길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강원도 관찰사의 소재지였는데 지도에는 읍치에 營으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에 치악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지도에는 雉岳寺를 통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치악산 동쪽의 물은 주천강에 모여 동남쪽 남한강 상류로 들어가고, 치악산 서쪽의 물은 섬강에 모여 서남쪽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주천강 유역은 주천폐현이 있던 자리로서 酒泉倉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역에 있는 興原倉은 고려 12漕倉의 하나였다. 조선 초에도 원주·영월·평창·정선·횡성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의 역할을 하였으나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미 원주의 田稅만 모으는 상태였다. 지금의 부론면 흥호리 창말에 해당한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신라 때 禪宗 9山의 하나였던 法興寺가 표시되어 있고 그 왼쪽에는 義湘(625-702)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九龍寺도 보인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丹丘驛에는 察訪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며 읍치 위쪽의 胎峯은 고려 공민왕의 胎가 뭍힌 곳이다. 기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지도 오른쪽에 黃腸이란 이름으로 두 군데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원주목은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의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북내면 동쪽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원주 시내 일산동 일대에 있었다. 신라 때 北原小京이었으며 下代 혼란기에는 궁예가 부하로 있었던 양길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강원도 관찰사의 소재지였는데 지도에는 읍치에 營으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에 치악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지도에는 雉岳寺를 통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치악산 동쪽의 물은 주천강에 모여 동남쪽 남한강 상류로 들어가고, 치악산 서쪽의 물은 섬강에 모여 서남쪽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주천강 유역은 주천폐현이 있던 자리로서 酒泉倉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역에 있는 興原倉은 고려 12漕倉의 하나였다. 조선 초에도 원주·영월·평창·정선·횡성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의 역할을 하였으나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미 원주의 田稅만 모으는 상태였다. 지금의 부론면 흥호리 창말에 해당한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신라 때 禪宗 9山의 하나였던 法興寺가 표시되어 있고 그 왼쪽에는 義湘(625-702)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九龍寺도 보인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丹丘驛에는 察訪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며 읍치 위쪽의 胎峯은 고려 공민왕의 胎가 뭍힌 곳이다. 기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지도 오른쪽에 黃腸이란 이름으로 두 군데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이천부는 일제시대의 안협면·서면·동면을 제외한 이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이천군과 판교군 일대이다. 원래는 경기도에 속했으나 조선 태종 때 강원도로 이관된 곳이다. 광해군이 세자가 되어 임진왜란 때 피난했던 곳 중의 하나로서 왕위에 오른 후 府로 승격시켰다. 蛇島 북쪽에서 흘러오는 임진강 본류는 안변의 경계 너머까지 이어져 있다. 防墻峙는 강가 옆으로 높은 산이 우뚝 솟아있는 要衝地로서 한 명이 關門을 지키면 1만 명의 적도 막을 수 있는 곳이라 한다. 蛇島 옆에 있는 伊川舊鎭基는 이러한 要衝地를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이며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이미 廢止되었다. 그 밑에 있는 溫井은 조선 세종이 行宮을 짓게 하고 다녀갈 정도로 유명한 온천이며 지금도 잘 개발되어 있다. 蛇島 오른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고미탄천으로서 평강을 지나 안변과의 경계선에서 흘러 들어온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城山 아래에 풍수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天遊堂·說雲亭 등의 유명한 정자까지 표시하였다.(이기봉)
이천부는 일제시대의 안협면·서면·동면을 제외한 이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이천군과 판교군 일대이다. 원래는 경기도에 속했으나 조선 태종 때 강원도로 이관된 곳이다. 광해군이 세자가 되어 임진왜란 때 피난했던 곳 중의 하나로서 왕위에 오른 후 府로 승격시켰다. 蛇島 북쪽에서 흘러오는 임진강 본류는 안변의 경계 너머까지 이어져 있다. 防墻峙는 강가 옆으로 높은 산이 우뚝 솟아있는 要衝地로서 한 명이 關門을 지키면 1만 명의 적도 막을 수 있는 곳이라 한다. 蛇島 옆에 있는 伊川舊鎭基는 이러한 要衝地를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이며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이미 廢止되었다. 그 밑에 있는 溫井은 조선 세종이 行宮을 짓게 하고 다녀갈 정도로 유명한 온천이며 지금도 잘 개발되어 있다. 蛇島 오른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고미탄천으로서 평강을 지나 안변과의 경계선에서 흘러 들어온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城山 아래에 풍수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天遊堂·說雲亭 등의 유명한 정자까지 표시하였다.(이기봉)
인제현은 지금의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인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인제읍 상동리 일대에 있었다. 북한강의 지류 소양강의 최 상류에 해당하며 지금은 소양댐이 만들어져 읍치 앞까지 물에 잠겨 있다. 읍치는 양구 경계의 廣峙로부터 뻗어 내려온 고을의 鎭山 伏龍山 아래에 있는데 읍치 뒷산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북동쪽에서 내려온 소양강과 남쪽에서 흘러온 내린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合江亭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지도 아래쪽에는 雪岳山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읍치의 동쪽에 있다. 설악산 위쪽에 보이는 深源寺는 1783년(정조 7)부터 백담사로 불리게 된 절로서 1988년에 전두환 부부가 1년 동안 유폐되어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지도에는 面과 驛뿐만 아니라 다른 강원도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한 마을 이름까지 적어 놓았다. 또한 고을의 동쪽으로 지나가는 백두대간 위에는 진부령, 미시령, 오색령 등 고개를 매우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다. 기타 하천변에 자주 보이는 ○○遷에서 '遷'이란 '강가를 돌아가는 벼랑길'이란 뜻이다.(이기봉)
인제현은 지금의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인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인제읍 상동리 일대에 있었다. 북한강의 지류 소양강의 최 상류에 해당하며 지금은 소양댐이 만들어져 읍치 앞까지 물에 잠겨 있다. 읍치는 양구 경계의 廣峙로부터 뻗어 내려온 고을의 鎭山 伏龍山 아래에 있는데 읍치 뒷산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북동쪽에서 내려온 소양강과 남쪽에서 흘러온 내린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合江亭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지도 아래쪽에는 雪岳山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읍치의 동쪽에 있다. 설악산 위쪽에 보이는 深源寺는 1783년(정조 7)부터 백담사로 불리게 된 절로서 1988년에 전두환 부부가 1년 동안 유폐되어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지도에는 面과 驛뿐만 아니라 다른 강원도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한 마을 이름까지 적어 놓았다. 또한 고을의 동쪽으로 지나가는 백두대간 위에는 진부령, 미시령, 오색령 등 고개를 매우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다. 기타 하천변에 자주 보이는 ○○遷에서 '遷'이란 '강가를 돌아가는 벼랑길'이란 뜻이다.(이기봉)
정선군은 지금의 신동읍과 임계면을 제외한 정선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정선읍 봉양리 일대에 있었다. 북동쪽에서 들어온 조양강이 읍치 앞쪽을 감아 돌아 下 村에 이르고 지금의 사북읍·고한읍에서 내려오는 동남천과 만나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하미촌 아래쪽은 동강댐 건설 논의로 널리 알려진 영월의 동강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飛鳳山 아래에 실제보다훨씬 확대·강조되어 있다. 또한 겹겹이 내려오는 산줄기와 휘돌아 가는 물줄기의 모습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위쪽의 餘粮驛에는 한국인의 정서를 잘 그린 정선아리랑의 발생지 아우라지 나루가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이곳에서부터 서울 사람들의 땔감과 목재로 사용하기 위한 뱃사공들의 뗏목이 흘러 내려갔다고 한다. 그 옆에 써 있는 花遷은 지금은 ''꽃벼루''라고 하는데 여기서 ''遷''은 강가의 벼랑길을 의미한다. 지도 아래쪽의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간략한 지도이지만 面뿐만 아니라 檜洞, 瓦坪, 熊洞, 下 村 등 중요한 마을도 표시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정선군은 지금의 신동읍과 임계면을 제외한 정선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정선읍 봉양리 일대에 있었다. 북동쪽에서 들어온 조양강이 읍치 앞쪽을 감아 돌아 下 村에 이르고 지금의 사북읍·고한읍에서 내려오는 동남천과 만나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하미촌 아래쪽은 동강댐 건설 논의로 널리 알려진 영월의 동강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飛鳳山 아래에 실제보다훨씬 확대·강조되어 있다. 또한 겹겹이 내려오는 산줄기와 휘돌아 가는 물줄기의 모습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위쪽의 餘粮驛에는 한국인의 정서를 잘 그린 정선아리랑의 발생지 아우라지 나루가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이곳에서부터 서울 사람들의 땔감과 목재로 사용하기 위한 뱃사공들의 뗏목이 흘러 내려갔다고 한다. 그 옆에 써 있는 花遷은 지금은 ''꽃벼루''라고 하는데 여기서 ''遷''은 강가의 벼랑길을 의미한다. 지도 아래쪽의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간략한 지도이지만 面뿐만 아니라 檜洞, 瓦坪, 熊洞, 下 村 등 중요한 마을도 표시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철원부는 철원군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어운면, 북면, 묘장면과 포천군 관인면, 연천군 신서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철원읍 관전리에 있었다. 고을은 내륙의 광활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도에도 平原이란 글자를 넣어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주기를 보면 밭이 논의 열 배를 넘고 있어 아직도 논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후삼국시기 태봉의 궁예가 都城를 만들었던 곳을 弓王故都로 표시하였다. 이 도성에는 外城과 內城이 있었는데 모두 土城이었다고 하며 지금은 휴전선 안쪽 비무장지대에 있다. 읍치에는 아주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지만 다른 공간에 비해 과장·확대되어 있고 풍수적 관념이 들어가 있다. 그 아래에 있는 遼東伯祠宇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여진족 建州衛의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한 金應河(1580-1618)를 배향하여 1666년(현종 7)에 賜額받은 褒忠祠이다. 고을은 두 개의 큰 물줄기로 갈라진다. 지도 오른쪽이 임진강의 큰 지류인 한탄강이고 왼쪽이 마곡천이다. 철원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용암대지로 나오는데 오른쪽 한탄강은 바로 그 용암이 지나간 자리에 만들어진 하천이다. 따라서 끝없이 펼쳐진 평원 아래로 강가의 절벽이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문 풍경을 만들고 있다. 한탄강가에 있는 孤石亭은 이러한 한탄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옆에 지어진 정자이다. 그 풍경이 아름다워 일찍이 신라의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며, 조선 중기의 義賊 임꺽정이 숨어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이기봉)
철원부는 철원군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어운면, 북면, 묘장면과 포천군 관인면, 연천군 신서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철원읍 관전리에 있었다. 고을은 내륙의 광활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도에도 平原이란 글자를 넣어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주기를 보면 밭이 논의 열 배를 넘고 있어 아직도 논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후삼국시기 태봉의 궁예가 都城를 만들었던 곳을 弓王故都로 표시하였다. 이 도성에는 外城과 內城이 있었는데 모두 土城이었다고 하며 지금은 휴전선 안쪽 비무장지대에 있다. 읍치에는 아주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지만 다른 공간에 비해 과장·확대되어 있고 풍수적 관념이 들어가 있다. 그 아래에 있는 遼東伯祠宇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여진족 建州衛의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한 金應河(1580-1618)를 배향하여 1666년(현종 7)에 賜額받은 褒忠祠이다. 고을은 두 개의 큰 물줄기로 갈라진다. 지도 오른쪽이 임진강의 큰 지류인 한탄강이고 왼쪽이 마곡천이다. 철원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용암대지로 나오는데 오른쪽 한탄강은 바로 그 용암이 지나간 자리에 만들어진 하천이다. 따라서 끝없이 펼쳐진 평원 아래로 강가의 절벽이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문 풍경을 만들고 있다. 한탄강가에 있는 孤石亭은 이러한 한탄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옆에 지어진 정자이다. 그 풍경이 아름다워 일찍이 신라의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며, 조선 중기의 義賊 임꺽정이 숨어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이기봉)
춘천부는 춘천시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춘천 시내 요선동 일대이다. 북한강 중류에 있는데 지도의 왼쪽에 있는 吾梅江이 북한강 본류이고 오른쪽이 지류소양강에 해당한다. 고을의 鎭山은 鳳義山이며 읍치는 그 아래에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江倉은 소양강창으로서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의 전세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이었다. 北內面에서白鷺洲에 이르는 곳은 ≪擇里志≫에 ''토질이 단단하고 기후가 고요하다. 강과 산이 맑고 훤하며 땅이 기름져서 여러 대를 사는 사대부가 많다.''고 기록되어 있는 지역이다. 지금의 춘천 시내 우두동 일대이다. 그 옆에 있는 壯節公墓는 고려 태조 왕건의 휘하에 있었던 신숭겸(?-927)의 묘이다. 신숭겸의 원래 이름은 能山이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팔공산 싸움에서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바쳐 위기를 모면하게 한 인물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고려 초인 973년에 창건되었고 지금도 보물 164호 회전문이 있는 淸平寺가 보이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保安驛은 29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지도에 강가에서 자주 보이는 ○○遷에서 ''遷''이란 강가의 절벽길을 의미한다. 주기에 보이는 기린면은 이 고을의 越境地로서 고려 때 병합되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금의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에 해당한다.(이기봉)
춘천부는 춘천시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춘천 시내 요선동 일대이다. 북한강 중류에 있는데 지도의 왼쪽에 있는 吾梅江이 북한강 본류이고 오른쪽이 지류소양강에 해당한다. 고을의 鎭山은 鳳義山이며 읍치는 그 아래에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江倉은 소양강창으로서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의 전세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이었다. 北內面에서白鷺洲에 이르는 곳은 ≪擇里志≫에 ''토질이 단단하고 기후가 고요하다. 강과 산이 맑고 훤하며 땅이 기름져서 여러 대를 사는 사대부가 많다.''고 기록되어 있는 지역이다. 지금의 춘천 시내 우두동 일대이다. 그 옆에 있는 壯節公墓는 고려 태조 왕건의 휘하에 있었던 신숭겸(?-927)의 묘이다. 신숭겸의 원래 이름은 能山이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팔공산 싸움에서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바쳐 위기를 모면하게 한 인물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고려 초인 973년에 창건되었고 지금도 보물 164호 회전문이 있는 淸平寺가 보이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保安驛은 29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지도에 강가에서 자주 보이는 ○○遷에서 ''遷''이란 강가의 절벽길을 의미한다. 주기에 보이는 기린면은 이 고을의 越境地로서 고려 때 병합되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금의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에 해당한다.(이기봉)
통천군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고저읍, 벽양면, 임남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총석정 남쪽과 고성군 북쪽 일부이다. 고을의 서쪽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사이사이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읍치에는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지만 다른 공간보다 확대·과장되어 있다. 또한 산이 포근히 감싼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맨 위쪽에는 바닷가에 돌기둥이 우뚝우뚝 솟은 叢石臺가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述郞, 南郞, 永郞, 安祥 등 신라의 네 화랑이 이곳에까지 와서 구경하며 놀았기 때문에 四仙峰이란 이름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 오른쪽에는 關東八景의 하나로 알려진 叢石亭이 보이며, 왼쪽에는 喚仙亭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瓮遷은 바닷가 벼랑길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말이 쌍으로 서서 다니지 못할 정도의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기타 지도 전체적으로는 간결하지만 驛, 面, 寺刹, 倉, 다리 등 당시에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대부분 표시하였다.(이기봉)
통천군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고저읍, 벽양면, 임남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총석정 남쪽과 고성군 북쪽 일부이다. 고을의 서쪽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사이사이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읍치에는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지만 다른 공간보다 확대·과장되어 있다. 또한 산이 포근히 감싼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맨 위쪽에는 바닷가에 돌기둥이 우뚝우뚝 솟은 叢石臺가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述郞, 南郞, 永郞, 安祥 등 신라의 네 화랑이 이곳에까지 와서 구경하며 놀았기 때문에 四仙峰이란 이름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 오른쪽에는 關東八景의 하나로 알려진 叢石亭이 보이며, 왼쪽에는 喚仙亭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瓮遷은 바닷가 벼랑길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말이 쌍으로 서서 다니지 못할 정도의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기타 지도 전체적으로는 간결하지만 驛, 面, 寺刹, 倉, 다리 등 당시에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대부분 표시하였다.(이기봉)
평강현은 일제시대의 평강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이다. 지도 위쪽의 分水岺은 지금의 추가령구조곡이 시작되는 곳으로서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는 철도가 지나간다. 옛날부터 이 통로는 철령과 함께 함경도와 서울을 잇는 요지였기 때문에 세 곳에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고 하며, 지도에는 그것이 三方路로 표시되어 있다. 이런 고을의 要衝地적 성격 때문에 역원과 봉수의 표시가 자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왕건에게 쫓겨난 弓裔王(?-918)이 이 삼방로 부근에서 백성들에게 잡혀 살해되었다고 하며, ≪大東輿地圖≫에는 이곳에 궁예왕의 묘가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백두대간은 이 분수령에서 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동북쪽으로 올라가다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태백산맥이 되고, 또 하나는 지도 오른쪽의 산줄기를 따라 서울까지 이어진다. 지도에서는 읍치에 대한 표현이 특징적인데 분수령에서 읍치까지 계속 이어진 산줄기와 읍치를 포근히 감싼 山勢, 아래쪽의 案山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매우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오른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 한탄강이 시작되는 곳이다.(이기봉)
평강현은 일제시대의 평강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이다. 지도 위쪽의 分水岺은 지금의 추가령구조곡이 시작되는 곳으로서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는 철도가 지나간다. 옛날부터 이 통로는 철령과 함께 함경도와 서울을 잇는 요지였기 때문에 세 곳에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고 하며, 지도에는 그것이 三方路로 표시되어 있다. 이런 고을의 要衝地적 성격 때문에 역원과 봉수의 표시가 자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왕건에게 쫓겨난 弓裔王(?-918)이 이 삼방로 부근에서 백성들에게 잡혀 살해되었다고 하며, ≪大東輿地圖≫에는 이곳에 궁예왕의 묘가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백두대간은 이 분수령에서 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동북쪽으로 올라가다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태백산맥이 되고, 또 하나는 지도 오른쪽의 산줄기를 따라 서울까지 이어진다. 지도에서는 읍치에 대한 표현이 특징적인데 분수령에서 읍치까지 계속 이어진 산줄기와 읍치를 포근히 감싼 山勢, 아래쪽의 案山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매우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오른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 한탄강이 시작되는 곳이다.(이기봉)
평창군은 평창군 평창읍, 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평창읍 중리 일대에 있었다. 봉평면에서발원한 南大川이 북쪽에서 들어와읍치를 휘감고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지금의 평창강이다. 오른쪽미탄면에 있는 하천은 지금의 창리천이며, 동면에는 영월의 동강이 한가운데를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잘 구별되어 표시되지 않았다. 미탄면과 동면은 실질적으로는 남동쪽으로 훨씬 깊숙이 뻗어 나가는데 직사각형의 지도 모양에 맞추기 위해 잘 표현하지 못했다. 읍치는 평창강에 의해 감싸여 있는데 다른 공간에 비해 훨씬 확대·과장되어 있다. 또한 왼쪽 鎭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겹겹이 쌓여 있고, 강 건너에 가로로 길게 누워있는 南山 등의 형세로 보아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위쪽의 黃 山은 나라에서 쓸 나무를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지도 왼쪽과 위쪽으로 강릉과의 경계가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의 평창읍 위쪽의 평창군대부분이 당시에는 강릉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1914년의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 때 평창으로 편입되었다.(이기봉)
평창군은 평창군 평창읍, 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평창읍 중리 일대에 있었다. 봉평면에서발원한 南大川이 북쪽에서 들어와읍치를 휘감고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지금의 평창강이다. 오른쪽미탄면에 있는 하천은 지금의 창리천이며, 동면에는 영월의 동강이 한가운데를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잘 구별되어 표시되지 않았다. 미탄면과 동면은 실질적으로는 남동쪽으로 훨씬 깊숙이 뻗어 나가는데 직사각형의 지도 모양에 맞추기 위해 잘 표현하지 못했다. 읍치는 평창강에 의해 감싸여 있는데 다른 공간에 비해 훨씬 확대·과장되어 있다. 또한 왼쪽 鎭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겹겹이 쌓여 있고, 강 건너에 가로로 길게 누워있는 南山 등의 형세로 보아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위쪽의 黃 山은 나라에서 쓸 나무를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지도 왼쪽과 위쪽으로 강릉과의 경계가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의 평창읍 위쪽의 평창군대부분이 당시에는 강릉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1914년의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 때 평창으로 편입되었다.(이기봉)
평해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후포면, 온정면, 기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평해읍 평해리 일대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동해안에 있는 강원도 관할의 최남단에 위치한 고을이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과 향교가 있는데 서쪽으로부터 내려온 산줄기 아래에 매우 풍수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종4품의 萬戶가 파견되었던 越松浦鎭이 石築의 성곽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동해안에는 모래사장의 소나무 숲에 지어졌다는 越松亭과 멀리 바다를 조망할 수 있었다는 望洋亭이 그려져 있어 뛰어난 경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월송정 옆에는 바닷바람에 의한 모래의 이동을 방지하기 위해 심었던 것으로 예상되는 松田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흥미롭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이 고을의 토산품으로 나오는 竹箭이 생산되던 箭竹山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 왼쪽의 白岩山 밑에는 溫井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가장 유명한 온천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백암온천이 개발되어 있다.(이기봉)
평해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후포면, 온정면, 기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평해읍 평해리 일대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동해안에 있는 강원도 관할의 최남단에 위치한 고을이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과 향교가 있는데 서쪽으로부터 내려온 산줄기 아래에 매우 풍수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종4품의 萬戶가 파견되었던 越松浦鎭이 石築의 성곽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동해안에는 모래사장의 소나무 숲에 지어졌다는 越松亭과 멀리 바다를 조망할 수 있었다는 望洋亭이 그려져 있어 뛰어난 경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월송정 옆에는 바닷바람에 의한 모래의 이동을 방지하기 위해 심었던 것으로 예상되는 松田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흥미롭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이 고을의 토산품으로 나오는 竹箭이 생산되던 箭竹山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 왼쪽의 白岩山 밑에는 溫井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가장 유명한 온천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백암온천이 개발되어 있다.(이기봉)
홍천현은 지금의 내면을 제외한 홍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홍천읍 희망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전반적인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세로 모양의 직사각형에 맞추기 위해 남북이 길게 그려졌다. 고을의 남·동·북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홍천강에 모여 서쪽의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과장되어 있으며 동북쪽으로부터 읍치까지 들어오는 산줄기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홍천강 가에는 觀水堂과 泛波亭이 그려져 있어 경치가 뛰어난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水墮寺는 신라 때 창건한 절로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여러 번 重創을 거듭하여 번창하였다. 지금은 1364년에 만든 종과 한 책 두 권으로 된 月印釋譜 제 17·18권의 원본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지도 오른쪽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홍천현은 지금의 내면을 제외한 홍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홍천읍 희망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전반적인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세로 모양의 직사각형에 맞추기 위해 남북이 길게 그려졌다. 고을의 남·동·북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홍천강에 모여 서쪽의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과장되어 있으며 동북쪽으로부터 읍치까지 들어오는 산줄기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홍천강 가에는 觀水堂과 泛波亭이 그려져 있어 경치가 뛰어난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水墮寺는 신라 때 창건한 절로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여러 번 重創을 거듭하여 번창하였다. 지금은 1364년에 만든 종과 한 책 두 권으로 된 月印釋譜 제 17·18권의 원본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지도 오른쪽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회양부는 일제시대의 회양군과 양구군 수입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회양군·금강군 일대이다. 북한강의 최 상류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지도의 오른쪽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북한강 本流이다. 또한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북한강의 지류 금강천이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유명한 金剛山이 그려져 있는데 기암절벽과 正陽寺·表訓寺·長安寺 등의 古刹 표시가 자세하다. 조선시대 때 함경도로 가는 통로 중 지도 위쪽에 보이는 鐵嶺이 가장 중요한 要衝地였다. 따라서 옛날부터 이곳에 關門을 세워 동북쪽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철령 아래쪽의 銀溪驛은 19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義?嶺 아래에 풍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 왼쪽의 德津溟(所祠)는 德津의 동쪽 봉우리에 있는 제단으로서 봄·가을에 나라에서 香을 내려 제사를 지냈고, 祀典에는 小祀로 기록된 곳이다. 지도에 보이는 嵐谷·長陽·水入·文登·和川은 이 고을의 屬縣으로 있다가 병합된 고을의 흔적이다. 기타 고개와 봉수의 표시가 자세함을 알 수 있으며 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회양부는 일제시대의 회양군과 양구군 수입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회양군·금강군 일대이다. 북한강의 최 상류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지도의 오른쪽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북한강 本流이다. 또한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북한강의 지류 금강천이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유명한 金剛山이 그려져 있는데 기암절벽과 正陽寺·表訓寺·長安寺 등의 古刹 표시가 자세하다. 조선시대 때 함경도로 가는 통로 중 지도 위쪽에 보이는 鐵嶺이 가장 중요한 要衝地였다. 따라서 옛날부터 이곳에 關門을 세워 동북쪽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철령 아래쪽의 銀溪驛은 19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義?嶺 아래에 풍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 왼쪽의 德津溟(所祠)는 德津의 동쪽 봉우리에 있는 제단으로서 봄·가을에 나라에서 香을 내려 제사를 지냈고, 祀典에는 小祀로 기록된 곳이다. 지도에 보이는 嵐谷·長陽·水入·文登·和川은 이 고을의 屬縣으로 있다가 병합된 고을의 흔적이다. 기타 고개와 봉수의 표시가 자세함을 알 수 있으며 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횡성현은 지금의 서원면과 강림면을 제외한 횡성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횡성읍 읍상리·읍하리 일대에 있었다. 北川으로 표시된 남한강의 지류 섬강이 읍치 아래쪽에서 前川을 합하여 서남쪽 원주방향으로 빠져나간다. 오른쪽 屯內面에 보이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 주천강의 상류이다. 泰坡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 밑에 풍수적으로 표현된 읍치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읍치 뒤쪽에 풍수적으로 그려진 鼎金山과 鴻頭山은 실제로는 읍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는 산으로서 읍치에 가까운 형국뿐만 아니라 먼 형국에서도 풍수적임을 보여주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가 확대·과장되다 보니까 북천보다 작은 前川이 더 크게 그려져 다른 지역의 위치나 방향에 대한 약간의 왜곡이 나타나게 되었다. 북천과 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보이는 寒江臺는 조선 광해군 때 寒江 鄭逑(1543-1620)가 잠시 은거하면서 낚시를 즐기던 섬강 가의 盤石이라 한다. 지금은 횡성읍 반곡리에 있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기타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安興驛은 지금의 안흥면 소재지로서 ''안흥찐빵''의 발생지이기도 하다.(이기봉)
횡성현은 지금의 서원면과 강림면을 제외한 횡성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횡성읍 읍상리·읍하리 일대에 있었다. 北川으로 표시된 남한강의 지류 섬강이 읍치 아래쪽에서 前川을 합하여 서남쪽 원주방향으로 빠져나간다. 오른쪽 屯內面에 보이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 주천강의 상류이다. 泰坡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 밑에 풍수적으로 표현된 읍치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읍치 뒤쪽에 풍수적으로 그려진 鼎金山과 鴻頭山은 실제로는 읍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는 산으로서 읍치에 가까운 형국뿐만 아니라 먼 형국에서도 풍수적임을 보여주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가 확대·과장되다 보니까 북천보다 작은 前川이 더 크게 그려져 다른 지역의 위치나 방향에 대한 약간의 왜곡이 나타나게 되었다. 북천과 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보이는 寒江臺는 조선 광해군 때 寒江 鄭逑(1543-1620)가 잠시 은거하면서 낚시를 즐기던 섬강 가의 盤石이라 한다. 지금은 횡성읍 반곡리에 있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기타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安興驛은 지금의 안흥면 소재지로서 ''안흥찐빵''의 발생지이기도 하다.(이기봉)
흡곡현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답전면과 고저읍 북쪽 일부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이다. 고을의 鎭山은 博山이며, 읍치와 향교는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읍치 위쪽으로 보이는 侍中臺는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호수와 바다 사이 소나무 길을 끼고 있는 우뚝 솟은 절벽바위라고 한다. 바다 쪽으로는 7개의 작은 섬이 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래의 이름은 七寶였는데 조선 세조 때 巡察使 한명회(1415-1487)가 이곳에서 구경하다가 우의정에 임명한다는 왕명을 들었기 때문에 이름을 侍中臺로 고쳤다고 한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간단한데 800호도 안 되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이기봉)
흡곡현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답전면과 고저읍 북쪽 일부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이다. 고을의 鎭山은 博山이며, 읍치와 향교는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읍치 위쪽으로 보이는 侍中臺는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호수와 바다 사이 소나무 길을 끼고 있는 우뚝 솟은 절벽바위라고 한다. 바다 쪽으로는 7개의 작은 섬이 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래의 이름은 七寶였는데 조선 세조 때 巡察使 한명회(1415-1487)가 이곳에서 구경하다가 우의정에 임명한다는 왕명을 들었기 때문에 이름을 侍中臺로 고쳤다고 한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간단한데 800호도 안 되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이기봉)
가평군은 설악면을 제외한 가평군 전체와 남양주시 수동면 외방리·입석리·내방리에 해당하며 읍치는 가평읍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북동쪽에서 들어온 북한강이 고을 남쪽을 휘감고 남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에 昭陽江下流라 적혀 있는 것이 바로 북한강 줄기이다. 읍치 지역에는 가평천이 남쪽으로 흘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위쪽의 朝宗面은 조선 초에 합쳐진 조종폐현이 있던 곳으로서 조종천이 남쪽으로 흘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서쪽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에 의해 포근히 둘러싸여 있고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읍치 왼쪽에 있는 城隍壇은 일반적으로 마을에 있는 성황당이 아니라 이 고을을 지키는 신에게 수령이 주관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읍치 위쪽에 있는 潛谷書院은 이곳에서 잠시 은둔생활을 했던 潛谷 金堉(1580-1658)을 배향하여 1707년(숙종 33)에 賜額받은 서원이다.(이기봉)
가평군은 설악면을 제외한 가평군 전체와 남양주시 수동면 외방리·입석리·내방리에 해당하며 읍치는 가평읍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북동쪽에서 들어온 북한강이 고을 남쪽을 휘감고 남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에 昭陽江下流라 적혀 있는 것이 바로 북한강 줄기이다. 읍치 지역에는 가평천이 남쪽으로 흘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위쪽의 朝宗面은 조선 초에 합쳐진 조종폐현이 있던 곳으로서 조종천이 남쪽으로 흘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서쪽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에 의해 포근히 둘러싸여 있고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읍치 왼쪽에 있는 城隍壇은 일반적으로 마을에 있는 성황당이 아니라 이 고을을 지키는 신에게 수령이 주관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읍치 위쪽에 있는 潛谷書院은 이곳에서 잠시 은둔생활을 했던 潛谷 金堉(1580-1658)을 배향하여 1707년(숙종 33)에 賜額받은 서원이다.(이기봉)
강화부는 지금의 인천광역시 교동도와 일부 섬을 제외한 강화군이며 읍치는 강화읍 관청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쪽으로 그렸다. 또한 강화도에도 邑城과 섬 전체를 둘러싼 外城, 史庫가 있었던 鼎足山城 및 동쪽의 여러 鎭堡를 설치하여 섬 전체를 요새지로 만들었다. 기타 외곽의 섬에 여러 진보를 설치하고, 강화도 맞은 편의 통진 땅에도 文殊山城을 만들어 이중의 견고한 방어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지도에는 鎭堡의 표현에서 종3품의 僉使가 파견된 곳은 ○○鎭으로, 정4품의 萬戶가 표시된 곳에는 ○○戶로,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된 곳은 ○○別로 구분하였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稅穀船은 강화도 남쪽의 東儉島 근처에서 모였다가 밀물 때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鹽河를 따라 올라가서 祖江을 통해 서울로 간다. 내려갈 때는 祖江의 통진에 속한 ?島 근처에서 모였다가썰물을 타고 올라갈 때와 반대 방향으로 간다. 祖江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바다로 들어가는 김포와 개풍군 사이의 물줄기를 지칭한다. 지도에서는 강화도 주위의 작은 섬들의 이름 앞에 京畿水營과 江華府 중 어느 곳에 속해 있는지를 분명히 적어 놓고 있다. 또한 밀물 때 바다가 되었다가 썰물 때 갯벌이 되는 지역도 표시하여 놓고 있다. 지금의 석모도는 당시까지 둘로 갈라져 있었음이 지도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해안가에서 개간된 곳은 屯畓으로 사용하였고 그렇지 않은 곳은 鹽盆, 鹽釜로 표시하여 이곳에서 소금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이기봉)
개성부는 일제시대의 개성시와 개풍군, 장단군의 대남면·소남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개성직할시의 개성시, 개풍군, 판문군, 장풍군의 서쪽 일대이다. 지도 왼쪽으로는 예성강이 보이고, 그 아래쪽으로는 교동도와 강화도가 실제보다 작게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실선으로 표시된 임진강이 한강과 만나 강화도 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이곳을 祖江이라 불렀다. 지금도 김포군 월곶면에 조강리란 이름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도에는 고을의 鎭山 松岳山을 중심으로 1393년(태조 2)에 만든 內城의 모습과 강감찬의 건의에 의해 1010년(고려 현종 1)부터 21년 걸려 만든 羅城(또는 外城)의 흔적이 잘 그려져 있다. 내성 안쪽에는 고려 초부터 正殿의 역할을 하다 고려 말기쯤 불에 타버렸다고 알려진 滿月臺의 터가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의 壽昌宮은 공민왕 때 延慶宮이 불탄 후 正殿으로 쓰였고, 조선의 태조·정종·태종이 즉위했던 곳이다. 연경궁 오른쪽에는 992년(고려 성종 11)에 國子監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졌다가 이름이 바뀐 成均館이 보이고 있는데 지금의 대학에 해당한다. 성균관 아래쪽으로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의 자객에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善竹橋를 비롯한 몇 개의 다리도 표시되어 있다. 고려 태조 왕건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무덤인 王太祖陵-昌陵-作帝建古墓가 내성 왼쪽과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고려 때 가장 번창한 항구였던 碧瀾渡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지도 왼쪽의 錢浦 아래쪽에 있었다. 그리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항복했던 곳과그가 거주하던 장소도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내성 오른쪽에 있는 穆淸殿과 아래쪽에 있는 敬德宮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이다. 특히 목청전에는 태조의 御容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 아래쪽의 齊陵은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 神懿王后, 厚陵은 조선의 2대왕 정종 부부의 무덤이다. 지도 위쪽에 있는 大興山城은 고려시대에는 戰時의 피난처로서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조선 초에 퇴락해 있던것을 조선 숙종 때 대대적으로 改築한 곳이다.(이기봉)
경기도는 평택시의 팽성읍, 연천군의 관인면·신서면, 여주군의 강천면과 곡수천 동쪽의 북내면을 제외한 경기도 전체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해당한다. 경기도에는 총 38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지도에서는 가장 큰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다. 다음으로 큰 직사각형 안에는 察訪驛이 표시되어 있다. 찰방역에는 종6품의 察訪이란 관리가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리하였다.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교동은 특별히 원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에 京畿水營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파견된 水軍節度使는 경기·황해·충청의 三道統禦使를 겸하였다. 강화도는 서울로 통하는 해로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많은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도에서는 작은 직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烽燧도 아주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 인문·사회적인 내용으로 가장 많은 것은 書院과 陵이다. 각 고을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서원들은 거의 모두 적혀 있는데 조선 후기에 서원이 차지하고 있었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陵은 서울 부근에 있는 고을들에 집중 분포되어 있음을 지도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여주에 있는 세종의 무덤인 英陵과 효종의 무덤인 寧陵만이 약간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산의 표현에서 중요한 산은 독립적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산줄기가 이어진 형태로 그려져 있다. 강줄기는 지금의 지도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자세히 그려져 있다. 특히 서울 밑의 한강 本流에는 포구와 나루를 많이 표시하여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기타 서해의 일부 큰 섬을 제외한 대부분의 섬들은 크기에 상관없이 대략적인 위치만 표시하였다.(이기봉)
경기도는 평택시의 팽성읍, 연천군의 관인면·신서면, 여주군의 강천면과 곡수천 동쪽의 북내면을 제외한 경기도 전체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해당한다. 경기도에는 총 38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지도에서는 가장 큰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다. 다음으로 큰 직사각형 안에는 察訪驛이 표시되어 있다. 찰방역에는 종6품의 察訪이란 관리가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리하였다.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교동은 특별히 원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에 京畿水營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파견된 水軍節度使는 경기·황해·충청의 三道統禦使를 겸하였다. 강화도는 서울로 통하는 해로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많은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도에서는 작은 직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烽燧도 아주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 인문·사회적인 내용으로 가장 많은 것은 書院과 陵이다. 각 고을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서원들은 거의 모두 적혀 있는데 조선 후기에 서원이 차지하고 있었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陵은 서울 부근에 있는 고을들에 집중 분포되어 있음을 지도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여주에 있는 세종의 무덤인 英陵과 효종의 무덤인 寧陵만이 약간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산의 표현에서 중요한 산은 독립적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산줄기가 이어진 형태로 그려져 있다. 강줄기는 지금의 지도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자세히 그려져 있다. 특히 서울 밑의 한강 本流에는 포구와 나루를 많이 표시하여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기타 서해의 일부 큰 섬을 제외한 대부분의 섬들은 크기에 상관없이 대략적인 위치만 표시하였다.(이기봉)
고양군은 덕양구의 오금동 동쪽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덕양구 고양동에 있었다. 지도 위쪽의 하천은 곡릉천의 상류로서 교하를 지나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아래쪽의 하천은 창릉천으로서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고양군은 수도 한양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무덤이 많다. 대표적으로 昌陵은 예종의 무덤이며, 明陵은 숙종의 무덤이다. 한편 고려 恭讓王의 무덤과 崔瑩(1316-1388)의 무덤도 지도 왼쪽에 보이고 있다. 읍치는 이중으로 둘러싸인 전형적 풍수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碧蹄驛은 중국 사신이 서울로 들어오기 하루 전에 꼭 묵어야만 하는 곳으로서 지금은 사적 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 보이는 文峯書院은 閔純(1520-1591), 南孝溫(1454-1492) 등을 배향하여 1709년(숙종 35)에 賜額받았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城山勝戰有碑''라 쓰여 있는 곳은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행주산성이다. 지도 아래쪽 한강가에는 궁중의 음식을 맡아보던 관청인 司饔院에서 進上品인 웅어(葦魚)를 잡던 곳이 두 군데 표시되어 있다. 한편 지도에는 店의 표시가 세 군데 보이고 있어 민간 숙박업의 발달도 엿볼 수 있다.(이기봉)
고양군은 덕양구의 오금동 동쪽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덕양구 고양동에 있었다. 지도 위쪽의 하천은 곡릉천의 상류로서 교하를 지나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아래쪽의 하천은 창릉천으로서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고양군은 수도 한양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무덤이 많다. 대표적으로 昌陵은 예종의 무덤이며, 明陵은 숙종의 무덤이다. 한편 고려 恭讓王의 무덤과 崔瑩(1316-1388)의 무덤도 지도 왼쪽에 보이고 있다. 읍치는 이중으로 둘러싸인 전형적 풍수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碧蹄驛은 중국 사신이 서울로 들어오기 하루 전에 꼭 묵어야만 하는 곳으로서 지금은 사적 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 보이는 文峯書院은 閔純(1520-1591), 南孝溫(1454-1492) 등을 배향하여 1709년(숙종 35)에 賜額받았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城山勝戰有碑''라 쓰여 있는 곳은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행주산성이다. 지도 아래쪽 한강가에는 궁중의 음식을 맡아보던 관청인 司饔院에서 進上品인 웅어(葦魚)를 잡던 곳이 두 군데 표시되어 있다. 한편 지도에는 店의 표시가 세 군데 보이고 있어 민간 숙박업의 발달도 엿볼 수 있다.(이기봉)
과천현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대부분,서초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 북쪽으로 한강이 지나간다. 읍치에서 발원한 하천이 지금의 양재천이고, 아래쪽의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冠岳山 밑에 자리잡고 있는데 客舍와 官衙를 비롯하여 3壇 1廟가 표시되어 있다. 3단 1묘란 城隍壇· 壇·社稷壇과 鄕校로서 고을 수령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던 곳이다. 관악산 위쪽의 愍節書院은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흥부 등 死六臣을 배향하여 1692년(숙종 18)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지금의 노량진 死六臣墓 근처에 있었다. 그 옆에 보이는 鷺江書院은 朴泰輔(1654-1689)를 배향하여 1697년(숙종 23)에 賜額받았다. 박태보는 숙종의 繼妃인 仁顯王后의 폐위에 대해 부당함을 주장했던 사람으로서 진도로 귀양을 가다 노량진에서 사망하였다.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良才驛은 12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그 오른쪽에는 민간에서 운영되던 新院酒幕도 표시되어 있어 조선 후기의 변화된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과천현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대부분,서초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 북쪽으로 한강이 지나간다. 읍치에서 발원한 하천이 지금의 양재천이고, 아래쪽의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冠岳山 밑에 자리잡고 있는데 客舍와 官衙를 비롯하여 3壇 1廟가 표시되어 있다. 3단 1묘란 城隍壇· 壇·社稷壇과 鄕校로서 고을 수령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던 곳이다. 관악산 위쪽의 愍節書院은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흥부 등 死六臣을 배향하여 1692년(숙종 18)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지금의 노량진 死六臣墓 근처에 있었다. 그 옆에 보이는 鷺江書院은 朴泰輔(1654-1689)를 배향하여 1697년(숙종 23)에 賜額받았다. 박태보는 숙종의 繼妃인 仁顯王后의 폐위에 대해 부당함을 주장했던 사람으로서 진도로 귀양을 가다 노량진에서 사망하였다.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良才驛은 12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그 오른쪽에는 민간에서 운영되던 新院酒幕도 표시되어 있어 조선 후기의 변화된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광주부는 남종면을 제외한 광주군 전체와 남양주시 와부면·조안면, 성남시, 하남시, 서울특별시 강남의 경부고속도로 동쪽, 의왕시, 안산시 성포동 동남쪽, 화성군 매송면의 서쪽에 해당하는 아주 큰 고을이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쪽으로 그렸다. 읍치는 원래 하남시의 교산동 일대에 있었는데 1626년(인조 4)에 광주군 중부면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원래의 읍치는 남한산성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으며,향교는 옮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은 옹성과 暗門까지도 자세히 그리고 있으며, 안쪽에는 관아 건물을 아주 자세히 그려 넣었다. 한강이 고을 동쪽에서 들어와 북쪽을 휘감고 서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강변에는 여울(灘)과 松波津, 三田渡 등의 나루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수십기의 무덤이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태종의 능인 獻陵, 성종의 능인 宣陵, 중종의 능인 靖陵을 비롯하여 公主, 君 등 왕실의 묘가 가장 많다. 지도에서 특이한 것 중의 하나는 酒幕이 대단히 많이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한 민간 숙박업소가 번영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작은 저수지에 해당하는 ''堰''이란 글자도 자주 보이고 있어 조선 후기에 수리시설이 확충되고 있는 모습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가물 때 비가 오기를 빌면서 제사를 지내던 祈雨祭壇도 돌마면과 실촌면에 2군데 표시되어 있다. 한편 지도 위쪽 왼쪽에 ''땅은 광주에 속하지만 백성은 한성부에 속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흥미롭다. 그 옆쪽의 聲串面, 北方面, 松洞面은 한강과는 관계없는 지금의 시화호 안쪽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안산과 남양에 인접해 있었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慶安驛은 지금 광주읍이 있는 곳으로서 7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이기봉)
광주부는 남종면을 제외한 광주군 전체와 남양주시 와부면·조안면, 성남시, 하남시, 서울특별시 강남의 경부고속도로 동쪽, 의왕시, 안산시 성포동 동남쪽, 화성군 매송면의 서쪽에 해당하는 아주 큰 고을이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쪽으로 그렸다. 읍치는 원래 하남시의 교산동 일대에 있었는데 1626년(인조 4)에 광주군 중부면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원래의 읍치는 남한산성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으며,향교는 옮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은 옹성과 暗門까지도 자세히 그리고 있으며, 안쪽에는 관아 건물을 아주 자세히 그려 넣었다. 한강이 고을 동쪽에서 들어와 북쪽을 휘감고 서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강변에는 여울(灘)과 松波津, 三田渡 등의 나루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수십기의 무덤이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태종의 능인 獻陵, 성종의 능인 宣陵, 중종의 능인 靖陵을 비롯하여 公主, 君 등 왕실의 묘가 가장 많다. 지도에서 특이한 것 중의 하나는 酒幕이 대단히 많이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한 민간 숙박업소가 번영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작은 저수지에 해당하는 ''堰''이란 글자도 자주 보이고 있어 조선 후기에 수리시설이 확충되고 있는 모습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가물 때 비가 오기를 빌면서 제사를 지내던 祈雨祭壇도 돌마면과 실촌면에 2군데 표시되어 있다. 한편 지도 위쪽 왼쪽에 ''땅은 광주에 속하지만 백성은 한성부에 속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흥미롭다. 그 옆쪽의 聲串面, 北方面, 松洞面은 한강과는 관계없는 지금의 시화호 안쪽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안산과 남양에 인접해 있었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慶安驛은 지금 광주읍이 있는 곳으로서 7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이기봉)
교동부는 강화군의 교동도와 석모도 위쪽과 주문도, 장봉도 등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이 고을은 서울로 통하는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京畿水營이 설치되어 있었으며,水軍節度使가 경기·황해·충청의 三道統禦使를 겸하였다. 지도에는 전략적 요충지답게 읍성에 대한 표시가 자세한데 각각의 문에 甕城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변가에는 포구가 자세하며 軍器庫 등도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교동도 안에는 面마다 소속되어 있는 里를 다 표시하고 있는데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섬은 지금의 석모도로서 田畓이 143結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간척이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모도의 남쪽 부분은 강화에 소속되어 있었다. 섬 북쪽에는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禁山이 있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교동도가 강조되어 있어, 주변 바다가 매우 축소되고 다른 고을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교동부는 강화군의 교동도와 석모도 위쪽과 주문도, 장봉도 등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이 고을은 서울로 통하는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京畿水營이 설치되어 있었으며,水軍節度使가 경기·황해·충청의 三道統禦使를 겸하였다. 지도에는 전략적 요충지답게 읍성에 대한 표시가 자세한데 각각의 문에 甕城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변가에는 포구가 자세하며 軍器庫 등도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교동도 안에는 面마다 소속되어 있는 里를 다 표시하고 있는데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섬은 지금의 석모도로서 田畓이 143結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간척이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모도의 남쪽 부분은 강화에 소속되어 있었다. 섬 북쪽에는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禁山이 있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교동도가 강조되어 있어, 주변 바다가 매우 축소되고 다른 고을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교하현은 파주시 시내(옛 금촌읍)와 교하면, 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교하면 교하리에 있었다. 고을의 아래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고을의 서쪽으로는 임진강이 흐른다.한강을 실선으로 표시하여 임진강보다 더 작은 것처럼 표현한 것이 의아스럽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점에는 鰲頭山城이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한 지금의 공릉천이다. 지도에는 읍치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 산의 형태를 그리고 있다. 읍치 오른쪽으로 보이는 新谷書院은 尹宣擧(1610-1669)를 배향하여 1683년(숙종 9)에 세워지고, 1695년(숙종 21)에 賜額받았다. 읍치 아래로는 궁중 정원의 꽃과 과일나무를 맡아보았던 掌苑署의 栗園이 표시되어 있다. 이 장원서에서는 苑直이라는 직책을 통해 과일에 대한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이기봉)
교하현은 파주시 시내(옛 금촌읍)와 교하면, 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교하면 교하리에 있었다. 고을의 아래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고을의 서쪽으로는 임진강이 흐른다.한강을 실선으로 표시하여 임진강보다 더 작은 것처럼 표현한 것이 의아스럽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점에는 鰲頭山城이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한 지금의 공릉천이다. 지도에는 읍치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 산의 형태를 그리고 있다. 읍치 오른쪽으로 보이는 新谷書院은 尹宣擧(1610-1669)를 배향하여 1683년(숙종 9)에 세워지고, 1695년(숙종 21)에 賜額받았다. 읍치 아래로는 궁중 정원의 꽃과 과일나무를 맡아보았던 掌苑署의 栗園이 표시되어 있다. 이 장원서에서는 苑直이라는 직책을 통해 과일에 대한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이기봉)
금천현은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는 읍치를 중심으로 사방의 산이 겹겹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에 한강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한강가에는 강을 넘나들던 楊花津과 方下串津 등의 나루가 표시되어 있다. 그 오른쪽에 보이는 仙遊峯은 지금의 양평동 인공폭포 부근에 있다. 읍치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이고, 아래쪽의 하천이 지금의 도림천이다. 안양천 주위는 지금의 구로공단과 광명시 아파트단지가 있는 광활한 평지인데 지도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三聖山 아래쪽에 있으며, 아주 간명하게 표현하였다. 지도 위쪽으로는 지금의 안양시로 연결되는 安養橋가 보이고 있고, 삼성산 아래쪽의 北紫霞洞이 지금의 서울대 자리이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愍懷墓는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1612-1645)의 부인인 姜氏의 무덤이다.(이기봉)
금천현은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는 읍치를 중심으로 사방의 산이 겹겹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에 한강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한강가에는 강을 넘나들던 楊花津과 方下串津 등의 나루가 표시되어 있다. 그 오른쪽에 보이는 仙遊峯은 지금의 양평동 인공폭포 부근에 있다. 읍치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이고, 아래쪽의 하천이 지금의 도림천이다. 안양천 주위는 지금의 구로공단과 광명시 아파트단지가 있는 광활한 평지인데 지도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三聖山 아래쪽에 있으며, 아주 간명하게 표현하였다. 지도 위쪽으로는 지금의 안양시로 연결되는 安養橋가 보이고 있고, 삼성산 아래쪽의 北紫霞洞이 지금의 서울대 자리이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愍懷墓는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1612-1645)의 부인인 姜氏의 무덤이다.(이기봉)
김포군은 지금의 김포군 김포읍, 고촌면, 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김포읍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의 위쪽이 서해이고, 아래쪽이 한강이다. 지도는 대체적으로 간략하게 그렸는데 김포 지역이 높은 산이 거의 없는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산을 봉긋봉긋 그려 넣은 것이 재미있다. 지도의 한가운데 있는 章島는 章陵으로서 인조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元宗으로 추증된 李 부부의 무덤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忠簡公墓는 병자호란 때 勤王兵을 모집하던 중 청나라 병사에게 잡혀 죽음을 당한 斥和臣 尹棨(1583-1636)의 무덤이다. 牛渚書院은 임진왜란때 금산 전투에서 殉節한 조헌(1544-1592)을 배향하여 1671년(현종 12)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기타 3개의 堤堰이 표시되어 있어 수리시설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김포군은 지금의 김포군 김포읍, 고촌면, 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김포읍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의 위쪽이 서해이고, 아래쪽이 한강이다. 지도는 대체적으로 간략하게 그렸는데 김포 지역이 높은 산이 거의 없는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산을 봉긋봉긋 그려 넣은 것이 재미있다. 지도의 한가운데 있는 章島는 章陵으로서 인조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元宗으로 추증된 李 부부의 무덤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忠簡公墓는 병자호란 때 勤王兵을 모집하던 중 청나라 병사에게 잡혀 죽음을 당한 斥和臣 尹棨(1583-1636)의 무덤이다. 牛渚書院은 임진왜란때 금산 전투에서 殉節한 조헌(1544-1592)을 배향하여 1671년(현종 12)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기타 3개의 堤堰이 표시되어 있어 수리시설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남양부는 화성군의 북쪽 문호리 일대를 제외한 남양면, 삼화리 일대를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과 안산시의 대부도·영흥도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남양면 남양리에 있었다. 지도에는 다른 지도와 달리 읍치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지 않다. 읍치 아래에 있는 龍栢寺는 龍栢祠를 잘못 적은 것으로서 중국의 諸葛亮 등을 배향하여 1669년(현종 10)에 賜額받았다. 서쪽 해안가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던 花梁鎭이 보이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1653년(효종 4)에 지금의 영종도로 옮겨간 영종진의 터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아래쪽 바닷가에는 충청도 서해안의 여러 고을이 적혀 있어 이 고을이 水運에서 중요한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서해안의 섬에는 사람이 거주하는 경우 戶數까지 정확하게 적어놓고 있음이 흥미롭다. 대부도와 지도 위쪽의 섬들은 지금 시화방조제에 의해 육지로 변모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分古面은 수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이며 지금의 향남면 상신리·구문천리·하길리에 있었다.(이기봉)
남양부는 화성군의 북쪽 문호리 일대를 제외한 남양면, 삼화리 일대를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과 안산시의 대부도·영흥도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남양면 남양리에 있었다. 지도에는 다른 지도와 달리 읍치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지 않다. 읍치 아래에 있는 龍栢寺는 龍栢祠를 잘못 적은 것으로서 중국의 諸葛亮 등을 배향하여 1669년(현종 10)에 賜額받았다. 서쪽 해안가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던 花梁鎭이 보이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1653년(효종 4)에 지금의 영종도로 옮겨간 영종진의 터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아래쪽 바닷가에는 충청도 서해안의 여러 고을이 적혀 있어 이 고을이 水運에서 중요한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서해안의 섬에는 사람이 거주하는 경우 戶數까지 정확하게 적어놓고 있음이 흥미롭다. 대부도와 지도 위쪽의 섬들은 지금 시화방조제에 의해 육지로 변모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分古面은 수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이며 지금의 향남면 상신리·구문천리·하길리에 있었다.(이기봉)
明堂圖와 유사한 윤곽으로 그려진서울지도. 1760년(영조 36)에 慶熙宮으로 개칭된 慶德宮이 원래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조대 전반기의 사정이 반영된 서울지도를 베껴 그린 것으로 보인다.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백악산(북악산)에서 한번 뭉쳐 솟아오르고 그 아래 옛 서울인 도성이 펼쳐져 있다. 서쪽 인왕산 자락이 왼쪽을 가려주고 있고, 가림막이 될만한 산이 없는 동쪽에는 假山 두 군데가 묘사되어 있다. 가산은 허한 지기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얕은 흙언덕을 의미한다. 전혀 높지 않은 가산이 그려진 것은 물론 서울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해당하는 곳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목멱산(남산)이 북한산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그려진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북악산 아래 경복궁의 터와 6조를 비롯한 관아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인왕산 자락에는 사직과 경덕궁이, 응봉 자락에는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가위치하고 있다. 백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開川:청계천)은 도심을 흐르다가 도성을 빠져나가면서 한강에 합류된다. 도성에 딸인 小門 가운데에는 興德門과 廣熙門이 이미 상당히 무너진 상태였음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두모포에서 서강에 이르는 京江(한강)이 그려져 있다. 경강 주변으로 주요 나루터와 광흥창 등의창고와 망원정 등의 명승지가 표시되어 있다. (배우성)
마전군은 연천군 미산면과 왕징면의 노동리·동중리·북삼리·무등리와 군남면의 남계리·황지리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미산면의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동북쪽에서 들어온 임진강이 읍치를 감싸고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에는 읍치가 특히 강조되어 있는데 겹겹이 둘러싸인 산줄기의 모습이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마전군은 규모가 너무 작아 없애자는 논의가 많았던 고을이지만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崇義殿 때문에 유지되었다. 숭의전은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가 1392년(태조 1)에 사당을 만들어 고려 태조를 비롯한 8명의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한 곳이다. 1425년(세종 7)에는 고려의 태조, 현종, 문종, 원종만 제사지내도록 했으며, 이후에 정몽주를 비롯한 16명의 고려 충신들을 함께 配享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3년에 미산면 아미리에 복구하여 사적 제223호로 지정하였다. 기타 읍치에 ''人家''란 글씨가 쓰여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마전군은 연천군 미산면과 왕징면의 노동리·동중리·북삼리·무등리와 군남면의 남계리·황지리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미산면의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동북쪽에서 들어온 임진강이 읍치를 감싸고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에는 읍치가 특히 강조되어 있는데 겹겹이 둘러싸인 산줄기의 모습이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마전군은 규모가 너무 작아 없애자는 논의가 많았던 고을이지만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崇義殿 때문에 유지되었다. 숭의전은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가 1392년(태조 1)에 사당을 만들어 고려 태조를 비롯한 8명의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한 곳이다. 1425년(세종 7)에는 고려의 태조, 현종, 문종, 원종만 제사지내도록 했으며, 이후에 정몽주를 비롯한 16명의 고려 충신들을 함께 配享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3년에 미산면 아미리에 복구하여 사적 제223호로 지정하였다. 기타 읍치에 ''人家''란 글씨가 쓰여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부평부는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양구, 검단동 일대를 제외한 서구, 경기도 부천시 및 서울특별시 구로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桂陽山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겹겹이 둘러싸인 산줄기를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왼쪽은 서해이고 오른쪽은 한강이다. 하지만 이 고을은 한강에 직접 접하고 있지는 않은데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듯이 陽川 땅을 넘어가야 한다. 서해에 있는 작은 섬들은 지금은 모두 간척되어 육지가 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運河를 뚫으려는 시도를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김포의 굴포천이다. 곳곳에 작은 저수지인 防築의 모습을통해 조선 후기 수리시설의 확충 모습을 읽을 수 있다.(이기봉)
부평부는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양구, 검단동 일대를 제외한 서구, 경기도 부천시 및 서울특별시 구로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桂陽山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겹겹이 둘러싸인 산줄기를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왼쪽은 서해이고 오른쪽은 한강이다. 하지만 이 고을은 한강에 직접 접하고 있지는 않은데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듯이 陽川 땅을 넘어가야 한다. 서해에 있는 작은 섬들은 지금은 모두 간척되어 육지가 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運河를 뚫으려는 시도를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김포의 굴포천이다. 곳곳에 작은 저수지인 防築의 모습을통해 조선 후기 수리시설의 확충 모습을 읽을 수 있다.(이기봉)
삭령군은 일제시대의 연천군 삭령면, 서남면, 중면, 왕징면 북쪽 일부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북한의 철원군 일대이다. 이 고을은 서북쪽은 황해도와 동북쪽은 강원도와 접해 있다. 고을의 서북쪽 토산으로부터 임진강 본류가 들어오고, 동북쪽 평강에서 마곡천이 들어와 고을 남쪽 羽化亭에서 합류한다. 지도에는 임진강의 본류를 大水源, 지류인 마곡천을 小水源으로 표시하여 구분하고 있다. 또 두 하천과 함께 읍치를 빙 둘러싸는 하천을 그려서 마치 섬처럼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읍치는 邑居로 표시되어 있는데 겹겹이 둘러싸인 산줄기와 강 건너의 南山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441년(세종 23)에 읍치를 옮겼는데 옛 읍치는 향교 동쪽에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삭령군은 일제시대의 연천군 삭령면, 서남면, 중면, 왕징면 북쪽 일부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북한의 철원군 일대이다. 이 고을은 서북쪽은 황해도와 동북쪽은 강원도와 접해 있다. 고을의 서북쪽 토산으로부터 임진강 본류가 들어오고, 동북쪽 평강에서 마곡천이 들어와 고을 남쪽 羽化亭에서 합류한다. 지도에는 임진강의 본류를 大水源, 지류인 마곡천을 小水源으로 표시하여 구분하고 있다. 또 두 하천과 함께 읍치를 빙 둘러싸는 하천을 그려서 마치 섬처럼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읍치는 邑居로 표시되어 있는데 겹겹이 둘러싸인 산줄기와 강 건너의 南山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441년(세종 23)에 읍치를 옮겼는데 옛 읍치는 향교 동쪽에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수원부는 수원시, 오산시, 화성군의 태안읍·동탄면·정남면·봉담읍·팔탄면·향남면·장안면·우정면·양감면·매송면 동쪽 그리고 평택시의 포승면·청북면·안중면·현덕면·오성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태안읍 용주사 부근이었다.북쪽의 光敎山으로부터 고을 구석구석까지 산줄기가 이어진 형태로 그렸다. 읍치는 서쪽에서 들어온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1789년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 고을 읍치였던 花山 아래로 옮겼고, 동시에 읍치를 지금의 수원 시내로 이동시켰다. 지도의 아래쪽은 지금의 아산만에 해당하며, 고을 동쪽으로는 황구지천과 오산천이 모여 진위천이 된다. 읍치 왼쪽에 있는 梅谷書院은 1694년(숙종 20)에 송시열을 配享하여 세웠으며, 다음 해에 賜額받았다. 고을 남쪽으로 稷山地와 陽城地란 글자가 쓰여 있는데 이것은 각각 직산과 양성의 越境地가 수원 땅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 옆의 監牧官은 목장을 관장하던 관리가 머물던 곳으로서 종6품관이파견되었다.(이기봉)
수원부는 수원시, 오산시, 화성군의 태안읍·동탄면·정남면·봉담읍·팔탄면·향남면·장안면·우정면·양감면·매송면 동쪽 그리고 평택시의 포승면·청북면·안중면·현덕면·오성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태안읍 용주사 부근이었다.북쪽의 光敎山으로부터 고을 구석구석까지 산줄기가 이어진 형태로 그렸다. 읍치는 서쪽에서 들어온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1789년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 고을 읍치였던 花山 아래로 옮겼고, 동시에 읍치를 지금의 수원 시내로 이동시켰다. 지도의 아래쪽은 지금의 아산만에 해당하며, 고을 동쪽으로는 황구지천과 오산천이 모여 진위천이 된다. 읍치 왼쪽에 있는 梅谷書院은 1694년(숙종 20)에 송시열을 配享하여 세웠으며, 다음 해에 賜額받았다. 고을 남쪽으로 稷山地와 陽城地란 글자가 쓰여 있는데 이것은 각각 직산과 양성의 越境地가 수원 땅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 옆의 監牧官은 목장을 관장하던 관리가 머물던 곳으로서 종6품관이파견되었다.(이기봉)
안산군은 시흥시의 하중동·하상동 남쪽 부분과 안산시의 시청 서·북쪽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에 있었다. 지도는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읍치는 475m의 修理山 밑에 자리잡고 있는데 산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모습과 물줄기가 빠져나가는 모습이 모두 풍수적 형국에 입각해 있다. 읍치는 매우 확대·과장되어 있는데 안산천이 남쪽으로 흘러 나간다. 객사의 왼쪽에는 전쟁, 질병 등으로 죽어 구천을 떠돌던 영혼에게 고을의 수령이 제사지내던 壇이 설치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역시 고을의 수령이 土地神에게 제사지내던 社壇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舊昭陵基는 단종의 어머니 顯德王后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다. 그 옆에는 萬戶가 파견되었던 草芝堡의 터가 보인다. 기타 바다에는 사람이 18호 거주하던 烏耳島와 두 개의 無人島가 보이고 있는데 지금은 모두 시화방조제에 의해 육지로 변해 있다.(이기봉)
안산군은 시흥시의 하중동·하상동 남쪽 부분과 안산시의 시청 서·북쪽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에 있었다. 지도는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읍치는 475m의 修理山 밑에 자리잡고 있는데 산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모습과 물줄기가 빠져나가는 모습이 모두 풍수적 형국에 입각해 있다. 읍치는 매우 확대·과장되어 있는데 안산천이 남쪽으로 흘러 나간다. 객사의 왼쪽에는 전쟁, 질병 등으로 죽어 구천을 떠돌던 영혼에게 고을의 수령이 제사지내던 壇이 설치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역시 고을의 수령이 土地神에게 제사지내던 社壇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舊昭陵基는 단종의 어머니 顯德王后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다. 그 옆에는 萬戶가 파견되었던 草芝堡의 터가 보인다. 기타 바다에는 사람이 18호 거주하던 烏耳島와 두 개의 無人島가 보이고 있는데 지금은 모두 시화방조제에 의해 육지로 변해 있다.(이기봉)
안성군은 지금의 안성군 안성읍, 보개면, 금광면, 미양면, 대덕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안성읍 구포리와 명륜리 일대에 있었다.안성은 충청도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고을로서 조선 후기에 경기 남부와 충청 북부에서 지금의 이천시 장호원장과 더불어 가장 번창했던 곳이다. 특히 鍮器가 유명하여 ''안성맞춤''이라는 용어가 생긴 곳이기도 하다. 고을의 鎭山은 飛鳳山이며, 진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읍치에는 수령이 집무를 보던 衙舍와 임금의 殿牌를 보관한 客舍만 간단히 표시하였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확대·과장되어 있다. 안성천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평택시를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읍치 아래에 있는 沙溪書院은 金長生(1548-1631)을 배향하여 안성읍 도기리에 세워졌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완전히 毁撤되었다. 그 아래쪽에 있는 靑龍寺의 대웅전은 보물 824호로 지정되어 있다.(이기봉)
안성군은 지금의 안성군 안성읍, 보개면, 금광면, 미양면, 대덕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안성읍 구포리와 명륜리 일대에 있었다.안성은 충청도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고을로서 조선 후기에 경기 남부와 충청 북부에서 지금의 이천시 장호원장과 더불어 가장 번창했던 곳이다. 특히 鍮器가 유명하여 ''안성맞춤''이라는 용어가 생긴 곳이기도 하다. 고을의 鎭山은 飛鳳山이며, 진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읍치에는 수령이 집무를 보던 衙舍와 임금의 殿牌를 보관한 客舍만 간단히 표시하였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확대·과장되어 있다. 안성천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평택시를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읍치 아래에 있는 沙溪書院은 金長生(1548-1631)을 배향하여 안성읍 도기리에 세워졌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완전히 毁撤되었다. 그 아래쪽에 있는 靑龍寺의 대웅전은 보물 824호로 지정되어 있다.(이기봉)
양근군은 양평군의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과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다. 1747년(영조 23)에 지도 오른쪽에 있는 葛山으로 읍치를 옮겼는데 지금의 양평읍 양근리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그렸다. 지도의 왼쪽 아래 蛇島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되는데 남한강은 오른쪽 위의 呂江으로부터 사도까지 실선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二水頭村은 팔당댐 안쪽에 있는 양수리이며, 옛 사람들은 ''두물머리''라고 불렀다. 지도에는정승을 비롯한 많은 벼슬아치들의 묘가 표시되어 있음이 재미있는데 모두 전형적인 풍수적 표현을 하고 있다. 남한강가에는 江漢亭을 비롯한 여러 개의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으로는 咸公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몽고 침입 때 고을 사람들이 들어가 피난했던 곳이라고 한다. 지도 왼쪽 위쪽의 米源縣倉이 있는 곳은 고려말 공민왕 때의 國師 普愚(1301-1382)가 머물렀던 米源莊이다. 보우 때문에 縣으로 승격되었으나 땅이 좁고, 사람이 적어 얼마 안되어 양근군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의 가평군 설악면이다. 기타 읍치에는 다른 지도에는 잘 표시되지 않았던 壇, 社壇, 發告壇 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양근군은 양평군의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과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다. 1747년(영조 23)에 지도 오른쪽에 있는 葛山으로 읍치를 옮겼는데 지금의 양평읍 양근리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그렸다. 지도의 왼쪽 아래 蛇島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되는데 남한강은 오른쪽 위의 呂江으로부터 사도까지 실선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二水頭村은 팔당댐 안쪽에 있는 양수리이며, 옛 사람들은 ''두물머리''라고 불렀다. 지도에는정승을 비롯한 많은 벼슬아치들의 묘가 표시되어 있음이 재미있는데 모두 전형적인 풍수적 표현을 하고 있다. 남한강가에는 江漢亭을 비롯한 여러 개의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으로는 咸公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몽고 침입 때 고을 사람들이 들어가 피난했던 곳이라고 한다. 지도 왼쪽 위쪽의 米源縣倉이 있는 곳은 고려말 공민왕 때의 國師 普愚(1301-1382)가 머물렀던 米源莊이다. 보우 때문에 縣으로 승격되었으나 땅이 좁고, 사람이 적어 얼마 안되어 양근군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의 가평군 설악면이다. 기타 읍치에는 다른 지도에는 잘 표시되지 않았던 壇, 社壇, 發告壇 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양성현은 안성군 양성면, 원곡면, 공도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성면 동항리에 있었다. 북쪽에서 들어온 大川이 고을의 동쪽을 감싸고, 다시 꺾여서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아주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이에 비해 산줄기의 표현은 양쪽으로 날개를 펼치듯 그려져 있어 아주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天德山이다. 읍치는 白蓮峯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邑內''라는 글자와 몇 개의 건물을 통해 간단히 표시하고 있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無限城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데 백제 때 만들어졌다는 說이 전해진다. 지도 맨 아래쪽에 있는 (栗)北面, 甘味洞面, 外良洞面은 모두 당시의수원 땅에 있었던 越境地이다. (율)북면은 평택시 청북면의 율북리 일대에 있었고, 감미동면도 같은 면의 고잔리와 삼계리 일대에있었다. 외량동면은 평택시 포승면의 내기리·운정리·방림리 일대에 있었다. 한편 지도 아래쪽에는 민간에서 운영하던 所沙酒幕이 표시되어 있다. 酒幕이 官에서 만드는 지도에 표시될 정도로 중요한 장소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통해 조선 후기에 민간 차원의 유동인구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양성현은 안성군 양성면, 원곡면, 공도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성면 동항리에 있었다. 북쪽에서 들어온 大川이 고을의 동쪽을 감싸고, 다시 꺾여서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아주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이에 비해 산줄기의 표현은 양쪽으로 날개를 펼치듯 그려져 있어 아주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天德山이다. 읍치는 白蓮峯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邑內''라는 글자와 몇 개의 건물을 통해 간단히 표시하고 있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無限城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데 백제 때 만들어졌다는 說이 전해진다. 지도 맨 아래쪽에 있는 (栗)北面, 甘味洞面, 外良洞面은 모두 당시의수원 땅에 있었던 越境地이다. (율)북면은 평택시 청북면의 율북리 일대에 있었고, 감미동면도 같은 면의 고잔리와 삼계리 일대에있었다. 외량동면은 평택시 포승면의 내기리·운정리·방림리 일대에 있었다. 한편 지도 아래쪽에는 민간에서 운영하던 所沙酒幕이 표시되어 있다. 酒幕이 官에서 만드는 지도에 표시될 정도로 중요한 장소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통해 조선 후기에 민간 차원의 유동인구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양주목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군, 와부읍과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 전곡읍·청산면, 고양시 덕양구의 오금동과 지축동, 서울특별시 은평구의 구파발동 일대와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있었다. 아래쪽으로는 한강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가는데 왕숙천과 중랑천이 합류한다. 위쪽으로 보이는 물줄기는 지금의 동두천을 통과하는 신천이며 한탄강과 합쳐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왼쪽에 있는 하천은 파주에 있는 곡릉천의 상류이다. 이 고을은 京都로 표시된 서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왕실의 무덤이 즐비한 곳이다. 지도에 보이는 여러 무덤 중 왕과 왕비의 무덤은 ''陵''으로 쓰여 있으며, 그 이외의 무덤들은 ''墓''라 표시되어 있다. 조선 태조의 무덤인 健元陵은 六陵內라 표시된 곳에 있으며, 울창한 숲이 잘 보전되어 유명한 光陵은 세조의 무덤으로서 읍치의 오른쪽 接洞面에 보이고 있다. 그 외에 왕이 되었다가 反正에 의해 쫓겨났던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도 각각 蘆原面과 乾川面에 보이고 있다. 芚夜面에 보이고 있는 道峯書院은 조광조, 송시열을 배향하여 1573년(선조 6)에 賜額받았고, 淸節祠宇는 김시습을 배향하여 1686년(숙종 12)에 賜額받았다. 禿用面에 보이는 石室書院은 김상용, 김상헌 등을 배향하여 1663년(현종 4)에 賜額받았다.(이기봉)
양주목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군, 와부읍과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 전곡읍·청산면, 고양시 덕양구의 오금동과 지축동, 서울특별시 은평구의 구파발동 일대와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있었다. 아래쪽으로는 한강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가는데 왕숙천과 중랑천이 합류한다. 위쪽으로 보이는 물줄기는 지금의 동두천을 통과하는 신천이며 한탄강과 합쳐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왼쪽에 있는 하천은 파주에 있는 곡릉천의 상류이다. 이 고을은 京都로 표시된 서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왕실의 무덤이 즐비한 곳이다. 지도에 보이는 여러 무덤 중 왕과 왕비의 무덤은 ''陵''으로 쓰여 있으며, 그 이외의 무덤들은 ''墓''라 표시되어 있다. 조선 태조의 무덤인 健元陵은 六陵內라 표시된 곳에 있으며, 울창한 숲이 잘 보전되어 유명한 光陵은 세조의 무덤으로서 읍치의 오른쪽 接洞面에 보이고 있다. 그 외에 왕이 되었다가 反正에 의해 쫓겨났던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도 각각 蘆原面과 乾川面에 보이고 있다. 芚夜面에 보이고 있는 道峯書院은 조광조, 송시열을 배향하여 1573년(선조 6)에 賜額받았고, 淸節祠宇는 김시습을 배향하여 1686년(숙종 12)에 賜額받았다. 禿用面에 보이는 石室書院은 김상용, 김상헌 등을 배향하여 1663년(현종 4)에 賜額받았다.(이기봉)
양지현은 지금의 용인시 시내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전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군의 고삼면, 일죽면의 능국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양지면양지리에 있었다. 양지현은 1399년(정종 1)에 수원에 딸려 있던 陽良部曲을 승격시켜 縣으로 만들었는데 지도에서는 古倉이 있는 지역이다. 지금은 안성군 고삼면 지역이다. 1413년(태종 13)에 광주의 秋溪鄕으로 읍치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지도 속의 읍치이다. 같은 시기에 朴谷, 高安, 蹄村, 木岳 등 죽산에 속했던 4개의 部曲을 함께 붙이게 되었는데 지도에는 모두 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이 만들어지게 된 이런 내력 때문에 한 곳에 모여 있지 못하고 여러 곳에 흩어져 있게 되었다. 지도에서도 고을이 흩어져 있는 모습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읍치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은 경안천의 최상류로서 용인과 광주를 지나 한강 본류로 들어간다. 왼쪽 아래쪽의 하천은 안성천으로서 양성, 진위를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오른쪽 아래의 하천은 청미천의 상류이고, 그 위쪽의 하천은 복하천의 상류인데 모두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이기봉)
양지현은 지금의 용인시 시내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전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군의 고삼면, 일죽면의 능국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양지면양지리에 있었다. 양지현은 1399년(정종 1)에 수원에 딸려 있던 陽良部曲을 승격시켜 縣으로 만들었는데 지도에서는 古倉이 있는 지역이다. 지금은 안성군 고삼면 지역이다. 1413년(태종 13)에 광주의 秋溪鄕으로 읍치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지도 속의 읍치이다. 같은 시기에 朴谷, 高安, 蹄村, 木岳 등 죽산에 속했던 4개의 部曲을 함께 붙이게 되었는데 지도에는 모두 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이 만들어지게 된 이런 내력 때문에 한 곳에 모여 있지 못하고 여러 곳에 흩어져 있게 되었다. 지도에서도 고을이 흩어져 있는 모습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읍치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은 경안천의 최상류로서 용인과 광주를 지나 한강 본류로 들어간다. 왼쪽 아래쪽의 하천은 안성천으로서 양성, 진위를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오른쪽 아래의 하천은 청미천의 상류이고, 그 위쪽의 하천은 복하천의 상류인데 모두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이기봉)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강서구 가양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오른쪽에는 한강이 보이고 있고, 지도의 맨 아래쪽에 鐵串橋가 있는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이다. 작은 하천마다 다리까지 자세히 그려 넣었음이 특이하다. 한강가에는 孔岩津과 楊花津 등 한강을 넘나들던 나루가 표시되어 있다. 공암진에는 가운데가 뚫린 바위가 한강 위에 있었는데 김포공항을 만들면서 없애버렸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城山 밑에 자리잡고 있는데 향교는 아직도 강서구 가양동에 남아 있다. 향교 옆에 있는 壇은 전쟁, 질병 등으로 사망하여 구천을 떠돌던영혼들을 위해 수령이 직접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기타 堤堰을 세 개나 표시하고 있어 당시 수리시설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강서구 가양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오른쪽에는 한강이 보이고 있고, 지도의 맨 아래쪽에 鐵串橋가 있는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이다. 작은 하천마다 다리까지 자세히 그려 넣었음이 특이하다. 한강가에는 孔岩津과 楊花津 등 한강을 넘나들던 나루가 표시되어 있다. 공암진에는 가운데가 뚫린 바위가 한강 위에 있었는데 김포공항을 만들면서 없애버렸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城山 밑에 자리잡고 있는데 향교는 아직도 강서구 가양동에 남아 있다. 향교 옆에 있는 壇은 전쟁, 질병 등으로 사망하여 구천을 떠돌던영혼들을 위해 수령이 직접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기타 堤堰을 세 개나 표시하고 있어 당시 수리시설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여주목은 강천면과 북내면 일부를 제외한 여주군 전체와 양평군의 개군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여주읍 여주 군청 주변에 있었다. 여주는 예종 때 세종대왕의 무덤인 英陵을 이곳에 옮기면서 지도 왼쪽의 金沙面에 중심을 두고 있던 川寧縣을 합해 牧으로 승격된 곳이다. 영릉 옆에는 효종의 무덤인 寧陵이 보이고 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그렸는데 관아 건물의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고을의 한가운데로는 남한강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데 많은 나루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나루 중에서 梨浦는 이중환의 ≪擇里志≫에 白崖村으로 나오는 곳으로서 조선 후기에 남한강가에서 가장 번성한 浦口 중의 하나였다. 오른쪽의 又晩津은 개항기와 일제 초기에 들어서 이포보다도 훨씬 더 번성한 浦口였다. 남한강가에 있는 神勒寺는 英陵을 옮기면서 크게 늘려던 절로서 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고, 강가의 풍경 또한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한편 지도 왼쪽의 1景 蛇村漁火로부터 용문산의 8景 龍門赤翠 등 여주 八景이 표시되어 있음이 재미있다. 김안국, 이언적 등을 배향하여 1625년(인조 3)에 賜額받은 沂川書院이 금사면에 보이고 있다. 기타 지도 위쪽의 等神面은 원래 登神莊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여주 登神莊 부분에는 신라 때 발생한 鄕·部曲과 고려시대 때 발생한 所·處·莊에 대한 내력이 자세히 적혀 있다.(이기봉)
여주목은 강천면과 북내면 일부를 제외한 여주군 전체와 양평군의 개군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여주읍 여주 군청 주변에 있었다. 여주는 예종 때 세종대왕의 무덤인 英陵을 이곳에 옮기면서 지도 왼쪽의 金沙面에 중심을 두고 있던 川寧縣을 합해 牧으로 승격된 곳이다. 영릉 옆에는 효종의 무덤인 寧陵이 보이고 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그렸는데 관아 건물의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고을의 한가운데로는 남한강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데 많은 나루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나루 중에서 梨浦는 이중환의 ≪擇里志≫에 白崖村으로 나오는 곳으로서 조선 후기에 남한강가에서 가장 번성한 浦口 중의 하나였다. 오른쪽의 又晩津은 개항기와 일제 초기에 들어서 이포보다도 훨씬 더 번성한 浦口였다. 남한강가에 있는 神勒寺는 英陵을 옮기면서 크게 늘려던 절로서 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고, 강가의 풍경 또한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한편 지도 왼쪽의 1景 蛇村漁火로부터 용문산의 8景 龍門赤翠 등 여주 八景이 표시되어 있음이 재미있다. 김안국, 이언적 등을 배향하여 1625년(인조 3)에 賜額받은 沂川書院이 금사면에 보이고 있다. 기타 지도 위쪽의 等神面은 원래 登神莊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여주 登神莊 부분에는 신라 때 발생한 鄕·部曲과 고려시대 때 발생한 所·處·莊에 대한 내력이 자세히 적혀 있다.(이기봉)
연천현은 연천군 연천읍과 중면, 황지리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연천읍 읍내리에 있었다. 고을의 왼쪽으로는 임진강 본류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맨 아래쪽으로는 한탄강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간다.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차탄천이다. 이 지도에서는面 단위가 아니라 마을 단위로 자세히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또한 背山臨水 형태의 마을 입지를 잘 보여주듯이 마을 이름 뒤에 꼭 산을 그려 넣고 있음도 재미있다. 읍치는 산세에 의해 빙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 역시 흥미롭다. 오른쪽의 紫煙瀑은 지금의 재인폭포로서 실재의 모습과 거의 비슷하게 그렸다. 지금은 연천읍 고문리에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臨 書院은 朱子를 배향하여 1713년(숙종 39)에 賜額받은 서원이다.(이기봉)
연천현은 연천군 연천읍과 중면, 황지리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연천읍 읍내리에 있었다. 고을의 왼쪽으로는 임진강 본류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맨 아래쪽으로는 한탄강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간다.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차탄천이다. 이 지도에서는面 단위가 아니라 마을 단위로 자세히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또한 背山臨水 형태의 마을 입지를 잘 보여주듯이 마을 이름 뒤에 꼭 산을 그려 넣고 있음도 재미있다. 읍치는 산세에 의해 빙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 역시 흥미롭다. 오른쪽의 紫煙瀑은 지금의 재인폭포로서 실재의 모습과 거의 비슷하게 그렸다. 지금은 연천읍 고문리에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臨 書院은 朱子를 배향하여 1713년(숙종 39)에 賜額받은 서원이다.(이기봉)
영종진에서 관할하던 지역은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와 용유도, 무의도 일대이며, 중심지는 영종도의 중산동 일대에 있었다. 1653년(효종 4)에 정4품의 萬戶가 관장하던 남양의 永宗鎭을 이곳으로 옮겨와서 監牧官을 겸임하게 하였고, 1681년(숙종 7)에 종3품의 僉使로 올렸다. 1690년(숙종 16)에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 그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에 종2품의 防禦使로 승격되었고, 1705년(숙종 31)에 교동도에 있는 京畿水營에 속하게 되었다. 지도 위쪽에는 강화도가 보이고 있으며, 강화도와 통진 사이에 있었던 鹽河가 京江船路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서 京江이란 首都 한양의 남쪽에 있었던 현재의 한강 지역을 일컫는다. 지도에는 지금의 영종도 중산동 일대가 갯벌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섬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이 갯벌을 ''썰물이 되면 육지가 된다''는 ''潮退成陸''으로 표시하였다. 또한 섬 곳곳에 나라에서 쓸 나무를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禁山과 말을 키우던 牧場이 있었음이 잘 표시되어 있다. 월미도에는 幸(→行)宮이 있었음이 보이고, 영종진에서 관할하는 면이 4개임도 알 수 있다.(이기봉)
영종진에서 관할하던 지역은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와 용유도, 무의도 일대이며, 중심지는 영종도의 중산동 일대에 있었다. 1653년(효종 4)에 정4품의 萬戶가 관장하던 남양의 永宗鎭을 이곳으로 옮겨와서 監牧官을 겸임하게 하였고, 1681년(숙종 7)에 종3품의 僉使로 올렸다. 1690년(숙종 16)에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 그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에 종2품의 防禦使로 승격되었고, 1705년(숙종 31)에 교동도에 있는 京畿水營에 속하게 되었다. 지도 위쪽에는 강화도가 보이고 있으며, 강화도와 통진 사이에 있었던 鹽河가 京江船路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서 京江이란 首都 한양의 남쪽에 있었던 현재의 한강 지역을 일컫는다. 지도에는 지금의 영종도 중산동 일대가 갯벌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섬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이 갯벌을 ''썰물이 되면 육지가 된다''는 ''潮退成陸''으로 표시하였다. 또한 섬 곳곳에 나라에서 쓸 나무를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禁山과 말을 키우던 牧場이 있었음이 잘 표시되어 있다. 월미도에는 幸(→行)宮이 있었음이 보이고, 영종진에서 관할하는 면이 4개임도 알 수 있다.(이기봉)
영평현은 포천군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중면 영평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왼쪽에 있는 하천은 지금의 한탄강이고 오른쪽에 표시된 하천이 지금의 북한강이다. 고을 동북쪽의 백운산에서 발원한 도평천과 아래쪽의 포천에서 발원한 포천천이 樂歸亭에서 합류하여 서쪽의 한탄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佛谷山에서 뻗어나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싸여 있는데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金水亭은 楊士彦(1517-1584)이 이름을 지어 현판을 달고, 李德馨(1561-1613)이 시를 지어찬양한 곳이다. 그 아래쪽의 蒼玉屛은 푸른 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 있는 곳이다. 두 곳 모두 당시에 아주 유명했던 영평 8경으로서 지금은 창수면 오가리에 있다. 창옥병 옆에 있는 서원은 玉屛書院으로서 政爭을 피해 이 고을 백운산에 숨어살았던 朴淳(1523-1589) 등을 배향하여 1713년(숙종 39)에 賜額받았다. 남산 오른쪽에 있는 樂歸亭과 흰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작은 섬인 白鷺洲 모두 당시에 아주 잘 알려진 名勝地였다. 지금은 영중면 거사리에 있다.(이기봉)
영평현은 포천군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중면 영평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왼쪽에 있는 하천은 지금의 한탄강이고 오른쪽에 표시된 하천이 지금의 북한강이다. 고을 동북쪽의 백운산에서 발원한 도평천과 아래쪽의 포천에서 발원한 포천천이 樂歸亭에서 합류하여 서쪽의 한탄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佛谷山에서 뻗어나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싸여 있는데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金水亭은 楊士彦(1517-1584)이 이름을 지어 현판을 달고, 李德馨(1561-1613)이 시를 지어찬양한 곳이다. 그 아래쪽의 蒼玉屛은 푸른 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 있는 곳이다. 두 곳 모두 당시에 아주 유명했던 영평 8경으로서 지금은 창수면 오가리에 있다. 창옥병 옆에 있는 서원은 玉屛書院으로서 政爭을 피해 이 고을 백운산에 숨어살았던 朴淳(1523-1589) 등을 배향하여 1713년(숙종 39)에 賜額받았다. 남산 오른쪽에 있는 樂歸亭과 흰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작은 섬인 白鷺洲 모두 당시에 아주 잘 알려진 名勝地였다. 지금은 영중면 거사리에 있다.(이기봉)
용인현은 양지면, 원삼면, 백암면을 제외한 용인시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구성면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하천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진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은 광주를 지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경안천의 최 상류이다. 왼쪽 위의 하천은 성남을 지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탄천의 상류이고, 아래는평택을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가는 진위천의 상류이다. 읍치는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으로 표현되어 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과장되어 있다. 읍치에는 다른 지도에서 보기 어려운 3壇 1廟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3단 1묘는 城隍壇· 壇·社稷壇과 鄕校로서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곳이다. 읍치 위쪽 정몽주의 묘 옆으로 그를 배향하여 1576년(선조 9)에 세워지고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은 忠烈書院이 보이고 있다. 지금은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왼쪽 아래에 보이는 深谷書院은 조광조(1482-1519)를 배향하여 1650년(효종 1)에 사액받은 書院이다. 지금은 수지읍 상현리에 있다.용인현은 조선 초에 龍駒縣과 處仁縣을 합해 만들어진 고을이다. 읍치는 용구현의 터이고, 지도아래쪽의 縣內面이 옛 처인현의 터이다. 처인현은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고의 침입 때 김윤후가 살례탑을 射殺한 곳으로 알려진 처인성 싸움의 현장이다. 그 위쪽으로는 直洞酒幕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어 지도 제작 당시 이미 주막이 보편화된 상태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기타 조선 후기 5軍營의 하나였던 守禦廳의 屯田이 지도의 오른쪽과 아래쪽에 각각 하나씩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용인현은 양지면, 원삼면, 백암면을 제외한 용인시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구성면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하천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진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은 광주를 지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경안천의 최 상류이다. 왼쪽 위의 하천은 성남을 지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탄천의 상류이고, 아래는평택을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가는 진위천의 상류이다. 읍치는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으로 표현되어 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과장되어 있다. 읍치에는 다른 지도에서 보기 어려운 3壇 1廟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3단 1묘는 城隍壇· 壇·社稷壇과 鄕校로서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곳이다. 읍치 위쪽 정몽주의 묘 옆으로 그를 배향하여 1576년(선조 9)에 세워지고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은 忠烈書院이 보이고 있다. 지금은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왼쪽 아래에 보이는 深谷書院은 조광조(1482-1519)를 배향하여 1650년(효종 1)에 사액받은 書院이다. 지금은 수지읍 상현리에 있다.용인현은 조선 초에 龍駒縣과 處仁縣을 합해 만들어진 고을이다. 읍치는 용구현의 터이고, 지도아래쪽의 縣內面이 옛 처인현의 터이다. 처인현은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고의 침입 때 김윤후가 살례탑을 射殺한 곳으로 알려진 처인성 싸움의 현장이다. 그 위쪽으로는 直洞酒幕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어 지도 제작 당시 이미 주막이 보편화된 상태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기타 조선 후기 5軍營의 하나였던 守禦廳의 屯田이 지도의 오른쪽과 아래쪽에 각각 하나씩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음죽현은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장호원읍 선읍리에 있었다. 고을의 아래쪽을 흐르는 하천이 남한강의 지류 청미천인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높은 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의 모습이 매우 강렬하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설성산과 영악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縣''이란 매우 간단한 표시로서 그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지도 아래쪽 청미천 위에는 長海院石橋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이 지금의 장호원이다. 장호원은 넓은 들판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리를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와 일제 초기까지 경기 남부 및 충청 북부 지역에서 안성과 함께 가장 번성했던 장호원장이 있었다. 지도의 왼쪽에 있는 無極?은 이 고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충주에 있었다. 지금은 음성군 금왕읍에 있다.(이기봉)
음죽현은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장호원읍 선읍리에 있었다. 고을의 아래쪽을 흐르는 하천이 남한강의 지류 청미천인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높은 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의 모습이 매우 강렬하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설성산과 영악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縣''이란 매우 간단한 표시로서 그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지도 아래쪽 청미천 위에는 長海院石橋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이 지금의 장호원이다. 장호원은 넓은 들판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리를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와 일제 초기까지 경기 남부 및 충청 북부 지역에서 안성과 함께 가장 번성했던 장호원장이 있었다. 지도의 왼쪽에 있는 無極?은 이 고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충주에 있었다. 지금은 음성군 금왕읍에 있다.(이기봉)
이천부는 이천시 시내, 부발읍, 대월면, 모가면, 호법면, 마장면, 신둔면, 백사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이천 시내 관고동·창전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서쪽에 있었던 고을의 鎭山 雪峯山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전체적으로 매우 간략한데 겹겹이 둘러싸인 산줄기의 모습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읍치를 매우 확대·과장되게 그렸다. 읍치 안에 있는 大闕은 行宮으로서 왕들이 여주에 있는 세종의 무덤인 영릉을 참배할 때 묵었던 곳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書院은 雪峯書院으로서 서희(940-998) 등을 배향하여 1504년(연산군 10)에 세워졌으며 賜額받지는 못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복하천으로서 남서쪽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의 여주 경계를 지나 남한강으로 들어간다.(이기봉)
이천부는 이천시 시내, 부발읍, 대월면, 모가면, 호법면, 마장면, 신둔면, 백사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이천 시내 관고동·창전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서쪽에 있었던 고을의 鎭山 雪峯山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전체적으로 매우 간략한데 겹겹이 둘러싸인 산줄기의 모습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읍치를 매우 확대·과장되게 그렸다. 읍치 안에 있는 大闕은 行宮으로서 왕들이 여주에 있는 세종의 무덤인 영릉을 참배할 때 묵었던 곳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書院은 雪峯書院으로서 서희(940-998) 등을 배향하여 1504년(연산군 10)에 세워졌으며 賜額받지는 못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복하천으로서 남서쪽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의 여주 경계를 지나 남한강으로 들어간다.(이기봉)
인천부는 인천광역시 동구, 중구, 남구, 연수구, 남동구와 시흥시 시내인 옛 소래읍에 해당하며 읍치는 남구 관교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의 蘇來山이며, 고을 전체가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싸여있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으로는 德積島를 비롯한 인천 앞 바다 여러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에 있는 鶴山書院은 이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던李端相(?-1669) 부자를 배향하여 1702년(숙종 28)에 세워졌다. 읍치 위쪽으로는 이미 頹落해 있었던 문학산성이 둘레가 10리라는 설명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도의 가장 왼쪽에 있는 重林驛은 6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한편 강화도 조약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지금의 인천항이 된 濟物浦가 지도 오른쪽에 濟物津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浦里浦는 지금 서울과 인천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소래포구 부근이다. 그 위쪽의 賑廳新堰은 賑恤廳에 소속되어 있었던 제언으로 보인다. 지도 맨 위쪽에 보이는 梨浦面은 원래 梨浦部曲이었으며, 바다를 넘어가 있는 인천의 越境地이다. 지금의 화성군 남양면 문호리와 비봉면 유포리 일대에 있었다.(이기봉)
인천부는 인천광역시 동구, 중구, 남구, 연수구, 남동구와 시흥시 시내인 옛 소래읍에 해당하며 읍치는 남구 관교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의 蘇來山이며, 고을 전체가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싸여있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으로는 德積島를 비롯한 인천 앞 바다 여러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에 있는 鶴山書院은 이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던李端相(?-1669) 부자를 배향하여 1702년(숙종 28)에 세워졌다. 읍치 위쪽으로는 이미 頹落해 있었던 문학산성이 둘레가 10리라는 설명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도의 가장 왼쪽에 있는 重林驛은 6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한편 강화도 조약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지금의 인천항이 된 濟物浦가 지도 오른쪽에 濟物津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浦里浦는 지금 서울과 인천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소래포구 부근이다. 그 위쪽의 賑廳新堰은 賑恤廳에 소속되어 있었던 제언으로 보인다. 지도 맨 위쪽에 보이는 梨浦面은 원래 梨浦部曲이었으며, 바다를 넘어가 있는 인천의 越境地이다. 지금의 화성군 남양면 문호리와 비봉면 유포리 일대에 있었다.(이기봉)
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과 소남면을 제외한 장단군에 해당한다. 지금은 휴전선이 가운데를 가르고 있어 일부는 남한에 들어와 있고, 북한쪽은 장풍군에 속한다. 임진강이 고을의 동남쪽을 감싸며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북쪽에서 흘러온 동쪽의 사미천과 서쪽의 사천이 임진강으로 합류한다. 지도에서는 두 하천의 경계가 그려져 있지 않은데 望海山 부근에서 양쪽으로 갈라진다. 장단부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부의 바로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 명종의 무덤인 智陵을 비롯한 많은 陵과 신하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지도에는 세종 때 옮기기 이전의 읍치를 古邑으로 나타냈으며, 이미 이 고을에 소속된 松林(古松縣), 臨江폐현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의 臨江書院은 안향(1243-1306), 이색(1328-1396) 등을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곳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이 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강 건너편의 古南面은 지금의 적성면 장좌리 일대이다. 지도 아래쪽의 임진강변에 있는 德津壇은 나라에서 봄가을로 香과 祝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으로서 中祀에 해당되었다. 그 맞은 편의 臨津別將所가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유명한 임진나루가 있던 곳이다.(이기봉)
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과 소남면을 제외한 장단군에 해당한다. 지금은 휴전선이 가운데를 가르고 있어 일부는 남한에 들어와 있고, 북한쪽은 장풍군에 속한다. 임진강이 고을의 동남쪽을 감싸며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북쪽에서 흘러온 동쪽의 사미천과 서쪽의 사천이 임진강으로 합류한다. 지도에서는 두 하천의 경계가 그려져 있지 않은데 望海山 부근에서 양쪽으로 갈라진다. 장단부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부의 바로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 명종의 무덤인 智陵을 비롯한 많은 陵과 신하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지도에는 세종 때 옮기기 이전의 읍치를 古邑으로 나타냈으며, 이미 이 고을에 소속된 松林(古松縣), 臨江폐현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의 臨江書院은 안향(1243-1306), 이색(1328-1396) 등을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곳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이 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강 건너편의 古南面은 지금의 적성면 장좌리 일대이다. 지도 아래쪽의 임진강변에 있는 德津壇은 나라에서 봄가을로 香과 祝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으로서 中祀에 해당되었다. 그 맞은 편의 臨津別將所가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유명한 임진나루가 있던 곳이다.(이기봉)
적성현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군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적성면 구읍리에 있었다.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남쪽의 紺岳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읍치는 여러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다. 또한 읍치가 지나치게 확대·과장되어 다른 지역은 극히 간단하게 표현되었다. 읍치에는 다른 지도에서 보기 어려운 3壇 1廟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3단 1묘는 城隍壇· 壇·社稷壇과 鄕校로서 고을 수령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던 곳이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紺岳山祭壇은 조선에서 中祀에 기재되었던 곳으로서 봄 가을에 香祝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이다. 이 산 꼭대기에는 龍池가 있어 아무리 가물거나 장마가 발생해도 물이 불거나 줄지 않는 신령스러운 힘이 있었다고 한다. 지도 아래쪽으로는 임진강 본류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는데 이 지역에서는 新津江, 頭只江 등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적성현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군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적성면 구읍리에 있었다.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남쪽의 紺岳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읍치는 여러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다. 또한 읍치가 지나치게 확대·과장되어 다른 지역은 극히 간단하게 표현되었다. 읍치에는 다른 지도에서 보기 어려운 3壇 1廟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3단 1묘는 城隍壇· 壇·社稷壇과 鄕校로서 고을 수령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던 곳이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紺岳山祭壇은 조선에서 中祀에 기재되었던 곳으로서 봄 가을에 香祝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이다. 이 산 꼭대기에는 龍池가 있어 아무리 가물거나 장마가 발생해도 물이 불거나 줄지 않는 신령스러운 힘이 있었다고 한다. 지도 아래쪽으로는 임진강 본류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는데 이 지역에서는 新津江, 頭只江 등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죽산부는 안성시의 죽산면·일죽면·삼죽면과 용인시 백암면·원삼면의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고을의 서북쪽에서 발원한 청미천과 죽산천이 서남쪽에서 만나 장호원을 거쳐 남한강과 합류하는데 지도에는 川民川이라 적혀 있다. 고을 전체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다. 읍치 남쪽의 本邑案山이란 표현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읍치에는 지금 보물 435호로 지정된 죽산리 5층 석탑과 매산리에 남아 있는 미륵불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임진왜란 때 副摠兵으로서 이여송을 보좌하여 출전한 명나라 장수 吳惟忠의 仁勇淸德碑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天朝는 명나라를 의미하며, 萬曆 25년은 1597년에 해당한다. 그 위쪽의 古山城은 竹州山城으로서 천혜의 要塞地이다. 1236년(고려 고종 23) 9월에 竹州防護別監 宋文胄가 이 성에 들어가 몽고군을 물리친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읍치의 왼쪽에 있는 七長寺는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에 있던 史籍이 위험해지자 옮겨 보관했던 장소이다. 사방이 산에 의해 둘러싸인 작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보물 488호 혜소국사비 등이 보관되어 있다. 고을 동쪽으로는 서울에서 동래까지의 嶺南大路가 지나가고 있다.(이기봉)
죽산부는 안성시의 죽산면·일죽면·삼죽면과 용인시 백암면·원삼면의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고을의 서북쪽에서 발원한 청미천과 죽산천이 서남쪽에서 만나 장호원을 거쳐 남한강과 합류하는데 지도에는 川民川이라 적혀 있다. 고을 전체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다. 읍치 남쪽의 本邑案山이란 표현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읍치에는 지금 보물 435호로 지정된 죽산리 5층 석탑과 매산리에 남아 있는 미륵불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임진왜란 때 副摠兵으로서 이여송을 보좌하여 출전한 명나라 장수 吳惟忠의 仁勇淸德碑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天朝는 명나라를 의미하며, 萬曆 25년은 1597년에 해당한다. 그 위쪽의 古山城은 竹州山城으로서 천혜의 要塞地이다. 1236년(고려 고종 23) 9월에 竹州防護別監 宋文胄가 이 성에 들어가 몽고군을 물리친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읍치의 왼쪽에 있는 七長寺는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에 있던 史籍이 위험해지자 옮겨 보관했던 장소이다. 사방이 산에 의해 둘러싸인 작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보물 488호 혜소국사비 등이 보관되어 있다. 고을 동쪽으로는 서울에서 동래까지의 嶺南大路가 지나가고 있다.(이기봉)
지평현은 양평군 지제면, 양동면, 청운면, 단월면, 용문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지제면 지평리에 있었다. 지도는 서북쪽을 위로 그렸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지나 위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지금의 흑천인데 양평을 지나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원주를 지나 섬강으로 들어가는지금의 석곡천이다. 지도의 맨 위쪽에 있는 彌智山은 지금의 용문산으로서 천연기념물 303호로 지정된 은행나무로 유명한 龍門寺 등 많은사찰이 입지해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雲溪書院은 용문산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길러낸 趙昱(1498-1557)과 그의 형 趙晟(1492-1555)을 배향하여 1714년(숙종 40)에 賜額받았다. 읍치에는 주요 관아 건물 및 鄕校, 城隍壇, 社稷壇과 함께 연못이 표시되어 있음이 재미있다. 읍치 아래쪽에 古寺塔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한편 지도 오른쪽에 ''守禦屯折受'', ''彰義宮折受''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수어청과 창의궁의 소속 전답이있던 지역이란 뜻이다. 지도 왼쪽에는 다른 지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曲水場이라는 場市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 후기로부터 일제시대까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장시였는데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번성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지도 위쪽에 있는 陽根과 마찬가지로 공주를 비롯한 유명한 사람들의 무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지평현은 양평군 지제면, 양동면, 청운면, 단월면, 용문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지제면 지평리에 있었다. 지도는 서북쪽을 위로 그렸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지나 위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지금의 흑천인데 양평을 지나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원주를 지나 섬강으로 들어가는지금의 석곡천이다. 지도의 맨 위쪽에 있는 彌智山은 지금의 용문산으로서 천연기념물 303호로 지정된 은행나무로 유명한 龍門寺 등 많은사찰이 입지해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雲溪書院은 용문산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길러낸 趙昱(1498-1557)과 그의 형 趙晟(1492-1555)을 배향하여 1714년(숙종 40)에 賜額받았다. 읍치에는 주요 관아 건물 및 鄕校, 城隍壇, 社稷壇과 함께 연못이 표시되어 있음이 재미있다. 읍치 아래쪽에 古寺塔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한편 지도 오른쪽에 ''守禦屯折受'', ''彰義宮折受''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수어청과 창의궁의 소속 전답이있던 지역이란 뜻이다. 지도 왼쪽에는 다른 지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曲水場이라는 場市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 후기로부터 일제시대까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장시였는데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번성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지도 위쪽에 있는 陽根과 마찬가지로 공주를 비롯한 유명한 사람들의 무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진위현은 평택시 진위면, 서타면, 고덕면, 옛 송탄시와 평택시내에 해당하며 읍치는 진위면 봉남리에 있었다. 고을의 중심부를 통과하는 하천이 용인에서 흘러오는 진위천이고, 서쪽의 하천이 수원에서 내려오는 수원천이다. 두 하천은 고을 서쪽에서 만나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렸다. 지도에는 읍치 부분이 확대·과장되어 남쪽이 지나치게 축소되어 있다. 읍치에 있는 ''衙''는 수령이 집무를 보던 衙舍이다. 客舍는 임금의 殿牌(또는 闕牌)를 보관하는 곳으로서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바라보며 절을 하였다(向闕望拜).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왼쪽에 있는 社壇은 수령이 주관이 되어 土地神에게 제사하던 곳이다. 한편 지도에는 두 개의 酒幕이 표시되어 있어 지도 제작 당시 일반인들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진위현은 평택시 진위면, 서타면, 고덕면, 옛 송탄시와 평택시내에 해당하며 읍치는 진위면 봉남리에 있었다. 고을의 중심부를 통과하는 하천이 용인에서 흘러오는 진위천이고, 서쪽의 하천이 수원에서 내려오는 수원천이다. 두 하천은 고을 서쪽에서 만나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렸다. 지도에는 읍치 부분이 확대·과장되어 남쪽이 지나치게 축소되어 있다. 읍치에 있는 ''衙''는 수령이 집무를 보던 衙舍이다. 客舍는 임금의 殿牌(또는 闕牌)를 보관하는 곳으로서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바라보며 절을 하였다(向闕望拜).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왼쪽에 있는 社壇은 수령이 주관이 되어 土地神에게 제사하던 곳이다. 한편 지도에는 두 개의 酒幕이 표시되어 있어 지도 제작 당시 일반인들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통진부는 김포군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월곶면 고막리, 군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동쪽과 북쪽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바다로 통하는 곳이고, 고을의 서쪽은 鹽河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와 마주보고 있다. 고을의 북쪽에 있는 한강을 당시에는 보통 祖江이라고 불렀는데 지도에는 ''阻江''으로 쓰여있다. 지금도 월곶면에는 조강리라는 마을이 있다. 문수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만들어졌는데 강화도로 건너가는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인 갑곶나루를 방어할 수 있는 장소이다.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군과 격전을 벌여 물리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德津은 이곳의 뱃길 중에서 가장 험한 곳으로서 그 앞쪽을 손돌목이라고 한다. 손돌목은 고려 때의 사공 손돌에관한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서 지금도 그의 묘가 남아 있다. 음력 10월 20일이 되면 큰 바람이 부는데 뱃사공들은 그것을 손돌바람이라고 불렀다.(이기봉)
통진부는 김포군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월곶면 고막리, 군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동쪽과 북쪽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바다로 통하는 곳이고, 고을의 서쪽은 鹽河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와 마주보고 있다. 고을의 북쪽에 있는 한강을 당시에는 보통 祖江이라고 불렀는데 지도에는 ''阻江''으로 쓰여있다. 지금도 월곶면에는 조강리라는 마을이 있다. 문수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만들어졌는데 강화도로 건너가는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인 갑곶나루를 방어할 수 있는 장소이다.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군과 격전을 벌여 물리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德津은 이곳의 뱃길 중에서 가장 험한 곳으로서 그 앞쪽을 손돌목이라고 한다. 손돌목은 고려 때의 사공 손돌에관한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서 지금도 그의 묘가 남아 있다. 음력 10월 20일이 되면 큰 바람이 부는데 뱃사공들은 그것을 손돌바람이라고 불렀다.(이기봉)
파주목은 파주시 파주읍, 파평면, 법원읍, 문산읍, 광탄면, 조리면, 월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牧''이란 높은 격의 고을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세조의 왕비 貞熹王后 윤씨의 본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동쪽에서 들어온 임진강이 고을 북쪽을 감싸며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임진강변에는 여러 개의 정자가 표시되어 있어 뛰어난 경치가 있는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伴鷗亭은 세종 때의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정자를 세우고 남은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지금의 문산읍 사목리에 있다. 花石亭은 율곡 이이(1536-1584)가 어렸을 때 공부했던 곳 중의 하나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비오는 밤중에 이 정자에 불을 질러 임진강을 건넜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파평면 율곡리에 있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紫巖(→雲)書院은 이이와 그의 제자 김장생 등을 배향하여 1615년(광해군 7)에 창건되었고 효종 때 賜額받았다. 지금은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데 이이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坡山書院과 豊溪祠宇도 모두 賜額받은 곳이다. 읍치 위쪽에 있는 長陵은 인조의 무덤으로서 나중에 지금의 파주시 탄현면으로 옮겨갔다. 읍치는 산에 의해 둘러싸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으며, 앞쪽으로는 지금의 문산천이 동쪽에서 흘러와 임진강에 합류하고 있다.(이기봉)
파주목은 파주시 파주읍, 파평면, 법원읍, 문산읍, 광탄면, 조리면, 월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牧''이란 높은 격의 고을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세조의 왕비 貞熹王后 윤씨의 본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동쪽에서 들어온 임진강이 고을 북쪽을 감싸며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임진강변에는 여러 개의 정자가 표시되어 있어 뛰어난 경치가 있는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伴鷗亭은 세종 때의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정자를 세우고 남은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지금의 문산읍 사목리에 있다. 花石亭은 율곡 이이(1536-1584)가 어렸을 때 공부했던 곳 중의 하나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비오는 밤중에 이 정자에 불을 질러 임진강을 건넜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파평면 율곡리에 있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紫巖(→雲)書院은 이이와 그의 제자 김장생 등을 배향하여 1615년(광해군 7)에 창건되었고 효종 때 賜額받았다. 지금은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데 이이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坡山書院과 豊溪祠宇도 모두 賜額받은 곳이다. 읍치 위쪽에 있는 長陵은 인조의 무덤으로서 나중에 지금의 파주시 탄현면으로 옮겨갔다. 읍치는 산에 의해 둘러싸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으며, 앞쪽으로는 지금의 문산천이 동쪽에서 흘러와 임진강에 합류하고 있다.(이기봉)
포천현은 포천읍, 화현면, 군내면, 가산면, 소흘읍, 내촌면, 갈월리 서쪽을 제외한 신북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에 있었다. 남쪽에서 발원한 포천천이 읍치 서쪽을 지나 북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영평을 거쳐 임진강의 지류 한탄강에 합류한다. 고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단순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읍치도 二重의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의 투영을 엿볼 수 있다. 읍치 뒤쪽에는 半月山堅城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1618년(광해군 10)에 永平에 監營을 설치함과 동시에 이 성을 수리하여 中軍을 두었던 곳이다. 1623년(인조 1)에 감영과 중군 모두 철폐되었다. 산성 위쪽에는 城隍堂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수령이 직접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읍치 왼쪽에는 李德馨(1561-1613) 등을 배향하여 1692년(숙종 18)에 賜額받은 龍淵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지도 아래쪽에는 李恒福(1556-1618)을 배향하여 1660년(현종 1)에 賜額받은 白沙書院도 표시되어 있다. 이 서원은 花山書院이라고도 불린다.(이기봉)
포천현은 포천읍, 화현면, 군내면, 가산면, 소흘읍, 내촌면, 갈월리 서쪽을 제외한 신북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에 있었다. 남쪽에서 발원한 포천천이 읍치 서쪽을 지나 북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영평을 거쳐 임진강의 지류 한탄강에 합류한다. 고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단순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읍치도 二重의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의 투영을 엿볼 수 있다. 읍치 뒤쪽에는 半月山堅城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1618년(광해군 10)에 永平에 監營을 설치함과 동시에 이 성을 수리하여 中軍을 두었던 곳이다. 1623년(인조 1)에 감영과 중군 모두 철폐되었다. 산성 위쪽에는 城隍堂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수령이 직접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읍치 왼쪽에는 李德馨(1561-1613) 등을 배향하여 1692년(숙종 18)에 賜額받은 龍淵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지도 아래쪽에는 李恒福(1556-1618)을 배향하여 1660년(현종 1)에 賜額받은 白沙書院도 표시되어 있다. 이 서원은 花山書院이라고도 불린다.(이기봉)
풍덕부는 일제시대의 개풍군 광덕면, 대성면, 흥교면, 임한면, 중면, 상도면, 봉동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개성직할시 판문군과 개풍군 남쪽 일대이다. 고을의 아래쪽으로는 강화도와 통진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사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아래쪽의 昇天鎭은 昇天津이 잘못 쓰여진 것이며 고려 때 이후 강화도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터였다. 昇天鎭은강화도에 있었다. 승천진 왼쪽의 梅花亭은 이미 폐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적고 있다. 통진과 마주하고 있는 한강 하구를 옛날에는 祖江이라고 불렀는데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齊陵은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왕비인 神懿王后의 무덤이다. 오른쪽에 있는 厚陵은 조선 2대왕 定宗의 무덤이다. 읍치 위쪽에 있는 서원은 龜巖書院으로서 율곡 이이를 배향하여 세워졌으며, 1682년(숙종 8)에 賜額받았다. 邑治는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으며 面은 표시하지 않고 洞과 里 4개만 표시한 것이 특이하다.(이기봉)
풍덕부는 일제시대의 개풍군 광덕면, 대성면, 흥교면, 임한면, 중면, 상도면, 봉동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개성직할시 판문군과 개풍군 남쪽 일대이다. 고을의 아래쪽으로는 강화도와 통진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사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아래쪽의 昇天鎭은 昇天津이 잘못 쓰여진 것이며 고려 때 이후 강화도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터였다. 昇天鎭은강화도에 있었다. 승천진 왼쪽의 梅花亭은 이미 폐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적고 있다. 통진과 마주하고 있는 한강 하구를 옛날에는 祖江이라고 불렀는데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齊陵은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왕비인 神懿王后의 무덤이다. 오른쪽에 있는 厚陵은 조선 2대왕 定宗의 무덤이다. 읍치 위쪽에 있는 서원은 龜巖書院으로서 율곡 이이를 배향하여 세워졌으며, 1682년(숙종 8)에 賜額받았다. 邑治는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으며 面은 표시하지 않고 洞과 里 4개만 표시한 것이 특이하다.(이기봉)
개령현은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 감문면 서쪽, 아포읍, 남면과 연명리 일대를 제외한 농소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개령면 동부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甘川이 흐르고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에 ''현의 경내에 아홉 군데의 洑를 막아 논에 물을 대기 때문에 水利가 가장 많다''는 표현이 있을 뿐만 아니라 ≪擇里志≫에도 ''관개의 이로움이 있다''고 서술되어 있어 감천 변의 넓은 평지가 일찍부터 논농사 지역으로 개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개령현은 ≪삼국사기≫에 231년(신라 조분왕 2)에 병합된 甘文國의 땅으로 나오는 곳이다.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읍치 오른쪽의 柳東山 북쪽 東院 곁에 감문국 때의 궁궐터가 남아 있고, 현 북쪽 20리(지금의 감문면삼성리)에는 감문국 金孝王陵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도에도 감문국의 흔적으로 읍치 뒤쪽의 甘文山이 나오고 있다. 읍치 공간은 그리 높지 않은 南山과 柳東山이 표시된 점으로 보아 풍수적 관념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읍치 아래쪽의 德林書院은 김종직, 정경세 등을 배향하여 1677년(숙종 3)에 사액받은 서원이다.(이기봉)
개령현은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 감문면 서쪽, 아포읍, 남면과 연명리 일대를 제외한 농소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개령면 동부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甘川이 흐르고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에 ''현의 경내에 아홉 군데의 洑를 막아 논에 물을 대기 때문에 水利가 가장 많다''는 표현이 있을 뿐만 아니라 ≪擇里志≫에도 ''관개의 이로움이 있다''고 서술되어 있어 감천 변의 넓은 평지가 일찍부터 논농사 지역으로 개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개령현은 ≪삼국사기≫에 231년(신라 조분왕 2)에 병합된 甘文國의 땅으로 나오는 곳이다.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읍치 오른쪽의 柳東山 북쪽 東院 곁에 감문국 때의 궁궐터가 남아 있고, 현 북쪽 20리(지금의 감문면삼성리)에는 감문국 金孝王陵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도에도 감문국의 흔적으로 읍치 뒤쪽의 甘文山이 나오고 있다. 읍치 공간은 그리 높지 않은 南山과 柳東山이 표시된 점으로 보아 풍수적 관념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읍치 아래쪽의 德林書院은 김종직, 정경세 등을 배향하여 1677년(숙종 3)에 사액받은 서원이다.(이기봉)
거제부는 지금의 거제시 지역으로서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있었다. 거제부의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도의 오른쪽 아래쪽에 日本界라 표시되어 있듯이 일본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기 때문에 설치된 해안가의 각종 關防處이다. 북쪽으로부터 장목포·조라포·옥포·지세포·가배량·영등포에는 鎭을 설치하여 정4품관인 萬戶를, 율포에는 堡를 설치하여 종9품관인 權官을 파견하여 지키게 했는데 이 중에서 일본의 對馬島를 왕래하는 자들은 조라포에서 바람길을 보았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해안가에는 烽火臺 표시와 함께 望으로 쓰여진 곳이 총 5개가 있는데 烽燧라 표시된 곳이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해안가의 감시를 주목적으로 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한편 舊永登, 舊栗浦 등 ''舊''자가 붙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鎭堡의 이동과 함께 그 이름도 따라서 옮겨감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지명과 그위치를 파악하려 할 경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함을 이 지도를 통해 다시 한번 새겨볼 수 있겠다. 기타 임진왜란 때 북상했다 후퇴한 왜군이 남해안에 수없이 쌓아놓고 주둔했다가 정유재란 때 재차 북상하는 전진기지 노릇을 했던 倭城이 이 지도에도 3개나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읍치는 원래 고을의 鎭山인 鷄龍山 위쪽, 지금의 거제 시내에 있던 古縣城 자리였는데 1711년(숙종 37)에 지도상의 자리로 옮겼고, 산줄기의 표시가 자세하고 겹겹히 쌓여 있는 모습으로 보아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기타 지도 위쪽의 柒川島와 加助島를 비롯한 여러 곳에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읍치 동쪽의 옥포에 있었던 鵝州廢縣은 ≪삼국사기≫에 신라 소성왕(798-800)이 國學生의 祿邑으로 설정한 居老縣으로서 통일신라 祿邑制 연구에서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이기봉)
거창부는 지금의 신원면,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을 제외한 거창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에 있었다. 거창이府로 승격된 시기는 1728년(영조 4)부터 1788년(정조 12)까지의 기간으로서 이 지도의 제작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고을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황강 본류와 가야산에서 발원한 가조천 변에 발달한 두 개의 전형적인 큰 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이 고을이 원래는 두 개의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오른쪽 加西面, 加東面 등의 지역이 옛 加祚縣 지역이다. 읍치 공간은 덕유산에서 뻗어 내려온 고을의 鎭山 建興山 밑에 자리잡고 있다. 지도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賊路要衝이 지도의 동남, 서북 두 군데에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과 눈에 쉽게 띄도록 표현된 봉수의 모습이다. 거창부가경상도의 합천·고령에서 전라도의 무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어 적의 침입시 중요한 요충지역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에 표시된 네 개의 서원 중 道山書院과 浣溪書院은 현종 때 세워져 賜額받았고, 褒忠祠는 1737년(영조 13)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받았다. 龍源書院은 賜額書院이 아니다. 이 중 포충사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가 되었다. 사찰은 古見岩(寺)까지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교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자세히 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이기봉)
거창부는 지금의 신원면,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을 제외한 거창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에 있었다. 거창이府로 승격된 시기는 1728년(영조 4)부터 1788년(정조 12)까지의 기간으로서 이 지도의 제작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고을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황강 본류와 가야산에서 발원한 가조천 변에 발달한 두 개의 전형적인 큰 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이 고을이 원래는 두 개의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오른쪽 加西面, 加東面 등의 지역이 옛 加祚縣 지역이다. 읍치 공간은 덕유산에서 뻗어 내려온 고을의 鎭山 建興山 밑에 자리잡고 있다. 지도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賊路要衝이 지도의 동남, 서북 두 군데에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과 눈에 쉽게 띄도록 표현된 봉수의 모습이다. 거창부가경상도의 합천·고령에서 전라도의 무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어 적의 침입시 중요한 요충지역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에 표시된 네 개의 서원 중 道山書院과 浣溪書院은 현종 때 세워져 賜額받았고, 褒忠祠는 1737년(영조 13)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받았다. 龍源書院은 賜額書院이 아니다. 이 중 포충사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가 되었다. 사찰은 古見岩(寺)까지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교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자세히 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이기봉)
경산현은 지금의 경산시 시내, 남천면, 압량면 북쪽과 대구광역시 수성구 동쪽, 동구 남쪽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시내 삼남동, 삼북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남쪽에 있는 鎭山 馬岩山 부근에서발원한 남천천이 북쪽으로 흘러 琴湖江으로 들어가 서쪽 대구로 빠져나간다. 고을의 남·서쪽은 높은 산지이며 북쪽 금호강가 넓은 평지에 읍치가 자리잡고 있다. 금호강변 押梁驛이 있는 곳은 신라 제6대 祗摩王 때 服屬된 나라로 나오는 押梁小國의 자리라고 하며 지금은 사적 21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경산시내 임당동과 조양동에는 신라 초기 경산지역의 토호세력이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 대형 고분군이 사적 30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孤山書院은 선조 때 이황에게 孤山이란 이름을 받아 만든 서재를 1633년(인조 11) 李滉(1501-1570)과 鄭經世(1563-1633)를 배향하여 세웠지만 賜額서원은 아니다. 기타 지도에 표시된 절 중 慶興寺, 安興菴, 雙溪寺 등은 모두 조선 초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던 사찰로서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민간에서는 불교의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기봉)
경산현은 지금의 경산시 시내, 남천면, 압량면 북쪽과 대구광역시 수성구 동쪽, 동구 남쪽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시내 삼남동, 삼북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남쪽에 있는 鎭山 馬岩山 부근에서발원한 남천천이 북쪽으로 흘러 琴湖江으로 들어가 서쪽 대구로 빠져나간다. 고을의 남·서쪽은 높은 산지이며 북쪽 금호강가 넓은 평지에 읍치가 자리잡고 있다. 금호강변 押梁驛이 있는 곳은 신라 제6대 祗摩王 때 服屬된 나라로 나오는 押梁小國의 자리라고 하며 지금은 사적 21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경산시내 임당동과 조양동에는 신라 초기 경산지역의 토호세력이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 대형 고분군이 사적 30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孤山書院은 선조 때 이황에게 孤山이란 이름을 받아 만든 서재를 1633년(인조 11) 李滉(1501-1570)과 鄭經世(1563-1633)를 배향하여 세웠지만 賜額서원은 아니다. 기타 지도에 표시된 절 중 慶興寺, 安興菴, 雙溪寺 등은 모두 조선 초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던 사찰로서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민간에서는 불교의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기봉)
경주부는 지금의 경주시 전체와 울산광역시 두동면·두서면, 포항시 죽장면·기북면·기계면·신광면 그리고 영천시 북안면 일부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경주 시내 동부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는 통일신라 이전에 만들어진 瞻星臺, 芬皇寺, 半月城과 5세기경에 만들어진 고분 중 가장 큰 것 중의 하나인 鳳凰臺 등이 보이고 있어 신라의 古都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밖에 신라의 마지막 왕을 모신 敬順王廟와 신라시조 박혁거세를 제사지내던 崇德殿 등도 보이고 있다. 읍치 주변으로는 신라 및 통일신라시대에 조영된 栢栗寺, 黃龍寺, 祇林寺, 骨屈(庵), 石窟(庵), 佛國寺, 遠願寺, 深源寺 등이 빙 둘러 있어 화려했던 신라 불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게 한다. 지도 아래쪽의 古關城은 신라 성덕왕(702-737) 때 일본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쪽과 경주시 외동읍 사이에 길게 쌓았던 長城이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 반대한 生六臣의 한 사람이며, 경주 금오산(남산)에서 隱居하며 ≪金鰲神話≫를 쓴 것으로 유명한 김시습(1435-1493)의 위패가 있는 梅月堂이 보이고 있다. 읍치 왼쪽으로는 1563년(명종 18) 설총, 최치원, 김유신을 배향하여 세웠고, 1623년(인조 1)에 賜額받은 西岳書院이 보이고 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서원이었다. 동북쪽 興海와의 경계선에 있는 東岡書院 지역은 조선 전기에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主理哲學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晦齋 이언적(1491-1553)이 살았던 곳으로서 지금도 양동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잘 보호되고 있다. 그 왼쪽에 보이는 玉山書院은 이언적을 배향하여 1574년(선조 7)에 賜額받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서원으로서, 이언적이 학문을 닦았다는 獨樂堂· 溪亭 등이 무성한 숲, 맑은 시내와 함께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위쪽으로는 정혜사지 13층 석탑으로 유명한 定惠寺가 수백미터의 간격을 두고 보이고 있음이 지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기타 北安谷面은 원래 부곡이었던 곳으로서 영천의 경계를 넘어 있는 월경지였으며, 역·원·봉수 등도 자세히 표현되어 있는 지도이다.(이기봉)
고령현은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 쌍림면, 우곡면·개진면 서쪽, 성산면·운수면·덕곡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는 고령읍지산리, 쾌빈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에는 회천이 북쪽 성주에서 들어와 남동쪽으로 빠져 낙동강과 합류하며, 안림천이 서남쪽 합천에서 들어와 읍치 남쪽에서 회천과 합쳐지고 있다. 지도에는 회천이 오른쪽에서 왼쪽 아래로 흐르고 있어 서쪽이 위쪽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의 서쪽에 있는 고을의 진산 耳山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고령현은 4-6세기 가야연맹에서 맹주 노릇을 했던 대가야 지역으로서 562년(신라 진흥왕 23년)에 신라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인해 멸망당했다. 향교 뒷산에는 대가야의 왕 및 수장급 무덤으로 여겨지는 대형고분들이 능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는데 지금은 사적 79호 지산동 고분군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또한 이 산의 정상에는 대가야의 산성으로 추정되는 사적 61호 고령 주산성이 있으며 기록에 의하면 고령읍내에 대가야 왕궁터와 御井 등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지도에는 梅林祠, 道岩祠, 靈淵祠, 文淵祠 등 4개의 ''祠宇''가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받지는 못했다. ≪輿地圖書≫에는 모두 鄕賢祠라고 기록되어 있다. 802년(신라 애장왕 2)에 만들어진 후 여러 번 불에 타서 泗溟大使 등에 의해 중건되어 지금까지 전하는 盤龍寺가 읍치 위쪽에 보이고 있다. 기타 가물 때 祈雨祭를 지냈다는 開山津 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고령현은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 쌍림면, 우곡면·개진면 서쪽, 성산면·운수면·덕곡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는 고령읍지산리, 쾌빈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에는 회천이 북쪽 성주에서 들어와 남동쪽으로 빠져 낙동강과 합류하며, 안림천이 서남쪽 합천에서 들어와 읍치 남쪽에서 회천과 합쳐지고 있다. 지도에는 회천이 오른쪽에서 왼쪽 아래로 흐르고 있어 서쪽이 위쪽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의 서쪽에 있는 고을의 진산 耳山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고령현은 4-6세기 가야연맹에서 맹주 노릇을 했던 대가야 지역으로서 562년(신라 진흥왕 23년)에 신라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인해 멸망당했다. 향교 뒷산에는 대가야의 왕 및 수장급 무덤으로 여겨지는 대형고분들이 능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는데 지금은 사적 79호 지산동 고분군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또한 이 산의 정상에는 대가야의 산성으로 추정되는 사적 61호 고령 주산성이 있으며 기록에 의하면 고령읍내에 대가야 왕궁터와 御井 등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지도에는 梅林祠, 道岩祠, 靈淵祠, 文淵祠 등 4개의 ''祠宇''가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받지는 못했다. ≪輿地圖書≫에는 모두 鄕賢祠라고 기록되어 있다. 802년(신라 애장왕 2)에 만들어진 후 여러 번 불에 타서 泗溟大使 등에 의해 중건되어 지금까지 전하는 盤龍寺가 읍치 위쪽에 보이고 있다. 기타 가물 때 祈雨祭를 지냈다는 開山津 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고성현은 지금의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을 제외한 고성군 전체와 통영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성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아래쪽의 統營은 慶尙右水營 兼 三道統制營이 설치된 곳이다. 지금의 통영시 시내에 해당한다. 경상우수영은 원래 거제도의 烏兒浦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1593년(선조 26)에 이순신을 統制使로 하여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모두 관장하게 하였다. 이후 1602년(선조 35)에 고성의 春元浦로, 1603년에 지도에 표시된 頭龍浦로 옮긴 후 統營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종2품의 통제사가 경상우수사를 겸하였으며, 그 아래에 정4품의 水軍虞侯가 파견되다. 石築의 성곽이 있었으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36척의 戰船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왼쪽에는 이순신을 배향하여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은 忠烈祠가 표시되어 있다. 충렬사 왼쪽 堀梁橋가 설치된 곳은 썰물 때면 섬과 연결되는 지역이다. 한 때 흙으로 메워 사람이 건널 수 있게 만들었지만 다시 파내어 배가 다닐 수 있게 만들고 다리를 설치한 곳이다. 통영 위쪽으로는 우수영과 외부와의 육로 차단 구실을 했던 外城과 轅門도 보이고 있다. 기타 水軍萬戶가 파견된 蛇梁鎭, 唐浦鎭과 別將이 파견된 舊所非鎭, 南村鎭 그리고 權官이 파견된 三千鎭 등도 보인다. 기타 읍치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葛川書院은 사액서원이 아니며,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10여개나 보이고 있다.(이기봉)
곤양군은 지금의 사천시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과 하동군 진교면 남쪽, 금남면, 금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곤양면 성내리에 있었다. 진주와의 경계에 있는 金城古邑이 거의 정 북쪽에 해당됨에도 불구하고 서북쪽으로 표시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 금성고읍 아래에 있는 胎封은 세종대왕의 胎를 안치한 곳으로서 이것 때문에 이 고을이 진주의 屬縣에서 벗어나 郡으로 될 수 있었다. 고을은 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듯이 전체적으로 둘로 나누어져 있다. 왼쪽 아래쪽의 金陽面과 西面 지역은 원래 통일신라 때의 省良縣이 있었던 곳이며 고려 때 金陽部曲으로 강등되어 진주와 남해를 거쳐 이 고을에 속하게 되었다. 그 아래쪽에 보이는 露梁은 남해도와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서 지금은 남해대교가 놓여져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殉國한 노량해전으로 유명하다. 그 위쪽으로는 읍치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進上靑大竹田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進上倉이 표시되어 있어 주목되고, 그 오른쪽으로는 船所와 統倉이 보인다. 기타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총 다섯 군데나 표시되어 있으며 사찰의 표시도 매우 자세함을 알 수 있다.(이기봉)
곤양군은 지금의 사천시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과 하동군 진교면 남쪽, 금남면, 금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곤양면 성내리에 있었다. 진주와의 경계에 있는 金城古邑이 거의 정 북쪽에 해당됨에도 불구하고 서북쪽으로 표시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 금성고읍 아래에 있는 胎封은 세종대왕의 胎를 안치한 곳으로서 이것 때문에 이 고을이 진주의 屬縣에서 벗어나 郡으로 될 수 있었다. 고을은 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듯이 전체적으로 둘로 나누어져 있다. 왼쪽 아래쪽의 金陽面과 西面 지역은 원래 통일신라 때의 省良縣이 있었던 곳이며 고려 때 金陽部曲으로 강등되어 진주와 남해를 거쳐 이 고을에 속하게 되었다. 그 아래쪽에 보이는 露梁은 남해도와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서 지금은 남해대교가 놓여져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殉國한 노량해전으로 유명하다. 그 위쪽으로는 읍치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進上靑大竹田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進上倉이 표시되어 있어 주목되고, 그 오른쪽으로는 船所와 統倉이 보인다. 기타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총 다섯 군데나 표시되어 있으며 사찰의 표시도 매우 자세함을 알 수 있다.(이기봉)
군위현은 지금의 군위군 군위읍, 소보면, 효령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군위읍 서부리, 동부리일대에 있었다. 의흥의 팔공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지류 위천이 고을 한가운데를 지나 서북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고을 동서남북의 산세가 실제에 가깝게 잘 그려져 있다. 읍치는 서쪽을 향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읍치 동남쪽 馬井菴 뒤에 있었던 고을의 鎭山 馬井山을 기준으로 그렸기 때문인 듯하다. 지도 아래쪽에 보이는 孝令面은 조선 초에 來屬된 효령폐현의 자리이며, 이곳에는 金庾信祠가 있어 매년 단오날에 고을의 우두머리 아전이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기를 세워 북을 치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신을 맞이하는 굿놀이가 행해졌다고 하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가 않다. 기타 읍치 위쪽의 南溪書院은 유성룡을 배향하여 1627년(인조 5)에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며, 博陀寺를 비롯한 절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군위현은 지금의 군위군 군위읍, 소보면, 효령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군위읍 서부리, 동부리일대에 있었다. 의흥의 팔공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지류 위천이 고을 한가운데를 지나 서북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고을 동서남북의 산세가 실제에 가깝게 잘 그려져 있다. 읍치는 서쪽을 향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읍치 동남쪽 馬井菴 뒤에 있었던 고을의 鎭山 馬井山을 기준으로 그렸기 때문인 듯하다. 지도 아래쪽에 보이는 孝令面은 조선 초에 來屬된 효령폐현의 자리이며, 이곳에는 金庾信祠가 있어 매년 단오날에 고을의 우두머리 아전이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기를 세워 북을 치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신을 맞이하는 굿놀이가 행해졌다고 하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가 않다. 기타 읍치 위쪽의 南溪書院은 유성룡을 배향하여 1627년(인조 5)에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며, 博陀寺를 비롯한 절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금산군은 지금의 김천시 시내, 어모면, 감문면 서쪽, 봉산면, 대항면, 구성면 북쪽, 조마면, 감천면 북쪽 일부, 농소면 연명리 일대와 영동군 추풍령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시내 교동에 있었다. 읍치의 아래쪽으로 감천이 서북쪽에서 흘러온 직지천을 받아 북동쪽 개령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牙川이 북쪽에서 흘러 개령으로 들어가 역시 감천에 합류한다. 아천 유역은 원래 禦侮縣이 있었던 곳인데 조선 태조 때 來屬되었다. 직지사는 418년(신라 눌지왕 2)에 墨胡子가 구미시 해평면의 도리사와 함께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는 곳이다. 조선 정종의 태가 뒷산에 묻히면서 노비와 전답을 기부 받아 번창하였다. 지금도 보물 319호 석조약사여래좌상 등의 문화유산이 간직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현재의 김천시 이름이 유래된 金泉驛이 보이고 있는데 20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그 아래쪽에 있는 景濂書院은 畢齋 김종직(1431-1492)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받지는 못했다. 지도의 맨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이후 대대적으로 修築된 산성 중의 하나인 金烏山城이 표시되어 있다. 유사시 선산, 개령, 지례, 금산을 관할하였으며 관할 고을의 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산성 옆의 延命面은 원래 延命鄕이었으며 개령 땅을 넘어가 있는 越境地로서 향·부곡의 규모 문제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秋風嶺이 지도의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추풍령면에 해당하는黃金所面은 고려시대에 발생한 특수행정구역인 所의 하나로 낙동강 수계가 아닌 금강 수계에 속해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금산군은 지금의 김천시 시내, 어모면, 감문면 서쪽, 봉산면, 대항면, 구성면 북쪽, 조마면, 감천면 북쪽 일부, 농소면 연명리 일대와 영동군 추풍령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시내 교동에 있었다. 읍치의 아래쪽으로 감천이 서북쪽에서 흘러온 직지천을 받아 북동쪽 개령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牙川이 북쪽에서 흘러 개령으로 들어가 역시 감천에 합류한다. 아천 유역은 원래 禦侮縣이 있었던 곳인데 조선 태조 때 來屬되었다. 직지사는 418년(신라 눌지왕 2)에 墨胡子가 구미시 해평면의 도리사와 함께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는 곳이다. 조선 정종의 태가 뒷산에 묻히면서 노비와 전답을 기부 받아 번창하였다. 지금도 보물 319호 석조약사여래좌상 등의 문화유산이 간직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현재의 김천시 이름이 유래된 金泉驛이 보이고 있는데 20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그 아래쪽에 있는 景濂書院은 畢齋 김종직(1431-1492)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받지는 못했다. 지도의 맨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이후 대대적으로 修築된 산성 중의 하나인 金烏山城이 표시되어 있다. 유사시 선산, 개령, 지례, 금산을 관할하였으며 관할 고을의 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산성 옆의 延命面은 원래 延命鄕이었으며 개령 땅을 넘어가 있는 越境地로서 향·부곡의 규모 문제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秋風嶺이 지도의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추풍령면에 해당하는黃金所面은 고려시대에 발생한 특수행정구역인 所의 하나로 낙동강 수계가 아닌 금강 수계에 속해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기장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의 산지로부터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는데 다만 읍치 왼쪽의 상서면, 하서면 지역의 물줄기가 동래 수영강으로 흘러감에도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못하다. 동해안에는 여러 浦口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중 基浦는 기록에는 碁浦로 나와 있으며 검은 바둑알이 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 한다. 한편 豆毛浦에는 원래 水軍萬戶가 파견된 鎭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1592년(선조 25)에 동래로 옮겼다. 그 옆에 있는 倭城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북상했다가 후퇴한 후 울산의 서생포에서 창원시 웅포 사이의 해안에 쌓아 마지막 교두보로 삼았던 倭城 중의 하나로 정유재란(1597) 때는 왜군 북상의 근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원래의 두모포진 자리에 쌓았으며 지금은 기장읍 죽성리에 사적 5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아래쪽의 侍郞臺는 해안가에 있는 절벽으로서 옛날부터 영험이 있다고 하여 삼월과 시월에 용왕제를 지냈다 하며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기타 원효대사가 678년(신라문무왕 18)에 창건했다는 長安寺가 지도 위쪽에 보이며 나라에서 쓸 재목을 보호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6개나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기장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의 산지로부터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는데 다만 읍치 왼쪽의 상서면, 하서면 지역의 물줄기가 동래 수영강으로 흘러감에도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못하다. 동해안에는 여러 浦口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중 基浦는 기록에는 碁浦로 나와 있으며 검은 바둑알이 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 한다. 한편 豆毛浦에는 원래 水軍萬戶가 파견된 鎭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1592년(선조 25)에 동래로 옮겼다. 그 옆에 있는 倭城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북상했다가 후퇴한 후 울산의 서생포에서 창원시 웅포 사이의 해안에 쌓아 마지막 교두보로 삼았던 倭城 중의 하나로 정유재란(1597) 때는 왜군 북상의 근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원래의 두모포진 자리에 쌓았으며 지금은 기장읍 죽성리에 사적 5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아래쪽의 侍郞臺는 해안가에 있는 절벽으로서 옛날부터 영험이 있다고 하여 삼월과 시월에 용왕제를 지냈다 하며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기타 원효대사가 678년(신라문무왕 18)에 창건했다는 長安寺가 지도 위쪽에 보이며 나라에서 쓸 재목을 보호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6개나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김해부는 지금의 김해시 전역과 창원시 대산면, 부산광역시 강서구강동동 서쪽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김해시내 서상리, 동상리 일대에 있었다. 낙동강이 고을 북쪽을 감싸며 남쪽으로 굽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며 고을의 중간 지점이 높아 북서쪽과 남동쪽이 평야지대에 해당한다. 김해부는 원래 금관가야였으며 532년(신라 법흥왕 19)에 신라에 항복하여 금관국 왕실의 食邑으로 되었으며 문무왕 때는 5小京 중의 하나인 금관소경으로 정해졌다. 이후 김유신 등의 名將이 금관국 왕실에서 나와 현재 우리 나라 성씨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김해 김씨의 본향이 되었다. 지도에는 이런 김해의 역사를 상징하는 首露王陵과 왕비릉인 許后陵, 금관가야 건국 설화가 전해지는 龜旨峯 등이 표시되어 있음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읍치 공간은 山城烽을 중심으로 좌우로 산줄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안에는 하천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南山 혹은 案山으로 여겨지는 內三台·外三台가 표시되어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이 보인다. 읍치 아래쪽 바닷가에 보이는 小篁竹田·大篁竹田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김해도호부의 土山조에 나오는 "竹箭이 德只島·竹島에서 생산된다"는 기록과 합치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일대이며, 그 왼쪽에도 箭竹田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의 七点山이 있는 섬은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듯이 梁山 땅과의 경계이며, 농사를 짓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 생선을 잡아 상류 여러 고을에 판매하는 사람들이 200호 이상 빽빽하게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 아래쪽의 鳴旨島는 갈대가 무성하였는데 천일제염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는 이 갈대를 이용하여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까지 경상도 내륙 낙동강 유역권에서 소비되는 소금의 대부분이 바로 이곳에서 생산되었다.그리고 지도 위쪽 양산계에 있는 龍塘津에는 祈雨壇이 있었다고 하며, 읍치 오른쪽의 新山書院은 이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학자로 알려진 南冥 曺植(1501-1572)을 배향하여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기타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台也封山이 지도 왼쪽에 보이고 있다.(이기봉)
남해현은 지금의 창선면을 제외한 남해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남해읍 남변리, 서변리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쪽으로 하고 있는데 서쪽에 있는 고을의 鎭山 望雲山의 坐向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의 아래쪽 晉州界라 표시된 지역은 진주의 越境地였던 지금의 창선도인데 매우 과장되어 표현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지도의 오른쪽 昆陽界라 표시된 지역은 이순신이 왜적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殉國한 노량해전의 현장이다. 이순신을 배향하여 1662년(현종 4)에 賜額받은 忠烈祠가 세워져 있음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고성현 지도 참조) 또한 고을의 남쪽에는 종3품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彌助項鎭, 정4품 水軍萬戶가 파견된 平山浦鎭, 종9품 權官이 파견된 曲浦鎭·尙州浦津(→鎭)이 늘어서 있어 남해안 전략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타 나라에서 쓸 船材를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2개 보이고 있고 露梁院, 只族津院 등 나루에 있는 院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남해현은 지금의 창선면을 제외한 남해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남해읍 남변리, 서변리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쪽으로 하고 있는데 서쪽에 있는 고을의 鎭山 望雲山의 坐向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의 아래쪽 晉州界라 표시된 지역은 진주의 越境地였던 지금의 창선도인데 매우 과장되어 표현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지도의 오른쪽 昆陽界라 표시된 지역은 이순신이 왜적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殉國한 노량해전의 현장이다. 이순신을 배향하여 1662년(현종 4)에 賜額받은 忠烈祠가 세워져 있음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고성현 지도 참조) 또한 고을의 남쪽에는 종3품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彌助項鎭, 정4품 水軍萬戶가 파견된 平山浦鎭, 종9품 權官이 파견된 曲浦鎭·尙州浦津(→鎭)이 늘어서 있어 남해안 전략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타 나라에서 쓸 船材를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2개 보이고 있고 露梁院, 只族津院 등 나루에 있는 院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단성현은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동쪽, 신안면, 신등면, 생비량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에 있었다. 단성현은 조선 초에 江城縣과 丹溪縣이 합해져 만들어진 곳으로서 단계창이 있는 곳이 단계현의 중심지였다. 지도에는 동북쪽을 위쪽으로 잡아 그렸다. 산음에서 들어온 남강의 본줄기가 읍치 오른쪽을 지나 단계창에서 내려온 양천을 합하여 진주로 들어간다. 단성현은 고려말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숨겨 들여와 우리 민족의 衣生活에 일대 혁신을 몰고 온 文益漸(1329-1398)이 그의 장인 鄭天益으로 하여금 지금의 단성면 사월리에서 목화씨를 배양하게 하여 성공한 곳으로 유명하다. 문익점의 손자 文萊는 製絲法을, 文英은면포 짜는 법을 발명했다고 한다. 제사기인 물레는 文萊에서, 면포의 이름인 무명은 文英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道川書院이 바로 문익점을 배향하여 세운 서원으로서 1401년(태종 1)에 건립되어 1554년(명종 9)에 사액받았다. 1612년(광해군 4)에 중건되어 1787년(정조 11)에 다시 賜額받았다. 그 오른쪽에 있는 靑谷祠宇는 사액받지 못한 곳이다. 왼쪽에 있는 赤壁은 붉은 빛의 바위더미가 병풍을 쳐 놓은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우암 송시열이 赤壁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고 한다. 기타 山陰界에 있는 尺旨峴은 의령에서 산청으로 가는 요해처라고 하며 사원과 고개, 봉수 등이 자세한 지도이다.(이기봉)
단성현은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동쪽, 신안면, 신등면, 생비량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에 있었다. 단성현은 조선 초에 江城縣과 丹溪縣이 합해져 만들어진 곳으로서 단계창이 있는 곳이 단계현의 중심지였다. 지도에는 동북쪽을 위쪽으로 잡아 그렸다. 산음에서 들어온 남강의 본줄기가 읍치 오른쪽을 지나 단계창에서 내려온 양천을 합하여 진주로 들어간다. 단성현은 고려말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숨겨 들여와 우리 민족의 衣生活에 일대 혁신을 몰고 온 文益漸(1329-1398)이 그의 장인 鄭天益으로 하여금 지금의 단성면 사월리에서 목화씨를 배양하게 하여 성공한 곳으로 유명하다. 문익점의 손자 文萊는 製絲法을, 文英은면포 짜는 법을 발명했다고 한다. 제사기인 물레는 文萊에서, 면포의 이름인 무명은 文英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道川書院이 바로 문익점을 배향하여 세운 서원으로서 1401년(태종 1)에 건립되어 1554년(명종 9)에 사액받았다. 1612년(광해군 4)에 중건되어 1787년(정조 11)에 다시 賜額받았다. 그 오른쪽에 있는 靑谷祠宇는 사액받지 못한 곳이다. 왼쪽에 있는 赤壁은 붉은 빛의 바위더미가 병풍을 쳐 놓은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우암 송시열이 赤壁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고 한다. 기타 山陰界에 있는 尺旨峴은 의령에서 산청으로 가는 요해처라고 하며 사원과 고개, 봉수 등이 자세한 지도이다.(이기봉)
대구부는 지금의 논공읍,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과 북구, 수성구 동쪽을 제외한 대구광역시 전체와 청도군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중구 남성동·동성동·서성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경산에서 흘러온 금호강이 고을의 서쪽 낙동강으로 들어가며,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 쌓인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盆地이기 때문에 여름 평균기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에는 경상도 관찰사 소재지인 監營과 石築의 읍성이 있었으며, 읍치 남쪽의 蓮龜山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치 위쪽으로는 達城이 그려져 있는데 천연적인 要塞地에 石築의 성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도 달성공원으로 단장되어 보호되고 있다. 지도의 맨 위쪽에 있는 八公山은 신라시대에는 父岳으로 불렸으며, 5岳 중 中岳으로 비정되어 中祀를 지냈던 명산으로서 把溪寺, 桐華寺, 夫仁寺 등 신라시대의 유서 깊은 절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 팔공산 아래는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으로서, 왕건이 견훤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그 부하 申崇謙과 金樂이 대신 죽음으로써 겨우 목숨을 건진 곳이다. 王山 밑에 있는 表忠書院은 이들 신숭겸과 김락을 배향하여 1670년(현종 11)에 세워지고, 1687년(숙종 13)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그밖에 이황, 정술, 정경세 등을 배향한 硏經書院은 현종 때 사액받았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의 死六臣을 배향한 洛濱書院은 숙종 때 사액받은 서원이다. 기타 대구에來屬된 해안현, 하빈현, 화원현, 풍각현, 수성현의 흔적이 각각의면 이름에 남아 있음이 보이고, 지도 아래쪽의 八助嶺은 대구에서 청도로 넘어가는 영남대로 상의 고개이다.(이기봉)
동래부는 기장군, 북구, 강서구를 제외한 부산광역시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동래구 수안동,복천동, 안락동 일대에 있었다. 부의 서쪽은 낙동강이 남해와 만나는곳이고, 동쪽으로는 수영강이 흐르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에 보이는 輪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으며, 옆에 있는 忠烈祠는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서 전사한 宋象賢(1551-1592), 부산진 僉使로서 전사한 鄭撥(1533-1592) 등 동래부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배향하여 1624년(인조 2)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이 보이고 있는데 역시 石築의 성이 있었으며, 정4품의 水軍虞侯가 파견되어 경상도 동쪽의 여러 鎭을 관할하였다. 읍치 왼쪽으로는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쌓았던 산성 중의 하나인 金井山城이 보이고 있는데 1702년(숙종 29)에 처음으로 쌓았다. 지도 왼쪽 아래쪽으로는 倭館이 보이고 있는데 조선 초에는 웅천(진해시)의 제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에 있었다. 하지만 三浦倭亂(1510) 이후에는 한곳만 설치하여 제포→부산포→초량으로 옮겼는데 지도에 표시된 곳이 1678년(숙종 4) 마지막으로 옮긴 곳이다. 이 왜관에는 주위에 성을 쌓고 그 안에 거류민, 公廳, 시장, 상점, 창고 등을 두었다.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은 보통 이곳 안팎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방어를 위한 많은 鎭이 설치되어 있는데 왼쪽으로부터 다대진, 서평진, 두모포진, 개운포진, 부산진, 포이진, 칠포진, 축산진, 감포진 등이 차례로 보이고 있다. 또한 해안가에는 沒雲臺, 太宗臺, 海雲臺 등의 기암절벽 해안과 五六島 등의 표현이 자세하다. ≪三國史記≫에 신라초기에 병합된 것으로 나오는 山國의 터가 지도 오른쪽에 보이고 있다. 그 밑에는 나라에서 쓸 재목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지한 封山이 보이고 있다. 기타 678년(신라 문무왕 18) 義湘에 의해 창건되고 華嚴宗 10찰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는 梵魚寺가 금정산성 위쪽에 그려져 있는데 이 절에는 보물 250호 3층석탑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이기봉)
문경현은 지금의 문경시 시내, 문경읍, 가은읍, 마성면, 호계면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문경읍 상리 일대에 있었다. 문경현은 고려말에 가은현이, 조선 초에 호계현이 각각 문경현에 병합되었다. 가은현은 加縣面으로, 호계현은 戶(→虎)縣內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북쪽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騎馬戰으로 승승장구했던 申砬(1546-1592) 장군이 왜군의 주력부대가 조총을 가진 보병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령보다는 충주 탄금대의 평지를 택해 일본군을 방어하다 크게 패했다. 이것을 거울로 삼아 1708년(숙종 34) 조령에 關門을 대대적으로 修築하였는데 지도에도 鳥嶺關, 中城門, 下城門 등이 매우 자세히 그려져 있다. 문경에서 조령만큼 중요하게 여겨진 또 다른 關防處로는 두하천이 만나는 龍淵 옆에 보이는 兎棧이다. 이곳은 串岬遷이라고도 하며 낙동강의 상류 영강이 이곳에서 깎아지른 절벽 사이를 흐르기 때문에 만들어진 낭떠러지 길을 의미한다. 그 옆에 姑母城이, 맞은편에 姑父城이 표시되어 있어 옛날부터 중요한 관방처로 인식되고 있었음이 보인다. 兎棧 아래쪽으로는 절벽 바위를 그려 넣어 이곳의 지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읍치 뒤쪽으로는 고을의 鎭山 主屹山이 실제 모습처럼 우뚝 솟아 위엄을 자랑하듯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봄·가을에 향을 내려 小祀를 지내던 곳으로 보이는 神廟가 표시되어 있다. 주흘산 뒤로는 845년(신라 문성왕 8)에 창건되었다는 惠國寺가 보이고 있고, 그 옆에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잠시 머물렀다는 御留殿 터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加北面 위쪽에는 879년(신라 헌강왕 5) 智證國師 圓悟가 창건하여 禪風을 일으키고 희양산파를 이룬 곳으로 유명한 鳳岩寺가 보이고 있다. 지금도 보물 137호로 지정된 지증대사석조탑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가서면 부근에는 후백제의 견훤궁터가 표시되어 있고, 읍치 오른쪽으로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던 龜山黃腸封山이 보이고 있다. 咸昌界에 있는 유곡역은 18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이기봉)
문경현은 지금의 문경시 시내, 문경읍, 가은읍, 마성면, 호계면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문경읍 상리 일대에 있었다. 문경현은 고려말에 가은현이, 조선 초에 호계현이 각각 문경현에 병합되었다. 가은현은 加縣面으로, 호계현은 戶(→虎)縣內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북쪽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騎馬戰으로 승승장구했던 申砬(1546-1592) 장군이 왜군의 주력부대가 조총을 가진 보병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령보다는 충주 탄금대의 평지를 택해 일본군을 방어하다 크게 패했다. 이것을 거울로 삼아 1708년(숙종 34) 조령에 關門을 대대적으로 修築하였는데 지도에도 鳥嶺關, 中城門, 下城門 등이 매우 자세히 그려져 있다. 문경에서 조령만큼 중요하게 여겨진 또 다른 關防處로는 두하천이 만나는 龍淵 옆에 보이는 兎棧이다. 이곳은 串岬遷이라고도 하며 낙동강의 상류 영강이 이곳에서 깎아지른 절벽 사이를 흐르기 때문에 만들어진 낭떠러지 길을 의미한다. 그 옆에 姑母城이, 맞은편에 姑父城이 표시되어 있어 옛날부터 중요한 관방처로 인식되고 있었음이 보인다. 兎棧 아래쪽으로는 절벽 바위를 그려 넣어 이곳의 지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읍치 뒤쪽으로는 고을의 鎭山 主屹山이 실제 모습처럼 우뚝 솟아 위엄을 자랑하듯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봄·가을에 향을 내려 小祀를 지내던 곳으로 보이는 神廟가 표시되어 있다. 주흘산 뒤로는 845년(신라 문성왕 8)에 창건되었다는 惠國寺가 보이고 있고, 그 옆에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잠시 머물렀다는 御留殿 터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加北面 위쪽에는 879년(신라 헌강왕 5) 智證國師 圓悟가 창건하여 禪風을 일으키고 희양산파를 이룬 곳으로 유명한 鳳岩寺가 보이고 있다. 지금도 보물 137호로 지정된 지증대사석조탑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가서면 부근에는 후백제의 견훤궁터가 표시되어 있고, 읍치 오른쪽으로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던 龜山黃腸封山이 보이고 있다. 咸昌界에 있는 유곡역은 18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이기봉)
밀양부는 지금의 청도면을 제외한 밀양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시내 내일동 일대에 있었다. 밀양강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로지르며 남쪽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 왼쪽 위쪽에 있는 華岳山이라고 하며, 읍치까지 하천사이로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읍치에는 4각형 모양의 읍성이 보이고 있으며, 지금도 보물 14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嶺南樓가 보이는데 원래는 嶺南寺라는 절의 작은 누각이었다고 한다. 지도의 아래쪽 오른쪽에는 조선 후기 동안 낙동강의 가장 큰 浦口 중의 하나로 번성했던 三浪津이 표시되어 있다. 이 삼랑진에는 1729년(영조 5)에 漕倉이 설치되어 밀양, 현풍, 창녕, 영산, 김해, 양산 등 여섯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서울로 보냈는데, 지도에서는 통제영의 환곡창고인 統營倉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영남대로 險隘 중의 하나인 鵲院棧路라는 낭떠러지 길이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도 경부선이 지나가며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낙동강가 守山津이있는 곳에는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삼한시대에 쌓았고, 둘레가 20리나 되었던 守山堤가 있었는데 세종 때 물길을 터서 屯田으로 만들었다 한다. 그 위에 있는 國農所는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유지 농장으로서 이곳의 연못에는 붉은 연꽃이 무성하여 그 향기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밖에 김굉필, 정여창과 같은 名儒를 길러낸 김종직(1431-1492)를 배향하여 현종 때 사액받은 禮林書院과 임진왜란 때 승장으로서 왜군을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을 배향하여 영조 때 사액받은 表忠祠 등이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의 오른쪽에는 나라에서 쓸 재목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도 두 군데나 보이고 있다.(이기봉)
봉화현은 지금의 봉화군 봉성면, 명호면, 상운면 북·동부, 물야면 가평리 일대, 춘양면 운곡천 동쪽 등에 해당하며 읍치는 봉성군 봉성리에 있었다. 지도의 위쪽에 조선 5대 사고 중의 하나인 太白山史庫가 보이고 있다. 이 사고 안에는 조선 왕실의 계보를 보관한 璿源閣과 실록을 보관한 寶錄閣이 보이고 있으며, 그 밑에는 686년(신라 신문왕 6)에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覺華寺가 그려져 있다. 읍치 왼쪽에 있는 文岩書院은 이황과 제자 趙穆을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사액받은 서원이며, 기타 梁川里社와 고려 고종 때 높은 벼슬을 지냈고 본관이 봉화인 琴儀(1153-1230) 등을 배향한 文溪里社도 보인다.이외에 勿也面과 上東面은 모두봉화현의 越境地로서 물야면 가평리 일대, 춘양면 운곡천 동쪽에 있었으며, 史庫 왼쪽에는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黃 封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봉화현은 지금의 봉화군 봉성면, 명호면, 상운면 북·동부, 물야면 가평리 일대, 춘양면 운곡천 동쪽 등에 해당하며 읍치는 봉성군 봉성리에 있었다. 지도의 위쪽에 조선 5대 사고 중의 하나인 太白山史庫가 보이고 있다. 이 사고 안에는 조선 왕실의 계보를 보관한 璿源閣과 실록을 보관한 寶錄閣이 보이고 있으며, 그 밑에는 686년(신라 신문왕 6)에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覺華寺가 그려져 있다. 읍치 왼쪽에 있는 文岩書院은 이황과 제자 趙穆을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사액받은 서원이며, 기타 梁川里社와 고려 고종 때 높은 벼슬을 지냈고 본관이 봉화인 琴儀(1153-1230) 등을 배향한 文溪里社도 보인다.이외에 勿也面과 上東面은 모두봉화현의 越境地로서 물야면 가평리 일대, 춘양면 운곡천 동쪽에 있었으며, 史庫 왼쪽에는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黃 封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비안현은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 구천면, 안게면, 안사면 남쪽, 신평면 검곡리·교안리 일대로서 읍치는 비안면 서부리,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낙동강의지류 위천의 상류가 군위와 의성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읍치 오른쪽에서 합쳐지고 다시 서북쪽으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읍치 주위의하천이 더 하류에 해당하는 서북쪽 하천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크게 그려져 있음이 눈에 띄는데, 하천의 이름도 읍치를 중심으로 前川, 後川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볼 때 읍치 공간을 중심에 두고 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읍치 공간이 북쪽의 산세에 의해 포근히 감싸여 있고 앞쪽으로는 하천이 흐르며, 하천 너머로 산세가 이중으로 그려져 있음을 볼 때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읍치가 남쪽에 매우 치우쳐져 있는데 이것은 조선 초에 後川 위쪽의 安貞倉 부근에 있었던 安貞縣과 읍치에 있었던 比屋縣이 합쳐져 比安縣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읍치와 향교가 거리상 매우 멀리 있음이 특이한데 향교는 조선 초까지만 해도 읍치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조선 중기에 오면 지도에 표시된 위치로 바뀌어 나온다. 이는 아마도 고려 후기까지는 안정창에 있었던 안정현의 감무가 현 읍치에있었던 비옥현을 겸임하였던 역사와 관계있는 것으로 보이며 조선초기 이후 벌어진 두 지역 사람들의 세력 다툼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기타 지도 왼쪽의 龜川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인 것으로 추정되는 朴瑞生 등의 다섯 사람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며 읍치 오른쪽의 望北亭은 본관인 이 고을인 比安 朴氏의 정자였다고 한다.(이기봉)
비안현은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 구천면, 안게면, 안사면 남쪽, 신평면 검곡리·교안리 일대로서 읍치는 비안면 서부리,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낙동강의지류 위천의 상류가 군위와 의성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읍치 오른쪽에서 합쳐지고 다시 서북쪽으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읍치 주위의하천이 더 하류에 해당하는 서북쪽 하천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크게 그려져 있음이 눈에 띄는데, 하천의 이름도 읍치를 중심으로 前川, 後川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볼 때 읍치 공간을 중심에 두고 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읍치 공간이 북쪽의 산세에 의해 포근히 감싸여 있고 앞쪽으로는 하천이 흐르며, 하천 너머로 산세가 이중으로 그려져 있음을 볼 때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읍치가 남쪽에 매우 치우쳐져 있는데 이것은 조선 초에 後川 위쪽의 安貞倉 부근에 있었던 安貞縣과 읍치에 있었던 比屋縣이 합쳐져 比安縣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읍치와 향교가 거리상 매우 멀리 있음이 특이한데 향교는 조선 초까지만 해도 읍치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조선 중기에 오면 지도에 표시된 위치로 바뀌어 나온다. 이는 아마도 고려 후기까지는 안정창에 있었던 안정현의 감무가 현 읍치에있었던 비옥현을 겸임하였던 역사와 관계있는 것으로 보이며 조선초기 이후 벌어진 두 지역 사람들의 세력 다툼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기타 지도 왼쪽의 龜川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인 것으로 추정되는 朴瑞生 등의 다섯 사람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며 읍치 오른쪽의 望北亭은 본관인 이 고을인 比安 朴氏의 정자였다고 한다.(이기봉)
사천현은 지금의 사천시 사천읍, 정동면, 사남면, 용구면, 사천시내 와룡동 부근에 해당하며 읍치는 사천읍 정의리, 선인리 일대에 있었다. 사천 지역은 높은 산들이 바닷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큰 하천이 발달해 있지 않다. 지도에도 동쪽의 높은 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서쪽 바다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있는 豆音代(→伐)山이다. 읍치 위쪽으로는 조선 명종 때 벼슬이 부제학에 오른 후 고향에 내려와 퇴계 이황(1501-1570)의 문하에 출입한 龜岩 李楨(1512-1571)의 書齋였다는 大觀臺가 보이고 있다. 그 왼쪽에는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여 1676년(숙종 2)에 賜額받은 龜溪書院이 그려져 있다. 읍치 오른쪽의 排王(→房)寺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寓居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쪽의 陵花山에는 고려 현종의 아버지 安宗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는 태조 왕건의 여덟 번째 아들인데, 고려 5대왕인 경종(재위 975-981)의 妃로서 미망인이 된 獻貞王后와 관계하여 현종을 낳고 사천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사천의 토산물인 대나무가 생산되었던 玉山箭竹田이 표시되어 있으며 下南面에도 角山竹田이 보이고 있다. 나라에서 쓸 재목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申卜山封山도 보이고 있다. 해안가에는 海倉, 統營倉, 右兵營倉, 巡營倉 등 倉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기타 三千里面은 옛 三千浦市(현재의 사천시)의 이름이 유래된 곳으로서 진주의 경계를 넘어 있는 사천현의 越境地이다.(이기봉)
사천현은 지금의 사천시 사천읍, 정동면, 사남면, 용구면, 사천시내 와룡동 부근에 해당하며 읍치는 사천읍 정의리, 선인리 일대에 있었다. 사천 지역은 높은 산들이 바닷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큰 하천이 발달해 있지 않다. 지도에도 동쪽의 높은 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서쪽 바다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있는 豆音代(→伐)山이다. 읍치 위쪽으로는 조선 명종 때 벼슬이 부제학에 오른 후 고향에 내려와 퇴계 이황(1501-1570)의 문하에 출입한 龜岩 李楨(1512-1571)의 書齋였다는 大觀臺가 보이고 있다. 그 왼쪽에는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여 1676년(숙종 2)에 賜額받은 龜溪書院이 그려져 있다. 읍치 오른쪽의 排王(→房)寺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寓居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쪽의 陵花山에는 고려 현종의 아버지 安宗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는 태조 왕건의 여덟 번째 아들인데, 고려 5대왕인 경종(재위 975-981)의 妃로서 미망인이 된 獻貞王后와 관계하여 현종을 낳고 사천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사천의 토산물인 대나무가 생산되었던 玉山箭竹田이 표시되어 있으며 下南面에도 角山竹田이 보이고 있다. 나라에서 쓸 재목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申卜山封山도 보이고 있다. 해안가에는 海倉, 統營倉, 右兵營倉, 巡營倉 등 倉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기타 三千里面은 옛 三千浦市(현재의 사천시)의 이름이 유래된 곳으로서 진주의 경계를 넘어 있는 사천현의 越境地이다.(이기봉)
산음현은 지금의 산청군 산청읍, 금서면, 생초면, 오부면, 차황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산청읍 옥산리, 산청리 일대에 있었다. 북쪽 함양에서 들어온 남강의 상류가 고을의 한가운데를 지나 남쪽 단성으로 빠져나가며, 좌우로 작은 지류들을 합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山陰縣은 1767년(영조 43) 이 고을에서 7살 된 아이가 아들을 낳은 것을 불길한 징조라고 하여 왕명으로 ''陰''자를 ''淸''자로 바꿔 山淸縣으로 하게 되었다. 지도에는 고개의 표시가 자세한데 이 고을이 함양→남원, 거창→무주 등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오른쪽의 東山이고, 읍치 위쪽으로는 조선 초 객사 옆에 세웠다는 換鵝亭이 푸른 물길을 바라보는 듯 그려져 있다. 환아정 위로는 德溪 吳健(1521-1574)을 배향하여 1606년(선조 39)에 세우지고, 1677년(숙종 3년)에 賜額받은 西溪書院이 보인다. 오건은 南溟 曺植(1501-1572)의 제자로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이다. 읍치 왼쪽의 王山寺 뒷산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왕릉이 있다는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1798년(정조 22) 이후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仇衡王의 陵으로 알려져 지금도 김해 김씨 문중에서 齋室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기타 사찰의 표시가 자세하며, 驛은 표시하였지만 院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산음현은 지금의 산청군 산청읍, 금서면, 생초면, 오부면, 차황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산청읍 옥산리, 산청리 일대에 있었다. 북쪽 함양에서 들어온 남강의 상류가 고을의 한가운데를 지나 남쪽 단성으로 빠져나가며, 좌우로 작은 지류들을 합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山陰縣은 1767년(영조 43) 이 고을에서 7살 된 아이가 아들을 낳은 것을 불길한 징조라고 하여 왕명으로 ''陰''자를 ''淸''자로 바꿔 山淸縣으로 하게 되었다. 지도에는 고개의 표시가 자세한데 이 고을이 함양→남원, 거창→무주 등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오른쪽의 東山이고, 읍치 위쪽으로는 조선 초 객사 옆에 세웠다는 換鵝亭이 푸른 물길을 바라보는 듯 그려져 있다. 환아정 위로는 德溪 吳健(1521-1574)을 배향하여 1606년(선조 39)에 세우지고, 1677년(숙종 3년)에 賜額받은 西溪書院이 보인다. 오건은 南溟 曺植(1501-1572)의 제자로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이다. 읍치 왼쪽의 王山寺 뒷산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왕릉이 있다는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1798년(정조 22) 이후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仇衡王의 陵으로 알려져 지금도 김해 김씨 문중에서 齋室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기타 사찰의 표시가 자세하며, 驛은 표시하였지만 院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삼가현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쌍백면, 가회면, 대병면, 봉산면 남쪽, 거창군 신원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삼가면 금리에 있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邑治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고을은 크게 두 개의 水系로 나누어져 있는데 북쪽은 황강의 지류들이고, 남쪽은 남강의 지류인 양천(水晶川)의 상류에 해당한다. 삼가현은 조선 태종 때 三 縣과 嘉壽縣을 합쳐 만든 고을로서두 개의 수계를 기준으로 나누어진다. 지도 위쪽의 古縣面이 가수현의 옛 터이다. 읍치에는 石築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읍성과 동헌에 있었던 淨襟堂이 표시되어 있다. 고현면 위쪽으로 龍岩書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 명종 때 퇴계 이황(1501-1570)과 함께 영남 성리학의 쌍두마차 역할을 했던 南溟 曺植(1501-1572)을 배향하여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그밖에 古岩祠宇, 平川祠宇 등도 표시되어 있는데 둘다 賜額받지 못한 곳이다. ''祠宇''라고 표시하여 賜額받은 ''書院''과 구별지어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狗 別路, 鋪遷險 등으로 표시된 곳에는 바위 그림을 첨가하여 벼랑길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지도 아래와 위쪽으로 雷龍亭이 동시에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삼가현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쌍백면, 가회면, 대병면, 봉산면 남쪽, 거창군 신원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삼가면 금리에 있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邑治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고을은 크게 두 개의 水系로 나누어져 있는데 북쪽은 황강의 지류들이고, 남쪽은 남강의 지류인 양천(水晶川)의 상류에 해당한다. 삼가현은 조선 태종 때 三 縣과 嘉壽縣을 합쳐 만든 고을로서두 개의 수계를 기준으로 나누어진다. 지도 위쪽의 古縣面이 가수현의 옛 터이다. 읍치에는 石築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읍성과 동헌에 있었던 淨襟堂이 표시되어 있다. 고현면 위쪽으로 龍岩書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 명종 때 퇴계 이황(1501-1570)과 함께 영남 성리학의 쌍두마차 역할을 했던 南溟 曺植(1501-1572)을 배향하여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그밖에 古岩祠宇, 平川祠宇 등도 표시되어 있는데 둘다 賜額받지 못한 곳이다. ''祠宇''라고 표시하여 賜額받은 ''書院''과 구별지어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狗 別路, 鋪遷險 등으로 표시된 곳에는 바위 그림을 첨가하여 벼랑길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지도 아래와 위쪽으로 雷龍亭이 동시에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상주목은 지금의 이안면, 공검면, 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전체와 의성군 단밀면, 단북면 그리고 문경시 산북면, 산양면, 영순면 서쪽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상주시내 서성동, 성하동 일대에 있었다. 상주의 전반적인 지세는 서·북·남쪽이 높아 동쪽의 낙동강으로 각종 지류가 흘러 들어가는데, 서북쪽의 化北面 일대는 한강 수계이고 서남쪽의 化寧倉과 中牟倉 일대는 금강수계에 속하여 낙동강 수계와 갈라지고 있는데 한강·금강 수계와 낙동강 수계가 갈라지는 곳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가고 있다. 상주목은 1401년(태종 1)에 觀察使營인 監營을 경주에서 옮겼다가 1596년(선조 29)에 대구로 다시 옮겼다. 읍치 왼쪽에 표시되어 있는 鎭營은 경상도 左營으로서 상주, 개령, 금산, 지례, 함창을 관할하였다. 상주는 원래 沙伐國이었고 통일신라 때는 9州의 하나였는데 통일신라 말기의 고적인 沙伐國古城이 읍치 오른쪽의 屛風山 북쪽, 지금의 사벌면 화달리에 있다. 후삼국을 세운 견훤의 아버지 阿慈介가 이 성에 웅거하였다고 하며, 화달리에는 지금도 沙伐國王陵이라 전해지는 큰 고분이 단장되어 있고 그 옆에는 보물 117호로 지정된 화달리 3층석탑이 서 있다. 또한 상주는 983년(고려 성종 2)에 전국 12牧의 하나로 설정되어 많은 속현을 거느렸는데, 이후에도 化寧, 中牟, 丹密, 山陽, 化昌, 靑里폐현을 비롯한 많은 部曲이 독립적으로 分設되지 못하고 상주 영내에 남아 큰 고을이 될 수 있었다. 상주목은 조선시대 경상도 굴지의 도회지답게 총 10개의 書院·祠·廟가 표시되어 있는데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노수신, 유성룡, 정경세 등 초선 초·중기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학자를 배향하여 숙종 3년에 賜額받은 읍치 오른쪽의 道南書院과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쌍벽을 이루었던 宋浚吉(1606-1672)을 배향하여 1716년(숙종 42)에 賜額받은 읍치 왼쪽의 興岩書院 이외에는 賜額받지 못했다. 이 두 서원 중에서 興岩書院만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상주에는 고찰도 많은데 587년(신라 진평왕 9)에 와이 四佛山에 거둥하여 돌에 새긴 부처를 구경하고 창건하였다는 大乘寺와 그 이듬해 雲達祖師가 창건하였다는 金龍寺가 지도 위쪽에 보이고 있고, 신라 흥덕왕 때 眞鑑禪師 慧昭(774-850)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北長寺, 南長寺가 읍치 왼쪽에 보이고 있다. 기타 영남대로가 지나가고 낙동강 나룻배의 일반적인 溯江 종점으로 알려진 洛東津 강가 절벽 위의 觀水樓를 비롯하여 수많은 亭子와 臺가 표시되어 있어 크고 이름난 고을로서의 상주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이기봉)
선산부는 지금의 구미 시내 낙동강 동쪽 임수동 일대를 제외한 구미시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선산읍 동부리, 완전리 일대에 있었다. 낙동강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김천에서 들어온 감천이 읍치 남쪽을지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런 고을의 명성에 걸맞게 고려말 조선의 개국에 반대하여 지도에 吉冶隱影宇로 표시된 곳으로 낙향한 冶隱 吉再(1353-1419)와 그의 학통을 이어 김굉필, 정여창과 같은 제자를 키워낸 畢齋 金宗直(1431-1492) 등 뛰어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金烏書院이 바로 길재와 김종직 등을 배향하여 1575년(선조 8)에 賜額받은 서원으로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기타 死六臣의 한 명인 河緯地(1387-1456) 등을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賜額받은 月岩書院과 洛峯書院, 茂洞書院 등도 보이고 있다. 또한 지도에는 유명한 양반 고을로서 많은 정자가 낙동강변에 보이고 있는데 이 중에서 蓮亭이 있는 곳은 김종직, 하위지 등 장원급제한 사람들이 많아 장원방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지도에서 낙동강 오른쪽은 주로 옛 海平폐현의 땅이었는데 ≪三國遺事≫에 신라에 처음으로 불법을 전한 사람으로 나오는 墨胡子와 我道和尙의 전설이 전해지는 지역으로서, 桃李寺가바로 이들이 처음 불법을 전하기 위해 毛禮가 파준 땅굴에서 생활했던 곳이라고 한다. 도리사 왼쪽에는 延香驛 아전 김성발이 시장에 갔다가 만취되어 월파정 아래 누워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들불이 일어나 주인을 위해 몸에 물을 적셔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해 높고 죽었다는 개의 무덤인 義狗 이 보이고 있다. 또 아래쪽으로도 義牛塚이 보이고 있는데 소 주인이 정성껏 길러 장에 내다 팔았는데 원 주인이 죽자 팔았던 소가 고삐를 끊고 달려와서 아주 슬프게 울다가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지금도 의구총은 해평면 낙산리에 남아 있으며, 의우총은 지도의 표시에서와는 달리 지금의 구미시 시내 연곡동에 있다고 한다. 기타 선산, 금산, 개령, 지례를 관할하던 金烏山城이 지도 아래쪽에 보이고 있는데 험준한 절벽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이기봉)
성주목은 지금의 성주군 전체와 고령군의 덕곡면·운수면·성산면·다산면, 달성군 논공읍 북쪽, 김천시 감천면·증산면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성주읍 경산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하여 그렸는데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을에는 지도 왼쪽의 회천과 읍치를 돌아 흐르는 백천이라는 두 개의 큰 하천이 동쪽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지도에는 큰 고을답게 총 9개의 書院, 影堂, 祠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중 程子와 朱子 등 중국 유학자를 비롯하여 김굉필, 이언적, 정구, 장현광 등 조선 초·중기의 성리학자를 배향한 川谷書院과 정구와 이윤우를 배향한 檜淵書院 만이 사액받았고 나머지는 사액받지 못했다. 읍치 왼쪽으로 胎封山과 胎封寺가 있는 곳에는 조선 태종의 태가 묻혀 있는 곳이고, 읍치 오른쪽 위에 있는 胎封山은 조선 세조의 태가 묻혀 있는 곳으로서 조선에서도 중요한 고을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초에는 읍성 안에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史庫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봉화군 태백산으로 史庫를 옮겼다. 읍치에는고을의 진산인 印懸山을 뒤로하고 石築의 읍성이 있었으며, 읍성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세운 關王廟가 표시되어 있어 명나라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읍치 아래쪽의 星山 밑에는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사적 86호로 지정된 대형고분군이 있어 삼한시대로부터 5·6세기까지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임진왜란 이후 대대적으로 수축된 산성 중의 하나인 禿用山城이 지도 왼쪽에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 초에는 頹落해 있던 산성을 1675년(숙종 1)에 다시 쌓아 성주, 고령 등을 관할하게 하였다.(이기봉)
순흥부는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단산면, 부석면, 풍기읍 창락리 일대, 안정면 여륵리 일대와 봉화군 봉화읍 북쪽부분, 물야면 대부분, 법전면 북쪽, 춘양면 남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순흥면 읍내리에 있었다. 순흥부는 1458년(세조 3) 이곳에 귀양와 있던 錦城大君과 부사 李甫欽이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한 것이 발각되어 풍기, 영천, 봉화로 나누어 혁파되었다가 1683년(숙종 9) 이 고을 사람들의 간청으로 복구되었다. 읍치 위쪽에 있는 白雲洞書院은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성리학을 들여온 최초의 사람으로 알려진 安珦(1243-1306)을 배향하여 세운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1550년(명종 5)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임금에게 아뢴 후 노비, 田結 및 紹修書院이라는 額書를 받아 賜額書院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백운동서원은 이후 소수서원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아 사적 55호로 지정되어 잘 보전되고 있다. 지도 아래쪽의 丹溪書院은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金淡을 배향하여 1618년(광해군 10)년에 창건되고 영조 때 사액받은 서원이다. 지도 위쪽의 浮石寺는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으며, 절 안에 뜬 돌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이 절에는 국보 17호무량수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보물이 산재하고 있으며, 봉황산 아래의 절터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끝없는 산줄기의 장관이 펼쳐져 있다. 지도 왼쪽의 昌樂驛은 죽령 바로 아래에 있으며, 9개의 屬驛을 거느린 찰방역이다. 그 옆에 있는 昌樂面, 아래쪽의 大龍山面, 지도 위쪽 오른쪽의 臥壇面 등은 모두 월경지에해당한다.(이기봉)
순흥부는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단산면, 부석면, 풍기읍 창락리 일대, 안정면 여륵리 일대와 봉화군 봉화읍 북쪽부분, 물야면 대부분, 법전면 북쪽, 춘양면 남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순흥면 읍내리에 있었다. 순흥부는 1458년(세조 3) 이곳에 귀양와 있던 錦城大君과 부사 李甫欽이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한 것이 발각되어 풍기, 영천, 봉화로 나누어 혁파되었다가 1683년(숙종 9) 이 고을 사람들의 간청으로 복구되었다. 읍치 위쪽에 있는 白雲洞書院은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성리학을 들여온 최초의 사람으로 알려진 安珦(1243-1306)을 배향하여 세운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1550년(명종 5)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임금에게 아뢴 후 노비, 田結 및 紹修書院이라는 額書를 받아 賜額書院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백운동서원은 이후 소수서원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아 사적 55호로 지정되어 잘 보전되고 있다. 지도 아래쪽의 丹溪書院은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金淡을 배향하여 1618년(광해군 10)년에 창건되고 영조 때 사액받은 서원이다. 지도 위쪽의 浮石寺는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으며, 절 안에 뜬 돌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이 절에는 국보 17호무량수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보물이 산재하고 있으며, 봉황산 아래의 절터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끝없는 산줄기의 장관이 펼쳐져 있다. 지도 왼쪽의 昌樂驛은 죽령 바로 아래에 있으며, 9개의 屬驛을 거느린 찰방역이다. 그 옆에 있는 昌樂面, 아래쪽의 大龍山面, 지도 위쪽 오른쪽의 臥壇面 등은 모두 월경지에해당한다.(이기봉)
신령현은 지금의 영천시 신녕면,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 서쪽, 와촌면 동강리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신령면 화성리 일대에 있었다. 금호강의 지류인 신령천과 고현천의 상류에 해당하며 지도 위쪽의 花山이 고을의 진산이다. 읍치는 원래 지도 오른쪽 아래의 古縣面에 있었는데 세종 때 현 읍치로 옮겼다고 한다. 지도 위쪽 보현산 밑의 新村面은 원래 新村部曲이 있었던 곳이고, 아래쪽의 南面은 원래 梨旨銀所가 있었던 곳으로 모두 영천의 땅을 넘어 있는 越境地이다. 한편 지도에는 2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는데 오른쪽의 白鶴書院은 이황을 배향하여 1678년(숙종 4)에, 왼쪽의 龜川書院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永川城을 탈환한 權應銖(1562-1608)를 배향하여 1686년(숙종 12)에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長水驛은 14개의 屬驛을 거느린 찰방역이었으며, 읍치 위에 있는 環碧亭은 원래 객사 서쪽 10보 거리에 있었던 정자이다. 기타 修道寺와 佛窟寺는 모두 신라 때의 사찰이라고 하며 이 중 불굴사에는 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보물 429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이기봉)
신령현은 지금의 영천시 신녕면,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 서쪽, 와촌면 동강리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신령면 화성리 일대에 있었다. 금호강의 지류인 신령천과 고현천의 상류에 해당하며 지도 위쪽의 花山이 고을의 진산이다. 읍치는 원래 지도 오른쪽 아래의 古縣面에 있었는데 세종 때 현 읍치로 옮겼다고 한다. 지도 위쪽 보현산 밑의 新村面은 원래 新村部曲이 있었던 곳이고, 아래쪽의 南面은 원래 梨旨銀所가 있었던 곳으로 모두 영천의 땅을 넘어 있는 越境地이다. 한편 지도에는 2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는데 오른쪽의 白鶴書院은 이황을 배향하여 1678년(숙종 4)에, 왼쪽의 龜川書院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永川城을 탈환한 權應銖(1562-1608)를 배향하여 1686년(숙종 12)에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長水驛은 14개의 屬驛을 거느린 찰방역이었으며, 읍치 위에 있는 環碧亭은 원래 객사 서쪽 10보 거리에 있었던 정자이다. 기타 修道寺와 佛窟寺는 모두 신라 때의 사찰이라고 하며 이 중 불굴사에는 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보물 429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이기봉)
안동부는 녹전면, 도산면, 예안면을 제외한 안동시 전체와 예천군 감천면, 봉화군 봉화읍 대부분, 법전면 일부, 춘양면 일부, 석포면, 소천면, 재산면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안동 시내 동부동 일대에 있었다. 안동부는 낙동강 상류가 고을의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데 지도에는 낙동강의 發源處로 알려진 黃池가 지도 위쪽의 태백산 뒤쪽에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한편 지도에는 嶺南士林의 중요한 고을답게 총 11개의 서원이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들 서원 중 賜額書院으로는 이황·유성룡·김성일 등을 배향한 虎溪書院, 權 을 배향한 三溪書院, 구봉령·권춘란 등을 배향한 周溪書院, 유성룡을 배향한 屛山書院등 4개이며, 이 중 병산서원만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아 사적 260호로 지정·보전되고 있다. 읍치의 낙동강변에는 고려말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에 잠시 머물렀던 공민왕이 친히 이름을 지어 내렸다는 暎湖樓를 비롯하여 歸來亭, 石門亭, 臨淸閣, 伴鳩亭, 白雲亭 등 수많은 정자가 표시되어 있어 경치 좋고, 위세 높은 고을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들 정자 중영호루, 귀래정, 반구정 등은 지금도 안동시 낙동강변에 복원·보존되고 있다. 읍치에는 임진왜란 때 援軍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薛虎臣이 왜란을 평정한 것은 武安王관우의 靈의 도움이라며 향교 뒤의 목성산 꼭대기에 세웠던 것을 1606년에西岳寺로 옮겨 세운 關王廟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이 시설물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명나라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뒤에는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지도 위쪽 부분의 감천면, 내성면, 춘양면, 소산면, 재산면 등은 모두 안동부의 월경지로서 원래는 대부분 部曲이나 鄕이었다. 이들 지역은 조선 초에 양반 세력이 이주하면서 世居地로 삼은 지역으로서 고려말 조선초읍치로부터 분화되어 나간 양반 세력의 정착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 왼쪽 아래쪽에는 영국 여왕이 방문했던 河回마을이 낙동강에 휘감긴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고, 지도 위쪽에는 ≪擇里志≫에도 못 복판의 커다란 암석 위에 지어진 것으로 나오는 靑岩亭이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도 봉화읍 유곡리에 잘 보존되어 있다. 기타 읍치 위쪽에 屬驛을 10개나 거느린 察訪驛인 安奇驛이 표시되어 있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의 하나로 알려진 極樂殿이 있는 鳳停寺가 읍치 서북쪽에 보이고 있다.(이기봉)
안음현은 지금의 함양군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과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안의면 금천리, 교북리 일대에 있었다. 안음현은 조선 초에 利安縣과 感陰縣을 합해 만든 고을이다. 지도에서도 남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東川, 황강의 지류에 해당하는 猿鶴洞川 등 두 개의 큰 수계로 나누어지고 있음이 보인다. 지도 위쪽의 古縣面 지역이 옛날의 감음현에 해당한다. 1767년(영조 43) 산청에서 7살 된 아이가 아들을 낳은 것을 불길하게 여겨 왕명으로 ''陰''자를 ''淸''자로 바꿀 때 안음현도 ''陰''자를 ''義''자로 바꿔 安義縣으로 하였다. 고을에는 3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는데, 龍門書院은 이 고을 현감을 지낸 鄭汝昌(1450-1504)과 이 고을 덕유산에서 낙향했다가 죽은 鄭 (1569-1642) 등을 배향하여 현종 때 사액받았다. 黃岩書院은 임진왜란 때 이 고을에서 전사한 郭 (?-1594) 등을 배향하여 숙종 때 사액받았다. 星川書院은 사액받지는 못했지만 宋浚吉(1606-1672) 등 유명한 정치인을 배향한 곳이며, 기타 다른 곳은 ''祠宇''라고 표시하여 서원과 구분 짓고 있다. 기타 읍치에는 객사 북쪽에 있었던 光風樓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 왼쪽에는 전라도 장수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인 六十峙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안음현은 지금의 함양군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과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안의면 금천리, 교북리 일대에 있었다. 안음현은 조선 초에 利安縣과 感陰縣을 합해 만든 고을이다. 지도에서도 남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東川, 황강의 지류에 해당하는 猿鶴洞川 등 두 개의 큰 수계로 나누어지고 있음이 보인다. 지도 위쪽의 古縣面 지역이 옛날의 감음현에 해당한다. 1767년(영조 43) 산청에서 7살 된 아이가 아들을 낳은 것을 불길하게 여겨 왕명으로 ''陰''자를 ''淸''자로 바꿀 때 안음현도 ''陰''자를 ''義''자로 바꿔 安義縣으로 하였다. 고을에는 3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는데, 龍門書院은 이 고을 현감을 지낸 鄭汝昌(1450-1504)과 이 고을 덕유산에서 낙향했다가 죽은 鄭 (1569-1642) 등을 배향하여 현종 때 사액받았다. 黃岩書院은 임진왜란 때 이 고을에서 전사한 郭 (?-1594) 등을 배향하여 숙종 때 사액받았다. 星川書院은 사액받지는 못했지만 宋浚吉(1606-1672) 등 유명한 정치인을 배향한 곳이며, 기타 다른 곳은 ''祠宇''라고 표시하여 서원과 구분 짓고 있다. 기타 읍치에는 객사 북쪽에 있었던 光風樓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 왼쪽에는 전라도 장수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인 六十峙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양산군은 지금의 웅상읍을 제외한 양산시 전체와 부산광역시 북구, 강서구의 대저동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산 시내 중부동 일대에 있었다. 북쪽에서 발원한 양산천이 양쪽 높은 산지 사이의 梁山斷層을 따라 남쪽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낙동강은 계속해서 지도 아래쪽에 보이는 낙동강 삼각주를 형성하며 남해바다로 빠져나간다. 지도 왼쪽의 伽倻津祭壇은 조선 때 공주의 웅진과 함께 南瀆으로 삼아 祀典의 中祀에 실어 봄·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이다. 그 아래쪽의 勿禁味棧路는 영남대로가 지나가는 곳으로서 험한 벼랑가의 좁은 길이다. 그 옆의 黃山驛은 11개의 속역을 지닌 찰방역이며, ≪三國史記≫에는 이곳 黃山江을 南瀆으로 여겨 中祀에 싣고 있는데 신라 때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松潭書院은 임진왜란 때 19세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9년만에 돌아와 광해군의 廢母論 通文을 찢어버려 인조반정 후 自如察訪을 지내고 사후 戶曹參議로 추증된 白受繪(1574-1642)를 배향하여 1717년(숙종 43)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지도 위쪽 鷲棲山 아래의 通度寺는 646년(신라 선덕여왕 15)에 慈裝律師가 창건하여 戒律宗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고, 이 후 해인사·송광사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여겨졌으며 보물 74호 국장생석표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유산이 간직되어 있는 절이다. 기타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內浦封山, 加乙浦封山등이 보인다.(이기봉)
양산군은 지금의 웅상읍을 제외한 양산시 전체와 부산광역시 북구, 강서구의 대저동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산 시내 중부동 일대에 있었다. 북쪽에서 발원한 양산천이 양쪽 높은 산지 사이의 梁山斷層을 따라 남쪽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낙동강은 계속해서 지도 아래쪽에 보이는 낙동강 삼각주를 형성하며 남해바다로 빠져나간다. 지도 왼쪽의 伽倻津祭壇은 조선 때 공주의 웅진과 함께 南瀆으로 삼아 祀典의 中祀에 실어 봄·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이다. 그 아래쪽의 勿禁味棧路는 영남대로가 지나가는 곳으로서 험한 벼랑가의 좁은 길이다. 그 옆의 黃山驛은 11개의 속역을 지닌 찰방역이며, ≪三國史記≫에는 이곳 黃山江을 南瀆으로 여겨 中祀에 싣고 있는데 신라 때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松潭書院은 임진왜란 때 19세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9년만에 돌아와 광해군의 廢母論 通文을 찢어버려 인조반정 후 自如察訪을 지내고 사후 戶曹參議로 추증된 白受繪(1574-1642)를 배향하여 1717년(숙종 43)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지도 위쪽 鷲棲山 아래의 通度寺는 646년(신라 선덕여왕 15)에 慈裝律師가 창건하여 戒律宗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고, 이 후 해인사·송광사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여겨졌으며 보물 74호 국장생석표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유산이 간직되어 있는 절이다. 기타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內浦封山, 加乙浦封山등이 보인다.(이기봉)
언양현은 현재의 울산광역시 언양읍,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읍치는 언양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사방에서 물을 받은 태화강이 동쪽 울산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현재도 사적 154호로 지정·복원되어 있으며, 읍치 산세의 표현에서 풍수적 관념이투영되고 있음이 보인다. 지도 위쪽의 盤龜書院은 1712년(숙종 38)에 정몽주, 이언적, 정구를 배향하여 창건한 서원인데 賜額받지는 못했다. 이 서원이 있는 곳은 지금은 사연댐에 의해 잠겼지만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반구대 岩刻畵로 유명한 곳이며 경치가 수려하여 위의 서원에 배향된 세 명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1,000m가 넘는 산들이 무수히 포진해 있는데 가지산 밑의 石南寺는 824년(신라 헌덕왕 16)에 도의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조선후기에 선철대사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보물 369호 부도가 간직되어 있다. 취서산 밑의 肝越寺에는 보물 370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이기봉)
언양현은 현재의 울산광역시 언양읍,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읍치는 언양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사방에서 물을 받은 태화강이 동쪽 울산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현재도 사적 154호로 지정·복원되어 있으며, 읍치 산세의 표현에서 풍수적 관념이투영되고 있음이 보인다. 지도 위쪽의 盤龜書院은 1712년(숙종 38)에 정몽주, 이언적, 정구를 배향하여 창건한 서원인데 賜額받지는 못했다. 이 서원이 있는 곳은 지금은 사연댐에 의해 잠겼지만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반구대 岩刻畵로 유명한 곳이며 경치가 수려하여 위의 서원에 배향된 세 명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1,000m가 넘는 산들이 무수히 포진해 있는데 가지산 밑의 石南寺는 824년(신라 헌덕왕 16)에 도의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조선후기에 선철대사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보물 369호 부도가 간직되어 있다. 취서산 밑의 肝越寺에는 보물 370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이기봉)
연일현은 지금의 포항시 시내 항구동 남쪽부분, 연일읍, 대송면, 오천읍, 동해면, 대보면 북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연일읍 생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경주로부터 오는 형산강이 읍치 북쪽에 표시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冷川이 실제보다 과장되어 표현되어 있다. 영일만 장기곶 부분이 실제로는 동북쪽을 향함에도 불구하고 남쪽을 향한 모습으로 왜곡되어 있다.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부분에는 지금의 포항시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浦項倉이 있으며 그 아래쪽의 섬으로 표현된 곳은 지금은 모두 메워져 포항시내의 중요부분이 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지도 아래쪽의 雲梯山이며 읍치에는 낮은 둔덕 위에 石築의 읍성이 있었다. 읍치 아래쪽의 烏川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 연일이며 고려말 충신으로 유명한 정몽주(1337-1392)와 우리말로 쓴 ≪關東別曲≫, ≪思美人曲≫의 작자인 정철(1536-1593) 등을 배향하여 1613년(광해군 5)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기타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지한 封山이 지도 아래쪽에 2개 보이고 있으며, 그 옆의 吾魚寺는 신라 진평왕(579-631) 때에 창건되어 恒沙寺로 지칭되다 원효대사와 혜공대사의 破戒僧적 설화가 만들어지면서 이름이 바뀐 절이라고 한다.(이기봉)
연일현은 지금의 포항시 시내 항구동 남쪽부분, 연일읍, 대송면, 오천읍, 동해면, 대보면 북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연일읍 생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경주로부터 오는 형산강이 읍치 북쪽에 표시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冷川이 실제보다 과장되어 표현되어 있다. 영일만 장기곶 부분이 실제로는 동북쪽을 향함에도 불구하고 남쪽을 향한 모습으로 왜곡되어 있다.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부분에는 지금의 포항시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浦項倉이 있으며 그 아래쪽의 섬으로 표현된 곳은 지금은 모두 메워져 포항시내의 중요부분이 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지도 아래쪽의 雲梯山이며 읍치에는 낮은 둔덕 위에 石築의 읍성이 있었다. 읍치 아래쪽의 烏川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 연일이며 고려말 충신으로 유명한 정몽주(1337-1392)와 우리말로 쓴 ≪關東別曲≫, ≪思美人曲≫의 작자인 정철(1536-1593) 등을 배향하여 1613년(광해군 5)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기타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지한 封山이 지도 아래쪽에 2개 보이고 있으며, 그 옆의 吾魚寺는 신라 진평왕(579-631) 때에 창건되어 恒沙寺로 지칭되다 원효대사와 혜공대사의 破戒僧적 설화가 만들어지면서 이름이 바뀐 절이라고 한다.(이기봉)
지금도 경상도 지방을 嶺南이라 부르고 있듯이 지도의 명칭인 嶺南은 경상도의 별칭이다. 지금 소백산맥이라 부르는 白頭大幹이 강원도로부터 북동쪽의 태백산으로 들어와 소백산, 덕유산을 지나 지리산에 이른다. 동해안쪽으로는 지금 태백산맥이라 부르는 洛東정맥이 동래까지, 남해안쪽으로는 지리산에서 시작하는 洛南정맥이 김해까지 이어져 있다. 경상도의 내륙은 백두대간, 낙동정맥, 낙남정맥으로 둘러 쌓인 거대한 분지에 해당하며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少雨地로 알려져 있다. 또한 경상도의 내륙을 관통하는 낙동강이 그 發源處로 알려져 있는 黃池로부터 시작되어 여러 지류를 합류하여 김해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동해안과 남해안에는 경주의 형산강과 울산의 태화강을 제외하면 큰 하천이 거의 없는데 지도에는 경상도의 이러한 지형지세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잘 그려져 있다. 경상도는 지금의 울진군을 제외한 경상도 전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총 71개 고을로 나누어져 있었다. 관찰사 소재지인 監營은 대구에 있었다. 경상도에는 진주의 右兵營과 울산의 左兵營 등 2개의 兵營이 있었다. 水營 또한 2개가 있었는데 남해안에 있는 統營이 慶尙右水營 兼 三道統制營이었고, 동래에 左水營이 있었다. 해안가에는 군사시설인 鎭堡가 郡縣보다 작은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고, 내륙에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숙종(1674-1720) 때를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修築된 산성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군현보다도 더 큰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는 것은 많은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한편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에 의해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에 최초로 세워진 白雲洞書院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어 조선 양반사회에서의 서원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백운동서원 이외에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여 賜額받은 경주의 玉山書院과 퇴계 이황(1501-1570)을 배향하여 賜額받은 禮安의 陶山書院만이 표시되어 있다.실록을 보관하던 5대 史庫 중의 하나였던 태백산 史庫가 표시되어 있고 경상도와 다른 지역을 구분 지어주던 백두대간 위에는 竹嶺, 鳥嶺 등 중요한 고개들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에 경상도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찰로 보여지는 경주의 佛國寺, 양산의 通度寺, 합천의 海印寺가 표시되어 있어 유교 사회 속에서도 불교가 완전히 배척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타 경주의 月城·대구의 達城·상주의 甄萱山城 등 역사성을 내포하는 유적까지 표시하는 세심함을 읽을 수 있다.(이기봉)
지금도 경상도 지방을 嶺南이라 부르고 있듯이 지도의 명칭인 嶺南은 경상도의 별칭이다. 지금 소백산맥이라 부르는 白頭大幹이 강원도로부터 북동쪽의 태백산으로 들어와 소백산, 덕유산을 지나 지리산에 이른다. 동해안쪽으로는 지금 태백산맥이라 부르는 洛東정맥이 동래까지, 남해안쪽으로는 지리산에서 시작하는 洛南정맥이 김해까지 이어져 있다. 경상도의 내륙은 백두대간, 낙동정맥, 낙남정맥으로 둘러 쌓인 거대한 분지에 해당하며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少雨地로 알려져 있다. 또한 경상도의 내륙을 관통하는 낙동강이 그 發源處로 알려져 있는 黃池로부터 시작되어 여러 지류를 합류하여 김해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동해안과 남해안에는 경주의 형산강과 울산의 태화강을 제외하면 큰 하천이 거의 없는데 지도에는 경상도의 이러한 지형지세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잘 그려져 있다. 경상도는 지금의 울진군을 제외한 경상도 전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총 71개 고을로 나누어져 있었다. 관찰사 소재지인 監營은 대구에 있었다. 경상도에는 진주의 右兵營과 울산의 左兵營 등 2개의 兵營이 있었다. 水營 또한 2개가 있었는데 남해안에 있는 統營이 慶尙右水營 兼 三道統制營이었고, 동래에 左水營이 있었다. 해안가에는 군사시설인 鎭堡가 郡縣보다 작은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고, 내륙에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숙종(1674-1720) 때를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修築된 산성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군현보다도 더 큰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는 것은 많은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한편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에 의해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에 최초로 세워진 白雲洞書院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어 조선 양반사회에서의 서원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백운동서원 이외에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여 賜額받은 경주의 玉山書院과 퇴계 이황(1501-1570)을 배향하여 賜額받은 禮安의 陶山書院만이 표시되어 있다.실록을 보관하던 5대 史庫 중의 하나였던 태백산 史庫가 표시되어 있고 경상도와 다른 지역을 구분 지어주던 백두대간 위에는 竹嶺, 鳥嶺 등 중요한 고개들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에 경상도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찰로 보여지는 경주의 佛國寺, 양산의 通度寺, 합천의 海印寺가 표시되어 있어 유교 사회 속에서도 불교가 완전히 배척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타 경주의 月城·대구의 達城·상주의 甄萱山城 등 역사성을 내포하는 유적까지 표시하는 세심함을 읽을 수 있다.(이기봉)
영덕현은 지금의 영덕군 영덕읍, 지품면, 달산면, 강구면, 남정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덕읍 남석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의 높은 산지로부터 발원한 물들이 五十川이 되어 읍치를 지나며 약간의 넓은 평지를 만들고 동해로 들어가는데, 상류는 西川·北川, 중류는 五十川, 하류는 南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蕪芚山을 배경으로 石築의 읍성이 있었으며, 안에 있는 淸心樓는 읍성 서문에 있었다. 지도의 표현에서 동해안의 방향이 실제로는 남북방향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서는 아래쪽이 서남방향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고을의 서쪽방향이 동서로 넓게 자리잡고 있는데 이 부분을 지도에 표현하려 하다 보니까 지도의 전반적인 표현이 고을의 북쪽을 서북쪽으로 길게 표현하고 동남쪽은 서남쪽으로 꺾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기타 지도의 표현은 山川과 面 등 아주 기초적인 내용만 싣고 있다.(이기봉)
영덕현은 지금의 영덕군 영덕읍, 지품면, 달산면, 강구면, 남정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덕읍 남석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의 높은 산지로부터 발원한 물들이 五十川이 되어 읍치를 지나며 약간의 넓은 평지를 만들고 동해로 들어가는데, 상류는 西川·北川, 중류는 五十川, 하류는 南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蕪芚山을 배경으로 石築의 읍성이 있었으며, 안에 있는 淸心樓는 읍성 서문에 있었다. 지도의 표현에서 동해안의 방향이 실제로는 남북방향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서는 아래쪽이 서남방향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고을의 서쪽방향이 동서로 넓게 자리잡고 있는데 이 부분을 지도에 표현하려 하다 보니까 지도의 전반적인 표현이 고을의 북쪽을 서북쪽으로 길게 표현하고 동남쪽은 서남쪽으로 꺾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기타 지도의 표현은 山川과 面 등 아주 기초적인 내용만 싣고 있다.(이기봉)
영산현은 지금의 창녕군 영산면, 계성면, 장마면, 남지읍, 도천면, 길곡면, 부곡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는 밀양·창녕과의 경계선의 표시가 흥미로운데 고을의 鎭山인 靈鷲山으로부터 밀양과의 경계는 남쪽으로 향함에도 불구하고 창령과의 경계선과 동일하게 북쪽에 일직선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낙동강의 표현도 달라졌는데 북쪽으로부터 고을의 서쪽을 감아 돌아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남쪽에 거의 일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왼쪽에는 조선 초에 來屬된 桂城폐현의 흔적이 계성면으로 남아 있는데 구마고속도로 옆으로 큰봉분을 갖고 있는 계성고분군이있어 고고학적으로 주목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지도에는 德峯鄕賢祠와 道泉鄕賢祠가 보이고 있는데 ≪輿地圖書≫에는 모두 祭禮의 기능을 하는 祠宇가 아니라 교육 기능이 중시되는 書院으로 기록되어 있다. 2개의 祠 모두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배향한 것이 아니며 또한 사액받지도 않은 것을 볼 때 祠와 書院이 어느 정도 구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기타 낙동강변에는 건너편의 칠원·함안과의 왕래를 위한 津의 표시가 자세하며 곽재우의 別墅였다는 忘憂亭 등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영산현은 지금의 창녕군 영산면, 계성면, 장마면, 남지읍, 도천면, 길곡면, 부곡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는 밀양·창녕과의 경계선의 표시가 흥미로운데 고을의 鎭山인 靈鷲山으로부터 밀양과의 경계는 남쪽으로 향함에도 불구하고 창령과의 경계선과 동일하게 북쪽에 일직선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낙동강의 표현도 달라졌는데 북쪽으로부터 고을의 서쪽을 감아 돌아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남쪽에 거의 일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왼쪽에는 조선 초에 來屬된 桂城폐현의 흔적이 계성면으로 남아 있는데 구마고속도로 옆으로 큰봉분을 갖고 있는 계성고분군이있어 고고학적으로 주목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지도에는 德峯鄕賢祠와 道泉鄕賢祠가 보이고 있는데 ≪輿地圖書≫에는 모두 祭禮의 기능을 하는 祠宇가 아니라 교육 기능이 중시되는 書院으로 기록되어 있다. 2개의 祠 모두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배향한 것이 아니며 또한 사액받지도 않은 것을 볼 때 祠와 書院이 어느 정도 구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기타 낙동강변에는 건너편의 칠원·함안과의 왕래를 위한 津의 표시가 자세하며 곽재우의 別墅였다는 忘憂亭 등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영양현은 현재의 영양군 입암면 면소재지 남쪽과 석보면을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양읍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영양현은 조선 초까지 영해도호부의 屬縣으로 존재했는데 1683년(숙종 9) 고을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새롭게 현감이 설치되었다. 고을은 낙동강 지류 반변천의 최상류에 해당하며 首比面 지역은 울진의 왕피천 수계에 해당한다. 고을 전체가 깊숙한 오지에 해당하여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 많은데 읍치 오른쪽의 연못은 靈穴泉을 표시한 것으로서 아무리 가물어도 줄지 아니하며 물이 맑고 흐린 것을 보아 풍흉을 알 수 있었다고 전한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立岩은 현재 선바위라고 부르는 곳으로 높이 10m의 바위가 절벽옆에 따로 서 있어 고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장소로 인식된 듯하며, 그 아래쪽의 招仙島 역시 높이 5m의 바위가 솟아 있어 神仙들이 놀았다고 전해지는 곳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한다. 그리고 읍치 왼쪽의 靑杞倉 지역은 大靑部曲, 小靑部曲이 합쳐져 고려 충렬왕 때 靑杞縣으로 만들었던 지역이고, 首比倉 지역은 首比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읍치 아래쪽의 英山書院은 이황과 김성일을 배향하여 숙종때 사액받은 서원이며,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黃腸封山이 지도 위쪽에 보이고 있다.(이기봉)
영양현은 현재의 영양군 입암면 면소재지 남쪽과 석보면을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양읍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영양현은 조선 초까지 영해도호부의 屬縣으로 존재했는데 1683년(숙종 9) 고을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새롭게 현감이 설치되었다. 고을은 낙동강 지류 반변천의 최상류에 해당하며 首比面 지역은 울진의 왕피천 수계에 해당한다. 고을 전체가 깊숙한 오지에 해당하여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 많은데 읍치 오른쪽의 연못은 靈穴泉을 표시한 것으로서 아무리 가물어도 줄지 아니하며 물이 맑고 흐린 것을 보아 풍흉을 알 수 있었다고 전한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立岩은 현재 선바위라고 부르는 곳으로 높이 10m의 바위가 절벽옆에 따로 서 있어 고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장소로 인식된 듯하며, 그 아래쪽의 招仙島 역시 높이 5m의 바위가 솟아 있어 神仙들이 놀았다고 전해지는 곳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한다. 그리고 읍치 왼쪽의 靑杞倉 지역은 大靑部曲, 小靑部曲이 합쳐져 고려 충렬왕 때 靑杞縣으로 만들었던 지역이고, 首比倉 지역은 首比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읍치 아래쪽의 英山書院은 이황과 김성일을 배향하여 숙종때 사액받은 서원이며,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黃腸封山이 지도 위쪽에 보이고 있다.(이기봉)
영천군은 지금의 영주시 시내, 장수면, 문수면, 이산면, 평은면과 봉화군 상운면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주시내 영주동 일대에 있었다. 소백산과 죽령에서 발원한 하천이 고을의 왼쪽의 남원천이 되고, 부석사 부근에서 발원한 물들이 지도 오른쪽의 내성천이 되어 고을 남쪽에서 합해져 빠져나간다. 지도 위쪽의 북면은 지금의 봉화군 봉성면 금봉리 일대에 해당하며,그 옆의 임지면 고감리는 봉화군 명호면 고감리 일대에 해당하는 越境地였다. 읍치는 말이 남쪽으로 달리는 형세라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고을의 鎭山 鐵呑山을 배경으로 향교를 비롯하여 각종 누각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총 6개의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중 1558년(명종 13)에 세워지고 1572년(선조 5)에 이황을 배향한 伊山書院만이 1574년(선조 7)에 賜額받았다. 기타 보물 681호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는 흑석사가 흑석암으로 읍치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음이 보이고, 驛·院이 하나도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특이하다.(이기봉)
영천군은 지금의 신녕면,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 일부와, 북안면 일부를 제외한 영천시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시내 문내동, 성내동, 창구동 일대에 있었다. 금호강이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으며 여러 개의 지류들이 사방에서 합류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 위쪽의 母子山이며 읍치에는 정몽주의 詩板을 달아 明遠樓라 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다시 만든 朝陽閣이 보이고 있다. 읍치 왼쪽의 향교에 있는 大成殿은 지금도 보물 61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지도에는 총 4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는데 이 중 이 고을 출신으로 알려진 고려 말 충신 鄭夢周와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된 영천 황보씨 皇甫仁 등을 배향한臨皐書院은 1603년(선조 36)에,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서 싸웠던 曹好益(1545-1609)을 배향한 導岑書院은 1678년(숙종 4)에 賜額받았다. 한편 지도 왼쪽위쪽의 八公山은 실제로는 읍치의 正西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네모난 틀 속에 지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방향이 전혀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이 팔공산은 신라 때 中岳으로 받들어져 中祀가 거행되었던 명산으로서 수많은 사찰들이 들어서 있다. 지도에서 보이는 銀海寺도 809년(신라 헌덕왕 1) 惠哲國師가 창건하여 海眼寺로 부르다 조선 인종의 태실을봉안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절이라 한다. 이 절 안에는 보물 514호 청동보살좌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이기봉)
영천군은 지금의 신녕면,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 일부와, 북안면 일부를 제외한 영천시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시내 문내동, 성내동, 창구동 일대에 있었다. 금호강이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으며 여러 개의 지류들이 사방에서 합류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 위쪽의 母子山이며 읍치에는 정몽주의 詩板을 달아 明遠樓라 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다시 만든 朝陽閣이 보이고 있다. 읍치 왼쪽의 향교에 있는 大成殿은 지금도 보물 61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지도에는 총 4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는데 이 중 이 고을 출신으로 알려진 고려 말 충신 鄭夢周와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된 영천 황보씨 皇甫仁 등을 배향한臨皐書院은 1603년(선조 36)에,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서 싸웠던 曹好益(1545-1609)을 배향한 導岑書院은 1678년(숙종 4)에 賜額받았다. 한편 지도 왼쪽위쪽의 八公山은 실제로는 읍치의 正西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네모난 틀 속에 지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방향이 전혀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이 팔공산은 신라 때 中岳으로 받들어져 中祀가 거행되었던 명산으로서 수많은 사찰들이 들어서 있다. 지도에서 보이는 銀海寺도 809년(신라 헌덕왕 1) 惠哲國師가 창건하여 海眼寺로 부르다 조선 인종의 태실을봉안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절이라 한다. 이 절 안에는 보물 514호 청동보살좌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이기봉)
영해부는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 축산면, 창수면, 병곡면과 영양군 석보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읍치는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다. 지도에는 동쪽이 위쪽으로표시되어 있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매우 소략한데 하천의 표시가 너무불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북천의 왼쪽에 있는 하천은 有金菴에서 시작되며, 지도 아래쪽의 석보면은 영양군 낙동강 수계에 속하는 곳으로 蒼水院을 경계로 물줄기의 흐름이 동서로 갈리고 있다. 그 외에 남천을 제외하면 모두 북천의 유역권에 들어 있으며, 서쪽은 태백산맥의 높은 산지이고 동해에 인접하여 제법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읍치 아래쪽의 丹山書院은 사액서원이 아니며, 그 위쪽의 有金菴은 신라시대의 절이라 한다.(이기봉)
영해부는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 축산면, 창수면, 병곡면과 영양군 석보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읍치는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다. 지도에는 동쪽이 위쪽으로표시되어 있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매우 소략한데 하천의 표시가 너무불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북천의 왼쪽에 있는 하천은 有金菴에서 시작되며, 지도 아래쪽의 석보면은 영양군 낙동강 수계에 속하는 곳으로 蒼水院을 경계로 물줄기의 흐름이 동서로 갈리고 있다. 그 외에 남천을 제외하면 모두 북천의 유역권에 들어 있으며, 서쪽은 태백산맥의 높은 산지이고 동해에 인접하여 제법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읍치 아래쪽의 丹山書院은 사액서원이 아니며, 그 위쪽의 有金菴은 신라시대의 절이라 한다.(이기봉)
예안현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도산면, 녹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예안현은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退溪 李滉(1501-1570)의 고향으로 유명한데 이황은 이 고을 토계리에 도산서당을 세우고 후학들을 교육했다. 이황이 죽은 4년 후인 1574년(선조 7) 도산서당에 이황을 배향하여 도산서원을 창건하였고 다음해에 賜額받았다. 이 후 이황의 제자 趙穆(1524-1606)을 추가로 配享하였는데 지금도 사적 170호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황이 태어나 자라난 곳은 지도에 退溪 宅으로 표시된 곳으로 지금의 도산면 온혜리이며 이곳에는 퇴계선생의 태실로 알려진 老松亭이 보존되고 있다. 지도에는 또한 유학의 본고장답게 도산서원 외에 4개의 서원이 낙동강변 경치 좋은 곳에 밀집되어 자리잡고 있는데, 易東書院은 고려말에 이 고을 예안에 살면서 성리학의 체계화에 노력한 易東 禹倬(1263-1343)을 배향하여 1568년(선조 1)에 창건하였고 1684년(숙종 10)에 사액받은 서원이다.그 나머지는 사액서원이 아니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도산서원만 살아남고 모두 훼철되었다. 기타 낙동강변에는 孤山亭 부근과 읍치 아래쪽의 鼻巖을 비롯하여 기암절벽의 화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 많았고, 읍치에는 다른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社稷壇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예안현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도산면, 녹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예안현은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退溪 李滉(1501-1570)의 고향으로 유명한데 이황은 이 고을 토계리에 도산서당을 세우고 후학들을 교육했다. 이황이 죽은 4년 후인 1574년(선조 7) 도산서당에 이황을 배향하여 도산서원을 창건하였고 다음해에 賜額받았다. 이 후 이황의 제자 趙穆(1524-1606)을 추가로 配享하였는데 지금도 사적 170호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황이 태어나 자라난 곳은 지도에 退溪 宅으로 표시된 곳으로 지금의 도산면 온혜리이며 이곳에는 퇴계선생의 태실로 알려진 老松亭이 보존되고 있다. 지도에는 또한 유학의 본고장답게 도산서원 외에 4개의 서원이 낙동강변 경치 좋은 곳에 밀집되어 자리잡고 있는데, 易東書院은 고려말에 이 고을 예안에 살면서 성리학의 체계화에 노력한 易東 禹倬(1263-1343)을 배향하여 1568년(선조 1)에 창건하였고 1684년(숙종 10)에 사액받은 서원이다.그 나머지는 사액서원이 아니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도산서원만 살아남고 모두 훼철되었다. 기타 낙동강변에는 孤山亭 부근과 읍치 아래쪽의 鼻巖을 비롯하여 기암절벽의 화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 많았고, 읍치에는 다른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社稷壇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예천군은 지금의 예천군 예천읍, 용문면, 유천면, 보문면, 호명면과 문경시 동로면, 의성군 다인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예천읍 노상리, 서본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마을은 옛 多仁屬縣의 지역으로서 용궁현의 경계 너머에 있는 예천군의 월경지이며 현재는 의성군 다인면으로 되어 있다. 그 위쪽의 강이 낙동강인데, 낙동강의 지류 내성천이 지도 왼쪽 아래쪽에서 갈라지고 있다. 또 읍치 직전에서 내성천과 갈라진 한천이 읍치 앞을 흐르고 있는데 지도에는 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있는 德鳳山이며 읍치 위쪽에 있는 黑鷹山城이원래는 덕봉산 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에도 지도에는 서로 다르게 표시되어 있음이 의아스럽다. 지도에는 총 4개의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중 이황과 그 제자 조목을 배향한 鼎山書院만이 1697년(숙종 23)에 賜額받았다. 기타 지도 위쪽에 보이는 龍門寺는 870년(신라 경문왕 10)에 창건되어 고려 태조 이후 여러 번 중수된 유서 깊은 절이며, 하천가에 여러 정자가 보이는데 그 중에서 沙川가의 仙夢臺는 내성천변 벼랑가에 세워진 정자로서 현재도 호명면 백송리에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이기봉)
용궁현은 지금의 예천군 용궁면, 지보면, 개포면 면소재지 서쪽, 풍양면 북쪽과 의성군 안사면 북쪽, 문경시 영순면 동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용궁면 향석리에 있었다. 이 읍치는 1856년 큰 장마로 인하여 관아건물이 떠내려가자 용궁면 읍부리로 옮겼다.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 금천의 세 물줄기가 蘇川書院 앞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에는 각각 2개의 書院, 祠, 社가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받지는 못했다. 이 중 三江書院은 정몽주, 이황, 유성룡을 배향하여 1643년(인조 21)에, 尙節祠는 정몽주 피살 후 의령으로 귀양갔던 安俊을 비롯한 이문흥, 문근, 문권, 이구를 배향하여 1669년(현종 10)에, 浣潭里社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鄭光弼(1462-1538)과 그 조상·자손을 배향하여 1568년(선조 1)에 세워졌다. 각각의 배향 인물로 보아 차이가 있었던 듯하며 특히 社는 일개 가문에서 세웠음을 알 수 있겠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長安菴 맞은편은 내성천이 휘돌아 감아 흐르며 만든 육지 속의 섬 마을인 의성포이며, 그 옆에는 石築으로 쌓은 고성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용궁현은 지금의 예천군 용궁면, 지보면, 개포면 면소재지 서쪽, 풍양면 북쪽과 의성군 안사면 북쪽, 문경시 영순면 동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용궁면 향석리에 있었다. 이 읍치는 1856년 큰 장마로 인하여 관아건물이 떠내려가자 용궁면 읍부리로 옮겼다.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 금천의 세 물줄기가 蘇川書院 앞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에는 각각 2개의 書院, 祠, 社가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받지는 못했다. 이 중 三江書院은 정몽주, 이황, 유성룡을 배향하여 1643년(인조 21)에, 尙節祠는 정몽주 피살 후 의령으로 귀양갔던 安俊을 비롯한 이문흥, 문근, 문권, 이구를 배향하여 1669년(현종 10)에, 浣潭里社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鄭光弼(1462-1538)과 그 조상·자손을 배향하여 1568년(선조 1)에 세워졌다. 각각의 배향 인물로 보아 차이가 있었던 듯하며 특히 社는 일개 가문에서 세웠음을 알 수 있겠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長安菴 맞은편은 내성천이 휘돌아 감아 흐르며 만든 육지 속의 섬 마을인 의성포이며, 그 옆에는 石築으로 쌓은 고성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울산부는 지금의 두동면, 두서면, 상북면, 언양읍, 삼남면, 삼동면을 제외한 울산광역시 전체와 양산시 웅상읍에 해당하며 읍치는 중구 성남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 아래쪽에 흐르는 강은 태화강이고 오른쪽에 있는 강은 동천강인데, 고을의 鎭山인 無里龍山이 읍치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 좀 이채롭다. 읍치 오른쪽으로는 종3품 兵馬虞候가 파견되었던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 보이고 있는데 경주의 後營, 대구의 中營, 안동의 前營을 관할하였다. 읍치 오른쪽의 鷗江書院은 정몽주와 이언적을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지도 오른쪽의 佛祠는 祀典에 小祀로 기록되어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가물 때 특히 효험이 있었다고 하는데 국가적 차원에서의 민간신앙수용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말이 넘나들지 못하도록 설치한 牧場馬城의 모습이 성문과 함께 잘 그려져 있는데, 이곳이 蔚山場이며 監牧官이 파견되었다. 그 왼쪽으로는 통일신라 말기 처용설화의 근원지가 이 고을임을 알려주는 處容岩이 보이고 있으며, 그 위쪽의 舊開雲浦는 신라 49대 헌강왕(875-886)이 海神에게 빌어 구름과 안개를 걷히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기타 임진왜란 때 倭軍이 쌓은 성에 설치한 西生鎭이 지도 아래쪽에 보이며, 나라에서 쓸 재목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지한 封山이 지도 왼쪽으로 6군데나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웅천현은 지금의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에 해당하며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 아래쪽의 薺浦鎭은 조선 세종 때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 등과 함께 對馬島主의 청에 의해 개항했던 三浦 중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倭館을 설치하여 교역, 접대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세종 말년에는 약 1,500명의 왜인이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510년(중종 5) 조선 조정의 압박에 불평을 품은 왜인들이 三浦倭亂을 일으키자 토벌한 후 삼포의 모든 왜인들을 추방하였다. 얼마 후 일본 足利幕府의 요청에 의해 염포만을 개항하기로 했다. 웅천 지역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남하하여 장기간 주둔하면서 많은 倭城을 쌓았던 곳 중의 하나이다. 지도에도 가덕도에 古倭城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음이 보인다. 이렇게 일본과의 직접적인 침입 위험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종3품관인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가덕진·제포진, 정4품관인 水軍萬戶가 파견된 천성진·안골진, 종9품관인 水軍別將이 파견된 청천진·신문진과 함께 望, 烟臺, 烽, 船所 등 각종 군사시설이 매우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을 북쪽으로는 400-800m급의 높은 산들이 웅장하게 솟아 있어 큰 하천은 발달하지 못했다. 이 고을의 鎭山이며 고을 이름과 관련되어 있는 熊巖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다.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여러 곳에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기타 가덕도 옆에 있는 竝山島에는 統營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統營箭竹田이 그려져 있다.(이기봉)
의령현은 지금의 궁유면 운계리 일대를 제외한 의령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남쪽에는 진주에서 들어온 남강이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가는데 본류인 낙동강보다 지류인 남강이 더 크게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읍치를 중심으로 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을의 북쪽으로도 신반천이라는 제법 큰 하천이 흐르는데 이 하천 변 유역이 고려말 來屬된 옛 新繁縣의 터이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德谷書院은 이황을 배향하여 1669년(현종 1)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그 아래쪽의 鼎岩津은 솥처럼 생긴 바위가 강 한가운데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함안으로 넘어가는 주요 통로이다. 조선 후기에는 소금배가 드나들어 남강 변에서 가장 번성했던 나루터로 알려져 있다.(함안군 지도 참조) 남강 상류쪽 介樹院 옆의 倉은 갈수기 때 남강의 물이 적어 배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종착지였기 때문에 소금을 저장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기타 읍치 서북쪽의 堀山 부근에 사찰이 많이 들어서 있음이 특이하고, 그 옆의 堀岺 로 표시된 곳은 의령에서 산청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였다.(이기봉)
의령현은 지금의 궁유면 운계리 일대를 제외한 의령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남쪽에는 진주에서 들어온 남강이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가는데 본류인 낙동강보다 지류인 남강이 더 크게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읍치를 중심으로 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을의 북쪽으로도 신반천이라는 제법 큰 하천이 흐르는데 이 하천 변 유역이 고려말 來屬된 옛 新繁縣의 터이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德谷書院은 이황을 배향하여 1669년(현종 1)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그 아래쪽의 鼎岩津은 솥처럼 생긴 바위가 강 한가운데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함안으로 넘어가는 주요 통로이다. 조선 후기에는 소금배가 드나들어 남강 변에서 가장 번성했던 나루터로 알려져 있다.(함안군 지도 참조) 남강 상류쪽 介樹院 옆의 倉은 갈수기 때 남강의 물이 적어 배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종착지였기 때문에 소금을 저장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기타 읍치 서북쪽의 堀山 부근에 사찰이 많이 들어서 있음이 특이하고, 그 옆의 堀岺 로 표시된 곳은 의령에서 산청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였다.(이기봉)
의성현은 지금의 의성군 의성읍, 단촌면, 안평면, 봉양면, 금성면, 가음면, 춘산면, 사곡면, 옥산면, 점곡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의성읍 후죽리, 도동리, 도서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물줄기는 크게 두 개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남서쪽의 여러 물줄기가 모여 서쪽의 비안으로 빠져 나가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동북쪽의 여러 물줄기가 모여 북쪽의 안동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이것은 의성현과 高丘폐현의 자연스런 경계였던 것 같다. 의성현은 원래 신라에 의해 병합된 召文國이었다고 하며, 그 터는 지도 아래쪽의 金鶴山(지금의 금성산) 왼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통일신라 초기의 것으로 알려진 국보 55호 탑리5층석탑과 수많은 고분이 산재해 있다. 읍치에는 다른 지도보다 여러 누각의 표시가 많으며 읍치 위쪽의 屯德山이 고을의 鎭山이다. 지도에는 많은 書院과 祠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중 조광조 등과 함께 김굉필의 제자로 알려진 金安國(1478-1543) 등을 배향한 지도 아래쪽의 氷溪書院만이 1576년(선조 9) 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 서원이 있는 곳은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氷穴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며, 조선 초에는 매년 정월 보름에 임금이 香을 내려 제사지내던 太一殿이 있었는데 1478년(성종9)에 태안군으로 옮겨갔다. 지도 위쪽에 있는 高雲寺는 31본산의 하나이며 신라 때 義湘法師가 세운 절로서 보물 246호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 자동차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河岸段丘가 잘 발달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기타 다른 지도에는 잘 표시되어 있지 않은 書堂이 많이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서당은 현재의 초등학교 교육기관에 해당하며, 대부분 국가가 아닌 개인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서 이 당시 서당교육의 보편화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기봉)
의흥현은 지금의 군위군 의흥면, 우보면, 부계면, 산성면, 고로면 남쪽, 효령면 매곡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에 있었다. 八公山, 화산 등 8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남동쪽에 포진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낙동강의 지류 위천으로 모여 서북쪽으로 빠져나간다. 읍치가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이는 지도 서남쪽의 缶西面 지역에 고려말來屬된 缶溪縣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곳에는 국보 109호로 지정된 제2석굴암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도 아래쪽에는 華山城이 보이고 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대적으로 수축된 산성 중의 하나이며, 1709년(숙종 35)에 성을 쌓다가 완성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안에는 戰時가 아닐 때 성의 유지·보존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軍需寺와 성문의 표시가 자세하며 또한 샘으로 추정되는 것이 9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華山 기슭에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風穴이 있었다는 기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 위쪽에는 角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기록에는 麟角寺로 나오고 있다. 이 절은 신라 때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때 一然이 이 절에서 ≪三國遺事≫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1289년(고려 충렬왕 15)에 일연이 죽자 시호를 普覺國師라 하고 碑石과 塔을 이 절에 세웠는데 지금도 보물 428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이기봉)
의흥현은 지금의 군위군 의흥면, 우보면, 부계면, 산성면, 고로면 남쪽, 효령면 매곡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에 있었다. 八公山, 화산 등 8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남동쪽에 포진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낙동강의 지류 위천으로 모여 서북쪽으로 빠져나간다. 읍치가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이는 지도 서남쪽의 缶西面 지역에 고려말來屬된 缶溪縣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곳에는 국보 109호로 지정된 제2석굴암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도 아래쪽에는 華山城이 보이고 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대적으로 수축된 산성 중의 하나이며, 1709년(숙종 35)에 성을 쌓다가 완성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안에는 戰時가 아닐 때 성의 유지·보존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軍需寺와 성문의 표시가 자세하며 또한 샘으로 추정되는 것이 9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華山 기슭에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風穴이 있었다는 기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 위쪽에는 角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기록에는 麟角寺로 나오고 있다. 이 절은 신라 때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때 一然이 이 절에서 ≪三國遺事≫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1289년(고려 충렬왕 15)에 일연이 죽자 시호를 普覺國師라 하고 碑石과 塔을 이 절에 세웠는데 지금도 보물 428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이기봉)
인동부는 지금의 칠곡군 기산면, 약목면, 북삼면, 석적면 대부분과 구미시내 낙동강 동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구미시내 인의동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로 낙동강이 지나가고 있으며, 그 지류 北川이 고을의 동·북쪽을 감아 돌고 있는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고을의 읍치가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낙동강의 왼쪽 3개 면이 원래 若木폐현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읍치 오른쪽으로는 天生山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사면의 깍아지른 절벽이 하늘이 만든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신라 때부터 있던 것을 1601년(선조 34)에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가 대대적으로 修築하였다. 그것 때문에 1604년(선조 37)에 고을의 격이 縣에서 府로 승격되었다. 기타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개창에 반대하여 낙향했던 吉再를 배향하여 1574년(선조 7)에 세우고 광해군 때 사액받은 吳山書院과 청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여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가 죽었다는 장현광(1554-1637)을 배향하여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東洛書院 등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인동부는 지금의 칠곡군 기산면, 약목면, 북삼면, 석적면 대부분과 구미시내 낙동강 동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구미시내 인의동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로 낙동강이 지나가고 있으며, 그 지류 北川이 고을의 동·북쪽을 감아 돌고 있는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고을의 읍치가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낙동강의 왼쪽 3개 면이 원래 若木폐현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읍치 오른쪽으로는 天生山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사면의 깍아지른 절벽이 하늘이 만든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신라 때부터 있던 것을 1601년(선조 34)에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가 대대적으로 修築하였다. 그것 때문에 1604년(선조 37)에 고을의 격이 縣에서 府로 승격되었다. 기타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개창에 반대하여 낙향했던 吉再를 배향하여 1574년(선조 7)에 세우고 광해군 때 사액받은 吳山書院과 청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여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가 죽었다는 장현광(1554-1637)을 배향하여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東洛書院 등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자인현은 현재의 경산시 자인면, 남산면, 용성면과 압량면·진량면 남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자인면 원당리 일대에 있었다. 자인현은 조선 초까지도 경주부의 屬縣으로 존재했지만 인조(1623-1649) 때 고을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分設되었고, 下北面 지역에 있었던 仇史部曲도 조선 초에는 경주의 屬縣이었는데 효종(1649-1659) 때 고을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자인현에 합쳐지게 되었다. 지도에는 고을 동서남북의 산지에서 발원한 금호강의 지류 오목천이 읍치 앞에서 모여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으며, 고을의 동남쪽 일부는 밀양강 수계에 속한다. 또한 여러 산의 모습과 유명하지는 않지만 고을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찰이 매우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기타 지도 아래쪽에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한 觀瀾書院이, 읍치 아래쪽에 임진왜란 때 이 고을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운 崔文炳(?-1599)을 배향한 忠賢祠가, 그 아래쪽에 인조 때 자인현을 복구시키는 데 공이 있는 이광후, 창후 형제와 김응명을 배향한 南川尙德祠 등이 보이고 있는데 모두 사액받지는 못했다.(이기봉)
자인현은 현재의 경산시 자인면, 남산면, 용성면과 압량면·진량면 남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자인면 원당리 일대에 있었다. 자인현은 조선 초까지도 경주부의 屬縣으로 존재했지만 인조(1623-1649) 때 고을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分設되었고, 下北面 지역에 있었던 仇史部曲도 조선 초에는 경주의 屬縣이었는데 효종(1649-1659) 때 고을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자인현에 합쳐지게 되었다. 지도에는 고을 동서남북의 산지에서 발원한 금호강의 지류 오목천이 읍치 앞에서 모여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으며, 고을의 동남쪽 일부는 밀양강 수계에 속한다. 또한 여러 산의 모습과 유명하지는 않지만 고을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찰이 매우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기타 지도 아래쪽에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한 觀瀾書院이, 읍치 아래쪽에 임진왜란 때 이 고을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운 崔文炳(?-1599)을 배향한 忠賢祠가, 그 아래쪽에 인조 때 자인현을 복구시키는 데 공이 있는 이광후, 창후 형제와 김응명을 배향한 南川尙德祠 등이 보이고 있는데 모두 사액받지는 못했다.(이기봉)
장기현은 지금의 포항시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남쪽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장기면 읍내리에 있었다. 서쪽의 산지로부터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동해바다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북쪽 장기곶 부분은 연일현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왜곡되어 표현되어 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巨山을 서쪽으로 하여 산세가 폭 감싸고 있는 형국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표현되고 있는 것 같으며, 읍치 아래쪽의 竹林書院은 1707년(숙종 33)에 송시열(1607-1689) 등을 배향하여 창건하였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다. 지도 위쪽으로는 牧場城門이 성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輿地圖書≫에는 冬乙背串牧場으로 331마리의 말을 키웠다고 나오며 울산목장에 속해 있었다. 기타 枾嶺封山이 지도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는데 장기면 수성리 감재 부근인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장기현은 지금의 포항시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남쪽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장기면 읍내리에 있었다. 서쪽의 산지로부터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동해바다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북쪽 장기곶 부분은 연일현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왜곡되어 표현되어 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巨山을 서쪽으로 하여 산세가 폭 감싸고 있는 형국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표현되고 있는 것 같으며, 읍치 아래쪽의 竹林書院은 1707년(숙종 33)에 송시열(1607-1689) 등을 배향하여 창건하였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다. 지도 위쪽으로는 牧場城門이 성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輿地圖書≫에는 冬乙背串牧場으로 331마리의 말을 키웠다고 나오며 울산목장에 속해 있었다. 기타 枾嶺封山이 지도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는데 장기면 수성리 감재 부근인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지례현은 지금의 김천시 지례면, 대덕면, 부항면, 구성면 남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지례면 교리, 상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이 위쪽으로 되어 있는데 서쪽, 서남쪽의 높은 산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들이 북동쪽 금산으로 빠져나가는 감천에 합류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남쪽에 있는 龜城山인데 1,177m의 三道峯, 1,290m의 大德山에 비해 매우 낮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진산으로 되어 있음이흥미롭다. 읍치에는 華玉亭, 鑑湖亭, 寒松亭 등의 정자가 자세히 표시된 것이 특이하다. 이 중 鑑湖亭은 1690년(조선 숙종 16) 현감 조인상이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세운 정자이다. 이름에 정자와 연못의 어우러진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거창에서 이 고을을 지나 무주나, 황간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중요한 要害處임을 알려주기 위해 특별히 嶺 라는 단어를 첨가한 牛頭峙가 읍치 왼쪽에 보이고 있다. 그 외에는 사찰, 창, 참, 역, 면 등만 간략히 표시한 소략한 지도이다.(이기봉)
지례현은 지금의 김천시 지례면, 대덕면, 부항면, 구성면 남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지례면 교리, 상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이 위쪽으로 되어 있는데 서쪽, 서남쪽의 높은 산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들이 북동쪽 금산으로 빠져나가는 감천에 합류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남쪽에 있는 龜城山인데 1,177m의 三道峯, 1,290m의 大德山에 비해 매우 낮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진산으로 되어 있음이흥미롭다. 읍치에는 華玉亭, 鑑湖亭, 寒松亭 등의 정자가 자세히 표시된 것이 특이하다. 이 중 鑑湖亭은 1690년(조선 숙종 16) 현감 조인상이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세운 정자이다. 이름에 정자와 연못의 어우러진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거창에서 이 고을을 지나 무주나, 황간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중요한 要害處임을 알려주기 위해 특별히 嶺 라는 단어를 첨가한 牛頭峙가 읍치 왼쪽에 보이고 있다. 그 외에는 사찰, 창, 참, 역, 면 등만 간략히 표시한 소략한 지도이다.(이기봉)
진보현은 청송군 진보면, 파천면 관리 북쪽과 영양군 입암면 신구리 남쪽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일대에 있었다. 낙동강의 지류 반변천의 상류에 해당하며 영양에서 내려온 물이 고을의 굽이굽이를 돌아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읍치는 고을의 진산 南角山으로부터 시작되어 북쪽 반변천까지 펼쳐진 작은 분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지도에도 이런 지형의 모습이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鳳覽書院은 1599년(선조 32)에 본관이 이 고을인 退溪 李滉(1501-1570)을 배향하여 세워져, 1690년(숙종 16)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 서원 근처에는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국보 187호로 지정된 봉감 5층석탑이 있어 유명한데 모전탑계열로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타 지도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는 落坪은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 있었던 월경지였으며, 낙동강의 상류이기 때문에 孔岩, 文岩 등의 수려한 경치와 風乎亭, 玉流亭 등의 풍류있는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진보현은 청송군 진보면, 파천면 관리 북쪽과 영양군 입암면 신구리 남쪽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일대에 있었다. 낙동강의 지류 반변천의 상류에 해당하며 영양에서 내려온 물이 고을의 굽이굽이를 돌아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읍치는 고을의 진산 南角山으로부터 시작되어 북쪽 반변천까지 펼쳐진 작은 분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지도에도 이런 지형의 모습이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鳳覽書院은 1599년(선조 32)에 본관이 이 고을인 退溪 李滉(1501-1570)을 배향하여 세워져, 1690년(숙종 16)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 서원 근처에는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국보 187호로 지정된 봉감 5층석탑이 있어 유명한데 모전탑계열로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타 지도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는 落坪은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 있었던 월경지였으며, 낙동강의 상류이기 때문에 孔岩, 文岩 등의 수려한 경치와 風乎亭, 玉流亭 등의 풍류있는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진주목은 진주시 전체와 고성군 개천면·영현면, 사천시 시내 일부·축동면, 남해군 창선면, 하동군 옥종면·청암면·북천면 북부, 산청군 시천면·삼장면·단성군 서쪽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진주시내 본성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서북쪽 지리산에서 발원한 남강이 여러 물줄기를 받아 읍치 아래쪽을 지나 동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진주목은 983년(고려 성종 2)에 12牧의 하나로 설정되어 많은 속현을 거느렸는데 이후에도 독립적으로 分設되지 않고 완전히 來屬된 속현이 많아 큰 고을이 될 수 있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面이 里로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로서 경상도에서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지도 아래쪽의 昌善里 일대는 지금의 남해군 창선면, 그 앞쪽의 末文里 일대는 지금의 사천시내에 있었던 越境地였다.지도에는 큰 고을답게 총 7개의 書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중 조선 명종 때 이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리학자로 알려진 南冥 曺植(1501-1572)을 배향한 德川書院과 연산군 때 甲子士禍(1504)에 연루되어 참화를 당하여 죽은 趙之瑞(?-1504)를 배향한 新唐書院 만이 賜額書院이고 나머지는 사액받지 못했다. 읍치에는 고을의 鎭山인 飛鳳山 아래에 石築의 성곽이 있었으며, 성곽 안쪽으로는 진주 右營, 상주 左營, 김해 別中營을 관장하던 右兵營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진주성 함락 후 왜장을 껴안고 순국한 논개의 일화가 전해지는 矗石樓와 義岩도 표시되어 있음이 보인다. 한편 진주에는 유서깊은 사찰 또한 많은데 이 중 경덕왕 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三國遺事≫에도 나오는 斷俗寺가 지도 서북쪽에 보이고 있다. 이 절에는 보물 72·73호로 지정된 동서 3층석탑이 있고 마을 입구에는 최치원이 廣濟岩門이라고 쓴 바위가 있다고 한다. 그 옆의 三壯寺는 지금은 폐사되었으며 절터에는 3층석탑이 아직도 남아 있다. 기타 읍치 오른쪽으로는 15개의 속역을 거느린 召村驛이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 아래쪽에는 僉使가 파견되었고 석축의 성이 있었던 赤梁鎭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는 감목관이 파견되었던 昌善牧場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위쪽에 있는 場岩倉 부근에는 여덟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서울로 나르던 駕山倉이란 漕倉이 설치되어 있었다.(이기봉)
진해현은 지금의 마산시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진동면 진동리에 있었다. 현재의 진해시는 일제시대에 군사기지로 개발된 곳으로서 조선시대의 진해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임진왜란 이후 고을이 작고 전쟁으로 인해 매우 피폐하였으므로 함안, 창원 등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세워지는 등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고을이다. 지도에는 고을의 북쪽으로 높은 산이 이어져 있는 모습과 그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해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아주 간략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의 왼쪽 해안가에는 咸安海倉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咸安界라고 표시된 지점의 한티라는 고개를 넘으면 바로 함안 땅이기 때문에 稅穀米 운송을 위한 창고를 이 고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기타 읍치 위쪽 胎封菴의 명칭에 나타나는 胎封은 조선왕조와는 관계가 없고 고려와 관계가 있는 지명이라고 하며, 해창 오른쪽으로는 統營都廳倉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진해현은 지금의 마산시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진동면 진동리에 있었다. 현재의 진해시는 일제시대에 군사기지로 개발된 곳으로서 조선시대의 진해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임진왜란 이후 고을이 작고 전쟁으로 인해 매우 피폐하였으므로 함안, 창원 등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세워지는 등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고을이다. 지도에는 고을의 북쪽으로 높은 산이 이어져 있는 모습과 그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해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아주 간략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의 왼쪽 해안가에는 咸安海倉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咸安界라고 표시된 지점의 한티라는 고개를 넘으면 바로 함안 땅이기 때문에 稅穀米 운송을 위한 창고를 이 고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기타 읍치 위쪽 胎封菴의 명칭에 나타나는 胎封은 조선왕조와는 관계가 없고 고려와 관계가 있는 지명이라고 하며, 해창 오른쪽으로는 統營都廳倉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창녕현은 지금의 창녕군 창령읍, 대지면, 유어면, 이방면, 대합면, 성산면, 고암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창령읍 교상리, 말흘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일대에는 사적 80호로 지정된 대형고분군이 밀집되어 있어 가야-신라 관계를 연구하는데 고고학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사적 지도에는 동쪽의 높은 산지가 위쪽에 표시되어 있고 서쪽의 낮은 낙동강변이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을의 鎭山인 火王山(지도에는 大旺山)이 동쪽에있음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읍치 위쪽에 있는 古城은 火王山古城으로서 정상부의 평평한 지역에 石築으로 쌓았으며 9개의 샘과 세 개의 못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세 개의 못이 龍池로 표현된 것 같다.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1552-1617)가 바로 이 산성에 들어와 紅衣將軍으로 칭하고 왜적과의 싸움에서 근거지로 삼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산성 옆에 있는 觀龍寺는 신라 때 창건한 절로서 1617년(광해군 9)靈雲이 재건한 절이라고 하며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약사전, 석가좌상 등이 보전되어 있다. 읍치 왼쪽의 冠山書院은 조식, 이황 등에게서 배운 광해군 때의 학자 鄭逑(1543-1620)가 서재를 만들어 강학하던 곳에 서원을 세워 정구를 배향하고 1711년(숙종 37)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그 아래쪽의 정구의 제자 成安義(1561-1629) 등을 배향한 燕岩書院과 세조 때 死六臣의 하나이며 본관이 창녕인 成三問(1418-1456)을 비롯하여 그 조상·자손 등 成氏 8인을 배향한 成氏世德祠는 사액받지 못했다. 기타 창녕에는 국보 34호 동3층석탑과 보물 520호 서3층석탑를 비롯한통일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 때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낙동강변에는 우포늪 등 우리 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배후습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이기봉)
창녕현은 지금의 창녕군 창령읍, 대지면, 유어면, 이방면, 대합면, 성산면, 고암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창령읍 교상리, 말흘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일대에는 사적 80호로 지정된 대형고분군이 밀집되어 있어 가야-신라 관계를 연구하는데 고고학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사적 지도에는 동쪽의 높은 산지가 위쪽에 표시되어 있고 서쪽의 낮은 낙동강변이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을의 鎭山인 火王山(지도에는 大旺山)이 동쪽에있음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읍치 위쪽에 있는 古城은 火王山古城으로서 정상부의 평평한 지역에 石築으로 쌓았으며 9개의 샘과 세 개의 못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세 개의 못이 龍池로 표현된 것 같다.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1552-1617)가 바로 이 산성에 들어와 紅衣將軍으로 칭하고 왜적과의 싸움에서 근거지로 삼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산성 옆에 있는 觀龍寺는 신라 때 창건한 절로서 1617년(광해군 9)靈雲이 재건한 절이라고 하며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약사전, 석가좌상 등이 보전되어 있다. 읍치 왼쪽의 冠山書院은 조식, 이황 등에게서 배운 광해군 때의 학자 鄭逑(1543-1620)가 서재를 만들어 강학하던 곳에 서원을 세워 정구를 배향하고 1711년(숙종 37)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그 아래쪽의 정구의 제자 成安義(1561-1629) 등을 배향한 燕岩書院과 세조 때 死六臣의 하나이며 본관이 창녕인 成三問(1418-1456)을 비롯하여 그 조상·자손 등 成氏 8인을 배향한 成氏世德祠는 사액받지 못했다. 기타 창녕에는 국보 34호 동3층석탑과 보물 520호 서3층석탑를 비롯한통일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 때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낙동강변에는 우포늪 등 우리 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배후습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이기봉)
창원부는 지금의 대산면을 제외한 창원시와 마산시 시내, 내서읍에 해당하며 읍치는 창원시내 (소계동, 북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은 조선 태종 때 義昌縣과 會原縣을 昌原이란 이름으로 합쳐 만들어졌는데 회원현의 治所는 회원서원 부근에 있었다. 읍치 북쪽은 낙동강 수계에 속하며 남쪽은 마산만으로 작은 하천들이 흘러 들어간다. 지도 왼쪽 바닷가의 月影臺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노닐던 곳으로 ''月影臺''라는 글자를 楷書體로 손수 써서 돌에 새긴 비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최치원이 수도했고 그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孤雲臺도 있었다. 그 옆의 海倉 부근은 고려 때 몽고가 일본을 정벌할 때 征東行省을 설치한 合浦로서 3차에 걸친 일본 원정의 출발지였는데 태풍으로 모두 실패하였다. 조선 초에는 이곳에 右兵營을 설치했으나 선조 때 진주로 옮겼다. 그 옆의 盤龍山 밑에는 1760년(영조 36)에 盤山倉이라는 漕倉을 설치하여 근처 9개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아 서울로 옮겼던 지역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왼쪽에는 정구와 그의 제자 허목(1595-1682)을 배향한 檜原書院이, 읍치 아래쪽으로는 朴身潤을 배향한 鄕賢祠가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 사액받지는 못했다. 기타 읍치 오른쪽에는 14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인 自如驛이 보이고 있으며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3개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창원부는 지금의 대산면을 제외한 창원시와 마산시 시내, 내서읍에 해당하며 읍치는 창원시내 (소계동, 북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은 조선 태종 때 義昌縣과 會原縣을 昌原이란 이름으로 합쳐 만들어졌는데 회원현의 治所는 회원서원 부근에 있었다. 읍치 북쪽은 낙동강 수계에 속하며 남쪽은 마산만으로 작은 하천들이 흘러 들어간다. 지도 왼쪽 바닷가의 月影臺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노닐던 곳으로 ''月影臺''라는 글자를 楷書體로 손수 써서 돌에 새긴 비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최치원이 수도했고 그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孤雲臺도 있었다. 그 옆의 海倉 부근은 고려 때 몽고가 일본을 정벌할 때 征東行省을 설치한 合浦로서 3차에 걸친 일본 원정의 출발지였는데 태풍으로 모두 실패하였다. 조선 초에는 이곳에 右兵營을 설치했으나 선조 때 진주로 옮겼다. 그 옆의 盤龍山 밑에는 1760년(영조 36)에 盤山倉이라는 漕倉을 설치하여 근처 9개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아 서울로 옮겼던 지역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왼쪽에는 정구와 그의 제자 허목(1595-1682)을 배향한 檜原書院이, 읍치 아래쪽으로는 朴身潤을 배향한 鄕賢祠가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 사액받지는 못했다. 기타 읍치 오른쪽에는 14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인 自如驛이 보이고 있으며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3개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청도군은 지금의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을 제외한 청도군 전체와 밀양시 청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양읍 서상리, 동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지형은 동서남북이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밀양강의 상류 청도천과 동창천이 사방에서 물을 받아 남쪽 밀양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고을의 모습이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임에도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읍치는 고을의 진산 鰲山을 배경으로 環抱形의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있음이 보인다. 읍치 위쪽에 있는 古伊西國은 ≪三國史記≫에 297년(신라 儒禮尼師今 14) 신라의 金城을 공격한 나라로 나온다. 읍치 아래쪽의 紫溪書院은 戊午士禍(1498) 때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金馹孫(1464-1498) 등을 배향하여 선조 때 건립하고 1661년(현종 2)에 사액받은 서원이며, 그 아래쪽의 南溪書院은 고려 고종 때의 관리이며, 청도 출신인 金之岱(1190-1266)를 배향하여 1740년(영조 16)에 세웠다. 지도 오른쪽의 雲門寺는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창건하여 591년(신라 진평왕 13) 圓光國師에 의해 중창된 후 고려 태조가 雲門禪師라 하면서 이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보물 193호 석등 등 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는 절이다. 그밖에 16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인 省峴驛이 위쪽에 보이고 있으며, 지도 아래쪽으로는 영남대로 상에 ''敵路要衝''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청도천을 따라 골짜기가수km 이어져 있다. 그 옆에는 삼한시대의 성으로 여겨지는 古山城基가 표시되어 있고 그 위쪽으로도 마찬가지의 古山城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청도군은 지금의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을 제외한 청도군 전체와 밀양시 청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양읍 서상리, 동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지형은 동서남북이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밀양강의 상류 청도천과 동창천이 사방에서 물을 받아 남쪽 밀양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고을의 모습이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임에도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읍치는 고을의 진산 鰲山을 배경으로 環抱形의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있음이 보인다. 읍치 위쪽에 있는 古伊西國은 ≪三國史記≫에 297년(신라 儒禮尼師今 14) 신라의 金城을 공격한 나라로 나온다. 읍치 아래쪽의 紫溪書院은 戊午士禍(1498) 때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金馹孫(1464-1498) 등을 배향하여 선조 때 건립하고 1661년(현종 2)에 사액받은 서원이며, 그 아래쪽의 南溪書院은 고려 고종 때의 관리이며, 청도 출신인 金之岱(1190-1266)를 배향하여 1740년(영조 16)에 세웠다. 지도 오른쪽의 雲門寺는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창건하여 591년(신라 진평왕 13) 圓光國師에 의해 중창된 후 고려 태조가 雲門禪師라 하면서 이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보물 193호 석등 등 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는 절이다. 그밖에 16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인 省峴驛이 위쪽에 보이고 있으며, 지도 아래쪽으로는 영남대로 상에 ''敵路要衝''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청도천을 따라 골짜기가수km 이어져 있다. 그 옆에는 삼한시대의 성으로 여겨지는 古山城基가 표시되어 있고 그 위쪽으로도 마찬가지의 古山城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청송부는 진보면, 파천면 북부를 제외한 청송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청송읍 월막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 왼쪽의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 길안천의 상류인데 옛 安德폐현이 있었던 곳이고, 오른쪽의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 용전천인데 상류는 松生縣, 하류는 靑鳧縣의자리로서 조선 세조 때 두 현을 합쳐서 청송부를 만들었다. 청송부는 그리 크지 않은 고을임에도 都護府라는 높은 군현명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고을이 세종의 妃 소헌왕후의 本鄕(본관)이기 때문에 승격된 것이다. 이 고을에는 두 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는데 지도 한가운데의 屛岩書院은 이이와 김장생을 배향하여 1702년(숙종 28)에 賜額되었고, 지도왼쪽의 松鶴書院은 이황, 김성일, 장현광을 배향하여 1699년(숙종 25)에 세워졌는데 조선 성리학의 양대 흐름이 하나의 고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기타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에 큰 글씨로 기재되어 있는 방광산이고, 지도 오른쪽의 周房山은 720m로 그리 높지않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주왕산이다.(이기봉)
청송부는 진보면, 파천면 북부를 제외한 청송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청송읍 월막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 왼쪽의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 길안천의 상류인데 옛 安德폐현이 있었던 곳이고, 오른쪽의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 용전천인데 상류는 松生縣, 하류는 靑鳧縣의자리로서 조선 세조 때 두 현을 합쳐서 청송부를 만들었다. 청송부는 그리 크지 않은 고을임에도 都護府라는 높은 군현명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고을이 세종의 妃 소헌왕후의 本鄕(본관)이기 때문에 승격된 것이다. 이 고을에는 두 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는데 지도 한가운데의 屛岩書院은 이이와 김장생을 배향하여 1702년(숙종 28)에 賜額되었고, 지도왼쪽의 松鶴書院은 이황, 김성일, 장현광을 배향하여 1699년(숙종 25)에 세워졌는데 조선 성리학의 양대 흐름이 하나의 고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기타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에 큰 글씨로 기재되어 있는 방광산이고, 지도 오른쪽의 周房山은 720m로 그리 높지않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주왕산이다.(이기봉)
청하현은 지금의 포항시 청하면, 송라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읍치는 청하면 덕성리에 있었다. 서쪽의 높은 산봉우리에서 발원한 北川, 南川이 동해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하천변 해안가에는 제법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舊韓末 평민 의병대장 申乭石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무찌른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을의 鎭山은 왼쪽의 呼鶴山이다. 지도 위쪽의 鶴山書院은 이언적을 배향하였지만 사액받지는 않았으며, 그 옆의 寶鏡寺에는 1226년(고려 고종 13)에 세운 圓眞國師碑가 보물 25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기타 읍치 위쪽의 松羅驛은 7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며, 지도 아래쪽에는 높이 21m의 거대한 바위가 바닷가에 솟아 있는 釣鯨臺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청하현은 지금의 포항시 청하면, 송라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읍치는 청하면 덕성리에 있었다. 서쪽의 높은 산봉우리에서 발원한 北川, 南川이 동해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하천변 해안가에는 제법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舊韓末 평민 의병대장 申乭石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무찌른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을의 鎭山은 왼쪽의 呼鶴山이다. 지도 위쪽의 鶴山書院은 이언적을 배향하였지만 사액받지는 않았으며, 그 옆의 寶鏡寺에는 1226년(고려 고종 13)에 세운 圓眞國師碑가 보물 25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기타 읍치 위쪽의 松羅驛은 7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며, 지도 아래쪽에는 높이 21m의 거대한 바위가 바닷가에 솟아 있는 釣鯨臺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초계군은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 적중면, 청덕면, 쌍책면, 덕곡면과 율곡면 동쪽, 대양면 동남쪽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 淸溪山 밑의 읍치가 있는 지역은 사방이 높은 봉우리로 둘러 쌓인 盆地이다. 마치 운석이 떨어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매우 독특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읍치 위쪽으로는 황강이 동쪽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낙동강이 開山江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통해 옛날에는 지역마다 강 이름을 다르게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초책면 부근 황강 변 낮은 언덕에는 三韓의 多羅國 유적으로 추정되는 대형고분군이 조성되어 있어 발굴된 바 있다. 지금은 사적 326호 옥전고분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데 읍치 주변의 넓은 분지와 옥전고분군의 위치가 상호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지도에는 淸溪書院과 宋源書院 등 두 개의 서원이 표시되어 있지만 모두 사액서원이 아니다. 기타 伯岩面이 남쪽의 높은 산봉우리를 넘어 있으면서도 초계군에 속해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초계군은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 적중면, 청덕면, 쌍책면, 덕곡면과 율곡면 동쪽, 대양면 동남쪽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 淸溪山 밑의 읍치가 있는 지역은 사방이 높은 봉우리로 둘러 쌓인 盆地이다. 마치 운석이 떨어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매우 독특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읍치 위쪽으로는 황강이 동쪽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낙동강이 開山江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통해 옛날에는 지역마다 강 이름을 다르게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초책면 부근 황강 변 낮은 언덕에는 三韓의 多羅國 유적으로 추정되는 대형고분군이 조성되어 있어 발굴된 바 있다. 지금은 사적 326호 옥전고분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데 읍치 주변의 넓은 분지와 옥전고분군의 위치가 상호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지도에는 淸溪書院과 宋源書院 등 두 개의 서원이 표시되어 있지만 모두 사액서원이 아니다. 기타 伯岩面이 남쪽의 높은 산봉우리를 넘어 있으면서도 초계군에 속해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칠곡부는 지금의 칠곡군 왜관읍, 지천면, 동명면, 가산면 일부와 대구광역시 북구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동명면 가산산성 안에 있었다. 칠곡부는 조선 초까지도 성주의 속현으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1640년(인조 18)에 架山山城을 쌓고 그곳에다 都護府를 설치함으로써 독립하게 되었다. 이 가산산성은 영남대로 상에서 남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왜적에 대한 최고의 關防處로 여겨졌으며, 지도에서도 읍치가 있는 內城을 비롯하여 밖으로 外城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향교는 다른 군현과 달리 읍치와 매우 떨어져 있음이 특이한데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에 있었다. 그 위쪽의 서원은 泗陽書院으로서 鄭逑(1543-1620)를 배향하여 1651년(효종 2)에 설립한 서원으로 현재 지천면 신리에 있었다. 기타 통일신라 때 건립한 塼塔 중의 하나로 보물 189호로지정된 5층탑이 있는 松林寺가 가산산성 남쪽에 보이고 있는데, 현재 동명면 구덕리에 있다.(이기봉)
칠곡부는 지금의 칠곡군 왜관읍, 지천면, 동명면, 가산면 일부와 대구광역시 북구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동명면 가산산성 안에 있었다. 칠곡부는 조선 초까지도 성주의 속현으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1640년(인조 18)에 架山山城을 쌓고 그곳에다 都護府를 설치함으로써 독립하게 되었다. 이 가산산성은 영남대로 상에서 남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왜적에 대한 최고의 關防處로 여겨졌으며, 지도에서도 읍치가 있는 內城을 비롯하여 밖으로 外城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향교는 다른 군현과 달리 읍치와 매우 떨어져 있음이 특이한데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에 있었다. 그 위쪽의 서원은 泗陽書院으로서 鄭逑(1543-1620)를 배향하여 1651년(효종 2)에 설립한 서원으로 현재 지천면 신리에 있었다. 기타 통일신라 때 건립한 塼塔 중의 하나로 보물 189호로지정된 5층탑이 있는 松林寺가 가산산성 남쪽에 보이고 있는데, 현재 동명면 구덕리에 있다.(이기봉)
칠원현은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 칠서면, 칠북면과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칠원면 구성리에 있었다. 고을 북쪽으로는 낙동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그 지류인 광노천이 남쪽 창원(지금의 마산시)의 높은 봉우리에서 발원하여 동·서쪽의 작은 하천들을 합류하고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아래쪽의 龜山面은 원래 省法部曲의 땅으로서 고려 때 龜山縣으로 승격된 후 고려말에 來屬된 越境地이다. 신라 때 발생한 특수행정단위인 部曲의 규모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예를 제공하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德淵書院은 周世鵬(1495-1554)을 배향하여 1676년(숙종 2)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주세붕은 1542년(중종 37) 풍기(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땅에 처음으로 백운동서원(지금의 소수서원)을 세운 사람이다. 지도 위쪽에는 낙동강 건너편 영산현(지금의창녕군 영산면 일대)으로 넘어가는 여러 나루가 표시되어 있는데 叱浦津은 지금의 창녕군 남지읍 건너편으로서 강가에 景釀臺라는 병풍같은 절벽이 늘어서 있다. 그 밑으로는 구멍이 난 큰 穴岩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보이는데 지금의 칠서면 태곡리에 있다. 남쪽 구산면에는 종3품관인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던 龜山鎭이 표시되어 있다. 더 아래쪽으로는 나라에서 쓸 나무를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大峙山封山이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 해안가에는 광해군의 형臨海君 宮房과 궁중 내명부에 소속되었던 淑媛房 등 궁방 소유의 漁箭을 관리하던 臨海君房屯所, 淑媛房屯所 등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칠원현은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 칠서면, 칠북면과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칠원면 구성리에 있었다. 고을 북쪽으로는 낙동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그 지류인 광노천이 남쪽 창원(지금의 마산시)의 높은 봉우리에서 발원하여 동·서쪽의 작은 하천들을 합류하고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아래쪽의 龜山面은 원래 省法部曲의 땅으로서 고려 때 龜山縣으로 승격된 후 고려말에 來屬된 越境地이다. 신라 때 발생한 특수행정단위인 部曲의 규모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예를 제공하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德淵書院은 周世鵬(1495-1554)을 배향하여 1676년(숙종 2)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주세붕은 1542년(중종 37) 풍기(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땅에 처음으로 백운동서원(지금의 소수서원)을 세운 사람이다. 지도 위쪽에는 낙동강 건너편 영산현(지금의창녕군 영산면 일대)으로 넘어가는 여러 나루가 표시되어 있는데 叱浦津은 지금의 창녕군 남지읍 건너편으로서 강가에 景釀臺라는 병풍같은 절벽이 늘어서 있다. 그 밑으로는 구멍이 난 큰 穴岩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보이는데 지금의 칠서면 태곡리에 있다. 남쪽 구산면에는 종3품관인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던 龜山鎭이 표시되어 있다. 더 아래쪽으로는 나라에서 쓸 나무를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大峙山封山이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 해안가에는 광해군의 형臨海君 宮房과 궁중 내명부에 소속되었던 淑媛房 등 궁방 소유의 漁箭을 관리하던 臨海君房屯所, 淑媛房屯所 등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統營은 慶尙右水營 兼 三道統制營이 설치된 곳으로 지금의 통영시 시내 북신동, 명정동 일대에 해당한다. 경상우수영은 원래 거제도의 烏兒浦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1593년(선조 26)에 이순신을 統制使로 하여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모두 관장하게 하였다. 이후 1602년(선조 35)에 고성의 春元浦로, 1603년(선조 36)에 지도에 표시된 頭龍浦로 옮긴 후 統營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통제사 아래 정4품의 水軍虞侯가 파견되었다.(고성현 지도 참조) 지도에는 통영 소재지 부근이 확대되어 그려져 있는데 石築의 성곽이 굴곡과 門까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성곽 안쪽으로는 여러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洗兵?으로 표시된 곳은 통제사가 집무를 보던 곳으로서 지금도 보물 29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 세병관은 1604년(선조 37)에 통제사 李慶濬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승을 기념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洗兵''은 ''피묻은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 다시는 싸움에 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성곽 왼쪽 위쪽의 건물은 忠烈祠로서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을 배향하여 1663년(선조 39)에 賜額받은 곳이다. 통영 외곽으로는 전라도의 興陽(지금의 고흥)으로부터 울산의 西生鎭까지 통영 관할의 여러 지역을 모두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땅의 모양이 매우 왜곡되어 표시되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혼란스럽게 하지만 통영 관할 지역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해안가에는 船所, 烽燧, 望臺 등이 鎭堡 등과 더불어 자세히 표현되어 있어 지도의 군사적 성격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풍기군은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봉현면, 안정면과 예천군 상리면, 하리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풍기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북쪽으로 소백산과 죽령의 험준한 산봉우리를 뒤에 두고 펼쳐진 넓은 평지에 읍치가 들어서 있다. 풍기군은 원래 基川縣과 殷豊縣이었는데 조선 문종의 태를 殷豊縣 鳴鳳寺 뒷산에 안치하면서 두 현을 합쳐 豊基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시킨 곳이다. 지도에서 보면 읍치가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이것은 가장 아래쪽의 하천 유역에 옛 殷豊폐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은풍폐현은 지금의 예천군 상리면, 하리면으로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풍기 읍치 지역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기타 읍치 위쪽의 郁陽書院은 이황(1501-1570)과 황준량(1517-1563) 등을 배향하여 1662년(현종 3)에, 아래쪽의 愚谷書院은 풍기군수로 재직한 적이 있던 유운룡(1539-1601) 등을 배향하여 1708년(숙종 34)에 세워졌지만 賜額書院은 아니다.(이기봉)
풍기군은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봉현면, 안정면과 예천군 상리면, 하리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풍기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북쪽으로 소백산과 죽령의 험준한 산봉우리를 뒤에 두고 펼쳐진 넓은 평지에 읍치가 들어서 있다. 풍기군은 원래 基川縣과 殷豊縣이었는데 조선 문종의 태를 殷豊縣 鳴鳳寺 뒷산에 안치하면서 두 현을 합쳐 豊基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시킨 곳이다. 지도에서 보면 읍치가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이것은 가장 아래쪽의 하천 유역에 옛 殷豊폐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은풍폐현은 지금의 예천군 상리면, 하리면으로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풍기 읍치 지역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기타 읍치 위쪽의 郁陽書院은 이황(1501-1570)과 황준량(1517-1563) 등을 배향하여 1662년(현종 3)에, 아래쪽의 愚谷書院은 풍기군수로 재직한 적이 있던 유운룡(1539-1601) 등을 배향하여 1708년(숙종 34)에 세워졌지만 賜額書院은 아니다.(이기봉)
하동부는 지금의 청암면, 옥종면, 금남면, 금성면, 북천면 북쪽, 진교면 남쪽을 제외한 하동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하동읍 읍내리에 있었다. 古縣面의 陽慶山 밑 古城은 세종 때 治所에 쌓았던 것이며 이후 여러 번 읍치를 옮겼다. 1702년(숙종 28)에 진주의 화개면, 악양면, 적량면, 진답면 등 4개면을 편입하여 같은 1704년(숙종 30)에 都護府로 승격되었고 1745년(영조 21)에 지도에 표시된 진답면으로 읍치를 옮겼다. 서북쪽의 지리산 아래에 있는 화개면과 악양면 지역은 높은 산지 사이에 있는 화개천과 악양천변의 평지에 자리잡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에는 독자적인 현으로 존재했었다. 지리산 아래쪽에 있는 雙溪寺와 주변의 암자들은 840년(신라 문성왕 2)에 眞鑑禪師 慧昭가 짓고 옥천사라 하였는데 50대 정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한다. 이곳에는 최치원이 쓴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와 여러 개의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 그 아래쪽의 石門을 비롯하여 악양면의 鳳凰臺등 중국의 蕭湘八景과 비교되는 여러 기암절벽이 즐비하다. 섬진강가의 賊路要害는 이곳부터 시작되는 깍아지른 강가의 절벽이 구례까지 계속 이어져 적의 침입 시 유일한 통로 구실을 하는 장소이다.봉황대 위쪽에 있는 古城은 이런 지형적 요충과 관련된 산성으로 보인다. 읍치 위쪽의 永溪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이고 무오사화(1504) 때 종성에 귀양가서 죽은 鄭汝昌(1450-1504)을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진 서원이다. 기타 나라에서 쓸 재목을 조달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지도 아래쪽에 2개 보이고 있다.(이기봉)
하동부는 지금의 청암면, 옥종면, 금남면, 금성면, 북천면 북쪽, 진교면 남쪽을 제외한 하동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하동읍 읍내리에 있었다. 古縣面의 陽慶山 밑 古城은 세종 때 治所에 쌓았던 것이며 이후 여러 번 읍치를 옮겼다. 1702년(숙종 28)에 진주의 화개면, 악양면, 적량면, 진답면 등 4개면을 편입하여 같은 1704년(숙종 30)에 都護府로 승격되었고 1745년(영조 21)에 지도에 표시된 진답면으로 읍치를 옮겼다. 서북쪽의 지리산 아래에 있는 화개면과 악양면 지역은 높은 산지 사이에 있는 화개천과 악양천변의 평지에 자리잡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에는 독자적인 현으로 존재했었다. 지리산 아래쪽에 있는 雙溪寺와 주변의 암자들은 840년(신라 문성왕 2)에 眞鑑禪師 慧昭가 짓고 옥천사라 하였는데 50대 정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한다. 이곳에는 최치원이 쓴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와 여러 개의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 그 아래쪽의 石門을 비롯하여 악양면의 鳳凰臺등 중국의 蕭湘八景과 비교되는 여러 기암절벽이 즐비하다. 섬진강가의 賊路要害는 이곳부터 시작되는 깍아지른 강가의 절벽이 구례까지 계속 이어져 적의 침입 시 유일한 통로 구실을 하는 장소이다.봉황대 위쪽에 있는 古城은 이런 지형적 요충과 관련된 산성으로 보인다. 읍치 위쪽의 永溪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이고 무오사화(1504) 때 종성에 귀양가서 죽은 鄭汝昌(1450-1504)을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진 서원이다. 기타 나라에서 쓸 재목을 조달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지도 아래쪽에 2개 보이고 있다.(이기봉)
하양현은 지금의 경산시 하양읍, 와촌면 동쪽, 진량면 북쪽과 대구광역시 동구 매여동 일대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읍치는 하양읍 금락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은 서·북쪽이 높고 금호강변의 동남쪽이 낮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위쪽의 無落山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琴湖書院은 조선 초에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본관이 이곳 河陽인 許稠(1369-1439)를 배향하여 1684년(숙종 10)에 세워진 서원으로서, 1790년(정조 14)에 가서야 賜額받았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23년에 부호리에 다시 세워졌다. 그 위쪽에 있는 環城寺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절로서 보물 562호로 지정된 대웅전이 있다. 지도의 안쪽에 慶山界의 표시가 있는데 安心面이 경산의 경계를 넘어 있는 越境地이기 때문으로 원래 安心所가 있었던 곳으로서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매여동, 신서동 일대에 해당한다.(이기봉)
하양현은 지금의 경산시 하양읍, 와촌면 동쪽, 진량면 북쪽과 대구광역시 동구 매여동 일대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읍치는 하양읍 금락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은 서·북쪽이 높고 금호강변의 동남쪽이 낮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위쪽의 無落山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琴湖書院은 조선 초에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본관이 이곳 河陽인 許稠(1369-1439)를 배향하여 1684년(숙종 10)에 세워진 서원으로서, 1790년(정조 14)에 가서야 賜額받았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23년에 부호리에 다시 세워졌다. 그 위쪽에 있는 環城寺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절로서 보물 562호로 지정된 대웅전이 있다. 지도의 안쪽에 慶山界의 표시가 있는데 安心面이 경산의 경계를 넘어 있는 越境地이기 때문으로 원래 安心所가 있었던 곳으로서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매여동, 신서동 일대에 해당한다.(이기봉)
함안군은 지금의 칠원면, 칠서면, 칠북면을 제외한 함안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안면 봉성리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표시하고 있다. 고을의 전반적인 지세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 남쪽의 높은 산지로부터 발원한 여러 물들이 북쪽으로 흘러 남강에 합류하고 다시 동쪽의 낙동강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북쪽의 남강 변과 그 지류 함안천 하류는 일제시대까지도 홍수시에 물이 역류하여 습지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읍치는 지금의 군청이 있는 가야읍에 있지 않고 함안천의 상류로 더 올라간 함안면 봉성리에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山外面 지역부터 북쪽으로는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바로 이곳에 阿羅伽倻의 왕 및 首長層의 무덤으로보이는 수십기의 고분이 城山으로부터 이어진 야트막한 야산 위에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사적 85호 말산리고분군과 사적 48호 도항리고분군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데 가야시대와 조선시대에 중심지의 입지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읍치 공간은 鎭山인 餘航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飛鳳山 아래에 풍수적 관념이 반영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지도에 표시된 4개의 서원 중 세조 때의 生六臣 6명을 배향한 西山書院만이 사액서원이고 나머지는 사액받지 못했다. 기타 의령과의 경계선에 있는 鼎岩津은 조선 후기에 소금배가 드나드는 등 매우 번창한 포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기봉)
함안군은 지금의 칠원면, 칠서면, 칠북면을 제외한 함안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안면 봉성리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표시하고 있다. 고을의 전반적인 지세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 남쪽의 높은 산지로부터 발원한 여러 물들이 북쪽으로 흘러 남강에 합류하고 다시 동쪽의 낙동강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북쪽의 남강 변과 그 지류 함안천 하류는 일제시대까지도 홍수시에 물이 역류하여 습지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읍치는 지금의 군청이 있는 가야읍에 있지 않고 함안천의 상류로 더 올라간 함안면 봉성리에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山外面 지역부터 북쪽으로는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바로 이곳에 阿羅伽倻의 왕 및 首長層의 무덤으로보이는 수십기의 고분이 城山으로부터 이어진 야트막한 야산 위에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사적 85호 말산리고분군과 사적 48호 도항리고분군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데 가야시대와 조선시대에 중심지의 입지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읍치 공간은 鎭山인 餘航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飛鳳山 아래에 풍수적 관념이 반영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지도에 표시된 4개의 서원 중 세조 때의 生六臣 6명을 배향한 西山書院만이 사액서원이고 나머지는 사액받지 못했다. 기타 의령과의 경계선에 있는 鼎岩津은 조선 후기에 소금배가 드나드는 등 매우 번창한 포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기봉)
함양부는 지금의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을 제외한 함양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양읍 상리 일대에 있었다. 함양부의 아래쪽에는 신라 때 南岳으로 받들어져 中祀를 모셨던 지리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간의 중요한 要衝地였던 八良嶺을 경계로 전라도 운봉현과 접해 있다. 고을의 동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그 지류 임천강과 위천이 서쪽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합쳐지는데 읍치 주변 위천가에는 제법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지리산 정상과 그 위쪽의 嚴川寺 부근에 聖母祠가 있었다고 하며 고려 이승휴의≪帝王韻記≫에는 이 ''聖母''가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威肅王后라 쓰여 있다고 한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白岩山으로부터 이어진 산봉우리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土築으로 옮겨 쌓은 읍성이 표시되어 있다. 읍성 안쪽에는 최치원이 태수로 있으면서 登臨하던 곳인 까닭에 이름을 붙였다는 學士樓가 보이고 있다. 지도에서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이미 廢寺되어 사라져 버린 사찰까지 매우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인데 유교국가임을 자부하여 抑佛政策을 추진한 조선왕조에서도 끈끈하게 살아남은 불교의 영향력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月明塚은 ''옛날에 東京 장사꾼이 사근역 계집 월명을 사랑하여 며칠 동안을 머물다가 갔는데 월명이 사모하다 병이 되어 죽자 그 뒤 장사꾼이 그 무덤에 가서 곡하다가 또한 죽어서 드디어 같은 무덤에 묻혔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무덤으로 민간에 떠도는, 약간은 반유교적인 모습까지도 지도에 표시한 세심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기타 무오사화 때 사망한 鄭汝昌(1450-1504) 등을 배향하여 1566년(명종 21)에 사액받은 濫溪書院을 비롯한 총 5개의 서원과 수많은 정자가 표시되어 있어 양반 사회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14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인 沙斤驛이 월명총 옆에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함창현은 지금의 상주시 함창읍, 이안면, 공검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함창읍 구향리에 있었다. 읍치 아래쪽으로 梨安川이 상주에서 들어와 동쪽의 영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읍치 주변에는 상당히 넓은 평지가 있다. 읍치 왼쪽 산의 모습과 이름의 표시가 모두 오른쪽에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고을의 鎭山인 宰岳山의 坐向을 고려한 듯하다. 읍치부터는 산의 모습과 이름이 모두 정면에서 볼 수 있도록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恭儉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제 19대 명종(1170-1197) 때 司錄 최정분이 옛 터에 다시 修築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된 저수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저수지는 함창현의 남쪽에 있을 뿐만 아니라 물줄기가 상주로 내려가기 때문에 함창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함창 사람과 상주 사람 사이에 많은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 저수지가 축조된 시기는 이런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조건이 마련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공검지는 현재 모두 메워져 논으로 변해 버렸는데 공검면 면소재지 부근에 해당한다. 기타 공검지 위쪽에 있는 臨湖書院은 사액서원이 아니며, 지도 아래쪽의 黃嶺寺가 있는 곳은 지금의 은척면 황령리에 있었던 함창의 越境地였다.(이기봉)
함창현은 지금의 상주시 함창읍, 이안면, 공검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함창읍 구향리에 있었다. 읍치 아래쪽으로 梨安川이 상주에서 들어와 동쪽의 영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읍치 주변에는 상당히 넓은 평지가 있다. 읍치 왼쪽 산의 모습과 이름의 표시가 모두 오른쪽에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고을의 鎭山인 宰岳山의 坐向을 고려한 듯하다. 읍치부터는 산의 모습과 이름이 모두 정면에서 볼 수 있도록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恭儉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제 19대 명종(1170-1197) 때 司錄 최정분이 옛 터에 다시 修築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된 저수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저수지는 함창현의 남쪽에 있을 뿐만 아니라 물줄기가 상주로 내려가기 때문에 함창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함창 사람과 상주 사람 사이에 많은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 저수지가 축조된 시기는 이런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조건이 마련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공검지는 현재 모두 메워져 논으로 변해 버렸는데 공검면 면소재지 부근에 해당한다. 기타 공검지 위쪽에 있는 臨湖書院은 사액서원이 아니며, 지도 아래쪽의 黃嶺寺가 있는 곳은 지금의 은척면 황령리에 있었던 함창의 越境地였다.(이기봉)
합천군은 지금의 합천군 합천읍, 가야면, 야로면, 묘산면, 봉산면 북쪽, 용주면 서쪽, 대양면 대부분과 의령군 궁유면의 운계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합천리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황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가야산에서 발원한 안림천이 고령의 회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안림천 유역 縣東面을 중심으로 한 곳에는 원래 冶爐縣이 있었다. 지도의 위쪽 伽倻山 밑에는 802년(신라 애장왕 3)에 건립되어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여겨지는 海印寺가 보이고 있다. 그 옆에는 藏經閣이 표시되어 있는데 몽고의 침입을 佛力으로 물리치고자 15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한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두 개 모두 국보 32·52호로 지정됨과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 해인사는 신라 말의 유명한 6두품 학자 孤雲 최치원(857-?)이 나라를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나 귀족세력에 의해 좌절당한 후 가족을 데리고 숨어살다가 생애를 마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해인사 입구에는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로 알려진 武陵橋가 표시되어 있다. 이 다리를 넘으면 武陵桃源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현재는 무릉동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伊淵書院은 연산군의 무오사화(1504) 때 죽음을 당한 김굉필(1454-1504), 정여창(1450-1504)을 배향하여 현종 때 사액받았다. 華山(巖의 오기)書院은 김굉필과 더불어 제자를 키운 박소를 배향하여 영조 때 사액받았다. 지도 아래쪽 宮所面은 삼가의 경계를 넘어 지금의 의령군 궁유면에 있는 越境地이다. 기타 폭포, 無學臺 등의 수려한 경치와 강가의 각종 정자, 사찰 등의 모습이 자세하다.(이기봉)
합천군은 지금의 합천군 합천읍, 가야면, 야로면, 묘산면, 봉산면 북쪽, 용주면 서쪽, 대양면 대부분과 의령군 궁유면의 운계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합천리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황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가야산에서 발원한 안림천이 고령의 회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안림천 유역 縣東面을 중심으로 한 곳에는 원래 冶爐縣이 있었다. 지도의 위쪽 伽倻山 밑에는 802년(신라 애장왕 3)에 건립되어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여겨지는 海印寺가 보이고 있다. 그 옆에는 藏經閣이 표시되어 있는데 몽고의 침입을 佛力으로 물리치고자 15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한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두 개 모두 국보 32·52호로 지정됨과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 해인사는 신라 말의 유명한 6두품 학자 孤雲 최치원(857-?)이 나라를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나 귀족세력에 의해 좌절당한 후 가족을 데리고 숨어살다가 생애를 마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해인사 입구에는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로 알려진 武陵橋가 표시되어 있다. 이 다리를 넘으면 武陵桃源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현재는 무릉동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伊淵書院은 연산군의 무오사화(1504) 때 죽음을 당한 김굉필(1454-1504), 정여창(1450-1504)을 배향하여 현종 때 사액받았다. 華山(巖의 오기)書院은 김굉필과 더불어 제자를 키운 박소를 배향하여 영조 때 사액받았다. 지도 아래쪽 宮所面은 삼가의 경계를 넘어 지금의 의령군 궁유면에 있는 越境地이다. 기타 폭포, 無學臺 등의 수려한 경치와 강가의 각종 정자, 사찰 등의 모습이 자세하다.(이기봉)
현풍현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논공읍과 고령군 개진면의 동쪽 옥산리 일대, 우곡면의 동남쪽답곡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현풍면 부리에 있었다. 고을의 동쪽으로는 琵瑟山 등 1,000m 이상의 산이 있고 서쪽 낙동강변으로 평지가 전개되어 있다. 이 비슬산에는 여러 절이 입지하고 있는데 그 중 瑜 寺는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699년(숙종 25), 1776년(영조 52) 등 많은 중창을 거쳐 현재까지 전해지는 사찰이다. 지도에는 여러 개의 書院이 보이고 있는데 지도 오른쪽 아래쪽의 禮淵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 현풍이고 임진왜란 때 의령에서 일어난 의병장으로 유명했던 곽재우(1552-1617)와 안음현감으로 왜적과 싸우다 죽은 곽준(?-1594)을 배향하여 1677년(숙종 18)에 賜額받았다.지도 왼쪽의 道洞書院은 김종직의제자로서 무오사화 때 유배당하고 갑자사화 때 처형당한 김굉필(1454-1504)를 배향하여 1607년(선조 40)에 賜額받았으며, 이후 정구(1543-1620)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 중 道洞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훼철되지 않고 살아 남았던 서원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淸白祠와 松潭祠는 사액서원이 아니다. 기타 읍치 뒷산의 모습이 특이하게 그려져 있음이 보이는데 약간의 풍수적 관념이 표현된 것으로 보이며, 지도 아래쪽의 仇之面은 고려 공양왕 때부터 소속된 仇知山部曲으로서 部曲의 규모와 입지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될 수 있는데 지금의 구지면 유산리 일대이다.(이기봉)
현풍현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논공읍과 고령군 개진면의 동쪽 옥산리 일대, 우곡면의 동남쪽답곡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현풍면 부리에 있었다. 고을의 동쪽으로는 琵瑟山 등 1,000m 이상의 산이 있고 서쪽 낙동강변으로 평지가 전개되어 있다. 이 비슬산에는 여러 절이 입지하고 있는데 그 중 瑜 寺는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699년(숙종 25), 1776년(영조 52) 등 많은 중창을 거쳐 현재까지 전해지는 사찰이다. 지도에는 여러 개의 書院이 보이고 있는데 지도 오른쪽 아래쪽의 禮淵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 현풍이고 임진왜란 때 의령에서 일어난 의병장으로 유명했던 곽재우(1552-1617)와 안음현감으로 왜적과 싸우다 죽은 곽준(?-1594)을 배향하여 1677년(숙종 18)에 賜額받았다.지도 왼쪽의 道洞書院은 김종직의제자로서 무오사화 때 유배당하고 갑자사화 때 처형당한 김굉필(1454-1504)를 배향하여 1607년(선조 40)에 賜額받았으며, 이후 정구(1543-1620)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 중 道洞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훼철되지 않고 살아 남았던 서원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淸白祠와 松潭祠는 사액서원이 아니다. 기타 읍치 뒷산의 모습이 특이하게 그려져 있음이 보이는데 약간의 풍수적 관념이 표현된 것으로 보이며, 지도 아래쪽의 仇之面은 고려 공양왕 때부터 소속된 仇知山部曲으로서 部曲의 규모와 입지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될 수 있는데 지금의 구지면 유산리 일대이다.(이기봉)
흥해군은 포항시 시내 북부와 연일읍 형산강 북쪽, 흥해읍에 해당하며 읍치는 흥해읍 성내리에 있었다. 고을의 전반적인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포항시 신광면에서 내려오는 北川(현재는 곡강천이라 함)변에 발달한 상당히 넓은 평지에 고을이 들어서 있다. 北川이 바다와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曲江은 신라 때 吐只河라고 불렸으며 나라 동쪽의 하천에 제사지내는 東瀆으로 여겨져 中祀에 실려있는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신라 때 東海神에게 제사를 지내어 中祀에 실렸던 阿等邊이 이 고을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신라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지도 왼쪽의 泉谷寺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靈泉이 있어 신라 선덕여왕이 이 물에 목욕하고 피부병이 나아 자장율사에게 창건하게 했다는 설이 전해지는 절인데 조선 숙종이 특별히 붓과 먹을 하사한 절로도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절 주변의 산세를 풍수적 형태에 맞춰 특별히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기타 이언적을 배향한 曲江書院이 보이나 사액서원은 아니며, 지도 왼에는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지한 船材封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흥해군은 포항시 시내 북부와 연일읍 형산강 북쪽, 흥해읍에 해당하며 읍치는 흥해읍 성내리에 있었다. 고을의 전반적인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포항시 신광면에서 내려오는 北川(현재는 곡강천이라 함)변에 발달한 상당히 넓은 평지에 고을이 들어서 있다. 北川이 바다와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曲江은 신라 때 吐只河라고 불렸으며 나라 동쪽의 하천에 제사지내는 東瀆으로 여겨져 中祀에 실려있는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신라 때 東海神에게 제사를 지내어 中祀에 실렸던 阿等邊이 이 고을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신라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지도 왼쪽의 泉谷寺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靈泉이 있어 신라 선덕여왕이 이 물에 목욕하고 피부병이 나아 자장율사에게 창건하게 했다는 설이 전해지는 절인데 조선 숙종이 특별히 붓과 먹을 하사한 절로도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절 주변의 산세를 풍수적 형태에 맞춰 특별히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기타 이언적을 배향한 曲江書院이 보이나 사액서원은 아니며, 지도 왼에는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지한 船材封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남구만이 입수한 성경지의 지도 중 <오라지방도>는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이 지도 역시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요계관방도는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배우성)
민간에서 유행하던 여지도 책자의 유구지도를 옮겨 그린 소략한 오키나와 지도. 내용상 민간의 여지도 책자에 실린 유구지도와 크게 다른점이 없다. 國都가 위치한 본 섬 주변으로 부속 도서를 그려 넣은 것, 본 섬에 國都, 寶庫, 國頭城이 강조되어 있는 것, 국도 성곽으로부터 900리에 거리에 국고지역의 핵심적인 시설로 寶庫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상선들이 정박했던 자리가 표시되어 있는 것 등도 모두 동일한 표현들이다. 다만 이 지도는 중산왕이 살고 있는 본 섬에 대한 정보가 미세하게 증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국두성으로부터 시작된 울타리는 왕성의 성곽과 寶庫에서 그치지 않고 해안가에까지 이어진 형태로 그려져 있다. 중산왕의 거주지와 성문, 그리고 王弟 대신의 거주지를 각기 별도의 석성처럼 묘사하였으며, 본섬 안에 世九島라는 지명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세구도와 보고 주변으로 건물 표시가 추가되었고, 靑荷山을 비롯한 네 산의 윤곽이 표현된 것 등도 여지도 책자의 유구지도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배우성)
조선전기 유형의 일본지도. 별도의 설명문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해동지도의 일본지도와 거의 유사하다.박돈지가 들여온 행기도, 해동제국기의 일본지도 등과는 기본적인 윤곽을 달리 하고 있으나, 17, 18세기에 유입된 개선된 일본지도에 비해서는 소략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하고 있는데,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일본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향이다. 일왕이 있는 國都와 막부 장군이 있는 江戶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그 밖에는 대강의 행정구역, 후지산을 비롯한 일부의 산과 주변 도서들을 그려 넣었다. 지도의 좌측 상단에 일본이 동서방향으로 육십일 거리, 남북 방향으로 12일거리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일본이 동서 방향으로 매우 길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일본 지리정보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17세기까지 일본에서 자체 제작된 일본지도들은 거의 예외 없이 동서방향으로 긴 윤곽을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동북단의 반도가 극도로 축소되어 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하고 있는데,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일본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향이다. 일왕이 있는 國都와 막부 장군이 있는 江戶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그 밖에는 대강의 행정구역, 후지산을 비롯한 일부의 산과 주변 도서들을 그려 넣었다. 북해도(홋카이도 : 지도의 좌측 하단)가 하이도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해도의 맞은 편에는 하이지라는 표현이 실려 있다. 아이누족이 홋카이도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 북단에까지 퍼져 있었던 사실이 인식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배우성)
이 지도는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 부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지도에서는 淸나라가 이미 대세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女眞이라 표현한 것이 우선 흥미롭다. 지도의 한가운데에 있는 白頭山을 기준으로 조선 땅에는 두만강과 압록강 변에 위치한 고을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渭源 옆에 있는 古閭延은 세조 때 폐지된 四郡 중의 하나이다. 백두산에 대한 설명이 위쪽에 쓰여 있다. 중국의 萬里長城은 지금의 발해만(뽀하이만)에 있는 山海關까지만 石築의 성곽이 있었다. 그 동쪽에 해당하는 지금의 만주에는 성곽을 木柵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지도 왼쪽에 보이는 木柵은 명나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서 開元, 撫順, 興京 등 중요한 도시들을 안쪽에 포함하고 있다. 그 오른쪽의 木柵은 지도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훨씬 엉성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당시 청나라의 최북단 국경 부근에 해당된다. 청나라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동쪽 끝의 행정도시가 지도에 보이는 寧古塔이다. 지도에는 船廠과 烏喇를 거쳐 영고탑까지 이르는 곳에 여러 개의 驛站이 일렬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는 강에 대한 표시가 자세한데 맨 위쪽에 黑龍江(아무르강)이 표시되어 있고, 오라와 선창 쪽에 있는 강이 지금의 송화강(쑹화강)이다. 영고탑 오른쪽에는 지금의 우수리강이 표시되어 있다. 한편 백두산 오른쪽에는 高麗境과 先春嶺이 표시되어 있다. 尹瓘(?-1111)이 別武班이라는 17만의 부대를 이끌고 先春嶺까지 여진족을 몰아냈던 사실을 지도에 표시한 것이다. 지도 위쪽에는 盛京과 烏喇, 寧古塔으로부터 각 지역에 이르는 거리가 쓰여져 있다.(이기봉)
조선초기적 유형의 조선전도. 지명만으로 본다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반 이전의 지명들이 실려 있다. 1682년(숙종 8)에 설치된 경상도 英陽縣, 1684년(숙종 12)에 설치된 함경도 茂山府가 실려 있어서 최소한 1684년(숙종 12)년 이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 1712년(숙종 38)에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점, 1767년(영조 43)에 안의와 산청으로 바뀐 안음과 산음이 원래의 이름으로 적혀 있는 것, 1776년(정조 즉위)에 尼城으로 바뀐 충청도 尼山이 원래의 이름으로 적혀 있는 것, 등은 지명으로 보는 상한선이 된다. 국토의 등뼈에 해당하는 백두대간 흐름이 가장 강조되고 있다. 대관령과 태백산을 지나 곧장 뻗어내린 백두대간은 지리산 자락에 가서 닿는다. 태백산 자락에서 갈라져 경상도 동래에 이르는 낙동정맥의 흐름도 선명한 편이다. 서울과 평양을 향해 이어진 듯 보이는 산줄기들도 확인된다. 대부분의 산들은 이어진 맥으로 표현되었으나, 삼각산(서울), 송악산(개성) 등 일부는 독립된 형태로 그려져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거의 반영되어있지 않으며, 평안도 청천강 이북지역, 함경도 장백정간 이북지역은극도로 축약되어 있다. 이는 국경지대인 강변에 야인이 거주하던 조선전기적 관점이 투영된 결과이다. 우산도가 울릉도 안쪽에 그려진 것 역시 <동람도>적인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조선전기적인 인식의 일종이다. (배우성)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 입각한 동아시아지도. 우공의 구주와 역대 왕조의 도읍지는 장방형의 작은 네모 안에, 전국시대의 11국은 작은 원 안에, 명나라때의 행정구역인 13성은 정방형의 큰 네모 안에 각각 써 넣었다. 명나라 땡의 13성 안에는 성별 首府의 이름이나 역사적 명칭이 실려 있다. 황하 양자강을 비롯한 주요 하천이 그려져 있으며, 곤륜산, 태산 등 내오악, 기타 중국 역사상 의미 있다고 생각되던 산들이 표시되어 있다. 13성 표시 아래에는 북경까지의 거리가 명시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는 주요 도시와 함께 능, 누대 등 명승지들이 표시되어 있다. 민간의 여지도 책자에 실린 중국지도와 다른 점도 눈에 띤다. 星宿海 아래 쪽의 嶺을 비롯해 일부 자연지명이 보충되었다. 嶺은 서역과의 경계지점으로 생각되어 오던 곳이다. 여지도 책자와는 달리 북경과 남경을 여타의 각 성들과 다른 기호로 표시하고 있다. 서울이 큰 원안에 강조되어 있으며, 그 옆으로 의주에서부터 북경까지의 거리가 2,014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가 유난히 강조되어 있는 모습도 이채롭다. 목판 여지도 책자에서 거의 무시되었던 일본은 부분적으로나마 표시되어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지도의 네 여백에 들어 있는 지명들이다. 장성 밖으로는 몽고, 달단, 흉노 등 역대 한족의 왕조를 위협해 왔던 여러 세력들의 이름이 실려 있다. 서쪽 여백에는 중국의 서쪽으로 간주되던 서역 뿐만 아니라천축국, 서양국, 교지, 월상 등의 이름이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서양국의 존재이다. 동남쪽으로 남만국, 유구국, 소유국 등과, 가상의 나라이름들인 여인국 소인국 대인국의 이름이 보인다. 유구국과 소유국 그리고 남만국의 존재는 오키니와와 대만, 포르투칼, 네덜란드 등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나라들에 대한 인식이 증가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배우성)
천하도의 변종. 천하도라는 제목과 원형으로 그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천하도와 전혀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으나 서구식 세계지도에 대한 조선적 해석의 계보를 잇고 있는 지도이다. 지도의 내용은 마테오리치가 1600년에 간행한 <산해여지전도>를 따르고 있으나 좀 더 소략한 편이다. <산해여지전도>에는 남북극의 경계가 실선으로 그려져 있고 지도 왼편으로 북회귀선, 적도, 남회귀선이 쓰여 있는데 비해 이 천하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또 이 지도는 <산해여지전도>에 실려 있는 태평양 서쪽 바다(소동양), 동지나해(대명해)의 이름조차 없다. 아시아, 유럽,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4대륙이 지명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랫쪽에는 墨瓦臘泥加라는 상상의 대륙이 그려져 있다. 상상의 대륙 아랫쪽에는 ''이곳 남쪽으로는 가본 사람이 드물어서 어떤 곳인지 알수 없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아세아 극동부의 狗國, 남아메리카 동부의 食人國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나라들이다. 동해에 해당하는 바다는 반원형의 內海처럼 묘사되어 있으나, 바다 이름은 없다. 아시아 대륙의 산천 이름 가운데 星宿海와 崑崙山이 보인다. 星宿海는 별이 잠드는 곳, 곤륜산은 천하의 모든 산의 중심으로 생각되던 곳으로 모두 동양적인 발상이다. 남아메리카동남부의 銀海는 라플라타 강이다.(배우성)
강진현은 지금의 전남 강진읍, 군동면, 대구면, 도암면, 병영면, 성전면, 옴천면, 작천면, 칠량면, 완도군 완도읍, 고금면, 약산면, 신지면, 청산면, 군외면지역이다. 읍치는 지금 전남 강진읍 남성리, 동성리, 서성리 일대이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현의 동쪽 7리에 위치한 寶恩山이다. 읍성은 1475년(성종 6)에 쌓았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둘레가8천 4백 2척이었다. 병마절도사영, 즉, ''병영''은 작천 분지 동단, 수인산(561m) 밑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417년(태종 17)에 설치되었다. 全羅道兵馬節度使와 中軍이 주재하고 있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2천 8백 20척이고 성문이 4개 甕城이 12개가 있다. 이 외에도 加里浦鎭, 古今島鎭, 馬島鎭, 薪智島鎭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완도에 있었던 가리포진이 가장 규모가 커서 水軍僉節制使가 주재하였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無爲寺는 도갑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597년(신라 진평왕19)에 원효대사가 개창하여 관음사라고 하였는데, 1555년(명종 10)에 무위사로 개칭하였다. 先覺大師遍光靈塔과 極樂殿이 유명하다. 월출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月南寺는 고려의 승려 眞覺이 처음 세웠다. 이 절에는 이규보가 지은 비문(보물 313호 석비)과 모전석탑(보물 298호)이 있다.(金在完)
강진현은 지금의 전남 강진읍, 군동면, 대구면, 도암면, 병영면, 성전면, 옴천면, 작천면, 칠량면, 완도군 완도읍, 고금면, 약산면, 신지면, 청산면, 군외면지역이다. 읍치는 지금 전남 강진읍 남성리, 동성리, 서성리 일대이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현의 동쪽 7리에 위치한 寶恩山이다. 읍성은 1475년(성종 6)에 쌓았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둘레가8천 4백 2척이었다. 병마절도사영, 즉, ''병영''은 작천 분지 동단, 수인산(561m) 밑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417년(태종 17)에 설치되었다. 全羅道兵馬節度使와 中軍이 주재하고 있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2천 8백 20척이고 성문이 4개 甕城이 12개가 있다. 이 외에도 加里浦鎭, 古今島鎭, 馬島鎭, 薪智島鎭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완도에 있었던 가리포진이 가장 규모가 커서 水軍僉節制使가 주재하였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無爲寺는 도갑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597년(신라 진평왕19)에 원효대사가 개창하여 관음사라고 하였는데, 1555년(명종 10)에 무위사로 개칭하였다. 先覺大師遍光靈塔과 極樂殿이 유명하다. 월출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月南寺는 고려의 승려 眞覺이 처음 세웠다. 이 절에는 이규보가 지은 비문(보물 313호 석비)과 모전석탑(보물 298호)이 있다.(金在完)
고부군은 정읍시 고부면 대부분, 영원면, 소성면 대부분, 이평면,덕천면, 정우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고부군의 읍치는 현재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객사터, 고부장, 동헌 터, 서낭산 등 지명이 남아있어 읍치임을 증명하고 있다. 객사는 일제 강점기 이후 관청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고부초등학교 터가 되었다. 부안군 백산면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인 고부는 고부천 중상류의 斗升山(444m) 기슭에 자리한다. 두승산은 높지 않지만 익산의 미륵산처럼 낮은 구릉지 위로 우뚝 솟아 명산으로 꼽히며, 산정에는 古山城이 남아 있는데, 또한 瀛州山城이라고도 불렸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0,820척이다. 부안군의 봉래산, 고창군의 방장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로 여겨졌다고 한다. 봉우리에 돌로 만든 말이 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고부읍성은 둘레가 2,369척이고, 우물이 3개가 있었다. 성안에 있는 琴鶴樓는 동헌 옆에 있었는데, 학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금학루 남쪽에 宇民堂이 위치하고 있다. 旋忠祠는 1632년(인조 10) 세워지고, 1657년(효종 8)에 사액되었다.(金在完)
고부군은 정읍시 고부면 대부분, 영원면, 소성면 대부분, 이평면,덕천면, 정우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고부군의 읍치는 현재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객사터, 고부장, 동헌 터, 서낭산 등 지명이 남아있어 읍치임을 증명하고 있다. 객사는 일제 강점기 이후 관청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고부초등학교 터가 되었다. 부안군 백산면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인 고부는 고부천 중상류의 斗升山(444m) 기슭에 자리한다. 두승산은 높지 않지만 익산의 미륵산처럼 낮은 구릉지 위로 우뚝 솟아 명산으로 꼽히며, 산정에는 古山城이 남아 있는데, 또한 瀛州山城이라고도 불렸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0,820척이다. 부안군의 봉래산, 고창군의 방장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로 여겨졌다고 한다. 봉우리에 돌로 만든 말이 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고부읍성은 둘레가 2,369척이고, 우물이 3개가 있었다. 성안에 있는 琴鶴樓는 동헌 옆에 있었는데, 학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금학루 남쪽에 宇民堂이 위치하고 있다. 旋忠祠는 1632년(인조 10) 세워지고, 1657년(효종 8)에 사액되었다.(金在完)
고산현은 지금의 전북 완주군 고산면, 동상면, 비봉면, 운주면, 화산면, 경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전북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산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鳳山이다. 읍치 동북쪽에 위치한 龍溪院은 현재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에 있다. 전에 앞 내에 있는 용소에서 닭이 우는 것을 듣고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부근에 용계성터가 남아 있다. 용계원 서쪽에 花岩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634년(신라 선덕여왕 3)에 창건되었다 하는데, 왕이 이곳 별장에 와서 있을 때 용추에서 오색이 찬란한 용이 놀고 있으며 바위 위에 무궁초가 환히 피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한다. 이 절에는 유명한 단향목이 있다. 대둔산 서남쪽에 위치한 안심사는 고산현에서 유명한 절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조구라는 승려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조선조 연산군 때 점필재 김 종직이 찬한 비문이 있으나 닳아서 내용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예전에는 대웅전, 약사전, 사리각, 십왕전, 범총각 등이 있었는데, 6·25 동란 때 불타 없어지고 약사전만 남아 있다.(金在完)
고산현은 지금의 전북 완주군 고산면, 동상면, 비봉면, 운주면, 화산면, 경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전북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산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鳳山이다. 읍치 동북쪽에 위치한 龍溪院은 현재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에 있다. 전에 앞 내에 있는 용소에서 닭이 우는 것을 듣고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부근에 용계성터가 남아 있다. 용계원 서쪽에 花岩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634년(신라 선덕여왕 3)에 창건되었다 하는데, 왕이 이곳 별장에 와서 있을 때 용추에서 오색이 찬란한 용이 놀고 있으며 바위 위에 무궁초가 환히 피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한다. 이 절에는 유명한 단향목이 있다. 대둔산 서남쪽에 위치한 안심사는 고산현에서 유명한 절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조구라는 승려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조선조 연산군 때 점필재 김 종직이 찬한 비문이 있으나 닳아서 내용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예전에는 대웅전, 약사전, 사리각, 십왕전, 범총각 등이 있었는데, 6·25 동란 때 불타 없어지고 약사전만 남아 있다.(金在完)
고창현은 지금의 전북 고창군 고창읍, 고수면, 아산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었다. 鎭山은 읍치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진 半登山이다. 다른 군현과 지도의 방향이 다르다. 위쪽이 서쪽, 아래쪽이 동쪽, 오른쪽이 북쪽, 왼쪽이 남쪽이다. 이것은 鎭山이 북쪽이 아니라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러한 배치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군현의 지도와 비교하여 너무 간략하다. 관아, 향교, 면, 경계, 고개 이외에는 나타나 있는 것이 없다. 지도에 보이는 고창읍성은 모양성이라고도 불린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 3,080척, 높이 12∼15척으로서 동쪽과 북쪽에는 성문이 있었고, 성안에는 못이 둘, 섬이 네 곳에 있었으며 관아들이 있었다 한다. 지금은 전부 헐리고 작청의 일부가 남았는데 북쪽으로 옮겨지어 놓았으며, 북문자리에는 拱北樓가 세워져 있으며, 성벽은 높이 3-5m, 둘레 10m로서 옛 그대로 남아 있다. 사적 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벽 위를 한 바퀴씩 돌면 10년은 더 살 수 있다는 전설에 따라 음력 윤달이 되면 인근에 사는 노파들이 모여들어 머리에 돌을 이고 성벽 위를 즐비하게 늘어서서 돈다. 지도에 보이는 성문은 읍성의 북문으로 拱北樓라고 하는데, 1676년(숙종 2)에 고창 현감 이 항이 세운 것이다.(金在完)
고창현은 지금의 전북 고창군 고창읍, 고수면, 아산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었다. 鎭山은 읍치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진 半登山이다. 다른 군현과 지도의 방향이 다르다. 위쪽이 서쪽, 아래쪽이 동쪽, 오른쪽이 북쪽, 왼쪽이 남쪽이다. 이것은 鎭山이 북쪽이 아니라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러한 배치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군현의 지도와 비교하여 너무 간략하다. 관아, 향교, 면, 경계, 고개 이외에는 나타나 있는 것이 없다. 지도에 보이는 고창읍성은 모양성이라고도 불린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 3,080척, 높이 12∼15척으로서 동쪽과 북쪽에는 성문이 있었고, 성안에는 못이 둘, 섬이 네 곳에 있었으며 관아들이 있었다 한다. 지금은 전부 헐리고 작청의 일부가 남았는데 북쪽으로 옮겨지어 놓았으며, 북문자리에는 拱北樓가 세워져 있으며, 성벽은 높이 3-5m, 둘레 10m로서 옛 그대로 남아 있다. 사적 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벽 위를 한 바퀴씩 돌면 10년은 더 살 수 있다는 전설에 따라 음력 윤달이 되면 인근에 사는 노파들이 모여들어 머리에 돌을 이고 성벽 위를 즐비하게 늘어서서 돈다. 지도에 보이는 성문은 읍성의 북문으로 拱北樓라고 하는데, 1676년(숙종 2)에 고창 현감 이 항이 세운 것이다.(金在完)
곡성현은 지금 신기리와 장선리 일부를 제외한 전북 곡성읍, 목사동면, 원등리를 제외한 삼기면, 석곡면, 오곡면, 죽곡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곡성읍 읍내리에 있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현의 서북쪽4리에 위치한 動樂山이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道林寺는 신라 진평왕 때 신덕왕후가 이 곳에 와서 기도하였으므로 神德寺라 하였는데, 신라 태종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절 이름을 고쳤다고 전한다. 泰安寺는 지도와는 달리 목사동면에는 없고, 죽곡면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흥덕왕 때 인적선사 혜철이 창건하여 태안사라 하고 919년(고려 태조 2)에 광자선사가 중창하였으며, 950년(숙종 9)에 동파정심이 중창하여 동리사로 고쳤다. 지도의 보성강 변에 위치한 凌波亭은 곡성군 석곡면 구봉리 능파리에 있다. 능파정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는 마름처럼 생겼다 하여 능암이라고 부른다. 읍치 우측 하단에 보이는 德陽祠는 고려 개국 공신이며 평산 신씨의 시조인 申崇謙 장군을 모신 곳으로 1695년(숙종 21)에 사액을 받았다. 이 곳에는 신 공의 업적을 기록한 많은 책이 보관되어 있다.(金在完)
곡성현은 지금 신기리와 장선리 일부를 제외한 전북 곡성읍, 목사동면, 원등리를 제외한 삼기면, 석곡면, 오곡면, 죽곡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곡성읍 읍내리에 있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현의 서북쪽4리에 위치한 動樂山이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道林寺는 신라 진평왕 때 신덕왕후가 이 곳에 와서 기도하였으므로 神德寺라 하였는데, 신라 태종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절 이름을 고쳤다고 전한다. 泰安寺는 지도와는 달리 목사동면에는 없고, 죽곡면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흥덕왕 때 인적선사 혜철이 창건하여 태안사라 하고 919년(고려 태조 2)에 광자선사가 중창하였으며, 950년(숙종 9)에 동파정심이 중창하여 동리사로 고쳤다. 지도의 보성강 변에 위치한 凌波亭은 곡성군 석곡면 구봉리 능파리에 있다. 능파정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는 마름처럼 생겼다 하여 능암이라고 부른다. 읍치 우측 하단에 보이는 德陽祠는 고려 개국 공신이며 평산 신씨의 시조인 申崇謙 장군을 모신 곳으로 1695년(숙종 21)에 사액을 받았다. 이 곳에는 신 공의 업적을 기록한 많은 책이 보관되어 있다.(金在完)
광양현은 지금의 금호도와 태인도를 제외한 광양시, 광양읍, 다압면, 봉강면, 옥곡면, 옥룡면, 진상면, 진월면, 경상남도 하동읍 섬진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전남 광양읍 읍내리 일대이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 白鷄山이다. 지도에 보이는 광양읍성은 方形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읍성은 둘레가 9백 85보이었다. 읍성 북쪽에 위치한 광양향교에는 大成殿, 明倫堂, 東齋, 上齋, 風化樓, 庫舍 등이 현재도 남아 있다. 지도에 보이는 蟾津鎭은 1705년(숙종 31)에 統制使 吳重周가 군사상의 요충지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설치된 것으로 別將 1인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도에 보이는 松川寺는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에 있는 절로 지금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절터에는 이 절에서 수도하던 海隱禪師가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아 적과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순절한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비를 세운 바가 있다. 玉龍寺는 백계산의 북쪽에 있는 절이다. 864년(신라 경문왕 4)에 道詵이 창건하여 수도를 하는 중 헌강왕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다시 이 절에 와서 일생을 마쳤다 한다. 도선은 음양지리설을 연구하여 도선비기를 지었다 하여 유명하다.(金在完)
광양현은 지금의 금호도와 태인도를 제외한 광양시, 광양읍, 다압면, 봉강면, 옥곡면, 옥룡면, 진상면, 진월면, 경상남도 하동읍 섬진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전남 광양읍 읍내리 일대이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 白鷄山이다. 지도에 보이는 광양읍성은 方形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읍성은 둘레가 9백 85보이었다. 읍성 북쪽에 위치한 광양향교에는 大成殿, 明倫堂, 東齋, 上齋, 風化樓, 庫舍 등이 현재도 남아 있다. 지도에 보이는 蟾津鎭은 1705년(숙종 31)에 統制使 吳重周가 군사상의 요충지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설치된 것으로 別將 1인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도에 보이는 松川寺는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에 있는 절로 지금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절터에는 이 절에서 수도하던 海隱禪師가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아 적과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순절한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비를 세운 바가 있다. 玉龍寺는 백계산의 북쪽에 있는 절이다. 864년(신라 경문왕 4)에 道詵이 창건하여 수도를 하는 중 헌강왕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다시 이 절에 와서 일생을 마쳤다 한다. 도선은 음양지리설을 연구하여 도선비기를 지었다 하여 유명하다.(金在完)
광주목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남부, 담양군 대전면 대부분지역, 수북면 일부, 신안군 하의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읍치는 옛 성내면지역으로 지금의 광주시 동구 광산동, 궁동, 금남로, 장동, 충장로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때는 武州 또는 武珍州로 불리우던 행정·군사 상의 요충지였으며, 光州라는 명칭은 고려 초에 쓰이기 시작했다. 無等山은 광주의 鎭山으로 광주를 상징하는웅장한 산이다. 산정부에는 柱狀節理에 의한 ''서석대''와 ''입석대'' 같은 독특한 지형이 있다. 신라 때무등산을 武珍岳이라 칭하고 名山으로 여겨 小祀를 지냈다. 그 후 1273년(고려 원종 14) 때부터 본읍으로 하여금 무등산에서 봄가을로 치제를 지내게 하였다. 광주읍성은 완전한 方形의 형태로 둘레가 8,253척이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月峯書院은 1646년(인조 24)에 세워지고, 1654년(효종 5)에 사액받았다. 북문 위에 위치한 拱北樓는 처음에 절양루라 하다가 북문 밖이 되므로牧使 吳斗寅이 공북루라 고쳤는데 그 뒤에 헐렸다. 景烈祠는 고려 말엽에 침입한 왜적을 여러 번 무찔러 전공을 세운 鄭地 장군의 사당이다. 지도에 보이는 澄心寺는 현재 證心寺라고 부르는데, 신라 경문왕 때 澈鑒(철감)禪師 道允이 창건하였다. 그 절에 있었던 국보 제 211호의 금동석가여래입상과 212호의 금동보살입상은 6·25사변 이후 분실되고, 보물 제 131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만 남아 있다.(金在完)
광주목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남부, 담양군 대전면 대부분지역, 수북면 일부, 신안군 하의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읍치는 옛 성내면지역으로 지금의 광주시 동구 광산동, 궁동, 금남로, 장동, 충장로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때는 武州 또는 武珍州로 불리우던 행정·군사 상의 요충지였으며, 光州라는 명칭은 고려 초에 쓰이기 시작했다. 無等山은 광주의 鎭山으로 광주를 상징하는웅장한 산이다. 산정부에는 柱狀節理에 의한 ''서석대''와 ''입석대'' 같은 독특한 지형이 있다. 신라 때무등산을 武珍岳이라 칭하고 名山으로 여겨 小祀를 지냈다. 그 후 1273년(고려 원종 14) 때부터 본읍으로 하여금 무등산에서 봄가을로 치제를 지내게 하였다. 광주읍성은 완전한 方形의 형태로 둘레가 8,253척이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月峯書院은 1646년(인조 24)에 세워지고, 1654년(효종 5)에 사액받았다. 북문 위에 위치한 拱北樓는 처음에 절양루라 하다가 북문 밖이 되므로牧使 吳斗寅이 공북루라 고쳤는데 그 뒤에 헐렸다. 景烈祠는 고려 말엽에 침입한 왜적을 여러 번 무찔러 전공을 세운 鄭地 장군의 사당이다. 지도에 보이는 澄心寺는 현재 證心寺라고 부르는데, 신라 경문왕 때 澈鑒(철감)禪師 道允이 창건하였다. 그 절에 있었던 국보 제 211호의 금동석가여래입상과 212호의 금동보살입상은 6·25사변 이후 분실되고, 보물 제 131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만 남아 있다.(金在完)
구례현은 지금의 전남 구례읍, 간전면, 광의면 서시천 북부 동안을 제외한 전지역, 마산면, 문척면, 용방면 남쪽 부분, 토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전남 구례읍 鳳東里 일대에 있었다. 현의 동쪽 8리에 위치한 智異山이 고을의 鎭山이다. 지도에서 구례를 "實要衝之地 麗季置鎭 壬辰之亂亦置鎭 今廢堡尙存''라고 표시하고 있다. 즉, 구례현은 실로 요충지로서 고려말 진을 두었고, 임진왜란 때도 역시 진을 두었다. 지금도 폐지된 군사시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에 埋伏處가 두 군데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구례가 전략적 용충지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구례읍성은 드물게 方形의 성곽을 갖고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石城으로 둘레가 4천 4백 81척이요, 높이가 13척이다. 구례현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로 화엄사와 연곡사를 든다. 화엄사는 지리산의 많은 사찰 가운데 가장 거대하며, 조선 중기의 웅장한 목조건물인 覺皇殿은 국보 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외에도 각황전석등(국보 12호), 사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 대웅전(보물 299호) 등 다수 문화재가 있다. 燕谷寺에는 고려 때 學士 王 融이 지은 玄覺禪師의 비문이 있다. 그리고 국보 53호 동부도, 54호 서부도, 보물 151호 3층 석탑 외 3점이 연곡사에 있다.(金在完)
구례현은 지금의 전남 구례읍, 간전면, 광의면 서시천 북부 동안을 제외한 전지역, 마산면, 문척면, 용방면 남쪽 부분, 토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전남 구례읍 鳳東里 일대에 있었다. 현의 동쪽 8리에 위치한 智異山이 고을의 鎭山이다. 지도에서 구례를 "實要衝之地 麗季置鎭 壬辰之亂亦置鎭 今廢堡尙存''라고 표시하고 있다. 즉, 구례현은 실로 요충지로서 고려말 진을 두었고, 임진왜란 때도 역시 진을 두었다. 지금도 폐지된 군사시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에 埋伏處가 두 군데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구례가 전략적 용충지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구례읍성은 드물게 方形의 성곽을 갖고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石城으로 둘레가 4천 4백 81척이요, 높이가 13척이다. 구례현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로 화엄사와 연곡사를 든다. 화엄사는 지리산의 많은 사찰 가운데 가장 거대하며, 조선 중기의 웅장한 목조건물인 覺皇殿은 국보 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외에도 각황전석등(국보 12호), 사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 대웅전(보물 299호) 등 다수 문화재가 있다. 燕谷寺에는 고려 때 學士 王 融이 지은 玄覺禪師의 비문이 있다. 그리고 국보 53호 동부도, 54호 서부도, 보물 151호 3층 석탑 외 3점이 연곡사에 있다.(金在完)
금구현은 지금 전북 김제시 금구면, 황산면, 금산면, 봉남면 일대이었다. 읍치는 금구면 금구리에 있었다. 금구현은 산지와 평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금구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무악산과 금산사이다. 금구 읍치 동남쪽, 지도의 오른쪽 위에는 모악산(794m)이 우뚝 솟아 있다. 호남지방의 명산이기도 한 모악산의 金山寺는 599년(백제 법왕 1)에 창건되었고, 766년(신라 혜공왕 2)에 진표율사가 중건하여 법상종의 도량이 되었으며, 935년(후백제 견훤 44) 신검이 그 아버지 견훤을 가두었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26년(인조 4)에 재건하였다. 또한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본거지이었다. 이 절에는 우리 나라 유일의 3층 불전인 미륵전(국보 337호), 金山寺露柱(국보 35호), 幢竿支柱(국보 41호), 金山寺石蓮臺, 石鐘 등 국보가 많다. 무악산 부근에는 금산사 외에도 귀신사, 용화사, 심원암, 청연암, 학선암 등 절과 암자가 많다.(金在完)
금구현은 지금 전북 김제시 금구면, 황산면, 금산면, 봉남면 일대이었다. 읍치는 금구면 금구리에 있었다. 금구현은 산지와 평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금구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무악산과 금산사이다. 금구 읍치 동남쪽, 지도의 오른쪽 위에는 모악산(794m)이 우뚝 솟아 있다. 호남지방의 명산이기도 한 모악산의 金山寺는 599년(백제 법왕 1)에 창건되었고, 766년(신라 혜공왕 2)에 진표율사가 중건하여 법상종의 도량이 되었으며, 935년(후백제 견훤 44) 신검이 그 아버지 견훤을 가두었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26년(인조 4)에 재건하였다. 또한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본거지이었다. 이 절에는 우리 나라 유일의 3층 불전인 미륵전(국보 337호), 金山寺露柱(국보 35호), 幢竿支柱(국보 41호), 金山寺石蓮臺, 石鐘 등 국보가 많다. 무악산 부근에는 금산사 외에도 귀신사, 용화사, 심원암, 청연암, 학선암 등 절과 암자가 많다.(金在完)
금산군은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금성면, 군북면, 제원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과 무주군 부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금산군은 1963년 이전까지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다. 읍치는 금산읍 중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바로 북쪽에 보이는 의총이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멸한 의병들을 추모하고자 성역화한 칠백의총이다. 현재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위치하고 있다. 유림이 殉義碑를 건립하고 지도에 보이는 종용당을 세워서 해마다 8월 18일 그의戰死일을 기념했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濟原驛은 찰방역으로서 4개의 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星谷書院은 1617년(광해군 9)에 세워졌고,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았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高霽峯殉節碑는 의병장 고경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60세의 노인으로 유팽로와 함께 의병 6,7천명을 거느리고, 선조의 행궁이 있는 평안도로 가고자 북상하다가 금산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는 문장·시·글씨에 뛰어났다고전해지고 있다.(金在完)
금산군은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금성면, 군북면, 제원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과 무주군 부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금산군은 1963년 이전까지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다. 읍치는 금산읍 중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바로 북쪽에 보이는 의총이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멸한 의병들을 추모하고자 성역화한 칠백의총이다. 현재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위치하고 있다. 유림이 殉義碑를 건립하고 지도에 보이는 종용당을 세워서 해마다 8월 18일 그의戰死일을 기념했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濟原驛은 찰방역으로서 4개의 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星谷書院은 1617년(광해군 9)에 세워졌고,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았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高霽峯殉節碑는 의병장 고경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60세의 노인으로 유팽로와 함께 의병 6,7천명을 거느리고, 선조의 행궁이 있는 평안도로 가고자 북상하다가 금산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는 문장·시·글씨에 뛰어났다고전해지고 있다.(金在完)
옛 김제군은 지금의 김제 시내, 백구면 대부분, 백산면, 부량면 대부분, 용지면 대부분, 월촌면, 죽산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김제시내 교동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랫쪽에보이는 것이 유명한 碧骨堤이다. 벽골제는 현재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 위치해 있다. 이미 백제시대부터 김제는 ''벽골''이라고 불리웠다. 大東地志 山水條에 따르면 ''벽골제는 백제 때 처음 제방이 축조되었고, 790년(신라 원성왕6) 侍中 金宗基가 전주 등 7읍 인민을 징발하여 증축한 바가 있고, 고려 현종과 인종 때 修築한 후 폐해졌다. 그 후 조선 태종 때 수축하였고 후에폐해졌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또한 수축하였는데, 제방의 길이가 2,600步, 둘레가 6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벽골제는 산골짜기 일반 저수지와는 달리 밀물 때 원평천을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을 막고 민물을 논에 가두어 쓰던 수리시설로 보인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興福寺는 현재 김제시 흥사동 승반산 북쪽에있는 절이다.(金在完)
옛 김제군은 지금의 김제 시내, 백구면 대부분, 백산면, 부량면 대부분, 용지면 대부분, 월촌면, 죽산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김제시내 교동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랫쪽에보이는 것이 유명한 碧骨堤이다. 벽골제는 현재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 위치해 있다. 이미 백제시대부터 김제는 ''벽골''이라고 불리웠다. 大東地志 山水條에 따르면 ''벽골제는 백제 때 처음 제방이 축조되었고, 790년(신라 원성왕6) 侍中 金宗基가 전주 등 7읍 인민을 징발하여 증축한 바가 있고, 고려 현종과 인종 때 修築한 후 폐해졌다. 그 후 조선 태종 때 수축하였고 후에폐해졌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또한 수축하였는데, 제방의 길이가 2,600步, 둘레가 6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벽골제는 산골짜기 일반 저수지와는 달리 밀물 때 원평천을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을 막고 민물을 논에 가두어 쓰던 수리시설로 보인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興福寺는 현재 김제시 흥사동 승반산 북쪽에있는 절이다.(金在完)
나주목은 나주시내, 나주시 공산면, 노안면, 다시면, 동강면, 문평면, 반남면, 세지면, 왕곡면, 영암군 금정면, 시종면 북부, 신안군 지도읍, 압해면, 자은면, 암태면, 안좌면, 비금면, 흑산면, 도초면, 장산면, 장성군 대화면 대부분,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부, 삼도면, 평동면, 무안군 삼향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읍치는 금성산 동남쪽 경현동과 교동지역이었다. 금성산은 나주의 鎭山으로 錦城山壇에서 고려 충렬왕 때부터 본읍에서치제를 지냈다. 읍성은 方形의 모양을 취하고 있으며,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가 9,966척이다. 향교 아래 보이는 서원은 景賢書院으로 1583년(선조 16)에 세워지고, 1607년(선조 40)에 사액을 받았다. 非音面에 위치한 月井書院에서는 朴 淳, 金 繼輝, 沈議謙, 鄭 澈을 배향하였다. 읍성 북쪽에 보이는 錦城堂은 1373년(고려 공민왕 22)에 목사 李 有仁이 창건하였고, 그 후에 여러 번 중수하였으며, 1976년 9월에 해체 복원하여, 지방 문화재 제 2호로 지정되었다. 영산포는 역사적으로 해안지방의 세곡을 모아 京倉으로 보내던 영산창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1512년(중종 7)에 영산창에서 수납하던 세곡이 영광의 법성창으로 이관된 후에도 이곳에는 江倉이 존속했다.(金在完)
나주목은 나주시내, 나주시 공산면, 노안면, 다시면, 동강면, 문평면, 반남면, 세지면, 왕곡면, 영암군 금정면, 시종면 북부, 신안군 지도읍, 압해면, 자은면, 암태면, 안좌면, 비금면, 흑산면, 도초면, 장산면, 장성군 대화면 대부분,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부, 삼도면, 평동면, 무안군 삼향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읍치는 금성산 동남쪽 경현동과 교동지역이었다. 금성산은 나주의 鎭山으로 錦城山壇에서 고려 충렬왕 때부터 본읍에서치제를 지냈다. 읍성은 方形의 모양을 취하고 있으며,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가 9,966척이다. 향교 아래 보이는 서원은 景賢書院으로 1583년(선조 16)에 세워지고, 1607년(선조 40)에 사액을 받았다. 非音面에 위치한 月井書院에서는 朴 淳, 金 繼輝, 沈議謙, 鄭 澈을 배향하였다. 읍성 북쪽에 보이는 錦城堂은 1373년(고려 공민왕 22)에 목사 李 有仁이 창건하였고, 그 후에 여러 번 중수하였으며, 1976년 9월에 해체 복원하여, 지방 문화재 제 2호로 지정되었다. 영산포는 역사적으로 해안지방의 세곡을 모아 京倉으로 보내던 영산창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1512년(중종 7)에 영산창에서 수납하던 세곡이 영광의 법성창으로 이관된 후에도 이곳에는 江倉이 존속했다.(金在完)
낙안군 지금의 순천시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 서부, 보성군 벌교읍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낙안면 서내리, 교촌리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군의 북쪽 1리에 위치한 金錢山이다. 지도에 보이는 낙안읍성은 정확히 方形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세 개의 성문을 갖추고 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읍성은 石城으로 둘레가 1천 5백 92척, 높이가 8척이다. 현재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내에 사람이 거주하는 드문 읍성이다. 읍치 북쪽의 鎭山 남쪽에 보이는 內崗菴은 현대 지도에서 금강암으로 나타나 있다. 鎭山의 서쪽에는 유명한 金芚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는 보물 945호 삼층석탑과 보물 946호 석불비상이 있다. 船所(진석포)는 옛 낙안 고을에서 稅米를 서울로 옮기기 위하여 쌓아 둔 창고가 있었다. 澄光寺는 큰 절로 현재 보성군 벌교읍 징광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1800년 무렵에 없어졌고, 현재 그 터에 징광 마을이 들어 서있다. 지도에서 제석산 동쪽에 위치한 祠華寺(祠는 桐의 誤記임)는 약 900년전 大覺國師가 이 절을 창건한 것으로, 梧桐鳳棲形인데 봉은 오동나무에 깃든다고 하여 오동동자와 꽃 화자를 넣어 동화사라 하고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金在完)
낙안군 지금의 순천시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 서부, 보성군 벌교읍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낙안면 서내리, 교촌리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군의 북쪽 1리에 위치한 金錢山이다. 지도에 보이는 낙안읍성은 정확히 方形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세 개의 성문을 갖추고 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읍성은 石城으로 둘레가 1천 5백 92척, 높이가 8척이다. 현재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내에 사람이 거주하는 드문 읍성이다. 읍치 북쪽의 鎭山 남쪽에 보이는 內崗菴은 현대 지도에서 금강암으로 나타나 있다. 鎭山의 서쪽에는 유명한 金芚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는 보물 945호 삼층석탑과 보물 946호 석불비상이 있다. 船所(진석포)는 옛 낙안 고을에서 稅米를 서울로 옮기기 위하여 쌓아 둔 창고가 있었다. 澄光寺는 큰 절로 현재 보성군 벌교읍 징광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1800년 무렵에 없어졌고, 현재 그 터에 징광 마을이 들어 서있다. 지도에서 제석산 동쪽에 위치한 祠華寺(祠는 桐의 誤記임)는 약 900년전 大覺國師가 이 절을 창건한 것으로, 梧桐鳳棲形인데 봉은 오동나무에 깃든다고 하여 오동동자와 꽃 화자를 넣어 동화사라 하고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金在完)
남원부는 지금의 전북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야영면을 제외한 남원시 전 지역과 장수군의 번암면, 산서면 일대, 임실군의 삼계면, 지사면과 오수면 남쪽 부분, 구례군의 산동면과 광의면·오방면 북쪽 부분 그리고 곡성군의 고달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당시 읍치는 현재 남원시내 東忠洞 일대이었다. 남원의 鎭山은 교룡산(520m)으로서 읍치 북쪽에 우뚝 솟은 이 산에는 남원성을 지키던 교룡산성이 있다. 남원은 섬진강의 물길로 남해와 통하고, 또한 경남의 함양에서 팔량치(513m)를 넘어 오면 나오는 첫 번째의 큰 고을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지도에는 ''面''을 ''坊''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전라도 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경우이다. 조선시대 서울의 경우 部 밑에 坊을 두었고, 황해도와 평안도에서도 面 대신에 坊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方形의 읍성 안에는客舍, 忠烈祠, 關王廟 등이 그려져 있다. 충렬사는 정유재란에 순절한 이복남 등 8명을 배향하였던 곳으로 1612년(광해군 4)에 건립되고 1653년(효종 4)에 사액되었다. 관왕묘는 중국 삼국시대에 촉한의 무왕인 관우의 묘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대가 내원하여 왜군을 남으로 격퇴시킨 공은 다 관우의 陰助에 의한 것이라 하여 관우묘를 세운 것이다. 특히 남원에는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대가 왜군과 전투를 치른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문 밖에 성춘향과 관련 있는 廣寒樓가 보인다. 광한루는 돌기둥 위에 세워진 작은 정자로 조선 초 황 희가 세웠다. 지도에서 보이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635년(인조 13)에 다시 지은 것이다.(金在完)
남원부는 지금의 전북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야영면을 제외한 남원시 전 지역과 장수군의 번암면, 산서면 일대, 임실군의 삼계면, 지사면과 오수면 남쪽 부분, 구례군의 산동면과 광의면·오방면 북쪽 부분 그리고 곡성군의 고달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당시 읍치는 현재 남원시내 東忠洞 일대이었다. 남원의 鎭山은 교룡산(520m)으로서 읍치 북쪽에 우뚝 솟은 이 산에는 남원성을 지키던 교룡산성이 있다. 남원은 섬진강의 물길로 남해와 통하고, 또한 경남의 함양에서 팔량치(513m)를 넘어 오면 나오는 첫 번째의 큰 고을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지도에는 ''面''을 ''坊''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전라도 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경우이다. 조선시대 서울의 경우 部 밑에 坊을 두었고, 황해도와 평안도에서도 面 대신에 坊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方形의 읍성 안에는客舍, 忠烈祠, 關王廟 등이 그려져 있다. 충렬사는 정유재란에 순절한 이복남 등 8명을 배향하였던 곳으로 1612년(광해군 4)에 건립되고 1653년(효종 4)에 사액되었다. 관왕묘는 중국 삼국시대에 촉한의 무왕인 관우의 묘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대가 내원하여 왜군을 남으로 격퇴시킨 공은 다 관우의 陰助에 의한 것이라 하여 관우묘를 세운 것이다. 특히 남원에는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대가 왜군과 전투를 치른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문 밖에 성춘향과 관련 있는 廣寒樓가 보인다. 광한루는 돌기둥 위에 세워진 작은 정자로 조선 초 황 희가 세웠다. 지도에서 보이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635년(인조 13)에 다시 지은 것이다.(金在完)
남평현은 지금 전남 나주시 남평읍, 다도면, 봉황면, 금천면, 산포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현재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일대이었다. 남평현은 대체로 북쪽으로 영산강 지류인 지석강으로 경계를 짓고, 서쪽으로 영산강 본류에 접하고 있다. 현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산강 본류와 지류인 지석강 유역에 발달한 범람원을끼고 있어 들이 넓은 편이다. 지도에서 읍치 우측에 보이는 鳳山書院은1650년(효종 1)에 건립되었으며, 1667년(현종 8)에 사액을 받았는데, 白仁傑을 배향하였다.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佛會寺는 현재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일봉암 중턱에위치하고 있다. 384년(백제 침류왕 1) 摩羅難陀가 개창하였고, 656년(의자왕 16)에 熙演祖師가 개수하였으며, 1402년(태종 2)에 元色國師가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과 6·25사변을 거쳤으나 대웅전만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과 석장승이 유명하다. 이 지역까지 영산강 수운이 닿지 않았으므로 세곡은 나주 영산포까지 육로로 운반한 다음 조운선으로 서울까지 세곡을 날랐다.(金在完)
남평현은 지금 전남 나주시 남평읍, 다도면, 봉황면, 금천면, 산포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현재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일대이었다. 남평현은 대체로 북쪽으로 영산강 지류인 지석강으로 경계를 짓고, 서쪽으로 영산강 본류에 접하고 있다. 현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산강 본류와 지류인 지석강 유역에 발달한 범람원을끼고 있어 들이 넓은 편이다. 지도에서 읍치 우측에 보이는 鳳山書院은1650년(효종 1)에 건립되었으며, 1667년(현종 8)에 사액을 받았는데, 白仁傑을 배향하였다.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佛會寺는 현재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일봉암 중턱에위치하고 있다. 384년(백제 침류왕 1) 摩羅難陀가 개창하였고, 656년(의자왕 16)에 熙演祖師가 개수하였으며, 1402년(태종 2)에 元色國師가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과 6·25사변을 거쳤으나 대웅전만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과 석장승이 유명하다. 이 지역까지 영산강 수운이 닿지 않았으므로 세곡은 나주 영산포까지 육로로 운반한 다음 조운선으로 서울까지 세곡을 날랐다.(金在完)
능주목은 지금의 화순군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이양면, 청풍면, 춘양면, 한천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읍치는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일대에 있었다. 능주목은 1594년(선조 27) 화순에 합쳐졌고, 1611년(광해군 3)에 그것을 갈라 놓았다. 1632년(인조 10) 仁獻王后 具氏의 貫鄕이므로 능주목으로 승격되었다. 능주목의 진산은 부의 남쪽 1리에 있는 雲山이다. 邑治에는 鳳棲樓, 暎碧亭, 淸興亭 등 누각과 정자가 위치하고 있다. 영벽정은 읍내 동쪽에 있는 정자로 수목이 우거지고 앞에 맑은 물이 있어서 수영과 뱃놀이를 하기가 좋다. 지도의 동면에 보이는 서원은 竹樹書院으로서 1570년(선조 3)에 건립되었고, 같은 해에 사액받았다. 운주사는 지금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에 있다. 이 절은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세웠다 하는데, 양쪽 산에 돌부처와 돌탑이 각각 1천이 되며, 돌집이 있는데 돌부처가 둘이 등을 맞대고 앉았으며, 누운 큰 부처와 9층 석탑, 미륵석불, 연화탑 등의 신기한 문화재가 많다. 지도에 보이는 쌍봉사는 현재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위치해 있다. 이 절에는 국보 제 163호인 쌍봉사 대웅전과 국보 제 57호인 철감선사탑이 있다. 이양면 강성리에 위치한 松石亭은 소나무와 바위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金在完)
능주목은 지금의 화순군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이양면, 청풍면, 춘양면, 한천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읍치는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일대에 있었다. 능주목은 1594년(선조 27) 화순에 합쳐졌고, 1611년(광해군 3)에 그것을 갈라 놓았다. 1632년(인조 10) 仁獻王后 具氏의 貫鄕이므로 능주목으로 승격되었다. 능주목의 진산은 부의 남쪽 1리에 있는 雲山이다. 邑治에는 鳳棲樓, 暎碧亭, 淸興亭 등 누각과 정자가 위치하고 있다. 영벽정은 읍내 동쪽에 있는 정자로 수목이 우거지고 앞에 맑은 물이 있어서 수영과 뱃놀이를 하기가 좋다. 지도의 동면에 보이는 서원은 竹樹書院으로서 1570년(선조 3)에 건립되었고, 같은 해에 사액받았다. 운주사는 지금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에 있다. 이 절은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세웠다 하는데, 양쪽 산에 돌부처와 돌탑이 각각 1천이 되며, 돌집이 있는데 돌부처가 둘이 등을 맞대고 앉았으며, 누운 큰 부처와 9층 석탑, 미륵석불, 연화탑 등의 신기한 문화재가 많다. 지도에 보이는 쌍봉사는 현재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위치해 있다. 이 절에는 국보 제 163호인 쌍봉사 대웅전과 국보 제 57호인 철감선사탑이 있다. 이양면 강성리에 위치한 松石亭은 소나무와 바위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金在完)
담양부도호부는 지금의 담양읍, 수북면 서부, 무정면, 봉산면, 용면, 월산면 북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포함하는 비교적 큰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읍치는 지금의 담양읍 객사리 일대에 있었다. 담양의 鎭山은 부의 동북쪽 20리에 위치한 秋月山인데, 기록에 따르면 石壁이 깎아 세운 듯 사방으로 들렀는데 마치 성과 같으니, 둘레가 9천 18척이요, 서북방으로만 보행자가 통행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에 시내가 둘러 흐른다. 읍내 객사리에는 보물 제 505호 石幢竿, 보물 506호 오층석탑이 있다. 오층석탑은 약 1,300여 년 전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 보이는 金城山城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다. 石城으로 1597년(선조 30)에 개축하였고, 언덕을 연하여 성을 쌓았다. 1653년(효종 4) 重修하였는데, 내성과 외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노적봉과 금성사가 있고, 서문 밖에는 龜岩寺가 있다. 읍치 남쪽 豆毛谷面(현재 담양군 봉산면)에는 傘仰亭이라는 유명한 정자가 있는데, 중종 때 면앙정 송 순이 여러 작품을 남긴 곳이다.(金在完)
담양부도호부는 지금의 담양읍, 수북면 서부, 무정면, 봉산면, 용면, 월산면 북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포함하는 비교적 큰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읍치는 지금의 담양읍 객사리 일대에 있었다. 담양의 鎭山은 부의 동북쪽 20리에 위치한 秋月山인데, 기록에 따르면 石壁이 깎아 세운 듯 사방으로 들렀는데 마치 성과 같으니, 둘레가 9천 18척이요, 서북방으로만 보행자가 통행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에 시내가 둘러 흐른다. 읍내 객사리에는 보물 제 505호 石幢竿, 보물 506호 오층석탑이 있다. 오층석탑은 약 1,300여 년 전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 보이는 金城山城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다. 石城으로 1597년(선조 30)에 개축하였고, 언덕을 연하여 성을 쌓았다. 1653년(효종 4) 重修하였는데, 내성과 외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노적봉과 금성사가 있고, 서문 밖에는 龜岩寺가 있다. 읍치 남쪽 豆毛谷面(현재 담양군 봉산면)에는 傘仰亭이라는 유명한 정자가 있는데, 중종 때 면앙정 송 순이 여러 작품을 남긴 곳이다.(金在完)
동복현은 지금의 전북 화순군 동복면, 남면, 북면, 이서면이 된다. 읍치는 화순군 동복면 천변리와 독상리 일대에 있었다. 현의 동쪽 10리에 위치한 母后山이 고을의 鎭山이다. 1655년(효종 6) 延殿牌가 불에 탔으므로 和順에 합하였다가 1664년(현종 5)에 다시 세웠다.읍치 위쪽에 보이는 道源書院은1670년(현종 11)에 세웠다가 1687년(숙종 13)에 사액을 받았다. 三韓古城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甕城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옹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8백 74척이다. 돌길은 겨우 사람의 발길이 통할 만하다. 동복천을 따라 勿染亭, 滄浪亭, 赤壁, 萬景臺, 姑蘇臺, 鳳凰臺 등이 분포한다. 하나같이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나 누각이다. 지도에 보이는 赤壁은 붉은 벼랑이 깎아지른 듯이 연하여 있고, 그 아래로 동복천이 맑게 흘러서 배를 띄우고 놀면 신선과 같다고 한다. 창랑정은 정자 아래 흐르는 개천이 마을을 감싸고돌아 흐르므로 그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勿染亭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맑은 물과 흰 모래가 있어서 가히 선경이라 할 만하므로, 송씨가 정자를 짓고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물염정이라 했다 한다.(金在完)
동복현은 지금의 전북 화순군 동복면, 남면, 북면, 이서면이 된다. 읍치는 화순군 동복면 천변리와 독상리 일대에 있었다. 현의 동쪽 10리에 위치한 母后山이 고을의 鎭山이다. 1655년(효종 6) 延殿牌가 불에 탔으므로 和順에 합하였다가 1664년(현종 5)에 다시 세웠다.읍치 위쪽에 보이는 道源書院은1670년(현종 11)에 세웠다가 1687년(숙종 13)에 사액을 받았다. 三韓古城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甕城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옹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8백 74척이다. 돌길은 겨우 사람의 발길이 통할 만하다. 동복천을 따라 勿染亭, 滄浪亭, 赤壁, 萬景臺, 姑蘇臺, 鳳凰臺 등이 분포한다. 하나같이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나 누각이다. 지도에 보이는 赤壁은 붉은 벼랑이 깎아지른 듯이 연하여 있고, 그 아래로 동복천이 맑게 흘러서 배를 띄우고 놀면 신선과 같다고 한다. 창랑정은 정자 아래 흐르는 개천이 마을을 감싸고돌아 흐르므로 그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勿染亭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맑은 물과 흰 모래가 있어서 가히 선경이라 할 만하므로, 송씨가 정자를 짓고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물염정이라 했다 한다.(金在完)
만경현은 지금의 전북 만경읍, 진봉면, 광활면, 공덕면, 청하면, 성덕면, 부안군 동진면 일부 등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일대에 있었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객사, 동헌, 향교터가 남아 있다. 夢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만경 읍치는 만경강 유역 쪽의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일대는 극히 저평하여 준평원의 인상을 준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2,828척이었다. 지도 좌측 島嶼 가운데 古群山鎭이 보인다. 이 곳에 있었던 군산진은 해적의 침입을 받아 옥구현 북쪽 鎭浦 연안으로 옮겼다. 1624년(인조 2) 舊鎭에 別將을 두고 古群山이라고 칭하였다가 1677년(숙종 3)에 승격시켜 수군첨절제사를 두었다. 망해사 옆에 진봉산(72m)은 현재 김제시 진봉면에 있는데, 근처에서 햇빛을 먼저 받는다고 전한다. 진봉산 북쪽에 望海寺라는 절이 있는데 바닷가 높은 곳에 위치하여 경치가 아름답다. 지도 상 현내면에 보이는 저수지는 능제이다. 지도 상 북면에 보이는 봉화가 있는 산이 舟行山이다. 이 산에는 祖仰寺 또는 震默寺라고 부르는 절이 있는데, 진묵대사가 모친을 섬기기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金在完)
만경현은 지금의 전북 만경읍, 진봉면, 광활면, 공덕면, 청하면, 성덕면, 부안군 동진면 일부 등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일대에 있었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객사, 동헌, 향교터가 남아 있다. 夢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만경 읍치는 만경강 유역 쪽의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일대는 극히 저평하여 준평원의 인상을 준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2,828척이었다. 지도 좌측 島嶼 가운데 古群山鎭이 보인다. 이 곳에 있었던 군산진은 해적의 침입을 받아 옥구현 북쪽 鎭浦 연안으로 옮겼다. 1624년(인조 2) 舊鎭에 別將을 두고 古群山이라고 칭하였다가 1677년(숙종 3)에 승격시켜 수군첨절제사를 두었다. 망해사 옆에 진봉산(72m)은 현재 김제시 진봉면에 있는데, 근처에서 햇빛을 먼저 받는다고 전한다. 진봉산 북쪽에 望海寺라는 절이 있는데 바닷가 높은 곳에 위치하여 경치가 아름답다. 지도 상 현내면에 보이는 저수지는 능제이다. 지도 상 북면에 보이는 봉화가 있는 산이 舟行山이다. 이 산에는 祖仰寺 또는 震默寺라고 부르는 절이 있는데, 진묵대사가 모친을 섬기기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金在完)
무안현은 지금의 전남 목포시, 무안읍, 일로읍, 몽탄면, 청계면, 함평군 엄다면, 학교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전북 무안군 무안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僧達山이 鎭山이다. 무안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둘레가 2천 7백 척, 높이가 15척이었다. 지도에 보이는 木浦鎭營에는 水軍萬戶 1인이 주재하고 있었다. 松林書院은 1630년(인조 8)에 건립되었으며 1682년(숙종 8)에 사액을 받았는데, 金 權과 兪 契을 배향하였다. 지도 아래쪽에一老村面에 駐龍津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石山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아래에 龍津溟所가 있다. 本邑에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법천사는 진산 승달산(317m)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읍치 아래에 보이는 花雪堂은 處士 柳 雲이 짓고, 尤庵 宋時烈이 이름을 지었다. 또한 화설당에는 花溪居士가 지은 柳基淳의 亭子가 있다. 進禮面의 沙湖津과 木浦津은 조운선의 발진포구 기능을 하였던 곳이다. 또한 영산강을 따라 나루터와 창고가 건설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지도의 고막원 부근에 돌다리가 있는데, 길이 19.2m, 높이 2.1m, 너비 3m이다. 1274년(고려 원종 15)에 고막대사가 놓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지방문화재 제 68호로 지정되어 있다.(金在完)
무안현은 지금의 전남 목포시, 무안읍, 일로읍, 몽탄면, 청계면, 함평군 엄다면, 학교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전북 무안군 무안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僧達山이 鎭山이다. 무안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둘레가 2천 7백 척, 높이가 15척이었다. 지도에 보이는 木浦鎭營에는 水軍萬戶 1인이 주재하고 있었다. 松林書院은 1630년(인조 8)에 건립되었으며 1682년(숙종 8)에 사액을 받았는데, 金 權과 兪 契을 배향하였다. 지도 아래쪽에一老村面에 駐龍津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石山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아래에 龍津溟所가 있다. 本邑에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법천사는 진산 승달산(317m)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읍치 아래에 보이는 花雪堂은 處士 柳 雲이 짓고, 尤庵 宋時烈이 이름을 지었다. 또한 화설당에는 花溪居士가 지은 柳基淳의 亭子가 있다. 進禮面의 沙湖津과 木浦津은 조운선의 발진포구 기능을 하였던 곳이다. 또한 영산강을 따라 나루터와 창고가 건설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지도의 고막원 부근에 돌다리가 있는데, 길이 19.2m, 높이 2.1m, 너비 3m이다. 1274년(고려 원종 15)에 고막대사가 놓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지방문화재 제 68호로 지정되어 있다.(金在完)
무장현은 지금의 전북 고창군 무장면, 상하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공음면, 아산면 일부,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읍치는 전북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 일대에 있었다. 1417년(태종 17)에 茂松縣과 長沙縣을 합쳐고 그 앞 글자의 이름을 따서 무장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도에 무장읍치를 둘러싼 읍성이 보인다. 무장읍성은 현재 무장면 성내리에 터가 남아 있다. 고려 경종 때 쌓았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둘레 2,639척, 높이 7척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세운 남문과 객사는 보존되어 있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忠賢寺(忠賢祠의 잘못?)는 1608년(선조 41)에 건립하였으며 광해군이 친필을 사액하였다. 禪雲山(325m)은 무장현의 名山으로 선운사가 있고, 석상암이 있다. 고려 가사로서 "禪雲別曲"이 전해 오고 있다. 선운사는 577년(백제 위덕왕 24)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운사에는 보물 290호 대웅전, 보물 279호 금동보살좌상, 보물 280호 지장보살좌상 등이 있고, 남쪽의 참당암에도 보물 803호 대웅전이 있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茂松古縣이 옛 무송현 읍치이었는데 토성 터가 남아 있다.(金在完)
무장현은 지금의 전북 고창군 무장면, 상하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공음면, 아산면 일부,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읍치는 전북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 일대에 있었다. 1417년(태종 17)에 茂松縣과 長沙縣을 합쳐고 그 앞 글자의 이름을 따서 무장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도에 무장읍치를 둘러싼 읍성이 보인다. 무장읍성은 현재 무장면 성내리에 터가 남아 있다. 고려 경종 때 쌓았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둘레 2,639척, 높이 7척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세운 남문과 객사는 보존되어 있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忠賢寺(忠賢祠의 잘못?)는 1608년(선조 41)에 건립하였으며 광해군이 친필을 사액하였다. 禪雲山(325m)은 무장현의 名山으로 선운사가 있고, 석상암이 있다. 고려 가사로서 "禪雲別曲"이 전해 오고 있다. 선운사는 577년(백제 위덕왕 24)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운사에는 보물 290호 대웅전, 보물 279호 금동보살좌상, 보물 280호 지장보살좌상 등이 있고, 남쪽의 참당암에도 보물 803호 대웅전이 있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茂松古縣이 옛 무송현 읍치이었는데 토성 터가 남아 있다.(金在完)
茂朱府는 부남면을 제외한 지금의 무주군 무주읍, 설천면, 적상면, 무풍면, 안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무주부의 읍치는 현 무주읍 읍내리 일대이었다. 무주는 1414년(태종 14)에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하고, 그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지명으로 삼국시대에 무풍현은 신라, 주계현은 백제의 땅이었다. 현 북쪽 1里에 위치한 爐山이 鎭山인데, 고지도 상에는 香爐峰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남쪽에 보이는 史庫는 읍치에서 남쪽으로 15리 떨어진 赤裳山城에 위치하고 있다. 적상산은 산 정상 부근이 평평한 고위평탄면의 지형을 이루고 있어 산성을 쌓기에 적합한 곳이다. 1374년(고려 공민왕 23)에 최 영의 건의에 따라 산성이 만들어졌고, 1639년(인조 17) 巡檢使 朴 潢의 건의에 따라 다시 쌓았다. 1614년(광해군 6)에 실록전을 창건하여, 1618년(광해군 10) 史冊을 봉안하였다. 璿源閣은 1641년(인조 19)에 세워진 것이다. 지도 아래에 보이는 竹溪書院은 현재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에 있었던 것으로, 1713년(숙종 39)에 政, 金 侁 遺址이 창건하였다가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金在完)
茂朱府는 부남면을 제외한 지금의 무주군 무주읍, 설천면, 적상면, 무풍면, 안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무주부의 읍치는 현 무주읍 읍내리 일대이었다. 무주는 1414년(태종 14)에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하고, 그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지명으로 삼국시대에 무풍현은 신라, 주계현은 백제의 땅이었다. 현 북쪽 1里에 위치한 爐山이 鎭山인데, 고지도 상에는 香爐峰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남쪽에 보이는 史庫는 읍치에서 남쪽으로 15리 떨어진 赤裳山城에 위치하고 있다. 적상산은 산 정상 부근이 평평한 고위평탄면의 지형을 이루고 있어 산성을 쌓기에 적합한 곳이다. 1374년(고려 공민왕 23)에 최 영의 건의에 따라 산성이 만들어졌고, 1639년(인조 17) 巡檢使 朴 潢의 건의에 따라 다시 쌓았다. 1614년(광해군 6)에 실록전을 창건하여, 1618년(광해군 10) 史冊을 봉안하였다. 璿源閣은 1641년(인조 19)에 세워진 것이다. 지도 아래에 보이는 竹溪書院은 현재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에 있었던 것으로, 1713년(숙종 39)에 政, 金 侁 遺址이 창건하였다가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金在完)
보성군은 지금 보성읍, 노동면, 득량면, 미력면, 겸백면, 문덕면, 북내면, 율어면, 조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보성읍 보성리에 있었다. 읍치는 보성천 상류의 산간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군의 북쪽 5리에 있는 德山이 鎭山이다. 보성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2천 9백 53척이요, 높이가 9척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大原寺는 중봉산에 있다. 고려 중 圓悟의 浮屠와 황 희 정승의 影堂이 있다. 읍성 좌측에 보이는 旌忠祠는 1677년(숙종 3)에 세웠다가 1690년(숙종 16)에 사액받았다. 정충사 위쪽에 보이는 서원은 大溪書院이다. 1657년(효종 8)에 창건되어, 인조 때 성리학자 安邦俊을 모시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을 받았는데,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리었다. 海倉은 현재 득량면 조양에 있는데, 배로 서울로 옮길 歲米를 쌓아 두던 창고이었다. 오봉산 부근에 위치한 개흥사는 지금 절터만 남아 있다. 개흥사 남쪽에 해창을 지키던 龍湫山城이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둘레 2km, 높이 7m쯤 되는 석성이었다. 그리고 전에 이 절에 벅수(석장승)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형상을 새기고, 그 밑에 "上元周將軍과 下元唐將軍"을 새겨 놓았었다고 전한다.(金在完)
보성군은 지금 보성읍, 노동면, 득량면, 미력면, 겸백면, 문덕면, 북내면, 율어면, 조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보성읍 보성리에 있었다. 읍치는 보성천 상류의 산간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군의 북쪽 5리에 있는 德山이 鎭山이다. 보성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2천 9백 53척이요, 높이가 9척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大原寺는 중봉산에 있다. 고려 중 圓悟의 浮屠와 황 희 정승의 影堂이 있다. 읍성 좌측에 보이는 旌忠祠는 1677년(숙종 3)에 세웠다가 1690년(숙종 16)에 사액받았다. 정충사 위쪽에 보이는 서원은 大溪書院이다. 1657년(효종 8)에 창건되어, 인조 때 성리학자 安邦俊을 모시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을 받았는데,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리었다. 海倉은 현재 득량면 조양에 있는데, 배로 서울로 옮길 歲米를 쌓아 두던 창고이었다. 오봉산 부근에 위치한 개흥사는 지금 절터만 남아 있다. 개흥사 남쪽에 해창을 지키던 龍湫山城이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둘레 2km, 높이 7m쯤 되는 석성이었다. 그리고 전에 이 절에 벅수(석장승)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형상을 새기고, 그 밑에 "上元周將軍과 下元唐將軍"을 새겨 놓았었다고 전한다.(金在完)
부안현은 지금의 전북 부안읍, 계화면, 동진면 대부분, 보안면, 변산면, 상서면, 위도면, 주산면, 줄포면 대부분, 하서면, 행안면, 진서면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 보이는 부안읍성은 중종조 때 改築한 것인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16,458척이었다. 蝟島鎭은 서해 수로로 50리 떨어져 있다. 1682년(숙종 8) 진을 설치하였는데, 두 개의 창고를 갖추고, 수군동첨절제사 1명이 주재한 제법 큰 진이었다. 格浦鎭은 인조 때 처음 진을 설치하고 別將을 두었고, 1653년(효종 4)에 축성 후 감영에 소속시켰다. 격포진 서쪽에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赤壁江과 彩石江이 있다. 적벽강은 해안을 따라 500여 미터의 붉은 빛 절벽이 휘돌아 있으며 돌벽 사이로 짙푸른 바닷물이 출렁이고, 그 위에는 수성당이 있다. 채석강은 해안을 끼고 층암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한데 쌓아 놓은 것처럼 높이 솟아 있는 곳이다. 來蘇寺는 663년(신라 선덕여왕 2)에 惠丘頭陀가 창건하여 소래사라고 하였는데, 대소래사와 소소래사로 나뉘었다가 소소래사에 새로 절을 짓고 조선조 말엽 내소사라고 고쳐 불렀다. 보물 제 291호로 지정된 대웅전, 제 277호 고려동종과 고려 공민왕 때의정지상이 쓴 현판이 있다.(金在完)
부안현은 지금의 전북 부안읍, 계화면, 동진면 대부분, 보안면, 변산면, 상서면, 위도면, 주산면, 줄포면 대부분, 하서면, 행안면, 진서면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 보이는 부안읍성은 중종조 때 改築한 것인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16,458척이었다. 蝟島鎭은 서해 수로로 50리 떨어져 있다. 1682년(숙종 8) 진을 설치하였는데, 두 개의 창고를 갖추고, 수군동첨절제사 1명이 주재한 제법 큰 진이었다. 格浦鎭은 인조 때 처음 진을 설치하고 別將을 두었고, 1653년(효종 4)에 축성 후 감영에 소속시켰다. 격포진 서쪽에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赤壁江과 彩石江이 있다. 적벽강은 해안을 따라 500여 미터의 붉은 빛 절벽이 휘돌아 있으며 돌벽 사이로 짙푸른 바닷물이 출렁이고, 그 위에는 수성당이 있다. 채석강은 해안을 끼고 층암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한데 쌓아 놓은 것처럼 높이 솟아 있는 곳이다. 來蘇寺는 663년(신라 선덕여왕 2)에 惠丘頭陀가 창건하여 소래사라고 하였는데, 대소래사와 소소래사로 나뉘었다가 소소래사에 새로 절을 짓고 조선조 말엽 내소사라고 고쳐 불렀다. 보물 제 291호로 지정된 대웅전, 제 277호 고려동종과 고려 공민왕 때의정지상이 쓴 현판이 있다.(金在完)
순창군은 지금의 영계면을 제외한 순창읍, 구림면, 인계면, 적성면, 유등면, 풍산면, 팔덕면, 금과면, 쌍치면, 복흥면 등 1읍 9면 지역이었다. 읍치는 순창읍 순화리 일대이었다. 순창읍의鎭山은 치소 북방 3리에 위치한 追山(현대 지형도에서는 금산이라고 표시되어 있음)으로 回文山으로부터 굼틀거리며 남쪽으로 달려 와서 군의 북쪽에 와서 다시 솟아 오른 것이다. 순창읍은 섬진강 상류 지류 사천과 양지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花山書院은 현재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에 있다. 이 서원은 1607년(선조 40)에 창건되었는데, 申末舟, 金 淨, 金麟厚, 高敬明, 金千鎰을 모셨다. 임실과 태인 및 정읍 경계에는 ''此邊平夷越邊險 ''라는 말이 적혀 있다. 즉, 이쪽 주변은 평탄한 반면 넘어 가면 길이 험하다는 뜻이다. 결국 순창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지만 그 반대쪽은 급경사를 이룬다는 것이다. 지도에 보이는 江泉寺는 현재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옥호 서쪽 강천산 북쪽 줄기에 있는 절이다. 887년(신라 진성여왕1)에 창건되었는데, 6·25사변 때에 소실되었다가 1959년에 재건되었다. 부근에 강천사 오층석탑과 삼인대가 있다.(金在完)
순창군은 지금의 영계면을 제외한 순창읍, 구림면, 인계면, 적성면, 유등면, 풍산면, 팔덕면, 금과면, 쌍치면, 복흥면 등 1읍 9면 지역이었다. 읍치는 순창읍 순화리 일대이었다. 순창읍의鎭山은 치소 북방 3리에 위치한 追山(현대 지형도에서는 금산이라고 표시되어 있음)으로 回文山으로부터 굼틀거리며 남쪽으로 달려 와서 군의 북쪽에 와서 다시 솟아&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