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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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地乘 지승

  • 편저자 : [編者未詳]
  • 청구기호 : 奎15423-v.1-6
  • 간행연도 : [刊年未詳]
  • 책권수 : 6冊, 彩色地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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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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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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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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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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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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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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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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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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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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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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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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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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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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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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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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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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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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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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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앞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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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앞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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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앞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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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앞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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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앞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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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앞표지 2면입니다.

  • ▶강원도
  • 간성군 (杆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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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중부에 있었던 간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간성군은 지금의 고성군 간성읍·현내면·거진읍·죽왕면·토성면과 속초시의 영랑호 주변에 해당된다. 해방이후 3·8선 이북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수복된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성곽(둘레240步)과 함께 객사, 아사, 영월루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지금의 간성읍 하리 일대이다. 鎭山은 읍치 서남 방향에 있는 麻耆山이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에 白頭大幹을 그리고, 뻗어 내린 산줄기에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북측 상단에 현내면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배봉천으로 보인다. 읍치의 북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천이며, 남쪽으로는 지금의 남천이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간정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청간천은 매우 작은 규모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으며, 화진포도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간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로부터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인제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에는 珍富嶺, 屹里嶺, 石破嶺, 彌恃嶺 등 많은 고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주기에는 이들 길이 매우 험준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안으로는 북으로 고성, 남으로 양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역이 비교적 많아 明波驛, 雲根驛, 竹泡驛, 元岩驛, 淸澗驛 등 5곳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00戶, 田 343結35負1束, 畓 459結11負9束로 기재되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간성군 주기 (杆城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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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중부에 있었던 간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간성군은 지금의 고성군 간성읍·현내면·거진읍·죽왕면·토성면과 속초시의 영랑호 주변에 해당된다. 해방이후 3·8선 이북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수복된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성곽(둘레240步)과 함께 객사, 아사, 영월루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지금의 간성읍 하리 일대이다. 鎭山은 읍치 서남 방향에 있는 麻耆山이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에 白頭大幹을 그리고, 뻗어 내린 산줄기에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북측 상단에 현내면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배봉천으로 보인다. 읍치의 북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천이며, 남쪽으로는 지금의 남천이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간정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청간천은 매우 작은 규모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으며, 화진포도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간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로부터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인제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에는 珍富嶺, 屹里嶺, 石破嶺, 彌恃嶺 등 많은 고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주기에는 이들 길이 매우 험준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안으로는 북으로 고성, 남으로 양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역이 비교적 많아 明波驛, 雲根驛, 竹泡驛, 元岩驛, 淸澗驛 등 5곳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00戶, 田 343結35負1束, 畓 459結11負9束로 기재되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강릉부 (江陵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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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강릉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강릉부는 현재 강릉시 용강동, 교동, 임당동, 명주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군의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도암면, 대화면, 방림면, 홍천군의 내면에 걸쳐 지금보다 매우 넓은 지역에 해당된다. 실제로는 동서로 긴 형태이나 『해동지도』등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남북이 긴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산지 표현 방법, 남대천, 내린천 등의 하천 표현 방법 및 성내동에 위치하였던 성곽(둘레 ; 3,782尺)과 읍치의 묘사, 수록 지명 등은 다른 지도와 유사하다.(지도 수록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강릉부 해제 참조) 해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에서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연곡천을,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안인역 부근에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염곡천을, 그 아래 남쪽의 하천은 주수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남류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하천은 남한강 상류의 여러 지류를 묘사한 것이다. 교통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나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한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읍성 남문에서 북쪽으로 대창역을 거쳐 양양부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는 안인역을 거쳐 삼척으로 연결되는 해안 도로가 있다. 내륙쪽으로는 도로는 월정산에서 구산역, 목계역을 거쳐 대관령을 지나 봉평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목계역에서 고단역을 거쳐 임계면을 거쳐 횡계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쪽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연곡면을 거쳐 오대산 사고를 거쳐 봉평창으로 연결된다. 본 지도에서 묘사되어 있는 월정산-송담서원, 연곡면-하동면과의 도로가 『여지도』에서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25戶, 田 791結65負, 畓 791結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강릉부 주기 (江陵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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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강릉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강릉부는 현재 강릉시 용강동, 교동, 임당동, 명주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군의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도암면, 대화면, 방림면, 홍천군의 내면에 걸쳐 지금보다 매우 넓은 지역에 해당된다. 실제로는 동서로 긴 형태이나 『해동지도』등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남북이 긴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산지 표현 방법, 남대천, 내린천 등의 하천 표현 방법 및 성내동에 위치하였던 성곽(둘레 ; 3,782尺)과 읍치의 묘사, 수록 지명 등은 다른 지도와 유사하다.(지도 수록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강릉부 해제 참조) 해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에서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연곡천을,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안인역 부근에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염곡천을, 그 아래 남쪽의 하천은 주수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남류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하천은 남한강 상류의 여러 지류를 묘사한 것이다. 교통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나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한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읍성 남문에서 북쪽으로 대창역을 거쳐 양양부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는 안인역을 거쳐 삼척으로 연결되는 해안 도로가 있다. 내륙쪽으로는 도로는 월정산에서 구산역, 목계역을 거쳐 대관령을 지나 봉평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목계역에서 고단역을 거쳐 임계면을 거쳐 횡계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쪽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연곡면을 거쳐 오대산 사고를 거쳐 봉평창으로 연결된다. 본 지도에서 묘사되어 있는 월정산-송담서원, 연곡면-하동면과의 도로가 『여지도』에서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25戶, 田 791結65負, 畓 791結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강원도 (江原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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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전체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책의 제일 앞에 강원도와 함경도 역사지리를 수록한 면에 이어 군현별 지도의 앞머리에 삽입되었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감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강원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은 다른 회화식 지도책들과 유사하나 하계망의 표현이 상세하고 다른 지도에 없는 도로망이 그려진 것이 특이하다. 지도 우측에 동해를 그렸으며 해안선은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 복잡하게 표현되었다. 해안에 발달한 석호들을 상세하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섬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따로 표현하지 않았다. 鬱陵島와 于山島만 지명을 적어 위치를 간접적으로 묘사하였다. 산지는 백두대간이 강조되어 그려졌고 동쪽에는 흡곡, 통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 평해 등 9개 군현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서쪽에는 하천 유로와 함께 17개의 군현 위치를 표시하였다. 하천 유역은 세지역으로 나뉘고 그려져 있다. 이천, 안협, 평강, 금화, 철원은 임진강 상류 유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북한강 상류유역에 위치한 군현은 회양, 금성, 낭천, 양구, 홍청, 춘천, 인제 등이며 기린은 비월지로서 별도의 부호로 표현하였다. 남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군현으로 원주, 횡성, 영월, 평창, 정선 등 5개 군현을 표시하였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은 적색 실선으로 상세히 그려져 있다.(김기혁)

  • 강원도 주기 (江原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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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전체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책의 제일 앞에 강원도와 함경도 역사지리를 수록한 면에 이어 군현별 지도의 앞머리에 삽입되었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감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강원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은 다른 회화식 지도책들과 유사하나 하계망의 표현이 상세하고 다른 지도에 없는 도로망이 그려진 것이 특이하다. 지도 우측에 동해를 그렸으며 해안선은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 복잡하게 표현되었다. 해안에 발달한 석호들을 상세하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섬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따로 표현하지 않았다. 鬱陵島와 于山島만 지명을 적어 위치를 간접적으로 묘사하였다. 산지는 백두대간이 강조되어 그려졌고 동쪽에는 흡곡, 통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 평해 등 9개 군현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서쪽에는 하천 유로와 함께 17개의 군현 위치를 표시하였다. 하천 유역은 세지역으로 나뉘고 그려져 있다. 이천, 안협, 평강, 금화, 철원은 임진강 상류 유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북한강 상류유역에 위치한 군현은 회양, 금성, 낭천, 양구, 홍청, 춘천, 인제 등이며 기린은 비월지로서 별도의 부호로 표현하였다. 남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군현으로 원주, 횡성, 영월, 평창, 정선 등 5개 군현을 표시하였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은 적색 실선으로 상세히 그려져 있다.(김기혁)

  •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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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1면입니다.

  •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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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2면입니다.

  • 고성군 (高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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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 동쪽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고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성군은 지금 북한의 고성군 고성읍,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 수동면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진산인 全城山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고, 성곽(둘레 2,123尺)을 묘사하였다. 지금의 고성군 구읍리에 위치한다. 지도의 좌측에 백두대간과 함께 금강산을 실경으로 그렸으며, 지금의 외금강에 해당된다. 하천은 백두대간의 2곳에서 발원한 후 동류하여 읍치를 감싸 돌며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신계천이며 남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남강이다. 두 하천은 읍치의 서쪽에서 합류하여 다시 分岐되어 동해안으로 유입한다. 해안선의 모습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다. 지금의 장전항 만입부는 표현되어 있지 않고, 삼일포도 훨씬 내륙지역에 그려져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驛으로 養珎驛, 高岺驛, 大康驛 등 3곳이 그려져 있다. 도로는 북으로 통천, 남으로 간성, 서로는 인제와 회양으로 이어진다. 통천으로 가는 길은 삼북면-양진역으로 연결된다. 간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동명-대강역을 통해 이어지며 이들 도로는 대체로 평탄하였다. 인제로 가는 길은 高岺驛, 炭嶺으로 연결되며, 회양은 백두대간의 溫井岺-九龍岺을 넘는다. 이들 백두대간을 넘는 길은 매우 험준함을 주기면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909戶, 田 268結19負2束, 畓 132結87負6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고성군 주기 (高城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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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 동쪽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고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성군은 지금 북한의 고성군 고성읍,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 수동면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진산인 全城山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고, 성곽(둘레 2,123尺)을 묘사하였다. 지금의 고성군 구읍리에 위치한다. 지도의 좌측에 백두대간과 함께 금강산을 실경으로 그렸으며, 지금의 외금강에 해당된다. 하천은 백두대간의 2곳에서 발원한 후 동류하여 읍치를 감싸 돌며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신계천이며 남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남강이다. 두 하천은 읍치의 서쪽에서 합류하여 다시 分岐되어 동해안으로 유입한다. 해안선의 모습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다. 지금의 장전항 만입부는 표현되어 있지 않고, 삼일포도 훨씬 내륙지역에 그려져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驛으로 養珎驛, 高岺驛, 大康驛 등 3곳이 그려져 있다. 도로는 북으로 통천, 남으로 간성, 서로는 인제와 회양으로 이어진다. 통천으로 가는 길은 삼북면-양진역으로 연결된다. 간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동명-대강역을 통해 이어지며 이들 도로는 대체로 평탄하였다. 인제로 가는 길은 高岺驛, 炭嶺으로 연결되며, 회양은 백두대간의 溫井岺-九龍岺을 넘는다. 이들 백두대간을 넘는 길은 매우 험준함을 주기면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909戶, 田 268結19負2束, 畓 132結87負6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금성현 (金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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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의 남서쪽의 내륙에 위치하였던 금성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의 김화군에 병합되면서 금성면·원동면·원남면·원북면·창도면·통구면이 되었으며, 지금은 북한의 김화군과 창도군 일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 좌측에 객사, 아사, 향교, 慶陽樓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鎭山인 慶坡山은 읍치의 북쪽에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古城이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우측에 남북으로 길게 그리고, 白亦山, 黃腸山이 읍치의 祖山으로 그려져 있다. 남대천으로 기재된 하천이 읍치 앞을 지나 동류하다가 회양으로부터 유입되는 하천과 합류한다. 남대천은 지금의 금성천이며, 우측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북한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금성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서남쪽으로 남대천을 건너 直木驛으로 적색으로 표현된 도로는 금화로 연결된다. 이 길은 당시 한양과 통하는 大路이며, 한반도 동북쪽의 함경도 서수라까지 통하는 길이었다. 남대천의 水串橋를 지나 西雲驛을 거쳐 낭천으로 이어진다. 회양으로 가는 도로는 仞乙坡峙 -昌道驛을 거쳐 연결된다. 가는 길목에 大慶津을 건너 縣倉으로 가는 작은 도로가 그려져 있다. 가까이 金剛路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의 주기 내용으로 보아 이 길은 금강산 斷髮嶺으로 가는 도로인 것으로 보인다. 주기에는 民戶 3,490戶, 田 199結43負9束, 畓 4結52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금성현 주기 (金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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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의 남서쪽의 내륙에 위치하였던 금성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의 김화군에 병합되면서 금성면·원동면·원남면·원북면·창도면·통구면이 되었으며, 지금은 북한의 김화군과 창도군 일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 좌측에 객사, 아사, 향교, 慶陽樓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鎭山인 慶坡山은 읍치의 북쪽에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古城이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우측에 남북으로 길게 그리고, 白亦山, 黃腸山이 읍치의 祖山으로 그려져 있다. 남대천으로 기재된 하천이 읍치 앞을 지나 동류하다가 회양으로부터 유입되는 하천과 합류한다. 남대천은 지금의 금성천이며, 우측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북한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금성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서남쪽으로 남대천을 건너 直木驛으로 적색으로 표현된 도로는 금화로 연결된다. 이 길은 당시 한양과 통하는 大路이며, 한반도 동북쪽의 함경도 서수라까지 통하는 길이었다. 남대천의 水串橋를 지나 西雲驛을 거쳐 낭천으로 이어진다. 회양으로 가는 도로는 仞乙坡峙 -昌道驛을 거쳐 연결된다. 가는 길목에 大慶津을 건너 縣倉으로 가는 작은 도로가 그려져 있다. 가까이 金剛路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의 주기 내용으로 보아 이 길은 금강산 斷髮嶺으로 가는 도로인 것으로 보인다. 주기에는 民戶 3,490戶, 田 199結43負9束, 畓 4結52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김화현 (金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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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김화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김화현은 지금 휴전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남한 부분은 철원군 김화읍, 근남면, 서면과 북한 부분은 김화군의 서쪽지역인 근동면, 근북면, 원북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에 읍치를 배치하였고, 남쪽에 柳琳大捷碑, 서쪽에 忠烈祠, 동쪽에 忠賢祠를 그려 넣었다. 진산은 五申山이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이웃한 금성과 낭천(지금의 화천), 춘천과의 경계는 산지로써 표현하였으며 평강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를 주변으로 감싸 돌며 서류하여 철원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의 우측 하단 馬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과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목탄천으로 추정된다. 읍치 북쪽의 白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한탄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김화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서쪽의 永平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生昌驛(김화읍 생창리 소재)을 지나 登古介를 거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길은 서울로 통하며 이 길은 지도 동쪽의 中峴을 넘어 金城으로 이어진다. 함경도 西水羅까지 통하는 이 도로는 당시 동북방향의 大路였다. 금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이외에 佛頂峴 등을 거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낭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馬峴을 지난다. 춘천, 철원, 회양으로 가는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통로마다 登古介, 可古介, 成造古介, 小古介 등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은 우리말의 고개를 한자화한 지명으로 다른 군현의 지도에서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지명이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57戶, 田 196結17負1束, 畓 13結45負4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김화현 주기 (金化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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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김화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김화현은 지금 휴전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남한 부분은 철원군 김화읍, 근남면, 서면과 북한 부분은 김화군의 서쪽지역인 근동면, 근북면, 원북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에 읍치를 배치하였고, 남쪽에 柳琳大捷碑, 서쪽에 忠烈祠, 동쪽에 忠賢祠를 그려 넣었다. 진산은 五申山이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이웃한 금성과 낭천(지금의 화천), 춘천과의 경계는 산지로써 표현하였으며 평강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를 주변으로 감싸 돌며 서류하여 철원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의 우측 하단 馬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과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목탄천으로 추정된다. 읍치 북쪽의 白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한탄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김화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서쪽의 永平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生昌驛(김화읍 생창리 소재)을 지나 登古介를 거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길은 서울로 통하며 이 길은 지도 동쪽의 中峴을 넘어 金城으로 이어진다. 함경도 西水羅까지 통하는 이 도로는 당시 동북방향의 大路였다. 금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이외에 佛頂峴 등을 거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낭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馬峴을 지난다. 춘천, 철원, 회양으로 가는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통로마다 登古介, 可古介, 成造古介, 小古介 등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은 우리말의 고개를 한자화한 지명으로 다른 군현의 지도에서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지명이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57戶, 田 196結17負1束, 畓 13結45負4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낭천현 (狼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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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낭천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1895년(고종 32)에 화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지도 여백에 “今皇上壬寅改華川”라는 내용이 별지로 첨부되어 있다. 조선시대 낭천군은 지금 화천군의 상서면, 화천읍, 하남면, 간동면 일대에 해당되며 사내면은 당시에는 춘천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진산인 牲山은 읍치의 서쪽에 그렸다. 춘천부와 금화, 양구현과의 경계를 산지로 표현하였다. 하천은 금성으로부터 유입하여 춘천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하천은 지금의 북한강 상류에 해당되며 화천댐 건설로 파로호가 된 곳이다. 지도의 북서쪽에서 흘러 들어와 읍치 북쪽을 감싸도는 2곳의 하천은 지금의 마헌천과 봉모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좌측의 啓里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논미천으로 생각된다. 하서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鋤吾之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현재 하남면에는 동리지명으로 서오지리가 남아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낭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와 경계가 되는 山의 위치, 명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남쪽에는 原川驛(하남면 원천리 소재)을 지나 서오지천을 건너는 도로는 춘천부로 이어진다. 읍치의 동쪽으로 觀佛峴을 지나 芳川驛(간동면 방천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四明山을 지나 양구현으로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彌勒峴을 지나 山陽驛(상서면 산양리 소재)에서 길이 갈라져 김화와 금성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76戶, 田 201結96負7束, 畓 14結1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낭천현 주기 (狼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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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낭천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1895년(고종 32)에 화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지도 여백에 “今皇上壬寅改華川”라는 내용이 별지로 첨부되어 있다. 조선시대 낭천군은 지금 화천군의 상서면, 화천읍, 하남면, 간동면 일대에 해당되며 사내면은 당시에는 춘천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진산인 牲山은 읍치의 서쪽에 그렸다. 춘천부와 금화, 양구현과의 경계를 산지로 표현하였다. 하천은 금성으로부터 유입하여 춘천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하천은 지금의 북한강 상류에 해당되며 화천댐 건설로 파로호가 된 곳이다. 지도의 북서쪽에서 흘러 들어와 읍치 북쪽을 감싸도는 2곳의 하천은 지금의 마헌천과 봉모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좌측의 啓里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논미천으로 생각된다. 하서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鋤吾之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현재 하남면에는 동리지명으로 서오지리가 남아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낭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와 경계가 되는 山의 위치, 명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남쪽에는 原川驛(하남면 원천리 소재)을 지나 서오지천을 건너는 도로는 춘천부로 이어진다. 읍치의 동쪽으로 觀佛峴을 지나 芳川驛(간동면 방천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四明山을 지나 양구현으로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彌勒峴을 지나 山陽驛(상서면 산양리 소재)에서 길이 갈라져 김화와 금성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76戶, 田 201結96負7束, 畓 14結1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삼척부 (三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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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의 동해안과 내륙에 걸쳐 위치하였던 삼척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척부는 지금의 삼척시와 태백시 전체, 평릉동을 포함한 남쪽의 동해시(옛 북평읍)에 해당되는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지도의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치우쳐 객사와 아사, 성곽(둘레; 570步)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다. 현재의 삼척시 성내동 일대이다. 고을의 鎭山이 읍치의 북서쪽 가까이에 그려진 葛夜山이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과 함께 竹嶺, 楡嶺을 표시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하천이 동해로 유입하며 그중 가장 큰 하천은 읍치를 감싸고 흐르는 五十川이다. 그 남쪽에 지금의 교곡천, 마음천, 주천천 등이 묘사되어 있다. 지도의 좌측 하단에는 태백산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黃池가 표시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삼척부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을 거쳐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旌善ㆍ寧越去路가 두 곳에 표시되어 있으며, 태백산 부근에 安東ㆍ春陽去路가 있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平陵驛과 新興驛을 지나는 두곳의 도로가 그려져 있고, 울진과 안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交柯驛, 龍化驛, 沃原驛이 있다. 한편 史直驛의 경우 다른 회화식 지도에서는 역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史直庫로 표기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39戶, 田 612結98負5束, 畓 214結89負9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군현에 비해 논농사 비율이 비교적 높다. (김기혁)

  • 삼척부 주기 (三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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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의 동해안과 내륙에 걸쳐 위치하였던 삼척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척부는 지금의 삼척시와 태백시 전체, 평릉동을 포함한 남쪽의 동해시(옛 북평읍)에 해당되는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지도의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치우쳐 객사와 아사, 성곽(둘레; 570步)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다. 현재의 삼척시 성내동 일대이다. 고을의 鎭山이 읍치의 북서쪽 가까이에 그려진 葛夜山이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과 함께 竹嶺, 楡嶺을 표시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하천이 동해로 유입하며 그중 가장 큰 하천은 읍치를 감싸고 흐르는 五十川이다. 그 남쪽에 지금의 교곡천, 마음천, 주천천 등이 묘사되어 있다. 지도의 좌측 하단에는 태백산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黃池가 표시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삼척부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을 거쳐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旌善ㆍ寧越去路가 두 곳에 표시되어 있으며, 태백산 부근에 安東ㆍ春陽去路가 있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平陵驛과 新興驛을 지나는 두곳의 도로가 그려져 있고, 울진과 안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交柯驛, 龍化驛, 沃原驛이 있다. 한편 史直驛의 경우 다른 회화식 지도에서는 역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史直庫로 표기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39戶, 田 612結98負5束, 畓 214結89負9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군현에 비해 논농사 비율이 비교적 높다. (김기혁)

  • 안협현 (安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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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서쪽의 임진강 상류 유역에 있었던 안협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이천군에 귀속되어 안협면·동면,·서면에 속하였다. 지금은 북한의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 아사와 향교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산지는 동서 줄기를 중심으로 묘사되었으며 남북 줄기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북쪽에 진산인 晩景山(방안식 지도에서는 萬景山으로 기재)을 배치하였다. 하천은 지도의 좌측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지금의 임진강 상류이다. 4개의 지류가 임진강으로 유입하고 있다. 이중 평강현에서 유입하여 동면을 거쳐 읍치 북쪽을 지나 임진강과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평안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협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이면의 주기에는 평강현에 험준한 嶺隘가 별로 없음을 기재하였다. 읍치의 남쪽으로 남으로는 경기도 朔寧과 鐵原으로 이어지는 길이 적색으로 그려져 있고 ‘京去路’(일부지도에서는 ‘去京路’의 기재), ‘鐵原去路’라고 표시하였다. 남서쪽으로는 兎山, 북쪽으로 伊川과 이어지는 길이 하천을 따라 그려져 있다. 동으로은 東面을 거쳐 평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78戶, 田 185結66負, 畓 75負8束로 기재되어 있어 현의 크기가 매우 작고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안협현 주기 (安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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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서쪽의 임진강 상류 유역에 있었던 안협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이천군에 귀속되어 안협면·동면,·서면에 속하였다. 지금은 북한의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 아사와 향교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산지는 동서 줄기를 중심으로 묘사되었으며 남북 줄기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북쪽에 진산인 晩景山(방안식 지도에서는 萬景山으로 기재)을 배치하였다. 하천은 지도의 좌측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지금의 임진강 상류이다. 4개의 지류가 임진강으로 유입하고 있다. 이중 평강현에서 유입하여 동면을 거쳐 읍치 북쪽을 지나 임진강과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평안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협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이면의 주기에는 평강현에 험준한 嶺隘가 별로 없음을 기재하였다. 읍치의 남쪽으로 남으로는 경기도 朔寧과 鐵原으로 이어지는 길이 적색으로 그려져 있고 ‘京去路’(일부지도에서는 ‘去京路’의 기재), ‘鐵原去路’라고 표시하였다. 남서쪽으로는 兎山, 북쪽으로 伊川과 이어지는 길이 하천을 따라 그려져 있다. 동으로은 東面을 거쳐 평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78戶, 田 185結66負, 畓 75負8束로 기재되어 있어 현의 크기가 매우 작고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구현 (楊口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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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양구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 휴전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로 지나고 있다. 조선시대 양구현은 현재 휴전선 이남의 양구군과 거의 비슷하다. 일제시대 양구군의 수입면은 조선시대에는 회양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진산인 飛鳳山을 동측에 두고 읍치를 그렸다. 읍치는 지금의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춘천과 인제, 회양과의 경계는 산지로 표현하였으며 낭천(지금의 화천)과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북동쪽의 계산령에서 발원한 하천이 남류하면서 읍치를 감싸 돈후 다시 북류하여 낭천으로 유입된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로 지금은 화천댐의 건설로 파로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상류부에서 본류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팔량선, 광지천, 청리천 등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서쪽의 방산면과 북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류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입천으로 추정된다. 양구현의 남쪽에는 소양강이 춘천과 경계를 이루며 서류하고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일부 지류가 그려져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구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북서쪽으로 含春驛(양구읍 하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낭천현으로 이어지며, 왼쪽 아래의 水仁驛(양구읍 수인리 소재)을 지나 춘천과 연결된다. 인제로 이어지는 도로는 여러 길이 있다. 읍치의 남쪽의 道里峙를 지나 인제로 이어지는 길은 지금의 소양호로 연결된다. 廣峙를 지나는 도로는 인제를 거쳐 양양부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66戶, 田 200結46負9束, 畓 27結69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구현 주기 (楊口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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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양구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 휴전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로 지나고 있다. 조선시대 양구현은 현재 휴전선 이남의 양구군과 거의 비슷하다. 일제시대 양구군의 수입면은 조선시대에는 회양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진산인 飛鳳山을 동측에 두고 읍치를 그렸다. 읍치는 지금의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춘천과 인제, 회양과의 경계는 산지로 표현하였으며 낭천(지금의 화천)과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북동쪽의 계산령에서 발원한 하천이 남류하면서 읍치를 감싸 돈후 다시 북류하여 낭천으로 유입된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로 지금은 화천댐의 건설로 파로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상류부에서 본류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팔량선, 광지천, 청리천 등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서쪽의 방산면과 북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류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입천으로 추정된다. 양구현의 남쪽에는 소양강이 춘천과 경계를 이루며 서류하고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일부 지류가 그려져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구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북서쪽으로 含春驛(양구읍 하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낭천현으로 이어지며, 왼쪽 아래의 水仁驛(양구읍 수인리 소재)을 지나 춘천과 연결된다. 인제로 이어지는 도로는 여러 길이 있다. 읍치의 남쪽의 道里峙를 지나 인제로 이어지는 길은 지금의 소양호로 연결된다. 廣峙를 지나는 도로는 인제를 거쳐 양양부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66戶, 田 200結46負9束, 畓 27結69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양부 (襄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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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연해 있던 양양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양양부는 지금의 양양군과 영랑호 주변을 제외한 속초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진산은 설악산이나 지도에는 天叩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성곽 표시(둘레 2,380尺)와 함께 지도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 줄기를 그리고 동해안에는 의상대, 청초호 등이 있다. 부치의 남쪽을 흐르는 남대천이 오색령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며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현재의 물치천이 읍치의 북쪽에서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양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에는 五色岺, 朴達岺, 阻枕岺, 九龍岺 등이 있어 읍치에서 인제와 춘천 등을 잇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들 도로가 매우 험난한 통로임을 이면의 주기에 밝혀 놓았다. 부치의 남쪽 도로로는 읍성의 남문에서 남대천교를 지나 상운역을 거쳐 강릉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連倉驛을 거쳐 낙산사를 지나 간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 신흥사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25戶, 田 323結12負6束, 畓 476結 2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지역보다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양부 주기 (襄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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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연해 있던 양양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양양부는 지금의 양양군과 영랑호 주변을 제외한 속초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진산은 설악산이나 지도에는 天叩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성곽 표시(둘레 2,380尺)와 함께 지도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 줄기를 그리고 동해안에는 의상대, 청초호 등이 있다. 부치의 남쪽을 흐르는 남대천이 오색령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며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현재의 물치천이 읍치의 북쪽에서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양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에는 五色岺, 朴達岺, 阻枕岺, 九龍岺 등이 있어 읍치에서 인제와 춘천 등을 잇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들 도로가 매우 험난한 통로임을 이면의 주기에 밝혀 놓았다. 부치의 남쪽 도로로는 읍성의 남문에서 남대천교를 지나 상운역을 거쳐 강릉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連倉驛을 거쳐 낙산사를 지나 간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 신흥사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25戶, 田 323結12負6束, 畓 476結 2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지역보다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영월부 (寧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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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영월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월부는 지금의 영월군 중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된다. 동으로 삼척에 접하고 서로 원주와 제천에 접하고 있어 동서로 긴 형태를 띠고 있으나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전체 구도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다.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성곽 시설은 없다. 가까이에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인 莊陵과 陵寺인 보덕사가 표시되어 있다. 산세는 동쪽에 백두대간의 내맥을 표현하여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읍치는 두만산에서 이어진 맥이 성산과 증산을 거쳐 내려오다 동쪽으로 삼옥치(광여도에서는 삼왕치로 기재)를 거쳐 읍치를 감싸면 서로는 加斤峙로 이어진다. 서강이 청령포를 지나 읍치 앞으로 흐르며서 동강을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월부 해제 참조). 다른 지도들과는 달리 영월부의 도로가 상세하게 표현된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다른 지도에는 陽淵驛, 延平驛, 高德驛 등 3곳의 역이 기재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고덕역이 고덕치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는 영춘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고, 동으로는 삼옥치-상동면을 거쳐 삼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으로는 분덕치를 지나 刀摩寺를 거쳐 평창(지도에는 ‘昌平’으로 기재되어 있다)으로 연결되고, 延平驛에서 고덕치를 지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정선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栗峴을 거친다. 서로는 가근치를 넘어 양연역을 거쳐 제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造乙峙를 지나며 원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龍井院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영월부 주기 (寧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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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영월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월부는 지금의 영월군 중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된다. 동으로 삼척에 접하고 서로 원주와 제천에 접하고 있어 동서로 긴 형태를 띠고 있으나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전체 구도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다.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성곽 시설은 없다. 가까이에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인 莊陵과 陵寺인 보덕사가 표시되어 있다. 산세는 동쪽에 백두대간의 내맥을 표현하여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읍치는 두만산에서 이어진 맥이 성산과 증산을 거쳐 내려오다 동쪽으로 삼옥치(광여도에서는 삼왕치로 기재)를 거쳐 읍치를 감싸면 서로는 加斤峙로 이어진다. 서강이 청령포를 지나 읍치 앞으로 흐르며서 동강을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월부 해제 참조). 다른 지도들과는 달리 영월부의 도로가 상세하게 표현된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다른 지도에는 陽淵驛, 延平驛, 高德驛 등 3곳의 역이 기재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고덕역이 고덕치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는 영춘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고, 동으로는 삼옥치-상동면을 거쳐 삼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으로는 분덕치를 지나 刀摩寺를 거쳐 평창(지도에는 ‘昌平’으로 기재되어 있다)으로 연결되고, 延平驛에서 고덕치를 지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정선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栗峴을 거친다. 서로는 가근치를 넘어 양연역을 거쳐 제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造乙峙를 지나며 원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龍井院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울릉도 (鬱陵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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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상의 울릉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가 제작될 당시 울릉도는 강원도 군현에서 주관하여 매 2-3년 간격으로 搜討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강원도 관할에 속하여 있었다. 지금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해당된다. 당시에 군현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현 지도책에 낱장으로 삽입된 것은 울릉도에 대한 지리적인 지식이 많이 유입되었고, 동해를 중심으로 높아진 영토 의식을 반영한다. 1711년 박석창이 수토후 제작한 「울릉도도형」(규장각 소장)에는 中峰이 유일한 지명으로 기재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이외의 지명이 추가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수토를 통해 지리적인 지식이 지속적으로 보완되었음을 보여준다. 두 지도의 구도는 유사하다. 중앙에 中峰(현재 성인봉)을 배치하였고, 산지는 독립된 봉우리 형태로 그렸다. 방안식 지도에서 줄기로 표현되는 것과 대비된다. 중봉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6곳이 그려져 있으며 그 형태도 방안식 군현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6곳의 도서가 묘사되어 있고 이중 동쪽에 배치된 섬에는 ‘所謂于山島’라는 기록이 있다. 于山島 지명은 동해상의 獨島를 지칭한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었으나 최근 울릉도 부속도서인 竹島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릉도 해제 참조). 이면의 주기에는 ‘周面二百餘里 東西八十餘里 南北五十餘里’라고 되어 있어 섬의 규모를 기재하고 있다. 특산물로 甘藷, 生鰒, 可之魚 등 16종, 飛禽으로 鷹, 鳥 등 4종, 走獸로 猫, 鼠 등 2종이 기록되어 있다. (김기혁)

  • 울릉도 주기 (鬱陵島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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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상의 울릉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가 제작될 당시 울릉도는 강원도 군현에서 주관하여 매 2-3년 간격으로 搜討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강원도 관할에 속하여 있었다. 지금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해당된다. 당시에 군현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현 지도책에 낱장으로 삽입된 것은 울릉도에 대한 지리적인 지식이 많이 유입되었고, 동해를 중심으로 높아진 영토 의식을 반영한다. 1711년 박석창이 수토후 제작한 「울릉도도형」(규장각 소장)에는 中峰이 유일한 지명으로 기재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이외의 지명이 추가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수토를 통해 지리적인 지식이 지속적으로 보완되었음을 보여준다. 두 지도의 구도는 유사하다. 중앙에 中峰(현재 성인봉)을 배치하였고, 산지는 독립된 봉우리 형태로 그렸다. 방안식 지도에서 줄기로 표현되는 것과 대비된다. 중봉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6곳이 그려져 있으며 그 형태도 방안식 군현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6곳의 도서가 묘사되어 있고 이중 동쪽에 배치된 섬에는 ‘所謂于山島’라는 기록이 있다. 于山島 지명은 동해상의 獨島를 지칭한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었으나 최근 울릉도 부속도서인 竹島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릉도 해제 참조). 이면의 주기에는 ‘周面二百餘里 東西八十餘里 南北五十餘里’라고 되어 있어 섬의 규모를 기재하고 있다. 특산물로 甘藷, 生鰒, 可之魚 등 16종, 飛禽으로 鷹, 鳥 등 4종, 走獸로 猫, 鼠 등 2종이 기록되어 있다. (김기혁)

  • 울진현 (蔚珍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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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강원도 동해안 남부에 위치하였던 울진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경상북도에 속해있으며, 울진군 울진읍·근남면·원남면·서면·죽변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를 성곽없이 지도의 중앙 우측에 배치하였다. 지금의 울진읍 읍내리에 소재한다. 진산인 安逸王山은 읍치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읍치 가까이에 古山城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생략되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표현하였으며 특히 죽변 일대(지도에서는 ‘竹田’ 으로 표현)에 발달한 두각지는 묘사되지 않았다. 서쪽에 백두대간을 묘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읍치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부구천과 두천천으로 보이며 읍치 남쪽을 감싸도는 하천은 지금의 광천으로 추정된다. 남쪽의 ‘嵐水山’(다른 울진 지도에는 ‘風水山’으로 기재되어 있다)에서 발원한 하천은 매화천이며 하류에서 지금의 왕피천과 합류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진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삼척부로 이어지는 도로는 북쪽에 위치한 興富驛館을 지나 葛峴을 넘어 연결된다. 평해로 연결되는 길은 前川橋를 守山驛-德新驛을 거쳐 연결된다. 내륙의 안동, 영양과 이어지는 도로는 鼎峙, 召造院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기에 도로가 매우 험준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238戶, 田 414結80, 畓 291結55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않에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울진현 주기 (蔚珍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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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강원도 동해안 남부에 위치하였던 울진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경상북도에 속해있으며, 울진군 울진읍·근남면·원남면·서면·죽변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를 성곽없이 지도의 중앙 우측에 배치하였다. 지금의 울진읍 읍내리에 소재한다. 진산인 安逸王山은 읍치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읍치 가까이에 古山城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생략되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표현하였으며 특히 죽변 일대(지도에서는 ‘竹田’ 으로 표현)에 발달한 두각지는 묘사되지 않았다. 서쪽에 백두대간을 묘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읍치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부구천과 두천천으로 보이며 읍치 남쪽을 감싸도는 하천은 지금의 광천으로 추정된다. 남쪽의 ‘嵐水山’(다른 울진 지도에는 ‘風水山’으로 기재되어 있다)에서 발원한 하천은 매화천이며 하류에서 지금의 왕피천과 합류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진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삼척부로 이어지는 도로는 북쪽에 위치한 興富驛館을 지나 葛峴을 넘어 연결된다. 평해로 연결되는 길은 前川橋를 守山驛-德新驛을 거쳐 연결된다. 내륙의 안동, 영양과 이어지는 도로는 鼎峙, 召造院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기에 도로가 매우 험준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238戶, 田 414結80, 畓 291結55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않에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원주목 (原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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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원주목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원주목은 강원도 감영이 있었으며, 지금의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북내면 동쪽에 해당한다. 다른 군현의 지도와는 달리 원주 지도에는 위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주는 1683년-1692년(숙종 9-18)과 1728년-1737년(영조 4-13) 사이에 原城縣으로 강등된 적이 있다.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지도들에는 原城으로 표시되어 있다. 동으로는 영월, 서로는 여주에 달하였기 때문에 동서로 매우 넓은 지역이었으나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평창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서쪽은 하천으로 여주·홍천과 경계를 이룬다. 횡성에서 유입하여 지도 좌측으로 흐르다가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섬강을 그린 것이다. 섬강 좌안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원주천과 백운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의 표현이 없이 객사, 아사를 중심으로 지도 중앙에 그려져 있다 지금의 원주시 일산동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원주목 해제 참조). 교통로와 역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나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이 지도에서 묘사된 교통로는 읍치에서 북쪽으로 횡성으로 이어지는 2개의 도로와 서쪽으로 유원역을 거쳐 지평으로 이어지는 도로, 서남방향으로 여주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 단구역-충주, 신림역-제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간선도로는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체로 일치하나 『지승』에서는 섬암강을 따라 도로가 추가로 그려져 있는 등 여러 지선 도로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8,556戶, 田 1,535結99負2束, 畓 758結57負4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원주목 주기 (原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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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원주목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원주목은 강원도 감영이 있었으며, 지금의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북내면 동쪽에 해당한다. 다른 군현의 지도와는 달리 원주 지도에는 위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주는 1683년-1692년(숙종 9-18)과 1728년-1737년(영조 4-13) 사이에 原城縣으로 강등된 적이 있다.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지도들에는 原城으로 표시되어 있다. 동으로는 영월, 서로는 여주에 달하였기 때문에 동서로 매우 넓은 지역이었으나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평창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서쪽은 하천으로 여주·홍천과 경계를 이룬다. 횡성에서 유입하여 지도 좌측으로 흐르다가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섬강을 그린 것이다. 섬강 좌안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원주천과 백운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의 표현이 없이 객사, 아사를 중심으로 지도 중앙에 그려져 있다 지금의 원주시 일산동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원주목 해제 참조). 교통로와 역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나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이 지도에서 묘사된 교통로는 읍치에서 북쪽으로 횡성으로 이어지는 2개의 도로와 서쪽으로 유원역을 거쳐 지평으로 이어지는 도로, 서남방향으로 여주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 단구역-충주, 신림역-제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간선도로는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체로 일치하나 『지승』에서는 섬암강을 따라 도로가 추가로 그려져 있는 등 여러 지선 도로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8,556戶, 田 1,535結99負2束, 畓 758結57負4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이천부 (伊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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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이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천부는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이천군·판교군·법동군 일대에 해당된다. 이천부의 실재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지도 하단부에 배치하였, 진산인 城山으로부터 내려온 줄기가 읍치를 감싸고 있다. 임진강이 부의 동쪽인 평강에서 유입하여 부의 중앙부를 서류하다가 하중도인 蛇島 부근에서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구당리천)을 합류하며 남류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부의 동쪽인 분지치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고미탄천)은 읍치의 남쪽을 감싸며 서류하다가 임진강과 합류된다. 읍치는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묘사되었고, 성곽 시설은 없다. 지금의 이천읍 향교리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이천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부내에는 역으로 乾川譯 한곳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 송나리현을 겨쳐 안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高城津을 지나 곡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부의 북쪽으로 고성진을 건너 檜弥時峴-廣峴-방응치, 축령, 박달령을 지나 안변으로 이어지며 이 도로가 당시 이천부의 주 간선도로였다. 동쪽으로 분지치를 지나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의 지역에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이천부 주기 (伊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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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이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천부는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이천군·판교군·법동군 일대에 해당된다. 이천부의 실재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지도 하단부에 배치하였, 진산인 城山으로부터 내려온 줄기가 읍치를 감싸고 있다. 임진강이 부의 동쪽인 평강에서 유입하여 부의 중앙부를 서류하다가 하중도인 蛇島 부근에서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구당리천)을 합류하며 남류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부의 동쪽인 분지치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고미탄천)은 읍치의 남쪽을 감싸며 서류하다가 임진강과 합류된다. 읍치는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묘사되었고, 성곽 시설은 없다. 지금의 이천읍 향교리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이천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부내에는 역으로 乾川譯 한곳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 송나리현을 겨쳐 안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高城津을 지나 곡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부의 북쪽으로 고성진을 건너 檜弥時峴-廣峴-방응치, 축령, 박달령을 지나 안변으로 이어지며 이 도로가 당시 이천부의 주 간선도로였다. 동쪽으로 분지치를 지나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의 지역에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인제현 (麟蹄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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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소재하였던 인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인제현은 지금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인제군에 해당된다. 당시 두 면은 춘천부에 속해 있었다. 인제군의 북쪽 지역은 휴전선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도 명칭에서 사용된 ‘獜’字는 ‘麟’의 속자이다. 실제 형태는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정방형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객사, 아사, 향교로 구성된 읍치를 진산인 伏龍山과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읍치는 지금의 인제읍 상동리·합강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주변의 산세는 매우 험준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지도의 동쪽에 백두대간을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성, 간성, 양양과의 경계를 표시하였다. 북으로는 양구, 서남으로는 홍천과의 경계도 산지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하천의 여러 지류들이 서류하면서 읍치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의 소양천으로 댐의 건설로 소양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의 하천은 지금의 서화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龍臺山과 雪嶽山에서 발원한 하천은 각각 북천과 한계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북천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영실천에 해당된다. 읍치 남쪽 동면에서 북쪽으로 흘러 유입되는 하천은 내린천을, 읍치 서쪽에서 남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가야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인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서화천을 따라 연결된 도로는 炭嶺을 지나 고성으로 이어진다. 간성과는 진부령, 양양과는 오색령을 통해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양구로는 廣峙, 沙乃峙를 통해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11戶, 田 130結85負5束, 畓 10結38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인제현 주기 (麟蹄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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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소재하였던 인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인제현은 지금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인제군에 해당된다. 당시 두 면은 춘천부에 속해 있었다. 인제군의 북쪽 지역은 휴전선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도 명칭에서 사용된 ‘獜’字는 ‘麟’의 속자이다. 실제 형태는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정방형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객사, 아사, 향교로 구성된 읍치를 진산인 伏龍山과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읍치는 지금의 인제읍 상동리·합강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주변의 산세는 매우 험준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지도의 동쪽에 백두대간을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성, 간성, 양양과의 경계를 표시하였다. 북으로는 양구, 서남으로는 홍천과의 경계도 산지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하천의 여러 지류들이 서류하면서 읍치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의 소양천으로 댐의 건설로 소양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의 하천은 지금의 서화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龍臺山과 雪嶽山에서 발원한 하천은 각각 북천과 한계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북천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영실천에 해당된다. 읍치 남쪽 동면에서 북쪽으로 흘러 유입되는 하천은 내린천을, 읍치 서쪽에서 남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가야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인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서화천을 따라 연결된 도로는 炭嶺을 지나 고성으로 이어진다. 간성과는 진부령, 양양과는 오색령을 통해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양구로는 廣峙, 沙乃峙를 통해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11戶, 田 130結85負5束, 畓 10結38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정선군 (旌善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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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부에 위치하였던 정선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정선군은 지금의 강원도 정선군중 북면, 정선읍, 동면, 남면, 사북읍, 고한읍 일대에 해당된다. 임계면은 강릉부, 신동읍은 평창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중앙에 고을의 鎭山인 飛鳳山과 함께 객사, 아사, 향교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있다. 현재 정선읍 봉양리 일대이다. 지도의 중앙을 남한강의 상류인 조양강이 북동에서 흘러 내려와 읍치를 감싸돌며 남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영월 동강과 만난다. 실제로는 읍치가 봉양리가 하천 가까이 입지하고 있으나 지도에서는 훨씬 내륙쪽으로 그려져 있다. 조양강 상류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송천과 용탄천이며, 지도의 아래 부분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동대천이다. 조양강의 상류는 임계천이라고도 불린다. 부근에 표시된 餘粮驛 가까이 유명한 아우라지 나루가 있어 정선 아리랑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정선군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여러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주 도로는 강릉, 삼척, 영월로 연결된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좌측에 표시된 碧呑驛(현재 정선읍 용탄리)을 거쳐 伽俚王山, 碧波嶺(정선읍 회동리 소재)을 지난다. 삼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조양강 하안-餘粮驛(현재 북면 여량리 소재)를 지난다. 倉으로는 沒雲倉 등 2곳이 있다. 주기에는 民戶 2,153戶, 田 159結93負8束, 畓 72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정선군 주기 (旌善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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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부에 위치하였던 정선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정선군은 지금의 강원도 정선군중 북면, 정선읍, 동면, 남면, 사북읍, 고한읍 일대에 해당된다. 임계면은 강릉부, 신동읍은 평창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중앙에 고을의 鎭山인 飛鳳山과 함께 객사, 아사, 향교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있다. 현재 정선읍 봉양리 일대이다. 지도의 중앙을 남한강의 상류인 조양강이 북동에서 흘러 내려와 읍치를 감싸돌며 남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영월 동강과 만난다. 실제로는 읍치가 봉양리가 하천 가까이 입지하고 있으나 지도에서는 훨씬 내륙쪽으로 그려져 있다. 조양강 상류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송천과 용탄천이며, 지도의 아래 부분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동대천이다. 조양강의 상류는 임계천이라고도 불린다. 부근에 표시된 餘粮驛 가까이 유명한 아우라지 나루가 있어 정선 아리랑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정선군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여러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주 도로는 강릉, 삼척, 영월로 연결된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좌측에 표시된 碧呑驛(현재 정선읍 용탄리)을 거쳐 伽俚王山, 碧波嶺(정선읍 회동리 소재)을 지난다. 삼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조양강 하안-餘粮驛(현재 북면 여량리 소재)를 지난다. 倉으로는 沒雲倉 등 2곳이 있다. 주기에는 民戶 2,153戶, 田 159結93負8束, 畓 72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철원부 (鐵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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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철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철원부는 지금의 철원군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어운면·북면·묘장면과 포천군의 관인면 및 연천군의 신서면에 해당된다. 일부지역은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지도의 구성은 다른 군현지도와는 달리 안정된 구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으며, 산지도 대부분 분리되어 그려져 있다. 鎭山인 高岩山은 지도의 좌측 상단에 표시되어 있으나 읍치와의 연결성을 나타내고 있지 못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측과 서측에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동쪽의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으로 남류하여 한탄강과 합류한다. 서쪽의 하천은 지금의 역곡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철원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당시 한양과 북부 지방을 잇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연천으로 서울과 연결되는 도로로 京路가 2곳에 표시되었고, 금화와는 去北路, 삭령과 이어지는 도로로 去安峽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외에 고암산 밑의 積石寺와 연결되는 도로와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역으로는 永平으로 가는 길목에 豊田驛(지금의 갈말읍 군탄리 소재)이 있으며 倉은 2곳에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19戶, 田 534結23負7束, 畓 47結48負2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철원부 주기 (鐵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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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철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철원부는 지금의 철원군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어운면·북면·묘장면과 포천군의 관인면 및 연천군의 신서면에 해당된다. 일부지역은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지도의 구성은 다른 군현지도와는 달리 안정된 구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으며, 산지도 대부분 분리되어 그려져 있다. 鎭山인 高岩山은 지도의 좌측 상단에 표시되어 있으나 읍치와의 연결성을 나타내고 있지 못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측과 서측에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동쪽의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으로 남류하여 한탄강과 합류한다. 서쪽의 하천은 지금의 역곡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철원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당시 한양과 북부 지방을 잇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연천으로 서울과 연결되는 도로로 京路가 2곳에 표시되었고, 금화와는 去北路, 삭령과 이어지는 도로로 去安峽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외에 고암산 밑의 積石寺와 연결되는 도로와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역으로는 永平으로 가는 길목에 豊田驛(지금의 갈말읍 군탄리 소재)이 있으며 倉은 2곳에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19戶, 田 534結23負7束, 畓 47結48負2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춘천부 (春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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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춘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춘천부는 지금의 춘천시 전체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된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인제 부근의 기린면 일대가 비월지로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지도 우측 상단에 연결하여 그렸다. 지도의 중심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묘사하였고 동쪽에 진산인 鳳儀山 지명이 있다. 지금의 춘천시 요선동 일대이다. 읍치의 북쪽에 북한강과 소양강을 묘사하였다. 현재 춘천댐이 건설되어 있는 북한강 상류의 하천지명은 母津江, 吾梅江으로 기록해 놓았으며 소양강과 합류한 후의 하천 지명은 新淵江으로 표기하였다. 지금의 소양강에는 原河津, 大同津 등의 나루터를 표시하였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춘천부 해제 참조). 도로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倉이 4곳이 기재되어 있으며 특히 읍치 위쪽에 있는 江倉은 소양강창으로서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이었다. 읍치의 동남쪽으로는 安保驛을 거쳐 嘉平(지금의 加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홍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原昌驛이나 德勇峙를 거치는 2곳의 도로가 표시되었다. 북쪽의 狼川(지금의 화천)과 이어지는 도로는 仁嵐驛, 인제로 가는 도로에는 富昌驛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51戶, 田 1,572結, 畓 330結 44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춘천부 주기 (春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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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춘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춘천부는 지금의 춘천시 전체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된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인제 부근의 기린면 일대가 비월지로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지도 우측 상단에 연결하여 그렸다. 지도의 중심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묘사하였고 동쪽에 진산인 鳳儀山 지명이 있다. 지금의 춘천시 요선동 일대이다. 읍치의 북쪽에 북한강과 소양강을 묘사하였다. 현재 춘천댐이 건설되어 있는 북한강 상류의 하천지명은 母津江, 吾梅江으로 기록해 놓았으며 소양강과 합류한 후의 하천 지명은 新淵江으로 표기하였다. 지금의 소양강에는 原河津, 大同津 등의 나루터를 표시하였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춘천부 해제 참조). 도로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倉이 4곳이 기재되어 있으며 특히 읍치 위쪽에 있는 江倉은 소양강창으로서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이었다. 읍치의 동남쪽으로는 安保驛을 거쳐 嘉平(지금의 加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홍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原昌驛이나 德勇峙를 거치는 2곳의 도로가 표시되었다. 북쪽의 狼川(지금의 화천)과 이어지는 도로는 仁嵐驛, 인제로 가는 도로에는 富昌驛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51戶, 田 1,572結, 畓 330結 44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통천군 (通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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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최북단에 있던 통천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통천군은 지금의 북한 강원도 통천군과 고성군에 걸쳐 있던 지역이었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표현되는 고을의 鎭山인 登禾山은 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를 지도의 중앙 상단에 배치하고 서로는 백두대간을 배치하였다. 통천군의 해안의 방향은 북서-남동이나 지도에서는 북-남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는 총석정을 실경으로 표현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하는 여러 하천이 동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장 큰 하천은 읍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광교천이며 북쪽에서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십이현천이다. 대부분 하천의 유로가 일직선상으로 동해에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조선지도』 등의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지금의 암남천 만입부가 매우 과장되어 그려진 것과는 대조된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통천군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3곳이 있다. 이중 楸池岺과 洒岺을 넘어 淮陽으로 연결되는 길이 대로에 해당된다. 이면의 주기에 이 도로가 험준함을 밝히고 있다. 한편 楸池岺으로 가는 길에는 中臺館이 있다. 남쪽으로는 읍치에서 巨豊驛-樓橋-登路驛-朝珎驛을 거쳐 高城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한편 朝珎驛에는 ‘館’ 표기가 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흡곡과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들 도로는 대부분 평탄하였음을 주기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09戶, 田 256結69負6束, 畓 152結15負1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통천군 주기 (通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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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최북단에 있던 통천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통천군은 지금의 북한 강원도 통천군과 고성군에 걸쳐 있던 지역이었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표현되는 고을의 鎭山인 登禾山은 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를 지도의 중앙 상단에 배치하고 서로는 백두대간을 배치하였다. 통천군의 해안의 방향은 북서-남동이나 지도에서는 북-남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는 총석정을 실경으로 표현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하는 여러 하천이 동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장 큰 하천은 읍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광교천이며 북쪽에서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십이현천이다. 대부분 하천의 유로가 일직선상으로 동해에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조선지도』 등의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지금의 암남천 만입부가 매우 과장되어 그려진 것과는 대조된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통천군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3곳이 있다. 이중 楸池岺과 洒岺을 넘어 淮陽으로 연결되는 길이 대로에 해당된다. 이면의 주기에 이 도로가 험준함을 밝히고 있다. 한편 楸池岺으로 가는 길에는 中臺館이 있다. 남쪽으로는 읍치에서 巨豊驛-樓橋-登路驛-朝珎驛을 거쳐 高城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한편 朝珎驛에는 ‘館’ 표기가 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흡곡과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들 도로는 대부분 평탄하였음을 주기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09戶, 田 256結69負6束, 畓 152結15負1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평강현 (平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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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평강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강현은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에 해당된다. 지금의 평강읍 동변리에 소재한 읍치를 지도의 중앙 아래 부분에 四寬亭과 함께 묘사하였다. 동쪽의 강원도 회양, 금성, 김화와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여러 하천이 이곳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북쪽의 古揷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에 해당되며, 이후 북쪽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과 합류한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한탄강 상류에 해당된다. 북쪽 산지의 분수령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하천은 평안강에 해당되며, 임진강의 상류부이다. 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고미탄천인 것으로 추정된다. 분수령은 넘어 안변쪽으로 북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남대천으로 안변에서 동해로 유입한다.(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강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 김화와 이어지는 도로는 赤礗院을 지나고, 회양으로 가는 길은 松古介를 거친다. 철원과 연결되는 도로는 裁松院을 지난다. 서로는 玉洞驛을 거쳐 이천으로 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북으로 안변으로 이어지는 길은 평안강 연변을 지나 천령을 거치는 길과 분수령을 거치는 삼방로가 표현되어 있다. 주기에는 이 도로의 험준함을 설명하고 있다. 이면 주기에 民戶 3,936戶, 田 406結71負4束, 畓 8結11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영위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평강현 주기 (平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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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평강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강현은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에 해당된다. 지금의 평강읍 동변리에 소재한 읍치를 지도의 중앙 아래 부분에 四寬亭과 함께 묘사하였다. 동쪽의 강원도 회양, 금성, 김화와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여러 하천이 이곳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북쪽의 古揷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에 해당되며, 이후 북쪽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과 합류한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한탄강 상류에 해당된다. 북쪽 산지의 분수령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하천은 평안강에 해당되며, 임진강의 상류부이다. 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고미탄천인 것으로 추정된다. 분수령은 넘어 안변쪽으로 북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남대천으로 안변에서 동해로 유입한다.(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강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 김화와 이어지는 도로는 赤礗院을 지나고, 회양으로 가는 길은 松古介를 거친다. 철원과 연결되는 도로는 裁松院을 지난다. 서로는 玉洞驛을 거쳐 이천으로 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북으로 안변으로 이어지는 길은 평안강 연변을 지나 천령을 거치는 길과 분수령을 거치는 삼방로가 표현되어 있다. 주기에는 이 도로의 험준함을 설명하고 있다. 이면 주기에 民戶 3,936戶, 田 406結71負4束, 畓 8結11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영위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평창군 (平昌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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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작은 고을이었던 평창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창군은 지금의 평창군 평창읍·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된다. 현재 평창군의 도암면 등은 당시 강릉부에 속하였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평창군은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는 객사, 창, 아사와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되었고, 南大川이 고을을 동쪽으로 감싸 돌아 남류하고 있다. 이 남대천은 남한강 상류의 현재 대화천인 것으로 보이며, 상류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규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우측의 동면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참리천으로 동강 상류에 해당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창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강릉, 원주, 영월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정선으로 가는 길이 추가되어 있다. 정선으로 가는 도로는 읍치에서 味呑峙-平安驛(미탄면 평안리)-星摩嶺을 지난다. 읍치의 남서쪽으로는 藥水驛(지금의 평창읍 약수리)을 거쳐 남면을 지나는 도로가 원주로 이어진다. 읍치 위쪽의 注津橋를 건너 梨峴을 넘어가는 도로는 강릉으로 이어진다. 지금도 이곳에는 주진교가 설치되어 있으며 동리 지명도 주진리이다. 梨峙는 배나무가 있어 뱃재로 불렸다고 한다. 倉은 2곳이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685戶, 田 185結51負9束, 畓 1結78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평창군 주기 (平昌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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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작은 고을이었던 평창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창군은 지금의 평창군 평창읍·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된다. 현재 평창군의 도암면 등은 당시 강릉부에 속하였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평창군은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는 객사, 창, 아사와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되었고, 南大川이 고을을 동쪽으로 감싸 돌아 남류하고 있다. 이 남대천은 남한강 상류의 현재 대화천인 것으로 보이며, 상류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규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우측의 동면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참리천으로 동강 상류에 해당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창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강릉, 원주, 영월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정선으로 가는 길이 추가되어 있다. 정선으로 가는 도로는 읍치에서 味呑峙-平安驛(미탄면 평안리)-星摩嶺을 지난다. 읍치의 남서쪽으로는 藥水驛(지금의 평창읍 약수리)을 거쳐 남면을 지나는 도로가 원주로 이어진다. 읍치 위쪽의 注津橋를 건너 梨峴을 넘어가는 도로는 강릉으로 이어진다. 지금도 이곳에는 주진교가 설치되어 있으며 동리 지명도 주진리이다. 梨峙는 배나무가 있어 뱃재로 불렸다고 한다. 倉은 2곳이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685戶, 田 185結51負9束, 畓 1結78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평해군 (平海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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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당시 강원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평해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해군은 당시 강원도 동해안의 최남단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후포면·온정면·기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지금의 평해읍 평해리 일대이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鎭山은 釜谷山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지도에서는 그려져 있지 않다. 성곽(둘레 2,120尺)과 함께 읍치를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을 연두색으로 표현하였다. 읍치를 중심으로 남북에 2곳의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남쪽의 하천은 지금의 평해 남대천이며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정명천이다. 황보천은 묘사가 생략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해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조선후기 서울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9대로 중에서 서울과 平海를 연결하는 길이 제 3大路에 해당하였다. 백두대간의 珠嶺, 三乘嶺, 元水項 등의 고개를 넘어 서쪽의 寧越, 英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며, 이면의 주기에서는 이들이 험준한 도로임을 서술하고 있다. 남으로 寧海로 이어지는 도로가 내륙에 남대천을 건너 내륙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북으로 蔚珍으로 통하는 대로로 望洋亭(지도에는 望津亭으로 표시)을 거쳐 가는 경로와 鳥峴을 거쳐 내륙으로 가는 경로가 함께 그려져 있다. 한편 월송포 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新立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448戶, 田 485結48負1束, 畓 387結50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평해군 주기 (平海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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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당시 강원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평해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해군은 당시 강원도 동해안의 최남단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후포면·온정면·기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지금의 평해읍 평해리 일대이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鎭山은 釜谷山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지도에서는 그려져 있지 않다. 성곽(둘레 2,120尺)과 함께 읍치를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을 연두색으로 표현하였다. 읍치를 중심으로 남북에 2곳의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남쪽의 하천은 지금의 평해 남대천이며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정명천이다. 황보천은 묘사가 생략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해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조선후기 서울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9대로 중에서 서울과 平海를 연결하는 길이 제 3大路에 해당하였다. 백두대간의 珠嶺, 三乘嶺, 元水項 등의 고개를 넘어 서쪽의 寧越, 英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며, 이면의 주기에서는 이들이 험준한 도로임을 서술하고 있다. 남으로 寧海로 이어지는 도로가 내륙에 남대천을 건너 내륙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북으로 蔚珍으로 통하는 대로로 望洋亭(지도에는 望津亭으로 표시)을 거쳐 가는 경로와 鳥峴을 거쳐 내륙으로 가는 경로가 함께 그려져 있다. 한편 월송포 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新立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448戶, 田 485結48負1束, 畓 387結50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홍천현 (洪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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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홍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천현은 지금의 홍천군 홍천읍, 서면, 북방면, 남면, 동면, 화촌면, 두촌면, 내촌면, 서석면 일대의 지역에 해당된다. 홍천군 내면은 당시에 강릉부에 속하였다. 동으로 麟蹄, 북으로 春川, 서로 砥平과 楊根에 접하여 동서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게 장방형의 형태로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客舍, 衙舍, 倉, 鄕校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표현하였으며, 延波亭과 觀水堂이 객사 앞에 있다. 읍치는 지금의 홍천읍 희망리·진리 일대에 소재한다. 진산인 石花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홍천강으로 북한강 상류의 한 지류에 해당된다. 지도 북동쪽의 建伊峙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야시대천으로, 柰村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내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의 동쪽 黃腸山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군업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하천의 중류에서 북류하여 홍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각각 지금의 성전천과 어룡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홍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춘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서쪽을 城峙를 지나 北方面을 거치는 도로와, 서남쪽의 蓮峰驛(홍천읍 연봉리 소재)을 지나 서창을 거쳐 가는 길이 있다. 남쪽으로는 陽德院(남면 양덕원리 소재)과 神堂峙를 지나 砥平으로 연결되며, 三馬峙, 小三馬峙를 지나는 도로는 횡성과 이어진다. 북동쪽의 泉甘驛(두촌면 역내리 소재)을 지나는 길은 인제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793戶, 田 622結35負4束, 畓 97結29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홍천현 주기 (洪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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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홍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천현은 지금의 홍천군 홍천읍, 서면, 북방면, 남면, 동면, 화촌면, 두촌면, 내촌면, 서석면 일대의 지역에 해당된다. 홍천군 내면은 당시에 강릉부에 속하였다. 동으로 麟蹄, 북으로 春川, 서로 砥平과 楊根에 접하여 동서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게 장방형의 형태로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客舍, 衙舍, 倉, 鄕校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표현하였으며, 延波亭과 觀水堂이 객사 앞에 있다. 읍치는 지금의 홍천읍 희망리·진리 일대에 소재한다. 진산인 石花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홍천강으로 북한강 상류의 한 지류에 해당된다. 지도 북동쪽의 建伊峙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야시대천으로, 柰村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내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의 동쪽 黃腸山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군업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하천의 중류에서 북류하여 홍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각각 지금의 성전천과 어룡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홍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춘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서쪽을 城峙를 지나 北方面을 거치는 도로와, 서남쪽의 蓮峰驛(홍천읍 연봉리 소재)을 지나 서창을 거쳐 가는 길이 있다. 남쪽으로는 陽德院(남면 양덕원리 소재)과 神堂峙를 지나 砥平으로 연결되며, 三馬峙, 小三馬峙를 지나는 도로는 횡성과 이어진다. 북동쪽의 泉甘驛(두촌면 역내리 소재)을 지나는 길은 인제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793戶, 田 622結35負4束, 畓 97結29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회양부 (淮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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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한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회양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양부는 지금의 북한 강원도 회양군·금강군·창도군·세포군에 걸쳐 있다. 회양부는 읍치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현재의 내금강면에 해당되는 지역 등 2 지역으로 되어있으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府治를 지도의 중앙 위쪽에 배치하고, 내금강산 일대는 오른쪽에 배치하여 실경으로 묘사하였다. 하천으로 부내에 2개의 유로가 그려져 있다. 부의 서남쪽에서 한탄강이 발원하고 있으나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지도 중앙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을 감싸 돌아 다시 남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북한강 상류인 지금의 개동연천에 해당된다. 지도의 동쪽 내금강에서 발원하여 양구쪽으로 남류하는 하천은 금강천에 해당되며, 이곳으로 유입하는 지류는 동금강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회양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역으로 銀溪驛, 新安譯 등 2곳이, 倉으로 縣倉, 和川縣倉, 文登倉 등 10곳이 그려져 있다. 남쪽 양구로 이어지는 도로는 신안역과 蘆桐嶺을 거쳐 水八面에 소재한 縣倉을 지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금강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 동쪽의 和川縣倉을 지나 末暉嶺을 지나 장안사까지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2戶, 田 219結9負, 畓 56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회양부 주기 (淮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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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한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회양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양부는 지금의 북한 강원도 회양군·금강군·창도군·세포군에 걸쳐 있다. 회양부는 읍치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현재의 내금강면에 해당되는 지역 등 2 지역으로 되어있으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府治를 지도의 중앙 위쪽에 배치하고, 내금강산 일대는 오른쪽에 배치하여 실경으로 묘사하였다. 하천으로 부내에 2개의 유로가 그려져 있다. 부의 서남쪽에서 한탄강이 발원하고 있으나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지도 중앙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을 감싸 돌아 다시 남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북한강 상류인 지금의 개동연천에 해당된다. 지도의 동쪽 내금강에서 발원하여 양구쪽으로 남류하는 하천은 금강천에 해당되며, 이곳으로 유입하는 지류는 동금강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회양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역으로 銀溪驛, 新安譯 등 2곳이, 倉으로 縣倉, 和川縣倉, 文登倉 등 10곳이 그려져 있다. 남쪽 양구로 이어지는 도로는 신안역과 蘆桐嶺을 거쳐 水八面에 소재한 縣倉을 지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금강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 동쪽의 和川縣倉을 지나 末暉嶺을 지나 장안사까지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2戶, 田 219結9負, 畓 56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횡성현 (橫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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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 유역에 소재하였던 횡성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횡성현은 지금의 횡성군 중 청일면, 갑천면, 둔내면, 안흥면, 우천면, 횡성읍, 공근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 횡성군의 서원면과 강림면은 조선시대 원주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 아래부분에 읍치를 배치하고 객사와 아사, 창을 그렸다. 泰岐山에서 줄기가 이어져 읍치를 감싸고 있다. 진산인 馬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좌측에 北川이 남류하고, 지도의 우측 원주부로부터 유입한 전천이 읍치를 감싸돌며 북천에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천은 지금의 금계천으로 보이며 상류부는 계천에 해당된다. 지도의 우측의 둔내면에서 발원하는 별도의 하천이 그려져 있는데 현재의 주천천으로 생각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횡성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의 명칭을 기록하였다. 지도에 역이 네 군데 표시되어 있다. 원주-지평으로 이어져 서울로 가는 길은 읍치에서 葛豊驛(횡성읍 갈풍리 소재)을 거치며, 蒼峯驛(공근면 창봉리)에서 三馬峙로 연결되는 길은 洪川과 이어진다. 安興驛(안흥면 안흥리)을 거쳐 禿峴으로 이어지는 길은 강릉과 통한다. 烏原驛을 거쳐서도 원주로 연결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 주천강안에 楡谷倉, 北川에 外倉이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59戶, 田 404結31負1束, 畓 205結81負5束로 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인다. (김기혁)

  • 횡성현 주기 (橫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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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 유역에 소재하였던 횡성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횡성현은 지금의 횡성군 중 청일면, 갑천면, 둔내면, 안흥면, 우천면, 횡성읍, 공근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 횡성군의 서원면과 강림면은 조선시대 원주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 아래부분에 읍치를 배치하고 객사와 아사, 창을 그렸다. 泰岐山에서 줄기가 이어져 읍치를 감싸고 있다. 진산인 馬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좌측에 北川이 남류하고, 지도의 우측 원주부로부터 유입한 전천이 읍치를 감싸돌며 북천에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천은 지금의 금계천으로 보이며 상류부는 계천에 해당된다. 지도의 우측의 둔내면에서 발원하는 별도의 하천이 그려져 있는데 현재의 주천천으로 생각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횡성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의 명칭을 기록하였다. 지도에 역이 네 군데 표시되어 있다. 원주-지평으로 이어져 서울로 가는 길은 읍치에서 葛豊驛(횡성읍 갈풍리 소재)을 거치며, 蒼峯驛(공근면 창봉리)에서 三馬峙로 연결되는 길은 洪川과 이어진다. 安興驛(안흥면 안흥리)을 거쳐 禿峴으로 이어지는 길은 강릉과 통한다. 烏原驛을 거쳐서도 원주로 연결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 주천강안에 楡谷倉, 北川에 外倉이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59戶, 田 404結31負1束, 畓 205結81負5束로 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인다. (김기혁)

  • 흡곡현 (歙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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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하였던 흡곡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부터 통천군에 속하였고, 지금의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의 장대리·송전리·거성리·노상리·보탄리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 위쪽에 진산인 博山과 함께 읍치를 그렸다. 지금의 통천군 송전리 일대이다. 서로는 백두대간을 그리고, 그 여맥이 현남면을 거쳐 읍치로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3곳 그려져 있다. 읍치 앞에서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한천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십이현천은 華藏菴 부근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하천의 하구에 기재된 田烽臺 지명은 다른 지도에서는 舊烽臺로 기재되어 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표현되었으나 북쪽에 長在湖와 함께 栗島가 그려져 있다. 율도 부근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패천천으로 생각된다.(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흡곡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大路, 小路로 구분하였다. 북으로 함경남도 안변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馬峙峴을 지나는 길이 대로로 표시되어 있고, 시중대를 거치는 도로는 소로로 표시하였다. 통천으로 이어지는 길은 읍치 남쪽에 貞德驛을 지나 文峙峴를 통해 이어진다. 내륙 회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黃龍山 산록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기에서는 이 도로의 험준함을 적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778戶, 田 139結83負7束, 畓 44結10負9束로 기재되어 고을 규모가 매우 작으나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흡곡현 주기 (歙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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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하였던 흡곡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부터 통천군에 속하였고, 지금의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의 장대리·송전리·거성리·노상리·보탄리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 위쪽에 진산인 博山과 함께 읍치를 그렸다. 지금의 통천군 송전리 일대이다. 서로는 백두대간을 그리고, 그 여맥이 현남면을 거쳐 읍치로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3곳 그려져 있다. 읍치 앞에서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한천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십이현천은 華藏菴 부근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하천의 하구에 기재된 田烽臺 지명은 다른 지도에서는 舊烽臺로 기재되어 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표현되었으나 북쪽에 長在湖와 함께 栗島가 그려져 있다. 율도 부근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패천천으로 생각된다.(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흡곡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大路, 小路로 구분하였다. 북으로 함경남도 안변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馬峙峴을 지나는 길이 대로로 표시되어 있고, 시중대를 거치는 도로는 소로로 표시하였다. 통천으로 이어지는 길은 읍치 남쪽에 貞德驛을 지나 文峙峴를 통해 이어진다. 내륙 회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黃龍山 산록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기에서는 이 도로의 험준함을 적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778戶, 田 139結83負7束, 畓 44結10負9束로 기재되어 고을 규모가 매우 작으나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경기도
  • 가평군 (嘉平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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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군은 설악면을 제외한 가평군 전체와 남양주시 수동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가평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왼쪽의 東에서 흘러나오는 昭陽江下流가 현재의 북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가평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 다른 측면이 있다. 일단 지도 명칭에서 嘉平郡은 加平郡의 오기로서 지도 필사자가 옛이름인 嘉平과 헷갈린 것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 위의 도로와 산줄기의 표현 양식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의 유입 방향인 서쪽을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필사 시기에 맞게 주기 내용으로 바꾸고, 지도의 전체적인 방향만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 역시 남쪽을 위로 향해 그리고 주기가 같은 점은 본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있던 南面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도 없는데, 주기에는 남면이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나 같은 계통에서 범한 오류를 뒤의 2개 지도가 수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뒤의 2개 지도에서 산줄기의 표현 양식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고, 도로가 없으며, 일부 지명이 달라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가평군 주기 (嘉平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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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군은 설악면을 제외한 가평군 전체와 남양주시 수동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가평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왼쪽의 東에서 흘러나오는 昭陽江下流가 현재의 북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가평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 다른 측면이 있다. 일단 지도 명칭에서 嘉平郡은 加平郡의 오기로서 지도 필사자가 옛이름인 嘉平과 헷갈린 것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 위의 도로와 산줄기의 표현 양식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의 유입 방향인 서쪽을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필사 시기에 맞게 주기 내용으로 바꾸고, 지도의 전체적인 방향만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 역시 남쪽을 위로 향해 그리고 주기가 같은 점은 본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있던 南面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도 없는데, 주기에는 남면이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나 같은 계통에서 범한 오류를 뒤의 2개 지도가 수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뒤의 2개 지도에서 산줄기의 표현 양식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고, 도로가 없으며, 일부 지명이 달라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강화부 (江華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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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강화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1627년(인조 5)에 都護府에서 留守府로 될 정도로 수도 방위에 가장 중요한 요해처로 인식되던 고을이었다. 지도에도 이러한 요해처를 잘 보여주듯이 강화읍성과 정족산성, 문수산성, 鎭堡를 비롯하여 해안가에 쌓은 외성 등 군사적 정보가 특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진보의 경우 종3품의 僉使가 파견된 경우 鎭으로, 정4품의 萬戶가 파견된 경우 戶로,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된 경우 別將으로 표시하여 구분해 주었다. 해안선과 섬의 모양 및 수록된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화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두 지도에는 본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육로와 수로에 대한 표시가 없어 본 지도가 이런 지도 계통의 원도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의 두 지도에는 육로와 수로가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것과 관계되어 적혀 있는 거리에 대한 문구는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앞의 두 지도가 본 지도와 비슷한 원도 계통에서 도로에 대한 표시만 생략하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는 강화부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아래에 교동부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군현의 그림지도에서는 주변 고을의 경우 아주 작고 방향만 알 수 있는 형태로 그리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수도인 한양의 방어에 이곳의 중요성이 컸기 때문에 비록 강화부지도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던 교동부까지 자세하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강화도와 교동도 이외의 섬에는 어느 고을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화부에 속한 경우 江華屬으로, 교동부에 속한 경우 水營屬으로 되어 있는데, 두 고을에 소속된 섬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밖에 밀물(潮進) 때는 바다가 되고 썰물(潮退) 때는 풀밭(草)이 된다는 간석지에 대한 표현도 몇 곳에 나타나고 있으며, 소금이 생산되던 塩盆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강화부 주기 (江華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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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강화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1627년(인조 5)에 都護府에서 留守府로 될 정도로 수도 방위에 가장 중요한 요해처로 인식되던 고을이었다. 지도에도 이러한 요해처를 잘 보여주듯이 강화읍성과 정족산성, 문수산성, 鎭堡를 비롯하여 해안가에 쌓은 외성 등 군사적 정보가 특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진보의 경우 종3품의 僉使가 파견된 경우 鎭으로, 정4품의 萬戶가 파견된 경우 戶로,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된 경우 別將으로 표시하여 구분해 주었다. 해안선과 섬의 모양 및 수록된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화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두 지도에는 본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육로와 수로에 대한 표시가 없어 본 지도가 이런 지도 계통의 원도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의 두 지도에는 육로와 수로가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것과 관계되어 적혀 있는 거리에 대한 문구는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앞의 두 지도가 본 지도와 비슷한 원도 계통에서 도로에 대한 표시만 생략하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는 강화부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아래에 교동부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군현의 그림지도에서는 주변 고을의 경우 아주 작고 방향만 알 수 있는 형태로 그리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수도인 한양의 방어에 이곳의 중요성이 컸기 때문에 비록 강화부지도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던 교동부까지 자세하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강화도와 교동도 이외의 섬에는 어느 고을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화부에 속한 경우 江華屬으로, 교동부에 속한 경우 水營屬으로 되어 있는데, 두 고을에 소속된 섬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밖에 밀물(潮進) 때는 바다가 되고 썰물(潮退) 때는 풀밭(草)이 된다는 간석지에 대한 표현도 몇 곳에 나타나고 있으며, 소금이 생산되던 塩盆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경기도 (京畿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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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전반적인 유로와 해안선 및 섬의 모습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경기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여지도》의 것보다 훨씬 자세하고 많으며, 《광여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면서 약간 자세한 편이다. 따라서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앞의 2개 지도보다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글시체나 채색 등의 측면에서는 앞의 2책보다 정교함이 훨씬 떨어지고 있어 관보다는 민간에서 필사하여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수록된 정보 중에 중요하게 여겨져서 기호가 사용된 것으로는 수도인 京都, 군현의 명칭, 군사기지인 鎭堡와 급한 군사 정보를 전달하는 烽燧, 牧場,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屬驛을 거느렸던 察訪驛 등이다. 군현의 명칭은 세로로 긴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광여도》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채색된 것과 달리 본 지도에서는 左․右道를 각각 노란색과 흰색으로 채색하여 구분하여 주었다. 開城府․江華․喬桐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일반 군현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개성부와 강화는 留守가 파견되어 수도에 준하는 지위로 인식되었고, 교동에는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찰방역․목장은 모두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을 기호로 사용하면서 각각 연분홍․연황색․노란색으로 채색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광여도》에서는 목장인 大阜와 찰방역인 重林驛을 진보와 동일한 색으로 표현하는 등의 오류를 범한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밖에 육지에는 산과 하천 등 자연지리적 정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인문지리적 정보로는 국가의 정통성과 관련된 陵, 지방 세력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書院(祠宇 포함), 기타 고지명 등이 있다. 바다의 섬에는 馬場, 訓屯(훈련원의 둔전)이라는 정보가 특별히 기입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경기도 주기 (京畿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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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전반적인 유로와 해안선 및 섬의 모습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경기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여지도》의 것보다 훨씬 자세하고 많으며, 《광여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면서 약간 자세한 편이다. 따라서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앞의 2개 지도보다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글시체나 채색 등의 측면에서는 앞의 2책보다 정교함이 훨씬 떨어지고 있어 관보다는 민간에서 필사하여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수록된 정보 중에 중요하게 여겨져서 기호가 사용된 것으로는 수도인 京都, 군현의 명칭, 군사기지인 鎭堡와 급한 군사 정보를 전달하는 烽燧, 牧場,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屬驛을 거느렸던 察訪驛 등이다. 군현의 명칭은 세로로 긴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광여도》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채색된 것과 달리 본 지도에서는 左․右道를 각각 노란색과 흰색으로 채색하여 구분하여 주었다. 開城府․江華․喬桐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일반 군현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개성부와 강화는 留守가 파견되어 수도에 준하는 지위로 인식되었고, 교동에는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찰방역․목장은 모두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을 기호로 사용하면서 각각 연분홍․연황색․노란색으로 채색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광여도》에서는 목장인 大阜와 찰방역인 重林驛을 진보와 동일한 색으로 표현하는 등의 오류를 범한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밖에 육지에는 산과 하천 등 자연지리적 정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인문지리적 정보로는 국가의 정통성과 관련된 陵, 지방 세력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書院(祠宇 포함), 기타 고지명 등이 있다. 바다의 섬에는 馬場, 訓屯(훈련원의 둔전)이라는 정보가 특별히 기입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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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1면입니다.

  •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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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2면입니다.

  • 경성 (京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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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를 그린 지도로서 都城과 城底十里를 하나의 지도에 그려넣었다. 산줄기와 하천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것과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하천의 표현 방식이 앞의 두 지도에 비해 간략화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일부 지명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보이고 있는데, 아래 왼쪽의 西北은 西江의 오기이다. 그리고 서강 오른쪽에는 앞의 두 지도에는 없는 栗島 등이 본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지도의 명칭이 《광여도》에는 都城圖로, 《여지도》에는 都城으로 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는 京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성이나 경성 모두 전통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였으며, 고유한 행정명칭으로는 漢城府라고 불렀다. 도성도는 조선에서 가장 많이 그려졌는데, 본 지도의 것은 다른 도성도에 비해 주변의 경관을 비롯하여 도성 안쪽의 정보도 간략한 편이다. 본 지도처럼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도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리고 정보가 적은 도성 밖을 상대적으로 작게 그리는 것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그림지도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상대적으로 많은 도성 안의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도성 안에 정보가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어 약간 의아한 느낌을 준다. 이런 경우 보통 도성 안을 따로 그린 지도가 첨부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아래쪽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가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며, 가장 오른쪽에 현재의 중랑천이 中梁浦로 기록되어 있다.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명칭을 포구나 나루 또는 진흙의 물가라는 뜻의 ‘浦’자를 써서 기록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량포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중량포는 실제로는 오른쪽 위의 양주에서 본류가 흘러오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알기 어렵게 그려놓았다. 도성 안쪽에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청계천이다.(이기봉)

  • 경성 주기 (京城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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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를 그린 지도로서 都城과 城底十里를 하나의 지도에 그려넣었다. 산줄기와 하천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것과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하천의 표현 방식이 앞의 두 지도에 비해 간략화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일부 지명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보이고 있는데, 아래 왼쪽의 西北은 西江의 오기이다. 그리고 서강 오른쪽에는 앞의 두 지도에는 없는 栗島 등이 본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지도의 명칭이 《광여도》에는 都城圖로, 《여지도》에는 都城으로 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는 京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성이나 경성 모두 전통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였으며, 고유한 행정명칭으로는 漢城府라고 불렀다. 도성도는 조선에서 가장 많이 그려졌는데, 본 지도의 것은 다른 도성도에 비해 주변의 경관을 비롯하여 도성 안쪽의 정보도 간략한 편이다. 본 지도처럼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도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리고 정보가 적은 도성 밖을 상대적으로 작게 그리는 것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그림지도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상대적으로 많은 도성 안의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도성 안에 정보가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어 약간 의아한 느낌을 준다. 이런 경우 보통 도성 안을 따로 그린 지도가 첨부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아래쪽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가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며, 가장 오른쪽에 현재의 중랑천이 中梁浦로 기록되어 있다.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명칭을 포구나 나루 또는 진흙의 물가라는 뜻의 ‘浦’자를 써서 기록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량포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중량포는 실제로는 오른쪽 위의 양주에서 본류가 흘러오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알기 어렵게 그려놓았다. 도성 안쪽에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청계천이다.(이기봉)

  • 고양군 (高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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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군은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덕양구 고양동 일대에 있었다. 아래쪽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고, 위쪽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공릉천이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 바로 서쪽에 있는 고을이기 때문에 수많은 陵墓가 있었음이 지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원래 고양의 읍치는 현재의 덕양구 원당동인 지도 가운데의 禧陵에 있었는데, 1528년(중종 23)에 희릉을 안치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와 본 지도의 차이점은 첫째,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둘째, 《해동지도》에 없던 지도 아래쪽의 朴萬島, 鴨島, 氷庫島의 정보가 추가되어 있다. 셋째, 司饔院進上葦魚結箭處가 1개 더 추가되어 있다. 사옹원은 왕의 식사나 궁중의 음식을 공급하던 관서였으며,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던 葦魚(웅어)의 포획처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정보였다. 《해동지도》에 1개만 있던 위어 포획처가 2개로 늘어난 것, 궁중의 땔감조달과 관계된 繕工草場과 관련된 섬의 정보가 늘어난 것은 필사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담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二山村이 二山府로 오기되어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中路와 小路 등의 정보가 수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자체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더 자세한 다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고양군 주기 (高陽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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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군은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덕양구 고양동 일대에 있었다. 아래쪽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고, 위쪽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공릉천이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 바로 서쪽에 있는 고을이기 때문에 수많은 陵墓가 있었음이 지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원래 고양의 읍치는 현재의 덕양구 원당동인 지도 가운데의 禧陵에 있었는데, 1528년(중종 23)에 희릉을 안치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와 본 지도의 차이점은 첫째,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둘째, 《해동지도》에 없던 지도 아래쪽의 朴萬島, 鴨島, 氷庫島의 정보가 추가되어 있다. 셋째, 司饔院進上葦魚結箭處가 1개 더 추가되어 있다. 사옹원은 왕의 식사나 궁중의 음식을 공급하던 관서였으며,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던 葦魚(웅어)의 포획처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정보였다. 《해동지도》에 1개만 있던 위어 포획처가 2개로 늘어난 것, 궁중의 땔감조달과 관계된 繕工草場과 관련된 섬의 정보가 늘어난 것은 필사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담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二山村이 二山府로 오기되어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中路와 小路 등의 정보가 수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자체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더 자세한 다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과천현 (果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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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현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대부분, 서초구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 현재의 양재천이고, 아래쪽은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과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衙(舍) 부분에 果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과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표시된 읍치의 城隍壇과 厲壇을 비롯하여 일부 지명이 본 지도에 빠져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조선후기에 민간에서 운영한 숙박시설인 葛山酒幕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가장 중요한 三南大路 위에 있었다.(이기봉)

  • 과천현 주기 (果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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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현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대부분, 서초구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 현재의 양재천이고, 아래쪽은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과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衙(舍) 부분에 果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과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표시된 읍치의 城隍壇과 厲壇을 비롯하여 일부 지명이 본 지도에 빠져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조선후기에 민간에서 운영한 숙박시설인 葛山酒幕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가장 중요한 三南大路 위에 있었다.(이기봉)

  • 광주부 (廣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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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부는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현재의 남양주시 와부면과 조안면을 양주군에, 현재의 의왕시와 안산시의 일부 및 화성시 매송면의 서쪽 부분을 수원군에 넘겨주고, 현재의 광주시 남종면을 양평으로부터 넘겨받아 광주군이 되었다. 이후 서울시의 확장에 따라 현재의 경부고속도로 동쪽 강남 일대를 서울시에 넘겨주었으며, 성남시와 하남시 등이 후에 독립하여 현재의 광주시가 되었다. 광주부의 읍치는 원래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는데 1626년(인조 4)에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확대 수축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다른 그림지도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인 남한산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다. 위쪽의 왼쪽은 현재의 화성시 매송면 서쪽과 안산시 일부에까지 쭉 뻗어있던 광주의 犬牙相入地였다. 본 지도의 전반적인 형태와 수록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광주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아주 자세히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전혀 없으며,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편이다. 주기의 내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고 《해동지도》가 전혀 다른 편이다. 앞의 4개 지도는 몇몇 부분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가장 앞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해동지도》의 경우 본 지도의 왼쪽 위 부분에 왼쪽의 安山界 바다와 그 오른쪽의 한강 하류가 마치 하천으로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를 보면 검은색 실선이 그어져 있는데, 하천으로 경계지어지지 않는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한다. 안산계 방면에 잘못 그려진 하천도 실제로는 그 사이에 금천, 과천, 부평, 인천, 안산 등의 군현이 사이에 끼어 있어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하는 검은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 역시 다른 원본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본 지도에는 이런 오류가 몇 개 더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平丘驛부터 楊州屈雲驛까지 마치 하천처럼 표시되어 있는 것은 《해동지도》에는 군현 경계로 그어져 있던 것이다. 실제로는 《해동지도》가 맞기 때문에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잘못 필사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후대의 필사자들이 《해동지도》나 그 원본보다는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왼쪽 위의 경우 한강과 安山界가 마치 바다로 바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는 《해동지도》처럼 오류를 범하고 있어 두 지도가 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이기봉)

  • 광주부 주기 (廣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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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부는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현재의 남양주시 와부면과 조안면을 양주군에, 현재의 의왕시와 안산시의 일부 및 화성시 매송면의 서쪽 부분을 수원군에 넘겨주고, 현재의 광주시 남종면을 양평으로부터 넘겨받아 광주군이 되었다. 이후 서울시의 확장에 따라 현재의 경부고속도로 동쪽 강남 일대를 서울시에 넘겨주었으며, 성남시와 하남시 등이 후에 독립하여 현재의 광주시가 되었다. 광주부의 읍치는 원래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는데 1626년(인조 4)에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확대 수축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다른 그림지도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인 남한산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다. 위쪽의 왼쪽은 현재의 화성시 매송면 서쪽과 안산시 일부에까지 쭉 뻗어있던 광주의 犬牙相入地였다. 본 지도의 전반적인 형태와 수록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광주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아주 자세히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전혀 없으며,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편이다. 주기의 내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고 《해동지도》가 전혀 다른 편이다. 앞의 4개 지도는 몇몇 부분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가장 앞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해동지도》의 경우 본 지도의 왼쪽 위 부분에 왼쪽의 安山界 바다와 그 오른쪽의 한강 하류가 마치 하천으로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를 보면 검은색 실선이 그어져 있는데, 하천으로 경계지어지지 않는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한다. 안산계 방면에 잘못 그려진 하천도 실제로는 그 사이에 금천, 과천, 부평, 인천, 안산 등의 군현이 사이에 끼어 있어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하는 검은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 역시 다른 원본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본 지도에는 이런 오류가 몇 개 더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平丘驛부터 楊州屈雲驛까지 마치 하천처럼 표시되어 있는 것은 《해동지도》에는 군현 경계로 그어져 있던 것이다. 실제로는 《해동지도》가 맞기 때문에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잘못 필사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후대의 필사자들이 《해동지도》나 그 원본보다는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왼쪽 위의 경우 한강과 安山界가 마치 바다로 바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는 《해동지도》처럼 오류를 범하고 있어 두 지도가 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이기봉)

  • 교동 (喬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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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 석모도 위쪽, 주문도, 장봉도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오른쪽 가장 위쪽이 예성강 하구이고, 그 아래쪽이 한강 하구이다. 오른쪽으로 강화도가 실제보다 가까운 것처럼 그려져 있고, 아래쪽이 현재의 석모도 위쪽에 해당된다. 원래 남양의 화량진(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던 경기도의 水營을 1629년(인조 7)에 이 고을로 옮기면서 아주 작은 고을임에도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교동부 지도, 《여지도》(古4790-58)의 교동수영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는 적혀 있었던 각 里의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의 주기에 없던 각 面의 초경과 종경의 거리 기록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 새로 수록하면서 지도 위의 거리 정보를 삭제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읍치 아래쪽의 貯水處와 船倉 부근이 《해동지도》에는 작은 돌무더기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는 산봉우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화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완벽하게 산처럼 그려져 있다. 이러한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또는 같은 계통의 지도가 원본을 필사하면서 변화시킨 내용을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산으로 잘못 인식하여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밖에 《해동지도》에는 밀물 때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하천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이런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여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가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교동 주기 (喬桐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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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 석모도 위쪽, 주문도, 장봉도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오른쪽 가장 위쪽이 예성강 하구이고, 그 아래쪽이 한강 하구이다. 오른쪽으로 강화도가 실제보다 가까운 것처럼 그려져 있고, 아래쪽이 현재의 석모도 위쪽에 해당된다. 원래 남양의 화량진(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던 경기도의 水營을 1629년(인조 7)에 이 고을로 옮기면서 아주 작은 고을임에도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교동부 지도, 《여지도》(古4790-58)의 교동수영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는 적혀 있었던 각 里의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의 주기에 없던 각 面의 초경과 종경의 거리 기록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 새로 수록하면서 지도 위의 거리 정보를 삭제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읍치 아래쪽의 貯水處와 船倉 부근이 《해동지도》에는 작은 돌무더기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는 산봉우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화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완벽하게 산처럼 그려져 있다. 이러한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또는 같은 계통의 지도가 원본을 필사하면서 변화시킨 내용을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산으로 잘못 인식하여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밖에 《해동지도》에는 밀물 때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하천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이런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여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가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교하현 (交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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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현은 파주시 시내(옛 금촌읍)와 교하면, 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현재의 탄현면 갈현리인데, 1731년(영조 7)에 長陵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현재의 파주시 금릉동인 지도 위의 金尺浦津의 위치로 옮긴다. 이후 1738년(영조 14)에 현재의 교하면 교하리인 지도 위의 長命山 동쪽으로 옮기는데, 본 지도의 읍치 위치를 통해 최초 원본이 1731년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교하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해동지도》에는 읍치 위쪽의 烽臺가 서쪽으로 풍덕의 덕적산 봉수와, 동쪽으로 고양의 고봉 봉수와 연결되고 있음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명칭이 교하군으로 되어 있는데, 1731년(영조 7)에 읍치에 장릉을 옮겨오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도면에는 장릉이 옮겨오기 전의 읍치가 그려져 있어 군으로 승격되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해동지도》의 지도는 1731년 이전에 그려지고, 주기는 그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명칭이 교하현으로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작성되지 않은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에도 교하현으로 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살펴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광여도》와 거의 동일한 《여지도》의 경우 교하군으로 되어 있어 사실을 확인한 다음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속에서도 읍치의 이동 사실은 교정하지 못하여 꼼꼼한 검토를 통해 필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고, 가운데가 곡릉천이며, 가장 아래쪽이 한강이다. 그러나 지도에는 세 하천의 규모를 전혀 알 수 없게 그려놓았는데,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부터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임진강을 곡릉천과 다르게 그려 일면 하천 규모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지만 한강을 곡릉천과 동일하게 그려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이기봉)

  • 교하현 주기 (交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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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현은 파주시 시내(옛 금촌읍)와 교하면, 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현재의 탄현면 갈현리인데, 1731년(영조 7)에 長陵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현재의 파주시 금릉동인 지도 위의 金尺浦津의 위치로 옮긴다. 이후 1738년(영조 14)에 현재의 교하면 교하리인 지도 위의 長命山 동쪽으로 옮기는데, 본 지도의 읍치 위치를 통해 최초 원본이 1731년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교하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해동지도》에는 읍치 위쪽의 烽臺가 서쪽으로 풍덕의 덕적산 봉수와, 동쪽으로 고양의 고봉 봉수와 연결되고 있음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명칭이 교하군으로 되어 있는데, 1731년(영조 7)에 읍치에 장릉을 옮겨오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도면에는 장릉이 옮겨오기 전의 읍치가 그려져 있어 군으로 승격되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해동지도》의 지도는 1731년 이전에 그려지고, 주기는 그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명칭이 교하현으로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작성되지 않은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에도 교하현으로 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살펴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광여도》와 거의 동일한 《여지도》의 경우 교하군으로 되어 있어 사실을 확인한 다음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속에서도 읍치의 이동 사실은 교정하지 못하여 꼼꼼한 검토를 통해 필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고, 가운데가 곡릉천이며, 가장 아래쪽이 한강이다. 그러나 지도에는 세 하천의 규모를 전혀 알 수 없게 그려놓았는데,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부터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임진강을 곡릉천과 다르게 그려 일면 하천 규모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지만 한강을 곡릉천과 동일하게 그려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이기봉)

  • 금천현 (衿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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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현재의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다.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읍치는 동쪽의 三聖山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위치해 있었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위쪽에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본 지도의 衙(舍) 부분에 衿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금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금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며, 水踰峴을 동일하게 水踰山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어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본 지도와 달리 衙(舍)에 邑內라고 적혀 있어 본 자도 자체보다는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필사과정에서 도로를 생략하였으며, 《여지도》의 경우 한강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는 등의 새로운 오류도 범하고 있다. 한편 뒤의 2개 지도가 읍치의 산세 묘사에서 본 지도나 《해동지도》보다 훨씬 풍수적인 형국에 가까운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음도 눈에 띈다.(이기봉)

  • 금천현 주기 (衿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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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현재의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다.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읍치는 동쪽의 三聖山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위치해 있었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위쪽에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본 지도의 衙(舍) 부분에 衿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금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금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며, 水踰峴을 동일하게 水踰山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어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본 지도와 달리 衙(舍)에 邑內라고 적혀 있어 본 자도 자체보다는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필사과정에서 도로를 생략하였으며, 《여지도》의 경우 한강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는 등의 새로운 오류도 범하고 있다. 한편 뒤의 2개 지도가 읍치의 산세 묘사에서 본 지도나 《해동지도》보다 훨씬 풍수적인 형국에 가까운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음도 눈에 띈다.(이기봉)

  • 김포군 (金浦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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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군은 현재의 김포시 시내, 고촌면, 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김포시 북변동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도 가운데의 章陵에 있었는데,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아버지인 元宗과 인헌왕후의 능을 양주에서 옮겨오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古縣內面이라는 명칭은 읍치가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의 좌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쪽에는 강화도와 영종도 방향의 서해가 있고, 아래쪽은 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김포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에는 위쪽의 서해가 생략되어 있는데, 본 지도를 통해 볼 때 후에 주기를 삽입하기 위해 서해 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도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 비해서는 소략한 편이어서 필사자가 꼼꼼하게 검토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괄적으로 없앤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광여도》의 경우 章陵을 章島로 잘못 표기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꼼꼼하지 못한 측면이 잘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김포군 주기 (金浦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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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군은 현재의 김포시 시내, 고촌면, 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김포시 북변동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도 가운데의 章陵에 있었는데,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아버지인 元宗과 인헌왕후의 능을 양주에서 옮겨오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古縣內面이라는 명칭은 읍치가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의 좌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쪽에는 강화도와 영종도 방향의 서해가 있고, 아래쪽은 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김포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에는 위쪽의 서해가 생략되어 있는데, 본 지도를 통해 볼 때 후에 주기를 삽입하기 위해 서해 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도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 비해서는 소략한 편이어서 필사자가 꼼꼼하게 검토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괄적으로 없앤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광여도》의 경우 章陵을 章島로 잘못 표기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꼼꼼하지 못한 측면이 잘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남양부 (南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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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부는 북쪽 문호동 일대를 제외한 화성시내, 삼화리 일대를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 등의 화성시와 안산시의 대부도 및 옹진군의 영흥도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성시 시내의 남양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分古面은 수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로서 화성시 향남면의 상신리·구문천리·하길리에 있었다. 지도 왼쪽에는 많은 섬이 표시되어 있는데, ‘本府地’라고 쓰여있는 것만 남양부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湖南의 조운선이 움직이는 海路란 뜻의 ‘湖南船路’를 비롯하여 충청도의 몇몇 고을의 船路가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충청도 서북부에서 중요한 수군기지인 安興鎭과 西近鎭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으며, 위쪽으로도 해로가 연결되는 인천, 안산, 永宗鎭, 강화 등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수록된 지명과 수로 및 육로의 측면에서 보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남양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로와 육로의 표시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당히 소략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산줄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보다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와 유사하다. 또한 왼쪽 아래의 호남선로나 기타 충청도의 군현 명칭이 적혀 있는 선로의 표시가 《해동지도》보다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수로와 육로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차이가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는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나 같은 계통의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남양부 주기 (南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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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부는 북쪽 문호동 일대를 제외한 화성시내, 삼화리 일대를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 등의 화성시와 안산시의 대부도 및 옹진군의 영흥도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성시 시내의 남양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分古面은 수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로서 화성시 향남면의 상신리·구문천리·하길리에 있었다. 지도 왼쪽에는 많은 섬이 표시되어 있는데, ‘本府地’라고 쓰여있는 것만 남양부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湖南의 조운선이 움직이는 海路란 뜻의 ‘湖南船路’를 비롯하여 충청도의 몇몇 고을의 船路가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충청도 서북부에서 중요한 수군기지인 安興鎭과 西近鎭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으며, 위쪽으로도 해로가 연결되는 인천, 안산, 永宗鎭, 강화 등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수록된 지명과 수로 및 육로의 측면에서 보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남양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로와 육로의 표시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당히 소략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산줄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보다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와 유사하다. 또한 왼쪽 아래의 호남선로나 기타 충청도의 군현 명칭이 적혀 있는 선로의 표시가 《해동지도》보다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수로와 육로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차이가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는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나 같은 계통의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마전군 (麻田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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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전군은 경기도의 연천군 미산면, 왕징면과 군남면의 일부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연천군 미산면의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에서 흘러와 腐近津에서 임진강에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본 지도 위의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당시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衙(舍)에 麻田郡이라 적혀 있는데, 이는 《해동지도》가 본 지도책이나 뒤의 2개 지도책처럼 군현의 명칭이 지도의 이름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 등 《해동지도》와 내용적으로 거의 동일한 지도에도 읍치에 군현의 명칭이 적혀 있어 그런 형태가 최초 원본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밖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주기에는 총 5개의 面  이름이 적혀 있는데 반해 지도 위에는 2개만 적혀 있다. 이는 지도의 제작과 주기의 내용 삽입이 다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지도에는 없지만 주기에는 기록된 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도 2개의 면만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필사 과정에서도 주기의 내용과 지도의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의 한탄강 모습이 《광여도》에서는 임진강 이외의 아주 작은 하천과 거의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임의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음도 이해할 수 있다.(이기봉)

  • 마전군 주기 (麻田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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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전군은 경기도의 연천군 미산면, 왕징면과 군남면의 일부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연천군 미산면의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에서 흘러와 腐近津에서 임진강에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본 지도 위의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당시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衙(舍)에 麻田郡이라 적혀 있는데, 이는 《해동지도》가 본 지도책이나 뒤의 2개 지도책처럼 군현의 명칭이 지도의 이름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 등 《해동지도》와 내용적으로 거의 동일한 지도에도 읍치에 군현의 명칭이 적혀 있어 그런 형태가 최초 원본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밖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주기에는 총 5개의 面  이름이 적혀 있는데 반해 지도 위에는 2개만 적혀 있다. 이는 지도의 제작과 주기의 내용 삽입이 다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지도에는 없지만 주기에는 기록된 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도 2개의 면만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필사 과정에서도 주기의 내용과 지도의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의 한탄강 모습이 《광여도》에서는 임진강 이외의 아주 작은 하천과 거의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임의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음도 이해할 수 있다.(이기봉)

  • 부평부 (富平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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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부는 현재 인천광역시의 부평구, 계양구, 검단동 일대를 제외한 서구, 경기도의 부천시, 서울특별시의 구로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계양산 남쪽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왼쪽 위의 바다는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에 있으며 상당 부분이 매립되어 육지로 변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부평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달라진 측면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으며, 왼쪽 위의 바다와 섬이 《해동지도》에는 없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산줄기 대부분이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진 점은 《해동지도》와 동일한 반면 뒤의 2개 지도는 모두 남쪽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다. 본 지도는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거의 동일한 반면 《해동지도》와는 상당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도 일부 다르게 필사한 것이 나타나고 있으며, 주기의 경우 시기적 변화 양상을 반영하기 위해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나 그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정보를 삭제하고, 동쪽의 한강이나 일부의 지명에서 약간의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부평부 주기 (富平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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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부는 현재 인천광역시의 부평구, 계양구, 검단동 일대를 제외한 서구, 경기도의 부천시, 서울특별시의 구로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계양산 남쪽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왼쪽 위의 바다는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에 있으며 상당 부분이 매립되어 육지로 변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부평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달라진 측면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으며, 왼쪽 위의 바다와 섬이 《해동지도》에는 없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산줄기 대부분이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진 점은 《해동지도》와 동일한 반면 뒤의 2개 지도는 모두 남쪽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다. 본 지도는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거의 동일한 반면 《해동지도》와는 상당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도 일부 다르게 필사한 것이 나타나고 있으며, 주기의 경우 시기적 변화 양상을 반영하기 위해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나 그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정보를 삭제하고, 동쪽의 한강이나 일부의 지명에서 약간의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삭녕군 (朔寧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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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령군은 일제시대 경기도의 연천군 삭령면, 서남면, 중면, 왕징면의 북쪽 일부, 강원도의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걸쳐 있었다. 현재는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에 속해 있으며, 읍치는 삭녕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 위의 小水源에서 흘러와 北川合流라 적혀 있는 지점에서 임진강 본류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역곡천이다. 본 지도에는 임진강 본류와 역곡천이 읍치 북쪽에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삭녕현 지도,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녕군 지도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도 앞의 3개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필사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필사 시기의 순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첫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고,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고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셋째, 기호의 사용이 본 지도보다 뒤의 2개 지도가 더 세밀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르고, 그 다음이 본 지도, 마지막이 《여지도》와 《광여도》인 것으로 판단된다. 기타 오른쪽에 기록되어 있는 古邑居는 1413년(태종 13)에 합쳐진 승령현의 읍치이며, 山城基가 있다는 기록은 고려초기까지 산성에 중심지가 있다는 기존의 연구와 합치되는 부분이다. 1441년(세종 23)까지 있었던 삭녕현의 읍치는 읍치 오른쪽의 城山 부근에 있었다.(이기봉)

  • 삭녕군 주기 (朔寧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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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령군은 일제시대 경기도의 연천군 삭령면, 서남면, 중면, 왕징면의 북쪽 일부, 강원도의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걸쳐 있었다. 현재는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에 속해 있으며, 읍치는 삭녕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 위의 小水源에서 흘러와 北川合流라 적혀 있는 지점에서 임진강 본류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역곡천이다. 본 지도에는 임진강 본류와 역곡천이 읍치 북쪽에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삭녕현 지도,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녕군 지도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도 앞의 3개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필사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필사 시기의 순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첫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고,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고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셋째, 기호의 사용이 본 지도보다 뒤의 2개 지도가 더 세밀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르고, 그 다음이 본 지도, 마지막이 《여지도》와 《광여도》인 것으로 판단된다. 기타 오른쪽에 기록되어 있는 古邑居는 1413년(태종 13)에 합쳐진 승령현의 읍치이며, 山城基가 있다는 기록은 고려초기까지 산성에 중심지가 있다는 기존의 연구와 합치되는 부분이다. 1441년(세종 23)까지 있었던 삭녕현의 읍치는 읍치 오른쪽의 城山 부근에 있었다.(이기봉)

  • 송도 (松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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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는 조선시대의 개성을 의미하며, 정2품 또는 종2품의 留守가 파견된 고을이었다. 留守는 종2품의 관찰사보다 높거나 같을 정도로 높은 관직이며, 지방관인 外職이 아니라 중앙관직으로 쳤다. 유수가 파견된 고을은 비록 서울은 아니지만 서울에 준하는 지위를 가졌으며, 개성이 松都라는 별칭으로 많이 불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유수가 파견된 곳은 고려시대의 수도였던 개성 이외에도 강화(江都), 광주, 수원 등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 등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개성부와 《여지도》(古4790-58)의 송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일부 지명이나 표현 방법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만월대 아래쪽의 上衙와 貳衙가 앞의 두 지도에는 단지 衙라고만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실제 상황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부 잘못 표기된 지명도 보이고 있는데, 왼쪽의 永安界는 永安城의 오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인데, 지도에도 禮成江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오는 하천이 임진강이며, 오른쪽 아래에서 흘러오는 漢江과 합류되어 서해로 빠져나간다. 하천 위에는 祖江, 洛河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하천의 구간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조강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가는 구간에서 부르던 한강의 별칭이었다. 한강 하류에는 江華와 喬桐이 실제보다 아주 작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의 목적인 개성 이외의 다른 군현은 대략적인 위치만 표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개성과 조강 사이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개성과 조강 사이에는 원래 풍덕부가 끼어 있어 서로 접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성이 조강과 서로 접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은 개성 남쪽으로 조강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가장 강조되어 있는 것은 개성의 성곽 안과 북쪽의 대흥산성인데, 이 두 곳의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확대해서 그리는 것은 다른 고을의 그림지도에서도 잘 나타나는 현상이며, 대흥산성이 강조되어 그려진 것은 임진․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 때문이다. 지도에 南大門과 함께 표시된 개성의 성곽은 1393년(태조 2)에 축소하여 만든 것이고, 강감찬의 건의에 의해 1010년(현종 1)부터 21년 동안 만든 羅城은 그 아래쪽 산줄기에 건설되어 있었다. 개성 성곽 안에는 고려의 정궁이 있었던 滿月臺가 폐허화된 채 축대만 남아 있는 모습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송도 주기 (松都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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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는 조선시대의 개성을 의미하며, 정2품 또는 종2품의 留守가 파견된 고을이었다. 留守는 종2품의 관찰사보다 높거나 같을 정도로 높은 관직이며, 지방관인 外職이 아니라 중앙관직으로 쳤다. 유수가 파견된 고을은 비록 서울은 아니지만 서울에 준하는 지위를 가졌으며, 개성이 松都라는 별칭으로 많이 불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유수가 파견된 곳은 고려시대의 수도였던 개성 이외에도 강화(江都), 광주, 수원 등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 등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개성부와 《여지도》(古4790-58)의 송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일부 지명이나 표현 방법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만월대 아래쪽의 上衙와 貳衙가 앞의 두 지도에는 단지 衙라고만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실제 상황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부 잘못 표기된 지명도 보이고 있는데, 왼쪽의 永安界는 永安城의 오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인데, 지도에도 禮成江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오는 하천이 임진강이며, 오른쪽 아래에서 흘러오는 漢江과 합류되어 서해로 빠져나간다. 하천 위에는 祖江, 洛河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하천의 구간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조강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가는 구간에서 부르던 한강의 별칭이었다. 한강 하류에는 江華와 喬桐이 실제보다 아주 작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의 목적인 개성 이외의 다른 군현은 대략적인 위치만 표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개성과 조강 사이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개성과 조강 사이에는 원래 풍덕부가 끼어 있어 서로 접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성이 조강과 서로 접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은 개성 남쪽으로 조강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가장 강조되어 있는 것은 개성의 성곽 안과 북쪽의 대흥산성인데, 이 두 곳의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확대해서 그리는 것은 다른 고을의 그림지도에서도 잘 나타나는 현상이며, 대흥산성이 강조되어 그려진 것은 임진․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 때문이다. 지도에 南大門과 함께 표시된 개성의 성곽은 1393년(태조 2)에 축소하여 만든 것이고, 강감찬의 건의에 의해 1010년(현종 1)부터 21년 동안 만든 羅城은 그 아래쪽 산줄기에 건설되어 있었다. 개성 성곽 안에는 고려의 정궁이 있었던 滿月臺가 폐허화된 채 축대만 남아 있는 모습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수원부 (水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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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부는 현재의 수원시와 오산시 및 매송면 남쪽의 화성시, 황구지천 서쪽의 평택시 등에 걸쳐 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邑內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면서 현재의 수원시내로 이동하기 이전의 읍치로서 현재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이 현재의 아산만으로 조선시대에 수원부의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부의 지도임에도 곳곳에 陽城倉, 陽城界, 稷山倉, 稷山界 등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아산만 부근에 여러 고을의 越境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원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바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비록 《해동지도》보다는 못하지만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도로가 전혀 기록되지 않은 뒤의 2개 지도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지명 등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의 아래쪽 가운데에 기록된 議倉이 《해동지도》에는 設倉이라 적혀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본 지도의 주기에는 設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지도에는 議倉으로, 주기에는 設倉으로 기록되어 있어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읍내 안쪽에 표시되어 있는 하천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읍내 위쪽의 後坪橋 부근의 하천 표시도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다르게 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게 되어 있다. 위쪽에 표시된 거리에 관한 내용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주기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와 같은 차이점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는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일부 다르게 필사하였으며, 특히 주기의 경우 시기적인 변화 양상을 담아내기 위해 전혀 다르게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와 동일한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方下池가 뒤의 2개 지도에는 方下地로 오기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 지명이 달라지고 있기도 하다.(이기봉)

  • 수원부 주기 (水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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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부는 현재의 수원시와 오산시 및 매송면 남쪽의 화성시, 황구지천 서쪽의 평택시 등에 걸쳐 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邑內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면서 현재의 수원시내로 이동하기 이전의 읍치로서 현재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이 현재의 아산만으로 조선시대에 수원부의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부의 지도임에도 곳곳에 陽城倉, 陽城界, 稷山倉, 稷山界 등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아산만 부근에 여러 고을의 越境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원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바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비록 《해동지도》보다는 못하지만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도로가 전혀 기록되지 않은 뒤의 2개 지도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지명 등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의 아래쪽 가운데에 기록된 議倉이 《해동지도》에는 設倉이라 적혀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본 지도의 주기에는 設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지도에는 議倉으로, 주기에는 設倉으로 기록되어 있어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읍내 안쪽에 표시되어 있는 하천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읍내 위쪽의 後坪橋 부근의 하천 표시도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다르게 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게 되어 있다. 위쪽에 표시된 거리에 관한 내용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주기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와 같은 차이점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는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일부 다르게 필사하였으며, 특히 주기의 경우 시기적인 변화 양상을 담아내기 위해 전혀 다르게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와 동일한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方下池가 뒤의 2개 지도에는 方下地로 오기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 지명이 달라지고 있기도 하다.(이기봉)

  • 안산군 (安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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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군은 경기도 시흥시의 하중동․하상동 남쪽 부분, 안산시의 시청 서쪽과 북쪽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의 수리산 서남쪽에 있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뻗은 修理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측면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있는 도로와 왼쪽의 梧里峴 및 正徃山烽臺 등은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나오고 있어 서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面과 소속된 洞里의 명칭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새로운 자료를 보충하여 수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面의 명칭은 수록되어 있지만 洞里의 명칭은 생략되어 있고, 면 중에서 郡內面이 빠져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하면서 일부 지명과 기타 정보를 생략하여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왼쪽 아래의 烏耳島에 본 지도에는 없는 十八戶에 대한 기록이 뒤의 2개 지도에 나오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아래의 3개 섬에 《여지도》가 《광여도》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어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이기봉)

  • 안산군 주기 (安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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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군은 경기도 시흥시의 하중동․하상동 남쪽 부분, 안산시의 시청 서쪽과 북쪽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의 수리산 서남쪽에 있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뻗은 修理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측면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있는 도로와 왼쪽의 梧里峴 및 正徃山烽臺 등은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나오고 있어 서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面과 소속된 洞里의 명칭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새로운 자료를 보충하여 수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面의 명칭은 수록되어 있지만 洞里의 명칭은 생략되어 있고, 면 중에서 郡內面이 빠져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하면서 일부 지명과 기타 정보를 생략하여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왼쪽 아래의 烏耳島에 본 지도에는 없는 十八戶에 대한 기록이 뒤의 2개 지도에 나오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아래의 3개 섬에 《여지도》가 《광여도》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어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이기봉)

  • 안성군 (安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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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군은 현재의 안성시 시내, 보개면, 금광면, 미양면, 대덕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구포동과 명륜동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안성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성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내용이 극히 소략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있으며, 읍치 남쪽의 산줄기 표현이 뒤의 2개 지도와 달리 《해동지도》처럼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리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되어 있고,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가 본 지도에 없는 점 등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계통을 따르면서 필요에 따라 교정을 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는 주기에 기록하면서 지도에서는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金剛山을 金剛寺로, 木川界를 水川界로 적는 등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어 정교하게 필사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주기의 내용이 같아 필사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산줄기의 표현 방식이 달라지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의 내용을 변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瑞雲山 등 일부 지명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는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안성군 주기 (安城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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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군은 현재의 안성시 시내, 보개면, 금광면, 미양면, 대덕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구포동과 명륜동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안성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성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내용이 극히 소략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있으며, 읍치 남쪽의 산줄기 표현이 뒤의 2개 지도와 달리 《해동지도》처럼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리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되어 있고,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가 본 지도에 없는 점 등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계통을 따르면서 필요에 따라 교정을 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는 주기에 기록하면서 지도에서는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金剛山을 金剛寺로, 木川界를 水川界로 적는 등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어 정교하게 필사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주기의 내용이 같아 필사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산줄기의 표현 방식이 달라지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의 내용을 변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瑞雲山 등 일부 지명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는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양근군 (楊根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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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군은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는데, 1747년(영조 23)에 현재의 양평읍 양근리인 지도 오른쪽의 葛山(칡미)으로 옮긴다. 왼쪽 위의 春川江이 현재의 북한강이며, 오른쪽의 驪江이 현재의 남한강으로 두 하천은 왼쪽 아래의 蛇島(현재의 두물머리인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근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아래쪽에 풍수적인 산줄기 모양을 하면서도 다른 곳과 달리 墓의 속자가 기록되지 않은 2개를 들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모두 墓의 명칭이 기록된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기본적으로 《해동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2개를 빠뜨렸고, 이렇게 빠뜨린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계속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客舍가 있는 읍치 부근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大院古寺垈란 글씨와 탑의 모양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나 그 계통이 뒤의 2개 지도보다는 《해동지도》 계통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읍치 왼쪽의 蹇止山 부근의 산줄기인데, 《해동지도》와 본 지도 및 《여지도》에는 산줄기가 표시되어 있지만 《광여도》에는 없다. 본 지도에는 경기도의 다른 고을과 달리 面이 왼쪽에 西從面과 西串面 2개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수정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주기에 面의 명칭과 거리만이 적혀 있음에 반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초경과 종경이 적혀 있어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주기에는 보충할 수 있었지만 지도 위에 위치를 기록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는 보충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양근군 주기 (楊根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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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군은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는데, 1747년(영조 23)에 현재의 양평읍 양근리인 지도 오른쪽의 葛山(칡미)으로 옮긴다. 왼쪽 위의 春川江이 현재의 북한강이며, 오른쪽의 驪江이 현재의 남한강으로 두 하천은 왼쪽 아래의 蛇島(현재의 두물머리인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근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아래쪽에 풍수적인 산줄기 모양을 하면서도 다른 곳과 달리 墓의 속자가 기록되지 않은 2개를 들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모두 墓의 명칭이 기록된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기본적으로 《해동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2개를 빠뜨렸고, 이렇게 빠뜨린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계속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客舍가 있는 읍치 부근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大院古寺垈란 글씨와 탑의 모양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나 그 계통이 뒤의 2개 지도보다는 《해동지도》 계통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읍치 왼쪽의 蹇止山 부근의 산줄기인데, 《해동지도》와 본 지도 및 《여지도》에는 산줄기가 표시되어 있지만 《광여도》에는 없다. 본 지도에는 경기도의 다른 고을과 달리 面이 왼쪽에 西從面과 西串面 2개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수정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주기에 面의 명칭과 거리만이 적혀 있음에 반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초경과 종경이 적혀 있어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주기에는 보충할 수 있었지만 지도 위에 위치를 기록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는 보충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양성현 (陽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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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현은 안성군의 양성면, 원곡면, 공도면을 중심으로 있었으며, 읍치는 양성면의 동항리에 있었다. 그러나 양성현에는 월경지가 많았는데, 진위와 수원의 땅을 넘어 현재의 평택시 청북면의 율북리, 고잔리, 삼계리, 포승면의 내기리, 운정리, 방림리 등에 있었다.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 있는 北面과 外良洞面 및 甘味洞面이 바로 이러한 월경지에 해당된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의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아래쪽에 西海가 크게 그려져 있고, 오른쪽의 하천과 왼쪽 아래의 하천이 바다로 흘러나가듯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의 안성천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은 진위천의 일부인데, 양성현의 월경지가 진위천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해동지도》처럼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은 《해동지도》의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그려진 西海가 사라지고, 진위천과 안성천 본류가 양성현의 땅에서 직접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이러한 오류는 근본적으로 왼쪽 아래의 북면 일대가 월경지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더 나아가 《광여도》와 《여지도》도 본 지도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이기봉)

  • 양성현 주기 (陽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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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현은 안성군의 양성면, 원곡면, 공도면을 중심으로 있었으며, 읍치는 양성면의 동항리에 있었다. 그러나 양성현에는 월경지가 많았는데, 진위와 수원의 땅을 넘어 현재의 평택시 청북면의 율북리, 고잔리, 삼계리, 포승면의 내기리, 운정리, 방림리 등에 있었다.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 있는 北面과 外良洞面 및 甘味洞面이 바로 이러한 월경지에 해당된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의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아래쪽에 西海가 크게 그려져 있고, 오른쪽의 하천과 왼쪽 아래의 하천이 바다로 흘러나가듯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의 안성천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은 진위천의 일부인데, 양성현의 월경지가 진위천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해동지도》처럼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은 《해동지도》의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그려진 西海가 사라지고, 진위천과 안성천 본류가 양성현의 땅에서 직접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이러한 오류는 근본적으로 왼쪽 아래의 북면 일대가 월경지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더 나아가 《광여도》와 《여지도》도 본 지도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이기봉)

  • 양주목 (楊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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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목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의 전곡읍․청산면, 한강 북쪽의 서울특별시 동쪽 지역 등에 걸쳐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의 가운데에 그려진 읍치는 양주시 유양동에 있었으며, 현재 관아지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 및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고 面의 명칭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뒤의 2개 지도보다 《해동지도》에 가까운 특징이다. 그러나 도로의 내용이 《해동지도》보다 소략하고, 《해동지도》에는 華陽亭으로 적혀 있던 것이 지도 아래쪽에 華陽場으로 바뀌어 있으며, 《해동지도》에는 없는 內農浦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는 없지만 화양장과 農浦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어 본 지도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며,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동일하다. 지도의 위쪽에 표시된 大灘은 현재 한탄강으로 불리는 곳으로 순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본 지도의 大灘 표시는 《해동지도》와 동일하며, 동쪽의 영평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大灘은 본 지도와 달리 영평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양주목 주기 (楊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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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목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의 전곡읍․청산면, 한강 북쪽의 서울특별시 동쪽 지역 등에 걸쳐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의 가운데에 그려진 읍치는 양주시 유양동에 있었으며, 현재 관아지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 및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고 面의 명칭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뒤의 2개 지도보다 《해동지도》에 가까운 특징이다. 그러나 도로의 내용이 《해동지도》보다 소략하고, 《해동지도》에는 華陽亭으로 적혀 있던 것이 지도 아래쪽에 華陽場으로 바뀌어 있으며, 《해동지도》에는 없는 內農浦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는 없지만 화양장과 農浦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어 본 지도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며,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동일하다. 지도의 위쪽에 표시된 大灘은 현재 한탄강으로 불리는 곳으로 순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본 지도의 大灘 표시는 《해동지도》와 동일하며, 동쪽의 영평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大灘은 본 지도와 달리 영평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양지현 (陽智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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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현은 1399년(정종 1)에 수원에 딸려 있던 陽良部曲을 승격시켜 縣으로 만들었고, 당시의 중심지는 왼쪽 아래에 古倉이라 표시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1413년(태종 13)에 광주의 秋溪鄕으로 읍치를 옮기면서 朴谷, 高安, 蹄村, 木岳 등 광주에 속했던 4개의 部曲을 함께 붙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양지현은 越境地와 犬牙相入地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고을이 되었고, 읍치는 양지면 양지리에 있었다. 양지현의 범위는 용인시 시내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전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군의 고삼면과 일죽면의 능국리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의 가운데쪽에 竹山과 龍仁 등의 군현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월경지와 견아상입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도에도 하천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데, 왼쪽 위가 경안천의 상류이고, 오른쪽은 복하천이 상류이다. 또한 오른쪽 아래는 청미천의 상류이고, 왼쪽 아래는 진위천의 상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지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에 대한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의 왼쪽 가운데 海谷里 부근에서 朱西面 뱡향으로 흘러드는 하천의 모습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이곳은 현재의 용인시 운학동과 해곡동 일대로서 실제와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해동지도》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양지현 주기 (陽智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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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현은 1399년(정종 1)에 수원에 딸려 있던 陽良部曲을 승격시켜 縣으로 만들었고, 당시의 중심지는 왼쪽 아래에 古倉이라 표시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1413년(태종 13)에 광주의 秋溪鄕으로 읍치를 옮기면서 朴谷, 高安, 蹄村, 木岳 등 광주에 속했던 4개의 部曲을 함께 붙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양지현은 越境地와 犬牙相入地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고을이 되었고, 읍치는 양지면 양지리에 있었다. 양지현의 범위는 용인시 시내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전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군의 고삼면과 일죽면의 능국리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의 가운데쪽에 竹山과 龍仁 등의 군현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월경지와 견아상입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도에도 하천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데, 왼쪽 위가 경안천의 상류이고, 오른쪽은 복하천이 상류이다. 또한 오른쪽 아래는 청미천의 상류이고, 왼쪽 아래는 진위천의 상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지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에 대한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의 왼쪽 가운데 海谷里 부근에서 朱西面 뱡향으로 흘러드는 하천의 모습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이곳은 현재의 용인시 운학동과 해곡동 일대로서 실제와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해동지도》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양천현 (陽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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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현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강서구 가양동의 궁산 남쪽에 있었다.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다. 읍치 뒤쪽의 城山에는 테뫼식의 작은 산성이 있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성황사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일부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주기에는 있지만 도면에는 없는 南山面이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거의 한가운데에 기록되어 있다. 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에는 고립적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상대적으로 연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우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필사 과정에서 일부 정보를 빠뜨리거나 변화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주기의 내용이 본 지도와 동일하며, 앞서 언급한 남산면이 본 지도와 마찬가지로 생략되어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도로를 생략하였고, 산이 본 지도보다도 더 연결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자체는 아니더라도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지도를 필사하면서 몇몇 정보를 더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지도 모두 가운데의 陵洞山이 명칭만 남고 산의 모습이 사라져 있으며, 특히 《여지도》의 경우는 오른쪽 아래의 嚴之山이 岩之山으로, 아래쪽의 馬山이 馬上으로 잘못 적혀 있어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양천현 주기 (陽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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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현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강서구 가양동의 궁산 남쪽에 있었다.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다. 읍치 뒤쪽의 城山에는 테뫼식의 작은 산성이 있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성황사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일부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주기에는 있지만 도면에는 없는 南山面이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거의 한가운데에 기록되어 있다. 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에는 고립적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상대적으로 연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우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필사 과정에서 일부 정보를 빠뜨리거나 변화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주기의 내용이 본 지도와 동일하며, 앞서 언급한 남산면이 본 지도와 마찬가지로 생략되어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도로를 생략하였고, 산이 본 지도보다도 더 연결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자체는 아니더라도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지도를 필사하면서 몇몇 정보를 더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지도 모두 가운데의 陵洞山이 명칭만 남고 산의 모습이 사라져 있으며, 특히 《여지도》의 경우는 오른쪽 아래의 嚴之山이 岩之山으로, 아래쪽의 馬山이 馬上으로 잘못 적혀 있어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여주목 (呂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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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본 자료에서 驪자를 呂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呂州牧은 驪州牧으로 써야한다. 지도는 읍치의 방향을 기준으로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하천의 유로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구도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여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고,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차이점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부분들은 본 지도책 경기도 대부분의 군현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본 지도에서 특이한 것은 다른 3개 지도에는 없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이 빼곡히 적혀 있다는 점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지도에는 면의 명칭도 적혀 있지 않고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도 없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은 없지만 면의 명칭은 사각형의 기호를 사용하여 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을 따르면서 마을명과 제언 명칭을 새로 기입하고, 도로를 소략하게 처리하면서 주기를 당시의 상황에 맞게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 계통에서 마을명을 없애고 면의 명칭만 기입한 지도 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이 계통의 지도 중 현재 남아 있지 않은 또다른 원본이 있고, 필사본 계통도 다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지도에는 一景부터 八景까지의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어, 당시에 이 지역의 八景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뿌리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가운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이며, 읍치의 주요 건물은 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여주군청 근처에 있었다.(이기봉)

  • 여주목 주기 (呂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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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본 자료에서 驪자를 呂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呂州牧은 驪州牧으로 써야한다. 지도는 읍치의 방향을 기준으로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하천의 유로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구도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여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고,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차이점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부분들은 본 지도책 경기도 대부분의 군현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본 지도에서 특이한 것은 다른 3개 지도에는 없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이 빼곡히 적혀 있다는 점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지도에는 면의 명칭도 적혀 있지 않고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도 없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은 없지만 면의 명칭은 사각형의 기호를 사용하여 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을 따르면서 마을명과 제언 명칭을 새로 기입하고, 도로를 소략하게 처리하면서 주기를 당시의 상황에 맞게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 계통에서 마을명을 없애고 면의 명칭만 기입한 지도 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이 계통의 지도 중 현재 남아 있지 않은 또다른 원본이 있고, 필사본 계통도 다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지도에는 一景부터 八景까지의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어, 당시에 이 지역의 八景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뿌리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가운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이며, 읍치의 주요 건물은 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여주군청 근처에 있었다.(이기봉)

  • 연천현 (漣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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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현은 현재의 연천군 연천읍과 중면, 황지리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천읍 읍내리에 있었다. 가장 왼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가장 오른쪽이 한탄강이며, 가운데의 하천이 차탄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고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곳곳에 大路, 中路, 小路 등 도로가 있었던 지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대로, 중로, 소로 등의 문자들은 거의 삭제되어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을 필사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본 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오른쪽에는 현재의 재인폭포가 紫烟瀑으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폭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는 재인폭포를 실제로 보고 그린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자의적으로 재인폭포의 모습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연천현 주기 (漣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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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현은 현재의 연천군 연천읍과 중면, 황지리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천읍 읍내리에 있었다. 가장 왼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가장 오른쪽이 한탄강이며, 가운데의 하천이 차탄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고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곳곳에 大路, 中路, 小路 등 도로가 있었던 지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대로, 중로, 소로 등의 문자들은 거의 삭제되어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을 필사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본 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오른쪽에는 현재의 재인폭포가 紫烟瀑으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폭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는 재인폭포를 실제로 보고 그린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자의적으로 재인폭포의 모습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영종 (永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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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종진은 원래 현재의 화성시 서신면에 있던 정4품 萬戶鎭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수도 한양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1653년(효종 4)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영종도로 옮겼고, 1681년(숙종 7)에는 종3품의 僉使鎭으로 승격되었다. 1690년(숙종 16)에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 그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에 종2품의 防禦使로 승격되었다. 영종진의 지도가 특별히 제작되어 군현지도와 함께 수록된 것은 이와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의 가운데에는 원래의 영종도 명칭과 관련되어 있는 古紫燕縣基가 표시되어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지리지에서는 자연현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본 지도는 전체적인 구도와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종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약간 더 상세한 도로 표시가 들어가 있다. 또한 본 지도에 수록된 주기의 내용이 《광여도》와 《여지도》의  주기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의 주기와는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 등의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꾸었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나 그 필사본을 다시 필사하면서 주기는 그대로 따르고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종진의 객사와 아사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중산동 구읍 마을에 있었는데, 현재는 본 지도와 달리 완전히 영종도와 연결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영종도와 그 주변의 섬이 밀물(潮退) 때 육지로 연결되고 있음(成陸)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영종진에 소속된 섬 주변 이외에는 마치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둔 육지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넓은 바다이다. 그림 지도의 경우 서로 연결되는 지역은 비록 멀리 있더라도 해당 방향의 가까에 그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지도에는 禁山이 3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戰船에 소용되는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하던 지역이었다.(이기봉)

  • 영종 주기 (永宗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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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종진은 원래 현재의 화성시 서신면에 있던 정4품 萬戶鎭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수도 한양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1653년(효종 4)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영종도로 옮겼고, 1681년(숙종 7)에는 종3품의 僉使鎭으로 승격되었다. 1690년(숙종 16)에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 그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에 종2품의 防禦使로 승격되었다. 영종진의 지도가 특별히 제작되어 군현지도와 함께 수록된 것은 이와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의 가운데에는 원래의 영종도 명칭과 관련되어 있는 古紫燕縣基가 표시되어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지리지에서는 자연현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본 지도는 전체적인 구도와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종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약간 더 상세한 도로 표시가 들어가 있다. 또한 본 지도에 수록된 주기의 내용이 《광여도》와 《여지도》의  주기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의 주기와는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 등의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꾸었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나 그 필사본을 다시 필사하면서 주기는 그대로 따르고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종진의 객사와 아사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중산동 구읍 마을에 있었는데, 현재는 본 지도와 달리 완전히 영종도와 연결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영종도와 그 주변의 섬이 밀물(潮退) 때 육지로 연결되고 있음(成陸)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영종진에 소속된 섬 주변 이외에는 마치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둔 육지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넓은 바다이다. 그림 지도의 경우 서로 연결되는 지역은 비록 멀리 있더라도 해당 방향의 가까에 그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지도에는 禁山이 3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戰船에 소용되는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하던 지역이었다.(이기봉)

  • 영평현 (永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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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평현은 포천시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중면 영평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 본류이고, 읍치를 지나 한탄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영평천이다. 지도에는 각각 麻屹川과 南大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하천 명칭이 통일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부르던 하천 명칭이었다. 두 하천의 합류 지점에는 漢灘이란 명칭이 적혀 있는데, 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漢灘의 漢은 ‘크다’는 뜻의 ‘한’에 대한 소리를 딴 것이고, 灘은 여울의 뜻을 딴 것이다. 오른쪽에 애매모호하게 표시된 하천은 북한강으로 흘러가는 가평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가평천 최상류의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 영평현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표시된 것이지만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현되어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러한 애매한 표현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영평현 지도에는 더욱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어 지도의 필사자들이 실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 오른쪽의 古城은 현재의 영중면 성동리에 있는 성동리산성으로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던 곳이었다.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산성이나 그 부근에서 지도 위에 표시된 곳으로 읍치가 이동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본 지도의 주기에는 읍내면, 이동면, 서면, 일동면, 남면, 북면 등 6개 面의 명칭이 적혀 있지만 지도에는 북면 2개와 남면 및 서면만이 마을 이름과 함께 적혀 있다. 본 지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평현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面 자체보다는 영평현에서 유명한 마을을 표시하기 위해 취해진 방식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서 도로 등 일부의 정보만을 생략한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평현 지도(智島)에서는 서면과 남면에 마을 이름을 생략하고 있는데, 필사자가 면의 명칭을 적어넣은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읍치 오른쪽의 미로곡봉이 미로곡역으로 잘못 필사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영평현 주기 (永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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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평현은 포천시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중면 영평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 본류이고, 읍치를 지나 한탄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영평천이다. 지도에는 각각 麻屹川과 南大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하천 명칭이 통일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부르던 하천 명칭이었다. 두 하천의 합류 지점에는 漢灘이란 명칭이 적혀 있는데, 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漢灘의 漢은 ‘크다’는 뜻의 ‘한’에 대한 소리를 딴 것이고, 灘은 여울의 뜻을 딴 것이다. 오른쪽에 애매모호하게 표시된 하천은 북한강으로 흘러가는 가평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가평천 최상류의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 영평현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표시된 것이지만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현되어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러한 애매한 표현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영평현 지도에는 더욱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어 지도의 필사자들이 실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 오른쪽의 古城은 현재의 영중면 성동리에 있는 성동리산성으로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던 곳이었다.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산성이나 그 부근에서 지도 위에 표시된 곳으로 읍치가 이동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본 지도의 주기에는 읍내면, 이동면, 서면, 일동면, 남면, 북면 등 6개 面의 명칭이 적혀 있지만 지도에는 북면 2개와 남면 및 서면만이 마을 이름과 함께 적혀 있다. 본 지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평현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面 자체보다는 영평현에서 유명한 마을을 표시하기 위해 취해진 방식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서 도로 등 일부의 정보만을 생략한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평현 지도(智島)에서는 서면과 남면에 마을 이름을 생략하고 있는데, 필사자가 면의 명칭을 적어넣은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읍치 오른쪽의 미로곡봉이 미로곡역으로 잘못 필사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용인현 (龍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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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현은 양지면, 원삼면, 백암면을 제외한 용인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용인시 구성읍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縣內面이란 명칭이 보이고 있는데, 용구현과 합쳐져 용인현이 된 처인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처인현은 원래 처인부곡이었다가 몽골의 침입 때 적장 살례탑을 전사시킨 공이 있어 현으로 바뀌었으며, 그 중심지였던 처인성은 현재의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남아 있다. 용인현은 처인현 지역이었던 남쪽의 오산천(왼쪽)과 진위천(오른쪽) 유역, 용구현 지역이었던 북쪽의 탄천(왼쪽)과 경안천(오른쪽) 유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용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본 지도책의 경기도 다른 고을 지도에 비해 面의 정보가 자세하고, 조선후기의 민간 숙박업소인 酒幕도 나오며, 읍치에 배치된 제사 장소인 성황단, 사직단, 여단, 문묘(향교) 등도 모두 표시되어 있어 고을 사이의 편차를 쉽게 알 수 있는 지도이다. 이러한 정보는 본 지도보다 앞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으며, 뒤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정보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본적인 정보는 거의 바꾸지 않아 지도가 필사 연대의 상황을 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본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가 소략하게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지도의 주기 내용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의 주기 내용과 동일한 주기가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면과 역 등에 정밀한 기호가 사용되고 있는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용인현 주기 (龍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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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현은 양지면, 원삼면, 백암면을 제외한 용인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용인시 구성읍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縣內面이란 명칭이 보이고 있는데, 용구현과 합쳐져 용인현이 된 처인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처인현은 원래 처인부곡이었다가 몽골의 침입 때 적장 살례탑을 전사시킨 공이 있어 현으로 바뀌었으며, 그 중심지였던 처인성은 현재의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남아 있다. 용인현은 처인현 지역이었던 남쪽의 오산천(왼쪽)과 진위천(오른쪽) 유역, 용구현 지역이었던 북쪽의 탄천(왼쪽)과 경안천(오른쪽) 유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용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본 지도책의 경기도 다른 고을 지도에 비해 面의 정보가 자세하고, 조선후기의 민간 숙박업소인 酒幕도 나오며, 읍치에 배치된 제사 장소인 성황단, 사직단, 여단, 문묘(향교) 등도 모두 표시되어 있어 고을 사이의 편차를 쉽게 알 수 있는 지도이다. 이러한 정보는 본 지도보다 앞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으며, 뒤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정보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본적인 정보는 거의 바꾸지 않아 지도가 필사 연대의 상황을 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본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가 소략하게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지도의 주기 내용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의 주기 내용과 동일한 주기가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면과 역 등에 정밀한 기호가 사용되고 있는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음죽현 (陰竹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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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죽현은 경기도의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 충청북도의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 병암리, 도신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호원읍의 선읍리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현재 청미천이라 부르는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음죽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첫째, 도로라는 측면에서 가장 자세한 것은 《해동지도》의 것이며, 본 지도의 것은 극히 소략하게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특히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왼쪽의 忠州界에서 아래쪽의 忠州界까지 이어진 도로를 하천으로 잘못 그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도로라는 기준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의 도로만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광여도》에는 비록 도로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도로와 함께 기록되어 있던 大路와 中路 및 小路의 기록이 《해동지도》와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다. 예를 들어 《광여도》에 표시된 읍치(縣) 오른쪽의 自縣去雙峴小路와 아래쪽의 自縣通無極小路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은 도로는 《해동지도》에 가깝고, 도로의 명칭 기록은 《광여도》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두 측면에서 본 지도는 원본을 아주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지도의 주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본 지도의 것은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가장 먼저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이후 상황에 맞게 주기를 변형한 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본 지도는 나머지 3개 지도에 縣이라 표시된 읍치에 衙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용어를 통일하기 위해 본 지도의 필사자가 교정한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 음죽현 주기 (陰竹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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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죽현은 경기도의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 충청북도의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 병암리, 도신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호원읍의 선읍리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현재 청미천이라 부르는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음죽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첫째, 도로라는 측면에서 가장 자세한 것은 《해동지도》의 것이며, 본 지도의 것은 극히 소략하게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특히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왼쪽의 忠州界에서 아래쪽의 忠州界까지 이어진 도로를 하천으로 잘못 그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도로라는 기준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의 도로만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광여도》에는 비록 도로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도로와 함께 기록되어 있던 大路와 中路 및 小路의 기록이 《해동지도》와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다. 예를 들어 《광여도》에 표시된 읍치(縣) 오른쪽의 自縣去雙峴小路와 아래쪽의 自縣通無極小路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은 도로는 《해동지도》에 가깝고, 도로의 명칭 기록은 《광여도》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두 측면에서 본 지도는 원본을 아주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지도의 주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본 지도의 것은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가장 먼저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이후 상황에 맞게 주기를 변형한 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본 지도는 나머지 3개 지도에 縣이라 표시된 읍치에 衙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용어를 통일하기 위해 본 지도의 필사자가 교정한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 이천부 (利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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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이천시의 시내, 부발읍, 대월면, 모가면, 호법면, 마장면, 신둔면, 백사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이천 시내 관고동․창전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복하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이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어 같은 계통이라도 필사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좌향과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서쪽에 있는 고을의 진산 雪峯山과 그로부터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에는 상대적으로 소략해지고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왼쪽 위의 彌勒山과 오른쪽의 南北五十里와 東西四十里 등의 문구가 《해동지도》와 동일하게 들어가 있어 동일한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리고 《해동지도》의 오른쪽 아래쪽에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가 참고한 원본 계통이 아니라 본 지도나 그 필사본 계통을 참고하여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필사 과정에서 도로와 일부 지명 및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 麗州界로 빠져나가는 복하천의 하류가 생략되어 있어 하천의 유로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 아래의 麗州梨浦界가 麗州浦界로 적혀 있는 등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이기봉)

  • 이천부 주기 (利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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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이천시의 시내, 부발읍, 대월면, 모가면, 호법면, 마장면, 신둔면, 백사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이천 시내 관고동․창전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복하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이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어 같은 계통이라도 필사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좌향과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서쪽에 있는 고을의 진산 雪峯山과 그로부터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에는 상대적으로 소략해지고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왼쪽 위의 彌勒山과 오른쪽의 南北五十里와 東西四十里 등의 문구가 《해동지도》와 동일하게 들어가 있어 동일한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리고 《해동지도》의 오른쪽 아래쪽에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가 참고한 원본 계통이 아니라 본 지도나 그 필사본 계통을 참고하여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필사 과정에서 도로와 일부 지명 및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 麗州界로 빠져나가는 복하천의 하류가 생략되어 있어 하천의 유로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 아래의 麗州梨浦界가 麗州浦界로 적혀 있는 등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이기봉)

  • 인천부 (仁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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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부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동구, 중구, 남구, 연수구, 남동구, 시흥시의 옛 소래읍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의 문학산 북쪽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인천부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文鶴山城과 문학산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인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도로와 위치 정보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 도로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서는 소략하지만 도로가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해동지도》에는 面과 驛 등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해동지도》의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가 없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의 주기에는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같은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였지만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를 수록하면서 지도 위에서는 삭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주기에는 월경지로 존재했던 梨浦面과 거리 정보가 생략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밖에 오른쪼의 덕적도와 무의도 및 용유도 등에 적혀 있던 《해동지도》의 주기 내용도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는 도로와 면의 표시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나 그 계통을 바탕으로 다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인천부 주기 (仁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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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부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동구, 중구, 남구, 연수구, 남동구, 시흥시의 옛 소래읍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의 문학산 북쪽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인천부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文鶴山城과 문학산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인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도로와 위치 정보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 도로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서는 소략하지만 도로가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해동지도》에는 面과 驛 등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해동지도》의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가 없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의 주기에는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같은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였지만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를 수록하면서 지도 위에서는 삭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주기에는 월경지로 존재했던 梨浦面과 거리 정보가 생략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밖에 오른쪼의 덕적도와 무의도 및 용유도 등에 적혀 있던 《해동지도》의 주기 내용도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는 도로와 면의 표시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나 그 계통을 바탕으로 다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장단부 (長湍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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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과 소남면을 제외한 경기도의 장단군에 걸쳐 있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단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長湍府라는 명칭이 적혀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衙(舍)가, 뒤의 2개 지도에는 邑內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가 본 지도나 뒤의 2개 지도처럼 군현명이 지도 이름으로 적혀 있지 않은 최초의 원본 모습에 가장 가까울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도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군현의 명칭이 읍치에 적혀 있는 경우이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 비해 소략한 편이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가 그려져 있지 않다. 특히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의 오른쪽 위 부분의 하천 유로가 완전히 잘못 그려져 있는데, 《해동지도》의 도로를 하천의 유로로 잘못 이해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본 지도의 경우 이 부분의 도로가 하천과 완전히 다른 색으로 그려져 있어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나는 오류가 발생하기 어렵다. 다만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면서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연관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난 도로와 하천의 오해, 본 지도에는 없는 古浪浦가 뒤의 2개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를 직접 필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도로와 하천을 오해할 수 있게 그린 지도를 원본으로 삼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장단부 주기 (長湍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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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과 소남면을 제외한 경기도의 장단군에 걸쳐 있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단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長湍府라는 명칭이 적혀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衙(舍)가, 뒤의 2개 지도에는 邑內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가 본 지도나 뒤의 2개 지도처럼 군현명이 지도 이름으로 적혀 있지 않은 최초의 원본 모습에 가장 가까울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도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군현의 명칭이 읍치에 적혀 있는 경우이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 비해 소략한 편이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가 그려져 있지 않다. 특히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의 오른쪽 위 부분의 하천 유로가 완전히 잘못 그려져 있는데, 《해동지도》의 도로를 하천의 유로로 잘못 이해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본 지도의 경우 이 부분의 도로가 하천과 완전히 다른 색으로 그려져 있어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나는 오류가 발생하기 어렵다. 다만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면서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연관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난 도로와 하천의 오해, 본 지도에는 없는 古浪浦가 뒤의 2개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를 직접 필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도로와 하천을 오해할 수 있게 그린 지도를 원본으로 삼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적성현 (積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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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성현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적성면의 구읍리에 있었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뻗은 산줄기가 동남쪽의 紺岳山으로부터 내려왔음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판단된다. 감악산은 조선시대에 국가의 中祀에 속해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정상 부근의 祭壇은 바로 중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현재의 임진강으로 지도 위에는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부르던 頭只江, 新津江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적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내용이 다르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는 《해동지도》에 더욱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전반적인 필사 순서는 《해동지도》가 가장 빠르고, 다음으로 본 지도이며,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나중에 필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내의 경우도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鄕廳이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客舍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客舍란 명칭이 아니라 殿牌奉安이란 문장이 적혀 있다. 客舍는 임금을 상징하는 殿牌 또는 闕牌가 보관되어 있는 건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관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객사만을 놓고 볼 때 《해동지도》는 지방에서 그려올린 지도의 원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다른 고을과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객사로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적성현 주기 (積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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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성현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적성면의 구읍리에 있었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뻗은 산줄기가 동남쪽의 紺岳山으로부터 내려왔음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판단된다. 감악산은 조선시대에 국가의 中祀에 속해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정상 부근의 祭壇은 바로 중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현재의 임진강으로 지도 위에는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부르던 頭只江, 新津江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적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내용이 다르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는 《해동지도》에 더욱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전반적인 필사 순서는 《해동지도》가 가장 빠르고, 다음으로 본 지도이며,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나중에 필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내의 경우도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鄕廳이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客舍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客舍란 명칭이 아니라 殿牌奉安이란 문장이 적혀 있다. 客舍는 임금을 상징하는 殿牌 또는 闕牌가 보관되어 있는 건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관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객사만을 놓고 볼 때 《해동지도》는 지방에서 그려올린 지도의 원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다른 고을과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객사로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죽산부 (竹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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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부는 현재의 안성시 죽산면, 일죽면, 삼죽면, 용인시 백암면, 원삼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현재의 청미천이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부근에 표시된 古山城은 몽골 침입 때 몽골군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한 죽주산성이며,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죽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에 더 가까운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에는 인근 군현과의 경계선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된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왼쪽 위의 西三面에서 발원하여 陽智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산지의 표현에서도 읍치 아래쪽의 本邑案山 부분이 《해동지도》와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상당히 유사한 편이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와 봉수 및 읍치의 旧鄕校 등이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여지도》의 경우 수원을 왕래하는 中山路가 水原界로 잘못 적혀 있기도 하고, 일부 지명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변경시켰고, 뒤의 2개 지도는 수정된 본 지도 계통을 다시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수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고산성 아래의 石塔과 彌勒 부분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명칭에 알맞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가 아니라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죽산부 주기 (竹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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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부는 현재의 안성시 죽산면, 일죽면, 삼죽면, 용인시 백암면, 원삼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현재의 청미천이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부근에 표시된 古山城은 몽골 침입 때 몽골군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한 죽주산성이며,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죽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에 더 가까운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에는 인근 군현과의 경계선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된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왼쪽 위의 西三面에서 발원하여 陽智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산지의 표현에서도 읍치 아래쪽의 本邑案山 부분이 《해동지도》와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상당히 유사한 편이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와 봉수 및 읍치의 旧鄕校 등이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여지도》의 경우 수원을 왕래하는 中山路가 水原界로 잘못 적혀 있기도 하고, 일부 지명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변경시켰고, 뒤의 2개 지도는 수정된 본 지도 계통을 다시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수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고산성 아래의 石塔과 彌勒 부분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명칭에 알맞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가 아니라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지평현 (砥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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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현은 현재의 양평군 지제면, 양동면, 청운면, 단월면, 용문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지제면의 지평리에 있었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 양평읍 남쪽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흑천이며, 아래쪽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으로 흘러가는 석곡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지평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첫째,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되어 있다. 셋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넷째, 본 지도의 읍치 건물 방향과 산의 표현 방식이 《해동지도》에 가까운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상당한 변화를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검토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본 지도가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주기 내용 등에서 변화를 주었고, 마지막으로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를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의 경우 일부 지명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하천이 다른 군현과 만나는 지점에 水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광여도》에는 이 중 아래쪽에서 두 번째의 것이 水原으로 바뀌어 있고, 《여지도》에는 이것이 水源으로, 그 위쪽의 것이 水路로 바뀌어 있다. 또한 읍치의 산줄기 모습이 실제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이기 때문에 그 뒤의 필사자들이 변형시킨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지평현 주기 (砥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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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현은 현재의 양평군 지제면, 양동면, 청운면, 단월면, 용문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지제면의 지평리에 있었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 양평읍 남쪽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흑천이며, 아래쪽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으로 흘러가는 석곡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지평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첫째,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되어 있다. 셋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넷째, 본 지도의 읍치 건물 방향과 산의 표현 방식이 《해동지도》에 가까운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상당한 변화를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검토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본 지도가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주기 내용 등에서 변화를 주었고, 마지막으로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를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의 경우 일부 지명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하천이 다른 군현과 만나는 지점에 水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광여도》에는 이 중 아래쪽에서 두 번째의 것이 水原으로 바뀌어 있고, 《여지도》에는 이것이 水源으로, 그 위쪽의 것이 水路로 바뀌어 있다. 또한 읍치의 산줄기 모습이 실제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이기 때문에 그 뒤의 필사자들이 변형시킨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진위현 (振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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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현은 평택시 진위면, 서탄면, 고덕면, 옛 송탄시와 평택시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진위면 봉남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에서 흘러오는 진위천이 위쪽에서 내려오는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의 내용으로 객사와 아사 등의 읍치와 고개 및 주막 등이 아주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내용이 간략함에도 불구하고 酒幕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도로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수록된 각 경계선까지의 거리가 모두 생략되어 있는데, 주기에 동서남북 경계선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수록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지만 주기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필사 당시의 정보로 교체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위현 지도에도 주기를 비롯하여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 위의 도로가 없는 것을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도로만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에 표시된 海倉은 진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한 군데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면서 해창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해창은 바닷배가 운행될 수 있는 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썰물 때 바닷물이 아산만 깊숙이 들어오는 자연지리적 지형을 잘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이기봉)

  • 진위현 주기 (振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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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현은 평택시 진위면, 서탄면, 고덕면, 옛 송탄시와 평택시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진위면 봉남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에서 흘러오는 진위천이 위쪽에서 내려오는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의 내용으로 객사와 아사 등의 읍치와 고개 및 주막 등이 아주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내용이 간략함에도 불구하고 酒幕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도로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수록된 각 경계선까지의 거리가 모두 생략되어 있는데, 주기에 동서남북 경계선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수록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지만 주기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필사 당시의 정보로 교체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위현 지도에도 주기를 비롯하여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 위의 도로가 없는 것을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도로만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에 표시된 海倉은 진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한 군데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면서 해창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해창은 바닷배가 운행될 수 있는 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썰물 때 바닷물이 아산만 깊숙이 들어오는 자연지리적 지형을 잘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이기봉)

  • 통진부 (通津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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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부는 현재의 김포시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월곶면의 고막리와 군하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과 북쪽이 한강과 접해 있고, 서쪽은 鹽河를 사이에 두고 강화와 마주보며, 남쪽으로 김포와 접해 있었다. 본 지도에서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아래쪽은 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이고, 오른쪽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해당된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 내용 및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통진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 점, 읍치의 왼쪽 산봉우리의 묘사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식으로 그려진 점, 面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본 지도의 邑內面이 《해동지도》에는 府內面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읍내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는 오른쪽으로 김포와 연결되어 있는 육지 부분이 아주 좁게 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이면서 몇몇 부분에서 변화를 주고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가 필사한 지도 계통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오른쪽 위 아래로 童城山과 守安山의 명칭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려말과 조선초를 거치면서 통진에 완전히 속하게 된 속현의 명칭과 동일하다. 이들 산에는 테뫼식의 중소형 산성이 있어 고려말 이전에는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연구 경향을 잘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사례 지역이 된다. 지도 위쪽에는 阻江이란 지명이 적혀 있는데, 한강 하구의 구간에서 사용되던 하천 명칭이었고, 祖江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통진부 주기 (通津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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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부는 현재의 김포시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월곶면의 고막리와 군하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과 북쪽이 한강과 접해 있고, 서쪽은 鹽河를 사이에 두고 강화와 마주보며, 남쪽으로 김포와 접해 있었다. 본 지도에서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아래쪽은 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이고, 오른쪽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해당된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 내용 및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통진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 점, 읍치의 왼쪽 산봉우리의 묘사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식으로 그려진 점, 面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본 지도의 邑內面이 《해동지도》에는 府內面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읍내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는 오른쪽으로 김포와 연결되어 있는 육지 부분이 아주 좁게 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이면서 몇몇 부분에서 변화를 주고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가 필사한 지도 계통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오른쪽 위 아래로 童城山과 守安山의 명칭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려말과 조선초를 거치면서 통진에 완전히 속하게 된 속현의 명칭과 동일하다. 이들 산에는 테뫼식의 중소형 산성이 있어 고려말 이전에는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연구 경향을 잘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사례 지역이 된다. 지도 위쪽에는 阻江이란 지명이 적혀 있는데, 한강 하구의 구간에서 사용되던 하천 명칭이었고, 祖江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파주목 (坡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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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목은 현재의 파주시 파주읍, 파평면, 법원읍, 문산읍, 광탄면, 조리면, 월롱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의 파주시청이 자리한 지역은 조선시대에 파주목의 땅이 아니라  교하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오른쪽 가운데에는 임진강 명칭의 기원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던 臨津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파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주기 역시 동일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 있던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으며, 본 지도에는 약간 소략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임진강의 하류 모양이 《해동지도》와는 거의 비슷하지만 나머지 2개 지도와는 다르고, 읍치의 중요 건물 중 軍器(庫) 표시와 읍치 중심으로 글씨를 쓰는 방식 등도 역시 동일한 경향을 띄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가까우면서 주기와 지도의 방향 등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에는 오자도 보이고 있는데, 읍치 왼쪽의 大山峯은 나머지 3개 지도에는 大山烽으로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에 烽燧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제작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파주목 주기 (坡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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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목은 현재의 파주시 파주읍, 파평면, 법원읍, 문산읍, 광탄면, 조리면, 월롱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의 파주시청이 자리한 지역은 조선시대에 파주목의 땅이 아니라  교하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오른쪽 가운데에는 임진강 명칭의 기원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던 臨津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파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주기 역시 동일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 있던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으며, 본 지도에는 약간 소략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임진강의 하류 모양이 《해동지도》와는 거의 비슷하지만 나머지 2개 지도와는 다르고, 읍치의 중요 건물 중 軍器(庫) 표시와 읍치 중심으로 글씨를 쓰는 방식 등도 역시 동일한 경향을 띄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가까우면서 주기와 지도의 방향 등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에는 오자도 보이고 있는데, 읍치 왼쪽의 大山峯은 나머지 3개 지도에는 大山烽으로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에 烽燧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제작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포천현 (抱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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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현은 현재의 포천시 시내, 화현면, 군내면, 가산면, 소흘읍, 내촌면, 갈월리 서쪽을 제외한 신북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포천천이다. 읍치 뒤쪽으로는 半月山堅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포천현의 옛 명칭 중의 하나인 堅城과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다. 또한 성황당이 산성 안에 설치되어 있는데, 고려초기까지는 고을의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새로운 연구 경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포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경향을 알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 없는 도로와 읍치 아래쪽의 현내면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에도 수록되어 있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경우 面의 명칭에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데,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그려졌다가 나중에 주기가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본 지도는 처음부터 읍치로부터 면까지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와 함께 필사되어 도면에서의 거리 정보는 삭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 과정에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는 주기가 첨가되고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 등을 변경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가 본 지도와 동일한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필사본을 바탕으로 재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읍치 뒤의 산에 대판 표현이 상당히 달라 본 지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필사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재필사 과정에서 도로를 없애고, 현내면의 명칭을 빠뜨리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포천현 주기 (抱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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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현은 현재의 포천시 시내, 화현면, 군내면, 가산면, 소흘읍, 내촌면, 갈월리 서쪽을 제외한 신북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포천천이다. 읍치 뒤쪽으로는 半月山堅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포천현의 옛 명칭 중의 하나인 堅城과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다. 또한 성황당이 산성 안에 설치되어 있는데, 고려초기까지는 고을의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새로운 연구 경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포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경향을 알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 없는 도로와 읍치 아래쪽의 현내면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에도 수록되어 있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경우 面의 명칭에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데,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그려졌다가 나중에 주기가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본 지도는 처음부터 읍치로부터 면까지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와 함께 필사되어 도면에서의 거리 정보는 삭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 과정에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는 주기가 첨가되고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 등을 변경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가 본 지도와 동일한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필사본을 바탕으로 재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읍치 뒤의 산에 대판 표현이 상당히 달라 본 지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필사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재필사 과정에서 도로를 없애고, 현내면의 명칭을 빠뜨리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풍덕부 (豊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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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덕부는 일제시대의 개풍군 광덕면, 대성면, 흥교면, 임한면, 중면, 상도면, 봉동면 등에 걸쳐 있었다.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남쪽에 해당되며, 읍치는 판문군 풍덕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지도의 오른쪽과 아래쪽이 모두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방향이 정확하지는 않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풍덕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양상을 알아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지만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있는 것이 도로이다. 비록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소략하지만 상호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요소이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달라지는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산에서 볼 수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봉우리로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산줄기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해안선과 오른쪽의 한강 하류의 표현에서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해동지도》에서는 다른 하천에 비해 한강 하류가 상당히 굵게 그려져 강의 크기를 쉽게 비교할 수 있게 한 반면에 본 지도에는 훨씬 얇아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더욱 얇아져 한강임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고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더 심하게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필사했다기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계통의 다른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표적인 예로 오른쪽 위의 德積山烽臺가 뒤의 2개 지도에는 그 위쪽의 烽에 표시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 본 지도가 잘못된 것이다. 오른쪽의 한강에 대한 표현은 네 지도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위쪽에서 흘러오는 현재의 사천이 임진강과 합류된 후 다시 한강과 합류되는 모습으로 그려져야 사실에 부합된다.(이기봉)

  • 풍덕부 주기 (豊德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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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덕부는 일제시대의 개풍군 광덕면, 대성면, 흥교면, 임한면, 중면, 상도면, 봉동면 등에 걸쳐 있었다.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남쪽에 해당되며, 읍치는 판문군 풍덕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지도의 오른쪽과 아래쪽이 모두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방향이 정확하지는 않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풍덕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양상을 알아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지만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있는 것이 도로이다. 비록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소략하지만 상호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요소이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달라지는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산에서 볼 수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봉우리로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산줄기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해안선과 오른쪽의 한강 하류의 표현에서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해동지도》에서는 다른 하천에 비해 한강 하류가 상당히 굵게 그려져 강의 크기를 쉽게 비교할 수 있게 한 반면에 본 지도에는 훨씬 얇아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더욱 얇아져 한강임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고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더 심하게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필사했다기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계통의 다른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표적인 예로 오른쪽 위의 德積山烽臺가 뒤의 2개 지도에는 그 위쪽의 烽에 표시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 본 지도가 잘못된 것이다. 오른쪽의 한강에 대한 표현은 네 지도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위쪽에서 흘러오는 현재의 사천이 임진강과 합류된 후 다시 한강과 합류되는 모습으로 그려져야 사실에 부합된다.(이기봉)

  • ▶경상도
  • 개령현 (開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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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김천시에 포함된 지역으로 개령면의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중심부였다.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아포읍, 남면, 감문면의 일부, 농소면의 일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서쪽의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며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감천(감곡천)이다.지도에 표시된 감천이 현재 하천명으로 여전히 사용된다. 지도의 왼쪽이 상류, 오른쪽이 하류쪽이다. 감천은 동북쪽으로 흘러 선산 앞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동국여지승람에 감문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는데 현재의 개령면 덕촌리의 취적봉에 해당한다. 읍치 중심부 군기고 뒤쪽에 봉대라고 적힌 산이다. 읍치에는 가장 큰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대부분의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향교를 독립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치와 같은 형국 속에 묘사하였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읍치 북쪽에 성황산만 표기되었다. 읍치 오른쪽에 동락정이 그려졌는데 백성과 함께 同樂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근처의 산이 柳山이다. 유산에는 甘文國 때의 궁궐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감천 남쪽에 덕림서원이 보이는데 1677년(숙종 3)에 사액받은 곳으로 김종직, 정경세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 뒤쪽의 사찰은 지금 계림사라는 이름으로 취적봉 아래에 남아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아포면이 지금의 아포읍이 되었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의 감천변 을 따라 난 길은 현재 910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감천 남쪽에는 경부 고속도로가 나 있어 아포읍을 지나 구미로 연결된다.(이현군)

  • 개령현 주기 (開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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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김천시에 포함된 지역으로 개령면의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중심부였다.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아포읍, 남면, 감문면의 일부, 농소면의 일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서쪽의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며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감천(감곡천)이다.지도에 표시된 감천이 현재 하천명으로 여전히 사용된다. 지도의 왼쪽이 상류, 오른쪽이 하류쪽이다. 감천은 동북쪽으로 흘러 선산 앞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동국여지승람에 감문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는데 현재의 개령면 덕촌리의 취적봉에 해당한다. 읍치 중심부 군기고 뒤쪽에 봉대라고 적힌 산이다. 읍치에는 가장 큰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대부분의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향교를 독립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치와 같은 형국 속에 묘사하였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읍치 북쪽에 성황산만 표기되었다. 읍치 오른쪽에 동락정이 그려졌는데 백성과 함께 同樂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근처의 산이 柳山이다. 유산에는 甘文國 때의 궁궐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감천 남쪽에 덕림서원이 보이는데 1677년(숙종 3)에 사액받은 곳으로 김종직, 정경세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 뒤쪽의 사찰은 지금 계림사라는 이름으로 취적봉 아래에 남아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아포면이 지금의 아포읍이 되었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의 감천변 을 따라 난 길은 현재 910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감천 남쪽에는 경부 고속도로가 나 있어 아포읍을 지나 구미로 연결된다.(이현군)

  • 거제부 (巨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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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해당하며 현재의 거제시가 거제부의 관할구역이었다.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남해상의 섬 지역임을 이 지도로 확연히 알 수 있다. 지도 왼쪽의 오양역은 현재의 사등면 오량리에 있던 역원으로 그 왼쪽에 도로망 표시가 있다. 이곳이 현재 통영과 연결되는 거제대교가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에 옥포가 표시되었는데 그 오른쪽이 옥포만이 되며 현재 조선소가 있다. 지도 중앙부에 객사를 비롯한 읍치에 배치되는 건물이 그려졌다. 진산은 계룡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남쪽 5리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실제로 동상리의 북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객사 오른쪽에 표시되었다. 석축으로 된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읍치 북쪽에 고현성이 있는데 1711년(숙종 37)에 이 지도상의 위치(동상리 일대)로 옮기기 전의 중심부였다. 현재 고현성의 유적이 있으며 신현읍에 고현리라는 지명, 고현중학교, 고현고교가 있어 그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근처에 한국전쟁 당시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현재 거제시의 중심부는 거제부의 읍치가 아니라 고현성이 있던 지역이다. 남해 바다에 있는 섬이기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곳곳에 성이 있다. 일부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일본과 경계가 된다고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에는 한산도가 보이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에 등장하는 곳이다. 거제도 본섬에 부속된 여러 섬들을 아주 자세하게 그렸다.(이현군)

  • 거제부 주기 (巨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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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해당하며 현재의 거제시가 거제부의 관할구역이었다.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남해상의 섬 지역임을 이 지도로 확연히 알 수 있다. 지도 왼쪽의 오양역은 현재의 사등면 오량리에 있던 역원으로 그 왼쪽에 도로망 표시가 있다. 이곳이 현재 통영과 연결되는 거제대교가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에 옥포가 표시되었는데 그 오른쪽이 옥포만이 되며 현재 조선소가 있다. 지도 중앙부에 객사를 비롯한 읍치에 배치되는 건물이 그려졌다. 진산은 계룡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남쪽 5리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실제로 동상리의 북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객사 오른쪽에 표시되었다. 석축으로 된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읍치 북쪽에 고현성이 있는데 1711년(숙종 37)에 이 지도상의 위치(동상리 일대)로 옮기기 전의 중심부였다. 현재 고현성의 유적이 있으며 신현읍에 고현리라는 지명, 고현중학교, 고현고교가 있어 그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근처에 한국전쟁 당시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현재 거제시의 중심부는 거제부의 읍치가 아니라 고현성이 있던 지역이다. 남해 바다에 있는 섬이기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곳곳에 성이 있다. 일부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일본과 경계가 된다고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에는 한산도가 보이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에 등장하는 곳이다. 거제도 본섬에 부속된 여러 섬들을 아주 자세하게 그렸다.(이현군)

  • 거창현 (居昌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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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는 거창군으로 등장하며 광여도에는 거창부로 나오는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지도이다. 삼가현에 속하던 신원면과 안의현에 속하였던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을 제외한 지역이 관할구역이었다.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 일대에 해당한다.. 속현으로 가조현이 있었는데 현재의 거창군 가조면은 그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지도에서 가북면, 가동면, 가남면 등이 옛 가조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지도 오른쪽의 현창도 가조현의 현창에 해당하는 것이다. 서남쪽의 신창이 거창현의 현창으로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위천천으로 동쪽의 황강천과 합류하여 남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황강천은 남쪽의 합천군 대병면에 합천댐이 건설되어 이 지도 오른쪽 아래 지역은 일부 수몰되었다. 읍치 북동쪽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가야산으로 연결되는 경로에 속한다. 진산은 건흥산으로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그 아래에는 건흥암이 자리하고 있다. 건흥산의 맥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읍치 뒤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읍성은 보이지 않고 객사를 가장 크게 중앙부에 그렸다. 읍치 앞의 다리는 현재의 거창교 부근에 있던 것이다. 역원으로는 성초역, 무계역, 성기역 등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거창군 동남쪽으로 88고속도로가 지난다. 이 밖에 봉수대, 서원 등이 표현되었으나 그 이름을 적지는 않았다.(이현군)

  • 거창현 주기 (居昌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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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는 거창군으로 등장하며 광여도에는 거창부로 나오는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지도이다. 삼가현에 속하던 신원면과 안의현에 속하였던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을 제외한 지역이 관할구역이었다.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 일대에 해당한다.. 속현으로 가조현이 있었는데 현재의 거창군 가조면은 그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지도에서 가북면, 가동면, 가남면 등이 옛 가조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지도 오른쪽의 현창도 가조현의 현창에 해당하는 것이다. 서남쪽의 신창이 거창현의 현창으로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위천천으로 동쪽의 황강천과 합류하여 남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황강천은 남쪽의 합천군 대병면에 합천댐이 건설되어 이 지도 오른쪽 아래 지역은 일부 수몰되었다. 읍치 북동쪽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가야산으로 연결되는 경로에 속한다. 진산은 건흥산으로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그 아래에는 건흥암이 자리하고 있다. 건흥산의 맥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읍치 뒤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읍성은 보이지 않고 객사를 가장 크게 중앙부에 그렸다. 읍치 앞의 다리는 현재의 거창교 부근에 있던 것이다. 역원으로는 성초역, 무계역, 성기역 등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거창군 동남쪽으로 88고속도로가 지난다. 이 밖에 봉수대, 서원 등이 표현되었으나 그 이름을 적지는 않았다.(이현군)

  • 경산군 (慶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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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근원이 된 지역으로 경산시내가 읍치가 된다. 관할 범위는 경산시내, 남천면, 압량면 일부와 대구광역시의 동구 일부, 수성구 일부지역이다. 광여도에서는 경산현으로 되어 있다. 금호강이 군의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데 이 지도는 금호강이 아래쪽에 그려져 있고 읍성 안의 건물이 모두 지도 위를 향하도록 그렸다. 객사와 옥 등이 그려졌다. 남쪽이 위가 되게 그린 지도이다. 금호강을 아래에 배치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산의 모든 물이 금호강에 유입된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성문의 방향을 보아도 북쪽이 아래가 되도록 그린 것이 확인된다. 동문, 서문, 남문을 그렸다. 북문은 보이지 않고 외부와 연결되는 주요도로는 동문과 남문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도로는 하천의 유로와 평행하게 만들어졌다. 교통로인 고개를 표시하고 이름을 붙였다. 남쪽의 마암산이 진산이 된다. 북쪽에 금호강이 흐르기에 자연스럽게 남쪽에 진산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읍치 서쪽에 옥산를 그렸는데 현재의 경산시내 옥산동이다. 읍성 밖의 향교를 마치 성곽처럼 보이게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의 위치도 표시되었다. 대구의 동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아래쪽(북쪽)에 팔공산이 보인다.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으로 동화사 등 유명사찰과 가산산성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 존재하였던 압량역 등의 역원은 그리지 않았다. 이 밖에 서원, 봉대, 사찰 등이 그려졌는데 다른 지도에는 보이는 倉이 그려지지 않았다.(이현군)

  • 경산군 주기 (慶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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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근원이 된 지역으로 경산시내가 읍치가 된다. 관할 범위는 경산시내, 남천면, 압량면 일부와 대구광역시의 동구 일부, 수성구 일부지역이다. 광여도에서는 경산현으로 되어 있다. 금호강이 군의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데 이 지도는 금호강이 아래쪽에 그려져 있고 읍성 안의 건물이 모두 지도 위를 향하도록 그렸다. 객사와 옥 등이 그려졌다. 남쪽이 위가 되게 그린 지도이다. 금호강을 아래에 배치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산의 모든 물이 금호강에 유입된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성문의 방향을 보아도 북쪽이 아래가 되도록 그린 것이 확인된다. 동문, 서문, 남문을 그렸다. 북문은 보이지 않고 외부와 연결되는 주요도로는 동문과 남문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도로는 하천의 유로와 평행하게 만들어졌다. 교통로인 고개를 표시하고 이름을 붙였다. 남쪽의 마암산이 진산이 된다. 북쪽에 금호강이 흐르기에 자연스럽게 남쪽에 진산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읍치 서쪽에 옥산를 그렸는데 현재의 경산시내 옥산동이다. 읍성 밖의 향교를 마치 성곽처럼 보이게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의 위치도 표시되었다. 대구의 동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아래쪽(북쪽)에 팔공산이 보인다.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으로 동화사 등 유명사찰과 가산산성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 존재하였던 압량역 등의 역원은 그리지 않았다. 이 밖에 서원, 봉대, 사찰 등이 그려졌는데 다른 지도에는 보이는 倉이 그려지지 않았다.(이현군)

  • 경상도 (慶尙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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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 경상도 부분의 처음에 나오는 지도로 경상도 전체를 그린 지도이다. 지승의 경상도 부분은 통영과 府 지역을 먼저 싣고 郡縣 지역을 그 다음에 배치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동해가 표시되었고 서쪽은 전라도 충청도, 북쪽은 강원도 충청도의 맞닿은 군현을 기록하였다. 현재 경상북도에 포함된 울릉도 독도는 표시되지 않았으며 남동쪽에 경상도의 섬 지역이 표시되었다. 대구 감영을 비롯하여 경상도의 부목군현을 표시하였다. 감영, 통영, 우병영, 좌수영 등 군사 중심지는 붉은 원 안에 표시하였고 부와 군현은 네모안에 그 지명을 기록하였다. 경상도의 주요 교통로는 육운으로 이 지도에서는 대구 감영을 중심으로 군현간의 연결망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역은 지도에 붉은 색으로 따로 표시하였다. 조령, 죽령 등 다른 도와 연결되는 고개를 표시하였다. 경상도 지역은 크게 낙동강 유역권으로 볼 수 있는데 상주, 선산, 비안 가운데 부분에 낙동강 지명이 보인다. 지도 오른쪽 위에 그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그 왼쪽에 태백산 史庫가 보인다. 태화강 등 낙동강에 합류하지 않는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태백산, 지리산 등 주요 산이 표시되었으며 山城의 이름과 위치가 표시되었다. 도산서원 등 여러 서원이 기록되었고, 경주의 불굴사, 합천의 해인사 등이 보인다. 남해안에는 해전으로 유명한 노량이 표시되었다. 지도의 주기에는 戶口, 田畓의 수량과 조세 관련 사항, 鎭營에 소속된 군사의 수 등을 기록해 놓았다.(이현군)

  • 경상도 주기 (慶尙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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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 경상도 부분의 처음에 나오는 지도로 경상도 전체를 그린 지도이다. 지승의 경상도 부분은 통영과 府 지역을 먼저 싣고 郡縣 지역을 그 다음에 배치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동해가 표시되었고 서쪽은 전라도 충청도, 북쪽은 강원도 충청도의 맞닿은 군현을 기록하였다. 현재 경상북도에 포함된 울릉도 독도는 표시되지 않았으며 남동쪽에 경상도의 섬 지역이 표시되었다. 대구 감영을 비롯하여 경상도의 부목군현을 표시하였다. 감영, 통영, 우병영, 좌수영 등 군사 중심지는 붉은 원 안에 표시하였고 부와 군현은 네모안에 그 지명을 기록하였다. 경상도의 주요 교통로는 육운으로 이 지도에서는 대구 감영을 중심으로 군현간의 연결망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역은 지도에 붉은 색으로 따로 표시하였다. 조령, 죽령 등 다른 도와 연결되는 고개를 표시하였다. 경상도 지역은 크게 낙동강 유역권으로 볼 수 있는데 상주, 선산, 비안 가운데 부분에 낙동강 지명이 보인다. 지도 오른쪽 위에 그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그 왼쪽에 태백산 史庫가 보인다. 태화강 등 낙동강에 합류하지 않는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태백산, 지리산 등 주요 산이 표시되었으며 山城의 이름과 위치가 표시되었다. 도산서원 등 여러 서원이 기록되었고, 경주의 불굴사, 합천의 해인사 등이 보인다. 남해안에는 해전으로 유명한 노량이 표시되었다. 지도의 주기에는 戶口, 田畓의 수량과 조세 관련 사항, 鎭營에 소속된 군사의 수 등을 기록해 놓았다.(이현군)

  •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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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1면입니다.

  •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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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2면입니다.

  • 경주부 (慶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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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부는 현재의 경주시 전체와 포항시, 영천시 일부, 울산광역시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었다. 지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형산강이며 읍치 북쪽의 북천, 남쪽의 남천이 형산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위에 兄山倉이 표시되었다. 북천은 보문관광단지의 보문호와 연결된다. 형산강은 남쪽이 상류에 해당하며 북쪽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읍치 동쪽의 바다가에 표시된 石堀은 토함산의 석굴암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왼쪽에는 탑이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의 鳳凰臺는 신라의 古墳이 있는 곳으로 신라 30대 문무왕이 남문 밖에 세웠다. 마치 봉황의 알처럼 그려져 있다. 봉황대 아래쪽에 반월성, 첨성대가 실제 모양과 유사하게 그려졌다. 남문 아래쪽의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곳이며 북쪽의 경순왕묘는 신라 마지막 왕을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안에는 동헌, 객사, 군관청, 향청, 사창, 제승당, 관청, 진남루 등 여러 건물이 그려졌다. 남문 밖에는 종을 걸어 놓은 모습으로 종각을 그렸다. 읍성 밖 남쪽에 향교가 표시되었고 서쪽에 鎭營이 보인다. 동쪽의 기림사를 비롯하여 융성했던 신라의 불교 문화를 보여주는 여러 사찰이 그려졌다. 조선시대의 여러 서원들이 지도에 표시되고 있어 불교의 사찰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중 서악서원은 신라의 설총, 최치원, 김유신을 배향하여 세운 곳이다. 붉은색으로 도로를 표시하고 주요 驛과 倉을 그려 놓았다(이현군).

  • 경주부 주기 (慶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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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부는 현재의 경주시 전체와 포항시, 영천시 일부, 울산광역시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었다. 지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형산강이며 읍치 북쪽의 북천, 남쪽의 남천이 형산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위에 兄山倉이 표시되었다. 북천은 보문관광단지의 보문호와 연결된다. 형산강은 남쪽이 상류에 해당하며 북쪽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읍치 동쪽의 바다가에 표시된 石堀은 토함산의 석굴암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왼쪽에는 탑이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의 鳳凰臺는 신라의 古墳이 있는 곳으로 신라 30대 문무왕이 남문 밖에 세웠다. 마치 봉황의 알처럼 그려져 있다. 봉황대 아래쪽에 반월성, 첨성대가 실제 모양과 유사하게 그려졌다. 남문 아래쪽의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곳이며 북쪽의 경순왕묘는 신라 마지막 왕을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안에는 동헌, 객사, 군관청, 향청, 사창, 제승당, 관청, 진남루 등 여러 건물이 그려졌다. 남문 밖에는 종을 걸어 놓은 모습으로 종각을 그렸다. 읍성 밖 남쪽에 향교가 표시되었고 서쪽에 鎭營이 보인다. 동쪽의 기림사를 비롯하여 융성했던 신라의 불교 문화를 보여주는 여러 사찰이 그려졌다. 조선시대의 여러 서원들이 지도에 표시되고 있어 불교의 사찰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중 서악서원은 신라의 설총, 최치원, 김유신을 배향하여 세운 곳이다. 붉은색으로 도로를 표시하고 주요 驛과 倉을 그려 놓았다(이현군).

  • 고령현 (高靈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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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진산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耳山이다. 그 왼쪽의 미숭산은 고령읍과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에 있는 733.5m의 산인데 지금은 관광지화 되었다. 미숭산의 북서쪽에는 해인사로 유명한 가야산 국립공원이 위치한다. 미숭산 오른쪽의 반룡사는 쌍림면 용리에 현재에도 남아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낙동강이 그렸졌으며 나루와 강창이 그 옆에 보인다. 개산진은 현재의 개진면의 진촌에 있던 나루이다. 고령현은 본래 대가야국이었는데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읍치 뒤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사적 61호 고령주산성, 사적 79호 고분군, 보물 54호 금림왕릉 당간지주, 유물전시관 등이 현재 남아있다. 객사 앞에 그려진 누정인 쾌빈루는 현재의 고령읍 쾌빈리에 있던 것이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이 표현되었다. 이전하여 재건축된 향교가 고령읍에 있다. 외곽에 있었던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지도에 그리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 지대가 낮은 하천가에는 숲이 조성되어 있고 赤林이라고 표시되었다. 지승 지도에서는 도로 이름을 적은 경우가 드문데 이 지도 오른쪽 위에 大丘路라고 따로 적은 점이 이채롭다. 대구로 통하는 26번 국도 경로와 비슷하다. 역원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봉수대가 곳곳에 표시되었고 육로에 중요한 고개의 위치와 이름을 표시하였다. (이현군)

  • 고령현 주기 (高靈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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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진산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耳山이다. 그 왼쪽의 미숭산은 고령읍과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에 있는 733.5m의 산인데 지금은 관광지화 되었다. 미숭산의 북서쪽에는 해인사로 유명한 가야산 국립공원이 위치한다. 미숭산 오른쪽의 반룡사는 쌍림면 용리에 현재에도 남아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낙동강이 그렸졌으며 나루와 강창이 그 옆에 보인다. 개산진은 현재의 개진면의 진촌에 있던 나루이다. 고령현은 본래 대가야국이었는데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읍치 뒤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사적 61호 고령주산성, 사적 79호 고분군, 보물 54호 금림왕릉 당간지주, 유물전시관 등이 현재 남아있다. 객사 앞에 그려진 누정인 쾌빈루는 현재의 고령읍 쾌빈리에 있던 것이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이 표현되었다. 이전하여 재건축된 향교가 고령읍에 있다. 외곽에 있었던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지도에 그리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 지대가 낮은 하천가에는 숲이 조성되어 있고 赤林이라고 표시되었다. 지승 지도에서는 도로 이름을 적은 경우가 드문데 이 지도 오른쪽 위에 大丘路라고 따로 적은 점이 이채롭다. 대구로 통하는 26번 국도 경로와 비슷하다. 역원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봉수대가 곳곳에 표시되었고 육로에 중요한 고개의 위치와 이름을 표시하였다. (이현군)

  • 고성현 (固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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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국에 해당하였는데 신라가 병합되면서 古自郡이 되었다. 고성의 읍치는 고성군 고성읍 일대이며 성내리라는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성군의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은 진주목에 해당하였으므로 나머지 지역과 통영시가 관할 구역이었다. 지도에 두 개의 성곽이 보이는데 위쪽이 고성 읍성이 되고 아래쪽이 통영이 된다. 읍성의 아래쪽 바다는 현재의 고성만이 된다. 읍성의 동문에서 통영으로 연결되는 이 지도의 도로는 현재의 14번 국도의 경로와 비슷하다. 위쪽의 고성 읍성에는 객사가 존재하는데 비해 남쪽의 통영에는 객사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세병관이 보이는데 통제사의 집무공간이다. 慶尙右水營 兼 三道統制營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통영시 북신동, 명정동, 도천동 일대에 해당한다. 地乘의 統營 지도에서는 통제영의 군사적 관할 구역을 다 그려서 전라도, 경상도 내륙까지 표현하였지만 이 지도는 고성군의 행정 관할로서 통영을 표현하였기에 지도의 범위가 적다. 조선 수군의 중심지답게 鎭, 船所, 船倉, 烽臺 등이 표시되었다. 통영 남문 앞 바다에는 小海라고 적고 당포진 아래에는 大海라고 적은 점이 이채롭다. 바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흔적으로 보인다. 당포진은 통영시 산양읍에 당포성이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통영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현재 세병관 옆에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충렬사가 남아있다.(이현군)

  • 고성현 주기 (固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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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국에 해당하였는데 신라가 병합되면서 古自郡이 되었다. 고성의 읍치는 고성군 고성읍 일대이며 성내리라는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성군의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은 진주목에 해당하였으므로 나머지 지역과 통영시가 관할 구역이었다. 지도에 두 개의 성곽이 보이는데 위쪽이 고성 읍성이 되고 아래쪽이 통영이 된다. 읍성의 아래쪽 바다는 현재의 고성만이 된다. 읍성의 동문에서 통영으로 연결되는 이 지도의 도로는 현재의 14번 국도의 경로와 비슷하다. 위쪽의 고성 읍성에는 객사가 존재하는데 비해 남쪽의 통영에는 객사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세병관이 보이는데 통제사의 집무공간이다. 慶尙右水營 兼 三道統制營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통영시 북신동, 명정동, 도천동 일대에 해당한다. 地乘의 統營 지도에서는 통제영의 군사적 관할 구역을 다 그려서 전라도, 경상도 내륙까지 표현하였지만 이 지도는 고성군의 행정 관할로서 통영을 표현하였기에 지도의 범위가 적다. 조선 수군의 중심지답게 鎭, 船所, 船倉, 烽臺 등이 표시되었다. 통영 남문 앞 바다에는 小海라고 적고 당포진 아래에는 大海라고 적은 점이 이채롭다. 바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흔적으로 보인다. 당포진은 통영시 산양읍에 당포성이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통영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현재 세병관 옆에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충렬사가 남아있다.(이현군)

  • 곤양군 (昆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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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양의 읍치는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일대이며 지금도 남문밖이라는 지명으로 과거에 읍성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관할구역은 사천시의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과 하동군의 진교면, 금성면, 금남면의 일부 지역이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곤양천이며 지도 아래쪽이 사천만이다. 군현명이 면 명칭으로 격하되었지만 남해고속국도 곤양분기점 인근에 옛 읍치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읍치의 남쪽이 바다가 되고 북쪽 3리 지점에 있는 동곡산이 진산이 된다. 이 지도는 서쪽이 위가 되도록 그렸다. 객사, 군기고, 아사 등 읍성 안의 건물이 왼쪽을 향하는 것은 남향하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옥이 그려진 점이 특이한데 일반적으로 옥은 읍성 안에 존재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노량이 표시되었는데 금남면 노량리에 해당한다. 이곳과 남해를 연결하는 다리가 남해대교이다. 이 일대에서 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다. 노량초등학교 등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남해로 연결되는 육로상에 양포역과 금양역이 보이며 그 옆에 진교장이 표시되었다. 진교장을 따서 현재의 진교면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바다와 접한 곳에 선소를 그렸다. 지도 위의 태봉은 세종대왕의 태를 안치한 것이다. 태봉 오른쪽 금성이 표시되었는데 곤명면 금성리에 있었다. 이 밖에 사찰, 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곤양군 주기 (昆陽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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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양의 읍치는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일대이며 지금도 남문밖이라는 지명으로 과거에 읍성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관할구역은 사천시의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과 하동군의 진교면, 금성면, 금남면의 일부 지역이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곤양천이며 지도 아래쪽이 사천만이다. 군현명이 면 명칭으로 격하되었지만 남해고속국도 곤양분기점 인근에 옛 읍치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읍치의 남쪽이 바다가 되고 북쪽 3리 지점에 있는 동곡산이 진산이 된다. 이 지도는 서쪽이 위가 되도록 그렸다. 객사, 군기고, 아사 등 읍성 안의 건물이 왼쪽을 향하는 것은 남향하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옥이 그려진 점이 특이한데 일반적으로 옥은 읍성 안에 존재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노량이 표시되었는데 금남면 노량리에 해당한다. 이곳과 남해를 연결하는 다리가 남해대교이다. 이 일대에서 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다. 노량초등학교 등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남해로 연결되는 육로상에 양포역과 금양역이 보이며 그 옆에 진교장이 표시되었다. 진교장을 따서 현재의 진교면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바다와 접한 곳에 선소를 그렸다. 지도 위의 태봉은 세종대왕의 태를 안치한 것이다. 태봉 오른쪽 금성이 표시되었는데 곤명면 금성리에 있었다. 이 밖에 사찰, 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군위현 (軍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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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중앙고속국도가 관통하는 지역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군위군 군위읍 동부리, 서부리 일대이다. 관할범위는 군위읍, 효령면, 소보면 등이다. 진산은 마정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치의 동남 5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현대 지형도 상으로 보면 현의 남쪽에 위치하는 402.4m의 산이다. 이 지도에는 위쪽에 그려졌는데 진산을 위에 표시하기 위해 지도의 남북 방향을 바꾸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봉수대가 있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북쪽(지도의 아래)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표시했는데 객사의 방향만 다른 쪽을 향하게 그리고 있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 등은 표시하지 않았다. 이 지도에는 객사 건물이 두 개 등장한다. 현재 읍치 오른쪽에 또다른 객사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 효령창이 보이는데 군위의 속현이었던 효령현에 해당하는 곳이다. 현재는 효령면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현재 읍치의 객사 왼쪽 아래의 영귀대는 군위읍 내량리에 위치하였는데 서애 유성룡이 노닐던 곳으로 전해진다. 그 옆의 남계서원은 1627년(인조 5)에 지어졌으며 유성룡을 배향하였다. 지도 위쪽의 소계역은 현재의 효령면 화계리에 있던 역으로 1896년에 폐지되었다. 이밖에 사찰, 누대, 창고, 도로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군위현 주기 (軍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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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중앙고속국도가 관통하는 지역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군위군 군위읍 동부리, 서부리 일대이다. 관할범위는 군위읍, 효령면, 소보면 등이다. 진산은 마정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치의 동남 5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현대 지형도 상으로 보면 현의 남쪽에 위치하는 402.4m의 산이다. 이 지도에는 위쪽에 그려졌는데 진산을 위에 표시하기 위해 지도의 남북 방향을 바꾸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봉수대가 있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북쪽(지도의 아래)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표시했는데 객사의 방향만 다른 쪽을 향하게 그리고 있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 등은 표시하지 않았다. 이 지도에는 객사 건물이 두 개 등장한다. 현재 읍치 오른쪽에 또다른 객사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 효령창이 보이는데 군위의 속현이었던 효령현에 해당하는 곳이다. 현재는 효령면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현재 읍치의 객사 왼쪽 아래의 영귀대는 군위읍 내량리에 위치하였는데 서애 유성룡이 노닐던 곳으로 전해진다. 그 옆의 남계서원은 1627년(인조 5)에 지어졌으며 유성룡을 배향하였다. 지도 위쪽의 소계역은 현재의 효령면 화계리에 있던 역으로 1896년에 폐지되었다. 이밖에 사찰, 누대, 창고, 도로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금산군 (金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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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의 읍치는 현재의 김천시내에 해당하는데 향교가 있던 곳이 교동이다. 충청도의 錦山郡과는 한자가 다르다. 금산군은 현재의 김천시내, 봉산면, 어모면, 대항문, 감문면 일부, 구성면 일부, 조마면, 감천면 일부, 농소면 일부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에 해당한다. 백두대간과 맞닿은 고을로 현재의 충청도 일부가 과거에는 경상도 금산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분수계와 행정구역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읍치 동쪽으로 아산천이 적혀 있는데 지금의 아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감천(감곡천)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감천교가 표시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하천명이 된 것이다. 읍치 앞의 남천과 왼쪽의 북천으로 표시된 것은 현재의 직지천인데 직지사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표시된 것이다. 직지천과 감천을 따라 경부고속도로가 나있다. 이 지도에서도 하천을 따라 도로가 표시되었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현대 도로의 모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 위에 추풍역과 두화원이 표시되었다. 원은 지승지도집의 다른 지도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이 지도에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충청도와의 경계 너머 추풍역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왜유현이 표시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은 오파산으로 현재의 어모면 남산리에 있는 산이다. 왼쪽 위의 직지사는 418년(신라 눌지왕 2)에 창건된 사찰이다. 지도 아래에 김천도역이 보이는데 이 이름이 현재 김천시의 어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이현군)

  • 금산군 주기 (金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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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의 읍치는 현재의 김천시내에 해당하는데 향교가 있던 곳이 교동이다. 충청도의 錦山郡과는 한자가 다르다. 금산군은 현재의 김천시내, 봉산면, 어모면, 대항문, 감문면 일부, 구성면 일부, 조마면, 감천면 일부, 농소면 일부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에 해당한다. 백두대간과 맞닿은 고을로 현재의 충청도 일부가 과거에는 경상도 금산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분수계와 행정구역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읍치 동쪽으로 아산천이 적혀 있는데 지금의 아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감천(감곡천)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감천교가 표시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하천명이 된 것이다. 읍치 앞의 남천과 왼쪽의 북천으로 표시된 것은 현재의 직지천인데 직지사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표시된 것이다. 직지천과 감천을 따라 경부고속도로가 나있다. 이 지도에서도 하천을 따라 도로가 표시되었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현대 도로의 모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 위에 추풍역과 두화원이 표시되었다. 원은 지승지도집의 다른 지도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이 지도에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충청도와의 경계 너머 추풍역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왜유현이 표시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은 오파산으로 현재의 어모면 남산리에 있는 산이다. 왼쪽 위의 직지사는 418년(신라 눌지왕 2)에 창건된 사찰이다. 지도 아래에 김천도역이 보이는데 이 이름이 현재 김천시의 어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이현군)

  • 기장현 (機張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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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현은 현재의 포항시에 포함된 호랑이 꼬리 모양에 있던 고을이고 이 지도에 나오는 기장현은 부산광역시에 포함된 기장군 일대이다.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동해남부선 철도의 기장역 북쪽에 위치한다. 낙동정맥 동쪽의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지도 왼쪽 산줄기에 險隘라고 적혀 있다. 읍치 서쪽 읍성 옆에 炭山이 표시되었는데 이 산이 진산이다.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려졌으며 읍성 밖에 원형으로 獄이 표시된 점이 특이하다. 읍성 밖의 제단은 다른 군현 지도에서 등장하지 않는데 이 지도에서는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 등이 잘 표시되어 있다. 읍치 동쪽의 죽성리에는 사적 52호인 죽성리성이 있었다. 나라에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한 봉산이 곳곳에 보인다. 읍성 안을 흘러 바다로 유입되는 청강천은 현재의 죽성천이다. 그 위쪽의 삼성대가 있는 곳은 현재의 일광해수욕장 인근이 된다. 해안을 따라 海倉, 船所, 烽臺가 그려졌다. 도로를 그리면서 大路, 中路 등을 표시하여서 도로의 폭과 중요도를 알려주는 점이 지승의 경상도 다른 군현지도와 차이점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장안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것이다. 현재의 장안읍 장안리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아래에 ‘旧豆毛浦基今移設東萊’라고 적혔는데 수군만호가 있던 鎭이 동래로 이전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이현군)

  • 기장현 주기 (機張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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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현은 현재의 포항시에 포함된 호랑이 꼬리 모양에 있던 고을이고 이 지도에 나오는 기장현은 부산광역시에 포함된 기장군 일대이다.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동해남부선 철도의 기장역 북쪽에 위치한다. 낙동정맥 동쪽의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지도 왼쪽 산줄기에 險隘라고 적혀 있다. 읍치 서쪽 읍성 옆에 炭山이 표시되었는데 이 산이 진산이다.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려졌으며 읍성 밖에 원형으로 獄이 표시된 점이 특이하다. 읍성 밖의 제단은 다른 군현 지도에서 등장하지 않는데 이 지도에서는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 등이 잘 표시되어 있다. 읍치 동쪽의 죽성리에는 사적 52호인 죽성리성이 있었다. 나라에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한 봉산이 곳곳에 보인다. 읍성 안을 흘러 바다로 유입되는 청강천은 현재의 죽성천이다. 그 위쪽의 삼성대가 있는 곳은 현재의 일광해수욕장 인근이 된다. 해안을 따라 海倉, 船所, 烽臺가 그려졌다. 도로를 그리면서 大路, 中路 등을 표시하여서 도로의 폭과 중요도를 알려주는 점이 지승의 경상도 다른 군현지도와 차이점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장안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것이다. 현재의 장안읍 장안리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아래에 ‘旧豆毛浦基今移設東萊’라고 적혔는데 수군만호가 있던 鎭이 동래로 이전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이현군)

  • 김해부 (金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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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김해시 동상동, 서상동 일대이며 현재의 김해시와 창원시, 부산광역시의 일부를 관할하였다. 읍성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성문을 표시하였고 객사, 아사 등의 건물이 보인다. 읍성 밖에는 향교만 보이고 성황단, 여단, 사직단을 찾을 수 없다. 김해부의 진산은 분산인데 인제대학교 서쪽에 있는 분성산에 해당한다. 신라에 합병된 금관가야이며 김수로왕이 시조가 되는 김해 김씨의 본향이다. 읍치 왼쪽에 수로왕릉이 그려졌고 그 위쪽에 왕비인 김해허씨의 후릉이 그려졌다. 구지봉은 龜旨歌와 관련된 봉우리이다. 현재 김해 중심부에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김해는 낙남정맥과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읍치 오른쪽의 낙동강이 남해로 유입되어 삼각주가 발달하였고 김해평야로 유명한 지역이다. 하천을 따라 농사를 위한 田과 池가 지도에 등장하고 있다. 지도 오른쪽에 바다로 삼차수로 적힌 지역이 서낙동강과 낙동강이 바다로 유입되는 지역이다. 아래쪽의 명지도는 현재 명지동의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인근에 김해국제공항이 있다. 현재는 하천의 퇴적과 매립으로 다른 모습이며 강과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그렸다. 바다에는 봉대, 전선소가 보인다. 지도 북쪽에 낙동강의 여러 나루가 표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삼량진이다. 삼량진은 밀양시 삼량진읍 삼량리에 있던 것으로 처음에는 나루터 중심의 교통요지였으나 철도의 도입이후 경전선과 경부선이 교차하는 철도교통의 요지가 되었다(이현군).

  • 김해부 주기 (金海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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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김해시 동상동, 서상동 일대이며 현재의 김해시와 창원시, 부산광역시의 일부를 관할하였다. 읍성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성문을 표시하였고 객사, 아사 등의 건물이 보인다. 읍성 밖에는 향교만 보이고 성황단, 여단, 사직단을 찾을 수 없다. 김해부의 진산은 분산인데 인제대학교 서쪽에 있는 분성산에 해당한다. 신라에 합병된 금관가야이며 김수로왕이 시조가 되는 김해 김씨의 본향이다. 읍치 왼쪽에 수로왕릉이 그려졌고 그 위쪽에 왕비인 김해허씨의 후릉이 그려졌다. 구지봉은 龜旨歌와 관련된 봉우리이다. 현재 김해 중심부에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김해는 낙남정맥과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읍치 오른쪽의 낙동강이 남해로 유입되어 삼각주가 발달하였고 김해평야로 유명한 지역이다. 하천을 따라 농사를 위한 田과 池가 지도에 등장하고 있다. 지도 오른쪽에 바다로 삼차수로 적힌 지역이 서낙동강과 낙동강이 바다로 유입되는 지역이다. 아래쪽의 명지도는 현재 명지동의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인근에 김해국제공항이 있다. 현재는 하천의 퇴적과 매립으로 다른 모습이며 강과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그렸다. 바다에는 봉대, 전선소가 보인다. 지도 북쪽에 낙동강의 여러 나루가 표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삼량진이다. 삼량진은 밀양시 삼량진읍 삼량리에 있던 것으로 처음에는 나루터 중심의 교통요지였으나 철도의 도입이후 경전선과 경부선이 교차하는 철도교통의 요지가 되었다(이현군).

  • 남해현 (南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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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해군 지역인데 창선면은 진주목의 관할구역이었다. 남해읍치는 남해읍의 동쪽인 북변리 남변리, 서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노량진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남해대교가 놓여진 곳이다. 남해바다의 섬으로 존재하던 군현으로 통영과 연결된다.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 되고 아래쪽이 북쪽이 된다.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점을 지도에 적용하였다. 지도에 보이는 충렬사는 현재 설천면 노량리에 남아있는데 1662년(현종 4)에 賜額받았으며 이순신 장군을 배향하였다. 그 오른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지금의 차면리 해안에 이락사가 있는데 충무공 전몰유적지이다. 고현면 왼쪽에 고현성이 그려졌다. 읍성 오른쪽에 표시된 망운산(서면)이 남해의 진산이다. 읍성은 사각형의 성으로 그리고 그 안에 객사, 아사, 창을 비교적 간략하게 그렸다. 읍성 아래에 선소가 표시되었는데 남해읍 선소리에 해당한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봉대, 진, 보 등이 많이 보인다. 진보를 마치 성처럼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에 여러 섬이 그려진 곳은 한려해상 국립공원 지역이다. 그 아래 상주포보가 그려진 곳은 상주면 상주리 일대일대 지금의 상주해수욕장 인근 지역이다. 그 왼쪽의 미조항진은 미조면 미조리에 있던 진이다. 아래의 노량진에서 읍성 옆을 지나는 도로는 현재의 19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이다.(이현군)

  • 남해현 주기 (南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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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해군 지역인데 창선면은 진주목의 관할구역이었다. 남해읍치는 남해읍의 동쪽인 북변리 남변리, 서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노량진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남해대교가 놓여진 곳이다. 남해바다의 섬으로 존재하던 군현으로 통영과 연결된다.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 되고 아래쪽이 북쪽이 된다.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점을 지도에 적용하였다. 지도에 보이는 충렬사는 현재 설천면 노량리에 남아있는데 1662년(현종 4)에 賜額받았으며 이순신 장군을 배향하였다. 그 오른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지금의 차면리 해안에 이락사가 있는데 충무공 전몰유적지이다. 고현면 왼쪽에 고현성이 그려졌다. 읍성 오른쪽에 표시된 망운산(서면)이 남해의 진산이다. 읍성은 사각형의 성으로 그리고 그 안에 객사, 아사, 창을 비교적 간략하게 그렸다. 읍성 아래에 선소가 표시되었는데 남해읍 선소리에 해당한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봉대, 진, 보 등이 많이 보인다. 진보를 마치 성처럼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에 여러 섬이 그려진 곳은 한려해상 국립공원 지역이다. 그 아래 상주포보가 그려진 곳은 상주면 상주리 일대일대 지금의 상주해수욕장 인근 지역이다. 그 왼쪽의 미조항진은 미조면 미조리에 있던 진이다. 아래의 노량진에서 읍성 옆을 지나는 도로는 현재의 19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이다.(이현군)

  • 단성현 (丹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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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산청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대전 통영간 고속국도의 단성 분기점 북쪽에 읍치가 있었다. 관할범위는 단성면, 신등면, 신안면, 생비량면 등이다. 지도에 표시된 향교는 지금의 산청 2터널 동쪽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지리산국립공원이 있고 북쪽에 황매산(합천군 대병면 경계)에 있다. 이 두 산이 단성현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지만 이 두 산의 맥이 단성으로 연결된다는 측면에서 지도 북쪽에 표시하였다. ‘黃梅山來’라고 적어 연결성을 강조하고 오른쪽에는 ‘黃梅山路’라고 적어 놓았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읍치 바로 뒤쪽에 해당하는 來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객사 오른쪽의 하천은 남강이며 진주시로 유입된다. 읍치 오른쪽 하천변에 바위를 연이어 그리고 赤壁이라고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적벽 아래 서원이 보이는데 그 이름을 문익점서원이라고 적었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시험적으로 재배한 곳이 단성인데 그 문익점을 배향한 서원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그 오른쪽의 하천이름을 따서 도천서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이름에 人名을 넣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읍치 오른쪽 위에 단계창이 보인다. 단성현은 丹溪縣과 江城縣을 합한 것이다. 옛 단계현의 중심지가 이곳인데 현재의 신등면 단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이 밖에 봉수대, 역원, 도로, 고개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이현군)

  • 단성현 주기 (丹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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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산청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대전 통영간 고속국도의 단성 분기점 북쪽에 읍치가 있었다. 관할범위는 단성면, 신등면, 신안면, 생비량면 등이다. 지도에 표시된 향교는 지금의 산청 2터널 동쪽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지리산국립공원이 있고 북쪽에 황매산(합천군 대병면 경계)에 있다. 이 두 산이 단성현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지만 이 두 산의 맥이 단성으로 연결된다는 측면에서 지도 북쪽에 표시하였다. ‘黃梅山來’라고 적어 연결성을 강조하고 오른쪽에는 ‘黃梅山路’라고 적어 놓았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읍치 바로 뒤쪽에 해당하는 來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객사 오른쪽의 하천은 남강이며 진주시로 유입된다. 읍치 오른쪽 하천변에 바위를 연이어 그리고 赤壁이라고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적벽 아래 서원이 보이는데 그 이름을 문익점서원이라고 적었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시험적으로 재배한 곳이 단성인데 그 문익점을 배향한 서원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그 오른쪽의 하천이름을 따서 도천서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이름에 人名을 넣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읍치 오른쪽 위에 단계창이 보인다. 단성현은 丹溪縣과 江城縣을 합한 것이다. 옛 단계현의 중심지가 이곳인데 현재의 신등면 단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이 밖에 봉수대, 역원, 도로, 고개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이현군)

  • 대구부 (大丘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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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 동남쪽에서 나오는 하천은 신천이며 신천이 유입되어 읍치 북쪽에 표시된 하천은 금호강이다. 이 하천은 지도 왼쪽의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 지도에서는 광다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행정구역명의 변동이 심한 지역이라 현재와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자연환경을 기초로 비정하면 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지금의 논공읍,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북구, 수성구 동쪽은 대구부에 관할구역이 아니었으며 청도군의 일부지역이 대구부에 포함된다. 이 지도에서는 坊과 面을 동시에 사용하는 이채롭다. 대구부의 읍치는 중구의 남성동, 동성동 일대로 지명으로 과거 읍성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지금도 대구 시내 중심부지역에 해당한다. 읍성 안에 객사와 더불어 감영, 진영, 중영이 보이는데 대구에 경상도 감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구의 경상감영공원을 통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읍성 밖에 향교와 3개의 제단(사직단, 성황단, 여단)이 배치된 것이 전형적인 성밖 배치구조에 부합된다. 서문 밖에 그려진 南池는 현재의 성당못으로 보인다. 읍치 서북쪽에 達成이 보이는데 지금은 달성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구의 진산은 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남쪽 3리에 있는 연귀산이라 기록하였는데 이 지도의 남문 밖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북쪽에 팔공산이 보이는데 원래 공산이었던 것을 견훤과 왕건의 전투 이후에 팔공산으로 개칭되었다고 하며 표충사는 신숭겸, 김락을 배향한 곳이다. 팔공산에는 동화사 등 유명 사찰들이 들어서 있다.(이현군)

  • 대구부 주기 (大丘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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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 동남쪽에서 나오는 하천은 신천이며 신천이 유입되어 읍치 북쪽에 표시된 하천은 금호강이다. 이 하천은 지도 왼쪽의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 지도에서는 광다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행정구역명의 변동이 심한 지역이라 현재와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자연환경을 기초로 비정하면 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지금의 논공읍,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북구, 수성구 동쪽은 대구부에 관할구역이 아니었으며 청도군의 일부지역이 대구부에 포함된다. 이 지도에서는 坊과 面을 동시에 사용하는 이채롭다. 대구부의 읍치는 중구의 남성동, 동성동 일대로 지명으로 과거 읍성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지금도 대구 시내 중심부지역에 해당한다. 읍성 안에 객사와 더불어 감영, 진영, 중영이 보이는데 대구에 경상도 감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구의 경상감영공원을 통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읍성 밖에 향교와 3개의 제단(사직단, 성황단, 여단)이 배치된 것이 전형적인 성밖 배치구조에 부합된다. 서문 밖에 그려진 南池는 현재의 성당못으로 보인다. 읍치 서북쪽에 達成이 보이는데 지금은 달성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구의 진산은 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남쪽 3리에 있는 연귀산이라 기록하였는데 이 지도의 남문 밖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북쪽에 팔공산이 보이는데 원래 공산이었던 것을 견훤과 왕건의 전투 이후에 팔공산으로 개칭되었다고 하며 표충사는 신숭겸, 김락을 배향한 곳이다. 팔공산에는 동화사 등 유명 사찰들이 들어서 있다.(이현군)

  • 동래부 (東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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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동래구 수안동, 복천동, 안락동 등이며 부산광역시에서 기장군(기장현), 북구(양산군), 강서구를 제외한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낙동정맥의 끝에 위치하고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읍치 북쪽의 윤산이 진산이다. 과거 동래의 속현이었던 동편고현이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읍성이 있었으나 그리지 않았고 객사와 주요 건물을 그렸다. 성 밖의 향교와 성황사, 여단, 사직단을 그렸다. 사직단은 사직동, 사직초등학교 등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왼쪽의 큰 산성은 금정산성으로 현재 금정구의 명칭은 이것을 딴 것이다. 그 옆의 범어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는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산성 오른쪽에 온정이 보이는데 현재의 동래온천으로 동래구 온천동에 있다. 현재는 부산이 통용되는 지명이지만, 과거의 중심부는 동래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 해안가에 부산진이 표시되었는데 여기서 현재의 부산광역시 지명이 나왔다. 바다에 접해 있고 일본과 가까워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대마도가 표시되었고 주요 浦와 봉수대의 명칭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왜관이 지도 왼쪽에 등장하고 있다. 좌수영은 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으로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 있었다. 해안에 명승지들을 표시하였다. 해수욕장과 온천으로 유명한 해운대, 오륙도 섬, 동백섬, 태종도, 다대동의 몰운대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 왼쪽의 이름없는 섬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을숙도로 보인다.(이현군)

  • 동래부 주기 (東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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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동래구 수안동, 복천동, 안락동 등이며 부산광역시에서 기장군(기장현), 북구(양산군), 강서구를 제외한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낙동정맥의 끝에 위치하고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읍치 북쪽의 윤산이 진산이다. 과거 동래의 속현이었던 동편고현이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읍성이 있었으나 그리지 않았고 객사와 주요 건물을 그렸다. 성 밖의 향교와 성황사, 여단, 사직단을 그렸다. 사직단은 사직동, 사직초등학교 등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왼쪽의 큰 산성은 금정산성으로 현재 금정구의 명칭은 이것을 딴 것이다. 그 옆의 범어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는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산성 오른쪽에 온정이 보이는데 현재의 동래온천으로 동래구 온천동에 있다. 현재는 부산이 통용되는 지명이지만, 과거의 중심부는 동래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 해안가에 부산진이 표시되었는데 여기서 현재의 부산광역시 지명이 나왔다. 바다에 접해 있고 일본과 가까워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대마도가 표시되었고 주요 浦와 봉수대의 명칭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왜관이 지도 왼쪽에 등장하고 있다. 좌수영은 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으로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 있었다. 해안에 명승지들을 표시하였다. 해수욕장과 온천으로 유명한 해운대, 오륙도 섬, 동백섬, 태종도, 다대동의 몰운대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 왼쪽의 이름없는 섬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을숙도로 보인다.(이현군)

  • 문경현 (聞慶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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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로 많이 알려진 경상북도 문경시 일대의 지도이다. 문경현의 읍치는 문경읍의 상리 교촌리 일대로 문경새재 도립공원 동남쪽에 위치한다. 관할범위는 문경읍, 마성면, 가은읍, 호계면 일부 지역인데 가은읍은 문경현의 속현이었던 加恩縣 지역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가현내면이 보이고 그 옆에는 가은창이 있어 과거를 반영하고 있다. 백두대간과 접한 지역으로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지도 북쪽에 새재, 즉 鳥嶺의 산성이 그려졌다. 한양에서 경상도로 통하던 영남대로의 주요 관문이었다. 문경현의 진산은 조령이 아니라 산성과 읍치 중간에 표시된 주흘산이다. 조령산성에서 나오는 읍치 왼쪽의 하천은 초곡천이며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신북천이다. 주흘산 왼쪽에 초곡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두 하천이 만나서 조령천이라는 이름으로 남쪽으로 흘러 영강에 합류되어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발원지에서 하류까지 하나의 흐름이지만, 구간마다 하천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경읍치에서 산성으로 연결된 도로를 따라 동성문, 중성문, 조령문이 적혀 있는데 현재의 조령 제 1, 제 2, 제 3 관문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의 조령산성은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대에 쌓은 것이다. 지도 아래의 고모성은 신라 때 방어를 위해 쌓은 것이다. 문경의 역원 중 가장 큰 것은 지도 오른쪽 아래의 유곡역이다. 察訪驛으로 18개 역을 관장하였는데 문경시 유곡동에 있었다. 높고 깊은 산줄기 사이로 여러 사찰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현군)

  • 문경현 주기 (聞慶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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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로 많이 알려진 경상북도 문경시 일대의 지도이다. 문경현의 읍치는 문경읍의 상리 교촌리 일대로 문경새재 도립공원 동남쪽에 위치한다. 관할범위는 문경읍, 마성면, 가은읍, 호계면 일부 지역인데 가은읍은 문경현의 속현이었던 加恩縣 지역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가현내면이 보이고 그 옆에는 가은창이 있어 과거를 반영하고 있다. 백두대간과 접한 지역으로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지도 북쪽에 새재, 즉 鳥嶺의 산성이 그려졌다. 한양에서 경상도로 통하던 영남대로의 주요 관문이었다. 문경현의 진산은 조령이 아니라 산성과 읍치 중간에 표시된 주흘산이다. 조령산성에서 나오는 읍치 왼쪽의 하천은 초곡천이며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신북천이다. 주흘산 왼쪽에 초곡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두 하천이 만나서 조령천이라는 이름으로 남쪽으로 흘러 영강에 합류되어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발원지에서 하류까지 하나의 흐름이지만, 구간마다 하천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경읍치에서 산성으로 연결된 도로를 따라 동성문, 중성문, 조령문이 적혀 있는데 현재의 조령 제 1, 제 2, 제 3 관문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의 조령산성은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대에 쌓은 것이다. 지도 아래의 고모성은 신라 때 방어를 위해 쌓은 것이다. 문경의 역원 중 가장 큰 것은 지도 오른쪽 아래의 유곡역이다. 察訪驛으로 18개 역을 관장하였는데 문경시 유곡동에 있었다. 높고 깊은 산줄기 사이로 여러 사찰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현군)

  • 밀양부 (密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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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밀양시내 내 1동, 내 2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청도면(청도군 영역)을 제외한 현재의 밀양시이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밀양강으로 남쪽의 삼랑진(삼랑진읍 삼랑리)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 지명표기가 보인다. 밀양은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도와의 경계가 되는 북쪽의 화악산이 진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되었다. 지도에서 읍성은 사행하는 밀양강의 모양에 맞추어 그려서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읍성 안에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밀주관으로 적힌 건물이 객사로 보인다. 밀양은 推火, 密城, 密州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밀주는 고려 성종대에 붙여진 고을 이름이다. 옛 이름을 따서 객사 건물에 붙인 것이다. 남문 인근의 영남루는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밀양교 인근에 위치한다. 읍치의 동쪽과 남쪽에서 강과 읍성을 따라 숲이 형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방풍이나 비보의 측면에서 숲을 조성하였는데 그 전형을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봉산은 한양의 禁山처럼 벌목을 금지하여 쓸만한 재목을 얻기 위한 곳이다. 읍치 서쪽에 향교가 보이며 서원, 사찰이 지도에 그려졌다. 지도 아래쪽의 국농소는 국가에서 경영하는 농장이며 하천의 영향으로 여러 곳에 田이 나타난다. 하천을 따라 창고들이 들어서 있으며 역관도 보인다. 읍치의 동쪽으로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는데 과거 수운의 중심지였던 삼랑진은 경부선과 경전선이 교차하는 기차역이다(이현군).

  • 밀양부 주기 (密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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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밀양시내 내 1동, 내 2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청도면(청도군 영역)을 제외한 현재의 밀양시이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밀양강으로 남쪽의 삼랑진(삼랑진읍 삼랑리)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 지명표기가 보인다. 밀양은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도와의 경계가 되는 북쪽의 화악산이 진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되었다. 지도에서 읍성은 사행하는 밀양강의 모양에 맞추어 그려서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읍성 안에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밀주관으로 적힌 건물이 객사로 보인다. 밀양은 推火, 密城, 密州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밀주는 고려 성종대에 붙여진 고을 이름이다. 옛 이름을 따서 객사 건물에 붙인 것이다. 남문 인근의 영남루는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밀양교 인근에 위치한다. 읍치의 동쪽과 남쪽에서 강과 읍성을 따라 숲이 형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방풍이나 비보의 측면에서 숲을 조성하였는데 그 전형을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봉산은 한양의 禁山처럼 벌목을 금지하여 쓸만한 재목을 얻기 위한 곳이다. 읍치 서쪽에 향교가 보이며 서원, 사찰이 지도에 그려졌다. 지도 아래쪽의 국농소는 국가에서 경영하는 농장이며 하천의 영향으로 여러 곳에 田이 나타난다. 하천을 따라 창고들이 들어서 있으며 역관도 보인다. 읍치의 동쪽으로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는데 과거 수운의 중심지였던 삼랑진은 경부선과 경전선이 교차하는 기차역이다(이현군).

  • 봉화현 (奉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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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지도 북쪽에 높고 험준하게 강한 맥세를 표현하고 태백산과 황장산을 그려 넣었다. 황장산은 나라에 필요한 재목을 구하기 위한 봉산이기도 했다. 그 아래에는 태백산 조선왕조실록 사고를 그려넣고 주변 건물인 실록각, 선원각을 표시하였다. 각화사가 함께 그려졌다. 그 남쪽이 봉화현의 읍치가 되는데 문수산, 광대산과 연결되는 금륜치(금륜봉)이 봉화의 진산이 된다. 일반적으로 진산의 맥이 뻗어나온 지점에 객사를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아사를 그리고 객사는 약간 동쪽에 그렸다. 지방 양반들이 중심이 되는 향청 건물을 따로 표시하였다. 왼쪽에는 향교가 그려졌다. 읍치는 봉화읍내가 아닌 봉성면 봉성리에 있었다. 영동선 철도의 봉성역 남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봉화읍은 대부분 안동부에 속하였고 일부는 순흥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관할구역은 봉성면, 명호면, 상운면 일부, 물야면 일부, 춘양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왼쪽 위의 물야면은 물야부곡이 있던 곳이다. 지도 왼쪽에 이름없이 그려진 서원은 文岩書院으로 보이는데 1694년(숙종 20)에 사액 받았으며 李滉과 趙穆을 배향하였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강대는 낙동강 변에 위치한 명승지이다. 지도 오른쪽 위에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도로만 그리고 역원을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다.(이현군)

  • 봉화현 주기 (奉化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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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지도 북쪽에 높고 험준하게 강한 맥세를 표현하고 태백산과 황장산을 그려 넣었다. 황장산은 나라에 필요한 재목을 구하기 위한 봉산이기도 했다. 그 아래에는 태백산 조선왕조실록 사고를 그려넣고 주변 건물인 실록각, 선원각을 표시하였다. 각화사가 함께 그려졌다. 그 남쪽이 봉화현의 읍치가 되는데 문수산, 광대산과 연결되는 금륜치(금륜봉)이 봉화의 진산이 된다. 일반적으로 진산의 맥이 뻗어나온 지점에 객사를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아사를 그리고 객사는 약간 동쪽에 그렸다. 지방 양반들이 중심이 되는 향청 건물을 따로 표시하였다. 왼쪽에는 향교가 그려졌다. 읍치는 봉화읍내가 아닌 봉성면 봉성리에 있었다. 영동선 철도의 봉성역 남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봉화읍은 대부분 안동부에 속하였고 일부는 순흥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관할구역은 봉성면, 명호면, 상운면 일부, 물야면 일부, 춘양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왼쪽 위의 물야면은 물야부곡이 있던 곳이다. 지도 왼쪽에 이름없이 그려진 서원은 文岩書院으로 보이는데 1694년(숙종 20)에 사액 받았으며 李滉과 趙穆을 배향하였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강대는 낙동강 변에 위치한 명승지이다. 지도 오른쪽 위에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도로만 그리고 역원을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다.(이현군)

  • 비안현 (比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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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의성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비안면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의성군의 비안면, 안계면, 구천면, 안사면 일부 지역이었다. 비안의 속현으로는 安貞縣이 있었는데 현재의 안계면 안정리 일대이다. 안정창이 지도에 표시되었고 그 왼쪽 에 안계역이 그려져 있어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진산은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는 성황산이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단, 성황단이 설치되었는데 성황단이 있던 산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낙동강에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에는 바위를 회화적으로 그린 점이 눈에 띈다. 옛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지역의 이미지 중심으로 그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읍치는 성곽없이 건물만 몇 개 그렸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안에 적어 넣어 구별이 되도록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치 뿐만 아니라 사찰들도 독립적 형국 안에 표시한 점이 눈에 띈다. 이 밖에 누정을 그려 넣었다. 향교와 읍치 중간에 망북정이 강변에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간점산과 대암산에 봉수가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도로를 표시하고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고개가 보인다. 지도 위쪽의 金堂峴은 현재의 비안면 자락리에서 안평면 금곡리 금당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이현군)

  • 비안현 주기 (比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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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의성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비안면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의성군의 비안면, 안계면, 구천면, 안사면 일부 지역이었다. 비안의 속현으로는 安貞縣이 있었는데 현재의 안계면 안정리 일대이다. 안정창이 지도에 표시되었고 그 왼쪽 에 안계역이 그려져 있어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진산은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는 성황산이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단, 성황단이 설치되었는데 성황단이 있던 산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낙동강에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에는 바위를 회화적으로 그린 점이 눈에 띈다. 옛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지역의 이미지 중심으로 그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읍치는 성곽없이 건물만 몇 개 그렸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안에 적어 넣어 구별이 되도록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치 뿐만 아니라 사찰들도 독립적 형국 안에 표시한 점이 눈에 띈다. 이 밖에 누정을 그려 넣었다. 향교와 읍치 중간에 망북정이 강변에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간점산과 대암산에 봉수가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도로를 표시하고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고개가 보인다. 지도 위쪽의 金堂峴은 현재의 비안면 자락리에서 안평면 금곡리 금당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이현군)

  • 사천현 (泗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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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사천시(삼천포시) 일부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사천읍 선인리, 정의리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사천읍, 사남면, 정동면, 용현면과 사천시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아래에 그려진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다. 자연 지형과 성문의 명칭, 면 명칭을 통해 동쪽을 위로 향하게 그린 지도임을 알수 있다. 읍치가 관할 구역의 북서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왼쪽 아래에 그려졌다. 읍치 지역을 크게 그렸는데 현대 지도와 달리 고지도는 중요한 부분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특성을 가진다. 진산은 동쪽의 두읍벌산인데 이 지도에서는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남쪽)의 사수천은 현재의 사천강에 해당한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 안에 표시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성을 그리고 그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렸다. 사천강 오른쪽 하천은 현재의 죽전천으로 판단된다. 하천 주변에 저수지, 제언 등이 표시되었다. 지도 위쪽에 書齋라고 적힌 곳은 李楨(1512-1571)의 書齋였다. 그 아래의 귀계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였다. 해안가에는 지역 특성을 반영한 海倉, 船所, 兵倉, 巡倉, 統倉 등이 보인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용현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있고 선진리에는 사천성이 있었다. 바다에는 주변의 섬들이 그려졌다.(이현군)

  • 사천현 주기 (泗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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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사천시(삼천포시) 일부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사천읍 선인리, 정의리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사천읍, 사남면, 정동면, 용현면과 사천시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아래에 그려진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다. 자연 지형과 성문의 명칭, 면 명칭을 통해 동쪽을 위로 향하게 그린 지도임을 알수 있다. 읍치가 관할 구역의 북서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왼쪽 아래에 그려졌다. 읍치 지역을 크게 그렸는데 현대 지도와 달리 고지도는 중요한 부분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특성을 가진다. 진산은 동쪽의 두읍벌산인데 이 지도에서는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남쪽)의 사수천은 현재의 사천강에 해당한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 안에 표시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성을 그리고 그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렸다. 사천강 오른쪽 하천은 현재의 죽전천으로 판단된다. 하천 주변에 저수지, 제언 등이 표시되었다. 지도 위쪽에 書齋라고 적힌 곳은 李楨(1512-1571)의 書齋였다. 그 아래의 귀계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였다. 해안가에는 지역 특성을 반영한 海倉, 船所, 兵倉, 巡倉, 統倉 등이 보인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용현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있고 선진리에는 사천성이 있었다. 바다에는 주변의 섬들이 그려졌다.(이현군)

  • 산청현 (山淸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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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동국여지승람, 여지도 등에는 山陰縣으로 등장한다. 1767년(영조 43)에 산음에서 산청으로 바꾸었다. 현재의 산청군은 조선시대 산청(산음)과 단성을 합한 것이다. 읍치는 산청읍 산청리 일대에 해당하며 경남 산청군의 산청읍, 생초면, 금서면, 차황면, 오부면 등이 관할 범위였다. 이 지도 왼쪽 위에 智異山下脈이라고 적혔는데 지리산의 맥이 읍치에까지 연결된 것처럼 보이도록 그렸다. 산청의 남서쪽에 지리산 국립공원이 있다. 오른쪽의 황매산은 차황면과 합천군 대병면의 경계에 해당하는 1108m의 산이다. 이 산 너머에 합천댐 건설로 생긴 합천호가 있다. 읍치 왼쪽에 鏡湖水가 적혔는데 현재 경호강으로 불린다. 읍치 남쪽에 돌을 세 개 그리고 造山이라 적었는데 비보풍수의 측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읍치에 성곽없이 여러 건물들을 그렸는데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건물의 수가 훨씬 많다. 향청까지 객사 뒤에 그려 넣었다. 읍치 주변의 제단들은 그려 넣지 않았다. 북쪽의 서계서원은 1677년(숙종 3년)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오른쪽 아래의 정곡역은 산청읍 정곡리에 있었던 역원이다. 고개는 일반적으로 嶺, 峙 등으로 표시하지만 우리말 발음을 따라 한자를 만들어 古介로 쓰기도 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그 표기가 나타난다. 이 밖에 쌍계사 등의 사찰, 창고, 연못, 교량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산청현 주기 (山淸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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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동국여지승람, 여지도 등에는 山陰縣으로 등장한다. 1767년(영조 43)에 산음에서 산청으로 바꾸었다. 현재의 산청군은 조선시대 산청(산음)과 단성을 합한 것이다. 읍치는 산청읍 산청리 일대에 해당하며 경남 산청군의 산청읍, 생초면, 금서면, 차황면, 오부면 등이 관할 범위였다. 이 지도 왼쪽 위에 智異山下脈이라고 적혔는데 지리산의 맥이 읍치에까지 연결된 것처럼 보이도록 그렸다. 산청의 남서쪽에 지리산 국립공원이 있다. 오른쪽의 황매산은 차황면과 합천군 대병면의 경계에 해당하는 1108m의 산이다. 이 산 너머에 합천댐 건설로 생긴 합천호가 있다. 읍치 왼쪽에 鏡湖水가 적혔는데 현재 경호강으로 불린다. 읍치 남쪽에 돌을 세 개 그리고 造山이라 적었는데 비보풍수의 측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읍치에 성곽없이 여러 건물들을 그렸는데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건물의 수가 훨씬 많다. 향청까지 객사 뒤에 그려 넣었다. 읍치 주변의 제단들은 그려 넣지 않았다. 북쪽의 서계서원은 1677년(숙종 3년)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오른쪽 아래의 정곡역은 산청읍 정곡리에 있었던 역원이다. 고개는 일반적으로 嶺, 峙 등으로 표시하지만 우리말 발음을 따라 한자를 만들어 古介로 쓰기도 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그 표기가 나타난다. 이 밖에 쌍계사 등의 사찰, 창고, 연못, 교량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삼가현 (三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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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합천군 삼가면의 중심부인 금리 일대가 읍치가 되며 합천군의 삼가면, 가회면, 쌍백면, 대병면, 봉산면 일부, 거창군 신원면이 관할 구역이었다. 현재의 합천군은 조선시대 삼가현, 초계군, 합천군 등이 합쳐진 것이다. 읍치 왼쪽 위에 악견산, 금성산성, 허굴산성이 보이는데 이를 경계로 하천의 분수계가 나누어진다. 남쪽 읍치 부근의 하천은 남류하여 남강에 합류되고 지도 북쪽의 하천은 황강으로 들어간다. 악견산, 허굴산, 금성산 옆에 사방이 높고 막혀 있어 산성이 설만한 자리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대병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풍속이 굳세고 사납다고 기록된 것은 이 지역의 산세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금성산성의 봉수대는 곽재우 장군이 봉화를 올렸다고 지역민들이 전한다. 그 오른쪽의 대평리가 지금 대병면의 어원이 되었다. 왼쪽 황매산 위에 병목면이 표시되었는데 대병면에 속하는 지역으로 그 옆에 ‘僧無學所生地’라고 적혀있다. 조선초기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탄생지라는 말이다. 악견산과 금성산성의 북쪽에 합천댐이 위치하고 있어 북쪽에 그려진 하천 주변은 수몰되었다. 고현창이라고 적힌 부분은 대병면 창리 일대로 지금은 수몰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전에 三岐縣의 현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왼쪽 아래에 서면 가회리가 현재의 가회면이 된다. 읍치에는 읍성과 객사 등의 건물을 그렸다. 지도 아래부분에 남명 조식의 태생지임을 적어 놓았다.(이현군)

  • 삼가현 주기 (三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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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합천군 삼가면의 중심부인 금리 일대가 읍치가 되며 합천군의 삼가면, 가회면, 쌍백면, 대병면, 봉산면 일부, 거창군 신원면이 관할 구역이었다. 현재의 합천군은 조선시대 삼가현, 초계군, 합천군 등이 합쳐진 것이다. 읍치 왼쪽 위에 악견산, 금성산성, 허굴산성이 보이는데 이를 경계로 하천의 분수계가 나누어진다. 남쪽 읍치 부근의 하천은 남류하여 남강에 합류되고 지도 북쪽의 하천은 황강으로 들어간다. 악견산, 허굴산, 금성산 옆에 사방이 높고 막혀 있어 산성이 설만한 자리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대병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풍속이 굳세고 사납다고 기록된 것은 이 지역의 산세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금성산성의 봉수대는 곽재우 장군이 봉화를 올렸다고 지역민들이 전한다. 그 오른쪽의 대평리가 지금 대병면의 어원이 되었다. 왼쪽 황매산 위에 병목면이 표시되었는데 대병면에 속하는 지역으로 그 옆에 ‘僧無學所生地’라고 적혀있다. 조선초기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탄생지라는 말이다. 악견산과 금성산성의 북쪽에 합천댐이 위치하고 있어 북쪽에 그려진 하천 주변은 수몰되었다. 고현창이라고 적힌 부분은 대병면 창리 일대로 지금은 수몰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전에 三岐縣의 현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왼쪽 아래에 서면 가회리가 현재의 가회면이 된다. 읍치에는 읍성과 객사 등의 건물을 그렸다. 지도 아래부분에 남명 조식의 태생지임을 적어 놓았다.(이현군)

  • 상주목 (尙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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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목은 이안면, 공검면, 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의성군 단밀면, 단북면, 문경시 산북면, 산양면, 영순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상주시내의 성동동, 서문동, 서성, 성하, 남성 등의 지명으로 과거 읍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표시된 객사는 상주시내 서성동에 있었는데 고려 때 창건하였다가 1526년(중종 21)에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상주 경찰서로 사용되었다. 동헌은 서성동의 상주 극장 앞에 있었다. 읍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병성천이다. 지도 오른쪽에 낙동역, 낙동진 등 洛東이 지명으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현재는 낙동면이라는 지명으로 사용된다. 지도 왼쪽의 산줄기는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백두대간의 일부이다. 산줄기를 따라 여러 사찰이 표시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속리산이 표시되었다. 변화가 심한 지역의 경우 조선시대 행정구역명이 사용되지 않지만 이 지도에 등장하는 은척면, 화북면, 화서면, 화동면, 외서면, 내서면 등 거의 대부분이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낙동강에 倉과 나루가 표시되었고 육로상에 낙서역(내서면 낙서리) 등 역이 표시되었다. 읍성 밖에는 성황단, 향교, 여제단이 표시되었다. 지도 북쪽의 은척면에 견훤산성이 그려졌는데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사벌성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사벌성은 읍치 동쪽 병풍산의 맞은편 지금의 사벌면 화달리에 있었다(이현군)

  • 상주목 주기 (尙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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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목은 이안면, 공검면, 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의성군 단밀면, 단북면, 문경시 산북면, 산양면, 영순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상주시내의 성동동, 서문동, 서성, 성하, 남성 등의 지명으로 과거 읍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표시된 객사는 상주시내 서성동에 있었는데 고려 때 창건하였다가 1526년(중종 21)에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상주 경찰서로 사용되었다. 동헌은 서성동의 상주 극장 앞에 있었다. 읍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병성천이다. 지도 오른쪽에 낙동역, 낙동진 등 洛東이 지명으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현재는 낙동면이라는 지명으로 사용된다. 지도 왼쪽의 산줄기는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백두대간의 일부이다. 산줄기를 따라 여러 사찰이 표시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속리산이 표시되었다. 변화가 심한 지역의 경우 조선시대 행정구역명이 사용되지 않지만 이 지도에 등장하는 은척면, 화북면, 화서면, 화동면, 외서면, 내서면 등 거의 대부분이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낙동강에 倉과 나루가 표시되었고 육로상에 낙서역(내서면 낙서리) 등 역이 표시되었다. 읍성 밖에는 성황단, 향교, 여제단이 표시되었다. 지도 북쪽의 은척면에 견훤산성이 그려졌는데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사벌성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사벌성은 읍치 동쪽 병풍산의 맞은편 지금의 사벌면 화달리에 있었다(이현군)

  • 선산부 (善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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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현재의 구미시(구미시내의 동쪽 임수동 인의동 황상동 일대 제외)에 해당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지도에서는 성곽없이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만 그렸다. 향교는 선산읍의 ‘교리’라는 지명을 통해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읍치 뒤쪽의 비봉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읍치 아래쪽의 하천은 감천으로 오른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남쪽의 감천에는 고을을 가리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낙동강을 따라 누정, 강창, 도연진을 비롯한 나루터가 들어서 있다. 산줄기와 감천 남쪽에 입지한 건물의 방향과 글씨를 읍치를 향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하나의 지도에 여러 시점이 사용됨을 확인시켜 준다. 선산읍 원리에 있었던 금오서원은 야은 길재와 김종직을 배향한 곳이다. 특이하게 의구총, 의우총이 보인다. 의구총은 만취한 상태의 주인을 구한 개를 기리는 무덤이며 의우총은 주인을 그리워하던 소의 무덤이다. 구미시는 1971년 전자공업단지로 지정되면서 번창해져 1978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표기된 상구미면과 하구미면이 1914년에 통합되어 구미면이 되었다가 현재의 구미시 중심부가 된 것이다. 행정경계는 유사하지만 산업화에 의해 기존의 중심부가 이전한 사례 지역이라 할 수 있다.(이현군)

  • 선산부 주기 (善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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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현재의 구미시(구미시내의 동쪽 임수동 인의동 황상동 일대 제외)에 해당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지도에서는 성곽없이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만 그렸다. 향교는 선산읍의 ‘교리’라는 지명을 통해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읍치 뒤쪽의 비봉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읍치 아래쪽의 하천은 감천으로 오른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남쪽의 감천에는 고을을 가리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낙동강을 따라 누정, 강창, 도연진을 비롯한 나루터가 들어서 있다. 산줄기와 감천 남쪽에 입지한 건물의 방향과 글씨를 읍치를 향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하나의 지도에 여러 시점이 사용됨을 확인시켜 준다. 선산읍 원리에 있었던 금오서원은 야은 길재와 김종직을 배향한 곳이다. 특이하게 의구총, 의우총이 보인다. 의구총은 만취한 상태의 주인을 구한 개를 기리는 무덤이며 의우총은 주인을 그리워하던 소의 무덤이다. 구미시는 1971년 전자공업단지로 지정되면서 번창해져 1978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표기된 상구미면과 하구미면이 1914년에 통합되어 구미면이 되었다가 현재의 구미시 중심부가 된 것이다. 행정경계는 유사하지만 산업화에 의해 기존의 중심부가 이전한 사례 지역이라 할 수 있다.(이현군)

  • 성주목 (星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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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목은 현재의 성주군과 고령군, 달성군, 김천시의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지도에 두개의 성이 보이는데 왼쪽은 독용산성이며 오른쪽이 읍성이다. 산성과 읍성이 병렬적으로 그려져 이중구조처럼 인식된다. 읍성과 산성 모두 객사와 군기고를 갖추고 있다. 읍성은 현재의 성주읍 중심부 경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독용산성은 금수면과 가천면의 경계인 독용산에 있었다. 산성은 1675년(숙종 1)에 쌓았던 것으로 그 안에 사찰, 장대가 보인다. 지금은 그 근처에 성주댐이 들어서 있다. 행정구역으로 面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지도에서는 坊을 적고 있다. 이 지도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뻗어나온 것이며 대가천, 이천, 백천 등이 그려져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는데 낙동강은 성주목의 동쪽 지역에 해당하며 남북으로 흐르는데 이 지도에서는 편의상 아래쪽에 그리고 있다. 서쪽을 위로 그린 지도로 보인다. 성주에는 천곡서원, 회연서원 등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의 명칭을 적지 않고 서원이라고 표시만 하고 사찰의 이름은 다 적고 있다. 성문과 연결되는 도로를 그리면서도 역원의 위치는 표시하지 않았고 봉대와 倉도 명칭을 적지 않고 표시하였다. 낙동강에도 나루터가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 다른 군현 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성주목 주기 (星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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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목은 현재의 성주군과 고령군, 달성군, 김천시의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지도에 두개의 성이 보이는데 왼쪽은 독용산성이며 오른쪽이 읍성이다. 산성과 읍성이 병렬적으로 그려져 이중구조처럼 인식된다. 읍성과 산성 모두 객사와 군기고를 갖추고 있다. 읍성은 현재의 성주읍 중심부 경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독용산성은 금수면과 가천면의 경계인 독용산에 있었다. 산성은 1675년(숙종 1)에 쌓았던 것으로 그 안에 사찰, 장대가 보인다. 지금은 그 근처에 성주댐이 들어서 있다. 행정구역으로 面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지도에서는 坊을 적고 있다. 이 지도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뻗어나온 것이며 대가천, 이천, 백천 등이 그려져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는데 낙동강은 성주목의 동쪽 지역에 해당하며 남북으로 흐르는데 이 지도에서는 편의상 아래쪽에 그리고 있다. 서쪽을 위로 그린 지도로 보인다. 성주에는 천곡서원, 회연서원 등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의 명칭을 적지 않고 서원이라고 표시만 하고 사찰의 이름은 다 적고 있다. 성문과 연결되는 도로를 그리면서도 역원의 위치는 표시하지 않았고 봉대와 倉도 명칭을 적지 않고 표시하였다. 낙동강에도 나루터가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 다른 군현 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순흥부 (順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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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부는 동쪽의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이다. 지도 위쪽에 태백산, 소백산을 확인할 수 있다. 봉화, 영천, 풍기와 인접하고 있으며 충청도,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있다. 죽령을 비롯한 여러 고개가 지도 북쪽에 표시되었는데 육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객사 앞을 지나 죽령을 지나는 도로에 大路라 적어 놓았으며 그 위에는 소로가 적혀 있다. 읍치 오른쪽의 내성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는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며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었다가 1457년(세조 3)에 풍기군에 속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 복구되었으나 1914년 군현 통합에 의해 영주시, 봉화군에 나누어 들어가게 되었다. 옛 순흥부는 영주시 순흥면, 부석면, 단산면과 풍기읍의 일부, 안정면 일부, 봉화읍 일부, 물야면, 법전면, 춘양면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아사만 그 이름을 적고 있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표시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백운동서원은 1542년(중종 37)에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후에 소수서원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북쪽의 부석사(부석면 북지리)는 의상대사가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 북쪽에는 태봉과 어류산성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倉, 봉대 등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순흥부 주기 (順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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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부는 동쪽의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이다. 지도 위쪽에 태백산, 소백산을 확인할 수 있다. 봉화, 영천, 풍기와 인접하고 있으며 충청도,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있다. 죽령을 비롯한 여러 고개가 지도 북쪽에 표시되었는데 육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객사 앞을 지나 죽령을 지나는 도로에 大路라 적어 놓았으며 그 위에는 소로가 적혀 있다. 읍치 오른쪽의 내성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는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며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었다가 1457년(세조 3)에 풍기군에 속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 복구되었으나 1914년 군현 통합에 의해 영주시, 봉화군에 나누어 들어가게 되었다. 옛 순흥부는 영주시 순흥면, 부석면, 단산면과 풍기읍의 일부, 안정면 일부, 봉화읍 일부, 물야면, 법전면, 춘양면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아사만 그 이름을 적고 있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표시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백운동서원은 1542년(중종 37)에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후에 소수서원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북쪽의 부석사(부석면 북지리)는 의상대사가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 북쪽에는 태봉과 어류산성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倉, 봉대 등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신녕현 (新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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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천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신녕면 화성리 일대이다. 중앙선 철도의 신녕역 북쪽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영천시 신녕면, 화남면, 화산면, 화북면의 일부, 와촌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대구 팔공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팔공산이 그려졌다. 현재의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이다. 지도 가운데 위쪽에 표시된 화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신녕면과 군위군 고로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828m의 산이다. 城內라고 적힌 것은 화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맥을 따라 아래로 내려 오면 객사가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驛館이 표시되었는데 읍치 서쪽 5리 지점에 있었던 長壽驛으로 파악된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역 이름을 적는데 여기서는 역관이라고 표시하였다. 역관 앞에서 읍치 서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로 볼 수 있다. 지도 왼쪽 위의 龜川院으로 연결된 도로는 919번 지방도로로 파악된다. 읍치 동쪽 화산면과 화남면 경계에 백학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있었던 것이 지도에 표시된 백학서원이다. 1678년(숙종 4)에 세워졌으며 이황을 배향하였다. 그 옆에 고현면이 적혔는데 신녕현의 옛 읍치가 있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신녕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이 밖에 창고, 봉수대, 누정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신녕현 주기 (新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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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천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신녕면 화성리 일대이다. 중앙선 철도의 신녕역 북쪽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영천시 신녕면, 화남면, 화산면, 화북면의 일부, 와촌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대구 팔공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팔공산이 그려졌다. 현재의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이다. 지도 가운데 위쪽에 표시된 화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신녕면과 군위군 고로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828m의 산이다. 城內라고 적힌 것은 화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맥을 따라 아래로 내려 오면 객사가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驛館이 표시되었는데 읍치 서쪽 5리 지점에 있었던 長壽驛으로 파악된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역 이름을 적는데 여기서는 역관이라고 표시하였다. 역관 앞에서 읍치 서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로 볼 수 있다. 지도 왼쪽 위의 龜川院으로 연결된 도로는 919번 지방도로로 파악된다. 읍치 동쪽 화산면과 화남면 경계에 백학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있었던 것이 지도에 표시된 백학서원이다. 1678년(숙종 4)에 세워졌으며 이황을 배향하였다. 그 옆에 고현면이 적혔는데 신녕현의 옛 읍치가 있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신녕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이 밖에 창고, 봉수대, 누정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안동부 (安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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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과 함께 주변 군현인 예안현, 봉화현, 영천군, 순흥부를 함께 그렸다. 중심부에 읍성을 그리고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읍성 안에는 객사, 아사, 사창, 낙남루, 관청, 강무당 등의 건물을 그렸으나 동헌은 보이지 않는다. 향교는 북문 인근에 표시하였으며 서문 밖에 鎭營이 있다. 읍성 주변의 하천은 낙동강으로 지도 북쪽에 그 발원지인 태백산의 황지를 표시하였다. 황지 아래쪽에는 史庫를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이 적혀있다. 낙동강을 따라 여러 倉과 험애, 요충지를 표시하였다. 안동댐의 건설로 많은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이 지도와 현재의 모습이 차이가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전통 양반촌의 대명사로 통하는 河回가 표시되었다. 산줄기와 강줄기가 돌아나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하회 옆의 병산서원(병산리)은 서애 유성룡을 배향한 곳이다. 읍치 남쪽 낙동강변에 영호루가 표시되었는데 안동교 남쪽에 복원되어 있다. 낙동강을 따라 경치 좋은 곳에 여러 서원과 누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삼태사묘는 고려 때 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길을 모신 사당이다. 읍치 서쪽의 관왕묘는 관우의 사당으로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견한 이후 세워진 것이다. 임란 이후 한양의 동대문 밖, 남대문 밖에 관왕묘가 세워졌지만, 지방 군현에 관왕묘가 세워진 것은 드문 일이다. 남문, 서문과 연결되는 도로상에 고개, 역이 표시되었다.

  • 안동부 주기 (安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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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과 함께 주변 군현인 예안현, 봉화현, 영천군, 순흥부를 함께 그렸다. 중심부에 읍성을 그리고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읍성 안에는 객사, 아사, 사창, 낙남루, 관청, 강무당 등의 건물을 그렸으나 동헌은 보이지 않는다. 향교는 북문 인근에 표시하였으며 서문 밖에 鎭營이 있다. 읍성 주변의 하천은 낙동강으로 지도 북쪽에 그 발원지인 태백산의 황지를 표시하였다. 황지 아래쪽에는 史庫를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이 적혀있다. 낙동강을 따라 여러 倉과 험애, 요충지를 표시하였다. 안동댐의 건설로 많은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이 지도와 현재의 모습이 차이가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전통 양반촌의 대명사로 통하는 河回가 표시되었다. 산줄기와 강줄기가 돌아나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하회 옆의 병산서원(병산리)은 서애 유성룡을 배향한 곳이다. 읍치 남쪽 낙동강변에 영호루가 표시되었는데 안동교 남쪽에 복원되어 있다. 낙동강을 따라 경치 좋은 곳에 여러 서원과 누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삼태사묘는 고려 때 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길을 모신 사당이다. 읍치 서쪽의 관왕묘는 관우의 사당으로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견한 이후 세워진 것이다. 임란 이후 한양의 동대문 밖, 남대문 밖에 관왕묘가 세워졌지만, 지방 군현에 관왕묘가 세워진 것은 드문 일이다. 남문, 서문과 연결되는 도로상에 고개, 역이 표시되었다.

  • 안의현 (安義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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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利安縣과 感陰縣이 합쳐져서 安陰縣이 되었다가 1767년(영조 43)에 안의현으로 그 명칭이 바뀐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광여도에 안음현으로 등장하는 지역의 고지도이다. 읍치는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일대에 해당하며 함양군의 안의면, 서상면, 서하면, 거창군 마리면, 북상면, 위천면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전라도와 경계에 있는 군현이다. 지도 위에 덕유산이 표시되었는데 덕유산 국립공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산줄기를 잇달아 그려 맥으로 보이게 그렸다. 진산은 읍치 서쪽에 위치한 城山이다. 일반적인 군현지도에서는 주변부 지역을 축소하고 읍치지역을 중심부에 의도적으로 크게 확대하여 그리는 이중 축척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이 지도는 어디가 읍치지역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렸다. 관아 건물도 다른 지도에서는 여러 건물을 그리는데 비해 이 지도는 衙라고 표시한 건물 하나만 그렸다. 지도 아래쪽이 읍치 지역이다. 산줄기, 물줄기 외에 향교, 충렬사, 용문서원, 창고만 표시하였다. 龍門書院은 鄭汝昌(1450-1504)과 鄭薀(1569-1642) 등을 배향한 서원이다. 지도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도로조차 그려지지 않았다. 지도에 도로를 그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지도이다. 다른 지도에서는 방면의 명칭을 네모 안에 따로 기입하는데 비해 이 지도에서는 村, 谷, 谷村 등으로 지명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안의현 주기 (安義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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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利安縣과 感陰縣이 합쳐져서 安陰縣이 되었다가 1767년(영조 43)에 안의현으로 그 명칭이 바뀐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광여도에 안음현으로 등장하는 지역의 고지도이다. 읍치는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일대에 해당하며 함양군의 안의면, 서상면, 서하면, 거창군 마리면, 북상면, 위천면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전라도와 경계에 있는 군현이다. 지도 위에 덕유산이 표시되었는데 덕유산 국립공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산줄기를 잇달아 그려 맥으로 보이게 그렸다. 진산은 읍치 서쪽에 위치한 城山이다. 일반적인 군현지도에서는 주변부 지역을 축소하고 읍치지역을 중심부에 의도적으로 크게 확대하여 그리는 이중 축척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이 지도는 어디가 읍치지역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렸다. 관아 건물도 다른 지도에서는 여러 건물을 그리는데 비해 이 지도는 衙라고 표시한 건물 하나만 그렸다. 지도 아래쪽이 읍치 지역이다. 산줄기, 물줄기 외에 향교, 충렬사, 용문서원, 창고만 표시하였다. 龍門書院은 鄭汝昌(1450-1504)과 鄭薀(1569-1642) 등을 배향한 서원이다. 지도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도로조차 그려지지 않았다. 지도에 도로를 그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지도이다. 다른 지도에서는 방면의 명칭을 네모 안에 따로 기입하는데 비해 이 지도에서는 村, 谷, 谷村 등으로 지명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양산군 (梁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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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의 읍치는 현재의 중부동 일대이며 현재의 양산시에서 웅상읍은 조선시대 울산부에 해당하였기에 웅상읍을 제외한 양산시 지역과 부산광역시 북구, 강서구 일부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이 지도에서 눈이 띄는 점은 많은 하천이 그려져 있고 읍치의 서남쪽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점이다. 동쪽이 낙동정맥의 끝부분에 해당하기에 하천의 방향이 그렇게 된 것이다. 진산은 동북쪽에 있는 성황산이 된다. 읍성 밖에는 일반적으로 향교, 사직단, 여단, 성황사가 배치되는데 성황사가 있었던 곳이 진산이 된 것이다. 읍성과 성문, 그리고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다른 관아 건물과 달리 객사는 서쪽을 향하게 그렸다. 진산의 방향과 연계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북문 안쪽에 옥이 원형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향교는 지금 교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양산천으로 남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낙동강의 하중도가 표시되었다. 동쪽의 낙동정맥 방향에는 국가에서 사용할 재목을 구하기 위한 封山과 여러 고개들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요충지가 표시되었는데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교통로로 황산역이 보이는데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었던 역으로 11개의 속역을 가졌다. 지도 북쪽의 통도사는 가지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646년(신라 선덕 15)에 창건되었다. 보물 74호 국장생석표, 보물 144호 대웅전 등 유물이 보존된 이름난 사찰이다. 이 밖에 교량,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양산군 주기 (梁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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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의 읍치는 현재의 중부동 일대이며 현재의 양산시에서 웅상읍은 조선시대 울산부에 해당하였기에 웅상읍을 제외한 양산시 지역과 부산광역시 북구, 강서구 일부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이 지도에서 눈이 띄는 점은 많은 하천이 그려져 있고 읍치의 서남쪽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점이다. 동쪽이 낙동정맥의 끝부분에 해당하기에 하천의 방향이 그렇게 된 것이다. 진산은 동북쪽에 있는 성황산이 된다. 읍성 밖에는 일반적으로 향교, 사직단, 여단, 성황사가 배치되는데 성황사가 있었던 곳이 진산이 된 것이다. 읍성과 성문, 그리고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다른 관아 건물과 달리 객사는 서쪽을 향하게 그렸다. 진산의 방향과 연계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북문 안쪽에 옥이 원형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향교는 지금 교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양산천으로 남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낙동강의 하중도가 표시되었다. 동쪽의 낙동정맥 방향에는 국가에서 사용할 재목을 구하기 위한 封山과 여러 고개들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요충지가 표시되었는데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교통로로 황산역이 보이는데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었던 역으로 11개의 속역을 가졌다. 지도 북쪽의 통도사는 가지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646년(신라 선덕 15)에 창건되었다. 보물 74호 국장생석표, 보물 144호 대웅전 등 유물이 보존된 이름난 사찰이다. 이 밖에 교량,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언양현 (彦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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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울산광역시 동쪽 지역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군현을 그린 지도이다. 지도 가운데에 그려진 읍성은 현재 언양읍내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사적 5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부고속국도의 언양분기점이 읍치 동쪽에 있다. 언양현의 관할범위는 언양읍, 삼동면, 삼남면, 상북면 등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고헌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고헌산의 맥이 읍치에 연결되도록 그렸다. 읍성은 의도적으로 정사각형으로 그렸으며 그 가운데 객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읍성 안에 들어서는 향청이 이 지역에서는 읍성 밖에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읍성 서남쪽에 표시된 향교는 언양읍 교동리에 남아있다. 낙동정맥의 동쪽 지방으로 읍성 앞의 하천은 태화강이다. 동쪽으로 흘러 울산만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문수산이 조선시대 울산과 경계가 되는데 울산의 월드컵 경기장인 문수경기장이 이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지도 오른쪽에 반구서원이 그려졌는데 정몽주, 이언적, 정구 등을 배향하였고 1712년(숙종 38)에 지어졌다. 이 근처에 반구대 유적지가 있다. 울산광역시 언양읍 대곡리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운문령, 석남령 등 다른 지역의 교통로가 되는 고개를 도로와 함게 표시하였다. 지도 아래에는 덕천역이 표시되었는데 읍성과 멀리 떨어져 보이지만 언양읍 교동리에 있던 역이다. 읍성 왼쪽의 봉대가 표시된 곳은 언양읍 천전리와 교동리 중간에 있으며 현재는 봉화산으로 불린다.(이현군)

  • 언양현 주기 (彦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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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울산광역시 동쪽 지역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군현을 그린 지도이다. 지도 가운데에 그려진 읍성은 현재 언양읍내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사적 5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부고속국도의 언양분기점이 읍치 동쪽에 있다. 언양현의 관할범위는 언양읍, 삼동면, 삼남면, 상북면 등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고헌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고헌산의 맥이 읍치에 연결되도록 그렸다. 읍성은 의도적으로 정사각형으로 그렸으며 그 가운데 객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읍성 안에 들어서는 향청이 이 지역에서는 읍성 밖에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읍성 서남쪽에 표시된 향교는 언양읍 교동리에 남아있다. 낙동정맥의 동쪽 지방으로 읍성 앞의 하천은 태화강이다. 동쪽으로 흘러 울산만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문수산이 조선시대 울산과 경계가 되는데 울산의 월드컵 경기장인 문수경기장이 이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지도 오른쪽에 반구서원이 그려졌는데 정몽주, 이언적, 정구 등을 배향하였고 1712년(숙종 38)에 지어졌다. 이 근처에 반구대 유적지가 있다. 울산광역시 언양읍 대곡리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운문령, 석남령 등 다른 지역의 교통로가 되는 고개를 도로와 함게 표시하였다. 지도 아래에는 덕천역이 표시되었는데 읍성과 멀리 떨어져 보이지만 언양읍 교동리에 있던 역이다. 읍성 왼쪽의 봉대가 표시된 곳은 언양읍 천전리와 교동리 중간에 있으며 현재는 봉화산으로 불린다.(이현군)

  • 영덕현 (盈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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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 대게로 알려진 영덕현의 지도이다. 동해와 접한 고을로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지역이 중심부이다. 현재의 지품면, 달산면, 강구면, 남정면 등이 관할 구역으로 영덕군의 다른 면은 영해부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영해부와 영덕현이 합쳐져 현재의 영덕군이 된 것이다. 영덕의 동쪽이 동해인데 이 지도는 마치 남쪽까지 바다인 것처럼 그렸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며 무둔산이 진산이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오십천이다. 읍치 뒤쪽에 오십천 표시가 있다. 왼쪽 아래 강구진(강구면 강구리)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 강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그 옆의 하저포는 강구면 하저리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의 장사진이 그려진 곳은 남정면 장사리인데 국민관광지인 장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동면에서 오른쪽 아래의 강구진, 왼쪽의 장사진은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으로 해안선이 연결되는데 이 지도는 마치 꺾여진 것처럼 그렸다. 지금은 해안을 따라 7번 국도가 지난다. 지도에 읍성과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다른 지도에서 잘 보이지 않는 동헌을 객사 뒤에 그렸고 홍문(홍살문)을 남문 앞에 그린 점이 이색적이다. 석축으로 된 읍성 밖에 향교, 서원이 그려졌으며 해안에는 봉대가 표시되었다. 역원으로는 지품원, 남역, 주등역이 보인다.(이현군).

  • 영덕현 주기 (盈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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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 대게로 알려진 영덕현의 지도이다. 동해와 접한 고을로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지역이 중심부이다. 현재의 지품면, 달산면, 강구면, 남정면 등이 관할 구역으로 영덕군의 다른 면은 영해부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영해부와 영덕현이 합쳐져 현재의 영덕군이 된 것이다. 영덕의 동쪽이 동해인데 이 지도는 마치 남쪽까지 바다인 것처럼 그렸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며 무둔산이 진산이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오십천이다. 읍치 뒤쪽에 오십천 표시가 있다. 왼쪽 아래 강구진(강구면 강구리)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 강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그 옆의 하저포는 강구면 하저리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의 장사진이 그려진 곳은 남정면 장사리인데 국민관광지인 장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동면에서 오른쪽 아래의 강구진, 왼쪽의 장사진은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으로 해안선이 연결되는데 이 지도는 마치 꺾여진 것처럼 그렸다. 지금은 해안을 따라 7번 국도가 지난다. 지도에 읍성과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다른 지도에서 잘 보이지 않는 동헌을 객사 뒤에 그렸고 홍문(홍살문)을 남문 앞에 그린 점이 이색적이다. 석축으로 된 읍성 밖에 향교, 서원이 그려졌으며 해안에는 봉대가 표시되었다. 역원으로는 지품원, 남역, 주등역이 보인다.(이현군).

  • 영산현 (靈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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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군면 통합으로 사라진 조선시대 현으로 일부는 함안군에 귀속되고 대부분은 창녕군에 포함된 고을이다.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에 해당하고 지도 제일 위에 그려진 영취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에 표시되진 않았지만, 현재 산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현재의 창녕군 영산면, 남지읍, 계성면, 장마면, 도천면, 부곡면, 길곡면 등이 영산의 범위에 포함된다. 진산인 영취산은 동쪽의 낙동정맥에서 뻗어나온 산이며 지도 아래 하천은 낙동강이다. 영취산에서 내려 온 맥이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일반적 군현지도에서 향교는 독자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려지는데 비해 이 지도는 객사로 내려오는 맥을 가로챈 자리에 향교가 들어선 점이 이색적이다. 낙동강의 작은 지류들이 많이 그려져 있고 곳곳에 농업을 위한 제언이 많이 조성된 점이 특징이다. 지도 오른쪽의 덕봉은 부곡면과 밀양시 무안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지금은 덕암산으로 불리며 544.5m이다. 그 아래 부곡면, 온정역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근처에 국민관광지로 개발된 부곡온천이 있다. 남쪽의 낙동강변에 나루와 정자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해연진은 부곡면 노리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가운데 아래쪽의 망우정은 도천면 우강리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앞에서 온정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1008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지도에 사찰이 전혀 나오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이현군)

  • 영산현 주기 (靈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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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군면 통합으로 사라진 조선시대 현으로 일부는 함안군에 귀속되고 대부분은 창녕군에 포함된 고을이다.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에 해당하고 지도 제일 위에 그려진 영취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에 표시되진 않았지만, 현재 산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현재의 창녕군 영산면, 남지읍, 계성면, 장마면, 도천면, 부곡면, 길곡면 등이 영산의 범위에 포함된다. 진산인 영취산은 동쪽의 낙동정맥에서 뻗어나온 산이며 지도 아래 하천은 낙동강이다. 영취산에서 내려 온 맥이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일반적 군현지도에서 향교는 독자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려지는데 비해 이 지도는 객사로 내려오는 맥을 가로챈 자리에 향교가 들어선 점이 이색적이다. 낙동강의 작은 지류들이 많이 그려져 있고 곳곳에 농업을 위한 제언이 많이 조성된 점이 특징이다. 지도 오른쪽의 덕봉은 부곡면과 밀양시 무안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지금은 덕암산으로 불리며 544.5m이다. 그 아래 부곡면, 온정역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근처에 국민관광지로 개발된 부곡온천이 있다. 남쪽의 낙동강변에 나루와 정자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해연진은 부곡면 노리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가운데 아래쪽의 망우정은 도천면 우강리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앞에서 온정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1008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지도에 사찰이 전혀 나오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이현군)

  • 영양현 (英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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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석보면은 영해부에 속하였고 입암면의 일부지역은 진보현에 속하여서 현재의 영양군에서 그 나머지 지역이 영양현의 관할범위였다. 영해부, 진보현에 귀속되기도 하였다가 1683년(숙종 9)에 다시 현을 두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동국여지승람에는 영해도호부의 속현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진산이 기록되지 않았다. 낙동정맥을 경계로 영해, 평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이다.북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서쪽으로 나온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의 ‘靑’이 들어가는 두개의 면 이름이 나오는데 과거 靑杞縣 이 있던 지역이다. 현재는 청기면이 되었다. 읍치 동쪽에 장군천으로 적힌 하천은 지금의 반변천이며 왼쪽은 동천으로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입암이 표시되었는데 돌이 서있는 모습을 회화적으로 그렸다. 현재의 입암면 강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는데 뒤쪽 산줄기가 읍치로 연결되게 표현하였다. 아사 왼쪽 아래 가장 큰 건물이 객사로 보이는데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향교는 독립적 형국 안에 그렸으며 읍성 밖에 설치되는 제단들도 표시하지 않은 간략하게 만든 지도이다. 하천과 도로를 따라 倉, 누정, 서원이 그려졌다. 입암 아래에 초선도를 그렸는데 이름으로 명승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임암면의 문해교 아래에 하중도가 있는데 그 섬으로 비정된다. 읍치 오른쪽에 그려진 도로는 현재의 31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가 된다.(이현군)

  • 영양현 주기 (英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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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석보면은 영해부에 속하였고 입암면의 일부지역은 진보현에 속하여서 현재의 영양군에서 그 나머지 지역이 영양현의 관할범위였다. 영해부, 진보현에 귀속되기도 하였다가 1683년(숙종 9)에 다시 현을 두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동국여지승람에는 영해도호부의 속현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진산이 기록되지 않았다. 낙동정맥을 경계로 영해, 평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이다.북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서쪽으로 나온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의 ‘靑’이 들어가는 두개의 면 이름이 나오는데 과거 靑杞縣 이 있던 지역이다. 현재는 청기면이 되었다. 읍치 동쪽에 장군천으로 적힌 하천은 지금의 반변천이며 왼쪽은 동천으로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입암이 표시되었는데 돌이 서있는 모습을 회화적으로 그렸다. 현재의 입암면 강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는데 뒤쪽 산줄기가 읍치로 연결되게 표현하였다. 아사 왼쪽 아래 가장 큰 건물이 객사로 보이는데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향교는 독립적 형국 안에 그렸으며 읍성 밖에 설치되는 제단들도 표시하지 않은 간략하게 만든 지도이다. 하천과 도로를 따라 倉, 누정, 서원이 그려졌다. 입암 아래에 초선도를 그렸는데 이름으로 명승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임암면의 문해교 아래에 하중도가 있는데 그 섬으로 비정된다. 읍치 오른쪽에 그려진 도로는 현재의 31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가 된다.(이현군)

  • 영일현 (迎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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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장기곶(호미곶)과 포항 사이가 영일만이다. 이 지도는 영일만과 그 서쪽에 있던 영일현을 그린 것이다. 광여도는 延日縣으로 표시했는데 그 이름을 딴 현재의 연일읍 생지리, 동문리 일대가 중심부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동쪽 바다에 접한 고을이므로 하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지도 위쪽의 강이 형산강인데 흥해군과의 경계가 된다. 오른쪽 위에 경주 포항창이 적혀있는데 이 이름을 따서 현재의 浦項 지명이 만들어졌다. 영일현의 진산은 읍치 남쪽 지금의 대송면 홍계리에 있는 482m의 운제산이다. 지도 남쪽 산줄기에 해당한다. 주변 산세를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향교와 서원은 산줄기를 따로 표현해서 독립적으로 보이도록 하였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읍성을 원형으로 그리고 그 안에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방향만 다르게 표현하였다. 읍치 동쪽으로 북송전을 그렸다. 바다의 바람을 막고 읍성이 바로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나무 숲을 조성한 곳으로 보인다. 현재의 송내동, 송정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소나무 숲 오른쪽의 바다는 일부 매립하여 제철산업의 중심기업인 포스코가 들어서 있다. 방면 표시도 없고 지명으로는 왼쪽 위에 부조리만 적혀 있는데 현재 연일읍 중명리에 아랫부조라는 마을이 있는 곳이다.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린 지도이다.(이현군)

  • 영일현 주기 (迎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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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장기곶(호미곶)과 포항 사이가 영일만이다. 이 지도는 영일만과 그 서쪽에 있던 영일현을 그린 것이다. 광여도는 延日縣으로 표시했는데 그 이름을 딴 현재의 연일읍 생지리, 동문리 일대가 중심부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동쪽 바다에 접한 고을이므로 하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지도 위쪽의 강이 형산강인데 흥해군과의 경계가 된다. 오른쪽 위에 경주 포항창이 적혀있는데 이 이름을 따서 현재의 浦項 지명이 만들어졌다. 영일현의 진산은 읍치 남쪽 지금의 대송면 홍계리에 있는 482m의 운제산이다. 지도 남쪽 산줄기에 해당한다. 주변 산세를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향교와 서원은 산줄기를 따로 표현해서 독립적으로 보이도록 하였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읍성을 원형으로 그리고 그 안에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방향만 다르게 표현하였다. 읍치 동쪽으로 북송전을 그렸다. 바다의 바람을 막고 읍성이 바로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나무 숲을 조성한 곳으로 보인다. 현재의 송내동, 송정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소나무 숲 오른쪽의 바다는 일부 매립하여 제철산업의 중심기업인 포스코가 들어서 있다. 방면 표시도 없고 지명으로는 왼쪽 위에 부조리만 적혀 있는데 현재 연일읍 중명리에 아랫부조라는 마을이 있는 곳이다.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린 지도이다.(이현군)

  • 영천군 (榮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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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발음은 같지만 永川은 지금의 영천시이고 榮川은 현재의 영주시에 해당한다. 榮川의 읍치는 현재의 영주시내 영주동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주시내, 문수면, 장수면, 이산면, 평은면, 봉화군 상운면 일부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읍치를 둘러싼 하천은 서천으로 오른쪽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군현지도에서는 산줄기가 중앙부를 향하게 그린 지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지도는 모두 아래쪽을 향하게 그렸다. 북쪽으로 백두대간이라는 큰 산줄기가 형성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인 철탄산으로 맥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읍치에는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는데 읍성은 그리지 않았다. 아사 뒤쪽의 철탄산이 진산이다. 읍치 북쪽에 성내산성이 있었다. 이 지역의 서원 중 읍치 동쪽의 이산서원은 이황을 배향한 서원으로 1558년(명종 13)에 세워져 1574년(선조 7)에 사액받았다.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으로 그렸는데 동쪽의 향교는 영주향교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성밖의 사직단, 여단, 성황사 등을 그리지 않았다. 창보역, 평은역, 효대원, 문수원, 금림원, 승리원, 가이원, 장금원, 덕산원, 철겸원 등이 있었던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역원이 표시되지는 않았다. 이 지도에서 영천의 도로망은 읍치를 중심으로 X 자 구조이다. 영동선과 중앙선 철도, 5번 국도와 36번 국도가 지금의 영주를 지나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모태가 되었다. 그 외 창고, 봉수, 누정 등이 지도에 보인다.(이현군)

  • 영천군 (永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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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는 다르지만 영천으로 발음되는 곳이 경상도에 두 곳이다. 永川은 현재의 영천시의 모태가 되었으며 榮川은 영주시로 바뀌었다. 永川의 읍치는 문내동, 성내동 일대이며 현재의 신녕면,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 일부(신녕현), 북안면 일부(경주부)를 제외한 영천시를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낙동정맥의 동쪽 금호강의 상류에 위치한 고을이다. 왼쪽 위에 팔공산이 보인다. 지도에 따라서는 공산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을 지나 남쪽으로 가는 하천이 금호강으로 지도 왼쪽 아래에 표기되었다. 지도 왼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그 옆의 하천을 지금 고현천으로 부른다. 읍치 뒤쪽의 산을 연이어 그려서 강한 맥세가 느껴지도록 그렸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성문 이름만 표시하였다. 자연의 능선을 활용하여 읍성을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문쪽에는 고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때 만든 성이다. 읍치에서 가장 큰 건물이 객사이다. 향교가 객사 뒤에 보이는데 향교의 대성전은 보물 616호에 해당한다. 북쪽의 모자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향교, 여제단, 사직단을 그리고 성황단 대신 왼쪽에 성황봉이라는 표시로 대신하였다. 왼쪽 위에 인종대왕태실이 그려졌으며 오른쪽에 있는 입암서원은 바위가 서 있는 풍경 아래에 그렸다. 읍치를 중심으로 북창, 남창, 동창, 서창 등이 들어서 있다. 곳곳에 봉수대가 그려졌고 도로를 표시하였다.(이현군)

  • 영천군 주기 (榮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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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발음은 같지만 永川은 지금의 영천시이고 榮川은 현재의 영주시에 해당한다. 榮川의 읍치는 현재의 영주시내 영주동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주시내, 문수면, 장수면, 이산면, 평은면, 봉화군 상운면 일부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읍치를 둘러싼 하천은 서천으로 오른쪽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군현지도에서는 산줄기가 중앙부를 향하게 그린 지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지도는 모두 아래쪽을 향하게 그렸다. 북쪽으로 백두대간이라는 큰 산줄기가 형성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인 철탄산으로 맥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읍치에는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는데 읍성은 그리지 않았다. 아사 뒤쪽의 철탄산이 진산이다. 읍치 북쪽에 성내산성이 있었다. 이 지역의 서원 중 읍치 동쪽의 이산서원은 이황을 배향한 서원으로 1558년(명종 13)에 세워져 1574년(선조 7)에 사액받았다.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으로 그렸는데 동쪽의 향교는 영주향교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성밖의 사직단, 여단, 성황사 등을 그리지 않았다. 창보역, 평은역, 효대원, 문수원, 금림원, 승리원, 가이원, 장금원, 덕산원, 철겸원 등이 있었던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역원이 표시되지는 않았다. 이 지도에서 영천의 도로망은 읍치를 중심으로 X 자 구조이다. 영동선과 중앙선 철도, 5번 국도와 36번 국도가 지금의 영주를 지나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모태가 되었다. 그 외 창고, 봉수, 누정 등이 지도에 보인다.(이현군)

  • 영천군 주기 (永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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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는 다르지만 영천으로 발음되는 곳이 경상도에 두 곳이다. 永川은 현재의 영천시의 모태가 되었으며 榮川은 영주시로 바뀌었다. 永川의 읍치는 문내동, 성내동 일대이며 현재의 신녕면,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 일부(신녕현), 북안면 일부(경주부)를 제외한 영천시를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낙동정맥의 동쪽 금호강의 상류에 위치한 고을이다. 왼쪽 위에 팔공산이 보인다. 지도에 따라서는 공산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을 지나 남쪽으로 가는 하천이 금호강으로 지도 왼쪽 아래에 표기되었다. 지도 왼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그 옆의 하천을 지금 고현천으로 부른다. 읍치 뒤쪽의 산을 연이어 그려서 강한 맥세가 느껴지도록 그렸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성문 이름만 표시하였다. 자연의 능선을 활용하여 읍성을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문쪽에는 고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때 만든 성이다. 읍치에서 가장 큰 건물이 객사이다. 향교가 객사 뒤에 보이는데 향교의 대성전은 보물 616호에 해당한다. 북쪽의 모자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향교, 여제단, 사직단을 그리고 성황단 대신 왼쪽에 성황봉이라는 표시로 대신하였다. 왼쪽 위에 인종대왕태실이 그려졌으며 오른쪽에 있는 입암서원은 바위가 서 있는 풍경 아래에 그렸다. 읍치를 중심으로 북창, 남창, 동창, 서창 등이 들어서 있다. 곳곳에 봉수대가 그려졌고 도로를 표시하였다.(이현군)

  • 영해부 (寧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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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으며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 축산면, 병곡면, 창수면, 영양군 석보면에 해당한다. 동해안을 따라 형성된 7번 국도가 옛 영해 읍치를 지난다. 읍성 안에는 객사, 동헌, 아사, 군기고, 창을 그렸는데 객사 건물이 동헌보다 훨씬 크고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성황단, 여단, 사직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그렸다. 현재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동쪽은 바다에 인접해 있는데 지도 왼쪽 아래의 축산은 축산해수욕장(축산면 축산리)이 있는 곳이다. 죽도산으로 불리기도 하며 축산등대가 설치되어있다. 그 위쪽의 대소산 봉대는 현재 도곡리의 봉화산이며 망일봉은 지금은 망월봉으로 불린다. 읍치 북쪽의 하천은 송천천으로 바다로 유입되는 지점에 국민관광지인 대진해수욕장(영해면 대진리)이 위치한다. 지도 위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영해 북쪽으로 뻗어나온 산줄기에 속한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높이 솟은 기암절벽처럼 산을 그린 것이 이색적이다. 낙동정맥을 넘어야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기에 지도 왼쪽에 역, 원창, 고개를 표시하고 있다. 영양역은 영양군 석보면에 있던 역으로 조선초기에 만들어졌다. 그 위쪽의 창수원은 창수면 창수리에 있던 원으로 918번 도로상에 위치한다. 광제원창은 석보면에 원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비교적 작은 고을이라 지도의 내용이 상세하지 않고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영해부 주기 (寧海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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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으며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 축산면, 병곡면, 창수면, 영양군 석보면에 해당한다. 동해안을 따라 형성된 7번 국도가 옛 영해 읍치를 지난다. 읍성 안에는 객사, 동헌, 아사, 군기고, 창을 그렸는데 객사 건물이 동헌보다 훨씬 크고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성황단, 여단, 사직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그렸다. 현재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동쪽은 바다에 인접해 있는데 지도 왼쪽 아래의 축산은 축산해수욕장(축산면 축산리)이 있는 곳이다. 죽도산으로 불리기도 하며 축산등대가 설치되어있다. 그 위쪽의 대소산 봉대는 현재 도곡리의 봉화산이며 망일봉은 지금은 망월봉으로 불린다. 읍치 북쪽의 하천은 송천천으로 바다로 유입되는 지점에 국민관광지인 대진해수욕장(영해면 대진리)이 위치한다. 지도 위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영해 북쪽으로 뻗어나온 산줄기에 속한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높이 솟은 기암절벽처럼 산을 그린 것이 이색적이다. 낙동정맥을 넘어야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기에 지도 왼쪽에 역, 원창, 고개를 표시하고 있다. 영양역은 영양군 석보면에 있던 역으로 조선초기에 만들어졌다. 그 위쪽의 창수원은 창수면 창수리에 있던 원으로 918번 도로상에 위치한다. 광제원창은 석보면에 원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비교적 작은 고을이라 지도의 내용이 상세하지 않고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예안현 (禮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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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안동시 북동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예안면, 녹전면, 도산면이 관할범위였다.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고 왼쪽은 백두대간에서 나온 산들이다.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이 낙동강이다. 지도에 크게 그려진 강이 낙동강이며 이 지도의 읍치 남쪽은 댐의 건설로 안동호가 된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청량산은 봉화와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금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주요 건물과 장소를 각각의 형국 속에 그린 점이 특이하다. 예안의 진산은 성황산인데 이 지도에는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과거에 이 산에 성황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객사 북쪽에 집이 두 채 그려졌는데 그 뒤쪽 산이 성황산으로 판단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건물만 표시하였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객사 오른쪽에 향청이 독립적으로 표시된 점이 눈에 띈다. 그 북쪽으로 도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한 것으로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 이황이 열었던 도산서당이었는데 사후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되었으며 1575년(선조 8)에 사액받았다. 이 서원의 전교당은 보물 21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의 고향이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고을이지만 사찰이 곳곳에 있어 상호공존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을 따라 나루, 정자, 서원, 명승지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예안현 주기 (禮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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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안동시 북동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예안면, 녹전면, 도산면이 관할범위였다.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고 왼쪽은 백두대간에서 나온 산들이다.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이 낙동강이다. 지도에 크게 그려진 강이 낙동강이며 이 지도의 읍치 남쪽은 댐의 건설로 안동호가 된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청량산은 봉화와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금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주요 건물과 장소를 각각의 형국 속에 그린 점이 특이하다. 예안의 진산은 성황산인데 이 지도에는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과거에 이 산에 성황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객사 북쪽에 집이 두 채 그려졌는데 그 뒤쪽 산이 성황산으로 판단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건물만 표시하였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객사 오른쪽에 향청이 독립적으로 표시된 점이 눈에 띈다. 그 북쪽으로 도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한 것으로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 이황이 열었던 도산서당이었는데 사후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되었으며 1575년(선조 8)에 사액받았다. 이 서원의 전교당은 보물 21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의 고향이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고을이지만 사찰이 곳곳에 있어 상호공존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을 따라 나루, 정자, 서원, 명승지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예천군 (醴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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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예천군은 현재의 예천읍, 용문면, 유천면, 보문면, 호명면, 의성군 다인면,  문경시 동로면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중심부의 읍치는 예천읍 노상리, 서본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예천군에서 상리면, 하리면은 풍기군, 감천면은 안동부, 지보면, 개포면 지역은 용궁현에 속하였다. 읍치를 감아 흐르는 양천은 현재 한천으로 불리며 동천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읍치 왼쪽 산줄기에 덕봉산이 있는데 지금은 봉덕산으로 불린다.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가지에 해당하고 지도 위에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고 적혀있지만 충청도와 바로 맞닿은 고을이 아니며 문경과 풍기를 지나야 충청도와 연결된다. 읍치에 성곽은 그리지 않았고 객사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는 존재하였지만 이 지도에는 그리지 않았다. 북쪽에 작성, 빙성이 보인다. 읍치 동쪽에 있는 통명역은 예천읍 통명리에 있던 역이다. 영주와 연결되는 현재의 28번 국도는 통명역이 있던 지점을 지난다. 현재의 도로는 조선시대 도로를 확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 등장하는 여러 사찰 중 북쪽의 용문사(예천군 용문면)는 고려 태조대에 창건한 사찰이다. 보물 145호 대장전 외 3종이 소장되었다. 읍치 오른쪽 위의 정산서원은 1697년(숙종 23)에 사액받은 곳으로 이황과 조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예천군 주기 (醴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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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예천군은 현재의 예천읍, 용문면, 유천면, 보문면, 호명면, 의성군 다인면,  문경시 동로면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중심부의 읍치는 예천읍 노상리, 서본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예천군에서 상리면, 하리면은 풍기군, 감천면은 안동부, 지보면, 개포면 지역은 용궁현에 속하였다. 읍치를 감아 흐르는 양천은 현재 한천으로 불리며 동천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읍치 왼쪽 산줄기에 덕봉산이 있는데 지금은 봉덕산으로 불린다.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가지에 해당하고 지도 위에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고 적혀있지만 충청도와 바로 맞닿은 고을이 아니며 문경과 풍기를 지나야 충청도와 연결된다. 읍치에 성곽은 그리지 않았고 객사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는 존재하였지만 이 지도에는 그리지 않았다. 북쪽에 작성, 빙성이 보인다. 읍치 동쪽에 있는 통명역은 예천읍 통명리에 있던 역이다. 영주와 연결되는 현재의 28번 국도는 통명역이 있던 지점을 지난다. 현재의 도로는 조선시대 도로를 확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 등장하는 여러 사찰 중 북쪽의 용문사(예천군 용문면)는 고려 태조대에 창건한 사찰이다. 보물 145호 대장전 외 3종이 소장되었다. 읍치 오른쪽 위의 정산서원은 1697년(숙종 23)에 사액받은 곳으로 이황과 조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용궁현 (龍宮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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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위쪽에 표현된 읍치는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일대이다. 원래 읍치는 읍치 남쪽의 용비산성의 북쪽 용궁면 향석리에 있었다. 용궁현의 관할구역은 예천군의 용궁면, 지보면, 개포면의 일부, 풍양면의 일부, 의성군 안사면의 일부, 문경시 영순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 뒤쪽의 축산이 용궁의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금천이고 읍치 남쪽은 내성천이다. 가장 아래의 하천은 낙동강인데 세 하천의 폭을 같은 넓이로 그렸다. 이 세 하천을 모으는 지점, 지도 왼쪽 아래에 삼강진이 그려졌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었다. 그 옆에는 삼강서원이 표시되었다. 삼강서원은 1643년(인조 21)에 세워진 것이다. 읍치 앞의 내성천은 두 번 크게 蛇行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용비산성 오른쪽이 회룡포 지역이며 마산(예천군 지보면 마산리) 위쪽에 크게 휘는 곳이 의성포이다. 근처의 장안사 근처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용비산성은 지보면 향석리에 있던 것으로 강을 내려다 보며 지킬 수 있는 방어기지가 된다. 그 흔적을 지금도 찾을 수 있다. 축산 아래의 읍치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다. 읍치를 옮기면서 다시 읍성을 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왼쪽에는 향교를 표시하였다. 내성천을 기준으로 북쪽은 화강암, 내성천 남쪽은 변성암 지대인데 지질구조선을 따라 하천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하천이 지나는 고을이면서 곳곳에 堤堰이 많이 그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저수지를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다.(이현군)

  • 용궁현 주기 (龍宮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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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위쪽에 표현된 읍치는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일대이다. 원래 읍치는 읍치 남쪽의 용비산성의 북쪽 용궁면 향석리에 있었다. 용궁현의 관할구역은 예천군의 용궁면, 지보면, 개포면의 일부, 풍양면의 일부, 의성군 안사면의 일부, 문경시 영순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 뒤쪽의 축산이 용궁의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금천이고 읍치 남쪽은 내성천이다. 가장 아래의 하천은 낙동강인데 세 하천의 폭을 같은 넓이로 그렸다. 이 세 하천을 모으는 지점, 지도 왼쪽 아래에 삼강진이 그려졌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었다. 그 옆에는 삼강서원이 표시되었다. 삼강서원은 1643년(인조 21)에 세워진 것이다. 읍치 앞의 내성천은 두 번 크게 蛇行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용비산성 오른쪽이 회룡포 지역이며 마산(예천군 지보면 마산리) 위쪽에 크게 휘는 곳이 의성포이다. 근처의 장안사 근처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용비산성은 지보면 향석리에 있던 것으로 강을 내려다 보며 지킬 수 있는 방어기지가 된다. 그 흔적을 지금도 찾을 수 있다. 축산 아래의 읍치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다. 읍치를 옮기면서 다시 읍성을 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왼쪽에는 향교를 표시하였다. 내성천을 기준으로 북쪽은 화강암, 내성천 남쪽은 변성암 지대인데 지질구조선을 따라 하천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하천이 지나는 고을이면서 곳곳에 堤堰이 많이 그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저수지를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다.(이현군)

  • 울산부 (蔚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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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의 읍치는 중구 성남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울산광역시에서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 언양읍(언양현), 두동면, 두서면(경주부)을 제외한 지역과 양산시 웅상읍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산은 낙동정맥에서 경주의 토함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에 있는 것이다. 진산은 무리용산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태화강인데 지도에 태화대가 보인다. 오른쪽은 동천강이다. 기록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지도에는 성곽이 없고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도 그리지 않았다. 객사 뒤쪽의 좌병영은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다. 현재의 중구 병영동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감목관은 옛날 울산에 있던 목마장을 표시한 것이다. 그 아래 방어진은 지금도 방어진항(동구 방어항)으로 남아있다. 바다에 기암을 그려서 명승지을 표시하였다. 해안을 따라 봉대를 표시하였는데 오른쪽의 남목봉대는 현재 봉대산(동구 남목 1동, 남목 2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의 남쪽 해안에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방어를 위한 진으로 서생진이 보이는데 현재의 서생면 서생리 일대에 있던 것으로 지금은 서생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북쪽의 만리성은 울산시 북구와 경주시의 경계에 있는 성이다. 왼쪽의 문수산을 따서 월드컵경기장의 명칭을 만들었다. 이밖에 사찰, 서원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울산부 주기 (蔚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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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의 읍치는 중구 성남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울산광역시에서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 언양읍(언양현), 두동면, 두서면(경주부)을 제외한 지역과 양산시 웅상읍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산은 낙동정맥에서 경주의 토함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에 있는 것이다. 진산은 무리용산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태화강인데 지도에 태화대가 보인다. 오른쪽은 동천강이다. 기록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지도에는 성곽이 없고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도 그리지 않았다. 객사 뒤쪽의 좌병영은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다. 현재의 중구 병영동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감목관은 옛날 울산에 있던 목마장을 표시한 것이다. 그 아래 방어진은 지금도 방어진항(동구 방어항)으로 남아있다. 바다에 기암을 그려서 명승지을 표시하였다. 해안을 따라 봉대를 표시하였는데 오른쪽의 남목봉대는 현재 봉대산(동구 남목 1동, 남목 2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의 남쪽 해안에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방어를 위한 진으로 서생진이 보이는데 현재의 서생면 서생리 일대에 있던 것으로 지금은 서생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북쪽의 만리성은 울산시 북구와 경주시의 경계에 있는 성이다. 왼쪽의 문수산을 따서 월드컵경기장의 명칭을 만들었다. 이밖에 사찰, 서원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웅천현 (熊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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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진해현은 지금의 진해시와 무관한 마산시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며 현재의 진해시에는 조선시대 웅천현이 있었다. 현재 진해시 중심부는 일제 강점기 이후에 도시화된 지역이며 웅천현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이다. 지금 남문동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웅천의 관할 범위는 현재의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의 남쪽 가덕도에 해당한다. 지도 위쪽에 웅암산으로 표기된 웅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바다는 진해만이 여러 섬들이 그려졌는데 오른쪽 아래의 가장 큰 섬이 가덕도이다. 읍치는 직사각형으로 읍성을 그렸는데 성문을 연결하는 도로에 의해 성 안 지역이 네 구역으로 나누어지며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북쪽에 배치됨을 볼 수 있다. 전통적 읍성 안의 배치구도를 볼 수 있는 지도이다. 읍치 동남쪽에 표시된 倭城은 184.3m의 남산에 만들어진 웅천왜성이다. 이 외에도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북쪽 240.7m의 자마산에도 왜성이 있었다. 오른쪽 위의 성흥사는 지금도 진해시 대장동에 남아있다. 그 남쪽의 晴川陣은 현재의 진해시 청안동에 있는 것이며 安骨鎭인 안골동에 있었던 진이다. 사적 53호로 지정된 안골성지가 있는 곳이다. 바다를 접하고 있어 군사적 목적의 鎭堡가 많이 설치되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덕도에는 天城堡, 船所, 烽臺 등이 보이는데 봉대는 459.4m의 연대봉에 있던 것이며 천성보는 지금 천성진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곳곳에 농사를 위한 제언, 창고, 도로, 역원이 그려졌다.(이현군)

  • 웅천현 주기 (熊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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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진해현은 지금의 진해시와 무관한 마산시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며 현재의 진해시에는 조선시대 웅천현이 있었다. 현재 진해시 중심부는 일제 강점기 이후에 도시화된 지역이며 웅천현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이다. 지금 남문동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웅천의 관할 범위는 현재의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의 남쪽 가덕도에 해당한다. 지도 위쪽에 웅암산으로 표기된 웅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바다는 진해만이 여러 섬들이 그려졌는데 오른쪽 아래의 가장 큰 섬이 가덕도이다. 읍치는 직사각형으로 읍성을 그렸는데 성문을 연결하는 도로에 의해 성 안 지역이 네 구역으로 나누어지며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북쪽에 배치됨을 볼 수 있다. 전통적 읍성 안의 배치구도를 볼 수 있는 지도이다. 읍치 동남쪽에 표시된 倭城은 184.3m의 남산에 만들어진 웅천왜성이다. 이 외에도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북쪽 240.7m의 자마산에도 왜성이 있었다. 오른쪽 위의 성흥사는 지금도 진해시 대장동에 남아있다. 그 남쪽의 晴川陣은 현재의 진해시 청안동에 있는 것이며 安骨鎭인 안골동에 있었던 진이다. 사적 53호로 지정된 안골성지가 있는 곳이다. 바다를 접하고 있어 군사적 목적의 鎭堡가 많이 설치되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덕도에는 天城堡, 船所, 烽臺 등이 보이는데 봉대는 459.4m의 연대봉에 있던 것이며 천성보는 지금 천성진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곳곳에 농사를 위한 제언, 창고, 도로, 역원이 그려졌다.(이현군)

  • 의령현 (宜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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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 일대가 되며 조선시대 합천군에 속했던 궁유면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이 조선시대 의령현이다. 속현으로 新繁縣을 두었는데 북쪽 초계와의 경계 지점에 있던 것으로 현재의 봉수면 신반리 일대에 해당한다. 그 옆의 낙서면은 현재에도 그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읍치의 성곽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통로라는 의미로 성문이 있던 곳에는 빈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읍성을 이런 형태로 그리는 것은 경상도 지도에 잘 드러나지 않는 표현방식이다. 그 안에 객사, 아사, 창 등 주요 건물이 보인다. 읍치 뒤쪽에 표시된 덕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 읍성 밖에 향교만 그리고 제단들은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남쪽에 난 도로는 현재의 20번 국도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남강은 동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위쪽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의 정암진은 낙동강의 번창한 포구로 현재의 의령읍 정암리에 해당한다. 바위그림이 크게 그려졌는데 솥처럼 생긴 바위가 강 가운데 서있다. 우리나라 대기업 창업자들이 이 인근에서 출생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읍치 왼쪽아래의 덕곡서원은 1669년(현종 1)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황을 배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 장군의 고향으로 현재 보물 671호로 지정된 곽망우당 유물이 의령읍내에 남아있다.(이현군)

  • 의령현 주기 (宜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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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 일대가 되며 조선시대 합천군에 속했던 궁유면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이 조선시대 의령현이다. 속현으로 新繁縣을 두었는데 북쪽 초계와의 경계 지점에 있던 것으로 현재의 봉수면 신반리 일대에 해당한다. 그 옆의 낙서면은 현재에도 그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읍치의 성곽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통로라는 의미로 성문이 있던 곳에는 빈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읍성을 이런 형태로 그리는 것은 경상도 지도에 잘 드러나지 않는 표현방식이다. 그 안에 객사, 아사, 창 등 주요 건물이 보인다. 읍치 뒤쪽에 표시된 덕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 읍성 밖에 향교만 그리고 제단들은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남쪽에 난 도로는 현재의 20번 국도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남강은 동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위쪽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의 정암진은 낙동강의 번창한 포구로 현재의 의령읍 정암리에 해당한다. 바위그림이 크게 그려졌는데 솥처럼 생긴 바위가 강 가운데 서있다. 우리나라 대기업 창업자들이 이 인근에서 출생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읍치 왼쪽아래의 덕곡서원은 1669년(현종 1)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황을 배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 장군의 고향으로 현재 보물 671호로 지정된 곽망우당 유물이 의령읍내에 남아있다.(이현군)

  • 의성현 (義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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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성군의 의성읍 도동리, 도서리, 후죽리 일대이며 현재의 의성군 중에서 중앙고속국도의 동쪽 지역이 관할구역과 비슷하다. 중앙고속국도의 서쪽은 비안현, 용궁현의 관할 구역에 포함되었다. 동남쪽의 낙동정맥에서 의성을 둘러싼 산줄기가 뻗어나오기 때문에 하천은 서북쪽으로 흐른다. 읍치 남쪽에 경덕릉이 보이는데 지금도 금성면에 남아있다. 원래 소문국이었던 곳을 신라 경덕왕이 이 지역을 高丘縣으로 고쳤다. 객사에서 경덕릉에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에 해당하며 이와 평행하게 중앙선 철로가 놓였다. 경덕릉 아래 석탑은 금성면 탑리 5층 석탑으로 보물 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 옆에 비봉산이 표시되었는데 인근의 금성산 일대는 화산암 지대이다. 현재의 제오리 일대는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오른쪽의 빙계서원은 춘산면 빙계리에 있던 서원으로 1576년(선조 9) 에 賜額받았다. 이 지도에서도 빙산, 빙계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지금은 빙계계곡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여름에도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읍치에는 누각과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건물을 행랑처럼 연이어 그린 점이 이채롭다. 읍치 오른쪽에는 충렬사를 그리고 그 설명을 길게 붙였다. 洪儒와 金洪術를 모신 곳으로 왕건을 도운 고려의 개국공신들이다. 이 밖에 향교, 봉수대, 창, 누대, 사찰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의성현 주기 (義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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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성군의 의성읍 도동리, 도서리, 후죽리 일대이며 현재의 의성군 중에서 중앙고속국도의 동쪽 지역이 관할구역과 비슷하다. 중앙고속국도의 서쪽은 비안현, 용궁현의 관할 구역에 포함되었다. 동남쪽의 낙동정맥에서 의성을 둘러싼 산줄기가 뻗어나오기 때문에 하천은 서북쪽으로 흐른다. 읍치 남쪽에 경덕릉이 보이는데 지금도 금성면에 남아있다. 원래 소문국이었던 곳을 신라 경덕왕이 이 지역을 高丘縣으로 고쳤다. 객사에서 경덕릉에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에 해당하며 이와 평행하게 중앙선 철로가 놓였다. 경덕릉 아래 석탑은 금성면 탑리 5층 석탑으로 보물 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 옆에 비봉산이 표시되었는데 인근의 금성산 일대는 화산암 지대이다. 현재의 제오리 일대는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오른쪽의 빙계서원은 춘산면 빙계리에 있던 서원으로 1576년(선조 9) 에 賜額받았다. 이 지도에서도 빙산, 빙계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지금은 빙계계곡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여름에도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읍치에는 누각과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건물을 행랑처럼 연이어 그린 점이 이채롭다. 읍치 오른쪽에는 충렬사를 그리고 그 설명을 길게 붙였다. 洪儒와 金洪術를 모신 곳으로 왕건을 도운 고려의 개국공신들이다. 이 밖에 향교, 봉수대, 창, 누대, 사찰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의흥현 (義興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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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북 군위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 일대이다. 현재의  의흥면, 부계면, 산성면, 우보면, 고로면 일부, 효령면 일부가 관할 구역이었다. 읍치 동쪽의 용두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왼쪽의 하천은 위천으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없이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다. 객사 건물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크게 만들어졌음을 볼 수 있다. 왼쪽에 舊鄕校가 표시되고 오른쪽에 향교가 그려졌는데 향교가 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 縣內面과 縣倉이 그려졌는데 의흥현의 속현이었던 缶溪縣의 중심지 였던 곳이다. 地乘 지도의 다른 군현지도에는 잘 그려지지 않은 제단들이 표시되었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제단, 성황단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성문, 장대, 사찰이 그려진 산성이 보인다. 현재의 산성면에 위치한 華山城이다. 그 아래에 칠곡과의 경계, 신령현과 경계가 적혀 있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남쪽에 팔공산 도립공원이 위치한다. 팔공산 도립공원 안에 칠곡의 읍치였던 가산산성이 있는데 이 지도에 나온 산성과는 다른 것이다. 곳곳에 봉수대가 보이는데 명칭과 위치를 자세히 표시하였다. 도로를 그리고 경로상의 역원을 표시하였다. 우곡역은 현재의 우보면 모산리에 있던 역이다. 고종 때 폐지되었다.(이현군)

  • 의흥현 주기 (義興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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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북 군위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 일대이다. 현재의  의흥면, 부계면, 산성면, 우보면, 고로면 일부, 효령면 일부가 관할 구역이었다. 읍치 동쪽의 용두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왼쪽의 하천은 위천으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없이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다. 객사 건물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크게 만들어졌음을 볼 수 있다. 왼쪽에 舊鄕校가 표시되고 오른쪽에 향교가 그려졌는데 향교가 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 縣內面과 縣倉이 그려졌는데 의흥현의 속현이었던 缶溪縣의 중심지 였던 곳이다. 地乘 지도의 다른 군현지도에는 잘 그려지지 않은 제단들이 표시되었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제단, 성황단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성문, 장대, 사찰이 그려진 산성이 보인다. 현재의 산성면에 위치한 華山城이다. 그 아래에 칠곡과의 경계, 신령현과 경계가 적혀 있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남쪽에 팔공산 도립공원이 위치한다. 팔공산 도립공원 안에 칠곡의 읍치였던 가산산성이 있는데 이 지도에 나온 산성과는 다른 것이다. 곳곳에 봉수대가 보이는데 명칭과 위치를 자세히 표시하였다. 도로를 그리고 경로상의 역원을 표시하였다. 우곡역은 현재의 우보면 모산리에 있던 역이다. 고종 때 폐지되었다.(이현군)

  • 인동부 (仁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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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내의 낙동강 동쪽 지역과 칠곡군 북삼면, 석적면, 기산면, 약목면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구미시내의 동쪽 인의동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인동초등학교를 통해 그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동쪽의 유악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으며 읍치 왼쪽에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이다. 낙동강 동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며 서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과 연결된다. 신라 경덕왕 때 인동이 되었고 현종대에는 경산부에 소속되었다가 공양왕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부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에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인동면 지역은 1978년 구미시에 포함되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진 군현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지도에서 읍치에는 성이 보이지 않고 객사 등 주요 건물이 배치되었고 동쪽에 천생산성(구미시 신동, 금전동)이 자리하고 있다. 본래 신라의 옛 성이었던 것을 의병장 곽재우가 1601년(선조 34)에 외성을 쌓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산성 안에 4개의 못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향교가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낙동강 변에 서원, 나루, 창, 堤, 봉수대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산서원은 길재를 배향한 서원으로 1574년(선조 7)에 세워졌다. 동락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도로와 함께 역을 표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역인 양원역은 구미시 진평동에 있던 것이다.(이현군)

  • 인동부 주기 (仁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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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내의 낙동강 동쪽 지역과 칠곡군 북삼면, 석적면, 기산면, 약목면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구미시내의 동쪽 인의동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인동초등학교를 통해 그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동쪽의 유악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으며 읍치 왼쪽에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이다. 낙동강 동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며 서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과 연결된다. 신라 경덕왕 때 인동이 되었고 현종대에는 경산부에 소속되었다가 공양왕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부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에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인동면 지역은 1978년 구미시에 포함되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진 군현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지도에서 읍치에는 성이 보이지 않고 객사 등 주요 건물이 배치되었고 동쪽에 천생산성(구미시 신동, 금전동)이 자리하고 있다. 본래 신라의 옛 성이었던 것을 의병장 곽재우가 1601년(선조 34)에 외성을 쌓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산성 안에 4개의 못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향교가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낙동강 변에 서원, 나루, 창, 堤, 봉수대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산서원은 길재를 배향한 서원으로 1574년(선조 7)에 세워졌다. 동락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도로와 함께 역을 표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역인 양원역은 구미시 진평동에 있던 것이다.(이현군)

  • 자인현 (慈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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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자인면 원당리 일대가 읍치 지역이었다. 관할범위는 자인면, 용성면, 남산면, 압량면 일부, 진량읍 일부 지역이었다. 압량면과 진량읍의 북쪽 지역은 경산군에 포함된다. 신라 때는 장산군(경산군)의 영현,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637년(조선 인조 15)에 비로소 현감을 두었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산이 등장하지 않는다. 중심부에 성곽 없이 건물만 그려졌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건물의 방향이 다른 경우도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전부 남면하는 점이 이색적이다.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 안에 그린 것이 아니라 읍치에 같이 그렸는데 조선후기에 들어와서야 현으로 승격된 것과 관련될 수도 있겠다. 읍성도 보이지 않고 읍치 남쪽의 하천은 오목천으로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지도 아래에 晦齋觀瀾書院이 표시되었는데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한 서원이다. 晦齋는 이언적의 호이다. 서원 이름 앞에 배향한 인물의 호를 적은 것은 지승 고지도에서 드문 경우이다. 그 옆에는 효자를 旌閭한 문이 표시되었다. 아래쪽의 대왕산은 경산시 남산면과 청도군 금천면 경계에 위치한 605m의 산이다. 면 이름을 다른 지도에서는 네모 안에 표시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곳곳에 사찰이 그려졌다.(이현군)

  • 자인현 주기 (慈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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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자인면 원당리 일대가 읍치 지역이었다. 관할범위는 자인면, 용성면, 남산면, 압량면 일부, 진량읍 일부 지역이었다. 압량면과 진량읍의 북쪽 지역은 경산군에 포함된다. 신라 때는 장산군(경산군)의 영현,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637년(조선 인조 15)에 비로소 현감을 두었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산이 등장하지 않는다. 중심부에 성곽 없이 건물만 그려졌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건물의 방향이 다른 경우도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전부 남면하는 점이 이색적이다.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 안에 그린 것이 아니라 읍치에 같이 그렸는데 조선후기에 들어와서야 현으로 승격된 것과 관련될 수도 있겠다. 읍성도 보이지 않고 읍치 남쪽의 하천은 오목천으로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지도 아래에 晦齋觀瀾書院이 표시되었는데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한 서원이다. 晦齋는 이언적의 호이다. 서원 이름 앞에 배향한 인물의 호를 적은 것은 지승 고지도에서 드문 경우이다. 그 옆에는 효자를 旌閭한 문이 표시되었다. 아래쪽의 대왕산은 경산시 남산면과 청도군 금천면 경계에 위치한 605m의 산이다. 면 이름을 다른 지도에서는 네모 안에 표시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곳곳에 사찰이 그려졌다.(이현군)

  • 장기현 (長鬐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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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동해안 남쪽에 호랑이 꼬리처럼 튀어나온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고을로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었다.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지역에 해당하며 중심부는 장기면 읍내리인데 지금도 장기읍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가 대각선으로 내려오는 것은 꼬리모양의 장기곶에 해당하는 포항시의 대보면과 동해면의 북쪽 해안 지역은 영일현에 속하고 남쪽 해안이 장기현에 속하기 때문이다. 남쪽 해안선만 연결해서 바다쪽을 표현했기 때문에 해안선도 직선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다. 진산은 북문 밖에 표시된 巨山으로 장기면 읍내리 서쪽에 있는 산이다. 현재는 동악산으로 불리는 252.5m의 산이다. 그 서쪽에 있는 산이 만리성재로 428m이다. 지도 왼쪽에 만성산으로 표기되었다. 이 산들은 남쪽의 경주 토함산에서 북으로 뻗어나온 산줄기 상에 있는 것이다. 성곽은 자연 지형을 활용해 쌓았으며 읍성 안 객사 뒤에 따로 산 하나를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성문은 동문과 북문만 그리고 도로를 연결했는데 현재의 906번 지방도로와 비슷하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전형적인 山圖 형식을 따라 그렸다. 지도 오른쪽 위에 마성문이 보이고 목장, 목관사 등이 표시되었다. 말을 기르던 목마장이 있었다. 마성문 남쪽의 뇌성봉대가 현재의 구룡포읍 성동리에 있었고 그 북쪽의 발산봉대에 해당하는 지점이 대보면의 봉화산으로 판단된다. 이에 근거해 목장의 위치를 추정하면 현재의 대보면 구만리, 대보리 일대가 된다. 호랑이 꼬리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이현군)

  • 장기현 주기 (長鬐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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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동해안 남쪽에 호랑이 꼬리처럼 튀어나온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고을로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었다.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지역에 해당하며 중심부는 장기면 읍내리인데 지금도 장기읍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가 대각선으로 내려오는 것은 꼬리모양의 장기곶에 해당하는 포항시의 대보면과 동해면의 북쪽 해안 지역은 영일현에 속하고 남쪽 해안이 장기현에 속하기 때문이다. 남쪽 해안선만 연결해서 바다쪽을 표현했기 때문에 해안선도 직선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다. 진산은 북문 밖에 표시된 巨山으로 장기면 읍내리 서쪽에 있는 산이다. 현재는 동악산으로 불리는 252.5m의 산이다. 그 서쪽에 있는 산이 만리성재로 428m이다. 지도 왼쪽에 만성산으로 표기되었다. 이 산들은 남쪽의 경주 토함산에서 북으로 뻗어나온 산줄기 상에 있는 것이다. 성곽은 자연 지형을 활용해 쌓았으며 읍성 안 객사 뒤에 따로 산 하나를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성문은 동문과 북문만 그리고 도로를 연결했는데 현재의 906번 지방도로와 비슷하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전형적인 山圖 형식을 따라 그렸다. 지도 오른쪽 위에 마성문이 보이고 목장, 목관사 등이 표시되었다. 말을 기르던 목마장이 있었다. 마성문 남쪽의 뇌성봉대가 현재의 구룡포읍 성동리에 있었고 그 북쪽의 발산봉대에 해당하는 지점이 대보면의 봉화산으로 판단된다. 이에 근거해 목장의 위치를 추정하면 현재의 대보면 구만리, 대보리 일대가 된다. 호랑이 꼬리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이현군)

  • 지례현 (知禮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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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면 명칭으로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이다. 읍치는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일대이며  지례면, 부항면, 대덕면, 구성면 일부지역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하며 읍치를 둘러싼 산줄기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산줄기의 방향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에 지도 위쪽이 서북쪽이 되며 전라도,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진산은 남쪽의 龜山이 되는데 현재 지례면에 龜首라는 지명이 있고 이 지도에는 龜尾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구미는 현재의 구성면 구미리이다. 일반적으로 坊面 의 명칭은 네모안에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며 방면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면 명칭을 생략하고 村, 谷, 谷村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감천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다. 향교는 현재의 지례면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아래쪽의 산줄기는 산줄기의 방향을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글씨 쓰는 방향도 바꾸어 적었다. 지도 오른쪽 위에는 황악산 來脈이라고 따로 적어 놓는 등 풍수적 관념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맥은 읍치의 객사까지 연결되고 있다. 읍치 앞 강가에 鑑湖亭이 보이는데 1690년(숙종 16)에 만든 것이다. 맞은편에는 폭포가 회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역원, 창, 고개, 봉수대를 그렸다. 도로가 하천을 따라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이현군)

  • 지례현 주기 (知禮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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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면 명칭으로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이다. 읍치는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일대이며  지례면, 부항면, 대덕면, 구성면 일부지역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하며 읍치를 둘러싼 산줄기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산줄기의 방향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에 지도 위쪽이 서북쪽이 되며 전라도,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진산은 남쪽의 龜山이 되는데 현재 지례면에 龜首라는 지명이 있고 이 지도에는 龜尾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구미는 현재의 구성면 구미리이다. 일반적으로 坊面 의 명칭은 네모안에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며 방면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면 명칭을 생략하고 村, 谷, 谷村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감천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다. 향교는 현재의 지례면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아래쪽의 산줄기는 산줄기의 방향을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글씨 쓰는 방향도 바꾸어 적었다. 지도 오른쪽 위에는 황악산 來脈이라고 따로 적어 놓는 등 풍수적 관념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맥은 읍치의 객사까지 연결되고 있다. 읍치 앞 강가에 鑑湖亭이 보이는데 1690년(숙종 16)에 만든 것이다. 맞은편에는 폭포가 회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역원, 창, 고개, 봉수대를 그렸다. 도로가 하천을 따라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이현군)

  • 진보현 (眞寶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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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 때 진보현이 되었는데 현재는 청송군의 진보면 명칭으로 남아 있다.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진안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진보면, 파천면 일부, 영양군 입암면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지도의 크기가 다른 군현지도와 같아서 넓은 범위처럼 보이지만 안동시의 동쪽에 위치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다. 읍치 근처로 흐르는 하천은 반변천으로 남쪽의 용전천과 합해져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의 유로와 폭이 과거와 달라졌다. 오른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으로 영해부와 경계가 된다. 읍치 주변의 산줄기는 가운데를 향하게 그리면서 다른 주요 건물, 산줄기도 각각 독자적인 형국을 이루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풍수 사상이 강하게 개입된 지도로 보인다. 읍치에는 土城이라는 표시가 있다. 읍성은 대부분 토성으로 만들었다가 후대에 석축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은 토성으로 남아있으며 그 사실을 지도에 적은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읍치 앞의 도로는 현재의 31번, 34번 국도에 해당하며 오른쪽에 표시된 각산역은 진보면 각산리에 있던 역이다. 객사 남쪽의 비봉산은 진보면과 청송군 파천면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671m이다. 그 남쪽에 퇴계선생선영을 山圖 형식에 따라 그리고 그 안에 봉분을 그림으로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의 鳳覽書院은 1690년(숙종 16)에 사액 받은 서원으로 퇴계 이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진보현 주기 (眞寶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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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 때 진보현이 되었는데 현재는 청송군의 진보면 명칭으로 남아 있다.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진안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진보면, 파천면 일부, 영양군 입암면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지도의 크기가 다른 군현지도와 같아서 넓은 범위처럼 보이지만 안동시의 동쪽에 위치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다. 읍치 근처로 흐르는 하천은 반변천으로 남쪽의 용전천과 합해져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의 유로와 폭이 과거와 달라졌다. 오른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으로 영해부와 경계가 된다. 읍치 주변의 산줄기는 가운데를 향하게 그리면서 다른 주요 건물, 산줄기도 각각 독자적인 형국을 이루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풍수 사상이 강하게 개입된 지도로 보인다. 읍치에는 土城이라는 표시가 있다. 읍성은 대부분 토성으로 만들었다가 후대에 석축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은 토성으로 남아있으며 그 사실을 지도에 적은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읍치 앞의 도로는 현재의 31번, 34번 국도에 해당하며 오른쪽에 표시된 각산역은 진보면 각산리에 있던 역이다. 객사 남쪽의 비봉산은 진보면과 청송군 파천면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671m이다. 그 남쪽에 퇴계선생선영을 山圖 형식에 따라 그리고 그 안에 봉분을 그림으로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의 鳳覽書院은 1690년(숙종 16)에 사액 받은 서원으로 퇴계 이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진주목 (晋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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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진주시와 그 주변 지역을 그린 지도이다. 남쪽으로 사천현(사천시), 창선도(남해 창선면)까지 포함하고 있다. 진주목은 현재의 진주시와 고성군, 사천시, 남해군, 하동군, 산청군, 단성군의 일부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가운데의 성곽은 읍치가 아니라 군사적 목적의 성으로 임진왜란때의 주요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그 안에 병영, 중영이 있으며 성의 남쪽에 임란 당시의 논개의 일화로 잘 알려진 촉석루와 의암이 보인다. 행정중심지는 진주의 북쪽, 진산인 비봉산 아래로 객사, 향교, 동헌이 그려진 곳이다. 군사적 중심지와 행정 중심지과 분리된 독특한 구조이다. 진주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남강이며 지도 왼쪽 위에는 지리산이 보인다. 남강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은 과거의 모습과 달라졌으며 진양호에 수몰된 지역이다. 지금도 같은 명칭으로 사용되는 금산면을 제외하고는 행정명을 모두 면이 아닌 리로 표시한 점이 특이하다. 지도 남쪽의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며 현재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해당한다. 水軍의 활동에 중요한 요충지인 관계로 지도에 봉수대의 위치가 표시되었고 각산봉(사천시 실안동, 대방동) 옆 해안에는 전선을 제작하는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현재의 사천시 송포동에는 이순신 장군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지도에 전선소(사천시 선구동)로 표시된 지역의 인근에 지금은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보이는 염창진은 지수면 청담리에 있던 나루터이다.(이현군)

  • 진주목 주기 (晋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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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진주시와 그 주변 지역을 그린 지도이다. 남쪽으로 사천현(사천시), 창선도(남해 창선면)까지 포함하고 있다. 진주목은 현재의 진주시와 고성군, 사천시, 남해군, 하동군, 산청군, 단성군의 일부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가운데의 성곽은 읍치가 아니라 군사적 목적의 성으로 임진왜란때의 주요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그 안에 병영, 중영이 있으며 성의 남쪽에 임란 당시의 논개의 일화로 잘 알려진 촉석루와 의암이 보인다. 행정중심지는 진주의 북쪽, 진산인 비봉산 아래로 객사, 향교, 동헌이 그려진 곳이다. 군사적 중심지와 행정 중심지과 분리된 독특한 구조이다. 진주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남강이며 지도 왼쪽 위에는 지리산이 보인다. 남강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은 과거의 모습과 달라졌으며 진양호에 수몰된 지역이다. 지금도 같은 명칭으로 사용되는 금산면을 제외하고는 행정명을 모두 면이 아닌 리로 표시한 점이 특이하다. 지도 남쪽의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며 현재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해당한다. 水軍의 활동에 중요한 요충지인 관계로 지도에 봉수대의 위치가 표시되었고 각산봉(사천시 실안동, 대방동) 옆 해안에는 전선을 제작하는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현재의 사천시 송포동에는 이순신 장군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지도에 전선소(사천시 선구동)로 표시된 지역의 인근에 지금은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보이는 염창진은 지수면 청담리에 있던 나루터이다.(이현군)

  • 진해현 (鎭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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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鎭海라는 지명은 창원시 옆에 위치한 진해시로 알려졌지만, 조선시대 진해현은 이곳과 다른 곳에 위치하였다. 현재의 경남 진해시는 웅천현에 속하였던 작은 지역이 일제 강점기 이후에 중심지가 이전하고 도시화된 지역이다. 진주, 고성, 함안, 칠원과 접하고 있는 이 지도의 진해현은 마산시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다.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이 관할 범위로 읍치는 진동면 진동리 일대가 된다. 북쪽의 산줄기는 낙남정맥과 연결 되며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취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취산이라는 지명은 오늘날 ‘수리봉’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 많다. 진해현의 진산 또한 현재 진동면에 405m의 수리봉으로 남아있다. 하천은 남류하여 남해로 유입되며 바다에는 섬들이 표시되었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작은 고을이라 객사, 아사, 창만 그려녛었다. 읍치 북쪽 취산 아래 文廟는 향교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군현지도에서는 문묘라 적지 않고 일반적으로 향교로 표시하는데 진해현 지도에서만 문묘라 적었다. 성밖의 여단, 성황단은 그리지 않고 사직단만 그렸다. 보통 사직단이라고 적는데 이 지도에서는 壇 대신 宇를 적었다. 다른 지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오른쪽에 이름없는 봉대는 가을포봉수이다. 의도적으로 해안가에 배치한 봉수대로 보인다. 尙令驛, 所達院 등의 역원, 의림사, 계원사 등의 사찰이 있었으나, 모두 지도에는 그려넣지 않았다. 지나치게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진해현 주기 (鎭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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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鎭海라는 지명은 창원시 옆에 위치한 진해시로 알려졌지만, 조선시대 진해현은 이곳과 다른 곳에 위치하였다. 현재의 경남 진해시는 웅천현에 속하였던 작은 지역이 일제 강점기 이후에 중심지가 이전하고 도시화된 지역이다. 진주, 고성, 함안, 칠원과 접하고 있는 이 지도의 진해현은 마산시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다.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이 관할 범위로 읍치는 진동면 진동리 일대가 된다. 북쪽의 산줄기는 낙남정맥과 연결 되며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취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취산이라는 지명은 오늘날 ‘수리봉’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 많다. 진해현의 진산 또한 현재 진동면에 405m의 수리봉으로 남아있다. 하천은 남류하여 남해로 유입되며 바다에는 섬들이 표시되었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작은 고을이라 객사, 아사, 창만 그려녛었다. 읍치 북쪽 취산 아래 文廟는 향교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군현지도에서는 문묘라 적지 않고 일반적으로 향교로 표시하는데 진해현 지도에서만 문묘라 적었다. 성밖의 여단, 성황단은 그리지 않고 사직단만 그렸다. 보통 사직단이라고 적는데 이 지도에서는 壇 대신 宇를 적었다. 다른 지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오른쪽에 이름없는 봉대는 가을포봉수이다. 의도적으로 해안가에 배치한 봉수대로 보인다. 尙令驛, 所達院 등의 역원, 의림사, 계원사 등의 사찰이 있었으나, 모두 지도에는 그려넣지 않았다. 지나치게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창녕현 (昌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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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창녕군은 조선시대 창녕현과 영산현으로 나누어 진다. 창녕현은 현재 창녕군의 북쪽 지역인 창령읍, 유어면, 대지면, 유어면, 고암면, 성산면, 이방면, 대합면에 해당한다. 중심부는 현재의 창녕읍 말흘리, 교상리, 교하리, 교리 일대이다. 구마고속국도 창녕분기점 동쪽 지역이 읍치 지역이었다. 진산은 동쪽 756.6m 높이인 화왕산으로 화왕산성은 사적 64호로 지정되었다. 그 아래에는 산성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세 개의 연못과 함께 성곽이 그려졌다. 이 지도에는 火班山으로 적혀 있고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다. 화왕산은 동쪽의 낙동정맥으로 연결되는 산이며 읍치의 서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데 지도에는 아래쪽에 표시되었다. 동쪽을 위로 하여 그린 지도이다. 읍치에는 객사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자세하게 그렸는데 남쪽에 獄을 원형으로 표시한 것과 지방 양반이 중심이 되는 鄕廳이 보이는 점이 특징적이다. 읍치 남쪽 탑 모양을 그리고 이름은 붙이지 않았는데 사적 33호인 신라진흥왕 척경비와 보물 34호로 지정된 동3층 석탑으로 보인다. 낙동강 유역으로 지대가 낮아 곳곳에 堤, 池 등이 많이 그려졌음을 볼 수 있다. 지도 맨 아래쪽 지역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연습지인 우포늪이 있는 곳이다. 곳곳에 사찰과 창고를 표시하였다. 관룡사는 동쪽 관룡산 아래 위치한 사찰로 약사전이 보물 146호, 대웅전이 보물 212호로 지정되었다.(이현군)

  • 창녕현 주기 (昌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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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창녕군은 조선시대 창녕현과 영산현으로 나누어 진다. 창녕현은 현재 창녕군의 북쪽 지역인 창령읍, 유어면, 대지면, 유어면, 고암면, 성산면, 이방면, 대합면에 해당한다. 중심부는 현재의 창녕읍 말흘리, 교상리, 교하리, 교리 일대이다. 구마고속국도 창녕분기점 동쪽 지역이 읍치 지역이었다. 진산은 동쪽 756.6m 높이인 화왕산으로 화왕산성은 사적 64호로 지정되었다. 그 아래에는 산성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세 개의 연못과 함께 성곽이 그려졌다. 이 지도에는 火班山으로 적혀 있고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다. 화왕산은 동쪽의 낙동정맥으로 연결되는 산이며 읍치의 서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데 지도에는 아래쪽에 표시되었다. 동쪽을 위로 하여 그린 지도이다. 읍치에는 객사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자세하게 그렸는데 남쪽에 獄을 원형으로 표시한 것과 지방 양반이 중심이 되는 鄕廳이 보이는 점이 특징적이다. 읍치 남쪽 탑 모양을 그리고 이름은 붙이지 않았는데 사적 33호인 신라진흥왕 척경비와 보물 34호로 지정된 동3층 석탑으로 보인다. 낙동강 유역으로 지대가 낮아 곳곳에 堤, 池 등이 많이 그려졌음을 볼 수 있다. 지도 맨 아래쪽 지역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연습지인 우포늪이 있는 곳이다. 곳곳에 사찰과 창고를 표시하였다. 관룡사는 동쪽 관룡산 아래 위치한 사찰로 약사전이 보물 146호, 대웅전이 보물 212호로 지정되었다.(이현군)

  • 창원부 (昌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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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은 조선초기 태종대에 義昌과 會原을 합쳐서 만든 지명으로 현재의 창원시, 마산시 일대에 해당한다. 회원현은 마산시에 회원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위쪽의 하천은 낙동강이며 아래쪽의 바다은 마산만, 진해만에 해당한다. 밀양의 경계에 표시된 손진은 밀양시 초동면 반월리 진촌나루이다. 그 남쪽의 동면은 창원시 동읍인데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는 곳이다. 원형으로 읍성을 그렸는데 현재 창원시내 지역이다. 읍성 안에 객사, 아사 등 건물을 표시하였는데 그 안에 蓮亭을 자세히 묘사한 것이 이색적이다. 행정구역으로 부내면과 상대적 위치에 동면, 서면, 남면, 북면을 기록하고 있다. 많은 내용을 담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게 지역을 그렸다. 남쪽 바닷가에 표시된 월영대와 그 위쪽의 고운대는 신라의 고운 최치원과 관련있는 장소이다. 마산시 합포구 월영동은 이 월영대를 따서 만든 지명이다. 월영대 옆에 선소가 지도에 표시되었는데 마산 여객선 터미널 근처로 비정된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창원천, 남천으로 보이며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섬은 유원지로 유명한 돌섬, 모도, 부도 등으로 보인다. 지도 왼쪽 아래의 내포는 마산시 구산면 내포리인데 내포에서 읍치 남쪽으로 연결되는 해안선이 실제와 다르게 그려졌다. 읍성 서문 밖에 향교와 구병영이 표시되었다. 구병영은 조선초기에 우병영이 있던 곳으로 선조때 진주로 이전하였기에 旧兵營이라고 적은 것이다.(이현군)

  • 창원부 주기 (昌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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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은 조선초기 태종대에 義昌과 會原을 합쳐서 만든 지명으로 현재의 창원시, 마산시 일대에 해당한다. 회원현은 마산시에 회원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위쪽의 하천은 낙동강이며 아래쪽의 바다은 마산만, 진해만에 해당한다. 밀양의 경계에 표시된 손진은 밀양시 초동면 반월리 진촌나루이다. 그 남쪽의 동면은 창원시 동읍인데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는 곳이다. 원형으로 읍성을 그렸는데 현재 창원시내 지역이다. 읍성 안에 객사, 아사 등 건물을 표시하였는데 그 안에 蓮亭을 자세히 묘사한 것이 이색적이다. 행정구역으로 부내면과 상대적 위치에 동면, 서면, 남면, 북면을 기록하고 있다. 많은 내용을 담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게 지역을 그렸다. 남쪽 바닷가에 표시된 월영대와 그 위쪽의 고운대는 신라의 고운 최치원과 관련있는 장소이다. 마산시 합포구 월영동은 이 월영대를 따서 만든 지명이다. 월영대 옆에 선소가 지도에 표시되었는데 마산 여객선 터미널 근처로 비정된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창원천, 남천으로 보이며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섬은 유원지로 유명한 돌섬, 모도, 부도 등으로 보인다. 지도 왼쪽 아래의 내포는 마산시 구산면 내포리인데 내포에서 읍치 남쪽으로 연결되는 해안선이 실제와 다르게 그려졌다. 읍성 서문 밖에 향교와 구병영이 표시되었다. 구병영은 조선초기에 우병영이 있던 곳으로 선조때 진주로 이전하였기에 旧兵營이라고 적은 것이다.(이현군)

  • 청도군 (淸道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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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청도군은 대구부에 속하는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을 제외한 청도군과 밀양시 청도면을 관할 구역으로 하며 읍치는 화양읍 동상리, 서상리 일대에 해당한다. 대구의 남쪽, 밀양의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이 지도는 남북을 바꾸어 그렸다. 성문의 명칭과 면 명칭에 들어간 동서남북의 방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읍성 뒤에 그려진 오산이 진산인데 실제 위치는 남쪽에 있다. 진산의 위치 때문에 남북 방향을 바꾸어 지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 위쪽의 화악산은 현재의 밀양시와 청도군을 나누는 경계지점에 있는 산이다. 읍치의 왼쪽(동쪽)에 흐르는 하천은 동창천인데 밀양의 밀양강을 지나 낙동강에 합류한다. 지도 왼쪽의 상동창, 하동창에서 하천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읍성 안에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읍성에 남문을 따로 표기하지 않았다. 읍성 안 건물 표기에 잘 등장하지 않는 향청이 읍성 안에 그려졌다. 지형적인 특성상 동문과 서문이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주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 북문 밖에 獄이 원형으로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성 밖의 향교는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율전, 죽전이 지도 곳곳에 보인다. 자계서원과 남계서원이 있었으며 성현역, 봉수대 등을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동문 밖에 큰 바위가 그려진 점이 이채로운데 보물 323호로 지정된 석빙고로 추정된다. 현재는 소싸움으로 유명한 지역이다.(이현군)

  • 청도군 주기 (淸道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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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청도군은 대구부에 속하는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을 제외한 청도군과 밀양시 청도면을 관할 구역으로 하며 읍치는 화양읍 동상리, 서상리 일대에 해당한다. 대구의 남쪽, 밀양의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이 지도는 남북을 바꾸어 그렸다. 성문의 명칭과 면 명칭에 들어간 동서남북의 방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읍성 뒤에 그려진 오산이 진산인데 실제 위치는 남쪽에 있다. 진산의 위치 때문에 남북 방향을 바꾸어 지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 위쪽의 화악산은 현재의 밀양시와 청도군을 나누는 경계지점에 있는 산이다. 읍치의 왼쪽(동쪽)에 흐르는 하천은 동창천인데 밀양의 밀양강을 지나 낙동강에 합류한다. 지도 왼쪽의 상동창, 하동창에서 하천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읍성 안에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읍성에 남문을 따로 표기하지 않았다. 읍성 안 건물 표기에 잘 등장하지 않는 향청이 읍성 안에 그려졌다. 지형적인 특성상 동문과 서문이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주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 북문 밖에 獄이 원형으로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성 밖의 향교는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율전, 죽전이 지도 곳곳에 보인다. 자계서원과 남계서원이 있었으며 성현역, 봉수대 등을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동문 밖에 큰 바위가 그려진 점이 이채로운데 보물 323호로 지정된 석빙고로 추정된다. 현재는 소싸움으로 유명한 지역이다.(이현군)

  • 청송부 (靑松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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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청송읍 지역이 되며 현재 청송군에서 진보면과 파천면 일부는 진보현에 해당한다. 청송군 중에 나머지 지역이 청송부의 관할 구역이었다. 청송이란 지명은 세종대에 靑寶郡과 松生縣을 합하여 만든 것이다. 지도 가운데에 송생고현(청송읍 송생리)이 보인다. 송생초등학교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청송부의 읍치는 청송읍 월막리로 지도 위쪽에 그려졌다. 읍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 아래의 하천은 용전천으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낙동정맥의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읍치 뒤에 그려진 방광산(청송읍과 파천면의 경계)이 진산이다. 오른쪽의 월외산, 월명산, 주방산 등은 모두 낙동정맥의 경로상에 있는 산이다. 주방산은 현재의 주왕산국립공원을 지칭하는 것이다. 지도 아래쪽의 면 명칭, 건물, 산줄기, 글씨를 모두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청송부 읍치가 중심부에 입지하지 않았지만 어느 곳이 중심인지 확연히 보여주는 구도라 할 수 있다. 병암서원은 1702년(숙종 28)에 사액된 서원으로 이이와 김장생을 배향하였고, 송학서원은 1699년(숙종 25)에 사액되었는데 이황, 김성일, 장현광을 배향하였다. 청운역, 문거역 등을 그리면서 도로와 연결되지 않게 따로 그린 점이 특이하다. 경치 좋은 곳에 누정이 많이 들어서 있다. 읍치와 가까운 지점에 있는 현비암은 지금도 청송읍의 청송교 근처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지도에서 창고, 사찰 등을 확인할 수 있다.(이현군)

  • 청송부 주기 (靑松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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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청송읍 지역이 되며 현재 청송군에서 진보면과 파천면 일부는 진보현에 해당한다. 청송군 중에 나머지 지역이 청송부의 관할 구역이었다. 청송이란 지명은 세종대에 靑寶郡과 松生縣을 합하여 만든 것이다. 지도 가운데에 송생고현(청송읍 송생리)이 보인다. 송생초등학교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청송부의 읍치는 청송읍 월막리로 지도 위쪽에 그려졌다. 읍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 아래의 하천은 용전천으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낙동정맥의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읍치 뒤에 그려진 방광산(청송읍과 파천면의 경계)이 진산이다. 오른쪽의 월외산, 월명산, 주방산 등은 모두 낙동정맥의 경로상에 있는 산이다. 주방산은 현재의 주왕산국립공원을 지칭하는 것이다. 지도 아래쪽의 면 명칭, 건물, 산줄기, 글씨를 모두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청송부 읍치가 중심부에 입지하지 않았지만 어느 곳이 중심인지 확연히 보여주는 구도라 할 수 있다. 병암서원은 1702년(숙종 28)에 사액된 서원으로 이이와 김장생을 배향하였고, 송학서원은 1699년(숙종 25)에 사액되었는데 이황, 김성일, 장현광을 배향하였다. 청운역, 문거역 등을 그리면서 도로와 연결되지 않게 따로 그린 점이 특이하다. 경치 좋은 곳에 누정이 많이 들어서 있다. 읍치와 가까운 지점에 있는 현비암은 지금도 청송읍의 청송교 근처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지도에서 창고, 사찰 등을 확인할 수 있다.(이현군)

  • 청하현 (淸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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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영일군에 병합되었다가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어 조선시대에 군현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작은 지역이다. 현재의 포항시의 북쪽 지역인 포항시 송라면, 청하면이 관할 범위였으며 청하면 덕성리가 읍치가 된다. 청하초등학교, 청하중학교, 관동 등의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 지역의 모든 하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산줄기가 읍치를 가운데 두고 바다를 향하게 그려진 점이 이색점이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읍성을 갖추고 그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다. 읍성의 성문은 동문과 서문만 표시하였는데 동문에서 연결되는 도로는 영덕과 흥해로 연결되는데 그 경로상에 송라관이 그려졌다. 해안을 따라 현재의 7번 국도가 이 길을 따라 형성되었다. 읍치 서쪽의 산줄기는 물결 모양의 산줄기 형태로 그렸지만 동쪽 해안가의 산들은 숲의 형태로 그려졌다. 동해의 바람을 막고 비보하는 측면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 위의 보경사는 송라면에 있는 사찰로 보물 252호로 지정된 원진국사비가 소장되었다. 보경사 서쪽에 현재 쌍생폭포, 복호폭포, 연산폭포 등이 있는데 이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용추는 그 중 가장 큰 연산폭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 아래 대양이라고 동해를 표시하고 그 아래 용산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청하면 용두리의 용산으로 189.8m이지만 해안이기에 시각적으로 훨씬 더 높은 산으로 느껴질 것으로 판단된다. 그 아래 조경대는 지금도 명승지로 남아있다.(이현군)

  • 청하현 주기 (淸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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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영일군에 병합되었다가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어 조선시대에 군현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작은 지역이다. 현재의 포항시의 북쪽 지역인 포항시 송라면, 청하면이 관할 범위였으며 청하면 덕성리가 읍치가 된다. 청하초등학교, 청하중학교, 관동 등의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 지역의 모든 하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산줄기가 읍치를 가운데 두고 바다를 향하게 그려진 점이 이색점이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읍성을 갖추고 그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다. 읍성의 성문은 동문과 서문만 표시하였는데 동문에서 연결되는 도로는 영덕과 흥해로 연결되는데 그 경로상에 송라관이 그려졌다. 해안을 따라 현재의 7번 국도가 이 길을 따라 형성되었다. 읍치 서쪽의 산줄기는 물결 모양의 산줄기 형태로 그렸지만 동쪽 해안가의 산들은 숲의 형태로 그려졌다. 동해의 바람을 막고 비보하는 측면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 위의 보경사는 송라면에 있는 사찰로 보물 252호로 지정된 원진국사비가 소장되었다. 보경사 서쪽에 현재 쌍생폭포, 복호폭포, 연산폭포 등이 있는데 이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용추는 그 중 가장 큰 연산폭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 아래 대양이라고 동해를 표시하고 그 아래 용산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청하면 용두리의 용산으로 189.8m이지만 해안이기에 시각적으로 훨씬 더 높은 산으로 느껴질 것으로 판단된다. 그 아래 조경대는 지금도 명승지로 남아있다.(이현군)

  • 초계군 (草溪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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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은 조선시대의 합천군, 삼가현, 초계군 등이 합쳐진 것이다. 초계군의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초계면, 적중면, 청덕면, 쌍책면, 덕곡면과 율곡면 일부, 대양면 일부가 관할구역이었다. 현재 합천군의 동쪽 부분에 해당한다. 읍치 주변을 흐르는 강은 현재의 황강으로 이 지도에는 황둔강으로 표시되었다. 동쪽의 낙동강에 유입된다. 주변 산줄기를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남쪽의 면 명칭도 위 아래를 바꾸어 썼다. 현대 지도와 달리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 의미화시켜 자연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읍치 북쪽 1리에 있는 청계산이 진산이라고 동국여지승람에 적혔는데 이 지도에는 이름이 나오진 않는다. 객사 뒤쪽의 작은 산이 청계산으로 인식된다. 읍치에 성곽은 없고 건물만 그렸는데 각 건물을 독립된 영역으로 그렸다. 홍살문과 종각까지 지도에 그린 점이 이채롭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그리지 않고 향교만 그렸는데 초계리에 교촌이 있어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초계읍치의 앞은 현재 합천읍과 연결되는 24번 국도가 지난다. 이 지도에서 팔진역을 지나 읍치 앞을 지나는 길이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도상의 덕곡면이 현재 지명에도 그대로 사용되며 그 왼쪽의 二冊面이라고 적힌 곳은 지금 쌍책면으로 불린다. 그 아래 황강(황둔강)변에는 사적 236호 옥전고분군이 위치한다. 황강과 낙동강 변에 津이 들어서 있다. 이 밖에 봉수대, 창, 사찰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초계군 주기 (草溪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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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은 조선시대의 합천군, 삼가현, 초계군 등이 합쳐진 것이다. 초계군의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초계면, 적중면, 청덕면, 쌍책면, 덕곡면과 율곡면 일부, 대양면 일부가 관할구역이었다. 현재 합천군의 동쪽 부분에 해당한다. 읍치 주변을 흐르는 강은 현재의 황강으로 이 지도에는 황둔강으로 표시되었다. 동쪽의 낙동강에 유입된다. 주변 산줄기를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남쪽의 면 명칭도 위 아래를 바꾸어 썼다. 현대 지도와 달리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 의미화시켜 자연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읍치 북쪽 1리에 있는 청계산이 진산이라고 동국여지승람에 적혔는데 이 지도에는 이름이 나오진 않는다. 객사 뒤쪽의 작은 산이 청계산으로 인식된다. 읍치에 성곽은 없고 건물만 그렸는데 각 건물을 독립된 영역으로 그렸다. 홍살문과 종각까지 지도에 그린 점이 이채롭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그리지 않고 향교만 그렸는데 초계리에 교촌이 있어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초계읍치의 앞은 현재 합천읍과 연결되는 24번 국도가 지난다. 이 지도에서 팔진역을 지나 읍치 앞을 지나는 길이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도상의 덕곡면이 현재 지명에도 그대로 사용되며 그 왼쪽의 二冊面이라고 적힌 곳은 지금 쌍책면으로 불린다. 그 아래 황강(황둔강)변에는 사적 236호 옥전고분군이 위치한다. 황강과 낙동강 변에 津이 들어서 있다. 이 밖에 봉수대, 창, 사찰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칠곡부 (漆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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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가산산성에 있었으며 대구광역시의 북구 일부지역과 칠곡군 동명면, 왜관읍, 지천면, 가산면 일부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낙동정맥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대구의 팔공산으로 연결되고 가산은 이 팔공산과 잇닿아 있다. 그래서 가산은 팔공산도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지도 오른쪽에 표시된 공산이 지금 팔공산으로 알려진 곳이다. 가산산성은 1640년(인조 18)에 쌓았고 그 이후 칠곡부가 독립하였는데 조선초기에는 성주의 속현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조선초기의 지리지에는 칠곡부가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지도에서 가산산성이 칠곡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 그렸다. 현대 지도와 달리 고지도에서는 중요한 부분을 확대해서 그리며 동일 지도에서 다양한 축척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가산산성은 객사, 아사, 사창, 담소대 등이 있는 내성의 양쪽에 잇닿아 외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가산산성에서 나온 물줄기는 남쪽에 모여 다시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 지역의 물줄기를 모아 서쪽으로 흐르는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금호강이며 지도 왼쪽에 크게 그려졌으나 중간에 끊긴 하천이 낙동강이다. 다른 읍치에서는 읍성과 인접한 곳에 향교가 들어서 있으나 이 지역은 멀리 떨어진 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에 위치한 점이 이색적이다. 지도 오른쪽에 석탑을 그렸는데 송림사에 있는 것이다. 동명면의 송림사 5층 전탑이다. 이 밖에 서원, 나루, 역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칠곡부 주기 (漆谷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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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가산산성에 있었으며 대구광역시의 북구 일부지역과 칠곡군 동명면, 왜관읍, 지천면, 가산면 일부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낙동정맥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대구의 팔공산으로 연결되고 가산은 이 팔공산과 잇닿아 있다. 그래서 가산은 팔공산도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지도 오른쪽에 표시된 공산이 지금 팔공산으로 알려진 곳이다. 가산산성은 1640년(인조 18)에 쌓았고 그 이후 칠곡부가 독립하였는데 조선초기에는 성주의 속현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조선초기의 지리지에는 칠곡부가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지도에서 가산산성이 칠곡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 그렸다. 현대 지도와 달리 고지도에서는 중요한 부분을 확대해서 그리며 동일 지도에서 다양한 축척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가산산성은 객사, 아사, 사창, 담소대 등이 있는 내성의 양쪽에 잇닿아 외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가산산성에서 나온 물줄기는 남쪽에 모여 다시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 지역의 물줄기를 모아 서쪽으로 흐르는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금호강이며 지도 왼쪽에 크게 그려졌으나 중간에 끊긴 하천이 낙동강이다. 다른 읍치에서는 읍성과 인접한 곳에 향교가 들어서 있으나 이 지역은 멀리 떨어진 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에 위치한 점이 이색적이다. 지도 오른쪽에 석탑을 그렸는데 송림사에 있는 것이다. 동명면의 송림사 5층 전탑이다. 이 밖에 서원, 나루, 역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칠원현 (漆原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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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원의 읍치는 현재의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함안군 칠원면, 칠북면, 칠서면,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한다. 구성리에 칠원초등학교, 교동 등이 남아 있어 옛 흔적을 추정하도록 해 준다. 이 지도 중앙부에 읍성이 그려지고 그 위쪽에 청룡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진산을 위로 가도록 하기 위해 동쪽을 지도 위쪽으로 하여 그렸다. 지도의 방향이 일반적인 배치와 다르다는 점은 성문의 방향과 면 명칭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칠원은 낙남정맥의 북쪽에 위치하며 지도의 산줄기는 남쪽으로 연결되어 낙남정맥에 이른다. 지도 오른쪽 위의 바다는 마산만 진해만 부근인데, 이 지도에서 구산면, 구산진이 표기되어 있다. 현재의 마산시 구산면은 이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지도에 船所, 海倉이 보인다. 읍성의 성문은 동문과 서문만 그렸는데 이 문이 주요 교통로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교통로 상에 주요 고개와 역원을 표시하였다. 현재는 읍치의 서쪽으로 구마고속국도가 지나간다. 읍성 안의 건물은 남쪽을 향하도록 한 점이 이색적이다. 읍치 왼쪽에 그려진 하천은 낙동강으로 들어가며 하천과 성문 사이에 鎭松, 藪 등이 그려졌는데 읍치가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방풍의 효과를 가져오기 위한 조치로 보여진다. 이 밖에 안곡산의 봉수대, 사찰, 제언, 진도 등이 지도에 그려졌다.(이현군)

  • 칠원현 주기 (漆原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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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원의 읍치는 현재의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함안군 칠원면, 칠북면, 칠서면,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한다. 구성리에 칠원초등학교, 교동 등이 남아 있어 옛 흔적을 추정하도록 해 준다. 이 지도 중앙부에 읍성이 그려지고 그 위쪽에 청룡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진산을 위로 가도록 하기 위해 동쪽을 지도 위쪽으로 하여 그렸다. 지도의 방향이 일반적인 배치와 다르다는 점은 성문의 방향과 면 명칭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칠원은 낙남정맥의 북쪽에 위치하며 지도의 산줄기는 남쪽으로 연결되어 낙남정맥에 이른다. 지도 오른쪽 위의 바다는 마산만 진해만 부근인데, 이 지도에서 구산면, 구산진이 표기되어 있다. 현재의 마산시 구산면은 이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지도에 船所, 海倉이 보인다. 읍성의 성문은 동문과 서문만 그렸는데 이 문이 주요 교통로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교통로 상에 주요 고개와 역원을 표시하였다. 현재는 읍치의 서쪽으로 구마고속국도가 지나간다. 읍성 안의 건물은 남쪽을 향하도록 한 점이 이색적이다. 읍치 왼쪽에 그려진 하천은 낙동강으로 들어가며 하천과 성문 사이에 鎭松, 藪 등이 그려졌는데 읍치가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방풍의 효과를 가져오기 위한 조치로 보여진다. 이 밖에 안곡산의 봉수대, 사찰, 제언, 진도 등이 지도에 그려졌다.(이현군)

  • 통영 (統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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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경상남도 통영시와 그 주변 지역의 모습을 그렸다. 지도 가운데의 성곽으로 쌓은 지역이 중심부에 해당하며 통영시의 북신동, 명정동, 도천동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의 洗兵館은 통제사의 집무 공간으로 보물 293호로 남아있다. 1604년(선조 37)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승을 기념하여 세웠으며 거제현에 있던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겨 본영으로 사용하였으며 이 때 이름도 통영이라 하였다. 세병관 왼쪽의 건물은 사적 236호로 지정된 충렬사로 보인다. 충렬사는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통영시 명정동 213번지에 위치하며 1606년(선조 39)에 처음 세워져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았다. 군사적 관할 구역을 함께 표시하여 전라도의 보성, 낙안, 순천, 광양, 구례와 경상도의 사천, 고성, 진주, 밀양, 함안, 진해, 창원, 김해, 기장, 동래, 거제 등의 군현명이 지도에 등장하고 있다. 水軍에 있어 중요한 船所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烽臺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지도 왼쪽 순천 선소 아래 左水營, 오른쪽의 동래, 위쪽의 진주에 右水營이 표시되었다. 남쪽에는 이순신 장군의 시에 나오는 한산섬(閑山島)을 비롯하여 욕지도, 용초도 등의 섬이 그려졌다. 주변의 섬들이 통영 중심부를 향하게 그려졌다. 바다와 인접한 곳에 望臺가 표시되었고 주요 浦의 위치와 명칭이 나온다.(이현군)

  • 통영 주기 (統營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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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경상남도 통영시와 그 주변 지역의 모습을 그렸다. 지도 가운데의 성곽으로 쌓은 지역이 중심부에 해당하며 통영시의 북신동, 명정동, 도천동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의 洗兵館은 통제사의 집무 공간으로 보물 293호로 남아있다. 1604년(선조 37)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승을 기념하여 세웠으며 거제현에 있던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겨 본영으로 사용하였으며 이 때 이름도 통영이라 하였다. 세병관 왼쪽의 건물은 사적 236호로 지정된 충렬사로 보인다. 충렬사는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통영시 명정동 213번지에 위치하며 1606년(선조 39)에 처음 세워져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았다. 군사적 관할 구역을 함께 표시하여 전라도의 보성, 낙안, 순천, 광양, 구례와 경상도의 사천, 고성, 진주, 밀양, 함안, 진해, 창원, 김해, 기장, 동래, 거제 등의 군현명이 지도에 등장하고 있다. 水軍에 있어 중요한 船所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烽臺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지도 왼쪽 순천 선소 아래 左水營, 오른쪽의 동래, 위쪽의 진주에 右水營이 표시되었다. 남쪽에는 이순신 장군의 시에 나오는 한산섬(閑山島)을 비롯하여 욕지도, 용초도 등의 섬이 그려졌다. 주변의 섬들이 통영 중심부를 향하게 그려졌다. 바다와 인접한 곳에 望臺가 표시되었고 주요 浦의 위치와 명칭이 나온다.(이현군)

  • 풍기군 (豊基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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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기의 읍치는 경북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 동부리, 서부리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지금의 풍기읍, 봉현면, 안정면의 일부와 예천군 상리면, 하리면이다. 예천군 상리면, 하리면은 殷豊 폐현 지역으로 은풍과 基川을 합친 이름이 풍기가 된다. 왼쪽 위에 문종대왕태봉이 보이는데 과거 은풍현에 태실이 있어 그 영향으로 두 군을 합쳐서 풍기를 만든 것이다. 문종대왕 태봉 아래에 은풍창이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북쪽에 소백산, 죽령 등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가 보이고 그 한 가지가 풍기의 동쪽으로 뻗어나오기 때문에 읍치의 주요 건물의 방향을 서쪽을 향하게 그렸다. 객사를 가장 크게 그렸고 아사 건물이 마치 2층 건물처럼 보인다. 향교를 독립적 산줄기 형국으로 묘사하였다. 현재의 풍기읍 교촌리에 해당한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남원천으로 榮川(지금의 영주시)으로 흘러 들어간다. 소백산, 죽령, 도솔봉 일대는 소백산 국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죽령은 과거부터 충청도와 통하는 주요한 통로였으며 현재의 5번국도의 죽령 휴게소 인근에 해당한다. 중앙고속국도가 생기면서 그 아래에 터널이 생겼다. 이 밖에 욱양서원, 우곡서원이 보인다. 도로를 그렸지만, 이 지역에 있었던 창락역, 죽동역 등은 표시하지 않았다. 죽령의 봉수는 표시하지 않았고 남쪽 망전산 봉수만 표시하였다.(이현군)

  • 풍기군 주기 (豊基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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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기의 읍치는 경북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 동부리, 서부리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지금의 풍기읍, 봉현면, 안정면의 일부와 예천군 상리면, 하리면이다. 예천군 상리면, 하리면은 殷豊 폐현 지역으로 은풍과 基川을 합친 이름이 풍기가 된다. 왼쪽 위에 문종대왕태봉이 보이는데 과거 은풍현에 태실이 있어 그 영향으로 두 군을 합쳐서 풍기를 만든 것이다. 문종대왕 태봉 아래에 은풍창이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북쪽에 소백산, 죽령 등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가 보이고 그 한 가지가 풍기의 동쪽으로 뻗어나오기 때문에 읍치의 주요 건물의 방향을 서쪽을 향하게 그렸다. 객사를 가장 크게 그렸고 아사 건물이 마치 2층 건물처럼 보인다. 향교를 독립적 산줄기 형국으로 묘사하였다. 현재의 풍기읍 교촌리에 해당한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남원천으로 榮川(지금의 영주시)으로 흘러 들어간다. 소백산, 죽령, 도솔봉 일대는 소백산 국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죽령은 과거부터 충청도와 통하는 주요한 통로였으며 현재의 5번국도의 죽령 휴게소 인근에 해당한다. 중앙고속국도가 생기면서 그 아래에 터널이 생겼다. 이 밖에 욱양서원, 우곡서원이 보인다. 도로를 그렸지만, 이 지역에 있었던 창락역, 죽동역 등은 표시하지 않았다. 죽령의 봉수는 표시하지 않았고 남쪽 망전산 봉수만 표시하였다.(이현군)

  • 하동부 (河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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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에서 특징적인 점은 時邑으로 기록되고 아사, 읍창이 그려진 지도 왼쪽 지역과 오른쪽의 구읍성, 구창이 있는 지역이 대비되는 점이다. 읍치가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 양경산(고전면 고하리, 안경산)이 동국여지승람에 진산으로 기록된 것은 옛 읍치가 이곳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현면이라는 지명이 붙인 것이며 현재는 고전면으로 불린다. 현재 주성성터로 남아있다. 이 지도에 읍치로 표시된 곳은 현재의 하동읍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성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지도 위쪽에 지리산이 보이며 남쪽에는 섬진강과 바다가 그려졌다. 악양성 옆을 흐르는 하천은 악양천이며 구읍치와 현재 읍치 사이를 흐르는 하천은 횡천강이며 구읍치 동쪽의 하천은 주교천이다. 하동은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도에 속하지만 분수계와 유통권의 측면에서는 전라도와 가깝다. 지도 북쪽의 화개면이 영호남 사람들이 함께 찾는 화개장터로 유명한 곳이다. 악양구성은 현재의 고소성(악양면 평사리)으로 보인다. 하동의 남쪽은 바다와 접해 있어 남해섬과 갈도 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에 해창, 선진, 전선이 표시되었는데 현재의 고전면 전도리 일대로 보인다. 전도리에는 선소, 월진, 신방나루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남해도와 마주한 나루터인 노량진은 금남면 노량리로 노량초등학교, 구노량 등의 이름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북쪽의 지리산과 연결되는 산 속에는 쌍계사 등의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이현군).

  • 하동부 주기 (河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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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에서 특징적인 점은 時邑으로 기록되고 아사, 읍창이 그려진 지도 왼쪽 지역과 오른쪽의 구읍성, 구창이 있는 지역이 대비되는 점이다. 읍치가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 양경산(고전면 고하리, 안경산)이 동국여지승람에 진산으로 기록된 것은 옛 읍치가 이곳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현면이라는 지명이 붙인 것이며 현재는 고전면으로 불린다. 현재 주성성터로 남아있다. 이 지도에 읍치로 표시된 곳은 현재의 하동읍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성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지도 위쪽에 지리산이 보이며 남쪽에는 섬진강과 바다가 그려졌다. 악양성 옆을 흐르는 하천은 악양천이며 구읍치와 현재 읍치 사이를 흐르는 하천은 횡천강이며 구읍치 동쪽의 하천은 주교천이다. 하동은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도에 속하지만 분수계와 유통권의 측면에서는 전라도와 가깝다. 지도 북쪽의 화개면이 영호남 사람들이 함께 찾는 화개장터로 유명한 곳이다. 악양구성은 현재의 고소성(악양면 평사리)으로 보인다. 하동의 남쪽은 바다와 접해 있어 남해섬과 갈도 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에 해창, 선진, 전선이 표시되었는데 현재의 고전면 전도리 일대로 보인다. 전도리에는 선소, 월진, 신방나루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남해도와 마주한 나루터인 노량진은 금남면 노량리로 노량초등학교, 구노량 등의 이름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북쪽의 지리산과 연결되는 산 속에는 쌍계사 등의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이현군).

  • 하양현 (河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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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흡수된 고을로 하양읍 금락리 일대가 읍치였다. 관할구역은 하양읍, 와촌면 일부, 진량읍 일부, 대구광역시 동구 일부 지역이었다. 북쪽에 대구의 팔공산이 그려져 있는데 현재는 팔공산 도립공원이 되었다. 그 안에 동화사 등 유명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팔공산 아래에 무락산이 표시되었다. 이 무락산이 하양의 진산에 해당한다. 연이어 산줄기를 그리고 산줄기와 평행하게 읍치의 건물들을 그려넣었다. 산줄기와 평행하게 하천을 표시했는데 남쪽의 금호강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흘러간다. 금호강 남쪽의 산줄기도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풍수사상이 지도에 반영된 것을 알 수 있다. 금호강과 평행하게 대구선 철로가 놓였다. 읍치 오른쪽에 향교는 독립적 산줄기 형국 속에 표현되었는데 하양읍 교리 일대이다. 그 옆에 구읍내면이 표시되었는데 읍치가 바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읍성 밖에 사직단, 성황단이 그려졌는데 여단은 그려넣지 않았다. 성황단 왼쪽에 시산 봉수대를 그려넣었다. 현재는 봉의산으로 불리는 곳이다. 왼쪽에 그려진 금호서원은 1790년(정조 14)에 사액된 서원으로 許稠를 배향하였다. 지도 오른쪽 위의 이지역은 경상시 와촌면에 있던 역이다. 지리지에 나오는 내용을 다 그리지 않고 간략하게 표현한 지도이다.(이현군)

  • 하양현 주기 (河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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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흡수된 고을로 하양읍 금락리 일대가 읍치였다. 관할구역은 하양읍, 와촌면 일부, 진량읍 일부, 대구광역시 동구 일부 지역이었다. 북쪽에 대구의 팔공산이 그려져 있는데 현재는 팔공산 도립공원이 되었다. 그 안에 동화사 등 유명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팔공산 아래에 무락산이 표시되었다. 이 무락산이 하양의 진산에 해당한다. 연이어 산줄기를 그리고 산줄기와 평행하게 읍치의 건물들을 그려넣었다. 산줄기와 평행하게 하천을 표시했는데 남쪽의 금호강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흘러간다. 금호강 남쪽의 산줄기도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풍수사상이 지도에 반영된 것을 알 수 있다. 금호강과 평행하게 대구선 철로가 놓였다. 읍치 오른쪽에 향교는 독립적 산줄기 형국 속에 표현되었는데 하양읍 교리 일대이다. 그 옆에 구읍내면이 표시되었는데 읍치가 바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읍성 밖에 사직단, 성황단이 그려졌는데 여단은 그려넣지 않았다. 성황단 왼쪽에 시산 봉수대를 그려넣었다. 현재는 봉의산으로 불리는 곳이다. 왼쪽에 그려진 금호서원은 1790년(정조 14)에 사액된 서원으로 許稠를 배향하였다. 지도 오른쪽 위의 이지역은 경상시 와촌면에 있던 역이다. 지리지에 나오는 내용을 다 그리지 않고 간략하게 표현한 지도이다.(이현군)

  • 함안군 (咸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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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함안군에서 칠원면, 칠북면, 칠서면은 칠원현에 속하였기에 함안군의 관할구역은 이 지역을 제외한 지역이다. 함안 읍치는 함안면 봉성리에 있었다. 여항면에 있는 여항산이 진산인데 지도 위에 표시되었고 그 맥이 읍성 옆의 비봉산으로 연결된다. 진산인 여항산이 군의 서남쪽 방향에 있고 낙동강의 유로를 적절히 배치하기 위해 지도의 남북 방향을 바꾸어 그렸다. 지도 아래에 표시된 하천이 낙동강이다. 읍성의 성문명에서도 방위를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로 건물의 방향과 글씨의 방향도 제각각이다. 수로와 함께 도로를 그렸는데 그 위에 파수역을 표시하였다. 파수역은 함안면 파수리에 있던 역이다. 지도 아래에 대산면이 보인다. 이 지역은 홍수시에 물이 역류하여 침수되기도 하였는데 비보풍수의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大山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함안은 고대 아라가야의 중심지로 인식되는 곳이다. 현재의 가야읍 사무소 인근에 사적 85호 고분군이 있는데 아라가야 왕릉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아래 의령과의 경계에 정암진이 보인다. 이곳에 솥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우리나라 대기업 창시자들이 이 근처 마을에서 나와서 더욱 유명하게 된 곳이다. 오른쪽의 서산서원은 조선초기의 생육신을 배향한 곳으로 군북면 사촌리에 있었다. 그 옆의 산이름도 백이산으로 붙여졌다. 군북면 명관리에 있는 368.6m의 산이다. 이 밖에 창고, 사찰, 의상대(군북면 오공리)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함안군 주기 (咸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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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함안군에서 칠원면, 칠북면, 칠서면은 칠원현에 속하였기에 함안군의 관할구역은 이 지역을 제외한 지역이다. 함안 읍치는 함안면 봉성리에 있었다. 여항면에 있는 여항산이 진산인데 지도 위에 표시되었고 그 맥이 읍성 옆의 비봉산으로 연결된다. 진산인 여항산이 군의 서남쪽 방향에 있고 낙동강의 유로를 적절히 배치하기 위해 지도의 남북 방향을 바꾸어 그렸다. 지도 아래에 표시된 하천이 낙동강이다. 읍성의 성문명에서도 방위를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로 건물의 방향과 글씨의 방향도 제각각이다. 수로와 함께 도로를 그렸는데 그 위에 파수역을 표시하였다. 파수역은 함안면 파수리에 있던 역이다. 지도 아래에 대산면이 보인다. 이 지역은 홍수시에 물이 역류하여 침수되기도 하였는데 비보풍수의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大山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함안은 고대 아라가야의 중심지로 인식되는 곳이다. 현재의 가야읍 사무소 인근에 사적 85호 고분군이 있는데 아라가야 왕릉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아래 의령과의 경계에 정암진이 보인다. 이곳에 솥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우리나라 대기업 창시자들이 이 근처 마을에서 나와서 더욱 유명하게 된 곳이다. 오른쪽의 서산서원은 조선초기의 생육신을 배향한 곳으로 군북면 사촌리에 있었다. 그 옆의 산이름도 백이산으로 붙여졌다. 군북면 명관리에 있는 368.6m의 산이다. 이 밖에 창고, 사찰, 의상대(군북면 오공리)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함양군 (咸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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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중심주에 그려진 읍치는 함양읍 상리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함양군에서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은 안의현의 관할구역이었으며 이 3 면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조선시대 함양군에 해당한다. 이 지방은 88올림픽 고속국도와 대전 통영간 고속국도가 지나는 지역으로 읍의 동북쪽에 함양분기점이 있다. 읍치 북쪽의 백암산(함양읍 대덕리)이 진산에 해당한다. 보물 154호로 지정된 함양상림이 있는 곳이다. 읍치 남쪽에 하천은 위천으로 남강에 합류된다. 읍치에는 성이 그려지고 그 안에 객사가 가장 큰 건물로 그려졌다. 주변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읍성을 감싸듯 그려졌다. 읍치 남쪽에 남산이 표시되었는데 이 지도상으로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제대로 갖춘 것처럼 보인다. 풍수적 관념이 반영된 지도이다. 읍치 남쪽의 면 이름과 산줄기도 중앙부를 향하게 묘사하였다. 읍성 위에 향교도 독립적 형국 속에 표현되었다. 함양군은 서쪽의 전라도 운봉과 맞닿은 곳이다. 지도 왼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나온 것으로 팔량령은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지도 남쪽에 지리산이 보인다. 팔랑령에 육로 표시가 되어있는데 현재 남원과 함양을 연결하는 24번 국도가 이 고개를 지난다. 동쪽에 사근역이 표시되었는데 주변의 14개 역을 거느린 찰방역이었으며 그 옆의 연화산에는 사근산성이 있었다. 하천을 따라 창고(임창), 누정(군자정), 서원이 보이며 북쪽의 산 속에는 사찰이 그려졌다.(이현군)

  • 함양군 주기 (咸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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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중심주에 그려진 읍치는 함양읍 상리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함양군에서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은 안의현의 관할구역이었으며 이 3 면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조선시대 함양군에 해당한다. 이 지방은 88올림픽 고속국도와 대전 통영간 고속국도가 지나는 지역으로 읍의 동북쪽에 함양분기점이 있다. 읍치 북쪽의 백암산(함양읍 대덕리)이 진산에 해당한다. 보물 154호로 지정된 함양상림이 있는 곳이다. 읍치 남쪽에 하천은 위천으로 남강에 합류된다. 읍치에는 성이 그려지고 그 안에 객사가 가장 큰 건물로 그려졌다. 주변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읍성을 감싸듯 그려졌다. 읍치 남쪽에 남산이 표시되었는데 이 지도상으로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제대로 갖춘 것처럼 보인다. 풍수적 관념이 반영된 지도이다. 읍치 남쪽의 면 이름과 산줄기도 중앙부를 향하게 묘사하였다. 읍성 위에 향교도 독립적 형국 속에 표현되었다. 함양군은 서쪽의 전라도 운봉과 맞닿은 곳이다. 지도 왼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나온 것으로 팔량령은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지도 남쪽에 지리산이 보인다. 팔랑령에 육로 표시가 되어있는데 현재 남원과 함양을 연결하는 24번 국도가 이 고개를 지난다. 동쪽에 사근역이 표시되었는데 주변의 14개 역을 거느린 찰방역이었으며 그 옆의 연화산에는 사근산성이 있었다. 하천을 따라 창고(임창), 누정(군자정), 서원이 보이며 북쪽의 산 속에는 사찰이 그려졌다.(이현군)

  • 함창현 (咸昌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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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상주시 함창읍으로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함창읍 구향리, 교촌리 일대이다. 경북선 철도 함창역 서북쪽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함창읍과 공검면, 이안면에 해당한다. 원래는 고령 가야국에 속하는 지역이었으며 1914년 군면 통합때 상주에 포함되었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함창읍내에 가야왕릉과 가야왕비릉이 남아있다. 이 지도에서 읍치 남쪽에 독립적 형국안에 누대가 들어서 있는데 이 부근이 왕릉, 왕비릉이 들어 선 지점이다. 북서쪽의 산들은 백두대간에 연결되는 산줄기이며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재악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재악산의 산줄기가 읍치 뒤쪽으로 연결되어 중앙부를 감싸는 형국을 이룬다. 남쪽의 산줄기도 읍치를 향하게 그렸는데 상주와의 경계에 있는 산줄기는 다시 남쪽을 향하게 그렸다. 하나의 지도에 서로 다른 視點을 사용하고 있는데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자연을 재해석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재악산은 현재의 이안면과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 지점에 있는 780m의 산으로 지금은 작약산으로 불린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지산천이며 남쪽은 이안천으로 오른쪽의 串川이라고 적힌 현재의 영강에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건물만 표시했는데 객사 좌우로 동지와 서지가 자세히 표시된 것이 이채롭다. 향교(함창읍 교촌리)는 북쪽에 따로 표시했으며 성밖의 제단은 그리지 않았다. 이 밖에 사찰, 역원, 창고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함창현 주기 (咸昌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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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상주시 함창읍으로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함창읍 구향리, 교촌리 일대이다. 경북선 철도 함창역 서북쪽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함창읍과 공검면, 이안면에 해당한다. 원래는 고령 가야국에 속하는 지역이었으며 1914년 군면 통합때 상주에 포함되었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함창읍내에 가야왕릉과 가야왕비릉이 남아있다. 이 지도에서 읍치 남쪽에 독립적 형국안에 누대가 들어서 있는데 이 부근이 왕릉, 왕비릉이 들어 선 지점이다. 북서쪽의 산들은 백두대간에 연결되는 산줄기이며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재악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재악산의 산줄기가 읍치 뒤쪽으로 연결되어 중앙부를 감싸는 형국을 이룬다. 남쪽의 산줄기도 읍치를 향하게 그렸는데 상주와의 경계에 있는 산줄기는 다시 남쪽을 향하게 그렸다. 하나의 지도에 서로 다른 視點을 사용하고 있는데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자연을 재해석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재악산은 현재의 이안면과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 지점에 있는 780m의 산으로 지금은 작약산으로 불린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지산천이며 남쪽은 이안천으로 오른쪽의 串川이라고 적힌 현재의 영강에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건물만 표시했는데 객사 좌우로 동지와 서지가 자세히 표시된 것이 이채롭다. 향교(함창읍 교촌리)는 북쪽에 따로 표시했으며 성밖의 제단은 그리지 않았다. 이 밖에 사찰, 역원, 창고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합천군 (陜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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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 중에서 합천읍의 북쪽 지역이 조선시대 합천군에 해당한다. 황강의 북쪽 지역인 가야면, 야로면, 묘산면, 봉산면 일부, 용주면 일부, 대양면, 의령군 궁유면의 일부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현재의 합천군은 합천군, 초계군, 삼가현이 합쳐진 것이다. 이 지도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읍치는 합천읍 합천리이다. 陜川으로 적혔지만 합천으로 읽는다. 객사 뒤쪽에 그려진 산이 북산으로 진산에 해당한다. 아사 왼쪽에 창이 그려졌는데 지금은 합천읍 창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연결되고 아래쪽의 산줄기는 육십령과 연결된다. 읍치 앞의 하천은 황강으로 동쪽으로 흘러 초계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황강의 상류에 합천댐이 들어섰다. 이 지도의 왼쪽 일부 지역은 수몰되었다. 용문사 근처에 조정지댐이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 폭포가 그려졌는데 용주면 황계리에 있는 황계 폭포이다. 지도 북쪽의 가야산에는 해인사가 그려져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소장된 곳으로 유명하다. 法寶 宗刹로 이름높다. 해인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소나무, 하천, 바위가 조화를 이루면서 장관을 이룬다. 그래서 그 입구의 다리이름을 무릉도원을 따서 무릉교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최치원이 머물렀고, 성철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가르침을 베풀던 사찰이다. 해인사 오른쪽에 현창, 현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과거 야로현이 있던 곳이라 그렇게 붙였다. 지금은 야로면에 해당한다.(이현군)

  • 합천군 주기 (陜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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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 중에서 합천읍의 북쪽 지역이 조선시대 합천군에 해당한다. 황강의 북쪽 지역인 가야면, 야로면, 묘산면, 봉산면 일부, 용주면 일부, 대양면, 의령군 궁유면의 일부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현재의 합천군은 합천군, 초계군, 삼가현이 합쳐진 것이다. 이 지도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읍치는 합천읍 합천리이다. 陜川으로 적혔지만 합천으로 읽는다. 객사 뒤쪽에 그려진 산이 북산으로 진산에 해당한다. 아사 왼쪽에 창이 그려졌는데 지금은 합천읍 창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연결되고 아래쪽의 산줄기는 육십령과 연결된다. 읍치 앞의 하천은 황강으로 동쪽으로 흘러 초계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황강의 상류에 합천댐이 들어섰다. 이 지도의 왼쪽 일부 지역은 수몰되었다. 용문사 근처에 조정지댐이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 폭포가 그려졌는데 용주면 황계리에 있는 황계 폭포이다. 지도 북쪽의 가야산에는 해인사가 그려져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소장된 곳으로 유명하다. 法寶 宗刹로 이름높다. 해인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소나무, 하천, 바위가 조화를 이루면서 장관을 이룬다. 그래서 그 입구의 다리이름을 무릉도원을 따서 무릉교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최치원이 머물렀고, 성철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가르침을 베풀던 사찰이다. 해인사 오른쪽에 현창, 현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과거 야로현이 있던 곳이라 그렇게 붙였다. 지금은 야로면에 해당한다.(이현군)

  • 현풍현 (玄風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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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일대에 있었던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상리, 부리 일대이다. 구마고속국도 현풍 휴게소 동쪽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현풍면, 논공읍, 유가면, 구지면에 해당한다. 읍치 앞의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데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되었다. 이 지도를 보아서는 위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왼쪽 아래 서남쪽이 하류 방향이다. 지도 오른쪽의 琵琶山은 1083.6m의 비슬산으로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낙동정맥의 한 가지가 뻗어나온 것이다. 지도 오른쪽의 산줄기가 현재의 청도군과 달성군의 경계가 된다. 그 옆에 여러 사찰들이 표시되었는데 이 중 유가사는 유가면에 있는 사찰로 신라 때 세워진 것이다. 지도 왼쪽 위의 도동서원은 현재의 현풍면 도동리 낙동강변에 위치한 것으로 김굉필을 배향하고 1607년(선조 40)에 사액받은 곳이다. 아래쪽에 그려진 예연서원은 1677년(숙종 18)에 사액 받은 서원으로 곽재우와 곽준을 배향하였다. 지금의 달성군 유가면에 곽망우당 신도비와 유적이 남아있다. 읍치 중심부는 전형적인 풍수 형국을 따라 그려졌다. 읍치 외곽의 사직단, 여단은 군현지도에서 생략된 경우가 많은데 이 지도에서는 좌우측에 표시하였다. 향교는 지금도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농사를 위한 제언들이 이 지도에서는 浦로 기록된 점이 특이하다.(이현군)

  • 현풍현 주기 (玄風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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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일대에 있었던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상리, 부리 일대이다. 구마고속국도 현풍 휴게소 동쪽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현풍면, 논공읍, 유가면, 구지면에 해당한다. 읍치 앞의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데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되었다. 이 지도를 보아서는 위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왼쪽 아래 서남쪽이 하류 방향이다. 지도 오른쪽의 琵琶山은 1083.6m의 비슬산으로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낙동정맥의 한 가지가 뻗어나온 것이다. 지도 오른쪽의 산줄기가 현재의 청도군과 달성군의 경계가 된다. 그 옆에 여러 사찰들이 표시되었는데 이 중 유가사는 유가면에 있는 사찰로 신라 때 세워진 것이다. 지도 왼쪽 위의 도동서원은 현재의 현풍면 도동리 낙동강변에 위치한 것으로 김굉필을 배향하고 1607년(선조 40)에 사액받은 곳이다. 아래쪽에 그려진 예연서원은 1677년(숙종 18)에 사액 받은 서원으로 곽재우와 곽준을 배향하였다. 지금의 달성군 유가면에 곽망우당 신도비와 유적이 남아있다. 읍치 중심부는 전형적인 풍수 형국을 따라 그려졌다. 읍치 외곽의 사직단, 여단은 군현지도에서 생략된 경우가 많은데 이 지도에서는 좌우측에 표시하였다. 향교는 지금도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농사를 위한 제언들이 이 지도에서는 浦로 기록된 점이 특이하다.(이현군)

  • 흥해군 (興海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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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지도에서 동해안 끝 호랑이 꼬리부분(호미곶, 장기곶)에서 서쪽으로 직선을 그으면 나오는 고을이 흥해이다.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어 과거의 독립된 군현이었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흥해읍 성내리가 읍치에 해당하는데 지금도 남성리, 중성리 등의 지명이 남아 있어 읍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지도의 중앙부에 읍성이 크게 그려졌는데 성문을 다 표시하지는 않았고 북문과 남문만 표시하였다. 이 지역의 도로는 모두 북문과 남문으로 연결되도록 그렸다. 읍성 안의 건물도 비교적 자세히 그렸다. 낙동정맥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나와 이 고을의 북쪽에 위치한다. 산줄기가 고을을 감싸듯이 그려졌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서쪽의 도음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에 곡강이라고 적힌 하천이 지금의 곡강천이다. 남쪽에는 형산강이 표시되었다. 이 지역이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기에 모든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경주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현재의 포항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동해로 유입되는 하천이 형산강이다. 이 지도를 통해 조선시대 흥해군은 현재의 포항시내에서 형산강 이북지역과 흥해읍을 관할구역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작은 고을이라 면 명칭을 동서남북 방위에서 따서 붙였다. 동해 바다와 인접한 곳에 봉수대를 여러개 그렸다. 봉림포, 사읍포, 두모포 등의 포구가 보인다. 이밖에 천곡사,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흥해군 주기 (興海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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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지도에서 동해안 끝 호랑이 꼬리부분(호미곶, 장기곶)에서 서쪽으로 직선을 그으면 나오는 고을이 흥해이다.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어 과거의 독립된 군현이었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흥해읍 성내리가 읍치에 해당하는데 지금도 남성리, 중성리 등의 지명이 남아 있어 읍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지도의 중앙부에 읍성이 크게 그려졌는데 성문을 다 표시하지는 않았고 북문과 남문만 표시하였다. 이 지역의 도로는 모두 북문과 남문으로 연결되도록 그렸다. 읍성 안의 건물도 비교적 자세히 그렸다. 낙동정맥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나와 이 고을의 북쪽에 위치한다. 산줄기가 고을을 감싸듯이 그려졌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서쪽의 도음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에 곡강이라고 적힌 하천이 지금의 곡강천이다. 남쪽에는 형산강이 표시되었다. 이 지역이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기에 모든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경주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현재의 포항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동해로 유입되는 하천이 형산강이다. 이 지도를 통해 조선시대 흥해군은 현재의 포항시내에서 형산강 이북지역과 흥해읍을 관할구역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작은 고을이라 면 명칭을 동서남북 방위에서 따서 붙였다. 동해 바다와 인접한 곳에 봉수대를 여러개 그렸다. 봉림포, 사읍포, 두모포 등의 포구가 보인다. 이밖에 천곡사,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기타
  • 조선여진양국경계도 (朝鮮女眞兩國境界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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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청나라 관할에 있었던 만주 지방의 寧古塔과 烏喇 지방 일대를 그린 지도중 하나이다. 그린 범위는 북으로 흑룡강, 동쪽으로 연해주 일대, 남으로는 압록강ㆍ두만강, 서로는 장성까지를 그렸다. 18세기 초 청나라에서 편찬된 『고금도서집성』에 「성경강역전도」안에 세부도로 「오라강역도」와 「영고탑 강역도」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이들 지도의 내용들이 참조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이 지역은 매우 불안한 정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지도가 그려진 당시에는 러시아의 동진이 있었지만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봉금지대로 설정되어 있었던 지역을 대상으로 이와 같은 상세한 지도가 그려진 것은 당시의 높아진 북방 강역 의식을 반영한다. 동일한 내용의 지도가 회화식 군현지도에 삽입되어 있으나(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들 지도의 해제 참조) 표현 양식은 상이하다. 북경 쪽에서 시작되어 船廠, 烏喇를 지나 寧古塔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진 것은 『해동지도』와 동일하다. 책문이 실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유사하나 다른 지도와는 달리 장성도 일부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조선측의 두만강변의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압록강변에 연한 군현들은 주황색으로 표현한 것이 독특하다. 寧古塔과 烏喇도 붉은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고 산지도 연두색으로 표현된 것은 이 지도만에서 나타난 특이한 표현 방식이다. (김기혁)

  • 조선여진양국경계도 주기 (朝鮮女眞兩國境界圖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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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청나라 관할에 있었던 만주 지방의 寧古塔과 烏喇 지방 일대를 그린 지도중 하나이다. 그린 범위는 북으로 흑룡강, 동쪽으로 연해주 일대, 남으로는 압록강ㆍ두만강, 서로는 장성까지를 그렸다. 18세기 초 청나라에서 편찬된 『고금도서집성』에 「성경강역전도」안에 세부도로 「오라강역도」와 「영고탑 강역도」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이들 지도의 내용들이 참조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이 지역은 매우 불안한 정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지도가 그려진 당시에는 러시아의 동진이 있었지만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봉금지대로 설정되어 있었던 지역을 대상으로 이와 같은 상세한 지도가 그려진 것은 당시의 높아진 북방 강역 의식을 반영한다. 동일한 내용의 지도가 회화식 군현지도에 삽입되어 있으나(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들 지도의 해제 참조) 표현 양식은 상이하다. 북경 쪽에서 시작되어 船廠, 烏喇를 지나 寧古塔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진 것은 『해동지도』와 동일하다. 책문이 실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유사하나 다른 지도와는 달리 장성도 일부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조선측의 두만강변의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압록강변에 연한 군현들은 주황색으로 표현한 것이 독특하다. 寧古塔과 烏喇도 붉은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고 산지도 연두색으로 표현된 것은 이 지도만에서 나타난 특이한 표현 방식이다. (김기혁)

  • ▶전라도
  • 강진현 (康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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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지명은 조선 태종대에 道康縣과 耽津縣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전라남도 강진군에 해당하며 남쪽의 섬들은 현재는 완도군에 포함되는 곳이다. 지도에 객사를 갖춘 두 개의 성이 보이는데 아래쪽은 강진 읍성이며 위쪽은 兵馬節度使營이다. 위쪽에 兵營이라고 줄여서 적었다. 현재의 병영면에 위치한다. 그 오른쪽 위에 수인사가 표시되었는데 장흥군 유치면과의 경계에 있는 561.2m의 수인산 아래 있는 것이다. 이곳이 장흥부의 진산이다. 왼쪽 위 염암과의 경계 지점에 표시된 무위사는 월출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道詵國師가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국보 13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보물이 소장되었다. 읍치 지역은 현재 지명으로도 과거 읍성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강진읍의 동성리, 서성리, 남성리 일대에 해당하며 향교는 성밖에 그려졌는데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성 동쪽의 보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성 남쪽의 하천은 옛 이름을 사용하여 탐진강으로 불린다. 읍치 서남쪽의 만덕사는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사찰로 현재는 백련사로 불린다. 근처에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다산 초당이 사적 107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지도 남쪽 두 개의 성곽은 鎭이 있던 곳이다. 가리포진이 표시된 섬은 완도이며 신라 말기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유명한 곳이다. 신지도는 남쪽 해안이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고금도는 이순신 장군이 이곳으로 진을 옮겼다고 전해지며 현재 고금도 동해안에 이충무공유적지가 남아있다.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가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신지도, 고금도, 조약도는 한 때 목장이 있었던 섬이다.(이현군)

  • 강진현 주기 (康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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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지명은 조선 태종대에 道康縣과 耽津縣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전라남도 강진군에 해당하며 남쪽의 섬들은 현재는 완도군에 포함되는 곳이다. 지도에 객사를 갖춘 두 개의 성이 보이는데 아래쪽은 강진 읍성이며 위쪽은 兵馬節度使營이다. 위쪽에 兵營이라고 줄여서 적었다. 현재의 병영면에 위치한다. 그 오른쪽 위에 수인사가 표시되었는데 장흥군 유치면과의 경계에 있는 561.2m의 수인산 아래 있는 것이다. 이곳이 장흥부의 진산이다. 왼쪽 위 염암과의 경계 지점에 표시된 무위사는 월출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道詵國師가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국보 13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보물이 소장되었다. 읍치 지역은 현재 지명으로도 과거 읍성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강진읍의 동성리, 서성리, 남성리 일대에 해당하며 향교는 성밖에 그려졌는데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성 동쪽의 보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성 남쪽의 하천은 옛 이름을 사용하여 탐진강으로 불린다. 읍치 서남쪽의 만덕사는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사찰로 현재는 백련사로 불린다. 근처에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다산 초당이 사적 107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지도 남쪽 두 개의 성곽은 鎭이 있던 곳이다. 가리포진이 표시된 섬은 완도이며 신라 말기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유명한 곳이다. 신지도는 남쪽 해안이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고금도는 이순신 장군이 이곳으로 진을 옮겼다고 전해지며 현재 고금도 동해안에 이충무공유적지가 남아있다.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가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신지도, 고금도, 조약도는 한 때 목장이 있었던 섬이다.(이현군)

  • 고부군 (古阜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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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이 시작된 곳으로 유명한 고부군은 현재의 정읍시 고부면, 소성면, 영원면, 덕천면, 이평면, 정우면, 고창군 부안면 일부 지역, 부안군 백산면을 관할범위로 하였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백산면이 현재의 부안군 백산면이고 지도 왼쪽 아래에 표시된 부안면이 현재의 고창군 부안면이다. 지도 왼쪽에 표시된 읍치는 현재의 고부면 고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성곽, 객사 등의 건물, 남문이 그려졌다. 남문 앞의 도로는 현재의 710번 지방도로 그 오른쪽의 도로는 29번 국도의 경로와 유사하다. 읍치 동쪽에 표시된 두승산이 고부의 진산에 해당하는데 실제로는 읍치의 동남쪽에 있으며 현재의 고부면, 정읍시, 덕천면의 경계에 위치한 443.5m의 산이다. 옛날에는 산성이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었으나 지도에 산성을 그리지는 않았다. 그 아래에 표시된 㫌忠祠는 1657년(효종 8)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송상현, 신호, 김준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고부천이며 오른쪽은 정읍천이 되는데 북쪽으로 흘러 동진강을 통해 바다로 유입된다. 이평면에는 전봉준 장군 고택이 남아있으며 정읍천 서쪽 두승산 북쪽의 현재의 덕천면에는 향토현전적지가 사적 295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보물 309호로 지정된 천곡사지칠층석탑, 동죽서원, 도계서원 등이 이 지역에 있었으나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이현군)

  • 고부군 주기 (古阜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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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이 시작된 곳으로 유명한 고부군은 현재의 정읍시 고부면, 소성면, 영원면, 덕천면, 이평면, 정우면, 고창군 부안면 일부 지역, 부안군 백산면을 관할범위로 하였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백산면이 현재의 부안군 백산면이고 지도 왼쪽 아래에 표시된 부안면이 현재의 고창군 부안면이다. 지도 왼쪽에 표시된 읍치는 현재의 고부면 고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성곽, 객사 등의 건물, 남문이 그려졌다. 남문 앞의 도로는 현재의 710번 지방도로 그 오른쪽의 도로는 29번 국도의 경로와 유사하다. 읍치 동쪽에 표시된 두승산이 고부의 진산에 해당하는데 실제로는 읍치의 동남쪽에 있으며 현재의 고부면, 정읍시, 덕천면의 경계에 위치한 443.5m의 산이다. 옛날에는 산성이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었으나 지도에 산성을 그리지는 않았다. 그 아래에 표시된 㫌忠祠는 1657년(효종 8)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송상현, 신호, 김준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고부천이며 오른쪽은 정읍천이 되는데 북쪽으로 흘러 동진강을 통해 바다로 유입된다. 이평면에는 전봉준 장군 고택이 남아있으며 정읍천 서쪽 두승산 북쪽의 현재의 덕천면에는 향토현전적지가 사적 295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보물 309호로 지정된 천곡사지칠층석탑, 동죽서원, 도계서원 등이 이 지역에 있었으나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이현군)

  • 고산현 (高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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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완주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고산면, 화산면, 경천면, 동상면, 운주면, 비봉면을 관할하였다. 과거에 雲梯廢縣이 있었는데 화산면 운산리, 운제리, 운곡리 등의 지명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산현의 읍치는 고산면 읍내리에 해당한다. 읍치는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고산천으로 불리며 남쪽으로 흘러 만경강에 합류된다. 읍치 옆으로 고산천과 평행하게 난 도로는 17번 국도로 확장되었다. 지도 왼쪽 위의 대둔산은 운주면과 논산시 벌곡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높이 877.7m의 산으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실제로는 읍치 동북쪽에 해당하지만 이 산이 고을 뒤쪽에 자리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위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산줄기는 맥으로 연결되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연이어 그렸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그리고 향교는 별도의 산줄기 아래에 그렸다. 현의 동쪽에 龍淵이 있어 가뭄 때 비를 빌면 효험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지만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현재 동상면에 대아저수지, 동상저수지가 있고 화산면에 경천저수지가 있다. 북쪽의 용계원은 운주면 금당리 금당초등학교 인근에 있던 역원이며 근처에 용계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화산면 화평리의 고성산에도 古城이 있었다. 용계원 아래 화암사는 경천면에 있는 사찰로 우화루가 보물 662호로, 극락전이 보물 663호로 지정된 곳이다. (이현군)

  • 고산현 주기 (高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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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완주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고산면, 화산면, 경천면, 동상면, 운주면, 비봉면을 관할하였다. 과거에 雲梯廢縣이 있었는데 화산면 운산리, 운제리, 운곡리 등의 지명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산현의 읍치는 고산면 읍내리에 해당한다. 읍치는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고산천으로 불리며 남쪽으로 흘러 만경강에 합류된다. 읍치 옆으로 고산천과 평행하게 난 도로는 17번 국도로 확장되었다. 지도 왼쪽 위의 대둔산은 운주면과 논산시 벌곡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높이 877.7m의 산으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실제로는 읍치 동북쪽에 해당하지만 이 산이 고을 뒤쪽에 자리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위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산줄기는 맥으로 연결되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연이어 그렸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그리고 향교는 별도의 산줄기 아래에 그렸다. 현의 동쪽에 龍淵이 있어 가뭄 때 비를 빌면 효험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지만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현재 동상면에 대아저수지, 동상저수지가 있고 화산면에 경천저수지가 있다. 북쪽의 용계원은 운주면 금당리 금당초등학교 인근에 있던 역원이며 근처에 용계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화산면 화평리의 고성산에도 古城이 있었다. 용계원 아래 화암사는 경천면에 있는 사찰로 우화루가 보물 662호로, 극락전이 보물 663호로 지정된 곳이다. (이현군)

  • 고창현 (高敞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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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이다. 현재의 고창군은 무장현, 흥덕현 등을 병합하여 1914년에 형성된 것이며 조선시대 고창현은 고창읍, 고수면, 아산면을 관할범위로 하였으며 읍치는 고창읍 읍내리에 해당한다. 지도를 통해 읍성이 주변 산줄기를 활용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은 북쪽에 하나만 그려지고 큰 바위들이 읍성에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향교는 읍성 밖에 그려졌는데 현재의 교촌리이다. 읍성과 향교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었다. 고창읍성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읍성 주변의 하천은 현재의 고창천이며 북쪽으로 흥덕으로 흘러 가서 곰소만으로 유입되는 경로상에 海門이 그려졌다. 해동지도에는 海門 북쪽에 壺岩이 그려졌다. 아산면 반암리에 있는 것이다. 진산은 동쪽의 반등산인데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간략하게 그린 지도라 지역의 정보를 많이 담지는 않았다. 지도 위쪽의 화시산은 아산면과 부안면의 경계에 위치한 403.2m 높이의 산으로 현재는 화실봉으로 불린다. 화시산 동쪽에 古城峯이라 일컫는 곳에는 西山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데 해동지도에는 오서면 왼쪽에 고성봉이 표시되었다. 고창읍 석정리에는 온천이 유명한데 향교의 동쪽에 해당한다. 고창읍의 서북쪽에는 고인돌인 지석묘가 남아 있다. 아산면 용계리에는 청자도요지가 있으며 그 남쪽의 운곡리에는 서원이 있었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은 그리지 않았다. (이현군)

  • 고창현 주기 (高敞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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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이다. 현재의 고창군은 무장현, 흥덕현 등을 병합하여 1914년에 형성된 것이며 조선시대 고창현은 고창읍, 고수면, 아산면을 관할범위로 하였으며 읍치는 고창읍 읍내리에 해당한다. 지도를 통해 읍성이 주변 산줄기를 활용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은 북쪽에 하나만 그려지고 큰 바위들이 읍성에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향교는 읍성 밖에 그려졌는데 현재의 교촌리이다. 읍성과 향교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었다. 고창읍성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읍성 주변의 하천은 현재의 고창천이며 북쪽으로 흥덕으로 흘러 가서 곰소만으로 유입되는 경로상에 海門이 그려졌다. 해동지도에는 海門 북쪽에 壺岩이 그려졌다. 아산면 반암리에 있는 것이다. 진산은 동쪽의 반등산인데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간략하게 그린 지도라 지역의 정보를 많이 담지는 않았다. 지도 위쪽의 화시산은 아산면과 부안면의 경계에 위치한 403.2m 높이의 산으로 현재는 화실봉으로 불린다. 화시산 동쪽에 古城峯이라 일컫는 곳에는 西山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데 해동지도에는 오서면 왼쪽에 고성봉이 표시되었다. 고창읍 석정리에는 온천이 유명한데 향교의 동쪽에 해당한다. 고창읍의 서북쪽에는 고인돌인 지석묘가 남아 있다. 아산면 용계리에는 청자도요지가 있으며 그 남쪽의 운곡리에는 서원이 있었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은 그리지 않았다. (이현군)

  • 곡성현 (谷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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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곡성군에서 곡성읍, 오곡면, 삼기면, 목사동면, 석곡면, 죽곡면을 관할한 조선시대 군현이다. 이 지도에 표시된 면 명칭이 현재에도 대부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곡성읍 읍내리 일대에 해당하는 읍치에는 성곽없이 건물이 그려졌고 산줄기를 달리하여 그린 향교는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곡성천이며 지도 아래쪽은 하천은 보성강으로 동쪽의 섬진강으로 유입된다. 동쪽으로 구례현과 마주하는 군현이다. 섬진강의 河中島를 그렸으며 보성강변에 정자가 보인다. 읍치 동북쪽 곡성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은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곡성천 남쪽의 통명산은 오곡면에 위치한 511.9m 높이의 산이다.읍치 남동쪽의 도림사는 국민관광지로 개방되었다. 그 아래 동악산은 현재 최악산으로 불리는 697m 높이의 산이다. 지도 왼쪽 아래의 대명산은 삼기면에 위치한 498.3m의 산이다. 주요 도로에 역원이 표시되었는데 남동쪽의 석곡원은 석곡면에 있었는데 호남고속국도 석곡 인터체인지 서쪽이다. 동쪽 아래의 압록원은 오곡면 압록리로 전라선 철도 압록역 서쪽이다. 근처에 압록 유원지, 진변 나루터 등이 있다. 지도 아래쪽의 태안사는 죽곡면 동남쪽 현재의 봉두산 아래에 위치한 사찰로 보물로 지정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안문성공영당은 성리학을 도입한 安珦을 모신 곳이고 그 아래 흥양사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을 모신 곳이다. (이현군)

  • 곡성현 주기 (谷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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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곡성군에서 곡성읍, 오곡면, 삼기면, 목사동면, 석곡면, 죽곡면을 관할한 조선시대 군현이다. 이 지도에 표시된 면 명칭이 현재에도 대부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곡성읍 읍내리 일대에 해당하는 읍치에는 성곽없이 건물이 그려졌고 산줄기를 달리하여 그린 향교는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곡성천이며 지도 아래쪽은 하천은 보성강으로 동쪽의 섬진강으로 유입된다. 동쪽으로 구례현과 마주하는 군현이다. 섬진강의 河中島를 그렸으며 보성강변에 정자가 보인다. 읍치 동북쪽 곡성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은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곡성천 남쪽의 통명산은 오곡면에 위치한 511.9m 높이의 산이다.읍치 남동쪽의 도림사는 국민관광지로 개방되었다. 그 아래 동악산은 현재 최악산으로 불리는 697m 높이의 산이다. 지도 왼쪽 아래의 대명산은 삼기면에 위치한 498.3m의 산이다. 주요 도로에 역원이 표시되었는데 남동쪽의 석곡원은 석곡면에 있었는데 호남고속국도 석곡 인터체인지 서쪽이다. 동쪽 아래의 압록원은 오곡면 압록리로 전라선 철도 압록역 서쪽이다. 근처에 압록 유원지, 진변 나루터 등이 있다. 지도 아래쪽의 태안사는 죽곡면 동남쪽 현재의 봉두산 아래에 위치한 사찰로 보물로 지정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안문성공영당은 성리학을 도입한 安珦을 모신 곳이고 그 아래 흥양사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을 모신 곳이다. (이현군)

  • 광양현 (光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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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남도 광양시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는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현재의 광양시내가 아닌 광양읍 읍내리에 있었다. 현재의 광양시내는 지도 오른쪽 아래 묘도 북쪽 해안이며 조선시대 읍치는 호남고속국도 광양인터체인지 서북쪽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바다는 광양만이며 읍치 좌우의 하천은 현재의 동천과 서천이다. 그 오른쪽 하천은 수어천이며 하동과의 경계에 있는 하천은 섬진강이다. 지도에 蟾江, 蟾津鎭이 표시되었다. 왼쪽 위에는 화개장터로 알려진 하동화개동을 표시하고 하류란 점을 명시하였다. 광양제철소는 오른쪽 아래의 묘도 북쪽 해안을 매립하여 만든 것이다. 광양의 진산은 북쪽에 있는 白鷄山이며 읍치에는 사각형의 읍성을 그리고 객사를 중심으로 건물을 표시하였다. 남문, 동문, 서문을 그리고 성문과 연결된 도로, 고개가 표시되었다. 향교는 성 밖에 독립되게 표시되었다. 향교 북쪽의 옥룡사는 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북쪽의 백운산은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산이며 남쪽의 가야산은 현재의 광양시내 북쪽에 위치한 497.3m의 산이다. 그 옆에 그려진 봉대는 광양시내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 이 일대에 광산이 들어서 있다. 그 남쪽의 해안에는 광양제철선 철도가 지나간다. 읍성 남쪽의 해창은 광양읍 세풍리의 해안에 있었던 것이다.(이현군)

  • 광양현 주기 (光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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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남도 광양시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는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현재의 광양시내가 아닌 광양읍 읍내리에 있었다. 현재의 광양시내는 지도 오른쪽 아래 묘도 북쪽 해안이며 조선시대 읍치는 호남고속국도 광양인터체인지 서북쪽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바다는 광양만이며 읍치 좌우의 하천은 현재의 동천과 서천이다. 그 오른쪽 하천은 수어천이며 하동과의 경계에 있는 하천은 섬진강이다. 지도에 蟾江, 蟾津鎭이 표시되었다. 왼쪽 위에는 화개장터로 알려진 하동화개동을 표시하고 하류란 점을 명시하였다. 광양제철소는 오른쪽 아래의 묘도 북쪽 해안을 매립하여 만든 것이다. 광양의 진산은 북쪽에 있는 白鷄山이며 읍치에는 사각형의 읍성을 그리고 객사를 중심으로 건물을 표시하였다. 남문, 동문, 서문을 그리고 성문과 연결된 도로, 고개가 표시되었다. 향교는 성 밖에 독립되게 표시되었다. 향교 북쪽의 옥룡사는 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북쪽의 백운산은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산이며 남쪽의 가야산은 현재의 광양시내 북쪽에 위치한 497.3m의 산이다. 그 옆에 그려진 봉대는 광양시내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 이 일대에 광산이 들어서 있다. 그 남쪽의 해안에는 광양제철선 철도가 지나간다. 읍성 남쪽의 해창은 광양읍 세풍리의 해안에 있었던 것이다.(이현군)

  • 광주목 (光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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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의 서쪽부분은 나주목에 속하였기 때문에 관할 구역이 아니며 지도 위쪽에 표시된 대치면이 현재의 담양군 대전면으로 광주목 관할 범위에 포함된다. 읍치는 현재 광주시의 중심부 지역이었다. 읍성은 사각형으로 그리고 성문을 표시하고 그 안에 건물을 그리면서 부내면이라는 행정구역명을 같이 적었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것처럼 그려진 무등산은 실제로는 동남 방향에 있다. 이 지도에는 無屯山으로 표기 되었으며 1186.8m의 높은 산이다. 그 안의 澄心寺에는 보물 131호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이 소장되었다. 현재의 무등산 도립공원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 위쪽의 景烈祠는 이성계를 도운 鄭地 장군을 모신 곳이다. 읍치 동쪽의 장원봉은 동구와 북구의 경계에 있는 386m의 산이다. 읍치 왼쪽의 광주천(극락강), 황룡강은 영산강에 유입된다. 읍성 밖에 여단, 성황단, 사직단은 그리지 않았고 향교만 표시하였다.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고개를 표시하면서 險隘라고 적었다. 읍치 동쪽의 景陽驛은 북구 우산동에 있었던 역원으로 주변의 6개 역을 관할하던 곳이다. 읍치 북쪽의 月峯書院은 기대승과 김장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방면 명칭을 따로 구별하여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치 북쪽에는 胎峯이 그려졌고 그 위에 한양의 산 이름과 같은 三角山을 적었고 남쪽에는 金剛山 지명이 보이는 점이 이색적이다.(이현군)

  • 광주목 주기 (光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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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의 서쪽부분은 나주목에 속하였기 때문에 관할 구역이 아니며 지도 위쪽에 표시된 대치면이 현재의 담양군 대전면으로 광주목 관할 범위에 포함된다. 읍치는 현재 광주시의 중심부 지역이었다. 읍성은 사각형으로 그리고 성문을 표시하고 그 안에 건물을 그리면서 부내면이라는 행정구역명을 같이 적었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것처럼 그려진 무등산은 실제로는 동남 방향에 있다. 이 지도에는 無屯山으로 표기 되었으며 1186.8m의 높은 산이다. 그 안의 澄心寺에는 보물 131호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이 소장되었다. 현재의 무등산 도립공원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 위쪽의 景烈祠는 이성계를 도운 鄭地 장군을 모신 곳이다. 읍치 동쪽의 장원봉은 동구와 북구의 경계에 있는 386m의 산이다. 읍치 왼쪽의 광주천(극락강), 황룡강은 영산강에 유입된다. 읍성 밖에 여단, 성황단, 사직단은 그리지 않았고 향교만 표시하였다.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고개를 표시하면서 險隘라고 적었다. 읍치 동쪽의 景陽驛은 북구 우산동에 있었던 역원으로 주변의 6개 역을 관할하던 곳이다. 읍치 북쪽의 月峯書院은 기대승과 김장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방면 명칭을 따로 구별하여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치 북쪽에는 胎峯이 그려졌고 그 위에 한양의 산 이름과 같은 三角山을 적었고 남쪽에는 金剛山 지명이 보이는 점이 이색적이다.(이현군)

  • 구례현 (求禮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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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구례군에서 산동면, 광의면 일부, 용방면 일부는 남원부에 속하였다. 그 나머지 지역이 조선시대 구례현의 관할범위였다. 지도 오른쪽 위에 백두대간에 속하는 지리산이 그려졌는데 구례현의 진산에 해당한다. 곳곳에 險隘, 埋伏處가 그려졌다. 지리산 남쪽의 산줄기를 연달아 그려서 험준함을 표현하였는데 요충지에 해당한다는 설명을 자세히 적어놓았다. 그 아래 토지면이 적혔는데 오미리는 金環落地의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토지면 사도리는 도선국사가 異人을 만나 모래를 모아 山川을 그렸다고 전해진다는 내용이 1872년에 제작된 지도에 적혀있다. 토지면 맞은편의 산은 오봉산으로 다섯 봉우리가 마치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구례현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속하는 군현으로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섬진강으로 하동을 지나 남해로 유입된다. 하동과의 경계에 화개동이 표시되었는데 그 근처에 화개장터가 위치한다. 읍성은 의도적으로 사각형으로 그렸는데 구례읍 봉동리 일대에 해당하며 성 밖에 향교가 보인다. 읍치 동북쪽에 그려진 華岩寺는 화엄사를 가르킨다. 국보와 보물이 여러 점 소장된 곳이다. 그 아래 표시된 대직전동, 소직전동은 지리산 피아골 인근의 산지 촌락이다. 그 아래 연곡사는 동부도, 서부도가 국보로 지정된 유서깊은 사찰이다. 읍성의 남문과 연결되는 주요 도로는 하천과 평행하게 형성되었다. 현재의 18번 국도, 19번 국도는 조선시대 이 길들을 확장하여 만든 것이다.(이현군)

  • 구례현 주기 (求禮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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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구례군에서 산동면, 광의면 일부, 용방면 일부는 남원부에 속하였다. 그 나머지 지역이 조선시대 구례현의 관할범위였다. 지도 오른쪽 위에 백두대간에 속하는 지리산이 그려졌는데 구례현의 진산에 해당한다. 곳곳에 險隘, 埋伏處가 그려졌다. 지리산 남쪽의 산줄기를 연달아 그려서 험준함을 표현하였는데 요충지에 해당한다는 설명을 자세히 적어놓았다. 그 아래 토지면이 적혔는데 오미리는 金環落地의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토지면 사도리는 도선국사가 異人을 만나 모래를 모아 山川을 그렸다고 전해진다는 내용이 1872년에 제작된 지도에 적혀있다. 토지면 맞은편의 산은 오봉산으로 다섯 봉우리가 마치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구례현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속하는 군현으로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섬진강으로 하동을 지나 남해로 유입된다. 하동과의 경계에 화개동이 표시되었는데 그 근처에 화개장터가 위치한다. 읍성은 의도적으로 사각형으로 그렸는데 구례읍 봉동리 일대에 해당하며 성 밖에 향교가 보인다. 읍치 동북쪽에 그려진 華岩寺는 화엄사를 가르킨다. 국보와 보물이 여러 점 소장된 곳이다. 그 아래 표시된 대직전동, 소직전동은 지리산 피아골 인근의 산지 촌락이다. 그 아래 연곡사는 동부도, 서부도가 국보로 지정된 유서깊은 사찰이다. 읍성의 남문과 연결되는 주요 도로는 하천과 평행하게 형성되었다. 현재의 18번 국도, 19번 국도는 조선시대 이 길들을 확장하여 만든 것이다.(이현군)

  • 금구현 (金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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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금산면, 황산면, 봉남면 일대를 관할범위로 하며 금구면 금구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호남고속국도 김제인터체인지 동쪽이 옛 금구현의 읍치 지역이었다. 이 지도의 중심부가 읍치 지역인데 읍성 없이 건물만 그려졌다. 진산은 동쪽에 표시된 봉두산이다. 봉두산의 맥이 객사가 아니라 향교쪽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산이 마치 봉황이 나는 듯한 형상이라 봉두산으로 이름 붙인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모악산은 읍치의 동남쪽에 위치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지도 오른쪽 위에 모악산과 금산사가 표시되었다. 산줄기의 맥세와 하천의 흐름을 반영하여 의도적으로 방향을 바꾸어 그린 것이다. 모악산은 현재 금산면에 위치한 것으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793.5m 높이의 산이다. 그 안에 금산사가 위치하는데 국보 62호 미륵전을 비롯한 여러 보물이 소장된 곳으로 독립된 형국 속에 그려졌다. 후백제의 견훤이 金剛에게 傳位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맏아들 神劍이 견훤을 이 절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지도 왼쪽의 저수지는 현재의 금구면 대율저수지로 비정된다. 지도 위쪽 전주와의 경계에 표시된 炭峙는 금구면 오봉리의 쑥고개로 불리는 곳이다. 전주시 완산구로 넘어가는 1번 국도 상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아래의 상두산은 김제시 금산면과 정읍시 산외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575.3m 높이의 산이다.(이현군)

  • 금구현 주기 (金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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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금산면, 황산면, 봉남면 일대를 관할범위로 하며 금구면 금구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호남고속국도 김제인터체인지 동쪽이 옛 금구현의 읍치 지역이었다. 이 지도의 중심부가 읍치 지역인데 읍성 없이 건물만 그려졌다. 진산은 동쪽에 표시된 봉두산이다. 봉두산의 맥이 객사가 아니라 향교쪽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산이 마치 봉황이 나는 듯한 형상이라 봉두산으로 이름 붙인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모악산은 읍치의 동남쪽에 위치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지도 오른쪽 위에 모악산과 금산사가 표시되었다. 산줄기의 맥세와 하천의 흐름을 반영하여 의도적으로 방향을 바꾸어 그린 것이다. 모악산은 현재 금산면에 위치한 것으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793.5m 높이의 산이다. 그 안에 금산사가 위치하는데 국보 62호 미륵전을 비롯한 여러 보물이 소장된 곳으로 독립된 형국 속에 그려졌다. 후백제의 견훤이 金剛에게 傳位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맏아들 神劍이 견훤을 이 절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지도 왼쪽의 저수지는 현재의 금구면 대율저수지로 비정된다. 지도 위쪽 전주와의 경계에 표시된 炭峙는 금구면 오봉리의 쑥고개로 불리는 곳이다. 전주시 완산구로 넘어가는 1번 국도 상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아래의 상두산은 김제시 금산면과 정읍시 산외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575.3m 높이의 산이다.(이현군)

  • 금산군 (錦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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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 지도의 전라도에 포함된 군현 중에서 금산군과 珍山郡은 현재 충청도에 해당한다. 금산군은 현재의 금산군 금산읍, 군북면, 금성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 제원면,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일대이다. 금산군의 나머지 면은 조선시대 진산군의 영역에 포함된다. 읍치 북쪽의 所山이 진산에 해당하며 금산읍 아인리 일대가 이 지도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의 봉황천은 오른쪽의 금강으로 유입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이 지도에는 읍성을 그리지 않았다. 향교 뒤쪽에 순절비를 표시하고 비석 그림을 그렸다. 그 북쪽에 義塚과 從容堂이 그려졌는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사적 105호 칠백의총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趙憲 등을 모신 곳이다. 도로를 그리고 역원을 표시하였다. 지도 오른쪽 위의 제원역은 현재의 제원면 제원리에 해당하며 읍치를 중심으로 한 도로가 현재의 68번 지방도로, 37번 국도의 근원이 되었다. 지도 오른쪽에 부동면, 부서면, 부남면, 부북면이 적혔는데 富利廢縣 지역이다. 현재의 부리면 현내리가 옛 부리현의 중심지이다. 읍치 왼쪽의 성곡서원은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金侁 등을 배향하였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險隘라고 표시하였다. (이현군)

  • 금산군 주기 (錦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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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 지도의 전라도에 포함된 군현 중에서 금산군과 珍山郡은 현재 충청도에 해당한다. 금산군은 현재의 금산군 금산읍, 군북면, 금성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 제원면,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일대이다. 금산군의 나머지 면은 조선시대 진산군의 영역에 포함된다. 읍치 북쪽의 所山이 진산에 해당하며 금산읍 아인리 일대가 이 지도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의 봉황천은 오른쪽의 금강으로 유입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이 지도에는 읍성을 그리지 않았다. 향교 뒤쪽에 순절비를 표시하고 비석 그림을 그렸다. 그 북쪽에 義塚과 從容堂이 그려졌는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사적 105호 칠백의총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趙憲 등을 모신 곳이다. 도로를 그리고 역원을 표시하였다. 지도 오른쪽 위의 제원역은 현재의 제원면 제원리에 해당하며 읍치를 중심으로 한 도로가 현재의 68번 지방도로, 37번 국도의 근원이 되었다. 지도 오른쪽에 부동면, 부서면, 부남면, 부북면이 적혔는데 富利廢縣 지역이다. 현재의 부리면 현내리가 옛 부리현의 중심지이다. 읍치 왼쪽의 성곡서원은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金侁 등을 배향하였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險隘라고 표시하였다. (이현군)

  • 김제군 (金堤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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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군은 현재의 김제시내를 중심으로 백산면, 죽산면, 부량면, 백구면, 용지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지도 중심부의 읍치는 옥산동, 신풍동, 요촌동 일대이며 향교는 교동에 있었다. 平皐廢縣과 鳴良縣이 김제군에 포함되었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하천은 만경강이며 아래쪽의 하천은 동진강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東津이 표시되었다. 근처에 지금 23번 국도상의 동진강 휴게소와 동진교가 있다. 그 옆에 해창이 표시되었는데 죽산면 대창리로 추정된다. 현재의 해안선은 간척의 영향으로 부분적으로 변경되었다. 동진강 북쪽에 浦橋가 그려진 하천은 현재의 원평천이다. 29번 국도변의 부량주유소 근처에 포교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읍치 남서쪽에 大堤가 크게 그려졌으며 지도 오른쪽 아래에 벽골제언이 표시되었다. 농사를 위한 제언으로 벽골제의 제방은 사적 115호 지정되었는데 현재의 부량면에 있었다. 김제군은 본래 백제의 碧骨郡으로 그 이름이 제언의 명칭이 된 것이다. 330년(訖解王 21)에 처음 둑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읍치 북쪽의 사찰은 서흥농공단지 동북쪽에 위치한 사찰로 26.2m의 승반산 아래에 있는 것이다. 김제가 해안에 인접한 군현이고 사찰 뒤쪽이 아주 낮은 산이지만 맥으로 주변 지형을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현재 김제시 곳곳에 저수지가 존재한다.(이현군)

  • 김제군 주기 (金堤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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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군은 현재의 김제시내를 중심으로 백산면, 죽산면, 부량면, 백구면, 용지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지도 중심부의 읍치는 옥산동, 신풍동, 요촌동 일대이며 향교는 교동에 있었다. 平皐廢縣과 鳴良縣이 김제군에 포함되었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하천은 만경강이며 아래쪽의 하천은 동진강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東津이 표시되었다. 근처에 지금 23번 국도상의 동진강 휴게소와 동진교가 있다. 그 옆에 해창이 표시되었는데 죽산면 대창리로 추정된다. 현재의 해안선은 간척의 영향으로 부분적으로 변경되었다. 동진강 북쪽에 浦橋가 그려진 하천은 현재의 원평천이다. 29번 국도변의 부량주유소 근처에 포교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읍치 남서쪽에 大堤가 크게 그려졌으며 지도 오른쪽 아래에 벽골제언이 표시되었다. 농사를 위한 제언으로 벽골제의 제방은 사적 115호 지정되었는데 현재의 부량면에 있었다. 김제군은 본래 백제의 碧骨郡으로 그 이름이 제언의 명칭이 된 것이다. 330년(訖解王 21)에 처음 둑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읍치 북쪽의 사찰은 서흥농공단지 동북쪽에 위치한 사찰로 26.2m의 승반산 아래에 있는 것이다. 김제가 해안에 인접한 군현이고 사찰 뒤쪽이 아주 낮은 산이지만 맥으로 주변 지형을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현재 김제시 곳곳에 저수지가 존재한다.(이현군)

  • 나주목 (羅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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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發羅郡을 신라에서 錦山郡으로 개칭하여 불렀다. 지도 위쪽에 금성산이 표시되었는데 이를 따서 錦城이라고 하기도 해서 해동지도에는 錦城縣으로 그려진 전라남도 나주 일대의 지도이다. 금성산이 나주의 진산에 해당한다. 서남해안의 중심 군현답게 많은 섬들이 보인다. 현재의 나주시에서 남평읍, 산포면, 봉황면, 다도면은 南平縣에 속하였기 때문에 제외되고 광주광역시의 서쪽 지역, 영암군 금정면, 신북면 일부, 시종면 일부, 무안군 삼향면, 신안군의 섬들이 관할 범위에 속한다. 읍치는 나주시내 남내동 일대인데 옛 읍치 지역에는 현재 보물 49호 동문외석당간이 남아있다. 읍성 왼쪽의 향교는 보물 제 394호 향교대성전으로 지정되었다. 읍성 안에 객사, 아사, 창이 그려지는 것은 군현지도에서 일반적이지만 東部, 西部 등 성 안 행정구역이 표시된 점은 이색적이다. 읍성 앞에는 左營이 보인다. 방면의 이름을 네모 안에 구별되게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치 동쪽에서 흘러내려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영산강이다. 지도 아래 바다로 유입되는 영산강 동쪽에 南海堂이 표시되었는데 南海神祠이다. 시종면에 남해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그 왼쪽에 삼향사, 삼향면 등의 지명이 보이는데 근처에 현재 영산호 하구둑이 건설된 곳이다. 봉대, 죽전, 포구, 진도,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 신안원은 왕곡면 신원리에 있던 역원이다. 섬들에는 牧場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고 있다.(이현군)

  • 나주목 주기 (羅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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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發羅郡을 신라에서 錦山郡으로 개칭하여 불렀다. 지도 위쪽에 금성산이 표시되었는데 이를 따서 錦城이라고 하기도 해서 해동지도에는 錦城縣으로 그려진 전라남도 나주 일대의 지도이다. 금성산이 나주의 진산에 해당한다. 서남해안의 중심 군현답게 많은 섬들이 보인다. 현재의 나주시에서 남평읍, 산포면, 봉황면, 다도면은 南平縣에 속하였기 때문에 제외되고 광주광역시의 서쪽 지역, 영암군 금정면, 신북면 일부, 시종면 일부, 무안군 삼향면, 신안군의 섬들이 관할 범위에 속한다. 읍치는 나주시내 남내동 일대인데 옛 읍치 지역에는 현재 보물 49호 동문외석당간이 남아있다. 읍성 왼쪽의 향교는 보물 제 394호 향교대성전으로 지정되었다. 읍성 안에 객사, 아사, 창이 그려지는 것은 군현지도에서 일반적이지만 東部, 西部 등 성 안 행정구역이 표시된 점은 이색적이다. 읍성 앞에는 左營이 보인다. 방면의 이름을 네모 안에 구별되게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치 동쪽에서 흘러내려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영산강이다. 지도 아래 바다로 유입되는 영산강 동쪽에 南海堂이 표시되었는데 南海神祠이다. 시종면에 남해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그 왼쪽에 삼향사, 삼향면 등의 지명이 보이는데 근처에 현재 영산호 하구둑이 건설된 곳이다. 봉대, 죽전, 포구, 진도,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 신안원은 왕곡면 신원리에 있던 역원이다. 섬들에는 牧場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고 있다.(이현군)

  • 낙안군 (樂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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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읍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충청도의 해미읍성과 낙안읍성이 거론되는데 이 지도는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낙안의 옛 모습을 그린 것이다. 낙안군은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 별량면, 외서면, 보성군 벌교읍을 관할한 군현이다. 지도 가운데 위에 그려진 금전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높이가 667.9m이다. 그 북쪽 지역이 현재의 조계산 도립공원이다.금전산 남쪽에 읍성이 사각형으로 그려졌고 남문이 표시되었으며 그 안에 客舍, 衙, 倉을 그렸다. 현재의 낙안면의 서내리, 남내리, 동내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금은 낙안읍성 민속마을로 남아있다. 읍치 북쪽은 현재 성북리라는 지명이 사용된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낙안면 교촌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 남쪽에 그려진 하천은 현재의 교촌천, 옥산천, 벌교천으로 남류하여 바다로 유입된다. 바다로 유입되는 곳은 경전선 철도의 벌교역 근처인데 이 지도에 伐橋가 적혀 있다. 보물 304호로 지정된 홍교가 이것을 가리킨다. 오른쪽 아래의 바다는 여자만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바다에 여자도, 장도, 해도가 그려졌다. 지도 오른쪽의 동화사는 별량면에 있는 사찰로 보물 831호 삼층석탑이 있다. 그 왼쪽의 제석산은 별량면과 낙안면의 경계가 되는 563.3m 높이의 산이다. 읍치 남쪽의 고읍면은 현재 벌교읍 고읍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다른 군현과의 연결로에 고개가 표시되었고 해안에는 船所, 海倉이 그려졌다.(이현군)

  • 낙안군 주기 (樂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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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읍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충청도의 해미읍성과 낙안읍성이 거론되는데 이 지도는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낙안의 옛 모습을 그린 것이다. 낙안군은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 별량면, 외서면, 보성군 벌교읍을 관할한 군현이다. 지도 가운데 위에 그려진 금전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높이가 667.9m이다. 그 북쪽 지역이 현재의 조계산 도립공원이다.금전산 남쪽에 읍성이 사각형으로 그려졌고 남문이 표시되었으며 그 안에 客舍, 衙, 倉을 그렸다. 현재의 낙안면의 서내리, 남내리, 동내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금은 낙안읍성 민속마을로 남아있다. 읍치 북쪽은 현재 성북리라는 지명이 사용된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낙안면 교촌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 남쪽에 그려진 하천은 현재의 교촌천, 옥산천, 벌교천으로 남류하여 바다로 유입된다. 바다로 유입되는 곳은 경전선 철도의 벌교역 근처인데 이 지도에 伐橋가 적혀 있다. 보물 304호로 지정된 홍교가 이것을 가리킨다. 오른쪽 아래의 바다는 여자만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바다에 여자도, 장도, 해도가 그려졌다. 지도 오른쪽의 동화사는 별량면에 있는 사찰로 보물 831호 삼층석탑이 있다. 그 왼쪽의 제석산은 별량면과 낙안면의 경계가 되는 563.3m 높이의 산이다. 읍치 남쪽의 고읍면은 현재 벌교읍 고읍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다른 군현과의 연결로에 고개가 표시되었고 해안에는 船所, 海倉이 그려졌다.(이현군)

  • 남원부 (南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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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원시에서 운봉읍, 산내면, 산동면, 아영면은 운봉현에 속하였으므로 이 지역을 제외한 남원시, 장수군 산서면, 번암면, 임실군 삼계면, 지사면 일부, 오수면 일부, 구례군 산동면, 광의면, 용방면 일부, 곡성군 고달면이 관할 범위였다. 남원부 읍치는 남원시내 동충동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에는 읍성이 그려졌고 그 앞에는 춘향전에 등장하는 광한루가 그려졌다. 보물 281호로 지정된 곳이다. 읍성에는 객사를 표시하였는데 다른 군현에 등장하지 않는 관왕묘가 표시되었다. 관우의 사당인데 읍성 밖이 아닌 읍성 안에 그렸다. 대부분의 군현지도에서는 행정구역명으로 ‘面’을 사용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坊’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읍성 안에도 坊 명칭을 적었다. 읍치의 동남쪽에는 지리산 국립공원이 있으며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지도 오른쪽 산줄기가 백두대간이다. 오른쪽 아래에는 南岳祠가 보인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요천이다. 읍치 북쪽의 蛟龍山城은 남원시내와 대산면의 경계에 위치한 520m의 교룡산에 세워진 것으로 지금은 국민관광지로 조성되었다. 지도 북쪽에 熬樹驛과 院이 표시되었다. 역과 원이 동시에 그려진 점이 이색적이다.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 있던 것이다. 주인을 살리고 죽인 義犬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서원, 사찰 등이 곳곳에 보인다. (이현군)

  • 남원부 주기 (南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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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원시에서 운봉읍, 산내면, 산동면, 아영면은 운봉현에 속하였으므로 이 지역을 제외한 남원시, 장수군 산서면, 번암면, 임실군 삼계면, 지사면 일부, 오수면 일부, 구례군 산동면, 광의면, 용방면 일부, 곡성군 고달면이 관할 범위였다. 남원부 읍치는 남원시내 동충동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에는 읍성이 그려졌고 그 앞에는 춘향전에 등장하는 광한루가 그려졌다. 보물 281호로 지정된 곳이다. 읍성에는 객사를 표시하였는데 다른 군현에 등장하지 않는 관왕묘가 표시되었다. 관우의 사당인데 읍성 밖이 아닌 읍성 안에 그렸다. 대부분의 군현지도에서는 행정구역명으로 ‘面’을 사용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坊’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읍성 안에도 坊 명칭을 적었다. 읍치의 동남쪽에는 지리산 국립공원이 있으며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지도 오른쪽 산줄기가 백두대간이다. 오른쪽 아래에는 南岳祠가 보인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요천이다. 읍치 북쪽의 蛟龍山城은 남원시내와 대산면의 경계에 위치한 520m의 교룡산에 세워진 것으로 지금은 국민관광지로 조성되었다. 지도 북쪽에 熬樹驛과 院이 표시되었다. 역과 원이 동시에 그려진 점이 이색적이다.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 있던 것이다. 주인을 살리고 죽인 義犬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서원, 사찰 등이 곳곳에 보인다. (이현군)

  • 남평현 (南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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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나주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남평읍, 봉황면, 다도면, 산포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지도 위쪽에 읍치가 보이는데 성곽없이 건물만 보인다. 객사가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남평읍 남평리 일대이며 그 아래 향교가 있던 곳은 남평읍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치 뒤쪽의 하천은 지석강으로 나주의 영산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쪽의 이름없이 그려진 서원은  蓬山書院으로 1667년(현종 8)에 사액받았으며 白仁傑을 배향하였다. 남평읍 동쪽에 서원마을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서원 오른쪽 지점은 하천 안에 섬이 형성되었는데 지석강 국민관광지에 해당한다. 읍치 남쪽은 鐵冶廢縣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불회사는 현재의 다도면에 위치한 사찰이다. 그 아래에 두개의 봉우리가 그려졌다. 불회사와 인접하게 그려진 봉우리는 덕룡산이다. 현재 덕룡재로 불리며 화산군 도암면, 영암군 금정면, 나주시 다도면 경계에 있는 것이다. 그 옆에 그려진 봉우리는 덕룡재 동북쪽의 높이 440.3m의 국사봉이다. 그 북쪽 다도면에는 현재 나주댐의 건설로 국민관광지인 나주호가 들어서 있어 이 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봉황면 철천리에는 미륵사가 들어서 있다. 칠불석상이 보물 461호로, 칠불입상이 보물 462호로 지정되었다. 읍창, 남창, 서창 등 창고만 표시되었고 역원은 그려지지 않았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도로망과 함께 교통의 요충지인 고개를 표시하는게 일반적인데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이현군)

  • 남평현 주기 (南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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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나주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남평읍, 봉황면, 다도면, 산포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지도 위쪽에 읍치가 보이는데 성곽없이 건물만 보인다. 객사가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남평읍 남평리 일대이며 그 아래 향교가 있던 곳은 남평읍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치 뒤쪽의 하천은 지석강으로 나주의 영산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쪽의 이름없이 그려진 서원은  蓬山書院으로 1667년(현종 8)에 사액받았으며 白仁傑을 배향하였다. 남평읍 동쪽에 서원마을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서원 오른쪽 지점은 하천 안에 섬이 형성되었는데 지석강 국민관광지에 해당한다. 읍치 남쪽은 鐵冶廢縣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불회사는 현재의 다도면에 위치한 사찰이다. 그 아래에 두개의 봉우리가 그려졌다. 불회사와 인접하게 그려진 봉우리는 덕룡산이다. 현재 덕룡재로 불리며 화산군 도암면, 영암군 금정면, 나주시 다도면 경계에 있는 것이다. 그 옆에 그려진 봉우리는 덕룡재 동북쪽의 높이 440.3m의 국사봉이다. 그 북쪽 다도면에는 현재 나주댐의 건설로 국민관광지인 나주호가 들어서 있어 이 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봉황면 철천리에는 미륵사가 들어서 있다. 칠불석상이 보물 461호로, 칠불입상이 보물 462호로 지정되었다. 읍창, 남창, 서창 등 창고만 표시되었고 역원은 그려지지 않았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도로망과 함께 교통의 요충지인 고개를 표시하는게 일반적인데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이현군)

  • 능주목 (綾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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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화순군의 능주면에 그 이름이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능주면 관영리 일대로 경전선 철도 능주역 북쪽 지역에 위치한다. 능주면, 도암면, 도곡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한천면을 관할 범위로 하였다. 읍치 동남쪽의 하천은 연주강으로 적혔는데 현재의 충신강으로 북쪽의 화순천, 서쪽의 대초천과 만나 지석강에 유입된다. 읍치 남쪽 작게 표시된 雲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신라 경덕왕이 綾城으로 부른 지역이며 동국여지승람에도 綾城縣으로 기록된 지역이다. 후에 인헌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격상시켰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을 그렸다. 읍치 동쪽 강변에 명승지를 그렸는데 현재 영벽정이 남아았다. 읍치 동쪽의 이름없는 서원은 해동지도에 竹樹書院으로 등장하는데 조광조를 배향한 곳이다. 왼쪽 아래에 雲住山이 표시되었는데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雲住寺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보물 796호 구층석탑, 797호 석조불감, 보물 798호 원형다층석탑이 있다. 그 북동쪽 현재의 도곡면은 고인돌(지석묘) 지역으로 유명하다. 오른쪽 아래 쌍계사는 이양면에 위치한 사찰로 국보 57호 철감선사탑 등이 있다. 그 위의 송석정은 이양면 북쪽 지석천변에 있는 누정이다. 능주목 도로의 특징은 하천과 평행하게 나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읍치에서 남쪽의 송석정, 쌍계사 서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경전선 철로, 29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를 보인다.(이현군)

  • 능주목 주기 (綾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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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화순군의 능주면에 그 이름이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능주면 관영리 일대로 경전선 철도 능주역 북쪽 지역에 위치한다. 능주면, 도암면, 도곡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한천면을 관할 범위로 하였다. 읍치 동남쪽의 하천은 연주강으로 적혔는데 현재의 충신강으로 북쪽의 화순천, 서쪽의 대초천과 만나 지석강에 유입된다. 읍치 남쪽 작게 표시된 雲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신라 경덕왕이 綾城으로 부른 지역이며 동국여지승람에도 綾城縣으로 기록된 지역이다. 후에 인헌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격상시켰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을 그렸다. 읍치 동쪽 강변에 명승지를 그렸는데 현재 영벽정이 남아았다. 읍치 동쪽의 이름없는 서원은 해동지도에 竹樹書院으로 등장하는데 조광조를 배향한 곳이다. 왼쪽 아래에 雲住山이 표시되었는데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雲住寺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보물 796호 구층석탑, 797호 석조불감, 보물 798호 원형다층석탑이 있다. 그 북동쪽 현재의 도곡면은 고인돌(지석묘) 지역으로 유명하다. 오른쪽 아래 쌍계사는 이양면에 위치한 사찰로 국보 57호 철감선사탑 등이 있다. 그 위의 송석정은 이양면 북쪽 지석천변에 있는 누정이다. 능주목 도로의 특징은 하천과 평행하게 나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읍치에서 남쪽의 송석정, 쌍계사 서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경전선 철로, 29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를 보인다.(이현군)

  • 담양부 (潭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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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潭陽縣 지도와 표기 내용이 비슷한 지도이다. 지도 중심부에 그려진 객사는 현재의 담양읍 객사리이며 그 북쪽의 향교는 담양읍 향교리에 해당한다. 담양부는 담양군의 담양읍, 부정면, 대덕면, 봉산면, 금성면, 용면, 월산면이 관할 구역이었다. 담양군의 남쪽은 창평현이 된다. 읍치에는 성곽을 그리지 않았으나 南門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지도의 주기에는 읍성이 없다고 표시하고 있다. 해동지도에서는 이 지도의 남문 위치에 건물을 그리고 그 앞에 길이 나 있는 것처럼 그렸으나 남문이라고 적지는 않았다. 읍성 오른쪽 위에서 내려오는 하천은 현재의 금성천으로 영산강에 합류된다. 읍치의 북쪽, 현재의 담양군 용면과 순창군의 경계에 729m의 추월산이 있는데 이곳이 담양의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 위에 그려진 山城은 금성산성이다. 금성면 금성리, 용면 산성리, 순창군 팔덕면의 중간에 있는 572.7m 높이의 현재의 산성산에 세워진 것이다. 장대, 창, 객사, 남문이 그려졌다. 지도의 주기에 읍성의 둘레를 적어놓았다. 조선 선조대에 개축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동쪽은 현재 댐의 건설로 인한 담양호가 들어서 있다. 義岩書院이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남쪽에는 보물 506호로 지정된 오층석탑, 505호 석당간 등이 있으나 이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금성면 원율리는 본래 백제의 栗之縣이었는데 신라때 栗原으로 바뀌었다가 고려때 原栗縣으로 불리었던 폐현이 있던 곳이다.(이현군)

  • 담양부 주기 (潭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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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潭陽縣 지도와 표기 내용이 비슷한 지도이다. 지도 중심부에 그려진 객사는 현재의 담양읍 객사리이며 그 북쪽의 향교는 담양읍 향교리에 해당한다. 담양부는 담양군의 담양읍, 부정면, 대덕면, 봉산면, 금성면, 용면, 월산면이 관할 구역이었다. 담양군의 남쪽은 창평현이 된다. 읍치에는 성곽을 그리지 않았으나 南門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지도의 주기에는 읍성이 없다고 표시하고 있다. 해동지도에서는 이 지도의 남문 위치에 건물을 그리고 그 앞에 길이 나 있는 것처럼 그렸으나 남문이라고 적지는 않았다. 읍성 오른쪽 위에서 내려오는 하천은 현재의 금성천으로 영산강에 합류된다. 읍치의 북쪽, 현재의 담양군 용면과 순창군의 경계에 729m의 추월산이 있는데 이곳이 담양의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 위에 그려진 山城은 금성산성이다. 금성면 금성리, 용면 산성리, 순창군 팔덕면의 중간에 있는 572.7m 높이의 현재의 산성산에 세워진 것이다. 장대, 창, 객사, 남문이 그려졌다. 지도의 주기에 읍성의 둘레를 적어놓았다. 조선 선조대에 개축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동쪽은 현재 댐의 건설로 인한 담양호가 들어서 있다. 義岩書院이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남쪽에는 보물 506호로 지정된 오층석탑, 505호 석당간 등이 있으나 이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금성면 원율리는 본래 백제의 栗之縣이었는데 신라때 栗原으로 바뀌었다가 고려때 原栗縣으로 불리었던 폐현이 있던 곳이다.(이현군)

  • 동복현 (同福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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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때 동복이란 지명이 생겼으며 이후 곡성, 보성, 화순 등에 포함되었다가 조선 태종대에 현이 되었다. 1914년에 다시 전라남도 화순군에 병합되었다. 현재의 화순군 동복면, 남면, 북면, 이서면을 관할 범위로 하였으며 동복면의 독상리, 천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동복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보성강에 유입된다. 하천을 따라 적벽, 만경대, 봉황대 등의 명승지가 회화적으로 묘사되었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 댐 건설로 동복호가 들어서 있다. 위쪽에 그려진 물염정은 이서면의 동복호 서북쪽에 위치하며 그 앞에 적벽이 있다. 물염정 서북쪽은 현재 화순온천으로 개발된 곳이다. 적벽 왼쪽에 표시된 외서면의 서북쪽에는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광주의 무등산이 자리하고 있다. 적벽의 동북쪽에 그려진 삼한 古城은 이서면, 북면, 동복면의 경계에 위치한 572.8m의 오성산에 만들어진 것이다. 옹암은 20번 국도 독재터널 서쪽에 있다. 古城과 松峙의 중간지점에는 수리천연동굴이 있다. 지도 오른쪽에 운월치, 모후산이 표시되었는데 이 산줄기가 현재의 화순군과 순천시 경계가 된다. 운월치 북쪽에 22번 국도 상에 운암터널이 뚫렸다. 모후산은 918.8m의 높은 산으로 동복현의 진산에 해당한다. 그 맥이 객사와 향교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지도에서는 도로만 그려졌지만, 해동지도에는 객사 동쪽에 黔富驛이 그려졌다. 적벽 아래 도원서원은 1687년(숙종 13)에 사액받았다.(이현군)

  • 동복현 주기 (同福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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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때 동복이란 지명이 생겼으며 이후 곡성, 보성, 화순 등에 포함되었다가 조선 태종대에 현이 되었다. 1914년에 다시 전라남도 화순군에 병합되었다. 현재의 화순군 동복면, 남면, 북면, 이서면을 관할 범위로 하였으며 동복면의 독상리, 천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동복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보성강에 유입된다. 하천을 따라 적벽, 만경대, 봉황대 등의 명승지가 회화적으로 묘사되었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 댐 건설로 동복호가 들어서 있다. 위쪽에 그려진 물염정은 이서면의 동복호 서북쪽에 위치하며 그 앞에 적벽이 있다. 물염정 서북쪽은 현재 화순온천으로 개발된 곳이다. 적벽 왼쪽에 표시된 외서면의 서북쪽에는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광주의 무등산이 자리하고 있다. 적벽의 동북쪽에 그려진 삼한 古城은 이서면, 북면, 동복면의 경계에 위치한 572.8m의 오성산에 만들어진 것이다. 옹암은 20번 국도 독재터널 서쪽에 있다. 古城과 松峙의 중간지점에는 수리천연동굴이 있다. 지도 오른쪽에 운월치, 모후산이 표시되었는데 이 산줄기가 현재의 화순군과 순천시 경계가 된다. 운월치 북쪽에 22번 국도 상에 운암터널이 뚫렸다. 모후산은 918.8m의 높은 산으로 동복현의 진산에 해당한다. 그 맥이 객사와 향교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지도에서는 도로만 그려졌지만, 해동지도에는 객사 동쪽에 黔富驛이 그려졌다. 적벽 아래 도원서원은 1687년(숙종 13)에 사액받았다.(이현군)

  • 만경현 (萬頃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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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왼쪽에는 바다가 그려졌는데 고군산군도 일대이다. 가장 큰 섬에 고군산진이 표시되었다. 육로와 함께 섬 사이의 해로까지 표시하였다. 현대 지도상의 섬 위치와 차이가 있는데 해로를 중심으로 섬을 인식한 결과로 보인다. 이 섬들은 군산시 옥도면에 포함되는 것으로 새만금간척사업이 진행되는 곳이다. 동쪽의 해안과 북쪽의 야미도, 신시도를 연결한 바다가 육지로 전환될 예정이다. 지도 동쪽은 현재의 김제시 만경읍, 공덕면, 청하면, 성덕면, 진봉면, 광활면 일대이다. 해안의 망해사, 전봉산은 현재의 광활면에 속하는데 이 아래 지역은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이 지도와 현재 지도의 해안선이 다르다. 전봉산은 높이 72.2m의 작은 산인데 이 지도에서는 강조하여 크게 그렸다. 북쪽의 옥구와 경계가 되는 하천은 만경강이다. 신창진은 29번 국도상의 만경대교 근처이다. 과거의 나루터가 있던 곳에 교량이 들어선 것이다. 읍성이 그려진 곳은 현재의 만경읍 만경리 일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 동쪽에 옛 토성이 남아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읍성 안에는 이름없이 건물만 그렸는데 가장 큰 건물이 객사이다. 읍성 남쪽에 압호정이 보이며 그 옆에 큰 저수지가 그려졌는데 현재의 능제(만경지)로 추정된다. 평야지대에 농업을 위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능제 남쪽에 남산서원이 있었다.(이현군)

  • 만경현 주기 (萬頃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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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왼쪽에는 바다가 그려졌는데 고군산군도 일대이다. 가장 큰 섬에 고군산진이 표시되었다. 육로와 함께 섬 사이의 해로까지 표시하였다. 현대 지도상의 섬 위치와 차이가 있는데 해로를 중심으로 섬을 인식한 결과로 보인다. 이 섬들은 군산시 옥도면에 포함되는 것으로 새만금간척사업이 진행되는 곳이다. 동쪽의 해안과 북쪽의 야미도, 신시도를 연결한 바다가 육지로 전환될 예정이다. 지도 동쪽은 현재의 김제시 만경읍, 공덕면, 청하면, 성덕면, 진봉면, 광활면 일대이다. 해안의 망해사, 전봉산은 현재의 광활면에 속하는데 이 아래 지역은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이 지도와 현재 지도의 해안선이 다르다. 전봉산은 높이 72.2m의 작은 산인데 이 지도에서는 강조하여 크게 그렸다. 북쪽의 옥구와 경계가 되는 하천은 만경강이다. 신창진은 29번 국도상의 만경대교 근처이다. 과거의 나루터가 있던 곳에 교량이 들어선 것이다. 읍성이 그려진 곳은 현재의 만경읍 만경리 일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 동쪽에 옛 토성이 남아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읍성 안에는 이름없이 건물만 그렸는데 가장 큰 건물이 객사이다. 읍성 남쪽에 압호정이 보이며 그 옆에 큰 저수지가 그려졌는데 현재의 능제(만경지)로 추정된다. 평야지대에 농업을 위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능제 남쪽에 남산서원이 있었다.(이현군)

  • 무안현 (務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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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운남면과 망운면은 영광군에 속하였으며 삼향면은 나주목, 현경면 일부지역은 함평현에 포함되었다. 조선시대 무안현은 그 나머지 지역과 목포시, 함평군 엄다면, 학교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읍성이 그려진 곳은 무안읍 성내리 일대이며 주변에 성남리, 성동리 지명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서해안 고속국도 무안 인터체인지 서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성 북쪽이 현재 함평군에 속하는 엄다면, 학교면이며 영광계라고 적힌 곳이 망운면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 아래에 그려진 木浦鎭 일대가 현재의 목포시에 해당한다.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城 형태로 존재하였고 水軍萬戶가 배치되었다. 그 옆의 봉수대는 229.3m 높이의 목포 유달산에 있던 것이다. 읍치 아래 그려진 송림서원은 1682년(숙종 8)에 사액받았다. 그 아래 읍성과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게 향교를 그렸다. 서쪽은 바다이며 동쪽에 크게 그려진 것은 영산강을 그린 것이다. 영산강을 따라 나루터, 창고, 선소, 누정이 들어서 있다.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몽탄진은 현재 몽탄면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아래 唐串이라고 표시된 건물 인근에 영산호 하구둑이 들어서 있다. 남쪽의 해안선은 퇴적 작용으로 인하여 현재 지형도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법천사는 317.7m 높이의 승달산 아래에 지금도 남아있다. 읍성의 남문을 중심으로 도로망이 그려졌다. 북쪽의 고막원은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에 있던 역원이다.(이현군)

  • 무안현 주기 (務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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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운남면과 망운면은 영광군에 속하였으며 삼향면은 나주목, 현경면 일부지역은 함평현에 포함되었다. 조선시대 무안현은 그 나머지 지역과 목포시, 함평군 엄다면, 학교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읍성이 그려진 곳은 무안읍 성내리 일대이며 주변에 성남리, 성동리 지명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서해안 고속국도 무안 인터체인지 서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성 북쪽이 현재 함평군에 속하는 엄다면, 학교면이며 영광계라고 적힌 곳이 망운면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 아래에 그려진 木浦鎭 일대가 현재의 목포시에 해당한다.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城 형태로 존재하였고 水軍萬戶가 배치되었다. 그 옆의 봉수대는 229.3m 높이의 목포 유달산에 있던 것이다. 읍치 아래 그려진 송림서원은 1682년(숙종 8)에 사액받았다. 그 아래 읍성과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게 향교를 그렸다. 서쪽은 바다이며 동쪽에 크게 그려진 것은 영산강을 그린 것이다. 영산강을 따라 나루터, 창고, 선소, 누정이 들어서 있다.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몽탄진은 현재 몽탄면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아래 唐串이라고 표시된 건물 인근에 영산호 하구둑이 들어서 있다. 남쪽의 해안선은 퇴적 작용으로 인하여 현재 지형도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법천사는 317.7m 높이의 승달산 아래에 지금도 남아있다. 읍성의 남문을 중심으로 도로망이 그려졌다. 북쪽의 고막원은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에 있던 역원이다.(이현군)

  • 무장현 (茂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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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무장면, 상하면, 공음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심원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무장은 조선 태종대에 茂松縣과 長沙縣을 합하면서 생긴 지명이다. 지도 아래쪽에 무송고현이 표시되었다. 읍치 서쪽은 바다와 접하고 있는데 바다 한 가운데 대죽도와 소죽도가 그려졌으며 지금도 그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대죽도 옆에 바다에 유입되게 그려진 하천은 인천강이다. 현재 지형도와 약간 다르게 보이는 것은 직사각형의 종이 안에 이 지역을 그리기 위해 왜곡한 것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땅은 변산반도이며 무장현과 곰소만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있다. 선운산은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며 그 안에 선운사가 있는데 이 지도에도 표시되었다. 보물 29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읍치는 무장면 무장리, 성내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도 가운데 성곽으로 그려진 지역이다. 읍치 서쪽과 남쪽의 산줄기를 맥세가 느껴지도록 그리고 있다. 원형으로 성곽을 그리고 성문은 남문만 표시하였는데 이 지역의 도로망이 모두 남문과 연결된다. 읍성 안에는 다른 군현지도에 잘 등장하지 않는 軍器庫를 그렸고 읍성 안에도 산줄기를 그려넣어 객사와 연결되도록 하였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무장면 교흥리에 있었던 것으로 읍성 지역과 분리된다. 그 옆의 충현사는 1608년(선조 41)에 세워졌으며 이존오, 유희춘 등을 배향하였다. 해안에 봉수대, 해창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무장현 주기 (茂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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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무장면, 상하면, 공음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심원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무장은 조선 태종대에 茂松縣과 長沙縣을 합하면서 생긴 지명이다. 지도 아래쪽에 무송고현이 표시되었다. 읍치 서쪽은 바다와 접하고 있는데 바다 한 가운데 대죽도와 소죽도가 그려졌으며 지금도 그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대죽도 옆에 바다에 유입되게 그려진 하천은 인천강이다. 현재 지형도와 약간 다르게 보이는 것은 직사각형의 종이 안에 이 지역을 그리기 위해 왜곡한 것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땅은 변산반도이며 무장현과 곰소만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있다. 선운산은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며 그 안에 선운사가 있는데 이 지도에도 표시되었다. 보물 29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읍치는 무장면 무장리, 성내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도 가운데 성곽으로 그려진 지역이다. 읍치 서쪽과 남쪽의 산줄기를 맥세가 느껴지도록 그리고 있다. 원형으로 성곽을 그리고 성문은 남문만 표시하였는데 이 지역의 도로망이 모두 남문과 연결된다. 읍성 안에는 다른 군현지도에 잘 등장하지 않는 軍器庫를 그렸고 읍성 안에도 산줄기를 그려넣어 객사와 연결되도록 하였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무장면 교흥리에 있었던 것으로 읍성 지역과 분리된다. 그 옆의 충현사는 1608년(선조 41)에 세워졌으며 이존오, 유희춘 등을 배향하였다. 해안에 봉수대, 해창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무주부 (茂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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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錦山郡에 속했던 부남면을 제외한 무주군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며 읍치는 무주읍 읍내리 일대이다. 읍치 앞쪽의 하천은 남대천이며 서쪽의 금강에 유입되어 북쪽으로 흘러간다.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한 군현으로 지도 북쪽에 천마산, 백화산, 향로봉이 보인다. 읍치 뒤쪽의 420.4m의 향로봉이 진산에 해당한다. 그 오른쪽에 栗峙가 표시되었는데 근처에 밤숙골이라는 지명이 현재 남아 있다. 읍치 동쪽 현재의 무주읍 오산리에는 무주구상화강편마암이 천연기념물 249호로 지정되어있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 등을 그렸다. 성곽은 읍치 남쪽의 1029.2m의 적상산에 보이는데 이곳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史庫와 선원각이 있던 곳이다. 덕유산 국립공원 안에 포함되는 지역으로 적상산성은 사적 146호로 지정되었다. 요새처럼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덕유산이 표시되었다. 그 근처에 구천동사라는 사찰이 보이는데 이 일대가 무주구천동으로 알려진 곳이다. 적성산성이라고 적힌 곳에 호수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 보이는데 현재의 적상호에 해당하며 그 동북쪽에 무주호가 있는데 양수식 발전 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무주부는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한 것이며 주계현이 현재의 읍치가 되며 동쪽의 풍동면, 풍서면, 풍남면은 무풍현 지역이다. 무주구천동 동쪽의 현재 지명이 무풍면으로 되어 있는데 옛 무풍현의 명칭을 딴 것이다. 경상도와 경계가 되는 군현으로 백두대간과 잇닿아 있어 고개들이 지도에 많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무주부 주기 (茂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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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錦山郡에 속했던 부남면을 제외한 무주군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며 읍치는 무주읍 읍내리 일대이다. 읍치 앞쪽의 하천은 남대천이며 서쪽의 금강에 유입되어 북쪽으로 흘러간다.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한 군현으로 지도 북쪽에 천마산, 백화산, 향로봉이 보인다. 읍치 뒤쪽의 420.4m의 향로봉이 진산에 해당한다. 그 오른쪽에 栗峙가 표시되었는데 근처에 밤숙골이라는 지명이 현재 남아 있다. 읍치 동쪽 현재의 무주읍 오산리에는 무주구상화강편마암이 천연기념물 249호로 지정되어있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 등을 그렸다. 성곽은 읍치 남쪽의 1029.2m의 적상산에 보이는데 이곳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史庫와 선원각이 있던 곳이다. 덕유산 국립공원 안에 포함되는 지역으로 적상산성은 사적 146호로 지정되었다. 요새처럼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덕유산이 표시되었다. 그 근처에 구천동사라는 사찰이 보이는데 이 일대가 무주구천동으로 알려진 곳이다. 적성산성이라고 적힌 곳에 호수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 보이는데 현재의 적상호에 해당하며 그 동북쪽에 무주호가 있는데 양수식 발전 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무주부는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한 것이며 주계현이 현재의 읍치가 되며 동쪽의 풍동면, 풍서면, 풍남면은 무풍현 지역이다. 무주구천동 동쪽의 현재 지명이 무풍면으로 되어 있는데 옛 무풍현의 명칭을 딴 것이다. 경상도와 경계가 되는 군현으로 백두대간과 잇닿아 있어 고개들이 지도에 많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보성군 (寶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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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보성군 일대의 지도인데 웅치면과 회천면은 장흥부에 속하며 벌교읍은 낙안군에 속하기 때문에 관할 범위에서 제외된다. 읍치는 경전선 철도 보성역 북쪽인 보성읍 보성리일대이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보성강으로 북쪽으로 흘러 섬진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북쪽에는 현재 댐의 건설로 주암호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읍치 남동쪽은 득량만, 보성만 일대의 바다이다. 지도에 표시된 해창과 선소가 바다와 인접한 군현임을 보여준다. 선소는 현재의 득량면 해안에 있던 것이며 북동쪽에 득량만 방조제가 있고 그 인근에 해창교가 있어 해창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이 일대가 兆陽폐현이 있던 곳이다. 지도 북쪽의 복내면이 표시된 지역이 福城폐현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복내리 일대가 중심지로 추정된다. 읍치에는 읍성과 객사, 아사, 창이 표시되었다. 그 북쪽의 德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의 율어면은 현재에도 율어면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해동지도에는 율어면 동쪽에 많은 고개들이 표시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생략되었다. 읍치 서쪽의 旌忠祠는 安弘國을 배향한 곳이며 이름없이 표시된 서원은 大溪書院과 龍山書院이다. 읍치 왼쪽의 대계서원은 安邦俊을 배향한 곳이며 오른쪽 아래의 용산서원은 朴光前을 배향하였다. 이 밖에 도로, 봉수대, 사찰, 향교가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보성군 주기 (寶城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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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보성군 일대의 지도인데 웅치면과 회천면은 장흥부에 속하며 벌교읍은 낙안군에 속하기 때문에 관할 범위에서 제외된다. 읍치는 경전선 철도 보성역 북쪽인 보성읍 보성리일대이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보성강으로 북쪽으로 흘러 섬진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북쪽에는 현재 댐의 건설로 주암호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읍치 남동쪽은 득량만, 보성만 일대의 바다이다. 지도에 표시된 해창과 선소가 바다와 인접한 군현임을 보여준다. 선소는 현재의 득량면 해안에 있던 것이며 북동쪽에 득량만 방조제가 있고 그 인근에 해창교가 있어 해창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이 일대가 兆陽폐현이 있던 곳이다. 지도 북쪽의 복내면이 표시된 지역이 福城폐현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복내리 일대가 중심지로 추정된다. 읍치에는 읍성과 객사, 아사, 창이 표시되었다. 그 북쪽의 德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의 율어면은 현재에도 율어면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해동지도에는 율어면 동쪽에 많은 고개들이 표시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생략되었다. 읍치 서쪽의 旌忠祠는 安弘國을 배향한 곳이며 이름없이 표시된 서원은 大溪書院과 龍山書院이다. 읍치 왼쪽의 대계서원은 安邦俊을 배향한 곳이며 오른쪽 아래의 용산서원은 朴光前을 배향하였다. 이 밖에 도로, 봉수대, 사찰, 향교가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부안현 (扶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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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산면은 조선시대에는 고부군에 포함되어 제외되며 그 나머지 전라북도 부안군이 관할 범위에 해당한다. 조선 태종대에 扶寧縣과 保安縣을 합해 만들어진 군현으로 읍치는 부안읍의 동중리, 서외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에 읍성과 함께 객사 등이 그려졌고 향교는 읍성 밖에 위치한다. 서해 바다에 접해 있으며 지도 아래쪽은 변산반도 국립공원이다. 읍치 동쪽의 염소면은 현재의 계화면 일대에 해당하며 왼쪽의 계화도까지 간척되어 이 지도와 현재의 해안선은 다르다. 봉대가 있는 곳은 계화리에 있는 246.3m의 계화산이다. 그 서쪽의 바다도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매립되는 중이다. 염소면 지명으로 보아 과거에 염전이 많았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계화초등학교 인근에 52.6m의 낮은 산의 이름이 염창산으로 과거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염전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지도 아래쪽의 해안인데 곰소만 일대에 해당한다. 곰소만 위쪽에 많은 사찰이 그려져 있는데 이 일대가 모두 국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높이 솟은 바위에 邊山이라고 적어 놓았다. 현재의 내변산 쌍선봉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내소사는 국보 278호 법화경절본사본과 보물들이 소장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그 위쪽에 龍湫는 와룡소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 아래의 격포진은 변산면 격포리에 해당하며 근처에 명승지인 채석강과 격포해수욕장이 있다. 위도진은 서해의 섬인 위도면에 해당하는데 그 안에 진리 지명이 남아있다.(이현군)

  • 부안현 주기 (扶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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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산면은 조선시대에는 고부군에 포함되어 제외되며 그 나머지 전라북도 부안군이 관할 범위에 해당한다. 조선 태종대에 扶寧縣과 保安縣을 합해 만들어진 군현으로 읍치는 부안읍의 동중리, 서외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에 읍성과 함께 객사 등이 그려졌고 향교는 읍성 밖에 위치한다. 서해 바다에 접해 있으며 지도 아래쪽은 변산반도 국립공원이다. 읍치 동쪽의 염소면은 현재의 계화면 일대에 해당하며 왼쪽의 계화도까지 간척되어 이 지도와 현재의 해안선은 다르다. 봉대가 있는 곳은 계화리에 있는 246.3m의 계화산이다. 그 서쪽의 바다도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매립되는 중이다. 염소면 지명으로 보아 과거에 염전이 많았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계화초등학교 인근에 52.6m의 낮은 산의 이름이 염창산으로 과거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염전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지도 아래쪽의 해안인데 곰소만 일대에 해당한다. 곰소만 위쪽에 많은 사찰이 그려져 있는데 이 일대가 모두 국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높이 솟은 바위에 邊山이라고 적어 놓았다. 현재의 내변산 쌍선봉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내소사는 국보 278호 법화경절본사본과 보물들이 소장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그 위쪽에 龍湫는 와룡소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 아래의 격포진은 변산면 격포리에 해당하며 근처에 명승지인 채석강과 격포해수욕장이 있다. 위도진은 서해의 섬인 위도면에 해당하는데 그 안에 진리 지명이 남아있다.(이현군)

  • 순창군 (淳昌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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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할 범위의 변화가 거의 없이 현재로 이어진 지역으로 현재의 전라북도 순창군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순창읍 순화리 일대인데 순화리는 신라 때의 군 명칭을 현재 지명에 활용한 것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 객사가 그려진 지역이 순화리이며 그 왼쪽 아래 향교는 교성리에 있던 것이다. 조선시대 방면의 명칭은 동서남북 방위 개념을 활용하여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읍치 인근 지역의 면 명칭에 左右 개념을 넣은 것이 이색적이다. 읍치 북쪽의 追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섬진강으로 남쪽으로 흘러 간다. 읍치 왼쪽 강천사는 팔덕면의 583.7m의 강천산에 있는 사찰로 지금도 존재한다. 그 북쪽에 표시된 내장산은 현재의 정읍시, 장성군, 순창군에 걸쳐 있는 내장산 국립공원이다. 읍치 동쪽에 적성면, 적성원, 적성진 등이 표시되었는데 적성폐현이 있던 곳이며 읍치 서쪽의 복흥면은 복흥폐현이 있던 곳이다. 현재는 적성면, 복흥면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적성진 아래 섬진강변에 華山이 표시되었는데 현재의 적성면 고원리에 있는 342m의 산이다. 그 동쪽에 화산서원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大母山城이 서쪽 4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해동지도 순창군 지도에는 봉서산과 월암면 사이에 山城을 그려 놓았다. 동국여지승람에 뾰죽한 봉우리가 사면을 에워싼 것으로 이 지역의 형승을 기록하였는데 지도의 북쪽에 險隘, 峯, 고개 등을 볼 수 있다.(이현군)

  • 순창군 주기 (淳昌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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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할 범위의 변화가 거의 없이 현재로 이어진 지역으로 현재의 전라북도 순창군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순창읍 순화리 일대인데 순화리는 신라 때의 군 명칭을 현재 지명에 활용한 것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 객사가 그려진 지역이 순화리이며 그 왼쪽 아래 향교는 교성리에 있던 것이다. 조선시대 방면의 명칭은 동서남북 방위 개념을 활용하여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읍치 인근 지역의 면 명칭에 左右 개념을 넣은 것이 이색적이다. 읍치 북쪽의 追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섬진강으로 남쪽으로 흘러 간다. 읍치 왼쪽 강천사는 팔덕면의 583.7m의 강천산에 있는 사찰로 지금도 존재한다. 그 북쪽에 표시된 내장산은 현재의 정읍시, 장성군, 순창군에 걸쳐 있는 내장산 국립공원이다. 읍치 동쪽에 적성면, 적성원, 적성진 등이 표시되었는데 적성폐현이 있던 곳이며 읍치 서쪽의 복흥면은 복흥폐현이 있던 곳이다. 현재는 적성면, 복흥면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적성진 아래 섬진강변에 華山이 표시되었는데 현재의 적성면 고원리에 있는 342m의 산이다. 그 동쪽에 화산서원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大母山城이 서쪽 4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해동지도 순창군 지도에는 봉서산과 월암면 사이에 山城을 그려 놓았다. 동국여지승람에 뾰죽한 봉우리가 사면을 에워싼 것으로 이 지역의 형승을 기록하였는데 지도의 북쪽에 險隘, 峯, 고개 등을 볼 수 있다.(이현군)

  • 순천부 (順天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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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樂安郡에 속하는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을 제외한 순천시와 여수통합시가 관할 범위가 되며 현재의 순천시청 서쪽의 저전동, 옥천동, 영동 일대가 읍치 지역이다. 진산은 읍치 남쪽의 인제산이다. 읍치 왼쪽 아래 바다는 순천만이다. 읍성 안에는 객사와 함께 前營을 표시하였다. 읍치 동남쪽에 용두면과 해창이 보이는데 해창은 현재의 해룡면 해창리에 해당한다. 그 북쪽이 현재의 순천시, 아래쪽이 여수시가 된다. 그 아래쪽에 고돌산진이 성곽으로 그려졌다. 현재의 소라면 지역에 해당한다. 그 동쪽의 흥국사는 대웅전, 홍교 등이 보물로 지정된 곳이다. 그 아래에는 呂水面이라 적혀 있는데 그 남쪽의 좌수영은 左道水軍節度使營을 말하는 것이다. 근처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비각이 있다. 忠愍祠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사자를 모신 곳이다. 지도 제일 아래에는 돌산도가 그려졌다. 지도 왼쪽 위에는 송광사, 선암사가 그려졌는데 두 사찰 모두 조계산 도립공원 안에 위치하며 보물로 지정된 많은 소장품이 있다. 그 오른쪽의 부유창은 옛 富有縣의 위치를 알려준다. 고돌산진의 서쪽에 목장이 표시되었다. 백야도의 북쪽에 표시된 봉대가 현재의 화양면에 있는 봉화산으로 비정한다면 목장은 화양면 이목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수영, 전영 등이 설치된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곳곳에 봉대가 표시되었고 船所, 船倉 등이 많이 보인다. 육로는 그렸으나 해로는 따로 그리지 않았다.(이현군)

  • 순천부 주기 (順天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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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樂安郡에 속하는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을 제외한 순천시와 여수통합시가 관할 범위가 되며 현재의 순천시청 서쪽의 저전동, 옥천동, 영동 일대가 읍치 지역이다. 진산은 읍치 남쪽의 인제산이다. 읍치 왼쪽 아래 바다는 순천만이다. 읍성 안에는 객사와 함께 前營을 표시하였다. 읍치 동남쪽에 용두면과 해창이 보이는데 해창은 현재의 해룡면 해창리에 해당한다. 그 북쪽이 현재의 순천시, 아래쪽이 여수시가 된다. 그 아래쪽에 고돌산진이 성곽으로 그려졌다. 현재의 소라면 지역에 해당한다. 그 동쪽의 흥국사는 대웅전, 홍교 등이 보물로 지정된 곳이다. 그 아래에는 呂水面이라 적혀 있는데 그 남쪽의 좌수영은 左道水軍節度使營을 말하는 것이다. 근처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비각이 있다. 忠愍祠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사자를 모신 곳이다. 지도 제일 아래에는 돌산도가 그려졌다. 지도 왼쪽 위에는 송광사, 선암사가 그려졌는데 두 사찰 모두 조계산 도립공원 안에 위치하며 보물로 지정된 많은 소장품이 있다. 그 오른쪽의 부유창은 옛 富有縣의 위치를 알려준다. 고돌산진의 서쪽에 목장이 표시되었다. 백야도의 북쪽에 표시된 봉대가 현재의 화양면에 있는 봉화산으로 비정한다면 목장은 화양면 이목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수영, 전영 등이 설치된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곳곳에 봉대가 표시되었고 船所, 船倉 등이 많이 보인다. 육로는 그렸으나 해로는 따로 그리지 않았다.(이현군)

  • 여산부 (礪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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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은 礪良縣과 朗山縣이 합쳐져 생긴 지명이다. 현재의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가 읍치에 해당하며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 논산군 연무읍 일부가 관할 구역이었다. 읍치 중심부를 1번 국도가 통과하며 호남고속국도 여산휴게소 북서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작은 군현으로 이 지도도 아주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天壺山으로 표시된 호산이 진산이 된다. 근처에 보물 177호 천호동굴이 있다. 현재 여산리 동남쪽 행정구역명이 호산리가 된다. 그 남쪽에 門峙가 표시되었는데 현재 문드러미재라고 불리는 곳이다. 용화산은 여산면 남서쪽의 342m의 산이다. 천호산은 여산 읍치의 동남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는 다르게 표시되었다. 그 맥이 읍치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용화산 서쪽에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430.2m의 미륵산이 있고 익산미륵산성이 있었다. 그 북쪽에 있는 것이 이 지도에 표시된 심곡사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팔괘정, 죽림서원, 해창이 함께 그려져 있다. 팔괘정은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던 정자로 인조 때 김장생이 황산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세운 정자로 창살을 八卦로 만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죽림서원은 그 앞에 있던 서원으로 처음에는 황산서원으로 불렸다. 1626년(인조 4)에 처음 지었으며 1665년(현종 6)에 죽림서원으로 사액받았다. 해창은 이 지역이 바다와 접한 곳이라 붙여진 것이다.(이현군)

  • 여산부 주기 (礪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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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은 礪良縣과 朗山縣이 합쳐져 생긴 지명이다. 현재의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가 읍치에 해당하며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 논산군 연무읍 일부가 관할 구역이었다. 읍치 중심부를 1번 국도가 통과하며 호남고속국도 여산휴게소 북서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작은 군현으로 이 지도도 아주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天壺山으로 표시된 호산이 진산이 된다. 근처에 보물 177호 천호동굴이 있다. 현재 여산리 동남쪽 행정구역명이 호산리가 된다. 그 남쪽에 門峙가 표시되었는데 현재 문드러미재라고 불리는 곳이다. 용화산은 여산면 남서쪽의 342m의 산이다. 천호산은 여산 읍치의 동남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는 다르게 표시되었다. 그 맥이 읍치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용화산 서쪽에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430.2m의 미륵산이 있고 익산미륵산성이 있었다. 그 북쪽에 있는 것이 이 지도에 표시된 심곡사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팔괘정, 죽림서원, 해창이 함께 그려져 있다. 팔괘정은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던 정자로 인조 때 김장생이 황산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세운 정자로 창살을 八卦로 만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죽림서원은 그 앞에 있던 서원으로 처음에는 황산서원으로 불렸다. 1626년(인조 4)에 처음 지었으며 1665년(현종 6)에 죽림서원으로 사액받았다. 해창은 이 지역이 바다와 접한 곳이라 붙여진 것이다.(이현군)

  • 영광군 (靈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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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비로 유명한 전라남도 영광군 일대의 지도이다. 읍치는 영광읍 무령리이며 관할범위는 현재의 영광군과 신안군의 임자도, 증도, 무안군의 운남면, 망운면, 장성군의 동화면, 삼계면, 삼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에 많은 섬들이 그려졌는데 그 중 가장 크게 그려진 것이 신안군의 임자도인데 지도에는 荏子鎭으로 표시되었다. 그 오른쪽 위에는 다경진이 그려졌는데 수군만호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목장이 있다. 왼쪽 위의 법성진은 법성면 법성리에 있던 진으로 이곳에도 수군 만호가 있었다. 읍치에는 성곽과 성문이 있고 그 안에 객사 등 건물이 그려졌다. 읍치 오른쪽의 향교는 교촌리 지명으로 남아있다. 진산은 읍치 서쪽의 筽山인데 이 지도에 표시되진 않았다. 법성포진 아래에 구수미진이 표시되었는데 현재도 백수읍 구수리에서 구시미나루터를 찾을 수 있다. 구수면이라고 적힌 곳은 현재의 원불교 성지에 해당하며 그 왼쪽에 표시된 봉대는 875.8의 봉화령으로 불리는 곳이다. 그 아래의 원산면, 염소면으로 표기된 지역을 나누는 하천은 현재의 불갑천이다. 현재의 백수읍 남쪽과 염산면 북쪽에는 곳곳에 鹽田이 발달해 있다. 오른쪽의 불갑면은 현재에도 불갑면으로 불리며 불갑사는 모악리에 있는 사찰로 대웅전이 보물 830호로 지정되었다. 그 아래에는 현재 천연기념물 112호로 지정된 참식나무자생지가 있는 곳이다. 이 밖에 서원, 창, 선창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영광군 주기 (靈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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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비로 유명한 전라남도 영광군 일대의 지도이다. 읍치는 영광읍 무령리이며 관할범위는 현재의 영광군과 신안군의 임자도, 증도, 무안군의 운남면, 망운면, 장성군의 동화면, 삼계면, 삼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에 많은 섬들이 그려졌는데 그 중 가장 크게 그려진 것이 신안군의 임자도인데 지도에는 荏子鎭으로 표시되었다. 그 오른쪽 위에는 다경진이 그려졌는데 수군만호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목장이 있다. 왼쪽 위의 법성진은 법성면 법성리에 있던 진으로 이곳에도 수군 만호가 있었다. 읍치에는 성곽과 성문이 있고 그 안에 객사 등 건물이 그려졌다. 읍치 오른쪽의 향교는 교촌리 지명으로 남아있다. 진산은 읍치 서쪽의 筽山인데 이 지도에 표시되진 않았다. 법성포진 아래에 구수미진이 표시되었는데 현재도 백수읍 구수리에서 구시미나루터를 찾을 수 있다. 구수면이라고 적힌 곳은 현재의 원불교 성지에 해당하며 그 왼쪽에 표시된 봉대는 875.8의 봉화령으로 불리는 곳이다. 그 아래의 원산면, 염소면으로 표기된 지역을 나누는 하천은 현재의 불갑천이다. 현재의 백수읍 남쪽과 염산면 북쪽에는 곳곳에 鹽田이 발달해 있다. 오른쪽의 불갑면은 현재에도 불갑면으로 불리며 불갑사는 모악리에 있는 사찰로 대웅전이 보물 830호로 지정되었다. 그 아래에는 현재 천연기념물 112호로 지정된 참식나무자생지가 있는 곳이다. 이 밖에 서원, 창, 선창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영암군 (靈巖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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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목(금성군)에 포함되는 지금의 금정면, 신북면 일부, 시종면 일부를 제외한 영암군과 해남군의 북일면, 북평면, 옥천면, 송지면, 완도군의 일부 섬을 관할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영암읍 동무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에 그려진 월출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 덕진면은 실제로 읍치의 북쪽이며 월출산은 남쪽에 위치한다. 이 지도는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점을 지도 제작에 적용시킨 것이다. 지도 오른쪽 위에 완도가 표시되었다. 왼쪽 위에 어란진이 보이며 그 아래에 이진진이 그려졌다. 이진진에는 수군만호가 배치되었다. 어란진은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일대가 되며 이진진은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해당한다. 이진리에는 鎭城의 흔적이 남아있다. 어란진과 이율진 중간에 튀어나온 땅모양이 보이는데 그곳이 땅끝 마을로 알려진 토말이다. 근처에 송호리 해수욕장이 남아있다. 토말 남동쪽에 있는 흑일도, 백일도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 북일면의 둔덕치로 표시된 지역이 대둔사가 있는 현재의 두륜산도립공원 지역이다. 읍치 왼쪽에 그려진 월출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안에 도갑사가 있다. 월출산에는 808.7m의 천황봉, 743.1m의 향로봉 등이 있는데 이 지도에서 높이 솟은 산 모양을 회화적으로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도갑사에는 국보 50호로 지정된 해탈문, 보물 89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다.(이현군)

  • 영암군 주기 (靈巖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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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목(금성군)에 포함되는 지금의 금정면, 신북면 일부, 시종면 일부를 제외한 영암군과 해남군의 북일면, 북평면, 옥천면, 송지면, 완도군의 일부 섬을 관할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영암읍 동무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에 그려진 월출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 덕진면은 실제로 읍치의 북쪽이며 월출산은 남쪽에 위치한다. 이 지도는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점을 지도 제작에 적용시킨 것이다. 지도 오른쪽 위에 완도가 표시되었다. 왼쪽 위에 어란진이 보이며 그 아래에 이진진이 그려졌다. 이진진에는 수군만호가 배치되었다. 어란진은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일대가 되며 이진진은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해당한다. 이진리에는 鎭城의 흔적이 남아있다. 어란진과 이율진 중간에 튀어나온 땅모양이 보이는데 그곳이 땅끝 마을로 알려진 토말이다. 근처에 송호리 해수욕장이 남아있다. 토말 남동쪽에 있는 흑일도, 백일도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 북일면의 둔덕치로 표시된 지역이 대둔사가 있는 현재의 두륜산도립공원 지역이다. 읍치 왼쪽에 그려진 월출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안에 도갑사가 있다. 월출산에는 808.7m의 천황봉, 743.1m의 향로봉 등이 있는데 이 지도에서 높이 솟은 산 모양을 회화적으로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도갑사에는 국보 50호로 지정된 해탈문, 보물 89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다.(이현군)

  • 옥과현 (玉果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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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곡성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옥과면, 겸면, 오산면, 입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신라 때에는 추성군(담양)의 영현이었다가 고려 초에는 보성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1914년 군 통합때는 땅을 나누어 담양, 창평에 포함되었다가 지금은 곡성군에 포함된 작은 고을이다. 객사가 표시된 읍치는 옥과면 옥과리 일대에 해당한다. 호남고속국도 옥과 인터체인지 북동쪽이 옛 옥과의 중심부였다. 읍성은 없고 주요 건물만 그리고 있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설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그 맥이 아래로 읍치와 향교로 연결되게 지도에 표현하였다. 객사와 향교는 형국이 분리되게 묘사하였다. 설산은 옥과면 설옥리에 있는 522.6m 높이의 산이다. 왼쪽의 산줄기는 호남정맥에 연결되며 읍치 남쪽의 하천은 현재의 옥과천으로 동북방향으로 흘러 섬진강에 유입된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지점에 고개를 표시하였고 要路, 埋伏處는 따로 표시하였다. 읍치 남쪽의 황산은 옥과면 황산리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의 관음사는 오산면에 있는 486m 높이의 검장산 동쪽에 위치한다. 지나치게 간략하게 그린 지도로 기록에 등장하는 역원, 사찰 등을 그리지 않았다. 해동지도에는 읍치 동쪽에 大富驛, 입평면 남쪽에 會賢亭이 그려졌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으나 설산 근처에 古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이현군)

  • 옥과현 주기 (玉果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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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곡성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옥과면, 겸면, 오산면, 입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신라 때에는 추성군(담양)의 영현이었다가 고려 초에는 보성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1914년 군 통합때는 땅을 나누어 담양, 창평에 포함되었다가 지금은 곡성군에 포함된 작은 고을이다. 객사가 표시된 읍치는 옥과면 옥과리 일대에 해당한다. 호남고속국도 옥과 인터체인지 북동쪽이 옛 옥과의 중심부였다. 읍성은 없고 주요 건물만 그리고 있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설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그 맥이 아래로 읍치와 향교로 연결되게 지도에 표현하였다. 객사와 향교는 형국이 분리되게 묘사하였다. 설산은 옥과면 설옥리에 있는 522.6m 높이의 산이다. 왼쪽의 산줄기는 호남정맥에 연결되며 읍치 남쪽의 하천은 현재의 옥과천으로 동북방향으로 흘러 섬진강에 유입된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지점에 고개를 표시하였고 要路, 埋伏處는 따로 표시하였다. 읍치 남쪽의 황산은 옥과면 황산리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의 관음사는 오산면에 있는 486m 높이의 검장산 동쪽에 위치한다. 지나치게 간략하게 그린 지도로 기록에 등장하는 역원, 사찰 등을 그리지 않았다. 해동지도에는 읍치 동쪽에 大富驛, 입평면 남쪽에 會賢亭이 그려졌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으나 설산 근처에 古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이현군)

  • 옥구현 (沃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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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군산시내, 옥구읍, 옥산면, 옥서면, 회현면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며 읍치는 현재의 군산시내가 아니라 옥구읍 상평리에 해당한다. 상평리에 동문 안 지명이 남아있다. 옥구선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중심지가 바뀐 군현이다. 지도 아래쪽에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은 만경강이며 옥구현의 북쪽에서 금강이 바다로 유입된다. 서쪽에 바다가 그려졌고 그 위에 여러 섬들이 표시되었다.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옥서면 옥봉리와 아래쪽의 비응도는 제방으로 연결되며 그 남쪽의 바다는 모두 매립되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겹겹이 감싸고 있는데 의도적으로 강한 맥세를 표현하고 있다. 읍치 북쪽의 발이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성과 성문을 그리고 그 안에 건물을 그렸는데 일반적으로 읍성 밖에 배치되는 향교가 성 안에 들어가 있는 점이 다른 군현과 차이점이다. 도로망은 남문과 서문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군산이라는 지명은 지도 북쪽에 표시된 羣山鎭에 기원을 둔다. 수군만호가 있었던 群山浦營이다. 그 왼쪽에 七邑海倉은 群山倉으로 옥구, 전주, 진안, 장수, 금구, 태인, 임실 등 7읍의 田稅와 大同米를 계량하여 한양으로 운송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비응도 위의 오식도가 지금 이 지도에서는 섬으로 표시되었으나 현대 지도는 다르게 나타난다. 오식도와 옥서면 사이는 매립되어 군산국가산업단지가 되었다.(이현군)

  • 옥구현 주기 (沃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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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군산시내, 옥구읍, 옥산면, 옥서면, 회현면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며 읍치는 현재의 군산시내가 아니라 옥구읍 상평리에 해당한다. 상평리에 동문 안 지명이 남아있다. 옥구선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중심지가 바뀐 군현이다. 지도 아래쪽에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은 만경강이며 옥구현의 북쪽에서 금강이 바다로 유입된다. 서쪽에 바다가 그려졌고 그 위에 여러 섬들이 표시되었다.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옥서면 옥봉리와 아래쪽의 비응도는 제방으로 연결되며 그 남쪽의 바다는 모두 매립되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겹겹이 감싸고 있는데 의도적으로 강한 맥세를 표현하고 있다. 읍치 북쪽의 발이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성과 성문을 그리고 그 안에 건물을 그렸는데 일반적으로 읍성 밖에 배치되는 향교가 성 안에 들어가 있는 점이 다른 군현과 차이점이다. 도로망은 남문과 서문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군산이라는 지명은 지도 북쪽에 표시된 羣山鎭에 기원을 둔다. 수군만호가 있었던 群山浦營이다. 그 왼쪽에 七邑海倉은 群山倉으로 옥구, 전주, 진안, 장수, 금구, 태인, 임실 등 7읍의 田稅와 大同米를 계량하여 한양으로 운송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비응도 위의 오식도가 지금 이 지도에서는 섬으로 표시되었으나 현대 지도는 다르게 나타난다. 오식도와 옥서면 사이는 매립되어 군산국가산업단지가 되었다.(이현군)

  • 용담현 (龍潭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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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주천면, 안천면, 정천면 일대를 관할범위로 하며 용담면 옥거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龍岡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향교 바로 뒤에 그려진 산이 용강산이다. 읍치 남쪽의 하천에 주자천, 정자천이 적혔는데 지금도 그 이름이 사용된다. 하천 이름에 朱子, 程子를 붙인 점이 이채롭다. 이 두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 伊川으로 유입되는데 금강의 상류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에 좁은 유로가 넓어지면서 島岩이 표시된 곳이 나오는데 읍치의 동쪽, 도암의 남쪽에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주변 지형이 달라졌다. 읍치에는 성곽은 없고 주요 건물만 표시되었는데 향교와 객사가 동일한 형국 안에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읍치 동남쪽에 이름없는 건물이 그려졌는데 三川書院으로 보인다. 용담면 월계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1679(숙종 5)에 사액받았다.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해동지도에는 읍치와 서원 사이에 달계역이 그려졌다. 월계리에 달계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읍치 왼쪽에 龍湫, 臥龍岩 등이 그려졌는데 삼천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 하나가 諸葛亮이다. 유가적 색채가 짙은 명칭인 君子亭, 도가적인 逍遙臺 등의 명칭이 읍치 남쪽에 나란히 표시되었다. 주요 하천과 산에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 지명이 활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읍치 서쪽은 금남정맥으로 연결되는 산줄기가 그려졌는데 埋伏處라고 따로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이현군)

  • 용담현 주기 (龍潭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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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주천면, 안천면, 정천면 일대를 관할범위로 하며 용담면 옥거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龍岡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향교 바로 뒤에 그려진 산이 용강산이다. 읍치 남쪽의 하천에 주자천, 정자천이 적혔는데 지금도 그 이름이 사용된다. 하천 이름에 朱子, 程子를 붙인 점이 이채롭다. 이 두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 伊川으로 유입되는데 금강의 상류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에 좁은 유로가 넓어지면서 島岩이 표시된 곳이 나오는데 읍치의 동쪽, 도암의 남쪽에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주변 지형이 달라졌다. 읍치에는 성곽은 없고 주요 건물만 표시되었는데 향교와 객사가 동일한 형국 안에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읍치 동남쪽에 이름없는 건물이 그려졌는데 三川書院으로 보인다. 용담면 월계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1679(숙종 5)에 사액받았다.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해동지도에는 읍치와 서원 사이에 달계역이 그려졌다. 월계리에 달계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읍치 왼쪽에 龍湫, 臥龍岩 등이 그려졌는데 삼천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 하나가 諸葛亮이다. 유가적 색채가 짙은 명칭인 君子亭, 도가적인 逍遙臺 등의 명칭이 읍치 남쪽에 나란히 표시되었다. 주요 하천과 산에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 지명이 활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읍치 서쪽은 금남정맥으로 연결되는 산줄기가 그려졌는데 埋伏處라고 따로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이현군)

  • 용안현 (龍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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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포함된 용안면, 용동면에 있던 군현으로 용안면의 덕용리, 교동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지도 가운데에 그려진 읍성은 주변 산줄기를 활용한 성곽임을 알 수 있다. 읍성 북쪽의 모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읍성 안에 향교가 그려졌는데 현재의 용안면 교동리이다. 서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주 간선도로에 해당하는데 그 사이에 객사가 그려졌다. 동쪽의 광두원은 용동면 화실리에 해당하며 그 옆의 봉대는 크게 그려졌지만 53m 높이에 불과하다. 현재 봉화산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으며 호남선 철도 용동역 남쪽에 위치한다. 북쪽에 백마강 하류가 적혔는데 백마강은 금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하천이다. 백마강 글씨 오른쪽에 황산대교가 있다. 왼쪽의 청포나루터는 부여군 세도면 청포리와 연결되는 곳이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현재의 부곡천이다. 부곡천 일대와 북쪽의 청포구진, 구대평 일대는 하천변에 있어 농사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비옥한 들이 바다와 잇닿았다”고 이 지역의 형승을 설명하고 있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으나 해동지도에는 왼쪽 은척산 아래에 海倉이 표시되었다. 得成倉으로 용안면 난포리에 있었던 것으로 전라도 인근 고을의 조세를 받아 수로를 통해 한양으로 옮기던 곳이다.(이현군)

  • 용안현 주기 (龍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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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포함된 용안면, 용동면에 있던 군현으로 용안면의 덕용리, 교동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지도 가운데에 그려진 읍성은 주변 산줄기를 활용한 성곽임을 알 수 있다. 읍성 북쪽의 모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읍성 안에 향교가 그려졌는데 현재의 용안면 교동리이다. 서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주 간선도로에 해당하는데 그 사이에 객사가 그려졌다. 동쪽의 광두원은 용동면 화실리에 해당하며 그 옆의 봉대는 크게 그려졌지만 53m 높이에 불과하다. 현재 봉화산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으며 호남선 철도 용동역 남쪽에 위치한다. 북쪽에 백마강 하류가 적혔는데 백마강은 금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하천이다. 백마강 글씨 오른쪽에 황산대교가 있다. 왼쪽의 청포나루터는 부여군 세도면 청포리와 연결되는 곳이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현재의 부곡천이다. 부곡천 일대와 북쪽의 청포구진, 구대평 일대는 하천변에 있어 농사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비옥한 들이 바다와 잇닿았다”고 이 지역의 형승을 설명하고 있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으나 해동지도에는 왼쪽 은척산 아래에 海倉이 표시되었다. 得成倉으로 용안면 난포리에 있었던 것으로 전라도 인근 고을의 조세를 받아 수로를 통해 한양으로 옮기던 곳이다.(이현군)

  • 운봉현 (雲峯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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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원시에 포함된 군현으로 운봉읍을 중심으로 산동면, 산내면, 아영면, 인월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표시된 읍치는 운봉읍 서천리, 동천리 일대에 해당한다. 향교는 읍치와 멀리 떨어진 것 처럼 표시되었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주촌천, 남천, 운봉천으로 읍치 북쪽에 모여 광천으로 이름붙여지며 동북쪽으로 흘러 지도 오른쪽의 만수천으로 유입된다.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군현으로 지도 오른쪽 아래에 지리산이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에 반야봉이 표시되었는데 1732m 높이의 봉우리이다. 그 왼쪽에 표시된 노적봉은 1507m 높이로 현재의 노고단으로 추정된다. 노고단-반야봉-천왕봉(1915.4m)이 지리산을 종주하는 경로이다. 지리산 북쪽에 표시된 실상사는 산내면 대정리의 사찰로 사적 309호에 해당하며 보물로 지정된 탑, 석장생 등이 보존되고 있다. 실상사 동쪽 만수천과 평행하게 형성된 도로는 현재의 60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그 옆에 함양과의 경계라고 적혔는데 경상도와 잇닿아 있는 군현이다. 읍치 북쪽에 성산, 고성터, 古城 등이 그려졌다. 험준한 지형과 더불어 험애, 매복처 등이 표시되었다. 이 고을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왜적을 무찔렀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읍치 북쪽에 표시된 碑殿이다. 사적 104호로 지정된 황산대첩비는 현재 운봉읍에 보존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해동지도에는 동면 곳곳에 농사를 위한 제언이 그려졌으며 碑殿 동쪽에 引月驛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인월면 인월리 일대로 추정된다.(이현군)

  • 운봉현 주기 (雲峯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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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원시에 포함된 군현으로 운봉읍을 중심으로 산동면, 산내면, 아영면, 인월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표시된 읍치는 운봉읍 서천리, 동천리 일대에 해당한다. 향교는 읍치와 멀리 떨어진 것 처럼 표시되었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주촌천, 남천, 운봉천으로 읍치 북쪽에 모여 광천으로 이름붙여지며 동북쪽으로 흘러 지도 오른쪽의 만수천으로 유입된다.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군현으로 지도 오른쪽 아래에 지리산이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에 반야봉이 표시되었는데 1732m 높이의 봉우리이다. 그 왼쪽에 표시된 노적봉은 1507m 높이로 현재의 노고단으로 추정된다. 노고단-반야봉-천왕봉(1915.4m)이 지리산을 종주하는 경로이다. 지리산 북쪽에 표시된 실상사는 산내면 대정리의 사찰로 사적 309호에 해당하며 보물로 지정된 탑, 석장생 등이 보존되고 있다. 실상사 동쪽 만수천과 평행하게 형성된 도로는 현재의 60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그 옆에 함양과의 경계라고 적혔는데 경상도와 잇닿아 있는 군현이다. 읍치 북쪽에 성산, 고성터, 古城 등이 그려졌다. 험준한 지형과 더불어 험애, 매복처 등이 표시되었다. 이 고을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왜적을 무찔렀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읍치 북쪽에 표시된 碑殿이다. 사적 104호로 지정된 황산대첩비는 현재 운봉읍에 보존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해동지도에는 동면 곳곳에 농사를 위한 제언이 그려졌으며 碑殿 동쪽에 引月驛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인월면 인월리 일대로 추정된다.(이현군)

  • 익산군 (益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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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오른쪽에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금마저수지 남쪽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 서고도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금의 익산시 삼기면, 춘포면, 금마면, 왕궁면의 북쪽 지역, 익산시 팔봉동 일대가 익산군의 관할 범위였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 등을 그렸는데 향교는 1번 국도 북쪽에 지금도 남아 있다. 읍치 북쪽의 건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오른쪽의 도순산은 금마면 도순리에 있다. 지도 위쪽에 미륵산은 430.2m의 산으로 이곳에 箕準古城이 표시되었는데 현재 익산미륵산성으로 불리는 곳이다. 箕準은 고조선의 왕이며 위만에게 쫓겨 바다를 통해 이곳에 도착하여 馬韓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금마면 지명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곳을 병합하고 金馬渚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기준고성 남쪽에는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사적 150호 미륵사지가 있다. 석탑이 국보 11호, 당간지주가 보물 236호로 지정된 곳이다. 미륵사는 서동요에 등장하는 백제의 武康王과 신라 출신의 善花夫人이 지도 위쪽에 표시된 獅子寺에 가는 길에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이 곳에서 세 미륵불이 나왔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선화부인의 간청으로 이곳에 미륵사가 들어서게 되었다. 오금산 아래 著英王都는 현재의 왕궁면 왕궁리 일대이다. 5층 석탑이 보물 44호로 지정되었다.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보다 기준성에서 오금산으로 연결되는 맥세를 더 강하게 표현한 점이 이색적이다. 왼쪽 위에 표시된 華山書院은 김장생과 송시열을 배향하던 곳이다.(이현군)

  • 익산군 주기 (益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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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오른쪽에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금마저수지 남쪽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 서고도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금의 익산시 삼기면, 춘포면, 금마면, 왕궁면의 북쪽 지역, 익산시 팔봉동 일대가 익산군의 관할 범위였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 등을 그렸는데 향교는 1번 국도 북쪽에 지금도 남아 있다. 읍치 북쪽의 건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오른쪽의 도순산은 금마면 도순리에 있다. 지도 위쪽에 미륵산은 430.2m의 산으로 이곳에 箕準古城이 표시되었는데 현재 익산미륵산성으로 불리는 곳이다. 箕準은 고조선의 왕이며 위만에게 쫓겨 바다를 통해 이곳에 도착하여 馬韓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금마면 지명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곳을 병합하고 金馬渚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기준고성 남쪽에는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사적 150호 미륵사지가 있다. 석탑이 국보 11호, 당간지주가 보물 236호로 지정된 곳이다. 미륵사는 서동요에 등장하는 백제의 武康王과 신라 출신의 善花夫人이 지도 위쪽에 표시된 獅子寺에 가는 길에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이 곳에서 세 미륵불이 나왔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선화부인의 간청으로 이곳에 미륵사가 들어서게 되었다. 오금산 아래 著英王都는 현재의 왕궁면 왕궁리 일대이다. 5층 석탑이 보물 44호로 지정되었다.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보다 기준성에서 오금산으로 연결되는 맥세를 더 강하게 표현한 점이 이색적이다. 왼쪽 위에 표시된 華山書院은 김장생과 송시열을 배향하던 곳이다.(이현군)

  • 임실현 (任實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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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임실군에서 남원부에 속했던 삼계면, 지사면 일부, 오수면 일부를 제외한 임실읍, 신평면, 신덕면, 관촌면, 성수면, 운암면, 청웅면, 강진면, 덕치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읍치는 지도 가운데 현내면으로 적힌 곳으로 현재의 임실읍 성가리에 해당한다. 현재 임실천으로 불리는 하천가에 벽운루를 앞에 두고 관아 건물이 그려졌으나 성곽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가 겹겹이 감싸는듯한 느낌을 준다. 향교와 읍치가 같은 형국 안에 들어서 있다. 읍치의 배경이 되는 봉황산 뒤쪽에 표시된 龍撓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에 구고면이 적혔는데 구고폐현이 있던 곳이다. 청웅면 구고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청웅면 향교리는 옛 구고현의 향교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 왼쪽에 서창이 표시되었는데 강진면 백련리에 서창 지명이 남아있다. 그 아래에 갈담교, 갈담원이 표시되었는데 강진면 갈담리 일대로 추정되며 그 앞의 하천은 현재 갈담천으로 불린다. 그 위에 표시된 백련산은 강진면과 청웅면의 경계에 위치한 754m 높이의 산이다. 갈담교 서북쪽, 백련산 서남쪽에 섬진강댐이 들어서면서 지도 왼쪽 위 지역은 현재 수몰되었고 그 자리에 옥정호(운암호)가 들어서 있다. 읍치 남쪽의 임실천이 북쪽의 조운천으로 유입되어 다시 서남쪽의 섬진강이 되는 하천구조이다. 지도 오른쪽 위 조운천변 현재의 관촌면에 국민관광지인 사선대가 있다. 주요 도로망이 연결되는 곳에 고개가 표시되었고 사찰, 서원이 그려졌다. (이현군)

  • 임실현 주기 (任實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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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임실군에서 남원부에 속했던 삼계면, 지사면 일부, 오수면 일부를 제외한 임실읍, 신평면, 신덕면, 관촌면, 성수면, 운암면, 청웅면, 강진면, 덕치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읍치는 지도 가운데 현내면으로 적힌 곳으로 현재의 임실읍 성가리에 해당한다. 현재 임실천으로 불리는 하천가에 벽운루를 앞에 두고 관아 건물이 그려졌으나 성곽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가 겹겹이 감싸는듯한 느낌을 준다. 향교와 읍치가 같은 형국 안에 들어서 있다. 읍치의 배경이 되는 봉황산 뒤쪽에 표시된 龍撓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에 구고면이 적혔는데 구고폐현이 있던 곳이다. 청웅면 구고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청웅면 향교리는 옛 구고현의 향교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 왼쪽에 서창이 표시되었는데 강진면 백련리에 서창 지명이 남아있다. 그 아래에 갈담교, 갈담원이 표시되었는데 강진면 갈담리 일대로 추정되며 그 앞의 하천은 현재 갈담천으로 불린다. 그 위에 표시된 백련산은 강진면과 청웅면의 경계에 위치한 754m 높이의 산이다. 갈담교 서북쪽, 백련산 서남쪽에 섬진강댐이 들어서면서 지도 왼쪽 위 지역은 현재 수몰되었고 그 자리에 옥정호(운암호)가 들어서 있다. 읍치 남쪽의 임실천이 북쪽의 조운천으로 유입되어 다시 서남쪽의 섬진강이 되는 하천구조이다. 지도 오른쪽 위 조운천변 현재의 관촌면에 국민관광지인 사선대가 있다. 주요 도로망이 연결되는 곳에 고개가 표시되었고 사찰, 서원이 그려졌다. (이현군)

  • 임피현 (臨陂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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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북쪽의 하천은 금강이며 아래쪽의 하천은 만경강이다. 현재의 군산시에서 임피면, 개정면, 성산면, 대야면, 나포면, 서수면 일대를 그렸으며 임피면 읍내리가 읍치에 해당한다. 현재의 읍내리에 성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 지도 중심부의 읍성 안을 가리킨다. 전라도 군현지도에 읍성을 그리지 않은 곳이 많은데 북쪽 산세와 연결된 성곽과 성문이 잘 나타나고 있다. 향교는 읍성 밖에 위치하는게 일반적인데 이 지도에서는 읍성 안에 위치한 점이 특이하다. 읍성 북쪽에 취성산이 표시되어 鎭山으로 보이지만 동국여지승람에는 서쪽의 芮山이 진산으로 기록되었다. 취성산은 임피면 취산리와 서수면, 성산면의 경계에 위치한 205m 높이의 산이다. 지도 왼쪽 위에 서시포, 오성산이 표시되었는데 서시포는 나포면 서포리 일대이며 오성산은 성산면에 있는 227.7m의 산이다. 서시포와 오성산 사이로 서해안 고속국도가 통과한다. 서시포 위에 水廣五里가 적혔다. 금강의 하류 지역으로 오성산 서북쪽에 금강하구둑이 위치한다. 오른쪽 위의 나리포는 현재의 나포면 나포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돌을 세워 놓은 듯한 그림을 그리고 입석이라고 표시하였는데 현재의 대야면 남쪽 만경강가에 입석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29번 국도상의 만경대교 동북쪽에 있다. 그 위쪽의 鳳岩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임피면 미원리에 있었다.(이현군)

  • 임피현 주기 (臨陂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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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북쪽의 하천은 금강이며 아래쪽의 하천은 만경강이다. 현재의 군산시에서 임피면, 개정면, 성산면, 대야면, 나포면, 서수면 일대를 그렸으며 임피면 읍내리가 읍치에 해당한다. 현재의 읍내리에 성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 지도 중심부의 읍성 안을 가리킨다. 전라도 군현지도에 읍성을 그리지 않은 곳이 많은데 북쪽 산세와 연결된 성곽과 성문이 잘 나타나고 있다. 향교는 읍성 밖에 위치하는게 일반적인데 이 지도에서는 읍성 안에 위치한 점이 특이하다. 읍성 북쪽에 취성산이 표시되어 鎭山으로 보이지만 동국여지승람에는 서쪽의 芮山이 진산으로 기록되었다. 취성산은 임피면 취산리와 서수면, 성산면의 경계에 위치한 205m 높이의 산이다. 지도 왼쪽 위에 서시포, 오성산이 표시되었는데 서시포는 나포면 서포리 일대이며 오성산은 성산면에 있는 227.7m의 산이다. 서시포와 오성산 사이로 서해안 고속국도가 통과한다. 서시포 위에 水廣五里가 적혔다. 금강의 하류 지역으로 오성산 서북쪽에 금강하구둑이 위치한다. 오른쪽 위의 나리포는 현재의 나포면 나포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돌을 세워 놓은 듯한 그림을 그리고 입석이라고 표시하였는데 현재의 대야면 남쪽 만경강가에 입석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29번 국도상의 만경대교 동북쪽에 있다. 그 위쪽의 鳳岩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임피면 미원리에 있었다.(이현군)

  • 장성부 (長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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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장성군에서 삼계면, 삼서면, 동화면은 조선시대 靈光郡의 관할 범위에 속하므로 이 세 면을 제외한 지역이 관할범위에 속한다. 객사가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장성읍 성산리 일대이며 이 지역을 지나는 1번 국도와 호남고속국도의 동쪽에 위치한다. 읍치 북쪽 가까이에 있는 금오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개천으로 읍치 아래의 장성천과 합류되어 황룡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북쪽 지역에는 장섬댐의 건설로 현재는 장성호가 형성되었다. 장성호 북쪽으로 내장산 국립공원이 있는데 그 안에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백양사와 입암산성이 있다. 입암산성은 기존에 있던 石城을 선조대에 새로 수축한 것이다. 그 안에 객사, 장대, 창, 별영소 등이 표시되었다. 왼쪽에 동서북 삼면이 험하다고 기록되었다. 그 아래 蛾眉山은 장성호 서쪽 북하면 수성리의 383m의 현재의 성미산을 그린 것이다. 회화적으로 묘사한 점이 눈에 띈다. 해동지도에는 蛾嵋岩으로 표시하고 불상 모양을 그려놓았다. 지도 왼쪽 아래의 필봉서원은 해동지도에는 筆岩書院으로 표시된 곳으로 현재의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것이다. 金麟厚를 배향한 곳으로 소장된 문서들이 보물 587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도로를 표시하고 북쪽으로 연결되는 주요 고개에는 險隘라고 적었다. 읍치 북쪽으로 청암역, 驛館을 표시하였다. 장성부는 1600년(선조 33)에 남쪽의 진원현을 병합하면서 읍치를 이전의 장성과 진원의 중간지점으로 옮겨서 이 지도의 중심부인 성산리 일대가 읍치지역이 되었는데 지도 왼쪽 북면의 고장성원은 옛 장성의 중심지를 보여주는 것이다.(이현군)

  • 장성부 주기 (長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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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장성군에서 삼계면, 삼서면, 동화면은 조선시대 靈光郡의 관할 범위에 속하므로 이 세 면을 제외한 지역이 관할범위에 속한다. 객사가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장성읍 성산리 일대이며 이 지역을 지나는 1번 국도와 호남고속국도의 동쪽에 위치한다. 읍치 북쪽 가까이에 있는 금오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개천으로 읍치 아래의 장성천과 합류되어 황룡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북쪽 지역에는 장섬댐의 건설로 현재는 장성호가 형성되었다. 장성호 북쪽으로 내장산 국립공원이 있는데 그 안에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백양사와 입암산성이 있다. 입암산성은 기존에 있던 石城을 선조대에 새로 수축한 것이다. 그 안에 객사, 장대, 창, 별영소 등이 표시되었다. 왼쪽에 동서북 삼면이 험하다고 기록되었다. 그 아래 蛾眉山은 장성호 서쪽 북하면 수성리의 383m의 현재의 성미산을 그린 것이다. 회화적으로 묘사한 점이 눈에 띈다. 해동지도에는 蛾嵋岩으로 표시하고 불상 모양을 그려놓았다. 지도 왼쪽 아래의 필봉서원은 해동지도에는 筆岩書院으로 표시된 곳으로 현재의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것이다. 金麟厚를 배향한 곳으로 소장된 문서들이 보물 587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도로를 표시하고 북쪽으로 연결되는 주요 고개에는 險隘라고 적었다. 읍치 북쪽으로 청암역, 驛館을 표시하였다. 장성부는 1600년(선조 33)에 남쪽의 진원현을 병합하면서 읍치를 이전의 장성과 진원의 중간지점으로 옮겨서 이 지도의 중심부인 성산리 일대가 읍치지역이 되었는데 지도 왼쪽 북면의 고장성원은 옛 장성의 중심지를 보여주는 것이다.(이현군)

  • 장수현 (長水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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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장수군 중에서 장수읍, 장계면, 천천면, 계남면, 계북면 일대에 해당하는 군현으로 겹쳐 그린 산줄기 아래 객사를 포함한 건물들이 그려진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 일대이다. 향교와 읍치가 동일한 형국안에 표시되고 있다. 향교는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읍치 동쪽의 靈鷲山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 오른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으로 덕유산에서 뻗어내려온 맥이 육십령, 백운산으로 연결된다. 장수현은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하며 이 산줄기가 영호남의 경계가 된다. 지도 오른쪽 위에 六十峙가 표시되었는데 현재 26번 국도 상의 위령탑 근처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에 水分院이 표시되었는데 장수읍 수분리 일대에 위치하며 그 아래에 고개가 수분재가 된다. 이곳을 기준으로 동쪽은 남쪽의 섬진강으로 유입되고 서쪽은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유입된다. 읍치 서쪽에 표시된 하천이 금강의 최상류가 된다. 읍치 북쪽에 임현내면, 계창, 임북면, 임남면 등이 표시되었는데 長溪廢縣이 있던 곳이다. 현재의 장계면 장계리 일대가 장계 폐현의 중심부로 추정되며 지금은 계남면, 계북면 등으로 불린다. 왼쪽의 신광사는 신광사는 현재에도 남아있는 사찰이며 읍치 북쪽 하천변에 그려진 창계서원은 황희 정승을 모신 곳이다.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과 함께 순국한 논개가 이 고장 출신으로 현재 장수읍에 논개사당이 있다. 험준한 지형을 통과하여 주변 지역과 연결되므로 곳곳에 고개를 표시하고 그 이름을 적어놓았다.(이현군)

  • 장수현 주기 (長水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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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장수군 중에서 장수읍, 장계면, 천천면, 계남면, 계북면 일대에 해당하는 군현으로 겹쳐 그린 산줄기 아래 객사를 포함한 건물들이 그려진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 일대이다. 향교와 읍치가 동일한 형국안에 표시되고 있다. 향교는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읍치 동쪽의 靈鷲山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 오른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으로 덕유산에서 뻗어내려온 맥이 육십령, 백운산으로 연결된다. 장수현은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하며 이 산줄기가 영호남의 경계가 된다. 지도 오른쪽 위에 六十峙가 표시되었는데 현재 26번 국도 상의 위령탑 근처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에 水分院이 표시되었는데 장수읍 수분리 일대에 위치하며 그 아래에 고개가 수분재가 된다. 이곳을 기준으로 동쪽은 남쪽의 섬진강으로 유입되고 서쪽은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유입된다. 읍치 서쪽에 표시된 하천이 금강의 최상류가 된다. 읍치 북쪽에 임현내면, 계창, 임북면, 임남면 등이 표시되었는데 長溪廢縣이 있던 곳이다. 현재의 장계면 장계리 일대가 장계 폐현의 중심부로 추정되며 지금은 계남면, 계북면 등으로 불린다. 왼쪽의 신광사는 신광사는 현재에도 남아있는 사찰이며 읍치 북쪽 하천변에 그려진 창계서원은 황희 정승을 모신 곳이다.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과 함께 순국한 논개가 이 고장 출신으로 현재 장수읍에 논개사당이 있다. 험준한 지형을 통과하여 주변 지역과 연결되므로 곳곳에 고개를 표시하고 그 이름을 적어놓았다.(이현군)

  • 장흥부 (長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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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에는 長興縣으로 등장하는 전라남도 장흥군 일대의 지도이다. 읍치는 장흥읍 남동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현재의 장흥군과 동남쪽에 연접한 보성군 웅치면, 회천면, 완도군 일부 섬이 관할 범위이다. 산줄기와 읍성을 그리는 방식은 다르지만 지도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동일하다. 長寧城으로 불리기도 하는 읍성 안에는 객사를 비롯한 주요한 건물을 그렸으며 성 밖에는 성황단, 사직단, 여단은 그리지 않고 향교만 그렸다. 향교는 장흥읍 교촌리에 현재 남아있다. 읍성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탐진강이다. 진산은 읍치의 서북쪽에 위치한 561.2m의 수인산으로 산성이 남아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회령진은 수군만호가 배치된 곳으로 성곽 형태로 되어있다.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회령리에 해당한다. 예전에 회령현이 있던 지역이다. 근처에 국민관광지인 율포 해수욕장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지역의 형승을 “땅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지도 오른쪽에 바다와 섬들을 그려넣었다. 해안에 海倉과 船所가 표시되었는데 지도 오른쪽의 해창은 현재의 안량면 해창리에 있던 것이다. 지도 북쪽에 그려진 보림사는 장흥궁 뉴치면에 있는 사찰로 국보 44호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117호 철조비로사나불좌상과 보물인 동부도, 서부도 등이 소장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천관사는 723.1m의 천관산 북쪽에 위치하는데 보물 795호 삼층석탑이 있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용산면 월송리는 조선백자도요지가 존재했던 곳이다. 서원, 봉수대, 고개, 도로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장흥부 주기 (長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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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에는 長興縣으로 등장하는 전라남도 장흥군 일대의 지도이다. 읍치는 장흥읍 남동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현재의 장흥군과 동남쪽에 연접한 보성군 웅치면, 회천면, 완도군 일부 섬이 관할 범위이다. 산줄기와 읍성을 그리는 방식은 다르지만 지도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동일하다. 長寧城으로 불리기도 하는 읍성 안에는 객사를 비롯한 주요한 건물을 그렸으며 성 밖에는 성황단, 사직단, 여단은 그리지 않고 향교만 그렸다. 향교는 장흥읍 교촌리에 현재 남아있다. 읍성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탐진강이다. 진산은 읍치의 서북쪽에 위치한 561.2m의 수인산으로 산성이 남아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회령진은 수군만호가 배치된 곳으로 성곽 형태로 되어있다.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회령리에 해당한다. 예전에 회령현이 있던 지역이다. 근처에 국민관광지인 율포 해수욕장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지역의 형승을 “땅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지도 오른쪽에 바다와 섬들을 그려넣었다. 해안에 海倉과 船所가 표시되었는데 지도 오른쪽의 해창은 현재의 안량면 해창리에 있던 것이다. 지도 북쪽에 그려진 보림사는 장흥궁 뉴치면에 있는 사찰로 국보 44호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117호 철조비로사나불좌상과 보물인 동부도, 서부도 등이 소장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천관사는 723.1m의 천관산 북쪽에 위치하는데 보물 795호 삼층석탑이 있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용산면 월송리는 조선백자도요지가 존재했던 곳이다. 서원, 봉수대, 고개, 도로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전라도 (全羅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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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지승 지도의 전라도를 그린 지도이다. 중심지인 전주는 색을 달리하여 원 안에 크게 표시하고 다른 군현은 네모 안에 그 이름을 적었다. 군사 중심지인 兵營, 左水營, 右營은 구별되게 원 안에 적었다. 전라도에 대한 설명 첫부분에 원래 馬韓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적어두었다. 주요 산물을 기록하였으며 나주에는 南海神祠가 있었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남해의 섬들을 자세하게 표시하였고 제주도의 제주, 대정, 정의현을 표시하였다. 현재의 제주도는 고려 초에 전라도에 포함된 것으로 적었다. 서해안을 따라 여러 鎭을 그려넣었으며 船所도 표시하였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진행되는 고군산군도가 지도 왼쪽 위에 보이며 그 아래 여러 섬들을 표시하였다. 만경강, 영산강, 섬진강을 그렸으나 강 이름은 적지 않고 나루터 이름만 적었다. 군현간의 도로를 표시하고 역원명을 적어넣었다. 주요한 군사 요충지인 산성, 목장을 표시하였다. 주요 사찰명은 적었으나 서원의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군현명 옆에는 주요 산 명칭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 군현 중에서 현재의 전라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錦山郡과 珍山郡이다. 금산군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일대이며 진산군은 금산군 진산면에 읍치가 있었다. 동쪽에는 경상도와 경계가 되는 하동, 진주, 안의를 표시하고 지리산, 섬진을 따로 적었다. 위쪽에는 충청도의 경계가 되는 군현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전라도 주기 (全羅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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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지승 지도의 전라도를 그린 지도이다. 중심지인 전주는 색을 달리하여 원 안에 크게 표시하고 다른 군현은 네모 안에 그 이름을 적었다. 군사 중심지인 兵營, 左水營, 右營은 구별되게 원 안에 적었다. 전라도에 대한 설명 첫부분에 원래 馬韓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적어두었다. 주요 산물을 기록하였으며 나주에는 南海神祠가 있었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남해의 섬들을 자세하게 표시하였고 제주도의 제주, 대정, 정의현을 표시하였다. 현재의 제주도는 고려 초에 전라도에 포함된 것으로 적었다. 서해안을 따라 여러 鎭을 그려넣었으며 船所도 표시하였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진행되는 고군산군도가 지도 왼쪽 위에 보이며 그 아래 여러 섬들을 표시하였다. 만경강, 영산강, 섬진강을 그렸으나 강 이름은 적지 않고 나루터 이름만 적었다. 군현간의 도로를 표시하고 역원명을 적어넣었다. 주요한 군사 요충지인 산성, 목장을 표시하였다. 주요 사찰명은 적었으나 서원의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군현명 옆에는 주요 산 명칭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 군현 중에서 현재의 전라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錦山郡과 珍山郡이다. 금산군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일대이며 진산군은 금산군 진산면에 읍치가 있었다. 동쪽에는 경상도와 경계가 되는 하동, 진주, 안의를 표시하고 지리산, 섬진을 따로 적었다. 위쪽에는 충청도의 경계가 되는 군현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전라도 총론 (全羅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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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전라도 총론 (全羅道 總論)1면입니다.

  • 전라도 총론 (全羅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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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전라도 총론 (全羅道 總論)2면입니다.

  • 전주부 (全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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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 북쪽에는 건지산, 남쪽에는 곤지산이 표시되었고 그 중간에 읍성을 그렸는데 각 성문에 옹성을 만든 점이 이색적이다. 건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백제의 完山이었으며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읍치 서쪽에 完山이 표시되었다. 전주부 읍치에 있었던 경기전(보물 931호), 전주객사(보물 583호), 풍남문(보물 308호) 등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읍성 안에 眞殿이라고 표시된 것이 경기전이다. 읍성 안에서도 따로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으로 차별화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御容 즉 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조선 태조의 선대가 전주 이씨이기 때문에 전주는 조선의 豊沛라고 불리던 곳인데 한고조 유방의 고향을 딴 것이다. 읍성의 남문을 풍남문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래쪽에 胎峯이 표시되었는데 전주에는 왕실의 胎가 많이 모셔졌다. 읍성 남쪽에는 군사 중심지인 中營이 보인다. 읍성이 있었던 지역이 현재에도 중심부에 해당하며 지금은 한옥마을로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의 이목대에 오르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전주천이며 북쪽의 하천은 소양강과 만경강이다. 지도 왼쪽 위의 만경강변의 新倉津은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있던 나루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덕진제는 현재 덕진구의 제언이다. 그 오른쪽에 위봉산성이 보인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도로를 표시하고 삼례역, 역관 등의 역원, 고개, 險隘 등을 그려넣었다.(이현군)

  • 전주부 주기 (全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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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 북쪽에는 건지산, 남쪽에는 곤지산이 표시되었고 그 중간에 읍성을 그렸는데 각 성문에 옹성을 만든 점이 이색적이다. 건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백제의 完山이었으며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읍치 서쪽에 完山이 표시되었다. 전주부 읍치에 있었던 경기전(보물 931호), 전주객사(보물 583호), 풍남문(보물 308호) 등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읍성 안에 眞殿이라고 표시된 것이 경기전이다. 읍성 안에서도 따로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으로 차별화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御容 즉 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조선 태조의 선대가 전주 이씨이기 때문에 전주는 조선의 豊沛라고 불리던 곳인데 한고조 유방의 고향을 딴 것이다. 읍성의 남문을 풍남문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래쪽에 胎峯이 표시되었는데 전주에는 왕실의 胎가 많이 모셔졌다. 읍성 남쪽에는 군사 중심지인 中營이 보인다. 읍성이 있었던 지역이 현재에도 중심부에 해당하며 지금은 한옥마을로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의 이목대에 오르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전주천이며 북쪽의 하천은 소양강과 만경강이다. 지도 왼쪽 위의 만경강변의 新倉津은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있던 나루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덕진제는 현재 덕진구의 제언이다. 그 오른쪽에 위봉산성이 보인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도로를 표시하고 삼례역, 역관 등의 역원, 고개, 險隘 등을 그려넣었다.(이현군)

  • 정읍현 (井邑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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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정읍시내, 북면, 입암면을 관할하였다. 지도 왼쪽의 읍치는 정읍시내 미창동 일대에 해당한다. 객사와 향교가 같은 영역 안에 그려졌으며 읍치 오른쪽에 두 개의 立石이 표시되었다. 호남고속국도 정읍 인터체인지 동쪽 지역에 위치하였다. 행상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망부석에 올라 지은 井邑詞로 유명한 군현이다. 현재 정읍시내에 망부상이 세워져 있다. 정읍천이 읍치 주위를 흘러 북쪽의 동진강으로 유입된다. 오른쪽 아래에 蘆嶺, 小蘆嶺이 표시되었다. 우리나라 산맥 표시 중 노령산맥은 이곳의 지명을 따 만든 것이다. 호남선 철도 노령역 인근으로 노령 제 1터널, 제 2터널, 호남고속국도의 호남터널 지역이다. 고개 길이 사나워 도적이 떼를 지어 있었서 蘆嶺堡를 설치한 적이 있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노령 위에 표시된 笠巖은 내장산 국립공원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626.1m 높이의 산으로 현재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곳에 산성이 있었으며 이 지도에 산성이 그려졌는데 이곳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입암면이 된 것이다. 忠烈祠는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곳으로 1689년(숙종 15)에 세워졌다. 왼쪽 아래의 고암서원은 송시열을 배향한 곳으로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았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곳에 고개이름을 적고 險隘라고 표시하였다. 도로를 그리고 역원을 표시하지 않았는데 입암면 천원리에 川原驛이 있었다. 노령을 넘기 전에 머물던 역원이다. (이현군)

  • 정읍현 주기 (井邑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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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정읍시내, 북면, 입암면을 관할하였다. 지도 왼쪽의 읍치는 정읍시내 미창동 일대에 해당한다. 객사와 향교가 같은 영역 안에 그려졌으며 읍치 오른쪽에 두 개의 立石이 표시되었다. 호남고속국도 정읍 인터체인지 동쪽 지역에 위치하였다. 행상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망부석에 올라 지은 井邑詞로 유명한 군현이다. 현재 정읍시내에 망부상이 세워져 있다. 정읍천이 읍치 주위를 흘러 북쪽의 동진강으로 유입된다. 오른쪽 아래에 蘆嶺, 小蘆嶺이 표시되었다. 우리나라 산맥 표시 중 노령산맥은 이곳의 지명을 따 만든 것이다. 호남선 철도 노령역 인근으로 노령 제 1터널, 제 2터널, 호남고속국도의 호남터널 지역이다. 고개 길이 사나워 도적이 떼를 지어 있었서 蘆嶺堡를 설치한 적이 있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노령 위에 표시된 笠巖은 내장산 국립공원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626.1m 높이의 산으로 현재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곳에 산성이 있었으며 이 지도에 산성이 그려졌는데 이곳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입암면이 된 것이다. 忠烈祠는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곳으로 1689년(숙종 15)에 세워졌다. 왼쪽 아래의 고암서원은 송시열을 배향한 곳으로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았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곳에 고개이름을 적고 險隘라고 표시하였다. 도로를 그리고 역원을 표시하지 않았는데 입암면 천원리에 川原驛이 있었다. 노령을 넘기 전에 머물던 역원이다. (이현군)

  • 제주목 (濟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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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위쪽에는 중국, 오키나와, 일본 등이 그려졌고 아래쪽에는 전라도 해안, 진도, 완도 등의 여러 섬이 그려졌다. 육지에서 바라 본 제주의 모습을 그렸다. 조선시대 제주의 군현은 지도 아래쪽 북쪽의 제주목, 지도의 왼쪽 위 동남 방향에 정의현, 오른쪽 서남 방향에 대정현이 위치한 구조이다. 그래서 해동지도에서는 濟州三縣圖로 이 세 군현을 함께 그린 것이다. 제주 읍성은 제주시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 오라동에 해당하며 정의현은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에 읍치가 있었다. 성읍민속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대정현 읍치는 대정읍 안성리, 인성리, 보성리 일대에 해당한다. 제주목이 중심부에 해당하므로 읍성 안에 많은 건물이 그려졌다. 다른 군현지도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作廳, 鄕廳, 明倫堂 등이 보인다. 대정 읍성에는 객사가 보이지만, 정의읍성에는 객사가 그려지지 않았다. 지도의 가운데 부분에 한라산과 백록담이 그려졌고 주변에 ‘岳’으로 표시된 오름은 기생화산을 그린 것이다. 한라산 주변에는 馬場이 여러 군데 보인다. 지도 위쪽의 西歸所가 현재의 서귀포시 일대이다. 서귀소 근처에 천지연폭포가 지도에 등장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果園이 표시되었다. 왼쪽 위 해안에 솟은 봉우리는 성산일출봉이다. 제주도의 하천은 한라산에서 발원하는데 그 모습을 그렸다. 마을은 해안의 용천대를 따라 형성되기 때문에 군현의 읍치가 해안에 위치한 특징이 보인다. 지도에 도로망이 그려지지 않은 점이 이색적이다.(이현군)

  • 제주목 주기 (濟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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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위쪽에는 중국, 오키나와, 일본 등이 그려졌고 아래쪽에는 전라도 해안, 진도, 완도 등의 여러 섬이 그려졌다. 육지에서 바라 본 제주의 모습을 그렸다. 조선시대 제주의 군현은 지도 아래쪽 북쪽의 제주목, 지도의 왼쪽 위 동남 방향에 정의현, 오른쪽 서남 방향에 대정현이 위치한 구조이다. 그래서 해동지도에서는 濟州三縣圖로 이 세 군현을 함께 그린 것이다. 제주 읍성은 제주시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 오라동에 해당하며 정의현은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에 읍치가 있었다. 성읍민속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대정현 읍치는 대정읍 안성리, 인성리, 보성리 일대에 해당한다. 제주목이 중심부에 해당하므로 읍성 안에 많은 건물이 그려졌다. 다른 군현지도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作廳, 鄕廳, 明倫堂 등이 보인다. 대정 읍성에는 객사가 보이지만, 정의읍성에는 객사가 그려지지 않았다. 지도의 가운데 부분에 한라산과 백록담이 그려졌고 주변에 ‘岳’으로 표시된 오름은 기생화산을 그린 것이다. 한라산 주변에는 馬場이 여러 군데 보인다. 지도 위쪽의 西歸所가 현재의 서귀포시 일대이다. 서귀소 근처에 천지연폭포가 지도에 등장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果園이 표시되었다. 왼쪽 위 해안에 솟은 봉우리는 성산일출봉이다. 제주도의 하천은 한라산에서 발원하는데 그 모습을 그렸다. 마을은 해안의 용천대를 따라 형성되기 때문에 군현의 읍치가 해안에 위치한 특징이 보인다. 지도에 도로망이 그려지지 않은 점이 이색적이다.(이현군)

  • 진도군 (珍島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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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 진도군은 “道海 가운데에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 지도를 보면 섬 인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서남해에 있는 진도군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며 현재의 진도읍 성내리가 읍치 지역이며 읍성 왼쪽에 표시된 향교가 교동리에 있었다. 읍성 오른쪽 위에 古城基, 고군내면 등이 표시되었는데 현재의 고군면 일대이다. 고군면에 고성리 지명과 용장산성이 남아있다. 진산은 嘉興山인데 동국여지승람에 “군의 治所가 가흥의 땅이므로 산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적혔는데 고군내면에서 치소가 지도의 중심부 지역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남쪽의 임회면은 임회폐현이 있던 곳이다. 읍성 이외에 남쪽에 두 개의 성이 그려졌다. 왼쪽의 남도진은 현재의 임회면 남동리의 남도석성으로 남아있는 곳으로 수군만호가 있던 南桃浦營이다. 오른쪽의 금갑진은 현재의 의신면 금갑리 일대로 수군만호가 있던 金甲島營이다. 그 북쪽 金島 근처가 썰물 때 바다가 드러나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간조육계도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벽파정은 고군면 벽파리에 있던 누정이며 근처에 이충무공 전적비가 있다. 고도진 위쪽에 목장면 지명이 보이는데 지력산 일대에 牧場이 있었다. 현재의 지산면에 관마리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 북쪽이 진도개가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된 지역이다. 읍치 동쪽의 鳳凰書院은 해동지도에는 鳳岩書院으로 표시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海倉, 船所 등이 보인다.(이현군)

  • 진도군 주기 (珍島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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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 진도군은 “道海 가운데에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 지도를 보면 섬 인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서남해에 있는 진도군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며 현재의 진도읍 성내리가 읍치 지역이며 읍성 왼쪽에 표시된 향교가 교동리에 있었다. 읍성 오른쪽 위에 古城基, 고군내면 등이 표시되었는데 현재의 고군면 일대이다. 고군면에 고성리 지명과 용장산성이 남아있다. 진산은 嘉興山인데 동국여지승람에 “군의 治所가 가흥의 땅이므로 산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적혔는데 고군내면에서 치소가 지도의 중심부 지역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남쪽의 임회면은 임회폐현이 있던 곳이다. 읍성 이외에 남쪽에 두 개의 성이 그려졌다. 왼쪽의 남도진은 현재의 임회면 남동리의 남도석성으로 남아있는 곳으로 수군만호가 있던 南桃浦營이다. 오른쪽의 금갑진은 현재의 의신면 금갑리 일대로 수군만호가 있던 金甲島營이다. 그 북쪽 金島 근처가 썰물 때 바다가 드러나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간조육계도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벽파정은 고군면 벽파리에 있던 누정이며 근처에 이충무공 전적비가 있다. 고도진 위쪽에 목장면 지명이 보이는데 지력산 일대에 牧場이 있었다. 현재의 지산면에 관마리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 북쪽이 진도개가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된 지역이다. 읍치 동쪽의 鳳凰書院은 해동지도에는 鳳岩書院으로 표시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海倉, 船所 등이 보인다.(이현군)

  • 진산군 (珍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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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충청남도에 포함되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에 해당하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추부면, 복수면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읍치는 진산면의 읍내리 일대이며 현재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대둔산을 진산으로 삼았다. 지도 왼쪽에 대둔산과 대둔암이 표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유등천으로 북류하여 대전광역시의 갑천에 합류된다. 읍치 중심부로 연결되는 산줄기보다는 지도 오른쪽 위의 태조대왕태봉 주변의 산세를 풍수적 관념에 기초하여 그렸다. 조선 태조 2년에 이곳에 胎를 봉안하였기 때문에 郡으로 승격하였다. 그 오른쪽의 서대산은 추부면과 군북면의 경계에 있는 903.7m의 산이며 왼쪽의 만인산은 금산군과 대전광역시 하소동 경계에 있는 537.1m의 산이다. 현재 자연휴양림이 있는 곳이다. 읍치 중심부에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다. 조선시대 군현의 읍성 밖에는 사직단, 여단, 성황단, 향교가 배치된다. 지승의 다른 군현 지도에서 제단은 그리지 않아도 향교는 표시해 두는데 이 지도에서는 향교를 표시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비슷한 해동지도와 비교했을 때 읍치 북쪽의 이름없이 그려진 건물이 향교로 추정된다. 진산면 교촌리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객사 동쪽에 요월교가 적혔는데 邀月亭 앞에 있던 교량이다. 읍치 북쪽에 山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표시되지 않았다. 고개, 險隘, 도로만 그리고 삼식원, 요광원, 신창원 등의 역원은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이현군)

  • 진산군 주기 (珍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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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충청남도에 포함되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에 해당하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추부면, 복수면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읍치는 진산면의 읍내리 일대이며 현재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대둔산을 진산으로 삼았다. 지도 왼쪽에 대둔산과 대둔암이 표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유등천으로 북류하여 대전광역시의 갑천에 합류된다. 읍치 중심부로 연결되는 산줄기보다는 지도 오른쪽 위의 태조대왕태봉 주변의 산세를 풍수적 관념에 기초하여 그렸다. 조선 태조 2년에 이곳에 胎를 봉안하였기 때문에 郡으로 승격하였다. 그 오른쪽의 서대산은 추부면과 군북면의 경계에 있는 903.7m의 산이며 왼쪽의 만인산은 금산군과 대전광역시 하소동 경계에 있는 537.1m의 산이다. 현재 자연휴양림이 있는 곳이다. 읍치 중심부에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다. 조선시대 군현의 읍성 밖에는 사직단, 여단, 성황단, 향교가 배치된다. 지승의 다른 군현 지도에서 제단은 그리지 않아도 향교는 표시해 두는데 이 지도에서는 향교를 표시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비슷한 해동지도와 비교했을 때 읍치 북쪽의 이름없이 그려진 건물이 향교로 추정된다. 진산면 교촌리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객사 동쪽에 요월교가 적혔는데 邀月亭 앞에 있던 교량이다. 읍치 북쪽에 山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표시되지 않았다. 고개, 險隘, 도로만 그리고 삼식원, 요광원, 신창원 등의 역원은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이현군)

  • 진안현 (鎭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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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진안군에서 진안읍, 부귀면, 상전면, 마령면, 백운면, 성수면 일대의 범위를 관할한 군현이다. 진안읍의 군상리, 군하리 일대가 읍치 지역이다. 읍치의 동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진안천으로 금강의 상류가 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長水下流라고 적혔는데 남쪽 장수현에서 나온 하천이 금강의 최상류가 되며 북쪽으로 흘러간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섬진강 수계에 해당하며 남쪽으로 흘러간다. 읍치 남쪽에 크게 그려진 두개의 봉우리가 마이산이다. 湧出峯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조선 태종이 南幸하여 제사를 지내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고 馬耳山으로 이름 붙였다. 그 안의 돌탑이 유명하며 탑사, 금당사, 은수사 등의 사찰이 있으며 마이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마이산 아래에 마령면이 적혔는데 지금도 마령면으로 불린다. 馬靈廢縣이 있던 곳이다. 진안현의 진산이 되는 곳은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806.4m의 富貴山이다. 향교와 객사는 지형적으로 분리되게 그렸다. 연달아 산줄기를 그려 맥세를 표현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는데 객사보다 향교에 부귀산의 맥이 더 잘 연결되는 것처럼 그렸다. 역원을 표시하지 않고 도로와 고개만 그렸는데 해동지도에서는 역원을 표시하였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사이의 고원지대에 속하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규보의 글을 인용하여 “馬靈과 鎭安 山谷 사이의 고읍으로 백성이 소박하다”고 기록하였다.(이현군)

  • 진안현 주기 (鎭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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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진안군에서 진안읍, 부귀면, 상전면, 마령면, 백운면, 성수면 일대의 범위를 관할한 군현이다. 진안읍의 군상리, 군하리 일대가 읍치 지역이다. 읍치의 동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진안천으로 금강의 상류가 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長水下流라고 적혔는데 남쪽 장수현에서 나온 하천이 금강의 최상류가 되며 북쪽으로 흘러간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섬진강 수계에 해당하며 남쪽으로 흘러간다. 읍치 남쪽에 크게 그려진 두개의 봉우리가 마이산이다. 湧出峯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조선 태종이 南幸하여 제사를 지내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고 馬耳山으로 이름 붙였다. 그 안의 돌탑이 유명하며 탑사, 금당사, 은수사 등의 사찰이 있으며 마이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마이산 아래에 마령면이 적혔는데 지금도 마령면으로 불린다. 馬靈廢縣이 있던 곳이다. 진안현의 진산이 되는 곳은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806.4m의 富貴山이다. 향교와 객사는 지형적으로 분리되게 그렸다. 연달아 산줄기를 그려 맥세를 표현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는데 객사보다 향교에 부귀산의 맥이 더 잘 연결되는 것처럼 그렸다. 역원을 표시하지 않고 도로와 고개만 그렸는데 해동지도에서는 역원을 표시하였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사이의 고원지대에 속하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규보의 글을 인용하여 “馬靈과 鎭安 山谷 사이의 고읍으로 백성이 소박하다”고 기록하였다.(이현군)

  • 창평현 (昌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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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담양군 창평면, 수북면, 고서면, 남면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는 지역이다. 호남고속국도 창평 인터체인지 북쪽의 창평리는 18세기 말에 읍치가 된 지역이며 이전의 읍치는 고서면 고읍리 일대이다. 고읍리에 구읍과 창평 지명이 남아있다. 읍치 지역에는 성곽, 객사도 없이 衙와 倉만 그려져 있다. 고읍리에 객사가 있었으며 향교는 고서면 교산리에 있었다. 지승 고지도는 일반적으로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졌는데 이 지도는 해동지도와 부분적으로 다르다. 해동지도에는 현내면 오른쪽에 南面과 장단원, 방아치, 진렴산 등이 그려졌다. 남면의 위치가 서로 다르게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산들은 회화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왼쪽에 무등산이 보인다. 광주광역시와 담양군의 경계에 위치한 무등산도립공원지역이다. 그 오른쪽에 瀟洒亭은 현재의 남면에 위치한 사적 304호 소쇄원이다. 장원봉은 옆에 그려진 식영정은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왼쪽의 증암천은 북쪽으로 흘러 영산강에 유입된다. 소쇄원과 식영정 서쪽은 현재 광주댐의 건설로 인해 광주호가 들어서 있다. 읍치 북쪽의 이름없는 서원은 松江書院으로 1706년(숙종 32)에 사액받았으며 정철을 배향하였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을 그려넣지 않았다.(이현군)

  • 창평현 주기 (昌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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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담양군 창평면, 수북면, 고서면, 남면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는 지역이다. 호남고속국도 창평 인터체인지 북쪽의 창평리는 18세기 말에 읍치가 된 지역이며 이전의 읍치는 고서면 고읍리 일대이다. 고읍리에 구읍과 창평 지명이 남아있다. 읍치 지역에는 성곽, 객사도 없이 衙와 倉만 그려져 있다. 고읍리에 객사가 있었으며 향교는 고서면 교산리에 있었다. 지승 고지도는 일반적으로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졌는데 이 지도는 해동지도와 부분적으로 다르다. 해동지도에는 현내면 오른쪽에 南面과 장단원, 방아치, 진렴산 등이 그려졌다. 남면의 위치가 서로 다르게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산들은 회화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왼쪽에 무등산이 보인다. 광주광역시와 담양군의 경계에 위치한 무등산도립공원지역이다. 그 오른쪽에 瀟洒亭은 현재의 남면에 위치한 사적 304호 소쇄원이다. 장원봉은 옆에 그려진 식영정은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왼쪽의 증암천은 북쪽으로 흘러 영산강에 유입된다. 소쇄원과 식영정 서쪽은 현재 광주댐의 건설로 인해 광주호가 들어서 있다. 읍치 북쪽의 이름없는 서원은 松江書院으로 1706년(숙종 32)에 사액받았으며 정철을 배향하였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을 그려넣지 않았다.(이현군)

  • 태인현 (泰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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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은 太山郡과 仁義縣이 합쳐져 만들어진 지명으로 1409년(태종 9)에 병합하면서 읍치를 현재의 태인면 태성리로 옮겼다. 호남고속국도 태인인터체인지 동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전의 읍치 였던 곳은 지도에 고현면으로 적힌 곳이다. 지도 중심부에 표시된 지역은 과거 居山驛이 있던 곳으로 이 지도에 거산면으로 표시되었으며 현재 태인면의 거산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왼쪽에 仁義谷面이 표시되었는데 옛 인의현 지역을 나타낸 것이다. 읍치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앞쪽에 연못이 있고 披香亭이 그려졌다. 披香亭은 태인면사무소 동쪽에 위치하며 보물 289호로 지정된 곳이다. 태인현은 현재의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산내면, 산외면, 감곡면, 옹동면, 칠보면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였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동진강으로 지도 왼쪽 아래에 東津이 표시되었다. 읍치 위쪽에 그려진 상두산은 실제로는 읍치 동쪽에 위치하며 김제시 금산면과 산외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575.3m의 산이다. 상두산의 맥이 읍치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읍치 뒤쪽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태인의 진산은 죽사산으로 현 북쪽 2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읍치 바로 뒷산이 죽사산으로 추정된다. 풍수적 관념이 산줄기 표현에 반영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武城書院은 칠보면 무성리에 위치한 서원으로 최치원을 배향하였으며 1696년(숙종 22)에 사액받았다. 현재 사적 166호로 지정되었다.(이현군)

  • 태인현 주기 (泰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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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은 太山郡과 仁義縣이 합쳐져 만들어진 지명으로 1409년(태종 9)에 병합하면서 읍치를 현재의 태인면 태성리로 옮겼다. 호남고속국도 태인인터체인지 동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전의 읍치 였던 곳은 지도에 고현면으로 적힌 곳이다. 지도 중심부에 표시된 지역은 과거 居山驛이 있던 곳으로 이 지도에 거산면으로 표시되었으며 현재 태인면의 거산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왼쪽에 仁義谷面이 표시되었는데 옛 인의현 지역을 나타낸 것이다. 읍치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앞쪽에 연못이 있고 披香亭이 그려졌다. 披香亭은 태인면사무소 동쪽에 위치하며 보물 289호로 지정된 곳이다. 태인현은 현재의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산내면, 산외면, 감곡면, 옹동면, 칠보면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였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동진강으로 지도 왼쪽 아래에 東津이 표시되었다. 읍치 위쪽에 그려진 상두산은 실제로는 읍치 동쪽에 위치하며 김제시 금산면과 산외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575.3m의 산이다. 상두산의 맥이 읍치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읍치 뒤쪽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태인의 진산은 죽사산으로 현 북쪽 2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읍치 바로 뒷산이 죽사산으로 추정된다. 풍수적 관념이 산줄기 표현에 반영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武城書院은 칠보면 무성리에 위치한 서원으로 최치원을 배향하였으며 1696년(숙종 22)에 사액받았다. 현재 사적 166호로 지정되었다.(이현군)

  • 함열현 (咸悅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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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 황라면, 함열읍, 황등면, 성당면, 웅포면 일대를 관할하던 군현으로 조선 태종대에 잠시 용안현과 합쳐져 安悅縣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곧 분리되었다. 읍치는 함열읍이 아니라 함라면 함열리에 있었다. 지도 중심부에 성곽없이 건물이 그려진 곳이다. 다른 군현지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孔子影堂이 향교 옆에 보인다. 읍치 북쪽의 함라산이 함열의 진산에 해당한다. 비교적 낮은 지대에 해당하지만 읍치 왼쪽으로 산줄기의 연결성을 강조한 맥으로 표현하고 있다. 북쪽의 성당창은 현재의 성당면 성당리에 있던 漕倉으로 용안 득성창의 수로가 막히어 이곳으로 옮겨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였다. 함열현감이 計量을 감독하고 수납하던 곳이다. 왼쪽의 웅포는 웅포면 웅포리의 나루로 한산과 통하는 곳으로 그 아래에는 해창이 있었다. 왼쪽 위에 백마강 하류라고 적혔는데 금강이다. 금강의 상류가 백마강이므로 이렇게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함열천으로 부곡천에 합류되어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유입된다. 지도상에는 위쪽의 두 하천이 분리되어 그려졌지만 오른쪽의 부곡천이 왼쪽의 금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남쪽에 성곽을 반쯤 그리고 용산고성이라고 적었는데 황등면 용산리 일대이다. 호남선 철도 다산역 서쪽에 해당하며 지금 성내일구, 성내이구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石城으로 조선 세종대에 함열현을 이곳으로 옮기기 위해 쌓았으나 실제로 현을 이전하지 못했다.(이현군)

  • 함열현 주기 (咸悅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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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 황라면, 함열읍, 황등면, 성당면, 웅포면 일대를 관할하던 군현으로 조선 태종대에 잠시 용안현과 합쳐져 安悅縣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곧 분리되었다. 읍치는 함열읍이 아니라 함라면 함열리에 있었다. 지도 중심부에 성곽없이 건물이 그려진 곳이다. 다른 군현지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孔子影堂이 향교 옆에 보인다. 읍치 북쪽의 함라산이 함열의 진산에 해당한다. 비교적 낮은 지대에 해당하지만 읍치 왼쪽으로 산줄기의 연결성을 강조한 맥으로 표현하고 있다. 북쪽의 성당창은 현재의 성당면 성당리에 있던 漕倉으로 용안 득성창의 수로가 막히어 이곳으로 옮겨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였다. 함열현감이 計量을 감독하고 수납하던 곳이다. 왼쪽의 웅포는 웅포면 웅포리의 나루로 한산과 통하는 곳으로 그 아래에는 해창이 있었다. 왼쪽 위에 백마강 하류라고 적혔는데 금강이다. 금강의 상류가 백마강이므로 이렇게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함열천으로 부곡천에 합류되어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유입된다. 지도상에는 위쪽의 두 하천이 분리되어 그려졌지만 오른쪽의 부곡천이 왼쪽의 금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남쪽에 성곽을 반쯤 그리고 용산고성이라고 적었는데 황등면 용산리 일대이다. 호남선 철도 다산역 서쪽에 해당하며 지금 성내일구, 성내이구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石城으로 조선 세종대에 함열현을 이곳으로 옮기기 위해 쌓았으나 실제로 현을 이전하지 못했다.(이현군)

  • 함평현 (咸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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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평은 조선 태종대에 咸豊縣과 牟平縣과 합하여 만들어진 지명이다. 현재의 함평군에서 남쪽의 학교면과 엄다면은 무안현 관할 범위여서 제외되며 무안군 해제면과 현경면의 일부가 관할 범위에 포함된다. 지도 왼쪽에 해제면으로 적힌 곳이 무안군 해제면이다. 그 동쪽의 바다는 함평만이다. 왼쪽 위의 해제봉대는 현재 203m의 봉대산으로 남아있으며 성곽 형태로 그려진 임치진은 임수리에 있던 것으로 水軍僉節制使의 營衙가 있었다. 주변의 浦와 섬을 관할하였다. 해제면으로 적힌 곳 왼쪽의 산은 국가에서 사용할 재목을 구하기 위한 封山으로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해동지도에는 그려졌다. 왼쪽 아래 옹산의 봉대는 현재 현경면 용정리의 82m 높이의 봉태산이다. 지도에 적힌 다경면이 현재의 무안군 현경면이다. 다경면 동쪽에 표시된 감방산은 무안읍과 현경면의 경계에 위치한 257.5m의 산이다. 감방산에서 임치진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4번 국도에 해당한다. 읍치는 성곽없이 건물만 표시하였는데 현재의 함평읍 기각리 일대이다. 읍치와 별개의 형국으로 그려진 향교는 향교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와 향교 사이로 흐르는 하천은 함평천이다. 읍치 북쪽의 君尼山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이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지도에 표시된 손불면, 신광면, 해보면 등의 지명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손불면 해안에 그려진 해창은 석창리에 있던 것이다. 왼쪽 위에 그려진 君遊寺 뒤쪽은 손불면 북성리에 위치한 403.2m 높이의 군유산이다.(이현군)

  • 함평현 주기 (咸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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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평은 조선 태종대에 咸豊縣과 牟平縣과 합하여 만들어진 지명이다. 현재의 함평군에서 남쪽의 학교면과 엄다면은 무안현 관할 범위여서 제외되며 무안군 해제면과 현경면의 일부가 관할 범위에 포함된다. 지도 왼쪽에 해제면으로 적힌 곳이 무안군 해제면이다. 그 동쪽의 바다는 함평만이다. 왼쪽 위의 해제봉대는 현재 203m의 봉대산으로 남아있으며 성곽 형태로 그려진 임치진은 임수리에 있던 것으로 水軍僉節制使의 營衙가 있었다. 주변의 浦와 섬을 관할하였다. 해제면으로 적힌 곳 왼쪽의 산은 국가에서 사용할 재목을 구하기 위한 封山으로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해동지도에는 그려졌다. 왼쪽 아래 옹산의 봉대는 현재 현경면 용정리의 82m 높이의 봉태산이다. 지도에 적힌 다경면이 현재의 무안군 현경면이다. 다경면 동쪽에 표시된 감방산은 무안읍과 현경면의 경계에 위치한 257.5m의 산이다. 감방산에서 임치진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4번 국도에 해당한다. 읍치는 성곽없이 건물만 표시하였는데 현재의 함평읍 기각리 일대이다. 읍치와 별개의 형국으로 그려진 향교는 향교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와 향교 사이로 흐르는 하천은 함평천이다. 읍치 북쪽의 君尼山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이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지도에 표시된 손불면, 신광면, 해보면 등의 지명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손불면 해안에 그려진 해창은 석창리에 있던 것이다. 왼쪽 위에 그려진 君遊寺 뒤쪽은 손불면 북성리에 위치한 403.2m 높이의 군유산이다.(이현군)

  • 해남현 (海南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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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서남해안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육지, 바다, 섬이 지도에 함께 그려졌다.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남쪽의 옥천면, 송지면, 북일면, 북평군은 조선시대에는 영암군에 포함되었다. 이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해남현의 관할범위였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현내면이 옛 해남현의 중심부이며 원형으로 그려진 읍성 지역은 해남읍 성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향교는 성 밖에 그려졌고 주변의 산줄기가 읍성을 감싸듯이 표현되었다. 읍성 북쪽의 금강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해남읍과 마산면의 경계가 되는 481m 높이의 산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영암방조제, 금호방조제가 들어서면서 영암호, 금호호로 바뀌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사각형의 성곽은 右道水軍節度使營으로 줄여서 右水營으로 적어놓았다. 그 위에 충무공비각이 세워져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충무공대첩이 기록되었다. 鳴津 근처에서 명량대첩이 있었다. 지금은 진도대교가 세워져 진도군과 연결되는 지역이다. 해남군 문내면에 명량대첩기념비, 우수영, 충무사 등이 남아 있어 관광지로 활용된다. 그 옆에는 용암방조제가 들어서면서 해안선이 이 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목장은 黃原場으로 監牧官이 배치되었다. 곳곳에 산성이 있었으나 이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해안에 봉수대, 船所, 海倉를 그려넣었다. 이 지도에 등장하진 않지만 읍성의 남쪽 해남읍 연동리에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이 있어 관광지로 활용된다. 그 안에 국보 240호로 지정된 윤두서상 등 여러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이현군)

  • 해남현 주기 (海南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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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서남해안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육지, 바다, 섬이 지도에 함께 그려졌다.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남쪽의 옥천면, 송지면, 북일면, 북평군은 조선시대에는 영암군에 포함되었다. 이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해남현의 관할범위였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현내면이 옛 해남현의 중심부이며 원형으로 그려진 읍성 지역은 해남읍 성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향교는 성 밖에 그려졌고 주변의 산줄기가 읍성을 감싸듯이 표현되었다. 읍성 북쪽의 금강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해남읍과 마산면의 경계가 되는 481m 높이의 산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영암방조제, 금호방조제가 들어서면서 영암호, 금호호로 바뀌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사각형의 성곽은 右道水軍節度使營으로 줄여서 右水營으로 적어놓았다. 그 위에 충무공비각이 세워져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충무공대첩이 기록되었다. 鳴津 근처에서 명량대첩이 있었다. 지금은 진도대교가 세워져 진도군과 연결되는 지역이다. 해남군 문내면에 명량대첩기념비, 우수영, 충무사 등이 남아 있어 관광지로 활용된다. 그 옆에는 용암방조제가 들어서면서 해안선이 이 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목장은 黃原場으로 監牧官이 배치되었다. 곳곳에 산성이 있었으나 이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해안에 봉수대, 船所, 海倉를 그려넣었다. 이 지도에 등장하진 않지만 읍성의 남쪽 해남읍 연동리에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이 있어 관광지로 활용된다. 그 안에 국보 240호로 지정된 윤두서상 등 여러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이현군)

  • 화순현 (和順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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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화순군은 조선시대 능주목, 동복현, 화순현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화순현은 이 중에서 화순읍과 동면을 관할하는 군현이었다. 고려 때 화순 지명이 생겼으며 나주, 능성, 남평, 동복 등에 소속되기도 하였으며 태종대에 현이 되었다. 지도 가운데의 읍치 지역은 화순읍의 광덕리, 향청리 일대이며 향교가 있었던 곳은 교리이다. 향청리는 관아 건물 중 지방 양반들이 중심이 되는 鄕廳에서 따온 것이다. 화순선 철도의 남화순역 북쪽이 과거 화순의 읍치에 해당한다. 작은 읍치 지역을 아주 크게 그렸다. 읍치 동쪽과 남쪽의 하천은 현재 화순천으로 불리며 남평의 지석강을 거쳐 서쪽으로 흘러 영산강을 통해 바다로 들어간다. 읍치 서북쪽에 광주의 무등산이 위치하며 화순읍의 일부가 무등산 도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나한산이 화순의 진산이다. 지금은 만연산으로 불린다. 좌우의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듯이 그려져 풍수적 사고가 이 지도에 반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한산 아래에 그려진 읍치 북쪽의 만연사는 화순읍 동구리에 남아있다. 읍치 동쪽의 오성산은 동면과 화순읍의 경계에 있는 292m 높이의 산으로 성터가 남아있다. 삼면이 모두 석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이 지도는 도로만 그렸는데 해동지도에는 남면 옆에 加林驛이 표시되었다. 화순읍 내평리에 있었던 역원이다.(이현군)

  • 화순현 주기 (和順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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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화순군은 조선시대 능주목, 동복현, 화순현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화순현은 이 중에서 화순읍과 동면을 관할하는 군현이었다. 고려 때 화순 지명이 생겼으며 나주, 능성, 남평, 동복 등에 소속되기도 하였으며 태종대에 현이 되었다. 지도 가운데의 읍치 지역은 화순읍의 광덕리, 향청리 일대이며 향교가 있었던 곳은 교리이다. 향청리는 관아 건물 중 지방 양반들이 중심이 되는 鄕廳에서 따온 것이다. 화순선 철도의 남화순역 북쪽이 과거 화순의 읍치에 해당한다. 작은 읍치 지역을 아주 크게 그렸다. 읍치 동쪽과 남쪽의 하천은 현재 화순천으로 불리며 남평의 지석강을 거쳐 서쪽으로 흘러 영산강을 통해 바다로 들어간다. 읍치 서북쪽에 광주의 무등산이 위치하며 화순읍의 일부가 무등산 도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나한산이 화순의 진산이다. 지금은 만연산으로 불린다. 좌우의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듯이 그려져 풍수적 사고가 이 지도에 반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한산 아래에 그려진 읍치 북쪽의 만연사는 화순읍 동구리에 남아있다. 읍치 동쪽의 오성산은 동면과 화순읍의 경계에 있는 292m 높이의 산으로 성터가 남아있다. 삼면이 모두 석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이 지도는 도로만 그렸는데 해동지도에는 남면 옆에 加林驛이 표시되었다. 화순읍 내평리에 있었던 역원이다.(이현군)

  • 흥덕현 (興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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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 부안면의 일부를 관할 범위로 하였다. 부안면의 일부는 고부군에 속한다. 지도 가운데 성곽없이 그려진 읍치는 흥덕면 흥덕리 일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으로 된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현재 흥덕면에 형성된 동림저수지의 서남쪽 방향에 옛 읍치가 있었으며 읍치 서쪽에 표시된 향교는 교운리에 있었다. 해동지도에서는 곳곳에 제언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 위쪽 죽도가 그려진 곳은 곰소만이며 서해로 통한다. 해안에 접한 군현으로 해발고도가 낮은 지역이지만 산줄기의 맥세를 강하고 표현하였고 읍치 지역은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게 그렸다. 향교는 읍치와 독립적 형국 속에 표현하고 있다. 향교 왼쪽의 하천은 현재 갈곡천으로 불린다. 죽도 남쪽에 그려진 소요산은 부안면에 위치한 444.2m 높이의 산이다. 선운산 도립공원과 인접해 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지만 부안면에는 사적 250호로 지정된 분청사기요지가 있다. 읍치 동쪽의 동산서원은 동림저수지와 인접한 성내면 동산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바다가에 해창이 그려진 사진포는 현재의 흥덕면의 사포로 불리는 곳이다. 갯가에 모래가 많아 사진포 또는 사포라 불리웠다. 지형적으로 배가 정박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은 지도에 그리지 않았다.(이현군)

  • 흥덕현 주기 (興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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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 부안면의 일부를 관할 범위로 하였다. 부안면의 일부는 고부군에 속한다. 지도 가운데 성곽없이 그려진 읍치는 흥덕면 흥덕리 일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으로 된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현재 흥덕면에 형성된 동림저수지의 서남쪽 방향에 옛 읍치가 있었으며 읍치 서쪽에 표시된 향교는 교운리에 있었다. 해동지도에서는 곳곳에 제언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 위쪽 죽도가 그려진 곳은 곰소만이며 서해로 통한다. 해안에 접한 군현으로 해발고도가 낮은 지역이지만 산줄기의 맥세를 강하고 표현하였고 읍치 지역은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게 그렸다. 향교는 읍치와 독립적 형국 속에 표현하고 있다. 향교 왼쪽의 하천은 현재 갈곡천으로 불린다. 죽도 남쪽에 그려진 소요산은 부안면에 위치한 444.2m 높이의 산이다. 선운산 도립공원과 인접해 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지만 부안면에는 사적 250호로 지정된 분청사기요지가 있다. 읍치 동쪽의 동산서원은 동림저수지와 인접한 성내면 동산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바다가에 해창이 그려진 사진포는 현재의 흥덕면의 사포로 불리는 곳이다. 갯가에 모래가 많아 사진포 또는 사포라 불리웠다. 지형적으로 배가 정박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은 지도에 그리지 않았다.(이현군)

  • 흥양현 (興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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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바다와 접한 전라남도 고흥군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원형의 읍성이 그려진 중심부는 현재의 고흥읍 행정리, 옥하리, 남계리, 서문리 일대에 해당한다. 과거에 이 지역에 있었던 남양폐현, 풍안폐현, 두원폐현, 도양폐현, 고흥폐현 등이 현재 읍면 지명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쪽은 득량만, 보성만이며 동쪽 순천만이다. 읍성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남쪽을 연결하는 가장 긴 도로는 현재의 27번 국도에 해당한다. 읍성 뒤쪽에 표시된 주월산은 흥양현의 진산으로 높이가 291m이며 동국여지승람에는 所伊山으로 표시되었으며 배너미로 불리기도 한다.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듯이 그려졌다. 읍성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고 향교는 성 밖에  표시되었다. 읍성 남쪽의 금탑사는 현재 도화면에 있으며 인근에 천연기념물 239호로 지정된 비자나무숲이 조성되었다. 그 옆의 천등산은 풍양면과 도화면의 경계에 위치한 550m 높이의 산이다. 읍성 외에 4개의 성곽이 그려졌다.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 사도진을 표시한 것이다. 이 중 사도진에 左道水軍僉節制使가 배치되어 주변을 관할하였다. 나머지 鎭營에는 水軍萬戶가 배치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36세에 발포 만호로 부임하기도 하였다. 왼쪽의 녹도진 아래에 표시된 섬이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위치한 곳이다. 지도 왼쪽도양면 위쪽에 목장이 표시되었는데 監牧官이 파견되어 주변의 목장을 관할하였다. 해안 곳곳에 봉수대가 배치되었고 海倉, 船所를 표시하고 있다.(이현군)

  • 흥양현 주기 (興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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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바다와 접한 전라남도 고흥군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원형의 읍성이 그려진 중심부는 현재의 고흥읍 행정리, 옥하리, 남계리, 서문리 일대에 해당한다. 과거에 이 지역에 있었던 남양폐현, 풍안폐현, 두원폐현, 도양폐현, 고흥폐현 등이 현재 읍면 지명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쪽은 득량만, 보성만이며 동쪽 순천만이다. 읍성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남쪽을 연결하는 가장 긴 도로는 현재의 27번 국도에 해당한다. 읍성 뒤쪽에 표시된 주월산은 흥양현의 진산으로 높이가 291m이며 동국여지승람에는 所伊山으로 표시되었으며 배너미로 불리기도 한다.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듯이 그려졌다. 읍성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고 향교는 성 밖에  표시되었다. 읍성 남쪽의 금탑사는 현재 도화면에 있으며 인근에 천연기념물 239호로 지정된 비자나무숲이 조성되었다. 그 옆의 천등산은 풍양면과 도화면의 경계에 위치한 550m 높이의 산이다. 읍성 외에 4개의 성곽이 그려졌다.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 사도진을 표시한 것이다. 이 중 사도진에 左道水軍僉節制使가 배치되어 주변을 관할하였다. 나머지 鎭營에는 水軍萬戶가 배치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36세에 발포 만호로 부임하기도 하였다. 왼쪽의 녹도진 아래에 표시된 섬이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위치한 곳이다. 지도 왼쪽도양면 위쪽에 목장이 표시되었는데 監牧官이 파견되어 주변의 목장을 관할하였다. 해안 곳곳에 봉수대가 배치되었고 海倉, 船所를 표시하고 있다.(이현군)

  • ▶충청도
  • 결성현 (結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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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현은 홍성군의 결성면, 서부면, 구항면, 은하면, 일부를 제외한 광천읍에 걸쳐 있엇으며, 읍치는 결성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금리천으로, 그 위쪽의 하천은 청굉천으로 불리고 있다. 두 하천 모두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온 곳의 연장선 위에 있어 바닷배의 출입이 자주 있었던 곳이다. 특히 청굉천에 있는 광천은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포구였으며, 현재도 하구언에 축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젓갈 등으로 유명한 곳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결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결성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와 본 지도와의 차이점을 첨지로 붙여 놓았다. 위쪽의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을, 아래쪽에는 면의 명칭이 다른 것을 적어놓았다. 아래쪽의 첨지에 의하면 본 지도에 있는 合西面이 備圖에는 없으며, 반대로 備圖에는 상서면과 하서면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합서면이 2개로 분리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원래 2개였던 것을 합서면으로 표현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첨가된 지명을 제외하고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으로는 읍치 오른쪽의 風流島가 있다. 《여지도》에는 풍류도가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광여도》에는 빠져 있어 본 지도와 《광여도》의 지도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타 읍치 서쪽의 船泊處는 결성현에서 관할하는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다.(이기봉)

  • 결성현 주기 (結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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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현은 홍성군의 결성면, 서부면, 구항면, 은하면, 일부를 제외한 광천읍에 걸쳐 있엇으며, 읍치는 결성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금리천으로, 그 위쪽의 하천은 청굉천으로 불리고 있다. 두 하천 모두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온 곳의 연장선 위에 있어 바닷배의 출입이 자주 있었던 곳이다. 특히 청굉천에 있는 광천은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포구였으며, 현재도 하구언에 축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젓갈 등으로 유명한 곳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결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결성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와 본 지도와의 차이점을 첨지로 붙여 놓았다. 위쪽의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을, 아래쪽에는 면의 명칭이 다른 것을 적어놓았다. 아래쪽의 첨지에 의하면 본 지도에 있는 合西面이 備圖에는 없으며, 반대로 備圖에는 상서면과 하서면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합서면이 2개로 분리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원래 2개였던 것을 합서면으로 표현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첨가된 지명을 제외하고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으로는 읍치 오른쪽의 風流島가 있다. 《여지도》에는 풍류도가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광여도》에는 빠져 있어 본 지도와 《광여도》의 지도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타 읍치 서쪽의 船泊處는 결성현에서 관할하는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다.(이기봉)

  • 공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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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공면입니다.

  • 공주목 (公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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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목은 현재의 공주시 전체, 연기군의 금남면과 종촌리․송담리를 포함한 남면의 서남쪽,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복룡동․상대동을 포함한 북쪽과 도룡동․덕진동을 포함한 서쪽 지역, 서구에서 복수동을 포함한 북쪽과 갑천 서쪽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공주시내 반죽동 일대에 있었다. 오른쪽의 文義界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지도 위쪽에 표시된 성곽이 현재의 공산성이다. 공산성 오른쪽에는 금강의 명칭 유래가 된 錦江津이 표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공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아래쪽에 기록된 尼城界가 나머지 지도에는 尼山界로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앞쪽의 湖西圖에도 본 지도에서는 尼城으로 기록된 반면에 《해동지도》와 《여지도》에서는 尼山으로, 《광여도》에서는 魯城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볼 때 《광여도》는 尼山이 魯城으로 바뀐 1800년(정조 24) 이후에 필사되면서 본 지도의 니산은 원본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는 늦어도 尼山이 尼城으로 바뀌는 1776년(영조 52)과 1800년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늦어도 1700년대 전반기에 필사된 것임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고, 《여지도》는 본 지도와 호서도만으로 볼 때 1776년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公州라는 지명은 본 지도책의 다른 군현 지도의 경계 표시에서 公山으로 기재되는 경우가 많아 본 지도의 원본도 公山으로 불리던 시절에 제작되었다가 후에 지도의 이름만 公州로 바꾸어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읍치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本官으로 되어 있는 건물이 본 지도에는 本州로 바뀌어 있다. 본주 맞은편에 있는 宣化堂은 충청도 감영의 동헌에 해당되는 건물이다.(이기봉)

  • 공주목 주기 (公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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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목은 현재의 공주시 전체, 연기군의 금남면과 종촌리․송담리를 포함한 남면의 서남쪽,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복룡동․상대동을 포함한 북쪽과 도룡동․덕진동을 포함한 서쪽 지역, 서구에서 복수동을 포함한 북쪽과 갑천 서쪽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공주시내 반죽동 일대에 있었다. 오른쪽의 文義界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지도 위쪽에 표시된 성곽이 현재의 공산성이다. 공산성 오른쪽에는 금강의 명칭 유래가 된 錦江津이 표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공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아래쪽에 기록된 尼城界가 나머지 지도에는 尼山界로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앞쪽의 湖西圖에도 본 지도에서는 尼城으로 기록된 반면에 《해동지도》와 《여지도》에서는 尼山으로, 《광여도》에서는 魯城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볼 때 《광여도》는 尼山이 魯城으로 바뀐 1800년(정조 24) 이후에 필사되면서 본 지도의 니산은 원본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는 늦어도 尼山이 尼城으로 바뀌는 1776년(영조 52)과 1800년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늦어도 1700년대 전반기에 필사된 것임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고, 《여지도》는 본 지도와 호서도만으로 볼 때 1776년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公州라는 지명은 본 지도책의 다른 군현 지도의 경계 표시에서 公山으로 기재되는 경우가 많아 본 지도의 원본도 公山으로 불리던 시절에 제작되었다가 후에 지도의 이름만 公州로 바꾸어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읍치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本官으로 되어 있는 건물이 본 지도에는 本州로 바뀌어 있다. 본주 맞은편에 있는 宣化堂은 충청도 감영의 동헌에 해당되는 건물이다.(이기봉)

  • 괴산군 (槐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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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군은 현재의 괴산군 괴산읍, 소수면, 사리면, 문광면, 칠성면, 감물면의 오창리, 불정면의 신흥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괴산읍의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서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東上面 방면에서 흘러와 오른쪽 梨灘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달천강 본류이고, 延豊界에서 흘러와 달천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쌍천이다. 두 하천 모두 다른 군현의 경계 너머에서 흘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쉽지 않게 그렸다. 다만 다른 군현에서 하천이 흘러 들어오는 경우에는 산줄기를 연결시켜 그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괴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첨지에 붙어 있는 지명이 더 수록되어 있는 차이가 있고, 그 이외에는 지명의 한자 1-2 글자가 바뀌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자가 다른 대표적인 지명이 읍치 위쪽의 目所山으로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는 月所山으로, 《여지도》에는 日所山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괴산군 주기 (槐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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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군은 현재의 괴산군 괴산읍, 소수면, 사리면, 문광면, 칠성면, 감물면의 오창리, 불정면의 신흥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괴산읍의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서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東上面 방면에서 흘러와 오른쪽 梨灘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달천강 본류이고, 延豊界에서 흘러와 달천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쌍천이다. 두 하천 모두 다른 군현의 경계 너머에서 흘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쉽지 않게 그렸다. 다만 다른 군현에서 하천이 흘러 들어오는 경우에는 산줄기를 연결시켜 그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괴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첨지에 붙어 있는 지명이 더 수록되어 있는 차이가 있고, 그 이외에는 지명의 한자 1-2 글자가 바뀌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자가 다른 대표적인 지명이 읍치 위쪽의 目所山으로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는 月所山으로, 《여지도》에는 日所山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남포현 (藍浦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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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현은 보령시의 남포면, 웅천읍, 주산면, 미산면, 성주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남포면의 읍내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남포 읍성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남포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좌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에서 흘러와 海倉 부근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하천이 현재의 웅천이다. 웅천은 현재의 부여군 외산면인 홍산현의 땅에서 흘러오는데, 본 지도에는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 이 부분의 산줄기가 연결된 것처럼 그려 하천의 유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였다. 북면 아래쪽에 그림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崔孤雲撰碑는현재 성주면의 성주사지에 있는 국보 8호의 백월보광탑비로서 신라말에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하나인 최치원의 글이 적혀 있다. 읍치 오른쪽 위에는 古邑基가 표시되어 있는데,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1872년 지방지도’의 남포현지도에는 고려말에 읍치가 옮겨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웅천읍 수부리와 평리 지역으로 지방 중심지의 이동 경향에 대한 이해에 좋은 사료가 될 수 있다. 기타 아래쪽의 船泊處는 남포현이 관할하고 있는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고, 海倉은 대동법 시행 이후 남포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곳이다.(이기봉)

  • 남포현 주기 (藍浦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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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현은 보령시의 남포면, 웅천읍, 주산면, 미산면, 성주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남포면의 읍내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남포 읍성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남포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좌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에서 흘러와 海倉 부근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하천이 현재의 웅천이다. 웅천은 현재의 부여군 외산면인 홍산현의 땅에서 흘러오는데, 본 지도에는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 이 부분의 산줄기가 연결된 것처럼 그려 하천의 유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였다. 북면 아래쪽에 그림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崔孤雲撰碑는현재 성주면의 성주사지에 있는 국보 8호의 백월보광탑비로서 신라말에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하나인 최치원의 글이 적혀 있다. 읍치 오른쪽 위에는 古邑基가 표시되어 있는데,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1872년 지방지도’의 남포현지도에는 고려말에 읍치가 옮겨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웅천읍 수부리와 평리 지역으로 지방 중심지의 이동 경향에 대한 이해에 좋은 사료가 될 수 있다. 기타 아래쪽의 船泊處는 남포현이 관할하고 있는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고, 海倉은 대동법 시행 이후 남포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곳이다.(이기봉)

  • 니성현 (尼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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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산현은 논산시의 노성면, 광석면, 상월면, 부여군의 초촌면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노성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니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니성현은 원래 尼山縣으로 불리다가 1776년(영조 52)에 니성현으로 바뀌었으며, 1800년(정조 24)에 魯城縣으로 다시 바뀐다. 《해동지도》와 《여지도》는 앞쪽의 충청도 전도와 군현지도 모두 니산으로 되어 있어 합치되고 있다. 본 지도 역시 모두 니성으로 바뀌어 있어 늦어도 1776년 이후에 필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의 경우 앞쪽의 충청도 전도인 湖西圖에서는 노성으로 되어 있음에 반해 군현지도에서는 니산현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광여도》는 호서도에서는 지명의 변화를 고려하였음에 반해 군현지도에서는 기존의 지도를 그대로 필사하면서 지명의 변화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를 지나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노성천이고, 왼쪽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석성천 상류이다. 노성천의 경우 북쪽의 공주 방면에서 흘러들어옴에도 본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나머지 3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 자체에서 이미 오류를 범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위쪽에는 古城이 그려져 있는데, 니성현의 고호인 魯城과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웠다. 현재의 노성산 정상을 두른 테뫼식의 중형 석성으로 삼국시대로부터 빨라도 고려초기까지는 본 고을의 중심지가 있었던 곳으로 연구되고 있다.(이기봉)

  • 니성현 주기 (尼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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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산현은 논산시의 노성면, 광석면, 상월면, 부여군의 초촌면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노성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니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니성현은 원래 尼山縣으로 불리다가 1776년(영조 52)에 니성현으로 바뀌었으며, 1800년(정조 24)에 魯城縣으로 다시 바뀐다. 《해동지도》와 《여지도》는 앞쪽의 충청도 전도와 군현지도 모두 니산으로 되어 있어 합치되고 있다. 본 지도 역시 모두 니성으로 바뀌어 있어 늦어도 1776년 이후에 필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의 경우 앞쪽의 충청도 전도인 湖西圖에서는 노성으로 되어 있음에 반해 군현지도에서는 니산현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광여도》는 호서도에서는 지명의 변화를 고려하였음에 반해 군현지도에서는 기존의 지도를 그대로 필사하면서 지명의 변화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를 지나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노성천이고, 왼쪽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석성천 상류이다. 노성천의 경우 북쪽의 공주 방면에서 흘러들어옴에도 본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나머지 3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 자체에서 이미 오류를 범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위쪽에는 古城이 그려져 있는데, 니성현의 고호인 魯城과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웠다. 현재의 노성산 정상을 두른 테뫼식의 중형 석성으로 삼국시대로부터 빨라도 고려초기까지는 본 고을의 중심지가 있었던 곳으로 연구되고 있다.(이기봉)

  • 단양군 (丹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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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양군은 현재 단양군의 단양읍, 대강면, 단성면, 적성면, 매포읍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단성면의 하방리 일대에 있었는데, 충주댐의 건설로 대부분 수몰되어 버렸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동)의 永春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淸風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단양군(또는 단양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다음과 같은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해동지도》가 동서(세로)보다는 남북(가로)을 더 길게 그린 것과 반대로 그렸다. 둘째, 읍치에 3개의 건물이 더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倉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기도 하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상세한 반면 본 지도는 일부만 그렸고, 뒤의 2개 지도는 도로를 모두 생략하였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도로는 《해동지도》가 더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읍치 내의 건물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원본에 더 가깝다고 판단된다. 한편 군현의 전반적인 모습은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필사 과정에서 약간씩 달라지는 경우가 나타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所里山烽臺가 다른 3개 지도에는 所伊山烽臺로 적혀 있고, 아래쪽 왼쪽의 錦綉山이 뒤의 2개 지도에는 동일한데 비해 《해동지도》에는 錦繡山으로 기록되어 있어 필사자에 따라 한자를 비슷한 글자로 바꾸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단양군 주기 (丹陽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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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양군은 현재 단양군의 단양읍, 대강면, 단성면, 적성면, 매포읍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단성면의 하방리 일대에 있었는데, 충주댐의 건설로 대부분 수몰되어 버렸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동)의 永春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淸風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단양군(또는 단양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다음과 같은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해동지도》가 동서(세로)보다는 남북(가로)을 더 길게 그린 것과 반대로 그렸다. 둘째, 읍치에 3개의 건물이 더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倉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기도 하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상세한 반면 본 지도는 일부만 그렸고, 뒤의 2개 지도는 도로를 모두 생략하였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도로는 《해동지도》가 더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읍치 내의 건물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원본에 더 가깝다고 판단된다. 한편 군현의 전반적인 모습은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필사 과정에서 약간씩 달라지는 경우가 나타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所里山烽臺가 다른 3개 지도에는 所伊山烽臺로 적혀 있고, 아래쪽 왼쪽의 錦綉山이 뒤의 2개 지도에는 동일한데 비해 《해동지도》에는 錦繡山으로 기록되어 있어 필사자에 따라 한자를 비슷한 글자로 바꾸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당진현 (唐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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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현은 당진군의 당진읍, 고대면, 석문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당진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당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당진현은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며, 읍치는 동남쪽에 치우쳐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특히 왼쪽 위의 長古項은 현재 석문면의 장고항리로서 서북쪽의 바다로 툭 튀어나가 있는 곶에 해당되며 읍치에서 가장 멀리 있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였다. 오른쪽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은 현재의 대방들천이며, 위쪽에서 흘러드는 하천은 현재의 당진천이다. 두 하천이 각각 沔川界와 海美界 넘어에서 흘러들어오는데, 이 부분은 사실에 부합되게 표현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海倉은  당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로서 현재도 고대면 당진포리에 해창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그 아래쪽의 船泊處는 해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船所였다.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 없는 4개의 섬이 첨가되어 있는데, 위쪽 첨지에는 備圖에 있는 것을 참조하여 첨가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당진 지도를 의미한다.(이기봉)

  • 당진현 주기 (唐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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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현은 당진군의 당진읍, 고대면, 석문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당진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당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당진현은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며, 읍치는 동남쪽에 치우쳐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특히 왼쪽 위의 長古項은 현재 석문면의 장고항리로서 서북쪽의 바다로 툭 튀어나가 있는 곶에 해당되며 읍치에서 가장 멀리 있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였다. 오른쪽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은 현재의 대방들천이며, 위쪽에서 흘러드는 하천은 현재의 당진천이다. 두 하천이 각각 沔川界와 海美界 넘어에서 흘러들어오는데, 이 부분은 사실에 부합되게 표현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海倉은  당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로서 현재도 고대면 당진포리에 해창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그 아래쪽의 船泊處는 해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船所였다.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 없는 4개의 섬이 첨가되어 있는데, 위쪽 첨지에는 備圖에 있는 것을 참조하여 첨가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당진 지도를 의미한다.(이기봉)

  • 대흥군 (大興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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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군은 예산군의 대흥면, 신양면, 광시면, 응봉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대흥면의 동서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대흥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우선 아래의 왼쪽 靑陽界로부터 흘러들어와 위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무한천 본류이고, 오른쪽 위와 아래에서 무한천에 합류하는 하천이 그 지류인 현재의 신양천이다. 신양천은 위쪽으로 예산, 아래쪽으로 청양의 경계 너머에서 흘러 들어오는데, 4개의 지도가 약간씩 다르게 되어 있다. 가장 사실에 합당한 것은 《해동지도》로 비록 아래쪽이 본 지도에서처럼 산줄기에 의해 막힌 것인 양 표현되어 있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하천을 굵게 표시하여 청양계에서 흘러들어옴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했다. 본 지도는 청양계에서 흘러오는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표현하였지만 예산계에서 흘러오는 하천의 끝을 뾰족하게 하여 마지 그곳이 발원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하였다. 《여지도》에서는 이러한 오해 가능성이 더 높게 표현되어 있으며, 《광여도》에서는 신양천의 남북 모두 완벽하게 오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신양천을 가장 이해하기 어렵게 그린 《광여도》의 경우 여러 필사본을 거치면서 조금씩 왜곡된 것을 필사자의 자의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묘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본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備圖에 있는 것을 바탕으로 첨가시킨 지명 중 鳳首山城이 기록되어 있으며, 지도에는 읍치 바로 뒷산에 웅장하게 그려놓았다. 그러나 봉수산성은 함께 그려져 있는 任存城에 대한 다른 명칭이기 때문에 《해동지도》에 첨지를 붙여 교정한 사람은 단순히 지도만 비교하였을 뿐 서로 다른 측면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행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대흥군 주기 (大興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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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군은 예산군의 대흥면, 신양면, 광시면, 응봉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대흥면의 동서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대흥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우선 아래의 왼쪽 靑陽界로부터 흘러들어와 위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무한천 본류이고, 오른쪽 위와 아래에서 무한천에 합류하는 하천이 그 지류인 현재의 신양천이다. 신양천은 위쪽으로 예산, 아래쪽으로 청양의 경계 너머에서 흘러 들어오는데, 4개의 지도가 약간씩 다르게 되어 있다. 가장 사실에 합당한 것은 《해동지도》로 비록 아래쪽이 본 지도에서처럼 산줄기에 의해 막힌 것인 양 표현되어 있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하천을 굵게 표시하여 청양계에서 흘러들어옴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했다. 본 지도는 청양계에서 흘러오는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표현하였지만 예산계에서 흘러오는 하천의 끝을 뾰족하게 하여 마지 그곳이 발원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하였다. 《여지도》에서는 이러한 오해 가능성이 더 높게 표현되어 있으며, 《광여도》에서는 신양천의 남북 모두 완벽하게 오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신양천을 가장 이해하기 어렵게 그린 《광여도》의 경우 여러 필사본을 거치면서 조금씩 왜곡된 것을 필사자의 자의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묘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본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備圖에 있는 것을 바탕으로 첨가시킨 지명 중 鳳首山城이 기록되어 있으며, 지도에는 읍치 바로 뒷산에 웅장하게 그려놓았다. 그러나 봉수산성은 함께 그려져 있는 任存城에 대한 다른 명칭이기 때문에 《해동지도》에 첨지를 붙여 교정한 사람은 단순히 지도만 비교하였을 뿐 서로 다른 측면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행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덕산현 (德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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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현은 예산군의 덕산면, 삽교읍, 봉산면, 고덕면, 당진군의 합덕면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덕산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오른쪽 아래에서 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며, 서남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른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덕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는” 몇 개의 지명을 첨가한다는 내용이 기록된 첨지가 붙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이며, 面 부분에는 外也面과 內也面이 첨가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외대곡면과 내대곡면이 실제로는 외야면과 내야면이기 때문에 첨지를 붙인 사람이 꼼꼼히 검토하지 않은 채 문자의 차이를 면의 차이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의 첨지에 지명이 첨가되기 이전의 상황과 거의 동일하며, 《광여도》와 《여지도》도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해동지도》에서 삽교천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던 場村面이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초기의 필사자가 빠뜨린 것을 다른 필사자들이 사실과 대조하지 않은 채 그대로 필사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오른쪽 위의 非方串面은 덕산의 월경지로서 현재의 당진군 합덕읍 점원리와 신흥리 일대에 있었다. 홍주의 대부분은 지도의 아래쪽 방향에 있었는데 왼쪽 위에도 홍주계가 기록되어 있다. 이쪽 방향에 홍주의 월경지인 雲山面이 현재의 서산시 운산면의 일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지도》에서는 洪州界를 洪川界로 잘못 기록해 놓았다.(이기봉)

  • 덕산현 주기 (德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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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현은 예산군의 덕산면, 삽교읍, 봉산면, 고덕면, 당진군의 합덕면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덕산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오른쪽 아래에서 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며, 서남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른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덕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는” 몇 개의 지명을 첨가한다는 내용이 기록된 첨지가 붙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이며, 面 부분에는 外也面과 內也面이 첨가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외대곡면과 내대곡면이 실제로는 외야면과 내야면이기 때문에 첨지를 붙인 사람이 꼼꼼히 검토하지 않은 채 문자의 차이를 면의 차이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의 첨지에 지명이 첨가되기 이전의 상황과 거의 동일하며, 《광여도》와 《여지도》도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해동지도》에서 삽교천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던 場村面이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초기의 필사자가 빠뜨린 것을 다른 필사자들이 사실과 대조하지 않은 채 그대로 필사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오른쪽 위의 非方串面은 덕산의 월경지로서 현재의 당진군 합덕읍 점원리와 신흥리 일대에 있었다. 홍주의 대부분은 지도의 아래쪽 방향에 있었는데 왼쪽 위에도 홍주계가 기록되어 있다. 이쪽 방향에 홍주의 월경지인 雲山面이 현재의 서산시 운산면의 일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지도》에서는 洪州界를 洪川界로 잘못 기록해 놓았다.(이기봉)

  • 면천군 (沔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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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군은 당진군의 면천면, 송악면, 순성면, 부장리와 신촌리 및 강문리를 제외한 우강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면천면의 성상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면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唐津界의 물줄기는 胎峯, 排峙, 火峙에서 나오는데, 備圖에는 있으나 이 지도에는 없어 그려넣는다”란 첨지가 붙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湖西地圖》이며, 본 지도에는 없는 태봉 서쪽의 물줄기와 배치, 화치 등의 지명이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도 앞의 문구 차원에서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연관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천에 대한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면천현은 북쪽으로 바다와 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마치 하천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또한 동쪽과 동남쪽으로 현재의 삽교천과는 新昌을 마주하면서 일부만 접해 있고, 대부분 홍주와 아산 및 덕산의 월경지가 끼어 있다. 따라서 오른쪽 아래로부터 위로 향해 있는 하천과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지도에도 洪陽界(洪州界)와 新昌界 및 德山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라면 그 바깥쪽으로 흘러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싶으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와 비교해 보면 된다. 이러한 오류는 본 지도뿐만 아니라 앞의 3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와 비교해 볼 때 바깥쪽 경계선과 하천을 동일하게 인식하여 범한 오류가 아닌가 한다. 이런 추정이 맞다면 본 지도 계통의 원본 지도에는 하천과 경계선을 애매하게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면천군 주기 (沔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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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군은 당진군의 면천면, 송악면, 순성면, 부장리와 신촌리 및 강문리를 제외한 우강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면천면의 성상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면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唐津界의 물줄기는 胎峯, 排峙, 火峙에서 나오는데, 備圖에는 있으나 이 지도에는 없어 그려넣는다”란 첨지가 붙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湖西地圖》이며, 본 지도에는 없는 태봉 서쪽의 물줄기와 배치, 화치 등의 지명이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도 앞의 문구 차원에서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연관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천에 대한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면천현은 북쪽으로 바다와 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마치 하천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또한 동쪽과 동남쪽으로 현재의 삽교천과는 新昌을 마주하면서 일부만 접해 있고, 대부분 홍주와 아산 및 덕산의 월경지가 끼어 있다. 따라서 오른쪽 아래로부터 위로 향해 있는 하천과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지도에도 洪陽界(洪州界)와 新昌界 및 德山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라면 그 바깥쪽으로 흘러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싶으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와 비교해 보면 된다. 이러한 오류는 본 지도뿐만 아니라 앞의 3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와 비교해 볼 때 바깥쪽 경계선과 하천을 동일하게 인식하여 범한 오류가 아닌가 한다. 이런 추정이 맞다면 본 지도 계통의 원본 지도에는 하천과 경계선을 애매하게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목천현 (木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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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천현은 천안시의 목천면, 성남면, 병천면, 동면, 북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목천면의 동리와 서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목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목천현의 물을 모두 모아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 병천천이라고 부른다. 幷川은 3.1운동 때 옥사한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장터에서 유래된 말로 ‘아우내’를 한자식으로 기록한 것이 공식 명칭으로 변한 것이다. 다만 오른쪽의 일원동면과 이원동면은 현재의 동면으로 이곳에서 흐르는 물은 청주의 땅에서 아우내와 합류됨에도 불구하고 마치 목천현 내에서 합류되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해동지도》의 읍치에는 향교를 비롯하여 6개의 건물밖에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본 지도에는 총 18개나 되는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목천현 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실제 배치와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이러한 건물 중 중요한 건물만 그렸으며, 부속된 건물을 생략하면서 건물의 숫자가 극도로 축소되게 되었다. 본 지도에는 《호서지도》와 거의 같은 숫자의 건물이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건물의 배치가 엉성하게 표현되는 단점이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해동지도》보다 덜 하지만 건물의 수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배치를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여 필사 과정에서 왜곡이 발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 목천현 주기 (木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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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천현은 천안시의 목천면, 성남면, 병천면, 동면, 북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목천면의 동리와 서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목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목천현의 물을 모두 모아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 병천천이라고 부른다. 幷川은 3.1운동 때 옥사한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장터에서 유래된 말로 ‘아우내’를 한자식으로 기록한 것이 공식 명칭으로 변한 것이다. 다만 오른쪽의 일원동면과 이원동면은 현재의 동면으로 이곳에서 흐르는 물은 청주의 땅에서 아우내와 합류됨에도 불구하고 마치 목천현 내에서 합류되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해동지도》의 읍치에는 향교를 비롯하여 6개의 건물밖에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본 지도에는 총 18개나 되는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목천현 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실제 배치와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이러한 건물 중 중요한 건물만 그렸으며, 부속된 건물을 생략하면서 건물의 숫자가 극도로 축소되게 되었다. 본 지도에는 《호서지도》와 거의 같은 숫자의 건물이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건물의 배치가 엉성하게 표현되는 단점이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해동지도》보다 덜 하지만 건물의 수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배치를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여 필사 과정에서 왜곡이 발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 문의현 (文義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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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현은 청원군의 현도면, 부용면, 일부를 제외한 문의면, 가덕면의 서남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대청호에 수몰되어 버렸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서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문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의 淸州界에서 흘러와 위쪽의 公州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며, 이 지역에서는 지도에도 적혀 있듯이 芙蓉江으로 불렀다. 淸州가 문의현의 오른쪽(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쪽(남동)에 淸州界라고 또 적혀 있는 이유는 이곳에 청주의 월경지인 周岸面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와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몇몇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약간 다른 점은 건물의 수와 하천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는 약간 다른 편이다. 어느 것이 원본에 더 가까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정보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차이점이라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서 《해동지도》와 달리 면과 역 등에 사각형의 기호를 사용하여 정보가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이기봉)

  • 문의현 주기 (文義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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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현은 청원군의 현도면, 부용면, 일부를 제외한 문의면, 가덕면의 서남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대청호에 수몰되어 버렸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서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문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의 淸州界에서 흘러와 위쪽의 公州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며, 이 지역에서는 지도에도 적혀 있듯이 芙蓉江으로 불렀다. 淸州가 문의현의 오른쪽(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쪽(남동)에 淸州界라고 또 적혀 있는 이유는 이곳에 청주의 월경지인 周岸面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와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몇몇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약간 다른 점은 건물의 수와 하천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는 약간 다른 편이다. 어느 것이 원본에 더 가까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정보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차이점이라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서 《해동지도》와 달리 면과 역 등에 사각형의 기호를 사용하여 정보가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이기봉)

  • 보령현 (保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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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현은 보령시의 시내, 주교면,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섬을 제외한 오천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주포면 보령리에 있었는데, 읍성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보령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지고 입지한 읍치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대문으로 판단된다. 水營은 충청도의 수영으로서 현재의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고, 현재도 성곽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아래쪽의 船泊處는 보령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으로 船所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읍치 오른쪽의 海倉은 보령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 현재도 주교면의 관창리에 해창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읍치 위쪽의 하천은 현재의 대천해수욕장 명칭이 유래된 大川이며, 우리말로는 ‘한내’라고 불렀다.(이기봉)

  • 보령현 주기 (保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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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현은 보령시의 시내, 주교면,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섬을 제외한 오천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주포면 보령리에 있었는데, 읍성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보령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지고 입지한 읍치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대문으로 판단된다. 水營은 충청도의 수영으로서 현재의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고, 현재도 성곽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아래쪽의 船泊處는 보령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으로 船所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읍치 오른쪽의 海倉은 보령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 현재도 주교면의 관창리에 해창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읍치 위쪽의 하천은 현재의 대천해수욕장 명칭이 유래된 大川이며, 우리말로는 ‘한내’라고 불렀다.(이기봉)

  • 보은현 (報恩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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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현은 회북면과 회남면 및 내북면의 대안리 북쪽을 제외한 보은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보은읍의 삼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보은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 위쪽에 五層閣이 그려진 사찰은 현재의 법주사이며, 이곳에서 흘러나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현재 보은군의 산외면과 외속리면에 해당된다. 읍치 지역의 물을 한데 모아 아래쪽의 靑山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현재의 보청천이다. 보청천은 오른쪽에 표기된 尙州界 방면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상주계 방면의 물은 현재의 상주시 화서면에서 발원하여 화남면을 지나 보은현으로 들어온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도 본 계통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데, 하천의 모습은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읍치와 법주사에서 그려진 건물의 수라는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보다는 훨씬 많과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다. 앞서 언급한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에도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원본의 건물 내용을 일괄적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에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 비해 건물의 모양과 배치가 더 선명하게 되어 있어 원본이거나 원본에 가장 가까운 지도로 추정된다.(이기봉)

  • 보은현 주기 (報恩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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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현은 회북면과 회남면 및 내북면의 대안리 북쪽을 제외한 보은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보은읍의 삼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보은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 위쪽에 五層閣이 그려진 사찰은 현재의 법주사이며, 이곳에서 흘러나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현재 보은군의 산외면과 외속리면에 해당된다. 읍치 지역의 물을 한데 모아 아래쪽의 靑山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현재의 보청천이다. 보청천은 오른쪽에 표기된 尙州界 방면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상주계 방면의 물은 현재의 상주시 화서면에서 발원하여 화남면을 지나 보은현으로 들어온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도 본 계통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데, 하천의 모습은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읍치와 법주사에서 그려진 건물의 수라는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보다는 훨씬 많과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다. 앞서 언급한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에도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원본의 건물 내용을 일괄적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에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 비해 건물의 모양과 배치가 더 선명하게 되어 있어 원본이거나 원본에 가장 가까운 지도로 추정된다.(이기봉)

  • 부여현 (夫餘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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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현은 부여군의 부여읍, 규암면, 은산면, 조촌면의 서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부여읍의 구아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부여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있는 반면에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른쪽의 公州界에서 흘러와 왼쪽의 林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읍치 왼쪽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 지역에서는 白馬江이라고 불렀다. 부여현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는 사각형의 종이 모양에 맞추기 위해 남북으로 약간 길게 그려져 있다. 읍치의 경우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금강 북쪽은 실제로는 읍치의 왼쪽 위의 방향으로 그려져 있어야 사실에 가깝다. 읍치 위쪽의 扶蘇山에는 백제시대의 부소산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통해 볼 때 조선후기에는 산성으로서의 의미가 거의 상실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쪽에 기록된 陵山은 백제의 고분군이 밀집한 능산리고분군이 있는 지역이다. 왼쪽의 海倉은 부여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부여현 주기 (夫餘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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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현은 부여군의 부여읍, 규암면, 은산면, 조촌면의 서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부여읍의 구아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부여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있는 반면에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른쪽의 公州界에서 흘러와 왼쪽의 林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읍치 왼쪽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 지역에서는 白馬江이라고 불렀다. 부여현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는 사각형의 종이 모양에 맞추기 위해 남북으로 약간 길게 그려져 있다. 읍치의 경우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금강 북쪽은 실제로는 읍치의 왼쪽 위의 방향으로 그려져 있어야 사실에 가깝다. 읍치 위쪽의 扶蘇山에는 백제시대의 부소산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통해 볼 때 조선후기에는 산성으로서의 의미가 거의 상실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쪽에 기록된 陵山은 백제의 고분군이 밀집한 능산리고분군이 있는 지역이다. 왼쪽의 海倉은 부여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비인현 (庇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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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인현은 서천군의 비인면, 서면, 판교면, 종천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비인면의 성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비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첫째,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둘재,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여지도》에는 읍치 주변의 산줄기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진 반면 《광여도》에서는 산봉우리가 밀집된 형태로 묘사했다. 셋째, 읍치 아래쪽의 栽松亭 숲이 《해동지도》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특히 두 번째는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의 개성이 표현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에 있는 섬은 대략적인 위치와 방향만 의미가 있을 뿐 거리는 실제와 상당히 다르다. 烟島는 현재 군산시 옥도면 연도리로서 다른 섬에 비해 해안에서 10배 이상 떨어져 있다. 본 지도에는 船泊處가 두 곳 표시되어 있는데, 왼쪽의 것은 마량진 관할의 전선이, 오른쪽의 것은 비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다. 馬梁鎭은 현재 서면의 마량리에 있던 해군 기지로서 원래 남포현의 땅이었던 보령시의 웅천읍 황교리에 있던 것을 1656년(효종 7)에 옮겨온 것이다.(이기봉)

  • 비인현 주기 (庇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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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인현은 서천군의 비인면, 서면, 판교면, 종천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비인면의 성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비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첫째,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둘재,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여지도》에는 읍치 주변의 산줄기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진 반면 《광여도》에서는 산봉우리가 밀집된 형태로 묘사했다. 셋째, 읍치 아래쪽의 栽松亭 숲이 《해동지도》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특히 두 번째는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의 개성이 표현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에 있는 섬은 대략적인 위치와 방향만 의미가 있을 뿐 거리는 실제와 상당히 다르다. 烟島는 현재 군산시 옥도면 연도리로서 다른 섬에 비해 해안에서 10배 이상 떨어져 있다. 본 지도에는 船泊處가 두 곳 표시되어 있는데, 왼쪽의 것은 마량진 관할의 전선이, 오른쪽의 것은 비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다. 馬梁鎭은 현재 서면의 마량리에 있던 해군 기지로서 원래 남포현의 땅이었던 보령시의 웅천읍 황교리에 있던 것을 1656년(효종 7)에 옮겨온 것이다.(이기봉)

  • 서산군 (瑞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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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군은 서산시의 시내, 대산면, 지곡면, 성연면, 팔봉면, 인지면, 부석면, 음암면, 태안군의 고남면과 북쪽 일부를 제외한 안면읍과 고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산시 시내의 읍내동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서산군에 속해 있던 안면도와 부근 섬들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안면도와 부근 섬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위쪽의 첨지에는 備圖에 있는 것을 참고로 필사하여 넣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備圖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서산 지도이며, 이를 통해 볼 때 4개 지도의 원본 계통에는 안면도와 부근 섬이 생략되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서산군은 남쪽과 북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는데, 본 지도뿐만 아니라 나머지 3개 지도에도 남북쪽의 바다가 하천과 같은 수로로 연결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래 현재의 굴포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태안과의 사이에 운하를 뚫으려고 하다가 실패한 기록이 있는 것처럼 비록 좁기는 하지만 바다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른쪽에 唐津界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오류이다. 서산군은 실제로 당진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으며, 지도 위의 당진계 부분에는 海美界나 德山界 또는 沔川界가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이 당진계와 맞대고 있다는 본 지도 계통의 오류는 정확성을 기한 본 사이트의 《조선지도》(규16030)에서 서산 동쪽 부분의 경계선 오류가 나타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이기봉)

  • 서산군 주기 (瑞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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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군은 서산시의 시내, 대산면, 지곡면, 성연면, 팔봉면, 인지면, 부석면, 음암면, 태안군의 고남면과 북쪽 일부를 제외한 안면읍과 고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산시 시내의 읍내동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서산군에 속해 있던 안면도와 부근 섬들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안면도와 부근 섬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위쪽의 첨지에는 備圖에 있는 것을 참고로 필사하여 넣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備圖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서산 지도이며, 이를 통해 볼 때 4개 지도의 원본 계통에는 안면도와 부근 섬이 생략되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서산군은 남쪽과 북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는데, 본 지도뿐만 아니라 나머지 3개 지도에도 남북쪽의 바다가 하천과 같은 수로로 연결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래 현재의 굴포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태안과의 사이에 운하를 뚫으려고 하다가 실패한 기록이 있는 것처럼 비록 좁기는 하지만 바다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른쪽에 唐津界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오류이다. 서산군은 실제로 당진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으며, 지도 위의 당진계 부분에는 海美界나 德山界 또는 沔川界가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이 당진계와 맞대고 있다는 본 지도 계통의 오류는 정확성을 기한 본 사이트의 《조선지도》(규16030)에서 서산 동쪽 부분의 경계선 오류가 나타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이기봉)

  • 서천군 (舒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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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군은 현재 서천군의 서천읍, 마서면, 장항읍, 시초면, 문산면과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의 개야도리․연도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천읍 군사리에 있었다. 서천군의 실제 모습은 읍치 동북쪽으로 韓山과 庇仁 사이로 犬牙相入地가 튀어나가 북쪽의 鴻山과 연결되고 있다. 본 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읍치의 풍수적 명당 형국을 강조하고, 사각형의 종이 모양에 맞추기 위해 아주 짧게 그려져 있다. 이로 인해 오른쪽의 하천이 실제로는 왼쪽의 하천보다 훨씬 길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비슷한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아래쪽에는 바다처럼 그려져 있지만 현재의 금강 하구 부분에 해당된다. 본 지도에도 沃溝界, 臨陂界 등의 문자가 적혀 있어 자세히 관찰해 보면 금강 하구임을 알 수 있다. 왼쪽 아래에 표시된 섬은 대략적인 방향만 알려줄 뿐 실제 거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烟島, 竹島, 開也召島는 현재 군산시 옥도면에 속해 있으며, 육지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 읍치 아래쪽의 南部面 지역은 마치 섬처럼 그려져 있는데, 과장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원래는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으로 변하던 곳으로 현재는 모두 간척되어 육지화 되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일부의 지명과 도로 등을 제외하면 별로 다르지 않으며, 《광여도》에서 본 지도에서 舒川浦라고만 표현했던 것을 舒川浦鎭으로 실제와 부합되게 변경한 것 정도가 큰 변화이다.(이기봉)

  • 서천군 주기 (舒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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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군은 현재 서천군의 서천읍, 마서면, 장항읍, 시초면, 문산면과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의 개야도리․연도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천읍 군사리에 있었다. 서천군의 실제 모습은 읍치 동북쪽으로 韓山과 庇仁 사이로 犬牙相入地가 튀어나가 북쪽의 鴻山과 연결되고 있다. 본 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읍치의 풍수적 명당 형국을 강조하고, 사각형의 종이 모양에 맞추기 위해 아주 짧게 그려져 있다. 이로 인해 오른쪽의 하천이 실제로는 왼쪽의 하천보다 훨씬 길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비슷한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아래쪽에는 바다처럼 그려져 있지만 현재의 금강 하구 부분에 해당된다. 본 지도에도 沃溝界, 臨陂界 등의 문자가 적혀 있어 자세히 관찰해 보면 금강 하구임을 알 수 있다. 왼쪽 아래에 표시된 섬은 대략적인 방향만 알려줄 뿐 실제 거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烟島, 竹島, 開也召島는 현재 군산시 옥도면에 속해 있으며, 육지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 읍치 아래쪽의 南部面 지역은 마치 섬처럼 그려져 있는데, 과장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원래는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으로 변하던 곳으로 현재는 모두 간척되어 육지화 되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일부의 지명과 도로 등을 제외하면 별로 다르지 않으며, 《광여도》에서 본 지도에서 舒川浦라고만 표현했던 것을 舒川浦鎭으로 실제와 부합되게 변경한 것 정도가 큰 변화이다.(이기봉)

  • 석성현 (石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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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성현은 부여군의 석성면, 부여읍의 현북리, 초촌면의 연화리, 논산시의 성동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석성면의 석성리에 있었다. 지도는 서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뻗은 산줄기의 來脈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의 임천계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임천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오른쪽의 恩津界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석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여지도》에서는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지만 《광여도》에서는 주로 남쪽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그렸다. 비록 창작이 아니라 필사라고 하더라도 표현 방식에서 변화를 주려했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여지도》에서는 논산천변에 수록된 5개의 堤가 생략되어 있는데, 다른 지도와 비교해 보았을 때 필사자가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여겨진다. 기타 산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기 위해 전 지역을 비슷한 크기로 그렸지만 실제로 위쪽에 비해 아래쪽은 산이 거의 없는 평지에 불과하다. 왼쪽의 江倉은 석성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석성현 주기 (石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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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성현은 부여군의 석성면, 부여읍의 현북리, 초촌면의 연화리, 논산시의 성동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석성면의 석성리에 있었다. 지도는 서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뻗은 산줄기의 來脈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의 임천계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임천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오른쪽의 恩津界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석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여지도》에서는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지만 《광여도》에서는 주로 남쪽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그렸다. 비록 창작이 아니라 필사라고 하더라도 표현 방식에서 변화를 주려했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여지도》에서는 논산천변에 수록된 5개의 堤가 생략되어 있는데, 다른 지도와 비교해 보았을 때 필사자가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여겨진다. 기타 산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기 위해 전 지역을 비슷한 크기로 그렸지만 실제로 위쪽에 비해 아래쪽은 산이 거의 없는 평지에 불과하다. 왼쪽의 江倉은 석성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수영 (水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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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도의 수영은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성곽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는 편이다. 지도의 이름인 水營 아래쪽에는 保寧이라는 문자를 써넣어 보령 땅에 소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해안선과 섬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水營(圖)와 거의 동일하여 동일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船泊處에 배의 모양을 그려넣은 정도에 불과하다. 왼쪽 위에 기록된 洪陽은 현종 2년(1661)과 숙종 36년(1710) 등에 홍주가 강등되어 사용되던 명칭으로 《해동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충청 수영의 최초 지도가 현종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후대의 필사본들이 지명의 변화를 확인하지 않고 필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수영성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수영의 성곽과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곳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확대하여 그렸고, 다른 부분들은 대략 방향만 맞추어 배치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은 정보가 많은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하나의 지면에 동시에 그리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방식으로 축척과 방향은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다. 雙熬島의 경우 암초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는 것은 성곽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중요한 경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쪽(서)의 섬들은 대략적인 방향과 섬의 상대적인 크기만이 반영되어 있을 뿐 실질적인 거리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外烟島와 於靑島의 경우 해안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 위에 있는 섬이다.(이기봉)

  • 수영 주기 (水營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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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도의 수영은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성곽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는 편이다. 지도의 이름인 水營 아래쪽에는 保寧이라는 문자를 써넣어 보령 땅에 소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해안선과 섬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水營(圖)와 거의 동일하여 동일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船泊處에 배의 모양을 그려넣은 정도에 불과하다. 왼쪽 위에 기록된 洪陽은 현종 2년(1661)과 숙종 36년(1710) 등에 홍주가 강등되어 사용되던 명칭으로 《해동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충청 수영의 최초 지도가 현종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후대의 필사본들이 지명의 변화를 확인하지 않고 필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수영성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수영의 성곽과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곳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확대하여 그렸고, 다른 부분들은 대략 방향만 맞추어 배치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은 정보가 많은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하나의 지면에 동시에 그리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방식으로 축척과 방향은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다. 雙熬島의 경우 암초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는 것은 성곽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중요한 경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쪽(서)의 섬들은 대략적인 방향과 섬의 상대적인 크기만이 반영되어 있을 뿐 실질적인 거리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外烟島와 於靑島의 경우 해안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 위에 있는 섬이다.(이기봉)

  • 신창현 (新昌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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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현은 아산시의 신창면, 도고면, 서쪽 일부를 제외한 선장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창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창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하천에 대한 표현이다. 읍치 북쪽의 하천은 현재의 곡교천으로 실제로는 천안에서 발원하여 온양과 아산의 경계를 흐르다가 신창현의 북쪽을 흐른다.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삽교천으로 頓串津 부근에서 곡교천과 합류되어 현재의 삽교호인 위쪽(북)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이러한 측면을 전혀 이해하기 어렵게 곡교천과 삽교천이 하나의 하천처럼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왼쪽 아래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렸다. 그림지도에서는 이런 현상이 가끔 나타나는데, 하천의 연결 관계보다는 해당 군현을 중심으로 하천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의 山城은 현재의 학성산 정상을 두른 테뫼식의 중형 산성으로 삼국시대로부터 빨라도 고려시대 초기까지는 신창현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산성이 있던 鶴城山이 이 고을의 鎭山인데, 조선시대 이전의 장소성이 진산이란 경관으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이기봉)

  • 신창현 주기 (新昌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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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현은 아산시의 신창면, 도고면, 서쪽 일부를 제외한 선장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창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창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하천에 대한 표현이다. 읍치 북쪽의 하천은 현재의 곡교천으로 실제로는 천안에서 발원하여 온양과 아산의 경계를 흐르다가 신창현의 북쪽을 흐른다.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삽교천으로 頓串津 부근에서 곡교천과 합류되어 현재의 삽교호인 위쪽(북)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이러한 측면을 전혀 이해하기 어렵게 곡교천과 삽교천이 하나의 하천처럼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왼쪽 아래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렸다. 그림지도에서는 이런 현상이 가끔 나타나는데, 하천의 연결 관계보다는 해당 군현을 중심으로 하천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의 山城은 현재의 학성산 정상을 두른 테뫼식의 중형 산성으로 삼국시대로부터 빨라도 고려시대 초기까지는 신창현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산성이 있던 鶴城山이 이 고을의 鎭山인데, 조선시대 이전의 장소성이 진산이란 경관으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이기봉)

  • 아산현 (牙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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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현은 아산시의 영인면, 음봉면, 서원리를 제외한 염치읍, 금성리․해암리를 제외한 인주면, 둔포면의 북쪽, 선장면의 신문리, 당진군 우강면의 신촌리와 부장리 및 강문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인면의 아산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아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의 沔川界라고 적혀 있는 부분이 현재의 아산만이고, 水原界에서 흘러오는 하천이 현재의 아산호인 안성천의 하구이다. 위쪽의 平澤界에서 아산호로 흘러드는 하천이 현재의 군계천이며, 아래쪽의 牛坪津이라 적혀 있는 하천이 현재의 곡교천이다. 곡교천은 동쪽의 천안에서 흘러들어오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왼쪽 위에는 唐津浦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唐津界로 바뀌어 있다. 두 지도의 필사자들이 唐津浦를 동일한 명칭인 唐津縣으로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아산현 지도에도 당진포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읍치에 7개의 건물이, 貢稅倉에는 5-6개의 건물과 성곽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4개의 건물이, 공세창에는 성곽은 없고 단지 1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다.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아산현 지도에는 《해동지도》보다는 나머지 3개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어떤 원칙에 의해 표현 방법을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貢稅倉은 주변 고을의 稅米를 모아 서울로 운반하던 漕倉인데, 조선전기에는 현재의 충청남도 대부분의 세미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해안가나 수상 운송이 가능한 하천을 끼고 있는 고을의 경우 세미를 자체적으로 운반하게 하면서 내륙 고을만 책임지게 되어 규모와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다. 공세창은 현재의 인주면 공세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성곽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이기봉)

  • 아산현 주기 (牙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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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현은 아산시의 영인면, 음봉면, 서원리를 제외한 염치읍, 금성리․해암리를 제외한 인주면, 둔포면의 북쪽, 선장면의 신문리, 당진군 우강면의 신촌리와 부장리 및 강문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인면의 아산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아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의 沔川界라고 적혀 있는 부분이 현재의 아산만이고, 水原界에서 흘러오는 하천이 현재의 아산호인 안성천의 하구이다. 위쪽의 平澤界에서 아산호로 흘러드는 하천이 현재의 군계천이며, 아래쪽의 牛坪津이라 적혀 있는 하천이 현재의 곡교천이다. 곡교천은 동쪽의 천안에서 흘러들어오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왼쪽 위에는 唐津浦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唐津界로 바뀌어 있다. 두 지도의 필사자들이 唐津浦를 동일한 명칭인 唐津縣으로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아산현 지도에도 당진포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읍치에 7개의 건물이, 貢稅倉에는 5-6개의 건물과 성곽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4개의 건물이, 공세창에는 성곽은 없고 단지 1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다.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아산현 지도에는 《해동지도》보다는 나머지 3개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어떤 원칙에 의해 표현 방법을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貢稅倉은 주변 고을의 稅米를 모아 서울로 운반하던 漕倉인데, 조선전기에는 현재의 충청남도 대부분의 세미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해안가나 수상 운송이 가능한 하천을 끼고 있는 고을의 경우 세미를 자체적으로 운반하게 하면서 내륙 고을만 책임지게 되어 규모와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다. 공세창은 현재의 인주면 공세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성곽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이기봉)

  • 연기현 (燕岐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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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현은 연기군의 서면, 동면, 조치원읍, 남면의 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남면의 연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하천이다. 오른쪽 아래의 文義界에서 흘러와 왼쪽의 公州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그리고 오른쪽 위의 ‘燕歧縣’이라는 지도의 명칭쪽에서 흘러와 읍치를 지나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과 그 지류인 조천이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오른쪽 아래의 白川은 현재의 백천천으로 금강의 본류뿐만 아니라 미호천보다도 훨씬 작은 하천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광여도》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더욱 커져 백천천과 금강 본류가 굵은 두 줄로 표시된 반면에 미호천은 실선으로만 처리되어 있어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위의 淸州界라고 적힌 글씨 방향에서 하천이 들어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다른 3개의 지도에서는 그런 하천이 없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동일 방향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데, 《광여도》의 필사자가 도로를 하천으로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연기현에서 1872년에 직접 그려올렸음이 확인된 1872년 지방지도의 연기현 지도와 비교해 보면 본 지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72년 지방지도의 연기현 지도에는 본 지도의 南面에서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도 직접 합류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실제에 부합되는 것이다.(이기봉)

  • 연기현 주기 (燕岐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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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현은 연기군의 서면, 동면, 조치원읍, 남면의 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남면의 연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하천이다. 오른쪽 아래의 文義界에서 흘러와 왼쪽의 公州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그리고 오른쪽 위의 ‘燕歧縣’이라는 지도의 명칭쪽에서 흘러와 읍치를 지나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과 그 지류인 조천이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오른쪽 아래의 白川은 현재의 백천천으로 금강의 본류뿐만 아니라 미호천보다도 훨씬 작은 하천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광여도》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더욱 커져 백천천과 금강 본류가 굵은 두 줄로 표시된 반면에 미호천은 실선으로만 처리되어 있어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위의 淸州界라고 적힌 글씨 방향에서 하천이 들어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다른 3개의 지도에서는 그런 하천이 없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동일 방향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데, 《광여도》의 필사자가 도로를 하천으로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연기현에서 1872년에 직접 그려올렸음이 확인된 1872년 지방지도의 연기현 지도와 비교해 보면 본 지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72년 지방지도의 연기현 지도에는 본 지도의 南面에서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도 직접 합류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실제에 부합되는 것이다.(이기봉)

  • 연산현 (連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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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현은 논산시의 연산면, 두마면, 부적면, 벌곡면, 양촌면의 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산면의 연산리 일대에 있었다. 아래의 왼쪽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오른쪽에 있는 하천은 아래쪽과 위쪽이 각각 갑천의 상류인 벌곡천과 두계천인데,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알 수 없게 그려져 있다. 실제로 두 하천은 동쪽의 진잠 땅에서 합류되어 동북쪽으로 빠져나간다. 두계천이 발원하는 鷄龍山 남쪽 부분은 태조 이성계가 수도로 정하려고 했던 신도안 지역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해동지도》에서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해동지도》는 동쪽을 등지고 있는 읍치의 입지 방향을 중요하게 여겨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나 뒤의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임의적으로 지도의 방향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의 경우 고려 왕건이 세운 개태사 동쪽의 開太峙에서 바로 산줄기가 뻗어내려온 것처럼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개태치에서 훨씬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동쪽으로 등지고 입지하여 있었다. 왼쪽 위의 海倉은 은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연산현 주기 (連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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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현은 논산시의 연산면, 두마면, 부적면, 벌곡면, 양촌면의 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산면의 연산리 일대에 있었다. 아래의 왼쪽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오른쪽에 있는 하천은 아래쪽과 위쪽이 각각 갑천의 상류인 벌곡천과 두계천인데,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알 수 없게 그려져 있다. 실제로 두 하천은 동쪽의 진잠 땅에서 합류되어 동북쪽으로 빠져나간다. 두계천이 발원하는 鷄龍山 남쪽 부분은 태조 이성계가 수도로 정하려고 했던 신도안 지역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해동지도》에서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해동지도》는 동쪽을 등지고 있는 읍치의 입지 방향을 중요하게 여겨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나 뒤의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임의적으로 지도의 방향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의 경우 고려 왕건이 세운 개태사 동쪽의 開太峙에서 바로 산줄기가 뻗어내려온 것처럼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개태치에서 훨씬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동쪽으로 등지고 입지하여 있었다. 왼쪽 위의 海倉은 은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연풍현 (延豊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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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현은 괴산군의 연풍면과 장연면, 충주시의 상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풍면의 삼풍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현재의 쌍천이고, 왼쪽의 하천은 충주시의 상모면에 있는 석문동천이다. 왼쪽 아래의 勉義面은 水回面과 다른 현재의 장연면 북쪽 오가천 유역에 있기 때문에 실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풍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의 연풍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조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로 붙어 있다. 이런 지명 중에 長岩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丈岩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해동지도》의 첨지에 첨가된 지명 중 장암을 제외하면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원본에 있던 장암을 빠뜨린 것으로 판단되며, 후에 備圖와의 비교 속에서 비로서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오른쪽 아래의 覺淵寺가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아 이 지도 계통의 원본에는 있었지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빠뜨린 것이 아닌가 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연풍현 지도는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수법으로 그려져 있지만 수록된 지명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와  거의 같다.(이기봉)

  • 연풍현 주기 (延豊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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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현은 괴산군의 연풍면과 장연면, 충주시의 상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풍면의 삼풍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현재의 쌍천이고, 왼쪽의 하천은 충주시의 상모면에 있는 석문동천이다. 왼쪽 아래의 勉義面은 水回面과 다른 현재의 장연면 북쪽 오가천 유역에 있기 때문에 실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풍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의 연풍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조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로 붙어 있다. 이런 지명 중에 長岩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丈岩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해동지도》의 첨지에 첨가된 지명 중 장암을 제외하면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원본에 있던 장암을 빠뜨린 것으로 판단되며, 후에 備圖와의 비교 속에서 비로서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오른쪽 아래의 覺淵寺가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아 이 지도 계통의 원본에는 있었지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빠뜨린 것이 아닌가 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연풍현 지도는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수법으로 그려져 있지만 수록된 지명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와  거의 같다.(이기봉)

  • 영동현 (永同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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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현은 영동군의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여의리를 제외한 용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동읍의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동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의 沃川界에서 흘러와 위쪽의 赤登津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며, 오른쪽 아래의 天馬岺에서 발원하여 北一面을 지나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초강천이다. 초강천은 본 지도의 표현과 달리 황간현에서 발원하여 상당부분을 거쳐 영동현의 땅으로 들어오는데,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또한 초강천 상류와 그 왼쪽의 하천 사이에는 三峯山(930.2m), 천마령(925.6m) 등의 높은 산줄기에 의해 나누어져 있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점은 앞의 3개 지도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영동현 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초강천이 蟾岩 부근까지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어 실제 사실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지도 아래쪽의 龍化倉은 현재의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 부근에 있던 것이다. 이 지역은 금강 지류 중의 하나인 남대천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 지도에는 남대천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 북쪽과는 산줄기에 의해 분리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그려 유역권이 다름을 짐작할 수 있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해당 지도에는 없어 새롭게 필사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영동 지도이며, 본 지도나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첨가되어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영동현 주기 (永同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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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현은 영동군의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여의리를 제외한 용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동읍의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동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의 沃川界에서 흘러와 위쪽의 赤登津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며, 오른쪽 아래의 天馬岺에서 발원하여 北一面을 지나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초강천이다. 초강천은 본 지도의 표현과 달리 황간현에서 발원하여 상당부분을 거쳐 영동현의 땅으로 들어오는데,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또한 초강천 상류와 그 왼쪽의 하천 사이에는 三峯山(930.2m), 천마령(925.6m) 등의 높은 산줄기에 의해 나누어져 있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점은 앞의 3개 지도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영동현 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초강천이 蟾岩 부근까지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어 실제 사실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지도 아래쪽의 龍化倉은 현재의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 부근에 있던 것이다. 이 지역은 금강 지류 중의 하나인 남대천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 지도에는 남대천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 북쪽과는 산줄기에 의해 분리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그려 유역권이 다름을 짐작할 수 있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해당 지도에는 없어 새롭게 필사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영동 지도이며, 본 지도나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첨가되어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영춘현 (永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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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현은 단양군의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춘면의 상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쪽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남한강변에는 北津과 南津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나루임과 동시에 포구로서 기능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처럼 한강이나 남한강 등의 명칭을 사용하기보다는 해당 지역에서 중요하게 인식된 나루나 포구 또는 여울 등을 하천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 지도에는 읍치에 客舍를 비롯하여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6개가, 《해동지도》에는 3개만이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영춘현 지도도 전체적인 구도가 본 지도와 거의 같아 동일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읍치에 그려진 건물의 수가 본 지도와 동일하게 7개이며, 이를 통해 볼 때 원본에 가까운 것은 본 지도나 《호서지도》의 영춘현 지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광여도》와 《여지도》 계통의 필사자는 실수로 건물 1개를 빼먹은 것으로, 《해동지도》의 필사자는 향교와 객사 및 아사 등 중요 건물만 선별하여 수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해당 지도에는 없어 새롭게 필사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도》의 영춘 지도이며, 본 지도나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첨가되어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영춘현 주기 (永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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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현은 단양군의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춘면의 상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쪽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남한강변에는 北津과 南津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나루임과 동시에 포구로서 기능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처럼 한강이나 남한강 등의 명칭을 사용하기보다는 해당 지역에서 중요하게 인식된 나루나 포구 또는 여울 등을 하천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 지도에는 읍치에 客舍를 비롯하여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6개가, 《해동지도》에는 3개만이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영춘현 지도도 전체적인 구도가 본 지도와 거의 같아 동일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읍치에 그려진 건물의 수가 본 지도와 동일하게 7개이며, 이를 통해 볼 때 원본에 가까운 것은 본 지도나 《호서지도》의 영춘현 지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광여도》와 《여지도》 계통의 필사자는 실수로 건물 1개를 빼먹은 것으로, 《해동지도》의 필사자는 향교와 객사 및 아사 등 중요 건물만 선별하여 수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해당 지도에는 없어 새롭게 필사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도》의 영춘 지도이며, 본 지도나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첨가되어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예산현 (禮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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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현은 예산군의 예산읍, 대술면, 오가면, 일부를 제외한 신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예산읍 예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예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하천이다. 아래쪽의 大興界에서 흘러들어오는 하천은 현재의 무한천이며, 方可山面의 산쪽에 굵게 표현된 하천은 洪陽界로 표현된 홍주 땅에서 들어오는 현재의 삽교천이다. 오른쪽의 大枝洞面과 述谷面은 현재의 대술면 지역으로 무한천의 지류인 화산천의 상류에 해당되며, 대흥 땅에서 무한천에 합류되나 본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여지도》의 경우 삽교천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으며, 《광여도》의 경우는 완전히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필사하는 경우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예산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바탕으로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지명 중 無限城이 나오는데, 본 지도의 浦倉 아래쪽 산봉우리에 적혀 있다. 무한성은 삼국시대부터 빨라도 고려초기까지 예산 지역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무한천변의 급경사를 이용해 쌓은 요새적 구릉지성이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정치적 중심지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이기봉)

  • 예산현 주기 (禮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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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현은 예산군의 예산읍, 대술면, 오가면, 일부를 제외한 신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예산읍 예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예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하천이다. 아래쪽의 大興界에서 흘러들어오는 하천은 현재의 무한천이며, 方可山面의 산쪽에 굵게 표현된 하천은 洪陽界로 표현된 홍주 땅에서 들어오는 현재의 삽교천이다. 오른쪽의 大枝洞面과 述谷面은 현재의 대술면 지역으로 무한천의 지류인 화산천의 상류에 해당되며, 대흥 땅에서 무한천에 합류되나 본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여지도》의 경우 삽교천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으며, 《광여도》의 경우는 완전히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필사하는 경우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예산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바탕으로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지명 중 無限城이 나오는데, 본 지도의 浦倉 아래쪽 산봉우리에 적혀 있다. 무한성은 삼국시대부터 빨라도 고려초기까지 예산 지역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무한천변의 급경사를 이용해 쌓은 요새적 구릉지성이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정치적 중심지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이기봉)

  • 옥천군 (沃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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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군은 청산면과 청성면을 제외한 옥천군 전체, 영동군의 양산면과 학산면 및 용화면의 여의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옥천읍의 삼양리와 상계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괴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의 錦山界에서 흘러와 동쪽으로 휘돌아가면서 위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그러나 금강이 본 지도처럼 옥천군의 영역을 완전히 관통하면서 이어져 흐르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錦山界로부터 아래쪽의 陽山倉 부근으로 들어왔다가 永同 땅을 거쳐 다시 利山倉 지역을 지난다. 양산창 부근은 현재의 영동군 학산면과 양산면 지역으로 옥천의 다른 지역에 비해 남쪽으로 쑥 내려가 있는데,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어 그리다보니까 앞과 같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왼쪽의 珍山界에서는 현재의 서화천이 흘러 들어오지만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서화천을 본 지도처럼 그리고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서는 진산계에서 흘러 들어오는 것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는 서화천의 모습이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었지만 이후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옥천군 주기 (沃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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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군은 청산면과 청성면을 제외한 옥천군 전체, 영동군의 양산면과 학산면 및 용화면의 여의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옥천읍의 삼양리와 상계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괴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의 錦山界에서 흘러와 동쪽으로 휘돌아가면서 위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그러나 금강이 본 지도처럼 옥천군의 영역을 완전히 관통하면서 이어져 흐르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錦山界로부터 아래쪽의 陽山倉 부근으로 들어왔다가 永同 땅을 거쳐 다시 利山倉 지역을 지난다. 양산창 부근은 현재의 영동군 학산면과 양산면 지역으로 옥천의 다른 지역에 비해 남쪽으로 쑥 내려가 있는데,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어 그리다보니까 앞과 같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왼쪽의 珍山界에서는 현재의 서화천이 흘러 들어오지만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서화천을 본 지도처럼 그리고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서는 진산계에서 흘러 들어오는 것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는 서화천의 모습이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었지만 이후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온양군 (溫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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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군은 아산시의 시내, 송악면, 배방면, 탕정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아산시의 읍내동에 있었는데, 현재도 동헌과 향교가 남아 있다. 왼쪽 위의 溫泉이 현재의 아산시 시내에 해당되며, 온양온천으로 개발되어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중심지가 되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介峙에서 발원하여 북쪽을 돌아 新昌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곡교천이며, 읍치를 통과해 곡교천에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온양천이다. 곡교천은 실제로는 천안의 땅에서 발원하여 흘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또한 稷山界와 全義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해당 방향으로 가면 두 군현의 경계에 이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아 오해의 여지가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온양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와 《해동지도》의 첨지에 붙어 있는 일부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정보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건물의 수와 위치 등이 약간씩 다른데, 필사자의 자의에 따라 일부씩 변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 아래의 書院이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의 南山寺  아래쪽 건물로 표시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와 다르게 표시했다. 이런 현상은 客舍와 衙舍의 위치에서도 나타나는데, 본 지도에서는 두 건물이 남북으로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동서로 그려져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서원과 객사 및 아사의 위치가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의 필사자나 본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자의로 원본의 내용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온양군 주기 (溫陽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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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군은 아산시의 시내, 송악면, 배방면, 탕정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아산시의 읍내동에 있었는데, 현재도 동헌과 향교가 남아 있다. 왼쪽 위의 溫泉이 현재의 아산시 시내에 해당되며, 온양온천으로 개발되어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중심지가 되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介峙에서 발원하여 북쪽을 돌아 新昌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곡교천이며, 읍치를 통과해 곡교천에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온양천이다. 곡교천은 실제로는 천안의 땅에서 발원하여 흘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또한 稷山界와 全義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해당 방향으로 가면 두 군현의 경계에 이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아 오해의 여지가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온양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와 《해동지도》의 첨지에 붙어 있는 일부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정보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건물의 수와 위치 등이 약간씩 다른데, 필사자의 자의에 따라 일부씩 변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 아래의 書院이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의 南山寺  아래쪽 건물로 표시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와 다르게 표시했다. 이런 현상은 客舍와 衙舍의 위치에서도 나타나는데, 본 지도에서는 두 건물이 남북으로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동서로 그려져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서원과 객사 및 아사의 위치가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의 필사자나 본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자의로 원본의 내용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은진현 (恩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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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진현은 논산시의 은진면과 채운면 및 가야곡면, 황산리를 제외한 강경읍, 일부를 제외한 시내, 양촌면과 연무읍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은진면의 연서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의 尼山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고, 오른쪽의 全州界에서 흘러와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본 지도책의 湖西圖에는 尼山이 1776년(영조 52)에 바뀌는 尼城으로 교정되어 있음에도 본 지도에는 과거의 지명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은진현과 경계를 맞대기 어려운 全州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의 논산시 양촌면 일대에 있었던 전주의 월경지 때문이다. 왼쪽에 江倉이 있는 지역은 조선후기에 금강에서 가장 번영한 포구였던 강경포가 있던 곳이다.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바닷배가 정박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이 잘 구비되어 있어 큰 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다. 江倉은 은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런 창고가 바다에 설치되면 보통 海倉이라고 하며, 강에 설치되면 江倉이라고 하였다. 산이 거의 없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산줄기를 강조하여 그렸기 때문에 본 지도만으로는 실제의 지형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른쪽의 高山界와 礪山界 방면에는 400m 이상의 산이 펼쳐져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작은 둔덕 정도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은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이기봉)

  • 은진현 주기 (恩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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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진현은 논산시의 은진면과 채운면 및 가야곡면, 황산리를 제외한 강경읍, 일부를 제외한 시내, 양촌면과 연무읍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은진면의 연서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의 尼山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고, 오른쪽의 全州界에서 흘러와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본 지도책의 湖西圖에는 尼山이 1776년(영조 52)에 바뀌는 尼城으로 교정되어 있음에도 본 지도에는 과거의 지명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은진현과 경계를 맞대기 어려운 全州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의 논산시 양촌면 일대에 있었던 전주의 월경지 때문이다. 왼쪽에 江倉이 있는 지역은 조선후기에 금강에서 가장 번영한 포구였던 강경포가 있던 곳이다.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바닷배가 정박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이 잘 구비되어 있어 큰 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다. 江倉은 은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런 창고가 바다에 설치되면 보통 海倉이라고 하며, 강에 설치되면 江倉이라고 하였다. 산이 거의 없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산줄기를 강조하여 그렸기 때문에 본 지도만으로는 실제의 지형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른쪽의 高山界와 礪山界 방면에는 400m 이상의 산이 펼쳐져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작은 둔덕 정도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은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이기봉)

  • 음성현 (陰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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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현은 음성군의 읍성읍과 원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음성읍의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음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첫째,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향교, 객사, 아사 등의 3개 건물만 표시된 반면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倉과 기타 건물 및 성곽이 표시되어 있다. 둘째, 《해동지도》에는 왼쪽 아래쪽 鎭川界 방면에 하천이 하나 그려져 있는 반면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없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음성현 지도도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구도를 하고 있지만 앞의 2가지 측면에서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을 필사하면서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앞의 2가지 측면을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을 충실히 따르면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 진천계 방향에 표시된 하천은 현재의 음성군 원남면에 있는 초평천 상류로서 사실에 부합되기 때문에 상당한 검토를 통해 첨가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음성현에는 읍성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성곽을 표시하지 않은 《해동지도》가 사실에 더 가깝다. 다만 본 지도 계통의 원본 작성자는 객사와 아사를 둘러싼 담장을 성곽처럼 그렸을 가능성이 높으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이런 사실을 이해하고 교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지도》의 경우 이 부분을 진짜 성곽처럼 그려넣고 있어 가장 많은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다.(이기봉)

  • 음성현 주기 (陰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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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현은 음성군의 읍성읍과 원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음성읍의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음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첫째,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향교, 객사, 아사 등의 3개 건물만 표시된 반면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倉과 기타 건물 및 성곽이 표시되어 있다. 둘째, 《해동지도》에는 왼쪽 아래쪽 鎭川界 방면에 하천이 하나 그려져 있는 반면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없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음성현 지도도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구도를 하고 있지만 앞의 2가지 측면에서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을 필사하면서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앞의 2가지 측면을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을 충실히 따르면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 진천계 방향에 표시된 하천은 현재의 음성군 원남면에 있는 초평천 상류로서 사실에 부합되기 때문에 상당한 검토를 통해 첨가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음성현에는 읍성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성곽을 표시하지 않은 《해동지도》가 사실에 더 가깝다. 다만 본 지도 계통의 원본 작성자는 객사와 아사를 둘러싼 담장을 성곽처럼 그렸을 가능성이 높으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이런 사실을 이해하고 교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지도》의 경우 이 부분을 진짜 성곽처럼 그려넣고 있어 가장 많은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다.(이기봉)

  • 임천군 (林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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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군은 부여군의 임천면, 세도면, 장암면, 충화면, 양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높은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의 夫餘界(동)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임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첨지에 새롭게 첨가한 지명으로 기록된 登景山이 본 지도 왼쪽 아래의 上之浦面 근처에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 자체를 필사했다고 보기 어렵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獄과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아 후대의 필사자가 의도적이거나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판단된다. 도로의 경우 본 지도보다 《해동지도》가 훨씬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가 본 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이밖에 오른쪽 아래의 海倉은 임천군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 대동법의 실시 이후 조선전기에 일정 지역의 군현 조세를 모아 함께 한양으로 나르던 漕倉制가 폐지되고 내륙의 일부 군현 이외에는 각 군현이 스스로 전세와 대동미를 한양까지 운반하도록 바뀌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지명이다.(이기봉)

  • 임천군 주기 (林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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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군은 부여군의 임천면, 세도면, 장암면, 충화면, 양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높은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의 夫餘界(동)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임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첨지에 새롭게 첨가한 지명으로 기록된 登景山이 본 지도 왼쪽 아래의 上之浦面 근처에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 자체를 필사했다고 보기 어렵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獄과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아 후대의 필사자가 의도적이거나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판단된다. 도로의 경우 본 지도보다 《해동지도》가 훨씬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가 본 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이밖에 오른쪽 아래의 海倉은 임천군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 대동법의 실시 이후 조선전기에 일정 지역의 군현 조세를 모아 함께 한양으로 나르던 漕倉制가 폐지되고 내륙의 일부 군현 이외에는 각 군현이 스스로 전세와 대동미를 한양까지 운반하도록 바뀌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지명이다.(이기봉)

  • 전의현 (全義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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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의현은 연기군의 전의면, 전동면, 소정면의 대곡리․고등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전의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전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하천이다. 본 지도를 보면 왼쪽(서)의 公州界와 오른쪽의 淸州界 사이를 관통하는 하천이 있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전의현에는 이렇게 관통하는 하천이 없으며, 읍치를 포함한 대부분의 물은 현재의 조천천이 되어 동쪽의 미호천으로 흘러간다. 본 지도에서의 大西面 지역의 일부만 서쪽의 곡교천 최상류 일부에 걸쳐 있을 뿐이다.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전의현 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에서부터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원본에서 애매하게 표현된 것을 후대의 필사자가 잘못 필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南面의 獨松亭 부근에서 작은 지류 하나가 흘러드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이런 하천이 없다. 반면에 《호서지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전의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고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로 붙어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를 《호서지도》의 전의 지도와 비교하여 검토했다는 의미인데, 후자의 지도에서는 본 지도 계통에서 나타나는 하천 표현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지 않다.(이기봉)

  • 전의현 주기 (全義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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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의현은 연기군의 전의면, 전동면, 소정면의 대곡리․고등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전의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전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하천이다. 본 지도를 보면 왼쪽(서)의 公州界와 오른쪽의 淸州界 사이를 관통하는 하천이 있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전의현에는 이렇게 관통하는 하천이 없으며, 읍치를 포함한 대부분의 물은 현재의 조천천이 되어 동쪽의 미호천으로 흘러간다. 본 지도에서의 大西面 지역의 일부만 서쪽의 곡교천 최상류 일부에 걸쳐 있을 뿐이다.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전의현 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에서부터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원본에서 애매하게 표현된 것을 후대의 필사자가 잘못 필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南面의 獨松亭 부근에서 작은 지류 하나가 흘러드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이런 하천이 없다. 반면에 《호서지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전의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고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로 붙어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를 《호서지도》의 전의 지도와 비교하여 검토했다는 의미인데, 후자의 지도에서는 본 지도 계통에서 나타나는 하천 표현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지 않다.(이기봉)

  • 정산현 (定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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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현은 청양군의 정산면, 목면, 청남면, 구룡리를 제외한 장평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정산면의 서정리에 있었다. 아래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금강변에는 半灘津, 汪津 등의 나루 명칭이 적혀 있는데, 금강에 대한 이 지역에서의 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왼쪽의 鵲川은 현재의 지천으로 청양 방면에서 흘러들어온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정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備圖를 참조하여 몇몇 지명을 첨가했다는 첨지가 붙어 있는데, 이 때 첨가된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지명이 본 지도와 동일하다.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없는 大朴谷面(또는 大方谷面)이 첨가되어 있다. 네 개의 지도 주기에 모두 대박곡면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와 본 지도의 필사자가 빠뜨렸을 가능성도 있고, 원본에도 없었는데 이후에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여지도》의 경우 제언 1개가 생략되고 제언의 모습도 그리지 않아 꼼꼼한 검토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어 《여지도》의 필사자가 대방곡면을 첨가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아래쪽에 표시된 江倉은 정산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런 창고가 바다에 설치되면 보통 海倉이라고 하며, 강에 설치되면 江倉이라고 하였다.(이기봉)

  • 정산현 주기 (定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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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현은 청양군의 정산면, 목면, 청남면, 구룡리를 제외한 장평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정산면의 서정리에 있었다. 아래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금강변에는 半灘津, 汪津 등의 나루 명칭이 적혀 있는데, 금강에 대한 이 지역에서의 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왼쪽의 鵲川은 현재의 지천으로 청양 방면에서 흘러들어온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정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備圖를 참조하여 몇몇 지명을 첨가했다는 첨지가 붙어 있는데, 이 때 첨가된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지명이 본 지도와 동일하다.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없는 大朴谷面(또는 大方谷面)이 첨가되어 있다. 네 개의 지도 주기에 모두 대박곡면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와 본 지도의 필사자가 빠뜨렸을 가능성도 있고, 원본에도 없었는데 이후에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여지도》의 경우 제언 1개가 생략되고 제언의 모습도 그리지 않아 꼼꼼한 검토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어 《여지도》의 필사자가 대방곡면을 첨가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아래쪽에 표시된 江倉은 정산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런 창고가 바다에 설치되면 보통 海倉이라고 하며, 강에 설치되면 江倉이라고 하였다.(이기봉)

  • 제천현 (堤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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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현은 제천시의 시내, 봉학면, 봉양읍, 백운면, 금성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제천시의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제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표현기법이나 내용이 거의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는 약간 다른 편이다. 《해동지도》의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는 지명을 첨가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제천 지도이며, 이 때 첨가된 내용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다. 본 지도에는 읍치를 지나는 하천이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왼쪽 아래의 三倉川 부분이 출구이다. 다른 3개 지도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되어 있어 본 지도 필사자가 무성의하게 처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쪽 가운데의 原州界 방향에서 현재의 원주시 신림면에 있는 용암천이 흘러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고, 뒤의 2개 지도 역사 마찬가지이다. 《해동지도》에서는 용암천이 원주 방면에서 흘러들어올 가능성을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도 이 부분이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었다고 추정되며, 후대의 필사자들이 실제로 오해하여 사실과 다르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제천현 주기 (堤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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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현은 제천시의 시내, 봉학면, 봉양읍, 백운면, 금성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제천시의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제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표현기법이나 내용이 거의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는 약간 다른 편이다. 《해동지도》의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는 지명을 첨가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제천 지도이며, 이 때 첨가된 내용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다. 본 지도에는 읍치를 지나는 하천이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왼쪽 아래의 三倉川 부분이 출구이다. 다른 3개 지도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되어 있어 본 지도 필사자가 무성의하게 처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쪽 가운데의 原州界 방향에서 현재의 원주시 신림면에 있는 용암천이 흘러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고, 뒤의 2개 지도 역사 마찬가지이다. 《해동지도》에서는 용암천이 원주 방면에서 흘러들어올 가능성을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도 이 부분이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었다고 추정되며, 후대의 필사자들이 실제로 오해하여 사실과 다르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직산현 (稷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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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현은 천안시의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입장면, 평택시 팽성읍의 도두리 일대, 오성면의 당거리 일대, 안중면의 안중리 일대, 포승면의 만호리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직산면 군서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직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며,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건물이 현저하게 많다. 본 지도에는 하천과 주변의 경계가 쉽게 알아보기 어렵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安城界 방면에서 흘러와 왼쪽의 外也串面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안성천의 본류이고, 왼쪽 아래의 牙山界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다. 직산현의 대부분은 삽교천과 접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삽교천이 그려져 있는 것은 월경지 때문으로 보인다. 왼쪽 위의 慶陽面, 堰里面, 외야곶면은 모두 아산만에 접해 있는 월경지이며, 특히 외야곶면은 현재의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 근처에 있었다.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외야곶면은 唐津과 洪州의 월경지인 현재의 당진군 신평면과 마주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왼쪽에 洪陽界(洪州界)와 唐津界가 기록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다만 沔川은 직산과 직접 마주 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沔川界는 해당 방향에 면천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이기봉)

  • 직산현 주기 (稷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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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현은 천안시의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입장면, 평택시 팽성읍의 도두리 일대, 오성면의 당거리 일대, 안중면의 안중리 일대, 포승면의 만호리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직산면 군서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직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며,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건물이 현저하게 많다. 본 지도에는 하천과 주변의 경계가 쉽게 알아보기 어렵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安城界 방면에서 흘러와 왼쪽의 外也串面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안성천의 본류이고, 왼쪽 아래의 牙山界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다. 직산현의 대부분은 삽교천과 접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삽교천이 그려져 있는 것은 월경지 때문으로 보인다. 왼쪽 위의 慶陽面, 堰里面, 외야곶면은 모두 아산만에 접해 있는 월경지이며, 특히 외야곶면은 현재의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 근처에 있었다.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외야곶면은 唐津과 洪州의 월경지인 현재의 당진군 신평면과 마주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왼쪽에 洪陽界(洪州界)와 唐津界가 기록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다만 沔川은 직산과 직접 마주 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沔川界는 해당 방향에 면천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이기봉)

  • 진잠현 (鎭岑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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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잠현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남쪽 부분(옛 진잠면), 서구의 남쪽 부분(옛 기성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유성구의 원내동과 교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그렸는데, 서쪽을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도에 大川으로 기록된 것이 갑천 상류에 해당된다. 大川은 전국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하천 명칭으로 해당 군현에서 가장 크다는 의미이며, 일반적으로 ‘한내’라고 불렸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잠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수록된 도로와 오른쪽 鶴雲寺에 표시된 탑의 모습이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생략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이기봉)

  • 진잠현 주기 (鎭岑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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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잠현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남쪽 부분(옛 진잠면), 서구의 남쪽 부분(옛 기성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유성구의 원내동과 교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그렸는데, 서쪽을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도에 大川으로 기록된 것이 갑천 상류에 해당된다. 大川은 전국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하천 명칭으로 해당 군현에서 가장 크다는 의미이며, 일반적으로 ‘한내’라고 불렸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잠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수록된 도로와 오른쪽 鶴雲寺에 표시된 탑의 모습이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생략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이기봉)

  • 진천현 (鎭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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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천현은 진천군의 대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진천읍의 읍내리와 교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해동지도》에는 진천현이 둥근 형태로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사각형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진천현 지도도 《해동지도》와 거의 같아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들이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기 위해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읍치의 건물이 《해동지도》에는 총 7개만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12개 이상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호서지도》의 진천현 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16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중요 건물과 부속 건물을 구별할 수 있게 그려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이런 건물 중 부속 건물이나 창을 제외한 것이고, 본 지도는 모두 그렸지만 부속 건물이 어느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보다도 더 애매하게 그려 부속 건물과 단독 건물을 전해 이해할 수 없도록 그렸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도》의 진천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조하여 몇 개의 지명을 첨가했다는 첨지가 붙어 있다. 이렇게 첨가한 지명이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진천현의 대부분의 물을 모아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의 미호천 상류이지만 실제와 다른 점이 발견되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미호천의 지류들은 북쪽의 죽산과 동쪽의 충주 및 음성의 경계 밖에서 흘러오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런 사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군현 전체의 모습을 퐁수적인 명당 구도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진천현 주기 (鎭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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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천현은 진천군의 대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진천읍의 읍내리와 교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해동지도》에는 진천현이 둥근 형태로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사각형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진천현 지도도 《해동지도》와 거의 같아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들이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기 위해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읍치의 건물이 《해동지도》에는 총 7개만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12개 이상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호서지도》의 진천현 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16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중요 건물과 부속 건물을 구별할 수 있게 그려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이런 건물 중 부속 건물이나 창을 제외한 것이고, 본 지도는 모두 그렸지만 부속 건물이 어느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보다도 더 애매하게 그려 부속 건물과 단독 건물을 전해 이해할 수 없도록 그렸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도》의 진천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조하여 몇 개의 지명을 첨가했다는 첨지가 붙어 있다. 이렇게 첨가한 지명이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진천현의 대부분의 물을 모아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의 미호천 상류이지만 실제와 다른 점이 발견되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미호천의 지류들은 북쪽의 죽산과 동쪽의 충주 및 음성의 경계 밖에서 흘러오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런 사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군현 전체의 모습을 퐁수적인 명당 구도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천안군 (天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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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군은 천안시의 시내, 풍세면, 광덕면을 중심으로 아산시 둔포면의 남쪽 부분, 금성리를 포함한 인주면의 일부, 가산리를 포함한 선장면의 일부, 신종리를 포함한 예산군 신암면의 일부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천안시 시내의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천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모두에는 몇 가지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첫째, 천안군은 전반적으로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래쪽 왼쪽의 일남면과 이남면 부분의 하천은 현재 풍재천이라 불리고 있으며, 실제로는 읍치를 통과하는 하천보다 더 길게 서남쪽으로 뻗어 있다. 둘째, 內西面에서 新宗面까지 이어진 하천은 현재 곡교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실제로는 아산과 온양 및 신창의 긴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본 지도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으며, 마치 신종면과 내서면이 붙어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셋째, 왼쪽의 돈의면, 흥덕면, 신종면은 모두 현재의 삽교호에 접해 있는 아산의 월경지이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없다. 또한 신종면은 본 지도의 표현과 달리 곡교천의 훨씬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셋째, 왼쪽 위의 모산면은 직산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월경지이며, 돈의면과 붙어 있지도 않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주기에 기록된 面의 초경과 종경에 대한 기록을 통해 일부 교정할 수 있지만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본 지도의 서쪽에는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삽교호와 접한 부분이 潮水란 문구와 함께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삽교호에 해당되는 부분이 생략되어 마치 좁은 수로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바뀌어 있어 필사자들이 자의적으로 하천의 정보를 왜곡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천안군 주기 (天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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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군은 천안시의 시내, 풍세면, 광덕면을 중심으로 아산시 둔포면의 남쪽 부분, 금성리를 포함한 인주면의 일부, 가산리를 포함한 선장면의 일부, 신종리를 포함한 예산군 신암면의 일부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천안시 시내의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천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모두에는 몇 가지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첫째, 천안군은 전반적으로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래쪽 왼쪽의 일남면과 이남면 부분의 하천은 현재 풍재천이라 불리고 있으며, 실제로는 읍치를 통과하는 하천보다 더 길게 서남쪽으로 뻗어 있다. 둘째, 內西面에서 新宗面까지 이어진 하천은 현재 곡교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실제로는 아산과 온양 및 신창의 긴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본 지도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으며, 마치 신종면과 내서면이 붙어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셋째, 왼쪽의 돈의면, 흥덕면, 신종면은 모두 현재의 삽교호에 접해 있는 아산의 월경지이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없다. 또한 신종면은 본 지도의 표현과 달리 곡교천의 훨씬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셋째, 왼쪽 위의 모산면은 직산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월경지이며, 돈의면과 붙어 있지도 않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주기에 기록된 面의 초경과 종경에 대한 기록을 통해 일부 교정할 수 있지만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본 지도의 서쪽에는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삽교호와 접한 부분이 潮水란 문구와 함께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삽교호에 해당되는 부분이 생략되어 마치 좁은 수로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바뀌어 있어 필사자들이 자의적으로 하천의 정보를 왜곡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청산현 (靑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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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현은 옥천군의 청산면, 청성면, 아곡리와 대안리를 포함한 보은군의 내북면 북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산면의 교평리와 백운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고, 오른쪽에서 금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보청천이다. 오른쪽 위에는 酒城面과 酒城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보은의 땅을 넘어가 있는 월경지이다. 현재의 보은군 내북면 북쪽 지역에 있었으며, 원래는 상주에 속해 있던 주성부곡이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청산현으로 옮겼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금강 본류와 보청천이 거의 같은 규모로 표현되어 있지만 《여지도》에서는 금강이 더 굵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서는 보청천은 하나의 실선으로만 표시하여 금강보다 훨씬 작은 하천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실제로는 두 하천의 크기에 큰 차이가 없어 《여지도》와 《광여도》의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표현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읍치에는 9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4개밖에 없고,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각각 7개와 8개가 있다.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청산현 지도에는 본 지도와 같은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객사에는 4개의 건물이 배치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객사의 부속 건물을 일부 빠뜨리고 있고, 더 나아가 부속 건물인지 알아보기 어렵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객사와 아사의 부속 건물과 倉을 생략하면서 4개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이기봉)

  • 청산현 주기 (靑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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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현은 옥천군의 청산면, 청성면, 아곡리와 대안리를 포함한 보은군의 내북면 북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산면의 교평리와 백운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고, 오른쪽에서 금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보청천이다. 오른쪽 위에는 酒城面과 酒城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보은의 땅을 넘어가 있는 월경지이다. 현재의 보은군 내북면 북쪽 지역에 있었으며, 원래는 상주에 속해 있던 주성부곡이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청산현으로 옮겼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금강 본류와 보청천이 거의 같은 규모로 표현되어 있지만 《여지도》에서는 금강이 더 굵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서는 보청천은 하나의 실선으로만 표시하여 금강보다 훨씬 작은 하천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실제로는 두 하천의 크기에 큰 차이가 없어 《여지도》와 《광여도》의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표현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읍치에는 9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4개밖에 없고,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각각 7개와 8개가 있다.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청산현 지도에는 본 지도와 같은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객사에는 4개의 건물이 배치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객사의 부속 건물을 일부 빠뜨리고 있고, 더 나아가 부속 건물인지 알아보기 어렵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객사와 아사의 부속 건물과 倉을 생략하면서 4개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이기봉)

  • 청안현 (淸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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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안현은 증평군의 증평읍과 도안면, 괴산군의 청안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안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왼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현재의 미호천이며, 실제로는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나간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안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향교, 객사, 아사 등의 3개 건물과 倉만 표시되어 있지만 나머지 3개 지도에는 2개의 건물과 담장이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청안현 지도도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구도를 하고 있지만 앞의 측면에서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본 지도의 원본 계통을 약간 변경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위의 음성계에서 하천이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여지도》에는 음성계가 발원지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 하천은 현재의 보강천으로 음성의 땅이었던 원남면이나 괴산의 땅이었던 사리면에서 흘러오기 때문에 본 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따라서 《여지도》의 필사자가 실제 사실과의 비교 없이 자의적으로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타 東面은 현재의 청안면 동남쪽에 해당되는데, 이 지역의 물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으로 흘러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청안현 주기 (淸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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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안현은 증평군의 증평읍과 도안면, 괴산군의 청안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안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왼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현재의 미호천이며, 실제로는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나간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안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향교, 객사, 아사 등의 3개 건물과 倉만 표시되어 있지만 나머지 3개 지도에는 2개의 건물과 담장이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청안현 지도도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구도를 하고 있지만 앞의 측면에서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본 지도의 원본 계통을 약간 변경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위의 음성계에서 하천이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여지도》에는 음성계가 발원지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 하천은 현재의 보강천으로 음성의 땅이었던 원남면이나 괴산의 땅이었던 사리면에서 흘러오기 때문에 본 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따라서 《여지도》의 필사자가 실제 사실과의 비교 없이 자의적으로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타 東面은 현재의 청안면 동남쪽에 해당되는데, 이 지역의 물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으로 흘러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청양현 (靑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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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현은 청양군의 청양읍, 운곡면, 대치면, 일부를 제외한 비봉면과 남양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양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양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된 지명 중 《해동지도》에 없는 것은 瀑布가 유일한데, 나머지 2개 지도에도 이 지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본 지도에는 폭포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쉽게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다. 나머지 2개 지도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게 그려져 있어 이후의 필사자가 원본에 그려진 폭포의 모습을 강조하여 표현하면서 瀑布라는 명칭도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왼쪽 위에는 《광여도》와 동일하게 公州界가 기록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公山界로 되어 있다. 公山은 公州가 강등되었을 때의 명칭으로 강등 시기는 1646년(인조 24)경, 1670(현종 11)-1679년(숙종 5), 1728(영조 4)-1737(영조 13), 1778년(정조 2)경 등이다.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이 공주가 공산으로 강등되었을 때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본 지도와 《광여도》는 공산에서 공주로 회복된 이후에 필사되면서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아래에는 洪陽界가 기록되어 있는데, 나머지 3개의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洪陽은 현종 2년(1661)과 숙종 36년(1710) 등에 홍주가 강등되어 사용되던 명칭으로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이 이런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강등된 시기가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주와 달리 홍주로 교정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이기봉)

  • 청양현 주기 (靑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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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현은 청양군의 청양읍, 운곡면, 대치면, 일부를 제외한 비봉면과 남양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양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양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된 지명 중 《해동지도》에 없는 것은 瀑布가 유일한데, 나머지 2개 지도에도 이 지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본 지도에는 폭포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쉽게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다. 나머지 2개 지도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게 그려져 있어 이후의 필사자가 원본에 그려진 폭포의 모습을 강조하여 표현하면서 瀑布라는 명칭도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왼쪽 위에는 《광여도》와 동일하게 公州界가 기록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公山界로 되어 있다. 公山은 公州가 강등되었을 때의 명칭으로 강등 시기는 1646년(인조 24)경, 1670(현종 11)-1679년(숙종 5), 1728(영조 4)-1737(영조 13), 1778년(정조 2)경 등이다.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이 공주가 공산으로 강등되었을 때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본 지도와 《광여도》는 공산에서 공주로 회복된 이후에 필사되면서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아래에는 洪陽界가 기록되어 있는데, 나머지 3개의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洪陽은 현종 2년(1661)과 숙종 36년(1710) 등에 홍주가 강등되어 사용되던 명칭으로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이 이런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강등된 시기가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주와 달리 홍주로 교정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이기봉)

  • 청주목 (淸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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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목은 문의면․부용면․현도면과 시동리 서남쪽의 가덕면을 제외한 청주시 전체, 괴산군 청천면, 천안시 수신면, 연기군 소정면의 소정리․운당리, 추동․주산동을 포함한 대전광역시 동구의 동북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북문로 일대에 있었다. 청주목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도의 오른쪽이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상류이며, 왼쪽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유역이다. 달천강 상류는 원래 속현이었던 靑川縣의 땅이었는데, 고려말 조선초를 거치면서 주현인 청주목에 완전히 합해졌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해동지도》의 첨지에 “望德山, 仙遊洞, 引頭山, 臥牛山은 備圖(비변사 소장 지도)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어 첨가하여 그려넣는다”고 기록된 지명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없다는 점 등이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자체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公山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公山은 公州가 강등되었을 때의 명칭이다. 공주목이 공산현으로 강등되었던 시기는 1646년(인조 24)경, 1670(현종 11)-1679년(숙종 5), 1728(영조 4)-1737(영조 13), 1778년(정조 2)경 등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광여도》에는 公州界로 바뀌어 있다. 기타 아래쪽의 周岸面과 왼쪽의 德平面 등은 다른 군현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월경지임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이기봉)

  • 청주목 주기 (淸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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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목은 문의면․부용면․현도면과 시동리 서남쪽의 가덕면을 제외한 청주시 전체, 괴산군 청천면, 천안시 수신면, 연기군 소정면의 소정리․운당리, 추동․주산동을 포함한 대전광역시 동구의 동북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북문로 일대에 있었다. 청주목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도의 오른쪽이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상류이며, 왼쪽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유역이다. 달천강 상류는 원래 속현이었던 靑川縣의 땅이었는데, 고려말 조선초를 거치면서 주현인 청주목에 완전히 합해졌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해동지도》의 첨지에 “望德山, 仙遊洞, 引頭山, 臥牛山은 備圖(비변사 소장 지도)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어 첨가하여 그려넣는다”고 기록된 지명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없다는 점 등이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자체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公山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公山은 公州가 강등되었을 때의 명칭이다. 공주목이 공산현으로 강등되었던 시기는 1646년(인조 24)경, 1670(현종 11)-1679년(숙종 5), 1728(영조 4)-1737(영조 13), 1778년(정조 2)경 등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광여도》에는 公州界로 바뀌어 있다. 기타 아래쪽의 周岸面과 왼쪽의 德平面 등은 다른 군현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월경지임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이기봉)

  • 청풍부 (淸風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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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풍군은 제천시 청풍면과 수산면 전체, 송계리 일대를 제외한 한수면, 양리와 위림리를 포함한 금성면의 남쪽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충추호에 수몰되어 있다. 오른쪽에서 흘러와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풍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측면이 발견되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먼저 필사된 것으로 알려진 《해동지도》의 첨지에는 “水穴, 屛山 , 風穴, 玉筍峯, 龜潭, 鄕校, 大峙가 備圖에는 있지만 本圖에는 없어 필사하여 그려넣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지도에는 大峙를 제외한 나머지 지명 부분에 수정의 흔적이 역력히 보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大峙가 없는 반면에 첨지의 나머지 지명은 대부분 나와 있다. 다만 《해동지도》에 사실처럼 묘사된 절벽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닌 다른 계통의 원본을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첨지에 나타난 문구는 大峙를 제외하면 지명이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지명에 대한 자세한 묘사 그림이 없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해동지도》의 수정한 부분에는 없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는 北倉, 鳳岡書院, 霧菴(또는 露菴) 등은 수정하고 나서 써넣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하천의 표시 중 본 지도의 北津 부분에서 남한강과 합류되는 작은 하천은 실제로는 북쪽의 제천에서 흘러 들어오는 현재의 고교천이다. 그러나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놓았는데, 《해동지도》에는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후대의 필사자들이 실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에는 面과 驛을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해 놓았는데, 오른쪽 위의 東面에는 이런 기호가 생략되어 있다. 《여지도》에도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에서는 東面에도 노란색 사각형을 그려넣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는 남한강과 지류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그려넣었다. 하지만 《여지도》에서는 구분이 애매하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서는 구분이 거의 어려울 정도로 잘못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른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남한강의 본류가 아예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할 때 지도 전문가가 아니라 비전문가에 의해 필사되면서 원본을 잘못 이해하여 필사한 부분이 상당 부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청풍부 주기 (淸風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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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풍군은 제천시 청풍면과 수산면 전체, 송계리 일대를 제외한 한수면, 양리와 위림리를 포함한 금성면의 남쪽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충추호에 수몰되어 있다. 오른쪽에서 흘러와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풍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측면이 발견되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먼저 필사된 것으로 알려진 《해동지도》의 첨지에는 “水穴, 屛山 , 風穴, 玉筍峯, 龜潭, 鄕校, 大峙가 備圖에는 있지만 本圖에는 없어 필사하여 그려넣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지도에는 大峙를 제외한 나머지 지명 부분에 수정의 흔적이 역력히 보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大峙가 없는 반면에 첨지의 나머지 지명은 대부분 나와 있다. 다만 《해동지도》에 사실처럼 묘사된 절벽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닌 다른 계통의 원본을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첨지에 나타난 문구는 大峙를 제외하면 지명이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지명에 대한 자세한 묘사 그림이 없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해동지도》의 수정한 부분에는 없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는 北倉, 鳳岡書院, 霧菴(또는 露菴) 등은 수정하고 나서 써넣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하천의 표시 중 본 지도의 北津 부분에서 남한강과 합류되는 작은 하천은 실제로는 북쪽의 제천에서 흘러 들어오는 현재의 고교천이다. 그러나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놓았는데, 《해동지도》에는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후대의 필사자들이 실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에는 面과 驛을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해 놓았는데, 오른쪽 위의 東面에는 이런 기호가 생략되어 있다. 《여지도》에도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에서는 東面에도 노란색 사각형을 그려넣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는 남한강과 지류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그려넣었다. 하지만 《여지도》에서는 구분이 애매하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서는 구분이 거의 어려울 정도로 잘못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른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남한강의 본류가 아예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할 때 지도 전문가가 아니라 비전문가에 의해 필사되면서 원본을 잘못 이해하여 필사한 부분이 상당 부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충주목 (忠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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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목은 상모면을 제외한 충주시 전체,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음성군 전체, 괴산군 감물면과 불정면, 제천시 덕산면 전체와 한수면의 송계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충주 시내의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높은 산을 등진 읍성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며, 오른쪽 아래에서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달천강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충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상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우선 읍성 아래쪽의 利安面 왼쪽에 《해동지도》에는 堯渡川이라는 지명과 하천이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없다. 이 점에서 참조되는 것이 《해동지도》의 충주목 지도에 붙여져 있는 첨지인데, 이 첨지에는 “德周寺, 朴達山, 十老峯山, 靑龍山, 堯渡川, 陰城川은 備圖(비변사 소장 지도)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어 필사하여 그려넣는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실제로 《해동지도》에는 앞의 첨지에서 언급되어 있는 지명과 하천이 모두 표시되어 있는데 반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모두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해동지도》 자체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지 않은 것이 거의 분명하며, 《해동지도》 이외의 원본 계통이 따로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알 수 있는 또다른 부분이 본 지도의 읍성 내에 있는 창고 2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해동지도》가 원본 중에서 일부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밖에 왼쪽 위에는 加次山面이 면의 명칭을 오해할 수 있게 적혀 있고, 도로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당히 조악하게 표시되어 있어 필사자가 정밀하게 필사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이기봉)

  • 충주목 주기 (忠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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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목은 상모면을 제외한 충주시 전체,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음성군 전체, 괴산군 감물면과 불정면, 제천시 덕산면 전체와 한수면의 송계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충주 시내의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높은 산을 등진 읍성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며, 오른쪽 아래에서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달천강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충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상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우선 읍성 아래쪽의 利安面 왼쪽에 《해동지도》에는 堯渡川이라는 지명과 하천이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없다. 이 점에서 참조되는 것이 《해동지도》의 충주목 지도에 붙여져 있는 첨지인데, 이 첨지에는 “德周寺, 朴達山, 十老峯山, 靑龍山, 堯渡川, 陰城川은 備圖(비변사 소장 지도)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어 필사하여 그려넣는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실제로 《해동지도》에는 앞의 첨지에서 언급되어 있는 지명과 하천이 모두 표시되어 있는데 반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모두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해동지도》 자체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지 않은 것이 거의 분명하며, 《해동지도》 이외의 원본 계통이 따로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알 수 있는 또다른 부분이 본 지도의 읍성 내에 있는 창고 2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해동지도》가 원본 중에서 일부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밖에 왼쪽 위에는 加次山面이 면의 명칭을 오해할 수 있게 적혀 있고, 도로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당히 조악하게 표시되어 있어 필사자가 정밀하게 필사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이기봉)

  • 충청도 총론(忠淸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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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충청도 총론(忠淸道 總論)1면입니다.

  • 태안군 (泰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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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군은 안면도의 대부분을 제외한 현재의 태안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태안읍의 남문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태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각 지도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7개의 지명과 각 지점까지의 거리를 제외하면 본 지도에 수록된 지명과 도로 등이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掘項津이 仇郞津으로 표기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한자가 바뀌는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서 오른쪽의 瑞山界로 이어진 육지 부분이 표시되어 있지 않아 마치 섬처럼 그려져 있고, 뒤의 2개 지도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필사자가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이 부분을 교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광여도》의 경우 안면도에 ‘人居四百餘戶’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는데, 이 지도의 필사자가 역시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첨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본 지도책의 충청도 전도인 湖西圖 부분에는 안면도가 엉뚱한 곳에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의 내용과 서로 어긋나고 있어 호서도의 제작자가 군현도를 참조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본 지도에는 北面이 다른 面에 있는 사각형 기호로 표시되어 있지 않고, 遠西面이 遠西村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정교하지 못한 필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이기봉)

  • 태안군 주기 (泰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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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군은 안면도의 대부분을 제외한 현재의 태안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태안읍의 남문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태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각 지도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7개의 지명과 각 지점까지의 거리를 제외하면 본 지도에 수록된 지명과 도로 등이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掘項津이 仇郞津으로 표기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한자가 바뀌는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서 오른쪽의 瑞山界로 이어진 육지 부분이 표시되어 있지 않아 마치 섬처럼 그려져 있고, 뒤의 2개 지도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필사자가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이 부분을 교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광여도》의 경우 안면도에 ‘人居四百餘戶’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는데, 이 지도의 필사자가 역시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첨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본 지도책의 충청도 전도인 湖西圖 부분에는 안면도가 엉뚱한 곳에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의 내용과 서로 어긋나고 있어 호서도의 제작자가 군현도를 참조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본 지도에는 北面이 다른 面에 있는 사각형 기호로 표시되어 있지 않고, 遠西面이 遠西村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정교하지 못한 필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이기봉)

  • 평택현 (平澤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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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현은 도두리, 신대리, 노양리, 본정리를 제외한 평택시 팽성읍에 걸쳐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에 속해 있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팽성읍의 객사리에 있었는데, 현재 객사와 향교가 보존되어 있다. 산줄기 형식으로 그려 마치 산이 많은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산이 거의 없는 평지이다. 오른쪽에서 위쪽을 돌아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안성천 본류이며, 왼쪽의 넓은 바다 부분이 아산만이다. 안성천의 본류는 현재의 안성시에서 발원하여 평택현에 이르러 아산만과 만남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안성천은 평택현 북쪽에서 진위천과 합류함에도 이런 사실이 그려져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평택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며, 《해동지도》는 읍치의 건물 수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이기봉)

  • 평택현 주기 (平澤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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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현은 도두리, 신대리, 노양리, 본정리를 제외한 평택시 팽성읍에 걸쳐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에 속해 있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팽성읍의 객사리에 있었는데, 현재 객사와 향교가 보존되어 있다. 산줄기 형식으로 그려 마치 산이 많은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산이 거의 없는 평지이다. 오른쪽에서 위쪽을 돌아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안성천 본류이며, 왼쪽의 넓은 바다 부분이 아산만이다. 안성천의 본류는 현재의 안성시에서 발원하여 평택현에 이르러 아산만과 만남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안성천은 평택현 북쪽에서 진위천과 합류함에도 이런 사실이 그려져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평택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며, 《해동지도》는 읍치의 건물 수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이기봉)

  • 한산군 (韓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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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군은 서천군의 한산면, 화양면, 기산면, 마산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한산면의 지현리 일대에 있었다. 아래의 오른쪽에서 흘러와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다. 한산군의 전체적인 모습은 북쪽으로 犬牙相入地가 길게 뻗어나간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기 위해 이 부분이 밋밋하게 처리되었다. 지도에서는 北面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鴻山界에서 麒麟山까지 좁고 길게 처리되어야 실제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한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九時橋와 新谷驛는 본 지도에 없으며, 읍치를 중심으로 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이 바뀌어 있는 차이가 있다. 앞의 두 지명이 없다는 점에서 뒤의 2개 지도도 동일하지만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다. 즉, 《여지도》의 산줄기 표현 방식은 본 지도와 《해동지도》 중간쯤에 해당되며, 《광여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이밖에 오른쪽 아래의 海倉은 한산군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 대동법의 실시 이후 조선전기에 일정 지역의 군현 조세를 모아 함께 한양으로 나르던 漕倉制가 폐지되고 내륙의 일부 군현 이외에는 각 군현이 스스로 전세와 대동미를 한양까지 운반하도록 바뀌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지명이다.(이기봉)

  • 한산군 주기 (韓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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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군은 서천군의 한산면, 화양면, 기산면, 마산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한산면의 지현리 일대에 있었다. 아래의 오른쪽에서 흘러와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다. 한산군의 전체적인 모습은 북쪽으로 犬牙相入地가 길게 뻗어나간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기 위해 이 부분이 밋밋하게 처리되었다. 지도에서는 北面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鴻山界에서 麒麟山까지 좁고 길게 처리되어야 실제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한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九時橋와 新谷驛는 본 지도에 없으며, 읍치를 중심으로 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이 바뀌어 있는 차이가 있다. 앞의 두 지명이 없다는 점에서 뒤의 2개 지도도 동일하지만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다. 즉, 《여지도》의 산줄기 표현 방식은 본 지도와 《해동지도》 중간쯤에 해당되며, 《광여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이밖에 오른쪽 아래의 海倉은 한산군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 대동법의 실시 이후 조선전기에 일정 지역의 군현 조세를 모아 함께 한양으로 나르던 漕倉制가 폐지되고 내륙의 일부 군현 이외에는 각 군현이 스스로 전세와 대동미를 한양까지 운반하도록 바뀌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지명이다.(이기봉)

  • 해미현 (海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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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현은 서산시의 해미면, 여미리 부근의 운산면, 당진군의 정미면과 대호지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해미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해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는 실제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해미현은 1407년(태종 7)에 정해현과 여미면을 합해 하나로 만들면서 각 고을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다가 海美縣을 만들었다. 읍치가 있는 지역이 정미현 지역이었고, 일도면과 이도면 및 서면 지역이 여미현의 지역이었다. 두 지역은 실제로는 따로 떨어져 있어 여미현 지역이 월경지로 존재했지만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을 이해할 수 없도록 그렸다. 정미현 지역과 여미현 지역 사이에는 서산과 덕산 및 홍주의 월경지가 끼어 있었다. 여미현 지역의 서면은 현재의 당진군 대호지면 지역에 있어 읍치에서 가장 먼 거의 정북 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져 있다. 또한 서면과 남면은 지역을 배로 왕복하려면 서산과 태안의 해안을 빙 돌아야 하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마치 서산 땅을 사이에 두고 아주 가까운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아래쪽의 海倉은 해미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며, 선박처는 해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船所였다.(이기봉)

  • 해미현 주기 (海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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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현은 서산시의 해미면, 여미리 부근의 운산면, 당진군의 정미면과 대호지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해미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해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는 실제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해미현은 1407년(태종 7)에 정해현과 여미면을 합해 하나로 만들면서 각 고을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다가 海美縣을 만들었다. 읍치가 있는 지역이 정미현 지역이었고, 일도면과 이도면 및 서면 지역이 여미현의 지역이었다. 두 지역은 실제로는 따로 떨어져 있어 여미현 지역이 월경지로 존재했지만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을 이해할 수 없도록 그렸다. 정미현 지역과 여미현 지역 사이에는 서산과 덕산 및 홍주의 월경지가 끼어 있었다. 여미현 지역의 서면은 현재의 당진군 대호지면 지역에 있어 읍치에서 가장 먼 거의 정북 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져 있다. 또한 서면과 남면은 지역을 배로 왕복하려면 서산과 태안의 해안을 빙 돌아야 하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마치 서산 땅을 사이에 두고 아주 가까운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아래쪽의 海倉은 해미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며, 선박처는 해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船所였다.(이기봉)

  • 호서도 (湖西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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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서도는 충청도에 대한 별칭이었으며, 54개의 군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감영은 지도에 큰 원으로 표시된 公州에 있었으며, 水營과 兵營이 각각 1개씩 있었다. 본 지도에서는 고을을 주황색 큰 원의 監營과 흰색 직사각형의 일반 군현으로 나누어 표시하였지만 제천, 영춘, 청산, 영동 등은 남색 계통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군사기지로는 水營과 兵營이 표시되어 있으며, 노란색 작은 직사각형은 鎭堡이다. 그밖의 정보로는 주황색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한 察訪驛이 있는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곳이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군현 지도는 전체적으로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것과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같이 도별 지도의 경우 본 지도책과 《광여도》 및 《여지도》는 거의 동일하지만 《해동지도》는 상당히 다른 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 이후 군현지도는 거의 비슷하게 필사하면서 도별도의 경우 전혀 다른 지도를 만들어 수록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명의 차원에서 볼 때 가장 주목되는 군현이 尼山이다. 尼山은 1776년(영조 52)에 尼城으로 바뀌며, 다시 1800년(정조 24)에 魯城으로 바뀐다. 《해동지도》와 《여지도》는 尼山으로 되어 있고, 본 지도에는 尼城으로 되어 있으며, 《광여도》에는 魯城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지명의 차원에서 볼 때 《해동지도》와 《여지도》가 가장 이르며, 다음으로 본 지도이고, 맨 마지막이 《광여도》이다. 그러나 필사과정에서 지명의 변화 양상을 반영하여 수정하지 않고, 과거의 것을 그대로 필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명만으로 지도의 제작 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지명의 변화 시기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1776년(영조 52) 이전에 《여지도》와 거의 동일한 지도가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여지도》에는 아래쪽의 전라도에서 흘러들어오는 금강이 마치 永同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반면에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어 《여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 지도와 《광여도》의 필사에 원본으로 된 지도는 《여지도》가 아니라 다른 지도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 중의 하나는 왼쪽 아래쪽에 표시된 安眠(島)의 위치이다. 안면도는 왼쪽 위의 安興 바로 아래쪽에 있어야 사실에 가깝기 때문에 본 지도의 필사자뿐만 아니라 원본의 지도 제작자 역시 사실에 대한 확인 작업이 부족했던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호서도 주기 (湖西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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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서도는 충청도에 대한 별칭이었으며, 54개의 군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감영은 지도에 큰 원으로 표시된 公州에 있었으며, 水營과 兵營이 각각 1개씩 있었다. 본 지도에서는 고을을 주황색 큰 원의 監營과 흰색 직사각형의 일반 군현으로 나누어 표시하였지만 제천, 영춘, 청산, 영동 등은 남색 계통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군사기지로는 水營과 兵營이 표시되어 있으며, 노란색 작은 직사각형은 鎭堡이다. 그밖의 정보로는 주황색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한 察訪驛이 있는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곳이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군현 지도는 전체적으로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것과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같이 도별 지도의 경우 본 지도책과 《광여도》 및 《여지도》는 거의 동일하지만 《해동지도》는 상당히 다른 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 이후 군현지도는 거의 비슷하게 필사하면서 도별도의 경우 전혀 다른 지도를 만들어 수록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명의 차원에서 볼 때 가장 주목되는 군현이 尼山이다. 尼山은 1776년(영조 52)에 尼城으로 바뀌며, 다시 1800년(정조 24)에 魯城으로 바뀐다. 《해동지도》와 《여지도》는 尼山으로 되어 있고, 본 지도에는 尼城으로 되어 있으며, 《광여도》에는 魯城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지명의 차원에서 볼 때 《해동지도》와 《여지도》가 가장 이르며, 다음으로 본 지도이고, 맨 마지막이 《광여도》이다. 그러나 필사과정에서 지명의 변화 양상을 반영하여 수정하지 않고, 과거의 것을 그대로 필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명만으로 지도의 제작 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지명의 변화 시기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1776년(영조 52) 이전에 《여지도》와 거의 동일한 지도가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여지도》에는 아래쪽의 전라도에서 흘러들어오는 금강이 마치 永同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반면에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어 《여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 지도와 《광여도》의 필사에 원본으로 된 지도는 《여지도》가 아니라 다른 지도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 중의 하나는 왼쪽 아래쪽에 표시된 安眠(島)의 위치이다. 안면도는 왼쪽 위의 安興 바로 아래쪽에 있어야 사실에 가깝기 때문에 본 지도의 필사자뿐만 아니라 원본의 지도 제작자 역시 사실에 대한 확인 작업이 부족했던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홍산현 (鴻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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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현은 부여군의 홍산면, 옥산면, 남면, 내산면, 외산면, 구룡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홍산면의 남촌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홍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홍산현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왼쪽 위는 현재의 부여군 외산면 지역으로서 서해로 바로 빠져나가는 웅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오른쪽 아래에는 금강에 대해 부여 지역에서 부르던 白馬江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백마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은 현재 금천으로 부르고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와 거의 동일한데, 《해동지도》에 수록된 지명이 생략되거나 일부 변화된 것이 있다. 《해동지도》에는 오른쪽에 海岸面과 大也谷面 및 彌造川 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주기에 해안면과 대야곡면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실수로 빠뜨린 것이 아닌가 한다. 宿鴻驛 왼쪽에는 淸逸寺가 기록되어 있는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淸逸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올바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생략되거나 잘못 기록한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오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정도로 꼼꼼한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홍산현 주기 (鴻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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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현은 부여군의 홍산면, 옥산면, 남면, 내산면, 외산면, 구룡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홍산면의 남촌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홍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홍산현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왼쪽 위는 현재의 부여군 외산면 지역으로서 서해로 바로 빠져나가는 웅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오른쪽 아래에는 금강에 대해 부여 지역에서 부르던 白馬江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백마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은 현재 금천으로 부르고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와 거의 동일한데, 《해동지도》에 수록된 지명이 생략되거나 일부 변화된 것이 있다. 《해동지도》에는 오른쪽에 海岸面과 大也谷面 및 彌造川 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주기에 해안면과 대야곡면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실수로 빠뜨린 것이 아닌가 한다. 宿鴻驛 왼쪽에는 淸逸寺가 기록되어 있는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淸逸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올바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생략되거나 잘못 기록한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오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정도로 꼼꼼한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홍주목 (洪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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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목은 홍성군에서 결성면, 서부면, 은하면, 광천읍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 보령시의 천북면과 오천면의 도서지역, 청양군의 화성면 전체와 남양면의 일부, 당진군의 거산리를 제외한 신평면과 합덕읍 대부분, 태안군의 안면읍 황도리 등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홍성읍 오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고을의 鎭山인 白月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읍치를 지나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며, 왼쪽 아래의 하천은 금강으로 흘러가는 작은 지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홍주목 지도와 겅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을 볼 수 있다. 다만 몇몇 부분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우선 《해동지도》에 수록된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으나 이 지도에는 없어 첨가시킨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첨가된 지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둘째, 《해동지도》에는 각 倉庫에 官(읍치)으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 자체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는 뒤의 2개 지도와 달리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 비하면 상당히 소략한 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원본 계통에는 《해동지도》만큼의 도로가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는데, 본 지도 또는 같은 계통의 필사자가 거칠게 필사하면서 소략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도로를 아예 생략해 버렸다. 기타 오른쪽 위의 雲川面과 아래쪽의 合南面 오른쪽은 모두 월경지임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운천면은 해미현의 경계를 넘어 있었고, 합남면을 포함한 오른쪽은 덕산현의 경계를 넘어 있었다.(이기봉)

  • 홍주목 주기 (洪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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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목은 홍성군에서 결성면, 서부면, 은하면, 광천읍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 보령시의 천북면과 오천면의 도서지역, 청양군의 화성면 전체와 남양면의 일부, 당진군의 거산리를 제외한 신평면과 합덕읍 대부분, 태안군의 안면읍 황도리 등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홍성읍 오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고을의 鎭山인 白月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읍치를 지나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며, 왼쪽 아래의 하천은 금강으로 흘러가는 작은 지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홍주목 지도와 겅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을 볼 수 있다. 다만 몇몇 부분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우선 《해동지도》에 수록된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으나 이 지도에는 없어 첨가시킨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첨가된 지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둘째, 《해동지도》에는 각 倉庫에 官(읍치)으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 자체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는 뒤의 2개 지도와 달리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 비하면 상당히 소략한 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원본 계통에는 《해동지도》만큼의 도로가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는데, 본 지도 또는 같은 계통의 필사자가 거칠게 필사하면서 소략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도로를 아예 생략해 버렸다. 기타 오른쪽 위의 雲川面과 아래쪽의 合南面 오른쪽은 모두 월경지임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운천면은 해미현의 경계를 넘어 있었고, 합남면을 포함한 오른쪽은 덕산현의 경계를 넘어 있었다.(이기봉)

  • 황간현 (黃澗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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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간현은 영동군의 황간면, 매곡면, 상촌면, 추풍령면의 계룡리, 경상북도 김천시의 봉산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황간면의 남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황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 上村面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지나 왼쪽 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초강천이다. 현재의 상주시 모서면과 모동면 방면에서 초강천으로 흘러드는 금상천과 소강 등이 있는데, 본 지도의 위쪽 하천에 해당되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오른쪽 金山界 방면에서 흘러오는 현재의 푸충령천이 본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현재의 영동군 추풍령면은 소백산백의 서쪽에 있어 금강 유역권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경상도의 金山에 속해 있었다. 원래는 황금소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였지만 고려말 조선초를 거치면서 金山의 영역으로 속하게 되면서 독자성을 완전히 상실한 지역이다. 오른쪽 아래의 南面 지역은 현재의 김천시 봉산면 일대로서 추풍령면과 반대로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 유역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의 황간 땅이었다. 이곳도 원래 金化部曲이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였는데, 고려말에 황간의 땅으로 편입되면서 독자성을 상실한 곳이다. 본 지도의 읍치에는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여지도》에는 5개, 《광여도》에는 8개가 있고, 《해동지도》에는 3개밖에 없다. 전체적인 구도가 본 지도 계통과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황간현 지도에도 9개가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倉의 건물 4개를 1개로, 《광여도》는 3개로 그리면서 숫자가 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해동지도》는 객사와 아사 및 華岳樓 등 중요한 3개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모두 생략하였다.(이기봉)

  • 황간현 주기 (黃澗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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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간현은 영동군의 황간면, 매곡면, 상촌면, 추풍령면의 계룡리, 경상북도 김천시의 봉산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황간면의 남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황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 上村面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지나 왼쪽 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초강천이다. 현재의 상주시 모서면과 모동면 방면에서 초강천으로 흘러드는 금상천과 소강 등이 있는데, 본 지도의 위쪽 하천에 해당되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오른쪽 金山界 방면에서 흘러오는 현재의 푸충령천이 본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현재의 영동군 추풍령면은 소백산백의 서쪽에 있어 금강 유역권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경상도의 金山에 속해 있었다. 원래는 황금소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였지만 고려말 조선초를 거치면서 金山의 영역으로 속하게 되면서 독자성을 완전히 상실한 지역이다. 오른쪽 아래의 南面 지역은 현재의 김천시 봉산면 일대로서 추풍령면과 반대로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 유역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의 황간 땅이었다. 이곳도 원래 金化部曲이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였는데, 고려말에 황간의 땅으로 편입되면서 독자성을 상실한 곳이다. 본 지도의 읍치에는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여지도》에는 5개, 《광여도》에는 8개가 있고, 《해동지도》에는 3개밖에 없다. 전체적인 구도가 본 지도 계통과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황간현 지도에도 9개가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倉의 건물 4개를 1개로, 《광여도》는 3개로 그리면서 숫자가 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해동지도》는 객사와 아사 및 華岳樓 등 중요한 3개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모두 생략하였다.(이기봉)

  • 회덕현 (懷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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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덕현은 대전직할시의 대덕구, 동구의 대성동과 신상동 사이, 유성구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대덕구의 읍내동 일대에 있었다. 위쪽의 오른쪽(동)에서 왼쪽(서)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고, 아래쪽에서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와 동일하게 甲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왼쪽과 아래쪽에 公州界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공주의 땅이 현재의 대전직할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쪽에는 인접하지 않은 淸州界가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신상동 북쪽 동구 지역에 청주의 월경지인 周岸面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회덕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는 《해동지도》가 가장 자세하여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회덕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조하여 了峴과 了田峴을 첨가한다는 첨지가 붙어 있다. 지도에도 이 지명을 첨가하여 수록하였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기타 객사 아래쪽의 造山은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의 취약 지점에 裨補를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案山에 해당된다.(이기봉)

  • 회덕현 주기 (懷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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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덕현은 대전직할시의 대덕구, 동구의 대성동과 신상동 사이, 유성구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대덕구의 읍내동 일대에 있었다. 위쪽의 오른쪽(동)에서 왼쪽(서)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고, 아래쪽에서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와 동일하게 甲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왼쪽과 아래쪽에 公州界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공주의 땅이 현재의 대전직할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쪽에는 인접하지 않은 淸州界가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신상동 북쪽 동구 지역에 청주의 월경지인 周岸面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회덕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는 《해동지도》가 가장 자세하여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회덕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조하여 了峴과 了田峴을 첨가한다는 첨지가 붙어 있다. 지도에도 이 지명을 첨가하여 수록하였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기타 객사 아래쪽의 造山은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의 취약 지점에 裨補를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案山에 해당된다.(이기봉)

  • 회인현 (懷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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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인현은 보은군의 회북면, ․회남면, 내북면의 염둔리 일대, 수한면의 차정리, 청원군의 문의면 마구리 일대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회북면 중앙리와 부수리 일대에 있었다. 아래쪽 오른쪽의 沃川界에서 흘러와 왼쪽의 文義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회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보다 더 많은 지명이 수록되어 있고, 읍치를 지나는 하천의 지류가 많이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의 첨지에는 “물줄기 7개와 3개의 지명이 備圖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어 필사하여 그려넣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회인 지도로서 후에 이 지도를 참조하여 일부 내용을 첨가했음을 알 수 있다. 주기 부분에도 邑內面과 江外面이 첨가되어 있고, “이 지도에는 없지만 備圖에는 있다”는 문구를 적어넣었다. 지도 부분에도 읍내면과 강외면이 첨가되어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첨가되기 이전의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기타 서면과 동면 및 북면의 경우 읍치를 지나는 현재의 회인천 유역뿐만 아니라 산줄기 너머에도 상당수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면의 경우 현재의 청원군 문의면 동쪽 마을이, 동면과 북면의 경우 현재의 보은군 수한면과 내북면의 일부 마을이 속해 있었다.(이기봉)

  • 회인현 주기 (懷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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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인현은 보은군의 회북면, ․회남면, 내북면의 염둔리 일대, 수한면의 차정리, 청원군의 문의면 마구리 일대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회북면 중앙리와 부수리 일대에 있었다. 아래쪽 오른쪽의 沃川界에서 흘러와 왼쪽의 文義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회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보다 더 많은 지명이 수록되어 있고, 읍치를 지나는 하천의 지류가 많이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의 첨지에는 “물줄기 7개와 3개의 지명이 備圖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어 필사하여 그려넣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회인 지도로서 후에 이 지도를 참조하여 일부 내용을 첨가했음을 알 수 있다. 주기 부분에도 邑內面과 江外面이 첨가되어 있고, “이 지도에는 없지만 備圖에는 있다”는 문구를 적어넣었다. 지도 부분에도 읍내면과 강외면이 첨가되어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첨가되기 이전의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기타 서면과 동면 및 북면의 경우 읍치를 지나는 현재의 회인천 유역뿐만 아니라 산줄기 너머에도 상당수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면의 경우 현재의 청원군 문의면 동쪽 마을이, 동면과 북면의 경우 현재의 보은군 수한면과 내북면의 일부 마을이 속해 있었다.(이기봉)

  • 가평군 (嘉平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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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군은 설악면을 제외한 가평군 전체와 남양주시 수동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가평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왼쪽의 東에서 흘러나오는 昭陽江下流가 현재의 북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가평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 다른 측면이 있다. 일단 지도 명칭에서 嘉平郡은 加平郡의 오기로서 지도 필사자가 옛이름인 嘉平과 헷갈린 것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 위의 도로와 산줄기의 표현 양식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의 유입 방향인 서쪽을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필사 시기에 맞게 주기 내용으로 바꾸고, 지도의 전체적인 방향만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 역시 남쪽을 위로 향해 그리고 주기가 같은 점은 본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있던 南面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도 없는데, 주기에는 남면이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나 같은 계통에서 범한 오류를 뒤의 2개 지도가 수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뒤의 2개 지도에서 산줄기의 표현 양식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고, 도로가 없으며, 일부 지명이 달라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평안도
  • 江界府 (江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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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界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자강도 강계시, 만포시, 시중군, 전천군, 장강군, 성간군, 용림군, 위원군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강계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지도의 상단에 그리고 있는 반면에, 본 지도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강계부는 세조 때 지도의 위쪽에 있는 四郡을 폐하고 주민을 이 고을로 옮기면서 평안도 최북단의 고을이 되었다. 최전방에 있는 고을의 성격에 맞도록 압록강변과 산줄기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는 많은 鎭과 烽燧, 院, 도로의 표시가 간결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읍성과 滿浦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狄踰岺은 남쪽 희천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고, 왼쪽의 麻田嶺과 梨嶺은 四郡 지역으로부터 적이 쳐들어 올 경우에 통과해야 하는 要衝地로서 모두 關門이 설치되어 있다. 압록강에 쓰여있는 八十六把에서 一百八巴까지는 모두 강계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강계 땅에 있는 把守를 순서대로 써놓은 것이다. 한편 만포진 건너편에 표시된 五國城은 金나라(1115-1234)의 초기 도읍지였다고 하며 그 옆에 있다는 황제묘도 함께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다만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衙舍 건물 하나만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客舍, 倉, 鄕校 등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이는 《광여도》와 거의 일치한다. (양윤정)

  • 江界府 주기 (江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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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界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자강도 강계시, 만포시, 시중군, 전천군, 장강군, 성간군, 용림군, 위원군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강계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지도의 상단에 그리고 있는 반면에, 본 지도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강계부는 세조 때 지도의 위쪽에 있는 四郡을 폐하고 주민을 이 고을로 옮기면서 평안도 최북단의 고을이 되었다. 최전방에 있는 고을의 성격에 맞도록 압록강변과 산줄기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는 많은 鎭과 烽燧, 院, 도로의 표시가 간결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읍성과 滿浦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狄踰岺은 남쪽 희천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고, 왼쪽의 麻田嶺과 梨嶺은 四郡 지역으로부터 적이 쳐들어 올 경우에 통과해야 하는 要衝地로서 모두 關門이 설치되어 있다. 압록강에 쓰여있는 八十六把에서 一百八巴까지는 모두 강계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강계 땅에 있는 把守를 순서대로 써놓은 것이다. 한편 만포진 건너편에 표시된 五國城은 金나라(1115-1234)의 초기 도읍지였다고 하며 그 옆에 있다는 황제묘도 함께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다만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衙舍 건물 하나만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客舍, 倉, 鄕校 등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이는 《광여도》와 거의 일치한다. (양윤정)

  • 가산군 (嘉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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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嘉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운전군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가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가산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와 비교해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증가하였을 뿐 그 외의 지역의 지명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읍치의 정보는 《해동지도》 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여지도》와 다른 부분이 발견된다. 지도의 왼쪽 아래의 乫亍浦 부분으로 《여지도》에는 乫亍洞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같이 乫亍浦로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와의 차이점은 오른쪽의 ‘古城鎭安陵淸川江’ 부분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古城鎭’이 산맥 안쪽에 표시되어 있고, ‘安陵淸川江(안주의 청천강이란 뜻)’은 청천강변을 따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모두 붙여 기록하여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여지도》와 《광여도》도 마찬가지이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같이 산지의 모습이 ‘X’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나, 본 지도에는 두 개의 산지가 나란히 평행하여 그려져 있어 그 부분 또한 차이점이 있다. (양윤정)

  • 가산군 주기 (嘉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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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嘉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운전군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가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가산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와 비교해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증가하였을 뿐 그 외의 지역의 지명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읍치의 정보는 《해동지도》 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여지도》와 다른 부분이 발견된다. 지도의 왼쪽 아래의 乫亍浦 부분으로 《여지도》에는 乫亍洞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같이 乫亍浦로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와의 차이점은 오른쪽의 ‘古城鎭安陵淸川江’ 부분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古城鎭’이 산맥 안쪽에 표시되어 있고, ‘安陵淸川江(안주의 청천강이란 뜻)’은 청천강변을 따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모두 붙여 기록하여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여지도》와 《광여도》도 마찬가지이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같이 산지의 모습이 ‘X’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나, 본 지도에는 두 개의 산지가 나란히 평행하여 그려져 있어 그 부분 또한 차이점이 있다. (양윤정)

  • 강동현 (江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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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東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승호구역과 강동군 북부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1136년(고려 인종 14) 西京에 속했던 仍乙舍鄕, 班石村, 朴達串村, 馬灘村을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동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나타나기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동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비슷한 4종의 지도 가운데 다만 《여지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표현에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왼쪽 위의 慈山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平壤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위쪽 가운데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비류강이고, 아래쪽의 三登界에서 들어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비류강, 남강의 규모는 실제로 거의 비슷하다. 《해동지도》에도 세 개의 하천은 다른 지류에 비해 훨씬 굵게 표시하여 실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여지도》 지도에서는 남강을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다. 이 부분 외에도 高泉面 부근, 水晶川 역시 《여지도》에 그려진 모습으로는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다. 高泉面 연안에 위치한 落岩은 둘레가 약 1km로 강 쪽으로 절벽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바위가 높은 곳은 100m에 이른다. 넓은 평지 끝 강가에 우뚝 솟아 있어서 상류에서 떨어져 흘러 왔다는 뜻으로 落來岩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또는 바위 전체의 모습이 거북과 같아 龜岩으로 통칭되고 있다. 거북의 눈에 해당하는 위치에 淸風穴이라는 큰 암굴도 있다. 古城과 인접해 있는 閱波亭은 본래 西江院이라 불렸으나 中宗의 駙馬인 宋宴이 열파정이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亭의 모양만 그려져 있다. 또한 《여지도》에는 반대로 지명만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江東縣의 선비들이 曺好益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다. (양윤정)

  • 강동현 주기 (江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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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東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승호구역과 강동군 북부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1136년(고려 인종 14) 西京에 속했던 仍乙舍鄕, 班石村, 朴達串村, 馬灘村을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동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나타나기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동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비슷한 4종의 지도 가운데 다만 《여지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표현에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왼쪽 위의 慈山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平壤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위쪽 가운데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비류강이고, 아래쪽의 三登界에서 들어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비류강, 남강의 규모는 실제로 거의 비슷하다. 《해동지도》에도 세 개의 하천은 다른 지류에 비해 훨씬 굵게 표시하여 실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여지도》 지도에서는 남강을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다. 이 부분 외에도 高泉面 부근, 水晶川 역시 《여지도》에 그려진 모습으로는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다. 高泉面 연안에 위치한 落岩은 둘레가 약 1km로 강 쪽으로 절벽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바위가 높은 곳은 100m에 이른다. 넓은 평지 끝 강가에 우뚝 솟아 있어서 상류에서 떨어져 흘러 왔다는 뜻으로 落來岩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또는 바위 전체의 모습이 거북과 같아 龜岩으로 통칭되고 있다. 거북의 눈에 해당하는 위치에 淸風穴이라는 큰 암굴도 있다. 古城과 인접해 있는 閱波亭은 본래 西江院이라 불렸으나 中宗의 駙馬인 宋宴이 열파정이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亭의 모양만 그려져 있다. 또한 《여지도》에는 반대로 지명만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江東縣의 선비들이 曺好益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다. (양윤정)

  • 강서현 (江西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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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西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동북쪽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서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다소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서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강서현 모양과 본 지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읍치 부분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둘째,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닌 강서현의 모습을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쪽(서북)의 한룡면은 위쪽으로 더 튀어나가게 그려져 있어야 실제와 비슷하다. 또한 아래쪽의 보원면 밑은 아래쪽(남)으로 길게 뻗어 있어야 한다. 이런 오류는 강서현 동남쪽에 접해 있는 대동강 구간이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지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읍치 부분을 확대하여 그려지긴 하였으나,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읍치 안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鶴洞書院으로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어 1686년(숙종 12)에 사액을 받았던 서원이다. 그리고 지도상에서 관아 위쪽으로 연봉이 이어져 가장 높게 표시된 산이 무학산이다. 중앙에는 주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동쪽으로는 鳳凰臺, 서쪽으로는 玉女峰이 좌우로 읍내를 포옹하고 있는 모양으로 마치 춤추는 학이 날개를 편 것 같다하여 원래는 登龜山이었으나 무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보면 舞鶴亭, 添鶴亭, 鳴鶴池, 中鶴山, 西鶴山 등 ''鶴'' 자 들어가는 지명이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양윤정)

  • 강서현 주기 (江西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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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西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동북쪽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서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다소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서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강서현 모양과 본 지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읍치 부분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둘째,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닌 강서현의 모습을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쪽(서북)의 한룡면은 위쪽으로 더 튀어나가게 그려져 있어야 실제와 비슷하다. 또한 아래쪽의 보원면 밑은 아래쪽(남)으로 길게 뻗어 있어야 한다. 이런 오류는 강서현 동남쪽에 접해 있는 대동강 구간이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지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읍치 부분을 확대하여 그려지긴 하였으나,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읍치 안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鶴洞書院으로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어 1686년(숙종 12)에 사액을 받았던 서원이다. 그리고 지도상에서 관아 위쪽으로 연봉이 이어져 가장 높게 표시된 산이 무학산이다. 중앙에는 주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동쪽으로는 鳳凰臺, 서쪽으로는 玉女峰이 좌우로 읍내를 포옹하고 있는 모양으로 마치 춤추는 학이 날개를 편 것 같다하여 원래는 登龜山이었으나 무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보면 舞鶴亭, 添鶴亭, 鳴鶴池, 中鶴山, 西鶴山 등 ''鶴'' 자 들어가는 지명이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양윤정)

  • 개천군 (价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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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군 도화리·광도리·봉창리를 제외한 개천군 전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개천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천의 표현 방식으로 인해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도의 하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왼쪽 위의 寧邊界에서 安陵界(安州界)까지 개천군은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寧邊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본 지도에는 이 청천강의 하천 유로가 대동강과 같은 규모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여지도》에는 마치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 바다처럼 표현한 점은 시정되었다. 하지만 2개의 실선으로 표시된 대동강과 달리 다른 지류와 마찬가지로 1개의 실선으로 그려 실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오류는 《여지도》에 표시된 面의 명칭 표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의 內外面은 內東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內東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 3개의 건물만이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倉,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9개 그려져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鄕廳과 倉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다른 부분은 일치하고 있다. (양윤정)

  • 개천군 주기 (价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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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군 도화리·광도리·봉창리를 제외한 개천군 전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개천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천의 표현 방식으로 인해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도의 하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왼쪽 위의 寧邊界에서 安陵界(安州界)까지 개천군은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寧邊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본 지도에는 이 청천강의 하천 유로가 대동강과 같은 규모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여지도》에는 마치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 바다처럼 표현한 점은 시정되었다. 하지만 2개의 실선으로 표시된 대동강과 달리 다른 지류와 마찬가지로 1개의 실선으로 그려 실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오류는 《여지도》에 표시된 面의 명칭 표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의 內外面은 內東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內東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 3개의 건물만이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倉,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9개 그려져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鄕廳과 倉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다른 부분은 일치하고 있다. (양윤정)

  • 곽산군 (郭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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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郭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곽산군 일대이다. 이 곳은 993년(고려 성종 12) 거란족의 1차 침입 때 고려 徐熙(940-998) 장군이 거란의 소손녕과 단판을 벌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개척한 江東六州 가운데 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곽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곽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서 가장 다른 점은 읍치와 雲興舘의 모습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그리고 衙舍 건물 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이 포함되어 5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거의 같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지명 중 《해동지도》와 일치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龜城塩里은 이곳에 있던 龜城의 월경지인 塩里面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을 龜城塩田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월경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실선으로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고을의 전체 모습은 실제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실제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려도 크게 왜곡되지 않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윤정)

  • 곽산군 주기 (郭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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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郭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곽산군 일대이다. 이 곳은 993년(고려 성종 12) 거란족의 1차 침입 때 고려 徐熙(940-998) 장군이 거란의 소손녕과 단판을 벌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개척한 江東六州 가운데 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곽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곽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서 가장 다른 점은 읍치와 雲興舘의 모습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그리고 衙舍 건물 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이 포함되어 5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거의 같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지명 중 《해동지도》와 일치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龜城塩里은 이곳에 있던 龜城의 월경지인 塩里面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을 龜城塩田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월경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실선으로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고을의 전체 모습은 실제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실제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려도 크게 왜곡되지 않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윤정)

  • 구성부 (龜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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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龜城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구성시와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천마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구성부 지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이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의 구성부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 읍성이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이 잘 나타나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역시 일부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는 필사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읍성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 부분을 생략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읍성은 方形의 石城으로, 동서남북 4개의 성문, 관청, 향교, 창고, 군사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읍성 안에 ‘萬年寺’라는 사찰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읍성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하여 성곽 안으로 물길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물길이 남문 앞에서 끊어져 있어 읍성 안에는 인문정보 만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서 보이는 鄕廳과 訓錬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읍성안에 그려진 내용이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양윤정)

  • 구성부 주기 (龜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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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龜城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구성시와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천마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구성부 지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이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의 구성부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 읍성이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이 잘 나타나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역시 일부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는 필사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읍성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 부분을 생략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읍성은 方形의 石城으로, 동서남북 4개의 성문, 관청, 향교, 창고, 군사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읍성 안에 ‘萬年寺’라는 사찰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읍성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하여 성곽 안으로 물길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물길이 남문 앞에서 끊어져 있어 읍성 안에는 인문정보 만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서 보이는 鄕廳과 訓錬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읍성안에 그려진 내용이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양윤정)

  • 덕천군 (德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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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덕천군 삼흥리를 제외한 전 지역을 포함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덕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덕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舘舍, 衙舍, 鄕校 3개의 정보만 수록되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건물의 수는 총 14개이고, 명칭도 6개나 적혀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에도 《해동지도》보다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이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鄕校 부분의 산지의 모습이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위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지만 본 지도에서는 아랫부분까지 산지로 그려져 마치 그 안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지도》의 경우 읍치 안에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訓練 왼쪽의 것이 鄕廳으로 교정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본 지도책의 다른 군현 지도에 대부분 적혀 있는 面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서로간의 관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오른쪽 위의 熙川界에서 들어와 아래쪽 順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본 지도에는 대동강의 지류에 대한 표기에서 크게 2개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째, 오른쪽의 孟山界에서 현재의 맹산강이 흘러들어오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본 고을 안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둘째, 왼쪽의 价川界에서 대동강의 지류가 흘러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런 지류는 없다. 이 역시 본 지도와 3종의 지도에서 모두 나타나는 오류이다. (양윤정)

  • 덕천군 주기 (德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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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덕천군 삼흥리를 제외한 전 지역을 포함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덕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덕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舘舍, 衙舍, 鄕校 3개의 정보만 수록되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건물의 수는 총 14개이고, 명칭도 6개나 적혀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에도 《해동지도》보다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이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鄕校 부분의 산지의 모습이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위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지만 본 지도에서는 아랫부분까지 산지로 그려져 마치 그 안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지도》의 경우 읍치 안에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訓練 왼쪽의 것이 鄕廳으로 교정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본 지도책의 다른 군현 지도에 대부분 적혀 있는 面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서로간의 관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오른쪽 위의 熙川界에서 들어와 아래쪽 順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본 지도에는 대동강의 지류에 대한 표기에서 크게 2개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째, 오른쪽의 孟山界에서 현재의 맹산강이 흘러들어오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본 고을 안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둘째, 왼쪽의 价川界에서 대동강의 지류가 흘러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런 지류는 없다. 이 역시 본 지도와 3종의 지도에서 모두 나타나는 오류이다. (양윤정)

  • 맹산현 (孟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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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孟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맹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맹산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서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배치하여 다른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거의 유사하게 보이나 하천 부분에 있어서 표현 방법의 차이로 지도를 읽기에 불편함이 있다. 즉, 왼쪽 위의 陽德界에서 발원하여 아래쪽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 대동강의 지류인 맹산강이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맹산강의 상류와 하류를 구분할 수 없도록 그려져 있다. 이는 《해동지도》에서 상류와 하류가 분명히 구별되도록 그려져 있던 것에 비하면 본 지도의 필사 시 하천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여지도》 보다는 구분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읍치 지역을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해서 그렸기 때문에 실제에 대한 왜곡 현상이 나타났다. 맹산강을 중심으로 실제로는 고을의 동쪽인 왼쪽 부분이 서쪽인 오른쪽 부분보다 훨씬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정반대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서쪽에 있었던 읍치 지역을 확대하여 그렸기 때문이다. 왼쪽 위에는 定平界가 보이고 있는데, 맹산현은 정평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런 계통 지도의 최초 제작자가 정보를 잘못 인식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후 검증 없이 그대로 필사하면서 계속적으로 발생한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맹산현 주기 (孟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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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孟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맹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맹산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서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배치하여 다른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거의 유사하게 보이나 하천 부분에 있어서 표현 방법의 차이로 지도를 읽기에 불편함이 있다. 즉, 왼쪽 위의 陽德界에서 발원하여 아래쪽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 대동강의 지류인 맹산강이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맹산강의 상류와 하류를 구분할 수 없도록 그려져 있다. 이는 《해동지도》에서 상류와 하류가 분명히 구별되도록 그려져 있던 것에 비하면 본 지도의 필사 시 하천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여지도》 보다는 구분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읍치 지역을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해서 그렸기 때문에 실제에 대한 왜곡 현상이 나타났다. 맹산강을 중심으로 실제로는 고을의 동쪽인 왼쪽 부분이 서쪽인 오른쪽 부분보다 훨씬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정반대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서쪽에 있었던 읍치 지역을 확대하여 그렸기 때문이다. 왼쪽 위에는 定平界가 보이고 있는데, 맹산현은 정평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런 계통 지도의 최초 제작자가 정보를 잘못 인식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후 검증 없이 그대로 필사하면서 계속적으로 발생한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박천군 (博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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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博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 일대이다. 고을의 동쪽·북쪽의 산줄기로부터 흘러 내려온 작은 물줄기들이 지금의 대령강인 大定江과 합류하여 청천강과 더불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박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박천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래쪽 望毛老 아래쪽이 《해동지도》에는 반도처럼 그려 있지만, 본 지도에는 밑 부분이 잘려서 생략되었다. 이것은 《해동지도》보다 세로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른쪽의 淸川江 본류가 竝溫山烽 아래쪽 부분에서 오른쪽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모습이 《여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沙古介 부분의 물줄기가 두 갈래로 나눠지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세 갈래로 나눠지고 있다. 또한 읍치 부분의 하천도 본 지도에는 읍치를 끼고 양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으나, 《여지도》에서는 오른쪽으로만 하천이 흐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沙古介 부분은 본 지도와 읍치 부분은 《여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해동지도》에 없던 訓練 건물이 있고, 《여지도》에 본 지도에서 邑倉으로 표시되었던 것이 倉으로 바뀌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다. (양윤정)

  • 박천군 주기 (博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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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博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 일대이다. 고을의 동쪽·북쪽의 산줄기로부터 흘러 내려온 작은 물줄기들이 지금의 대령강인 大定江과 합류하여 청천강과 더불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박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박천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래쪽 望毛老 아래쪽이 《해동지도》에는 반도처럼 그려 있지만, 본 지도에는 밑 부분이 잘려서 생략되었다. 이것은 《해동지도》보다 세로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른쪽의 淸川江 본류가 竝溫山烽 아래쪽 부분에서 오른쪽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모습이 《여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沙古介 부분의 물줄기가 두 갈래로 나눠지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세 갈래로 나눠지고 있다. 또한 읍치 부분의 하천도 본 지도에는 읍치를 끼고 양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으나, 《여지도》에서는 오른쪽으로만 하천이 흐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沙古介 부분은 본 지도와 읍치 부분은 《여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해동지도》에 없던 訓練 건물이 있고, 《여지도》에 본 지도에서 邑倉으로 표시되었던 것이 倉으로 바뀌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다. (양윤정)

  • 벽동군 (壁潼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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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壁潼郡〉으로, 지금은 평안북도 벽동군 및 자강도 우시군 서쪽 일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살고 있었던 땅으로, 1357년(공민왕 6)에 여진족을 쫓고 남쪽 고을의 백성을 옮겨 새로 편입하였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벽동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벽동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동건강으로, 압록강이 왼쪽 아래 방향에서 흘러 들어와 동건강을 합류시켜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동건강과 압록강의 합류 모습을 그리지 않아 동건강이 압록강 본류인 것처럼 보인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벽동군 전체의 모습은 남동쪽 끝을 정점으로 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벽동군의 모습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사각형 모양의 종이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점점 좁아지는 남동쪽(위)의 하천들이 대부분 北流함에도 東流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아래쪽 하천들의 유로는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진 편이다. 지도상에 그려진 읍성을 벽단진의 모습은 작은 삭가형으로 읍치의 1/5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벽단진은 둘레가 1만 3천 32척으로 8천 45척, 높이가 7척인 읍성보다 훨씬 크다. 《광여도》의 경우 벽단진이 벽단보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벅단진이 너무 작게 그려지면서 생긴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벽동군 주기 (壁潼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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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壁潼郡〉으로, 지금은 평안북도 벽동군 및 자강도 우시군 서쪽 일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살고 있었던 땅으로, 1357년(공민왕 6)에 여진족을 쫓고 남쪽 고을의 백성을 옮겨 새로 편입하였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벽동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벽동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동건강으로, 압록강이 왼쪽 아래 방향에서 흘러 들어와 동건강을 합류시켜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동건강과 압록강의 합류 모습을 그리지 않아 동건강이 압록강 본류인 것처럼 보인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벽동군 전체의 모습은 남동쪽 끝을 정점으로 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벽동군의 모습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사각형 모양의 종이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점점 좁아지는 남동쪽(위)의 하천들이 대부분 北流함에도 東流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아래쪽 하천들의 유로는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진 편이다. 지도상에 그려진 읍성을 벽단진의 모습은 작은 삭가형으로 읍치의 1/5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벽단진은 둘레가 1만 3천 32척으로 8천 45척, 높이가 7척인 읍성보다 훨씬 크다. 《광여도》의 경우 벽단진이 벽단보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벅단진이 너무 작게 그려지면서 생긴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삭주부 (朔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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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朔州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삭주군 동부, 대관군, 태천군 개혁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차이점이 보이는데, 우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 부분이 더 짧아졌다. 그리고 읍치 왼쪽에 향교 부분을 보면 《해동지도》에서는 향교 위쪽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향교 밑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향교 부분에 關門城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烽燧의 명칭을 적지 않고 봉수라는 사실만 간단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아래쪽에 仇寧鎭이 仇寧嶺으로, 위쪽에서는 幕嶺鎭이 幕鎭岺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 부분이 바르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의 모습을 보면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건물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그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지만, 본 지도의 경우에는 그런 점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삭주부 주기 (朔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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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朔州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삭주군 동부, 대관군, 태천군 개혁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차이점이 보이는데, 우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 부분이 더 짧아졌다. 그리고 읍치 왼쪽에 향교 부분을 보면 《해동지도》에서는 향교 위쪽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향교 밑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향교 부분에 關門城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烽燧의 명칭을 적지 않고 봉수라는 사실만 간단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아래쪽에 仇寧鎭이 仇寧嶺으로, 위쪽에서는 幕嶺鎭이 幕鎭岺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 부분이 바르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의 모습을 보면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건물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그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지만, 본 지도의 경우에는 그런 점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삼등현 (三登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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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登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강동군 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등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삼등현 지도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주기 부분의 지명과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비교해 보았을 때 가운데 부분에는 西境面이라 적혀 있지만 주기에는 西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지명은 4종의 지도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읍치의 경우에는 《해동지도》가 다른 지도들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다.  《해동지도》는 客舍, 鄕校, 衙舍, 倉이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2 정도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가 남북보다는 동서를 길게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그 영향으로 읍치 왼쪽의 하천이 상대적으로 길게 그려졌다. 또한 古丁洞面이 있는 하천은 동서 방향에서 남북 방향으로 유로가 바뀌어 표현되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陽德界가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 삼등현은 양덕현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았다. 또한 왼쪽에 祥原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로 삼등현은 아래쪽 綾城江(현재의 남강)을 경계로 상원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이는 이런 종류의 지도를 최초로 제작한 사람이 삼등현의 경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삼등현 주기 (三登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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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登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강동군 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등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삼등현 지도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주기 부분의 지명과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비교해 보았을 때 가운데 부분에는 西境面이라 적혀 있지만 주기에는 西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지명은 4종의 지도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읍치의 경우에는 《해동지도》가 다른 지도들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다.  《해동지도》는 客舍, 鄕校, 衙舍, 倉이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2 정도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가 남북보다는 동서를 길게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그 영향으로 읍치 왼쪽의 하천이 상대적으로 길게 그려졌다. 또한 古丁洞面이 있는 하천은 동서 방향에서 남북 방향으로 유로가 바뀌어 표현되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陽德界가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 삼등현은 양덕현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았다. 또한 왼쪽에 祥原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로 삼등현은 아래쪽 綾城江(현재의 남강)을 경계로 상원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이는 이런 종류의 지도를 최초로 제작한 사람이 삼등현의 경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삼화부 (三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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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和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남포직할시 와우도구역, 항구구역 서부, 강서구역 삼화리, 온천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三和’라는 지명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金堂·呼山·漆井을 합하여 삼화현이라 칭한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화부 지도의 구도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읍치와 廣梁鎭만은 《해동지도》보다 건물이 더 많이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았던 廳과 倉을 포함해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또한 광량진 부분도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2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한 정보는 많고, 본 지도의 종이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훨씬 작아 읍치와 광량진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서 서쪽 바다까지의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었으며, 광량진 안쪽의 灣 역시 작게 묘사되었다. 읍치에서는 하천의 유로가 일부 바뀌어 표현되기도 하였다. 광량진 좌측에 표시된 德島의 경우 지명은 표기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현재 섬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보이는 楮島와 号島가 생략되어 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삼화부 주기 (三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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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和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남포직할시 와우도구역, 항구구역 서부, 강서구역 삼화리, 온천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三和’라는 지명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金堂·呼山·漆井을 합하여 삼화현이라 칭한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화부 지도의 구도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읍치와 廣梁鎭만은 《해동지도》보다 건물이 더 많이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았던 廳과 倉을 포함해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또한 광량진 부분도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2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한 정보는 많고, 본 지도의 종이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훨씬 작아 읍치와 광량진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서 서쪽 바다까지의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었으며, 광량진 안쪽의 灣 역시 작게 묘사되었다. 읍치에서는 하천의 유로가 일부 바뀌어 표현되기도 하였다. 광량진 좌측에 표시된 德島의 경우 지명은 표기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현재 섬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보이는 楮島와 号島가 생략되어 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상원군 (祥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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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祥原郡〉으로, 현재의 평안남도 상원군의 서남부와 서부 일부를 제외한 상원군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상원군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가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다. 《해동지도》는 세로보다 가로가 긴 형태로 지도를 그리고 있지만, 본 지도는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가로보다 세로가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상원군은 실제로 남북이 동서보다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해동지도》기 본 지도보다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4개의 건물과 명칭이 표시되어 있을 뿐인데, 본 지도에는 8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2개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여지도》의 경우 건물 수는 같고, 대신 訓練의 위치가 본 지도와 달리 客舍 바로 아래 건물이고, 본 지도의  訓練 건물은 祥明院으로 표시되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며, 본 지도에 명칭이 없는 건물 하나가 鄕廳으로 표시되어 읍치 안에 鄕廳이 2개 표시되어 있다. 그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것은 첫째, 정보가 많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책의 크기가 훨씬 작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즉, 정보는 많고, 크기는 작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읍치를 크게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와 비교해 볼 때 본 지도의 오류가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 읍치 아래쪽에 표기된 紅岩面이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주기에 홍암면이 적혀 있으므로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쪽의 三登界는 《해동지도》에 遂安界로 되어 있다. 三登縣의 영역은 대동강의 지류로 현재 남강으로 불리는 오른쪽의 能成江 건너편에만 있었다. 따라서 본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필사 시에 실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양윤정)

  • 상원군 주기 (祥原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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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祥原郡〉으로, 현재의 평안남도 상원군의 서남부와 서부 일부를 제외한 상원군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상원군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가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다. 《해동지도》는 세로보다 가로가 긴 형태로 지도를 그리고 있지만, 본 지도는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가로보다 세로가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상원군은 실제로 남북이 동서보다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해동지도》기 본 지도보다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4개의 건물과 명칭이 표시되어 있을 뿐인데, 본 지도에는 8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2개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여지도》의 경우 건물 수는 같고, 대신 訓練의 위치가 본 지도와 달리 客舍 바로 아래 건물이고, 본 지도의  訓練 건물은 祥明院으로 표시되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며, 본 지도에 명칭이 없는 건물 하나가 鄕廳으로 표시되어 읍치 안에 鄕廳이 2개 표시되어 있다. 그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것은 첫째, 정보가 많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책의 크기가 훨씬 작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즉, 정보는 많고, 크기는 작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읍치를 크게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와 비교해 볼 때 본 지도의 오류가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 읍치 아래쪽에 표기된 紅岩面이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주기에 홍암면이 적혀 있으므로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쪽의 三登界는 《해동지도》에 遂安界로 되어 있다. 三登縣의 영역은 대동강의 지류로 현재 남강으로 불리는 오른쪽의 能成江 건너편에만 있었다. 따라서 본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필사 시에 실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양윤정)

  • 선천부 (宣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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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宣川府〉로, 현재의 북부를 제외한 평안북도 선천군 전체, 서부를 제외한 동림군 전체, 곽산군 동래강 서안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선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선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읍치 안에 표시되어 있는 訓練, 鄕廳 등의 건물은 《해동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추가된 정보를 《해동지도》의 크기보다 훨씬 작은 종이 위에 표시하기 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에는 없는 동서남북 경계까지의 거리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겨우 본 지도와 읍치 안에 그려진 건물들은 비슷하나 산맥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 본 지도의 경우 읍치를 감싸고 있는 산맥으로부터 읍치 안쪽으로 4개의 산물이 뻗어 있어 각 건물들을 산맥에 의해 분리되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읍치 안의 산맥을 생략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유사하긴 하나 덜 복잡하게 그리기 위해 생략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南面의 경우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는 주기를 꼼꼼히 검토하여 지도를 그리기 보다는 지도와 地誌 부분을 따로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아래쪽(남)의 바닷가에 있는 섬들은 身彌島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크기를 별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또한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리려고 하다보니까 해안가로부터 섬까지의 거리가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점 역시 본 지도뿐만 아니라 앞의 3종의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고을의 실제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종이의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양윤정)

  • 선천부 주기 (宣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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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宣川府〉로, 현재의 북부를 제외한 평안북도 선천군 전체, 서부를 제외한 동림군 전체, 곽산군 동래강 서안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선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선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읍치 안에 표시되어 있는 訓練, 鄕廳 등의 건물은 《해동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추가된 정보를 《해동지도》의 크기보다 훨씬 작은 종이 위에 표시하기 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에는 없는 동서남북 경계까지의 거리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겨우 본 지도와 읍치 안에 그려진 건물들은 비슷하나 산맥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 본 지도의 경우 읍치를 감싸고 있는 산맥으로부터 읍치 안쪽으로 4개의 산물이 뻗어 있어 각 건물들을 산맥에 의해 분리되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읍치 안의 산맥을 생략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유사하긴 하나 덜 복잡하게 그리기 위해 생략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南面의 경우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는 주기를 꼼꼼히 검토하여 지도를 그리기 보다는 지도와 地誌 부분을 따로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아래쪽(남)의 바닷가에 있는 섬들은 身彌島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크기를 별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또한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리려고 하다보니까 해안가로부터 섬까지의 거리가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점 역시 본 지도뿐만 아니라 앞의 3종의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고을의 실제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종이의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양윤정)

  • 성천부 (成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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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成川府〉로, 지금은 평안남도 성천군과 회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성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필사 과정에서 여러 부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왼쪽 아래의 慈山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오른쪽 아래의 谷山界에서 들어와 왼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남강 사이에는 江東과 三登의 땅이 넓게 포진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아주 작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본 지도에서만 나타나는 오류가 아니라, 《해동지도》는 물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른쪽 위의 陽德界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비류강이다. 비류강과 대동강 본류 및 남강은 실제로 규모가 비슷하며, 본 지도에도 비슷한 굵기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대동강과 남강을 2개의 실선으로 그리고, 비류강은 단지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실제 사실을 착각할 수 있게 그렸다. 더 나아가 양덕계 부근의 비류강 끝을 얇아지는 형태로 그려 이곳이 발원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양덕계 부근이 발원지인 듯이 표현을 고쳤을 뿐 나머지 부분은 《여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양윤정)

  • 성천부 주기 (成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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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成川府〉로, 지금은 평안남도 성천군과 회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성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필사 과정에서 여러 부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왼쪽 아래의 慈山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오른쪽 아래의 谷山界에서 들어와 왼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남강 사이에는 江東과 三登의 땅이 넓게 포진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아주 작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본 지도에서만 나타나는 오류가 아니라, 《해동지도》는 물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른쪽 위의 陽德界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비류강이다. 비류강과 대동강 본류 및 남강은 실제로 규모가 비슷하며, 본 지도에도 비슷한 굵기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대동강과 남강을 2개의 실선으로 그리고, 비류강은 단지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실제 사실을 착각할 수 있게 그렸다. 더 나아가 양덕계 부근의 비류강 끝을 얇아지는 형태로 그려 이곳이 발원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양덕계 부근이 발원지인 듯이 표현을 고쳤을 뿐 나머지 부분은 《여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양윤정)

  • 숙천부 (肅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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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肅川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숙천군의 남서부 일대를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숙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필사 과정에서 지명이 잘못 옮겨진 부분이 있다. 《여지도》의 오른쪽 曰里面은 三里面이며, 왼쪽의 平里面은 坪里面이다. 이는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 주기를 바탕으로 《여지도》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지도의 남서쪽에 표시된 法里面 부근에 있던 釰山面의 경우에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가 모두 상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의 모습에 있어서는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읍성이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었다. 《광여도》에서는 읍성의 전체적인 모양을 비롯하여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2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 7개로 증가했으며, 본 지도의 경우 8개가 그려져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와 《여지도》의 차이점은 본 지도를 衙舍 건물이 3개 나란히 겹쳐져서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 독립된 2개의 건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숙천부는 남북보다 동서가 긴 고을이지만 지도에는 반대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세로로 긴 사각형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이로 인해 서쪽으로 튀어나가 있어야 할 고리면, 당리면, 식리면, 평리면 등이 마치 남북으로 늘어선 것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동쪽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마치 북쪽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위쪽의 安陵界는 安州界를 의미하며, 이는 다른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숙천부 주기 (肅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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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肅川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숙천군의 남서부 일대를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숙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필사 과정에서 지명이 잘못 옮겨진 부분이 있다. 《여지도》의 오른쪽 曰里面은 三里面이며, 왼쪽의 平里面은 坪里面이다. 이는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 주기를 바탕으로 《여지도》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지도의 남서쪽에 표시된 法里面 부근에 있던 釰山面의 경우에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가 모두 상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의 모습에 있어서는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읍성이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었다. 《광여도》에서는 읍성의 전체적인 모양을 비롯하여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2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 7개로 증가했으며, 본 지도의 경우 8개가 그려져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와 《여지도》의 차이점은 본 지도를 衙舍 건물이 3개 나란히 겹쳐져서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 독립된 2개의 건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숙천부는 남북보다 동서가 긴 고을이지만 지도에는 반대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세로로 긴 사각형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이로 인해 서쪽으로 튀어나가 있어야 할 고리면, 당리면, 식리면, 평리면 등이 마치 남북으로 늘어선 것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동쪽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마치 북쪽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위쪽의 安陵界는 安州界를 의미하며, 이는 다른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순안현 (順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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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安縣〉으로, 현재 북한의 순안비행장으로 알려진 평양특별시 순안구역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안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순안현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星山書院이며, 이는 1647년(인조 25)에 세워져 1696년(숙종 22)에 사액을 받았고, 정몽주와 한우신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輿地圖書』에 따르면 읍치에 보이는 雲影池는 치소에서 남쪽으로 2리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상하 두 개의 저수지로 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의 경우 지명에 차이가 다소 보인다. 왼쪽의 順和面이 《여지도》에는 和順面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冬花日面은 順和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역시 본 지도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본 지도의 읍치 모습은 《해동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즉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訓練과 擺撥, 鄕廳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읍치의 건물이 4개밖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본 지도에는 무려 13개나 된다. 왼쪽의 大船串烽도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그러나 이 부분들은 《여지도》와 《광여도》에 반영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가 다르게 그려진 부분도 있는데, 왼쪽의 鎭里面에 대한 표현이 있다. 진리면은 원래 永柔와 平壤의 경계를 넘어가 해안가에 있는 越境地이다. 본 지도의 경우 永柔界와 平壤界가 진리면과 순화면 사이를 가르듯이 적혀 있고, 산줄기가 이어져 있지 않아 월경지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영유계와 평양계가 적혀 있는 방식뿐만 아니라 마치 산줄기가 이어진 것처럼 그려져 있어 진리면이 월경지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여지도》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 시 두 지도를 모두 참고하여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윤정)

  • 순안현 주기 (順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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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安縣〉으로, 현재 북한의 순안비행장으로 알려진 평양특별시 순안구역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안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순안현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星山書院이며, 이는 1647년(인조 25)에 세워져 1696년(숙종 22)에 사액을 받았고, 정몽주와 한우신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輿地圖書』에 따르면 읍치에 보이는 雲影池는 치소에서 남쪽으로 2리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상하 두 개의 저수지로 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의 경우 지명에 차이가 다소 보인다. 왼쪽의 順和面이 《여지도》에는 和順面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冬花日面은 順和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역시 본 지도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본 지도의 읍치 모습은 《해동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즉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訓練과 擺撥, 鄕廳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읍치의 건물이 4개밖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본 지도에는 무려 13개나 된다. 왼쪽의 大船串烽도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그러나 이 부분들은 《여지도》와 《광여도》에 반영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가 다르게 그려진 부분도 있는데, 왼쪽의 鎭里面에 대한 표현이 있다. 진리면은 원래 永柔와 平壤의 경계를 넘어가 해안가에 있는 越境地이다. 본 지도의 경우 永柔界와 平壤界가 진리면과 순화면 사이를 가르듯이 적혀 있고, 산줄기가 이어져 있지 않아 월경지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영유계와 평양계가 적혀 있는 방식뿐만 아니라 마치 산줄기가 이어진 것처럼 그려져 있어 진리면이 월경지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여지도》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 시 두 지도를 모두 참고하여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윤정)

  • 순천군 (順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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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군의 서쪽과 북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를 비롯하여 하천의 모습은 《해동지도》의 순천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본류와 지류, 크기 등을 이해하기 힘들다. 왼쪽의 德川江下流에서 흘러와 오른쪽의 殷山地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해동지도》에는 대동강 본류가 다른 하천보다 훨씬 굵게 그려져 있어 지류와 분명하게 구분해주고 있다. 아울러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의 굵기도 약간 다르게 표현하여 구분을 쉽게 하였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하천을 표현함에 있어 굵기의 변화를 주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굵기를 대부분 동일하게 그리고 있어 이해하기 힘들다. 《광여도》 에는 대부분의 하천을 1개의 실선으로 나타내었다. 다만 왼쪽의 德川江下流 부분과 오른쪽의 殷山地 부분을 2개의 실선으로 표시하여 다른 부분과 구분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하천의 상류와 하류를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광여도》의 필사 자 자체가 하천들 사이의 규모 차이,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지명 표기에 있어 오류가 보이고 있다. 주기와 달리 密田面이 田面으로, 粘石浦面이 粘伊彦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이 바르게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도 《광여도》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본 지도의 경우 倉과 鄕校 위에 두 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지도 윗부분의 院倉과 新倉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총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어 다른 지도와는 차이가 있다. (양윤정)

  • 순천군 주기 (順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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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군의 서쪽과 북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를 비롯하여 하천의 모습은 《해동지도》의 순천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본류와 지류, 크기 등을 이해하기 힘들다. 왼쪽의 德川江下流에서 흘러와 오른쪽의 殷山地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해동지도》에는 대동강 본류가 다른 하천보다 훨씬 굵게 그려져 있어 지류와 분명하게 구분해주고 있다. 아울러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의 굵기도 약간 다르게 표현하여 구분을 쉽게 하였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하천을 표현함에 있어 굵기의 변화를 주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굵기를 대부분 동일하게 그리고 있어 이해하기 힘들다. 《광여도》 에는 대부분의 하천을 1개의 실선으로 나타내었다. 다만 왼쪽의 德川江下流 부분과 오른쪽의 殷山地 부분을 2개의 실선으로 표시하여 다른 부분과 구분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하천의 상류와 하류를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광여도》의 필사 자 자체가 하천들 사이의 규모 차이,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지명 표기에 있어 오류가 보이고 있다. 주기와 달리 密田面이 田面으로, 粘石浦面이 粘伊彦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이 바르게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도 《광여도》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본 지도의 경우 倉과 鄕校 위에 두 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지도 윗부분의 院倉과 新倉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총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어 다른 지도와는 차이가 있다. (양윤정)

  • 안주목 (安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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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安州牧〉으로, 북한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천강 이북지역을 제외한 안주시 전 지역, 문덕군, 박천군 청산리와 영변군 연화리와 서화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平安道의 이름 중 ‘平’자는 평양에서, ‘安’자는 바로 이 고을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이름난 고을이며, 의주대로 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안주목 지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하천의 유로는 《해동지도》도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렸지만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동서를 남북보다 훨씬 길게 그렸지만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이렇게 된 이유는 본 지도가 세로로 긴 사각형의 종이에 맞게 고을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고을의 실제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긴 형태를 이루고 있어 《해동지도》가 본 지도보다 더 사실에 가깝다. 동서와 남북의 길이에 대한 차이 때문에 하천의 유로에 대한 표현이 많이 달라졌다. 읍치 위쪽의 청천강은 《해동지도》에는 실제처럼 거의 西流하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본 지도는 마치 서류하다가 南流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오른쪽 위에 順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실제로는 고을의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이 하천의 위치가 실제와 유사한 위치에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동북쪽에 있는 것처럼 잘못 표현되어 있다. 왼쪽 아래의 老江鎭 역시 《해동지도》에는 실제와 가깝게 읍치의 서남 방향에 있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남쪽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의 모습을 보면,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의 경우 평안도 병마절도사영이 이 고을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兵營과 기타 건물이 총 6개 그려져 있으나,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倉을 비롯한 총 11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 모습은 《광여도》와 비슷하나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山亭을 포함하여 총 1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본 지도에 비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양윤정)

  • 안주목 주기 (安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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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安州牧〉으로, 북한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천강 이북지역을 제외한 안주시 전 지역, 문덕군, 박천군 청산리와 영변군 연화리와 서화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平安道의 이름 중 ‘平’자는 평양에서, ‘安’자는 바로 이 고을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이름난 고을이며, 의주대로 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 양덕현 (陽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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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陽德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양덕군과 신양군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 초부터 여진과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성격의 陽岩鎭, 樹德鎭으로 존재하였다. 이후 국경선이 훨씬 북쪽으로 올라감에 따라 조선 태조 때 두 진을 합하여 세운 고을이다. 지도에도 읍치 왼쪽에 樹德城이, 오른쪽 고읍면에 陽岩城이 표시되어 있어 고을의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양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양덕현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吳江面에서 발원하여 왼쪽 成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비류강 최상류이다. 읍치 방향에서 비류강에 합류되는 하천은 현재 평원천이라 불리고 있다. 오른쪽의 溫井面 지역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 최상류이다. 3개 하천의 길이와 유역 면적은 실제로는 거의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의 내용만으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읍치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흐르는 평원천 유역의 면적이 넓어지고, 상대적으로 다른 두 하천 유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니면서 동서가 남북보다 긴 양덕현의 모습을 세로(남북)가 긴 사각형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평원천 유역의 동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매우 작게 그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본 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 표시된 정보의 양이 늘어났으며, 아울러 읍치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읍치 모습이 거의 비슷하기는 하나,  客舍와 鄕校 부분에 건물이 본 지도에 2개 더 그려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보다는 《여지도》와 더 비슷하나, 倉을 邑倉으로 표시하고 있다. (양윤정)

  • 양덕현 주기 (陽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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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陽德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양덕군과 신양군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 초부터 여진과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성격의 陽岩鎭, 樹德鎭으로 존재하였다. 이후 국경선이 훨씬 북쪽으로 올라감에 따라 조선 태조 때 두 진을 합하여 세운 고을이다. 지도에도 읍치 왼쪽에 樹德城이, 오른쪽 고읍면에 陽岩城이 표시되어 있어 고을의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양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양덕현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吳江面에서 발원하여 왼쪽 成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비류강 최상류이다. 읍치 방향에서 비류강에 합류되는 하천은 현재 평원천이라 불리고 있다. 오른쪽의 溫井面 지역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 최상류이다. 3개 하천의 길이와 유역 면적은 실제로는 거의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의 내용만으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읍치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흐르는 평원천 유역의 면적이 넓어지고, 상대적으로 다른 두 하천 유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니면서 동서가 남북보다 긴 양덕현의 모습을 세로(남북)가 긴 사각형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평원천 유역의 동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매우 작게 그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본 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 표시된 정보의 양이 늘어났으며, 아울러 읍치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읍치 모습이 거의 비슷하기는 하나,  客舍와 鄕校 부분에 건물이 본 지도에 2개 더 그려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보다는 《여지도》와 더 비슷하나, 倉을 邑倉으로 표시하고 있다. (양윤정)

  • 영변부 (寧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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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邊府〉 지도로, 지금은 평안북도 영변군, 구장군, 향산군 일대이다. 영변부는 1429년(세종 11)에 연산과 무산을 합쳐 藥山城에 읍치를 두고都節制使의 本營을 만든 것으로, 지도에도 아래쪽에 延山面, 왼쪽에 撫山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변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하천의 유로는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변부 지도와 비슷하다. 특히  鐵甕山城 부분의 험준한 지형을 강조한 모습 역시 두 지도가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다. 《광여도》 역시 남문 부분은 다소 간단하게 그리고 있으나 그 외의 부분에서 산의 험준함을 느낄 수 있으며, 지형을 이용한 성곽의 축조 모습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상당히 간단하게 그려졌다. 성곽 안의 물줄기가 밖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水口로 표시되어 있을 뿐 정확히 그려져 있지 않다. 이 점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비슷한데, 《해동지도》에는 水口를 통해 흘러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성 안과 왼쪽의 天水鎭에 표현된 건물 역시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가 훨씬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청천강 본류이며,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구룡강이다. 그런데 청천강의 표현에서 큰 실수가 발견된다. 청천강은 위쪽의 熙川界에서 흘러옴에도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구룡강 역시 雲山界에서 흘러 들어오지만 하천 끝을 얇게 하여 마치 최상류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그려져 있다.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청천강과 구룡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2개의 실선으로 그리는 것을 통해 볼 때 두 하천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부분은 본 지도를 비롯한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변부의 실제 모습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게 뻗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양윤정)

  • 영변부 주기 (寧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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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邊府〉 지도로, 지금은 평안북도 영변군, 구장군, 향산군 일대이다. 영변부는 1429년(세종 11)에 연산과 무산을 합쳐 藥山城에 읍치를 두고都節制使의 本營을 만든 것으로, 지도에도 아래쪽에 延山面, 왼쪽에 撫山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변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하천의 유로는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변부 지도와 비슷하다. 특히  鐵甕山城 부분의 험준한 지형을 강조한 모습 역시 두 지도가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다. 《광여도》 역시 남문 부분은 다소 간단하게 그리고 있으나 그 외의 부분에서 산의 험준함을 느낄 수 있으며, 지형을 이용한 성곽의 축조 모습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상당히 간단하게 그려졌다. 성곽 안의 물줄기가 밖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水口로 표시되어 있을 뿐 정확히 그려져 있지 않다. 이 점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비슷한데, 《해동지도》에는 水口를 통해 흘러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성 안과 왼쪽의 天水鎭에 표현된 건물 역시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가 훨씬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청천강 본류이며,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구룡강이다. 그런데 청천강의 표현에서 큰 실수가 발견된다. 청천강은 위쪽의 熙川界에서 흘러옴에도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구룡강 역시 雲山界에서 흘러 들어오지만 하천 끝을 얇게 하여 마치 최상류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그려져 있다.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청천강과 구룡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2개의 실선으로 그리는 것을 통해 볼 때 두 하천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부분은 본 지도를 비롯한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변부의 실제 모습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게 뻗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양윤정)

  • 영원군 (寧遠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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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遠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녕원군과 대흥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지도의 상단 부분의 방위 차이로 지도의 모습이 달라 보이기도 한다. 본 지도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해동지도》가 동서를 남북보다 1.5배 정도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약간 길게 그렸다. 북쪽을 위로 하면서 세로로 약간 긴 종이 위에 영원군의 영역을 다 담으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영원군의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더 길기 때문에 사실 본 지도보다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 나오는 대부분의 지명은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지만 읍치에는 건물과 그 명칭이 《해동지도》보다 더 많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더 많아진 정보와 작아진 종이 크기를 고려하여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오른쪽 위(동북)에서 발원하여 왼쪽 아래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읍치를 확대하였기 때문에 읍치 부근의 대동강 지류가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영원군 주기 (寧遠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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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遠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녕원군과 대흥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지도의 상단 부분의 방위 차이로 지도의 모습이 달라 보이기도 한다. 본 지도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해동지도》가 동서를 남북보다 1.5배 정도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약간 길게 그렸다. 북쪽을 위로 하면서 세로로 약간 긴 종이 위에 영원군의 영역을 다 담으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영원군의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더 길기 때문에 사실 본 지도보다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 나오는 대부분의 지명은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지만 읍치에는 건물과 그 명칭이 《해동지도》보다 더 많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더 많아진 정보와 작아진 종이 크기를 고려하여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오른쪽 위(동북)에서 발원하여 왼쪽 아래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읍치를 확대하였기 때문에 읍치 부근의 대동강 지류가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영유현 (永柔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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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永柔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유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유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몇 군데 잘못된 것이 보인다. 왼쪽 아래의 盆湖는 盆浦를, 蓮花面은 蓮下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광여도》에서는 전자는 교정되지 않았지만 후자는 교정되어 본 지도와 같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표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차이점이 보인다. 읍치에서 흘러나가는 하천 중 紫華山 아래쪽에 표시된 것은  《해동지도》에는 그 위쪽에 그려져 있다. 이 부분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아래쪽의 德池筒에 2개의 섬이 하천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한 것도 《해동지도》의 내용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德池筒은 둘레가 5萬尺을 넘는 저수지였는데, 1731년(영조 7)에 모두 메워 논으로 만들었다. 德池 안에 있는 鎭舍·鎭廳은 德池鎭을 의미하며 1748년(영조 23)에 폐지되었다.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읍치 지역을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였다. 아래쪽(서)에 면이 밀집되어 있는 것처럼 그려진 것은 동쪽(위)에 있는 읍치 지역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영유현의 전체적인 모습은 동쪽의 남북 폭이 좁고, 서쪽은 넓다. (양윤정)

  • 영유현 주기 (永柔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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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永柔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유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유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몇 군데 잘못된 것이 보인다. 왼쪽 아래의 盆湖는 盆浦를, 蓮花面은 蓮下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광여도》에서는 전자는 교정되지 않았지만 후자는 교정되어 본 지도와 같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표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차이점이 보인다. 읍치에서 흘러나가는 하천 중 紫華山 아래쪽에 표시된 것은  《해동지도》에는 그 위쪽에 그려져 있다. 이 부분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아래쪽의 德池筒에 2개의 섬이 하천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한 것도 《해동지도》의 내용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德池筒은 둘레가 5萬尺을 넘는 저수지였는데, 1731년(영조 7)에 모두 메워 논으로 만들었다. 德池 안에 있는 鎭舍·鎭廳은 德池鎭을 의미하며 1748년(영조 23)에 폐지되었다.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읍치 지역을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였다. 아래쪽(서)에 면이 밀집되어 있는 것처럼 그려진 것은 동쪽(위)에 있는 읍치 지역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영유현의 전체적인 모습은 동쪽의 남북 폭이 좁고, 서쪽은 넓다. (양윤정)

  • 용강현 (龍岡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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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岡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남동쪽과 평안남도 온천군 북쪽 일대지역이다. 고을의 실제 모습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지만 직사각형의 지면에 그리기 위해 약간 왜곡되어 있다. 이런 모습을 비롯하여 본 지도의 전체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강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 부분을 제외하면 본 지도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해동지도》와 일치한다.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의 모습만 보이고 있으나,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鄕廳을 잘못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이와 같은 부분이 몇 군데 보인다. 《여지도》의 오른쪽에 표시된 月連也面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月連池面으로 되어 있으며, 주기를 근거로 《여지도》가 잘못 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는 본 지도보다 상대적으로 세로가 가로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책처럼 세로가 약간 긴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세로 부분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길어짐에 따라 하천의 길이 표현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는 대략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남쪽(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길이가 《해동지도》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반면에 동쪽(아래)으로 흐르는 하천은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져 있다. 왼쪽의 三和界로 연결되는 육지도 본 지도에는 폭이 좁게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상대적으로 넓게 그려져 있다. 이것 역시 세로의 폭이 좁아지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용강현의 실제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지도 위쪽 지도명 바로 옆에 표시되어 있는 오석산은 일명 황룡산이다. 이 산은 예로부터 八奇八景으로 이름난 산으로, 산록에는 당나라 태종이 친히 치려다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황룡산성이 그려져 있다. 황룡산성 안에 있는 影殿은 1721년(경종 1)에 세워지고, 1725년(영조 1)에 사액받은 箕子影殿이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書院은 鰲山書院으로 1664년(현종 5)에 세워지고, 1701년(숙종 27)에 사액을 받았다. (양윤정)

  • 용강현 주기 (龍岡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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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岡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남동쪽과 평안남도 온천군 북쪽 일대지역이다. 고을의 실제 모습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지만 직사각형의 지면에 그리기 위해 약간 왜곡되어 있다. 이런 모습을 비롯하여 본 지도의 전체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강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 부분을 제외하면 본 지도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해동지도》와 일치한다.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의 모습만 보이고 있으나,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鄕廳을 잘못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이와 같은 부분이 몇 군데 보인다. 《여지도》의 오른쪽에 표시된 月連也面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月連池面으로 되어 있으며, 주기를 근거로 《여지도》가 잘못 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는 본 지도보다 상대적으로 세로가 가로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책처럼 세로가 약간 긴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세로 부분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길어짐에 따라 하천의 길이 표현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는 대략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남쪽(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길이가 《해동지도》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반면에 동쪽(아래)으로 흐르는 하천은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져 있다. 왼쪽의 三和界로 연결되는 육지도 본 지도에는 폭이 좁게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상대적으로 넓게 그려져 있다. 이것 역시 세로의 폭이 좁아지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용강현의 실제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지도 위쪽 지도명 바로 옆에 표시되어 있는 오석산은 일명 황룡산이다. 이 산은 예로부터 八奇八景으로 이름난 산으로, 산록에는 당나라 태종이 친히 치려다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황룡산성이 그려져 있다. 황룡산성 안에 있는 影殿은 1721년(경종 1)에 세워지고, 1725년(영조 1)에 사액받은 箕子影殿이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書院은 鰲山書院으로 1664년(현종 5)에 세워지고, 1701년(숙종 27)에 사액을 받았다. (양윤정)

  • 용천부 (龍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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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川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용천군 남부 지역, 염주군 동부 지역, 피현군 서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형태에서부터 어느 정도의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보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더 길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세로가 짧아진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읍치와 龍骨山城, 위쪽의 良策站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읍치와 良策站 등에 《해동지도》에 없는 정보가 추가되었고, 상대적으로 훨씬 작은 종이 위에 많은 정보를 수록하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특이한 점은 각 성문 밖 지형의 험준함과 높낮이를 기록한 것이며, 지도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을 통해서도 성 주변이 험준함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본 지도보다 회화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해동지도》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덜 나타나며, 《여지도》의 경우에는 주기 부분이 없으면 산지의 모습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 읍치의 북쪽에는 淸北討捕營이 위치하고 있다. 군사 관련 시설인 官廳, 客舍와 軍倉인 倉과 巡營庫, 기타 淸心堂과 聽流堂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 동남쪽에 있는 용골산성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성 안에는 3개의 샘, 將臺,봉수대가 있다고 한다. 용골산성 아래는  "龍骨山脈 而下 今若植木脫有緩急 庶可得力云"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즉, 구불구불 이어져 내려간 줄기를 따라 나무를 심어 놓을 경우 유사시 지역 방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 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으로 보면 大東地志에 기록된 내용을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고을의 모습은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의 종이에 그려도 왜곡되지 않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아래쪽의 바다에 있는 섬들은 크기나 거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薪島를 제외하면 나머지 섬들의 크기나 거리가 실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거리가 고려되지 않은 이유는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렸기 때문이다. 크기가 반영되지 않은 이유는 지도 제작 당시에 섬의 크기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리지에 섬의 크기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용천부 주기 (龍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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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川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용천군 남부 지역, 염주군 동부 지역, 피현군 서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형태에서부터 어느 정도의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보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더 길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세로가 짧아진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읍치와 龍骨山城, 위쪽의 良策站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읍치와 良策站 등에 《해동지도》에 없는 정보가 추가되었고, 상대적으로 훨씬 작은 종이 위에 많은 정보를 수록하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특이한 점은 각 성문 밖 지형의 험준함과 높낮이를 기록한 것이며, 지도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을 통해서도 성 주변이 험준함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본 지도보다 회화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해동지도》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덜 나타나며, 《여지도》의 경우에는 주기 부분이 없으면 산지의 모습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 읍치의 북쪽에는 淸北討捕營이 위치하고 있다. 군사 관련 시설인 官廳, 客舍와 軍倉인 倉과 巡營庫, 기타 淸心堂과 聽流堂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 동남쪽에 있는 용골산성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성 안에는 3개의 샘, 將臺,봉수대가 있다고 한다. 용골산성 아래는  "龍骨山脈 而下 今若植木脫有緩急 庶可得力云"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즉, 구불구불 이어져 내려간 줄기를 따라 나무를 심어 놓을 경우 유사시 지역 방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 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으로 보면 大東地志에 기록된 내용을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고을의 모습은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의 종이에 그려도 왜곡되지 않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아래쪽의 바다에 있는 섬들은 크기나 거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薪島를 제외하면 나머지 섬들의 크기나 거리가 실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거리가 고려되지 않은 이유는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렸기 때문이다. 크기가 반영되지 않은 이유는 지도 제작 당시에 섬의 크기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리지에 섬의 크기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운산군 (雲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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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雲山郡〉으로, 지금도 평안북도 운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운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운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읍치와 委曲鎭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의 건물 수가 훨씬 많음을 한눈에도 구별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衙舍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倉이 표시되어 있고,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委曲鎭에도 《해동지도》에는 없는 鎭舍이 표시되어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위곡진 오른쪽에는 발음이 같은 면의 명칭이 委谷面과 委曲面으로 적혀 있다. 이는 委曲面과 委曲江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고, 《광여도》에는 委谷面 자리에 委曲面을, 委曲面 자리에 古延州面을 적어 넣었다. 고연주면의 경우 그 오른쪽에 구연주창이 있기 때문에 바꾸어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비슷하게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운산군 주기 (雲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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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雲山郡〉으로, 지금도 평안북도 운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운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운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읍치와 委曲鎭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의 건물 수가 훨씬 많음을 한눈에도 구별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衙舍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倉이 표시되어 있고,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委曲鎭에도 《해동지도》에는 없는 鎭舍이 표시되어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위곡진 오른쪽에는 발음이 같은 면의 명칭이 委谷面과 委曲面으로 적혀 있다. 이는 委曲面과 委曲江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고, 《광여도》에는 委谷面 자리에 委曲面을, 委曲面 자리에 古延州面을 적어 넣었다. 고연주면의 경우 그 오른쪽에 구연주창이 있기 때문에 바꾸어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비슷하게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위원군 (渭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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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渭原郡〉으로, 지금의 자강도 위원군 일대이다. 원래는 都乙漢堡였는데 다른 곳과 격리되어 있어 갑작스런 침입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443년(세종 25)에 理山(후에 楚山)과 江界의 땅을 나누어 새로 설치한 고을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위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위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 보다 읍치의 건물수와 명칭이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해동지도》와 거의 일치하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하천이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독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압록강과 그 지류인 독로강이 직접 연결되어 있어 본류와 지류의 구분을 어렵게 하였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에는 압록강이 왼쪽(동북)에서 흘러들어오며, 독로강이 합류되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의 경우 《여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광여도》 역시 압록강 본류와 지류인 독로강을 구별할 수 있도록 교정되어 있다. 산지 표현을 비롯하여 지도의 전체적 표현 방식은 회화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으나, 위원군 전체의 모습이나 하천의 유로 등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위원군의 실제 모습 자체가 동남-서북 방향으로 그리면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양윤정)

  • 위원군 주기 (渭原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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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渭原郡〉으로, 지금의 자강도 위원군 일대이다. 원래는 都乙漢堡였는데 다른 곳과 격리되어 있어 갑작스런 침입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443년(세종 25)에 理山(후에 楚山)과 江界의 땅을 나누어 새로 설치한 고을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위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위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 보다 읍치의 건물수와 명칭이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해동지도》와 거의 일치하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하천이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독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압록강과 그 지류인 독로강이 직접 연결되어 있어 본류와 지류의 구분을 어렵게 하였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에는 압록강이 왼쪽(동북)에서 흘러들어오며, 독로강이 합류되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의 경우 《여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광여도》 역시 압록강 본류와 지류인 독로강을 구별할 수 있도록 교정되어 있다. 산지 표현을 비롯하여 지도의 전체적 표현 방식은 회화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으나, 위원군 전체의 모습이나 하천의 유로 등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위원군의 실제 모습 자체가 동남-서북 방향으로 그리면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양윤정)

  • 은산현 (殷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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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殷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시 동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은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은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위의 天聖山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비해 길고, 좀더 서남쪽으로 기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와는 하천의 일부분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順川界에서 들어와 왼쪽을 휘감고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그런데 《여지도》에서는 順川界 부분이 대동강의 발원지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의 順川界에서 읍치 방향으로 현재의 장선강이 흘러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이 부분을 아예 생략하여 위쪽의 천성산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왼쪽 위에는 价川界에는 왼쪽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흘러들어오는 하천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이 하천이 없으며, 따라서 無盡臺의 위치도 차이가 있다. 《광여도》의 경우본류와 지류를 거의 같은 굵기로 그리고 있으나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며, 《해동지도》 역시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따라서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고,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다른 자료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나타난 지명의 경우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므로 본 지도와의 관계도 무시할 수 는 없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만 나타는 지명이 있는데, 바로 지도 아래쪽의 阿灘窟이다. 《해동지도》에는 집 모양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崇化山 석벽에 있는 굴로서 굴 안에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은산현 주기 (殷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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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殷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시 동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은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은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위의 天聖山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비해 길고, 좀더 서남쪽으로 기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와는 하천의 일부분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順川界에서 들어와 왼쪽을 휘감고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그런데 《여지도》에서는 順川界 부분이 대동강의 발원지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의 順川界에서 읍치 방향으로 현재의 장선강이 흘러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이 부분을 아예 생략하여 위쪽의 천성산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왼쪽 위에는 价川界에는 왼쪽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흘러들어오는 하천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이 하천이 없으며, 따라서 無盡臺의 위치도 차이가 있다. 《광여도》의 경우본류와 지류를 거의 같은 굵기로 그리고 있으나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며, 《해동지도》 역시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따라서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고,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다른 자료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나타난 지명의 경우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므로 본 지도와의 관계도 무시할 수 는 없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만 나타는 지명이 있는데, 바로 지도 아래쪽의 阿灘窟이다. 《해동지도》에는 집 모양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崇化山 석벽에 있는 굴로서 굴 안에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의주부 (義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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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義州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의주군, 피현군, 천마군 서북쪽, 삭주군 청수 서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규장각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의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이들은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의주부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을 훨씬 길게 그렸지만 본 지도에서는 남북과 동서를 비슷하게 그렸다. 하천의 유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광여도》와 《여지도》보다 《해동지도》가 地誌 부분에 충실하게 표시하고 있으며, 본 지도의 겨우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於骨山은 松骨山을, 獜川鎭은 獜山鎭을 잘못 옮긴 것이며, 이런 지명은 이외에도 많다. 《광여도》에서는 본 지도에서 잘못 옮긴 것을 상당히 교정해 놓았다. 본 지도의 경우 獜山鎭은 《광여도》와 같이 표기하고 있으나, 松骨山의 경우에는 산은 그려져 있으나, 지명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 비해 정보가 추가된 곳은 읍치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건물수가 4개 였으나, 본 지도에서는 7개로 늘어났고, 鄕社堂, 凝香堂이란 지명이 추가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더 크게 묘사하였으며, 鄕社堂이 鄕射堂으로 바뀌어 있다.(양윤정)

  • 의주부 주기 (義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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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義州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의주군, 피현군, 천마군 서북쪽, 삭주군 청수 서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규장각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의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이들은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의주부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을 훨씬 길게 그렸지만 본 지도에서는 남북과 동서를 비슷하게 그렸다. 하천의 유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광여도》와 《여지도》보다 《해동지도》가 地誌 부분에 충실하게 표시하고 있으며, 본 지도의 겨우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於骨山은 松骨山을, 獜川鎭은 獜山鎭을 잘못 옮긴 것이며, 이런 지명은 이외에도 많다. 《광여도》에서는 본 지도에서 잘못 옮긴 것을 상당히 교정해 놓았다. 본 지도의 경우 獜山鎭은 《광여도》와 같이 표기하고 있으나, 松骨山의 경우에는 산은 그려져 있으나, 지명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 비해 정보가 추가된 곳은 읍치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건물수가 4개 였으나, 본 지도에서는 7개로 늘어났고, 鄕社堂, 凝香堂이란 지명이 추가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더 크게 묘사하였으며, 鄕社堂이 鄕射堂으로 바뀌어 있다.(양윤정)

  • 자산부 (慈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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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慈山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평성시 대부분 지역, 순천시 서쪽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자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눈에도 알아 볼 수 있는 차이점이 있다. 본 지도는 북쪽이 지도의 상단이지만,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보다 동서를 길게 그렸고, 본 지도는 반대로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이에 따라 《해동지도》에 동서로 길게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지게 되었다. 자산부의 실제 모습은 본 지도처럼 남북이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자세해졌으나, 慈母城의 경우에는 《해동지도》의 모습이 산세를 더 자세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慈母城 의 모습을 매우 간략하게 그리고 있으며, 성곽에 요철 모양도 그리고 있지 않다. 자모산성 안에는 別將所, 將臺, 軍器庫 등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고, 또한 순천창, 순안창, 성천창, 자산 동창 등읍창 등이 위치하였다. 그 남쪽 牛馬城에도 營南倉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성안의 건물 역시 본 지도에는 1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여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성 안의 작은 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성안에 많은 우물을 표현한 것으로 성 안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양윤정)

  • 자산부 주기 (慈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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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慈山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평성시 대부분 지역, 순천시 서쪽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자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눈에도 알아 볼 수 있는 차이점이 있다. 본 지도는 북쪽이 지도의 상단이지만,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보다 동서를 길게 그렸고, 본 지도는 반대로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이에 따라 《해동지도》에 동서로 길게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지게 되었다. 자산부의 실제 모습은 본 지도처럼 남북이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자세해졌으나, 慈母城의 경우에는 《해동지도》의 모습이 산세를 더 자세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慈母城 의 모습을 매우 간략하게 그리고 있으며, 성곽에 요철 모양도 그리고 있지 않다. 자모산성 안에는 別將所, 將臺, 軍器庫 등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고, 또한 순천창, 순안창, 성천창, 자산 동창 등읍창 등이 위치하였다. 그 남쪽 牛馬城에도 營南倉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성안의 건물 역시 본 지도에는 1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여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성 안의 작은 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성안에 많은 우물을 표현한 것으로 성 안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양윤정)

  • 정주목 (定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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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定州牧〉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정주군 전체, 곽산군 당상리 일부, 운전군 장수탄 이남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정주목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이들은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가 비슷한 《해동지도》의 정주목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에는 읍치가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읍치가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그려졌다. 읍치로부터 서쪽(왼쪽)까지의 거리는 동쪽(오른쪽)까지의 거리에 비해 4분의 1정도밖에 안되는데,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그려진 동쪽 부분에는 面이 조밀하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오른쪽에 長水灘이라고 적혀 있는 하천은 실제로는 嘉山과의 경계선 역할을 하였다. 본 지도에도 嘉山界를 하천 옆에 적어놓아 이런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경계선 밖의 부분에도 산줄기를 그려 넣어 실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부분까지도 《광여도》와 《여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안의 모습은 본 지도와 《광여도》는 매우 유사하나 《여지도》의 경우 산맥이 거의 생략되어 있으며 하천의 경우에도 부분적으로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광여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건물이 보이며, 松相堂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양윤정)

  • 정주목 주기 (定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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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定州牧〉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정주군 전체, 곽산군 당상리 일부, 운전군 장수탄 이남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정주목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이들은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가 비슷한 《해동지도》의 정주목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에는 읍치가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읍치가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그려졌다. 읍치로부터 서쪽(왼쪽)까지의 거리는 동쪽(오른쪽)까지의 거리에 비해 4분의 1정도밖에 안되는데,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그려진 동쪽 부분에는 面이 조밀하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오른쪽에 長水灘이라고 적혀 있는 하천은 실제로는 嘉山과의 경계선 역할을 하였다. 본 지도에도 嘉山界를 하천 옆에 적어놓아 이런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경계선 밖의 부분에도 산줄기를 그려 넣어 실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부분까지도 《광여도》와 《여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안의 모습은 본 지도와 《광여도》는 매우 유사하나 《여지도》의 경우 산맥이 거의 생략되어 있으며 하천의 경우에도 부분적으로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광여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건물이 보이며, 松相堂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양윤정)

  • 중화부 (中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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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中和府〉로, 현재의 평양특별시 강남군, 중화군, 상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중화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중화부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비교해서 몇 가지 차이점이 보인다. 우선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서쪽에 그려진 宣化堂 등을 포함해 총 6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총 1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客 ·衙 밑으로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鄕校와 鄕廳,訓鍊이 그려져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廳과 訓鍊이 客舍 주변에 그려져 있고 鄕校만이 독립되어 그려져 있다. 즉 그 사이에 산맥이 그려져 있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광여도》 역시 《여지도》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본 지도가 《광여도》, 《여지도》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아진 읍치의 정보를 표시하기 위해 읍치 지역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읍치 아래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로가 길게 그려졌다. 이에 따라 동쪽(위)에서 서쪽(아래)으로 길게 뻗은 고을의 실제 모습보다 심하게 왜곡되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하천에 대한 이해에서도 오해를 낳을 수 있게 하였다. 실제로는 하천이 위에서 아래로 즉, 西流하는 길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즉, 北流하는 길이보다 훨씬 길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쪽은 바다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대동강의 하류 부분이다. 다만 밀물 때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바다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 적혀 있는 海倉이란 지명이 그런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양윤정)

  • 중화부 주기 (中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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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中和府〉로, 현재의 평양특별시 강남군, 중화군, 상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중화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중화부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비교해서 몇 가지 차이점이 보인다. 우선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서쪽에 그려진 宣化堂 등을 포함해 총 6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총 1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客 ·衙 밑으로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鄕校와 鄕廳,訓鍊이 그려져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廳과 訓鍊이 客舍 주변에 그려져 있고 鄕校만이 독립되어 그려져 있다. 즉 그 사이에 산맥이 그려져 있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광여도》 역시 《여지도》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본 지도가 《광여도》, 《여지도》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아진 읍치의 정보를 표시하기 위해 읍치 지역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읍치 아래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로가 길게 그려졌다. 이에 따라 동쪽(위)에서 서쪽(아래)으로 길게 뻗은 고을의 실제 모습보다 심하게 왜곡되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하천에 대한 이해에서도 오해를 낳을 수 있게 하였다. 실제로는 하천이 위에서 아래로 즉, 西流하는 길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즉, 北流하는 길이보다 훨씬 길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쪽은 바다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대동강의 하류 부분이다. 다만 밀물 때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바다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 적혀 있는 海倉이란 지명이 그런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양윤정)

  • 증산현 (甑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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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甑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북쪽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원래 江西縣의 甑山鄕이었으며, 1394년(태조 3)에 縣으로 승격되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증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증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지명이 《해동지도》에 나오는 것이지만 왼쪽의 車踰嶺과 兎山烽은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여지도》와 《광여도》에도 이 지명들이 나오는데, 兎山烽이 兎山烟臺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는 鄕校, 客舍, 衙舍가 매우 간단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보이지 않던 倉과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총 11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을 전체의 세로(남북) 역시 더 길게 표현되었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지나는 하천의 모습이 달라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南流하다가 西流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거의 西南流하는 모양으로 바뀌어 있다. (양윤정)

  • 증산현 주기 (甑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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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甑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북쪽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원래 江西縣의 甑山鄕이었으며, 1394년(태조 3)에 縣으로 승격되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증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증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지명이 《해동지도》에 나오는 것이지만 왼쪽의 車踰嶺과 兎山烽은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여지도》와 《광여도》에도 이 지명들이 나오는데, 兎山烽이 兎山烟臺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는 鄕校, 客舍, 衙舍가 매우 간단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보이지 않던 倉과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총 11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을 전체의 세로(남북) 역시 더 길게 표현되었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지나는 하천의 모습이 달라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南流하다가 西流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거의 西南流하는 모양으로 바뀌어 있다. (양윤정)

  • 창성부 (昌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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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昌城府〉로,‘창성’이라는 명칭은 1402년(태종 2) 昌州와 泥城을 합친 것에 유래하였다. 창성부는 압록강 수계와 대정강 수계 양쪽에 걸쳐 있다. 본래 창성부는 대정강 유역에 위치하였다가 압록강 유역으로 영토가 확대되면서 읍치를 옮겼기 때문에 그 흔적이 행정구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안북도 창성군, 會上里를 제외한 동창군 전 지역, 삭주군 일부, 벽동군 송연리, 태천군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창성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물론 《해동지도》와는 형식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본 지도의 경우 남동쪽을 지도 상단에 그리고 있다. 위쪽은 대령강의 지류인 창성강 유역이고, 아래쪽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압록강 유역이다.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는 세로가 축소되었고, 특히 창성강 유역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두 유역을 가로지르는 산줄기 위에 《해동지도》에는 3개의 關門城이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大防墻岺 1곳에만 그려져 있다.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小防墻岺 1곳만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지명은 모두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부분을 피해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이 임의로 생략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성의 모습 역시 《해동지도》에서는 지형을 이용해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일부분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비하면 그런 모습을 지도를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생략되어 마치 산 안에 읍치가 위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양윤정)

  • 창성부 주기 (昌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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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昌城府〉로,‘창성’이라는 명칭은 1402년(태종 2) 昌州와 泥城을 합친 것에 유래하였다. 창성부는 압록강 수계와 대정강 수계 양쪽에 걸쳐 있다. 본래 창성부는 대정강 유역에 위치하였다가 압록강 유역으로 영토가 확대되면서 읍치를 옮겼기 때문에 그 흔적이 행정구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안북도 창성군, 會上里를 제외한 동창군 전 지역, 삭주군 일부, 벽동군 송연리, 태천군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창성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물론 《해동지도》와는 형식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본 지도의 경우 남동쪽을 지도 상단에 그리고 있다. 위쪽은 대령강의 지류인 창성강 유역이고, 아래쪽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압록강 유역이다.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는 세로가 축소되었고, 특히 창성강 유역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두 유역을 가로지르는 산줄기 위에 《해동지도》에는 3개의 關門城이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大防墻岺 1곳에만 그려져 있다.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小防墻岺 1곳만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지명은 모두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부분을 피해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이 임의로 생략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성의 모습 역시 《해동지도》에서는 지형을 이용해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일부분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비하면 그런 모습을 지도를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생략되어 마치 산 안에 읍치가 위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양윤정)

  • 철산부 (鐵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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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鐵山府〉로,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 전부와 동림군 서부, 염주군 동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철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철산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와 車輦舘에 그려진 건물의 수가 훨씬 증가하였고,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세로(남북)의 길이가 동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아졌다. 이런 이유로 《해동지도》에는 읍치에서 해안까지의 거리가 위쪽 義州界까지보다 멀게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이외의 정보는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해동지도》에 나오는 정보 중 본 지도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있으며, 약간 바뀌어 표현된 것도 있다. 바뀐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읍치 아래쪽에 土城이라 적혀 있는 곳부터 天荒山까지 그려져 있는 하천이다. 《해동지도》에는 이것이 하천이 아니라 土城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토성을 하천으로 인식했기 때문에《해동지도》에 下惠面으로부터 아래쪽으로 이어져 있던 산줄기 역시 끊어져 있다. 이 부분은 《해동지도》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본 지도와 같이 하천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섬의 경우 그 모양이나 위치가 정확하지는 못하다. 본 지도의 경우 섬을 크게 그려 다른 지도들에 비해 그 거리가 더 좁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철산부 주기 (鐵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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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鐵山府〉로,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 전부와 동림군 서부, 염주군 동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철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철산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와 車輦舘에 그려진 건물의 수가 훨씬 증가하였고,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세로(남북)의 길이가 동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아졌다. 이런 이유로 《해동지도》에는 읍치에서 해안까지의 거리가 위쪽 義州界까지보다 멀게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이외의 정보는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해동지도》에 나오는 정보 중 본 지도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있으며, 약간 바뀌어 표현된 것도 있다. 바뀐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읍치 아래쪽에 土城이라 적혀 있는 곳부터 天荒山까지 그려져 있는 하천이다. 《해동지도》에는 이것이 하천이 아니라 土城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토성을 하천으로 인식했기 때문에《해동지도》에 下惠面으로부터 아래쪽으로 이어져 있던 산줄기 역시 끊어져 있다. 이 부분은 《해동지도》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본 지도와 같이 하천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섬의 경우 그 모양이나 위치가 정확하지는 못하다. 본 지도의 경우 섬을 크게 그려 다른 지도들에 비해 그 거리가 더 좁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초산부 (楚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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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楚山府〉로, 지금의 자강도 초산군, 고풍군, 송원군 일대의 지역이다. 고려말까지는 여진족이 거주하던 豆木里였다고 하며, 공민왕 때부터 사람들이 점차 불어나 1401년(태종 2)에 새롭게 고을을 설치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이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이산부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理山은 1724년(경종 4)에 郡에서 府로 승격된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의 명칭은 이산부로 되어 있어 내용적으로 1724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광여도》에는 이산군으로 되어 있어 고을 명칭만으로는 1724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본 지도의 경우 지도명이 초산부로 되어 있는데, 理山이 楚山으로 바뀐 것은 1776년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필체를 보면 지도내의 필체와는 차이가 있으며, 도곽선의 모습에 있어서도 지도의 명칭만을 따로 표기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도는 《해동지도》 및 《여지도》와 《광여도》와 마찬가지로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아래쪽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압록강이다. 위쪽(남)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충만강이다. 본 지도의 상단의 車岺鎭 오른쪽에 표기된 車嶺面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나타나 있으나,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 中江倉의 경우 본 지도에는 2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나, 《해동지도》에는 건물 하나가 그려져 있으며, 초산부까지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와 《광여도》의 오른쪽 아래에 적혀 있는 東寧府와 元刺山城에 대한 설명은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읍치의 모습을 보면 사실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쉽게 찾기가 힘들다. 건물도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1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理山府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客舍, 衙舍, 鄕校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본 지도의 경우 《여지도》와 《광여도》와는 상대적으로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어 쉽게 읍치를 찾을 수 있는데,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없었던 倉과 訓練까지 표시되어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양윤정)

  • 초산부 주기 (楚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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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楚山府〉로, 지금의 자강도 초산군, 고풍군, 송원군 일대의 지역이다. 고려말까지는 여진족이 거주하던 豆木里였다고 하며, 공민왕 때부터 사람들이 점차 불어나 1401년(태종 2)에 새롭게 고을을 설치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이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이산부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理山은 1724년(경종 4)에 郡에서 府로 승격된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의 명칭은 이산부로 되어 있어 내용적으로 1724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광여도》에는 이산군으로 되어 있어 고을 명칭만으로는 1724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본 지도의 경우 지도명이 초산부로 되어 있는데, 理山이 楚山으로 바뀐 것은 1776년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필체를 보면 지도내의 필체와는 차이가 있으며, 도곽선의 모습에 있어서도 지도의 명칭만을 따로 표기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도는 《해동지도》 및 《여지도》와 《광여도》와 마찬가지로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아래쪽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압록강이다. 위쪽(남)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충만강이다. 본 지도의 상단의 車岺鎭 오른쪽에 표기된 車嶺面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나타나 있으나,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 中江倉의 경우 본 지도에는 2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나, 《해동지도》에는 건물 하나가 그려져 있으며, 초산부까지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와 《광여도》의 오른쪽 아래에 적혀 있는 東寧府와 元刺山城에 대한 설명은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읍치의 모습을 보면 사실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쉽게 찾기가 힘들다. 건물도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1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理山府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客舍, 衙舍, 鄕校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본 지도의 경우 《여지도》와 《광여도》와는 상대적으로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어 쉽게 읍치를 찾을 수 있는데,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없었던 倉과 訓練까지 표시되어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양윤정)

  • 태천현 (泰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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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泰川縣〉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태천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태천현, 《여지도(古4790-58)》의 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태천현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泰川은 1895년에 郡으로 되기까지 조선 초기부터 계속 縣으로 존재했다. 따라서 《여지도》의 내제가 ‘태천군’으로 표기된 것은 필사 하는 과정에 실수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衙舍, 客舍, 鄕校만이 나오지만 본 지도에는 鄕廳과 訓練, 倉 등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외의 지역은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가 비록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되어 그려져 있지만 하천의 유로나 고을 전체의 모습이 상당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태천군 자체의 모습이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읍치 서북쪽에 보이는 籠五里山城은 고구려 때 於九라는 사람의 지도 아래 을해년에 축성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성벽은 길이 20km, 높이 3m이다. 성의 동쪽과 서쪽에는 누마루형 將臺가 있는데 둘레가 6m이며 작은 반월형을 이루었다. 《광여도》의 경우 요철 모양까지 그려 산성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여지도》의 경우에는 지명 없이는 산성으로 보기 힘들정도로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籠五里山城烽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에는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표시에서 오른쪽에 雲山界와 寧邊界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주기와 동일하게 본 지도상에도 다른 고을과의 경계 부분을 표시하고 있다. (양윤정)

  • 태천현 주기 (泰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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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泰川縣〉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태천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태천현, 《여지도(古4790-58)》의 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태천현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泰川은 1895년에 郡으로 되기까지 조선 초기부터 계속 縣으로 존재했다. 따라서 《여지도》의 내제가 ‘태천군’으로 표기된 것은 필사 하는 과정에 실수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衙舍, 客舍, 鄕校만이 나오지만 본 지도에는 鄕廳과 訓練, 倉 등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외의 지역은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가 비록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되어 그려져 있지만 하천의 유로나 고을 전체의 모습이 상당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태천군 자체의 모습이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읍치 서북쪽에 보이는 籠五里山城은 고구려 때 於九라는 사람의 지도 아래 을해년에 축성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성벽은 길이 20km, 높이 3m이다. 성의 동쪽과 서쪽에는 누마루형 將臺가 있는데 둘레가 6m이며 작은 반월형을 이루었다. 《광여도》의 경우 요철 모양까지 그려 산성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여지도》의 경우에는 지명 없이는 산성으로 보기 힘들정도로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籠五里山城烽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에는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표시에서 오른쪽에 雲山界와 寧邊界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주기와 동일하게 본 지도상에도 다른 고을과의 경계 부분을 표시하고 있다. (양윤정)

  • 평안도 (平安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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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도별도이다. 평안도는 지금의 평양특별시·남포직할시·평안남도·평안북도·랑림군을 제외한 자강도·량강도 김형직군에 해당한다. 平安道의 이름은 平壤과 安州를 합해서 만든 것으로, 평안도에는 총 42개의 고을이 있으며 지도에서는 원 안에 표시하였다. 기타 우예, 자성, 여연, 무창 등의 폐사군도 관장하였다. 관찰사 소재지인 監營은 평양에 있었으며 兵營은 안주에 있었다. 지도에서 직사각형 안에 표시된 것은 鎭堡로서 청나라와의 국경선에 해당하는 압록강변과 단종과 세조 때 四郡이 혁파된 후 최북단의 경계를 맡았던 강계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 또한 압록강을 넘은 적에 대한 1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던 지금의 강남산맥 아래·위쪽과 해안가에도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해안가 쪽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대대적으로 修築된 산성의 모습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어 청나라에 대한 위기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최고의 천연요새로 알려진 영변의 鐵甕城도 보이고 있다. 타원형의 노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평안도 북쪽으로는 압록강이, 가운데에는 청천강이, 대동강이 흐르고 있다. 서해에는 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크기는 고려하지 않았으며,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도록 그렸다.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평안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평안도 지도와도 전체적인 구도가 비슷하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청나라 땅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산줄기와 강줄기 및 마을 이름을 적어 놓았다.(양윤정)

  • 평안도 (平安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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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압록강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平安道〉 지도의 경우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으나, 본 지도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다. 즉 세로가 길기 때문에 압록강 주변의 정보를 자세히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 강줄기가 거의 일직선으로 그려지면서 왜곡된 부분이 많이 생기고 있다. 또한 가산 남쪽 부분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平安道〉 지도보다 많은 정보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산지 부분에 있어 〈平安道〉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峴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특히 〈平安道〉 지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압록강 이북지역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폐사군현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섬에 대한 정보는 〈평안도〉 지도와 마찬가지로 크기는 고려하지 않고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도록 그렸다.(양윤정)

  • 평안도 주기 (平安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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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도별도이다. 평안도는 지금의 평양특별시·남포직할시·평안남도·평안북도·랑림군을 제외한 자강도·량강도 김형직군에 해당한다. 平安道의 이름은 平壤과 安州를 합해서 만든 것으로, 평안도에는 총 42개의 고을이 있으며 지도에서는 원 안에 표시하였다. 기타 우예, 자성, 여연, 무창 등의 폐사군도 관장하였다. 관찰사 소재지인 監營은 평양에 있었으며 兵營은 안주에 있었다. 지도에서 직사각형 안에 표시된 것은 鎭堡로서 청나라와의 국경선에 해당하는 압록강변과 단종과 세조 때 四郡이 혁파된 후 최북단의 경계를 맡았던 강계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 또한 압록강을 넘은 적에 대한 1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던 지금의 강남산맥 아래·위쪽과 해안가에도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해안가 쪽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대대적으로 修築된 산성의 모습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어 청나라에 대한 위기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최고의 천연요새로 알려진 영변의 鐵甕城도 보이고 있다. 타원형의 노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평안도 북쪽으로는 압록강이, 가운데에는 청천강이, 대동강이 흐르고 있다. 서해에는 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크기는 고려하지 않았으며,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도록 그렸다.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평안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평안도 지도와도 전체적인 구도가 비슷하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청나라 땅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산줄기와 강줄기 및 마을 이름을 적어 놓았다.(양윤정)

  • 평안도 주기 (平安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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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압록강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平安道〉 지도의 경우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으나, 본 지도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다. 즉 세로가 길기 때문에 압록강 주변의 정보를 자세히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 강줄기가 거의 일직선으로 그려지면서 왜곡된 부분이 많이 생기고 있다. 또한 가산 남쪽 부분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平安道〉 지도보다 많은 정보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산지 부분에 있어 〈平安道〉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峴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특히 〈平安道〉 지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압록강 이북지역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폐사군현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섬에 대한 정보는 〈평안도〉 지도와 마찬가지로 크기는 고려하지 않고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도록 그렸다.(양윤정)

  • 평양윤 (平壤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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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 부분에 수록된 〈平壤尹〉으로, 현재의 평양특별시 부근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규장각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평양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다. 그리고 본 지도책에 수록되어 있는 평안도의 군현 지도 대부분이 《해동지도》와 유사한 반면에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평양부 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산지의 표현 양식과 색감부분도 다른 지도와는 다르다. 이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연관성 문제라기 보디는 후에 《해동지도》에 평양부 지도가 삽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여지도》와는 다소 차이점이 보인다. 《여지도》에서는 왼쪽 위에 西海와의 경계선이 하천과 동일한 선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 북한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증산군과 평원군 사이의 해안가로서 西海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이 맞다. 본 지도의 필사 시 그런 사실을 잘못 이해하여 해안선을 하천처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해안선이라고 인식했다면 대동강과 육지의 경계선처럼 진한 실선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본 지도와 《광여도》에서는 이 부분이 해안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런 부분을 볼 때 《광여도》와 본 지도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간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평양성에서도 여러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성곽 북쪽의 普通門은 글씨 왼쪽에 있는 것이고, 그 아래의 문은 七星門이다. 이 부분 역시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런 오류가 나타나지 않으며, 본 지도보다 훨씬 정교하고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에 보이는 內城은 본래 高麗 때 쌓은 성으로 1397년(태조 6)에 개축한 바 있었고, 그 후 1624년(인조 2)에 서남쪽을 줄이고, 개축하였다. 내성에는 대동문, 주작문(남문), 정해문, 칠성문, 장경문 등 5개의 성문과 대동문의 門樓인 相灝樓, 超然臺, 反求亭, 鍊光亭이 있다. 성안에는 上衙·二衙, 中營 建物, 武器庫와 倉庫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건물 모양이나 섬세함에 있어서는 본 지도가 《광여도》 보다 떨어지고 있다. 中城 남쪽에 위치한 것이 外城인데 이 곳에는 箕子井과 井田의 遺制가 남아 있다. 내성의 동쪽에 보이는 성은 北城인데, 1714년(숙종 40)에 監司 閔鎭遠이 쌓았다. 門樓인 浮碧樓와 乙密臺가 있고, 성 안에는 永明寺와 文武井 및 고구려 동명왕 설화와 관련 있는 麒麟窟이 있다. 동쪽 長安城에는 고구려 궁인 안학궁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동강가에 있는 酒岩, 岩, 朝天石, 德岩 등은 모두 옛 古事에 관련된 유명한 바위들이다. 府城 북쪽 兎山 위에 箕子墓가 있다. 正陽門 안에 있는 仁賢書院은 1564(명종 19)에 세워지고, 1608년(선조 41)에 사액 받은 서원이다. (양윤정)

  • 평양윤 주기 (平壤尹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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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 부분에 수록된 〈平壤尹〉으로, 현재의 평양특별시 부근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규장각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평양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다. 그리고 본 지도책에 수록되어 있는 평안도의 군현 지도 대부분이 《해동지도》와 유사한 반면에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평양부 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산지의 표현 양식과 색감부분도 다른 지도와는 다르다. 이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연관성 문제라기 보디는 후에 《해동지도》에 평양부 지도가 삽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여지도》와는 다소 차이점이 보인다. 《여지도》에서는 왼쪽 위에 西海와의 경계선이 하천과 동일한 선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 북한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증산군과 평원군 사이의 해안가로서 西海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이 맞다. 본 지도의 필사 시 그런 사실을 잘못 이해하여 해안선을 하천처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해안선이라고 인식했다면 대동강과 육지의 경계선처럼 진한 실선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본 지도와 《광여도》에서는 이 부분이 해안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런 부분을 볼 때 《광여도》와 본 지도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간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평양성에서도 여러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성곽 북쪽의 普通門은 글씨 왼쪽에 있는 것이고, 그 아래의 문은 七星門이다. 이 부분 역시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런 오류가 나타나지 않으며, 본 지도보다 훨씬 정교하고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에 보이는 內城은 본래 高麗 때 쌓은 성으로 1397년(태조 6)에 개축한 바 있었고, 그 후 1624년(인조 2)에 서남쪽을 줄이고, 개축하였다. 내성에는 대동문, 주작문(남문), 정해문, 칠성문, 장경문 등 5개의 성문과 대동문의 門樓인 相灝樓, 超然臺, 反求亭, 鍊光亭이 있다. 성안에는 上衙·二衙, 中營 建物, 武器庫와 倉庫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건물 모양이나 섬세함에 있어서는 본 지도가 《광여도》 보다 떨어지고 있다. 中城 남쪽에 위치한 것이 外城인데 이 곳에는 箕子井과 井田의 遺制가 남아 있다. 내성의 동쪽에 보이는 성은 北城인데, 1714년(숙종 40)에 監司 閔鎭遠이 쌓았다. 門樓인 浮碧樓와 乙密臺가 있고, 성 안에는 永明寺와 文武井 및 고구려 동명왕 설화와 관련 있는 麒麟窟이 있다. 동쪽 長安城에는 고구려 궁인 안학궁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동강가에 있는 酒岩, 岩, 朝天石, 德岩 등은 모두 옛 古事에 관련된 유명한 바위들이다. 府城 북쪽 兎山 위에 箕子墓가 있다. 正陽門 안에 있는 仁賢書院은 1564(명종 19)에 세워지고, 1608년(선조 41)에 사액 받은 서원이다. (양윤정)

  • 폐사군 (廢四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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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廢四郡〉 지도로, 지금의 자강도 자성군, 중강군, 화평군과 량강도 김형직군 일대 지역이다. 四郡의 설치는 1416년(태종 16)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閭延郡을 설치하여 咸吉道로부터 평안도로 이관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1433년(세종 15)에 慈城郡을, 1440년(세종 22)에 茂昌縣을, 1443년(세종 25) 虞芮郡을 설치하면서 四郡의 설치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땅을 잃어버린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유지·확보가 어려워지자 145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 3군을 폐지하고 주민을 강계·구성 2부로 옮겼다. 또한 1459년(세조 5)에는 자성군마저 폐지하여 주민을 강계로 옮긴 후 廢四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군현 新設 논의가 계속되다가 새로 들어가 사는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1869년(고종 6)에 자성군·후창군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지도에는 폐사군의 위치와 이곳을 관할하던 강계부 및관할 鎭의 표시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폐사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폐사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여지도》와 비슷하게 폐사군과 鎭堡가 동일하게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오른쪽의 滿浦鎭과 伐登浦鎭은 노란색이라고 보기 어렵고, 江界 위쪽의 板秋는 楸坡鎭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광여도》에서는 폐사군은 분홍색 사각형으로, 鎭堡는 노란색 사각형으로 그려 구분해주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 달리 楸坡鎭도 올바르게 표시되어 있다. 왼쪽의 압록강 건너에 표시되어 있는 皇城은 현재 고구려의 수도였던 國內城으로 밝혀져 있다. 전체적인 구도는 사실에 가까운 편이나 너무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이 부분은 생략되어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오른쪽 위에는 압록강이 발원하는 白頭山이 적혀 있기도 하다. 백두산은 훨씬 동쪽에 있지만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지도에서도 백두산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양윤정)

  • 폐사군 주기 (廢四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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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廢四郡〉 지도로, 지금의 자강도 자성군, 중강군, 화평군과 량강도 김형직군 일대 지역이다. 四郡의 설치는 1416년(태종 16)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閭延郡을 설치하여 咸吉道로부터 평안도로 이관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1433년(세종 15)에 慈城郡을, 1440년(세종 22)에 茂昌縣을, 1443년(세종 25) 虞芮郡을 설치하면서 四郡의 설치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땅을 잃어버린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유지·확보가 어려워지자 145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 3군을 폐지하고 주민을 강계·구성 2부로 옮겼다. 또한 1459년(세조 5)에는 자성군마저 폐지하여 주민을 강계로 옮긴 후 廢四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군현 新設 논의가 계속되다가 새로 들어가 사는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1869년(고종 6)에 자성군·후창군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지도에는 폐사군의 위치와 이곳을 관할하던 강계부 및관할 鎭의 표시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폐사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폐사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여지도》와 비슷하게 폐사군과 鎭堡가 동일하게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오른쪽의 滿浦鎭과 伐登浦鎭은 노란색이라고 보기 어렵고, 江界 위쪽의 板秋는 楸坡鎭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광여도》에서는 폐사군은 분홍색 사각형으로, 鎭堡는 노란색 사각형으로 그려 구분해주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 달리 楸坡鎭도 올바르게 표시되어 있다. 왼쪽의 압록강 건너에 표시되어 있는 皇城은 현재 고구려의 수도였던 國內城으로 밝혀져 있다. 전체적인 구도는 사실에 가까운 편이나 너무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이 부분은 생략되어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오른쪽 위에는 압록강이 발원하는 白頭山이 적혀 있기도 하다. 백두산은 훨씬 동쪽에 있지만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지도에서도 백두산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양윤정)

  • 함종부 (咸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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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咸從府〉 지도로,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남쪽 일대이다. 종이에 맞춰 고을을 그리다 보니까 다른 고을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 이 마을은 비교적 작은 편이다. 그러나 1721년(경종 1)에 경종 宣懿王后 魚氏의 貫鄕이라 하여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함종현, 《여지도(古4790-58)》의 함종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함종부 지도와도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咸從은 원래 縣이었는데, 1721년(경종 1)에 중전이었던 宣懿王后 魚氏의 본관 지역이라고 하여 府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본 지도와 《해동지도》, 그리고 《여지도》는 1721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군현의 승격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부분을 제외하면 본 지도의 대부분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읍치 부분은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본 지도와 유사하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마찬가지로 客舍, 衙舍, 鄕校, 그리고 邑倉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鄕廳이 추가되었으며 邑倉이 倉으로 표시되어 있다. 《광여도》는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며, 《여지도》의 경우에는 倉이라는 명칭이 생략되어 있다. 왼쪽의 二岳島와 鶴岩 부분도 《여지도》에는 三岳島와 岩鶴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여지도서』에 의하면 본 지도가 맞는 것이며, 《해동지도》는 본 지도와 같게 표기되어 있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여지도》처럼 표기되어 있다. 이 같은 점을 보았을 때 《광여도》는 본 지도와 《여지도》를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서 지도를 필사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지도에 옮기는 과정에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양윤정)

  • 함종부 주기 (咸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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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咸從府〉 지도로,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남쪽 일대이다. 종이에 맞춰 고을을 그리다 보니까 다른 고을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 이 마을은 비교적 작은 편이다. 그러나 1721년(경종 1)에 경종 宣懿王后 魚氏의 貫鄕이라 하여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함종현, 《여지도(古4790-58)》의 함종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함종부 지도와도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咸從은 원래 縣이었는데, 1721년(경종 1)에 중전이었던 宣懿王后 魚氏의 본관 지역이라고 하여 府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본 지도와 《해동지도》, 그리고 《여지도》는 1721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군현의 승격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부분을 제외하면 본 지도의 대부분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읍치 부분은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본 지도와 유사하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마찬가지로 客舍, 衙舍, 鄕校, 그리고 邑倉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鄕廳이 추가되었으며 邑倉이 倉으로 표시되어 있다. 《광여도》는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며, 《여지도》의 경우에는 倉이라는 명칭이 생략되어 있다. 왼쪽의 二岳島와 鶴岩 부분도 《여지도》에는 三岳島와 岩鶴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여지도서』에 의하면 본 지도가 맞는 것이며, 《해동지도》는 본 지도와 같게 표기되어 있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여지도》처럼 표기되어 있다. 이 같은 점을 보았을 때 《광여도》는 본 지도와 《여지도》를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서 지도를 필사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지도에 옮기는 과정에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양윤정)

  • 희천군 (熙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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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熙川郡〉으로, 지금의 자강도 희천시, 동신군 일대이다. 희천군의 북쪽은 높은 산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어 지도상에 그려진 산지를 보면 마치 폭포가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희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희천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희천군의 실제적인 모습은 마름모(◇) 형태에 가깝다. 이것을 직사각형의 형태(□)로 그리고, 읍치를 다른 지역보다 확대해서 그리다보니까 몇 가지 왜곡이 발생하였다. 오른쪽 위의 甲峴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왼쪽 아래의 寧邊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청천강 본류이다. 청천강 본류의 실제 유로는 대략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남류하다가 읍치 부근에서 서류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하천의 남쪽 부분도 북쪽 부분과 비슷한 규모임에도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이런 오류는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에서 오른쪽의 寧邊界를 寧遠界으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오른쪽의 新倉 부근에는 寧遠 방면에서 하천이 흘러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오류 역시 《해동지도》를 비롯하여 《여지도》와 《광여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가 서로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본 지도와 《해동지도》를 바탕으로 《여지도》와 《광여도》가 필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윤정)

  • 희천군 주기 (熙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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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熙川郡〉으로, 지금의 자강도 희천시, 동신군 일대이다. 희천군의 북쪽은 높은 산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어 지도상에 그려진 산지를 보면 마치 폭포가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희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희천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희천군의 실제적인 모습은 마름모(◇) 형태에 가깝다. 이것을 직사각형의 형태(□)로 그리고, 읍치를 다른 지역보다 확대해서 그리다보니까 몇 가지 왜곡이 발생하였다. 오른쪽 위의 甲峴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왼쪽 아래의 寧邊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청천강 본류이다. 청천강 본류의 실제 유로는 대략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남류하다가 읍치 부근에서 서류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하천의 남쪽 부분도 북쪽 부분과 비슷한 규모임에도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이런 오류는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에서 오른쪽의 寧邊界를 寧遠界으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오른쪽의 新倉 부근에는 寧遠 방면에서 하천이 흘러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오류 역시 《해동지도》를 비롯하여 《여지도》와 《광여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가 서로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본 지도와 《해동지도》를 바탕으로 《여지도》와 《광여도》가 필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윤정)

  • 결성현 (結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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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현은 홍성군의 결성면, 서부면, 구항면, 은하면, 일부를 제외한 광천읍에 걸쳐 있엇으며, 읍치는 결성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금리천으로, 그 위쪽의 하천은 청굉천으로 불리고 있다. 두 하천 모두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온 곳의 연장선 위에 있어 바닷배의 출입이 자주 있었던 곳이다. 특히 청굉천에 있는 광천은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포구였으며, 현재도 하구언에 축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젓갈 등으로 유명한 곳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결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결성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와 본 지도와의 차이점을 첨지로 붙여 놓았다. 위쪽의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을, 아래쪽에는 면의 명칭이 다른 것을 적어놓았다. 아래쪽의 첨지에 의하면 본 지도에 있는 合西面이 備圖에는 없으며, 반대로 備圖에는 상서면과 하서면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합서면이 2개로 분리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원래 2개였던 것을 합서면으로 표현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첨가된 지명을 제외하고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으로는 읍치 오른쪽의 風流島가 있다. 《여지도》에는 풍류도가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광여도》에는 빠져 있어 본 지도와 《광여도》의 지도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타 읍치 서쪽의 船泊處는 결성현에서 관할하는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다.(이기봉)

  • ▶함경도
  • 갑산부 (甲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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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의 최상류에 위치하였던 함경도 갑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군과 풍산군의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량강도의 보천군·혜산시·운흥군·갑산군·풍서군 전체와 삼지연군·삼수군·김형권군의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뒤쪽에 백두산과 天池를 실경으로 그렸고, 이곳 부근에서 발원하는 압록강의 갑입곡류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백두산의 동쪽으로는 두만강의 일부 유로가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갑산부 해제 참조). 갑산부를 둘러싼 산지의 모습이 이곳의 험준한 지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곳 산지에서 발원한 많은 하천들이 압록강으로 유입한다. 상류부에서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이영수, 가림천 등을 묘사하고 있다. 갑산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류는 남쪽의 太白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으로 지금의 허천강에 해당된다. 허천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2차 지류 중 가장 큰 유로는 지금의 황수원강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우안으로 합류하는 여러 하천은 운룡천, 회인천, 진동천 등이다. 읍치는 허천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3,003尺)과 함께 그렸으며 진산인 天鳳山에는 사찰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북청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주요 도로는 압록강과 두만강변을 따라 연결되는 도로로 惠山驛을 경유한다. 北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雲龍, 仁同, 鎭東驛 등을 경유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308戶, 田 1,333結93負로 기재되어 있고 畓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인구가 매우 희박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갑산부 주기 (甲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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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의 최상류에 위치하였던 함경도 갑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군과 풍산군의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량강도의 보천군·혜산시·운흥군·갑산군·풍서군 전체와 삼지연군·삼수군·김형권군의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뒤쪽에 백두산과 天池를 실경으로 그렸고, 이곳 부근에서 발원하는 압록강의 갑입곡류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백두산의 동쪽으로는 두만강의 일부 유로가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갑산부 해제 참조). 갑산부를 둘러싼 산지의 모습이 이곳의 험준한 지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곳 산지에서 발원한 많은 하천들이 압록강으로 유입한다. 상류부에서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이영수, 가림천 등을 묘사하고 있다. 갑산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류는 남쪽의 太白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으로 지금의 허천강에 해당된다. 허천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2차 지류 중 가장 큰 유로는 지금의 황수원강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우안으로 합류하는 여러 하천은 운룡천, 회인천, 진동천 등이다. 읍치는 허천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3,003尺)과 함께 그렸으며 진산인 天鳳山에는 사찰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북청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주요 도로는 압록강과 두만강변을 따라 연결되는 도로로 惠山驛을 경유한다. 北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雲龍, 仁同, 鎭東驛 등을 경유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308戶, 田 1,333結93負로 기재되어 있고 畓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인구가 매우 희박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경성부 (鏡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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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경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경성부는 일제시대 경성군과 청진부로 분리되었고 일부 지역은 명천군에 귀속되었다. 지금은 함경북도 경성군·어랑군과 청진시 서쪽 및 화성군 동쪽 지역이 해당된다. 부의 동쪽에 동해가 있으나 지도에서는 아래쪽에 해안선이 그려져 있어 지도의 윗부분이 서쪽에 해당된다. 서쪽으로 무산과는 험준한 산지로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곳에서 산지가 부의 서쪽과 남쪽을 감싸고 있으며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우측 立岩 일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청진시을 지나는 나북천이며 읍치 좌측에 묘사된 하천은 오촌천으로 보인다. 장백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으로 두 개의 지류가 묘사되어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주을천과 보로천에 해당된다. 寶化驛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주북천에 해당되며 八景坮로 유입하는 하천은 어랑천에 해당된다. 甑山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명천의 동면을 흐르는 명간천으로 생각된다. 한편 팔경대 부근에 형성된 석호인 長淵湖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부근에 서련호와 동련호로 추정되는 호수가 그려져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 4,610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려져 있으며 우측에 진산인 祖白山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경성군 경성읍 일대이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성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지도에 8개의 역이 적색의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고 이중 지도 우측에 기재된 輸城驛은 18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도로는 읍치에서 이 유성역을 거쳐 북으로는 부령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朱村驛을 거쳐 명천으로 연결된다. 甫老驛, 寶化驛, 森森坡를 잇는 도로가 내륙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51戶이며 田畓 면적이 1,948結70負8束으로 함께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경성부 주기 (鏡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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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경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경성부는 일제시대 경성군과 청진부로 분리되었고 일부 지역은 명천군에 귀속되었다. 지금은 함경북도 경성군·어랑군과 청진시 서쪽 및 화성군 동쪽 지역이 해당된다. 부의 동쪽에 동해가 있으나 지도에서는 아래쪽에 해안선이 그려져 있어 지도의 윗부분이 서쪽에 해당된다. 서쪽으로 무산과는 험준한 산지로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곳에서 산지가 부의 서쪽과 남쪽을 감싸고 있으며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우측 立岩 일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청진시을 지나는 나북천이며 읍치 좌측에 묘사된 하천은 오촌천으로 보인다. 장백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으로 두 개의 지류가 묘사되어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주을천과 보로천에 해당된다. 寶化驛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주북천에 해당되며 八景坮로 유입하는 하천은 어랑천에 해당된다. 甑山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명천의 동면을 흐르는 명간천으로 생각된다. 한편 팔경대 부근에 형성된 석호인 長淵湖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부근에 서련호와 동련호로 추정되는 호수가 그려져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 4,610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려져 있으며 우측에 진산인 祖白山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경성군 경성읍 일대이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성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지도에 8개의 역이 적색의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고 이중 지도 우측에 기재된 輸城驛은 18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도로는 읍치에서 이 유성역을 거쳐 북으로는 부령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朱村驛을 거쳐 명천으로 연결된다. 甫老驛, 寶化驛, 森森坡를 잇는 도로가 내륙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51戶이며 田畓 면적이 1,948結70負8束으로 함께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경원부 (慶源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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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류에 위치하였던 경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일부 지역이 경흥군과 온성군으로 경원군과 온성군 일부로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북도 새별군과 은덕군 서북부, 나진시 동북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금의 경흥군에 있던 비월지는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의 중앙에 위에서 아래쪽으로 두만강을 그렸으며 청나라에서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厚春江의 지류를 그렸다. 부의 서쪽에 산지를 표시하였고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여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한다. 지도의 중앙 윗부분에 성곽(둘레 10,475尺)과 함께 그려진 읍치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會介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송천으로 보인다. 그 아래 소규모 하천은 지금의 농포천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종성에서 유입하여 동류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하천(吾美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오룡천이다. 방안식 지도에서 경흥으로 유입하는 아오지천의 상류부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두만강을 경계로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관방 관련 지명뿐만 아니라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북과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의 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경로에 6개의 역이 표시되어 있다. 남쪽으로 安原驛을 거쳐 乾元驛적-阿山驛색을 지나 경흥으로 이어지며 古元乾驛을 지나는 도로는 종성으로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訓戎역을 지나는 도로는 穩城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田 3,314結48負, 畓 39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경원부 주기 (慶源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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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류에 위치하였던 경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일부 지역이 경흥군과 온성군으로 경원군과 온성군 일부로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북도 새별군과 은덕군 서북부, 나진시 동북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금의 경흥군에 있던 비월지는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의 중앙에 위에서 아래쪽으로 두만강을 그렸으며 청나라에서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厚春江의 지류를 그렸다. 부의 서쪽에 산지를 표시하였고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여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한다. 지도의 중앙 윗부분에 성곽(둘레 10,475尺)과 함께 그려진 읍치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會介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송천으로 보인다. 그 아래 소규모 하천은 지금의 농포천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종성에서 유입하여 동류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하천(吾美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오룡천이다. 방안식 지도에서 경흥으로 유입하는 아오지천의 상류부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두만강을 경계로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관방 관련 지명뿐만 아니라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북과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의 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경로에 6개의 역이 표시되어 있다. 남쪽으로 安原驛을 거쳐 乾元驛적-阿山驛색을 지나 경흥으로 이어지며 古元乾驛을 지나는 도로는 종성으로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訓戎역을 지나는 도로는 穩城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田 3,314結48負, 畓 39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경흥부 (慶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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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구에 위치하였던 경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일제시대 慶源府의 일부 지역( 웅기읍과 풍해면 일대)을 포함하여 경흥군으로 되었다. 지금 경흥 지명은 없어지고 함경북도 은덕군의 동쪽 부분과 라선시의 동쪽 부분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부의 서쪽으로부터 곡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이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으며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흥부 해제 참조) 이는 당시 두만강이 국경하천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상류부에서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아오지천을 그린 것이며, 白岳山 부근에서 북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포항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赤地湖에서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인 鹿屯島는 당시 조선영토였으나 지금은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다. 하천의 퇴적 작용으로 러시아의 육지부와 연결되어 있다. 후에 한국령으로 귀속되어야 할 섬이다. 지도 아래쪽에 그려져 있는 규모가 큰 湖水는 지금의 서번포와 동번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서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호수는 만포를 묘사한 것이다. 읍치는 두만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4,525尺)과 함께 묘사되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5곳의 驛이 표시되어 있다. 西水羅驛으로부터 두만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는 造山驛, 撫夷驛으로 연결된다. 내륙으로는 읍치에서 阿吾地驛과 德明驛을 거쳐 경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578戶, 田 897結이 기록되어 있고 畓 면적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김기혁)

  • 경흥부 주기 (慶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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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구에 위치하였던 경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일제시대 慶源府의 일부 지역( 웅기읍과 풍해면 일대)을 포함하여 경흥군으로 되었다. 지금 경흥 지명은 없어지고 함경북도 은덕군의 동쪽 부분과 라선시의 동쪽 부분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부의 서쪽으로부터 곡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이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으며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흥부 해제 참조) 이는 당시 두만강이 국경하천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상류부에서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아오지천을 그린 것이며, 白岳山 부근에서 북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포항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赤地湖에서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인 鹿屯島는 당시 조선영토였으나 지금은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다. 하천의 퇴적 작용으로 러시아의 육지부와 연결되어 있다. 후에 한국령으로 귀속되어야 할 섬이다. 지도 아래쪽에 그려져 있는 규모가 큰 湖水는 지금의 서번포와 동번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서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호수는 만포를 묘사한 것이다. 읍치는 두만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4,525尺)과 함께 묘사되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5곳의 驛이 표시되어 있다. 西水羅驛으로부터 두만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는 造山驛, 撫夷驛으로 연결된다. 내륙으로는 읍치에서 阿吾地驛과 德明驛을 거쳐 경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578戶, 田 897結이 기록되어 있고 畓 면적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김기혁)

  • 고원군 (高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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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고원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원군은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 일대이다. 지도의 아래 부분에 동해를 그려 해안에 연한 군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구 일부만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이 서쪽이다. 지도의 윗부분에 평안도 양덕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험준하게 묘사한 반면 문천과 영흥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여러 고개 지명과 도로들이 그려져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군의 서에서 동으로 흘러 造進浦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弗南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山谷을 거쳐 석산창을 지나 읍치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덕지강을 그린 것이다. 土岺에서 발원하여 덕지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동천을 그린 듯 하다. 지도 좌측의 龍淵 부근에서 발원하여 문천과의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읍치는 조진포 가까이에 衙舍와 文廟를 통해 묘사하였다. 성곽은 그려져 있지 않다. 지금의 고원읍 조양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내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원군 해제 참조).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일부 도로는 생략되어 표현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고원군에 역으로 隘水驛이 그려져 있으나 지명으로만 隘水倉으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덕지강변을 따라 山谷과 隘水倉을 거쳐 弗南岺을 지나는 도로는 양덕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곳으로는 평원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 좌측에서도 양덕으로 연결되는 별도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문천에서 이곳 읍치를 지나 영흥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표현되어 있는데 지금 이 경로로 함경남부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5戶, 田 1,732結33負4束, 畓 198結42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기혁)

  • 고원군 주기 (高原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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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고원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원군은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 일대이다. 지도의 아래 부분에 동해를 그려 해안에 연한 군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구 일부만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이 서쪽이다. 지도의 윗부분에 평안도 양덕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험준하게 묘사한 반면 문천과 영흥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여러 고개 지명과 도로들이 그려져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군의 서에서 동으로 흘러 造進浦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弗南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山谷을 거쳐 석산창을 지나 읍치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덕지강을 그린 것이다. 土岺에서 발원하여 덕지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동천을 그린 듯 하다. 지도 좌측의 龍淵 부근에서 발원하여 문천과의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읍치는 조진포 가까이에 衙舍와 文廟를 통해 묘사하였다. 성곽은 그려져 있지 않다. 지금의 고원읍 조양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내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원군 해제 참조).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일부 도로는 생략되어 표현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고원군에 역으로 隘水驛이 그려져 있으나 지명으로만 隘水倉으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덕지강변을 따라 山谷과 隘水倉을 거쳐 弗南岺을 지나는 도로는 양덕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곳으로는 평원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 좌측에서도 양덕으로 연결되는 별도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문천에서 이곳 읍치를 지나 영흥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표현되어 있는데 지금 이 경로로 함경남부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5戶, 田 1,732結33負4束, 畓 198結42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기혁)

  • 길주목 (吉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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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길주목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길주목은 일제시대 길주군과 학성군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은 함경북도 길주군과 김책시, 화대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길주의 실제 모습은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배치하여 그리고 있다. 明川·端川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강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곳곳에 峰과 嶺 지명을 기재하였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여러 곳에 그려져 있으며 그중 지도의 중앙부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현재 길주군을 지나는 남대천이다. 斜下斗와 七榮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사학분천, 유위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남대천 외에도 여러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김책시(일제시대 학성군)를 지나는 임명천, 쌍포천, 한천천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남대천의 좌안에 성곽(둘레 ; 10,600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길주군 길주읍 일대이다.(기타 지명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길주목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우측으로 地境峙를 지나는 도로는 명천으로 연결된다. 위쪽으로는 남대천의 좌측 하안을 따라 西北驛을 거쳐 雲嶺으로 이어진다. 지도의 좌측으로는 臨溟驛, 鎭東驛, 城津驛, 胡打里驛을 거쳐 단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들이 여러 경로로 그려져 있다. 이들 도로중 마천령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주 관북대로의 일부였으며, 지금은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032戶, 田 4,144結2負5束, 畓 284結7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길주목 주기 (吉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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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길주목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길주목은 일제시대 길주군과 학성군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은 함경북도 길주군과 김책시, 화대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길주의 실제 모습은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배치하여 그리고 있다. 明川·端川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강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곳곳에 峰과 嶺 지명을 기재하였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여러 곳에 그려져 있으며 그중 지도의 중앙부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현재 길주군을 지나는 남대천이다. 斜下斗와 七榮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사학분천, 유위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남대천 외에도 여러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김책시(일제시대 학성군)를 지나는 임명천, 쌍포천, 한천천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남대천의 좌안에 성곽(둘레 ; 10,600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길주군 길주읍 일대이다.(기타 지명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길주목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우측으로 地境峙를 지나는 도로는 명천으로 연결된다. 위쪽으로는 남대천의 좌측 하안을 따라 西北驛을 거쳐 雲嶺으로 이어진다. 지도의 좌측으로는 臨溟驛, 鎭東驛, 城津驛, 胡打里驛을 거쳐 단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들이 여러 경로로 그려져 있다. 이들 도로중 마천령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주 관북대로의 일부였으며, 지금은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032戶, 田 4,144結2負5束, 畓 284結7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단천군 (端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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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단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단천군은 일제시대 일부 지역(풍산군 천남면)이 분리되었고,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허천군에 해당된다. 단천군을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길주, 북청, 갑산)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굴곡있게 표현하여 실제 모습과 유사하다. 해안에는 두 하천이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황토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 좌측의 新洞岺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동천을 묘사한 것이다. 馬騰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동쪽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대천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1,945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묘사되었다. 지금의 단천시 내문동, 금봉동 일대이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단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그려지 내용에 비해 북청으로 이어지는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이들 도로에 8곳의 역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서 길주로 이어지는 도로는 磨谷驛, 胡打里驛, 城津驛을 경유한다. 이 도로를 따라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북청으로 연결되는 해안도로는 谷口驛을 경유한다. 군내 두 하천을 따라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이들 도로는 갑산부로 연결된다. 남대천을 따라 황토령을 지나 갑산으로 연결된 도로에는 黃土坡驛과 雙靑驛이 있다. 북대천에 연한 도로에는 利洞驛과 吾乙只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45戶, 田 2,520結97負, 畓 205結3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단천군 주기 (端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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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단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단천군은 일제시대 일부 지역(풍산군 천남면)이 분리되었고,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허천군에 해당된다. 단천군을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길주, 북청, 갑산)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굴곡있게 표현하여 실제 모습과 유사하다. 해안에는 두 하천이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황토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 좌측의 新洞岺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동천을 묘사한 것이다. 馬騰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동쪽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대천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1,945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묘사되었다. 지금의 단천시 내문동, 금봉동 일대이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단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그려지 내용에 비해 북청으로 이어지는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이들 도로에 8곳의 역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서 길주로 이어지는 도로는 磨谷驛, 胡打里驛, 城津驛을 경유한다. 이 도로를 따라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북청으로 연결되는 해안도로는 谷口驛을 경유한다. 군내 두 하천을 따라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이들 도로는 갑산부로 연결된다. 남대천을 따라 황토령을 지나 갑산으로 연결된 도로에는 黃土坡驛과 雙靑驛이 있다. 북대천에 연한 도로에는 利洞驛과 吾乙只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45戶, 田 2,520結97負, 畓 205結3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덕원부 (德源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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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덕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덕원부는 해체되어 원산시와 문천군 덕원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와 문천시의 남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동해안을 지도 아래에 배치하여 위쪽이 서쪽으로 그려져 있다. 덕원부를 둘러싼 산지에 여러 하천들이 동해안에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 왼쪽에서 영흥만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덕원면 일대를 흐르는 심포천이다. 赤川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적천천을 그린 것으로 지금 원산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제일 왼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하천은 지금 원산시의 남대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원산평(현재의 원산시 일대)에서 해안으로 돌출하여 連島로 표시된 반도는 지금의 갈마반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성곽과 함께 그려져 있으나 이면 주기의 내용과(‘城郭 無’)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읍치에는 衙舍와 함께 厲壇, 社稷壇, 鄕校, 客舍 등의 위치가 표현되어 있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덕원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門岩-馬息嶺을 연결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安邊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해안도로와 鳳林驛을 지나는 2곳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내륙에서 안변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심포천 연안을 거쳐 瀑布嶺을 지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 우측의 文川현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門岩과 龍倉 일대를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871戶, 田 面積은 1,250結69負, 畓은 185結37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군현의 규모에 비해 농경지 면적이 비교적 넒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덕원부 주기 (德源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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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덕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덕원부는 해체되어 원산시와 문천군 덕원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와 문천시의 남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동해안을 지도 아래에 배치하여 위쪽이 서쪽으로 그려져 있다. 덕원부를 둘러싼 산지에 여러 하천들이 동해안에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 왼쪽에서 영흥만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덕원면 일대를 흐르는 심포천이다. 赤川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적천천을 그린 것으로 지금 원산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제일 왼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하천은 지금 원산시의 남대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원산평(현재의 원산시 일대)에서 해안으로 돌출하여 連島로 표시된 반도는 지금의 갈마반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성곽과 함께 그려져 있으나 이면 주기의 내용과(‘城郭 無’)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읍치에는 衙舍와 함께 厲壇, 社稷壇, 鄕校, 客舍 등의 위치가 표현되어 있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덕원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門岩-馬息嶺을 연결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安邊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해안도로와 鳳林驛을 지나는 2곳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내륙에서 안변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심포천 연안을 거쳐 瀑布嶺을 지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 우측의 文川현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門岩과 龍倉 일대를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871戶, 田 面積은 1,250結69負, 畓은 185結37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군현의 규모에 비해 농경지 면적이 비교적 넒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마운령 (磨雲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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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이성현과 단천현의 경계를 이루던 마운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운령은 진흥왕 순수비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함경남도 이원군과 단천군의 경계를 이룬다. 이 일대의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그려진 것은 이 일대가 북방 강역의 군사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경흥을 잇는 관북 대로가 이곳을 지났으며, 두만강 대안에서 침입이 있을 경우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마운령을 통하여 谷口驛과 단천현을 잇는 경로가 있었으나 지금은 해안으로 도로와 철도가 개통되어 교통로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지도에서는 함경산맥 줄기를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모습으로 그렸고 磨雲嶺을 비롯하여 長津嶺, 佐驛嶺, 城古介, 松楸嶺, 下田嶺, 凡色嶺, 馬兒峴, 利德嶺, 金昌嶺, 新洞嶺 등의 위치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하천은 두 곳이 표현되어 있다. 利德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福貴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단천군 관암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단천읍을 통해 동해로 유입하는 복대천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북쪽에는 작은 지류가 그려져 있다. 지금의 이원군 성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대천으로 합류하는 소규모의 지류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운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에 비해 도로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마운령을 지나는 도로외에 谷口驛에서 昌道古介를 거쳐 濟仁館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長津峴 小路 등 10여 곳의 고갯길을 中路, 中大路, 小路, 細路 등으로 위계를 나누어 구분했다.(김기혁)

  • 마운령 주기 (磨雲嶺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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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이성현과 단천현의 경계를 이루던 마운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운령은 진흥왕 순수비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함경남도 이원군과 단천군의 경계를 이룬다. 이 일대의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그려진 것은 이 일대가 북방 강역의 군사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경흥을 잇는 관북 대로가 이곳을 지났으며, 두만강 대안에서 침입이 있을 경우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마운령을 통하여 谷口驛과 단천현을 잇는 경로가 있었으나 지금은 해안으로 도로와 철도가 개통되어 교통로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지도에서는 함경산맥 줄기를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모습으로 그렸고 磨雲嶺을 비롯하여 長津嶺, 佐驛嶺, 城古介, 松楸嶺, 下田嶺, 凡色嶺, 馬兒峴, 利德嶺, 金昌嶺, 新洞嶺 등의 위치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하천은 두 곳이 표현되어 있다. 利德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福貴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단천군 관암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단천읍을 통해 동해로 유입하는 복대천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북쪽에는 작은 지류가 그려져 있다. 지금의 이원군 성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대천으로 합류하는 소규모의 지류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운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에 비해 도로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마운령을 지나는 도로외에 谷口驛에서 昌道古介를 거쳐 濟仁館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長津峴 小路 등 10여 곳의 고갯길을 中路, 中大路, 小路, 細路 등으로 위계를 나누어 구분했다.(김기혁)

  • 마천령 (磨天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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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함경산맥의 마천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천령은 조선시대 함경북도 길주와 단천을 잇는 교통로상에 있었으며 지금은 함경남도 단천군과 함경북도 김책시를 잇는 도로상에 있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낱장으로 그려진 것은 磨雲嶺, 黃草嶺, 咸關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났다. 지도의 중앙에 북쪽의 鷹峰에서 이어진 줄기가 북에서 남쪽으로 강하게 그려져 있으며 마천령을 비롯하여 茄坡嶺, 板莫嶺, 坡嶺, 招美嶺, 蛇角嶺, 牛指嶺, 沙器嶺, 方阿嶺, 長方嶺 등의 고개와 嶺路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로 유입하는 여러 하천들이 이들 산줄기에서 발원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礪石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단천군의 북대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산줄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여러 하천들은 지금의 송어천, 갈파천, 쌍포천, 한천천 등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천령 일대의 도로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세 경로가 그려져 있다. 마천령을 지나는 도로는 당시 길주목의 嶺東驛과 단천현의 磨谷驛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지금도 주요 교통로로 이용된다. 마천령의 북쪽에서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는 臨寅驛과 利洞堡와 연결된다. 남쪽의 도로는 城津柵과 胡打里堡와 연결되는 해안도로로 지금 이곳에는 철도가 지나고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方阿岺 등 이곳의 고개들의 위치가 단천현과 길주목으로부터의 거리가 간단히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마천령 주기 (磨天嶺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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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함경산맥의 마천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천령은 조선시대 함경북도 길주와 단천을 잇는 교통로상에 있었으며 지금은 함경남도 단천군과 함경북도 김책시를 잇는 도로상에 있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낱장으로 그려진 것은 磨雲嶺, 黃草嶺, 咸關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났다. 지도의 중앙에 북쪽의 鷹峰에서 이어진 줄기가 북에서 남쪽으로 강하게 그려져 있으며 마천령을 비롯하여 茄坡嶺, 板莫嶺, 坡嶺, 招美嶺, 蛇角嶺, 牛指嶺, 沙器嶺, 方阿嶺, 長方嶺 등의 고개와 嶺路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로 유입하는 여러 하천들이 이들 산줄기에서 발원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礪石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단천군의 북대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산줄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여러 하천들은 지금의 송어천, 갈파천, 쌍포천, 한천천 등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천령 일대의 도로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세 경로가 그려져 있다. 마천령을 지나는 도로는 당시 길주목의 嶺東驛과 단천현의 磨谷驛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지금도 주요 교통로로 이용된다. 마천령의 북쪽에서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는 臨寅驛과 利洞堡와 연결된다. 남쪽의 도로는 城津柵과 胡打里堡와 연결되는 해안도로로 지금 이곳에는 철도가 지나고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方阿岺 등 이곳의 고개들의 위치가 단천현과 길주목으로부터의 거리가 간단히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명천부 (明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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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명천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명천부는 일제시대 경성군의 일부지역(동면, 서면)을 합하여 명천군이 되었으며 지금의 함경북도 명천군·화성군·화대군 일대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서쪽이 위로 향하였다. 해안의 돌출된 부분을 실제와 유사하게 묘사하였다. 지도의 위쪽에 무산과 경계를 이루는 長白山이 실경으로 그려져 있으며 지도 왼쪽에는 길주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험준하게 표현하였다. 魚郞川이 장백산에서 발원한 읍치를 거쳐 경성부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명간천이다. 지도 왼쪽의 地境寺烽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화대천을 그린 것이다. 하구에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으나 현재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퇴적되어 연육된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둘레; 5,394尺)과 함께 그렸으며 지금의 화성군 하우리 일대이다. 진산인 永平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명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역으로 在德驛만 표시되어 있고, 다른 지도에서 나타나는 甫老知驛은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경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보로지역을 경유하여 鬼門館을 지난다. 길주와는 在德驛-阿倉-別安代嶺을 잇는 도로외에 별도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금 이 경로를 따라 함경선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716戶, 田 1,665結64負, 畓 115結35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명천부 주기 (明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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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명천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명천부는 일제시대 경성군의 일부지역(동면, 서면)을 합하여 명천군이 되었으며 지금의 함경북도 명천군·화성군·화대군 일대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서쪽이 위로 향하였다. 해안의 돌출된 부분을 실제와 유사하게 묘사하였다. 지도의 위쪽에 무산과 경계를 이루는 長白山이 실경으로 그려져 있으며 지도 왼쪽에는 길주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험준하게 표현하였다. 魚郞川이 장백산에서 발원한 읍치를 거쳐 경성부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명간천이다. 지도 왼쪽의 地境寺烽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화대천을 그린 것이다. 하구에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으나 현재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퇴적되어 연육된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둘레; 5,394尺)과 함께 그렸으며 지금의 화성군 하우리 일대이다. 진산인 永平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명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역으로 在德驛만 표시되어 있고, 다른 지도에서 나타나는 甫老知驛은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경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보로지역을 경유하여 鬼門館을 지난다. 길주와는 在德驛-阿倉-別安代嶺을 잇는 도로외에 별도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금 이 경로를 따라 함경선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716戶, 田 1,665結64負, 畓 115結35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무산부 (茂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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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최상류 유역에 위치하였던 무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백두산 아래 첫 고을로 1712년 중국과의 정계비가 세워진 곳이다. 조선시대 무산부는 지금의 함경북도 무산군·연사군, 양강도의 대흥단군·백암군 전체와 삼지연군 동쪽에 걸쳐 있다. 나진시의 삼해리 일대에 비월지가 있었으나 본 지도에서는 제외되었다. 지도의 좌측 상단에 白頭山 來脈을 그리고, 남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험준한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이 상류부에서 감입 곡류하여 회령부로 흘러 나가는 모습을 실감있게 그려져 있다.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지류들이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고 있다. 최상류부에서 유입하는 하천 지명은 魚潤江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의 소홍만수로 추정된다. 장백산 일대의 2곳에서 지류가 발원한 朴下川은 지금의 연면수와 산암천인 것으로 보인다. 虛水羅川이 政丞坡達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오른쪽을 지나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6,228尺)과 함께 두만강 연안에 그려져 있다. 두만강 대안에 있는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비교적 자세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쪽의 영토에는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무산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 3곳의 역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회령부로 이어지는 도로에 梁水驛과 豊山驛이 있으며, 麻田驛과 車楡嶺을 거쳐 鏡城府로 연결된다. 읍치에서 갑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두만강 상류의 연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68戶로 군의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매우 희박하게 분포하고 있었고, 田면적이 1,716結29負인데 반하여 畓은 2結9負4束에 불과하여 개척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무산부 주기 (茂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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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최상류 유역에 위치하였던 무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백두산 아래 첫 고을로 1712년 중국과의 정계비가 세워진 곳이다. 조선시대 무산부는 지금의 함경북도 무산군·연사군, 양강도의 대흥단군·백암군 전체와 삼지연군 동쪽에 걸쳐 있다. 나진시의 삼해리 일대에 비월지가 있었으나 본 지도에서는 제외되었다. 지도의 좌측 상단에 白頭山 來脈을 그리고, 남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험준한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이 상류부에서 감입 곡류하여 회령부로 흘러 나가는 모습을 실감있게 그려져 있다.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지류들이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고 있다. 최상류부에서 유입하는 하천 지명은 魚潤江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의 소홍만수로 추정된다. 장백산 일대의 2곳에서 지류가 발원한 朴下川은 지금의 연면수와 산암천인 것으로 보인다. 虛水羅川이 政丞坡達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오른쪽을 지나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6,228尺)과 함께 두만강 연안에 그려져 있다. 두만강 대안에 있는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비교적 자세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쪽의 영토에는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무산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 3곳의 역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회령부로 이어지는 도로에 梁水驛과 豊山驛이 있으며, 麻田驛과 車楡嶺을 거쳐 鏡城府로 연결된다. 읍치에서 갑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두만강 상류의 연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68戶로 군의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매우 희박하게 분포하고 있었고, 田면적이 1,716結29負인데 반하여 畓은 2結9負4束에 불과하여 개척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문천군 (文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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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문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문천군은 일제 시대 인접한 덕원군과 안변부 일대를 편입함에 따라 문천군의 문천읍·운림면·천내읍·명귀면, 북성면 등 5개면 지역이다. 현재의 함경남도 문천시와 천내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 아래쪽에 동해를 그려 위가 서쪽이다. 인접한 군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에는 두류산등의 산지 지명과 고개 지명의 위치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여러 하천이 이곳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頭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현재 전탄강의 하구에 넓은 퇴적지형을 바탕으로 형성된 호도반도는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의 直洞岺에서 발원하여 읍치 남쪽을 지나는 하천은 지금의 남천강을 그린 것이다. 현재의 송전만에 해당되는 곳에 2곳의 반도가 돌출되어 표현되어 있다. 이는 현재 원산항 북항으로 개발 이용되고 있는 長致串이다. 읍치에는 衙舍, 향교 건물만이 그려져 있고 성곽은 없다.(기타 기재된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문천군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長峴을 지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읍치에서 炭峴을 지나 明孝倉을 경유는 도로는 영흥으로 연결된다. 車波峴(‘車坡峴’의 오기)을 지나 박문포를 거쳐 泥峴을 넘는 도로는 고원으로 연결된다. 현재 이 경로로 도로와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에서 남천강 변을 따라 直洞岺을 넘는 도로는 안변군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덕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27戶, 田 975結98負8束, 畓 147結91負5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문천군 주기 (文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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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문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문천군은 일제 시대 인접한 덕원군과 안변부 일대를 편입함에 따라 문천군의 문천읍·운림면·천내읍·명귀면, 북성면 등 5개면 지역이다. 현재의 함경남도 문천시와 천내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 아래쪽에 동해를 그려 위가 서쪽이다. 인접한 군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에는 두류산등의 산지 지명과 고개 지명의 위치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여러 하천이 이곳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頭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현재 전탄강의 하구에 넓은 퇴적지형을 바탕으로 형성된 호도반도는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의 直洞岺에서 발원하여 읍치 남쪽을 지나는 하천은 지금의 남천강을 그린 것이다. 현재의 송전만에 해당되는 곳에 2곳의 반도가 돌출되어 표현되어 있다. 이는 현재 원산항 북항으로 개발 이용되고 있는 長致串이다. 읍치에는 衙舍, 향교 건물만이 그려져 있고 성곽은 없다.(기타 기재된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문천군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長峴을 지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읍치에서 炭峴을 지나 明孝倉을 경유는 도로는 영흥으로 연결된다. 車波峴(‘車坡峴’의 오기)을 지나 박문포를 거쳐 泥峴을 넘는 도로는 고원으로 연결된다. 현재 이 경로로 도로와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에서 남천강 변을 따라 直洞岺을 넘는 도로는 안변군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덕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27戶, 田 975結98負8束, 畓 147結91負5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부령부 (富寧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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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부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경흥부의 일부 지역(관해명, 삼해면)을 흡수하여 부령군이 되었다. 지금의 청진시 동부의 일부와 위의 2개 면을 제외한 부령군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지도의 위가 서쪽이다. 부령부의 실제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나 지도에서는 매우 단조롭게 표현되었다. 현재의 수성천이 부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여러 하천들이 산지에서 발원하여 수성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상류부의 大古介 부근에 표현된 지류는 지금의 백사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虛通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수성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춘천이다. 수성천의 하류 지역은 지금의 청진시 일대로 지도에 그려진 삼각주는 지금 매립되어 있다. 靑岩으로 기재된 곳은 지금의 청진시 고말산으로 보인다. 읍치는 수성천 중류의 우안에 성곽(둘레 3,774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부령읍 부령동 일대이다.(지도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부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각 도로에 4곳의 驛 표시가 있다. 읍치에서 회령으로 이어지는 경로에서 내륙 도로에는 古堡驛이 있으며 해안도로는 懷綏驛을 지난다. 남쪽으로 鏡城에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에서 수성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輸城驛을 지난다. 서쪽의 무산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廢茂山驛까지만 그려져 있으나 다른 지도에서는 麻田驛을 통과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읍치를 거치지 않고 회령에서 경성으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가 해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391戶, 田 1,241結41負, 畓 13結80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부령부 주기 (富寧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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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부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경흥부의 일부 지역(관해명, 삼해면)을 흡수하여 부령군이 되었다. 지금의 청진시 동부의 일부와 위의 2개 면을 제외한 부령군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지도의 위가 서쪽이다. 부령부의 실제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나 지도에서는 매우 단조롭게 표현되었다. 현재의 수성천이 부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여러 하천들이 산지에서 발원하여 수성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상류부의 大古介 부근에 표현된 지류는 지금의 백사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虛通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수성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춘천이다. 수성천의 하류 지역은 지금의 청진시 일대로 지도에 그려진 삼각주는 지금 매립되어 있다. 靑岩으로 기재된 곳은 지금의 청진시 고말산으로 보인다. 읍치는 수성천 중류의 우안에 성곽(둘레 3,774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부령읍 부령동 일대이다.(지도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부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각 도로에 4곳의 驛 표시가 있다. 읍치에서 회령으로 이어지는 경로에서 내륙 도로에는 古堡驛이 있으며 해안도로는 懷綏驛을 지난다. 남쪽으로 鏡城에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에서 수성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輸城驛을 지난다. 서쪽의 무산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廢茂山驛까지만 그려져 있으나 다른 지도에서는 麻田驛을 통과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읍치를 거치지 않고 회령에서 경성으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가 해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391戶, 田 1,241結41負, 畓 13結80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북청부 (北靑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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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북청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북청군으로 되었고 일부 지역이 신설된 풍산군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신포시·덕성군과 량강도 김형권군 일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에 부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남대천을 그리고 읍치는 하류 가까이에 배치시켰다. 읍치는 현재 북청읍 내리 일대에 해당되며 지도에는 성곽(둘레 11,604尺)과 함께 衙舍를 그려넣었다. 鎭山인 連德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읍치 관련 지명의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북청부 해제 참조) 여러 하천 지류들이 북청부를 둘러싼 산지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으로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도 좌측의 通坡 부근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팔련천을 그린 것이다. 그 남쪽에 표현된 지류들은 지금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되는 향동천, 거서천과 송고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의 金昌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좌안으로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곤파천을 그린 것이다. 洪源과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 홍원군의 용포면에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동대천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동해안 유입부에 그려진 섬은 지금의 마양도이다. 지도 위쪽의 厚峙岺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지금 풍산군의 허천강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세 방향의 도로만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 동쪽의 利城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土城驛과 居山驛이 있으며 홍원현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平浦驛이 있다. 甲山府로 이어지는 도로는 남대천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경로상에 濟仁館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17戶, 田 1,348結29負7束, 畓 241結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북청부 주기 (北靑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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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북청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북청군으로 되었고 일부 지역이 신설된 풍산군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신포시·덕성군과 량강도 김형권군 일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에 부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남대천을 그리고 읍치는 하류 가까이에 배치시켰다. 읍치는 현재 북청읍 내리 일대에 해당되며 지도에는 성곽(둘레 11,604尺)과 함께 衙舍를 그려넣었다. 鎭山인 連德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읍치 관련 지명의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북청부 해제 참조) 여러 하천 지류들이 북청부를 둘러싼 산지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으로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도 좌측의 通坡 부근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팔련천을 그린 것이다. 그 남쪽에 표현된 지류들은 지금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되는 향동천, 거서천과 송고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의 金昌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좌안으로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곤파천을 그린 것이다. 洪源과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 홍원군의 용포면에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동대천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동해안 유입부에 그려진 섬은 지금의 마양도이다. 지도 위쪽의 厚峙岺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지금 풍산군의 허천강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세 방향의 도로만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 동쪽의 利城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土城驛과 居山驛이 있으며 홍원현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平浦驛이 있다. 甲山府로 이어지는 도로는 남대천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경로상에 濟仁館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17戶, 田 1,348結29負7束, 畓 241結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삼수부 (三水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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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상류에 위치하며 평안도와 접하고 있었던 삼수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수부는 일제시대 삼수군과 장진군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의 량강도의 삼수군·김정숙군, 자강도 랑림군 전체, 함경남도 부전군 북쪽 일부에 해당된다. 압록강이 지도 위쪽에 동에서 서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국경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삼수부 해제 참조). 삼수부를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갑산부·강계부)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여러 하천들이 이곳에서 발원하여 압록강과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 중 가장 큰 지류는 장진강이다. 지도 남쪽의 完田坡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여러 2차 지류를 합류한다. 상류부에는 지금은 장전댐이 건설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別害驛 부근에서 좌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창동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赴戰嶺 일대에서 발원하여 江口驛 부근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전강이다. 지도 동쪽에 읍치가 성곽(둘레 5,993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감싸면서 압록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증평천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압록강 연안의 경로가 추가되어 있으나 『해동지도』와는 유사하다. 압록강 연안을 따라 그려진 경로는 동으로는 갑산부, 서로는 강계부와 이어지며, 5곳에 역이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東山岺을 지나 장진강 중류의 自作只驛-魚面을 거쳐 江口驛에서 두 갈래의 도로로 나뉘어진다. 장진강 연변의 도로에는 神方驛, 廟坡驛, 別害驛, 長津柵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50戶, 田 898結62負4束으로 기록되어 있고 畓이 없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삼수부 주기 (三水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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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상류에 위치하며 평안도와 접하고 있었던 삼수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수부는 일제시대 삼수군과 장진군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의 량강도의 삼수군·김정숙군, 자강도 랑림군 전체, 함경남도 부전군 북쪽 일부에 해당된다. 압록강이 지도 위쪽에 동에서 서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국경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삼수부 해제 참조). 삼수부를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갑산부·강계부)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여러 하천들이 이곳에서 발원하여 압록강과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 중 가장 큰 지류는 장진강이다. 지도 남쪽의 完田坡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여러 2차 지류를 합류한다. 상류부에는 지금은 장전댐이 건설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別害驛 부근에서 좌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창동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赴戰嶺 일대에서 발원하여 江口驛 부근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전강이다. 지도 동쪽에 읍치가 성곽(둘레 5,993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감싸면서 압록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증평천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압록강 연안의 경로가 추가되어 있으나 『해동지도』와는 유사하다. 압록강 연안을 따라 그려진 경로는 동으로는 갑산부, 서로는 강계부와 이어지며, 5곳에 역이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東山岺을 지나 장진강 중류의 自作只驛-魚面을 거쳐 江口驛에서 두 갈래의 도로로 나뉘어진다. 장진강 연변의 도로에는 神方驛, 廟坡驛, 別害驛, 長津柵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50戶, 田 898結62負4束으로 기록되어 있고 畓이 없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안변부 (安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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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최남단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안변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변부는 일제시대 함경남도 안변군, 문천군의 풍상면·풍하면, 강원도 통천군의 흡곡면·학일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안변군·고산군·법동군과 통천군의 시중대 일대에 해당된다. 지도의 방위는 위쪽이 남쪽으로 그려져 있다. 산지들 사이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風流山 부근에서 남대천이 발원하여 흐르다가 읍치를 감싸돌면서 동해로 유입된다. 남대천 상류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동대천인 것으로 사료된다. 지도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 외에 2곳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朴多乙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蟹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지금의 학천인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 통천군 흡곡면을 흐르는 시천과 패천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위쪽에 강원도 伊川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서 하천들이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임진강 상류부의 지류들이다. 읍치는 남대천의 우안에 성곽(둘레 10,358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진산인 鶴城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변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매우 간단하다. 읍치에서 남대천의 하류를 따라 연결되는 도로는 德原과 이어진다. 남대천의 상류를 따라 南山驛과 高山驛-淮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秋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563戶, 田 2,603結83負1束, 畓 2,603結89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안변부 주기 (安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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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최남단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안변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변부는 일제시대 함경남도 안변군, 문천군의 풍상면·풍하면, 강원도 통천군의 흡곡면·학일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안변군·고산군·법동군과 통천군의 시중대 일대에 해당된다. 지도의 방위는 위쪽이 남쪽으로 그려져 있다. 산지들 사이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風流山 부근에서 남대천이 발원하여 흐르다가 읍치를 감싸돌면서 동해로 유입된다. 남대천 상류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동대천인 것으로 사료된다. 지도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 외에 2곳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朴多乙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蟹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지금의 학천인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 통천군 흡곡면을 흐르는 시천과 패천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위쪽에 강원도 伊川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서 하천들이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임진강 상류부의 지류들이다. 읍치는 남대천의 우안에 성곽(둘레 10,358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진산인 鶴城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변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매우 간단하다. 읍치에서 남대천의 하류를 따라 연결되는 도로는 德原과 이어진다. 남대천의 상류를 따라 南山驛과 高山驛-淮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秋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563戶, 田 2,603結83負1束, 畓 2,603結89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영흥부 (永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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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상으로 유입하는 용흥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영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요덕군·금야군과 고원군 일부에 해당된다. 이성계의 부친인 桓祖이 살고 조선 태조의 탄생지인 濬源殿 등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흥부 해제 참조). 영흥부의 실제 형태는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동쪽을 아래로 배치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지도의 위쪽에 산지와 곳곳에 위치한 峴과 嶺의 위치를 기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이 유역을 감싸는 형태로 묘사하였다. 龍興江이 산지의 여러 곳에서 발원한 지류들을 합류하면서 동해상에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입석천으로 보인다. 五峰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두 지류는 지금의 단속천과 용수피천으로 생각된다. 이들 지류를 합류한 용흥강은 하류에서는 여러 하중도와 삼각주를 형성한다. 하구에 위치한 대저도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반도 형태로 묘사된 馬熊島는 지금 육계도화한 호도반도이다. 읍치는 용흥강 우안에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금야군 금야읍 일대이다. 鎭山인 聖歷山의 위치에는 聖歷寺가 표시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그 내용은 간략하다. 읍치의 우측으로는 里石乙峴을 거쳐 定平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 高原과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으로 용흥강변을 따라 鐵水倉과 雲倉을 거쳐 雲山嶺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046戶, 田 6,089結12負9束, 畓 446結74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지만 고을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영흥부 주기 (永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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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상으로 유입하는 용흥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영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요덕군·금야군과 고원군 일부에 해당된다. 이성계의 부친인 桓祖이 살고 조선 태조의 탄생지인 濬源殿 등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흥부 해제 참조). 영흥부의 실제 형태는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동쪽을 아래로 배치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지도의 위쪽에 산지와 곳곳에 위치한 峴과 嶺의 위치를 기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이 유역을 감싸는 형태로 묘사하였다. 龍興江이 산지의 여러 곳에서 발원한 지류들을 합류하면서 동해상에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입석천으로 보인다. 五峰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두 지류는 지금의 단속천과 용수피천으로 생각된다. 이들 지류를 합류한 용흥강은 하류에서는 여러 하중도와 삼각주를 형성한다. 하구에 위치한 대저도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반도 형태로 묘사된 馬熊島는 지금 육계도화한 호도반도이다. 읍치는 용흥강 우안에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금야군 금야읍 일대이다. 鎭山인 聖歷山의 위치에는 聖歷寺가 표시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그 내용은 간략하다. 읍치의 우측으로는 里石乙峴을 거쳐 定平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 高原과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으로 용흥강변을 따라 鐵水倉과 雲倉을 거쳐 雲山嶺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046戶, 田 6,089結12負9束, 畓 446結74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지만 고을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온성부 (穩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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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의 북부지방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온성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온성부의 비월지가 경원부와 경흥부에 있어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회화식 지도에서 비월지의 묘사가 생략되어 있으며 지도에 묘사된 범위는 지금의 함경북도 온성군의 동북부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감입 곡류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중국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으로 豊界江(일명 分界江)이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 月德訓에서 발원한 하천(비변사인 지도에서는 ‘泉川’으로 기재)과 三溪川이 그려져 있다. 또한 두만강 대안의 청나라 영토에도 지명이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 당시 두만강은 국경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조선측 영토에서는 소규모 하천이 두만강으로 유입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곽(둘레;5,804尺)으로 둘러싸인 읍치의 서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산천인 것으로 보이며, 우측의 하천은 풍천천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류부의 立岩 부근으로 흐르는 하천은 월파천으로 보인다. 국경이었던 두만강에 접하고 있어 관방관련 지명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온성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柔遠驛와 美錢驛·永達驛·黃拓坡驛 등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역을 경유하여 인근 군현과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41戶, 田 2,666結1負9束, 畓 13結91負로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다.(김기혁)

  • 온성부 주기 (穩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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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의 북부지방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온성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온성부의 비월지가 경원부와 경흥부에 있어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회화식 지도에서 비월지의 묘사가 생략되어 있으며 지도에 묘사된 범위는 지금의 함경북도 온성군의 동북부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감입 곡류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중국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으로 豊界江(일명 分界江)이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 月德訓에서 발원한 하천(비변사인 지도에서는 ‘泉川’으로 기재)과 三溪川이 그려져 있다. 또한 두만강 대안의 청나라 영토에도 지명이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 당시 두만강은 국경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조선측 영토에서는 소규모 하천이 두만강으로 유입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곽(둘레;5,804尺)으로 둘러싸인 읍치의 서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산천인 것으로 보이며, 우측의 하천은 풍천천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류부의 立岩 부근으로 흐르는 하천은 월파천으로 보인다. 국경이었던 두만강에 접하고 있어 관방관련 지명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온성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柔遠驛와 美錢驛·永達驛·黃拓坡驛 등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역을 경유하여 인근 군현과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41戶, 田 2,666結1負9束, 畓 13結91負로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다.(김기혁)

  • 이성현 (利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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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의 동해안 이원만에 위치하였던 이성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성현은 정조24년(1800) 순조가 즉위하면서 利原縣으로 개칭하였다. 지금 함경남도 리원군 일대이다. 인접한 군현(단천, 북청)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는 교통로와 磨雲嶺 등의 고개 지명들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2개의 하천이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下田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을 지나 南松亭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城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谷口驛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대천이다. 이원만에서 해안선은 실제 모습과 거의 유사하게 표현하였고, 소나무 숲으로서 남송정, 북송정을 표현한 것은 다른 군현에서 볼수 없는 독특한 묘사 기법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3,026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렸다. 지금의 이원읍 교동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는 驛으로 谷口驛 한곳만 있으며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었다. 도로가 적색 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도로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곡구역을 지나 마운령을 거치는 도로는 단천으로 연결되며 남으로는 시중대를 지나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들 해안 도로에는 함경선 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남대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구색령과 하전령을 지난다. 단천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는 城古介와 松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44戶, 田 1,379結8負4束, 畓 19結81負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이성현 주기 (利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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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의 동해안 이원만에 위치하였던 이성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성현은 정조24년(1800) 순조가 즉위하면서 利原縣으로 개칭하였다. 지금 함경남도 리원군 일대이다. 인접한 군현(단천, 북청)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는 교통로와 磨雲嶺 등의 고개 지명들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2개의 하천이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下田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을 지나 南松亭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城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谷口驛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대천이다. 이원만에서 해안선은 실제 모습과 거의 유사하게 표현하였고, 소나무 숲으로서 남송정, 북송정을 표현한 것은 다른 군현에서 볼수 없는 독특한 묘사 기법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3,026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렸다. 지금의 이원읍 교동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는 驛으로 谷口驛 한곳만 있으며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었다. 도로가 적색 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도로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곡구역을 지나 마운령을 거치는 도로는 단천으로 연결되며 남으로는 시중대를 지나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들 해안 도로에는 함경선 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남대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구색령과 하전령을 지난다. 단천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는 城古介와 松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44戶, 田 1,379結8負4束, 畓 19結81負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정평부 (定平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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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정평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정평군이 되면서 일부지역(선덕면)은 이웃 함주군에 귀속되었다. 현재의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 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정평부의 전체 형상이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하여 그렸다. 부치를 여러 산지가 둘러싸고 이들 산지에서 하천이 발원하여 부의 중앙을 흐르면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금진천을 그린 것이다. 하천의 하류부에 金江津을 기재하였다. 지도 오른쪽에 廣浦로 유입되는 소규모의 하천이 朱伊川 지명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봉대천으로 추정된다. 廣浦로 기재된 호수는 지금의 광포호이다. 광포를 에워싼 산지에 大頭山 지명이 기재된 곳은 현재 함주군의 선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5,935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衙舍가 표시되어 있다. 진산인 鼻白山에는 봉수 표시가 있다. 읍치는 지금의 정평읍 동천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은 회화식 군현지도 정평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함흥부로 연결되는 도로에 봉대역이 그려져 있다. 왼쪽의 永興府로 이어지는 길로 草原驛을 지나는 길 외에 다른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의 위쪽으로는 馬騰嶺을 거쳐 영원과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91戶, 田 1,485結 9束, 畓 519結42負1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정평부 주기 (定平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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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정평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정평군이 되면서 일부지역(선덕면)은 이웃 함주군에 귀속되었다. 현재의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 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정평부의 전체 형상이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하여 그렸다. 부치를 여러 산지가 둘러싸고 이들 산지에서 하천이 발원하여 부의 중앙을 흐르면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금진천을 그린 것이다. 하천의 하류부에 金江津을 기재하였다. 지도 오른쪽에 廣浦로 유입되는 소규모의 하천이 朱伊川 지명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봉대천으로 추정된다. 廣浦로 기재된 호수는 지금의 광포호이다. 광포를 에워싼 산지에 大頭山 지명이 기재된 곳은 현재 함주군의 선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5,935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衙舍가 표시되어 있다. 진산인 鼻白山에는 봉수 표시가 있다. 읍치는 지금의 정평읍 동천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은 회화식 군현지도 정평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함흥부로 연결되는 도로에 봉대역이 그려져 있다. 왼쪽의 永興府로 이어지는 길로 草原驛을 지나는 길 외에 다른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의 위쪽으로는 馬騰嶺을 거쳐 영원과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91戶, 田 1,485結 9束, 畓 519結42負1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종성부 (鍾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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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종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까지 종성군으로 행정 지명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지역이 함경북도 온성군에 흡수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새별군·회령군·은덕군·나진시에 일부 걸쳐 있다. 지도의 좌측에 남에서 북으로 두만강이 묘사되었고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북방 강계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종성부 해제 참조).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 5,510尺)과 함께 그려져 있고, 진산인 小白山은 읍치의 동남쪽에 그려져 있다. 종성부는 하천의 유역분지로 볼 때 두 개의 유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禿山에서 발원하여 鷹谷을 지나 두만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관천으로 추정되며, 소백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읍치 부근에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서풍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北行營(성 둘레 310尺) 부근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를 합류하며 경원군으로 흘러 나가는 하천은 지금 오룡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3방향으로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서 북으로 潼關驛을 지나는 도로는 온성부로 이어지며, 남으로 防垣驛을 거쳐 무산부까지 이어진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서풍천을 따라 이어지며 북행영을 거쳐 회령, 경흥, 경원 방향의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171戶, 田 4,705結31負2束, 畓 34結71負로 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종성부 주기 (鍾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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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종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까지 종성군으로 행정 지명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지역이 함경북도 온성군에 흡수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새별군·회령군·은덕군·나진시에 일부 걸쳐 있다. 지도의 좌측에 남에서 북으로 두만강이 묘사되었고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북방 강계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종성부 해제 참조).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 5,510尺)과 함께 그려져 있고, 진산인 小白山은 읍치의 동남쪽에 그려져 있다. 종성부는 하천의 유역분지로 볼 때 두 개의 유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禿山에서 발원하여 鷹谷을 지나 두만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관천으로 추정되며, 소백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읍치 부근에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서풍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北行營(성 둘레 310尺) 부근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를 합류하며 경원군으로 흘러 나가는 하천은 지금 오룡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3방향으로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서 북으로 潼關驛을 지나는 도로는 온성부로 이어지며, 남으로 防垣驛을 거쳐 무산부까지 이어진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서풍천을 따라 이어지며 북행영을 거쳐 회령, 경흥, 경원 방향의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171戶, 田 4,705結31負2束, 畓 34結71負로 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함경도 (咸鏡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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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전체 지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각 군현 지도의 첫머리에 그려져 삽입되었으며 지도의 윤곽은 다른 도별 지도들과 유사하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감영과 행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鎭堡는 분홍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 양강지대에 많이 분포한다. 해안은 실제 모습보다 복잡하게 그려졌다. 이는 해안에 유입하는 하천과 동해안에 형성된 석호 등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이다. 赤島 등 8개의 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 최북단에 위치하여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다른 도별 지도와는 달리 관방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표현되었다. 지도의 위쪽에 백두산을 天池(‘大澤’)와 함께 실경으로 표시하였고 그 아래에 백두산 정계비와 목책을 표현하였다. 두만강의 유로와는 별도로 土門江이 발원지와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중국 영토에서 分界江이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 영토내의 하천 유로와 일부 지명들이 기재되어 있어 지도 제작 당시 압록강·두만강이 국경하천보다는 생활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에 유입하는 지류들로 朴下川등의 유로들이 상세히 표현되었고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등 5개 군현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압록강에 유입하는 지류로 장전강의 모습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으며 삼수, 갑산부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안에는 경흥 등의 16개 군현의 위치가 하천과 함께 그려져 있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이 적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고 특히 『해동지도』에서 점선으로 표현되던 백두산 일대의 도로망이 이 지도에서는 실선으로 표시되는 것이 독특하다. 지도책의 제일 앞부분에 강원도와 함께 함경도의 역사지리 내용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김기혁)

  • 함경도 주기 (咸鏡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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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전체 지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각 군현 지도의 첫머리에 그려져 삽입되었으며 지도의 윤곽은 다른 도별 지도들과 유사하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감영과 행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鎭堡는 분홍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 양강지대에 많이 분포한다. 해안은 실제 모습보다 복잡하게 그려졌다. 이는 해안에 유입하는 하천과 동해안에 형성된 석호 등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이다. 赤島 등 8개의 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 최북단에 위치하여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다른 도별 지도와는 달리 관방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표현되었다. 지도의 위쪽에 백두산을 天池(‘大澤’)와 함께 실경으로 표시하였고 그 아래에 백두산 정계비와 목책을 표현하였다. 두만강의 유로와는 별도로 土門江이 발원지와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중국 영토에서 分界江이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 영토내의 하천 유로와 일부 지명들이 기재되어 있어 지도 제작 당시 압록강·두만강이 국경하천보다는 생활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에 유입하는 지류들로 朴下川등의 유로들이 상세히 표현되었고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등 5개 군현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압록강에 유입하는 지류로 장전강의 모습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으며 삼수, 갑산부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안에는 경흥 등의 16개 군현의 위치가 하천과 함께 그려져 있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이 적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고 특히 『해동지도』에서 점선으로 표현되던 백두산 일대의 도로망이 이 지도에서는 실선으로 표시되는 것이 독특하다. 지도책의 제일 앞부분에 강원도와 함께 함경도의 역사지리 내용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김기혁)

  • 함관령 (咸關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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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홍원현과 함흥부의 교통로 상에 있던 함관령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함경남도 홍원군과 함주군을 잇는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삽입된 것은 磨天嶺, 磨雲嶺, 서북쪽의 黃草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함경도 북쪽에서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이 경로를 따라 철령을 통해 한양에 이르게 되어 조선시대 관방의 요지였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난다. 지도에서 태백산에서 이어 내려오는 산줄기가 지도의 북에서 남으로 강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곳곳에 고개를 의미하는 岺과 峴 표시가 있다. 산줄기의 좌·우측에 하천을 그렸다. 石乙長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성천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하천은 지금 북한의 함주군에서 발원하여 함흥으로 유입하는 성천강과 동일한 하천으로 추정된다. 가까이에 동해상에 유입하는 소규모의 하천인 湖漣川은 지금도 호련천으로 불리고 있다. 頭無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함관령에서 발원하여 홍원군을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서대천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함관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서를 잇는 2곳의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중 함관령을 지나는 도로는 함흥의 德山驛과 洪原의 咸原驛을 지난다. 지금 이곳에는 홍원읍과 함흥을 잇는 간선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남쪽으로 草古垈岺을 잇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車踰嶺 등 이곳을 지나는 9곳의 고개 위치를 간단히 기재하고 있다. (김기혁)

  • 함관령 주기 (咸關嶺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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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홍원현과 함흥부의 교통로 상에 있던 함관령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함경남도 홍원군과 함주군을 잇는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삽입된 것은 磨天嶺, 磨雲嶺, 서북쪽의 黃草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함경도 북쪽에서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이 경로를 따라 철령을 통해 한양에 이르게 되어 조선시대 관방의 요지였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난다. 지도에서 태백산에서 이어 내려오는 산줄기가 지도의 북에서 남으로 강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곳곳에 고개를 의미하는 岺과 峴 표시가 있다. 산줄기의 좌·우측에 하천을 그렸다. 石乙長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성천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하천은 지금 북한의 함주군에서 발원하여 함흥으로 유입하는 성천강과 동일한 하천으로 추정된다. 가까이에 동해상에 유입하는 소규모의 하천인 湖漣川은 지금도 호련천으로 불리고 있다. 頭無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함관령에서 발원하여 홍원군을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서대천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함관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서를 잇는 2곳의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중 함관령을 지나는 도로는 함흥의 德山驛과 洪原의 咸原驛을 지난다. 지금 이곳에는 홍원읍과 함흥을 잇는 간선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남쪽으로 草古垈岺을 잇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車踰嶺 등 이곳을 지나는 9곳의 고개 위치를 간단히 기재하고 있다. (김기혁)

  • 함흥부 (咸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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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동해안 성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함흥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함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영광군·신흥군·락원군·장진군, 부전군의 남쪽, 함주군의 동쪽 일대에 해당된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이후 우리나라 영토가 된 곳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이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유적 등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함흥부 해제 참조). 조선시대 함흥부의 모습은 방안식 지도에서는 역삼각형의 형태로 그려지며 이 지도에서도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묘사되었다. 지도의 북동쪽에서 남서류하여 지금의 함흥만으로 유입하는 성천강을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하류 부분에서는 성천강의 지류인 여러 하천의 지명을 乾川, 中川 등으로 표시하였고 竹島, 花島 등 여러 하중도를 그렸다. 성천강 지명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지류로 동성천강, 호련천 등이 있으며 하구에 삼각주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府治를 성천강의 좌안에 묘사하였고, 진산인 城串山은 城串烽으로 지명이 지재되어 있다. 회화식 지도인 『해동지도』에서 읍치의 성곽이 뚜렷한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이 지도에서는 성곽 형태는 그려져 있지 않고, 단지 원으로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면 주기에 성곽의 규모가 14,065尺으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는 德山館을 거쳐 咸關嶺을 지나 咸原驛을 거처 洪原으로 이어진다. 서로는 定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북으로는 성천강변을 따라 그려진 도로가 赴戰嶺을 지나 압록강변의 三水로 이어진다. 북서로는 中山嶺과 長津柵을 잇는 도로가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民戶 14,453戶로 기재되어 있어 당시로서 큰 도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 주요 전각, 面, 倉 등의 위치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김기혁)

  • 함흥부 주기 (咸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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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동해안 성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함흥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함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영광군·신흥군·락원군·장진군, 부전군의 남쪽, 함주군의 동쪽 일대에 해당된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이후 우리나라 영토가 된 곳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이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유적 등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함흥부 해제 참조). 조선시대 함흥부의 모습은 방안식 지도에서는 역삼각형의 형태로 그려지며 이 지도에서도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묘사되었다. 지도의 북동쪽에서 남서류하여 지금의 함흥만으로 유입하는 성천강을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하류 부분에서는 성천강의 지류인 여러 하천의 지명을 乾川, 中川 등으로 표시하였고 竹島, 花島 등 여러 하중도를 그렸다. 성천강 지명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지류로 동성천강, 호련천 등이 있으며 하구에 삼각주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府治를 성천강의 좌안에 묘사하였고, 진산인 城串山은 城串烽으로 지명이 지재되어 있다. 회화식 지도인 『해동지도』에서 읍치의 성곽이 뚜렷한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이 지도에서는 성곽 형태는 그려져 있지 않고, 단지 원으로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면 주기에 성곽의 규모가 14,065尺으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는 德山館을 거쳐 咸關嶺을 지나 咸原驛을 거처 洪原으로 이어진다. 서로는 定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북으로는 성천강변을 따라 그려진 도로가 赴戰嶺을 지나 압록강변의 三水로 이어진다. 북서로는 中山嶺과 長津柵을 잇는 도로가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民戶 14,453戶로 기재되어 있어 당시로서 큰 도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 주요 전각, 面, 倉 등의 위치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김기혁)

  • 홍원현 (洪原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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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홍원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원현은 지금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된다. 현재의 동대천을 그려 북청부와의 경계를 표현하였다. 지도의 좌측에 함흥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그렸고 車楡岺, 咸關岺 등 주요 교통로를 그렸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현의 중앙을 흘러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이다. 頭無山에서 발원하여 門岩부근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서대천을 그린 것이다. 해안선을 비교적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그렸다. 동해상에 그려져 있는 죽도와 馬養島는 지금도 사용되는 지명이다. 특히 마양도는 이곳에 있었던 목장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 1,005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홍원읍 신흥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에 기재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 세곳의 驛이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되었다. 南浦驛의 경우 다른 지도에서는 平浦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남포역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지며 서쪽으로는 신은역, 함원역을 거쳐 함관령을 지나는 길은 함흥으로 연결된다. 해안도로에는 지금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으며 함관령을 지나는 경로에는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서대천을 따라 내륙으로 연결된 도로는 龍華山을 거쳐 북청부로 연결된다. 용화산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60戶, 田 1,336結, 畓 293結83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홍원현 주기 (洪原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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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홍원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원현은 지금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된다. 현재의 동대천을 그려 북청부와의 경계를 표현하였다. 지도의 좌측에 함흥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그렸고 車楡岺, 咸關岺 등 주요 교통로를 그렸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현의 중앙을 흘러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이다. 頭無山에서 발원하여 門岩부근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서대천을 그린 것이다. 해안선을 비교적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그렸다. 동해상에 그려져 있는 죽도와 馬養島는 지금도 사용되는 지명이다. 특히 마양도는 이곳에 있었던 목장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 1,005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홍원읍 신흥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에 기재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 세곳의 驛이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되었다. 南浦驛의 경우 다른 지도에서는 平浦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남포역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지며 서쪽으로는 신은역, 함원역을 거쳐 함관령을 지나는 길은 함흥으로 연결된다. 해안도로에는 지금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으며 함관령을 지나는 경로에는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서대천을 따라 내륙으로 연결된 도로는 龍華山을 거쳐 북청부로 연결된다. 용화산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60戶, 田 1,336結, 畓 293結83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회령부 (會寧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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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 두만강 상류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였던 회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령부는 두만강연안부터 동해안까지 걸쳐 있었으나 일제시대 동해안에 연한 지역이 분리되어 부령군 관해면이 되었다. 지금은 회령시의 일부 지역과 나진시의 서쪽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에서는 두만강에 연한 지역만 묘사되었다. 지도의 서북쪽에 두만강을 그리고, 동남쪽에 여러 산지와 함께 梨峴 등의 고개 지명들을 기재하였다. 세곳의 지류가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제일 북쪽의 下川은 지금의 팔을천에 해당하는 하천으로 於連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에서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무산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회령천에 해당된다. 鞍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면서 雲頭城 북쪽에서 두만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보을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12,344尺) 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鎭山인 鰲山 지명이 가까이에 기재되어 있다. 지금의 회령군 회령읍 일대이다. 국경지대에 있어 관방 시설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회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의 북쪽으로 高嶺驛을 거쳐 穩城府로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甫乙下驛을 지나 무산부로 이어지며 내륙쪽으로는 회령천변을 지나 古豊山驛을 거쳐 부령으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482戶, 田 1,405結57負6束, 畓 12結43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회령부 주기 (會寧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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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 두만강 상류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였던 회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령부는 두만강연안부터 동해안까지 걸쳐 있었으나 일제시대 동해안에 연한 지역이 분리되어 부령군 관해면이 되었다. 지금은 회령시의 일부 지역과 나진시의 서쪽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에서는 두만강에 연한 지역만 묘사되었다. 지도의 서북쪽에 두만강을 그리고, 동남쪽에 여러 산지와 함께 梨峴 등의 고개 지명들을 기재하였다. 세곳의 지류가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제일 북쪽의 下川은 지금의 팔을천에 해당하는 하천으로 於連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에서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무산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회령천에 해당된다. 鞍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면서 雲頭城 북쪽에서 두만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보을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12,344尺) 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鎭山인 鰲山 지명이 가까이에 기재되어 있다. 지금의 회령군 회령읍 일대이다. 국경지대에 있어 관방 시설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회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의 북쪽으로 高嶺驛을 거쳐 穩城府로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甫乙下驛을 지나 무산부로 이어지며 내륙쪽으로는 회령천변을 지나 古豊山驛을 거쳐 부령으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482戶, 田 1,405結57負6束, 畓 12結43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황해도
  • 강령현 (康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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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령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동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강령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강령군의 강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강령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용적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보다 훨씬 조악한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지도 아래쪽에 洋中水路가 2개만 적혀 있고 수로의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洋中水路(또는 水路)가 4개나 기록되어 있고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왼쪽 巡威島 위쪽 섬에는 瓮津이라 적으려다가 만 瓮이라는 글자도 보이고 있으며, 읍치에는 객사와 창의 문자도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는 본 지도보다 정선되게 기록되어 있어 서로 필사 관계에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가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여 동일 계통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형태와 내용의 측면에서 본 지도나 《광여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지만 순위도를 비롯하여 상당 부분에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라고 볼 수 있으며,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 가까운 필사본이 《해동지도》와는 또 다른 계통으로 필사되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이기봉)

  • 강령현 주기 (康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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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령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동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강령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강령군의 강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강령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용적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보다 훨씬 조악한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지도 아래쪽에 洋中水路가 2개만 적혀 있고 수로의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洋中水路(또는 水路)가 4개나 기록되어 있고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왼쪽 巡威島 위쪽 섬에는 瓮津이라 적으려다가 만 瓮이라는 글자도 보이고 있으며, 읍치에는 객사와 창의 문자도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는 본 지도보다 정선되게 기록되어 있어 서로 필사 관계에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가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여 동일 계통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형태와 내용의 측면에서 본 지도나 《광여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지만 순위도를 비롯하여 상당 부분에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라고 볼 수 있으며,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 가까운 필사본이 《해동지도》와는 또 다른 계통으로 필사되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이기봉)

  • 곡산부 (谷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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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곡산군, 신평군, 평안남도의 회창군 동쪽 일부 및 강원도의 판교군 서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곡산군의 곡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곡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글씨 방향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 원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주기를 첨가하면서 북쪽을 위로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가 남북을 동서보다 훨씬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을 약간 더 길게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가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원본 계통을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북)의 陽德 방향에서 흘러와 위쪽(서)의 成川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남강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양덕에서 흘러오는 남강의 모습이 상당히 굵게 표현되어 있어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 약간 애매하게 바뀌어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왼쪽(남)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현재의 곡산천보다 더 좁은 하천인 것처럼 실선으로 표현하였다. 필사 과정에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인위적으로 표현 방법을 바꿈으로써 사실을 왜곡하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왼쪽의 남서쪽과 남쪽의 일부는 예성강의 최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에도 그런 사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래쪽(동)의 동촌면 일부는 현재의 판교군에 걸쳐 있으면서 임진강의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 부분에 《해동지도》에는 있는 高達山이 생략되어 있고, 佛峯寺가 佛峯山으로 오기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곡산부 주기 (谷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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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곡산군, 신평군, 평안남도의 회창군 동쪽 일부 및 강원도의 판교군 서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곡산군의 곡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곡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글씨 방향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 원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주기를 첨가하면서 북쪽을 위로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가 남북을 동서보다 훨씬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을 약간 더 길게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가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원본 계통을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북)의 陽德 방향에서 흘러와 위쪽(서)의 成川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남강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양덕에서 흘러오는 남강의 모습이 상당히 굵게 표현되어 있어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 약간 애매하게 바뀌어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왼쪽(남)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현재의 곡산천보다 더 좁은 하천인 것처럼 실선으로 표현하였다. 필사 과정에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인위적으로 표현 방법을 바꿈으로써 사실을 왜곡하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왼쪽의 남서쪽과 남쪽의 일부는 예성강의 최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에도 그런 사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래쪽(동)의 동촌면 일부는 현재의 판교군에 걸쳐 있으면서 임진강의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 부분에 《해동지도》에는 있는 高達山이 생략되어 있고, 佛峯寺가 佛峯山으로 오기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금천군 (金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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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남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의 금천군, 토산군의 서쪽, 황해남도 봉천군의 동쪽 일부, 개성직할시 장풍군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금천군의 금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읍치의 동남쪽에 있는 大興山城과 동쪽의 大南面 부분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방향이 일정하게 맞지는 않는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가장 큰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예성강 본류는 대체적으로 북쪽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본 지도에 표현된 내용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다른 3개 지도에는 왼쪽 위쪽에 新溪界와 兎山界가 적혀 있지만 본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어 대략적인 방향을 이해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토산계 방면에서는 현재의 구연강이 흘러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구연강은 대흥산성에서 흘러오는 하천보다 훨씬 길고 하폭도 넓지만 아주 작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대형산성인 대현산성과 읍치 부분을 가장 크고 자세하게 그리고, 동북-서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고을의 모습을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비슷하지만 산줄기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산줄기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변형이 가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금천군은 효종 3년(1652)에 江陰縣과 牛峯縣이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각각의 중심지가 읍치 위쪽에 古牛峯旧基로, 아래쪽에 古江陰으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금천군 주기 (金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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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남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의 금천군, 토산군의 서쪽, 황해남도 봉천군의 동쪽 일부, 개성직할시 장풍군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금천군의 금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읍치의 동남쪽에 있는 大興山城과 동쪽의 大南面 부분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방향이 일정하게 맞지는 않는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가장 큰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예성강 본류는 대체적으로 북쪽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본 지도에 표현된 내용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다른 3개 지도에는 왼쪽 위쪽에 新溪界와 兎山界가 적혀 있지만 본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어 대략적인 방향을 이해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토산계 방면에서는 현재의 구연강이 흘러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구연강은 대흥산성에서 흘러오는 하천보다 훨씬 길고 하폭도 넓지만 아주 작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대형산성인 대현산성과 읍치 부분을 가장 크고 자세하게 그리고, 동북-서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고을의 모습을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비슷하지만 산줄기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산줄기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변형이 가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금천군은 효종 3년(1652)에 江陰縣과 牛峯縣이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각각의 중심지가 읍치 위쪽에 古牛峯旧基로, 아래쪽에 古江陰으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문화현 (文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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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삼천군 북쪽 절반, 신천군의 서북쪽 일부, 안악군의 서쪽 1/3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건천리 부근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문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는 대체적으로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서쪽의 산을 등지고 있는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던 九月山城과 그 남쪽에 수없이 많이 들어서 있던 사찰이다. 구월산은 조선시대에 단군 조선의 신화와 결부된 산으로 여겨져 신성시되었던 곳 중의 하나이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부응하여 구월산성이 축조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징적 측면 때문에 구월산성과 그 주변이 가장 자세하게 묘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읍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지역에서 물이 모여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상류에 해당된다. 지도의 왼쪽 위에는 작은 하천 하나가 그려져 있고, 興徃面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의 삼천군 金川里  부근으로 실제로 장연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하천의 모습이 생략되어 있고 興徃面의 위치가 산줄기의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다. 후대의 필사자가 실제의 사실을 검토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지도의 내용을 바꾸면서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자의적 변경은 단순한 실수라기보다는 고을을 물줄기와 산줄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풍수적 명당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문화현 주기 (文化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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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삼천군 북쪽 절반, 신천군의 서북쪽 일부, 안악군의 서쪽 1/3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건천리 부근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문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는 대체적으로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서쪽의 산을 등지고 있는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던 九月山城과 그 남쪽에 수없이 많이 들어서 있던 사찰이다. 구월산은 조선시대에 단군 조선의 신화와 결부된 산으로 여겨져 신성시되었던 곳 중의 하나이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부응하여 구월산성이 축조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징적 측면 때문에 구월산성과 그 주변이 가장 자세하게 묘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읍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지역에서 물이 모여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상류에 해당된다. 지도의 왼쪽 위에는 작은 하천 하나가 그려져 있고, 興徃面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의 삼천군 金川里  부근으로 실제로 장연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하천의 모습이 생략되어 있고 興徃面의 위치가 산줄기의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다. 후대의 필사자가 실제의 사실을 검토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지도의 내용을 바꾸면서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자의적 변경은 단순한 실수라기보다는 고을을 물줄기와 산줄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풍수적 명당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배천군 (白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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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남부 일부를 제외한 배천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배천군의 배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배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배천군은 동쪽으로 예성강 하류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 교동과 마주보고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예성강 하류에 開城府 방향의 육지가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碧瀾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맞은편 개성부 지역에 고려시대의 최대 무역항이었던 벽란도가 있었다. 바로 위쪽의 錢浦는 우리말 ‘돈개’에 대한 한자 표현이다. 읍치에는 총 8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4개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7개가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책의 충청도 군현 지도에 대한 해제를 참조해 보면 본 지도책의 지도가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편이다. 배천군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는 또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일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도 필사자에 따라 내용이 일부 변형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배천군 주기 (白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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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남부 일부를 제외한 배천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배천군의 배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배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배천군은 동쪽으로 예성강 하류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 교동과 마주보고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예성강 하류에 開城府 방향의 육지가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碧瀾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맞은편 개성부 지역에 고려시대의 최대 무역항이었던 벽란도가 있었다. 바로 위쪽의 錢浦는 우리말 ‘돈개’에 대한 한자 표현이다. 읍치에는 총 8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4개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7개가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책의 충청도 군현 지도에 대한 해제를 참조해 보면 본 지도책의 지도가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편이다. 배천군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는 또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일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도 필사자에 따라 내용이 일부 변형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봉산군 (鳳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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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봉산군, 사리원시, 은파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봉산군의 봉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봉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의 왼쪽에 바다처럼 표현된 부분은 현재의 재령강으로 밀물 때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현재는 일제시대 이후 상당한 개간이 이루어져 하천처럼 하폭이 좁아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도에서처럼 상당히 넓은 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재령강의 본류는 아래쪽 載寧界에서 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여지도》 및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 본류의 끝을 굵게 표현하여 해당 방향에서 흘러옴을 암시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마치 아주 짧은 하천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지도의 위쪽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현재의 서흥강이고, 아래쪽은 현재의 은파천이다. 두 하천 모두 동쪽의 瑞興界와 平山界에서 흘러들어오지만 역시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점은 나머지 3개의 지도에도 비슷하게 되어 있어 실제를 확인할 수 없는 필사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正方山城과 그로부터 왼쪽으로 성곽이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에도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곳은 대동강을 건넌 적이 긴 평지를 지나다가 만나는 산줄기로서 중요한 관방처로서 인식되었다. 오른쪽(동)으로부터 東里鎭, 정방산성, 蒜山鎭 등이 설치되어 있고, 埋伏處가 기록되었던 것은 이러한 지형적 중요성 때문이다. 산산진 왼쪽의 성곽은 원래는 가시 나무를 심어놓아 棘城이라 불렸지만 후대에 토성과 석성으로 증축되었다. 동쪽의 산줄기를 피해 재령강변의 평지를 돌아 남진하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관방처이다.(이기봉)

  • 봉산군 주기 (鳳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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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봉산군, 사리원시, 은파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봉산군의 봉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봉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의 왼쪽에 바다처럼 표현된 부분은 현재의 재령강으로 밀물 때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현재는 일제시대 이후 상당한 개간이 이루어져 하천처럼 하폭이 좁아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도에서처럼 상당히 넓은 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재령강의 본류는 아래쪽 載寧界에서 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여지도》 및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 본류의 끝을 굵게 표현하여 해당 방향에서 흘러옴을 암시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마치 아주 짧은 하천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지도의 위쪽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현재의 서흥강이고, 아래쪽은 현재의 은파천이다. 두 하천 모두 동쪽의 瑞興界와 平山界에서 흘러들어오지만 역시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점은 나머지 3개의 지도에도 비슷하게 되어 있어 실제를 확인할 수 없는 필사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正方山城과 그로부터 왼쪽으로 성곽이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에도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곳은 대동강을 건넌 적이 긴 평지를 지나다가 만나는 산줄기로서 중요한 관방처로서 인식되었다. 오른쪽(동)으로부터 東里鎭, 정방산성, 蒜山鎭 등이 설치되어 있고, 埋伏處가 기록되었던 것은 이러한 지형적 중요성 때문이다. 산산진 왼쪽의 성곽은 원래는 가시 나무를 심어놓아 棘城이라 불렸지만 후대에 토성과 석성으로 증축되었다. 동쪽의 산줄기를 피해 재령강변의 평지를 돌아 남진하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관방처이다.(이기봉)

  • 서흥부 (瑞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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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서흥군, 연탄군 동쪽 절반, 봉산군과 린산군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흥군의 화곡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흥부(또는 서흥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서흥이 현으로 강등된 시기는 1671년(현종 12)-1762년(영조 38) 사이와 1777년(정조 1)-1786년(정조 10) 사이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縣으로 되어 있고,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府로 되어 있어 필사 시기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를 지나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서흥강이고,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황주강으로 재령강과 대동강에 합류되어 바다로 빠져나간다. 서흥부의 동북쪽 일부가 예성강 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의 오른쪽 위의 하천이 바로 그것이다. 본 지도에는 읍치와 大峴山城이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대현산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대현산성 안에는 토산, 수안, 신계, 곡산 등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서흥과 함께 산성에 들어와 적을 방어하는 고을의 식량을 보관하던 곳이다. 평상시에는 보통 사찰에서 성곽의 수리를 담당했는데, 대현산성 안에 표시된 紫烟寺가 그런 사찰이다. 지도 위에는 ‘○○坊’이라는 지명이 자주 기록되어 있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대신하여 부르던 명칭이었다.(이기봉)

  • 서흥부 주기 (瑞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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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서흥군, 연탄군 동쪽 절반, 봉산군과 린산군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흥군의 화곡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흥부(또는 서흥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서흥이 현으로 강등된 시기는 1671년(현종 12)-1762년(영조 38) 사이와 1777년(정조 1)-1786년(정조 10) 사이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縣으로 되어 있고,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府로 되어 있어 필사 시기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를 지나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서흥강이고,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황주강으로 재령강과 대동강에 합류되어 바다로 빠져나간다. 서흥부의 동북쪽 일부가 예성강 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의 오른쪽 위의 하천이 바로 그것이다. 본 지도에는 읍치와 大峴山城이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대현산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대현산성 안에는 토산, 수안, 신계, 곡산 등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서흥과 함께 산성에 들어와 적을 방어하는 고을의 식량을 보관하던 곳이다. 평상시에는 보통 사찰에서 성곽의 수리를 담당했는데, 대현산성 안에 표시된 紫烟寺가 그런 사찰이다. 지도 위에는 ‘○○坊’이라는 지명이 자주 기록되어 있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대신하여 부르던 명칭이었다.(이기봉)

  • 송화현 (松禾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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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송화군, 삼천군의 남쪽 절반 정도, 신천군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송화군의 송화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송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의 글씨 중 가장 중요한 읍치의 客舍와 衙(舍)가 북쪽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을 통해 볼 때 원본은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위쪽에 그려진 2개의 큰 하천은 모두 장연부의 땅을 지나 서해로 바로 빠져나가며, 아래쪽의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인 현재의 신천군 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본 지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하천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 있게 그렸다. 첫째, 아래쪽의 하천이 信川界로 빠져나가는 방향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입구에 長淵界와 海州界를 모두 써넣어 마치 장연과 해주의 경계선 부근으로 하천이 흘러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해주계에 장연계가 기록되어 있고, 해주계는 더 동쪽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 하천들은 해주계와 상관 없이 장연계 방면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이 오류는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한번 범해진 오류가 지속적으로 필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 송화현 주기 (松禾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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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송화군, 삼천군의 남쪽 절반 정도, 신천군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송화군의 송화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송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의 글씨 중 가장 중요한 읍치의 客舍와 衙(舍)가 북쪽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을 통해 볼 때 원본은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위쪽에 그려진 2개의 큰 하천은 모두 장연부의 땅을 지나 서해로 바로 빠져나가며, 아래쪽의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인 현재의 신천군 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본 지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하천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 있게 그렸다. 첫째, 아래쪽의 하천이 信川界로 빠져나가는 방향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입구에 長淵界와 海州界를 모두 써넣어 마치 장연과 해주의 경계선 부근으로 하천이 흘러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해주계에 장연계가 기록되어 있고, 해주계는 더 동쪽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 하천들은 해주계와 상관 없이 장연계 방면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이 오류는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한번 범해진 오류가 지속적으로 필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 수안군 (遂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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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수안군, 연산군, 연탄군의 동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수안군의 석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현재의 예성강 최상류에 해당되며, 오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왼쪽 栗界坊 부근은 현재의 황주강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황주강 최상류가 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상호 관련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예성강과 남강 사이의 산줄기는 오른쪽 위의 彦眞山(1,120m)을 비롯하여 험준한 관방처를 이루고 있다. 지도에도 왼쪽 위의 防垣岺에 관문성이 그려져 있고, 산줄기의 남쪽 부분에는 文山鎭과 位羅鎭이 설치되어 있어 요해처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도에는 ‘○○坊 ’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해동지도》에는 坊마다 소속된 里의 수가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도한 《해동지도》에 기록된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도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 정보를 일괄적으로 생략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읍치 부분에는 遂安이라는 군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어 각 군현이 하나의 지도책으로 묶이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수안군 주기 (遂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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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수안군, 연산군, 연탄군의 동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수안군의 석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현재의 예성강 최상류에 해당되며, 오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왼쪽 栗界坊 부근은 현재의 황주강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황주강 최상류가 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상호 관련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예성강과 남강 사이의 산줄기는 오른쪽 위의 彦眞山(1,120m)을 비롯하여 험준한 관방처를 이루고 있다. 지도에도 왼쪽 위의 防垣岺에 관문성이 그려져 있고, 산줄기의 남쪽 부분에는 文山鎭과 位羅鎭이 설치되어 있어 요해처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도에는 ‘○○坊 ’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해동지도》에는 坊마다 소속된 里의 수가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도한 《해동지도》에 기록된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도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 정보를 일괄적으로 생략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읍치 부분에는 遂安이라는 군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어 각 군현이 하나의 지도책으로 묶이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신계현 (新溪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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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신계군, 수안군의 서남쪽 일부, 곡산군의 남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계군의 신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쪽의 遂安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의 平山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평산계 방면에는 平山猪灘上流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평산에서는 예성강을 猪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신계현 지역의 예성강 부분에도 甫音川, 沙羅川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현재처럼 본류와 지류에 따라 명칭을 구분하기보다는 하천의 각 구간마다 지역에서 부르는 명칭이 달랐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본 지도에서는 예성강이 遂安界 방면에서 흘러 들어오고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고, 예성강 본류와 지류가 별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상당히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인위적으로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더욱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본류와 지류에 대한 실제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읍치 안에는 《광여도》, 《여지도》와 동일하게 총 9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6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신계현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해동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신계현 주기 (新溪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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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신계군, 수안군의 서남쪽 일부, 곡산군의 남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계군의 신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쪽의 遂安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의 平山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평산계 방면에는 平山猪灘上流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평산에서는 예성강을 猪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신계현 지역의 예성강 부분에도 甫音川, 沙羅川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현재처럼 본류와 지류에 따라 명칭을 구분하기보다는 하천의 각 구간마다 지역에서 부르는 명칭이 달랐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본 지도에서는 예성강이 遂安界 방면에서 흘러 들어오고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고, 예성강 본류와 지류가 별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상당히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인위적으로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더욱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본류와 지류에 대한 실제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읍치 안에는 《광여도》, 《여지도》와 동일하게 총 9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6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신계현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해동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신천군 (信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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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쪽 1/3 정도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신천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신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지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아래쪽의 加介面과 大井面 지역은 서강 유역에 속해 있지 않으며, 동쪽으로 흘러가는 또다른 재령강의 지류 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는 이 방향이 산줄기로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 본 지도에서는 완전하게 이어진 것으로 바뀌어 있어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다. 이 점은 《광여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여지도》에서는 대부분 비슷하지만 天峯山 부근의 산줄기가 일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더 심한 오해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읍치 부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은치 왼쪽의 訓練이 있는 부분이 본 지도에는 완전히 산줄기로 둘러싸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衙舍 부분의 산줄기가 극히 짧음에 반해 본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감싸고 있다. 또한 남쪽 造山도 《해동지도》에는 단지 평지에 작게 솟아난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동쪽의 산줄기와 연결된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읍치의 풍수적 명당 형국을 강조하여 그리려는 의도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본 지도보다는 덜 하지만 造山이 동쪽 산줄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측면은 동일하다.(이기봉)

  • 신천군 주기 (信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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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쪽 1/3 정도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신천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신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지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아래쪽의 加介面과 大井面 지역은 서강 유역에 속해 있지 않으며, 동쪽으로 흘러가는 또다른 재령강의 지류 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는 이 방향이 산줄기로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 본 지도에서는 완전하게 이어진 것으로 바뀌어 있어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다. 이 점은 《광여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여지도》에서는 대부분 비슷하지만 天峯山 부근의 산줄기가 일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더 심한 오해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읍치 부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은치 왼쪽의 訓練이 있는 부분이 본 지도에는 완전히 산줄기로 둘러싸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衙舍 부분의 산줄기가 극히 짧음에 반해 본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감싸고 있다. 또한 남쪽 造山도 《해동지도》에는 단지 평지에 작게 솟아난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동쪽의 산줄기와 연결된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읍치의 풍수적 명당 형국을 강조하여 그리려는 의도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본 지도보다는 덜 하지만 造山이 동쪽 산줄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측면은 동일하다.(이기봉)

  • 안악군 (安岳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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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은천군, 서쪽 일부를 제외한 안악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안군의 안악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악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북쪽은 바다처럼, 동쪽과 남쪽의 하천이 상당히 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북쪽은 대동강이 바다로 진입하는 부분이고, 동쪽은 재령강의 본류이며, 남쪽은 그 지류인 현재의 서강이다. 모두 밀물 때 바닷물이 유입되는 곳으로서 상당히 넓은 부분에 걸쳐 지도에서처럼 갯벌이 발달되어 있었다. 이곳은 일제시대 이후 대대적으로 개간된 지역 중의 하나이며, 북쪽의 猪島도 현재는 완전히 육지화되어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없다. 특히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長慶塔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없는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해동지도》는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도로나 일부 부분에서 편집을 행하면서 필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읍치로부터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이러한 거리 기록이 생략되어 있다. 거리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까우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거리 기록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안악군 주기 (安岳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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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은천군, 서쪽 일부를 제외한 안악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안군의 안악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악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북쪽은 바다처럼, 동쪽과 남쪽의 하천이 상당히 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북쪽은 대동강이 바다로 진입하는 부분이고, 동쪽은 재령강의 본류이며, 남쪽은 그 지류인 현재의 서강이다. 모두 밀물 때 바닷물이 유입되는 곳으로서 상당히 넓은 부분에 걸쳐 지도에서처럼 갯벌이 발달되어 있었다. 이곳은 일제시대 이후 대대적으로 개간된 지역 중의 하나이며, 북쪽의 猪島도 현재는 완전히 육지화되어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없다. 특히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長慶塔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없는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해동지도》는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도로나 일부 부분에서 편집을 행하면서 필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읍치로부터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이러한 거리 기록이 생략되어 있다. 거리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까우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거리 기록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연안부 (延安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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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연안군 동쪽과 남쪽, 배천군의 서남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안군의 연안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안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지명과 표현 방식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성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져 있고, 읍성 내의 건물 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첫째, 나머지 3개 지도가 《해동지도》에 비해 훨씬 작기 때문에 수록된 정보를 모두 표현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으며 둘째, 충청도의 몇몇 군현 지도에서 확인되고 있듯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를 생략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명의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오류도 보이고 있다. 읍성의 아래쪽에 기록된 南大地는 나머지 3개 지도에 南大池로 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아래의 並城界가 《해동지도》에는 並城面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주기 부분에 並城面으로 나오고 있어 《해동지도》가 올바르고 나머지 3개 지도와 같은 필사본 계통에서 오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읍성 오른쪽의 池村面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洪村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지도의 주기면에 池村面이 표시되어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읍성 오른쪽에 다른 3개 지도에는 있는 文書山이 생략되는 등 필사 과정에서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자료 이용시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기봉)

  • 연안부 주기 (延安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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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연안군 동쪽과 남쪽, 배천군의 서남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안군의 연안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안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지명과 표현 방식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성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져 있고, 읍성 내의 건물 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첫째, 나머지 3개 지도가 《해동지도》에 비해 훨씬 작기 때문에 수록된 정보를 모두 표현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으며 둘째, 충청도의 몇몇 군현 지도에서 확인되고 있듯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를 생략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명의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오류도 보이고 있다. 읍성의 아래쪽에 기록된 南大地는 나머지 3개 지도에 南大池로 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아래의 並城界가 《해동지도》에는 並城面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주기 부분에 並城面으로 나오고 있어 《해동지도》가 올바르고 나머지 3개 지도와 같은 필사본 계통에서 오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읍성 오른쪽의 池村面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洪村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지도의 주기면에 池村面이 표시되어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읍성 오른쪽에 다른 3개 지도에는 있는 文書山이 생략되는 등 필사 과정에서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자료 이용시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기봉)

  • 옹진현 (瓮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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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여으로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옹진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옹진군의 옹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옹진부(또는 옹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옹진은 1719년(숙종 45)에 所江僉使鎭을 水軍節度使營으로 바꾸면서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옹진부사가 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본 지도에는 명칭이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에 사용된 원본이 1719년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본 지도가 언제 필사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1800년 이후에 필사된 것이 확인되고 있는 《광여도》에도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군현의 명칭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옹진현이 아니라 옹진부로 되어 있어 옹진이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된 이후에 필사되면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성과 소강진에 표시된 건물의 수라는 측면에서 앞의 4개 지도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본 지도이며, 《광여도》와 《여지도》가 그 다음으로 많고, 《해동지도》가 가장 적다. 이러한 경향성은 충청도의 군현지도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황해도의 일부 군현 지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은 원본에 가장 가깝게 필사한 것이 본 지도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몇몇 건물을 제외하면 원본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지도에는 船倉(또는 舡倉)이 2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왼쪽의 것에는 소강진 소속의 전선이, 오른쪽의 것에는 옹진현 소속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었다.(이기봉)

  • 옹진현 주기 (瓮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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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여으로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옹진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옹진군의 옹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옹진부(또는 옹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옹진은 1719년(숙종 45)에 所江僉使鎭을 水軍節度使營으로 바꾸면서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옹진부사가 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본 지도에는 명칭이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에 사용된 원본이 1719년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본 지도가 언제 필사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1800년 이후에 필사된 것이 확인되고 있는 《광여도》에도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군현의 명칭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옹진현이 아니라 옹진부로 되어 있어 옹진이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된 이후에 필사되면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성과 소강진에 표시된 건물의 수라는 측면에서 앞의 4개 지도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본 지도이며, 《광여도》와 《여지도》가 그 다음으로 많고, 《해동지도》가 가장 적다. 이러한 경향성은 충청도의 군현지도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황해도의 일부 군현 지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은 원본에 가장 가깝게 필사한 것이 본 지도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몇몇 건물을 제외하면 원본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지도에는 船倉(또는 舡倉)이 2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왼쪽의 것에는 소강진 소속의 전선이, 오른쪽의 것에는 옹진현 소속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었다.(이기봉)

  • 은율현 (은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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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윤율군 서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은율군 은율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은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부분은 읍치와 九月山城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대부분의 대형산성이 황폐화되거나 사용되지 않았는데, 두 번에 걸친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는 대규모의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주변의 여러 고을 사람들이 입성하여 장기전을 펼치는 방식이다. 이러한 장기전은 대규모 외적의 보급로 차단 등을 통해 힘을 약화시킨 후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는 전략으로 이미 고구려에서 수당과의 전쟁 때 효과를 보았던 방법이다. 구월산성 안에는 안악, 장련, 풍천, 문화, 송화, 은율 등의 명칭이 적힌 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대규모 외적의 침입 시 함께 입성하여 적을 방어하게 되어 있는 고을들이다. 앞서 언급한 4개의 지도 중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지 않은 반면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본 지도는 지도의 제작 수준이 상당히 저열한 편이며, 《해동지도》의 경우 鄕賢祠宇에서 賢을 縣으로 기록하고 읍치 위쪽에 표시된 塔峴의 塔을 잘못 기록하는 등 몇 가지 오류가 보이고 있어 둘 다 최초의 원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왼쪽에는 防舡이 표시되어 있는데, 은율현에 소속되어 있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곳이다. 그 아래쪽의 海倉은 은율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읍치 아래쪽에 기록된 漢川은 우리말 ‘한내’에 대한 표현 중의 하나로 일반적으로는 ‘大川’이라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은율현 주기 (은율현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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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윤율군 서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은율군 은율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은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부분은 읍치와 九月山城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대부분의 대형산성이 황폐화되거나 사용되지 않았는데, 두 번에 걸친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는 대규모의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주변의 여러 고을 사람들이 입성하여 장기전을 펼치는 방식이다. 이러한 장기전은 대규모 외적의 보급로 차단 등을 통해 힘을 약화시킨 후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는 전략으로 이미 고구려에서 수당과의 전쟁 때 효과를 보았던 방법이다. 구월산성 안에는 안악, 장련, 풍천, 문화, 송화, 은율 등의 명칭이 적힌 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대규모 외적의 침입 시 함께 입성하여 적을 방어하게 되어 있는 고을들이다. 앞서 언급한 4개의 지도 중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지 않은 반면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본 지도는 지도의 제작 수준이 상당히 저열한 편이며, 《해동지도》의 경우 鄕賢祠宇에서 賢을 縣으로 기록하고 읍치 위쪽에 표시된 塔峴의 塔을 잘못 기록하는 등 몇 가지 오류가 보이고 있어 둘 다 최초의 원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왼쪽에는 防舡이 표시되어 있는데, 은율현에 소속되어 있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곳이다. 그 아래쪽의 海倉은 은율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읍치 아래쪽에 기록된 漢川은 우리말 ‘한내’에 대한 표현 중의 하나로 일반적으로는 ‘大川’이라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장련현 (長連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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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은율군의 동북쪽 절반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은율군의 장련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크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은 모두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해동지도》에는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에 옅은 남색을 칠해 넣어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동쪽과 서북쪽 일부에만 옅은 남색을 칠하여 나머지 지역은 육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북쪽에 기록된 三和界에서 三和는 대동강과 서해가 만나는 넓은 물을 건너 있는 평안도의 고을이기 때문에 도별도를 약간만 검토해도 이 부분이 바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서는 이중 서북쪽 부분이 분명하게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고, 동북쪽 부분도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광여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더 심해져 동북쪽 부분에도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해동지도》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분에 대한 최초의 오해 가능성은 본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만들어냈으며, 이러한 오해 가능성이 《여지도》나 《광여도》에 가면서 실제로 큰 오류로 전화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오류의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지도의 필사자들이 지도 위의 정보를 다른 자료와 검토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지도 전문가라기보다는 지도를 그림으로 인식한 화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이기봉)

  • 장련현 주기 (長連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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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은율군의 동북쪽 절반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은율군의 장련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크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은 모두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해동지도》에는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에 옅은 남색을 칠해 넣어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동쪽과 서북쪽 일부에만 옅은 남색을 칠하여 나머지 지역은 육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북쪽에 기록된 三和界에서 三和는 대동강과 서해가 만나는 넓은 물을 건너 있는 평안도의 고을이기 때문에 도별도를 약간만 검토해도 이 부분이 바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서는 이중 서북쪽 부분이 분명하게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고, 동북쪽 부분도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광여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더 심해져 동북쪽 부분에도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해동지도》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분에 대한 최초의 오해 가능성은 본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만들어냈으며, 이러한 오해 가능성이 《여지도》나 《광여도》에 가면서 실제로 큰 오류로 전화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오류의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지도의 필사자들이 지도 위의 정보를 다른 자료와 검토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지도 전문가라기보다는 지도를 그림으로 인식한 화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이기봉)

  • 장연부 (長淵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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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현은 인천직할시의 백령면,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장연군, 룡연군, 태탄군의 서쪽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연군의 장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과 수록된 내용에서 일부 달라지는 측면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첫째, 바다에 대한 표현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서쪽과 서남쪽이 탁 트인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마치 호수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서쪽에 西大海라는 문구가 있어 바다임을 알 수는 있지만 이 문구가 없다면 바다임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표현은 그림식 지도에서 가끔 나타나고 있는데, 표현하고자 하는 지역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추정된다. 둘째, 《해동지도》는 동서가 길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이 길게 그려져 있다. 실제의 장연현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길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세로가 긴 종이에 맞추기 위해 남북을 길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원본 계통은 《해동지도》에 가깝지만 후에 필사 과정에서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형식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필사 과정에서 일부 한자가 달라지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지도 아래쪽에 新鎭과 旧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五叉鎭을 의미하며 鎭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新鎭이 新津으로 바뀌어 있다. 이런 지명 중의 하나로 아래쪽의 乃沙陸(島)가 있는데, 역시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나머지 2개 지도에는 乃沙島로 바뀌어 있다. 또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하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약간 다르면서 서로 비슷하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와 다른 필사본 계통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계통 내에서도 일부 달라지는 지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장연부 주기 (長淵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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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현은 인천직할시의 백령면,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장연군, 룡연군, 태탄군의 서쪽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연군의 장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과 수록된 내용에서 일부 달라지는 측면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첫째, 바다에 대한 표현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서쪽과 서남쪽이 탁 트인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마치 호수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서쪽에 西大海라는 문구가 있어 바다임을 알 수는 있지만 이 문구가 없다면 바다임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표현은 그림식 지도에서 가끔 나타나고 있는데, 표현하고자 하는 지역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추정된다. 둘째, 《해동지도》는 동서가 길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이 길게 그려져 있다. 실제의 장연현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길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세로가 긴 종이에 맞추기 위해 남북을 길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원본 계통은 《해동지도》에 가깝지만 후에 필사 과정에서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형식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필사 과정에서 일부 한자가 달라지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지도 아래쪽에 新鎭과 旧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五叉鎭을 의미하며 鎭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新鎭이 新津으로 바뀌어 있다. 이런 지명 중의 하나로 아래쪽의 乃沙陸(島)가 있는데, 역시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나머지 2개 지도에는 乃沙島로 바뀌어 있다. 또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하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약간 다르면서 서로 비슷하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와 다른 필사본 계통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계통 내에서도 일부 달라지는 지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재령군 (載寧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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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재령군, 남쪽 일부를 제외한 신원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재령군의 재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재령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천에 대한 표현이다. 남쪽의 海州界에서 흘러와 동쪽을 지나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본류이며, 왼쪽 위의 安岳界에서 흘러와 재령강에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의 표현만을 놓고 보면 재령강이 마치 북쪽으로 흐르다 서쪽의 安岳界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서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과 서강이 北이란 문자가 쓰여 있는 곳에서 분명하게 합류되듯이 그려져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만이 오해할 수 있도록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왼쪽 위에 三橋屯 오른쪽의 하천이다. 이 하천은 현재의 서강 본류로서 신천군에서 흘러 들어와야 한다. 본 지도에서도 이 하천의 끝을 굵게 하여 그런 사실의 일면을 전하고 있지만 산줄기를 그 서쪽에 그려넣어 신천계에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에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사실에 가깝게 그렸다. 다만 《해동지도》에 이 부분의 왼쪽에 積山이라는 작은 봉우리를 그리고 있는데, 후대의 필사자들이 이 봉우리를 아래쪽의 산줄기와 이어 그리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까지 이 오류가 이어지고 있어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아래쪽의 立岩 부근에서도 이러한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린 것은 읍치가 아니라 오른쪽 아래의 장수산성이다. 산성 안에는 白川, 信川, 載寧(本) 등의 군기고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이들 고을의 사람들이 들어와 장기 항전을 하기 위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재령군 주기 (載寧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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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재령군, 남쪽 일부를 제외한 신원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재령군의 재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재령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천에 대한 표현이다. 남쪽의 海州界에서 흘러와 동쪽을 지나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본류이며, 왼쪽 위의 安岳界에서 흘러와 재령강에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의 표현만을 놓고 보면 재령강이 마치 북쪽으로 흐르다 서쪽의 安岳界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서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과 서강이 北이란 문자가 쓰여 있는 곳에서 분명하게 합류되듯이 그려져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만이 오해할 수 있도록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왼쪽 위에 三橋屯 오른쪽의 하천이다. 이 하천은 현재의 서강 본류로서 신천군에서 흘러 들어와야 한다. 본 지도에서도 이 하천의 끝을 굵게 하여 그런 사실의 일면을 전하고 있지만 산줄기를 그 서쪽에 그려넣어 신천계에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에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사실에 가깝게 그렸다. 다만 《해동지도》에 이 부분의 왼쪽에 積山이라는 작은 봉우리를 그리고 있는데, 후대의 필사자들이 이 봉우리를 아래쪽의 산줄기와 이어 그리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까지 이 오류가 이어지고 있어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아래쪽의 立岩 부근에서도 이러한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린 것은 읍치가 아니라 오른쪽 아래의 장수산성이다. 산성 안에는 白川, 信川, 載寧(本) 등의 군기고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이들 고을의 사람들이 들어와 장기 항전을 하기 위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토산현 (兎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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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산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의 토산군에 걸쳐 있엇으며, 읍치는 토산군의 월성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토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른쪽은 현재의 임진강 본류에 작은 지류 유역에 속하고, 왼쪽은 예성강의 지류인 구연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본 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중 본 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둘째, 건물의 표현에서 본 지도가 가장 자세한 편이다. 읍치에 있는 건물의 경우 본 지도에는 총 9개가 있는 반면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6개가, 《해동지도》에는 단지 3개만이 표시되어 있다. 동헌의 경우 본 지도에는 三門, 내동헌, 외동헌, 衙舍 등 4개가 그려져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三門을 생략하였고, 《해동지도》에서는 衙舍만을 표시하였다. 이런 변화는 客舍와 향교 건물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본 지도는 삼문을 비롯하여 부속건물이 가장 자세한 편이고 《해동지도》는 부속건물을 전혀 수록하지 않아 가장 단순한 편이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馬龍淵이 龍馬淵으로, 龍岩이 馬岩으로 기록되는 등의 오류가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종합해 볼 때 본 지도가 최초 원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최초 원본에 가장 가깝게 필사한 필사본이라고 판단할 수는 있다.(이기봉)

  • 토산현 주기 (兎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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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산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의 토산군에 걸쳐 있엇으며, 읍치는 토산군의 월성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토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른쪽은 현재의 임진강 본류에 작은 지류 유역에 속하고, 왼쪽은 예성강의 지류인 구연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본 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중 본 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둘째, 건물의 표현에서 본 지도가 가장 자세한 편이다. 읍치에 있는 건물의 경우 본 지도에는 총 9개가 있는 반면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6개가, 《해동지도》에는 단지 3개만이 표시되어 있다. 동헌의 경우 본 지도에는 三門, 내동헌, 외동헌, 衙舍 등 4개가 그려져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三門을 생략하였고, 《해동지도》에서는 衙舍만을 표시하였다. 이런 변화는 客舍와 향교 건물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본 지도는 삼문을 비롯하여 부속건물이 가장 자세한 편이고 《해동지도》는 부속건물을 전혀 수록하지 않아 가장 단순한 편이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馬龍淵이 龍馬淵으로, 龍岩이 馬岩으로 기록되는 등의 오류가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종합해 볼 때 본 지도가 최초 원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최초 원본에 가장 가깝게 필사한 필사본이라고 판단할 수는 있다.(이기봉)

  • 평산부 (平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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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평산군, 린산군, 황해남도의 봉천군, 연안군 서쪽 일부, 청단군 동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평산군의 산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평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고, 왼쪽 아래가 서해에 맞닿아 있다. 왼쪽 위의 下月面과 上月面 지역은 예성강이 아닌 재령강의 최상류 유역에 해당되며, 현재의 린산군 서쪽과 북쪽 지역에 해당된다. 아래쪽(남)은 실제를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놓아 꼼꼼하게 검토해야만 실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평산부의 남쪽은 金川, 白川, 延安 등과 접해 있으며, 해주와 연안 사이의 좁은 犬牙相入地를 통해 남해와 맞닿아 있다. 이 견아상입지는 현재의 연안군 서쪽과 청단군 동쪽에 해당되는데, 지도에서 왼쪽 아래의 海州界와 海倉 사이 부분이다. 해창과 오른쪽의 예성강 사이에 延安界와 江陰界가 보이고 있는데, 실제로는 이 사이에 白川界가 하나 더 들어가야 사실에 가깝다. 江陰은 牛峯과 합쳐져 金川이 된 지명 중의 하나로 금천 지역 중 옛 江陰 지역에 해당되기 때문에 기록해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연안과 배천 및 강음의 땅이 상당히 넓게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산부의 지도이기 때문에 세 고을의 땅은 대략적인 방향만 기록해 놓았다. 읍치 왼쪽의 漏川橋가 있는 하천은 현재도 누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지도에서와 달리 실제로는 서쪽에서 동으로 흐른다. 읍치와 太白山城을 강조하여 그리고 사각형이 아닌 고을을 사각형에 맞추는 과정에서 실제의 하천 유로 방향이 왜곡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평산부 주기 (平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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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평산군, 린산군, 황해남도의 봉천군, 연안군 서쪽 일부, 청단군 동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평산군의 산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평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고, 왼쪽 아래가 서해에 맞닿아 있다. 왼쪽 위의 下月面과 上月面 지역은 예성강이 아닌 재령강의 최상류 유역에 해당되며, 현재의 린산군 서쪽과 북쪽 지역에 해당된다. 아래쪽(남)은 실제를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놓아 꼼꼼하게 검토해야만 실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평산부의 남쪽은 金川, 白川, 延安 등과 접해 있으며, 해주와 연안 사이의 좁은 犬牙相入地를 통해 남해와 맞닿아 있다. 이 견아상입지는 현재의 연안군 서쪽과 청단군 동쪽에 해당되는데, 지도에서 왼쪽 아래의 海州界와 海倉 사이 부분이다. 해창과 오른쪽의 예성강 사이에 延安界와 江陰界가 보이고 있는데, 실제로는 이 사이에 白川界가 하나 더 들어가야 사실에 가깝다. 江陰은 牛峯과 합쳐져 金川이 된 지명 중의 하나로 금천 지역 중 옛 江陰 지역에 해당되기 때문에 기록해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연안과 배천 및 강음의 땅이 상당히 넓게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산부의 지도이기 때문에 세 고을의 땅은 대략적인 방향만 기록해 놓았다. 읍치 왼쪽의 漏川橋가 있는 하천은 현재도 누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지도에서와 달리 실제로는 서쪽에서 동으로 흐른다. 읍치와 太白山城을 강조하여 그리고 사각형이 아닌 고을을 사각형에 맞추는 과정에서 실제의 하천 유로 방향이 왜곡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풍천부 (豊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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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천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과일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과일군의 과일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풍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과 수록된 내용에서 일부 달라지는 측면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왼쪽 위의 琵琶串 부분이 마치 육지가 平安道界 방면으로 이어진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 이곳은 바다이다. 지도에도 大海가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 위에는 2개의 섬도 표시되어 있어 바다임을 알 수 있지만 비파곶 부분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이 부분을 본 지도만큼 애매하게 그리지는 않았지만 약간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이 부분을 오해하여 잘못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치 남쪽의 산줄기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해동지도》가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는 남쪽에서 바라본 형태로 그렸다. 읍치 오른쪽의 任墓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任倉으로 바뀌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깝고, 그 다음으로 본 지도, 나머지 2개 지도의 순이 아닌가 한다. 지도에는 허사진과 초도진 부분에 防船이 표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海倉 바로 아래쪽에도 방선이 기록되어 있다. 허사진과 초도진 모두 수군 기지로서 전선이 정박해 있는 곳에 防船을 표시한 것이며, 가장 아래쪽의 방선은 풍천부에서 관할하던 전선의 정박처이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防船留泊으로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필사자가 줄여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 安邑山 부근에 《해동지도》에는 栗里面이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4개 지도의 모든 주기에 율리면이 표시되어 있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필사 계통이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와는 약간 다른 동일 계통이라고 판단된다.(이기봉)

  • 풍천부 주기 (豊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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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천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과일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과일군의 과일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풍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과 수록된 내용에서 일부 달라지는 측면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왼쪽 위의 琵琶串 부분이 마치 육지가 平安道界 방면으로 이어진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 이곳은 바다이다. 지도에도 大海가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 위에는 2개의 섬도 표시되어 있어 바다임을 알 수 있지만 비파곶 부분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이 부분을 본 지도만큼 애매하게 그리지는 않았지만 약간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이 부분을 오해하여 잘못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치 남쪽의 산줄기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해동지도》가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는 남쪽에서 바라본 형태로 그렸다. 읍치 오른쪽의 任墓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任倉으로 바뀌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깝고, 그 다음으로 본 지도, 나머지 2개 지도의 순이 아닌가 한다. 지도에는 허사진과 초도진 부분에 防船이 표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海倉 바로 아래쪽에도 방선이 기록되어 있다. 허사진과 초도진 모두 수군 기지로서 전선이 정박해 있는 곳에 防船을 표시한 것이며, 가장 아래쪽의 방선은 풍천부에서 관할하던 전선의 정박처이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防船留泊으로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필사자가 줄여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 安邑山 부근에 《해동지도》에는 栗里面이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4개 지도의 모든 주기에 율리면이 표시되어 있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필사 계통이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와는 약간 다른 동일 계통이라고 판단된다.(이기봉)

  • 해주목 (海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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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목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해주시, 벽성군, 서쪽 일부를 제외한 청단군, 신원군의 남쪽 일부, 태탄군의 서쪽, 옹진군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해주시의 영광동과 부용동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해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첫째, 나머지 3개 지도가 북쪽을 위로 그린 반면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글씨 방향을 고려할 때 실제로는 북쪽을 위로 그렸다고 볼 수 있으며, 다만 후에 주기를 추가할 때 서쪽을 위로 하여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나머지 3개 지도가 동서보다 남북을 길게 그리고 있는 반면 《해동지도》는 동서를 길게 그렸다. 실제로 해주목은 남북보다는 동서가 긴 형태를 취하고 있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세로로 긴 종이의 모양에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리면서 남북이 긴 형태로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네 지도가 일부 생략되거나 바뀐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나머지 3개 지도에 없는 것으로는 오른쪽 아래의 海倉이 있다. 《해동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으로 오른쪽 아래 4개 섬 부근의 “潮退水路十里徒涉”이 있는데, 《광여도》에서는 “徒涉”을 “渡涉”으로 적어놓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볼 때 4개의 지도 모두 원본은 아니라고 판단되며,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생략되거나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읍성의 경우도 본 지도에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달리 西門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있는 曲城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각 지도의 내용을 자료로 사용할 때 필사 과정에서 생략되었거나 바뀐 내용이 무엇인지를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기봉)

  • 해주목 주기 (海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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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목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해주시, 벽성군, 서쪽 일부를 제외한 청단군, 신원군의 남쪽 일부, 태탄군의 서쪽, 옹진군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해주시의 영광동과 부용동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해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첫째, 나머지 3개 지도가 북쪽을 위로 그린 반면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글씨 방향을 고려할 때 실제로는 북쪽을 위로 그렸다고 볼 수 있으며, 다만 후에 주기를 추가할 때 서쪽을 위로 하여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나머지 3개 지도가 동서보다 남북을 길게 그리고 있는 반면 《해동지도》는 동서를 길게 그렸다. 실제로 해주목은 남북보다는 동서가 긴 형태를 취하고 있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세로로 긴 종이의 모양에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리면서 남북이 긴 형태로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네 지도가 일부 생략되거나 바뀐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나머지 3개 지도에 없는 것으로는 오른쪽 아래의 海倉이 있다. 《해동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으로 오른쪽 아래 4개 섬 부근의 “潮退水路十里徒涉”이 있는데, 《광여도》에서는 “徒涉”을 “渡涉”으로 적어놓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볼 때 4개의 지도 모두 원본은 아니라고 판단되며,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생략되거나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읍성의 경우도 본 지도에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달리 西門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있는 曲城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각 지도의 내용을 자료로 사용할 때 필사 과정에서 생략되었거나 바뀐 내용이 무엇인지를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기봉)

  • 황주목 (黃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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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목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 황주군, 송림시, 연탄군의 서쪽 절반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황주군의 황주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황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에 비해 나머지 3개 지도는 읍성과 정방산성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는데, 지도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작아 자세한 내용을 수록하기 위해 취한 방법으로 판단된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쪽은 바다가 아니라 대동강의 하류에 해당되며, 이곳은 물이 급하게 흐른다고 하여 지도 아래쪽에 표기된 것처럼 急水門이라 불렸다. 위쪽의 瑞興界로부터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의 황주천이다. 황주에는 황해도의 병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읍치의 客舍 위쪽에 兵營의 관아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아래의 正方山城은 대동강 주변의 평지를 넘어 남진하는 적을 차단하기 위해 동서의 산줄기 위에 축조한 대형산성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가 강조되었는데, 산성 주변의 군현을 한데 묶어 지역 방어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산성 안에는 군기고와 비상용 식량을 보관하던 山倉, 장기전을 위한 식수와 관련된 池, 일상시에 산성의 관리를 맡던 寺 등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대형산성은 험준한 산지에 축조되어 있어 적이 쉽게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전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후방을 교란할 수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지도에는 坊이란 문자가 자주 보이는데,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등에서 面 대신에 사용되던 행정 단위이다. 읍치 아래쪽에는 海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황주목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이기봉)

  • 황주목 주기 (黃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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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목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 황주군, 송림시, 연탄군의 서쪽 절반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황주군의 황주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황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에 비해 나머지 3개 지도는 읍성과 정방산성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는데, 지도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작아 자세한 내용을 수록하기 위해 취한 방법으로 판단된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쪽은 바다가 아니라 대동강의 하류에 해당되며, 이곳은 물이 급하게 흐른다고 하여 지도 아래쪽에 표기된 것처럼 急水門이라 불렸다. 위쪽의 瑞興界로부터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의 황주천이다. 황주에는 황해도의 병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읍치의 客舍 위쪽에 兵營의 관아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아래의 正方山城은 대동강 주변의 평지를 넘어 남진하는 적을 차단하기 위해 동서의 산줄기 위에 축조한 대형산성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가 강조되었는데, 산성 주변의 군현을 한데 묶어 지역 방어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산성 안에는 군기고와 비상용 식량을 보관하던 山倉, 장기전을 위한 식수와 관련된 池, 일상시에 산성의 관리를 맡던 寺 등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대형산성은 험준한 산지에 축조되어 있어 적이 쉽게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전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후방을 교란할 수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지도에는 坊이란 문자가 자주 보이는데,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등에서 面 대신에 사용되던 행정 단위이다. 읍치 아래쪽에는 海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황주목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이기봉)

  • 황해도 (黃海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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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에는 총 24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효종 3년(1652)에 牛峰縣과 江陰縣을 합해 金川으로 만들면서 23개로 줄어들었다. 황해도의 각 군현 지도가 그림 지도의 형식을 취한 것임에 비해 본 지도는 거리와 방향이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각 군현의 지도는 전체적으로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道 전체를 그린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것과는 전혀 다르며,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다. 다만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에서는 평안도, 강원도, 경기도 등 경계를 맞대고 있는 부분을 바다와 동일하게 처리했음에 반해 본 지도에서는 서로 육지로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에 있던 도로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어  본 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에 수록된 내용 중 監營이 있는 해주는 황색의 큰 원으로, 일반 군현은 노란색의 작은 원으로 구분하여 주었다. 군사 기지인 鎭堡는 가로 또는 세로의 분홍색 직사각형으로 표현하였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 강죄되어 구분된 黃州의 兵營이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왼쪽 위의 椒島에도 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를 빼먹은 오류가 보인다. 《여도》에는 초도진 뿐만 아니라 여러 진의 표시에서 오류가 나타나고 있으며, 《광여도》에는 이러한 오류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 비해서 내용적으로 가장 두두러진 특징은 앞의 지도에서 강조된 대형산성이 본 지도에는 명칭만 기재될 정도로 중요한 정보로 취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조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이기봉)

  • 황해도 주기 (黃海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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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에는 총 24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효종 3년(1652)에 牛峰縣과 江陰縣을 합해 金川으로 만들면서 23개로 줄어들었다. 황해도의 각 군현 지도가 그림 지도의 형식을 취한 것임에 비해 본 지도는 거리와 방향이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각 군현의 지도는 전체적으로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道 전체를 그린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것과는 전혀 다르며,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다. 다만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에서는 평안도, 강원도, 경기도 등 경계를 맞대고 있는 부분을 바다와 동일하게 처리했음에 반해 본 지도에서는 서로 육지로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에 있던 도로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어  본 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에 수록된 내용 중 監營이 있는 해주는 황색의 큰 원으로, 일반 군현은 노란색의 작은 원으로 구분하여 주었다. 군사 기지인 鎭堡는 가로 또는 세로의 분홍색 직사각형으로 표현하였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 강죄되어 구분된 黃州의 兵營이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왼쪽 위의 椒島에도 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를 빼먹은 오류가 보인다. 《여도》에는 초도진 뿐만 아니라 여러 진의 표시에서 오류가 나타나고 있으며, 《광여도》에는 이러한 오류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 비해서 내용적으로 가장 두두러진 특징은 앞의 지도에서 강조된 대형산성이 본 지도에는 명칭만 기재될 정도로 중요한 정보로 취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조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이기봉)

  • 황해도·평안도 총론 (黃海道·平安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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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황해도·평안도 총론 (黃海道·平安道 總論)1면입니다.

  • 황해도·평안도 총론 (黃海道·平安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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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황해도·평안도 총론 (黃海道·平安道 總論)2면입니다.

  • 개령현 (開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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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김천시에 포함된 지역으로 개령면의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중심부였다.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아포읍, 남면, 감문면의 일부, 농소면의 일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서쪽의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며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감천(감곡천)이다.지도에 표시된 감천이 현재 하천명으로 여전히 사용된다. 지도의 왼쪽이 상류, 오른쪽이 하류쪽이다. 감천은 동북쪽으로 흘러 선산 앞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동국여지승람에 감문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는데 현재의 개령면 덕촌리의 취적봉에 해당한다. 읍치 중심부 군기고 뒤쪽에 봉대라고 적힌 산이다. 읍치에는 가장 큰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대부분의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향교를 독립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치와 같은 형국 속에 묘사하였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읍치 북쪽에 성황산만 표기되었다. 읍치 오른쪽에 동락정이 그려졌는데 백성과 함께 同樂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근처의 산이 柳山이다. 유산에는 甘文國 때의 궁궐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감천 남쪽에 덕림서원이 보이는데 1677년(숙종 3)에 사액받은 곳으로 김종직, 정경세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 뒤쪽의 사찰은 지금 계림사라는 이름으로 취적봉 아래에 남아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아포면이 지금의 아포읍이 되었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의 감천변 을 따라 난 길은 현재 910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감천 남쪽에는 경부 고속도로가 나 있어 아포읍을 지나 구미로 연결된다.(이현군)

  • 강진현 (康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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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지명은 조선 태종대에 道康縣과 耽津縣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전라남도 강진군에 해당하며 남쪽의 섬들은 현재는 완도군에 포함되는 곳이다. 지도에 객사를 갖춘 두 개의 성이 보이는데 아래쪽은 강진 읍성이며 위쪽은 兵馬節度使營이다. 위쪽에 兵營이라고 줄여서 적었다. 현재의 병영면에 위치한다. 그 오른쪽 위에 수인사가 표시되었는데 장흥군 유치면과의 경계에 있는 561.2m의 수인산 아래 있는 것이다. 이곳이 장흥부의 진산이다. 왼쪽 위 염암과의 경계 지점에 표시된 무위사는 월출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道詵國師가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국보 13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보물이 소장되었다. 읍치 지역은 현재 지명으로도 과거 읍성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강진읍의 동성리, 서성리, 남성리 일대에 해당하며 향교는 성밖에 그려졌는데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성 동쪽의 보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성 남쪽의 하천은 옛 이름을 사용하여 탐진강으로 불린다. 읍치 서남쪽의 만덕사는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사찰로 현재는 백련사로 불린다. 근처에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다산 초당이 사적 107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지도 남쪽 두 개의 성곽은 鎭이 있던 곳이다. 가리포진이 표시된 섬은 완도이며 신라 말기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유명한 곳이다. 신지도는 남쪽 해안이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고금도는 이순신 장군이 이곳으로 진을 옮겼다고 전해지며 현재 고금도 동해안에 이충무공유적지가 남아있다.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가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신지도, 고금도, 조약도는 한 때 목장이 있었던 섬이다.(이현군)

  • 江界府 (江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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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界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자강도 강계시, 만포시, 시중군, 전천군, 장강군, 성간군, 용림군, 위원군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강계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지도의 상단에 그리고 있는 반면에, 본 지도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강계부는 세조 때 지도의 위쪽에 있는 四郡을 폐하고 주민을 이 고을로 옮기면서 평안도 최북단의 고을이 되었다. 최전방에 있는 고을의 성격에 맞도록 압록강변과 산줄기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는 많은 鎭과 烽燧, 院, 도로의 표시가 간결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읍성과 滿浦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狄踰岺은 남쪽 희천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고, 왼쪽의 麻田嶺과 梨嶺은 四郡 지역으로부터 적이 쳐들어 올 경우에 통과해야 하는 要衝地로서 모두 關門이 설치되어 있다. 압록강에 쓰여있는 八十六把에서 一百八巴까지는 모두 강계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강계 땅에 있는 把守를 순서대로 써놓은 것이다. 한편 만포진 건너편에 표시된 五國城은 金나라(1115-1234)의 초기 도읍지였다고 하며 그 옆에 있다는 황제묘도 함께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다만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衙舍 건물 하나만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客舍, 倉, 鄕校 등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이는 《광여도》와 거의 일치한다. (양윤정)

  • 간성군 (杆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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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중부에 있었던 간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간성군은 지금의 고성군 간성읍·현내면·거진읍·죽왕면·토성면과 속초시의 영랑호 주변에 해당된다. 해방이후 3·8선 이북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수복된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성곽(둘레240步)과 함께 객사, 아사, 영월루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지금의 간성읍 하리 일대이다. 鎭山은 읍치 서남 방향에 있는 麻耆山이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에 白頭大幹을 그리고, 뻗어 내린 산줄기에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북측 상단에 현내면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배봉천으로 보인다. 읍치의 북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천이며, 남쪽으로는 지금의 남천이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간정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청간천은 매우 작은 규모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으며, 화진포도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간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로부터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인제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에는 珍富嶺, 屹里嶺, 石破嶺, 彌恃嶺 등 많은 고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주기에는 이들 길이 매우 험준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안으로는 북으로 고성, 남으로 양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역이 비교적 많아 明波驛, 雲根驛, 竹泡驛, 元岩驛, 淸澗驛 등 5곳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00戶, 田 343結35負1束, 畓 459結11負9束로 기재되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가평군 주기 (嘉平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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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군은 설악면을 제외한 가평군 전체와 남양주시 수동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가평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왼쪽의 東에서 흘러나오는 昭陽江下流가 현재의 북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가평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 다른 측면이 있다. 일단 지도 명칭에서 嘉平郡은 加平郡의 오기로서 지도 필사자가 옛이름인 嘉平과 헷갈린 것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 위의 도로와 산줄기의 표현 양식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의 유입 방향인 서쪽을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필사 시기에 맞게 주기 내용으로 바꾸고, 지도의 전체적인 방향만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 역시 남쪽을 위로 향해 그리고 주기가 같은 점은 본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있던 南面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도 없는데, 주기에는 남면이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나 같은 계통에서 범한 오류를 뒤의 2개 지도가 수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뒤의 2개 지도에서 산줄기의 표현 양식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고, 도로가 없으며, 일부 지명이 달라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결성현 주기 (結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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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현은 홍성군의 결성면, 서부면, 구항면, 은하면, 일부를 제외한 광천읍에 걸쳐 있엇으며, 읍치는 결성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금리천으로, 그 위쪽의 하천은 청굉천으로 불리고 있다. 두 하천 모두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온 곳의 연장선 위에 있어 바닷배의 출입이 자주 있었던 곳이다. 특히 청굉천에 있는 광천은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포구였으며, 현재도 하구언에 축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젓갈 등으로 유명한 곳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결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결성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와 본 지도와의 차이점을 첨지로 붙여 놓았다. 위쪽의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을, 아래쪽에는 면의 명칭이 다른 것을 적어놓았다. 아래쪽의 첨지에 의하면 본 지도에 있는 合西面이 備圖에는 없으며, 반대로 備圖에는 상서면과 하서면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합서면이 2개로 분리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원래 2개였던 것을 합서면으로 표현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첨가된 지명을 제외하고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으로는 읍치 오른쪽의 風流島가 있다. 《여지도》에는 풍류도가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광여도》에는 빠져 있어 본 지도와 《광여도》의 지도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타 읍치 서쪽의 船泊處는 결성현에서 관할하는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다.(이기봉)

  • 개령현 주기 (開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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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김천시에 포함된 지역으로 개령면의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중심부였다.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아포읍, 남면, 감문면의 일부, 농소면의 일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서쪽의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며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감천(감곡천)이다.지도에 표시된 감천이 현재 하천명으로 여전히 사용된다. 지도의 왼쪽이 상류, 오른쪽이 하류쪽이다. 감천은 동북쪽으로 흘러 선산 앞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동국여지승람에 감문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는데 현재의 개령면 덕촌리의 취적봉에 해당한다. 읍치 중심부 군기고 뒤쪽에 봉대라고 적힌 산이다. 읍치에는 가장 큰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대부분의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향교를 독립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치와 같은 형국 속에 묘사하였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읍치 북쪽에 성황산만 표기되었다. 읍치 오른쪽에 동락정이 그려졌는데 백성과 함께 同樂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근처의 산이 柳山이다. 유산에는 甘文國 때의 궁궐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감천 남쪽에 덕림서원이 보이는데 1677년(숙종 3)에 사액받은 곳으로 김종직, 정경세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 뒤쪽의 사찰은 지금 계림사라는 이름으로 취적봉 아래에 남아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아포면이 지금의 아포읍이 되었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의 감천변 을 따라 난 길은 현재 910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감천 남쪽에는 경부 고속도로가 나 있어 아포읍을 지나 구미로 연결된다.(이현군)

  • 강진현 주기 (康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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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지명은 조선 태종대에 道康縣과 耽津縣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전라남도 강진군에 해당하며 남쪽의 섬들은 현재는 완도군에 포함되는 곳이다. 지도에 객사를 갖춘 두 개의 성이 보이는데 아래쪽은 강진 읍성이며 위쪽은 兵馬節度使營이다. 위쪽에 兵營이라고 줄여서 적었다. 현재의 병영면에 위치한다. 그 오른쪽 위에 수인사가 표시되었는데 장흥군 유치면과의 경계에 있는 561.2m의 수인산 아래 있는 것이다. 이곳이 장흥부의 진산이다. 왼쪽 위 염암과의 경계 지점에 표시된 무위사는 월출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道詵國師가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국보 13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보물이 소장되었다. 읍치 지역은 현재 지명으로도 과거 읍성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강진읍의 동성리, 서성리, 남성리 일대에 해당하며 향교는 성밖에 그려졌는데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성 동쪽의 보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성 남쪽의 하천은 옛 이름을 사용하여 탐진강으로 불린다. 읍치 서남쪽의 만덕사는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사찰로 현재는 백련사로 불린다. 근처에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다산 초당이 사적 107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지도 남쪽 두 개의 성곽은 鎭이 있던 곳이다. 가리포진이 표시된 섬은 완도이며 신라 말기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유명한 곳이다. 신지도는 남쪽 해안이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고금도는 이순신 장군이 이곳으로 진을 옮겼다고 전해지며 현재 고금도 동해안에 이충무공유적지가 남아있다.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가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신지도, 고금도, 조약도는 한 때 목장이 있었던 섬이다.(이현군)

  • 江界府 주기 (江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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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界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자강도 강계시, 만포시, 시중군, 전천군, 장강군, 성간군, 용림군, 위원군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강계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지도의 상단에 그리고 있는 반면에, 본 지도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강계부는 세조 때 지도의 위쪽에 있는 四郡을 폐하고 주민을 이 고을로 옮기면서 평안도 최북단의 고을이 되었다. 최전방에 있는 고을의 성격에 맞도록 압록강변과 산줄기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는 많은 鎭과 烽燧, 院, 도로의 표시가 간결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읍성과 滿浦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狄踰岺은 남쪽 희천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고, 왼쪽의 麻田嶺과 梨嶺은 四郡 지역으로부터 적이 쳐들어 올 경우에 통과해야 하는 要衝地로서 모두 關門이 설치되어 있다. 압록강에 쓰여있는 八十六把에서 一百八巴까지는 모두 강계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강계 땅에 있는 把守를 순서대로 써놓은 것이다. 한편 만포진 건너편에 표시된 五國城은 金나라(1115-1234)의 초기 도읍지였다고 하며 그 옆에 있다는 황제묘도 함께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다만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衙舍 건물 하나만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客舍, 倉, 鄕校 등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이는 《광여도》와 거의 일치한다. (양윤정)

  • 간성군 주기 (杆城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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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중부에 있었던 간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간성군은 지금의 고성군 간성읍·현내면·거진읍·죽왕면·토성면과 속초시의 영랑호 주변에 해당된다. 해방이후 3·8선 이북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수복된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성곽(둘레240步)과 함께 객사, 아사, 영월루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지금의 간성읍 하리 일대이다. 鎭山은 읍치 서남 방향에 있는 麻耆山이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에 白頭大幹을 그리고, 뻗어 내린 산줄기에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북측 상단에 현내면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배봉천으로 보인다. 읍치의 북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천이며, 남쪽으로는 지금의 남천이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간정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청간천은 매우 작은 규모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으며, 화진포도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간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로부터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인제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에는 珍富嶺, 屹里嶺, 石破嶺, 彌恃嶺 등 많은 고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주기에는 이들 길이 매우 험준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안으로는 북으로 고성, 남으로 양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역이 비교적 많아 明波驛, 雲根驛, 竹泡驛, 元岩驛, 淸澗驛 등 5곳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00戶, 田 343結35負1束, 畓 459結11負9束로 기재되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강화부 (江華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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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강화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1627년(인조 5)에 都護府에서 留守府로 될 정도로 수도 방위에 가장 중요한 요해처로 인식되던 고을이었다. 지도에도 이러한 요해처를 잘 보여주듯이 강화읍성과 정족산성, 문수산성, 鎭堡를 비롯하여 해안가에 쌓은 외성 등 군사적 정보가 특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진보의 경우 종3품의 僉使가 파견된 경우 鎭으로, 정4품의 萬戶가 파견된 경우 戶로,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된 경우 別將으로 표시하여 구분해 주었다. 해안선과 섬의 모양 및 수록된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화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두 지도에는 본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육로와 수로에 대한 표시가 없어 본 지도가 이런 지도 계통의 원도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의 두 지도에는 육로와 수로가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것과 관계되어 적혀 있는 거리에 대한 문구는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앞의 두 지도가 본 지도와 비슷한 원도 계통에서 도로에 대한 표시만 생략하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는 강화부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아래에 교동부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군현의 그림지도에서는 주변 고을의 경우 아주 작고 방향만 알 수 있는 형태로 그리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수도인 한양의 방어에 이곳의 중요성이 컸기 때문에 비록 강화부지도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던 교동부까지 자세하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강화도와 교동도 이외의 섬에는 어느 고을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화부에 속한 경우 江華屬으로, 교동부에 속한 경우 水營屬으로 되어 있는데, 두 고을에 소속된 섬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밖에 밀물(潮進) 때는 바다가 되고 썰물(潮退) 때는 풀밭(草)이 된다는 간석지에 대한 표현도 몇 곳에 나타나고 있으며, 소금이 생산되던 塩盆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공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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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공면입니다.

  • 거제부 (巨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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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해당하며 현재의 거제시가 거제부의 관할구역이었다.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남해상의 섬 지역임을 이 지도로 확연히 알 수 있다. 지도 왼쪽의 오양역은 현재의 사등면 오량리에 있던 역원으로 그 왼쪽에 도로망 표시가 있다. 이곳이 현재 통영과 연결되는 거제대교가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에 옥포가 표시되었는데 그 오른쪽이 옥포만이 되며 현재 조선소가 있다. 지도 중앙부에 객사를 비롯한 읍치에 배치되는 건물이 그려졌다. 진산은 계룡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남쪽 5리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실제로 동상리의 북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객사 오른쪽에 표시되었다. 석축으로 된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읍치 북쪽에 고현성이 있는데 1711년(숙종 37)에 이 지도상의 위치(동상리 일대)로 옮기기 전의 중심부였다. 현재 고현성의 유적이 있으며 신현읍에 고현리라는 지명, 고현중학교, 고현고교가 있어 그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근처에 한국전쟁 당시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현재 거제시의 중심부는 거제부의 읍치가 아니라 고현성이 있던 지역이다. 남해 바다에 있는 섬이기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곳곳에 성이 있다. 일부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일본과 경계가 된다고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에는 한산도가 보이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에 등장하는 곳이다. 거제도 본섬에 부속된 여러 섬들을 아주 자세하게 그렸다.(이현군)

  • 고부군 (古阜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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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이 시작된 곳으로 유명한 고부군은 현재의 정읍시 고부면, 소성면, 영원면, 덕천면, 이평면, 정우면, 고창군 부안면 일부 지역, 부안군 백산면을 관할범위로 하였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백산면이 현재의 부안군 백산면이고 지도 왼쪽 아래에 표시된 부안면이 현재의 고창군 부안면이다. 지도 왼쪽에 표시된 읍치는 현재의 고부면 고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성곽, 객사 등의 건물, 남문이 그려졌다. 남문 앞의 도로는 현재의 710번 지방도로 그 오른쪽의 도로는 29번 국도의 경로와 유사하다. 읍치 동쪽에 표시된 두승산이 고부의 진산에 해당하는데 실제로는 읍치의 동남쪽에 있으며 현재의 고부면, 정읍시, 덕천면의 경계에 위치한 443.5m의 산이다. 옛날에는 산성이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었으나 지도에 산성을 그리지는 않았다. 그 아래에 표시된 㫌忠祠는 1657년(효종 8)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송상현, 신호, 김준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고부천이며 오른쪽은 정읍천이 되는데 북쪽으로 흘러 동진강을 통해 바다로 유입된다. 이평면에는 전봉준 장군 고택이 남아있으며 정읍천 서쪽 두승산 북쪽의 현재의 덕천면에는 향토현전적지가 사적 295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보물 309호로 지정된 천곡사지칠층석탑, 동죽서원, 도계서원 등이 이 지역에 있었으나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이현군)

  • 가산군 (嘉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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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嘉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운전군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가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가산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와 비교해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증가하였을 뿐 그 외의 지역의 지명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읍치의 정보는 《해동지도》 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여지도》와 다른 부분이 발견된다. 지도의 왼쪽 아래의 乫亍浦 부분으로 《여지도》에는 乫亍洞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같이 乫亍浦로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와의 차이점은 오른쪽의 ‘古城鎭安陵淸川江’ 부분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古城鎭’이 산맥 안쪽에 표시되어 있고, ‘安陵淸川江(안주의 청천강이란 뜻)’은 청천강변을 따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모두 붙여 기록하여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여지도》와 《광여도》도 마찬가지이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같이 산지의 모습이 ‘X’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나, 본 지도에는 두 개의 산지가 나란히 평행하여 그려져 있어 그 부분 또한 차이점이 있다. (양윤정)

  • 갑산부 (甲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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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의 최상류에 위치하였던 함경도 갑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군과 풍산군의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량강도의 보천군·혜산시·운흥군·갑산군·풍서군 전체와 삼지연군·삼수군·김형권군의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뒤쪽에 백두산과 天池를 실경으로 그렸고, 이곳 부근에서 발원하는 압록강의 갑입곡류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백두산의 동쪽으로는 두만강의 일부 유로가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갑산부 해제 참조). 갑산부를 둘러싼 산지의 모습이 이곳의 험준한 지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곳 산지에서 발원한 많은 하천들이 압록강으로 유입한다. 상류부에서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이영수, 가림천 등을 묘사하고 있다. 갑산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류는 남쪽의 太白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으로 지금의 허천강에 해당된다. 허천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2차 지류 중 가장 큰 유로는 지금의 황수원강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우안으로 합류하는 여러 하천은 운룡천, 회인천, 진동천 등이다. 읍치는 허천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3,003尺)과 함께 그렸으며 진산인 天鳳山에는 사찰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북청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주요 도로는 압록강과 두만강변을 따라 연결되는 도로로 惠山驛을 경유한다. 北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雲龍, 仁同, 鎭東驛 등을 경유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308戶, 田 1,333結93負로 기재되어 있고 畓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인구가 매우 희박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강화부 주기 (江華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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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강화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1627년(인조 5)에 都護府에서 留守府로 될 정도로 수도 방위에 가장 중요한 요해처로 인식되던 고을이었다. 지도에도 이러한 요해처를 잘 보여주듯이 강화읍성과 정족산성, 문수산성, 鎭堡를 비롯하여 해안가에 쌓은 외성 등 군사적 정보가 특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진보의 경우 종3품의 僉使가 파견된 경우 鎭으로, 정4품의 萬戶가 파견된 경우 戶로,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된 경우 別將으로 표시하여 구분해 주었다. 해안선과 섬의 모양 및 수록된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화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두 지도에는 본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육로와 수로에 대한 표시가 없어 본 지도가 이런 지도 계통의 원도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의 두 지도에는 육로와 수로가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것과 관계되어 적혀 있는 거리에 대한 문구는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앞의 두 지도가 본 지도와 비슷한 원도 계통에서 도로에 대한 표시만 생략하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는 강화부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아래에 교동부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군현의 그림지도에서는 주변 고을의 경우 아주 작고 방향만 알 수 있는 형태로 그리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수도인 한양의 방어에 이곳의 중요성이 컸기 때문에 비록 강화부지도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던 교동부까지 자세하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강화도와 교동도 이외의 섬에는 어느 고을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화부에 속한 경우 江華屬으로, 교동부에 속한 경우 水營屬으로 되어 있는데, 두 고을에 소속된 섬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밖에 밀물(潮進) 때는 바다가 되고 썰물(潮退) 때는 풀밭(草)이 된다는 간석지에 대한 표현도 몇 곳에 나타나고 있으며, 소금이 생산되던 塩盆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공주목 (公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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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목은 현재의 공주시 전체, 연기군의 금남면과 종촌리․송담리를 포함한 남면의 서남쪽,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복룡동․상대동을 포함한 북쪽과 도룡동․덕진동을 포함한 서쪽 지역, 서구에서 복수동을 포함한 북쪽과 갑천 서쪽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공주시내 반죽동 일대에 있었다. 오른쪽의 文義界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지도 위쪽에 표시된 성곽이 현재의 공산성이다. 공산성 오른쪽에는 금강의 명칭 유래가 된 錦江津이 표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공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아래쪽에 기록된 尼城界가 나머지 지도에는 尼山界로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앞쪽의 湖西圖에도 본 지도에서는 尼城으로 기록된 반면에 《해동지도》와 《여지도》에서는 尼山으로, 《광여도》에서는 魯城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볼 때 《광여도》는 尼山이 魯城으로 바뀐 1800년(정조 24) 이후에 필사되면서 본 지도의 니산은 원본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는 늦어도 尼山이 尼城으로 바뀌는 1776년(영조 52)과 1800년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늦어도 1700년대 전반기에 필사된 것임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고, 《여지도》는 본 지도와 호서도만으로 볼 때 1776년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公州라는 지명은 본 지도책의 다른 군현 지도의 경계 표시에서 公山으로 기재되는 경우가 많아 본 지도의 원본도 公山으로 불리던 시절에 제작되었다가 후에 지도의 이름만 公州로 바꾸어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읍치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本官으로 되어 있는 건물이 본 지도에는 本州로 바뀌어 있다. 본주 맞은편에 있는 宣化堂은 충청도 감영의 동헌에 해당되는 건물이다.(이기봉)

  • 거제부 주기 (巨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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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해당하며 현재의 거제시가 거제부의 관할구역이었다.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남해상의 섬 지역임을 이 지도로 확연히 알 수 있다. 지도 왼쪽의 오양역은 현재의 사등면 오량리에 있던 역원으로 그 왼쪽에 도로망 표시가 있다. 이곳이 현재 통영과 연결되는 거제대교가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에 옥포가 표시되었는데 그 오른쪽이 옥포만이 되며 현재 조선소가 있다. 지도 중앙부에 객사를 비롯한 읍치에 배치되는 건물이 그려졌다. 진산은 계룡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남쪽 5리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실제로 동상리의 북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객사 오른쪽에 표시되었다. 석축으로 된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읍치 북쪽에 고현성이 있는데 1711년(숙종 37)에 이 지도상의 위치(동상리 일대)로 옮기기 전의 중심부였다. 현재 고현성의 유적이 있으며 신현읍에 고현리라는 지명, 고현중학교, 고현고교가 있어 그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근처에 한국전쟁 당시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현재 거제시의 중심부는 거제부의 읍치가 아니라 고현성이 있던 지역이다. 남해 바다에 있는 섬이기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곳곳에 성이 있다. 일부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일본과 경계가 된다고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에는 한산도가 보이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에 등장하는 곳이다. 거제도 본섬에 부속된 여러 섬들을 아주 자세하게 그렸다.(이현군)

  • 고부군 주기 (古阜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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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이 시작된 곳으로 유명한 고부군은 현재의 정읍시 고부면, 소성면, 영원면, 덕천면, 이평면, 정우면, 고창군 부안면 일부 지역, 부안군 백산면을 관할범위로 하였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백산면이 현재의 부안군 백산면이고 지도 왼쪽 아래에 표시된 부안면이 현재의 고창군 부안면이다. 지도 왼쪽에 표시된 읍치는 현재의 고부면 고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성곽, 객사 등의 건물, 남문이 그려졌다. 남문 앞의 도로는 현재의 710번 지방도로 그 오른쪽의 도로는 29번 국도의 경로와 유사하다. 읍치 동쪽에 표시된 두승산이 고부의 진산에 해당하는데 실제로는 읍치의 동남쪽에 있으며 현재의 고부면, 정읍시, 덕천면의 경계에 위치한 443.5m의 산이다. 옛날에는 산성이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었으나 지도에 산성을 그리지는 않았다. 그 아래에 표시된 㫌忠祠는 1657년(효종 8)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송상현, 신호, 김준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고부천이며 오른쪽은 정읍천이 되는데 북쪽으로 흘러 동진강을 통해 바다로 유입된다. 이평면에는 전봉준 장군 고택이 남아있으며 정읍천 서쪽 두승산 북쪽의 현재의 덕천면에는 향토현전적지가 사적 295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보물 309호로 지정된 천곡사지칠층석탑, 동죽서원, 도계서원 등이 이 지역에 있었으나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이현군)

  • 가산군 주기 (嘉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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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嘉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운전군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가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가산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와 비교해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증가하였을 뿐 그 외의 지역의 지명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읍치의 정보는 《해동지도》 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여지도》와 다른 부분이 발견된다. 지도의 왼쪽 아래의 乫亍浦 부분으로 《여지도》에는 乫亍洞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같이 乫亍浦로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와의 차이점은 오른쪽의 ‘古城鎭安陵淸川江’ 부분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古城鎭’이 산맥 안쪽에 표시되어 있고, ‘安陵淸川江(안주의 청천강이란 뜻)’은 청천강변을 따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모두 붙여 기록하여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여지도》와 《광여도》도 마찬가지이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같이 산지의 모습이 ‘X’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나, 본 지도에는 두 개의 산지가 나란히 평행하여 그려져 있어 그 부분 또한 차이점이 있다. (양윤정)

  • 갑산부 주기 (甲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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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의 최상류에 위치하였던 함경도 갑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군과 풍산군의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량강도의 보천군·혜산시·운흥군·갑산군·풍서군 전체와 삼지연군·삼수군·김형권군의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뒤쪽에 백두산과 天池를 실경으로 그렸고, 이곳 부근에서 발원하는 압록강의 갑입곡류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백두산의 동쪽으로는 두만강의 일부 유로가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갑산부 해제 참조). 갑산부를 둘러싼 산지의 모습이 이곳의 험준한 지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곳 산지에서 발원한 많은 하천들이 압록강으로 유입한다. 상류부에서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이영수, 가림천 등을 묘사하고 있다. 갑산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류는 남쪽의 太白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으로 지금의 허천강에 해당된다. 허천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2차 지류 중 가장 큰 유로는 지금의 황수원강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우안으로 합류하는 여러 하천은 운룡천, 회인천, 진동천 등이다. 읍치는 허천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3,003尺)과 함께 그렸으며 진산인 天鳳山에는 사찰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북청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주요 도로는 압록강과 두만강변을 따라 연결되는 도로로 惠山驛을 경유한다. 北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雲龍, 仁同, 鎭東驛 등을 경유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308戶, 田 1,333結93負로 기재되어 있고 畓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인구가 매우 희박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경기도 (京畿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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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전반적인 유로와 해안선 및 섬의 모습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경기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여지도》의 것보다 훨씬 자세하고 많으며, 《광여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면서 약간 자세한 편이다. 따라서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앞의 2개 지도보다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글시체나 채색 등의 측면에서는 앞의 2책보다 정교함이 훨씬 떨어지고 있어 관보다는 민간에서 필사하여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수록된 정보 중에 중요하게 여겨져서 기호가 사용된 것으로는 수도인 京都, 군현의 명칭, 군사기지인 鎭堡와 급한 군사 정보를 전달하는 烽燧, 牧場,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屬驛을 거느렸던 察訪驛 등이다. 군현의 명칭은 세로로 긴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광여도》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채색된 것과 달리 본 지도에서는 左․右道를 각각 노란색과 흰색으로 채색하여 구분하여 주었다. 開城府․江華․喬桐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일반 군현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개성부와 강화는 留守가 파견되어 수도에 준하는 지위로 인식되었고, 교동에는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찰방역․목장은 모두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을 기호로 사용하면서 각각 연분홍․연황색․노란색으로 채색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광여도》에서는 목장인 大阜와 찰방역인 重林驛을 진보와 동일한 색으로 표현하는 등의 오류를 범한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밖에 육지에는 산과 하천 등 자연지리적 정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인문지리적 정보로는 국가의 정통성과 관련된 陵, 지방 세력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書院(祠宇 포함), 기타 고지명 등이 있다. 바다의 섬에는 馬場, 訓屯(훈련원의 둔전)이라는 정보가 특별히 기입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공주목 주기 (公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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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목은 현재의 공주시 전체, 연기군의 금남면과 종촌리․송담리를 포함한 남면의 서남쪽,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복룡동․상대동을 포함한 북쪽과 도룡동․덕진동을 포함한 서쪽 지역, 서구에서 복수동을 포함한 북쪽과 갑천 서쪽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공주시내 반죽동 일대에 있었다. 오른쪽의 文義界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지도 위쪽에 표시된 성곽이 현재의 공산성이다. 공산성 오른쪽에는 금강의 명칭 유래가 된 錦江津이 표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공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아래쪽에 기록된 尼城界가 나머지 지도에는 尼山界로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앞쪽의 湖西圖에도 본 지도에서는 尼城으로 기록된 반면에 《해동지도》와 《여지도》에서는 尼山으로, 《광여도》에서는 魯城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볼 때 《광여도》는 尼山이 魯城으로 바뀐 1800년(정조 24) 이후에 필사되면서 본 지도의 니산은 원본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는 늦어도 尼山이 尼城으로 바뀌는 1776년(영조 52)과 1800년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늦어도 1700년대 전반기에 필사된 것임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고, 《여지도》는 본 지도와 호서도만으로 볼 때 1776년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公州라는 지명은 본 지도책의 다른 군현 지도의 경계 표시에서 公山으로 기재되는 경우가 많아 본 지도의 원본도 公山으로 불리던 시절에 제작되었다가 후에 지도의 이름만 公州로 바꾸어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읍치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本官으로 되어 있는 건물이 본 지도에는 本州로 바뀌어 있다. 본주 맞은편에 있는 宣化堂은 충청도 감영의 동헌에 해당되는 건물이다.(이기봉)

  • 거창현 (居昌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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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는 거창군으로 등장하며 광여도에는 거창부로 나오는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지도이다. 삼가현에 속하던 신원면과 안의현에 속하였던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을 제외한 지역이 관할구역이었다.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 일대에 해당한다.. 속현으로 가조현이 있었는데 현재의 거창군 가조면은 그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지도에서 가북면, 가동면, 가남면 등이 옛 가조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지도 오른쪽의 현창도 가조현의 현창에 해당하는 것이다. 서남쪽의 신창이 거창현의 현창으로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위천천으로 동쪽의 황강천과 합류하여 남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황강천은 남쪽의 합천군 대병면에 합천댐이 건설되어 이 지도 오른쪽 아래 지역은 일부 수몰되었다. 읍치 북동쪽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가야산으로 연결되는 경로에 속한다. 진산은 건흥산으로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그 아래에는 건흥암이 자리하고 있다. 건흥산의 맥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읍치 뒤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읍성은 보이지 않고 객사를 가장 크게 중앙부에 그렸다. 읍치 앞의 다리는 현재의 거창교 부근에 있던 것이다. 역원으로는 성초역, 무계역, 성기역 등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거창군 동남쪽으로 88고속도로가 지난다. 이 밖에 봉수대, 서원 등이 표현되었으나 그 이름을 적지는 않았다.(이현군)

  • 고산현 (高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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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완주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고산면, 화산면, 경천면, 동상면, 운주면, 비봉면을 관할하였다. 과거에 雲梯廢縣이 있었는데 화산면 운산리, 운제리, 운곡리 등의 지명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산현의 읍치는 고산면 읍내리에 해당한다. 읍치는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고산천으로 불리며 남쪽으로 흘러 만경강에 합류된다. 읍치 옆으로 고산천과 평행하게 난 도로는 17번 국도로 확장되었다. 지도 왼쪽 위의 대둔산은 운주면과 논산시 벌곡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높이 877.7m의 산으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실제로는 읍치 동북쪽에 해당하지만 이 산이 고을 뒤쪽에 자리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위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산줄기는 맥으로 연결되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연이어 그렸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그리고 향교는 별도의 산줄기 아래에 그렸다. 현의 동쪽에 龍淵이 있어 가뭄 때 비를 빌면 효험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지만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현재 동상면에 대아저수지, 동상저수지가 있고 화산면에 경천저수지가 있다. 북쪽의 용계원은 운주면 금당리 금당초등학교 인근에 있던 역원이며 근처에 용계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화산면 화평리의 고성산에도 古城이 있었다. 용계원 아래 화암사는 경천면에 있는 사찰로 우화루가 보물 662호로, 극락전이 보물 663호로 지정된 곳이다. (이현군)

  • 강동현 (江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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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東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승호구역과 강동군 북부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1136년(고려 인종 14) 西京에 속했던 仍乙舍鄕, 班石村, 朴達串村, 馬灘村을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동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나타나기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동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비슷한 4종의 지도 가운데 다만 《여지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표현에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왼쪽 위의 慈山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平壤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위쪽 가운데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비류강이고, 아래쪽의 三登界에서 들어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비류강, 남강의 규모는 실제로 거의 비슷하다. 《해동지도》에도 세 개의 하천은 다른 지류에 비해 훨씬 굵게 표시하여 실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여지도》 지도에서는 남강을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다. 이 부분 외에도 高泉面 부근, 水晶川 역시 《여지도》에 그려진 모습으로는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다. 高泉面 연안에 위치한 落岩은 둘레가 약 1km로 강 쪽으로 절벽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바위가 높은 곳은 100m에 이른다. 넓은 평지 끝 강가에 우뚝 솟아 있어서 상류에서 떨어져 흘러 왔다는 뜻으로 落來岩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또는 바위 전체의 모습이 거북과 같아 龜岩으로 통칭되고 있다. 거북의 눈에 해당하는 위치에 淸風穴이라는 큰 암굴도 있다. 古城과 인접해 있는 閱波亭은 본래 西江院이라 불렸으나 中宗의 駙馬인 宋宴이 열파정이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亭의 모양만 그려져 있다. 또한 《여지도》에는 반대로 지명만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江東縣의 선비들이 曺好益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다. (양윤정)

  • 강릉부 (江陵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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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강릉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강릉부는 현재 강릉시 용강동, 교동, 임당동, 명주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군의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도암면, 대화면, 방림면, 홍천군의 내면에 걸쳐 지금보다 매우 넓은 지역에 해당된다. 실제로는 동서로 긴 형태이나 『해동지도』등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남북이 긴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산지 표현 방법, 남대천, 내린천 등의 하천 표현 방법 및 성내동에 위치하였던 성곽(둘레 ; 3,782尺)과 읍치의 묘사, 수록 지명 등은 다른 지도와 유사하다.(지도 수록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강릉부 해제 참조) 해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에서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연곡천을,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안인역 부근에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염곡천을, 그 아래 남쪽의 하천은 주수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남류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하천은 남한강 상류의 여러 지류를 묘사한 것이다. 교통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나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한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읍성 남문에서 북쪽으로 대창역을 거쳐 양양부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는 안인역을 거쳐 삼척으로 연결되는 해안 도로가 있다. 내륙쪽으로는 도로는 월정산에서 구산역, 목계역을 거쳐 대관령을 지나 봉평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목계역에서 고단역을 거쳐 임계면을 거쳐 횡계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쪽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연곡면을 거쳐 오대산 사고를 거쳐 봉평창으로 연결된다. 본 지도에서 묘사되어 있는 월정산-송담서원, 연곡면-하동면과의 도로가 『여지도』에서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25戶, 田 791結65負, 畓 791結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경기도 주기 (京畿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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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전반적인 유로와 해안선 및 섬의 모습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경기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여지도》의 것보다 훨씬 자세하고 많으며, 《광여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면서 약간 자세한 편이다. 따라서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앞의 2개 지도보다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글시체나 채색 등의 측면에서는 앞의 2책보다 정교함이 훨씬 떨어지고 있어 관보다는 민간에서 필사하여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수록된 정보 중에 중요하게 여겨져서 기호가 사용된 것으로는 수도인 京都, 군현의 명칭, 군사기지인 鎭堡와 급한 군사 정보를 전달하는 烽燧, 牧場,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屬驛을 거느렸던 察訪驛 등이다. 군현의 명칭은 세로로 긴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광여도》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채색된 것과 달리 본 지도에서는 左․右道를 각각 노란색과 흰색으로 채색하여 구분하여 주었다. 開城府․江華․喬桐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일반 군현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개성부와 강화는 留守가 파견되어 수도에 준하는 지위로 인식되었고, 교동에는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찰방역․목장은 모두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을 기호로 사용하면서 각각 연분홍․연황색․노란색으로 채색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광여도》에서는 목장인 大阜와 찰방역인 重林驛을 진보와 동일한 색으로 표현하는 등의 오류를 범한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밖에 육지에는 산과 하천 등 자연지리적 정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인문지리적 정보로는 국가의 정통성과 관련된 陵, 지방 세력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書院(祠宇 포함), 기타 고지명 등이 있다. 바다의 섬에는 馬場, 訓屯(훈련원의 둔전)이라는 정보가 특별히 기입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괴산군 (槐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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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군은 현재의 괴산군 괴산읍, 소수면, 사리면, 문광면, 칠성면, 감물면의 오창리, 불정면의 신흥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괴산읍의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서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東上面 방면에서 흘러와 오른쪽 梨灘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달천강 본류이고, 延豊界에서 흘러와 달천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쌍천이다. 두 하천 모두 다른 군현의 경계 너머에서 흘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쉽지 않게 그렸다. 다만 다른 군현에서 하천이 흘러 들어오는 경우에는 산줄기를 연결시켜 그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괴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첨지에 붙어 있는 지명이 더 수록되어 있는 차이가 있고, 그 이외에는 지명의 한자 1-2 글자가 바뀌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자가 다른 대표적인 지명이 읍치 위쪽의 目所山으로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는 月所山으로, 《여지도》에는 日所山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거창현 주기 (居昌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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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는 거창군으로 등장하며 광여도에는 거창부로 나오는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지도이다. 삼가현에 속하던 신원면과 안의현에 속하였던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을 제외한 지역이 관할구역이었다.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 일대에 해당한다.. 속현으로 가조현이 있었는데 현재의 거창군 가조면은 그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지도에서 가북면, 가동면, 가남면 등이 옛 가조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지도 오른쪽의 현창도 가조현의 현창에 해당하는 것이다. 서남쪽의 신창이 거창현의 현창으로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위천천으로 동쪽의 황강천과 합류하여 남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황강천은 남쪽의 합천군 대병면에 합천댐이 건설되어 이 지도 오른쪽 아래 지역은 일부 수몰되었다. 읍치 북동쪽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가야산으로 연결되는 경로에 속한다. 진산은 건흥산으로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그 아래에는 건흥암이 자리하고 있다. 건흥산의 맥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읍치 뒤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읍성은 보이지 않고 객사를 가장 크게 중앙부에 그렸다. 읍치 앞의 다리는 현재의 거창교 부근에 있던 것이다. 역원으로는 성초역, 무계역, 성기역 등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거창군 동남쪽으로 88고속도로가 지난다. 이 밖에 봉수대, 서원 등이 표현되었으나 그 이름을 적지는 않았다.(이현군)

  • 고산현 주기 (高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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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완주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고산면, 화산면, 경천면, 동상면, 운주면, 비봉면을 관할하였다. 과거에 雲梯廢縣이 있었는데 화산면 운산리, 운제리, 운곡리 등의 지명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산현의 읍치는 고산면 읍내리에 해당한다. 읍치는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고산천으로 불리며 남쪽으로 흘러 만경강에 합류된다. 읍치 옆으로 고산천과 평행하게 난 도로는 17번 국도로 확장되었다. 지도 왼쪽 위의 대둔산은 운주면과 논산시 벌곡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높이 877.7m의 산으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실제로는 읍치 동북쪽에 해당하지만 이 산이 고을 뒤쪽에 자리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위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산줄기는 맥으로 연결되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연이어 그렸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그리고 향교는 별도의 산줄기 아래에 그렸다. 현의 동쪽에 龍淵이 있어 가뭄 때 비를 빌면 효험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지만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현재 동상면에 대아저수지, 동상저수지가 있고 화산면에 경천저수지가 있다. 북쪽의 용계원은 운주면 금당리 금당초등학교 인근에 있던 역원이며 근처에 용계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화산면 화평리의 고성산에도 古城이 있었다. 용계원 아래 화암사는 경천면에 있는 사찰로 우화루가 보물 662호로, 극락전이 보물 663호로 지정된 곳이다. (이현군)

  • 강동현 주기 (江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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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東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승호구역과 강동군 북부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1136년(고려 인종 14) 西京에 속했던 仍乙舍鄕, 班石村, 朴達串村, 馬灘村을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동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나타나기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동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비슷한 4종의 지도 가운데 다만 《여지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표현에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왼쪽 위의 慈山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平壤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위쪽 가운데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비류강이고, 아래쪽의 三登界에서 들어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비류강, 남강의 규모는 실제로 거의 비슷하다. 《해동지도》에도 세 개의 하천은 다른 지류에 비해 훨씬 굵게 표시하여 실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여지도》 지도에서는 남강을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다. 이 부분 외에도 高泉面 부근, 水晶川 역시 《여지도》에 그려진 모습으로는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다. 高泉面 연안에 위치한 落岩은 둘레가 약 1km로 강 쪽으로 절벽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바위가 높은 곳은 100m에 이른다. 넓은 평지 끝 강가에 우뚝 솟아 있어서 상류에서 떨어져 흘러 왔다는 뜻으로 落來岩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또는 바위 전체의 모습이 거북과 같아 龜岩으로 통칭되고 있다. 거북의 눈에 해당하는 위치에 淸風穴이라는 큰 암굴도 있다. 古城과 인접해 있는 閱波亭은 본래 西江院이라 불렸으나 中宗의 駙馬인 宋宴이 열파정이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亭의 모양만 그려져 있다. 또한 《여지도》에는 반대로 지명만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江東縣의 선비들이 曺好益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다. (양윤정)

  • 강릉부 주기 (江陵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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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강릉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강릉부는 현재 강릉시 용강동, 교동, 임당동, 명주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군의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도암면, 대화면, 방림면, 홍천군의 내면에 걸쳐 지금보다 매우 넓은 지역에 해당된다. 실제로는 동서로 긴 형태이나 『해동지도』등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남북이 긴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산지 표현 방법, 남대천, 내린천 등의 하천 표현 방법 및 성내동에 위치하였던 성곽(둘레 ; 3,782尺)과 읍치의 묘사, 수록 지명 등은 다른 지도와 유사하다.(지도 수록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강릉부 해제 참조) 해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에서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연곡천을,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안인역 부근에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염곡천을, 그 아래 남쪽의 하천은 주수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남류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하천은 남한강 상류의 여러 지류를 묘사한 것이다. 교통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나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한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읍성 남문에서 북쪽으로 대창역을 거쳐 양양부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는 안인역을 거쳐 삼척으로 연결되는 해안 도로가 있다. 내륙쪽으로는 도로는 월정산에서 구산역, 목계역을 거쳐 대관령을 지나 봉평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목계역에서 고단역을 거쳐 임계면을 거쳐 횡계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쪽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연곡면을 거쳐 오대산 사고를 거쳐 봉평창으로 연결된다. 본 지도에서 묘사되어 있는 월정산-송담서원, 연곡면-하동면과의 도로가 『여지도』에서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25戶, 田 791結65負, 畓 791結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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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1면입니다.

  • 괴산군 주기 (槐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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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군은 현재의 괴산군 괴산읍, 소수면, 사리면, 문광면, 칠성면, 감물면의 오창리, 불정면의 신흥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괴산읍의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서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東上面 방면에서 흘러와 오른쪽 梨灘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달천강 본류이고, 延豊界에서 흘러와 달천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쌍천이다. 두 하천 모두 다른 군현의 경계 너머에서 흘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쉽지 않게 그렸다. 다만 다른 군현에서 하천이 흘러 들어오는 경우에는 산줄기를 연결시켜 그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괴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첨지에 붙어 있는 지명이 더 수록되어 있는 차이가 있고, 그 이외에는 지명의 한자 1-2 글자가 바뀌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자가 다른 대표적인 지명이 읍치 위쪽의 目所山으로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는 月所山으로, 《여지도》에는 日所山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경산군 (慶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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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근원이 된 지역으로 경산시내가 읍치가 된다. 관할 범위는 경산시내, 남천면, 압량면 일부와 대구광역시의 동구 일부, 수성구 일부지역이다. 광여도에서는 경산현으로 되어 있다. 금호강이 군의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데 이 지도는 금호강이 아래쪽에 그려져 있고 읍성 안의 건물이 모두 지도 위를 향하도록 그렸다. 객사와 옥 등이 그려졌다. 남쪽이 위가 되게 그린 지도이다. 금호강을 아래에 배치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산의 모든 물이 금호강에 유입된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성문의 방향을 보아도 북쪽이 아래가 되도록 그린 것이 확인된다. 동문, 서문, 남문을 그렸다. 북문은 보이지 않고 외부와 연결되는 주요도로는 동문과 남문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도로는 하천의 유로와 평행하게 만들어졌다. 교통로인 고개를 표시하고 이름을 붙였다. 남쪽의 마암산이 진산이 된다. 북쪽에 금호강이 흐르기에 자연스럽게 남쪽에 진산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읍치 서쪽에 옥산를 그렸는데 현재의 경산시내 옥산동이다. 읍성 밖의 향교를 마치 성곽처럼 보이게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의 위치도 표시되었다. 대구의 동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아래쪽(북쪽)에 팔공산이 보인다.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으로 동화사 등 유명사찰과 가산산성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 존재하였던 압량역 등의 역원은 그리지 않았다. 이 밖에 서원, 봉대, 사찰 등이 그려졌는데 다른 지도에는 보이는 倉이 그려지지 않았다.(이현군)

  • 고창현 (高敞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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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이다. 현재의 고창군은 무장현, 흥덕현 등을 병합하여 1914년에 형성된 것이며 조선시대 고창현은 고창읍, 고수면, 아산면을 관할범위로 하였으며 읍치는 고창읍 읍내리에 해당한다. 지도를 통해 읍성이 주변 산줄기를 활용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은 북쪽에 하나만 그려지고 큰 바위들이 읍성에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향교는 읍성 밖에 그려졌는데 현재의 교촌리이다. 읍성과 향교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었다. 고창읍성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읍성 주변의 하천은 현재의 고창천이며 북쪽으로 흥덕으로 흘러 가서 곰소만으로 유입되는 경로상에 海門이 그려졌다. 해동지도에는 海門 북쪽에 壺岩이 그려졌다. 아산면 반암리에 있는 것이다. 진산은 동쪽의 반등산인데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간략하게 그린 지도라 지역의 정보를 많이 담지는 않았다. 지도 위쪽의 화시산은 아산면과 부안면의 경계에 위치한 403.2m 높이의 산으로 현재는 화실봉으로 불린다. 화시산 동쪽에 古城峯이라 일컫는 곳에는 西山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데 해동지도에는 오서면 왼쪽에 고성봉이 표시되었다. 고창읍 석정리에는 온천이 유명한데 향교의 동쪽에 해당한다. 고창읍의 서북쪽에는 고인돌인 지석묘가 남아 있다. 아산면 용계리에는 청자도요지가 있으며 그 남쪽의 운곡리에는 서원이 있었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은 그리지 않았다. (이현군)

  • 강령현 (康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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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령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동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강령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강령군의 강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강령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용적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보다 훨씬 조악한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지도 아래쪽에 洋中水路가 2개만 적혀 있고 수로의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洋中水路(또는 水路)가 4개나 기록되어 있고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왼쪽 巡威島 위쪽 섬에는 瓮津이라 적으려다가 만 瓮이라는 글자도 보이고 있으며, 읍치에는 객사와 창의 문자도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는 본 지도보다 정선되게 기록되어 있어 서로 필사 관계에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가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여 동일 계통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형태와 내용의 측면에서 본 지도나 《광여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지만 순위도를 비롯하여 상당 부분에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라고 볼 수 있으며,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 가까운 필사본이 《해동지도》와는 또 다른 계통으로 필사되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이기봉)

  • 강원도 (江原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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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전체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책의 제일 앞에 강원도와 함경도 역사지리를 수록한 면에 이어 군현별 지도의 앞머리에 삽입되었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감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강원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은 다른 회화식 지도책들과 유사하나 하계망의 표현이 상세하고 다른 지도에 없는 도로망이 그려진 것이 특이하다. 지도 우측에 동해를 그렸으며 해안선은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 복잡하게 표현되었다. 해안에 발달한 석호들을 상세하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섬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따로 표현하지 않았다. 鬱陵島와 于山島만 지명을 적어 위치를 간접적으로 묘사하였다. 산지는 백두대간이 강조되어 그려졌고 동쪽에는 흡곡, 통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 평해 등 9개 군현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서쪽에는 하천 유로와 함께 17개의 군현 위치를 표시하였다. 하천 유역은 세지역으로 나뉘고 그려져 있다. 이천, 안협, 평강, 금화, 철원은 임진강 상류 유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북한강 상류유역에 위치한 군현은 회양, 금성, 낭천, 양구, 홍청, 춘천, 인제 등이며 기린은 비월지로서 별도의 부호로 표현하였다. 남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군현으로 원주, 횡성, 영월, 평창, 정선 등 5개 군현을 표시하였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은 적색 실선으로 상세히 그려져 있다.(김기혁)

  •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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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2면입니다.

  • 남포현 (藍浦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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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현은 보령시의 남포면, 웅천읍, 주산면, 미산면, 성주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남포면의 읍내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남포 읍성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남포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좌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에서 흘러와 海倉 부근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하천이 현재의 웅천이다. 웅천은 현재의 부여군 외산면인 홍산현의 땅에서 흘러오는데, 본 지도에는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 이 부분의 산줄기가 연결된 것처럼 그려 하천의 유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였다. 북면 아래쪽에 그림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崔孤雲撰碑는현재 성주면의 성주사지에 있는 국보 8호의 백월보광탑비로서 신라말에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하나인 최치원의 글이 적혀 있다. 읍치 오른쪽 위에는 古邑基가 표시되어 있는데,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1872년 지방지도’의 남포현지도에는 고려말에 읍치가 옮겨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웅천읍 수부리와 평리 지역으로 지방 중심지의 이동 경향에 대한 이해에 좋은 사료가 될 수 있다. 기타 아래쪽의 船泊處는 남포현이 관할하고 있는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고, 海倉은 대동법 시행 이후 남포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곳이다.(이기봉)

  • 경산군 주기 (慶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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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근원이 된 지역으로 경산시내가 읍치가 된다. 관할 범위는 경산시내, 남천면, 압량면 일부와 대구광역시의 동구 일부, 수성구 일부지역이다. 광여도에서는 경산현으로 되어 있다. 금호강이 군의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데 이 지도는 금호강이 아래쪽에 그려져 있고 읍성 안의 건물이 모두 지도 위를 향하도록 그렸다. 객사와 옥 등이 그려졌다. 남쪽이 위가 되게 그린 지도이다. 금호강을 아래에 배치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산의 모든 물이 금호강에 유입된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성문의 방향을 보아도 북쪽이 아래가 되도록 그린 것이 확인된다. 동문, 서문, 남문을 그렸다. 북문은 보이지 않고 외부와 연결되는 주요도로는 동문과 남문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도로는 하천의 유로와 평행하게 만들어졌다. 교통로인 고개를 표시하고 이름을 붙였다. 남쪽의 마암산이 진산이 된다. 북쪽에 금호강이 흐르기에 자연스럽게 남쪽에 진산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읍치 서쪽에 옥산를 그렸는데 현재의 경산시내 옥산동이다. 읍성 밖의 향교를 마치 성곽처럼 보이게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의 위치도 표시되었다. 대구의 동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아래쪽(북쪽)에 팔공산이 보인다.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으로 동화사 등 유명사찰과 가산산성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 존재하였던 압량역 등의 역원은 그리지 않았다. 이 밖에 서원, 봉대, 사찰 등이 그려졌는데 다른 지도에는 보이는 倉이 그려지지 않았다.(이현군)

  • 고창현 주기 (高敞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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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이다. 현재의 고창군은 무장현, 흥덕현 등을 병합하여 1914년에 형성된 것이며 조선시대 고창현은 고창읍, 고수면, 아산면을 관할범위로 하였으며 읍치는 고창읍 읍내리에 해당한다. 지도를 통해 읍성이 주변 산줄기를 활용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은 북쪽에 하나만 그려지고 큰 바위들이 읍성에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향교는 읍성 밖에 그려졌는데 현재의 교촌리이다. 읍성과 향교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었다. 고창읍성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읍성 주변의 하천은 현재의 고창천이며 북쪽으로 흥덕으로 흘러 가서 곰소만으로 유입되는 경로상에 海門이 그려졌다. 해동지도에는 海門 북쪽에 壺岩이 그려졌다. 아산면 반암리에 있는 것이다. 진산은 동쪽의 반등산인데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간략하게 그린 지도라 지역의 정보를 많이 담지는 않았다. 지도 위쪽의 화시산은 아산면과 부안면의 경계에 위치한 403.2m 높이의 산으로 현재는 화실봉으로 불린다. 화시산 동쪽에 古城峯이라 일컫는 곳에는 西山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데 해동지도에는 오서면 왼쪽에 고성봉이 표시되었다. 고창읍 석정리에는 온천이 유명한데 향교의 동쪽에 해당한다. 고창읍의 서북쪽에는 고인돌인 지석묘가 남아 있다. 아산면 용계리에는 청자도요지가 있으며 그 남쪽의 운곡리에는 서원이 있었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은 그리지 않았다. (이현군)

  • 강령현 주기 (康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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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령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동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강령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강령군의 강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강령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용적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보다 훨씬 조악한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지도 아래쪽에 洋中水路가 2개만 적혀 있고 수로의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洋中水路(또는 水路)가 4개나 기록되어 있고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왼쪽 巡威島 위쪽 섬에는 瓮津이라 적으려다가 만 瓮이라는 글자도 보이고 있으며, 읍치에는 객사와 창의 문자도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는 본 지도보다 정선되게 기록되어 있어 서로 필사 관계에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가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여 동일 계통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형태와 내용의 측면에서 본 지도나 《광여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지만 순위도를 비롯하여 상당 부분에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라고 볼 수 있으며,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 가까운 필사본이 《해동지도》와는 또 다른 계통으로 필사되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이기봉)

  • 강원도 주기 (江原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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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전체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책의 제일 앞에 강원도와 함경도 역사지리를 수록한 면에 이어 군현별 지도의 앞머리에 삽입되었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감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강원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은 다른 회화식 지도책들과 유사하나 하계망의 표현이 상세하고 다른 지도에 없는 도로망이 그려진 것이 특이하다. 지도 우측에 동해를 그렸으며 해안선은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 복잡하게 표현되었다. 해안에 발달한 석호들을 상세하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섬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따로 표현하지 않았다. 鬱陵島와 于山島만 지명을 적어 위치를 간접적으로 묘사하였다. 산지는 백두대간이 강조되어 그려졌고 동쪽에는 흡곡, 통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 평해 등 9개 군현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서쪽에는 하천 유로와 함께 17개의 군현 위치를 표시하였다. 하천 유역은 세지역으로 나뉘고 그려져 있다. 이천, 안협, 평강, 금화, 철원은 임진강 상류 유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북한강 상류유역에 위치한 군현은 회양, 금성, 낭천, 양구, 홍청, 춘천, 인제 등이며 기린은 비월지로서 별도의 부호로 표현하였다. 남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군현으로 원주, 횡성, 영월, 평창, 정선 등 5개 군현을 표시하였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은 적색 실선으로 상세히 그려져 있다.(김기혁)

  • 경성 (京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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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를 그린 지도로서 都城과 城底十里를 하나의 지도에 그려넣었다. 산줄기와 하천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것과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하천의 표현 방식이 앞의 두 지도에 비해 간략화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일부 지명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보이고 있는데, 아래 왼쪽의 西北은 西江의 오기이다. 그리고 서강 오른쪽에는 앞의 두 지도에는 없는 栗島 등이 본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지도의 명칭이 《광여도》에는 都城圖로, 《여지도》에는 都城으로 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는 京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성이나 경성 모두 전통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였으며, 고유한 행정명칭으로는 漢城府라고 불렀다. 도성도는 조선에서 가장 많이 그려졌는데, 본 지도의 것은 다른 도성도에 비해 주변의 경관을 비롯하여 도성 안쪽의 정보도 간략한 편이다. 본 지도처럼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도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리고 정보가 적은 도성 밖을 상대적으로 작게 그리는 것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그림지도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상대적으로 많은 도성 안의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도성 안에 정보가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어 약간 의아한 느낌을 준다. 이런 경우 보통 도성 안을 따로 그린 지도가 첨부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아래쪽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가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며, 가장 오른쪽에 현재의 중랑천이 中梁浦로 기록되어 있다.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명칭을 포구나 나루 또는 진흙의 물가라는 뜻의 ‘浦’자를 써서 기록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량포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중량포는 실제로는 오른쪽 위의 양주에서 본류가 흘러오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알기 어렵게 그려놓았다. 도성 안쪽에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청계천이다.(이기봉)

  • 남포현 주기 (藍浦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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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현은 보령시의 남포면, 웅천읍, 주산면, 미산면, 성주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남포면의 읍내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남포 읍성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남포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좌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에서 흘러와 海倉 부근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하천이 현재의 웅천이다. 웅천은 현재의 부여군 외산면인 홍산현의 땅에서 흘러오는데, 본 지도에는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 이 부분의 산줄기가 연결된 것처럼 그려 하천의 유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였다. 북면 아래쪽에 그림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崔孤雲撰碑는현재 성주면의 성주사지에 있는 국보 8호의 백월보광탑비로서 신라말에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하나인 최치원의 글이 적혀 있다. 읍치 오른쪽 위에는 古邑基가 표시되어 있는데,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1872년 지방지도’의 남포현지도에는 고려말에 읍치가 옮겨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웅천읍 수부리와 평리 지역으로 지방 중심지의 이동 경향에 대한 이해에 좋은 사료가 될 수 있다. 기타 아래쪽의 船泊處는 남포현이 관할하고 있는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고, 海倉은 대동법 시행 이후 남포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곳이다.(이기봉)

  • 경상도 (慶尙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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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 경상도 부분의 처음에 나오는 지도로 경상도 전체를 그린 지도이다. 지승의 경상도 부분은 통영과 府 지역을 먼저 싣고 郡縣 지역을 그 다음에 배치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동해가 표시되었고 서쪽은 전라도 충청도, 북쪽은 강원도 충청도의 맞닿은 군현을 기록하였다. 현재 경상북도에 포함된 울릉도 독도는 표시되지 않았으며 남동쪽에 경상도의 섬 지역이 표시되었다. 대구 감영을 비롯하여 경상도의 부목군현을 표시하였다. 감영, 통영, 우병영, 좌수영 등 군사 중심지는 붉은 원 안에 표시하였고 부와 군현은 네모안에 그 지명을 기록하였다. 경상도의 주요 교통로는 육운으로 이 지도에서는 대구 감영을 중심으로 군현간의 연결망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역은 지도에 붉은 색으로 따로 표시하였다. 조령, 죽령 등 다른 도와 연결되는 고개를 표시하였다. 경상도 지역은 크게 낙동강 유역권으로 볼 수 있는데 상주, 선산, 비안 가운데 부분에 낙동강 지명이 보인다. 지도 오른쪽 위에 그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그 왼쪽에 태백산 史庫가 보인다. 태화강 등 낙동강에 합류하지 않는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태백산, 지리산 등 주요 산이 표시되었으며 山城의 이름과 위치가 표시되었다. 도산서원 등 여러 서원이 기록되었고, 경주의 불굴사, 합천의 해인사 등이 보인다. 남해안에는 해전으로 유명한 노량이 표시되었다. 지도의 주기에는 戶口, 田畓의 수량과 조세 관련 사항, 鎭營에 소속된 군사의 수 등을 기록해 놓았다.(이현군)

  • 곡성현 (谷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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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곡성군에서 곡성읍, 오곡면, 삼기면, 목사동면, 석곡면, 죽곡면을 관할한 조선시대 군현이다. 이 지도에 표시된 면 명칭이 현재에도 대부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곡성읍 읍내리 일대에 해당하는 읍치에는 성곽없이 건물이 그려졌고 산줄기를 달리하여 그린 향교는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곡성천이며 지도 아래쪽은 하천은 보성강으로 동쪽의 섬진강으로 유입된다. 동쪽으로 구례현과 마주하는 군현이다. 섬진강의 河中島를 그렸으며 보성강변에 정자가 보인다. 읍치 동북쪽 곡성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은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곡성천 남쪽의 통명산은 오곡면에 위치한 511.9m 높이의 산이다.읍치 남동쪽의 도림사는 국민관광지로 개방되었다. 그 아래 동악산은 현재 최악산으로 불리는 697m 높이의 산이다. 지도 왼쪽 아래의 대명산은 삼기면에 위치한 498.3m의 산이다. 주요 도로에 역원이 표시되었는데 남동쪽의 석곡원은 석곡면에 있었는데 호남고속국도 석곡 인터체인지 서쪽이다. 동쪽 아래의 압록원은 오곡면 압록리로 전라선 철도 압록역 서쪽이다. 근처에 압록 유원지, 진변 나루터 등이 있다. 지도 아래쪽의 태안사는 죽곡면 동남쪽 현재의 봉두산 아래에 위치한 사찰로 보물로 지정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안문성공영당은 성리학을 도입한 安珦을 모신 곳이고 그 아래 흥양사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을 모신 곳이다. (이현군)

  • 강서현 (江西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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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西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동북쪽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서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다소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서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강서현 모양과 본 지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읍치 부분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둘째,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닌 강서현의 모습을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쪽(서북)의 한룡면은 위쪽으로 더 튀어나가게 그려져 있어야 실제와 비슷하다. 또한 아래쪽의 보원면 밑은 아래쪽(남)으로 길게 뻗어 있어야 한다. 이런 오류는 강서현 동남쪽에 접해 있는 대동강 구간이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지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읍치 부분을 확대하여 그려지긴 하였으나,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읍치 안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鶴洞書院으로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어 1686년(숙종 12)에 사액을 받았던 서원이다. 그리고 지도상에서 관아 위쪽으로 연봉이 이어져 가장 높게 표시된 산이 무학산이다. 중앙에는 주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동쪽으로는 鳳凰臺, 서쪽으로는 玉女峰이 좌우로 읍내를 포옹하고 있는 모양으로 마치 춤추는 학이 날개를 편 것 같다하여 원래는 登龜山이었으나 무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보면 舞鶴亭, 添鶴亭, 鳴鶴池, 中鶴山, 西鶴山 등 ''鶴'' 자 들어가는 지명이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양윤정)

  •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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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1면입니다.

  • 경성 주기 (京城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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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를 그린 지도로서 都城과 城底十里를 하나의 지도에 그려넣었다. 산줄기와 하천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것과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하천의 표현 방식이 앞의 두 지도에 비해 간략화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일부 지명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보이고 있는데, 아래 왼쪽의 西北은 西江의 오기이다. 그리고 서강 오른쪽에는 앞의 두 지도에는 없는 栗島 등이 본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지도의 명칭이 《광여도》에는 都城圖로, 《여지도》에는 都城으로 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는 京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성이나 경성 모두 전통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였으며, 고유한 행정명칭으로는 漢城府라고 불렀다. 도성도는 조선에서 가장 많이 그려졌는데, 본 지도의 것은 다른 도성도에 비해 주변의 경관을 비롯하여 도성 안쪽의 정보도 간략한 편이다. 본 지도처럼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도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리고 정보가 적은 도성 밖을 상대적으로 작게 그리는 것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그림지도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상대적으로 많은 도성 안의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도성 안에 정보가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어 약간 의아한 느낌을 준다. 이런 경우 보통 도성 안을 따로 그린 지도가 첨부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아래쪽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가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며, 가장 오른쪽에 현재의 중랑천이 中梁浦로 기록되어 있다.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명칭을 포구나 나루 또는 진흙의 물가라는 뜻의 ‘浦’자를 써서 기록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량포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중량포는 실제로는 오른쪽 위의 양주에서 본류가 흘러오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알기 어렵게 그려놓았다. 도성 안쪽에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청계천이다.(이기봉)

  • 니성현 (尼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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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산현은 논산시의 노성면, 광석면, 상월면, 부여군의 초촌면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노성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니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니성현은 원래 尼山縣으로 불리다가 1776년(영조 52)에 니성현으로 바뀌었으며, 1800년(정조 24)에 魯城縣으로 다시 바뀐다. 《해동지도》와 《여지도》는 앞쪽의 충청도 전도와 군현지도 모두 니산으로 되어 있어 합치되고 있다. 본 지도 역시 모두 니성으로 바뀌어 있어 늦어도 1776년 이후에 필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의 경우 앞쪽의 충청도 전도인 湖西圖에서는 노성으로 되어 있음에 반해 군현지도에서는 니산현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광여도》는 호서도에서는 지명의 변화를 고려하였음에 반해 군현지도에서는 기존의 지도를 그대로 필사하면서 지명의 변화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를 지나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노성천이고, 왼쪽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석성천 상류이다. 노성천의 경우 북쪽의 공주 방면에서 흘러들어옴에도 본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나머지 3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 자체에서 이미 오류를 범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위쪽에는 古城이 그려져 있는데, 니성현의 고호인 魯城과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웠다. 현재의 노성산 정상을 두른 테뫼식의 중형 석성으로 삼국시대로부터 빨라도 고려초기까지는 본 고을의 중심지가 있었던 곳으로 연구되고 있다.(이기봉)

  • 경상도 주기 (慶尙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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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 경상도 부분의 처음에 나오는 지도로 경상도 전체를 그린 지도이다. 지승의 경상도 부분은 통영과 府 지역을 먼저 싣고 郡縣 지역을 그 다음에 배치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동해가 표시되었고 서쪽은 전라도 충청도, 북쪽은 강원도 충청도의 맞닿은 군현을 기록하였다. 현재 경상북도에 포함된 울릉도 독도는 표시되지 않았으며 남동쪽에 경상도의 섬 지역이 표시되었다. 대구 감영을 비롯하여 경상도의 부목군현을 표시하였다. 감영, 통영, 우병영, 좌수영 등 군사 중심지는 붉은 원 안에 표시하였고 부와 군현은 네모안에 그 지명을 기록하였다. 경상도의 주요 교통로는 육운으로 이 지도에서는 대구 감영을 중심으로 군현간의 연결망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역은 지도에 붉은 색으로 따로 표시하였다. 조령, 죽령 등 다른 도와 연결되는 고개를 표시하였다. 경상도 지역은 크게 낙동강 유역권으로 볼 수 있는데 상주, 선산, 비안 가운데 부분에 낙동강 지명이 보인다. 지도 오른쪽 위에 그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그 왼쪽에 태백산 史庫가 보인다. 태화강 등 낙동강에 합류하지 않는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태백산, 지리산 등 주요 산이 표시되었으며 山城의 이름과 위치가 표시되었다. 도산서원 등 여러 서원이 기록되었고, 경주의 불굴사, 합천의 해인사 등이 보인다. 남해안에는 해전으로 유명한 노량이 표시되었다. 지도의 주기에는 戶口, 田畓의 수량과 조세 관련 사항, 鎭營에 소속된 군사의 수 등을 기록해 놓았다.(이현군)

  • 곡성현 주기 (谷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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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곡성군에서 곡성읍, 오곡면, 삼기면, 목사동면, 석곡면, 죽곡면을 관할한 조선시대 군현이다. 이 지도에 표시된 면 명칭이 현재에도 대부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곡성읍 읍내리 일대에 해당하는 읍치에는 성곽없이 건물이 그려졌고 산줄기를 달리하여 그린 향교는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곡성천이며 지도 아래쪽은 하천은 보성강으로 동쪽의 섬진강으로 유입된다. 동쪽으로 구례현과 마주하는 군현이다. 섬진강의 河中島를 그렸으며 보성강변에 정자가 보인다. 읍치 동북쪽 곡성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은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곡성천 남쪽의 통명산은 오곡면에 위치한 511.9m 높이의 산이다.읍치 남동쪽의 도림사는 국민관광지로 개방되었다. 그 아래 동악산은 현재 최악산으로 불리는 697m 높이의 산이다. 지도 왼쪽 아래의 대명산은 삼기면에 위치한 498.3m의 산이다. 주요 도로에 역원이 표시되었는데 남동쪽의 석곡원은 석곡면에 있었는데 호남고속국도 석곡 인터체인지 서쪽이다. 동쪽 아래의 압록원은 오곡면 압록리로 전라선 철도 압록역 서쪽이다. 근처에 압록 유원지, 진변 나루터 등이 있다. 지도 아래쪽의 태안사는 죽곡면 동남쪽 현재의 봉두산 아래에 위치한 사찰로 보물로 지정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안문성공영당은 성리학을 도입한 安珦을 모신 곳이고 그 아래 흥양사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을 모신 곳이다. (이현군)

  • 강서현 주기 (江西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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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西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동북쪽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서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다소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서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강서현 모양과 본 지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읍치 부분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둘째,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닌 강서현의 모습을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쪽(서북)의 한룡면은 위쪽으로 더 튀어나가게 그려져 있어야 실제와 비슷하다. 또한 아래쪽의 보원면 밑은 아래쪽(남)으로 길게 뻗어 있어야 한다. 이런 오류는 강서현 동남쪽에 접해 있는 대동강 구간이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지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읍치 부분을 확대하여 그려지긴 하였으나,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읍치 안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鶴洞書院으로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어 1686년(숙종 12)에 사액을 받았던 서원이다. 그리고 지도상에서 관아 위쪽으로 연봉이 이어져 가장 높게 표시된 산이 무학산이다. 중앙에는 주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동쪽으로는 鳳凰臺, 서쪽으로는 玉女峰이 좌우로 읍내를 포옹하고 있는 모양으로 마치 춤추는 학이 날개를 편 것 같다하여 원래는 登龜山이었으나 무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보면 舞鶴亭, 添鶴亭, 鳴鶴池, 中鶴山, 西鶴山 등 ''鶴'' 자 들어가는 지명이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양윤정)

  •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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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2면입니다.

  • 고양군 (高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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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군은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덕양구 고양동 일대에 있었다. 아래쪽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고, 위쪽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공릉천이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 바로 서쪽에 있는 고을이기 때문에 수많은 陵墓가 있었음이 지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원래 고양의 읍치는 현재의 덕양구 원당동인 지도 가운데의 禧陵에 있었는데, 1528년(중종 23)에 희릉을 안치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와 본 지도의 차이점은 첫째,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둘째, 《해동지도》에 없던 지도 아래쪽의 朴萬島, 鴨島, 氷庫島의 정보가 추가되어 있다. 셋째, 司饔院進上葦魚結箭處가 1개 더 추가되어 있다. 사옹원은 왕의 식사나 궁중의 음식을 공급하던 관서였으며,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던 葦魚(웅어)의 포획처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정보였다. 《해동지도》에 1개만 있던 위어 포획처가 2개로 늘어난 것, 궁중의 땔감조달과 관계된 繕工草場과 관련된 섬의 정보가 늘어난 것은 필사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담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二山村이 二山府로 오기되어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中路와 小路 등의 정보가 수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자체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더 자세한 다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니성현 주기 (尼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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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산현은 논산시의 노성면, 광석면, 상월면, 부여군의 초촌면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노성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니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니성현은 원래 尼山縣으로 불리다가 1776년(영조 52)에 니성현으로 바뀌었으며, 1800년(정조 24)에 魯城縣으로 다시 바뀐다. 《해동지도》와 《여지도》는 앞쪽의 충청도 전도와 군현지도 모두 니산으로 되어 있어 합치되고 있다. 본 지도 역시 모두 니성으로 바뀌어 있어 늦어도 1776년 이후에 필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의 경우 앞쪽의 충청도 전도인 湖西圖에서는 노성으로 되어 있음에 반해 군현지도에서는 니산현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광여도》는 호서도에서는 지명의 변화를 고려하였음에 반해 군현지도에서는 기존의 지도를 그대로 필사하면서 지명의 변화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를 지나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노성천이고, 왼쪽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석성천 상류이다. 노성천의 경우 북쪽의 공주 방면에서 흘러들어옴에도 본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나머지 3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 자체에서 이미 오류를 범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위쪽에는 古城이 그려져 있는데, 니성현의 고호인 魯城과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웠다. 현재의 노성산 정상을 두른 테뫼식의 중형 석성으로 삼국시대로부터 빨라도 고려초기까지는 본 고을의 중심지가 있었던 곳으로 연구되고 있다.(이기봉)

  •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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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1면입니다.

  • 광양현 (光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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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남도 광양시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는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현재의 광양시내가 아닌 광양읍 읍내리에 있었다. 현재의 광양시내는 지도 오른쪽 아래 묘도 북쪽 해안이며 조선시대 읍치는 호남고속국도 광양인터체인지 서북쪽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바다는 광양만이며 읍치 좌우의 하천은 현재의 동천과 서천이다. 그 오른쪽 하천은 수어천이며 하동과의 경계에 있는 하천은 섬진강이다. 지도에 蟾江, 蟾津鎭이 표시되었다. 왼쪽 위에는 화개장터로 알려진 하동화개동을 표시하고 하류란 점을 명시하였다. 광양제철소는 오른쪽 아래의 묘도 북쪽 해안을 매립하여 만든 것이다. 광양의 진산은 북쪽에 있는 白鷄山이며 읍치에는 사각형의 읍성을 그리고 객사를 중심으로 건물을 표시하였다. 남문, 동문, 서문을 그리고 성문과 연결된 도로, 고개가 표시되었다. 향교는 성 밖에 독립되게 표시되었다. 향교 북쪽의 옥룡사는 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북쪽의 백운산은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산이며 남쪽의 가야산은 현재의 광양시내 북쪽에 위치한 497.3m의 산이다. 그 옆에 그려진 봉대는 광양시내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 이 일대에 광산이 들어서 있다. 그 남쪽의 해안에는 광양제철선 철도가 지나간다. 읍성 남쪽의 해창은 광양읍 세풍리의 해안에 있었던 것이다.(이현군)

  • 개천군 (价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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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군 도화리·광도리·봉창리를 제외한 개천군 전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개천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천의 표현 방식으로 인해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도의 하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왼쪽 위의 寧邊界에서 安陵界(安州界)까지 개천군은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寧邊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본 지도에는 이 청천강의 하천 유로가 대동강과 같은 규모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여지도》에는 마치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 바다처럼 표현한 점은 시정되었다. 하지만 2개의 실선으로 표시된 대동강과 달리 다른 지류와 마찬가지로 1개의 실선으로 그려 실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오류는 《여지도》에 표시된 面의 명칭 표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의 內外面은 內東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內東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 3개의 건물만이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倉,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9개 그려져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鄕廳과 倉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다른 부분은 일치하고 있다. (양윤정)

  • 경성부 (鏡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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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경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경성부는 일제시대 경성군과 청진부로 분리되었고 일부 지역은 명천군에 귀속되었다. 지금은 함경북도 경성군·어랑군과 청진시 서쪽 및 화성군 동쪽 지역이 해당된다. 부의 동쪽에 동해가 있으나 지도에서는 아래쪽에 해안선이 그려져 있어 지도의 윗부분이 서쪽에 해당된다. 서쪽으로 무산과는 험준한 산지로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곳에서 산지가 부의 서쪽과 남쪽을 감싸고 있으며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우측 立岩 일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청진시을 지나는 나북천이며 읍치 좌측에 묘사된 하천은 오촌천으로 보인다. 장백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으로 두 개의 지류가 묘사되어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주을천과 보로천에 해당된다. 寶化驛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주북천에 해당되며 八景坮로 유입하는 하천은 어랑천에 해당된다. 甑山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명천의 동면을 흐르는 명간천으로 생각된다. 한편 팔경대 부근에 형성된 석호인 長淵湖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부근에 서련호와 동련호로 추정되는 호수가 그려져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 4,610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려져 있으며 우측에 진산인 祖白山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경성군 경성읍 일대이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성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지도에 8개의 역이 적색의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고 이중 지도 우측에 기재된 輸城驛은 18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도로는 읍치에서 이 유성역을 거쳐 북으로는 부령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朱村驛을 거쳐 명천으로 연결된다. 甫老驛, 寶化驛, 森森坡를 잇는 도로가 내륙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51戶이며 田畓 면적이 1,948結70負8束으로 함께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고양군 주기 (高陽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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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군은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덕양구 고양동 일대에 있었다. 아래쪽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고, 위쪽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공릉천이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 바로 서쪽에 있는 고을이기 때문에 수많은 陵墓가 있었음이 지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원래 고양의 읍치는 현재의 덕양구 원당동인 지도 가운데의 禧陵에 있었는데, 1528년(중종 23)에 희릉을 안치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와 본 지도의 차이점은 첫째,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둘째, 《해동지도》에 없던 지도 아래쪽의 朴萬島, 鴨島, 氷庫島의 정보가 추가되어 있다. 셋째, 司饔院進上葦魚結箭處가 1개 더 추가되어 있다. 사옹원은 왕의 식사나 궁중의 음식을 공급하던 관서였으며,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던 葦魚(웅어)의 포획처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정보였다. 《해동지도》에 1개만 있던 위어 포획처가 2개로 늘어난 것, 궁중의 땔감조달과 관계된 繕工草場과 관련된 섬의 정보가 늘어난 것은 필사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담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二山村이 二山府로 오기되어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中路와 小路 등의 정보가 수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자체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더 자세한 다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단양군 (丹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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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양군은 현재 단양군의 단양읍, 대강면, 단성면, 적성면, 매포읍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단성면의 하방리 일대에 있었는데, 충주댐의 건설로 대부분 수몰되어 버렸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동)의 永春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淸風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단양군(또는 단양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다음과 같은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해동지도》가 동서(세로)보다는 남북(가로)을 더 길게 그린 것과 반대로 그렸다. 둘째, 읍치에 3개의 건물이 더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倉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기도 하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상세한 반면 본 지도는 일부만 그렸고, 뒤의 2개 지도는 도로를 모두 생략하였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도로는 《해동지도》가 더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읍치 내의 건물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원본에 더 가깝다고 판단된다. 한편 군현의 전반적인 모습은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필사 과정에서 약간씩 달라지는 경우가 나타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所里山烽臺가 다른 3개 지도에는 所伊山烽臺로 적혀 있고, 아래쪽 왼쪽의 錦綉山이 뒤의 2개 지도에는 동일한데 비해 《해동지도》에는 錦繡山으로 기록되어 있어 필사자에 따라 한자를 비슷한 글자로 바꾸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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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2면입니다.

  • 광양현 주기 (光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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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남도 광양시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는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현재의 광양시내가 아닌 광양읍 읍내리에 있었다. 현재의 광양시내는 지도 오른쪽 아래 묘도 북쪽 해안이며 조선시대 읍치는 호남고속국도 광양인터체인지 서북쪽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바다는 광양만이며 읍치 좌우의 하천은 현재의 동천과 서천이다. 그 오른쪽 하천은 수어천이며 하동과의 경계에 있는 하천은 섬진강이다. 지도에 蟾江, 蟾津鎭이 표시되었다. 왼쪽 위에는 화개장터로 알려진 하동화개동을 표시하고 하류란 점을 명시하였다. 광양제철소는 오른쪽 아래의 묘도 북쪽 해안을 매립하여 만든 것이다. 광양의 진산은 북쪽에 있는 白鷄山이며 읍치에는 사각형의 읍성을 그리고 객사를 중심으로 건물을 표시하였다. 남문, 동문, 서문을 그리고 성문과 연결된 도로, 고개가 표시되었다. 향교는 성 밖에 독립되게 표시되었다. 향교 북쪽의 옥룡사는 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북쪽의 백운산은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산이며 남쪽의 가야산은 현재의 광양시내 북쪽에 위치한 497.3m의 산이다. 그 옆에 그려진 봉대는 광양시내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 이 일대에 광산이 들어서 있다. 그 남쪽의 해안에는 광양제철선 철도가 지나간다. 읍성 남쪽의 해창은 광양읍 세풍리의 해안에 있었던 것이다.(이현군)

  • 개천군 주기 (价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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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군 도화리·광도리·봉창리를 제외한 개천군 전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개천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천의 표현 방식으로 인해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도의 하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왼쪽 위의 寧邊界에서 安陵界(安州界)까지 개천군은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寧邊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본 지도에는 이 청천강의 하천 유로가 대동강과 같은 규모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여지도》에는 마치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 바다처럼 표현한 점은 시정되었다. 하지만 2개의 실선으로 표시된 대동강과 달리 다른 지류와 마찬가지로 1개의 실선으로 그려 실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오류는 《여지도》에 표시된 面의 명칭 표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의 內外面은 內東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內東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 3개의 건물만이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倉,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9개 그려져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鄕廳과 倉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다른 부분은 일치하고 있다. (양윤정)

  • 경성부 주기 (鏡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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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경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경성부는 일제시대 경성군과 청진부로 분리되었고 일부 지역은 명천군에 귀속되었다. 지금은 함경북도 경성군·어랑군과 청진시 서쪽 및 화성군 동쪽 지역이 해당된다. 부의 동쪽에 동해가 있으나 지도에서는 아래쪽에 해안선이 그려져 있어 지도의 윗부분이 서쪽에 해당된다. 서쪽으로 무산과는 험준한 산지로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곳에서 산지가 부의 서쪽과 남쪽을 감싸고 있으며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우측 立岩 일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청진시을 지나는 나북천이며 읍치 좌측에 묘사된 하천은 오촌천으로 보인다. 장백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으로 두 개의 지류가 묘사되어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주을천과 보로천에 해당된다. 寶化驛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주북천에 해당되며 八景坮로 유입하는 하천은 어랑천에 해당된다. 甑山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명천의 동면을 흐르는 명간천으로 생각된다. 한편 팔경대 부근에 형성된 석호인 長淵湖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부근에 서련호와 동련호로 추정되는 호수가 그려져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 4,610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려져 있으며 우측에 진산인 祖白山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경성군 경성읍 일대이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성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지도에 8개의 역이 적색의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고 이중 지도 우측에 기재된 輸城驛은 18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도로는 읍치에서 이 유성역을 거쳐 북으로는 부령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朱村驛을 거쳐 명천으로 연결된다. 甫老驛, 寶化驛, 森森坡를 잇는 도로가 내륙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51戶이며 田畓 면적이 1,948結70負8束으로 함께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과천현 (果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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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현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대부분, 서초구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 현재의 양재천이고, 아래쪽은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과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衙(舍) 부분에 果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과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표시된 읍치의 城隍壇과 厲壇을 비롯하여 일부 지명이 본 지도에 빠져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조선후기에 민간에서 운영한 숙박시설인 葛山酒幕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가장 중요한 三南大路 위에 있었다.(이기봉)

  • 단양군 주기 (丹陽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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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양군은 현재 단양군의 단양읍, 대강면, 단성면, 적성면, 매포읍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단성면의 하방리 일대에 있었는데, 충주댐의 건설로 대부분 수몰되어 버렸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동)의 永春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淸風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단양군(또는 단양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다음과 같은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해동지도》가 동서(세로)보다는 남북(가로)을 더 길게 그린 것과 반대로 그렸다. 둘째, 읍치에 3개의 건물이 더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倉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기도 하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상세한 반면 본 지도는 일부만 그렸고, 뒤의 2개 지도는 도로를 모두 생략하였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도로는 《해동지도》가 더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읍치 내의 건물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원본에 더 가깝다고 판단된다. 한편 군현의 전반적인 모습은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필사 과정에서 약간씩 달라지는 경우가 나타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所里山烽臺가 다른 3개 지도에는 所伊山烽臺로 적혀 있고, 아래쪽 왼쪽의 錦綉山이 뒤의 2개 지도에는 동일한데 비해 《해동지도》에는 錦繡山으로 기록되어 있어 필사자에 따라 한자를 비슷한 글자로 바꾸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경주부 (慶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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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부는 현재의 경주시 전체와 포항시, 영천시 일부, 울산광역시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었다. 지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형산강이며 읍치 북쪽의 북천, 남쪽의 남천이 형산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위에 兄山倉이 표시되었다. 북천은 보문관광단지의 보문호와 연결된다. 형산강은 남쪽이 상류에 해당하며 북쪽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읍치 동쪽의 바다가에 표시된 石堀은 토함산의 석굴암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왼쪽에는 탑이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의 鳳凰臺는 신라의 古墳이 있는 곳으로 신라 30대 문무왕이 남문 밖에 세웠다. 마치 봉황의 알처럼 그려져 있다. 봉황대 아래쪽에 반월성, 첨성대가 실제 모양과 유사하게 그려졌다. 남문 아래쪽의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곳이며 북쪽의 경순왕묘는 신라 마지막 왕을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안에는 동헌, 객사, 군관청, 향청, 사창, 제승당, 관청, 진남루 등 여러 건물이 그려졌다. 남문 밖에는 종을 걸어 놓은 모습으로 종각을 그렸다. 읍성 밖 남쪽에 향교가 표시되었고 서쪽에 鎭營이 보인다. 동쪽의 기림사를 비롯하여 융성했던 신라의 불교 문화를 보여주는 여러 사찰이 그려졌다. 조선시대의 여러 서원들이 지도에 표시되고 있어 불교의 사찰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중 서악서원은 신라의 설총, 최치원, 김유신을 배향하여 세운 곳이다. 붉은색으로 도로를 표시하고 주요 驛과 倉을 그려 놓았다(이현군).

  • 광주목 (光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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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의 서쪽부분은 나주목에 속하였기 때문에 관할 구역이 아니며 지도 위쪽에 표시된 대치면이 현재의 담양군 대전면으로 광주목 관할 범위에 포함된다. 읍치는 현재 광주시의 중심부 지역이었다. 읍성은 사각형으로 그리고 성문을 표시하고 그 안에 건물을 그리면서 부내면이라는 행정구역명을 같이 적었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것처럼 그려진 무등산은 실제로는 동남 방향에 있다. 이 지도에는 無屯山으로 표기 되었으며 1186.8m의 높은 산이다. 그 안의 澄心寺에는 보물 131호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이 소장되었다. 현재의 무등산 도립공원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 위쪽의 景烈祠는 이성계를 도운 鄭地 장군을 모신 곳이다. 읍치 동쪽의 장원봉은 동구와 북구의 경계에 있는 386m의 산이다. 읍치 왼쪽의 광주천(극락강), 황룡강은 영산강에 유입된다. 읍성 밖에 여단, 성황단, 사직단은 그리지 않았고 향교만 표시하였다.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고개를 표시하면서 險隘라고 적었다. 읍치 동쪽의 景陽驛은 북구 우산동에 있었던 역원으로 주변의 6개 역을 관할하던 곳이다. 읍치 북쪽의 月峯書院은 기대승과 김장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방면 명칭을 따로 구별하여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치 북쪽에는 胎峯이 그려졌고 그 위에 한양의 산 이름과 같은 三角山을 적었고 남쪽에는 金剛山 지명이 보이는 점이 이색적이다.(이현군)

  • 곡산부 (谷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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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곡산군, 신평군, 평안남도의 회창군 동쪽 일부 및 강원도의 판교군 서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곡산군의 곡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곡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글씨 방향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 원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주기를 첨가하면서 북쪽을 위로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가 남북을 동서보다 훨씬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을 약간 더 길게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가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원본 계통을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북)의 陽德 방향에서 흘러와 위쪽(서)의 成川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남강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양덕에서 흘러오는 남강의 모습이 상당히 굵게 표현되어 있어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 약간 애매하게 바뀌어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왼쪽(남)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현재의 곡산천보다 더 좁은 하천인 것처럼 실선으로 표현하였다. 필사 과정에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인위적으로 표현 방법을 바꿈으로써 사실을 왜곡하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왼쪽의 남서쪽과 남쪽의 일부는 예성강의 최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에도 그런 사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래쪽(동)의 동촌면 일부는 현재의 판교군에 걸쳐 있으면서 임진강의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 부분에 《해동지도》에는 있는 高達山이 생략되어 있고, 佛峯寺가 佛峯山으로 오기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경원부 (慶源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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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류에 위치하였던 경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일부 지역이 경흥군과 온성군으로 경원군과 온성군 일부로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북도 새별군과 은덕군 서북부, 나진시 동북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금의 경흥군에 있던 비월지는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의 중앙에 위에서 아래쪽으로 두만강을 그렸으며 청나라에서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厚春江의 지류를 그렸다. 부의 서쪽에 산지를 표시하였고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여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한다. 지도의 중앙 윗부분에 성곽(둘레 10,475尺)과 함께 그려진 읍치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會介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송천으로 보인다. 그 아래 소규모 하천은 지금의 농포천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종성에서 유입하여 동류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하천(吾美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오룡천이다. 방안식 지도에서 경흥으로 유입하는 아오지천의 상류부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두만강을 경계로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관방 관련 지명뿐만 아니라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북과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의 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경로에 6개의 역이 표시되어 있다. 남쪽으로 安原驛을 거쳐 乾元驛적-阿山驛색을 지나 경흥으로 이어지며 古元乾驛을 지나는 도로는 종성으로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訓戎역을 지나는 도로는 穩城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田 3,314結48負, 畓 39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과천현 주기 (果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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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현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대부분, 서초구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 현재의 양재천이고, 아래쪽은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과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衙(舍) 부분에 果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과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표시된 읍치의 城隍壇과 厲壇을 비롯하여 일부 지명이 본 지도에 빠져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조선후기에 민간에서 운영한 숙박시설인 葛山酒幕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가장 중요한 三南大路 위에 있었다.(이기봉)

  • 당진현 (唐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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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현은 당진군의 당진읍, 고대면, 석문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당진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당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당진현은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며, 읍치는 동남쪽에 치우쳐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특히 왼쪽 위의 長古項은 현재 석문면의 장고항리로서 서북쪽의 바다로 툭 튀어나가 있는 곶에 해당되며 읍치에서 가장 멀리 있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였다. 오른쪽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은 현재의 대방들천이며, 위쪽에서 흘러드는 하천은 현재의 당진천이다. 두 하천이 각각 沔川界와 海美界 넘어에서 흘러들어오는데, 이 부분은 사실에 부합되게 표현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海倉은  당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로서 현재도 고대면 당진포리에 해창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그 아래쪽의 船泊處는 해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船所였다.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 없는 4개의 섬이 첨가되어 있는데, 위쪽 첨지에는 備圖에 있는 것을 참조하여 첨가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당진 지도를 의미한다.(이기봉)

  • 경주부 주기 (慶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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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부는 현재의 경주시 전체와 포항시, 영천시 일부, 울산광역시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었다. 지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형산강이며 읍치 북쪽의 북천, 남쪽의 남천이 형산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위에 兄山倉이 표시되었다. 북천은 보문관광단지의 보문호와 연결된다. 형산강은 남쪽이 상류에 해당하며 북쪽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읍치 동쪽의 바다가에 표시된 石堀은 토함산의 석굴암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왼쪽에는 탑이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의 鳳凰臺는 신라의 古墳이 있는 곳으로 신라 30대 문무왕이 남문 밖에 세웠다. 마치 봉황의 알처럼 그려져 있다. 봉황대 아래쪽에 반월성, 첨성대가 실제 모양과 유사하게 그려졌다. 남문 아래쪽의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곳이며 북쪽의 경순왕묘는 신라 마지막 왕을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안에는 동헌, 객사, 군관청, 향청, 사창, 제승당, 관청, 진남루 등 여러 건물이 그려졌다. 남문 밖에는 종을 걸어 놓은 모습으로 종각을 그렸다. 읍성 밖 남쪽에 향교가 표시되었고 서쪽에 鎭營이 보인다. 동쪽의 기림사를 비롯하여 융성했던 신라의 불교 문화를 보여주는 여러 사찰이 그려졌다. 조선시대의 여러 서원들이 지도에 표시되고 있어 불교의 사찰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중 서악서원은 신라의 설총, 최치원, 김유신을 배향하여 세운 곳이다. 붉은색으로 도로를 표시하고 주요 驛과 倉을 그려 놓았다(이현군).

  • 광주목 주기 (光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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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의 서쪽부분은 나주목에 속하였기 때문에 관할 구역이 아니며 지도 위쪽에 표시된 대치면이 현재의 담양군 대전면으로 광주목 관할 범위에 포함된다. 읍치는 현재 광주시의 중심부 지역이었다. 읍성은 사각형으로 그리고 성문을 표시하고 그 안에 건물을 그리면서 부내면이라는 행정구역명을 같이 적었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것처럼 그려진 무등산은 실제로는 동남 방향에 있다. 이 지도에는 無屯山으로 표기 되었으며 1186.8m의 높은 산이다. 그 안의 澄心寺에는 보물 131호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이 소장되었다. 현재의 무등산 도립공원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 위쪽의 景烈祠는 이성계를 도운 鄭地 장군을 모신 곳이다. 읍치 동쪽의 장원봉은 동구와 북구의 경계에 있는 386m의 산이다. 읍치 왼쪽의 광주천(극락강), 황룡강은 영산강에 유입된다. 읍성 밖에 여단, 성황단, 사직단은 그리지 않았고 향교만 표시하였다.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고개를 표시하면서 險隘라고 적었다. 읍치 동쪽의 景陽驛은 북구 우산동에 있었던 역원으로 주변의 6개 역을 관할하던 곳이다. 읍치 북쪽의 月峯書院은 기대승과 김장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방면 명칭을 따로 구별하여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치 북쪽에는 胎峯이 그려졌고 그 위에 한양의 산 이름과 같은 三角山을 적었고 남쪽에는 金剛山 지명이 보이는 점이 이색적이다.(이현군)

  • 곡산부 주기 (谷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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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곡산군, 신평군, 평안남도의 회창군 동쪽 일부 및 강원도의 판교군 서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곡산군의 곡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곡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글씨 방향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 원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주기를 첨가하면서 북쪽을 위로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가 남북을 동서보다 훨씬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을 약간 더 길게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가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원본 계통을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북)의 陽德 방향에서 흘러와 위쪽(서)의 成川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남강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양덕에서 흘러오는 남강의 모습이 상당히 굵게 표현되어 있어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 약간 애매하게 바뀌어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왼쪽(남)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현재의 곡산천보다 더 좁은 하천인 것처럼 실선으로 표현하였다. 필사 과정에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인위적으로 표현 방법을 바꿈으로써 사실을 왜곡하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왼쪽의 남서쪽과 남쪽의 일부는 예성강의 최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에도 그런 사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래쪽(동)의 동촌면 일부는 현재의 판교군에 걸쳐 있으면서 임진강의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 부분에 《해동지도》에는 있는 高達山이 생략되어 있고, 佛峯寺가 佛峯山으로 오기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경원부 주기 (慶源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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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류에 위치하였던 경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일부 지역이 경흥군과 온성군으로 경원군과 온성군 일부로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북도 새별군과 은덕군 서북부, 나진시 동북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금의 경흥군에 있던 비월지는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의 중앙에 위에서 아래쪽으로 두만강을 그렸으며 청나라에서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厚春江의 지류를 그렸다. 부의 서쪽에 산지를 표시하였고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여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한다. 지도의 중앙 윗부분에 성곽(둘레 10,475尺)과 함께 그려진 읍치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會介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송천으로 보인다. 그 아래 소규모 하천은 지금의 농포천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종성에서 유입하여 동류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하천(吾美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오룡천이다. 방안식 지도에서 경흥으로 유입하는 아오지천의 상류부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두만강을 경계로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관방 관련 지명뿐만 아니라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북과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의 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경로에 6개의 역이 표시되어 있다. 남쪽으로 安原驛을 거쳐 乾元驛적-阿山驛색을 지나 경흥으로 이어지며 古元乾驛을 지나는 도로는 종성으로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訓戎역을 지나는 도로는 穩城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田 3,314結48負, 畓 39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광주부 (廣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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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부는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현재의 남양주시 와부면과 조안면을 양주군에, 현재의 의왕시와 안산시의 일부 및 화성시 매송면의 서쪽 부분을 수원군에 넘겨주고, 현재의 광주시 남종면을 양평으로부터 넘겨받아 광주군이 되었다. 이후 서울시의 확장에 따라 현재의 경부고속도로 동쪽 강남 일대를 서울시에 넘겨주었으며, 성남시와 하남시 등이 후에 독립하여 현재의 광주시가 되었다. 광주부의 읍치는 원래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는데 1626년(인조 4)에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확대 수축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다른 그림지도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인 남한산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다. 위쪽의 왼쪽은 현재의 화성시 매송면 서쪽과 안산시 일부에까지 쭉 뻗어있던 광주의 犬牙相入地였다. 본 지도의 전반적인 형태와 수록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광주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아주 자세히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전혀 없으며,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편이다. 주기의 내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고 《해동지도》가 전혀 다른 편이다. 앞의 4개 지도는 몇몇 부분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가장 앞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해동지도》의 경우 본 지도의 왼쪽 위 부분에 왼쪽의 安山界 바다와 그 오른쪽의 한강 하류가 마치 하천으로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를 보면 검은색 실선이 그어져 있는데, 하천으로 경계지어지지 않는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한다. 안산계 방면에 잘못 그려진 하천도 실제로는 그 사이에 금천, 과천, 부평, 인천, 안산 등의 군현이 사이에 끼어 있어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하는 검은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 역시 다른 원본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본 지도에는 이런 오류가 몇 개 더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平丘驛부터 楊州屈雲驛까지 마치 하천처럼 표시되어 있는 것은 《해동지도》에는 군현 경계로 그어져 있던 것이다. 실제로는 《해동지도》가 맞기 때문에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잘못 필사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후대의 필사자들이 《해동지도》나 그 원본보다는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왼쪽 위의 경우 한강과 安山界가 마치 바다로 바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는 《해동지도》처럼 오류를 범하고 있어 두 지도가 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이기봉)

  • 당진현 주기 (唐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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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현은 당진군의 당진읍, 고대면, 석문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당진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당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당진현은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며, 읍치는 동남쪽에 치우쳐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특히 왼쪽 위의 長古項은 현재 석문면의 장고항리로서 서북쪽의 바다로 툭 튀어나가 있는 곶에 해당되며 읍치에서 가장 멀리 있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였다. 오른쪽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은 현재의 대방들천이며, 위쪽에서 흘러드는 하천은 현재의 당진천이다. 두 하천이 각각 沔川界와 海美界 넘어에서 흘러들어오는데, 이 부분은 사실에 부합되게 표현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海倉은  당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로서 현재도 고대면 당진포리에 해창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그 아래쪽의 船泊處는 해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船所였다.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 없는 4개의 섬이 첨가되어 있는데, 위쪽 첨지에는 備圖에 있는 것을 참조하여 첨가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당진 지도를 의미한다.(이기봉)

  • 고령현 (高靈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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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진산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耳山이다. 그 왼쪽의 미숭산은 고령읍과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에 있는 733.5m의 산인데 지금은 관광지화 되었다. 미숭산의 북서쪽에는 해인사로 유명한 가야산 국립공원이 위치한다. 미숭산 오른쪽의 반룡사는 쌍림면 용리에 현재에도 남아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낙동강이 그렸졌으며 나루와 강창이 그 옆에 보인다. 개산진은 현재의 개진면의 진촌에 있던 나루이다. 고령현은 본래 대가야국이었는데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읍치 뒤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사적 61호 고령주산성, 사적 79호 고분군, 보물 54호 금림왕릉 당간지주, 유물전시관 등이 현재 남아있다. 객사 앞에 그려진 누정인 쾌빈루는 현재의 고령읍 쾌빈리에 있던 것이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이 표현되었다. 이전하여 재건축된 향교가 고령읍에 있다. 외곽에 있었던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지도에 그리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 지대가 낮은 하천가에는 숲이 조성되어 있고 赤林이라고 표시되었다. 지승 지도에서는 도로 이름을 적은 경우가 드문데 이 지도 오른쪽 위에 大丘路라고 따로 적은 점이 이채롭다. 대구로 통하는 26번 국도 경로와 비슷하다. 역원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봉수대가 곳곳에 표시되었고 육로에 중요한 고개의 위치와 이름을 표시하였다. (이현군)

  • 구례현 (求禮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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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구례군에서 산동면, 광의면 일부, 용방면 일부는 남원부에 속하였다. 그 나머지 지역이 조선시대 구례현의 관할범위였다. 지도 오른쪽 위에 백두대간에 속하는 지리산이 그려졌는데 구례현의 진산에 해당한다. 곳곳에 險隘, 埋伏處가 그려졌다. 지리산 남쪽의 산줄기를 연달아 그려서 험준함을 표현하였는데 요충지에 해당한다는 설명을 자세히 적어놓았다. 그 아래 토지면이 적혔는데 오미리는 金環落地의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토지면 사도리는 도선국사가 異人을 만나 모래를 모아 山川을 그렸다고 전해진다는 내용이 1872년에 제작된 지도에 적혀있다. 토지면 맞은편의 산은 오봉산으로 다섯 봉우리가 마치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구례현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속하는 군현으로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섬진강으로 하동을 지나 남해로 유입된다. 하동과의 경계에 화개동이 표시되었는데 그 근처에 화개장터가 위치한다. 읍성은 의도적으로 사각형으로 그렸는데 구례읍 봉동리 일대에 해당하며 성 밖에 향교가 보인다. 읍치 동북쪽에 그려진 華岩寺는 화엄사를 가르킨다. 국보와 보물이 여러 점 소장된 곳이다. 그 아래 표시된 대직전동, 소직전동은 지리산 피아골 인근의 산지 촌락이다. 그 아래 연곡사는 동부도, 서부도가 국보로 지정된 유서깊은 사찰이다. 읍성의 남문과 연결되는 주요 도로는 하천과 평행하게 형성되었다. 현재의 18번 국도, 19번 국도는 조선시대 이 길들을 확장하여 만든 것이다.(이현군)

  • 곽산군 (郭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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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郭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곽산군 일대이다. 이 곳은 993년(고려 성종 12) 거란족의 1차 침입 때 고려 徐熙(940-998) 장군이 거란의 소손녕과 단판을 벌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개척한 江東六州 가운데 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곽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곽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서 가장 다른 점은 읍치와 雲興舘의 모습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그리고 衙舍 건물 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이 포함되어 5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거의 같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지명 중 《해동지도》와 일치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龜城塩里은 이곳에 있던 龜城의 월경지인 塩里面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을 龜城塩田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월경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실선으로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고을의 전체 모습은 실제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실제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려도 크게 왜곡되지 않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윤정)

  • 경흥부 (慶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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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구에 위치하였던 경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일제시대 慶源府의 일부 지역( 웅기읍과 풍해면 일대)을 포함하여 경흥군으로 되었다. 지금 경흥 지명은 없어지고 함경북도 은덕군의 동쪽 부분과 라선시의 동쪽 부분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부의 서쪽으로부터 곡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이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으며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흥부 해제 참조) 이는 당시 두만강이 국경하천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상류부에서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아오지천을 그린 것이며, 白岳山 부근에서 북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포항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赤地湖에서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인 鹿屯島는 당시 조선영토였으나 지금은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다. 하천의 퇴적 작용으로 러시아의 육지부와 연결되어 있다. 후에 한국령으로 귀속되어야 할 섬이다. 지도 아래쪽에 그려져 있는 규모가 큰 湖水는 지금의 서번포와 동번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서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호수는 만포를 묘사한 것이다. 읍치는 두만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4,525尺)과 함께 묘사되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5곳의 驛이 표시되어 있다. 西水羅驛으로부터 두만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는 造山驛, 撫夷驛으로 연결된다. 내륙으로는 읍치에서 阿吾地驛과 德明驛을 거쳐 경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578戶, 田 897結이 기록되어 있고 畓 면적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김기혁)

  • 광주부 주기 (廣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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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부는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현재의 남양주시 와부면과 조안면을 양주군에, 현재의 의왕시와 안산시의 일부 및 화성시 매송면의 서쪽 부분을 수원군에 넘겨주고, 현재의 광주시 남종면을 양평으로부터 넘겨받아 광주군이 되었다. 이후 서울시의 확장에 따라 현재의 경부고속도로 동쪽 강남 일대를 서울시에 넘겨주었으며, 성남시와 하남시 등이 후에 독립하여 현재의 광주시가 되었다. 광주부의 읍치는 원래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는데 1626년(인조 4)에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확대 수축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다른 그림지도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인 남한산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다. 위쪽의 왼쪽은 현재의 화성시 매송면 서쪽과 안산시 일부에까지 쭉 뻗어있던 광주의 犬牙相入地였다. 본 지도의 전반적인 형태와 수록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광주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아주 자세히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전혀 없으며,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편이다. 주기의 내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고 《해동지도》가 전혀 다른 편이다. 앞의 4개 지도는 몇몇 부분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가장 앞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해동지도》의 경우 본 지도의 왼쪽 위 부분에 왼쪽의 安山界 바다와 그 오른쪽의 한강 하류가 마치 하천으로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를 보면 검은색 실선이 그어져 있는데, 하천으로 경계지어지지 않는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한다. 안산계 방면에 잘못 그려진 하천도 실제로는 그 사이에 금천, 과천, 부평, 인천, 안산 등의 군현이 사이에 끼어 있어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하는 검은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 역시 다른 원본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본 지도에는 이런 오류가 몇 개 더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平丘驛부터 楊州屈雲驛까지 마치 하천처럼 표시되어 있는 것은 《해동지도》에는 군현 경계로 그어져 있던 것이다. 실제로는 《해동지도》가 맞기 때문에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잘못 필사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후대의 필사자들이 《해동지도》나 그 원본보다는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왼쪽 위의 경우 한강과 安山界가 마치 바다로 바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는 《해동지도》처럼 오류를 범하고 있어 두 지도가 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이기봉)

  • 대흥군 (大興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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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군은 예산군의 대흥면, 신양면, 광시면, 응봉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대흥면의 동서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대흥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우선 아래의 왼쪽 靑陽界로부터 흘러들어와 위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무한천 본류이고, 오른쪽 위와 아래에서 무한천에 합류하는 하천이 그 지류인 현재의 신양천이다. 신양천은 위쪽으로 예산, 아래쪽으로 청양의 경계 너머에서 흘러 들어오는데, 4개의 지도가 약간씩 다르게 되어 있다. 가장 사실에 합당한 것은 《해동지도》로 비록 아래쪽이 본 지도에서처럼 산줄기에 의해 막힌 것인 양 표현되어 있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하천을 굵게 표시하여 청양계에서 흘러들어옴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했다. 본 지도는 청양계에서 흘러오는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표현하였지만 예산계에서 흘러오는 하천의 끝을 뾰족하게 하여 마지 그곳이 발원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하였다. 《여지도》에서는 이러한 오해 가능성이 더 높게 표현되어 있으며, 《광여도》에서는 신양천의 남북 모두 완벽하게 오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신양천을 가장 이해하기 어렵게 그린 《광여도》의 경우 여러 필사본을 거치면서 조금씩 왜곡된 것을 필사자의 자의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묘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본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備圖에 있는 것을 바탕으로 첨가시킨 지명 중 鳳首山城이 기록되어 있으며, 지도에는 읍치 바로 뒷산에 웅장하게 그려놓았다. 그러나 봉수산성은 함께 그려져 있는 任存城에 대한 다른 명칭이기 때문에 《해동지도》에 첨지를 붙여 교정한 사람은 단순히 지도만 비교하였을 뿐 서로 다른 측면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행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고령현 주기 (高靈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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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진산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耳山이다. 그 왼쪽의 미숭산은 고령읍과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에 있는 733.5m의 산인데 지금은 관광지화 되었다. 미숭산의 북서쪽에는 해인사로 유명한 가야산 국립공원이 위치한다. 미숭산 오른쪽의 반룡사는 쌍림면 용리에 현재에도 남아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낙동강이 그렸졌으며 나루와 강창이 그 옆에 보인다. 개산진은 현재의 개진면의 진촌에 있던 나루이다. 고령현은 본래 대가야국이었는데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읍치 뒤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사적 61호 고령주산성, 사적 79호 고분군, 보물 54호 금림왕릉 당간지주, 유물전시관 등이 현재 남아있다. 객사 앞에 그려진 누정인 쾌빈루는 현재의 고령읍 쾌빈리에 있던 것이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이 표현되었다. 이전하여 재건축된 향교가 고령읍에 있다. 외곽에 있었던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지도에 그리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 지대가 낮은 하천가에는 숲이 조성되어 있고 赤林이라고 표시되었다. 지승 지도에서는 도로 이름을 적은 경우가 드문데 이 지도 오른쪽 위에 大丘路라고 따로 적은 점이 이채롭다. 대구로 통하는 26번 국도 경로와 비슷하다. 역원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봉수대가 곳곳에 표시되었고 육로에 중요한 고개의 위치와 이름을 표시하였다. (이현군)

  • 구례현 주기 (求禮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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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구례군에서 산동면, 광의면 일부, 용방면 일부는 남원부에 속하였다. 그 나머지 지역이 조선시대 구례현의 관할범위였다. 지도 오른쪽 위에 백두대간에 속하는 지리산이 그려졌는데 구례현의 진산에 해당한다. 곳곳에 險隘, 埋伏處가 그려졌다. 지리산 남쪽의 산줄기를 연달아 그려서 험준함을 표현하였는데 요충지에 해당한다는 설명을 자세히 적어놓았다. 그 아래 토지면이 적혔는데 오미리는 金環落地의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토지면 사도리는 도선국사가 異人을 만나 모래를 모아 山川을 그렸다고 전해진다는 내용이 1872년에 제작된 지도에 적혀있다. 토지면 맞은편의 산은 오봉산으로 다섯 봉우리가 마치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구례현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속하는 군현으로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섬진강으로 하동을 지나 남해로 유입된다. 하동과의 경계에 화개동이 표시되었는데 그 근처에 화개장터가 위치한다. 읍성은 의도적으로 사각형으로 그렸는데 구례읍 봉동리 일대에 해당하며 성 밖에 향교가 보인다. 읍치 동북쪽에 그려진 華岩寺는 화엄사를 가르킨다. 국보와 보물이 여러 점 소장된 곳이다. 그 아래 표시된 대직전동, 소직전동은 지리산 피아골 인근의 산지 촌락이다. 그 아래 연곡사는 동부도, 서부도가 국보로 지정된 유서깊은 사찰이다. 읍성의 남문과 연결되는 주요 도로는 하천과 평행하게 형성되었다. 현재의 18번 국도, 19번 국도는 조선시대 이 길들을 확장하여 만든 것이다.(이현군)

  • 곽산군 주기 (郭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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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郭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곽산군 일대이다. 이 곳은 993년(고려 성종 12) 거란족의 1차 침입 때 고려 徐熙(940-998) 장군이 거란의 소손녕과 단판을 벌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개척한 江東六州 가운데 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곽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곽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서 가장 다른 점은 읍치와 雲興舘의 모습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그리고 衙舍 건물 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이 포함되어 5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거의 같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지명 중 《해동지도》와 일치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龜城塩里은 이곳에 있던 龜城의 월경지인 塩里面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을 龜城塩田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월경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실선으로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고을의 전체 모습은 실제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실제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려도 크게 왜곡되지 않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윤정)

  • 경흥부 주기 (慶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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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구에 위치하였던 경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일제시대 慶源府의 일부 지역( 웅기읍과 풍해면 일대)을 포함하여 경흥군으로 되었다. 지금 경흥 지명은 없어지고 함경북도 은덕군의 동쪽 부분과 라선시의 동쪽 부분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부의 서쪽으로부터 곡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이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으며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흥부 해제 참조) 이는 당시 두만강이 국경하천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상류부에서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아오지천을 그린 것이며, 白岳山 부근에서 북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포항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赤地湖에서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인 鹿屯島는 당시 조선영토였으나 지금은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다. 하천의 퇴적 작용으로 러시아의 육지부와 연결되어 있다. 후에 한국령으로 귀속되어야 할 섬이다. 지도 아래쪽에 그려져 있는 규모가 큰 湖水는 지금의 서번포와 동번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서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호수는 만포를 묘사한 것이다. 읍치는 두만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4,525尺)과 함께 묘사되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5곳의 驛이 표시되어 있다. 西水羅驛으로부터 두만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는 造山驛, 撫夷驛으로 연결된다. 내륙으로는 읍치에서 阿吾地驛과 德明驛을 거쳐 경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578戶, 田 897結이 기록되어 있고 畓 면적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김기혁)

  • 교동 (喬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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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 석모도 위쪽, 주문도, 장봉도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오른쪽 가장 위쪽이 예성강 하구이고, 그 아래쪽이 한강 하구이다. 오른쪽으로 강화도가 실제보다 가까운 것처럼 그려져 있고, 아래쪽이 현재의 석모도 위쪽에 해당된다. 원래 남양의 화량진(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던 경기도의 水營을 1629년(인조 7)에 이 고을로 옮기면서 아주 작은 고을임에도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교동부 지도, 《여지도》(古4790-58)의 교동수영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는 적혀 있었던 각 里의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의 주기에 없던 각 面의 초경과 종경의 거리 기록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 새로 수록하면서 지도 위의 거리 정보를 삭제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읍치 아래쪽의 貯水處와 船倉 부근이 《해동지도》에는 작은 돌무더기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는 산봉우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화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완벽하게 산처럼 그려져 있다. 이러한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또는 같은 계통의 지도가 원본을 필사하면서 변화시킨 내용을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산으로 잘못 인식하여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밖에 《해동지도》에는 밀물 때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하천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이런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여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가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대흥군 주기 (大興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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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군은 예산군의 대흥면, 신양면, 광시면, 응봉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대흥면의 동서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대흥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우선 아래의 왼쪽 靑陽界로부터 흘러들어와 위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무한천 본류이고, 오른쪽 위와 아래에서 무한천에 합류하는 하천이 그 지류인 현재의 신양천이다. 신양천은 위쪽으로 예산, 아래쪽으로 청양의 경계 너머에서 흘러 들어오는데, 4개의 지도가 약간씩 다르게 되어 있다. 가장 사실에 합당한 것은 《해동지도》로 비록 아래쪽이 본 지도에서처럼 산줄기에 의해 막힌 것인 양 표현되어 있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하천을 굵게 표시하여 청양계에서 흘러들어옴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했다. 본 지도는 청양계에서 흘러오는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표현하였지만 예산계에서 흘러오는 하천의 끝을 뾰족하게 하여 마지 그곳이 발원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하였다. 《여지도》에서는 이러한 오해 가능성이 더 높게 표현되어 있으며, 《광여도》에서는 신양천의 남북 모두 완벽하게 오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신양천을 가장 이해하기 어렵게 그린 《광여도》의 경우 여러 필사본을 거치면서 조금씩 왜곡된 것을 필사자의 자의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묘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본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備圖에 있는 것을 바탕으로 첨가시킨 지명 중 鳳首山城이 기록되어 있으며, 지도에는 읍치 바로 뒷산에 웅장하게 그려놓았다. 그러나 봉수산성은 함께 그려져 있는 任存城에 대한 다른 명칭이기 때문에 《해동지도》에 첨지를 붙여 교정한 사람은 단순히 지도만 비교하였을 뿐 서로 다른 측면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행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고성현 (固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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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국에 해당하였는데 신라가 병합되면서 古自郡이 되었다. 고성의 읍치는 고성군 고성읍 일대이며 성내리라는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성군의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은 진주목에 해당하였으므로 나머지 지역과 통영시가 관할 구역이었다. 지도에 두 개의 성곽이 보이는데 위쪽이 고성 읍성이 되고 아래쪽이 통영이 된다. 읍성의 아래쪽 바다는 현재의 고성만이 된다. 읍성의 동문에서 통영으로 연결되는 이 지도의 도로는 현재의 14번 국도의 경로와 비슷하다. 위쪽의 고성 읍성에는 객사가 존재하는데 비해 남쪽의 통영에는 객사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세병관이 보이는데 통제사의 집무공간이다. 慶尙右水營 兼 三道統制營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통영시 북신동, 명정동, 도천동 일대에 해당한다. 地乘의 統營 지도에서는 통제영의 군사적 관할 구역을 다 그려서 전라도, 경상도 내륙까지 표현하였지만 이 지도는 고성군의 행정 관할로서 통영을 표현하였기에 지도의 범위가 적다. 조선 수군의 중심지답게 鎭, 船所, 船倉, 烽臺 등이 표시되었다. 통영 남문 앞 바다에는 小海라고 적고 당포진 아래에는 大海라고 적은 점이 이채롭다. 바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흔적으로 보인다. 당포진은 통영시 산양읍에 당포성이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통영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현재 세병관 옆에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충렬사가 남아있다.(이현군)

  • 금구현 (金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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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금산면, 황산면, 봉남면 일대를 관할범위로 하며 금구면 금구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호남고속국도 김제인터체인지 동쪽이 옛 금구현의 읍치 지역이었다. 이 지도의 중심부가 읍치 지역인데 읍성 없이 건물만 그려졌다. 진산은 동쪽에 표시된 봉두산이다. 봉두산의 맥이 객사가 아니라 향교쪽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산이 마치 봉황이 나는 듯한 형상이라 봉두산으로 이름 붙인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모악산은 읍치의 동남쪽에 위치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지도 오른쪽 위에 모악산과 금산사가 표시되었다. 산줄기의 맥세와 하천의 흐름을 반영하여 의도적으로 방향을 바꾸어 그린 것이다. 모악산은 현재 금산면에 위치한 것으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793.5m 높이의 산이다. 그 안에 금산사가 위치하는데 국보 62호 미륵전을 비롯한 여러 보물이 소장된 곳으로 독립된 형국 속에 그려졌다. 후백제의 견훤이 金剛에게 傳位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맏아들 神劍이 견훤을 이 절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지도 왼쪽의 저수지는 현재의 금구면 대율저수지로 비정된다. 지도 위쪽 전주와의 경계에 표시된 炭峙는 금구면 오봉리의 쑥고개로 불리는 곳이다. 전주시 완산구로 넘어가는 1번 국도 상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아래의 상두산은 김제시 금산면과 정읍시 산외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575.3m 높이의 산이다.(이현군)

  • 구성부 (龜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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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龜城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구성시와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천마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구성부 지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이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의 구성부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 읍성이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이 잘 나타나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역시 일부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는 필사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읍성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 부분을 생략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읍성은 方形의 石城으로, 동서남북 4개의 성문, 관청, 향교, 창고, 군사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읍성 안에 ‘萬年寺’라는 사찰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읍성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하여 성곽 안으로 물길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물길이 남문 앞에서 끊어져 있어 읍성 안에는 인문정보 만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서 보이는 鄕廳과 訓錬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읍성안에 그려진 내용이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양윤정)

  • 고성군 (高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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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 동쪽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고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성군은 지금 북한의 고성군 고성읍,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 수동면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진산인 全城山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고, 성곽(둘레 2,123尺)을 묘사하였다. 지금의 고성군 구읍리에 위치한다. 지도의 좌측에 백두대간과 함께 금강산을 실경으로 그렸으며, 지금의 외금강에 해당된다. 하천은 백두대간의 2곳에서 발원한 후 동류하여 읍치를 감싸 돌며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신계천이며 남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남강이다. 두 하천은 읍치의 서쪽에서 합류하여 다시 分岐되어 동해안으로 유입한다. 해안선의 모습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다. 지금의 장전항 만입부는 표현되어 있지 않고, 삼일포도 훨씬 내륙지역에 그려져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驛으로 養珎驛, 高岺驛, 大康驛 등 3곳이 그려져 있다. 도로는 북으로 통천, 남으로 간성, 서로는 인제와 회양으로 이어진다. 통천으로 가는 길은 삼북면-양진역으로 연결된다. 간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동명-대강역을 통해 이어지며 이들 도로는 대체로 평탄하였다. 인제로 가는 길은 高岺驛, 炭嶺으로 연결되며, 회양은 백두대간의 溫井岺-九龍岺을 넘는다. 이들 백두대간을 넘는 길은 매우 험준함을 주기면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909戶, 田 268結19負2束, 畓 132結87負6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교동 주기 (喬桐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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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 석모도 위쪽, 주문도, 장봉도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오른쪽 가장 위쪽이 예성강 하구이고, 그 아래쪽이 한강 하구이다. 오른쪽으로 강화도가 실제보다 가까운 것처럼 그려져 있고, 아래쪽이 현재의 석모도 위쪽에 해당된다. 원래 남양의 화량진(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던 경기도의 水營을 1629년(인조 7)에 이 고을로 옮기면서 아주 작은 고을임에도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교동부 지도, 《여지도》(古4790-58)의 교동수영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는 적혀 있었던 각 里의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의 주기에 없던 각 面의 초경과 종경의 거리 기록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 새로 수록하면서 지도 위의 거리 정보를 삭제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읍치 아래쪽의 貯水處와 船倉 부근이 《해동지도》에는 작은 돌무더기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는 산봉우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화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완벽하게 산처럼 그려져 있다. 이러한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또는 같은 계통의 지도가 원본을 필사하면서 변화시킨 내용을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산으로 잘못 인식하여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밖에 《해동지도》에는 밀물 때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하천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이런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여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가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덕산현 (德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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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현은 예산군의 덕산면, 삽교읍, 봉산면, 고덕면, 당진군의 합덕면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덕산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오른쪽 아래에서 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며, 서남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른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덕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는” 몇 개의 지명을 첨가한다는 내용이 기록된 첨지가 붙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이며, 面 부분에는 外也面과 內也面이 첨가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외대곡면과 내대곡면이 실제로는 외야면과 내야면이기 때문에 첨지를 붙인 사람이 꼼꼼히 검토하지 않은 채 문자의 차이를 면의 차이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의 첨지에 지명이 첨가되기 이전의 상황과 거의 동일하며, 《광여도》와 《여지도》도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해동지도》에서 삽교천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던 場村面이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초기의 필사자가 빠뜨린 것을 다른 필사자들이 사실과 대조하지 않은 채 그대로 필사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오른쪽 위의 非方串面은 덕산의 월경지로서 현재의 당진군 합덕읍 점원리와 신흥리 일대에 있었다. 홍주의 대부분은 지도의 아래쪽 방향에 있었는데 왼쪽 위에도 홍주계가 기록되어 있다. 이쪽 방향에 홍주의 월경지인 雲山面이 현재의 서산시 운산면의 일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지도》에서는 洪州界를 洪川界로 잘못 기록해 놓았다.(이기봉)

  • 고성현 주기 (固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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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국에 해당하였는데 신라가 병합되면서 古自郡이 되었다. 고성의 읍치는 고성군 고성읍 일대이며 성내리라는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성군의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은 진주목에 해당하였으므로 나머지 지역과 통영시가 관할 구역이었다. 지도에 두 개의 성곽이 보이는데 위쪽이 고성 읍성이 되고 아래쪽이 통영이 된다. 읍성의 아래쪽 바다는 현재의 고성만이 된다. 읍성의 동문에서 통영으로 연결되는 이 지도의 도로는 현재의 14번 국도의 경로와 비슷하다. 위쪽의 고성 읍성에는 객사가 존재하는데 비해 남쪽의 통영에는 객사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세병관이 보이는데 통제사의 집무공간이다. 慶尙右水營 兼 三道統制營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통영시 북신동, 명정동, 도천동 일대에 해당한다. 地乘의 統營 지도에서는 통제영의 군사적 관할 구역을 다 그려서 전라도, 경상도 내륙까지 표현하였지만 이 지도는 고성군의 행정 관할로서 통영을 표현하였기에 지도의 범위가 적다. 조선 수군의 중심지답게 鎭, 船所, 船倉, 烽臺 등이 표시되었다. 통영 남문 앞 바다에는 小海라고 적고 당포진 아래에는 大海라고 적은 점이 이채롭다. 바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흔적으로 보인다. 당포진은 통영시 산양읍에 당포성이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통영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현재 세병관 옆에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충렬사가 남아있다.(이현군)

  • 금구현 주기 (金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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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금산면, 황산면, 봉남면 일대를 관할범위로 하며 금구면 금구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호남고속국도 김제인터체인지 동쪽이 옛 금구현의 읍치 지역이었다. 이 지도의 중심부가 읍치 지역인데 읍성 없이 건물만 그려졌다. 진산은 동쪽에 표시된 봉두산이다. 봉두산의 맥이 객사가 아니라 향교쪽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산이 마치 봉황이 나는 듯한 형상이라 봉두산으로 이름 붙인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모악산은 읍치의 동남쪽에 위치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지도 오른쪽 위에 모악산과 금산사가 표시되었다. 산줄기의 맥세와 하천의 흐름을 반영하여 의도적으로 방향을 바꾸어 그린 것이다. 모악산은 현재 금산면에 위치한 것으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793.5m 높이의 산이다. 그 안에 금산사가 위치하는데 국보 62호 미륵전을 비롯한 여러 보물이 소장된 곳으로 독립된 형국 속에 그려졌다. 후백제의 견훤이 金剛에게 傳位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맏아들 神劍이 견훤을 이 절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지도 왼쪽의 저수지는 현재의 금구면 대율저수지로 비정된다. 지도 위쪽 전주와의 경계에 표시된 炭峙는 금구면 오봉리의 쑥고개로 불리는 곳이다. 전주시 완산구로 넘어가는 1번 국도 상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아래의 상두산은 김제시 금산면과 정읍시 산외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575.3m 높이의 산이다.(이현군)

  • 구성부 주기 (龜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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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龜城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구성시와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천마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구성부 지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이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의 구성부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 읍성이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이 잘 나타나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역시 일부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는 필사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읍성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 부분을 생략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읍성은 方形의 石城으로, 동서남북 4개의 성문, 관청, 향교, 창고, 군사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읍성 안에 ‘萬年寺’라는 사찰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읍성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하여 성곽 안으로 물길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물길이 남문 앞에서 끊어져 있어 읍성 안에는 인문정보 만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서 보이는 鄕廳과 訓錬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읍성안에 그려진 내용이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양윤정)

  • 고성군 주기 (高城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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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 동쪽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고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성군은 지금 북한의 고성군 고성읍,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 수동면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진산인 全城山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고, 성곽(둘레 2,123尺)을 묘사하였다. 지금의 고성군 구읍리에 위치한다. 지도의 좌측에 백두대간과 함께 금강산을 실경으로 그렸으며, 지금의 외금강에 해당된다. 하천은 백두대간의 2곳에서 발원한 후 동류하여 읍치를 감싸 돌며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신계천이며 남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남강이다. 두 하천은 읍치의 서쪽에서 합류하여 다시 分岐되어 동해안으로 유입한다. 해안선의 모습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다. 지금의 장전항 만입부는 표현되어 있지 않고, 삼일포도 훨씬 내륙지역에 그려져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驛으로 養珎驛, 高岺驛, 大康驛 등 3곳이 그려져 있다. 도로는 북으로 통천, 남으로 간성, 서로는 인제와 회양으로 이어진다. 통천으로 가는 길은 삼북면-양진역으로 연결된다. 간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동명-대강역을 통해 이어지며 이들 도로는 대체로 평탄하였다. 인제로 가는 길은 高岺驛, 炭嶺으로 연결되며, 회양은 백두대간의 溫井岺-九龍岺을 넘는다. 이들 백두대간을 넘는 길은 매우 험준함을 주기면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909戶, 田 268結19負2束, 畓 132結87負6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교하현 (交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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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현은 파주시 시내(옛 금촌읍)와 교하면, 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현재의 탄현면 갈현리인데, 1731년(영조 7)에 長陵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현재의 파주시 금릉동인 지도 위의 金尺浦津의 위치로 옮긴다. 이후 1738년(영조 14)에 현재의 교하면 교하리인 지도 위의 長命山 동쪽으로 옮기는데, 본 지도의 읍치 위치를 통해 최초 원본이 1731년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교하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해동지도》에는 읍치 위쪽의 烽臺가 서쪽으로 풍덕의 덕적산 봉수와, 동쪽으로 고양의 고봉 봉수와 연결되고 있음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명칭이 교하군으로 되어 있는데, 1731년(영조 7)에 읍치에 장릉을 옮겨오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도면에는 장릉이 옮겨오기 전의 읍치가 그려져 있어 군으로 승격되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해동지도》의 지도는 1731년 이전에 그려지고, 주기는 그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명칭이 교하현으로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작성되지 않은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에도 교하현으로 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살펴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광여도》와 거의 동일한 《여지도》의 경우 교하군으로 되어 있어 사실을 확인한 다음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속에서도 읍치의 이동 사실은 교정하지 못하여 꼼꼼한 검토를 통해 필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고, 가운데가 곡릉천이며, 가장 아래쪽이 한강이다. 그러나 지도에는 세 하천의 규모를 전혀 알 수 없게 그려놓았는데,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부터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임진강을 곡릉천과 다르게 그려 일면 하천 규모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지만 한강을 곡릉천과 동일하게 그려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이기봉)

  • 덕산현 주기 (德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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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현은 예산군의 덕산면, 삽교읍, 봉산면, 고덕면, 당진군의 합덕면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덕산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오른쪽 아래에서 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며, 서남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른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덕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는” 몇 개의 지명을 첨가한다는 내용이 기록된 첨지가 붙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이며, 面 부분에는 外也面과 內也面이 첨가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외대곡면과 내대곡면이 실제로는 외야면과 내야면이기 때문에 첨지를 붙인 사람이 꼼꼼히 검토하지 않은 채 문자의 차이를 면의 차이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의 첨지에 지명이 첨가되기 이전의 상황과 거의 동일하며, 《광여도》와 《여지도》도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해동지도》에서 삽교천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던 場村面이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초기의 필사자가 빠뜨린 것을 다른 필사자들이 사실과 대조하지 않은 채 그대로 필사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오른쪽 위의 非方串面은 덕산의 월경지로서 현재의 당진군 합덕읍 점원리와 신흥리 일대에 있었다. 홍주의 대부분은 지도의 아래쪽 방향에 있었는데 왼쪽 위에도 홍주계가 기록되어 있다. 이쪽 방향에 홍주의 월경지인 雲山面이 현재의 서산시 운산면의 일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지도》에서는 洪州界를 洪川界로 잘못 기록해 놓았다.(이기봉)

  • 곤양군 (昆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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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양의 읍치는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일대이며 지금도 남문밖이라는 지명으로 과거에 읍성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관할구역은 사천시의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과 하동군의 진교면, 금성면, 금남면의 일부 지역이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곤양천이며 지도 아래쪽이 사천만이다. 군현명이 면 명칭으로 격하되었지만 남해고속국도 곤양분기점 인근에 옛 읍치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읍치의 남쪽이 바다가 되고 북쪽 3리 지점에 있는 동곡산이 진산이 된다. 이 지도는 서쪽이 위가 되도록 그렸다. 객사, 군기고, 아사 등 읍성 안의 건물이 왼쪽을 향하는 것은 남향하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옥이 그려진 점이 특이한데 일반적으로 옥은 읍성 안에 존재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노량이 표시되었는데 금남면 노량리에 해당한다. 이곳과 남해를 연결하는 다리가 남해대교이다. 이 일대에서 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다. 노량초등학교 등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남해로 연결되는 육로상에 양포역과 금양역이 보이며 그 옆에 진교장이 표시되었다. 진교장을 따서 현재의 진교면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바다와 접한 곳에 선소를 그렸다. 지도 위의 태봉은 세종대왕의 태를 안치한 것이다. 태봉 오른쪽 금성이 표시되었는데 곤명면 금성리에 있었다. 이 밖에 사찰, 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금산군 (錦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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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 지도의 전라도에 포함된 군현 중에서 금산군과 珍山郡은 현재 충청도에 해당한다. 금산군은 현재의 금산군 금산읍, 군북면, 금성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 제원면,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일대이다. 금산군의 나머지 면은 조선시대 진산군의 영역에 포함된다. 읍치 북쪽의 所山이 진산에 해당하며 금산읍 아인리 일대가 이 지도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의 봉황천은 오른쪽의 금강으로 유입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이 지도에는 읍성을 그리지 않았다. 향교 뒤쪽에 순절비를 표시하고 비석 그림을 그렸다. 그 북쪽에 義塚과 從容堂이 그려졌는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사적 105호 칠백의총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趙憲 등을 모신 곳이다. 도로를 그리고 역원을 표시하였다. 지도 오른쪽 위의 제원역은 현재의 제원면 제원리에 해당하며 읍치를 중심으로 한 도로가 현재의 68번 지방도로, 37번 국도의 근원이 되었다. 지도 오른쪽에 부동면, 부서면, 부남면, 부북면이 적혔는데 富利廢縣 지역이다. 현재의 부리면 현내리가 옛 부리현의 중심지이다. 읍치 왼쪽의 성곡서원은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金侁 등을 배향하였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險隘라고 표시하였다. (이현군)

  • 금천군 (金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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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남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의 금천군, 토산군의 서쪽, 황해남도 봉천군의 동쪽 일부, 개성직할시 장풍군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금천군의 금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읍치의 동남쪽에 있는 大興山城과 동쪽의 大南面 부분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방향이 일정하게 맞지는 않는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가장 큰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예성강 본류는 대체적으로 북쪽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본 지도에 표현된 내용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다른 3개 지도에는 왼쪽 위쪽에 新溪界와 兎山界가 적혀 있지만 본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어 대략적인 방향을 이해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토산계 방면에서는 현재의 구연강이 흘러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구연강은 대흥산성에서 흘러오는 하천보다 훨씬 길고 하폭도 넓지만 아주 작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대형산성인 대현산성과 읍치 부분을 가장 크고 자세하게 그리고, 동북-서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고을의 모습을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비슷하지만 산줄기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산줄기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변형이 가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금천군은 효종 3년(1652)에 江陰縣과 牛峯縣이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각각의 중심지가 읍치 위쪽에 古牛峯旧基로, 아래쪽에 古江陰으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고원군 (高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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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고원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원군은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 일대이다. 지도의 아래 부분에 동해를 그려 해안에 연한 군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구 일부만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이 서쪽이다. 지도의 윗부분에 평안도 양덕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험준하게 묘사한 반면 문천과 영흥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여러 고개 지명과 도로들이 그려져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군의 서에서 동으로 흘러 造進浦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弗南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山谷을 거쳐 석산창을 지나 읍치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덕지강을 그린 것이다. 土岺에서 발원하여 덕지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동천을 그린 듯 하다. 지도 좌측의 龍淵 부근에서 발원하여 문천과의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읍치는 조진포 가까이에 衙舍와 文廟를 통해 묘사하였다. 성곽은 그려져 있지 않다. 지금의 고원읍 조양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내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원군 해제 참조).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일부 도로는 생략되어 표현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고원군에 역으로 隘水驛이 그려져 있으나 지명으로만 隘水倉으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덕지강변을 따라 山谷과 隘水倉을 거쳐 弗南岺을 지나는 도로는 양덕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곳으로는 평원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 좌측에서도 양덕으로 연결되는 별도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문천에서 이곳 읍치를 지나 영흥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표현되어 있는데 지금 이 경로로 함경남부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5戶, 田 1,732結33負4束, 畓 198結42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기혁)

  • 교하현 주기 (交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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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현은 파주시 시내(옛 금촌읍)와 교하면, 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현재의 탄현면 갈현리인데, 1731년(영조 7)에 長陵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현재의 파주시 금릉동인 지도 위의 金尺浦津의 위치로 옮긴다. 이후 1738년(영조 14)에 현재의 교하면 교하리인 지도 위의 長命山 동쪽으로 옮기는데, 본 지도의 읍치 위치를 통해 최초 원본이 1731년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교하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해동지도》에는 읍치 위쪽의 烽臺가 서쪽으로 풍덕의 덕적산 봉수와, 동쪽으로 고양의 고봉 봉수와 연결되고 있음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명칭이 교하군으로 되어 있는데, 1731년(영조 7)에 읍치에 장릉을 옮겨오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도면에는 장릉이 옮겨오기 전의 읍치가 그려져 있어 군으로 승격되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해동지도》의 지도는 1731년 이전에 그려지고, 주기는 그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명칭이 교하현으로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작성되지 않은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에도 교하현으로 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살펴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광여도》와 거의 동일한 《여지도》의 경우 교하군으로 되어 있어 사실을 확인한 다음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속에서도 읍치의 이동 사실은 교정하지 못하여 꼼꼼한 검토를 통해 필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고, 가운데가 곡릉천이며, 가장 아래쪽이 한강이다. 그러나 지도에는 세 하천의 규모를 전혀 알 수 없게 그려놓았는데,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부터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임진강을 곡릉천과 다르게 그려 일면 하천 규모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지만 한강을 곡릉천과 동일하게 그려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이기봉)

  • 뒷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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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뒷표지 1면입니다.

  • 곤양군 주기 (昆陽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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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양의 읍치는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일대이며 지금도 남문밖이라는 지명으로 과거에 읍성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관할구역은 사천시의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과 하동군의 진교면, 금성면, 금남면의 일부 지역이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곤양천이며 지도 아래쪽이 사천만이다. 군현명이 면 명칭으로 격하되었지만 남해고속국도 곤양분기점 인근에 옛 읍치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읍치의 남쪽이 바다가 되고 북쪽 3리 지점에 있는 동곡산이 진산이 된다. 이 지도는 서쪽이 위가 되도록 그렸다. 객사, 군기고, 아사 등 읍성 안의 건물이 왼쪽을 향하는 것은 남향하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옥이 그려진 점이 특이한데 일반적으로 옥은 읍성 안에 존재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노량이 표시되었는데 금남면 노량리에 해당한다. 이곳과 남해를 연결하는 다리가 남해대교이다. 이 일대에서 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다. 노량초등학교 등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남해로 연결되는 육로상에 양포역과 금양역이 보이며 그 옆에 진교장이 표시되었다. 진교장을 따서 현재의 진교면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바다와 접한 곳에 선소를 그렸다. 지도 위의 태봉은 세종대왕의 태를 안치한 것이다. 태봉 오른쪽 금성이 표시되었는데 곤명면 금성리에 있었다. 이 밖에 사찰, 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금산군 주기 (錦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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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 지도의 전라도에 포함된 군현 중에서 금산군과 珍山郡은 현재 충청도에 해당한다. 금산군은 현재의 금산군 금산읍, 군북면, 금성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 제원면,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일대이다. 금산군의 나머지 면은 조선시대 진산군의 영역에 포함된다. 읍치 북쪽의 所山이 진산에 해당하며 금산읍 아인리 일대가 이 지도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의 봉황천은 오른쪽의 금강으로 유입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이 지도에는 읍성을 그리지 않았다. 향교 뒤쪽에 순절비를 표시하고 비석 그림을 그렸다. 그 북쪽에 義塚과 從容堂이 그려졌는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사적 105호 칠백의총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趙憲 등을 모신 곳이다. 도로를 그리고 역원을 표시하였다. 지도 오른쪽 위의 제원역은 현재의 제원면 제원리에 해당하며 읍치를 중심으로 한 도로가 현재의 68번 지방도로, 37번 국도의 근원이 되었다. 지도 오른쪽에 부동면, 부서면, 부남면, 부북면이 적혔는데 富利廢縣 지역이다. 현재의 부리면 현내리가 옛 부리현의 중심지이다. 읍치 왼쪽의 성곡서원은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金侁 등을 배향하였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險隘라고 표시하였다. (이현군)

  • 금천군 주기 (金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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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남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의 금천군, 토산군의 서쪽, 황해남도 봉천군의 동쪽 일부, 개성직할시 장풍군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금천군의 금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읍치의 동남쪽에 있는 大興山城과 동쪽의 大南面 부분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방향이 일정하게 맞지는 않는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가장 큰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예성강 본류는 대체적으로 북쪽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본 지도에 표현된 내용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다른 3개 지도에는 왼쪽 위쪽에 新溪界와 兎山界가 적혀 있지만 본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어 대략적인 방향을 이해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토산계 방면에서는 현재의 구연강이 흘러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구연강은 대흥산성에서 흘러오는 하천보다 훨씬 길고 하폭도 넓지만 아주 작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대형산성인 대현산성과 읍치 부분을 가장 크고 자세하게 그리고, 동북-서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고을의 모습을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비슷하지만 산줄기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산줄기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변형이 가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금천군은 효종 3년(1652)에 江陰縣과 牛峯縣이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각각의 중심지가 읍치 위쪽에 古牛峯旧基로, 아래쪽에 古江陰으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고원군 주기 (高原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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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고원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원군은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 일대이다. 지도의 아래 부분에 동해를 그려 해안에 연한 군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구 일부만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이 서쪽이다. 지도의 윗부분에 평안도 양덕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험준하게 묘사한 반면 문천과 영흥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여러 고개 지명과 도로들이 그려져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군의 서에서 동으로 흘러 造進浦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弗南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山谷을 거쳐 석산창을 지나 읍치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덕지강을 그린 것이다. 土岺에서 발원하여 덕지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동천을 그린 듯 하다. 지도 좌측의 龍淵 부근에서 발원하여 문천과의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읍치는 조진포 가까이에 衙舍와 文廟를 통해 묘사하였다. 성곽은 그려져 있지 않다. 지금의 고원읍 조양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내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원군 해제 참조).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일부 도로는 생략되어 표현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고원군에 역으로 隘水驛이 그려져 있으나 지명으로만 隘水倉으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덕지강변을 따라 山谷과 隘水倉을 거쳐 弗南岺을 지나는 도로는 양덕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곳으로는 평원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 좌측에서도 양덕으로 연결되는 별도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문천에서 이곳 읍치를 지나 영흥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표현되어 있는데 지금 이 경로로 함경남부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5戶, 田 1,732結33負4束, 畓 198結42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기혁)

  • 금천현 (衿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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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현재의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다.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읍치는 동쪽의 三聖山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위치해 있었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위쪽에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본 지도의 衙(舍) 부분에 衿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금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금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며, 水踰峴을 동일하게 水踰山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어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본 지도와 달리 衙(舍)에 邑內라고 적혀 있어 본 자도 자체보다는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필사과정에서 도로를 생략하였으며, 《여지도》의 경우 한강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는 등의 새로운 오류도 범하고 있다. 한편 뒤의 2개 지도가 읍치의 산세 묘사에서 본 지도나 《해동지도》보다 훨씬 풍수적인 형국에 가까운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음도 눈에 띈다.(이기봉)

  • 뒷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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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뒷표지 2면입니다.

  • 군위현 (軍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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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중앙고속국도가 관통하는 지역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군위군 군위읍 동부리, 서부리 일대이다. 관할범위는 군위읍, 효령면, 소보면 등이다. 진산은 마정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치의 동남 5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현대 지형도 상으로 보면 현의 남쪽에 위치하는 402.4m의 산이다. 이 지도에는 위쪽에 그려졌는데 진산을 위에 표시하기 위해 지도의 남북 방향을 바꾸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봉수대가 있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북쪽(지도의 아래)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표시했는데 객사의 방향만 다른 쪽을 향하게 그리고 있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 등은 표시하지 않았다. 이 지도에는 객사 건물이 두 개 등장한다. 현재 읍치 오른쪽에 또다른 객사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 효령창이 보이는데 군위의 속현이었던 효령현에 해당하는 곳이다. 현재는 효령면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현재 읍치의 객사 왼쪽 아래의 영귀대는 군위읍 내량리에 위치하였는데 서애 유성룡이 노닐던 곳으로 전해진다. 그 옆의 남계서원은 1627년(인조 5)에 지어졌으며 유성룡을 배향하였다. 지도 위쪽의 소계역은 현재의 효령면 화계리에 있던 역으로 1896년에 폐지되었다. 이밖에 사찰, 누대, 창고, 도로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김제군 (金堤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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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군은 현재의 김제시내를 중심으로 백산면, 죽산면, 부량면, 백구면, 용지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지도 중심부의 읍치는 옥산동, 신풍동, 요촌동 일대이며 향교는 교동에 있었다. 平皐廢縣과 鳴良縣이 김제군에 포함되었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하천은 만경강이며 아래쪽의 하천은 동진강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東津이 표시되었다. 근처에 지금 23번 국도상의 동진강 휴게소와 동진교가 있다. 그 옆에 해창이 표시되었는데 죽산면 대창리로 추정된다. 현재의 해안선은 간척의 영향으로 부분적으로 변경되었다. 동진강 북쪽에 浦橋가 그려진 하천은 현재의 원평천이다. 29번 국도변의 부량주유소 근처에 포교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읍치 남서쪽에 大堤가 크게 그려졌으며 지도 오른쪽 아래에 벽골제언이 표시되었다. 농사를 위한 제언으로 벽골제의 제방은 사적 115호 지정되었는데 현재의 부량면에 있었다. 김제군은 본래 백제의 碧骨郡으로 그 이름이 제언의 명칭이 된 것이다. 330년(訖解王 21)에 처음 둑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읍치 북쪽의 사찰은 서흥농공단지 동북쪽에 위치한 사찰로 26.2m의 승반산 아래에 있는 것이다. 김제가 해안에 인접한 군현이고 사찰 뒤쪽이 아주 낮은 산이지만 맥으로 주변 지형을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현재 김제시 곳곳에 저수지가 존재한다.(이현군)

  • 덕천군 (德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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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덕천군 삼흥리를 제외한 전 지역을 포함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덕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덕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舘舍, 衙舍, 鄕校 3개의 정보만 수록되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건물의 수는 총 14개이고, 명칭도 6개나 적혀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에도 《해동지도》보다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이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鄕校 부분의 산지의 모습이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위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지만 본 지도에서는 아랫부분까지 산지로 그려져 마치 그 안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지도》의 경우 읍치 안에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訓練 왼쪽의 것이 鄕廳으로 교정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본 지도책의 다른 군현 지도에 대부분 적혀 있는 面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서로간의 관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오른쪽 위의 熙川界에서 들어와 아래쪽 順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본 지도에는 대동강의 지류에 대한 표기에서 크게 2개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째, 오른쪽의 孟山界에서 현재의 맹산강이 흘러들어오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본 고을 안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둘째, 왼쪽의 价川界에서 대동강의 지류가 흘러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런 지류는 없다. 이 역시 본 지도와 3종의 지도에서 모두 나타나는 오류이다. (양윤정)

  • 금성현 (金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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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의 남서쪽의 내륙에 위치하였던 금성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의 김화군에 병합되면서 금성면·원동면·원남면·원북면·창도면·통구면이 되었으며, 지금은 북한의 김화군과 창도군 일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 좌측에 객사, 아사, 향교, 慶陽樓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鎭山인 慶坡山은 읍치의 북쪽에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古城이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우측에 남북으로 길게 그리고, 白亦山, 黃腸山이 읍치의 祖山으로 그려져 있다. 남대천으로 기재된 하천이 읍치 앞을 지나 동류하다가 회양으로부터 유입되는 하천과 합류한다. 남대천은 지금의 금성천이며, 우측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북한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금성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서남쪽으로 남대천을 건너 直木驛으로 적색으로 표현된 도로는 금화로 연결된다. 이 길은 당시 한양과 통하는 大路이며, 한반도 동북쪽의 함경도 서수라까지 통하는 길이었다. 남대천의 水串橋를 지나 西雲驛을 거쳐 낭천으로 이어진다. 회양으로 가는 도로는 仞乙坡峙 -昌道驛을 거쳐 연결된다. 가는 길목에 大慶津을 건너 縣倉으로 가는 작은 도로가 그려져 있다. 가까이 金剛路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의 주기 내용으로 보아 이 길은 금강산 斷髮嶺으로 가는 도로인 것으로 보인다. 주기에는 民戶 3,490戶, 田 199結43負9束, 畓 4結52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금천현 주기 (衿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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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현재의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다.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읍치는 동쪽의 三聖山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위치해 있었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위쪽에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본 지도의 衙(舍) 부분에 衿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금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금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며, 水踰峴을 동일하게 水踰山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어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본 지도와 달리 衙(舍)에 邑內라고 적혀 있어 본 자도 자체보다는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필사과정에서 도로를 생략하였으며, 《여지도》의 경우 한강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는 등의 새로운 오류도 범하고 있다. 한편 뒤의 2개 지도가 읍치의 산세 묘사에서 본 지도나 《해동지도》보다 훨씬 풍수적인 형국에 가까운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음도 눈에 띈다.(이기봉)

  • 면천군 (沔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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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군은 당진군의 면천면, 송악면, 순성면, 부장리와 신촌리 및 강문리를 제외한 우강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면천면의 성상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면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唐津界의 물줄기는 胎峯, 排峙, 火峙에서 나오는데, 備圖에는 있으나 이 지도에는 없어 그려넣는다”란 첨지가 붙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湖西地圖》이며, 본 지도에는 없는 태봉 서쪽의 물줄기와 배치, 화치 등의 지명이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도 앞의 문구 차원에서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연관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천에 대한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면천현은 북쪽으로 바다와 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마치 하천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또한 동쪽과 동남쪽으로 현재의 삽교천과는 新昌을 마주하면서 일부만 접해 있고, 대부분 홍주와 아산 및 덕산의 월경지가 끼어 있다. 따라서 오른쪽 아래로부터 위로 향해 있는 하천과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지도에도 洪陽界(洪州界)와 新昌界 및 德山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라면 그 바깥쪽으로 흘러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싶으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와 비교해 보면 된다. 이러한 오류는 본 지도뿐만 아니라 앞의 3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와 비교해 볼 때 바깥쪽 경계선과 하천을 동일하게 인식하여 범한 오류가 아닌가 한다. 이런 추정이 맞다면 본 지도 계통의 원본 지도에는 하천과 경계선을 애매하게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군위현 주기 (軍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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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중앙고속국도가 관통하는 지역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군위군 군위읍 동부리, 서부리 일대이다. 관할범위는 군위읍, 효령면, 소보면 등이다. 진산은 마정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치의 동남 5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현대 지형도 상으로 보면 현의 남쪽에 위치하는 402.4m의 산이다. 이 지도에는 위쪽에 그려졌는데 진산을 위에 표시하기 위해 지도의 남북 방향을 바꾸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봉수대가 있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북쪽(지도의 아래)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표시했는데 객사의 방향만 다른 쪽을 향하게 그리고 있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 등은 표시하지 않았다. 이 지도에는 객사 건물이 두 개 등장한다. 현재 읍치 오른쪽에 또다른 객사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 효령창이 보이는데 군위의 속현이었던 효령현에 해당하는 곳이다. 현재는 효령면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현재 읍치의 객사 왼쪽 아래의 영귀대는 군위읍 내량리에 위치하였는데 서애 유성룡이 노닐던 곳으로 전해진다. 그 옆의 남계서원은 1627년(인조 5)에 지어졌으며 유성룡을 배향하였다. 지도 위쪽의 소계역은 현재의 효령면 화계리에 있던 역으로 1896년에 폐지되었다. 이밖에 사찰, 누대, 창고, 도로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김제군 주기 (金堤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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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군은 현재의 김제시내를 중심으로 백산면, 죽산면, 부량면, 백구면, 용지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지도 중심부의 읍치는 옥산동, 신풍동, 요촌동 일대이며 향교는 교동에 있었다. 平皐廢縣과 鳴良縣이 김제군에 포함되었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하천은 만경강이며 아래쪽의 하천은 동진강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東津이 표시되었다. 근처에 지금 23번 국도상의 동진강 휴게소와 동진교가 있다. 그 옆에 해창이 표시되었는데 죽산면 대창리로 추정된다. 현재의 해안선은 간척의 영향으로 부분적으로 변경되었다. 동진강 북쪽에 浦橋가 그려진 하천은 현재의 원평천이다. 29번 국도변의 부량주유소 근처에 포교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읍치 남서쪽에 大堤가 크게 그려졌으며 지도 오른쪽 아래에 벽골제언이 표시되었다. 농사를 위한 제언으로 벽골제의 제방은 사적 115호 지정되었는데 현재의 부량면에 있었다. 김제군은 본래 백제의 碧骨郡으로 그 이름이 제언의 명칭이 된 것이다. 330년(訖解王 21)에 처음 둑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읍치 북쪽의 사찰은 서흥농공단지 동북쪽에 위치한 사찰로 26.2m의 승반산 아래에 있는 것이다. 김제가 해안에 인접한 군현이고 사찰 뒤쪽이 아주 낮은 산이지만 맥으로 주변 지형을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현재 김제시 곳곳에 저수지가 존재한다.(이현군)

  • 덕천군 주기 (德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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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덕천군 삼흥리를 제외한 전 지역을 포함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덕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덕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舘舍, 衙舍, 鄕校 3개의 정보만 수록되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건물의 수는 총 14개이고, 명칭도 6개나 적혀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에도 《해동지도》보다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이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鄕校 부분의 산지의 모습이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위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지만 본 지도에서는 아랫부분까지 산지로 그려져 마치 그 안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지도》의 경우 읍치 안에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訓練 왼쪽의 것이 鄕廳으로 교정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본 지도책의 다른 군현 지도에 대부분 적혀 있는 面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서로간의 관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오른쪽 위의 熙川界에서 들어와 아래쪽 順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본 지도에는 대동강의 지류에 대한 표기에서 크게 2개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째, 오른쪽의 孟山界에서 현재의 맹산강이 흘러들어오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본 고을 안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둘째, 왼쪽의 价川界에서 대동강의 지류가 흘러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런 지류는 없다. 이 역시 본 지도와 3종의 지도에서 모두 나타나는 오류이다. (양윤정)

  • 금성현 주기 (金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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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의 남서쪽의 내륙에 위치하였던 금성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의 김화군에 병합되면서 금성면·원동면·원남면·원북면·창도면·통구면이 되었으며, 지금은 북한의 김화군과 창도군 일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 좌측에 객사, 아사, 향교, 慶陽樓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鎭山인 慶坡山은 읍치의 북쪽에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古城이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우측에 남북으로 길게 그리고, 白亦山, 黃腸山이 읍치의 祖山으로 그려져 있다. 남대천으로 기재된 하천이 읍치 앞을 지나 동류하다가 회양으로부터 유입되는 하천과 합류한다. 남대천은 지금의 금성천이며, 우측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북한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금성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서남쪽으로 남대천을 건너 直木驛으로 적색으로 표현된 도로는 금화로 연결된다. 이 길은 당시 한양과 통하는 大路이며, 한반도 동북쪽의 함경도 서수라까지 통하는 길이었다. 남대천의 水串橋를 지나 西雲驛을 거쳐 낭천으로 이어진다. 회양으로 가는 도로는 仞乙坡峙 -昌道驛을 거쳐 연결된다. 가는 길목에 大慶津을 건너 縣倉으로 가는 작은 도로가 그려져 있다. 가까이 金剛路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의 주기 내용으로 보아 이 길은 금강산 斷髮嶺으로 가는 도로인 것으로 보인다. 주기에는 民戶 3,490戶, 田 199結43負9束, 畓 4結52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김포군 (金浦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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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군은 현재의 김포시 시내, 고촌면, 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김포시 북변동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도 가운데의 章陵에 있었는데,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아버지인 元宗과 인헌왕후의 능을 양주에서 옮겨오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古縣內面이라는 명칭은 읍치가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의 좌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쪽에는 강화도와 영종도 방향의 서해가 있고, 아래쪽은 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김포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에는 위쪽의 서해가 생략되어 있는데, 본 지도를 통해 볼 때 후에 주기를 삽입하기 위해 서해 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도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 비해서는 소략한 편이어서 필사자가 꼼꼼하게 검토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괄적으로 없앤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광여도》의 경우 章陵을 章島로 잘못 표기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꼼꼼하지 못한 측면이 잘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면천군 주기 (沔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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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군은 당진군의 면천면, 송악면, 순성면, 부장리와 신촌리 및 강문리를 제외한 우강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면천면의 성상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면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唐津界의 물줄기는 胎峯, 排峙, 火峙에서 나오는데, 備圖에는 있으나 이 지도에는 없어 그려넣는다”란 첨지가 붙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湖西地圖》이며, 본 지도에는 없는 태봉 서쪽의 물줄기와 배치, 화치 등의 지명이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도 앞의 문구 차원에서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연관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천에 대한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면천현은 북쪽으로 바다와 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마치 하천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또한 동쪽과 동남쪽으로 현재의 삽교천과는 新昌을 마주하면서 일부만 접해 있고, 대부분 홍주와 아산 및 덕산의 월경지가 끼어 있다. 따라서 오른쪽 아래로부터 위로 향해 있는 하천과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지도에도 洪陽界(洪州界)와 新昌界 및 德山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라면 그 바깥쪽으로 흘러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싶으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와 비교해 보면 된다. 이러한 오류는 본 지도뿐만 아니라 앞의 3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호서지도》의 덕산 지도와 비교해 볼 때 바깥쪽 경계선과 하천을 동일하게 인식하여 범한 오류가 아닌가 한다. 이런 추정이 맞다면 본 지도 계통의 원본 지도에는 하천과 경계선을 애매하게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금산군 (金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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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의 읍치는 현재의 김천시내에 해당하는데 향교가 있던 곳이 교동이다. 충청도의 錦山郡과는 한자가 다르다. 금산군은 현재의 김천시내, 봉산면, 어모면, 대항문, 감문면 일부, 구성면 일부, 조마면, 감천면 일부, 농소면 일부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에 해당한다. 백두대간과 맞닿은 고을로 현재의 충청도 일부가 과거에는 경상도 금산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분수계와 행정구역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읍치 동쪽으로 아산천이 적혀 있는데 지금의 아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감천(감곡천)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감천교가 표시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하천명이 된 것이다. 읍치 앞의 남천과 왼쪽의 북천으로 표시된 것은 현재의 직지천인데 직지사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표시된 것이다. 직지천과 감천을 따라 경부고속도로가 나있다. 이 지도에서도 하천을 따라 도로가 표시되었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현대 도로의 모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 위에 추풍역과 두화원이 표시되었다. 원은 지승지도집의 다른 지도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이 지도에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충청도와의 경계 너머 추풍역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왜유현이 표시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은 오파산으로 현재의 어모면 남산리에 있는 산이다. 왼쪽 위의 직지사는 418년(신라 눌지왕 2)에 창건된 사찰이다. 지도 아래에 김천도역이 보이는데 이 이름이 현재 김천시의 어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이현군)

  • 나주목 (羅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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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發羅郡을 신라에서 錦山郡으로 개칭하여 불렀다. 지도 위쪽에 금성산이 표시되었는데 이를 따서 錦城이라고 하기도 해서 해동지도에는 錦城縣으로 그려진 전라남도 나주 일대의 지도이다. 금성산이 나주의 진산에 해당한다. 서남해안의 중심 군현답게 많은 섬들이 보인다. 현재의 나주시에서 남평읍, 산포면, 봉황면, 다도면은 南平縣에 속하였기 때문에 제외되고 광주광역시의 서쪽 지역, 영암군 금정면, 신북면 일부, 시종면 일부, 무안군 삼향면, 신안군의 섬들이 관할 범위에 속한다. 읍치는 나주시내 남내동 일대인데 옛 읍치 지역에는 현재 보물 49호 동문외석당간이 남아있다. 읍성 왼쪽의 향교는 보물 제 394호 향교대성전으로 지정되었다. 읍성 안에 객사, 아사, 창이 그려지는 것은 군현지도에서 일반적이지만 東部, 西部 등 성 안 행정구역이 표시된 점은 이색적이다. 읍성 앞에는 左營이 보인다. 방면의 이름을 네모 안에 구별되게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치 동쪽에서 흘러내려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영산강이다. 지도 아래 바다로 유입되는 영산강 동쪽에 南海堂이 표시되었는데 南海神祠이다. 시종면에 남해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그 왼쪽에 삼향사, 삼향면 등의 지명이 보이는데 근처에 현재 영산호 하구둑이 건설된 곳이다. 봉대, 죽전, 포구, 진도,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 신안원은 왕곡면 신원리에 있던 역원이다. 섬들에는 牧場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고 있다.(이현군)

  • 뒷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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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뒷표지 1면입니다.

  • 길주목 (吉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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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길주목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길주목은 일제시대 길주군과 학성군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은 함경북도 길주군과 김책시, 화대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길주의 실제 모습은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배치하여 그리고 있다. 明川·端川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강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곳곳에 峰과 嶺 지명을 기재하였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여러 곳에 그려져 있으며 그중 지도의 중앙부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현재 길주군을 지나는 남대천이다. 斜下斗와 七榮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사학분천, 유위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남대천 외에도 여러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김책시(일제시대 학성군)를 지나는 임명천, 쌍포천, 한천천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남대천의 좌안에 성곽(둘레 ; 10,600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길주군 길주읍 일대이다.(기타 지명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길주목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우측으로 地境峙를 지나는 도로는 명천으로 연결된다. 위쪽으로는 남대천의 좌측 하안을 따라 西北驛을 거쳐 雲嶺으로 이어진다. 지도의 좌측으로는 臨溟驛, 鎭東驛, 城津驛, 胡打里驛을 거쳐 단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들이 여러 경로로 그려져 있다. 이들 도로중 마천령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주 관북대로의 일부였으며, 지금은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032戶, 田 4,144結2負5束, 畓 284結7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김포군 주기 (金浦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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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군은 현재의 김포시 시내, 고촌면, 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김포시 북변동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도 가운데의 章陵에 있었는데,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아버지인 元宗과 인헌왕후의 능을 양주에서 옮겨오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古縣內面이라는 명칭은 읍치가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의 좌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쪽에는 강화도와 영종도 방향의 서해가 있고, 아래쪽은 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김포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에는 위쪽의 서해가 생략되어 있는데, 본 지도를 통해 볼 때 후에 주기를 삽입하기 위해 서해 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도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 비해서는 소략한 편이어서 필사자가 꼼꼼하게 검토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괄적으로 없앤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광여도》의 경우 章陵을 章島로 잘못 표기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꼼꼼하지 못한 측면이 잘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목천현 (木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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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천현은 천안시의 목천면, 성남면, 병천면, 동면, 북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목천면의 동리와 서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목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목천현의 물을 모두 모아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 병천천이라고 부른다. 幷川은 3.1운동 때 옥사한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장터에서 유래된 말로 ‘아우내’를 한자식으로 기록한 것이 공식 명칭으로 변한 것이다. 다만 오른쪽의 일원동면과 이원동면은 현재의 동면으로 이곳에서 흐르는 물은 청주의 땅에서 아우내와 합류됨에도 불구하고 마치 목천현 내에서 합류되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해동지도》의 읍치에는 향교를 비롯하여 6개의 건물밖에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본 지도에는 총 18개나 되는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목천현 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실제 배치와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이러한 건물 중 중요한 건물만 그렸으며, 부속된 건물을 생략하면서 건물의 숫자가 극도로 축소되게 되었다. 본 지도에는 《호서지도》와 거의 같은 숫자의 건물이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건물의 배치가 엉성하게 표현되는 단점이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해동지도》보다 덜 하지만 건물의 수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배치를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여 필사 과정에서 왜곡이 발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 금산군 주기 (金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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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의 읍치는 현재의 김천시내에 해당하는데 향교가 있던 곳이 교동이다. 충청도의 錦山郡과는 한자가 다르다. 금산군은 현재의 김천시내, 봉산면, 어모면, 대항문, 감문면 일부, 구성면 일부, 조마면, 감천면 일부, 농소면 일부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에 해당한다. 백두대간과 맞닿은 고을로 현재의 충청도 일부가 과거에는 경상도 금산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분수계와 행정구역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읍치 동쪽으로 아산천이 적혀 있는데 지금의 아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감천(감곡천)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감천교가 표시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하천명이 된 것이다. 읍치 앞의 남천과 왼쪽의 북천으로 표시된 것은 현재의 직지천인데 직지사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표시된 것이다. 직지천과 감천을 따라 경부고속도로가 나있다. 이 지도에서도 하천을 따라 도로가 표시되었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현대 도로의 모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 위에 추풍역과 두화원이 표시되었다. 원은 지승지도집의 다른 지도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이 지도에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충청도와의 경계 너머 추풍역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왜유현이 표시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은 오파산으로 현재의 어모면 남산리에 있는 산이다. 왼쪽 위의 직지사는 418년(신라 눌지왕 2)에 창건된 사찰이다. 지도 아래에 김천도역이 보이는데 이 이름이 현재 김천시의 어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이현군)

  • 나주목 주기 (羅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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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發羅郡을 신라에서 錦山郡으로 개칭하여 불렀다. 지도 위쪽에 금성산이 표시되었는데 이를 따서 錦城이라고 하기도 해서 해동지도에는 錦城縣으로 그려진 전라남도 나주 일대의 지도이다. 금성산이 나주의 진산에 해당한다. 서남해안의 중심 군현답게 많은 섬들이 보인다. 현재의 나주시에서 남평읍, 산포면, 봉황면, 다도면은 南平縣에 속하였기 때문에 제외되고 광주광역시의 서쪽 지역, 영암군 금정면, 신북면 일부, 시종면 일부, 무안군 삼향면, 신안군의 섬들이 관할 범위에 속한다. 읍치는 나주시내 남내동 일대인데 옛 읍치 지역에는 현재 보물 49호 동문외석당간이 남아있다. 읍성 왼쪽의 향교는 보물 제 394호 향교대성전으로 지정되었다. 읍성 안에 객사, 아사, 창이 그려지는 것은 군현지도에서 일반적이지만 東部, 西部 등 성 안 행정구역이 표시된 점은 이색적이다. 읍성 앞에는 左營이 보인다. 방면의 이름을 네모 안에 구별되게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치 동쪽에서 흘러내려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영산강이다. 지도 아래 바다로 유입되는 영산강 동쪽에 南海堂이 표시되었는데 南海神祠이다. 시종면에 남해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그 왼쪽에 삼향사, 삼향면 등의 지명이 보이는데 근처에 현재 영산호 하구둑이 건설된 곳이다. 봉대, 죽전, 포구, 진도,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 신안원은 왕곡면 신원리에 있던 역원이다. 섬들에는 牧場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고 있다.(이현군)

  • 뒷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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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뒷표지 2면입니다.

  • 길주목 주기 (吉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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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길주목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길주목은 일제시대 길주군과 학성군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은 함경북도 길주군과 김책시, 화대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길주의 실제 모습은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배치하여 그리고 있다. 明川·端川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강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곳곳에 峰과 嶺 지명을 기재하였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여러 곳에 그려져 있으며 그중 지도의 중앙부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현재 길주군을 지나는 남대천이다. 斜下斗와 七榮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사학분천, 유위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남대천 외에도 여러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김책시(일제시대 학성군)를 지나는 임명천, 쌍포천, 한천천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남대천의 좌안에 성곽(둘레 ; 10,600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길주군 길주읍 일대이다.(기타 지명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길주목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우측으로 地境峙를 지나는 도로는 명천으로 연결된다. 위쪽으로는 남대천의 좌측 하안을 따라 西北驛을 거쳐 雲嶺으로 이어진다. 지도의 좌측으로는 臨溟驛, 鎭東驛, 城津驛, 胡打里驛을 거쳐 단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들이 여러 경로로 그려져 있다. 이들 도로중 마천령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주 관북대로의 일부였으며, 지금은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032戶, 田 4,144結2負5束, 畓 284結7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남양부 (南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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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부는 북쪽 문호동 일대를 제외한 화성시내, 삼화리 일대를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 등의 화성시와 안산시의 대부도 및 옹진군의 영흥도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성시 시내의 남양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分古面은 수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로서 화성시 향남면의 상신리·구문천리·하길리에 있었다. 지도 왼쪽에는 많은 섬이 표시되어 있는데, ‘本府地’라고 쓰여있는 것만 남양부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湖南의 조운선이 움직이는 海路란 뜻의 ‘湖南船路’를 비롯하여 충청도의 몇몇 고을의 船路가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충청도 서북부에서 중요한 수군기지인 安興鎭과 西近鎭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으며, 위쪽으로도 해로가 연결되는 인천, 안산, 永宗鎭, 강화 등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수록된 지명과 수로 및 육로의 측면에서 보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남양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로와 육로의 표시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당히 소략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산줄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보다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와 유사하다. 또한 왼쪽 아래의 호남선로나 기타 충청도의 군현 명칭이 적혀 있는 선로의 표시가 《해동지도》보다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수로와 육로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차이가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는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나 같은 계통의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목천현 주기 (木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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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천현은 천안시의 목천면, 성남면, 병천면, 동면, 북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목천면의 동리와 서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목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목천현의 물을 모두 모아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 병천천이라고 부른다. 幷川은 3.1운동 때 옥사한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장터에서 유래된 말로 ‘아우내’를 한자식으로 기록한 것이 공식 명칭으로 변한 것이다. 다만 오른쪽의 일원동면과 이원동면은 현재의 동면으로 이곳에서 흐르는 물은 청주의 땅에서 아우내와 합류됨에도 불구하고 마치 목천현 내에서 합류되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해동지도》의 읍치에는 향교를 비롯하여 6개의 건물밖에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본 지도에는 총 18개나 되는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목천현 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실제 배치와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이러한 건물 중 중요한 건물만 그렸으며, 부속된 건물을 생략하면서 건물의 숫자가 극도로 축소되게 되었다. 본 지도에는 《호서지도》와 거의 같은 숫자의 건물이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건물의 배치가 엉성하게 표현되는 단점이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해동지도》보다 덜 하지만 건물의 수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배치를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여 필사 과정에서 왜곡이 발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 기장현 (機張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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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현은 현재의 포항시에 포함된 호랑이 꼬리 모양에 있던 고을이고 이 지도에 나오는 기장현은 부산광역시에 포함된 기장군 일대이다.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동해남부선 철도의 기장역 북쪽에 위치한다. 낙동정맥 동쪽의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지도 왼쪽 산줄기에 險隘라고 적혀 있다. 읍치 서쪽 읍성 옆에 炭山이 표시되었는데 이 산이 진산이다.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려졌으며 읍성 밖에 원형으로 獄이 표시된 점이 특이하다. 읍성 밖의 제단은 다른 군현 지도에서 등장하지 않는데 이 지도에서는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 등이 잘 표시되어 있다. 읍치 동쪽의 죽성리에는 사적 52호인 죽성리성이 있었다. 나라에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한 봉산이 곳곳에 보인다. 읍성 안을 흘러 바다로 유입되는 청강천은 현재의 죽성천이다. 그 위쪽의 삼성대가 있는 곳은 현재의 일광해수욕장 인근이 된다. 해안을 따라 海倉, 船所, 烽臺가 그려졌다. 도로를 그리면서 大路, 中路 등을 표시하여서 도로의 폭과 중요도를 알려주는 점이 지승의 경상도 다른 군현지도와 차이점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장안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것이다. 현재의 장안읍 장안리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아래에 ‘旧豆毛浦基今移設東萊’라고 적혔는데 수군만호가 있던 鎭이 동래로 이전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이현군)

  • 낙안군 (樂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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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읍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충청도의 해미읍성과 낙안읍성이 거론되는데 이 지도는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낙안의 옛 모습을 그린 것이다. 낙안군은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 별량면, 외서면, 보성군 벌교읍을 관할한 군현이다. 지도 가운데 위에 그려진 금전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높이가 667.9m이다. 그 북쪽 지역이 현재의 조계산 도립공원이다.금전산 남쪽에 읍성이 사각형으로 그려졌고 남문이 표시되었으며 그 안에 客舍, 衙, 倉을 그렸다. 현재의 낙안면의 서내리, 남내리, 동내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금은 낙안읍성 민속마을로 남아있다. 읍치 북쪽은 현재 성북리라는 지명이 사용된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낙안면 교촌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 남쪽에 그려진 하천은 현재의 교촌천, 옥산천, 벌교천으로 남류하여 바다로 유입된다. 바다로 유입되는 곳은 경전선 철도의 벌교역 근처인데 이 지도에 伐橋가 적혀 있다. 보물 304호로 지정된 홍교가 이것을 가리킨다. 오른쪽 아래의 바다는 여자만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바다에 여자도, 장도, 해도가 그려졌다. 지도 오른쪽의 동화사는 별량면에 있는 사찰로 보물 831호 삼층석탑이 있다. 그 왼쪽의 제석산은 별량면과 낙안면의 경계가 되는 563.3m 높이의 산이다. 읍치 남쪽의 고읍면은 현재 벌교읍 고읍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다른 군현과의 연결로에 고개가 표시되었고 해안에는 船所, 海倉이 그려졌다.(이현군)

  • 맹산현 (孟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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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孟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맹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맹산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서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배치하여 다른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거의 유사하게 보이나 하천 부분에 있어서 표현 방법의 차이로 지도를 읽기에 불편함이 있다. 즉, 왼쪽 위의 陽德界에서 발원하여 아래쪽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 대동강의 지류인 맹산강이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맹산강의 상류와 하류를 구분할 수 없도록 그려져 있다. 이는 《해동지도》에서 상류와 하류가 분명히 구별되도록 그려져 있던 것에 비하면 본 지도의 필사 시 하천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여지도》 보다는 구분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읍치 지역을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해서 그렸기 때문에 실제에 대한 왜곡 현상이 나타났다. 맹산강을 중심으로 실제로는 고을의 동쪽인 왼쪽 부분이 서쪽인 오른쪽 부분보다 훨씬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정반대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서쪽에 있었던 읍치 지역을 확대하여 그렸기 때문이다. 왼쪽 위에는 定平界가 보이고 있는데, 맹산현은 정평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런 계통 지도의 최초 제작자가 정보를 잘못 인식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후 검증 없이 그대로 필사하면서 계속적으로 발생한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김화현 (金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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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김화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김화현은 지금 휴전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남한 부분은 철원군 김화읍, 근남면, 서면과 북한 부분은 김화군의 서쪽지역인 근동면, 근북면, 원북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에 읍치를 배치하였고, 남쪽에 柳琳大捷碑, 서쪽에 忠烈祠, 동쪽에 忠賢祠를 그려 넣었다. 진산은 五申山이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이웃한 금성과 낭천(지금의 화천), 춘천과의 경계는 산지로써 표현하였으며 평강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를 주변으로 감싸 돌며 서류하여 철원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의 우측 하단 馬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과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목탄천으로 추정된다. 읍치 북쪽의 白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한탄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김화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서쪽의 永平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生昌驛(김화읍 생창리 소재)을 지나 登古介를 거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길은 서울로 통하며 이 길은 지도 동쪽의 中峴을 넘어 金城으로 이어진다. 함경도 西水羅까지 통하는 이 도로는 당시 동북방향의 大路였다. 금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이외에 佛頂峴 등을 거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낭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馬峴을 지난다. 춘천, 철원, 회양으로 가는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통로마다 登古介, 可古介, 成造古介, 小古介 등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은 우리말의 고개를 한자화한 지명으로 다른 군현의 지도에서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지명이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57戶, 田 196結17負1束, 畓 13結45負4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남양부 주기 (南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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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부는 북쪽 문호동 일대를 제외한 화성시내, 삼화리 일대를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 등의 화성시와 안산시의 대부도 및 옹진군의 영흥도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성시 시내의 남양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分古面은 수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로서 화성시 향남면의 상신리·구문천리·하길리에 있었다. 지도 왼쪽에는 많은 섬이 표시되어 있는데, ‘本府地’라고 쓰여있는 것만 남양부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湖南의 조운선이 움직이는 海路란 뜻의 ‘湖南船路’를 비롯하여 충청도의 몇몇 고을의 船路가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충청도 서북부에서 중요한 수군기지인 安興鎭과 西近鎭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으며, 위쪽으로도 해로가 연결되는 인천, 안산, 永宗鎭, 강화 등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수록된 지명과 수로 및 육로의 측면에서 보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남양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로와 육로의 표시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당히 소략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산줄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보다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와 유사하다. 또한 왼쪽 아래의 호남선로나 기타 충청도의 군현 명칭이 적혀 있는 선로의 표시가 《해동지도》보다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수로와 육로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차이가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는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나 같은 계통의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문의현 (文義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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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현은 청원군의 현도면, 부용면, 일부를 제외한 문의면, 가덕면의 서남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대청호에 수몰되어 버렸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서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문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의 淸州界에서 흘러와 위쪽의 公州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며, 이 지역에서는 지도에도 적혀 있듯이 芙蓉江으로 불렀다. 淸州가 문의현의 오른쪽(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쪽(남동)에 淸州界라고 또 적혀 있는 이유는 이곳에 청주의 월경지인 周岸面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와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몇몇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약간 다른 점은 건물의 수와 하천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는 약간 다른 편이다. 어느 것이 원본에 더 가까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정보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차이점이라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서 《해동지도》와 달리 면과 역 등에 사각형의 기호를 사용하여 정보가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이기봉)

  • 기장현 주기 (機張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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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현은 현재의 포항시에 포함된 호랑이 꼬리 모양에 있던 고을이고 이 지도에 나오는 기장현은 부산광역시에 포함된 기장군 일대이다.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동해남부선 철도의 기장역 북쪽에 위치한다. 낙동정맥 동쪽의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지도 왼쪽 산줄기에 險隘라고 적혀 있다. 읍치 서쪽 읍성 옆에 炭山이 표시되었는데 이 산이 진산이다.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려졌으며 읍성 밖에 원형으로 獄이 표시된 점이 특이하다. 읍성 밖의 제단은 다른 군현 지도에서 등장하지 않는데 이 지도에서는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 등이 잘 표시되어 있다. 읍치 동쪽의 죽성리에는 사적 52호인 죽성리성이 있었다. 나라에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한 봉산이 곳곳에 보인다. 읍성 안을 흘러 바다로 유입되는 청강천은 현재의 죽성천이다. 그 위쪽의 삼성대가 있는 곳은 현재의 일광해수욕장 인근이 된다. 해안을 따라 海倉, 船所, 烽臺가 그려졌다. 도로를 그리면서 大路, 中路 등을 표시하여서 도로의 폭과 중요도를 알려주는 점이 지승의 경상도 다른 군현지도와 차이점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장안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것이다. 현재의 장안읍 장안리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아래에 ‘旧豆毛浦基今移設東萊’라고 적혔는데 수군만호가 있던 鎭이 동래로 이전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이현군)

  • 낙안군 주기 (樂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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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읍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충청도의 해미읍성과 낙안읍성이 거론되는데 이 지도는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낙안의 옛 모습을 그린 것이다. 낙안군은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 별량면, 외서면, 보성군 벌교읍을 관할한 군현이다. 지도 가운데 위에 그려진 금전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높이가 667.9m이다. 그 북쪽 지역이 현재의 조계산 도립공원이다.금전산 남쪽에 읍성이 사각형으로 그려졌고 남문이 표시되었으며 그 안에 客舍, 衙, 倉을 그렸다. 현재의 낙안면의 서내리, 남내리, 동내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금은 낙안읍성 민속마을로 남아있다. 읍치 북쪽은 현재 성북리라는 지명이 사용된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낙안면 교촌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 남쪽에 그려진 하천은 현재의 교촌천, 옥산천, 벌교천으로 남류하여 바다로 유입된다. 바다로 유입되는 곳은 경전선 철도의 벌교역 근처인데 이 지도에 伐橋가 적혀 있다. 보물 304호로 지정된 홍교가 이것을 가리킨다. 오른쪽 아래의 바다는 여자만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바다에 여자도, 장도, 해도가 그려졌다. 지도 오른쪽의 동화사는 별량면에 있는 사찰로 보물 831호 삼층석탑이 있다. 그 왼쪽의 제석산은 별량면과 낙안면의 경계가 되는 563.3m 높이의 산이다. 읍치 남쪽의 고읍면은 현재 벌교읍 고읍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다른 군현과의 연결로에 고개가 표시되었고 해안에는 船所, 海倉이 그려졌다.(이현군)

  • 맹산현 주기 (孟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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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孟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맹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맹산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서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배치하여 다른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거의 유사하게 보이나 하천 부분에 있어서 표현 방법의 차이로 지도를 읽기에 불편함이 있다. 즉, 왼쪽 위의 陽德界에서 발원하여 아래쪽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 대동강의 지류인 맹산강이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맹산강의 상류와 하류를 구분할 수 없도록 그려져 있다. 이는 《해동지도》에서 상류와 하류가 분명히 구별되도록 그려져 있던 것에 비하면 본 지도의 필사 시 하천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여지도》 보다는 구분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읍치 지역을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해서 그렸기 때문에 실제에 대한 왜곡 현상이 나타났다. 맹산강을 중심으로 실제로는 고을의 동쪽인 왼쪽 부분이 서쪽인 오른쪽 부분보다 훨씬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정반대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서쪽에 있었던 읍치 지역을 확대하여 그렸기 때문이다. 왼쪽 위에는 定平界가 보이고 있는데, 맹산현은 정평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런 계통 지도의 최초 제작자가 정보를 잘못 인식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후 검증 없이 그대로 필사하면서 계속적으로 발생한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김화현 주기 (金化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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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김화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김화현은 지금 휴전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남한 부분은 철원군 김화읍, 근남면, 서면과 북한 부분은 김화군의 서쪽지역인 근동면, 근북면, 원북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에 읍치를 배치하였고, 남쪽에 柳琳大捷碑, 서쪽에 忠烈祠, 동쪽에 忠賢祠를 그려 넣었다. 진산은 五申山이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이웃한 금성과 낭천(지금의 화천), 춘천과의 경계는 산지로써 표현하였으며 평강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를 주변으로 감싸 돌며 서류하여 철원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의 우측 하단 馬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과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목탄천으로 추정된다. 읍치 북쪽의 白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한탄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김화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서쪽의 永平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生昌驛(김화읍 생창리 소재)을 지나 登古介를 거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길은 서울로 통하며 이 길은 지도 동쪽의 中峴을 넘어 金城으로 이어진다. 함경도 西水羅까지 통하는 이 도로는 당시 동북방향의 大路였다. 금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이외에 佛頂峴 등을 거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낭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馬峴을 지난다. 춘천, 철원, 회양으로 가는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통로마다 登古介, 可古介, 成造古介, 小古介 등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은 우리말의 고개를 한자화한 지명으로 다른 군현의 지도에서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지명이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57戶, 田 196結17負1束, 畓 13結45負4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뒷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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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뒷표지 1면입니다.

  • 문의현 주기 (文義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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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현은 청원군의 현도면, 부용면, 일부를 제외한 문의면, 가덕면의 서남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대청호에 수몰되어 버렸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서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문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의 淸州界에서 흘러와 위쪽의 公州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며, 이 지역에서는 지도에도 적혀 있듯이 芙蓉江으로 불렀다. 淸州가 문의현의 오른쪽(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쪽(남동)에 淸州界라고 또 적혀 있는 이유는 이곳에 청주의 월경지인 周岸面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와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몇몇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약간 다른 점은 건물의 수와 하천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는 약간 다른 편이다. 어느 것이 원본에 더 가까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정보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차이점이라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서 《해동지도》와 달리 면과 역 등에 사각형의 기호를 사용하여 정보가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이기봉)

  • 김해부 (金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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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김해시 동상동, 서상동 일대이며 현재의 김해시와 창원시, 부산광역시의 일부를 관할하였다. 읍성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성문을 표시하였고 객사, 아사 등의 건물이 보인다. 읍성 밖에는 향교만 보이고 성황단, 여단, 사직단을 찾을 수 없다. 김해부의 진산은 분산인데 인제대학교 서쪽에 있는 분성산에 해당한다. 신라에 합병된 금관가야이며 김수로왕이 시조가 되는 김해 김씨의 본향이다. 읍치 왼쪽에 수로왕릉이 그려졌고 그 위쪽에 왕비인 김해허씨의 후릉이 그려졌다. 구지봉은 龜旨歌와 관련된 봉우리이다. 현재 김해 중심부에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김해는 낙남정맥과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읍치 오른쪽의 낙동강이 남해로 유입되어 삼각주가 발달하였고 김해평야로 유명한 지역이다. 하천을 따라 농사를 위한 田과 池가 지도에 등장하고 있다. 지도 오른쪽에 바다로 삼차수로 적힌 지역이 서낙동강과 낙동강이 바다로 유입되는 지역이다. 아래쪽의 명지도는 현재 명지동의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인근에 김해국제공항이 있다. 현재는 하천의 퇴적과 매립으로 다른 모습이며 강과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그렸다. 바다에는 봉대, 전선소가 보인다. 지도 북쪽에 낙동강의 여러 나루가 표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삼량진이다. 삼량진은 밀양시 삼량진읍 삼량리에 있던 것으로 처음에는 나루터 중심의 교통요지였으나 철도의 도입이후 경전선과 경부선이 교차하는 철도교통의 요지가 되었다(이현군).

  • 남원부 (南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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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원시에서 운봉읍, 산내면, 산동면, 아영면은 운봉현에 속하였으므로 이 지역을 제외한 남원시, 장수군 산서면, 번암면, 임실군 삼계면, 지사면 일부, 오수면 일부, 구례군 산동면, 광의면, 용방면 일부, 곡성군 고달면이 관할 범위였다. 남원부 읍치는 남원시내 동충동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에는 읍성이 그려졌고 그 앞에는 춘향전에 등장하는 광한루가 그려졌다. 보물 281호로 지정된 곳이다. 읍성에는 객사를 표시하였는데 다른 군현에 등장하지 않는 관왕묘가 표시되었다. 관우의 사당인데 읍성 밖이 아닌 읍성 안에 그렸다. 대부분의 군현지도에서는 행정구역명으로 ‘面’을 사용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坊’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읍성 안에도 坊 명칭을 적었다. 읍치의 동남쪽에는 지리산 국립공원이 있으며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지도 오른쪽 산줄기가 백두대간이다. 오른쪽 아래에는 南岳祠가 보인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요천이다. 읍치 북쪽의 蛟龍山城은 남원시내와 대산면의 경계에 위치한 520m의 교룡산에 세워진 것으로 지금은 국민관광지로 조성되었다. 지도 북쪽에 熬樹驛과 院이 표시되었다. 역과 원이 동시에 그려진 점이 이색적이다.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 있던 것이다. 주인을 살리고 죽인 義犬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서원, 사찰 등이 곳곳에 보인다. (이현군)

  • 문화현 (文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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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삼천군 북쪽 절반, 신천군의 서북쪽 일부, 안악군의 서쪽 1/3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건천리 부근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문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는 대체적으로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서쪽의 산을 등지고 있는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던 九月山城과 그 남쪽에 수없이 많이 들어서 있던 사찰이다. 구월산은 조선시대에 단군 조선의 신화와 결부된 산으로 여겨져 신성시되었던 곳 중의 하나이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부응하여 구월산성이 축조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징적 측면 때문에 구월산성과 그 주변이 가장 자세하게 묘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읍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지역에서 물이 모여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상류에 해당된다. 지도의 왼쪽 위에는 작은 하천 하나가 그려져 있고, 興徃面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의 삼천군 金川里  부근으로 실제로 장연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하천의 모습이 생략되어 있고 興徃面의 위치가 산줄기의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다. 후대의 필사자가 실제의 사실을 검토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지도의 내용을 바꾸면서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자의적 변경은 단순한 실수라기보다는 고을을 물줄기와 산줄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풍수적 명당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낭천현 (狼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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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낭천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1895년(고종 32)에 화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지도 여백에 “今皇上壬寅改華川”라는 내용이 별지로 첨부되어 있다. 조선시대 낭천군은 지금 화천군의 상서면, 화천읍, 하남면, 간동면 일대에 해당되며 사내면은 당시에는 춘천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진산인 牲山은 읍치의 서쪽에 그렸다. 춘천부와 금화, 양구현과의 경계를 산지로 표현하였다. 하천은 금성으로부터 유입하여 춘천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하천은 지금의 북한강 상류에 해당되며 화천댐 건설로 파로호가 된 곳이다. 지도의 북서쪽에서 흘러 들어와 읍치 북쪽을 감싸도는 2곳의 하천은 지금의 마헌천과 봉모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좌측의 啓里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논미천으로 생각된다. 하서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鋤吾之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현재 하남면에는 동리지명으로 서오지리가 남아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낭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와 경계가 되는 山의 위치, 명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남쪽에는 原川驛(하남면 원천리 소재)을 지나 서오지천을 건너는 도로는 춘천부로 이어진다. 읍치의 동쪽으로 觀佛峴을 지나 芳川驛(간동면 방천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四明山을 지나 양구현으로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彌勒峴을 지나 山陽驛(상서면 산양리 소재)에서 길이 갈라져 김화와 금성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76戶, 田 201結96負7束, 畓 14結1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뒷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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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뒷표지 2면입니다.

  • 보령현 (保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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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현은 보령시의 시내, 주교면,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섬을 제외한 오천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주포면 보령리에 있었는데, 읍성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보령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지고 입지한 읍치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대문으로 판단된다. 水營은 충청도의 수영으로서 현재의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고, 현재도 성곽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아래쪽의 船泊處는 보령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으로 船所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읍치 오른쪽의 海倉은 보령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 현재도 주교면의 관창리에 해창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읍치 위쪽의 하천은 현재의 대천해수욕장 명칭이 유래된 大川이며, 우리말로는 ‘한내’라고 불렀다.(이기봉)

  • 김해부 주기 (金海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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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김해시 동상동, 서상동 일대이며 현재의 김해시와 창원시, 부산광역시의 일부를 관할하였다. 읍성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성문을 표시하였고 객사, 아사 등의 건물이 보인다. 읍성 밖에는 향교만 보이고 성황단, 여단, 사직단을 찾을 수 없다. 김해부의 진산은 분산인데 인제대학교 서쪽에 있는 분성산에 해당한다. 신라에 합병된 금관가야이며 김수로왕이 시조가 되는 김해 김씨의 본향이다. 읍치 왼쪽에 수로왕릉이 그려졌고 그 위쪽에 왕비인 김해허씨의 후릉이 그려졌다. 구지봉은 龜旨歌와 관련된 봉우리이다. 현재 김해 중심부에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김해는 낙남정맥과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읍치 오른쪽의 낙동강이 남해로 유입되어 삼각주가 발달하였고 김해평야로 유명한 지역이다. 하천을 따라 농사를 위한 田과 池가 지도에 등장하고 있다. 지도 오른쪽에 바다로 삼차수로 적힌 지역이 서낙동강과 낙동강이 바다로 유입되는 지역이다. 아래쪽의 명지도는 현재 명지동의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인근에 김해국제공항이 있다. 현재는 하천의 퇴적과 매립으로 다른 모습이며 강과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그렸다. 바다에는 봉대, 전선소가 보인다. 지도 북쪽에 낙동강의 여러 나루가 표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삼량진이다. 삼량진은 밀양시 삼량진읍 삼량리에 있던 것으로 처음에는 나루터 중심의 교통요지였으나 철도의 도입이후 경전선과 경부선이 교차하는 철도교통의 요지가 되었다(이현군).

  • 남원부 주기 (南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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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원시에서 운봉읍, 산내면, 산동면, 아영면은 운봉현에 속하였으므로 이 지역을 제외한 남원시, 장수군 산서면, 번암면, 임실군 삼계면, 지사면 일부, 오수면 일부, 구례군 산동면, 광의면, 용방면 일부, 곡성군 고달면이 관할 범위였다. 남원부 읍치는 남원시내 동충동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에는 읍성이 그려졌고 그 앞에는 춘향전에 등장하는 광한루가 그려졌다. 보물 281호로 지정된 곳이다. 읍성에는 객사를 표시하였는데 다른 군현에 등장하지 않는 관왕묘가 표시되었다. 관우의 사당인데 읍성 밖이 아닌 읍성 안에 그렸다. 대부분의 군현지도에서는 행정구역명으로 ‘面’을 사용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坊’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읍성 안에도 坊 명칭을 적었다. 읍치의 동남쪽에는 지리산 국립공원이 있으며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지도 오른쪽 산줄기가 백두대간이다. 오른쪽 아래에는 南岳祠가 보인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요천이다. 읍치 북쪽의 蛟龍山城은 남원시내와 대산면의 경계에 위치한 520m의 교룡산에 세워진 것으로 지금은 국민관광지로 조성되었다. 지도 북쪽에 熬樹驛과 院이 표시되었다. 역과 원이 동시에 그려진 점이 이색적이다.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 있던 것이다. 주인을 살리고 죽인 義犬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서원, 사찰 등이 곳곳에 보인다. (이현군)

  • 문화현 주기 (文化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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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삼천군 북쪽 절반, 신천군의 서북쪽 일부, 안악군의 서쪽 1/3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건천리 부근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문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는 대체적으로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서쪽의 산을 등지고 있는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던 九月山城과 그 남쪽에 수없이 많이 들어서 있던 사찰이다. 구월산은 조선시대에 단군 조선의 신화와 결부된 산으로 여겨져 신성시되었던 곳 중의 하나이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부응하여 구월산성이 축조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징적 측면 때문에 구월산성과 그 주변이 가장 자세하게 묘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읍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지역에서 물이 모여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상류에 해당된다. 지도의 왼쪽 위에는 작은 하천 하나가 그려져 있고, 興徃面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의 삼천군 金川里  부근으로 실제로 장연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하천의 모습이 생략되어 있고 興徃面의 위치가 산줄기의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다. 후대의 필사자가 실제의 사실을 검토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지도의 내용을 바꾸면서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자의적 변경은 단순한 실수라기보다는 고을을 물줄기와 산줄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풍수적 명당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낭천현 주기 (狼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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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낭천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1895년(고종 32)에 화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지도 여백에 “今皇上壬寅改華川”라는 내용이 별지로 첨부되어 있다. 조선시대 낭천군은 지금 화천군의 상서면, 화천읍, 하남면, 간동면 일대에 해당되며 사내면은 당시에는 춘천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진산인 牲山은 읍치의 서쪽에 그렸다. 춘천부와 금화, 양구현과의 경계를 산지로 표현하였다. 하천은 금성으로부터 유입하여 춘천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하천은 지금의 북한강 상류에 해당되며 화천댐 건설로 파로호가 된 곳이다. 지도의 북서쪽에서 흘러 들어와 읍치 북쪽을 감싸도는 2곳의 하천은 지금의 마헌천과 봉모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좌측의 啓里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논미천으로 생각된다. 하서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鋤吾之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현재 하남면에는 동리지명으로 서오지리가 남아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낭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와 경계가 되는 山의 위치, 명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남쪽에는 原川驛(하남면 원천리 소재)을 지나 서오지천을 건너는 도로는 춘천부로 이어진다. 읍치의 동쪽으로 觀佛峴을 지나 芳川驛(간동면 방천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四明山을 지나 양구현으로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彌勒峴을 지나 山陽驛(상서면 산양리 소재)에서 길이 갈라져 김화와 금성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76戶, 田 201結96負7束, 畓 14結1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마전군 (麻田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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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전군은 경기도의 연천군 미산면, 왕징면과 군남면의 일부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연천군 미산면의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에서 흘러와 腐近津에서 임진강에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본 지도 위의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당시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衙(舍)에 麻田郡이라 적혀 있는데, 이는 《해동지도》가 본 지도책이나 뒤의 2개 지도책처럼 군현의 명칭이 지도의 이름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 등 《해동지도》와 내용적으로 거의 동일한 지도에도 읍치에 군현의 명칭이 적혀 있어 그런 형태가 최초 원본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밖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주기에는 총 5개의 面  이름이 적혀 있는데 반해 지도 위에는 2개만 적혀 있다. 이는 지도의 제작과 주기의 내용 삽입이 다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지도에는 없지만 주기에는 기록된 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도 2개의 면만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필사 과정에서도 주기의 내용과 지도의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의 한탄강 모습이 《광여도》에서는 임진강 이외의 아주 작은 하천과 거의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임의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음도 이해할 수 있다.(이기봉)

  • 보령현 주기 (保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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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현은 보령시의 시내, 주교면,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섬을 제외한 오천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주포면 보령리에 있었는데, 읍성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보령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지고 입지한 읍치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대문으로 판단된다. 水營은 충청도의 수영으로서 현재의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고, 현재도 성곽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아래쪽의 船泊處는 보령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으로 船所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읍치 오른쪽의 海倉은 보령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 현재도 주교면의 관창리에 해창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읍치 위쪽의 하천은 현재의 대천해수욕장 명칭이 유래된 大川이며, 우리말로는 ‘한내’라고 불렀다.(이기봉)

  • 남해현 (南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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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해군 지역인데 창선면은 진주목의 관할구역이었다. 남해읍치는 남해읍의 동쪽인 북변리 남변리, 서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노량진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남해대교가 놓여진 곳이다. 남해바다의 섬으로 존재하던 군현으로 통영과 연결된다.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 되고 아래쪽이 북쪽이 된다.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점을 지도에 적용하였다. 지도에 보이는 충렬사는 현재 설천면 노량리에 남아있는데 1662년(현종 4)에 賜額받았으며 이순신 장군을 배향하였다. 그 오른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지금의 차면리 해안에 이락사가 있는데 충무공 전몰유적지이다. 고현면 왼쪽에 고현성이 그려졌다. 읍성 오른쪽에 표시된 망운산(서면)이 남해의 진산이다. 읍성은 사각형의 성으로 그리고 그 안에 객사, 아사, 창을 비교적 간략하게 그렸다. 읍성 아래에 선소가 표시되었는데 남해읍 선소리에 해당한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봉대, 진, 보 등이 많이 보인다. 진보를 마치 성처럼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에 여러 섬이 그려진 곳은 한려해상 국립공원 지역이다. 그 아래 상주포보가 그려진 곳은 상주면 상주리 일대일대 지금의 상주해수욕장 인근 지역이다. 그 왼쪽의 미조항진은 미조면 미조리에 있던 진이다. 아래의 노량진에서 읍성 옆을 지나는 도로는 현재의 19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이다.(이현군)

  • 남평현 (南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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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나주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남평읍, 봉황면, 다도면, 산포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지도 위쪽에 읍치가 보이는데 성곽없이 건물만 보인다. 객사가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남평읍 남평리 일대이며 그 아래 향교가 있던 곳은 남평읍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치 뒤쪽의 하천은 지석강으로 나주의 영산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쪽의 이름없이 그려진 서원은  蓬山書院으로 1667년(현종 8)에 사액받았으며 白仁傑을 배향하였다. 남평읍 동쪽에 서원마을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서원 오른쪽 지점은 하천 안에 섬이 형성되었는데 지석강 국민관광지에 해당한다. 읍치 남쪽은 鐵冶廢縣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불회사는 현재의 다도면에 위치한 사찰이다. 그 아래에 두개의 봉우리가 그려졌다. 불회사와 인접하게 그려진 봉우리는 덕룡산이다. 현재 덕룡재로 불리며 화산군 도암면, 영암군 금정면, 나주시 다도면 경계에 있는 것이다. 그 옆에 그려진 봉우리는 덕룡재 동북쪽의 높이 440.3m의 국사봉이다. 그 북쪽 다도면에는 현재 나주댐의 건설로 국민관광지인 나주호가 들어서 있어 이 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봉황면 철천리에는 미륵사가 들어서 있다. 칠불석상이 보물 461호로, 칠불입상이 보물 462호로 지정되었다. 읍창, 남창, 서창 등 창고만 표시되었고 역원은 그려지지 않았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도로망과 함께 교통의 요충지인 고개를 표시하는게 일반적인데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이현군)

  • 박천군 (博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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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博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 일대이다. 고을의 동쪽·북쪽의 산줄기로부터 흘러 내려온 작은 물줄기들이 지금의 대령강인 大定江과 합류하여 청천강과 더불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박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박천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래쪽 望毛老 아래쪽이 《해동지도》에는 반도처럼 그려 있지만, 본 지도에는 밑 부분이 잘려서 생략되었다. 이것은 《해동지도》보다 세로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른쪽의 淸川江 본류가 竝溫山烽 아래쪽 부분에서 오른쪽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모습이 《여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沙古介 부분의 물줄기가 두 갈래로 나눠지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세 갈래로 나눠지고 있다. 또한 읍치 부분의 하천도 본 지도에는 읍치를 끼고 양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으나, 《여지도》에서는 오른쪽으로만 하천이 흐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沙古介 부분은 본 지도와 읍치 부분은 《여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해동지도》에 없던 訓練 건물이 있고, 《여지도》에 본 지도에서 邑倉으로 표시되었던 것이 倉으로 바뀌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다. (양윤정)

  • 단천군 (端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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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단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단천군은 일제시대 일부 지역(풍산군 천남면)이 분리되었고,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허천군에 해당된다. 단천군을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길주, 북청, 갑산)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굴곡있게 표현하여 실제 모습과 유사하다. 해안에는 두 하천이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황토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 좌측의 新洞岺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동천을 묘사한 것이다. 馬騰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동쪽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대천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1,945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묘사되었다. 지금의 단천시 내문동, 금봉동 일대이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단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그려지 내용에 비해 북청으로 이어지는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이들 도로에 8곳의 역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서 길주로 이어지는 도로는 磨谷驛, 胡打里驛, 城津驛을 경유한다. 이 도로를 따라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북청으로 연결되는 해안도로는 谷口驛을 경유한다. 군내 두 하천을 따라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이들 도로는 갑산부로 연결된다. 남대천을 따라 황토령을 지나 갑산으로 연결된 도로에는 黃土坡驛과 雙靑驛이 있다. 북대천에 연한 도로에는 利洞驛과 吾乙只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45戶, 田 2,520結97負, 畓 205結3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마전군 주기 (麻田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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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전군은 경기도의 연천군 미산면, 왕징면과 군남면의 일부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연천군 미산면의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에서 흘러와 腐近津에서 임진강에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본 지도 위의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당시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衙(舍)에 麻田郡이라 적혀 있는데, 이는 《해동지도》가 본 지도책이나 뒤의 2개 지도책처럼 군현의 명칭이 지도의 이름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 등 《해동지도》와 내용적으로 거의 동일한 지도에도 읍치에 군현의 명칭이 적혀 있어 그런 형태가 최초 원본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밖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주기에는 총 5개의 面  이름이 적혀 있는데 반해 지도 위에는 2개만 적혀 있다. 이는 지도의 제작과 주기의 내용 삽입이 다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지도에는 없지만 주기에는 기록된 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도 2개의 면만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필사 과정에서도 주기의 내용과 지도의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의 한탄강 모습이 《광여도》에서는 임진강 이외의 아주 작은 하천과 거의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임의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음도 이해할 수 있다.(이기봉)

  • 보은현 (報恩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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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현은 회북면과 회남면 및 내북면의 대안리 북쪽을 제외한 보은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보은읍의 삼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보은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 위쪽에 五層閣이 그려진 사찰은 현재의 법주사이며, 이곳에서 흘러나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현재 보은군의 산외면과 외속리면에 해당된다. 읍치 지역의 물을 한데 모아 아래쪽의 靑山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현재의 보청천이다. 보청천은 오른쪽에 표기된 尙州界 방면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상주계 방면의 물은 현재의 상주시 화서면에서 발원하여 화남면을 지나 보은현으로 들어온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도 본 계통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데, 하천의 모습은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읍치와 법주사에서 그려진 건물의 수라는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보다는 훨씬 많과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다. 앞서 언급한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에도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원본의 건물 내용을 일괄적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에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 비해 건물의 모양과 배치가 더 선명하게 되어 있어 원본이거나 원본에 가장 가까운 지도로 추정된다.(이기봉)

  • 남해현 주기 (南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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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해군 지역인데 창선면은 진주목의 관할구역이었다. 남해읍치는 남해읍의 동쪽인 북변리 남변리, 서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노량진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남해대교가 놓여진 곳이다. 남해바다의 섬으로 존재하던 군현으로 통영과 연결된다.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 되고 아래쪽이 북쪽이 된다.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점을 지도에 적용하였다. 지도에 보이는 충렬사는 현재 설천면 노량리에 남아있는데 1662년(현종 4)에 賜額받았으며 이순신 장군을 배향하였다. 그 오른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지금의 차면리 해안에 이락사가 있는데 충무공 전몰유적지이다. 고현면 왼쪽에 고현성이 그려졌다. 읍성 오른쪽에 표시된 망운산(서면)이 남해의 진산이다. 읍성은 사각형의 성으로 그리고 그 안에 객사, 아사, 창을 비교적 간략하게 그렸다. 읍성 아래에 선소가 표시되었는데 남해읍 선소리에 해당한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봉대, 진, 보 등이 많이 보인다. 진보를 마치 성처럼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에 여러 섬이 그려진 곳은 한려해상 국립공원 지역이다. 그 아래 상주포보가 그려진 곳은 상주면 상주리 일대일대 지금의 상주해수욕장 인근 지역이다. 그 왼쪽의 미조항진은 미조면 미조리에 있던 진이다. 아래의 노량진에서 읍성 옆을 지나는 도로는 현재의 19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이다.(이현군)

  • 남평현 주기 (南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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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나주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남평읍, 봉황면, 다도면, 산포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지도 위쪽에 읍치가 보이는데 성곽없이 건물만 보인다. 객사가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남평읍 남평리 일대이며 그 아래 향교가 있던 곳은 남평읍 교촌리에 해당한다. 읍치 뒤쪽의 하천은 지석강으로 나주의 영산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쪽의 이름없이 그려진 서원은  蓬山書院으로 1667년(현종 8)에 사액받았으며 白仁傑을 배향하였다. 남평읍 동쪽에 서원마을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서원 오른쪽 지점은 하천 안에 섬이 형성되었는데 지석강 국민관광지에 해당한다. 읍치 남쪽은 鐵冶廢縣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불회사는 현재의 다도면에 위치한 사찰이다. 그 아래에 두개의 봉우리가 그려졌다. 불회사와 인접하게 그려진 봉우리는 덕룡산이다. 현재 덕룡재로 불리며 화산군 도암면, 영암군 금정면, 나주시 다도면 경계에 있는 것이다. 그 옆에 그려진 봉우리는 덕룡재 동북쪽의 높이 440.3m의 국사봉이다. 그 북쪽 다도면에는 현재 나주댐의 건설로 국민관광지인 나주호가 들어서 있어 이 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봉황면 철천리에는 미륵사가 들어서 있다. 칠불석상이 보물 461호로, 칠불입상이 보물 462호로 지정되었다. 읍창, 남창, 서창 등 창고만 표시되었고 역원은 그려지지 않았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도로망과 함께 교통의 요충지인 고개를 표시하는게 일반적인데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이현군)

  • 박천군 주기 (博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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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博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 일대이다. 고을의 동쪽·북쪽의 산줄기로부터 흘러 내려온 작은 물줄기들이 지금의 대령강인 大定江과 합류하여 청천강과 더불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박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박천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래쪽 望毛老 아래쪽이 《해동지도》에는 반도처럼 그려 있지만, 본 지도에는 밑 부분이 잘려서 생략되었다. 이것은 《해동지도》보다 세로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른쪽의 淸川江 본류가 竝溫山烽 아래쪽 부분에서 오른쪽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모습이 《여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沙古介 부분의 물줄기가 두 갈래로 나눠지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세 갈래로 나눠지고 있다. 또한 읍치 부분의 하천도 본 지도에는 읍치를 끼고 양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으나, 《여지도》에서는 오른쪽으로만 하천이 흐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沙古介 부분은 본 지도와 읍치 부분은 《여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해동지도》에 없던 訓練 건물이 있고, 《여지도》에 본 지도에서 邑倉으로 표시되었던 것이 倉으로 바뀌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다. (양윤정)

  • 단천군 주기 (端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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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단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단천군은 일제시대 일부 지역(풍산군 천남면)이 분리되었고,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허천군에 해당된다. 단천군을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길주, 북청, 갑산)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굴곡있게 표현하여 실제 모습과 유사하다. 해안에는 두 하천이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황토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 좌측의 新洞岺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동천을 묘사한 것이다. 馬騰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동쪽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대천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1,945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묘사되었다. 지금의 단천시 내문동, 금봉동 일대이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단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그려지 내용에 비해 북청으로 이어지는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이들 도로에 8곳의 역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서 길주로 이어지는 도로는 磨谷驛, 胡打里驛, 城津驛을 경유한다. 이 도로를 따라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북청으로 연결되는 해안도로는 谷口驛을 경유한다. 군내 두 하천을 따라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이들 도로는 갑산부로 연결된다. 남대천을 따라 황토령을 지나 갑산으로 연결된 도로에는 黃土坡驛과 雙靑驛이 있다. 북대천에 연한 도로에는 利洞驛과 吾乙只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45戶, 田 2,520結97負, 畓 205結3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부평부 (富平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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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부는 현재 인천광역시의 부평구, 계양구, 검단동 일대를 제외한 서구, 경기도의 부천시, 서울특별시의 구로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계양산 남쪽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왼쪽 위의 바다는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에 있으며 상당 부분이 매립되어 육지로 변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부평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달라진 측면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으며, 왼쪽 위의 바다와 섬이 《해동지도》에는 없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산줄기 대부분이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진 점은 《해동지도》와 동일한 반면 뒤의 2개 지도는 모두 남쪽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다. 본 지도는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거의 동일한 반면 《해동지도》와는 상당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도 일부 다르게 필사한 것이 나타나고 있으며, 주기의 경우 시기적 변화 양상을 반영하기 위해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나 그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정보를 삭제하고, 동쪽의 한강이나 일부의 지명에서 약간의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보은현 주기 (報恩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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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현은 회북면과 회남면 및 내북면의 대안리 북쪽을 제외한 보은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보은읍의 삼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보은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 위쪽에 五層閣이 그려진 사찰은 현재의 법주사이며, 이곳에서 흘러나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현재 보은군의 산외면과 외속리면에 해당된다. 읍치 지역의 물을 한데 모아 아래쪽의 靑山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현재의 보청천이다. 보청천은 오른쪽에 표기된 尙州界 방면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상주계 방면의 물은 현재의 상주시 화서면에서 발원하여 화남면을 지나 보은현으로 들어온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도 본 계통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데, 하천의 모습은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읍치와 법주사에서 그려진 건물의 수라는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보다는 훨씬 많과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다. 앞서 언급한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에도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원본의 건물 내용을 일괄적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호서지도》의 보은현 지도에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 비해 건물의 모양과 배치가 더 선명하게 되어 있어 원본이거나 원본에 가장 가까운 지도로 추정된다.(이기봉)

  • 단성현 (丹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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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산청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대전 통영간 고속국도의 단성 분기점 북쪽에 읍치가 있었다. 관할범위는 단성면, 신등면, 신안면, 생비량면 등이다. 지도에 표시된 향교는 지금의 산청 2터널 동쪽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지리산국립공원이 있고 북쪽에 황매산(합천군 대병면 경계)에 있다. 이 두 산이 단성현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지만 이 두 산의 맥이 단성으로 연결된다는 측면에서 지도 북쪽에 표시하였다. ‘黃梅山來’라고 적어 연결성을 강조하고 오른쪽에는 ‘黃梅山路’라고 적어 놓았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읍치 바로 뒤쪽에 해당하는 來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객사 오른쪽의 하천은 남강이며 진주시로 유입된다. 읍치 오른쪽 하천변에 바위를 연이어 그리고 赤壁이라고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적벽 아래 서원이 보이는데 그 이름을 문익점서원이라고 적었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시험적으로 재배한 곳이 단성인데 그 문익점을 배향한 서원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그 오른쪽의 하천이름을 따서 도천서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이름에 人名을 넣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읍치 오른쪽 위에 단계창이 보인다. 단성현은 丹溪縣과 江城縣을 합한 것이다. 옛 단계현의 중심지가 이곳인데 현재의 신등면 단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이 밖에 봉수대, 역원, 도로, 고개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이현군)

  • 능주목 (綾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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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화순군의 능주면에 그 이름이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능주면 관영리 일대로 경전선 철도 능주역 북쪽 지역에 위치한다. 능주면, 도암면, 도곡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한천면을 관할 범위로 하였다. 읍치 동남쪽의 하천은 연주강으로 적혔는데 현재의 충신강으로 북쪽의 화순천, 서쪽의 대초천과 만나 지석강에 유입된다. 읍치 남쪽 작게 표시된 雲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신라 경덕왕이 綾城으로 부른 지역이며 동국여지승람에도 綾城縣으로 기록된 지역이다. 후에 인헌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격상시켰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을 그렸다. 읍치 동쪽 강변에 명승지를 그렸는데 현재 영벽정이 남아았다. 읍치 동쪽의 이름없는 서원은 해동지도에 竹樹書院으로 등장하는데 조광조를 배향한 곳이다. 왼쪽 아래에 雲住山이 표시되었는데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雲住寺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보물 796호 구층석탑, 797호 석조불감, 보물 798호 원형다층석탑이 있다. 그 북동쪽 현재의 도곡면은 고인돌(지석묘) 지역으로 유명하다. 오른쪽 아래 쌍계사는 이양면에 위치한 사찰로 국보 57호 철감선사탑 등이 있다. 그 위의 송석정은 이양면 북쪽 지석천변에 있는 누정이다. 능주목 도로의 특징은 하천과 평행하게 나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읍치에서 남쪽의 송석정, 쌍계사 서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경전선 철로, 29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를 보인다.(이현군)

  • 배천군 (白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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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남부 일부를 제외한 배천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배천군의 배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배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배천군은 동쪽으로 예성강 하류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 교동과 마주보고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예성강 하류에 開城府 방향의 육지가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碧瀾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맞은편 개성부 지역에 고려시대의 최대 무역항이었던 벽란도가 있었다. 바로 위쪽의 錢浦는 우리말 ‘돈개’에 대한 한자 표현이다. 읍치에는 총 8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4개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7개가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책의 충청도 군현 지도에 대한 해제를 참조해 보면 본 지도책의 지도가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편이다. 배천군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는 또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일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도 필사자에 따라 내용이 일부 변형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덕원부 (德源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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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덕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덕원부는 해체되어 원산시와 문천군 덕원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와 문천시의 남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동해안을 지도 아래에 배치하여 위쪽이 서쪽으로 그려져 있다. 덕원부를 둘러싼 산지에 여러 하천들이 동해안에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 왼쪽에서 영흥만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덕원면 일대를 흐르는 심포천이다. 赤川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적천천을 그린 것으로 지금 원산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제일 왼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하천은 지금 원산시의 남대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원산평(현재의 원산시 일대)에서 해안으로 돌출하여 連島로 표시된 반도는 지금의 갈마반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성곽과 함께 그려져 있으나 이면 주기의 내용과(‘城郭 無’)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읍치에는 衙舍와 함께 厲壇, 社稷壇, 鄕校, 客舍 등의 위치가 표현되어 있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덕원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門岩-馬息嶺을 연결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安邊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해안도로와 鳳林驛을 지나는 2곳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내륙에서 안변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심포천 연안을 거쳐 瀑布嶺을 지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 우측의 文川현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門岩과 龍倉 일대를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871戶, 田 面積은 1,250結69負, 畓은 185結37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군현의 규모에 비해 농경지 면적이 비교적 넒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부평부 주기 (富平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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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부는 현재 인천광역시의 부평구, 계양구, 검단동 일대를 제외한 서구, 경기도의 부천시, 서울특별시의 구로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계양산 남쪽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왼쪽 위의 바다는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에 있으며 상당 부분이 매립되어 육지로 변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부평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달라진 측면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으며, 왼쪽 위의 바다와 섬이 《해동지도》에는 없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산줄기 대부분이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진 점은 《해동지도》와 동일한 반면 뒤의 2개 지도는 모두 남쪽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다. 본 지도는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거의 동일한 반면 《해동지도》와는 상당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도 일부 다르게 필사한 것이 나타나고 있으며, 주기의 경우 시기적 변화 양상을 반영하기 위해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나 그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정보를 삭제하고, 동쪽의 한강이나 일부의 지명에서 약간의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부여현 (夫餘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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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현은 부여군의 부여읍, 규암면, 은산면, 조촌면의 서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부여읍의 구아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부여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있는 반면에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른쪽의 公州界에서 흘러와 왼쪽의 林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읍치 왼쪽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 지역에서는 白馬江이라고 불렀다. 부여현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는 사각형의 종이 모양에 맞추기 위해 남북으로 약간 길게 그려져 있다. 읍치의 경우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금강 북쪽은 실제로는 읍치의 왼쪽 위의 방향으로 그려져 있어야 사실에 가깝다. 읍치 위쪽의 扶蘇山에는 백제시대의 부소산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통해 볼 때 조선후기에는 산성으로서의 의미가 거의 상실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쪽에 기록된 陵山은 백제의 고분군이 밀집한 능산리고분군이 있는 지역이다. 왼쪽의 海倉은 부여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단성현 주기 (丹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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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산청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대전 통영간 고속국도의 단성 분기점 북쪽에 읍치가 있었다. 관할범위는 단성면, 신등면, 신안면, 생비량면 등이다. 지도에 표시된 향교는 지금의 산청 2터널 동쪽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지리산국립공원이 있고 북쪽에 황매산(합천군 대병면 경계)에 있다. 이 두 산이 단성현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지만 이 두 산의 맥이 단성으로 연결된다는 측면에서 지도 북쪽에 표시하였다. ‘黃梅山來’라고 적어 연결성을 강조하고 오른쪽에는 ‘黃梅山路’라고 적어 놓았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읍치 바로 뒤쪽에 해당하는 來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객사 오른쪽의 하천은 남강이며 진주시로 유입된다. 읍치 오른쪽 하천변에 바위를 연이어 그리고 赤壁이라고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적벽 아래 서원이 보이는데 그 이름을 문익점서원이라고 적었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시험적으로 재배한 곳이 단성인데 그 문익점을 배향한 서원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그 오른쪽의 하천이름을 따서 도천서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이름에 人名을 넣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읍치 오른쪽 위에 단계창이 보인다. 단성현은 丹溪縣과 江城縣을 합한 것이다. 옛 단계현의 중심지가 이곳인데 현재의 신등면 단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이 밖에 봉수대, 역원, 도로, 고개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이현군)

  • 능주목 주기 (綾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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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화순군의 능주면에 그 이름이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능주면 관영리 일대로 경전선 철도 능주역 북쪽 지역에 위치한다. 능주면, 도암면, 도곡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한천면을 관할 범위로 하였다. 읍치 동남쪽의 하천은 연주강으로 적혔는데 현재의 충신강으로 북쪽의 화순천, 서쪽의 대초천과 만나 지석강에 유입된다. 읍치 남쪽 작게 표시된 雲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신라 경덕왕이 綾城으로 부른 지역이며 동국여지승람에도 綾城縣으로 기록된 지역이다. 후에 인헌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격상시켰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을 그렸다. 읍치 동쪽 강변에 명승지를 그렸는데 현재 영벽정이 남아았다. 읍치 동쪽의 이름없는 서원은 해동지도에 竹樹書院으로 등장하는데 조광조를 배향한 곳이다. 왼쪽 아래에 雲住山이 표시되었는데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雲住寺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보물 796호 구층석탑, 797호 석조불감, 보물 798호 원형다층석탑이 있다. 그 북동쪽 현재의 도곡면은 고인돌(지석묘) 지역으로 유명하다. 오른쪽 아래 쌍계사는 이양면에 위치한 사찰로 국보 57호 철감선사탑 등이 있다. 그 위의 송석정은 이양면 북쪽 지석천변에 있는 누정이다. 능주목 도로의 특징은 하천과 평행하게 나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읍치에서 남쪽의 송석정, 쌍계사 서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경전선 철로, 29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를 보인다.(이현군)

  • 배천군 주기 (白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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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남부 일부를 제외한 배천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배천군의 배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배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배천군은 동쪽으로 예성강 하류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 교동과 마주보고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예성강 하류에 開城府 방향의 육지가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碧瀾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맞은편 개성부 지역에 고려시대의 최대 무역항이었던 벽란도가 있었다. 바로 위쪽의 錢浦는 우리말 ‘돈개’에 대한 한자 표현이다. 읍치에는 총 8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4개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7개가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책의 충청도 군현 지도에 대한 해제를 참조해 보면 본 지도책의 지도가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편이다. 배천군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는 또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일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도 필사자에 따라 내용이 일부 변형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덕원부 주기 (德源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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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덕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덕원부는 해체되어 원산시와 문천군 덕원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와 문천시의 남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동해안을 지도 아래에 배치하여 위쪽이 서쪽으로 그려져 있다. 덕원부를 둘러싼 산지에 여러 하천들이 동해안에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 왼쪽에서 영흥만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덕원면 일대를 흐르는 심포천이다. 赤川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적천천을 그린 것으로 지금 원산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제일 왼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하천은 지금 원산시의 남대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원산평(현재의 원산시 일대)에서 해안으로 돌출하여 連島로 표시된 반도는 지금의 갈마반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성곽과 함께 그려져 있으나 이면 주기의 내용과(‘城郭 無’)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읍치에는 衙舍와 함께 厲壇, 社稷壇, 鄕校, 客舍 등의 위치가 표현되어 있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덕원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門岩-馬息嶺을 연결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安邊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해안도로와 鳳林驛을 지나는 2곳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내륙에서 안변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심포천 연안을 거쳐 瀑布嶺을 지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 우측의 文川현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門岩과 龍倉 일대를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871戶, 田 面積은 1,250結69負, 畓은 185結37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군현의 규모에 비해 농경지 면적이 비교적 넒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삭녕군 (朔寧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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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령군은 일제시대 경기도의 연천군 삭령면, 서남면, 중면, 왕징면의 북쪽 일부, 강원도의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걸쳐 있었다. 현재는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에 속해 있으며, 읍치는 삭녕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 위의 小水源에서 흘러와 北川合流라 적혀 있는 지점에서 임진강 본류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역곡천이다. 본 지도에는 임진강 본류와 역곡천이 읍치 북쪽에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삭녕현 지도,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녕군 지도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도 앞의 3개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필사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필사 시기의 순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첫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고,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고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셋째, 기호의 사용이 본 지도보다 뒤의 2개 지도가 더 세밀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르고, 그 다음이 본 지도, 마지막이 《여지도》와 《광여도》인 것으로 판단된다. 기타 오른쪽에 기록되어 있는 古邑居는 1413년(태종 13)에 합쳐진 승령현의 읍치이며, 山城基가 있다는 기록은 고려초기까지 산성에 중심지가 있다는 기존의 연구와 합치되는 부분이다. 1441년(세종 23)까지 있었던 삭녕현의 읍치는 읍치 오른쪽의 城山 부근에 있었다.(이기봉)

  • 부여현 주기 (夫餘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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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현은 부여군의 부여읍, 규암면, 은산면, 조촌면의 서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부여읍의 구아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부여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있는 반면에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른쪽의 公州界에서 흘러와 왼쪽의 林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읍치 왼쪽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 지역에서는 白馬江이라고 불렀다. 부여현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는 사각형의 종이 모양에 맞추기 위해 남북으로 약간 길게 그려져 있다. 읍치의 경우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금강 북쪽은 실제로는 읍치의 왼쪽 위의 방향으로 그려져 있어야 사실에 가깝다. 읍치 위쪽의 扶蘇山에는 백제시대의 부소산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통해 볼 때 조선후기에는 산성으로서의 의미가 거의 상실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쪽에 기록된 陵山은 백제의 고분군이 밀집한 능산리고분군이 있는 지역이다. 왼쪽의 海倉은 부여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대구부 (大丘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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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 동남쪽에서 나오는 하천은 신천이며 신천이 유입되어 읍치 북쪽에 표시된 하천은 금호강이다. 이 하천은 지도 왼쪽의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 지도에서는 광다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행정구역명의 변동이 심한 지역이라 현재와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자연환경을 기초로 비정하면 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지금의 논공읍,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북구, 수성구 동쪽은 대구부에 관할구역이 아니었으며 청도군의 일부지역이 대구부에 포함된다. 이 지도에서는 坊과 面을 동시에 사용하는 이채롭다. 대구부의 읍치는 중구의 남성동, 동성동 일대로 지명으로 과거 읍성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지금도 대구 시내 중심부지역에 해당한다. 읍성 안에 객사와 더불어 감영, 진영, 중영이 보이는데 대구에 경상도 감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구의 경상감영공원을 통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읍성 밖에 향교와 3개의 제단(사직단, 성황단, 여단)이 배치된 것이 전형적인 성밖 배치구조에 부합된다. 서문 밖에 그려진 南池는 현재의 성당못으로 보인다. 읍치 서북쪽에 達成이 보이는데 지금은 달성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구의 진산은 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남쪽 3리에 있는 연귀산이라 기록하였는데 이 지도의 남문 밖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북쪽에 팔공산이 보이는데 원래 공산이었던 것을 견훤과 왕건의 전투 이후에 팔공산으로 개칭되었다고 하며 표충사는 신숭겸, 김락을 배향한 곳이다. 팔공산에는 동화사 등 유명 사찰들이 들어서 있다.(이현군)

  • 담양부 (潭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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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潭陽縣 지도와 표기 내용이 비슷한 지도이다. 지도 중심부에 그려진 객사는 현재의 담양읍 객사리이며 그 북쪽의 향교는 담양읍 향교리에 해당한다. 담양부는 담양군의 담양읍, 부정면, 대덕면, 봉산면, 금성면, 용면, 월산면이 관할 구역이었다. 담양군의 남쪽은 창평현이 된다. 읍치에는 성곽을 그리지 않았으나 南門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지도의 주기에는 읍성이 없다고 표시하고 있다. 해동지도에서는 이 지도의 남문 위치에 건물을 그리고 그 앞에 길이 나 있는 것처럼 그렸으나 남문이라고 적지는 않았다. 읍성 오른쪽 위에서 내려오는 하천은 현재의 금성천으로 영산강에 합류된다. 읍치의 북쪽, 현재의 담양군 용면과 순창군의 경계에 729m의 추월산이 있는데 이곳이 담양의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 위에 그려진 山城은 금성산성이다. 금성면 금성리, 용면 산성리, 순창군 팔덕면의 중간에 있는 572.7m 높이의 현재의 산성산에 세워진 것이다. 장대, 창, 객사, 남문이 그려졌다. 지도의 주기에 읍성의 둘레를 적어놓았다. 조선 선조대에 개축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동쪽은 현재 댐의 건설로 인한 담양호가 들어서 있다. 義岩書院이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남쪽에는 보물 506호로 지정된 오층석탑, 505호 석당간 등이 있으나 이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금성면 원율리는 본래 백제의 栗之縣이었는데 신라때 栗原으로 바뀌었다가 고려때 原栗縣으로 불리었던 폐현이 있던 곳이다.(이현군)

  • 벽동군 (壁潼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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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壁潼郡〉으로, 지금은 평안북도 벽동군 및 자강도 우시군 서쪽 일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살고 있었던 땅으로, 1357년(공민왕 6)에 여진족을 쫓고 남쪽 고을의 백성을 옮겨 새로 편입하였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벽동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벽동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동건강으로, 압록강이 왼쪽 아래 방향에서 흘러 들어와 동건강을 합류시켜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동건강과 압록강의 합류 모습을 그리지 않아 동건강이 압록강 본류인 것처럼 보인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벽동군 전체의 모습은 남동쪽 끝을 정점으로 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벽동군의 모습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사각형 모양의 종이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점점 좁아지는 남동쪽(위)의 하천들이 대부분 北流함에도 東流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아래쪽 하천들의 유로는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진 편이다. 지도상에 그려진 읍성을 벽단진의 모습은 작은 삭가형으로 읍치의 1/5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벽단진은 둘레가 1만 3천 32척으로 8천 45척, 높이가 7척인 읍성보다 훨씬 크다. 《광여도》의 경우 벽단진이 벽단보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벅단진이 너무 작게 그려지면서 생긴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뒷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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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뒷표지 1면입니다.

  • 삭녕군 주기 (朔寧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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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령군은 일제시대 경기도의 연천군 삭령면, 서남면, 중면, 왕징면의 북쪽 일부, 강원도의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걸쳐 있었다. 현재는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에 속해 있으며, 읍치는 삭녕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 위의 小水源에서 흘러와 北川合流라 적혀 있는 지점에서 임진강 본류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역곡천이다. 본 지도에는 임진강 본류와 역곡천이 읍치 북쪽에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삭녕현 지도,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녕군 지도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도 앞의 3개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필사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필사 시기의 순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첫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고,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고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셋째, 기호의 사용이 본 지도보다 뒤의 2개 지도가 더 세밀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르고, 그 다음이 본 지도, 마지막이 《여지도》와 《광여도》인 것으로 판단된다. 기타 오른쪽에 기록되어 있는 古邑居는 1413년(태종 13)에 합쳐진 승령현의 읍치이며, 山城基가 있다는 기록은 고려초기까지 산성에 중심지가 있다는 기존의 연구와 합치되는 부분이다. 1441년(세종 23)까지 있었던 삭녕현의 읍치는 읍치 오른쪽의 城山 부근에 있었다.(이기봉)

  • 비인현 (庇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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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인현은 서천군의 비인면, 서면, 판교면, 종천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비인면의 성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비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첫째,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둘재,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여지도》에는 읍치 주변의 산줄기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진 반면 《광여도》에서는 산봉우리가 밀집된 형태로 묘사했다. 셋째, 읍치 아래쪽의 栽松亭 숲이 《해동지도》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특히 두 번째는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의 개성이 표현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에 있는 섬은 대략적인 위치와 방향만 의미가 있을 뿐 거리는 실제와 상당히 다르다. 烟島는 현재 군산시 옥도면 연도리로서 다른 섬에 비해 해안에서 10배 이상 떨어져 있다. 본 지도에는 船泊處가 두 곳 표시되어 있는데, 왼쪽의 것은 마량진 관할의 전선이, 오른쪽의 것은 비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다. 馬梁鎭은 현재 서면의 마량리에 있던 해군 기지로서 원래 남포현의 땅이었던 보령시의 웅천읍 황교리에 있던 것을 1656년(효종 7)에 옮겨온 것이다.(이기봉)

  • 대구부 주기 (大丘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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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 동남쪽에서 나오는 하천은 신천이며 신천이 유입되어 읍치 북쪽에 표시된 하천은 금호강이다. 이 하천은 지도 왼쪽의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 지도에서는 광다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행정구역명의 변동이 심한 지역이라 현재와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자연환경을 기초로 비정하면 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지금의 논공읍,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북구, 수성구 동쪽은 대구부에 관할구역이 아니었으며 청도군의 일부지역이 대구부에 포함된다. 이 지도에서는 坊과 面을 동시에 사용하는 이채롭다. 대구부의 읍치는 중구의 남성동, 동성동 일대로 지명으로 과거 읍성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지금도 대구 시내 중심부지역에 해당한다. 읍성 안에 객사와 더불어 감영, 진영, 중영이 보이는데 대구에 경상도 감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구의 경상감영공원을 통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읍성 밖에 향교와 3개의 제단(사직단, 성황단, 여단)이 배치된 것이 전형적인 성밖 배치구조에 부합된다. 서문 밖에 그려진 南池는 현재의 성당못으로 보인다. 읍치 서북쪽에 達成이 보이는데 지금은 달성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구의 진산은 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남쪽 3리에 있는 연귀산이라 기록하였는데 이 지도의 남문 밖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북쪽에 팔공산이 보이는데 원래 공산이었던 것을 견훤과 왕건의 전투 이후에 팔공산으로 개칭되었다고 하며 표충사는 신숭겸, 김락을 배향한 곳이다. 팔공산에는 동화사 등 유명 사찰들이 들어서 있다.(이현군)

  • 담양부 주기 (潭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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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潭陽縣 지도와 표기 내용이 비슷한 지도이다. 지도 중심부에 그려진 객사는 현재의 담양읍 객사리이며 그 북쪽의 향교는 담양읍 향교리에 해당한다. 담양부는 담양군의 담양읍, 부정면, 대덕면, 봉산면, 금성면, 용면, 월산면이 관할 구역이었다. 담양군의 남쪽은 창평현이 된다. 읍치에는 성곽을 그리지 않았으나 南門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지도의 주기에는 읍성이 없다고 표시하고 있다. 해동지도에서는 이 지도의 남문 위치에 건물을 그리고 그 앞에 길이 나 있는 것처럼 그렸으나 남문이라고 적지는 않았다. 읍성 오른쪽 위에서 내려오는 하천은 현재의 금성천으로 영산강에 합류된다. 읍치의 북쪽, 현재의 담양군 용면과 순창군의 경계에 729m의 추월산이 있는데 이곳이 담양의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 위에 그려진 山城은 금성산성이다. 금성면 금성리, 용면 산성리, 순창군 팔덕면의 중간에 있는 572.7m 높이의 현재의 산성산에 세워진 것이다. 장대, 창, 객사, 남문이 그려졌다. 지도의 주기에 읍성의 둘레를 적어놓았다. 조선 선조대에 개축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동쪽은 현재 댐의 건설로 인한 담양호가 들어서 있다. 義岩書院이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남쪽에는 보물 506호로 지정된 오층석탑, 505호 석당간 등이 있으나 이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금성면 원율리는 본래 백제의 栗之縣이었는데 신라때 栗原으로 바뀌었다가 고려때 原栗縣으로 불리었던 폐현이 있던 곳이다.(이현군)

  • 벽동군 주기 (壁潼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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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壁潼郡〉으로, 지금은 평안북도 벽동군 및 자강도 우시군 서쪽 일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살고 있었던 땅으로, 1357년(공민왕 6)에 여진족을 쫓고 남쪽 고을의 백성을 옮겨 새로 편입하였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벽동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벽동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동건강으로, 압록강이 왼쪽 아래 방향에서 흘러 들어와 동건강을 합류시켜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동건강과 압록강의 합류 모습을 그리지 않아 동건강이 압록강 본류인 것처럼 보인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벽동군 전체의 모습은 남동쪽 끝을 정점으로 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벽동군의 모습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사각형 모양의 종이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점점 좁아지는 남동쪽(위)의 하천들이 대부분 北流함에도 東流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아래쪽 하천들의 유로는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진 편이다. 지도상에 그려진 읍성을 벽단진의 모습은 작은 삭가형으로 읍치의 1/5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벽단진은 둘레가 1만 3천 32척으로 8천 45척, 높이가 7척인 읍성보다 훨씬 크다. 《광여도》의 경우 벽단진이 벽단보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벅단진이 너무 작게 그려지면서 생긴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뒷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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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뒷표지 2면입니다.

  • 송도 (松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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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는 조선시대의 개성을 의미하며, 정2품 또는 종2품의 留守가 파견된 고을이었다. 留守는 종2품의 관찰사보다 높거나 같을 정도로 높은 관직이며, 지방관인 外職이 아니라 중앙관직으로 쳤다. 유수가 파견된 고을은 비록 서울은 아니지만 서울에 준하는 지위를 가졌으며, 개성이 松都라는 별칭으로 많이 불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유수가 파견된 곳은 고려시대의 수도였던 개성 이외에도 강화(江都), 광주, 수원 등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 등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개성부와 《여지도》(古4790-58)의 송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일부 지명이나 표현 방법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만월대 아래쪽의 上衙와 貳衙가 앞의 두 지도에는 단지 衙라고만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실제 상황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부 잘못 표기된 지명도 보이고 있는데, 왼쪽의 永安界는 永安城의 오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인데, 지도에도 禮成江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오는 하천이 임진강이며, 오른쪽 아래에서 흘러오는 漢江과 합류되어 서해로 빠져나간다. 하천 위에는 祖江, 洛河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하천의 구간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조강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가는 구간에서 부르던 한강의 별칭이었다. 한강 하류에는 江華와 喬桐이 실제보다 아주 작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의 목적인 개성 이외의 다른 군현은 대략적인 위치만 표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개성과 조강 사이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개성과 조강 사이에는 원래 풍덕부가 끼어 있어 서로 접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성이 조강과 서로 접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은 개성 남쪽으로 조강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가장 강조되어 있는 것은 개성의 성곽 안과 북쪽의 대흥산성인데, 이 두 곳의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확대해서 그리는 것은 다른 고을의 그림지도에서도 잘 나타나는 현상이며, 대흥산성이 강조되어 그려진 것은 임진․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 때문이다. 지도에 南大門과 함께 표시된 개성의 성곽은 1393년(태조 2)에 축소하여 만든 것이고, 강감찬의 건의에 의해 1010년(현종 1)부터 21년 동안 만든 羅城은 그 아래쪽 산줄기에 건설되어 있었다. 개성 성곽 안에는 고려의 정궁이 있었던 滿月臺가 폐허화된 채 축대만 남아 있는 모습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비인현 주기 (庇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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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인현은 서천군의 비인면, 서면, 판교면, 종천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비인면의 성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비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첫째,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둘재,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여지도》에는 읍치 주변의 산줄기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진 반면 《광여도》에서는 산봉우리가 밀집된 형태로 묘사했다. 셋째, 읍치 아래쪽의 栽松亭 숲이 《해동지도》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특히 두 번째는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의 개성이 표현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에 있는 섬은 대략적인 위치와 방향만 의미가 있을 뿐 거리는 실제와 상당히 다르다. 烟島는 현재 군산시 옥도면 연도리로서 다른 섬에 비해 해안에서 10배 이상 떨어져 있다. 본 지도에는 船泊處가 두 곳 표시되어 있는데, 왼쪽의 것은 마량진 관할의 전선이, 오른쪽의 것은 비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다. 馬梁鎭은 현재 서면의 마량리에 있던 해군 기지로서 원래 남포현의 땅이었던 보령시의 웅천읍 황교리에 있던 것을 1656년(효종 7)에 옮겨온 것이다.(이기봉)

  • 동래부 (東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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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동래구 수안동, 복천동, 안락동 등이며 부산광역시에서 기장군(기장현), 북구(양산군), 강서구를 제외한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낙동정맥의 끝에 위치하고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읍치 북쪽의 윤산이 진산이다. 과거 동래의 속현이었던 동편고현이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읍성이 있었으나 그리지 않았고 객사와 주요 건물을 그렸다. 성 밖의 향교와 성황사, 여단, 사직단을 그렸다. 사직단은 사직동, 사직초등학교 등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왼쪽의 큰 산성은 금정산성으로 현재 금정구의 명칭은 이것을 딴 것이다. 그 옆의 범어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는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산성 오른쪽에 온정이 보이는데 현재의 동래온천으로 동래구 온천동에 있다. 현재는 부산이 통용되는 지명이지만, 과거의 중심부는 동래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 해안가에 부산진이 표시되었는데 여기서 현재의 부산광역시 지명이 나왔다. 바다에 접해 있고 일본과 가까워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대마도가 표시되었고 주요 浦와 봉수대의 명칭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왜관이 지도 왼쪽에 등장하고 있다. 좌수영은 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으로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 있었다. 해안에 명승지들을 표시하였다. 해수욕장과 온천으로 유명한 해운대, 오륙도 섬, 동백섬, 태종도, 다대동의 몰운대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 왼쪽의 이름없는 섬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을숙도로 보인다.(이현군)

  • 동복현 (同福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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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때 동복이란 지명이 생겼으며 이후 곡성, 보성, 화순 등에 포함되었다가 조선 태종대에 현이 되었다. 1914년에 다시 전라남도 화순군에 병합되었다. 현재의 화순군 동복면, 남면, 북면, 이서면을 관할 범위로 하였으며 동복면의 독상리, 천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동복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보성강에 유입된다. 하천을 따라 적벽, 만경대, 봉황대 등의 명승지가 회화적으로 묘사되었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 댐 건설로 동복호가 들어서 있다. 위쪽에 그려진 물염정은 이서면의 동복호 서북쪽에 위치하며 그 앞에 적벽이 있다. 물염정 서북쪽은 현재 화순온천으로 개발된 곳이다. 적벽 왼쪽에 표시된 외서면의 서북쪽에는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광주의 무등산이 자리하고 있다. 적벽의 동북쪽에 그려진 삼한 古城은 이서면, 북면, 동복면의 경계에 위치한 572.8m의 오성산에 만들어진 것이다. 옹암은 20번 국도 독재터널 서쪽에 있다. 古城과 松峙의 중간지점에는 수리천연동굴이 있다. 지도 오른쪽에 운월치, 모후산이 표시되었는데 이 산줄기가 현재의 화순군과 순천시 경계가 된다. 운월치 북쪽에 22번 국도 상에 운암터널이 뚫렸다. 모후산은 918.8m의 높은 산으로 동복현의 진산에 해당한다. 그 맥이 객사와 향교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지도에서는 도로만 그려졌지만, 해동지도에는 객사 동쪽에 黔富驛이 그려졌다. 적벽 아래 도원서원은 1687년(숙종 13)에 사액받았다.(이현군)

  • 봉산군 (鳳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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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봉산군, 사리원시, 은파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봉산군의 봉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봉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의 왼쪽에 바다처럼 표현된 부분은 현재의 재령강으로 밀물 때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현재는 일제시대 이후 상당한 개간이 이루어져 하천처럼 하폭이 좁아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도에서처럼 상당히 넓은 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재령강의 본류는 아래쪽 載寧界에서 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여지도》 및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 본류의 끝을 굵게 표현하여 해당 방향에서 흘러옴을 암시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마치 아주 짧은 하천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지도의 위쪽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현재의 서흥강이고, 아래쪽은 현재의 은파천이다. 두 하천 모두 동쪽의 瑞興界와 平山界에서 흘러들어오지만 역시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점은 나머지 3개의 지도에도 비슷하게 되어 있어 실제를 확인할 수 없는 필사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正方山城과 그로부터 왼쪽으로 성곽이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에도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곳은 대동강을 건넌 적이 긴 평지를 지나다가 만나는 산줄기로서 중요한 관방처로서 인식되었다. 오른쪽(동)으로부터 東里鎭, 정방산성, 蒜山鎭 등이 설치되어 있고, 埋伏處가 기록되었던 것은 이러한 지형적 중요성 때문이다. 산산진 왼쪽의 성곽은 원래는 가시 나무를 심어놓아 棘城이라 불렸지만 후대에 토성과 석성으로 증축되었다. 동쪽의 산줄기를 피해 재령강변의 평지를 돌아 남진하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관방처이다.(이기봉)

  • 마운령 (磨雲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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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이성현과 단천현의 경계를 이루던 마운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운령은 진흥왕 순수비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함경남도 이원군과 단천군의 경계를 이룬다. 이 일대의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그려진 것은 이 일대가 북방 강역의 군사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경흥을 잇는 관북 대로가 이곳을 지났으며, 두만강 대안에서 침입이 있을 경우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마운령을 통하여 谷口驛과 단천현을 잇는 경로가 있었으나 지금은 해안으로 도로와 철도가 개통되어 교통로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지도에서는 함경산맥 줄기를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모습으로 그렸고 磨雲嶺을 비롯하여 長津嶺, 佐驛嶺, 城古介, 松楸嶺, 下田嶺, 凡色嶺, 馬兒峴, 利德嶺, 金昌嶺, 新洞嶺 등의 위치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하천은 두 곳이 표현되어 있다. 利德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福貴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단천군 관암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단천읍을 통해 동해로 유입하는 복대천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북쪽에는 작은 지류가 그려져 있다. 지금의 이원군 성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대천으로 합류하는 소규모의 지류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운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에 비해 도로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마운령을 지나는 도로외에 谷口驛에서 昌道古介를 거쳐 濟仁館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長津峴 小路 등 10여 곳의 고갯길을 中路, 中大路, 小路, 細路 등으로 위계를 나누어 구분했다.(김기혁)

  • 송도 주기 (松都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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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는 조선시대의 개성을 의미하며, 정2품 또는 종2품의 留守가 파견된 고을이었다. 留守는 종2품의 관찰사보다 높거나 같을 정도로 높은 관직이며, 지방관인 外職이 아니라 중앙관직으로 쳤다. 유수가 파견된 고을은 비록 서울은 아니지만 서울에 준하는 지위를 가졌으며, 개성이 松都라는 별칭으로 많이 불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유수가 파견된 곳은 고려시대의 수도였던 개성 이외에도 강화(江都), 광주, 수원 등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 등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개성부와 《여지도》(古4790-58)의 송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일부 지명이나 표현 방법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만월대 아래쪽의 上衙와 貳衙가 앞의 두 지도에는 단지 衙라고만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실제 상황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부 잘못 표기된 지명도 보이고 있는데, 왼쪽의 永安界는 永安城의 오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인데, 지도에도 禮成江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오는 하천이 임진강이며, 오른쪽 아래에서 흘러오는 漢江과 합류되어 서해로 빠져나간다. 하천 위에는 祖江, 洛河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하천의 구간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조강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가는 구간에서 부르던 한강의 별칭이었다. 한강 하류에는 江華와 喬桐이 실제보다 아주 작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의 목적인 개성 이외의 다른 군현은 대략적인 위치만 표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개성과 조강 사이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개성과 조강 사이에는 원래 풍덕부가 끼어 있어 서로 접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성이 조강과 서로 접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은 개성 남쪽으로 조강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가장 강조되어 있는 것은 개성의 성곽 안과 북쪽의 대흥산성인데, 이 두 곳의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확대해서 그리는 것은 다른 고을의 그림지도에서도 잘 나타나는 현상이며, 대흥산성이 강조되어 그려진 것은 임진․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 때문이다. 지도에 南大門과 함께 표시된 개성의 성곽은 1393년(태조 2)에 축소하여 만든 것이고, 강감찬의 건의에 의해 1010년(현종 1)부터 21년 동안 만든 羅城은 그 아래쪽 산줄기에 건설되어 있었다. 개성 성곽 안에는 고려의 정궁이 있었던 滿月臺가 폐허화된 채 축대만 남아 있는 모습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서산군 (瑞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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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군은 서산시의 시내, 대산면, 지곡면, 성연면, 팔봉면, 인지면, 부석면, 음암면, 태안군의 고남면과 북쪽 일부를 제외한 안면읍과 고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산시 시내의 읍내동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서산군에 속해 있던 안면도와 부근 섬들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안면도와 부근 섬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위쪽의 첨지에는 備圖에 있는 것을 참고로 필사하여 넣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備圖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서산 지도이며, 이를 통해 볼 때 4개 지도의 원본 계통에는 안면도와 부근 섬이 생략되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서산군은 남쪽과 북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는데, 본 지도뿐만 아니라 나머지 3개 지도에도 남북쪽의 바다가 하천과 같은 수로로 연결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래 현재의 굴포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태안과의 사이에 운하를 뚫으려고 하다가 실패한 기록이 있는 것처럼 비록 좁기는 하지만 바다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른쪽에 唐津界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오류이다. 서산군은 실제로 당진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으며, 지도 위의 당진계 부분에는 海美界나 德山界 또는 沔川界가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이 당진계와 맞대고 있다는 본 지도 계통의 오류는 정확성을 기한 본 사이트의 《조선지도》(규16030)에서 서산 동쪽 부분의 경계선 오류가 나타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이기봉)

  • 동래부 주기 (東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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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동래구 수안동, 복천동, 안락동 등이며 부산광역시에서 기장군(기장현), 북구(양산군), 강서구를 제외한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낙동정맥의 끝에 위치하고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읍치 북쪽의 윤산이 진산이다. 과거 동래의 속현이었던 동편고현이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읍성이 있었으나 그리지 않았고 객사와 주요 건물을 그렸다. 성 밖의 향교와 성황사, 여단, 사직단을 그렸다. 사직단은 사직동, 사직초등학교 등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왼쪽의 큰 산성은 금정산성으로 현재 금정구의 명칭은 이것을 딴 것이다. 그 옆의 범어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는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산성 오른쪽에 온정이 보이는데 현재의 동래온천으로 동래구 온천동에 있다. 현재는 부산이 통용되는 지명이지만, 과거의 중심부는 동래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 해안가에 부산진이 표시되었는데 여기서 현재의 부산광역시 지명이 나왔다. 바다에 접해 있고 일본과 가까워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대마도가 표시되었고 주요 浦와 봉수대의 명칭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왜관이 지도 왼쪽에 등장하고 있다. 좌수영은 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으로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 있었다. 해안에 명승지들을 표시하였다. 해수욕장과 온천으로 유명한 해운대, 오륙도 섬, 동백섬, 태종도, 다대동의 몰운대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 왼쪽의 이름없는 섬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을숙도로 보인다.(이현군)

  • 동복현 주기 (同福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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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때 동복이란 지명이 생겼으며 이후 곡성, 보성, 화순 등에 포함되었다가 조선 태종대에 현이 되었다. 1914년에 다시 전라남도 화순군에 병합되었다. 현재의 화순군 동복면, 남면, 북면, 이서면을 관할 범위로 하였으며 동복면의 독상리, 천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동복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보성강에 유입된다. 하천을 따라 적벽, 만경대, 봉황대 등의 명승지가 회화적으로 묘사되었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 댐 건설로 동복호가 들어서 있다. 위쪽에 그려진 물염정은 이서면의 동복호 서북쪽에 위치하며 그 앞에 적벽이 있다. 물염정 서북쪽은 현재 화순온천으로 개발된 곳이다. 적벽 왼쪽에 표시된 외서면의 서북쪽에는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광주의 무등산이 자리하고 있다. 적벽의 동북쪽에 그려진 삼한 古城은 이서면, 북면, 동복면의 경계에 위치한 572.8m의 오성산에 만들어진 것이다. 옹암은 20번 국도 독재터널 서쪽에 있다. 古城과 松峙의 중간지점에는 수리천연동굴이 있다. 지도 오른쪽에 운월치, 모후산이 표시되었는데 이 산줄기가 현재의 화순군과 순천시 경계가 된다. 운월치 북쪽에 22번 국도 상에 운암터널이 뚫렸다. 모후산은 918.8m의 높은 산으로 동복현의 진산에 해당한다. 그 맥이 객사와 향교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지도에서는 도로만 그려졌지만, 해동지도에는 객사 동쪽에 黔富驛이 그려졌다. 적벽 아래 도원서원은 1687년(숙종 13)에 사액받았다.(이현군)

  • 봉산군 주기 (鳳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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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봉산군, 사리원시, 은파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봉산군의 봉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봉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의 왼쪽에 바다처럼 표현된 부분은 현재의 재령강으로 밀물 때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현재는 일제시대 이후 상당한 개간이 이루어져 하천처럼 하폭이 좁아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도에서처럼 상당히 넓은 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재령강의 본류는 아래쪽 載寧界에서 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여지도》 및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 본류의 끝을 굵게 표현하여 해당 방향에서 흘러옴을 암시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마치 아주 짧은 하천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지도의 위쪽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현재의 서흥강이고, 아래쪽은 현재의 은파천이다. 두 하천 모두 동쪽의 瑞興界와 平山界에서 흘러들어오지만 역시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점은 나머지 3개의 지도에도 비슷하게 되어 있어 실제를 확인할 수 없는 필사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正方山城과 그로부터 왼쪽으로 성곽이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에도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곳은 대동강을 건넌 적이 긴 평지를 지나다가 만나는 산줄기로서 중요한 관방처로서 인식되었다. 오른쪽(동)으로부터 東里鎭, 정방산성, 蒜山鎭 등이 설치되어 있고, 埋伏處가 기록되었던 것은 이러한 지형적 중요성 때문이다. 산산진 왼쪽의 성곽은 원래는 가시 나무를 심어놓아 棘城이라 불렸지만 후대에 토성과 석성으로 증축되었다. 동쪽의 산줄기를 피해 재령강변의 평지를 돌아 남진하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관방처이다.(이기봉)

  • 마운령 주기 (磨雲嶺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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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이성현과 단천현의 경계를 이루던 마운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운령은 진흥왕 순수비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함경남도 이원군과 단천군의 경계를 이룬다. 이 일대의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그려진 것은 이 일대가 북방 강역의 군사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경흥을 잇는 관북 대로가 이곳을 지났으며, 두만강 대안에서 침입이 있을 경우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마운령을 통하여 谷口驛과 단천현을 잇는 경로가 있었으나 지금은 해안으로 도로와 철도가 개통되어 교통로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지도에서는 함경산맥 줄기를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모습으로 그렸고 磨雲嶺을 비롯하여 長津嶺, 佐驛嶺, 城古介, 松楸嶺, 下田嶺, 凡色嶺, 馬兒峴, 利德嶺, 金昌嶺, 新洞嶺 등의 위치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하천은 두 곳이 표현되어 있다. 利德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福貴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단천군 관암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단천읍을 통해 동해로 유입하는 복대천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북쪽에는 작은 지류가 그려져 있다. 지금의 이원군 성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대천으로 합류하는 소규모의 지류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운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에 비해 도로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마운령을 지나는 도로외에 谷口驛에서 昌道古介를 거쳐 濟仁館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長津峴 小路 등 10여 곳의 고갯길을 中路, 中大路, 小路, 細路 등으로 위계를 나누어 구분했다.(김기혁)

  • 수원부 (水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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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부는 현재의 수원시와 오산시 및 매송면 남쪽의 화성시, 황구지천 서쪽의 평택시 등에 걸쳐 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邑內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면서 현재의 수원시내로 이동하기 이전의 읍치로서 현재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이 현재의 아산만으로 조선시대에 수원부의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부의 지도임에도 곳곳에 陽城倉, 陽城界, 稷山倉, 稷山界 등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아산만 부근에 여러 고을의 越境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원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바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비록 《해동지도》보다는 못하지만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도로가 전혀 기록되지 않은 뒤의 2개 지도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지명 등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의 아래쪽 가운데에 기록된 議倉이 《해동지도》에는 設倉이라 적혀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본 지도의 주기에는 設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지도에는 議倉으로, 주기에는 設倉으로 기록되어 있어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읍내 안쪽에 표시되어 있는 하천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읍내 위쪽의 後坪橋 부근의 하천 표시도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다르게 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게 되어 있다. 위쪽에 표시된 거리에 관한 내용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주기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와 같은 차이점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는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일부 다르게 필사하였으며, 특히 주기의 경우 시기적인 변화 양상을 담아내기 위해 전혀 다르게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와 동일한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方下池가 뒤의 2개 지도에는 方下地로 오기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 지명이 달라지고 있기도 하다.(이기봉)

  • 서산군 주기 (瑞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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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군은 서산시의 시내, 대산면, 지곡면, 성연면, 팔봉면, 인지면, 부석면, 음암면, 태안군의 고남면과 북쪽 일부를 제외한 안면읍과 고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산시 시내의 읍내동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서산군에 속해 있던 안면도와 부근 섬들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안면도와 부근 섬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위쪽의 첨지에는 備圖에 있는 것을 참고로 필사하여 넣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備圖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서산 지도이며, 이를 통해 볼 때 4개 지도의 원본 계통에는 안면도와 부근 섬이 생략되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서산군은 남쪽과 북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는데, 본 지도뿐만 아니라 나머지 3개 지도에도 남북쪽의 바다가 하천과 같은 수로로 연결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래 현재의 굴포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태안과의 사이에 운하를 뚫으려고 하다가 실패한 기록이 있는 것처럼 비록 좁기는 하지만 바다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른쪽에 唐津界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오류이다. 서산군은 실제로 당진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으며, 지도 위의 당진계 부분에는 海美界나 德山界 또는 沔川界가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이 당진계와 맞대고 있다는 본 지도 계통의 오류는 정확성을 기한 본 사이트의 《조선지도》(규16030)에서 서산 동쪽 부분의 경계선 오류가 나타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이기봉)

  • 뒷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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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뒷표지 1면입니다.

  • 뒷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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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뒷표지 1면입니다.

  • 삭주부 (朔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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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朔州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삭주군 동부, 대관군, 태천군 개혁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차이점이 보이는데, 우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 부분이 더 짧아졌다. 그리고 읍치 왼쪽에 향교 부분을 보면 《해동지도》에서는 향교 위쪽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향교 밑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향교 부분에 關門城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烽燧의 명칭을 적지 않고 봉수라는 사실만 간단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아래쪽에 仇寧鎭이 仇寧嶺으로, 위쪽에서는 幕嶺鎭이 幕鎭岺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 부분이 바르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의 모습을 보면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건물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그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지만, 본 지도의 경우에는 그런 점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마천령 (磨天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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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함경산맥의 마천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천령은 조선시대 함경북도 길주와 단천을 잇는 교통로상에 있었으며 지금은 함경남도 단천군과 함경북도 김책시를 잇는 도로상에 있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낱장으로 그려진 것은 磨雲嶺, 黃草嶺, 咸關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났다. 지도의 중앙에 북쪽의 鷹峰에서 이어진 줄기가 북에서 남쪽으로 강하게 그려져 있으며 마천령을 비롯하여 茄坡嶺, 板莫嶺, 坡嶺, 招美嶺, 蛇角嶺, 牛指嶺, 沙器嶺, 方阿嶺, 長方嶺 등의 고개와 嶺路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로 유입하는 여러 하천들이 이들 산줄기에서 발원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礪石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단천군의 북대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산줄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여러 하천들은 지금의 송어천, 갈파천, 쌍포천, 한천천 등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천령 일대의 도로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세 경로가 그려져 있다. 마천령을 지나는 도로는 당시 길주목의 嶺東驛과 단천현의 磨谷驛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지금도 주요 교통로로 이용된다. 마천령의 북쪽에서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는 臨寅驛과 利洞堡와 연결된다. 남쪽의 도로는 城津柵과 胡打里堡와 연결되는 해안도로로 지금 이곳에는 철도가 지나고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方阿岺 등 이곳의 고개들의 위치가 단천현과 길주목으로부터의 거리가 간단히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수원부 주기 (水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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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부는 현재의 수원시와 오산시 및 매송면 남쪽의 화성시, 황구지천 서쪽의 평택시 등에 걸쳐 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邑內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면서 현재의 수원시내로 이동하기 이전의 읍치로서 현재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이 현재의 아산만으로 조선시대에 수원부의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부의 지도임에도 곳곳에 陽城倉, 陽城界, 稷山倉, 稷山界 등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아산만 부근에 여러 고을의 越境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원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바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비록 《해동지도》보다는 못하지만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도로가 전혀 기록되지 않은 뒤의 2개 지도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지명 등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의 아래쪽 가운데에 기록된 議倉이 《해동지도》에는 設倉이라 적혀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본 지도의 주기에는 設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지도에는 議倉으로, 주기에는 設倉으로 기록되어 있어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읍내 안쪽에 표시되어 있는 하천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읍내 위쪽의 後坪橋 부근의 하천 표시도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다르게 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게 되어 있다. 위쪽에 표시된 거리에 관한 내용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주기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와 같은 차이점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는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일부 다르게 필사하였으며, 특히 주기의 경우 시기적인 변화 양상을 담아내기 위해 전혀 다르게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와 동일한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方下池가 뒤의 2개 지도에는 方下地로 오기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 지명이 달라지고 있기도 하다.(이기봉)

  • 서천군 (舒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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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군은 현재 서천군의 서천읍, 마서면, 장항읍, 시초면, 문산면과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의 개야도리․연도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천읍 군사리에 있었다. 서천군의 실제 모습은 읍치 동북쪽으로 韓山과 庇仁 사이로 犬牙相入地가 튀어나가 북쪽의 鴻山과 연결되고 있다. 본 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읍치의 풍수적 명당 형국을 강조하고, 사각형의 종이 모양에 맞추기 위해 아주 짧게 그려져 있다. 이로 인해 오른쪽의 하천이 실제로는 왼쪽의 하천보다 훨씬 길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비슷한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아래쪽에는 바다처럼 그려져 있지만 현재의 금강 하구 부분에 해당된다. 본 지도에도 沃溝界, 臨陂界 등의 문자가 적혀 있어 자세히 관찰해 보면 금강 하구임을 알 수 있다. 왼쪽 아래에 표시된 섬은 대략적인 방향만 알려줄 뿐 실제 거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烟島, 竹島, 開也召島는 현재 군산시 옥도면에 속해 있으며, 육지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 읍치 아래쪽의 南部面 지역은 마치 섬처럼 그려져 있는데, 과장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원래는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으로 변하던 곳으로 현재는 모두 간척되어 육지화 되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일부의 지명과 도로 등을 제외하면 별로 다르지 않으며, 《광여도》에서 본 지도에서 舒川浦라고만 표현했던 것을 舒川浦鎭으로 실제와 부합되게 변경한 것 정도가 큰 변화이다.(이기봉)

  • 뒷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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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뒷표지 2면입니다.

  • 뒷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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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뒷표지 2면입니다.

  • 삭주부 주기 (朔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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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朔州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삭주군 동부, 대관군, 태천군 개혁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차이점이 보이는데, 우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 부분이 더 짧아졌다. 그리고 읍치 왼쪽에 향교 부분을 보면 《해동지도》에서는 향교 위쪽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향교 밑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향교 부분에 關門城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烽燧의 명칭을 적지 않고 봉수라는 사실만 간단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아래쪽에 仇寧鎭이 仇寧嶺으로, 위쪽에서는 幕嶺鎭이 幕鎭岺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 부분이 바르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의 모습을 보면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건물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그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지만, 본 지도의 경우에는 그런 점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마천령 주기 (磨天嶺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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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함경산맥의 마천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천령은 조선시대 함경북도 길주와 단천을 잇는 교통로상에 있었으며 지금은 함경남도 단천군과 함경북도 김책시를 잇는 도로상에 있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낱장으로 그려진 것은 磨雲嶺, 黃草嶺, 咸關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났다. 지도의 중앙에 북쪽의 鷹峰에서 이어진 줄기가 북에서 남쪽으로 강하게 그려져 있으며 마천령을 비롯하여 茄坡嶺, 板莫嶺, 坡嶺, 招美嶺, 蛇角嶺, 牛指嶺, 沙器嶺, 方阿嶺, 長方嶺 등의 고개와 嶺路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로 유입하는 여러 하천들이 이들 산줄기에서 발원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礪石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단천군의 북대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산줄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여러 하천들은 지금의 송어천, 갈파천, 쌍포천, 한천천 등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천령 일대의 도로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세 경로가 그려져 있다. 마천령을 지나는 도로는 당시 길주목의 嶺東驛과 단천현의 磨谷驛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지금도 주요 교통로로 이용된다. 마천령의 북쪽에서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는 臨寅驛과 利洞堡와 연결된다. 남쪽의 도로는 城津柵과 胡打里堡와 연결되는 해안도로로 지금 이곳에는 철도가 지나고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方阿岺 등 이곳의 고개들의 위치가 단천현과 길주목으로부터의 거리가 간단히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안산군 (安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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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군은 경기도 시흥시의 하중동․하상동 남쪽 부분, 안산시의 시청 서쪽과 북쪽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의 수리산 서남쪽에 있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뻗은 修理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측면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있는 도로와 왼쪽의 梧里峴 및 正徃山烽臺 등은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나오고 있어 서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面과 소속된 洞里의 명칭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새로운 자료를 보충하여 수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面의 명칭은 수록되어 있지만 洞里의 명칭은 생략되어 있고, 면 중에서 郡內面이 빠져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하면서 일부 지명과 기타 정보를 생략하여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왼쪽 아래의 烏耳島에 본 지도에는 없는 十八戶에 대한 기록이 뒤의 2개 지도에 나오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아래의 3개 섬에 《여지도》가 《광여도》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어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이기봉)

  • 서천군 주기 (舒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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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군은 현재 서천군의 서천읍, 마서면, 장항읍, 시초면, 문산면과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의 개야도리․연도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천읍 군사리에 있었다. 서천군의 실제 모습은 읍치 동북쪽으로 韓山과 庇仁 사이로 犬牙相入地가 튀어나가 북쪽의 鴻山과 연결되고 있다. 본 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읍치의 풍수적 명당 형국을 강조하고, 사각형의 종이 모양에 맞추기 위해 아주 짧게 그려져 있다. 이로 인해 오른쪽의 하천이 실제로는 왼쪽의 하천보다 훨씬 길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비슷한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아래쪽에는 바다처럼 그려져 있지만 현재의 금강 하구 부분에 해당된다. 본 지도에도 沃溝界, 臨陂界 등의 문자가 적혀 있어 자세히 관찰해 보면 금강 하구임을 알 수 있다. 왼쪽 아래에 표시된 섬은 대략적인 방향만 알려줄 뿐 실제 거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烟島, 竹島, 開也召島는 현재 군산시 옥도면에 속해 있으며, 육지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 읍치 아래쪽의 南部面 지역은 마치 섬처럼 그려져 있는데, 과장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원래는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으로 변하던 곳으로 현재는 모두 간척되어 육지화 되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일부의 지명과 도로 등을 제외하면 별로 다르지 않으며, 《광여도》에서 본 지도에서 舒川浦라고만 표현했던 것을 舒川浦鎭으로 실제와 부합되게 변경한 것 정도가 큰 변화이다.(이기봉)

  • 문경현 (聞慶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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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로 많이 알려진 경상북도 문경시 일대의 지도이다. 문경현의 읍치는 문경읍의 상리 교촌리 일대로 문경새재 도립공원 동남쪽에 위치한다. 관할범위는 문경읍, 마성면, 가은읍, 호계면 일부 지역인데 가은읍은 문경현의 속현이었던 加恩縣 지역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가현내면이 보이고 그 옆에는 가은창이 있어 과거를 반영하고 있다. 백두대간과 접한 지역으로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지도 북쪽에 새재, 즉 鳥嶺의 산성이 그려졌다. 한양에서 경상도로 통하던 영남대로의 주요 관문이었다. 문경현의 진산은 조령이 아니라 산성과 읍치 중간에 표시된 주흘산이다. 조령산성에서 나오는 읍치 왼쪽의 하천은 초곡천이며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신북천이다. 주흘산 왼쪽에 초곡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두 하천이 만나서 조령천이라는 이름으로 남쪽으로 흘러 영강에 합류되어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발원지에서 하류까지 하나의 흐름이지만, 구간마다 하천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경읍치에서 산성으로 연결된 도로를 따라 동성문, 중성문, 조령문이 적혀 있는데 현재의 조령 제 1, 제 2, 제 3 관문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의 조령산성은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대에 쌓은 것이다. 지도 아래의 고모성은 신라 때 방어를 위해 쌓은 것이다. 문경의 역원 중 가장 큰 것은 지도 오른쪽 아래의 유곡역이다. 察訪驛으로 18개 역을 관장하였는데 문경시 유곡동에 있었다. 높고 깊은 산줄기 사이로 여러 사찰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현군)

  • 만경현 (萬頃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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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왼쪽에는 바다가 그려졌는데 고군산군도 일대이다. 가장 큰 섬에 고군산진이 표시되었다. 육로와 함께 섬 사이의 해로까지 표시하였다. 현대 지도상의 섬 위치와 차이가 있는데 해로를 중심으로 섬을 인식한 결과로 보인다. 이 섬들은 군산시 옥도면에 포함되는 것으로 새만금간척사업이 진행되는 곳이다. 동쪽의 해안과 북쪽의 야미도, 신시도를 연결한 바다가 육지로 전환될 예정이다. 지도 동쪽은 현재의 김제시 만경읍, 공덕면, 청하면, 성덕면, 진봉면, 광활면 일대이다. 해안의 망해사, 전봉산은 현재의 광활면에 속하는데 이 아래 지역은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이 지도와 현재 지도의 해안선이 다르다. 전봉산은 높이 72.2m의 작은 산인데 이 지도에서는 강조하여 크게 그렸다. 북쪽의 옥구와 경계가 되는 하천은 만경강이다. 신창진은 29번 국도상의 만경대교 근처이다. 과거의 나루터가 있던 곳에 교량이 들어선 것이다. 읍성이 그려진 곳은 현재의 만경읍 만경리 일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 동쪽에 옛 토성이 남아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읍성 안에는 이름없이 건물만 그렸는데 가장 큰 건물이 객사이다. 읍성 남쪽에 압호정이 보이며 그 옆에 큰 저수지가 그려졌는데 현재의 능제(만경지)로 추정된다. 평야지대에 농업을 위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능제 남쪽에 남산서원이 있었다.(이현군)

  • 삼등현 (三登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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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登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강동군 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등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삼등현 지도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주기 부분의 지명과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비교해 보았을 때 가운데 부분에는 西境面이라 적혀 있지만 주기에는 西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지명은 4종의 지도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읍치의 경우에는 《해동지도》가 다른 지도들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다.  《해동지도》는 客舍, 鄕校, 衙舍, 倉이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2 정도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가 남북보다는 동서를 길게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그 영향으로 읍치 왼쪽의 하천이 상대적으로 길게 그려졌다. 또한 古丁洞面이 있는 하천은 동서 방향에서 남북 방향으로 유로가 바뀌어 표현되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陽德界가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 삼등현은 양덕현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았다. 또한 왼쪽에 祥原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로 삼등현은 아래쪽 綾城江(현재의 남강)을 경계로 상원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이는 이런 종류의 지도를 최초로 제작한 사람이 삼등현의 경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명천부 (明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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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명천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명천부는 일제시대 경성군의 일부지역(동면, 서면)을 합하여 명천군이 되었으며 지금의 함경북도 명천군·화성군·화대군 일대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서쪽이 위로 향하였다. 해안의 돌출된 부분을 실제와 유사하게 묘사하였다. 지도의 위쪽에 무산과 경계를 이루는 長白山이 실경으로 그려져 있으며 지도 왼쪽에는 길주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험준하게 표현하였다. 魚郞川이 장백산에서 발원한 읍치를 거쳐 경성부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명간천이다. 지도 왼쪽의 地境寺烽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화대천을 그린 것이다. 하구에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으나 현재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퇴적되어 연육된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둘레; 5,394尺)과 함께 그렸으며 지금의 화성군 하우리 일대이다. 진산인 永平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명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역으로 在德驛만 표시되어 있고, 다른 지도에서 나타나는 甫老知驛은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경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보로지역을 경유하여 鬼門館을 지난다. 길주와는 在德驛-阿倉-別安代嶺을 잇는 도로외에 별도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금 이 경로를 따라 함경선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716戶, 田 1,665結64負, 畓 115結35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안산군 주기 (安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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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군은 경기도 시흥시의 하중동․하상동 남쪽 부분, 안산시의 시청 서쪽과 북쪽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의 수리산 서남쪽에 있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뻗은 修理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측면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있는 도로와 왼쪽의 梧里峴 및 正徃山烽臺 등은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나오고 있어 서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面과 소속된 洞里의 명칭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새로운 자료를 보충하여 수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面의 명칭은 수록되어 있지만 洞里의 명칭은 생략되어 있고, 면 중에서 郡內面이 빠져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하면서 일부 지명과 기타 정보를 생략하여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왼쪽 아래의 烏耳島에 본 지도에는 없는 十八戶에 대한 기록이 뒤의 2개 지도에 나오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아래의 3개 섬에 《여지도》가 《광여도》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어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이기봉)

  • 석성현 (石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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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성현은 부여군의 석성면, 부여읍의 현북리, 초촌면의 연화리, 논산시의 성동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석성면의 석성리에 있었다. 지도는 서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뻗은 산줄기의 來脈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의 임천계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임천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오른쪽의 恩津界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석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여지도》에서는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지만 《광여도》에서는 주로 남쪽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그렸다. 비록 창작이 아니라 필사라고 하더라도 표현 방식에서 변화를 주려했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여지도》에서는 논산천변에 수록된 5개의 堤가 생략되어 있는데, 다른 지도와 비교해 보았을 때 필사자가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여겨진다. 기타 산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기 위해 전 지역을 비슷한 크기로 그렸지만 실제로 위쪽에 비해 아래쪽은 산이 거의 없는 평지에 불과하다. 왼쪽의 江倉은 석성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문경현 주기 (聞慶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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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로 많이 알려진 경상북도 문경시 일대의 지도이다. 문경현의 읍치는 문경읍의 상리 교촌리 일대로 문경새재 도립공원 동남쪽에 위치한다. 관할범위는 문경읍, 마성면, 가은읍, 호계면 일부 지역인데 가은읍은 문경현의 속현이었던 加恩縣 지역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가현내면이 보이고 그 옆에는 가은창이 있어 과거를 반영하고 있다. 백두대간과 접한 지역으로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지도 북쪽에 새재, 즉 鳥嶺의 산성이 그려졌다. 한양에서 경상도로 통하던 영남대로의 주요 관문이었다. 문경현의 진산은 조령이 아니라 산성과 읍치 중간에 표시된 주흘산이다. 조령산성에서 나오는 읍치 왼쪽의 하천은 초곡천이며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신북천이다. 주흘산 왼쪽에 초곡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두 하천이 만나서 조령천이라는 이름으로 남쪽으로 흘러 영강에 합류되어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발원지에서 하류까지 하나의 흐름이지만, 구간마다 하천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경읍치에서 산성으로 연결된 도로를 따라 동성문, 중성문, 조령문이 적혀 있는데 현재의 조령 제 1, 제 2, 제 3 관문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의 조령산성은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대에 쌓은 것이다. 지도 아래의 고모성은 신라 때 방어를 위해 쌓은 것이다. 문경의 역원 중 가장 큰 것은 지도 오른쪽 아래의 유곡역이다. 察訪驛으로 18개 역을 관장하였는데 문경시 유곡동에 있었다. 높고 깊은 산줄기 사이로 여러 사찰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현군)

  • 만경현 주기 (萬頃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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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왼쪽에는 바다가 그려졌는데 고군산군도 일대이다. 가장 큰 섬에 고군산진이 표시되었다. 육로와 함께 섬 사이의 해로까지 표시하였다. 현대 지도상의 섬 위치와 차이가 있는데 해로를 중심으로 섬을 인식한 결과로 보인다. 이 섬들은 군산시 옥도면에 포함되는 것으로 새만금간척사업이 진행되는 곳이다. 동쪽의 해안과 북쪽의 야미도, 신시도를 연결한 바다가 육지로 전환될 예정이다. 지도 동쪽은 현재의 김제시 만경읍, 공덕면, 청하면, 성덕면, 진봉면, 광활면 일대이다. 해안의 망해사, 전봉산은 현재의 광활면에 속하는데 이 아래 지역은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이 지도와 현재 지도의 해안선이 다르다. 전봉산은 높이 72.2m의 작은 산인데 이 지도에서는 강조하여 크게 그렸다. 북쪽의 옥구와 경계가 되는 하천은 만경강이다. 신창진은 29번 국도상의 만경대교 근처이다. 과거의 나루터가 있던 곳에 교량이 들어선 것이다. 읍성이 그려진 곳은 현재의 만경읍 만경리 일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 동쪽에 옛 토성이 남아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읍성 안에는 이름없이 건물만 그렸는데 가장 큰 건물이 객사이다. 읍성 남쪽에 압호정이 보이며 그 옆에 큰 저수지가 그려졌는데 현재의 능제(만경지)로 추정된다. 평야지대에 농업을 위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능제 남쪽에 남산서원이 있었다.(이현군)

  • 삼등현 주기 (三登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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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登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강동군 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등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삼등현 지도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주기 부분의 지명과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비교해 보았을 때 가운데 부분에는 西境面이라 적혀 있지만 주기에는 西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지명은 4종의 지도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읍치의 경우에는 《해동지도》가 다른 지도들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다.  《해동지도》는 客舍, 鄕校, 衙舍, 倉이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2 정도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가 남북보다는 동서를 길게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그 영향으로 읍치 왼쪽의 하천이 상대적으로 길게 그려졌다. 또한 古丁洞面이 있는 하천은 동서 방향에서 남북 방향으로 유로가 바뀌어 표현되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陽德界가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 삼등현은 양덕현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았다. 또한 왼쪽에 祥原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로 삼등현은 아래쪽 綾城江(현재의 남강)을 경계로 상원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이는 이런 종류의 지도를 최초로 제작한 사람이 삼등현의 경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명천부 주기 (明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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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명천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명천부는 일제시대 경성군의 일부지역(동면, 서면)을 합하여 명천군이 되었으며 지금의 함경북도 명천군·화성군·화대군 일대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서쪽이 위로 향하였다. 해안의 돌출된 부분을 실제와 유사하게 묘사하였다. 지도의 위쪽에 무산과 경계를 이루는 長白山이 실경으로 그려져 있으며 지도 왼쪽에는 길주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험준하게 표현하였다. 魚郞川이 장백산에서 발원한 읍치를 거쳐 경성부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명간천이다. 지도 왼쪽의 地境寺烽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화대천을 그린 것이다. 하구에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으나 현재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퇴적되어 연육된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둘레; 5,394尺)과 함께 그렸으며 지금의 화성군 하우리 일대이다. 진산인 永平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명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역으로 在德驛만 표시되어 있고, 다른 지도에서 나타나는 甫老知驛은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경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보로지역을 경유하여 鬼門館을 지난다. 길주와는 在德驛-阿倉-別安代嶺을 잇는 도로외에 별도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금 이 경로를 따라 함경선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716戶, 田 1,665結64負, 畓 115結35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안성군 (安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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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군은 현재의 안성시 시내, 보개면, 금광면, 미양면, 대덕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구포동과 명륜동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안성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성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내용이 극히 소략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있으며, 읍치 남쪽의 산줄기 표현이 뒤의 2개 지도와 달리 《해동지도》처럼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리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되어 있고,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가 본 지도에 없는 점 등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계통을 따르면서 필요에 따라 교정을 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는 주기에 기록하면서 지도에서는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金剛山을 金剛寺로, 木川界를 水川界로 적는 등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어 정교하게 필사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주기의 내용이 같아 필사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산줄기의 표현 방식이 달라지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의 내용을 변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瑞雲山 등 일부 지명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는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석성현 주기 (石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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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성현은 부여군의 석성면, 부여읍의 현북리, 초촌면의 연화리, 논산시의 성동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석성면의 석성리에 있었다. 지도는 서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뻗은 산줄기의 來脈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의 임천계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임천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며, 오른쪽의 恩津界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석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여지도》에서는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지만 《광여도》에서는 주로 남쪽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그렸다. 비록 창작이 아니라 필사라고 하더라도 표현 방식에서 변화를 주려했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여지도》에서는 논산천변에 수록된 5개의 堤가 생략되어 있는데, 다른 지도와 비교해 보았을 때 필사자가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여겨진다. 기타 산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기 위해 전 지역을 비슷한 크기로 그렸지만 실제로 위쪽에 비해 아래쪽은 산이 거의 없는 평지에 불과하다. 왼쪽의 江倉은 석성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밀양부 (密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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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밀양시내 내 1동, 내 2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청도면(청도군 영역)을 제외한 현재의 밀양시이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밀양강으로 남쪽의 삼랑진(삼랑진읍 삼랑리)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 지명표기가 보인다. 밀양은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도와의 경계가 되는 북쪽의 화악산이 진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되었다. 지도에서 읍성은 사행하는 밀양강의 모양에 맞추어 그려서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읍성 안에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밀주관으로 적힌 건물이 객사로 보인다. 밀양은 推火, 密城, 密州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밀주는 고려 성종대에 붙여진 고을 이름이다. 옛 이름을 따서 객사 건물에 붙인 것이다. 남문 인근의 영남루는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밀양교 인근에 위치한다. 읍치의 동쪽과 남쪽에서 강과 읍성을 따라 숲이 형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방풍이나 비보의 측면에서 숲을 조성하였는데 그 전형을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봉산은 한양의 禁山처럼 벌목을 금지하여 쓸만한 재목을 얻기 위한 곳이다. 읍치 서쪽에 향교가 보이며 서원, 사찰이 지도에 그려졌다. 지도 아래쪽의 국농소는 국가에서 경영하는 농장이며 하천의 영향으로 여러 곳에 田이 나타난다. 하천을 따라 창고들이 들어서 있으며 역관도 보인다. 읍치의 동쪽으로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는데 과거 수운의 중심지였던 삼랑진은 경부선과 경전선이 교차하는 기차역이다(이현군).

  • 무안현 (務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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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운남면과 망운면은 영광군에 속하였으며 삼향면은 나주목, 현경면 일부지역은 함평현에 포함되었다. 조선시대 무안현은 그 나머지 지역과 목포시, 함평군 엄다면, 학교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읍성이 그려진 곳은 무안읍 성내리 일대이며 주변에 성남리, 성동리 지명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서해안 고속국도 무안 인터체인지 서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성 북쪽이 현재 함평군에 속하는 엄다면, 학교면이며 영광계라고 적힌 곳이 망운면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 아래에 그려진 木浦鎭 일대가 현재의 목포시에 해당한다.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城 형태로 존재하였고 水軍萬戶가 배치되었다. 그 옆의 봉수대는 229.3m 높이의 목포 유달산에 있던 것이다. 읍치 아래 그려진 송림서원은 1682년(숙종 8)에 사액받았다. 그 아래 읍성과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게 향교를 그렸다. 서쪽은 바다이며 동쪽에 크게 그려진 것은 영산강을 그린 것이다. 영산강을 따라 나루터, 창고, 선소, 누정이 들어서 있다.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몽탄진은 현재 몽탄면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아래 唐串이라고 표시된 건물 인근에 영산호 하구둑이 들어서 있다. 남쪽의 해안선은 퇴적 작용으로 인하여 현재 지형도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법천사는 317.7m 높이의 승달산 아래에 지금도 남아있다. 읍성의 남문을 중심으로 도로망이 그려졌다. 북쪽의 고막원은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에 있던 역원이다.(이현군)

  • 삼화부 (三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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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和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남포직할시 와우도구역, 항구구역 서부, 강서구역 삼화리, 온천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三和’라는 지명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金堂·呼山·漆井을 합하여 삼화현이라 칭한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화부 지도의 구도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읍치와 廣梁鎭만은 《해동지도》보다 건물이 더 많이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았던 廳과 倉을 포함해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또한 광량진 부분도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2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한 정보는 많고, 본 지도의 종이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훨씬 작아 읍치와 광량진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서 서쪽 바다까지의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었으며, 광량진 안쪽의 灣 역시 작게 묘사되었다. 읍치에서는 하천의 유로가 일부 바뀌어 표현되기도 하였다. 광량진 좌측에 표시된 德島의 경우 지명은 표기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현재 섬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보이는 楮島와 号島가 생략되어 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무산부 (茂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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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최상류 유역에 위치하였던 무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백두산 아래 첫 고을로 1712년 중국과의 정계비가 세워진 곳이다. 조선시대 무산부는 지금의 함경북도 무산군·연사군, 양강도의 대흥단군·백암군 전체와 삼지연군 동쪽에 걸쳐 있다. 나진시의 삼해리 일대에 비월지가 있었으나 본 지도에서는 제외되었다. 지도의 좌측 상단에 白頭山 來脈을 그리고, 남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험준한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이 상류부에서 감입 곡류하여 회령부로 흘러 나가는 모습을 실감있게 그려져 있다.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지류들이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고 있다. 최상류부에서 유입하는 하천 지명은 魚潤江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의 소홍만수로 추정된다. 장백산 일대의 2곳에서 지류가 발원한 朴下川은 지금의 연면수와 산암천인 것으로 보인다. 虛水羅川이 政丞坡達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오른쪽을 지나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6,228尺)과 함께 두만강 연안에 그려져 있다. 두만강 대안에 있는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비교적 자세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쪽의 영토에는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무산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 3곳의 역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회령부로 이어지는 도로에 梁水驛과 豊山驛이 있으며, 麻田驛과 車楡嶺을 거쳐 鏡城府로 연결된다. 읍치에서 갑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두만강 상류의 연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68戶로 군의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매우 희박하게 분포하고 있었고, 田면적이 1,716結29負인데 반하여 畓은 2結9負4束에 불과하여 개척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안성군 주기 (安城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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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군은 현재의 안성시 시내, 보개면, 금광면, 미양면, 대덕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구포동과 명륜동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안성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성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내용이 극히 소략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있으며, 읍치 남쪽의 산줄기 표현이 뒤의 2개 지도와 달리 《해동지도》처럼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리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되어 있고,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가 본 지도에 없는 점 등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계통을 따르면서 필요에 따라 교정을 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는 주기에 기록하면서 지도에서는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金剛山을 金剛寺로, 木川界를 水川界로 적는 등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어 정교하게 필사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주기의 내용이 같아 필사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산줄기의 표현 방식이 달라지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의 내용을 변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瑞雲山 등 일부 지명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는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수영 (水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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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도의 수영은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성곽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는 편이다. 지도의 이름인 水營 아래쪽에는 保寧이라는 문자를 써넣어 보령 땅에 소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해안선과 섬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水營(圖)와 거의 동일하여 동일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船泊處에 배의 모양을 그려넣은 정도에 불과하다. 왼쪽 위에 기록된 洪陽은 현종 2년(1661)과 숙종 36년(1710) 등에 홍주가 강등되어 사용되던 명칭으로 《해동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충청 수영의 최초 지도가 현종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후대의 필사본들이 지명의 변화를 확인하지 않고 필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수영성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수영의 성곽과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곳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확대하여 그렸고, 다른 부분들은 대략 방향만 맞추어 배치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은 정보가 많은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하나의 지면에 동시에 그리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방식으로 축척과 방향은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다. 雙熬島의 경우 암초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는 것은 성곽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중요한 경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쪽(서)의 섬들은 대략적인 방향과 섬의 상대적인 크기만이 반영되어 있을 뿐 실질적인 거리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外烟島와 於靑島의 경우 해안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 위에 있는 섬이다.(이기봉)

  • 밀양부 주기 (密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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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밀양시내 내 1동, 내 2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청도면(청도군 영역)을 제외한 현재의 밀양시이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밀양강으로 남쪽의 삼랑진(삼랑진읍 삼랑리)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 지명표기가 보인다. 밀양은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도와의 경계가 되는 북쪽의 화악산이 진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되었다. 지도에서 읍성은 사행하는 밀양강의 모양에 맞추어 그려서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읍성 안에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밀주관으로 적힌 건물이 객사로 보인다. 밀양은 推火, 密城, 密州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밀주는 고려 성종대에 붙여진 고을 이름이다. 옛 이름을 따서 객사 건물에 붙인 것이다. 남문 인근의 영남루는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밀양교 인근에 위치한다. 읍치의 동쪽과 남쪽에서 강과 읍성을 따라 숲이 형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방풍이나 비보의 측면에서 숲을 조성하였는데 그 전형을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봉산은 한양의 禁山처럼 벌목을 금지하여 쓸만한 재목을 얻기 위한 곳이다. 읍치 서쪽에 향교가 보이며 서원, 사찰이 지도에 그려졌다. 지도 아래쪽의 국농소는 국가에서 경영하는 농장이며 하천의 영향으로 여러 곳에 田이 나타난다. 하천을 따라 창고들이 들어서 있으며 역관도 보인다. 읍치의 동쪽으로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는데 과거 수운의 중심지였던 삼랑진은 경부선과 경전선이 교차하는 기차역이다(이현군).

  • 무안현 주기 (務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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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운남면과 망운면은 영광군에 속하였으며 삼향면은 나주목, 현경면 일부지역은 함평현에 포함되었다. 조선시대 무안현은 그 나머지 지역과 목포시, 함평군 엄다면, 학교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읍성이 그려진 곳은 무안읍 성내리 일대이며 주변에 성남리, 성동리 지명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서해안 고속국도 무안 인터체인지 서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성 북쪽이 현재 함평군에 속하는 엄다면, 학교면이며 영광계라고 적힌 곳이 망운면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 아래에 그려진 木浦鎭 일대가 현재의 목포시에 해당한다. 이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城 형태로 존재하였고 水軍萬戶가 배치되었다. 그 옆의 봉수대는 229.3m 높이의 목포 유달산에 있던 것이다. 읍치 아래 그려진 송림서원은 1682년(숙종 8)에 사액받았다. 그 아래 읍성과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게 향교를 그렸다. 서쪽은 바다이며 동쪽에 크게 그려진 것은 영산강을 그린 것이다. 영산강을 따라 나루터, 창고, 선소, 누정이 들어서 있다.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몽탄진은 현재 몽탄면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아래 唐串이라고 표시된 건물 인근에 영산호 하구둑이 들어서 있다. 남쪽의 해안선은 퇴적 작용으로 인하여 현재 지형도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법천사는 317.7m 높이의 승달산 아래에 지금도 남아있다. 읍성의 남문을 중심으로 도로망이 그려졌다. 북쪽의 고막원은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에 있던 역원이다.(이현군)

  • 삼화부 주기 (三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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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和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남포직할시 와우도구역, 항구구역 서부, 강서구역 삼화리, 온천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三和’라는 지명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金堂·呼山·漆井을 합하여 삼화현이라 칭한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화부 지도의 구도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읍치와 廣梁鎭만은 《해동지도》보다 건물이 더 많이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았던 廳과 倉을 포함해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또한 광량진 부분도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2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한 정보는 많고, 본 지도의 종이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훨씬 작아 읍치와 광량진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서 서쪽 바다까지의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었으며, 광량진 안쪽의 灣 역시 작게 묘사되었다. 읍치에서는 하천의 유로가 일부 바뀌어 표현되기도 하였다. 광량진 좌측에 표시된 德島의 경우 지명은 표기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현재 섬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보이는 楮島와 号島가 생략되어 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무산부 주기 (茂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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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최상류 유역에 위치하였던 무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백두산 아래 첫 고을로 1712년 중국과의 정계비가 세워진 곳이다. 조선시대 무산부는 지금의 함경북도 무산군·연사군, 양강도의 대흥단군·백암군 전체와 삼지연군 동쪽에 걸쳐 있다. 나진시의 삼해리 일대에 비월지가 있었으나 본 지도에서는 제외되었다. 지도의 좌측 상단에 白頭山 來脈을 그리고, 남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험준한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이 상류부에서 감입 곡류하여 회령부로 흘러 나가는 모습을 실감있게 그려져 있다.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지류들이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고 있다. 최상류부에서 유입하는 하천 지명은 魚潤江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의 소홍만수로 추정된다. 장백산 일대의 2곳에서 지류가 발원한 朴下川은 지금의 연면수와 산암천인 것으로 보인다. 虛水羅川이 政丞坡達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오른쪽을 지나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6,228尺)과 함께 두만강 연안에 그려져 있다. 두만강 대안에 있는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비교적 자세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쪽의 영토에는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무산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 3곳의 역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회령부로 이어지는 도로에 梁水驛과 豊山驛이 있으며, 麻田驛과 車楡嶺을 거쳐 鏡城府로 연결된다. 읍치에서 갑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두만강 상류의 연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68戶로 군의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매우 희박하게 분포하고 있었고, 田면적이 1,716結29負인데 반하여 畓은 2結9負4束에 불과하여 개척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앞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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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앞표지 1면입니다.

  • 수영 주기 (水營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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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도의 수영은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성곽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는 편이다. 지도의 이름인 水營 아래쪽에는 保寧이라는 문자를 써넣어 보령 땅에 소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해안선과 섬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水營(圖)와 거의 동일하여 동일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船泊處에 배의 모양을 그려넣은 정도에 불과하다. 왼쪽 위에 기록된 洪陽은 현종 2년(1661)과 숙종 36년(1710) 등에 홍주가 강등되어 사용되던 명칭으로 《해동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충청 수영의 최초 지도가 현종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후대의 필사본들이 지명의 변화를 확인하지 않고 필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수영성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수영의 성곽과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곳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확대하여 그렸고, 다른 부분들은 대략 방향만 맞추어 배치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은 정보가 많은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하나의 지면에 동시에 그리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방식으로 축척과 방향은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다. 雙熬島의 경우 암초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는 것은 성곽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중요한 경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쪽(서)의 섬들은 대략적인 방향과 섬의 상대적인 크기만이 반영되어 있을 뿐 실질적인 거리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外烟島와 於靑島의 경우 해안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 위에 있는 섬이다.(이기봉)

  • 봉화현 (奉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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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지도 북쪽에 높고 험준하게 강한 맥세를 표현하고 태백산과 황장산을 그려 넣었다. 황장산은 나라에 필요한 재목을 구하기 위한 봉산이기도 했다. 그 아래에는 태백산 조선왕조실록 사고를 그려넣고 주변 건물인 실록각, 선원각을 표시하였다. 각화사가 함께 그려졌다. 그 남쪽이 봉화현의 읍치가 되는데 문수산, 광대산과 연결되는 금륜치(금륜봉)이 봉화의 진산이 된다. 일반적으로 진산의 맥이 뻗어나온 지점에 객사를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아사를 그리고 객사는 약간 동쪽에 그렸다. 지방 양반들이 중심이 되는 향청 건물을 따로 표시하였다. 왼쪽에는 향교가 그려졌다. 읍치는 봉화읍내가 아닌 봉성면 봉성리에 있었다. 영동선 철도의 봉성역 남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봉화읍은 대부분 안동부에 속하였고 일부는 순흥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관할구역은 봉성면, 명호면, 상운면 일부, 물야면 일부, 춘양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왼쪽 위의 물야면은 물야부곡이 있던 곳이다. 지도 왼쪽에 이름없이 그려진 서원은 文岩書院으로 보이는데 1694년(숙종 20)에 사액 받았으며 李滉과 趙穆을 배향하였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강대는 낙동강 변에 위치한 명승지이다. 지도 오른쪽 위에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도로만 그리고 역원을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다.(이현군)

  • 무장현 (茂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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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무장면, 상하면, 공음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심원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무장은 조선 태종대에 茂松縣과 長沙縣을 합하면서 생긴 지명이다. 지도 아래쪽에 무송고현이 표시되었다. 읍치 서쪽은 바다와 접하고 있는데 바다 한 가운데 대죽도와 소죽도가 그려졌으며 지금도 그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대죽도 옆에 바다에 유입되게 그려진 하천은 인천강이다. 현재 지형도와 약간 다르게 보이는 것은 직사각형의 종이 안에 이 지역을 그리기 위해 왜곡한 것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땅은 변산반도이며 무장현과 곰소만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있다. 선운산은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며 그 안에 선운사가 있는데 이 지도에도 표시되었다. 보물 29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읍치는 무장면 무장리, 성내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도 가운데 성곽으로 그려진 지역이다. 읍치 서쪽과 남쪽의 산줄기를 맥세가 느껴지도록 그리고 있다. 원형으로 성곽을 그리고 성문은 남문만 표시하였는데 이 지역의 도로망이 모두 남문과 연결된다. 읍성 안에는 다른 군현지도에 잘 등장하지 않는 軍器庫를 그렸고 읍성 안에도 산줄기를 그려넣어 객사와 연결되도록 하였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무장면 교흥리에 있었던 것으로 읍성 지역과 분리된다. 그 옆의 충현사는 1608년(선조 41)에 세워졌으며 이존오, 유희춘 등을 배향하였다. 해안에 봉수대, 해창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상원군 (祥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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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祥原郡〉으로, 현재의 평안남도 상원군의 서남부와 서부 일부를 제외한 상원군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상원군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가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다. 《해동지도》는 세로보다 가로가 긴 형태로 지도를 그리고 있지만, 본 지도는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가로보다 세로가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상원군은 실제로 남북이 동서보다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해동지도》기 본 지도보다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4개의 건물과 명칭이 표시되어 있을 뿐인데, 본 지도에는 8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2개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여지도》의 경우 건물 수는 같고, 대신 訓練의 위치가 본 지도와 달리 客舍 바로 아래 건물이고, 본 지도의  訓練 건물은 祥明院으로 표시되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며, 본 지도에 명칭이 없는 건물 하나가 鄕廳으로 표시되어 읍치 안에 鄕廳이 2개 표시되어 있다. 그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것은 첫째, 정보가 많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책의 크기가 훨씬 작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즉, 정보는 많고, 크기는 작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읍치를 크게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와 비교해 볼 때 본 지도의 오류가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 읍치 아래쪽에 표기된 紅岩面이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주기에 홍암면이 적혀 있으므로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쪽의 三登界는 《해동지도》에 遂安界로 되어 있다. 三登縣의 영역은 대동강의 지류로 현재 남강으로 불리는 오른쪽의 能成江 건너편에만 있었다. 따라서 본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필사 시에 실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양윤정)

  • 문천군 (文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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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문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문천군은 일제 시대 인접한 덕원군과 안변부 일대를 편입함에 따라 문천군의 문천읍·운림면·천내읍·명귀면, 북성면 등 5개면 지역이다. 현재의 함경남도 문천시와 천내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 아래쪽에 동해를 그려 위가 서쪽이다. 인접한 군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에는 두류산등의 산지 지명과 고개 지명의 위치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여러 하천이 이곳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頭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현재 전탄강의 하구에 넓은 퇴적지형을 바탕으로 형성된 호도반도는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의 直洞岺에서 발원하여 읍치 남쪽을 지나는 하천은 지금의 남천강을 그린 것이다. 현재의 송전만에 해당되는 곳에 2곳의 반도가 돌출되어 표현되어 있다. 이는 현재 원산항 북항으로 개발 이용되고 있는 長致串이다. 읍치에는 衙舍, 향교 건물만이 그려져 있고 성곽은 없다.(기타 기재된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문천군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長峴을 지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읍치에서 炭峴을 지나 明孝倉을 경유는 도로는 영흥으로 연결된다. 車波峴(‘車坡峴’의 오기)을 지나 박문포를 거쳐 泥峴을 넘는 도로는 고원으로 연결된다. 현재 이 경로로 도로와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에서 남천강 변을 따라 直洞岺을 넘는 도로는 안변군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덕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27戶, 田 975結98負8束, 畓 147結91負5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앞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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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앞표지 2면입니다.

  • 신창현 (新昌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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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현은 아산시의 신창면, 도고면, 서쪽 일부를 제외한 선장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창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창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하천에 대한 표현이다. 읍치 북쪽의 하천은 현재의 곡교천으로 실제로는 천안에서 발원하여 온양과 아산의 경계를 흐르다가 신창현의 북쪽을 흐른다.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삽교천으로 頓串津 부근에서 곡교천과 합류되어 현재의 삽교호인 위쪽(북)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이러한 측면을 전혀 이해하기 어렵게 곡교천과 삽교천이 하나의 하천처럼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왼쪽 아래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렸다. 그림지도에서는 이런 현상이 가끔 나타나는데, 하천의 연결 관계보다는 해당 군현을 중심으로 하천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의 山城은 현재의 학성산 정상을 두른 테뫼식의 중형 산성으로 삼국시대로부터 빨라도 고려시대 초기까지는 신창현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산성이 있던 鶴城山이 이 고을의 鎭山인데, 조선시대 이전의 장소성이 진산이란 경관으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이기봉)

  • 봉화현 주기 (奉化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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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지도 북쪽에 높고 험준하게 강한 맥세를 표현하고 태백산과 황장산을 그려 넣었다. 황장산은 나라에 필요한 재목을 구하기 위한 봉산이기도 했다. 그 아래에는 태백산 조선왕조실록 사고를 그려넣고 주변 건물인 실록각, 선원각을 표시하였다. 각화사가 함께 그려졌다. 그 남쪽이 봉화현의 읍치가 되는데 문수산, 광대산과 연결되는 금륜치(금륜봉)이 봉화의 진산이 된다. 일반적으로 진산의 맥이 뻗어나온 지점에 객사를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아사를 그리고 객사는 약간 동쪽에 그렸다. 지방 양반들이 중심이 되는 향청 건물을 따로 표시하였다. 왼쪽에는 향교가 그려졌다. 읍치는 봉화읍내가 아닌 봉성면 봉성리에 있었다. 영동선 철도의 봉성역 남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봉화읍은 대부분 안동부에 속하였고 일부는 순흥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관할구역은 봉성면, 명호면, 상운면 일부, 물야면 일부, 춘양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왼쪽 위의 물야면은 물야부곡이 있던 곳이다. 지도 왼쪽에 이름없이 그려진 서원은 文岩書院으로 보이는데 1694년(숙종 20)에 사액 받았으며 李滉과 趙穆을 배향하였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강대는 낙동강 변에 위치한 명승지이다. 지도 오른쪽 위에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도로만 그리고 역원을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다.(이현군)

  • 무장현 주기 (茂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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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무장면, 상하면, 공음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심원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무장은 조선 태종대에 茂松縣과 長沙縣을 합하면서 생긴 지명이다. 지도 아래쪽에 무송고현이 표시되었다. 읍치 서쪽은 바다와 접하고 있는데 바다 한 가운데 대죽도와 소죽도가 그려졌으며 지금도 그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대죽도 옆에 바다에 유입되게 그려진 하천은 인천강이다. 현재 지형도와 약간 다르게 보이는 것은 직사각형의 종이 안에 이 지역을 그리기 위해 왜곡한 것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땅은 변산반도이며 무장현과 곰소만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있다. 선운산은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며 그 안에 선운사가 있는데 이 지도에도 표시되었다. 보물 29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읍치는 무장면 무장리, 성내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도 가운데 성곽으로 그려진 지역이다. 읍치 서쪽과 남쪽의 산줄기를 맥세가 느껴지도록 그리고 있다. 원형으로 성곽을 그리고 성문은 남문만 표시하였는데 이 지역의 도로망이 모두 남문과 연결된다. 읍성 안에는 다른 군현지도에 잘 등장하지 않는 軍器庫를 그렸고 읍성 안에도 산줄기를 그려넣어 객사와 연결되도록 하였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무장면 교흥리에 있었던 것으로 읍성 지역과 분리된다. 그 옆의 충현사는 1608년(선조 41)에 세워졌으며 이존오, 유희춘 등을 배향하였다. 해안에 봉수대, 해창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상원군 주기 (祥原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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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祥原郡〉으로, 현재의 평안남도 상원군의 서남부와 서부 일부를 제외한 상원군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상원군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가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다. 《해동지도》는 세로보다 가로가 긴 형태로 지도를 그리고 있지만, 본 지도는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가로보다 세로가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상원군은 실제로 남북이 동서보다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해동지도》기 본 지도보다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4개의 건물과 명칭이 표시되어 있을 뿐인데, 본 지도에는 8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2개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여지도》의 경우 건물 수는 같고, 대신 訓練의 위치가 본 지도와 달리 客舍 바로 아래 건물이고, 본 지도의  訓練 건물은 祥明院으로 표시되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며, 본 지도에 명칭이 없는 건물 하나가 鄕廳으로 표시되어 읍치 안에 鄕廳이 2개 표시되어 있다. 그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것은 첫째, 정보가 많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책의 크기가 훨씬 작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즉, 정보는 많고, 크기는 작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읍치를 크게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와 비교해 볼 때 본 지도의 오류가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 읍치 아래쪽에 표기된 紅岩面이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주기에 홍암면이 적혀 있으므로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쪽의 三登界는 《해동지도》에 遂安界로 되어 있다. 三登縣의 영역은 대동강의 지류로 현재 남강으로 불리는 오른쪽의 能成江 건너편에만 있었다. 따라서 본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필사 시에 실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양윤정)

  • 문천군 주기 (文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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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문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문천군은 일제 시대 인접한 덕원군과 안변부 일대를 편입함에 따라 문천군의 문천읍·운림면·천내읍·명귀면, 북성면 등 5개면 지역이다. 현재의 함경남도 문천시와 천내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 아래쪽에 동해를 그려 위가 서쪽이다. 인접한 군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에는 두류산등의 산지 지명과 고개 지명의 위치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여러 하천이 이곳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頭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현재 전탄강의 하구에 넓은 퇴적지형을 바탕으로 형성된 호도반도는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의 直洞岺에서 발원하여 읍치 남쪽을 지나는 하천은 지금의 남천강을 그린 것이다. 현재의 송전만에 해당되는 곳에 2곳의 반도가 돌출되어 표현되어 있다. 이는 현재 원산항 북항으로 개발 이용되고 있는 長致串이다. 읍치에는 衙舍, 향교 건물만이 그려져 있고 성곽은 없다.(기타 기재된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문천군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長峴을 지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읍치에서 炭峴을 지나 明孝倉을 경유는 도로는 영흥으로 연결된다. 車波峴(‘車坡峴’의 오기)을 지나 박문포를 거쳐 泥峴을 넘는 도로는 고원으로 연결된다. 현재 이 경로로 도로와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에서 남천강 변을 따라 直洞岺을 넘는 도로는 안변군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덕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27戶, 田 975結98負8束, 畓 147結91負5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근군 (楊根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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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군은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는데, 1747년(영조 23)에 현재의 양평읍 양근리인 지도 오른쪽의 葛山(칡미)으로 옮긴다. 왼쪽 위의 春川江이 현재의 북한강이며, 오른쪽의 驪江이 현재의 남한강으로 두 하천은 왼쪽 아래의 蛇島(현재의 두물머리인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근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아래쪽에 풍수적인 산줄기 모양을 하면서도 다른 곳과 달리 墓의 속자가 기록되지 않은 2개를 들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모두 墓의 명칭이 기록된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기본적으로 《해동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2개를 빠뜨렸고, 이렇게 빠뜨린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계속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客舍가 있는 읍치 부근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大院古寺垈란 글씨와 탑의 모양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나 그 계통이 뒤의 2개 지도보다는 《해동지도》 계통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읍치 왼쪽의 蹇止山 부근의 산줄기인데, 《해동지도》와 본 지도 및 《여지도》에는 산줄기가 표시되어 있지만 《광여도》에는 없다. 본 지도에는 경기도의 다른 고을과 달리 面이 왼쪽에 西從面과 西串面 2개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수정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주기에 面의 명칭과 거리만이 적혀 있음에 반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초경과 종경이 적혀 있어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주기에는 보충할 수 있었지만 지도 위에 위치를 기록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는 보충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신창현 주기 (新昌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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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현은 아산시의 신창면, 도고면, 서쪽 일부를 제외한 선장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창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창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하천에 대한 표현이다. 읍치 북쪽의 하천은 현재의 곡교천으로 실제로는 천안에서 발원하여 온양과 아산의 경계를 흐르다가 신창현의 북쪽을 흐른다.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삽교천으로 頓串津 부근에서 곡교천과 합류되어 현재의 삽교호인 위쪽(북)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이러한 측면을 전혀 이해하기 어렵게 곡교천과 삽교천이 하나의 하천처럼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왼쪽 아래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렸다. 그림지도에서는 이런 현상이 가끔 나타나는데, 하천의 연결 관계보다는 해당 군현을 중심으로 하천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의 山城은 현재의 학성산 정상을 두른 테뫼식의 중형 산성으로 삼국시대로부터 빨라도 고려시대 초기까지는 신창현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산성이 있던 鶴城山이 이 고을의 鎭山인데, 조선시대 이전의 장소성이 진산이란 경관으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이기봉)

  • 비안현 (比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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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의성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비안면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의성군의 비안면, 안계면, 구천면, 안사면 일부 지역이었다. 비안의 속현으로는 安貞縣이 있었는데 현재의 안계면 안정리 일대이다. 안정창이 지도에 표시되었고 그 왼쪽 에 안계역이 그려져 있어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진산은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는 성황산이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단, 성황단이 설치되었는데 성황단이 있던 산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낙동강에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에는 바위를 회화적으로 그린 점이 눈에 띈다. 옛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지역의 이미지 중심으로 그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읍치는 성곽없이 건물만 몇 개 그렸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안에 적어 넣어 구별이 되도록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치 뿐만 아니라 사찰들도 독립적 형국 안에 표시한 점이 눈에 띈다. 이 밖에 누정을 그려 넣었다. 향교와 읍치 중간에 망북정이 강변에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간점산과 대암산에 봉수가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도로를 표시하고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고개가 보인다. 지도 위쪽의 金堂峴은 현재의 비안면 자락리에서 안평면 금곡리 금당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이현군)

  • 무주부 (茂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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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錦山郡에 속했던 부남면을 제외한 무주군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며 읍치는 무주읍 읍내리 일대이다. 읍치 앞쪽의 하천은 남대천이며 서쪽의 금강에 유입되어 북쪽으로 흘러간다.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한 군현으로 지도 북쪽에 천마산, 백화산, 향로봉이 보인다. 읍치 뒤쪽의 420.4m의 향로봉이 진산에 해당한다. 그 오른쪽에 栗峙가 표시되었는데 근처에 밤숙골이라는 지명이 현재 남아 있다. 읍치 동쪽 현재의 무주읍 오산리에는 무주구상화강편마암이 천연기념물 249호로 지정되어있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 등을 그렸다. 성곽은 읍치 남쪽의 1029.2m의 적상산에 보이는데 이곳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史庫와 선원각이 있던 곳이다. 덕유산 국립공원 안에 포함되는 지역으로 적상산성은 사적 146호로 지정되었다. 요새처럼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덕유산이 표시되었다. 그 근처에 구천동사라는 사찰이 보이는데 이 일대가 무주구천동으로 알려진 곳이다. 적성산성이라고 적힌 곳에 호수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 보이는데 현재의 적상호에 해당하며 그 동북쪽에 무주호가 있는데 양수식 발전 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무주부는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한 것이며 주계현이 현재의 읍치가 되며 동쪽의 풍동면, 풍서면, 풍남면은 무풍현 지역이다. 무주구천동 동쪽의 현재 지명이 무풍면으로 되어 있는데 옛 무풍현의 명칭을 딴 것이다. 경상도와 경계가 되는 군현으로 백두대간과 잇닿아 있어 고개들이 지도에 많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서흥부 (瑞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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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서흥군, 연탄군 동쪽 절반, 봉산군과 린산군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흥군의 화곡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흥부(또는 서흥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서흥이 현으로 강등된 시기는 1671년(현종 12)-1762년(영조 38) 사이와 1777년(정조 1)-1786년(정조 10) 사이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縣으로 되어 있고,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府로 되어 있어 필사 시기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를 지나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서흥강이고,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황주강으로 재령강과 대동강에 합류되어 바다로 빠져나간다. 서흥부의 동북쪽 일부가 예성강 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의 오른쪽 위의 하천이 바로 그것이다. 본 지도에는 읍치와 大峴山城이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대현산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대현산성 안에는 토산, 수안, 신계, 곡산 등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서흥과 함께 산성에 들어와 적을 방어하는 고을의 식량을 보관하던 곳이다. 평상시에는 보통 사찰에서 성곽의 수리를 담당했는데, 대현산성 안에 표시된 紫烟寺가 그런 사찰이다. 지도 위에는 ‘○○坊’이라는 지명이 자주 기록되어 있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대신하여 부르던 명칭이었다.(이기봉)

  • 부령부 (富寧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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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부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경흥부의 일부 지역(관해명, 삼해면)을 흡수하여 부령군이 되었다. 지금의 청진시 동부의 일부와 위의 2개 면을 제외한 부령군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지도의 위가 서쪽이다. 부령부의 실제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나 지도에서는 매우 단조롭게 표현되었다. 현재의 수성천이 부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여러 하천들이 산지에서 발원하여 수성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상류부의 大古介 부근에 표현된 지류는 지금의 백사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虛通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수성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춘천이다. 수성천의 하류 지역은 지금의 청진시 일대로 지도에 그려진 삼각주는 지금 매립되어 있다. 靑岩으로 기재된 곳은 지금의 청진시 고말산으로 보인다. 읍치는 수성천 중류의 우안에 성곽(둘레 3,774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부령읍 부령동 일대이다.(지도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부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각 도로에 4곳의 驛 표시가 있다. 읍치에서 회령으로 이어지는 경로에서 내륙 도로에는 古堡驛이 있으며 해안도로는 懷綏驛을 지난다. 남쪽으로 鏡城에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에서 수성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輸城驛을 지난다. 서쪽의 무산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廢茂山驛까지만 그려져 있으나 다른 지도에서는 麻田驛을 통과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읍치를 거치지 않고 회령에서 경성으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가 해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391戶, 田 1,241結41負, 畓 13結80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근군 주기 (楊根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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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군은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는데, 1747년(영조 23)에 현재의 양평읍 양근리인 지도 오른쪽의 葛山(칡미)으로 옮긴다. 왼쪽 위의 春川江이 현재의 북한강이며, 오른쪽의 驪江이 현재의 남한강으로 두 하천은 왼쪽 아래의 蛇島(현재의 두물머리인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근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아래쪽에 풍수적인 산줄기 모양을 하면서도 다른 곳과 달리 墓의 속자가 기록되지 않은 2개를 들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모두 墓의 명칭이 기록된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기본적으로 《해동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2개를 빠뜨렸고, 이렇게 빠뜨린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계속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客舍가 있는 읍치 부근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大院古寺垈란 글씨와 탑의 모양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나 그 계통이 뒤의 2개 지도보다는 《해동지도》 계통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읍치 왼쪽의 蹇止山 부근의 산줄기인데, 《해동지도》와 본 지도 및 《여지도》에는 산줄기가 표시되어 있지만 《광여도》에는 없다. 본 지도에는 경기도의 다른 고을과 달리 面이 왼쪽에 西從面과 西串面 2개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수정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주기에 面의 명칭과 거리만이 적혀 있음에 반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초경과 종경이 적혀 있어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주기에는 보충할 수 있었지만 지도 위에 위치를 기록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는 보충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아산현 (牙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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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현은 아산시의 영인면, 음봉면, 서원리를 제외한 염치읍, 금성리․해암리를 제외한 인주면, 둔포면의 북쪽, 선장면의 신문리, 당진군 우강면의 신촌리와 부장리 및 강문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인면의 아산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아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의 沔川界라고 적혀 있는 부분이 현재의 아산만이고, 水原界에서 흘러오는 하천이 현재의 아산호인 안성천의 하구이다. 위쪽의 平澤界에서 아산호로 흘러드는 하천이 현재의 군계천이며, 아래쪽의 牛坪津이라 적혀 있는 하천이 현재의 곡교천이다. 곡교천은 동쪽의 천안에서 흘러들어오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왼쪽 위에는 唐津浦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唐津界로 바뀌어 있다. 두 지도의 필사자들이 唐津浦를 동일한 명칭인 唐津縣으로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아산현 지도에도 당진포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읍치에 7개의 건물이, 貢稅倉에는 5-6개의 건물과 성곽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4개의 건물이, 공세창에는 성곽은 없고 단지 1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다.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아산현 지도에는 《해동지도》보다는 나머지 3개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어떤 원칙에 의해 표현 방법을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貢稅倉은 주변 고을의 稅米를 모아 서울로 운반하던 漕倉인데, 조선전기에는 현재의 충청남도 대부분의 세미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해안가나 수상 운송이 가능한 하천을 끼고 있는 고을의 경우 세미를 자체적으로 운반하게 하면서 내륙 고을만 책임지게 되어 규모와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다. 공세창은 현재의 인주면 공세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성곽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이기봉)

  • 비안현 주기 (比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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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의성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비안면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의성군의 비안면, 안계면, 구천면, 안사면 일부 지역이었다. 비안의 속현으로는 安貞縣이 있었는데 현재의 안계면 안정리 일대이다. 안정창이 지도에 표시되었고 그 왼쪽 에 안계역이 그려져 있어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진산은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는 성황산이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단, 성황단이 설치되었는데 성황단이 있던 산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낙동강에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에는 바위를 회화적으로 그린 점이 눈에 띈다. 옛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지역의 이미지 중심으로 그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읍치는 성곽없이 건물만 몇 개 그렸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안에 적어 넣어 구별이 되도록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치 뿐만 아니라 사찰들도 독립적 형국 안에 표시한 점이 눈에 띈다. 이 밖에 누정을 그려 넣었다. 향교와 읍치 중간에 망북정이 강변에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간점산과 대암산에 봉수가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도로를 표시하고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고개가 보인다. 지도 위쪽의 金堂峴은 현재의 비안면 자락리에서 안평면 금곡리 금당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이현군)

  • 무주부 주기 (茂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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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錦山郡에 속했던 부남면을 제외한 무주군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며 읍치는 무주읍 읍내리 일대이다. 읍치 앞쪽의 하천은 남대천이며 서쪽의 금강에 유입되어 북쪽으로 흘러간다.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한 군현으로 지도 북쪽에 천마산, 백화산, 향로봉이 보인다. 읍치 뒤쪽의 420.4m의 향로봉이 진산에 해당한다. 그 오른쪽에 栗峙가 표시되었는데 근처에 밤숙골이라는 지명이 현재 남아 있다. 읍치 동쪽 현재의 무주읍 오산리에는 무주구상화강편마암이 천연기념물 249호로 지정되어있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 등을 그렸다. 성곽은 읍치 남쪽의 1029.2m의 적상산에 보이는데 이곳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史庫와 선원각이 있던 곳이다. 덕유산 국립공원 안에 포함되는 지역으로 적상산성은 사적 146호로 지정되었다. 요새처럼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덕유산이 표시되었다. 그 근처에 구천동사라는 사찰이 보이는데 이 일대가 무주구천동으로 알려진 곳이다. 적성산성이라고 적힌 곳에 호수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 보이는데 현재의 적상호에 해당하며 그 동북쪽에 무주호가 있는데 양수식 발전 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무주부는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한 것이며 주계현이 현재의 읍치가 되며 동쪽의 풍동면, 풍서면, 풍남면은 무풍현 지역이다. 무주구천동 동쪽의 현재 지명이 무풍면으로 되어 있는데 옛 무풍현의 명칭을 딴 것이다. 경상도와 경계가 되는 군현으로 백두대간과 잇닿아 있어 고개들이 지도에 많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서흥부 주기 (瑞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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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서흥군, 연탄군 동쪽 절반, 봉산군과 린산군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흥군의 화곡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흥부(또는 서흥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서흥이 현으로 강등된 시기는 1671년(현종 12)-1762년(영조 38) 사이와 1777년(정조 1)-1786년(정조 10) 사이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縣으로 되어 있고,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府로 되어 있어 필사 시기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를 지나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서흥강이고,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황주강으로 재령강과 대동강에 합류되어 바다로 빠져나간다. 서흥부의 동북쪽 일부가 예성강 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의 오른쪽 위의 하천이 바로 그것이다. 본 지도에는 읍치와 大峴山城이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대현산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대현산성 안에는 토산, 수안, 신계, 곡산 등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서흥과 함께 산성에 들어와 적을 방어하는 고을의 식량을 보관하던 곳이다. 평상시에는 보통 사찰에서 성곽의 수리를 담당했는데, 대현산성 안에 표시된 紫烟寺가 그런 사찰이다. 지도 위에는 ‘○○坊’이라는 지명이 자주 기록되어 있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대신하여 부르던 명칭이었다.(이기봉)

  • 부령부 주기 (富寧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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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부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경흥부의 일부 지역(관해명, 삼해면)을 흡수하여 부령군이 되었다. 지금의 청진시 동부의 일부와 위의 2개 면을 제외한 부령군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지도의 위가 서쪽이다. 부령부의 실제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나 지도에서는 매우 단조롭게 표현되었다. 현재의 수성천이 부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여러 하천들이 산지에서 발원하여 수성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상류부의 大古介 부근에 표현된 지류는 지금의 백사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虛通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수성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춘천이다. 수성천의 하류 지역은 지금의 청진시 일대로 지도에 그려진 삼각주는 지금 매립되어 있다. 靑岩으로 기재된 곳은 지금의 청진시 고말산으로 보인다. 읍치는 수성천 중류의 우안에 성곽(둘레 3,774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부령읍 부령동 일대이다.(지도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부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각 도로에 4곳의 驛 표시가 있다. 읍치에서 회령으로 이어지는 경로에서 내륙 도로에는 古堡驛이 있으며 해안도로는 懷綏驛을 지난다. 남쪽으로 鏡城에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에서 수성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輸城驛을 지난다. 서쪽의 무산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廢茂山驛까지만 그려져 있으나 다른 지도에서는 麻田驛을 통과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읍치를 거치지 않고 회령에서 경성으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가 해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391戶, 田 1,241結41負, 畓 13結80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성현 (陽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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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현은 안성군의 양성면, 원곡면, 공도면을 중심으로 있었으며, 읍치는 양성면의 동항리에 있었다. 그러나 양성현에는 월경지가 많았는데, 진위와 수원의 땅을 넘어 현재의 평택시 청북면의 율북리, 고잔리, 삼계리, 포승면의 내기리, 운정리, 방림리 등에 있었다.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 있는 北面과 外良洞面 및 甘味洞面이 바로 이러한 월경지에 해당된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의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아래쪽에 西海가 크게 그려져 있고, 오른쪽의 하천과 왼쪽 아래의 하천이 바다로 흘러나가듯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의 안성천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은 진위천의 일부인데, 양성현의 월경지가 진위천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해동지도》처럼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은 《해동지도》의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그려진 西海가 사라지고, 진위천과 안성천 본류가 양성현의 땅에서 직접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이러한 오류는 근본적으로 왼쪽 아래의 북면 일대가 월경지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더 나아가 《광여도》와 《여지도》도 본 지도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이기봉)

  • 아산현 주기 (牙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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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현은 아산시의 영인면, 음봉면, 서원리를 제외한 염치읍, 금성리․해암리를 제외한 인주면, 둔포면의 북쪽, 선장면의 신문리, 당진군 우강면의 신촌리와 부장리 및 강문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인면의 아산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아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의 沔川界라고 적혀 있는 부분이 현재의 아산만이고, 水原界에서 흘러오는 하천이 현재의 아산호인 안성천의 하구이다. 위쪽의 平澤界에서 아산호로 흘러드는 하천이 현재의 군계천이며, 아래쪽의 牛坪津이라 적혀 있는 하천이 현재의 곡교천이다. 곡교천은 동쪽의 천안에서 흘러들어오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왼쪽 위에는 唐津浦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唐津界로 바뀌어 있다. 두 지도의 필사자들이 唐津浦를 동일한 명칭인 唐津縣으로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아산현 지도에도 당진포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읍치에 7개의 건물이, 貢稅倉에는 5-6개의 건물과 성곽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4개의 건물이, 공세창에는 성곽은 없고 단지 1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다.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아산현 지도에는 《해동지도》보다는 나머지 3개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어떤 원칙에 의해 표현 방법을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貢稅倉은 주변 고을의 稅米를 모아 서울로 운반하던 漕倉인데, 조선전기에는 현재의 충청남도 대부분의 세미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해안가나 수상 운송이 가능한 하천을 끼고 있는 고을의 경우 세미를 자체적으로 운반하게 하면서 내륙 고을만 책임지게 되어 규모와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다. 공세창은 현재의 인주면 공세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성곽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이기봉)

  • 사천현 (泗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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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사천시(삼천포시) 일부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사천읍 선인리, 정의리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사천읍, 사남면, 정동면, 용현면과 사천시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아래에 그려진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다. 자연 지형과 성문의 명칭, 면 명칭을 통해 동쪽을 위로 향하게 그린 지도임을 알수 있다. 읍치가 관할 구역의 북서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왼쪽 아래에 그려졌다. 읍치 지역을 크게 그렸는데 현대 지도와 달리 고지도는 중요한 부분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특성을 가진다. 진산은 동쪽의 두읍벌산인데 이 지도에서는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남쪽)의 사수천은 현재의 사천강에 해당한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 안에 표시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성을 그리고 그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렸다. 사천강 오른쪽 하천은 현재의 죽전천으로 판단된다. 하천 주변에 저수지, 제언 등이 표시되었다. 지도 위쪽에 書齋라고 적힌 곳은 李楨(1512-1571)의 書齋였다. 그 아래의 귀계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였다. 해안가에는 지역 특성을 반영한 海倉, 船所, 兵倉, 巡倉, 統倉 등이 보인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용현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있고 선진리에는 사천성이 있었다. 바다에는 주변의 섬들이 그려졌다.(이현군)

  • 보성군 (寶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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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보성군 일대의 지도인데 웅치면과 회천면은 장흥부에 속하며 벌교읍은 낙안군에 속하기 때문에 관할 범위에서 제외된다. 읍치는 경전선 철도 보성역 북쪽인 보성읍 보성리일대이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보성강으로 북쪽으로 흘러 섬진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북쪽에는 현재 댐의 건설로 주암호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읍치 남동쪽은 득량만, 보성만 일대의 바다이다. 지도에 표시된 해창과 선소가 바다와 인접한 군현임을 보여준다. 선소는 현재의 득량면 해안에 있던 것이며 북동쪽에 득량만 방조제가 있고 그 인근에 해창교가 있어 해창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이 일대가 兆陽폐현이 있던 곳이다. 지도 북쪽의 복내면이 표시된 지역이 福城폐현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복내리 일대가 중심지로 추정된다. 읍치에는 읍성과 객사, 아사, 창이 표시되었다. 그 북쪽의 德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의 율어면은 현재에도 율어면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해동지도에는 율어면 동쪽에 많은 고개들이 표시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생략되었다. 읍치 서쪽의 旌忠祠는 安弘國을 배향한 곳이며 이름없이 표시된 서원은 大溪書院과 龍山書院이다. 읍치 왼쪽의 대계서원은 安邦俊을 배향한 곳이며 오른쪽 아래의 용산서원은 朴光前을 배향하였다. 이 밖에 도로, 봉수대, 사찰, 향교가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선천부 (宣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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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宣川府〉로, 현재의 북부를 제외한 평안북도 선천군 전체, 서부를 제외한 동림군 전체, 곽산군 동래강 서안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선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선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읍치 안에 표시되어 있는 訓練, 鄕廳 등의 건물은 《해동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추가된 정보를 《해동지도》의 크기보다 훨씬 작은 종이 위에 표시하기 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에는 없는 동서남북 경계까지의 거리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겨우 본 지도와 읍치 안에 그려진 건물들은 비슷하나 산맥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 본 지도의 경우 읍치를 감싸고 있는 산맥으로부터 읍치 안쪽으로 4개의 산물이 뻗어 있어 각 건물들을 산맥에 의해 분리되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읍치 안의 산맥을 생략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유사하긴 하나 덜 복잡하게 그리기 위해 생략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南面의 경우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는 주기를 꼼꼼히 검토하여 지도를 그리기 보다는 지도와 地誌 부분을 따로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아래쪽(남)의 바닷가에 있는 섬들은 身彌島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크기를 별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또한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리려고 하다보니까 해안가로부터 섬까지의 거리가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점 역시 본 지도뿐만 아니라 앞의 3종의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고을의 실제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종이의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양윤정)

  • 북청부 (北靑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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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북청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북청군으로 되었고 일부 지역이 신설된 풍산군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신포시·덕성군과 량강도 김형권군 일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에 부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남대천을 그리고 읍치는 하류 가까이에 배치시켰다. 읍치는 현재 북청읍 내리 일대에 해당되며 지도에는 성곽(둘레 11,604尺)과 함께 衙舍를 그려넣었다. 鎭山인 連德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읍치 관련 지명의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북청부 해제 참조) 여러 하천 지류들이 북청부를 둘러싼 산지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으로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도 좌측의 通坡 부근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팔련천을 그린 것이다. 그 남쪽에 표현된 지류들은 지금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되는 향동천, 거서천과 송고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의 金昌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좌안으로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곤파천을 그린 것이다. 洪源과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 홍원군의 용포면에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동대천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동해안 유입부에 그려진 섬은 지금의 마양도이다. 지도 위쪽의 厚峙岺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지금 풍산군의 허천강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세 방향의 도로만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 동쪽의 利城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土城驛과 居山驛이 있으며 홍원현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平浦驛이 있다. 甲山府로 이어지는 도로는 남대천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경로상에 濟仁館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17戶, 田 1,348結29負7束, 畓 241結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성현 주기 (陽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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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현은 안성군의 양성면, 원곡면, 공도면을 중심으로 있었으며, 읍치는 양성면의 동항리에 있었다. 그러나 양성현에는 월경지가 많았는데, 진위와 수원의 땅을 넘어 현재의 평택시 청북면의 율북리, 고잔리, 삼계리, 포승면의 내기리, 운정리, 방림리 등에 있었다.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 있는 北面과 外良洞面 및 甘味洞面이 바로 이러한 월경지에 해당된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의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아래쪽에 西海가 크게 그려져 있고, 오른쪽의 하천과 왼쪽 아래의 하천이 바다로 흘러나가듯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의 안성천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은 진위천의 일부인데, 양성현의 월경지가 진위천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해동지도》처럼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은 《해동지도》의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그려진 西海가 사라지고, 진위천과 안성천 본류가 양성현의 땅에서 직접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이러한 오류는 근본적으로 왼쪽 아래의 북면 일대가 월경지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더 나아가 《광여도》와 《여지도》도 본 지도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이기봉)

  • 앞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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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앞표지 1면입니다.

  • 사천현 주기 (泗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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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사천시(삼천포시) 일부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사천읍 선인리, 정의리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사천읍, 사남면, 정동면, 용현면과 사천시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아래에 그려진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다. 자연 지형과 성문의 명칭, 면 명칭을 통해 동쪽을 위로 향하게 그린 지도임을 알수 있다. 읍치가 관할 구역의 북서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왼쪽 아래에 그려졌다. 읍치 지역을 크게 그렸는데 현대 지도와 달리 고지도는 중요한 부분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특성을 가진다. 진산은 동쪽의 두읍벌산인데 이 지도에서는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남쪽)의 사수천은 현재의 사천강에 해당한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 안에 표시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성을 그리고 그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렸다. 사천강 오른쪽 하천은 현재의 죽전천으로 판단된다. 하천 주변에 저수지, 제언 등이 표시되었다. 지도 위쪽에 書齋라고 적힌 곳은 李楨(1512-1571)의 書齋였다. 그 아래의 귀계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였다. 해안가에는 지역 특성을 반영한 海倉, 船所, 兵倉, 巡倉, 統倉 등이 보인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용현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있고 선진리에는 사천성이 있었다. 바다에는 주변의 섬들이 그려졌다.(이현군)

  • 보성군 주기 (寶城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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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보성군 일대의 지도인데 웅치면과 회천면은 장흥부에 속하며 벌교읍은 낙안군에 속하기 때문에 관할 범위에서 제외된다. 읍치는 경전선 철도 보성역 북쪽인 보성읍 보성리일대이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보성강으로 북쪽으로 흘러 섬진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북쪽에는 현재 댐의 건설로 주암호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읍치 남동쪽은 득량만, 보성만 일대의 바다이다. 지도에 표시된 해창과 선소가 바다와 인접한 군현임을 보여준다. 선소는 현재의 득량면 해안에 있던 것이며 북동쪽에 득량만 방조제가 있고 그 인근에 해창교가 있어 해창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이 일대가 兆陽폐현이 있던 곳이다. 지도 북쪽의 복내면이 표시된 지역이 福城폐현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복내리 일대가 중심지로 추정된다. 읍치에는 읍성과 객사, 아사, 창이 표시되었다. 그 북쪽의 德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의 율어면은 현재에도 율어면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해동지도에는 율어면 동쪽에 많은 고개들이 표시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생략되었다. 읍치 서쪽의 旌忠祠는 安弘國을 배향한 곳이며 이름없이 표시된 서원은 大溪書院과 龍山書院이다. 읍치 왼쪽의 대계서원은 安邦俊을 배향한 곳이며 오른쪽 아래의 용산서원은 朴光前을 배향하였다. 이 밖에 도로, 봉수대, 사찰, 향교가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선천부 주기 (宣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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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宣川府〉로, 현재의 북부를 제외한 평안북도 선천군 전체, 서부를 제외한 동림군 전체, 곽산군 동래강 서안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선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선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읍치 안에 표시되어 있는 訓練, 鄕廳 등의 건물은 《해동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추가된 정보를 《해동지도》의 크기보다 훨씬 작은 종이 위에 표시하기 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에는 없는 동서남북 경계까지의 거리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겨우 본 지도와 읍치 안에 그려진 건물들은 비슷하나 산맥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 본 지도의 경우 읍치를 감싸고 있는 산맥으로부터 읍치 안쪽으로 4개의 산물이 뻗어 있어 각 건물들을 산맥에 의해 분리되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읍치 안의 산맥을 생략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유사하긴 하나 덜 복잡하게 그리기 위해 생략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南面의 경우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는 주기를 꼼꼼히 검토하여 지도를 그리기 보다는 지도와 地誌 부분을 따로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아래쪽(남)의 바닷가에 있는 섬들은 身彌島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크기를 별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또한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리려고 하다보니까 해안가로부터 섬까지의 거리가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점 역시 본 지도뿐만 아니라 앞의 3종의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고을의 실제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종이의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양윤정)

  • 북청부 주기 (北靑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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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북청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북청군으로 되었고 일부 지역이 신설된 풍산군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신포시·덕성군과 량강도 김형권군 일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에 부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남대천을 그리고 읍치는 하류 가까이에 배치시켰다. 읍치는 현재 북청읍 내리 일대에 해당되며 지도에는 성곽(둘레 11,604尺)과 함께 衙舍를 그려넣었다. 鎭山인 連德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읍치 관련 지명의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북청부 해제 참조) 여러 하천 지류들이 북청부를 둘러싼 산지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으로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도 좌측의 通坡 부근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팔련천을 그린 것이다. 그 남쪽에 표현된 지류들은 지금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되는 향동천, 거서천과 송고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의 金昌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좌안으로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곤파천을 그린 것이다. 洪源과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 홍원군의 용포면에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동대천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동해안 유입부에 그려진 섬은 지금의 마양도이다. 지도 위쪽의 厚峙岺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지금 풍산군의 허천강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세 방향의 도로만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 동쪽의 利城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土城驛과 居山驛이 있으며 홍원현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平浦驛이 있다. 甲山府로 이어지는 도로는 남대천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경로상에 濟仁館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17戶, 田 1,348結29負7束, 畓 241結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주목 (楊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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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목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의 전곡읍․청산면, 한강 북쪽의 서울특별시 동쪽 지역 등에 걸쳐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의 가운데에 그려진 읍치는 양주시 유양동에 있었으며, 현재 관아지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 및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고 面의 명칭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뒤의 2개 지도보다 《해동지도》에 가까운 특징이다. 그러나 도로의 내용이 《해동지도》보다 소략하고, 《해동지도》에는 華陽亭으로 적혀 있던 것이 지도 아래쪽에 華陽場으로 바뀌어 있으며, 《해동지도》에는 없는 內農浦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는 없지만 화양장과 農浦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어 본 지도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며,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동일하다. 지도의 위쪽에 표시된 大灘은 현재 한탄강으로 불리는 곳으로 순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본 지도의 大灘 표시는 《해동지도》와 동일하며, 동쪽의 영평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大灘은 본 지도와 달리 영평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앞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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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앞표지 2면입니다.

  • 산청현 (山淸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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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동국여지승람, 여지도 등에는 山陰縣으로 등장한다. 1767년(영조 43)에 산음에서 산청으로 바꾸었다. 현재의 산청군은 조선시대 산청(산음)과 단성을 합한 것이다. 읍치는 산청읍 산청리 일대에 해당하며 경남 산청군의 산청읍, 생초면, 금서면, 차황면, 오부면 등이 관할 범위였다. 이 지도 왼쪽 위에 智異山下脈이라고 적혔는데 지리산의 맥이 읍치에까지 연결된 것처럼 보이도록 그렸다. 산청의 남서쪽에 지리산 국립공원이 있다. 오른쪽의 황매산은 차황면과 합천군 대병면의 경계에 해당하는 1108m의 산이다. 이 산 너머에 합천댐 건설로 생긴 합천호가 있다. 읍치 왼쪽에 鏡湖水가 적혔는데 현재 경호강으로 불린다. 읍치 남쪽에 돌을 세 개 그리고 造山이라 적었는데 비보풍수의 측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읍치에 성곽없이 여러 건물들을 그렸는데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건물의 수가 훨씬 많다. 향청까지 객사 뒤에 그려 넣었다. 읍치 주변의 제단들은 그려 넣지 않았다. 북쪽의 서계서원은 1677년(숙종 3년)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오른쪽 아래의 정곡역은 산청읍 정곡리에 있었던 역원이다. 고개는 일반적으로 嶺, 峙 등으로 표시하지만 우리말 발음을 따라 한자를 만들어 古介로 쓰기도 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그 표기가 나타난다. 이 밖에 쌍계사 등의 사찰, 창고, 연못, 교량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부안현 (扶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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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산면은 조선시대에는 고부군에 포함되어 제외되며 그 나머지 전라북도 부안군이 관할 범위에 해당한다. 조선 태종대에 扶寧縣과 保安縣을 합해 만들어진 군현으로 읍치는 부안읍의 동중리, 서외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에 읍성과 함께 객사 등이 그려졌고 향교는 읍성 밖에 위치한다. 서해 바다에 접해 있으며 지도 아래쪽은 변산반도 국립공원이다. 읍치 동쪽의 염소면은 현재의 계화면 일대에 해당하며 왼쪽의 계화도까지 간척되어 이 지도와 현재의 해안선은 다르다. 봉대가 있는 곳은 계화리에 있는 246.3m의 계화산이다. 그 서쪽의 바다도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매립되는 중이다. 염소면 지명으로 보아 과거에 염전이 많았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계화초등학교 인근에 52.6m의 낮은 산의 이름이 염창산으로 과거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염전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지도 아래쪽의 해안인데 곰소만 일대에 해당한다. 곰소만 위쪽에 많은 사찰이 그려져 있는데 이 일대가 모두 국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높이 솟은 바위에 邊山이라고 적어 놓았다. 현재의 내변산 쌍선봉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내소사는 국보 278호 법화경절본사본과 보물들이 소장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그 위쪽에 龍湫는 와룡소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 아래의 격포진은 변산면 격포리에 해당하며 근처에 명승지인 채석강과 격포해수욕장이 있다. 위도진은 서해의 섬인 위도면에 해당하는데 그 안에 진리 지명이 남아있다.(이현군)

  • 성천부 (成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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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成川府〉로, 지금은 평안남도 성천군과 회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성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필사 과정에서 여러 부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왼쪽 아래의 慈山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오른쪽 아래의 谷山界에서 들어와 왼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남강 사이에는 江東과 三登의 땅이 넓게 포진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아주 작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본 지도에서만 나타나는 오류가 아니라, 《해동지도》는 물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른쪽 위의 陽德界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비류강이다. 비류강과 대동강 본류 및 남강은 실제로 규모가 비슷하며, 본 지도에도 비슷한 굵기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대동강과 남강을 2개의 실선으로 그리고, 비류강은 단지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실제 사실을 착각할 수 있게 그렸다. 더 나아가 양덕계 부근의 비류강 끝을 얇아지는 형태로 그려 이곳이 발원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양덕계 부근이 발원지인 듯이 표현을 고쳤을 뿐 나머지 부분은 《여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양윤정)

  • 삼수부 (三水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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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상류에 위치하며 평안도와 접하고 있었던 삼수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수부는 일제시대 삼수군과 장진군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의 량강도의 삼수군·김정숙군, 자강도 랑림군 전체, 함경남도 부전군 북쪽 일부에 해당된다. 압록강이 지도 위쪽에 동에서 서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국경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삼수부 해제 참조). 삼수부를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갑산부·강계부)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여러 하천들이 이곳에서 발원하여 압록강과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 중 가장 큰 지류는 장진강이다. 지도 남쪽의 完田坡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여러 2차 지류를 합류한다. 상류부에는 지금은 장전댐이 건설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別害驛 부근에서 좌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창동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赴戰嶺 일대에서 발원하여 江口驛 부근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전강이다. 지도 동쪽에 읍치가 성곽(둘레 5,993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감싸면서 압록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증평천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압록강 연안의 경로가 추가되어 있으나 『해동지도』와는 유사하다. 압록강 연안을 따라 그려진 경로는 동으로는 갑산부, 서로는 강계부와 이어지며, 5곳에 역이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東山岺을 지나 장진강 중류의 自作只驛-魚面을 거쳐 江口驛에서 두 갈래의 도로로 나뉘어진다. 장진강 연변의 도로에는 神方驛, 廟坡驛, 別害驛, 長津柵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50戶, 田 898結62負4束으로 기록되어 있고 畓이 없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주목 주기 (楊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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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목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의 전곡읍․청산면, 한강 북쪽의 서울특별시 동쪽 지역 등에 걸쳐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의 가운데에 그려진 읍치는 양주시 유양동에 있었으며, 현재 관아지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 및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고 面의 명칭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뒤의 2개 지도보다 《해동지도》에 가까운 특징이다. 그러나 도로의 내용이 《해동지도》보다 소략하고, 《해동지도》에는 華陽亭으로 적혀 있던 것이 지도 아래쪽에 華陽場으로 바뀌어 있으며, 《해동지도》에는 없는 內農浦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는 없지만 화양장과 農浦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어 본 지도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며,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동일하다. 지도의 위쪽에 표시된 大灘은 현재 한탄강으로 불리는 곳으로 순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본 지도의 大灘 표시는 《해동지도》와 동일하며, 동쪽의 영평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大灘은 본 지도와 달리 영평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연기현 (燕岐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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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현은 연기군의 서면, 동면, 조치원읍, 남면의 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남면의 연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하천이다. 오른쪽 아래의 文義界에서 흘러와 왼쪽의 公州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그리고 오른쪽 위의 ‘燕歧縣’이라는 지도의 명칭쪽에서 흘러와 읍치를 지나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과 그 지류인 조천이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오른쪽 아래의 白川은 현재의 백천천으로 금강의 본류뿐만 아니라 미호천보다도 훨씬 작은 하천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광여도》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더욱 커져 백천천과 금강 본류가 굵은 두 줄로 표시된 반면에 미호천은 실선으로만 처리되어 있어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위의 淸州界라고 적힌 글씨 방향에서 하천이 들어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다른 3개의 지도에서는 그런 하천이 없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동일 방향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데, 《광여도》의 필사자가 도로를 하천으로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연기현에서 1872년에 직접 그려올렸음이 확인된 1872년 지방지도의 연기현 지도와 비교해 보면 본 지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72년 지방지도의 연기현 지도에는 본 지도의 南面에서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도 직접 합류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실제에 부합되는 것이다.(이기봉)

  • 산청현 주기 (山淸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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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동국여지승람, 여지도 등에는 山陰縣으로 등장한다. 1767년(영조 43)에 산음에서 산청으로 바꾸었다. 현재의 산청군은 조선시대 산청(산음)과 단성을 합한 것이다. 읍치는 산청읍 산청리 일대에 해당하며 경남 산청군의 산청읍, 생초면, 금서면, 차황면, 오부면 등이 관할 범위였다. 이 지도 왼쪽 위에 智異山下脈이라고 적혔는데 지리산의 맥이 읍치에까지 연결된 것처럼 보이도록 그렸다. 산청의 남서쪽에 지리산 국립공원이 있다. 오른쪽의 황매산은 차황면과 합천군 대병면의 경계에 해당하는 1108m의 산이다. 이 산 너머에 합천댐 건설로 생긴 합천호가 있다. 읍치 왼쪽에 鏡湖水가 적혔는데 현재 경호강으로 불린다. 읍치 남쪽에 돌을 세 개 그리고 造山이라 적었는데 비보풍수의 측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읍치에 성곽없이 여러 건물들을 그렸는데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건물의 수가 훨씬 많다. 향청까지 객사 뒤에 그려 넣었다. 읍치 주변의 제단들은 그려 넣지 않았다. 북쪽의 서계서원은 1677년(숙종 3년)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오른쪽 아래의 정곡역은 산청읍 정곡리에 있었던 역원이다. 고개는 일반적으로 嶺, 峙 등으로 표시하지만 우리말 발음을 따라 한자를 만들어 古介로 쓰기도 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그 표기가 나타난다. 이 밖에 쌍계사 등의 사찰, 창고, 연못, 교량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부안현 주기 (扶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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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산면은 조선시대에는 고부군에 포함되어 제외되며 그 나머지 전라북도 부안군이 관할 범위에 해당한다. 조선 태종대에 扶寧縣과 保安縣을 합해 만들어진 군현으로 읍치는 부안읍의 동중리, 서외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에 읍성과 함께 객사 등이 그려졌고 향교는 읍성 밖에 위치한다. 서해 바다에 접해 있으며 지도 아래쪽은 변산반도 국립공원이다. 읍치 동쪽의 염소면은 현재의 계화면 일대에 해당하며 왼쪽의 계화도까지 간척되어 이 지도와 현재의 해안선은 다르다. 봉대가 있는 곳은 계화리에 있는 246.3m의 계화산이다. 그 서쪽의 바다도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매립되는 중이다. 염소면 지명으로 보아 과거에 염전이 많았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계화초등학교 인근에 52.6m의 낮은 산의 이름이 염창산으로 과거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염전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지도 아래쪽의 해안인데 곰소만 일대에 해당한다. 곰소만 위쪽에 많은 사찰이 그려져 있는데 이 일대가 모두 국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높이 솟은 바위에 邊山이라고 적어 놓았다. 현재의 내변산 쌍선봉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내소사는 국보 278호 법화경절본사본과 보물들이 소장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그 위쪽에 龍湫는 와룡소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 아래의 격포진은 변산면 격포리에 해당하며 근처에 명승지인 채석강과 격포해수욕장이 있다. 위도진은 서해의 섬인 위도면에 해당하는데 그 안에 진리 지명이 남아있다.(이현군)

  • 성천부 주기 (成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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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成川府〉로, 지금은 평안남도 성천군과 회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성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필사 과정에서 여러 부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왼쪽 아래의 慈山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오른쪽 아래의 谷山界에서 들어와 왼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남강 사이에는 江東과 三登의 땅이 넓게 포진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아주 작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본 지도에서만 나타나는 오류가 아니라, 《해동지도》는 물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른쪽 위의 陽德界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비류강이다. 비류강과 대동강 본류 및 남강은 실제로 규모가 비슷하며, 본 지도에도 비슷한 굵기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대동강과 남강을 2개의 실선으로 그리고, 비류강은 단지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실제 사실을 착각할 수 있게 그렸다. 더 나아가 양덕계 부근의 비류강 끝을 얇아지는 형태로 그려 이곳이 발원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양덕계 부근이 발원지인 듯이 표현을 고쳤을 뿐 나머지 부분은 《여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양윤정)

  • 삼수부 주기 (三水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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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상류에 위치하며 평안도와 접하고 있었던 삼수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수부는 일제시대 삼수군과 장진군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의 량강도의 삼수군·김정숙군, 자강도 랑림군 전체, 함경남도 부전군 북쪽 일부에 해당된다. 압록강이 지도 위쪽에 동에서 서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국경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삼수부 해제 참조). 삼수부를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갑산부·강계부)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여러 하천들이 이곳에서 발원하여 압록강과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 중 가장 큰 지류는 장진강이다. 지도 남쪽의 完田坡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여러 2차 지류를 합류한다. 상류부에는 지금은 장전댐이 건설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別害驛 부근에서 좌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창동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赴戰嶺 일대에서 발원하여 江口驛 부근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전강이다. 지도 동쪽에 읍치가 성곽(둘레 5,993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감싸면서 압록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증평천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압록강 연안의 경로가 추가되어 있으나 『해동지도』와는 유사하다. 압록강 연안을 따라 그려진 경로는 동으로는 갑산부, 서로는 강계부와 이어지며, 5곳에 역이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東山岺을 지나 장진강 중류의 自作只驛-魚面을 거쳐 江口驛에서 두 갈래의 도로로 나뉘어진다. 장진강 연변의 도로에는 神方驛, 廟坡驛, 別害驛, 長津柵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50戶, 田 898結62負4束으로 기록되어 있고 畓이 없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지현 (陽智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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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현은 1399년(정종 1)에 수원에 딸려 있던 陽良部曲을 승격시켜 縣으로 만들었고, 당시의 중심지는 왼쪽 아래에 古倉이라 표시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1413년(태종 13)에 광주의 秋溪鄕으로 읍치를 옮기면서 朴谷, 高安, 蹄村, 木岳 등 광주에 속했던 4개의 部曲을 함께 붙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양지현은 越境地와 犬牙相入地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고을이 되었고, 읍치는 양지면 양지리에 있었다. 양지현의 범위는 용인시 시내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전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군의 고삼면과 일죽면의 능국리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의 가운데쪽에 竹山과 龍仁 등의 군현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월경지와 견아상입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도에도 하천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데, 왼쪽 위가 경안천의 상류이고, 오른쪽은 복하천이 상류이다. 또한 오른쪽 아래는 청미천의 상류이고, 왼쪽 아래는 진위천의 상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지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에 대한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의 왼쪽 가운데 海谷里 부근에서 朱西面 뱡향으로 흘러드는 하천의 모습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이곳은 현재의 용인시 운학동과 해곡동 일대로서 실제와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해동지도》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연기현 주기 (燕岐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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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현은 연기군의 서면, 동면, 조치원읍, 남면의 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남면의 연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하천이다. 오른쪽 아래의 文義界에서 흘러와 왼쪽의 公州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그리고 오른쪽 위의 ‘燕歧縣’이라는 지도의 명칭쪽에서 흘러와 읍치를 지나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과 그 지류인 조천이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오른쪽 아래의 白川은 현재의 백천천으로 금강의 본류뿐만 아니라 미호천보다도 훨씬 작은 하천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광여도》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더욱 커져 백천천과 금강 본류가 굵은 두 줄로 표시된 반면에 미호천은 실선으로만 처리되어 있어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위의 淸州界라고 적힌 글씨 방향에서 하천이 들어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다른 3개의 지도에서는 그런 하천이 없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동일 방향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데, 《광여도》의 필사자가 도로를 하천으로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연기현에서 1872년에 직접 그려올렸음이 확인된 1872년 지방지도의 연기현 지도와 비교해 보면 본 지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72년 지방지도의 연기현 지도에는 본 지도의 南面에서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도 직접 합류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실제에 부합되는 것이다.(이기봉)

  • 삼가현 (三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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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합천군 삼가면의 중심부인 금리 일대가 읍치가 되며 합천군의 삼가면, 가회면, 쌍백면, 대병면, 봉산면 일부, 거창군 신원면이 관할 구역이었다. 현재의 합천군은 조선시대 삼가현, 초계군, 합천군 등이 합쳐진 것이다. 읍치 왼쪽 위에 악견산, 금성산성, 허굴산성이 보이는데 이를 경계로 하천의 분수계가 나누어진다. 남쪽 읍치 부근의 하천은 남류하여 남강에 합류되고 지도 북쪽의 하천은 황강으로 들어간다. 악견산, 허굴산, 금성산 옆에 사방이 높고 막혀 있어 산성이 설만한 자리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대병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풍속이 굳세고 사납다고 기록된 것은 이 지역의 산세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금성산성의 봉수대는 곽재우 장군이 봉화를 올렸다고 지역민들이 전한다. 그 오른쪽의 대평리가 지금 대병면의 어원이 되었다. 왼쪽 황매산 위에 병목면이 표시되었는데 대병면에 속하는 지역으로 그 옆에 ‘僧無學所生地’라고 적혀있다. 조선초기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탄생지라는 말이다. 악견산과 금성산성의 북쪽에 합천댐이 위치하고 있어 북쪽에 그려진 하천 주변은 수몰되었다. 고현창이라고 적힌 부분은 대병면 창리 일대로 지금은 수몰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전에 三岐縣의 현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왼쪽 아래에 서면 가회리가 현재의 가회면이 된다. 읍치에는 읍성과 객사 등의 건물을 그렸다. 지도 아래부분에 남명 조식의 태생지임을 적어 놓았다.(이현군)

  • 순창군 (淳昌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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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할 범위의 변화가 거의 없이 현재로 이어진 지역으로 현재의 전라북도 순창군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순창읍 순화리 일대인데 순화리는 신라 때의 군 명칭을 현재 지명에 활용한 것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 객사가 그려진 지역이 순화리이며 그 왼쪽 아래 향교는 교성리에 있던 것이다. 조선시대 방면의 명칭은 동서남북 방위 개념을 활용하여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읍치 인근 지역의 면 명칭에 左右 개념을 넣은 것이 이색적이다. 읍치 북쪽의 追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섬진강으로 남쪽으로 흘러 간다. 읍치 왼쪽 강천사는 팔덕면의 583.7m의 강천산에 있는 사찰로 지금도 존재한다. 그 북쪽에 표시된 내장산은 현재의 정읍시, 장성군, 순창군에 걸쳐 있는 내장산 국립공원이다. 읍치 동쪽에 적성면, 적성원, 적성진 등이 표시되었는데 적성폐현이 있던 곳이며 읍치 서쪽의 복흥면은 복흥폐현이 있던 곳이다. 현재는 적성면, 복흥면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적성진 아래 섬진강변에 華山이 표시되었는데 현재의 적성면 고원리에 있는 342m의 산이다. 그 동쪽에 화산서원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大母山城이 서쪽 4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해동지도 순창군 지도에는 봉서산과 월암면 사이에 山城을 그려 놓았다. 동국여지승람에 뾰죽한 봉우리가 사면을 에워싼 것으로 이 지역의 형승을 기록하였는데 지도의 북쪽에 險隘, 峯, 고개 등을 볼 수 있다.(이현군)

  • 송화현 (松禾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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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송화군, 삼천군의 남쪽 절반 정도, 신천군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송화군의 송화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송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의 글씨 중 가장 중요한 읍치의 客舍와 衙(舍)가 북쪽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을 통해 볼 때 원본은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위쪽에 그려진 2개의 큰 하천은 모두 장연부의 땅을 지나 서해로 바로 빠져나가며, 아래쪽의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인 현재의 신천군 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본 지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하천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 있게 그렸다. 첫째, 아래쪽의 하천이 信川界로 빠져나가는 방향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입구에 長淵界와 海州界를 모두 써넣어 마치 장연과 해주의 경계선 부근으로 하천이 흘러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해주계에 장연계가 기록되어 있고, 해주계는 더 동쪽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 하천들은 해주계와 상관 없이 장연계 방면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이 오류는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한번 범해진 오류가 지속적으로 필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 삼척부 (三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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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의 동해안과 내륙에 걸쳐 위치하였던 삼척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척부는 지금의 삼척시와 태백시 전체, 평릉동을 포함한 남쪽의 동해시(옛 북평읍)에 해당되는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지도의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치우쳐 객사와 아사, 성곽(둘레; 570步)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다. 현재의 삼척시 성내동 일대이다. 고을의 鎭山이 읍치의 북서쪽 가까이에 그려진 葛夜山이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과 함께 竹嶺, 楡嶺을 표시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하천이 동해로 유입하며 그중 가장 큰 하천은 읍치를 감싸고 흐르는 五十川이다. 그 남쪽에 지금의 교곡천, 마음천, 주천천 등이 묘사되어 있다. 지도의 좌측 하단에는 태백산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黃池가 표시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삼척부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을 거쳐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旌善ㆍ寧越去路가 두 곳에 표시되어 있으며, 태백산 부근에 安東ㆍ春陽去路가 있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平陵驛과 新興驛을 지나는 두곳의 도로가 그려져 있고, 울진과 안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交柯驛, 龍化驛, 沃原驛이 있다. 한편 史直驛의 경우 다른 회화식 지도에서는 역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史直庫로 표기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39戶, 田 612結98負5束, 畓 214結89負9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군현에 비해 논농사 비율이 비교적 높다. (김기혁)

  • 양지현 주기 (陽智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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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현은 1399년(정종 1)에 수원에 딸려 있던 陽良部曲을 승격시켜 縣으로 만들었고, 당시의 중심지는 왼쪽 아래에 古倉이라 표시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1413년(태종 13)에 광주의 秋溪鄕으로 읍치를 옮기면서 朴谷, 高安, 蹄村, 木岳 등 광주에 속했던 4개의 部曲을 함께 붙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양지현은 越境地와 犬牙相入地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고을이 되었고, 읍치는 양지면 양지리에 있었다. 양지현의 범위는 용인시 시내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전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군의 고삼면과 일죽면의 능국리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의 가운데쪽에 竹山과 龍仁 등의 군현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월경지와 견아상입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도에도 하천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데, 왼쪽 위가 경안천의 상류이고, 오른쪽은 복하천이 상류이다. 또한 오른쪽 아래는 청미천의 상류이고, 왼쪽 아래는 진위천의 상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지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에 대한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의 왼쪽 가운데 海谷里 부근에서 朱西面 뱡향으로 흘러드는 하천의 모습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이곳은 현재의 용인시 운학동과 해곡동 일대로서 실제와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해동지도》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연산현 (連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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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현은 논산시의 연산면, 두마면, 부적면, 벌곡면, 양촌면의 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산면의 연산리 일대에 있었다. 아래의 왼쪽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오른쪽에 있는 하천은 아래쪽과 위쪽이 각각 갑천의 상류인 벌곡천과 두계천인데,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알 수 없게 그려져 있다. 실제로 두 하천은 동쪽의 진잠 땅에서 합류되어 동북쪽으로 빠져나간다. 두계천이 발원하는 鷄龍山 남쪽 부분은 태조 이성계가 수도로 정하려고 했던 신도안 지역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해동지도》에서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해동지도》는 동쪽을 등지고 있는 읍치의 입지 방향을 중요하게 여겨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나 뒤의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임의적으로 지도의 방향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의 경우 고려 왕건이 세운 개태사 동쪽의 開太峙에서 바로 산줄기가 뻗어내려온 것처럼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개태치에서 훨씬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동쪽으로 등지고 입지하여 있었다. 왼쪽 위의 海倉은 은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삼가현 주기 (三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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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합천군 삼가면의 중심부인 금리 일대가 읍치가 되며 합천군의 삼가면, 가회면, 쌍백면, 대병면, 봉산면 일부, 거창군 신원면이 관할 구역이었다. 현재의 합천군은 조선시대 삼가현, 초계군, 합천군 등이 합쳐진 것이다. 읍치 왼쪽 위에 악견산, 금성산성, 허굴산성이 보이는데 이를 경계로 하천의 분수계가 나누어진다. 남쪽 읍치 부근의 하천은 남류하여 남강에 합류되고 지도 북쪽의 하천은 황강으로 들어간다. 악견산, 허굴산, 금성산 옆에 사방이 높고 막혀 있어 산성이 설만한 자리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대병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풍속이 굳세고 사납다고 기록된 것은 이 지역의 산세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금성산성의 봉수대는 곽재우 장군이 봉화를 올렸다고 지역민들이 전한다. 그 오른쪽의 대평리가 지금 대병면의 어원이 되었다. 왼쪽 황매산 위에 병목면이 표시되었는데 대병면에 속하는 지역으로 그 옆에 ‘僧無學所生地’라고 적혀있다. 조선초기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탄생지라는 말이다. 악견산과 금성산성의 북쪽에 합천댐이 위치하고 있어 북쪽에 그려진 하천 주변은 수몰되었다. 고현창이라고 적힌 부분은 대병면 창리 일대로 지금은 수몰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전에 三岐縣의 현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왼쪽 아래에 서면 가회리가 현재의 가회면이 된다. 읍치에는 읍성과 객사 등의 건물을 그렸다. 지도 아래부분에 남명 조식의 태생지임을 적어 놓았다.(이현군)

  • 순창군 주기 (淳昌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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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할 범위의 변화가 거의 없이 현재로 이어진 지역으로 현재의 전라북도 순창군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순창읍 순화리 일대인데 순화리는 신라 때의 군 명칭을 현재 지명에 활용한 것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 객사가 그려진 지역이 순화리이며 그 왼쪽 아래 향교는 교성리에 있던 것이다. 조선시대 방면의 명칭은 동서남북 방위 개념을 활용하여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읍치 인근 지역의 면 명칭에 左右 개념을 넣은 것이 이색적이다. 읍치 북쪽의 追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섬진강으로 남쪽으로 흘러 간다. 읍치 왼쪽 강천사는 팔덕면의 583.7m의 강천산에 있는 사찰로 지금도 존재한다. 그 북쪽에 표시된 내장산은 현재의 정읍시, 장성군, 순창군에 걸쳐 있는 내장산 국립공원이다. 읍치 동쪽에 적성면, 적성원, 적성진 등이 표시되었는데 적성폐현이 있던 곳이며 읍치 서쪽의 복흥면은 복흥폐현이 있던 곳이다. 현재는 적성면, 복흥면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적성진 아래 섬진강변에 華山이 표시되었는데 현재의 적성면 고원리에 있는 342m의 산이다. 그 동쪽에 화산서원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大母山城이 서쪽 4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해동지도 순창군 지도에는 봉서산과 월암면 사이에 山城을 그려 놓았다. 동국여지승람에 뾰죽한 봉우리가 사면을 에워싼 것으로 이 지역의 형승을 기록하였는데 지도의 북쪽에 險隘, 峯, 고개 등을 볼 수 있다.(이현군)

  • 송화현 주기 (松禾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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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송화군, 삼천군의 남쪽 절반 정도, 신천군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송화군의 송화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송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의 글씨 중 가장 중요한 읍치의 客舍와 衙(舍)가 북쪽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을 통해 볼 때 원본은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위쪽에 그려진 2개의 큰 하천은 모두 장연부의 땅을 지나 서해로 바로 빠져나가며, 아래쪽의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인 현재의 신천군 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본 지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하천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 있게 그렸다. 첫째, 아래쪽의 하천이 信川界로 빠져나가는 방향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입구에 長淵界와 海州界를 모두 써넣어 마치 장연과 해주의 경계선 부근으로 하천이 흘러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해주계에 장연계가 기록되어 있고, 해주계는 더 동쪽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 하천들은 해주계와 상관 없이 장연계 방면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이 오류는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한번 범해진 오류가 지속적으로 필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 삼척부 주기 (三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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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의 동해안과 내륙에 걸쳐 위치하였던 삼척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척부는 지금의 삼척시와 태백시 전체, 평릉동을 포함한 남쪽의 동해시(옛 북평읍)에 해당되는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지도의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치우쳐 객사와 아사, 성곽(둘레; 570步)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다. 현재의 삼척시 성내동 일대이다. 고을의 鎭山이 읍치의 북서쪽 가까이에 그려진 葛夜山이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과 함께 竹嶺, 楡嶺을 표시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하천이 동해로 유입하며 그중 가장 큰 하천은 읍치를 감싸고 흐르는 五十川이다. 그 남쪽에 지금의 교곡천, 마음천, 주천천 등이 묘사되어 있다. 지도의 좌측 하단에는 태백산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黃池가 표시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삼척부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을 거쳐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旌善ㆍ寧越去路가 두 곳에 표시되어 있으며, 태백산 부근에 安東ㆍ春陽去路가 있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平陵驛과 新興驛을 지나는 두곳의 도로가 그려져 있고, 울진과 안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交柯驛, 龍化驛, 沃原驛이 있다. 한편 史直驛의 경우 다른 회화식 지도에서는 역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史直庫로 표기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39戶, 田 612結98負5束, 畓 214結89負9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군현에 비해 논농사 비율이 비교적 높다. (김기혁)

  • 양천현 (陽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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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현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강서구 가양동의 궁산 남쪽에 있었다.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다. 읍치 뒤쪽의 城山에는 테뫼식의 작은 산성이 있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성황사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일부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주기에는 있지만 도면에는 없는 南山面이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거의 한가운데에 기록되어 있다. 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에는 고립적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상대적으로 연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우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필사 과정에서 일부 정보를 빠뜨리거나 변화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주기의 내용이 본 지도와 동일하며, 앞서 언급한 남산면이 본 지도와 마찬가지로 생략되어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도로를 생략하였고, 산이 본 지도보다도 더 연결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자체는 아니더라도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지도를 필사하면서 몇몇 정보를 더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지도 모두 가운데의 陵洞山이 명칭만 남고 산의 모습이 사라져 있으며, 특히 《여지도》의 경우는 오른쪽 아래의 嚴之山이 岩之山으로, 아래쪽의 馬山이 馬上으로 잘못 적혀 있어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연산현 주기 (連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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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현은 논산시의 연산면, 두마면, 부적면, 벌곡면, 양촌면의 북쪽 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산면의 연산리 일대에 있었다. 아래의 왼쪽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오른쪽에 있는 하천은 아래쪽과 위쪽이 각각 갑천의 상류인 벌곡천과 두계천인데,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알 수 없게 그려져 있다. 실제로 두 하천은 동쪽의 진잠 땅에서 합류되어 동북쪽으로 빠져나간다. 두계천이 발원하는 鷄龍山 남쪽 부분은 태조 이성계가 수도로 정하려고 했던 신도안 지역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해동지도》에서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해동지도》는 동쪽을 등지고 있는 읍치의 입지 방향을 중요하게 여겨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나 뒤의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임의적으로 지도의 방향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의 경우 고려 왕건이 세운 개태사 동쪽의 開太峙에서 바로 산줄기가 뻗어내려온 것처럼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개태치에서 훨씬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동쪽으로 등지고 입지하여 있었다. 왼쪽 위의 海倉은 은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기봉)

  • 상주목 (尙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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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목은 이안면, 공검면, 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의성군 단밀면, 단북면, 문경시 산북면, 산양면, 영순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상주시내의 성동동, 서문동, 서성, 성하, 남성 등의 지명으로 과거 읍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표시된 객사는 상주시내 서성동에 있었는데 고려 때 창건하였다가 1526년(중종 21)에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상주 경찰서로 사용되었다. 동헌은 서성동의 상주 극장 앞에 있었다. 읍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병성천이다. 지도 오른쪽에 낙동역, 낙동진 등 洛東이 지명으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현재는 낙동면이라는 지명으로 사용된다. 지도 왼쪽의 산줄기는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백두대간의 일부이다. 산줄기를 따라 여러 사찰이 표시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속리산이 표시되었다. 변화가 심한 지역의 경우 조선시대 행정구역명이 사용되지 않지만 이 지도에 등장하는 은척면, 화북면, 화서면, 화동면, 외서면, 내서면 등 거의 대부분이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낙동강에 倉과 나루가 표시되었고 육로상에 낙서역(내서면 낙서리) 등 역이 표시되었다. 읍성 밖에는 성황단, 향교, 여제단이 표시되었다. 지도 북쪽의 은척면에 견훤산성이 그려졌는데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사벌성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사벌성은 읍치 동쪽 병풍산의 맞은편 지금의 사벌면 화달리에 있었다(이현군)

  • 순천부 (順天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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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樂安郡에 속하는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을 제외한 순천시와 여수통합시가 관할 범위가 되며 현재의 순천시청 서쪽의 저전동, 옥천동, 영동 일대가 읍치 지역이다. 진산은 읍치 남쪽의 인제산이다. 읍치 왼쪽 아래 바다는 순천만이다. 읍성 안에는 객사와 함께 前營을 표시하였다. 읍치 동남쪽에 용두면과 해창이 보이는데 해창은 현재의 해룡면 해창리에 해당한다. 그 북쪽이 현재의 순천시, 아래쪽이 여수시가 된다. 그 아래쪽에 고돌산진이 성곽으로 그려졌다. 현재의 소라면 지역에 해당한다. 그 동쪽의 흥국사는 대웅전, 홍교 등이 보물로 지정된 곳이다. 그 아래에는 呂水面이라 적혀 있는데 그 남쪽의 좌수영은 左道水軍節度使營을 말하는 것이다. 근처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비각이 있다. 忠愍祠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사자를 모신 곳이다. 지도 제일 아래에는 돌산도가 그려졌다. 지도 왼쪽 위에는 송광사, 선암사가 그려졌는데 두 사찰 모두 조계산 도립공원 안에 위치하며 보물로 지정된 많은 소장품이 있다. 그 오른쪽의 부유창은 옛 富有縣의 위치를 알려준다. 고돌산진의 서쪽에 목장이 표시되었다. 백야도의 북쪽에 표시된 봉대가 현재의 화양면에 있는 봉화산으로 비정한다면 목장은 화양면 이목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수영, 전영 등이 설치된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곳곳에 봉대가 표시되었고 船所, 船倉 등이 많이 보인다. 육로는 그렸으나 해로는 따로 그리지 않았다.(이현군)

  • 수안군 (遂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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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수안군, 연산군, 연탄군의 동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수안군의 석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현재의 예성강 최상류에 해당되며, 오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왼쪽 栗界坊 부근은 현재의 황주강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황주강 최상류가 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상호 관련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예성강과 남강 사이의 산줄기는 오른쪽 위의 彦眞山(1,120m)을 비롯하여 험준한 관방처를 이루고 있다. 지도에도 왼쪽 위의 防垣岺에 관문성이 그려져 있고, 산줄기의 남쪽 부분에는 文山鎭과 位羅鎭이 설치되어 있어 요해처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도에는 ‘○○坊 ’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해동지도》에는 坊마다 소속된 里의 수가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도한 《해동지도》에 기록된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도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 정보를 일괄적으로 생략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읍치 부분에는 遂安이라는 군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어 각 군현이 하나의 지도책으로 묶이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안변부 (安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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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최남단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안변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변부는 일제시대 함경남도 안변군, 문천군의 풍상면·풍하면, 강원도 통천군의 흡곡면·학일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안변군·고산군·법동군과 통천군의 시중대 일대에 해당된다. 지도의 방위는 위쪽이 남쪽으로 그려져 있다. 산지들 사이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風流山 부근에서 남대천이 발원하여 흐르다가 읍치를 감싸돌면서 동해로 유입된다. 남대천 상류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동대천인 것으로 사료된다. 지도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 외에 2곳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朴多乙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蟹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지금의 학천인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 통천군 흡곡면을 흐르는 시천과 패천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위쪽에 강원도 伊川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서 하천들이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임진강 상류부의 지류들이다. 읍치는 남대천의 우안에 성곽(둘레 10,358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진산인 鶴城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변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매우 간단하다. 읍치에서 남대천의 하류를 따라 연결되는 도로는 德原과 이어진다. 남대천의 상류를 따라 南山驛과 高山驛-淮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秋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563戶, 田 2,603結83負1束, 畓 2,603結89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천현 주기 (陽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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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현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강서구 가양동의 궁산 남쪽에 있었다.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다. 읍치 뒤쪽의 城山에는 테뫼식의 작은 산성이 있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성황사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일부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주기에는 있지만 도면에는 없는 南山面이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거의 한가운데에 기록되어 있다. 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에는 고립적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상대적으로 연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우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필사 과정에서 일부 정보를 빠뜨리거나 변화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주기의 내용이 본 지도와 동일하며, 앞서 언급한 남산면이 본 지도와 마찬가지로 생략되어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도로를 생략하였고, 산이 본 지도보다도 더 연결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자체는 아니더라도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지도를 필사하면서 몇몇 정보를 더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지도 모두 가운데의 陵洞山이 명칭만 남고 산의 모습이 사라져 있으며, 특히 《여지도》의 경우는 오른쪽 아래의 嚴之山이 岩之山으로, 아래쪽의 馬山이 馬上으로 잘못 적혀 있어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연풍현 (延豊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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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현은 괴산군의 연풍면과 장연면, 충주시의 상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풍면의 삼풍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현재의 쌍천이고, 왼쪽의 하천은 충주시의 상모면에 있는 석문동천이다. 왼쪽 아래의 勉義面은 水回面과 다른 현재의 장연면 북쪽 오가천 유역에 있기 때문에 실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풍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의 연풍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조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로 붙어 있다. 이런 지명 중에 長岩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丈岩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해동지도》의 첨지에 첨가된 지명 중 장암을 제외하면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원본에 있던 장암을 빠뜨린 것으로 판단되며, 후에 備圖와의 비교 속에서 비로서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오른쪽 아래의 覺淵寺가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아 이 지도 계통의 원본에는 있었지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빠뜨린 것이 아닌가 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연풍현 지도는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수법으로 그려져 있지만 수록된 지명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와  거의 같다.(이기봉)

  • 상주목 주기 (尙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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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목은 이안면, 공검면, 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의성군 단밀면, 단북면, 문경시 산북면, 산양면, 영순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상주시내의 성동동, 서문동, 서성, 성하, 남성 등의 지명으로 과거 읍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표시된 객사는 상주시내 서성동에 있었는데 고려 때 창건하였다가 1526년(중종 21)에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상주 경찰서로 사용되었다. 동헌은 서성동의 상주 극장 앞에 있었다. 읍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병성천이다. 지도 오른쪽에 낙동역, 낙동진 등 洛東이 지명으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현재는 낙동면이라는 지명으로 사용된다. 지도 왼쪽의 산줄기는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백두대간의 일부이다. 산줄기를 따라 여러 사찰이 표시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속리산이 표시되었다. 변화가 심한 지역의 경우 조선시대 행정구역명이 사용되지 않지만 이 지도에 등장하는 은척면, 화북면, 화서면, 화동면, 외서면, 내서면 등 거의 대부분이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낙동강에 倉과 나루가 표시되었고 육로상에 낙서역(내서면 낙서리) 등 역이 표시되었다. 읍성 밖에는 성황단, 향교, 여제단이 표시되었다. 지도 북쪽의 은척면에 견훤산성이 그려졌는데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사벌성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사벌성은 읍치 동쪽 병풍산의 맞은편 지금의 사벌면 화달리에 있었다(이현군)

  • 순천부 주기 (順天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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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樂安郡에 속하는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을 제외한 순천시와 여수통합시가 관할 범위가 되며 현재의 순천시청 서쪽의 저전동, 옥천동, 영동 일대가 읍치 지역이다. 진산은 읍치 남쪽의 인제산이다. 읍치 왼쪽 아래 바다는 순천만이다. 읍성 안에는 객사와 함께 前營을 표시하였다. 읍치 동남쪽에 용두면과 해창이 보이는데 해창은 현재의 해룡면 해창리에 해당한다. 그 북쪽이 현재의 순천시, 아래쪽이 여수시가 된다. 그 아래쪽에 고돌산진이 성곽으로 그려졌다. 현재의 소라면 지역에 해당한다. 그 동쪽의 흥국사는 대웅전, 홍교 등이 보물로 지정된 곳이다. 그 아래에는 呂水面이라 적혀 있는데 그 남쪽의 좌수영은 左道水軍節度使營을 말하는 것이다. 근처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비각이 있다. 忠愍祠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사자를 모신 곳이다. 지도 제일 아래에는 돌산도가 그려졌다. 지도 왼쪽 위에는 송광사, 선암사가 그려졌는데 두 사찰 모두 조계산 도립공원 안에 위치하며 보물로 지정된 많은 소장품이 있다. 그 오른쪽의 부유창은 옛 富有縣의 위치를 알려준다. 고돌산진의 서쪽에 목장이 표시되었다. 백야도의 북쪽에 표시된 봉대가 현재의 화양면에 있는 봉화산으로 비정한다면 목장은 화양면 이목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수영, 전영 등이 설치된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곳곳에 봉대가 표시되었고 船所, 船倉 등이 많이 보인다. 육로는 그렸으나 해로는 따로 그리지 않았다.(이현군)

  • 수안군 주기 (遂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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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수안군, 연산군, 연탄군의 동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수안군의 석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현재의 예성강 최상류에 해당되며, 오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왼쪽 栗界坊 부근은 현재의 황주강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황주강 최상류가 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상호 관련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예성강과 남강 사이의 산줄기는 오른쪽 위의 彦眞山(1,120m)을 비롯하여 험준한 관방처를 이루고 있다. 지도에도 왼쪽 위의 防垣岺에 관문성이 그려져 있고, 산줄기의 남쪽 부분에는 文山鎭과 位羅鎭이 설치되어 있어 요해처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도에는 ‘○○坊 ’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해동지도》에는 坊마다 소속된 里의 수가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도한 《해동지도》에 기록된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도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 정보를 일괄적으로 생략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읍치 부분에는 遂安이라는 군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어 각 군현이 하나의 지도책으로 묶이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안변부 주기 (安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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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최남단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안변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변부는 일제시대 함경남도 안변군, 문천군의 풍상면·풍하면, 강원도 통천군의 흡곡면·학일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안변군·고산군·법동군과 통천군의 시중대 일대에 해당된다. 지도의 방위는 위쪽이 남쪽으로 그려져 있다. 산지들 사이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風流山 부근에서 남대천이 발원하여 흐르다가 읍치를 감싸돌면서 동해로 유입된다. 남대천 상류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동대천인 것으로 사료된다. 지도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 외에 2곳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朴多乙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蟹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지금의 학천인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 통천군 흡곡면을 흐르는 시천과 패천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위쪽에 강원도 伊川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서 하천들이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임진강 상류부의 지류들이다. 읍치는 남대천의 우안에 성곽(둘레 10,358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진산인 鶴城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변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매우 간단하다. 읍치에서 남대천의 하류를 따라 연결되는 도로는 德原과 이어진다. 남대천의 상류를 따라 南山驛과 高山驛-淮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秋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563戶, 田 2,603結83負1束, 畓 2,603結89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여주목 (呂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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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본 자료에서 驪자를 呂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呂州牧은 驪州牧으로 써야한다. 지도는 읍치의 방향을 기준으로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하천의 유로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구도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여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고,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차이점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부분들은 본 지도책 경기도 대부분의 군현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본 지도에서 특이한 것은 다른 3개 지도에는 없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이 빼곡히 적혀 있다는 점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지도에는 면의 명칭도 적혀 있지 않고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도 없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은 없지만 면의 명칭은 사각형의 기호를 사용하여 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을 따르면서 마을명과 제언 명칭을 새로 기입하고, 도로를 소략하게 처리하면서 주기를 당시의 상황에 맞게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 계통에서 마을명을 없애고 면의 명칭만 기입한 지도 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이 계통의 지도 중 현재 남아 있지 않은 또다른 원본이 있고, 필사본 계통도 다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지도에는 一景부터 八景까지의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어, 당시에 이 지역의 八景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뿌리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가운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이며, 읍치의 주요 건물은 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여주군청 근처에 있었다.(이기봉)

  • 연풍현 주기 (延豊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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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현은 괴산군의 연풍면과 장연면, 충주시의 상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풍면의 삼풍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현재의 쌍천이고, 왼쪽의 하천은 충주시의 상모면에 있는 석문동천이다. 왼쪽 아래의 勉義面은 水回面과 다른 현재의 장연면 북쪽 오가천 유역에 있기 때문에 실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풍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의 연풍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조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로 붙어 있다. 이런 지명 중에 長岩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丈岩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해동지도》의 첨지에 첨가된 지명 중 장암을 제외하면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원본에 있던 장암을 빠뜨린 것으로 판단되며, 후에 備圖와의 비교 속에서 비로서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오른쪽 아래의 覺淵寺가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아 이 지도 계통의 원본에는 있었지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빠뜨린 것이 아닌가 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연풍현 지도는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수법으로 그려져 있지만 수록된 지명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와  거의 같다.(이기봉)

  • 선산부 (善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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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현재의 구미시(구미시내의 동쪽 임수동 인의동 황상동 일대 제외)에 해당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지도에서는 성곽없이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만 그렸다. 향교는 선산읍의 ‘교리’라는 지명을 통해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읍치 뒤쪽의 비봉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읍치 아래쪽의 하천은 감천으로 오른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남쪽의 감천에는 고을을 가리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낙동강을 따라 누정, 강창, 도연진을 비롯한 나루터가 들어서 있다. 산줄기와 감천 남쪽에 입지한 건물의 방향과 글씨를 읍치를 향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하나의 지도에 여러 시점이 사용됨을 확인시켜 준다. 선산읍 원리에 있었던 금오서원은 야은 길재와 김종직을 배향한 곳이다. 특이하게 의구총, 의우총이 보인다. 의구총은 만취한 상태의 주인을 구한 개를 기리는 무덤이며 의우총은 주인을 그리워하던 소의 무덤이다. 구미시는 1971년 전자공업단지로 지정되면서 번창해져 1978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표기된 상구미면과 하구미면이 1914년에 통합되어 구미면이 되었다가 현재의 구미시 중심부가 된 것이다. 행정경계는 유사하지만 산업화에 의해 기존의 중심부가 이전한 사례 지역이라 할 수 있다.(이현군)

  • 앞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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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앞표지 1면입니다.

  • 숙천부 (肅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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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肅川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숙천군의 남서부 일대를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숙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필사 과정에서 지명이 잘못 옮겨진 부분이 있다. 《여지도》의 오른쪽 曰里面은 三里面이며, 왼쪽의 平里面은 坪里面이다. 이는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 주기를 바탕으로 《여지도》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지도의 남서쪽에 표시된 法里面 부근에 있던 釰山面의 경우에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가 모두 상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의 모습에 있어서는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읍성이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었다. 《광여도》에서는 읍성의 전체적인 모양을 비롯하여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2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 7개로 증가했으며, 본 지도의 경우 8개가 그려져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와 《여지도》의 차이점은 본 지도를 衙舍 건물이 3개 나란히 겹쳐져서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 독립된 2개의 건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숙천부는 남북보다 동서가 긴 고을이지만 지도에는 반대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세로로 긴 사각형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이로 인해 서쪽으로 튀어나가 있어야 할 고리면, 당리면, 식리면, 평리면 등이 마치 남북으로 늘어선 것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동쪽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마치 북쪽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위쪽의 安陵界는 安州界를 의미하며, 이는 다른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안협현 (安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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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서쪽의 임진강 상류 유역에 있었던 안협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이천군에 귀속되어 안협면·동면,·서면에 속하였다. 지금은 북한의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 아사와 향교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산지는 동서 줄기를 중심으로 묘사되었으며 남북 줄기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북쪽에 진산인 晩景山(방안식 지도에서는 萬景山으로 기재)을 배치하였다. 하천은 지도의 좌측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지금의 임진강 상류이다. 4개의 지류가 임진강으로 유입하고 있다. 이중 평강현에서 유입하여 동면을 거쳐 읍치 북쪽을 지나 임진강과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평안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협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이면의 주기에는 평강현에 험준한 嶺隘가 별로 없음을 기재하였다. 읍치의 남쪽으로 남으로는 경기도 朔寧과 鐵原으로 이어지는 길이 적색으로 그려져 있고 ‘京去路’(일부지도에서는 ‘去京路’의 기재), ‘鐵原去路’라고 표시하였다. 남서쪽으로는 兎山, 북쪽으로 伊川과 이어지는 길이 하천을 따라 그려져 있다. 동으로은 東面을 거쳐 평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78戶, 田 185結66負, 畓 75負8束로 기재되어 있어 현의 크기가 매우 작고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여주목 주기 (呂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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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본 자료에서 驪자를 呂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呂州牧은 驪州牧으로 써야한다. 지도는 읍치의 방향을 기준으로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하천의 유로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구도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여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고,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차이점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부분들은 본 지도책 경기도 대부분의 군현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본 지도에서 특이한 것은 다른 3개 지도에는 없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이 빼곡히 적혀 있다는 점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지도에는 면의 명칭도 적혀 있지 않고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도 없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은 없지만 면의 명칭은 사각형의 기호를 사용하여 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을 따르면서 마을명과 제언 명칭을 새로 기입하고, 도로를 소략하게 처리하면서 주기를 당시의 상황에 맞게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 계통에서 마을명을 없애고 면의 명칭만 기입한 지도 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이 계통의 지도 중 현재 남아 있지 않은 또다른 원본이 있고, 필사본 계통도 다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지도에는 一景부터 八景까지의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어, 당시에 이 지역의 八景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뿌리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가운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이며, 읍치의 주요 건물은 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여주군청 근처에 있었다.(이기봉)

  • 영동현 (永同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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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현은 영동군의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여의리를 제외한 용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동읍의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동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의 沃川界에서 흘러와 위쪽의 赤登津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며, 오른쪽 아래의 天馬岺에서 발원하여 北一面을 지나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초강천이다. 초강천은 본 지도의 표현과 달리 황간현에서 발원하여 상당부분을 거쳐 영동현의 땅으로 들어오는데,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또한 초강천 상류와 그 왼쪽의 하천 사이에는 三峯山(930.2m), 천마령(925.6m) 등의 높은 산줄기에 의해 나누어져 있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점은 앞의 3개 지도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영동현 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초강천이 蟾岩 부근까지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어 실제 사실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지도 아래쪽의 龍化倉은 현재의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 부근에 있던 것이다. 이 지역은 금강 지류 중의 하나인 남대천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 지도에는 남대천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 북쪽과는 산줄기에 의해 분리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그려 유역권이 다름을 짐작할 수 있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해당 지도에는 없어 새롭게 필사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영동 지도이며, 본 지도나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첨가되어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선산부 주기 (善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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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현재의 구미시(구미시내의 동쪽 임수동 인의동 황상동 일대 제외)에 해당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지도에서는 성곽없이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만 그렸다. 향교는 선산읍의 ‘교리’라는 지명을 통해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읍치 뒤쪽의 비봉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읍치 아래쪽의 하천은 감천으로 오른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남쪽의 감천에는 고을을 가리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낙동강을 따라 누정, 강창, 도연진을 비롯한 나루터가 들어서 있다. 산줄기와 감천 남쪽에 입지한 건물의 방향과 글씨를 읍치를 향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하나의 지도에 여러 시점이 사용됨을 확인시켜 준다. 선산읍 원리에 있었던 금오서원은 야은 길재와 김종직을 배향한 곳이다. 특이하게 의구총, 의우총이 보인다. 의구총은 만취한 상태의 주인을 구한 개를 기리는 무덤이며 의우총은 주인을 그리워하던 소의 무덤이다. 구미시는 1971년 전자공업단지로 지정되면서 번창해져 1978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표기된 상구미면과 하구미면이 1914년에 통합되어 구미면이 되었다가 현재의 구미시 중심부가 된 것이다. 행정경계는 유사하지만 산업화에 의해 기존의 중심부가 이전한 사례 지역이라 할 수 있다.(이현군)

  • 앞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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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앞표지 2면입니다.

  • 숙천부 주기 (肅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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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肅川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숙천군의 남서부 일대를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숙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필사 과정에서 지명이 잘못 옮겨진 부분이 있다. 《여지도》의 오른쪽 曰里面은 三里面이며, 왼쪽의 平里面은 坪里面이다. 이는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 주기를 바탕으로 《여지도》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지도의 남서쪽에 표시된 法里面 부근에 있던 釰山面의 경우에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가 모두 상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의 모습에 있어서는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읍성이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었다. 《광여도》에서는 읍성의 전체적인 모양을 비롯하여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2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 7개로 증가했으며, 본 지도의 경우 8개가 그려져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와 《여지도》의 차이점은 본 지도를 衙舍 건물이 3개 나란히 겹쳐져서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 독립된 2개의 건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숙천부는 남북보다 동서가 긴 고을이지만 지도에는 반대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세로로 긴 사각형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이로 인해 서쪽으로 튀어나가 있어야 할 고리면, 당리면, 식리면, 평리면 등이 마치 남북으로 늘어선 것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동쪽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마치 북쪽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위쪽의 安陵界는 安州界를 의미하며, 이는 다른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안협현 주기 (安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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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서쪽의 임진강 상류 유역에 있었던 안협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이천군에 귀속되어 안협면·동면,·서면에 속하였다. 지금은 북한의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 아사와 향교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산지는 동서 줄기를 중심으로 묘사되었으며 남북 줄기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북쪽에 진산인 晩景山(방안식 지도에서는 萬景山으로 기재)을 배치하였다. 하천은 지도의 좌측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지금의 임진강 상류이다. 4개의 지류가 임진강으로 유입하고 있다. 이중 평강현에서 유입하여 동면을 거쳐 읍치 북쪽을 지나 임진강과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평안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협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이면의 주기에는 평강현에 험준한 嶺隘가 별로 없음을 기재하였다. 읍치의 남쪽으로 남으로는 경기도 朔寧과 鐵原으로 이어지는 길이 적색으로 그려져 있고 ‘京去路’(일부지도에서는 ‘去京路’의 기재), ‘鐵原去路’라고 표시하였다. 남서쪽으로는 兎山, 북쪽으로 伊川과 이어지는 길이 하천을 따라 그려져 있다. 동으로은 東面을 거쳐 평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78戶, 田 185結66負, 畓 75負8束로 기재되어 있어 현의 크기가 매우 작고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연천현 (漣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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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현은 현재의 연천군 연천읍과 중면, 황지리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천읍 읍내리에 있었다. 가장 왼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가장 오른쪽이 한탄강이며, 가운데의 하천이 차탄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고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곳곳에 大路, 中路, 小路 등 도로가 있었던 지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대로, 중로, 소로 등의 문자들은 거의 삭제되어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을 필사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본 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오른쪽에는 현재의 재인폭포가 紫烟瀑으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폭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는 재인폭포를 실제로 보고 그린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자의적으로 재인폭포의 모습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江界府 (江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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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界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자강도 강계시, 만포시, 시중군, 전천군, 장강군, 성간군, 용림군, 위원군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강계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지도의 상단에 그리고 있는 반면에, 본 지도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강계부는 세조 때 지도의 위쪽에 있는 四郡을 폐하고 주민을 이 고을로 옮기면서 평안도 최북단의 고을이 되었다. 최전방에 있는 고을의 성격에 맞도록 압록강변과 산줄기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는 많은 鎭과 烽燧, 院, 도로의 표시가 간결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읍성과 滿浦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狄踰岺은 남쪽 희천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고, 왼쪽의 麻田嶺과 梨嶺은 四郡 지역으로부터 적이 쳐들어 올 경우에 통과해야 하는 要衝地로서 모두 關門이 설치되어 있다. 압록강에 쓰여있는 八十六把에서 一百八巴까지는 모두 강계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강계 땅에 있는 把守를 순서대로 써놓은 것이다. 한편 만포진 건너편에 표시된 五國城은 金나라(1115-1234)의 초기 도읍지였다고 하며 그 옆에 있다는 황제묘도 함께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다만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衙舍 건물 하나만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客舍, 倉, 鄕校 등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이는 《광여도》와 거의 일치한다. (양윤정)

  • 江界府 주기 (江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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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界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자강도 강계시, 만포시, 시중군, 전천군, 장강군, 성간군, 용림군, 위원군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강계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지도의 상단에 그리고 있는 반면에, 본 지도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강계부는 세조 때 지도의 위쪽에 있는 四郡을 폐하고 주민을 이 고을로 옮기면서 평안도 최북단의 고을이 되었다. 최전방에 있는 고을의 성격에 맞도록 압록강변과 산줄기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는 많은 鎭과 烽燧, 院, 도로의 표시가 간결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읍성과 滿浦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狄踰岺은 남쪽 희천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고, 왼쪽의 麻田嶺과 梨嶺은 四郡 지역으로부터 적이 쳐들어 올 경우에 통과해야 하는 要衝地로서 모두 關門이 설치되어 있다. 압록강에 쓰여있는 八十六把에서 一百八巴까지는 모두 강계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강계 땅에 있는 把守를 순서대로 써놓은 것이다. 한편 만포진 건너편에 표시된 五國城은 金나라(1115-1234)의 초기 도읍지였다고 하며 그 옆에 있다는 황제묘도 함께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다만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衙舍 건물 하나만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客舍, 倉, 鄕校 등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이는 《광여도》와 거의 일치한다. (양윤정)

  • 가산군 (嘉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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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嘉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운전군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가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가산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와 비교해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증가하였을 뿐 그 외의 지역의 지명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읍치의 정보는 《해동지도》 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여지도》와 다른 부분이 발견된다. 지도의 왼쪽 아래의 乫亍浦 부분으로 《여지도》에는 乫亍洞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같이 乫亍浦로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와의 차이점은 오른쪽의 ‘古城鎭安陵淸川江’ 부분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古城鎭’이 산맥 안쪽에 표시되어 있고, ‘安陵淸川江(안주의 청천강이란 뜻)’은 청천강변을 따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모두 붙여 기록하여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여지도》와 《광여도》도 마찬가지이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같이 산지의 모습이 ‘X’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나, 본 지도에는 두 개의 산지가 나란히 평행하여 그려져 있어 그 부분 또한 차이점이 있다. (양윤정)

  • 가산군 주기 (嘉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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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嘉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운전군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가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가산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와 비교해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증가하였을 뿐 그 외의 지역의 지명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읍치의 정보는 《해동지도》 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여지도》와 다른 부분이 발견된다. 지도의 왼쪽 아래의 乫亍浦 부분으로 《여지도》에는 乫亍洞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같이 乫亍浦로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와의 차이점은 오른쪽의 ‘古城鎭安陵淸川江’ 부분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古城鎭’이 산맥 안쪽에 표시되어 있고, ‘安陵淸川江(안주의 청천강이란 뜻)’은 청천강변을 따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모두 붙여 기록하여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여지도》와 《광여도》도 마찬가지이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같이 산지의 모습이 ‘X’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나, 본 지도에는 두 개의 산지가 나란히 평행하여 그려져 있어 그 부분 또한 차이점이 있다. (양윤정)

  • 강동현 (江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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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東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승호구역과 강동군 북부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1136년(고려 인종 14) 西京에 속했던 仍乙舍鄕, 班石村, 朴達串村, 馬灘村을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동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나타나기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동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비슷한 4종의 지도 가운데 다만 《여지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표현에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왼쪽 위의 慈山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平壤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위쪽 가운데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비류강이고, 아래쪽의 三登界에서 들어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비류강, 남강의 규모는 실제로 거의 비슷하다. 《해동지도》에도 세 개의 하천은 다른 지류에 비해 훨씬 굵게 표시하여 실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여지도》 지도에서는 남강을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다. 이 부분 외에도 高泉面 부근, 水晶川 역시 《여지도》에 그려진 모습으로는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다. 高泉面 연안에 위치한 落岩은 둘레가 약 1km로 강 쪽으로 절벽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바위가 높은 곳은 100m에 이른다. 넓은 평지 끝 강가에 우뚝 솟아 있어서 상류에서 떨어져 흘러 왔다는 뜻으로 落來岩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또는 바위 전체의 모습이 거북과 같아 龜岩으로 통칭되고 있다. 거북의 눈에 해당하는 위치에 淸風穴이라는 큰 암굴도 있다. 古城과 인접해 있는 閱波亭은 본래 西江院이라 불렸으나 中宗의 駙馬인 宋宴이 열파정이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亭의 모양만 그려져 있다. 또한 《여지도》에는 반대로 지명만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江東縣의 선비들이 曺好益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다. (양윤정)

  • 강동현 주기 (江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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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東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승호구역과 강동군 북부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1136년(고려 인종 14) 西京에 속했던 仍乙舍鄕, 班石村, 朴達串村, 馬灘村을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동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나타나기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동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비슷한 4종의 지도 가운데 다만 《여지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표현에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왼쪽 위의 慈山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의 平壤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위쪽 가운데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비류강이고, 아래쪽의 三登界에서 들어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비류강, 남강의 규모는 실제로 거의 비슷하다. 《해동지도》에도 세 개의 하천은 다른 지류에 비해 훨씬 굵게 표시하여 실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여지도》 지도에서는 남강을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다. 이 부분 외에도 高泉面 부근, 水晶川 역시 《여지도》에 그려진 모습으로는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다. 高泉面 연안에 위치한 落岩은 둘레가 약 1km로 강 쪽으로 절벽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바위가 높은 곳은 100m에 이른다. 넓은 평지 끝 강가에 우뚝 솟아 있어서 상류에서 떨어져 흘러 왔다는 뜻으로 落來岩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또는 바위 전체의 모습이 거북과 같아 龜岩으로 통칭되고 있다. 거북의 눈에 해당하는 위치에 淸風穴이라는 큰 암굴도 있다. 古城과 인접해 있는 閱波亭은 본래 西江院이라 불렸으나 中宗의 駙馬인 宋宴이 열파정이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亭의 모양만 그려져 있다. 또한 《여지도》에는 반대로 지명만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江東縣의 선비들이 曺好益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다. (양윤정)

  • 강서현 (江西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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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西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동북쪽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서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다소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서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강서현 모양과 본 지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읍치 부분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둘째,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닌 강서현의 모습을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쪽(서북)의 한룡면은 위쪽으로 더 튀어나가게 그려져 있어야 실제와 비슷하다. 또한 아래쪽의 보원면 밑은 아래쪽(남)으로 길게 뻗어 있어야 한다. 이런 오류는 강서현 동남쪽에 접해 있는 대동강 구간이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지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읍치 부분을 확대하여 그려지긴 하였으나,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읍치 안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鶴洞書院으로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어 1686년(숙종 12)에 사액을 받았던 서원이다. 그리고 지도상에서 관아 위쪽으로 연봉이 이어져 가장 높게 표시된 산이 무학산이다. 중앙에는 주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동쪽으로는 鳳凰臺, 서쪽으로는 玉女峰이 좌우로 읍내를 포옹하고 있는 모양으로 마치 춤추는 학이 날개를 편 것 같다하여 원래는 登龜山이었으나 무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보면 舞鶴亭, 添鶴亭, 鳴鶴池, 中鶴山, 西鶴山 등 ''鶴'' 자 들어가는 지명이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양윤정)

  • 강서현 주기 (江西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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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江西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동북쪽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서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다소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강서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강서현 모양과 본 지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읍치 부분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둘째,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닌 강서현의 모습을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쪽(서북)의 한룡면은 위쪽으로 더 튀어나가게 그려져 있어야 실제와 비슷하다. 또한 아래쪽의 보원면 밑은 아래쪽(남)으로 길게 뻗어 있어야 한다. 이런 오류는 강서현 동남쪽에 접해 있는 대동강 구간이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지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읍치 부분을 확대하여 그려지긴 하였으나,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읍치 안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鶴洞書院으로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어 1686년(숙종 12)에 사액을 받았던 서원이다. 그리고 지도상에서 관아 위쪽으로 연봉이 이어져 가장 높게 표시된 산이 무학산이다. 중앙에는 주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동쪽으로는 鳳凰臺, 서쪽으로는 玉女峰이 좌우로 읍내를 포옹하고 있는 모양으로 마치 춤추는 학이 날개를 편 것 같다하여 원래는 登龜山이었으나 무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보면 舞鶴亭, 添鶴亭, 鳴鶴池, 中鶴山, 西鶴山 등 ''鶴'' 자 들어가는 지명이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양윤정)

  • 개천군 (价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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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군 도화리·광도리·봉창리를 제외한 개천군 전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개천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천의 표현 방식으로 인해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도의 하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왼쪽 위의 寧邊界에서 安陵界(安州界)까지 개천군은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寧邊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본 지도에는 이 청천강의 하천 유로가 대동강과 같은 규모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여지도》에는 마치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 바다처럼 표현한 점은 시정되었다. 하지만 2개의 실선으로 표시된 대동강과 달리 다른 지류와 마찬가지로 1개의 실선으로 그려 실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오류는 《여지도》에 표시된 面의 명칭 표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의 內外面은 內東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內東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 3개의 건물만이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倉,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9개 그려져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鄕廳과 倉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다른 부분은 일치하고 있다. (양윤정)

  • 개천군 주기 (价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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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군 도화리·광도리·봉창리를 제외한 개천군 전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개천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천의 표현 방식으로 인해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도의 하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왼쪽 위의 寧邊界에서 安陵界(安州界)까지 개천군은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寧邊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본 지도에는 이 청천강의 하천 유로가 대동강과 같은 규모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여지도》에는 마치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 바다처럼 표현한 점은 시정되었다. 하지만 2개의 실선으로 표시된 대동강과 달리 다른 지류와 마찬가지로 1개의 실선으로 그려 실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오류는 《여지도》에 표시된 面의 명칭 표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의 內外面은 內東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內東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 3개의 건물만이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倉,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9개 그려져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鄕廳과 倉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다른 부분은 일치하고 있다. (양윤정)

  • 곽산군 (郭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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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郭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곽산군 일대이다. 이 곳은 993년(고려 성종 12) 거란족의 1차 침입 때 고려 徐熙(940-998) 장군이 거란의 소손녕과 단판을 벌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개척한 江東六州 가운데 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곽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곽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서 가장 다른 점은 읍치와 雲興舘의 모습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그리고 衙舍 건물 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이 포함되어 5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거의 같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지명 중 《해동지도》와 일치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龜城塩里은 이곳에 있던 龜城의 월경지인 塩里面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을 龜城塩田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월경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실선으로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고을의 전체 모습은 실제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실제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려도 크게 왜곡되지 않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윤정)

  • 곽산군 주기 (郭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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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郭山郡〉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곽산군 일대이다. 이 곳은 993년(고려 성종 12) 거란족의 1차 침입 때 고려 徐熙(940-998) 장군이 거란의 소손녕과 단판을 벌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개척한 江東六州 가운데 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곽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곽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서 가장 다른 점은 읍치와 雲興舘의 모습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그리고 衙舍 건물 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이 포함되어 5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거의 같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지명 중 《해동지도》와 일치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龜城塩里은 이곳에 있던 龜城의 월경지인 塩里面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 부분을 龜城塩田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월경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실선으로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고을의 전체 모습은 실제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실제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안에 그려도 크게 왜곡되지 않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윤정)

  • 구성부 (龜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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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龜城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구성시와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천마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구성부 지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이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의 구성부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 읍성이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이 잘 나타나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역시 일부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는 필사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읍성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 부분을 생략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읍성은 方形의 石城으로, 동서남북 4개의 성문, 관청, 향교, 창고, 군사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읍성 안에 ‘萬年寺’라는 사찰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읍성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하여 성곽 안으로 물길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물길이 남문 앞에서 끊어져 있어 읍성 안에는 인문정보 만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서 보이는 鄕廳과 訓錬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읍성안에 그려진 내용이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양윤정)

  • 구성부 주기 (龜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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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龜城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구성시와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천마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구성부 지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이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의 구성부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 읍성이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이 잘 나타나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역시 일부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는 필사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읍성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 부분을 생략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읍성은 方形의 石城으로, 동서남북 4개의 성문, 관청, 향교, 창고, 군사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읍성 안에 ‘萬年寺’라는 사찰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읍성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하여 성곽 안으로 물길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물길이 남문 앞에서 끊어져 있어 읍성 안에는 인문정보 만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서 보이는 鄕廳과 訓錬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읍성안에 그려진 내용이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양윤정)

  • 덕천군 (德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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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덕천군 삼흥리를 제외한 전 지역을 포함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덕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덕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舘舍, 衙舍, 鄕校 3개의 정보만 수록되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건물의 수는 총 14개이고, 명칭도 6개나 적혀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에도 《해동지도》보다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이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鄕校 부분의 산지의 모습이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위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지만 본 지도에서는 아랫부분까지 산지로 그려져 마치 그 안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지도》의 경우 읍치 안에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訓練 왼쪽의 것이 鄕廳으로 교정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본 지도책의 다른 군현 지도에 대부분 적혀 있는 面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서로간의 관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오른쪽 위의 熙川界에서 들어와 아래쪽 順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본 지도에는 대동강의 지류에 대한 표기에서 크게 2개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째, 오른쪽의 孟山界에서 현재의 맹산강이 흘러들어오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본 고을 안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둘째, 왼쪽의 价川界에서 대동강의 지류가 흘러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런 지류는 없다. 이 역시 본 지도와 3종의 지도에서 모두 나타나는 오류이다. (양윤정)

  • 덕천군 주기 (德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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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德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덕천군 삼흥리를 제외한 전 지역을 포함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덕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덕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舘舍, 衙舍, 鄕校 3개의 정보만 수록되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건물의 수는 총 14개이고, 명칭도 6개나 적혀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에도 《해동지도》보다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이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鄕校 부분의 산지의 모습이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위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지만 본 지도에서는 아랫부분까지 산지로 그려져 마치 그 안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지도》의 경우 읍치 안에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訓練 왼쪽의 것이 鄕廳으로 교정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본 지도책의 다른 군현 지도에 대부분 적혀 있는 面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서로간의 관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오른쪽 위의 熙川界에서 들어와 아래쪽 順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본 지도에는 대동강의 지류에 대한 표기에서 크게 2개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째, 오른쪽의 孟山界에서 현재의 맹산강이 흘러들어오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본 고을 안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둘째, 왼쪽의 价川界에서 대동강의 지류가 흘러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런 지류는 없다. 이 역시 본 지도와 3종의 지도에서 모두 나타나는 오류이다. (양윤정)

  • 맹산현 (孟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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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孟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맹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맹산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서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배치하여 다른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거의 유사하게 보이나 하천 부분에 있어서 표현 방법의 차이로 지도를 읽기에 불편함이 있다. 즉, 왼쪽 위의 陽德界에서 발원하여 아래쪽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 대동강의 지류인 맹산강이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맹산강의 상류와 하류를 구분할 수 없도록 그려져 있다. 이는 《해동지도》에서 상류와 하류가 분명히 구별되도록 그려져 있던 것에 비하면 본 지도의 필사 시 하천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여지도》 보다는 구분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읍치 지역을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해서 그렸기 때문에 실제에 대한 왜곡 현상이 나타났다. 맹산강을 중심으로 실제로는 고을의 동쪽인 왼쪽 부분이 서쪽인 오른쪽 부분보다 훨씬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정반대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서쪽에 있었던 읍치 지역을 확대하여 그렸기 때문이다. 왼쪽 위에는 定平界가 보이고 있는데, 맹산현은 정평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런 계통 지도의 최초 제작자가 정보를 잘못 인식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후 검증 없이 그대로 필사하면서 계속적으로 발생한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맹산현 주기 (孟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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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孟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맹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맹산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 서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배치하여 다른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거의 유사하게 보이나 하천 부분에 있어서 표현 방법의 차이로 지도를 읽기에 불편함이 있다. 즉, 왼쪽 위의 陽德界에서 발원하여 아래쪽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 대동강의 지류인 맹산강이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맹산강의 상류와 하류를 구분할 수 없도록 그려져 있다. 이는 《해동지도》에서 상류와 하류가 분명히 구별되도록 그려져 있던 것에 비하면 본 지도의 필사 시 하천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여지도》 보다는 구분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읍치 지역을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해서 그렸기 때문에 실제에 대한 왜곡 현상이 나타났다. 맹산강을 중심으로 실제로는 고을의 동쪽인 왼쪽 부분이 서쪽인 오른쪽 부분보다 훨씬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정반대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서쪽에 있었던 읍치 지역을 확대하여 그렸기 때문이다. 왼쪽 위에는 定平界가 보이고 있는데, 맹산현은 정평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런 계통 지도의 최초 제작자가 정보를 잘못 인식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후 검증 없이 그대로 필사하면서 계속적으로 발생한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박천군 (博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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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博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 일대이다. 고을의 동쪽·북쪽의 산줄기로부터 흘러 내려온 작은 물줄기들이 지금의 대령강인 大定江과 합류하여 청천강과 더불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박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박천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래쪽 望毛老 아래쪽이 《해동지도》에는 반도처럼 그려 있지만, 본 지도에는 밑 부분이 잘려서 생략되었다. 이것은 《해동지도》보다 세로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른쪽의 淸川江 본류가 竝溫山烽 아래쪽 부분에서 오른쪽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모습이 《여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沙古介 부분의 물줄기가 두 갈래로 나눠지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세 갈래로 나눠지고 있다. 또한 읍치 부분의 하천도 본 지도에는 읍치를 끼고 양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으나, 《여지도》에서는 오른쪽으로만 하천이 흐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沙古介 부분은 본 지도와 읍치 부분은 《여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해동지도》에 없던 訓練 건물이 있고, 《여지도》에 본 지도에서 邑倉으로 표시되었던 것이 倉으로 바뀌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다. (양윤정)

  • 박천군 주기 (博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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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博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 일대이다. 고을의 동쪽·북쪽의 산줄기로부터 흘러 내려온 작은 물줄기들이 지금의 대령강인 大定江과 합류하여 청천강과 더불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박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박천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래쪽 望毛老 아래쪽이 《해동지도》에는 반도처럼 그려 있지만, 본 지도에는 밑 부분이 잘려서 생략되었다. 이것은 《해동지도》보다 세로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른쪽의 淸川江 본류가 竝溫山烽 아래쪽 부분에서 오른쪽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모습이 《여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달리 沙古介 부분의 물줄기가 두 갈래로 나눠지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세 갈래로 나눠지고 있다. 또한 읍치 부분의 하천도 본 지도에는 읍치를 끼고 양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으나, 《여지도》에서는 오른쪽으로만 하천이 흐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沙古介 부분은 본 지도와 읍치 부분은 《여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해동지도》에 없던 訓練 건물이 있고, 《여지도》에 본 지도에서 邑倉으로 표시되었던 것이 倉으로 바뀌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다. (양윤정)

  • 벽동군 (壁潼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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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壁潼郡〉으로, 지금은 평안북도 벽동군 및 자강도 우시군 서쪽 일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살고 있었던 땅으로, 1357년(공민왕 6)에 여진족을 쫓고 남쪽 고을의 백성을 옮겨 새로 편입하였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벽동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벽동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동건강으로, 압록강이 왼쪽 아래 방향에서 흘러 들어와 동건강을 합류시켜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동건강과 압록강의 합류 모습을 그리지 않아 동건강이 압록강 본류인 것처럼 보인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벽동군 전체의 모습은 남동쪽 끝을 정점으로 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벽동군의 모습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사각형 모양의 종이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점점 좁아지는 남동쪽(위)의 하천들이 대부분 北流함에도 東流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아래쪽 하천들의 유로는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진 편이다. 지도상에 그려진 읍성을 벽단진의 모습은 작은 삭가형으로 읍치의 1/5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벽단진은 둘레가 1만 3천 32척으로 8천 45척, 높이가 7척인 읍성보다 훨씬 크다. 《광여도》의 경우 벽단진이 벽단보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벅단진이 너무 작게 그려지면서 생긴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벽동군 주기 (壁潼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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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壁潼郡〉으로, 지금은 평안북도 벽동군 및 자강도 우시군 서쪽 일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살고 있었던 땅으로, 1357년(공민왕 6)에 여진족을 쫓고 남쪽 고을의 백성을 옮겨 새로 편입하였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벽동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벽동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동건강으로, 압록강이 왼쪽 아래 방향에서 흘러 들어와 동건강을 합류시켜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동건강과 압록강의 합류 모습을 그리지 않아 동건강이 압록강 본류인 것처럼 보인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벽동군 전체의 모습은 남동쪽 끝을 정점으로 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벽동군의 모습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사각형 모양의 종이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점점 좁아지는 남동쪽(위)의 하천들이 대부분 北流함에도 東流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아래쪽 하천들의 유로는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진 편이다. 지도상에 그려진 읍성을 벽단진의 모습은 작은 삭가형으로 읍치의 1/5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벽단진은 둘레가 1만 3천 32척으로 8천 45척, 높이가 7척인 읍성보다 훨씬 크다. 《광여도》의 경우 벽단진이 벽단보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벅단진이 너무 작게 그려지면서 생긴 오류로 생각된다. (양윤정)

  • 삭주부 (朔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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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朔州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삭주군 동부, 대관군, 태천군 개혁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차이점이 보이는데, 우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 부분이 더 짧아졌다. 그리고 읍치 왼쪽에 향교 부분을 보면 《해동지도》에서는 향교 위쪽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향교 밑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향교 부분에 關門城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烽燧의 명칭을 적지 않고 봉수라는 사실만 간단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아래쪽에 仇寧鎭이 仇寧嶺으로, 위쪽에서는 幕嶺鎭이 幕鎭岺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 부분이 바르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의 모습을 보면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건물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그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지만, 본 지도의 경우에는 그런 점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삭주부 주기 (朔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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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朔州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삭주군 동부, 대관군, 태천군 개혁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차이점이 보이는데, 우선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 부분이 더 짧아졌다. 그리고 읍치 왼쪽에 향교 부분을 보면 《해동지도》에서는 향교 위쪽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향교 밑에 關門城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향교 부분에 關門城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烽燧의 명칭을 적지 않고 봉수라는 사실만 간단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아래쪽에 仇寧鎭이 仇寧嶺으로, 위쪽에서는 幕嶺鎭이 幕鎭岺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 부분이 바르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의 모습을 보면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건물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그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지만, 본 지도의 경우에는 그런 점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삼등현 (三登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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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登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강동군 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등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삼등현 지도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주기 부분의 지명과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비교해 보았을 때 가운데 부분에는 西境面이라 적혀 있지만 주기에는 西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지명은 4종의 지도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읍치의 경우에는 《해동지도》가 다른 지도들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다.  《해동지도》는 客舍, 鄕校, 衙舍, 倉이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2 정도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가 남북보다는 동서를 길게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그 영향으로 읍치 왼쪽의 하천이 상대적으로 길게 그려졌다. 또한 古丁洞面이 있는 하천은 동서 방향에서 남북 방향으로 유로가 바뀌어 표현되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陽德界가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 삼등현은 양덕현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았다. 또한 왼쪽에 祥原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로 삼등현은 아래쪽 綾城江(현재의 남강)을 경계로 상원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이는 이런 종류의 지도를 최초로 제작한 사람이 삼등현의 경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삼등현 주기 (三登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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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登縣〉으로, 지금의 평양특별시 강동군 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등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삼등현 지도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주기 부분의 지명과 지도에 표시된 지명을 비교해 보았을 때 가운데 부분에는 西境面이라 적혀 있지만 주기에는 西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지명은 4종의 지도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읍치의 경우에는 《해동지도》가 다른 지도들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다.  《해동지도》는 客舍, 鄕校, 衙舍, 倉이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2 정도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가 남북보다는 동서를 길게 그린 반면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그 영향으로 읍치 왼쪽의 하천이 상대적으로 길게 그려졌다. 또한 古丁洞面이 있는 하천은 동서 방향에서 남북 방향으로 유로가 바뀌어 표현되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陽德界가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 삼등현은 양덕현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았다. 또한 왼쪽에 祥原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로 삼등현은 아래쪽 綾城江(현재의 남강)을 경계로 상원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오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이는 이런 종류의 지도를 최초로 제작한 사람이 삼등현의 경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삼화부 (三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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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和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남포직할시 와우도구역, 항구구역 서부, 강서구역 삼화리, 온천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三和’라는 지명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金堂·呼山·漆井을 합하여 삼화현이라 칭한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화부 지도의 구도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읍치와 廣梁鎭만은 《해동지도》보다 건물이 더 많이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았던 廳과 倉을 포함해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또한 광량진 부분도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2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한 정보는 많고, 본 지도의 종이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훨씬 작아 읍치와 광량진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서 서쪽 바다까지의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었으며, 광량진 안쪽의 灣 역시 작게 묘사되었다. 읍치에서는 하천의 유로가 일부 바뀌어 표현되기도 하였다. 광량진 좌측에 표시된 德島의 경우 지명은 표기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현재 섬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보이는 楮島와 号島가 생략되어 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삼화부 주기 (三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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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三和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남포직할시 와우도구역, 항구구역 서부, 강서구역 삼화리, 온천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三和’라는 지명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金堂·呼山·漆井을 합하여 삼화현이라 칭한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삼화부 지도의 구도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읍치와 廣梁鎭만은 《해동지도》보다 건물이 더 많이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았던 廳과 倉을 포함해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또한 광량진 부분도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2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한 정보는 많고, 본 지도의 종이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훨씬 작아 읍치와 광량진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서 서쪽 바다까지의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었으며, 광량진 안쪽의 灣 역시 작게 묘사되었다. 읍치에서는 하천의 유로가 일부 바뀌어 표현되기도 하였다. 광량진 좌측에 표시된 德島의 경우 지명은 표기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현재 섬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보이는 楮島와 号島가 생략되어 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상원군 (祥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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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祥原郡〉으로, 현재의 평안남도 상원군의 서남부와 서부 일부를 제외한 상원군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상원군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가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다. 《해동지도》는 세로보다 가로가 긴 형태로 지도를 그리고 있지만, 본 지도는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가로보다 세로가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상원군은 실제로 남북이 동서보다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해동지도》기 본 지도보다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4개의 건물과 명칭이 표시되어 있을 뿐인데, 본 지도에는 8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2개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여지도》의 경우 건물 수는 같고, 대신 訓練의 위치가 본 지도와 달리 客舍 바로 아래 건물이고, 본 지도의  訓練 건물은 祥明院으로 표시되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며, 본 지도에 명칭이 없는 건물 하나가 鄕廳으로 표시되어 읍치 안에 鄕廳이 2개 표시되어 있다. 그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것은 첫째, 정보가 많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책의 크기가 훨씬 작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즉, 정보는 많고, 크기는 작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읍치를 크게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와 비교해 볼 때 본 지도의 오류가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 읍치 아래쪽에 표기된 紅岩面이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주기에 홍암면이 적혀 있으므로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쪽의 三登界는 《해동지도》에 遂安界로 되어 있다. 三登縣의 영역은 대동강의 지류로 현재 남강으로 불리는 오른쪽의 能成江 건너편에만 있었다. 따라서 본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필사 시에 실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양윤정)

  • 상원군 주기 (祥原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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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祥原郡〉으로, 현재의 평안남도 상원군의 서남부와 서부 일부를 제외한 상원군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상원군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가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다. 《해동지도》는 세로보다 가로가 긴 형태로 지도를 그리고 있지만, 본 지도는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가로보다 세로가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상원군은 실제로 남북이 동서보다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해동지도》기 본 지도보다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4개의 건물과 명칭이 표시되어 있을 뿐인데, 본 지도에는 8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2개의 건물에는 명칭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여지도》의 경우 건물 수는 같고, 대신 訓練의 위치가 본 지도와 달리 客舍 바로 아래 건물이고, 본 지도의  訓練 건물은 祥明院으로 표시되어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며, 본 지도에 명칭이 없는 건물 하나가 鄕廳으로 표시되어 읍치 안에 鄕廳이 2개 표시되어 있다. 그 이외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광여도》와 《여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이것은 첫째, 정보가 많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책의 크기가 훨씬 작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즉, 정보는 많고, 크기는 작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읍치를 크게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와 비교해 볼 때 본 지도의 오류가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 읍치 아래쪽에 표기된 紅岩面이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주기에 홍암면이 적혀 있으므로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쪽의 三登界는 《해동지도》에 遂安界로 되어 있다. 三登縣의 영역은 대동강의 지류로 현재 남강으로 불리는 오른쪽의 能成江 건너편에만 있었다. 따라서 본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필사 시에 실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양윤정)

  • 선천부 (宣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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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宣川府〉로, 현재의 북부를 제외한 평안북도 선천군 전체, 서부를 제외한 동림군 전체, 곽산군 동래강 서안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선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선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읍치 안에 표시되어 있는 訓練, 鄕廳 등의 건물은 《해동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추가된 정보를 《해동지도》의 크기보다 훨씬 작은 종이 위에 표시하기 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에는 없는 동서남북 경계까지의 거리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겨우 본 지도와 읍치 안에 그려진 건물들은 비슷하나 산맥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 본 지도의 경우 읍치를 감싸고 있는 산맥으로부터 읍치 안쪽으로 4개의 산물이 뻗어 있어 각 건물들을 산맥에 의해 분리되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읍치 안의 산맥을 생략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유사하긴 하나 덜 복잡하게 그리기 위해 생략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南面의 경우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는 주기를 꼼꼼히 검토하여 지도를 그리기 보다는 지도와 地誌 부분을 따로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아래쪽(남)의 바닷가에 있는 섬들은 身彌島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크기를 별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또한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리려고 하다보니까 해안가로부터 섬까지의 거리가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점 역시 본 지도뿐만 아니라 앞의 3종의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고을의 실제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종이의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양윤정)

  • 선천부 주기 (宣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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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宣川府〉로, 현재의 북부를 제외한 평안북도 선천군 전체, 서부를 제외한 동림군 전체, 곽산군 동래강 서안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선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선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읍치 안에 표시되어 있는 訓練, 鄕廳 등의 건물은 《해동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추가된 정보를 《해동지도》의 크기보다 훨씬 작은 종이 위에 표시하기 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에는 없는 동서남북 경계까지의 거리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의 겨우 본 지도와 읍치 안에 그려진 건물들은 비슷하나 산맥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 본 지도의 경우 읍치를 감싸고 있는 산맥으로부터 읍치 안쪽으로 4개의 산물이 뻗어 있어 각 건물들을 산맥에 의해 분리되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읍치 안의 산맥을 생략하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유사하긴 하나 덜 복잡하게 그리기 위해 생략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南面의 경우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는 주기를 꼼꼼히 검토하여 지도를 그리기 보다는 지도와 地誌 부분을 따로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아래쪽(남)의 바닷가에 있는 섬들은 身彌島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크기를 별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또한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리려고 하다보니까 해안가로부터 섬까지의 거리가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점 역시 본 지도뿐만 아니라 앞의 3종의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고을의 실제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종이의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양윤정)

  • 성천부 (成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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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成川府〉로, 지금은 평안남도 성천군과 회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성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필사 과정에서 여러 부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왼쪽 아래의 慈山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오른쪽 아래의 谷山界에서 들어와 왼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남강 사이에는 江東과 三登의 땅이 넓게 포진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아주 작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본 지도에서만 나타나는 오류가 아니라, 《해동지도》는 물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른쪽 위의 陽德界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비류강이다. 비류강과 대동강 본류 및 남강은 실제로 규모가 비슷하며, 본 지도에도 비슷한 굵기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대동강과 남강을 2개의 실선으로 그리고, 비류강은 단지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실제 사실을 착각할 수 있게 그렸다. 더 나아가 양덕계 부근의 비류강 끝을 얇아지는 형태로 그려 이곳이 발원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양덕계 부근이 발원지인 듯이 표현을 고쳤을 뿐 나머지 부분은 《여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양윤정)

  • 성천부 주기 (成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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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成川府〉로, 지금은 평안남도 성천군과 회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성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필사 과정에서 여러 부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왼쪽 아래의 慈山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오른쪽 아래의 谷山界에서 들어와 왼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대동강 본류와 남강 사이에는 江東과 三登의 땅이 넓게 포진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아주 작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본 지도에서만 나타나는 오류가 아니라, 《해동지도》는 물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른쪽 위의 陽德界에서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비류강이다. 비류강과 대동강 본류 및 남강은 실제로 규모가 비슷하며, 본 지도에도 비슷한 굵기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대동강과 남강을 2개의 실선으로 그리고, 비류강은 단지 1개의 실선으로만 그려 실제 사실을 착각할 수 있게 그렸다. 더 나아가 양덕계 부근의 비류강 끝을 얇아지는 형태로 그려 이곳이 발원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광여도》의 경우에는 양덕계 부근이 발원지인 듯이 표현을 고쳤을 뿐 나머지 부분은 《여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양윤정)

  • 숙천부 (肅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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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肅川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숙천군의 남서부 일대를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숙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필사 과정에서 지명이 잘못 옮겨진 부분이 있다. 《여지도》의 오른쪽 曰里面은 三里面이며, 왼쪽의 平里面은 坪里面이다. 이는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 주기를 바탕으로 《여지도》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지도의 남서쪽에 표시된 法里面 부근에 있던 釰山面의 경우에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가 모두 상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의 모습에 있어서는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읍성이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었다. 《광여도》에서는 읍성의 전체적인 모양을 비롯하여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2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 7개로 증가했으며, 본 지도의 경우 8개가 그려져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와 《여지도》의 차이점은 본 지도를 衙舍 건물이 3개 나란히 겹쳐져서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 독립된 2개의 건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숙천부는 남북보다 동서가 긴 고을이지만 지도에는 반대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세로로 긴 사각형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이로 인해 서쪽으로 튀어나가 있어야 할 고리면, 당리면, 식리면, 평리면 등이 마치 남북으로 늘어선 것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동쪽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마치 북쪽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위쪽의 安陵界는 安州界를 의미하며, 이는 다른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숙천부 주기 (肅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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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肅川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숙천군의 남서부 일대를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숙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필사 과정에서 지명이 잘못 옮겨진 부분이 있다. 《여지도》의 오른쪽 曰里面은 三里面이며, 왼쪽의 平里面은 坪里面이다. 이는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 주기를 바탕으로 《여지도》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지도의 남서쪽에 표시된 法里面 부근에 있던 釰山面의 경우에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가 모두 상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의 모습에 있어서는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읍성이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여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생략되었다. 《광여도》에서는 읍성의 전체적인 모양을 비롯하여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이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성 안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의 경우 2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경우 7개로 증가했으며, 본 지도의 경우 8개가 그려져 있다. 본 지도와 《광여도》와 《여지도》의 차이점은 본 지도를 衙舍 건물이 3개 나란히 겹쳐져서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 독립된 2개의 건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숙천부는 남북보다 동서가 긴 고을이지만 지도에는 반대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세로로 긴 사각형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이로 인해 서쪽으로 튀어나가 있어야 할 고리면, 당리면, 식리면, 평리면 등이 마치 남북으로 늘어선 것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동쪽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마치 북쪽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위쪽의 安陵界는 安州界를 의미하며, 이는 다른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순안현 (順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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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安縣〉으로, 현재 북한의 순안비행장으로 알려진 평양특별시 순안구역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안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순안현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星山書院이며, 이는 1647년(인조 25)에 세워져 1696년(숙종 22)에 사액을 받았고, 정몽주와 한우신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輿地圖書』에 따르면 읍치에 보이는 雲影池는 치소에서 남쪽으로 2리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상하 두 개의 저수지로 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의 경우 지명에 차이가 다소 보인다. 왼쪽의 順和面이 《여지도》에는 和順面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冬花日面은 順和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역시 본 지도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본 지도의 읍치 모습은 《해동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즉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訓練과 擺撥, 鄕廳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읍치의 건물이 4개밖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본 지도에는 무려 13개나 된다. 왼쪽의 大船串烽도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그러나 이 부분들은 《여지도》와 《광여도》에 반영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가 다르게 그려진 부분도 있는데, 왼쪽의 鎭里面에 대한 표현이 있다. 진리면은 원래 永柔와 平壤의 경계를 넘어가 해안가에 있는 越境地이다. 본 지도의 경우 永柔界와 平壤界가 진리면과 순화면 사이를 가르듯이 적혀 있고, 산줄기가 이어져 있지 않아 월경지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영유계와 평양계가 적혀 있는 방식뿐만 아니라 마치 산줄기가 이어진 것처럼 그려져 있어 진리면이 월경지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여지도》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 시 두 지도를 모두 참고하여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윤정)

  • 순안현 주기 (順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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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安縣〉으로, 현재 북한의 순안비행장으로 알려진 평양특별시 순안구역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안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순안현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星山書院이며, 이는 1647년(인조 25)에 세워져 1696년(숙종 22)에 사액을 받았고, 정몽주와 한우신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輿地圖書』에 따르면 읍치에 보이는 雲影池는 치소에서 남쪽으로 2리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상하 두 개의 저수지로 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의 경우 지명에 차이가 다소 보인다. 왼쪽의 順和面이 《여지도》에는 和順面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冬花日面은 順和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역시 본 지도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본 지도의 읍치 모습은 《해동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즉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訓練과 擺撥, 鄕廳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읍치의 건물이 4개밖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본 지도에는 무려 13개나 된다. 왼쪽의 大船串烽도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그러나 이 부분들은 《여지도》와 《광여도》에 반영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가 다르게 그려진 부분도 있는데, 왼쪽의 鎭里面에 대한 표현이 있다. 진리면은 원래 永柔와 平壤의 경계를 넘어가 해안가에 있는 越境地이다. 본 지도의 경우 永柔界와 平壤界가 진리면과 순화면 사이를 가르듯이 적혀 있고, 산줄기가 이어져 있지 않아 월경지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영유계와 평양계가 적혀 있는 방식뿐만 아니라 마치 산줄기가 이어진 것처럼 그려져 있어 진리면이 월경지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여지도》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 시 두 지도를 모두 참고하여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윤정)

  • 순천군 (順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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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군의 서쪽과 북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를 비롯하여 하천의 모습은 《해동지도》의 순천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본류와 지류, 크기 등을 이해하기 힘들다. 왼쪽의 德川江下流에서 흘러와 오른쪽의 殷山地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해동지도》에는 대동강 본류가 다른 하천보다 훨씬 굵게 그려져 있어 지류와 분명하게 구분해주고 있다. 아울러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의 굵기도 약간 다르게 표현하여 구분을 쉽게 하였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하천을 표현함에 있어 굵기의 변화를 주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굵기를 대부분 동일하게 그리고 있어 이해하기 힘들다. 《광여도》 에는 대부분의 하천을 1개의 실선으로 나타내었다. 다만 왼쪽의 德川江下流 부분과 오른쪽의 殷山地 부분을 2개의 실선으로 표시하여 다른 부분과 구분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하천의 상류와 하류를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광여도》의 필사 자 자체가 하천들 사이의 규모 차이,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지명 표기에 있어 오류가 보이고 있다. 주기와 달리 密田面이 田面으로, 粘石浦面이 粘伊彦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이 바르게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도 《광여도》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본 지도의 경우 倉과 鄕校 위에 두 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지도 윗부분의 院倉과 新倉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총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어 다른 지도와는 차이가 있다. (양윤정)

  • 순천군 주기 (順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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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군의 서쪽과 북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를 비롯하여 하천의 모습은 《해동지도》의 순천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본류와 지류, 크기 등을 이해하기 힘들다. 왼쪽의 德川江下流에서 흘러와 오른쪽의 殷山地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해동지도》에는 대동강 본류가 다른 하천보다 훨씬 굵게 그려져 있어 지류와 분명하게 구분해주고 있다. 아울러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의 굵기도 약간 다르게 표현하여 구분을 쉽게 하였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하천을 표현함에 있어 굵기의 변화를 주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굵기를 대부분 동일하게 그리고 있어 이해하기 힘들다. 《광여도》 에는 대부분의 하천을 1개의 실선으로 나타내었다. 다만 왼쪽의 德川江下流 부분과 오른쪽의 殷山地 부분을 2개의 실선으로 표시하여 다른 부분과 구분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하천의 상류와 하류를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광여도》의 필사 자 자체가 하천들 사이의 규모 차이,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지명 표기에 있어 오류가 보이고 있다. 주기와 달리 密田面이 田面으로, 粘石浦面이 粘伊彦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이 바르게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도 《광여도》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본 지도의 경우 倉과 鄕校 위에 두 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지도 윗부분의 院倉과 新倉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총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어 다른 지도와는 차이가 있다. (양윤정)

  • 안주목 (安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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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安州牧〉으로, 북한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천강 이북지역을 제외한 안주시 전 지역, 문덕군, 박천군 청산리와 영변군 연화리와 서화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平安道의 이름 중 ‘平’자는 평양에서, ‘安’자는 바로 이 고을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이름난 고을이며, 의주대로 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안주목 지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하천의 유로는 《해동지도》도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렸지만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동서를 남북보다 훨씬 길게 그렸지만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이렇게 된 이유는 본 지도가 세로로 긴 사각형의 종이에 맞게 고을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고을의 실제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긴 형태를 이루고 있어 《해동지도》가 본 지도보다 더 사실에 가깝다. 동서와 남북의 길이에 대한 차이 때문에 하천의 유로에 대한 표현이 많이 달라졌다. 읍치 위쪽의 청천강은 《해동지도》에는 실제처럼 거의 西流하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본 지도는 마치 서류하다가 南流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오른쪽 위에 順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실제로는 고을의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이 하천의 위치가 실제와 유사한 위치에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동북쪽에 있는 것처럼 잘못 표현되어 있다. 왼쪽 아래의 老江鎭 역시 《해동지도》에는 실제와 가깝게 읍치의 서남 방향에 있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남쪽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의 모습을 보면,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의 경우 평안도 병마절도사영이 이 고을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兵營과 기타 건물이 총 6개 그려져 있으나,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倉을 비롯한 총 11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 모습은 《광여도》와 비슷하나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山亭을 포함하여 총 1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본 지도에 비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양윤정)

  • 안주목 주기 (安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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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安州牧〉으로, 북한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천강 이북지역을 제외한 안주시 전 지역, 문덕군, 박천군 청산리와 영변군 연화리와 서화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平安道의 이름 중 ‘平’자는 평양에서, ‘安’자는 바로 이 고을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이름난 고을이며, 의주대로 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 양덕현 (陽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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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陽德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양덕군과 신양군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 초부터 여진과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성격의 陽岩鎭, 樹德鎭으로 존재하였다. 이후 국경선이 훨씬 북쪽으로 올라감에 따라 조선 태조 때 두 진을 합하여 세운 고을이다. 지도에도 읍치 왼쪽에 樹德城이, 오른쪽 고읍면에 陽岩城이 표시되어 있어 고을의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양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양덕현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吳江面에서 발원하여 왼쪽 成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비류강 최상류이다. 읍치 방향에서 비류강에 합류되는 하천은 현재 평원천이라 불리고 있다. 오른쪽의 溫井面 지역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 최상류이다. 3개 하천의 길이와 유역 면적은 실제로는 거의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의 내용만으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읍치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흐르는 평원천 유역의 면적이 넓어지고, 상대적으로 다른 두 하천 유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니면서 동서가 남북보다 긴 양덕현의 모습을 세로(남북)가 긴 사각형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평원천 유역의 동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매우 작게 그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본 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 표시된 정보의 양이 늘어났으며, 아울러 읍치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읍치 모습이 거의 비슷하기는 하나,  客舍와 鄕校 부분에 건물이 본 지도에 2개 더 그려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보다는 《여지도》와 더 비슷하나, 倉을 邑倉으로 표시하고 있다. (양윤정)

  • 양덕현 주기 (陽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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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陽德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양덕군과 신양군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 초부터 여진과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성격의 陽岩鎭, 樹德鎭으로 존재하였다. 이후 국경선이 훨씬 북쪽으로 올라감에 따라 조선 태조 때 두 진을 합하여 세운 고을이다. 지도에도 읍치 왼쪽에 樹德城이, 오른쪽 고읍면에 陽岩城이 표시되어 있어 고을의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양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양덕현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吳江面에서 발원하여 왼쪽 成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비류강 최상류이다. 읍치 방향에서 비류강에 합류되는 하천은 현재 평원천이라 불리고 있다. 오른쪽의 溫井面 지역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 최상류이다. 3개 하천의 길이와 유역 면적은 실제로는 거의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의 내용만으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읍치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흐르는 평원천 유역의 면적이 넓어지고, 상대적으로 다른 두 하천 유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니면서 동서가 남북보다 긴 양덕현의 모습을 세로(남북)가 긴 사각형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평원천 유역의 동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매우 작게 그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본 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 표시된 정보의 양이 늘어났으며, 아울러 읍치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읍치 모습이 거의 비슷하기는 하나,  客舍와 鄕校 부분에 건물이 본 지도에 2개 더 그려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보다는 《여지도》와 더 비슷하나, 倉을 邑倉으로 표시하고 있다. (양윤정)

  • 영변부 (寧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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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邊府〉 지도로, 지금은 평안북도 영변군, 구장군, 향산군 일대이다. 영변부는 1429년(세종 11)에 연산과 무산을 합쳐 藥山城에 읍치를 두고都節制使의 本營을 만든 것으로, 지도에도 아래쪽에 延山面, 왼쪽에 撫山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변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하천의 유로는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변부 지도와 비슷하다. 특히  鐵甕山城 부분의 험준한 지형을 강조한 모습 역시 두 지도가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다. 《광여도》 역시 남문 부분은 다소 간단하게 그리고 있으나 그 외의 부분에서 산의 험준함을 느낄 수 있으며, 지형을 이용한 성곽의 축조 모습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상당히 간단하게 그려졌다. 성곽 안의 물줄기가 밖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水口로 표시되어 있을 뿐 정확히 그려져 있지 않다. 이 점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비슷한데, 《해동지도》에는 水口를 통해 흘러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성 안과 왼쪽의 天水鎭에 표현된 건물 역시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가 훨씬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청천강 본류이며,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구룡강이다. 그런데 청천강의 표현에서 큰 실수가 발견된다. 청천강은 위쪽의 熙川界에서 흘러옴에도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구룡강 역시 雲山界에서 흘러 들어오지만 하천 끝을 얇게 하여 마치 최상류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그려져 있다.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청천강과 구룡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2개의 실선으로 그리는 것을 통해 볼 때 두 하천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부분은 본 지도를 비롯한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변부의 실제 모습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게 뻗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양윤정)

  • 영변부 주기 (寧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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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邊府〉 지도로, 지금은 평안북도 영변군, 구장군, 향산군 일대이다. 영변부는 1429년(세종 11)에 연산과 무산을 합쳐 藥山城에 읍치를 두고都節制使의 本營을 만든 것으로, 지도에도 아래쪽에 延山面, 왼쪽에 撫山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변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하천의 유로는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변부 지도와 비슷하다. 특히  鐵甕山城 부분의 험준한 지형을 강조한 모습 역시 두 지도가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다. 《광여도》 역시 남문 부분은 다소 간단하게 그리고 있으나 그 외의 부분에서 산의 험준함을 느낄 수 있으며, 지형을 이용한 성곽의 축조 모습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상당히 간단하게 그려졌다. 성곽 안의 물줄기가 밖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水口로 표시되어 있을 뿐 정확히 그려져 있지 않다. 이 점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비슷한데, 《해동지도》에는 水口를 통해 흘러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성 안과 왼쪽의 天水鎭에 표현된 건물 역시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가 훨씬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청천강 본류이며,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구룡강이다. 그런데 청천강의 표현에서 큰 실수가 발견된다. 청천강은 위쪽의 熙川界에서 흘러옴에도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구룡강 역시 雲山界에서 흘러 들어오지만 하천 끝을 얇게 하여 마치 최상류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그려져 있다.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청천강과 구룡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2개의 실선으로 그리는 것을 통해 볼 때 두 하천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부분은 본 지도를 비롯한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변부의 실제 모습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게 뻗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양윤정)

  • 영원군 (寧遠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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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遠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녕원군과 대흥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지도의 상단 부분의 방위 차이로 지도의 모습이 달라 보이기도 한다. 본 지도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해동지도》가 동서를 남북보다 1.5배 정도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약간 길게 그렸다. 북쪽을 위로 하면서 세로로 약간 긴 종이 위에 영원군의 영역을 다 담으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영원군의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더 길기 때문에 사실 본 지도보다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 나오는 대부분의 지명은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지만 읍치에는 건물과 그 명칭이 《해동지도》보다 더 많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더 많아진 정보와 작아진 종이 크기를 고려하여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오른쪽 위(동북)에서 발원하여 왼쪽 아래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읍치를 확대하였기 때문에 읍치 부근의 대동강 지류가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영원군 주기 (寧遠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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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遠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녕원군과 대흥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지도의 상단 부분의 방위 차이로 지도의 모습이 달라 보이기도 한다. 본 지도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해동지도》가 동서를 남북보다 1.5배 정도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약간 길게 그렸다. 북쪽을 위로 하면서 세로로 약간 긴 종이 위에 영원군의 영역을 다 담으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영원군의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더 길기 때문에 사실 본 지도보다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 나오는 대부분의 지명은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지만 읍치에는 건물과 그 명칭이 《해동지도》보다 더 많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더 많아진 정보와 작아진 종이 크기를 고려하여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오른쪽 위(동북)에서 발원하여 왼쪽 아래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읍치를 확대하였기 때문에 읍치 부근의 대동강 지류가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영유현 (永柔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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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永柔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유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유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몇 군데 잘못된 것이 보인다. 왼쪽 아래의 盆湖는 盆浦를, 蓮花面은 蓮下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광여도》에서는 전자는 교정되지 않았지만 후자는 교정되어 본 지도와 같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표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차이점이 보인다. 읍치에서 흘러나가는 하천 중 紫華山 아래쪽에 표시된 것은  《해동지도》에는 그 위쪽에 그려져 있다. 이 부분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아래쪽의 德池筒에 2개의 섬이 하천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한 것도 《해동지도》의 내용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德池筒은 둘레가 5萬尺을 넘는 저수지였는데, 1731년(영조 7)에 모두 메워 논으로 만들었다. 德池 안에 있는 鎭舍·鎭廳은 德池鎭을 의미하며 1748년(영조 23)에 폐지되었다.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읍치 지역을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였다. 아래쪽(서)에 면이 밀집되어 있는 것처럼 그려진 것은 동쪽(위)에 있는 읍치 지역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영유현의 전체적인 모습은 동쪽의 남북 폭이 좁고, 서쪽은 넓다. (양윤정)

  • 영유현 주기 (永柔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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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永柔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유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유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몇 군데 잘못된 것이 보인다. 왼쪽 아래의 盆湖는 盆浦를, 蓮花面은 蓮下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광여도》에서는 전자는 교정되지 않았지만 후자는 교정되어 본 지도와 같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표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차이점이 보인다. 읍치에서 흘러나가는 하천 중 紫華山 아래쪽에 표시된 것은  《해동지도》에는 그 위쪽에 그려져 있다. 이 부분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아래쪽의 德池筒에 2개의 섬이 하천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한 것도 《해동지도》의 내용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德池筒은 둘레가 5萬尺을 넘는 저수지였는데, 1731년(영조 7)에 모두 메워 논으로 만들었다. 德池 안에 있는 鎭舍·鎭廳은 德池鎭을 의미하며 1748년(영조 23)에 폐지되었다.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읍치 지역을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였다. 아래쪽(서)에 면이 밀집되어 있는 것처럼 그려진 것은 동쪽(위)에 있는 읍치 지역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영유현의 전체적인 모습은 동쪽의 남북 폭이 좁고, 서쪽은 넓다. (양윤정)

  • 용강현 (龍岡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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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岡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남동쪽과 평안남도 온천군 북쪽 일대지역이다. 고을의 실제 모습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지만 직사각형의 지면에 그리기 위해 약간 왜곡되어 있다. 이런 모습을 비롯하여 본 지도의 전체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강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 부분을 제외하면 본 지도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해동지도》와 일치한다.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의 모습만 보이고 있으나,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鄕廳을 잘못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이와 같은 부분이 몇 군데 보인다. 《여지도》의 오른쪽에 표시된 月連也面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月連池面으로 되어 있으며, 주기를 근거로 《여지도》가 잘못 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는 본 지도보다 상대적으로 세로가 가로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책처럼 세로가 약간 긴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세로 부분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길어짐에 따라 하천의 길이 표현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는 대략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남쪽(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길이가 《해동지도》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반면에 동쪽(아래)으로 흐르는 하천은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져 있다. 왼쪽의 三和界로 연결되는 육지도 본 지도에는 폭이 좁게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상대적으로 넓게 그려져 있다. 이것 역시 세로의 폭이 좁아지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용강현의 실제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지도 위쪽 지도명 바로 옆에 표시되어 있는 오석산은 일명 황룡산이다. 이 산은 예로부터 八奇八景으로 이름난 산으로, 산록에는 당나라 태종이 친히 치려다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황룡산성이 그려져 있다. 황룡산성 안에 있는 影殿은 1721년(경종 1)에 세워지고, 1725년(영조 1)에 사액받은 箕子影殿이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書院은 鰲山書院으로 1664년(현종 5)에 세워지고, 1701년(숙종 27)에 사액을 받았다. (양윤정)

  • 용강현 주기 (龍岡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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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岡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남동쪽과 평안남도 온천군 북쪽 일대지역이다. 고을의 실제 모습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지만 직사각형의 지면에 그리기 위해 약간 왜곡되어 있다. 이런 모습을 비롯하여 본 지도의 전체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강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 부분을 제외하면 본 지도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해동지도》와 일치한다.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의 모습만 보이고 있으나,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鄕廳을 잘못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이와 같은 부분이 몇 군데 보인다. 《여지도》의 오른쪽에 표시된 月連也面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月連池面으로 되어 있으며, 주기를 근거로 《여지도》가 잘못 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는 본 지도보다 상대적으로 세로가 가로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책처럼 세로가 약간 긴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세로 부분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길어짐에 따라 하천의 길이 표현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는 대략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남쪽(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길이가 《해동지도》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반면에 동쪽(아래)으로 흐르는 하천은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져 있다. 왼쪽의 三和界로 연결되는 육지도 본 지도에는 폭이 좁게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상대적으로 넓게 그려져 있다. 이것 역시 세로의 폭이 좁아지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용강현의 실제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지도 위쪽 지도명 바로 옆에 표시되어 있는 오석산은 일명 황룡산이다. 이 산은 예로부터 八奇八景으로 이름난 산으로, 산록에는 당나라 태종이 친히 치려다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황룡산성이 그려져 있다. 황룡산성 안에 있는 影殿은 1721년(경종 1)에 세워지고, 1725년(영조 1)에 사액받은 箕子影殿이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書院은 鰲山書院으로 1664년(현종 5)에 세워지고, 1701년(숙종 27)에 사액을 받았다. (양윤정)

  • 용천부 (龍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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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川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용천군 남부 지역, 염주군 동부 지역, 피현군 서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형태에서부터 어느 정도의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보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더 길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세로가 짧아진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읍치와 龍骨山城, 위쪽의 良策站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읍치와 良策站 등에 《해동지도》에 없는 정보가 추가되었고, 상대적으로 훨씬 작은 종이 위에 많은 정보를 수록하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특이한 점은 각 성문 밖 지형의 험준함과 높낮이를 기록한 것이며, 지도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을 통해서도 성 주변이 험준함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본 지도보다 회화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해동지도》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덜 나타나며, 《여지도》의 경우에는 주기 부분이 없으면 산지의 모습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 읍치의 북쪽에는 淸北討捕營이 위치하고 있다. 군사 관련 시설인 官廳, 客舍와 軍倉인 倉과 巡營庫, 기타 淸心堂과 聽流堂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 동남쪽에 있는 용골산성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성 안에는 3개의 샘, 將臺,봉수대가 있다고 한다. 용골산성 아래는  "龍骨山脈 而下 今若植木脫有緩急 庶可得力云"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즉, 구불구불 이어져 내려간 줄기를 따라 나무를 심어 놓을 경우 유사시 지역 방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 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으로 보면 大東地志에 기록된 내용을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고을의 모습은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의 종이에 그려도 왜곡되지 않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아래쪽의 바다에 있는 섬들은 크기나 거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薪島를 제외하면 나머지 섬들의 크기나 거리가 실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거리가 고려되지 않은 이유는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렸기 때문이다. 크기가 반영되지 않은 이유는 지도 제작 당시에 섬의 크기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리지에 섬의 크기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용천부 주기 (龍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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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川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용천군 남부 지역, 염주군 동부 지역, 피현군 서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형태에서부터 어느 정도의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보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더 길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세로가 짧아진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읍치와 龍骨山城, 위쪽의 良策站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읍치와 良策站 등에 《해동지도》에 없는 정보가 추가되었고, 상대적으로 훨씬 작은 종이 위에 많은 정보를 수록하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특이한 점은 각 성문 밖 지형의 험준함과 높낮이를 기록한 것이며, 지도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을 통해서도 성 주변이 험준함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본 지도보다 회화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해동지도》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덜 나타나며, 《여지도》의 경우에는 주기 부분이 없으면 산지의 모습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 읍치의 북쪽에는 淸北討捕營이 위치하고 있다. 군사 관련 시설인 官廳, 客舍와 軍倉인 倉과 巡營庫, 기타 淸心堂과 聽流堂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 동남쪽에 있는 용골산성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성 안에는 3개의 샘, 將臺,봉수대가 있다고 한다. 용골산성 아래는  "龍骨山脈 而下 今若植木脫有緩急 庶可得力云"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즉, 구불구불 이어져 내려간 줄기를 따라 나무를 심어 놓을 경우 유사시 지역 방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 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으로 보면 大東地志에 기록된 내용을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고을의 모습은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의 종이에 그려도 왜곡되지 않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아래쪽의 바다에 있는 섬들은 크기나 거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薪島를 제외하면 나머지 섬들의 크기나 거리가 실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거리가 고려되지 않은 이유는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렸기 때문이다. 크기가 반영되지 않은 이유는 지도 제작 당시에 섬의 크기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리지에 섬의 크기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운산군 (雲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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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雲山郡〉으로, 지금도 평안북도 운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운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운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읍치와 委曲鎭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의 건물 수가 훨씬 많음을 한눈에도 구별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衙舍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倉이 표시되어 있고,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委曲鎭에도 《해동지도》에는 없는 鎭舍이 표시되어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위곡진 오른쪽에는 발음이 같은 면의 명칭이 委谷面과 委曲面으로 적혀 있다. 이는 委曲面과 委曲江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고, 《광여도》에는 委谷面 자리에 委曲面을, 委曲面 자리에 古延州面을 적어 넣었다. 고연주면의 경우 그 오른쪽에 구연주창이 있기 때문에 바꾸어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비슷하게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운산군 주기 (雲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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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雲山郡〉으로, 지금도 평안북도 운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운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운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읍치와 委曲鎭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의 건물 수가 훨씬 많음을 한눈에도 구별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衙舍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倉이 표시되어 있고,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委曲鎭에도 《해동지도》에는 없는 鎭舍이 표시되어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위곡진 오른쪽에는 발음이 같은 면의 명칭이 委谷面과 委曲面으로 적혀 있다. 이는 委曲面과 委曲江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고, 《광여도》에는 委谷面 자리에 委曲面을, 委曲面 자리에 古延州面을 적어 넣었다. 고연주면의 경우 그 오른쪽에 구연주창이 있기 때문에 바꾸어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비슷하게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위원군 (渭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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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渭原郡〉으로, 지금의 자강도 위원군 일대이다. 원래는 都乙漢堡였는데 다른 곳과 격리되어 있어 갑작스런 침입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443년(세종 25)에 理山(후에 楚山)과 江界의 땅을 나누어 새로 설치한 고을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위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위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 보다 읍치의 건물수와 명칭이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해동지도》와 거의 일치하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하천이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독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압록강과 그 지류인 독로강이 직접 연결되어 있어 본류와 지류의 구분을 어렵게 하였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에는 압록강이 왼쪽(동북)에서 흘러들어오며, 독로강이 합류되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의 경우 《여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광여도》 역시 압록강 본류와 지류인 독로강을 구별할 수 있도록 교정되어 있다. 산지 표현을 비롯하여 지도의 전체적 표현 방식은 회화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으나, 위원군 전체의 모습이나 하천의 유로 등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위원군의 실제 모습 자체가 동남-서북 방향으로 그리면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양윤정)

  • 위원군 주기 (渭原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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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渭原郡〉으로, 지금의 자강도 위원군 일대이다. 원래는 都乙漢堡였는데 다른 곳과 격리되어 있어 갑작스런 침입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443년(세종 25)에 理山(후에 楚山)과 江界의 땅을 나누어 새로 설치한 고을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위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위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 보다 읍치의 건물수와 명칭이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해동지도》와 거의 일치하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하천이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독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압록강과 그 지류인 독로강이 직접 연결되어 있어 본류와 지류의 구분을 어렵게 하였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에는 압록강이 왼쪽(동북)에서 흘러들어오며, 독로강이 합류되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의 경우 《여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광여도》 역시 압록강 본류와 지류인 독로강을 구별할 수 있도록 교정되어 있다. 산지 표현을 비롯하여 지도의 전체적 표현 방식은 회화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으나, 위원군 전체의 모습이나 하천의 유로 등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위원군의 실제 모습 자체가 동남-서북 방향으로 그리면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양윤정)

  • 은산현 (殷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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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殷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시 동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은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은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위의 天聖山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비해 길고, 좀더 서남쪽으로 기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와는 하천의 일부분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順川界에서 들어와 왼쪽을 휘감고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그런데 《여지도》에서는 順川界 부분이 대동강의 발원지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의 順川界에서 읍치 방향으로 현재의 장선강이 흘러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이 부분을 아예 생략하여 위쪽의 천성산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왼쪽 위에는 价川界에는 왼쪽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흘러들어오는 하천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이 하천이 없으며, 따라서 無盡臺의 위치도 차이가 있다. 《광여도》의 경우본류와 지류를 거의 같은 굵기로 그리고 있으나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며, 《해동지도》 역시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따라서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고,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다른 자료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나타난 지명의 경우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므로 본 지도와의 관계도 무시할 수 는 없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만 나타는 지명이 있는데, 바로 지도 아래쪽의 阿灘窟이다. 《해동지도》에는 집 모양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崇化山 석벽에 있는 굴로서 굴 안에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은산현 주기 (殷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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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殷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시 동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은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은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위의 天聖山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비해 길고, 좀더 서남쪽으로 기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와는 하천의 일부분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順川界에서 들어와 왼쪽을 휘감고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그런데 《여지도》에서는 順川界 부분이 대동강의 발원지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의 順川界에서 읍치 방향으로 현재의 장선강이 흘러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이 부분을 아예 생략하여 위쪽의 천성산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왼쪽 위에는 价川界에는 왼쪽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흘러들어오는 하천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이 하천이 없으며, 따라서 無盡臺의 위치도 차이가 있다. 《광여도》의 경우본류와 지류를 거의 같은 굵기로 그리고 있으나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며, 《해동지도》 역시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따라서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고,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다른 자료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나타난 지명의 경우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므로 본 지도와의 관계도 무시할 수 는 없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만 나타는 지명이 있는데, 바로 지도 아래쪽의 阿灘窟이다. 《해동지도》에는 집 모양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崇化山 석벽에 있는 굴로서 굴 안에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의주부 (義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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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義州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의주군, 피현군, 천마군 서북쪽, 삭주군 청수 서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규장각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의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이들은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의주부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을 훨씬 길게 그렸지만 본 지도에서는 남북과 동서를 비슷하게 그렸다. 하천의 유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광여도》와 《여지도》보다 《해동지도》가 地誌 부분에 충실하게 표시하고 있으며, 본 지도의 겨우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於骨山은 松骨山을, 獜川鎭은 獜山鎭을 잘못 옮긴 것이며, 이런 지명은 이외에도 많다. 《광여도》에서는 본 지도에서 잘못 옮긴 것을 상당히 교정해 놓았다. 본 지도의 경우 獜山鎭은 《광여도》와 같이 표기하고 있으나, 松骨山의 경우에는 산은 그려져 있으나, 지명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 비해 정보가 추가된 곳은 읍치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건물수가 4개 였으나, 본 지도에서는 7개로 늘어났고, 鄕社堂, 凝香堂이란 지명이 추가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더 크게 묘사하였으며, 鄕社堂이 鄕射堂으로 바뀌어 있다.(양윤정)

  • 의주부 주기 (義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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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義州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의주군, 피현군, 천마군 서북쪽, 삭주군 청수 서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규장각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의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이들은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의주부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을 훨씬 길게 그렸지만 본 지도에서는 남북과 동서를 비슷하게 그렸다. 하천의 유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광여도》와 《여지도》보다 《해동지도》가 地誌 부분에 충실하게 표시하고 있으며, 본 지도의 겨우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於骨山은 松骨山을, 獜川鎭은 獜山鎭을 잘못 옮긴 것이며, 이런 지명은 이외에도 많다. 《광여도》에서는 본 지도에서 잘못 옮긴 것을 상당히 교정해 놓았다. 본 지도의 경우 獜山鎭은 《광여도》와 같이 표기하고 있으나, 松骨山의 경우에는 산은 그려져 있으나, 지명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 비해 정보가 추가된 곳은 읍치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건물수가 4개 였으나, 본 지도에서는 7개로 늘어났고, 鄕社堂, 凝香堂이란 지명이 추가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더 크게 묘사하였으며, 鄕社堂이 鄕射堂으로 바뀌어 있다.(양윤정)

  • 자산부 (慈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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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慈山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평성시 대부분 지역, 순천시 서쪽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자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눈에도 알아 볼 수 있는 차이점이 있다. 본 지도는 북쪽이 지도의 상단이지만,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보다 동서를 길게 그렸고, 본 지도는 반대로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이에 따라 《해동지도》에 동서로 길게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지게 되었다. 자산부의 실제 모습은 본 지도처럼 남북이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자세해졌으나, 慈母城의 경우에는 《해동지도》의 모습이 산세를 더 자세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慈母城 의 모습을 매우 간략하게 그리고 있으며, 성곽에 요철 모양도 그리고 있지 않다. 자모산성 안에는 別將所, 將臺, 軍器庫 등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고, 또한 순천창, 순안창, 성천창, 자산 동창 등읍창 등이 위치하였다. 그 남쪽 牛馬城에도 營南倉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성안의 건물 역시 본 지도에는 1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여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성 안의 작은 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성안에 많은 우물을 표현한 것으로 성 안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양윤정)

  • 자산부 주기 (慈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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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慈山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평성시 대부분 지역, 순천시 서쪽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자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눈에도 알아 볼 수 있는 차이점이 있다. 본 지도는 북쪽이 지도의 상단이지만,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보다 동서를 길게 그렸고, 본 지도는 반대로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이에 따라 《해동지도》에 동서로 길게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지게 되었다. 자산부의 실제 모습은 본 지도처럼 남북이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자세해졌으나, 慈母城의 경우에는 《해동지도》의 모습이 산세를 더 자세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慈母城 의 모습을 매우 간략하게 그리고 있으며, 성곽에 요철 모양도 그리고 있지 않다. 자모산성 안에는 別將所, 將臺, 軍器庫 등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고, 또한 순천창, 순안창, 성천창, 자산 동창 등읍창 등이 위치하였다. 그 남쪽 牛馬城에도 營南倉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성안의 건물 역시 본 지도에는 1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여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성 안의 작은 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성안에 많은 우물을 표현한 것으로 성 안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양윤정)

  • 정주목 (定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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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定州牧〉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정주군 전체, 곽산군 당상리 일부, 운전군 장수탄 이남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정주목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이들은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가 비슷한 《해동지도》의 정주목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에는 읍치가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읍치가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그려졌다. 읍치로부터 서쪽(왼쪽)까지의 거리는 동쪽(오른쪽)까지의 거리에 비해 4분의 1정도밖에 안되는데,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그려진 동쪽 부분에는 面이 조밀하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오른쪽에 長水灘이라고 적혀 있는 하천은 실제로는 嘉山과의 경계선 역할을 하였다. 본 지도에도 嘉山界를 하천 옆에 적어놓아 이런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경계선 밖의 부분에도 산줄기를 그려 넣어 실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부분까지도 《광여도》와 《여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안의 모습은 본 지도와 《광여도》는 매우 유사하나 《여지도》의 경우 산맥이 거의 생략되어 있으며 하천의 경우에도 부분적으로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광여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건물이 보이며, 松相堂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양윤정)

  • 정주목 주기 (定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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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定州牧〉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정주군 전체, 곽산군 당상리 일부, 운전군 장수탄 이남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정주목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이들은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가 비슷한 《해동지도》의 정주목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에는 읍치가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읍치가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그려졌다. 읍치로부터 서쪽(왼쪽)까지의 거리는 동쪽(오른쪽)까지의 거리에 비해 4분의 1정도밖에 안되는데,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그려진 동쪽 부분에는 面이 조밀하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오른쪽에 長水灘이라고 적혀 있는 하천은 실제로는 嘉山과의 경계선 역할을 하였다. 본 지도에도 嘉山界를 하천 옆에 적어놓아 이런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경계선 밖의 부분에도 산줄기를 그려 넣어 실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부분까지도 《광여도》와 《여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안의 모습은 본 지도와 《광여도》는 매우 유사하나 《여지도》의 경우 산맥이 거의 생략되어 있으며 하천의 경우에도 부분적으로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광여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건물이 보이며, 松相堂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양윤정)

  • 중화부 (中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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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中和府〉로, 현재의 평양특별시 강남군, 중화군, 상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중화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중화부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비교해서 몇 가지 차이점이 보인다. 우선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서쪽에 그려진 宣化堂 등을 포함해 총 6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총 1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客 ·衙 밑으로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鄕校와 鄕廳,訓鍊이 그려져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廳과 訓鍊이 客舍 주변에 그려져 있고 鄕校만이 독립되어 그려져 있다. 즉 그 사이에 산맥이 그려져 있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광여도》 역시 《여지도》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본 지도가 《광여도》, 《여지도》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아진 읍치의 정보를 표시하기 위해 읍치 지역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읍치 아래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로가 길게 그려졌다. 이에 따라 동쪽(위)에서 서쪽(아래)으로 길게 뻗은 고을의 실제 모습보다 심하게 왜곡되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하천에 대한 이해에서도 오해를 낳을 수 있게 하였다. 실제로는 하천이 위에서 아래로 즉, 西流하는 길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즉, 北流하는 길이보다 훨씬 길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쪽은 바다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대동강의 하류 부분이다. 다만 밀물 때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바다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 적혀 있는 海倉이란 지명이 그런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양윤정)

  • 중화부 주기 (中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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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中和府〉로, 현재의 평양특별시 강남군, 중화군, 상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중화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중화부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비교해서 몇 가지 차이점이 보인다. 우선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서쪽에 그려진 宣化堂 등을 포함해 총 6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총 1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客 ·衙 밑으로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鄕校와 鄕廳,訓鍊이 그려져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廳과 訓鍊이 客舍 주변에 그려져 있고 鄕校만이 독립되어 그려져 있다. 즉 그 사이에 산맥이 그려져 있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광여도》 역시 《여지도》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본 지도가 《광여도》, 《여지도》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아진 읍치의 정보를 표시하기 위해 읍치 지역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읍치 아래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로가 길게 그려졌다. 이에 따라 동쪽(위)에서 서쪽(아래)으로 길게 뻗은 고을의 실제 모습보다 심하게 왜곡되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하천에 대한 이해에서도 오해를 낳을 수 있게 하였다. 실제로는 하천이 위에서 아래로 즉, 西流하는 길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즉, 北流하는 길이보다 훨씬 길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쪽은 바다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대동강의 하류 부분이다. 다만 밀물 때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바다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 적혀 있는 海倉이란 지명이 그런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양윤정)

  • 증산현 (甑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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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甑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북쪽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원래 江西縣의 甑山鄕이었으며, 1394년(태조 3)에 縣으로 승격되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증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증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지명이 《해동지도》에 나오는 것이지만 왼쪽의 車踰嶺과 兎山烽은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여지도》와 《광여도》에도 이 지명들이 나오는데, 兎山烽이 兎山烟臺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는 鄕校, 客舍, 衙舍가 매우 간단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보이지 않던 倉과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총 11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을 전체의 세로(남북) 역시 더 길게 표현되었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지나는 하천의 모습이 달라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南流하다가 西流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거의 西南流하는 모양으로 바뀌어 있다. (양윤정)

  • 증산현 주기 (甑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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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甑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북쪽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원래 江西縣의 甑山鄕이었으며, 1394년(태조 3)에 縣으로 승격되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증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증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지명이 《해동지도》에 나오는 것이지만 왼쪽의 車踰嶺과 兎山烽은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여지도》와 《광여도》에도 이 지명들이 나오는데, 兎山烽이 兎山烟臺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는 鄕校, 客舍, 衙舍가 매우 간단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보이지 않던 倉과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총 11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을 전체의 세로(남북) 역시 더 길게 표현되었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지나는 하천의 모습이 달라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南流하다가 西流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거의 西南流하는 모양으로 바뀌어 있다. (양윤정)

  • 창성부 (昌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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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昌城府〉로,‘창성’이라는 명칭은 1402년(태종 2) 昌州와 泥城을 합친 것에 유래하였다. 창성부는 압록강 수계와 대정강 수계 양쪽에 걸쳐 있다. 본래 창성부는 대정강 유역에 위치하였다가 압록강 유역으로 영토가 확대되면서 읍치를 옮겼기 때문에 그 흔적이 행정구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안북도 창성군, 會上里를 제외한 동창군 전 지역, 삭주군 일부, 벽동군 송연리, 태천군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창성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물론 《해동지도》와는 형식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본 지도의 경우 남동쪽을 지도 상단에 그리고 있다. 위쪽은 대령강의 지류인 창성강 유역이고, 아래쪽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압록강 유역이다.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는 세로가 축소되었고, 특히 창성강 유역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두 유역을 가로지르는 산줄기 위에 《해동지도》에는 3개의 關門城이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大防墻岺 1곳에만 그려져 있다.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小防墻岺 1곳만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지명은 모두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부분을 피해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이 임의로 생략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성의 모습 역시 《해동지도》에서는 지형을 이용해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일부분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비하면 그런 모습을 지도를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생략되어 마치 산 안에 읍치가 위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양윤정)

  • 창성부 주기 (昌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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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昌城府〉로,‘창성’이라는 명칭은 1402년(태종 2) 昌州와 泥城을 합친 것에 유래하였다. 창성부는 압록강 수계와 대정강 수계 양쪽에 걸쳐 있다. 본래 창성부는 대정강 유역에 위치하였다가 압록강 유역으로 영토가 확대되면서 읍치를 옮겼기 때문에 그 흔적이 행정구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안북도 창성군, 會上里를 제외한 동창군 전 지역, 삭주군 일부, 벽동군 송연리, 태천군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창성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물론 《해동지도》와는 형식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본 지도의 경우 남동쪽을 지도 상단에 그리고 있다. 위쪽은 대령강의 지류인 창성강 유역이고, 아래쪽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압록강 유역이다.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는 세로가 축소되었고, 특히 창성강 유역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두 유역을 가로지르는 산줄기 위에 《해동지도》에는 3개의 關門城이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大防墻岺 1곳에만 그려져 있다.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小防墻岺 1곳만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지명은 모두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부분을 피해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이 임의로 생략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성의 모습 역시 《해동지도》에서는 지형을 이용해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일부분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비하면 그런 모습을 지도를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생략되어 마치 산 안에 읍치가 위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양윤정)

  • 철산부 (鐵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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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鐵山府〉로,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 전부와 동림군 서부, 염주군 동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철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철산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와 車輦舘에 그려진 건물의 수가 훨씬 증가하였고,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세로(남북)의 길이가 동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아졌다. 이런 이유로 《해동지도》에는 읍치에서 해안까지의 거리가 위쪽 義州界까지보다 멀게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이외의 정보는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해동지도》에 나오는 정보 중 본 지도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있으며, 약간 바뀌어 표현된 것도 있다. 바뀐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읍치 아래쪽에 土城이라 적혀 있는 곳부터 天荒山까지 그려져 있는 하천이다. 《해동지도》에는 이것이 하천이 아니라 土城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토성을 하천으로 인식했기 때문에《해동지도》에 下惠面으로부터 아래쪽으로 이어져 있던 산줄기 역시 끊어져 있다. 이 부분은 《해동지도》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본 지도와 같이 하천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섬의 경우 그 모양이나 위치가 정확하지는 못하다. 본 지도의 경우 섬을 크게 그려 다른 지도들에 비해 그 거리가 더 좁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철산부 주기 (鐵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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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鐵山府〉로,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 전부와 동림군 서부, 염주군 동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철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철산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와 車輦舘에 그려진 건물의 수가 훨씬 증가하였고,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세로(남북)의 길이가 동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아졌다. 이런 이유로 《해동지도》에는 읍치에서 해안까지의 거리가 위쪽 義州界까지보다 멀게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이외의 정보는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해동지도》에 나오는 정보 중 본 지도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있으며, 약간 바뀌어 표현된 것도 있다. 바뀐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읍치 아래쪽에 土城이라 적혀 있는 곳부터 天荒山까지 그려져 있는 하천이다. 《해동지도》에는 이것이 하천이 아니라 土城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토성을 하천으로 인식했기 때문에《해동지도》에 下惠面으로부터 아래쪽으로 이어져 있던 산줄기 역시 끊어져 있다. 이 부분은 《해동지도》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본 지도와 같이 하천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섬의 경우 그 모양이나 위치가 정확하지는 못하다. 본 지도의 경우 섬을 크게 그려 다른 지도들에 비해 그 거리가 더 좁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초산부 (楚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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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楚山府〉로, 지금의 자강도 초산군, 고풍군, 송원군 일대의 지역이다. 고려말까지는 여진족이 거주하던 豆木里였다고 하며, 공민왕 때부터 사람들이 점차 불어나 1401년(태종 2)에 새롭게 고을을 설치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이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이산부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理山은 1724년(경종 4)에 郡에서 府로 승격된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의 명칭은 이산부로 되어 있어 내용적으로 1724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광여도》에는 이산군으로 되어 있어 고을 명칭만으로는 1724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본 지도의 경우 지도명이 초산부로 되어 있는데, 理山이 楚山으로 바뀐 것은 1776년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필체를 보면 지도내의 필체와는 차이가 있으며, 도곽선의 모습에 있어서도 지도의 명칭만을 따로 표기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도는 《해동지도》 및 《여지도》와 《광여도》와 마찬가지로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아래쪽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압록강이다. 위쪽(남)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충만강이다. 본 지도의 상단의 車岺鎭 오른쪽에 표기된 車嶺面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나타나 있으나,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 中江倉의 경우 본 지도에는 2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나, 《해동지도》에는 건물 하나가 그려져 있으며, 초산부까지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와 《광여도》의 오른쪽 아래에 적혀 있는 東寧府와 元刺山城에 대한 설명은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읍치의 모습을 보면 사실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쉽게 찾기가 힘들다. 건물도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1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理山府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客舍, 衙舍, 鄕校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본 지도의 경우 《여지도》와 《광여도》와는 상대적으로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어 쉽게 읍치를 찾을 수 있는데,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없었던 倉과 訓練까지 표시되어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양윤정)

  • 초산부 주기 (楚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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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楚山府〉로, 지금의 자강도 초산군, 고풍군, 송원군 일대의 지역이다. 고려말까지는 여진족이 거주하던 豆木里였다고 하며, 공민왕 때부터 사람들이 점차 불어나 1401년(태종 2)에 새롭게 고을을 설치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이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이산부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理山은 1724년(경종 4)에 郡에서 府로 승격된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의 명칭은 이산부로 되어 있어 내용적으로 1724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광여도》에는 이산군으로 되어 있어 고을 명칭만으로는 1724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본 지도의 경우 지도명이 초산부로 되어 있는데, 理山이 楚山으로 바뀐 것은 1776년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필체를 보면 지도내의 필체와는 차이가 있으며, 도곽선의 모습에 있어서도 지도의 명칭만을 따로 표기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도는 《해동지도》 및 《여지도》와 《광여도》와 마찬가지로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아래쪽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압록강이다. 위쪽(남)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충만강이다. 본 지도의 상단의 車岺鎭 오른쪽에 표기된 車嶺面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나타나 있으나,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 中江倉의 경우 본 지도에는 2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나, 《해동지도》에는 건물 하나가 그려져 있으며, 초산부까지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와 《광여도》의 오른쪽 아래에 적혀 있는 東寧府와 元刺山城에 대한 설명은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읍치의 모습을 보면 사실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쉽게 찾기가 힘들다. 건물도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1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理山府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客舍, 衙舍, 鄕校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본 지도의 경우 《여지도》와 《광여도》와는 상대적으로 많은 건물이 그려져 있어 쉽게 읍치를 찾을 수 있는데,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없었던 倉과 訓練까지 표시되어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양윤정)

  • 태천현 (泰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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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泰川縣〉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태천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태천현, 《여지도(古4790-58)》의 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태천현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泰川은 1895년에 郡으로 되기까지 조선 초기부터 계속 縣으로 존재했다. 따라서 《여지도》의 내제가 ‘태천군’으로 표기된 것은 필사 하는 과정에 실수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衙舍, 客舍, 鄕校만이 나오지만 본 지도에는 鄕廳과 訓練, 倉 등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외의 지역은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가 비록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되어 그려져 있지만 하천의 유로나 고을 전체의 모습이 상당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태천군 자체의 모습이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읍치 서북쪽에 보이는 籠五里山城은 고구려 때 於九라는 사람의 지도 아래 을해년에 축성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성벽은 길이 20km, 높이 3m이다. 성의 동쪽과 서쪽에는 누마루형 將臺가 있는데 둘레가 6m이며 작은 반월형을 이루었다. 《광여도》의 경우 요철 모양까지 그려 산성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여지도》의 경우에는 지명 없이는 산성으로 보기 힘들정도로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籠五里山城烽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에는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표시에서 오른쪽에 雲山界와 寧邊界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주기와 동일하게 본 지도상에도 다른 고을과의 경계 부분을 표시하고 있다. (양윤정)

  • 태천현 주기 (泰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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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泰川縣〉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태천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태천현, 《여지도(古4790-58)》의 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태천현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泰川은 1895년에 郡으로 되기까지 조선 초기부터 계속 縣으로 존재했다. 따라서 《여지도》의 내제가 ‘태천군’으로 표기된 것은 필사 하는 과정에 실수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衙舍, 客舍, 鄕校만이 나오지만 본 지도에는 鄕廳과 訓練, 倉 등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외의 지역은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가 비록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되어 그려져 있지만 하천의 유로나 고을 전체의 모습이 상당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태천군 자체의 모습이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읍치 서북쪽에 보이는 籠五里山城은 고구려 때 於九라는 사람의 지도 아래 을해년에 축성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성벽은 길이 20km, 높이 3m이다. 성의 동쪽과 서쪽에는 누마루형 將臺가 있는데 둘레가 6m이며 작은 반월형을 이루었다. 《광여도》의 경우 요철 모양까지 그려 산성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여지도》의 경우에는 지명 없이는 산성으로 보기 힘들정도로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籠五里山城烽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에는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표시에서 오른쪽에 雲山界와 寧邊界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주기와 동일하게 본 지도상에도 다른 고을과의 경계 부분을 표시하고 있다. (양윤정)

  • 평안도 (平安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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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도별도이다. 평안도는 지금의 평양특별시·남포직할시·평안남도·평안북도·랑림군을 제외한 자강도·량강도 김형직군에 해당한다. 平安道의 이름은 平壤과 安州를 합해서 만든 것으로, 평안도에는 총 42개의 고을이 있으며 지도에서는 원 안에 표시하였다. 기타 우예, 자성, 여연, 무창 등의 폐사군도 관장하였다. 관찰사 소재지인 監營은 평양에 있었으며 兵營은 안주에 있었다. 지도에서 직사각형 안에 표시된 것은 鎭堡로서 청나라와의 국경선에 해당하는 압록강변과 단종과 세조 때 四郡이 혁파된 후 최북단의 경계를 맡았던 강계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 또한 압록강을 넘은 적에 대한 1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던 지금의 강남산맥 아래·위쪽과 해안가에도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해안가 쪽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대대적으로 修築된 산성의 모습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어 청나라에 대한 위기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최고의 천연요새로 알려진 영변의 鐵甕城도 보이고 있다. 타원형의 노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평안도 북쪽으로는 압록강이, 가운데에는 청천강이, 대동강이 흐르고 있다. 서해에는 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크기는 고려하지 않았으며,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도록 그렸다.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평안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평안도 지도와도 전체적인 구도가 비슷하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청나라 땅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산줄기와 강줄기 및 마을 이름을 적어 놓았다.(양윤정)

  • 평안도 (平安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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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압록강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平安道〉 지도의 경우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으나, 본 지도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다. 즉 세로가 길기 때문에 압록강 주변의 정보를 자세히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 강줄기가 거의 일직선으로 그려지면서 왜곡된 부분이 많이 생기고 있다. 또한 가산 남쪽 부분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平安道〉 지도보다 많은 정보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산지 부분에 있어 〈平安道〉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峴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특히 〈平安道〉 지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압록강 이북지역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폐사군현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섬에 대한 정보는 〈평안도〉 지도와 마찬가지로 크기는 고려하지 않고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도록 그렸다.(양윤정)

  • 평안도 주기 (平安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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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도별도이다. 평안도는 지금의 평양특별시·남포직할시·평안남도·평안북도·랑림군을 제외한 자강도·량강도 김형직군에 해당한다. 平安道의 이름은 平壤과 安州를 합해서 만든 것으로, 평안도에는 총 42개의 고을이 있으며 지도에서는 원 안에 표시하였다. 기타 우예, 자성, 여연, 무창 등의 폐사군도 관장하였다. 관찰사 소재지인 監營은 평양에 있었으며 兵營은 안주에 있었다. 지도에서 직사각형 안에 표시된 것은 鎭堡로서 청나라와의 국경선에 해당하는 압록강변과 단종과 세조 때 四郡이 혁파된 후 최북단의 경계를 맡았던 강계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 또한 압록강을 넘은 적에 대한 1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던 지금의 강남산맥 아래·위쪽과 해안가에도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해안가 쪽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대대적으로 修築된 산성의 모습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어 청나라에 대한 위기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최고의 천연요새로 알려진 영변의 鐵甕城도 보이고 있다. 타원형의 노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평안도 북쪽으로는 압록강이, 가운데에는 청천강이, 대동강이 흐르고 있다. 서해에는 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크기는 고려하지 않았으며,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도록 그렸다.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평안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평안도 지도와도 전체적인 구도가 비슷하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청나라 땅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산줄기와 강줄기 및 마을 이름을 적어 놓았다.(양윤정)

  • 평안도 주기 (平安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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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압록강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平安道〉 지도의 경우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으나, 본 지도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리고 있다. 즉 세로가 길기 때문에 압록강 주변의 정보를 자세히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 강줄기가 거의 일직선으로 그려지면서 왜곡된 부분이 많이 생기고 있다. 또한 가산 남쪽 부분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平安道〉 지도보다 많은 정보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산지 부분에 있어 〈平安道〉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峴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특히 〈平安道〉 지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압록강 이북지역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폐사군현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섬에 대한 정보는 〈평안도〉 지도와 마찬가지로 크기는 고려하지 않고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도록 그렸다.(양윤정)

  • 평양윤 (平壤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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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 부분에 수록된 〈平壤尹〉으로, 현재의 평양특별시 부근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규장각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평양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다. 그리고 본 지도책에 수록되어 있는 평안도의 군현 지도 대부분이 《해동지도》와 유사한 반면에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평양부 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산지의 표현 양식과 색감부분도 다른 지도와는 다르다. 이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연관성 문제라기 보디는 후에 《해동지도》에 평양부 지도가 삽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여지도》와는 다소 차이점이 보인다. 《여지도》에서는 왼쪽 위에 西海와의 경계선이 하천과 동일한 선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 북한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증산군과 평원군 사이의 해안가로서 西海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이 맞다. 본 지도의 필사 시 그런 사실을 잘못 이해하여 해안선을 하천처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해안선이라고 인식했다면 대동강과 육지의 경계선처럼 진한 실선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본 지도와 《광여도》에서는 이 부분이 해안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런 부분을 볼 때 《광여도》와 본 지도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간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평양성에서도 여러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성곽 북쪽의 普通門은 글씨 왼쪽에 있는 것이고, 그 아래의 문은 七星門이다. 이 부분 역시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런 오류가 나타나지 않으며, 본 지도보다 훨씬 정교하고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에 보이는 內城은 본래 高麗 때 쌓은 성으로 1397년(태조 6)에 개축한 바 있었고, 그 후 1624년(인조 2)에 서남쪽을 줄이고, 개축하였다. 내성에는 대동문, 주작문(남문), 정해문, 칠성문, 장경문 등 5개의 성문과 대동문의 門樓인 相灝樓, 超然臺, 反求亭, 鍊光亭이 있다. 성안에는 上衙·二衙, 中營 建物, 武器庫와 倉庫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건물 모양이나 섬세함에 있어서는 본 지도가 《광여도》 보다 떨어지고 있다. 中城 남쪽에 위치한 것이 外城인데 이 곳에는 箕子井과 井田의 遺制가 남아 있다. 내성의 동쪽에 보이는 성은 北城인데, 1714년(숙종 40)에 監司 閔鎭遠이 쌓았다. 門樓인 浮碧樓와 乙密臺가 있고, 성 안에는 永明寺와 文武井 및 고구려 동명왕 설화와 관련 있는 麒麟窟이 있다. 동쪽 長安城에는 고구려 궁인 안학궁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동강가에 있는 酒岩, 岩, 朝天石, 德岩 등은 모두 옛 古事에 관련된 유명한 바위들이다. 府城 북쪽 兎山 위에 箕子墓가 있다. 正陽門 안에 있는 仁賢書院은 1564(명종 19)에 세워지고, 1608년(선조 41)에 사액 받은 서원이다. (양윤정)

  • 평양윤 주기 (平壤尹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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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 부분에 수록된 〈平壤尹〉으로, 현재의 평양특별시 부근에 해당한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규장각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평양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다. 그리고 본 지도책에 수록되어 있는 평안도의 군현 지도 대부분이 《해동지도》와 유사한 반면에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평양부 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산지의 표현 양식과 색감부분도 다른 지도와는 다르다. 이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연관성 문제라기 보디는 후에 《해동지도》에 평양부 지도가 삽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여지도》와는 다소 차이점이 보인다. 《여지도》에서는 왼쪽 위에 西海와의 경계선이 하천과 동일한 선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 북한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증산군과 평원군 사이의 해안가로서 西海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이 맞다. 본 지도의 필사 시 그런 사실을 잘못 이해하여 해안선을 하천처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해안선이라고 인식했다면 대동강과 육지의 경계선처럼 진한 실선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본 지도와 《광여도》에서는 이 부분이 해안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런 부분을 볼 때 《광여도》와 본 지도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간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평양성에서도 여러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성곽 북쪽의 普通門은 글씨 왼쪽에 있는 것이고, 그 아래의 문은 七星門이다. 이 부분 역시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런 오류가 나타나지 않으며, 본 지도보다 훨씬 정교하고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에 보이는 內城은 본래 高麗 때 쌓은 성으로 1397년(태조 6)에 개축한 바 있었고, 그 후 1624년(인조 2)에 서남쪽을 줄이고, 개축하였다. 내성에는 대동문, 주작문(남문), 정해문, 칠성문, 장경문 등 5개의 성문과 대동문의 門樓인 相灝樓, 超然臺, 反求亭, 鍊光亭이 있다. 성안에는 上衙·二衙, 中營 建物, 武器庫와 倉庫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건물 모양이나 섬세함에 있어서는 본 지도가 《광여도》 보다 떨어지고 있다. 中城 남쪽에 위치한 것이 外城인데 이 곳에는 箕子井과 井田의 遺制가 남아 있다. 내성의 동쪽에 보이는 성은 北城인데, 1714년(숙종 40)에 監司 閔鎭遠이 쌓았다. 門樓인 浮碧樓와 乙密臺가 있고, 성 안에는 永明寺와 文武井 및 고구려 동명왕 설화와 관련 있는 麒麟窟이 있다. 동쪽 長安城에는 고구려 궁인 안학궁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동강가에 있는 酒岩, 岩, 朝天石, 德岩 등은 모두 옛 古事에 관련된 유명한 바위들이다. 府城 북쪽 兎山 위에 箕子墓가 있다. 正陽門 안에 있는 仁賢書院은 1564(명종 19)에 세워지고, 1608년(선조 41)에 사액 받은 서원이다. (양윤정)

  • 폐사군 (廢四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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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廢四郡〉 지도로, 지금의 자강도 자성군, 중강군, 화평군과 량강도 김형직군 일대 지역이다. 四郡의 설치는 1416년(태종 16)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閭延郡을 설치하여 咸吉道로부터 평안도로 이관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1433년(세종 15)에 慈城郡을, 1440년(세종 22)에 茂昌縣을, 1443년(세종 25) 虞芮郡을 설치하면서 四郡의 설치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땅을 잃어버린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유지·확보가 어려워지자 145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 3군을 폐지하고 주민을 강계·구성 2부로 옮겼다. 또한 1459년(세조 5)에는 자성군마저 폐지하여 주민을 강계로 옮긴 후 廢四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군현 新設 논의가 계속되다가 새로 들어가 사는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1869년(고종 6)에 자성군·후창군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지도에는 폐사군의 위치와 이곳을 관할하던 강계부 및관할 鎭의 표시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폐사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폐사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여지도》와 비슷하게 폐사군과 鎭堡가 동일하게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오른쪽의 滿浦鎭과 伐登浦鎭은 노란색이라고 보기 어렵고, 江界 위쪽의 板秋는 楸坡鎭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광여도》에서는 폐사군은 분홍색 사각형으로, 鎭堡는 노란색 사각형으로 그려 구분해주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 달리 楸坡鎭도 올바르게 표시되어 있다. 왼쪽의 압록강 건너에 표시되어 있는 皇城은 현재 고구려의 수도였던 國內城으로 밝혀져 있다. 전체적인 구도는 사실에 가까운 편이나 너무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이 부분은 생략되어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오른쪽 위에는 압록강이 발원하는 白頭山이 적혀 있기도 하다. 백두산은 훨씬 동쪽에 있지만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지도에서도 백두산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양윤정)

  • 폐사군 주기 (廢四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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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廢四郡〉 지도로, 지금의 자강도 자성군, 중강군, 화평군과 량강도 김형직군 일대 지역이다. 四郡의 설치는 1416년(태종 16)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閭延郡을 설치하여 咸吉道로부터 평안도로 이관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1433년(세종 15)에 慈城郡을, 1440년(세종 22)에 茂昌縣을, 1443년(세종 25) 虞芮郡을 설치하면서 四郡의 설치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땅을 잃어버린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유지·확보가 어려워지자 145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 3군을 폐지하고 주민을 강계·구성 2부로 옮겼다. 또한 1459년(세조 5)에는 자성군마저 폐지하여 주민을 강계로 옮긴 후 廢四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군현 新設 논의가 계속되다가 새로 들어가 사는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1869년(고종 6)에 자성군·후창군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지도에는 폐사군의 위치와 이곳을 관할하던 강계부 및관할 鎭의 표시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폐사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폐사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여지도》와 비슷하게 폐사군과 鎭堡가 동일하게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오른쪽의 滿浦鎭과 伐登浦鎭은 노란색이라고 보기 어렵고, 江界 위쪽의 板秋는 楸坡鎭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광여도》에서는 폐사군은 분홍색 사각형으로, 鎭堡는 노란색 사각형으로 그려 구분해주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 달리 楸坡鎭도 올바르게 표시되어 있다. 왼쪽의 압록강 건너에 표시되어 있는 皇城은 현재 고구려의 수도였던 國內城으로 밝혀져 있다. 전체적인 구도는 사실에 가까운 편이나 너무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이 부분은 생략되어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오른쪽 위에는 압록강이 발원하는 白頭山이 적혀 있기도 하다. 백두산은 훨씬 동쪽에 있지만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지도에서도 백두산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양윤정)

  • 함종부 (咸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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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咸從府〉 지도로,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남쪽 일대이다. 종이에 맞춰 고을을 그리다 보니까 다른 고을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 이 마을은 비교적 작은 편이다. 그러나 1721년(경종 1)에 경종 宣懿王后 魚氏의 貫鄕이라 하여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함종현, 《여지도(古4790-58)》의 함종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함종부 지도와도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咸從은 원래 縣이었는데, 1721년(경종 1)에 중전이었던 宣懿王后 魚氏의 본관 지역이라고 하여 府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본 지도와 《해동지도》, 그리고 《여지도》는 1721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군현의 승격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부분을 제외하면 본 지도의 대부분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읍치 부분은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본 지도와 유사하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마찬가지로 客舍, 衙舍, 鄕校, 그리고 邑倉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鄕廳이 추가되었으며 邑倉이 倉으로 표시되어 있다. 《광여도》는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며, 《여지도》의 경우에는 倉이라는 명칭이 생략되어 있다. 왼쪽의 二岳島와 鶴岩 부분도 《여지도》에는 三岳島와 岩鶴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여지도서』에 의하면 본 지도가 맞는 것이며, 《해동지도》는 본 지도와 같게 표기되어 있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여지도》처럼 표기되어 있다. 이 같은 점을 보았을 때 《광여도》는 본 지도와 《여지도》를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서 지도를 필사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지도에 옮기는 과정에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양윤정)

  • 함종부 주기 (咸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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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咸從府〉 지도로,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남쪽 일대이다. 종이에 맞춰 고을을 그리다 보니까 다른 고을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 이 마을은 비교적 작은 편이다. 그러나 1721년(경종 1)에 경종 宣懿王后 魚氏의 貫鄕이라 하여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된 곳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함종현, 《여지도(古4790-58)》의 함종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함종부 지도와도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咸從은 원래 縣이었는데, 1721년(경종 1)에 중전이었던 宣懿王后 魚氏의 본관 지역이라고 하여 府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본 지도와 《해동지도》, 그리고 《여지도》는 1721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군현의 승격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부분을 제외하면 본 지도의 대부분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일치하며, 읍치 부분은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본 지도와 유사하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마찬가지로 客舍, 衙舍, 鄕校, 그리고 邑倉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鄕廳이 추가되었으며 邑倉이 倉으로 표시되어 있다. 《광여도》는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며, 《여지도》의 경우에는 倉이라는 명칭이 생략되어 있다. 왼쪽의 二岳島와 鶴岩 부분도 《여지도》에는 三岳島와 岩鶴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여지도서』에 의하면 본 지도가 맞는 것이며, 《해동지도》는 본 지도와 같게 표기되어 있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여지도》처럼 표기되어 있다. 이 같은 점을 보았을 때 《광여도》는 본 지도와 《여지도》를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서 지도를 필사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지도에 옮기는 과정에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양윤정)

  • 희천군 (熙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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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熙川郡〉으로, 지금의 자강도 희천시, 동신군 일대이다. 희천군의 북쪽은 높은 산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어 지도상에 그려진 산지를 보면 마치 폭포가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희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희천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희천군의 실제적인 모습은 마름모(◇) 형태에 가깝다. 이것을 직사각형의 형태(□)로 그리고, 읍치를 다른 지역보다 확대해서 그리다보니까 몇 가지 왜곡이 발생하였다. 오른쪽 위의 甲峴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왼쪽 아래의 寧邊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청천강 본류이다. 청천강 본류의 실제 유로는 대략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남류하다가 읍치 부근에서 서류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하천의 남쪽 부분도 북쪽 부분과 비슷한 규모임에도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이런 오류는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에서 오른쪽의 寧邊界를 寧遠界으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오른쪽의 新倉 부근에는 寧遠 방면에서 하천이 흘러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오류 역시 《해동지도》를 비롯하여 《여지도》와 《광여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가 서로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본 지도와 《해동지도》를 바탕으로 《여지도》와 《광여도》가 필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윤정)

  • 희천군 주기 (熙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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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熙川郡〉으로, 지금의 자강도 희천시, 동신군 일대이다. 희천군의 북쪽은 높은 산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어 지도상에 그려진 산지를 보면 마치 폭포가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희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희천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희천군의 실제적인 모습은 마름모(◇) 형태에 가깝다. 이것을 직사각형의 형태(□)로 그리고, 읍치를 다른 지역보다 확대해서 그리다보니까 몇 가지 왜곡이 발생하였다. 오른쪽 위의 甲峴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왼쪽 아래의 寧邊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청천강 본류이다. 청천강 본류의 실제 유로는 대략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남류하다가 읍치 부근에서 서류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하천의 남쪽 부분도 북쪽 부분과 비슷한 규모임에도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이런 오류는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에서 오른쪽의 寧邊界를 寧遠界으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오른쪽의 新倉 부근에는 寧遠 방면에서 하천이 흘러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오류 역시 《해동지도》를 비롯하여 《여지도》와 《광여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를 포함한 4종의 지도가 서로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본 지도와 《해동지도》를 바탕으로 《여지도》와 《광여도》가 필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윤정)

  • 영동현 주기 (永同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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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현은 영동군의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여의리를 제외한 용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동읍의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동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의 沃川界에서 흘러와 위쪽의 赤登津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며, 오른쪽 아래의 天馬岺에서 발원하여 北一面을 지나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초강천이다. 초강천은 본 지도의 표현과 달리 황간현에서 발원하여 상당부분을 거쳐 영동현의 땅으로 들어오는데,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또한 초강천 상류와 그 왼쪽의 하천 사이에는 三峯山(930.2m), 천마령(925.6m) 등의 높은 산줄기에 의해 나누어져 있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점은 앞의 3개 지도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영동현 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초강천이 蟾岩 부근까지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어 실제 사실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지도 아래쪽의 龍化倉은 현재의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 부근에 있던 것이다. 이 지역은 금강 지류 중의 하나인 남대천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 지도에는 남대천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 북쪽과는 산줄기에 의해 분리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그려 유역권이 다름을 짐작할 수 있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해당 지도에는 없어 새롭게 필사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영동 지도이며, 본 지도나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첨가되어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성주목 (星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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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목은 현재의 성주군과 고령군, 달성군, 김천시의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지도에 두개의 성이 보이는데 왼쪽은 독용산성이며 오른쪽이 읍성이다. 산성과 읍성이 병렬적으로 그려져 이중구조처럼 인식된다. 읍성과 산성 모두 객사와 군기고를 갖추고 있다. 읍성은 현재의 성주읍 중심부 경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독용산성은 금수면과 가천면의 경계인 독용산에 있었다. 산성은 1675년(숙종 1)에 쌓았던 것으로 그 안에 사찰, 장대가 보인다. 지금은 그 근처에 성주댐이 들어서 있다. 행정구역으로 面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지도에서는 坊을 적고 있다. 이 지도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뻗어나온 것이며 대가천, 이천, 백천 등이 그려져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는데 낙동강은 성주목의 동쪽 지역에 해당하며 남북으로 흐르는데 이 지도에서는 편의상 아래쪽에 그리고 있다. 서쪽을 위로 그린 지도로 보인다. 성주에는 천곡서원, 회연서원 등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의 명칭을 적지 않고 서원이라고 표시만 하고 사찰의 이름은 다 적고 있다. 성문과 연결되는 도로를 그리면서도 역원의 위치는 표시하지 않았고 봉대와 倉도 명칭을 적지 않고 표시하였다. 낙동강에도 나루터가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 다른 군현 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여산부 (礪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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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은 礪良縣과 朗山縣이 합쳐져 생긴 지명이다. 현재의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가 읍치에 해당하며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 논산군 연무읍 일부가 관할 구역이었다. 읍치 중심부를 1번 국도가 통과하며 호남고속국도 여산휴게소 북서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작은 군현으로 이 지도도 아주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天壺山으로 표시된 호산이 진산이 된다. 근처에 보물 177호 천호동굴이 있다. 현재 여산리 동남쪽 행정구역명이 호산리가 된다. 그 남쪽에 門峙가 표시되었는데 현재 문드러미재라고 불리는 곳이다. 용화산은 여산면 남서쪽의 342m의 산이다. 천호산은 여산 읍치의 동남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는 다르게 표시되었다. 그 맥이 읍치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용화산 서쪽에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430.2m의 미륵산이 있고 익산미륵산성이 있었다. 그 북쪽에 있는 것이 이 지도에 표시된 심곡사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팔괘정, 죽림서원, 해창이 함께 그려져 있다. 팔괘정은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던 정자로 인조 때 김장생이 황산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세운 정자로 창살을 八卦로 만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죽림서원은 그 앞에 있던 서원으로 처음에는 황산서원으로 불렸다. 1626년(인조 4)에 처음 지었으며 1665년(현종 6)에 죽림서원으로 사액받았다. 해창은 이 지역이 바다와 접한 곳이라 붙여진 것이다.(이현군)

  • 순안현 (順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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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安縣〉으로, 현재 북한의 순안비행장으로 알려진 평양특별시 순안구역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안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순안현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星山書院이며, 이는 1647년(인조 25)에 세워져 1696년(숙종 22)에 사액을 받았고, 정몽주와 한우신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輿地圖書』에 따르면 읍치에 보이는 雲影池는 치소에서 남쪽으로 2리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상하 두 개의 저수지로 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의 경우 지명에 차이가 다소 보인다. 왼쪽의 順和面이 《여지도》에는 和順面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冬花日面은 順和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역시 본 지도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본 지도의 읍치 모습은 《해동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즉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訓練과 擺撥, 鄕廳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읍치의 건물이 4개밖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본 지도에는 무려 13개나 된다. 왼쪽의 大船串烽도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그러나 이 부분들은 《여지도》와 《광여도》에 반영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가 다르게 그려진 부분도 있는데, 왼쪽의 鎭里面에 대한 표현이 있다. 진리면은 원래 永柔와 平壤의 경계를 넘어가 해안가에 있는 越境地이다. 본 지도의 경우 永柔界와 平壤界가 진리면과 순화면 사이를 가르듯이 적혀 있고, 산줄기가 이어져 있지 않아 월경지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영유계와 평양계가 적혀 있는 방식뿐만 아니라 마치 산줄기가 이어진 것처럼 그려져 있어 진리면이 월경지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여지도》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 시 두 지도를 모두 참고하여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윤정)

  • 앞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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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앞표지 1면입니다.

  • 연천현 주기 (漣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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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현은 현재의 연천군 연천읍과 중면, 황지리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천읍 읍내리에 있었다. 가장 왼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가장 오른쪽이 한탄강이며, 가운데의 하천이 차탄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고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곳곳에 大路, 中路, 小路 등 도로가 있었던 지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대로, 중로, 소로 등의 문자들은 거의 삭제되어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을 필사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본 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오른쪽에는 현재의 재인폭포가 紫烟瀑으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폭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는 재인폭포를 실제로 보고 그린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자의적으로 재인폭포의 모습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영춘현 (永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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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현은 단양군의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춘면의 상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쪽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남한강변에는 北津과 南津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나루임과 동시에 포구로서 기능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처럼 한강이나 남한강 등의 명칭을 사용하기보다는 해당 지역에서 중요하게 인식된 나루나 포구 또는 여울 등을 하천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 지도에는 읍치에 客舍를 비롯하여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6개가, 《해동지도》에는 3개만이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영춘현 지도도 전체적인 구도가 본 지도와 거의 같아 동일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읍치에 그려진 건물의 수가 본 지도와 동일하게 7개이며, 이를 통해 볼 때 원본에 가까운 것은 본 지도나 《호서지도》의 영춘현 지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광여도》와 《여지도》 계통의 필사자는 실수로 건물 1개를 빼먹은 것으로, 《해동지도》의 필사자는 향교와 객사 및 아사 등 중요 건물만 선별하여 수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해당 지도에는 없어 새롭게 필사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도》의 영춘 지도이며, 본 지도나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첨가되어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성주목 주기 (星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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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목은 현재의 성주군과 고령군, 달성군, 김천시의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지도에 두개의 성이 보이는데 왼쪽은 독용산성이며 오른쪽이 읍성이다. 산성과 읍성이 병렬적으로 그려져 이중구조처럼 인식된다. 읍성과 산성 모두 객사와 군기고를 갖추고 있다. 읍성은 현재의 성주읍 중심부 경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독용산성은 금수면과 가천면의 경계인 독용산에 있었다. 산성은 1675년(숙종 1)에 쌓았던 것으로 그 안에 사찰, 장대가 보인다. 지금은 그 근처에 성주댐이 들어서 있다. 행정구역으로 面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지도에서는 坊을 적고 있다. 이 지도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뻗어나온 것이며 대가천, 이천, 백천 등이 그려져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는데 낙동강은 성주목의 동쪽 지역에 해당하며 남북으로 흐르는데 이 지도에서는 편의상 아래쪽에 그리고 있다. 서쪽을 위로 그린 지도로 보인다. 성주에는 천곡서원, 회연서원 등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의 명칭을 적지 않고 서원이라고 표시만 하고 사찰의 이름은 다 적고 있다. 성문과 연결되는 도로를 그리면서도 역원의 위치는 표시하지 않았고 봉대와 倉도 명칭을 적지 않고 표시하였다. 낙동강에도 나루터가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 다른 군현 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여산부 주기 (礪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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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은 礪良縣과 朗山縣이 합쳐져 생긴 지명이다. 현재의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가 읍치에 해당하며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 논산군 연무읍 일부가 관할 구역이었다. 읍치 중심부를 1번 국도가 통과하며 호남고속국도 여산휴게소 북서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작은 군현으로 이 지도도 아주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天壺山으로 표시된 호산이 진산이 된다. 근처에 보물 177호 천호동굴이 있다. 현재 여산리 동남쪽 행정구역명이 호산리가 된다. 그 남쪽에 門峙가 표시되었는데 현재 문드러미재라고 불리는 곳이다. 용화산은 여산면 남서쪽의 342m의 산이다. 천호산은 여산 읍치의 동남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는 다르게 표시되었다. 그 맥이 읍치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용화산 서쪽에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430.2m의 미륵산이 있고 익산미륵산성이 있었다. 그 북쪽에 있는 것이 이 지도에 표시된 심곡사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팔괘정, 죽림서원, 해창이 함께 그려져 있다. 팔괘정은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던 정자로 인조 때 김장생이 황산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세운 정자로 창살을 八卦로 만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죽림서원은 그 앞에 있던 서원으로 처음에는 황산서원으로 불렸다. 1626년(인조 4)에 처음 지었으며 1665년(현종 6)에 죽림서원으로 사액받았다. 해창은 이 지역이 바다와 접한 곳이라 붙여진 것이다.(이현군)

  • 순안현 주기 (順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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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安縣〉으로, 현재 북한의 순안비행장으로 알려진 평양특별시 순안구역 일대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안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순안현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星山書院이며, 이는 1647년(인조 25)에 세워져 1696년(숙종 22)에 사액을 받았고, 정몽주와 한우신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輿地圖書』에 따르면 읍치에 보이는 雲影池는 치소에서 남쪽으로 2리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상하 두 개의 저수지로 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의 경우 지명에 차이가 다소 보인다. 왼쪽의 順和面이 《여지도》에는 和順面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冬花日面은 順和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광여도》 역시 본 지도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본 지도의 읍치 모습은 《해동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즉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訓練과 擺撥, 鄕廳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읍치의 건물이 4개밖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본 지도에는 무려 13개나 된다. 왼쪽의 大船串烽도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그러나 이 부분들은 《여지도》와 《광여도》에 반영되어 있다. 본 지도와 《여지도》가 다르게 그려진 부분도 있는데, 왼쪽의 鎭里面에 대한 표현이 있다. 진리면은 원래 永柔와 平壤의 경계를 넘어가 해안가에 있는 越境地이다. 본 지도의 경우 永柔界와 平壤界가 진리면과 순화면 사이를 가르듯이 적혀 있고, 산줄기가 이어져 있지 않아 월경지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영유계와 평양계가 적혀 있는 방식뿐만 아니라 마치 산줄기가 이어진 것처럼 그려져 있어 진리면이 월경지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은 모습이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여지도》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 시 두 지도를 모두 참고하여 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윤정)

  • 앞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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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앞표지 2면입니다.

  • 영종 (永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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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종진은 원래 현재의 화성시 서신면에 있던 정4품 萬戶鎭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수도 한양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1653년(효종 4)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영종도로 옮겼고, 1681년(숙종 7)에는 종3품의 僉使鎭으로 승격되었다. 1690년(숙종 16)에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 그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에 종2품의 防禦使로 승격되었다. 영종진의 지도가 특별히 제작되어 군현지도와 함께 수록된 것은 이와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의 가운데에는 원래의 영종도 명칭과 관련되어 있는 古紫燕縣基가 표시되어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지리지에서는 자연현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본 지도는 전체적인 구도와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종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약간 더 상세한 도로 표시가 들어가 있다. 또한 본 지도에 수록된 주기의 내용이 《광여도》와 《여지도》의  주기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의 주기와는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 등의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꾸었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나 그 필사본을 다시 필사하면서 주기는 그대로 따르고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종진의 객사와 아사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중산동 구읍 마을에 있었는데, 현재는 본 지도와 달리 완전히 영종도와 연결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영종도와 그 주변의 섬이 밀물(潮退) 때 육지로 연결되고 있음(成陸)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영종진에 소속된 섬 주변 이외에는 마치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둔 육지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넓은 바다이다. 그림 지도의 경우 서로 연결되는 지역은 비록 멀리 있더라도 해당 방향의 가까에 그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지도에는 禁山이 3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戰船에 소용되는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하던 지역이었다.(이기봉)

  • 영춘현 주기 (永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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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현은 단양군의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춘면의 상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쪽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남한강변에는 北津과 南津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나루임과 동시에 포구로서 기능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처럼 한강이나 남한강 등의 명칭을 사용하기보다는 해당 지역에서 중요하게 인식된 나루나 포구 또는 여울 등을 하천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 지도에는 읍치에 客舍를 비롯하여 총 7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6개가, 《해동지도》에는 3개만이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영춘현 지도도 전체적인 구도가 본 지도와 거의 같아 동일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읍치에 그려진 건물의 수가 본 지도와 동일하게 7개이며, 이를 통해 볼 때 원본에 가까운 것은 본 지도나 《호서지도》의 영춘현 지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광여도》와 《여지도》 계통의 필사자는 실수로 건물 1개를 빼먹은 것으로, 《해동지도》의 필사자는 향교와 객사 및 아사 등 중요 건물만 선별하여 수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해당 지도에는 없어 새롭게 필사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도》의 영춘 지도이며, 본 지도나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첨가되어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갑산부 (甲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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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의 최상류에 위치하였던 함경도 갑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군과 풍산군의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량강도의 보천군·혜산시·운흥군·갑산군·풍서군 전체와 삼지연군·삼수군·김형권군의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뒤쪽에 백두산과 天池를 실경으로 그렸고, 이곳 부근에서 발원하는 압록강의 갑입곡류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백두산의 동쪽으로는 두만강의 일부 유로가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갑산부 해제 참조). 갑산부를 둘러싼 산지의 모습이 이곳의 험준한 지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곳 산지에서 발원한 많은 하천들이 압록강으로 유입한다. 상류부에서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이영수, 가림천 등을 묘사하고 있다. 갑산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류는 남쪽의 太白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으로 지금의 허천강에 해당된다. 허천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2차 지류 중 가장 큰 유로는 지금의 황수원강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우안으로 합류하는 여러 하천은 운룡천, 회인천, 진동천 등이다. 읍치는 허천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3,003尺)과 함께 그렸으며 진산인 天鳳山에는 사찰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북청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주요 도로는 압록강과 두만강변을 따라 연결되는 도로로 惠山驛을 경유한다. 北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雲龍, 仁同, 鎭東驛 등을 경유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308戶, 田 1,333結93負로 기재되어 있고 畓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인구가 매우 희박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갑산부 주기 (甲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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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의 최상류에 위치하였던 함경도 갑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군과 풍산군의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량강도의 보천군·혜산시·운흥군·갑산군·풍서군 전체와 삼지연군·삼수군·김형권군의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뒤쪽에 백두산과 天池를 실경으로 그렸고, 이곳 부근에서 발원하는 압록강의 갑입곡류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백두산의 동쪽으로는 두만강의 일부 유로가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갑산부 해제 참조). 갑산부를 둘러싼 산지의 모습이 이곳의 험준한 지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곳 산지에서 발원한 많은 하천들이 압록강으로 유입한다. 상류부에서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이영수, 가림천 등을 묘사하고 있다. 갑산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류는 남쪽의 太白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압록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으로 지금의 허천강에 해당된다. 허천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2차 지류 중 가장 큰 유로는 지금의 황수원강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우안으로 합류하는 여러 하천은 운룡천, 회인천, 진동천 등이다. 읍치는 허천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3,003尺)과 함께 그렸으며 진산인 天鳳山에는 사찰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북청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주요 도로는 압록강과 두만강변을 따라 연결되는 도로로 惠山驛을 경유한다. 北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雲龍, 仁同, 鎭東驛 등을 경유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308戶, 田 1,333結93負로 기재되어 있고 畓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인구가 매우 희박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경성부 (鏡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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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경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경성부는 일제시대 경성군과 청진부로 분리되었고 일부 지역은 명천군에 귀속되었다. 지금은 함경북도 경성군·어랑군과 청진시 서쪽 및 화성군 동쪽 지역이 해당된다. 부의 동쪽에 동해가 있으나 지도에서는 아래쪽에 해안선이 그려져 있어 지도의 윗부분이 서쪽에 해당된다. 서쪽으로 무산과는 험준한 산지로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곳에서 산지가 부의 서쪽과 남쪽을 감싸고 있으며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우측 立岩 일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청진시을 지나는 나북천이며 읍치 좌측에 묘사된 하천은 오촌천으로 보인다. 장백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으로 두 개의 지류가 묘사되어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주을천과 보로천에 해당된다. 寶化驛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주북천에 해당되며 八景坮로 유입하는 하천은 어랑천에 해당된다. 甑山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명천의 동면을 흐르는 명간천으로 생각된다. 한편 팔경대 부근에 형성된 석호인 長淵湖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부근에 서련호와 동련호로 추정되는 호수가 그려져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 4,610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려져 있으며 우측에 진산인 祖白山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경성군 경성읍 일대이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성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지도에 8개의 역이 적색의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고 이중 지도 우측에 기재된 輸城驛은 18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도로는 읍치에서 이 유성역을 거쳐 북으로는 부령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朱村驛을 거쳐 명천으로 연결된다. 甫老驛, 寶化驛, 森森坡를 잇는 도로가 내륙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51戶이며 田畓 면적이 1,948結70負8束으로 함께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경성부 주기 (鏡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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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경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경성부는 일제시대 경성군과 청진부로 분리되었고 일부 지역은 명천군에 귀속되었다. 지금은 함경북도 경성군·어랑군과 청진시 서쪽 및 화성군 동쪽 지역이 해당된다. 부의 동쪽에 동해가 있으나 지도에서는 아래쪽에 해안선이 그려져 있어 지도의 윗부분이 서쪽에 해당된다. 서쪽으로 무산과는 험준한 산지로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곳에서 산지가 부의 서쪽과 남쪽을 감싸고 있으며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우측 立岩 일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청진시을 지나는 나북천이며 읍치 좌측에 묘사된 하천은 오촌천으로 보인다. 장백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으로 두 개의 지류가 묘사되어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주을천과 보로천에 해당된다. 寶化驛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주북천에 해당되며 八景坮로 유입하는 하천은 어랑천에 해당된다. 甑山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명천의 동면을 흐르는 명간천으로 생각된다. 한편 팔경대 부근에 형성된 석호인 長淵湖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부근에 서련호와 동련호로 추정되는 호수가 그려져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 4,610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려져 있으며 우측에 진산인 祖白山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경성군 경성읍 일대이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성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지도에 8개의 역이 적색의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고 이중 지도 우측에 기재된 輸城驛은 18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도로는 읍치에서 이 유성역을 거쳐 북으로는 부령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朱村驛을 거쳐 명천으로 연결된다. 甫老驛, 寶化驛, 森森坡를 잇는 도로가 내륙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51戶이며 田畓 면적이 1,948結70負8束으로 함께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경원부 (慶源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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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류에 위치하였던 경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일부 지역이 경흥군과 온성군으로 경원군과 온성군 일부로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북도 새별군과 은덕군 서북부, 나진시 동북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금의 경흥군에 있던 비월지는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의 중앙에 위에서 아래쪽으로 두만강을 그렸으며 청나라에서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厚春江의 지류를 그렸다. 부의 서쪽에 산지를 표시하였고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여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한다. 지도의 중앙 윗부분에 성곽(둘레 10,475尺)과 함께 그려진 읍치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會介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송천으로 보인다. 그 아래 소규모 하천은 지금의 농포천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종성에서 유입하여 동류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하천(吾美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오룡천이다. 방안식 지도에서 경흥으로 유입하는 아오지천의 상류부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두만강을 경계로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관방 관련 지명뿐만 아니라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북과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의 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경로에 6개의 역이 표시되어 있다. 남쪽으로 安原驛을 거쳐 乾元驛적-阿山驛색을 지나 경흥으로 이어지며 古元乾驛을 지나는 도로는 종성으로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訓戎역을 지나는 도로는 穩城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田 3,314結48負, 畓 39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경원부 주기 (慶源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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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류에 위치하였던 경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일부 지역이 경흥군과 온성군으로 경원군과 온성군 일부로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북도 새별군과 은덕군 서북부, 나진시 동북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금의 경흥군에 있던 비월지는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의 중앙에 위에서 아래쪽으로 두만강을 그렸으며 청나라에서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厚春江의 지류를 그렸다. 부의 서쪽에 산지를 표시하였고 이곳에서 여러 하천이 발원하여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한다. 지도의 중앙 윗부분에 성곽(둘레 10,475尺)과 함께 그려진 읍치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會介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송천으로 보인다. 그 아래 소규모 하천은 지금의 농포천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종성에서 유입하여 동류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하천(吾美川으로 기재)은 지금의 오룡천이다. 방안식 지도에서 경흥으로 유입하는 아오지천의 상류부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두만강을 경계로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관방 관련 지명뿐만 아니라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북과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의 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경로에 6개의 역이 표시되어 있다. 남쪽으로 安原驛을 거쳐 乾元驛적-阿山驛색을 지나 경흥으로 이어지며 古元乾驛을 지나는 도로는 종성으로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訓戎역을 지나는 도로는 穩城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田 3,314結48負, 畓 39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경흥부 (慶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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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구에 위치하였던 경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일제시대 慶源府의 일부 지역( 웅기읍과 풍해면 일대)을 포함하여 경흥군으로 되었다. 지금 경흥 지명은 없어지고 함경북도 은덕군의 동쪽 부분과 라선시의 동쪽 부분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부의 서쪽으로부터 곡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이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으며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흥부 해제 참조) 이는 당시 두만강이 국경하천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상류부에서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아오지천을 그린 것이며, 白岳山 부근에서 북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포항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赤地湖에서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인 鹿屯島는 당시 조선영토였으나 지금은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다. 하천의 퇴적 작용으로 러시아의 육지부와 연결되어 있다. 후에 한국령으로 귀속되어야 할 섬이다. 지도 아래쪽에 그려져 있는 규모가 큰 湖水는 지금의 서번포와 동번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서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호수는 만포를 묘사한 것이다. 읍치는 두만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4,525尺)과 함께 묘사되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5곳의 驛이 표시되어 있다. 西水羅驛으로부터 두만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는 造山驛, 撫夷驛으로 연결된다. 내륙으로는 읍치에서 阿吾地驛과 德明驛을 거쳐 경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578戶, 田 897結이 기록되어 있고 畓 면적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김기혁)

  • 경흥부 주기 (慶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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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단의 두만강 하구에 위치하였던 경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일제시대 慶源府의 일부 지역( 웅기읍과 풍해면 일대)을 포함하여 경흥군으로 되었다. 지금 경흥 지명은 없어지고 함경북도 은덕군의 동쪽 부분과 라선시의 동쪽 부분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부의 서쪽으로부터 곡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청나라와의 국경 하천이기 때문에 관방 관련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으며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경흥부 해제 참조) 이는 당시 두만강이 국경하천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상류부에서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아오지천을 그린 것이며, 白岳山 부근에서 북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포항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赤地湖에서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인 鹿屯島는 당시 조선영토였으나 지금은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다. 하천의 퇴적 작용으로 러시아의 육지부와 연결되어 있다. 후에 한국령으로 귀속되어야 할 섬이다. 지도 아래쪽에 그려져 있는 규모가 큰 湖水는 지금의 서번포와 동번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서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호수는 만포를 묘사한 것이다. 읍치는 두만강의 우안에 성곽(둘레 4,525尺)과 함께 묘사되었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5곳의 驛이 표시되어 있다. 西水羅驛으로부터 두만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는 造山驛, 撫夷驛으로 연결된다. 내륙으로는 읍치에서 阿吾地驛과 德明驛을 거쳐 경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578戶, 田 897結이 기록되어 있고 畓 면적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김기혁)

  • 고원군 (高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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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고원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원군은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 일대이다. 지도의 아래 부분에 동해를 그려 해안에 연한 군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구 일부만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이 서쪽이다. 지도의 윗부분에 평안도 양덕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험준하게 묘사한 반면 문천과 영흥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여러 고개 지명과 도로들이 그려져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군의 서에서 동으로 흘러 造進浦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弗南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山谷을 거쳐 석산창을 지나 읍치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덕지강을 그린 것이다. 土岺에서 발원하여 덕지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동천을 그린 듯 하다. 지도 좌측의 龍淵 부근에서 발원하여 문천과의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읍치는 조진포 가까이에 衙舍와 文廟를 통해 묘사하였다. 성곽은 그려져 있지 않다. 지금의 고원읍 조양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내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원군 해제 참조).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일부 도로는 생략되어 표현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고원군에 역으로 隘水驛이 그려져 있으나 지명으로만 隘水倉으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덕지강변을 따라 山谷과 隘水倉을 거쳐 弗南岺을 지나는 도로는 양덕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곳으로는 평원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 좌측에서도 양덕으로 연결되는 별도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문천에서 이곳 읍치를 지나 영흥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표현되어 있는데 지금 이 경로로 함경남부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5戶, 田 1,732結33負4束, 畓 198結42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기혁)

  • 고원군 주기 (高原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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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고원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원군은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 일대이다. 지도의 아래 부분에 동해를 그려 해안에 연한 군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구 일부만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이 서쪽이다. 지도의 윗부분에 평안도 양덕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험준하게 묘사한 반면 문천과 영흥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여러 고개 지명과 도로들이 그려져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군의 서에서 동으로 흘러 造進浦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弗南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山谷을 거쳐 석산창을 지나 읍치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덕지강을 그린 것이다. 土岺에서 발원하여 덕지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동천을 그린 듯 하다. 지도 좌측의 龍淵 부근에서 발원하여 문천과의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읍치는 조진포 가까이에 衙舍와 文廟를 통해 묘사하였다. 성곽은 그려져 있지 않다. 지금의 고원읍 조양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내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원군 해제 참조).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일부 도로는 생략되어 표현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고원군에 역으로 隘水驛이 그려져 있으나 지명으로만 隘水倉으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덕지강변을 따라 山谷과 隘水倉을 거쳐 弗南岺을 지나는 도로는 양덕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곳으로는 평원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 좌측에서도 양덕으로 연결되는 별도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문천에서 이곳 읍치를 지나 영흥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표현되어 있는데 지금 이 경로로 함경남부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5戶, 田 1,732結33負4束, 畓 198結42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기혁)

  • 길주목 (吉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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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길주목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길주목은 일제시대 길주군과 학성군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은 함경북도 길주군과 김책시, 화대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길주의 실제 모습은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배치하여 그리고 있다. 明川·端川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강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곳곳에 峰과 嶺 지명을 기재하였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여러 곳에 그려져 있으며 그중 지도의 중앙부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현재 길주군을 지나는 남대천이다. 斜下斗와 七榮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사학분천, 유위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남대천 외에도 여러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김책시(일제시대 학성군)를 지나는 임명천, 쌍포천, 한천천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남대천의 좌안에 성곽(둘레 ; 10,600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길주군 길주읍 일대이다.(기타 지명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길주목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우측으로 地境峙를 지나는 도로는 명천으로 연결된다. 위쪽으로는 남대천의 좌측 하안을 따라 西北驛을 거쳐 雲嶺으로 이어진다. 지도의 좌측으로는 臨溟驛, 鎭東驛, 城津驛, 胡打里驛을 거쳐 단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들이 여러 경로로 그려져 있다. 이들 도로중 마천령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주 관북대로의 일부였으며, 지금은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032戶, 田 4,144結2負5束, 畓 284結7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길주목 주기 (吉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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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지방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길주목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길주목은 일제시대 길주군과 학성군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은 함경북도 길주군과 김책시, 화대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길주의 실제 모습은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배치하여 그리고 있다. 明川·端川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매우 강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곳곳에 峰과 嶺 지명을 기재하였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여러 곳에 그려져 있으며 그중 지도의 중앙부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현재 길주군을 지나는 남대천이다. 斜下斗와 七榮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사학분천, 유위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남대천 외에도 여러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김책시(일제시대 학성군)를 지나는 임명천, 쌍포천, 한천천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남대천의 좌안에 성곽(둘레 ; 10,600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길주군 길주읍 일대이다.(기타 지명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길주목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우측으로 地境峙를 지나는 도로는 명천으로 연결된다. 위쪽으로는 남대천의 좌측 하안을 따라 西北驛을 거쳐 雲嶺으로 이어진다. 지도의 좌측으로는 臨溟驛, 鎭東驛, 城津驛, 胡打里驛을 거쳐 단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들이 여러 경로로 그려져 있다. 이들 도로중 마천령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주 관북대로의 일부였으며, 지금은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032戶, 田 4,144結2負5束, 畓 284結7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단천군 (端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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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단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단천군은 일제시대 일부 지역(풍산군 천남면)이 분리되었고,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허천군에 해당된다. 단천군을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길주, 북청, 갑산)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굴곡있게 표현하여 실제 모습과 유사하다. 해안에는 두 하천이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황토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 좌측의 新洞岺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동천을 묘사한 것이다. 馬騰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동쪽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대천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1,945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묘사되었다. 지금의 단천시 내문동, 금봉동 일대이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단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그려지 내용에 비해 북청으로 이어지는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이들 도로에 8곳의 역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서 길주로 이어지는 도로는 磨谷驛, 胡打里驛, 城津驛을 경유한다. 이 도로를 따라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북청으로 연결되는 해안도로는 谷口驛을 경유한다. 군내 두 하천을 따라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이들 도로는 갑산부로 연결된다. 남대천을 따라 황토령을 지나 갑산으로 연결된 도로에는 黃土坡驛과 雙靑驛이 있다. 북대천에 연한 도로에는 利洞驛과 吾乙只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45戶, 田 2,520結97負, 畓 205結3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단천군 주기 (端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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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단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단천군은 일제시대 일부 지역(풍산군 천남면)이 분리되었고,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허천군에 해당된다. 단천군을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길주, 북청, 갑산)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굴곡있게 표현하여 실제 모습과 유사하다. 해안에는 두 하천이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황토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 좌측의 新洞岺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동천을 묘사한 것이다. 馬騰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동쪽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대천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1,945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묘사되었다. 지금의 단천시 내문동, 금봉동 일대이다.(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지도의 단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그려지 내용에 비해 북청으로 이어지는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이들 도로에 8곳의 역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서 길주로 이어지는 도로는 磨谷驛, 胡打里驛, 城津驛을 경유한다. 이 도로를 따라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북청으로 연결되는 해안도로는 谷口驛을 경유한다. 군내 두 하천을 따라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이들 도로는 갑산부로 연결된다. 남대천을 따라 황토령을 지나 갑산으로 연결된 도로에는 黃土坡驛과 雙靑驛이 있다. 북대천에 연한 도로에는 利洞驛과 吾乙只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45戶, 田 2,520結97負, 畓 205結3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덕원부 (德源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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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덕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덕원부는 해체되어 원산시와 문천군 덕원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와 문천시의 남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동해안을 지도 아래에 배치하여 위쪽이 서쪽으로 그려져 있다. 덕원부를 둘러싼 산지에 여러 하천들이 동해안에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 왼쪽에서 영흥만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덕원면 일대를 흐르는 심포천이다. 赤川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적천천을 그린 것으로 지금 원산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제일 왼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하천은 지금 원산시의 남대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원산평(현재의 원산시 일대)에서 해안으로 돌출하여 連島로 표시된 반도는 지금의 갈마반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성곽과 함께 그려져 있으나 이면 주기의 내용과(‘城郭 無’)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읍치에는 衙舍와 함께 厲壇, 社稷壇, 鄕校, 客舍 등의 위치가 표현되어 있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덕원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門岩-馬息嶺을 연결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安邊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해안도로와 鳳林驛을 지나는 2곳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내륙에서 안변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심포천 연안을 거쳐 瀑布嶺을 지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 우측의 文川현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門岩과 龍倉 일대를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871戶, 田 面積은 1,250結69負, 畓은 185結37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군현의 규모에 비해 농경지 면적이 비교적 넒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덕원부 주기 (德源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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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덕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덕원부는 해체되어 원산시와 문천군 덕원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와 문천시의 남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동해안을 지도 아래에 배치하여 위쪽이 서쪽으로 그려져 있다. 덕원부를 둘러싼 산지에 여러 하천들이 동해안에 유입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읍치 왼쪽에서 영흥만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덕원면 일대를 흐르는 심포천이다. 赤川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적천천을 그린 것으로 지금 원산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제일 왼쪽에 그려진 소규모의 하천은 지금 원산시의 남대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원산평(현재의 원산시 일대)에서 해안으로 돌출하여 連島로 표시된 반도는 지금의 갈마반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성곽과 함께 그려져 있으나 이면 주기의 내용과(‘城郭 無’)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읍치에는 衙舍와 함께 厲壇, 社稷壇, 鄕校, 客舍 등의 위치가 표현되어 있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덕원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門岩-馬息嶺을 연결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安邊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해안도로와 鳳林驛을 지나는 2곳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내륙에서 안변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심포천 연안을 거쳐 瀑布嶺을 지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 우측의 文川현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門岩과 龍倉 일대를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871戶, 田 面積은 1,250結69負, 畓은 185結37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군현의 규모에 비해 농경지 면적이 비교적 넒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마운령 (磨雲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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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이성현과 단천현의 경계를 이루던 마운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운령은 진흥왕 순수비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함경남도 이원군과 단천군의 경계를 이룬다. 이 일대의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그려진 것은 이 일대가 북방 강역의 군사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경흥을 잇는 관북 대로가 이곳을 지났으며, 두만강 대안에서 침입이 있을 경우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마운령을 통하여 谷口驛과 단천현을 잇는 경로가 있었으나 지금은 해안으로 도로와 철도가 개통되어 교통로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지도에서는 함경산맥 줄기를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모습으로 그렸고 磨雲嶺을 비롯하여 長津嶺, 佐驛嶺, 城古介, 松楸嶺, 下田嶺, 凡色嶺, 馬兒峴, 利德嶺, 金昌嶺, 新洞嶺 등의 위치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하천은 두 곳이 표현되어 있다. 利德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福貴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단천군 관암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단천읍을 통해 동해로 유입하는 복대천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북쪽에는 작은 지류가 그려져 있다. 지금의 이원군 성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대천으로 합류하는 소규모의 지류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운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에 비해 도로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마운령을 지나는 도로외에 谷口驛에서 昌道古介를 거쳐 濟仁館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長津峴 小路 등 10여 곳의 고갯길을 中路, 中大路, 小路, 細路 등으로 위계를 나누어 구분했다.(김기혁)

  • 마운령 주기 (磨雲嶺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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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이성현과 단천현의 경계를 이루던 마운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운령은 진흥왕 순수비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함경남도 이원군과 단천군의 경계를 이룬다. 이 일대의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그려진 것은 이 일대가 북방 강역의 군사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경흥을 잇는 관북 대로가 이곳을 지났으며, 두만강 대안에서 침입이 있을 경우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마운령을 통하여 谷口驛과 단천현을 잇는 경로가 있었으나 지금은 해안으로 도로와 철도가 개통되어 교통로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지도에서는 함경산맥 줄기를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모습으로 그렸고 磨雲嶺을 비롯하여 長津嶺, 佐驛嶺, 城古介, 松楸嶺, 下田嶺, 凡色嶺, 馬兒峴, 利德嶺, 金昌嶺, 新洞嶺 등의 위치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하천은 두 곳이 표현되어 있다. 利德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福貴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단천군 관암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단천읍을 통해 동해로 유입하는 복대천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북쪽에는 작은 지류가 그려져 있다. 지금의 이원군 성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대천으로 합류하는 소규모의 지류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운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에 비해 도로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마운령을 지나는 도로외에 谷口驛에서 昌道古介를 거쳐 濟仁館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長津峴 小路 등 10여 곳의 고갯길을 中路, 中大路, 小路, 細路 등으로 위계를 나누어 구분했다.(김기혁)

  • 마천령 (磨天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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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함경산맥의 마천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천령은 조선시대 함경북도 길주와 단천을 잇는 교통로상에 있었으며 지금은 함경남도 단천군과 함경북도 김책시를 잇는 도로상에 있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낱장으로 그려진 것은 磨雲嶺, 黃草嶺, 咸關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났다. 지도의 중앙에 북쪽의 鷹峰에서 이어진 줄기가 북에서 남쪽으로 강하게 그려져 있으며 마천령을 비롯하여 茄坡嶺, 板莫嶺, 坡嶺, 招美嶺, 蛇角嶺, 牛指嶺, 沙器嶺, 方阿嶺, 長方嶺 등의 고개와 嶺路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로 유입하는 여러 하천들이 이들 산줄기에서 발원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礪石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단천군의 북대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산줄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여러 하천들은 지금의 송어천, 갈파천, 쌍포천, 한천천 등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천령 일대의 도로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세 경로가 그려져 있다. 마천령을 지나는 도로는 당시 길주목의 嶺東驛과 단천현의 磨谷驛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지금도 주요 교통로로 이용된다. 마천령의 북쪽에서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는 臨寅驛과 利洞堡와 연결된다. 남쪽의 도로는 城津柵과 胡打里堡와 연결되는 해안도로로 지금 이곳에는 철도가 지나고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方阿岺 등 이곳의 고개들의 위치가 단천현과 길주목으로부터의 거리가 간단히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마천령 주기 (磨天嶺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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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함경산맥의 마천령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마천령은 조선시대 함경북도 길주와 단천을 잇는 교통로상에 있었으며 지금은 함경남도 단천군과 함경북도 김책시를 잇는 도로상에 있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낱장으로 그려진 것은 磨雲嶺, 黃草嶺, 咸關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났다. 지도의 중앙에 북쪽의 鷹峰에서 이어진 줄기가 북에서 남쪽으로 강하게 그려져 있으며 마천령을 비롯하여 茄坡嶺, 板莫嶺, 坡嶺, 招美嶺, 蛇角嶺, 牛指嶺, 沙器嶺, 方阿嶺, 長方嶺 등의 고개와 嶺路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로 유입하는 여러 하천들이 이들 산줄기에서 발원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礪石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면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단천군의 북대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산줄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여러 하천들은 지금의 송어천, 갈파천, 쌍포천, 한천천 등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마천령 일대의 도로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세 경로가 그려져 있다. 마천령을 지나는 도로는 당시 길주목의 嶺東驛과 단천현의 磨谷驛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지금도 주요 교통로로 이용된다. 마천령의 북쪽에서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는 臨寅驛과 利洞堡와 연결된다. 남쪽의 도로는 城津柵과 胡打里堡와 연결되는 해안도로로 지금 이곳에는 철도가 지나고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方阿岺 등 이곳의 고개들의 위치가 단천현과 길주목으로부터의 거리가 간단히 기재되어 있다. (김기혁)

  • 명천부 (明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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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명천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명천부는 일제시대 경성군의 일부지역(동면, 서면)을 합하여 명천군이 되었으며 지금의 함경북도 명천군·화성군·화대군 일대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서쪽이 위로 향하였다. 해안의 돌출된 부분을 실제와 유사하게 묘사하였다. 지도의 위쪽에 무산과 경계를 이루는 長白山이 실경으로 그려져 있으며 지도 왼쪽에는 길주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험준하게 표현하였다. 魚郞川이 장백산에서 발원한 읍치를 거쳐 경성부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명간천이다. 지도 왼쪽의 地境寺烽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화대천을 그린 것이다. 하구에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으나 현재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퇴적되어 연육된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둘레; 5,394尺)과 함께 그렸으며 지금의 화성군 하우리 일대이다. 진산인 永平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명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역으로 在德驛만 표시되어 있고, 다른 지도에서 나타나는 甫老知驛은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경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보로지역을 경유하여 鬼門館을 지난다. 길주와는 在德驛-阿倉-別安代嶺을 잇는 도로외에 별도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금 이 경로를 따라 함경선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716戶, 田 1,665結64負, 畓 115結35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명천부 주기 (明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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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명천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명천부는 일제시대 경성군의 일부지역(동면, 서면)을 합하여 명천군이 되었으며 지금의 함경북도 명천군·화성군·화대군 일대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서쪽이 위로 향하였다. 해안의 돌출된 부분을 실제와 유사하게 묘사하였다. 지도의 위쪽에 무산과 경계를 이루는 長白山이 실경으로 그려져 있으며 지도 왼쪽에는 길주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험준하게 표현하였다. 魚郞川이 장백산에서 발원한 읍치를 거쳐 경성부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명간천이다. 지도 왼쪽의 地境寺烽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화대천을 그린 것이다. 하구에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으나 현재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퇴적되어 연육된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둘레; 5,394尺)과 함께 그렸으며 지금의 화성군 하우리 일대이다. 진산인 永平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명천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역으로 在德驛만 표시되어 있고, 다른 지도에서 나타나는 甫老知驛은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서 경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보로지역을 경유하여 鬼門館을 지난다. 길주와는 在德驛-阿倉-別安代嶺을 잇는 도로외에 별도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금 이 경로를 따라 함경선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716戶, 田 1,665結64負, 畓 115結35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무산부 (茂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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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최상류 유역에 위치하였던 무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백두산 아래 첫 고을로 1712년 중국과의 정계비가 세워진 곳이다. 조선시대 무산부는 지금의 함경북도 무산군·연사군, 양강도의 대흥단군·백암군 전체와 삼지연군 동쪽에 걸쳐 있다. 나진시의 삼해리 일대에 비월지가 있었으나 본 지도에서는 제외되었다. 지도의 좌측 상단에 白頭山 來脈을 그리고, 남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험준한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이 상류부에서 감입 곡류하여 회령부로 흘러 나가는 모습을 실감있게 그려져 있다.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지류들이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고 있다. 최상류부에서 유입하는 하천 지명은 魚潤江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의 소홍만수로 추정된다. 장백산 일대의 2곳에서 지류가 발원한 朴下川은 지금의 연면수와 산암천인 것으로 보인다. 虛水羅川이 政丞坡達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오른쪽을 지나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6,228尺)과 함께 두만강 연안에 그려져 있다. 두만강 대안에 있는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비교적 자세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쪽의 영토에는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무산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 3곳의 역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회령부로 이어지는 도로에 梁水驛과 豊山驛이 있으며, 麻田驛과 車楡嶺을 거쳐 鏡城府로 연결된다. 읍치에서 갑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두만강 상류의 연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68戶로 군의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매우 희박하게 분포하고 있었고, 田면적이 1,716結29負인데 반하여 畓은 2結9負4束에 불과하여 개척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무산부 주기 (茂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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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최상류 유역에 위치하였던 무산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백두산 아래 첫 고을로 1712년 중국과의 정계비가 세워진 곳이다. 조선시대 무산부는 지금의 함경북도 무산군·연사군, 양강도의 대흥단군·백암군 전체와 삼지연군 동쪽에 걸쳐 있다. 나진시의 삼해리 일대에 비월지가 있었으나 본 지도에서는 제외되었다. 지도의 좌측 상단에 白頭山 來脈을 그리고, 남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험준한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이 상류부에서 감입 곡류하여 회령부로 흘러 나가는 모습을 실감있게 그려져 있다.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지류들이 두만강 우안으로 유입하고 있다. 최상류부에서 유입하는 하천 지명은 魚潤江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의 소홍만수로 추정된다. 장백산 일대의 2곳에서 지류가 발원한 朴下川은 지금의 연면수와 산암천인 것으로 보인다. 虛水羅川이 政丞坡達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오른쪽을 지나 두만강으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는 성곽(둘레6,228尺)과 함께 두만강 연안에 그려져 있다. 두만강 대안에 있는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비교적 자세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쪽의 영토에는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무산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 3곳의 역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회령부로 이어지는 도로에 梁水驛과 豊山驛이 있으며, 麻田驛과 車楡嶺을 거쳐 鏡城府로 연결된다. 읍치에서 갑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두만강 상류의 연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68戶로 군의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매우 희박하게 분포하고 있었고, 田면적이 1,716結29負인데 반하여 畓은 2結9負4束에 불과하여 개척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문천군 (文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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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문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문천군은 일제 시대 인접한 덕원군과 안변부 일대를 편입함에 따라 문천군의 문천읍·운림면·천내읍·명귀면, 북성면 등 5개면 지역이다. 현재의 함경남도 문천시와 천내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 아래쪽에 동해를 그려 위가 서쪽이다. 인접한 군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에는 두류산등의 산지 지명과 고개 지명의 위치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여러 하천이 이곳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頭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현재 전탄강의 하구에 넓은 퇴적지형을 바탕으로 형성된 호도반도는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의 直洞岺에서 발원하여 읍치 남쪽을 지나는 하천은 지금의 남천강을 그린 것이다. 현재의 송전만에 해당되는 곳에 2곳의 반도가 돌출되어 표현되어 있다. 이는 현재 원산항 북항으로 개발 이용되고 있는 長致串이다. 읍치에는 衙舍, 향교 건물만이 그려져 있고 성곽은 없다.(기타 기재된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문천군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長峴을 지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읍치에서 炭峴을 지나 明孝倉을 경유는 도로는 영흥으로 연결된다. 車波峴(‘車坡峴’의 오기)을 지나 박문포를 거쳐 泥峴을 넘는 도로는 고원으로 연결된다. 현재 이 경로로 도로와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에서 남천강 변을 따라 直洞岺을 넘는 도로는 안변군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덕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27戶, 田 975結98負8束, 畓 147結91負5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문천군 주기 (文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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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안 영흥만에 위치하였던 문천군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문천군은 일제 시대 인접한 덕원군과 안변부 일대를 편입함에 따라 문천군의 문천읍·운림면·천내읍·명귀면, 북성면 등 5개면 지역이다. 현재의 함경남도 문천시와 천내군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 아래쪽에 동해를 그려 위가 서쪽이다. 인접한 군현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에는 두류산등의 산지 지명과 고개 지명의 위치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여러 하천이 이곳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頭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전탄강이다. 현재 전탄강의 하구에 넓은 퇴적지형을 바탕으로 형성된 호도반도는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의 直洞岺에서 발원하여 읍치 남쪽을 지나는 하천은 지금의 남천강을 그린 것이다. 현재의 송전만에 해당되는 곳에 2곳의 반도가 돌출되어 표현되어 있다. 이는 현재 원산항 북항으로 개발 이용되고 있는 長致串이다. 읍치에는 衙舍, 향교 건물만이 그려져 있고 성곽은 없다.(기타 기재된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문천군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나타나는 長峴을 지나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읍치에서 炭峴을 지나 明孝倉을 경유는 도로는 영흥으로 연결된다. 車波峴(‘車坡峴’의 오기)을 지나 박문포를 거쳐 泥峴을 넘는 도로는 고원으로 연결된다. 현재 이 경로로 도로와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다. 읍치에서 남천강 변을 따라 直洞岺을 넘는 도로는 안변군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덕원부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27戶, 田 975結98負8束, 畓 147結91負5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부령부 (富寧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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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부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경흥부의 일부 지역(관해명, 삼해면)을 흡수하여 부령군이 되었다. 지금의 청진시 동부의 일부와 위의 2개 면을 제외한 부령군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지도의 위가 서쪽이다. 부령부의 실제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나 지도에서는 매우 단조롭게 표현되었다. 현재의 수성천이 부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여러 하천들이 산지에서 발원하여 수성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상류부의 大古介 부근에 표현된 지류는 지금의 백사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虛通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수성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춘천이다. 수성천의 하류 지역은 지금의 청진시 일대로 지도에 그려진 삼각주는 지금 매립되어 있다. 靑岩으로 기재된 곳은 지금의 청진시 고말산으로 보인다. 읍치는 수성천 중류의 우안에 성곽(둘레 3,774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부령읍 부령동 일대이다.(지도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부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각 도로에 4곳의 驛 표시가 있다. 읍치에서 회령으로 이어지는 경로에서 내륙 도로에는 古堡驛이 있으며 해안도로는 懷綏驛을 지난다. 남쪽으로 鏡城에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에서 수성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輸城驛을 지난다. 서쪽의 무산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廢茂山驛까지만 그려져 있으나 다른 지도에서는 麻田驛을 통과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읍치를 거치지 않고 회령에서 경성으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가 해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391戶, 田 1,241結41負, 畓 13結80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부령부 주기 (富寧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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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부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경흥부의 일부 지역(관해명, 삼해면)을 흡수하여 부령군이 되었다. 지금의 청진시 동부의 일부와 위의 2개 면을 제외한 부령군에 해당된다. 동해를 지도의 아래에 배치하여 지도의 위가 서쪽이다. 부령부의 실제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나 지도에서는 매우 단조롭게 표현되었다. 현재의 수성천이 부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여러 하천들이 산지에서 발원하여 수성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상류부의 大古介 부근에 표현된 지류는 지금의 백사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虛通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수성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춘천이다. 수성천의 하류 지역은 지금의 청진시 일대로 지도에 그려진 삼각주는 지금 매립되어 있다. 靑岩으로 기재된 곳은 지금의 청진시 고말산으로 보인다. 읍치는 수성천 중류의 우안에 성곽(둘레 3,774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부령읍 부령동 일대이다.(지도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부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각 도로에 4곳의 驛 표시가 있다. 읍치에서 회령으로 이어지는 경로에서 내륙 도로에는 古堡驛이 있으며 해안도로는 懷綏驛을 지난다. 남쪽으로 鏡城에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에서 수성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輸城驛을 지난다. 서쪽의 무산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廢茂山驛까지만 그려져 있으나 다른 지도에서는 麻田驛을 통과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읍치를 거치지 않고 회령에서 경성으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가 해안을 따라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391戶, 田 1,241結41負, 畓 13結80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북청부 (北靑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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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북청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북청군으로 되었고 일부 지역이 신설된 풍산군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신포시·덕성군과 량강도 김형권군 일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에 부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남대천을 그리고 읍치는 하류 가까이에 배치시켰다. 읍치는 현재 북청읍 내리 일대에 해당되며 지도에는 성곽(둘레 11,604尺)과 함께 衙舍를 그려넣었다. 鎭山인 連德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읍치 관련 지명의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북청부 해제 참조) 여러 하천 지류들이 북청부를 둘러싼 산지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으로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도 좌측의 通坡 부근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팔련천을 그린 것이다. 그 남쪽에 표현된 지류들은 지금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되는 향동천, 거서천과 송고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의 金昌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좌안으로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곤파천을 그린 것이다. 洪源과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 홍원군의 용포면에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동대천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동해안 유입부에 그려진 섬은 지금의 마양도이다. 지도 위쪽의 厚峙岺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지금 풍산군의 허천강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세 방향의 도로만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 동쪽의 利城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土城驛과 居山驛이 있으며 홍원현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平浦驛이 있다. 甲山府로 이어지는 도로는 남대천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경로상에 濟仁館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17戶, 田 1,348結29負7束, 畓 241結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북청부 주기 (北靑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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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북청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북청군으로 되었고 일부 지역이 신설된 풍산군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신포시·덕성군과 량강도 김형권군 일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에 부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남대천을 그리고 읍치는 하류 가까이에 배치시켰다. 읍치는 현재 북청읍 내리 일대에 해당되며 지도에는 성곽(둘레 11,604尺)과 함께 衙舍를 그려넣었다. 鎭山인 連德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읍치 관련 지명의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북청부 해제 참조) 여러 하천 지류들이 북청부를 둘러싼 산지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으로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도 좌측의 通坡 부근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팔련천을 그린 것이다. 그 남쪽에 표현된 지류들은 지금 남대천의 우안으로 합류되는 향동천, 거서천과 송고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의 金昌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의 좌안으로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곤파천을 그린 것이다. 洪源과 경계를 이루는 하천은 지금 홍원군의 용포면에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동대천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동해안 유입부에 그려진 섬은 지금의 마양도이다. 지도 위쪽의 厚峙岺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지금 풍산군의 허천강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세 방향의 도로만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 동쪽의 利城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土城驛과 居山驛이 있으며 홍원현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平浦驛이 있다. 甲山府로 이어지는 도로는 남대천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경로상에 濟仁館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6,017戶, 田 1,348結29負7束, 畓 241結4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삼수부 (三水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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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상류에 위치하며 평안도와 접하고 있었던 삼수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수부는 일제시대 삼수군과 장진군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의 량강도의 삼수군·김정숙군, 자강도 랑림군 전체, 함경남도 부전군 북쪽 일부에 해당된다. 압록강이 지도 위쪽에 동에서 서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국경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삼수부 해제 참조). 삼수부를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갑산부·강계부)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여러 하천들이 이곳에서 발원하여 압록강과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 중 가장 큰 지류는 장진강이다. 지도 남쪽의 完田坡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여러 2차 지류를 합류한다. 상류부에는 지금은 장전댐이 건설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別害驛 부근에서 좌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창동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赴戰嶺 일대에서 발원하여 江口驛 부근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전강이다. 지도 동쪽에 읍치가 성곽(둘레 5,993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감싸면서 압록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증평천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압록강 연안의 경로가 추가되어 있으나 『해동지도』와는 유사하다. 압록강 연안을 따라 그려진 경로는 동으로는 갑산부, 서로는 강계부와 이어지며, 5곳에 역이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東山岺을 지나 장진강 중류의 自作只驛-魚面을 거쳐 江口驛에서 두 갈래의 도로로 나뉘어진다. 장진강 연변의 도로에는 神方驛, 廟坡驛, 別害驛, 長津柵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50戶, 田 898結62負4束으로 기록되어 있고 畓이 없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삼수부 주기 (三水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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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상류에 위치하며 평안도와 접하고 있었던 삼수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수부는 일제시대 삼수군과 장진군 일부 지역으로 분리되었으며 지금의 량강도의 삼수군·김정숙군, 자강도 랑림군 전체, 함경남도 부전군 북쪽 일부에 해당된다. 압록강이 지도 위쪽에 동에서 서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국경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삼수부 해제 참조). 삼수부를 둘러싸면서 인접한 군현(갑산부·강계부)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가 험준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여러 하천들이 이곳에서 발원하여 압록강과 합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 중 가장 큰 지류는 장진강이다. 지도 남쪽의 完田坡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여러 2차 지류를 합류한다. 상류부에는 지금은 장전댐이 건설되어 있다. 지도 좌측의 別害驛 부근에서 좌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신창동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赴戰嶺 일대에서 발원하여 江口驛 부근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부전강이다. 지도 동쪽에 읍치가 성곽(둘레 5,993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감싸면서 압록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증평천이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압록강 연안의 경로가 추가되어 있으나 『해동지도』와는 유사하다. 압록강 연안을 따라 그려진 경로는 동으로는 갑산부, 서로는 강계부와 이어지며, 5곳에 역이 그려져 있다. 읍치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東山岺을 지나 장진강 중류의 自作只驛-魚面을 거쳐 江口驛에서 두 갈래의 도로로 나뉘어진다. 장진강 연변의 도로에는 神方驛, 廟坡驛, 別害驛, 長津柵驛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50戶, 田 898結62負4束으로 기록되어 있고 畓이 없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안변부 (安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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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최남단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안변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변부는 일제시대 함경남도 안변군, 문천군의 풍상면·풍하면, 강원도 통천군의 흡곡면·학일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안변군·고산군·법동군과 통천군의 시중대 일대에 해당된다. 지도의 방위는 위쪽이 남쪽으로 그려져 있다. 산지들 사이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風流山 부근에서 남대천이 발원하여 흐르다가 읍치를 감싸돌면서 동해로 유입된다. 남대천 상류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동대천인 것으로 사료된다. 지도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 외에 2곳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朴多乙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蟹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지금의 학천인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 통천군 흡곡면을 흐르는 시천과 패천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위쪽에 강원도 伊川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서 하천들이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임진강 상류부의 지류들이다. 읍치는 남대천의 우안에 성곽(둘레 10,358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진산인 鶴城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변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매우 간단하다. 읍치에서 남대천의 하류를 따라 연결되는 도로는 德原과 이어진다. 남대천의 상류를 따라 南山驛과 高山驛-淮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秋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563戶, 田 2,603結83負1束, 畓 2,603結89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안변부 주기 (安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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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최남단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안변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변부는 일제시대 함경남도 안변군, 문천군의 풍상면·풍하면, 강원도 통천군의 흡곡면·학일면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안변군·고산군·법동군과 통천군의 시중대 일대에 해당된다. 지도의 방위는 위쪽이 남쪽으로 그려져 있다. 산지들 사이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風流山 부근에서 남대천이 발원하여 흐르다가 읍치를 감싸돌면서 동해로 유입된다. 남대천 상류에서 우안으로 합류하는 지류는 지금의 동대천인 것으로 사료된다. 지도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 외에 2곳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朴多乙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蟹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지금의 학천인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 통천군 흡곡면을 흐르는 시천과 패천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위쪽에 강원도 伊川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서 하천들이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 하천은 임진강 상류부의 지류들이다. 읍치는 남대천의 우안에 성곽(둘레 10,358尺)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진산인 鶴城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변부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매우 간단하다. 읍치에서 남대천의 하류를 따라 연결되는 도로는 德原과 이어진다. 남대천의 상류를 따라 南山驛과 高山驛-淮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秋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563戶, 田 2,603結83負1束, 畓 2,603結89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영흥부 (永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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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상으로 유입하는 용흥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영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요덕군·금야군과 고원군 일부에 해당된다. 이성계의 부친인 桓祖이 살고 조선 태조의 탄생지인 濬源殿 등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흥부 해제 참조). 영흥부의 실제 형태는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동쪽을 아래로 배치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지도의 위쪽에 산지와 곳곳에 위치한 峴과 嶺의 위치를 기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이 유역을 감싸는 형태로 묘사하였다. 龍興江이 산지의 여러 곳에서 발원한 지류들을 합류하면서 동해상에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입석천으로 보인다. 五峰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두 지류는 지금의 단속천과 용수피천으로 생각된다. 이들 지류를 합류한 용흥강은 하류에서는 여러 하중도와 삼각주를 형성한다. 하구에 위치한 대저도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반도 형태로 묘사된 馬熊島는 지금 육계도화한 호도반도이다. 읍치는 용흥강 우안에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금야군 금야읍 일대이다. 鎭山인 聖歷山의 위치에는 聖歷寺가 표시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그 내용은 간략하다. 읍치의 우측으로는 里石乙峴을 거쳐 定平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 高原과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으로 용흥강변을 따라 鐵水倉과 雲倉을 거쳐 雲山嶺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046戶, 田 6,089結12負9束, 畓 446結74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지만 고을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영흥부 주기 (永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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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상으로 유입하는 용흥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영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요덕군·금야군과 고원군 일부에 해당된다. 이성계의 부친인 桓祖이 살고 조선 태조의 탄생지인 濬源殿 등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흥부 해제 참조). 영흥부의 실제 형태는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동쪽을 아래로 배치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지도의 위쪽에 산지와 곳곳에 위치한 峴과 嶺의 위치를 기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이 유역을 감싸는 형태로 묘사하였다. 龍興江이 산지의 여러 곳에서 발원한 지류들을 합류하면서 동해상에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입석천으로 보인다. 五峰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두 지류는 지금의 단속천과 용수피천으로 생각된다. 이들 지류를 합류한 용흥강은 하류에서는 여러 하중도와 삼각주를 형성한다. 하구에 위치한 대저도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반도 형태로 묘사된 馬熊島는 지금 육계도화한 호도반도이다. 읍치는 용흥강 우안에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금야군 금야읍 일대이다. 鎭山인 聖歷山의 위치에는 聖歷寺가 표시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그 내용은 간략하다. 읍치의 우측으로는 里石乙峴을 거쳐 定平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 高原과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으로 용흥강변을 따라 鐵水倉과 雲倉을 거쳐 雲山嶺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046戶, 田 6,089結12負9束, 畓 446結74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지만 고을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온성부 (穩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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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의 북부지방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온성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온성부의 비월지가 경원부와 경흥부에 있어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회화식 지도에서 비월지의 묘사가 생략되어 있으며 지도에 묘사된 범위는 지금의 함경북도 온성군의 동북부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감입 곡류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중국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으로 豊界江(일명 分界江)이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 月德訓에서 발원한 하천(비변사인 지도에서는 ‘泉川’으로 기재)과 三溪川이 그려져 있다. 또한 두만강 대안의 청나라 영토에도 지명이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 당시 두만강은 국경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조선측 영토에서는 소규모 하천이 두만강으로 유입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곽(둘레;5,804尺)으로 둘러싸인 읍치의 서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산천인 것으로 보이며, 우측의 하천은 풍천천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류부의 立岩 부근으로 흐르는 하천은 월파천으로 보인다. 국경이었던 두만강에 접하고 있어 관방관련 지명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온성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柔遠驛와 美錢驛·永達驛·黃拓坡驛 등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역을 경유하여 인근 군현과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41戶, 田 2,666結1負9束, 畓 13結91負로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다.(김기혁)

  • 온성부 주기 (穩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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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의 북부지방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온성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온성부의 비월지가 경원부와 경흥부에 있어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회화식 지도에서 비월지의 묘사가 생략되어 있으며 지도에 묘사된 범위는 지금의 함경북도 온성군의 동북부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감입 곡류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중국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으로 豊界江(일명 分界江)이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 月德訓에서 발원한 하천(비변사인 지도에서는 ‘泉川’으로 기재)과 三溪川이 그려져 있다. 또한 두만강 대안의 청나라 영토에도 지명이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 당시 두만강은 국경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조선측 영토에서는 소규모 하천이 두만강으로 유입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곽(둘레;5,804尺)으로 둘러싸인 읍치의 서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산천인 것으로 보이며, 우측의 하천은 풍천천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류부의 立岩 부근으로 흐르는 하천은 월파천으로 보인다. 국경이었던 두만강에 접하고 있어 관방관련 지명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온성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柔遠驛와 美錢驛·永達驛·黃拓坡驛 등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역을 경유하여 인근 군현과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41戶, 田 2,666結1負9束, 畓 13結91負로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다.(김기혁)

  • 이성현 (利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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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의 동해안 이원만에 위치하였던 이성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성현은 정조24년(1800) 순조가 즉위하면서 利原縣으로 개칭하였다. 지금 함경남도 리원군 일대이다. 인접한 군현(단천, 북청)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는 교통로와 磨雲嶺 등의 고개 지명들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2개의 하천이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下田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을 지나 南松亭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城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谷口驛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대천이다. 이원만에서 해안선은 실제 모습과 거의 유사하게 표현하였고, 소나무 숲으로서 남송정, 북송정을 표현한 것은 다른 군현에서 볼수 없는 독특한 묘사 기법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3,026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렸다. 지금의 이원읍 교동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는 驛으로 谷口驛 한곳만 있으며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었다. 도로가 적색 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도로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곡구역을 지나 마운령을 거치는 도로는 단천으로 연결되며 남으로는 시중대를 지나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들 해안 도로에는 함경선 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남대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구색령과 하전령을 지난다. 단천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는 城古介와 松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44戶, 田 1,379結8負4束, 畓 19結81負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이성현 주기 (利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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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의 동해안 이원만에 위치하였던 이성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성현은 정조24년(1800) 순조가 즉위하면서 利原縣으로 개칭하였다. 지금 함경남도 리원군 일대이다. 인접한 군현(단천, 북청)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는 교통로와 磨雲嶺 등의 고개 지명들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2개의 하천이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下田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을 지나 南松亭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城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谷口驛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대천이다. 이원만에서 해안선은 실제 모습과 거의 유사하게 표현하였고, 소나무 숲으로서 남송정, 북송정을 표현한 것은 다른 군현에서 볼수 없는 독특한 묘사 기법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3,026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렸다. 지금의 이원읍 교동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는 驛으로 谷口驛 한곳만 있으며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었다. 도로가 적색 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도로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곡구역을 지나 마운령을 거치는 도로는 단천으로 연결되며 남으로는 시중대를 지나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들 해안 도로에는 함경선 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남대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구색령과 하전령을 지난다. 단천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는 城古介와 松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44戶, 田 1,379結8負4束, 畓 19結81負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정평부 (定平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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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정평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정평군이 되면서 일부지역(선덕면)은 이웃 함주군에 귀속되었다. 현재의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 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정평부의 전체 형상이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하여 그렸다. 부치를 여러 산지가 둘러싸고 이들 산지에서 하천이 발원하여 부의 중앙을 흐르면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금진천을 그린 것이다. 하천의 하류부에 金江津을 기재하였다. 지도 오른쪽에 廣浦로 유입되는 소규모의 하천이 朱伊川 지명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봉대천으로 추정된다. 廣浦로 기재된 호수는 지금의 광포호이다. 광포를 에워싼 산지에 大頭山 지명이 기재된 곳은 현재 함주군의 선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5,935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衙舍가 표시되어 있다. 진산인 鼻白山에는 봉수 표시가 있다. 읍치는 지금의 정평읍 동천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은 회화식 군현지도 정평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함흥부로 연결되는 도로에 봉대역이 그려져 있다. 왼쪽의 永興府로 이어지는 길로 草原驛을 지나는 길 외에 다른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의 위쪽으로는 馬騰嶺을 거쳐 영원과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91戶, 田 1,485結 9束, 畓 519結42負1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정평부 주기 (定平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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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정평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정평군이 되면서 일부지역(선덕면)은 이웃 함주군에 귀속되었다. 현재의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 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정평부의 전체 형상이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하여 그렸다. 부치를 여러 산지가 둘러싸고 이들 산지에서 하천이 발원하여 부의 중앙을 흐르면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금진천을 그린 것이다. 하천의 하류부에 金江津을 기재하였다. 지도 오른쪽에 廣浦로 유입되는 소규모의 하천이 朱伊川 지명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봉대천으로 추정된다. 廣浦로 기재된 호수는 지금의 광포호이다. 광포를 에워싼 산지에 大頭山 지명이 기재된 곳은 현재 함주군의 선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5,935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衙舍가 표시되어 있다. 진산인 鼻白山에는 봉수 표시가 있다. 읍치는 지금의 정평읍 동천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은 회화식 군현지도 정평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함흥부로 연결되는 도로에 봉대역이 그려져 있다. 왼쪽의 永興府로 이어지는 길로 草原驛을 지나는 길 외에 다른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의 위쪽으로는 馬騰嶺을 거쳐 영원과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91戶, 田 1,485結 9束, 畓 519結42負1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종성부 (鍾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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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종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까지 종성군으로 행정 지명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지역이 함경북도 온성군에 흡수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새별군·회령군·은덕군·나진시에 일부 걸쳐 있다. 지도의 좌측에 남에서 북으로 두만강이 묘사되었고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북방 강계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종성부 해제 참조).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 5,510尺)과 함께 그려져 있고, 진산인 小白山은 읍치의 동남쪽에 그려져 있다. 종성부는 하천의 유역분지로 볼 때 두 개의 유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禿山에서 발원하여 鷹谷을 지나 두만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관천으로 추정되며, 소백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읍치 부근에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서풍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北行營(성 둘레 310尺) 부근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를 합류하며 경원군으로 흘러 나가는 하천은 지금 오룡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3방향으로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서 북으로 潼關驛을 지나는 도로는 온성부로 이어지며, 남으로 防垣驛을 거쳐 무산부까지 이어진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서풍천을 따라 이어지며 북행영을 거쳐 회령, 경흥, 경원 방향의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171戶, 田 4,705結31負2束, 畓 34結71負로 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종성부 주기 (鍾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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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종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까지 종성군으로 행정 지명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지역이 함경북도 온성군에 흡수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새별군·회령군·은덕군·나진시에 일부 걸쳐 있다. 지도의 좌측에 남에서 북으로 두만강이 묘사되었고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북방 강계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종성부 해제 참조).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 5,510尺)과 함께 그려져 있고, 진산인 小白山은 읍치의 동남쪽에 그려져 있다. 종성부는 하천의 유역분지로 볼 때 두 개의 유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禿山에서 발원하여 鷹谷을 지나 두만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관천으로 추정되며, 소백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읍치 부근에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서풍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北行營(성 둘레 310尺) 부근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를 합류하며 경원군으로 흘러 나가는 하천은 지금 오룡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3방향으로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서 북으로 潼關驛을 지나는 도로는 온성부로 이어지며, 남으로 防垣驛을 거쳐 무산부까지 이어진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서풍천을 따라 이어지며 북행영을 거쳐 회령, 경흥, 경원 방향의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171戶, 田 4,705結31負2束, 畓 34結71負로 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함경도 (咸鏡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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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전체 지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각 군현 지도의 첫머리에 그려져 삽입되었으며 지도의 윤곽은 다른 도별 지도들과 유사하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감영과 행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鎭堡는 분홍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 양강지대에 많이 분포한다. 해안은 실제 모습보다 복잡하게 그려졌다. 이는 해안에 유입하는 하천과 동해안에 형성된 석호 등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이다. 赤島 등 8개의 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 최북단에 위치하여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다른 도별 지도와는 달리 관방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표현되었다. 지도의 위쪽에 백두산을 天池(‘大澤’)와 함께 실경으로 표시하였고 그 아래에 백두산 정계비와 목책을 표현하였다. 두만강의 유로와는 별도로 土門江이 발원지와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중국 영토에서 分界江이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 영토내의 하천 유로와 일부 지명들이 기재되어 있어 지도 제작 당시 압록강·두만강이 국경하천보다는 생활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에 유입하는 지류들로 朴下川등의 유로들이 상세히 표현되었고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등 5개 군현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압록강에 유입하는 지류로 장전강의 모습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으며 삼수, 갑산부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안에는 경흥 등의 16개 군현의 위치가 하천과 함께 그려져 있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이 적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고 특히 『해동지도』에서 점선으로 표현되던 백두산 일대의 도로망이 이 지도에서는 실선으로 표시되는 것이 독특하다. 지도책의 제일 앞부분에 강원도와 함께 함경도의 역사지리 내용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김기혁)

  • 함경도 주기 (咸鏡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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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전체 지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각 군현 지도의 첫머리에 그려져 삽입되었으며 지도의 윤곽은 다른 도별 지도들과 유사하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감영과 행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鎭堡는 분홍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 양강지대에 많이 분포한다. 해안은 실제 모습보다 복잡하게 그려졌다. 이는 해안에 유입하는 하천과 동해안에 형성된 석호 등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이다. 赤島 등 8개의 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 최북단에 위치하여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다른 도별 지도와는 달리 관방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표현되었다. 지도의 위쪽에 백두산을 天池(‘大澤’)와 함께 실경으로 표시하였고 그 아래에 백두산 정계비와 목책을 표현하였다. 두만강의 유로와는 별도로 土門江이 발원지와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중국 영토에서 分界江이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 영토내의 하천 유로와 일부 지명들이 기재되어 있어 지도 제작 당시 압록강·두만강이 국경하천보다는 생활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에 유입하는 지류들로 朴下川등의 유로들이 상세히 표현되었고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등 5개 군현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압록강에 유입하는 지류로 장전강의 모습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으며 삼수, 갑산부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안에는 경흥 등의 16개 군현의 위치가 하천과 함께 그려져 있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이 적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고 특히 『해동지도』에서 점선으로 표현되던 백두산 일대의 도로망이 이 지도에서는 실선으로 표시되는 것이 독특하다. 지도책의 제일 앞부분에 강원도와 함께 함경도의 역사지리 내용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김기혁)

  • 함관령 (咸關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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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홍원현과 함흥부의 교통로 상에 있던 함관령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함경남도 홍원군과 함주군을 잇는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삽입된 것은 磨天嶺, 磨雲嶺, 서북쪽의 黃草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함경도 북쪽에서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이 경로를 따라 철령을 통해 한양에 이르게 되어 조선시대 관방의 요지였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난다. 지도에서 태백산에서 이어 내려오는 산줄기가 지도의 북에서 남으로 강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곳곳에 고개를 의미하는 岺과 峴 표시가 있다. 산줄기의 좌·우측에 하천을 그렸다. 石乙長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성천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하천은 지금 북한의 함주군에서 발원하여 함흥으로 유입하는 성천강과 동일한 하천으로 추정된다. 가까이에 동해상에 유입하는 소규모의 하천인 湖漣川은 지금도 호련천으로 불리고 있다. 頭無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함관령에서 발원하여 홍원군을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서대천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함관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서를 잇는 2곳의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중 함관령을 지나는 도로는 함흥의 德山驛과 洪原의 咸原驛을 지난다. 지금 이곳에는 홍원읍과 함흥을 잇는 간선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남쪽으로 草古垈岺을 잇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車踰嶺 등 이곳을 지나는 9곳의 고개 위치를 간단히 기재하고 있다. (김기혁)

  • 함관령 주기 (咸關嶺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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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홍원현과 함흥부의 교통로 상에 있던 함관령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함경남도 홍원군과 함주군을 잇는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삽입된 것은 磨天嶺, 磨雲嶺, 서북쪽의 黃草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함경도 북쪽에서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이 경로를 따라 철령을 통해 한양에 이르게 되어 조선시대 관방의 요지였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난다. 지도에서 태백산에서 이어 내려오는 산줄기가 지도의 북에서 남으로 강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곳곳에 고개를 의미하는 岺과 峴 표시가 있다. 산줄기의 좌·우측에 하천을 그렸다. 石乙長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성천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하천은 지금 북한의 함주군에서 발원하여 함흥으로 유입하는 성천강과 동일한 하천으로 추정된다. 가까이에 동해상에 유입하는 소규모의 하천인 湖漣川은 지금도 호련천으로 불리고 있다. 頭無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함관령에서 발원하여 홍원군을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서대천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함관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서를 잇는 2곳의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중 함관령을 지나는 도로는 함흥의 德山驛과 洪原의 咸原驛을 지난다. 지금 이곳에는 홍원읍과 함흥을 잇는 간선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남쪽으로 草古垈岺을 잇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車踰嶺 등 이곳을 지나는 9곳의 고개 위치를 간단히 기재하고 있다. (김기혁)

  • 함흥부 (咸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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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동해안 성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함흥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함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영광군·신흥군·락원군·장진군, 부전군의 남쪽, 함주군의 동쪽 일대에 해당된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이후 우리나라 영토가 된 곳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이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유적 등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함흥부 해제 참조). 조선시대 함흥부의 모습은 방안식 지도에서는 역삼각형의 형태로 그려지며 이 지도에서도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묘사되었다. 지도의 북동쪽에서 남서류하여 지금의 함흥만으로 유입하는 성천강을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하류 부분에서는 성천강의 지류인 여러 하천의 지명을 乾川, 中川 등으로 표시하였고 竹島, 花島 등 여러 하중도를 그렸다. 성천강 지명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지류로 동성천강, 호련천 등이 있으며 하구에 삼각주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府治를 성천강의 좌안에 묘사하였고, 진산인 城串山은 城串烽으로 지명이 지재되어 있다. 회화식 지도인 『해동지도』에서 읍치의 성곽이 뚜렷한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이 지도에서는 성곽 형태는 그려져 있지 않고, 단지 원으로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면 주기에 성곽의 규모가 14,065尺으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는 德山館을 거쳐 咸關嶺을 지나 咸原驛을 거처 洪原으로 이어진다. 서로는 定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북으로는 성천강변을 따라 그려진 도로가 赴戰嶺을 지나 압록강변의 三水로 이어진다. 북서로는 中山嶺과 長津柵을 잇는 도로가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民戶 14,453戶로 기재되어 있어 당시로서 큰 도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 주요 전각, 面, 倉 등의 위치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김기혁)

  • 함흥부 주기 (咸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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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동해안 성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함흥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함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영광군·신흥군·락원군·장진군, 부전군의 남쪽, 함주군의 동쪽 일대에 해당된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이후 우리나라 영토가 된 곳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이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유적 등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함흥부 해제 참조). 조선시대 함흥부의 모습은 방안식 지도에서는 역삼각형의 형태로 그려지며 이 지도에서도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묘사되었다. 지도의 북동쪽에서 남서류하여 지금의 함흥만으로 유입하는 성천강을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하류 부분에서는 성천강의 지류인 여러 하천의 지명을 乾川, 中川 등으로 표시하였고 竹島, 花島 등 여러 하중도를 그렸다. 성천강 지명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지류로 동성천강, 호련천 등이 있으며 하구에 삼각주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府治를 성천강의 좌안에 묘사하였고, 진산인 城串山은 城串烽으로 지명이 지재되어 있다. 회화식 지도인 『해동지도』에서 읍치의 성곽이 뚜렷한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이 지도에서는 성곽 형태는 그려져 있지 않고, 단지 원으로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면 주기에 성곽의 규모가 14,065尺으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는 德山館을 거쳐 咸關嶺을 지나 咸原驛을 거처 洪原으로 이어진다. 서로는 定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북으로는 성천강변을 따라 그려진 도로가 赴戰嶺을 지나 압록강변의 三水로 이어진다. 북서로는 中山嶺과 長津柵을 잇는 도로가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民戶 14,453戶로 기재되어 있어 당시로서 큰 도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 주요 전각, 面, 倉 등의 위치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김기혁)

  • 홍원현 (洪原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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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홍원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원현은 지금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된다. 현재의 동대천을 그려 북청부와의 경계를 표현하였다. 지도의 좌측에 함흥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그렸고 車楡岺, 咸關岺 등 주요 교통로를 그렸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현의 중앙을 흘러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이다. 頭無山에서 발원하여 門岩부근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서대천을 그린 것이다. 해안선을 비교적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그렸다. 동해상에 그려져 있는 죽도와 馬養島는 지금도 사용되는 지명이다. 특히 마양도는 이곳에 있었던 목장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 1,005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홍원읍 신흥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에 기재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 세곳의 驛이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되었다. 南浦驛의 경우 다른 지도에서는 平浦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남포역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지며 서쪽으로는 신은역, 함원역을 거쳐 함관령을 지나는 길은 함흥으로 연결된다. 해안도로에는 지금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으며 함관령을 지나는 경로에는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서대천을 따라 내륙으로 연결된 도로는 龍華山을 거쳐 북청부로 연결된다. 용화산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60戶, 田 1,336結, 畓 293結83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홍원현 주기 (洪原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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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홍원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원현은 지금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된다. 현재의 동대천을 그려 북청부와의 경계를 표현하였다. 지도의 좌측에 함흥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그렸고 車楡岺, 咸關岺 등 주요 교통로를 그렸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현의 중앙을 흘러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이다. 頭無山에서 발원하여 門岩부근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서대천을 그린 것이다. 해안선을 비교적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그렸다. 동해상에 그려져 있는 죽도와 馬養島는 지금도 사용되는 지명이다. 특히 마양도는 이곳에 있었던 목장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 1,005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홍원읍 신흥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에 기재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 세곳의 驛이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되었다. 南浦驛의 경우 다른 지도에서는 平浦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남포역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지며 서쪽으로는 신은역, 함원역을 거쳐 함관령을 지나는 길은 함흥으로 연결된다. 해안도로에는 지금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으며 함관령을 지나는 경로에는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서대천을 따라 내륙으로 연결된 도로는 龍華山을 거쳐 북청부로 연결된다. 용화산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60戶, 田 1,336結, 畓 293結83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회령부 (會寧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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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 두만강 상류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였던 회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령부는 두만강연안부터 동해안까지 걸쳐 있었으나 일제시대 동해안에 연한 지역이 분리되어 부령군 관해면이 되었다. 지금은 회령시의 일부 지역과 나진시의 서쪽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에서는 두만강에 연한 지역만 묘사되었다. 지도의 서북쪽에 두만강을 그리고, 동남쪽에 여러 산지와 함께 梨峴 등의 고개 지명들을 기재하였다. 세곳의 지류가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제일 북쪽의 下川은 지금의 팔을천에 해당하는 하천으로 於連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에서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무산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회령천에 해당된다. 鞍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면서 雲頭城 북쪽에서 두만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보을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12,344尺) 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鎭山인 鰲山 지명이 가까이에 기재되어 있다. 지금의 회령군 회령읍 일대이다. 국경지대에 있어 관방 시설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회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의 북쪽으로 高嶺驛을 거쳐 穩城府로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甫乙下驛을 지나 무산부로 이어지며 내륙쪽으로는 회령천변을 지나 古豊山驛을 거쳐 부령으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482戶, 田 1,405結57負6束, 畓 12結43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회령부 주기 (會寧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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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 두만강 상류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였던 회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령부는 두만강연안부터 동해안까지 걸쳐 있었으나 일제시대 동해안에 연한 지역이 분리되어 부령군 관해면이 되었다. 지금은 회령시의 일부 지역과 나진시의 서쪽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에서는 두만강에 연한 지역만 묘사되었다. 지도의 서북쪽에 두만강을 그리고, 동남쪽에 여러 산지와 함께 梨峴 등의 고개 지명들을 기재하였다. 세곳의 지류가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제일 북쪽의 下川은 지금의 팔을천에 해당하는 하천으로 於連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에서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무산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회령천에 해당된다. 鞍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면서 雲頭城 북쪽에서 두만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보을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12,344尺) 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鎭山인 鰲山 지명이 가까이에 기재되어 있다. 지금의 회령군 회령읍 일대이다. 국경지대에 있어 관방 시설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회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의 북쪽으로 高嶺驛을 거쳐 穩城府로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甫乙下驛을 지나 무산부로 이어지며 내륙쪽으로는 회령천변을 지나 古豊山驛을 거쳐 부령으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482戶, 田 1,405結57負6束, 畓 12結43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순흥부 (順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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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부는 동쪽의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이다. 지도 위쪽에 태백산, 소백산을 확인할 수 있다. 봉화, 영천, 풍기와 인접하고 있으며 충청도,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있다. 죽령을 비롯한 여러 고개가 지도 북쪽에 표시되었는데 육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객사 앞을 지나 죽령을 지나는 도로에 大路라 적어 놓았으며 그 위에는 소로가 적혀 있다. 읍치 오른쪽의 내성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는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며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었다가 1457년(세조 3)에 풍기군에 속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 복구되었으나 1914년 군현 통합에 의해 영주시, 봉화군에 나누어 들어가게 되었다. 옛 순흥부는 영주시 순흥면, 부석면, 단산면과 풍기읍의 일부, 안정면 일부, 봉화읍 일부, 물야면, 법전면, 춘양면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아사만 그 이름을 적고 있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표시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백운동서원은 1542년(중종 37)에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후에 소수서원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북쪽의 부석사(부석면 북지리)는 의상대사가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 북쪽에는 태봉과 어류산성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倉, 봉대 등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영광군 (靈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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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비로 유명한 전라남도 영광군 일대의 지도이다. 읍치는 영광읍 무령리이며 관할범위는 현재의 영광군과 신안군의 임자도, 증도, 무안군의 운남면, 망운면, 장성군의 동화면, 삼계면, 삼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에 많은 섬들이 그려졌는데 그 중 가장 크게 그려진 것이 신안군의 임자도인데 지도에는 荏子鎭으로 표시되었다. 그 오른쪽 위에는 다경진이 그려졌는데 수군만호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목장이 있다. 왼쪽 위의 법성진은 법성면 법성리에 있던 진으로 이곳에도 수군 만호가 있었다. 읍치에는 성곽과 성문이 있고 그 안에 객사 등 건물이 그려졌다. 읍치 오른쪽의 향교는 교촌리 지명으로 남아있다. 진산은 읍치 서쪽의 筽山인데 이 지도에 표시되진 않았다. 법성포진 아래에 구수미진이 표시되었는데 현재도 백수읍 구수리에서 구시미나루터를 찾을 수 있다. 구수면이라고 적힌 곳은 현재의 원불교 성지에 해당하며 그 왼쪽에 표시된 봉대는 875.8의 봉화령으로 불리는 곳이다. 그 아래의 원산면, 염소면으로 표기된 지역을 나누는 하천은 현재의 불갑천이다. 현재의 백수읍 남쪽과 염산면 북쪽에는 곳곳에 鹽田이 발달해 있다. 오른쪽의 불갑면은 현재에도 불갑면으로 불리며 불갑사는 모악리에 있는 사찰로 대웅전이 보물 830호로 지정되었다. 그 아래에는 현재 천연기념물 112호로 지정된 참식나무자생지가 있는 곳이다. 이 밖에 서원, 창, 선창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순천군 (順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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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군의 서쪽과 북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를 비롯하여 하천의 모습은 《해동지도》의 순천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본류와 지류, 크기 등을 이해하기 힘들다. 왼쪽의 德川江下流에서 흘러와 오른쪽의 殷山地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해동지도》에는 대동강 본류가 다른 하천보다 훨씬 굵게 그려져 있어 지류와 분명하게 구분해주고 있다. 아울러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의 굵기도 약간 다르게 표현하여 구분을 쉽게 하였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하천을 표현함에 있어 굵기의 변화를 주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굵기를 대부분 동일하게 그리고 있어 이해하기 힘들다. 《광여도》 에는 대부분의 하천을 1개의 실선으로 나타내었다. 다만 왼쪽의 德川江下流 부분과 오른쪽의 殷山地 부분을 2개의 실선으로 표시하여 다른 부분과 구분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하천의 상류와 하류를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광여도》의 필사 자 자체가 하천들 사이의 규모 차이,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지명 표기에 있어 오류가 보이고 있다. 주기와 달리 密田面이 田面으로, 粘石浦面이 粘伊彦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이 바르게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도 《광여도》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본 지도의 경우 倉과 鄕校 위에 두 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지도 윗부분의 院倉과 新倉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총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어 다른 지도와는 차이가 있다. (양윤정)

  • 양구현 (楊口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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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양구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 휴전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로 지나고 있다. 조선시대 양구현은 현재 휴전선 이남의 양구군과 거의 비슷하다. 일제시대 양구군의 수입면은 조선시대에는 회양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진산인 飛鳳山을 동측에 두고 읍치를 그렸다. 읍치는 지금의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춘천과 인제, 회양과의 경계는 산지로 표현하였으며 낭천(지금의 화천)과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북동쪽의 계산령에서 발원한 하천이 남류하면서 읍치를 감싸 돈후 다시 북류하여 낭천으로 유입된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로 지금은 화천댐의 건설로 파로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상류부에서 본류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팔량선, 광지천, 청리천 등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서쪽의 방산면과 북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류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입천으로 추정된다. 양구현의 남쪽에는 소양강이 춘천과 경계를 이루며 서류하고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일부 지류가 그려져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구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북서쪽으로 含春驛(양구읍 하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낭천현으로 이어지며, 왼쪽 아래의 水仁驛(양구읍 수인리 소재)을 지나 춘천과 연결된다. 인제로 이어지는 도로는 여러 길이 있다. 읍치의 남쪽의 道里峙를 지나 인제로 이어지는 길은 지금의 소양호로 연결된다. 廣峙를 지나는 도로는 인제를 거쳐 양양부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66戶, 田 200結46負9束, 畓 27結69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영종 주기 (永宗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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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종진은 원래 현재의 화성시 서신면에 있던 정4품 萬戶鎭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수도 한양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1653년(효종 4)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영종도로 옮겼고, 1681년(숙종 7)에는 종3품의 僉使鎭으로 승격되었다. 1690년(숙종 16)에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 그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에 종2품의 防禦使로 승격되었다. 영종진의 지도가 특별히 제작되어 군현지도와 함께 수록된 것은 이와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의 가운데에는 원래의 영종도 명칭과 관련되어 있는 古紫燕縣基가 표시되어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지리지에서는 자연현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본 지도는 전체적인 구도와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종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약간 더 상세한 도로 표시가 들어가 있다. 또한 본 지도에 수록된 주기의 내용이 《광여도》와 《여지도》의  주기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의 주기와는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 등의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꾸었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나 그 필사본을 다시 필사하면서 주기는 그대로 따르고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종진의 객사와 아사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중산동 구읍 마을에 있었는데, 현재는 본 지도와 달리 완전히 영종도와 연결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영종도와 그 주변의 섬이 밀물(潮退) 때 육지로 연결되고 있음(成陸)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영종진에 소속된 섬 주변 이외에는 마치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둔 육지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넓은 바다이다. 그림 지도의 경우 서로 연결되는 지역은 비록 멀리 있더라도 해당 방향의 가까에 그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지도에는 禁山이 3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戰船에 소용되는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하던 지역이었다.(이기봉)

  • 예산현 (禮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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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현은 예산군의 예산읍, 대술면, 오가면, 일부를 제외한 신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예산읍 예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예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하천이다. 아래쪽의 大興界에서 흘러들어오는 하천은 현재의 무한천이며, 方可山面의 산쪽에 굵게 표현된 하천은 洪陽界로 표현된 홍주 땅에서 들어오는 현재의 삽교천이다. 오른쪽의 大枝洞面과 述谷面은 현재의 대술면 지역으로 무한천의 지류인 화산천의 상류에 해당되며, 대흥 땅에서 무한천에 합류되나 본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여지도》의 경우 삽교천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으며, 《광여도》의 경우는 완전히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필사하는 경우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예산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바탕으로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지명 중 無限城이 나오는데, 본 지도의 浦倉 아래쪽 산봉우리에 적혀 있다. 무한성은 삼국시대부터 빨라도 고려초기까지 예산 지역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무한천변의 급경사를 이용해 쌓은 요새적 구릉지성이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정치적 중심지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이기봉)

  • 순흥부 주기 (順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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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부는 동쪽의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이다. 지도 위쪽에 태백산, 소백산을 확인할 수 있다. 봉화, 영천, 풍기와 인접하고 있으며 충청도,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있다. 죽령을 비롯한 여러 고개가 지도 북쪽에 표시되었는데 육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객사 앞을 지나 죽령을 지나는 도로에 大路라 적어 놓았으며 그 위에는 소로가 적혀 있다. 읍치 오른쪽의 내성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는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며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었다가 1457년(세조 3)에 풍기군에 속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 복구되었으나 1914년 군현 통합에 의해 영주시, 봉화군에 나누어 들어가게 되었다. 옛 순흥부는 영주시 순흥면, 부석면, 단산면과 풍기읍의 일부, 안정면 일부, 봉화읍 일부, 물야면, 법전면, 춘양면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아사만 그 이름을 적고 있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표시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백운동서원은 1542년(중종 37)에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후에 소수서원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북쪽의 부석사(부석면 북지리)는 의상대사가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 북쪽에는 태봉과 어류산성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倉, 봉대 등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영광군 주기 (靈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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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비로 유명한 전라남도 영광군 일대의 지도이다. 읍치는 영광읍 무령리이며 관할범위는 현재의 영광군과 신안군의 임자도, 증도, 무안군의 운남면, 망운면, 장성군의 동화면, 삼계면, 삼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에 많은 섬들이 그려졌는데 그 중 가장 크게 그려진 것이 신안군의 임자도인데 지도에는 荏子鎭으로 표시되었다. 그 오른쪽 위에는 다경진이 그려졌는데 수군만호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목장이 있다. 왼쪽 위의 법성진은 법성면 법성리에 있던 진으로 이곳에도 수군 만호가 있었다. 읍치에는 성곽과 성문이 있고 그 안에 객사 등 건물이 그려졌다. 읍치 오른쪽의 향교는 교촌리 지명으로 남아있다. 진산은 읍치 서쪽의 筽山인데 이 지도에 표시되진 않았다. 법성포진 아래에 구수미진이 표시되었는데 현재도 백수읍 구수리에서 구시미나루터를 찾을 수 있다. 구수면이라고 적힌 곳은 현재의 원불교 성지에 해당하며 그 왼쪽에 표시된 봉대는 875.8의 봉화령으로 불리는 곳이다. 그 아래의 원산면, 염소면으로 표기된 지역을 나누는 하천은 현재의 불갑천이다. 현재의 백수읍 남쪽과 염산면 북쪽에는 곳곳에 鹽田이 발달해 있다. 오른쪽의 불갑면은 현재에도 불갑면으로 불리며 불갑사는 모악리에 있는 사찰로 대웅전이 보물 830호로 지정되었다. 그 아래에는 현재 천연기념물 112호로 지정된 참식나무자생지가 있는 곳이다. 이 밖에 서원, 창, 선창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순천군 주기 (順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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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順川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군의 서쪽과 북창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순천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를 비롯하여 하천의 모습은 《해동지도》의 순천군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본류와 지류, 크기 등을 이해하기 힘들다. 왼쪽의 德川江下流에서 흘러와 오른쪽의 殷山地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해동지도》에는 대동강 본류가 다른 하천보다 훨씬 굵게 그려져 있어 지류와 분명하게 구분해주고 있다. 아울러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의 굵기도 약간 다르게 표현하여 구분을 쉽게 하였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만큼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하천을 표현함에 있어 굵기의 변화를 주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하천의 굵기를 대부분 동일하게 그리고 있어 이해하기 힘들다. 《광여도》 에는 대부분의 하천을 1개의 실선으로 나타내었다. 다만 왼쪽의 德川江下流 부분과 오른쪽의 殷山地 부분을 2개의 실선으로 표시하여 다른 부분과 구분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하천의 상류와 하류를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광여도》의 필사 자 자체가 하천들 사이의 규모 차이, 대동강의 상류와 하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지명 표기에 있어 오류가 보이고 있다. 주기와 달리 密田面이 田面으로, 粘石浦面이 粘伊彦面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이 바르게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모습도 《광여도》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본 지도의 경우 倉과 鄕校 위에 두 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지도 윗부분의 院倉과 新倉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총 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어 다른 지도와는 차이가 있다. (양윤정)

  • 양구현 주기 (楊口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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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양구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 휴전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로 지나고 있다. 조선시대 양구현은 현재 휴전선 이남의 양구군과 거의 비슷하다. 일제시대 양구군의 수입면은 조선시대에는 회양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진산인 飛鳳山을 동측에 두고 읍치를 그렸다. 읍치는 지금의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춘천과 인제, 회양과의 경계는 산지로 표현하였으며 낭천(지금의 화천)과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북동쪽의 계산령에서 발원한 하천이 남류하면서 읍치를 감싸 돈후 다시 북류하여 낭천으로 유입된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로 지금은 화천댐의 건설로 파로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상류부에서 본류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팔량선, 광지천, 청리천 등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서쪽의 방산면과 북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류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입천으로 추정된다. 양구현의 남쪽에는 소양강이 춘천과 경계를 이루며 서류하고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일부 지류가 그려져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구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북서쪽으로 含春驛(양구읍 하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낭천현으로 이어지며, 왼쪽 아래의 水仁驛(양구읍 수인리 소재)을 지나 춘천과 연결된다. 인제로 이어지는 도로는 여러 길이 있다. 읍치의 남쪽의 道里峙를 지나 인제로 이어지는 길은 지금의 소양호로 연결된다. 廣峙를 지나는 도로는 인제를 거쳐 양양부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66戶, 田 200結46負9束, 畓 27結69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영평현 (永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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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평현은 포천시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중면 영평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 본류이고, 읍치를 지나 한탄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영평천이다. 지도에는 각각 麻屹川과 南大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하천 명칭이 통일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부르던 하천 명칭이었다. 두 하천의 합류 지점에는 漢灘이란 명칭이 적혀 있는데, 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漢灘의 漢은 ‘크다’는 뜻의 ‘한’에 대한 소리를 딴 것이고, 灘은 여울의 뜻을 딴 것이다. 오른쪽에 애매모호하게 표시된 하천은 북한강으로 흘러가는 가평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가평천 최상류의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 영평현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표시된 것이지만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현되어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러한 애매한 표현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영평현 지도에는 더욱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어 지도의 필사자들이 실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 오른쪽의 古城은 현재의 영중면 성동리에 있는 성동리산성으로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던 곳이었다.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산성이나 그 부근에서 지도 위에 표시된 곳으로 읍치가 이동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본 지도의 주기에는 읍내면, 이동면, 서면, 일동면, 남면, 북면 등 6개 面의 명칭이 적혀 있지만 지도에는 북면 2개와 남면 및 서면만이 마을 이름과 함께 적혀 있다. 본 지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평현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面 자체보다는 영평현에서 유명한 마을을 표시하기 위해 취해진 방식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서 도로 등 일부의 정보만을 생략한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평현 지도(智島)에서는 서면과 남면에 마을 이름을 생략하고 있는데, 필사자가 면의 명칭을 적어넣은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읍치 오른쪽의 미로곡봉이 미로곡역으로 잘못 필사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예산현 주기 (禮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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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현은 예산군의 예산읍, 대술면, 오가면, 일부를 제외한 신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예산읍 예산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예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하천이다. 아래쪽의 大興界에서 흘러들어오는 하천은 현재의 무한천이며, 方可山面의 산쪽에 굵게 표현된 하천은 洪陽界로 표현된 홍주 땅에서 들어오는 현재의 삽교천이다. 오른쪽의 大枝洞面과 述谷面은 현재의 대술면 지역으로 무한천의 지류인 화산천의 상류에 해당되며, 대흥 땅에서 무한천에 합류되나 본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여지도》의 경우 삽교천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으며, 《광여도》의 경우는 완전히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필사하는 경우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예산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바탕으로 첨가한 지명이 첨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지명 중 無限城이 나오는데, 본 지도의 浦倉 아래쪽 산봉우리에 적혀 있다. 무한성은 삼국시대부터 빨라도 고려초기까지 예산 지역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무한천변의 급경사를 이용해 쌓은 요새적 구릉지성이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정치적 중심지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이기봉)

  • 신녕현 (新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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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천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신녕면 화성리 일대이다. 중앙선 철도의 신녕역 북쪽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영천시 신녕면, 화남면, 화산면, 화북면의 일부, 와촌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대구 팔공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팔공산이 그려졌다. 현재의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이다. 지도 가운데 위쪽에 표시된 화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신녕면과 군위군 고로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828m의 산이다. 城內라고 적힌 것은 화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맥을 따라 아래로 내려 오면 객사가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驛館이 표시되었는데 읍치 서쪽 5리 지점에 있었던 長壽驛으로 파악된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역 이름을 적는데 여기서는 역관이라고 표시하였다. 역관 앞에서 읍치 서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로 볼 수 있다. 지도 왼쪽 위의 龜川院으로 연결된 도로는 919번 지방도로로 파악된다. 읍치 동쪽 화산면과 화남면 경계에 백학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있었던 것이 지도에 표시된 백학서원이다. 1678년(숙종 4)에 세워졌으며 이황을 배향하였다. 그 옆에 고현면이 적혔는데 신녕현의 옛 읍치가 있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신녕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이 밖에 창고, 봉수대, 누정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영암군 (靈巖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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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목(금성군)에 포함되는 지금의 금정면, 신북면 일부, 시종면 일부를 제외한 영암군과 해남군의 북일면, 북평면, 옥천면, 송지면, 완도군의 일부 섬을 관할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영암읍 동무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에 그려진 월출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 덕진면은 실제로 읍치의 북쪽이며 월출산은 남쪽에 위치한다. 이 지도는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점을 지도 제작에 적용시킨 것이다. 지도 오른쪽 위에 완도가 표시되었다. 왼쪽 위에 어란진이 보이며 그 아래에 이진진이 그려졌다. 이진진에는 수군만호가 배치되었다. 어란진은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일대가 되며 이진진은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해당한다. 이진리에는 鎭城의 흔적이 남아있다. 어란진과 이율진 중간에 튀어나온 땅모양이 보이는데 그곳이 땅끝 마을로 알려진 토말이다. 근처에 송호리 해수욕장이 남아있다. 토말 남동쪽에 있는 흑일도, 백일도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 북일면의 둔덕치로 표시된 지역이 대둔사가 있는 현재의 두륜산도립공원 지역이다. 읍치 왼쪽에 그려진 월출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안에 도갑사가 있다. 월출산에는 808.7m의 천황봉, 743.1m의 향로봉 등이 있는데 이 지도에서 높이 솟은 산 모양을 회화적으로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도갑사에는 국보 50호로 지정된 해탈문, 보물 89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다.(이현군)

  • 신계현 (新溪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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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신계군, 수안군의 서남쪽 일부, 곡산군의 남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계군의 신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쪽의 遂安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의 平山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평산계 방면에는 平山猪灘上流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평산에서는 예성강을 猪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신계현 지역의 예성강 부분에도 甫音川, 沙羅川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현재처럼 본류와 지류에 따라 명칭을 구분하기보다는 하천의 각 구간마다 지역에서 부르는 명칭이 달랐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본 지도에서는 예성강이 遂安界 방면에서 흘러 들어오고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고, 예성강 본류와 지류가 별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상당히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인위적으로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더욱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본류와 지류에 대한 실제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읍치 안에는 《광여도》, 《여지도》와 동일하게 총 9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6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신계현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해동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양양부 (襄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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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연해 있던 양양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양양부는 지금의 양양군과 영랑호 주변을 제외한 속초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진산은 설악산이나 지도에는 天叩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성곽 표시(둘레 2,380尺)와 함께 지도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 줄기를 그리고 동해안에는 의상대, 청초호 등이 있다. 부치의 남쪽을 흐르는 남대천이 오색령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며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현재의 물치천이 읍치의 북쪽에서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양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에는 五色岺, 朴達岺, 阻枕岺, 九龍岺 등이 있어 읍치에서 인제와 춘천 등을 잇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들 도로가 매우 험난한 통로임을 이면의 주기에 밝혀 놓았다. 부치의 남쪽 도로로는 읍성의 남문에서 남대천교를 지나 상운역을 거쳐 강릉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連倉驛을 거쳐 낙산사를 지나 간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 신흥사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25戶, 田 323結12負6束, 畓 476結 2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지역보다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영평현 주기 (永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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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평현은 포천시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중면 영평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 본류이고, 읍치를 지나 한탄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영평천이다. 지도에는 각각 麻屹川과 南大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하천 명칭이 통일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부르던 하천 명칭이었다. 두 하천의 합류 지점에는 漢灘이란 명칭이 적혀 있는데, 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漢灘의 漢은 ‘크다’는 뜻의 ‘한’에 대한 소리를 딴 것이고, 灘은 여울의 뜻을 딴 것이다. 오른쪽에 애매모호하게 표시된 하천은 북한강으로 흘러가는 가평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가평천 최상류의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 영평현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표시된 것이지만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현되어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러한 애매한 표현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영평현 지도에는 더욱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어 지도의 필사자들이 실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 오른쪽의 古城은 현재의 영중면 성동리에 있는 성동리산성으로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던 곳이었다.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산성이나 그 부근에서 지도 위에 표시된 곳으로 읍치가 이동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본 지도의 주기에는 읍내면, 이동면, 서면, 일동면, 남면, 북면 등 6개 面의 명칭이 적혀 있지만 지도에는 북면 2개와 남면 및 서면만이 마을 이름과 함께 적혀 있다. 본 지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평현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面 자체보다는 영평현에서 유명한 마을을 표시하기 위해 취해진 방식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서 도로 등 일부의 정보만을 생략한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평현 지도(智島)에서는 서면과 남면에 마을 이름을 생략하고 있는데, 필사자가 면의 명칭을 적어넣은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읍치 오른쪽의 미로곡봉이 미로곡역으로 잘못 필사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옥천군 (沃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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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군은 청산면과 청성면을 제외한 옥천군 전체, 영동군의 양산면과 학산면 및 용화면의 여의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옥천읍의 삼양리와 상계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괴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의 錦山界에서 흘러와 동쪽으로 휘돌아가면서 위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그러나 금강이 본 지도처럼 옥천군의 영역을 완전히 관통하면서 이어져 흐르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錦山界로부터 아래쪽의 陽山倉 부근으로 들어왔다가 永同 땅을 거쳐 다시 利山倉 지역을 지난다. 양산창 부근은 현재의 영동군 학산면과 양산면 지역으로 옥천의 다른 지역에 비해 남쪽으로 쑥 내려가 있는데,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어 그리다보니까 앞과 같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왼쪽의 珍山界에서는 현재의 서화천이 흘러 들어오지만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서화천을 본 지도처럼 그리고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서는 진산계에서 흘러 들어오는 것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는 서화천의 모습이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었지만 이후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신녕현 주기 (新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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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천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신녕면 화성리 일대이다. 중앙선 철도의 신녕역 북쪽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영천시 신녕면, 화남면, 화산면, 화북면의 일부, 와촌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대구 팔공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팔공산이 그려졌다. 현재의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이다. 지도 가운데 위쪽에 표시된 화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신녕면과 군위군 고로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828m의 산이다. 城內라고 적힌 것은 화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맥을 따라 아래로 내려 오면 객사가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驛館이 표시되었는데 읍치 서쪽 5리 지점에 있었던 長壽驛으로 파악된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역 이름을 적는데 여기서는 역관이라고 표시하였다. 역관 앞에서 읍치 서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로 볼 수 있다. 지도 왼쪽 위의 龜川院으로 연결된 도로는 919번 지방도로로 파악된다. 읍치 동쪽 화산면과 화남면 경계에 백학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있었던 것이 지도에 표시된 백학서원이다. 1678년(숙종 4)에 세워졌으며 이황을 배향하였다. 그 옆에 고현면이 적혔는데 신녕현의 옛 읍치가 있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신녕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이 밖에 창고, 봉수대, 누정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영암군 주기 (靈巖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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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목(금성군)에 포함되는 지금의 금정면, 신북면 일부, 시종면 일부를 제외한 영암군과 해남군의 북일면, 북평면, 옥천면, 송지면, 완도군의 일부 섬을 관할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영암읍 동무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에 그려진 월출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 덕진면은 실제로 읍치의 북쪽이며 월출산은 남쪽에 위치한다. 이 지도는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점을 지도 제작에 적용시킨 것이다. 지도 오른쪽 위에 완도가 표시되었다. 왼쪽 위에 어란진이 보이며 그 아래에 이진진이 그려졌다. 이진진에는 수군만호가 배치되었다. 어란진은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일대가 되며 이진진은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해당한다. 이진리에는 鎭城의 흔적이 남아있다. 어란진과 이율진 중간에 튀어나온 땅모양이 보이는데 그곳이 땅끝 마을로 알려진 토말이다. 근처에 송호리 해수욕장이 남아있다. 토말 남동쪽에 있는 흑일도, 백일도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 북일면의 둔덕치로 표시된 지역이 대둔사가 있는 현재의 두륜산도립공원 지역이다. 읍치 왼쪽에 그려진 월출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안에 도갑사가 있다. 월출산에는 808.7m의 천황봉, 743.1m의 향로봉 등이 있는데 이 지도에서 높이 솟은 산 모양을 회화적으로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도갑사에는 국보 50호로 지정된 해탈문, 보물 89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다.(이현군)

  • 신계현 주기 (新溪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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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신계군, 수안군의 서남쪽 일부, 곡산군의 남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계군의 신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쪽의 遂安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의 平山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평산계 방면에는 平山猪灘上流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평산에서는 예성강을 猪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신계현 지역의 예성강 부분에도 甫音川, 沙羅川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현재처럼 본류와 지류에 따라 명칭을 구분하기보다는 하천의 각 구간마다 지역에서 부르는 명칭이 달랐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본 지도에서는 예성강이 遂安界 방면에서 흘러 들어오고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고, 예성강 본류와 지류가 별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상당히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인위적으로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더욱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본류와 지류에 대한 실제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읍치 안에는 《광여도》, 《여지도》와 동일하게 총 9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6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신계현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해동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양양부 주기 (襄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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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연해 있던 양양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양양부는 지금의 양양군과 영랑호 주변을 제외한 속초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진산은 설악산이나 지도에는 天叩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성곽 표시(둘레 2,380尺)와 함께 지도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 줄기를 그리고 동해안에는 의상대, 청초호 등이 있다. 부치의 남쪽을 흐르는 남대천이 오색령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며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현재의 물치천이 읍치의 북쪽에서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양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에는 五色岺, 朴達岺, 阻枕岺, 九龍岺 등이 있어 읍치에서 인제와 춘천 등을 잇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들 도로가 매우 험난한 통로임을 이면의 주기에 밝혀 놓았다. 부치의 남쪽 도로로는 읍성의 남문에서 남대천교를 지나 상운역을 거쳐 강릉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連倉驛을 거쳐 낙산사를 지나 간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 신흥사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25戶, 田 323結12負6束, 畓 476結 2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지역보다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용인현 (龍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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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현은 양지면, 원삼면, 백암면을 제외한 용인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용인시 구성읍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縣內面이란 명칭이 보이고 있는데, 용구현과 합쳐져 용인현이 된 처인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처인현은 원래 처인부곡이었다가 몽골의 침입 때 적장 살례탑을 전사시킨 공이 있어 현으로 바뀌었으며, 그 중심지였던 처인성은 현재의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남아 있다. 용인현은 처인현 지역이었던 남쪽의 오산천(왼쪽)과 진위천(오른쪽) 유역, 용구현 지역이었던 북쪽의 탄천(왼쪽)과 경안천(오른쪽) 유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용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본 지도책의 경기도 다른 고을 지도에 비해 面의 정보가 자세하고, 조선후기의 민간 숙박업소인 酒幕도 나오며, 읍치에 배치된 제사 장소인 성황단, 사직단, 여단, 문묘(향교) 등도 모두 표시되어 있어 고을 사이의 편차를 쉽게 알 수 있는 지도이다. 이러한 정보는 본 지도보다 앞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으며, 뒤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정보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본적인 정보는 거의 바꾸지 않아 지도가 필사 연대의 상황을 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본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가 소략하게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지도의 주기 내용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의 주기 내용과 동일한 주기가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면과 역 등에 정밀한 기호가 사용되고 있는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옥천군 주기 (沃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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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군은 청산면과 청성면을 제외한 옥천군 전체, 영동군의 양산면과 학산면 및 용화면의 여의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옥천읍의 삼양리와 상계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괴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의 錦山界에서 흘러와 동쪽으로 휘돌아가면서 위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그러나 금강이 본 지도처럼 옥천군의 영역을 완전히 관통하면서 이어져 흐르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錦山界로부터 아래쪽의 陽山倉 부근으로 들어왔다가 永同 땅을 거쳐 다시 利山倉 지역을 지난다. 양산창 부근은 현재의 영동군 학산면과 양산면 지역으로 옥천의 다른 지역에 비해 남쪽으로 쑥 내려가 있는데,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어 그리다보니까 앞과 같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왼쪽의 珍山界에서는 현재의 서화천이 흘러 들어오지만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서화천을 본 지도처럼 그리고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서는 진산계에서 흘러 들어오는 것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는 서화천의 모습이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었지만 이후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안동부 (安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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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과 함께 주변 군현인 예안현, 봉화현, 영천군, 순흥부를 함께 그렸다. 중심부에 읍성을 그리고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읍성 안에는 객사, 아사, 사창, 낙남루, 관청, 강무당 등의 건물을 그렸으나 동헌은 보이지 않는다. 향교는 북문 인근에 표시하였으며 서문 밖에 鎭營이 있다. 읍성 주변의 하천은 낙동강으로 지도 북쪽에 그 발원지인 태백산의 황지를 표시하였다. 황지 아래쪽에는 史庫를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이 적혀있다. 낙동강을 따라 여러 倉과 험애, 요충지를 표시하였다. 안동댐의 건설로 많은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이 지도와 현재의 모습이 차이가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전통 양반촌의 대명사로 통하는 河回가 표시되었다. 산줄기와 강줄기가 돌아나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하회 옆의 병산서원(병산리)은 서애 유성룡을 배향한 곳이다. 읍치 남쪽 낙동강변에 영호루가 표시되었는데 안동교 남쪽에 복원되어 있다. 낙동강을 따라 경치 좋은 곳에 여러 서원과 누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삼태사묘는 고려 때 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길을 모신 사당이다. 읍치 서쪽의 관왕묘는 관우의 사당으로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견한 이후 세워진 것이다. 임란 이후 한양의 동대문 밖, 남대문 밖에 관왕묘가 세워졌지만, 지방 군현에 관왕묘가 세워진 것은 드문 일이다. 남문, 서문과 연결되는 도로상에 고개, 역이 표시되었다.

  • 옥과현 (玉果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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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곡성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옥과면, 겸면, 오산면, 입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신라 때에는 추성군(담양)의 영현이었다가 고려 초에는 보성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1914년 군 통합때는 땅을 나누어 담양, 창평에 포함되었다가 지금은 곡성군에 포함된 작은 고을이다. 객사가 표시된 읍치는 옥과면 옥과리 일대에 해당한다. 호남고속국도 옥과 인터체인지 북동쪽이 옛 옥과의 중심부였다. 읍성은 없고 주요 건물만 그리고 있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설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그 맥이 아래로 읍치와 향교로 연결되게 지도에 표현하였다. 객사와 향교는 형국이 분리되게 묘사하였다. 설산은 옥과면 설옥리에 있는 522.6m 높이의 산이다. 왼쪽의 산줄기는 호남정맥에 연결되며 읍치 남쪽의 하천은 현재의 옥과천으로 동북방향으로 흘러 섬진강에 유입된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지점에 고개를 표시하였고 要路, 埋伏處는 따로 표시하였다. 읍치 남쪽의 황산은 옥과면 황산리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의 관음사는 오산면에 있는 486m 높이의 검장산 동쪽에 위치한다. 지나치게 간략하게 그린 지도로 기록에 등장하는 역원, 사찰 등을 그리지 않았다. 해동지도에는 읍치 동쪽에 大富驛, 입평면 남쪽에 會賢亭이 그려졌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으나 설산 근처에 古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이현군)

  • 신천군 (信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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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쪽 1/3 정도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신천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신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지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아래쪽의 加介面과 大井面 지역은 서강 유역에 속해 있지 않으며, 동쪽으로 흘러가는 또다른 재령강의 지류 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는 이 방향이 산줄기로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 본 지도에서는 완전하게 이어진 것으로 바뀌어 있어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다. 이 점은 《광여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여지도》에서는 대부분 비슷하지만 天峯山 부근의 산줄기가 일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더 심한 오해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읍치 부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은치 왼쪽의 訓練이 있는 부분이 본 지도에는 완전히 산줄기로 둘러싸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衙舍 부분의 산줄기가 극히 짧음에 반해 본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감싸고 있다. 또한 남쪽 造山도 《해동지도》에는 단지 평지에 작게 솟아난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동쪽의 산줄기와 연결된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읍치의 풍수적 명당 형국을 강조하여 그리려는 의도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본 지도보다는 덜 하지만 造山이 동쪽 산줄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측면은 동일하다.(이기봉)

  • 영월부 (寧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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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영월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월부는 지금의 영월군 중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된다. 동으로 삼척에 접하고 서로 원주와 제천에 접하고 있어 동서로 긴 형태를 띠고 있으나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전체 구도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다.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성곽 시설은 없다. 가까이에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인 莊陵과 陵寺인 보덕사가 표시되어 있다. 산세는 동쪽에 백두대간의 내맥을 표현하여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읍치는 두만산에서 이어진 맥이 성산과 증산을 거쳐 내려오다 동쪽으로 삼옥치(광여도에서는 삼왕치로 기재)를 거쳐 읍치를 감싸면 서로는 加斤峙로 이어진다. 서강이 청령포를 지나 읍치 앞으로 흐르며서 동강을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월부 해제 참조). 다른 지도들과는 달리 영월부의 도로가 상세하게 표현된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다른 지도에는 陽淵驛, 延平驛, 高德驛 등 3곳의 역이 기재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고덕역이 고덕치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는 영춘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고, 동으로는 삼옥치-상동면을 거쳐 삼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으로는 분덕치를 지나 刀摩寺를 거쳐 평창(지도에는 ‘昌平’으로 기재되어 있다)으로 연결되고, 延平驛에서 고덕치를 지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정선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栗峴을 거친다. 서로는 가근치를 넘어 양연역을 거쳐 제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造乙峙를 지나며 원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龍井院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용인현 주기 (龍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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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현은 양지면, 원삼면, 백암면을 제외한 용인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용인시 구성읍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縣內面이란 명칭이 보이고 있는데, 용구현과 합쳐져 용인현이 된 처인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처인현은 원래 처인부곡이었다가 몽골의 침입 때 적장 살례탑을 전사시킨 공이 있어 현으로 바뀌었으며, 그 중심지였던 처인성은 현재의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남아 있다. 용인현은 처인현 지역이었던 남쪽의 오산천(왼쪽)과 진위천(오른쪽) 유역, 용구현 지역이었던 북쪽의 탄천(왼쪽)과 경안천(오른쪽) 유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용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본 지도책의 경기도 다른 고을 지도에 비해 面의 정보가 자세하고, 조선후기의 민간 숙박업소인 酒幕도 나오며, 읍치에 배치된 제사 장소인 성황단, 사직단, 여단, 문묘(향교) 등도 모두 표시되어 있어 고을 사이의 편차를 쉽게 알 수 있는 지도이다. 이러한 정보는 본 지도보다 앞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으며, 뒤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정보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본적인 정보는 거의 바꾸지 않아 지도가 필사 연대의 상황을 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본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가 소략하게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지도의 주기 내용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의 주기 내용과 동일한 주기가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면과 역 등에 정밀한 기호가 사용되고 있는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온양군 (溫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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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군은 아산시의 시내, 송악면, 배방면, 탕정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아산시의 읍내동에 있었는데, 현재도 동헌과 향교가 남아 있다. 왼쪽 위의 溫泉이 현재의 아산시 시내에 해당되며, 온양온천으로 개발되어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중심지가 되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介峙에서 발원하여 북쪽을 돌아 新昌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곡교천이며, 읍치를 통과해 곡교천에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온양천이다. 곡교천은 실제로는 천안의 땅에서 발원하여 흘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또한 稷山界와 全義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해당 방향으로 가면 두 군현의 경계에 이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아 오해의 여지가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온양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와 《해동지도》의 첨지에 붙어 있는 일부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정보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건물의 수와 위치 등이 약간씩 다른데, 필사자의 자의에 따라 일부씩 변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 아래의 書院이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의 南山寺  아래쪽 건물로 표시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와 다르게 표시했다. 이런 현상은 客舍와 衙舍의 위치에서도 나타나는데, 본 지도에서는 두 건물이 남북으로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동서로 그려져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서원과 객사 및 아사의 위치가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의 필사자나 본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자의로 원본의 내용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안동부 주기 (安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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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과 함께 주변 군현인 예안현, 봉화현, 영천군, 순흥부를 함께 그렸다. 중심부에 읍성을 그리고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읍성 안에는 객사, 아사, 사창, 낙남루, 관청, 강무당 등의 건물을 그렸으나 동헌은 보이지 않는다. 향교는 북문 인근에 표시하였으며 서문 밖에 鎭營이 있다. 읍성 주변의 하천은 낙동강으로 지도 북쪽에 그 발원지인 태백산의 황지를 표시하였다. 황지 아래쪽에는 史庫를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이 적혀있다. 낙동강을 따라 여러 倉과 험애, 요충지를 표시하였다. 안동댐의 건설로 많은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이 지도와 현재의 모습이 차이가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전통 양반촌의 대명사로 통하는 河回가 표시되었다. 산줄기와 강줄기가 돌아나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하회 옆의 병산서원(병산리)은 서애 유성룡을 배향한 곳이다. 읍치 남쪽 낙동강변에 영호루가 표시되었는데 안동교 남쪽에 복원되어 있다. 낙동강을 따라 경치 좋은 곳에 여러 서원과 누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삼태사묘는 고려 때 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길을 모신 사당이다. 읍치 서쪽의 관왕묘는 관우의 사당으로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견한 이후 세워진 것이다. 임란 이후 한양의 동대문 밖, 남대문 밖에 관왕묘가 세워졌지만, 지방 군현에 관왕묘가 세워진 것은 드문 일이다. 남문, 서문과 연결되는 도로상에 고개, 역이 표시되었다.

  • 옥과현 주기 (玉果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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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곡성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옥과면, 겸면, 오산면, 입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신라 때에는 추성군(담양)의 영현이었다가 고려 초에는 보성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1914년 군 통합때는 땅을 나누어 담양, 창평에 포함되었다가 지금은 곡성군에 포함된 작은 고을이다. 객사가 표시된 읍치는 옥과면 옥과리 일대에 해당한다. 호남고속국도 옥과 인터체인지 북동쪽이 옛 옥과의 중심부였다. 읍성은 없고 주요 건물만 그리고 있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설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그 맥이 아래로 읍치와 향교로 연결되게 지도에 표현하였다. 객사와 향교는 형국이 분리되게 묘사하였다. 설산은 옥과면 설옥리에 있는 522.6m 높이의 산이다. 왼쪽의 산줄기는 호남정맥에 연결되며 읍치 남쪽의 하천은 현재의 옥과천으로 동북방향으로 흘러 섬진강에 유입된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지점에 고개를 표시하였고 要路, 埋伏處는 따로 표시하였다. 읍치 남쪽의 황산은 옥과면 황산리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의 관음사는 오산면에 있는 486m 높이의 검장산 동쪽에 위치한다. 지나치게 간략하게 그린 지도로 기록에 등장하는 역원, 사찰 등을 그리지 않았다. 해동지도에는 읍치 동쪽에 大富驛, 입평면 남쪽에 會賢亭이 그려졌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으나 설산 근처에 古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이현군)

  • 신천군 주기 (信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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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쪽 1/3 정도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신천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신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지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아래쪽의 加介面과 大井面 지역은 서강 유역에 속해 있지 않으며, 동쪽으로 흘러가는 또다른 재령강의 지류 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는 이 방향이 산줄기로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 본 지도에서는 완전하게 이어진 것으로 바뀌어 있어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다. 이 점은 《광여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여지도》에서는 대부분 비슷하지만 天峯山 부근의 산줄기가 일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더 심한 오해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읍치 부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은치 왼쪽의 訓練이 있는 부분이 본 지도에는 완전히 산줄기로 둘러싸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衙舍 부분의 산줄기가 극히 짧음에 반해 본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감싸고 있다. 또한 남쪽 造山도 《해동지도》에는 단지 평지에 작게 솟아난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동쪽의 산줄기와 연결된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읍치의 풍수적 명당 형국을 강조하여 그리려는 의도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본 지도보다는 덜 하지만 造山이 동쪽 산줄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측면은 동일하다.(이기봉)

  • 영월부 주기 (寧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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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영월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월부는 지금의 영월군 중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된다. 동으로 삼척에 접하고 서로 원주와 제천에 접하고 있어 동서로 긴 형태를 띠고 있으나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전체 구도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다.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성곽 시설은 없다. 가까이에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인 莊陵과 陵寺인 보덕사가 표시되어 있다. 산세는 동쪽에 백두대간의 내맥을 표현하여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읍치는 두만산에서 이어진 맥이 성산과 증산을 거쳐 내려오다 동쪽으로 삼옥치(광여도에서는 삼왕치로 기재)를 거쳐 읍치를 감싸면 서로는 加斤峙로 이어진다. 서강이 청령포를 지나 읍치 앞으로 흐르며서 동강을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월부 해제 참조). 다른 지도들과는 달리 영월부의 도로가 상세하게 표현된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다른 지도에는 陽淵驛, 延平驛, 高德驛 등 3곳의 역이 기재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고덕역이 고덕치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는 영춘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고, 동으로는 삼옥치-상동면을 거쳐 삼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으로는 분덕치를 지나 刀摩寺를 거쳐 평창(지도에는 ‘昌平’으로 기재되어 있다)으로 연결되고, 延平驛에서 고덕치를 지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정선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栗峴을 거친다. 서로는 가근치를 넘어 양연역을 거쳐 제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造乙峙를 지나며 원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龍井院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음죽현 (陰竹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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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죽현은 경기도의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 충청북도의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 병암리, 도신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호원읍의 선읍리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현재 청미천이라 부르는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음죽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첫째, 도로라는 측면에서 가장 자세한 것은 《해동지도》의 것이며, 본 지도의 것은 극히 소략하게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특히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왼쪽의 忠州界에서 아래쪽의 忠州界까지 이어진 도로를 하천으로 잘못 그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도로라는 기준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의 도로만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광여도》에는 비록 도로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도로와 함께 기록되어 있던 大路와 中路 및 小路의 기록이 《해동지도》와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다. 예를 들어 《광여도》에 표시된 읍치(縣) 오른쪽의 自縣去雙峴小路와 아래쪽의 自縣通無極小路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은 도로는 《해동지도》에 가깝고, 도로의 명칭 기록은 《광여도》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두 측면에서 본 지도는 원본을 아주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지도의 주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본 지도의 것은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가장 먼저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이후 상황에 맞게 주기를 변형한 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본 지도는 나머지 3개 지도에 縣이라 표시된 읍치에 衙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용어를 통일하기 위해 본 지도의 필사자가 교정한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 온양군 주기 (溫陽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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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군은 아산시의 시내, 송악면, 배방면, 탕정면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아산시의 읍내동에 있었는데, 현재도 동헌과 향교가 남아 있다. 왼쪽 위의 溫泉이 현재의 아산시 시내에 해당되며, 온양온천으로 개발되어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중심지가 되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介峙에서 발원하여 북쪽을 돌아 新昌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곡교천이며, 읍치를 통과해 곡교천에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온양천이다. 곡교천은 실제로는 천안의 땅에서 발원하여 흘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또한 稷山界와 全義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해당 방향으로 가면 두 군현의 경계에 이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아 오해의 여지가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온양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와 《해동지도》의 첨지에 붙어 있는 일부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정보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건물의 수와 위치 등이 약간씩 다른데, 필사자의 자의에 따라 일부씩 변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 아래의 書院이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의 南山寺  아래쪽 건물로 표시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와 다르게 표시했다. 이런 현상은 客舍와 衙舍의 위치에서도 나타나는데, 본 지도에서는 두 건물이 남북으로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동서로 그려져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서원과 객사 및 아사의 위치가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의 필사자나 본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자의로 원본의 내용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안의현 (安義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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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利安縣과 感陰縣이 합쳐져서 安陰縣이 되었다가 1767년(영조 43)에 안의현으로 그 명칭이 바뀐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광여도에 안음현으로 등장하는 지역의 고지도이다. 읍치는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일대에 해당하며 함양군의 안의면, 서상면, 서하면, 거창군 마리면, 북상면, 위천면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전라도와 경계에 있는 군현이다. 지도 위에 덕유산이 표시되었는데 덕유산 국립공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산줄기를 잇달아 그려 맥으로 보이게 그렸다. 진산은 읍치 서쪽에 위치한 城山이다. 일반적인 군현지도에서는 주변부 지역을 축소하고 읍치지역을 중심부에 의도적으로 크게 확대하여 그리는 이중 축척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이 지도는 어디가 읍치지역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렸다. 관아 건물도 다른 지도에서는 여러 건물을 그리는데 비해 이 지도는 衙라고 표시한 건물 하나만 그렸다. 지도 아래쪽이 읍치 지역이다. 산줄기, 물줄기 외에 향교, 충렬사, 용문서원, 창고만 표시하였다. 龍門書院은 鄭汝昌(1450-1504)과 鄭薀(1569-1642) 등을 배향한 서원이다. 지도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도로조차 그려지지 않았다. 지도에 도로를 그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지도이다. 다른 지도에서는 방면의 명칭을 네모 안에 따로 기입하는데 비해 이 지도에서는 村, 谷, 谷村 등으로 지명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옥구현 (沃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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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군산시내, 옥구읍, 옥산면, 옥서면, 회현면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며 읍치는 현재의 군산시내가 아니라 옥구읍 상평리에 해당한다. 상평리에 동문 안 지명이 남아있다. 옥구선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중심지가 바뀐 군현이다. 지도 아래쪽에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은 만경강이며 옥구현의 북쪽에서 금강이 바다로 유입된다. 서쪽에 바다가 그려졌고 그 위에 여러 섬들이 표시되었다.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옥서면 옥봉리와 아래쪽의 비응도는 제방으로 연결되며 그 남쪽의 바다는 모두 매립되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겹겹이 감싸고 있는데 의도적으로 강한 맥세를 표현하고 있다. 읍치 북쪽의 발이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성과 성문을 그리고 그 안에 건물을 그렸는데 일반적으로 읍성 밖에 배치되는 향교가 성 안에 들어가 있는 점이 다른 군현과 차이점이다. 도로망은 남문과 서문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군산이라는 지명은 지도 북쪽에 표시된 羣山鎭에 기원을 둔다. 수군만호가 있었던 群山浦營이다. 그 왼쪽에 七邑海倉은 群山倉으로 옥구, 전주, 진안, 장수, 금구, 태인, 임실 등 7읍의 田稅와 大同米를 계량하여 한양으로 운송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비응도 위의 오식도가 지금 이 지도에서는 섬으로 표시되었으나 현대 지도는 다르게 나타난다. 오식도와 옥서면 사이는 매립되어 군산국가산업단지가 되었다.(이현군)

  • 안악군 (安岳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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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은천군, 서쪽 일부를 제외한 안악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안군의 안악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악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북쪽은 바다처럼, 동쪽과 남쪽의 하천이 상당히 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북쪽은 대동강이 바다로 진입하는 부분이고, 동쪽은 재령강의 본류이며, 남쪽은 그 지류인 현재의 서강이다. 모두 밀물 때 바닷물이 유입되는 곳으로서 상당히 넓은 부분에 걸쳐 지도에서처럼 갯벌이 발달되어 있었다. 이곳은 일제시대 이후 대대적으로 개간된 지역 중의 하나이며, 북쪽의 猪島도 현재는 완전히 육지화되어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없다. 특히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長慶塔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없는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해동지도》는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도로나 일부 부분에서 편집을 행하면서 필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읍치로부터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이러한 거리 기록이 생략되어 있다. 거리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까우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거리 기록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영흥부 (永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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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상으로 유입하는 용흥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영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요덕군·금야군과 고원군 일부에 해당된다. 이성계의 부친인 桓祖이 살고 조선 태조의 탄생지인 濬源殿 등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흥부 해제 참조). 영흥부의 실제 형태는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동쪽을 아래로 배치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지도의 위쪽에 산지와 곳곳에 위치한 峴과 嶺의 위치를 기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이 유역을 감싸는 형태로 묘사하였다. 龍興江이 산지의 여러 곳에서 발원한 지류들을 합류하면서 동해상에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입석천으로 보인다. 五峰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두 지류는 지금의 단속천과 용수피천으로 생각된다. 이들 지류를 합류한 용흥강은 하류에서는 여러 하중도와 삼각주를 형성한다. 하구에 위치한 대저도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반도 형태로 묘사된 馬熊島는 지금 육계도화한 호도반도이다. 읍치는 용흥강 우안에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금야군 금야읍 일대이다. 鎭山인 聖歷山의 위치에는 聖歷寺가 표시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그 내용은 간략하다. 읍치의 우측으로는 里石乙峴을 거쳐 定平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 高原과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으로 용흥강변을 따라 鐵水倉과 雲倉을 거쳐 雲山嶺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046戶, 田 6,089結12負9束, 畓 446結74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지만 고을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음죽현 주기 (陰竹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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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죽현은 경기도의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 충청북도의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 병암리, 도신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호원읍의 선읍리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현재 청미천이라 부르는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음죽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첫째, 도로라는 측면에서 가장 자세한 것은 《해동지도》의 것이며, 본 지도의 것은 극히 소략하게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특히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왼쪽의 忠州界에서 아래쪽의 忠州界까지 이어진 도로를 하천으로 잘못 그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도로라는 기준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의 도로만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광여도》에는 비록 도로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도로와 함께 기록되어 있던 大路와 中路 및 小路의 기록이 《해동지도》와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다. 예를 들어 《광여도》에 표시된 읍치(縣) 오른쪽의 自縣去雙峴小路와 아래쪽의 自縣通無極小路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은 도로는 《해동지도》에 가깝고, 도로의 명칭 기록은 《광여도》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두 측면에서 본 지도는 원본을 아주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지도의 주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본 지도의 것은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가장 먼저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이후 상황에 맞게 주기를 변형한 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본 지도는 나머지 3개 지도에 縣이라 표시된 읍치에 衙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용어를 통일하기 위해 본 지도의 필사자가 교정한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 은진현 (恩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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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진현은 논산시의 은진면과 채운면 및 가야곡면, 황산리를 제외한 강경읍, 일부를 제외한 시내, 양촌면과 연무읍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은진면의 연서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의 尼山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고, 오른쪽의 全州界에서 흘러와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본 지도책의 湖西圖에는 尼山이 1776년(영조 52)에 바뀌는 尼城으로 교정되어 있음에도 본 지도에는 과거의 지명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은진현과 경계를 맞대기 어려운 全州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의 논산시 양촌면 일대에 있었던 전주의 월경지 때문이다. 왼쪽에 江倉이 있는 지역은 조선후기에 금강에서 가장 번영한 포구였던 강경포가 있던 곳이다.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바닷배가 정박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이 잘 구비되어 있어 큰 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다. 江倉은 은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런 창고가 바다에 설치되면 보통 海倉이라고 하며, 강에 설치되면 江倉이라고 하였다. 산이 거의 없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산줄기를 강조하여 그렸기 때문에 본 지도만으로는 실제의 지형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른쪽의 高山界와 礪山界 방면에는 400m 이상의 산이 펼쳐져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작은 둔덕 정도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은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이기봉)

  • 안의현 주기 (安義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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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利安縣과 感陰縣이 합쳐져서 安陰縣이 되었다가 1767년(영조 43)에 안의현으로 그 명칭이 바뀐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광여도에 안음현으로 등장하는 지역의 고지도이다. 읍치는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일대에 해당하며 함양군의 안의면, 서상면, 서하면, 거창군 마리면, 북상면, 위천면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전라도와 경계에 있는 군현이다. 지도 위에 덕유산이 표시되었는데 덕유산 국립공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산줄기를 잇달아 그려 맥으로 보이게 그렸다. 진산은 읍치 서쪽에 위치한 城山이다. 일반적인 군현지도에서는 주변부 지역을 축소하고 읍치지역을 중심부에 의도적으로 크게 확대하여 그리는 이중 축척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이 지도는 어디가 읍치지역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렸다. 관아 건물도 다른 지도에서는 여러 건물을 그리는데 비해 이 지도는 衙라고 표시한 건물 하나만 그렸다. 지도 아래쪽이 읍치 지역이다. 산줄기, 물줄기 외에 향교, 충렬사, 용문서원, 창고만 표시하였다. 龍門書院은 鄭汝昌(1450-1504)과 鄭薀(1569-1642) 등을 배향한 서원이다. 지도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도로조차 그려지지 않았다. 지도에 도로를 그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지도이다. 다른 지도에서는 방면의 명칭을 네모 안에 따로 기입하는데 비해 이 지도에서는 村, 谷, 谷村 등으로 지명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옥구현 주기 (沃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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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군산시내, 옥구읍, 옥산면, 옥서면, 회현면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며 읍치는 현재의 군산시내가 아니라 옥구읍 상평리에 해당한다. 상평리에 동문 안 지명이 남아있다. 옥구선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중심지가 바뀐 군현이다. 지도 아래쪽에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은 만경강이며 옥구현의 북쪽에서 금강이 바다로 유입된다. 서쪽에 바다가 그려졌고 그 위에 여러 섬들이 표시되었다.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옥서면 옥봉리와 아래쪽의 비응도는 제방으로 연결되며 그 남쪽의 바다는 모두 매립되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겹겹이 감싸고 있는데 의도적으로 강한 맥세를 표현하고 있다. 읍치 북쪽의 발이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성과 성문을 그리고 그 안에 건물을 그렸는데 일반적으로 읍성 밖에 배치되는 향교가 성 안에 들어가 있는 점이 다른 군현과 차이점이다. 도로망은 남문과 서문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군산이라는 지명은 지도 북쪽에 표시된 羣山鎭에 기원을 둔다. 수군만호가 있었던 群山浦營이다. 그 왼쪽에 七邑海倉은 群山倉으로 옥구, 전주, 진안, 장수, 금구, 태인, 임실 등 7읍의 田稅와 大同米를 계량하여 한양으로 운송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비응도 위의 오식도가 지금 이 지도에서는 섬으로 표시되었으나 현대 지도는 다르게 나타난다. 오식도와 옥서면 사이는 매립되어 군산국가산업단지가 되었다.(이현군)

  • 안악군 주기 (安岳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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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은천군, 서쪽 일부를 제외한 안악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안군의 안악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악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북쪽은 바다처럼, 동쪽과 남쪽의 하천이 상당히 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북쪽은 대동강이 바다로 진입하는 부분이고, 동쪽은 재령강의 본류이며, 남쪽은 그 지류인 현재의 서강이다. 모두 밀물 때 바닷물이 유입되는 곳으로서 상당히 넓은 부분에 걸쳐 지도에서처럼 갯벌이 발달되어 있었다. 이곳은 일제시대 이후 대대적으로 개간된 지역 중의 하나이며, 북쪽의 猪島도 현재는 완전히 육지화되어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없다. 특히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長慶塔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없는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해동지도》는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도로나 일부 부분에서 편집을 행하면서 필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읍치로부터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이러한 거리 기록이 생략되어 있다. 거리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까우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거리 기록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영흥부 주기 (永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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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의 동해상으로 유입하는 용흥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영흥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요덕군·금야군과 고원군 일부에 해당된다. 이성계의 부친인 桓祖이 살고 조선 태조의 탄생지인 濬源殿 등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흥부 해제 참조). 영흥부의 실제 형태는 서에서 동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서쪽을 위로, 동쪽을 아래로 배치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지도의 위쪽에 산지와 곳곳에 위치한 峴과 嶺의 위치를 기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이 유역을 감싸는 형태로 묘사하였다. 龍興江이 산지의 여러 곳에서 발원한 지류들을 합류하면서 동해상에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입석천으로 보인다. 五峰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두 지류는 지금의 단속천과 용수피천으로 생각된다. 이들 지류를 합류한 용흥강은 하류에서는 여러 하중도와 삼각주를 형성한다. 하구에 위치한 대저도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반도 형태로 묘사된 馬熊島는 지금 육계도화한 호도반도이다. 읍치는 용흥강 우안에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금야군 금야읍 일대이다. 鎭山인 聖歷山의 위치에는 聖歷寺가 표시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그 내용은 간략하다. 읍치의 우측으로는 里石乙峴을 거쳐 定平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 高原과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으로 용흥강변을 따라 鐵水倉과 雲倉을 거쳐 雲山嶺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046戶, 田 6,089結12負9束, 畓 446結74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지만 고을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이천부 (利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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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이천시의 시내, 부발읍, 대월면, 모가면, 호법면, 마장면, 신둔면, 백사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이천 시내 관고동․창전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복하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이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어 같은 계통이라도 필사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좌향과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서쪽에 있는 고을의 진산 雪峯山과 그로부터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에는 상대적으로 소략해지고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왼쪽 위의 彌勒山과 오른쪽의 南北五十里와 東西四十里 등의 문구가 《해동지도》와 동일하게 들어가 있어 동일한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리고 《해동지도》의 오른쪽 아래쪽에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가 참고한 원본 계통이 아니라 본 지도나 그 필사본 계통을 참고하여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필사 과정에서 도로와 일부 지명 및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 麗州界로 빠져나가는 복하천의 하류가 생략되어 있어 하천의 유로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 아래의 麗州梨浦界가 麗州浦界로 적혀 있는 등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이기봉)

  • 은진현 주기 (恩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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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진현은 논산시의 은진면과 채운면 및 가야곡면, 황산리를 제외한 강경읍, 일부를 제외한 시내, 양촌면과 연무읍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은진면의 연서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의 尼山界에서 흘러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고, 오른쪽의 全州界에서 흘러와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논산천이다. 본 지도책의 湖西圖에는 尼山이 1776년(영조 52)에 바뀌는 尼城으로 교정되어 있음에도 본 지도에는 과거의 지명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은진현과 경계를 맞대기 어려운 全州界가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의 논산시 양촌면 일대에 있었던 전주의 월경지 때문이다. 왼쪽에 江倉이 있는 지역은 조선후기에 금강에서 가장 번영한 포구였던 강경포가 있던 곳이다.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바닷배가 정박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이 잘 구비되어 있어 큰 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다. 江倉은 은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런 창고가 바다에 설치되면 보통 海倉이라고 하며, 강에 설치되면 江倉이라고 하였다. 산이 거의 없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산줄기를 강조하여 그렸기 때문에 본 지도만으로는 실제의 지형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른쪽의 高山界와 礪山界 방면에는 400m 이상의 산이 펼쳐져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작은 둔덕 정도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은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이기봉)

  • 앞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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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앞표지 1면입니다.

  • 용담현 (龍潭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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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주천면, 안천면, 정천면 일대를 관할범위로 하며 용담면 옥거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龍岡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향교 바로 뒤에 그려진 산이 용강산이다. 읍치 남쪽의 하천에 주자천, 정자천이 적혔는데 지금도 그 이름이 사용된다. 하천 이름에 朱子, 程子를 붙인 점이 이채롭다. 이 두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 伊川으로 유입되는데 금강의 상류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에 좁은 유로가 넓어지면서 島岩이 표시된 곳이 나오는데 읍치의 동쪽, 도암의 남쪽에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주변 지형이 달라졌다. 읍치에는 성곽은 없고 주요 건물만 표시되었는데 향교와 객사가 동일한 형국 안에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읍치 동남쪽에 이름없는 건물이 그려졌는데 三川書院으로 보인다. 용담면 월계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1679(숙종 5)에 사액받았다.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해동지도에는 읍치와 서원 사이에 달계역이 그려졌다. 월계리에 달계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읍치 왼쪽에 龍湫, 臥龍岩 등이 그려졌는데 삼천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 하나가 諸葛亮이다. 유가적 색채가 짙은 명칭인 君子亭, 도가적인 逍遙臺 등의 명칭이 읍치 남쪽에 나란히 표시되었다. 주요 하천과 산에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 지명이 활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읍치 서쪽은 금남정맥으로 연결되는 산줄기가 그려졌는데 埋伏處라고 따로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이현군)

  • 안주목 (安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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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安州牧〉으로, 북한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천강 이북지역을 제외한 안주시 전 지역, 문덕군, 박천군 청산리와 영변군 연화리와 서화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平安道의 이름 중 ‘平’자는 평양에서, ‘安’자는 바로 이 고을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이름난 고을이며, 의주대로 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안주목 지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하천의 유로는 《해동지도》도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그렸지만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동서를 남북보다 훨씬 길게 그렸지만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이렇게 된 이유는 본 지도가 세로로 긴 사각형의 종이에 맞게 고을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고을의 실제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긴 형태를 이루고 있어 《해동지도》가 본 지도보다 더 사실에 가깝다. 동서와 남북의 길이에 대한 차이 때문에 하천의 유로에 대한 표현이 많이 달라졌다. 읍치 위쪽의 청천강은 《해동지도》에는 실제처럼 거의 西流하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본 지도는 마치 서류하다가 南流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오른쪽 위에 順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실제로는 고을의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이 하천의 위치가 실제와 유사한 위치에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동북쪽에 있는 것처럼 잘못 표현되어 있다. 왼쪽 아래의 老江鎭 역시 《해동지도》에는 실제와 가깝게 읍치의 서남 방향에 있지만 본 지도에는 마치 남쪽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의 모습을 보면,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의 경우 평안도 병마절도사영이 이 고을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兵營과 기타 건물이 총 6개 그려져 있으나,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倉을 비롯한 총 11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 모습은 《광여도》와 비슷하나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山亭을 포함하여 총 14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본 지도에 비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양윤정)

  • 온성부 (穩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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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의 북부지방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온성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온성부의 비월지가 경원부와 경흥부에 있어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회화식 지도에서 비월지의 묘사가 생략되어 있으며 지도에 묘사된 범위는 지금의 함경북도 온성군의 동북부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감입 곡류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중국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으로 豊界江(일명 分界江)이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 月德訓에서 발원한 하천(비변사인 지도에서는 ‘泉川’으로 기재)과 三溪川이 그려져 있다. 또한 두만강 대안의 청나라 영토에도 지명이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 당시 두만강은 국경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조선측 영토에서는 소규모 하천이 두만강으로 유입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곽(둘레;5,804尺)으로 둘러싸인 읍치의 서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산천인 것으로 보이며, 우측의 하천은 풍천천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류부의 立岩 부근으로 흐르는 하천은 월파천으로 보인다. 국경이었던 두만강에 접하고 있어 관방관련 지명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온성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柔遠驛와 美錢驛·永達驛·黃拓坡驛 등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역을 경유하여 인근 군현과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41戶, 田 2,666結1負9束, 畓 13結91負로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다.(김기혁)

  • 이천부 주기 (利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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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이천시의 시내, 부발읍, 대월면, 모가면, 호법면, 마장면, 신둔면, 백사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이천 시내 관고동․창전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복하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이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어 같은 계통이라도 필사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좌향과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서쪽에 있는 고을의 진산 雪峯山과 그로부터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에는 상대적으로 소략해지고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왼쪽 위의 彌勒山과 오른쪽의 南北五十里와 東西四十里 등의 문구가 《해동지도》와 동일하게 들어가 있어 동일한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리고 《해동지도》의 오른쪽 아래쪽에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가 참고한 원본 계통이 아니라 본 지도나 그 필사본 계통을 참고하여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필사 과정에서 도로와 일부 지명 및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 麗州界로 빠져나가는 복하천의 하류가 생략되어 있어 하천의 유로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 아래의 麗州梨浦界가 麗州浦界로 적혀 있는 등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이기봉)

  • 음성현 (陰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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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현은 음성군의 읍성읍과 원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음성읍의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음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첫째,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향교, 객사, 아사 등의 3개 건물만 표시된 반면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倉과 기타 건물 및 성곽이 표시되어 있다. 둘째, 《해동지도》에는 왼쪽 아래쪽 鎭川界 방면에 하천이 하나 그려져 있는 반면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없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음성현 지도도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구도를 하고 있지만 앞의 2가지 측면에서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을 필사하면서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앞의 2가지 측면을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을 충실히 따르면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 진천계 방향에 표시된 하천은 현재의 음성군 원남면에 있는 초평천 상류로서 사실에 부합되기 때문에 상당한 검토를 통해 첨가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음성현에는 읍성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성곽을 표시하지 않은 《해동지도》가 사실에 더 가깝다. 다만 본 지도 계통의 원본 작성자는 객사와 아사를 둘러싼 담장을 성곽처럼 그렸을 가능성이 높으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이런 사실을 이해하고 교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지도》의 경우 이 부분을 진짜 성곽처럼 그려넣고 있어 가장 많은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다.(이기봉)

  • 앞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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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앞표지 2면입니다.

  • 용담현 주기 (龍潭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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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주천면, 안천면, 정천면 일대를 관할범위로 하며 용담면 옥거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龍岡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향교 바로 뒤에 그려진 산이 용강산이다. 읍치 남쪽의 하천에 주자천, 정자천이 적혔는데 지금도 그 이름이 사용된다. 하천 이름에 朱子, 程子를 붙인 점이 이채롭다. 이 두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 伊川으로 유입되는데 금강의 상류에 해당한다. 읍치 동쪽에 좁은 유로가 넓어지면서 島岩이 표시된 곳이 나오는데 읍치의 동쪽, 도암의 남쪽에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주변 지형이 달라졌다. 읍치에는 성곽은 없고 주요 건물만 표시되었는데 향교와 객사가 동일한 형국 안에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읍치 동남쪽에 이름없는 건물이 그려졌는데 三川書院으로 보인다. 용담면 월계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1679(숙종 5)에 사액받았다.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해동지도에는 읍치와 서원 사이에 달계역이 그려졌다. 월계리에 달계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읍치 왼쪽에 龍湫, 臥龍岩 등이 그려졌는데 삼천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 하나가 諸葛亮이다. 유가적 색채가 짙은 명칭인 君子亭, 도가적인 逍遙臺 등의 명칭이 읍치 남쪽에 나란히 표시되었다. 주요 하천과 산에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 지명이 활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읍치 서쪽은 금남정맥으로 연결되는 산줄기가 그려졌는데 埋伏處라고 따로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이현군)

  • 안주목 주기 (安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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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安州牧〉으로, 북한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천강 이북지역을 제외한 안주시 전 지역, 문덕군, 박천군 청산리와 영변군 연화리와 서화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平安道의 이름 중 ‘平’자는 평양에서, ‘安’자는 바로 이 고을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이름난 고을이며, 의주대로 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 온성부 주기 (穩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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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의 북부지방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온성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온성부의 비월지가 경원부와 경흥부에 있어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회화식 지도에서 비월지의 묘사가 생략되어 있으며 지도에 묘사된 범위는 지금의 함경북도 온성군의 동북부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두만강이 감입 곡류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중국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으로 豊界江(일명 分界江)이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 月德訓에서 발원한 하천(비변사인 지도에서는 ‘泉川’으로 기재)과 三溪川이 그려져 있다. 또한 두만강 대안의 청나라 영토에도 지명이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 당시 두만강은 국경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생활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조선측 영토에서는 소규모 하천이 두만강으로 유입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곽(둘레;5,804尺)으로 둘러싸인 읍치의 서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산천인 것으로 보이며, 우측의 하천은 풍천천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류부의 立岩 부근으로 흐르는 하천은 월파천으로 보인다. 국경이었던 두만강에 접하고 있어 관방관련 지명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온성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柔遠驛와 美錢驛·永達驛·黃拓坡驛 등이 적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들 역을 경유하여 인근 군현과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41戶, 田 2,666結1負9束, 畓 13結91負로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다.(김기혁)

  • 인천부 (仁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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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부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동구, 중구, 남구, 연수구, 남동구, 시흥시의 옛 소래읍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의 문학산 북쪽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인천부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文鶴山城과 문학산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인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도로와 위치 정보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 도로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서는 소략하지만 도로가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해동지도》에는 面과 驛 등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해동지도》의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가 없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의 주기에는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같은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였지만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를 수록하면서 지도 위에서는 삭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주기에는 월경지로 존재했던 梨浦面과 거리 정보가 생략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밖에 오른쪼의 덕적도와 무의도 및 용유도 등에 적혀 있던 《해동지도》의 주기 내용도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는 도로와 면의 표시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나 그 계통을 바탕으로 다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음성현 주기 (陰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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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현은 음성군의 읍성읍과 원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음성읍의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음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첫째,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향교, 객사, 아사 등의 3개 건물만 표시된 반면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倉과 기타 건물 및 성곽이 표시되어 있다. 둘째, 《해동지도》에는 왼쪽 아래쪽 鎭川界 방면에 하천이 하나 그려져 있는 반면에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없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음성현 지도도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구도를 하고 있지만 앞의 2가지 측면에서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을 필사하면서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앞의 2가지 측면을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을 충실히 따르면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 진천계 방향에 표시된 하천은 현재의 음성군 원남면에 있는 초평천 상류로서 사실에 부합되기 때문에 상당한 검토를 통해 첨가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음성현에는 읍성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성곽을 표시하지 않은 《해동지도》가 사실에 더 가깝다. 다만 본 지도 계통의 원본 작성자는 객사와 아사를 둘러싼 담장을 성곽처럼 그렸을 가능성이 높으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이런 사실을 이해하고 교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지도》의 경우 이 부분을 진짜 성곽처럼 그려넣고 있어 가장 많은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다.(이기봉)

  • 양산군 (梁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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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의 읍치는 현재의 중부동 일대이며 현재의 양산시에서 웅상읍은 조선시대 울산부에 해당하였기에 웅상읍을 제외한 양산시 지역과 부산광역시 북구, 강서구 일부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이 지도에서 눈이 띄는 점은 많은 하천이 그려져 있고 읍치의 서남쪽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점이다. 동쪽이 낙동정맥의 끝부분에 해당하기에 하천의 방향이 그렇게 된 것이다. 진산은 동북쪽에 있는 성황산이 된다. 읍성 밖에는 일반적으로 향교, 사직단, 여단, 성황사가 배치되는데 성황사가 있었던 곳이 진산이 된 것이다. 읍성과 성문, 그리고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다른 관아 건물과 달리 객사는 서쪽을 향하게 그렸다. 진산의 방향과 연계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북문 안쪽에 옥이 원형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향교는 지금 교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양산천으로 남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낙동강의 하중도가 표시되었다. 동쪽의 낙동정맥 방향에는 국가에서 사용할 재목을 구하기 위한 封山과 여러 고개들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요충지가 표시되었는데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교통로로 황산역이 보이는데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었던 역으로 11개의 속역을 가졌다. 지도 북쪽의 통도사는 가지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646년(신라 선덕 15)에 창건되었다. 보물 74호 국장생석표, 보물 144호 대웅전 등 유물이 보존된 이름난 사찰이다. 이 밖에 교량,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용안현 (龍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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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포함된 용안면, 용동면에 있던 군현으로 용안면의 덕용리, 교동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지도 가운데에 그려진 읍성은 주변 산줄기를 활용한 성곽임을 알 수 있다. 읍성 북쪽의 모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읍성 안에 향교가 그려졌는데 현재의 용안면 교동리이다. 서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주 간선도로에 해당하는데 그 사이에 객사가 그려졌다. 동쪽의 광두원은 용동면 화실리에 해당하며 그 옆의 봉대는 크게 그려졌지만 53m 높이에 불과하다. 현재 봉화산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으며 호남선 철도 용동역 남쪽에 위치한다. 북쪽에 백마강 하류가 적혔는데 백마강은 금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하천이다. 백마강 글씨 오른쪽에 황산대교가 있다. 왼쪽의 청포나루터는 부여군 세도면 청포리와 연결되는 곳이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현재의 부곡천이다. 부곡천 일대와 북쪽의 청포구진, 구대평 일대는 하천변에 있어 농사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비옥한 들이 바다와 잇닿았다”고 이 지역의 형승을 설명하고 있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으나 해동지도에는 왼쪽 은척산 아래에 海倉이 표시되었다. 得成倉으로 용안면 난포리에 있었던 것으로 전라도 인근 고을의 조세를 받아 수로를 통해 한양으로 옮기던 곳이다.(이현군)

  • 앞표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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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앞표지 1면입니다.

  • 울릉도 (鬱陵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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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상의 울릉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가 제작될 당시 울릉도는 강원도 군현에서 주관하여 매 2-3년 간격으로 搜討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강원도 관할에 속하여 있었다. 지금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해당된다. 당시에 군현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현 지도책에 낱장으로 삽입된 것은 울릉도에 대한 지리적인 지식이 많이 유입되었고, 동해를 중심으로 높아진 영토 의식을 반영한다. 1711년 박석창이 수토후 제작한 「울릉도도형」(규장각 소장)에는 中峰이 유일한 지명으로 기재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이외의 지명이 추가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수토를 통해 지리적인 지식이 지속적으로 보완되었음을 보여준다. 두 지도의 구도는 유사하다. 중앙에 中峰(현재 성인봉)을 배치하였고, 산지는 독립된 봉우리 형태로 그렸다. 방안식 지도에서 줄기로 표현되는 것과 대비된다. 중봉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6곳이 그려져 있으며 그 형태도 방안식 군현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6곳의 도서가 묘사되어 있고 이중 동쪽에 배치된 섬에는 ‘所謂于山島’라는 기록이 있다. 于山島 지명은 동해상의 獨島를 지칭한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었으나 최근 울릉도 부속도서인 竹島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릉도 해제 참조). 이면의 주기에는 ‘周面二百餘里 東西八十餘里 南北五十餘里’라고 되어 있어 섬의 규모를 기재하고 있다. 특산물로 甘藷, 生鰒, 可之魚 등 16종, 飛禽으로 鷹, 鳥 등 4종, 走獸로 猫, 鼠 등 2종이 기록되어 있다. (김기혁)

  • 인천부 주기 (仁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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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부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동구, 중구, 남구, 연수구, 남동구, 시흥시의 옛 소래읍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의 문학산 북쪽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인천부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文鶴山城과 문학산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인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도로와 위치 정보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 도로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서는 소략하지만 도로가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해동지도》에는 面과 驛 등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해동지도》의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가 없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의 주기에는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같은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였지만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를 수록하면서 지도 위에서는 삭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주기에는 월경지로 존재했던 梨浦面과 거리 정보가 생략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밖에 오른쪼의 덕적도와 무의도 및 용유도 등에 적혀 있던 《해동지도》의 주기 내용도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는 도로와 면의 표시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나 그 계통을 바탕으로 다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임천군 (林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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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군은 부여군의 임천면, 세도면, 장암면, 충화면, 양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높은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의 夫餘界(동)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임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첨지에 새롭게 첨가한 지명으로 기록된 登景山이 본 지도 왼쪽 아래의 上之浦面 근처에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 자체를 필사했다고 보기 어렵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獄과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아 후대의 필사자가 의도적이거나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판단된다. 도로의 경우 본 지도보다 《해동지도》가 훨씬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가 본 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이밖에 오른쪽 아래의 海倉은 임천군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 대동법의 실시 이후 조선전기에 일정 지역의 군현 조세를 모아 함께 한양으로 나르던 漕倉制가 폐지되고 내륙의 일부 군현 이외에는 각 군현이 스스로 전세와 대동미를 한양까지 운반하도록 바뀌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지명이다.(이기봉)

  • 양산군 주기 (梁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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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의 읍치는 현재의 중부동 일대이며 현재의 양산시에서 웅상읍은 조선시대 울산부에 해당하였기에 웅상읍을 제외한 양산시 지역과 부산광역시 북구, 강서구 일부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이 지도에서 눈이 띄는 점은 많은 하천이 그려져 있고 읍치의 서남쪽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점이다. 동쪽이 낙동정맥의 끝부분에 해당하기에 하천의 방향이 그렇게 된 것이다. 진산은 동북쪽에 있는 성황산이 된다. 읍성 밖에는 일반적으로 향교, 사직단, 여단, 성황사가 배치되는데 성황사가 있었던 곳이 진산이 된 것이다. 읍성과 성문, 그리고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다른 관아 건물과 달리 객사는 서쪽을 향하게 그렸다. 진산의 방향과 연계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북문 안쪽에 옥이 원형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향교는 지금 교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양산천으로 남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낙동강의 하중도가 표시되었다. 동쪽의 낙동정맥 방향에는 국가에서 사용할 재목을 구하기 위한 封山과 여러 고개들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요충지가 표시되었는데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교통로로 황산역이 보이는데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었던 역으로 11개의 속역을 가졌다. 지도 북쪽의 통도사는 가지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646년(신라 선덕 15)에 창건되었다. 보물 74호 국장생석표, 보물 144호 대웅전 등 유물이 보존된 이름난 사찰이다. 이 밖에 교량,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용안현 주기 (龍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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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포함된 용안면, 용동면에 있던 군현으로 용안면의 덕용리, 교동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지도 가운데에 그려진 읍성은 주변 산줄기를 활용한 성곽임을 알 수 있다. 읍성 북쪽의 모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읍성 안에 향교가 그려졌는데 현재의 용안면 교동리이다. 서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주 간선도로에 해당하는데 그 사이에 객사가 그려졌다. 동쪽의 광두원은 용동면 화실리에 해당하며 그 옆의 봉대는 크게 그려졌지만 53m 높이에 불과하다. 현재 봉화산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으며 호남선 철도 용동역 남쪽에 위치한다. 북쪽에 백마강 하류가 적혔는데 백마강은 금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하천이다. 백마강 글씨 오른쪽에 황산대교가 있다. 왼쪽의 청포나루터는 부여군 세도면 청포리와 연결되는 곳이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현재의 부곡천이다. 부곡천 일대와 북쪽의 청포구진, 구대평 일대는 하천변에 있어 농사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비옥한 들이 바다와 잇닿았다”고 이 지역의 형승을 설명하고 있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으나 해동지도에는 왼쪽 은척산 아래에 海倉이 표시되었다. 得成倉으로 용안면 난포리에 있었던 것으로 전라도 인근 고을의 조세를 받아 수로를 통해 한양으로 옮기던 곳이다.(이현군)

  • 앞표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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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앞표지 2면입니다.

  • 울릉도 주기 (鬱陵島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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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상의 울릉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가 제작될 당시 울릉도는 강원도 군현에서 주관하여 매 2-3년 간격으로 搜討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강원도 관할에 속하여 있었다. 지금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해당된다. 당시에 군현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현 지도책에 낱장으로 삽입된 것은 울릉도에 대한 지리적인 지식이 많이 유입되었고, 동해를 중심으로 높아진 영토 의식을 반영한다. 1711년 박석창이 수토후 제작한 「울릉도도형」(규장각 소장)에는 中峰이 유일한 지명으로 기재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이외의 지명이 추가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수토를 통해 지리적인 지식이 지속적으로 보완되었음을 보여준다. 두 지도의 구도는 유사하다. 중앙에 中峰(현재 성인봉)을 배치하였고, 산지는 독립된 봉우리 형태로 그렸다. 방안식 지도에서 줄기로 표현되는 것과 대비된다. 중봉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6곳이 그려져 있으며 그 형태도 방안식 군현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6곳의 도서가 묘사되어 있고 이중 동쪽에 배치된 섬에는 ‘所謂于山島’라는 기록이 있다. 于山島 지명은 동해상의 獨島를 지칭한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었으나 최근 울릉도 부속도서인 竹島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릉도 해제 참조). 이면의 주기에는 ‘周面二百餘里 東西八十餘里 南北五十餘里’라고 되어 있어 섬의 규모를 기재하고 있다. 특산물로 甘藷, 生鰒, 可之魚 등 16종, 飛禽으로 鷹, 鳥 등 4종, 走獸로 猫, 鼠 등 2종이 기록되어 있다. (김기혁)

  • 장단부 (長湍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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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과 소남면을 제외한 경기도의 장단군에 걸쳐 있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단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長湍府라는 명칭이 적혀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衙(舍)가, 뒤의 2개 지도에는 邑內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가 본 지도나 뒤의 2개 지도처럼 군현명이 지도 이름으로 적혀 있지 않은 최초의 원본 모습에 가장 가까울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도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군현의 명칭이 읍치에 적혀 있는 경우이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 비해 소략한 편이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가 그려져 있지 않다. 특히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의 오른쪽 위 부분의 하천 유로가 완전히 잘못 그려져 있는데, 《해동지도》의 도로를 하천의 유로로 잘못 이해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본 지도의 경우 이 부분의 도로가 하천과 완전히 다른 색으로 그려져 있어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나는 오류가 발생하기 어렵다. 다만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면서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연관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난 도로와 하천의 오해, 본 지도에는 없는 古浪浦가 뒤의 2개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를 직접 필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도로와 하천을 오해할 수 있게 그린 지도를 원본으로 삼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임천군 주기 (林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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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군은 부여군의 임천면, 세도면, 장암면, 충화면, 양화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높은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위쪽의 夫餘界(동)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임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첨지에 새롭게 첨가한 지명으로 기록된 登景山이 본 지도 왼쪽 아래의 上之浦面 근처에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 자체를 필사했다고 보기 어렵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獄과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아 후대의 필사자가 의도적이거나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판단된다. 도로의 경우 본 지도보다 《해동지도》가 훨씬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해동지도》가 본 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이밖에 오른쪽 아래의 海倉은 임천군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 대동법의 실시 이후 조선전기에 일정 지역의 군현 조세를 모아 함께 한양으로 나르던 漕倉制가 폐지되고 내륙의 일부 군현 이외에는 각 군현이 스스로 전세와 대동미를 한양까지 운반하도록 바뀌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지명이다.(이기봉)

  • 언양현 (彦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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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울산광역시 동쪽 지역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군현을 그린 지도이다. 지도 가운데에 그려진 읍성은 현재 언양읍내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사적 5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부고속국도의 언양분기점이 읍치 동쪽에 있다. 언양현의 관할범위는 언양읍, 삼동면, 삼남면, 상북면 등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고헌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고헌산의 맥이 읍치에 연결되도록 그렸다. 읍성은 의도적으로 정사각형으로 그렸으며 그 가운데 객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읍성 안에 들어서는 향청이 이 지역에서는 읍성 밖에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읍성 서남쪽에 표시된 향교는 언양읍 교동리에 남아있다. 낙동정맥의 동쪽 지방으로 읍성 앞의 하천은 태화강이다. 동쪽으로 흘러 울산만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문수산이 조선시대 울산과 경계가 되는데 울산의 월드컵 경기장인 문수경기장이 이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지도 오른쪽에 반구서원이 그려졌는데 정몽주, 이언적, 정구 등을 배향하였고 1712년(숙종 38)에 지어졌다. 이 근처에 반구대 유적지가 있다. 울산광역시 언양읍 대곡리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운문령, 석남령 등 다른 지역의 교통로가 되는 고개를 도로와 함게 표시하였다. 지도 아래에는 덕천역이 표시되었는데 읍성과 멀리 떨어져 보이지만 언양읍 교동리에 있던 역이다. 읍성 왼쪽의 봉대가 표시된 곳은 언양읍 천전리와 교동리 중간에 있으며 현재는 봉화산으로 불린다.(이현군)

  • 운봉현 (雲峯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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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원시에 포함된 군현으로 운봉읍을 중심으로 산동면, 산내면, 아영면, 인월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표시된 읍치는 운봉읍 서천리, 동천리 일대에 해당한다. 향교는 읍치와 멀리 떨어진 것 처럼 표시되었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주촌천, 남천, 운봉천으로 읍치 북쪽에 모여 광천으로 이름붙여지며 동북쪽으로 흘러 지도 오른쪽의 만수천으로 유입된다.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군현으로 지도 오른쪽 아래에 지리산이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에 반야봉이 표시되었는데 1732m 높이의 봉우리이다. 그 왼쪽에 표시된 노적봉은 1507m 높이로 현재의 노고단으로 추정된다. 노고단-반야봉-천왕봉(1915.4m)이 지리산을 종주하는 경로이다. 지리산 북쪽에 표시된 실상사는 산내면 대정리의 사찰로 사적 309호에 해당하며 보물로 지정된 탑, 석장생 등이 보존되고 있다. 실상사 동쪽 만수천과 평행하게 형성된 도로는 현재의 60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그 옆에 함양과의 경계라고 적혔는데 경상도와 잇닿아 있는 군현이다. 읍치 북쪽에 성산, 고성터, 古城 등이 그려졌다. 험준한 지형과 더불어 험애, 매복처 등이 표시되었다. 이 고을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왜적을 무찔렀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읍치 북쪽에 표시된 碑殿이다. 사적 104호로 지정된 황산대첩비는 현재 운봉읍에 보존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해동지도에는 동면 곳곳에 농사를 위한 제언이 그려졌으며 碑殿 동쪽에 引月驛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인월면 인월리 일대로 추정된다.(이현군)

  • 양덕현 (陽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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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陽德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양덕군과 신양군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 초부터 여진과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성격의 陽岩鎭, 樹德鎭으로 존재하였다. 이후 국경선이 훨씬 북쪽으로 올라감에 따라 조선 태조 때 두 진을 합하여 세운 고을이다. 지도에도 읍치 왼쪽에 樹德城이, 오른쪽 고읍면에 陽岩城이 표시되어 있어 고을의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양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양덕현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吳江面에서 발원하여 왼쪽 成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비류강 최상류이다. 읍치 방향에서 비류강에 합류되는 하천은 현재 평원천이라 불리고 있다. 오른쪽의 溫井面 지역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 최상류이다. 3개 하천의 길이와 유역 면적은 실제로는 거의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의 내용만으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읍치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흐르는 평원천 유역의 면적이 넓어지고, 상대적으로 다른 두 하천 유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니면서 동서가 남북보다 긴 양덕현의 모습을 세로(남북)가 긴 사각형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평원천 유역의 동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매우 작게 그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본 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 표시된 정보의 양이 늘어났으며, 아울러 읍치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읍치 모습이 거의 비슷하기는 하나,  客舍와 鄕校 부분에 건물이 본 지도에 2개 더 그려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보다는 《여지도》와 더 비슷하나, 倉을 邑倉으로 표시하고 있다. (양윤정)

  • 울진현 (蔚珍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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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강원도 동해안 남부에 위치하였던 울진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경상북도에 속해있으며, 울진군 울진읍·근남면·원남면·서면·죽변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를 성곽없이 지도의 중앙 우측에 배치하였다. 지금의 울진읍 읍내리에 소재한다. 진산인 安逸王山은 읍치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읍치 가까이에 古山城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생략되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표현하였으며 특히 죽변 일대(지도에서는 ‘竹田’ 으로 표현)에 발달한 두각지는 묘사되지 않았다. 서쪽에 백두대간을 묘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읍치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부구천과 두천천으로 보이며 읍치 남쪽을 감싸도는 하천은 지금의 광천으로 추정된다. 남쪽의 ‘嵐水山’(다른 울진 지도에는 ‘風水山’으로 기재되어 있다)에서 발원한 하천은 매화천이며 하류에서 지금의 왕피천과 합류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진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삼척부로 이어지는 도로는 북쪽에 위치한 興富驛館을 지나 葛峴을 넘어 연결된다. 평해로 연결되는 길은 前川橋를 守山驛-德新驛을 거쳐 연결된다. 내륙의 안동, 영양과 이어지는 도로는 鼎峙, 召造院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기에 도로가 매우 험준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238戶, 田 414結80, 畓 291結55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않에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장단부 주기 (長湍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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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과 소남면을 제외한 경기도의 장단군에 걸쳐 있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단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長湍府라는 명칭이 적혀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衙(舍)가, 뒤의 2개 지도에는 邑內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가 본 지도나 뒤의 2개 지도처럼 군현명이 지도 이름으로 적혀 있지 않은 최초의 원본 모습에 가장 가까울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도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군현의 명칭이 읍치에 적혀 있는 경우이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 비해 소략한 편이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가 그려져 있지 않다. 특히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의 오른쪽 위 부분의 하천 유로가 완전히 잘못 그려져 있는데, 《해동지도》의 도로를 하천의 유로로 잘못 이해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본 지도의 경우 이 부분의 도로가 하천과 완전히 다른 색으로 그려져 있어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나는 오류가 발생하기 어렵다. 다만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면서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연관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난 도로와 하천의 오해, 본 지도에는 없는 古浪浦가 뒤의 2개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를 직접 필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도로와 하천을 오해할 수 있게 그린 지도를 원본으로 삼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전의현 (全義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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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의현은 연기군의 전의면, 전동면, 소정면의 대곡리․고등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전의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전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하천이다. 본 지도를 보면 왼쪽(서)의 公州界와 오른쪽의 淸州界 사이를 관통하는 하천이 있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전의현에는 이렇게 관통하는 하천이 없으며, 읍치를 포함한 대부분의 물은 현재의 조천천이 되어 동쪽의 미호천으로 흘러간다. 본 지도에서의 大西面 지역의 일부만 서쪽의 곡교천 최상류 일부에 걸쳐 있을 뿐이다.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전의현 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에서부터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원본에서 애매하게 표현된 것을 후대의 필사자가 잘못 필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南面의 獨松亭 부근에서 작은 지류 하나가 흘러드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이런 하천이 없다. 반면에 《호서지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전의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고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로 붙어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를 《호서지도》의 전의 지도와 비교하여 검토했다는 의미인데, 후자의 지도에서는 본 지도 계통에서 나타나는 하천 표현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지 않다.(이기봉)

  • 언양현 주기 (彦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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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울산광역시 동쪽 지역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군현을 그린 지도이다. 지도 가운데에 그려진 읍성은 현재 언양읍내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사적 5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부고속국도의 언양분기점이 읍치 동쪽에 있다. 언양현의 관할범위는 언양읍, 삼동면, 삼남면, 상북면 등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고헌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고헌산의 맥이 읍치에 연결되도록 그렸다. 읍성은 의도적으로 정사각형으로 그렸으며 그 가운데 객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읍성 안에 들어서는 향청이 이 지역에서는 읍성 밖에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읍성 서남쪽에 표시된 향교는 언양읍 교동리에 남아있다. 낙동정맥의 동쪽 지방으로 읍성 앞의 하천은 태화강이다. 동쪽으로 흘러 울산만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문수산이 조선시대 울산과 경계가 되는데 울산의 월드컵 경기장인 문수경기장이 이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지도 오른쪽에 반구서원이 그려졌는데 정몽주, 이언적, 정구 등을 배향하였고 1712년(숙종 38)에 지어졌다. 이 근처에 반구대 유적지가 있다. 울산광역시 언양읍 대곡리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운문령, 석남령 등 다른 지역의 교통로가 되는 고개를 도로와 함게 표시하였다. 지도 아래에는 덕천역이 표시되었는데 읍성과 멀리 떨어져 보이지만 언양읍 교동리에 있던 역이다. 읍성 왼쪽의 봉대가 표시된 곳은 언양읍 천전리와 교동리 중간에 있으며 현재는 봉화산으로 불린다.(이현군)

  • 운봉현 주기 (雲峯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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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원시에 포함된 군현으로 운봉읍을 중심으로 산동면, 산내면, 아영면, 인월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표시된 읍치는 운봉읍 서천리, 동천리 일대에 해당한다. 향교는 읍치와 멀리 떨어진 것 처럼 표시되었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주촌천, 남천, 운봉천으로 읍치 북쪽에 모여 광천으로 이름붙여지며 동북쪽으로 흘러 지도 오른쪽의 만수천으로 유입된다.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군현으로 지도 오른쪽 아래에 지리산이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에 반야봉이 표시되었는데 1732m 높이의 봉우리이다. 그 왼쪽에 표시된 노적봉은 1507m 높이로 현재의 노고단으로 추정된다. 노고단-반야봉-천왕봉(1915.4m)이 지리산을 종주하는 경로이다. 지리산 북쪽에 표시된 실상사는 산내면 대정리의 사찰로 사적 309호에 해당하며 보물로 지정된 탑, 석장생 등이 보존되고 있다. 실상사 동쪽 만수천과 평행하게 형성된 도로는 현재의 60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그 옆에 함양과의 경계라고 적혔는데 경상도와 잇닿아 있는 군현이다. 읍치 북쪽에 성산, 고성터, 古城 등이 그려졌다. 험준한 지형과 더불어 험애, 매복처 등이 표시되었다. 이 고을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왜적을 무찔렀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읍치 북쪽에 표시된 碑殿이다. 사적 104호로 지정된 황산대첩비는 현재 운봉읍에 보존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해동지도에는 동면 곳곳에 농사를 위한 제언이 그려졌으며 碑殿 동쪽에 引月驛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인월면 인월리 일대로 추정된다.(이현군)

  • 양덕현 주기 (陽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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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陽德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양덕군과 신양군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고려 초부터 여진과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성격의 陽岩鎭, 樹德鎭으로 존재하였다. 이후 국경선이 훨씬 북쪽으로 올라감에 따라 조선 태조 때 두 진을 합하여 세운 고을이다. 지도에도 읍치 왼쪽에 樹德城이, 오른쪽 고읍면에 陽岩城이 표시되어 있어 고을의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양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의 일부분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양덕현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吳江面에서 발원하여 왼쪽 成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비류강 최상류이다. 읍치 방향에서 비류강에 합류되는 하천은 현재 평원천이라 불리고 있다. 오른쪽의 溫井面 지역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 최상류이다. 3개 하천의 길이와 유역 면적은 실제로는 거의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의 내용만으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읍치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흐르는 평원천 유역의 면적이 넓어지고, 상대적으로 다른 두 하천 유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실제로는 사각형이 아니면서 동서가 남북보다 긴 양덕현의 모습을 세로(남북)가 긴 사각형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평원천 유역의 동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매우 작게 그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본 지도와 《광여도》, 《여지도》 경우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에 표시된 정보의 양이 늘어났으며, 아울러 읍치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본 지도와 읍치 모습이 거의 비슷하기는 하나,  客舍와 鄕校 부분에 건물이 본 지도에 2개 더 그려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보다는 《여지도》와 더 비슷하나, 倉을 邑倉으로 표시하고 있다. (양윤정)

  • 울진현 주기 (蔚珍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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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강원도 동해안 남부에 위치하였던 울진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경상북도에 속해있으며, 울진군 울진읍·근남면·원남면·서면·죽변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를 성곽없이 지도의 중앙 우측에 배치하였다. 지금의 울진읍 읍내리에 소재한다. 진산인 安逸王山은 읍치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읍치 가까이에 古山城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생략되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표현하였으며 특히 죽변 일대(지도에서는 ‘竹田’ 으로 표현)에 발달한 두각지는 묘사되지 않았다. 서쪽에 백두대간을 묘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읍치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부구천과 두천천으로 보이며 읍치 남쪽을 감싸도는 하천은 지금의 광천으로 추정된다. 남쪽의 ‘嵐水山’(다른 울진 지도에는 ‘風水山’으로 기재되어 있다)에서 발원한 하천은 매화천이며 하류에서 지금의 왕피천과 합류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진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삼척부로 이어지는 도로는 북쪽에 위치한 興富驛館을 지나 葛峴을 넘어 연결된다. 평해로 연결되는 길은 前川橋를 守山驛-德新驛을 거쳐 연결된다. 내륙의 안동, 영양과 이어지는 도로는 鼎峙, 召造院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기에 도로가 매우 험준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238戶, 田 414結80, 畓 291結55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않에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적성현 (積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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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성현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적성면의 구읍리에 있었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뻗은 산줄기가 동남쪽의 紺岳山으로부터 내려왔음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판단된다. 감악산은 조선시대에 국가의 中祀에 속해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정상 부근의 祭壇은 바로 중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현재의 임진강으로 지도 위에는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부르던 頭只江, 新津江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적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내용이 다르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는 《해동지도》에 더욱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전반적인 필사 순서는 《해동지도》가 가장 빠르고, 다음으로 본 지도이며,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나중에 필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내의 경우도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鄕廳이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客舍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客舍란 명칭이 아니라 殿牌奉安이란 문장이 적혀 있다. 客舍는 임금을 상징하는 殿牌 또는 闕牌가 보관되어 있는 건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관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객사만을 놓고 볼 때 《해동지도》는 지방에서 그려올린 지도의 원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다른 고을과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객사로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전의현 주기 (全義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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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의현은 연기군의 전의면, 전동면, 소정면의 대곡리․고등리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전의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전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하천이다. 본 지도를 보면 왼쪽(서)의 公州界와 오른쪽의 淸州界 사이를 관통하는 하천이 있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전의현에는 이렇게 관통하는 하천이 없으며, 읍치를 포함한 대부분의 물은 현재의 조천천이 되어 동쪽의 미호천으로 흘러간다. 본 지도에서의 大西面 지역의 일부만 서쪽의 곡교천 최상류 일부에 걸쳐 있을 뿐이다.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전의현 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에서부터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원본에서 애매하게 표현된 것을 후대의 필사자가 잘못 필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南面의 獨松亭 부근에서 작은 지류 하나가 흘러드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이런 하천이 없다. 반면에 《호서지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 전의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고하여 첨가한 지명이 첨지로 붙어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를 《호서지도》의 전의 지도와 비교하여 검토했다는 의미인데, 후자의 지도에서는 본 지도 계통에서 나타나는 하천 표현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지 않다.(이기봉)

  • 영덕현 (盈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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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 대게로 알려진 영덕현의 지도이다. 동해와 접한 고을로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지역이 중심부이다. 현재의 지품면, 달산면, 강구면, 남정면 등이 관할 구역으로 영덕군의 다른 면은 영해부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영해부와 영덕현이 합쳐져 현재의 영덕군이 된 것이다. 영덕의 동쪽이 동해인데 이 지도는 마치 남쪽까지 바다인 것처럼 그렸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며 무둔산이 진산이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오십천이다. 읍치 뒤쪽에 오십천 표시가 있다. 왼쪽 아래 강구진(강구면 강구리)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 강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그 옆의 하저포는 강구면 하저리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의 장사진이 그려진 곳은 남정면 장사리인데 국민관광지인 장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동면에서 오른쪽 아래의 강구진, 왼쪽의 장사진은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으로 해안선이 연결되는데 이 지도는 마치 꺾여진 것처럼 그렸다. 지금은 해안을 따라 7번 국도가 지난다. 지도에 읍성과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다른 지도에서 잘 보이지 않는 동헌을 객사 뒤에 그렸고 홍문(홍살문)을 남문 앞에 그린 점이 이색적이다. 석축으로 된 읍성 밖에 향교, 서원이 그려졌으며 해안에는 봉대가 표시되었다. 역원으로는 지품원, 남역, 주등역이 보인다.(이현군).

  • 익산군 (益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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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오른쪽에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금마저수지 남쪽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 서고도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금의 익산시 삼기면, 춘포면, 금마면, 왕궁면의 북쪽 지역, 익산시 팔봉동 일대가 익산군의 관할 범위였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 등을 그렸는데 향교는 1번 국도 북쪽에 지금도 남아 있다. 읍치 북쪽의 건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오른쪽의 도순산은 금마면 도순리에 있다. 지도 위쪽에 미륵산은 430.2m의 산으로 이곳에 箕準古城이 표시되었는데 현재 익산미륵산성으로 불리는 곳이다. 箕準은 고조선의 왕이며 위만에게 쫓겨 바다를 통해 이곳에 도착하여 馬韓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금마면 지명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곳을 병합하고 金馬渚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기준고성 남쪽에는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사적 150호 미륵사지가 있다. 석탑이 국보 11호, 당간지주가 보물 236호로 지정된 곳이다. 미륵사는 서동요에 등장하는 백제의 武康王과 신라 출신의 善花夫人이 지도 위쪽에 표시된 獅子寺에 가는 길에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이 곳에서 세 미륵불이 나왔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선화부인의 간청으로 이곳에 미륵사가 들어서게 되었다. 오금산 아래 著英王都는 현재의 왕궁면 왕궁리 일대이다. 5층 석탑이 보물 44호로 지정되었다.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보다 기준성에서 오금산으로 연결되는 맥세를 더 강하게 표현한 점이 이색적이다. 왼쪽 위에 표시된 華山書院은 김장생과 송시열을 배향하던 곳이다.(이현군)

  • 연안부 (延安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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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연안군 동쪽과 남쪽, 배천군의 서남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안군의 연안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안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지명과 표현 방식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성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져 있고, 읍성 내의 건물 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첫째, 나머지 3개 지도가 《해동지도》에 비해 훨씬 작기 때문에 수록된 정보를 모두 표현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으며 둘째, 충청도의 몇몇 군현 지도에서 확인되고 있듯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를 생략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명의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오류도 보이고 있다. 읍성의 아래쪽에 기록된 南大地는 나머지 3개 지도에 南大池로 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아래의 並城界가 《해동지도》에는 並城面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주기 부분에 並城面으로 나오고 있어 《해동지도》가 올바르고 나머지 3개 지도와 같은 필사본 계통에서 오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읍성 오른쪽의 池村面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洪村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지도의 주기면에 池村面이 표시되어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읍성 오른쪽에 다른 3개 지도에는 있는 文書山이 생략되는 등 필사 과정에서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자료 이용시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기봉)

  • 원주목 (原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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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원주목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원주목은 강원도 감영이 있었으며, 지금의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북내면 동쪽에 해당한다. 다른 군현의 지도와는 달리 원주 지도에는 위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주는 1683년-1692년(숙종 9-18)과 1728년-1737년(영조 4-13) 사이에 原城縣으로 강등된 적이 있다.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지도들에는 原城으로 표시되어 있다. 동으로는 영월, 서로는 여주에 달하였기 때문에 동서로 매우 넓은 지역이었으나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평창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서쪽은 하천으로 여주·홍천과 경계를 이룬다. 횡성에서 유입하여 지도 좌측으로 흐르다가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섬강을 그린 것이다. 섬강 좌안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원주천과 백운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의 표현이 없이 객사, 아사를 중심으로 지도 중앙에 그려져 있다 지금의 원주시 일산동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원주목 해제 참조). 교통로와 역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나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이 지도에서 묘사된 교통로는 읍치에서 북쪽으로 횡성으로 이어지는 2개의 도로와 서쪽으로 유원역을 거쳐 지평으로 이어지는 도로, 서남방향으로 여주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 단구역-충주, 신림역-제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간선도로는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체로 일치하나 『지승』에서는 섬암강을 따라 도로가 추가로 그려져 있는 등 여러 지선 도로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8,556戶, 田 1,535結99負2束, 畓 758結57負4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적성현 주기 (積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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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성현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적성면의 구읍리에 있었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뻗은 산줄기가 동남쪽의 紺岳山으로부터 내려왔음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판단된다. 감악산은 조선시대에 국가의 中祀에 속해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정상 부근의 祭壇은 바로 중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현재의 임진강으로 지도 위에는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부르던 頭只江, 新津江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적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내용이 다르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는 《해동지도》에 더욱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전반적인 필사 순서는 《해동지도》가 가장 빠르고, 다음으로 본 지도이며,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나중에 필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내의 경우도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鄕廳이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客舍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客舍란 명칭이 아니라 殿牌奉安이란 문장이 적혀 있다. 客舍는 임금을 상징하는 殿牌 또는 闕牌가 보관되어 있는 건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관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객사만을 놓고 볼 때 《해동지도》는 지방에서 그려올린 지도의 원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다른 고을과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객사로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정산현 (定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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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현은 청양군의 정산면, 목면, 청남면, 구룡리를 제외한 장평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정산면의 서정리에 있었다. 아래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금강변에는 半灘津, 汪津 등의 나루 명칭이 적혀 있는데, 금강에 대한 이 지역에서의 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왼쪽의 鵲川은 현재의 지천으로 청양 방면에서 흘러들어온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정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備圖를 참조하여 몇몇 지명을 첨가했다는 첨지가 붙어 있는데, 이 때 첨가된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지명이 본 지도와 동일하다.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없는 大朴谷面(또는 大方谷面)이 첨가되어 있다. 네 개의 지도 주기에 모두 대박곡면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와 본 지도의 필사자가 빠뜨렸을 가능성도 있고, 원본에도 없었는데 이후에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여지도》의 경우 제언 1개가 생략되고 제언의 모습도 그리지 않아 꼼꼼한 검토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어 《여지도》의 필사자가 대방곡면을 첨가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아래쪽에 표시된 江倉은 정산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런 창고가 바다에 설치되면 보통 海倉이라고 하며, 강에 설치되면 江倉이라고 하였다.(이기봉)

  • 영덕현 주기 (盈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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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 대게로 알려진 영덕현의 지도이다. 동해와 접한 고을로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지역이 중심부이다. 현재의 지품면, 달산면, 강구면, 남정면 등이 관할 구역으로 영덕군의 다른 면은 영해부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영해부와 영덕현이 합쳐져 현재의 영덕군이 된 것이다. 영덕의 동쪽이 동해인데 이 지도는 마치 남쪽까지 바다인 것처럼 그렸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며 무둔산이 진산이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오십천이다. 읍치 뒤쪽에 오십천 표시가 있다. 왼쪽 아래 강구진(강구면 강구리)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 강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그 옆의 하저포는 강구면 하저리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의 장사진이 그려진 곳은 남정면 장사리인데 국민관광지인 장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동면에서 오른쪽 아래의 강구진, 왼쪽의 장사진은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으로 해안선이 연결되는데 이 지도는 마치 꺾여진 것처럼 그렸다. 지금은 해안을 따라 7번 국도가 지난다. 지도에 읍성과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다른 지도에서 잘 보이지 않는 동헌을 객사 뒤에 그렸고 홍문(홍살문)을 남문 앞에 그린 점이 이색적이다. 석축으로 된 읍성 밖에 향교, 서원이 그려졌으며 해안에는 봉대가 표시되었다. 역원으로는 지품원, 남역, 주등역이 보인다.(이현군).

  • 익산군 주기 (益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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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오른쪽에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금마저수지 남쪽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 서고도리 일대에 해당하며 지금의 익산시 삼기면, 춘포면, 금마면, 왕궁면의 북쪽 지역, 익산시 팔봉동 일대가 익산군의 관할 범위였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객사 등을 그렸는데 향교는 1번 국도 북쪽에 지금도 남아 있다. 읍치 북쪽의 건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오른쪽의 도순산은 금마면 도순리에 있다. 지도 위쪽에 미륵산은 430.2m의 산으로 이곳에 箕準古城이 표시되었는데 현재 익산미륵산성으로 불리는 곳이다. 箕準은 고조선의 왕이며 위만에게 쫓겨 바다를 통해 이곳에 도착하여 馬韓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금마면 지명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곳을 병합하고 金馬渚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기준고성 남쪽에는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사적 150호 미륵사지가 있다. 석탑이 국보 11호, 당간지주가 보물 236호로 지정된 곳이다. 미륵사는 서동요에 등장하는 백제의 武康王과 신라 출신의 善花夫人이 지도 위쪽에 표시된 獅子寺에 가는 길에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이 곳에서 세 미륵불이 나왔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선화부인의 간청으로 이곳에 미륵사가 들어서게 되었다. 오금산 아래 著英王都는 현재의 왕궁면 왕궁리 일대이다. 5층 석탑이 보물 44호로 지정되었다.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보다 기준성에서 오금산으로 연결되는 맥세를 더 강하게 표현한 점이 이색적이다. 왼쪽 위에 표시된 華山書院은 김장생과 송시열을 배향하던 곳이다.(이현군)

  • 연안부 주기 (延安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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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연안군 동쪽과 남쪽, 배천군의 서남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안군의 연안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안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지명과 표현 방식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성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져 있고, 읍성 내의 건물 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첫째, 나머지 3개 지도가 《해동지도》에 비해 훨씬 작기 때문에 수록된 정보를 모두 표현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으며 둘째, 충청도의 몇몇 군현 지도에서 확인되고 있듯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를 생략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명의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오류도 보이고 있다. 읍성의 아래쪽에 기록된 南大地는 나머지 3개 지도에 南大池로 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아래의 並城界가 《해동지도》에는 並城面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주기 부분에 並城面으로 나오고 있어 《해동지도》가 올바르고 나머지 3개 지도와 같은 필사본 계통에서 오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읍성 오른쪽의 池村面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洪村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지도의 주기면에 池村面이 표시되어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읍성 오른쪽에 다른 3개 지도에는 있는 文書山이 생략되는 등 필사 과정에서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자료 이용시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기봉)

  • 원주목 주기 (原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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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원주목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원주목은 강원도 감영이 있었으며, 지금의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북내면 동쪽에 해당한다. 다른 군현의 지도와는 달리 원주 지도에는 위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주는 1683년-1692년(숙종 9-18)과 1728년-1737년(영조 4-13) 사이에 原城縣으로 강등된 적이 있다.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지도들에는 原城으로 표시되어 있다. 동으로는 영월, 서로는 여주에 달하였기 때문에 동서로 매우 넓은 지역이었으나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평창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서쪽은 하천으로 여주·홍천과 경계를 이룬다. 횡성에서 유입하여 지도 좌측으로 흐르다가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섬강을 그린 것이다. 섬강 좌안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원주천과 백운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의 표현이 없이 객사, 아사를 중심으로 지도 중앙에 그려져 있다 지금의 원주시 일산동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원주목 해제 참조). 교통로와 역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나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이 지도에서 묘사된 교통로는 읍치에서 북쪽으로 횡성으로 이어지는 2개의 도로와 서쪽으로 유원역을 거쳐 지평으로 이어지는 도로, 서남방향으로 여주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 단구역-충주, 신림역-제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간선도로는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체로 일치하나 『지승』에서는 섬암강을 따라 도로가 추가로 그려져 있는 등 여러 지선 도로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8,556戶, 田 1,535結99負2束, 畓 758結57負4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죽산부 (竹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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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부는 현재의 안성시 죽산면, 일죽면, 삼죽면, 용인시 백암면, 원삼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현재의 청미천이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부근에 표시된 古山城은 몽골 침입 때 몽골군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한 죽주산성이며,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죽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에 더 가까운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에는 인근 군현과의 경계선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된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왼쪽 위의 西三面에서 발원하여 陽智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산지의 표현에서도 읍치 아래쪽의 本邑案山 부분이 《해동지도》와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상당히 유사한 편이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와 봉수 및 읍치의 旧鄕校 등이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여지도》의 경우 수원을 왕래하는 中山路가 水原界로 잘못 적혀 있기도 하고, 일부 지명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변경시켰고, 뒤의 2개 지도는 수정된 본 지도 계통을 다시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수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고산성 아래의 石塔과 彌勒 부분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명칭에 알맞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가 아니라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정산현 주기 (定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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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현은 청양군의 정산면, 목면, 청남면, 구룡리를 제외한 장평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정산면의 서정리에 있었다. 아래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다. 금강변에는 半灘津, 汪津 등의 나루 명칭이 적혀 있는데, 금강에 대한 이 지역에서의 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왼쪽의 鵲川은 현재의 지천으로 청양 방면에서 흘러들어온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정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備圖를 참조하여 몇몇 지명을 첨가했다는 첨지가 붙어 있는데, 이 때 첨가된 지명을 제외하면 수록된 지명이 본 지도와 동일하다.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없는 大朴谷面(또는 大方谷面)이 첨가되어 있다. 네 개의 지도 주기에 모두 대박곡면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와 본 지도의 필사자가 빠뜨렸을 가능성도 있고, 원본에도 없었는데 이후에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여지도》의 경우 제언 1개가 생략되고 제언의 모습도 그리지 않아 꼼꼼한 검토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어 《여지도》의 필사자가 대방곡면을 첨가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아래쪽에 표시된 江倉은 정산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漕倉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水運이 불가능한 내륙 고을 이외에는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런 창고가 바다에 설치되면 보통 海倉이라고 하며, 강에 설치되면 江倉이라고 하였다.(이기봉)

  • 영산현 (靈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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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군면 통합으로 사라진 조선시대 현으로 일부는 함안군에 귀속되고 대부분은 창녕군에 포함된 고을이다.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에 해당하고 지도 제일 위에 그려진 영취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에 표시되진 않았지만, 현재 산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현재의 창녕군 영산면, 남지읍, 계성면, 장마면, 도천면, 부곡면, 길곡면 등이 영산의 범위에 포함된다. 진산인 영취산은 동쪽의 낙동정맥에서 뻗어나온 산이며 지도 아래 하천은 낙동강이다. 영취산에서 내려 온 맥이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일반적 군현지도에서 향교는 독자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려지는데 비해 이 지도는 객사로 내려오는 맥을 가로챈 자리에 향교가 들어선 점이 이색적이다. 낙동강의 작은 지류들이 많이 그려져 있고 곳곳에 농업을 위한 제언이 많이 조성된 점이 특징이다. 지도 오른쪽의 덕봉은 부곡면과 밀양시 무안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지금은 덕암산으로 불리며 544.5m이다. 그 아래 부곡면, 온정역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근처에 국민관광지로 개발된 부곡온천이 있다. 남쪽의 낙동강변에 나루와 정자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해연진은 부곡면 노리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가운데 아래쪽의 망우정은 도천면 우강리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앞에서 온정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1008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지도에 사찰이 전혀 나오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이현군)

  • 임실현 (任實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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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임실군에서 남원부에 속했던 삼계면, 지사면 일부, 오수면 일부를 제외한 임실읍, 신평면, 신덕면, 관촌면, 성수면, 운암면, 청웅면, 강진면, 덕치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읍치는 지도 가운데 현내면으로 적힌 곳으로 현재의 임실읍 성가리에 해당한다. 현재 임실천으로 불리는 하천가에 벽운루를 앞에 두고 관아 건물이 그려졌으나 성곽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가 겹겹이 감싸는듯한 느낌을 준다. 향교와 읍치가 같은 형국 안에 들어서 있다. 읍치의 배경이 되는 봉황산 뒤쪽에 표시된 龍撓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에 구고면이 적혔는데 구고폐현이 있던 곳이다. 청웅면 구고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청웅면 향교리는 옛 구고현의 향교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 왼쪽에 서창이 표시되었는데 강진면 백련리에 서창 지명이 남아있다. 그 아래에 갈담교, 갈담원이 표시되었는데 강진면 갈담리 일대로 추정되며 그 앞의 하천은 현재 갈담천으로 불린다. 그 위에 표시된 백련산은 강진면과 청웅면의 경계에 위치한 754m 높이의 산이다. 갈담교 서북쪽, 백련산 서남쪽에 섬진강댐이 들어서면서 지도 왼쪽 위 지역은 현재 수몰되었고 그 자리에 옥정호(운암호)가 들어서 있다. 읍치 남쪽의 임실천이 북쪽의 조운천으로 유입되어 다시 서남쪽의 섬진강이 되는 하천구조이다. 지도 오른쪽 위 조운천변 현재의 관촌면에 국민관광지인 사선대가 있다. 주요 도로망이 연결되는 곳에 고개가 표시되었고 사찰, 서원이 그려졌다. (이현군)

  • 영변부 (寧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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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邊府〉 지도로, 지금은 평안북도 영변군, 구장군, 향산군 일대이다. 영변부는 1429년(세종 11)에 연산과 무산을 합쳐 藥山城에 읍치를 두고都節制使의 本營을 만든 것으로, 지도에도 아래쪽에 延山面, 왼쪽에 撫山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변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하천의 유로는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변부 지도와 비슷하다. 특히  鐵甕山城 부분의 험준한 지형을 강조한 모습 역시 두 지도가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다. 《광여도》 역시 남문 부분은 다소 간단하게 그리고 있으나 그 외의 부분에서 산의 험준함을 느낄 수 있으며, 지형을 이용한 성곽의 축조 모습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상당히 간단하게 그려졌다. 성곽 안의 물줄기가 밖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水口로 표시되어 있을 뿐 정확히 그려져 있지 않다. 이 점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비슷한데, 《해동지도》에는 水口를 통해 흘러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성 안과 왼쪽의 天水鎭에 표현된 건물 역시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가 훨씬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청천강 본류이며,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구룡강이다. 그런데 청천강의 표현에서 큰 실수가 발견된다. 청천강은 위쪽의 熙川界에서 흘러옴에도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구룡강 역시 雲山界에서 흘러 들어오지만 하천 끝을 얇게 하여 마치 최상류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그려져 있다.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청천강과 구룡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2개의 실선으로 그리는 것을 통해 볼 때 두 하천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부분은 본 지도를 비롯한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변부의 실제 모습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게 뻗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양윤정)

  • 이성현 (利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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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의 동해안 이원만에 위치하였던 이성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성현은 정조24년(1800) 순조가 즉위하면서 利原縣으로 개칭하였다. 지금 함경남도 리원군 일대이다. 인접한 군현(단천, 북청)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는 교통로와 磨雲嶺 등의 고개 지명들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2개의 하천이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下田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을 지나 南松亭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城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谷口驛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대천이다. 이원만에서 해안선은 실제 모습과 거의 유사하게 표현하였고, 소나무 숲으로서 남송정, 북송정을 표현한 것은 다른 군현에서 볼수 없는 독특한 묘사 기법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3,026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렸다. 지금의 이원읍 교동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는 驛으로 谷口驛 한곳만 있으며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었다. 도로가 적색 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도로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곡구역을 지나 마운령을 거치는 도로는 단천으로 연결되며 남으로는 시중대를 지나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들 해안 도로에는 함경선 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남대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구색령과 하전령을 지난다. 단천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는 城古介와 松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44戶, 田 1,379結8負4束, 畓 19結81負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죽산부 주기 (竹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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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부는 현재의 안성시 죽산면, 일죽면, 삼죽면, 용인시 백암면, 원삼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현재의 청미천이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부근에 표시된 古山城은 몽골 침입 때 몽골군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한 죽주산성이며,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죽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에 더 가까운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에는 인근 군현과의 경계선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된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왼쪽 위의 西三面에서 발원하여 陽智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산지의 표현에서도 읍치 아래쪽의 本邑案山 부분이 《해동지도》와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상당히 유사한 편이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와 봉수 및 읍치의 旧鄕校 등이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여지도》의 경우 수원을 왕래하는 中山路가 水原界로 잘못 적혀 있기도 하고, 일부 지명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변경시켰고, 뒤의 2개 지도는 수정된 본 지도 계통을 다시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수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고산성 아래의 石塔과 彌勒 부분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명칭에 알맞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가 아니라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제천현 (堤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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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현은 제천시의 시내, 봉학면, 봉양읍, 백운면, 금성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제천시의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제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표현기법이나 내용이 거의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는 약간 다른 편이다. 《해동지도》의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는 지명을 첨가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제천 지도이며, 이 때 첨가된 내용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다. 본 지도에는 읍치를 지나는 하천이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왼쪽 아래의 三倉川 부분이 출구이다. 다른 3개 지도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되어 있어 본 지도 필사자가 무성의하게 처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쪽 가운데의 原州界 방향에서 현재의 원주시 신림면에 있는 용암천이 흘러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고, 뒤의 2개 지도 역사 마찬가지이다. 《해동지도》에서는 용암천이 원주 방면에서 흘러들어올 가능성을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도 이 부분이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었다고 추정되며, 후대의 필사자들이 실제로 오해하여 사실과 다르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영산현 주기 (靈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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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군면 통합으로 사라진 조선시대 현으로 일부는 함안군에 귀속되고 대부분은 창녕군에 포함된 고을이다.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에 해당하고 지도 제일 위에 그려진 영취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에 표시되진 않았지만, 현재 산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현재의 창녕군 영산면, 남지읍, 계성면, 장마면, 도천면, 부곡면, 길곡면 등이 영산의 범위에 포함된다. 진산인 영취산은 동쪽의 낙동정맥에서 뻗어나온 산이며 지도 아래 하천은 낙동강이다. 영취산에서 내려 온 맥이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일반적 군현지도에서 향교는 독자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려지는데 비해 이 지도는 객사로 내려오는 맥을 가로챈 자리에 향교가 들어선 점이 이색적이다. 낙동강의 작은 지류들이 많이 그려져 있고 곳곳에 농업을 위한 제언이 많이 조성된 점이 특징이다. 지도 오른쪽의 덕봉은 부곡면과 밀양시 무안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지금은 덕암산으로 불리며 544.5m이다. 그 아래 부곡면, 온정역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근처에 국민관광지로 개발된 부곡온천이 있다. 남쪽의 낙동강변에 나루와 정자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해연진은 부곡면 노리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가운데 아래쪽의 망우정은 도천면 우강리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앞에서 온정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1008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지도에 사찰이 전혀 나오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이현군)

  • 임실현 주기 (任實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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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임실군에서 남원부에 속했던 삼계면, 지사면 일부, 오수면 일부를 제외한 임실읍, 신평면, 신덕면, 관촌면, 성수면, 운암면, 청웅면, 강진면, 덕치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읍치는 지도 가운데 현내면으로 적힌 곳으로 현재의 임실읍 성가리에 해당한다. 현재 임실천으로 불리는 하천가에 벽운루를 앞에 두고 관아 건물이 그려졌으나 성곽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가 겹겹이 감싸는듯한 느낌을 준다. 향교와 읍치가 같은 형국 안에 들어서 있다. 읍치의 배경이 되는 봉황산 뒤쪽에 표시된 龍撓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에 구고면이 적혔는데 구고폐현이 있던 곳이다. 청웅면 구고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청웅면 향교리는 옛 구고현의 향교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 왼쪽에 서창이 표시되었는데 강진면 백련리에 서창 지명이 남아있다. 그 아래에 갈담교, 갈담원이 표시되었는데 강진면 갈담리 일대로 추정되며 그 앞의 하천은 현재 갈담천으로 불린다. 그 위에 표시된 백련산은 강진면과 청웅면의 경계에 위치한 754m 높이의 산이다. 갈담교 서북쪽, 백련산 서남쪽에 섬진강댐이 들어서면서 지도 왼쪽 위 지역은 현재 수몰되었고 그 자리에 옥정호(운암호)가 들어서 있다. 읍치 남쪽의 임실천이 북쪽의 조운천으로 유입되어 다시 서남쪽의 섬진강이 되는 하천구조이다. 지도 오른쪽 위 조운천변 현재의 관촌면에 국민관광지인 사선대가 있다. 주요 도로망이 연결되는 곳에 고개가 표시되었고 사찰, 서원이 그려졌다. (이현군)

  • 영변부 주기 (寧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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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邊府〉 지도로, 지금은 평안북도 영변군, 구장군, 향산군 일대이다. 영변부는 1429년(세종 11)에 연산과 무산을 합쳐 藥山城에 읍치를 두고都節制使의 本營을 만든 것으로, 지도에도 아래쪽에 延山面, 왼쪽에 撫山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변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하천의 유로는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변부 지도와 비슷하다. 특히  鐵甕山城 부분의 험준한 지형을 강조한 모습 역시 두 지도가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다. 《광여도》 역시 남문 부분은 다소 간단하게 그리고 있으나 그 외의 부분에서 산의 험준함을 느낄 수 있으며, 지형을 이용한 성곽의 축조 모습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상당히 간단하게 그려졌다. 성곽 안의 물줄기가 밖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水口로 표시되어 있을 뿐 정확히 그려져 있지 않다. 이 점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비슷한데, 《해동지도》에는 水口를 통해 흘러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성 안과 왼쪽의 天水鎭에 표현된 건물 역시  《해동지도》보다 본 지도가 훨씬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청천강 본류이며,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구룡강이다. 그런데 청천강의 표현에서 큰 실수가 발견된다. 청천강은 위쪽의 熙川界에서 흘러옴에도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구룡강 역시 雲山界에서 흘러 들어오지만 하천 끝을 얇게 하여 마치 최상류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그려져 있다. 본 지도의 필사 시에 청천강과 구룡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2개의 실선으로 그리는 것을 통해 볼 때 두 하천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부분은 본 지도를 비롯한 《해동지도》와 《광여도》,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변부의 실제 모습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게 뻗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양윤정)

  • 이성현 주기 (利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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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의 동해안 이원만에 위치하였던 이성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성현은 정조24년(1800) 순조가 즉위하면서 利原縣으로 개칭하였다. 지금 함경남도 리원군 일대이다. 인접한 군현(단천, 북청)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를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는 교통로와 磨雲嶺 등의 고개 지명들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2개의 하천이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下田嶺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서쪽을 지나 南松亭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城古介 부근에서 발원하여 谷口驛 부근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대천이다. 이원만에서 해안선은 실제 모습과 거의 유사하게 표현하였고, 소나무 숲으로서 남송정, 북송정을 표현한 것은 다른 군현에서 볼수 없는 독특한 묘사 기법이다. 읍치는 성곽(둘레; 3,026尺)과 함께 해안 가까이에 그렸다. 지금의 이원읍 교동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는 驛으로 谷口驛 한곳만 있으며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었다. 도로가 적색 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도로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곡구역을 지나 마운령을 거치는 도로는 단천으로 연결되며 남으로는 시중대를 지나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진다. 지금 이들 해안 도로에는 함경선 철도와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남대천 연변을 따라 그려져 있으며 구색령과 하전령을 지난다. 단천으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는 城古介와 松嶺을 지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44戶, 田 1,379結8負4束, 畓 19結81負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지평현 (砥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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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현은 현재의 양평군 지제면, 양동면, 청운면, 단월면, 용문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지제면의 지평리에 있었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 양평읍 남쪽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흑천이며, 아래쪽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으로 흘러가는 석곡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지평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첫째,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되어 있다. 셋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넷째, 본 지도의 읍치 건물 방향과 산의 표현 방식이 《해동지도》에 가까운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상당한 변화를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검토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본 지도가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주기 내용 등에서 변화를 주었고, 마지막으로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를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의 경우 일부 지명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하천이 다른 군현과 만나는 지점에 水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광여도》에는 이 중 아래쪽에서 두 번째의 것이 水原으로 바뀌어 있고, 《여지도》에는 이것이 水源으로, 그 위쪽의 것이 水路로 바뀌어 있다. 또한 읍치의 산줄기 모습이 실제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이기 때문에 그 뒤의 필사자들이 변형시킨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제천현 주기 (堤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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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현은 제천시의 시내, 봉학면, 봉양읍, 백운면, 금성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제천시의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제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표현기법이나 내용이 거의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는 약간 다른 편이다. 《해동지도》의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는 지명을 첨가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제천 지도이며, 이 때 첨가된 내용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다. 본 지도에는 읍치를 지나는 하천이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왼쪽 아래의 三倉川 부분이 출구이다. 다른 3개 지도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되어 있어 본 지도 필사자가 무성의하게 처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쪽 가운데의 原州界 방향에서 현재의 원주시 신림면에 있는 용암천이 흘러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에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고, 뒤의 2개 지도 역사 마찬가지이다. 《해동지도》에서는 용암천이 원주 방면에서 흘러들어올 가능성을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도 이 부분이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었다고 추정되며, 후대의 필사자들이 실제로 오해하여 사실과 다르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영양현 (英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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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석보면은 영해부에 속하였고 입암면의 일부지역은 진보현에 속하여서 현재의 영양군에서 그 나머지 지역이 영양현의 관할범위였다. 영해부, 진보현에 귀속되기도 하였다가 1683년(숙종 9)에 다시 현을 두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동국여지승람에는 영해도호부의 속현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진산이 기록되지 않았다. 낙동정맥을 경계로 영해, 평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이다.북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서쪽으로 나온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의 ‘靑’이 들어가는 두개의 면 이름이 나오는데 과거 靑杞縣 이 있던 지역이다. 현재는 청기면이 되었다. 읍치 동쪽에 장군천으로 적힌 하천은 지금의 반변천이며 왼쪽은 동천으로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입암이 표시되었는데 돌이 서있는 모습을 회화적으로 그렸다. 현재의 입암면 강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는데 뒤쪽 산줄기가 읍치로 연결되게 표현하였다. 아사 왼쪽 아래 가장 큰 건물이 객사로 보이는데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향교는 독립적 형국 안에 그렸으며 읍성 밖에 설치되는 제단들도 표시하지 않은 간략하게 만든 지도이다. 하천과 도로를 따라 倉, 누정, 서원이 그려졌다. 입암 아래에 초선도를 그렸는데 이름으로 명승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임암면의 문해교 아래에 하중도가 있는데 그 섬으로 비정된다. 읍치 오른쪽에 그려진 도로는 현재의 31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가 된다.(이현군)

  • 임피현 (臨陂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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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북쪽의 하천은 금강이며 아래쪽의 하천은 만경강이다. 현재의 군산시에서 임피면, 개정면, 성산면, 대야면, 나포면, 서수면 일대를 그렸으며 임피면 읍내리가 읍치에 해당한다. 현재의 읍내리에 성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 지도 중심부의 읍성 안을 가리킨다. 전라도 군현지도에 읍성을 그리지 않은 곳이 많은데 북쪽 산세와 연결된 성곽과 성문이 잘 나타나고 있다. 향교는 읍성 밖에 위치하는게 일반적인데 이 지도에서는 읍성 안에 위치한 점이 특이하다. 읍성 북쪽에 취성산이 표시되어 鎭山으로 보이지만 동국여지승람에는 서쪽의 芮山이 진산으로 기록되었다. 취성산은 임피면 취산리와 서수면, 성산면의 경계에 위치한 205m 높이의 산이다. 지도 왼쪽 위에 서시포, 오성산이 표시되었는데 서시포는 나포면 서포리 일대이며 오성산은 성산면에 있는 227.7m의 산이다. 서시포와 오성산 사이로 서해안 고속국도가 통과한다. 서시포 위에 水廣五里가 적혔다. 금강의 하류 지역으로 오성산 서북쪽에 금강하구둑이 위치한다. 오른쪽 위의 나리포는 현재의 나포면 나포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돌을 세워 놓은 듯한 그림을 그리고 입석이라고 표시하였는데 현재의 대야면 남쪽 만경강가에 입석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29번 국도상의 만경대교 동북쪽에 있다. 그 위쪽의 鳳岩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임피면 미원리에 있었다.(이현군)

  • 영원군 (寧遠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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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遠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녕원군과 대흥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지도의 상단 부분의 방위 차이로 지도의 모습이 달라 보이기도 한다. 본 지도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해동지도》가 동서를 남북보다 1.5배 정도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약간 길게 그렸다. 북쪽을 위로 하면서 세로로 약간 긴 종이 위에 영원군의 영역을 다 담으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영원군의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더 길기 때문에 사실 본 지도보다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 나오는 대부분의 지명은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지만 읍치에는 건물과 그 명칭이 《해동지도》보다 더 많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더 많아진 정보와 작아진 종이 크기를 고려하여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오른쪽 위(동북)에서 발원하여 왼쪽 아래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읍치를 확대하였기 때문에 읍치 부근의 대동강 지류가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이천부 (伊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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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이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천부는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이천군·판교군·법동군 일대에 해당된다. 이천부의 실재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지도 하단부에 배치하였, 진산인 城山으로부터 내려온 줄기가 읍치를 감싸고 있다. 임진강이 부의 동쪽인 평강에서 유입하여 부의 중앙부를 서류하다가 하중도인 蛇島 부근에서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구당리천)을 합류하며 남류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부의 동쪽인 분지치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고미탄천)은 읍치의 남쪽을 감싸며 서류하다가 임진강과 합류된다. 읍치는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묘사되었고, 성곽 시설은 없다. 지금의 이천읍 향교리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이천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부내에는 역으로 乾川譯 한곳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 송나리현을 겨쳐 안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高城津을 지나 곡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부의 북쪽으로 고성진을 건너 檜弥時峴-廣峴-방응치, 축령, 박달령을 지나 안변으로 이어지며 이 도로가 당시 이천부의 주 간선도로였다. 동쪽으로 분지치를 지나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의 지역에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지평현 주기 (砥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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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현은 현재의 양평군 지제면, 양동면, 청운면, 단월면, 용문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지제면의 지평리에 있었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 양평읍 남쪽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흑천이며, 아래쪽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으로 흘러가는 석곡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지평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첫째,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되어 있다. 셋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넷째, 본 지도의 읍치 건물 방향과 산의 표현 방식이 《해동지도》에 가까운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상당한 변화를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검토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본 지도가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주기 내용 등에서 변화를 주었고, 마지막으로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를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의 경우 일부 지명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하천이 다른 군현과 만나는 지점에 水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광여도》에는 이 중 아래쪽에서 두 번째의 것이 水原으로 바뀌어 있고, 《여지도》에는 이것이 水源으로, 그 위쪽의 것이 水路로 바뀌어 있다. 또한 읍치의 산줄기 모습이 실제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이기 때문에 그 뒤의 필사자들이 변형시킨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직산현 (稷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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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현은 천안시의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입장면, 평택시 팽성읍의 도두리 일대, 오성면의 당거리 일대, 안중면의 안중리 일대, 포승면의 만호리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직산면 군서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직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며,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건물이 현저하게 많다. 본 지도에는 하천과 주변의 경계가 쉽게 알아보기 어렵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安城界 방면에서 흘러와 왼쪽의 外也串面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안성천의 본류이고, 왼쪽 아래의 牙山界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다. 직산현의 대부분은 삽교천과 접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삽교천이 그려져 있는 것은 월경지 때문으로 보인다. 왼쪽 위의 慶陽面, 堰里面, 외야곶면은 모두 아산만에 접해 있는 월경지이며, 특히 외야곶면은 현재의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 근처에 있었다.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외야곶면은 唐津과 洪州의 월경지인 현재의 당진군 신평면과 마주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왼쪽에 洪陽界(洪州界)와 唐津界가 기록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다만 沔川은 직산과 직접 마주 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沔川界는 해당 방향에 면천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이기봉)

  • 영양현 주기 (英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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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석보면은 영해부에 속하였고 입암면의 일부지역은 진보현에 속하여서 현재의 영양군에서 그 나머지 지역이 영양현의 관할범위였다. 영해부, 진보현에 귀속되기도 하였다가 1683년(숙종 9)에 다시 현을 두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동국여지승람에는 영해도호부의 속현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진산이 기록되지 않았다. 낙동정맥을 경계로 영해, 평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이다.북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서쪽으로 나온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의 ‘靑’이 들어가는 두개의 면 이름이 나오는데 과거 靑杞縣 이 있던 지역이다. 현재는 청기면이 되었다. 읍치 동쪽에 장군천으로 적힌 하천은 지금의 반변천이며 왼쪽은 동천으로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입암이 표시되었는데 돌이 서있는 모습을 회화적으로 그렸다. 현재의 입암면 강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는데 뒤쪽 산줄기가 읍치로 연결되게 표현하였다. 아사 왼쪽 아래 가장 큰 건물이 객사로 보이는데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향교는 독립적 형국 안에 그렸으며 읍성 밖에 설치되는 제단들도 표시하지 않은 간략하게 만든 지도이다. 하천과 도로를 따라 倉, 누정, 서원이 그려졌다. 입암 아래에 초선도를 그렸는데 이름으로 명승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임암면의 문해교 아래에 하중도가 있는데 그 섬으로 비정된다. 읍치 오른쪽에 그려진 도로는 현재의 31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가 된다.(이현군)

  • 임피현 주기 (臨陂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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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북쪽의 하천은 금강이며 아래쪽의 하천은 만경강이다. 현재의 군산시에서 임피면, 개정면, 성산면, 대야면, 나포면, 서수면 일대를 그렸으며 임피면 읍내리가 읍치에 해당한다. 현재의 읍내리에 성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 지도 중심부의 읍성 안을 가리킨다. 전라도 군현지도에 읍성을 그리지 않은 곳이 많은데 북쪽 산세와 연결된 성곽과 성문이 잘 나타나고 있다. 향교는 읍성 밖에 위치하는게 일반적인데 이 지도에서는 읍성 안에 위치한 점이 특이하다. 읍성 북쪽에 취성산이 표시되어 鎭山으로 보이지만 동국여지승람에는 서쪽의 芮山이 진산으로 기록되었다. 취성산은 임피면 취산리와 서수면, 성산면의 경계에 위치한 205m 높이의 산이다. 지도 왼쪽 위에 서시포, 오성산이 표시되었는데 서시포는 나포면 서포리 일대이며 오성산은 성산면에 있는 227.7m의 산이다. 서시포와 오성산 사이로 서해안 고속국도가 통과한다. 서시포 위에 水廣五里가 적혔다. 금강의 하류 지역으로 오성산 서북쪽에 금강하구둑이 위치한다. 오른쪽 위의 나리포는 현재의 나포면 나포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돌을 세워 놓은 듯한 그림을 그리고 입석이라고 표시하였는데 현재의 대야면 남쪽 만경강가에 입석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29번 국도상의 만경대교 동북쪽에 있다. 그 위쪽의 鳳岩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임피면 미원리에 있었다.(이현군)

  • 영원군 주기 (寧遠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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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寧遠郡〉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녕원군과 대흥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지도의 상단 부분의 방위 차이로 지도의 모습이 달라 보이기도 한다. 본 지도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해동지도》가 동서를 남북보다 1.5배 정도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북을 동서보다 약간 길게 그렸다. 북쪽을 위로 하면서 세로로 약간 긴 종이 위에 영원군의 영역을 다 담으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영원군의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더 길기 때문에 사실 본 지도보다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 나오는 대부분의 지명은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지만 읍치에는 건물과 그 명칭이 《해동지도》보다 더 많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읍치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더 많아진 정보와 작아진 종이 크기를 고려하여 그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오른쪽 위(동북)에서 발원하여 왼쪽 아래의 德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읍치를 확대하였기 때문에 읍치 부근의 대동강 지류가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이천부 주기 (伊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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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이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천부는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이천군·판교군·법동군 일대에 해당된다. 이천부의 실재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지도 하단부에 배치하였, 진산인 城山으로부터 내려온 줄기가 읍치를 감싸고 있다. 임진강이 부의 동쪽인 평강에서 유입하여 부의 중앙부를 서류하다가 하중도인 蛇島 부근에서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구당리천)을 합류하며 남류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부의 동쪽인 분지치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고미탄천)은 읍치의 남쪽을 감싸며 서류하다가 임진강과 합류된다. 읍치는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묘사되었고, 성곽 시설은 없다. 지금의 이천읍 향교리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이천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부내에는 역으로 乾川譯 한곳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 송나리현을 겨쳐 안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高城津을 지나 곡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부의 북쪽으로 고성진을 건너 檜弥時峴-廣峴-방응치, 축령, 박달령을 지나 안변으로 이어지며 이 도로가 당시 이천부의 주 간선도로였다. 동쪽으로 분지치를 지나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의 지역에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진위현 (振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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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현은 평택시 진위면, 서탄면, 고덕면, 옛 송탄시와 평택시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진위면 봉남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에서 흘러오는 진위천이 위쪽에서 내려오는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의 내용으로 객사와 아사 등의 읍치와 고개 및 주막 등이 아주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내용이 간략함에도 불구하고 酒幕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도로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수록된 각 경계선까지의 거리가 모두 생략되어 있는데, 주기에 동서남북 경계선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수록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지만 주기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필사 당시의 정보로 교체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위현 지도에도 주기를 비롯하여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 위의 도로가 없는 것을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도로만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에 표시된 海倉은 진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한 군데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면서 해창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해창은 바닷배가 운행될 수 있는 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썰물 때 바닷물이 아산만 깊숙이 들어오는 자연지리적 지형을 잘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이기봉)

  • 직산현 주기 (稷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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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현은 천안시의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입장면, 평택시 팽성읍의 도두리 일대, 오성면의 당거리 일대, 안중면의 안중리 일대, 포승면의 만호리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직산면 군서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직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며,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건물이 현저하게 많다. 본 지도에는 하천과 주변의 경계가 쉽게 알아보기 어렵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安城界 방면에서 흘러와 왼쪽의 外也串面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안성천의 본류이고, 왼쪽 아래의 牙山界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다. 직산현의 대부분은 삽교천과 접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삽교천이 그려져 있는 것은 월경지 때문으로 보인다. 왼쪽 위의 慶陽面, 堰里面, 외야곶면은 모두 아산만에 접해 있는 월경지이며, 특히 외야곶면은 현재의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 근처에 있었다.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외야곶면은 唐津과 洪州의 월경지인 현재의 당진군 신평면과 마주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왼쪽에 洪陽界(洪州界)와 唐津界가 기록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다만 沔川은 직산과 직접 마주 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沔川界는 해당 방향에 면천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이기봉)

  • 영일현 (迎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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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장기곶(호미곶)과 포항 사이가 영일만이다. 이 지도는 영일만과 그 서쪽에 있던 영일현을 그린 것이다. 광여도는 延日縣으로 표시했는데 그 이름을 딴 현재의 연일읍 생지리, 동문리 일대가 중심부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동쪽 바다에 접한 고을이므로 하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지도 위쪽의 강이 형산강인데 흥해군과의 경계가 된다. 오른쪽 위에 경주 포항창이 적혀있는데 이 이름을 따서 현재의 浦項 지명이 만들어졌다. 영일현의 진산은 읍치 남쪽 지금의 대송면 홍계리에 있는 482m의 운제산이다. 지도 남쪽 산줄기에 해당한다. 주변 산세를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향교와 서원은 산줄기를 따로 표현해서 독립적으로 보이도록 하였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읍성을 원형으로 그리고 그 안에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방향만 다르게 표현하였다. 읍치 동쪽으로 북송전을 그렸다. 바다의 바람을 막고 읍성이 바로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나무 숲을 조성한 곳으로 보인다. 현재의 송내동, 송정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소나무 숲 오른쪽의 바다는 일부 매립하여 제철산업의 중심기업인 포스코가 들어서 있다. 방면 표시도 없고 지명으로는 왼쪽 위에 부조리만 적혀 있는데 현재 연일읍 중명리에 아랫부조라는 마을이 있는 곳이다.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린 지도이다.(이현군)

  • 장성부 (長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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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장성군에서 삼계면, 삼서면, 동화면은 조선시대 靈光郡의 관할 범위에 속하므로 이 세 면을 제외한 지역이 관할범위에 속한다. 객사가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장성읍 성산리 일대이며 이 지역을 지나는 1번 국도와 호남고속국도의 동쪽에 위치한다. 읍치 북쪽 가까이에 있는 금오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개천으로 읍치 아래의 장성천과 합류되어 황룡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북쪽 지역에는 장섬댐의 건설로 현재는 장성호가 형성되었다. 장성호 북쪽으로 내장산 국립공원이 있는데 그 안에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백양사와 입암산성이 있다. 입암산성은 기존에 있던 石城을 선조대에 새로 수축한 것이다. 그 안에 객사, 장대, 창, 별영소 등이 표시되었다. 왼쪽에 동서북 삼면이 험하다고 기록되었다. 그 아래 蛾眉山은 장성호 서쪽 북하면 수성리의 383m의 현재의 성미산을 그린 것이다. 회화적으로 묘사한 점이 눈에 띈다. 해동지도에는 蛾嵋岩으로 표시하고 불상 모양을 그려놓았다. 지도 왼쪽 아래의 필봉서원은 해동지도에는 筆岩書院으로 표시된 곳으로 현재의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것이다. 金麟厚를 배향한 곳으로 소장된 문서들이 보물 587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도로를 표시하고 북쪽으로 연결되는 주요 고개에는 險隘라고 적었다. 읍치 북쪽으로 청암역, 驛館을 표시하였다. 장성부는 1600년(선조 33)에 남쪽의 진원현을 병합하면서 읍치를 이전의 장성과 진원의 중간지점으로 옮겨서 이 지도의 중심부인 성산리 일대가 읍치지역이 되었는데 지도 왼쪽 북면의 고장성원은 옛 장성의 중심지를 보여주는 것이다.(이현군)

  • 영유현 (永柔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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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永柔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유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유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몇 군데 잘못된 것이 보인다. 왼쪽 아래의 盆湖는 盆浦를, 蓮花面은 蓮下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광여도》에서는 전자는 교정되지 않았지만 후자는 교정되어 본 지도와 같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표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차이점이 보인다. 읍치에서 흘러나가는 하천 중 紫華山 아래쪽에 표시된 것은  《해동지도》에는 그 위쪽에 그려져 있다. 이 부분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아래쪽의 德池筒에 2개의 섬이 하천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한 것도 《해동지도》의 내용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德池筒은 둘레가 5萬尺을 넘는 저수지였는데, 1731년(영조 7)에 모두 메워 논으로 만들었다. 德池 안에 있는 鎭舍·鎭廳은 德池鎭을 의미하며 1748년(영조 23)에 폐지되었다.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읍치 지역을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였다. 아래쪽(서)에 면이 밀집되어 있는 것처럼 그려진 것은 동쪽(위)에 있는 읍치 지역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영유현의 전체적인 모습은 동쪽의 남북 폭이 좁고, 서쪽은 넓다. (양윤정)

  • 인제현 (麟蹄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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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소재하였던 인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인제현은 지금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인제군에 해당된다. 당시 두 면은 춘천부에 속해 있었다. 인제군의 북쪽 지역은 휴전선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도 명칭에서 사용된 ‘獜’字는 ‘麟’의 속자이다. 실제 형태는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정방형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객사, 아사, 향교로 구성된 읍치를 진산인 伏龍山과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읍치는 지금의 인제읍 상동리·합강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주변의 산세는 매우 험준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지도의 동쪽에 백두대간을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성, 간성, 양양과의 경계를 표시하였다. 북으로는 양구, 서남으로는 홍천과의 경계도 산지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하천의 여러 지류들이 서류하면서 읍치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의 소양천으로 댐의 건설로 소양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의 하천은 지금의 서화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龍臺山과 雪嶽山에서 발원한 하천은 각각 북천과 한계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북천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영실천에 해당된다. 읍치 남쪽 동면에서 북쪽으로 흘러 유입되는 하천은 내린천을, 읍치 서쪽에서 남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가야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인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서화천을 따라 연결된 도로는 炭嶺을 지나 고성으로 이어진다. 간성과는 진부령, 양양과는 오색령을 통해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양구로는 廣峙, 沙乃峙를 통해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11戶, 田 130結85負5束, 畓 10結38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진위현 주기 (振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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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현은 평택시 진위면, 서탄면, 고덕면, 옛 송탄시와 평택시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진위면 봉남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에서 흘러오는 진위천이 위쪽에서 내려오는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의 내용으로 객사와 아사 등의 읍치와 고개 및 주막 등이 아주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내용이 간략함에도 불구하고 酒幕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도로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수록된 각 경계선까지의 거리가 모두 생략되어 있는데, 주기에 동서남북 경계선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수록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지만 주기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필사 당시의 정보로 교체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위현 지도에도 주기를 비롯하여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 위의 도로가 없는 것을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도로만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에 표시된 海倉은 진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한 군데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면서 해창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해창은 바닷배가 운행될 수 있는 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썰물 때 바닷물이 아산만 깊숙이 들어오는 자연지리적 지형을 잘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이기봉)

  • 진잠현 (鎭岑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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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잠현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남쪽 부분(옛 진잠면), 서구의 남쪽 부분(옛 기성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유성구의 원내동과 교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그렸는데, 서쪽을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도에 大川으로 기록된 것이 갑천 상류에 해당된다. 大川은 전국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하천 명칭으로 해당 군현에서 가장 크다는 의미이며, 일반적으로 ‘한내’라고 불렸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잠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수록된 도로와 오른쪽 鶴雲寺에 표시된 탑의 모습이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생략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이기봉)

  • 영일현 주기 (迎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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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장기곶(호미곶)과 포항 사이가 영일만이다. 이 지도는 영일만과 그 서쪽에 있던 영일현을 그린 것이다. 광여도는 延日縣으로 표시했는데 그 이름을 딴 현재의 연일읍 생지리, 동문리 일대가 중심부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동쪽 바다에 접한 고을이므로 하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지도 위쪽의 강이 형산강인데 흥해군과의 경계가 된다. 오른쪽 위에 경주 포항창이 적혀있는데 이 이름을 따서 현재의 浦項 지명이 만들어졌다. 영일현의 진산은 읍치 남쪽 지금의 대송면 홍계리에 있는 482m의 운제산이다. 지도 남쪽 산줄기에 해당한다. 주변 산세를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향교와 서원은 산줄기를 따로 표현해서 독립적으로 보이도록 하였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읍성을 원형으로 그리고 그 안에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방향만 다르게 표현하였다. 읍치 동쪽으로 북송전을 그렸다. 바다의 바람을 막고 읍성이 바로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나무 숲을 조성한 곳으로 보인다. 현재의 송내동, 송정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소나무 숲 오른쪽의 바다는 일부 매립하여 제철산업의 중심기업인 포스코가 들어서 있다. 방면 표시도 없고 지명으로는 왼쪽 위에 부조리만 적혀 있는데 현재 연일읍 중명리에 아랫부조라는 마을이 있는 곳이다.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린 지도이다.(이현군)

  • 장성부 주기 (長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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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장성군에서 삼계면, 삼서면, 동화면은 조선시대 靈光郡의 관할 범위에 속하므로 이 세 면을 제외한 지역이 관할범위에 속한다. 객사가 그려진 읍치는 현재의 장성읍 성산리 일대이며 이 지역을 지나는 1번 국도와 호남고속국도의 동쪽에 위치한다. 읍치 북쪽 가까이에 있는 금오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개천으로 읍치 아래의 장성천과 합류되어 황룡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북쪽 지역에는 장섬댐의 건설로 현재는 장성호가 형성되었다. 장성호 북쪽으로 내장산 국립공원이 있는데 그 안에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백양사와 입암산성이 있다. 입암산성은 기존에 있던 石城을 선조대에 새로 수축한 것이다. 그 안에 객사, 장대, 창, 별영소 등이 표시되었다. 왼쪽에 동서북 삼면이 험하다고 기록되었다. 그 아래 蛾眉山은 장성호 서쪽 북하면 수성리의 383m의 현재의 성미산을 그린 것이다. 회화적으로 묘사한 점이 눈에 띈다. 해동지도에는 蛾嵋岩으로 표시하고 불상 모양을 그려놓았다. 지도 왼쪽 아래의 필봉서원은 해동지도에는 筆岩書院으로 표시된 곳으로 현재의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것이다. 金麟厚를 배향한 곳으로 소장된 문서들이 보물 587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도로를 표시하고 북쪽으로 연결되는 주요 고개에는 險隘라고 적었다. 읍치 북쪽으로 청암역, 驛館을 표시하였다. 장성부는 1600년(선조 33)에 남쪽의 진원현을 병합하면서 읍치를 이전의 장성과 진원의 중간지점으로 옮겨서 이 지도의 중심부인 성산리 일대가 읍치지역이 되었는데 지도 왼쪽 북면의 고장성원은 옛 장성의 중심지를 보여주는 것이다.(이현군)

  • 영유현 주기 (永柔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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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永柔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유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영유현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지명은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에는 몇 군데 잘못된 것이 보인다. 왼쪽 아래의 盆湖는 盆浦를, 蓮花面은 蓮下面을 잘못 옮긴 것이다. 《광여도》에서는 전자는 교정되지 않았지만 후자는 교정되어 본 지도와 같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표현에 있어서는 《해동지도》와 차이점이 보인다. 읍치에서 흘러나가는 하천 중 紫華山 아래쪽에 표시된 것은  《해동지도》에는 그 위쪽에 그려져 있다. 이 부분은 《여지도》와 《광여도》에서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아래쪽의 德池筒에 2개의 섬이 하천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한 것도 《해동지도》의 내용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德池筒은 둘레가 5萬尺을 넘는 저수지였는데, 1731년(영조 7)에 모두 메워 논으로 만들었다. 德池 안에 있는 鎭舍·鎭廳은 德池鎭을 의미하며 1748년(영조 23)에 폐지되었다.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읍치 지역을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였다. 아래쪽(서)에 면이 밀집되어 있는 것처럼 그려진 것은 동쪽(위)에 있는 읍치 지역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영유현의 전체적인 모습은 동쪽의 남북 폭이 좁고, 서쪽은 넓다. (양윤정)

  • 인제현 주기 (麟蹄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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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소재하였던 인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인제현은 지금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인제군에 해당된다. 당시 두 면은 춘천부에 속해 있었다. 인제군의 북쪽 지역은 휴전선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도 명칭에서 사용된 ‘獜’字는 ‘麟’의 속자이다. 실제 형태는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정방형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객사, 아사, 향교로 구성된 읍치를 진산인 伏龍山과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읍치는 지금의 인제읍 상동리·합강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주변의 산세는 매우 험준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지도의 동쪽에 백두대간을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성, 간성, 양양과의 경계를 표시하였다. 북으로는 양구, 서남으로는 홍천과의 경계도 산지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하천의 여러 지류들이 서류하면서 읍치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의 소양천으로 댐의 건설로 소양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의 하천은 지금의 서화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龍臺山과 雪嶽山에서 발원한 하천은 각각 북천과 한계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북천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영실천에 해당된다. 읍치 남쪽 동면에서 북쪽으로 흘러 유입되는 하천은 내린천을, 읍치 서쪽에서 남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가야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인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서화천을 따라 연결된 도로는 炭嶺을 지나 고성으로 이어진다. 간성과는 진부령, 양양과는 오색령을 통해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양구로는 廣峙, 沙乃峙를 통해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11戶, 田 130結85負5束, 畓 10結38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통진부 (通津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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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부는 현재의 김포시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월곶면의 고막리와 군하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과 북쪽이 한강과 접해 있고, 서쪽은 鹽河를 사이에 두고 강화와 마주보며, 남쪽으로 김포와 접해 있었다. 본 지도에서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아래쪽은 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이고, 오른쪽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해당된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 내용 및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통진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 점, 읍치의 왼쪽 산봉우리의 묘사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식으로 그려진 점, 面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본 지도의 邑內面이 《해동지도》에는 府內面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읍내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는 오른쪽으로 김포와 연결되어 있는 육지 부분이 아주 좁게 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이면서 몇몇 부분에서 변화를 주고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가 필사한 지도 계통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오른쪽 위 아래로 童城山과 守安山의 명칭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려말과 조선초를 거치면서 통진에 완전히 속하게 된 속현의 명칭과 동일하다. 이들 산에는 테뫼식의 중소형 산성이 있어 고려말 이전에는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연구 경향을 잘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사례 지역이 된다. 지도 위쪽에는 阻江이란 지명이 적혀 있는데, 한강 하구의 구간에서 사용되던 하천 명칭이었고, 祖江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진잠현 주기 (鎭岑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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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잠현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남쪽 부분(옛 진잠면), 서구의 남쪽 부분(옛 기성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유성구의 원내동과 교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그렸는데, 서쪽을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도에 大川으로 기록된 것이 갑천 상류에 해당된다. 大川은 전국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하천 명칭으로 해당 군현에서 가장 크다는 의미이며, 일반적으로 ‘한내’라고 불렸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잠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수록된 도로와 오른쪽 鶴雲寺에 표시된 탑의 모습이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생략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이기봉)

  • 영천군 (榮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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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발음은 같지만 永川은 지금의 영천시이고 榮川은 현재의 영주시에 해당한다. 榮川의 읍치는 현재의 영주시내 영주동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주시내, 문수면, 장수면, 이산면, 평은면, 봉화군 상운면 일부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읍치를 둘러싼 하천은 서천으로 오른쪽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군현지도에서는 산줄기가 중앙부를 향하게 그린 지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지도는 모두 아래쪽을 향하게 그렸다. 북쪽으로 백두대간이라는 큰 산줄기가 형성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인 철탄산으로 맥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읍치에는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는데 읍성은 그리지 않았다. 아사 뒤쪽의 철탄산이 진산이다. 읍치 북쪽에 성내산성이 있었다. 이 지역의 서원 중 읍치 동쪽의 이산서원은 이황을 배향한 서원으로 1558년(명종 13)에 세워져 1574년(선조 7)에 사액받았다.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으로 그렸는데 동쪽의 향교는 영주향교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성밖의 사직단, 여단, 성황사 등을 그리지 않았다. 창보역, 평은역, 효대원, 문수원, 금림원, 승리원, 가이원, 장금원, 덕산원, 철겸원 등이 있었던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역원이 표시되지는 않았다. 이 지도에서 영천의 도로망은 읍치를 중심으로 X 자 구조이다. 영동선과 중앙선 철도, 5번 국도와 36번 국도가 지금의 영주를 지나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모태가 되었다. 그 외 창고, 봉수, 누정 등이 지도에 보인다.(이현군)

  • 장수현 (長水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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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장수군 중에서 장수읍, 장계면, 천천면, 계남면, 계북면 일대에 해당하는 군현으로 겹쳐 그린 산줄기 아래 객사를 포함한 건물들이 그려진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 일대이다. 향교와 읍치가 동일한 형국안에 표시되고 있다. 향교는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읍치 동쪽의 靈鷲山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 오른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으로 덕유산에서 뻗어내려온 맥이 육십령, 백운산으로 연결된다. 장수현은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하며 이 산줄기가 영호남의 경계가 된다. 지도 오른쪽 위에 六十峙가 표시되었는데 현재 26번 국도 상의 위령탑 근처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에 水分院이 표시되었는데 장수읍 수분리 일대에 위치하며 그 아래에 고개가 수분재가 된다. 이곳을 기준으로 동쪽은 남쪽의 섬진강으로 유입되고 서쪽은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유입된다. 읍치 서쪽에 표시된 하천이 금강의 최상류가 된다. 읍치 북쪽에 임현내면, 계창, 임북면, 임남면 등이 표시되었는데 長溪廢縣이 있던 곳이다. 현재의 장계면 장계리 일대가 장계 폐현의 중심부로 추정되며 지금은 계남면, 계북면 등으로 불린다. 왼쪽의 신광사는 신광사는 현재에도 남아있는 사찰이며 읍치 북쪽 하천변에 그려진 창계서원은 황희 정승을 모신 곳이다.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과 함께 순국한 논개가 이 고장 출신으로 현재 장수읍에 논개사당이 있다. 험준한 지형을 통과하여 주변 지역과 연결되므로 곳곳에 고개를 표시하고 그 이름을 적어놓았다.(이현군)

  • 옹진현 (瓮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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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여으로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옹진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옹진군의 옹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옹진부(또는 옹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옹진은 1719년(숙종 45)에 所江僉使鎭을 水軍節度使營으로 바꾸면서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옹진부사가 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본 지도에는 명칭이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에 사용된 원본이 1719년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본 지도가 언제 필사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1800년 이후에 필사된 것이 확인되고 있는 《광여도》에도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군현의 명칭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옹진현이 아니라 옹진부로 되어 있어 옹진이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된 이후에 필사되면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성과 소강진에 표시된 건물의 수라는 측면에서 앞의 4개 지도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본 지도이며, 《광여도》와 《여지도》가 그 다음으로 많고, 《해동지도》가 가장 적다. 이러한 경향성은 충청도의 군현지도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황해도의 일부 군현 지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은 원본에 가장 가깝게 필사한 것이 본 지도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몇몇 건물을 제외하면 원본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지도에는 船倉(또는 舡倉)이 2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왼쪽의 것에는 소강진 소속의 전선이, 오른쪽의 것에는 옹진현 소속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었다.(이기봉)

  • 정선군 (旌善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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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부에 위치하였던 정선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정선군은 지금의 강원도 정선군중 북면, 정선읍, 동면, 남면, 사북읍, 고한읍 일대에 해당된다. 임계면은 강릉부, 신동읍은 평창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중앙에 고을의 鎭山인 飛鳳山과 함께 객사, 아사, 향교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있다. 현재 정선읍 봉양리 일대이다. 지도의 중앙을 남한강의 상류인 조양강이 북동에서 흘러 내려와 읍치를 감싸돌며 남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영월 동강과 만난다. 실제로는 읍치가 봉양리가 하천 가까이 입지하고 있으나 지도에서는 훨씬 내륙쪽으로 그려져 있다. 조양강 상류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송천과 용탄천이며, 지도의 아래 부분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동대천이다. 조양강의 상류는 임계천이라고도 불린다. 부근에 표시된 餘粮驛 가까이 유명한 아우라지 나루가 있어 정선 아리랑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정선군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여러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주 도로는 강릉, 삼척, 영월로 연결된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좌측에 표시된 碧呑驛(현재 정선읍 용탄리)을 거쳐 伽俚王山, 碧波嶺(정선읍 회동리 소재)을 지난다. 삼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조양강 하안-餘粮驛(현재 북면 여량리 소재)를 지난다. 倉으로는 沒雲倉 등 2곳이 있다. 주기에는 民戶 2,153戶, 田 159結93負8束, 畓 72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통진부 주기 (通津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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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부는 현재의 김포시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월곶면의 고막리와 군하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과 북쪽이 한강과 접해 있고, 서쪽은 鹽河를 사이에 두고 강화와 마주보며, 남쪽으로 김포와 접해 있었다. 본 지도에서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아래쪽은 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이고, 오른쪽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해당된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 내용 및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통진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 점, 읍치의 왼쪽 산봉우리의 묘사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식으로 그려진 점, 面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본 지도의 邑內面이 《해동지도》에는 府內面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읍내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는 오른쪽으로 김포와 연결되어 있는 육지 부분이 아주 좁게 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이면서 몇몇 부분에서 변화를 주고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가 필사한 지도 계통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오른쪽 위 아래로 童城山과 守安山의 명칭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려말과 조선초를 거치면서 통진에 완전히 속하게 된 속현의 명칭과 동일하다. 이들 산에는 테뫼식의 중소형 산성이 있어 고려말 이전에는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연구 경향을 잘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사례 지역이 된다. 지도 위쪽에는 阻江이란 지명이 적혀 있는데, 한강 하구의 구간에서 사용되던 하천 명칭이었고, 祖江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진천현 (鎭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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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천현은 진천군의 대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진천읍의 읍내리와 교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해동지도》에는 진천현이 둥근 형태로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사각형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진천현 지도도 《해동지도》와 거의 같아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들이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기 위해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읍치의 건물이 《해동지도》에는 총 7개만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12개 이상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호서지도》의 진천현 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16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중요 건물과 부속 건물을 구별할 수 있게 그려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이런 건물 중 부속 건물이나 창을 제외한 것이고, 본 지도는 모두 그렸지만 부속 건물이 어느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보다도 더 애매하게 그려 부속 건물과 단독 건물을 전해 이해할 수 없도록 그렸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도》의 진천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조하여 몇 개의 지명을 첨가했다는 첨지가 붙어 있다. 이렇게 첨가한 지명이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진천현의 대부분의 물을 모아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의 미호천 상류이지만 실제와 다른 점이 발견되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미호천의 지류들은 북쪽의 죽산과 동쪽의 충주 및 음성의 경계 밖에서 흘러오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런 사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군현 전체의 모습을 퐁수적인 명당 구도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영천군 (永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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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는 다르지만 영천으로 발음되는 곳이 경상도에 두 곳이다. 永川은 현재의 영천시의 모태가 되었으며 榮川은 영주시로 바뀌었다. 永川의 읍치는 문내동, 성내동 일대이며 현재의 신녕면,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 일부(신녕현), 북안면 일부(경주부)를 제외한 영천시를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낙동정맥의 동쪽 금호강의 상류에 위치한 고을이다. 왼쪽 위에 팔공산이 보인다. 지도에 따라서는 공산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을 지나 남쪽으로 가는 하천이 금호강으로 지도 왼쪽 아래에 표기되었다. 지도 왼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그 옆의 하천을 지금 고현천으로 부른다. 읍치 뒤쪽의 산을 연이어 그려서 강한 맥세가 느껴지도록 그렸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성문 이름만 표시하였다. 자연의 능선을 활용하여 읍성을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문쪽에는 고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때 만든 성이다. 읍치에서 가장 큰 건물이 객사이다. 향교가 객사 뒤에 보이는데 향교의 대성전은 보물 616호에 해당한다. 북쪽의 모자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향교, 여제단, 사직단을 그리고 성황단 대신 왼쪽에 성황봉이라는 표시로 대신하였다. 왼쪽 위에 인종대왕태실이 그려졌으며 오른쪽에 있는 입암서원은 바위가 서 있는 풍경 아래에 그렸다. 읍치를 중심으로 북창, 남창, 동창, 서창 등이 들어서 있다. 곳곳에 봉수대가 그려졌고 도로를 표시하였다.(이현군)

  • 장수현 주기 (長水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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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장수군 중에서 장수읍, 장계면, 천천면, 계남면, 계북면 일대에 해당하는 군현으로 겹쳐 그린 산줄기 아래 객사를 포함한 건물들이 그려진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 일대이다. 향교와 읍치가 동일한 형국안에 표시되고 있다. 향교는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읍치 동쪽의 靈鷲山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 오른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으로 덕유산에서 뻗어내려온 맥이 육십령, 백운산으로 연결된다. 장수현은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하며 이 산줄기가 영호남의 경계가 된다. 지도 오른쪽 위에 六十峙가 표시되었는데 현재 26번 국도 상의 위령탑 근처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에 水分院이 표시되었는데 장수읍 수분리 일대에 위치하며 그 아래에 고개가 수분재가 된다. 이곳을 기준으로 동쪽은 남쪽의 섬진강으로 유입되고 서쪽은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유입된다. 읍치 서쪽에 표시된 하천이 금강의 최상류가 된다. 읍치 북쪽에 임현내면, 계창, 임북면, 임남면 등이 표시되었는데 長溪廢縣이 있던 곳이다. 현재의 장계면 장계리 일대가 장계 폐현의 중심부로 추정되며 지금은 계남면, 계북면 등으로 불린다. 왼쪽의 신광사는 신광사는 현재에도 남아있는 사찰이며 읍치 북쪽 하천변에 그려진 창계서원은 황희 정승을 모신 곳이다.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과 함께 순국한 논개가 이 고장 출신으로 현재 장수읍에 논개사당이 있다. 험준한 지형을 통과하여 주변 지역과 연결되므로 곳곳에 고개를 표시하고 그 이름을 적어놓았다.(이현군)

  • 옹진현 주기 (瓮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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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여으로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옹진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옹진군의 옹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옹진부(또는 옹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옹진은 1719년(숙종 45)에 所江僉使鎭을 水軍節度使營으로 바꾸면서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옹진부사가 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본 지도에는 명칭이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에 사용된 원본이 1719년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본 지도가 언제 필사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1800년 이후에 필사된 것이 확인되고 있는 《광여도》에도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군현의 명칭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옹진현이 아니라 옹진부로 되어 있어 옹진이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된 이후에 필사되면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성과 소강진에 표시된 건물의 수라는 측면에서 앞의 4개 지도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본 지도이며, 《광여도》와 《여지도》가 그 다음으로 많고, 《해동지도》가 가장 적다. 이러한 경향성은 충청도의 군현지도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황해도의 일부 군현 지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은 원본에 가장 가깝게 필사한 것이 본 지도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몇몇 건물을 제외하면 원본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지도에는 船倉(또는 舡倉)이 2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왼쪽의 것에는 소강진 소속의 전선이, 오른쪽의 것에는 옹진현 소속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었다.(이기봉)

  • 정선군 주기 (旌善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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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부에 위치하였던 정선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정선군은 지금의 강원도 정선군중 북면, 정선읍, 동면, 남면, 사북읍, 고한읍 일대에 해당된다. 임계면은 강릉부, 신동읍은 평창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중앙에 고을의 鎭山인 飛鳳山과 함께 객사, 아사, 향교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있다. 현재 정선읍 봉양리 일대이다. 지도의 중앙을 남한강의 상류인 조양강이 북동에서 흘러 내려와 읍치를 감싸돌며 남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영월 동강과 만난다. 실제로는 읍치가 봉양리가 하천 가까이 입지하고 있으나 지도에서는 훨씬 내륙쪽으로 그려져 있다. 조양강 상류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송천과 용탄천이며, 지도의 아래 부분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동대천이다. 조양강의 상류는 임계천이라고도 불린다. 부근에 표시된 餘粮驛 가까이 유명한 아우라지 나루가 있어 정선 아리랑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정선군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여러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주 도로는 강릉, 삼척, 영월로 연결된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좌측에 표시된 碧呑驛(현재 정선읍 용탄리)을 거쳐 伽俚王山, 碧波嶺(정선읍 회동리 소재)을 지난다. 삼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조양강 하안-餘粮驛(현재 북면 여량리 소재)를 지난다. 倉으로는 沒雲倉 등 2곳이 있다. 주기에는 民戶 2,153戶, 田 159結93負8束, 畓 72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파주목 (坡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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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목은 현재의 파주시 파주읍, 파평면, 법원읍, 문산읍, 광탄면, 조리면, 월롱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의 파주시청이 자리한 지역은 조선시대에 파주목의 땅이 아니라  교하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오른쪽 가운데에는 임진강 명칭의 기원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던 臨津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파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주기 역시 동일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 있던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으며, 본 지도에는 약간 소략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임진강의 하류 모양이 《해동지도》와는 거의 비슷하지만 나머지 2개 지도와는 다르고, 읍치의 중요 건물 중 軍器(庫) 표시와 읍치 중심으로 글씨를 쓰는 방식 등도 역시 동일한 경향을 띄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가까우면서 주기와 지도의 방향 등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에는 오자도 보이고 있는데, 읍치 왼쪽의 大山峯은 나머지 3개 지도에는 大山烽으로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에 烽燧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제작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진천현 주기 (鎭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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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천현은 진천군의 대부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진천읍의 읍내리와 교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해동지도》에는 진천현이 둥근 형태로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사각형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진천현 지도도 《해동지도》와 거의 같아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들이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기 위해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읍치의 건물이 《해동지도》에는 총 7개만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12개 이상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호서지도》의 진천현 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16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중요 건물과 부속 건물을 구별할 수 있게 그려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는 이런 건물 중 부속 건물이나 창을 제외한 것이고, 본 지도는 모두 그렸지만 부속 건물이 어느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보다도 더 애매하게 그려 부속 건물과 단독 건물을 전해 이해할 수 없도록 그렸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충청좌도각읍지도》의 진천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조하여 몇 개의 지명을 첨가했다는 첨지가 붙어 있다. 이렇게 첨가한 지명이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진천현의 대부분의 물을 모아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의 미호천 상류이지만 실제와 다른 점이 발견되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미호천의 지류들은 북쪽의 죽산과 동쪽의 충주 및 음성의 경계 밖에서 흘러오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런 사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군현 전체의 모습을 퐁수적인 명당 구도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영천군 주기 (榮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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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발음은 같지만 永川은 지금의 영천시이고 榮川은 현재의 영주시에 해당한다. 榮川의 읍치는 현재의 영주시내 영주동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주시내, 문수면, 장수면, 이산면, 평은면, 봉화군 상운면 일부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읍치를 둘러싼 하천은 서천으로 오른쪽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군현지도에서는 산줄기가 중앙부를 향하게 그린 지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지도는 모두 아래쪽을 향하게 그렸다. 북쪽으로 백두대간이라는 큰 산줄기가 형성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인 철탄산으로 맥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읍치에는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는데 읍성은 그리지 않았다. 아사 뒤쪽의 철탄산이 진산이다. 읍치 북쪽에 성내산성이 있었다. 이 지역의 서원 중 읍치 동쪽의 이산서원은 이황을 배향한 서원으로 1558년(명종 13)에 세워져 1574년(선조 7)에 사액받았다.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으로 그렸는데 동쪽의 향교는 영주향교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성밖의 사직단, 여단, 성황사 등을 그리지 않았다. 창보역, 평은역, 효대원, 문수원, 금림원, 승리원, 가이원, 장금원, 덕산원, 철겸원 등이 있었던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역원이 표시되지는 않았다. 이 지도에서 영천의 도로망은 읍치를 중심으로 X 자 구조이다. 영동선과 중앙선 철도, 5번 국도와 36번 국도가 지금의 영주를 지나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모태가 되었다. 그 외 창고, 봉수, 누정 등이 지도에 보인다.(이현군)

  • 장흥부 (長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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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에는 長興縣으로 등장하는 전라남도 장흥군 일대의 지도이다. 읍치는 장흥읍 남동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현재의 장흥군과 동남쪽에 연접한 보성군 웅치면, 회천면, 완도군 일부 섬이 관할 범위이다. 산줄기와 읍성을 그리는 방식은 다르지만 지도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동일하다. 長寧城으로 불리기도 하는 읍성 안에는 객사를 비롯한 주요한 건물을 그렸으며 성 밖에는 성황단, 사직단, 여단은 그리지 않고 향교만 그렸다. 향교는 장흥읍 교촌리에 현재 남아있다. 읍성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탐진강이다. 진산은 읍치의 서북쪽에 위치한 561.2m의 수인산으로 산성이 남아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회령진은 수군만호가 배치된 곳으로 성곽 형태로 되어있다.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회령리에 해당한다. 예전에 회령현이 있던 지역이다. 근처에 국민관광지인 율포 해수욕장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지역의 형승을 “땅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지도 오른쪽에 바다와 섬들을 그려넣었다. 해안에 海倉과 船所가 표시되었는데 지도 오른쪽의 해창은 현재의 안량면 해창리에 있던 것이다. 지도 북쪽에 그려진 보림사는 장흥궁 뉴치면에 있는 사찰로 국보 44호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117호 철조비로사나불좌상과 보물인 동부도, 서부도 등이 소장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천관사는 723.1m의 천관산 북쪽에 위치하는데 보물 795호 삼층석탑이 있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용산면 월송리는 조선백자도요지가 존재했던 곳이다. 서원, 봉수대, 고개, 도로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용강현 (龍岡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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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岡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남동쪽과 평안남도 온천군 북쪽 일대지역이다. 고을의 실제 모습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지만 직사각형의 지면에 그리기 위해 약간 왜곡되어 있다. 이런 모습을 비롯하여 본 지도의 전체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강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 부분을 제외하면 본 지도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해동지도》와 일치한다.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의 모습만 보이고 있으나,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鄕廳을 잘못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이와 같은 부분이 몇 군데 보인다. 《여지도》의 오른쪽에 표시된 月連也面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月連池面으로 되어 있으며, 주기를 근거로 《여지도》가 잘못 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는 본 지도보다 상대적으로 세로가 가로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책처럼 세로가 약간 긴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세로 부분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길어짐에 따라 하천의 길이 표현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는 대략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남쪽(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길이가 《해동지도》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반면에 동쪽(아래)으로 흐르는 하천은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져 있다. 왼쪽의 三和界로 연결되는 육지도 본 지도에는 폭이 좁게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상대적으로 넓게 그려져 있다. 이것 역시 세로의 폭이 좁아지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용강현의 실제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지도 위쪽 지도명 바로 옆에 표시되어 있는 오석산은 일명 황룡산이다. 이 산은 예로부터 八奇八景으로 이름난 산으로, 산록에는 당나라 태종이 친히 치려다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황룡산성이 그려져 있다. 황룡산성 안에 있는 影殿은 1721년(경종 1)에 세워지고, 1725년(영조 1)에 사액받은 箕子影殿이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書院은 鰲山書院으로 1664년(현종 5)에 세워지고, 1701년(숙종 27)에 사액을 받았다. (양윤정)

  • 정평부 (定平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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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정평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정평군이 되면서 일부지역(선덕면)은 이웃 함주군에 귀속되었다. 현재의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 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정평부의 전체 형상이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하여 그렸다. 부치를 여러 산지가 둘러싸고 이들 산지에서 하천이 발원하여 부의 중앙을 흐르면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금진천을 그린 것이다. 하천의 하류부에 金江津을 기재하였다. 지도 오른쪽에 廣浦로 유입되는 소규모의 하천이 朱伊川 지명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봉대천으로 추정된다. 廣浦로 기재된 호수는 지금의 광포호이다. 광포를 에워싼 산지에 大頭山 지명이 기재된 곳은 현재 함주군의 선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5,935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衙舍가 표시되어 있다. 진산인 鼻白山에는 봉수 표시가 있다. 읍치는 지금의 정평읍 동천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은 회화식 군현지도 정평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함흥부로 연결되는 도로에 봉대역이 그려져 있다. 왼쪽의 永興府로 이어지는 길로 草原驛을 지나는 길 외에 다른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의 위쪽으로는 馬騰嶺을 거쳐 영원과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91戶, 田 1,485結 9束, 畓 519結42負1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파주목 주기 (坡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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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목은 현재의 파주시 파주읍, 파평면, 법원읍, 문산읍, 광탄면, 조리면, 월롱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의 파주시청이 자리한 지역은 조선시대에 파주목의 땅이 아니라  교하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오른쪽 가운데에는 임진강 명칭의 기원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던 臨津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파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주기 역시 동일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 있던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으며, 본 지도에는 약간 소략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임진강의 하류 모양이 《해동지도》와는 거의 비슷하지만 나머지 2개 지도와는 다르고, 읍치의 중요 건물 중 軍器(庫) 표시와 읍치 중심으로 글씨를 쓰는 방식 등도 역시 동일한 경향을 띄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가까우면서 주기와 지도의 방향 등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에는 오자도 보이고 있는데, 읍치 왼쪽의 大山峯은 나머지 3개 지도에는 大山烽으로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에 烽燧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제작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천안군 (天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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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군은 천안시의 시내, 풍세면, 광덕면을 중심으로 아산시 둔포면의 남쪽 부분, 금성리를 포함한 인주면의 일부, 가산리를 포함한 선장면의 일부, 신종리를 포함한 예산군 신암면의 일부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천안시 시내의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천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모두에는 몇 가지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첫째, 천안군은 전반적으로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래쪽 왼쪽의 일남면과 이남면 부분의 하천은 현재 풍재천이라 불리고 있으며, 실제로는 읍치를 통과하는 하천보다 더 길게 서남쪽으로 뻗어 있다. 둘째, 內西面에서 新宗面까지 이어진 하천은 현재 곡교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실제로는 아산과 온양 및 신창의 긴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본 지도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으며, 마치 신종면과 내서면이 붙어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셋째, 왼쪽의 돈의면, 흥덕면, 신종면은 모두 현재의 삽교호에 접해 있는 아산의 월경지이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없다. 또한 신종면은 본 지도의 표현과 달리 곡교천의 훨씬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셋째, 왼쪽 위의 모산면은 직산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월경지이며, 돈의면과 붙어 있지도 않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주기에 기록된 面의 초경과 종경에 대한 기록을 통해 일부 교정할 수 있지만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본 지도의 서쪽에는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삽교호와 접한 부분이 潮水란 문구와 함께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삽교호에 해당되는 부분이 생략되어 마치 좁은 수로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바뀌어 있어 필사자들이 자의적으로 하천의 정보를 왜곡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영천군 주기 (永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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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는 다르지만 영천으로 발음되는 곳이 경상도에 두 곳이다. 永川은 현재의 영천시의 모태가 되었으며 榮川은 영주시로 바뀌었다. 永川의 읍치는 문내동, 성내동 일대이며 현재의 신녕면,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 일부(신녕현), 북안면 일부(경주부)를 제외한 영천시를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낙동정맥의 동쪽 금호강의 상류에 위치한 고을이다. 왼쪽 위에 팔공산이 보인다. 지도에 따라서는 공산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을 지나 남쪽으로 가는 하천이 금호강으로 지도 왼쪽 아래에 표기되었다. 지도 왼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그 옆의 하천을 지금 고현천으로 부른다. 읍치 뒤쪽의 산을 연이어 그려서 강한 맥세가 느껴지도록 그렸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성문 이름만 표시하였다. 자연의 능선을 활용하여 읍성을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문쪽에는 고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때 만든 성이다. 읍치에서 가장 큰 건물이 객사이다. 향교가 객사 뒤에 보이는데 향교의 대성전은 보물 616호에 해당한다. 북쪽의 모자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향교, 여제단, 사직단을 그리고 성황단 대신 왼쪽에 성황봉이라는 표시로 대신하였다. 왼쪽 위에 인종대왕태실이 그려졌으며 오른쪽에 있는 입암서원은 바위가 서 있는 풍경 아래에 그렸다. 읍치를 중심으로 북창, 남창, 동창, 서창 등이 들어서 있다. 곳곳에 봉수대가 그려졌고 도로를 표시하였다.(이현군)

  • 장흥부 주기 (長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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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에는 長興縣으로 등장하는 전라남도 장흥군 일대의 지도이다. 읍치는 장흥읍 남동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현재의 장흥군과 동남쪽에 연접한 보성군 웅치면, 회천면, 완도군 일부 섬이 관할 범위이다. 산줄기와 읍성을 그리는 방식은 다르지만 지도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동일하다. 長寧城으로 불리기도 하는 읍성 안에는 객사를 비롯한 주요한 건물을 그렸으며 성 밖에는 성황단, 사직단, 여단은 그리지 않고 향교만 그렸다. 향교는 장흥읍 교촌리에 현재 남아있다. 읍성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탐진강이다. 진산은 읍치의 서북쪽에 위치한 561.2m의 수인산으로 산성이 남아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회령진은 수군만호가 배치된 곳으로 성곽 형태로 되어있다.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회령리에 해당한다. 예전에 회령현이 있던 지역이다. 근처에 국민관광지인 율포 해수욕장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지역의 형승을 “땅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지도 오른쪽에 바다와 섬들을 그려넣었다. 해안에 海倉과 船所가 표시되었는데 지도 오른쪽의 해창은 현재의 안량면 해창리에 있던 것이다. 지도 북쪽에 그려진 보림사는 장흥궁 뉴치면에 있는 사찰로 국보 44호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117호 철조비로사나불좌상과 보물인 동부도, 서부도 등이 소장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천관사는 723.1m의 천관산 북쪽에 위치하는데 보물 795호 삼층석탑이 있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용산면 월송리는 조선백자도요지가 존재했던 곳이다. 서원, 봉수대, 고개, 도로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용강현 주기 (龍岡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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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岡縣〉으로, 지금의 남포직할시 남동쪽과 평안남도 온천군 북쪽 일대지역이다. 고을의 실제 모습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지만 직사각형의 지면에 그리기 위해 약간 왜곡되어 있다. 이런 모습을 비롯하여 본 지도의 전체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강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강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 부분을 제외하면 본 지도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해동지도》와 일치한다. 《해동지도》에는 客舍, 衙舍, 鄕校의 모습만 보이고 있으나, 본 지도에는 鄕廳과 倉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校가 2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鄕廳을 잘못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의 경우 이와 같은 부분이 몇 군데 보인다. 《여지도》의 오른쪽에 표시된 月連也面의 경우에도 본 지도에는 月連池面으로 되어 있으며, 주기를 근거로 《여지도》가 잘못 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는 본 지도보다 상대적으로 세로가 가로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본 지도책처럼 세로가 약간 긴 종이 위에 그리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세로 부분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길어짐에 따라 하천의 길이 표현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는 대략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남쪽(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길이가 《해동지도》보다 더 길게 그려져 있다. 반면에 동쪽(아래)으로 흐르는 하천은 상대적으로 짧게 그려져 있다. 왼쪽의 三和界로 연결되는 육지도 본 지도에는 폭이 좁게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상대적으로 넓게 그려져 있다. 이것 역시 세로의 폭이 좁아지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용강현의 실제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실제에 더 가깝게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지도 위쪽 지도명 바로 옆에 표시되어 있는 오석산은 일명 황룡산이다. 이 산은 예로부터 八奇八景으로 이름난 산으로, 산록에는 당나라 태종이 친히 치려다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황룡산성이 그려져 있다. 황룡산성 안에 있는 影殿은 1721년(경종 1)에 세워지고, 1725년(영조 1)에 사액받은 箕子影殿이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書院은 鰲山書院으로 1664년(현종 5)에 세워지고, 1701년(숙종 27)에 사액을 받았다. (양윤정)

  • 정평부 주기 (定平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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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정평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 정평군이 되면서 일부지역(선덕면)은 이웃 함주군에 귀속되었다. 현재의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 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정평부의 전체 형상이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하여 그렸다. 부치를 여러 산지가 둘러싸고 이들 산지에서 하천이 발원하여 부의 중앙을 흐르면서 동해안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금진천을 그린 것이다. 하천의 하류부에 金江津을 기재하였다. 지도 오른쪽에 廣浦로 유입되는 소규모의 하천이 朱伊川 지명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봉대천으로 추정된다. 廣浦로 기재된 호수는 지금의 광포호이다. 광포를 에워싼 산지에 大頭山 지명이 기재된 곳은 현재 함주군의 선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5,935尺)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衙舍가 표시되어 있다. 진산인 鼻白山에는 봉수 표시가 있다. 읍치는 지금의 정평읍 동천리 일대이다.(기타 지명은 회화식 군현지도 정평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에 비해 일부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함흥부로 연결되는 도로에 봉대역이 그려져 있다. 왼쪽의 永興府로 이어지는 길로 草原驛을 지나는 길 외에 다른 경로가 그려져 있다. 지도의 위쪽으로는 馬騰嶺을 거쳐 영원과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91戶, 田 1,485結 9束, 畓 519結42負1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포천현 (抱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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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현은 현재의 포천시 시내, 화현면, 군내면, 가산면, 소흘읍, 내촌면, 갈월리 서쪽을 제외한 신북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포천천이다. 읍치 뒤쪽으로는 半月山堅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포천현의 옛 명칭 중의 하나인 堅城과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다. 또한 성황당이 산성 안에 설치되어 있는데, 고려초기까지는 고을의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새로운 연구 경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포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경향을 알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 없는 도로와 읍치 아래쪽의 현내면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에도 수록되어 있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경우 面의 명칭에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데,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그려졌다가 나중에 주기가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본 지도는 처음부터 읍치로부터 면까지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와 함께 필사되어 도면에서의 거리 정보는 삭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 과정에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는 주기가 첨가되고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 등을 변경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가 본 지도와 동일한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필사본을 바탕으로 재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읍치 뒤의 산에 대판 표현이 상당히 달라 본 지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필사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재필사 과정에서 도로를 없애고, 현내면의 명칭을 빠뜨리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천안군 주기 (天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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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군은 천안시의 시내, 풍세면, 광덕면을 중심으로 아산시 둔포면의 남쪽 부분, 금성리를 포함한 인주면의 일부, 가산리를 포함한 선장면의 일부, 신종리를 포함한 예산군 신암면의 일부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천안시 시내의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천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모두에는 몇 가지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첫째, 천안군은 전반적으로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래쪽 왼쪽의 일남면과 이남면 부분의 하천은 현재 풍재천이라 불리고 있으며, 실제로는 읍치를 통과하는 하천보다 더 길게 서남쪽으로 뻗어 있다. 둘째, 內西面에서 新宗面까지 이어진 하천은 현재 곡교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실제로는 아산과 온양 및 신창의 긴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본 지도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으며, 마치 신종면과 내서면이 붙어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셋째, 왼쪽의 돈의면, 흥덕면, 신종면은 모두 현재의 삽교호에 접해 있는 아산의 월경지이지만 이 지도만으로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없다. 또한 신종면은 본 지도의 표현과 달리 곡교천의 훨씬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셋째, 왼쪽 위의 모산면은 직산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월경지이며, 돈의면과 붙어 있지도 않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주기에 기록된 面의 초경과 종경에 대한 기록을 통해 일부 교정할 수 있지만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본 지도의 서쪽에는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삽교호와 접한 부분이 潮水란 문구와 함께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삽교호에 해당되는 부분이 생략되어 마치 좁은 수로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바뀌어 있어 필사자들이 자의적으로 하천의 정보를 왜곡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영해부 (寧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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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으며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 축산면, 병곡면, 창수면, 영양군 석보면에 해당한다. 동해안을 따라 형성된 7번 국도가 옛 영해 읍치를 지난다. 읍성 안에는 객사, 동헌, 아사, 군기고, 창을 그렸는데 객사 건물이 동헌보다 훨씬 크고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성황단, 여단, 사직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그렸다. 현재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동쪽은 바다에 인접해 있는데 지도 왼쪽 아래의 축산은 축산해수욕장(축산면 축산리)이 있는 곳이다. 죽도산으로 불리기도 하며 축산등대가 설치되어있다. 그 위쪽의 대소산 봉대는 현재 도곡리의 봉화산이며 망일봉은 지금은 망월봉으로 불린다. 읍치 북쪽의 하천은 송천천으로 바다로 유입되는 지점에 국민관광지인 대진해수욕장(영해면 대진리)이 위치한다. 지도 위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영해 북쪽으로 뻗어나온 산줄기에 속한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높이 솟은 기암절벽처럼 산을 그린 것이 이색적이다. 낙동정맥을 넘어야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기에 지도 왼쪽에 역, 원창, 고개를 표시하고 있다. 영양역은 영양군 석보면에 있던 역으로 조선초기에 만들어졌다. 그 위쪽의 창수원은 창수면 창수리에 있던 원으로 918번 도로상에 위치한다. 광제원창은 석보면에 원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비교적 작은 고을이라 지도의 내용이 상세하지 않고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전라도 (全羅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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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지승 지도의 전라도를 그린 지도이다. 중심지인 전주는 색을 달리하여 원 안에 크게 표시하고 다른 군현은 네모 안에 그 이름을 적었다. 군사 중심지인 兵營, 左水營, 右營은 구별되게 원 안에 적었다. 전라도에 대한 설명 첫부분에 원래 馬韓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적어두었다. 주요 산물을 기록하였으며 나주에는 南海神祠가 있었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남해의 섬들을 자세하게 표시하였고 제주도의 제주, 대정, 정의현을 표시하였다. 현재의 제주도는 고려 초에 전라도에 포함된 것으로 적었다. 서해안을 따라 여러 鎭을 그려넣었으며 船所도 표시하였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진행되는 고군산군도가 지도 왼쪽 위에 보이며 그 아래 여러 섬들을 표시하였다. 만경강, 영산강, 섬진강을 그렸으나 강 이름은 적지 않고 나루터 이름만 적었다. 군현간의 도로를 표시하고 역원명을 적어넣었다. 주요한 군사 요충지인 산성, 목장을 표시하였다. 주요 사찰명은 적었으나 서원의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군현명 옆에는 주요 산 명칭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 군현 중에서 현재의 전라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錦山郡과 珍山郡이다. 금산군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일대이며 진산군은 금산군 진산면에 읍치가 있었다. 동쪽에는 경상도와 경계가 되는 하동, 진주, 안의를 표시하고 지리산, 섬진을 따로 적었다. 위쪽에는 충청도의 경계가 되는 군현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용천부 (龍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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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川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용천군 남부 지역, 염주군 동부 지역, 피현군 서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형태에서부터 어느 정도의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보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더 길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세로가 짧아진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읍치와 龍骨山城, 위쪽의 良策站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읍치와 良策站 등에 《해동지도》에 없는 정보가 추가되었고, 상대적으로 훨씬 작은 종이 위에 많은 정보를 수록하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특이한 점은 각 성문 밖 지형의 험준함과 높낮이를 기록한 것이며, 지도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을 통해서도 성 주변이 험준함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본 지도보다 회화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해동지도》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덜 나타나며, 《여지도》의 경우에는 주기 부분이 없으면 산지의 모습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 읍치의 북쪽에는 淸北討捕營이 위치하고 있다. 군사 관련 시설인 官廳, 客舍와 軍倉인 倉과 巡營庫, 기타 淸心堂과 聽流堂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 동남쪽에 있는 용골산성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성 안에는 3개의 샘, 將臺,봉수대가 있다고 한다. 용골산성 아래는  "龍骨山脈 而下 今若植木脫有緩急 庶可得力云"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즉, 구불구불 이어져 내려간 줄기를 따라 나무를 심어 놓을 경우 유사시 지역 방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 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으로 보면 大東地志에 기록된 내용을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고을의 모습은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의 종이에 그려도 왜곡되지 않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아래쪽의 바다에 있는 섬들은 크기나 거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薪島를 제외하면 나머지 섬들의 크기나 거리가 실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거리가 고려되지 않은 이유는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렸기 때문이다. 크기가 반영되지 않은 이유는 지도 제작 당시에 섬의 크기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리지에 섬의 크기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조선여진양국경계도 (朝鮮女眞兩國境界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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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청나라 관할에 있었던 만주 지방의 寧古塔과 烏喇 지방 일대를 그린 지도중 하나이다. 그린 범위는 북으로 흑룡강, 동쪽으로 연해주 일대, 남으로는 압록강ㆍ두만강, 서로는 장성까지를 그렸다. 18세기 초 청나라에서 편찬된 『고금도서집성』에 「성경강역전도」안에 세부도로 「오라강역도」와 「영고탑 강역도」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이들 지도의 내용들이 참조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이 지역은 매우 불안한 정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지도가 그려진 당시에는 러시아의 동진이 있었지만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봉금지대로 설정되어 있었던 지역을 대상으로 이와 같은 상세한 지도가 그려진 것은 당시의 높아진 북방 강역 의식을 반영한다. 동일한 내용의 지도가 회화식 군현지도에 삽입되어 있으나(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들 지도의 해제 참조) 표현 양식은 상이하다. 북경 쪽에서 시작되어 船廠, 烏喇를 지나 寧古塔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진 것은 『해동지도』와 동일하다. 책문이 실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유사하나 다른 지도와는 달리 장성도 일부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조선측의 두만강변의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압록강변에 연한 군현들은 주황색으로 표현한 것이 독특하다. 寧古塔과 烏喇도 붉은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고 산지도 연두색으로 표현된 것은 이 지도만에서 나타난 특이한 표현 방식이다. (김기혁)

  • 포천현 주기 (抱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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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현은 현재의 포천시 시내, 화현면, 군내면, 가산면, 소흘읍, 내촌면, 갈월리 서쪽을 제외한 신북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포천천이다. 읍치 뒤쪽으로는 半月山堅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포천현의 옛 명칭 중의 하나인 堅城과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다. 또한 성황당이 산성 안에 설치되어 있는데, 고려초기까지는 고을의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새로운 연구 경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포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경향을 알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 없는 도로와 읍치 아래쪽의 현내면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에도 수록되어 있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경우 面의 명칭에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데,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그려졌다가 나중에 주기가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본 지도는 처음부터 읍치로부터 면까지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와 함께 필사되어 도면에서의 거리 정보는 삭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 과정에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는 주기가 첨가되고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 등을 변경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가 본 지도와 동일한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필사본을 바탕으로 재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읍치 뒤의 산에 대판 표현이 상당히 달라 본 지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필사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재필사 과정에서 도로를 없애고, 현내면의 명칭을 빠뜨리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청산현 (靑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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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현은 옥천군의 청산면, 청성면, 아곡리와 대안리를 포함한 보은군의 내북면 북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산면의 교평리와 백운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고, 오른쪽에서 금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보청천이다. 오른쪽 위에는 酒城面과 酒城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보은의 땅을 넘어가 있는 월경지이다. 현재의 보은군 내북면 북쪽 지역에 있었으며, 원래는 상주에 속해 있던 주성부곡이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청산현으로 옮겼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금강 본류와 보청천이 거의 같은 규모로 표현되어 있지만 《여지도》에서는 금강이 더 굵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서는 보청천은 하나의 실선으로만 표시하여 금강보다 훨씬 작은 하천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실제로는 두 하천의 크기에 큰 차이가 없어 《여지도》와 《광여도》의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표현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읍치에는 9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4개밖에 없고,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각각 7개와 8개가 있다.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청산현 지도에는 본 지도와 같은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객사에는 4개의 건물이 배치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객사의 부속 건물을 일부 빠뜨리고 있고, 더 나아가 부속 건물인지 알아보기 어렵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객사와 아사의 부속 건물과 倉을 생략하면서 4개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이기봉)

  • 영해부 주기 (寧海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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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으며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 축산면, 병곡면, 창수면, 영양군 석보면에 해당한다. 동해안을 따라 형성된 7번 국도가 옛 영해 읍치를 지난다. 읍성 안에는 객사, 동헌, 아사, 군기고, 창을 그렸는데 객사 건물이 동헌보다 훨씬 크고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성황단, 여단, 사직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그렸다. 현재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동쪽은 바다에 인접해 있는데 지도 왼쪽 아래의 축산은 축산해수욕장(축산면 축산리)이 있는 곳이다. 죽도산으로 불리기도 하며 축산등대가 설치되어있다. 그 위쪽의 대소산 봉대는 현재 도곡리의 봉화산이며 망일봉은 지금은 망월봉으로 불린다. 읍치 북쪽의 하천은 송천천으로 바다로 유입되는 지점에 국민관광지인 대진해수욕장(영해면 대진리)이 위치한다. 지도 위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영해 북쪽으로 뻗어나온 산줄기에 속한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높이 솟은 기암절벽처럼 산을 그린 것이 이색적이다. 낙동정맥을 넘어야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기에 지도 왼쪽에 역, 원창, 고개를 표시하고 있다. 영양역은 영양군 석보면에 있던 역으로 조선초기에 만들어졌다. 그 위쪽의 창수원은 창수면 창수리에 있던 원으로 918번 도로상에 위치한다. 광제원창은 석보면에 원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비교적 작은 고을이라 지도의 내용이 상세하지 않고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전라도 주기 (全羅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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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지승 지도의 전라도를 그린 지도이다. 중심지인 전주는 색을 달리하여 원 안에 크게 표시하고 다른 군현은 네모 안에 그 이름을 적었다. 군사 중심지인 兵營, 左水營, 右營은 구별되게 원 안에 적었다. 전라도에 대한 설명 첫부분에 원래 馬韓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적어두었다. 주요 산물을 기록하였으며 나주에는 南海神祠가 있었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남해의 섬들을 자세하게 표시하였고 제주도의 제주, 대정, 정의현을 표시하였다. 현재의 제주도는 고려 초에 전라도에 포함된 것으로 적었다. 서해안을 따라 여러 鎭을 그려넣었으며 船所도 표시하였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진행되는 고군산군도가 지도 왼쪽 위에 보이며 그 아래 여러 섬들을 표시하였다. 만경강, 영산강, 섬진강을 그렸으나 강 이름은 적지 않고 나루터 이름만 적었다. 군현간의 도로를 표시하고 역원명을 적어넣었다. 주요한 군사 요충지인 산성, 목장을 표시하였다. 주요 사찰명은 적었으나 서원의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군현명 옆에는 주요 산 명칭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 군현 중에서 현재의 전라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錦山郡과 珍山郡이다. 금산군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일대이며 진산군은 금산군 진산면에 읍치가 있었다. 동쪽에는 경상도와 경계가 되는 하동, 진주, 안의를 표시하고 지리산, 섬진을 따로 적었다. 위쪽에는 충청도의 경계가 되는 군현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용천부 주기 (龍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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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龍川府〉로, 현재의 평안북도 용천군 남부 지역, 염주군 동부 지역, 피현군 서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용천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용천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형태에서부터 어느 정도의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에 비해 세로보다 가로가 상대적으로 더 길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세로가 짧아진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읍치와 龍骨山城, 위쪽의 良策站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읍치와 良策站 등에 《해동지도》에 없는 정보가 추가되었고, 상대적으로 훨씬 작은 종이 위에 많은 정보를 수록하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특이한 점은 각 성문 밖 지형의 험준함과 높낮이를 기록한 것이며, 지도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을 통해서도 성 주변이 험준함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본 지도보다 회화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해동지도》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덜 나타나며, 《여지도》의 경우에는 주기 부분이 없으면 산지의 모습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 읍치의 북쪽에는 淸北討捕營이 위치하고 있다. 군사 관련 시설인 官廳, 客舍와 軍倉인 倉과 巡營庫, 기타 淸心堂과 聽流堂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 동남쪽에 있는 용골산성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성 안에는 3개의 샘, 將臺,봉수대가 있다고 한다. 용골산성 아래는  "龍骨山脈 而下 今若植木脫有緩急 庶可得力云"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즉, 구불구불 이어져 내려간 줄기를 따라 나무를 심어 놓을 경우 유사시 지역 방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 상에 그려진 산지의 모습으로 보면 大東地志에 기록된 내용을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본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고을의 모습은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 모습 자체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의 종이에 그려도 왜곡되지 않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아래쪽의 바다에 있는 섬들은 크기나 거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薪島를 제외하면 나머지 섬들의 크기나 거리가 실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거리가 고려되지 않은 이유는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그렸기 때문이다. 크기가 반영되지 않은 이유는 지도 제작 당시에 섬의 크기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리지에 섬의 크기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윤정)

  • 조선여진양국경계도 주기 (朝鮮女眞兩國境界圖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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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청나라 관할에 있었던 만주 지방의 寧古塔과 烏喇 지방 일대를 그린 지도중 하나이다. 그린 범위는 북으로 흑룡강, 동쪽으로 연해주 일대, 남으로는 압록강ㆍ두만강, 서로는 장성까지를 그렸다. 18세기 초 청나라에서 편찬된 『고금도서집성』에 「성경강역전도」안에 세부도로 「오라강역도」와 「영고탑 강역도」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이들 지도의 내용들이 참조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이 지역은 매우 불안한 정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지도가 그려진 당시에는 러시아의 동진이 있었지만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봉금지대로 설정되어 있었던 지역을 대상으로 이와 같은 상세한 지도가 그려진 것은 당시의 높아진 북방 강역 의식을 반영한다. 동일한 내용의 지도가 회화식 군현지도에 삽입되어 있으나(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들 지도의 해제 참조) 표현 양식은 상이하다. 북경 쪽에서 시작되어 船廠, 烏喇를 지나 寧古塔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진 것은 『해동지도』와 동일하다. 책문이 실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유사하나 다른 지도와는 달리 장성도 일부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조선측의 두만강변의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압록강변에 연한 군현들은 주황색으로 표현한 것이 독특하다. 寧古塔과 烏喇도 붉은색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고 산지도 연두색으로 표현된 것은 이 지도만에서 나타난 특이한 표현 방식이다. (김기혁)

  • 풍덕부 (豊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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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덕부는 일제시대의 개풍군 광덕면, 대성면, 흥교면, 임한면, 중면, 상도면, 봉동면 등에 걸쳐 있었다.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남쪽에 해당되며, 읍치는 판문군 풍덕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지도의 오른쪽과 아래쪽이 모두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방향이 정확하지는 않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풍덕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양상을 알아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지만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있는 것이 도로이다. 비록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소략하지만 상호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요소이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달라지는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산에서 볼 수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봉우리로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산줄기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해안선과 오른쪽의 한강 하류의 표현에서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해동지도》에서는 다른 하천에 비해 한강 하류가 상당히 굵게 그려져 강의 크기를 쉽게 비교할 수 있게 한 반면에 본 지도에는 훨씬 얇아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더욱 얇아져 한강임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고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더 심하게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필사했다기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계통의 다른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표적인 예로 오른쪽 위의 德積山烽臺가 뒤의 2개 지도에는 그 위쪽의 烽에 표시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 본 지도가 잘못된 것이다. 오른쪽의 한강에 대한 표현은 네 지도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위쪽에서 흘러오는 현재의 사천이 임진강과 합류된 후 다시 한강과 합류되는 모습으로 그려져야 사실에 부합된다.(이기봉)

  • 청산현 주기 (靑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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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현은 옥천군의 청산면, 청성면, 아곡리와 대안리를 포함한 보은군의 내북면 북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산면의 교평리와 백운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쪽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고, 오른쪽에서 금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보청천이다. 오른쪽 위에는 酒城面과 酒城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보은의 땅을 넘어가 있는 월경지이다. 현재의 보은군 내북면 북쪽 지역에 있었으며, 원래는 상주에 속해 있던 주성부곡이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청산현으로 옮겼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금강 본류와 보청천이 거의 같은 규모로 표현되어 있지만 《여지도》에서는 금강이 더 굵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서는 보청천은 하나의 실선으로만 표시하여 금강보다 훨씬 작은 하천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실제로는 두 하천의 크기에 큰 차이가 없어 《여지도》와 《광여도》의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표현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읍치에는 9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4개밖에 없고,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각각 7개와 8개가 있다.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청산현 지도에는 본 지도와 같은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객사에는 4개의 건물이 배치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와 《광여도》에서는 객사의 부속 건물을 일부 빠뜨리고 있고, 더 나아가 부속 건물인지 알아보기 어렵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객사와 아사의 부속 건물과 倉을 생략하면서 4개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이기봉)

  • 예안현 (禮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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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안동시 북동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예안면, 녹전면, 도산면이 관할범위였다.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고 왼쪽은 백두대간에서 나온 산들이다.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이 낙동강이다. 지도에 크게 그려진 강이 낙동강이며 이 지도의 읍치 남쪽은 댐의 건설로 안동호가 된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청량산은 봉화와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금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주요 건물과 장소를 각각의 형국 속에 그린 점이 특이하다. 예안의 진산은 성황산인데 이 지도에는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과거에 이 산에 성황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객사 북쪽에 집이 두 채 그려졌는데 그 뒤쪽 산이 성황산으로 판단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건물만 표시하였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객사 오른쪽에 향청이 독립적으로 표시된 점이 눈에 띈다. 그 북쪽으로 도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한 것으로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 이황이 열었던 도산서당이었는데 사후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되었으며 1575년(선조 8)에 사액받았다. 이 서원의 전교당은 보물 21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의 고향이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고을이지만 사찰이 곳곳에 있어 상호공존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을 따라 나루, 정자, 서원, 명승지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전라도 총론 (全羅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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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전라도 총론 (全羅道 總論)1면입니다.

  • 운산군 (雲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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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雲山郡〉으로, 지금도 평안북도 운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운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운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읍치와 委曲鎭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의 건물 수가 훨씬 많음을 한눈에도 구별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衙舍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倉이 표시되어 있고,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委曲鎭에도 《해동지도》에는 없는 鎭舍이 표시되어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위곡진 오른쪽에는 발음이 같은 면의 명칭이 委谷面과 委曲面으로 적혀 있다. 이는 委曲面과 委曲江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고, 《광여도》에는 委谷面 자리에 委曲面을, 委曲面 자리에 古延州面을 적어 넣었다. 고연주면의 경우 그 오른쪽에 구연주창이 있기 때문에 바꾸어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비슷하게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종성부 (鍾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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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종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까지 종성군으로 행정 지명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지역이 함경북도 온성군에 흡수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새별군·회령군·은덕군·나진시에 일부 걸쳐 있다. 지도의 좌측에 남에서 북으로 두만강이 묘사되었고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북방 강계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종성부 해제 참조).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 5,510尺)과 함께 그려져 있고, 진산인 小白山은 읍치의 동남쪽에 그려져 있다. 종성부는 하천의 유역분지로 볼 때 두 개의 유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禿山에서 발원하여 鷹谷을 지나 두만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관천으로 추정되며, 소백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읍치 부근에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서풍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北行營(성 둘레 310尺) 부근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를 합류하며 경원군으로 흘러 나가는 하천은 지금 오룡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3방향으로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서 북으로 潼關驛을 지나는 도로는 온성부로 이어지며, 남으로 防垣驛을 거쳐 무산부까지 이어진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서풍천을 따라 이어지며 북행영을 거쳐 회령, 경흥, 경원 방향의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171戶, 田 4,705結31負2束, 畓 34結71負로 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풍덕부 주기 (豊德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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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덕부는 일제시대의 개풍군 광덕면, 대성면, 흥교면, 임한면, 중면, 상도면, 봉동면 등에 걸쳐 있었다.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남쪽에 해당되며, 읍치는 판문군 풍덕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지도의 오른쪽과 아래쪽이 모두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방향이 정확하지는 않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풍덕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양상을 알아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지만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있는 것이 도로이다. 비록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소략하지만 상호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요소이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달라지는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산에서 볼 수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봉우리로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산줄기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해안선과 오른쪽의 한강 하류의 표현에서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해동지도》에서는 다른 하천에 비해 한강 하류가 상당히 굵게 그려져 강의 크기를 쉽게 비교할 수 있게 한 반면에 본 지도에는 훨씬 얇아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더욱 얇아져 한강임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고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더 심하게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필사했다기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계통의 다른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표적인 예로 오른쪽 위의 德積山烽臺가 뒤의 2개 지도에는 그 위쪽의 烽에 표시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 본 지도가 잘못된 것이다. 오른쪽의 한강에 대한 표현은 네 지도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위쪽에서 흘러오는 현재의 사천이 임진강과 합류된 후 다시 한강과 합류되는 모습으로 그려져야 사실에 부합된다.(이기봉)

  • 청안현 (淸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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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안현은 증평군의 증평읍과 도안면, 괴산군의 청안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안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왼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현재의 미호천이며, 실제로는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나간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안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향교, 객사, 아사 등의 3개 건물과 倉만 표시되어 있지만 나머지 3개 지도에는 2개의 건물과 담장이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청안현 지도도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구도를 하고 있지만 앞의 측면에서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본 지도의 원본 계통을 약간 변경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위의 음성계에서 하천이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여지도》에는 음성계가 발원지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 하천은 현재의 보강천으로 음성의 땅이었던 원남면이나 괴산의 땅이었던 사리면에서 흘러오기 때문에 본 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따라서 《여지도》의 필사자가 실제 사실과의 비교 없이 자의적으로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타 東面은 현재의 청안면 동남쪽에 해당되는데, 이 지역의 물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으로 흘러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예안현 주기 (禮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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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안동시 북동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예안면, 녹전면, 도산면이 관할범위였다.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고 왼쪽은 백두대간에서 나온 산들이다.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이 낙동강이다. 지도에 크게 그려진 강이 낙동강이며 이 지도의 읍치 남쪽은 댐의 건설로 안동호가 된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청량산은 봉화와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금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주요 건물과 장소를 각각의 형국 속에 그린 점이 특이하다. 예안의 진산은 성황산인데 이 지도에는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과거에 이 산에 성황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객사 북쪽에 집이 두 채 그려졌는데 그 뒤쪽 산이 성황산으로 판단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건물만 표시하였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객사 오른쪽에 향청이 독립적으로 표시된 점이 눈에 띈다. 그 북쪽으로 도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한 것으로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 이황이 열었던 도산서당이었는데 사후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되었으며 1575년(선조 8)에 사액받았다. 이 서원의 전교당은 보물 21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의 고향이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고을이지만 사찰이 곳곳에 있어 상호공존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을 따라 나루, 정자, 서원, 명승지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전라도 총론 (全羅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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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전라도 총론 (全羅道 總論)2면입니다.

  • 운산군 주기 (雲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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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雲山郡〉으로, 지금도 평안북도 운산군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운산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운산군 지도와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읍치와 委曲鎭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의 건물 수가 훨씬 많음을 한눈에도 구별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客舍, 鄕校, 衙舍 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倉이 표시되어 있고,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委曲鎭에도 《해동지도》에는 없는 鎭舍이 표시되어 있다.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위곡진 오른쪽에는 발음이 같은 면의 명칭이 委谷面과 委曲面으로 적혀 있다. 이는 委曲面과 委曲江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같고, 《광여도》에는 委谷面 자리에 委曲面을, 委曲面 자리에 古延州面을 적어 넣었다. 고연주면의 경우 그 오른쪽에 구연주창이 있기 때문에 바꾸어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경우에는 비슷하게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도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종성부 주기 (鍾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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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종성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까지 종성군으로 행정 지명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지역이 함경북도 온성군에 흡수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새별군·회령군·은덕군·나진시에 일부 걸쳐 있다. 지도의 좌측에 남에서 북으로 두만강이 묘사되었고 당시 청나라 영토에도 적지 않은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북방 강계에 접하고 있어 관방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종성부 해제 참조).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 5,510尺)과 함께 그려져 있고, 진산인 小白山은 읍치의 동남쪽에 그려져 있다. 종성부는 하천의 유역분지로 볼 때 두 개의 유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禿山에서 발원하여 鷹谷을 지나 두만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동관천으로 추정되며, 소백산 일대에서 발원하여 읍치 부근에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서풍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北行營(성 둘레 310尺) 부근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를 합류하며 경원군으로 흘러 나가는 하천은 지금 오룡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3방향으로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서 북으로 潼關驛을 지나는 도로는 온성부로 이어지며, 남으로 防垣驛을 거쳐 무산부까지 이어진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서풍천을 따라 이어지며 북행영을 거쳐 회령, 경흥, 경원 방향의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171戶, 田 4,705結31負2束, 畓 34結71負로 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지역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청안현 주기 (淸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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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안현은 증평군의 증평읍과 도안면, 괴산군의 청안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안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왼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현재의 미호천이며, 실제로는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나간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안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해동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향교, 객사, 아사 등의 3개 건물과 倉만 표시되어 있지만 나머지 3개 지도에는 2개의 건물과 담장이 그려져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청안현 지도도 도로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구도를 하고 있지만 앞의 측면에서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본 지도의 원본 계통을 약간 변경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및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위의 음성계에서 하천이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여지도》에는 음성계가 발원지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 하천은 현재의 보강천으로 음성의 땅이었던 원남면이나 괴산의 땅이었던 사리면에서 흘러오기 때문에 본 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따라서 《여지도》의 필사자가 실제 사실과의 비교 없이 자의적으로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타 東面은 현재의 청안면 동남쪽에 해당되는데, 이 지역의 물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으로 흘러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예천군 (醴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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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예천군은 현재의 예천읍, 용문면, 유천면, 보문면, 호명면, 의성군 다인면,  문경시 동로면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중심부의 읍치는 예천읍 노상리, 서본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예천군에서 상리면, 하리면은 풍기군, 감천면은 안동부, 지보면, 개포면 지역은 용궁현에 속하였다. 읍치를 감아 흐르는 양천은 현재 한천으로 불리며 동천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읍치 왼쪽 산줄기에 덕봉산이 있는데 지금은 봉덕산으로 불린다.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가지에 해당하고 지도 위에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고 적혀있지만 충청도와 바로 맞닿은 고을이 아니며 문경과 풍기를 지나야 충청도와 연결된다. 읍치에 성곽은 그리지 않았고 객사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는 존재하였지만 이 지도에는 그리지 않았다. 북쪽에 작성, 빙성이 보인다. 읍치 동쪽에 있는 통명역은 예천읍 통명리에 있던 역이다. 영주와 연결되는 현재의 28번 국도는 통명역이 있던 지점을 지난다. 현재의 도로는 조선시대 도로를 확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 등장하는 여러 사찰 중 북쪽의 용문사(예천군 용문면)는 고려 태조대에 창건한 사찰이다. 보물 145호 대장전 외 3종이 소장되었다. 읍치 오른쪽 위의 정산서원은 1697년(숙종 23)에 사액받은 곳으로 이황과 조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전주부 (全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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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 북쪽에는 건지산, 남쪽에는 곤지산이 표시되었고 그 중간에 읍성을 그렸는데 각 성문에 옹성을 만든 점이 이색적이다. 건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백제의 完山이었으며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읍치 서쪽에 完山이 표시되었다. 전주부 읍치에 있었던 경기전(보물 931호), 전주객사(보물 583호), 풍남문(보물 308호) 등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읍성 안에 眞殿이라고 표시된 것이 경기전이다. 읍성 안에서도 따로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으로 차별화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御容 즉 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조선 태조의 선대가 전주 이씨이기 때문에 전주는 조선의 豊沛라고 불리던 곳인데 한고조 유방의 고향을 딴 것이다. 읍성의 남문을 풍남문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래쪽에 胎峯이 표시되었는데 전주에는 왕실의 胎가 많이 모셔졌다. 읍성 남쪽에는 군사 중심지인 中營이 보인다. 읍성이 있었던 지역이 현재에도 중심부에 해당하며 지금은 한옥마을로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의 이목대에 오르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전주천이며 북쪽의 하천은 소양강과 만경강이다. 지도 왼쪽 위의 만경강변의 新倉津은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있던 나루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덕진제는 현재 덕진구의 제언이다. 그 오른쪽에 위봉산성이 보인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도로를 표시하고 삼례역, 역관 등의 역원, 고개, 險隘 등을 그려넣었다.(이현군)

  • 위원군 (渭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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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渭原郡〉으로, 지금의 자강도 위원군 일대이다. 원래는 都乙漢堡였는데 다른 곳과 격리되어 있어 갑작스런 침입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443년(세종 25)에 理山(후에 楚山)과 江界의 땅을 나누어 새로 설치한 고을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위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위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 보다 읍치의 건물수와 명칭이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해동지도》와 거의 일치하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하천이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독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압록강과 그 지류인 독로강이 직접 연결되어 있어 본류와 지류의 구분을 어렵게 하였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에는 압록강이 왼쪽(동북)에서 흘러들어오며, 독로강이 합류되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의 경우 《여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광여도》 역시 압록강 본류와 지류인 독로강을 구별할 수 있도록 교정되어 있다. 산지 표현을 비롯하여 지도의 전체적 표현 방식은 회화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으나, 위원군 전체의 모습이나 하천의 유로 등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위원군의 실제 모습 자체가 동남-서북 방향으로 그리면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양윤정)

  • 철원부 (鐵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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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철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철원부는 지금의 철원군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어운면·북면·묘장면과 포천군의 관인면 및 연천군의 신서면에 해당된다. 일부지역은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지도의 구성은 다른 군현지도와는 달리 안정된 구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으며, 산지도 대부분 분리되어 그려져 있다. 鎭山인 高岩山은 지도의 좌측 상단에 표시되어 있으나 읍치와의 연결성을 나타내고 있지 못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측과 서측에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동쪽의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으로 남류하여 한탄강과 합류한다. 서쪽의 하천은 지금의 역곡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철원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당시 한양과 북부 지방을 잇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연천으로 서울과 연결되는 도로로 京路가 2곳에 표시되었고, 금화와는 去北路, 삭령과 이어지는 도로로 去安峽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외에 고암산 밑의 積石寺와 연결되는 도로와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역으로는 永平으로 가는 길목에 豊田驛(지금의 갈말읍 군탄리 소재)이 있으며 倉은 2곳에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19戶, 田 534結23負7束, 畓 47結48負2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청양현 (靑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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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현은 청양군의 청양읍, 운곡면, 대치면, 일부를 제외한 비봉면과 남양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양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양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된 지명 중 《해동지도》에 없는 것은 瀑布가 유일한데, 나머지 2개 지도에도 이 지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본 지도에는 폭포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쉽게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다. 나머지 2개 지도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게 그려져 있어 이후의 필사자가 원본에 그려진 폭포의 모습을 강조하여 표현하면서 瀑布라는 명칭도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왼쪽 위에는 《광여도》와 동일하게 公州界가 기록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公山界로 되어 있다. 公山은 公州가 강등되었을 때의 명칭으로 강등 시기는 1646년(인조 24)경, 1670(현종 11)-1679년(숙종 5), 1728(영조 4)-1737(영조 13), 1778년(정조 2)경 등이다.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이 공주가 공산으로 강등되었을 때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본 지도와 《광여도》는 공산에서 공주로 회복된 이후에 필사되면서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아래에는 洪陽界가 기록되어 있는데, 나머지 3개의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洪陽은 현종 2년(1661)과 숙종 36년(1710) 등에 홍주가 강등되어 사용되던 명칭으로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이 이런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강등된 시기가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주와 달리 홍주로 교정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이기봉)

  • 예천군 주기 (醴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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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예천군은 현재의 예천읍, 용문면, 유천면, 보문면, 호명면, 의성군 다인면,  문경시 동로면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중심부의 읍치는 예천읍 노상리, 서본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예천군에서 상리면, 하리면은 풍기군, 감천면은 안동부, 지보면, 개포면 지역은 용궁현에 속하였다. 읍치를 감아 흐르는 양천은 현재 한천으로 불리며 동천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읍치 왼쪽 산줄기에 덕봉산이 있는데 지금은 봉덕산으로 불린다.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가지에 해당하고 지도 위에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고 적혀있지만 충청도와 바로 맞닿은 고을이 아니며 문경과 풍기를 지나야 충청도와 연결된다. 읍치에 성곽은 그리지 않았고 객사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는 존재하였지만 이 지도에는 그리지 않았다. 북쪽에 작성, 빙성이 보인다. 읍치 동쪽에 있는 통명역은 예천읍 통명리에 있던 역이다. 영주와 연결되는 현재의 28번 국도는 통명역이 있던 지점을 지난다. 현재의 도로는 조선시대 도로를 확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 등장하는 여러 사찰 중 북쪽의 용문사(예천군 용문면)는 고려 태조대에 창건한 사찰이다. 보물 145호 대장전 외 3종이 소장되었다. 읍치 오른쪽 위의 정산서원은 1697년(숙종 23)에 사액받은 곳으로 이황과 조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전주부 주기 (全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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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 북쪽에는 건지산, 남쪽에는 곤지산이 표시되었고 그 중간에 읍성을 그렸는데 각 성문에 옹성을 만든 점이 이색적이다. 건지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백제의 完山이었으며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읍치 서쪽에 完山이 표시되었다. 전주부 읍치에 있었던 경기전(보물 931호), 전주객사(보물 583호), 풍남문(보물 308호) 등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읍성 안에 眞殿이라고 표시된 것이 경기전이다. 읍성 안에서도 따로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으로 차별화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御容 즉 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조선 태조의 선대가 전주 이씨이기 때문에 전주는 조선의 豊沛라고 불리던 곳인데 한고조 유방의 고향을 딴 것이다. 읍성의 남문을 풍남문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래쪽에 胎峯이 표시되었는데 전주에는 왕실의 胎가 많이 모셔졌다. 읍성 남쪽에는 군사 중심지인 中營이 보인다. 읍성이 있었던 지역이 현재에도 중심부에 해당하며 지금은 한옥마을로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의 이목대에 오르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전주천이며 북쪽의 하천은 소양강과 만경강이다. 지도 왼쪽 위의 만경강변의 新倉津은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있던 나루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덕진제는 현재 덕진구의 제언이다. 그 오른쪽에 위봉산성이 보인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도로를 표시하고 삼례역, 역관 등의 역원, 고개, 險隘 등을 그려넣었다.(이현군)

  • 위원군 주기 (渭原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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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渭原郡〉으로, 지금의 자강도 위원군 일대이다. 원래는 都乙漢堡였는데 다른 곳과 격리되어 있어 갑작스런 침입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443년(세종 25)에 理山(후에 楚山)과 江界의 땅을 나누어 새로 설치한 고을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위원군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위원군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의 경우 《해동지도》 보다 읍치의 건물수와 명칭이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해동지도》와 거의 일치하며, 《여지도》와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하천이 압록강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이 그 지류인 독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압록강과 그 지류인 독로강이 직접 연결되어 있어 본류와 지류의 구분을 어렵게 하였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 에는 압록강이 왼쪽(동북)에서 흘러들어오며, 독로강이 합류되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의 경우 《여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광여도》 역시 압록강 본류와 지류인 독로강을 구별할 수 있도록 교정되어 있다. 산지 표현을 비롯하여 지도의 전체적 표현 방식은 회화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으나, 위원군 전체의 모습이나 하천의 유로 등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위원군의 실제 모습 자체가 동남-서북 방향으로 그리면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양윤정)

  • 철원부 주기 (鐵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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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철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철원부는 지금의 철원군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어운면·북면·묘장면과 포천군의 관인면 및 연천군의 신서면에 해당된다. 일부지역은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지도의 구성은 다른 군현지도와는 달리 안정된 구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으며, 산지도 대부분 분리되어 그려져 있다. 鎭山인 高岩山은 지도의 좌측 상단에 표시되어 있으나 읍치와의 연결성을 나타내고 있지 못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측과 서측에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동쪽의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으로 남류하여 한탄강과 합류한다. 서쪽의 하천은 지금의 역곡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철원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당시 한양과 북부 지방을 잇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연천으로 서울과 연결되는 도로로 京路가 2곳에 표시되었고, 금화와는 去北路, 삭령과 이어지는 도로로 去安峽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외에 고암산 밑의 積石寺와 연결되는 도로와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역으로는 永平으로 가는 길목에 豊田驛(지금의 갈말읍 군탄리 소재)이 있으며 倉은 2곳에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19戶, 田 534結23負7束, 畓 47結48負2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청양현 주기 (靑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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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현은 청양군의 청양읍, 운곡면, 대치면, 일부를 제외한 비봉면과 남양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양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양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된 지명 중 《해동지도》에 없는 것은 瀑布가 유일한데, 나머지 2개 지도에도 이 지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본 지도에는 폭포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쉽게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다. 나머지 2개 지도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게 그려져 있어 이후의 필사자가 원본에 그려진 폭포의 모습을 강조하여 표현하면서 瀑布라는 명칭도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왼쪽 위에는 《광여도》와 동일하게 公州界가 기록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公山界로 되어 있다. 公山은 公州가 강등되었을 때의 명칭으로 강등 시기는 1646년(인조 24)경, 1670(현종 11)-1679년(숙종 5), 1728(영조 4)-1737(영조 13), 1778년(정조 2)경 등이다.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이 공주가 공산으로 강등되었을 때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본 지도와 《광여도》는 공산에서 공주로 회복된 이후에 필사되면서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아래에는 洪陽界가 기록되어 있는데, 나머지 3개의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洪陽은 현종 2년(1661)과 숙종 36년(1710) 등에 홍주가 강등되어 사용되던 명칭으로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이 이런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강등된 시기가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주와 달리 홍주로 교정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이기봉)

  • 용궁현 (龍宮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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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위쪽에 표현된 읍치는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일대이다. 원래 읍치는 읍치 남쪽의 용비산성의 북쪽 용궁면 향석리에 있었다. 용궁현의 관할구역은 예천군의 용궁면, 지보면, 개포면의 일부, 풍양면의 일부, 의성군 안사면의 일부, 문경시 영순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 뒤쪽의 축산이 용궁의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금천이고 읍치 남쪽은 내성천이다. 가장 아래의 하천은 낙동강인데 세 하천의 폭을 같은 넓이로 그렸다. 이 세 하천을 모으는 지점, 지도 왼쪽 아래에 삼강진이 그려졌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었다. 그 옆에는 삼강서원이 표시되었다. 삼강서원은 1643년(인조 21)에 세워진 것이다. 읍치 앞의 내성천은 두 번 크게 蛇行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용비산성 오른쪽이 회룡포 지역이며 마산(예천군 지보면 마산리) 위쪽에 크게 휘는 곳이 의성포이다. 근처의 장안사 근처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용비산성은 지보면 향석리에 있던 것으로 강을 내려다 보며 지킬 수 있는 방어기지가 된다. 그 흔적을 지금도 찾을 수 있다. 축산 아래의 읍치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다. 읍치를 옮기면서 다시 읍성을 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왼쪽에는 향교를 표시하였다. 내성천을 기준으로 북쪽은 화강암, 내성천 남쪽은 변성암 지대인데 지질구조선을 따라 하천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하천이 지나는 고을이면서 곳곳에 堤堰이 많이 그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저수지를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다.(이현군)

  • 정읍현 (井邑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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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정읍시내, 북면, 입암면을 관할하였다. 지도 왼쪽의 읍치는 정읍시내 미창동 일대에 해당한다. 객사와 향교가 같은 영역 안에 그려졌으며 읍치 오른쪽에 두 개의 立石이 표시되었다. 호남고속국도 정읍 인터체인지 동쪽 지역에 위치하였다. 행상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망부석에 올라 지은 井邑詞로 유명한 군현이다. 현재 정읍시내에 망부상이 세워져 있다. 정읍천이 읍치 주위를 흘러 북쪽의 동진강으로 유입된다. 오른쪽 아래에 蘆嶺, 小蘆嶺이 표시되었다. 우리나라 산맥 표시 중 노령산맥은 이곳의 지명을 따 만든 것이다. 호남선 철도 노령역 인근으로 노령 제 1터널, 제 2터널, 호남고속국도의 호남터널 지역이다. 고개 길이 사나워 도적이 떼를 지어 있었서 蘆嶺堡를 설치한 적이 있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노령 위에 표시된 笠巖은 내장산 국립공원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626.1m 높이의 산으로 현재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곳에 산성이 있었으며 이 지도에 산성이 그려졌는데 이곳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입암면이 된 것이다. 忠烈祠는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곳으로 1689년(숙종 15)에 세워졌다. 왼쪽 아래의 고암서원은 송시열을 배향한 곳으로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았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곳에 고개이름을 적고 險隘라고 표시하였다. 도로를 그리고 역원을 표시하지 않았는데 입암면 천원리에 川原驛이 있었다. 노령을 넘기 전에 머물던 역원이다. (이현군)

  • 은산현 (殷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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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殷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시 동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은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은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위의 天聖山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비해 길고, 좀더 서남쪽으로 기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와는 하천의 일부분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順川界에서 들어와 왼쪽을 휘감고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그런데 《여지도》에서는 順川界 부분이 대동강의 발원지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의 順川界에서 읍치 방향으로 현재의 장선강이 흘러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이 부분을 아예 생략하여 위쪽의 천성산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왼쪽 위에는 价川界에는 왼쪽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흘러들어오는 하천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이 하천이 없으며, 따라서 無盡臺의 위치도 차이가 있다. 《광여도》의 경우본류와 지류를 거의 같은 굵기로 그리고 있으나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며, 《해동지도》 역시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따라서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고,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다른 자료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나타난 지명의 경우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므로 본 지도와의 관계도 무시할 수 는 없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만 나타는 지명이 있는데, 바로 지도 아래쪽의 阿灘窟이다. 《해동지도》에는 집 모양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崇化山 석벽에 있는 굴로서 굴 안에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춘천부 (春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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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춘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춘천부는 지금의 춘천시 전체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된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인제 부근의 기린면 일대가 비월지로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지도 우측 상단에 연결하여 그렸다. 지도의 중심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묘사하였고 동쪽에 진산인 鳳儀山 지명이 있다. 지금의 춘천시 요선동 일대이다. 읍치의 북쪽에 북한강과 소양강을 묘사하였다. 현재 춘천댐이 건설되어 있는 북한강 상류의 하천지명은 母津江, 吾梅江으로 기록해 놓았으며 소양강과 합류한 후의 하천 지명은 新淵江으로 표기하였다. 지금의 소양강에는 原河津, 大同津 등의 나루터를 표시하였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춘천부 해제 참조). 도로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倉이 4곳이 기재되어 있으며 특히 읍치 위쪽에 있는 江倉은 소양강창으로서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이었다. 읍치의 동남쪽으로는 安保驛을 거쳐 嘉平(지금의 加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홍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原昌驛이나 德勇峙를 거치는 2곳의 도로가 표시되었다. 북쪽의 狼川(지금의 화천)과 이어지는 도로는 仁嵐驛, 인제로 가는 도로에는 富昌驛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51戶, 田 1,572結, 畓 330結 44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청주목 (淸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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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목은 문의면․부용면․현도면과 시동리 서남쪽의 가덕면을 제외한 청주시 전체, 괴산군 청천면, 천안시 수신면, 연기군 소정면의 소정리․운당리, 추동․주산동을 포함한 대전광역시 동구의 동북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북문로 일대에 있었다. 청주목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도의 오른쪽이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상류이며, 왼쪽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유역이다. 달천강 상류는 원래 속현이었던 靑川縣의 땅이었는데, 고려말 조선초를 거치면서 주현인 청주목에 완전히 합해졌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해동지도》의 첨지에 “望德山, 仙遊洞, 引頭山, 臥牛山은 備圖(비변사 소장 지도)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어 첨가하여 그려넣는다”고 기록된 지명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없다는 점 등이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자체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公山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公山은 公州가 강등되었을 때의 명칭이다. 공주목이 공산현으로 강등되었던 시기는 1646년(인조 24)경, 1670(현종 11)-1679년(숙종 5), 1728(영조 4)-1737(영조 13), 1778년(정조 2)경 등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광여도》에는 公州界로 바뀌어 있다. 기타 아래쪽의 周岸面과 왼쪽의 德平面 등은 다른 군현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월경지임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이기봉)

  • 용궁현 주기 (龍宮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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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위쪽에 표현된 읍치는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일대이다. 원래 읍치는 읍치 남쪽의 용비산성의 북쪽 용궁면 향석리에 있었다. 용궁현의 관할구역은 예천군의 용궁면, 지보면, 개포면의 일부, 풍양면의 일부, 의성군 안사면의 일부, 문경시 영순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 뒤쪽의 축산이 용궁의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금천이고 읍치 남쪽은 내성천이다. 가장 아래의 하천은 낙동강인데 세 하천의 폭을 같은 넓이로 그렸다. 이 세 하천을 모으는 지점, 지도 왼쪽 아래에 삼강진이 그려졌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었다. 그 옆에는 삼강서원이 표시되었다. 삼강서원은 1643년(인조 21)에 세워진 것이다. 읍치 앞의 내성천은 두 번 크게 蛇行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용비산성 오른쪽이 회룡포 지역이며 마산(예천군 지보면 마산리) 위쪽에 크게 휘는 곳이 의성포이다. 근처의 장안사 근처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용비산성은 지보면 향석리에 있던 것으로 강을 내려다 보며 지킬 수 있는 방어기지가 된다. 그 흔적을 지금도 찾을 수 있다. 축산 아래의 읍치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다. 읍치를 옮기면서 다시 읍성을 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왼쪽에는 향교를 표시하였다. 내성천을 기준으로 북쪽은 화강암, 내성천 남쪽은 변성암 지대인데 지질구조선을 따라 하천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하천이 지나는 고을이면서 곳곳에 堤堰이 많이 그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저수지를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다.(이현군)

  • 정읍현 주기 (井邑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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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정읍시내, 북면, 입암면을 관할하였다. 지도 왼쪽의 읍치는 정읍시내 미창동 일대에 해당한다. 객사와 향교가 같은 영역 안에 그려졌으며 읍치 오른쪽에 두 개의 立石이 표시되었다. 호남고속국도 정읍 인터체인지 동쪽 지역에 위치하였다. 행상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망부석에 올라 지은 井邑詞로 유명한 군현이다. 현재 정읍시내에 망부상이 세워져 있다. 정읍천이 읍치 주위를 흘러 북쪽의 동진강으로 유입된다. 오른쪽 아래에 蘆嶺, 小蘆嶺이 표시되었다. 우리나라 산맥 표시 중 노령산맥은 이곳의 지명을 따 만든 것이다. 호남선 철도 노령역 인근으로 노령 제 1터널, 제 2터널, 호남고속국도의 호남터널 지역이다. 고개 길이 사나워 도적이 떼를 지어 있었서 蘆嶺堡를 설치한 적이 있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노령 위에 표시된 笠巖은 내장산 국립공원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626.1m 높이의 산으로 현재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곳에 산성이 있었으며 이 지도에 산성이 그려졌는데 이곳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입암면이 된 것이다. 忠烈祠는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곳으로 1689년(숙종 15)에 세워졌다. 왼쪽 아래의 고암서원은 송시열을 배향한 곳으로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았다. 다른 군현과 연결되는 곳에 고개이름을 적고 險隘라고 표시하였다. 도로를 그리고 역원을 표시하지 않았는데 입암면 천원리에 川原驛이 있었다. 노령을 넘기 전에 머물던 역원이다. (이현군)

  • 은산현 주기 (殷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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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殷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시 동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은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은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가 상대적으로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위의 天聖山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비해 길고, 좀더 서남쪽으로 기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와는 하천의 일부분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의 順川界에서 들어와 왼쪽을 휘감고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대동강 본류이다. 그런데 《여지도》에서는 順川界 부분이 대동강의 발원지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의 順川界에서 읍치 방향으로 현재의 장선강이 흘러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는 이 부분을 아예 생략하여 위쪽의 천성산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왼쪽 위에는 价川界에는 왼쪽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흘러들어오는 하천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이 하천이 없으며, 따라서 無盡臺의 위치도 차이가 있다. 《광여도》의 경우본류와 지류를 거의 같은 굵기로 그리고 있으나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며, 《해동지도》 역시 본 지도와 더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따라서 《광여도》의 경우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고,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다른 자료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나타난 지명의 경우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므로 본 지도와의 관계도 무시할 수 는 없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만 나타는 지명이 있는데, 바로 지도 아래쪽의 阿灘窟이다. 《해동지도》에는 집 모양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崇化山 석벽에 있는 굴로서 굴 안에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 춘천부 주기 (春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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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춘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춘천부는 지금의 춘천시 전체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된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인제 부근의 기린면 일대가 비월지로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지도 우측 상단에 연결하여 그렸다. 지도의 중심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묘사하였고 동쪽에 진산인 鳳儀山 지명이 있다. 지금의 춘천시 요선동 일대이다. 읍치의 북쪽에 북한강과 소양강을 묘사하였다. 현재 춘천댐이 건설되어 있는 북한강 상류의 하천지명은 母津江, 吾梅江으로 기록해 놓았으며 소양강과 합류한 후의 하천 지명은 新淵江으로 표기하였다. 지금의 소양강에는 原河津, 大同津 등의 나루터를 표시하였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춘천부 해제 참조). 도로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倉이 4곳이 기재되어 있으며 특히 읍치 위쪽에 있는 江倉은 소양강창으로서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이었다. 읍치의 동남쪽으로는 安保驛을 거쳐 嘉平(지금의 加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홍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原昌驛이나 德勇峙를 거치는 2곳의 도로가 표시되었다. 북쪽의 狼川(지금의 화천)과 이어지는 도로는 仁嵐驛, 인제로 가는 도로에는 富昌驛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51戶, 田 1,572結, 畓 330結 44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청주목 주기 (淸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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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목은 문의면․부용면․현도면과 시동리 서남쪽의 가덕면을 제외한 청주시 전체, 괴산군 청천면, 천안시 수신면, 연기군 소정면의 소정리․운당리, 추동․주산동을 포함한 대전광역시 동구의 동북쪽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북문로 일대에 있었다. 청주목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도의 오른쪽이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상류이며, 왼쪽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유역이다. 달천강 상류는 원래 속현이었던 靑川縣의 땅이었는데, 고려말 조선초를 거치면서 주현인 청주목에 완전히 합해졌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해동지도》의 첨지에 “望德山, 仙遊洞, 引頭山, 臥牛山은 備圖(비변사 소장 지도)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어 첨가하여 그려넣는다”고 기록된 지명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없다는 점 등이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자체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公山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公山은 公州가 강등되었을 때의 명칭이다. 공주목이 공산현으로 강등되었던 시기는 1646년(인조 24)경, 1670(현종 11)-1679년(숙종 5), 1728(영조 4)-1737(영조 13), 1778년(정조 2)경 등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광여도》에는 公州界로 바뀌어 있다. 기타 아래쪽의 周岸面과 왼쪽의 德平面 등은 다른 군현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월경지임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이기봉)

  • 울산부 (蔚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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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의 읍치는 중구 성남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울산광역시에서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 언양읍(언양현), 두동면, 두서면(경주부)을 제외한 지역과 양산시 웅상읍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산은 낙동정맥에서 경주의 토함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에 있는 것이다. 진산은 무리용산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태화강인데 지도에 태화대가 보인다. 오른쪽은 동천강이다. 기록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지도에는 성곽이 없고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도 그리지 않았다. 객사 뒤쪽의 좌병영은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다. 현재의 중구 병영동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감목관은 옛날 울산에 있던 목마장을 표시한 것이다. 그 아래 방어진은 지금도 방어진항(동구 방어항)으로 남아있다. 바다에 기암을 그려서 명승지을 표시하였다. 해안을 따라 봉대를 표시하였는데 오른쪽의 남목봉대는 현재 봉대산(동구 남목 1동, 남목 2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의 남쪽 해안에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방어를 위한 진으로 서생진이 보이는데 현재의 서생면 서생리 일대에 있던 것으로 지금은 서생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북쪽의 만리성은 울산시 북구와 경주시의 경계에 있는 성이다. 왼쪽의 문수산을 따서 월드컵경기장의 명칭을 만들었다. 이밖에 사찰, 서원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제주목 (濟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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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위쪽에는 중국, 오키나와, 일본 등이 그려졌고 아래쪽에는 전라도 해안, 진도, 완도 등의 여러 섬이 그려졌다. 육지에서 바라 본 제주의 모습을 그렸다. 조선시대 제주의 군현은 지도 아래쪽 북쪽의 제주목, 지도의 왼쪽 위 동남 방향에 정의현, 오른쪽 서남 방향에 대정현이 위치한 구조이다. 그래서 해동지도에서는 濟州三縣圖로 이 세 군현을 함께 그린 것이다. 제주 읍성은 제주시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 오라동에 해당하며 정의현은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에 읍치가 있었다. 성읍민속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대정현 읍치는 대정읍 안성리, 인성리, 보성리 일대에 해당한다. 제주목이 중심부에 해당하므로 읍성 안에 많은 건물이 그려졌다. 다른 군현지도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作廳, 鄕廳, 明倫堂 등이 보인다. 대정 읍성에는 객사가 보이지만, 정의읍성에는 객사가 그려지지 않았다. 지도의 가운데 부분에 한라산과 백록담이 그려졌고 주변에 ‘岳’으로 표시된 오름은 기생화산을 그린 것이다. 한라산 주변에는 馬場이 여러 군데 보인다. 지도 위쪽의 西歸所가 현재의 서귀포시 일대이다. 서귀소 근처에 천지연폭포가 지도에 등장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果園이 표시되었다. 왼쪽 위 해안에 솟은 봉우리는 성산일출봉이다. 제주도의 하천은 한라산에서 발원하는데 그 모습을 그렸다. 마을은 해안의 용천대를 따라 형성되기 때문에 군현의 읍치가 해안에 위치한 특징이 보인다. 지도에 도로망이 그려지지 않은 점이 이색적이다.(이현군)

  • 은율현 (은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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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윤율군 서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은율군 은율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은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부분은 읍치와 九月山城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대부분의 대형산성이 황폐화되거나 사용되지 않았는데, 두 번에 걸친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는 대규모의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주변의 여러 고을 사람들이 입성하여 장기전을 펼치는 방식이다. 이러한 장기전은 대규모 외적의 보급로 차단 등을 통해 힘을 약화시킨 후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는 전략으로 이미 고구려에서 수당과의 전쟁 때 효과를 보았던 방법이다. 구월산성 안에는 안악, 장련, 풍천, 문화, 송화, 은율 등의 명칭이 적힌 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대규모 외적의 침입 시 함께 입성하여 적을 방어하게 되어 있는 고을들이다. 앞서 언급한 4개의 지도 중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지 않은 반면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본 지도는 지도의 제작 수준이 상당히 저열한 편이며, 《해동지도》의 경우 鄕賢祠宇에서 賢을 縣으로 기록하고 읍치 위쪽에 표시된 塔峴의 塔을 잘못 기록하는 등 몇 가지 오류가 보이고 있어 둘 다 최초의 원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왼쪽에는 防舡이 표시되어 있는데, 은율현에 소속되어 있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곳이다. 그 아래쪽의 海倉은 은율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읍치 아래쪽에 기록된 漢川은 우리말 ‘한내’에 대한 표현 중의 하나로 일반적으로는 ‘大川’이라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통천군 (通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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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최북단에 있던 통천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통천군은 지금의 북한 강원도 통천군과 고성군에 걸쳐 있던 지역이었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표현되는 고을의 鎭山인 登禾山은 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를 지도의 중앙 상단에 배치하고 서로는 백두대간을 배치하였다. 통천군의 해안의 방향은 북서-남동이나 지도에서는 북-남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는 총석정을 실경으로 표현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하는 여러 하천이 동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장 큰 하천은 읍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광교천이며 북쪽에서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십이현천이다. 대부분 하천의 유로가 일직선상으로 동해에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조선지도』 등의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지금의 암남천 만입부가 매우 과장되어 그려진 것과는 대조된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통천군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3곳이 있다. 이중 楸池岺과 洒岺을 넘어 淮陽으로 연결되는 길이 대로에 해당된다. 이면의 주기에 이 도로가 험준함을 밝히고 있다. 한편 楸池岺으로 가는 길에는 中臺館이 있다. 남쪽으로는 읍치에서 巨豊驛-樓橋-登路驛-朝珎驛을 거쳐 高城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한편 朝珎驛에는 ‘館’ 표기가 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흡곡과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들 도로는 대부분 평탄하였음을 주기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09戶, 田 256結69負6束, 畓 152結15負1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청풍부 (淸風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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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풍군은 제천시 청풍면과 수산면 전체, 송계리 일대를 제외한 한수면, 양리와 위림리를 포함한 금성면의 남쪽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충추호에 수몰되어 있다. 오른쪽에서 흘러와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풍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측면이 발견되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먼저 필사된 것으로 알려진 《해동지도》의 첨지에는 “水穴, 屛山 , 風穴, 玉筍峯, 龜潭, 鄕校, 大峙가 備圖에는 있지만 本圖에는 없어 필사하여 그려넣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지도에는 大峙를 제외한 나머지 지명 부분에 수정의 흔적이 역력히 보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大峙가 없는 반면에 첨지의 나머지 지명은 대부분 나와 있다. 다만 《해동지도》에 사실처럼 묘사된 절벽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닌 다른 계통의 원본을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첨지에 나타난 문구는 大峙를 제외하면 지명이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지명에 대한 자세한 묘사 그림이 없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해동지도》의 수정한 부분에는 없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는 北倉, 鳳岡書院, 霧菴(또는 露菴) 등은 수정하고 나서 써넣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하천의 표시 중 본 지도의 北津 부분에서 남한강과 합류되는 작은 하천은 실제로는 북쪽의 제천에서 흘러 들어오는 현재의 고교천이다. 그러나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놓았는데, 《해동지도》에는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후대의 필사자들이 실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에는 面과 驛을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해 놓았는데, 오른쪽 위의 東面에는 이런 기호가 생략되어 있다. 《여지도》에도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에서는 東面에도 노란색 사각형을 그려넣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는 남한강과 지류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그려넣었다. 하지만 《여지도》에서는 구분이 애매하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서는 구분이 거의 어려울 정도로 잘못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른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남한강의 본류가 아예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할 때 지도 전문가가 아니라 비전문가에 의해 필사되면서 원본을 잘못 이해하여 필사한 부분이 상당 부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울산부 주기 (蔚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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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의 읍치는 중구 성남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울산광역시에서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 언양읍(언양현), 두동면, 두서면(경주부)을 제외한 지역과 양산시 웅상읍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산은 낙동정맥에서 경주의 토함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에 있는 것이다. 진산은 무리용산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태화강인데 지도에 태화대가 보인다. 오른쪽은 동천강이다. 기록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지도에는 성곽이 없고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도 그리지 않았다. 객사 뒤쪽의 좌병영은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다. 현재의 중구 병영동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감목관은 옛날 울산에 있던 목마장을 표시한 것이다. 그 아래 방어진은 지금도 방어진항(동구 방어항)으로 남아있다. 바다에 기암을 그려서 명승지을 표시하였다. 해안을 따라 봉대를 표시하였는데 오른쪽의 남목봉대는 현재 봉대산(동구 남목 1동, 남목 2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의 남쪽 해안에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방어를 위한 진으로 서생진이 보이는데 현재의 서생면 서생리 일대에 있던 것으로 지금은 서생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북쪽의 만리성은 울산시 북구와 경주시의 경계에 있는 성이다. 왼쪽의 문수산을 따서 월드컵경기장의 명칭을 만들었다. 이밖에 사찰, 서원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제주목 주기 (濟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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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위쪽에는 중국, 오키나와, 일본 등이 그려졌고 아래쪽에는 전라도 해안, 진도, 완도 등의 여러 섬이 그려졌다. 육지에서 바라 본 제주의 모습을 그렸다. 조선시대 제주의 군현은 지도 아래쪽 북쪽의 제주목, 지도의 왼쪽 위 동남 방향에 정의현, 오른쪽 서남 방향에 대정현이 위치한 구조이다. 그래서 해동지도에서는 濟州三縣圖로 이 세 군현을 함께 그린 것이다. 제주 읍성은 제주시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 오라동에 해당하며 정의현은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에 읍치가 있었다. 성읍민속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대정현 읍치는 대정읍 안성리, 인성리, 보성리 일대에 해당한다. 제주목이 중심부에 해당하므로 읍성 안에 많은 건물이 그려졌다. 다른 군현지도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作廳, 鄕廳, 明倫堂 등이 보인다. 대정 읍성에는 객사가 보이지만, 정의읍성에는 객사가 그려지지 않았다. 지도의 가운데 부분에 한라산과 백록담이 그려졌고 주변에 ‘岳’으로 표시된 오름은 기생화산을 그린 것이다. 한라산 주변에는 馬場이 여러 군데 보인다. 지도 위쪽의 西歸所가 현재의 서귀포시 일대이다. 서귀소 근처에 천지연폭포가 지도에 등장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果園이 표시되었다. 왼쪽 위 해안에 솟은 봉우리는 성산일출봉이다. 제주도의 하천은 한라산에서 발원하는데 그 모습을 그렸다. 마을은 해안의 용천대를 따라 형성되기 때문에 군현의 읍치가 해안에 위치한 특징이 보인다. 지도에 도로망이 그려지지 않은 점이 이색적이다.(이현군)

  • 은율현 주기 (은율현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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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윤율군 서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은율군 은율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은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부분은 읍치와 九月山城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대부분의 대형산성이 황폐화되거나 사용되지 않았는데, 두 번에 걸친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는 대규모의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주변의 여러 고을 사람들이 입성하여 장기전을 펼치는 방식이다. 이러한 장기전은 대규모 외적의 보급로 차단 등을 통해 힘을 약화시킨 후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는 전략으로 이미 고구려에서 수당과의 전쟁 때 효과를 보았던 방법이다. 구월산성 안에는 안악, 장련, 풍천, 문화, 송화, 은율 등의 명칭이 적힌 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대규모 외적의 침입 시 함께 입성하여 적을 방어하게 되어 있는 고을들이다. 앞서 언급한 4개의 지도 중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지 않은 반면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본 지도는 지도의 제작 수준이 상당히 저열한 편이며, 《해동지도》의 경우 鄕賢祠宇에서 賢을 縣으로 기록하고 읍치 위쪽에 표시된 塔峴의 塔을 잘못 기록하는 등 몇 가지 오류가 보이고 있어 둘 다 최초의 원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왼쪽에는 防舡이 표시되어 있는데, 은율현에 소속되어 있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곳이다. 그 아래쪽의 海倉은 은율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읍치 아래쪽에 기록된 漢川은 우리말 ‘한내’에 대한 표현 중의 하나로 일반적으로는 ‘大川’이라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통천군 주기 (通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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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최북단에 있던 통천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통천군은 지금의 북한 강원도 통천군과 고성군에 걸쳐 있던 지역이었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표현되는 고을의 鎭山인 登禾山은 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를 지도의 중앙 상단에 배치하고 서로는 백두대간을 배치하였다. 통천군의 해안의 방향은 북서-남동이나 지도에서는 북-남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는 총석정을 실경으로 표현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하는 여러 하천이 동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장 큰 하천은 읍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광교천이며 북쪽에서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십이현천이다. 대부분 하천의 유로가 일직선상으로 동해에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조선지도』 등의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지금의 암남천 만입부가 매우 과장되어 그려진 것과는 대조된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통천군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3곳이 있다. 이중 楸池岺과 洒岺을 넘어 淮陽으로 연결되는 길이 대로에 해당된다. 이면의 주기에 이 도로가 험준함을 밝히고 있다. 한편 楸池岺으로 가는 길에는 中臺館이 있다. 남쪽으로는 읍치에서 巨豊驛-樓橋-登路驛-朝珎驛을 거쳐 高城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한편 朝珎驛에는 ‘館’ 표기가 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흡곡과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들 도로는 대부분 평탄하였음을 주기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09戶, 田 256結69負6束, 畓 152結15負1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청풍부 주기 (淸風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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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풍군은 제천시 청풍면과 수산면 전체, 송계리 일대를 제외한 한수면, 양리와 위림리를 포함한 금성면의 남쪽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충추호에 수몰되어 있다. 오른쪽에서 흘러와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청풍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측면이 발견되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먼저 필사된 것으로 알려진 《해동지도》의 첨지에는 “水穴, 屛山 , 風穴, 玉筍峯, 龜潭, 鄕校, 大峙가 備圖에는 있지만 本圖에는 없어 필사하여 그려넣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지도에는 大峙를 제외한 나머지 지명 부분에 수정의 흔적이 역력히 보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大峙가 없는 반면에 첨지의 나머지 지명은 대부분 나와 있다. 다만 《해동지도》에 사실처럼 묘사된 절벽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닌 다른 계통의 원본을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첨지에 나타난 문구는 大峙를 제외하면 지명이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지명에 대한 자세한 묘사 그림이 없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해동지도》의 수정한 부분에는 없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는 北倉, 鳳岡書院, 霧菴(또는 露菴) 등은 수정하고 나서 써넣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하천의 표시 중 본 지도의 北津 부분에서 남한강과 합류되는 작은 하천은 실제로는 북쪽의 제천에서 흘러 들어오는 현재의 고교천이다. 그러나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놓았는데, 《해동지도》에는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후대의 필사자들이 실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에는 面과 驛을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해 놓았는데, 오른쪽 위의 東面에는 이런 기호가 생략되어 있다. 《여지도》에도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에서는 東面에도 노란색 사각형을 그려넣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는 남한강과 지류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그려넣었다. 하지만 《여지도》에서는 구분이 애매하게 되어 있고, 《광여도》에서는 구분이 거의 어려울 정도로 잘못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른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남한강의 본류가 아예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할 때 지도 전문가가 아니라 비전문가에 의해 필사되면서 원본을 잘못 이해하여 필사한 부분이 상당 부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웅천현 (熊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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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진해현은 지금의 진해시와 무관한 마산시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며 현재의 진해시에는 조선시대 웅천현이 있었다. 현재 진해시 중심부는 일제 강점기 이후에 도시화된 지역이며 웅천현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이다. 지금 남문동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웅천의 관할 범위는 현재의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의 남쪽 가덕도에 해당한다. 지도 위쪽에 웅암산으로 표기된 웅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바다는 진해만이 여러 섬들이 그려졌는데 오른쪽 아래의 가장 큰 섬이 가덕도이다. 읍치는 직사각형으로 읍성을 그렸는데 성문을 연결하는 도로에 의해 성 안 지역이 네 구역으로 나누어지며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북쪽에 배치됨을 볼 수 있다. 전통적 읍성 안의 배치구도를 볼 수 있는 지도이다. 읍치 동남쪽에 표시된 倭城은 184.3m의 남산에 만들어진 웅천왜성이다. 이 외에도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북쪽 240.7m의 자마산에도 왜성이 있었다. 오른쪽 위의 성흥사는 지금도 진해시 대장동에 남아있다. 그 남쪽의 晴川陣은 현재의 진해시 청안동에 있는 것이며 安骨鎭인 안골동에 있었던 진이다. 사적 53호로 지정된 안골성지가 있는 곳이다. 바다를 접하고 있어 군사적 목적의 鎭堡가 많이 설치되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덕도에는 天城堡, 船所, 烽臺 등이 보이는데 봉대는 459.4m의 연대봉에 있던 것이며 천성보는 지금 천성진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곳곳에 농사를 위한 제언, 창고, 도로, 역원이 그려졌다.(이현군)

  • 진도군 (珍島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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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 진도군은 “道海 가운데에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 지도를 보면 섬 인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서남해에 있는 진도군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며 현재의 진도읍 성내리가 읍치 지역이며 읍성 왼쪽에 표시된 향교가 교동리에 있었다. 읍성 오른쪽 위에 古城基, 고군내면 등이 표시되었는데 현재의 고군면 일대이다. 고군면에 고성리 지명과 용장산성이 남아있다. 진산은 嘉興山인데 동국여지승람에 “군의 治所가 가흥의 땅이므로 산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적혔는데 고군내면에서 치소가 지도의 중심부 지역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남쪽의 임회면은 임회폐현이 있던 곳이다. 읍성 이외에 남쪽에 두 개의 성이 그려졌다. 왼쪽의 남도진은 현재의 임회면 남동리의 남도석성으로 남아있는 곳으로 수군만호가 있던 南桃浦營이다. 오른쪽의 금갑진은 현재의 의신면 금갑리 일대로 수군만호가 있던 金甲島營이다. 그 북쪽 金島 근처가 썰물 때 바다가 드러나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간조육계도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벽파정은 고군면 벽파리에 있던 누정이며 근처에 이충무공 전적비가 있다. 고도진 위쪽에 목장면 지명이 보이는데 지력산 일대에 牧場이 있었다. 현재의 지산면에 관마리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 북쪽이 진도개가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된 지역이다. 읍치 동쪽의 鳳凰書院은 해동지도에는 鳳岩書院으로 표시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海倉, 船所 등이 보인다.(이현군)

  • 의주부 (義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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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義州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의주군, 피현군, 천마군 서북쪽, 삭주군 청수 서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규장각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의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이들은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의주부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을 훨씬 길게 그렸지만 본 지도에서는 남북과 동서를 비슷하게 그렸다. 하천의 유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광여도》와 《여지도》보다 《해동지도》가 地誌 부분에 충실하게 표시하고 있으며, 본 지도의 겨우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於骨山은 松骨山을, 獜川鎭은 獜山鎭을 잘못 옮긴 것이며, 이런 지명은 이외에도 많다. 《광여도》에서는 본 지도에서 잘못 옮긴 것을 상당히 교정해 놓았다. 본 지도의 경우 獜山鎭은 《광여도》와 같이 표기하고 있으나, 松骨山의 경우에는 산은 그려져 있으나, 지명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 비해 정보가 추가된 곳은 읍치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건물수가 4개 였으나, 본 지도에서는 7개로 늘어났고, 鄕社堂, 凝香堂이란 지명이 추가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더 크게 묘사하였으며, 鄕社堂이 鄕射堂으로 바뀌어 있다.(양윤정)

  • 평강현 (平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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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평강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강현은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에 해당된다. 지금의 평강읍 동변리에 소재한 읍치를 지도의 중앙 아래 부분에 四寬亭과 함께 묘사하였다. 동쪽의 강원도 회양, 금성, 김화와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여러 하천이 이곳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북쪽의 古揷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에 해당되며, 이후 북쪽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과 합류한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한탄강 상류에 해당된다. 북쪽 산지의 분수령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하천은 평안강에 해당되며, 임진강의 상류부이다. 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고미탄천인 것으로 추정된다. 분수령은 넘어 안변쪽으로 북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남대천으로 안변에서 동해로 유입한다.(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강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 김화와 이어지는 도로는 赤礗院을 지나고, 회양으로 가는 길은 松古介를 거친다. 철원과 연결되는 도로는 裁松院을 지난다. 서로는 玉洞驛을 거쳐 이천으로 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북으로 안변으로 이어지는 길은 평안강 연변을 지나 천령을 거치는 길과 분수령을 거치는 삼방로가 표현되어 있다. 주기에는 이 도로의 험준함을 설명하고 있다. 이면 주기에 民戶 3,936戶, 田 406結71負4束, 畓 8結11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영위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충주목 (忠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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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목은 상모면을 제외한 충주시 전체,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음성군 전체, 괴산군 감물면과 불정면, 제천시 덕산면 전체와 한수면의 송계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충주 시내의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높은 산을 등진 읍성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며, 오른쪽 아래에서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달천강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충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상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우선 읍성 아래쪽의 利安面 왼쪽에 《해동지도》에는 堯渡川이라는 지명과 하천이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없다. 이 점에서 참조되는 것이 《해동지도》의 충주목 지도에 붙여져 있는 첨지인데, 이 첨지에는 “德周寺, 朴達山, 十老峯山, 靑龍山, 堯渡川, 陰城川은 備圖(비변사 소장 지도)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어 필사하여 그려넣는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실제로 《해동지도》에는 앞의 첨지에서 언급되어 있는 지명과 하천이 모두 표시되어 있는데 반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모두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해동지도》 자체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지 않은 것이 거의 분명하며, 《해동지도》 이외의 원본 계통이 따로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알 수 있는 또다른 부분이 본 지도의 읍성 내에 있는 창고 2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해동지도》가 원본 중에서 일부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밖에 왼쪽 위에는 加次山面이 면의 명칭을 오해할 수 있게 적혀 있고, 도로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당히 조악하게 표시되어 있어 필사자가 정밀하게 필사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이기봉)

  • 웅천현 주기 (熊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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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진해현은 지금의 진해시와 무관한 마산시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며 현재의 진해시에는 조선시대 웅천현이 있었다. 현재 진해시 중심부는 일제 강점기 이후에 도시화된 지역이며 웅천현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이다. 지금 남문동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웅천의 관할 범위는 현재의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의 남쪽 가덕도에 해당한다. 지도 위쪽에 웅암산으로 표기된 웅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바다는 진해만이 여러 섬들이 그려졌는데 오른쪽 아래의 가장 큰 섬이 가덕도이다. 읍치는 직사각형으로 읍성을 그렸는데 성문을 연결하는 도로에 의해 성 안 지역이 네 구역으로 나누어지며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북쪽에 배치됨을 볼 수 있다. 전통적 읍성 안의 배치구도를 볼 수 있는 지도이다. 읍치 동남쪽에 표시된 倭城은 184.3m의 남산에 만들어진 웅천왜성이다. 이 외에도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북쪽 240.7m의 자마산에도 왜성이 있었다. 오른쪽 위의 성흥사는 지금도 진해시 대장동에 남아있다. 그 남쪽의 晴川陣은 현재의 진해시 청안동에 있는 것이며 安骨鎭인 안골동에 있었던 진이다. 사적 53호로 지정된 안골성지가 있는 곳이다. 바다를 접하고 있어 군사적 목적의 鎭堡가 많이 설치되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덕도에는 天城堡, 船所, 烽臺 등이 보이는데 봉대는 459.4m의 연대봉에 있던 것이며 천성보는 지금 천성진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곳곳에 농사를 위한 제언, 창고, 도로, 역원이 그려졌다.(이현군)

  • 진도군 주기 (珍島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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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 진도군은 “道海 가운데에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 지도를 보면 섬 인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서남해에 있는 진도군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며 현재의 진도읍 성내리가 읍치 지역이며 읍성 왼쪽에 표시된 향교가 교동리에 있었다. 읍성 오른쪽 위에 古城基, 고군내면 등이 표시되었는데 현재의 고군면 일대이다. 고군면에 고성리 지명과 용장산성이 남아있다. 진산은 嘉興山인데 동국여지승람에 “군의 治所가 가흥의 땅이므로 산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적혔는데 고군내면에서 치소가 지도의 중심부 지역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남쪽의 임회면은 임회폐현이 있던 곳이다. 읍성 이외에 남쪽에 두 개의 성이 그려졌다. 왼쪽의 남도진은 현재의 임회면 남동리의 남도석성으로 남아있는 곳으로 수군만호가 있던 南桃浦營이다. 오른쪽의 금갑진은 현재의 의신면 금갑리 일대로 수군만호가 있던 金甲島營이다. 그 북쪽 金島 근처가 썰물 때 바다가 드러나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간조육계도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벽파정은 고군면 벽파리에 있던 누정이며 근처에 이충무공 전적비가 있다. 고도진 위쪽에 목장면 지명이 보이는데 지력산 일대에 牧場이 있었다. 현재의 지산면에 관마리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 북쪽이 진도개가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된 지역이다. 읍치 동쪽의 鳳凰書院은 해동지도에는 鳳岩書院으로 표시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海倉, 船所 등이 보인다.(이현군)

  • 의주부 주기 (義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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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義州府〉로, 지금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의주군, 피현군, 천마군 서북쪽, 삭주군 청수 서남쪽 일대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규장각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의주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이들은 표현 양식과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해동지도》의 의주부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해동지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의 경우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을 훨씬 길게 그렸지만 본 지도에서는 남북과 동서를 비슷하게 그렸다. 하천의 유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명 부분에 있어서는 《광여도》와 《여지도》보다 《해동지도》가 地誌 부분에 충실하게 표시하고 있으며, 본 지도의 겨우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의 於骨山은 松骨山을, 獜川鎭은 獜山鎭을 잘못 옮긴 것이며, 이런 지명은 이외에도 많다. 《광여도》에서는 본 지도에서 잘못 옮긴 것을 상당히 교정해 놓았다. 본 지도의 경우 獜山鎭은 《광여도》와 같이 표기하고 있으나, 松骨山의 경우에는 산은 그려져 있으나, 지명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 비해 정보가 추가된 곳은 읍치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건물수가 4개 였으나, 본 지도에서는 7개로 늘어났고, 鄕社堂, 凝香堂이란 지명이 추가되어 있다. 《광여도》에서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더 크게 묘사하였으며, 鄕社堂이 鄕射堂으로 바뀌어 있다.(양윤정)

  • 평강현 주기 (平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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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평강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강현은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에 해당된다. 지금의 평강읍 동변리에 소재한 읍치를 지도의 중앙 아래 부분에 四寬亭과 함께 묘사하였다. 동쪽의 강원도 회양, 금성, 김화와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여러 하천이 이곳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북쪽의 古揷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에 해당되며, 이후 북쪽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과 합류한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한탄강 상류에 해당된다. 북쪽 산지의 분수령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하천은 평안강에 해당되며, 임진강의 상류부이다. 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고미탄천인 것으로 추정된다. 분수령은 넘어 안변쪽으로 북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남대천으로 안변에서 동해로 유입한다.(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강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 김화와 이어지는 도로는 赤礗院을 지나고, 회양으로 가는 길은 松古介를 거친다. 철원과 연결되는 도로는 裁松院을 지난다. 서로는 玉洞驛을 거쳐 이천으로 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북으로 안변으로 이어지는 길은 평안강 연변을 지나 천령을 거치는 길과 분수령을 거치는 삼방로가 표현되어 있다. 주기에는 이 도로의 험준함을 설명하고 있다. 이면 주기에 民戶 3,936戶, 田 406結71負4束, 畓 8結11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영위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충주목 주기 (忠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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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목은 상모면을 제외한 충주시 전체,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음성군 전체, 괴산군 감물면과 불정면, 제천시 덕산면 전체와 한수면의 송계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충주 시내의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높은 산을 등진 읍성의 입지 방향을 고려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 본류이며, 오른쪽 아래에서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달천강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충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상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우선 읍성 아래쪽의 利安面 왼쪽에 《해동지도》에는 堯渡川이라는 지명과 하천이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없다. 이 점에서 참조되는 것이 《해동지도》의 충주목 지도에 붙여져 있는 첨지인데, 이 첨지에는 “德周寺, 朴達山, 十老峯山, 靑龍山, 堯渡川, 陰城川은 備圖(비변사 소장 지도)에는 있지만 이 지도에는 없어 필사하여 그려넣는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실제로 《해동지도》에는 앞의 첨지에서 언급되어 있는 지명과 하천이 모두 표시되어 있는데 반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는 모두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여기서의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해동지도》 자체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지 않은 것이 거의 분명하며, 《해동지도》 이외의 원본 계통이 따로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알 수 있는 또다른 부분이 본 지도의 읍성 내에 있는 창고 2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해동지도》가 원본 중에서 일부를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밖에 왼쪽 위에는 加次山面이 면의 명칭을 오해할 수 있게 적혀 있고, 도로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당히 조악하게 표시되어 있어 필사자가 정밀하게 필사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이기봉)

  • 의령현 (宜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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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 일대가 되며 조선시대 합천군에 속했던 궁유면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이 조선시대 의령현이다. 속현으로 新繁縣을 두었는데 북쪽 초계와의 경계 지점에 있던 것으로 현재의 봉수면 신반리 일대에 해당한다. 그 옆의 낙서면은 현재에도 그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읍치의 성곽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통로라는 의미로 성문이 있던 곳에는 빈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읍성을 이런 형태로 그리는 것은 경상도 지도에 잘 드러나지 않는 표현방식이다. 그 안에 객사, 아사, 창 등 주요 건물이 보인다. 읍치 뒤쪽에 표시된 덕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 읍성 밖에 향교만 그리고 제단들은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남쪽에 난 도로는 현재의 20번 국도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남강은 동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위쪽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의 정암진은 낙동강의 번창한 포구로 현재의 의령읍 정암리에 해당한다. 바위그림이 크게 그려졌는데 솥처럼 생긴 바위가 강 가운데 서있다. 우리나라 대기업 창업자들이 이 인근에서 출생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읍치 왼쪽아래의 덕곡서원은 1669년(현종 1)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황을 배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 장군의 고향으로 현재 보물 671호로 지정된 곽망우당 유물이 의령읍내에 남아있다.(이현군)

  • 진산군 (珍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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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충청남도에 포함되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에 해당하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추부면, 복수면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읍치는 진산면의 읍내리 일대이며 현재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대둔산을 진산으로 삼았다. 지도 왼쪽에 대둔산과 대둔암이 표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유등천으로 북류하여 대전광역시의 갑천에 합류된다. 읍치 중심부로 연결되는 산줄기보다는 지도 오른쪽 위의 태조대왕태봉 주변의 산세를 풍수적 관념에 기초하여 그렸다. 조선 태조 2년에 이곳에 胎를 봉안하였기 때문에 郡으로 승격하였다. 그 오른쪽의 서대산은 추부면과 군북면의 경계에 있는 903.7m의 산이며 왼쪽의 만인산은 금산군과 대전광역시 하소동 경계에 있는 537.1m의 산이다. 현재 자연휴양림이 있는 곳이다. 읍치 중심부에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다. 조선시대 군현의 읍성 밖에는 사직단, 여단, 성황단, 향교가 배치된다. 지승의 다른 군현 지도에서 제단은 그리지 않아도 향교는 표시해 두는데 이 지도에서는 향교를 표시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비슷한 해동지도와 비교했을 때 읍치 북쪽의 이름없이 그려진 건물이 향교로 추정된다. 진산면 교촌리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객사 동쪽에 요월교가 적혔는데 邀月亭 앞에 있던 교량이다. 읍치 북쪽에 山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표시되지 않았다. 고개, 險隘, 도로만 그리고 삼식원, 요광원, 신창원 등의 역원은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이현군)

  • 자산부 (慈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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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慈山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평성시 대부분 지역, 순천시 서쪽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자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눈에도 알아 볼 수 있는 차이점이 있다. 본 지도는 북쪽이 지도의 상단이지만,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보다 동서를 길게 그렸고, 본 지도는 반대로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이에 따라 《해동지도》에 동서로 길게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지게 되었다. 자산부의 실제 모습은 본 지도처럼 남북이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자세해졌으나, 慈母城의 경우에는 《해동지도》의 모습이 산세를 더 자세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慈母城 의 모습을 매우 간략하게 그리고 있으며, 성곽에 요철 모양도 그리고 있지 않다. 자모산성 안에는 別將所, 將臺, 軍器庫 등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고, 또한 순천창, 순안창, 성천창, 자산 동창 등읍창 등이 위치하였다. 그 남쪽 牛馬城에도 營南倉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성안의 건물 역시 본 지도에는 1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여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성 안의 작은 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성안에 많은 우물을 표현한 것으로 성 안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양윤정)

  • 평창군 (平昌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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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작은 고을이었던 평창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창군은 지금의 평창군 평창읍·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된다. 현재 평창군의 도암면 등은 당시 강릉부에 속하였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평창군은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는 객사, 창, 아사와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되었고, 南大川이 고을을 동쪽으로 감싸 돌아 남류하고 있다. 이 남대천은 남한강 상류의 현재 대화천인 것으로 보이며, 상류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규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우측의 동면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참리천으로 동강 상류에 해당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창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강릉, 원주, 영월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정선으로 가는 길이 추가되어 있다. 정선으로 가는 도로는 읍치에서 味呑峙-平安驛(미탄면 평안리)-星摩嶺을 지난다. 읍치의 남서쪽으로는 藥水驛(지금의 평창읍 약수리)을 거쳐 남면을 지나는 도로가 원주로 이어진다. 읍치 위쪽의 注津橋를 건너 梨峴을 넘어가는 도로는 강릉으로 이어진다. 지금도 이곳에는 주진교가 설치되어 있으며 동리 지명도 주진리이다. 梨峙는 배나무가 있어 뱃재로 불렸다고 한다. 倉은 2곳이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685戶, 田 185結51負9束, 畓 1結78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충청도 총론(忠淸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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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충청도 총론(忠淸道 總論)1면입니다.

  • 의령현 주기 (宜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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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 일대가 되며 조선시대 합천군에 속했던 궁유면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이 조선시대 의령현이다. 속현으로 新繁縣을 두었는데 북쪽 초계와의 경계 지점에 있던 것으로 현재의 봉수면 신반리 일대에 해당한다. 그 옆의 낙서면은 현재에도 그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읍치의 성곽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통로라는 의미로 성문이 있던 곳에는 빈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읍성을 이런 형태로 그리는 것은 경상도 지도에 잘 드러나지 않는 표현방식이다. 그 안에 객사, 아사, 창 등 주요 건물이 보인다. 읍치 뒤쪽에 표시된 덕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 읍성 밖에 향교만 그리고 제단들은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남쪽에 난 도로는 현재의 20번 국도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남강은 동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위쪽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의 정암진은 낙동강의 번창한 포구로 현재의 의령읍 정암리에 해당한다. 바위그림이 크게 그려졌는데 솥처럼 생긴 바위가 강 가운데 서있다. 우리나라 대기업 창업자들이 이 인근에서 출생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읍치 왼쪽아래의 덕곡서원은 1669년(현종 1)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황을 배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 장군의 고향으로 현재 보물 671호로 지정된 곽망우당 유물이 의령읍내에 남아있다.(이현군)

  • 진산군 주기 (珍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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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충청남도에 포함되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에 해당하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추부면, 복수면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읍치는 진산면의 읍내리 일대이며 현재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대둔산을 진산으로 삼았다. 지도 왼쪽에 대둔산과 대둔암이 표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유등천으로 북류하여 대전광역시의 갑천에 합류된다. 읍치 중심부로 연결되는 산줄기보다는 지도 오른쪽 위의 태조대왕태봉 주변의 산세를 풍수적 관념에 기초하여 그렸다. 조선 태조 2년에 이곳에 胎를 봉안하였기 때문에 郡으로 승격하였다. 그 오른쪽의 서대산은 추부면과 군북면의 경계에 있는 903.7m의 산이며 왼쪽의 만인산은 금산군과 대전광역시 하소동 경계에 있는 537.1m의 산이다. 현재 자연휴양림이 있는 곳이다. 읍치 중심부에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다. 조선시대 군현의 읍성 밖에는 사직단, 여단, 성황단, 향교가 배치된다. 지승의 다른 군현 지도에서 제단은 그리지 않아도 향교는 표시해 두는데 이 지도에서는 향교를 표시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비슷한 해동지도와 비교했을 때 읍치 북쪽의 이름없이 그려진 건물이 향교로 추정된다. 진산면 교촌리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객사 동쪽에 요월교가 적혔는데 邀月亭 앞에 있던 교량이다. 읍치 북쪽에 山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표시되지 않았다. 고개, 險隘, 도로만 그리고 삼식원, 요광원, 신창원 등의 역원은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이현군)

  • 자산부 주기 (慈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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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慈山府〉로, 현재의 평안남도 평성시 대부분 지역, 순천시 서쪽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자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의 일부분이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눈에도 알아 볼 수 있는 차이점이 있다. 본 지도는 북쪽이 지도의 상단이지만,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해동지도》는 남북보다 동서를 길게 그렸고, 본 지도는 반대로 남북을 동서보다 길게 그렸다. 이에 따라 《해동지도》에 동서로 길게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에서는 남북으로 길게 그려지게 되었다. 자산부의 실제 모습은 본 지도처럼 남북이 더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의 정보가 자세해졌으나, 慈母城의 경우에는 《해동지도》의 모습이 산세를 더 자세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慈母城 의 모습을 매우 간략하게 그리고 있으며, 성곽에 요철 모양도 그리고 있지 않다. 자모산성 안에는 別將所, 將臺, 軍器庫 등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고, 또한 순천창, 순안창, 성천창, 자산 동창 등읍창 등이 위치하였다. 그 남쪽 牛馬城에도 營南倉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성안의 건물 역시 본 지도에는 13개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여지도》에는 총 10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성 안의 작은 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성안에 많은 우물을 표현한 것으로 성 안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양윤정)

  • 평창군 주기 (平昌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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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작은 고을이었던 평창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창군은 지금의 평창군 평창읍·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된다. 현재 평창군의 도암면 등은 당시 강릉부에 속하였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평창군은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는 객사, 창, 아사와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되었고, 南大川이 고을을 동쪽으로 감싸 돌아 남류하고 있다. 이 남대천은 남한강 상류의 현재 대화천인 것으로 보이며, 상류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규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우측의 동면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참리천으로 동강 상류에 해당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창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강릉, 원주, 영월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정선으로 가는 길이 추가되어 있다. 정선으로 가는 도로는 읍치에서 味呑峙-平安驛(미탄면 평안리)-星摩嶺을 지난다. 읍치의 남서쪽으로는 藥水驛(지금의 평창읍 약수리)을 거쳐 남면을 지나는 도로가 원주로 이어진다. 읍치 위쪽의 注津橋를 건너 梨峴을 넘어가는 도로는 강릉으로 이어진다. 지금도 이곳에는 주진교가 설치되어 있으며 동리 지명도 주진리이다. 梨峙는 배나무가 있어 뱃재로 불렸다고 한다. 倉은 2곳이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685戶, 田 185結51負9束, 畓 1結78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태안군 (泰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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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군은 안면도의 대부분을 제외한 현재의 태안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태안읍의 남문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태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각 지도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7개의 지명과 각 지점까지의 거리를 제외하면 본 지도에 수록된 지명과 도로 등이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掘項津이 仇郞津으로 표기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한자가 바뀌는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서 오른쪽의 瑞山界로 이어진 육지 부분이 표시되어 있지 않아 마치 섬처럼 그려져 있고, 뒤의 2개 지도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필사자가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이 부분을 교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광여도》의 경우 안면도에 ‘人居四百餘戶’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는데, 이 지도의 필사자가 역시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첨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본 지도책의 충청도 전도인 湖西圖 부분에는 안면도가 엉뚱한 곳에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의 내용과 서로 어긋나고 있어 호서도의 제작자가 군현도를 참조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본 지도에는 北面이 다른 面에 있는 사각형 기호로 표시되어 있지 않고, 遠西面이 遠西村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정교하지 못한 필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이기봉)

  • 의성현 (義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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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성군의 의성읍 도동리, 도서리, 후죽리 일대이며 현재의 의성군 중에서 중앙고속국도의 동쪽 지역이 관할구역과 비슷하다. 중앙고속국도의 서쪽은 비안현, 용궁현의 관할 구역에 포함되었다. 동남쪽의 낙동정맥에서 의성을 둘러싼 산줄기가 뻗어나오기 때문에 하천은 서북쪽으로 흐른다. 읍치 남쪽에 경덕릉이 보이는데 지금도 금성면에 남아있다. 원래 소문국이었던 곳을 신라 경덕왕이 이 지역을 高丘縣으로 고쳤다. 객사에서 경덕릉에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에 해당하며 이와 평행하게 중앙선 철로가 놓였다. 경덕릉 아래 석탑은 금성면 탑리 5층 석탑으로 보물 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 옆에 비봉산이 표시되었는데 인근의 금성산 일대는 화산암 지대이다. 현재의 제오리 일대는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오른쪽의 빙계서원은 춘산면 빙계리에 있던 서원으로 1576년(선조 9) 에 賜額받았다. 이 지도에서도 빙산, 빙계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지금은 빙계계곡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여름에도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읍치에는 누각과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건물을 행랑처럼 연이어 그린 점이 이채롭다. 읍치 오른쪽에는 충렬사를 그리고 그 설명을 길게 붙였다. 洪儒와 金洪術를 모신 곳으로 왕건을 도운 고려의 개국공신들이다. 이 밖에 향교, 봉수대, 창, 누대, 사찰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진안현 (鎭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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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진안군에서 진안읍, 부귀면, 상전면, 마령면, 백운면, 성수면 일대의 범위를 관할한 군현이다. 진안읍의 군상리, 군하리 일대가 읍치 지역이다. 읍치의 동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진안천으로 금강의 상류가 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長水下流라고 적혔는데 남쪽 장수현에서 나온 하천이 금강의 최상류가 되며 북쪽으로 흘러간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섬진강 수계에 해당하며 남쪽으로 흘러간다. 읍치 남쪽에 크게 그려진 두개의 봉우리가 마이산이다. 湧出峯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조선 태종이 南幸하여 제사를 지내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고 馬耳山으로 이름 붙였다. 그 안의 돌탑이 유명하며 탑사, 금당사, 은수사 등의 사찰이 있으며 마이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마이산 아래에 마령면이 적혔는데 지금도 마령면으로 불린다. 馬靈廢縣이 있던 곳이다. 진안현의 진산이 되는 곳은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806.4m의 富貴山이다. 향교와 객사는 지형적으로 분리되게 그렸다. 연달아 산줄기를 그려 맥세를 표현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는데 객사보다 향교에 부귀산의 맥이 더 잘 연결되는 것처럼 그렸다. 역원을 표시하지 않고 도로와 고개만 그렸는데 해동지도에서는 역원을 표시하였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사이의 고원지대에 속하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규보의 글을 인용하여 “馬靈과 鎭安 山谷 사이의 고읍으로 백성이 소박하다”고 기록하였다.(이현군)

  • 장련현 (長連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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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은율군의 동북쪽 절반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은율군의 장련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크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은 모두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해동지도》에는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에 옅은 남색을 칠해 넣어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동쪽과 서북쪽 일부에만 옅은 남색을 칠하여 나머지 지역은 육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북쪽에 기록된 三和界에서 三和는 대동강과 서해가 만나는 넓은 물을 건너 있는 평안도의 고을이기 때문에 도별도를 약간만 검토해도 이 부분이 바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서는 이중 서북쪽 부분이 분명하게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고, 동북쪽 부분도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광여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더 심해져 동북쪽 부분에도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해동지도》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분에 대한 최초의 오해 가능성은 본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만들어냈으며, 이러한 오해 가능성이 《여지도》나 《광여도》에 가면서 실제로 큰 오류로 전화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오류의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지도의 필사자들이 지도 위의 정보를 다른 자료와 검토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지도 전문가라기보다는 지도를 그림으로 인식한 화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이기봉)

  • 평해군 (平海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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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당시 강원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평해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해군은 당시 강원도 동해안의 최남단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후포면·온정면·기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지금의 평해읍 평해리 일대이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鎭山은 釜谷山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지도에서는 그려져 있지 않다. 성곽(둘레 2,120尺)과 함께 읍치를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을 연두색으로 표현하였다. 읍치를 중심으로 남북에 2곳의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남쪽의 하천은 지금의 평해 남대천이며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정명천이다. 황보천은 묘사가 생략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해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조선후기 서울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9대로 중에서 서울과 平海를 연결하는 길이 제 3大路에 해당하였다. 백두대간의 珠嶺, 三乘嶺, 元水項 등의 고개를 넘어 서쪽의 寧越, 英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며, 이면의 주기에서는 이들이 험준한 도로임을 서술하고 있다. 남으로 寧海로 이어지는 도로가 내륙에 남대천을 건너 내륙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북으로 蔚珍으로 통하는 대로로 望洋亭(지도에는 望津亭으로 표시)을 거쳐 가는 경로와 鳥峴을 거쳐 내륙으로 가는 경로가 함께 그려져 있다. 한편 월송포 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新立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448戶, 田 485結48負1束, 畓 387結50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태안군 주기 (泰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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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군은 안면도의 대부분을 제외한 현재의 태안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태안읍의 남문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태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각 지도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 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7개의 지명과 각 지점까지의 거리를 제외하면 본 지도에 수록된 지명과 도로 등이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掘項津이 仇郞津으로 표기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한자가 바뀌는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에서 오른쪽의 瑞山界로 이어진 육지 부분이 표시되어 있지 않아 마치 섬처럼 그려져 있고, 뒤의 2개 지도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필사자가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이 부분을 교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광여도》의 경우 안면도에 ‘人居四百餘戶’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는데, 이 지도의 필사자가 역시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첨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본 지도책의 충청도 전도인 湖西圖 부분에는 안면도가 엉뚱한 곳에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의 내용과 서로 어긋나고 있어 호서도의 제작자가 군현도를 참조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본 지도에는 北面이 다른 面에 있는 사각형 기호로 표시되어 있지 않고, 遠西面이 遠西村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정교하지 못한 필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이기봉)

  • 의성현 주기 (義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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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성군의 의성읍 도동리, 도서리, 후죽리 일대이며 현재의 의성군 중에서 중앙고속국도의 동쪽 지역이 관할구역과 비슷하다. 중앙고속국도의 서쪽은 비안현, 용궁현의 관할 구역에 포함되었다. 동남쪽의 낙동정맥에서 의성을 둘러싼 산줄기가 뻗어나오기 때문에 하천은 서북쪽으로 흐른다. 읍치 남쪽에 경덕릉이 보이는데 지금도 금성면에 남아있다. 원래 소문국이었던 곳을 신라 경덕왕이 이 지역을 高丘縣으로 고쳤다. 객사에서 경덕릉에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에 해당하며 이와 평행하게 중앙선 철로가 놓였다. 경덕릉 아래 석탑은 금성면 탑리 5층 석탑으로 보물 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 옆에 비봉산이 표시되었는데 인근의 금성산 일대는 화산암 지대이다. 현재의 제오리 일대는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오른쪽의 빙계서원은 춘산면 빙계리에 있던 서원으로 1576년(선조 9) 에 賜額받았다. 이 지도에서도 빙산, 빙계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지금은 빙계계곡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여름에도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읍치에는 누각과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건물을 행랑처럼 연이어 그린 점이 이채롭다. 읍치 오른쪽에는 충렬사를 그리고 그 설명을 길게 붙였다. 洪儒와 金洪術를 모신 곳으로 왕건을 도운 고려의 개국공신들이다. 이 밖에 향교, 봉수대, 창, 누대, 사찰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진안현 주기 (鎭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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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진안군에서 진안읍, 부귀면, 상전면, 마령면, 백운면, 성수면 일대의 범위를 관할한 군현이다. 진안읍의 군상리, 군하리 일대가 읍치 지역이다. 읍치의 동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진안천으로 금강의 상류가 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長水下流라고 적혔는데 남쪽 장수현에서 나온 하천이 금강의 최상류가 되며 북쪽으로 흘러간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섬진강 수계에 해당하며 남쪽으로 흘러간다. 읍치 남쪽에 크게 그려진 두개의 봉우리가 마이산이다. 湧出峯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조선 태종이 南幸하여 제사를 지내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고 馬耳山으로 이름 붙였다. 그 안의 돌탑이 유명하며 탑사, 금당사, 은수사 등의 사찰이 있으며 마이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마이산 아래에 마령면이 적혔는데 지금도 마령면으로 불린다. 馬靈廢縣이 있던 곳이다. 진안현의 진산이 되는 곳은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806.4m의 富貴山이다. 향교와 객사는 지형적으로 분리되게 그렸다. 연달아 산줄기를 그려 맥세를 표현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는데 객사보다 향교에 부귀산의 맥이 더 잘 연결되는 것처럼 그렸다. 역원을 표시하지 않고 도로와 고개만 그렸는데 해동지도에서는 역원을 표시하였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사이의 고원지대에 속하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규보의 글을 인용하여 “馬靈과 鎭安 山谷 사이의 고읍으로 백성이 소박하다”고 기록하였다.(이현군)

  • 장련현 주기 (長連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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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은율군의 동북쪽 절반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은율군의 장련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크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은 모두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해동지도》에는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에 옅은 남색을 칠해 넣어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동쪽과 서북쪽 일부에만 옅은 남색을 칠하여 나머지 지역은 육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북쪽에 기록된 三和界에서 三和는 대동강과 서해가 만나는 넓은 물을 건너 있는 평안도의 고을이기 때문에 도별도를 약간만 검토해도 이 부분이 바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서는 이중 서북쪽 부분이 분명하게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고, 동북쪽 부분도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광여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더 심해져 동북쪽 부분에도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해동지도》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분에 대한 최초의 오해 가능성은 본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만들어냈으며, 이러한 오해 가능성이 《여지도》나 《광여도》에 가면서 실제로 큰 오류로 전화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오류의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지도의 필사자들이 지도 위의 정보를 다른 자료와 검토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지도 전문가라기보다는 지도를 그림으로 인식한 화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이기봉)

  • 평해군 주기 (平海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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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당시 강원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평해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해군은 당시 강원도 동해안의 최남단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후포면·온정면·기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지금의 평해읍 평해리 일대이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鎭山은 釜谷山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지도에서는 그려져 있지 않다. 성곽(둘레 2,120尺)과 함께 읍치를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을 연두색으로 표현하였다. 읍치를 중심으로 남북에 2곳의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남쪽의 하천은 지금의 평해 남대천이며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정명천이다. 황보천은 묘사가 생략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해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조선후기 서울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9대로 중에서 서울과 平海를 연결하는 길이 제 3大路에 해당하였다. 백두대간의 珠嶺, 三乘嶺, 元水項 등의 고개를 넘어 서쪽의 寧越, 英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며, 이면의 주기에서는 이들이 험준한 도로임을 서술하고 있다. 남으로 寧海로 이어지는 도로가 내륙에 남대천을 건너 내륙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북으로 蔚珍으로 통하는 대로로 望洋亭(지도에는 望津亭으로 표시)을 거쳐 가는 경로와 鳥峴을 거쳐 내륙으로 가는 경로가 함께 그려져 있다. 한편 월송포 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新立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448戶, 田 485結48負1束, 畓 387結50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평택현 (平澤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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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현은 도두리, 신대리, 노양리, 본정리를 제외한 평택시 팽성읍에 걸쳐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에 속해 있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팽성읍의 객사리에 있었는데, 현재 객사와 향교가 보존되어 있다. 산줄기 형식으로 그려 마치 산이 많은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산이 거의 없는 평지이다. 오른쪽에서 위쪽을 돌아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안성천 본류이며, 왼쪽의 넓은 바다 부분이 아산만이다. 안성천의 본류는 현재의 안성시에서 발원하여 평택현에 이르러 아산만과 만남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안성천은 평택현 북쪽에서 진위천과 합류함에도 이런 사실이 그려져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평택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며, 《해동지도》는 읍치의 건물 수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이기봉)

  • 의흥현 (義興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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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북 군위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 일대이다. 현재의  의흥면, 부계면, 산성면, 우보면, 고로면 일부, 효령면 일부가 관할 구역이었다. 읍치 동쪽의 용두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왼쪽의 하천은 위천으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없이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다. 객사 건물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크게 만들어졌음을 볼 수 있다. 왼쪽에 舊鄕校가 표시되고 오른쪽에 향교가 그려졌는데 향교가 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 縣內面과 縣倉이 그려졌는데 의흥현의 속현이었던 缶溪縣의 중심지 였던 곳이다. 地乘 지도의 다른 군현지도에는 잘 그려지지 않은 제단들이 표시되었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제단, 성황단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성문, 장대, 사찰이 그려진 산성이 보인다. 현재의 산성면에 위치한 華山城이다. 그 아래에 칠곡과의 경계, 신령현과 경계가 적혀 있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남쪽에 팔공산 도립공원이 위치한다. 팔공산 도립공원 안에 칠곡의 읍치였던 가산산성이 있는데 이 지도에 나온 산성과는 다른 것이다. 곳곳에 봉수대가 보이는데 명칭과 위치를 자세히 표시하였다. 도로를 그리고 경로상의 역원을 표시하였다. 우곡역은 현재의 우보면 모산리에 있던 역이다. 고종 때 폐지되었다.(이현군)

  • 창평현 (昌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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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담양군 창평면, 수북면, 고서면, 남면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는 지역이다. 호남고속국도 창평 인터체인지 북쪽의 창평리는 18세기 말에 읍치가 된 지역이며 이전의 읍치는 고서면 고읍리 일대이다. 고읍리에 구읍과 창평 지명이 남아있다. 읍치 지역에는 성곽, 객사도 없이 衙와 倉만 그려져 있다. 고읍리에 객사가 있었으며 향교는 고서면 교산리에 있었다. 지승 고지도는 일반적으로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졌는데 이 지도는 해동지도와 부분적으로 다르다. 해동지도에는 현내면 오른쪽에 南面과 장단원, 방아치, 진렴산 등이 그려졌다. 남면의 위치가 서로 다르게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산들은 회화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왼쪽에 무등산이 보인다. 광주광역시와 담양군의 경계에 위치한 무등산도립공원지역이다. 그 오른쪽에 瀟洒亭은 현재의 남면에 위치한 사적 304호 소쇄원이다. 장원봉은 옆에 그려진 식영정은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왼쪽의 증암천은 북쪽으로 흘러 영산강에 유입된다. 소쇄원과 식영정 서쪽은 현재 광주댐의 건설로 인해 광주호가 들어서 있다. 읍치 북쪽의 이름없는 서원은 松江書院으로 1706년(숙종 32)에 사액받았으며 정철을 배향하였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을 그려넣지 않았다.(이현군)

  • 장연부 (長淵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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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현은 인천직할시의 백령면,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장연군, 룡연군, 태탄군의 서쪽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연군의 장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과 수록된 내용에서 일부 달라지는 측면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첫째, 바다에 대한 표현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서쪽과 서남쪽이 탁 트인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마치 호수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서쪽에 西大海라는 문구가 있어 바다임을 알 수는 있지만 이 문구가 없다면 바다임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표현은 그림식 지도에서 가끔 나타나고 있는데, 표현하고자 하는 지역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추정된다. 둘째, 《해동지도》는 동서가 길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이 길게 그려져 있다. 실제의 장연현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길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세로가 긴 종이에 맞추기 위해 남북을 길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원본 계통은 《해동지도》에 가깝지만 후에 필사 과정에서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형식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필사 과정에서 일부 한자가 달라지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지도 아래쪽에 新鎭과 旧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五叉鎭을 의미하며 鎭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新鎭이 新津으로 바뀌어 있다. 이런 지명 중의 하나로 아래쪽의 乃沙陸(島)가 있는데, 역시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나머지 2개 지도에는 乃沙島로 바뀌어 있다. 또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하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약간 다르면서 서로 비슷하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와 다른 필사본 계통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계통 내에서도 일부 달라지는 지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함경도 (咸鏡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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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전체 지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각 군현 지도의 첫머리에 그려져 삽입되었으며 지도의 윤곽은 다른 도별 지도들과 유사하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감영과 행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鎭堡는 분홍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 양강지대에 많이 분포한다. 해안은 실제 모습보다 복잡하게 그려졌다. 이는 해안에 유입하는 하천과 동해안에 형성된 석호 등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이다. 赤島 등 8개의 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 최북단에 위치하여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다른 도별 지도와는 달리 관방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표현되었다. 지도의 위쪽에 백두산을 天池(‘大澤’)와 함께 실경으로 표시하였고 그 아래에 백두산 정계비와 목책을 표현하였다. 두만강의 유로와는 별도로 土門江이 발원지와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중국 영토에서 分界江이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 영토내의 하천 유로와 일부 지명들이 기재되어 있어 지도 제작 당시 압록강·두만강이 국경하천보다는 생활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에 유입하는 지류들로 朴下川등의 유로들이 상세히 표현되었고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등 5개 군현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압록강에 유입하는 지류로 장전강의 모습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으며 삼수, 갑산부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안에는 경흥 등의 16개 군현의 위치가 하천과 함께 그려져 있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이 적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고 특히 『해동지도』에서 점선으로 표현되던 백두산 일대의 도로망이 이 지도에서는 실선으로 표시되는 것이 독특하다. 지도책의 제일 앞부분에 강원도와 함께 함경도의 역사지리 내용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김기혁)

  • 평택현 주기 (平澤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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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현은 도두리, 신대리, 노양리, 본정리를 제외한 평택시 팽성읍에 걸쳐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에 속해 있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팽성읍의 객사리에 있었는데, 현재 객사와 향교가 보존되어 있다. 산줄기 형식으로 그려 마치 산이 많은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산이 거의 없는 평지이다. 오른쪽에서 위쪽을 돌아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안성천 본류이며, 왼쪽의 넓은 바다 부분이 아산만이다. 안성천의 본류는 현재의 안성시에서 발원하여 평택현에 이르러 아산만과 만남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안성천은 평택현 북쪽에서 진위천과 합류함에도 이런 사실이 그려져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평택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며, 《해동지도》는 읍치의 건물 수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이기봉)

  • 의흥현 주기 (義興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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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북 군위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 일대이다. 현재의  의흥면, 부계면, 산성면, 우보면, 고로면 일부, 효령면 일부가 관할 구역이었다. 읍치 동쪽의 용두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왼쪽의 하천은 위천으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없이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다. 객사 건물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크게 만들어졌음을 볼 수 있다. 왼쪽에 舊鄕校가 표시되고 오른쪽에 향교가 그려졌는데 향교가 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 縣內面과 縣倉이 그려졌는데 의흥현의 속현이었던 缶溪縣의 중심지 였던 곳이다. 地乘 지도의 다른 군현지도에는 잘 그려지지 않은 제단들이 표시되었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제단, 성황단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성문, 장대, 사찰이 그려진 산성이 보인다. 현재의 산성면에 위치한 華山城이다. 그 아래에 칠곡과의 경계, 신령현과 경계가 적혀 있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남쪽에 팔공산 도립공원이 위치한다. 팔공산 도립공원 안에 칠곡의 읍치였던 가산산성이 있는데 이 지도에 나온 산성과는 다른 것이다. 곳곳에 봉수대가 보이는데 명칭과 위치를 자세히 표시하였다. 도로를 그리고 경로상의 역원을 표시하였다. 우곡역은 현재의 우보면 모산리에 있던 역이다. 고종 때 폐지되었다.(이현군)

  • 창평현 주기 (昌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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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담양군 창평면, 수북면, 고서면, 남면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는 지역이다. 호남고속국도 창평 인터체인지 북쪽의 창평리는 18세기 말에 읍치가 된 지역이며 이전의 읍치는 고서면 고읍리 일대이다. 고읍리에 구읍과 창평 지명이 남아있다. 읍치 지역에는 성곽, 객사도 없이 衙와 倉만 그려져 있다. 고읍리에 객사가 있었으며 향교는 고서면 교산리에 있었다. 지승 고지도는 일반적으로 해동지도와 유사하게 그려졌는데 이 지도는 해동지도와 부분적으로 다르다. 해동지도에는 현내면 오른쪽에 南面과 장단원, 방아치, 진렴산 등이 그려졌다. 남면의 위치가 서로 다르게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산들은 회화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왼쪽에 무등산이 보인다. 광주광역시와 담양군의 경계에 위치한 무등산도립공원지역이다. 그 오른쪽에 瀟洒亭은 현재의 남면에 위치한 사적 304호 소쇄원이다. 장원봉은 옆에 그려진 식영정은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왼쪽의 증암천은 북쪽으로 흘러 영산강에 유입된다. 소쇄원과 식영정 서쪽은 현재 광주댐의 건설로 인해 광주호가 들어서 있다. 읍치 북쪽의 이름없는 서원은 松江書院으로 1706년(숙종 32)에 사액받았으며 정철을 배향하였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을 그려넣지 않았다.(이현군)

  • 장연부 주기 (長淵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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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현은 인천직할시의 백령면,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장연군, 룡연군, 태탄군의 서쪽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연군의 장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과 수록된 내용에서 일부 달라지는 측면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첫째, 바다에 대한 표현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서쪽과 서남쪽이 탁 트인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마치 호수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서쪽에 西大海라는 문구가 있어 바다임을 알 수는 있지만 이 문구가 없다면 바다임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표현은 그림식 지도에서 가끔 나타나고 있는데, 표현하고자 하는 지역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추정된다. 둘째, 《해동지도》는 동서가 길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이 길게 그려져 있다. 실제의 장연현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길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세로가 긴 종이에 맞추기 위해 남북을 길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원본 계통은 《해동지도》에 가깝지만 후에 필사 과정에서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형식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필사 과정에서 일부 한자가 달라지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지도 아래쪽에 新鎭과 旧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五叉鎭을 의미하며 鎭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新鎭이 新津으로 바뀌어 있다. 이런 지명 중의 하나로 아래쪽의 乃沙陸(島)가 있는데, 역시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나머지 2개 지도에는 乃沙島로 바뀌어 있다. 또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하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약간 다르면서 서로 비슷하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와 다른 필사본 계통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계통 내에서도 일부 달라지는 지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함경도 주기 (咸鏡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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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전체 지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각 군현 지도의 첫머리에 그려져 삽입되었으며 지도의 윤곽은 다른 도별 지도들과 유사하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감영과 행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鎭堡는 분홍색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 양강지대에 많이 분포한다. 해안은 실제 모습보다 복잡하게 그려졌다. 이는 해안에 유입하는 하천과 동해안에 형성된 석호 등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이다. 赤島 등 8개의 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 최북단에 위치하여 청나라와 접하고 있어 다른 도별 지도와는 달리 관방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표현되었다. 지도의 위쪽에 백두산을 天池(‘大澤’)와 함께 실경으로 표시하였고 그 아래에 백두산 정계비와 목책을 표현하였다. 두만강의 유로와는 별도로 土門江이 발원지와 함께 그려져 있으며 지금의 중국 영토에서 分界江이 두만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 영토내의 하천 유로와 일부 지명들이 기재되어 있어 지도 제작 당시 압록강·두만강이 국경하천보다는 생활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에 유입하는 지류들로 朴下川등의 유로들이 상세히 표현되었고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등 5개 군현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압록강에 유입하는 지류로 장전강의 모습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으며 삼수, 갑산부가 표시되어 있다. 동해안에는 경흥 등의 16개 군현의 위치가 하천과 함께 그려져 있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이 적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고 특히 『해동지도』에서 점선으로 표현되던 백두산 일대의 도로망이 이 지도에서는 실선으로 표시되는 것이 독특하다. 지도책의 제일 앞부분에 강원도와 함께 함경도의 역사지리 내용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김기혁)

  • 한산군 (韓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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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군은 서천군의 한산면, 화양면, 기산면, 마산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한산면의 지현리 일대에 있었다. 아래의 오른쪽에서 흘러와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다. 한산군의 전체적인 모습은 북쪽으로 犬牙相入地가 길게 뻗어나간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기 위해 이 부분이 밋밋하게 처리되었다. 지도에서는 北面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鴻山界에서 麒麟山까지 좁고 길게 처리되어야 실제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한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九時橋와 新谷驛는 본 지도에 없으며, 읍치를 중심으로 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이 바뀌어 있는 차이가 있다. 앞의 두 지명이 없다는 점에서 뒤의 2개 지도도 동일하지만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다. 즉, 《여지도》의 산줄기 표현 방식은 본 지도와 《해동지도》 중간쯤에 해당되며, 《광여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이밖에 오른쪽 아래의 海倉은 한산군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 대동법의 실시 이후 조선전기에 일정 지역의 군현 조세를 모아 함께 한양으로 나르던 漕倉制가 폐지되고 내륙의 일부 군현 이외에는 각 군현이 스스로 전세와 대동미를 한양까지 운반하도록 바뀌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지명이다.(이기봉)

  • 인동부 (仁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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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내의 낙동강 동쪽 지역과 칠곡군 북삼면, 석적면, 기산면, 약목면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구미시내의 동쪽 인의동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인동초등학교를 통해 그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동쪽의 유악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으며 읍치 왼쪽에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이다. 낙동강 동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며 서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과 연결된다. 신라 경덕왕 때 인동이 되었고 현종대에는 경산부에 소속되었다가 공양왕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부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에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인동면 지역은 1978년 구미시에 포함되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진 군현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지도에서 읍치에는 성이 보이지 않고 객사 등 주요 건물이 배치되었고 동쪽에 천생산성(구미시 신동, 금전동)이 자리하고 있다. 본래 신라의 옛 성이었던 것을 의병장 곽재우가 1601년(선조 34)에 외성을 쌓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산성 안에 4개의 못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향교가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낙동강 변에 서원, 나루, 창, 堤, 봉수대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산서원은 길재를 배향한 서원으로 1574년(선조 7)에 세워졌다. 동락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도로와 함께 역을 표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역인 양원역은 구미시 진평동에 있던 것이다.(이현군)

  • 태인현 (泰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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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은 太山郡과 仁義縣이 합쳐져 만들어진 지명으로 1409년(태종 9)에 병합하면서 읍치를 현재의 태인면 태성리로 옮겼다. 호남고속국도 태인인터체인지 동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전의 읍치 였던 곳은 지도에 고현면으로 적힌 곳이다. 지도 중심부에 표시된 지역은 과거 居山驛이 있던 곳으로 이 지도에 거산면으로 표시되었으며 현재 태인면의 거산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왼쪽에 仁義谷面이 표시되었는데 옛 인의현 지역을 나타낸 것이다. 읍치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앞쪽에 연못이 있고 披香亭이 그려졌다. 披香亭은 태인면사무소 동쪽에 위치하며 보물 289호로 지정된 곳이다. 태인현은 현재의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산내면, 산외면, 감곡면, 옹동면, 칠보면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였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동진강으로 지도 왼쪽 아래에 東津이 표시되었다. 읍치 위쪽에 그려진 상두산은 실제로는 읍치 동쪽에 위치하며 김제시 금산면과 산외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575.3m의 산이다. 상두산의 맥이 읍치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읍치 뒤쪽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태인의 진산은 죽사산으로 현 북쪽 2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읍치 바로 뒷산이 죽사산으로 추정된다. 풍수적 관념이 산줄기 표현에 반영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武城書院은 칠보면 무성리에 위치한 서원으로 최치원을 배향하였으며 1696년(숙종 22)에 사액받았다. 현재 사적 166호로 지정되었다.(이현군)

  • 재령군 (載寧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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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재령군, 남쪽 일부를 제외한 신원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재령군의 재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재령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천에 대한 표현이다. 남쪽의 海州界에서 흘러와 동쪽을 지나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본류이며, 왼쪽 위의 安岳界에서 흘러와 재령강에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의 표현만을 놓고 보면 재령강이 마치 북쪽으로 흐르다 서쪽의 安岳界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서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과 서강이 北이란 문자가 쓰여 있는 곳에서 분명하게 합류되듯이 그려져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만이 오해할 수 있도록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왼쪽 위에 三橋屯 오른쪽의 하천이다. 이 하천은 현재의 서강 본류로서 신천군에서 흘러 들어와야 한다. 본 지도에서도 이 하천의 끝을 굵게 하여 그런 사실의 일면을 전하고 있지만 산줄기를 그 서쪽에 그려넣어 신천계에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에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사실에 가깝게 그렸다. 다만 《해동지도》에 이 부분의 왼쪽에 積山이라는 작은 봉우리를 그리고 있는데, 후대의 필사자들이 이 봉우리를 아래쪽의 산줄기와 이어 그리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까지 이 오류가 이어지고 있어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아래쪽의 立岩 부근에서도 이러한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린 것은 읍치가 아니라 오른쪽 아래의 장수산성이다. 산성 안에는 白川, 信川, 載寧(本) 등의 군기고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이들 고을의 사람들이 들어와 장기 항전을 하기 위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함관령 (咸關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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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홍원현과 함흥부의 교통로 상에 있던 함관령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함경남도 홍원군과 함주군을 잇는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삽입된 것은 磨天嶺, 磨雲嶺, 서북쪽의 黃草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함경도 북쪽에서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이 경로를 따라 철령을 통해 한양에 이르게 되어 조선시대 관방의 요지였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난다. 지도에서 태백산에서 이어 내려오는 산줄기가 지도의 북에서 남으로 강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곳곳에 고개를 의미하는 岺과 峴 표시가 있다. 산줄기의 좌·우측에 하천을 그렸다. 石乙長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성천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하천은 지금 북한의 함주군에서 발원하여 함흥으로 유입하는 성천강과 동일한 하천으로 추정된다. 가까이에 동해상에 유입하는 소규모의 하천인 湖漣川은 지금도 호련천으로 불리고 있다. 頭無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함관령에서 발원하여 홍원군을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서대천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함관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서를 잇는 2곳의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중 함관령을 지나는 도로는 함흥의 德山驛과 洪原의 咸原驛을 지난다. 지금 이곳에는 홍원읍과 함흥을 잇는 간선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남쪽으로 草古垈岺을 잇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車踰嶺 등 이곳을 지나는 9곳의 고개 위치를 간단히 기재하고 있다. (김기혁)

  • 한산군 주기 (韓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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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군은 서천군의 한산면, 화양면, 기산면, 마산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한산면의 지현리 일대에 있었다. 아래의 오른쪽에서 흘러와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이다. 한산군의 전체적인 모습은 북쪽으로 犬牙相入地가 길게 뻗어나간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기 위해 이 부분이 밋밋하게 처리되었다. 지도에서는 北面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鴻山界에서 麒麟山까지 좁고 길게 처리되어야 실제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한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해동지도》의 첨지에 기록된 九時橋와 新谷驛는 본 지도에 없으며, 읍치를 중심으로 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이 바뀌어 있는 차이가 있다. 앞의 두 지명이 없다는 점에서 뒤의 2개 지도도 동일하지만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다. 즉, 《여지도》의 산줄기 표현 방식은 본 지도와 《해동지도》 중간쯤에 해당되며, 《광여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이밖에 오른쪽 아래의 海倉은 한산군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 대동법의 실시 이후 조선전기에 일정 지역의 군현 조세를 모아 함께 한양으로 나르던 漕倉制가 폐지되고 내륙의 일부 군현 이외에는 각 군현이 스스로 전세와 대동미를 한양까지 운반하도록 바뀌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지명이다.(이기봉)

  • 인동부 주기 (仁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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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내의 낙동강 동쪽 지역과 칠곡군 북삼면, 석적면, 기산면, 약목면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구미시내의 동쪽 인의동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인동초등학교를 통해 그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동쪽의 유악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으며 읍치 왼쪽에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이다. 낙동강 동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며 서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과 연결된다. 신라 경덕왕 때 인동이 되었고 현종대에는 경산부에 소속되었다가 공양왕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부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에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인동면 지역은 1978년 구미시에 포함되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진 군현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지도에서 읍치에는 성이 보이지 않고 객사 등 주요 건물이 배치되었고 동쪽에 천생산성(구미시 신동, 금전동)이 자리하고 있다. 본래 신라의 옛 성이었던 것을 의병장 곽재우가 1601년(선조 34)에 외성을 쌓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산성 안에 4개의 못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향교가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낙동강 변에 서원, 나루, 창, 堤, 봉수대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산서원은 길재를 배향한 서원으로 1574년(선조 7)에 세워졌다. 동락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도로와 함께 역을 표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역인 양원역은 구미시 진평동에 있던 것이다.(이현군)

  • 태인현 주기 (泰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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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은 太山郡과 仁義縣이 합쳐져 만들어진 지명으로 1409년(태종 9)에 병합하면서 읍치를 현재의 태인면 태성리로 옮겼다. 호남고속국도 태인인터체인지 동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전의 읍치 였던 곳은 지도에 고현면으로 적힌 곳이다. 지도 중심부에 표시된 지역은 과거 居山驛이 있던 곳으로 이 지도에 거산면으로 표시되었으며 현재 태인면의 거산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왼쪽에 仁義谷面이 표시되었는데 옛 인의현 지역을 나타낸 것이다. 읍치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앞쪽에 연못이 있고 披香亭이 그려졌다. 披香亭은 태인면사무소 동쪽에 위치하며 보물 289호로 지정된 곳이다. 태인현은 현재의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산내면, 산외면, 감곡면, 옹동면, 칠보면 일대를 관할 범위로 하였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동진강으로 지도 왼쪽 아래에 東津이 표시되었다. 읍치 위쪽에 그려진 상두산은 실제로는 읍치 동쪽에 위치하며 김제시 금산면과 산외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575.3m의 산이다. 상두산의 맥이 읍치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읍치 뒤쪽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태인의 진산은 죽사산으로 현 북쪽 2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읍치 바로 뒷산이 죽사산으로 추정된다. 풍수적 관념이 산줄기 표현에 반영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武城書院은 칠보면 무성리에 위치한 서원으로 최치원을 배향하였으며 1696년(숙종 22)에 사액받았다. 현재 사적 166호로 지정되었다.(이현군)

  • 재령군 주기 (載寧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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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재령군, 남쪽 일부를 제외한 신원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재령군의 재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재령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천에 대한 표현이다. 남쪽의 海州界에서 흘러와 동쪽을 지나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본류이며, 왼쪽 위의 安岳界에서 흘러와 재령강에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의 표현만을 놓고 보면 재령강이 마치 북쪽으로 흐르다 서쪽의 安岳界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서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과 서강이 北이란 문자가 쓰여 있는 곳에서 분명하게 합류되듯이 그려져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만이 오해할 수 있도록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왼쪽 위에 三橋屯 오른쪽의 하천이다. 이 하천은 현재의 서강 본류로서 신천군에서 흘러 들어와야 한다. 본 지도에서도 이 하천의 끝을 굵게 하여 그런 사실의 일면을 전하고 있지만 산줄기를 그 서쪽에 그려넣어 신천계에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에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사실에 가깝게 그렸다. 다만 《해동지도》에 이 부분의 왼쪽에 積山이라는 작은 봉우리를 그리고 있는데, 후대의 필사자들이 이 봉우리를 아래쪽의 산줄기와 이어 그리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까지 이 오류가 이어지고 있어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아래쪽의 立岩 부근에서도 이러한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린 것은 읍치가 아니라 오른쪽 아래의 장수산성이다. 산성 안에는 白川, 信川, 載寧(本) 등의 군기고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이들 고을의 사람들이 들어와 장기 항전을 하기 위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함관령 주기 (咸關嶺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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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홍원현과 함흥부의 교통로 상에 있던 함관령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함경남도 홍원군과 함주군을 잇는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이 지도가 군현지도책에 삽입된 것은 磨天嶺, 磨雲嶺, 서북쪽의 黃草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 일대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함경도 북쪽에서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이 경로를 따라 철령을 통해 한양에 이르게 되어 조선시대 관방의 요지였다. 당시 한양과 함경도 북단의 慶興을 잇는 關北大路가 이곳을 지난다. 지도에서 태백산에서 이어 내려오는 산줄기가 지도의 북에서 남으로 강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곳곳에 고개를 의미하는 岺과 峴 표시가 있다. 산줄기의 좌·우측에 하천을 그렸다. 石乙長岺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성천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하천은 지금 북한의 함주군에서 발원하여 함흥으로 유입하는 성천강과 동일한 하천으로 추정된다. 가까이에 동해상에 유입하는 소규모의 하천인 湖漣川은 지금도 호련천으로 불리고 있다. 頭無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 함관령에서 발원하여 홍원군을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서대천으로 보인다. 일부 회화식 지도와는 달리 함관령 일대의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서를 잇는 2곳의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중 함관령을 지나는 도로는 함흥의 德山驛과 洪原의 咸原驛을 지난다. 지금 이곳에는 홍원읍과 함흥을 잇는 간선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남쪽으로 草古垈岺을 잇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車踰嶺 등 이곳을 지나는 9곳의 고개 위치를 간단히 기재하고 있다. (김기혁)

  • 해미현 (海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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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현은 서산시의 해미면, 여미리 부근의 운산면, 당진군의 정미면과 대호지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해미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해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는 실제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해미현은 1407년(태종 7)에 정해현과 여미면을 합해 하나로 만들면서 각 고을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다가 海美縣을 만들었다. 읍치가 있는 지역이 정미현 지역이었고, 일도면과 이도면 및 서면 지역이 여미현의 지역이었다. 두 지역은 실제로는 따로 떨어져 있어 여미현 지역이 월경지로 존재했지만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을 이해할 수 없도록 그렸다. 정미현 지역과 여미현 지역 사이에는 서산과 덕산 및 홍주의 월경지가 끼어 있었다. 여미현 지역의 서면은 현재의 당진군 대호지면 지역에 있어 읍치에서 가장 먼 거의 정북 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져 있다. 또한 서면과 남면은 지역을 배로 왕복하려면 서산과 태안의 해안을 빙 돌아야 하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마치 서산 땅을 사이에 두고 아주 가까운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아래쪽의 海倉은 해미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며, 선박처는 해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船所였다.(이기봉)

  • 자인현 (慈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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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자인면 원당리 일대가 읍치 지역이었다. 관할범위는 자인면, 용성면, 남산면, 압량면 일부, 진량읍 일부 지역이었다. 압량면과 진량읍의 북쪽 지역은 경산군에 포함된다. 신라 때는 장산군(경산군)의 영현,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637년(조선 인조 15)에 비로소 현감을 두었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산이 등장하지 않는다. 중심부에 성곽 없이 건물만 그려졌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건물의 방향이 다른 경우도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전부 남면하는 점이 이색적이다.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 안에 그린 것이 아니라 읍치에 같이 그렸는데 조선후기에 들어와서야 현으로 승격된 것과 관련될 수도 있겠다. 읍성도 보이지 않고 읍치 남쪽의 하천은 오목천으로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지도 아래에 晦齋觀瀾書院이 표시되었는데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한 서원이다. 晦齋는 이언적의 호이다. 서원 이름 앞에 배향한 인물의 호를 적은 것은 지승 고지도에서 드문 경우이다. 그 옆에는 효자를 旌閭한 문이 표시되었다. 아래쪽의 대왕산은 경산시 남산면과 청도군 금천면 경계에 위치한 605m의 산이다. 면 이름을 다른 지도에서는 네모 안에 표시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곳곳에 사찰이 그려졌다.(이현군)

  • 함열현 (咸悅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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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 황라면, 함열읍, 황등면, 성당면, 웅포면 일대를 관할하던 군현으로 조선 태종대에 잠시 용안현과 합쳐져 安悅縣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곧 분리되었다. 읍치는 함열읍이 아니라 함라면 함열리에 있었다. 지도 중심부에 성곽없이 건물이 그려진 곳이다. 다른 군현지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孔子影堂이 향교 옆에 보인다. 읍치 북쪽의 함라산이 함열의 진산에 해당한다. 비교적 낮은 지대에 해당하지만 읍치 왼쪽으로 산줄기의 연결성을 강조한 맥으로 표현하고 있다. 북쪽의 성당창은 현재의 성당면 성당리에 있던 漕倉으로 용안 득성창의 수로가 막히어 이곳으로 옮겨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였다. 함열현감이 計量을 감독하고 수납하던 곳이다. 왼쪽의 웅포는 웅포면 웅포리의 나루로 한산과 통하는 곳으로 그 아래에는 해창이 있었다. 왼쪽 위에 백마강 하류라고 적혔는데 금강이다. 금강의 상류가 백마강이므로 이렇게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함열천으로 부곡천에 합류되어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유입된다. 지도상에는 위쪽의 두 하천이 분리되어 그려졌지만 오른쪽의 부곡천이 왼쪽의 금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남쪽에 성곽을 반쯤 그리고 용산고성이라고 적었는데 황등면 용산리 일대이다. 호남선 철도 다산역 서쪽에 해당하며 지금 성내일구, 성내이구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石城으로 조선 세종대에 함열현을 이곳으로 옮기기 위해 쌓았으나 실제로 현을 이전하지 못했다.(이현군)

  • 정주목 (定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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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定州牧〉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정주군 전체, 곽산군 당상리 일부, 운전군 장수탄 이남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정주목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이들은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가 비슷한 《해동지도》의 정주목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에는 읍치가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읍치가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그려졌다. 읍치로부터 서쪽(왼쪽)까지의 거리는 동쪽(오른쪽)까지의 거리에 비해 4분의 1정도밖에 안되는데,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그려진 동쪽 부분에는 面이 조밀하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오른쪽에 長水灘이라고 적혀 있는 하천은 실제로는 嘉山과의 경계선 역할을 하였다. 본 지도에도 嘉山界를 하천 옆에 적어놓아 이런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경계선 밖의 부분에도 산줄기를 그려 넣어 실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부분까지도 《광여도》와 《여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안의 모습은 본 지도와 《광여도》는 매우 유사하나 《여지도》의 경우 산맥이 거의 생략되어 있으며 하천의 경우에도 부분적으로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광여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건물이 보이며, 松相堂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양윤정)

  • 함흥부 (咸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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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동해안 성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함흥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함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영광군·신흥군·락원군·장진군, 부전군의 남쪽, 함주군의 동쪽 일대에 해당된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이후 우리나라 영토가 된 곳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이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유적 등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함흥부 해제 참조). 조선시대 함흥부의 모습은 방안식 지도에서는 역삼각형의 형태로 그려지며 이 지도에서도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묘사되었다. 지도의 북동쪽에서 남서류하여 지금의 함흥만으로 유입하는 성천강을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하류 부분에서는 성천강의 지류인 여러 하천의 지명을 乾川, 中川 등으로 표시하였고 竹島, 花島 등 여러 하중도를 그렸다. 성천강 지명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지류로 동성천강, 호련천 등이 있으며 하구에 삼각주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府治를 성천강의 좌안에 묘사하였고, 진산인 城串山은 城串烽으로 지명이 지재되어 있다. 회화식 지도인 『해동지도』에서 읍치의 성곽이 뚜렷한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이 지도에서는 성곽 형태는 그려져 있지 않고, 단지 원으로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면 주기에 성곽의 규모가 14,065尺으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는 德山館을 거쳐 咸關嶺을 지나 咸原驛을 거처 洪原으로 이어진다. 서로는 定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북으로는 성천강변을 따라 그려진 도로가 赴戰嶺을 지나 압록강변의 三水로 이어진다. 북서로는 中山嶺과 長津柵을 잇는 도로가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民戶 14,453戶로 기재되어 있어 당시로서 큰 도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 주요 전각, 面, 倉 등의 위치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김기혁)

  • 해미현 주기 (海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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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현은 서산시의 해미면, 여미리 부근의 운산면, 당진군의 정미면과 대호지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해미면의 읍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해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는 실제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해미현은 1407년(태종 7)에 정해현과 여미면을 합해 하나로 만들면서 각 고을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다가 海美縣을 만들었다. 읍치가 있는 지역이 정미현 지역이었고, 일도면과 이도면 및 서면 지역이 여미현의 지역이었다. 두 지역은 실제로는 따로 떨어져 있어 여미현 지역이 월경지로 존재했지만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을 이해할 수 없도록 그렸다. 정미현 지역과 여미현 지역 사이에는 서산과 덕산 및 홍주의 월경지가 끼어 있었다. 여미현 지역의 서면은 현재의 당진군 대호지면 지역에 있어 읍치에서 가장 먼 거의 정북 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져 있다. 또한 서면과 남면은 지역을 배로 왕복하려면 서산과 태안의 해안을 빙 돌아야 하지만 본 지도만으로는 마치 서산 땅을 사이에 두고 아주 가까운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아래쪽의 海倉은 해미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며, 선박처는 해미현 관할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船所였다.(이기봉)

  • 자인현 주기 (慈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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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자인면 원당리 일대가 읍치 지역이었다. 관할범위는 자인면, 용성면, 남산면, 압량면 일부, 진량읍 일부 지역이었다. 압량면과 진량읍의 북쪽 지역은 경산군에 포함된다. 신라 때는 장산군(경산군)의 영현,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637년(조선 인조 15)에 비로소 현감을 두었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산이 등장하지 않는다. 중심부에 성곽 없이 건물만 그려졌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건물의 방향이 다른 경우도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전부 남면하는 점이 이색적이다.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 안에 그린 것이 아니라 읍치에 같이 그렸는데 조선후기에 들어와서야 현으로 승격된 것과 관련될 수도 있겠다. 읍성도 보이지 않고 읍치 남쪽의 하천은 오목천으로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지도 아래에 晦齋觀瀾書院이 표시되었는데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한 서원이다. 晦齋는 이언적의 호이다. 서원 이름 앞에 배향한 인물의 호를 적은 것은 지승 고지도에서 드문 경우이다. 그 옆에는 효자를 旌閭한 문이 표시되었다. 아래쪽의 대왕산은 경산시 남산면과 청도군 금천면 경계에 위치한 605m의 산이다. 면 이름을 다른 지도에서는 네모 안에 표시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곳곳에 사찰이 그려졌다.(이현군)

  • 함열현 주기 (咸悅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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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 황라면, 함열읍, 황등면, 성당면, 웅포면 일대를 관할하던 군현으로 조선 태종대에 잠시 용안현과 합쳐져 安悅縣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곧 분리되었다. 읍치는 함열읍이 아니라 함라면 함열리에 있었다. 지도 중심부에 성곽없이 건물이 그려진 곳이다. 다른 군현지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孔子影堂이 향교 옆에 보인다. 읍치 북쪽의 함라산이 함열의 진산에 해당한다. 비교적 낮은 지대에 해당하지만 읍치 왼쪽으로 산줄기의 연결성을 강조한 맥으로 표현하고 있다. 북쪽의 성당창은 현재의 성당면 성당리에 있던 漕倉으로 용안 득성창의 수로가 막히어 이곳으로 옮겨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였다. 함열현감이 計量을 감독하고 수납하던 곳이다. 왼쪽의 웅포는 웅포면 웅포리의 나루로 한산과 통하는 곳으로 그 아래에는 해창이 있었다. 왼쪽 위에 백마강 하류라고 적혔는데 금강이다. 금강의 상류가 백마강이므로 이렇게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함열천으로 부곡천에 합류되어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유입된다. 지도상에는 위쪽의 두 하천이 분리되어 그려졌지만 오른쪽의 부곡천이 왼쪽의 금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남쪽에 성곽을 반쯤 그리고 용산고성이라고 적었는데 황등면 용산리 일대이다. 호남선 철도 다산역 서쪽에 해당하며 지금 성내일구, 성내이구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石城으로 조선 세종대에 함열현을 이곳으로 옮기기 위해 쌓았으나 실제로 현을 이전하지 못했다.(이현군)

  • 정주목 주기 (定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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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定州牧〉으로, 현재의 평안북도 정주군 전체, 곽산군 당상리 일부, 운전군 장수탄 이남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정주목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이들은 표현 방식이나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도가 비슷한 《해동지도》의 정주목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에는 읍치가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읍치가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그려졌다. 읍치로부터 서쪽(왼쪽)까지의 거리는 동쪽(오른쪽)까지의 거리에 비해 4분의 1정도밖에 안되는데,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그려진 동쪽 부분에는 面이 조밀하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오른쪽에 長水灘이라고 적혀 있는 하천은 실제로는 嘉山과의 경계선 역할을 하였다. 본 지도에도 嘉山界를 하천 옆에 적어놓아 이런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경계선 밖의 부분에도 산줄기를 그려 넣어 실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부분까지도 《광여도》와 《여지도》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치 안의 모습은 본 지도와 《광여도》는 매우 유사하나 《여지도》의 경우 산맥이 거의 생략되어 있으며 하천의 경우에도 부분적으로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광여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건물이 보이며, 松相堂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양윤정)

  • 함흥부 주기 (咸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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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동해안 성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함흥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함흥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영광군·신흥군·락원군·장진군, 부전군의 남쪽, 함주군의 동쪽 일대에 해당된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이후 우리나라 영토가 된 곳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이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유적 등의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함흥부 해제 참조). 조선시대 함흥부의 모습은 방안식 지도에서는 역삼각형의 형태로 그려지며 이 지도에서도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묘사되었다. 지도의 북동쪽에서 남서류하여 지금의 함흥만으로 유입하는 성천강을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하류 부분에서는 성천강의 지류인 여러 하천의 지명을 乾川, 中川 등으로 표시하였고 竹島, 花島 등 여러 하중도를 그렸다. 성천강 지명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지류로 동성천강, 호련천 등이 있으며 하구에 삼각주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府治를 성천강의 좌안에 묘사하였고, 진산인 城串山은 城串烽으로 지명이 지재되어 있다. 회화식 지도인 『해동지도』에서 읍치의 성곽이 뚜렷한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이 지도에서는 성곽 형태는 그려져 있지 않고, 단지 원으로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면 주기에 성곽의 규모가 14,065尺으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는 德山館을 거쳐 咸關嶺을 지나 咸原驛을 거처 洪原으로 이어진다. 서로는 定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묘사되어 있다. 북으로는 성천강변을 따라 그려진 도로가 赴戰嶺을 지나 압록강변의 三水로 이어진다. 북서로는 中山嶺과 長津柵을 잇는 도로가 있다. 이면의 주기에는 民戶 14,453戶로 기재되어 있어 당시로서 큰 도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 주요 전각, 面, 倉 등의 위치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김기혁)

  • 호서도 (湖西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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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서도는 충청도에 대한 별칭이었으며, 54개의 군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감영은 지도에 큰 원으로 표시된 公州에 있었으며, 水營과 兵營이 각각 1개씩 있었다. 본 지도에서는 고을을 주황색 큰 원의 監營과 흰색 직사각형의 일반 군현으로 나누어 표시하였지만 제천, 영춘, 청산, 영동 등은 남색 계통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군사기지로는 水營과 兵營이 표시되어 있으며, 노란색 작은 직사각형은 鎭堡이다. 그밖의 정보로는 주황색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한 察訪驛이 있는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곳이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군현 지도는 전체적으로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것과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같이 도별 지도의 경우 본 지도책과 《광여도》 및 《여지도》는 거의 동일하지만 《해동지도》는 상당히 다른 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 이후 군현지도는 거의 비슷하게 필사하면서 도별도의 경우 전혀 다른 지도를 만들어 수록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명의 차원에서 볼 때 가장 주목되는 군현이 尼山이다. 尼山은 1776년(영조 52)에 尼城으로 바뀌며, 다시 1800년(정조 24)에 魯城으로 바뀐다. 《해동지도》와 《여지도》는 尼山으로 되어 있고, 본 지도에는 尼城으로 되어 있으며, 《광여도》에는 魯城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지명의 차원에서 볼 때 《해동지도》와 《여지도》가 가장 이르며, 다음으로 본 지도이고, 맨 마지막이 《광여도》이다. 그러나 필사과정에서 지명의 변화 양상을 반영하여 수정하지 않고, 과거의 것을 그대로 필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명만으로 지도의 제작 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지명의 변화 시기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1776년(영조 52) 이전에 《여지도》와 거의 동일한 지도가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여지도》에는 아래쪽의 전라도에서 흘러들어오는 금강이 마치 永同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반면에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어 《여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 지도와 《광여도》의 필사에 원본으로 된 지도는 《여지도》가 아니라 다른 지도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 중의 하나는 왼쪽 아래쪽에 표시된 安眠(島)의 위치이다. 안면도는 왼쪽 위의 安興 바로 아래쪽에 있어야 사실에 가깝기 때문에 본 지도의 필사자뿐만 아니라 원본의 지도 제작자 역시 사실에 대한 확인 작업이 부족했던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장기현 (長鬐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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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동해안 남쪽에 호랑이 꼬리처럼 튀어나온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고을로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었다.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지역에 해당하며 중심부는 장기면 읍내리인데 지금도 장기읍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가 대각선으로 내려오는 것은 꼬리모양의 장기곶에 해당하는 포항시의 대보면과 동해면의 북쪽 해안 지역은 영일현에 속하고 남쪽 해안이 장기현에 속하기 때문이다. 남쪽 해안선만 연결해서 바다쪽을 표현했기 때문에 해안선도 직선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다. 진산은 북문 밖에 표시된 巨山으로 장기면 읍내리 서쪽에 있는 산이다. 현재는 동악산으로 불리는 252.5m의 산이다. 그 서쪽에 있는 산이 만리성재로 428m이다. 지도 왼쪽에 만성산으로 표기되었다. 이 산들은 남쪽의 경주 토함산에서 북으로 뻗어나온 산줄기 상에 있는 것이다. 성곽은 자연 지형을 활용해 쌓았으며 읍성 안 객사 뒤에 따로 산 하나를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성문은 동문과 북문만 그리고 도로를 연결했는데 현재의 906번 지방도로와 비슷하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전형적인 山圖 형식을 따라 그렸다. 지도 오른쪽 위에 마성문이 보이고 목장, 목관사 등이 표시되었다. 말을 기르던 목마장이 있었다. 마성문 남쪽의 뇌성봉대가 현재의 구룡포읍 성동리에 있었고 그 북쪽의 발산봉대에 해당하는 지점이 대보면의 봉화산으로 판단된다. 이에 근거해 목장의 위치를 추정하면 현재의 대보면 구만리, 대보리 일대가 된다. 호랑이 꼬리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이현군)

  • 함평현 (咸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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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평은 조선 태종대에 咸豊縣과 牟平縣과 합하여 만들어진 지명이다. 현재의 함평군에서 남쪽의 학교면과 엄다면은 무안현 관할 범위여서 제외되며 무안군 해제면과 현경면의 일부가 관할 범위에 포함된다. 지도 왼쪽에 해제면으로 적힌 곳이 무안군 해제면이다. 그 동쪽의 바다는 함평만이다. 왼쪽 위의 해제봉대는 현재 203m의 봉대산으로 남아있으며 성곽 형태로 그려진 임치진은 임수리에 있던 것으로 水軍僉節制使의 營衙가 있었다. 주변의 浦와 섬을 관할하였다. 해제면으로 적힌 곳 왼쪽의 산은 국가에서 사용할 재목을 구하기 위한 封山으로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해동지도에는 그려졌다. 왼쪽 아래 옹산의 봉대는 현재 현경면 용정리의 82m 높이의 봉태산이다. 지도에 적힌 다경면이 현재의 무안군 현경면이다. 다경면 동쪽에 표시된 감방산은 무안읍과 현경면의 경계에 위치한 257.5m의 산이다. 감방산에서 임치진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4번 국도에 해당한다. 읍치는 성곽없이 건물만 표시하였는데 현재의 함평읍 기각리 일대이다. 읍치와 별개의 형국으로 그려진 향교는 향교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와 향교 사이로 흐르는 하천은 함평천이다. 읍치 북쪽의 君尼山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이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지도에 표시된 손불면, 신광면, 해보면 등의 지명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손불면 해안에 그려진 해창은 석창리에 있던 것이다. 왼쪽 위에 그려진 君遊寺 뒤쪽은 손불면 북성리에 위치한 403.2m 높이의 군유산이다.(이현군)

  • 중화부 (中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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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中和府〉로, 현재의 평양특별시 강남군, 중화군, 상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중화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중화부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비교해서 몇 가지 차이점이 보인다. 우선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서쪽에 그려진 宣化堂 등을 포함해 총 6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총 1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客 ·衙 밑으로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鄕校와 鄕廳,訓鍊이 그려져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廳과 訓鍊이 客舍 주변에 그려져 있고 鄕校만이 독립되어 그려져 있다. 즉 그 사이에 산맥이 그려져 있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광여도》 역시 《여지도》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본 지도가 《광여도》, 《여지도》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아진 읍치의 정보를 표시하기 위해 읍치 지역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읍치 아래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로가 길게 그려졌다. 이에 따라 동쪽(위)에서 서쪽(아래)으로 길게 뻗은 고을의 실제 모습보다 심하게 왜곡되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하천에 대한 이해에서도 오해를 낳을 수 있게 하였다. 실제로는 하천이 위에서 아래로 즉, 西流하는 길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즉, 北流하는 길이보다 훨씬 길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쪽은 바다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대동강의 하류 부분이다. 다만 밀물 때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바다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 적혀 있는 海倉이란 지명이 그런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양윤정)

  • 홍원현 (洪原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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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홍원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원현은 지금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된다. 현재의 동대천을 그려 북청부와의 경계를 표현하였다. 지도의 좌측에 함흥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그렸고 車楡岺, 咸關岺 등 주요 교통로를 그렸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현의 중앙을 흘러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이다. 頭無山에서 발원하여 門岩부근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서대천을 그린 것이다. 해안선을 비교적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그렸다. 동해상에 그려져 있는 죽도와 馬養島는 지금도 사용되는 지명이다. 특히 마양도는 이곳에 있었던 목장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 1,005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홍원읍 신흥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에 기재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 세곳의 驛이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되었다. 南浦驛의 경우 다른 지도에서는 平浦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남포역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지며 서쪽으로는 신은역, 함원역을 거쳐 함관령을 지나는 길은 함흥으로 연결된다. 해안도로에는 지금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으며 함관령을 지나는 경로에는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서대천을 따라 내륙으로 연결된 도로는 龍華山을 거쳐 북청부로 연결된다. 용화산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60戶, 田 1,336結, 畓 293結83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호서도 주기 (湖西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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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서도는 충청도에 대한 별칭이었으며, 54개의 군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감영은 지도에 큰 원으로 표시된 公州에 있었으며, 水營과 兵營이 각각 1개씩 있었다. 본 지도에서는 고을을 주황색 큰 원의 監營과 흰색 직사각형의 일반 군현으로 나누어 표시하였지만 제천, 영춘, 청산, 영동 등은 남색 계통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군사기지로는 水營과 兵營이 표시되어 있으며, 노란색 작은 직사각형은 鎭堡이다. 그밖의 정보로는 주황색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한 察訪驛이 있는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곳이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군현 지도는 전체적으로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것과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와 같이 도별 지도의 경우 본 지도책과 《광여도》 및 《여지도》는 거의 동일하지만 《해동지도》는 상당히 다른 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 이후 군현지도는 거의 비슷하게 필사하면서 도별도의 경우 전혀 다른 지도를 만들어 수록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명의 차원에서 볼 때 가장 주목되는 군현이 尼山이다. 尼山은 1776년(영조 52)에 尼城으로 바뀌며, 다시 1800년(정조 24)에 魯城으로 바뀐다. 《해동지도》와 《여지도》는 尼山으로 되어 있고, 본 지도에는 尼城으로 되어 있으며, 《광여도》에는 魯城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지명의 차원에서 볼 때 《해동지도》와 《여지도》가 가장 이르며, 다음으로 본 지도이고, 맨 마지막이 《광여도》이다. 그러나 필사과정에서 지명의 변화 양상을 반영하여 수정하지 않고, 과거의 것을 그대로 필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명만으로 지도의 제작 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지명의 변화 시기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1776년(영조 52) 이전에 《여지도》와 거의 동일한 지도가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여지도》에는 아래쪽의 전라도에서 흘러들어오는 금강이 마치 永同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반면에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되어 있어 《여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 지도와 《광여도》의 필사에 원본으로 된 지도는 《여지도》가 아니라 다른 지도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 중의 하나는 왼쪽 아래쪽에 표시된 安眠(島)의 위치이다. 안면도는 왼쪽 위의 安興 바로 아래쪽에 있어야 사실에 가깝기 때문에 본 지도의 필사자뿐만 아니라 원본의 지도 제작자 역시 사실에 대한 확인 작업이 부족했던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장기현 주기 (長鬐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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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동해안 남쪽에 호랑이 꼬리처럼 튀어나온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고을로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었다.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지역에 해당하며 중심부는 장기면 읍내리인데 지금도 장기읍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가 대각선으로 내려오는 것은 꼬리모양의 장기곶에 해당하는 포항시의 대보면과 동해면의 북쪽 해안 지역은 영일현에 속하고 남쪽 해안이 장기현에 속하기 때문이다. 남쪽 해안선만 연결해서 바다쪽을 표현했기 때문에 해안선도 직선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다. 진산은 북문 밖에 표시된 巨山으로 장기면 읍내리 서쪽에 있는 산이다. 현재는 동악산으로 불리는 252.5m의 산이다. 그 서쪽에 있는 산이 만리성재로 428m이다. 지도 왼쪽에 만성산으로 표기되었다. 이 산들은 남쪽의 경주 토함산에서 북으로 뻗어나온 산줄기 상에 있는 것이다. 성곽은 자연 지형을 활용해 쌓았으며 읍성 안 객사 뒤에 따로 산 하나를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성문은 동문과 북문만 그리고 도로를 연결했는데 현재의 906번 지방도로와 비슷하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전형적인 山圖 형식을 따라 그렸다. 지도 오른쪽 위에 마성문이 보이고 목장, 목관사 등이 표시되었다. 말을 기르던 목마장이 있었다. 마성문 남쪽의 뇌성봉대가 현재의 구룡포읍 성동리에 있었고 그 북쪽의 발산봉대에 해당하는 지점이 대보면의 봉화산으로 판단된다. 이에 근거해 목장의 위치를 추정하면 현재의 대보면 구만리, 대보리 일대가 된다. 호랑이 꼬리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이현군)

  • 함평현 주기 (咸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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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평은 조선 태종대에 咸豊縣과 牟平縣과 합하여 만들어진 지명이다. 현재의 함평군에서 남쪽의 학교면과 엄다면은 무안현 관할 범위여서 제외되며 무안군 해제면과 현경면의 일부가 관할 범위에 포함된다. 지도 왼쪽에 해제면으로 적힌 곳이 무안군 해제면이다. 그 동쪽의 바다는 함평만이다. 왼쪽 위의 해제봉대는 현재 203m의 봉대산으로 남아있으며 성곽 형태로 그려진 임치진은 임수리에 있던 것으로 水軍僉節制使의 營衙가 있었다. 주변의 浦와 섬을 관할하였다. 해제면으로 적힌 곳 왼쪽의 산은 국가에서 사용할 재목을 구하기 위한 封山으로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해동지도에는 그려졌다. 왼쪽 아래 옹산의 봉대는 현재 현경면 용정리의 82m 높이의 봉태산이다. 지도에 적힌 다경면이 현재의 무안군 현경면이다. 다경면 동쪽에 표시된 감방산은 무안읍과 현경면의 경계에 위치한 257.5m의 산이다. 감방산에서 임치진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4번 국도에 해당한다. 읍치는 성곽없이 건물만 표시하였는데 현재의 함평읍 기각리 일대이다. 읍치와 별개의 형국으로 그려진 향교는 향교리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와 향교 사이로 흐르는 하천은 함평천이다. 읍치 북쪽의 君尼山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이 지도에 표시되지는 않았다. 지도에 표시된 손불면, 신광면, 해보면 등의 지명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손불면 해안에 그려진 해창은 석창리에 있던 것이다. 왼쪽 위에 그려진 君遊寺 뒤쪽은 손불면 북성리에 위치한 403.2m 높이의 군유산이다.(이현군)

  • 중화부 주기 (中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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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中和府〉로, 현재의 평양특별시 강남군, 중화군, 상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중화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이나 내용에서 약간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중화부 지도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와 비교해서 몇 가지 차이점이 보인다. 우선 읍치의 모습을 보면 《해동지도》에는 客舍 서쪽에 그려진 宣化堂 등을 포함해 총 6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총 13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客 ·衙 밑으로 《해동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鄕校와 鄕廳,訓鍊이 그려져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鄕廳과 訓鍊이 客舍 주변에 그려져 있고 鄕校만이 독립되어 그려져 있다. 즉 그 사이에 산맥이 그려져 있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광여도》 역시 《여지도》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본 지도가 《광여도》, 《여지도》와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아진 읍치의 정보를 표시하기 위해 읍치 지역이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졌다. 이로 인해 읍치 아래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로가 길게 그려졌다. 이에 따라 동쪽(위)에서 서쪽(아래)으로 길게 뻗은 고을의 실제 모습보다 심하게 왜곡되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하천에 대한 이해에서도 오해를 낳을 수 있게 하였다. 실제로는 하천이 위에서 아래로 즉, 西流하는 길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즉, 北流하는 길이보다 훨씬 길다. 이는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쪽은 바다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대동강의 하류 부분이다. 다만 밀물 때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바다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 적혀 있는 海倉이란 지명이 그런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양윤정)

  • 홍원현 주기 (洪原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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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홍원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원현은 지금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된다. 현재의 동대천을 그려 북청부와의 경계를 표현하였다. 지도의 좌측에 함흥과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그렸고 車楡岺, 咸關岺 등 주요 교통로를 그렸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현의 중앙을 흘러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이다. 頭無山에서 발원하여 門岩부근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서대천을 그린 것이다. 해안선을 비교적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그렸다. 동해상에 그려져 있는 죽도와 馬養島는 지금도 사용되는 지명이다. 특히 마양도는 이곳에 있었던 목장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읍치는 해안 가까이에 성곽(둘레 ; 1,005尺)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의 홍원읍 신흥리 일대이다. (기타 지도에 기재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의 홍원현 해제 참조). 지도에 세곳의 驛이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현되었다. 南浦驛의 경우 다른 지도에서는 平浦로 기재되어 있다. 도로가 적색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경로는 『해동지도』와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에서 남포역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북청으로 이어지며 서쪽으로는 신은역, 함원역을 거쳐 함관령을 지나는 길은 함흥으로 연결된다. 해안도로에는 지금 함경선 철도가 개설되어 있으며 함관령을 지나는 경로에는 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서대천을 따라 내륙으로 연결된 도로는 龍華山을 거쳐 북청부로 연결된다. 용화산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60戶, 田 1,336結, 畓 293結83負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홍산현 (鴻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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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현은 부여군의 홍산면, 옥산면, 남면, 내산면, 외산면, 구룡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홍산면의 남촌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홍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홍산현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왼쪽 위는 현재의 부여군 외산면 지역으로서 서해로 바로 빠져나가는 웅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오른쪽 아래에는 금강에 대해 부여 지역에서 부르던 白馬江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백마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은 현재 금천으로 부르고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와 거의 동일한데, 《해동지도》에 수록된 지명이 생략되거나 일부 변화된 것이 있다. 《해동지도》에는 오른쪽에 海岸面과 大也谷面 및 彌造川 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주기에 해안면과 대야곡면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실수로 빠뜨린 것이 아닌가 한다. 宿鴻驛 왼쪽에는 淸逸寺가 기록되어 있는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淸逸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올바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생략되거나 잘못 기록한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오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정도로 꼼꼼한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지례현 (知禮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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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면 명칭으로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이다. 읍치는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일대이며  지례면, 부항면, 대덕면, 구성면 일부지역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하며 읍치를 둘러싼 산줄기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산줄기의 방향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에 지도 위쪽이 서북쪽이 되며 전라도,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진산은 남쪽의 龜山이 되는데 현재 지례면에 龜首라는 지명이 있고 이 지도에는 龜尾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구미는 현재의 구성면 구미리이다. 일반적으로 坊面 의 명칭은 네모안에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며 방면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면 명칭을 생략하고 村, 谷, 谷村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감천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다. 향교는 현재의 지례면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아래쪽의 산줄기는 산줄기의 방향을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글씨 쓰는 방향도 바꾸어 적었다. 지도 오른쪽 위에는 황악산 來脈이라고 따로 적어 놓는 등 풍수적 관념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맥은 읍치의 객사까지 연결되고 있다. 읍치 앞 강가에 鑑湖亭이 보이는데 1690년(숙종 16)에 만든 것이다. 맞은편에는 폭포가 회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역원, 창, 고개, 봉수대를 그렸다. 도로가 하천을 따라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이현군)

  • 해남현 (海南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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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서남해안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육지, 바다, 섬이 지도에 함께 그려졌다.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남쪽의 옥천면, 송지면, 북일면, 북평군은 조선시대에는 영암군에 포함되었다. 이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해남현의 관할범위였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현내면이 옛 해남현의 중심부이며 원형으로 그려진 읍성 지역은 해남읍 성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향교는 성 밖에 그려졌고 주변의 산줄기가 읍성을 감싸듯이 표현되었다. 읍성 북쪽의 금강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해남읍과 마산면의 경계가 되는 481m 높이의 산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영암방조제, 금호방조제가 들어서면서 영암호, 금호호로 바뀌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사각형의 성곽은 右道水軍節度使營으로 줄여서 右水營으로 적어놓았다. 그 위에 충무공비각이 세워져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충무공대첩이 기록되었다. 鳴津 근처에서 명량대첩이 있었다. 지금은 진도대교가 세워져 진도군과 연결되는 지역이다. 해남군 문내면에 명량대첩기념비, 우수영, 충무사 등이 남아 있어 관광지로 활용된다. 그 옆에는 용암방조제가 들어서면서 해안선이 이 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목장은 黃原場으로 監牧官이 배치되었다. 곳곳에 산성이 있었으나 이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해안에 봉수대, 船所, 海倉를 그려넣었다. 이 지도에 등장하진 않지만 읍성의 남쪽 해남읍 연동리에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이 있어 관광지로 활용된다. 그 안에 국보 240호로 지정된 윤두서상 등 여러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이현군)

  • 증산현 (甑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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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甑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북쪽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원래 江西縣의 甑山鄕이었으며, 1394년(태조 3)에 縣으로 승격되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증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증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지명이 《해동지도》에 나오는 것이지만 왼쪽의 車踰嶺과 兎山烽은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여지도》와 《광여도》에도 이 지명들이 나오는데, 兎山烽이 兎山烟臺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는 鄕校, 客舍, 衙舍가 매우 간단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보이지 않던 倉과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총 11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을 전체의 세로(남북) 역시 더 길게 표현되었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지나는 하천의 모습이 달라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南流하다가 西流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거의 西南流하는 모양으로 바뀌어 있다. (양윤정)

  • 홍천현 (洪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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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홍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천현은 지금의 홍천군 홍천읍, 서면, 북방면, 남면, 동면, 화촌면, 두촌면, 내촌면, 서석면 일대의 지역에 해당된다. 홍천군 내면은 당시에 강릉부에 속하였다. 동으로 麟蹄, 북으로 春川, 서로 砥平과 楊根에 접하여 동서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게 장방형의 형태로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客舍, 衙舍, 倉, 鄕校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표현하였으며, 延波亭과 觀水堂이 객사 앞에 있다. 읍치는 지금의 홍천읍 희망리·진리 일대에 소재한다. 진산인 石花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홍천강으로 북한강 상류의 한 지류에 해당된다. 지도 북동쪽의 建伊峙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야시대천으로, 柰村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내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의 동쪽 黃腸山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군업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하천의 중류에서 북류하여 홍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각각 지금의 성전천과 어룡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홍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춘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서쪽을 城峙를 지나 北方面을 거치는 도로와, 서남쪽의 蓮峰驛(홍천읍 연봉리 소재)을 지나 서창을 거쳐 가는 길이 있다. 남쪽으로는 陽德院(남면 양덕원리 소재)과 神堂峙를 지나 砥平으로 연결되며, 三馬峙, 小三馬峙를 지나는 도로는 횡성과 이어진다. 북동쪽의 泉甘驛(두촌면 역내리 소재)을 지나는 길은 인제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793戶, 田 622結35負4束, 畓 97結29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홍산현 주기 (鴻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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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현은 부여군의 홍산면, 옥산면, 남면, 내산면, 외산면, 구룡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홍산면의 남촌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홍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홍산현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왼쪽 위는 현재의 부여군 외산면 지역으로서 서해로 바로 빠져나가는 웅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오른쪽 아래에는 금강에 대해 부여 지역에서 부르던 白馬江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백마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은 현재 금천으로 부르고 있다.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와 거의 동일한데, 《해동지도》에 수록된 지명이 생략되거나 일부 변화된 것이 있다. 《해동지도》에는 오른쪽에 海岸面과 大也谷面 및 彌造川 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주기에 해안면과 대야곡면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실수로 빠뜨린 것이 아닌가 한다. 宿鴻驛 왼쪽에는 淸逸寺가 기록되어 있는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淸逸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올바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생략되거나 잘못 기록한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오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정도로 꼼꼼한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지례현 주기 (知禮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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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면 명칭으로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이다. 읍치는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일대이며  지례면, 부항면, 대덕면, 구성면 일부지역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하며 읍치를 둘러싼 산줄기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산줄기의 방향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에 지도 위쪽이 서북쪽이 되며 전라도,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진산은 남쪽의 龜山이 되는데 현재 지례면에 龜首라는 지명이 있고 이 지도에는 龜尾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구미는 현재의 구성면 구미리이다. 일반적으로 坊面 의 명칭은 네모안에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며 방면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면 명칭을 생략하고 村, 谷, 谷村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감천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다. 향교는 현재의 지례면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아래쪽의 산줄기는 산줄기의 방향을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글씨 쓰는 방향도 바꾸어 적었다. 지도 오른쪽 위에는 황악산 來脈이라고 따로 적어 놓는 등 풍수적 관념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맥은 읍치의 객사까지 연결되고 있다. 읍치 앞 강가에 鑑湖亭이 보이는데 1690년(숙종 16)에 만든 것이다. 맞은편에는 폭포가 회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역원, 창, 고개, 봉수대를 그렸다. 도로가 하천을 따라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이현군)

  • 해남현 주기 (海南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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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서남해안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육지, 바다, 섬이 지도에 함께 그려졌다.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남쪽의 옥천면, 송지면, 북일면, 북평군은 조선시대에는 영암군에 포함되었다. 이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해남현의 관할범위였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현내면이 옛 해남현의 중심부이며 원형으로 그려진 읍성 지역은 해남읍 성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향교는 성 밖에 그려졌고 주변의 산줄기가 읍성을 감싸듯이 표현되었다. 읍성 북쪽의 금강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해남읍과 마산면의 경계가 되는 481m 높이의 산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영암방조제, 금호방조제가 들어서면서 영암호, 금호호로 바뀌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사각형의 성곽은 右道水軍節度使營으로 줄여서 右水營으로 적어놓았다. 그 위에 충무공비각이 세워져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충무공대첩이 기록되었다. 鳴津 근처에서 명량대첩이 있었다. 지금은 진도대교가 세워져 진도군과 연결되는 지역이다. 해남군 문내면에 명량대첩기념비, 우수영, 충무사 등이 남아 있어 관광지로 활용된다. 그 옆에는 용암방조제가 들어서면서 해안선이 이 지도와 차이를 보인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목장은 黃原場으로 監牧官이 배치되었다. 곳곳에 산성이 있었으나 이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해안에 봉수대, 船所, 海倉를 그려넣었다. 이 지도에 등장하진 않지만 읍성의 남쪽 해남읍 연동리에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이 있어 관광지로 활용된다. 그 안에 국보 240호로 지정된 윤두서상 등 여러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이현군)

  • 증산현 주기 (甑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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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甑山縣〉으로,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북쪽 일대 지역이다. 이 고을은 원래 江西縣의 甑山鄕이었으며, 1394년(태조 3)에 縣으로 승격되었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증산현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표현 양식과 내용면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증산현 지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지명이 《해동지도》에 나오는 것이지만 왼쪽의 車踰嶺과 兎山烽은 《해동지도》에 없는 지명이다. 《여지도》와 《광여도》에도 이 지명들이 나오는데, 兎山烽이 兎山烟臺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졌다  《해동지도》의 경우 읍치에는 鄕校, 客舍, 衙舍가 매우 간단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보이지 않던 倉과 鄕廳이 표시되어 있으며, 건물도 총 11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을 전체의 세로(남북) 역시 더 길게 표현되었다. 이에 따라 읍치 지역을 지나는 하천의 모습이 달라져 있다. 《해동지도》에는 南流하다가 西流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거의 西南流하는 모양으로 바뀌어 있다. (양윤정)

  • 홍천현 주기 (洪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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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홍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천현은 지금의 홍천군 홍천읍, 서면, 북방면, 남면, 동면, 화촌면, 두촌면, 내촌면, 서석면 일대의 지역에 해당된다. 홍천군 내면은 당시에 강릉부에 속하였다. 동으로 麟蹄, 북으로 春川, 서로 砥平과 楊根에 접하여 동서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게 장방형의 형태로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客舍, 衙舍, 倉, 鄕校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표현하였으며, 延波亭과 觀水堂이 객사 앞에 있다. 읍치는 지금의 홍천읍 희망리·진리 일대에 소재한다. 진산인 石花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홍천강으로 북한강 상류의 한 지류에 해당된다. 지도 북동쪽의 建伊峙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야시대천으로, 柰村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내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의 동쪽 黃腸山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군업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하천의 중류에서 북류하여 홍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각각 지금의 성전천과 어룡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홍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춘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서쪽을 城峙를 지나 北方面을 거치는 도로와, 서남쪽의 蓮峰驛(홍천읍 연봉리 소재)을 지나 서창을 거쳐 가는 길이 있다. 남쪽으로는 陽德院(남면 양덕원리 소재)과 神堂峙를 지나 砥平으로 연결되며, 三馬峙, 小三馬峙를 지나는 도로는 횡성과 이어진다. 북동쪽의 泉甘驛(두촌면 역내리 소재)을 지나는 길은 인제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793戶, 田 622結35負4束, 畓 97結29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홍주목 (洪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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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목은 홍성군에서 결성면, 서부면, 은하면, 광천읍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 보령시의 천북면과 오천면의 도서지역, 청양군의 화성면 전체와 남양면의 일부, 당진군의 거산리를 제외한 신평면과 합덕읍 대부분, 태안군의 안면읍 황도리 등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홍성읍 오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고을의 鎭山인 白月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읍치를 지나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며, 왼쪽 아래의 하천은 금강으로 흘러가는 작은 지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홍주목 지도와 겅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을 볼 수 있다. 다만 몇몇 부분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우선 《해동지도》에 수록된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으나 이 지도에는 없어 첨가시킨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첨가된 지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둘째, 《해동지도》에는 각 倉庫에 官(읍치)으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 자체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는 뒤의 2개 지도와 달리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 비하면 상당히 소략한 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원본 계통에는 《해동지도》만큼의 도로가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는데, 본 지도 또는 같은 계통의 필사자가 거칠게 필사하면서 소략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도로를 아예 생략해 버렸다. 기타 오른쪽 위의 雲川面과 아래쪽의 合南面 오른쪽은 모두 월경지임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운천면은 해미현의 경계를 넘어 있었고, 합남면을 포함한 오른쪽은 덕산현의 경계를 넘어 있었다.(이기봉)

  • 진보현 (眞寶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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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 때 진보현이 되었는데 현재는 청송군의 진보면 명칭으로 남아 있다.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진안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진보면, 파천면 일부, 영양군 입암면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지도의 크기가 다른 군현지도와 같아서 넓은 범위처럼 보이지만 안동시의 동쪽에 위치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다. 읍치 근처로 흐르는 하천은 반변천으로 남쪽의 용전천과 합해져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의 유로와 폭이 과거와 달라졌다. 오른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으로 영해부와 경계가 된다. 읍치 주변의 산줄기는 가운데를 향하게 그리면서 다른 주요 건물, 산줄기도 각각 독자적인 형국을 이루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풍수 사상이 강하게 개입된 지도로 보인다. 읍치에는 土城이라는 표시가 있다. 읍성은 대부분 토성으로 만들었다가 후대에 석축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은 토성으로 남아있으며 그 사실을 지도에 적은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읍치 앞의 도로는 현재의 31번, 34번 국도에 해당하며 오른쪽에 표시된 각산역은 진보면 각산리에 있던 역이다. 객사 남쪽의 비봉산은 진보면과 청송군 파천면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671m이다. 그 남쪽에 퇴계선생선영을 山圖 형식에 따라 그리고 그 안에 봉분을 그림으로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의 鳳覽書院은 1690년(숙종 16)에 사액 받은 서원으로 퇴계 이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화순현 (和順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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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화순군은 조선시대 능주목, 동복현, 화순현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화순현은 이 중에서 화순읍과 동면을 관할하는 군현이었다. 고려 때 화순 지명이 생겼으며 나주, 능성, 남평, 동복 등에 소속되기도 하였으며 태종대에 현이 되었다. 지도 가운데의 읍치 지역은 화순읍의 광덕리, 향청리 일대이며 향교가 있었던 곳은 교리이다. 향청리는 관아 건물 중 지방 양반들이 중심이 되는 鄕廳에서 따온 것이다. 화순선 철도의 남화순역 북쪽이 과거 화순의 읍치에 해당한다. 작은 읍치 지역을 아주 크게 그렸다. 읍치 동쪽과 남쪽의 하천은 현재 화순천으로 불리며 남평의 지석강을 거쳐 서쪽으로 흘러 영산강을 통해 바다로 들어간다. 읍치 서북쪽에 광주의 무등산이 위치하며 화순읍의 일부가 무등산 도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나한산이 화순의 진산이다. 지금은 만연산으로 불린다. 좌우의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듯이 그려져 풍수적 사고가 이 지도에 반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한산 아래에 그려진 읍치 북쪽의 만연사는 화순읍 동구리에 남아있다. 읍치 동쪽의 오성산은 동면과 화순읍의 경계에 있는 292m 높이의 산으로 성터가 남아있다. 삼면이 모두 석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이 지도는 도로만 그렸는데 해동지도에는 남면 옆에 加林驛이 표시되었다. 화순읍 내평리에 있었던 역원이다.(이현군)

  • 창성부 (昌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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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昌城府〉로,‘창성’이라는 명칭은 1402년(태종 2) 昌州와 泥城을 합친 것에 유래하였다. 창성부는 압록강 수계와 대정강 수계 양쪽에 걸쳐 있다. 본래 창성부는 대정강 유역에 위치하였다가 압록강 유역으로 영토가 확대되면서 읍치를 옮겼기 때문에 그 흔적이 행정구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안북도 창성군, 會上里를 제외한 동창군 전 지역, 삭주군 일부, 벽동군 송연리, 태천군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창성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물론 《해동지도》와는 형식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본 지도의 경우 남동쪽을 지도 상단에 그리고 있다. 위쪽은 대령강의 지류인 창성강 유역이고, 아래쪽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압록강 유역이다.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는 세로가 축소되었고, 특히 창성강 유역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두 유역을 가로지르는 산줄기 위에 《해동지도》에는 3개의 關門城이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大防墻岺 1곳에만 그려져 있다.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小防墻岺 1곳만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지명은 모두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부분을 피해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이 임의로 생략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성의 모습 역시 《해동지도》에서는 지형을 이용해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일부분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비하면 그런 모습을 지도를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생략되어 마치 산 안에 읍치가 위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양윤정)

  • 회령부 (會寧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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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 두만강 상류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였던 회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령부는 두만강연안부터 동해안까지 걸쳐 있었으나 일제시대 동해안에 연한 지역이 분리되어 부령군 관해면이 되었다. 지금은 회령시의 일부 지역과 나진시의 서쪽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에서는 두만강에 연한 지역만 묘사되었다. 지도의 서북쪽에 두만강을 그리고, 동남쪽에 여러 산지와 함께 梨峴 등의 고개 지명들을 기재하였다. 세곳의 지류가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제일 북쪽의 下川은 지금의 팔을천에 해당하는 하천으로 於連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에서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무산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회령천에 해당된다. 鞍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면서 雲頭城 북쪽에서 두만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보을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12,344尺) 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鎭山인 鰲山 지명이 가까이에 기재되어 있다. 지금의 회령군 회령읍 일대이다. 국경지대에 있어 관방 시설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회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의 북쪽으로 高嶺驛을 거쳐 穩城府로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甫乙下驛을 지나 무산부로 이어지며 내륙쪽으로는 회령천변을 지나 古豊山驛을 거쳐 부령으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482戶, 田 1,405結57負6束, 畓 12結43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홍주목 주기 (洪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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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목은 홍성군에서 결성면, 서부면, 은하면, 광천읍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 보령시의 천북면과 오천면의 도서지역, 청양군의 화성면 전체와 남양면의 일부, 당진군의 거산리를 제외한 신평면과 합덕읍 대부분, 태안군의 안면읍 황도리 등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홍성읍 오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고을의 鎭山인 白月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읍치를 지나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삽교천이며, 왼쪽 아래의 하천은 금강으로 흘러가는 작은 지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홍주목 지도와 겅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을 볼 수 있다. 다만 몇몇 부분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우선 《해동지도》에 수록된 첨지에는 備圖에는 있으나 이 지도에는 없어 첨가시킨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첨가된 지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備圖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이다. 둘째, 《해동지도》에는 각 倉庫에 官(읍치)으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 자체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는 뒤의 2개 지도와 달리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 비하면 상당히 소략한 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원본 계통에는 《해동지도》만큼의 도로가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는데, 본 지도 또는 같은 계통의 필사자가 거칠게 필사하면서 소략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도로를 아예 생략해 버렸다. 기타 오른쪽 위의 雲川面과 아래쪽의 合南面 오른쪽은 모두 월경지임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운천면은 해미현의 경계를 넘어 있었고, 합남면을 포함한 오른쪽은 덕산현의 경계를 넘어 있었다.(이기봉)

  • 진보현 주기 (眞寶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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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 때 진보현이 되었는데 현재는 청송군의 진보면 명칭으로 남아 있다.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진안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진보면, 파천면 일부, 영양군 입암면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지도의 크기가 다른 군현지도와 같아서 넓은 범위처럼 보이지만 안동시의 동쪽에 위치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다. 읍치 근처로 흐르는 하천은 반변천으로 남쪽의 용전천과 합해져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의 유로와 폭이 과거와 달라졌다. 오른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으로 영해부와 경계가 된다. 읍치 주변의 산줄기는 가운데를 향하게 그리면서 다른 주요 건물, 산줄기도 각각 독자적인 형국을 이루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풍수 사상이 강하게 개입된 지도로 보인다. 읍치에는 土城이라는 표시가 있다. 읍성은 대부분 토성으로 만들었다가 후대에 석축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은 토성으로 남아있으며 그 사실을 지도에 적은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읍치 앞의 도로는 현재의 31번, 34번 국도에 해당하며 오른쪽에 표시된 각산역은 진보면 각산리에 있던 역이다. 객사 남쪽의 비봉산은 진보면과 청송군 파천면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671m이다. 그 남쪽에 퇴계선생선영을 山圖 형식에 따라 그리고 그 안에 봉분을 그림으로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의 鳳覽書院은 1690년(숙종 16)에 사액 받은 서원으로 퇴계 이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화순현 주기 (和順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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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화순군은 조선시대 능주목, 동복현, 화순현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화순현은 이 중에서 화순읍과 동면을 관할하는 군현이었다. 고려 때 화순 지명이 생겼으며 나주, 능성, 남평, 동복 등에 소속되기도 하였으며 태종대에 현이 되었다. 지도 가운데의 읍치 지역은 화순읍의 광덕리, 향청리 일대이며 향교가 있었던 곳은 교리이다. 향청리는 관아 건물 중 지방 양반들이 중심이 되는 鄕廳에서 따온 것이다. 화순선 철도의 남화순역 북쪽이 과거 화순의 읍치에 해당한다. 작은 읍치 지역을 아주 크게 그렸다. 읍치 동쪽과 남쪽의 하천은 현재 화순천으로 불리며 남평의 지석강을 거쳐 서쪽으로 흘러 영산강을 통해 바다로 들어간다. 읍치 서북쪽에 광주의 무등산이 위치하며 화순읍의 일부가 무등산 도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나한산이 화순의 진산이다. 지금은 만연산으로 불린다. 좌우의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듯이 그려져 풍수적 사고가 이 지도에 반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한산 아래에 그려진 읍치 북쪽의 만연사는 화순읍 동구리에 남아있다. 읍치 동쪽의 오성산은 동면과 화순읍의 경계에 있는 292m 높이의 산으로 성터가 남아있다. 삼면이 모두 석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이 지도는 도로만 그렸는데 해동지도에는 남면 옆에 加林驛이 표시되었다. 화순읍 내평리에 있었던 역원이다.(이현군)

  • 창성부 주기 (昌城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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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昌城府〉로,‘창성’이라는 명칭은 1402년(태종 2) 昌州와 泥城을 합친 것에 유래하였다. 창성부는 압록강 수계와 대정강 수계 양쪽에 걸쳐 있다. 본래 창성부는 대정강 유역에 위치하였다가 압록강 유역으로 영토가 확대되면서 읍치를 옮겼기 때문에 그 흔적이 행정구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안북도 창성군, 會上里를 제외한 동창군 전 지역, 삭주군 일부, 벽동군 송연리, 태천군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창성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또한 표현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물론 《해동지도》와는 형식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본 지도의 경우 남동쪽을 지도 상단에 그리고 있다. 위쪽은 대령강의 지류인 창성강 유역이고, 아래쪽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압록강 유역이다. 《해동지도》에 비해 본 지도는 세로가 축소되었고, 특히 창성강 유역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졌다. 또한 두 유역을 가로지르는 산줄기 위에 《해동지도》에는 3개의 關門城이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大防墻岺 1곳에만 그려져 있다. 반면에 《여지도》의 경우에는 小防墻岺 1곳만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지명은 모두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필사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부분을 피해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이 임의로 생략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성의 모습 역시 《해동지도》에서는 지형을 이용해 축조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일부분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 비하면 그런 모습을 지도를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다. 《여지도》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이 생략되어 마치 산 안에 읍치가 위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양윤정)

  • 회령부 주기 (會寧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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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북부 지방 두만강 상류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였던 회령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령부는 두만강연안부터 동해안까지 걸쳐 있었으나 일제시대 동해안에 연한 지역이 분리되어 부령군 관해면이 되었다. 지금은 회령시의 일부 지역과 나진시의 서쪽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에서는 두만강에 연한 지역만 묘사되었다. 지도의 서북쪽에 두만강을 그리고, 동남쪽에 여러 산지와 함께 梨峴 등의 고개 지명들을 기재하였다. 세곳의 지류가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제일 북쪽의 下川은 지금의 팔을천에 해당하는 하천으로 於連洞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에서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무산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회령천에 해당된다. 鞍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면서 雲頭城 북쪽에서 두만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보을천인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는 두만강 우안에 성곽(둘레;12,344尺) 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鎭山인 鰲山 지명이 가까이에 기재되어 있다. 지금의 회령군 회령읍 일대이다. 국경지대에 있어 관방 시설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이들 지명에 대한 내용은 회화식 군현지도 중 회령부 해제 참조). 적색 실선으로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에 비해 간략하다. 읍치의 북쪽으로 高嶺驛을 거쳐 穩城府로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甫乙下驛을 지나 무산부로 이어지며 내륙쪽으로는 회령천변을 지나 古豊山驛을 거쳐 부령으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4,482戶, 田 1,405結57負6束, 畓 12結43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황간현 (黃澗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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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간현은 영동군의 황간면, 매곡면, 상촌면, 추풍령면의 계룡리, 경상북도 김천시의 봉산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황간면의 남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황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 上村面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지나 왼쪽 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초강천이다. 현재의 상주시 모서면과 모동면 방면에서 초강천으로 흘러드는 금상천과 소강 등이 있는데, 본 지도의 위쪽 하천에 해당되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오른쪽 金山界 방면에서 흘러오는 현재의 푸충령천이 본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현재의 영동군 추풍령면은 소백산백의 서쪽에 있어 금강 유역권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경상도의 金山에 속해 있었다. 원래는 황금소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였지만 고려말 조선초를 거치면서 金山의 영역으로 속하게 되면서 독자성을 완전히 상실한 지역이다. 오른쪽 아래의 南面 지역은 현재의 김천시 봉산면 일대로서 추풍령면과 반대로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 유역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의 황간 땅이었다. 이곳도 원래 金化部曲이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였는데, 고려말에 황간의 땅으로 편입되면서 독자성을 상실한 곳이다. 본 지도의 읍치에는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여지도》에는 5개, 《광여도》에는 8개가 있고, 《해동지도》에는 3개밖에 없다. 전체적인 구도가 본 지도 계통과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황간현 지도에도 9개가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倉의 건물 4개를 1개로, 《광여도》는 3개로 그리면서 숫자가 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해동지도》는 객사와 아사 및 華岳樓 등 중요한 3개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모두 생략하였다.(이기봉)

  • 진주목 (晋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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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진주시와 그 주변 지역을 그린 지도이다. 남쪽으로 사천현(사천시), 창선도(남해 창선면)까지 포함하고 있다. 진주목은 현재의 진주시와 고성군, 사천시, 남해군, 하동군, 산청군, 단성군의 일부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가운데의 성곽은 읍치가 아니라 군사적 목적의 성으로 임진왜란때의 주요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그 안에 병영, 중영이 있으며 성의 남쪽에 임란 당시의 논개의 일화로 잘 알려진 촉석루와 의암이 보인다. 행정중심지는 진주의 북쪽, 진산인 비봉산 아래로 객사, 향교, 동헌이 그려진 곳이다. 군사적 중심지와 행정 중심지과 분리된 독특한 구조이다. 진주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남강이며 지도 왼쪽 위에는 지리산이 보인다. 남강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은 과거의 모습과 달라졌으며 진양호에 수몰된 지역이다. 지금도 같은 명칭으로 사용되는 금산면을 제외하고는 행정명을 모두 면이 아닌 리로 표시한 점이 특이하다. 지도 남쪽의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며 현재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해당한다. 水軍의 활동에 중요한 요충지인 관계로 지도에 봉수대의 위치가 표시되었고 각산봉(사천시 실안동, 대방동) 옆 해안에는 전선을 제작하는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현재의 사천시 송포동에는 이순신 장군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지도에 전선소(사천시 선구동)로 표시된 지역의 인근에 지금은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보이는 염창진은 지수면 청담리에 있던 나루터이다.(이현군)

  • 흥덕현 (興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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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 부안면의 일부를 관할 범위로 하였다. 부안면의 일부는 고부군에 속한다. 지도 가운데 성곽없이 그려진 읍치는 흥덕면 흥덕리 일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으로 된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현재 흥덕면에 형성된 동림저수지의 서남쪽 방향에 옛 읍치가 있었으며 읍치 서쪽에 표시된 향교는 교운리에 있었다. 해동지도에서는 곳곳에 제언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 위쪽 죽도가 그려진 곳은 곰소만이며 서해로 통한다. 해안에 접한 군현으로 해발고도가 낮은 지역이지만 산줄기의 맥세를 강하고 표현하였고 읍치 지역은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게 그렸다. 향교는 읍치와 독립적 형국 속에 표현하고 있다. 향교 왼쪽의 하천은 현재 갈곡천으로 불린다. 죽도 남쪽에 그려진 소요산은 부안면에 위치한 444.2m 높이의 산이다. 선운산 도립공원과 인접해 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지만 부안면에는 사적 250호로 지정된 분청사기요지가 있다. 읍치 동쪽의 동산서원은 동림저수지와 인접한 성내면 동산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바다가에 해창이 그려진 사진포는 현재의 흥덕면의 사포로 불리는 곳이다. 갯가에 모래가 많아 사진포 또는 사포라 불리웠다. 지형적으로 배가 정박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은 지도에 그리지 않았다.(이현군)

  • 철산부 (鐵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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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鐵山府〉로,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 전부와 동림군 서부, 염주군 동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철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철산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와 車輦舘에 그려진 건물의 수가 훨씬 증가하였고,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세로(남북)의 길이가 동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아졌다. 이런 이유로 《해동지도》에는 읍치에서 해안까지의 거리가 위쪽 義州界까지보다 멀게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이외의 정보는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해동지도》에 나오는 정보 중 본 지도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있으며, 약간 바뀌어 표현된 것도 있다. 바뀐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읍치 아래쪽에 土城이라 적혀 있는 곳부터 天荒山까지 그려져 있는 하천이다. 《해동지도》에는 이것이 하천이 아니라 土城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토성을 하천으로 인식했기 때문에《해동지도》에 下惠面으로부터 아래쪽으로 이어져 있던 산줄기 역시 끊어져 있다. 이 부분은 《해동지도》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본 지도와 같이 하천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섬의 경우 그 모양이나 위치가 정확하지는 못하다. 본 지도의 경우 섬을 크게 그려 다른 지도들에 비해 그 거리가 더 좁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회양부 (淮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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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한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회양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양부는 지금의 북한 강원도 회양군·금강군·창도군·세포군에 걸쳐 있다. 회양부는 읍치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현재의 내금강면에 해당되는 지역 등 2 지역으로 되어있으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府治를 지도의 중앙 위쪽에 배치하고, 내금강산 일대는 오른쪽에 배치하여 실경으로 묘사하였다. 하천으로 부내에 2개의 유로가 그려져 있다. 부의 서남쪽에서 한탄강이 발원하고 있으나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지도 중앙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을 감싸 돌아 다시 남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북한강 상류인 지금의 개동연천에 해당된다. 지도의 동쪽 내금강에서 발원하여 양구쪽으로 남류하는 하천은 금강천에 해당되며, 이곳으로 유입하는 지류는 동금강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회양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역으로 銀溪驛, 新安譯 등 2곳이, 倉으로 縣倉, 和川縣倉, 文登倉 등 10곳이 그려져 있다. 남쪽 양구로 이어지는 도로는 신안역과 蘆桐嶺을 거쳐 水八面에 소재한 縣倉을 지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금강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 동쪽의 和川縣倉을 지나 末暉嶺을 지나 장안사까지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2戶, 田 219結9負, 畓 56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황간현 주기 (黃澗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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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간현은 영동군의 황간면, 매곡면, 상촌면, 추풍령면의 계룡리, 경상북도 김천시의 봉산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황간면의 남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황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쪽 上村面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지나 왼쪽 위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초강천이다. 현재의 상주시 모서면과 모동면 방면에서 초강천으로 흘러드는 금상천과 소강 등이 있는데, 본 지도의 위쪽 하천에 해당되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오른쪽 金山界 방면에서 흘러오는 현재의 푸충령천이 본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현재의 영동군 추풍령면은 소백산백의 서쪽에 있어 금강 유역권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경상도의 金山에 속해 있었다. 원래는 황금소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였지만 고려말 조선초를 거치면서 金山의 영역으로 속하게 되면서 독자성을 완전히 상실한 지역이다. 오른쪽 아래의 南面 지역은 현재의 김천시 봉산면 일대로서 추풍령면과 반대로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 유역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의 황간 땅이었다. 이곳도 원래 金化部曲이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였는데, 고려말에 황간의 땅으로 편입되면서 독자성을 상실한 곳이다. 본 지도의 읍치에는 총 9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여지도》에는 5개, 《광여도》에는 8개가 있고, 《해동지도》에는 3개밖에 없다. 전체적인 구도가 본 지도 계통과 거의 동일한 본 사이트의 《호서지도》황간현 지도에도 9개가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倉의 건물 4개를 1개로, 《광여도》는 3개로 그리면서 숫자가 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해동지도》는 객사와 아사 및 華岳樓 등 중요한 3개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모두 생략하였다.(이기봉)

  • 진주목 주기 (晋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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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진주시와 그 주변 지역을 그린 지도이다. 남쪽으로 사천현(사천시), 창선도(남해 창선면)까지 포함하고 있다. 진주목은 현재의 진주시와 고성군, 사천시, 남해군, 하동군, 산청군, 단성군의 일부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가운데의 성곽은 읍치가 아니라 군사적 목적의 성으로 임진왜란때의 주요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그 안에 병영, 중영이 있으며 성의 남쪽에 임란 당시의 논개의 일화로 잘 알려진 촉석루와 의암이 보인다. 행정중심지는 진주의 북쪽, 진산인 비봉산 아래로 객사, 향교, 동헌이 그려진 곳이다. 군사적 중심지와 행정 중심지과 분리된 독특한 구조이다. 진주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남강이며 지도 왼쪽 위에는 지리산이 보인다. 남강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은 과거의 모습과 달라졌으며 진양호에 수몰된 지역이다. 지금도 같은 명칭으로 사용되는 금산면을 제외하고는 행정명을 모두 면이 아닌 리로 표시한 점이 특이하다. 지도 남쪽의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며 현재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해당한다. 水軍의 활동에 중요한 요충지인 관계로 지도에 봉수대의 위치가 표시되었고 각산봉(사천시 실안동, 대방동) 옆 해안에는 전선을 제작하는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현재의 사천시 송포동에는 이순신 장군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지도에 전선소(사천시 선구동)로 표시된 지역의 인근에 지금은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보이는 염창진은 지수면 청담리에 있던 나루터이다.(이현군)

  • 흥덕현 주기 (興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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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 부안면의 일부를 관할 범위로 하였다. 부안면의 일부는 고부군에 속한다. 지도 가운데 성곽없이 그려진 읍치는 흥덕면 흥덕리 일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으로 된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현재 흥덕면에 형성된 동림저수지의 서남쪽 방향에 옛 읍치가 있었으며 읍치 서쪽에 표시된 향교는 교운리에 있었다. 해동지도에서는 곳곳에 제언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 위쪽 죽도가 그려진 곳은 곰소만이며 서해로 통한다. 해안에 접한 군현으로 해발고도가 낮은 지역이지만 산줄기의 맥세를 강하고 표현하였고 읍치 지역은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게 그렸다. 향교는 읍치와 독립적 형국 속에 표현하고 있다. 향교 왼쪽의 하천은 현재 갈곡천으로 불린다. 죽도 남쪽에 그려진 소요산은 부안면에 위치한 444.2m 높이의 산이다. 선운산 도립공원과 인접해 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지만 부안면에는 사적 250호로 지정된 분청사기요지가 있다. 읍치 동쪽의 동산서원은 동림저수지와 인접한 성내면 동산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바다가에 해창이 그려진 사진포는 현재의 흥덕면의 사포로 불리는 곳이다. 갯가에 모래가 많아 사진포 또는 사포라 불리웠다. 지형적으로 배가 정박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로만 표시하고 역원은 지도에 그리지 않았다.(이현군)

  • 철산부 주기 (鐵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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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지도는 평안도의 〈鐵山府〉로,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 전부와 동림군 서부, 염주군 동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철산부 지도의 구도 및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표현 방식이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해동지도》의 철산부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비해 읍치와 車輦舘에 그려진 건물의 수가 훨씬 증가하였고, 상대적으로 더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세로(남북)의 길이가 동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아졌다. 이런 이유로 《해동지도》에는 읍치에서 해안까지의 거리가 위쪽 義州界까지보다 멀게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이외의 정보는 모두 《해동지도》와 비슷하다. 《해동지도》에 나오는 정보 중 본 지도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있으며, 약간 바뀌어 표현된 것도 있다. 바뀐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읍치 아래쪽에 土城이라 적혀 있는 곳부터 天荒山까지 그려져 있는 하천이다. 《해동지도》에는 이것이 하천이 아니라 土城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 토성을 하천으로 인식했기 때문에《해동지도》에 下惠面으로부터 아래쪽으로 이어져 있던 산줄기 역시 끊어져 있다. 이 부분은 《해동지도》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 역시 본 지도와 같이 하천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섬의 경우 그 모양이나 위치가 정확하지는 못하다. 본 지도의 경우 섬을 크게 그려 다른 지도들에 비해 그 거리가 더 좁게 그려져 있다. (양윤정)

  • 회양부 주기 (淮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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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한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회양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양부는 지금의 북한 강원도 회양군·금강군·창도군·세포군에 걸쳐 있다. 회양부는 읍치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현재의 내금강면에 해당되는 지역 등 2 지역으로 되어있으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府治를 지도의 중앙 위쪽에 배치하고, 내금강산 일대는 오른쪽에 배치하여 실경으로 묘사하였다. 하천으로 부내에 2개의 유로가 그려져 있다. 부의 서남쪽에서 한탄강이 발원하고 있으나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지도 중앙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을 감싸 돌아 다시 남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북한강 상류인 지금의 개동연천에 해당된다. 지도의 동쪽 내금강에서 발원하여 양구쪽으로 남류하는 하천은 금강천에 해당되며, 이곳으로 유입하는 지류는 동금강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회양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역으로 銀溪驛, 新安譯 등 2곳이, 倉으로 縣倉, 和川縣倉, 文登倉 등 10곳이 그려져 있다. 남쪽 양구로 이어지는 도로는 신안역과 蘆桐嶺을 거쳐 水八面에 소재한 縣倉을 지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금강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 동쪽의 和川縣倉을 지나 末暉嶺을 지나 장안사까지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2戶, 田 219結9負, 畓 56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회덕현 (懷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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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덕현은 대전직할시의 대덕구, 동구의 대성동과 신상동 사이, 유성구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대덕구의 읍내동 일대에 있었다. 위쪽의 오른쪽(동)에서 왼쪽(서)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금강 본류이고, 아래쪽에서 금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와 동일하게 甲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왼쪽과 아래쪽에 公州界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공주의 땅이 현재의 대전직할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쪽에는 인접하지 않은 淸州界가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신상동 북쪽 동구 지역에 청주의 월경지인 周岸面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회덕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로는 《해동지도》가 가장 자세하여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호서지도》의 회덕 지도를 의미하는 備圖를 참조하여 了峴과 了田峴을 첨가한다는 첨지가 붙어 있다. 지도에도 이 지명을 첨가하여 수록하였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기타 객사 아래쪽의 造山은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의 취약 지점에 裨補를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案山에 해당된다.(이기봉)

  • 강령현 (康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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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령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동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강령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강령군의 강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강령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용적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보다 훨씬 조악한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지도 아래쪽에 洋中水路가 2개만 적혀 있고 수로의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洋中水路(또는 水路)가 4개나 기록되어 있고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왼쪽 巡威島 위쪽 섬에는 瓮津이라 적으려다가 만 瓮이라는 글자도 보이고 있으며, 읍치에는 객사와 창의 문자도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는 본 지도보다 정선되게 기록되어 있어 서로 필사 관계에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가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여 동일 계통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형태와 내용의 측면에서 본 지도나 《광여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지만 순위도를 비롯하여 상당 부분에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라고 볼 수 있으며,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 가까운 필사본이 《해동지도》와는 또 다른 계통으로 필사되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이기봉)

  • 강령현 주기 (康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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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령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동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강령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강령군의 강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강령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용적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보다 훨씬 조악한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지도 아래쪽에 洋中水路가 2개만 적혀 있고 수로의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洋中水路(또는 水路)가 4개나 기록되어 있고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왼쪽 巡威島 위쪽 섬에는 瓮津이라 적으려다가 만 瓮이라는 글자도 보이고 있으며, 읍치에는 객사와 창의 문자도 생략되어 있다. 《광여도》는 본 지도보다 정선되게 기록되어 있어 서로 필사 관계에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가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여 동일 계통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형태와 내용의 측면에서 본 지도나 《광여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지만 순위도를 비롯하여 상당 부분에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라고 볼 수 있으며,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에 가까운 필사본이 《해동지도》와는 또 다른 계통으로 필사되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이기봉)

  • 곡산부 (谷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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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곡산군, 신평군, 평안남도의 회창군 동쪽 일부 및 강원도의 판교군 서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곡산군의 곡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곡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글씨 방향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 원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주기를 첨가하면서 북쪽을 위로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가 남북을 동서보다 훨씬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을 약간 더 길게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가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원본 계통을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북)의 陽德 방향에서 흘러와 위쪽(서)의 成川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남강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양덕에서 흘러오는 남강의 모습이 상당히 굵게 표현되어 있어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 약간 애매하게 바뀌어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왼쪽(남)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현재의 곡산천보다 더 좁은 하천인 것처럼 실선으로 표현하였다. 필사 과정에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인위적으로 표현 방법을 바꿈으로써 사실을 왜곡하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왼쪽의 남서쪽과 남쪽의 일부는 예성강의 최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에도 그런 사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래쪽(동)의 동촌면 일부는 현재의 판교군에 걸쳐 있으면서 임진강의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 부분에 《해동지도》에는 있는 高達山이 생략되어 있고, 佛峯寺가 佛峯山으로 오기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곡산부 주기 (谷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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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곡산군, 신평군, 평안남도의 회창군 동쪽 일부 및 강원도의 판교군 서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곡산군의 곡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곡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글씨 방향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 원래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주기를 첨가하면서 북쪽을 위로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가 남북을 동서보다 훨씬 길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을 약간 더 길게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가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원본 계통을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북)의 陽德 방향에서 흘러와 위쪽(서)의 成川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남강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양덕에서 흘러오는 남강의 모습이 상당히 굵게 표현되어 있어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 약간 애매하게 바뀌어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왼쪽(남)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현재의 곡산천보다 더 좁은 하천인 것처럼 실선으로 표현하였다. 필사 과정에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인위적으로 표현 방법을 바꿈으로써 사실을 왜곡하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왼쪽의 남서쪽과 남쪽의 일부는 예성강의 최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에도 그런 사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래쪽(동)의 동촌면 일부는 현재의 판교군에 걸쳐 있으면서 임진강의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 부분에 《해동지도》에는 있는 高達山이 생략되어 있고, 佛峯寺가 佛峯山으로 오기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금천군 (金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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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남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의 금천군, 토산군의 서쪽, 황해남도 봉천군의 동쪽 일부, 개성직할시 장풍군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금천군의 금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읍치의 동남쪽에 있는 大興山城과 동쪽의 大南面 부분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방향이 일정하게 맞지는 않는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가장 큰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예성강 본류는 대체적으로 북쪽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본 지도에 표현된 내용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다른 3개 지도에는 왼쪽 위쪽에 新溪界와 兎山界가 적혀 있지만 본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어 대략적인 방향을 이해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토산계 방면에서는 현재의 구연강이 흘러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구연강은 대흥산성에서 흘러오는 하천보다 훨씬 길고 하폭도 넓지만 아주 작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대형산성인 대현산성과 읍치 부분을 가장 크고 자세하게 그리고, 동북-서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고을의 모습을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비슷하지만 산줄기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산줄기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변형이 가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금천군은 효종 3년(1652)에 江陰縣과 牛峯縣이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각각의 중심지가 읍치 위쪽에 古牛峯旧基로, 아래쪽에 古江陰으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금천군 주기 (金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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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남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의 금천군, 토산군의 서쪽, 황해남도 봉천군의 동쪽 일부, 개성직할시 장풍군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금천군의 금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읍치의 동남쪽에 있는 大興山城과 동쪽의 大南面 부분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방향이 일정하게 맞지는 않는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가장 큰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예성강 본류는 대체적으로 북쪽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본 지도에 표현된 내용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다른 3개 지도에는 왼쪽 위쪽에 新溪界와 兎山界가 적혀 있지만 본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어 대략적인 방향을 이해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토산계 방면에서는 현재의 구연강이 흘러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구연강은 대흥산성에서 흘러오는 하천보다 훨씬 길고 하폭도 넓지만 아주 작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대형산성인 대현산성과 읍치 부분을 가장 크고 자세하게 그리고, 동북-서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고을의 모습을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어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비슷하지만 산줄기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산줄기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변형이 가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금천군은 효종 3년(1652)에 江陰縣과 牛峯縣이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각각의 중심지가 읍치 위쪽에 古牛峯旧基로, 아래쪽에 古江陰으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문화현 (文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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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삼천군 북쪽 절반, 신천군의 서북쪽 일부, 안악군의 서쪽 1/3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건천리 부근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문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는 대체적으로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서쪽의 산을 등지고 있는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던 九月山城과 그 남쪽에 수없이 많이 들어서 있던 사찰이다. 구월산은 조선시대에 단군 조선의 신화와 결부된 산으로 여겨져 신성시되었던 곳 중의 하나이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부응하여 구월산성이 축조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징적 측면 때문에 구월산성과 그 주변이 가장 자세하게 묘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읍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지역에서 물이 모여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상류에 해당된다. 지도의 왼쪽 위에는 작은 하천 하나가 그려져 있고, 興徃面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의 삼천군 金川里  부근으로 실제로 장연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하천의 모습이 생략되어 있고 興徃面의 위치가 산줄기의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다. 후대의 필사자가 실제의 사실을 검토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지도의 내용을 바꾸면서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자의적 변경은 단순한 실수라기보다는 고을을 물줄기와 산줄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풍수적 명당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문화현 주기 (文化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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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삼천군 북쪽 절반, 신천군의 서북쪽 일부, 안악군의 서쪽 1/3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건천리 부근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문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는 대체적으로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서쪽의 산을 등지고 있는 입지 방향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던 九月山城과 그 남쪽에 수없이 많이 들어서 있던 사찰이다. 구월산은 조선시대에 단군 조선의 신화와 결부된 산으로 여겨져 신성시되었던 곳 중의 하나이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부응하여 구월산성이 축조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징적 측면 때문에 구월산성과 그 주변이 가장 자세하게 묘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읍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지역에서 물이 모여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상류에 해당된다. 지도의 왼쪽 위에는 작은 하천 하나가 그려져 있고, 興徃面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의 삼천군 金川里  부근으로 실제로 장연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하천의 모습이 생략되어 있고 興徃面의 위치가 산줄기의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다. 후대의 필사자가 실제의 사실을 검토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지도의 내용을 바꾸면서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자의적 변경은 단순한 실수라기보다는 고을을 물줄기와 산줄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풍수적 명당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배천군 (白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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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남부 일부를 제외한 배천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배천군의 배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배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배천군은 동쪽으로 예성강 하류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 교동과 마주보고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예성강 하류에 開城府 방향의 육지가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碧瀾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맞은편 개성부 지역에 고려시대의 최대 무역항이었던 벽란도가 있었다. 바로 위쪽의 錢浦는 우리말 ‘돈개’에 대한 한자 표현이다. 읍치에는 총 8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4개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7개가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책의 충청도 군현 지도에 대한 해제를 참조해 보면 본 지도책의 지도가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편이다. 배천군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는 또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일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도 필사자에 따라 내용이 일부 변형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배천군 주기 (白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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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남부 일부를 제외한 배천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배천군의 배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배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배천군은 동쪽으로 예성강 하류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 교동과 마주보고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예성강 하류에 開城府 방향의 육지가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碧瀾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맞은편 개성부 지역에 고려시대의 최대 무역항이었던 벽란도가 있었다. 바로 위쪽의 錢浦는 우리말 ‘돈개’에 대한 한자 표현이다. 읍치에는 총 8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4개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7개가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책의 충청도 군현 지도에 대한 해제를 참조해 보면 본 지도책의 지도가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편이다. 배천군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광여도》와 《여지도》는 또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일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도 필사자에 따라 내용이 일부 변형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봉산군 (鳳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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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봉산군, 사리원시, 은파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봉산군의 봉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봉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의 왼쪽에 바다처럼 표현된 부분은 현재의 재령강으로 밀물 때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현재는 일제시대 이후 상당한 개간이 이루어져 하천처럼 하폭이 좁아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도에서처럼 상당히 넓은 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재령강의 본류는 아래쪽 載寧界에서 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여지도》 및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 본류의 끝을 굵게 표현하여 해당 방향에서 흘러옴을 암시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마치 아주 짧은 하천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지도의 위쪽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현재의 서흥강이고, 아래쪽은 현재의 은파천이다. 두 하천 모두 동쪽의 瑞興界와 平山界에서 흘러들어오지만 역시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점은 나머지 3개의 지도에도 비슷하게 되어 있어 실제를 확인할 수 없는 필사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正方山城과 그로부터 왼쪽으로 성곽이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에도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곳은 대동강을 건넌 적이 긴 평지를 지나다가 만나는 산줄기로서 중요한 관방처로서 인식되었다. 오른쪽(동)으로부터 東里鎭, 정방산성, 蒜山鎭 등이 설치되어 있고, 埋伏處가 기록되었던 것은 이러한 지형적 중요성 때문이다. 산산진 왼쪽의 성곽은 원래는 가시 나무를 심어놓아 棘城이라 불렸지만 후대에 토성과 석성으로 증축되었다. 동쪽의 산줄기를 피해 재령강변의 평지를 돌아 남진하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관방처이다.(이기봉)

  • 봉산군 주기 (鳳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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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봉산군, 사리원시, 은파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봉산군의 봉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봉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의 왼쪽에 바다처럼 표현된 부분은 현재의 재령강으로 밀물 때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현재는 일제시대 이후 상당한 개간이 이루어져 하천처럼 하폭이 좁아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도에서처럼 상당히 넓은 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재령강의 본류는 아래쪽 載寧界에서 들어오는데,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해동지도》와 《여지도》 및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 본류의 끝을 굵게 표현하여 해당 방향에서 흘러옴을 암시하고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마치 아주 짧은 하천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지도의 위쪽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현재의 서흥강이고, 아래쪽은 현재의 은파천이다. 두 하천 모두 동쪽의 瑞興界와 平山界에서 흘러들어오지만 역시 본 지도만으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점은 나머지 3개의 지도에도 비슷하게 되어 있어 실제를 확인할 수 없는 필사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正方山城과 그로부터 왼쪽으로 성곽이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에도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곳은 대동강을 건넌 적이 긴 평지를 지나다가 만나는 산줄기로서 중요한 관방처로서 인식되었다. 오른쪽(동)으로부터 東里鎭, 정방산성, 蒜山鎭 등이 설치되어 있고, 埋伏處가 기록되었던 것은 이러한 지형적 중요성 때문이다. 산산진 왼쪽의 성곽은 원래는 가시 나무를 심어놓아 棘城이라 불렸지만 후대에 토성과 석성으로 증축되었다. 동쪽의 산줄기를 피해 재령강변의 평지를 돌아 남진하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관방처이다.(이기봉)

  • 서흥부 (瑞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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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서흥군, 연탄군 동쪽 절반, 봉산군과 린산군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흥군의 화곡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흥부(또는 서흥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서흥이 현으로 강등된 시기는 1671년(현종 12)-1762년(영조 38) 사이와 1777년(정조 1)-1786년(정조 10) 사이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縣으로 되어 있고,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府로 되어 있어 필사 시기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를 지나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서흥강이고,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황주강으로 재령강과 대동강에 합류되어 바다로 빠져나간다. 서흥부의 동북쪽 일부가 예성강 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의 오른쪽 위의 하천이 바로 그것이다. 본 지도에는 읍치와 大峴山城이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대현산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대현산성 안에는 토산, 수안, 신계, 곡산 등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서흥과 함께 산성에 들어와 적을 방어하는 고을의 식량을 보관하던 곳이다. 평상시에는 보통 사찰에서 성곽의 수리를 담당했는데, 대현산성 안에 표시된 紫烟寺가 그런 사찰이다. 지도 위에는 ‘○○坊’이라는 지명이 자주 기록되어 있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대신하여 부르던 명칭이었다.(이기봉)

  • 서흥부 주기 (瑞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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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서흥군, 연탄군 동쪽 절반, 봉산군과 린산군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서흥군의 화곡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서흥부(또는 서흥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서흥이 현으로 강등된 시기는 1671년(현종 12)-1762년(영조 38) 사이와 1777년(정조 1)-1786년(정조 10) 사이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縣으로 되어 있고, 본 지도와 《광여도》에는 府로 되어 있어 필사 시기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를 지나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서흥강이고,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황주강으로 재령강과 대동강에 합류되어 바다로 빠져나간다. 서흥부의 동북쪽 일부가 예성강 상류에 걸쳐 있는데, 본 지도의 오른쪽 위의 하천이 바로 그것이다. 본 지도에는 읍치와 大峴山城이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대현산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대현산성 안에는 토산, 수안, 신계, 곡산 등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서흥과 함께 산성에 들어와 적을 방어하는 고을의 식량을 보관하던 곳이다. 평상시에는 보통 사찰에서 성곽의 수리를 담당했는데, 대현산성 안에 표시된 紫烟寺가 그런 사찰이다. 지도 위에는 ‘○○坊’이라는 지명이 자주 기록되어 있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대신하여 부르던 명칭이었다.(이기봉)

  • 송화현 (松禾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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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송화군, 삼천군의 남쪽 절반 정도, 신천군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송화군의 송화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송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의 글씨 중 가장 중요한 읍치의 客舍와 衙(舍)가 북쪽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을 통해 볼 때 원본은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위쪽에 그려진 2개의 큰 하천은 모두 장연부의 땅을 지나 서해로 바로 빠져나가며, 아래쪽의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인 현재의 신천군 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본 지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하천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 있게 그렸다. 첫째, 아래쪽의 하천이 信川界로 빠져나가는 방향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입구에 長淵界와 海州界를 모두 써넣어 마치 장연과 해주의 경계선 부근으로 하천이 흘러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해주계에 장연계가 기록되어 있고, 해주계는 더 동쪽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 하천들은 해주계와 상관 없이 장연계 방면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이 오류는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한번 범해진 오류가 지속적으로 필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 송화현 주기 (松禾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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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송화군, 삼천군의 남쪽 절반 정도, 신천군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송화군의 송화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송화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동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의 글씨 중 가장 중요한 읍치의 客舍와 衙(舍)가 북쪽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을 통해 볼 때 원본은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위쪽에 그려진 2개의 큰 하천은 모두 장연부의 땅을 지나 서해로 바로 빠져나가며, 아래쪽의 하천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인 현재의 신천군 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본 지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하천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 있게 그렸다. 첫째, 아래쪽의 하천이 信川界로 빠져나가는 방향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나머지 3개 지도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입구에 長淵界와 海州界를 모두 써넣어 마치 장연과 해주의 경계선 부근으로 하천이 흘러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해주계에 장연계가 기록되어 있고, 해주계는 더 동쪽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 하천들은 해주계와 상관 없이 장연계 방면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이 오류는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한번 범해진 오류가 지속적으로 필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 수안군 (遂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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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수안군, 연산군, 연탄군의 동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수안군의 석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현재의 예성강 최상류에 해당되며, 오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왼쪽 栗界坊 부근은 현재의 황주강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황주강 최상류가 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상호 관련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예성강과 남강 사이의 산줄기는 오른쪽 위의 彦眞山(1,120m)을 비롯하여 험준한 관방처를 이루고 있다. 지도에도 왼쪽 위의 防垣岺에 관문성이 그려져 있고, 산줄기의 남쪽 부분에는 文山鎭과 位羅鎭이 설치되어 있어 요해처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도에는 ‘○○坊 ’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해동지도》에는 坊마다 소속된 里의 수가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도한 《해동지도》에 기록된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도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 정보를 일괄적으로 생략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읍치 부분에는 遂安이라는 군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어 각 군현이 하나의 지도책으로 묶이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수안군 주기 (遂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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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수안군, 연산군, 연탄군의 동북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수안군의 석담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안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현재의 예성강 최상류에 해당되며, 오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왼쪽 栗界坊 부근은 현재의 황주강 최상류에 해당되지만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황주강 최상류가 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상호 관련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예성강과 남강 사이의 산줄기는 오른쪽 위의 彦眞山(1,120m)을 비롯하여 험준한 관방처를 이루고 있다. 지도에도 왼쪽 위의 防垣岺에 관문성이 그려져 있고, 산줄기의 남쪽 부분에는 文山鎭과 位羅鎭이 설치되어 있어 요해처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도에는 ‘○○坊 ’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부에서 面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해동지도》에는 坊마다 소속된 里의 수가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도한 《해동지도》에 기록된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도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 정보를 일괄적으로 생략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읍치 부분에는 遂安이라는 군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어 각 군현이 하나의 지도책으로 묶이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신계현 (新溪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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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신계군, 수안군의 서남쪽 일부, 곡산군의 남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계군의 신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쪽의 遂安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의 平山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평산계 방면에는 平山猪灘上流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평산에서는 예성강을 猪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신계현 지역의 예성강 부분에도 甫音川, 沙羅川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현재처럼 본류와 지류에 따라 명칭을 구분하기보다는 하천의 각 구간마다 지역에서 부르는 명칭이 달랐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본 지도에서는 예성강이 遂安界 방면에서 흘러 들어오고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고, 예성강 본류와 지류가 별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상당히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인위적으로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더욱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본류와 지류에 대한 실제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읍치 안에는 《광여도》, 《여지도》와 동일하게 총 9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6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신계현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해동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신계현 주기 (新溪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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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신계군, 수안군의 서남쪽 일부, 곡산군의 남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계군의 신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쪽의 遂安界에서 들어와 아래쪽의 平山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다. 평산계 방면에는 平山猪灘上流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평산에서는 예성강을 猪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신계현 지역의 예성강 부분에도 甫音川, 沙羅川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현재처럼 본류와 지류에 따라 명칭을 구분하기보다는 하천의 각 구간마다 지역에서 부르는 명칭이 달랐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본 지도에서는 예성강이 遂安界 방면에서 흘러 들어오고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고, 예성강 본류와 지류가 별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상당히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인위적으로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더욱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자가 본류와 지류에 대한 실제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읍치 안에는 《광여도》, 《여지도》와 동일하게 총 9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6개의 건물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신계현의 읍치 건물 수와 배치도 충청도의 군현 지도와 비슷한 경향을 띄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한 건물을 제외한 일부 건물을 생략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읍치의 건물 수와 배치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해동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신천군 (信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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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쪽 1/3 정도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신천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신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지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아래쪽의 加介面과 大井面 지역은 서강 유역에 속해 있지 않으며, 동쪽으로 흘러가는 또다른 재령강의 지류 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는 이 방향이 산줄기로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 본 지도에서는 완전하게 이어진 것으로 바뀌어 있어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다. 이 점은 《광여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여지도》에서는 대부분 비슷하지만 天峯山 부근의 산줄기가 일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더 심한 오해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읍치 부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은치 왼쪽의 訓練이 있는 부분이 본 지도에는 완전히 산줄기로 둘러싸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衙舍 부분의 산줄기가 극히 짧음에 반해 본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감싸고 있다. 또한 남쪽 造山도 《해동지도》에는 단지 평지에 작게 솟아난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동쪽의 산줄기와 연결된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읍치의 풍수적 명당 형국을 강조하여 그리려는 의도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본 지도보다는 덜 하지만 造山이 동쪽 산줄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측면은 동일하다.(이기봉)

  • 신천군 주기 (信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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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쪽 1/3 정도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신천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신천군의 신천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신천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읍치를 지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지류인 서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아래쪽의 加介面과 大井面 지역은 서강 유역에 속해 있지 않으며, 동쪽으로 흘러가는 또다른 재령강의 지류 상류에 해당된다. 《해동지도》에는 이 방향이 산줄기로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 본 지도에서는 완전하게 이어진 것으로 바뀌어 있어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다. 이 점은 《광여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여지도》에서는 대부분 비슷하지만 天峯山 부근의 산줄기가 일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더 심한 오해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읍치 부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은치 왼쪽의 訓練이 있는 부분이 본 지도에는 완전히 산줄기로 둘러싸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衙舍 부분의 산줄기가 극히 짧음에 반해 본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감싸고 있다. 또한 남쪽 造山도 《해동지도》에는 단지 평지에 작게 솟아난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에는 동쪽의 산줄기와 연결된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읍치의 풍수적 명당 형국을 강조하여 그리려는 의도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본 지도보다는 덜 하지만 造山이 동쪽 산줄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측면은 동일하다.(이기봉)

  • 안악군 (安岳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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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은천군, 서쪽 일부를 제외한 안악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안군의 안악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악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북쪽은 바다처럼, 동쪽과 남쪽의 하천이 상당히 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북쪽은 대동강이 바다로 진입하는 부분이고, 동쪽은 재령강의 본류이며, 남쪽은 그 지류인 현재의 서강이다. 모두 밀물 때 바닷물이 유입되는 곳으로서 상당히 넓은 부분에 걸쳐 지도에서처럼 갯벌이 발달되어 있었다. 이곳은 일제시대 이후 대대적으로 개간된 지역 중의 하나이며, 북쪽의 猪島도 현재는 완전히 육지화되어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없다. 특히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長慶塔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없는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해동지도》는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도로나 일부 부분에서 편집을 행하면서 필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읍치로부터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이러한 거리 기록이 생략되어 있다. 거리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까우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거리 기록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안악군 주기 (安岳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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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은천군, 서쪽 일부를 제외한 안악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안군의 안악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악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북쪽은 바다처럼, 동쪽과 남쪽의 하천이 상당히 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북쪽은 대동강이 바다로 진입하는 부분이고, 동쪽은 재령강의 본류이며, 남쪽은 그 지류인 현재의 서강이다. 모두 밀물 때 바닷물이 유입되는 곳으로서 상당히 넓은 부분에 걸쳐 지도에서처럼 갯벌이 발달되어 있었다. 이곳은 일제시대 이후 대대적으로 개간된 지역 중의 하나이며, 북쪽의 猪島도 현재는 완전히 육지화되어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없다. 특히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長慶塔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없는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다른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해동지도》는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도로나 일부 부분에서 편집을 행하면서 필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읍치로부터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이러한 거리 기록이 생략되어 있다. 거리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까우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원본에서 거리 기록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연안부 (延安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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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연안군 동쪽과 남쪽, 배천군의 서남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안군의 연안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안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지명과 표현 방식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성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져 있고, 읍성 내의 건물 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첫째, 나머지 3개 지도가 《해동지도》에 비해 훨씬 작기 때문에 수록된 정보를 모두 표현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으며 둘째, 충청도의 몇몇 군현 지도에서 확인되고 있듯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를 생략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명의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오류도 보이고 있다. 읍성의 아래쪽에 기록된 南大地는 나머지 3개 지도에 南大池로 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아래의 並城界가 《해동지도》에는 並城面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주기 부분에 並城面으로 나오고 있어 《해동지도》가 올바르고 나머지 3개 지도와 같은 필사본 계통에서 오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읍성 오른쪽의 池村面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洪村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지도의 주기면에 池村面이 표시되어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읍성 오른쪽에 다른 3개 지도에는 있는 文書山이 생략되는 등 필사 과정에서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자료 이용시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기봉)

  • 연안부 주기 (延安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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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연안군 동쪽과 남쪽, 배천군의 서남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안군의 연안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안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지명과 표현 방식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상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나머지 3개 지도에 비해 읍성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져 있고, 읍성 내의 건물 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첫째, 나머지 3개 지도가 《해동지도》에 비해 훨씬 작기 때문에 수록된 정보를 모두 표현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으며 둘째, 충청도의 몇몇 군현 지도에서 확인되고 있듯 《해동지도》의 필사자가 중요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를 생략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지명의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오류도 보이고 있다. 읍성의 아래쪽에 기록된 南大地는 나머지 3개 지도에 南大池로 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왼쪽 아래의 並城界가 《해동지도》에는 並城面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다. 주기 부분에 並城面으로 나오고 있어 《해동지도》가 올바르고 나머지 3개 지도와 같은 필사본 계통에서 오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읍성 오른쪽의 池村面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洪村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지도의 주기면에 池村面이 표시되어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읍성 오른쪽에 다른 3개 지도에는 있는 文書山이 생략되는 등 필사 과정에서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자료 이용시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기봉)

  • 옹진현 (瓮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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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여으로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옹진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옹진군의 옹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옹진부(또는 옹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옹진은 1719년(숙종 45)에 所江僉使鎭을 水軍節度使營으로 바꾸면서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옹진부사가 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본 지도에는 명칭이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에 사용된 원본이 1719년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본 지도가 언제 필사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1800년 이후에 필사된 것이 확인되고 있는 《광여도》에도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군현의 명칭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옹진현이 아니라 옹진부로 되어 있어 옹진이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된 이후에 필사되면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성과 소강진에 표시된 건물의 수라는 측면에서 앞의 4개 지도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본 지도이며, 《광여도》와 《여지도》가 그 다음으로 많고, 《해동지도》가 가장 적다. 이러한 경향성은 충청도의 군현지도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황해도의 일부 군현 지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은 원본에 가장 가깝게 필사한 것이 본 지도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몇몇 건물을 제외하면 원본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지도에는 船倉(또는 舡倉)이 2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왼쪽의 것에는 소강진 소속의 전선이, 오른쪽의 것에는 옹진현 소속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었다.(이기봉)

  • 옹진현 주기 (瓮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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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진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여으로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의 옹진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옹진군의 옹진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옹진부(또는 옹진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옹진은 1719년(숙종 45)에 所江僉使鎭을 水軍節度使營으로 바꾸면서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옹진부사가 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본 지도에는 명칭이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에 사용된 원본이 1719년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본 지도가 언제 필사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1800년 이후에 필사된 것이 확인되고 있는 《광여도》에도 옹진현으로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군현의 명칭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에는 옹진현이 아니라 옹진부로 되어 있어 옹진이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된 이후에 필사되면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성과 소강진에 표시된 건물의 수라는 측면에서 앞의 4개 지도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본 지도이며, 《광여도》와 《여지도》가 그 다음으로 많고, 《해동지도》가 가장 적다. 이러한 경향성은 충청도의 군현지도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황해도의 일부 군현 지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은 원본에 가장 가깝게 필사한 것이 본 지도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동지도》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몇몇 건물을 제외하면 원본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지도에는 船倉(또는 舡倉)이 2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왼쪽의 것에는 소강진 소속의 전선이, 오른쪽의 것에는 옹진현 소속의 전선이 정박되어 있었다.(이기봉)

  • 은율현 (은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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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윤율군 서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은율군 은율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은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부분은 읍치와 九月山城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대부분의 대형산성이 황폐화되거나 사용되지 않았는데, 두 번에 걸친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는 대규모의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주변의 여러 고을 사람들이 입성하여 장기전을 펼치는 방식이다. 이러한 장기전은 대규모 외적의 보급로 차단 등을 통해 힘을 약화시킨 후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는 전략으로 이미 고구려에서 수당과의 전쟁 때 효과를 보았던 방법이다. 구월산성 안에는 안악, 장련, 풍천, 문화, 송화, 은율 등의 명칭이 적힌 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대규모 외적의 침입 시 함께 입성하여 적을 방어하게 되어 있는 고을들이다. 앞서 언급한 4개의 지도 중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지 않은 반면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본 지도는 지도의 제작 수준이 상당히 저열한 편이며, 《해동지도》의 경우 鄕賢祠宇에서 賢을 縣으로 기록하고 읍치 위쪽에 표시된 塔峴의 塔을 잘못 기록하는 등 몇 가지 오류가 보이고 있어 둘 다 최초의 원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왼쪽에는 防舡이 표시되어 있는데, 은율현에 소속되어 있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곳이다. 그 아래쪽의 海倉은 은율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읍치 아래쪽에 기록된 漢川은 우리말 ‘한내’에 대한 표현 중의 하나로 일반적으로는 ‘大川’이라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은율현 주기 (은율현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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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윤율군 서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은율군 은율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은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부분은 읍치와 九月山城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방어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대부분의 대형산성이 황폐화되거나 사용되지 않았는데, 두 번에 걸친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는 대규모의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주변의 여러 고을 사람들이 입성하여 장기전을 펼치는 방식이다. 이러한 장기전은 대규모 외적의 보급로 차단 등을 통해 힘을 약화시킨 후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는 전략으로 이미 고구려에서 수당과의 전쟁 때 효과를 보았던 방법이다. 구월산성 안에는 안악, 장련, 풍천, 문화, 송화, 은율 등의 명칭이 적힌 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대규모 외적의 침입 시 함께 입성하여 적을 방어하게 되어 있는 고을들이다. 앞서 언급한 4개의 지도 중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지 않은 반면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본 지도는 지도의 제작 수준이 상당히 저열한 편이며, 《해동지도》의 경우 鄕賢祠宇에서 賢을 縣으로 기록하고 읍치 위쪽에 표시된 塔峴의 塔을 잘못 기록하는 등 몇 가지 오류가 보이고 있어 둘 다 최초의 원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왼쪽에는 防舡이 표시되어 있는데, 은율현에 소속되어 있던 전선이 정박되어 있던 곳이다. 그 아래쪽의 海倉은 은율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읍치 아래쪽에 기록된 漢川은 우리말 ‘한내’에 대한 표현 중의 하나로 일반적으로는 ‘大川’이라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장련현 (長連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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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은율군의 동북쪽 절반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은율군의 장련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크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은 모두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해동지도》에는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에 옅은 남색을 칠해 넣어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동쪽과 서북쪽 일부에만 옅은 남색을 칠하여 나머지 지역은 육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북쪽에 기록된 三和界에서 三和는 대동강과 서해가 만나는 넓은 물을 건너 있는 평안도의 고을이기 때문에 도별도를 약간만 검토해도 이 부분이 바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서는 이중 서북쪽 부분이 분명하게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고, 동북쪽 부분도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광여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더 심해져 동북쪽 부분에도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해동지도》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분에 대한 최초의 오해 가능성은 본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만들어냈으며, 이러한 오해 가능성이 《여지도》나 《광여도》에 가면서 실제로 큰 오류로 전화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오류의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지도의 필사자들이 지도 위의 정보를 다른 자료와 검토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지도 전문가라기보다는 지도를 그림으로 인식한 화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이기봉)

  • 장련현 주기 (長連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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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련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 은율군의 동북쪽 절반 정도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은율군의 장련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련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크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은 모두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해동지도》에는 장련현의 동쪽과 북쪽 및 서쪽에 옅은 남색을 칠해 넣어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동쪽과 서북쪽 일부에만 옅은 남색을 칠하여 나머지 지역은 육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렸다. 북쪽에 기록된 三和界에서 三和는 대동강과 서해가 만나는 넓은 물을 건너 있는 평안도의 고을이기 때문에 도별도를 약간만 검토해도 이 부분이 바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지도》에서는 이중 서북쪽 부분이 분명하게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고, 동북쪽 부분도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광여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더 심해져 동북쪽 부분에도 일부만 바다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해동지도》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분에 대한 최초의 오해 가능성은 본 지도 계통의 필사자가 만들어냈으며, 이러한 오해 가능성이 《여지도》나 《광여도》에 가면서 실제로 큰 오류로 전화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오류의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지도의 필사자들이 지도 위의 정보를 다른 자료와 검토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지도 전문가라기보다는 지도를 그림으로 인식한 화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이기봉)

  • 장연부 (長淵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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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현은 인천직할시의 백령면,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장연군, 룡연군, 태탄군의 서쪽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연군의 장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과 수록된 내용에서 일부 달라지는 측면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첫째, 바다에 대한 표현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서쪽과 서남쪽이 탁 트인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마치 호수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서쪽에 西大海라는 문구가 있어 바다임을 알 수는 있지만 이 문구가 없다면 바다임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표현은 그림식 지도에서 가끔 나타나고 있는데, 표현하고자 하는 지역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추정된다. 둘째, 《해동지도》는 동서가 길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이 길게 그려져 있다. 실제의 장연현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길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세로가 긴 종이에 맞추기 위해 남북을 길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원본 계통은 《해동지도》에 가깝지만 후에 필사 과정에서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형식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필사 과정에서 일부 한자가 달라지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지도 아래쪽에 新鎭과 旧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五叉鎭을 의미하며 鎭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新鎭이 新津으로 바뀌어 있다. 이런 지명 중의 하나로 아래쪽의 乃沙陸(島)가 있는데, 역시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나머지 2개 지도에는 乃沙島로 바뀌어 있다. 또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하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약간 다르면서 서로 비슷하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와 다른 필사본 계통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계통 내에서도 일부 달라지는 지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장연부 주기 (長淵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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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현은 인천직할시의 백령면,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장연군, 룡연군, 태탄군의 서쪽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연군의 장연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과 수록된 내용에서 일부 달라지는 측면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첫째, 바다에 대한 표현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서쪽과 서남쪽이 탁 트인 바다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마치 호수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서쪽에 西大海라는 문구가 있어 바다임을 알 수는 있지만 이 문구가 없다면 바다임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표현은 그림식 지도에서 가끔 나타나고 있는데, 표현하고자 하는 지역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추정된다. 둘째, 《해동지도》는 동서가 길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남북이 길게 그려져 있다. 실제의 장연현 모습은 동서가 남북보다 길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지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세로가 긴 종이에 맞추기 위해 남북을 길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원본 계통은 《해동지도》에 가깝지만 후에 필사 과정에서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형식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필사 과정에서 일부 한자가 달라지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지도 아래쪽에 新鎭과 旧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五叉鎭을 의미하며 鎭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해동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新鎭이 新津으로 바뀌어 있다. 이런 지명 중의 하나로 아래쪽의 乃沙陸(島)가 있는데, 역시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나머지 2개 지도에는 乃沙島로 바뀌어 있다. 또한 산줄기의 표현 방식에서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거의 비슷하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와 약간 다르면서 서로 비슷하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와 다른 필사본 계통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계통 내에서도 일부 달라지는 지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재령군 (載寧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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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재령군, 남쪽 일부를 제외한 신원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재령군의 재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재령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천에 대한 표현이다. 남쪽의 海州界에서 흘러와 동쪽을 지나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본류이며, 왼쪽 위의 安岳界에서 흘러와 재령강에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의 표현만을 놓고 보면 재령강이 마치 북쪽으로 흐르다 서쪽의 安岳界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서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과 서강이 北이란 문자가 쓰여 있는 곳에서 분명하게 합류되듯이 그려져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만이 오해할 수 있도록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왼쪽 위에 三橋屯 오른쪽의 하천이다. 이 하천은 현재의 서강 본류로서 신천군에서 흘러 들어와야 한다. 본 지도에서도 이 하천의 끝을 굵게 하여 그런 사실의 일면을 전하고 있지만 산줄기를 그 서쪽에 그려넣어 신천계에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에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사실에 가깝게 그렸다. 다만 《해동지도》에 이 부분의 왼쪽에 積山이라는 작은 봉우리를 그리고 있는데, 후대의 필사자들이 이 봉우리를 아래쪽의 산줄기와 이어 그리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까지 이 오류가 이어지고 있어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아래쪽의 立岩 부근에서도 이러한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린 것은 읍치가 아니라 오른쪽 아래의 장수산성이다. 산성 안에는 白川, 信川, 載寧(本) 등의 군기고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이들 고을의 사람들이 들어와 장기 항전을 하기 위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재령군 주기 (載寧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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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군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재령군, 남쪽 일부를 제외한 신원군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재령군의 재령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재령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지도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천에 대한 표현이다. 남쪽의 海州界에서 흘러와 동쪽을 지나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재령강 본류이며, 왼쪽 위의 安岳界에서 흘러와 재령강에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서강이다. 그러나 본 지도의 표현만을 놓고 보면 재령강이 마치 북쪽으로 흐르다 서쪽의 安岳界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다. 나머지 3개 지도에서는 본 지도와 달리 재령강과 서강이 北이란 문자가 쓰여 있는 곳에서 분명하게 합류되듯이 그려져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만이 오해할 수 있도록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왼쪽 위에 三橋屯 오른쪽의 하천이다. 이 하천은 현재의 서강 본류로서 신천군에서 흘러 들어와야 한다. 본 지도에서도 이 하천의 끝을 굵게 하여 그런 사실의 일면을 전하고 있지만 산줄기를 그 서쪽에 그려넣어 신천계에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해동지도》에서는 이 부분에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사실에 가깝게 그렸다. 다만 《해동지도》에 이 부분의 왼쪽에 積山이라는 작은 봉우리를 그리고 있는데, 후대의 필사자들이 이 봉우리를 아래쪽의 산줄기와 이어 그리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까지 이 오류가 이어지고 있어 필사자들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에서는 오른쪽 아래쪽의 立岩 부근에서도 이러한 오류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지도에서 가장 자세하게 그린 것은 읍치가 아니라 오른쪽 아래의 장수산성이다. 산성 안에는 白川, 信川, 載寧(本) 등의 군기고나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유사시 이들 고을의 사람들이 들어와 장기 항전을 하기 위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토산현 (兎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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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산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의 토산군에 걸쳐 있엇으며, 읍치는 토산군의 월성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토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른쪽은 현재의 임진강 본류에 작은 지류 유역에 속하고, 왼쪽은 예성강의 지류인 구연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본 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중 본 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둘째, 건물의 표현에서 본 지도가 가장 자세한 편이다. 읍치에 있는 건물의 경우 본 지도에는 총 9개가 있는 반면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6개가, 《해동지도》에는 단지 3개만이 표시되어 있다. 동헌의 경우 본 지도에는 三門, 내동헌, 외동헌, 衙舍 등 4개가 그려져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三門을 생략하였고, 《해동지도》에서는 衙舍만을 표시하였다. 이런 변화는 客舍와 향교 건물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본 지도는 삼문을 비롯하여 부속건물이 가장 자세한 편이고 《해동지도》는 부속건물을 전혀 수록하지 않아 가장 단순한 편이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馬龍淵이 龍馬淵으로, 龍岩이 馬岩으로 기록되는 등의 오류가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종합해 볼 때 본 지도가 최초 원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최초 원본에 가장 가깝게 필사한 필사본이라고 판단할 수는 있다.(이기봉)

  • 토산현 주기 (兎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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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산현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서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의 토산군에 걸쳐 있엇으며, 읍치는 토산군의 월성리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토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른쪽은 현재의 임진강 본류에 작은 지류 유역에 속하고, 왼쪽은 예성강의 지류인 구연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본 지도와 나머지 3개 지도 중 본 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둘째, 건물의 표현에서 본 지도가 가장 자세한 편이다. 읍치에 있는 건물의 경우 본 지도에는 총 9개가 있는 반면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6개가, 《해동지도》에는 단지 3개만이 표시되어 있다. 동헌의 경우 본 지도에는 三門, 내동헌, 외동헌, 衙舍 등 4개가 그려져 있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三門을 생략하였고, 《해동지도》에서는 衙舍만을 표시하였다. 이런 변화는 客舍와 향교 건물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본 지도는 삼문을 비롯하여 부속건물이 가장 자세한 편이고 《해동지도》는 부속건물을 전혀 수록하지 않아 가장 단순한 편이다. 셋째, 《해동지도》에는 馬龍淵이 龍馬淵으로, 龍岩이 馬岩으로 기록되는 등의 오류가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종합해 볼 때 본 지도가 최초 원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최초 원본에 가장 가깝게 필사한 필사본이라고 판단할 수는 있다.(이기봉)

  • 평산부 (平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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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평산군, 린산군, 황해남도의 봉천군, 연안군 서쪽 일부, 청단군 동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평산군의 산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평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고, 왼쪽 아래가 서해에 맞닿아 있다. 왼쪽 위의 下月面과 上月面 지역은 예성강이 아닌 재령강의 최상류 유역에 해당되며, 현재의 린산군 서쪽과 북쪽 지역에 해당된다. 아래쪽(남)은 실제를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놓아 꼼꼼하게 검토해야만 실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평산부의 남쪽은 金川, 白川, 延安 등과 접해 있으며, 해주와 연안 사이의 좁은 犬牙相入地를 통해 남해와 맞닿아 있다. 이 견아상입지는 현재의 연안군 서쪽과 청단군 동쪽에 해당되는데, 지도에서 왼쪽 아래의 海州界와 海倉 사이 부분이다. 해창과 오른쪽의 예성강 사이에 延安界와 江陰界가 보이고 있는데, 실제로는 이 사이에 白川界가 하나 더 들어가야 사실에 가깝다. 江陰은 牛峯과 합쳐져 金川이 된 지명 중의 하나로 금천 지역 중 옛 江陰 지역에 해당되기 때문에 기록해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연안과 배천 및 강음의 땅이 상당히 넓게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산부의 지도이기 때문에 세 고을의 땅은 대략적인 방향만 기록해 놓았다. 읍치 왼쪽의 漏川橋가 있는 하천은 현재도 누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지도에서와 달리 실제로는 서쪽에서 동으로 흐른다. 읍치와 太白山城을 강조하여 그리고 사각형이 아닌 고을을 사각형에 맞추는 과정에서 실제의 하천 유로 방향이 왜곡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평산부 주기 (平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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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의 평산군, 린산군, 황해남도의 봉천군, 연안군 서쪽 일부, 청단군 동쪽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평산군의 산성리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평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 본류이고, 왼쪽 아래가 서해에 맞닿아 있다. 왼쪽 위의 下月面과 上月面 지역은 예성강이 아닌 재령강의 최상류 유역에 해당되며, 현재의 린산군 서쪽과 북쪽 지역에 해당된다. 아래쪽(남)은 실제를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놓아 꼼꼼하게 검토해야만 실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평산부의 남쪽은 金川, 白川, 延安 등과 접해 있으며, 해주와 연안 사이의 좁은 犬牙相入地를 통해 남해와 맞닿아 있다. 이 견아상입지는 현재의 연안군 서쪽과 청단군 동쪽에 해당되는데, 지도에서 왼쪽 아래의 海州界와 海倉 사이 부분이다. 해창과 오른쪽의 예성강 사이에 延安界와 江陰界가 보이고 있는데, 실제로는 이 사이에 白川界가 하나 더 들어가야 사실에 가깝다. 江陰은 牛峯과 합쳐져 金川이 된 지명 중의 하나로 금천 지역 중 옛 江陰 지역에 해당되기 때문에 기록해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연안과 배천 및 강음의 땅이 상당히 넓게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산부의 지도이기 때문에 세 고을의 땅은 대략적인 방향만 기록해 놓았다. 읍치 왼쪽의 漏川橋가 있는 하천은 현재도 누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지도에서와 달리 실제로는 서쪽에서 동으로 흐른다. 읍치와 太白山城을 강조하여 그리고 사각형이 아닌 고을을 사각형에 맞추는 과정에서 실제의 하천 유로 방향이 왜곡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풍천부 (豊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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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천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과일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과일군의 과일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풍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과 수록된 내용에서 일부 달라지는 측면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왼쪽 위의 琵琶串 부분이 마치 육지가 平安道界 방면으로 이어진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 이곳은 바다이다. 지도에도 大海가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 위에는 2개의 섬도 표시되어 있어 바다임을 알 수 있지만 비파곶 부분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이 부분을 본 지도만큼 애매하게 그리지는 않았지만 약간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이 부분을 오해하여 잘못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치 남쪽의 산줄기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해동지도》가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는 남쪽에서 바라본 형태로 그렸다. 읍치 오른쪽의 任墓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任倉으로 바뀌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깝고, 그 다음으로 본 지도, 나머지 2개 지도의 순이 아닌가 한다. 지도에는 허사진과 초도진 부분에 防船이 표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海倉 바로 아래쪽에도 방선이 기록되어 있다. 허사진과 초도진 모두 수군 기지로서 전선이 정박해 있는 곳에 防船을 표시한 것이며, 가장 아래쪽의 방선은 풍천부에서 관할하던 전선의 정박처이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防船留泊으로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필사자가 줄여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 安邑山 부근에 《해동지도》에는 栗里面이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4개 지도의 모든 주기에 율리면이 표시되어 있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필사 계통이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와는 약간 다른 동일 계통이라고 판단된다.(이기봉)

  • 풍천부 주기 (豊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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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천부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과일군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과일군의 과일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풍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과 수록된 내용에서 일부 달라지는 측면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왼쪽 위의 琵琶串 부분이 마치 육지가 平安道界 방면으로 이어진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 이곳은 바다이다. 지도에도 大海가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 위에는 2개의 섬도 표시되어 있어 바다임을 알 수 있지만 비파곶 부분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이 부분을 본 지도만큼 애매하게 그리지는 않았지만 약간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이 부분을 오해하여 잘못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사실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치 남쪽의 산줄기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해동지도》가 본 지도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는 남쪽에서 바라본 형태로 그렸다. 읍치 오른쪽의 任墓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任倉으로 바뀌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원본에 가장 가깝고, 그 다음으로 본 지도, 나머지 2개 지도의 순이 아닌가 한다. 지도에는 허사진과 초도진 부분에 防船이 표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海倉 바로 아래쪽에도 방선이 기록되어 있다. 허사진과 초도진 모두 수군 기지로서 전선이 정박해 있는 곳에 防船을 표시한 것이며, 가장 아래쪽의 방선은 풍천부에서 관할하던 전선의 정박처이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防船留泊으로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필사자가 줄여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 安邑山 부근에 《해동지도》에는 栗里面이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4개 지도의 모든 주기에 율리면이 표시되어 있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필사 계통이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와는 약간 다른 동일 계통이라고 판단된다.(이기봉)

  • 해주목 (海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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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목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해주시, 벽성군, 서쪽 일부를 제외한 청단군, 신원군의 남쪽 일부, 태탄군의 서쪽, 옹진군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해주시의 영광동과 부용동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해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첫째, 나머지 3개 지도가 북쪽을 위로 그린 반면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글씨 방향을 고려할 때 실제로는 북쪽을 위로 그렸다고 볼 수 있으며, 다만 후에 주기를 추가할 때 서쪽을 위로 하여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나머지 3개 지도가 동서보다 남북을 길게 그리고 있는 반면 《해동지도》는 동서를 길게 그렸다. 실제로 해주목은 남북보다는 동서가 긴 형태를 취하고 있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세로로 긴 종이의 모양에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리면서 남북이 긴 형태로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네 지도가 일부 생략되거나 바뀐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나머지 3개 지도에 없는 것으로는 오른쪽 아래의 海倉이 있다. 《해동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으로 오른쪽 아래 4개 섬 부근의 “潮退水路十里徒涉”이 있는데, 《광여도》에서는 “徒涉”을 “渡涉”으로 적어놓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볼 때 4개의 지도 모두 원본은 아니라고 판단되며,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생략되거나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읍성의 경우도 본 지도에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달리 西門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있는 曲城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각 지도의 내용을 자료로 사용할 때 필사 과정에서 생략되었거나 바뀐 내용이 무엇인지를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기봉)

  • 해주목 주기 (海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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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목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남도의 해주시, 벽성군, 서쪽 일부를 제외한 청단군, 신원군의 남쪽 일부, 태탄군의 서쪽, 옹진군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해주시의 영광동과 부용동 일대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해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첫째, 나머지 3개 지도가 북쪽을 위로 그린 반면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그렸다. 그러나 《해동지도》의 글씨 방향을 고려할 때 실제로는 북쪽을 위로 그렸다고 볼 수 있으며, 다만 후에 주기를 추가할 때 서쪽을 위로 하여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나머지 3개 지도가 동서보다 남북을 길게 그리고 있는 반면 《해동지도》는 동서를 길게 그렸다. 실제로 해주목은 남북보다는 동서가 긴 형태를 취하고 있어 《해동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세로로 긴 종이의 모양에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리면서 남북이 긴 형태로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네 지도가 일부 생략되거나 바뀐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나머지 3개 지도에 없는 것으로는 오른쪽 아래의 海倉이 있다. 《해동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있지만 본 지도에는 없는 것으로 오른쪽 아래 4개 섬 부근의 “潮退水路十里徒涉”이 있는데, 《광여도》에서는 “徒涉”을 “渡涉”으로 적어놓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볼 때 4개의 지도 모두 원본은 아니라고 판단되며,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생략되거나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읍성의 경우도 본 지도에는 나머지 3개 지도와 달리 西門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여지도》와 《광여도》에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있는 曲城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각 지도의 내용을 자료로 사용할 때 필사 과정에서 생략되었거나 바뀐 내용이 무엇인지를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이기봉)

  • 황주목 (黃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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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목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 황주군, 송림시, 연탄군의 서쪽 절반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황주군의 황주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황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에 비해 나머지 3개 지도는 읍성과 정방산성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는데, 지도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작아 자세한 내용을 수록하기 위해 취한 방법으로 판단된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쪽은 바다가 아니라 대동강의 하류에 해당되며, 이곳은 물이 급하게 흐른다고 하여 지도 아래쪽에 표기된 것처럼 急水門이라 불렸다. 위쪽의 瑞興界로부터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의 황주천이다. 황주에는 황해도의 병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읍치의 客舍 위쪽에 兵營의 관아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아래의 正方山城은 대동강 주변의 평지를 넘어 남진하는 적을 차단하기 위해 동서의 산줄기 위에 축조한 대형산성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가 강조되었는데, 산성 주변의 군현을 한데 묶어 지역 방어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산성 안에는 군기고와 비상용 식량을 보관하던 山倉, 장기전을 위한 식수와 관련된 池, 일상시에 산성의 관리를 맡던 寺 등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대형산성은 험준한 산지에 축조되어 있어 적이 쉽게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전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후방을 교란할 수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지도에는 坊이란 문자가 자주 보이는데,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등에서 面 대신에 사용되던 행정 단위이다. 읍치 아래쪽에는 海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황주목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이기봉)

  • 황주목 주기 (黃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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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목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황해북도 황주군, 송림시, 연탄군의 서쪽 절반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황주군의 황주읍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황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에 비해 나머지 3개 지도는 읍성과 정방산성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는데, 지도의 크기가 《해동지도》보다 작아 자세한 내용을 수록하기 위해 취한 방법으로 판단된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동쪽의 산을 등진 읍치의 입지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쪽은 바다가 아니라 대동강의 하류에 해당되며, 이곳은 물이 급하게 흐른다고 하여 지도 아래쪽에 표기된 것처럼 急水門이라 불렸다. 위쪽의 瑞興界로부터 흘러와 대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의 황주천이다. 황주에는 황해도의 병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읍치의 客舍 위쪽에 兵營의 관아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아래의 正方山城은 대동강 주변의 평지를 넘어 남진하는 적을 차단하기 위해 동서의 산줄기 위에 축조한 대형산성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가 강조되었는데, 산성 주변의 군현을 한데 묶어 지역 방어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산성 안에는 군기고와 비상용 식량을 보관하던 山倉, 장기전을 위한 식수와 관련된 池, 일상시에 산성의 관리를 맡던 寺 등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대형산성은 험준한 산지에 축조되어 있어 적이 쉽게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전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후방을 교란할 수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지도에는 坊이란 문자가 자주 보이는데,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등에서 面 대신에 사용되던 행정 단위이다. 읍치 아래쪽에는 海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황주목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이기봉)

  • 황해도 (黃海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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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에는 총 24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효종 3년(1652)에 牛峰縣과 江陰縣을 합해 金川으로 만들면서 23개로 줄어들었다. 황해도의 각 군현 지도가 그림 지도의 형식을 취한 것임에 비해 본 지도는 거리와 방향이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각 군현의 지도는 전체적으로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道 전체를 그린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것과는 전혀 다르며,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다. 다만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에서는 평안도, 강원도, 경기도 등 경계를 맞대고 있는 부분을 바다와 동일하게 처리했음에 반해 본 지도에서는 서로 육지로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에 있던 도로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어  본 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에 수록된 내용 중 監營이 있는 해주는 황색의 큰 원으로, 일반 군현은 노란색의 작은 원으로 구분하여 주었다. 군사 기지인 鎭堡는 가로 또는 세로의 분홍색 직사각형으로 표현하였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 강죄되어 구분된 黃州의 兵營이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왼쪽 위의 椒島에도 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를 빼먹은 오류가 보인다. 《여도》에는 초도진 뿐만 아니라 여러 진의 표시에서 오류가 나타나고 있으며, 《광여도》에는 이러한 오류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 비해서 내용적으로 가장 두두러진 특징은 앞의 지도에서 강조된 대형산성이 본 지도에는 명칭만 기재될 정도로 중요한 정보로 취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조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이기봉)

  • 황해도 주기 (黃海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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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에는 총 24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효종 3년(1652)에 牛峰縣과 江陰縣을 합해 金川으로 만들면서 23개로 줄어들었다. 황해도의 각 군현 지도가 그림 지도의 형식을 취한 것임에 비해 본 지도는 거리와 방향이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각 군현의 지도는 전체적으로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道 전체를 그린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것과는 전혀 다르며,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다. 다만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에서는 평안도, 강원도, 경기도 등 경계를 맞대고 있는 부분을 바다와 동일하게 처리했음에 반해 본 지도에서는 서로 육지로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에 있던 도로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어  본 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에 수록된 내용 중 監營이 있는 해주는 황색의 큰 원으로, 일반 군현은 노란색의 작은 원으로 구분하여 주었다. 군사 기지인 鎭堡는 가로 또는 세로의 분홍색 직사각형으로 표현하였는데, 《광여도》와 《여지도》에 강죄되어 구분된 黃州의 兵營이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왼쪽 위의 椒島에도 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를 빼먹은 오류가 보인다. 《여도》에는 초도진 뿐만 아니라 여러 진의 표시에서 오류가 나타나고 있으며, 《광여도》에는 이러한 오류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 비해서 내용적으로 가장 두두러진 특징은 앞의 지도에서 강조된 대형산성이 본 지도에는 명칭만 기재될 정도로 중요한 정보로 취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조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이기봉)

  • 황해도·평안도 총론 (黃海道·平安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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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황해도·평안도 총론 (黃海道·平安道 總論)1면입니다.

  • 황해도·평안도 총론 (黃海道·平安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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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황해도·평안도 총론 (黃海道·平安道 總論)2면입니다.

  • 진해현 (鎭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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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鎭海라는 지명은 창원시 옆에 위치한 진해시로 알려졌지만, 조선시대 진해현은 이곳과 다른 곳에 위치하였다. 현재의 경남 진해시는 웅천현에 속하였던 작은 지역이 일제 강점기 이후에 중심지가 이전하고 도시화된 지역이다. 진주, 고성, 함안, 칠원과 접하고 있는 이 지도의 진해현은 마산시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다.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이 관할 범위로 읍치는 진동면 진동리 일대가 된다. 북쪽의 산줄기는 낙남정맥과 연결 되며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취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취산이라는 지명은 오늘날 ‘수리봉’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 많다. 진해현의 진산 또한 현재 진동면에 405m의 수리봉으로 남아있다. 하천은 남류하여 남해로 유입되며 바다에는 섬들이 표시되었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작은 고을이라 객사, 아사, 창만 그려녛었다. 읍치 북쪽 취산 아래 文廟는 향교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군현지도에서는 문묘라 적지 않고 일반적으로 향교로 표시하는데 진해현 지도에서만 문묘라 적었다. 성밖의 여단, 성황단은 그리지 않고 사직단만 그렸다. 보통 사직단이라고 적는데 이 지도에서는 壇 대신 宇를 적었다. 다른 지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오른쪽에 이름없는 봉대는 가을포봉수이다. 의도적으로 해안가에 배치한 봉수대로 보인다. 尙令驛, 所達院 등의 역원, 의림사, 계원사 등의 사찰이 있었으나, 모두 지도에는 그려넣지 않았다. 지나치게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흥양현 (興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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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바다와 접한 전라남도 고흥군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원형의 읍성이 그려진 중심부는 현재의 고흥읍 행정리, 옥하리, 남계리, 서문리 일대에 해당한다. 과거에 이 지역에 있었던 남양폐현, 풍안폐현, 두원폐현, 도양폐현, 고흥폐현 등이 현재 읍면 지명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쪽은 득량만, 보성만이며 동쪽 순천만이다. 읍성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남쪽을 연결하는 가장 긴 도로는 현재의 27번 국도에 해당한다. 읍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