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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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地乘 지승

  • 편저자 : [編者未詳]
  • 청구기호 : 奎15423-v.1-6
  • 간행연도 : [刊年未詳]
  • 책권수 : 6冊, 彩色地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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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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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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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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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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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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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뒷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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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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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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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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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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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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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뒷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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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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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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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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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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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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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앞표지 1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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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앞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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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2책 앞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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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앞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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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4책 앞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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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5책 앞표지 2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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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앞표지 2면입니다.

  • ▶강원도
  • 간성군 (杆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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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중부에 있었던 간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간성군은 지금의 고성군 간성읍·현내면·거진읍·죽왕면·토성면과 속초시의 영랑호 주변에 해당된다. 해방이후 3·8선 이북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수복된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성곽(둘레240步)과 함께 객사, 아사, 영월루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지금의 간성읍 하리 일대이다. 鎭山은 읍치 서남 방향에 있는 麻耆山이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에 白頭大幹을 그리고, 뻗어 내린 산줄기에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북측 상단에 현내면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배봉천으로 보인다. 읍치의 북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천이며, 남쪽으로는 지금의 남천이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간정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청간천은 매우 작은 규모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으며, 화진포도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간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로부터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인제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에는 珍富嶺, 屹里嶺, 石破嶺, 彌恃嶺 등 많은 고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주기에는 이들 길이 매우 험준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안으로는 북으로 고성, 남으로 양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역이 비교적 많아 明波驛, 雲根驛, 竹泡驛, 元岩驛, 淸澗驛 등 5곳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00戶, 田 343結35負1束, 畓 459結11負9束로 기재되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간성군 주기 (杆城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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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중부에 있었던 간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간성군은 지금의 고성군 간성읍·현내면·거진읍·죽왕면·토성면과 속초시의 영랑호 주변에 해당된다. 해방이후 3·8선 이북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수복된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성곽(둘레240步)과 함께 객사, 아사, 영월루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지금의 간성읍 하리 일대이다. 鎭山은 읍치 서남 방향에 있는 麻耆山이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도 좌측에 白頭大幹을 그리고, 뻗어 내린 산줄기에서 여러 하천들이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북측 상단에 현내면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배봉천으로 보인다. 읍치의 북쪽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북천이며, 남쪽으로는 지금의 남천이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간정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청간천은 매우 작은 규모로 그려져 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으며, 화진포도 지명만 기재되어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간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로부터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인제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에는 珍富嶺, 屹里嶺, 石破嶺, 彌恃嶺 등 많은 고개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주기에는 이들 길이 매우 험준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안으로는 북으로 고성, 남으로 양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역이 비교적 많아 明波驛, 雲根驛, 竹泡驛, 元岩驛, 淸澗驛 등 5곳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100戶, 田 343結35負1束, 畓 459結11負9束로 기재되어 논농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강릉부 (江陵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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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강릉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강릉부는 현재 강릉시 용강동, 교동, 임당동, 명주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군의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도암면, 대화면, 방림면, 홍천군의 내면에 걸쳐 지금보다 매우 넓은 지역에 해당된다. 실제로는 동서로 긴 형태이나 『해동지도』등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남북이 긴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산지 표현 방법, 남대천, 내린천 등의 하천 표현 방법 및 성내동에 위치하였던 성곽(둘레 ; 3,782尺)과 읍치의 묘사, 수록 지명 등은 다른 지도와 유사하다.(지도 수록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강릉부 해제 참조) 해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에서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연곡천을,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안인역 부근에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염곡천을, 그 아래 남쪽의 하천은 주수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남류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하천은 남한강 상류의 여러 지류를 묘사한 것이다. 교통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나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한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읍성 남문에서 북쪽으로 대창역을 거쳐 양양부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는 안인역을 거쳐 삼척으로 연결되는 해안 도로가 있다. 내륙쪽으로는 도로는 월정산에서 구산역, 목계역을 거쳐 대관령을 지나 봉평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목계역에서 고단역을 거쳐 임계면을 거쳐 횡계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쪽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연곡면을 거쳐 오대산 사고를 거쳐 봉평창으로 연결된다. 본 지도에서 묘사되어 있는 월정산-송담서원, 연곡면-하동면과의 도로가 『여지도』에서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25戶, 田 791結65負, 畓 791結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강릉부 주기 (江陵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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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강릉부 일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강릉부는 현재 강릉시 용강동, 교동, 임당동, 명주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군의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도암면, 대화면, 방림면, 홍천군의 내면에 걸쳐 지금보다 매우 넓은 지역에 해당된다. 실제로는 동서로 긴 형태이나 『해동지도』등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남북이 긴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산지 표현 방법, 남대천, 내린천 등의 하천 표현 방법 및 성내동에 위치하였던 성곽(둘레 ; 3,782尺)과 읍치의 묘사, 수록 지명 등은 다른 지도와 유사하다.(지도 수록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강릉부 해제 참조) 해안으로 유입하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에서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연곡천을, 남쪽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남대천을 그린 것이다. 안인역 부근에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염곡천을, 그 아래 남쪽의 하천은 주수천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좌측에서 남류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하천은 남한강 상류의 여러 지류를 묘사한 것이다. 교통로는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나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한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읍성 남문에서 북쪽으로 대창역을 거쳐 양양부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는 안인역을 거쳐 삼척으로 연결되는 해안 도로가 있다. 내륙쪽으로는 도로는 월정산에서 구산역, 목계역을 거쳐 대관령을 지나 봉평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목계역에서 고단역을 거쳐 임계면을 거쳐 횡계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쪽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연곡면을 거쳐 오대산 사고를 거쳐 봉평창으로 연결된다. 본 지도에서 묘사되어 있는 월정산-송담서원, 연곡면-하동면과의 도로가 『여지도』에서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25戶, 田 791結65負, 畓 791結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강원도 (江原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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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전체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책의 제일 앞에 강원도와 함경도 역사지리를 수록한 면에 이어 군현별 지도의 앞머리에 삽입되었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감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강원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은 다른 회화식 지도책들과 유사하나 하계망의 표현이 상세하고 다른 지도에 없는 도로망이 그려진 것이 특이하다. 지도 우측에 동해를 그렸으며 해안선은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 복잡하게 표현되었다. 해안에 발달한 석호들을 상세하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섬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따로 표현하지 않았다. 鬱陵島와 于山島만 지명을 적어 위치를 간접적으로 묘사하였다. 산지는 백두대간이 강조되어 그려졌고 동쪽에는 흡곡, 통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 평해 등 9개 군현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서쪽에는 하천 유로와 함께 17개의 군현 위치를 표시하였다. 하천 유역은 세지역으로 나뉘고 그려져 있다. 이천, 안협, 평강, 금화, 철원은 임진강 상류 유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북한강 상류유역에 위치한 군현은 회양, 금성, 낭천, 양구, 홍청, 춘천, 인제 등이며 기린은 비월지로서 별도의 부호로 표현하였다. 남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군현으로 원주, 횡성, 영월, 평창, 정선 등 5개 군현을 표시하였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은 적색 실선으로 상세히 그려져 있다.(김기혁)

  • 강원도 주기 (江原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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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전체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책의 제일 앞에 강원도와 함경도 역사지리를 수록한 면에 이어 군현별 지도의 앞머리에 삽입되었다. 표현 양식에서 산지는 연두색, 하천과 바다는 푸른색, 군현은 붉은색 사각형으로 감영은 붉은색 원으로 그렸다. 강원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은 다른 회화식 지도책들과 유사하나 하계망의 표현이 상세하고 다른 지도에 없는 도로망이 그려진 것이 특이하다. 지도 우측에 동해를 그렸으며 해안선은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을 과장하여 그린 결과 복잡하게 표현되었다. 해안에 발달한 석호들을 상세하게 그렸다. 『해동지도』에는 섬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따로 표현하지 않았다. 鬱陵島와 于山島만 지명을 적어 위치를 간접적으로 묘사하였다. 산지는 백두대간이 강조되어 그려졌고 동쪽에는 흡곡, 통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 평해 등 9개 군현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서쪽에는 하천 유로와 함께 17개의 군현 위치를 표시하였다. 하천 유역은 세지역으로 나뉘고 그려져 있다. 이천, 안협, 평강, 금화, 철원은 임진강 상류 유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북한강 상류유역에 위치한 군현은 회양, 금성, 낭천, 양구, 홍청, 춘천, 인제 등이며 기린은 비월지로서 별도의 부호로 표현하였다. 남한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군현으로 원주, 횡성, 영월, 평창, 정선 등 5개 군현을 표시하였다. 각 군현을 잇는 도로망은 적색 실선으로 상세히 그려져 있다.(김기혁)

  •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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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1면입니다.

  •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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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6책 강원도 총론(江原道 總論)2면입니다.

  • 고성군 (高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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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 동쪽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고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성군은 지금 북한의 고성군 고성읍,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 수동면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진산인 全城山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고, 성곽(둘레 2,123尺)을 묘사하였다. 지금의 고성군 구읍리에 위치한다. 지도의 좌측에 백두대간과 함께 금강산을 실경으로 그렸으며, 지금의 외금강에 해당된다. 하천은 백두대간의 2곳에서 발원한 후 동류하여 읍치를 감싸 돌며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신계천이며 남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남강이다. 두 하천은 읍치의 서쪽에서 합류하여 다시 分岐되어 동해안으로 유입한다. 해안선의 모습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다. 지금의 장전항 만입부는 표현되어 있지 않고, 삼일포도 훨씬 내륙지역에 그려져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驛으로 養珎驛, 高岺驛, 大康驛 등 3곳이 그려져 있다. 도로는 북으로 통천, 남으로 간성, 서로는 인제와 회양으로 이어진다. 통천으로 가는 길은 삼북면-양진역으로 연결된다. 간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동명-대강역을 통해 이어지며 이들 도로는 대체로 평탄하였다. 인제로 가는 길은 高岺驛, 炭嶺으로 연결되며, 회양은 백두대간의 溫井岺-九龍岺을 넘는다. 이들 백두대간을 넘는 길은 매우 험준함을 주기면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909戶, 田 268結19負2束, 畓 132結87負6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고성군 주기 (高城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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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 동쪽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고성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고성군은 지금 북한의 고성군 고성읍,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 수동면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진산인 全城山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고, 성곽(둘레 2,123尺)을 묘사하였다. 지금의 고성군 구읍리에 위치한다. 지도의 좌측에 백두대간과 함께 금강산을 실경으로 그렸으며, 지금의 외금강에 해당된다. 하천은 백두대간의 2곳에서 발원한 후 동류하여 읍치를 감싸 돌며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신계천이며 남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남강이다. 두 하천은 읍치의 서쪽에서 합류하여 다시 分岐되어 동해안으로 유입한다. 해안선의 모습은 매우 단조롭게 그려져 있다. 지금의 장전항 만입부는 표현되어 있지 않고, 삼일포도 훨씬 내륙지역에 그려져 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고성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驛으로 養珎驛, 高岺驛, 大康驛 등 3곳이 그려져 있다. 도로는 북으로 통천, 남으로 간성, 서로는 인제와 회양으로 이어진다. 통천으로 가는 길은 삼북면-양진역으로 연결된다. 간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동명-대강역을 통해 이어지며 이들 도로는 대체로 평탄하였다. 인제로 가는 길은 高岺驛, 炭嶺으로 연결되며, 회양은 백두대간의 溫井岺-九龍岺을 넘는다. 이들 백두대간을 넘는 길은 매우 험준함을 주기면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909戶, 田 268結19負2束, 畓 132結87負6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금성현 (金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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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의 남서쪽의 내륙에 위치하였던 금성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의 김화군에 병합되면서 금성면·원동면·원남면·원북면·창도면·통구면이 되었으며, 지금은 북한의 김화군과 창도군 일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 좌측에 객사, 아사, 향교, 慶陽樓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鎭山인 慶坡山은 읍치의 북쪽에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古城이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우측에 남북으로 길게 그리고, 白亦山, 黃腸山이 읍치의 祖山으로 그려져 있다. 남대천으로 기재된 하천이 읍치 앞을 지나 동류하다가 회양으로부터 유입되는 하천과 합류한다. 남대천은 지금의 금성천이며, 우측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북한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금성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서남쪽으로 남대천을 건너 直木驛으로 적색으로 표현된 도로는 금화로 연결된다. 이 길은 당시 한양과 통하는 大路이며, 한반도 동북쪽의 함경도 서수라까지 통하는 길이었다. 남대천의 水串橋를 지나 西雲驛을 거쳐 낭천으로 이어진다. 회양으로 가는 도로는 仞乙坡峙 -昌道驛을 거쳐 연결된다. 가는 길목에 大慶津을 건너 縣倉으로 가는 작은 도로가 그려져 있다. 가까이 金剛路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의 주기 내용으로 보아 이 길은 금강산 斷髮嶺으로 가는 도로인 것으로 보인다. 주기에는 民戶 3,490戶, 田 199結43負9束, 畓 4結52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금성현 주기 (金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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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금강산의 남서쪽의 내륙에 위치하였던 금성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의 김화군에 병합되면서 금성면·원동면·원남면·원북면·창도면·통구면이 되었으며, 지금은 북한의 김화군과 창도군 일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 좌측에 객사, 아사, 향교, 慶陽樓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鎭山인 慶坡山은 읍치의 북쪽에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古城이 그려져 있다. 백두대간을 우측에 남북으로 길게 그리고, 白亦山, 黃腸山이 읍치의 祖山으로 그려져 있다. 남대천으로 기재된 하천이 읍치 앞을 지나 동류하다가 회양으로부터 유입되는 하천과 합류한다. 남대천은 지금의 금성천이며, 우측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북한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금성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서남쪽으로 남대천을 건너 直木驛으로 적색으로 표현된 도로는 금화로 연결된다. 이 길은 당시 한양과 통하는 大路이며, 한반도 동북쪽의 함경도 서수라까지 통하는 길이었다. 남대천의 水串橋를 지나 西雲驛을 거쳐 낭천으로 이어진다. 회양으로 가는 도로는 仞乙坡峙 -昌道驛을 거쳐 연결된다. 가는 길목에 大慶津을 건너 縣倉으로 가는 작은 도로가 그려져 있다. 가까이 金剛路가 표시되어 있다. 이면의 주기 내용으로 보아 이 길은 금강산 斷髮嶺으로 가는 도로인 것으로 보인다. 주기에는 民戶 3,490戶, 田 199結43負9束, 畓 4結52負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김화현 (金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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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김화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김화현은 지금 휴전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남한 부분은 철원군 김화읍, 근남면, 서면과 북한 부분은 김화군의 서쪽지역인 근동면, 근북면, 원북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에 읍치를 배치하였고, 남쪽에 柳琳大捷碑, 서쪽에 忠烈祠, 동쪽에 忠賢祠를 그려 넣었다. 진산은 五申山이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이웃한 금성과 낭천(지금의 화천), 춘천과의 경계는 산지로써 표현하였으며 평강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를 주변으로 감싸 돌며 서류하여 철원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의 우측 하단 馬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과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목탄천으로 추정된다. 읍치 북쪽의 白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한탄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김화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서쪽의 永平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生昌驛(김화읍 생창리 소재)을 지나 登古介를 거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길은 서울로 통하며 이 길은 지도 동쪽의 中峴을 넘어 金城으로 이어진다. 함경도 西水羅까지 통하는 이 도로는 당시 동북방향의 大路였다. 금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이외에 佛頂峴 등을 거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낭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馬峴을 지난다. 춘천, 철원, 회양으로 가는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통로마다 登古介, 可古介, 成造古介, 小古介 등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은 우리말의 고개를 한자화한 지명으로 다른 군현의 지도에서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지명이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57戶, 田 196結17負1束, 畓 13結45負4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김화현 주기 (金化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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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김화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김화현은 지금 휴전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남한 부분은 철원군 김화읍, 근남면, 서면과 북한 부분은 김화군의 서쪽지역인 근동면, 근북면, 원북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의 중앙에 읍치를 배치하였고, 남쪽에 柳琳大捷碑, 서쪽에 忠烈祠, 동쪽에 忠賢祠를 그려 넣었다. 진산은 五申山이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이웃한 금성과 낭천(지금의 화천), 춘천과의 경계는 산지로써 표현하였으며 평강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를 주변으로 감싸 돌며 서류하여 철원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남대천이다. 지도의 우측 하단 馬峴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대천과 합류되는 하천은 지금의 목탄천으로 추정된다. 읍치 북쪽의 白峙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한탄강 상류부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김화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남서쪽의 永平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生昌驛(김화읍 생창리 소재)을 지나 登古介를 거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길은 서울로 통하며 이 길은 지도 동쪽의 中峴을 넘어 金城으로 이어진다. 함경도 西水羅까지 통하는 이 도로는 당시 동북방향의 大路였다. 금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이외에 佛頂峴 등을 거치는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낭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馬峴을 지난다. 춘천, 철원, 회양으로 가는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통로마다 登古介, 可古介, 成造古介, 小古介 등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은 우리말의 고개를 한자화한 지명으로 다른 군현의 지도에서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지명이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257戶, 田 196結17負1束, 畓 13結45負4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낭천현 (狼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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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낭천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1895년(고종 32)에 화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지도 여백에 “今皇上壬寅改華川”라는 내용이 별지로 첨부되어 있다. 조선시대 낭천군은 지금 화천군의 상서면, 화천읍, 하남면, 간동면 일대에 해당되며 사내면은 당시에는 춘천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진산인 牲山은 읍치의 서쪽에 그렸다. 춘천부와 금화, 양구현과의 경계를 산지로 표현하였다. 하천은 금성으로부터 유입하여 춘천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하천은 지금의 북한강 상류에 해당되며 화천댐 건설로 파로호가 된 곳이다. 지도의 북서쪽에서 흘러 들어와 읍치 북쪽을 감싸도는 2곳의 하천은 지금의 마헌천과 봉모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좌측의 啓里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논미천으로 생각된다. 하서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鋤吾之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현재 하남면에는 동리지명으로 서오지리가 남아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낭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와 경계가 되는 山의 위치, 명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남쪽에는 原川驛(하남면 원천리 소재)을 지나 서오지천을 건너는 도로는 춘천부로 이어진다. 읍치의 동쪽으로 觀佛峴을 지나 芳川驛(간동면 방천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四明山을 지나 양구현으로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彌勒峴을 지나 山陽驛(상서면 산양리 소재)에서 길이 갈라져 김화와 금성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76戶, 田 201結96負7束, 畓 14結1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낭천현 주기 (狼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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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낭천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1895년(고종 32)에 화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지도 여백에 “今皇上壬寅改華川”라는 내용이 별지로 첨부되어 있다. 조선시대 낭천군은 지금 화천군의 상서면, 화천읍, 하남면, 간동면 일대에 해당되며 사내면은 당시에는 춘천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으며 진산인 牲山은 읍치의 서쪽에 그렸다. 춘천부와 금화, 양구현과의 경계를 산지로 표현하였다. 하천은 금성으로부터 유입하여 춘천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하천은 지금의 북한강 상류에 해당되며 화천댐 건설로 파로호가 된 곳이다. 지도의 북서쪽에서 흘러 들어와 읍치 북쪽을 감싸도는 2곳의 하천은 지금의 마헌천과 봉모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좌측의 啓里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논미천으로 생각된다. 하서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鋤吾之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현재 하남면에는 동리지명으로 서오지리가 남아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낭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와 경계가 되는 山의 위치, 명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남쪽에는 原川驛(하남면 원천리 소재)을 지나 서오지천을 건너는 도로는 춘천부로 이어진다. 읍치의 동쪽으로 觀佛峴을 지나 芳川驛(간동면 방천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四明山을 지나 양구현으로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彌勒峴을 지나 山陽驛(상서면 산양리 소재)에서 길이 갈라져 김화와 금성으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976戶, 田 201結96負7束, 畓 14結18負3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삼척부 (三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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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의 동해안과 내륙에 걸쳐 위치하였던 삼척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척부는 지금의 삼척시와 태백시 전체, 평릉동을 포함한 남쪽의 동해시(옛 북평읍)에 해당되는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지도의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치우쳐 객사와 아사, 성곽(둘레; 570步)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다. 현재의 삼척시 성내동 일대이다. 고을의 鎭山이 읍치의 북서쪽 가까이에 그려진 葛夜山이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과 함께 竹嶺, 楡嶺을 표시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하천이 동해로 유입하며 그중 가장 큰 하천은 읍치를 감싸고 흐르는 五十川이다. 그 남쪽에 지금의 교곡천, 마음천, 주천천 등이 묘사되어 있다. 지도의 좌측 하단에는 태백산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黃池가 표시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삼척부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을 거쳐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旌善ㆍ寧越去路가 두 곳에 표시되어 있으며, 태백산 부근에 安東ㆍ春陽去路가 있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平陵驛과 新興驛을 지나는 두곳의 도로가 그려져 있고, 울진과 안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交柯驛, 龍化驛, 沃原驛이 있다. 한편 史直驛의 경우 다른 회화식 지도에서는 역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史直庫로 표기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39戶, 田 612結98負5束, 畓 214結89負9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군현에 비해 논농사 비율이 비교적 높다. (김기혁)

  • 삼척부 주기 (三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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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의 동해안과 내륙에 걸쳐 위치하였던 삼척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삼척부는 지금의 삼척시와 태백시 전체, 평릉동을 포함한 남쪽의 동해시(옛 북평읍)에 해당되는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지도의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치우쳐 객사와 아사, 성곽(둘레; 570步)과 함께 읍치를 배치하였다. 현재의 삼척시 성내동 일대이다. 고을의 鎭山이 읍치의 북서쪽 가까이에 그려진 葛夜山이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과 함께 竹嶺, 楡嶺을 표시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하천이 동해로 유입하며 그중 가장 큰 하천은 읍치를 감싸고 흐르는 五十川이다. 그 남쪽에 지금의 교곡천, 마음천, 주천천 등이 묘사되어 있다. 지도의 좌측 하단에는 태백산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黃池가 표시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삼척부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을 거쳐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旌善ㆍ寧越去路가 두 곳에 표시되어 있으며, 태백산 부근에 安東ㆍ春陽去路가 있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平陵驛과 新興驛을 지나는 두곳의 도로가 그려져 있고, 울진과 안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交柯驛, 龍化驛, 沃原驛이 있다. 한편 史直驛의 경우 다른 회화식 지도에서는 역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史直庫로 표기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639戶, 田 612結98負5束, 畓 214結89負9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군현에 비해 논농사 비율이 비교적 높다. (김기혁)

  • 안협현 (安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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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서쪽의 임진강 상류 유역에 있었던 안협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이천군에 귀속되어 안협면·동면,·서면에 속하였다. 지금은 북한의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 아사와 향교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산지는 동서 줄기를 중심으로 묘사되었으며 남북 줄기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북쪽에 진산인 晩景山(방안식 지도에서는 萬景山으로 기재)을 배치하였다. 하천은 지도의 좌측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지금의 임진강 상류이다. 4개의 지류가 임진강으로 유입하고 있다. 이중 평강현에서 유입하여 동면을 거쳐 읍치 북쪽을 지나 임진강과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평안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협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이면의 주기에는 평강현에 험준한 嶺隘가 별로 없음을 기재하였다. 읍치의 남쪽으로 남으로는 경기도 朔寧과 鐵原으로 이어지는 길이 적색으로 그려져 있고 ‘京去路’(일부지도에서는 ‘去京路’의 기재), ‘鐵原去路’라고 표시하였다. 남서쪽으로는 兎山, 북쪽으로 伊川과 이어지는 길이 하천을 따라 그려져 있다. 동으로은 東面을 거쳐 평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78戶, 田 185結66負, 畓 75負8束로 기재되어 있어 현의 크기가 매우 작고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안협현 주기 (安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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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서쪽의 임진강 상류 유역에 있었던 안협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이천군에 귀속되어 안협면·동면,·서면에 속하였다. 지금은 북한의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지도의 중앙에 객사, 아사와 향교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산지는 동서 줄기를 중심으로 묘사되었으며 남북 줄기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북쪽에 진산인 晩景山(방안식 지도에서는 萬景山으로 기재)을 배치하였다. 하천은 지도의 좌측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지금의 임진강 상류이다. 4개의 지류가 임진강으로 유입하고 있다. 이중 평강현에서 유입하여 동면을 거쳐 읍치 북쪽을 지나 임진강과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평안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안협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이면의 주기에는 평강현에 험준한 嶺隘가 별로 없음을 기재하였다. 읍치의 남쪽으로 남으로는 경기도 朔寧과 鐵原으로 이어지는 길이 적색으로 그려져 있고 ‘京去路’(일부지도에서는 ‘去京路’의 기재), ‘鐵原去路’라고 표시하였다. 남서쪽으로는 兎山, 북쪽으로 伊川과 이어지는 길이 하천을 따라 그려져 있다. 동으로은 東面을 거쳐 평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278戶, 田 185結66負, 畓 75負8束로 기재되어 있어 현의 크기가 매우 작고 대부분 밭농사 위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구현 (楊口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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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양구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 휴전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로 지나고 있다. 조선시대 양구현은 현재 휴전선 이남의 양구군과 거의 비슷하다. 일제시대 양구군의 수입면은 조선시대에는 회양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진산인 飛鳳山을 동측에 두고 읍치를 그렸다. 읍치는 지금의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춘천과 인제, 회양과의 경계는 산지로 표현하였으며 낭천(지금의 화천)과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북동쪽의 계산령에서 발원한 하천이 남류하면서 읍치를 감싸 돈후 다시 북류하여 낭천으로 유입된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로 지금은 화천댐의 건설로 파로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상류부에서 본류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팔량선, 광지천, 청리천 등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서쪽의 방산면과 북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류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입천으로 추정된다. 양구현의 남쪽에는 소양강이 춘천과 경계를 이루며 서류하고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일부 지류가 그려져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구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북서쪽으로 含春驛(양구읍 하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낭천현으로 이어지며, 왼쪽 아래의 水仁驛(양구읍 수인리 소재)을 지나 춘천과 연결된다. 인제로 이어지는 도로는 여러 길이 있다. 읍치의 남쪽의 道里峙를 지나 인제로 이어지는 길은 지금의 소양호로 연결된다. 廣峙를 지나는 도로는 인제를 거쳐 양양부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66戶, 田 200結46負9束, 畓 27結69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구현 주기 (楊口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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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양구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 휴전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로 지나고 있다. 조선시대 양구현은 현재 휴전선 이남의 양구군과 거의 비슷하다. 일제시대 양구군의 수입면은 조선시대에는 회양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에 진산인 飛鳳山을 동측에 두고 읍치를 그렸다. 읍치는 지금의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춘천과 인제, 회양과의 경계는 산지로 표현하였으며 낭천(지금의 화천)과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북동쪽의 계산령에서 발원한 하천이 남류하면서 읍치를 감싸 돈후 다시 북류하여 낭천으로 유입된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로 지금은 화천댐의 건설로 파로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상류부에서 본류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팔량선, 광지천, 청리천 등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서쪽의 방산면과 북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류하여 북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수입천으로 추정된다. 양구현의 남쪽에는 소양강이 춘천과 경계를 이루며 서류하고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일부 지류가 그려져 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구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의 북서쪽으로 含春驛(양구읍 하리 소재)을 지나는 도로는 낭천현으로 이어지며, 왼쪽 아래의 水仁驛(양구읍 수인리 소재)을 지나 춘천과 연결된다. 인제로 이어지는 도로는 여러 길이 있다. 읍치의 남쪽의 道里峙를 지나 인제로 이어지는 길은 지금의 소양호로 연결된다. 廣峙를 지나는 도로는 인제를 거쳐 양양부로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66戶, 田 200結46負9束, 畓 27結69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주로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양부 (襄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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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연해 있던 양양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양양부는 지금의 양양군과 영랑호 주변을 제외한 속초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진산은 설악산이나 지도에는 天叩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성곽 표시(둘레 2,380尺)와 함께 지도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 줄기를 그리고 동해안에는 의상대, 청초호 등이 있다. 부치의 남쪽을 흐르는 남대천이 오색령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며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현재의 물치천이 읍치의 북쪽에서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양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에는 五色岺, 朴達岺, 阻枕岺, 九龍岺 등이 있어 읍치에서 인제와 춘천 등을 잇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들 도로가 매우 험난한 통로임을 이면의 주기에 밝혀 놓았다. 부치의 남쪽 도로로는 읍성의 남문에서 남대천교를 지나 상운역을 거쳐 강릉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連倉驛을 거쳐 낙산사를 지나 간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 신흥사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25戶, 田 323結12負6束, 畓 476結 2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지역보다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양양부 주기 (襄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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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연해 있던 양양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양양부는 지금의 양양군과 영랑호 주변을 제외한 속초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진산은 설악산이나 지도에는 天叩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성곽 표시(둘레 2,380尺)와 함께 지도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 줄기를 그리고 동해안에는 의상대, 청초호 등이 있다. 부치의 남쪽을 흐르는 남대천이 오색령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며 동해로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현재의 물치천이 읍치의 북쪽에서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양양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백두대간에는 五色岺, 朴達岺, 阻枕岺, 九龍岺 등이 있어 읍치에서 인제와 춘천 등을 잇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들 도로가 매우 험난한 통로임을 이면의 주기에 밝혀 놓았다. 부치의 남쪽 도로로는 읍성의 남문에서 남대천교를 지나 상운역을 거쳐 강릉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連倉驛을 거쳐 낙산사를 지나 간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 신흥사로 이어지는 내륙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025戶, 田 323結12負6束, 畓 476結 2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다른 지역보다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영월부 (寧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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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영월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월부는 지금의 영월군 중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된다. 동으로 삼척에 접하고 서로 원주와 제천에 접하고 있어 동서로 긴 형태를 띠고 있으나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전체 구도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다.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성곽 시설은 없다. 가까이에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인 莊陵과 陵寺인 보덕사가 표시되어 있다. 산세는 동쪽에 백두대간의 내맥을 표현하여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읍치는 두만산에서 이어진 맥이 성산과 증산을 거쳐 내려오다 동쪽으로 삼옥치(광여도에서는 삼왕치로 기재)를 거쳐 읍치를 감싸면 서로는 加斤峙로 이어진다. 서강이 청령포를 지나 읍치 앞으로 흐르며서 동강을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월부 해제 참조). 다른 지도들과는 달리 영월부의 도로가 상세하게 표현된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다른 지도에는 陽淵驛, 延平驛, 高德驛 등 3곳의 역이 기재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고덕역이 고덕치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는 영춘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고, 동으로는 삼옥치-상동면을 거쳐 삼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으로는 분덕치를 지나 刀摩寺를 거쳐 평창(지도에는 ‘昌平’으로 기재되어 있다)으로 연결되고, 延平驛에서 고덕치를 지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정선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栗峴을 거친다. 서로는 가근치를 넘어 양연역을 거쳐 제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造乙峙를 지나며 원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龍井院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영월부 주기 (寧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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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영월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영월부는 지금의 영월군 중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된다. 동으로 삼척에 접하고 서로 원주와 제천에 접하고 있어 동서로 긴 형태를 띠고 있으나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전체 구도는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다. 중앙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성곽 시설은 없다. 가까이에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인 莊陵과 陵寺인 보덕사가 표시되어 있다. 산세는 동쪽에 백두대간의 내맥을 표현하여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읍치는 두만산에서 이어진 맥이 성산과 증산을 거쳐 내려오다 동쪽으로 삼옥치(광여도에서는 삼왕치로 기재)를 거쳐 읍치를 감싸면 서로는 加斤峙로 이어진다. 서강이 청령포를 지나 읍치 앞으로 흐르며서 동강을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영월부 해제 참조). 다른 지도들과는 달리 영월부의 도로가 상세하게 표현된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다른 지도에는 陽淵驛, 延平驛, 高德驛 등 3곳의 역이 기재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고덕역이 고덕치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는 영춘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고, 동으로는 삼옥치-상동면을 거쳐 삼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으로는 분덕치를 지나 刀摩寺를 거쳐 평창(지도에는 ‘昌平’으로 기재되어 있다)으로 연결되고, 延平驛에서 고덕치를 지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정선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栗峴을 거친다. 서로는 가근치를 넘어 양연역을 거쳐 제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造乙峙를 지나며 원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龍井院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울릉도 (鬱陵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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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상의 울릉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가 제작될 당시 울릉도는 강원도 군현에서 주관하여 매 2-3년 간격으로 搜討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강원도 관할에 속하여 있었다. 지금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해당된다. 당시에 군현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현 지도책에 낱장으로 삽입된 것은 울릉도에 대한 지리적인 지식이 많이 유입되었고, 동해를 중심으로 높아진 영토 의식을 반영한다. 1711년 박석창이 수토후 제작한 「울릉도도형」(규장각 소장)에는 中峰이 유일한 지명으로 기재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이외의 지명이 추가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수토를 통해 지리적인 지식이 지속적으로 보완되었음을 보여준다. 두 지도의 구도는 유사하다. 중앙에 中峰(현재 성인봉)을 배치하였고, 산지는 독립된 봉우리 형태로 그렸다. 방안식 지도에서 줄기로 표현되는 것과 대비된다. 중봉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6곳이 그려져 있으며 그 형태도 방안식 군현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6곳의 도서가 묘사되어 있고 이중 동쪽에 배치된 섬에는 ‘所謂于山島’라는 기록이 있다. 于山島 지명은 동해상의 獨島를 지칭한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었으나 최근 울릉도 부속도서인 竹島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릉도 해제 참조). 이면의 주기에는 ‘周面二百餘里 東西八十餘里 南北五十餘里’라고 되어 있어 섬의 규모를 기재하고 있다. 특산물로 甘藷, 生鰒, 可之魚 등 16종, 飛禽으로 鷹, 鳥 등 4종, 走獸로 猫, 鼠 등 2종이 기록되어 있다. (김기혁)

  • 울릉도 주기 (鬱陵島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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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상의 울릉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지도가 제작될 당시 울릉도는 강원도 군현에서 주관하여 매 2-3년 간격으로 搜討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강원도 관할에 속하여 있었다. 지금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해당된다. 당시에 군현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현 지도책에 낱장으로 삽입된 것은 울릉도에 대한 지리적인 지식이 많이 유입되었고, 동해를 중심으로 높아진 영토 의식을 반영한다. 1711년 박석창이 수토후 제작한 「울릉도도형」(규장각 소장)에는 中峰이 유일한 지명으로 기재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이외의 지명이 추가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수토를 통해 지리적인 지식이 지속적으로 보완되었음을 보여준다. 두 지도의 구도는 유사하다. 중앙에 中峰(현재 성인봉)을 배치하였고, 산지는 독립된 봉우리 형태로 그렸다. 방안식 지도에서 줄기로 표현되는 것과 대비된다. 중봉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6곳이 그려져 있으며 그 형태도 방안식 군현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6곳의 도서가 묘사되어 있고 이중 동쪽에 배치된 섬에는 ‘所謂于山島’라는 기록이 있다. 于山島 지명은 동해상의 獨島를 지칭한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었으나 최근 울릉도 부속도서인 竹島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릉도 해제 참조). 이면의 주기에는 ‘周面二百餘里 東西八十餘里 南北五十餘里’라고 되어 있어 섬의 규모를 기재하고 있다. 특산물로 甘藷, 生鰒, 可之魚 등 16종, 飛禽으로 鷹, 鳥 등 4종, 走獸로 猫, 鼠 등 2종이 기록되어 있다. (김기혁)

  • 울진현 (蔚珍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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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강원도 동해안 남부에 위치하였던 울진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경상북도에 속해있으며, 울진군 울진읍·근남면·원남면·서면·죽변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를 성곽없이 지도의 중앙 우측에 배치하였다. 지금의 울진읍 읍내리에 소재한다. 진산인 安逸王山은 읍치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읍치 가까이에 古山城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생략되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표현하였으며 특히 죽변 일대(지도에서는 ‘竹田’ 으로 표현)에 발달한 두각지는 묘사되지 않았다. 서쪽에 백두대간을 묘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읍치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부구천과 두천천으로 보이며 읍치 남쪽을 감싸도는 하천은 지금의 광천으로 추정된다. 남쪽의 ‘嵐水山’(다른 울진 지도에는 ‘風水山’으로 기재되어 있다)에서 발원한 하천은 매화천이며 하류에서 지금의 왕피천과 합류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진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삼척부로 이어지는 도로는 북쪽에 위치한 興富驛館을 지나 葛峴을 넘어 연결된다. 평해로 연결되는 길은 前川橋를 守山驛-德新驛을 거쳐 연결된다. 내륙의 안동, 영양과 이어지는 도로는 鼎峙, 召造院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기에 도로가 매우 험준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238戶, 田 414結80, 畓 291結55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않에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울진현 주기 (蔚珍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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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강원도 동해안 남부에 위치하였던 울진현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경상북도에 속해있으며, 울진군 울진읍·근남면·원남면·서면·죽변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를 성곽없이 지도의 중앙 우측에 배치하였다. 지금의 울진읍 읍내리에 소재한다. 진산인 安逸王山은 읍치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읍치 가까이에 古山城이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생략되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표현하였으며 특히 죽변 일대(지도에서는 ‘竹田’ 으로 표현)에 발달한 두각지는 묘사되지 않았다. 서쪽에 백두대간을 묘사하였고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읍치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부구천과 두천천으로 보이며 읍치 남쪽을 감싸도는 하천은 지금의 광천으로 추정된다. 남쪽의 ‘嵐水山’(다른 울진 지도에는 ‘風水山’으로 기재되어 있다)에서 발원한 하천은 매화천이며 하류에서 지금의 왕피천과 합류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울진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삼척부로 이어지는 도로는 북쪽에 위치한 興富驛館을 지나 葛峴을 넘어 연결된다. 평해로 연결되는 길은 前川橋를 守山驛-德新驛을 거쳐 연결된다. 내륙의 안동, 영양과 이어지는 도로는 鼎峙, 召造院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기에 도로가 매우 험준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238戶, 田 414結80, 畓 291結55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않에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원주목 (原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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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원주목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원주목은 강원도 감영이 있었으며, 지금의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북내면 동쪽에 해당한다. 다른 군현의 지도와는 달리 원주 지도에는 위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주는 1683년-1692년(숙종 9-18)과 1728년-1737년(영조 4-13) 사이에 原城縣으로 강등된 적이 있다.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지도들에는 原城으로 표시되어 있다. 동으로는 영월, 서로는 여주에 달하였기 때문에 동서로 매우 넓은 지역이었으나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평창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서쪽은 하천으로 여주·홍천과 경계를 이룬다. 횡성에서 유입하여 지도 좌측으로 흐르다가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섬강을 그린 것이다. 섬강 좌안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원주천과 백운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의 표현이 없이 객사, 아사를 중심으로 지도 중앙에 그려져 있다 지금의 원주시 일산동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원주목 해제 참조). 교통로와 역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나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이 지도에서 묘사된 교통로는 읍치에서 북쪽으로 횡성으로 이어지는 2개의 도로와 서쪽으로 유원역을 거쳐 지평으로 이어지는 도로, 서남방향으로 여주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 단구역-충주, 신림역-제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간선도로는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체로 일치하나 『지승』에서는 섬암강을 따라 도로가 추가로 그려져 있는 등 여러 지선 도로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8,556戶, 田 1,535結99負2束, 畓 758結57負4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원주목 주기 (原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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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남한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원주목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원주목은 강원도 감영이 있었으며, 지금의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북내면 동쪽에 해당한다. 다른 군현의 지도와는 달리 원주 지도에는 위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주는 1683년-1692년(숙종 9-18)과 1728년-1737년(영조 4-13) 사이에 原城縣으로 강등된 적이 있다.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지도들에는 原城으로 표시되어 있다. 동으로는 영월, 서로는 여주에 달하였기 때문에 동서로 매우 넓은 지역이었으나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평창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비교적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서쪽은 하천으로 여주·홍천과 경계를 이룬다. 횡성에서 유입하여 지도 좌측으로 흐르다가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섬강을 그린 것이다. 섬강 좌안으로 유입되는 하천은 지금의 원주천과 백운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성곽의 표현이 없이 객사, 아사를 중심으로 지도 중앙에 그려져 있다 지금의 원주시 일산동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원주목 해제 참조). 교통로와 역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으나 『해동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이 지도에서 묘사된 교통로는 읍치에서 북쪽으로 횡성으로 이어지는 2개의 도로와 서쪽으로 유원역을 거쳐 지평으로 이어지는 도로, 서남방향으로 여주로 이어지는 도로와 남쪽으로 단구역-충주, 신림역-제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간선도로는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와 대체로 일치하나 『지승』에서는 섬암강을 따라 도로가 추가로 그려져 있는 등 여러 지선 도로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8,556戶, 田 1,535結99負2束, 畓 758結57負4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이천부 (伊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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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이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천부는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이천군·판교군·법동군 일대에 해당된다. 이천부의 실재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지도 하단부에 배치하였, 진산인 城山으로부터 내려온 줄기가 읍치를 감싸고 있다. 임진강이 부의 동쪽인 평강에서 유입하여 부의 중앙부를 서류하다가 하중도인 蛇島 부근에서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구당리천)을 합류하며 남류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부의 동쪽인 분지치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고미탄천)은 읍치의 남쪽을 감싸며 서류하다가 임진강과 합류된다. 읍치는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묘사되었고, 성곽 시설은 없다. 지금의 이천읍 향교리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이천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부내에는 역으로 乾川譯 한곳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 송나리현을 겨쳐 안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高城津을 지나 곡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부의 북쪽으로 고성진을 건너 檜弥時峴-廣峴-방응치, 축령, 박달령을 지나 안변으로 이어지며 이 도로가 당시 이천부의 주 간선도로였다. 동쪽으로 분지치를 지나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의 지역에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이천부 주기 (伊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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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이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이천부는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이천군·판교군·법동군 일대에 해당된다. 이천부의 실재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다른 회화식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를 지도 하단부에 배치하였, 진산인 城山으로부터 내려온 줄기가 읍치를 감싸고 있다. 임진강이 부의 동쪽인 평강에서 유입하여 부의 중앙부를 서류하다가 하중도인 蛇島 부근에서 북쪽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구당리천)을 합류하며 남류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부의 동쪽인 분지치에서 발원한 하천(현재 고미탄천)은 읍치의 남쪽을 감싸며 서류하다가 임진강과 합류된다. 읍치는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묘사되었고, 성곽 시설은 없다. 지금의 이천읍 향교리 일대에 해당된다.(지도에 수록된 지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이천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부내에는 역으로 乾川譯 한곳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 송나리현을 겨쳐 안협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高城津을 지나 곡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부의 북쪽으로 고성진을 건너 檜弥時峴-廣峴-방응치, 축령, 박달령을 지나 안변으로 이어지며 이 도로가 당시 이천부의 주 간선도로였다. 동쪽으로 분지치를 지나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81戶, 田 509結42負6束, 畓 15結26負7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의 지역에 밭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인제현 (麟蹄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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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소재하였던 인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인제현은 지금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인제군에 해당된다. 당시 두 면은 춘천부에 속해 있었다. 인제군의 북쪽 지역은 휴전선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도 명칭에서 사용된 ‘獜’字는 ‘麟’의 속자이다. 실제 형태는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정방형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객사, 아사, 향교로 구성된 읍치를 진산인 伏龍山과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읍치는 지금의 인제읍 상동리·합강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주변의 산세는 매우 험준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지도의 동쪽에 백두대간을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성, 간성, 양양과의 경계를 표시하였다. 북으로는 양구, 서남으로는 홍천과의 경계도 산지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하천의 여러 지류들이 서류하면서 읍치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의 소양천으로 댐의 건설로 소양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의 하천은 지금의 서화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龍臺山과 雪嶽山에서 발원한 하천은 각각 북천과 한계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북천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영실천에 해당된다. 읍치 남쪽 동면에서 북쪽으로 흘러 유입되는 하천은 내린천을, 읍치 서쪽에서 남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가야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인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서화천을 따라 연결된 도로는 炭嶺을 지나 고성으로 이어진다. 간성과는 진부령, 양양과는 오색령을 통해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양구로는 廣峙, 沙乃峙를 통해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11戶, 田 130結85負5束, 畓 10結38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인제현 주기 (麟蹄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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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소재하였던 인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인제현은 지금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인제군에 해당된다. 당시 두 면은 춘천부에 속해 있었다. 인제군의 북쪽 지역은 휴전선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도 명칭에서 사용된 ‘獜’字는 ‘麟’의 속자이다. 실제 형태는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정방형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객사, 아사, 향교로 구성된 읍치를 진산인 伏龍山과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읍치는 지금의 인제읍 상동리·합강리 일대에 소재하였다. 주변의 산세는 매우 험준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지도의 동쪽에 백두대간을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성, 간성, 양양과의 경계를 표시하였다. 북으로는 양구, 서남으로는 홍천과의 경계도 산지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하천의 여러 지류들이 서류하면서 읍치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하천은 북한강 상류의 소양천으로 댐의 건설로 소양호의 일부가 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의 하천은 지금의 서화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龍臺山과 雪嶽山에서 발원한 하천은 각각 북천과 한계천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북천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영실천에 해당된다. 읍치 남쪽 동면에서 북쪽으로 흘러 유입되는 하천은 내린천을, 읍치 서쪽에서 남류하여 합류되는 하천은 가야천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인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서화천을 따라 연결된 도로는 炭嶺을 지나 고성으로 이어진다. 간성과는 진부령, 양양과는 오색령을 통해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양구로는 廣峙, 沙乃峙를 통해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411戶, 田 130結85負5束, 畓 10結38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이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정선군 (旌善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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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부에 위치하였던 정선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정선군은 지금의 강원도 정선군중 북면, 정선읍, 동면, 남면, 사북읍, 고한읍 일대에 해당된다. 임계면은 강릉부, 신동읍은 평창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중앙에 고을의 鎭山인 飛鳳山과 함께 객사, 아사, 향교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있다. 현재 정선읍 봉양리 일대이다. 지도의 중앙을 남한강의 상류인 조양강이 북동에서 흘러 내려와 읍치를 감싸돌며 남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영월 동강과 만난다. 실제로는 읍치가 봉양리가 하천 가까이 입지하고 있으나 지도에서는 훨씬 내륙쪽으로 그려져 있다. 조양강 상류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송천과 용탄천이며, 지도의 아래 부분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동대천이다. 조양강의 상류는 임계천이라고도 불린다. 부근에 표시된 餘粮驛 가까이 유명한 아우라지 나루가 있어 정선 아리랑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정선군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여러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주 도로는 강릉, 삼척, 영월로 연결된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좌측에 표시된 碧呑驛(현재 정선읍 용탄리)을 거쳐 伽俚王山, 碧波嶺(정선읍 회동리 소재)을 지난다. 삼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조양강 하안-餘粮驛(현재 북면 여량리 소재)를 지난다. 倉으로는 沒雲倉 등 2곳이 있다. 주기에는 民戶 2,153戶, 田 159結93負8束, 畓 72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정선군 주기 (旌善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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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부에 위치하였던 정선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정선군은 지금의 강원도 정선군중 북면, 정선읍, 동면, 남면, 사북읍, 고한읍 일대에 해당된다. 임계면은 강릉부, 신동읍은 평창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중앙에 고을의 鎭山인 飛鳳山과 함께 객사, 아사, 향교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고 있다. 현재 정선읍 봉양리 일대이다. 지도의 중앙을 남한강의 상류인 조양강이 북동에서 흘러 내려와 읍치를 감싸돌며 남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지금의 영월 동강과 만난다. 실제로는 읍치가 봉양리가 하천 가까이 입지하고 있으나 지도에서는 훨씬 내륙쪽으로 그려져 있다. 조양강 상류에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송천과 용탄천이며, 지도의 아래 부분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동대천이다. 조양강의 상류는 임계천이라고도 불린다. 부근에 표시된 餘粮驛 가까이 유명한 아우라지 나루가 있어 정선 아리랑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정선군 해제 참조). 지도에 그려진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여러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주 도로는 강릉, 삼척, 영월로 연결된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좌측에 표시된 碧呑驛(현재 정선읍 용탄리)을 거쳐 伽俚王山, 碧波嶺(정선읍 회동리 소재)을 지난다. 삼척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조양강 하안-餘粮驛(현재 북면 여량리 소재)를 지난다. 倉으로는 沒雲倉 등 2곳이 있다. 주기에는 民戶 2,153戶, 田 159結93負8束, 畓 72負6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가 영위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철원부 (鐵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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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철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철원부는 지금의 철원군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어운면·북면·묘장면과 포천군의 관인면 및 연천군의 신서면에 해당된다. 일부지역은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지도의 구성은 다른 군현지도와는 달리 안정된 구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으며, 산지도 대부분 분리되어 그려져 있다. 鎭山인 高岩山은 지도의 좌측 상단에 표시되어 있으나 읍치와의 연결성을 나타내고 있지 못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측과 서측에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동쪽의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으로 남류하여 한탄강과 합류한다. 서쪽의 하천은 지금의 역곡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철원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당시 한양과 북부 지방을 잇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연천으로 서울과 연결되는 도로로 京路가 2곳에 표시되었고, 금화와는 去北路, 삭령과 이어지는 도로로 去安峽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외에 고암산 밑의 積石寺와 연결되는 도로와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역으로는 永平으로 가는 길목에 豊田驛(지금의 갈말읍 군탄리 소재)이 있으며 倉은 2곳에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19戶, 田 534結23負7束, 畓 47結48負2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철원부 주기 (鐵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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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임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철원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당시 철원부는 지금의 철원군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어운면·북면·묘장면과 포천군의 관인면 및 연천군의 신서면에 해당된다. 일부지역은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지도의 구성은 다른 군현지도와는 달리 안정된 구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으며, 산지도 대부분 분리되어 그려져 있다. 鎭山인 高岩山은 지도의 좌측 상단에 표시되어 있으나 읍치와의 연결성을 나타내고 있지 못하다. 읍치를 중심으로 동측과 서측에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동쪽의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으로 남류하여 한탄강과 합류한다. 서쪽의 하천은 지금의 역곡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철원부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당시 한양과 북부 지방을 잇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연천으로 서울과 연결되는 도로로 京路가 2곳에 표시되었고, 금화와는 去北路, 삭령과 이어지는 도로로 去安峽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외에 고암산 밑의 積石寺와 연결되는 도로와 평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역으로는 永平으로 가는 길목에 豊田驛(지금의 갈말읍 군탄리 소재)이 있으며 倉은 2곳에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019戶, 田 534結23負7束, 畓 47結48負2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춘천부 (春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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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춘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춘천부는 지금의 춘천시 전체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된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인제 부근의 기린면 일대가 비월지로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지도 우측 상단에 연결하여 그렸다. 지도의 중심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묘사하였고 동쪽에 진산인 鳳儀山 지명이 있다. 지금의 춘천시 요선동 일대이다. 읍치의 북쪽에 북한강과 소양강을 묘사하였다. 현재 춘천댐이 건설되어 있는 북한강 상류의 하천지명은 母津江, 吾梅江으로 기록해 놓았으며 소양강과 합류한 후의 하천 지명은 新淵江으로 표기하였다. 지금의 소양강에는 原河津, 大同津 등의 나루터를 표시하였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춘천부 해제 참조). 도로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倉이 4곳이 기재되어 있으며 특히 읍치 위쪽에 있는 江倉은 소양강창으로서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이었다. 읍치의 동남쪽으로는 安保驛을 거쳐 嘉平(지금의 加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홍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原昌驛이나 德勇峙를 거치는 2곳의 도로가 표시되었다. 북쪽의 狼川(지금의 화천)과 이어지는 도로는 仁嵐驛, 인제로 가는 도로에는 富昌驛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51戶, 田 1,572結, 畓 330結 44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춘천부 주기 (春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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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의 북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춘천부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춘천부는 지금의 춘천시 전체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된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인제 부근의 기린면 일대가 비월지로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지도 우측 상단에 연결하여 그렸다. 지도의 중심에 객사와 아사를 중심으로 읍치를 묘사하였고 동쪽에 진산인 鳳儀山 지명이 있다. 지금의 춘천시 요선동 일대이다. 읍치의 북쪽에 북한강과 소양강을 묘사하였다. 현재 춘천댐이 건설되어 있는 북한강 상류의 하천지명은 母津江, 吾梅江으로 기록해 놓았으며 소양강과 합류한 후의 하천 지명은 新淵江으로 표기하였다. 지금의 소양강에는 原河津, 大同津 등의 나루터를 표시하였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춘천부 해제 참조). 도로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倉이 4곳이 기재되어 있으며 특히 읍치 위쪽에 있는 江倉은 소양강창으로서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이었다. 읍치의 동남쪽으로는 安保驛을 거쳐 嘉平(지금의 加平)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홍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原昌驛이나 德勇峙를 거치는 2곳의 도로가 표시되었다. 북쪽의 狼川(지금의 화천)과 이어지는 도로는 仁嵐驛, 인제로 가는 도로에는 富昌驛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5,251戶, 田 1,572結, 畓 330結 44負9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통천군 (通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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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최북단에 있던 통천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통천군은 지금의 북한 강원도 통천군과 고성군에 걸쳐 있던 지역이었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표현되는 고을의 鎭山인 登禾山은 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를 지도의 중앙 상단에 배치하고 서로는 백두대간을 배치하였다. 통천군의 해안의 방향은 북서-남동이나 지도에서는 북-남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는 총석정을 실경으로 표현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하는 여러 하천이 동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장 큰 하천은 읍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광교천이며 북쪽에서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십이현천이다. 대부분 하천의 유로가 일직선상으로 동해에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조선지도』 등의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지금의 암남천 만입부가 매우 과장되어 그려진 것과는 대조된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통천군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3곳이 있다. 이중 楸池岺과 洒岺을 넘어 淮陽으로 연결되는 길이 대로에 해당된다. 이면의 주기에 이 도로가 험준함을 밝히고 있다. 한편 楸池岺으로 가는 길에는 中臺館이 있다. 남쪽으로는 읍치에서 巨豊驛-樓橋-登路驛-朝珎驛을 거쳐 高城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한편 朝珎驛에는 ‘館’ 표기가 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흡곡과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들 도로는 대부분 평탄하였음을 주기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09戶, 田 256結69負6束, 畓 152結15負1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통천군 주기 (通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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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최북단에 있던 통천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통천군은 지금의 북한 강원도 통천군과 고성군에 걸쳐 있던 지역이었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표현되는 고을의 鎭山인 登禾山은 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를 지도의 중앙 상단에 배치하고 서로는 백두대간을 배치하였다. 통천군의 해안의 방향은 북서-남동이나 지도에서는 북-남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는 총석정을 실경으로 표현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하는 여러 하천이 동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장 큰 하천은 읍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광교천이며 북쪽에서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십이현천이다. 대부분 하천의 유로가 일직선상으로 동해에 유입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조선지도』 등의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지금의 암남천 만입부가 매우 과장되어 그려진 것과는 대조된다(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통천군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3곳이 있다. 이중 楸池岺과 洒岺을 넘어 淮陽으로 연결되는 길이 대로에 해당된다. 이면의 주기에 이 도로가 험준함을 밝히고 있다. 한편 楸池岺으로 가는 길에는 中臺館이 있다. 남쪽으로는 읍치에서 巨豊驛-樓橋-登路驛-朝珎驛을 거쳐 高城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한편 朝珎驛에는 ‘館’ 표기가 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흡곡과 이어지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들 도로는 대부분 평탄하였음을 주기에서 밝히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709戶, 田 256結69負6束, 畓 152結15負1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기혁)

  • 평강현 (平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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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평강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강현은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에 해당된다. 지금의 평강읍 동변리에 소재한 읍치를 지도의 중앙 아래 부분에 四寬亭과 함께 묘사하였다. 동쪽의 강원도 회양, 금성, 김화와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여러 하천이 이곳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북쪽의 古揷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에 해당되며, 이후 북쪽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과 합류한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한탄강 상류에 해당된다. 북쪽 산지의 분수령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하천은 평안강에 해당되며, 임진강의 상류부이다. 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고미탄천인 것으로 추정된다. 분수령은 넘어 안변쪽으로 북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남대천으로 안변에서 동해로 유입한다.(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강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 김화와 이어지는 도로는 赤礗院을 지나고, 회양으로 가는 길은 松古介를 거친다. 철원과 연결되는 도로는 裁松院을 지난다. 서로는 玉洞驛을 거쳐 이천으로 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북으로 안변으로 이어지는 길은 평안강 연변을 지나 천령을 거치는 길과 분수령을 거치는 삼방로가 표현되어 있다. 주기에는 이 도로의 험준함을 설명하고 있다. 이면 주기에 民戶 3,936戶, 田 406結71負4束, 畓 8結11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영위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평강현 주기 (平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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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평강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강현은 지금의 북한의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에 해당된다. 지금의 평강읍 동변리에 소재한 읍치를 지도의 중앙 아래 부분에 四寬亭과 함께 묘사하였다. 동쪽의 강원도 회양, 금성, 김화와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험준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여러 하천이 이곳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북쪽의 古揷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대교천에 해당되며, 이후 북쪽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과 합류한다. 이들 하천은 지금의 한탄강 상류에 해당된다. 북쪽 산지의 분수령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하천은 평안강에 해당되며, 임진강의 상류부이다. 禁山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고미탄천인 것으로 추정된다. 분수령은 넘어 안변쪽으로 북류하는 형태로 그려진 하천은 남대천으로 안변에서 동해로 유입한다.(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강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동으로 김화와 이어지는 도로는 赤礗院을 지나고, 회양으로 가는 길은 松古介를 거친다. 철원과 연결되는 도로는 裁松院을 지난다. 서로는 玉洞驛을 거쳐 이천으로 가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북으로 안변으로 이어지는 길은 평안강 연변을 지나 천령을 거치는 길과 분수령을 거치는 삼방로가 표현되어 있다. 주기에는 이 도로의 험준함을 설명하고 있다. 이면 주기에 民戶 3,936戶, 田 406結71負4束, 畓 8結11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를 영위하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평창군 (平昌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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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작은 고을이었던 평창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창군은 지금의 평창군 평창읍·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된다. 현재 평창군의 도암면 등은 당시 강릉부에 속하였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평창군은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는 객사, 창, 아사와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되었고, 南大川이 고을을 동쪽으로 감싸 돌아 남류하고 있다. 이 남대천은 남한강 상류의 현재 대화천인 것으로 보이며, 상류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규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우측의 동면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참리천으로 동강 상류에 해당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창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강릉, 원주, 영월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정선으로 가는 길이 추가되어 있다. 정선으로 가는 도로는 읍치에서 味呑峙-平安驛(미탄면 평안리)-星摩嶺을 지난다. 읍치의 남서쪽으로는 藥水驛(지금의 평창읍 약수리)을 거쳐 남면을 지나는 도로가 원주로 이어진다. 읍치 위쪽의 注津橋를 건너 梨峴을 넘어가는 도로는 강릉으로 이어진다. 지금도 이곳에는 주진교가 설치되어 있으며 동리 지명도 주진리이다. 梨峙는 배나무가 있어 뱃재로 불렸다고 한다. 倉은 2곳이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685戶, 田 185結51負9束, 畓 1結78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평창군 주기 (平昌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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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작은 고을이었던 평창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창군은 지금의 평창군 평창읍·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된다. 현재 평창군의 도암면 등은 당시 강릉부에 속하였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평창군은 남북으로 긴 형태이나 이 지도에서는 장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는 객사, 창, 아사와 함께 지도의 중앙에 배치되었고, 南大川이 고을을 동쪽으로 감싸 돌아 남류하고 있다. 이 남대천은 남한강 상류의 현재 대화천인 것으로 보이며, 상류에서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규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 우측의 동면에서 남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참리천으로 동강 상류에 해당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창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는 강릉, 원주, 영월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려져 있으나 이 지도에서는 정선으로 가는 길이 추가되어 있다. 정선으로 가는 도로는 읍치에서 味呑峙-平安驛(미탄면 평안리)-星摩嶺을 지난다. 읍치의 남서쪽으로는 藥水驛(지금의 평창읍 약수리)을 거쳐 남면을 지나는 도로가 원주로 이어진다. 읍치 위쪽의 注津橋를 건너 梨峴을 넘어가는 도로는 강릉으로 이어진다. 지금도 이곳에는 주진교가 설치되어 있으며 동리 지명도 주진리이다. 梨峙는 배나무가 있어 뱃재로 불렸다고 한다. 倉은 2곳이 기재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1,685戶, 田 185結51負9束, 畓 1結78負3束로 기재되어 있어 대부분 밭농사 위주였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평해군 (平海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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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당시 강원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평해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해군은 당시 강원도 동해안의 최남단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후포면·온정면·기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지금의 평해읍 평해리 일대이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鎭山은 釜谷山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지도에서는 그려져 있지 않다. 성곽(둘레 2,120尺)과 함께 읍치를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을 연두색으로 표현하였다. 읍치를 중심으로 남북에 2곳의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남쪽의 하천은 지금의 평해 남대천이며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정명천이다. 황보천은 묘사가 생략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해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조선후기 서울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9대로 중에서 서울과 平海를 연결하는 길이 제 3大路에 해당하였다. 백두대간의 珠嶺, 三乘嶺, 元水項 등의 고개를 넘어 서쪽의 寧越, 英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며, 이면의 주기에서는 이들이 험준한 도로임을 서술하고 있다. 남으로 寧海로 이어지는 도로가 내륙에 남대천을 건너 내륙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북으로 蔚珍으로 통하는 대로로 望洋亭(지도에는 望津亭으로 표시)을 거쳐 가는 경로와 鳥峴을 거쳐 내륙으로 가는 경로가 함께 그려져 있다. 한편 월송포 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新立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448戶, 田 485結48負1束, 畓 387結50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평해군 주기 (平海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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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당시 강원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하였던 평해군을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평해군은 당시 강원도 동해안의 최남단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후포면·온정면·기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지금의 평해읍 평해리 일대이다. 방안식 군현지도에서 鎭山은 釜谷山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지도에서는 그려져 있지 않다. 성곽(둘레 2,120尺)과 함께 읍치를 지도의 중앙에 배치하고 서쪽에 백두대간을 연두색으로 표현하였다. 읍치를 중심으로 남북에 2곳의 하천이 묘사되어 있다. 남쪽의 하천은 지금의 평해 남대천이며 북쪽에 그려진 하천은 정명천이다. 황보천은 묘사가 생략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평해군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조선후기 서울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9대로 중에서 서울과 平海를 연결하는 길이 제 3大路에 해당하였다. 백두대간의 珠嶺, 三乘嶺, 元水項 등의 고개를 넘어 서쪽의 寧越, 英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며, 이면의 주기에서는 이들이 험준한 도로임을 서술하고 있다. 남으로 寧海로 이어지는 도로가 내륙에 남대천을 건너 내륙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북으로 蔚珍으로 통하는 대로로 望洋亭(지도에는 望津亭으로 표시)을 거쳐 가는 경로와 鳥峴을 거쳐 내륙으로 가는 경로가 함께 그려져 있다. 한편 월송포 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新立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2,448戶, 田 485結48負1束, 畓 387結50負5束로 기재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홍천현 (洪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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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홍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천현은 지금의 홍천군 홍천읍, 서면, 북방면, 남면, 동면, 화촌면, 두촌면, 내촌면, 서석면 일대의 지역에 해당된다. 홍천군 내면은 당시에 강릉부에 속하였다. 동으로 麟蹄, 북으로 春川, 서로 砥平과 楊根에 접하여 동서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게 장방형의 형태로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客舍, 衙舍, 倉, 鄕校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표현하였으며, 延波亭과 觀水堂이 객사 앞에 있다. 읍치는 지금의 홍천읍 희망리·진리 일대에 소재한다. 진산인 石花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홍천강으로 북한강 상류의 한 지류에 해당된다. 지도 북동쪽의 建伊峙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야시대천으로, 柰村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내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의 동쪽 黃腸山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군업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하천의 중류에서 북류하여 홍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각각 지금의 성전천과 어룡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홍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춘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서쪽을 城峙를 지나 北方面을 거치는 도로와, 서남쪽의 蓮峰驛(홍천읍 연봉리 소재)을 지나 서창을 거쳐 가는 길이 있다. 남쪽으로는 陽德院(남면 양덕원리 소재)과 神堂峙를 지나 砥平으로 연결되며, 三馬峙, 小三馬峙를 지나는 도로는 횡성과 이어진다. 북동쪽의 泉甘驛(두촌면 역내리 소재)을 지나는 길은 인제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793戶, 田 622結35負4束, 畓 97結29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홍천현 주기 (洪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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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였던 홍천현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홍천현은 지금의 홍천군 홍천읍, 서면, 북방면, 남면, 동면, 화촌면, 두촌면, 내촌면, 서석면 일대의 지역에 해당된다. 홍천군 내면은 당시에 강릉부에 속하였다. 동으로 麟蹄, 북으로 春川, 서로 砥平과 楊根에 접하여 동서로 긴 형태이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동일하게 장방형의 형태로 그렸다. 지도의 중앙에 客舍, 衙舍, 倉, 鄕校 등을 중심으로 읍치를 표현하였으며, 延波亭과 觀水堂이 객사 앞에 있다. 읍치는 지금의 홍천읍 희망리·진리 일대에 소재한다. 진산인 石花山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지금의 홍천강으로 북한강 상류의 한 지류에 해당된다. 지도 북동쪽의 建伊峙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지금의 야시대천으로, 柰村面에서 발원한 하천은 내촌천으로 추정된다. 지도의 동쪽 黃腸山 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은 군업천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하천의 중류에서 북류하여 홍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각각 지금의 성전천과 어룡천이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홍천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춘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의 서쪽을 城峙를 지나 北方面을 거치는 도로와, 서남쪽의 蓮峰驛(홍천읍 연봉리 소재)을 지나 서창을 거쳐 가는 길이 있다. 남쪽으로는 陽德院(남면 양덕원리 소재)과 神堂峙를 지나 砥平으로 연결되며, 三馬峙, 小三馬峙를 지나는 도로는 횡성과 이어진다. 북동쪽의 泉甘驛(두촌면 역내리 소재)을 지나는 길은 인제로 연결된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793戶, 田 622結35負4束, 畓 97結29負2束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회양부 (淮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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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한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회양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양부는 지금의 북한 강원도 회양군·금강군·창도군·세포군에 걸쳐 있다. 회양부는 읍치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현재의 내금강면에 해당되는 지역 등 2 지역으로 되어있으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府治를 지도의 중앙 위쪽에 배치하고, 내금강산 일대는 오른쪽에 배치하여 실경으로 묘사하였다. 하천으로 부내에 2개의 유로가 그려져 있다. 부의 서남쪽에서 한탄강이 발원하고 있으나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지도 중앙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을 감싸 돌아 다시 남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북한강 상류인 지금의 개동연천에 해당된다. 지도의 동쪽 내금강에서 발원하여 양구쪽으로 남류하는 하천은 금강천에 해당되며, 이곳으로 유입하는 지류는 동금강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회양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역으로 銀溪驛, 新安譯 등 2곳이, 倉으로 縣倉, 和川縣倉, 文登倉 등 10곳이 그려져 있다. 남쪽 양구로 이어지는 도로는 신안역과 蘆桐嶺을 거쳐 水八面에 소재한 縣倉을 지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금강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 동쪽의 和川縣倉을 지나 末暉嶺을 지나 장안사까지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2戶, 田 219結9負, 畓 56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회양부 주기 (淮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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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북부 내륙의 한탄강 상류에 위치하였던 회양부를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회양부는 지금의 북한 강원도 회양군·금강군·창도군·세포군에 걸쳐 있다. 회양부는 읍치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현재의 내금강면에 해당되는 지역 등 2 지역으로 되어있으나 다른 회화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장방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府治를 지도의 중앙 위쪽에 배치하고, 내금강산 일대는 오른쪽에 배치하여 실경으로 묘사하였다. 하천으로 부내에 2개의 유로가 그려져 있다. 부의 서남쪽에서 한탄강이 발원하고 있으나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지도 중앙에서 발원하여 읍치의 북쪽을 감싸 돌아 다시 남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하천은 북한강 상류인 지금의 개동연천에 해당된다. 지도의 동쪽 내금강에서 발원하여 양구쪽으로 남류하는 하천은 금강천에 해당되며, 이곳으로 유입하는 지류는 동금강천이다.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회양부 해제 참조). 도로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지도에는 역으로 銀溪驛, 新安譯 등 2곳이, 倉으로 縣倉, 和川縣倉, 文登倉 등 10곳이 그려져 있다. 남쪽 양구로 이어지는 도로는 신안역과 蘆桐嶺을 거쳐 水八面에 소재한 縣倉을 지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금강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읍치 동쪽의 和川縣倉을 지나 末暉嶺을 지나 장안사까지 이어진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62戶, 田 219結9負, 畓 56負8束으로 기재되어 있어 밭농사가 대부분임을 보여준다. (김기혁)

  • 횡성현 (橫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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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 유역에 소재하였던 횡성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횡성현은 지금의 횡성군 중 청일면, 갑천면, 둔내면, 안흥면, 우천면, 횡성읍, 공근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 횡성군의 서원면과 강림면은 조선시대 원주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 아래부분에 읍치를 배치하고 객사와 아사, 창을 그렸다. 泰岐山에서 줄기가 이어져 읍치를 감싸고 있다. 진산인 馬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좌측에 北川이 남류하고, 지도의 우측 원주부로부터 유입한 전천이 읍치를 감싸돌며 북천에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천은 지금의 금계천으로 보이며 상류부는 계천에 해당된다. 지도의 우측의 둔내면에서 발원하는 별도의 하천이 그려져 있는데 현재의 주천천으로 생각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횡성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의 명칭을 기록하였다. 지도에 역이 네 군데 표시되어 있다. 원주-지평으로 이어져 서울로 가는 길은 읍치에서 葛豊驛(횡성읍 갈풍리 소재)을 거치며, 蒼峯驛(공근면 창봉리)에서 三馬峙로 연결되는 길은 洪川과 이어진다. 安興驛(안흥면 안흥리)을 거쳐 禿峴으로 이어지는 길은 강릉과 통한다. 烏原驛을 거쳐서도 원주로 연결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 주천강안에 楡谷倉, 北川에 外倉이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59戶, 田 404結31負1束, 畓 205結81負5束로 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인다. (김기혁)

  • 횡성현 주기 (橫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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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남부 내륙의 남한강 상류 유역에 소재하였던 횡성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횡성현은 지금의 횡성군 중 청일면, 갑천면, 둔내면, 안흥면, 우천면, 횡성읍, 공근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 횡성군의 서원면과 강림면은 조선시대 원주부에 속하였다. 지도의 중앙 아래부분에 읍치를 배치하고 객사와 아사, 창을 그렸다. 泰岐山에서 줄기가 이어져 읍치를 감싸고 있다. 진산인 馬山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좌측에 北川이 남류하고, 지도의 우측 원주부로부터 유입한 전천이 읍치를 감싸돌며 북천에 유입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천은 지금의 금계천으로 보이며 상류부는 계천에 해당된다. 지도의 우측의 둔내면에서 발원하는 별도의 하천이 그려져 있는데 현재의 주천천으로 생각된다. (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횡성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의 명칭을 기록하였다. 지도에 역이 네 군데 표시되어 있다. 원주-지평으로 이어져 서울로 가는 길은 읍치에서 葛豊驛(횡성읍 갈풍리 소재)을 거치며, 蒼峯驛(공근면 창봉리)에서 三馬峙로 연결되는 길은 洪川과 이어진다. 安興驛(안흥면 안흥리)을 거쳐 禿峴으로 이어지는 길은 강릉과 통한다. 烏原驛을 거쳐서도 원주로 연결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 주천강안에 楡谷倉, 北川에 外倉이 그려져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3,359戶, 田 404結31負1束, 畓 205結81負5束로 되어 있어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인다. (김기혁)

  • 흡곡현 (歙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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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하였던 흡곡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부터 통천군에 속하였고, 지금의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의 장대리·송전리·거성리·노상리·보탄리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 위쪽에 진산인 博山과 함께 읍치를 그렸다. 지금의 통천군 송전리 일대이다. 서로는 백두대간을 그리고, 그 여맥이 현남면을 거쳐 읍치로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3곳 그려져 있다. 읍치 앞에서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한천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십이현천은 華藏菴 부근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하천의 하구에 기재된 田烽臺 지명은 다른 지도에서는 舊烽臺로 기재되어 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표현되었으나 북쪽에 長在湖와 함께 栗島가 그려져 있다. 율도 부근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패천천으로 생각된다.(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흡곡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大路, 小路로 구분하였다. 북으로 함경남도 안변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馬峙峴을 지나는 길이 대로로 표시되어 있고, 시중대를 거치는 도로는 소로로 표시하였다. 통천으로 이어지는 길은 읍치 남쪽에 貞德驛을 지나 文峙峴를 통해 이어진다. 내륙 회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黃龍山 산록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기에서는 이 도로의 험준함을 적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778戶, 田 139結83負7束, 畓 44結10負9束로 기재되어 고을 규모가 매우 작으나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흡곡현 주기 (歙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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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하였던 흡곡현을 그린 회화식 지도중의 하나이다. 일제시대부터 통천군에 속하였고, 지금의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의 장대리·송전리·거성리·노상리·보탄리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앙 위쪽에 진산인 博山과 함께 읍치를 그렸다. 지금의 통천군 송전리 일대이다. 서로는 백두대간을 그리고, 그 여맥이 현남면을 거쳐 읍치로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이 3곳 그려져 있다. 읍치 앞에서 동류하는 하천은 지금의 한천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십이현천은 華藏菴 부근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하천의 하구에 기재된 田烽臺 지명은 다른 지도에서는 舊烽臺로 기재되어 있다. 해안선은 매우 단조롭게 표현되었으나 북쪽에 長在湖와 함께 栗島가 그려져 있다. 율도 부근으로 유입하는 하천은 지금의 패천천으로 생각된다.(기타 지명 등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회화식 군현지도 흡곡현 해제 참조).  도로망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大路, 小路로 구분하였다. 북으로 함경남도 안변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馬峙峴을 지나는 길이 대로로 표시되어 있고, 시중대를 거치는 도로는 소로로 표시하였다. 통천으로 이어지는 길은 읍치 남쪽에 貞德驛을 지나 文峙峴를 통해 이어진다. 내륙 회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黃龍山 산록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기에서는 이 도로의 험준함을 적고 있다. 이면 주기에는 民戶 778戶, 田 139結83負7束, 畓 44結10負9束로 기재되어 고을 규모가 매우 작으나 논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기혁)

  • ▶경기도
  • 가평군 (嘉平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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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군은 설악면을 제외한 가평군 전체와 남양주시 수동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가평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왼쪽의 東에서 흘러나오는 昭陽江下流가 현재의 북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가평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 다른 측면이 있다. 일단 지도 명칭에서 嘉平郡은 加平郡의 오기로서 지도 필사자가 옛이름인 嘉平과 헷갈린 것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 위의 도로와 산줄기의 표현 양식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의 유입 방향인 서쪽을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필사 시기에 맞게 주기 내용으로 바꾸고, 지도의 전체적인 방향만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 역시 남쪽을 위로 향해 그리고 주기가 같은 점은 본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있던 南面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도 없는데, 주기에는 남면이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나 같은 계통에서 범한 오류를 뒤의 2개 지도가 수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뒤의 2개 지도에서 산줄기의 표현 양식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고, 도로가 없으며, 일부 지명이 달라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가평군 주기 (嘉平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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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군은 설악면을 제외한 가평군 전체와 남양주시 수동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가평읍의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왼쪽의 東에서 흘러나오는 昭陽江下流가 현재의 북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가평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 다른 측면이 있다. 일단 지도 명칭에서 嘉平郡은 加平郡의 오기로서 지도 필사자가 옛이름인 嘉平과 헷갈린 것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 위의 도로와 산줄기의 표현 양식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의 유입 방향인 서쪽을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고,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필사 시기에 맞게 주기 내용으로 바꾸고, 지도의 전체적인 방향만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 역시 남쪽을 위로 향해 그리고 주기가 같은 점은 본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있던 南面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뒤의 2개 지도에도 없는데, 주기에는 남면이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나 같은 계통에서 범한 오류를 뒤의 2개 지도가 수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뒤의 2개 지도에서 산줄기의 표현 양식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고, 도로가 없으며, 일부 지명이 달라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강화부 (江華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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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강화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1627년(인조 5)에 都護府에서 留守府로 될 정도로 수도 방위에 가장 중요한 요해처로 인식되던 고을이었다. 지도에도 이러한 요해처를 잘 보여주듯이 강화읍성과 정족산성, 문수산성, 鎭堡를 비롯하여 해안가에 쌓은 외성 등 군사적 정보가 특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진보의 경우 종3품의 僉使가 파견된 경우 鎭으로, 정4품의 萬戶가 파견된 경우 戶로,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된 경우 別將으로 표시하여 구분해 주었다. 해안선과 섬의 모양 및 수록된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화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두 지도에는 본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육로와 수로에 대한 표시가 없어 본 지도가 이런 지도 계통의 원도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의 두 지도에는 육로와 수로가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것과 관계되어 적혀 있는 거리에 대한 문구는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앞의 두 지도가 본 지도와 비슷한 원도 계통에서 도로에 대한 표시만 생략하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는 강화부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아래에 교동부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군현의 그림지도에서는 주변 고을의 경우 아주 작고 방향만 알 수 있는 형태로 그리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수도인 한양의 방어에 이곳의 중요성이 컸기 때문에 비록 강화부지도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던 교동부까지 자세하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강화도와 교동도 이외의 섬에는 어느 고을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화부에 속한 경우 江華屬으로, 교동부에 속한 경우 水營屬으로 되어 있는데, 두 고을에 소속된 섬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밖에 밀물(潮進) 때는 바다가 되고 썰물(潮退) 때는 풀밭(草)이 된다는 간석지에 대한 표현도 몇 곳에 나타나고 있으며, 소금이 생산되던 塩盆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강화부 주기 (江華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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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강화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1627년(인조 5)에 都護府에서 留守府로 될 정도로 수도 방위에 가장 중요한 요해처로 인식되던 고을이었다. 지도에도 이러한 요해처를 잘 보여주듯이 강화읍성과 정족산성, 문수산성, 鎭堡를 비롯하여 해안가에 쌓은 외성 등 군사적 정보가 특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진보의 경우 종3품의 僉使가 파견된 경우 鎭으로, 정4품의 萬戶가 파견된 경우 戶로,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된 경우 別將으로 표시하여 구분해 주었다. 해안선과 섬의 모양 및 수록된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강화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두 지도에는 본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육로와 수로에 대한 표시가 없어 본 지도가 이런 지도 계통의 원도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의 두 지도에는 육로와 수로가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것과 관계되어 적혀 있는 거리에 대한 문구는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앞의 두 지도가 본 지도와 비슷한 원도 계통에서 도로에 대한 표시만 생략하고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는 강화부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아래에 교동부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군현의 그림지도에서는 주변 고을의 경우 아주 작고 방향만 알 수 있는 형태로 그리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수도인 한양의 방어에 이곳의 중요성이 컸기 때문에 비록 강화부지도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던 교동부까지 자세하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강화도와 교동도 이외의 섬에는 어느 고을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화부에 속한 경우 江華屬으로, 교동부에 속한 경우 水營屬으로 되어 있는데, 두 고을에 소속된 섬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밖에 밀물(潮進) 때는 바다가 되고 썰물(潮退) 때는 풀밭(草)이 된다는 간석지에 대한 표현도 몇 곳에 나타나고 있으며, 소금이 생산되던 塩盆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경기도 (京畿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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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전반적인 유로와 해안선 및 섬의 모습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경기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여지도》의 것보다 훨씬 자세하고 많으며, 《광여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면서 약간 자세한 편이다. 따라서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앞의 2개 지도보다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글시체나 채색 등의 측면에서는 앞의 2책보다 정교함이 훨씬 떨어지고 있어 관보다는 민간에서 필사하여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수록된 정보 중에 중요하게 여겨져서 기호가 사용된 것으로는 수도인 京都, 군현의 명칭, 군사기지인 鎭堡와 급한 군사 정보를 전달하는 烽燧, 牧場,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屬驛을 거느렸던 察訪驛 등이다. 군현의 명칭은 세로로 긴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광여도》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채색된 것과 달리 본 지도에서는 左․右道를 각각 노란색과 흰색으로 채색하여 구분하여 주었다. 開城府․江華․喬桐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일반 군현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개성부와 강화는 留守가 파견되어 수도에 준하는 지위로 인식되었고, 교동에는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찰방역․목장은 모두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을 기호로 사용하면서 각각 연분홍․연황색․노란색으로 채색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광여도》에서는 목장인 大阜와 찰방역인 重林驛을 진보와 동일한 색으로 표현하는 등의 오류를 범한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밖에 육지에는 산과 하천 등 자연지리적 정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인문지리적 정보로는 국가의 정통성과 관련된 陵, 지방 세력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書院(祠宇 포함), 기타 고지명 등이 있다. 바다의 섬에는 馬場, 訓屯(훈련원의 둔전)이라는 정보가 특별히 기입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경기도 주기 (京畿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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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전반적인 유로와 해안선 및 섬의 모습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경기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여지도》의 것보다 훨씬 자세하고 많으며, 《광여도》의 것과는 거의 동일하면서 약간 자세한 편이다. 따라서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가 앞의 2개 지도보다 자세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글시체나 채색 등의 측면에서는 앞의 2책보다 정교함이 훨씬 떨어지고 있어 관보다는 민간에서 필사하여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수록된 정보 중에 중요하게 여겨져서 기호가 사용된 것으로는 수도인 京都, 군현의 명칭, 군사기지인 鎭堡와 급한 군사 정보를 전달하는 烽燧, 牧場,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屬驛을 거느렸던 察訪驛 등이다. 군현의 명칭은 세로로 긴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광여도》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채색된 것과 달리 본 지도에서는 左․右道를 각각 노란색과 흰색으로 채색하여 구분하여 주었다. 開城府․江華․喬桐이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일반 군현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개성부와 강화는 留守가 파견되어 수도에 준하는 지위로 인식되었고, 교동에는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찰방역․목장은 모두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을 기호로 사용하면서 각각 연분홍․연황색․노란색으로 채색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광여도》에서는 목장인 大阜와 찰방역인 重林驛을 진보와 동일한 색으로 표현하는 등의 오류를 범한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밖에 육지에는 산과 하천 등 자연지리적 정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인문지리적 정보로는 국가의 정통성과 관련된 陵, 지방 세력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書院(祠宇 포함), 기타 고지명 등이 있다. 바다의 섬에는 馬場, 訓屯(훈련원의 둔전)이라는 정보가 특별히 기입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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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1면입니다.

  •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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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1책 경기도 총론(京畿道 總論)2면입니다.

  • 경성 (京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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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를 그린 지도로서 都城과 城底十里를 하나의 지도에 그려넣었다. 산줄기와 하천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것과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하천의 표현 방식이 앞의 두 지도에 비해 간략화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일부 지명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보이고 있는데, 아래 왼쪽의 西北은 西江의 오기이다. 그리고 서강 오른쪽에는 앞의 두 지도에는 없는 栗島 등이 본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지도의 명칭이 《광여도》에는 都城圖로, 《여지도》에는 都城으로 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는 京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성이나 경성 모두 전통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였으며, 고유한 행정명칭으로는 漢城府라고 불렀다. 도성도는 조선에서 가장 많이 그려졌는데, 본 지도의 것은 다른 도성도에 비해 주변의 경관을 비롯하여 도성 안쪽의 정보도 간략한 편이다. 본 지도처럼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도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리고 정보가 적은 도성 밖을 상대적으로 작게 그리는 것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그림지도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상대적으로 많은 도성 안의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도성 안에 정보가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어 약간 의아한 느낌을 준다. 이런 경우 보통 도성 안을 따로 그린 지도가 첨부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아래쪽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가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며, 가장 오른쪽에 현재의 중랑천이 中梁浦로 기록되어 있다.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명칭을 포구나 나루 또는 진흙의 물가라는 뜻의 ‘浦’자를 써서 기록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량포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중량포는 실제로는 오른쪽 위의 양주에서 본류가 흘러오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알기 어렵게 그려놓았다. 도성 안쪽에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청계천이다.(이기봉)

  • 경성 주기 (京城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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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를 그린 지도로서 都城과 城底十里를 하나의 지도에 그려넣었다. 산줄기와 하천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68)의 것과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하천의 표현 방식이 앞의 두 지도에 비해 간략화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일부 지명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보이고 있는데, 아래 왼쪽의 西北은 西江의 오기이다. 그리고 서강 오른쪽에는 앞의 두 지도에는 없는 栗島 등이 본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지도의 명칭이 《광여도》에는 都城圖로, 《여지도》에는 都城으로 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는 京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성이나 경성 모두 전통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였으며, 고유한 행정명칭으로는 漢城府라고 불렀다. 도성도는 조선에서 가장 많이 그려졌는데, 본 지도의 것은 다른 도성도에 비해 주변의 경관을 비롯하여 도성 안쪽의 정보도 간략한 편이다. 본 지도처럼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도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리고 정보가 적은 도성 밖을 상대적으로 작게 그리는 것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그림지도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상대적으로 많은 도성 안의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도성 안에 정보가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어 약간 의아한 느낌을 준다. 이런 경우 보통 도성 안을 따로 그린 지도가 첨부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아래쪽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가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며, 가장 오른쪽에 현재의 중랑천이 中梁浦로 기록되어 있다.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명칭을 포구나 나루 또는 진흙의 물가라는 뜻의 ‘浦’자를 써서 기록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량포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중량포는 실제로는 오른쪽 위의 양주에서 본류가 흘러오지만 본 지도에는 이런 사실을 알기 어렵게 그려놓았다. 도성 안쪽에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하는 것이 현재의 청계천이다.(이기봉)

  • 고양군 (高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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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군은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덕양구 고양동 일대에 있었다. 아래쪽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고, 위쪽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공릉천이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 바로 서쪽에 있는 고을이기 때문에 수많은 陵墓가 있었음이 지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원래 고양의 읍치는 현재의 덕양구 원당동인 지도 가운데의 禧陵에 있었는데, 1528년(중종 23)에 희릉을 안치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와 본 지도의 차이점은 첫째,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둘째, 《해동지도》에 없던 지도 아래쪽의 朴萬島, 鴨島, 氷庫島의 정보가 추가되어 있다. 셋째, 司饔院進上葦魚結箭處가 1개 더 추가되어 있다. 사옹원은 왕의 식사나 궁중의 음식을 공급하던 관서였으며,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던 葦魚(웅어)의 포획처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정보였다. 《해동지도》에 1개만 있던 위어 포획처가 2개로 늘어난 것, 궁중의 땔감조달과 관계된 繕工草場과 관련된 섬의 정보가 늘어난 것은 필사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담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二山村이 二山府로 오기되어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中路와 小路 등의 정보가 수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자체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더 자세한 다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고양군 주기 (高陽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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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군은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덕양구 고양동 일대에 있었다. 아래쪽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고, 위쪽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공릉천이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 바로 서쪽에 있는 고을이기 때문에 수많은 陵墓가 있었음이 지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원래 고양의 읍치는 현재의 덕양구 원당동인 지도 가운데의 禧陵에 있었는데, 1528년(중종 23)에 희릉을 안치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와 본 지도의 차이점은 첫째, 주기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둘째, 《해동지도》에 없던 지도 아래쪽의 朴萬島, 鴨島, 氷庫島의 정보가 추가되어 있다. 셋째, 司饔院進上葦魚結箭處가 1개 더 추가되어 있다. 사옹원은 왕의 식사나 궁중의 음식을 공급하던 관서였으며,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던 葦魚(웅어)의 포획처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정보였다. 《해동지도》에 1개만 있던 위어 포획처가 2개로 늘어난 것, 궁중의 땔감조달과 관계된 繕工草場과 관련된 섬의 정보가 늘어난 것은 필사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도로를 제외하면 본 지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담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二山村이 二山府로 오기되어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中路와 小路 등의 정보가 수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자체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더 자세한 다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과천현 (果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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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현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대부분, 서초구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 현재의 양재천이고, 아래쪽은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과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衙(舍) 부분에 果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과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표시된 읍치의 城隍壇과 厲壇을 비롯하여 일부 지명이 본 지도에 빠져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조선후기에 민간에서 운영한 숙박시설인 葛山酒幕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가장 중요한 三南大路 위에 있었다.(이기봉)

  • 과천현 주기 (果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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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현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대부분, 서초구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 현재의 양재천이고, 아래쪽은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과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衙(舍) 부분에 果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과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표시된 읍치의 城隍壇과 厲壇을 비롯하여 일부 지명이 본 지도에 빠져 있어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보다는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조선후기에 민간에서 운영한 숙박시설인 葛山酒幕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가장 중요한 三南大路 위에 있었다.(이기봉)

  • 광주부 (廣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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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부는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현재의 남양주시 와부면과 조안면을 양주군에, 현재의 의왕시와 안산시의 일부 및 화성시 매송면의 서쪽 부분을 수원군에 넘겨주고, 현재의 광주시 남종면을 양평으로부터 넘겨받아 광주군이 되었다. 이후 서울시의 확장에 따라 현재의 경부고속도로 동쪽 강남 일대를 서울시에 넘겨주었으며, 성남시와 하남시 등이 후에 독립하여 현재의 광주시가 되었다. 광주부의 읍치는 원래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는데 1626년(인조 4)에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확대 수축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다른 그림지도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인 남한산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다. 위쪽의 왼쪽은 현재의 화성시 매송면 서쪽과 안산시 일부에까지 쭉 뻗어있던 광주의 犬牙相入地였다. 본 지도의 전반적인 형태와 수록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광주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아주 자세히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전혀 없으며,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편이다. 주기의 내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고 《해동지도》가 전혀 다른 편이다. 앞의 4개 지도는 몇몇 부분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가장 앞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해동지도》의 경우 본 지도의 왼쪽 위 부분에 왼쪽의 安山界 바다와 그 오른쪽의 한강 하류가 마치 하천으로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를 보면 검은색 실선이 그어져 있는데, 하천으로 경계지어지지 않는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한다. 안산계 방면에 잘못 그려진 하천도 실제로는 그 사이에 금천, 과천, 부평, 인천, 안산 등의 군현이 사이에 끼어 있어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하는 검은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 역시 다른 원본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본 지도에는 이런 오류가 몇 개 더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平丘驛부터 楊州屈雲驛까지 마치 하천처럼 표시되어 있는 것은 《해동지도》에는 군현 경계로 그어져 있던 것이다. 실제로는 《해동지도》가 맞기 때문에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잘못 필사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후대의 필사자들이 《해동지도》나 그 원본보다는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왼쪽 위의 경우 한강과 安山界가 마치 바다로 바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는 《해동지도》처럼 오류를 범하고 있어 두 지도가 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이기봉)

  • 광주부 주기 (廣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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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부는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현재의 남양주시 와부면과 조안면을 양주군에, 현재의 의왕시와 안산시의 일부 및 화성시 매송면의 서쪽 부분을 수원군에 넘겨주고, 현재의 광주시 남종면을 양평으로부터 넘겨받아 광주군이 되었다. 이후 서울시의 확장에 따라 현재의 경부고속도로 동쪽 강남 일대를 서울시에 넘겨주었으며, 성남시와 하남시 등이 후에 독립하여 현재의 광주시가 되었다. 광주부의 읍치는 원래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는데 1626년(인조 4)에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확대 수축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다른 그림지도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인 남한산성 부분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강이 현재의 한강이다. 위쪽의 왼쪽은 현재의 화성시 매송면 서쪽과 안산시 일부에까지 쭉 뻗어있던 광주의 犬牙相入地였다. 본 지도의 전반적인 형태와 수록 내용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광주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도로가 아주 자세히 그려져 있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가 전혀 없으며,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편이다. 주기의 내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가 거의 동일하고 《해동지도》가 전혀 다른 편이다. 앞의 4개 지도는 몇몇 부분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가장 앞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해동지도》의 경우 본 지도의 왼쪽 위 부분에 왼쪽의 安山界 바다와 그 오른쪽의 한강 하류가 마치 하천으로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를 보면 검은색 실선이 그어져 있는데, 하천으로 경계지어지지 않는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한다. 안산계 방면에 잘못 그려진 하천도 실제로는 그 사이에 금천, 과천, 부평, 인천, 안산 등의 군현이 사이에 끼어 있어 다른 군현과의 경계를 의미하는 검은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 역시 다른 원본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본 지도에는 이런 오류가 몇 개 더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平丘驛부터 楊州屈雲驛까지 마치 하천처럼 표시되어 있는 것은 《해동지도》에는 군현 경계로 그어져 있던 것이다. 실제로는 《해동지도》가 맞기 때문에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잘못 필사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오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후대의 필사자들이 《해동지도》나 그 원본보다는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왼쪽 위의 경우 한강과 安山界가 마치 바다로 바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는 《해동지도》처럼 오류를 범하고 있어 두 지도가 본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이기봉)

  • 교동 (喬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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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 석모도 위쪽, 주문도, 장봉도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오른쪽 가장 위쪽이 예성강 하구이고, 그 아래쪽이 한강 하구이다. 오른쪽으로 강화도가 실제보다 가까운 것처럼 그려져 있고, 아래쪽이 현재의 석모도 위쪽에 해당된다. 원래 남양의 화량진(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던 경기도의 水營을 1629년(인조 7)에 이 고을로 옮기면서 아주 작은 고을임에도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교동부 지도, 《여지도》(古4790-58)의 교동수영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는 적혀 있었던 각 里의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의 주기에 없던 각 面의 초경과 종경의 거리 기록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 새로 수록하면서 지도 위의 거리 정보를 삭제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읍치 아래쪽의 貯水處와 船倉 부근이 《해동지도》에는 작은 돌무더기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는 산봉우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화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완벽하게 산처럼 그려져 있다. 이러한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또는 같은 계통의 지도가 원본을 필사하면서 변화시킨 내용을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산으로 잘못 인식하여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밖에 《해동지도》에는 밀물 때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하천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이런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여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가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교동 주기 (喬桐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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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 석모도 위쪽, 주문도, 장봉도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오른쪽 가장 위쪽이 예성강 하구이고, 그 아래쪽이 한강 하구이다. 오른쪽으로 강화도가 실제보다 가까운 것처럼 그려져 있고, 아래쪽이 현재의 석모도 위쪽에 해당된다. 원래 남양의 화량진(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던 경기도의 水營을 1629년(인조 7)에 이 고을로 옮기면서 아주 작은 고을임에도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교동부 지도, 《여지도》(古4790-58)의 교동수영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해동지도》에는 적혀 있었던 각 里의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해동지도》의 주기에 없던 각 面의 초경과 종경의 거리 기록은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 새로 수록하면서 지도 위의 거리 정보를 삭제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읍치 아래쪽의 貯水處와 船倉 부근이 《해동지도》에는 작은 돌무더기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본 지도에서는 산봉우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화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완벽하게 산처럼 그려져 있다. 이러한 변화 양상을 통해 볼 때 본 지도 또는 같은 계통의 지도가 원본을 필사하면서 변화시킨 내용을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산으로 잘못 인식하여 오류를 범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밖에 《해동지도》에는 밀물 때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하천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이런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하여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가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교하현 (交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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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현은 파주시 시내(옛 금촌읍)와 교하면, 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현재의 탄현면 갈현리인데, 1731년(영조 7)에 長陵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현재의 파주시 금릉동인 지도 위의 金尺浦津의 위치로 옮긴다. 이후 1738년(영조 14)에 현재의 교하면 교하리인 지도 위의 長命山 동쪽으로 옮기는데, 본 지도의 읍치 위치를 통해 최초 원본이 1731년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교하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해동지도》에는 읍치 위쪽의 烽臺가 서쪽으로 풍덕의 덕적산 봉수와, 동쪽으로 고양의 고봉 봉수와 연결되고 있음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명칭이 교하군으로 되어 있는데, 1731년(영조 7)에 읍치에 장릉을 옮겨오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도면에는 장릉이 옮겨오기 전의 읍치가 그려져 있어 군으로 승격되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해동지도》의 지도는 1731년 이전에 그려지고, 주기는 그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명칭이 교하현으로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작성되지 않은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에도 교하현으로 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살펴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광여도》와 거의 동일한 《여지도》의 경우 교하군으로 되어 있어 사실을 확인한 다음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속에서도 읍치의 이동 사실은 교정하지 못하여 꼼꼼한 검토를 통해 필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고, 가운데가 곡릉천이며, 가장 아래쪽이 한강이다. 그러나 지도에는 세 하천의 규모를 전혀 알 수 없게 그려놓았는데,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부터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임진강을 곡릉천과 다르게 그려 일면 하천 규모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지만 한강을 곡릉천과 동일하게 그려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이기봉)

  • 교하현 주기 (交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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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현은 파주시 시내(옛 금촌읍)와 교하면, 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현재의 탄현면 갈현리인데, 1731년(영조 7)에 長陵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현재의 파주시 금릉동인 지도 위의 金尺浦津의 위치로 옮긴다. 이후 1738년(영조 14)에 현재의 교하면 교하리인 지도 위의 長命山 동쪽으로 옮기는데, 본 지도의 읍치 위치를 통해 최초 원본이 1731년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교하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해동지도》에는 읍치 위쪽의 烽臺가 서쪽으로 풍덕의 덕적산 봉수와, 동쪽으로 고양의 고봉 봉수와 연결되고 있음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명칭이 교하군으로 되어 있는데, 1731년(영조 7)에 읍치에 장릉을 옮겨오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도면에는 장릉이 옮겨오기 전의 읍치가 그려져 있어 군으로 승격되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해동지도》의 지도는 1731년 이전에 그려지고, 주기는 그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명칭이 교하현으로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작성되지 않은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에도 교하현으로 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한 사실을 살펴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광여도》와 거의 동일한 《여지도》의 경우 교하군으로 되어 있어 사실을 확인한 다음 교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속에서도 읍치의 이동 사실은 교정하지 못하여 꼼꼼한 검토를 통해 필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위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고, 가운데가 곡릉천이며, 가장 아래쪽이 한강이다. 그러나 지도에는 세 하천의 규모를 전혀 알 수 없게 그려놓았는데,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원본부터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에서는 임진강을 곡릉천과 다르게 그려 일면 하천 규모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지만 한강을 곡릉천과 동일하게 그려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이기봉)

  • 금천현 (衿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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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현재의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다.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읍치는 동쪽의 三聖山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위치해 있었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위쪽에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본 지도의 衙(舍) 부분에 衿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금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금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며, 水踰峴을 동일하게 水踰山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어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본 지도와 달리 衙(舍)에 邑內라고 적혀 있어 본 자도 자체보다는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필사과정에서 도로를 생략하였으며, 《여지도》의 경우 한강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는 등의 새로운 오류도 범하고 있다. 한편 뒤의 2개 지도가 읍치의 산세 묘사에서 본 지도나 《해동지도》보다 훨씬 풍수적인 형국에 가까운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음도 눈에 띈다.(이기봉)

  • 금천현 주기 (衿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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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현재의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다.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읍치는 동쪽의 三聖山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위치해 있었다.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위쪽에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안양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금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해동지도》의 도면에는 이외에도 본 지도의 衙(舍) 부분에 衿川縣이란 문구가 적혀 있고, 본 지도에는 없는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의 도면이 금천현에서 직접 그려올린 것에 가까우며, 거리 정보가 기록된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본 지도는 전 고을을 일정한 체계에 의해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금천현이라는 문구 대신에 衙(舍)를 써넣은 것이고, 처음부터 거리 정보가 있는 주기를 함께 편집하였기 때문에 도면에는 거리 정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며, 水踰峴을 동일하게 水踰山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어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본 지도와 달리 衙(舍)에 邑內라고 적혀 있어 본 자도 자체보다는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필사과정에서 도로를 생략하였으며, 《여지도》의 경우 한강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는 등의 새로운 오류도 범하고 있다. 한편 뒤의 2개 지도가 읍치의 산세 묘사에서 본 지도나 《해동지도》보다 훨씬 풍수적인 형국에 가까운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음도 눈에 띈다.(이기봉)

  • 김포군 (金浦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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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군은 현재의 김포시 시내, 고촌면, 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김포시 북변동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도 가운데의 章陵에 있었는데,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아버지인 元宗과 인헌왕후의 능을 양주에서 옮겨오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古縣內面이라는 명칭은 읍치가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의 좌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쪽에는 강화도와 영종도 방향의 서해가 있고, 아래쪽은 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김포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에는 위쪽의 서해가 생략되어 있는데, 본 지도를 통해 볼 때 후에 주기를 삽입하기 위해 서해 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도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 비해서는 소략한 편이어서 필사자가 꼼꼼하게 검토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괄적으로 없앤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광여도》의 경우 章陵을 章島로 잘못 표기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꼼꼼하지 못한 측면이 잘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김포군 주기 (金浦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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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군은 현재의 김포시 시내, 고촌면, 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에 걸쳐 있었고, 읍치는 김포시 북변동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도 가운데의 章陵에 있었는데,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아버지인 元宗과 인헌왕후의 능을 양주에서 옮겨오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古縣內面이라는 명칭은 읍치가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의 좌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쪽에는 강화도와 영종도 방향의 서해가 있고, 아래쪽은 한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김포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에는 위쪽의 서해가 생략되어 있는데, 본 지도를 통해 볼 때 후에 주기를 삽입하기 위해 서해 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도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 비해서는 소략한 편이어서 필사자가 꼼꼼하게 검토하여 필사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생략되어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괄적으로 없앤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광여도》의 경우 章陵을 章島로 잘못 표기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꼼꼼하지 못한 측면이 잘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남양부 (南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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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부는 북쪽 문호동 일대를 제외한 화성시내, 삼화리 일대를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 등의 화성시와 안산시의 대부도 및 옹진군의 영흥도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성시 시내의 남양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分古面은 수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로서 화성시 향남면의 상신리·구문천리·하길리에 있었다. 지도 왼쪽에는 많은 섬이 표시되어 있는데, ‘本府地’라고 쓰여있는 것만 남양부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湖南의 조운선이 움직이는 海路란 뜻의 ‘湖南船路’를 비롯하여 충청도의 몇몇 고을의 船路가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충청도 서북부에서 중요한 수군기지인 安興鎭과 西近鎭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으며, 위쪽으로도 해로가 연결되는 인천, 안산, 永宗鎭, 강화 등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수록된 지명과 수로 및 육로의 측면에서 보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남양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로와 육로의 표시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당히 소략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산줄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보다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와 유사하다. 또한 왼쪽 아래의 호남선로나 기타 충청도의 군현 명칭이 적혀 있는 선로의 표시가 《해동지도》보다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수로와 육로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차이가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는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나 같은 계통의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남양부 주기 (南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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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부는 북쪽 문호동 일대를 제외한 화성시내, 삼화리 일대를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 등의 화성시와 안산시의 대부도 및 옹진군의 영흥도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성시 시내의 남양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分古面은 수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로서 화성시 향남면의 상신리·구문천리·하길리에 있었다. 지도 왼쪽에는 많은 섬이 표시되어 있는데, ‘本府地’라고 쓰여있는 것만 남양부에 속해 있었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湖南의 조운선이 움직이는 海路란 뜻의 ‘湖南船路’를 비롯하여 충청도의 몇몇 고을의 船路가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충청도 서북부에서 중요한 수군기지인 安興鎭과 西近鎭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으며, 위쪽으로도 해로가 연결되는 인천, 안산, 永宗鎭, 강화 등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수록된 지명과 수로 및 육로의 측면에서 보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남양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로와 육로의 표시가 《해동지도》에 비해 상당히 소략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산줄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보다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와 유사하다. 또한 왼쪽 아래의 호남선로나 기타 충청도의 군현 명칭이 적혀 있는 선로의 표시가 《해동지도》보다는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는 수로와 육로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차이가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남양부 지도는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나 같은 계통의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마전군 (麻田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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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전군은 경기도의 연천군 미산면, 왕징면과 군남면의 일부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연천군 미산면의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에서 흘러와 腐近津에서 임진강에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본 지도 위의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당시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衙(舍)에 麻田郡이라 적혀 있는데, 이는 《해동지도》가 본 지도책이나 뒤의 2개 지도책처럼 군현의 명칭이 지도의 이름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 등 《해동지도》와 내용적으로 거의 동일한 지도에도 읍치에 군현의 명칭이 적혀 있어 그런 형태가 최초 원본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밖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주기에는 총 5개의 面  이름이 적혀 있는데 반해 지도 위에는 2개만 적혀 있다. 이는 지도의 제작과 주기의 내용 삽입이 다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지도에는 없지만 주기에는 기록된 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도 2개의 면만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필사 과정에서도 주기의 내용과 지도의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의 한탄강 모습이 《광여도》에서는 임진강 이외의 아주 작은 하천과 거의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임의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음도 이해할 수 있다.(이기봉)

  • 마전군 주기 (麻田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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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전군은 경기도의 연천군 미산면, 왕징면과 군남면의 일부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연천군 미산면의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에서 흘러와 腐近津에서 임진강에 합류되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마전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본 지도 위의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당시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衙(舍)에 麻田郡이라 적혀 있는데, 이는 《해동지도》가 본 지도책이나 뒤의 2개 지도책처럼 군현의 명칭이 지도의 이름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 등 《해동지도》와 내용적으로 거의 동일한 지도에도 읍치에 군현의 명칭이 적혀 있어 그런 형태가 최초 원본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밖에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주기에는 총 5개의 面  이름이 적혀 있는데 반해 지도 위에는 2개만 적혀 있다. 이는 지도의 제작과 주기의 내용 삽입이 다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지도에는 없지만 주기에는 기록된 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도 2개의 면만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필사 과정에서도 주기의 내용과 지도의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의 한탄강 모습이 《광여도》에서는 임진강 이외의 아주 작은 하천과 거의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하천의 정보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임의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음도 이해할 수 있다.(이기봉)

  • 부평부 (富平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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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부는 현재 인천광역시의 부평구, 계양구, 검단동 일대를 제외한 서구, 경기도의 부천시, 서울특별시의 구로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계양산 남쪽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왼쪽 위의 바다는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에 있으며 상당 부분이 매립되어 육지로 변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부평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달라진 측면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으며, 왼쪽 위의 바다와 섬이 《해동지도》에는 없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산줄기 대부분이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진 점은 《해동지도》와 동일한 반면 뒤의 2개 지도는 모두 남쪽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다. 본 지도는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거의 동일한 반면 《해동지도》와는 상당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도 일부 다르게 필사한 것이 나타나고 있으며, 주기의 경우 시기적 변화 양상을 반영하기 위해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나 그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정보를 삭제하고, 동쪽의 한강이나 일부의 지명에서 약간의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부평부 주기 (富平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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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부는 현재 인천광역시의 부평구, 계양구, 검단동 일대를 제외한 서구, 경기도의 부천시, 서울특별시의 구로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계양산 남쪽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며, 왼쪽 위의 바다는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에 있으며 상당 부분이 매립되어 육지로 변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부평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달라진 측면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으며, 왼쪽 위의 바다와 섬이 《해동지도》에는 없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산줄기 대부분이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진 점은 《해동지도》와 동일한 반면 뒤의 2개 지도는 모두 남쪽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다. 본 지도는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거의 동일한 반면 《해동지도》와는 상당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도 일부 다르게 필사한 것이 나타나고 있으며, 주기의 경우 시기적 변화 양상을 반영하기 위해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나 그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정보를 삭제하고, 동쪽의 한강이나 일부의 지명에서 약간의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삭녕군 (朔寧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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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령군은 일제시대 경기도의 연천군 삭령면, 서남면, 중면, 왕징면의 북쪽 일부, 강원도의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걸쳐 있었다. 현재는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에 속해 있으며, 읍치는 삭녕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 위의 小水源에서 흘러와 北川合流라 적혀 있는 지점에서 임진강 본류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역곡천이다. 본 지도에는 임진강 본류와 역곡천이 읍치 북쪽에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삭녕현 지도,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녕군 지도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도 앞의 3개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필사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필사 시기의 순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첫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고,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고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셋째, 기호의 사용이 본 지도보다 뒤의 2개 지도가 더 세밀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르고, 그 다음이 본 지도, 마지막이 《여지도》와 《광여도》인 것으로 판단된다. 기타 오른쪽에 기록되어 있는 古邑居는 1413년(태종 13)에 합쳐진 승령현의 읍치이며, 山城基가 있다는 기록은 고려초기까지 산성에 중심지가 있다는 기존의 연구와 합치되는 부분이다. 1441년(세종 23)까지 있었던 삭녕현의 읍치는 읍치 오른쪽의 城山 부근에 있었다.(이기봉)

  • 삭녕군 주기 (朔寧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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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령군은 일제시대 경기도의 연천군 삭령면, 서남면, 중면, 왕징면의 북쪽 일부, 강원도의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걸쳐 있었다. 현재는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에 속해 있으며, 읍치는 삭녕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 위에서 흘러와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오른쪽 위의 小水源에서 흘러와 北川合流라 적혀 있는 지점에서 임진강 본류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역곡천이다. 본 지도에는 임진강 본류와 역곡천이 읍치 북쪽에서 연결된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삭녕현 지도,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삭녕군 지도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도 앞의 3개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필사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필사 시기의 순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첫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고,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고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셋째, 기호의 사용이 본 지도보다 뒤의 2개 지도가 더 세밀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르고, 그 다음이 본 지도, 마지막이 《여지도》와 《광여도》인 것으로 판단된다. 기타 오른쪽에 기록되어 있는 古邑居는 1413년(태종 13)에 합쳐진 승령현의 읍치이며, 山城基가 있다는 기록은 고려초기까지 산성에 중심지가 있다는 기존의 연구와 합치되는 부분이다. 1441년(세종 23)까지 있었던 삭녕현의 읍치는 읍치 오른쪽의 城山 부근에 있었다.(이기봉)

  • 송도 (松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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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는 조선시대의 개성을 의미하며, 정2품 또는 종2품의 留守가 파견된 고을이었다. 留守는 종2품의 관찰사보다 높거나 같을 정도로 높은 관직이며, 지방관인 外職이 아니라 중앙관직으로 쳤다. 유수가 파견된 고을은 비록 서울은 아니지만 서울에 준하는 지위를 가졌으며, 개성이 松都라는 별칭으로 많이 불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유수가 파견된 곳은 고려시대의 수도였던 개성 이외에도 강화(江都), 광주, 수원 등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 등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개성부와 《여지도》(古4790-58)의 송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일부 지명이나 표현 방법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만월대 아래쪽의 上衙와 貳衙가 앞의 두 지도에는 단지 衙라고만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실제 상황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부 잘못 표기된 지명도 보이고 있는데, 왼쪽의 永安界는 永安城의 오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인데, 지도에도 禮成江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오는 하천이 임진강이며, 오른쪽 아래에서 흘러오는 漢江과 합류되어 서해로 빠져나간다. 하천 위에는 祖江, 洛河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하천의 구간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조강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가는 구간에서 부르던 한강의 별칭이었다. 한강 하류에는 江華와 喬桐이 실제보다 아주 작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의 목적인 개성 이외의 다른 군현은 대략적인 위치만 표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개성과 조강 사이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개성과 조강 사이에는 원래 풍덕부가 끼어 있어 서로 접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성이 조강과 서로 접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은 개성 남쪽으로 조강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가장 강조되어 있는 것은 개성의 성곽 안과 북쪽의 대흥산성인데, 이 두 곳의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확대해서 그리는 것은 다른 고을의 그림지도에서도 잘 나타나는 현상이며, 대흥산성이 강조되어 그려진 것은 임진․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 때문이다. 지도에 南大門과 함께 표시된 개성의 성곽은 1393년(태조 2)에 축소하여 만든 것이고, 강감찬의 건의에 의해 1010년(현종 1)부터 21년 동안 만든 羅城은 그 아래쪽 산줄기에 건설되어 있었다. 개성 성곽 안에는 고려의 정궁이 있었던 滿月臺가 폐허화된 채 축대만 남아 있는 모습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송도 주기 (松都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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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는 조선시대의 개성을 의미하며, 정2품 또는 종2품의 留守가 파견된 고을이었다. 留守는 종2품의 관찰사보다 높거나 같을 정도로 높은 관직이며, 지방관인 外職이 아니라 중앙관직으로 쳤다. 유수가 파견된 고을은 비록 서울은 아니지만 서울에 준하는 지위를 가졌으며, 개성이 松都라는 별칭으로 많이 불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유수가 파견된 곳은 고려시대의 수도였던 개성 이외에도 강화(江都), 광주, 수원 등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내용 등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개성부와 《여지도》(古4790-58)의 송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일부 지명이나 표현 방법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만월대 아래쪽의 上衙와 貳衙가 앞의 두 지도에는 단지 衙라고만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실제 상황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부 잘못 표기된 지명도 보이고 있는데, 왼쪽의 永安界는 永安城의 오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이 현재의 예성강인데, 지도에도 禮成江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오는 하천이 임진강이며, 오른쪽 아래에서 흘러오는 漢江과 합류되어 서해로 빠져나간다. 하천 위에는 祖江, 洛河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하천의 구간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조강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가는 구간에서 부르던 한강의 별칭이었다. 한강 하류에는 江華와 喬桐이 실제보다 아주 작게 그려져 있는데, 본 지도의 목적인 개성 이외의 다른 군현은 대략적인 위치만 표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개성과 조강 사이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개성과 조강 사이에는 원래 풍덕부가 끼어 있어 서로 접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성이 조강과 서로 접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은 개성 남쪽으로 조강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가장 강조되어 있는 것은 개성의 성곽 안과 북쪽의 대흥산성인데, 이 두 곳의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확대해서 그리는 것은 다른 고을의 그림지도에서도 잘 나타나는 현상이며, 대흥산성이 강조되어 그려진 것은 임진․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채택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 때문이다. 지도에 南大門과 함께 표시된 개성의 성곽은 1393년(태조 2)에 축소하여 만든 것이고, 강감찬의 건의에 의해 1010년(현종 1)부터 21년 동안 만든 羅城은 그 아래쪽 산줄기에 건설되어 있었다. 개성 성곽 안에는 고려의 정궁이 있었던 滿月臺가 폐허화된 채 축대만 남아 있는 모습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수원부 (水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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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부는 현재의 수원시와 오산시 및 매송면 남쪽의 화성시, 황구지천 서쪽의 평택시 등에 걸쳐 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邑內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면서 현재의 수원시내로 이동하기 이전의 읍치로서 현재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이 현재의 아산만으로 조선시대에 수원부의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부의 지도임에도 곳곳에 陽城倉, 陽城界, 稷山倉, 稷山界 등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아산만 부근에 여러 고을의 越境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원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바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비록 《해동지도》보다는 못하지만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도로가 전혀 기록되지 않은 뒤의 2개 지도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지명 등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의 아래쪽 가운데에 기록된 議倉이 《해동지도》에는 設倉이라 적혀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본 지도의 주기에는 設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지도에는 議倉으로, 주기에는 設倉으로 기록되어 있어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읍내 안쪽에 표시되어 있는 하천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읍내 위쪽의 後坪橋 부근의 하천 표시도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다르게 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게 되어 있다. 위쪽에 표시된 거리에 관한 내용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주기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와 같은 차이점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는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일부 다르게 필사하였으며, 특히 주기의 경우 시기적인 변화 양상을 담아내기 위해 전혀 다르게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와 동일한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方下池가 뒤의 2개 지도에는 方下地로 오기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 지명이 달라지고 있기도 하다.(이기봉)

  • 수원부 주기 (水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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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부는 현재의 수원시와 오산시 및 매송면 남쪽의 화성시, 황구지천 서쪽의 평택시 등에 걸쳐 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邑內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면서 현재의 수원시내로 이동하기 이전의 읍치로서 현재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이 현재의 아산만으로 조선시대에 수원부의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부의 지도임에도 곳곳에 陽城倉, 陽城界, 稷山倉, 稷山界 등의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아산만 부근에 여러 고을의 越境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수원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바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비록 《해동지도》보다는 못하지만 도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도로가 전혀 기록되지 않은 뒤의 2개 지도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하천의 유로와 수록된 지명 등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의 아래쪽 가운데에 기록된 議倉이 《해동지도》에는 設倉이라 적혀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본 지도의 주기에는 設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처럼 지도에는 議倉으로, 주기에는 設倉으로 기록되어 있어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읍내 안쪽에 표시되어 있는 하천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읍내 위쪽의 後坪橋 부근의 하천 표시도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다르게 되어 있고,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게 되어 있다. 위쪽에 표시된 거리에 관한 내용이 《해동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있다. 주기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와 같은 차이점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해동지도》는 같은 계통의 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일부 다르게 필사하였으며, 특히 주기의 경우 시기적인 변화 양상을 담아내기 위해 전혀 다르게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뒤의 2개 지도는 기본적으로 본 지도와 동일한 계통을 원본으로 하여 필사하면서 도로 등의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方下池가 뒤의 2개 지도에는 方下地로 오기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일부 지명이 달라지고 있기도 하다.(이기봉)

  • 안산군 (安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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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군은 경기도 시흥시의 하중동․하상동 남쪽 부분, 안산시의 시청 서쪽과 북쪽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의 수리산 서남쪽에 있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뻗은 修理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측면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있는 도로와 왼쪽의 梧里峴 및 正徃山烽臺 등은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나오고 있어 서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面과 소속된 洞里의 명칭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새로운 자료를 보충하여 수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面의 명칭은 수록되어 있지만 洞里의 명칭은 생략되어 있고, 면 중에서 郡內面이 빠져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하면서 일부 지명과 기타 정보를 생략하여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왼쪽 아래의 烏耳島에 본 지도에는 없는 十八戶에 대한 기록이 뒤의 2개 지도에 나오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아래의 3개 섬에 《여지도》가 《광여도》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어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이기봉)

  • 안산군 주기 (安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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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군은 경기도 시흥시의 하중동․하상동 남쪽 부분, 안산시의 시청 서쪽과 북쪽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의 수리산 서남쪽에 있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뻗은 修理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측면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본 지도에 있는 도로와 왼쪽의 梧里峴 및 正徃山烽臺 등은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나오고 있어 서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는 없는 面과 소속된 洞里의 명칭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나 그 원본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새로운 자료를 보충하여 수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서는 面의 명칭은 수록되어 있지만 洞里의 명칭은 생략되어 있고, 면 중에서 郡內面이 빠져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나 그 원본을 필사하면서 일부 지명과 기타 정보를 생략하여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왼쪽 아래의 烏耳島에 본 지도에는 없는 十八戶에 대한 기록이 뒤의 2개 지도에 나오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다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아래의 3개 섬에 《여지도》가 《광여도》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어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이기봉)

  • 안성군 (安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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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군은 현재의 안성시 시내, 보개면, 금광면, 미양면, 대덕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구포동과 명륜동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안성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성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내용이 극히 소략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있으며, 읍치 남쪽의 산줄기 표현이 뒤의 2개 지도와 달리 《해동지도》처럼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리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되어 있고,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가 본 지도에 없는 점 등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계통을 따르면서 필요에 따라 교정을 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는 주기에 기록하면서 지도에서는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金剛山을 金剛寺로, 木川界를 水川界로 적는 등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어 정교하게 필사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주기의 내용이 같아 필사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산줄기의 표현 방식이 달라지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의 내용을 변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瑞雲山 등 일부 지명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는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안성군 주기 (安城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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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군은 현재의 안성시 시내, 보개면, 금광면, 미양면, 대덕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구포동과 명륜동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안성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안성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내용이 극히 소략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의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있으며, 읍치 남쪽의 산줄기 표현이 뒤의 2개 지도와 달리 《해동지도》처럼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리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되어 있고,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가 본 지도에 없는 점 등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계통을 따르면서 필요에 따라 교정을 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각 경계까지의 거리 정보는 주기에 기록하면서 지도에서는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金剛山을 金剛寺로, 木川界를 水川界로 적는 등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어 정교하게 필사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주기의 내용이 같아 필사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의 2개 지도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산줄기의 표현 방식이 달라지고 있어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의 내용을 변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瑞雲山 등 일부 지명이 본 지도와 달라지고 있는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아니라 본 지도와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양근군 (楊根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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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군은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는데, 1747년(영조 23)에 현재의 양평읍 양근리인 지도 오른쪽의 葛山(칡미)으로 옮긴다. 왼쪽 위의 春川江이 현재의 북한강이며, 오른쪽의 驪江이 현재의 남한강으로 두 하천은 왼쪽 아래의 蛇島(현재의 두물머리인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근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아래쪽에 풍수적인 산줄기 모양을 하면서도 다른 곳과 달리 墓의 속자가 기록되지 않은 2개를 들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모두 墓의 명칭이 기록된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기본적으로 《해동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2개를 빠뜨렸고, 이렇게 빠뜨린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계속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客舍가 있는 읍치 부근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大院古寺垈란 글씨와 탑의 모양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나 그 계통이 뒤의 2개 지도보다는 《해동지도》 계통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읍치 왼쪽의 蹇止山 부근의 산줄기인데, 《해동지도》와 본 지도 및 《여지도》에는 산줄기가 표시되어 있지만 《광여도》에는 없다. 본 지도에는 경기도의 다른 고을과 달리 面이 왼쪽에 西從面과 西串面 2개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수정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주기에 面의 명칭과 거리만이 적혀 있음에 반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초경과 종경이 적혀 있어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주기에는 보충할 수 있었지만 지도 위에 위치를 기록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는 보충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양근군 주기 (楊根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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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군은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는데, 1747년(영조 23)에 현재의 양평읍 양근리인 지도 오른쪽의 葛山(칡미)으로 옮긴다. 왼쪽 위의 春川江이 현재의 북한강이며, 오른쪽의 驪江이 현재의 남한강으로 두 하천은 왼쪽 아래의 蛇島(현재의 두물머리인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근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아래쪽에 풍수적인 산줄기 모양을 하면서도 다른 곳과 달리 墓의 속자가 기록되지 않은 2개를 들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모두 墓의 명칭이 기록된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기본적으로 《해동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2개를 빠뜨렸고, 이렇게 빠뜨린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계속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客舍가 있는 읍치 부근에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와 마찬가지로 大院古寺垈란 글씨와 탑의 모양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나 그 계통이 뒤의 2개 지도보다는 《해동지도》 계통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읍치 왼쪽의 蹇止山 부근의 산줄기인데, 《해동지도》와 본 지도 및 《여지도》에는 산줄기가 표시되어 있지만 《광여도》에는 없다. 본 지도에는 경기도의 다른 고을과 달리 面이 왼쪽에 西從面과 西串面 2개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수정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주기에 面의 명칭과 거리만이 적혀 있음에 반해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초경과 종경이 적혀 있어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주기에는 보충할 수 있었지만 지도 위에 위치를 기록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는 보충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양성현 (陽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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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현은 안성군의 양성면, 원곡면, 공도면을 중심으로 있었으며, 읍치는 양성면의 동항리에 있었다. 그러나 양성현에는 월경지가 많았는데, 진위와 수원의 땅을 넘어 현재의 평택시 청북면의 율북리, 고잔리, 삼계리, 포승면의 내기리, 운정리, 방림리 등에 있었다.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 있는 北面과 外良洞面 및 甘味洞面이 바로 이러한 월경지에 해당된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의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아래쪽에 西海가 크게 그려져 있고, 오른쪽의 하천과 왼쪽 아래의 하천이 바다로 흘러나가듯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의 안성천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은 진위천의 일부인데, 양성현의 월경지가 진위천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해동지도》처럼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은 《해동지도》의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그려진 西海가 사라지고, 진위천과 안성천 본류가 양성현의 땅에서 직접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이러한 오류는 근본적으로 왼쪽 아래의 북면 일대가 월경지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더 나아가 《광여도》와 《여지도》도 본 지도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이기봉)

  • 양성현 주기 (陽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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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현은 안성군의 양성면, 원곡면, 공도면을 중심으로 있었으며, 읍치는 양성면의 동항리에 있었다. 그러나 양성현에는 월경지가 많았는데, 진위와 수원의 땅을 넘어 현재의 평택시 청북면의 율북리, 고잔리, 삼계리, 포승면의 내기리, 운정리, 방림리 등에 있었다.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 있는 北面과 外良洞面 및 甘味洞面이 바로 이러한 월경지에 해당된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의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아래쪽에 西海가 크게 그려져 있고, 오른쪽의 하천과 왼쪽 아래의 하천이 바다로 흘러나가듯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의 안성천 본류이고, 왼쪽의 하천은 진위천의 일부인데, 양성현의 월경지가 진위천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해동지도》처럼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은 《해동지도》의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그려진 西海가 사라지고, 진위천과 안성천 본류가 양성현의 땅에서 직접 연결된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이러한 오류는 근본적으로 왼쪽 아래의 북면 일대가 월경지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더 나아가 《광여도》와 《여지도》도 본 지도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이기봉)

  • 양주목 (楊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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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목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의 전곡읍․청산면, 한강 북쪽의 서울특별시 동쪽 지역 등에 걸쳐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의 가운데에 그려진 읍치는 양주시 유양동에 있었으며, 현재 관아지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 및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고 面의 명칭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뒤의 2개 지도보다 《해동지도》에 가까운 특징이다. 그러나 도로의 내용이 《해동지도》보다 소략하고, 《해동지도》에는 華陽亭으로 적혀 있던 것이 지도 아래쪽에 華陽場으로 바뀌어 있으며, 《해동지도》에는 없는 內農浦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는 없지만 화양장과 農浦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어 본 지도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며,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동일하다. 지도의 위쪽에 표시된 大灘은 현재 한탄강으로 불리는 곳으로 순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본 지도의 大灘 표시는 《해동지도》와 동일하며, 동쪽의 영평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大灘은 본 지도와 달리 영평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양주목 주기 (楊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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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목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의 전곡읍․청산면, 한강 북쪽의 서울특별시 동쪽 지역 등에 걸쳐있는 큰 고을이었다. 지도의 가운데에 그려진 읍치는 양주시 유양동에 있었으며, 현재 관아지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 및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고 面의 명칭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뒤의 2개 지도보다 《해동지도》에 가까운 특징이다. 그러나 도로의 내용이 《해동지도》보다 소략하고, 《해동지도》에는 華陽亭으로 적혀 있던 것이 지도 아래쪽에 華陽場으로 바뀌어 있으며, 《해동지도》에는 없는 內農浦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도로는 없지만 화양장과 農浦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어 본 지도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며, 《광여도》와 《여지도》의 것과는 동일하다. 지도의 위쪽에 표시된 大灘은 현재 한탄강으로 불리는 곳으로 순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본 지도의 大灘 표시는 《해동지도》와 동일하며, 동쪽의 영평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大灘은 본 지도와 달리 영평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양지현 (陽智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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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현은 1399년(정종 1)에 수원에 딸려 있던 陽良部曲을 승격시켜 縣으로 만들었고, 당시의 중심지는 왼쪽 아래에 古倉이라 표시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1413년(태종 13)에 광주의 秋溪鄕으로 읍치를 옮기면서 朴谷, 高安, 蹄村, 木岳 등 광주에 속했던 4개의 部曲을 함께 붙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양지현은 越境地와 犬牙相入地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고을이 되었고, 읍치는 양지면 양지리에 있었다. 양지현의 범위는 용인시 시내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전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군의 고삼면과 일죽면의 능국리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의 가운데쪽에 竹山과 龍仁 등의 군현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월경지와 견아상입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도에도 하천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데, 왼쪽 위가 경안천의 상류이고, 오른쪽은 복하천이 상류이다. 또한 오른쪽 아래는 청미천의 상류이고, 왼쪽 아래는 진위천의 상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지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에 대한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의 왼쪽 가운데 海谷里 부근에서 朱西面 뱡향으로 흘러드는 하천의 모습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이곳은 현재의 용인시 운학동과 해곡동 일대로서 실제와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해동지도》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양지현 주기 (陽智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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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현은 1399년(정종 1)에 수원에 딸려 있던 陽良部曲을 승격시켜 縣으로 만들었고, 당시의 중심지는 왼쪽 아래에 古倉이라 표시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1413년(태종 13)에 광주의 秋溪鄕으로 읍치를 옮기면서 朴谷, 高安, 蹄村, 木岳 등 광주에 속했던 4개의 部曲을 함께 붙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양지현은 越境地와 犬牙相入地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고을이 되었고, 읍치는 양지면 양지리에 있었다. 양지현의 범위는 용인시 시내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전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군의 고삼면과 일죽면의 능국리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의 가운데쪽에 竹山과 龍仁 등의 군현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월경지와 견아상입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도에도 하천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데, 왼쪽 위가 경안천의 상류이고, 오른쪽은 복하천이 상류이다. 또한 오른쪽 아래는 청미천의 상류이고, 왼쪽 아래는 진위천의 상류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지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천에 대한 표시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의 왼쪽 가운데 海谷里 부근에서 朱西面 뱡향으로 흘러드는 하천의 모습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본 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이곳은 현재의 용인시 운학동과 해곡동 일대로서 실제와 비교해 보면 《해동지도》보다는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가 사실에 가깝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해동지도》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양천현 (陽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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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현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강서구 가양동의 궁산 남쪽에 있었다.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다. 읍치 뒤쪽의 城山에는 테뫼식의 작은 산성이 있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성황사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일부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주기에는 있지만 도면에는 없는 南山面이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거의 한가운데에 기록되어 있다. 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에는 고립적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상대적으로 연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우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필사 과정에서 일부 정보를 빠뜨리거나 변화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주기의 내용이 본 지도와 동일하며, 앞서 언급한 남산면이 본 지도와 마찬가지로 생략되어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도로를 생략하였고, 산이 본 지도보다도 더 연결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자체는 아니더라도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지도를 필사하면서 몇몇 정보를 더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지도 모두 가운데의 陵洞山이 명칭만 남고 산의 모습이 사라져 있으며, 특히 《여지도》의 경우는 오른쪽 아래의 嚴之山이 岩之山으로, 아래쪽의 馬山이 馬上으로 잘못 적혀 있어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양천현 주기 (陽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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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현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강서구 가양동의 궁산 남쪽에 있었다.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한강이다. 읍치 뒤쪽의 城山에는 테뫼식의 작은 산성이 있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성황사가 복원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양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일부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또한 본 지도의 주기에는 있지만 도면에는 없는 南山面이 《해동지도》에는 지도의 거의 한가운데에 기록되어 있다. 산의 표현 방식은 《해동지도》에는 고립적으로 그린 반면 본 지도는 상대적으로 연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우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필사 과정에서 일부 정보를 빠뜨리거나 변화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광여도》와 《여지도》는 주기의 내용이 본 지도와 동일하며, 앞서 언급한 남산면이 본 지도와 마찬가지로 생략되어 있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도로를 생략하였고, 산이 본 지도보다도 더 연결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자체는 아니더라도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지도를 필사하면서 몇몇 정보를 더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지도 모두 가운데의 陵洞山이 명칭만 남고 산의 모습이 사라져 있으며, 특히 《여지도》의 경우는 오른쪽 아래의 嚴之山이 岩之山으로, 아래쪽의 馬山이 馬上으로 잘못 적혀 있어 필사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여주목 (呂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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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본 자료에서 驪자를 呂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呂州牧은 驪州牧으로 써야한다. 지도는 읍치의 방향을 기준으로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하천의 유로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구도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여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고,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차이점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부분들은 본 지도책 경기도 대부분의 군현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본 지도에서 특이한 것은 다른 3개 지도에는 없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이 빼곡히 적혀 있다는 점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지도에는 면의 명칭도 적혀 있지 않고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도 없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은 없지만 면의 명칭은 사각형의 기호를 사용하여 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을 따르면서 마을명과 제언 명칭을 새로 기입하고, 도로를 소략하게 처리하면서 주기를 당시의 상황에 맞게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 계통에서 마을명을 없애고 면의 명칭만 기입한 지도 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이 계통의 지도 중 현재 남아 있지 않은 또다른 원본이 있고, 필사본 계통도 다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지도에는 一景부터 八景까지의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어, 당시에 이 지역의 八景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뿌리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가운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이며, 읍치의 주요 건물은 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여주군청 근처에 있었다.(이기봉)

  • 여주목 주기 (呂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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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본 자료에서 驪자를 呂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呂州牧은 驪州牧으로 써야한다. 지도는 읍치의 방향을 기준으로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하천의 유로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구도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여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수록된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고, 본 지도에는 도로가 있지만 《해동지도》보다는 소략한 차이점이 있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부분들은 본 지도책 경기도 대부분의 군현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본 지도에서 특이한 것은 다른 3개 지도에는 없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이 빼곡히 적혀 있다는 점이다. 《해동지도》의 경우 지도에는 면의 명칭도 적혀 있지 않고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도 없는 반면에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마을명과 제언의 명칭은 없지만 면의 명칭은 사각형의 기호를 사용하여 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그 원본 계통을 따르면서 마을명과 제언 명칭을 새로 기입하고, 도로를 소략하게 처리하면서 주기를 당시의 상황에 맞게 새로 작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 계통에서 마을명을 없애고 면의 명칭만 기입한 지도 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이 계통의 지도 중 현재 남아 있지 않은 또다른 원본이 있고, 필사본 계통도 다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지도에는 一景부터 八景까지의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어, 당시에 이 지역의 八景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뿌리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가운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남한강이며, 읍치의 주요 건물은 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여주군청 근처에 있었다.(이기봉)

  • 연천현 (漣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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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현은 현재의 연천군 연천읍과 중면, 황지리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천읍 읍내리에 있었다. 가장 왼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가장 오른쪽이 한탄강이며, 가운데의 하천이 차탄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고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곳곳에 大路, 中路, 小路 등 도로가 있었던 지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대로, 중로, 소로 등의 문자들은 거의 삭제되어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을 필사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본 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오른쪽에는 현재의 재인폭포가 紫烟瀑으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폭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는 재인폭포를 실제로 보고 그린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자의적으로 재인폭포의 모습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연천현 주기 (漣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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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현은 현재의 연천군 연천읍과 중면, 황지리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연천읍 읍내리에 있었다. 가장 왼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 본류이고, 가장 오른쪽이 한탄강이며, 가운데의 하천이 차탄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연천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 위의 도로가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가 그 다음이고,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고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곳곳에 大路, 中路, 小路 등 도로가 있었던 지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반면에 본 지도에는 도로는 그려져 있지만 《해동지도》에 기록되어 있던 대로, 중로, 소로 등의 문자들은 거의 삭제되어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을 필사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본 지도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지도를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의 오른쪽에는 현재의 재인폭포가 紫烟瀑으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폭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동지도》는 재인폭포를 실제로 보고 그린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자가 자의적으로 재인폭포의 모습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영종 (永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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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종진은 원래 현재의 화성시 서신면에 있던 정4품 萬戶鎭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수도 한양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1653년(효종 4)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영종도로 옮겼고, 1681년(숙종 7)에는 종3품의 僉使鎭으로 승격되었다. 1690년(숙종 16)에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 그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에 종2품의 防禦使로 승격되었다. 영종진의 지도가 특별히 제작되어 군현지도와 함께 수록된 것은 이와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의 가운데에는 원래의 영종도 명칭과 관련되어 있는 古紫燕縣基가 표시되어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지리지에서는 자연현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본 지도는 전체적인 구도와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종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약간 더 상세한 도로 표시가 들어가 있다. 또한 본 지도에 수록된 주기의 내용이 《광여도》와 《여지도》의  주기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의 주기와는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 등의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꾸었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나 그 필사본을 다시 필사하면서 주기는 그대로 따르고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종진의 객사와 아사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중산동 구읍 마을에 있었는데, 현재는 본 지도와 달리 완전히 영종도와 연결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영종도와 그 주변의 섬이 밀물(潮退) 때 육지로 연결되고 있음(成陸)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영종진에 소속된 섬 주변 이외에는 마치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둔 육지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넓은 바다이다. 그림 지도의 경우 서로 연결되는 지역은 비록 멀리 있더라도 해당 방향의 가까에 그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지도에는 禁山이 3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戰船에 소용되는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하던 지역이었다.(이기봉)

  • 영종 주기 (永宗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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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종진은 원래 현재의 화성시 서신면에 있던 정4품 萬戶鎭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수도 한양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1653년(효종 4)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영종도로 옮겼고, 1681년(숙종 7)에는 종3품의 僉使鎭으로 승격되었다. 1690년(숙종 16)에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 그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에 종2품의 防禦使로 승격되었다. 영종진의 지도가 특별히 제작되어 군현지도와 함께 수록된 것은 이와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의 가운데에는 원래의 영종도 명칭과 관련되어 있는 古紫燕縣基가 표시되어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지리지에서는 자연현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본 지도는 전체적인 구도와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영종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여도》와 《여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에 있는 도로 표시가 없는 반면에 《해동지도》의 지도에는 본 지도보다 약간 더 상세한 도로 표시가 들어가 있다. 또한 본 지도에 수록된 주기의 내용이 《광여도》와 《여지도》의  주기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의 주기와는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 등의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게 주기 내용을 바꾸었고, 《광여도》와 《여지도》는 본 지도나 그 필사본을 다시 필사하면서 주기는 그대로 따르고 도로 등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종진의 객사와 아사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중산동 구읍 마을에 있었는데, 현재는 본 지도와 달리 완전히 영종도와 연결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영종도와 그 주변의 섬이 밀물(潮退) 때 육지로 연결되고 있음(成陸)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영종진에 소속된 섬 주변 이외에는 마치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둔 육지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넓은 바다이다. 그림 지도의 경우 서로 연결되는 지역은 비록 멀리 있더라도 해당 방향의 가까에 그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지도에는 禁山이 3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戰船에 소용되는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하던 지역이었다.(이기봉)

  • 영평현 (永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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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평현은 포천시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중면 영평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 본류이고, 읍치를 지나 한탄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영평천이다. 지도에는 각각 麻屹川과 南大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하천 명칭이 통일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부르던 하천 명칭이었다. 두 하천의 합류 지점에는 漢灘이란 명칭이 적혀 있는데, 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漢灘의 漢은 ‘크다’는 뜻의 ‘한’에 대한 소리를 딴 것이고, 灘은 여울의 뜻을 딴 것이다. 오른쪽에 애매모호하게 표시된 하천은 북한강으로 흘러가는 가평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가평천 최상류의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 영평현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표시된 것이지만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현되어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러한 애매한 표현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영평현 지도에는 더욱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어 지도의 필사자들이 실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 오른쪽의 古城은 현재의 영중면 성동리에 있는 성동리산성으로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던 곳이었다.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산성이나 그 부근에서 지도 위에 표시된 곳으로 읍치가 이동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본 지도의 주기에는 읍내면, 이동면, 서면, 일동면, 남면, 북면 등 6개 面의 명칭이 적혀 있지만 지도에는 북면 2개와 남면 및 서면만이 마을 이름과 함께 적혀 있다. 본 지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평현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面 자체보다는 영평현에서 유명한 마을을 표시하기 위해 취해진 방식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서 도로 등 일부의 정보만을 생략한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평현 지도(智島)에서는 서면과 남면에 마을 이름을 생략하고 있는데, 필사자가 면의 명칭을 적어넣은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읍치 오른쪽의 미로곡봉이 미로곡역으로 잘못 필사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영평현 주기 (永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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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평현은 포천시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영중면 영평리 일대에 있었다. 위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 본류이고, 읍치를 지나 한탄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영평천이다. 지도에는 각각 麻屹川과 南大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하천 명칭이 통일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부르던 하천 명칭이었다. 두 하천의 합류 지점에는 漢灘이란 명칭이 적혀 있는데, 우리말로는 ‘한여울’이라고 한다. 漢灘의 漢은 ‘크다’는 뜻의 ‘한’에 대한 소리를 딴 것이고, 灘은 여울의 뜻을 딴 것이다. 오른쪽에 애매모호하게 표시된 하천은 북한강으로 흘러가는 가평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가평천 최상류의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 영평현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표시된 것이지만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현되어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러한 애매한 표현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영평현 지도에는 더욱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어 지도의 필사자들이 실제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 오른쪽의 古城은 현재의 영중면 성동리에 있는 성동리산성으로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던 곳이었다.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산성이나 그 부근에서 지도 위에 표시된 곳으로 읍치가 이동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본 지도의 주기에는 읍내면, 이동면, 서면, 일동면, 남면, 북면 등 6개 面의 명칭이 적혀 있지만 지도에는 북면 2개와 남면 및 서면만이 마을 이름과 함께 적혀 있다. 본 지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해동지도》의 영평현 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面 자체보다는 영평현에서 유명한 마을을 표시하기 위해 취해진 방식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서 도로 등 일부의 정보만을 생략한 《광여도》와 《여지도》(古4790-58)의 영평현 지도(智島)에서는 서면과 남면에 마을 이름을 생략하고 있는데, 필사자가 면의 명칭을 적어넣은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읍치 오른쪽의 미로곡봉이 미로곡역으로 잘못 필사되어 있기도 하다.(이기봉)

  • 용인현 (龍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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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현은 양지면, 원삼면, 백암면을 제외한 용인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용인시 구성읍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縣內面이란 명칭이 보이고 있는데, 용구현과 합쳐져 용인현이 된 처인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처인현은 원래 처인부곡이었다가 몽골의 침입 때 적장 살례탑을 전사시킨 공이 있어 현으로 바뀌었으며, 그 중심지였던 처인성은 현재의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남아 있다. 용인현은 처인현 지역이었던 남쪽의 오산천(왼쪽)과 진위천(오른쪽) 유역, 용구현 지역이었던 북쪽의 탄천(왼쪽)과 경안천(오른쪽) 유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용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본 지도책의 경기도 다른 고을 지도에 비해 面의 정보가 자세하고, 조선후기의 민간 숙박업소인 酒幕도 나오며, 읍치에 배치된 제사 장소인 성황단, 사직단, 여단, 문묘(향교) 등도 모두 표시되어 있어 고을 사이의 편차를 쉽게 알 수 있는 지도이다. 이러한 정보는 본 지도보다 앞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으며, 뒤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정보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본적인 정보는 거의 바꾸지 않아 지도가 필사 연대의 상황을 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본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가 소략하게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지도의 주기 내용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의 주기 내용과 동일한 주기가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면과 역 등에 정밀한 기호가 사용되고 있는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용인현 주기 (龍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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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현은 양지면, 원삼면, 백암면을 제외한 용인시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용인시 구성읍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縣內面이란 명칭이 보이고 있는데, 용구현과 합쳐져 용인현이 된 처인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처인현은 원래 처인부곡이었다가 몽골의 침입 때 적장 살례탑을 전사시킨 공이 있어 현으로 바뀌었으며, 그 중심지였던 처인성은 현재의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남아 있다. 용인현은 처인현 지역이었던 남쪽의 오산천(왼쪽)과 진위천(오른쪽) 유역, 용구현 지역이었던 북쪽의 탄천(왼쪽)과 경안천(오른쪽) 유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용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본 지도책의 경기도 다른 고을 지도에 비해 面의 정보가 자세하고, 조선후기의 민간 숙박업소인 酒幕도 나오며, 읍치에 배치된 제사 장소인 성황단, 사직단, 여단, 문묘(향교) 등도 모두 표시되어 있어 고을 사이의 편차를 쉽게 알 수 있는 지도이다. 이러한 정보는 본 지도보다 앞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으며, 뒤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여도》와 《여지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일부의 정보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본적인 정보는 거의 바꾸지 않아 지도가 필사 연대의 상황을 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본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가 소략하게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지도의 주기 내용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본 지도의 주기 내용과 동일한 주기가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도로가 생략되어 있고, 면과 역 등에 정밀한 기호가 사용되고 있는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음죽현 (陰竹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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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죽현은 경기도의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 충청북도의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 병암리, 도신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호원읍의 선읍리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현재 청미천이라 부르는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음죽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첫째, 도로라는 측면에서 가장 자세한 것은 《해동지도》의 것이며, 본 지도의 것은 극히 소략하게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특히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왼쪽의 忠州界에서 아래쪽의 忠州界까지 이어진 도로를 하천으로 잘못 그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도로라는 기준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의 도로만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광여도》에는 비록 도로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도로와 함께 기록되어 있던 大路와 中路 및 小路의 기록이 《해동지도》와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다. 예를 들어 《광여도》에 표시된 읍치(縣) 오른쪽의 自縣去雙峴小路와 아래쪽의 自縣通無極小路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은 도로는 《해동지도》에 가깝고, 도로의 명칭 기록은 《광여도》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두 측면에서 본 지도는 원본을 아주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지도의 주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본 지도의 것은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가장 먼저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이후 상황에 맞게 주기를 변형한 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본 지도는 나머지 3개 지도에 縣이라 표시된 읍치에 衙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용어를 통일하기 위해 본 지도의 필사자가 교정한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 음죽현 주기 (陰竹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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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죽현은 경기도의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 충청북도의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 병암리, 도신리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장호원읍의 선읍리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현재 청미천이라 부르는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음죽현 지도와 동일하지만 일부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첫째, 도로라는 측면에서 가장 자세한 것은 《해동지도》의 것이며, 본 지도의 것은 극히 소략하게 되어 있고, 나머지 2개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특히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왼쪽의 忠州界에서 아래쪽의 忠州界까지 이어진 도로를 하천으로 잘못 그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도로라는 기준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본 지도는 원본에서 일부의 도로만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광여도》에는 비록 도로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도로와 함께 기록되어 있던 大路와 中路 및 小路의 기록이 《해동지도》와 본 지도보다 더 자세하다. 예를 들어 《광여도》에 표시된 읍치(縣) 오른쪽의 自縣去雙峴小路와 아래쪽의 自縣通無極小路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에는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 계통의 원본은 도로는 《해동지도》에 가깝고, 도로의 명칭 기록은 《광여도》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두 측면에서 본 지도는 원본을 아주 거칠게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지도의 주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본 지도의 것은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며, 뒤의 2개 지도와는 거의 동일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해동지도》의 주기가 가장 먼저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이후 상황에 맞게 주기를 변형한 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본 지도는 나머지 3개 지도에 縣이라 표시된 읍치에 衙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용어를 통일하기 위해 본 지도의 필사자가 교정한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 이천부 (利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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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이천시의 시내, 부발읍, 대월면, 모가면, 호법면, 마장면, 신둔면, 백사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이천 시내 관고동․창전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복하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이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어 같은 계통이라도 필사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좌향과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서쪽에 있는 고을의 진산 雪峯山과 그로부터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에는 상대적으로 소략해지고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왼쪽 위의 彌勒山과 오른쪽의 南北五十里와 東西四十里 등의 문구가 《해동지도》와 동일하게 들어가 있어 동일한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리고 《해동지도》의 오른쪽 아래쪽에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가 참고한 원본 계통이 아니라 본 지도나 그 필사본 계통을 참고하여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필사 과정에서 도로와 일부 지명 및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 麗州界로 빠져나가는 복하천의 하류가 생략되어 있어 하천의 유로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 아래의 麗州梨浦界가 麗州浦界로 적혀 있는 등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이기봉)

  • 이천부 주기 (利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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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이천시의 시내, 부발읍, 대월면, 모가면, 호법면, 마장면, 신둔면, 백사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이천 시내 관고동․창전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복하천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이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어 같은 계통이라도 필사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의 좌향과 동일하게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서쪽에 있는 고을의 진산 雪峯山과 그로부터 읍치까지 뻗어내린 산줄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본 지도에는 상대적으로 소략해지고 있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도로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는 왼쪽 위의 彌勒山과 오른쪽의 南北五十里와 東西四十里 등의 문구가 《해동지도》와 동일하게 들어가 있어 동일한 원본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주기의 내용은 《해동지도》와 상당히 달라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와는 동일하다. 그리고 《해동지도》의 오른쪽 아래쪽에 그려진 하천이 본 지도의 왼쪽 아래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뒤의 2개 지도에도 동일하게 생략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해동지도》나 본 지도가 참고한 원본 계통이 아니라 본 지도나 그 필사본 계통을 참고하여 필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필사 과정에서 도로와 일부 지명 및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지도》의 경우 아래쪽 麗州界로 빠져나가는 복하천의 하류가 생략되어 있어 하천의 유로를 오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또한 오른쪽 아래의 麗州梨浦界가 麗州浦界로 적혀 있는 등 필사 과정에서 상당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이기봉)

  • 인천부 (仁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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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부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동구, 중구, 남구, 연수구, 남동구, 시흥시의 옛 소래읍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의 문학산 북쪽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인천부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文鶴山城과 문학산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인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도로와 위치 정보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 도로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서는 소략하지만 도로가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해동지도》에는 面과 驛 등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해동지도》의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가 없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의 주기에는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같은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였지만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를 수록하면서 지도 위에서는 삭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주기에는 월경지로 존재했던 梨浦面과 거리 정보가 생략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밖에 오른쪼의 덕적도와 무의도 및 용유도 등에 적혀 있던 《해동지도》의 주기 내용도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는 도로와 면의 표시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나 그 계통을 바탕으로 다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인천부 주기 (仁川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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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부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동구, 중구, 남구, 연수구, 남동구, 시흥시의 옛 소래읍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의 문학산 북쪽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인천부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文鶴山城과 문학산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인천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도로와 위치 정보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동지도》에 도로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서는 소략하지만 도로가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해동지도》에는 面과 驛 등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해동지도》의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가 없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의 주기에는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같은 계통을 바탕으로 필사하였지만 주기에 면과 거리 정보를 수록하면서 지도 위에서는 삭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주기에는 월경지로 존재했던 梨浦面과 거리 정보가 생략되어 있어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밖에 오른쪼의 덕적도와 무의도 및 용유도 등에 적혀 있던 《해동지도》의 주기 내용도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는 도로와 면의 표시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나 그 계통을 바탕으로 다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장단부 (長湍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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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과 소남면을 제외한 경기도의 장단군에 걸쳐 있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단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長湍府라는 명칭이 적혀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衙(舍)가, 뒤의 2개 지도에는 邑內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가 본 지도나 뒤의 2개 지도처럼 군현명이 지도 이름으로 적혀 있지 않은 최초의 원본 모습에 가장 가까울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도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군현의 명칭이 읍치에 적혀 있는 경우이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 비해 소략한 편이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가 그려져 있지 않다. 특히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의 오른쪽 위 부분의 하천 유로가 완전히 잘못 그려져 있는데, 《해동지도》의 도로를 하천의 유로로 잘못 이해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본 지도의 경우 이 부분의 도로가 하천과 완전히 다른 색으로 그려져 있어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나는 오류가 발생하기 어렵다. 다만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면서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연관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난 도로와 하천의 오해, 본 지도에는 없는 古浪浦가 뒤의 2개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를 직접 필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도로와 하천을 오해할 수 있게 그린 지도를 원본으로 삼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장단부 주기 (長湍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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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과 소남면을 제외한 경기도의 장단군에 걸쳐 있었다. 오른쪽 위에서 흘러와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장단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읍치에 長湍府라는 명칭이 적혀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衙(舍)가, 뒤의 2개 지도에는 邑內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해동지도》가 본 지도나 뒤의 2개 지도처럼 군현명이 지도 이름으로 적혀 있지 않은 최초의 원본 모습에 가장 가까울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경주도회좌통지도》와 《안동도회좌통지도》도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군현의 명칭이 읍치에 적혀 있는 경우이다.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는 《해동지도》에 비해 소략한 편이지만 뒤의 2개 지도에는 도로가 그려져 있지 않다. 특히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의 오른쪽 위 부분의 하천 유로가 완전히 잘못 그려져 있는데, 《해동지도》의 도로를 하천의 유로로 잘못 이해하여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본 지도의 경우 이 부분의 도로가 하천과 완전히 다른 색으로 그려져 있어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나는 오류가 발생하기 어렵다. 다만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면서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연관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에서 나타난 도로와 하천의 오해, 본 지도에는 없는 古浪浦가 뒤의 2개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를 직접 필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면서 도로와 하천을 오해할 수 있게 그린 지도를 원본으로 삼아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적성현 (積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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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성현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적성면의 구읍리에 있었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뻗은 산줄기가 동남쪽의 紺岳山으로부터 내려왔음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판단된다. 감악산은 조선시대에 국가의 中祀에 속해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정상 부근의 祭壇은 바로 중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현재의 임진강으로 지도 위에는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부르던 頭只江, 新津江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적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내용이 다르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는 《해동지도》에 더욱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전반적인 필사 순서는 《해동지도》가 가장 빠르고, 다음으로 본 지도이며,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나중에 필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내의 경우도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鄕廳이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客舍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客舍란 명칭이 아니라 殿牌奉安이란 문장이 적혀 있다. 客舍는 임금을 상징하는 殿牌 또는 闕牌가 보관되어 있는 건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관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객사만을 놓고 볼 때 《해동지도》는 지방에서 그려올린 지도의 원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다른 고을과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객사로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적성현 주기 (積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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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성현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걸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적성면의 구읍리에 있었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까지 뻗은 산줄기가 동남쪽의 紺岳山으로부터 내려왔음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판단된다. 감악산은 조선시대에 국가의 中祀에 속해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정상 부근의 祭壇은 바로 중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현재의 임진강으로 지도 위에는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부르던 頭只江, 新津江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적성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의 내용이 다르다. 본 지도에 수록된 도로는 《해동지도》에 더욱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는 없다. 반면에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은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하지만 《해동지도》와는 전혀 다르다. 이를 통해 볼 때 전반적인 필사 순서는 《해동지도》가 가장 빠르고, 다음으로 본 지도이며, 뒤의 2개 지도가 가장 나중에 필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 내의 경우도 《해동지도》와 본 지도에는 鄕廳이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客舍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客舍란 명칭이 아니라 殿牌奉安이란 문장이 적혀 있다. 客舍는 임금을 상징하는 殿牌 또는 闕牌가 보관되어 있는 건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관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객사만을 놓고 볼 때 《해동지도》는 지방에서 그려올린 지도의 원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는 다른 고을과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객사로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죽산부 (竹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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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부는 현재의 안성시 죽산면, 일죽면, 삼죽면, 용인시 백암면, 원삼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현재의 청미천이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부근에 표시된 古山城은 몽골 침입 때 몽골군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한 죽주산성이며,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죽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에 더 가까운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에는 인근 군현과의 경계선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된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왼쪽 위의 西三面에서 발원하여 陽智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산지의 표현에서도 읍치 아래쪽의 本邑案山 부분이 《해동지도》와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상당히 유사한 편이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와 봉수 및 읍치의 旧鄕校 등이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여지도》의 경우 수원을 왕래하는 中山路가 水原界로 잘못 적혀 있기도 하고, 일부 지명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변경시켰고, 뒤의 2개 지도는 수정된 본 지도 계통을 다시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수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고산성 아래의 石塔과 彌勒 부분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명칭에 알맞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가 아니라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죽산부 주기 (竹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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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부는 현재의 안성시 죽산면, 일죽면, 삼죽면, 용인시 백암면, 원삼면의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왼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현재의 청미천이며, 지도에는 天民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부근에 표시된 古山城은 몽골 침입 때 몽골군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한 죽주산성이며, 고려초기까지 중심지가 입지해 있었다.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죽산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어 본 지도가 《해동지도》에 더 가까운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동지도》에는 인근 군현과의 경계선에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된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왼쪽 위의 西三面에서 발원하여 陽智界로 흘러가는 하천이 《해동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산지의 표현에서도 읍치 아래쪽의 本邑案山 부분이 《해동지도》와 다른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와는 상당히 유사한 편이다.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 사이에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 있는 도로와 봉수 및 읍치의 旧鄕校 등이 뒤의 2개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여지도》의 경우 수원을 왕래하는 中山路가 水原界로 잘못 적혀 있기도 하고, 일부 지명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한 원본 계통을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변경시켰고, 뒤의 2개 지도는 수정된 본 지도 계통을 다시 필사하면서 일부 내용을 수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고산성 아래의 石塔과 彌勒 부분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명칭에 알맞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가 아니라 같은 계통의 다른 지도를 수정하여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지평현 (砥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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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현은 현재의 양평군 지제면, 양동면, 청운면, 단월면, 용문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지제면의 지평리에 있었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 양평읍 남쪽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흑천이며, 아래쪽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으로 흘러가는 석곡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지평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첫째,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되어 있다. 셋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넷째, 본 지도의 읍치 건물 방향과 산의 표현 방식이 《해동지도》에 가까운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상당한 변화를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검토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본 지도가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주기 내용 등에서 변화를 주었고, 마지막으로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를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의 경우 일부 지명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하천이 다른 군현과 만나는 지점에 水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광여도》에는 이 중 아래쪽에서 두 번째의 것이 水原으로 바뀌어 있고, 《여지도》에는 이것이 水源으로, 그 위쪽의 것이 水路로 바뀌어 있다. 또한 읍치의 산줄기 모습이 실제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이기 때문에 그 뒤의 필사자들이 변형시킨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지평현 주기 (砥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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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현은 현재의 양평군 지제면, 양동면, 청운면, 단월면, 용문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지제면의 지평리에 있었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 양평읍 남쪽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흑천이며, 아래쪽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으로 흘러가는 석곡천이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지평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첫째, 본 지도와 《광여도》 및 《여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해동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둘째, 본 지도의 주기 내용이 뒤의 2개 지도와 동일한 반면에 《해동지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되어 있다. 셋째, 본 지도에 있는 도로가 《해동지도》에는 더 자세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다. 넷째, 본 지도의 읍치 건물 방향과 산의 표현 방식이 《해동지도》에 가까운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서는 상당한 변화를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검토해 볼 때 《해동지도》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본 지도가 《해동지도》계통을 필사하면서 주기 내용 등에서 변화를 주었고, 마지막으로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도로를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뒤의 2개 지도의 경우 일부 지명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하천이 다른 군현과 만나는 지점에 水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광여도》에는 이 중 아래쪽에서 두 번째의 것이 水原으로 바뀌어 있고, 《여지도》에는 이것이 水源으로, 그 위쪽의 것이 水路로 바뀌어 있다. 또한 읍치의 산줄기 모습이 실제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해동지도》이기 때문에 그 뒤의 필사자들이 변형시킨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 진위현 (振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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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현은 평택시 진위면, 서탄면, 고덕면, 옛 송탄시와 평택시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진위면 봉남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에서 흘러오는 진위천이 위쪽에서 내려오는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의 내용으로 객사와 아사 등의 읍치와 고개 및 주막 등이 아주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내용이 간략함에도 불구하고 酒幕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도로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수록된 각 경계선까지의 거리가 모두 생략되어 있는데, 주기에 동서남북 경계선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수록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지만 주기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필사 당시의 정보로 교체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위현 지도에도 주기를 비롯하여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 위의 도로가 없는 것을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도로만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에 표시된 海倉은 진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한 군데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면서 해창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해창은 바닷배가 운행될 수 있는 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썰물 때 바닷물이 아산만 깊숙이 들어오는 자연지리적 지형을 잘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이기봉)

  • 진위현 주기 (振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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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현은 평택시 진위면, 서탄면, 고덕면, 옛 송탄시와 평택시내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진위면 봉남리 일대에 있었다. 왼쪽에서 흘러오는 진위천이 위쪽에서 내려오는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의 내용으로 객사와 아사 등의 읍치와 고개 및 주막 등이 아주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내용이 간략함에도 불구하고 酒幕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도로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수록된 각 경계선까지의 거리가 모두 생략되어 있는데, 주기에 동서남북 경계선까지의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수록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가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지만 주기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필사 당시의 정보로 교체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진위현 지도에도 주기를 비롯하여 거의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 위의 도로가 없는 것을 통해 볼 때 필사 과정에서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도로만 생략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에 표시된 海倉은 진위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수도인 한양으로 실어나르던 창고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조세를 한 군데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반을 책임지면서 해창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해창은 바닷배가 운행될 수 있는 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썰물 때 바닷물이 아산만 깊숙이 들어오는 자연지리적 지형을 잘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이기봉)

  • 통진부 (通津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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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부는 현재의 김포시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월곶면의 고막리와 군하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과 북쪽이 한강과 접해 있고, 서쪽은 鹽河를 사이에 두고 강화와 마주보며, 남쪽으로 김포와 접해 있었다. 본 지도에서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아래쪽은 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이고, 오른쪽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해당된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 내용 및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통진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 점, 읍치의 왼쪽 산봉우리의 묘사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식으로 그려진 점, 面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본 지도의 邑內面이 《해동지도》에는 府內面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읍내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는 오른쪽으로 김포와 연결되어 있는 육지 부분이 아주 좁게 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이면서 몇몇 부분에서 변화를 주고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가 필사한 지도 계통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오른쪽 위 아래로 童城山과 守安山의 명칭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려말과 조선초를 거치면서 통진에 완전히 속하게 된 속현의 명칭과 동일하다. 이들 산에는 테뫼식의 중소형 산성이 있어 고려말 이전에는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연구 경향을 잘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사례 지역이 된다. 지도 위쪽에는 阻江이란 지명이 적혀 있는데, 한강 하구의 구간에서 사용되던 하천 명칭이었고, 祖江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통진부 주기 (通津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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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부는 현재의 김포시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월곶면의 고막리와 군하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과 북쪽이 한강과 접해 있고, 서쪽은 鹽河를 사이에 두고 강화와 마주보며, 남쪽으로 김포와 접해 있었다. 본 지도에서는 대체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아래쪽은 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이고, 오른쪽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해당된다. 하천의 유로와 수록 내용 및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통진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에 도로가 표시되어 있는 점, 읍치의 왼쪽 산봉우리의 묘사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식으로 그려진 점, 面에 사각형의 기호가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본 지도의 邑內面이 《해동지도》에는 府內面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뒤의 2개 지도에는 본 지도와 동일하게 읍내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는 오른쪽으로 김포와 연결되어 있는 육지 부분이 아주 좁게 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에는 상당히 넓게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와 다르며, 나머지 2개 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계통이면서 몇몇 부분에서 변화를 주고 있고, 《광여도》와 《여지도》가 필사한 지도 계통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오른쪽 위 아래로 童城山과 守安山의 명칭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려말과 조선초를 거치면서 통진에 완전히 속하게 된 속현의 명칭과 동일하다. 이들 산에는 테뫼식의 중소형 산성이 있어 고려말 이전에는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연구 경향을 잘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사례 지역이 된다. 지도 위쪽에는 阻江이란 지명이 적혀 있는데, 한강 하구의 구간에서 사용되던 하천 명칭이었고, 祖江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이기봉)

  • 파주목 (坡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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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목은 현재의 파주시 파주읍, 파평면, 법원읍, 문산읍, 광탄면, 조리면, 월롱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의 파주시청이 자리한 지역은 조선시대에 파주목의 땅이 아니라  교하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오른쪽 가운데에는 임진강 명칭의 기원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던 臨津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파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주기 역시 동일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 있던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으며, 본 지도에는 약간 소략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임진강의 하류 모양이 《해동지도》와는 거의 비슷하지만 나머지 2개 지도와는 다르고, 읍치의 중요 건물 중 軍器(庫) 표시와 읍치 중심으로 글씨를 쓰는 방식 등도 역시 동일한 경향을 띄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가까우면서 주기와 지도의 방향 등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에는 오자도 보이고 있는데, 읍치 왼쪽의 大山峯은 나머지 3개 지도에는 大山烽으로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에 烽燧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제작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파주목 주기 (坡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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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목은 현재의 파주시 파주읍, 파평면, 법원읍, 문산읍, 광탄면, 조리면, 월롱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의 파주시청이 자리한 지역은 조선시대에 파주목의 땅이 아니라  교하군에 속해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흘러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오른쪽 가운데에는 임진강 명칭의 기원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던 臨津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유로와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파주목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동지도》가 북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나머지 2개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주기 역시 동일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에 있던 도로가 《광여도》와 《여지도》에는 없으며, 본 지도에는 약간 소략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임진강의 하류 모양이 《해동지도》와는 거의 비슷하지만 나머지 2개 지도와는 다르고, 읍치의 중요 건물 중 軍器(庫) 표시와 읍치 중심으로 글씨를 쓰는 방식 등도 역시 동일한 경향을 띄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에 가까우면서 주기와 지도의 방향 등은 나머지 2개 지도와 같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에는 오자도 보이고 있는데, 읍치 왼쪽의 大山峯은 나머지 3개 지도에는 大山烽으로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에 烽燧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제작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포천현 (抱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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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현은 현재의 포천시 시내, 화현면, 군내면, 가산면, 소흘읍, 내촌면, 갈월리 서쪽을 제외한 신북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포천천이다. 읍치 뒤쪽으로는 半月山堅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포천현의 옛 명칭 중의 하나인 堅城과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다. 또한 성황당이 산성 안에 설치되어 있는데, 고려초기까지는 고을의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새로운 연구 경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포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경향을 알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 없는 도로와 읍치 아래쪽의 현내면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에도 수록되어 있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경우 面의 명칭에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데,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그려졌다가 나중에 주기가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본 지도는 처음부터 읍치로부터 면까지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와 함께 필사되어 도면에서의 거리 정보는 삭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 과정에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는 주기가 첨가되고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 등을 변경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가 본 지도와 동일한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필사본을 바탕으로 재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읍치 뒤의 산에 대판 표현이 상당히 달라 본 지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필사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재필사 과정에서 도로를 없애고, 현내면의 명칭을 빠뜨리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포천현 주기 (抱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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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현은 현재의 포천시 시내, 화현면, 군내면, 가산면, 소흘읍, 내촌면, 갈월리 서쪽을 제외한 신북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으며,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포천천이다. 읍치 뒤쪽으로는 半月山堅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포천현의 옛 명칭 중의 하나인 堅城과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다. 또한 성황당이 산성 안에 설치되어 있는데, 고려초기까지는 고을의 중심지가 산성에 있었다는 새로운 연구 경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하천의 유로와 산줄기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포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일부의 내용에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필사 과정에서의 변화 경향을 알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 없는 도로와 읍치 아래쪽의 현내면이 본 지도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에도 수록되어 있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해동지도》의 경우 面의 명칭에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데,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가 없는 상태에서 그려졌다가 나중에 주기가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본 지도는 처음부터 읍치로부터 면까지의 거리가 적혀 있는 주기와 함께 필사되어 도면에서의 거리 정보는 삭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의 필사 과정에서 필사 당시의 상황에 맞는 주기가 첨가되고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 등을 변경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주기가 본 지도와 동일한 점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와 동일 계통의 필사본을 바탕으로 재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뒤의 2개 지도와 본 지도 사이에는 읍치 뒤의 산에 대판 표현이 상당히 달라 본 지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필사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재필사 과정에서 도로를 없애고, 현내면의 명칭을 빠뜨리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이기봉)

  • 풍덕부 (豊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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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덕부는 일제시대의 개풍군 광덕면, 대성면, 흥교면, 임한면, 중면, 상도면, 봉동면 등에 걸쳐 있었다.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남쪽에 해당되며, 읍치는 판문군 풍덕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지도의 오른쪽과 아래쪽이 모두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방향이 정확하지는 않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풍덕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양상을 알아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지만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있는 것이 도로이다. 비록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소략하지만 상호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요소이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달라지는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산에서 볼 수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봉우리로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산줄기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해안선과 오른쪽의 한강 하류의 표현에서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해동지도》에서는 다른 하천에 비해 한강 하류가 상당히 굵게 그려져 강의 크기를 쉽게 비교할 수 있게 한 반면에 본 지도에는 훨씬 얇아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더욱 얇아져 한강임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고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더 심하게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필사했다기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계통의 다른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표적인 예로 오른쪽 위의 德積山烽臺가 뒤의 2개 지도에는 그 위쪽의 烽에 표시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 본 지도가 잘못된 것이다. 오른쪽의 한강에 대한 표현은 네 지도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위쪽에서 흘러오는 현재의 사천이 임진강과 합류된 후 다시 한강과 합류되는 모습으로 그려져야 사실에 부합된다.(이기봉)

  • 풍덕부 주기 (豊德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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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덕부는 일제시대의 개풍군 광덕면, 대성면, 흥교면, 임한면, 중면, 상도면, 봉동면 등에 걸쳐 있었다.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남쪽에 해당되며, 읍치는 판문군 풍덕리에 있었다.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지만 지도의 오른쪽과 아래쪽이 모두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방향이 정확하지는 않다.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및 수록된 내용이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古4790-58)의 풍덕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필사 과정의 변화양상을 알아볼 수 있다. 뒤의 2개 지도에는 없지만 본 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있는 것이 도로이다. 비록 본 지도의 도로가 《해동지도》보다 소략하지만 상호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요소이다. 그러나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달라지는 측면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산에서 볼 수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봉우리로 그린 반면에 본 지도와 뒤의 2개 지도에는 산줄기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해안선과 오른쪽의 한강 하류의 표현에서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해동지도》에서는 다른 하천에 비해 한강 하류가 상당히 굵게 그려져 강의 크기를 쉽게 비교할 수 있게 한 반면에 본 지도에는 훨씬 얇아지고 있으며, 뒤의 2개 지도에서는 더욱 얇아져 한강임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리고 있다. 뒤의 2개 지도는 본 지도 계통을 필사하면서 더 심하게 변화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뒤의 2개 지도가 본 지도 자체를 필사했다기보다는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한 계통의 다른 지도를 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표적인 예로 오른쪽 위의 德積山烽臺가 뒤의 2개 지도에는 그 위쪽의 烽에 표시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 본 지도가 잘못된 것이다. 오른쪽의 한강에 대한 표현은 네 지도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위쪽에서 흘러오는 현재의 사천이 임진강과 합류된 후 다시 한강과 합류되는 모습으로 그려져야 사실에 부합된다.(이기봉)

  • ▶경상도
  • 개령현 (開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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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김천시에 포함된 지역으로 개령면의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중심부였다.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아포읍, 남면, 감문면의 일부, 농소면의 일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서쪽의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며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감천(감곡천)이다.지도에 표시된 감천이 현재 하천명으로 여전히 사용된다. 지도의 왼쪽이 상류, 오른쪽이 하류쪽이다. 감천은 동북쪽으로 흘러 선산 앞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동국여지승람에 감문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는데 현재의 개령면 덕촌리의 취적봉에 해당한다. 읍치 중심부 군기고 뒤쪽에 봉대라고 적힌 산이다. 읍치에는 가장 큰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대부분의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향교를 독립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치와 같은 형국 속에 묘사하였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읍치 북쪽에 성황산만 표기되었다. 읍치 오른쪽에 동락정이 그려졌는데 백성과 함께 同樂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근처의 산이 柳山이다. 유산에는 甘文國 때의 궁궐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감천 남쪽에 덕림서원이 보이는데 1677년(숙종 3)에 사액받은 곳으로 김종직, 정경세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 뒤쪽의 사찰은 지금 계림사라는 이름으로 취적봉 아래에 남아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아포면이 지금의 아포읍이 되었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의 감천변 을 따라 난 길은 현재 910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감천 남쪽에는 경부 고속도로가 나 있어 아포읍을 지나 구미로 연결된다.(이현군)

  • 개령현 주기 (開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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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김천시에 포함된 지역으로 개령면의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중심부였다.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아포읍, 남면, 감문면의 일부, 농소면의 일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서쪽의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며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감천(감곡천)이다.지도에 표시된 감천이 현재 하천명으로 여전히 사용된다. 지도의 왼쪽이 상류, 오른쪽이 하류쪽이다. 감천은 동북쪽으로 흘러 선산 앞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동국여지승람에 감문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는데 현재의 개령면 덕촌리의 취적봉에 해당한다. 읍치 중심부 군기고 뒤쪽에 봉대라고 적힌 산이다. 읍치에는 가장 큰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대부분의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향교를 독립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치와 같은 형국 속에 묘사하였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읍치 북쪽에 성황산만 표기되었다. 읍치 오른쪽에 동락정이 그려졌는데 백성과 함께 同樂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근처의 산이 柳山이다. 유산에는 甘文國 때의 궁궐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감천 남쪽에 덕림서원이 보이는데 1677년(숙종 3)에 사액받은 곳으로 김종직, 정경세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 뒤쪽의 사찰은 지금 계림사라는 이름으로 취적봉 아래에 남아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아포면이 지금의 아포읍이 되었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의 감천변 을 따라 난 길은 현재 910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감천 남쪽에는 경부 고속도로가 나 있어 아포읍을 지나 구미로 연결된다.(이현군)

  • 거제부 (巨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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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해당하며 현재의 거제시가 거제부의 관할구역이었다.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남해상의 섬 지역임을 이 지도로 확연히 알 수 있다. 지도 왼쪽의 오양역은 현재의 사등면 오량리에 있던 역원으로 그 왼쪽에 도로망 표시가 있다. 이곳이 현재 통영과 연결되는 거제대교가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에 옥포가 표시되었는데 그 오른쪽이 옥포만이 되며 현재 조선소가 있다. 지도 중앙부에 객사를 비롯한 읍치에 배치되는 건물이 그려졌다. 진산은 계룡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남쪽 5리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실제로 동상리의 북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객사 오른쪽에 표시되었다. 석축으로 된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읍치 북쪽에 고현성이 있는데 1711년(숙종 37)에 이 지도상의 위치(동상리 일대)로 옮기기 전의 중심부였다. 현재 고현성의 유적이 있으며 신현읍에 고현리라는 지명, 고현중학교, 고현고교가 있어 그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근처에 한국전쟁 당시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현재 거제시의 중심부는 거제부의 읍치가 아니라 고현성이 있던 지역이다. 남해 바다에 있는 섬이기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곳곳에 성이 있다. 일부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일본과 경계가 된다고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에는 한산도가 보이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에 등장하는 곳이다. 거제도 본섬에 부속된 여러 섬들을 아주 자세하게 그렸다.(이현군)

  • 거제부 주기 (巨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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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해당하며 현재의 거제시가 거제부의 관할구역이었다.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남해상의 섬 지역임을 이 지도로 확연히 알 수 있다. 지도 왼쪽의 오양역은 현재의 사등면 오량리에 있던 역원으로 그 왼쪽에 도로망 표시가 있다. 이곳이 현재 통영과 연결되는 거제대교가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에 옥포가 표시되었는데 그 오른쪽이 옥포만이 되며 현재 조선소가 있다. 지도 중앙부에 객사를 비롯한 읍치에 배치되는 건물이 그려졌다. 진산은 계룡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남쪽 5리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실제로 동상리의 북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객사 오른쪽에 표시되었다. 석축으로 된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읍치 북쪽에 고현성이 있는데 1711년(숙종 37)에 이 지도상의 위치(동상리 일대)로 옮기기 전의 중심부였다. 현재 고현성의 유적이 있으며 신현읍에 고현리라는 지명, 고현중학교, 고현고교가 있어 그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근처에 한국전쟁 당시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현재 거제시의 중심부는 거제부의 읍치가 아니라 고현성이 있던 지역이다. 남해 바다에 있는 섬이기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곳곳에 성이 있다. 일부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일본과 경계가 된다고 표시되었다. 지도 아래에는 한산도가 보이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에 등장하는 곳이다. 거제도 본섬에 부속된 여러 섬들을 아주 자세하게 그렸다.(이현군)

  • 거창현 (居昌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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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는 거창군으로 등장하며 광여도에는 거창부로 나오는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지도이다. 삼가현에 속하던 신원면과 안의현에 속하였던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을 제외한 지역이 관할구역이었다.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 일대에 해당한다.. 속현으로 가조현이 있었는데 현재의 거창군 가조면은 그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지도에서 가북면, 가동면, 가남면 등이 옛 가조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지도 오른쪽의 현창도 가조현의 현창에 해당하는 것이다. 서남쪽의 신창이 거창현의 현창으로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위천천으로 동쪽의 황강천과 합류하여 남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황강천은 남쪽의 합천군 대병면에 합천댐이 건설되어 이 지도 오른쪽 아래 지역은 일부 수몰되었다. 읍치 북동쪽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가야산으로 연결되는 경로에 속한다. 진산은 건흥산으로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그 아래에는 건흥암이 자리하고 있다. 건흥산의 맥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읍치 뒤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읍성은 보이지 않고 객사를 가장 크게 중앙부에 그렸다. 읍치 앞의 다리는 현재의 거창교 부근에 있던 것이다. 역원으로는 성초역, 무계역, 성기역 등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거창군 동남쪽으로 88고속도로가 지난다. 이 밖에 봉수대, 서원 등이 표현되었으나 그 이름을 적지는 않았다.(이현군)

  • 거창현 주기 (居昌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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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는 거창군으로 등장하며 광여도에는 거창부로 나오는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지도이다. 삼가현에 속하던 신원면과 안의현에 속하였던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을 제외한 지역이 관할구역이었다.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 일대에 해당한다.. 속현으로 가조현이 있었는데 현재의 거창군 가조면은 그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지도에서 가북면, 가동면, 가남면 등이 옛 가조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지도 오른쪽의 현창도 가조현의 현창에 해당하는 것이다. 서남쪽의 신창이 거창현의 현창으로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위천천으로 동쪽의 황강천과 합류하여 남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황강천은 남쪽의 합천군 대병면에 합천댐이 건설되어 이 지도 오른쪽 아래 지역은 일부 수몰되었다. 읍치 북동쪽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가야산으로 연결되는 경로에 속한다. 진산은 건흥산으로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그 아래에는 건흥암이 자리하고 있다. 건흥산의 맥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읍치 뒤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읍성은 보이지 않고 객사를 가장 크게 중앙부에 그렸다. 읍치 앞의 다리는 현재의 거창교 부근에 있던 것이다. 역원으로는 성초역, 무계역, 성기역 등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거창군 동남쪽으로 88고속도로가 지난다. 이 밖에 봉수대, 서원 등이 표현되었으나 그 이름을 적지는 않았다.(이현군)

  • 경산군 (慶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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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근원이 된 지역으로 경산시내가 읍치가 된다. 관할 범위는 경산시내, 남천면, 압량면 일부와 대구광역시의 동구 일부, 수성구 일부지역이다. 광여도에서는 경산현으로 되어 있다. 금호강이 군의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데 이 지도는 금호강이 아래쪽에 그려져 있고 읍성 안의 건물이 모두 지도 위를 향하도록 그렸다. 객사와 옥 등이 그려졌다. 남쪽이 위가 되게 그린 지도이다. 금호강을 아래에 배치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산의 모든 물이 금호강에 유입된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성문의 방향을 보아도 북쪽이 아래가 되도록 그린 것이 확인된다. 동문, 서문, 남문을 그렸다. 북문은 보이지 않고 외부와 연결되는 주요도로는 동문과 남문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도로는 하천의 유로와 평행하게 만들어졌다. 교통로인 고개를 표시하고 이름을 붙였다. 남쪽의 마암산이 진산이 된다. 북쪽에 금호강이 흐르기에 자연스럽게 남쪽에 진산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읍치 서쪽에 옥산를 그렸는데 현재의 경산시내 옥산동이다. 읍성 밖의 향교를 마치 성곽처럼 보이게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의 위치도 표시되었다. 대구의 동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아래쪽(북쪽)에 팔공산이 보인다.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으로 동화사 등 유명사찰과 가산산성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 존재하였던 압량역 등의 역원은 그리지 않았다. 이 밖에 서원, 봉대, 사찰 등이 그려졌는데 다른 지도에는 보이는 倉이 그려지지 않았다.(이현군)

  • 경산군 주기 (慶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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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근원이 된 지역으로 경산시내가 읍치가 된다. 관할 범위는 경산시내, 남천면, 압량면 일부와 대구광역시의 동구 일부, 수성구 일부지역이다. 광여도에서는 경산현으로 되어 있다. 금호강이 군의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데 이 지도는 금호강이 아래쪽에 그려져 있고 읍성 안의 건물이 모두 지도 위를 향하도록 그렸다. 객사와 옥 등이 그려졌다. 남쪽이 위가 되게 그린 지도이다. 금호강을 아래에 배치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산의 모든 물이 금호강에 유입된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성문의 방향을 보아도 북쪽이 아래가 되도록 그린 것이 확인된다. 동문, 서문, 남문을 그렸다. 북문은 보이지 않고 외부와 연결되는 주요도로는 동문과 남문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도로는 하천의 유로와 평행하게 만들어졌다. 교통로인 고개를 표시하고 이름을 붙였다. 남쪽의 마암산이 진산이 된다. 북쪽에 금호강이 흐르기에 자연스럽게 남쪽에 진산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읍치 서쪽에 옥산를 그렸는데 현재의 경산시내 옥산동이다. 읍성 밖의 향교를 마치 성곽처럼 보이게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의 위치도 표시되었다. 대구의 동쪽에 위치한 군현이다. 아래쪽(북쪽)에 팔공산이 보인다.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으로 동화사 등 유명사찰과 가산산성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 존재하였던 압량역 등의 역원은 그리지 않았다. 이 밖에 서원, 봉대, 사찰 등이 그려졌는데 다른 지도에는 보이는 倉이 그려지지 않았다.(이현군)

  • 경상도 (慶尙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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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 경상도 부분의 처음에 나오는 지도로 경상도 전체를 그린 지도이다. 지승의 경상도 부분은 통영과 府 지역을 먼저 싣고 郡縣 지역을 그 다음에 배치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동해가 표시되었고 서쪽은 전라도 충청도, 북쪽은 강원도 충청도의 맞닿은 군현을 기록하였다. 현재 경상북도에 포함된 울릉도 독도는 표시되지 않았으며 남동쪽에 경상도의 섬 지역이 표시되었다. 대구 감영을 비롯하여 경상도의 부목군현을 표시하였다. 감영, 통영, 우병영, 좌수영 등 군사 중심지는 붉은 원 안에 표시하였고 부와 군현은 네모안에 그 지명을 기록하였다. 경상도의 주요 교통로는 육운으로 이 지도에서는 대구 감영을 중심으로 군현간의 연결망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역은 지도에 붉은 색으로 따로 표시하였다. 조령, 죽령 등 다른 도와 연결되는 고개를 표시하였다. 경상도 지역은 크게 낙동강 유역권으로 볼 수 있는데 상주, 선산, 비안 가운데 부분에 낙동강 지명이 보인다. 지도 오른쪽 위에 그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그 왼쪽에 태백산 史庫가 보인다. 태화강 등 낙동강에 합류하지 않는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태백산, 지리산 등 주요 산이 표시되었으며 山城의 이름과 위치가 표시되었다. 도산서원 등 여러 서원이 기록되었고, 경주의 불굴사, 합천의 해인사 등이 보인다. 남해안에는 해전으로 유명한 노량이 표시되었다. 지도의 주기에는 戶口, 田畓의 수량과 조세 관련 사항, 鎭營에 소속된 군사의 수 등을 기록해 놓았다.(이현군)

  • 경상도 주기 (慶尙道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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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 경상도 부분의 처음에 나오는 지도로 경상도 전체를 그린 지도이다. 지승의 경상도 부분은 통영과 府 지역을 먼저 싣고 郡縣 지역을 그 다음에 배치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동해가 표시되었고 서쪽은 전라도 충청도, 북쪽은 강원도 충청도의 맞닿은 군현을 기록하였다. 현재 경상북도에 포함된 울릉도 독도는 표시되지 않았으며 남동쪽에 경상도의 섬 지역이 표시되었다. 대구 감영을 비롯하여 경상도의 부목군현을 표시하였다. 감영, 통영, 우병영, 좌수영 등 군사 중심지는 붉은 원 안에 표시하였고 부와 군현은 네모안에 그 지명을 기록하였다. 경상도의 주요 교통로는 육운으로 이 지도에서는 대구 감영을 중심으로 군현간의 연결망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역은 지도에 붉은 색으로 따로 표시하였다. 조령, 죽령 등 다른 도와 연결되는 고개를 표시하였다. 경상도 지역은 크게 낙동강 유역권으로 볼 수 있는데 상주, 선산, 비안 가운데 부분에 낙동강 지명이 보인다. 지도 오른쪽 위에 그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그 왼쪽에 태백산 史庫가 보인다. 태화강 등 낙동강에 합류하지 않는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태백산, 지리산 등 주요 산이 표시되었으며 山城의 이름과 위치가 표시되었다. 도산서원 등 여러 서원이 기록되었고, 경주의 불굴사, 합천의 해인사 등이 보인다. 남해안에는 해전으로 유명한 노량이 표시되었다. 지도의 주기에는 戶口, 田畓의 수량과 조세 관련 사항, 鎭營에 소속된 군사의 수 등을 기록해 놓았다.(이현군)

  •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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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1면입니다.

  •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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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地乘)〈奎 15423〉 3책 경상도 총론 (慶尙道 總論)2면입니다.

  • 경주부 (慶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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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부는 현재의 경주시 전체와 포항시, 영천시 일부, 울산광역시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었다. 지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형산강이며 읍치 북쪽의 북천, 남쪽의 남천이 형산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위에 兄山倉이 표시되었다. 북천은 보문관광단지의 보문호와 연결된다. 형산강은 남쪽이 상류에 해당하며 북쪽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읍치 동쪽의 바다가에 표시된 石堀은 토함산의 석굴암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왼쪽에는 탑이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의 鳳凰臺는 신라의 古墳이 있는 곳으로 신라 30대 문무왕이 남문 밖에 세웠다. 마치 봉황의 알처럼 그려져 있다. 봉황대 아래쪽에 반월성, 첨성대가 실제 모양과 유사하게 그려졌다. 남문 아래쪽의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곳이며 북쪽의 경순왕묘는 신라 마지막 왕을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안에는 동헌, 객사, 군관청, 향청, 사창, 제승당, 관청, 진남루 등 여러 건물이 그려졌다. 남문 밖에는 종을 걸어 놓은 모습으로 종각을 그렸다. 읍성 밖 남쪽에 향교가 표시되었고 서쪽에 鎭營이 보인다. 동쪽의 기림사를 비롯하여 융성했던 신라의 불교 문화를 보여주는 여러 사찰이 그려졌다. 조선시대의 여러 서원들이 지도에 표시되고 있어 불교의 사찰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중 서악서원은 신라의 설총, 최치원, 김유신을 배향하여 세운 곳이다. 붉은색으로 도로를 표시하고 주요 驛과 倉을 그려 놓았다(이현군).

  • 경주부 주기 (慶州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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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부는 현재의 경주시 전체와 포항시, 영천시 일부, 울산광역시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었다. 지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형산강이며 읍치 북쪽의 북천, 남쪽의 남천이 형산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위에 兄山倉이 표시되었다. 북천은 보문관광단지의 보문호와 연결된다. 형산강은 남쪽이 상류에 해당하며 북쪽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읍치 동쪽의 바다가에 표시된 石堀은 토함산의 석굴암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왼쪽에는 탑이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의 鳳凰臺는 신라의 古墳이 있는 곳으로 신라 30대 문무왕이 남문 밖에 세웠다. 마치 봉황의 알처럼 그려져 있다. 봉황대 아래쪽에 반월성, 첨성대가 실제 모양과 유사하게 그려졌다. 남문 아래쪽의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곳이며 북쪽의 경순왕묘는 신라 마지막 왕을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안에는 동헌, 객사, 군관청, 향청, 사창, 제승당, 관청, 진남루 등 여러 건물이 그려졌다. 남문 밖에는 종을 걸어 놓은 모습으로 종각을 그렸다. 읍성 밖 남쪽에 향교가 표시되었고 서쪽에 鎭營이 보인다. 동쪽의 기림사를 비롯하여 융성했던 신라의 불교 문화를 보여주는 여러 사찰이 그려졌다. 조선시대의 여러 서원들이 지도에 표시되고 있어 불교의 사찰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중 서악서원은 신라의 설총, 최치원, 김유신을 배향하여 세운 곳이다. 붉은색으로 도로를 표시하고 주요 驛과 倉을 그려 놓았다(이현군).

  • 고령현 (高靈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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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진산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耳山이다. 그 왼쪽의 미숭산은 고령읍과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에 있는 733.5m의 산인데 지금은 관광지화 되었다. 미숭산의 북서쪽에는 해인사로 유명한 가야산 국립공원이 위치한다. 미숭산 오른쪽의 반룡사는 쌍림면 용리에 현재에도 남아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낙동강이 그렸졌으며 나루와 강창이 그 옆에 보인다. 개산진은 현재의 개진면의 진촌에 있던 나루이다. 고령현은 본래 대가야국이었는데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읍치 뒤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사적 61호 고령주산성, 사적 79호 고분군, 보물 54호 금림왕릉 당간지주, 유물전시관 등이 현재 남아있다. 객사 앞에 그려진 누정인 쾌빈루는 현재의 고령읍 쾌빈리에 있던 것이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이 표현되었다. 이전하여 재건축된 향교가 고령읍에 있다. 외곽에 있었던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지도에 그리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 지대가 낮은 하천가에는 숲이 조성되어 있고 赤林이라고 표시되었다. 지승 지도에서는 도로 이름을 적은 경우가 드문데 이 지도 오른쪽 위에 大丘路라고 따로 적은 점이 이채롭다. 대구로 통하는 26번 국도 경로와 비슷하다. 역원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봉수대가 곳곳에 표시되었고 육로에 중요한 고개의 위치와 이름을 표시하였다. (이현군)

  • 고령현 주기 (高靈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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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진산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耳山이다. 그 왼쪽의 미숭산은 고령읍과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에 있는 733.5m의 산인데 지금은 관광지화 되었다. 미숭산의 북서쪽에는 해인사로 유명한 가야산 국립공원이 위치한다. 미숭산 오른쪽의 반룡사는 쌍림면 용리에 현재에도 남아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낙동강이 그렸졌으며 나루와 강창이 그 옆에 보인다. 개산진은 현재의 개진면의 진촌에 있던 나루이다. 고령현은 본래 대가야국이었는데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읍치 뒤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사적 61호 고령주산성, 사적 79호 고분군, 보물 54호 금림왕릉 당간지주, 유물전시관 등이 현재 남아있다. 객사 앞에 그려진 누정인 쾌빈루는 현재의 고령읍 쾌빈리에 있던 것이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이 표현되었다. 이전하여 재건축된 향교가 고령읍에 있다. 외곽에 있었던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지도에 그리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 지대가 낮은 하천가에는 숲이 조성되어 있고 赤林이라고 표시되었다. 지승 지도에서는 도로 이름을 적은 경우가 드문데 이 지도 오른쪽 위에 大丘路라고 따로 적은 점이 이채롭다. 대구로 통하는 26번 국도 경로와 비슷하다. 역원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봉수대가 곳곳에 표시되었고 육로에 중요한 고개의 위치와 이름을 표시하였다. (이현군)

  • 고성현 (固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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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국에 해당하였는데 신라가 병합되면서 古自郡이 되었다. 고성의 읍치는 고성군 고성읍 일대이며 성내리라는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성군의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은 진주목에 해당하였으므로 나머지 지역과 통영시가 관할 구역이었다. 지도에 두 개의 성곽이 보이는데 위쪽이 고성 읍성이 되고 아래쪽이 통영이 된다. 읍성의 아래쪽 바다는 현재의 고성만이 된다. 읍성의 동문에서 통영으로 연결되는 이 지도의 도로는 현재의 14번 국도의 경로와 비슷하다. 위쪽의 고성 읍성에는 객사가 존재하는데 비해 남쪽의 통영에는 객사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세병관이 보이는데 통제사의 집무공간이다. 慶尙右水營 兼 三道統制營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통영시 북신동, 명정동, 도천동 일대에 해당한다. 地乘의 統營 지도에서는 통제영의 군사적 관할 구역을 다 그려서 전라도, 경상도 내륙까지 표현하였지만 이 지도는 고성군의 행정 관할로서 통영을 표현하였기에 지도의 범위가 적다. 조선 수군의 중심지답게 鎭, 船所, 船倉, 烽臺 등이 표시되었다. 통영 남문 앞 바다에는 小海라고 적고 당포진 아래에는 大海라고 적은 점이 이채롭다. 바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흔적으로 보인다. 당포진은 통영시 산양읍에 당포성이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통영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현재 세병관 옆에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충렬사가 남아있다.(이현군)

  • 고성현 주기 (固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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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국에 해당하였는데 신라가 병합되면서 古自郡이 되었다. 고성의 읍치는 고성군 고성읍 일대이며 성내리라는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성군의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은 진주목에 해당하였으므로 나머지 지역과 통영시가 관할 구역이었다. 지도에 두 개의 성곽이 보이는데 위쪽이 고성 읍성이 되고 아래쪽이 통영이 된다. 읍성의 아래쪽 바다는 현재의 고성만이 된다. 읍성의 동문에서 통영으로 연결되는 이 지도의 도로는 현재의 14번 국도의 경로와 비슷하다. 위쪽의 고성 읍성에는 객사가 존재하는데 비해 남쪽의 통영에는 객사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세병관이 보이는데 통제사의 집무공간이다. 慶尙右水營 兼 三道統制營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통영시 북신동, 명정동, 도천동 일대에 해당한다. 地乘의 統營 지도에서는 통제영의 군사적 관할 구역을 다 그려서 전라도, 경상도 내륙까지 표현하였지만 이 지도는 고성군의 행정 관할로서 통영을 표현하였기에 지도의 범위가 적다. 조선 수군의 중심지답게 鎭, 船所, 船倉, 烽臺 등이 표시되었다. 통영 남문 앞 바다에는 小海라고 적고 당포진 아래에는 大海라고 적은 점이 이채롭다. 바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흔적으로 보인다. 당포진은 통영시 산양읍에 당포성이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통영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현재 세병관 옆에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충렬사가 남아있다.(이현군)

  • 곤양군 (昆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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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양의 읍치는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일대이며 지금도 남문밖이라는 지명으로 과거에 읍성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관할구역은 사천시의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과 하동군의 진교면, 금성면, 금남면의 일부 지역이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곤양천이며 지도 아래쪽이 사천만이다. 군현명이 면 명칭으로 격하되었지만 남해고속국도 곤양분기점 인근에 옛 읍치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읍치의 남쪽이 바다가 되고 북쪽 3리 지점에 있는 동곡산이 진산이 된다. 이 지도는 서쪽이 위가 되도록 그렸다. 객사, 군기고, 아사 등 읍성 안의 건물이 왼쪽을 향하는 것은 남향하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옥이 그려진 점이 특이한데 일반적으로 옥은 읍성 안에 존재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노량이 표시되었는데 금남면 노량리에 해당한다. 이곳과 남해를 연결하는 다리가 남해대교이다. 이 일대에서 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다. 노량초등학교 등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남해로 연결되는 육로상에 양포역과 금양역이 보이며 그 옆에 진교장이 표시되었다. 진교장을 따서 현재의 진교면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바다와 접한 곳에 선소를 그렸다. 지도 위의 태봉은 세종대왕의 태를 안치한 것이다. 태봉 오른쪽 금성이 표시되었는데 곤명면 금성리에 있었다. 이 밖에 사찰, 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곤양군 주기 (昆陽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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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양의 읍치는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일대이며 지금도 남문밖이라는 지명으로 과거에 읍성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관할구역은 사천시의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과 하동군의 진교면, 금성면, 금남면의 일부 지역이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이 현재의 곤양천이며 지도 아래쪽이 사천만이다. 군현명이 면 명칭으로 격하되었지만 남해고속국도 곤양분기점 인근에 옛 읍치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읍치의 남쪽이 바다가 되고 북쪽 3리 지점에 있는 동곡산이 진산이 된다. 이 지도는 서쪽이 위가 되도록 그렸다. 객사, 군기고, 아사 등 읍성 안의 건물이 왼쪽을 향하는 것은 남향하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옥이 그려진 점이 특이한데 일반적으로 옥은 읍성 안에 존재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읍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노량이 표시되었는데 금남면 노량리에 해당한다. 이곳과 남해를 연결하는 다리가 남해대교이다. 이 일대에서 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다. 노량초등학교 등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남해로 연결되는 육로상에 양포역과 금양역이 보이며 그 옆에 진교장이 표시되었다. 진교장을 따서 현재의 진교면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바다와 접한 곳에 선소를 그렸다. 지도 위의 태봉은 세종대왕의 태를 안치한 것이다. 태봉 오른쪽 금성이 표시되었는데 곤명면 금성리에 있었다. 이 밖에 사찰, 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군위현 (軍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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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중앙고속국도가 관통하는 지역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군위군 군위읍 동부리, 서부리 일대이다. 관할범위는 군위읍, 효령면, 소보면 등이다. 진산은 마정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치의 동남 5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현대 지형도 상으로 보면 현의 남쪽에 위치하는 402.4m의 산이다. 이 지도에는 위쪽에 그려졌는데 진산을 위에 표시하기 위해 지도의 남북 방향을 바꾸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봉수대가 있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북쪽(지도의 아래)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표시했는데 객사의 방향만 다른 쪽을 향하게 그리고 있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 등은 표시하지 않았다. 이 지도에는 객사 건물이 두 개 등장한다. 현재 읍치 오른쪽에 또다른 객사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 효령창이 보이는데 군위의 속현이었던 효령현에 해당하는 곳이다. 현재는 효령면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현재 읍치의 객사 왼쪽 아래의 영귀대는 군위읍 내량리에 위치하였는데 서애 유성룡이 노닐던 곳으로 전해진다. 그 옆의 남계서원은 1627년(인조 5)에 지어졌으며 유성룡을 배향하였다. 지도 위쪽의 소계역은 현재의 효령면 화계리에 있던 역으로 1896년에 폐지되었다. 이밖에 사찰, 누대, 창고, 도로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군위현 주기 (軍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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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중앙고속국도가 관통하는 지역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군위군 군위읍 동부리, 서부리 일대이다. 관할범위는 군위읍, 효령면, 소보면 등이다. 진산은 마정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치의 동남 5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현대 지형도 상으로 보면 현의 남쪽에 위치하는 402.4m의 산이다. 이 지도에는 위쪽에 그려졌는데 진산을 위에 표시하기 위해 지도의 남북 방향을 바꾸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봉수대가 있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북쪽(지도의 아래)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읍치에는 성곽없이 주요 건물만 표시했는데 객사의 방향만 다른 쪽을 향하게 그리고 있다. 여단, 사직단, 성황단 등은 표시하지 않았다. 이 지도에는 객사 건물이 두 개 등장한다. 현재 읍치 오른쪽에 또다른 객사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 효령창이 보이는데 군위의 속현이었던 효령현에 해당하는 곳이다. 현재는 효령면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현재 읍치의 객사 왼쪽 아래의 영귀대는 군위읍 내량리에 위치하였는데 서애 유성룡이 노닐던 곳으로 전해진다. 그 옆의 남계서원은 1627년(인조 5)에 지어졌으며 유성룡을 배향하였다. 지도 위쪽의 소계역은 현재의 효령면 화계리에 있던 역으로 1896년에 폐지되었다. 이밖에 사찰, 누대, 창고, 도로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금산군 (金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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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의 읍치는 현재의 김천시내에 해당하는데 향교가 있던 곳이 교동이다. 충청도의 錦山郡과는 한자가 다르다. 금산군은 현재의 김천시내, 봉산면, 어모면, 대항문, 감문면 일부, 구성면 일부, 조마면, 감천면 일부, 농소면 일부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에 해당한다. 백두대간과 맞닿은 고을로 현재의 충청도 일부가 과거에는 경상도 금산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분수계와 행정구역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읍치 동쪽으로 아산천이 적혀 있는데 지금의 아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감천(감곡천)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감천교가 표시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하천명이 된 것이다. 읍치 앞의 남천과 왼쪽의 북천으로 표시된 것은 현재의 직지천인데 직지사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표시된 것이다. 직지천과 감천을 따라 경부고속도로가 나있다. 이 지도에서도 하천을 따라 도로가 표시되었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현대 도로의 모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 위에 추풍역과 두화원이 표시되었다. 원은 지승지도집의 다른 지도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이 지도에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충청도와의 경계 너머 추풍역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왜유현이 표시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은 오파산으로 현재의 어모면 남산리에 있는 산이다. 왼쪽 위의 직지사는 418년(신라 눌지왕 2)에 창건된 사찰이다. 지도 아래에 김천도역이 보이는데 이 이름이 현재 김천시의 어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이현군)

  • 금산군 주기 (金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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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의 읍치는 현재의 김천시내에 해당하는데 향교가 있던 곳이 교동이다. 충청도의 錦山郡과는 한자가 다르다. 금산군은 현재의 김천시내, 봉산면, 어모면, 대항문, 감문면 일부, 구성면 일부, 조마면, 감천면 일부, 농소면 일부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에 해당한다. 백두대간과 맞닿은 고을로 현재의 충청도 일부가 과거에는 경상도 금산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분수계와 행정구역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읍치 동쪽으로 아산천이 적혀 있는데 지금의 아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감천(감곡천)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감천교가 표시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하천명이 된 것이다. 읍치 앞의 남천과 왼쪽의 북천으로 표시된 것은 현재의 직지천인데 직지사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표시된 것이다. 직지천과 감천을 따라 경부고속도로가 나있다. 이 지도에서도 하천을 따라 도로가 표시되었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현대 도로의 모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 위에 추풍역과 두화원이 표시되었다. 원은 지승지도집의 다른 지도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이 지도에 표시한 점이 이채롭다.  충청도와의 경계 너머 추풍역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왜유현이 표시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은 오파산으로 현재의 어모면 남산리에 있는 산이다. 왼쪽 위의 직지사는 418년(신라 눌지왕 2)에 창건된 사찰이다. 지도 아래에 김천도역이 보이는데 이 이름이 현재 김천시의 어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이현군)

  • 기장현 (機張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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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현은 현재의 포항시에 포함된 호랑이 꼬리 모양에 있던 고을이고 이 지도에 나오는 기장현은 부산광역시에 포함된 기장군 일대이다.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동해남부선 철도의 기장역 북쪽에 위치한다. 낙동정맥 동쪽의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지도 왼쪽 산줄기에 險隘라고 적혀 있다. 읍치 서쪽 읍성 옆에 炭山이 표시되었는데 이 산이 진산이다.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려졌으며 읍성 밖에 원형으로 獄이 표시된 점이 특이하다. 읍성 밖의 제단은 다른 군현 지도에서 등장하지 않는데 이 지도에서는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 등이 잘 표시되어 있다. 읍치 동쪽의 죽성리에는 사적 52호인 죽성리성이 있었다. 나라에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한 봉산이 곳곳에 보인다. 읍성 안을 흘러 바다로 유입되는 청강천은 현재의 죽성천이다. 그 위쪽의 삼성대가 있는 곳은 현재의 일광해수욕장 인근이 된다. 해안을 따라 海倉, 船所, 烽臺가 그려졌다. 도로를 그리면서 大路, 中路 등을 표시하여서 도로의 폭과 중요도를 알려주는 점이 지승의 경상도 다른 군현지도와 차이점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장안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것이다. 현재의 장안읍 장안리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아래에 ‘旧豆毛浦基今移設東萊’라고 적혔는데 수군만호가 있던 鎭이 동래로 이전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이현군)

  • 기장현 주기 (機張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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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현은 현재의 포항시에 포함된 호랑이 꼬리 모양에 있던 고을이고 이 지도에 나오는 기장현은 부산광역시에 포함된 기장군 일대이다.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동해남부선 철도의 기장역 북쪽에 위치한다. 낙동정맥 동쪽의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지도 왼쪽 산줄기에 險隘라고 적혀 있다. 읍치 서쪽 읍성 옆에 炭山이 표시되었는데 이 산이 진산이다.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려졌으며 읍성 밖에 원형으로 獄이 표시된 점이 특이하다. 읍성 밖의 제단은 다른 군현 지도에서 등장하지 않는데 이 지도에서는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 등이 잘 표시되어 있다. 읍치 동쪽의 죽성리에는 사적 52호인 죽성리성이 있었다. 나라에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한 봉산이 곳곳에 보인다. 읍성 안을 흘러 바다로 유입되는 청강천은 현재의 죽성천이다. 그 위쪽의 삼성대가 있는 곳은 현재의 일광해수욕장 인근이 된다. 해안을 따라 海倉, 船所, 烽臺가 그려졌다. 도로를 그리면서 大路, 中路 등을 표시하여서 도로의 폭과 중요도를 알려주는 점이 지승의 경상도 다른 군현지도와 차이점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장안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것이다. 현재의 장안읍 장안리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아래에 ‘旧豆毛浦基今移設東萊’라고 적혔는데 수군만호가 있던 鎭이 동래로 이전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이현군)

  • 김해부 (金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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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김해시 동상동, 서상동 일대이며 현재의 김해시와 창원시, 부산광역시의 일부를 관할하였다. 읍성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성문을 표시하였고 객사, 아사 등의 건물이 보인다. 읍성 밖에는 향교만 보이고 성황단, 여단, 사직단을 찾을 수 없다. 김해부의 진산은 분산인데 인제대학교 서쪽에 있는 분성산에 해당한다. 신라에 합병된 금관가야이며 김수로왕이 시조가 되는 김해 김씨의 본향이다. 읍치 왼쪽에 수로왕릉이 그려졌고 그 위쪽에 왕비인 김해허씨의 후릉이 그려졌다. 구지봉은 龜旨歌와 관련된 봉우리이다. 현재 김해 중심부에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김해는 낙남정맥과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읍치 오른쪽의 낙동강이 남해로 유입되어 삼각주가 발달하였고 김해평야로 유명한 지역이다. 하천을 따라 농사를 위한 田과 池가 지도에 등장하고 있다. 지도 오른쪽에 바다로 삼차수로 적힌 지역이 서낙동강과 낙동강이 바다로 유입되는 지역이다. 아래쪽의 명지도는 현재 명지동의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인근에 김해국제공항이 있다. 현재는 하천의 퇴적과 매립으로 다른 모습이며 강과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그렸다. 바다에는 봉대, 전선소가 보인다. 지도 북쪽에 낙동강의 여러 나루가 표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삼량진이다. 삼량진은 밀양시 삼량진읍 삼량리에 있던 것으로 처음에는 나루터 중심의 교통요지였으나 철도의 도입이후 경전선과 경부선이 교차하는 철도교통의 요지가 되었다(이현군).

  • 김해부 주기 (金海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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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김해시 동상동, 서상동 일대이며 현재의 김해시와 창원시, 부산광역시의 일부를 관할하였다. 읍성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성문을 표시하였고 객사, 아사 등의 건물이 보인다. 읍성 밖에는 향교만 보이고 성황단, 여단, 사직단을 찾을 수 없다. 김해부의 진산은 분산인데 인제대학교 서쪽에 있는 분성산에 해당한다. 신라에 합병된 금관가야이며 김수로왕이 시조가 되는 김해 김씨의 본향이다. 읍치 왼쪽에 수로왕릉이 그려졌고 그 위쪽에 왕비인 김해허씨의 후릉이 그려졌다. 구지봉은 龜旨歌와 관련된 봉우리이다. 현재 김해 중심부에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김해는 낙남정맥과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읍치 오른쪽의 낙동강이 남해로 유입되어 삼각주가 발달하였고 김해평야로 유명한 지역이다. 하천을 따라 농사를 위한 田과 池가 지도에 등장하고 있다. 지도 오른쪽에 바다로 삼차수로 적힌 지역이 서낙동강과 낙동강이 바다로 유입되는 지역이다. 아래쪽의 명지도는 현재 명지동의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인근에 김해국제공항이 있다. 현재는 하천의 퇴적과 매립으로 다른 모습이며 강과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그렸다. 바다에는 봉대, 전선소가 보인다. 지도 북쪽에 낙동강의 여러 나루가 표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삼량진이다. 삼량진은 밀양시 삼량진읍 삼량리에 있던 것으로 처음에는 나루터 중심의 교통요지였으나 철도의 도입이후 경전선과 경부선이 교차하는 철도교통의 요지가 되었다(이현군).

  • 남해현 (南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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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해군 지역인데 창선면은 진주목의 관할구역이었다. 남해읍치는 남해읍의 동쪽인 북변리 남변리, 서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노량진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남해대교가 놓여진 곳이다. 남해바다의 섬으로 존재하던 군현으로 통영과 연결된다.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 되고 아래쪽이 북쪽이 된다.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점을 지도에 적용하였다. 지도에 보이는 충렬사는 현재 설천면 노량리에 남아있는데 1662년(현종 4)에 賜額받았으며 이순신 장군을 배향하였다. 그 오른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지금의 차면리 해안에 이락사가 있는데 충무공 전몰유적지이다. 고현면 왼쪽에 고현성이 그려졌다. 읍성 오른쪽에 표시된 망운산(서면)이 남해의 진산이다. 읍성은 사각형의 성으로 그리고 그 안에 객사, 아사, 창을 비교적 간략하게 그렸다. 읍성 아래에 선소가 표시되었는데 남해읍 선소리에 해당한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봉대, 진, 보 등이 많이 보인다. 진보를 마치 성처럼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에 여러 섬이 그려진 곳은 한려해상 국립공원 지역이다. 그 아래 상주포보가 그려진 곳은 상주면 상주리 일대일대 지금의 상주해수욕장 인근 지역이다. 그 왼쪽의 미조항진은 미조면 미조리에 있던 진이다. 아래의 노량진에서 읍성 옆을 지나는 도로는 현재의 19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이다.(이현군)

  • 남해현 주기 (南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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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남해군 지역인데 창선면은 진주목의 관할구역이었다. 남해읍치는 남해읍의 동쪽인 북변리 남변리, 서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노량진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남해대교가 놓여진 곳이다. 남해바다의 섬으로 존재하던 군현으로 통영과 연결된다.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 되고 아래쪽이 북쪽이 된다.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점을 지도에 적용하였다. 지도에 보이는 충렬사는 현재 설천면 노량리에 남아있는데 1662년(현종 4)에 賜額받았으며 이순신 장군을 배향하였다. 그 오른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지금의 차면리 해안에 이락사가 있는데 충무공 전몰유적지이다. 고현면 왼쪽에 고현성이 그려졌다. 읍성 오른쪽에 표시된 망운산(서면)이 남해의 진산이다. 읍성은 사각형의 성으로 그리고 그 안에 객사, 아사, 창을 비교적 간략하게 그렸다. 읍성 아래에 선소가 표시되었는데 남해읍 선소리에 해당한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봉대, 진, 보 등이 많이 보인다. 진보를 마치 성처럼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에 여러 섬이 그려진 곳은 한려해상 국립공원 지역이다. 그 아래 상주포보가 그려진 곳은 상주면 상주리 일대일대 지금의 상주해수욕장 인근 지역이다. 그 왼쪽의 미조항진은 미조면 미조리에 있던 진이다. 아래의 노량진에서 읍성 옆을 지나는 도로는 현재의 19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이다.(이현군)

  • 단성현 (丹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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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산청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대전 통영간 고속국도의 단성 분기점 북쪽에 읍치가 있었다. 관할범위는 단성면, 신등면, 신안면, 생비량면 등이다. 지도에 표시된 향교는 지금의 산청 2터널 동쪽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지리산국립공원이 있고 북쪽에 황매산(합천군 대병면 경계)에 있다. 이 두 산이 단성현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지만 이 두 산의 맥이 단성으로 연결된다는 측면에서 지도 북쪽에 표시하였다. ‘黃梅山來’라고 적어 연결성을 강조하고 오른쪽에는 ‘黃梅山路’라고 적어 놓았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읍치 바로 뒤쪽에 해당하는 來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객사 오른쪽의 하천은 남강이며 진주시로 유입된다. 읍치 오른쪽 하천변에 바위를 연이어 그리고 赤壁이라고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적벽 아래 서원이 보이는데 그 이름을 문익점서원이라고 적었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시험적으로 재배한 곳이 단성인데 그 문익점을 배향한 서원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그 오른쪽의 하천이름을 따서 도천서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이름에 人名을 넣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읍치 오른쪽 위에 단계창이 보인다. 단성현은 丹溪縣과 江城縣을 합한 것이다. 옛 단계현의 중심지가 이곳인데 현재의 신등면 단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이 밖에 봉수대, 역원, 도로, 고개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이현군)

  • 단성현 주기 (丹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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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산청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대전 통영간 고속국도의 단성 분기점 북쪽에 읍치가 있었다. 관할범위는 단성면, 신등면, 신안면, 생비량면 등이다. 지도에 표시된 향교는 지금의 산청 2터널 동쪽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지리산국립공원이 있고 북쪽에 황매산(합천군 대병면 경계)에 있다. 이 두 산이 단성현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지만 이 두 산의 맥이 단성으로 연결된다는 측면에서 지도 북쪽에 표시하였다. ‘黃梅山來’라고 적어 연결성을 강조하고 오른쪽에는 ‘黃梅山路’라고 적어 놓았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읍치 바로 뒤쪽에 해당하는 來山이 진산에 해당한다. 객사 오른쪽의 하천은 남강이며 진주시로 유입된다. 읍치 오른쪽 하천변에 바위를 연이어 그리고 赤壁이라고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적벽 아래 서원이 보이는데 그 이름을 문익점서원이라고 적었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시험적으로 재배한 곳이 단성인데 그 문익점을 배향한 서원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그 오른쪽의 하천이름을 따서 도천서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이름에 人名을 넣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읍치 오른쪽 위에 단계창이 보인다. 단성현은 丹溪縣과 江城縣을 합한 것이다. 옛 단계현의 중심지가 이곳인데 현재의 신등면 단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이 밖에 봉수대, 역원, 도로, 고개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이현군)

  • 대구부 (大丘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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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 동남쪽에서 나오는 하천은 신천이며 신천이 유입되어 읍치 북쪽에 표시된 하천은 금호강이다. 이 하천은 지도 왼쪽의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 지도에서는 광다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행정구역명의 변동이 심한 지역이라 현재와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자연환경을 기초로 비정하면 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지금의 논공읍,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북구, 수성구 동쪽은 대구부에 관할구역이 아니었으며 청도군의 일부지역이 대구부에 포함된다. 이 지도에서는 坊과 面을 동시에 사용하는 이채롭다. 대구부의 읍치는 중구의 남성동, 동성동 일대로 지명으로 과거 읍성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지금도 대구 시내 중심부지역에 해당한다. 읍성 안에 객사와 더불어 감영, 진영, 중영이 보이는데 대구에 경상도 감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구의 경상감영공원을 통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읍성 밖에 향교와 3개의 제단(사직단, 성황단, 여단)이 배치된 것이 전형적인 성밖 배치구조에 부합된다. 서문 밖에 그려진 南池는 현재의 성당못으로 보인다. 읍치 서북쪽에 達成이 보이는데 지금은 달성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구의 진산은 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남쪽 3리에 있는 연귀산이라 기록하였는데 이 지도의 남문 밖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북쪽에 팔공산이 보이는데 원래 공산이었던 것을 견훤과 왕건의 전투 이후에 팔공산으로 개칭되었다고 하며 표충사는 신숭겸, 김락을 배향한 곳이다. 팔공산에는 동화사 등 유명 사찰들이 들어서 있다.(이현군)

  • 대구부 주기 (大丘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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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 동남쪽에서 나오는 하천은 신천이며 신천이 유입되어 읍치 북쪽에 표시된 하천은 금호강이다. 이 하천은 지도 왼쪽의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 지도에서는 광다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행정구역명의 변동이 심한 지역이라 현재와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자연환경을 기초로 비정하면 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지금의 논공읍,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북구, 수성구 동쪽은 대구부에 관할구역이 아니었으며 청도군의 일부지역이 대구부에 포함된다. 이 지도에서는 坊과 面을 동시에 사용하는 이채롭다. 대구부의 읍치는 중구의 남성동, 동성동 일대로 지명으로 과거 읍성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지금도 대구 시내 중심부지역에 해당한다. 읍성 안에 객사와 더불어 감영, 진영, 중영이 보이는데 대구에 경상도 감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구의 경상감영공원을 통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읍성 밖에 향교와 3개의 제단(사직단, 성황단, 여단)이 배치된 것이 전형적인 성밖 배치구조에 부합된다. 서문 밖에 그려진 南池는 현재의 성당못으로 보인다. 읍치 서북쪽에 達成이 보이는데 지금은 달성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구의 진산은 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남쪽 3리에 있는 연귀산이라 기록하였는데 이 지도의 남문 밖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북쪽에 팔공산이 보이는데 원래 공산이었던 것을 견훤과 왕건의 전투 이후에 팔공산으로 개칭되었다고 하며 표충사는 신숭겸, 김락을 배향한 곳이다. 팔공산에는 동화사 등 유명 사찰들이 들어서 있다.(이현군)

  • 동래부 (東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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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동래구 수안동, 복천동, 안락동 등이며 부산광역시에서 기장군(기장현), 북구(양산군), 강서구를 제외한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낙동정맥의 끝에 위치하고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읍치 북쪽의 윤산이 진산이다. 과거 동래의 속현이었던 동편고현이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읍성이 있었으나 그리지 않았고 객사와 주요 건물을 그렸다. 성 밖의 향교와 성황사, 여단, 사직단을 그렸다. 사직단은 사직동, 사직초등학교 등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왼쪽의 큰 산성은 금정산성으로 현재 금정구의 명칭은 이것을 딴 것이다. 그 옆의 범어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는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산성 오른쪽에 온정이 보이는데 현재의 동래온천으로 동래구 온천동에 있다. 현재는 부산이 통용되는 지명이지만, 과거의 중심부는 동래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 해안가에 부산진이 표시되었는데 여기서 현재의 부산광역시 지명이 나왔다. 바다에 접해 있고 일본과 가까워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대마도가 표시되었고 주요 浦와 봉수대의 명칭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왜관이 지도 왼쪽에 등장하고 있다. 좌수영은 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으로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 있었다. 해안에 명승지들을 표시하였다. 해수욕장과 온천으로 유명한 해운대, 오륙도 섬, 동백섬, 태종도, 다대동의 몰운대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 왼쪽의 이름없는 섬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을숙도로 보인다.(이현군)

  • 동래부 주기 (東萊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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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동래구 수안동, 복천동, 안락동 등이며 부산광역시에서 기장군(기장현), 북구(양산군), 강서구를 제외한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낙동정맥의 끝에 위치하고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읍치 북쪽의 윤산이 진산이다. 과거 동래의 속현이었던 동편고현이 지도 왼쪽에 표시되었다. 읍성이 있었으나 그리지 않았고 객사와 주요 건물을 그렸다. 성 밖의 향교와 성황사, 여단, 사직단을 그렸다. 사직단은 사직동, 사직초등학교 등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왼쪽의 큰 산성은 금정산성으로 현재 금정구의 명칭은 이것을 딴 것이다. 그 옆의 범어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는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산성 오른쪽에 온정이 보이는데 현재의 동래온천으로 동래구 온천동에 있다. 현재는 부산이 통용되는 지명이지만, 과거의 중심부는 동래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쪽 해안가에 부산진이 표시되었는데 여기서 현재의 부산광역시 지명이 나왔다. 바다에 접해 있고 일본과 가까워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대마도가 표시되었고 주요 浦와 봉수대의 명칭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왜관이 지도 왼쪽에 등장하고 있다. 좌수영은 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으로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 있었다. 해안에 명승지들을 표시하였다. 해수욕장과 온천으로 유명한 해운대, 오륙도 섬, 동백섬, 태종도, 다대동의 몰운대 등이 지도에 등장한다. 왼쪽의 이름없는 섬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을숙도로 보인다.(이현군)

  • 문경현 (聞慶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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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로 많이 알려진 경상북도 문경시 일대의 지도이다. 문경현의 읍치는 문경읍의 상리 교촌리 일대로 문경새재 도립공원 동남쪽에 위치한다. 관할범위는 문경읍, 마성면, 가은읍, 호계면 일부 지역인데 가은읍은 문경현의 속현이었던 加恩縣 지역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가현내면이 보이고 그 옆에는 가은창이 있어 과거를 반영하고 있다. 백두대간과 접한 지역으로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지도 북쪽에 새재, 즉 鳥嶺의 산성이 그려졌다. 한양에서 경상도로 통하던 영남대로의 주요 관문이었다. 문경현의 진산은 조령이 아니라 산성과 읍치 중간에 표시된 주흘산이다. 조령산성에서 나오는 읍치 왼쪽의 하천은 초곡천이며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신북천이다. 주흘산 왼쪽에 초곡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두 하천이 만나서 조령천이라는 이름으로 남쪽으로 흘러 영강에 합류되어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발원지에서 하류까지 하나의 흐름이지만, 구간마다 하천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경읍치에서 산성으로 연결된 도로를 따라 동성문, 중성문, 조령문이 적혀 있는데 현재의 조령 제 1, 제 2, 제 3 관문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의 조령산성은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대에 쌓은 것이다. 지도 아래의 고모성은 신라 때 방어를 위해 쌓은 것이다. 문경의 역원 중 가장 큰 것은 지도 오른쪽 아래의 유곡역이다. 察訪驛으로 18개 역을 관장하였는데 문경시 유곡동에 있었다. 높고 깊은 산줄기 사이로 여러 사찰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현군)

  • 문경현 주기 (聞慶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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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로 많이 알려진 경상북도 문경시 일대의 지도이다. 문경현의 읍치는 문경읍의 상리 교촌리 일대로 문경새재 도립공원 동남쪽에 위치한다. 관할범위는 문경읍, 마성면, 가은읍, 호계면 일부 지역인데 가은읍은 문경현의 속현이었던 加恩縣 지역이다. 지도 왼쪽 아래에 가현내면이 보이고 그 옆에는 가은창이 있어 과거를 반영하고 있다. 백두대간과 접한 지역으로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지도 북쪽에 새재, 즉 鳥嶺의 산성이 그려졌다. 한양에서 경상도로 통하던 영남대로의 주요 관문이었다. 문경현의 진산은 조령이 아니라 산성과 읍치 중간에 표시된 주흘산이다. 조령산성에서 나오는 읍치 왼쪽의 하천은 초곡천이며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신북천이다. 주흘산 왼쪽에 초곡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두 하천이 만나서 조령천이라는 이름으로 남쪽으로 흘러 영강에 합류되어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발원지에서 하류까지 하나의 흐름이지만, 구간마다 하천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경읍치에서 산성으로 연결된 도로를 따라 동성문, 중성문, 조령문이 적혀 있는데 현재의 조령 제 1, 제 2, 제 3 관문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의 조령산성은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대에 쌓은 것이다. 지도 아래의 고모성은 신라 때 방어를 위해 쌓은 것이다. 문경의 역원 중 가장 큰 것은 지도 오른쪽 아래의 유곡역이다. 察訪驛으로 18개 역을 관장하였는데 문경시 유곡동에 있었다. 높고 깊은 산줄기 사이로 여러 사찰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현군)

  • 밀양부 (密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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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밀양시내 내 1동, 내 2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청도면(청도군 영역)을 제외한 현재의 밀양시이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밀양강으로 남쪽의 삼랑진(삼랑진읍 삼랑리)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 지명표기가 보인다. 밀양은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도와의 경계가 되는 북쪽의 화악산이 진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되었다. 지도에서 읍성은 사행하는 밀양강의 모양에 맞추어 그려서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읍성 안에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밀주관으로 적힌 건물이 객사로 보인다. 밀양은 推火, 密城, 密州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밀주는 고려 성종대에 붙여진 고을 이름이다. 옛 이름을 따서 객사 건물에 붙인 것이다. 남문 인근의 영남루는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밀양교 인근에 위치한다. 읍치의 동쪽과 남쪽에서 강과 읍성을 따라 숲이 형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방풍이나 비보의 측면에서 숲을 조성하였는데 그 전형을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봉산은 한양의 禁山처럼 벌목을 금지하여 쓸만한 재목을 얻기 위한 곳이다. 읍치 서쪽에 향교가 보이며 서원, 사찰이 지도에 그려졌다. 지도 아래쪽의 국농소는 국가에서 경영하는 농장이며 하천의 영향으로 여러 곳에 田이 나타난다. 하천을 따라 창고들이 들어서 있으며 역관도 보인다. 읍치의 동쪽으로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는데 과거 수운의 중심지였던 삼랑진은 경부선과 경전선이 교차하는 기차역이다(이현군).

  • 밀양부 주기 (密陽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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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밀양시내 내 1동, 내 2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청도면(청도군 영역)을 제외한 현재의 밀양시이다. 읍치 동쪽의 하천은 밀양강으로 남쪽의 삼랑진(삼랑진읍 삼랑리)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 지명표기가 보인다. 밀양은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도와의 경계가 되는 북쪽의 화악산이 진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되었다. 지도에서 읍성은 사행하는 밀양강의 모양에 맞추어 그려서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읍성 안에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밀주관으로 적힌 건물이 객사로 보인다. 밀양은 推火, 密城, 密州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밀주는 고려 성종대에 붙여진 고을 이름이다. 옛 이름을 따서 객사 건물에 붙인 것이다. 남문 인근의 영남루는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밀양교 인근에 위치한다. 읍치의 동쪽과 남쪽에서 강과 읍성을 따라 숲이 형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방풍이나 비보의 측면에서 숲을 조성하였는데 그 전형을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봉산은 한양의 禁山처럼 벌목을 금지하여 쓸만한 재목을 얻기 위한 곳이다. 읍치 서쪽에 향교가 보이며 서원, 사찰이 지도에 그려졌다. 지도 아래쪽의 국농소는 국가에서 경영하는 농장이며 하천의 영향으로 여러 곳에 田이 나타난다. 하천을 따라 창고들이 들어서 있으며 역관도 보인다. 읍치의 동쪽으로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는데 과거 수운의 중심지였던 삼랑진은 경부선과 경전선이 교차하는 기차역이다(이현군).

  • 봉화현 (奉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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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지도 북쪽에 높고 험준하게 강한 맥세를 표현하고 태백산과 황장산을 그려 넣었다. 황장산은 나라에 필요한 재목을 구하기 위한 봉산이기도 했다. 그 아래에는 태백산 조선왕조실록 사고를 그려넣고 주변 건물인 실록각, 선원각을 표시하였다. 각화사가 함께 그려졌다. 그 남쪽이 봉화현의 읍치가 되는데 문수산, 광대산과 연결되는 금륜치(금륜봉)이 봉화의 진산이 된다. 일반적으로 진산의 맥이 뻗어나온 지점에 객사를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아사를 그리고 객사는 약간 동쪽에 그렸다. 지방 양반들이 중심이 되는 향청 건물을 따로 표시하였다. 왼쪽에는 향교가 그려졌다. 읍치는 봉화읍내가 아닌 봉성면 봉성리에 있었다. 영동선 철도의 봉성역 남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봉화읍은 대부분 안동부에 속하였고 일부는 순흥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관할구역은 봉성면, 명호면, 상운면 일부, 물야면 일부, 춘양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왼쪽 위의 물야면은 물야부곡이 있던 곳이다. 지도 왼쪽에 이름없이 그려진 서원은 文岩書院으로 보이는데 1694년(숙종 20)에 사액 받았으며 李滉과 趙穆을 배향하였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강대는 낙동강 변에 위치한 명승지이다. 지도 오른쪽 위에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도로만 그리고 역원을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다.(이현군)

  • 봉화현 주기 (奉化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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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지도 북쪽에 높고 험준하게 강한 맥세를 표현하고 태백산과 황장산을 그려 넣었다. 황장산은 나라에 필요한 재목을 구하기 위한 봉산이기도 했다. 그 아래에는 태백산 조선왕조실록 사고를 그려넣고 주변 건물인 실록각, 선원각을 표시하였다. 각화사가 함께 그려졌다. 그 남쪽이 봉화현의 읍치가 되는데 문수산, 광대산과 연결되는 금륜치(금륜봉)이 봉화의 진산이 된다. 일반적으로 진산의 맥이 뻗어나온 지점에 객사를 그리는데 이 지도에서는 아사를 그리고 객사는 약간 동쪽에 그렸다. 지방 양반들이 중심이 되는 향청 건물을 따로 표시하였다. 왼쪽에는 향교가 그려졌다. 읍치는 봉화읍내가 아닌 봉성면 봉성리에 있었다. 영동선 철도의 봉성역 남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봉화읍은 대부분 안동부에 속하였고 일부는 순흥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관할구역은 봉성면, 명호면, 상운면 일부, 물야면 일부, 춘양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왼쪽 위의 물야면은 물야부곡이 있던 곳이다. 지도 왼쪽에 이름없이 그려진 서원은 文岩書院으로 보이는데 1694년(숙종 20)에 사액 받았으며 李滉과 趙穆을 배향하였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강대는 낙동강 변에 위치한 명승지이다. 지도 오른쪽 위에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가 표시되었다. 도로만 그리고 역원을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다.(이현군)

  • 비안현 (比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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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의성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비안면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의성군의 비안면, 안계면, 구천면, 안사면 일부 지역이었다. 비안의 속현으로는 安貞縣이 있었는데 현재의 안계면 안정리 일대이다. 안정창이 지도에 표시되었고 그 왼쪽 에 안계역이 그려져 있어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진산은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는 성황산이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단, 성황단이 설치되었는데 성황단이 있던 산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낙동강에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에는 바위를 회화적으로 그린 점이 눈에 띈다. 옛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지역의 이미지 중심으로 그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읍치는 성곽없이 건물만 몇 개 그렸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안에 적어 넣어 구별이 되도록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치 뿐만 아니라 사찰들도 독립적 형국 안에 표시한 점이 눈에 띈다. 이 밖에 누정을 그려 넣었다. 향교와 읍치 중간에 망북정이 강변에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간점산과 대암산에 봉수가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도로를 표시하고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고개가 보인다. 지도 위쪽의 金堂峴은 현재의 비안면 자락리에서 안평면 금곡리 금당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이현군)

  • 비안현 주기 (比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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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는 경북 의성군에 포함된 군현으로 비안면 동부리,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의성군의 비안면, 안계면, 구천면, 안사면 일부 지역이었다. 비안의 속현으로는 安貞縣이 있었는데 현재의 안계면 안정리 일대이다. 안정창이 지도에 표시되었고 그 왼쪽 에 안계역이 그려져 있어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진산은 이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는 성황산이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단, 성황단이 설치되었는데 성황단이 있던 산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위천으로 낙동강에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에는 바위를 회화적으로 그린 점이 눈에 띈다. 옛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지역의 이미지 중심으로 그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읍치는 성곽없이 건물만 몇 개 그렸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안에 적어 넣어 구별이 되도록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치 뿐만 아니라 사찰들도 독립적 형국 안에 표시한 점이 눈에 띈다. 이 밖에 누정을 그려 넣었다. 향교와 읍치 중간에 망북정이 강변에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간점산과 대암산에 봉수가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도로를 표시하고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고개가 보인다. 지도 위쪽의 金堂峴은 현재의 비안면 자락리에서 안평면 금곡리 금당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이현군)

  • 사천현 (泗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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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사천시(삼천포시) 일부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사천읍 선인리, 정의리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사천읍, 사남면, 정동면, 용현면과 사천시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아래에 그려진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다. 자연 지형과 성문의 명칭, 면 명칭을 통해 동쪽을 위로 향하게 그린 지도임을 알수 있다. 읍치가 관할 구역의 북서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왼쪽 아래에 그려졌다. 읍치 지역을 크게 그렸는데 현대 지도와 달리 고지도는 중요한 부분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특성을 가진다. 진산은 동쪽의 두읍벌산인데 이 지도에서는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남쪽)의 사수천은 현재의 사천강에 해당한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 안에 표시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성을 그리고 그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렸다. 사천강 오른쪽 하천은 현재의 죽전천으로 판단된다. 하천 주변에 저수지, 제언 등이 표시되었다. 지도 위쪽에 書齋라고 적힌 곳은 李楨(1512-1571)의 書齋였다. 그 아래의 귀계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였다. 해안가에는 지역 특성을 반영한 海倉, 船所, 兵倉, 巡倉, 統倉 등이 보인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용현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있고 선진리에는 사천성이 있었다. 바다에는 주변의 섬들이 그려졌다.(이현군)

  • 사천현 주기 (泗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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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사천시(삼천포시) 일부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사천읍 선인리, 정의리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사천읍, 사남면, 정동면, 용현면과 사천시내 일부 지역이다. 지도 아래에 그려진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다. 자연 지형과 성문의 명칭, 면 명칭을 통해 동쪽을 위로 향하게 그린 지도임을 알수 있다. 읍치가 관할 구역의 북서쪽에 위치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왼쪽 아래에 그려졌다. 읍치 지역을 크게 그렸는데 현대 지도와 달리 고지도는 중요한 부분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특성을 가진다. 진산은 동쪽의 두읍벌산인데 이 지도에서는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오른쪽(남쪽)의 사수천은 현재의 사천강에 해당한다. 다른 지도에서는 면 명칭을 네모 안에 표시하지만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읍성을 그리고 그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가 남쪽을 향하게 그렸다. 사천강 오른쪽 하천은 현재의 죽전천으로 판단된다. 하천 주변에 저수지, 제언 등이 표시되었다. 지도 위쪽에 書齋라고 적힌 곳은 李楨(1512-1571)의 書齋였다. 그 아래의 귀계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였다. 해안가에는 지역 특성을 반영한 海倉, 船所, 兵倉, 巡倉, 統倉 등이 보인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용현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있고 선진리에는 사천성이 있었다. 바다에는 주변의 섬들이 그려졌다.(이현군)

  • 산청현 (山淸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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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동국여지승람, 여지도 등에는 山陰縣으로 등장한다. 1767년(영조 43)에 산음에서 산청으로 바꾸었다. 현재의 산청군은 조선시대 산청(산음)과 단성을 합한 것이다. 읍치는 산청읍 산청리 일대에 해당하며 경남 산청군의 산청읍, 생초면, 금서면, 차황면, 오부면 등이 관할 범위였다. 이 지도 왼쪽 위에 智異山下脈이라고 적혔는데 지리산의 맥이 읍치에까지 연결된 것처럼 보이도록 그렸다. 산청의 남서쪽에 지리산 국립공원이 있다. 오른쪽의 황매산은 차황면과 합천군 대병면의 경계에 해당하는 1108m의 산이다. 이 산 너머에 합천댐 건설로 생긴 합천호가 있다. 읍치 왼쪽에 鏡湖水가 적혔는데 현재 경호강으로 불린다. 읍치 남쪽에 돌을 세 개 그리고 造山이라 적었는데 비보풍수의 측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읍치에 성곽없이 여러 건물들을 그렸는데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건물의 수가 훨씬 많다. 향청까지 객사 뒤에 그려 넣었다. 읍치 주변의 제단들은 그려 넣지 않았다. 북쪽의 서계서원은 1677년(숙종 3년)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오른쪽 아래의 정곡역은 산청읍 정곡리에 있었던 역원이다. 고개는 일반적으로 嶺, 峙 등으로 표시하지만 우리말 발음을 따라 한자를 만들어 古介로 쓰기도 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그 표기가 나타난다. 이 밖에 쌍계사 등의 사찰, 창고, 연못, 교량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산청현 주기 (山淸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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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동국여지승람, 여지도 등에는 山陰縣으로 등장한다. 1767년(영조 43)에 산음에서 산청으로 바꾸었다. 현재의 산청군은 조선시대 산청(산음)과 단성을 합한 것이다. 읍치는 산청읍 산청리 일대에 해당하며 경남 산청군의 산청읍, 생초면, 금서면, 차황면, 오부면 등이 관할 범위였다. 이 지도 왼쪽 위에 智異山下脈이라고 적혔는데 지리산의 맥이 읍치에까지 연결된 것처럼 보이도록 그렸다. 산청의 남서쪽에 지리산 국립공원이 있다. 오른쪽의 황매산은 차황면과 합천군 대병면의 경계에 해당하는 1108m의 산이다. 이 산 너머에 합천댐 건설로 생긴 합천호가 있다. 읍치 왼쪽에 鏡湖水가 적혔는데 현재 경호강으로 불린다. 읍치 남쪽에 돌을 세 개 그리고 造山이라 적었는데 비보풍수의 측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읍치에 성곽없이 여러 건물들을 그렸는데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건물의 수가 훨씬 많다. 향청까지 객사 뒤에 그려 넣었다. 읍치 주변의 제단들은 그려 넣지 않았다. 북쪽의 서계서원은 1677년(숙종 3년)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오른쪽 아래의 정곡역은 산청읍 정곡리에 있었던 역원이다. 고개는 일반적으로 嶺, 峙 등으로 표시하지만 우리말 발음을 따라 한자를 만들어 古介로 쓰기도 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그 표기가 나타난다. 이 밖에 쌍계사 등의 사찰, 창고, 연못, 교량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삼가현 (三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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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합천군 삼가면의 중심부인 금리 일대가 읍치가 되며 합천군의 삼가면, 가회면, 쌍백면, 대병면, 봉산면 일부, 거창군 신원면이 관할 구역이었다. 현재의 합천군은 조선시대 삼가현, 초계군, 합천군 등이 합쳐진 것이다. 읍치 왼쪽 위에 악견산, 금성산성, 허굴산성이 보이는데 이를 경계로 하천의 분수계가 나누어진다. 남쪽 읍치 부근의 하천은 남류하여 남강에 합류되고 지도 북쪽의 하천은 황강으로 들어간다. 악견산, 허굴산, 금성산 옆에 사방이 높고 막혀 있어 산성이 설만한 자리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대병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풍속이 굳세고 사납다고 기록된 것은 이 지역의 산세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금성산성의 봉수대는 곽재우 장군이 봉화를 올렸다고 지역민들이 전한다. 그 오른쪽의 대평리가 지금 대병면의 어원이 되었다. 왼쪽 황매산 위에 병목면이 표시되었는데 대병면에 속하는 지역으로 그 옆에 ‘僧無學所生地’라고 적혀있다. 조선초기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탄생지라는 말이다. 악견산과 금성산성의 북쪽에 합천댐이 위치하고 있어 북쪽에 그려진 하천 주변은 수몰되었다. 고현창이라고 적힌 부분은 대병면 창리 일대로 지금은 수몰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전에 三岐縣의 현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왼쪽 아래에 서면 가회리가 현재의 가회면이 된다. 읍치에는 읍성과 객사 등의 건물을 그렸다. 지도 아래부분에 남명 조식의 태생지임을 적어 놓았다.(이현군)

  • 삼가현 주기 (三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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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합천군 삼가면의 중심부인 금리 일대가 읍치가 되며 합천군의 삼가면, 가회면, 쌍백면, 대병면, 봉산면 일부, 거창군 신원면이 관할 구역이었다. 현재의 합천군은 조선시대 삼가현, 초계군, 합천군 등이 합쳐진 것이다. 읍치 왼쪽 위에 악견산, 금성산성, 허굴산성이 보이는데 이를 경계로 하천의 분수계가 나누어진다. 남쪽 읍치 부근의 하천은 남류하여 남강에 합류되고 지도 북쪽의 하천은 황강으로 들어간다. 악견산, 허굴산, 금성산 옆에 사방이 높고 막혀 있어 산성이 설만한 자리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대병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풍속이 굳세고 사납다고 기록된 것은 이 지역의 산세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금성산성의 봉수대는 곽재우 장군이 봉화를 올렸다고 지역민들이 전한다. 그 오른쪽의 대평리가 지금 대병면의 어원이 되었다. 왼쪽 황매산 위에 병목면이 표시되었는데 대병면에 속하는 지역으로 그 옆에 ‘僧無學所生地’라고 적혀있다. 조선초기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탄생지라는 말이다. 악견산과 금성산성의 북쪽에 합천댐이 위치하고 있어 북쪽에 그려진 하천 주변은 수몰되었다. 고현창이라고 적힌 부분은 대병면 창리 일대로 지금은 수몰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전에 三岐縣의 현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왼쪽 아래에 서면 가회리가 현재의 가회면이 된다. 읍치에는 읍성과 객사 등의 건물을 그렸다. 지도 아래부분에 남명 조식의 태생지임을 적어 놓았다.(이현군)

  • 상주목 (尙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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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목은 이안면, 공검면, 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의성군 단밀면, 단북면, 문경시 산북면, 산양면, 영순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상주시내의 성동동, 서문동, 서성, 성하, 남성 등의 지명으로 과거 읍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표시된 객사는 상주시내 서성동에 있었는데 고려 때 창건하였다가 1526년(중종 21)에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상주 경찰서로 사용되었다. 동헌은 서성동의 상주 극장 앞에 있었다. 읍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병성천이다. 지도 오른쪽에 낙동역, 낙동진 등 洛東이 지명으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현재는 낙동면이라는 지명으로 사용된다. 지도 왼쪽의 산줄기는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백두대간의 일부이다. 산줄기를 따라 여러 사찰이 표시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속리산이 표시되었다. 변화가 심한 지역의 경우 조선시대 행정구역명이 사용되지 않지만 이 지도에 등장하는 은척면, 화북면, 화서면, 화동면, 외서면, 내서면 등 거의 대부분이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낙동강에 倉과 나루가 표시되었고 육로상에 낙서역(내서면 낙서리) 등 역이 표시되었다. 읍성 밖에는 성황단, 향교, 여제단이 표시되었다. 지도 북쪽의 은척면에 견훤산성이 그려졌는데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사벌성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사벌성은 읍치 동쪽 병풍산의 맞은편 지금의 사벌면 화달리에 있었다(이현군)

  • 상주목 주기 (尙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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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목은 이안면, 공검면, 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의성군 단밀면, 단북면, 문경시 산북면, 산양면, 영순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상주시내의 성동동, 서문동, 서성, 성하, 남성 등의 지명으로 과거 읍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표시된 객사는 상주시내 서성동에 있었는데 고려 때 창건하였다가 1526년(중종 21)에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상주 경찰서로 사용되었다. 동헌은 서성동의 상주 극장 앞에 있었다. 읍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병성천이다. 지도 오른쪽에 낙동역, 낙동진 등 洛東이 지명으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현재는 낙동면이라는 지명으로 사용된다. 지도 왼쪽의 산줄기는 충청도와 경계가 되는데 백두대간의 일부이다. 산줄기를 따라 여러 사찰이 표시되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 속리산이 표시되었다. 변화가 심한 지역의 경우 조선시대 행정구역명이 사용되지 않지만 이 지도에 등장하는 은척면, 화북면, 화서면, 화동면, 외서면, 내서면 등 거의 대부분이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낙동강에 倉과 나루가 표시되었고 육로상에 낙서역(내서면 낙서리) 등 역이 표시되었다. 읍성 밖에는 성황단, 향교, 여제단이 표시되었다. 지도 북쪽의 은척면에 견훤산성이 그려졌는데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사벌성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사벌성은 읍치 동쪽 병풍산의 맞은편 지금의 사벌면 화달리에 있었다(이현군)

  • 선산부 (善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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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현재의 구미시(구미시내의 동쪽 임수동 인의동 황상동 일대 제외)에 해당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지도에서는 성곽없이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만 그렸다. 향교는 선산읍의 ‘교리’라는 지명을 통해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읍치 뒤쪽의 비봉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읍치 아래쪽의 하천은 감천으로 오른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남쪽의 감천에는 고을을 가리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낙동강을 따라 누정, 강창, 도연진을 비롯한 나루터가 들어서 있다. 산줄기와 감천 남쪽에 입지한 건물의 방향과 글씨를 읍치를 향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하나의 지도에 여러 시점이 사용됨을 확인시켜 준다. 선산읍 원리에 있었던 금오서원은 야은 길재와 김종직을 배향한 곳이다. 특이하게 의구총, 의우총이 보인다. 의구총은 만취한 상태의 주인을 구한 개를 기리는 무덤이며 의우총은 주인을 그리워하던 소의 무덤이다. 구미시는 1971년 전자공업단지로 지정되면서 번창해져 1978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표기된 상구미면과 하구미면이 1914년에 통합되어 구미면이 되었다가 현재의 구미시 중심부가 된 것이다. 행정경계는 유사하지만 산업화에 의해 기존의 중심부가 이전한 사례 지역이라 할 수 있다.(이현군)

  • 선산부 주기 (善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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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현재의 구미시(구미시내의 동쪽 임수동 인의동 황상동 일대 제외)에 해당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지도에서는 성곽없이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만 그렸다. 향교는 선산읍의 ‘교리’라는 지명을 통해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읍치 뒤쪽의 비봉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읍치 아래쪽의 하천은 감천으로 오른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남쪽의 감천에는 고을을 가리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낙동강을 따라 누정, 강창, 도연진을 비롯한 나루터가 들어서 있다. 산줄기와 감천 남쪽에 입지한 건물의 방향과 글씨를 읍치를 향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지도는 현대 지도와 달리 하나의 지도에 여러 시점이 사용됨을 확인시켜 준다. 선산읍 원리에 있었던 금오서원은 야은 길재와 김종직을 배향한 곳이다. 특이하게 의구총, 의우총이 보인다. 의구총은 만취한 상태의 주인을 구한 개를 기리는 무덤이며 의우총은 주인을 그리워하던 소의 무덤이다. 구미시는 1971년 전자공업단지로 지정되면서 번창해져 1978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표기된 상구미면과 하구미면이 1914년에 통합되어 구미면이 되었다가 현재의 구미시 중심부가 된 것이다. 행정경계는 유사하지만 산업화에 의해 기존의 중심부가 이전한 사례 지역이라 할 수 있다.(이현군)

  • 성주목 (星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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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목은 현재의 성주군과 고령군, 달성군, 김천시의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지도에 두개의 성이 보이는데 왼쪽은 독용산성이며 오른쪽이 읍성이다. 산성과 읍성이 병렬적으로 그려져 이중구조처럼 인식된다. 읍성과 산성 모두 객사와 군기고를 갖추고 있다. 읍성은 현재의 성주읍 중심부 경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독용산성은 금수면과 가천면의 경계인 독용산에 있었다. 산성은 1675년(숙종 1)에 쌓았던 것으로 그 안에 사찰, 장대가 보인다. 지금은 그 근처에 성주댐이 들어서 있다. 행정구역으로 面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지도에서는 坊을 적고 있다. 이 지도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뻗어나온 것이며 대가천, 이천, 백천 등이 그려져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는데 낙동강은 성주목의 동쪽 지역에 해당하며 남북으로 흐르는데 이 지도에서는 편의상 아래쪽에 그리고 있다. 서쪽을 위로 그린 지도로 보인다. 성주에는 천곡서원, 회연서원 등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의 명칭을 적지 않고 서원이라고 표시만 하고 사찰의 이름은 다 적고 있다. 성문과 연결되는 도로를 그리면서도 역원의 위치는 표시하지 않았고 봉대와 倉도 명칭을 적지 않고 표시하였다. 낙동강에도 나루터가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 다른 군현 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성주목 주기 (星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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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목은 현재의 성주군과 고령군, 달성군, 김천시의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지도에 두개의 성이 보이는데 왼쪽은 독용산성이며 오른쪽이 읍성이다. 산성과 읍성이 병렬적으로 그려져 이중구조처럼 인식된다. 읍성과 산성 모두 객사와 군기고를 갖추고 있다. 읍성은 현재의 성주읍 중심부 경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독용산성은 금수면과 가천면의 경계인 독용산에 있었다. 산성은 1675년(숙종 1)에 쌓았던 것으로 그 안에 사찰, 장대가 보인다. 지금은 그 근처에 성주댐이 들어서 있다. 행정구역으로 面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지도에서는 坊을 적고 있다. 이 지도의 산줄기는 덕유산에서 뻗어나온 것이며 대가천, 이천, 백천 등이 그려져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는데 낙동강은 성주목의 동쪽 지역에 해당하며 남북으로 흐르는데 이 지도에서는 편의상 아래쪽에 그리고 있다. 서쪽을 위로 그린 지도로 보인다. 성주에는 천곡서원, 회연서원 등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서원의 명칭을 적지 않고 서원이라고 표시만 하고 사찰의 이름은 다 적고 있다. 성문과 연결되는 도로를 그리면서도 역원의 위치는 표시하지 않았고 봉대와 倉도 명칭을 적지 않고 표시하였다. 낙동강에도 나루터가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 다른 군현 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순흥부 (順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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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부는 동쪽의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이다. 지도 위쪽에 태백산, 소백산을 확인할 수 있다. 봉화, 영천, 풍기와 인접하고 있으며 충청도,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있다. 죽령을 비롯한 여러 고개가 지도 북쪽에 표시되었는데 육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객사 앞을 지나 죽령을 지나는 도로에 大路라 적어 놓았으며 그 위에는 소로가 적혀 있다. 읍치 오른쪽의 내성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는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며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었다가 1457년(세조 3)에 풍기군에 속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 복구되었으나 1914년 군현 통합에 의해 영주시, 봉화군에 나누어 들어가게 되었다. 옛 순흥부는 영주시 순흥면, 부석면, 단산면과 풍기읍의 일부, 안정면 일부, 봉화읍 일부, 물야면, 법전면, 춘양면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아사만 그 이름을 적고 있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표시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백운동서원은 1542년(중종 37)에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후에 소수서원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북쪽의 부석사(부석면 북지리)는 의상대사가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 북쪽에는 태봉과 어류산성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倉, 봉대 등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순흥부 주기 (順興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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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부는 동쪽의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이다. 지도 위쪽에 태백산, 소백산을 확인할 수 있다. 봉화, 영천, 풍기와 인접하고 있으며 충청도,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있다. 죽령을 비롯한 여러 고개가 지도 북쪽에 표시되었는데 육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객사 앞을 지나 죽령을 지나는 도로에 大路라 적어 놓았으며 그 위에는 소로가 적혀 있다. 읍치 오른쪽의 내성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는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며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었다가 1457년(세조 3)에 풍기군에 속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 복구되었으나 1914년 군현 통합에 의해 영주시, 봉화군에 나누어 들어가게 되었다. 옛 순흥부는 영주시 순흥면, 부석면, 단산면과 풍기읍의 일부, 안정면 일부, 봉화읍 일부, 물야면, 법전면, 춘양면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아사만 그 이름을 적고 있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표시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백운동서원은 1542년(중종 37)에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후에 소수서원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북쪽의 부석사(부석면 북지리)는 의상대사가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 북쪽에는 태봉과 어류산성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倉, 봉대 등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신녕현 (新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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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천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신녕면 화성리 일대이다. 중앙선 철도의 신녕역 북쪽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영천시 신녕면, 화남면, 화산면, 화북면의 일부, 와촌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대구 팔공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팔공산이 그려졌다. 현재의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이다. 지도 가운데 위쪽에 표시된 화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신녕면과 군위군 고로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828m의 산이다. 城內라고 적힌 것은 화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맥을 따라 아래로 내려 오면 객사가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驛館이 표시되었는데 읍치 서쪽 5리 지점에 있었던 長壽驛으로 파악된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역 이름을 적는데 여기서는 역관이라고 표시하였다. 역관 앞에서 읍치 서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로 볼 수 있다. 지도 왼쪽 위의 龜川院으로 연결된 도로는 919번 지방도로로 파악된다. 읍치 동쪽 화산면과 화남면 경계에 백학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있었던 것이 지도에 표시된 백학서원이다. 1678년(숙종 4)에 세워졌으며 이황을 배향하였다. 그 옆에 고현면이 적혔는데 신녕현의 옛 읍치가 있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신녕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이 밖에 창고, 봉수대, 누정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신녕현 주기 (新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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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천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신녕면 화성리 일대이다. 중앙선 철도의 신녕역 북쪽에 해당한다. 관할범위는 영천시 신녕면, 화남면, 화산면, 화북면의 일부, 와촌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대구 팔공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 위에 팔공산이 그려졌다. 현재의 팔공산 도립공원 지역이다. 지도 가운데 위쪽에 표시된 화산이 진산에 해당하는데 신녕면과 군위군 고로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828m의 산이다. 城內라고 적힌 것은 화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맥을 따라 아래로 내려 오면 객사가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驛館이 표시되었는데 읍치 서쪽 5리 지점에 있었던 長壽驛으로 파악된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역 이름을 적는데 여기서는 역관이라고 표시하였다. 역관 앞에서 읍치 서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로 볼 수 있다. 지도 왼쪽 위의 龜川院으로 연결된 도로는 919번 지방도로로 파악된다. 읍치 동쪽 화산면과 화남면 경계에 백학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있었던 것이 지도에 표시된 백학서원이다. 1678년(숙종 4)에 세워졌으며 이황을 배향하였다. 그 옆에 고현면이 적혔는데 신녕현의 옛 읍치가 있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신녕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이 밖에 창고, 봉수대, 누정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안동부 (安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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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과 함께 주변 군현인 예안현, 봉화현, 영천군, 순흥부를 함께 그렸다. 중심부에 읍성을 그리고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읍성 안에는 객사, 아사, 사창, 낙남루, 관청, 강무당 등의 건물을 그렸으나 동헌은 보이지 않는다. 향교는 북문 인근에 표시하였으며 서문 밖에 鎭營이 있다. 읍성 주변의 하천은 낙동강으로 지도 북쪽에 그 발원지인 태백산의 황지를 표시하였다. 황지 아래쪽에는 史庫를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이 적혀있다. 낙동강을 따라 여러 倉과 험애, 요충지를 표시하였다. 안동댐의 건설로 많은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이 지도와 현재의 모습이 차이가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전통 양반촌의 대명사로 통하는 河回가 표시되었다. 산줄기와 강줄기가 돌아나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하회 옆의 병산서원(병산리)은 서애 유성룡을 배향한 곳이다. 읍치 남쪽 낙동강변에 영호루가 표시되었는데 안동교 남쪽에 복원되어 있다. 낙동강을 따라 경치 좋은 곳에 여러 서원과 누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삼태사묘는 고려 때 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길을 모신 사당이다. 읍치 서쪽의 관왕묘는 관우의 사당으로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견한 이후 세워진 것이다. 임란 이후 한양의 동대문 밖, 남대문 밖에 관왕묘가 세워졌지만, 지방 군현에 관왕묘가 세워진 것은 드문 일이다. 남문, 서문과 연결되는 도로상에 고개, 역이 표시되었다.

  • 안동부 주기 (安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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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과 함께 주변 군현인 예안현, 봉화현, 영천군, 순흥부를 함께 그렸다. 중심부에 읍성을 그리고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읍성 안에는 객사, 아사, 사창, 낙남루, 관청, 강무당 등의 건물을 그렸으나 동헌은 보이지 않는다. 향교는 북문 인근에 표시하였으며 서문 밖에 鎭營이 있다. 읍성 주변의 하천은 낙동강으로 지도 북쪽에 그 발원지인 태백산의 황지를 표시하였다. 황지 아래쪽에는 史庫를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아래에 낙동강이 적혀있다. 낙동강을 따라 여러 倉과 험애, 요충지를 표시하였다. 안동댐의 건설로 많은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이 지도와 현재의 모습이 차이가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전통 양반촌의 대명사로 통하는 河回가 표시되었다. 산줄기와 강줄기가 돌아나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하회 옆의 병산서원(병산리)은 서애 유성룡을 배향한 곳이다. 읍치 남쪽 낙동강변에 영호루가 표시되었는데 안동교 남쪽에 복원되어 있다. 낙동강을 따라 경치 좋은 곳에 여러 서원과 누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 삼태사묘는 고려 때 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길을 모신 사당이다. 읍치 서쪽의 관왕묘는 관우의 사당으로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견한 이후 세워진 것이다. 임란 이후 한양의 동대문 밖, 남대문 밖에 관왕묘가 세워졌지만, 지방 군현에 관왕묘가 세워진 것은 드문 일이다. 남문, 서문과 연결되는 도로상에 고개, 역이 표시되었다.

  • 안의현 (安義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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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利安縣과 感陰縣이 합쳐져서 安陰縣이 되었다가 1767년(영조 43)에 안의현으로 그 명칭이 바뀐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광여도에 안음현으로 등장하는 지역의 고지도이다. 읍치는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일대에 해당하며 함양군의 안의면, 서상면, 서하면, 거창군 마리면, 북상면, 위천면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전라도와 경계에 있는 군현이다. 지도 위에 덕유산이 표시되었는데 덕유산 국립공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산줄기를 잇달아 그려 맥으로 보이게 그렸다. 진산은 읍치 서쪽에 위치한 城山이다. 일반적인 군현지도에서는 주변부 지역을 축소하고 읍치지역을 중심부에 의도적으로 크게 확대하여 그리는 이중 축척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이 지도는 어디가 읍치지역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렸다. 관아 건물도 다른 지도에서는 여러 건물을 그리는데 비해 이 지도는 衙라고 표시한 건물 하나만 그렸다. 지도 아래쪽이 읍치 지역이다. 산줄기, 물줄기 외에 향교, 충렬사, 용문서원, 창고만 표시하였다. 龍門書院은 鄭汝昌(1450-1504)과 鄭薀(1569-1642) 등을 배향한 서원이다. 지도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도로조차 그려지지 않았다. 지도에 도로를 그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지도이다. 다른 지도에서는 방면의 명칭을 네모 안에 따로 기입하는데 비해 이 지도에서는 村, 谷, 谷村 등으로 지명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안의현 주기 (安義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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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利安縣과 感陰縣이 합쳐져서 安陰縣이 되었다가 1767년(영조 43)에 안의현으로 그 명칭이 바뀐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광여도에 안음현으로 등장하는 지역의 고지도이다. 읍치는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일대에 해당하며 함양군의 안의면, 서상면, 서하면, 거창군 마리면, 북상면, 위천면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전라도와 경계에 있는 군현이다. 지도 위에 덕유산이 표시되었는데 덕유산 국립공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산줄기를 잇달아 그려 맥으로 보이게 그렸다. 진산은 읍치 서쪽에 위치한 城山이다. 일반적인 군현지도에서는 주변부 지역을 축소하고 읍치지역을 중심부에 의도적으로 크게 확대하여 그리는 이중 축척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이 지도는 어디가 읍치지역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렸다. 관아 건물도 다른 지도에서는 여러 건물을 그리는데 비해 이 지도는 衙라고 표시한 건물 하나만 그렸다. 지도 아래쪽이 읍치 지역이다. 산줄기, 물줄기 외에 향교, 충렬사, 용문서원, 창고만 표시하였다. 龍門書院은 鄭汝昌(1450-1504)과 鄭薀(1569-1642) 등을 배향한 서원이다. 지도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도로조차 그려지지 않았다. 지도에 도로를 그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지도이다. 다른 지도에서는 방면의 명칭을 네모 안에 따로 기입하는데 비해 이 지도에서는 村, 谷, 谷村 등으로 지명을 표시하였다.(이현군)

  • 양산군 (梁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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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의 읍치는 현재의 중부동 일대이며 현재의 양산시에서 웅상읍은 조선시대 울산부에 해당하였기에 웅상읍을 제외한 양산시 지역과 부산광역시 북구, 강서구 일부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이 지도에서 눈이 띄는 점은 많은 하천이 그려져 있고 읍치의 서남쪽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점이다. 동쪽이 낙동정맥의 끝부분에 해당하기에 하천의 방향이 그렇게 된 것이다. 진산은 동북쪽에 있는 성황산이 된다. 읍성 밖에는 일반적으로 향교, 사직단, 여단, 성황사가 배치되는데 성황사가 있었던 곳이 진산이 된 것이다. 읍성과 성문, 그리고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다른 관아 건물과 달리 객사는 서쪽을 향하게 그렸다. 진산의 방향과 연계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북문 안쪽에 옥이 원형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향교는 지금 교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양산천으로 남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낙동강의 하중도가 표시되었다. 동쪽의 낙동정맥 방향에는 국가에서 사용할 재목을 구하기 위한 封山과 여러 고개들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요충지가 표시되었는데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교통로로 황산역이 보이는데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었던 역으로 11개의 속역을 가졌다. 지도 북쪽의 통도사는 가지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646년(신라 선덕 15)에 창건되었다. 보물 74호 국장생석표, 보물 144호 대웅전 등 유물이 보존된 이름난 사찰이다. 이 밖에 교량,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양산군 주기 (梁山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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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의 읍치는 현재의 중부동 일대이며 현재의 양산시에서 웅상읍은 조선시대 울산부에 해당하였기에 웅상읍을 제외한 양산시 지역과 부산광역시 북구, 강서구 일부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이 지도에서 눈이 띄는 점은 많은 하천이 그려져 있고 읍치의 서남쪽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점이다. 동쪽이 낙동정맥의 끝부분에 해당하기에 하천의 방향이 그렇게 된 것이다. 진산은 동북쪽에 있는 성황산이 된다. 읍성 밖에는 일반적으로 향교, 사직단, 여단, 성황사가 배치되는데 성황사가 있었던 곳이 진산이 된 것이다. 읍성과 성문, 그리고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다른 관아 건물과 달리 객사는 서쪽을 향하게 그렸다. 진산의 방향과 연계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북문 안쪽에 옥이 원형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향교는 지금 교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서쪽의 하천은 양산천으로 남쪽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낙동강의 하중도가 표시되었다. 동쪽의 낙동정맥 방향에는 국가에서 사용할 재목을 구하기 위한 封山과 여러 고개들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요충지가 표시되었는데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교통로로 황산역이 보이는데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었던 역으로 11개의 속역을 가졌다. 지도 북쪽의 통도사는 가지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로 646년(신라 선덕 15)에 창건되었다. 보물 74호 국장생석표, 보물 144호 대웅전 등 유물이 보존된 이름난 사찰이다. 이 밖에 교량, 서원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언양현 (彦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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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울산광역시 동쪽 지역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군현을 그린 지도이다. 지도 가운데에 그려진 읍성은 현재 언양읍내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사적 5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부고속국도의 언양분기점이 읍치 동쪽에 있다. 언양현의 관할범위는 언양읍, 삼동면, 삼남면, 상북면 등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고헌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고헌산의 맥이 읍치에 연결되도록 그렸다. 읍성은 의도적으로 정사각형으로 그렸으며 그 가운데 객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읍성 안에 들어서는 향청이 이 지역에서는 읍성 밖에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읍성 서남쪽에 표시된 향교는 언양읍 교동리에 남아있다. 낙동정맥의 동쪽 지방으로 읍성 앞의 하천은 태화강이다. 동쪽으로 흘러 울산만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문수산이 조선시대 울산과 경계가 되는데 울산의 월드컵 경기장인 문수경기장이 이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지도 오른쪽에 반구서원이 그려졌는데 정몽주, 이언적, 정구 등을 배향하였고 1712년(숙종 38)에 지어졌다. 이 근처에 반구대 유적지가 있다. 울산광역시 언양읍 대곡리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운문령, 석남령 등 다른 지역의 교통로가 되는 고개를 도로와 함게 표시하였다. 지도 아래에는 덕천역이 표시되었는데 읍성과 멀리 떨어져 보이지만 언양읍 교동리에 있던 역이다. 읍성 왼쪽의 봉대가 표시된 곳은 언양읍 천전리와 교동리 중간에 있으며 현재는 봉화산으로 불린다.(이현군)

  • 언양현 주기 (彦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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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울산광역시 동쪽 지역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군현을 그린 지도이다. 지도 가운데에 그려진 읍성은 현재 언양읍내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사적 5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부고속국도의 언양분기점이 읍치 동쪽에 있다. 언양현의 관할범위는 언양읍, 삼동면, 삼남면, 상북면 등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고헌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고헌산의 맥이 읍치에 연결되도록 그렸다. 읍성은 의도적으로 정사각형으로 그렸으며 그 가운데 객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읍성 안에 들어서는 향청이 이 지역에서는 읍성 밖에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읍성 서남쪽에 표시된 향교는 언양읍 교동리에 남아있다. 낙동정맥의 동쪽 지방으로 읍성 앞의 하천은 태화강이다. 동쪽으로 흘러 울산만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문수산이 조선시대 울산과 경계가 되는데 울산의 월드컵 경기장인 문수경기장이 이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지도 오른쪽에 반구서원이 그려졌는데 정몽주, 이언적, 정구 등을 배향하였고 1712년(숙종 38)에 지어졌다. 이 근처에 반구대 유적지가 있다. 울산광역시 언양읍 대곡리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운문령, 석남령 등 다른 지역의 교통로가 되는 고개를 도로와 함게 표시하였다. 지도 아래에는 덕천역이 표시되었는데 읍성과 멀리 떨어져 보이지만 언양읍 교동리에 있던 역이다. 읍성 왼쪽의 봉대가 표시된 곳은 언양읍 천전리와 교동리 중간에 있으며 현재는 봉화산으로 불린다.(이현군)

  • 영덕현 (盈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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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 대게로 알려진 영덕현의 지도이다. 동해와 접한 고을로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지역이 중심부이다. 현재의 지품면, 달산면, 강구면, 남정면 등이 관할 구역으로 영덕군의 다른 면은 영해부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영해부와 영덕현이 합쳐져 현재의 영덕군이 된 것이다. 영덕의 동쪽이 동해인데 이 지도는 마치 남쪽까지 바다인 것처럼 그렸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며 무둔산이 진산이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오십천이다. 읍치 뒤쪽에 오십천 표시가 있다. 왼쪽 아래 강구진(강구면 강구리)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 강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그 옆의 하저포는 강구면 하저리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의 장사진이 그려진 곳은 남정면 장사리인데 국민관광지인 장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동면에서 오른쪽 아래의 강구진, 왼쪽의 장사진은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으로 해안선이 연결되는데 이 지도는 마치 꺾여진 것처럼 그렸다. 지금은 해안을 따라 7번 국도가 지난다. 지도에 읍성과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다른 지도에서 잘 보이지 않는 동헌을 객사 뒤에 그렸고 홍문(홍살문)을 남문 앞에 그린 점이 이색적이다. 석축으로 된 읍성 밖에 향교, 서원이 그려졌으며 해안에는 봉대가 표시되었다. 역원으로는 지품원, 남역, 주등역이 보인다.(이현군).

  • 영덕현 주기 (盈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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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 대게로 알려진 영덕현의 지도이다. 동해와 접한 고을로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지역이 중심부이다. 현재의 지품면, 달산면, 강구면, 남정면 등이 관할 구역으로 영덕군의 다른 면은 영해부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영해부와 영덕현이 합쳐져 현재의 영덕군이 된 것이다. 영덕의 동쪽이 동해인데 이 지도는 마치 남쪽까지 바다인 것처럼 그렸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며 무둔산이 진산이다. 읍치 앞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오십천이다. 읍치 뒤쪽에 오십천 표시가 있다. 왼쪽 아래 강구진(강구면 강구리)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 강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그 옆의 하저포는 강구면 하저리에 해당한다. 지도 왼쪽의 장사진이 그려진 곳은 남정면 장사리인데 국민관광지인 장사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동면에서 오른쪽 아래의 강구진, 왼쪽의 장사진은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으로 해안선이 연결되는데 이 지도는 마치 꺾여진 것처럼 그렸다. 지금은 해안을 따라 7번 국도가 지난다. 지도에 읍성과 주요 건물을 그렸는데 다른 지도에서 잘 보이지 않는 동헌을 객사 뒤에 그렸고 홍문(홍살문)을 남문 앞에 그린 점이 이색적이다. 석축으로 된 읍성 밖에 향교, 서원이 그려졌으며 해안에는 봉대가 표시되었다. 역원으로는 지품원, 남역, 주등역이 보인다.(이현군).

  • 영산현 (靈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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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군면 통합으로 사라진 조선시대 현으로 일부는 함안군에 귀속되고 대부분은 창녕군에 포함된 고을이다.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에 해당하고 지도 제일 위에 그려진 영취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에 표시되진 않았지만, 현재 산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현재의 창녕군 영산면, 남지읍, 계성면, 장마면, 도천면, 부곡면, 길곡면 등이 영산의 범위에 포함된다. 진산인 영취산은 동쪽의 낙동정맥에서 뻗어나온 산이며 지도 아래 하천은 낙동강이다. 영취산에서 내려 온 맥이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일반적 군현지도에서 향교는 독자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려지는데 비해 이 지도는 객사로 내려오는 맥을 가로챈 자리에 향교가 들어선 점이 이색적이다. 낙동강의 작은 지류들이 많이 그려져 있고 곳곳에 농업을 위한 제언이 많이 조성된 점이 특징이다. 지도 오른쪽의 덕봉은 부곡면과 밀양시 무안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지금은 덕암산으로 불리며 544.5m이다. 그 아래 부곡면, 온정역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근처에 국민관광지로 개발된 부곡온천이 있다. 남쪽의 낙동강변에 나루와 정자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해연진은 부곡면 노리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가운데 아래쪽의 망우정은 도천면 우강리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앞에서 온정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1008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지도에 사찰이 전혀 나오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이현군)

  • 영산현 주기 (靈山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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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군면 통합으로 사라진 조선시대 현으로 일부는 함안군에 귀속되고 대부분은 창녕군에 포함된 고을이다.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에 해당하고 지도 제일 위에 그려진 영취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에 표시되진 않았지만, 현재 산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현재의 창녕군 영산면, 남지읍, 계성면, 장마면, 도천면, 부곡면, 길곡면 등이 영산의 범위에 포함된다. 진산인 영취산은 동쪽의 낙동정맥에서 뻗어나온 산이며 지도 아래 하천은 낙동강이다. 영취산에서 내려 온 맥이 읍치를 감싸고 있다. 일반적 군현지도에서 향교는 독자적 산줄기 형국 속에 그려지는데 비해 이 지도는 객사로 내려오는 맥을 가로챈 자리에 향교가 들어선 점이 이색적이다. 낙동강의 작은 지류들이 많이 그려져 있고 곳곳에 농업을 위한 제언이 많이 조성된 점이 특징이다. 지도 오른쪽의 덕봉은 부곡면과 밀양시 무안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지금은 덕암산으로 불리며 544.5m이다. 그 아래 부곡면, 온정역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근처에 국민관광지로 개발된 부곡온천이 있다. 남쪽의 낙동강변에 나루와 정자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임해연진은 부곡면 노리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가운데 아래쪽의 망우정은 도천면 우강리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읍치 앞에서 온정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1008번 지방도로에 해당한다. 지도에 사찰이 전혀 나오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이현군)

  • 영양현 (英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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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석보면은 영해부에 속하였고 입암면의 일부지역은 진보현에 속하여서 현재의 영양군에서 그 나머지 지역이 영양현의 관할범위였다. 영해부, 진보현에 귀속되기도 하였다가 1683년(숙종 9)에 다시 현을 두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동국여지승람에는 영해도호부의 속현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진산이 기록되지 않았다. 낙동정맥을 경계로 영해, 평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이다.북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서쪽으로 나온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의 ‘靑’이 들어가는 두개의 면 이름이 나오는데 과거 靑杞縣 이 있던 지역이다. 현재는 청기면이 되었다. 읍치 동쪽에 장군천으로 적힌 하천은 지금의 반변천이며 왼쪽은 동천으로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입암이 표시되었는데 돌이 서있는 모습을 회화적으로 그렸다. 현재의 입암면 강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는데 뒤쪽 산줄기가 읍치로 연결되게 표현하였다. 아사 왼쪽 아래 가장 큰 건물이 객사로 보이는데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향교는 독립적 형국 안에 그렸으며 읍성 밖에 설치되는 제단들도 표시하지 않은 간략하게 만든 지도이다. 하천과 도로를 따라 倉, 누정, 서원이 그려졌다. 입암 아래에 초선도를 그렸는데 이름으로 명승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임암면의 문해교 아래에 하중도가 있는데 그 섬으로 비정된다. 읍치 오른쪽에 그려진 도로는 현재의 31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가 된다.(이현군)

  • 영양현 주기 (英陽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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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석보면은 영해부에 속하였고 입암면의 일부지역은 진보현에 속하여서 현재의 영양군에서 그 나머지 지역이 영양현의 관할범위였다. 영해부, 진보현에 귀속되기도 하였다가 1683년(숙종 9)에 다시 현을 두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동국여지승람에는 영해도호부의 속현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진산이 기록되지 않았다. 낙동정맥을 경계로 영해, 평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한 고을이다.북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서쪽으로 나온 산줄기이다. 지도 왼쪽의 ‘靑’이 들어가는 두개의 면 이름이 나오는데 과거 靑杞縣 이 있던 지역이다. 현재는 청기면이 되었다. 읍치 동쪽에 장군천으로 적힌 하천은 지금의 반변천이며 왼쪽은 동천으로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입암이 표시되었는데 돌이 서있는 모습을 회화적으로 그렸다. 현재의 입암면 강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는데 뒤쪽 산줄기가 읍치로 연결되게 표현하였다. 아사 왼쪽 아래 가장 큰 건물이 객사로 보이는데 건물명은 적지 않았다. 향교는 독립적 형국 안에 그렸으며 읍성 밖에 설치되는 제단들도 표시하지 않은 간략하게 만든 지도이다. 하천과 도로를 따라 倉, 누정, 서원이 그려졌다. 입암 아래에 초선도를 그렸는데 이름으로 명승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임암면의 문해교 아래에 하중도가 있는데 그 섬으로 비정된다. 읍치 오른쪽에 그려진 도로는 현재의 31번 국도와 비슷한 경로가 된다.(이현군)

  • 영일현 (迎日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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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장기곶(호미곶)과 포항 사이가 영일만이다. 이 지도는 영일만과 그 서쪽에 있던 영일현을 그린 것이다. 광여도는 延日縣으로 표시했는데 그 이름을 딴 현재의 연일읍 생지리, 동문리 일대가 중심부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동쪽 바다에 접한 고을이므로 하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지도 위쪽의 강이 형산강인데 흥해군과의 경계가 된다. 오른쪽 위에 경주 포항창이 적혀있는데 이 이름을 따서 현재의 浦項 지명이 만들어졌다. 영일현의 진산은 읍치 남쪽 지금의 대송면 홍계리에 있는 482m의 운제산이다. 지도 남쪽 산줄기에 해당한다. 주변 산세를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향교와 서원은 산줄기를 따로 표현해서 독립적으로 보이도록 하였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읍성을 원형으로 그리고 그 안에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방향만 다르게 표현하였다. 읍치 동쪽으로 북송전을 그렸다. 바다의 바람을 막고 읍성이 바로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나무 숲을 조성한 곳으로 보인다. 현재의 송내동, 송정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소나무 숲 오른쪽의 바다는 일부 매립하여 제철산업의 중심기업인 포스코가 들어서 있다. 방면 표시도 없고 지명으로는 왼쪽 위에 부조리만 적혀 있는데 현재 연일읍 중명리에 아랫부조라는 마을이 있는 곳이다.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린 지도이다.(이현군)

  • 영일현 주기 (迎日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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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장기곶(호미곶)과 포항 사이가 영일만이다. 이 지도는 영일만과 그 서쪽에 있던 영일현을 그린 것이다. 광여도는 延日縣으로 표시했는데 그 이름을 딴 현재의 연일읍 생지리, 동문리 일대가 중심부에 해당한다. 낙동정맥의 동쪽 바다에 접한 고을이므로 하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지도 위쪽의 강이 형산강인데 흥해군과의 경계가 된다. 오른쪽 위에 경주 포항창이 적혀있는데 이 이름을 따서 현재의 浦項 지명이 만들어졌다. 영일현의 진산은 읍치 남쪽 지금의 대송면 홍계리에 있는 482m의 운제산이다. 지도 남쪽 산줄기에 해당한다. 주변 산세를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향교와 서원은 산줄기를 따로 표현해서 독립적으로 보이도록 하였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읍성을 원형으로 그리고 그 안에 건물을 그렸는데 객사와 방향만 다르게 표현하였다. 읍치 동쪽으로 북송전을 그렸다. 바다의 바람을 막고 읍성이 바로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나무 숲을 조성한 곳으로 보인다. 현재의 송내동, 송정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소나무 숲 오른쪽의 바다는 일부 매립하여 제철산업의 중심기업인 포스코가 들어서 있다. 방면 표시도 없고 지명으로는 왼쪽 위에 부조리만 적혀 있는데 현재 연일읍 중명리에 아랫부조라는 마을이 있는 곳이다.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간략하게 그린 지도이다.(이현군)

  • 영천군 (榮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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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발음은 같지만 永川은 지금의 영천시이고 榮川은 현재의 영주시에 해당한다. 榮川의 읍치는 현재의 영주시내 영주동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주시내, 문수면, 장수면, 이산면, 평은면, 봉화군 상운면 일부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읍치를 둘러싼 하천은 서천으로 오른쪽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군현지도에서는 산줄기가 중앙부를 향하게 그린 지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지도는 모두 아래쪽을 향하게 그렸다. 북쪽으로 백두대간이라는 큰 산줄기가 형성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인 철탄산으로 맥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읍치에는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는데 읍성은 그리지 않았다. 아사 뒤쪽의 철탄산이 진산이다. 읍치 북쪽에 성내산성이 있었다. 이 지역의 서원 중 읍치 동쪽의 이산서원은 이황을 배향한 서원으로 1558년(명종 13)에 세워져 1574년(선조 7)에 사액받았다.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으로 그렸는데 동쪽의 향교는 영주향교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성밖의 사직단, 여단, 성황사 등을 그리지 않았다. 창보역, 평은역, 효대원, 문수원, 금림원, 승리원, 가이원, 장금원, 덕산원, 철겸원 등이 있었던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역원이 표시되지는 않았다. 이 지도에서 영천의 도로망은 읍치를 중심으로 X 자 구조이다. 영동선과 중앙선 철도, 5번 국도와 36번 국도가 지금의 영주를 지나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모태가 되었다. 그 외 창고, 봉수, 누정 등이 지도에 보인다.(이현군)

  • 영천군 (永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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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는 다르지만 영천으로 발음되는 곳이 경상도에 두 곳이다. 永川은 현재의 영천시의 모태가 되었으며 榮川은 영주시로 바뀌었다. 永川의 읍치는 문내동, 성내동 일대이며 현재의 신녕면,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 일부(신녕현), 북안면 일부(경주부)를 제외한 영천시를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낙동정맥의 동쪽 금호강의 상류에 위치한 고을이다. 왼쪽 위에 팔공산이 보인다. 지도에 따라서는 공산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을 지나 남쪽으로 가는 하천이 금호강으로 지도 왼쪽 아래에 표기되었다. 지도 왼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그 옆의 하천을 지금 고현천으로 부른다. 읍치 뒤쪽의 산을 연이어 그려서 강한 맥세가 느껴지도록 그렸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성문 이름만 표시하였다. 자연의 능선을 활용하여 읍성을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문쪽에는 고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때 만든 성이다. 읍치에서 가장 큰 건물이 객사이다. 향교가 객사 뒤에 보이는데 향교의 대성전은 보물 616호에 해당한다. 북쪽의 모자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향교, 여제단, 사직단을 그리고 성황단 대신 왼쪽에 성황봉이라는 표시로 대신하였다. 왼쪽 위에 인종대왕태실이 그려졌으며 오른쪽에 있는 입암서원은 바위가 서 있는 풍경 아래에 그렸다. 읍치를 중심으로 북창, 남창, 동창, 서창 등이 들어서 있다. 곳곳에 봉수대가 그려졌고 도로를 표시하였다.(이현군)

  • 영천군 주기 (榮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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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발음은 같지만 永川은 지금의 영천시이고 榮川은 현재의 영주시에 해당한다. 榮川의 읍치는 현재의 영주시내 영주동 일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주시내, 문수면, 장수면, 이산면, 평은면, 봉화군 상운면 일부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읍치를 둘러싼 하천은 서천으로 오른쪽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군현지도에서는 산줄기가 중앙부를 향하게 그린 지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지도는 모두 아래쪽을 향하게 그렸다. 북쪽으로 백두대간이라는 큰 산줄기가 형성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진산인 철탄산으로 맥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읍치에는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는데 읍성은 그리지 않았다. 아사 뒤쪽의 철탄산이 진산이다. 읍치 북쪽에 성내산성이 있었다. 이 지역의 서원 중 읍치 동쪽의 이산서원은 이황을 배향한 서원으로 1558년(명종 13)에 세워져 1574년(선조 7)에 사액받았다.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으로 그렸는데 동쪽의 향교는 영주향교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성밖의 사직단, 여단, 성황사 등을 그리지 않았다. 창보역, 평은역, 효대원, 문수원, 금림원, 승리원, 가이원, 장금원, 덕산원, 철겸원 등이 있었던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으나 이 지도에서는 역원이 표시되지는 않았다. 이 지도에서 영천의 도로망은 읍치를 중심으로 X 자 구조이다. 영동선과 중앙선 철도, 5번 국도와 36번 국도가 지금의 영주를 지나는데 조선시대 도로가 모태가 되었다. 그 외 창고, 봉수, 누정 등이 지도에 보인다.(이현군)

  • 영천군 주기 (永川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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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는 다르지만 영천으로 발음되는 곳이 경상도에 두 곳이다. 永川은 현재의 영천시의 모태가 되었으며 榮川은 영주시로 바뀌었다. 永川의 읍치는 문내동, 성내동 일대이며 현재의 신녕면,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 일부(신녕현), 북안면 일부(경주부)를 제외한 영천시를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낙동정맥의 동쪽 금호강의 상류에 위치한 고을이다. 왼쪽 위에 팔공산이 보인다. 지도에 따라서는 공산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 지도에서 읍치 앞을 지나 남쪽으로 가는 하천이 금호강으로 지도 왼쪽 아래에 표기되었다. 지도 왼쪽에 고현면이 보이는데 그 옆의 하천을 지금 고현천으로 부른다. 읍치 뒤쪽의 산을 연이어 그려서 강한 맥세가 느껴지도록 그렸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성문 이름만 표시하였다. 자연의 능선을 활용하여 읍성을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문쪽에는 고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때 만든 성이다. 읍치에서 가장 큰 건물이 객사이다. 향교가 객사 뒤에 보이는데 향교의 대성전은 보물 616호에 해당한다. 북쪽의 모자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향교, 여제단, 사직단을 그리고 성황단 대신 왼쪽에 성황봉이라는 표시로 대신하였다. 왼쪽 위에 인종대왕태실이 그려졌으며 오른쪽에 있는 입암서원은 바위가 서 있는 풍경 아래에 그렸다. 읍치를 중심으로 북창, 남창, 동창, 서창 등이 들어서 있다. 곳곳에 봉수대가 그려졌고 도로를 표시하였다.(이현군)

  • 영해부 (寧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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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으며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 축산면, 병곡면, 창수면, 영양군 석보면에 해당한다. 동해안을 따라 형성된 7번 국도가 옛 영해 읍치를 지난다. 읍성 안에는 객사, 동헌, 아사, 군기고, 창을 그렸는데 객사 건물이 동헌보다 훨씬 크고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성황단, 여단, 사직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그렸다. 현재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동쪽은 바다에 인접해 있는데 지도 왼쪽 아래의 축산은 축산해수욕장(축산면 축산리)이 있는 곳이다. 죽도산으로 불리기도 하며 축산등대가 설치되어있다. 그 위쪽의 대소산 봉대는 현재 도곡리의 봉화산이며 망일봉은 지금은 망월봉으로 불린다. 읍치 북쪽의 하천은 송천천으로 바다로 유입되는 지점에 국민관광지인 대진해수욕장(영해면 대진리)이 위치한다. 지도 위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영해 북쪽으로 뻗어나온 산줄기에 속한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높이 솟은 기암절벽처럼 산을 그린 것이 이색적이다. 낙동정맥을 넘어야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기에 지도 왼쪽에 역, 원창, 고개를 표시하고 있다. 영양역은 영양군 석보면에 있던 역으로 조선초기에 만들어졌다. 그 위쪽의 창수원은 창수면 창수리에 있던 원으로 918번 도로상에 위치한다. 광제원창은 석보면에 원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비교적 작은 고을이라 지도의 내용이 상세하지 않고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영해부 주기 (寧海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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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으며 관할구역은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 축산면, 병곡면, 창수면, 영양군 석보면에 해당한다. 동해안을 따라 형성된 7번 국도가 옛 영해 읍치를 지난다. 읍성 안에는 객사, 동헌, 아사, 군기고, 창을 그렸는데 객사 건물이 동헌보다 훨씬 크고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성황단, 여단, 사직단은 보이지 않고 향교만 그렸다. 현재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동쪽은 바다에 인접해 있는데 지도 왼쪽 아래의 축산은 축산해수욕장(축산면 축산리)이 있는 곳이다. 죽도산으로 불리기도 하며 축산등대가 설치되어있다. 그 위쪽의 대소산 봉대는 현재 도곡리의 봉화산이며 망일봉은 지금은 망월봉으로 불린다. 읍치 북쪽의 하천은 송천천으로 바다로 유입되는 지점에 국민관광지인 대진해수욕장(영해면 대진리)이 위치한다. 지도 위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영해 북쪽으로 뻗어나온 산줄기에 속한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하천은 동해로 유입된다. 높이 솟은 기암절벽처럼 산을 그린 것이 이색적이다. 낙동정맥을 넘어야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기에 지도 왼쪽에 역, 원창, 고개를 표시하고 있다. 영양역은 영양군 석보면에 있던 역으로 조선초기에 만들어졌다. 그 위쪽의 창수원은 창수면 창수리에 있던 원으로 918번 도로상에 위치한다. 광제원창은 석보면에 원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비교적 작은 고을이라 지도의 내용이 상세하지 않고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예안현 (禮安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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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안동시 북동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예안면, 녹전면, 도산면이 관할범위였다.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고 왼쪽은 백두대간에서 나온 산들이다.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이 낙동강이다. 지도에 크게 그려진 강이 낙동강이며 이 지도의 읍치 남쪽은 댐의 건설로 안동호가 된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청량산은 봉화와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금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주요 건물과 장소를 각각의 형국 속에 그린 점이 특이하다. 예안의 진산은 성황산인데 이 지도에는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과거에 이 산에 성황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객사 북쪽에 집이 두 채 그려졌는데 그 뒤쪽 산이 성황산으로 판단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건물만 표시하였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객사 오른쪽에 향청이 독립적으로 표시된 점이 눈에 띈다. 그 북쪽으로 도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한 것으로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 이황이 열었던 도산서당이었는데 사후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되었으며 1575년(선조 8)에 사액받았다. 이 서원의 전교당은 보물 21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의 고향이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고을이지만 사찰이 곳곳에 있어 상호공존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을 따라 나루, 정자, 서원, 명승지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예안현 주기 (禮安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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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안동시 북동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군현으로 예안면, 녹전면, 도산면이 관할범위였다.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오른쪽의 산들은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고 왼쪽은 백두대간에서 나온 산들이다.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이 낙동강이다. 지도에 크게 그려진 강이 낙동강이며 이 지도의 읍치 남쪽은 댐의 건설로 안동호가 된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청량산은 봉화와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금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주요 건물과 장소를 각각의 형국 속에 그린 점이 특이하다. 예안의 진산은 성황산인데 이 지도에는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과거에 이 산에 성황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객사 북쪽에 집이 두 채 그려졌는데 그 뒤쪽 산이 성황산으로 판단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건물만 표시하였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객사 오른쪽에 향청이 독립적으로 표시된 점이 눈에 띈다. 그 북쪽으로 도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한 것으로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 이황이 열었던 도산서당이었는데 사후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되었으며 1575년(선조 8)에 사액받았다. 이 서원의 전교당은 보물 210호로 지정되었다. 퇴계의 고향이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고을이지만 사찰이 곳곳에 있어 상호공존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을 따라 나루, 정자, 서원, 명승지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예천군 (醴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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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예천군은 현재의 예천읍, 용문면, 유천면, 보문면, 호명면, 의성군 다인면,  문경시 동로면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중심부의 읍치는 예천읍 노상리, 서본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예천군에서 상리면, 하리면은 풍기군, 감천면은 안동부, 지보면, 개포면 지역은 용궁현에 속하였다. 읍치를 감아 흐르는 양천은 현재 한천으로 불리며 동천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읍치 왼쪽 산줄기에 덕봉산이 있는데 지금은 봉덕산으로 불린다.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가지에 해당하고 지도 위에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고 적혀있지만 충청도와 바로 맞닿은 고을이 아니며 문경과 풍기를 지나야 충청도와 연결된다. 읍치에 성곽은 그리지 않았고 객사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는 존재하였지만 이 지도에는 그리지 않았다. 북쪽에 작성, 빙성이 보인다. 읍치 동쪽에 있는 통명역은 예천읍 통명리에 있던 역이다. 영주와 연결되는 현재의 28번 국도는 통명역이 있던 지점을 지난다. 현재의 도로는 조선시대 도로를 확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 등장하는 여러 사찰 중 북쪽의 용문사(예천군 용문면)는 고려 태조대에 창건한 사찰이다. 보물 145호 대장전 외 3종이 소장되었다. 읍치 오른쪽 위의 정산서원은 1697년(숙종 23)에 사액받은 곳으로 이황과 조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예천군 주기 (醴泉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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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예천군은 현재의 예천읍, 용문면, 유천면, 보문면, 호명면, 의성군 다인면,  문경시 동로면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지도 중심부의 읍치는 예천읍 노상리, 서본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예천군에서 상리면, 하리면은 풍기군, 감천면은 안동부, 지보면, 개포면 지역은 용궁현에 속하였다. 읍치를 감아 흐르는 양천은 현재 한천으로 불리며 동천의 내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읍치 왼쪽 산줄기에 덕봉산이 있는데 지금은 봉덕산으로 불린다.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가지에 해당하고 지도 위에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고 적혀있지만 충청도와 바로 맞닿은 고을이 아니며 문경과 풍기를 지나야 충청도와 연결된다. 읍치에 성곽은 그리지 않았고 객사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는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는 존재하였지만 이 지도에는 그리지 않았다. 북쪽에 작성, 빙성이 보인다. 읍치 동쪽에 있는 통명역은 예천읍 통명리에 있던 역이다. 영주와 연결되는 현재의 28번 국도는 통명역이 있던 지점을 지난다. 현재의 도로는 조선시대 도로를 확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 등장하는 여러 사찰 중 북쪽의 용문사(예천군 용문면)는 고려 태조대에 창건한 사찰이다. 보물 145호 대장전 외 3종이 소장되었다. 읍치 오른쪽 위의 정산서원은 1697년(숙종 23)에 사액받은 곳으로 이황과 조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용궁현 (龍宮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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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위쪽에 표현된 읍치는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일대이다. 원래 읍치는 읍치 남쪽의 용비산성의 북쪽 용궁면 향석리에 있었다. 용궁현의 관할구역은 예천군의 용궁면, 지보면, 개포면의 일부, 풍양면의 일부, 의성군 안사면의 일부, 문경시 영순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 뒤쪽의 축산이 용궁의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금천이고 읍치 남쪽은 내성천이다. 가장 아래의 하천은 낙동강인데 세 하천의 폭을 같은 넓이로 그렸다. 이 세 하천을 모으는 지점, 지도 왼쪽 아래에 삼강진이 그려졌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었다. 그 옆에는 삼강서원이 표시되었다. 삼강서원은 1643년(인조 21)에 세워진 것이다. 읍치 앞의 내성천은 두 번 크게 蛇行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용비산성 오른쪽이 회룡포 지역이며 마산(예천군 지보면 마산리) 위쪽에 크게 휘는 곳이 의성포이다. 근처의 장안사 근처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용비산성은 지보면 향석리에 있던 것으로 강을 내려다 보며 지킬 수 있는 방어기지가 된다. 그 흔적을 지금도 찾을 수 있다. 축산 아래의 읍치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다. 읍치를 옮기면서 다시 읍성을 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왼쪽에는 향교를 표시하였다. 내성천을 기준으로 북쪽은 화강암, 내성천 남쪽은 변성암 지대인데 지질구조선을 따라 하천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하천이 지나는 고을이면서 곳곳에 堤堰이 많이 그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저수지를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다.(이현군)

  • 용궁현 주기 (龍宮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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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위쪽에 표현된 읍치는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일대이다. 원래 읍치는 읍치 남쪽의 용비산성의 북쪽 용궁면 향석리에 있었다. 용궁현의 관할구역은 예천군의 용궁면, 지보면, 개포면의 일부, 풍양면의 일부, 의성군 안사면의 일부, 문경시 영순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 뒤쪽의 축산이 용궁의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금천이고 읍치 남쪽은 내성천이다. 가장 아래의 하천은 낙동강인데 세 하천의 폭을 같은 넓이로 그렸다. 이 세 하천을 모으는 지점, 지도 왼쪽 아래에 삼강진이 그려졌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었다. 그 옆에는 삼강서원이 표시되었다. 삼강서원은 1643년(인조 21)에 세워진 것이다. 읍치 앞의 내성천은 두 번 크게 蛇行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용비산성 오른쪽이 회룡포 지역이며 마산(예천군 지보면 마산리) 위쪽에 크게 휘는 곳이 의성포이다. 근처의 장안사 근처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용비산성은 지보면 향석리에 있던 것으로 강을 내려다 보며 지킬 수 있는 방어기지가 된다. 그 흔적을 지금도 찾을 수 있다. 축산 아래의 읍치는 읍성 없이 주요 건물만 그렸다. 읍치를 옮기면서 다시 읍성을 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왼쪽에는 향교를 표시하였다. 내성천을 기준으로 북쪽은 화강암, 내성천 남쪽은 변성암 지대인데 지질구조선을 따라 하천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하천이 지나는 고을이면서 곳곳에 堤堰이 많이 그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저수지를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다.(이현군)

  • 울산부 (蔚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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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의 읍치는 중구 성남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울산광역시에서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 언양읍(언양현), 두동면, 두서면(경주부)을 제외한 지역과 양산시 웅상읍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산은 낙동정맥에서 경주의 토함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에 있는 것이다. 진산은 무리용산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태화강인데 지도에 태화대가 보인다. 오른쪽은 동천강이다. 기록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지도에는 성곽이 없고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도 그리지 않았다. 객사 뒤쪽의 좌병영은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다. 현재의 중구 병영동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감목관은 옛날 울산에 있던 목마장을 표시한 것이다. 그 아래 방어진은 지금도 방어진항(동구 방어항)으로 남아있다. 바다에 기암을 그려서 명승지을 표시하였다. 해안을 따라 봉대를 표시하였는데 오른쪽의 남목봉대는 현재 봉대산(동구 남목 1동, 남목 2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의 남쪽 해안에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방어를 위한 진으로 서생진이 보이는데 현재의 서생면 서생리 일대에 있던 것으로 지금은 서생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북쪽의 만리성은 울산시 북구와 경주시의 경계에 있는 성이다. 왼쪽의 문수산을 따서 월드컵경기장의 명칭을 만들었다. 이밖에 사찰, 서원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울산부 주기 (蔚山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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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의 읍치는 중구 성남동 일대이며 관할구역은 울산광역시에서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 언양읍(언양현), 두동면, 두서면(경주부)을 제외한 지역과 양산시 웅상읍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산은 낙동정맥에서 경주의 토함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에 있는 것이다. 진산은 무리용산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태화강인데 지도에 태화대가 보인다. 오른쪽은 동천강이다. 기록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지도에는 성곽이 없고 객사와 여러 건물을 그렸다. 사직단, 여단, 성황사도 그리지 않았다. 객사 뒤쪽의 좌병영은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다. 현재의 중구 병영동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감목관은 옛날 울산에 있던 목마장을 표시한 것이다. 그 아래 방어진은 지금도 방어진항(동구 방어항)으로 남아있다. 바다에 기암을 그려서 명승지을 표시하였다. 해안을 따라 봉대를 표시하였는데 오른쪽의 남목봉대는 현재 봉대산(동구 남목 1동, 남목 2동)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의 남쪽 해안에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방어를 위한 진으로 서생진이 보이는데 현재의 서생면 서생리 일대에 있던 것으로 지금은 서생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쌓은 성이다. 지도 북쪽의 만리성은 울산시 북구와 경주시의 경계에 있는 성이다. 왼쪽의 문수산을 따서 월드컵경기장의 명칭을 만들었다. 이밖에 사찰, 서원 등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웅천현 (熊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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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진해현은 지금의 진해시와 무관한 마산시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며 현재의 진해시에는 조선시대 웅천현이 있었다. 현재 진해시 중심부는 일제 강점기 이후에 도시화된 지역이며 웅천현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이다. 지금 남문동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웅천의 관할 범위는 현재의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의 남쪽 가덕도에 해당한다. 지도 위쪽에 웅암산으로 표기된 웅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바다는 진해만이 여러 섬들이 그려졌는데 오른쪽 아래의 가장 큰 섬이 가덕도이다. 읍치는 직사각형으로 읍성을 그렸는데 성문을 연결하는 도로에 의해 성 안 지역이 네 구역으로 나누어지며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북쪽에 배치됨을 볼 수 있다. 전통적 읍성 안의 배치구도를 볼 수 있는 지도이다. 읍치 동남쪽에 표시된 倭城은 184.3m의 남산에 만들어진 웅천왜성이다. 이 외에도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북쪽 240.7m의 자마산에도 왜성이 있었다. 오른쪽 위의 성흥사는 지금도 진해시 대장동에 남아있다. 그 남쪽의 晴川陣은 현재의 진해시 청안동에 있는 것이며 安骨鎭인 안골동에 있었던 진이다. 사적 53호로 지정된 안골성지가 있는 곳이다. 바다를 접하고 있어 군사적 목적의 鎭堡가 많이 설치되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덕도에는 天城堡, 船所, 烽臺 등이 보이는데 봉대는 459.4m의 연대봉에 있던 것이며 천성보는 지금 천성진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곳곳에 농사를 위한 제언, 창고, 도로, 역원이 그려졌다.(이현군)

  • 웅천현 주기 (熊川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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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진해현은 지금의 진해시와 무관한 마산시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며 현재의 진해시에는 조선시대 웅천현이 있었다. 현재 진해시 중심부는 일제 강점기 이후에 도시화된 지역이며 웅천현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이다. 지금 남문동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웅천의 관할 범위는 현재의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의 남쪽 가덕도에 해당한다. 지도 위쪽에 웅암산으로 표기된 웅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바다는 진해만이 여러 섬들이 그려졌는데 오른쪽 아래의 가장 큰 섬이 가덕도이다. 읍치는 직사각형으로 읍성을 그렸는데 성문을 연결하는 도로에 의해 성 안 지역이 네 구역으로 나누어지며 객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이 북쪽에 배치됨을 볼 수 있다. 전통적 읍성 안의 배치구도를 볼 수 있는 지도이다. 읍치 동남쪽에 표시된 倭城은 184.3m의 남산에 만들어진 웅천왜성이다. 이 외에도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북쪽 240.7m의 자마산에도 왜성이 있었다. 오른쪽 위의 성흥사는 지금도 진해시 대장동에 남아있다. 그 남쪽의 晴川陣은 현재의 진해시 청안동에 있는 것이며 安骨鎭인 안골동에 있었던 진이다. 사적 53호로 지정된 안골성지가 있는 곳이다. 바다를 접하고 있어 군사적 목적의 鎭堡가 많이 설치되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덕도에는 天城堡, 船所, 烽臺 등이 보이는데 봉대는 459.4m의 연대봉에 있던 것이며 천성보는 지금 천성진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곳곳에 농사를 위한 제언, 창고, 도로, 역원이 그려졌다.(이현군)

  • 의령현 (宜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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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 일대가 되며 조선시대 합천군에 속했던 궁유면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이 조선시대 의령현이다. 속현으로 新繁縣을 두었는데 북쪽 초계와의 경계 지점에 있던 것으로 현재의 봉수면 신반리 일대에 해당한다. 그 옆의 낙서면은 현재에도 그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읍치의 성곽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통로라는 의미로 성문이 있던 곳에는 빈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읍성을 이런 형태로 그리는 것은 경상도 지도에 잘 드러나지 않는 표현방식이다. 그 안에 객사, 아사, 창 등 주요 건물이 보인다. 읍치 뒤쪽에 표시된 덕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 읍성 밖에 향교만 그리고 제단들은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남쪽에 난 도로는 현재의 20번 국도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남강은 동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위쪽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의 정암진은 낙동강의 번창한 포구로 현재의 의령읍 정암리에 해당한다. 바위그림이 크게 그려졌는데 솥처럼 생긴 바위가 강 가운데 서있다. 우리나라 대기업 창업자들이 이 인근에서 출생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읍치 왼쪽아래의 덕곡서원은 1669년(현종 1)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황을 배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 장군의 고향으로 현재 보물 671호로 지정된 곽망우당 유물이 의령읍내에 남아있다.(이현군)

  • 의령현 주기 (宜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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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 일대가 되며 조선시대 합천군에 속했던 궁유면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이 조선시대 의령현이다. 속현으로 新繁縣을 두었는데 북쪽 초계와의 경계 지점에 있던 것으로 현재의 봉수면 신반리 일대에 해당한다. 그 옆의 낙서면은 현재에도 그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읍치의 성곽을 사각형으로 그리고 통로라는 의미로 성문이 있던 곳에는 빈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읍성을 이런 형태로 그리는 것은 경상도 지도에 잘 드러나지 않는 표현방식이다. 그 안에 객사, 아사, 창 등 주요 건물이 보인다. 읍치 뒤쪽에 표시된 덕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읍치 왼쪽 읍성 밖에 향교만 그리고 제단들은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 남쪽에 난 도로는 현재의 20번 국도에 해당한다. 지도 아래의 남강은 동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위쪽에 낙동강이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의 정암진은 낙동강의 번창한 포구로 현재의 의령읍 정암리에 해당한다. 바위그림이 크게 그려졌는데 솥처럼 생긴 바위가 강 가운데 서있다. 우리나라 대기업 창업자들이 이 인근에서 출생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읍치 왼쪽아래의 덕곡서원은 1669년(현종 1)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이황을 배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 장군의 고향으로 현재 보물 671호로 지정된 곽망우당 유물이 의령읍내에 남아있다.(이현군)

  • 의성현 (義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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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성군의 의성읍 도동리, 도서리, 후죽리 일대이며 현재의 의성군 중에서 중앙고속국도의 동쪽 지역이 관할구역과 비슷하다. 중앙고속국도의 서쪽은 비안현, 용궁현의 관할 구역에 포함되었다. 동남쪽의 낙동정맥에서 의성을 둘러싼 산줄기가 뻗어나오기 때문에 하천은 서북쪽으로 흐른다. 읍치 남쪽에 경덕릉이 보이는데 지금도 금성면에 남아있다. 원래 소문국이었던 곳을 신라 경덕왕이 이 지역을 高丘縣으로 고쳤다. 객사에서 경덕릉에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에 해당하며 이와 평행하게 중앙선 철로가 놓였다. 경덕릉 아래 석탑은 금성면 탑리 5층 석탑으로 보물 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 옆에 비봉산이 표시되었는데 인근의 금성산 일대는 화산암 지대이다. 현재의 제오리 일대는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오른쪽의 빙계서원은 춘산면 빙계리에 있던 서원으로 1576년(선조 9) 에 賜額받았다. 이 지도에서도 빙산, 빙계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지금은 빙계계곡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여름에도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읍치에는 누각과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건물을 행랑처럼 연이어 그린 점이 이채롭다. 읍치 오른쪽에는 충렬사를 그리고 그 설명을 길게 붙였다. 洪儒와 金洪術를 모신 곳으로 왕건을 도운 고려의 개국공신들이다. 이 밖에 향교, 봉수대, 창, 누대, 사찰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의성현 주기 (義城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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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의성군의 의성읍 도동리, 도서리, 후죽리 일대이며 현재의 의성군 중에서 중앙고속국도의 동쪽 지역이 관할구역과 비슷하다. 중앙고속국도의 서쪽은 비안현, 용궁현의 관할 구역에 포함되었다. 동남쪽의 낙동정맥에서 의성을 둘러싼 산줄기가 뻗어나오기 때문에 하천은 서북쪽으로 흐른다. 읍치 남쪽에 경덕릉이 보이는데 지금도 금성면에 남아있다. 원래 소문국이었던 곳을 신라 경덕왕이 이 지역을 高丘縣으로 고쳤다. 객사에서 경덕릉에 연결되는 도로는 현재의 28번 국도에 해당하며 이와 평행하게 중앙선 철로가 놓였다. 경덕릉 아래 석탑은 금성면 탑리 5층 석탑으로 보물 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 옆에 비봉산이 표시되었는데 인근의 금성산 일대는 화산암 지대이다. 현재의 제오리 일대는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오른쪽의 빙계서원은 춘산면 빙계리에 있던 서원으로 1576년(선조 9) 에 賜額받았다. 이 지도에서도 빙산, 빙계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지금은 빙계계곡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여름에도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읍치에는 누각과 여러 건물이 그려졌는데 건물을 행랑처럼 연이어 그린 점이 이채롭다. 읍치 오른쪽에는 충렬사를 그리고 그 설명을 길게 붙였다. 洪儒와 金洪術를 모신 곳으로 왕건을 도운 고려의 개국공신들이다. 이 밖에 향교, 봉수대, 창, 누대, 사찰 등이 그려졌다.(이현군)

  • 의흥현 (義興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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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북 군위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 일대이다. 현재의  의흥면, 부계면, 산성면, 우보면, 고로면 일부, 효령면 일부가 관할 구역이었다. 읍치 동쪽의 용두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왼쪽의 하천은 위천으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없이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다. 객사 건물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크게 만들어졌음을 볼 수 있다. 왼쪽에 舊鄕校가 표시되고 오른쪽에 향교가 그려졌는데 향교가 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 縣內面과 縣倉이 그려졌는데 의흥현의 속현이었던 缶溪縣의 중심지 였던 곳이다. 地乘 지도의 다른 군현지도에는 잘 그려지지 않은 제단들이 표시되었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제단, 성황단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성문, 장대, 사찰이 그려진 산성이 보인다. 현재의 산성면에 위치한 華山城이다. 그 아래에 칠곡과의 경계, 신령현과 경계가 적혀 있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남쪽에 팔공산 도립공원이 위치한다. 팔공산 도립공원 안에 칠곡의 읍치였던 가산산성이 있는데 이 지도에 나온 산성과는 다른 것이다. 곳곳에 봉수대가 보이는데 명칭과 위치를 자세히 표시하였다. 도로를 그리고 경로상의 역원을 표시하였다. 우곡역은 현재의 우보면 모산리에 있던 역이다. 고종 때 폐지되었다.(이현군)

  • 의흥현 주기 (義興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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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북 군위군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 일대이다. 현재의  의흥면, 부계면, 산성면, 우보면, 고로면 일부, 효령면 일부가 관할 구역이었다. 읍치 동쪽의 용두산이 진산에 해당하며 왼쪽의 하천은 위천으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없이 주요 건물이 표시되었다. 객사 건물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크게 만들어졌음을 볼 수 있다. 왼쪽에 舊鄕校가 표시되고 오른쪽에 향교가 그려졌는데 향교가 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 縣內面과 縣倉이 그려졌는데 의흥현의 속현이었던 缶溪縣의 중심지 였던 곳이다. 地乘 지도의 다른 군현지도에는 잘 그려지지 않은 제단들이 표시되었다. 읍치 주변부에 사직단, 여제단, 성황단이 자세히 표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에 성문, 장대, 사찰이 그려진 산성이 보인다. 현재의 산성면에 위치한 華山城이다. 그 아래에 칠곡과의 경계, 신령현과 경계가 적혀 있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남쪽에 팔공산 도립공원이 위치한다. 팔공산 도립공원 안에 칠곡의 읍치였던 가산산성이 있는데 이 지도에 나온 산성과는 다른 것이다. 곳곳에 봉수대가 보이는데 명칭과 위치를 자세히 표시하였다. 도로를 그리고 경로상의 역원을 표시하였다. 우곡역은 현재의 우보면 모산리에 있던 역이다. 고종 때 폐지되었다.(이현군)

  • 인동부 (仁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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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내의 낙동강 동쪽 지역과 칠곡군 북삼면, 석적면, 기산면, 약목면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구미시내의 동쪽 인의동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인동초등학교를 통해 그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동쪽의 유악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으며 읍치 왼쪽에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이다. 낙동강 동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며 서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과 연결된다. 신라 경덕왕 때 인동이 되었고 현종대에는 경산부에 소속되었다가 공양왕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부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에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인동면 지역은 1978년 구미시에 포함되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진 군현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지도에서 읍치에는 성이 보이지 않고 객사 등 주요 건물이 배치되었고 동쪽에 천생산성(구미시 신동, 금전동)이 자리하고 있다. 본래 신라의 옛 성이었던 것을 의병장 곽재우가 1601년(선조 34)에 외성을 쌓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산성 안에 4개의 못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향교가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낙동강 변에 서원, 나루, 창, 堤, 봉수대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산서원은 길재를 배향한 서원으로 1574년(선조 7)에 세워졌다. 동락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도로와 함께 역을 표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역인 양원역은 구미시 진평동에 있던 것이다.(이현군)

  • 인동부 주기 (仁同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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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내의 낙동강 동쪽 지역과 칠곡군 북삼면, 석적면, 기산면, 약목면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였다. 구미시내의 동쪽 인의동 일대가 읍치에 해당한다. 인동초등학교를 통해 그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동쪽의 유악산이 진산으로 기록되었으며 읍치 왼쪽에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이다. 낙동강 동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이며 서쪽의 산줄기는 백두대간과 연결된다. 신라 경덕왕 때 인동이 되었고 현종대에는 경산부에 소속되었다가 공양왕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부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에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인동면 지역은 1978년 구미시에 포함되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진 군현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지도에서 읍치에는 성이 보이지 않고 객사 등 주요 건물이 배치되었고 동쪽에 천생산성(구미시 신동, 금전동)이 자리하고 있다. 본래 신라의 옛 성이었던 것을 의병장 곽재우가 1601년(선조 34)에 외성을 쌓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산성 안에 4개의 못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향교가 독자적인 형국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낙동강 변에 서원, 나루, 창, 堤, 봉수대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산서원은 길재를 배향한 서원으로 1574년(선조 7)에 세워졌다. 동락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도로와 함께 역을 표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역인 양원역은 구미시 진평동에 있던 것이다.(이현군)

  • 자인현 (慈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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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자인면 원당리 일대가 읍치 지역이었다. 관할범위는 자인면, 용성면, 남산면, 압량면 일부, 진량읍 일부 지역이었다. 압량면과 진량읍의 북쪽 지역은 경산군에 포함된다. 신라 때는 장산군(경산군)의 영현,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637년(조선 인조 15)에 비로소 현감을 두었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산이 등장하지 않는다. 중심부에 성곽 없이 건물만 그려졌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건물의 방향이 다른 경우도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전부 남면하는 점이 이색적이다.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 안에 그린 것이 아니라 읍치에 같이 그렸는데 조선후기에 들어와서야 현으로 승격된 것과 관련될 수도 있겠다. 읍성도 보이지 않고 읍치 남쪽의 하천은 오목천으로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지도 아래에 晦齋觀瀾書院이 표시되었는데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한 서원이다. 晦齋는 이언적의 호이다. 서원 이름 앞에 배향한 인물의 호를 적은 것은 지승 고지도에서 드문 경우이다. 그 옆에는 효자를 旌閭한 문이 표시되었다. 아래쪽의 대왕산은 경산시 남산면과 청도군 금천면 경계에 위치한 605m의 산이다. 면 이름을 다른 지도에서는 네모 안에 표시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곳곳에 사찰이 그려졌다.(이현군)

  • 자인현 주기 (慈仁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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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포함된 조선시대 군현으로 자인면 원당리 일대가 읍치 지역이었다. 관할범위는 자인면, 용성면, 남산면, 압량면 일부, 진량읍 일부 지역이었다. 압량면과 진량읍의 북쪽 지역은 경산군에 포함된다. 신라 때는 장산군(경산군)의 영현,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637년(조선 인조 15)에 비로소 현감을 두었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산이 등장하지 않는다. 중심부에 성곽 없이 건물만 그려졌다.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건물의 방향이 다른 경우도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전부 남면하는 점이 이색적이다. 향교는 독립적인 형국 안에 그린 것이 아니라 읍치에 같이 그렸는데 조선후기에 들어와서야 현으로 승격된 것과 관련될 수도 있겠다. 읍성도 보이지 않고 읍치 남쪽의 하천은 오목천으로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된다. 지도 아래에 晦齋觀瀾書院이 표시되었는데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한 서원이다. 晦齋는 이언적의 호이다. 서원 이름 앞에 배향한 인물의 호를 적은 것은 지승 고지도에서 드문 경우이다. 그 옆에는 효자를 旌閭한 문이 표시되었다. 아래쪽의 대왕산은 경산시 남산면과 청도군 금천면 경계에 위치한 605m의 산이다. 면 이름을 다른 지도에서는 네모 안에 표시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곳곳에 사찰이 그려졌다.(이현군)

  • 장기현 (長鬐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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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동해안 남쪽에 호랑이 꼬리처럼 튀어나온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고을로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었다.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지역에 해당하며 중심부는 장기면 읍내리인데 지금도 장기읍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가 대각선으로 내려오는 것은 꼬리모양의 장기곶에 해당하는 포항시의 대보면과 동해면의 북쪽 해안 지역은 영일현에 속하고 남쪽 해안이 장기현에 속하기 때문이다. 남쪽 해안선만 연결해서 바다쪽을 표현했기 때문에 해안선도 직선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다. 진산은 북문 밖에 표시된 巨山으로 장기면 읍내리 서쪽에 있는 산이다. 현재는 동악산으로 불리는 252.5m의 산이다. 그 서쪽에 있는 산이 만리성재로 428m이다. 지도 왼쪽에 만성산으로 표기되었다. 이 산들은 남쪽의 경주 토함산에서 북으로 뻗어나온 산줄기 상에 있는 것이다. 성곽은 자연 지형을 활용해 쌓았으며 읍성 안 객사 뒤에 따로 산 하나를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성문은 동문과 북문만 그리고 도로를 연결했는데 현재의 906번 지방도로와 비슷하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전형적인 山圖 형식을 따라 그렸다. 지도 오른쪽 위에 마성문이 보이고 목장, 목관사 등이 표시되었다. 말을 기르던 목마장이 있었다. 마성문 남쪽의 뇌성봉대가 현재의 구룡포읍 성동리에 있었고 그 북쪽의 발산봉대에 해당하는 지점이 대보면의 봉화산으로 판단된다. 이에 근거해 목장의 위치를 추정하면 현재의 대보면 구만리, 대보리 일대가 된다. 호랑이 꼬리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이현군)

  • 장기현 주기 (長鬐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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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동해안 남쪽에 호랑이 꼬리처럼 튀어나온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고을로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었다.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지역에 해당하며 중심부는 장기면 읍내리인데 지금도 장기읍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도 북쪽의 산줄기가 대각선으로 내려오는 것은 꼬리모양의 장기곶에 해당하는 포항시의 대보면과 동해면의 북쪽 해안 지역은 영일현에 속하고 남쪽 해안이 장기현에 속하기 때문이다. 남쪽 해안선만 연결해서 바다쪽을 표현했기 때문에 해안선도 직선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다. 진산은 북문 밖에 표시된 巨山으로 장기면 읍내리 서쪽에 있는 산이다. 현재는 동악산으로 불리는 252.5m의 산이다. 그 서쪽에 있는 산이 만리성재로 428m이다. 지도 왼쪽에 만성산으로 표기되었다. 이 산들은 남쪽의 경주 토함산에서 북으로 뻗어나온 산줄기 상에 있는 것이다. 성곽은 자연 지형을 활용해 쌓았으며 읍성 안 객사 뒤에 따로 산 하나를 표시한 것이 이색적이다. 성문은 동문과 북문만 그리고 도로를 연결했는데 현재의 906번 지방도로와 비슷하다. 읍성 동쪽의 향교는 전형적인 山圖 형식을 따라 그렸다. 지도 오른쪽 위에 마성문이 보이고 목장, 목관사 등이 표시되었다. 말을 기르던 목마장이 있었다. 마성문 남쪽의 뇌성봉대가 현재의 구룡포읍 성동리에 있었고 그 북쪽의 발산봉대에 해당하는 지점이 대보면의 봉화산으로 판단된다. 이에 근거해 목장의 위치를 추정하면 현재의 대보면 구만리, 대보리 일대가 된다. 호랑이 꼬리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이현군)

  • 지례현 (知禮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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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면 명칭으로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이다. 읍치는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일대이며  지례면, 부항면, 대덕면, 구성면 일부지역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하며 읍치를 둘러싼 산줄기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산줄기의 방향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에 지도 위쪽이 서북쪽이 되며 전라도,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진산은 남쪽의 龜山이 되는데 현재 지례면에 龜首라는 지명이 있고 이 지도에는 龜尾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구미는 현재의 구성면 구미리이다. 일반적으로 坊面 의 명칭은 네모안에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며 방면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면 명칭을 생략하고 村, 谷, 谷村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감천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다. 향교는 현재의 지례면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아래쪽의 산줄기는 산줄기의 방향을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글씨 쓰는 방향도 바꾸어 적었다. 지도 오른쪽 위에는 황악산 來脈이라고 따로 적어 놓는 등 풍수적 관념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맥은 읍치의 객사까지 연결되고 있다. 읍치 앞 강가에 鑑湖亭이 보이는데 1690년(숙종 16)에 만든 것이다. 맞은편에는 폭포가 회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역원, 창, 고개, 봉수대를 그렸다. 도로가 하천을 따라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이현군)

  • 지례현 주기 (知禮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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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면 명칭으로 남아있는 조선시대 군현이다. 읍치는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일대이며  지례면, 부항면, 대덕면, 구성면 일부지역이 관할 범위였다.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하며 읍치를 둘러싼 산줄기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산줄기의 방향에 맞추어 지도를 그렸기 때문에 지도 위쪽이 서북쪽이 되며 전라도,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진산은 남쪽의 龜山이 되는데 현재 지례면에 龜首라는 지명이 있고 이 지도에는 龜尾가 표시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구미는 현재의 구성면 구미리이다. 일반적으로 坊面 의 명칭은 네모안에 표시하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며 방면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면 명칭을 생략하고 村, 谷, 谷村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읍치 주변의 하천은 감천으로 유입된다. 읍치에는 읍성 없이 여러 건물을 그렸다. 향교는 현재의 지례면 교리 일대에 해당한다. 아래쪽의 산줄기는 산줄기의 방향을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글씨 쓰는 방향도 바꾸어 적었다. 지도 오른쪽 위에는 황악산 來脈이라고 따로 적어 놓는 등 풍수적 관념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맥은 읍치의 객사까지 연결되고 있다. 읍치 앞 강가에 鑑湖亭이 보이는데 1690년(숙종 16)에 만든 것이다. 맞은편에는 폭포가 회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역원, 창, 고개, 봉수대를 그렸다. 도로가 하천을 따라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이현군)

  • 진보현 (眞寶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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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 때 진보현이 되었는데 현재는 청송군의 진보면 명칭으로 남아 있다.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진안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진보면, 파천면 일부, 영양군 입암면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지도의 크기가 다른 군현지도와 같아서 넓은 범위처럼 보이지만 안동시의 동쪽에 위치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다. 읍치 근처로 흐르는 하천은 반변천으로 남쪽의 용전천과 합해져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의 유로와 폭이 과거와 달라졌다. 오른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으로 영해부와 경계가 된다. 읍치 주변의 산줄기는 가운데를 향하게 그리면서 다른 주요 건물, 산줄기도 각각 독자적인 형국을 이루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풍수 사상이 강하게 개입된 지도로 보인다. 읍치에는 土城이라는 표시가 있다. 읍성은 대부분 토성으로 만들었다가 후대에 석축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은 토성으로 남아있으며 그 사실을 지도에 적은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읍치 앞의 도로는 현재의 31번, 34번 국도에 해당하며 오른쪽에 표시된 각산역은 진보면 각산리에 있던 역이다. 객사 남쪽의 비봉산은 진보면과 청송군 파천면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671m이다. 그 남쪽에 퇴계선생선영을 山圖 형식에 따라 그리고 그 안에 봉분을 그림으로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의 鳳覽書院은 1690년(숙종 16)에 사액 받은 서원으로 퇴계 이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진보현 주기 (眞寶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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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 때 진보현이 되었는데 현재는 청송군의 진보면 명칭으로 남아 있다.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진안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진보면, 파천면 일부, 영양군 입암면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지도의 크기가 다른 군현지도와 같아서 넓은 범위처럼 보이지만 안동시의 동쪽에 위치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다. 읍치 근처로 흐르는 하천은 반변천으로 남쪽의 용전천과 합해져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의 유로와 폭이 과거와 달라졌다. 오른쪽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나온 것으로 영해부와 경계가 된다. 읍치 주변의 산줄기는 가운데를 향하게 그리면서 다른 주요 건물, 산줄기도 각각 독자적인 형국을 이루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풍수 사상이 강하게 개입된 지도로 보인다. 읍치에는 土城이라는 표시가 있다. 읍성은 대부분 토성으로 만들었다가 후대에 석축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은 토성으로 남아있으며 그 사실을 지도에 적은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읍치 앞의 도로는 현재의 31번, 34번 국도에 해당하며 오른쪽에 표시된 각산역은 진보면 각산리에 있던 역이다. 객사 남쪽의 비봉산은 진보면과 청송군 파천면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671m이다. 그 남쪽에 퇴계선생선영을 山圖 형식에 따라 그리고 그 안에 봉분을 그림으로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의 鳳覽書院은 1690년(숙종 16)에 사액 받은 서원으로 퇴계 이황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진주목 (晋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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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진주시와 그 주변 지역을 그린 지도이다. 남쪽으로 사천현(사천시), 창선도(남해 창선면)까지 포함하고 있다. 진주목은 현재의 진주시와 고성군, 사천시, 남해군, 하동군, 산청군, 단성군의 일부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가운데의 성곽은 읍치가 아니라 군사적 목적의 성으로 임진왜란때의 주요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그 안에 병영, 중영이 있으며 성의 남쪽에 임란 당시의 논개의 일화로 잘 알려진 촉석루와 의암이 보인다. 행정중심지는 진주의 북쪽, 진산인 비봉산 아래로 객사, 향교, 동헌이 그려진 곳이다. 군사적 중심지와 행정 중심지과 분리된 독특한 구조이다. 진주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남강이며 지도 왼쪽 위에는 지리산이 보인다. 남강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은 과거의 모습과 달라졌으며 진양호에 수몰된 지역이다. 지금도 같은 명칭으로 사용되는 금산면을 제외하고는 행정명을 모두 면이 아닌 리로 표시한 점이 특이하다. 지도 남쪽의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며 현재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해당한다. 水軍의 활동에 중요한 요충지인 관계로 지도에 봉수대의 위치가 표시되었고 각산봉(사천시 실안동, 대방동) 옆 해안에는 전선을 제작하는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현재의 사천시 송포동에는 이순신 장군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지도에 전선소(사천시 선구동)로 표시된 지역의 인근에 지금은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보이는 염창진은 지수면 청담리에 있던 나루터이다.(이현군)

  • 진주목 주기 (晋州牧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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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진주시와 그 주변 지역을 그린 지도이다. 남쪽으로 사천현(사천시), 창선도(남해 창선면)까지 포함하고 있다. 진주목은 현재의 진주시와 고성군, 사천시, 남해군, 하동군, 산청군, 단성군의 일부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가운데의 성곽은 읍치가 아니라 군사적 목적의 성으로 임진왜란때의 주요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그 안에 병영, 중영이 있으며 성의 남쪽에 임란 당시의 논개의 일화로 잘 알려진 촉석루와 의암이 보인다. 행정중심지는 진주의 북쪽, 진산인 비봉산 아래로 객사, 향교, 동헌이 그려진 곳이다. 군사적 중심지와 행정 중심지과 분리된 독특한 구조이다. 진주성을 둘러싼 하천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남강이며 지도 왼쪽 위에는 지리산이 보인다. 남강댐의 건설로 지도 왼쪽 부분은 과거의 모습과 달라졌으며 진양호에 수몰된 지역이다. 지금도 같은 명칭으로 사용되는 금산면을 제외하고는 행정명을 모두 면이 아닌 리로 표시한 점이 특이하다. 지도 남쪽의 바다는 사천만 일대이며 현재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해당한다. 水軍의 활동에 중요한 요충지인 관계로 지도에 봉수대의 위치가 표시되었고 각산봉(사천시 실안동, 대방동) 옆 해안에는 전선을 제작하는 전선소가 표시되었다. 현재의 사천시 송포동에는 이순신 장군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지도에 전선소(사천시 선구동)로 표시된 지역의 인근에 지금은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지도 오른쪽 위에 보이는 염창진은 지수면 청담리에 있던 나루터이다.(이현군)

  • 진해현 (鎭海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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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鎭海라는 지명은 창원시 옆에 위치한 진해시로 알려졌지만, 조선시대 진해현은 이곳과 다른 곳에 위치하였다. 현재의 경남 진해시는 웅천현에 속하였던 작은 지역이 일제 강점기 이후에 중심지가 이전하고 도시화된 지역이다. 진주, 고성, 함안, 칠원과 접하고 있는 이 지도의 진해현은 마산시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다.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이 관할 범위로 읍치는 진동면 진동리 일대가 된다. 북쪽의 산줄기는 낙남정맥과 연결 되며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취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취산이라는 지명은 오늘날 ‘수리봉’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 많다. 진해현의 진산 또한 현재 진동면에 405m의 수리봉으로 남아있다. 하천은 남류하여 남해로 유입되며 바다에는 섬들이 표시되었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작은 고을이라 객사, 아사, 창만 그려녛었다. 읍치 북쪽 취산 아래 文廟는 향교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군현지도에서는 문묘라 적지 않고 일반적으로 향교로 표시하는데 진해현 지도에서만 문묘라 적었다. 성밖의 여단, 성황단은 그리지 않고 사직단만 그렸다. 보통 사직단이라고 적는데 이 지도에서는 壇 대신 宇를 적었다. 다른 지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오른쪽에 이름없는 봉대는 가을포봉수이다. 의도적으로 해안가에 배치한 봉수대로 보인다. 尙令驛, 所達院 등의 역원, 의림사, 계원사 등의 사찰이 있었으나, 모두 지도에는 그려넣지 않았다. 지나치게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진해현 주기 (鎭海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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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鎭海라는 지명은 창원시 옆에 위치한 진해시로 알려졌지만, 조선시대 진해현은 이곳과 다른 곳에 위치하였다. 현재의 경남 진해시는 웅천현에 속하였던 작은 지역이 일제 강점기 이후에 중심지가 이전하고 도시화된 지역이다. 진주, 고성, 함안, 칠원과 접하고 있는 이 지도의 진해현은 마산시의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다.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이 관할 범위로 읍치는 진동면 진동리 일대가 된다. 북쪽의 산줄기는 낙남정맥과 연결 되며 지도 오른쪽 위에 표시된 취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취산이라는 지명은 오늘날 ‘수리봉’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 많다. 진해현의 진산 또한 현재 진동면에 405m의 수리봉으로 남아있다. 하천은 남류하여 남해로 유입되며 바다에는 섬들이 표시되었다. 읍성은 그리지 않고 작은 고을이라 객사, 아사, 창만 그려녛었다. 읍치 북쪽 취산 아래 文廟는 향교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군현지도에서는 문묘라 적지 않고 일반적으로 향교로 표시하는데 진해현 지도에서만 문묘라 적었다. 성밖의 여단, 성황단은 그리지 않고 사직단만 그렸다. 보통 사직단이라고 적는데 이 지도에서는 壇 대신 宇를 적었다. 다른 지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오른쪽에 이름없는 봉대는 가을포봉수이다. 의도적으로 해안가에 배치한 봉수대로 보인다. 尙令驛, 所達院 등의 역원, 의림사, 계원사 등의 사찰이 있었으나, 모두 지도에는 그려넣지 않았다. 지나치게 간략하게 그렸다.(이현군)

  • 창녕현 (昌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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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창녕군은 조선시대 창녕현과 영산현으로 나누어 진다. 창녕현은 현재 창녕군의 북쪽 지역인 창령읍, 유어면, 대지면, 유어면, 고암면, 성산면, 이방면, 대합면에 해당한다. 중심부는 현재의 창녕읍 말흘리, 교상리, 교하리, 교리 일대이다. 구마고속국도 창녕분기점 동쪽 지역이 읍치 지역이었다. 진산은 동쪽 756.6m 높이인 화왕산으로 화왕산성은 사적 64호로 지정되었다. 그 아래에는 산성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세 개의 연못과 함께 성곽이 그려졌다. 이 지도에는 火班山으로 적혀 있고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다. 화왕산은 동쪽의 낙동정맥으로 연결되는 산이며 읍치의 서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데 지도에는 아래쪽에 표시되었다. 동쪽을 위로 하여 그린 지도이다. 읍치에는 객사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자세하게 그렸는데 남쪽에 獄을 원형으로 표시한 것과 지방 양반이 중심이 되는 鄕廳이 보이는 점이 특징적이다. 읍치 남쪽 탑 모양을 그리고 이름은 붙이지 않았는데 사적 33호인 신라진흥왕 척경비와 보물 34호로 지정된 동3층 석탑으로 보인다. 낙동강 유역으로 지대가 낮아 곳곳에 堤, 池 등이 많이 그려졌음을 볼 수 있다. 지도 맨 아래쪽 지역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연습지인 우포늪이 있는 곳이다. 곳곳에 사찰과 창고를 표시하였다. 관룡사는 동쪽 관룡산 아래 위치한 사찰로 약사전이 보물 146호, 대웅전이 보물 212호로 지정되었다.(이현군)

  • 창녕현 주기 (昌寧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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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창녕군은 조선시대 창녕현과 영산현으로 나누어 진다. 창녕현은 현재 창녕군의 북쪽 지역인 창령읍, 유어면, 대지면, 유어면, 고암면, 성산면, 이방면, 대합면에 해당한다. 중심부는 현재의 창녕읍 말흘리, 교상리, 교하리, 교리 일대이다. 구마고속국도 창녕분기점 동쪽 지역이 읍치 지역이었다. 진산은 동쪽 756.6m 높이인 화왕산으로 화왕산성은 사적 64호로 지정되었다. 그 아래에는 산성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세 개의 연못과 함께 성곽이 그려졌다. 이 지도에는 火班山으로 적혀 있고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다. 화왕산은 동쪽의 낙동정맥으로 연결되는 산이며 읍치의 서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데 지도에는 아래쪽에 표시되었다. 동쪽을 위로 하여 그린 지도이다. 읍치에는 객사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자세하게 그렸는데 남쪽에 獄을 원형으로 표시한 것과 지방 양반이 중심이 되는 鄕廳이 보이는 점이 특징적이다. 읍치 남쪽 탑 모양을 그리고 이름은 붙이지 않았는데 사적 33호인 신라진흥왕 척경비와 보물 34호로 지정된 동3층 석탑으로 보인다. 낙동강 유역으로 지대가 낮아 곳곳에 堤, 池 등이 많이 그려졌음을 볼 수 있다. 지도 맨 아래쪽 지역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연습지인 우포늪이 있는 곳이다. 곳곳에 사찰과 창고를 표시하였다. 관룡사는 동쪽 관룡산 아래 위치한 사찰로 약사전이 보물 146호, 대웅전이 보물 212호로 지정되었다.(이현군)

  • 창원부 (昌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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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은 조선초기 태종대에 義昌과 會原을 합쳐서 만든 지명으로 현재의 창원시, 마산시 일대에 해당한다. 회원현은 마산시에 회원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위쪽의 하천은 낙동강이며 아래쪽의 바다은 마산만, 진해만에 해당한다. 밀양의 경계에 표시된 손진은 밀양시 초동면 반월리 진촌나루이다. 그 남쪽의 동면은 창원시 동읍인데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는 곳이다. 원형으로 읍성을 그렸는데 현재 창원시내 지역이다. 읍성 안에 객사, 아사 등 건물을 표시하였는데 그 안에 蓮亭을 자세히 묘사한 것이 이색적이다. 행정구역으로 부내면과 상대적 위치에 동면, 서면, 남면, 북면을 기록하고 있다. 많은 내용을 담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게 지역을 그렸다. 남쪽 바닷가에 표시된 월영대와 그 위쪽의 고운대는 신라의 고운 최치원과 관련있는 장소이다. 마산시 합포구 월영동은 이 월영대를 따서 만든 지명이다. 월영대 옆에 선소가 지도에 표시되었는데 마산 여객선 터미널 근처로 비정된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창원천, 남천으로 보이며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섬은 유원지로 유명한 돌섬, 모도, 부도 등으로 보인다. 지도 왼쪽 아래의 내포는 마산시 구산면 내포리인데 내포에서 읍치 남쪽으로 연결되는 해안선이 실제와 다르게 그려졌다. 읍성 서문 밖에 향교와 구병영이 표시되었다. 구병영은 조선초기에 우병영이 있던 곳으로 선조때 진주로 이전하였기에 旧兵營이라고 적은 것이다.(이현군)

  • 창원부 주기 (昌原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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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은 조선초기 태종대에 義昌과 會原을 합쳐서 만든 지명으로 현재의 창원시, 마산시 일대에 해당한다. 회원현은 마산시에 회원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지도 위쪽의 하천은 낙동강이며 아래쪽의 바다은 마산만, 진해만에 해당한다. 밀양의 경계에 표시된 손진은 밀양시 초동면 반월리 진촌나루이다. 그 남쪽의 동면은 창원시 동읍인데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는 곳이다. 원형으로 읍성을 그렸는데 현재 창원시내 지역이다. 읍성 안에 객사, 아사 등 건물을 표시하였는데 그 안에 蓮亭을 자세히 묘사한 것이 이색적이다. 행정구역으로 부내면과 상대적 위치에 동면, 서면, 남면, 북면을 기록하고 있다. 많은 내용을 담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게 지역을 그렸다. 남쪽 바닷가에 표시된 월영대와 그 위쪽의 고운대는 신라의 고운 최치원과 관련있는 장소이다. 마산시 합포구 월영동은 이 월영대를 따서 만든 지명이다. 월영대 옆에 선소가 지도에 표시되었는데 마산 여객선 터미널 근처로 비정된다. 읍치 남쪽의 하천은 창원천, 남천으로 보이며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섬은 유원지로 유명한 돌섬, 모도, 부도 등으로 보인다. 지도 왼쪽 아래의 내포는 마산시 구산면 내포리인데 내포에서 읍치 남쪽으로 연결되는 해안선이 실제와 다르게 그려졌다. 읍성 서문 밖에 향교와 구병영이 표시되었다. 구병영은 조선초기에 우병영이 있던 곳으로 선조때 진주로 이전하였기에 旧兵營이라고 적은 것이다.(이현군)

  • 청도군 (淸道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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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청도군은 대구부에 속하는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을 제외한 청도군과 밀양시 청도면을 관할 구역으로 하며 읍치는 화양읍 동상리, 서상리 일대에 해당한다. 대구의 남쪽, 밀양의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이 지도는 남북을 바꾸어 그렸다. 성문의 명칭과 면 명칭에 들어간 동서남북의 방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읍성 뒤에 그려진 오산이 진산인데 실제 위치는 남쪽에 있다. 진산의 위치 때문에 남북 방향을 바꾸어 지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 위쪽의 화악산은 현재의 밀양시와 청도군을 나누는 경계지점에 있는 산이다. 읍치의 왼쪽(동쪽)에 흐르는 하천은 동창천인데 밀양의 밀양강을 지나 낙동강에 합류한다. 지도 왼쪽의 상동창, 하동창에서 하천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읍성 안에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읍성에 남문을 따로 표기하지 않았다. 읍성 안 건물 표기에 잘 등장하지 않는 향청이 읍성 안에 그려졌다. 지형적인 특성상 동문과 서문이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주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 북문 밖에 獄이 원형으로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성 밖의 향교는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율전, 죽전이 지도 곳곳에 보인다. 자계서원과 남계서원이 있었으며 성현역, 봉수대 등을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동문 밖에 큰 바위가 그려진 점이 이채로운데 보물 323호로 지정된 석빙고로 추정된다. 현재는 소싸움으로 유명한 지역이다.(이현군)

  • 청도군 주기 (淸道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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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청도군은 대구부에 속하는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을 제외한 청도군과 밀양시 청도면을 관할 구역으로 하며 읍치는 화양읍 동상리, 서상리 일대에 해당한다. 대구의 남쪽, 밀양의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이 지도는 남북을 바꾸어 그렸다. 성문의 명칭과 면 명칭에 들어간 동서남북의 방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읍성 뒤에 그려진 오산이 진산인데 실제 위치는 남쪽에 있다. 진산의 위치 때문에 남북 방향을 바꾸어 지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 위쪽의 화악산은 현재의 밀양시와 청도군을 나누는 경계지점에 있는 산이다. 읍치의 왼쪽(동쪽)에 흐르는 하천은 동창천인데 밀양의 밀양강을 지나 낙동강에 합류한다. 지도 왼쪽의 상동창, 하동창에서 하천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읍성 안에 여러 건물을 그렸는데 읍성에 남문을 따로 표기하지 않았다. 읍성 안 건물 표기에 잘 등장하지 않는 향청이 읍성 안에 그려졌다. 지형적인 특성상 동문과 서문이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주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 북문 밖에 獄이 원형으로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성 밖의 향교는 교촌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율전, 죽전이 지도 곳곳에 보인다. 자계서원과 남계서원이 있었으며 성현역, 봉수대 등을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동문 밖에 큰 바위가 그려진 점이 이채로운데 보물 323호로 지정된 석빙고로 추정된다. 현재는 소싸움으로 유명한 지역이다.(이현군)

  • 청송부 (靑松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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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청송읍 지역이 되며 현재 청송군에서 진보면과 파천면 일부는 진보현에 해당한다. 청송군 중에 나머지 지역이 청송부의 관할 구역이었다. 청송이란 지명은 세종대에 靑寶郡과 松生縣을 합하여 만든 것이다. 지도 가운데에 송생고현(청송읍 송생리)이 보인다. 송생초등학교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청송부의 읍치는 청송읍 월막리로 지도 위쪽에 그려졌다. 읍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 아래의 하천은 용전천으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낙동정맥의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읍치 뒤에 그려진 방광산(청송읍과 파천면의 경계)이 진산이다. 오른쪽의 월외산, 월명산, 주방산 등은 모두 낙동정맥의 경로상에 있는 산이다. 주방산은 현재의 주왕산국립공원을 지칭하는 것이다. 지도 아래쪽의 면 명칭, 건물, 산줄기, 글씨를 모두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청송부 읍치가 중심부에 입지하지 않았지만 어느 곳이 중심인지 확연히 보여주는 구도라 할 수 있다. 병암서원은 1702년(숙종 28)에 사액된 서원으로 이이와 김장생을 배향하였고, 송학서원은 1699년(숙종 25)에 사액되었는데 이황, 김성일, 장현광을 배향하였다. 청운역, 문거역 등을 그리면서 도로와 연결되지 않게 따로 그린 점이 특이하다. 경치 좋은 곳에 누정이 많이 들어서 있다. 읍치와 가까운 지점에 있는 현비암은 지금도 청송읍의 청송교 근처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지도에서 창고, 사찰 등을 확인할 수 있다.(이현군)

  • 청송부 주기 (靑松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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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청송읍 지역이 되며 현재 청송군에서 진보면과 파천면 일부는 진보현에 해당한다. 청송군 중에 나머지 지역이 청송부의 관할 구역이었다. 청송이란 지명은 세종대에 靑寶郡과 松生縣을 합하여 만든 것이다. 지도 가운데에 송생고현(청송읍 송생리)이 보인다. 송생초등학교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청송부의 읍치는 청송읍 월막리로 지도 위쪽에 그려졌다. 읍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 아래의 하천은 용전천으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낙동정맥의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읍치 뒤에 그려진 방광산(청송읍과 파천면의 경계)이 진산이다. 오른쪽의 월외산, 월명산, 주방산 등은 모두 낙동정맥의 경로상에 있는 산이다. 주방산은 현재의 주왕산국립공원을 지칭하는 것이다. 지도 아래쪽의 면 명칭, 건물, 산줄기, 글씨를 모두 읍치를 향하게 그렸다. 청송부 읍치가 중심부에 입지하지 않았지만 어느 곳이 중심인지 확연히 보여주는 구도라 할 수 있다. 병암서원은 1702년(숙종 28)에 사액된 서원으로 이이와 김장생을 배향하였고, 송학서원은 1699년(숙종 25)에 사액되었는데 이황, 김성일, 장현광을 배향하였다. 청운역, 문거역 등을 그리면서 도로와 연결되지 않게 따로 그린 점이 특이하다. 경치 좋은 곳에 누정이 많이 들어서 있다. 읍치와 가까운 지점에 있는 현비암은 지금도 청송읍의 청송교 근처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지도에서 창고, 사찰 등을 확인할 수 있다.(이현군)

  • 청하현 (淸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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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영일군에 병합되었다가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어 조선시대에 군현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작은 지역이다. 현재의 포항시의 북쪽 지역인 포항시 송라면, 청하면이 관할 범위였으며 청하면 덕성리가 읍치가 된다. 청하초등학교, 청하중학교, 관동 등의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 지역의 모든 하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산줄기가 읍치를 가운데 두고 바다를 향하게 그려진 점이 이색점이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읍성을 갖추고 그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다. 읍성의 성문은 동문과 서문만 표시하였는데 동문에서 연결되는 도로는 영덕과 흥해로 연결되는데 그 경로상에 송라관이 그려졌다. 해안을 따라 현재의 7번 국도가 이 길을 따라 형성되었다. 읍치 서쪽의 산줄기는 물결 모양의 산줄기 형태로 그렸지만 동쪽 해안가의 산들은 숲의 형태로 그려졌다. 동해의 바람을 막고 비보하는 측면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 위의 보경사는 송라면에 있는 사찰로 보물 252호로 지정된 원진국사비가 소장되었다. 보경사 서쪽에 현재 쌍생폭포, 복호폭포, 연산폭포 등이 있는데 이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용추는 그 중 가장 큰 연산폭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 아래 대양이라고 동해를 표시하고 그 아래 용산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청하면 용두리의 용산으로 189.8m이지만 해안이기에 시각적으로 훨씬 더 높은 산으로 느껴질 것으로 판단된다. 그 아래 조경대는 지금도 명승지로 남아있다.(이현군)

  • 청하현 주기 (淸河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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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영일군에 병합되었다가 지금은 포항시에 포함되어 조선시대에 군현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작은 지역이다. 현재의 포항시의 북쪽 지역인 포항시 송라면, 청하면이 관할 범위였으며 청하면 덕성리가 읍치가 된다. 청하초등학교, 청하중학교, 관동 등의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낙동정맥의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 지역의 모든 하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산줄기가 읍치를 가운데 두고 바다를 향하게 그려진 점이 이색점이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읍성을 갖추고 그 안에 주요 건물을 그렸다. 읍성의 성문은 동문과 서문만 표시하였는데 동문에서 연결되는 도로는 영덕과 흥해로 연결되는데 그 경로상에 송라관이 그려졌다. 해안을 따라 현재의 7번 국도가 이 길을 따라 형성되었다. 읍치 서쪽의 산줄기는 물결 모양의 산줄기 형태로 그렸지만 동쪽 해안가의 산들은 숲의 형태로 그려졌다. 동해의 바람을 막고 비보하는 측면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 위의 보경사는 송라면에 있는 사찰로 보물 252호로 지정된 원진국사비가 소장되었다. 보경사 서쪽에 현재 쌍생폭포, 복호폭포, 연산폭포 등이 있는데 이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용추는 그 중 가장 큰 연산폭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 아래 대양이라고 동해를 표시하고 그 아래 용산이 표시되었다. 현재의 청하면 용두리의 용산으로 189.8m이지만 해안이기에 시각적으로 훨씬 더 높은 산으로 느껴질 것으로 판단된다. 그 아래 조경대는 지금도 명승지로 남아있다.(이현군)

  • 초계군 (草溪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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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은 조선시대의 합천군, 삼가현, 초계군 등이 합쳐진 것이다. 초계군의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초계면, 적중면, 청덕면, 쌍책면, 덕곡면과 율곡면 일부, 대양면 일부가 관할구역이었다. 현재 합천군의 동쪽 부분에 해당한다. 읍치 주변을 흐르는 강은 현재의 황강으로 이 지도에는 황둔강으로 표시되었다. 동쪽의 낙동강에 유입된다. 주변 산줄기를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남쪽의 면 명칭도 위 아래를 바꾸어 썼다. 현대 지도와 달리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 의미화시켜 자연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읍치 북쪽 1리에 있는 청계산이 진산이라고 동국여지승람에 적혔는데 이 지도에는 이름이 나오진 않는다. 객사 뒤쪽의 작은 산이 청계산으로 인식된다. 읍치에 성곽은 없고 건물만 그렸는데 각 건물을 독립된 영역으로 그렸다. 홍살문과 종각까지 지도에 그린 점이 이채롭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그리지 않고 향교만 그렸는데 초계리에 교촌이 있어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초계읍치의 앞은 현재 합천읍과 연결되는 24번 국도가 지난다. 이 지도에서 팔진역을 지나 읍치 앞을 지나는 길이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도상의 덕곡면이 현재 지명에도 그대로 사용되며 그 왼쪽의 二冊面이라고 적힌 곳은 지금 쌍책면으로 불린다. 그 아래 황강(황둔강)변에는 사적 236호 옥전고분군이 위치한다. 황강과 낙동강 변에 津이 들어서 있다. 이 밖에 봉수대, 창, 사찰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초계군 주기 (草溪郡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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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은 조선시대의 합천군, 삼가현, 초계군 등이 합쳐진 것이다. 초계군의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초계면, 적중면, 청덕면, 쌍책면, 덕곡면과 율곡면 일부, 대양면 일부가 관할구역이었다. 현재 합천군의 동쪽 부분에 해당한다. 읍치 주변을 흐르는 강은 현재의 황강으로 이 지도에는 황둔강으로 표시되었다. 동쪽의 낙동강에 유입된다. 주변 산줄기를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남쪽의 면 명칭도 위 아래를 바꾸어 썼다. 현대 지도와 달리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 의미화시켜 자연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읍치 북쪽 1리에 있는 청계산이 진산이라고 동국여지승람에 적혔는데 이 지도에는 이름이 나오진 않는다. 객사 뒤쪽의 작은 산이 청계산으로 인식된다. 읍치에 성곽은 없고 건물만 그렸는데 각 건물을 독립된 영역으로 그렸다. 홍살문과 종각까지 지도에 그린 점이 이채롭다. 사직단, 여단, 성황단은 그리지 않고 향교만 그렸는데 초계리에 교촌이 있어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초계읍치의 앞은 현재 합천읍과 연결되는 24번 국도가 지난다. 이 지도에서 팔진역을 지나 읍치 앞을 지나는 길이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도상의 덕곡면이 현재 지명에도 그대로 사용되며 그 왼쪽의 二冊面이라고 적힌 곳은 지금 쌍책면으로 불린다. 그 아래 황강(황둔강)변에는 사적 236호 옥전고분군이 위치한다. 황강과 낙동강 변에 津이 들어서 있다. 이 밖에 봉수대, 창, 사찰 등이 표시되었다.(이현군)

  • 칠곡부 (漆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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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가산산성에 있었으며 대구광역시의 북구 일부지역과 칠곡군 동명면, 왜관읍, 지천면, 가산면 일부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낙동정맥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대구의 팔공산으로 연결되고 가산은 이 팔공산과 잇닿아 있다. 그래서 가산은 팔공산도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지도 오른쪽에 표시된 공산이 지금 팔공산으로 알려진 곳이다. 가산산성은 1640년(인조 18)에 쌓았고 그 이후 칠곡부가 독립하였는데 조선초기에는 성주의 속현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조선초기의 지리지에는 칠곡부가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지도에서 가산산성이 칠곡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 그렸다. 현대 지도와 달리 고지도에서는 중요한 부분을 확대해서 그리며 동일 지도에서 다양한 축척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가산산성은 객사, 아사, 사창, 담소대 등이 있는 내성의 양쪽에 잇닿아 외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가산산성에서 나온 물줄기는 남쪽에 모여 다시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 지역의 물줄기를 모아 서쪽으로 흐르는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금호강이며 지도 왼쪽에 크게 그려졌으나 중간에 끊긴 하천이 낙동강이다. 다른 읍치에서는 읍성과 인접한 곳에 향교가 들어서 있으나 이 지역은 멀리 떨어진 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에 위치한 점이 이색적이다. 지도 오른쪽에 석탑을 그렸는데 송림사에 있는 것이다. 동명면의 송림사 5층 전탑이다. 이 밖에 서원, 나루, 역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칠곡부 주기 (漆谷府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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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가산산성에 있었으며 대구광역시의 북구 일부지역과 칠곡군 동명면, 왜관읍, 지천면, 가산면 일부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다. 낙동정맥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대구의 팔공산으로 연결되고 가산은 이 팔공산과 잇닿아 있다. 그래서 가산은 팔공산도립공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지도 오른쪽에 표시된 공산이 지금 팔공산으로 알려진 곳이다. 가산산성은 1640년(인조 18)에 쌓았고 그 이후 칠곡부가 독립하였는데 조선초기에는 성주의 속현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조선초기의 지리지에는 칠곡부가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지도에서 가산산성이 칠곡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 그렸다. 현대 지도와 달리 고지도에서는 중요한 부분을 확대해서 그리며 동일 지도에서 다양한 축척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가산산성은 객사, 아사, 사창, 담소대 등이 있는 내성의 양쪽에 잇닿아 외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가산산성에서 나온 물줄기는 남쪽에 모여 다시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 지역의 물줄기를 모아 서쪽으로 흐르는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금호강이며 지도 왼쪽에 크게 그려졌으나 중간에 끊긴 하천이 낙동강이다. 다른 읍치에서는 읍성과 인접한 곳에 향교가 들어서 있으나 이 지역은 멀리 떨어진 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에 위치한 점이 이색적이다. 지도 오른쪽에 석탑을 그렸는데 송림사에 있는 것이다. 동명면의 송림사 5층 전탑이다. 이 밖에 서원, 나루, 역이 지도에 표시되었다.(이현군)

  • 칠원현 (漆原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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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원의 읍치는 현재의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함안군 칠원면, 칠북면, 칠서면,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한다. 구성리에 칠원초등학교, 교동 등이 남아 있어 옛 흔적을 추정하도록 해 준다. 이 지도 중앙부에 읍성이 그려지고 그 위쪽에 청룡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진산을 위로 가도록 하기 위해 동쪽을 지도 위쪽으로 하여 그렸다. 지도의 방향이 일반적인 배치와 다르다는 점은 성문의 방향과 면 명칭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칠원은 낙남정맥의 북쪽에 위치하며 지도의 산줄기는 남쪽으로 연결되어 낙남정맥에 이른다. 지도 오른쪽 위의 바다는 마산만 진해만 부근인데, 이 지도에서 구산면, 구산진이 표기되어 있다. 현재의 마산시 구산면은 이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지도에 船所, 海倉이 보인다. 읍성의 성문은 동문과 서문만 그렸는데 이 문이 주요 교통로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교통로 상에 주요 고개와 역원을 표시하였다. 현재는 읍치의 서쪽으로 구마고속국도가 지나간다. 읍성 안의 건물은 남쪽을 향하도록 한 점이 이색적이다. 읍치 왼쪽에 그려진 하천은 낙동강으로 들어가며 하천과 성문 사이에 鎭松, 藪 등이 그려졌는데 읍치가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방풍의 효과를 가져오기 위한 조치로 보여진다. 이 밖에 안곡산의 봉수대, 사찰, 제언, 진도 등이 지도에 그려졌다.(이현군)

  • 칠원현 주기 (漆原縣 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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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원의 읍치는 현재의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일대이며 관할범위는 함안군 칠원면, 칠북면, 칠서면,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한다. 구성리에 칠원초등학교, 교동 등이 남아 있어 옛 흔적을 추정하도록 해 준다. 이 지도 중앙부에 읍성이 그려지고 그 위쪽에 청룡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진산에 해당한다. 진산을 위로 가도록 하기 위해 동쪽을 지도 위쪽으로 하여 그렸다. 지도의 방향이 일반적인 배치와 다르다는 점은 성문의 방향과 면 명칭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칠원은 낙남정맥의 북쪽에 위치하며 지도의 산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