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유형별,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지도

海東地圖 해동지도

  • 편저자 : [作者未詳]
  • 청구기호 : 古大4709-41-v.1-8
  • 간행연도 : [18世紀(英祖 年間:1724-1776)]
  • 책권수 : 8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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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
  • 간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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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간성현이 되었으며 고성, 강릉과 통합되고 분리되는 과정을 겪다가 1914년 이후 고성군에 포함되었다. 현재의 강원도 속초시 북쪽 일부(영랑호 부근)와 고성군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고성군 간성읍의 중심지가 과거의 邑治에 해당한다. 북쪽으로 烈山?과 縣內面이 나타나는데 여기서의 縣은 간성이 아니라 과거 이 곳에 있었던 烈山縣을 가리킨다.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의 열산이 烈山 邑治였다.간성의 邑治는 邑城의 형태로 그렸으며 그 안에 客舍, 倉, 衙舍 등의관청과  月樓, 蓮亭 등의 정자를 그렸다. 鄕校는 읍성의 서쪽 지금의 간성읍 교동리에 있었다. 군의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이 막혀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해 있다. 백두대간을 지도에서는 간략하게 일직선의 형태로 표시하면서 험준함을 나타나기 위하여 산들을 중첩하여 그리고 있다. 珍富嶺, 屹里嶺, 石破嶺, 彌恃嶺을 넘어 인제로 통하는 길은 험준하며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高城, 襄陽으로 통하는 길은 평탄하다. 明波驛, 雲根驛, 竹泡驛, 元岩驛, 淸澗驛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자산천, 초계천, 북천, 남천 등의 하천이 서쪽에서 나와 동해로 들어가는데 縣의 남쪽에 南川이 적혀 있다. 해안에는 바다였다가 해수에 의한 퇴적작용으로 潟湖가 된 廣湖, 永郞湖 등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해안이었다는 사실은 松池浦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육지에 형성된 호수에 浦자가 붙어있다. 해안으로는 花津浦 등 포구가 발달하였으며 그 옆으로는 倉庫가 그려져 있다. 해안의 경치가 빼어나 仙遊亭, 淸澗亭 등의 정자가 있었는데 토성면 청간리에 있는 청간정은 關東八景의 하나에 속한다. 禾岩寺(토성면 신평리)는 769년(신라 惠恭王 5)에 세워진 것이며 乾鳳寺(거진읍 냉천리)는 520년(신라 法興王 7)에 세워졌으며 圓角寺, 西鳳寺 등으로 불리다가 1358년(고려 恭愍王 7)에 懶翁和尙이 중수하고 乾鳳寺라 고쳤다.(이현군)

  • 강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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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穢國의 땅이었으며 639년(신라 선덕여왕 6)에 小京을 삼아 北濱京이라 하였으며 936년(고려 태조 19)에 東原京이라 하였다. 현재의 강원도 강릉시와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군의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도암면, 대화면, 방림면, 홍천군의 내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강릉시 용강동, 교동, 임당동, 명주동 일대가 중심지가 된다. 성곽 안에 客舍, 衙舍, 倉이 있으며 성밖에 鄕校가 있다. 성곽은 현재 남문동 등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이 이 지도의 가운데를 지나며 험준함을 표시하기 위하여 산을 중첩하여 그렸으며 雪岳山에서 이어져 내려왔음을 표시하고 있다. 백두대간은 이 지역의 分水界가 되기도 한다. 府의 앞을 흐르는 하천은 남대천이며 동해로 들어간다. 동해안의 호수(香湖, 鏡湖, 楓湖)는 海水에 의한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潟湖이다. 鏡湖는 鏡浦湖로 그 앞의 정자인 鏡浦臺와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五臺山의 月精寺(평창군 진부면 동산리)는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보았으나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한 노승이 梵戒를 가르쳐주고 舍利를 주면서 봉안할 곳을 찾으라 하니 이곳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월정사 근처의 史庫는 1606년(선조 39)에 세운 것으로 朝鮮王朝實錄과 주요문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일제시대에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지고 건물은 한국전쟁때 불타고 그 터만 남았다. 서원으로는 松潭書院, 五峰書院이 있었다. 도로는 大倉驛, 安仁驛을 통해 남북의 삼척, 양양으로 통하는 길은 편리하였으나, 丘山驛, 橫溪驛, 木界驛, 高端驛, 大和驛, 芳林驛, 雲交驛 등을 거쳐 白頭大幹을 통과하는 길은 험준하였다.(이현군)

  •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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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東海와 닿아있다.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동쪽은 9개, 서쪽은 17개, 총 26개의 府·郡·縣이 있으며 監營은 原州에 설치되어 있다. 동해안을 따라 표시된 9개의 군현이 嶺東에 해당한다. 각 군현별 지도에서는 26개 군현외에 울릉도를 따로 그려 강원도 안에 포함하였다. 高城, 通川,  谷, 淮陽, 金城, 金化, 鐵原, 平康, 安峽, 伊川은 군사 분계선 북쪽 지역이며 蔚珍, 平海, 鬱陵島는 현재 경상북도에 속해있다. 해동지도에서는 도별로 色을 달리하여 군현을 표시하는데 강원도는 녹색을 사용하였다. 監營이 있는 원주의 경우 홍색을 사용하고 다른 군현보다 크게 표시하였다. 삼척영장과 월송만호의 鎭營은 붉은 사각형안에 별도로 표시하였다. 이 지도는 강줄기, 산줄기를 중심으로 그렸으며 도로망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으나 주요 驛의 이름은 기록하였다. 강은 흐름이 이어지게 그렸으며 산은 연결하여 그리지는 않았다. 강을 먼저 그리고 그 사이로 산을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동쪽의 강은 동해로, 서쪽의 강은 서해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 지도에서 가장 서쪽의 강은 임진강이며 그 동쪽은 한탄강이 된다. 가장 水系가 길고 여러 하천과 합류되는 것은 북한강으로 소양강과 홍천강의 물을 받아들인다. 가장 남쪽의 강은 남한강이다. 강의 명칭이 현재와 다르며 같은 강이라도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원도의 가장 큰 산줄기는 역시 백두대간이며 분수령에서 漢北正脈이 서남쪽으로 갈라진다. 이 지도에서 백두대간은 북쪽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金剛山을 지나 太白山까지 이어진 것이며, 한북정맥은 북한강 서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로 金城과 金化 사이를 지나는 것이다. 산과 주요 고개(嶺·峙)의 이름을 표시하였다. 금강산을 특히 강조하여 그리고 있으며 山城이 있는 곳은 따로 표시하였다. 동해안에는 海水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석호들을 그렸으며 동해에 많은 섬들을 그렸는데 浦를 바다에 그린 점이 이채롭다. 지도의 여백에는 戶口, 田畓, 軍兵, 官職, 收稅 등의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이현군)

  • 강원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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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東海와 닿아있다.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동쪽은 9개, 서쪽은 17개, 총 26개의 府·郡·縣이 있으며 監營은 原州에 설치되어 있다. 동해안을 따라 표시된 9개의 군현이 嶺東에 해당한다. 각 군현별 지도에서는 26개 군현외에 울릉도를 따로 그려 강원도 안에 포함하였다. 高城, 通川,  谷, 淮陽, 金城, 金化, 鐵原, 平康, 安峽, 伊川은 군사 분계선 북쪽 지역이며 蔚珍, 平海, 鬱陵島는 현재 경상북도에 속해있다. 해동지도에서는 도별로 色을 달리하여 군현을 표시하는데 강원도는 녹색을 사용하였다. 監營이 있는 원주의 경우 홍색을 사용하고 다른 군현보다 크게 표시하였다. 삼척영장과 월송만호의 鎭營은 붉은 사각형안에 별도로 표시하였다. 이 지도는 강줄기, 산줄기를 중심으로 그렸으며 도로망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으나 주요 驛의 이름은 기록하였다. 강은 흐름이 이어지게 그렸으며 산은 연결하여 그리지는 않았다. 강을 먼저 그리고 그 사이로 산을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동쪽의 강은 동해로, 서쪽의 강은 서해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 지도에서 가장 서쪽의 강은 임진강이며 그 동쪽은 한탄강이 된다. 가장 水系가 길고 여러 하천과 합류되는 것은 북한강으로 소양강과 홍천강의 물을 받아들인다. 가장 남쪽의 강은 남한강이다. 강의 명칭이 현재와 다르며 같은 강이라도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원도의 가장 큰 산줄기는 역시 백두대간이며 분수령에서 漢北正脈이 서남쪽으로 갈라진다. 이 지도에서 백두대간은 북쪽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金剛山을 지나 太白山까지 이어진 것이며, 한북정맥은 북한강 서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로 金城과 金化 사이를 지나는 것이다. 산과 주요 고개(嶺·峙)의 이름을 표시하였다. 금강산을 특히 강조하여 그리고 있으며 山城이 있는 곳은 따로 표시하였다. 동해안에는 海水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석호들을 그렸으며 동해에 많은 섬들을 그렸는데 浦를 바다에 그린 점이 이채롭다. 지도의 여백에는 戶口, 田畓, 軍兵, 官職, 收稅 등의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이현군)

  • 고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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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穢國의 땅이었으며 신라 경덕왕때 고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으로 현재의 북한 강원도 고성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고성읍 구읍리가 邑治에 해당한다. 읍치는 성곽으로 되어 있으며 客舍, 衙舍와 함께 海山亭이 그려져 있다. 성밖 서쪽에 鄕校가 표시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동쪽 지역으로 杆城, 通川과 남북으로 경계를 이루며 東海와 접하는 지역이다. 서쪽에 金剛山을 그렸으며 봉우리들을 중첩하여 많이 그렸다. 백두대간에서 나온 하천이 읍성을 감싸며 바다로 들어가는데 邑治 북쪽의 강은 新溪川이며 남쪽은 南江이다. 교량으로 百川橋가 표시되어 있다.읍성 북쪽으로 三日浦(외금강면 삼일포리)가 해안이 아닌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삼일포는 海水에 의한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潟湖로서 과거의 해안선을 유추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경치가 빼어나 옛날에 네 신선이 여기서 놀며 3일간이나 돌아가지 않았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붙였다고 한다. 養 驛을 지나 통천으로, 溫井岺, 九龍岺을 넘어 淮陽으로, 高岺驛, 炭嶺을 지나  蹄로, 大康驛을 넘어 杆城으로 통한다.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연결된 도로는 평탄하며 大幹을 넘는 서쪽으로의 통로는 험준하다. 新溪寺, 鉢淵寺, 圓通寺, 楡站寺(楡岾寺의 誤記) 등의 사찰이 금강산을 끼고 있었다. 楡岾寺는≪동국여지승람≫에 53佛이 月 國에서 무쇠종을 타고왔으며 9龍이 숨어있는 못을 메우고 이 절을 지어 이들을 모셨다하며 조선 세종이 찾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밖에  庫, 倉이 표시되어 있고 읍성 남쪽에는 帶湖亭이 나타난다.(이현군)

  • 금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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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금성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1914년에 김화군에 포함되었다.현재 대부분이 휴전선 이북으로 북한의 행정구역상 강원도 김화군 동쪽지역과 창도군의 서쪽과 북쪽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邑治 동북쪽의 通口面(창도군)은 通口縣이었으며 縣里가 중심지였다.  城面(창도군)은  城縣이었으며 현재 기성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두 縣 모두 고려 때에 金城에 속하게 된다. 邑治에 성곽은 없고 다른 郡縣과 마찬가지로 客舍, 衙舍, 倉, 鄕校를 표시하였으며 慶陽樓를 그려 넣었다. 邑治의 북쪽에 있는 慶坡山이 鎭山에 해당한다. 서쪽에서 나와 縣의 앞쪽을 흐르는 하천(南大川)은 金城川으로 북쪽에서 나온 北漢江 상류와 합해진다. 합류되는 지점을 이 지도에서는 錢浦合水라고 적고 있다. 水串橋, 西大橋 등의 교량을 하천에 표시하였으며 邑治 앞의 南大川가에 披襟亭이 있다. 나루로서는 大慶津을 표시하였고 河中島로 보이는 白鷺島가 지도에 나타난다. 서쪽의 북한강 상류에 縣倉, 任倉 등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縣倉의 縣은 이전의 通口縣을, 任倉의 任은 任南面을 지칭하는 것이다. 縣 동쪽에는 古城이 표시되어 있다. 直木驛을 지나 金化로 통하는 길은 서울과 통하는 大路이며 이 길은 한반도 동북쪽으로 함경도 서수라까지 통하는 길이다. 瑞雲驛을통하는 길은 狼川으로 연결되며 斷髮嶺을 지나는 金剛路가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김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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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년(고려 현종 9)에 김화로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의 김화군은 1914년에 김화군과 금성군을 합한 것이다. 김화현의 범위 중에서 휴전선 이남은 1952년에 철원군에 편입되었으며 휴전선 이북은 김화군에 편입되어 있는 상태이다. 현재 남한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근남면, 서면과 북한의 강원도 김화군의 서쪽지역인 근동면, 근북면, 원북면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가 중심지가 된다. 읍치에는 客舍, 衙舍, 倉庫, 鄕校가 표시되어 있다. 縣 앞의 하천은 南大川이며 서북쪽으로 가서 한탄강에 합류된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縣을 감싸고 있어 땅이 넓지 못하다. ≪동국여지승람≫에 강희백, 성석인, 이곡 등의 시에서 ''산이 고을을 포위하고 있다,'' ''山川이 답답하게 막혀서 평탄한 땅이 없구나'' 등으로 이 지역을 묘사하고 있다. 남서쪽의 永平에서 登古介를 넘고 生昌驛(김화읍 생창리)을 지나 縣에 연결되는 길은 서울로 통하며 이 길은 동북쪽의 中峴을 넘어 金城으로 이어지는데 함경도 西水羅까지 통하는 한반도 동북방향의 大路이다. 도로가 통과하는 고개를 명칭과 함께 표시하였다. 이 지도에서 특이한 점은 登古介, 可古介, 成造古介, 小古介 등 우리말의 ''고개''를 ''古介''로 쓰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강원도 군현지도에서 볼 수 없는 점이다. 지도의 여백에 이 지역의 길들이 험준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縣의 북쪽에 성곽은 그리지 않고 古山城을 표시하였으며 縣 남쪽에는 柳琳大捷碑가 보인다.忠烈祠, 水泰菴 등의 사당과 사찰이 표시되어 있으며 남쪽에 七臺岩을 그려놓았다.(이현군)

  • 낭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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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川縣이었다가 757년(신라 景德王 16)에 狼川郡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화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에서 사내면(춘천부 땅)을 제외한 상서면, 화천읍, 하남면, 간동면 일대에 해당하며 중심지는 현재의 화천읍내가 된다. 읍치는 성곽은 없고 다른 강원도 군현지도에서처럼 客舍, 衙舍, 倉庫만 표시하고 있다. 鄕校는 邑治의 서쪽 화천읍 하리에 있었다. 읍치의서쪽에 있는 牲山이 鎭山에 해당하며 과거에 山城이 있었다고 한다. 읍치의 약간 북쪽에 있는 新邑里(화천읍 신읍리)는 낭천읍의 읍터가 되었던 적이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붙였다. 현 북쪽에서 흘러온 馬峴川이 縣 서쪽에서 북한강과 합류되는데 북한강 중 狼川縣의 앞쪽은 과거에는 南江으로 불리었다.하남면 위나리에 남강나루가 있었다. 鋤吾之川은 하남면 서오지리라는 지명을 통해 알 수 있으며 母津江은 북한강의 일부분을 지칭하는 것이다. 육로와 수운을 통해 가평을 지나 서울로 연결되며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楊口, 金城과 통한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와 경계가 되는 山의 위치, 명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山陽驛(상서면 산양리), 芳川驛(간동면 방천리), 原川驛(하남면 원천리)이 이곳에 있었다. 邑治 북서쪽의 烽燧山(상서면 봉오리)은 과거에 烽火를 들었던 이유로 산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龍淵, 龍首, 龍岩寺, 龍華山 등 ''龍''字가 들어간 지명이 많은데 崔府(1369-1452)의 詩에 ''산은 龍이 서린 것 같으며 地軸이 깊도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雲峰寺(화천읍 동촌리 운봉동), 龍岩寺(간동면 방천리 절골) 등의 사찰이 과거에 있었는데 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삼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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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강원도 동해시, 삼척시, 태백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삼척시 중심부가 삼척부가 자리한 지역이다.본래 悉直國이었는데 신라 婆娑王때 항복하였으며 760년(景德王 19)에 三陟郡이 되었다. 현재 북평읍과 묵호읍이 합해져 동해시가 되었고, 황지읍과 장성읍이 합해져 태백시가 되었으며 삼척읍이 삼척시가 되었다. 백두대간(頭陀山, 太白山)의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五十川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太白山의 黃池는 낙동강의 발원처로 알려진 곳이다. 삼척영장이 주재하는 鎭營과 府의 중심지에 성곽이 형성되어 있었다. 平陵驛, 新興驛을 지나 江陵으로, 百復嶺, 竹嶺, 楡嶺을 넘어 정선, 영월로 연결되었으며 史直驛, 交柯驛, 龍化驛, 沃原驛 등을 거쳐 울진과 안동으로통하는 지역이다. 명승지로 이름난 곳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武陵溪(동해시 이도동)이다. 바닷가에는 東樓와 召公臺가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縣倉(원덕읍 옥원리)이 있는데 과거에 竹嶺縣이 이곳에 있었다.(이현군)

  • 안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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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안협으로 고쳤으며 1414년(태종 14)에 경기도 삭녕군과 합하여 안삭군이 되었다. 1416년(태종 16)에 안협현이 되었다가 1914년에 伊川에 병합되었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철원군의 북쪽 안협면과 이천군의 남쪽 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도로, 산줄기, 강줄기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그린 지도이다. 철원군 안협면의 읍내리가 邑治가 되며 북쪽의 晩景山이 鎭山에 해당한다. 邑治에 성곽은 없고 客舍, 衙舍, 倉, 鄕校만 표시하였다. 읍치를 중심으로 두 개의 古城과 擧城이 표시되어 있다. 邑治의 서쪽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은 臨津江으로 강을 따라 북쪽의 平康, 伊川과 이어지는 길에는 별로 험준한 嶺隘가 없다. 서쪽으로는 황해도 兎山, 남으로는 경기도 朔寧과 鐵原, 북으로는 伊川이 경계를 이룬다. 적색의 도로상에 고개(峴)를 표시하였으며 지도 아래쪽에 去京路, 鐵原去路 등 서울, 철원과 이어지는 길을 따로 기록하였다. 그 밖에 북쪽에 烽燧臺를 표시하였다.(이현군)

  • 양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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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楊口郡이었으며 현재의 강원도 양구군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縣의 중심지는 양구읍내의 상리, 중리, 하리 일대가 된다. 邑治에 城郭은 없고 客舍, 衙舍, 倉만 그려져 있다. 鄕校는 양구읍 중리에 있었다. 북쪽의 方山面縣은 원래 方山縣으로 1424년(세종 6)에 회양으로부터 양구에 속하게 되었다. 중심지는 고려때 방산면 고방산리에서 현리로 옮겨졌다. 亥安面縣은 亥安所가 있었던곳으로 역시 1424년(세종 6)에 春川으로부터 양구에 속하게 되었는데 해안면 현리가 과거의 읍치였다. 방산면과 해안면에는 각각 倉庫가 있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縣을 감싸며 縣의 앞을 흐르는 하천은 서천으로 北漢江에 들어간다. 지금은 댐 건설로 인해 파로호가 되어있다. 縣의 鎭山은 飛鳳山으로 과거에는 삼한 때 쌓았다는 山城이 있었다. 南面의 烽臺山에는 烽燧가 있었으나 폐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지도 위쪽으로는 禁山이 표시되어 있다. 道里峙, 廣峙, 鷄山岺을 지나는 세 갈래 길을 통해  蹄와 통하며 含春驛(양구읍 하리)을 지나 淮陽, 狼川과 통하게 되는데 험준한 길이다. 지도 왼쪽 아래의 水仁驛(양구읍 수인리)을 지나는 길은 춘천과 가평을 경유하여 서울로연결되는 길이다. 이 밖에 정자(松岩亭)와 암자(深谷庵)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양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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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7년(태조 6)에 府로 승격되었으며 1416년(태종 16)에 양양으로 개칭되었다. 현재의 강원도 양양군 일대와 속초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양양읍 군향리가 그 중심지가 된다. 지도 위쪽의 所川面과 道門面이 현재의 속초시에 해당하며 지도 아래쪽의 洞山縣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양양에 포함된 땅으로 양양군 현북면 지역이다. 府의 중심지에는 城郭이 있었으며 오늘날 남문리, 서문리 등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성곽의 서쪽에 위치한 향교는 양양읍 내곡리 향교동에 있었다. 백두대간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쌍천과 남대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靑草湖, 雙湖 등의 潟湖가 발달한 지역으로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위는 설악산 일대이며 五色岺, 朴達岺, 阻枕岺, 九龍岺 등의 고개는 양구, 인제, 춘천과 통하는 통로가 된다. 降仙驛(강현면 강선리), 祥雲驛(손양면 상운리), 連倉驛(양양읍 연창리),  丘驛(현남면 인구리) 등의 역이 있었다. 東海廟(東海神祠, 양양읍 조산리)는 나라에서 봄가을에 香과 祝을 내리어 東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洛山寺(강현면 전진리)를 비롯하여 神興寺, 靈穴寺, 開雲寺, 明珠庵 등의 사찰이 있었다.(이현군)

  • 영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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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때에 영월로 이름을 고쳤으며 1401년(태종 원년)에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편입되었다. 현재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북면, 서면, 남면, 중동면, 하동면, 상동읍 일부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현재의 영월군에서 수주면과 주천면은 당시에는 원주에 소속된 지역이므로 제외된다. 현재의 영월읍내가 당시의 중심지였으며 지도에 客舍, 衙舍, 倉, 鄕校를 표시하였다. 백두대간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진 산줄기가 府를 감싸고 있다. 산을 중첩하여 산줄기를 표현하였으며 來脈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밝히기 위해 ''斗滿山來'', ''太白山來''를 지도 위에 적어놓았다. 東江과 西江이 邑治 앞에서 만나 남한강이 된다.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았는데 동강가의 錦江亭(영월읍 영흥리)은 1428년(세종 10)에 영월군수 김복항이 절벽 위에 세운 것이다. 서강 앞의 淸 浦(남면 광천리)는 端宗이 유배를 당했던 곳으로 1753년(영조 29)에 碑를 세워 端廟在本府時遺址라고 기록하였다. 莊陵(영월읍 영흥리)은 조선 6대 임금인 端宗의 陵으로 世祖에게 죽임을 당한 후 암장하여 魯山君墓라 칭하다가 1698년(숙종 24)에 단종으로 복위됨에 따라 장릉으로 追封되었다. 그 아래 丁字閣은 忠臣閣으로 安平大君, 趙遂良, 宦官, 侍女들의 위패를 배향하였으며 彰節祠(영월읍 영흥리)는 死六臣을 배향하던 곳이다. 石臺庵, 報德寺 등의 사찰이 표시되어 있는데 보덕사(영월읍 영흥리)는 658년(신라 문무왕 8)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으며 1726년(영조 2)에 보덕사로 이름을 고쳤으며 莊陵의 陵寺가 되었다. 龍井院, 楊淵驛, 延平驛 등의 역원이 표시되어 있으며 강가에 倉庫가 있다. 다른 강원도 지도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社倉이 지도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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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于山國으로 511년(신라 지증왕 12)에 異斯夫가 정복하였다. 조선태종 이후 섬을 비우고 강원도 울진현에 붙였다. 1694년(숙종 20)에 三陟僉使로 하여금 울릉도의 경비를 엄하게 하도록 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강원도 平海郡 越松萬戶가 鬱陵島長을 겸하게 하였으며 1884년(고종 21)에 울릉도 개척령을 내렸다. 1906년에 경상남도에 속하였다가 1913년부터 경상북도에 속하게 된다. 현재의 경상북도 울릉군의 울릉도와 독도, 주변의 섬들을 그렸다. 독도는 이 지도에서 于山島로 적혀 있다. 울릉도 가운데에 中峰(성인봉)을 그리고 주변의 봉우리가 모두 중심을 향하게 그린 독특한 형식의 지도이다. 東西南北과 함께 文王八卦方位(巽, 艮, 乾, 艮)에 의해 방향을 표시하였다. 산줄기 사이로 하천을 그리고 大川流出이라고 적고 있다. 해안에는 中峰까지의 거리를 표시하고 있다. 비교적 넓은 땅에는 寬豁이라고 표시해 두었으며 살만한 지역은 可居라고 표시하였다. 해안의 바위에는 立岩刻標라고 적었으며 북쪽의 구멍바위(孔岩)까지 표시하였다. 倭船倉, 待風, 船泊, 家居 등 일본과의 관계, 바람, 선박운행, 거주 가능한 지역 등도 표시되어 있으며 石城門의 터, 石葬(지금도 남아 있는 울릉도의 古墳), 塔, 寺刹 터 등 유적을 표시하고 있다. 해안에는 竹田이 여러 곳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은 간단하게 기록하였는데 나무, 해산물, 동물 등이 주된 내용이다.(이현군)

  • 울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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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울진군의 북쪽에 해당하는 원남면, 서면, 근남면, 울진읍, 죽변면, 북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현재의 울진군은 울진과 평해를 1914년에 합한 것이며1963년에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옮겨왔다. 중심지는 이 지도에서 邑基로 표시되고 있는데 울진읍 읍내리에 해당하며 객사, 내아, 동헌 등의 건물이 있었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낙동정맥이 縣의 서쪽을 막고 있으며 부구천, 두천천, 남대천, 왕피천이 서쪽 고지대에서 東海로 흘러 들어간다. 縣의 앞쪽을 흐르는 것이 남대천이다. 興富驛을 지나 葛峴을 넘어 三陟으로 향하는 길은 평탄하였으며 鼎峙, 召造院을 지나산맥을 넘어 安東, 英陽으로 통하는 길은 험준하였다. 守山驛, 德新驛은 평해와 통하는 경로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古山城(울진읍 고성리)은 1396년 (태조 5)에 왜구의 침입으로 古邑城이 폐허가 되자 이곳으로 옮겨 성을 쌓고 古山城, 古寺山城, 縣上城으로 이름붙였는데 현재 성은 헐리고 터만 남았다. 鄕校는 1484년(성종 15)에 세워졌는데 1697년(숙종 23)에 이 지도에 나타나는 위치(울진읍 고성리)로 옮겨졌다가 1872년(고종 9)에 울진읍 읍내리로 옮겨지게 된다. 동해안의 竹田(죽변면 죽변리)은 바닷가에 많은 대나무가 있어 竹濱, 竹邊 등으로 불려지던 곳이다. 울진읍 대흥리에 大興寺, 佛影寺가 있었으며 孤山祠宇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聖留窟(근남면 구산리)은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천연동굴로 선유굴, 석류굴, 탱천굴, 성류굴 등으로 불리었으며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때 주민들이 이 굴에 피난했는데, 왜군이 입구를 막아 굶어죽었다고 전해진다.(이현군)

  • 원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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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문무왕 때 北原小京을 두었다가 940년(고려 태조 23)에 原州牧으로 고쳤다. 1395년(태조 4)에 강원도 監營을 이곳에 두었다. 현재의 강원도 원주시, 영월군의 수주면, 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 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영월군 주천면은 고구려의 酒淵縣이었으며 신라 때는 酒泉縣이었다. 客舍, 倉, 衙舍, 鄕校 등이 표시된 중심지는 현재의 원주시 일산동, 명륜동에 해당한다. 客舍옆에 표시된 營은 강원도 監營을 뜻하며 일산동에 있었다. 동쪽에는 치악산이 있으며 서쪽으로 섬강이 흐른다. 치악산 동쪽의 강은 주천강이 된다. 치악산이 원주의 鎭山이 되며 서쪽으로 禁山이 기록되어 있다. 서쪽의 섬강은 남한강과 합류되는데 이 곳에 興原倉(부론면 흥호리)이 표시되어 있다. 과거 원주, 영월, 평창, 정선, 횡성 등의 세곡을 모았던 곳이다. 주천강가에는 酒泉倉(영월군 주천면)이 보인다. 섬강, 남한강을 끼고 梨湖津, 仰岩津, 江津 등의 나루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변에 太宗臺, 蟾岩, 淸虛樓 등의 명승지가 보인다. 사찰로는  原寺, 法興寺, 上院寺, 兩松寺, 九龍寺가 있다. 치악산 기슭의 원주시 관설동, 판부면 금대리 등에는 많은 산성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도 金臺 옆과  原寺 옆에 城(金臺城,  原山城)이 그려져 있다. 由原驛, 安昌驛을 통해 지평, 횡성과 통하며 新興驛은 평창과 神林驛, 丹丘驛은 제천, 충주와 통하는 경로상에 위치한다. 단구역에는 館이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이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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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이천으로 고쳤으며 1413년(태종 13)에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다. 현재 북한의 강원도 伊川郡은 과거의 이천과 안협을 합한 것이다. 이 지도에서의 伊川은 이천군의 북쪽부분과 판교군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의 여백에 관할 면으로 板橋面이 나타난다. 동쪽은 강원도 平康, 남쪽은 安峽, 서쪽은 황해도 新溪, 북쪽은 함경도 安邊과 경계를 이루며 府의 서쪽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강은 임진강이 된다. 강 안에 高城津, 蛇島가 표시되어 있다. 邑治에는 성곽없이 衙舍, 客舍, 倉을 그렸으며 북쪽의 城山이 鎭山이 되고 鄕校는 약간 떨어져있다. 悅雲亭, 天遊堂, 定齋祠 등의 정자, 사당이 나타난다. 북쪽 陽陰山 근처에 禁山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북쪽으로 溫井이 나타난다. 이 지역의 온천에 조선 世宗이 行宮을 지으라고 명령하고 거둥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高城山 동쪽으로는 鎭基가 표시되어 있다. 驛院으로는 邑治 남쪽의 乾川驛, 서북쪽의 玉谷院이 나타난다.(이현군)

  • 인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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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때 인제로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현재의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서화면, 북면, 남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현재의 인제군에서 상남면, 기린면(춘천부 소속)은 제외된다. 인제읍이 과거의 중심지가 된다. 이 곳 읍치는 邑城없이 客舍, 衙舍, 倉庫만 그려져 있으며 鄕校는 인제읍 상동리에 있었다. 縣의 바로 뒤 伏龍山이 鎭山에 해당한다. 서화면은 과거 瑞和縣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 세종 때부터 인제현에 속하게 되었으며 서화리가 과거의 읍치에 해당하였다. 이 지도에서도 瑞和縣이 표시되어 있다. 縣의 동쪽은 백두대간이 되고 백두대간에서 나온 산줄기들이 縣을 둘러싸고 있어 험준하며 산줄기 사이로 하천이 흘러나와 縣의 앞쪽에서 합하여져 合江이 된다. 북쪽의 소양강과 남쪽의 내린천이 합하여진 것인데 合江가에 合江亭이 표시되어 있다. 이 강은 서쪽으로 흘러 북한강과 합류된다. 지금은 댐으로 인하여 소양호가 되어 있다. 하천을 따라 津과 倉庫들을 표시해주고 있다. 지도에서 산들을 중첩하여 표현함으로 험준함을 표현하였으며 교통의 통로가 되는 고개(嶺·峴·峙)들은 명칭과 함께 표시해 두었다. 嵐校驛, 富林驛이 高城, 杆城으로 가는 도로 위에 있었다. 행정구역상의 面과 마을(村)의 위치와 명칭을 기록하였으며 深源寺, 大勝庵 등의 사찰을 그림과 함께 표시해 주고 있다. 길이 험준하여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쉽지 않았으며 많은 눈과 적은 인구로 유명하였던 지역이다.(이현군)

  • 정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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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정선현으로 고쳤으며 현재의 강원도 정선군에서 임계면(강릉 땅), 신동읍(평창 땅)을 제외한 북면, 정선읍, 동면, 남면, 사북읍, 고한읍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정선읍 봉양리가 邑治이다.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강릉, 삼척과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평창, 영월과 맞닿아있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사이로 조양강이 심하게 곡류하여 縣의 앞쪽을지나며 南流하여 영월의 동강과 만난다. 縣 북쪽의 飛龍山(飛鳳山)이 鎭山이 된다. 邑治에는 客舍, 衙舍, 倉, 鄕校 등이 그려져 있으며 조양강변에 好善驛과 倚風亭이 있으며 縣의 동쪽으로 河中島가 표시되어 있다. 조양강에는 北津(북평면 북평리) 등의 여러 나루가 있었다.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지도 북쪽의 餘粮驛근처 북면 여량리에는 아우라지 나루가 있어 정선아리랑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조양강과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동대천 사이에 瓦坪(정선읍 신월리)이 있는데 과거 이곳에서 기와를 구워냈다고 전한다. 와평 동남쪽에는 沒雲倉(동면 몰운리)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龍湫, 龍岩淵 등이 江과 연결되어 표시되어 있다. 적색의 도로 중에서 碧呑驛(정선읍 용탄리), 伽俚王山, 碧波嶺(정선읍 회동리)을 지나는 길과 餘粮驛(북면 여량리)을 지나는 길은 강릉으로 연결되며 行邁院(정선읍 용탄리)과 星摩嶺(정선읍 용탄리)을 지나는 길은 평창군과 연결된다.(이현군)

  • 철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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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鐵圓郡으로 弓裔가 이 곳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泰封이라 칭하였다. 1434년(세종 16)에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되었다. 현재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어운면, 묘장면, 북면과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일부지역은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동쪽의 대교천은 합하여 한탄강이 되고 서쪽의 하천은 역곡천으로 들어간다. 邑治 북쪽의 땅은 평야가 넓어 楓川原으로 불리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平原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 궁예가 泰封을 세우면서 도읍을 정하였는데 지도에 弓王古都라 적혀 있다. 弓王은 궁예를 지칭하는 것이다. 弓裔城은 현재 비무장지대 북쪽지역에 있으며 外城과 內城으로 되어 있었다. 지도에서는 근처에 船倉이 표시되어 있다. 邑治에는 성곽없이 客舍, 衙舍, 倉, 鄕校가 표시되어 있다. 去北路, 京路, 去安峽路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과 한반도 북부지역을 잇는 교통상의 요지가 된다. 漣川을 통해 서울로 가는 방법과 永平을 거쳐 서울로 가는 방법이 있었는데 永平으로 가는 길목에 豊田驛(갈말읍 군탄리)이 있었다. 積石寺, 源深寺 등의 사찰과 祠宇가 그림과 함께 표시되었으며 割眉山과 所伊山에는 적색으로 烽燧를 표시하였다. 동쪽의 대교천, 한탄강 부근에는 명승지가 많았는데 지도에서는 北寬亭, 孤石亭, 三釜淵이 표시되어 있다. 孤石亭(동송읍 장흥리)은 신라 진평왕, 고려 충숙왕이 이곳에서 놀았다고 전해지며 임꺽정이 이곳에 숨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三釜淵(갈말읍 신철원리)은 沼가 세 개가 있는데 모두 솥처럼 생겼다하여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탄강에는 險屹津, 道德津 등의 나루와 倉이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춘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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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貊國이 있었던 곳으로 府의 북쪽에 古貊都라고 표시되어 있다.942년(고려 태조 23)에 春州로 고쳤으며 1413년(태종 13)에 춘천군으로 고쳤다가 1415년(태종 15)에 도호부가 되었다. 1888년(고종 23)부터 1895년(고종 32)까지 경기도에 속했던 적이 있다. 현재의 강원도 춘천시, 인제군의 상남면, 기린면과 화천군 사내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춘천시내가 당시의 중심지가 된다. 鳳儀山이 鎭山이며 중심지에는 客舍, 衙舍, 鄕校, 倉, 聞韶閣이 있다. 聞韶閣(춘천시 요선동)은 1646년(인조 24)에 세운 정각으로 현재 門樓인 朝陽樓만 남아 우두동에 옮겨져 있다. 큰 두 개의 강이 府의 서쪽에서 만난다. 동쪽은 소양강, 서쪽은 북한강이 되는데 지금은 소양댐, 춘천댐, 의암댐 등의 댐 건설로 호수가 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 소양강을 끼고 原河津, 大同津 등의 나루가 표시되어 있으며 북한강은 범위에 따라 母津江, 吾梅江, 新淵江 등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강을 끼고 北社倉, 南社倉,   倉, 史呑外倉이 표시되어 있다. 춘천부의 기린면(인제군 상남면, 기림면)은 고려때에는 기린현이었으며 사탄면(화천군 사내면)은 원래 史呑鄕이었던 곳이다. 府 남쪽에 명승지로 武陵溪가 보인다. 原昌驛은 홍천과, 保安驛은 양구와, 仁嵐驛은 낭천과 연결되는 도로상에 표시되어 있다. 도로상의 고개 명칭에 있어 岺, 峴, 峙와 함께 다른 강원도 군현지도에서 자주 나타나지 않는 ''遷''이 사용되고 있다. 三岳寺(서면 덕두원리)가 자리한 三岳山에는 과거 맥국시대에 쌓은 山城이 있었다고 전한다. 淸平寺(북산면 청평리)는 973년(고려 光宗 24)에 禪師 玄承이 창건하였으며 1550년(명종 5)에 수리하고 청평사로 이름을 고쳤다. 極樂殿과 남쪽 정문(回轉門)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壯節公墓(서면 방동리)는 처음 이름은 能山으로 견훤과 싸울 때 위급한 고려 태조 왕건을 구하고 죽은 申崇謙(? - 927)의 묘이다. 그의 시호가 壯節이다.(이현군)

  • 통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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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년(태종 13)에 통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군사분계선 이북의 강원도 통천군에서 남쪽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동쪽지역이며 남쪽으로는 高城, 북쪽으로  谷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바다이다. 백두대간은 산을 중첩하여 넓게 그림으로써 험준함을 나타냈으며  谷과의 경계가 되는 산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함으로써 경계를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읍치에는 성곽이 과거에 있었으나 표시되지 않았고 客舍, 倉, 衙舍, 鄕校가 그려져 있다. 북쪽바다가에 叢石亭을 그리고 그 옆에 뾰족하게 솟은 바위들을 산수화에서처럼 그리고 있다. 門岩도 같은 형식으로 그렸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읍치 남쪽에 巨豊驛이 있다. 楸池岺,  岺을 넘어 淮陽으로 연결되는 길은 大路에 해당하며 大幹을 넘기에 험준하다. 반면, 登路驛, 朝 驛을 지나 高城으로 가는 해안의 남북통로는 평탄한 편이다. 楸池岺으로 가는 길에는 中臺?이, 고성으로 통하는 朝 驛에도 ?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남쪽 고성으로 통하는 곳에 瓮遷이 그려져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돌산이 바다로 들어가는 형태이며 좁아서 말이 쌍으로 지나지 못한다고 한다. 옛날 倭寇가 여기까지 왔는데 官軍이 쳐서 모두 바다에 빠뜨렸다고 한다. 사찰로는 雙鶴菴, 觀音寺, 龍貢寺, 明道庵이 있으며 縣倉이외에남쪽 해안에 外倉이 있고 읍치 앞의 하천에는 樓橋가 그려져 있다. 남쪽에 萬里城이 적혀 있어 과거에 城이 있었음을 지시해 준다.(이현군)

  • 평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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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년(고려 현종 9)에 평강으로 고쳤으며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현재의 북한 강원도 평강군과 세포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중에서 평강군의 남쪽 일부(철원땅)와 세포군의 북쪽일부(고산 땅)는 제외된다. 邑治는 성곽없이 客舍, 衙舍, 倉, 鄕校를 표시하였다. 서쪽으로 四寬亭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禁山이 표시되어 있고 남쪽으로 풍수 개념에서 나온 案山이 기록되어 있다. 玉洞驛院은 伊川, 林丹驛은 淮陽, 裁松院은 鐵原, 赤 院은 金化와 金城으로 통하는 경로상에 표시되어 있으며 金城去路, 三防路(安邊방향)를 따로 기록하고 있다. 북쪽에 分水嶺과 天岺이 표시되어 있는데 分水嶺은 백두대간이 南向하는 가운데 한북정맥이 서쪽으로 갈라져 나오는 지점에 해당한다. 물이 나누어진다는 의미의 分水嶺에서 실제로 임진강, 한탄강, 북한강 水系와 동해로 들어가는 하천이 크게 나누어진다.  箭川烽臺, 松古介烽, 土氷烽 등의 봉수가 표시되어 있는데, 淮陽의 雙嶺에서 남쪽으로 이 세 봉수를 거쳐 서쪽의 鐵原 所伊山봉수로 연결된다. 이 밖에 縣의 동북방향으로 社倉이 보인다.(이현군)

  • 평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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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때에 평창으로 고쳤으며 현재의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평창읍내의 상리, 중리, 하리 일대가 과거의 중심지이다. 현재 평창군에서 평창읍과 미탄면을 제외한 지역은 과거에는 강릉에 속해 있었다.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그린지도이다. 다른 강원도 군현지도에서와 같이 邑治에는 客舍, 倉, 衙舍, 鄕校가 그려져있다. 지도에 南大川으로 표시되어 邑治를 휘감아 흐르는 강은 평창강이며 동쪽의 강은 동강으로 영월로 들어간다. 邑治 북쪽의 注橋는 현재에도 주진교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옆에 津으로 표시된 것은 注津으로 현재의 동리 명칭(평창읍 주진리)의 근원이 된다. 또한, 평창강 남쪽에는 摩池津(평창읍 마지리)이 표시되어 있다. 동강변에는 東倉(정선군 신동읍 고성리)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중 동쪽의 味呑峙, 平安驛(미탄면 평안리), 星摩嶺을 지나는 길은 정선과 통하는 大路이며 평창읍 주진리 북쪽의 利峙는 큰 배나무가 있어 뱃재로 불렸다고 하며 강릉으로 연결되었다. 남쪽의 藥水驛(평창읍 약수리)을 지나는 길은 원주와 연결된다.(이현군)

  • 평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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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평해가 되었으며 1914년에 울진군에 편입되었다. 이 지도에서는 강원도에 속하나 1963년부터 경상북도에 속하게 된다. 현재의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남쪽에 해당하는 평해읍, 후포면, 온정면, 기성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울진군 평해읍 평해리가 중심지가 된다. 서쪽으로는 낙동정맥에 가로막혀 있고 황보천과 남대천이 흘러 東海로 들어간다. 鳥峴, 珠嶺 등의 고개를 넘어 서쪽의 寧越, 英陽으로 향하는 길은 험준하지만, 남으로 寧海, 북으로 蔚珍으로 통하는 大路는 평탄하다. 조선후기 서울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9대로 중에서 서울과 平海를 연결하는 길이 제 3大路에 해당하였다. 新立驛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邑治에는 邑城이 쌓여졌고 그 안에 客舍, 衙舍, 倉, 淸香亭 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읍성의 서쪽으로 鄕校가 그려져 있다. 越松浦(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는 石城이 있었는데, 이 城은 1555년(명종 10)에 쌓았으며 水軍萬戶를 두어 해적을 막았다. 松田은 소나무 숲이 조성된 곳으로 평해읍 월송리에 해당한다. 望洋亭은 현재는 근남면 산포리에 있는데 이곳은 옛 울진현의 땅에 해당한다. 이 지도(평해군 지도)에 망양정이 나타나는 것은 본래 망양정이 평해군의 땅인 기성면 망양리 바닷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숙종이 관동 팔경 중 으뜸이라 하여 ''關東第一樓''라는 御筆 편액을 내렸으며 松江 鄭澈, 梅月堂 金時習이 시를 지어 경치를 찬양하였다. 1883년(고종 19)에 근남면으로 그 위치를 옮겼다. 지도에서 溫井(온정면 온정리)으로 표시된 것은 현재 백암온천으로 개발되어 휴양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이현군)

  • 홍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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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년(고려 현종 9)에 홍천으로 이름을 고쳤다. 현재의 강원도 홍천군에서 내면(강릉 땅)을 제외한 홍천읍, 서면, 북방면, 남면, 동면, 화촌면, 두촌면, 내촌면, 서석면 일대의 지역으로 麟蹄, 春川, 橫城, 砥平과 접하고 있다. 홍천읍내가 邑治에 해당하였다. 客舍, 衙舍, 倉, 鄕校가 邑治에 표시되어 있다. 장남천, 내촌천 등의 물을 모아 홍천강이 縣의 중심부를흐르고 있다. 홍천강은 西流하여 북한강과 합하게 된다. 홍천강가(홍천읍 갈마곡리)에 泛波亭, 觀水堂이 그려져 있다. 縣倉 이외에도 강을 끼고 東倉, 西倉이 있었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었고 경로상의 고개 이름을 적었다. 邑治를 기준으로 泉甘驛(두촌면 역내리)을 지나는 길은  蹄로 통하며 蓮峰驛(홍천읍 연봉리), 陽德院(남면 양덕원리)을 지나는 길은 砥平을 거쳐 서울로 통한다. 위의 역원을 지나 인제, 홍천, 지평과 통하는 이 길은 大路에 속한다. 사찰로는 龍水庵, 成佛庵, 水墮寺 등이 그려져 있다. 공작산 아래 있는 절인 水墮寺(동면 덕치리)에는 1364년에 만든 鐘과 石塔이 있으며 月印釋譜의 원본 일부가 있다고 한다.(이현군)

  • 회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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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회양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고, 세조 때에 鎭을 두어 북방경비의 요충지로 삼았다. 현재 북한의 강원도 금강군, 회양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는회양군의 회양읍내리가 된다. 新津江이 邑治 서쪽을 지나는데, 남쪽으로 蓮松浦가 표시되어 있다.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이 되는데 이 지역에 대해 ≪동국여지승람≫에서 ''겹친 언덕, 중복된 재가 그윽하게 깊고, 매우 험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지도에서도 여러 고개(岺)가 등장하고 있으며 육로망은 이곳들을 지나게 된다. 동남쪽에 금강산이 나타나는데 산수화 기법으로 봉우리들을 그렸다. 금강산을 끼고 正陽寺, 表訓寺, 摩阿衍, 長安寺 등의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금강산 서쪽의 斷髮岺은 俗人이 이 재(嶺)를 올라 금강산을 본 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한다하여 붙인 이름으로 전한다. 表訓寺는 신라의 승려 能仁, 神林, 表訓 등이 이 절을 처음 지었으며 명나라 황제가 돈과 명주를 시주하였다고 한다. 長安寺는 法堂, 佛殿, 佛像을 모두 중국 기술자가 제작하였으며 신라 법흥왕 때 처음으로 세웠다. 회양부에 속하는 和川, 嵐谷, 水入, 文登, 長楊面은 과거에 縣이 있던 곳으로 이 지도에서 각각 창고가 설치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읍치 북쪽 義?岺이 鎭山이며 금강산 남쪽으로 黃腸禁山이 표시되어 있다. 邑治는 성곽 없이 客舍, 衙舍, 倉, 鄕校를 표시하였다. 서북쪽의 鐵嶺은 한반도 동북 방향의 중요한 통로가 되는 곳으로 大路가 지나는 길목이다. 1222년(고려 고종 9)에 이곳에 능선을 따라 城을 쌓고 관문을 만들었다. 육로상에 銀溪驛, 新安驛이 표시되었고 邑治 서쪽으로 네 개의 烽燧가 연이어 나타난다.(이현군)

  • 횡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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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橫川縣으로 1414년(태종 14)에 洪川과 발음이 비슷하다하여 횡성으로 고쳤다. 현재의 강원도 횡성군에서 서원면과 강림면(원주 땅)을 제외한 청일면, 갑천면, 둔내면, 안흥면, 우천면, 횡성읍, 공근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그 중심지는 횡성읍내가 된다. 客舍, 衙舍, 倉庫, 鄕校를 표시하였다. 지도에서 前川, 北川이 縣 앞에서 만나는데 北川은 지금의 蟾江 상류에 해당한다. 서쪽 屯內面의 강은 주천강이다.縣 북쪽의 泰 山은 옛날 辰韓의 泰 王이 신라 시조 박혁거세에 쫓기어 이곳에 머물면서 군사를 훈련하였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 때 갑옷을 냇물에 씻었는데 이를 따서 이 지역이 횡성의 甲川面이 되었다 한다. 奉福寺(갑천면 신대리)는 1420년(신라 진흥왕 23)에 세운 절이며 이외에 南山寺(우천면 남산리)가 지도에 보인다. 寒江臺(寒岡臺, 횡성읍 반곡리)는 섬강가에 있는 반석으로 寒岡 鄭逑(1543-1620)가 은거하며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주천강가에 楡谷倉, 현 북쪽 北川(섬강)가에 外倉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의 명칭을 기록하였다. 葛豊驛(횡성읍 갈풍리)을 통하는 길은 原州, 砥平을 거쳐 서울로 이어지고 蒼峯驛(공근면 창봉리)은 洪川과 연결되는 길에 있으며 烏原驛, 安興驛(안흥면 안흥리)은 강릉과 통하는 길에 있다.(이현군)

  • 흡곡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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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때에 흡곡으로 바뀌었으며 통천에 병합과 분리과정을 겪다가 1914년에 통천에 병합되어 지금에 이른다. 동쪽으로는 東海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安邊, 淮陽, 남쪽으로는 通川과 경계를 이룬다. 현재 북한 강원도 통천군의 북쪽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비교적 작은 縣으로 이 지도 역시 간략하게 그렸다. 邑治에는 성곽이 있었으나 표시하지 않았고 客舍, 衙舍, 倉을 그렸으며 동쪽으로 鄕校가 있는데 邑治와 鄕校를 별개의 形局처럼 보이게 묘사하였다. 향교 뒤에 표시된 博山이 鎭山이다. 읍치 북쪽에 侍中臺가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긴 멧부리가 뻗어나가다가 동으로 서렸는데 3면이 모두 큰 호수이다. 밖으로 큰 바다가 둘렀으며 작은 섬이 바다 가운데 들어선 것이 일곱이 있다. 경치가 鏡浦臺에 뒤지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는 바다 가운데 栗島를 표시하였으며 서쪽으로는 長在湖를 그렸다. 적색의 도로에 大路, 小路 표시를 해 두었다. 읍치 남쪽에 貞德驛이 있었다. 지도에서 馬峴峙는 안변으로, 文峙峴는 통천으로 통하는 길목이다. 하나의 고개이름에 峴과 峙를 동시에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남쪽 해안에 봉수터로 舊烽臺가 표시되어 있으며 사찰로는 華藏菴이 있었다.(이현군)

  • ▶경기도
  • 가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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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 때에 加平이 되었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에 강원도로부터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1883년(고종 20)에 다시 강원도에 이속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경기도에 이속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가평군의 가평읍, 북면, 상면, 하면, 외서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설악면은 양근땅에 속하므로 제외된다. 가평읍 읍내리가 郡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지도에 나타난 朝宗面은 원래 朝宗縣이 있었던 곳으로 1396년(태조 5)에 최종적으로 加平에 편입되었으며 현재의 가평군 상면, 하면에 해당된다. 조종현의 읍치는 가평군 하면 현리였다.  지도 왼쪽의 강은 북한강이며 昭陽江, 洪川江을 비롯하여 靑平川, 潛谷川, 朝宗川, 五木川, 嘉平川, 桂良川, 巨林川 등의 하천을 상세히 그리고 이름을 붙였다. 북한강을 지도의 왼쪽에 배치한 결과 이 지도는 서쪽이 위가 되게 된다. 산줄기와 물줄기를 邑治를 둘러싸게 그렸으며 풍수사상이 지도제작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邑治의 坐向을 지도안에 기록하였다. 連洞驛(상면 연하리 역말), 甘泉驛, 狄栗院 林子院 등의 역원이 이 지역에 존재하였으며 大路는 서울과 春川, 狼川(강원도 화천군)을 연결하는 길이다. 懸燈寺, 兩道馬寺, 龍泉寺 등의 사찰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으며 花岳山(華岳山)은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북한강의 지류인 朝宗川 근처에 縣倉(하면 현리)이 표시되어 있는데 옛 朝宗縣의 창고이다. 이 밖에 김육을 배향한 潛谷書院이 지도에 나타난다.(이현군)

  • 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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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으로 강화 본섬과 주변의 섬들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城이 위치한 중심지는 지금의 강화읍내가 된다. 강화도는 중심지에 內城이 있고 해안을 따라 外城이 형성된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그 밖에 鼎足山과 文殊山, 喬桐의 華盖山에는 山城이 있었다. 강화도는 남북으로 긴 형태이므로 이 지도에서는 위를 동쪽으로 하여 그리고 있다. 섬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에서 육로만 표시하고 海路는 표시하지 않고 있다. 고려초에 江華라 불리기 시작했으며 1232년(고려 고종 19)에 몽고의 침입으로 이곳으로 遷都함으로써 江都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1627년(인조 5)에 후금의 침입을 피하여 이곳으로 천도하기도 하였다. 이곳에 鎭撫使를 둔 것은 1678년(숙종 4)이후이다. 몽고와 후금의 침입,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구한말 일본의 침입 등 많은 역사적 전란을 겪었던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성을 가지는 지역이다. 동쪽 해안을 따라 外城이 쌓여졌고 山城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성안에는 과거 고려 궁궐(강화읍 관청리)이 있었으며 이 지도에서 통치와 관련된 많은 건물들이 성안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禁衛營, 訓練都監 등이 설치되었으며 해안을 따라 月串僉使鎭, 濟物萬戶鎭, 龍津萬戶鎭, 廣城別將堡, 德津萬戶鎭, 草芝萬戶鎭, 船頭別將堡, 長串別將堡, 井浦別將堡, 寅火萬戶鎭, 鐵串別將堡, 昇天別將堡, 文殊別將鎭, 德浦僉使鎭 등의 鎭堡와 각 진보에 소속된 墩臺가 지도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아울러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진 여러 樓와 倉庫, 水門, 暗門, 烽臺, 烟臺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요한 나루로는 甲串津(강화읍 갑곶리), 廣城津(불은면 덕성리), 寅火津(양사면 인화리), 昇天津(송해면 당산리) 등이 있었다. 위치와 방향에 따라 초지진과 광성진은 通津으로, 인화진은 喬桐으로, 승천진은 豊德(황해도 개평군)으로 연결되는 나루가 된다. 鼎足山城에는 병인양요 때까지 史庫(길상면 온수리)가 있었다. 傳燈寺(眞宗寺)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처음 창건되었으며 고려 충렬왕의 원비가 옥등을 바친 이후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忠烈祠(선원면 선행리)는 仙源 金尙容의 집터에 세워진 사당이다. 摩尼山 정상에는 塹城壇이 있었다.(이현군)

  • 강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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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으로 강화 본섬과 주변의 섬들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城이 위치한 중심지는 지금의 강화읍내가 된다. 강화도는 중심지에 內城이 있고 해안을 따라 外城이 형성된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그 밖에 鼎足山과 文殊山, 喬桐의 華盖山에는 山城이 있었다. 강화도는 남북으로 긴 형태이므로 이 지도에서는 위를 동쪽으로 하여 그리고 있다. 섬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에서 육로만 표시하고 海路는 표시하지 않고 있다. 고려초에 江華라 불리기 시작했으며 1232년(고려 고종 19)에 몽고의 침입으로 이곳으로 遷都함으로써 江都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1627년(인조 5)에 후금의 침입을 피하여 이곳으로 천도하기도 하였다. 이곳에 鎭撫使를 둔 것은 1678년(숙종 4)이후이다. 몽고와 후금의 침입,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구한말 일본의 침입 등 많은 역사적 전란을 겪었던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성을 가지는 지역이다. 동쪽 해안을 따라 外城이 쌓여졌고 山城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성안에는 과거 고려 궁궐(강화읍 관청리)이 있었으며 이 지도에서 통치와 관련된 많은 건물들이 성안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禁衛營, 訓練都監 등이 설치되었으며 해안을 따라 月串僉使鎭, 濟物萬戶鎭, 龍津萬戶鎭, 廣城別將堡, 德津萬戶鎭, 草芝萬戶鎭, 船頭別將堡, 長串別將堡, 井浦別將堡, 寅火萬戶鎭, 鐵串別將堡, 昇天別將堡, 文殊別將鎭, 德浦僉使鎭 등의 鎭堡와 각 진보에 소속된 墩臺가 지도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아울러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진 여러 樓와 倉庫, 水門, 暗門, 烽臺, 烟臺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요한 나루로는 甲串津(강화읍 갑곶리), 廣城津(불은면 덕성리), 寅火津(양사면 인화리), 昇天津(송해면 당산리) 등이 있었다. 위치와 방향에 따라 초지진과 광성진은 通津으로, 인화진은 喬桐으로, 승천진은 豊德(황해도 개평군)으로 연결되는 나루가 된다. 鼎足山城에는 병인양요 때까지 史庫(길상면 온수리)가 있었다. 傳燈寺(眞宗寺)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처음 창건되었으며 고려 충렬왕의 원비가 옥등을 바친 이후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忠烈祠(선원면 선행리)는 仙源 金尙容의 집터에 세워진 사당이다. 摩尼山 정상에는 塹城壇이 있었다.(이현군)

  •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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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운데로 한강과 임진강이 흐른다. 백두대간에서 나온 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 한남정맥이 경기도를 지나며 서쪽은 京畿灣 일대가 된다. 강화만, 남양만, 아산만을 영역속에 포함하고 있다. 한강을기준으로 左道와 右道로 나누어지며 西海와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휴전선 이북의 松都(개성), 豊德, 長湍, 朔寧까지 영역에 포함된다. 이 지도에서 京都는 적색의 원으로 크게 강조하여 표시하고 있으며 각 군현은 황색의 원으로 표시하였다. 경기도와 경계가 되는 다른 도의 군현은 명칭만 적고 있다. 군사 요충지가 되는 鎭은 적색의 사각형으로 표시하여 차별을 두었다. 京都의 都城과 北漢山城, 廣州의 南漢山城, 通津의 文殊山城은 흰색으로 성곽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강줄기를 강조하여 그렸으며 강 사이로 산줄기와 산의 명칭을 적고 있다. 서해의 섬들을 그리고 각 섬의 명칭을 붙여놓았다. 龍津, 禿津, 廣津 등 주요 나루를 한강에 표시하고 健元陵을 비롯한 주요 陵의 위치와 명칭을 표기하였다. 지도의 여백에는 土地와 穀物, 路程의 기준, 驛, 軍兵, 官職, 船舶의 수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현군)

  • 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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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한성부는 都城과 城底十里로 구성되는데 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한강 이북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의 한 줄기가 북한산으로 이어진다. 서쪽에는 사천, 동쪽에는 중랑천이 흐르는데 도성 내부의 여러 산에서 나온 開川(청계천)이 동쪽으로 모아져 청계천과 합류하여 남쪽의 한강으로 들어가며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 서해로 나간다. 하천은 점선으로 표시하고 덧칠을 하여 나타내었다. 북한산에서 내려온 脈이 白岳(북악산)으로 이어지며 그 앞에 景福宮이 자리하게 된다. 白岳, 仁王山, 駱山, 木覓(남산)을 연결하여 都城을 쌓았다. 이 도성을 이 지도의 가운에 크게 그렸으며 城門의 이름이 자세히 나와있다. 도성이 연결되는 산과 봉우리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인왕산 아래에는 淸風溪, 玉流洞, 弼雲臺를 표시해 두었다. 都城의 서북쪽으로 연결된 성곽은 蕩春臺城(西城)이며 북쪽으로 北漢山城지역을 자세히 그렸다. 북한산에는 주요 봉우리와 성문의 이름, 여러 창고가 잘 나타난다. 北漢山城을 자세히 그리겠다는 의도는 지도의 제목을 北漢山城附라고 한데서도 드러난다. 도성 내부에는 景福宮, 慶熙宮, 昌德宮, 昌慶宮 등의 궁궐과 宗廟, 社稷, 鐘閣이 배치되어 있으며 경복궁 남쪽으로는 漢城府와 행정부의 각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에는 五部制가 실시되었는데 이 지도에서 각 부(東部, 西部, 南部, 北部, 中部)의 위치를 확인할 수있다. 成均館과 함께 中學, 東學, 西學, 南學 등의 교육기관과 軍營, 기타 관청들이 나와있다. 또한 청계천의 교량들이 명칭과 함께 자세히 표시되어있다. 도로망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崇禮門, 昭義門, 敦義門에서 출발한 도로는 한반도 서북쪽으로 향하여 의주까지 이어지는데 이 길은 중국 사신들의 통행로이기도 하며 그 경로상에 慕華館, 弘濟院이 위치하고 있다. 興仁門, 惠化門에서 나온 길은 한반도 동북부로 연결되며 그 경로상에 活人寺(活人署)가 있다. 崇禮門, 光熙門에서 나온 길은 한강을 지나 삼남지방으로 연결된다. 한강에는 여러 津渡, 浦, 西氷庫, 東氷庫 등이 있으며 纛島(뚝섬)과 栗島(여의도와 밤섬)이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先農壇, 關王廟 등의 제단과 箭串橋(살곶이 다리) 동쪽으로 牧場이 지도에 나타난다.(이현군)

  • 경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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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한성부는 都城과 城底十里로 구성되는데 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한강 이북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의 한 줄기가 북한산으로 이어진다. 서쪽에는 사천, 동쪽에는 중랑천이 흐르는데 도성 내부의 여러 산에서 나온 開川(청계천)이 동쪽으로 모아져 청계천과 합류하여 남쪽의 한강으로 들어가며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 서해로 나간다. 하천은 점선으로 표시하고 덧칠을 하여 나타내었다. 북한산에서 내려온 脈이 白岳(북악산)으로 이어지며 그 앞에 景福宮이 자리하게 된다. 白岳, 仁王山, 駱山, 木覓(남산)을 연결하여 都城을 쌓았다. 이 도성을 이 지도의 가운에 크게 그렸으며 城門의 이름이 자세히 나와있다. 도성이 연결되는 산과 봉우리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인왕산 아래에는 淸風溪, 玉流洞, 弼雲臺를 표시해 두었다. 都城의 서북쪽으로 연결된 성곽은 蕩春臺城(西城)이며 북쪽으로 北漢山城지역을 자세히 그렸다. 북한산에는 주요 봉우리와 성문의 이름, 여러 창고가 잘 나타난다. 北漢山城을 자세히 그리겠다는 의도는 지도의 제목을 北漢山城附라고 한데서도 드러난다. 도성 내부에는 景福宮, 慶熙宮, 昌德宮, 昌慶宮 등의 궁궐과 宗廟, 社稷, 鐘閣이 배치되어 있으며 경복궁 남쪽으로는 漢城府와 행정부의 각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에는 五部制가 실시되었는데 이 지도에서 각 부(東部, 西部, 南部, 北部, 中部)의 위치를 확인할 수있다. 成均館과 함께 中學, 東學, 西學, 南學 등의 교육기관과 軍營, 기타 관청들이 나와있다. 또한 청계천의 교량들이 명칭과 함께 자세히 표시되어있다. 도로망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崇禮門, 昭義門, 敦義門에서 출발한 도로는 한반도 서북쪽으로 향하여 의주까지 이어지는데 이 길은 중국 사신들의 통행로이기도 하며 그 경로상에 慕華館, 弘濟院이 위치하고 있다. 興仁門, 惠化門에서 나온 길은 한반도 동북부로 연결되며 그 경로상에 活人寺(活人署)가 있다. 崇禮門, 光熙門에서 나온 길은 한강을 지나 삼남지방으로 연결된다. 한강에는 여러 津渡, 浦, 西氷庫, 東氷庫 등이 있으며 纛島(뚝섬)과 栗島(여의도와 밤섬)이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先農壇, 關王廟 등의 제단과 箭串橋(살곶이 다리) 동쪽으로 牧場이 지도에 나타난다.(이현군)

  • 고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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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년(태종 13)에 高峯縣과 德陽縣을 합하여 高陽을 만들고 縣監을 두었으며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일대이다. 고양동이 과거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읍치에 배치된 건물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지도에서 남쪽의 강은 한강이며 孔岩津을 통해 陽川과 통하며 楊州, 坡州, 交河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石峴을 넘어 交河, 坡州를 통해 義州까지 통하는 大路가 邑治를 지나고 있다. 碧蹄驛, 德水院(삼송동), 碧蹄店, 新院店 등의 驛院, 店幕이 도로변에 위치하였음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碧蹄驛에는 驛村(벽제동)이 존재하였음을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남쪽의 城山이라 기록된 것은 幸州山城이 위치한 덕양산으로 1593년(선조 26)에 權慄 將軍이 이곳에 주둔하여 왜병을 크게 무찔렀다. 대첩비와 대첩비각이 있는데 지도에 勝戰碑를 표시해주고 있다. 이 지역은 고려 崔塋將軍의 墓(대자동), 고려 恭讓王의 墓(주교동)를 비롯하여 원당동에 西三陵(昭顯墓, 孝陵, 禧陵), 용두동에 西五陵(昌陵, 敬陵, 翼陵, 明陵, 順懷墓) 등 많은 능묘가 존재하였음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이 밖에 禿山烽燧, 高峯烽燧, 藍浦烽燧 등의 봉수, 堤堰, 저수지(龍淵, 銀池), 書院(文峰書院)등이 있었음이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과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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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서울특별시 한강이남(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동작구, 관악구 일부지역)과 경기도 과천시, 안양시 일대가 과천현의 범위에 소속되었으며 과천시 문원동, 중앙동이 과거의 중심지였다. 冠岳山이 鎭山이며 修理山, 淸溪山과 漢江이 과천현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漢江을 비롯한 여러 하천이 이 지역에 분포하므로 농사에 적합한 지역이 많아  室坪, 僧房坪, 仁德院坪 등이 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縣 앞으로 물길이 빠져나가는 곳에 水口藪가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한강 이남에 위치한 지역이므로 露梁津, 銅雀津, 漢江津과 연계된 형태로 도로가 발달하였으며 서울과 三南으로 연결되는 大路, 衿川, 安山으로 연결되는 길이 지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육로망의 발달과 관계 깊은 여러 고개(峴)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良才驛, 仁德院 등의 역원이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로변에는 新院酒幕, 葛山酒幕 등의 酒幕이 있었음을 지도에서 알 수 있다. 그 밖에 書院, 寺刹 등이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광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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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0년(고려 태조 23)부터 광주로 불렸으며 현재의 경기도 광주군, 하남시, 성남시, 의왕시, 군포시 일대와 화성군 매송면 일부지역(원리, 송라리, 야목리 등), 안산시 일부지역(일동, 이동, 본오동, 성포동), 서울특별시 송파구, 강동구 일부지역, 남양주시 와부읍 일부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남한산성 안의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가 1917년까지 중심지였다. 이 지도에서 보이는 山城은 南漢山城으로 병자호란때 왕이 피난하였다가 결국은 항복하였다. 門과 將臺, 甕城의 위치를 자세히 그리고 있으며 성곽 안의 건물들과 사찰을 표시하고 있다. 서울의 남동쪽, 한강의 이남에 위치한 곳으로 지도의 위가 서쪽이 되게 그리고 있다. 水運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으므로 松坡津, 三田渡, 廣津, 龍津 등의 나루가 한강변에 발달하였으며 倉庫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가는 大路상에 있는 곳으로 慶安驛, 奉安驛, 良才驛, 樂生驛, 沙平院, 渡迷院, 廣津院 등의 역원이 배치되어 있으며 곳곳에 酒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사찰과 암자를 지도에 자세히 표시하고 있다. 禮賓山아래는 議政府의 柴場이었으며 토산품으로 磁器, 陶器를 들 수 있는데 있는데 司饔院의 分院이 이지역에 있었다.(이현군)

  • 광주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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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0년(고려 태조 23)부터 광주로 불렸으며 현재의 경기도 광주군, 하남시, 성남시, 의왕시, 군포시 일대와 화성군 매송면 일부지역(원리, 송라리, 야목리 등), 안산시 일부지역(일동, 이동, 본오동, 성포동), 서울특별시 송파구, 강동구 일부지역, 남양주시 와부읍 일부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남한산성 안의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가 1917년까지 중심지였다. 이 지도에서 보이는 山城은 南漢山城으로 병자호란때 왕이 피난하였다가 결국은 항복하였다. 門과 將臺, 甕城의 위치를 자세히 그리고 있으며 성곽 안의 건물들과 사찰을 표시하고 있다. 서울의 남동쪽, 한강의 이남에 위치한 곳으로 지도의 위가 서쪽이 되게 그리고 있다. 水運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으므로 松坡津, 三田渡, 廣津, 龍津 등의 나루가 한강변에 발달하였으며 倉庫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가는 大路상에 있는 곳으로 慶安驛, 奉安驛, 良才驛, 樂生驛, 沙平院, 渡迷院, 廣津院 등의 역원이 배치되어 있으며 곳곳에 酒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사찰과 암자를 지도에 자세히 표시하고 있다. 禮賓山아래는 議政府의 柴場이었으며 토산품으로 磁器, 陶器를 들 수 있는데 있는데 司饔院의 分院이 이지역에 있었다.(이현군)

  • 교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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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해당하는 지역으로 읍내리가 중심지가 된다. 1629년(인조 7)에 府로 승격되었으며 1914년에 강화군에 합하여졌다. 지도에서 邑治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성곽은 1629년(인조 7)에 南陽의 花梁에 있던 水營을 월곶진터(읍내리)로 옮길 때 쌓았다한다. 이 지역은 1633년(인조 11)에 三道統禦使를 두어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의 水軍을 관장하던 곳이다. 지도에 많은 浦, 津이 있으며 관할하던 선박의 수량이 지도 여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지도 안에 水路를 통할 때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船倉 등의 창고가 지도에 나와 있으며 무기를 관리하던 軍器庫가 표시되어 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 修井山, 華盖山에 烽燧가 있었으며 華盖山에는 山城이 있었다. 화개산 남쪽의 華岩寺는 고려 말 牧隱 李穡이 독서하던 곳이라 전해진다. 남쪽의 鷹岩은 지금 상여바위로 불리는 곳이며 그 아래의 松家島는 지금의 석모도이다. 지금의 석모도는 과거에는 두 개의 큰 섬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중 송가도는 북쪽의 섬에 해당한다. 송가도에는 山林과 石材의 채취를 금지하는 禁山이 설치되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지 않은 지역이지만 脈勢를 잡아 산줄기들을 표현하였으며 모두 府의 중심지를 향하게 그렸다.(이현군)

  • 교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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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交河로 이름을 고쳤으며 경기도 파주시내, 파주시 교하면, 탄현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14년에 파주에 합하여졌다. 중심지는 파주시 교하면 교하리, 파주시 금릉동일대이다. 교하현은 원래 탄현면 갈현리에 있었는데 1733년(영조 9)에 長陵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交河縣을 금촌읍 금릉리(현재의 파주시 금릉동)으로 옮겼다가 7년 후 다시 교하면 교하리로 옮기게 된다. 지도 왼쪽의 여러 강들이 모이는 지점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가장 위쪽의 강이 임진강이고, 가운데는 恭陵川(곡릉천), 아래쪽은 한강이다. 임진강 하류에 河中島인 一眉島가 있었던 것이 흥미롭다. 읍치 내부 건물들의 그림은 그리지 않고 건물 이름만 표시한 점이 독특한데 客舍와 司倉 사이에 官坐地라 적고 있다. 新谷書院은 파주시 금릉동에 있는 것으로 1683년(숙종 9)에 세워져 尹宣擧 등을 배향하였다. 邑治 뒤쪽의 烽燧는 黔丹山烽燧이다. 주변의 산은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있으며 山所가 있는 곳은 산줄기를 하나의 독자적 形局이 되게 그렸다.(이현군)

  • 금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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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衿川縣이 되었다. 조선 태종때 果川과 합하여져 衿果縣이 되었다가 분리되었으며 다시 陽川縣과 합하여져서 衿陽縣이 되기도 하였다.이 지도 제작 이후의 정조대에 이르러 始興이 되었다. 한강의 이남에 있으며 안산, 과천, 양천, 인천과 경계를 이루었다. 현재 서울특별시의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금천구, 동작구 일부지역과 경기도 광명시와 안양시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縣의 중심지는 금천구 시흥동이 된다. 三聖山이 鎭山으로 이 산의 三幕寺는 세 명의 대사가 각각 절을 짓고 살았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縣의 북쪽에 한강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지도에서는 아래에 그렸다. 남쪽을 위로 하여 그린 지도이다. 산과 하천, 도로를 중심으로 그렸으며 邑治의 내부와 행정구역명은 지도에는 생략하여 간략하게 작성하였다. 주변의 산들은 모두 邑治를 바라보는 형태를 취하였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현하였으며 水原과 露梁津을 연결하는 大路, 인천, 안산, 과천, 양화진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표시하고 있다. 그 밖에 古城의 터와 陵墓 등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김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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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김포시내와 김포시 고촌면, 인천광역시 서구 검단동, 백석동, 오류동, 금곡동 일대이다. 김포시 북변동과 걸포동이 군의 중심지에 해당하였다. 지도의 아래쪽은 바다가 아니라 한강이며 서해바다는 지도의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 지도는 남서쪽을 위로하고 북동쪽을 아래로하여 그린 지도이다. 이 지역은 양천, 부평, 통진과 한강에 의해 둘러싸인 곳으로 지도의 오른쪽 위에 표시된 도로는 서울에서 통진을 거쳐 강화로 가는 直路(제 9대로)이다. 章陵(김포시 풍무동)은 조선 仁祖의 생부인 元宗(추존)의 능이다. 원래의 김포고을의 터였는데 읍치를 옮기고 능을 썼다. 장릉 아래쪽의 古縣內面은 이전의 郡 중심지가 이 일대였음을 말해준다. 牛渚書院(김포시 감정동)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趙憲을 추모하여 세운 서원이다.(이현군)

  • 남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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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 비봉면 일부지역과 안산시 대부도, 제부도, 옹진군 영흥면(영흥도) 등의 섬들이 포함되는 지역이다. 그 중심지는 화성군 남양면 남양리가 된다. 바다의 섬들은 府의 서쪽에 위치하는데 이 지도의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다. 육지부에 해당하는 지도의 위가 동쪽이 된다. 산줄기와 지도안의 글씨는 府를 중심으로 그려넣었다. 같은 지도안에 다양한 視點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닷가에 海倉이 그려져 있으며 海路와 陸路를 구분하지 않고 적색으로 표시하고 있다. 海路는 全羅道, 瑞山, 海美, 平澤 등과 연결되는데 주로 貢稅를 목적으로 개발된 船路이다. 염불산(봉화산, 서신면 상안리, 전곡리)과 해운산(봉화산, 송산면 독지리, 신천리)에 봉수가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바다를 접하고 있었던 지역이라 군사적 목적에 의해 花梁鎭, 永宗浦營, 安興鎭 등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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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百濟의 南漢山城으로 溫祚王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으로 新羅에 병합되어 漢山州, 南漢山州, 漢州 등으로 불리었다. 현재의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위치한 것으로 지도에 나타난 山城은 1595년(선조 28)에 축조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왕이 피난하였던 곳이다. 성안의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가 광주부의 중심지였다. 한강을 지도의 아래에 두고 그린 결과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 된다. 산줄기 사이로 물줄기를 자세히 그렸는데 산성의 안에까지 물줄기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本城과 함께 甕城, 新城, 將臺, 城門을 자세히 그렸다. 山城 안에는 行宮을 비롯하여 左殿, 社壇, 溫王廟, 鍊兵館, 倉庫, 寺刹 등이 표시되어 있다. 군사 지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地形을 자세히 그리면서 候望處, 斥候處, 埋伏處 등을 지도에 일일이 표시하고있다. 특히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丙子胡陣處, 胡兵埋伏處 등을 따로 표시해 두었다. 육로를 그리면서 고개(峴), 驛, 酒幕 등을 경로상에 표시해 두었다. (이현군)

  • 덕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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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적도는 원래 南陽 땅이었으나 1486년(성종 17)에 인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진면에 해당한다. 이 지도는 덕적도만 그린 것이 아니라 경기만 일대 전체를 그리고 있다. 육지부와 섬을 함께 그리고 있는데, 육지부의 각 지역은 도별로 색을 달리하여 구분하고 있으며 각 섬들은 행정구역상 어디에 소속된 지역인지 일일이 표시하고 있다. 각 섬들의 형태는 정확하지 않으나 거의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방어적 성격을 지닌 지도이므로 水營, 鎭, 津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서해의 여러 섬들을 중심으로 그린 지도이므로 각 지방과 통하는 水路와 水路상의 거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섬과 섬, 섬과 육지사이의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여백에는 선박의 운행과 관련된 사항이 적혀 있으며 바람과 물때(밀물과 썰물)를 기다리던 곳을 표시하고 있다(三南稅船往來時 暫時碇留待風水處). 또한, 潮水干滿의 차가 큰 서해안이라 조수가 빠져나갈 때는 섬과 섬 사이를 건너다닐 수 있으며 물이 다시 들어올 경우 배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水退則靑泥 行人皆越去 潮進則行舟).(이현군)

  • 마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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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麻田淺縣이었다가 고려 초에麻田이 되었으며 漣川, 積城, 長湍, 朔寧과 경계를 이루었으며 현재는 경기도 연천군에 포함되어 있다. 임진강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지도에서 大江으로 기록된 것은 臨津江을 의미하며 楡林津, 腐近津 등의 나루가 보인다.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왕징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미산면 마전리가 중심지였다. 비교적 간략하게 그린 지도로 읍치 안에 人家라고 기록한 것이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점이다. 숭의전은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사당이다. 1392년(태조 원년)에 사당을 지어 고려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지도에 표시된 大路는 積城과 漣川을 연결해주던 도로이다. 읍치의 뒤쪽 脈勢를 강조하여 그렸으며 강줄기도 郡전체를 감싸듯이 그렸다. 실제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읍치를 중심으로 재해석하여 표현하고 있다.(이현군)

  • 부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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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일부지역(일부는 김포땅), 경기도 부천시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府의 중심지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이다. 지도의 오른쪽에 ''北''이라는 방위표시가 나와있다. 지도의 아래쪽에 한강이 표시되어 있으며露梁津路, 陽花津路, 孔岩津路등의 도로명이 붙어 있는데 이 길들을 통해 한강으로 연결되지만 한강과 인접한 지역은 부평의 땅이 아니다. 金浦路, 江都路, 安山路, 仁川永宗路를 통해 이 지역이 김포를 거쳐 강화도와 연결되며 인천을 거쳐 영종도까지 연결되고 안산과 인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桂陽山(인천광역시 계양구 방축동, 계산동)이 府의 鎭山으로 이곳에는 삼한 때 쌓았다는 城이 있었다. 府의 앞쪽에 표시된 ''造山''은 계산동의 들판에 풍수적 목적으로 쌓은 것이다.(이현군)

  • 삭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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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朔邑과 僧嶺이 합하여 삭녕이 되었다. 현재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 삭녕면,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삭녕면 삭녕리가 중심지가 된다. 邑治에 부속건물은 그리지 않고 邑居라고만 표시하고 있다. 寅目面 僧嶺山 아래 古邑居라고 기록된 곳이 과거의 僧嶺縣 읍치였음을 알 수 있다. 有山城이라고 되어 있어 과거에 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을 점선으로 표시하였는데 지도왼쪽의 大水源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임진강이며 오른쪽의 小水源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驛谷川으로 합류하여 서해로 들어간다. 산줄기는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있다. 하천 사이로 廣華坪 등 농사에 적합한 땅을 표시하였으며 임진강가에 羽化亭이 있다.또한 觀音寺, 龍腹寺 등의 사찰이 표시되어 있다. 京道라고 표시된 길은 長湍의 고랑포를 지나 파주, 고양을 거쳐 서울로 통하는 길이다.(이현군)

  • 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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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松岳, 開京. 開州 등으로 불리었으며 1467년(세조 13)에 경기도에 포함되었다. 현재의 북한 개성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동쪽으로 長湍, 남쪽으로 豊德, 서쪽으로 白川, 북쪽으로 金川과 맞닿아 있다. 이 지도에서 ''靑色長湍地'', ''赤色豊德地'', ''黃色金川地'' 등으로 色을 달리하여 주변지역과의 경계를 표시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五部三十五坊制가 실시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도가 한양으로 바뀜에 따라 四部가 되었고 坊의 수도 줄어들게 된다. 이 지역의 聖居山, 天摩山, 松岳山은 임진북예성남정맥의 경로에 포함되며 이 산들에서 시작되는 이 지도의 모든 하천은 결국 서해로 들어가게 된다. 지도에는 沙川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 板門店 근처의 板門橋가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동쪽을 위로하여 그린 지도이다. 지도에는 內城, 外城과 天摩山의 大興山城이 그려져 있으며 중심지는 남쪽의 松岳山 아래 성안이 된다. 성곽에는 성문의 이름이 기록되어있고 성안에는 滿月臺가 보이며 관아건물, 고려 成均館, 觀德亭, 여러 書院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연결되는 城門들과 고개(峴)의 이름이 자세히 나와있으며 善竹橋, 吹笛橋 등의 교량이 경로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과는 大路로 연결되었으며 이 길은 平壤을 지나 義州까지 통하였다. 송악산에 ''水路烟臺'', ''陸路烟臺''로 기록되어 있어 육로와 수로를 통해 봉수가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악산의 국사당봉수가 육로를 통해 온 것이며 성황당봉수가 수로를 통해 온 것이다. 북쪽의 大興山城에는 將臺, 中營 등의 군사시설과 倉庫, 城門의 이름, 여러 사찰들이 그려져있다. 서쪽에는 礪峴鎭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 漕運이 통하였음을 기록해 두었다. 또한 나무를 그리고 ''種樹處''라고 표시해 두었다. 송악의 서쪽에는 무역항이었던 碧瀾渡, 고려 유신이 숨었다는 杜門洞, 高麗太祖顯陵이 나타난다. 송악의 동쪽에는 花潭書院이 보인다.(이현군)

  • 송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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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松岳, 開京. 開州 등으로 불리었으며 1467년(세조 13)에 경기도에 포함되었다. 현재의 북한 개성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동쪽으로 長湍, 남쪽으로 豊德, 서쪽으로 白川, 북쪽으로 金川과 맞닿아 있다. 이 지도에서 ''靑色長湍地'', ''赤色豊德地'', ''黃色金川地'' 등으로 色을 달리하여 주변지역과의 경계를 표시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五部三十五坊制가 실시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도가 한양으로 바뀜에 따라 四部가 되었고 坊의 수도 줄어들게 된다. 이 지역의 聖居山, 天摩山, 松岳山은 임진북예성남정맥의 경로에 포함되며 이 산들에서 시작되는 이 지도의 모든 하천은 결국 서해로 들어가게 된다. 지도에는 沙川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 板門店 근처의 板門橋가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동쪽을 위로하여 그린 지도이다. 지도에는 內城, 外城과 天摩山의 大興山城이 그려져 있으며 중심지는 남쪽의 松岳山 아래 성안이 된다. 성곽에는 성문의 이름이 기록되어있고 성안에는 滿月臺가 보이며 관아건물, 고려 成均館, 觀德亭, 여러 書院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연결되는 城門들과 고개(峴)의 이름이 자세히 나와있으며 善竹橋, 吹笛橋 등의 교량이 경로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과는 大路로 연결되었으며 이 길은 平壤을 지나 義州까지 통하였다. 송악산에 ''水路烟臺'', ''陸路烟臺''로 기록되어 있어 육로와 수로를 통해 봉수가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악산의 국사당봉수가 육로를 통해 온 것이며 성황당봉수가 수로를 통해 온 것이다. 북쪽의 大興山城에는 將臺, 中營 등의 군사시설과 倉庫, 城門의 이름, 여러 사찰들이 그려져있다. 서쪽에는 礪峴鎭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 漕運이 통하였음을 기록해 두었다. 또한 나무를 그리고 ''種樹處''라고 표시해 두었다. 송악의 서쪽에는 무역항이었던 碧瀾渡, 고려 유신이 숨었다는 杜門洞, 高麗太祖顯陵이 나타난다. 송악의 동쪽에는 花潭書院이 보인다.(이현군)

  • 수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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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9년(정조 13)에 顯隆園(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로 옮기기로 하고 수원부는 팔달산 아래 현재의 수원시 위치로 옮겼다. 이 지도는 그 이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영역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 지도에서의 수원부는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화성군의 봉담읍, 태안읍, 우정면, 장안면, 팔탄면, 정남면, 향남면, 양감면, 매송면 일부지역과 경기도 오산시, 경기도 평택시의 청북면, 안중면, 오성면, 현덕면, 포승면일대에 해당한다. 당시의 중심지는 화산과 城隍山, 南山으로 둘러싸인 태안읍 송산리, 안녕리 일대가 된다. 지도의 아래 왼쪽은 아산만이 되며 여러 섬들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水運의 발달에 의해 設倉, 陽城倉, 海倉, 雙阜倉 등의 창고가 많이 설치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수원부이지만 그 안에 ''稷山地''(충청남도 천안군),  ''陽城地''(경기도 안성군) 등의 越境地가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읍내를 중심으로 도로망이 표시되어 있으며 興天山(봉화산, 화성군 장안면과 우정면의 경계)의 烽燧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여러 津과 橋梁이 있었음이 나타난다.(이현군)

  • 수원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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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9년(정조 13)에 顯隆園(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로 옮기기로 하고 수원부는 팔달산 아래 현재의 수원시 위치로 옮겼다. 이 지도는 그 이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영역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 지도에서의 수원부는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화성군의 봉담읍, 태안읍, 우정면, 장안면, 팔탄면, 정남면, 향남면, 양감면, 매송면 일부지역과 경기도 오산시, 경기도 평택시의 청북면, 안중면, 오성면, 현덕면, 포승면일대에 해당한다. 당시의 중심지는 화산과 城隍山, 南山으로 둘러싸인 태안읍 송산리, 안녕리 일대가 된다. 지도의 아래 왼쪽은 아산만이 되며 여러 섬들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水運의 발달에 의해 設倉, 陽城倉, 海倉, 雙阜倉 등의 창고가 많이 설치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수원부이지만 그 안에 ''稷山地''(충청남도 천안군),  ''陽城地''(경기도 안성군) 등의 越境地가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읍내를 중심으로 도로망이 표시되어 있으며 興天山(봉화산, 화성군 장안면과 우정면의 경계)의 烽燧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여러 津과 橋梁이 있었음이 나타난다.(이현군)

  • 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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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안산시와 시흥시 일대인데 현재의 안산시에서 일동, 이동, 본오동, 성포동 등(廣州 땅)은 제외되며 시흥시 거모동, 군자동, 월곶동, 장곶동, 장현동, 정왕동, 죽률동, 조남동, 목감동, 논곡동, 하상동, 하중동 등이 포함된다. 修理山(경기도 안산시, 안양시, 군포시의 경계에 있는 산)이 郡의 鎭山으로 안산시 수암동이 郡의 중심지였다. 郡의 서쪽이 바다에 해당하며 廣州, 衿川, 果川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이 지도에는 서쪽인 바다가 아래쪽에 위치하며 ''北'', ''南'' 이라는 방위 표시가 지도의 좌우에 나타나고 있다. 舊草芝堡(안산시 초지동)는 바다가에서 외적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으로 水軍萬戶가 있었다. 1656년(효종 7)에 강화로 옮기고 성의 옛터가 남아있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烏耳島(시흥시 정왕동)는 이 지도에서는 섬으로 나타나지만 현재는 육지에서 오이도까지 매립되어 시화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오이도는 시화간척지 공사에서 시화방조제가 출발하는 지점에 해당하기도 하다. 八尾島와 雙島는 현재의 인천광역시에 소속된 섬으로 당시에는 無人島였다. ''無田地'', ''田地'' 등으로 농사에 적합한 토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지도가 정보 제공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안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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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에서 안성시내와 보개면, 금광면, 서운면, 미양면, 대덕면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안성시 구포동, 명륜동 일대가 그 중심지가 된다. 고려 초에 安城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현재의 안성시는 조선시대의 安城, 陽城, 竹山을 합한 것이다. 이 지도는 주변의 산, 하천, 도로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그렸으며 인문지리적 사항은 鄕校, 衙舍, 客舍와 沙溪書院, 靑龍寺(서운면 청룡리) 등만 표시하고 있다. 縣의 북쪽에 있는 飛鳳山(보개면 불현리, 안성시 실왕동 경계)이 鎭山이며 과거에 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縣의 남쪽에 흐르는 하천은 安城川으로 서쪽으로 흘러 아산만으로 연결된다. 鄕校는 현재의 안성시 명륜동에, 客舍는 구포동에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道路는 주위의 陽城, 稷山, 竹山 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주요한 토산품으로는 磁器, 陶器를 들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시장이 있어 전국의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번성했다고 한다.(이현군)

  • 양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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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 陽根郡이었으며 현재의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서종면, 양서면, 옥천면일대, 광주군 남종면, 가평군 설악면에 해당하며 양근군의 대부분은 砥平과 합하여져 현재는 양평군이 된 지역이다. 현재의 양평군 양평읍이 郡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있으며 지도 왼쪽 아래의 二水頭村(양수면 양수리)은 두 물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두물머리라 불린다. 大灘은 남한강으로 여주 앞을 흐르는 驪江이 이어진 것이다. 지도 왼쪽에서 북으로 연결되는 강은 북한강이 된다. 大路, 中路에 의해 加平, 砥平, 利川 등과 교류하였으며 양근은 서울과 平海를 연결하는 大路상에 위치하였다. 육로와 함께 수운이 통하는 길이라 迷源倉과 같은 창고가 있었다. 강가에 위치하였으므로 觀水亭, 洋洋亭 등 경치가 좋은 곳에 많은 정자가 있었으며 많은 寺刹, 庵子가 산재해 있었음을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농사에 필요한 堤堰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咸公城(옥천면 용천리)은 고려 때 몽고 군사를 피하던 곳이다. 이 지역은 특히 많은 墓가 있다. 산줄기 표현방식에 있어 脈勢를 강조하였으며 穴이 되는 곳은 풍수 개념에서 나온 山圖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도를 그리고 있다.(이현군)

  • 양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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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공도면, 원곡면 일대로 지금의 안성시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그 중심지는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이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으며 1914년에 안성군에 합하여진 지역이다. 북쪽을 위로하여 그린 지도이며 간략하게 그렸다. 鎭山인 天德山에서 高城山, 白雲山으로 연결되는 맥이 縣의 동쪽을 감싸고 있는데 脈勢를 강하게 표현하였다. 동쪽의 大川은 禪院川으로 아산만까지 이어지는 하천이다. 지도에 나타나는 無限城은 지금의 白雲山에 있었던 古城이다. 縣 북쪽의 大路는 용인과 안성을 연결하는 길이다. 驛院으로는 加川驛, 禪院, 所草院 등이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지도 아래쪽에 所沙酒幕이 보이고 있다. 그 밖에 吳判書書院, 吳判書墓, 尹判書墓, 崔副學墓 등의 서원, 능묘가 나타나고 지도 아래쪽의 烽臺는 槐台吉串烽燧이다.(이현군)

  • 양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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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강 남쪽과 한강이북, 한성부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청산면, 양주군, 의정부시, 동두천시(탑동 제외), 구리시, 남양주시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397년(태조 6)에서 1504년(연산군 10)까지는 양주군 주내면 고읍리가 중심지였다가 1511년(중종 6)부터는 주내면 유양리가 중심지가 되었다. 漢城府 동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 지도에서도 왼쪽 아래에 京都를 표시하고 있고 아래쪽에 한강을 그려 놓았다. 전체적으로 脈을 강조하였으며 京都와 邑治 모두 하나의 形局이 되게 표현하였다. 朝鮮 太祖陵인 健元陵을 비롯하여 光陵, 顯陵등 많은 능묘가 표시되어 있다. 漢城의 동대문에서 지방으로 가는 모든 길은 楊州를 지나게 되어 있어 도로망이 복잡하며 곳곳에 驛院이 산재해 있다. 서울에서 경기북부로 이어지는 길(抱川通路, 麻田通路, 坡州通路, 積城通路)과 강원도로 이어지는 길(關東路), 한강의 나루로 이어지는 길이 이 지역을 지나게 된다. 서울과 인접하여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며 峨嵯山과 大伊山의 烽燧는 抱川과 木覓山(서울의 남산)烽燧와 연계된다.(이현군)

  • 양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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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0년(정종 2)에 처음으로 縣을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양지현은 廣州府의 秋溪鄕이었는데 양지현청을 이 지역으로 옮겨오면서 지역의 명칭이 바뀌었으며 지도에 나타나는 ''秋溪古縣''(양지면 추계리)은 그 이전의 중심지를 나타낸 것이다.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원삼면 학일리, 목신리(목악부곡), 백암면 고안리(고안부곡), 백봉리, 안성시 고삼면 일대에 해당하며 그 중심지는 용인시 양지면 양지리가 된다. 定水山(양지면 정수리, 추계리, 양지리 경계)이 이곳의 鎭山이 되며 縣의 북쪽에서 중심지로 뻗어오는 脈勢를 강하게 표현하였다. 지도의 위쪽이 북쪽이 되게 그렸으며 陸路網이 얽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지역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大路에 위치하고 있으며 安城, 竹山, 利川, 昆池岩, 廣州 등을 연결하는 육로의 결절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도에서는 陸路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고개(峴)들이 그 명칭과 함께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이현군)

  • 양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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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양천현은 1895년 郡이 되었으며1914년에 김포군에 합쳐졌다가 1977년 강서구, 1978년에 양천구가 신설되면서 서울시의 일부가 되었다. 양천현의 중심지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이다. 양천현은 한강의 남서쪽에 위치한 현으로 한강은 지도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흐르게 된다. 한강이 빠져나가는 방향인 지도의 위쪽은 실제 북서방향이 된다. 孔岩津(강서구 가양동)은 북쪽의 幸州津과 통하며 지도에 표시된 上京大路,  京路는 漢城府와 연결되는 길이다. 그 밖에 衿川, 富平과 통하는 길이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 위쪽으로 뻗어나간 길은 김포, 통진을 거쳐 강화도로 가는 길이 된다. 지도 오른쪽에 길게 표시된 한강에는 長湍의 臨津江, 江華의 甲串津, 黃海道 海路와 통한다는 설명이 적혀있다. 홍색의 ''ㅏ'' 형태로 표시된 것은 開花山 烽燧로 김포의 北城山과 木覓山(서울의 남산)봉수를 연결하는 것이다. 강서구 가양동 234번지에 있는 양천향교는 조선 태종 때 창건된 것으로 서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향교이다. 지도의 오른쪽 아래에  倉山이 있는데 숙종대에 폐지될 때까지 이 지역(염창동)에 소금 창고가 있었는데 이를 따서 산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이현군)

  • 여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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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기도 여주군에서 강천면(강원도 원주땅), 북내면의 금당천 동쪽 지역, 가남면의 일부지역, 흥천면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과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이 이 당시 여주목에 해당한다. 당시의 중심지는 현재 여주읍의 상리, 하리, 창리 일대가 된다. 하리와 창리 지명의 근원이 되는  下洞과 倉洞이 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관아의 서쪽에 있는 北城山이 鎭山이 되는데 이 지역이 남한강의 남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이곳은 龜尾浦, 梨浦津, 梁化津, 邑津 등의 여러 浦와 津이 교통로로서 발달하고 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에서 大路, 利川路, 京城路로 표시된 길들이 나타나는데 여주에서는 利川과 廣州를 거쳐 서울로 연결된다. 남한강을 끼고 있어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의 八景은 그 각각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婆娑城은 삼국시대에 처음 세워졌던 것으로 1592년(선조 25)에 義嚴이 다시 수축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이 조선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인 英陵과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寧陵이 있는 곳임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이현군)

  • 연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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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麻田, 朔寧과 합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했던 지역이다.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군남면, 중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중심지는 연천읍 읍내리가 된다. 읍치에는 客舍, 鄕校, 衙舍 등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왼쪽으로 임진강이, 오른쪽으로는 차탄, 한탄강이 표시되어 있으며 袈裟坪, 平野 등 농사에 적합한 땅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紫烟暴(연천읍 고문리)이 있는데 폭포를 山水畵에 가깝게 표현하고 있다. 임진강가에 澄波津을 비롯한 津渡들이 표시되어 있다. 大路, 中路, 小路를 구분하여 표시하고 있는데 大路는 북으로는 철원, 남으로는 양주, 서울과 연결된다. 지형적으로 험준한 곳을 지나는 통로에는 險隘라고 표시되어 있다. 신라 때 창건된 五鳳寺(연천읍 고문리) 등의 절이 표시되어 있다. 臨潼書院은 1710년(숙종 36)에 세워지고 1713년(숙종 39)에 사액되었다.(이현군)

  • 영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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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의 일부에 해당하는 영종도이다. 현재 인천국제공항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인천부에 소속되어 있다가 1653년(효종 4)에 南陽의 永宗浦鎭을 이곳으로 옮겨온 이후 永宗鎭이 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水軍僉節制使가 배치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鎭이 폐지되었으며 그후 부천군,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인천광역시에 포함되었다. 지도에 표시된 衙舍와 客舍가 있던 鎭의 중심지는 중산동의 구읍동이다. 이 지도에서는 영종도와 함께 무의도, 왕산, 삼목도 등의 섬을 함께 그렸다. 섬과 섬 사이가 마치 육지처럼 보이도록 그린 것은 지도안의 설명 ''潮退成陸'' 즉, 썰물이 될 때는 연계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섬지역이므로 주변지역과 水路를 통해 연결됨을 기록하고 있으며 月尾島에는 幸宮(行宮의 오기)이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지도의 여백에는 주변 지역과의 거리와 경로 등을 기록하였다. 또한, 古牧倉이 지도에 나타나고 無衣島에는 牧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목도, 신불도에는 ''人居''라고 기록하여 무인도가 아님을 표시하고 있다. 서해안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禁山제도를 실시하여 산림과 석재 채취를 금지하였음을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이현군)

  • 영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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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4년(태조 3)에 영평으로 고쳐 불리게 되었으며 1914년에 포천군에 병합된 지역이다. 현재의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 일대에 해당하며 그 중심지는 포천군 영중면 영평리가 된다. 읍치의 앞을 흐르는 강은 영평천이며 지도 왼쪽의 강은 한탄강이 된다. 이 두 강은 임진강과 합류된다. 주변의 산들을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있으며 읍치 뒤쪽의 산줄기의 脈勢를 특히 강조하고 있어 풍수 관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작성된 지도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에 속하면서 강원도와 인접한 지역이라 漣川, 楊州, 抱川, 加平, 鐵原, 金化로 연결되는 도로가 지도에 자세히 나와 있다. 驛院으로는 梁文驛이 영중면 양문리에 있었는데 平丘道察訪에 딸린 驛이다. 읍치의 뒷산에는 古城이 표시되어 있고 읍치의 서쪽에는 金水亭(창수면 오가리)이 표시되어 있다. 金水亭은 永平八景의 하나이다. 蒼玉屛(창수면 오가리)은 永平川가의 벼랑으로 푸른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있어 생긴 이름이며 永平八景의 하나이다. 맞은 편에 玉屛書院(창수면 주원리)이 있었는데 1658년(효종 9)에 창건하였다. 朴思庵은 思庵 朴淳을 지칭하는 것이다.(이현군)

  • 용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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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년(태종 13)에 龍駒縣과 處仁縣(본래 수원부 처인부곡, 남사면 아곡리)을 합하여 용인이 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모현면, 수지읍, 기흥읍, 이동면, 포곡면, 남사면일대이며 중심지는 구성면 언남리, 마북리가 된다. 지도 위쪽에 ''北''이라는 방위표시가 있다. 용인현은 法華山, 香水山, 石城山( 盖山)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이 산들은 漢南正脈과 연결된다. 縣의 북쪽에 있는 ''鄭圃隱墓''는 포은 정몽주의 묘이며 忠烈書院(모현면 능원리)은 1576년(선조 9)에 세워져 사액한 곳으로 정몽주를 모시었다. 縣 서쪽의 深谷書院(수지읍 상현리)은 1605년(효종 원년)에 세워져 사액한 곳으로 정암 조광조를 제사지냈으며 그 옆에는 趙淨庵墓가 있다. 여백의 설명에만 나타나는 處仁城(남사면 아곡리, 북리, 완장리 경계)은 1232년(고려 고종 19)에 僧將 金允侯가 몽고 장수 살례탑을 쏘아 죽인 곳이다. 驛으로는 駒興驛과 金嶺驛이 나타나는데 陽智와 연결된다.(이현군)

  • 음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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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일부지역에 해당한다.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陰竹郡이 폐하여졌다. 縣의 중심지는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에 해당한다.지도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天民川은 지금의 청미천으로 남한강에 합류되며 縣의 앞쪽에 흐르는 작은 하천은 설성천이다. 이 지역은 남한강 일대의 교통의 중심지로 서울에서 鳥嶺을 통해 嶺南地方으로 가는 大路가 거치는 곳이며 여주와 죽산, 이천과도 大路로 연결됨을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경기도의 다른 지도에 비해 縣의 내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縣이란 표시만 해 두었다. 縣의 서쪽 雪城山에 산성 표시가 되어 있는데 신라 17대 내물왕이 왜구의 난을 피해 이곳에 와서 성을 쌓았다고 한다.(이현군)

  • 이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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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이천시에서 설성면과 장호원읍, 율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한다. 부의 중심지는 지금의 이천시내 창전동이다. 창전동은 이 지도에 나타나는 司倉의 존재로 인해 생긴 동명이다. 南川, 南買, 黃武 등으로 불리던 이 지역의 지명이 利川이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에 이 지방의 徐穆이 인도하여 이 지도에서의 福河大川(지금의 복하천)을 건넜기 때문이다. 이 때에 占을 쳤는데 周易에서 ''利涉大川(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이라는 占辭를 얻었기 때문에 利川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福河(大)川은 남한강의 한 지류에 해당하며 과거 南川으로 불리웠다. 利川이 한동안 南川으로 불리웠던 것은 이 복하천으로 인해서이다. 梨樹川은 지금의 신둔천에  해당한다. 지도 북쪽에 나타나는 大路는 廣州를 거쳐 서울까지 연결되는 길이며 남쪽으로는 陰竹으로 연결된다. 지도에 나타난 서원은 설봉서원(관고리)으로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으며 古城으로 표시된 것은 설봉산에 있었던 것으로 신라 때 쌓았던 것이다. 安興堤堰은 현재의 안흥동에 있던 것으로 安平大君이 영릉에 참배하고 이천에 이르러 농사에 필요한 물이 부족함을 보고 팠다고 전해진다. 이 지도의 표현양식은 山圖와 유사하여 풍수적 관념이 지도제작에 반영되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이현군)

  • 인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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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인천광역시의 서구, 부평구, 계양구를 제외한 동구, 남구, 중구, 연수구, 남동구 일대와 시흥시 일부지역에 해당한다. 조선 태종때 처음으로 仁川郡이 되었다가 세조때 都護府로 승격되었는데 그 중심지는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으로 현재 문학 초등학교 자리가 인천도호부의 터가 된다. 鎭山은 동쪽에 있는 蘇來山이며 서해와 맞닿은 지역으로 산줄기의 방향을 바다를 마주보게 겹겹이 그리고 있다. 서쪽인 바다를 지도의 오른쪽에 그리고 있으며 남쪽이 위가 되게 그리고 있다. 文鶴山城(남구 문학동)은 백제 시조 온조왕의 형 沸流의 도읍터이며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무찔렀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 지도에서는 문학산성이 바다와 잇닿아 있지만 현재는 이 곳이 매립되어 연수구 일대가 된다. 인천광역시 중구, 연수구, 동구 일대의 많은 땅이 매립되어 형성된 땅임을 이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府의 중심지에서 고개를 통하는 여러 길들이 표시되어 있으며 重林驛, 慶信驛, 濟物院등의 역원이 표시되어 있다. 濟物津頭 앞의 얼미도(월미도의 오기)에는 왕의 임시 거처인 行宮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밖에 서해의 여러 섬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 중 無衣島, 龍流島 등에는 牧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장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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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장단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장단면, 진동면과 연천군 장남면, 북한의 장단군 진서면, 장도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가 그 중심지가 된다. 장단면, 진동면은 임진현에 속하였다가 1457년(세조 3)에 장단에 편입되었고 진서면은 1418년(태종18)에 송림현에서 임강현으로 되었다가 1458년(세조 4)에 장단에 편입되었다. 지도에 나타난 板積橋 바로 가까이에 현재 판문점이 있다. 휴전선 이남과 이북에 걸쳐 있으며 임진강 북쪽에 해당한다. 이 지도에서는 종이에 맞추기 위하여 임진강의 流路를 왜곡하여 그렸다. 지도의 오른쪽의  三味(大)川은 임진강의 한 지류로 지금 사미천이라 불리는 것이다. 임진강가에 古浪浦, 楮浦 등의 포구가 발달하였으며 정자(退北亭)가 있었다. 임진강변에는 司僕倉, 北倉, 亭子浦倉 등의 창고가 있었다. 臨江書院은 1680년(숙종 6)에 세워졌으며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이 지역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장남면 고랑포리)을 비롯하여 고려 肅宗陵, 고려 明宗陵 등의 왕릉과 무덤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華藏寺는 서역에서 元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指空이 세운 절이다. 長湍의 도로는 북으로는 개성과 연결되며 남으로는 임진강을 건너 파주, 고양을 거쳐 서울로 연결되었다.(이현군)

  • 장단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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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장단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장단면, 진동면과 연천군 장남면, 북한의 장단군 진서면, 장도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가 그 중심지가 된다. 장단면, 진동면은 임진현에 속하였다가 1457년(세조 3)에 장단에 편입되었고 진서면은 1418년(태종18)에 송림현에서 임강현으로 되었다가 1458년(세조 4)에 장단에 편입되었다. 지도에 나타난 板積橋 바로 가까이에 현재 판문점이 있다. 휴전선 이남과 이북에 걸쳐 있으며 임진강 북쪽에 해당한다. 이 지도에서는 종이에 맞추기 위하여 임진강의 流路를 왜곡하여 그렸다. 지도의 오른쪽의  三味(大)川은 임진강의 한 지류로 지금 사미천이라 불리는 것이다. 임진강가에 古浪浦, 楮浦 등의 포구가 발달하였으며 정자(退北亭)가 있었다. 임진강변에는 司僕倉, 北倉, 亭子浦倉 등의 창고가 있었다. 臨江書院은 1680년(숙종 6)에 세워졌으며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이 지역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장남면 고랑포리)을 비롯하여 고려 肅宗陵, 고려 明宗陵 등의 왕릉과 무덤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華藏寺는 서역에서 元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指空이 세운 절이다. 長湍의 도로는 북으로는 개성과 연결되며 남으로는 임진강을 건너 파주, 고양을 거쳐 서울로 연결되었다.(이현군)

  • 적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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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적성현이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 연천군에 흡수되었다가 1945년에 대부분의 지역이 파주군에 편입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과 연천군 백학면, 장남면 일부, 양주군 남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중심지는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가 된다. 감악산 북쪽과 임진강 유역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 지도의 아래쪽에 있는 頭只江은 임진강이다. 頭只江(임진강)에서 갈라진 三伊川은 연천군 백학면과 장남면의 경계가 되는 사미천(삼미천, 새미내)이다. 新津江(神智개, 新津浦)은 감악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임진강과 합류되는데 신지개는 적성면 구읍리의 북동쪽에 해당한다. 임진강이 아래에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縣의 북쪽에 위치한다. 감악산이 있는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 된다. 임진강가에 있어 농사에 적합한 지역이라 坪이라고 기록된 곳이 보인다. 읍치 안의 건물들을 자세히 그렸으며 紺岳山祭壇을 비롯하여 城隍壇,  祭壇, 社稷(壇) 등의 제단을 그림과 함께 표시하고 있다. 紺岳山은 서울의 三角山(북한산)을 뒷받침하여 서울의 땅기운을 북돋아준다하여 신성시되는 산으로 지금도 많은 굿이 벌어지고 있다. 이 지도에서의 산줄기는 脈을 강하게 표현하여 그렸으며 풍수 관념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가 지나가는 고개(峴)가 자세히 나와있으며 湘水驛, 丹棗驛 등의 驛이 함께 표시되어 있다. 그 밖에  芳寺, 鳳岩寺등의 사찰이 나와있다.(이현군)

  • 죽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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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일죽면, 죽산면, 용인시 백암면, 원삼면 일부지역이 이 지도의 범위에 해당하며 중심지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이다. 1434년(세종 16)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으며 1914년에 용인군과 안성군에 편입되었다.縣의 앞쪽을 흐르는 竹山川이 天民川(지금의 청미천)과 만나 驪州를 지나 남한강으로 들어가며 縣의 중심지는 죽산천과 飛鳳山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도에서는 다른 경기도 지도에서 잘 표시되지 않고 있는 풍수 개념인 ''案山''을 표시하고 있다. 비봉산 북쪽의 鼎陪山에는 석굴이 있고 그 안에 흰 뱀이 있어 비가 많이오면 청미천으로 내려와 사람을 해친다는 내용이 지도의 주기에 나타나고 있다. 서울, 안성, 광혜원, 돌원(乭院)등으로 향하는 大路와 陰竹, 利川, 水原 등으로 향하는 中路가 자세히 표현되어 있으며 각각의 길이 지나는 고개(峴)의 명칭을 표시하고 있다. 지도 위쪽에 적색으로 표시된 봉수는 巾之山에 있는 것으로 지도 아래에 보이는 충주 望夷山烽臺에서 와서 용인 石城山으로 이어진다. 古山城은 竹州古城으로 1226년(고려 高宗 13)에 竹州防護別監 宋文胄가 몽고와 싸워 이겼던 곳으로 죽산면 매산리에 위치한다. 七長寺는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 아래에 있는 것으로 고려 말에 倭寇를 피하여 충주 開天寺로부터 이곳으로 史籍을 옮겨 보관하였다. 그 밖에 五層石塔, 彌勒 등의 불교 관련 유적이 표시되어 있으며 天朝副摠兵吳惟忠仁勇淸德碑가 표시되어 있는데 吳惟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싸웠던 명나라 장군이다.(이현군)

  • 지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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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砥峴縣으로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단월면, 양동면, 용문면, 청운면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며 陽根과 합해져 지금은 양평군에 포함되어있다. 현재의 양평군 지제면 지평리가 縣의 중심지였다. 읍치를 주위의 산들이 편안하게 둘러싼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으며 건물들도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있다. 남한강으로 흐르는 이 지역의 하천들이 남한강과 합류되는 지점은 水破라고 적어놓고 있다. 서울에서 平海로 가는 大路상에 위치하며 陽根과 洪川 사이에 해당한다. 육로가 지나가는 주요한 고개(峴·峙)를 지도에 자세히 표시하고 있으며 田谷驛, 白冬驛, 之德院 등의 역원이 존재하였다. 縣의 북쪽으로는 倉이 있다. 雲溪書院(용문면 덕촌리)은 1594년(선조 27)에 창건하여 1714년(숙종 40)에 사액하였으며 趙晟과 趙昱을 제사지냈다. 이 밖에 齋宮, 농사와 관련된 堤堰, 많은 사찰과 암자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의 토산품으로 磁器와 陶器가 지도의 여백에 기록되어 있다.(이현군)

  • 진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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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8년(조선 태조 7)에 충청도에서경기도로 이속되었으며 경기도 평택시 시내와 진위면, 팽성읍, 고덕면, 서탄면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현재 평택시에서 청북면, 안중면, 오성면, 현덕면, 포승면 일대는 제외된다.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가 縣의 중심지가 된다. 지도에 표시된 鄕校는 봉남리 267번지에 해당한다. 邑治(城隍堂, 客舍, 衙舍, 社壇, 鄕校)와 도로, 하천, 산 정도만 표시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은 지도에 자세하게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에서 桂陽海口(계양은 지금의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이다)로 표시된 곳은 아산만과 연결되는 곳이다. 海口 부근에 海倉이 있는데 배를 이용하여 稅穀을 실어 나르기 위한 저장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振威縣은 서울에서 統營 및 忠淸水營으로 가는 大路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평택, 양성, 용인, 수원 등과 교류가 잦은 지역이다. 지도에는 각 도로를 표시하면서 각 도로가 통과하는 고개(峴)들의 이름을 적고 있다. 이와 함께 도로변에 위치한 葛院酒幕, 靑好酒幕 등의 주막을 표시해 주고 있다.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長好驛(진위면 봉남리) 등의 역원이 여백에 기록되어 있다.(이현군)

  • 통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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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고 1694년(숙종 20)에 부로 승격하였다. 1914년에 김포군에 합쳐졌으며 지금은 김포시에 포함되어 있다.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 대곶면, 양촌면, 월곶면, 하성면 일대이다. 중심지는 김포시 월곶면 군하리로 通津府의 터는 지금 월곶면 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지도의 위쪽은 한강이 임진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나가게 되는 곳으로 지도에 阻江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祖江의 誤記이다. 한강의 근원이 된다하여 祖江이라 부르는 곳이다. 지도의 왼쪽은 강화도와 통진 사이를 흐르는 바다이며 甲串(大)津을 통해 통진에서 강화도로 연결되었다. 지금은 강화대교가 과거 갑곶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文殊山城은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의 산성으로 고려 때 몽고군과 전투를 하였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프랑스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이현군)

  • 파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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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는 坡平縣과 瑞原縣을 합한 것으로 현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문산읍, 월롱면, 조리면, 법원읍, 파주읍, 파평면 일대에 해당하며 그 중심지는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이다.임진강의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臨津渡를 비롯한 나루터가 발달하였고 임진강을 따라 花石亭(파평면 율곡리) 등 亭子들이 연이어 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읍치 안의 건물들을 상세히 그렸으며 다른 경기도 군현지도에 잘 나타나지 않는 軍器(庫)가 이 지도에는 등장하고 있다. 지도에 나타난 坡山書院(파평면 눌로리)은 1568년(선조 원년)에 세워져 1650년(효종 원년)에 사액된 것으로 聽松 成守琛과 그의 아들 牛溪 成渾 등을 배향하였다. 파주읍 향양리에 성혼의 墓가 있는데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紫雲書院(법원읍 동문리)은 1615년(광해군 7)에 창건하여 栗谷 李珥를 배향하였으며 주위에 이율곡 묘와 신사임당 묘가 있다. 長陵(이 지도에서는 문산읍 운천리에 해당하며 현재는 탄현면 갈현리로 이장된 상태)은 조선 인조와 인열왕후 청주 한씨의 능이며 恭陵(조리면 장곡리)은 조선 예종의 계비 장순왕후의 능이며 順陵(조리면 봉일천리)은 성종의 비 공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이 밖에 恭肅公墓, 孝章墓 등이 있다.(이현군)

  • 포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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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抱州라 불렀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현재의 포천군은 조선시대 경기도 永平縣, 강원도 鐵原府의 일부와 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 지도에서의 포천현은현재의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군내면, 내촌면, 신북면, 포천읍, 소흘읍, 화현면 일대에 해당하며 당시의 중심지는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鄕校, 衙舍, 客舍)이다. 漢北正脈의 한 줄기가 이어지는 지역으로 高橋川(포천천, 한내, 남대천)이 남에서 북으로 흘러 縣을 통과하여 영평천으로 이어져 한탄강과 합류하여 임진강으로 연결된다. 이 하천과 평행하게 그려진 도로는 永平縣 만세교로 연결되는 北關大路이다. 安奇驛, 碧呑石院 등의 역원이 있으며 安奇驛이 있는 곳에는 驛村이 형성되어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禿峴과 仍邑峴에는 烽臺가 있었는데 영평현과 양주를 연결하는 봉수에 해당된다. 읍치의 북쪽에 있는 半月山(청성산, 성산)에는 산성이 있었다. 이 산은 포천의 鎭山이 된다. 龍淵書院(신북면 신평리)은 1691년(숙종 17)에 세워졌으며 李德馨과 趙絅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풍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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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개풍군 일대이며 府의 중심지는 황해도 개풍군 대성면 풍덕리이다. 지도에 하천으로 그려진 것은 東江으로 개성부의 天磨山, 聖居山, 松岳山의 물이 모인 沙川을 받아서 하류로 흘러 임진강과 만나 바다로 가게 된다. 따라서 이 강은 임진강의 한 지류가 된다. 이 지역은 長湍, 通津, 開城府와 맞닿아 있으며 휴전선 이북에 해당한다. 이 지도는 북쪽이 위가 되게 그려져 있으며 행정구역의 面, 洞은 생략되고 산과 강줄기, 도로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그리고 있다. 이 곳의 산들은 임진북예성남정맥이 개성의 송악산을 거쳐 바다로 나가는 곳에 위치하며 지도의 모든 산들을 바다로 향하게 그렸다. 군현지도의 경우 산들은 감싸안듯이 관아를 향하게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독특한 표현양식이라 할 수 있다. 지도 아래쪽은 김포시, 강화군과 이 지역 사이를 흘러 서해로 향하는 한강과 임진강의 하류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祖江은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이 되고 두 강의 근원이 되므로 생긴 지명이다. 바다와 연해 있기 때문에 남쪽에 여러 浦, 津, 渡가 발달하였다. 이중  昇天津은 강화도와 연결되는 곳이며 祖江津은 통진과 연결되는 곳이다. 지도 위쪽의 德積山 烽燧는 交河縣 黔丹山, 開城府 松岳山과 연결되는 봉수이다. 이 밖에  齊陵, 厚陵 등의陵을 표시하고 있다. 여러 驛院이 존재했던 사실을 여백에 기록하고 있으나, 지도에서는 도로만 표시하고 있다.(이현군)

  • ▶경상도
  • 개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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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령현은 본래 甘文小國이었다. 개령의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 생긴 것이다. 감문소국의 흔적이 ''甘川''과 ''甘文山'' 등의 하천과 산의 이름에 남아 있다. 개령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개령읍, 남면, 농소면, 감문면 동부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개령은 네 고을의 중심지(상주, 금산, 선산, 성주)와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城隍山이다. 북쪽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성황산에서 멈추고, 읍치를 양팔로 감싸안은 형세로 전형적인 명당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성황산에는 봉수대와 신라 법흥왕 때 阿道가 창건했다는 鷄林寺가 위치하고 있다. 관아 남쪽 감천 변에 자리잡은 獨靑亭과 風詠亭은 절승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이다. 감천 건너편에 있는 德林書院은 1669년(현종 10)에 세워져 1697년(숙종 23)에 사액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김종직, 정 붕, 정경세를 함께 배향하였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감천에 아홉 군데의 보를 막아서 논에 물을 대어서 水利가 많다고 한다.(金在完)

  • 거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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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부는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군과 일치하였고, 읍치는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있었다. 옛 치소는 지도에 보이는 고현성이 위치한 신현읍 고현리 일대이었다. 거제의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사용되었다. 고려 현종 때 현이 설치되었는데, 1664년(현종 5)에  지도상의 위치로 치소를 옮기고, 1711년(숙종 37)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계룡산이다. 향교 위쪽에 있는 서원은 盤谷書院으로 1704년(숙종 30)에 세워져, 송시열, 김진규, 김창집을 배향하였는데, 사액은 받지 못했다. 읍치 왼쪽에 보이는 岐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석성으로 둘레가 1,002척, 높이가 9척이 되며, 조선 초기에 고려의 왕족을 귀양보냈던 곳이라 한다. 기성 위쪽에 보이는 沙等城은 석성으로 둘레가 1,809척, 높이가 13척이 되며 오래되어 허물어져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기성과 사등성 사이에 위치한 견내량진은 거제에서 고성으로 가는 중요한 나루터이다. 海防을 위하여 해안지역에 영등포진, 옥포진, 조라포진, 지세포진, 율포진이 설치되어 있다.(金在完)

  •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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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도호부는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가북면, 가조면, 고제면, 남상면(춘전리와 진목리 제외), 남하면, 웅양면, 주상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거창읍 상림리와 중앙리 일대에 있었다. 군 북쪽에 위치한 乾興山이 鎭山이다.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거창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枕流亭은 府 남쪽 瀯川에 위치하고 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浣溪書院은 1664년(현종 5)에 세워져, 1670년(현종 11)에 사액되었고, 金 湜을 배향하였다. 가남면에 위치한 道山書院은 1660년(현종 1)에 세워져, 1663년(현종 3)에 사액되었고, 김굉필, 정여창, 정 온을 배향하였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鄕賢祠에서는 뛰어난 學行으로 추천을 받은 文 緯를 배향하였다. 문 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의병장 김 면과 합세하여 지례에서 왜적을 대파한 공이 있는 사람이다. 가동면에 위치한 見岩寺는 1395년(태조 4)에 조선 태조가 前朝 王氏를 위해서 밭 100結을 내리고, 매년 5월과 10월에 內香을 내려서 水陸齋를 실행하였던 곳이다. 金貴山烽燧는 남쪽으로 합천 所峴烽燧의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巨末訖山烽燧에 전달하였다.(金在完)

  • 경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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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현은 지금의 경산시 경산시내 동부 신천동 등 6개 동을 제외한 전체, 남천면, 압량면 북부, 대구광역시 동구 금호강 북쪽 연안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경산시 경산시내 삼남동과 삼북동 일대에 있었다. 이 일대에는 지금도 동헌 터, 객사 터, 읍성 터등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지도는 좌측이 서쪽, 우측이 동쪽, 위쪽이 남쪽, 아래쪽이 북쪽이다. 산줄기가 경산현 전체를 둘러싸고 있고, 남천 유역에 비교적 큰 들이 발달하였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정방형의 石城으로 둘레는 4천 8백 척이며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을 갖고 있는데, 그 가운데 西門의 門樓를 鎭玉樓라고 불렀다. 玉山 아래쪽에 보이는 孤山書院은 1633년(인조 11)에 세워졌으며, 이 황과 정경세를 모셨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孤山이라는 명칭은  선조 때 현령 윤희렴이 고을 선비들과 함께 이 곳에 서재를 세우고, 이 황에게 이름짓기를 청하여 얻은 것이라고 한다.(金在完)

  • 경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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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尙道의 명칭은 경상도의 주요 읍이었던 慶州와 尙州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경상도의 別稱인 ''嶺南''이란 새재(조령)의 남쪽 지방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상도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진군을 제외한 경상북도, 경상남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도를 보면 이 지역은 대체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외곽을 두른 대 분지임을 알 수 있다. 소백산맥은 비교적 연속성이 강한 모습을 보이면서 충청도 및 전라도와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반면에, 동해안에 치우친 태백산맥의 연속성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지도는 경상도의 山系와 水系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잘 나타내고 있고, 아울러 각 군현의 鎭山과 山城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70여 개의 府牧郡縣이 주황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고, 이들을 총괄하는 大邱監營은 좀 더 큰 주황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군사행정조직으로는 左兵營이 울산, 右兵營이 진주에 위치하고, 水營이 동래, 통영(삼도통제영)이 고성에 위치하고 있는데, 모두 파란색 원으로 표시하여 일반 지방 행정조직과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통영과 수영 산하의 소규모 鎭은 직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察訪驛은 노란색 타원형으로, 주요 도로는 붉은 색 선으로 표시하여 경상도의 도로 및 통신망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金在完)

  • 경상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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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尙道의 명칭은 경상도의 주요 읍이었던 慶州와 尙州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경상도의 別稱인 ''嶺南''이란 새재(조령)의 남쪽 지방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상도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진군을 제외한 경상북도, 경상남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도를 보면 이 지역은 대체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외곽을 두른 대 분지임을 알 수 있다. 소백산맥은 비교적 연속성이 강한 모습을 보이면서 충청도 및 전라도와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반면에, 동해안에 치우친 태백산맥의 연속성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지도는 경상도의 山系와 水系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잘 나타내고 있고, 아울러 각 군현의 鎭山과 山城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70여 개의 府牧郡縣이 주황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고, 이들을 총괄하는 大邱監營은 좀 더 큰 주황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군사행정조직으로는 左兵營이 울산, 右兵營이 진주에 위치하고, 水營이 동래, 통영(삼도통제영)이 고성에 위치하고 있는데, 모두 파란색 원으로 표시하여 일반 지방 행정조직과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통영과 수영 산하의 소규모 鎭은 직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察訪驛은 노란색 타원형으로, 주요 도로는 붉은 색 선으로 표시하여 경상도의 도로 및 통신망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金在完)

  •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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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부는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전체, 포항시 죽장면 전지역, 신광면, 기계면, 기북면, 영천시 임고면 일부, 고경면 일부, 북안면 일부, 대창면 대창리, 울산광역시 두동면·두서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경주부의 읍치는 경주시내 동부동 일대이었다. 경주는 평평한 땅에 들어서서 남원의 경우처럼 읍성이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4각형으로 축성되었다. 읍성은 고려시대 처음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시가지 안에 약 50m의 성벽만 남아 있다. 읍성 우측에 신라 마지막 왕인 敬順王陵과 廟影堂이 위치하고 있다. 금강산 남쪽에 위치한 栢栗寺는 528년(신라 법흥왕 15)에 이차돈의 순교를 추모하여 창건했다고 한다. 유물로 石幢과 국보 제 28호의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있다. 그 아래쪽에 634년(신라 선덕여왕 3)에 창건한 분황사와 국보 제 30호의 분황사 석탑이 그려져 있다. 그 우측에 佛國寺와 석굴암, 그리고 祗林寺가 있다. 지림사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창건되었다 한다. 이 절의 대웅전 안에 있는 乾漆菩薩坐像은 보물 제 4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읍성 남쪽에 보이는 반월성은 신라 왕도의 土城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101년(신라 파사왕 22) 2월 이 곳에 흙과 돌을 섞어서 둘레 3,023척의 성을 쌓고, 이 성을 월성 또는 반월성이라고하였다 한다.(金在完)

  • 고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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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현은 신라 진흥왕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대가야국의 중심지이었다. 고령의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령현은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 인안리 등 3개리를 제외한 개진면 전지역, 우곡면 서부, 쌍림면, 운수면 운산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 지산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 서쪽 美崇山에서 산줄기가 동쪽으로 향해 가다가 鎭山인 耳山에서 멈추고 명당인 읍치를 감싸안고 있다. 또한 명당수인 가야천과 용담천이 읍치 앞에서 합쳐져 合川(지금의 會川)이 되어 東流하여 낙동강 본류로 들어 간다. 披香亭은 읍내에 있는 누각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碧松亭은 B.C.57(신라 박혁거세 1)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신라 말에 중수할 때 최치원이 上梁文과 시를 지었다 하며, 조선 성종 때 김굉필, 정여창이 시를 지어 찬송하였다 한다. 1920년 장마 때 떠내려가는 것을 일부 건져서 현재의 위치(고령군 쌍림면 신촌)에 세웠다고 한다. 미숭산에 있는 盤龍寺는 용이 서리고 앉은 것 같은 지형에 위치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반룡사는 802년(신라 애장왕 3) 해인사보다 먼저 지었다 하며, 신라 말에 보조국사가 중수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사명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후 화재로 1764년(영조 40)에 현감 윤심협이 옮겨 세웠다. 읍치 서쪽 낙동강에 위치한 개산진은 고령에서 현풍으로 가는 주요 나루터로서도 중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령현에서 거둔 세곡이 개산진 부근의 강창에 수납되어 조운선의 발선지로서도 중요하였다. 또한 고령의 중요한 관문포구로서 이 곳에서 어염과 곡물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金在完)

  • 고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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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 전체, 통영시 도산면, 광도면, 용남면, 사천시 시천시내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고, 읍치는 고성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서쪽에 위치한 無量山이다. 碧芳山은 날씨가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읍성은 石築으로 둘레가 3,524척, 높이가 15척이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舞妓亭에서 옛날 固州刺史가 기생을 끼고 이 곳에서 歌舞를 즐겼다고 전한다. 옛날 읍치 남쪽에 樂悅亭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大芚面에 위치한 갈천향현사(갈천서원)는 1712년(숙종 38)에 세워져, 이 암, 어득강 등을 나란히 배향하였는데, 사액서원은 아니다. 읍치 서남쪽下里二運面에 위치한 床足岩은 4개의 돌로 된 기둥이 마치 책상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며, 潮水가 이르면 물이 그 아래를 지난다고 한다. 현 북쪽 龍水山의 龍水巖에 샘이 있는데 바닥이 없는가 싶을 정도로 깊고, 가물 때 기우하면 영험이 있다고 한다. 해안에는 海防을 위하여 舊所非浦鎭, 蛇梁鎭, 唐浦鎭, 三千鎭 등이 설치되어 있다.(金在完)

  • 곤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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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양군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 사포면, 곤명면, 하동군 금남면, 진교면 동부지역을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곤양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1419년(세종 1)에 郡에 御胎를 안치하고, 남해군을 합쳐서 곤남군으로 승격하였다. 1437년(세종 19)에 다시 분리하고, 진주 금양부곡(금양면)을 병합시키면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옛 곤남현의 치소는 지도상의 곤명면 금성이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銅谷山이다.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있는 바와 같이 곤양군은 다른 군현과 비교하여 산이 많고 들이 적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石築으로 둘레가 3,765척, 높이가 12척이다. 읍치 좌측에 위치한 辰橋는 理盲寺 못의 용이 이 다리 밑으로 옮겨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多率寺는 503년(신라 지증왕 4)에 인도의 연기조사가 창설하여 영악사라 칭하였는데, 636년(신라 선덕여왕 5)에 다솔사라 고치고,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영봉사라 개칭하였다가, 다시 다솔사라 하였다. 북문 밖에 보이는 곤양향교는 중종 때에 서정리 舊鄕校자리에 세워진 것이다.(金在完)

  • 군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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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위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광현리 제외), 소보면, 효령면(고곡리와 매곡리 제외)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군위읍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馬井山이 이 고을의 鎭山인데, 이 산의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마정산의 봉수는 남쪽으로 朴達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비안현의 肝岾山에 응한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南溪書院은 1627년(인조 5)에 창건되어 류성룡을 모셨는데, 사액을 받지 못하였다. 南面 韓敵山의 祈雨峯에 기우단이 있었다고 전한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선방산 아래에는 지도에는 없지만, 持寶寺가 있었는데, 염색 재료가 없을 때, 이 절 경내에서 황청토를 캐내어 채색에 적당히 썼으므로, 보물로 전하여져서, 보배를 가진 절이라고 명명하였다. 673년(신라 문무왕 13) 의상이 창건하고, 조선 중엽에 개축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는 보물 제 682호 지보사 3층석탑이 있다. 博陀山 밑에 있는 朴達寺는 博陀寺로 불렸는데, 약80년 전에 소실되었고 다만 서북쪽 골짜기에 전에 浮屠가 있었다 한다. 효령면에 보이는 客舍는 군위군에 딸린 효령현 때의 관아 건물로 보인다.(金在完)

  • 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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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금산현으로 개령군의 영현이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산부(지금의 성주)에 이속되었고, 1390년(공양왕 2)에 監務를 두었다. 1398년(정종 1)에 御胎를 묻은 곳이라 해서 군으로 승격시켰다. 금산군은 지금의 김천시 덕곡동을 제외한 김천시내 전체, 대항면, 조마면, 구성면 북부, 봉산면, 어모면, 감문면 서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김천시 김천시내 교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동쪽 1리에 위치한 五波山이다. 지도에는 오파산에서 分岐하는 산줄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 남쪽에 鳶華池와 鳳凰臺가 위치하고 있다. 봉황대는 원래 못가 둑에 있었는데, 낡고 무너져서 못 안에 옮겨 세웠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直指寺는 418년(신라 눌지왕 2) 墨湖子가 창건하였고, 936년(고려 태조 19)에 能如가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 仁守, 明禮가 재건하였다. 이 절에는 국보 제 475호 석조 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다. 신라 때 阿道가 이 곳을 큰 절이 위치할 자리라고 가리켰다 하여 직지사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萬歲樓는 직지사 입구에 위치한 樓閣이다. 직지사 북쪽에 위치한 황악산은 조선 정종 때 御胎를 안치한 곳이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金泉驛은 金泉道의 찰방역으로서 19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金在完)

  • 기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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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장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장안읍, 정관면, 철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서쪽에 위치한 炭山이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많은 소 하천들이 발원하여 사방으로 흘러가는 지형으로 산이 많고 들이 적은 군현임을 알 수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읍성은 方形의 石城으로 둘레가 3천 1백 97척이고, 높이가 12척이다. 읍성 우측에 古豆毛浦鎭이 보이는데, 1510년(중종 5)에 이 곳에 석성을 쌓고, 수군만호가 주재하였으나 1592년(선조 25)에 동래로 옮겨갔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長安寺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인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月照大師가 중건했다. 다른 군현지도와 달리 기장현 지도에는 각 도로가 大路·中路·小路·衝路 등으로 나뉘어 표시되어 있다. 또한 面里, 封山, 祈雨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南山烽燧는 남쪽으로는 동래부 干飛烏山烽燧에 응하고, 북쪽으로 阿爾烽燧에 응한다. 읍성 아래쪽에 보이는 鴛鴦臺는 또한 侍郞臺라고 하는데, 1733년(영조 9)에 縣監 權  가 이조참의가 되어 이 곳에 와서 "시랑대" 석자를 새겼다 한다. 옛날부터 영험하다 하여 4월과 10월에 용왕제를 지내며, 날이 가물면 기우제도 지낸다고 한다.(金在完)

  • 김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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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부는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전체, 창원시 대산면, 부산광역시 강서구 낙동강 西岸, 강동동과 명지동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김해시내 동상동과 서상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으로 3리 떨어진 盆山인데, 이 산의 정상에 土城이 있다. 읍치의 동북쪽에 있는 神魚山이 邑基의 주맥이 된다. 구지봉은 분성산의 줄기로서 산 모양이 거북의 머리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이 산에 김수로왕 탄생과 가야건국설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서려 있다. 읍성은 고려 우왕 때 부사 박위가 쌓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성은 방형의 石築으로 둘레가 4,683척, 높이가 15척이다. 그 주위를 김수로왕 때 쌓았다는 土城이 둘러싸고 있다. 토성 밖에 수로왕릉과 수로왕비 허씨릉이 있는데, 봄과 가을에 그 능에서 제사를 지낸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新山書院은 1576년(선조 9)에 세워져 조식을 主享하고, 신리성을 아울러 從享하였다. 그리고 이 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다. 신산서원 북쪽에 있는 甘露寺는 신어산 동쪽 玉池淵에 임해 있다. 1237년(고려 고종 24)에 海安이 건립하였고, 夢庵이 쓴 記文이 있다.(金在完)

  • 남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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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현은 지금의 창선면을 제외한 남해군 전체에 해당하고, 읍치는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 남변리,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 위쪽이 남쪽, 아래쪽이 북쪽, 우측이 서쪽, 좌측이 동쪽이다. 이 고을의 진산은 서쪽에 위치한 望雲山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따르면 읍성은 1459년(세조 5)에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876척, 높이가 13척이라 한다. 성안에 우물 1개, 샘이 5개가 있는데, 사시사철 마르지 않았다 한다. 1459년(세조 5)에 성을 쌓았다. 아래쪽에 보이는 古縣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石築으로 둘레가 1,740척, 높이가 10척이다. 그 외에 평산포진, 곡포보, 상주포보, 미조항진은 모두 海岸防禦를 위한 鎭이다. 아래쪽에 보이는 忠烈祠는 노량 북쪽 호두산 기슭에 있는 사당이다. 이순신 장군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1632년(인조 10)에 본래 초가를 세웠는데, 1657년(효종 9)에 조정에서 통제사 정 익에게 명하여 크게 사당을 세웠고, 1662년(현종 4)에 충렬사로 사액되었다. 지도 하단의 德申驛은 晋州 召村道의 屬驛이었다.(金在完)

  • 단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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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세종 때 江城縣과 丹溪縣의 두 명칭을 따서 단성현이라고 하였다. 단성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의 동부, 신등면, 신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읍치는 북쪽에 위치한 來山이다. 단계폐현의 읍치는 동북쪽 단계창 부근이었다. 객사 오른쪽에 보이는 赤壁은 붉은 빛의 바위더미가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것 같아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송시열이 바위 위에 ''赤壁'' 2자를 새겼다. 적벽 상류에 있는백마산성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삼면이 절벽이고, 둘레가 2,795척이다. 그리고 동남쪽 100여 척을 돌로 쌓아 허한 곳을 보완하였다. 文益漸書院은 1401년(태종 1)에 세워져, 문익점과 권 도를 모셔 왔는데, 권 도는 신등면 단계리의 완계서원으로 옮겨 모셨다. 1612년(광해군 4)에 중건되었고, 1787년(정조 11)에 사액되었다. 향교 위쪽에 위치한 斷俗寺는 749년(신라 경덕왕 7)에 대내마 이 준이 벼슬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또는 신충이 764년(신라 경덕왕 22)에 임금을 위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洞口에는 신라 때 최치원이 廣濟岩門이라고 쓴 바위가 있고, 절터에는 보물 제 72호의 단속사지 동삼층석탑과 보물 제 73호의 단속사지 서삼층석탑이 있다.(金在完)

  • 대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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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는 본래 達句火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大丘로 고쳤다. 고려 때는 京山府(星州)에 붙였었다. 1466년(세조 12)에 이르러서야 都護府로 승격되면서 경주에 있던 경상도 관찰사영이 이 곳으로 옮겨왔다. 이는 대구를 경상도의 중심지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孔子의 이름인 ''丘''자를 고을의 이름으로 쓰는 것은 불가하다가 하여 정조 때부터 ''邱''자로 고쳐 쓰게 되었다. 지도에는 여전히 ''丘''가 사용되고 있다. 大邱府는 북구 중 팔거천 이동지역과 동구지역 일부를 뺀 대구광역시 전체, 달성군  다사읍, 화원읍, 가창면, 옥포면, 하빈면, 청도군 풍각면 대부분, 각북면, 각남면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대구부의 읍치는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일대에 있었다. 대구부는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금호강 유역에 발달한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大邱府城은 1736년(英祖 12)에 축조된 것이고, 좌측에 위치한 達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돌로 쌓은 성으로 옛날에 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치소 일대에는 監營, 客舍, 貳衙, 中營, 鎭營, 鄕校 등이 위치하고 있어 행정중심지를 이룬다. 대구부의 名山으로는 읍치 북쪽에 위치한 八公山을 들수 있다. 신라 때 父岳이라고 일컬었고, 中岳에 비겨, 中祀하였다. 산기슭에는 동화사와 부인사 및 파계사 등 명 사찰이 위치하고 있다. 남쪽에 위치한 表忠祠는 고려 태조 왕 건이 후백제 견훤과 싸워 대패했을 때,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왕건이 삼한을 통일한 후에, 이 곳에 미리사를 지어서 혼령들을 위로하였었는데,  절은 없어지고 탑만 남아 있다.(金在完)

  • 대구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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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는 본래 達句火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大丘로 고쳤다. 고려 때는 京山府(星州)에 붙였었다. 1466년(세조 12)에 이르러서야 都護府로 승격되면서 경주에 있던 경상도 관찰사영이 이 곳으로 옮겨왔다. 이는 대구를 경상도의 중심지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孔子의 이름인 ''丘''자를 고을의 이름으로 쓰는 것은 불가하다가 하여 정조 때부터 ''邱''자로 고쳐 쓰게 되었다. 지도에는 여전히 ''丘''가 사용되고 있다. 大邱府는 북구 중 팔거천 이동지역과 동구지역 일부를 뺀 대구광역시 전체, 달성군  다사읍, 화원읍, 가창면, 옥포면, 하빈면, 청도군 풍각면 대부분, 각북면, 각남면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대구부의 읍치는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일대에 있었다. 대구부는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금호강 유역에 발달한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大邱府城은 1736년(英祖 12)에 축조된 것이고, 좌측에 위치한 達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돌로 쌓은 성으로 옛날에 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치소 일대에는 監營, 客舍, 貳衙, 中營, 鎭營, 鄕校 등이 위치하고 있어 행정중심지를 이룬다. 대구부의 名山으로는 읍치 북쪽에 위치한 八公山을 들수 있다. 신라 때 父岳이라고 일컬었고, 中岳에 비겨, 中祀하였다. 산기슭에는 동화사와 부인사 및 파계사 등 명 사찰이 위치하고 있다. 남쪽에 위치한 表忠祠는 고려 태조 왕 건이 후백제 견훤과 싸워 대패했을 때,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왕건이 삼한을 통일한 후에, 이 곳에 미리사를 지어서 혼령들을 위로하였었는데,  절은 없어지고 탑만 남아 있다.(金在完)

  • 동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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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부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가운데 북구와 강서구를 뺀 나머지 지역과 대략 일치한다. 읍치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일대에 있었다. 산줄기가 북쪽의 鷄鳴山에서 남하하여 蘇山과 鎭山인 輪山을 경유하여 府治 북쪽에서 팔을 벌려 府治를 감싸안고 있으며, 명당수가南流하다가 府의 서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읍치 앞을 지나 수영만으로흘러 들어 가고 있고, 남쪽에 있는 盃山이 案山 역할을 하여 이상적인 명당형국을 이루고 있다. 읍성 안에 위치한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軍民의 영령을 모신 사당이다. 읍치 동북쪽에 위치한 金井山城은 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둘레가 6만 9백 8척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성으로 1703년(숙종 29)에 처음으로 쌓았다가 곧 다시 폐하였고, 그 후 1806년(순조 6)에 부사 오한원이 수축하였다. 금정산 중턱에 위치한 梵魚寺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의상법사가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2년(선조 35)에 중건하고, 1613년(광해군 5)에 다시 중건하였다. 이 절에는 국보 제 3389호인 범어사 삼층석탑이 있다. 釜山鎭에는 水軍僉節制使가, 左水營에는 左道水軍節度使가 주재하였다. 좌측의 古邑城이 옛 동래읍성 터이다. 倭館은 乙亥通和(1599) 후 다시 설치한 것이다. 이 곳에는 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대략 300명의 왜인이 거주하였으나 1678년(숙종 4)에 초량으로 왜관을 옮겼다.(金在完)

  • 문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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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 初 冠山을 聞喜郡으로 고치고, 고려 현종 때 이를 다시 聞慶으로 고쳐 현재까지 그 縣의 이름이 내려오고 있다. 문경현은 지금의 문경시 문경읍, 저음리를 제외한 가은읍 전체, 마성면, 농암면, 영신동을 제외한 문경시내 전체, 호계면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읍치는 현 문경시 문경읍 상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主屹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치에 있는 蓮亭은 客舍 남쪽에 있는 작은 연못가에 있는 亭子이다. 曦陽山과 主屹山은 문경의 名山으로 해마다 봄가을로 小祀를 지냈던 곳이다. 가서면에 위치한 선유동은 골이 깊고 수목이 울창하며, 기이한 봉우리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 굽이굽이마다 소와 폭포가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는데, 선유구곡이 유명하다. 희양산 남쪽에 위치한 鳳岩寺는 879년(신라 헌강왕 5)에 智證國師가 처음 세웠는데, 그 후 重修, 火災, 重建을 겪었다. 이 사찰에 있는 보물로 삼층석탑(보물 제 169호), 지증대사 적조탑(137호), 지증대사 적조탑비(138호), 정진대사 원오탑(171호), 정진대사 원오탑비(172호) 등 5점이 있다. 아래에 보이는 姑母城은 돌로 쌓은 성인데, 삼국시대 늙은 할미가 하루 아침에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 오고 있다. 고모성 아래에 보이는 幽谷驛은 찰방역으로서 18개 역을 관할하였다. 지도에는 없지만, 조령성 좌측에 있는 惠國寺는 846년(신라 문성왕 8)에 普照國師가 창건하여 법흥사라 하였는데, 고려 때 혜국사로 고쳤고, 1870년경에 송장, 지성 두 禪師가 重建하였다.(金在完)

  • 밀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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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밀양부는 지금의 청도면을제외한 밀양시 전체와 대략 일치하였다. 읍치는 밀양시 밀양시내 내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의 북쪽에 위치한 華岳山이다. 읍성 안에 위치한 嶺南樓는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보물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1365년(고려 공민왕 14)에 창건되었으나 불에 타고 현재의 건물은 조선 헌종 때 지어진 것이다. 남쪽의 栗林은 밀양부 남쪽에 案山이 없어 허하므로 그것을 대신하여 洞藪의 역할을 하게 했던 것으로 일종의 裨補風水의 예이다. 守山津 부근에 보이는 국농소에는 紅蓮이 무성해서 그 향기가 좋다고 한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萬魚寺에는 자연석으로 된 미륵존불과 만어상이라 일컫는 종석 및 보물 제 466호인 만어사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서문 밖에 위치한 서원은 禮林書院으로서 1567년(명종 22)에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리고, 뒤에 상남면에 옮겨진 후 1663년(현종 4)에 사액되었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재악사는 表忠寺(밀양군 단장면 구천리)인데, 이 사찰은 829년(신라 흥덕왕 4)에 황 면이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이다. 이 절에는 국보 제 75호 靑銅含銀香 이란 향로와 보물 제 467호 3층 석탑이 있다. 삼랑진은 나루터일 뿐만 아니라 상·하류를 오가는 배들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대포구이었다.

  • 봉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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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라는 지명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명칭이다. 봉화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물야면, 명호면 낙동강 以西地域, 상운면, 춘양면 석현리,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봉화군 봉성리 일대에 있었다. 현 북쪽에 위치한 金輪峰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산세가 태백산에서 서쪽으로 熊踰峴, 文殊山, 光大山을 거쳐 鎭山인 금륜봉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금륜봉의 정기가 곧바로 명당으로 내려오고, 망월봉과 백운봉이 좌우에서 명당을 보호하고 있는 형세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서원은 文岩書院이다. 이 서원은 1616년(광해군 8)에 건립되어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서원 좌측에 보이는 雙松亭은 물야판관 琴衍이 세운 것이다. 뜰에 雙松이 넓게 엉켜 덮고 있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 읍치 아래에 보이는 種善亭은 현 서쪽에 있는데, 主簿 琴應石이 지은 것으로 이 황이 亭號를 지어 걸었다. 태백산 남쪽에 璿源閣·實錄閣·史庫 등 太白山史庫와 그 부속건물이 보인다. 이 곳에 참봉 및 守直軍이 주재하여 史庫를 지켰다. 각화사는 986년(신라 신문왕 6)에 원요국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예종 때 무애국사 계응이 중창하였다.(金在完)

  • 비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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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안은 比屋縣과 安貞縣을 합치면서 앞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비안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구천면(청산리 제외), 안계면, 안평면 삼촌리와 하령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의성군 비안면 동부리와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安定倉 부근이 옛 안정현의 읍치이었는 데, 두 현이 합쳐지면서 현 위치로 읍치를 옮겼다 비안현은 산지가 많은 의성현과는 달리 위천을 따라 비교적 비옥한 평야를 갖고 있다. 읍치 뒤에 있는 山이 城隍山으로서 이 고을의 鎭山이 된다. 앞에는 위천의 지류가 東流하여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衙舍의 오른쪽에 보이는 望北亭은 일명 屛山亭이라고 하는데, 병산 정상에 위치한 비안 박씨의 정자이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龜川鄕賢祠는 參議 朴瑞生 등을 배향한 서원(구산서원)이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玉蓮寺는 514년(신라 법흥왕 1)에 건립되었으며, 당시에는 승려가 300여 명에 달하는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법당 일부인 門小屋만 잔존할 뿐이다. 비안현에 있는 安溪驛과 雙溪驛은 幽谷道에 딸린 驛이었다.(金在完)

  • 사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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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정동면, 사남면, 용현면, 사천시내(삼천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사천읍 정의리와 선인리 일대에 있었다. 옛 치소는 정동면 고읍리에 있었는데, 1445년(세종 27)에 지도상의 위치로 옮겼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豆代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고을 명칭의 유래가 된 泗川水가 읍성의 남쪽을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읍성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둘레가 5,015척, 높이가 15척이다. 향교의 위쪽에 보이는 읍치 위쪽의 龜溪書院은 李 楨을 배향한 서원이다. 1611년(광해군 3) 萬竹山에 건립된 사당이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어 龜溪書院이라고 하였다. 그 후 1723년(경종 3)에 金德鍼을 나란히 배향하였다. 구계서원 위쪽에 있는 齋는 본래 李龜岩의 서재로서 靜觀臺라 하였다 하는데, 이 황이 대관이란 詩를 지음으로써 명명되었다고 한다. 근남면에 위치한 歸龍菴은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는데, 1183년(고려 명종 13) 3월에 보림국사가 중창하고 귀룡암이라고 하였다 한다. 東面의 排王寺(설명문의 排房寺)는 고려 현종이 태자였을 때 이 절에서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해안을 따라 읍창, 남창, 해창, 통영창, 우병영창 등이 분포한 것이 특색이다.(金在完)

  • 산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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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군은 본래 산음현이었는데, 1767년(영조 43)에 7살 된 아이가 아들을 난 것은 떳떳하지 않다 하여 ''음''자를 버리라는 왕명으로 인하여 산청으로 고쳤다. 산음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금서면, 오부면, 차황면, 생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산청읍옥동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내에 있는 造山은 풍수 상 허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산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객사의 서쪽에 있는 換鵝亭은 조선 초기의 산청현감 심 린이 창건하고, 권 반이 환아정이라 명명하였다.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산청초등학교가 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西溪書院은 1606년(선조 39)에 세워져  吳 健을 모셨다. 1677년(숙종 3)에 사액되었다. 王山寺가 위치한 王山의산중턱에 가락국 제 10대 讓王의 능이 있다. 지도의 왕산사의 터에 지은 사당이 王山祠이다. 신라 때 장군 金庾信과 金 孟, 金馹孫을 모셨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읍치남쪽에 위치한 智谷寺에는 고려 예부상서 孫夢周가 지은 慧月과 眞觀의 두 碑가 있다.(金在完)

  • 삼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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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태종 때 三岐縣과 嘉壽縣을 합쳐서 三嘉縣라고 하면서 치소를 지금의 삼가현 읍치로 옮겼다. 삼기현의 옛 읍치는 지도상 古縣倉 부근이 된다. 삼가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대병면, 삼가면, 쌍백면, 거창군 신원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삼가면 錦里에 있었다.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3,259척, 높이가 9척이었다. 향교 아래에 ''曹南溟胎生處''이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방에서 남명 조식의 위치를 가늠할수 있다. 읍치 북쪽의 龍巖書院은 조 식을 배향한 곳으로 1603년(선조 36)에 세워져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金城山은 삼기고현의 진산이었고, 옛 성터가 남아 있다. 古縣倉 부근에 무학대사의 所生處가 표시되어 있다. 금성산의 우측에 보이는 岳堅山은 사방이 높고 막혀 있어서 산성을 쌓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 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 있는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2,008척인데, 이미 옛날에 폐했다고 한다. 읍치 우측에 위치한 有 驛은 沙斤道의 屬驛이었다.(金在完)

  • 상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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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목은 1392년(태조 1)에 경주에서 관찰사영이 옮겨온 후부터 1596년(선조 29) 관찰사영이 대구부로 옮겨질 때까지 경상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인조 때 상주에 左營이 설치되었는데, 屬邑은 상주·개령·금산·지례·함창 등이었다. 상주목은 지금의 상주광역시 전체와 의성군 단밀면과 단북면,문경시 산양면, 영순면 일부, 산북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상주시 가운데 화북면, 화남면, 화서면, 화동면, 모서면, 모동면은 낙동강 수계가 아니라 금강 수계에 속한다. 읍치는 상주시 상주시내 서성동 일대에있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天奉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洛東津은 낙동강의 가항종점으로서 어염선 왕래가 잦았던 浦口이었고, 또한 나루터와 역이 있어서 수륙교통의 요지이었다.읍치 좌측에 보이는 남장사는 832년(신라 흥덕왕 7)에 진감선사가 창건하여 長栢寺라 하였는데, 1186년(고려 명종 16)에 각원대사가 이 자리에 옮겨 짓고 남장사로 고쳤다. 남장사 좌측에 있는 北長寺는 833년(신라 흥덕왕 8)에 진감선사가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24년(인조 2)에 명나라 승려 10여 명이 와서 중창하였고, 그 후에도 몇 번 화재를 입고, 다시 중창된 바 있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龍興寺는 839년(신라 문성왕 1)에 진감국사가 창건하였고, 그 뒤에 여러 번 중수하였는데, 법당의 용틀임이 유명하다. 읍치 서북쪽에 위치한 甄萱山城은 견훤이 가은에서 나서 그 누이와 같이 청화산의 돌을 한 치마씩 주워 다가 하루만에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켜 후백제를 이룩하였다고 전한다. 지금도 흔적이 완연하게 남아 있다.(金在完)

  • 선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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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善山府는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옥성면, 도개면, 무을면, 고야읍, 해평면, 산동면, 장천면, 낙동강 서안 구미시내,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고, 읍치는 선산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선산은 감천과 낙동강 본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였다. 府治의 북쪽에 위치한 飛鳳山이 이 고을의 鎭山겸 主山이다. 읍치에 보이는 河先生遺墟는 河緯地의 遺墟碑를 지칭하는 것이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金烏書院은 본래 1570년(선조 3)에 금오산 아래에 세워져 길 재를 배향하였고, 1575년(선조 8)에 사액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므로, 1609년(광해군 1)에 지도상의 위치(현재의 선산군 선산읍 원동)로 옮겨 세우고 편액을 다시 썼으며, 그 뒤에 김종직 등을 추배하였다. 月岩書院(지도의 우측 상단)은 본래 1630년(인조 8)에 來格廟로 창건되어 김 주를 제사지내다가, 그 후에 하위지, 이맹전을 배향하고 三仁이라 하였고,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리고, 그 후 이 곳에 月岩亭이라는 정자가 세웠졌다. 그 외 茂洞書院과 洛峯書院은 미사액서원이다. 義狗塚은 개가 주인 연향역 아전 김성발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 죽어 이 곳에 묻힌 개무덤이다. 桃李寺는 383년(신라 내물왕 28) 아도화상이 입산하였던 절로서 겨울철에 복숭아와 오얏꽃이 만발하였으므로, 이곳에 절을 세웠다한다. 1977년 4월에 도리사 담장을 수리하던 중 阿道和尙石像이 발견되기도 하였다.(金在完)

  • 성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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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목은 고려시대 牧으로서 경상도의 중요 고을이었다. 조선후기 대구가 경상도의 首府로서 성장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대구부보다 郡勢가 강했다. 성주목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전체, 고령군 다산면, 덕곡면, 운수면을 포함하는 지역으로서 현 성주군보다 훨씬 넓었다. 읍치는 성주군 경산리 일대에 있었다. 북쪽에 위치한 印懸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邑城은 옛날에 흙으로 쌓았다가 1520년(중종 15)에 돌로 고쳐 쌓았고, 1591년(선조 24)에 또 고쳐 쌓은 원형의 성이다. 좌측에 보이는 禿用山城은 본래 都山城인데, 옛날 돌로 쌓았는데, 1675년(숙종 1)에 목사 이시현이 고쳐 쌓았다. 남문 밖에 있는 關王廟는 1597년(선조 30) 명나라 장수 茅國器가동문 밖에 세워 관우의 초상을 모셨는데, 1727년(영조 3)에 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성주에는 川谷書院, 柳溪書院, 晴川書院, 德峯書院, 檜淵書院, 玉川書院 등 서원이 많다. 이들 가운데 천곡서원과 회연서원만이 사액서원이다. 천곡서원은 지도상으로 읍치 북쪽 명암방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서원은 1558년(명종 13)에 목사 노경린이 세웠고, 1560년(명종 15)에 목사 황준량이 연봉서원이라 하여 이조년, 이인복, 김굉필을 봉안하였는데, 정 구가 이천 운곡의 뜻을 따서 천곡서원이라 하였고, 선조 때 사액을 받았다. 지도상에 대리방에 위치한 회연서원은 1627년(인조 5)에 세워지고, 정 구와이윤우를 배향하였는데, 1690년(숙종 16)에 사액받았다. 독용산성 좌측에 있는 法水寺에는 3층 석탑과 당간지주가 있다.(金在完)

  • 순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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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부는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부석면, 물야면, 단산면, 봉화군 봉화읍 일부, 봉성면 우곡리, 춘양면 소로리, 법전면 법전리, 소지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읍내리에는 객사 터, 동헌 터, 군기고 터가 남아 있어 이 곳이 옛 치소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읍치에 보이는 白雲洞書院은 1542년(중종 37) 8월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 향의 영정을 이 곳에 모시고, 이듬해 안 보를 배향하여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는데, 1549년(명종 4)에 풍기 군수 이 황이 啓請하여 이듬해 4월에 어필로 소수서원의 편액을 받아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되었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浮石寺는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의상조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절이다. 고려 초에 불타서, 1041년(고려 정종 7)에 원 융이 왕명을 받아 중건하고, 1376년(고려 우왕 2)에 중수하고, 선조 때 보수하였다. 의상조사가 짚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살았다는 仙飛花 나무가 있고, 동쪽에 善妙井, 서쪽에 食沙龍井이 있으며, 국보로 무량수전, 조사당, 소조석가여래좌상, 조사당벽화, 석등 등이 있다.(金在完)

  • 신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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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령현은 지금의 영천시 신령면, 화산면 북부, 화북면 고현천 以西, 영천시내 매산동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천시 신령면 화성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花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기록에 따르면 "화산은 현 북쪽에 있는데, 청송경계의 普賢山으로부터 내려 와서 현의 主龍이 되었다. 산의 모양이 피는 꽃과 같고, 그 가운데가 매우 넓고, 샘이 솟아 멀리 흘러간다"고 되어 있다. 輿地圖書에는 신령현을 "북쪽으로花山에 거하고, 남쪽으로 龍川으로 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지도에는 읍치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로 잘 나타나 있다. 環碧亭은 客舍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1551년(명종 6)에 縣監 黃俊良이 처음 지었고, 이름을 竹閣이라고 하였다. 그 후 縣監 松爾昌이 重修하고 이름을 環碧亭으로 고쳤고, 宋俊吉이 記를 지어 걸었다. 長水驛은 찰방역으로서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白鶴書院은 縣監 黃俊良이 1678년(숙종 4)에 세워 이 황을 배향하였는데, 사액은 받지 못했다.(金在完)

  • 안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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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부는 지금의 안동시 안동시내, 풍산읍, 길안면, 남선면, 북후면, 서후면, 예안면 남부, 와룡면, 일직면, 임동면, 임하면, 풍천면, 예천군 감천면, 봉화군 봉화읍 남부, 재산면, 소천면, 법전면 일부, 춘양면 남부, 물야면 개단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안동시내 동부동 일대에 있었다. 북쪽 태백산에서 남하하는 산줄기가 읍치 북쪽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낙동강의 근원이라고 일컫는 黃池를 노랗게 표시하여 근원이 깊음을 강조하고 있다. 읍성 안에 위치한 太師廟는 고려 때 공신 金宣平, 權 幸, 張 吉 세 태사의 사당이다.후에 이들 세 명은 각각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읍성 남문 밖 낙동강 가에 위치한 映湖樓는 고려 때 공민왕이 친히 현액을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1488년(성종 19)에 안동부사 김 질이 중수하였는데,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1934년 장마에 떠내려가서 영호루 현판은 안동시청에 보관하고, 전 영호루 맞은 편에 새로 세웠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關王廟는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 장수 설호신이 세운 것이다. 安奇驛은찰방역으로서 10개의 속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屛山書院, 虎溪書院, 三溪書院 등은 모두 사액서원이다.(金在完)

  • 양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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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군은 지금의 양산시 양산시내, 물금읍, 동면, 상북면, 원동면, 하북면, 부산광역시 북구의 구포동, 강서구 대저동·강동동을 포함하는 지역이고, 읍치는 양산시내 북부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북쪽에 위치한 城隍山이다. 읍성은 현재 북부리산성(史蹟 98號)이라고 하는데 돌로 쌓은 성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松潭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세워져, 1717년(숙종 43)에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찰방 백수희를 배향하였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송담서원의 아래에 보이는 황산역은 영남대로의 요로에 위치한 황산도의 찰방역으로서 16개 역을 관할하였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3대 사찰의 하나인 通度寺는 648년(신라 진덕여왕 2)에 자장법사가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3년(선조 38)에 松雲大師가 재건하였고, 그 후 1641년(인조 19)에 友雲이 중건하였다. 이 사찰에는 銀絲入香爐, 國長生石標, 大雄殿, 3층석탑, 사리탑, 石燈, 石床이 있다. 낙동강 변에 위치한 伽倻津壇은 公州·熊津과 함께 南瀆으로 삼았다고 中祀에 실려 있다. 해마다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상류에서 선박으로 운반된 세곡은 甘同倉(현 부산시 북구 구포동지도의 우측 하단)에 보관되었다가, 다시 통영으로 이송되었다. 호포진은 양산군의 물자를 이출입하는 포구이었다.(金在完)

  • 언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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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양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울주군 언양읍, 삼남면, 삼동면, 소호리를 제외한 상북면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언양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高 山이다. 고헌산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읍치 뒷산인 화장산에서 멈추었고, 청도의 운문산과 밀양의 취서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서쪽으로 흘러 읍치를 지나가고있다. 그리고 사방의 산들이 읍치를 둘러싸서 분지지형을 이루고 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화장산 중턱에 굴이 있고, 굴 앞에 샘이 있는데, 그 곳에서 샘물이 세차게 뿜어 나온다고 한다. 읍성은 본래 土築이었으나, 1500년(연산군 6)에 이 담이 돌로 고쳐 쌓았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盤龜書院은 1712년(숙종 38)에 고을 선비들이 고려 때 충신 정몽주, 정 구, 이언적이 이 곳에 머문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다. 읍치 왼쪽에 보이는 石南寺는 1560년(명종 15)에 선철대사가 중건한 사찰로서 보물 제 369호 부도가이 곳에 있다. 석남사 아래에 보이는 肝月寺는 현재 절터와 보물 제 370호석조여래좌상만 남아 있다.(金在完)

  • 영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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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강구면, 남정면, 달산면, 지품리와 옥류리를 제외한 지품면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덕읍 남석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無芚山이다.읍성의 西門인 淸心樓는 1423년(세종 5)에 知縣 崔 宇가 세웠고, 1457년(세조 3)에 縣令 廉尙恒이 중수했으며, 權 擥이 記를 적었다. 지도에는 없지만, 동문 밖 서쪽 냇가에 위치한 臨鏡臺는 물이 거울과 같이 맑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그 밑에 깊은 沼가 있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서원은 南江書院으로 이언적과 이 황을 배향하였다. 남강서원 남쪽 오십천 가에 浩浩臺가 있는데 경치가 아름답다. 또한 읍치 북쪽 오십천 상류에 위치한 龍湫가있는데 비를 빌면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五十川의 명칭은 縣으로부터 知品院에 이르는 사이에 50개의 건널목이 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읍치 서북쪽에 위치한 知品院은 황장재를 넘어 청송, 진보, 안동으로 가는 사람들의 먹고 자는 편의를 위한 시설이었다. 지품원은 원래 옛 영해부에 딸린 지품부곡이 위치하고 있었다.(金在完)

  • 영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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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남부, 영산면, 계성면, 도천면, 길곡면, 부곡면, 장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靈鷲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서역의 승려 指空이 이 산에서 와서 말하기를, "이 산이 天竺(인도)의 영취산과모양이 같다해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太子山은 신라 태자의 묘가 있다해서 이름지은 것이다. 北嶽祈雨壇은 영취산정상에, 南嶽祈雨壇은 작약산 정상에 있어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 마이면에 있는 硯池는 벼루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으로 연지 가운데 육모정 정자가 있다.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法帥池는 가물 때 호랑이 머리를 담그면 곧 비가 왔다고 한다. 법수지 아래쪽에 보이는 忘憂亭은 낙동강 변에 위치하여 경치가 아름다웠는데, 아깝게도 6·25사변으로 소실되었다. 이 곳에 곽재우 유허비가 있다. 낙동강 변의 임해연진, 멸포진, 송진, 우질포진, 기강진은 모두 영산에서 칠원과 함안으로 통하는 대로에 위치한 나루터 겸 조운선의 발진포구로서 뿐만 아니라 어염과 곡물의교환 장소로 이용되었다. 부곡면의 溫井驛 부근은 현재 유명한 부곡온천이 위치하는 곳이다.(金在完)

  • 영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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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현은 고려 말까지 현이었으나 조선에 들어 와서 영해부에 속하였고, 1683년(숙종 9) 주민들의 진정에 따라 다시 현이 설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석보는 영해부에, 청기는 영양현에 속하게 되었다.영양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영양읍, 수비면, 일월면, 입암면 북부, 청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양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영양군 대부분의 지역은 낙동강의 상류지역에 속하지만 수비면만은 동해로 흘러드는 왕피천의 상류지역에 속한다. 일월산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이 고을의 진산이다. 滄海에 임해 일출과 월출을 굽어 볼 수 있으므로 일월산의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읍치의 主山은 芍藥山이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書院은 英山書院으로 1655년(효종 6)에 세워져 이 황과 김성일을 배향하였고,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衙舍 右側에 보이는 英毅公廟는 영의공 南 敏의사당이다. 1689년(숙종 15)에 창건되었고, 1830년(순조 30)에 鄕祠宇로 승격하였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書院 右側 琵琶潭 위에 있는 삼구정은 門月堂 吳 翁이 창건하였는데, 그 밑에 거북처럼 생긴 세 바위가 있다.(金在完)

  • 영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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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일현은 지금의 포항시 포항시내 북구 남부, 남구, 형산강 이남의 연일읍, 오천읍, 대송면, 동해면 대부분, 대보면의 영일만 연안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포항시 연일읍 생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雲梯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운제산 부근에 위치한 吾魚寺는 신라 진평왕 때에 창건하여 恒沙寺라 하였는데, 문무왕 때에 혜공대사가 吾魚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절 개칭에 관한 재미있는 古事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경내에 자장암, 혜공암, 원효암 등 오어사에 딸린 암자가 위치하고 있다. 운제산 우측에 보이는 大王岩의 바위 틈에 샘물이 솟아나는데, 가뭄에 비를 빌면 곧 비가 내린다고 한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서원은 烏川書院이다. 1588년(선조 21)에 현감 이광악이 세웠고, 1613년(광해군 5)에 사액되었고, 정습명과 정몽주를 배향하였다가,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읍치 우측 하단에 위치한 浦項倉은 1732년(영조 8)에 함경도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資本으로 설치된 倉이며, 別將을 두어서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는 경상도 감사 조현명의 請에 따른 것이다. 扶助里는 형산강을 따라 올라온 魚鹽과 내륙의 穀物이 교환되는 곳이었다.(金在完)

  • 영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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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榮川郡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영주시내, 장수면, 문수면, 이산면, 평은면, 봉화군 상운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영주시 영주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鐵呑山이다. 산세가 남향으로 달리는 형세가 마치 달리는 말과 같아서 철탄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여러 겹의 산줄기가 명당인 읍치를 포근히 감싸안은 형국이다. 읍치에 있는 字民樓는 1427년(세종 9)에 郡守 權 詳이 세운 것이고, 雙淸堂은 객사 동쪽에 있는데, 郡守 金世勳이 지은 것이다. 지도에는 없지만, 雙淸堂의 남북에 蓮池가 위치하고 있다. 迎薰亭은 郡守 鄭從韶가 지은 것으로 이 황이 손수 迎薰이라는 글자를 써서 걸었다. 읍치 좌측에 東龜臺, 龜鶴亭이 나타나 있다. 구학정이 있는 서구대는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고, 동쪽에 있는 동구대와 쌍으로 솟아 있고, 그 가운데로 西川이 흘러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龜鶴亭은 1603년(선조 36)에 이조판서 김 륵이 세운 정자이다. 경치가 아름답고 류성룡 등의 詩가 있어서 더욱 유명하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伊山書院은 1558년(명종13)에 군수 안 상이 세워, 이 황을 배향하였고, 1572년(선조 5)에 사액되었다.(金在完)

  • 영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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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永川이라는 명칭은 고려 초 道同과 臨川 두 고을을 합쳐서 永州라고 고친 데에서 연유한다. 영천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영천시내 전지역, 금호읍, 고경면 대부분, 임고면 서부, 자양면 전지역, 청통면, 화산면 남부, 화남면 일부, 화북면 남부와 동부, 대창면 전지역, 북안면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영천시내 창구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母子山이다. 모자산과 보현산에서 발원한 北川과 南川이 읍 앞에서 만나 서쪽으로 흘러 금호강과 합류하고 있다. 읍성 안에 위치한 朝陽閣은 600년 전 曺 郡守가 누각을짓고 명원루라 하여 정몽주의 詩板을 달았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20년 후에 재건하여 서세루라 하였으며, 그 후 조양각이라 칭하였다. 서원으로는 臨皐書院, 立岩書院, 松谷書院, 道岑書院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임고서원은 1533년(명종 8)에 盧 遂, 金應生, 鄭允良 등이 합세하여 사액을 받았으며,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는데, 1602년(선조 35)에 현 양항리로 옮겨졌다. 좌측에 보이는 道岑書院은 1613년(광해군 5)에 세워져, 1678년(숙종 4)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松谷書院은임고서원보다 늦은 1702년(숙종 28)에 세워진 서원이다.(金在完)

  • 영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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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해부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병곡면, 창수면, 축산면, 영양군 석보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다. 읍치 주변의들을 제외하고는 사방을  산들이 첩첩이 둘러싸고 있다. 읍치 좌측에 두 개의 서원이 보이는 데, 읍치에서 좀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서원이 仁山書院이고, 다른 하나는 丹山書院이다.  인산서원은 1696년(숙종 22)에 창건되어 李徽逸을 배향하였는데, 순조 때 병곡면 인량모개로 옮겼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단산서원은 선조 때 창건되어 禹 倬과 李 穀, 李 穡 父子를 배향하였는데,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蒼水院은 영해에서 영양을 거쳐 안동으로 가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이었다. 옛날에는 이 곳에 영해부에 딸린 倉 部曲이 있었다. 부근에 위치한 小泣嶺과 大泣嶺은 고을에 오는 손님을 맞아들이고, 떠나 보내는 곳으로 되어 있다. 병곡역 우측에 보이는 觀魚臺는 上臺山 밑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래 松川이 흘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金在完)

  • 예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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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안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북부, 녹전면, 도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의 북쪽에 위치한 城隍山이다. 寬心樓와 望美樓는 객관 부근에 있는 누각이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易水書院은 1568년(선조 1)에 이 황이 창건하여 禹 倬, 朴忠佐를 배향하였고, 1684년(숙종 10)에 사액되었다. 陶山書院은 1574년(선조 7)에 창건되어 퇴계 이 황을 배향하였고, 그 다음 해에 사액되었는데, "도산서원"의 넉 자는 한 호의 글씨이다. 그 후 퇴계의 제자 조 목을 추배하였다. 뒤에 있는 尙德祠는 보물 제 210호로 지정되었다. 그 외 淸溪書院과 汾江書院은 賜額書院이 아니다.月川書堂은 부용산에 있는데, 조 목이 책을 갈무리하던 장소이다. 낙동강을 따라 수많은 亭子와 臺가 분포하고 있다. 상류로 올라가면서 枕洛亭, 觀水臺, 愛日堂, 雲影臺, 谷口岩, 天淵臺, 葛仙臺, 寒棲樓, 松鶴亭 등이 분포하고 있다. 애일당은 李賢輔가 세워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하였기 때문에 堂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리고 낙동강에는 淵과 潭의 명칭이 많이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곳은 깎아지른 절벽과 깊은 沼를 이루기 때문에 절경을 이룬다. 도산서원의 對岸에 위치한 月瀾寺는 "七臺三曲"의 絶勝이 있고, 이 황이 어릴 때 책을 읽었던 곳이라고 전한다.(金在完)

  • 예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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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현은 지금의 예천군 예천읍, 유천면, 보문면, 용문면, 호명면, 개포면 동부, 유천면, 풍양면 남부, 문경시 산북면 동부, 동로면, 의성군 다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예천읍노상리 일대에 있었다. 鼎山書院은 1612년(광해군 4)에 세워져 이 황, 조 목을 배향하였는데, 1677년(숙종 3)에 정산서원으로 사액되었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읍치 우측 보문면에 보이는 보문사는 667년(신라 문무왕 7)에 의상대사가 세웠으며, 1184년(고려 명종 14)에 보조국사가 중창하였다. 읍치 서남쪽에 보이는 龍頭亭은 臥龍山 頂上에 있는 亭子로 낙동강에 임하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龍門寺는 870년(신라 경문왕 10)에 杜雲이 창건하여 용문사라 하였고, 그 후 고려 초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중수와 중건을 하였다. 헌종 1년(1835) 8월에 타서, 중 역파가 상민, 부열들과 함께 중건하였다.(金在完)

  • 용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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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궁현은 지금의 예천군 용궁면, 개포면 서부, 문경시 영순면 동부, 예천군 지보면, 풍양면 북부, 의성군 인사면 쌍호리·월소리·신수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당시의 읍치는 지금의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일대였다. 1856년(철종 7) 큰 장마로 인하여 낙동강이 범람하여 이 현청이 떠내려가서 이듬해 현청을 읍부리로 옮겼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竺山인데, 신라 때 고을의 명칭이기도 하다. 읍치 아래의 龍飛(飛龍)山城은 돌로 쌓은 성으로 안에 우물 3개, 군창이 있었다 한다. 비룡산성의 남쪽에 위치한 三江書院은 1643년(인조 21)에 창건되어 정몽주, 이 황, 류성룡을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헐렸다. 여기서 三江은 낙동강, 내성천, 금천 세 강이 이 곳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낙동강이 비룡산을 감돌면서 심하게 곡류를 하는데, 지도에는 없지만,부근에 義城浦가 있다. 마치 섬처럼 되어 있어서 조선 때 귀양지로 이용되었다. 낙동강에 위치한 知保津, 三江津, 河豊津 등의 나루터에는 지나가는 손님과 물자를 건네 주는 나룻배가있었고, 또한 낙동강을 거슬러 온 鹽船이 정박하여 주민과 물물교환을 하였다. 지도에 저수지가 많이 표시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金在完)

  • 울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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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부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산시, 울주군 온산읍, 웅상읍, 범서면, 서생면, 온양면, 웅촌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울산시 중구 성남동 일대에 있었다. 含月山에서 고을의 鎭山까지 남쪽으로 내려오는 山勢가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태화강과 동천강 및 울산만이 만나는 지점에 府治가 자리잡고 있다. 향교 좌측에 보이는 太和臺에서 태화강의 지명이 유래되었다. 태화대는 강에 임해서 경치가 아름답다. 읍치 동쪽의 鶴城과 남쪽의 甑城은 임진왜란 때 왜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전쟁터이다. 북쪽에 보이는 萬里城은 關門城과 함께 울산과 경주 경계의 주요 도로에 위치하여 경주를 방어하기 위한 성이었다. 1415년(태종 15)에 좌병영을 경주 동남 20여 리에 설치하였다가, 1417년(태종17)에 계변성으로 옮겨 설치하였고, 1604년(선조 37)에 지도에 보이는 곳으로 옮겼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西生鎭에 처음에는 수군만호를 두었으나, 1592년(선조 25)에 왜인이 쌓은 甑城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鷗江書院은 1678년(숙종 4)에 세워지고,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문수산 서쪽에 위치한 청송사는 지금 밭으로 변하고, 절터만 남아 있고, 보물 382호 청송사지석탑만 지키고 있다. 원적산 아래에 위치한 雲興寺에는 현재 절터와 석탑 3개가 남아 있다.

  • 웅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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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명이 熊只, 熊口, 熊神, 熊山 등 곰과 관련된 명칭이 많다. 이것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鎭山인 熊山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웅천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 가덕도를 합친 지역이었으며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흔히 진해시가 진해현의 지역으로 알고 있으나, 진해시는 본래 웅천현의 소재지인데, 마산부제 실시 때 웅천을 진해면으로 고쳐서 그대로 시로 변한 것이다. 읍성은 정방형으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석축으로 둘레가 3,514척, 높이가 15척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熊山岩에는 熊山神堂이 있다. 지역 주민들이 매년 4월과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산에서 내려와서, 반드시 쇠북과 북을 치며 잡놀이를 벌이는데, 원근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제사지낸다고 한다. 해안 방어를 위하여 가덕도진, 천성포진, 안골포진, 제포진 등의 鎭과 신문보, 청천보, 풍덕포보 등이 설치되어 있고, 이들 진보에는 첨사와 만호가 주재하고 있었다.(金在完)

  • 의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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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현은 지금의 의령군 궁유면 서부를 제외한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 일대에 있었다. 蔓芝山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碧溪山을 거쳐 鎭山인 德山까지 내려오고 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정방형의 읍성은  1589년(선조 22)에 知縣 李 가 쌓았는데, 둘레는 1천 5백 70척, 높이가 4척 5촌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德谷書院은 1656년(효종 7)에 세워져, 1660년(현종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이 황을 배향하였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鼎岩은 강 가운데 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솥 위에 겹겹이 쌓인 바위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암진은 의령에서 함안으로 통하는 대로가 통과하는 주요 나루터일 뿐만 아니라 의령과 삼가에서 온 주민들과 낙동강을 거슬러 온 船商들이 곡물과 어염을 교환하는 시장이기도 하였다.(金在完)

  • 의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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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가음면, 금성면, 단촌면, 봉양면, 사곡면, 안평면, 점곡면, 춘산면, 신평면 광산천 유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고, 읍치는 의성읍 도동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 보이는 烏川忠烈祠는 김홍술이 고려 태조와 비슷하여 후백제 견훤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고사와 관련 깊은 사당이다. 읍치 아래쪽에 古召文國과 관련되어 있는 유적이 보인다. 경덕왕릉은 많은 여러 무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인데, 소문국의 경덕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문국의 옛 터로 알려진 이 곳에서는 지금도 주춧돌과 매장품이 발견되고 있다. 부근의 御井과 飛鳳山 줄기의 노적봉, 금학산의 古山城 모두 소문국과 관련있는 유적이다. 경덕왕릉 부근에 보이는 鶴山書院은 현령 이광조가 1698년(숙종 24)에탑리리의 금성산 밑에 창건하여 사육신 등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氷山面에는 유명한 氷穴이 있다. 바위 밑에 굴이 있는데, 立夏 뒤에 얼음이 비로소 얼기 시작하여 삼복 때에는 얼음이 굳어지고, 흙비가 오면 얼음이 녹으며, 봄, 가을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고, 겨울에는 봄같이 따뜻하다고 한다. 부근에 위치한 氷溪書院은 1556년(명종 11)에 건립되고, 1576년(선조 9)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金在完)

  • 의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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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흥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산성면, 의흥면, 부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龍頭山(지도의 좌측 중단)이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華山城은 兵使 尹 淑이 1709년(숙종 35)에 쌓다가 중단된 성인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9천3백여 보이다. 성안에 군수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건물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화산 기슭에 굴이 있는데, 늘 찬바람이 나오는데, 몹시 차서 초여름에도 얼음이 언다고 한다. 읍치 위쪽에 麟角寺가 보인다. 인각사는 절벽에서 기린이 놀다가 뿔이 빠져서 인각사라 하였다하며, 신라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때 一然이 이 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고 전한다. 1699년(숙종 25)에 縣監 朴聖漢이 증축하였다. 이 곳에는 보물 제 428호인 普覺國師碑가 있다. 인각사 앞에 鶴巢臺가 있다. 軍威郡誌에 따르면 푸른 바위가 마치 병풍과 같아 높이가 40길이 된다. 앞에 맑은 못이 있고, 그 아래에 큰 돌이 수중에 우뚝 솟았는데, 높이가 10여 척, 넓이가 7, 8척이다. 그 옆에 鶴巢菴이 있다. 옛날 쌍학이 바위 위 소나무에 깃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699년(숙종 25)에 현감 박성한이 石臺를 증축하고 이름을 학소암이라 하였다.(金在完)

  • 인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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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동부는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洛東江 以東, 구미시 오태동, 칠곡군, 기산면 서부, 석적면, 북삼면, 약목면, 기산면, 왜관읍 아곡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읍치는 구미시 인의동 일대이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留鶴山이고, 主山은 玉山이다. 인동부는 특이하게도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행정구역이 분리되어 있다. 선산부 경계에 위치한 金烏山은 佛家에서는 南崇山이라고 하는데 이는 海州의 北崇山과 상대하여 부른 것이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天生山은 사면에 석벽이 깎아 세운 듯하고, 마치 하늘이 만든 것 같다해서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못 4개가 있다. 이 산을 의지하여 쌓은 성이 天生山城이다. 이 성은 본래 신라의 옛 성이었는데,1601년(선조 34)에 郭再祐가 外城을쌓았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는 3천 6백 12척이다. 낙동강 西岸에 위치한 吳山書院은 1574년(선조7)에 세워져 1609년(광해군 1)에 사액을 받았고, 길재를 배향하였다. 낙동강 東岸에 위치한 洛東書院(東洛書院의 오기)은 1654년(효종 5)에 세워져 1676년(숙종 2)에 사액을 받았고, 張顯光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으나, 1904년에 장현광을 위한 影堂이 건립되었다.(金在完)

  • 자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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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인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자인면, 용성면, 경산시 경산시내 동남부, 진량읍 동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 일대에 있었다. 到天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치에 보이는 樂山樓는 1700년(숙종 26)에 縣監 全命三이 세워, 樂山樂水의 글자를 따서 요산루라고 하였다. 1767년(영조 43)에 進士 鄭忠彬이 쓴 記가 있었다. 1871년(고종 8)에 縣監 柳道奭이 재건하였는데, 1912년에 헐렸다. 향교 우측에 보이는 大興寺는 신라 때 창건되어 원통암이라 불렸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고, 인조 때 암자와 동서 요사를 다시 세웠으며, 현종 때 법당과 종각을 세우고 대흥사라 고쳤다. 근처에서 가장 큰 절로 유명했는데, 120여 년 전에 폐사가 되었다. 대흥사 아래쪽에 보이는 盤龍寺는 1303년(고려 충렬왕 29)에 창건되었는데 1641년(인조 19)에 戒云과 明彦이 중건하였다. 반룡사 좌측에 보이는 觀瀾書院은 1659년(효종 10)에 세워져, 선조 때  李承曾을 모시려다, 경주에 사는 여강 이씨들의 반대로 이언적을 배향하였다. 관란서원 좌측에 孝子徐濂旌門이 보인다. 효자 서 렴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죽자 손가락 하나를 자르고, 어머니가 죽자 다시 손가락 하나를 자르고, 초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른 것을 기리기 위해 旌門을 세운 것이다.(金在完)

  • 장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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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읍, 장기면, 대보면 동부, 동해면 상정리·중산리·공당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장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치소의 서쪽에 위치한 巨山이다. 읍성은 평지가 아니라 산에 의지해서 쌓은 石城으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둘레는 2천 9백 80척이다. 읍성 안의 紫鳳山 부근에 紫鳳亭과 浴日堂은 1481년(성종 12)에 현감 최영이 지은 것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소봉대는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는데, 한쪽은 육지에 연하여 있고, 삼면은 바다에 둘러싸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신라의 어느 왕자가 이 곳 경치에 취해서 3일 동안 놀았다 한다. 북쪽에 위치한 冬背串牧場은 신라 때부터 말을 키웠던 유서 깊은 牧場이다. 磊城烽燧는 북으로 鉢山烽燧에 응하고, 남으로 福吉烽燧에 응한다. 毛伊山에 있는 毛伊峴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이 재를 넘었다 해서, 혹은 고개 모양이 오소리가 잠자는 형국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뇌성봉수가 있는 뇌성산에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 石城이 있고, 이 산에서 나는 磊綠, 人蔘, 紫芝, 蜈蚣, 蜂蜜, 雉獺, 銅鐵의 7寶 등을 나라에 진상하였으므로, 장기현감을 칠보현감이라 부르기도 한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獨山은 거북이 엎드린 것처럼 생겼는데, 林再華가 늘 놀았다 하며, 현재 그의 유허비가 있다.(金在完)

  • 조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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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鳥嶺山城은 임진왜란 후 1708년(숙종 34)에 쌓았는데, 남북이 8리이며 둘레가 1만 8천 59보이다. 성이 세 곳에 있는데, 첫째는 고개 위에 있는 지도에 보이는 鳥嶺關이고, 둘째는 東城門이고, 셋째는 초곡에 위치한 主西關이다. 또한 北暗門, 東暗門 등 暗門이 있다. 지도 여백의 설명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 주변의 名山인 主訖山, 曦陽山, 獐山, 冠方山 등에는 제단이 있어서 해마다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조령성 부근 사찰 5개와 승려수를 기록하고 있다. 사찰의 승려들은 유사시에 조령성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東倉은 문경·함창·예천·용궁·상주 5읍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이다. 지도에 보이는 交龜亭은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를 맞아 관인을 넘겨주는 곳으로, 성종 때 현감 신승명이 세웠는데, 김종직이 시를 지어 칭송하였다 한다. 교구정 부근에 보이는 龍湫에서 옛날 용이 승천했다고 전하며 기우제를 지낸다. 惠國寺는 846년(신라 문성왕 8)에 보조국사가 창건하여 법흥사라 하였는데, 고려 때 혜국사로 고쳤다. 다른 군현지도와 달리 초록색으로 아름답게 산을 표시하였다.산들이 조령성을 진호하는 형국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의 영향 때문이다. 도로는 붉은 실선으로 표시하였고, 건물은 회색과 붉은 색을 적절히 사용하여 한 눈에 파악 가능하다. 그리고 설명문의 내용도 다른 군현 지도에 비해서 무척 자세한 편이다.(金在完)

  • 조령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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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는 조령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태백산, 서쪽으로 속리산, 남쪽으로 황령산, 북으로 충주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주요 산과 고개를 그려 넣으면서 관문을 만들만한 곳과 적을 끊고 막을 만한 곳을 아울러 써놓았다. 그리고 조령 부근의 산성, 사찰, 창고를 자세히 그리고 있는데, 유사시 외적을 막기 위하여 꼭 필요한 방어시설이다. 그리고 도로를 강조하여 붉은 색 실선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조령에 위치한 동문, 초곡창, 중성, 동화원의 위치를 붉은 색 건물 모양으로 그려서 강조하고 있다. 설명문에는 조령의 위치, 사방의 경계, 각 군현까지 거리, 倉庫까지 거리를 자세히 적어 놓고 있다.(金在完)

  • 지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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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知禮縣의 縣名은 신라의 知品川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때 縣名은 지례현을 흐르는 하천이름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례현은 지금의 김천시 지례면, 부항면, 구성면 서쪽, 대덕면을 포함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방향은 좌측이 동쪽, 우측이 서쪽, 위쪽이 남쪽, 아래쪽이 북쪽이다. 이 지역은 감천의 상류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산지가 많고, 좁은 골짜기에 읍이 형성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지례현 지도가 다른 군현지도와 다른 점은 곳곳에"村''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는 점이다. 衙舍 좌측에 보이는 鑑湖亭은 1690년(숙종 16)에 현감 조인상이 못을 파고, 蓮을 심고 정자를 세웠는데, 1755년(영조 31)에 홍수로 인하여 허물어졌으므로, 1760년(영조 36)에 현감 이 창원이 다시 짓고 못 가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지례현에는 장곡역과 작내역 두 개가 있었다. 장곡역은 남으로 거창 성기역과 연결되고, 북으로 작내역과 연결된다.(金在完)

  • 진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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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眞寶는 신라 경덕왕 때 등장한 현의 오랜 명칭이다. 조선 세종 때 靑鳧에 합쳐져 靑寶郡(진보와 청송을 합친 것)이라 불렸다가 얼마 안 있어 이를 폐지하고 진보로 고쳤다. 진보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파천면 북부, 영양군 입암면 남부, 석보면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 보이는 선은 옛 土城의 흔적이다. 읍치에 위치한 飛鳳山은 봉황이 날아가는 형국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 아래 水淨菴은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정암의 아래쪽에 보이는 退溪先塋은 현재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甘南墓 또는 호장공 묘라고 불리는 이 황의 6대조 묘이다. 金鷄抱卵穴이라 하여 명당으로 손꼽힌다. 이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도에도 전형적인 명당형국을 잘 보여주고 있다. 玉流亭 위쪽에 위치한 石璧은 성을 쌓을 만한 곳으로 인정되었으나 실제로 성을 쌓지는 않았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南角山烽燧는 동쪽으로는 寧海府의 廣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安東府 臨河縣의 藥山에 응한다. 角山驛은 安奇道察訪驛의 屬驛으로 동쪽으로 寧陽驛과 연결된다.(金在完)

  • 진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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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목은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전체, 산청군 삼장면, 시천면, 단성면 남사천 이서지역, 하동군 옥종면, 북천면 일부, 사천시 축동면, 삼천포시 일부, 고성군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 남해군 창선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진주시내 남성동과 본성동 일대에 있었다. 우뚝 솟은 集賢山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鎭山인 飛鳳山에서 멈추고, 그 아래 명당을 만들고, 양 팔 모양의 산줄기로 명당을 감싸안은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아래 명당수인 남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비봉산 아래 읍치에는 本州, 객사, 진영,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大寺池는 남강과 함께 矗石城의 垓字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도에 보이는 성은 矗石城인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石築으로 둘레가 4,359척, 높이가 15척, 샘과 우물이 각각 3개, 軍倉이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 남쪽에 있는 누각이 유명한 촉석루이다. 성안에 있는 忠愍祠는 1652년(효종 3)에 사당을 세워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김시민 등을 배향하였던 서원으로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義岩은 임진왜란 때 義妓 논개가 진주성 함락의 애통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여 왜장을 껴안고 이 바위에서 남강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바위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찰방은 소촌도의 찰방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속역이 14개이다.(金在完)

  • 진주목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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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목은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전체, 산청군 삼장면, 시천면, 단성면 남사천 이서지역, 하동군 옥종면, 북천면 일부, 사천시 축동면, 삼천포시 일부, 고성군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 남해군 창선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진주시내 남성동과 본성동 일대에 있었다. 우뚝 솟은 集賢山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鎭山인 飛鳳山에서 멈추고, 그 아래 명당을 만들고, 양 팔 모양의 산줄기로 명당을 감싸안은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아래 명당수인 남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비봉산 아래 읍치에는 本州, 객사, 진영,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大寺池는 남강과 함께 矗石城의 垓字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도에 보이는 성은 矗石城인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石築으로 둘레가 4,359척, 높이가 15척, 샘과 우물이 각각 3개, 軍倉이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 남쪽에 있는 누각이 유명한 촉석루이다. 성안에 있는 忠愍祠는 1652년(효종 3)에 사당을 세워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김시민 등을 배향하였던 서원으로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義岩은 임진왜란 때 義妓 논개가 진주성 함락의 애통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여 왜장을 껴안고 이 바위에서 남강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바위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찰방은 소촌도의 찰방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속역이 14개이다.(金在完)

  • 진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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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현은 1018년(고려 현종 9)에 진주에 예속되었고, 조선 태종 때 현감을 두었다. 그러나 1570년(선조 3)과 이듬해에는 함안과 합쳤다가 1617년(광해군 9)에 다시 두었다. 1627년(인조 5)에는 창원에, 1629년(인조 7)에는 또 함안에 합쳤다가 1639년(인조 17)에는 다시 두었다. 이와 같이 다른 군현에 종종 흡수된 이유는 진해현이 주위의 다른 군현에 비해 면적과 인구가 적어 郡勢가 약하였기 때문이다. 진해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마산시 진동면 진동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鷲山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진해읍성은 石築으로 둘레가 446척, 높이가 9척이다. 이 지도에서는 드물게 향교를 文廟로 표시하고 있다.(金在完)

  • 창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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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고암면, 대지면,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와 말흘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지도상으로 위쪽에 있는 火旺山이다. 화왕은 통일신라시대 창녕의 명칭이었다. 즉, 진산의 명칭을 고을의 이름으로 사용한 예이다. 지도에서 방향은 위쪽이 동쪽, 아래쪽이 서쪽, 우측이 남쪽, 좌측이 북쪽이다. 읍치 동쪽에 비슬산, 화왕산, 구룡산, 영취산 등 웅장한 산들이 외곽을 두르고, 그 안 쪽에 낮은 산들이 다시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산 기슭 곳곳에 절과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 구룡산 밑 觀龍寺에는 보물 제 212호 대웅전과 보물 제 146호 약사전이 있다. 비슬산 밑에 있는 龍興寺는 覺了庵이라고도 하는데, 曺關文이 영조의 11女 和寧翁主의 願刹로 지었다 한다. 객사 위에 있는 道成菴은 신라말에 창건된 유서 깊은 암자이다. 도성암 좌측에 보이는 冠山書院은 1620년(광해군 12)에 세워져 1711년(숙종 37)에 사액되었고, 정 구를 배향하였다. 관산서원 좌측에 보이는 燕岩書院은 李承彦, 李長坤, 成安義를 배향하였는데, 사액은 받지 못했다.(金在完)

  • 창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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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부는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 마산시내, 내서읍, 창원시 창원시내, 동읍, 북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창원시 창원시내 서상동 일대에 있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읍성은 石築으로 둘레가 2,004척이다. 읍치 동남쪽에 보이는 自如?은 찰방역으로서 속역 14개를 거느리고 있었다. 자여관 좌측에 보이는 鳳林寺는 봉림산에 있는데, 新羅 執事侍郞 崔仁滾이 쓴 僧眞鏡塔碑가 있다. 향교 아래에 보이는 舊兵營은 고려 원종 때 원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이 곳에 征東行營을 두어 元帥  都가 몽골병 4,500명을 이끌고 주둔하였던 터라고 한다. 구병영 좌측에 있는 書院은 檜原書院으로 1634년(인조 12)에 정 구를 모시고, 뒤에 허 목을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孤雲臺는 崔致遠이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서원 아래에 보이는 月影臺는 최치원이 노닐던 곳으로, ''월영대''라고 손수 楷書로 써서 돌에 새긴 비가 있다.(金在完)

  • 청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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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도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화양읍, 매전면, 이서면, 운문면, 금천면, 각남면 동부,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와 서상리 일대에 있었다. 청도군의 옛 중심지는 현 청도읍이 아니라 화양읍이다. 현 청도읍은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청도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이다. 華岳山에서내려오는 산줄기가 鎭山인 鰲山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고, 여러 갈래의 산줄기가 명당인 읍치를 감싸고있다. 또한 明堂水가 고을의 남쪽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감싸 돌아 다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오산 좌측에 위치한 高沙洞은 하늘에서 장차 바람이나 비가 오려면 먼저 알려서 운다고 한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1591년(선조 24)에 쌓은 성인데, 지금은 거의 다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아래에 보이는 省峴道는 察訪驛으로서 16개의 屬驛을 관할하였다. 읍성의 우측에 보이는 紫溪書院은 1578년(선조 11)에 건립되었고, 1661년(현종 2)에 사액되었다.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를 배향하였다. 상동면과 중동면 지역에 보이는 立岩, 孔岩, 落花岩 등은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金在完)

  • 청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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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송부의 府名은 靑寶郡과 松生縣을 합치면서 첫머리를 따서 이루어진 것이다. 청송부는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부동면, 안덕면, 현서면, 현동면, 현서면, 부동면, 부남면, 파천면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청송읍 월막리 일대에 있었다. 府의 북쪽에 우뚝 솟은 산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치에 있는 讚慶樓는 沈洪孚의 齋室이다. 이 누각에는 우암 송시열의 記가 기록되어 있고, 安平大君 瑢의 扁額이 걸려 있다. 1792년(정조 16)에 府使 韓光近이 증수하였다. 찬경루 우측에 龍纏巖이 보인다. 그 밑에 깊은 沼가 있는데, 그 소에 살던 용이 이 바위를 감고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바위 위에 望美亭이라는 정자가 위치하고 있었다. 부남면에위치한 屛岩書院은 1702년(숙종 28)에 세워져, 이 이와 김장생을 배향하였고, 1702년(숙종 28)에 사액되었다. 현내면에 위치한 松鶴書院은 숙종 1년(1675)에 세워졌으나 사액받지 못하였다. 읍치 동쪽 周房山(현 주왕산)에 위치한 大典寺는 주왕의 아들 대전이가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대전사 좌측에 보이는 松生古縣은 송생현이 조선 세종 때 靑鳧縣과 합치기 전 읍치로서 지금의 청송읍 송생리와 부동면 및 부남면에 해당한다. 송학서원위쪽에 보이는 風樹堂에서 조선 선조 때 선비 趙遵道가 짓고 글을 가르쳤다 하는데 현재는 밭으로 변해 있다.(金在完)

  • 청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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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하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과 송라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청하면 덕성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呼鶴山이 고을의 鎭山이다.읍성은 1427년(세종 9)에 縣監 閔 寅의 청에 따라 안동, 봉화, 풍기, 영천 등지의 장정들을 모아서 돌로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읍치 북쪽의 松羅?은 7개의 屬驛을 거느린 송라찰방역의 관아 건물이다. 송라관 위쪽에 보이는 鶴山書院은 1692년(숙종 18)에 세워서 李彦適을 봉안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학산서원 좌측에 위치한 寶鏡寺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절이다. 745년(신라 경덕왕 4)에 南岳門人 哲敏이 중수하였으며, 1023년(고려 현종 14)에 金堂塔을 세웠고, 1221년(고려 고종 8)에 圓眞國師가 사리탑과 사적비를 세웠다. 현재 원진국사비는 보물 제 251호 지정되어 있다. 보경사 왼쪽에 보이는 神龜山에 세 마리의 용이 웅덩이에 있는데 가뭄에 비를 빌면 응했다고 한다. 신귀산 좌측에 보이는 龍湫는 폭포가 내리질러서 깊은 못를 이루었는데, 그 속에 용이 산다 하며,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해안 가에 보이는 釣鏡臺에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앞에 있는 동해 바다가 거울같이 비춰 주므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金在完)

  • 초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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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계군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대양면 백암리·오산리, 덕곡면, 율곡면 동부, 적중면, 쌍책면, 청덕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청계산이다. 지도에는 汎峯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초계현은 초계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초계분지는 동서방향의 길이가 약 6km, 남북방향의 너비가 약 3km에 달한다. 輿地圖書의 形勝條에서 초계군을 ''四山八水''라고 묘사하고 있다. 즉,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여덟 갈래의 물이 마을을 감싸안으면서 흐른다"고 한 것으로, 분지지형을 묘사한 것이다. 읍치 동쪽 낙동강 변에 위치한 甘勿倉津은 창녕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면서 초계군과 합천군의 稅穀을 실어내는 포구였다. 또한 이 곳에서 주민들의 곡물과 어염이 거래되었다. 읍치 북동쪽 덕곡면에 위치한 巢鶴寺는 소학산 중턱에 있었는데, 승려들이 중방면 留鶴寺로 옮겨 가면서 폐사되었다. 서원으로는 淸溪書院과 松原書院이 있으나 사액받지 못한 서원으로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司倉 부근에 있는 新淵은 무릉 못이라고 불리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그 좌측에 보이는 鳳栖菴도 지금은 없어지고, 암자터만 남아 있다. 1940년 경 이 곳에서 쇠부처가 발견되었다 한다.(金在完)

  • 칠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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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곡부는 본래 星州 屬縣 八 縣이었다. 1640년(인조 18)에 架山山城을 쌓았는데, 읍치와의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칠곡도호부를 두었다. 칠곡부는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동명면, 지천면, 가산면 동부, 대구광역시 대구 시내 팔거천 이서의 북구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대구 시내 북구 읍내동에 있었다. 읍치가 산성 안에 위치한 점이 특이하다. 架山城은 1640년(인조 18)에 관찰사 이명웅이 쌓은 성이다. 1700년(숙종 26) 관찰사 이세재가 돌로 외성을 쌓고, 동·서·암문과 성문을 내고 성문의 樓額에 ''嶺南 第一關防''이라는 현액을 걸었다. 그 후 1741년(영조 17)에 관찰사 정익하가 문루를 세웠다. 내성에는 동·서·남·북의 4砲樓와 將臺, 鎭南樓가 있었고, 외성에는 南門樓와 雲帥軒이 있었다. 성안에보이는 가산암은 깎아지른 듯이 우뚝 서 있는데, 위에는 천여 명이 앉을 수 있으며,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한다. 道村面에 있는 書院(泗陽書院)은 본래 1651년(효종 2)에 문주면(현 대구시 북구)에 세워져 정 구를 主享하고, 이윤우를 從享하였는데, 1694년(숙종 20)에 지도상의 위치(칠곡군 지관읍 신리)이 곳으로 옮기어 이원정을 추배하였다. 지도 아래 하북면에위치한 松林寺는 신라 내물왕 때 세운 절로, 5층탑이 있는데, 1958년 수리할 때에 사리와 유물이 나와 국보 189호로 지정되었다.(金在完)

  • 칠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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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원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칠북면, 칠서면, 마산시 구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칠원면 구성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 위치한 靑龍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성은 둥근 형태의 돌로 쌓은 성이다. 성 안에 보이는 擇勝亭은 客館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감 이 숙규가 세운 것이다. 상리면에 보이는 書院은 德淵書院인데,  周世鵬을 배향하였고,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었다. 부근 계내리에 주세붕묘가, 무릉리에 주세붕영당이 있다. 서면에 보이는 景釀臺는 우질포 서안 용주암 동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불쑥 솟은 가운데 꼭대기가 평탄하여 손바닥 같아 1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옛날에 그 위에정자가 있었으며, 역대 지방관들이 巫祭를 지냈다고 한다. 昌仁驛과靈浦驛은 모두 自如道의 屬驛이다. 龜山鎭은 칠원현의 월경지에 있는 鎭으로 첨사가 주재하였다. 칠원이 내륙에 위치한 군현으로 어염의 확보를 위해 해안지역에 월경지를 소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安谷山烽燧는 남쪽으로 창원부의 성황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영산현 봉산에 응한다.(金在完)

  •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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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統營의 본래 명칭은 右水營兼三道統制營이다. 조선 초에 우수영을 거제의 오아포에 두었다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에 처음으로 통제사를 두어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관장하게 하고 이순신을 통제사로 삼았다. 1602년(선조 35)에는 통제영을 고성현의 頭龍浦로 옮겼다. 두룡포가 바로 오늘의 통영이다. 통영은 지금의 통영시 통영시내, 산양읍, 한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통영시내 북신동, 문화동, 태평동, 정량동, 명정동에 걸쳐 있었다. 지도에 보이는 통영 읍성은 1678년(숙종 4)에 통제사 尹天賚가 쌓았던 것으로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 13,830척, 높이 9척이며, 동에는 春主門, 서에는 金肅門, 남에는 淸南樓, 북에는 北樓가 있었다. 지금은 모두 헐어지고 없다. 읍성에 있는 洗兵?은 통제사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1604년(선조 37)에 통제사 이경준이 이순신 장군의 전승을기념하기 위해 창건하고, 두 보의 시 구절을 따서 이름을 세병관이라 하였다. 거제현에 있었던 통제영을 이 곳으로 옮기고 본영으로 썼으며, 이 때 이름도 통영이라 하였다. 1645년(인조 22)에 통제사 김응해가 다시 크게 고쳤다. 현재 보물 제 2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문 밖에 있는 건물이 충렬사이다.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606년(선조 39)에 통제사 이운룡이 나라의 명을 받들어 세웠다. 통영을 중심으로 거리에 따라 郡縣과 鎭營을 배치하고 있는 점이 현대 정거방위도법의 지도를 연상시킨다. 섬의 형태도 실제 항해할 때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섬의 형태로 그리고 있다.(金在完)

  • 풍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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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기현의 명칭은 조선 초에 基川縣에서 ''基''자를, 殷豊縣에서 ''豊''자를 따서 지어진 것이다. 풍기현은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상리면, 하리면, 봉현면, 안정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풍기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 금계리에 있었던 풍기향교는 1542년(중종 37)에 군수 주세붕이 지도상의 위치(현재 영주시 풍기읍 교촌리)로 옮겼는데, 1692년(숙종 18)에 다시 옛터로 옮겼다가, 1735년(영조 11)에 또 다시 교촌리로 옮겼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愚谷書院은 1708년(숙종 34)에 창건되어, 류운룡, 황 섬, 이 준, 김광엽을 배향하였는데,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향교 우측에 보이는 郁陽書院은 1662년(현종 3)에 창건되어 이 황과 황준량을 배향하였는데 1869년(고종 6)에 헐렸다. 昌樂驛은 찰방역으로 속역 9개를 거느리고 있었다. 지도의 좌측 상단에 보이는 옛 은풍현의 鳴鳳山에는 조선 문종대왕의 胎가 묻혀 있다. 지도의 상단에 보이는 竹嶺은 영남에서 호서로 통하는 대로가 통하는 고개로 158년(신라 아달라왕 5)에 처음으로 길이 열렸다.(金在完)

  • 하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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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부는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악양면, 화개면, 적량면, 횡천면, 북천면 방화리·사평리, 양보면, 고전면, 진교면 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읍치는 하동읍 두곡리 일대에있었다. 옛 치소는 양경산 밑의 구읍성 자리이었는데, 1461년(세조 7)에 지도상의 위치로 옮겼다. 舊邑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1417년(태종 17)에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1,019척, 높이가 13척이었는데, 모두 퇴락하였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書院(永溪書院)은 1698년(숙종 24)에 鄕人들이 정여창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중국의 명승지인 岳陽縣을 본따서 악양면으로 하였고, 악양산 정상에 악양루 누각을 지었다. 그리고 중국 악양현의 ''瀟湘八景''의 뜻을 따서 절승지에 그 이름을 땄다. 세상에 전하기를 鳳凰臺, 姑蘇城, 寒山寺遺址, 洞庭瀟湘, 君山平沙은 대개 악양이 신라 소다사현 때 호칭이라고 한다. 화개면에 위치한 雙溪寺는 840년(신라 문성왕 2)에 眞鑑禪師 慧昭가 짓고 옥천사라 하였는데, 정강왕이 쌍계사라 고쳐 불렀다. 경내에는 석조여래좌상, 국보 제 47호의 진감선사공탑비, 보물 제 380호의 쌍계사부도, 쌍계사 팔상전 등이 있다. 절 입구 바위에 새겨진 ''雙溪石門''의 4자는 최치원의 글씨로 유명하다. 쌍계사 좌측에 위치한 七佛菴은 가락국 수로왕의 아들 7형제가 이 곳에서 수도하여 성불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암자이다.(金在完)

  • 하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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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양읍은 지금의 경상북도 하양읍, 진량읍 북부, 대구광역시 동구 일부, 경산시 와촌면 동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경산시 하양읍 금락동 일대에 있었다. 향교 위쪽에 보이는 無落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대구 경계에 보이는 醮禮山은 고려 태조가 桐藪에서 甄萱을 치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한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琴湖書院은 1684년(숙종 10)에 서사등에 세워, 고려 공양왕 때의 좌의정 許 稠를 모시었는데, 1790년(정조 14)에 사액되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고 다만 琴湖書院有墟碑만 남아 있다. 1608년(선조 41) 지도상의 치소로 옮기기 전의 舊邑(현 하양읍 한사동)은 지도상에 향교가 위치한 곳이다. 지도상에는 없고, 설명문에만 보이는 環城寺는 835년(신라 흥덕왕 10) 心志 또는 문무왕 때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환성사 대웅전은 보물 제 562호로 지정되어 있다. 匙山烽燧는 동쪽으로는 영천군 성황당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경산현 성산에 응한다.(金在完)

  • 함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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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함안면, 여항면, 군북면, 법수면, 대산면, 산인면,마산시 진전면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서남쪽에 위치한 여항산이 고을의 鎭山이고, 飛鳳山이 主山이다. 대략 지도의 방향은 위쪽이 남쪽, 아래쪽이 북쪽, 우측이 서쪽, 좌측이 동쪽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읍성은 石築으로 둘레가 7,003척, 높이가 13척이다. 남문 밖에 위치한 德岩書院은 1634년(인조 12)에 조 순, 박한주, 조종도를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동문 밖에 있는 道林書院은 1702년(숙종 28)에 정 구를 배향하였고, 그 아래에 위치한 松亭書院은 1721년(경종 1)에 조임도를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西山書院은 1646년(인조 24)에 세워져, 1663년(현종 4)에 사액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조 려, 원 호, 김시습, 이맹전, 성담수, 남효온 등 생육신을 배향하였다. 남문 밖에 보이는 咸州古基는 옛 아라가야국의 도읍지이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이 곳에 가야고성의 옛 터가 있고, 백사리에 옛날 국가 유적이 있고, 야산에 고분 40여기가 있는데, 가야 때 임금을 장사지냈다고 한다. 춘곡역과 파수역 모두 自如道 찰방역에 속하는 속역이었다.(金在完)

  • 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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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군은 1729년(영조 5)에 府로 승격되고, 1788년(정조 12)에 도로 郡으로 강등되기까지 함양부이었다. 함양군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전면, 병곡면, 수동면, 유림면, 지곡면, 휴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함양읍상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함양군은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고을 북쪽에 위치한 白巖山이 鎭山이다. 지도에 栢淵書院,  洲書院,  溪書院이 나타나 있는데, 당주서원과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고, 백연서원은 사액을 받지 못한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1552(명종 7)에 세워져 정여창, 강 익, 정 온, 유호인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당주서원은 1581년(선조 14)에 세워져 1660년(현종 1)에 사액되었다. 백연서원은 1670년(현종 11)에 세워져 최치원과 김종직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君子寺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다. 세간에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진평왕이 어렸을 때 그 숙부 진지왕을 피하여 이 곳에서 살다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읍치 북쪽 백전면에 위치한 靈隱寺는 절터만 있고, 부근에 영은사 부도가 남아 있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사근역은 찰방역으로서 속역 14개를 거느리고 있었다.(金在完)

  • 함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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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창현은 본래 古寧伽倻國이었다. 함창의 지명은 고려 초 古寧에서 咸寧으로, 다시 咸寧에서 咸昌으로 고친 데에서 유래한다. 함창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이안면, 공검면, 문경시 가은읍 일부, 영순면 일부,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상주시 함창읍 구향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현의 서쪽에 위치한 宰岳山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恭儉池(공갈못)는 고려 명종 때 司錄 최정분이 옛 터대로 다시 수축하였다. 공검지는 근래까지 쓰다가 상류에 규모가 큰 오태지를 조성한 후 매립하였다. 읍치에는 東池와 西池, 그리고 觀南池와 井花池가 위치하고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가야왕이 정화지에 행차하여 놀았다고 한다. 읍치에는 객관의 門樓인 明隱樓, 友蓮亭, 先月亭, 閱武亭 등 누각과 정자가 집중 분포하고 있다. 동면에 위치한 鳳凰臺는 바위가 첩첩히 얹히어 솟았는데, "鳳凰臺" 석자가 새겨져 있다. 남면 五峯山 자락의 서원은 臨湖書院인데, 1692년(숙종 18)에 세워졌고, 洪貴達, 表沿沫, 蔡 壽 등을 배향하였다. 지도 위쪽 七峯山 아래에 위치한 黃嶺寺는 함창현의 월경지에 위치한 절로서 현재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에 위치하고 있다.(金在完)

  • 합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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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군의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율곡면 서부, 대양면(백암리와 오산리 제외), 용주면, 봉산면, 묘산면, 야로면, 가야면 대부분, 의령군 궁류면 서부, 봉수면 청계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합천읍 합천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바로 위쪽에 보이는 華岩書院은 朴紹가 김굉필과 만나 강론하였던 곳이다. 후학들이 서원을 세워, 1727년(영조 3)에 사액받았다. 伊淵書院은 김굉필이 남교동에 있으면서 정여창과 서로 만나 강론한 곳이다. 부근에 암석이 있는데, 志同巖이라고 부른다. 후학들이 추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나란히 그들을 배향하였다. 1660년(현종 1)에 사액받았다. 海印寺는 31본산의 하나로 802년(신라 애장왕 3)에 順應·利貞 두 대사가 세운 절로 禪敎兩宗의 본산으로 되어 있다. 고려 현종 이후 7번의 큰 불이 났으나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대장경각은 온전하였으며, 딸린 암자가 12개이고, 국보로 대장경판(국보 32호), 대장경판고(국보 52호), 고려판각(국보 206호), 원경왕사비(보물 128호)가 있다. 원당암은 해인사가 창건될 때 같이 세워졌다 하며, 신라 애장왕이 해인사를 지을 때 이 곳에서 공사 감독을 하였다 한다. 이 암자에는 보물 518호로 지정된 원당암다층석탑이 있다. 객사 맞은 편에 있는 澄心樓, 涵碧樓, 湖然亭 모두 황강변에 위치한 수려한 누각과 정자이다.(金在完)

  • 현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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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풍현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일부, 동군 우곡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 달성군 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東道(道東의 오기)書院은 1605년(선조 38)에 창건되었는데, 김굉필을 봉안하였다.2년 후에 사액받았으며, 1677년(숙종 3)에 정 구가 配享되었고, 또 1694년(숙종 20)에 곽승화, 원 개, 배 신, 곽 율이 추배되었다. 그 아래 松潭書院은 1664년(숙종 5)에 창건되었고, 박성을 봉안하였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禮淵書院은 숙종 15년(1674)에 세워져 곽 준, 곽재우를 배향하였는데, 3년 후 사액받았다. 비슬산은 현풍의 名山이다. 비슬산 서남 기슭에 자리잡은 유가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1699년(숙종 25)에 淸心과 道瓊이 중창한 바 있고, 1776년(영조 52)에 密雲이 다섯 번째 중창하였다. 비슬산 기슭에는 유가사 외에도 道成菴과 消災寺가 위치하고 있다.  소재사는 1701년(숙종 27)에 청심이 창건하였고, 1841년(헌종 7)에 완산이 중창한 절이다.(金在完)

  • 흥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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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해군은 지금의 포항시 북구 북부, 흥해읍, 연일읍의 형산강 이북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포항시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우측 하단에 그려진 禱陰山이다. 산줄기가 鎭山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가서 臨虛臺에 그치어 읍치의 명당형국을 형성하였다. 飛鶴山과 禱陰山에서 발원한 하천이 東流하여 곡강서원에서 합류하여 동해로 빠져나가면서 읍치 주변에 좁은 들을 형성하였다. 원형의 읍성은 1011년(고려 현종 2)에 성을 쌓아서 왜적의 침입을 막게 하였는데, 우왕 때 돌로 고쳐 쌓았다. 1914년 후에 모두 없어졌다. 성안에 있는 望宸樓는 1546년(중종1)에 城堞을 의지하여 누각을 세우고 망신루라 하였는데, 1785년(정조 9)에 중수하였다. 읍성 위쪽에 보이는 서원은 曲江書院이다. 1612년(광해군 4)에 창건하여 李彦迪을 봉안하고, 뒤에  趙 絅을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도음산 부근에 위치한 泉谷寺에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靈泉이 있는데, 신라 선덕여왕이 이 물에 목욕하고 피부병이 완치되었으므로, 자장율사를 시켜서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6·25사변 때 절이 소실되었다.(金在完)

  • ▶기타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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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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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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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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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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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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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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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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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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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북경궁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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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때의 紫禁城 일대를 그린 지도. 이 지도가 수입된 중국 쪽 지도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인지, 사신의 견문기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지도의 중앙부에 午門, 承天門, 大淸門이 직선상에 있다.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 안쪽으로 자금성의 주요 전각들이 표시되어 있다. 오문 아래 쪽에 있는 承天門은 현재의 天安門이다. 옹정제(1723-1735) 때 이곳을 중건하면서 천안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지도는 옹정제 이전의 청나라 황성이 표현된 것이다. 午門의 아래쪽으로 청나라 때의 궁궐 규모임을 보여주는 大淸門이 표시되어 있다. 오문 안쪽의 太和殿과 中和殿은 국가의 공식 행사가 치러지던 곳이며, 그 위 乾淸宮은 청나라 황제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대청문 아래쪽으로 下馬碑가 있고 그 주변으로 여러 관서 건물들이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이들 관서를 감싸고 있는 성곽은 북경의 內城 중 일부인데, 현재는 내성의 남문인 正陽門을 제외하고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배우성)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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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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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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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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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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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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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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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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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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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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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십삼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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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 입각한 동아시아지도.  중원대륙과 그 주변의 윤곽을 보여줌과 동시에 일종의 역사부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지도 안에는 학문을 연마하는 데 있어서 경학과 역사학의 상호관계를 설명해주는 經史體用, 서적과 도형을 통해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左圖右書의 두 원칙이 적절히 반영되어 있다. 우공의 구주와 역대 왕조의 도읍지는 엷은 적색의 원 안에, 전국시대의 11국은 황색의 작은 원 안에, 명나라때의 행정구역인 13성은 짙은 적색의 큰 원 안에 각각 그려 넣었다.  황하, 양자강을 비롯한 주요 하천이 그려져 있으며, 곤륜산, 태산 등 내오악, 기타 중국 역사상 의미 있다고 생각되던 산들이 표시되어 있다. 13성 표시 아래에는 북경까지의 거리가 명시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는 주요 도시와 함께 능, 누대 등 명승지들이 표시되어 있다. 귀주성에 보이는 灣夷라는 표현, 운남성에 보이는 南灣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오랑캐를 뜻하는 夷는 지리적 구분법이 아니라 문화적 구분법이다.중화국가의 행정체계 내에 있으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중화와 먼 거리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과 중국 산동반도 사이에 유일한섬으로 그려진 田橫島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는 전횡이라는 인물의 설화가 어려 있는 섬이다. 이 지도는 성리학을 받아들여 국시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지식인들이 중화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배우성)

  • 왜국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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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전기에 제작된 일본지도의 유형을 따르고 있는 일본지도. 지도는 남쪽을 위로 하고 있는데,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일본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향이다. 일왕이 있는 國都와 막부 장군이 있는 江戶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그 밖에는 대강의 행정구역, 후지산을 비롯한 일부의 산과 주변 도서들을 그려 넣었다. 북해도가 蝦 島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으며, 북해도의 맞은편에도 아이누족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蝦地라는 표현이 보인다. 설명문에는 일본이 동서방향으로 육십일 거리, 남북 방향으로 12일거리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國都-大坂-九州-對馬島- 조선에 이르는 노정이 설명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기록된 일본의 里數가 조선의 里數에 비해 1/10의 단위라는 사실이 앞부분에 표시되어 있다. 일본어 발음까지 한글로 병기하려 했다 하나 표시되어 있지 않다. 노정기 중에는 부산포 뿐만 아니라 대마도에서 왕래가 가능한 경상도 남부 해안지역의 해로 사정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설명문의 말미에는 國都, 大坂城 등 일본 주요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붙어 있다. 오사카의 토지 대부분이 막부장군(關白)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지도는 해동제국기의 일본지도 계통, 혹은 그 변형이라고 보기에는 전체적으로 너무나 다른 윤곽을 하고 있다. 지도의 윤곽은 여전히 조선 전기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해동제국기의 일본지도와 많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이는 이 지도의 원본인 필사본 여지도 책자의 일본지도가 해동제국기와는 다른 원도를 바탕으로 하고있었음을 말해준다.(배우성)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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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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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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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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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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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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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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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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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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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유구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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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에서 유행하던 여지도 책자의 유구지도를 옮겨 그린 소략한 오키나와 지도. 해동제국기의 유구국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략함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조선후기의 유구 인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지도라 할 수 있다. 國都가 위치한 본 섬 주변으로 부속 도서를 그려 넣은 소략한 윤곽을 하고 있다. 본 섬에는 國都, 寶庫, 國頭城이 강조되어 있다. 국도는 삼산왕 시기를 마무리짓고 통일왕조를 이룩한 중산왕이 있었던 곳이다. 성문을 포함한 왕성의 기초적인 윤곽이 그려져 있는데, 중산왕의 거주 지역과 왕제, 대신들의 거주 지역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음이 이채롭다.  1453년에 구미도에 표류했다가 오키나와 본 섬으로 보내졌던 梁城 등에 따르면, 중산왕이 거주하던 성곽은 석성으로 되어 있었다 한다. 국도 성곽으로부터 900리에 거리에 국고지역의 핵심적인 시설로 寶庫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상선들이 정박했던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해동제국기에서 섬으로 묘사되었던 국고지역은 이 지도에서 본섬의 일부로 그려져 있다 이 지도의 원도가 되었을 유구지도는 유구에 항해한 경험을 가진 일본인에 의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본 섬 주변의 여러 섬들의 지명에는 당시 일본인들의 한자 발음이 반영되어 있다.  栗島(아하시마), 鳥島(도리시마) 등이 그것이다.  지도 상단의 九米島는 화교집단이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었던 곳이다. 그들은 유구가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그 조공무역체제에 들어가게 되면서 유구의 대명 무역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배우성))

  • 조선여진분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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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과 청 사이의 국경지대를 그린 지도.  북으로 흑룡강, 동쪽으로 연해주 일대, 남으로는 조선 국경, 서로는 장성까지를 그렸다. 의주의 건너편으로 조선 사신들이 출입하던 책문이 보인다. 지도를 그린 대부분의 자료들은 성경지의 지도, 요계관방도의 지도 등 중국측의 자료들이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평안도의 군현은 적색 사각형 안에, 함경도는 황색 사각형 안에 그려넣었다.  백두산은 독립된 산으로 표현되지 않고 의무려산에서 시작되는 한 줄기처럼 묘사되어 있다. 중국의 동북지방으로는 청이 몽고를 의식해 쌓아놓은 나무 울타리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조선은 청이 오랑캐라는 이유 때문에 필연적으로 멸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고, 그 경우 청은 그들의 본거지인 영고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지도는 이러한 조선측의 전형적인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북경 쪽에서 시작되어 船廠 烏喇를 지나 寧古塔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유일하게 그려진 것은 조선이 이 경로를 청이 퇴각할 것을 가상하고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에 대한 설명은 중국측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이다.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부르고 있으나, 실제 이 강을 토문강으로 적은 것은 성경지였다. 이러한 오류는 <요계관방도>에서도 발견된다. 토문과 관련해서는 정계비 건립 이후 심화된 인식이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국경 밖에 있는 高麗境, 先春嶺의 위치는 고토의식의 심화를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배우성)

  • 조선여진분계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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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과 청 사이의 국경지대를 그린 지도.  북으로 흑룡강, 동쪽으로 연해주 일대, 남으로는 조선 국경, 서로는 장성까지를 그렸다. 의주의 건너편으로 조선 사신들이 출입하던 책문이 보인다. 지도를 그린 대부분의 자료들은 성경지의 지도, 요계관방도의 지도 등 중국측의 자료들이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평안도의 군현은 적색 사각형 안에, 함경도는 황색 사각형 안에 그려넣었다.  백두산은 독립된 산으로 표현되지 않고 의무려산에서 시작되는 한 줄기처럼 묘사되어 있다. 중국의 동북지방으로는 청이 몽고를 의식해 쌓아놓은 나무 울타리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조선은 청이 오랑캐라는 이유 때문에 필연적으로 멸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고, 그 경우 청은 그들의 본거지인 영고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지도는 이러한 조선측의 전형적인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북경 쪽에서 시작되어 船廠 烏喇를 지나 寧古塔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유일하게 그려진 것은 조선이 이 경로를 청이 퇴각할 것을 가상하고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에 대한 설명은 중국측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이다.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부르고 있으나, 실제 이 강을 토문강으로 적은 것은 성경지였다. 이러한 오류는 <요계관방도>에서도 발견된다. 토문과 관련해서는 정계비 건립 이후 심화된 인식이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국경 밖에 있는 高麗境, 先春嶺의 위치는 고토의식의 심화를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배우성)

  • 천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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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독특한 세계지도. 가면 모양의 중앙대륙(내대륙), 중앙대륙을 감싸고 있는 안쪽의 바다(내해), 안쪽의 바다를 감싸고 있는 바깥쪽의 대륙(외대륙), 외대륙 밖의 바다(외해)가 있고,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곳이 그 바깥 쪽 좌우에 있다.  나라 이름, 산천 이름 등 140여개가 넘는 지명들이 지도 전체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도면에 기록된 지명 대부분은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지명들로 동양 고전 가운데 하나인 산해경에서 확인되는 것들이다. 중앙대륙의 지명은 해내경에서, 내해의 지명들은 해외경에서, 외대륙의 지명들은 대황경에서 각각 확인된다. 중앙대륙의 지명 가운데 조선, 중국, 안남(베트남), 섬라(타이), 유구(오키나와), 일본, 번호12국, 서역제국 정도가 실체가 있거나 있다고 생각되던 나라들이다. 중앙대륙 동쪽 중국의 주변으로 태산, 숭산, 화산, 형산, 항산의 內五嶽이 설정되어 있다. 중앙대륙의 중심에는 내오악 대신 곤륜산이 있다. 곤륜산은 안쪽 바다(내해) 사방의 광승산, 장리산, 여농산, 광야산 등과 함께 外五嶽을 구성한다.  중앙대륙 서쪽 끝에 서역제국과 여러 나라이름들이 보인다.  이 지명들은 한서 서역전을 비롯한 중국 고대의 역사서, 지리서 등에서 확인되는 것들이다. 천하도는 서구식 세계지도가 조선에서 변용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도면이다. 천하도는 중국을 중심에 둔 서구식 세계지도의 한계를 부분적으로 반영하면서도 중앙대륙 안에서 중국의 위치를 주변화함으로써 중화적 지리관을 극복해 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배우성)

  • 황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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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때의 수도 북경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 궁궐을 둘러싸는 내성과 외성, 으로 이루어진 북경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지도가 수입된 중국 쪽 지도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인지, 사신의 견문기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지도의 중앙부에 그려진 높은 담벼락은 내성이다. 명나라 태조가 건립한 성곽이다. 태조는 공사가 완료되자 남경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뒤 성(내성) 밖으로 민가가 늘어나면서 이곳을 모두 둘러쌀 수 있는 성곽이 필요해졌고, 그 결과 새로운 성벽이 축조되었다. 이 성벽을 외성(=나성)이라고 하는데, 지도의 아래 쪽에 내성의 남문인 正陽門 밖으로 그려진 성곽이 그것이다.  현재는 대부분의 내성과 외성이 철거된 상태이며, 유일하게 정양문 만이 남아 있다. 내성의 안쪽으로는 자금성(황성)을 둘러싼 또하나의 담장이 보이고, 그 밖으로 수많은 관청과 도읍지의 주요 시설물들이 보인다. 정양문 위쪽으로 명나라 때의 대문임을 알려주는 大明門이 있다.(배우성)

  • ▶전라도
  • 강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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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강진군과 완도군 서쪽 섬 지역으로서 읍치는 강진읍 서성리, 동성리, 남성리 일대에 있었다. 강진현은 1417년(태종 17) 道康縣과 耽津縣을 합해 만들어졌는데 탐진현의 치소가 읍치가 되었고 도강현의 치소에는 兵營이 들어섰다. 강진현의 본래 모습은 탐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이 안쪽으로 쑥 들어온 형태이지만 竹島 위쪽 부분에 매우 작게 그려져 있다. 월출산 남쪽의 無爲寺는 신라말 도선이 처음 세웠다고 하며, 읍치 남서쪽의 萬德寺도 신라 때 세운 절로서 지금은 동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白蓮寺로 알려져 있다. 읍치 동북쪽의 兵營은 종2품관인 全羅道兵馬節度使가 파견된 곳으로 지금의 강진읍 병영면에 해당하며, 그 오른쪽의 修仁寺가 있는 산성은고려말 왜구의 침입 때 주변 군현의 사람들이 난리를 피했던 修因山城이다. 지도의 남쪽에는 성이 있었던 加里浦鎭, 馬島眞, 성이 없었던 古今島鎭, 新智島鎭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완도는 신라 때 장보고의 청해진이 세워졌던 곳이고 조선 초에는 완도 밑의 靑山島에도 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금도진 옆의 關王廟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都督으로 파견되었던 陳璘이 세운 것으로 관우, 진린, 鄧子龍 등의 중국인과 이순신이 배향되어 있어 임진왜란의 여파를 짐작하게 한다.(이기봉)

  • 고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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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군은 정읍시 고부면, 영원면, 소성면, 덕천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의 백산면, 고창군의 부안면 북부 일대이며 읍치는고부면 고부리에 있었다. 군은 서쪽으로는 고부천이, 동쪽으로는 정읍천이 남북으로 흐르다 동진강을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며, 지세는 남동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다. 지도 왼쪽 밑에 보이는 富安面은 고부군의 월경지로서 지금의 고창군 부안면에 해당하며 원래는 富安鄕이었다.읍치 동쪽의  忠祠는 1632년(인조 10)에 세워졌고 1657년(효종 8)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임진왜란 때 동래전투에서 순절한 宋象賢,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국한 申浩 및 金俊등이 배향되었다. 읍치는 동학농민전쟁이 처음으로 발생한 곳으로 남쪽으로부터 뻗어 올라온 산줄기의 서북 기슭에 의지한 성곽과 함께 客舍, 衙舍, 寧民堂, 琴鶴樓, 邑倉 등의 주요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읍치가 확대되어 있고, 산줄기와 물줄기를 강조하여 다른 부분은 소략하게 다루고 있다. 기타 다른 지도에 많이 표시되는 역, 원, 절이 하나도 그려져 있지 않는 특징이 있다.(이기봉)

  • 고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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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현은 지금의 완주군 고산면, 동상면, 경천면, 운주면, 화산면, 비봉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산면 읍내리에 있었다.지도의 가운데를 통과하는 하천은 동진강의 상류 고산천으로서 실제로는 서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며,위쪽의 하천은 금강 지류 논산천의 상류로서 실제로는 서북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읍치가 지도의 아래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雲西面, 雲北面 등의 고산천 상류와 논산천 상류는 雲梯폐현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읍치에는 고을의 主脈 鳳山 밑에 각종 관아시설이 들어서 있는데 鳳山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사방을 감싸고 앞쪽으로는 하천이 흐르는 형태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 지형에서는 鳳山이 읍치로부터 훨씬 서쪽에 있고, 읍치도 하천가에 더 가까워 지도의 표현에서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기타 佛明山 밑의 花巖寺는 여백 주기에도 나와 있듯이  檀木 즉 檀香木이 있어 유명하며, 도로 표시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붉은색, 기타의 도로는 노란색으로 표시하여 구분해 주고 있다.(이기봉)

  • 고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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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현은 지금의 고창군 고창읍, 고수면, 아산면 일대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고창읍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에는 동남쪽의 높은 산지로부터 발원한 고창천이 서북쪽 곰소만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하지만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향한 고을 모양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그렸기 때문에 읍치가 실제보다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남쪽이 축소되었다. 읍성은동남쪽의 산지를 배경으로 삼아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지금도 사적 145호로 지정되어 그 모양을 거의 완전하게 보전하고 있다. 지도 맨 위쪽의 壺岩은 지금의 아산면 반암리 호암마을 뒤쪽에 있는 높이 약 35m, 둘레 300m의 바위로서 모양이 병을 거꾸로 놓은 것 같다고 하며, 그 아래쪽의 海門은 바닷가임에도 좁은 계곡이 하천을 따라 계속 이어져 밀물 때는 바닷물이 출입하는 곳이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매우 간략하며 여백 주기도 필수적인 사항만 적어 놓았다.(이기봉)

  • 곡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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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성현은 지금의 곡성군 곡성읍, 삼기면, 오곡면, 석곡면, 목사동면, 죽곡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곡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북·동쪽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으며, 남쪽의 大荒川은 지금의 보성강이다. 읍치는 고을 鎭山인動樂山을 맨 뒤로하고 2-3겹의 산줄기가 포근하게 감싼 풍수적 관념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오른쪽의 安文成公影堂은 고려 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했다고 전해지는 安珦의 영정을 모신 곳이고, 아래쪽의 德陽祠는 이 고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고려 태조 때의 開國功臣 申崇謙을 배향한 서원으로 1695년(숙종 21)에 賜額받았다. 지도 아래쪽의 泰安寺는 신라 흥덕왕 때 선종 9山門의 하나인 銅裏山門을 열었던 惠哲에 의해 세워져 대안사라 했다가 919(고려 태조 2)에 廣慈禪師가 태안사로 고쳤다는 절로서 지금도 여러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 대황천 변 절벽 위의 凌波亭은 이 때 이미 황폐해졌음에도 기록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이기봉)

  • 광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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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현은 지금의 광양시로서 읍치는 광양읍 읍내리에 있었다.서북쪽에서 흘러온 섬진강이 고을 동쪽을 감싸며 남해로 들어가는 모습이 선명하며, 산지가 대부분이고 큰 평지가 없는 고을의 지형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읍치가 고을의 왼쪽 아래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광양에서 큰 들이 이곳밖에 없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읍치 위쪽에 있는 玉龍寺는 道詵秘記를 지어 우리 나라 풍수지리설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道詵이 마지막으로 수도하다 입적한 절로 알려져 있으며, 1150년(고려 의종 4)에 세운 道詵國師碑가 있었으나 1930년경에 훼손되어 없어졌다 한다. 지도 오른쪽 섬진강변에 蟾津鎭이 보이는데 1705년(숙종 31)에 統制使 吳重周가 군사상의 요충지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설치한 鎭이다. 옛날에는 지역마다 강의 이름을 달리 불렀는데, 현재 통일되어 불리고 있는 섬진강의 이름이 바로 이 蟾津으로부터 나왔다.(이기봉)

  • 광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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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구의 황룡강 서쪽 부분을 제외한 광주광역시 전역과 담양군의 대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충장로, 장동, 금남로 1·2가, 광산동, 궁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1601년(선조 34)에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사망한 高敬命과 아들 因厚를 배향한 褒忠祠, 1604년(선조 37)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을 배향한 義烈祠, 1646년(인조 24)에 名儒 奇大升과 金長生을 배향한 月峯書院이 보이는데 모두 사액서원으로 호남에서 이름난 양반고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포충사만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읍치 밑에 보이는 景烈祠는 고려말 왜적 침입 때 전공을 세웠으며 위화도 회군에서 태조 이성계를 도운 鄭地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읍성 남쪽에는 신라 때는 小祀를, 고려 때는 國祭를, 조선 초에도 無等山神祠를 세워 제사를 지냈던 고을의 鎭山 無等山이 보이고 아래쪽에 신라 경문왕 때 澈鑒禪師 道允이 세웠다는 證心寺가 登心寺로 표시되어 있다. 더 밑 쪽에는 기둥같은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瑞石臺가 그려져 있다. 읍치 서쪽의 景陽驛은 덕기, 가림, 인물, 검부, 창신, 대부 등 여섯 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이기봉)

  • 구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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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례현은 산동면과 광의면·용방면 일부를 제외한 구례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구례읍 봉동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정사각형의 읍성이 선명하고 섬진강 하류 쪽으로는 지도에도 쓰여 있듯이 하동부터 깎아지른 긴 계곡이 30리나 이어져 있어 중요한 要衝地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토지면 송정리에 있는 石柱洞은 고려 말기에 石柱鎭이 설치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았고, 조선 초기에는 황폐해져 있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다시 군사시설을 설치하여 왜군을 방어하였다.지도 오른쪽 위쪽의 華嚴寺는 31본산의 하나로 우리 나라 華嚴宗의 鼻祖로 알려진 義相이 신라 문무왕 때 화엄경 80권을 석판에 새겨 보관하였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화려한 석등과 석탑 등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유명한 사찰이다. 그 아래쪽의 燕谷寺는 신라 때 만들어진 후 고려 초에 번창하여 신라 말, 고려 초의 부도 및 석탑 등의 국보와 보물을 갖고 있는 유명한 절이다. 그밖에 고을 鎭山인 지리산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고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섬진강의 선명한 점이 눈에 띄며, 지도 오른쪽에는 나라에서 쓸 나무를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栗木封山 및 宜松封山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 금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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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구현은 지금의 김제시 금구면, 황산면, 봉남면, 금산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구면 금구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이 위쪽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고을의 진산 鳳頭山이 동쪽에 있어 읍치가 서북쪽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인 듯하다. 지도에서는 鳳頭山이 읍치 남쪽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동쪽에 있으며, 여백 주기에 보면 봉두산은 봉황이날아가는 형세를 하고 있는데 掘禪山에 開同寺를 지으면 봉황이 날아가지 않게 할 수 있다 는 풍수적 해석이 적혀 있다. 지도의 오른쪽에 있는 母岳山은 이 지역에서 명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아래쪽에 있는 金山寺는 599년(백제 법왕 1)에 창건하고 766년(신라 36대 혜공왕 2)에 眞表律師가 중건하여 5교의 하나인 法相宗의 도량이 되었던 곳이다. 후백제 때에는 전주에 도읍한 견훤에 의해 중요한 사찰로서 인정되었으며, 견훤이 넷째 아들 金剛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자 첫째 아들 神劍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가두었던 절로도 유명하다. 지도에서도 모악산 산줄기에 의해 포근히 둘러 쌓여 있는 형태와 정상으로부터 山脈이 이어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어 중요한 사찰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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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은 지금의 금산군 금산읍, 금성면, 군북면, 제원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과 무주군 부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산읍 아인리 일대였다. 군 서쪽의 여러 계곡에서 발원한 봉황천, 용문천 등의 하천이 모여 군 동쪽의 금강 상류로 흘러 들어간다. 여백 주기의 고적조에 부리폐현이 나오는데 지도에서는 동남쪽의 부북면, 부서면, 부동면, 부남면에 해당한다. 향교 위쪽에 보이는 義 은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 등 700여명이 왜군 수만명과 싸우다 전원이 순국한 후 고경명의 문인들이 시체를 거두어 戰場 남쪽에 장사를지낸 곳이고, 이들을 봄·가을로 제사지내는 從容堂과 高霽峯殉節碑도 보인다. 지금은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사적 10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星谷書院은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參政이라는 벼슬을 받은 공로가 있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게 만든 金侁 등이 배향되었고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았다. 부북면에 보이는 濟原驛은 여백의 주기에도 보이듯이 무주의 所川, 용담의 達溪, 진안의 丹嶺, 고산의 玉包 등 4개역을 관장하는 察訪驛이었으며, 身安寺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오다가 몸을 편히 쉬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절이다.(이기봉)

  • 금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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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현은 남평면, 산포면, 다도면, 봉황면을 제외한 나주시 전체와 광주광역시 황룡강 서쪽, 영암군 금정면, 신북면·시종면 일부, 무안군 삼향면, 신안군의 여러 섬에 해당한다. 읍치는 나주시내 서내동, 남내동 일대이다. 보통 羅州牧으로 지칭되었는데 1733년(영조 9)에 금성현으로 강등된 것이 지도 이름에 그대로 기록된 것이다. 나주는 후삼국시대 고려 왕건의 편을 들어 주목받았고 1018년(현종 9) 牧으로 승격되어 수많은 屬縣을 거느렸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도 艅 縣, 安老縣, 伏龍縣, 潘南縣,壓海縣, 長山縣, 榮山縣 등은 나주 관내에 완전히 편입되어 民戶 2만이 넘는 큰 고을이 되었다. 지도 왼쪽의 많은 섬들과 아래쪽의 삼향면은 나주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읍치 위쪽의 錦城堂은 고을의 鎭山인 錦城山에 1277년(충렬왕 3)부터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조선에서도 名山이라 하여 小祀로 삼았고, 지도 아래쪽의 南海堂은 中祀를 거행했던 곳이다. 읍치 남쪽의 榮江倉은 조선 초기에 조창을 설치하고 倉城을 쌓아 현재의 전라남도 대부분 군현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운송하던 곳이었는데 중종 7년(1512)에 법성포로 옮겼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의 발달과 함께 영산강 수운의 중요한 포구로서 번성했던 곳이다.(이기봉)

  • 김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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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시의 시내, 죽산면, 부량면, 백산면, 용지면, 백구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교동, 옥산동, 요촌동 일대에 있었다. 김제군은 실제로는 산이 거의 없는 광활한 벌판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지도에는 산들이 수없이 연결되어 그려져 있다. 산이 많은 지역에선 작은 뒷동산이나 둔덕에 불과한 지형이 이곳에서는 山·山脈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통해 조선시대 자연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고적조에 보이는 平皐廢縣은 지도의 동북쪽에 해당되는데 김제군의 전체적 모양이 지도와 달리 실제로는 동북쪽에서 서북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라는 사실을 통해 두 개의 고을이 합쳐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도의 남쪽에는 ≪三國史記≫에 330년(訖解王 21)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며,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번 개축된 碧骨堤의 모습이 수문과 둑의 형태로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지도가 그려진 시대에는 여백의 주기 古蹟조에 적혀 있듯이 이미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모두 논으로 바뀐 상태였다. 현재는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직접 가보면 지도에서의 동서방향과는 달리 남북방향으로 둑이 쌓여져 있다.(이기봉)

  • 낙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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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안군은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 이서면, 별량면과 보성군 벌교읍에 해당하며 읍치는 낙안면 서내리, 남내리, 동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소설 ≪太白山脈≫의 주무대인 벌교를 비롯하여 외서면 등이 보이며, 金錢山에서 발원한 벌교천이 사방의 물을 모아 남동쪽 남해바다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고을의 鎭山인 金錢山 밑에 현재 낙안읍성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사각형의 읍성이 잘 그려져 있는데, 읍치와 진산을 강조하다 보니까 보성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외서면과 金錢山 뒤쪽 부분이거의 생략되어 있다. 남쪽의 古邑面 下道에 있는 伐橋는 지금 보물 30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虹橋로서 1729년(영조 5) 무지개 모양으로 다듬은 돌 셋을 이어 만들었고, 밑에는 용머리 형상을 한 개씩 조각하여 붙여 놓은 다리이다. 기타 草川面에 있는 桐華寺는 大覺國師 義天(1055-1101)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지형이 鳳이 梧桐나무에 많이 깃든다는 梧桐鳳棲形이라 오동나무를 많이 심고 절을 지었다고 한다.(이기봉)

  • 남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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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부는 지금의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아영면을 제외한 남원시 전 지역과 장수군의 반암면, 산서면 일대, 임실군의 삼계면, 지사면과 오수면 남쪽부분, 구례군의 산동면과 광의면·용방면 북쪽부분 그리고 곡성군의 고달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당시 읍치는 남원시내 동충동 일대에 있었다. 남원부는 동쪽과 서쪽으로 백두대간과 그 산줄기의 높은 봉우리에 의해 둘러 쌓여 있지만 북쪽 장수군 반암면에서 발원한 요천이 고을 중심부를 관통하며 넓은 평지를만들고 남쪽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郡名에 보이는 ''帶方''이란 명칭은 ≪三國史記≫에는 나오지 않다가 ≪高麗史≫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는 지명으로 이 지도에서는 고을 옛 이름 중 가장 먼저 쓰여 있어 세계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지도에는 ''面''을 ''坊''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전라도 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경우이다. 읍성 안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7인을 배향한 忠烈祠와 1599년(선조 32) 서문밖에 세워졌던 關王廟가 객사, 아사 등과 함께 그려져 있어 임진왜란의 여파를 짐작할 수 있다. 동남쪽 所義坊에는 신라 때 五岳의 하나로 받들어져 中祀를 거행했던 지리산에게 제사지내던 南岳祠가 그려져 있어 산악신앙의 계승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남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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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평현은 지금의 나주시 남평읍, 산포면, 봉황면, 다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남평읍 남평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영산강의 지류 지석강이 남북으로 흐르며 고을의 북쪽을 휘감고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가 고을의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이는 남쪽 덕곡면 부근에 있었던 鐵冶縣이 고려시대에 합쳐졌기 때문이다. 읍치의 모습은 풍수적 관념이 전혀 표현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 지역의 지형 자체가 풍수적 형국과는 상당히 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읍치 오른쪽의 서원은 蓬山書院으로서 조광조의 제자이자 선조 때 이조참판과 大司憲에까지 오른 休庵 白仁傑(1497-1579)을 배향하여 1667년(현종 8)에 사액받았다. 기타 사찰의 표시가 잘 되어 있고, 읍치 왼쪽에 군사훈련 때 지휘부로 사용되던 장대가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음이 눈에 띤다. 역원은 이름만이 표시되어 있어 건물과 함께 그려져 있는 다른 지도와 대비된다.(이기봉)

  • 능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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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주목은 화순군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한천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능주면 관영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영산강 상류 지석천이 남동쪽 여러 물을 받아 능주목 한가운데를 지나 북서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각종 관아뿐만 아니라 映碧亭, 淸興亭, 鳳棲樓 등의 樓亭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읍치 아래쪽의 상동면에는 바위 위에 앉아있는 듯한 松石亭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뛰어난 경치가 있는 고을임을 알 수 있다. 읍치 오른쪽의 서원은 중종 때의 名臣이고 己卯士禍(1519) 때 능주로 귀양와 사약을 받은 조광조를 배향한 竹樹書院으로서 1570년(선조 3)에 賜額되었다. 지도 왼쪽 아래쪽에는 千佛天塔으로 유명한 雲住寺 터가 雲住塔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 때에는 절이 廢寺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쪽의  峯寺는 신라 선종 9山門의 하나인 獅子山派를 개창한 澈鑒禪師 道允의 舍利塔과 塔碑가 있는 곳이다. 기타 이 지역의 특산물인 대나무를 생산하던 竹田이 특별히 두 군데나 표시되어 있음이 독특하고, 읍치 아래쪽의 雲山은 아주 작인 산임에도 불구하고 이 고을의 鎭山으로 되었음이 재미있다.(이기봉)

  • 담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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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현은 담양군 담양읍, 봉산면, 무정면, 대덕면, 금성면, 용면, 월산면 지역으로서 읍치는 담양읍 객사리, 향교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와 金城山城을 제외하면 산천과 면만을 표시한 매우 간단한 지도로서 구체적인 내용은 여백 주기에서 보완하고 있다. 지도에는 사방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들을 받고, 현 한가운데를 지나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영산강 상류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지도의 오른쪽 위쪽에 있는 金城山城은 원래부터 있던 石城을 임진왜란을 겪고 난 1597년(선조 30)에 개축하고, 1653년(효종 4)에 중수하여 담양, 순창, 옥과, 창평 등을 관할하게 한 성으로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정비된 국방체제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금성산성에는 金城寺가 있어 평상시의 산성관리를 행하게 하였으며, 조선초부터 金城山神祠가 있어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기타 여백 주기의 祠廟조에 있는 義岩書院은 1568년(선조1)부터 1577년(선조 10)까지 10년간의 公的, 私的 사실을 기록한, 조선 최대의 일기인 ≪眉巖日記≫의 저자 柳希春(1513-1577)을 배향한 서원으로 위치는 담양이 아닌 창평면 의항리에 있었다.(이기봉)

  • 동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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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복현은 지금의 화순군 동복면, 이서면, 남면, 북면 일대로 읍치는 동복면 천변리, 독상리에 있었다. 동복천이 동쪽의 높은 봉우리들로부터 흘러내린 작은 하천들을 아우르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 보성강으로 빠져나간다. 동복천 일대는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며 지도에서도 赤璧, 萬瀑臺, 姑蘇臺, 鳳凰臺 등의 기암절벽과 勿染亭, 滄浪亭, 流玉亭 등의 정자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지금은 동복댐이 만들어져 호수가 되었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三韓古城은 지금의 동복면 북쪽 옹성산에 있는 산성으로 사방이 깍아지른 절벽의 천연 요새로 되어 있으며,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까지 석대, 돌기둥 등이 남아 있었다. 읍치 북쪽의 도원서원은 1670년(현종 11)에 만들어지고 1687년(숙종 13)에 사액받았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동쪽의 높은 산줄기와 서쪽의 동복천 물줄기가 실제 지세와 거의 비슷하게 제작되었으며, 현의 진산인 母后山이 동남쪽에 가장 크게 그려져 있고 여백의 주기는 아주 간략하게 처리되었다.(이기봉)

  • 만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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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김제시 만경읍, 청하면, 공덕면, 성덕면, 진봉면, 광활면과 군산시 옥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만경읍 만경리에 있었다. 현 전체가 광활한 평지에 있기 때문에 높고 큰 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산들이 봉긋봉긋 연결된 형태로 그려져 있다. 특히 현 서쪽의 進鳳山 ·泥波山·加釵山은 실제 높이가 80m도 안 되는 작은 산임에도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어 지도가 만들어진 18세기경의 산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서쪽의 섬들은 현재의 군산시 고군산군도에 해당되며 경상·전라의 漕運船이 통과하는 해로상의 險路였다. 따라서 지금의 선유도에 설치된 古群山鎭 첨사는 일상적인 해양 경비와 함께 조운선의 안전 운항에 관한 보조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또한 바닷길과 여러 암초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여백 주기에도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 고군산도는 고려 때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남송이 된 후에는 양쯔강 하류 항주와 연결되는 중요한 使臣路의 기착지가 되기도 했다. 입석산 뒤쪽으로 烽燧가 표현되어 있고 도로상의 여러 다리가 자세히 그려져 있는 점도 눈에 띈다.(이기봉)

  • 무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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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안현은 삼향면, 해제면, 망원면, 운남면, 현경면 일부를 제외한 무안군 전체와 목포시, 함평군의 엄다면, 학교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안읍 성내리에 있었다. 영산강이 南流하다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바다로 들어가며, 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최남단 목포까지 현의 가운데를 관통한다. 읍치 서쪽의 松林書院은 광해군 때 廢母論을 반대하다 무안으로 유배되어 사망한 金權을 배향하고 있으며 1682년(숙종 8)에 사액받았다. 읍치 서남쪽의 僧達山이 고을의 鎭山인데 고려 때 원나라 중 圓明과 그의 제자 500명이 이곳에 와서 도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원명이 머물렀던 절이 산 아래의 法泉寺이다. 그 왼쪽의 胎峯에는 단종의 태가 묻힌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지도 아래쪽의 木浦鎭은 종6품 萬戶가 파견되었으며, 唐串은 충무공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왜군을 물리친 후 비축된 군량미를 나주 高下島에 비치하였다가 1647년(인조 25)에 옮긴 곳이다. 駐龍津에는 조선 초까지 龍津溟所라 하여 고을에서 봄·가을로 제사지내던 곳인데 ≪輿地圖書≫와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무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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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현은 고창군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심원면과 아산면의 일부지역으로 읍치는 무장면 성내리, 무장리, 교흥리 일대에 있었다. 무장현은 1417년(태종 17) 읍치 남동쪽의 茂松縣과 서북쪽의 長沙縣을 합쳐 만들어졌으며 새로운 읍치는 두 현의 중간으로 결정되었다. 현의 실제 모양은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비스듬하게 서해를 향하고 있는데 지도에서는 거의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묘사하였다. 따라서 지도의 읍치 동남쪽이 실제로는 바다와접해 있지 않음에도 바다와 접해 있는 것으로, 읍치 동북쪽 부분도 확대·과장되어 그려져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禪雲山은 ≪高麗史≫ 樂志에 나오는 禪雲山曲의 무대이며, 높이는 300-400m에 불과하지만 북쪽 곰소만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어 신령스러운 느낌을 발산하기 때문에 禪雲寺를 비롯한 많은 절들이 곳곳에자리잡고 있다. 읍치 서쪽의 忠賢祠는 1608년(선조 41)에 세워지고 광해군이 친필로 사액한 서원으로 ≪眉岩日記≫로 알려진 柳希春 등이 배향되었다. 기타 읍성과 각종 관아 건물 및 남문밖에 있었던 觀豊亭이 연못과 함께 그려져 있고 烽臺, 靑松驛 등도 보인다.(이기봉)

  • 무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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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부는 지금의 부남면을 제외한 무주군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주읍 읍내리에 있었다. 무주부는 1391년(공양왕 3)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쳐 만들었고, 1414년(태종 14)에 주계를 治所로 삼았는데 무풍현은 지도 동북쪽 풍서면, 풍동면, 풍남면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도 가운데에는 五大史庫 중의 하나였던 적상산 사고가 적상산성의 天然要塞적 모습과 함께 자세히 그려져 있다. 산성 안에는 왕실의 계보가 안치된 선원각과 왕조실록이 보관된 사고 및 객사가 그려져 있어 史庫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읍치 남쪽에는 加玉洞酒幕이 표시되어 있어 관에서 운영하는 驛院뿐만 아니라 사적으로 운영되어 길손의 편의를 돕던 시설도 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기타 읍내에는 향교·객사·아사뿐만 아니라 1706년(숙종 32)에 세운 喚垂亭 등의 정자와 敎場, 주자영당 등이 그려져 있고, 읍의 진산인 향로봉이 향교 뒤에 그려져 있다.(이기봉)

  • 보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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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군은 벌교읍, 웅치면, 회천면을 제외한 보성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보성읍 보성리 일대에 있었다.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강이 고을의 남쪽 바닷가 근처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 뒤쪽에는 고을의 鎭山인 德山이 그리 높지 않은 산임에도 크게 강조되어 있고 그로부터 뻗어 나온 산들의 이름이 자세하다. 또한 읍치 주변의 물줄기가 실제로는 남북으로 흐름에도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 읍치가 풍수적 명당임을 보여주려 했음을 엿볼 수 있다. 보성군에는 폐현이 2개가 있었는데 읍치 북쪽의 福內面은 福城폐현, 동쪽의 兆內面은 兆陽폐현의 흔적이 면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읍치 왼쪽에는 이 고을 사람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운 安邦俊을 배향한 大溪書院과 이 고을 郡守를 지냈고 정유재란 때 이순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安弘國을 배향한 旌忠祠, 오른쪽 兆內面에는 이 고을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운 朴光前을 배향한 龍山書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 숙종 때 賜額을 받아 17세기말-18세기초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지도에는 세종 때의 名臣 黃喜의 影堂이 있었던 大原寺를 비롯하여 지도 제작 당시에 있었던 절 세 개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부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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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현은 백산면을 제외한 부안군 전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부안읍 서외리, 동중리 일대에 있었다. 부안현은 1416년(태종 16) 扶寧縣과 保安縣을 합해 만들어졌는데 부령현은 부안 읍치쪽, 보안현은 현 남쪽 입하면, 입상면 일대에 있었다. 현의 서남부는 현재 국립공원인 변산의 우뚝우뚝 솟은 기암절벽 명산들이 잘 그려져 있으며, 신라의 惠丘頭陀가 창건했다는 來蘇寺와 고려 숙종 때 圓鑑國師가 개창했다는 開巖寺 등의 절들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북·서쪽으로는 고부천과 동진강이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낸 저평한 모습이 서남부와 대비되어 이해될 수 있도록 표현되었다. 현의 남쪽에는 종3품 僉使가 파견된 위도진, 종4품 萬戶가 파견된 검모진, 종5품 別將이 파견된 격포진 등이 전선과 함께 표시되어 있고, 月古里烽臺, 界火島烽燧 등이 그려져 있어 군사적 요충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격포진에는 내륙으로 쑥 들어온 천혜의 항구 모습이 잘 그려져 있고 안쪽에는 숙종 때 쌓았던 제방 같은 것이 보인다. 이 곳은 일찍부터 입구에 제방을 쌓아 간척된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이며, 기타 왼쪽 위쪽에 지금은 간척되어 육지가 되어버린 계화도가 보이고 있다.(이기봉)

  • 순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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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창군은 동계면의 일부를 제외한 순창군 전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순창읍 순화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내장산을 비롯한 서쪽의 여러 산에서 발원한 물들이 산줄기 사이사이를 돌아 동쪽 섬진강 본류로 들어가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고, 山川조의 追山에 써 있듯이 지도 맨 위쪽의 回文山으로부터 읍치 북쪽의 鳳棲山까지 산줄기가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이 보인다. 읍치 오른쪽의 적성면은 赤城폐현, 왼쪽의 복흥면은 福興폐현의 흔적이며, 읍치 위쪽의 산성은 軍倉이 있었던 大母山城이다. 읍치오른쪽의 華山書院은 邑誌에는 花山書院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급제하여 벼슬이 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단종 양위 후 벼슬을 버리고 이 고을 순창에 내려와 歸來亭을 짓고 산수를 즐기며 살았다는 신숙주의 동생 申末舟 등이 배향된 서원이다. 읍치 서남쪽의 赤城津은 남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인데, 山川조에 보면 속설에 물이 맑고 깊어 神物이 있다고 하여 비가 오지 않으면 祈雨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전통 민간신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기봉)

  • 순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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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부는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을 제외한 순천시 전체와 여수통합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순천시내 영동, 저전동, 옥천동 일대에 있었다. 순천부는 북쪽의 富有縣, 남쪽의 麗水縣, 突山縣이 고려, 조선초를 거치면서 합속되어 큰 고을이 되었다. 지도에는 全羅左水營과 古突山鎭, 防踏鎭이 城, 船倉, 戰船 등과 더불어 자세히 표시되어 있고, 읍성 안에는 전라도 동남쪽을 관할하던 前營이 그려져 있어 순천부가 전라도 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좌수영 왼쪽에는 忠武公碑閣이, 오른쪽 위쪽에는 李舜臣 등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전사한 충신들을 배향한 忠愍祠가, 읍치 아래쪽에는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張潤을 배향한  忠祠가 표시되어 있어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古突山鎭 옆에 있는 牧場은 曲華場으로서 監牧官이 파견되어 突山島場, 猫島場 등을 함께 관할하였다. 읍치 서북쪽 조계산 밑에 있는 松廣寺는 통도사, 해인사와 더불어 天下三寶의 하나로 유명하며, 보조국사 이후 15국사가 나와 僧寶宗刹이라고도 불리고 지금도 국보 3점을 비롯한 수많은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 그 밑의 仙岩寺는 신라 말기 도선에 의해 창건되고, 1,092년(선종 9) 大覺國師 義天이 중건한 절로서 현재도 수많은 보물이 위치한 유서 깊은 절이다.(이기봉)

  • 여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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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부는 지금의 익산시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과 논산군 연무읍 남쪽부분에 해당하며 읍치는 여산면 여산리에 있었다. 여산부는 조선초에 礪良縣과 朗山縣이 합쳐져 된 고을로서 동남쪽이높고 서북쪽은 금강의 넓은 들과 연결되어 낮다. 지도에서는 동쪽에 있는 고을의 진산 天壺山을 위쪽으로 하였으며, 읍치를 겹겹이 둘러 쌓인 풍수적 모습으로 그렸다. 지도 왼쪽의 강은 금강이고 읍치에서 나온 물이 금강과 만나는 곳이 지금의 강경읍 黃山村이다. 黃山에서는 인조 때 낙향한 沙溪 金長生(1548-1631)이 이황, 이이, 성혼을 향사한 黃山書院과 八卦亭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의 제자 송시열은 西人 계열의 거두가 되었다. 김장생이 추가로 배향된 후 1655년(현종 6)에 竹林書院으로 賜額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송시열도 배향되었다. 黃山은 조선후기에는 강경포와 더불어 금강 연안에서 제일 번성한 포구로도 유명하다. 읍치 왼쪽의 皇華亭은 전라도의 新舊 관찰사들이 교대하던 장소로서 지금의 논산군 연무읍 황화정리이다.(이기봉)

  • 영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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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군은 현재의 영광군 전체와 신안군의 임자면·증도면, 무안군의 망운면·운남면과 장성군의 삼계면·삼서면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영광읍 무령리에 있었다. 영광군은 원래 세 개의 현이 합쳐진 것으로 동쪽의 현내면은 고려 때 영광에 속하게 된 森溪廢縣의 땅이고, 읍치 남쪽 동서로 뻗은 하천유역은 신라 碣島縣의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법성진은 영광 굴비로 유명한 곳으로 매년 봄 京外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바다 위에서 조기를 팔고 사던 波市田이 성황을 이뤘던 곳이며,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밀고 들어와 마치 호수와 같다 하여 大西湖라고도 불렸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으며, 전라도 12개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수집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법성창이라는 漕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래쪽의 임자진과 다경포진에는 각각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와 종4품의 萬戶가 파견되었으며, 두 지역 모두 나라에서 말을 키우던 牧場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다경포진 오른쪽에 나주목 소관이었던 목장이 표시되어 있다. 다경포진과 망운면 지역은 영광군의 월경지로서 지금의 무안군 망운면과 운남면에 해당하며 원래는 望雲部曲이 있던 곳이다. 그밖에 서원과 절, 창, 봉수 등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영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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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군은 지금의 금정면, 신북면·시종면 북쪽을 제외한 영암군 전체와 해남면의 옥천면, 북일면, 북평면, 송지면 그리고 완도군의 보길도 부근 도서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암읍 동무리, 서남리에있었다. 지도에는 서쪽이 위쪽을 향하고 있는데 읍치의 坐向을 고려한 결과로 보이며, 읍치의 성곽이 확대·과장되어 다른 부분은 상당히 축소되어 그려졌다. 신라 때 小祀에 해당되었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山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 월출산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산 안쪽의 道甲寺는 풍수지리설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道詵國師가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했던 절로서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도선국사와 관련된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읍치 위쪽의 곤일면과 곤이면은 고려 때 영암에 완전히 속하게 된 昆湄縣 지역이며, 읍치 왼쪽의 옥천면, 북평면, 송지면은 각각 冷泉部曲, 北平鄕, 松首鄕이 있었던 지역으로 실제로는 해남현의 땅을 넘어 있는 越境地에 해당한다. 기타 於蘭鎭, 梨津鎭 등이 지도의 왼쪽에 보이며, 그 옆으로 보길도 주변의 섬들이 실지보다 작은 형태로 그려져 있다. 갈두진은 이미 폐지되었으나 주기에 그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옥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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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과현은 곡성군 옥과면, 입면, 겸면, 오산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읍치는 옥과면 옥과리 일대에 있었다. 옥과천이 사방의 산에서 물을 받아 현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동북쪽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간략하게 그려져 있는데, 실제 고을의 형태가 사각형 모양이 아님에도 전체적인 안정감을 위해 네모난 형태로 그린 듯하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雪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가 포근히 감싸안은 풍수적 명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여백 주기의 佛宇조에는 여러 개의 절이 표시되어 있음에도 觀音寺 하나만 표시되어 있고, 역은 표시하였지만 원은 표시하지 않는 등 매우 간략한 지도이다. 기타 관음사 위쪽에 깊고 험한 埋伏處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옥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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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구현은 지금의 군산시 시내와 옥구읍, 옥서면, 옥산면, 회현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옥구읍 상평리에 있었다. 고을의 북쪽은 금강하구이고 서쪽은 황해, 남쪽은 만경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고을의 산들은 높아야 120m밖에 안 되는 낮은 산들임에도 굵고 웅장하게 표현하여 고을의 위엄을 높여주고 있으며, 특히 읍치 뒤쪽의 산과 그로부터 뻗어 내린 산세는 더욱 웅장하게 표현하여 읍치 공간을 부각시키고 있다. 지도 위쪽에는 群山鎭이 보이는데 원래 만경현의 古群山群島에 있던 것을 해적의 침입 때문에 옮긴 것으로 처음에는 水軍萬戶가 파견되다가 1700년(숙종 26) 종3품관인水軍僉節制使로 승격되었다. 군산진 옆의 七邑海倉은 원래 용안현 得成倉에서 관할하던 고을 중 옥구, 전주, 태인, 금구, 임실, 진안, 장수 등의 7개 고을 조세를 모아 서울 京倉으로 보내던 漕倉이었다. 그 옆의 雪林山 아래 隱寂菴 부근은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협공할 때 황해를 건너온 소정방 부대 12만명이 정박했던 곳으로 전해진다.(이기봉)

  • 용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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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현은 지금의 진안군 용담면, 주천면, 동향면, 안천면, 정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용담면 옥거리에 있었다. 금강이 현의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으나 큰 들이 없고 산과 물 사이에 어우러진 골짜기의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져 있다. 용담현에는 금강으로 흘러드는 큰 하천이 세 개 있는데 지도에 보이는 朱子川, 程子川과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輿地圖書≫에 보이는 동면 지역의 顔子川이 그것이다. 또한 읍치 서쪽의 三川書院은 顔子, 程伯子, 程叔子, 朱子와 諸葛亮을 배향한 서원으로 1667년(현종 8)에 세워지고 1679(숙종 5)에 사액받았다. 세 하천이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삼천서원이 17세기 후반에 세워진 사실을 볼 때 16-7세기를 지나며 확고해진 유교적 양반사회의 모습이 지도에도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서남쪽에 있는 馬山은 실제로는 작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산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는데 여백의 사묘조에 보이는 熊津溟所祠의 산천제사와 관련이 있다.(이기봉)

  • 용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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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안현은 지금의 익산시 용안면과 용동면에 있었던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용안면 교동리에 있었다. 용안현은 원래 함열현에 딸린 道乃山銀所였는데 1321년(고려 충숙왕 8) 이 고장 사람 伯顔夫介가 원나라에 공이 있어 현으로 승격되고, 1391년(고려 공양왕 3) 지금의 용동면에 있었던 전주의 屬縣 豊儲縣을 합해 만들어진 특이한 역사를 가진 고을이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남동쪽으로는 금마면 미륵산에서 발원한 부곡천이 흐르는데, 이 부곡천변과 읍치 오른쪽 하천변은 밀물 때면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갈대가 무성했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海倉이 있는 곳은 조선 초에 得成倉(그 이전에는 德成倉이라 불렀음)이 있었던 곳으로 물길이 막혀 함열현으로 옮겼다가 1482년(성종 13)에 다시 옮겼다. 이후 8개 고을은 맞은편 함열의 聖堂倉에서, 7개 고을은 옥구의 군산창에서 맡게 하고 나머지 용안, 임피, 김제, 만경, 여산, 금산, 무주 등의 조세를 받아 서울로 옮기던 漕倉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용안면 난포리이다.(이기봉)

  • 운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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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봉현은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아영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고 읍치는 운봉읍 동천리, 서천리 일대에 있었다. 서·남쪽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동쪽 남강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水系 상으로는 낙동강 유역권에 속하며, 문화적으로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점이지대적 성격을 보인다. 또한 남원 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동쪽 경상도와도 두터운 산지로 막힌 고원형 지형을 이루고 있어 삼국간 경쟁이 치열했을 때 백제와 신라 사이의 중요한 要衝地였다. 이런 흔적으로 백제와 신라간 중요한 관문이었던 팔량치 등의 險隘를비롯하여 여러 개의 古城터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객사 오른쪽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碑殿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을 기념하는 비석을 보호하는 전각이고 선종 9산의 하나로 828년(흥덕왕 3년) 증각대사에 의해 세워진 실상사가 왼쪽 아랫부분에 보이고 있다. 기타 군사적 요충지임을 보여주는 埋伏處가 표시되어 있으며, 제언이 자세하고 산세가 전반적인 지형을 잘 보여주는 지도라고 할 수 있다.(이기봉)

  • 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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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군은 지금의 익산시 금마면, 삼기면, 춘포면, 왕궁면의 일부와 익산시내 팔봉동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마면 동고도리에 있었다. 고을의 산세는 미륵산과 용화산을 제외하면 야트막한 언덕 정도에 불과함에도 산세가 이어지며 강조되어 있어 山脈의 흐름을 중요시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彌勒山의 箕準古城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 準王이 衛滿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배를 타고 들어와 성을 쌓고 馬韓을 세운 곳으로 전해진다. 미륵산 앞쪽의 彌力面에는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지가 있는 곳이지만 지도에서는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왼쪽 五金山에 있는 성은 고구려 유민 劒牟岑이 安勝을 君으로 삼아 신라문무왕으로부터 報德王란 칭호를 얻어낸 후 고구려 부흥운동을 하던 곳으로서 일반적으로 報德城으로 불린다. 또 읍치 아래쪽의 王宮塔은 현재 보물 4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5층석탑으로서 부여의 정림사지 5층석탑을 모방하여 고려시대의 지방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소재로서 등장하고 있다. 기타 미륵산 아래쪽의 華山書院은 김장생과 송시열을 배향하여 현종 때 사액받았으며, 그 왼쪽의 南村書院은 고려 공민왕 때의 충신이며 이 고을 사람인 李公遂 등을 배향했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다.(이기봉)

  • 임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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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현은 지금의 임실군 임실읍, 성수면, 관촌면, 신덕면, 신평면, 운암면, 강진면, 덕치면, 청웅면, 오수면 북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실읍 성가리 일대에 있었다. 섬진강 줄기가 동북쪽의 진안으로부터 들어와 여러 지류들을 합하며 현 전체를 휘감고 동남쪽 순창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지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읍치는 鎭山인 龍繞山을 비롯한 산줄기와 섬진강 물줄기가 잘 어우러진 풍수상의 명당형국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과장·확대되어 있다. 고적조에나오는 구고폐현은 1394년(태조 3)에 편입된 후 읍치 서쪽에 구고면이란 이름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겨울에는 다리(橋)를 놓고 여름에는 외나무다리( )를 놓았다는 갈담교, 마항교, 오원교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으며 읍 앞쪽의 작은 다리는 廣濟橋이다. 기타 원, 창, 서원, 절 등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임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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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피현은 지금의 군산시 임피면, 대야면, 개정면, 성산면, 나포면, 서수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피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남쪽에는 동진강이, 북쪽에는 금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가며, 전주에서 군산까지 허허벌판을 달리다 이곳에서 200m이상의 산지가 등장한다. 지도에는 동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고을 곳곳으로 이어져 있으며, 읍치는 북쪽에 우뚝 솟은 鷲城山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사방으로 포근히 감싸안고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이 쉽게 이해된다. 읍성은 조선 초에 최윤덕이 전라도 巡問使가 되어 지역을 순시하다가 주현의 장정 16,900여명을 동원하여 만든 성으로 성안에물과 샘이 많아 요해처의 방비시설로 삼았다 한다. 읍치 남쪽의 鳳岩書院은 김장생의 아들이고 임피 현감을 지낸 金集 등을 배향하여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기타 읍치 아래의 남이면에는 바닷가에 솟아난 두 개의 큰 바위가 立石으로 표시되어 있어 어떤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이기봉)

  • 장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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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부는 삼계면, 삼서면, 동화면을 제외한 장성군의 지역으로서 읍치는 장성읍 성산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전라도의 다른 지도와 달리 읍치를 특별히 강조하지도 않고 풍수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은 점이 독특하다. 지도 왼쪽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大蘆嶺, 小蘆嶺은 전라도 남과 북을 잇는 가장 중요한 要衝地이다. 그 옆에 있는 笠岩山城은 조선 초까지는 석성터만 남아 있던 곳인데 임진왜란을 겪은 후 1597년(선조 30)에 대대적으로 修築한 곳으로, 지도에서도 특별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어 임진왜란 이후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장성부는 조선 초까지도 長城縣과 珍原縣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두 고을이 衰殘하자 합쳐서 하나로 만들고, 유사시 장성, 광주, 나주, 고창, 정읍, 태인을 관할하던 입암산성의 수성장을 이 고을 수령이 겸하게 됨에 따라 1655년(효종 6)에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장성에는많은 서원이 있었는데 乙巳士禍(1545) 후 고향 장성에 돌아와 성리학을 연구한 金麟厚를 배향하여 현종 때 사액받은 筆岩書院만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았다.(이기봉)

  • 장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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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현은 지금의 장수군 장수읍, 천천면, 계남면, 장계면, 계북면 일대로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에 있었다. 지도에서는 금강 최 상류 물줄기가 현의 서쪽으로 치우쳐 남북으로 흐르며 동쪽 백두대간으로부터 여러 물들을 합하는 지형적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조선 초에 장수현에 폐합된 장계현은 임현내면, 임남면, 임북면 등의 지역으로 물줄기와 산줄기에 의해 장수 지역과 구분됨이 지도에서 분명히 보이며, 면 이름에서도 옛 장계현의 땅이었음을 남기고 있다. 현 동쪽에 경상도 안음현과의 경계로 표시된 六十峙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간 요해처로서 이후 도적이 많아 행인 60명이 모여야만 안전하게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蒼溪書院은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며 본관이 장수인 황희와 그 아들 황수신, 기타 유호인, 장응두 등을 배향하고 황희의 영정을 안치한 서원이며, 기타 절, 창, 원, 고개, 제언 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여백에는 연혁, 고적, 불우 등이 상세히 적혀 있지만 지도에 다르게 표시된 것이 있어 옛 문헌을 베낀 흔적이 보인다.(이기봉)

  • 장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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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장흥군 전체와 보성군의 웅치면, 회천면 그리고 완도군의 동쪽 섬들에 해당하며, 읍치는 장흥읍 남동리, 동동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위쪽의 장서면과 장동면은 長澤폐현의 땅이었고, 오른쪽의 회령면은 會寧폐현의 흔적이다. 고을의 읍치는 원래 遂寧폐현의 자리였으며, 古長興은 天冠山 근처에 있었다. 탐진강이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감아 돌며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제와 비슷하게 잘 그려져 있다. 동북쪽의 물줄기는 섬진강의 지류 보성강의 상류이다. 지도 위쪽의  林寺는 860년(헌안왕 4)에 普照禪師가 세운 절로서 신라 말기 선종 九山門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국보 44호 삼층석탑과 보물 158호 普照禪師彰聖塔碑 등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지도 아래쪽의 천관산은 해안가에 우뚝 솟은 험한 산으로 고을에서는 神祠를 두어 봄·가을로 제사지냈고, 산밑에는 신라 때 만들어진 天冠寺가 보인다. 읍치 오른쪽의 碧沙驛은 9개의 屬驛을 가진 察訪驛이었으며, 지도 아래 해안가에는 정4품 水軍萬戶가 파견된 會寧鎭이 보이고 있다. 기타 7개의 서원과 사당이 표시되어 있어 임란 이후 향촌사회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게 한다.(이기봉)

  •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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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는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및 충청남도 금산군에 해당하며, 관찰사 소재지인 감영은 전주에 있었다. 지도에는 전라도에 속한 57개 고을이 표시되어 있으며, 25개의 鎭과 해남군 문내면에 있었던 右水營, 여수시 시내에 있었던 左水營, 강진군 병영면에 있었던 兵營이 보이고 있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靑岩, 景陽, 獒樹, 碧沙는 여러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지도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각 지역의 山城인데 이들 산성은 조선 초까지는 거의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여러 郡縣의 집단적 방어를 위한 거점으로 삼기 위해 대대적으로 修築한 곳이다. 하천은 맨 위쪽에 금강하류, 금강상류가 충청도 부분이 절단된 채 표시되어 있으며,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섬진강 등이 비교적 실제 모양에 맞게 잘 그려져 있다. 산의 표현은 계속적으로 이어진 선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지도 오른쪽의 백두대간으로부터 전지역이 거의 연결된 형태로 그려져 있어 강의 유역권을 이해하는데 편리하게 만들었다. 산의 크기는 높낮이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지역이 평지인지, 산지인지가 잘 구분되지는 않는다. 섬은 크고 중요한 몇 개를 제외하면 섬의 크기와 상관없이 대략적인 위치만을 알 수 있도록 표현하여 섬의 존재유무만을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이기봉)

  • 전라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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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는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및 충청남도 금산군에 해당하며, 관찰사 소재지인 감영은 전주에 있었다. 지도에는 전라도에 속한 57개 고을이 표시되어 있으며, 25개의 鎭과 해남군 문내면에 있었던 右水營, 여수시 시내에 있었던 左水營, 강진군 병영면에 있었던 兵營이 보이고 있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靑岩, 景陽, 獒樹, 碧沙는 여러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지도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각 지역의 山城인데 이들 산성은 조선 초까지는 거의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여러 郡縣의 집단적 방어를 위한 거점으로 삼기 위해 대대적으로 修築한 곳이다. 하천은 맨 위쪽에 금강하류, 금강상류가 충청도 부분이 절단된 채 표시되어 있으며,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섬진강 등이 비교적 실제 모양에 맞게 잘 그려져 있다. 산의 표현은 계속적으로 이어진 선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지도 오른쪽의 백두대간으로부터 전지역이 거의 연결된 형태로 그려져 있어 강의 유역권을 이해하는데 편리하게 만들었다. 산의 크기는 높낮이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지역이 평지인지, 산지인지가 잘 구분되지는 않는다. 섬은 크고 중요한 몇 개를 제외하면 섬의 크기와 상관없이 대략적인 위치만을 알 수 있도록 표현하여 섬의 존재유무만을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이기봉)

  • 전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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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부는 지금의 전주시와 완주군의 봉동읍, 삼례읍, 이서면, 구이면, 상관면, 소양면 그리고 익산시 시내와 오산면을 포괄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전주시 중동, 경원동, 풍남동 일대에 있었다. 전주는 전라도 관찰사가 주재하던 監營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 읍성은 동학농민 전쟁 때 격전지로서 잘 알려져 있으며, 일제에 의해 1907년 모두 헐리고 지금은 남문인  南門만이 남아 있다. 읍성 안쪽의 眞殿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라 하여 이성계의 御容을 奉安한 곳으로 1422년(세종 4)에 慶基殿으로 고쳐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읍성 위쪽의 건지산은 실제로는 매우낮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고을의 鎭山이기 때문에 지도에서도 강조되어 그려져 있으며, 건지산 왼쪽의 德津堤는 전주의 지세가 북쪽이 공허하여 氣脈이 흘러나간다는 설에 의해 건지산과 가련산 사이에 인공적으로 둑을 세워 만든 호수로서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오른쪽의 威鳳山城은 1675년(숙종 1)에 성을 쌓고 行宮을 설치했던 곳으로 지도에서는 이 행궁이 別殿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察訪이 파견되어 12개의 屬驛을 거느린 參禮驛이 지도 위쪽에 館舍와 함께 표시되어 있고, 후백제의 수도였음을 알려주는 甄萱古城이 읍치 아래쪽에 보인다. 전주의 옛 이름이 비롯된 完山이 읍성 아래쪽에 거대한 바위 모양으로 그려져 있고, 그 아래쪽의 胎峯은 조선의 8대 임금 睿宗의 태가 묻힌 곳으로 겹겹이 쌓인 산줄기의 모습으로 표시되어 있다. 기타 西一道面, 南一道面, 南二道面 지역은 옛 沃野縣 지역으로서 지금의 익산시내 남쪽과 오산면 일대에 있었던 월경지이며, 利西面, 利北面, 利東面은 옛 利城縣 자리로서 지금의 김제시 청하면 부근에 있었던 월경지이다.(이기봉)

  • 정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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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현은 지금의 정읍시 시내와 북면, 입암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연지동, 미창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 하천은 현재의 정읍천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동진강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지도는 서쪽이 아래쪽, 동쪽이 위쪽을 향하고 있는데 고을의 주산인 鷹山이 읍치의 동쪽에 있어 읍치의 坐向을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蘆嶺은 옛날부터 전라도 남북을 잇는 중요한 要衝地였는데 고개 위쪽의 笠巖山城은 노령의 방어와 관련된 산성이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가을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의 모습이 수많은 바위가 솟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안쪽에는 지금은 내장사라 불리는 靈隱寺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의 考巖書院은 西人의 거두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 제주로 귀양갔다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사망하였기 때문에 1695년(숙종 21)송시열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같은 해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忠烈祠는1689년(숙종 15)에 세워지고 충무공 이순신 등을 배향했다.(이기봉)

  • 제주삼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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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목은 지금의 제주시와 북제주군이며 읍치는 제주시 삼도동 일대에 있었다. 대정현은 지금의남제주군 대정읍·안덕면·서귀포시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대정읍 안성리·인성리·보성리 일대에 있었다. 정의현은 남제주군 성산읍·표선면·남원읍·서귀포시 동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표선면 성읍리에 있었다.지도의 아래쪽에는 전라도 남해안의여러 고을, 오른쪽에는 중국 북부해안이 표시되어 있고, 위쪽에는 중국 남부해안 및 현재의 베트남인 安南國과 오끼나와인 琉球國, 일본의 一岐島 등이, 오른쪽에는 일본 본토와 對馬島가 적혀 있다. 지도에서는 고을의 鎭山인 한라산의 白鹿潭이 강조되어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음이 눈에 뜨이고, 거대한 무덤처럼 수없이 솟아있는 寄生火山 오름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들이 해안가로 줄지어 내려가는 모습도 그려져 있는데, 이런 하천은 화산 폭발에 의한 多孔質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乾川이 대부분이다. 한라산을 둘러싸고 一所부터 十所까지 노란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는 곳은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서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가에도 여러 개의 馬場이 보이고 있다. 기타 해안가의 전략적 요충에 수많은 烽臺가 만들어져 해안 감시를 맡게 하였으며 古縣과 각종 마을 이름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이기봉)

  • 제주삼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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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지도보다 산과 하천의 표현이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었음이 눈에 띈다. 白鹿潭은 여전히 부각되어 있으나 가운데의 우뚝 솟아 동서로 걸쳐 있는 한라산의 모습이 강조되고 기타 오름은 작은 크기로 표현되었다. 한라산 산간 중턱에 있는 여러 목장이 울타리가 쳐진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果樹園의 표시도 자세하다. 앞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읍성이 굴곡의 모양까지도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특히 제주 읍성 안에는 여러 관아시설을 상세하게 표현하였다.이런 건물 중 김상헌·송시열을 비롯하여 제주에 귀양왔던 여러 사람을 배향하고 1682년(숙종 8)에 賜額받은 제주 유일의 橘林書院도 보인다. 읍성 위쪽으로는 제주 탐라국의 조상으로 받들어지는 良乙那, 高乙那, 夫乙那가 나왔다는 三姓穴이 毛興穴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 三姓에게 제사지내던 三姓壇의 모습도 보인다. 그 위쪽으로는 한라산의 護國神에게 제사지내던 廣壤壇이 있다. 해안가에는 대규모의병력이 상륙할 수 있는 지점에 성을 쌓아 병졸을 주둔시키던 防護所를 자세히 그렸는데, 제주 읍성 왼쪽의 朝天館은 제주도에서 본토로 떠나는 배들이 출발하던 곳으로서 배의 모습을 그려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기타 烈女門 2개, 孝子門 1개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고 涯月所 위쪽으로는 고려 때 몽고에게 항복하기를 반대하여 끝까지 저항했던 三別抄의 고성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제주삼현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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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목은 지금의 제주시와 북제주군이며 읍치는 제주시 삼도동 일대에 있었다. 대정현은 지금의남제주군 대정읍·안덕면·서귀포시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대정읍 안성리·인성리·보성리 일대에 있었다. 정의현은 남제주군 성산읍·표선면·남원읍·서귀포시 동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표선면 성읍리에 있었다.지도의 아래쪽에는 전라도 남해안의여러 고을, 오른쪽에는 중국 북부해안이 표시되어 있고, 위쪽에는 중국 남부해안 및 현재의 베트남인 安南國과 오끼나와인 琉球國, 일본의 一岐島 등이, 오른쪽에는 일본 본토와 對馬島가 적혀 있다. 지도에서는 고을의 鎭山인 한라산의 白鹿潭이 강조되어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음이 눈에 뜨이고, 거대한 무덤처럼 수없이 솟아있는 寄生火山 오름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들이 해안가로 줄지어 내려가는 모습도 그려져 있는데, 이런 하천은 화산 폭발에 의한 多孔質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乾川이 대부분이다. 한라산을 둘러싸고 一所부터 十所까지 노란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는 곳은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서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가에도 여러 개의 馬場이 보이고 있다. 기타 해안가의 전략적 요충에 수많은 烽臺가 만들어져 해안 감시를 맡게 하였으며 古縣과 각종 마을 이름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이기봉)

  • 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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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진도군 일대로서 읍치는 진도읍 성내리에 있었다. 읍성위쪽의 고군내면 古城基가 옛 진도의 중심지였고, 지도상의 읍치는 嘉興폐현 자리에 새로 조성한 것이며, 아래쪽 임회면은 臨淮폐현의 흔적이다. 지도 위쪽의 命山面은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일대, 오른쪽의 三寸面은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일대의 越境地이다. 碧波亭은 고려 때 만든 정자로서 진도에서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三枝院으로 건너가는 요충지에 지어졌으며, 그 왼쪽의 綠津은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해남현의 右水營과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읍치 남쪽에는 나라에서 필요한 목재를 조성하기 위해 벌채를 금지한 封山이 4개나 보이고 있다. 지도 서남쪽 끝의 智力山에는 조선 초에 목장이 설치되고 監牧官이 파견되어 진도 내의 南桃浦, 尖察山, 富智山의 屬場을 거느렸으나 감목관은 나중에 해남의 黃原場으로 옮겨갔다. 지도 아래쪽에는 각각 정4품 萬戶가 파견된 金甲鎭과 南桃鎭이 그려져 있고, 그 사이에 沙仇味烟臺, 上堂串烟臺, 屈浦烟臺가 연속적으로 보이고 있는데 1622년(광해군 14) 감시가 어려운 곳에 특별히 설치한 것이다. 읍치에는 鎭山인 望敵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좌우로 감싸고 있고 內南山·外南山이 설정되어 있어 풍수적 관념이 충실하게투영되고 있다.(이기봉)

  • 진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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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산군은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복수면, 추부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진산면 읍내리 일대이다. 남쪽의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물들이 모여 북쪽으로 흘러 나가는데 큰 들이 없는 산골 작은 고을로서, 지도에서도 산줄기와 물줄기를 서로 뒤엉키게 그려내어 산골 고을의 특징을 잘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지도의 가운데에 보이는 하천은 대전광역시 시내 한 복판을 흘러 갑천으로 들어가는 유등천의 상류이다. 읍치 서쪽에는 이 고을 鎭山인 大芚山이 표시되어 있는데 특별히 강조되어 있지는 않고, 실제 높이로는 대둔산보다 더 낮은 읍내 뒷산 五臺山이 우뚝 솟은 봉우리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오른쪽 상단 天庇山 밑에는 태조 이성계의 태를 묻은 곳임이 표시되어 있는데 풍수적으로 산줄기가 겹겹이 중첩된 최고의 명당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입지의 탁월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현재의 위치는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태봉촌 뒷산이다.(이기봉)

  • 진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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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안현은 지금의 진안군 진안읍, 상전면, 부귀면, 마령면, 성수면, 백운면에 해당하고 읍치는 진안읍 군상리 일대에 있었다. 진안현은 서쪽 전주로부터 熊峙(곰치재) 등의 험한 고개를 오른 후부터 평탄해지는 고원형 지형이고 남서쪽으로는 섬진강, 동북쪽으로는 금강상류 진안천이 마이산을 중심으로 갈라지며 두 지역으로 구분되고 있다. 고적조에 1413년(태종 13)에 來屬한 것으로 나오는 馬靈폐현은 지도 왼쪽 아랫부분의 馬靈面 일대로서 고려시대까지 존재한 두 현의 규모와 경계선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읍치 남쪽에 있는 마이산은 거대한두 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이감을 일으키게 하는 명산이다. 신라 에서도 西多山이라부르며 小祀를 거행했다 하며, 태종이 南行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馬耳山이란 이름을 내렸다 한다. 전체적으로 산줄기와 물줄기의 조합을 통해 지역적 특징을 쉽게 볼 수 있게 했으며, 기타 절, 역, 원 등도 자세히 표시하고 있다.(이기봉)

  • 창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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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평현은 지금의 담양군 수북면, 고서면, 창평면, 남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창평면창평리에 있었다. 현의 북쪽으로 영산강이 흐르고 그 지류 증암천이 남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모습과 왼쪽 아래쪽의 무등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가 잘 그려져 있다. 지도 위쪽의 장북면과 장남면은 長平部曲의 자리로서 지금의 담양군 수북면 일대이고, 甲鄕面은 甲鄕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대전면 갑향리 일대로서 모두 창평의 越境地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書院은 松江書院으로서 선조 때 서인의 거두였고, 關東別曲, 思美人曲 등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 宋江 鄭澈(1536-1593)을 배향하여 1706년(숙종 32)에 賜額받았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건축미를 잘 보여주고 있어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瀟 亭과 息泳亭의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태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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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현은 지금의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감곡면, 산내면, 산외면, 옹동면, 칠보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태인면 태성리에 있었다. 태인현은 1409년(태종 9) 太山郡과 仁義縣을 합쳐 만들어졌으며, 읍치는 두 고을의 중간에 해당하는 居山驛으로 정해졌다. 지도에서 태산군은 읍치 동쪽의 古縣面으로, 인의현은 읍치 서쪽의 仁義谷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읍치 동남쪽에 있는 武城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賜額받았고 통일신라 때 이곳 태산군의 태수로 부임했던 최치원을 배향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은 사적 16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그 밖의 모충사, 용계서원, 남고서원 등은 모두 1868년 훼철되었다. 지도는 풍수적 사고를 충실히 따르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 읍치가 과장되어 있으며, 산줄기가 백두대간으로부터 이 고을로 들어오는 동쪽 방향이 지도의 위쪽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고을의 실제 지형은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다. 따라서 이 고을 동남쪽 산지에서 발원한 동진강은 서북쪽으로 흘러 김제를 통해 서해로 들어간다. 전라도 대부분의 지도에 수록된 驛院이 여백 주기에만 표시되어 있고 지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이기봉)

  • 함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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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열현은 지금의 익산시 함열읍, 황등면, 함라면, 웅포면, 성당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라면 함열리에 있었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금강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나가는데, 지도의 위쪽에 표현된 白馬江은 금강 중 부여에서 시작되는 부분을 일컫는데 함열현이 시작되는 곳이 하류인 것 같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咸羅山 밑에 있으며 읍치 오른쪽의 龍山古城은 세종 때 현을 옮기기 위해 쌓았지만 결국은 읍치를 옮기지 못한 곳이다. 고을의 전체적인 형세는 서쪽이 높고동남쪽이 낮은데, 읍치 오른쪽의 산들이 약간 과장되어 표현되어 있다.지도 위쪽의 聖堂倉은 지금의 용안면 난포리에 있었던 得城倉이 수로가 막혀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세종 때 海倉이 있는 皮浦로 옮겼다가 1487년(성종 18)에 옮겨 남원, 운봉, 진산, 금산, 용담, 고산, 익산, 함열 등 8읍의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던 漕倉이 있었다. 기타 금강가에는 한산으로 넘어가던 熊浦, 임천으로 넘어가던 南塘津 등이 자세하다.(이기봉)

  • 함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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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다면, 학교면을 제외한 함평군 전 지역과 무안군 해제면, 현경면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평읍 기각리에 있었다. 함평현은 1409년(태종 9) 咸豊縣과 牟平縣이 합해져 만들어졌는데 현 중심의 높은 산지를 중심으로 동쪽의 고막원천 유역은 모평, 서쪽의 함평천 유역은 함풍의 땅이었다. 지도 왼쪽부분의 해제면과 다경면은 함평현의 越境地로서 원래는 해제현과 다경부곡이었고 읍치 왼쪽의 영풍면은 영풍향이 면으로 편제된 곳이다. 지도 왼쪽에는 臨淄鎭이 성곽, 건물, 전선과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종3품인 全羅右道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던 곳으로 黔毛浦,법성포, 다경포, 목포, 於蘭浦,군산포, 南桃浦, 金甲島 등을 관할하였다. 鎭 오른쪽에 해제봉대, 아래쪽에 옹산봉대가 함께 그려져 있어 군사적 부분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는 대체적으로 간결하며 여백의 주기도 중요한 몇 개를 제외하고는 싣지 않고 있다.(이기봉)

  • 해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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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현은 옥천면, 북일면, 북평면, 송지면을 제외한 지금의 해남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해남읍성내리에 있었다. 지도 왼쪽의 황원면은 黃原폐현, 그 위쪽의 산일면과 산이면은 竹山폐현의 흔적이다. 해남현은 원래 지도 아래쪽의 현산면에 있었는데 1412년(태종 12) 玉山폐현의 땅으로 읍치를 옮기었다. 지도 왼쪽의 우수영은 지금의 화원반도 문내면 서상리, 동외리 일대에 있었으며, 正二品 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파견되어 전라도 서쪽 12개의 고을과 18개의 鎭을 관할하던 곳이다. 성 오른쪽엔 忠武公 이순신의 勝捷碑 비각이 표시되어 있고, 우수영과 외부와의 육로 차단 구실을 했던 外城과 轅門도 보인다. 우수영 아래쪽에 보이는 鳴洋은 진도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물살이 빠르고 소리가 커서 ''울돌목''이라 불리며, 충무공 이순신이 12척의 적은 배로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33척의 倭船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우수영 위쪽의 牧場은 黃原場으로서 종6품의 監牧官이 파견되었고 지금의 화원면 청룡리에 있었다. 읍치 남쪽의 館頭烽臺 밑은 제주도를 왕래하던 배들이 정박하던 곳이었다. 읍치는 고을 鎭山인 金剛山으로부터 뻗은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는데 실제 지형도 이와 비슷하다.(이기봉)

  • 화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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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현은 지금의 화순군 화순읍, 동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순읍 교리, 향청리, 광덕리 일대에 있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형의 작은 고을로서 사방의 산에서 쏟아져 내린 물들이 화순천으로 모이고 고을 중심부를 지나 서남쪽 영산강으로 들어간다. 지도에서는 고을 鎭山인 羅漢山이 읍치 북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강조되어 있는 점, 좌우로 겹겹이 뻗어 내린 산줄기, 그 사이사이에서 발원한 물들이 모여 읍치를 빙 돌아 내려가는 모습을 통해 풍수적 명당 관념을 지도로 형상화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지도에서는 외부로부터 이 고을로 脈勢가 이어지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지도 맨 윗부분에 광주의 서석산이 그려져 있고, 읍치가 매우 확대·과장되어 있다.그 밖의 지역은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여백의 주기 부분도 가장 기초적인 내용만 실려있는 아주 간소한 지도이다. 읍치 남쪽 加林驛의 건물과 색이 눈에 띄게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 흥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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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덕현은 지금의 고창군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과 부안면 남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흥덕면 흥덕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뒤쪽의 培風峴은 이름에서도 山이 아니라 峴으로 표현되어 있듯이 108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임에도 고을의 主脈이 되고 있으며 이 산으로부터 뻗어 나온 산줄기가 읍치를 포근히 감싸고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있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培風峴의 산줄기가 부안의 변산에서 온 것으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인데, 백두대간으로부터 시작된 산맥의 흐름에서 보면 지도 아래쪽의 半登山으로부터 와야 한다. 지도의 위쪽에 있는 沙津浦는 곰소만의 안쪽으로, 밀물 때면 바닷물이 쑥 들어와 호수처럼 만들어져 배를 대기에 알맞은 곳이며 ≪擇里志≫에도 장삿배가 모여 상업이 번창한 곳으로 나온다. 기타 고창현의 지도에도 나오는 壺岩이 지도 왼쪽에 표시되어 있음이 보이고,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확충된 수리시설의 모습을 보여주는 生斤堤, 蓬池堤, 新池堤 등의 제언이 그려져 있는데 이 중 生斤堤는 성내면 덕산리에 아직도 남아 있어 이 시기 수리시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이기봉)

  • 흥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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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양현은 지금의 고흥군 일대로서 읍치는 고흥읍 옥하리, 행정리, 서문리 일대에 있었다. 흥양현은 원래 장흥부에 딸린 高伊部曲이었는데 충렬왕 11년 고을 아전 柳庇가 통역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이 있어 高興으로 이름을 고쳐 현으로 승격된 후 세종 때 장흥부의 南陽縣과 합쳐 興陽이 된특이한 고을이다. 비록 部曲에서 출발했지만 대강면으로 표시된 泰江폐현, 남양면으로 표시된 南陽폐현, 두원면으로 표시된 荳原폐현, 도양면으로 표시된 道陽폐현, 포두면 자리에 있었던 豊安폐현, 도화면으로 표시된 道化폐현 등을 거느린 큰 고을이 되었다. 이 중 도양, 풍안, 도화폐현은 모두 부곡이었다가 고려 때 현으로 승격된 후 합쳐진 곳이다. 읍치 왼쪽의 도양면에는 牧場이 설치되어 있는데 監牧官이 파견되어 小鹿島, 折 島, 示山島, 羅老島 등에 설치된 목장을 관할하였다. 지도에는 읍치뿐만 아니라 呂島鎭, 鹿島鎭, 鉢浦鎭, 蛇渡鎭 등 4개의 鎭이 성곽, 船倉과 함께 표시되어 있고, 5개의 봉수 역시 정확히 표현되어 있어 海防에서 중요한 고을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녹도진 옆에 있는 雙忠祠는 임진왜란 직전 남해에 침입했던倭寇를 추격 물리치다가 사망한 李大源(1566-1587)을 배향한 서원으로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게 한다.(이기봉)

  • ▶충청도
  • 결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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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현은 현재 광천읍 동북쪽(과거에 홍주군 궁경면 일부)과 남쪽 일부(보령현 청소면 일부)를 제외한 전체, 결성면, 은하면, 서부면, 구항면 일대를 포함한다. 읍치는 지금의 결성면 읍내리 부근이었는데, 현재도 결성성곽과 향교 등 옛날 읍치 흔적이 남아 있다. 현 중심지가 남쪽으로 극히 치우쳐 있는데, 이는 방어와 수운 조건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성고읍은 읍치 북쪽 청룡산 고산사 부근, 광천의 상류에 있었다. 북서쪽 靑龍山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진산 枰山 아래에서 穴을 이루었다. 읍성은 돌로 쌓은 성이었다. 본현 서쪽에 위치한 海倉은 石串浦에 있었는데, 석곶포는 결성현 세곡을 싣은 조운선의 출발지이었다. 지도의 오른쪽에 廣川面과 廣川院이 보인다. 新增東國與地勝覽에 따르면 이 지역을 흐르는 하천인 광천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홍주(지금의 홍성) 烏史里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오서산에서 나와 같이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조수의 영향으로 수심이 깊어 지도의 廣川院(현재 광천읍 옹암리 부근)까지 배가 들어 와서 포구가 호황을 누렸다. 이 지역의 ''광천새우젓''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다.(金在完)

  • 공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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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목은 지금의 공주시, 유구읍, 계룡면, 이인면, 우성면, 탄천면, 반포면, 장기면, 의당면, 정안면, 사곡면, 대전직할시 유성 부근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조선시대의 관아가 자리했던 금강 변의 公山城 부근의 중동 지역일대이었다. 공주목은 18세기 중엽 26개면을 거느리는 大郡이었고, 牧使가 주재하는 충청도의 4목(충주목, 청주목, 홍주목, 공주목) 중의 하나이었다. 공주는 천안에서 차령을 넘어 호남지방으로 가는 도로와 금강이 만나는 수륙교통의 요지로서 선조 31년(1598)에는 충주에서 충청감영이 옮겨 와 더욱 발달하였다. 新增東國與地勝覽의 形勝條에 ''웅천(공주)은 바다에 연하였고, 계룡산은 하늘을 들어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는 ''계룡산이 진산이 되고, 웅진이 襟帶를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공주는 산과 강이 어우러진 고을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 보이는 雙樹山城은 일명 公山城이라고 하는데, 북쪽 2리에 있고, 523년(백제 성왕 1)에 웅진성으로 수리하였던 것이다.  1603년(선조 36)에 수축하였다. 공주지방의 사찰로는 마곡사가 또한 유명하다. 마곡사는 계룡산의 갑사·동학사 등 충남의 70여 개 말사를 거느린 큰 사찰이다. 유구는 차령산맥 산간지역의 중심지로서 鄭鑑錄의 十勝之地 중 한 곳이다.(金在完)

  • 괴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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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괴산군은 현재 괴산읍, 칠성면, 불정면, 소수면, 사리면, 문광면, 감물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괴산군의 읍치는 현재 괴산읍 서부리 일대이었다. 조선시대 객사 터에는 현재 괴산읍사무소, 동헌 터에는 괴산 경찰서가 자리잡고 있다. 동헌 터는 고려 때 一昇寺란 절이 있었다. 즉, 고려시대의 절터에 행정기관을 지은 셈이다. 부근에 괴산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괴산은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한 달천 유역의 좁은 골짜기에 자리잡아 인구가 적었다. 괴산군을 관통해서 흐르는 하천이 달천이다. 물이 많으면 괴산읍 동쪽의 槐江과 梨灘까지 배가 소강하여 이들 나루터에서 어염과 곡물 물물교환되었다. 大東地志 倉庫條에 옛날 괴산읍에서 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지도에 없는 柳倉이 있어서 세곡을 수납하였다가 후에 창고를 없앴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마 달천의 수심이 점차 낮아져서 창고를 폐한 것일 것이다. 현대 1:50,000 지형도에 감물면 五倉里에 上柳倉과 下柳倉의 지명이 보이는 데 이 곳일 것이다. 지도에 보이는 土溪書院은 위치상 花巖書院으로 보인다. 화암서원은 1622년(광해군 14)에 세워졌고, 이 황, 노수신, 김제갑, 유 근을 배향하였다가, 그 후 박세무, 이문건, 허 후, 이신의, 김유형, 박지겸, 허 조 등을 추배하였다.(金在完)

  • 남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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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현은 현재 보령시 남포면, 성주면, 미산면, 웅천읍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남포현의 읍치는 지금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와 옥동리 일대이다. 현재도 이 지역에는 남포읍성과 향교골, 읍내등 지명이 남아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形勝條에 남포현을 ''靑淵浦는 바다와 통하고, 玉馬山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본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 九龍山이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 현은 성주산에서 발원하는 웅천천 중상류의 골짜기 평지를 제외하고, 산세가 바닷가까지 이르러 평지가 거의 없다. 읍치의 동쪽 성주면 성주사지에는 국보 8호 백월보광탑비, 보물 19호 9층 석탑 외 3점, 사적 307호가 있다. 성주산 일대에서는 흑색 사암인 ''남포오석''이 또한 산출되어 예로부터 벼루돌로 애용되어 왔다. 輿地圖書 土産條에도 성주산 서쪽에서 나는 벼루돌은 검은색으로 품질이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聖主寺는 나말 여 초 선종 9산 중 하나인 無染(郞慧)의 성주산파의근거지이었다. 지도의 聖住山 부근에 ''최고운찬비(崔孤雲撰碑)''가 크게 그려져 있다. 이 비석은 성주사에 있는 것으로서 최치원이 지은 대낭혜화상(大朗慧和尙)의 塔碑이다. 읍성은 석축으로 되어 있다. 해창은 남포현 세곡이 수납되어 배로 서울로 운송되었던 조운지이었다.(金在完)

  • 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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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단양군은 단양읍, 매포읍, 적성면, 단성면, 대강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당시 읍치는 단양읍 하방리에 있었다. 하방리일대가 구단양이고, 충주댐 건설 이후 단양의 행정중심지가 북쪽 도전리 일대로 옮겨 졌는데 그 곳이 신단양이다. 지도에 보이는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도담 등은 모두 단양팔경에 들어 갈 정도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향교 위쪽에 보이는 祭堂은 다자구야 산신당(다자구할미집, 죽령산신묘, 국사당)이다. 1623년(인조 1) 죽령 일대에 도적 떼가 웅거하여 죽령을 넘어 다니는 행인들을 괴롭히므로 관군을 풀어 토벌하는데, 어떤 노파가 나타나 관군의 앞길을 인도하여 도적을 섬멸한 후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죽령 산신 또는 다자구 할머니라 하여 단양, 영춘, 풍기 세 고을 군수가 신당을 짓고 제주가 되어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냈으며, 합군 후로는 용부원리 주민들이 지내게 되었다. 죽령은 충청북도 단양과 경상북도 영주군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158년(신라 아달라 이사금 5)에 이 길을 열었다. 남쪽에 보이는 丹岩書院(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소재)은 1662년(현종 3)에 창건하여,禹 倬과 李 滉을 배향하였으며, 숙종 때 사액되었다.(金在完)

  • 당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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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현은 현재 당진군 당진읍, 고대면, 석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당진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唐津이란 지명은 신라의 삼국통일 후 중국과의 교섭이 잦아지고 당나라 사람들이 귀화·정착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진 읍치는 역천 유역의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의 題詠條 李承召의 詩에 ''平岡斷 路高低''라는 표현이 있다. 번역하면 ''편평한 산등성 끊어진 언덕엔 길도 높고 낮은데''이다. 이 시는 당진현 지역의 구릉성의 지형을 아주 잘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북쪽의 태백산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다시 主山인 高山에서 뻗어내려 射亭, 鄕校, 客舍, 衙舍,  壇을 감싸안은 형국을 보여 주고 있다. 倉庫로 읍내에는 邑倉 東庫와 南庫 및 西庫 각각 3間이 있고, 현 북 5리에 위치한 北倉에는 東庫와 西庫 각각 3間이 채운포 주변에 있고, 현 서 30리 지점의 海倉에는 東庫 6間, 西庫 5間이 있었다. 본 현 서쪽 5리 지점에 상채운포가 보이는데, 이 포구는 당진현의 물자를 이출입하는 곳이었다. 전체적으로 읍성, 봉수, 서원, 절 등이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다.(金在完)

  • 대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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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군은 현재 예산군 대흥면, 광시면, 신양면, 응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대흥면 동서리와 교촌리 일대에 있었다. 그런데 현재 읍치 동쪽의 상당 부분이 예당저수지의 건설로 수몰되어 있는 상태이다. 忠淸道邑誌에서 대흥현의 형승이 ''後背烽燧前帶奈川''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즉, 뒤에는 봉수산이, 앞에는 내천이 감싸고 있다는 것으로 배산임수의 형국 그 자체를 보여준다. 無限川의 지류들이 읍치 앞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 가고 있다. 地圖와 현대 지형도와 방향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地圖에서는 鳳首山城이 읍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실제 지형도에서는 읍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배치구조는 大興郡의 鎭山이 봉수산이므로 鎭山을 중심으로 공간배치를 한다는 원칙에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두 개의 산지가 衙舍와 客舍를 두 겹으로 감싸 안은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보여 주고 있다. 관아 배치를 볼 때 읍치의 명당 입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방향을 왜곡시킨 것으로 보인다. 읍치의 서쪽에 위치한 봉수산(484m)의 임존성은 백제의 부흥군이 웅거하면서 백제를 다시 세우려고 나당연합군에 항전했던 古城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 동쪽에 顯廟胎峯이 보이는데, 1681년(숙종 7)에 父王인 현종의 御胎를 이 곳에 묻고, 군으로 승격시켰다.(金在完)

  • 덕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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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현은 현재 예산군 삽교읍, 덕산면, 고덕면, 봉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덕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부근에 사직동, 향교말, 북문리 등 지명이 남아 있어 이 곳이 옛날 읍의 중심지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形勝條에 ''덕산현은 동쪽으로 큰 들을 끼고, 북쪽에 鶯山을 등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치 서쪽에 伽倻寺라는 절이 보인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없애고 남연군의 묘를 쓴이 곳의 지형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뽑힌다. 읍치 남서쪽에 보이는 덕숭산(495m) 기슭 修德寺의 대웅전은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맞배지붕의 장중한 맛이 있다. 이 건물은 창건 연대가 알려진 목조 건물로는 가장 오랜 것이다. 특이한 점은 客舍가 明堂形局 內에 자리잡은 반면에 衙舍는 동쪽으로 약간 비껴 나 있다. 邑治 북동쪽에 위치한 海倉 건물은 20칸으로 되어 있다. 해창포는 삽교천 변에 위치하여 수운의 편리함이 있어 덕산현에서 나오는 미곡을 실어 내보내는 포구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체적으로 津渡, 寺宇 등 고적 유적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미 경계에 위치한 大峙는 內浦 諸邑의 咽喉로서 전략요충지이었다.(金在完)

  • 마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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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량진은 현재 서천군 서면 마량리 일대에 있었다. 작은 반도로서 바다쪽으로 돌출하였기 때문에 해상 요충지로서 매우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 진은 비인현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內都屯串에 있었다가 1655년(효종 6)에 藍浦·廣岩으로부터 이 곳으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옛 진은 배를 놓아두는 데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수군첨절제사 한 사람이 주재하고 있었다. 본 진의 임무는 舒川浦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성곽은 없고, 民戶 155호로 충청도의 다른 진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다. 戰船, 防船, 伺候船 각각 1척이 있었다. 지도에서 진의 건물도 官舍와 客舍 외에는 중요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金在完)

  • 면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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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현은 현재 당진군 합덕읍, 면천면, 신평면, 송악면, 순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와 성하리 일대이었다. 지금도 동문 밖, 서문 밖, 남문 밖 지명이 남아 있다. 진산은 군 북쪽 4리 지점에 있는 蒙山이다. 邑城은 石築으로, 그 안에 두 개의 우물, 4개의 성문이 있었다. 忠淸道邑誌의 形勝條에 ''南控伽倻北環大津''라고 쓰여 있다. 즉, 우리말로 옮기면 ''면천은 남쪽으로 가야산을 끌어당기고, 북쪽으로 大津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主山인 所尾山에서 내려 온 산세가 몇 겹으로 명당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남원천이 명당수이고, 南山이 案山이 된다. 현 동 20리 지점에 남창南倉이 보인다. 창고 앞 나루터를 犯斤乃浦라고 한다. 남창에서 공주와 홍주에서 관할하는 군현의 세미를 수납하였다가 서울로 조운하여 갔었는데, 1478년(성종 9) 봄에 수심이 깊지 않아 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아산의 공세창으로 옮겼다. 현 북 50리 甘泉面에 蒼澤串牧場이 있다. 면천의 북동쪽 해안의 한진(지도상에는 大津)은 과거에 아산만의 큰 포구로서 당진과 면천의 곡물을 서울로 반출하는 데 이용되었다. 지도의 오른쪽에 蒼宅山 烽燧가 보이는데, 이 봉수대는 서쪽으로는 당진현 고산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경기도 양성현의 槐臺吉串의 봉수와 호응한다.(金在完)

  • 목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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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木川縣은 지금의 천안시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면, 성남면, 수신면에 해당하고, 邑治는 현재 목천면 西里 일대에 있었다. 목천현은 북쪽으로 흑성산으로 막혀 있고, 남쪽으로 전의와 낮은 산으로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진천 및 청주와 접해 있다. 또한 천안에서 진천과 청주로 통하는 요로에 위치하여 전략상 중요하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진 鵲城山이 鎭山인데, 진산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읍치로 연결되고, 하천이 읍치의 동북쪽과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읍치 앞에 모여 동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하천이 읍치 앞에 넓은 들을 만들었다. 목천현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에 위치하여 양국 간의 전쟁이 치열하였던 곳으로 도처에 작성산성 등 산성이 많이 분포한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道東書院은 賜額書院으로서 銀石山 아래 水石이 맑고, 기묘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鄭 逑가 寓居하였던 곳이다. 또한  鄭 逑와 金馹孫을 配享하였다. 읍치 북쪽에 위례성이 보이는데, 위례성은 그 동안 학자들에 의하여 백제 초기 도읍지로서 부정된 바 있으나 최근에 와서 많은 유물의 발견으로 논의가 다시 일고 있다.(金在完)

  • 문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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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문의현은 현재의 청원군 문의면, 가덕면, 현도면, 부용면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현재 문의면 문산리 일대에 있었다. 그러나 대청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면사무소도 북쪽으로 옮겼다. 진산은 읍치 서쪽 2리에 위치한 養城山이다. 지도에 읍치 아래쪽에 大龍穴이 표시되어  있다. 이 동굴은 통로로 되어 있어서 횃불을 들고, 밧줄을 타고 한참 내려가서 2km쯤 들어가면 굴이 많이 있는데, 다섯 굴은 넉넉히 들어 갈 수 있으나 물이 흘러서 들어가지 못하며, 굴 위에는 산마루로 구멍이 뚫려서 하늘이 내다보인다. 아마 석회암 동굴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문의현에는 서원이 두 개가 있다. 노봉서원은 1615년(광해군 7)에 세워졌고, 1658년(효종 9)에 사액을 받았다. 금암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세워졌고, 같은 해에 사액받았다. 진산인 양성산에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돌로 쌓은 古城이 있었다. 성안에 둥그런 못이 있는데, 큰 못이라 부르며, 둘레가 1백92척 8치이다. 사면에 모두 돌로 쌓아 섬돌이 되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장마나 가뭄에도 물이 마르거나 넘치는 일이 없다 한다. 좌측에 보이는 나루터가 荊角津이다.利遠津이라고도 하는데, 옥천과회덕으로 통한다. 상류쪽의 연산진은 고려 태조가 유금필로 征西大將軍을 삼고, 백제의 연산진을 공격하고 장군 길환을 죽였던 곳이다.(金在完)

  • 보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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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현은 현재 보령시 보령시내,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홍성군 광천읍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보령현의 읍치는 현재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이 지역에 보령성곽과 향교말 지명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 形勝條에 ''보령현은 땅이 협소하고 서해가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보령현은 오서산(791m)에서 성주산(680m)·옥마산(602m)을 거쳐 월명산(544m)에 이르는 산지와 해안의 구릉지로 되어 있다. 본 현 동북쪽 4리 지점에 위치한唐山(지도에는 鎭堂山으로 표시되어 있음)이 고을의 진산이다. 지도에서는 祖山의 역할을 하는 白月山에서 산줄기가 주산인 당산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대 지형도에는 진당산이 읍치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도에서는 진산 및 주산으로서 위쪽에 배치함으로써 풍수형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위쪽이 동쪽, 아래쪽이 서쪽, 우측이 남쪽, 좌측이 북쪽으로 알고 지도를 읽어야 한다. 읍성은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보령현의 세곡과 대동미가 지도에 나오는 海倉에서 모아져 경강까지 賃運되었다. 산세는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으나 절, 서원, 역, 원, 창 등이 거의 나와 있지 않다.(金在完)

  • 보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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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현은 현재 보은군 보은읍, 수한면, 탄부면, 삼승면, 내북면, 산외면, 내속리면, 외속리면, 마로면 등 1읍 8면을 포함하는지역이었다. 보은현은 경상도에 속했다가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현재 보은읍 교사리 부근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蛇山이다. 읍치 동북쪽에 위치한 삼년산성은 史蹟 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년산성은 백제에 대한 신라의 전초기지로 470년(신라 자비왕 13)에 쌓은 古城으로서 성벽의 보존이 양호하여 크지는 않지만 웅장하고 아름답다. 고지도 우측에 속리산 법주사에 대하여 자세히 그려져 있다. 특히 속리산, 대웅전, 오층각, 용화각, 문장대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14)에 義信이 흰 말에 불경을 싣고 이 절을 세웠다. 신라 성덕왕이 중수하고 776년(신라 혜공왕 12)에 眞表가 중창하였으며, 1624년(인조2)에 다시 벽암이 중수하였다. 捌相殿, 磨崖如來倚象, 四天王石燈, 雙獅子石燈, 石蓮池 등의 국보와 石槽, 石橋, 珊瑚殿, 金身丈六像, 同幢, 75자 높이의 미륵불 등으로 유명하다. 특히 팔상전은 신라시대의 목탑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신라와 고려 모두 속리산에서 中祀를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감하여 본 읍으로 하여금 致祭하도록 하였다.(金在完)

  • 부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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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현은 현재 부여군 부여읍, 초촌면, 규암면, 은산면, 공주군 노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부여현의 읍치는 현재 부여읍 舊衙里, 官北里, 舊校里 일대에 있었다. 본래 百濟의 所夫里郡이었고 사비라고도 불렀다. 백제의 성왕이 웅천(지금의 공주)으로부터 여기에 와서 도읍하였고, 南夫餘라고 이름하였다. 의자왕 때에 신라의 김유신이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군으로 공격하여 멸망당했다. 부여는 538년(백제 성왕 16)부터 660년(백제 의자왕 20)까지 123년 간 백제의 도읍지였다. 현재도 부소산성·낙화암·고란사·궁남지·정림사지 5층석탑 등 옛 백제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부여는 공주와 마찬가지로 금강 남쪽에 자리잡고 있고, 수로로는 白江(기벌포), 육로로는 炭峴을 막으면 방어가 가능한 견고한 요새이었다. 현 북쪽 3리에 위치한 扶蘇山이 진산이다. 부소산에는 백제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 부소산성이 있는데, 일명 半月城이라 부른다. 부소산을 쌓아 안고 두 머리가 백마강에 닿았는데, 그 형상이 반달 같기 때문에 반월성이라 이름한 것이다.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만 3천 6척이니이것이 곧 옛 百濟의 都城이었다.  현북쪽에 落花巖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宮女들이 쏟아져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가서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이름했다. 義烈祠가 현 동쪽 10리에 있는데, 1576년(선조 9)에 세워졌고, 2년 후에 사액을 받았다. 백제 때 충신 成忠, 興首, 階伯을 모신 곳이다.(金在完)

  • 비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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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인현은 현재 서천군 비인면, 서면, 종천면, 판교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비인현의 읍치는 비인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도 읍성의 성곽이 일부 남아 있다. 지도에서 산지가 읍치를 겹겹이 싸고 있고, 산지가 바다에 가까이 면해 있는 것처럼 나타나 있다. 지도에서 위쪽이 동쪽, 아래쪽이 서쪽, 왼쪽이 북쪽, 오른쪽이 남쪽이다. 扶蘇山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月明山(298m)을 이루고, 그 한 줄기가 읍치의 진산 및 주산을 이루었다. 주산에서 명당인 읍치로 내려오는 기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지도상에 보이는 鍾川은 본 읍 남쪽 13리 지점에 있는데, 물 근원이 읍 동북쪽 9리지점에 있는 深洞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도에서도 근원을 강조하기 위하여 深洞이라는 지명을 표시하고 있다. 읍성은 돌로 쌓은 것이다. 지도에는 둥근 성벽, 2개의 성문, 관아 건물이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좌측에 보이는 石塔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 석탑은 5층 석탑으로 보물 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海倉은 長津浦에 위치하는데, 이 곳에서 세곡이 수납되어 경강까지 운반되었다.(金在完)

  • 서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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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군은 현재 서산시, 부석면, 인지면, 팔봉면, 지곡면, 성연면, 대산면, 음암면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읍치는 서산시 읍내동과 동문동 일대이었다. 시가지는 읍성에 둘러싸여 있고, 성안에는 蓮池가 있다. 서산현의 지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산세가 읍치를 둘러싸고, 바다가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지도 상에는 팔봉산(361m)이 읍성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실제 지도에서 팔봉산은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팔봉산에서 내려 오는 산줄기가 면밀히 주산인 부춘산(187m)까지 이어져 읍치인 명당을 형성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 북쪽 20리 성연면에 鳴川倉이 보이는데, 이 곳에서 서산의 조세곡이 모아져 조운되었다. 지도 아래쪽에 안면도가 나타나 있다. 忠淸道邑誌 形勝條에 안면도에 白沙場, 鳳凰臺, 八枝松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쪽의 안면도는 조선 인조 때 운하를 팜으로써 섬이 된 것이다. 지도에 ''泰安掘項''이 이를 입증한다. 조선시대 안면도는 송림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송목은 선박 건조, 궁궐 건축, 장례용으로 사용되었다. 烽燧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主山 烽燧이고, 다른 하나는 島飛山 烽燧이다.(金在完)

  • 서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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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군은 현재 서천군 서천읍, 장항읍, 마서면, 문산면, 시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서천군의 읍치는 서천읍 사곡리 일대에 있었다. 멀리 차령산맥의 산줄기가 봉림산과 천방산을 거쳐 고을 북쪽에 위치한 鎭山 겸 主山인 烏石山에 그쳐 명당형국을 이루고 있다. 북동쪽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잘 표현되어 있다. 앞의 板川이 朝水가 되고 印山이 案山이 된다. 서천군 읍성은 돌로 쌓은 石城이었다. 1:50,000지형도에서 확인한 결과, 평지에 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 산에 의지해서 쌓은 성임을 알 수 있었다. 지도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원형의 성곽으로 4개의 대문을 갖고 있고, 성안에 衙舍와 客舍가 입지하고 있다. 아래쪽 서천포에는 서천포영이 있었고, 수군 만호 1명을 두어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우측에 보이는 멋진 다리는 吉山橋이다. 또한 우측에 보이는 建巖書院은 1662년(현종 3)에 세워졌고, 1713년(숙종 39)에 사액을 받았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25리에 위치한 龍堂津은 옛날에는 長岩津이라 불렸는데, 옥구현으로 통하는 나루겸 포구이었다. 민간물자의 유통은 이 포구에서 이루어졌다. 海倉은 서천군 세곡이 배에 실려 출발하는 발진포구이었다.

  • 서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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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포는 海防의 鎭으로서 현 서천군 장항읍 장암동 일대에 있었다. 後望山에서 내려 오는 산 줄기가 성 안을 둘러싼 형세이다. 둥근 성벽, 두 개의 성문, 관사 및 군기고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배치된 군선軍船으로 戰船 1隻, 兵船 1隻, 伺候船 1隻이 배치되어 있다. 전선과 병선은 전투함에 속하였고, 사후선은 보조선에 속하였다. 卜物庫는 사신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이었다.(金在完)

  • 석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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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성현은 현재 부여군과 석성면과 논산군 성동면 일대이었다.당시 행정구역은 동쪽으로 임천현, 서쪽으로 노성현, 북쪽으로 부여현, 남쪽으로 은진현과 경계를접하고 있었다. 읍치는 현재 석성면 석성리 일대에 있었는데, 지금도 ''석성읍내'', ''향교골'' 지명이 남아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구관아터는 지금의 석성초등학교 자리이다. 고지도에는 명칭이 나와 있지 않지만 읍치 북쪽에 용머리산(170m)과 국사봉(170m)이 있어 읍치의 진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동쪽에는 태조산-망월산-봉황산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좌청룡의 역할을 하고, 서쪽에는 파진산이 우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남쪽에는 山峙(지형도에는 남산)가 案山의 역할을 하는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나타내고 있다. 석성현 지도는 다른 현의 지도와 달리 堤堰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특히 하천을 따라 나타나는 제언들은 우각호를 저수지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도에서 석성천을 따라 舟橋, 腰光橋, 水湯橋가 놓여 있고, 금강 본류에는 蓬湖津, 鼓岩津, 佛岩津 나루터가 있다. 鼓岩津은 임천의 古多津의 對岸에 있는데, 물살이 빠른 곳으로 임천으로 통하는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석성현의 세곡은 석성천변에 위치한 江倉에 수납된 다음, 저포에서 서울까지 운반되었다.(金在完)

  • 소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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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근진은 현재 태안군 원북면 소근리 소근진 일대에 있었다. 소근진은 朽斤伊浦라고도 하며 태안 서쪽 30리에 있었다. 지도에서 소근진은 큰 반도로 둘러싸인 작은반도지역에 위치한 원형의 성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소근진성은 둘레가 1천 3백 56척이고, 4개의 성문이 있고, 성안에는 官舍, 影波亭, 軍器庫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지도의 설명란을 보면 民戶가 244戶로 평신진 638戶과 안흥진 533戶보다 훨씬 적다. 설명란에 보이는 卜物船은 사신을 수행하는 화물선을 말한다.(金在完)

  • 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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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淸水營은 현재 보령시 오천면영보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오천 성곽이 남아 있다. 수영은 보령 읍치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진 해변에 있었다. 1396년(태조 5)에 水軍僉節制使를 두어 보령을 관리하였다. 1421년(세종 3)에 都安撫處置使로 고쳤다가, 1430년(세조 12)에는 수군절도사로 고쳤다. 節度使와 虞侯 각각 1명이 주재하였다. 속읍은 홍주, 태안, 서산, 당진, 면천, 서천, 임천, 한산, 비인, 남포, 보령, 결성, 해미 등 13개 군현이었다. 본 營과 屬邑·屬鎭은 다양한 종류의 戰船 92척을 가지고 있었다. 수영성은 1510년(중종 5)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다. 지도를 보면 석성은 산의 지세를 따라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衙舍, 亞營, 軍餉庫, 軍器庫 등의 군사 관련 시설이 있고, 그 외에 永保亭, 觀德樓,  凌虛閣 등이 있었다. 역시 다른 진과 달리 다양한 배가 주둔하고 있었다. 주력 전투선인 戰船, 龜船, 防船 등과 보조선박인 卜物船과 伺候船 등 각각 1척이 있었고, 특수 용도의 海外搜討船과 亭子船 등이 각각 1척씩 있었다.(金在完)

  • 신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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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현은 현재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도고면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신창면 읍내리 일대인데 현재 부근에 순천향대학교가 있다. 鎭山은 본 현에서 서쪽 1리 지점에 있는 城山이다. 지도에는 鶴城山으로 표기되어 있고,성벽도 나타나 있다. 성산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명당인 관아 터를 포옹하는 형세로 풍수지리상 명당 형국을 잘 표현하였다. 忠淸道邑誌의 形勝條에 ''小赤壁''이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는 孤山峰 아래 물가가 절벽을 이루면서 긴 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일찌기 현의 서쪽이 삽교천과 접하여 고려 때부터 조운과 수운이 발달하였다. 읍치서쪽 면천현으로 건너가는 頓串津 나루터가 있는데, 나루터로서 기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근에서 산출되는 미곡을 서울로 반출하는 포구로 이용되었다. 衙舍 동쪽에 있는 拱北亭이라는 정자에는 서거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읍치 북쪽에 大堤라는 큰 저수지가 보이는데, 이것은 현재 신창지라고 부르며 농업 관개용으로 이용되고 있다.(金在完)

  • 아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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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현은 현재 아산시 염치읍, 영인면, 음봉면, 인주면, 둔포면을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일대이었다. 남쪽으로 곡교천을 따라 신창현 및 온양현과 경계를, 북쪽으로 郡界川을 경계로 평택현(현재 평택시 팽성시)과 접하고 있었다. 곡교천 연안에는 범람원이 비교적 넓게 펼쳐져 있다. 수많은 산봉우리가 교착하여 대치해 섰고, 두 시냇물이 돌아 흐르는 형세이다. 따라서 적을 방어하기에는 매우 유리한 형세를 갖추고 있다. 본 현 서쪽 10리 지점에 貢稅串倉이 있었다. 공세창은 현재 아산만 방조제 남쪽의 공세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창고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倉庫條에 의하면 옛날에는 창고가 없었는데, 1523년(중종 18)에 비로소 건물을 지으니 무릇 80칸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인근 40여 고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보내던 조운 활동의 요지로서 1523년(중종 18)부터 1762년(영조 38)까지 유지된 이 곳의 조창(공진창)은 전국 9대 조창의 하나였다. 숙종때에는 아산, 전의, 목천, 연기, 청주, 온양 등 6읍의 稅米만 이 창고에 보관되었다. 지도상에 衙舍 동남쪽 방향에 忠武公祠宇가 나타나 있다. 이것은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하여 1706년(숙종 32)에 세워졌고 이듬해에 사액되었다.(金在完)

  • 안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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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흥진은 현재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안흥에 있었다. 안흥의 지명은 安興梁에서 유래하였는데, 안흥량은 태안읍에서 서쪽 34리 지점에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태안군 산천조의 기록에 따르면 옛날에는 難行梁이라 불렀는데, 바닷물이 험하여 조운선이 이 곳에 이르러 여러 차례 침몰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흥진은 삼남지방의 세곡을 한성으로 수송하던 조운선의 주요 기항지였으며,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안흥성은 바다에 임한 절벽 위에 쌓은 천연 요새이다. 지도에 나타난 성은 1665년(효종 6)에 士人 金石堅이 청하여 鎭城을 쌓은  것으로 수군첨절제사를 두었다. 지도를 보면 동서남북 4대문이 있고, 관사 1동, 창고 2동, 군기고 2동, 조총고 1동 등 방어시설을 완비한 성임을 알 수 있다. 안흥진성을 중앙에 두고 주변지역에 섬이 둘러싸인 형태의 지도로서 해안에 위치한 진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도와 유사하다. 안흥량은 조류가 빨라 험난했다. 그래서 세곡수송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운하의 건설이 시도된 바 있다. 加積運河가 그것인데, 1134년(고려 인종 12)에 운하건설이 추진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조선 태조 이후 현종 때까지 여러 차례 거론된 바 있다.(金在完)

  • 연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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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현은 현재 연기군 동면, 서면, 종촌리와 송담리을 제외한 남면, 북면을 합친 지역이었다. 연기현은 청주목과 공주목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하였다. 읍치는 현재 연기군 읍내리에 있었다. 현 동쪽 1리에 위치한 城山이 鎭山이다. 특이한 점은 客舍와 衙舍가 분리되어 있고, 관아가 鎭山인 城山 서쪽에 배치되어 있는 점이다. 이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主山과 읍치 진산의 불일치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읍치 앞을 흐르는 연기천이 현대 지형도에서는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흐르는데, 지도에서는 반대 방향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모든 하천이 읍치 앞으로 모이는 형세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군현 중심의 지리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읍치의 동쪽 5리에 위치한 東津은 文義·懷仁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다. 연기현의 稅穀이 이 곳 東津에서실려 군산창에 수납되었고,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羅里津은 유성·진잠으로 통하는 나루터로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멀리 제주에서 수운으로 운반된 해산물과 농산물이 교역된 장소이었다. 읍치 동쪽의 봉암에 위치한 鳳岩書院은 1651년(효종 2)에 세워졌고, 1665년(현종 6)에 賜額되었다.(金在完)

  • 연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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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연산현은 현재 논산시 연산면, 두마면, 양촌면 일부, 벌곡면, 부적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연산면 연산리 부근에 있었다. 부근에 ''향교골''의 지명이 남아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形勝條에 ''연산현은 산천이 웅장 수려하다. 땅이 적고 편평하며 넓은 지대가 적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계백이 신라군과 최후의 격전을 벌였던 ''황산벌''은 넓은 들이 아니라 연산이 자리한 연산천 골짜기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황산치가 보이는데 그 부근으로 생각된다. 북쪽에는 유명한 계룡산이 표시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였을 때, 이 계룡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친히 와서 순시하고 길지를 택하여, 대략 그 터를 정하고는 공사를 시작하였다가, 결국 조운의 길이 멀다 하여 이를 중단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곳을 新都라고 부르고 있으며, 당시 구획하였던 개울과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고지도 상에서 읍치 위쪽에 보이는 開泰寺는 고려 태조와 관련이 있다. 개태사는 天護山 북쪽에 있는데, 고려 태조의 眞殿이 있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백제를 정벌하여 큰 승리를 거둔 후 有司에게 명하여 개태사를 창건하게 하였다 한다. 연산의 세곡은 은진의 시진포까지 육로로 운반되어 조운되었다.(金在完)

  • 연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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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현은 현재 괴산군 연풍면, 장연면, 충주시 상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있었다. 읍치는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일대이었다. 연풍은 영하취락이 중요하였다. 계립령은 속칭 마골재 또는 하늘재라고 불린다. 三國史記에 158년(신라 아달라 이사금 3)에 계립령을 처음 열었다는 기록되어 있다. 하늘재는 전략요충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쟁탈전이 발생하였다. 다음 기록은 그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고구려 온달이 말하기를 "계립현과 죽령 이서 지방이 아국에 돌아오지 않으면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늘재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중요한 길이었다. 조선이 개국되고 태종 때 문경새재가 개척되자 하늘재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문경새재는 鳥嶺 또는 草岾라고 부른다. 1708년(숙종 34)에 관문과 산성을 쌓았고, 1752년(영조 28)에 조령관문을 설치하였다. 이유릿재(이화령)을 통과하는 역로는 연풍-괴산-음성-죽산을 거쳐 서울로 통했다. 원래 伊火峴이던 것이 일제시대 초에 梨花嶺으로 바뀌었다. 가파르고 험하여 산짐승의 피해가 많으므로 전에는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 갔다 한다. 지도에서 읍치 좌측에 소옥정 정자가 나타나 있다. 이 정자 부근에는 유명한 소옥정 폭포가 있다. 조령에서 흐르는 물이 이 곳 위아래 龍湫를 이루고 아래 용추에서 폭포를 이룬다.(金在完)

  • 영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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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영동현은 현재의 영동읍, 심천면, 양산면, 학산면, 용화면, 양강면, 용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영동의 진산은 읍치에서 북쪽 1리에 있는 城隍山이다. 지도 상에는 영동읍성이 보이지 않지만 新增東國輿地勝覽 城郭條에는 읍성이 돌로 쌓여졌으며 성안에는 우물이 두 개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輿地圖書에 보면 옛날에는 읍성이 있었으나 당시는 없어졌다고 하였으나 조선 영조 이후는 폐하여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면에 보이는 重華寺는 신라 진평왕 때 義湘祖師가 창건했다 한다. 고려 普覺國尊·登階祖師· 山祖師 등이 낡고 헌 것을 다시 손대서 고쳤으며 1907년 순종 때 白衣禪師가 또 다시 고쳤다. 읍치 서쪽 심천수에 위치한 草江書院은 옛날에 晦谷에 있었는데 1676년(숙종 2)에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로 옮겼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지도에 高塘浦 서쪽에 瀑布가 보인다. 이 폭포는 玉溪瀑布 또는 朴堧瀑布라고 불리는데, 영동에서 대전 쪽으로 4번 국도로 가다 보면 심천면 고당리 2구 옥계동이 있고, 계속 올라가면 月伊山(551m)의 맥이 동쪽으로 뻗어나 서래 마을을 거쳐계곡을 흘러오는 물로, 20m 쯤 되는 절벽 암반 위에서 쏟아 떨어지는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어 양쪽 벼랑바위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金在完)

  • 영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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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영춘현은 단양군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단양군 영춘면 상리 일대이었다. 산간지방이지만 남한강이 관류하여 삼국시대에는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산천조에 읍치 남쪽 3리에 위치한 城山이 鎭山으로 나와 있다. 성산에는 유명한 온달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지도상 읍치 북쪽에 北壁에 표시되어 있다. 太守 李普祥이 벼랑에 "北壁" 두 자를 크게 새기었다. 높이 수십길, 넓이 500여 보 되는 절벽이 강을 끼고 있는데, 봄과 가을에 배를 타고 절벽을 안고 돌면서 바라보는 경치는 선경이라고 한다. 관아에서 南津을 건너면 松坡書院(단양군 영춘면 상리 409번지)이 있다. 1703년(숙종 29)에 창건하여 尹宣擧를 배향하였는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서 헐렸다. 지도에서 읍치 남쪽에 보이는 南窟은 성산굴이라고도 불린다. 현대 지형도에는 온달동굴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일종의 석회암 동굴이다. 하리 남쪽 온달성 아래에 있는 굴로 입구의 높이 3m, 너비 4m 정도이다. 얼음같이 찬 물이 나오는데, 그 깊이가 무릎 위에 올라올 정도이며, 곳에 따라서는 허리 위에 올라오는 곳도 있어 작은 배로 굴 안을 왕래할 수 있다. 읍치의 북쪽과 남쪽에 위치한 北津과 南津은 나루터로서 뿐만 아니라 18세기 조운선의 출발지로서 또는 船商의 어염과 주민의 곡물이 물물교환되던 장소로서 기능하였다.(金在完)

  • 예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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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현은 현재 예산군 예산읍, 대술면, 오가면, 신암면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예산읍 예산리 일대이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본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는 金烏山이다. 예산현은 동쪽으로 삽교천을 경계로 덕산현 및洪州牧(현재 홍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 도고산 등 산 줄기로 아산현과 접하고 있었다. 지도에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삽교천 유역의 옛 명칭은 內浦인데, 擇里志에 가야산 둘레의 十縣을 가리킬 정도로 넓은 지역을 포함하는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예산의 읍치는 무한천으로 유입하는, 지도의 香泉寺에서 발원하는 하천의 좁은 골짜기로 들어 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읍치 북쪽 15리 무한천 변에 浦倉 건물이 보인다. 이 창고를 예산창이라고 부르는데, 13칸 건물로 大同稅를 배에 싣고 떠나는 곳이었다. 지도에서 보이는 무한천은 감조하천으로 바닷물이 역류할 때는 대형선박이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다. 강변에 위치한 무한성은 창고를 지키기 위하여 건설된 것으로 생각된다. 향교에 인접해 있는 서원은 德岑書院인데, 1705년(숙종 31)에 세워졌고, 1714년(숙종 40)에 사액되었다.(金在完)

  • 옥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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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군은 현재 옥천읍, 동이면, 이원면,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등 1읍 5면을 포함하는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옥천읍 馬城山(409m) 밑의 교동리에 있었다. 옥천읍의 鎭山은 마성산으로, 전하기를 고을 사람들이 馬祖神을 제사지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붙었다고 한다. 금강 상류의 지류들이 군 전체를 원형으로 감싸안고, 또 읍내면 지역도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옥천에는 봉수대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月伊山烽燧으로 동으로 영동현 박달산에 응하고, 북으로 環山烽燧에 응한다. 다른 하나는 環山烽燧로 서로는 懷德縣 鷄足山 烽燧, 남으로 月伊山 燧에 응한다. 지도에서 보이는 가화역 뒤에 있는 산이 三城山인데,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정상 부근에 옛 성터가 남아 있다. 이 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신라 때 국경선이라 하는데 현재 약 1km 쯤이 남아 있다. 읍치 동쪽에 옥천향교가 보이는데, 현재 옥천읍 교동리에 위치하고 있다. 1398년(조선 태조 7)에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다시 지었으며, 1960년도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현재 대성전 이 외에도 향교에 딸린 행랑채와 홍문, 하마비 등이 남아 있다.(金在完)

  • 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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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군은 현재 아산시, 배방면, 송악면, 탕정면을 합친 지역이었다. 온양군의 읍치는 현재 아산시 읍내동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관아 터에 온양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燕山은 읍 북쪽 2리 지점에 있는 이 고을의 鎭山이다. 진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읍치 앞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멀리 우뚝 솟은 설화산이 보이는 전형적인명당 형국을 취하고 있다. 즉, 진산인 燕山이 주산에, 신인천이 명당수에, 설화산이 안산에 대응한다. 온양군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옛 온천은 읍 서쪽 7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온천의 둘레가 1,758척이었고, 內正殿, 外正殿, 湯室 12칸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建置沿革條에 의하면 1442년(세종 24) 임금이 온천에 거둥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온양군 관아 건물은 직산현 관아 건물과 같이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지방관아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8리 지점에 時興驛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역은 찰방역으로서 驛丞 1명이 있었고, 昌德, 日興, 汲泉, 順城, 興世, 長時, 花川驛 등을 관할하였다. 西面 온천에 보이는 건물은 여러 임금이 온천에서 머물고 갔던 溫泉 行宮 建物이다.(金在完)

  • 은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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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은진현은 현재 강경읍, 연무읍, 은진면, 가야곡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논산시 은진면 연서리 일대에 있었다. 지금도 ''향교골''의 지명이 남아 있다. 이 고을의 진산인 摩耶山은 현 남쪽 24리에 위치해 있다. 은진현보다도 강경포가 더 이름이 나 있다. 강경포는 본래 은진현 금포면에 속하였다.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강경포에는 지명의유래가 되었던 강경산 봉수대, 강창이 자리잡고 있다. 이중환의擇里志의 기록에 의하면 ''은진의 강경 한 마을만은 충청도·전라도의 바다와 육지 사이에 위치하여 금강 남안의 평야 가운데에서 하나의 큰도회를 이룬다''고 하였다. 특히 소금과 새우젓의 거래로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강창은 은진현의 세곡이 수납되어 보관되었던 창고이었다. 강경 상류의 군현에서 세곡을 실고 오는 배는 반드시 강경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다. 지도에서 북쪽 반야산(96m)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가 있다. 관촉사는 968년(고려 광종 19)에 창건되었고, 은진미륵은 36년 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1006년(고려 목종 9)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지도 북쪽 皇華山 서쪽에 市津 나루터가 보인다. 옛 시진현에 있었는데 장삿배가 모이는 곳으로서 돛대가 연접하고 사람들이 빈번히 왕래하며 물화를 매매하기 때문에 시진포라 이름하였다 한다.(金在完)

  • 음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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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음성현은 소이면을 제외한 음성읍, 금왕읍, 삼성면, 감곡면, 대소면, 생극면, 맹동면, 원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이었다.음성현은 금강 유역과 남한강 유역의 분수계에 자리한다. 음성현에서 북쪽으로 8리 떨어진 가엽산(709m)이 鎭山이 된다. 이 산의 정상에는 가엽산 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읍치 윗쪽에 위치한 望山은 현대 지형도의 수정산(393m)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산 정상에는 산성터가 남아 있고, 산성의 남쪽에 古邑遺址가 있어 官坪이라 불린다. 수정산 남쪽에 있는 수정사터에서 "新羅景文王五年"이라 적힌 기와를 발견하였다. 관세음보살 입상과 노사나불좌상이 있는데, 좌상은 1968년 윤병준이 발견하여 머리가 잘린 것을 복원하였다. 윗쪽에 보이는 雪城山은 음죽현의 鎭山으로 산성이 있다.(金在完)

  • 이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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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현은 현재 논산시 노성면, 상월면, 광석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논산시 노성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1414년(태종 14)에 石城과 합쳐서 尼城縣이라 일컬었다가 1416년(태종 16)에 다시 쪼개어 현감을 두었다. 1646년(인조 24) 은진, 연산, 이산을 합쳐 하나의 현으로 하고, 恩山이라 명명하였다가 1656년(효종 7)에 각각 복구하였다. 1776년(정조 1)에 이성을 노성으로 고쳤으며, 현재는 노성면이라 불린다. 擇里志에 의하면 이산은 산악에 가깝고 토지가 비옥하다. 이 고을의 진산은 현 북쪽 5리에 있는 魯山으로 일명 城山이라고도 한다. 읍치를 鎭護하는 산성이 바로 魯山城이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노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9백 50척이고, 높이가 8척이다. 노산에 위치한 성산봉수는 남쪽으로 은진현 황화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공주의 월성산에 응한다. 진산 겸 주산인 노성산에서 내려온 지세가 여러 겹으로 명당을 감싸고 있고, 남쪽에도 여러 겹의 산줄기가 감싸고 있다. 지도에 보이는 板峙嶺의 남쪽의 ''平地要害''지역은 敬天村이 되는데 토지는 기름지고 산은 웅대하여 복지라고 한다. 서남 30리에 海倉이 보이는데, 은진 시진포의 북쪽 대안에 해당되며 이 곳에서 이산현의 세곡이 조운되었다.(金在完)

  • 임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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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현은 현재 부여군 임천면, 장암면, 충화면, 세도면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인 聖興山(268m)은 군 북쪽 2리에 위치하고 있다. 성흥산은 백제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는 금강 변  저지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성흥산성은 백제 동성왕(479∼501) 때 쌓은 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한 후 부흥운동의 한 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산 중턱에 위치한 大鳥寺는 초라하지만 12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볼만하다. 남쪽에 위치한 書院은 七山書院인데, 1687년(숙종 13)에 세워졌고, 1697년(숙종 23)에 사액을 받았다. 남쪽 금강 변에 南堂津祠가 보인다. 물이 깊고 출렁거려 무서우므로 장삿배들이 왕래할 때에는 반드시 노래하고 북을 울리며 제사지낸다고 되어 있다. 남당진은 임천현의 세곡을 실은 배가 발진하는 포구로도 이용되었다. 부근에 세곡을 보관하였던 海倉이 위치하고 있었다. 임천현은 바다와 직접 닿아 있지 않았지만 軍船을 보유하고 있었다. 설명란에 보면 防船 2隻, 伺候船 2隻, 卜物船 1隻이 보인다. 임천군은 강경과 마찬가지로 조수의 영향을 받는 곳에 위치하므로 海船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수군이 주둔한 것처럼 보인다.(金在完)

  • 전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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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전의현은 현재 연기군 전의면과 전동면을 합친 것이었다. 당시 동쪽으로는 목천현 및 청주목과, 북쪽으로는 천안군과, 서쪽으로는 공주목과, 남쪽으로는 연기현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읍치는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다. 전의현은 5개 면으로 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郡勢가 약하였다. 忠淸道邑誌에서는 전의현의 形勝을 ''三峰圍野二水繞城''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의현은 鎭山인 月昭山과 古麗山 및 雲主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두 하천이 동쪽에서 읍치 앞을 지나는 형세이다. 지도에 나타나 있는 수계를 언뜻 보면 하천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사실은 조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마 태백산맥 서사면의 하천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데 이 경우는 逆水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므로 풍수상 고의로 하천의 형태를그렇게 그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남쪽의 연기현은 금강 수운을 이용하여 세곡을 군산창으로 운송하였지만, 전의현은 금강 수계에 있으면서도 아산만 공세창까지 세곡을 육운으로 운반하였다.즉, 금강 수운 영향권과 아산만 육운 영향권의 중간에 위치한 것이다.(金在完)

  • 정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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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현은 현재 청양군 정산면, 목면, 청남면, 장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정산면 서정리 부근에 있었다. 동헌자리는 현재 정산면 면사무소 자리이고, 부근에 향교골 등 지명이 남아 있다. 정산현은 서쪽으로 험준한 大峙(317m)로 청양현과, 남쪽으로 금강을 사이에 두고 부여현과 접하고 있었다. 鎭山은 읍치에서 북쪽 7리에 위치한 大朴谷山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舍人峰과 칠갑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사인봉, 남쪽의 앵봉산, 동쪽의 성주산, 서쪽의 오동산 등 4산이 명당형국을 에워싼 형세이다. 명당국 내에 명당수가 각각 북쪽에서 흘러 내려 와 읍치 앞에서 만나 남으로 향하는 형국이다. 이 또한 명당형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지도에 읍치 남쪽 금강 변에 江倉과 汪津이 표시되어 있다. 강창은 정산현의 세곡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 보관된 창고이었다. 왕진은 혹은 왕지진이라 불리는데 漕運船이 출발하는 포구이면서 부여로 통하는 도로의 주요 나루터이었다. 서북쪽의 칠갑산에 옛 성의 터가 있는데 慈悲城 또는 兜率城터 이라고 부른다. 읍치의동쪽에 위치한 聖主山은 위치 상으로 볼 때 현대 지형도의 계봉산(210m)인 것으로 생각된다. 계봉산의 정상에는 돌로 쌓은 석성이 있었다고전해진다.(金在完)

  • 제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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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제천현은 현 제천시, 백운면, 송학면, 봉양읍, 금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제천시 중앙로 1가 일대이었다. 제천은 해발 250m 내외의 넓은 침식분지에 자리하며, 강원도의 영월과 정선지방의 관문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形勝條에는 "제천은 지세가 가장 높고, 물은 겹겹이요, 산은 중첩되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천의 鎭山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12리 떨어진 龍頭山이다. 관아 북쪽에 의림지가 표시되어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城池條에 의림지는 현 북 10리에 있는데,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고, 관개면적이 심히 넓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때 의림이 적성(단양), 자춘(영춘), 사열이현(청풍), 내제(제천)의 네 고을사람들을 불러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세종 23년(1441)에 충청관찰사 정인지가 고쳐 쌓았고, 또 헐어진 것을 세조 1년(1456)에 다시 쌓았다. 지도에 보이는 제천향교는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金綏田이 창건하였으며, 1907년 7월 12일 李康年이 왜적과 싸울 때 대성전과 재실이 불에 탔다. 관아 좌측에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南塘書院이 있었다. 1570년(선조 3)에 縣監 全弘民이 세워 읍 남쪽 못 옆이 되므로 남당서원이라 하여 퇴계 이 황을 모셨다가, 1831년(순조 31)에 강 유를 배향하였다.(金在完)

  • 직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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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현은 현재 천안시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평택시와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직산현도 천안군과 마찬가지로 경양면, 안중면, 연피면, 외야곶면 등 4곳을 월경지로 가지고 있었는데, 그 지역은 현재 평택시지역이다. 읍치는 현재 직산면 군동리와 군서리일대에 있었다. 忠淸道邑誌의 形勝條에 직산현의 형세를 ''北帶漢水東據高丘南望沃澤西阻海''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동쪽에는 비교적 높은 구릉이 있고, 서쪽에는 바다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쪽에 漢水가 있다는 것과 남쪽에 기름진 들이 있다는 것은 현재 지형과 맞지 않는 것 같다. 아마 하남위례성의 지형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직산현의 鎭山은 현에서 서쪽으로 3리 떨어진 蛇山이고, 聖居山이 祖山이 된다. 다른 지역은 읍치 앞에서 하천이 모이는 형국인데, 직산현은 읍치 앞의 하천이 북류하는 형태로 좀 색다르다. 중앙에 보이는 직산현 관아는 현재 지방유형 문화재 41호로 지정되어 있고, 관아문, 내동헌, 외동헌, 내삼문, 외삼문 등 조선조 지방 행정 관청의 건물의 구조배치 등이 완전히 보존되어 있으므로 지방관아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지도에 보이는 天興寺址(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234)에는 幢竿支柱(寶物 99號)가 남아 있는데 1002년(고려 목종 5)에 만들어진 것이다. 성환역은 성환도의 찰방역으로 공주 이북의  11개 역을 관장하였다.(金在完)

  • 진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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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잠현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유성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진잠현의 읍치는 현재 유성구 교촌동 일대에 있었다. 현재 진잠초등학교가 옛 진잠현 동헌 터이다. 현재도 부근에 진잠향교가 남아 있어 옛 진잠현의 치소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고을의 진산은 현 서쪽 5리에 위치한 産長山(또는 山長山, 258m)이다. 산허리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속담에 전하기를 鷄龍이 바위에서 나왔다 하여 산장산이라 이름했다 한다. 이중환의 擇里志에 진잠현은 동서의 두 산이 남쪽에서 평야를 끼고 돌아 북쪽에 이르러서 합치었고, 또 높게 사방을 산으로 막아 가운데를 둘러쌌고, 평평한 언덕과 산은 길고 구불구불하고, 구봉산(진잠현의 남쪽에 있는 산)과 보문산(진잠현 동남쪽에 있는 산)이 남쪽에 높이 솟아 그 맑고 깨끗한 기상이 거의 한양의 동교보다 낫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진잠현은 논밭은 극히 좋고 넓으나 다만 바다에서 다소 떨어져 서쪽에 있는 강경에서 교역하는 것에 의지한다. 지도에 산장산 산기슭에 鶴雲寺라는 절과 오층석탑이 보인다. 이 절은 읍치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산장산(현 금수산) 기슭에 있었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다. 지도에 보이는 逍遙亭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 쇠퍼니(풀무집) 뒷산에 있었는데, 정자는 없어지고정자 터만 남아 있다.(金在完)

  • 진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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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진천현은 현재 진천군과 거의 일치하나 현재 진천군은 음성군 사다면의 2개 리와 맹동면 6개 리, 및 대조면 1개 리, 경기도 죽산군의 남면의 2개 리, 청안군의 사면 1개리가 편입된 지역이다.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였다. 지도에서 서쪽에 吉祥山이 있다. 일명 胎靈山이라고 하는데, 현 서쪽 15리에 있고, 寶蓮山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신라 진평왕 때 萬弩郡 太守 金舒玄(김유신의 아버지)의 妻 萬明이 임신하여 20개월만에 아들을 낳아 유신이라 하고 태를 이 산에 묻었다고 한다. 그런고로 길상산이라고 불렀다. 신라 때 길상산에 사당을 짓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1398년(태조 7)에 이를 금지시켰으나, 주민들이 계속 제사를 지내다가 그 뒤 이 곳으로 옮겼다. 지도의 오른쪽 梨谷面에 보이는 書院은 百源書院이다. 1597년(선조 30)에 세워서李鍾學과 그의 5대손 李  와 李 皐, 金德崇을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1669년(현종 10)에 사액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리었다. 초평면 두타산(599m)은 진천의 명산으로 모양이 頭陀처럼 생겼으며, 온 산이 붉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金在完)

  • 천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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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군은 지금의 천안시내 전부, 천안시 풍세면, 광덕면 일원이 포함되고, 현재 아산만 부근의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현재 천안시 지역은 바다와 접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는 군의 경계가 좁고 길다랗게 해안까지 두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당시 해안지역에 월경지를 둔 것은 어염의 확보 때문이었다. <大東輿地圖>를 보면 천안의 월경지 3개가 보이는데,  모산은 고려시대 모산부곡(도자기)으로서 조선시대까지 천안군의 월경지이였다. 신정부곡(서 80리)과 돈의향(서 62리)의 설치는 어염 공급의목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읍치는 현재 천안시 대흥동과 오룡동 일대이다. 현재 관아 터는 五龍爭珠形의 황룡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한다. 지도는 명당인 관아를 중심으로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천안의 鎭山은 王子山이다. 新增東國與地勝覽 천안군 산천조에 ''왕자산은 동북으로 십이 리쯤에 있는데 천안의 진산이며 고려 태조가 이 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다고'' 한다. 新增東國與地勝覽 천안부 형승조에 천안을 ''三國中心''으로 기록할 정도로 중요한 요충지이었다. 지도에 보이는 華祝館은 현재 천안시 오룡동 188번지에 있는 行宮 건물로서 인조가 이 괄의 난리를 피하여 이 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金在完)

  • 청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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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현은 현재 옥천군 청산면과 청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있었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 일대에 있었다. 청산면 교평리에 위치한 청산향교는 1581년(선조 14)에 창건하여 효종(1649-1659)때 교평리로 옮긴 것으로 1777년(정조 1)과 1848년(헌종 14)에 증수한 바 있다. 고지도의 아래쪽에 淸凉寺와 日出庵이 보인다. 현재 옥천군 청산면 삼방리 장노골 앞 千金山 골짜기 2km를 올라가면 좀 넓게 벌어진 분지 같은 곳에 1,000여 평 되는 논과 밭이 있는데, 이 곳에 300여 평의 절터가 남아 있다. 이 절터가 지도에 보이는 청량사가 있었던 곳이다. 輿地圖書는 일출암 절터(장노골 千金山)에 대해서 "일출암은 천둔산에 있고 동쪽에 송내가 있는데 가뭄을 만나면 기우제를 지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청량사와 일출암은 절터만 남아 있다. 지도에서 관아 좌측에 있는 서원이 德峰書院이다. 덕봉서원은 현재 옥천군 청산면 하서리 서원동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창건되어  趙憲과 宋時烈의 位牌를 봉안하였으나 편액은 하사를 받지 못하였다. 그 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모두 헐렸다.(金在完)

  • 청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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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청안현은 현재 괴산군 증평읍, 청안면, 도안면, 청원군 북이면과 오창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청안현의 읍치는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일대이다. 현 청안지서가 청안현의 동헌터이고, 현 청안초등학교가 객사 터이다. 객사터의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는 고려 성종 때 백성들이 본 城主의 덕을 기리어 이 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나무는 천연 기념물 제 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1402년(태종 5)에 淸塘과 道安의 두 고을이 좁고 백성이 적으므로 합하여 청안으로 고쳤다. 청안현은 6개 면을 거느린 작은 현이었다. 청안현은 미호천 상류의 저지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동쪽의 일부는 달천 상류지역에 속한다. 지도에서 읍치 남쪽에 龜石山이 보인다. 이 산은 일명 좌구산이라고 부른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이 고을을 세울 적에 離山이 높은 것을 꺼려서 이 절을 세우고, 水族의 신인 거북의 이름을 따서 구석이라고 했는데, 이 사실은 曹 會의 記에 실려 있다. 고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書院은 金塘書院이다. 1789년(정조 13)에 창건하여 延嗣宗, 延忠秀, 延世鴻, 延最積을 배향하였는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서 헐리었다.(金在完)

  • 청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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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현은 현재 청양군 청양읍, 운곡면, 남양면, 대치면, 비봉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읍치는 청양읍 읍내리 일대에있었다. 東國與地勝覽 靑陽縣 形勝條에 ''삼면이 준령이고, 서쪽은 약간 평평하다. 산이 많고 들이 적어 지세가 골짜기에 가깝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청양은 작천 상류의 산간지대에 자리잡은 분지에 해당한다. 진산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牛山 일명 騎龍山이다. 진산은 옛날에 전국 및 도성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을 그곳을 鎭護하는 주산으로 생각하고 제사지내는 산이다. 지도에는 사獅子山이 祖山이고, 조산에서 지맥이 文博山을 지나 主山인 우산으로 이어지고, 그 밑에 명당인 읍치가 자리잡고 있다.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이루고 있다. 金井驛은 찰방역으로서 屬驛이 8개이었다. 읍치 북쪽에 牛山城이 있는데, 돌로 쌓은 성이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칠갑산(七甲山)(561m)은 名山으로서 유명한 장곡사가 있다. 장곡사에는 국보 58호 철조약사여래좌상과 보물 162호 상대웅전 외 3종이 있다.(金在完)

  • 청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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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목은 여러 차례 일시 강등되기도 했으나 충주·공주와 함께 목사가 주재했고, 1402년(태종 2)에 설치되었던 忠淸兵營은 1416년(태종 16)에 충남 해미로 옮겨갔다가 1651년(효종 2)에 다시 돌아 왔다. 또한 鎭管으로서 2군(천안, 옥천), 10현(직산,목천,문의,회인,청안,진천,보은,영동,황간,청산)을 거느리고 있었다. 청주목은 현재 청주시, 내수읍, 오창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북이면, 북일면, 낭성면, 미원면, 남이면, 천안시 수신면 그리고 괴산군 청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대성동, 수동 부근이었다. 청주목의 진산은 읍치 동 1리에 위치한 당이산(唐羨山, 壯岩山, 臥牛山의 별칭이 있음)이다. 청주 읍성은 우암산(지도에는 臥牛山,338m) 아래, 無心川 동쪽 연안의 저지대에 남북방향으로 긴 장방형의 성곽으로 축성되었다.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4개의 성문을 갖고 있고, 성안에는 兵營, 本官, 客舍 건물이 있고, 성 밖에는 鄕校와 中營이 위치하고 있다. 충청도 군현에서 장방형의 성곽을 가진 군현은 淸州牧과 忠淸水營뿐이다. 지도에서 읍치 서북쪽에 鳳林藪가 보인다. 청주의 지형이 북쪽이 허하므로 이 곳에 숲을 조성한 곳으로 수 백년 된 나무가 5리에 뻗어 있다. 일종의 裨補風水의 예로 볼 수 있다.(金在完)

  • 청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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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청풍부는 현재 제천시 청풍면, 수산면, 한수면, 금성면, 덕산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청풍은 크기가 작은 현에 불과하지만 도호부가 있었다. 이유는 현종 1년(1660) 중궁전하 김씨(명성왕후)의 貫鄕이기 때문에 현에서 도호부로승격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읍치는 청풍면 읍리였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물에 잠겨 버렸다. 수몰지역의 누각·향교·고가 등은 충주호반의 勿台里로 옮겨졌다. 청풍부남쪽에 위치한 飛鳳山이 고을의 진산이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茂巖山(지형도에서는 望月山으로 나옴)에 창고 터가 있는데, 고려 때 이 곳에서 경상도 田賦를 조운했다고 전해진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北津은 청풍에서 제천 방면으로 갈 때 건너는 나루터로서 청풍과 제천에서 이출입하는 물자는 모두 북진을 경유하였다. 古地圖 左側에 보이는 황강역은 역과나루터를 겸하고 있는 수륙교통의 요지이었다. 官衙의 강 건너편에 있는 병풍바위는 병풍처럼 생긴 바위로 바람굴, 물굴, 부엉이굴 등이 있어서 더욱 유명하다. 황강역 우측에 보이는 서원이 황강서원이다. 1726년(영조 2)에 창건하여 다음 해에 사액을 받았고,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 윤봉구, 권 욱을 배향하였는데,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리었다. 서쪽에 보이는 惶恐灘은 서창 북쪽에 있는 여울로 이 곳은 큰 물결이 쏜살같은데, 아래여울을 지나면 龍湫를 이루는데,  물밑에는 반석이 깔려 있고,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金在完)

  • 충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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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충주목은 목사의 주재지로서 현 충주시, 주덕읍, 이류면, 신니면, 가금면, 앙성면, 금가면, 동량면, 노은면, 산척면, 엄정면, 소대면, 살미면, 괴산군 불정면 3개리, 괴산군 감물면, 제천시 덕산면을 포함하는 큰 읍이었다. 18세기 중엽 당시에도 충주목은 42개 면을 거느리는 大郡이었다. 충주는 임진왜란 이후 공주로 옮겨가지 전까지 충청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읍치는 현재 충주시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지금도 이 곳에는 ''객사 터'', ''경영루 터'', ''성문 터'', ''습사장'', ''감옥 터'', ''동헌 터'' 등 지명이 남아 있어 과거의 읍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지도에 보이는 원형의 충주읍성은 충렬왕 3년(1277) 충주성을 개축할 당시 礎石에다 연꽃을 화려하게 놓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읍성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지도에 보이는 가흥창은 조선 세조 때 덕흥창(금천면 창동 소재)에서 옮겨 온 창고이다. 중종 16년(1512) 때 70칸 규모의 倉庫를 축조하였고, 그 후 현종 10년(1669)에 49칸을 증축하였다. 이 가흥창에서 관리하는 세곡 수납 관할 구역은 충청도의 14개 읍, 경상도 12 개읍에 달하였다. 충주에는 左水站 소속의 漕運船 15隻이 배치되어 있었다. 충주목 관하의 주요 창고로는 東倉, 北倉, 南倉, 社倉, 金遷倉이 있었고, 주요 서원으로는 八峯書院, 樓岩書院이 있었다.(金在完)

  • 충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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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충청도는 현재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옛 평택현은 현재 경기도에 속하였고 당시에는 충청도에 속하였고, 금산군은 현재 충남에 속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라도에 속하였다. 당시의 충청도는 현재 충남과 충북을 합친 면적보다 약간 좁았다. 산줄기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고, 아울러 각 군현의 진산도 잘 나타나 있다. 한강 수계와 금강 수계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표시되어 있어 분수계의 파악이 용이하다. 18세기 중엽 충청도의 행정조직은 1府(淸風府), 4牧(忠州牧, 淸州牧, 洪州牧, 公州牧), 10郡, 39縣 등 54 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총괄하는 忠淸道監營은 公山(현 공주)에 있었다. 지도에서 監營은 붉은 원으로, 부·목·군·현은 분홍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행정조직과는 별도로 독립적인 군사조직이 있었다. 충청도에는 서천포, 마량진, 안흥진, 소근진, 평신진 5개의 鎭이 있었고, 이들을 지휘총괄하는 충청도 수영(보령현)이 있었는데, 이들 조직은 海岸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巡營은 공주목, 병영은 청주목에 있었다. 討捕營으로 前營(洪州), 右營(海美), 中營(淸州), 左營(公州), 後營(忠州)이 있었다. 지도에서 병영, 수영, 진 등 군주둔지는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충청도의 驛站으로는 利仁道(10驛), 金井道(17驛), 栗峯道(17驛), 連源道(15驛), 成歡道(12驛) 총 71개 역이 있었고, 찰방역은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金在完)

  • 충청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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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충청도는 현재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옛 평택현은 현재 경기도에 속하였고 당시에는 충청도에 속하였고, 금산군은 현재 충남에 속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라도에 속하였다. 당시의 충청도는 현재 충남과 충북을 합친 면적보다 약간 좁았다. 산줄기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고, 아울러 각 군현의 진산도 잘 나타나 있다. 한강 수계와 금강 수계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표시되어 있어 분수계의 파악이 용이하다. 18세기 중엽 충청도의 행정조직은 1府(淸風府), 4牧(忠州牧, 淸州牧, 洪州牧, 公州牧), 10郡, 39縣 등 54 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총괄하는 忠淸道監營은 公山(현 공주)에 있었다. 지도에서 監營은 붉은 원으로, 부·목·군·현은 분홍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행정조직과는 별도로 독립적인 군사조직이 있었다. 충청도에는 서천포, 마량진, 안흥진, 소근진, 평신진 5개의 鎭이 있었고, 이들을 지휘총괄하는 충청도 수영(보령현)이 있었는데, 이들 조직은 海岸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巡營은 공주목, 병영은 청주목에 있었다. 討捕營으로 前營(洪州), 右營(海美), 中營(淸州), 左營(公州), 後營(忠州)이 있었다. 지도에서 병영, 수영, 진 등 군주둔지는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충청도의 驛站으로는 利仁道(10驛), 金井道(17驛), 栗峯道(17驛), 連源道(15驛), 成歡道(12驛) 총 71개 역이 있었고, 찰방역은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金在完)

  • 태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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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군은 현재 태안군 태안읍, 남면, 이원면, 원북면, 소원면, 근흥면, 서산시 팔봉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태안읍 동문리와 남문리 일대에 있었고, 현재 읍사무소가 동헌자리이다. 태안군은 당진과 마찬가지로일찍부터 중국과 교류가 잦았다. 한편  ''왜구의 왕래 요충지''로서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왜구의 노략질로 시달리기도 했다. 태안의 鎭山은 정북쪽에 위치한 白華山(284m)이다. 주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읍치를 두 겹으로 감싸 안은 형국이고, 남쪽에는 案山인 南山이 있다. 읍성은 돌로 쌓은 성이다. 읍치의 남쪽에 위치한 憬夷亭은 조선 정종 때 건립한 것으로 중국 사신이 안흥으로 들어 올 때 경유·휴식하는 한편 防禦使가 군사업무를 보던 곳이다. 關隘로서는 白華山 舊山城이 있다. 縣北 7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세는 4면이 절벽으로 사람이 발을 디딜 수 없는 천혜의 요새이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북면목장(현재 태안군 이원면 청산리 부근)은 암말 21필, 수말 31필이 分養되었고, 해마다 말 두 필을 4월에 상납하였다. 백화산 정상에 있는 봉수는 동쪽으로는 서산현의 北山과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역시 서산현의 都飛山과 호응한다.(金在完)

  • 평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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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진은 현재 서산시 대산읍 전지역과 지곡면 북부 일부지역을 포함한다. 옛날 助立部曲이었는데, 지금은 대산곶이다. 서산읍에서 북쪽으로 60리에 있는데, 이 곳에 波知浦萬戶를 이속시켰다가 僉使로 승격시켰다. 1794년(정조 18)에 독립된 진으로 만들었고 水軍僉節制使兼摠理屯牙兵把摠 1명을 두었다. 목장이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1794년(정조 18)에 없애고 이어 첨사를 減하여 監牧官을 겸하게하였다. 평신진은 안흥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작고 병력이 적다. 그리고 성곽이 없고, 다만 官舍를 방형의 벽으로 둘러쌌다. 주기란에 보면 다양한 軍船이 나오고 있다. 조선후기 군선은 그 船種이 戰船·龜船·防船·兵船·伺候船·  船·汲水船·挾船·追捕船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평신진에 배치된 배는 방선, 병선, 사후선이다. 방선은 전선 대신에 쓰여지는 조선후기에 새로 등장한 중형 전투선이며, 병선도 조선 후기에 새로이 사용되기 시작한 소형 무장선이고, 사후선은 임진왜란에서도 쓰여진 비무장 보조정이다.(金在完)

  • 평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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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평택현은 현재의 평택시 팽성읍을 포함하는 좁은 지역이었다.읍치는 현재 팽성읍 객사리 및 안정리 부근에 있었다. 관아 터는 현재 팽성초등학교 자리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평택현은 1505년(연산군 11)에 경기도로 이속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전대로 환원하게 하였다. 왜구로 인한 피해 때문에 1596년(선조 29)에 직산에 예속시켰다가 1610년(광해군 2)에 다시 복귀시켰다. 평택현의 지형은 산이 낮고 들이 평평하고, 다른 군현에 비하여 크기가 작다. 지도에서 낮은 산줄기들이 흩어져 분포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위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鎭山은 본 읍 북쪽 1리 지점에 있는 城山(지형도에는 부용산으로 나와 있음, 34m)이다. 이 곳에는 옛 성터가 남아 있다. 서쪽 안성천 변에 위치한 褒義洞書院은 1661년(현종 2)에 세워졌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서원이다. 홍익한, 오달재, 윤집의 3학사를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렸다. 북쪽에 위치한 軍勿津(현재 군문포)은 양성과 진위로 통하는 나루터 겸 포구로서 이 곳에서 어염과 곡물의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읍치 서쪽에 작은 성이 보이는데 이것이 農城이다. 서정자 동북쪽에 있는 옛 성으로 동그란 야산 꼭대기에 성이 둘러 있는데 농성이라고 부른다. 1981년 7월 지방문화재 제 103호로 지정되었다.(金在完)

  • 한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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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군은 현재 서천군 한산면, 마산면, 기산면, 화양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한산군의 읍치는 현재 한산면 虎岩里 일대에있었다. 현재 읍치 북쪽에 위치한 건지산성이 사적 60호로 지정되어 있다. 교촌, 읍내, 성외리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이 읍치이었음을 알게 해주고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形勝條에서 ''한산군은 산이 기이하고 물이 곱고, 麒麟峰은 북쪽에 鎭山이 되어 있고, 熊浦는 그 남쪽을 들러 흐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麒麟山, 鷲峰山, 鷄岾山 등의 산은 상서로운 동물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풍수형국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산군의 진산은 군 서쪽 1리에 위치한 乾至山 혹은 乾止山이다. 건지산성은 건지산에 의지하여 쌓은 산성이었다. 흙으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3천 61척이었다. 성 안에 일곱 개의 우물과 한 개의 못이 있으며 軍倉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산군은 산성과 별도로 돌로 쌓은 읍성을 갖고 있었다. 현재도 읍성 일부가 남아 있다.(金在完)

  • 해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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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현은 현재 서산시 해미면, 운산면, 고북면, 당진군 정미면과 대호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부근에 있었다. 지도에 보이는 해미읍성(史蹟116號)은 1491년(성종 22)에 축성된 성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읍성은 옹성(甕城)(큰 성문밖의 작은 성문)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으며 성밖은 탱자나무 숲(枳林)으로 둘러 있다고 한다. 1402년(태종 2)부터 1651년(효종 2)까지 충청병사가 주재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많은 신도가 이 곳에서 순교하여 천주교의 성지가 되었다. 이 읍성은 1973년까지도 160여 채의 민가와 함께 학교와 관공서가 있다가 모두 철거되어 넓은 성안이 거의 비어 있다. 그러나 성벽과 문루의 보존·복원이 양호하여 우리나라 읍성의 표본으로 꼽힌다. 이 지도는 다른 지도와 달리 위쪽이 동쪽, 좌측이 북쪽, 우측이 오른쪽이다. 이와 같은 방향을 무시한 것은 문수산과 석문동의 지세가 읍치까지 내려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左營建物이다. 인조 때에 온양에 세웠다가 1712년(숙종 38)에 본 현으로 옮겼다. 左營將은 본 현감이 겸하였다. 속읍은 13개이었다.(金在完)

  • 홍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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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현은 현재 부여군 홍산면, 외산면, 내산면, 옥산면, 구룡면, 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와 부근의 면들은 금강의 지류 금천 상류 산간지대에 위치하지만, 북쪽의 외북면과 내북면은 웅천 수계의 상류에 속해 수계를 달리한다. 이 고을의 진산은 본 읍 서쪽에 위치한 飛鴻山이다. 본현의 형국이 나는 기러기의 형세가 있다하여 地官이 비홍이라는 이름을 부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主山과 鎭山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도의 위쪽에 星台山, 崇角山, 望心山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그 곳에서 산줄기가 남하하여 荒次山과 月明山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풍수상 주산은 월명산으로 볼 수 있다. 홍산현 지도에는 다른 지방의 지도와 달리 암자와 사원이 많이 나타나 있다. 新庵, 金池庵, 高德庵, 天寶庵, 周浦庵, 栖雲庵 등 6개와 彰烈祠가 분포한다. 彰烈祠는 1717년(숙종 43)에 세워졌고, 1721년(경종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大東地志의 典故에 따르면 1376년(고려 우 왕 2) 判三司 崔 瑩 등이 군사를 이끌고, 홍산에 이르렀는데, 이미 왜가 險隘를 점거하고 있었다. 최영이 몸소 병졸을 이끌고 힘써 싸워 왜를 대패시키고, 거의 다 죽였다. 북쪽의 무량사에는 국보 233호 석등, 보물185호 5층 석탑 외 2점, 보물 356호극락전 등이 있다.(金在完)

  • 홍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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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목은 홍성군 흥성읍, 홍북면, 홍동면, 금마면, 장곡면, 청양군 비봉면 일부를 포함하는 큰고을이었다. 읍치는 홍성읍 대교리와 오관리 부근에 있었다. 홍주목은 18세기 중엽 27개면을 거느리는 大郡으로 목사가 주재하고 있었다. 本 州 서쪽 3리 지점에 위치한白月山이 鎭山이다. 지도에는 고을의 진산 白月山을 중심으로 모든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즉, 지도는 위쪽을 북쪽으로 보고 지도를 그린 것이 아니라 고을의 진산을 중심으로그린 것이다. 白月山을 중심으로 명당을 감싼 좌청룡과 우백호가 잘 나타나 있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 읍성의 일부와 성문인 조양문이 보존되어 있다. 성안에 前營將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전영은 인조 때 세워진 것으로 屬邑은 홍주, 서천, 임천, 보령, 한산, 청양, 정산, 홍산, 비인, 남포이었다. 魯恩書院은 1676년(숙종 2)에 세워졌고, 1692년(숙종 18)에 사액을 받았다. 다른 지방의 지도와 달리 소규모의 저수지가 많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金在完)

  • 황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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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황간현은 현재 영동군 황간면, 상촌면, 매곡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영동군 추풍령면은 본래 김천현의 황금소면인데, 190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황간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읍치는 현재 황강면 남성리 지역에 있었다. 황간향교는 본래 1394년(태조 3)에 현의 뒷산에 창건하였던 것인데, 1666년(현종 7)에 옛 향교 서쪽 2리인 토성 안으로 옮겨 세웠으며, 1752년(영조 28)에 보수하였고, 또 1901년에도 낡은 곳을  고쳤다. 향교 옆 절벽 위에 자리한 鶴駕樓는 지방유형문화재 제 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태조 초년에 縣監 河 澹이 세웠으며, 남 공이 편액을 걸고, 이남이 記文을 썼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때 縣監 孫蓄, 具長源이 이어 증수를 했다. 1716년(숙종 42) 현감 黃鍍가 기와를 보수하였고, 1808년(순조 8)에 縣監 李運永이, 그리고 1930년 郡守 金錫泳이 각각 증수하였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寒泉書院은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 冷泉에있고, 숙종 때 건립하여 영조 때 사액을 받았다. 지금은 없어졌고, 모셨던 선현은 宋時烈 한 분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松溪書院은 1570년(선조 3) 지방 유림들이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金在完)

  • 회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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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회덕현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와 유성구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었다. 회덕현의 읍치는 경부고속도로변의 대덕구 읍내동에 있었다. 회덕현은 갑천 유역의 화강암지대의 거대한 침식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을의 진산은 현 동쪽 3리에 위치한 鷄足山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산은 봉우리가 특이하게 뛰어나고, 날이 가물 때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지도에 보이는 계족산 봉수대는 동쪽으로는 옥천군 環山 봉수대와 서로 응하고, 북쪽으로는 문의현 所伊山 봉수대와 응한다. 崇賢書院은 1609년(광해군 1)에 중건하였고, 그 해에 사액을 받았다. 진산 계족산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명당인 관사에서 穴을 이루고 있으나 남쪽에 案山이 없어서 일부러 造山을 만들어 허한 것을 보충하였다. 擇里志에 따르면 주민들의 속담에 一 유성 二 경천 三 이인 四 유구라고 하는데 회덕현의 유성이 부근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의미이다.(金在完)

  • 회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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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인현은 현재 보은군 회북면과 회남면을 포함하는 좁은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인은 보은에 병합되었다. 회인 구읍은 현재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 있었다. 지금도 ''향교말'' 지명이 남아 있다. 산줄기가 읍치를 겹겹히 싸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新增東國與地勝覽 형승조에 ''거듭된 묏부리가 겹겹의 고개 멀리 서로 연했고, 길은 羊의 창자처럼 둘리었으니 馬이 나아가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회인현의 산세를 입증하는 것이다. 회인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 2리에 있는 何磨山이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虎岾山城은 돌로 쌓은 성이었는데, 지금은 없다. 우측에 보이는 麻田庵은 세종대왕이 이 곳 절에 와서 비에 젖은 옷을 빨아 입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암자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玉女峰은 山形이 풍수형국 상 玉女彈琴形이라 한다. 읍치 동쪽에 있는  壇은 못된 돌림병을 퍼뜨리는 惡鬼를 慰撫하고자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사직단은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토지의 神인 社와 곡식의 神인 稷에 대하여 제사지내는 壇이다.(金在完)

  • ▶평안도
  • 가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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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군은 일제시대의 박천군 가산면, 용계면, 청룡면, 서면, 양가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운전군의 장수탄강 동북쪽 일대이다. 읍치는 고을의 진산 鳳頭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쌓여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봉두산에는 가산의 옛터임을 표시해주는 古嘉州란 글자와 성곽의 표시가 있으며, 그 옆에는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上菴, 中菴 등의 암자가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 그 아래의 曉星嶺은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곳으로서 사면이 둘러 쌓여 있는 要衝地라고 한다. 하천의 표시에서는 읍치 동남쪽에 있는大定江이 다른 하천에 비해 월등히 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구별하지 않았다. 아래의 여백 주기에 강물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적어 놓았다. 주기 끝 부분에는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남쪽으로 도망갈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건널 수 있어 적의 추격을 뿌릴 칠 수 있었다는 ≪三國史記≫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하지만 이 때 건넌 강이 大定江이라는 기록은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부정되고 있다. 대정강변에 있는 마을들은 이 고을에 속해 있는 땅이며, 古城鎭은 博川에 속해 있는 곳이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논이 밭보다 약간 많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강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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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계부는 일제시대의 강계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강계시, 만포시, 시중군, 장강군, 성간군, 전천군, 룡림군 일대이다. 이 고을의 옛 이름은 禿魯江이었다고 하며, 1361년(고려 공민왕 10)에 萬戶府를 두면서 우리 영토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세조 때 지도의 위쪽에 있는 四郡을 폐하고 주민을 이 고을로 옮기면서 평안도 최북단의 고을이 되었다. 고을 아래쪽을 흐르는 禿魯江은 남쪽에서 발원하여 읍치 앞에서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꿈에도 불구하고 직선으로 그려져 있다. 고을 위쪽에 있는 산줄기도 고을 동쪽에 있는 것이다. 압록강의 방향은 하류를 제외하면 대체로 실제와 비슷하게 표현되었다. 최전방에 있는 고을의 성격에 맞도록 압록강변과 산줄기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는 많은 鎭과 烽燧, 院, 도로의 표시가 간결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읍성과 滿浦鎭이 특별히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지도 오른쪽의 狄踰岺은 남쪽 희천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고, 왼쪽의 麻田嶺과 梨嶺은 四郡 지역으로부터 적이 쳐들어 올 경우에 통과해야 하는 要衝地로서 모두 關門이 설치되어 있다. 압록강에 쓰여있는 八十六把에서 一百八巴까지는 모두 강계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강계 땅에 있는 把守를 순서대로 써놓은 것이다. 한편 만포진 건너편에 표시된 五國城은 金나라(1115-1234)의 초기 도읍지였다고 하며 그 옆에 있다는 황제묘도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 만포진 반대편의 중국 땅에는 고구려의 수도인 國內城이 있던 곳이다.(이기봉)

  • 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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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현은 일제시대의 삼등현을 제외한 강동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양특별시 승호구역과 강동군 북부 일대이다. 이 고을은 1136년(고려 인종 14) 西京에 속했던 仍乙舍鄕, 班石村, 朴達串村, 馬灘村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고을의 서쪽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대동강 본류이며, 북쪽 오른쪽에서 합류하는 것이 가장 큰 지류인 沸流江이고, 지도 아래쪽 오른쪽에서 합류하는 것이 지금 南江으로 불리는 能城江이다. 읍치는 고을의 진산 大朴山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남쪽으로 水晶川이 흘러 대동강에 합류한다. 대동강변에는 閱波亭 등의 정자와 암석이 있어 뛰어난 경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정천과 대동강이 합류하는 古城은 옛 강동현의 읍성으로서 몽고군에게 쫓긴 거란족 5만여명이 高麗·蒙古·東眞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강동성 싸움(1219)으로 유명하다. 이 때 포로가 된 5만여명 대부분은 몽고로 끌려갔지만 약 700명 정도는 고려에 남겨지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각 고을에 나누어 살게 했는데 그곳을 契丹場(글안장으로 읽는다)으로 불렀다 한다. 한편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읍치 서쪽 3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속설에 檀君墓라 전한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이 북한에서 요즈음 발굴했다는 단군릉이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논은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이기봉)

  • 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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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현은 일제시대의 강서군 강서면, 동진면, 성암면, 대산면, 쌍룡면, 보림면, 잉차면, 초리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남포직할시 동북쪽이다. 고을의 鎭山 舞鶴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가 읍치를 겹겹이 감싸 안은 형국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客舍와 衙舍를 비롯하여 각종 정자와 鳴鶴池까지 자세히 표시하여 읍치 공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읍치에 있는 서원은 鶴洞書院으로서 벼슬이 大司成에 오른 후 은퇴하여 이 고을에서 살았던 金泮을 배향하여 1686년(숙종 12)에 賜額받았다. 지도에표시된 角墓鄕, 甲岳鄕, 大垢鄕 등의 鄕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西京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고을이 될 당시의 마을 이름이다. 그런데 읍치에 있었던 梨岳鄕만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 아래쪽에는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채를 금한 封山이 네 개나 표시되어 있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서해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밭이 논보다 훨씬 많은 고을임을 알 수 있으며 지도 아래쪽에 흐르는 강은 대동강이다.(이기봉)

  • 개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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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군은 일제시대의 봉동면 남쪽을 제외한 개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개천시 일대이다. 고려 초기에는 여진·거란과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성격이 강한 安水鎭·朝陽鎭으로 편제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 영토가 압록강변에 이르러 이곳이 內地가 됨에 따라 일반 郡縣으로 편제된 고을이다. 지도의 오른쪽에 보이는 강은 청천강이고, 아래쪽에 보이는 강은 대동강이다. 동북쪽으로부터 들어온 산줄기가 고을을 빙 돌아 대동강변을 따라가다 다시 서북쪽으로 꺾이기 때문에 고을의 물이 모두 서북쪽으로 흘러 청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고을의 진산 大林山으로부터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둘러 쌓여 있고, 앞쪽으로는 개천강을 임해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천강의 상류에는 釜淵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는데 매우깊어서 가뭄이 들면 祈雨祭를 지내던 곳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는 대동강가에 절벽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음이 재미있는데 이곳은 銀山에서 대동강을 넘어 개천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지점이다. 기타 乭古介, 者斤古介 등 순 우리말의 모습들이 지도에 많이 들어가 있음이 매우 흥미롭다.(이기봉)

  • 곽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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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산군은 일제시대의 정주군 관주면, 임포면, 안흥면, 옥천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곽산군 일대이다. 이 고을은 993년(고려 성종 12) 거란족의 1차 침입 때 고려 徐熙(940-998) 장군이 거란의 소손녕과 단판을 벌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개척한 江東六州의 하나이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陵漢山城은 이 때 쌓은 산성이며 당시의 고을 이름인 郭州가 산성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는 客舍와 衙舍 등 간단한 건물만 표시하였지만 다른 고을과의 거리는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읍치동북쪽의 雲興?은 雲興驛으로서 1746년(영조 22)에 읍치를 이곳으로 옮겼다가 1768년(영조 44)에 지도상의 읍치 지역으로 다시 옮겼다. 이것을 통해 이 지도가 1746년 이전 또는 1768년 이후에 작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는 龜城 里는 곽산의 북쪽에 있었던 구성의 越境地로서 염전과 관련되어 설치되었음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지도에 자세히 표시된 烽燧를 통해 국방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밭이 약간 많은 고을이며 능한산성에는 산성의 평상시 관리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寺刹이 3개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관서일로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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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는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평안도 서북방면의 방어시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그려 놓았다. 우선 지도의 한가운데를 가르는 지금의 강남산맥이 서북방면에서 침입하는 적에 대한 제1차 저지선이 됨을 알 수 있다. 최북단의 강계 위쪽에는 廢四郡 쪽에서 들어오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麻田岺의 관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鎭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지금의 강남산맥 위에서 가장 중요한 要衝地였던 狄踰岺 위에 關門을 설치하여 1차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그 아래쪽으로는 柔院鎭·鳳丹城 등의 방어시설을 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최고의 천연요새라 알려진 영변의 鐵甕城이 나온다. 창성, 벽동, 이산, 위원으로부터 들어온 적을 막기 위해 곳곳에 鎭과 山城을 설치하였으며, 강남산맥 위에도 여러 개의 關門이 있어 1차 저지선이 되고 있다. 산맥 아래쪽으로는 天摩鎭으로부터 委曲鎭까지 여러 개의 鎭과 山城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龜城과 영변의 鐵甕城이 버티고 있다. 서쪽 방면의 의주를 넘어온 적은 白馬山城을 지나 내륙과 해안가를 따라가는 두 길로 갈라진다. 해안가쪽에서는 강남산맥이 곳곳에서 낮아지고 있기 때문에 관문보다는 龍骨城, 西林城, 東林城, 雲暗城,  山城, 凌漢城 등의 산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다. 내륙쪽으로는 植松, 安義 등의 鎭을 설치하여 막고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龜城이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길들은 대개 安州에서 합류되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청천강을 뒤로하고 튼튼한 성곽을 건설하여 渡江한 적을 막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동쪽 함경도의 함흥, 영흥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의 통로에 해당하는 영원, 양덕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다. 기타 압록강을 넘어 온 적의 육로 침입에 대한 방어선을 알려주기 위한 지도이기 때문에 압록강과 서해바다는 생략되어 있다. 뒤쪽의 여백주기에는 산과 강의 흐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싣고 있어 지도의 단점을 보완해주고 있다.(이기봉)

  • 관서일로영애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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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는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평안도 서북방면의 방어시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그려 놓았다. 우선 지도의 한가운데를 가르는 지금의 강남산맥이 서북방면에서 침입하는 적에 대한 제1차 저지선이 됨을 알 수 있다. 최북단의 강계 위쪽에는 廢四郡 쪽에서 들어오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麻田岺의 관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鎭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지금의 강남산맥 위에서 가장 중요한 要衝地였던 狄踰岺 위에 關門을 설치하여 1차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그 아래쪽으로는 柔院鎭·鳳丹城 등의 방어시설을 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최고의 천연요새라 알려진 영변의 鐵甕城이 나온다. 창성, 벽동, 이산, 위원으로부터 들어온 적을 막기 위해 곳곳에 鎭과 山城을 설치하였으며, 강남산맥 위에도 여러 개의 關門이 있어 1차 저지선이 되고 있다. 산맥 아래쪽으로는 天摩鎭으로부터 委曲鎭까지 여러 개의 鎭과 山城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龜城과 영변의 鐵甕城이 버티고 있다. 서쪽 방면의 의주를 넘어온 적은 白馬山城을 지나 내륙과 해안가를 따라가는 두 길로 갈라진다. 해안가쪽에서는 강남산맥이 곳곳에서 낮아지고 있기 때문에 관문보다는 龍骨城, 西林城, 東林城, 雲暗城,  山城, 凌漢城 등의 산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다. 내륙쪽으로는 植松, 安義 등의 鎭을 설치하여 막고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龜城이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길들은 대개 安州에서 합류되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청천강을 뒤로하고 튼튼한 성곽을 건설하여 渡江한 적을 막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동쪽 함경도의 함흥, 영흥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의 통로에 해당하는 영원, 양덕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다. 기타 압록강을 넘어 온 적의 육로 침입에 대한 방어선을 알려주기 위한 지도이기 때문에 압록강과 서해바다는 생략되어 있다. 뒤쪽의 여백주기에는 산과 강의 흐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싣고 있어 지도의 단점을 보완해주고 있다.(이기봉)

  • 구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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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부는 일제시대의 구성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구성시와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천마군 일대이다. 993년(고려 성종 12)에 서희가 회복한 江東六州의 하나이다. 고을은 크게 두 개의 물줄기에 의해 나누어지는데 동쪽에는 대령강의 지류인 천방강이 있고, 서쪽은 신의주에서 압록강과 합류하는 삼교천의 상류에 해당한다. 청나라와의 국경에 있는 의주·삭주와 경계선을 맞대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지는 고을이다. 의주와의 통로에는 塞墻門을 비롯하여 植松鎭·安義鎭이 포진하고 있으며 삭주와의 통로에도 窟菴山城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읍성 역시 石築의 성곽과 성문, 연못과 샘의 표시가 아주 자세하며 인조 때 설치된 中營도 보이고 있다. 그밖에 이미 頹落한 각종 산성이 모두 수록되어 있고, 烽燧와 要衝地의 표시가 아주 자세한 것도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고을 성격 때문으로 보인다. 여백주기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는  防面은 정주와 곽산을 넘어 있는 이 고을의 越境地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덕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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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천군은 일제시대의 잠도면, 잠상면을 제외한 덕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덕천군 일대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을의 鎭山이 지도의 왼쪽 아래에 보이는 長安山으로 되어 있고, ≪輿地圖書≫에는 고을의 主脈이 읍치 위쪽의 堂山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진산을 읍치에 가까운 산으로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의 한가운데 흐르는 강은 寧遠에서 발원한 대동강의 상류인데 孟山쪽에서 내려오는 맹산강이 금성산성 부근에서 합류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못하다. 지도에는 읍치가 매우 확대·과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舍와 衙舍 등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다. 기타 院과 倉의 표시가 자세하며, 여백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알 수 있고 火田도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맹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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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산현은 일제시대의 옥천면, 봉인면, 학천면을 제외한 맹산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맹산군 일대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을의 鎭山이 지도의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頭尾(→無)山으로 되어 있고, ≪輿地圖書≫에는 고을의 主脈이 읍치 위쪽의 秀羅山으로 되어 있는데 나중에 진산을 읍치에 가까운 산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의 오른쪽으로는 白頭大幹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나간다. 頭尾嶺 등은 함경도의 永興 땅으로 넘어가는 요충지로서 지도의 定平界는 잘못 표시된 것이다. 영흥과의 경계 상에 鐵瓮城이 보이고 있는데 그렇게 크지 않은 성이지만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고 항아리와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성은 맹산현의 옛 이름인 鐵瓮縣이 유래된 곳이지만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영흥 관할로 옮겨졌다고 한다. 읍치는 맹산강가에 있으며 ?舍와 衙舍, 倉 등만 간략히 표시되어 있고 관사 앞에는 특별히 大泉이 그려져 있다. 기타 읍치를 제외한 부분이 많이 축소·왜곡되어 있고 여백주기를 보면 논(畓)이 하나도 표시되어 있지 않아 논농사의 한계지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박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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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천군은 일제시대의 박천군 박천읍, 동남면, 덕안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박천군 일대이다. 고을의 동쪽·북쪽의 산줄기로부터 흘러 내려온 작은 물줄기들이 지금의 대령강인 大定江과 합류하여 청천강과 더불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舍·衙舍 등 중요한 건물만 표시하였으며, 그 아래쪽에는 옛 읍성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古城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서북 嘉山쪽으로부터 들어오는 방어상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1741년(영조 17)에 새로 설치한 군사시설로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북방수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烽燧와 고개의 표현이 자세함도 고을의 요충적 성격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성진 왼쪽에 있는 望毛路는 길이 아니라 해안가 절벽바위의 이름이다.(가산군 지도의 望毛老) 기타 교과서에 안주·박천평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넓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고을답게 여백주기를 보면 논이 밭보다 많은 고을임을 알려주고 있다.(이기봉)

  • 벽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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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동군은 일제시대의 벽동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벽동군 및 자강도 우시군 서쪽 일부이다. 이 고을은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살던 땅이었는데 1357년(공민왕 6)에 여진족을 쫓고 남쪽 고을의 백성을 옮겨 새로 편입하였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 왼쪽의 童巾江은 지금의 충만강으로서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합류된다. 압록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며 북류하는 작은 하천들을 합친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1개의 鎭과 5개의 堡 및 수많은 把守가 그려져 있고, 건너편 청나라 땅의 마을 이름까지 자세히 표시되어 있어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북방 경비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각 봉수의 표시도 자세하고, 다른 봉수와의 호응관계도 잘 기록되어 있다. 읍치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林土鎭이 보이고 있는데 그 북쪽으로는 關門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 위쪽에는 읍치의, 오른쪽에는 벽동 소속 각 鎭堡의 군사적 내용 및 적의 침입로가 자세히 적혀 있다. 기타 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밭농사 지역임을 알 수 있고 火田도 성행하고 있었음도 보인다.(이기봉)

  • 벽동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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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동군은 일제시대의 벽동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벽동군 및 자강도 우시군 서쪽 일부이다. 이 고을은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살던 땅이었는데 1357년(공민왕 6)에 여진족을 쫓고 남쪽 고을의 백성을 옮겨 새로 편입하였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 왼쪽의 童巾江은 지금의 충만강으로서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합류된다. 압록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며 북류하는 작은 하천들을 합친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1개의 鎭과 5개의 堡 및 수많은 把守가 그려져 있고, 건너편 청나라 땅의 마을 이름까지 자세히 표시되어 있어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북방 경비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각 봉수의 표시도 자세하고, 다른 봉수와의 호응관계도 잘 기록되어 있다. 읍치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林土鎭이 보이고 있는데 그 북쪽으로는 關門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 위쪽에는 읍치의, 오른쪽에는 벽동 소속 각 鎭堡의 군사적 내용 및 적의 침입로가 자세히 적혀 있다. 기타 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밭농사 지역임을 알 수 있고 火田도 성행하고 있었음도 보인다.(이기봉)

  • 삭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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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주부는 일제시대의 청수읍을 제외한 삭주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삭주군 동쪽과 대관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그렸다. 지금의 강남산맥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위쪽은 대령강의 상류이며, 아래쪽은 압록강의 지류이다. 실제로는 위쪽 부분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읍치 공간을 부각시키기 위해 아래쪽 부분을 더 크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아래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강이 압록강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시설에 대한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압록강변에는 최전방의 방어와 감시를 위한 仇寧鎭과 두 개의 把守 및 봉수의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읍치에는 정사각형의 石城이 있음을 잘 그려 놓았고, 지금의 강남산맥에는 넘어가는 고개와 도로의 표시가 자세하다. 고개를 넘어가는 곳에 小塞墻과 幕嶺鎭·天摩鎭이 설치되어 있고 각 鎭에서 관할하는 창고가 있음도 보인다. 그 위쪽에 보이는 大朔州는 원래의 삭주 읍터로서 지도상의 읍치인 小朔州로 읍치를 옮긴 것은 1430년(세종 12)이다.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대삭주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기록되어 있다. 오른쪽의 여백주기에는 삭주부 읍치와 仇寧鎭의 군인수와 군사시설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되어 있다.(이기봉)

  • 삭주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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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주부는 일제시대의 청수읍을 제외한 삭주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삭주군 동쪽과 대관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그렸다. 지금의 강남산맥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위쪽은 대령강의 상류이며, 아래쪽은 압록강의 지류이다. 실제로는 위쪽 부분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읍치 공간을 부각시키기 위해 아래쪽 부분을 더 크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아래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강이 압록강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시설에 대한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압록강변에는 최전방의 방어와 감시를 위한 仇寧鎭과 두 개의 把守 및 봉수의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읍치에는 정사각형의 石城이 있음을 잘 그려 놓았고, 지금의 강남산맥에는 넘어가는 고개와 도로의 표시가 자세하다. 고개를 넘어가는 곳에 小塞墻과 幕嶺鎭·天摩鎭이 설치되어 있고 각 鎭에서 관할하는 창고가 있음도 보인다. 그 위쪽에 보이는 大朔州는 원래의 삭주 읍터로서 지도상의 읍치인 小朔州로 읍치를 옮긴 것은 1430년(세종 12)이다.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대삭주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기록되어 있다. 오른쪽의 여백주기에는 삭주부 읍치와 仇寧鎭의 군인수와 군사시설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되어 있다.(이기봉)

  • 삼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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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등현은 일제시대의 강동군 삼등면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며, 지금은 평양특별시 강동군 남쪽 일대이다. 삼등현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新城·蘿坪·狗牙 세 部曲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고을의 鎭山은 鳳頭山이며, 읍치 공간은 진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풍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을 아래쪽을 흐르는 강은 대동강의 지류인 南江으로서 옛날에는 綾城江(能成江으로도 쓴다)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강가에는 많은 기암절벽이 표시되어 있는데,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黃鶴樓는 아주 오래된 누각으로서 그 이름은 이백의 시 ''三登黃鶴''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지도에는 평안도의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碧雲菴이라는 사찰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논(畓)이 거의 없고 火田이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던 고을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삼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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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화부는 일제시대의 진남포부와 용강군 삼화면, 금곡면, 토성면, 신녕면, 귀림면, 대대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남포직할시 남서쪽과 온천군 남쪽 일대이다. 대동강의 물줄기가 서해로 들어가는 마지막 입구에 해당하며, 고등학교 지리책에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少雨地로서 천일제염으로 유명한 광량만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고을은 1136년(고려 인종 14) 西京 경내에 있던 金堂, 呼山, 漆井 등 세부곡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1686년(숙종 12)에 防禦營이 이 고을로 옮겨져 여러 고을을 관장하게 되면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동북쪽으로부터 들어온 산줄기 아래에 읍치가 자리잡고 있으며, 읍치에는 ?舍와 衙舍 등만 표시하여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廣梁鎭이 보이고 있는데, 원래는 虎島에 있던 것을 1444년(세종 26)에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관리하였으며, 여백 주기에는 각 병사의 숫자와 성의 크기, 다른 곳과의 거리가 자세히 적혀 있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해안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논(畓)보다는 밭(田)이 훨씬 많은 고을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상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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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군은 일제시대의 중화군 상원면, 수산면, 천곡면, 풍동면, 배화면, (상도면, 하도면)에 해당하며지금은 평양특별시 상원군 일대이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하여 그렸는데 고을의 서쪽에 있는 鎭山 盤龍山의 坐向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을은 동·서·남쪽이 높은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사방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모여 북쪽 能城江에 합해진다. 이 能城江은 현재는 南江으로 불리고 있다. 읍치는 서쪽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이중으로 둘러 쌓인 전형적인 풍수적 형태로 그려져 있어 시각적으로 눈에 쉽게 들어온다. 이 고을은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에게 불려가 반역에 대한 추궁을 당할 때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어 위기를 모면하게 도와준 崔凝(898-932)의 출신지이다. 또한 고려 충렬왕(1274-1308) 때 몽고에 30회나 사신으로 드나들며 원나라 관할하에 있었던 동녕부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이 고을이 황주로부터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되게 만든 趙仁規(1227-1308)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논(畓)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火田도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선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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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부는 일제시대의 선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선천군의 대부분과 서쪽 일부를 제외한 동림군 일대이다. 이 고을은 993년(고려 성종 12)에 서희가 회복한 江東六州의 하나로서 그 때의 읍치가 지도 왼쪽 東林古城에 宣州로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古邑基에는 ''병자호란 때 불타서 林畔?으로 옮겼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이 때 옮긴 곳이 지도에 보이는 읍치이다. 읍치에는 客舍 등의 건물 이외에 中軍所가 보이고 있는데 병자호란(1636) 직후인 1642년(인조 20)에 설치된 淸北水軍防營으로서 평안도 서북쪽 고을과 鎭堡를 관할하였다. 여백주기에도 防營의 내용이 쓰여 있으며, 이 방영에서 관할하였던 鎭이 다음 페이지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劒山城은 1627년(인조 5)에 처음으로 쌓았다가 1631년(숙종 9)에 임경업이 증축했던 성이다. 그 옆의 淸江鎭은 1678년(숙종 4)에 설치되고 영조 때 종3품의 僉使가 파견되었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방어영에 소속된 배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東林古城은 의주대로상의 요충지로서 조선 초까지 頹落해 있던 성터를 1693년(숙종 19)에 修築하였다.그 왼쪽의 左峴大路라 표시된 곳은 의주대로 최대 요충지로 인정되어 1750년(영조 26)에 성을 쌓고 (西林城)關門을 설치했던 곳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런 요충지로서의 성격에 맞게 고개와 봉수의 표시가 매우 자세하며, 다음 페이지의 여백주기에는 중국과의 국경선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身彌島는 지형의 특성이 잘 그려져 있으며, 點馬營을 통해 목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선천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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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부는 일제시대의 선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선천군의 대부분과 서쪽 일부를 제외한 동림군 일대이다. 이 고을은 993년(고려 성종 12)에 서희가 회복한 江東六州의 하나로서 그 때의 읍치가 지도 왼쪽 東林古城에 宣州로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古邑基에는 ''병자호란 때 불타서 林畔?으로 옮겼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이 때 옮긴 곳이 지도에 보이는 읍치이다. 읍치에는 客舍 등의 건물 이외에 中軍所가 보이고 있는데 병자호란(1636) 직후인 1642년(인조 20)에 설치된 淸北水軍防營으로서 평안도 서북쪽 고을과 鎭堡를 관할하였다. 여백주기에도 防營의 내용이 쓰여 있으며, 이 방영에서 관할하였던 鎭이 다음 페이지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劒山城은 1627년(인조 5)에 처음으로 쌓았다가 1631년(숙종 9)에 임경업이 증축했던 성이다. 그 옆의 淸江鎭은 1678년(숙종 4)에 설치되고 영조 때 종3품의 僉使가 파견되었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방어영에 소속된 배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東林古城은 의주대로상의 요충지로서 조선 초까지 頹落해 있던 성터를 1693년(숙종 19)에 修築하였다.그 왼쪽의 左峴大路라 표시된 곳은 의주대로 최대 요충지로 인정되어 1750년(영조 26)에 성을 쌓고 (西林城)關門을 설치했던 곳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런 요충지로서의 성격에 맞게 고개와 봉수의 표시가 매우 자세하며, 다음 페이지의 여백주기에는 중국과의 국경선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身彌島는 지형의 특성이 잘 그려져 있으며, 點馬營을 통해 목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성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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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천부는 일제시대의 성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성천군과 회창군 일대이다. 대동강의 지류 沸流江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관통하며  波에서 대동강 본류와 합해진다.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강은 역시 대동강의 지류인 能城江으로서 지금은 南江이라 부른다. 읍치는 비류강가의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衙舍·客舍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명물이며, 운치 있는 이름을 갖고 있는 降仙樓와 訪仙門까지도 특별히 표시하였다. 여백 주기에 강선루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되어 있음도 흥미롭다. 강선루 건너편에는 屹骨山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구려 시조 東明王이 부여로부터 남하하여 힘을 겨루어 굴복시킨 沸流國의 왕 松讓이 쌓은 성이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동명성왕의 근거지인 졸본성이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므로 이 기록은 믿어지지 않고 있다. 이 기록 이외에도 고구려 초기 동명성왕과 관련된 고적이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많이 나온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東倉 부근에표시되어 있는 총 4개의 銀店을 통해 조선 후기에 많이 개발되었다는 은광산의 존재를 지도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사회·경제적 변화의 일면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산과 고개의 표시가 자세한데 고개의 표현에서 古介와 嶺이 섞여 표시되어 있어 양자가 실제에서도 혼용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이 지역은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숙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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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천부는 일제시대의 숙천면, 서해면, 검산면, 조망면, 동송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숙천군 일대이다. 고을의 원래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모양인데 위·아래로 긴 직사각형의 지면에 그리다가 보니까 서쪽에 있어야 할 바다가 남동쪽에 있는 모습으로 약간 왜곡되어 표현되었다. 읍치에는 고을의 진산 唐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 위에 土城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城을 밋밋한 선으로 그림으로써 石城과 구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虎田城 역시 토성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옛 읍터였다고 하며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이미 황폐해져 있었다. 읍치 왼쪽에 있는 館舍는 읍치 서쪽 2리에 있었다는 肅寧驛이다. 기타 봉수와 도로의 표현이 자세하며, 여백 주기의 田畓 結數를 통해 해안가에 있으면서도 田이 畓보다 훨씬 많은 곳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순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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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안현은 일제시대의 평원군 순안면, 공평면, 양화면, 자덕면, 용흥면, 동두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북한의 순안비행장으로 알려진 평양특별시 순안구역 일대이다. 평양시내 서쪽에서 대동강과 합류하는 보통강의 상류가 자모산에서 발원하여 사방으로부터 여러 물을 받아 남동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읍치는 산세에 의해 포근히 감싸있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표현되어 있으며, 향교·아사 등만 간단하게 표시하고 있다. 향교 옆에 있는 서원은 星山書院으로서 정몽주(1337-1392) 등을 배향하여 1696년(숙종 22)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조선 초기에는 頹落했던 성을 인조 때 修築한 慈母山城이 보이고 있는데 鎭을 설치하여 성천, 은산, 자산, 순안, 영유 등 다섯 고을을 관장하게 하였다. 성곽과 성문의 표시가 자세하고, 南門 아래쪽으로 外城에 해당하는 牛馬城이 있음을 통해 병자호란 이후 증가된 북방 방비의 일단을 볼 수 있다.  기타 지도의 왼쪽에 보이는 鎭里面은 서해안 바닷가에 있었던 순안현의 월경지이다.(이기봉)

  • 순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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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군은 일제시대의 순천군 순천읍, 내남면, 신창면과 덕천군 잠상면, 잠도면 그리고 맹산군 옥천면, 학천면, 봉인면에 해당한다. 지금은 평안남도 순천군의 서쪽과 북창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쪽으로 그렸는데 고을 전체가 殷山 땅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둘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은산 땅 서쪽에 있는 읍치 지역의 글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은산 땅 동쪽에 있는 古順川 지역의 글자는 위에서아래로 볼 수 있도록 그려 두 지역을 구별짓고 있다. 고을의 가운데를 흐르는 강은 대동강 본류로서 동북쪽에서 들어와 읍치 동쪽을 거쳐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刀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古順川 지역에는 釜淵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겨울에도 얼지 않으며 흘러나와 3리를 땅 속으로 흐른다''고 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는 유명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기타 창고의 표시가 매우 자세함이 특이하다.(이기봉)

  • 안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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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목은 일제시대의 안주군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평안남도 안주시, 문덕군에 해당한다. 平安道의 이름 중 ''平''자는 평양에서, ''安''자는 바로 이 고을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이름난 고을이며, 의주대로 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런 고을의 성격답게 지도의 한 가운데에 웅장한 읍성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 넣었다. 동북쪽으로는 청천강을 해자로 삼아 천연적인 요새를 이루었고 남쪽에는 남문의 甕城을 쌓아서, 동쪽에는 外城을 두름으로써 지형적인 단점을 극복하려 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읍성의 안쪽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영이 이 고을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兵營과 기타 건물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을 북쪽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淸川江이 보이고 있는데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隋煬帝의 별동대 30만 5천명을 궤멸시킨 薩水大捷(612)의 현장이다. 강 가운데에 있는 七佛島는 수나라 병사들이 강을 건너는 중을 보고 따라 건너다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섬이기도 하다. 기타 청천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老江鎭이 보이고 있는데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곳이며, 여백 주기에 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양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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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현은 일제시대의 양덕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양덕군과 신양군 일대이다. 이 고을은 고려 초부터 여진과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성격의 陽岩鎭, 樹德鎭으로 존재하였다. 이후 국경선이 훨씬 북쪽으로 올라감에 따라 조선 태조 때 두 진을 합하여 세운 고을이다. 지도에도 읍치 왼쪽에 樹德城이, 오른쪽 고읍면에 陽岩城이 표시되어 있어 고을의 역사성을 전해주고 있다. 고을의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이 지나가고 있어 함경도의 高原, 文川, 安邊 등과 연결되는 각종 고개가 산재해 있다. 고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왼쪽은 대동강의 지류 沸流江의 상류이고 오른쪽은 대동강의 지류 南江 곧 能城江의 상류이다. 그런데 읍치를 강조하다 보니까 남강 유역이 지나치게 축소·왜곡되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는 조선 초기에는 고읍면 지역에 있었으나 이후 지도상에 표시된 비류강 유역으로 옮겨진 듯하다. ≪大東輿地圖≫에는 고읍면 지역에 읍치가 있는 것으로표시되어 있어 약간의 혼란이 있었던 듯한데 현재의 북한지도에는 지도상의 읍치가 군중심지로 표시되어 있다. 한편 읍치 오른쪽과 고읍면 위쪽에 각각 溫井과 溫泉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의 북한지도에도 陽德溫泉, 石湯溫泉 등으로 표시되어 있어 그 연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군사적 요충지답게 回岩山城 등의 산성이 나와 있으며, 吳江面에는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兎城鎭이 그려져 있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논은 거의 없으며 火田이 밭의 ⅓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영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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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변부는 일제시대의 영변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영변군, 구장군, 향산군 일대이다. 영변부는 1429년(세종 11)에 연산과 무산을 합쳐 藥山城에 읍치를 두고都節制使의 本營으로 만들었는데 지도에도 아래쪽에 延山面, 왼쪽에 撫山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도 한가운데에는 읍성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는데 여백 주기에 보이는 鐵瓮城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북방향의 방어에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였다. 읍성 안쪽의 왼쪽에는 고을의 鎭山 藥山이 우뚝 솟아 있고 또 하나의 성이 둘러 쌓여 있는데 여백 주기에 보이는 藥山山城이 이것이다. 이 산은 한국인의 정서를 잘 표현한 素月 김정식(1903-1934)의 시, ''진달래꽃''의 무대로서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에서 약산은 이곳을 가리킨다. 이런 鐵瓮城의 중요성에 따라 읍치 부분이 매우 자세하며 다른 지역에 비해 과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청천강의 본류이며, 왼쪽에 보이는 것이 그 지류 구룡강인데 두 강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빠져나감에도 불구하고 약간 왜곡되어 그려져 있다. 특히 청천강 본류는 실제로는 서북쪽에서 흘러 들어오지만 지도에는 정북방향을 하고 있다. 지도 위쪽 오른쪽에는 수려한 경치로 유명한 妙香山이 표시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때 僧兵을 이끌고 싸웠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도를 닦았던 곳이라고 하며, 고려 광종 때 세웠다는 보현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었다. 기타 그 아래쪽에 있는 魚川驛은 21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며, 그 왼쪽에 보이는 客舍와 衙舍는 天水鎭이 있었던 곳이다.(이기봉)

  • 영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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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군은 일제시대의 영원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녕원군과 대흥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쪽으로 그렸다. 狼林山에서발원한 대동강이 여러 산줄기 사이의 물을 받아 남서쪽 德川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고려 초에는 국경선에서 가까워 군사적 성격의 鎭으로 존재하다가 조선 초에 郡이 설치되었다. 숙종 이후 寧城鎭을 설치하여 종3품의 僉使를 파견하였는데 지도의 아래쪽에는 寧遠郡 읍치가 표시되어 있고, 중앙부에 寧城鎭이 따로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창고의 표시가 자세한데 각 창고마다 앞쪽에 郡·鎭의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아 군과 진에서 관할하는 창고를 구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고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동쪽으로는 白頭大幹이 지나가는데 함경도 및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대한 설명이 매우 자세하다. 읍치 왼쪽에 보이는 土非脫, 長非脫의 표현은 다른 지도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우리말의 ''비탈길''을 漢字화 한 것으로 여겨진다. 남면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萬陳德에서 ''德''은 함경도 등에서 산을 의미하는 용어로 많이 쓰인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논은 전혀 없고 火田이 상당히 많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영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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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유현은 일제시대의 영유면, 노지면, 청산면, 용호면, 해소면, 한천면 일부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평원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그렸는데 고을의 鎭山 尾頭山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쪽의 높은 산지로부터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서해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는 미두산으로부터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여 있고 衙舍와 ?舍뿐만 아니라 두 개의 정자와 연못까지 표시하여 다른 곳에 비해 많이 부각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德池筒은 둘레가 5萬尺을 넘는, 이 고을에서 가장 큰 저수지였는데 1731년(영조 7)에 모두 메워 논으로 만들고 屯田을 설치하여 摠戎廳에서 세금을 걷어 쓰게 하였다. 德池 안에 있는 鎭舍·鎭廳은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던 德池鎭을 의미하는데, 이곳이 논으로 메워진 이후 1748년(영조 23)에 폐지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鎭里面은 그 옆에 써 있는 ''今屬順安縣''이라는 문구를 통해 원래는 이 고을 땅이었지만 순안의 월경지로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용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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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강현은 일제시대의 용강군 봉산면, 오신면, 지운면, 다미면, 서화면, 용월면, 양곡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남포직할시 남동쪽과 평안남도 온천군 북쪽 일대이다. 고을의 실제 모습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지만 직사각형의 지면에 그리기 위해 약간 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 烏石山 바로 밑에는 黃龍山城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는데 옛날 黃龍國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의 다른 이름으로 安市城이라는 기록이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나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산성 안에 있는 影殿은 箕子殿으로서 1725년(영조 1)에 賜額받았다. 아사 위쪽에 있는 書院은 鰲山書院으로서 김굉필의 제자로서 유명한 金安國(1478-1543)과 金正國(1485-1541) 형제를 배향하여 1701년(숙종 27)에 賜額받았다. 지도 아래쪽의 急水門은 대동강 물이 급하게 돌아 絶 海로 불렸던 작은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기타 지도 위쪽에 보이는 德島 등의 섬은 그 위치가 三和의 경계를 넘어 서남쪽의 바다에 있는 섬으로서 위치와 거리는 신경 쓰지 않고 이 고을의 땅이라는 사실만 표시하였다.(이기봉)

  • 용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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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천부는 일제시대의 양서면, 양하면, 양광면을 제외한 용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용천군과 동쪽 일부를 제외한 염주군 일대이다. 993년(고려 성종 12)에 서희가 개척한 江東六州의 하나로서 의주와 맞대고 있는 첫 번째 고을이다. 의주대로는 지도 위쪽의 철산계로부터 들어와 의주계로 나아가는데 그 가운데에 있는 良策站은 良策驛이다. 이곳에는 다른 지도에는 ?舍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 客舍로 표시되어 있어 흥미롭다. 읍치에는 石城이 둘러쳐져 있는데 北面險高, 南門險高 등의 天然要塞的 모습이 문장으로까지 쓰여져 있다. 성 안쪽에는 시내와 우물이 있음도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천연요새로서의 읍성조차도 간략하게 처리된 성곽과 성문의 표시를 통해 이미 퇴락해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것에 비해 1624년(인조 2)에 신축되어 1704년(숙종 30)에 완성된 龍骨山城의 웅장한 표현을 통해 병자호란 이후 더욱 강화된 북방수비의 일면을 실감할 수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1678년(숙종 4)에 설치되어 僉使가 파견된 彌串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 경계 내의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청나라 관할 지역까지의 거리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봉수의 표시도 고을의 요충지적 성격 때문에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다른 고을뿐만 아니라 남쪽에 산재하여 있는 여러 섬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싣고 있다.(이기봉)

  • 운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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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산군은 일제시대의 운산군에 해당하며 지금도 평안북도 운산군 일대이다. 고을은 청천강의 지류 구룡강의 최 상류로서 지도에는 委曲江, 鷲江으로 되어 있다. 구룡강이 고을 북쪽·서쪽의 물을 받아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북방 방어의 제1차 저지선에 해당하는 지금의 강남산맥이 지나가고 있다. 지도에도 이런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여 車踰嶺 옆에 要衝地라 특별히 적혀 있는 것을 비롯하여 고개와 도로의 표시가 자세하다. 여백주기에 關防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상세히 적혀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도 위쪽에 있는 ?舍는 委曲鎭으로서 그 북쪽 세 고개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병자호란 이후 설치한 것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白碧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여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백주기 밑 부분에는 남쪽으로 定州 경계를 넘어 240리에 古雲山倉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古雲山 지역은 몽고와의 항쟁을 위해 섬으로 피난 갔다가 육지로 나와 첫 번째로 정착했던 곳으로서 월경지 발생의 한 유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火田이 밭의 ½에 육박할 정도로 많이 행하여지는 곳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위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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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은 일제시대의 위원군에 해당하며 지금도 자강도 위원군 일대이다. 원래는 都乙漢堡였는데 다른 곳과 격리되어 있어 갑작스런 침입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443년(세종 25)에 理山(후에 楚山)과 江界의 땅을 나누어 새로 설치한 고을이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그렸다. 고을 한가운데를 위원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합류한다. 지도 왼쪽의 禿魯江은 지금의 장자강으로서 강계에서 흘러와 압록강에 합류한다. 압록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성곽이 있는 2개의 堡와 성곽이 없는 吾老梁鎭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把守와 봉수의 표시가 자세하다. 강 건너편에는 청나라의 마을 이름도 적혀 있다. 오른쪽 여백주기에는 읍치 및 鎭堡의 군사적 내용과 적의 침입 시 통과할 경로에 대해 자세히 적어놓고 있다. 읍치 위쪽으로는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어 안쪽은 평평하고, 바깥쪽은 험한 마을이 두 곳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大興寺와 興福寺 등의 절을 세웠다고 쓰여 있는데 위급할 때 군사적 용도로 쓰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 왼쪽으로도 ''이 들에는 만명의 군사도 수용할 수 있으며, 강계로 가는 직로''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군사적 要衝地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등 군사적 내용이 매우 자세히 표현된 지도이다.(이기봉)

  • 위원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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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은 일제시대의 위원군에 해당하며 지금도 자강도 위원군 일대이다. 원래는 都乙漢堡였는데 다른 곳과 격리되어 있어 갑작스런 침입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443년(세종 25)에 理山(후에 楚山)과 江界의 땅을 나누어 새로 설치한 고을이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그렸다. 고을 한가운데를 위원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합류한다. 지도 왼쪽의 禿魯江은 지금의 장자강으로서 강계에서 흘러와 압록강에 합류한다. 압록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성곽이 있는 2개의 堡와 성곽이 없는 吾老梁鎭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把守와 봉수의 표시가 자세하다. 강 건너편에는 청나라의 마을 이름도 적혀 있다. 오른쪽 여백주기에는 읍치 및 鎭堡의 군사적 내용과 적의 침입 시 통과할 경로에 대해 자세히 적어놓고 있다. 읍치 위쪽으로는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어 안쪽은 평평하고, 바깥쪽은 험한 마을이 두 곳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大興寺와 興福寺 등의 절을 세웠다고 쓰여 있는데 위급할 때 군사적 용도로 쓰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 왼쪽으로도 ''이 들에는 만명의 군사도 수용할 수 있으며, 강계로 가는 직로''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군사적 要衝地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등 군사적 내용이 매우 자세히 표현된 지도이다.(이기봉)

  • 은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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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산현은 일제시대의 순천군 은산면, 선소면, 북창면과 개천군의 봉동면 남쪽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순천시 동쪽 일대이다. 대동강이 고을의 동북쪽으로부터 들어와 서쪽을 휘감고 남동쪽으로 빠져나간다. 고을의 한가운데에는 長善江이 동쪽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읍치 북쪽을 감싸고 대동강에 합류하는데 이 강에 의해 고을의 산줄기가 남북으로 갈라진다. 고을의 鎭山은 鎭江山인데 읍치로부터 강을 건너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읍치는 장선강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둘레에는 토성이 둘러쳐져 있는데 지도에도 밋밋한 선으로 표시하여 石城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阿灘窟이 표시되어 있는데 崇化山 석벽에 있는 굴로서 굴 안에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이 고을도 부근 고을과 마찬가지로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이기봉)

  • 의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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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부는 일제시대의 의주군과 삭주군 청수읍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의주군, 피현군, 천마군 서북쪽, 삭주군 청수 서남쪽 일대이다. 의주부는 청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첫 번째 고을이다. 따라서 압록강변에는 수많은 鎭堡와 烽燧가 자세히 그려져 있고 반대편의 청나라 지역까지도 표시하였다. 다음 페이지의 여백주기에는 각 鎭堡와 의주 읍치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적혀 있다. 청나라를 ''賊''으로 간주하고 이들이 쳐들어 올 경우에 만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조선 영내까지 취할 수 있는 여러 경로를 아주 자세히 적어놓았다. 읍성 아래쪽에는 고려 때 강감찬에 의해 만들어지고 1646년(인조 24)에 임경업에 의해 修築된 白馬山城이 보인다. 압록강에는 고려말 이성계에 의한 요동정벌군의 回軍으로 유명한 威化島를 비롯하여 여러 섬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청나라와 조선의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오갔던 渡船路도 그려져 있다. 읍성의 압록강 반대편 청나라 땅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중국 사이의 公·私貿易을 의미하는 柵門後市가 열렸던 곳이다. 압록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의 楊下鎭에는 청나라 사람의 집(胡家)이 즐비하다는 표현이 있어 재미있는데, 여백주기 楊下鎭 부분의 ''漁店이 즐비하다''는 기록과 관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타 백마산성 옆에 그려져 있는 國內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 이후 여러 기록에 계속 기록되어 오던 것이 지도에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國內城이 중국의 吉林省 集安市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이기봉)

  • 의주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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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부는 일제시대의 의주군과 삭주군 청수읍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의주군, 피현군, 천마군 서북쪽, 삭주군 청수 서남쪽 일대이다. 의주부는 청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첫 번째 고을이다. 따라서 압록강변에는 수많은 鎭堡와 烽燧가 자세히 그려져 있고 반대편의 청나라 지역까지도 표시하였다. 다음 페이지의 여백주기에는 각 鎭堡와 의주 읍치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적혀 있다. 청나라를 ''賊''으로 간주하고 이들이 쳐들어 올 경우에 만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조선 영내까지 취할 수 있는 여러 경로를 아주 자세히 적어놓았다. 읍성 아래쪽에는 고려 때 강감찬에 의해 만들어지고 1646년(인조 24)에 임경업에 의해 修築된 白馬山城이 보인다. 압록강에는 고려말 이성계에 의한 요동정벌군의 回軍으로 유명한 威化島를 비롯하여 여러 섬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청나라와 조선의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오갔던 渡船路도 그려져 있다. 읍성의 압록강 반대편 청나라 땅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중국 사이의 公·私貿易을 의미하는 柵門後市가 열렸던 곳이다. 압록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의 楊下鎭에는 청나라 사람의 집(胡家)이 즐비하다는 표현이 있어 재미있는데, 여백주기 楊下鎭 부분의 ''漁店이 즐비하다''는 기록과 관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타 백마산성 옆에 그려져 있는 國內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 이후 여러 기록에 계속 기록되어 오던 것이 지도에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國內城이 중국의 吉林省 集安市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이기봉)

  • 이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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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부는 일제시대의 초산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초산군, 고풍군, 송원군 일대이다.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거주하던 豆木里였다고 하며, 공민왕 때부터 사람들이 점차 불어나 1401년(태종 2)에 새롭게 고을을 설치한 곳이다.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童巾江은 지금의 충만강이다. 이 고을 남·동쪽에 있는 높은 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압록강에 합류한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山羊會鎭·阿耳鎭의 要塞的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으며, 여러 개의 把守 및 烽燧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에는 북방 방어의 제1차 관문에 해당하는 지금의 강남산맥 여러 고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고개마다 사람과 말이 모두 통과할 수 있는지, 단지 사람만 걸어 넘어갈 수 있는지를 적어놓았다. 고개 아래쪽으로는 車嶺鎭과 牛峴鎭이 설치되어 있어 군사적 要衝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압록강변으로부터 이곳까지 이르는 길목의 고개들도 그 내용이 자세하여 지도제작에서 군사적 내용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한복판에는 옛 理山터가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여백주기에는 압록강변에 있는 읍성 및 2개의 鎭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적의 침입 시 통과할 수 있는 경로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이기봉)

  • 이산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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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부는 일제시대의 초산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초산군, 고풍군, 송원군 일대이다.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거주하던 豆木里였다고 하며, 공민왕 때부터 사람들이 점차 불어나 1401년(태종 2)에 새롭게 고을을 설치한 곳이다.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童巾江은 지금의 충만강이다. 이 고을 남·동쪽에 있는 높은 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압록강에 합류한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山羊會鎭·阿耳鎭의 要塞的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으며, 여러 개의 把守 및 烽燧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에는 북방 방어의 제1차 관문에 해당하는 지금의 강남산맥 여러 고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고개마다 사람과 말이 모두 통과할 수 있는지, 단지 사람만 걸어 넘어갈 수 있는지를 적어놓았다. 고개 아래쪽으로는 車嶺鎭과 牛峴鎭이 설치되어 있어 군사적 要衝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압록강변으로부터 이곳까지 이르는 길목의 고개들도 그 내용이 자세하여 지도제작에서 군사적 내용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한복판에는 옛 理山터가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여백주기에는 압록강변에 있는 읍성 및 2개의 鎭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적의 침입 시 통과할 수 있는 경로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이기봉)

  • 자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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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부는 일제시대의 순천군 자산면, 사인면, 후탄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평성시 일대이다. 지도는 서쪽을 위쪽으로 그렸는데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읍치와 慈母城을 지면의 긴 쪽에 배치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을의 전반적인 지세는 서·남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데 여러 산줄기에서 발원한 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대동강에 합류한다. 읍치는 지도 오른쪽 중간에 보이는 고을의 主脈 黃龍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오다 솟아난 文興山·龍興山 아래에 있으며, 이중의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인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위쪽에는 조선 초기에는 頹落했던 성을 인조 때 修築한 慈母城이 보이고 있는데 鎭을 설치하여 성천, 은산, 자산, 순안, 영유 등 다섯 고을을 관장하게 하였다. 성곽과 성문이 자세히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성안에는 관아 건물과 여러 고을의 창고 그리고 여백 주기에 보이는 많은 연못의 일부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南門 아래쪽에 보이는 牛馬城은 慈母城의 外城에 해당되는데 병자호란 이후 증가된 북방 방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정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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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목은 일제시대의 옥천면, 관주면, 임포면, 안흥면을 제외한 정주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정주군과 운전군 서남쪽 일대이다. 지도의 한가운데 보이는 읍성은 1714년(숙종 40)에 石築으로 쌓은 성으로서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북방 경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읍성은 동·서·남·북문을 비롯한 성곽의 표시가 자세할 뿐만 아니라 성안의 각종 관아 건물도 다른 고을보다는 많이 그려 넣어 군사상 중요한 지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읍치 서남쪽의 고읍면은 옛 정주의 중심지였는데 1466년(세조 12)에 隨川郡을 합치면서 수천군 新安驛으로 읍치를 옮겼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把撥은 求井星站으로서 1597년(선조 20)부터 변방으로 가는 공문서의 빠른 전달을 꾀하려고 만든 파발의 하나이다. 파발에는 騎撥과 步撥 2가지가 있었으며 기발은 25리마다, 보발은 30리마다 1站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해안가 섬에는 無人島와 有人島를 구별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戶數도 자세히 기록하였다. 기타 지도 아래쪽에는 말을 기르던 목장이 표시되어 있고, 여백주기를 보면 논밭의 비율이 거의 비슷한 고을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중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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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부는 일제시대의 중화군 중화면, 동두면, 간동면, 신흥면, 양정면, 해압면, 당정면, 고생량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양특별시 중화군과 강남군 일대에 해당한다.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하게 그렸는데 고을의 모습이 실제로는 동서로 길게 누워 있어 위·아래로 긴 직사각형의 지도 모양에 맞추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읍치는 웅장하게 표현된 고을의 진산 淸凉山 아래에 아사와 향교만으로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도로의 표시에서는 義州大路를 굵은 선으로 표시하여 다른 도로와 구분하여 주고 있다. 黃州境으로부터 의주대로가 들어오는 입구인 駒峴은 평안도 관찰사가 교대하는 장소였다고 하며, 지도에 嶺, 峴, 古介가섞여 사용되고 있음을 통해 당시에도 고개를 다양하게 부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묘라 전하는 곳이 지도 위쪽에 표시되어 있음이 보이는데 그 진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기타 봉수의 표시가 자세하여 지도의 군사적 성격이 강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고을동남쪽에 있었던 城山堡가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이기봉)

  • 증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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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현은 일제시대의 강서군 증산면, 적송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지금은 평안남도 증산군 북쪽 일대이다. 이 고을은 원래 江西縣의 甑山鄕이었는데 1394년(태조 3)에 현으로 승격되었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바닷가에 가까워 작은 하천밖에 발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고을의 鎭山은 國嶺山이며 이곳에서 나온 산줄기가 읍치 공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읍치에도 衙舍와 ?舍 등 아주 간단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는 등 전체적으로 아주 소략한 지도이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 표시되어 있는 禿串筒과 黃筒은 ≪輿地圖書≫에 의하면 각각 주위가 7千尺, 2千尺쯤 되는 저수지이며, 이 주변에서는 논농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백 주기를 보면 해안가임에도 불구하고 논보다 밭이 훨씬 많은 곳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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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성부는 일제시대의 창성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창성군, 동창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쪽으로 그렸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지금의 강남산맥이 지나간다.위쪽에는 대령강의 상류 창성강이작은 물줄기를 모아 서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압록강이 작은 지류들을 합류시키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압록강변에는 총 6개의 鎭·堡와 여러 개의 把守가 보이고 있어 국경선의 긴장감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읍성은 성문과 성곽의 굴곡까지 자세히 표시하여 그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금의 강남산맥에는 세 개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어 要衝地임을 알 수 있다. 緩項岺을 넘으면 恃寨鎭이 설치되어 있고, 小防墻嶺쪽으로는  昌城이 있다. 그 위쪽으로는  蛾山城이 보이고 있는 등 군사시설에 대한 표시가 매우 자세하다. 기타 倉庫, 烽燧, 院과 도로의 표시가 자세하며,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사찰도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읍치를 비롯하여 각 鎭堡의 군사적 내용과 유사시 적의 침입 경로에 대한 사항이 자세히 적혀 있다.(이기봉)

  • 철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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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산부는 일제시대의 철산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철산군, 동림군 서쪽 일부, 염주군 동쪽 일부 일대이다. 993년(고려 성종 12)에 서희가 개척한 江東六州의 하나로서 당시의 읍치는 西林城에 있었다. 이 고을 역시 의주대로상의 요충지로서 지도에는 각종 關防施設이 잘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雲暗山城은 1631년(인조 9)에 쌓았으며, 1684년(숙종 10)에 石城으로 개축하여 요새로 삼은 곳이다. 그 아래쪽에는 산성에서 강 입구까지 이르는 길이 300보임을 기록하여 중요한 곳임을 실감할 수 있게 했다. 지도 오른쪽 위의 佐峴에서 시작되는 의주대로는 車輦驛(?)을 지나 西林城을 통해 의주로 향한다. 1747년(영조 23)에 의주대로상의 서림성 옛 터에도 石城을 쌓고 僉使를 파견하여 鎭을 설치하였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 아래쪽에는 宣沙浦鎭과 이 鎭에 소속된 배의 종류가 자세히 쓰여져 있다. 읍치 아래쪽의 架山古城은 조선 태종 때 성을 쌓아 읍치로 삼았던 곳인데 고을 사람들이 너무 높고 험하여 꺼렸기 때문에 세조 때 평지로 옮겼다고 한다. 이 외에도 요충지답게 고개와 봉수의 표시가 매우 자세함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고을에는 지도 아래쪽의  島와 그 조금 위쪽에 표시된 場內에 목장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말들을 가두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土城이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태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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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천현은 일제시대의 태천군에 해당하며 지금도 평안북도 태천군 일대이다. 龜城, 朔州, 昌城으로부터 들어온 세 물줄기가 읍치 앞쪽에서 모여 串赤江을 이루고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이 串赤江은 바다 입구에서 청천강과 만나는 대령강의 상류로서 당시에는 大定江으로 불렸다. 강의 하류 쪽에 세 개의 근원과 대정강에 합류하는 내용을 적어놓아 지도 이용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오른쪽 여백주기에는 읍치 5리 거리에 內江 檢岩灘이 있으며 물이 불으면 배로 건넌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읍치는 朔州로부터 들어온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여 있으며 주변 고을까지의 거리가 자세히 적혀 있다. 고을의 主脈이 읍치 서쪽에 있는 烏山으로 나오는데 그 위치가 독특하여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오산 위쪽에 있는 籠吾里山城은 ≪輿地圖書≫에 의하면 여진 장수 莫德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성벽의 돌 위에 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었던 바로 동쪽의 雲山 고을과는 달리 논도 상당수 존재함을 알 수 있다.(이기봉)

  • 평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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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는 지금의 평양특별시·남포직할시·평안남도·평안북도·랑림군을 제외한 자강도·량강도 김형직군에 해당한다. 平安道의 이름은 平壤과 安州를 합해서 만든 것이다. 평안도에는 총 42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지도에서는 원 안에 표시하였다. 기타 우예, 자성, 여연, 무창 등의 폐사군도 관장하였다. 관찰사 소재지인 監營은 평양에 있었으며 兵營은 안주에 있었다. 지도에서 직사각형 안에 표시된 것은 鎭堡로서 청나라와의 국경선에 해당하는 압록강변과 단종과 세조 때 四郡이 혁파된 후 최북단의 경계를 맡았던 강계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 또한 압록강을 넘은 적에 대한 1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던 지금의 강남산맥 아래·위쪽과 해안가에도 설치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해안가 쪽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대대적으로 修築된 산성의 모습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어 청나라에 대한 위기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최고의 천연요새로 알려진 영변의 鐵甕城도 보이고 있다. 타원형의 노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평안도 북쪽으로는 압록강이, 가운데에는 청천강이, 대동강이 흐르고 있다. 서해에는 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크기는 고려하지 않았으며,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도록 그렸다. 한편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청나라 땅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산줄기와 강줄기 및 마을 이름을 적어 놓았다. 이것은 청나라 땅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의주로부터 압록강을 넘어 표시된 붉은 선의 도로는 使臣이 오고가던 使臣路이다.(이기봉)

  • 평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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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부는 일제시대의 평양부, 대동군 전체와 강서군 북쪽, 평원군 남쪽 등 서해안까지 뻗어 있는 큰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평양특별시 부근에 해당한다. 평양은 평안도 관찰사 소재지였으며 고조선시대부터 각종 역사적 사건이 응집되어 있는 현장이었다. 邑城의 표시가 두드러진데 한가운데에 內城이, 서북쪽으로는 1714년(숙종 40)에 쌓은 北城이 있으며 성곽과 문의 표시가 자세하다. 내성 남쪽으로는 箕子朝鮮 때 쌓았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축성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外城이 표시되어 있다. 성곽이 이미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그 자취와 성문만을 표시하고 있다. 외성 안쪽에는 箕子井과 기자조선 때의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井田이 표시되어 있지만 이것 또한 많은 논란의 와중에 있다. 내성의 안쪽에는 箕子를 제사지내던 崇仁殿과 檀君을 제사지내던 檀君殿(숭령전)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어 조선시대 역사관의 이중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내성 북쪽에는 箕子墓의 표시도 보인다. 北城 안쪽에 있는 기린굴과 그 오른쪽에 있는 文武井, 아래쪽에 있는 朝天石은 고구려의 시조 東明王과 관련된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인데 고구려의 초기 근거지가 평양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되고 있지는 않다. 기린굴 오른쪽에는 고구려 때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는 英明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때禪敎兩宗 36본산의 하나였다. 그 옆에는 고구려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석탑으로 알려져 있는 八角五層石塔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동북쪽에 보이는 長安城은 고구려의 평원왕(559-590) 때 安鶴宮을 건설하여 잠시 宮城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한편 남북 분단 이후 망향의 설움을 노래한 가요를 통해 우리의 귀에 익숙한 모란봉(牧丹峰)·乙密臺·錦繡山·浮碧樓 등이 北城 부근에 표시되어 있어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성곽의 남쪽으로는 우리 나라 역사 속에서 浿水 또는 浿江으로 등장하는 대동강의 모습이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대동강 하류에는 이 고을에 유일하게 있었던 保山鎭이 석축의 성곽과 천연 요새의 모습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평양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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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부는 일제시대의 평양부, 대동군 전체와 강서군 북쪽, 평원군 남쪽 등 서해안까지 뻗어 있는 큰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평양특별시 부근에 해당한다. 평양은 평안도 관찰사 소재지였으며 고조선시대부터 각종 역사적 사건이 응집되어 있는 현장이었다. 邑城의 표시가 두드러진데 한가운데에 內城이, 서북쪽으로는 1714년(숙종 40)에 쌓은 北城이 있으며 성곽과 문의 표시가 자세하다. 내성 남쪽으로는 箕子朝鮮 때 쌓았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축성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外城이 표시되어 있다. 성곽이 이미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그 자취와 성문만을 표시하고 있다. 외성 안쪽에는 箕子井과 기자조선 때의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井田이 표시되어 있지만 이것 또한 많은 논란의 와중에 있다. 내성의 안쪽에는 箕子를 제사지내던 崇仁殿과 檀君을 제사지내던 檀君殿(숭령전)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어 조선시대 역사관의 이중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내성 북쪽에는 箕子墓의 표시도 보인다. 北城 안쪽에 있는 기린굴과 그 오른쪽에 있는 文武井, 아래쪽에 있는 朝天石은 고구려의 시조 東明王과 관련된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인데 고구려의 초기 근거지가 평양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되고 있지는 않다. 기린굴 오른쪽에는 고구려 때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는 英明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때禪敎兩宗 36본산의 하나였다. 그 옆에는 고구려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석탑으로 알려져 있는 八角五層石塔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동북쪽에 보이는 長安城은 고구려의 평원왕(559-590) 때 安鶴宮을 건설하여 잠시 宮城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한편 남북 분단 이후 망향의 설움을 노래한 가요를 통해 우리의 귀에 익숙한 모란봉(牧丹峰)·乙密臺·錦繡山·浮碧樓 등이 北城 부근에 표시되어 있어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성곽의 남쪽으로는 우리 나라 역사 속에서 浿水 또는 浿江으로 등장하는 대동강의 모습이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대동강 하류에는 이 고을에 유일하게 있었던 保山鎭이 석축의 성곽과 천연 요새의 모습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폐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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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사군은 일제시대의 자성군과 후창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자성군, 중강군, 화평군과 량강도 김형직군 일대이다. 四郡의 설치는 1416년(태종 16)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閭延郡을 설치하여 咸吉道로부터 평안도로 이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433년(세종 15)에 慈城郡을, 1440년(세종 22)에 茂昌縣을, 1443년(세종 25) 虞芮郡을 설치하면서 四郡의 설치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땅을 잃어버린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유지·확보가 어려워지자 145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 3군을 폐지하고 주민을 강계·구성 2부로 옮겼다. 또한 1459년(세조 5)에는 자성군마저 폐지하여 주민을 강계로 옮긴 후 廢四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군현 新設 논의가 계속되다가 새로 들어가 사는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1869년(고종 6)에 자성군·후창군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지도에는 폐사군의 위치와 이곳을 관할하던 강계부 및관할 鎭의 표시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폐사군과 강계부의 경계에는 麻田岺·梨岺에 관문이 설치되어 있어 최전방의 防禦處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압록강변에는 폐사군 지역에 있는 강계 관할의 把守가 一巴부터 八十五巴까지 적혀 있으며, 鎭堡 역시 직책까지 포함되어 적혀 있다. 무창 왼쪽으로부터 강계부에 이르는  도로에도 많은 把守와 고개가 자세히 적혀 있어 주요 통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위·아래의 여백주기에는 폐사군으로부터 강계까지 이르는 경로와 곳곳에 설치된 把守의 내용이 적혀있다. 또한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강계 영역 내에 있는 鎭의 군사적 내용 및 적의 침입 시 거쳐가는 통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지도 위쪽 오른쪽에 백두산이 天池와 함께 표시되어 있음이 이채롭다.(이기봉)

  • 폐사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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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사군은 일제시대의 자성군과 후창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자성군, 중강군, 화평군과 량강도 김형직군 일대이다. 四郡의 설치는 1416년(태종 16)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閭延郡을 설치하여 咸吉道로부터 평안도로 이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433년(세종 15)에 慈城郡을, 1440년(세종 22)에 茂昌縣을, 1443년(세종 25) 虞芮郡을 설치하면서 四郡의 설치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땅을 잃어버린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유지·확보가 어려워지자 145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 3군을 폐지하고 주민을 강계·구성 2부로 옮겼다. 또한 1459년(세조 5)에는 자성군마저 폐지하여 주민을 강계로 옮긴 후 廢四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군현 新設 논의가 계속되다가 새로 들어가 사는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1869년(고종 6)에 자성군·후창군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지도에는 폐사군의 위치와 이곳을 관할하던 강계부 및관할 鎭의 표시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폐사군과 강계부의 경계에는 麻田岺·梨岺에 관문이 설치되어 있어 최전방의 防禦處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압록강변에는 폐사군 지역에 있는 강계 관할의 把守가 一巴부터 八十五巴까지 적혀 있으며, 鎭堡 역시 직책까지 포함되어 적혀 있다. 무창 왼쪽으로부터 강계부에 이르는  도로에도 많은 把守와 고개가 자세히 적혀 있어 주요 통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위·아래의 여백주기에는 폐사군으로부터 강계까지 이르는 경로와 곳곳에 설치된 把守의 내용이 적혀있다. 또한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강계 영역 내에 있는 鎭의 군사적 내용 및 적의 침입 시 거쳐가는 통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지도 위쪽 오른쪽에 백두산이 天池와 함께 표시되어 있음이 이채롭다.(이기봉)

  • 함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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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종부는 일제시대의 강서군 함종면, 신정면, 수산면 서쪽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증산군 남쪽 일대이다. 작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1721년(경종 1)에 경종 宣懿王后 魚氏의 貫鄕이라 하여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동쪽의 높은 산지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가 남북을 감싸며 작은 하천을 만들었고, 서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북쪽의 牙善山이며 읍치에는 客舍와 衙舍, 邑倉 등 가장 중요한 건물만 묘사하였다. 또한 사방 경계의 세 고을과 바다까지의 거리가 자세히 적혀 있다. 海倉 옆에 있는 鳳頭山은 바다를 베고 우뚝 솟아 마치 봉황이 높이 나는 모양을 하고 있어 고을에서 풍경이 제일 좋다고 한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논밭이 거의 비슷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아래쪽의 花山面과 中里面은 후에 다시 첨가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 희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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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천군은 일제시대의 희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희천시, 동신군 일대이다. 청천강의 최 상류가 동북쪽에서 여러 물줄기를 받아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고을의 동북쪽이 많이 축소·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의 위쪽에 있는 白山인데 산허리부터 꼭대기까지 모두 흰 돌로 되어 있는 실제 모습을 지도에서도 표현하였다. 읍치는 진산으로부터 뻗어내려 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둘러 쌓여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土築의 성곽이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어 읍성이 이미 퇴락해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평안도 지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書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김굉필, 조광조를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사액받은 衆賢書院이다. 지도의 위쪽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狄踰岺과 적의 방어를 위한 關門은 당시 조선 최북단 고을 중의 하나인 江界로 넘어가는 요충지이다. 그 아래쪽에 客舍와 衙舍가 있는 곳은 柔院鎭으로서 1623년(인조 1)에 설치되었다. 그 밑으로 狄踰驛, 長洞驛 등이 보이고 있으며, 여백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으로, 화전도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함경도
  • 갑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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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산부는 함경남도 북부 고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서로는 삼수, 남으로는 단천 북청, 북으로는 혜산진과 접하고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갑산군 장평면, 산남면, 동인면, 보혜면, 운흥면, 진동면 그리고 풍산군 이인면, 웅이면, 천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량강도 갑산군과 운흥군, 혜산시, 보천군, 삼지연군 등에 속해 있다. 지도는 녹색 당채를 사용하여 산지를 채색하였고 산줄기의 연결 관계도 비교적 소상하게 기재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비롯한 하천도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정계비 아래쪽에서 흘러나가는 물줄기를 土門江源이라 하고 두만강과 이어 그렸다. 읍치에서 주변 지역에 이르는 도로망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봉수도 비교적 자세히 표시되었다. 압록강 건너편 중국 지역의 지명도 상세히 기입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 石茸烽臺 부근에는 무쇠를 캐던 水鐵店도 보이고 있다.(노혜정)

  • 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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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부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영이 있던 해안 고을로 남으로는 明川, 북으로는 富寧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오촌면, 주을온면, 주북면, 주남면, 어랑면, 용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군, 청진시의 일부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지도도 다른 군현의 지도처럼 봉수와 같은 군사적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다. 특히 이 지역의 절경들이 잘 표시된 점이 특징적이다. 윤관 장군이 잠시 머물렀다는 해안가의 元帥臺를 비롯하여 동남쪽 해안에는 長淵과 魚郞武湖(지금의 武溪湖)가 그려져 있다. 주변에는 立岩, 臥岩 등의 기암괴석과 水中臺, 八景臺 등의 절경도 표시되어 있다. 또한 牟德과 中德은 이름에 걸맞게 평평한 모습으로 그려져 이채롭다. 동쪽 해안에 위치한 大良化는 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과거 良川縣이 있었던 터라 한다. 동북쪽에 위치한 輸城은 察訪驛인 輸城驛으로 22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노혜정)

  • 경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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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원부는 함경도의 북쪽 접경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서쪽은 穩城, 동쪽은 慶興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면, 안농면, 동원면, 아산면, 용덕면, 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새별군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일부는 은덕군에 편입되어 있다. 지도에는 두만강 이남의 경원 지역과 더불어 厚春部落을 비롯한 강 이북도 그려져 있다. 중국과 접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두만강 연안에는 많은 把守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도에는 ''守''로 표시하였다. 訓戎鎭, 安原堡, 乾元堡, 阿山堡 등은 이 지역 방어를 위한 중요한 군사기지로서 설치된 것이다. 두만강에는 하중도인 古欲耳島가 그려져 있는데 1666년(현종 7)에 물길이 갈라지면서 섬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섬은 두만강에서는 가장 큰 하중도로 남아 있다. 두만강 부근에 풍수적으로 그려진 龍堂에는 古城이 있었으며 태조 이성계의 조상인 穆祖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을의 남쪽에는 羅端山이 두 개나 표기되어 있다. 이는 원래 羅端山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없는 것으로 착각하여 후에 追記한 데서 생긴 오류이다.(노혜정)

  • 경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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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흥부는 두만강 하구 접경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서쪽으로는 경원과 접하고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면, 노서면, 상하면, 웅기면, 신안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선봉군을 비롯하여 은덕군과 나진시에 일부 편입되어 있다. 이 고을은 태조 이성계의 高祖父인 穆祖가 살던 곳으로 지도상에도 赤池 부근에 목조와 왕비의 릉인 德陵과 安陵의 옛 터가 古陵으로 표시되어 있다. 원래 이곳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함흥부로 옮겼던 것이다.度祖가 검은 용을 쏘았다는 赤池는 붉은 색으로 채색되어 있고 翼祖가 여진족의 공격을 피해 들어가 살았다는 赤島도 그려져 있다. 지금은 러시아 쪽 영토로 육지와 이어진 鹿屯島가 섬의 모습으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 아래로 草島가 있는데 당시 穩城에 속해 있었다. 그 전면 해안가는 일제시기 급성장한 지금의 羅津市에 해당한다. 두만강 연안에는 외적 방어를 위한 파수와 진보가 다수 설치되어 있다. 현재 탄광으로 유명한 阿吾地에는 1488년(성종 19)에 설치된 堡가 있었다.(노혜정)

  • 고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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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원군은 함경도의 남쪽 해변가 고을로 북쪽은 永興, 남쪽은 文川과 접해 있다. 해방 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군내면, 상산면, 산곡면, 수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영흥군의 남서쪽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함경남도 고원군으로 되어 있다. 읍치를 비롯하여 주변의 각 社, 사찰, 창고, 그리고 도로망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서남쪽  雲嶺 인근에는 古鎭城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大東地志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983년(성종 2)에 성을 쌓고 설치했던 隘守鎭인데, 1360년(공민왕 9)에 폐지되었다. 文川 부근에 있는 龍庫洞에는 龍淵이 그려져 있는데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고을에는 은을 캐던 곳인 銀店도 보이고 있다. 於音乭에는 舊銀店이 每雲洞에는 新銀店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통해 당시 광업의 일단도 엿볼 수 있다.(노혜정)

  • 길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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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주목은 동해안에 연해 있는 고을로 북으로는 明川, 남으로는 端川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길성면, 웅평면, 동해면, 덕사면, 장백면, 영북면, 양사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길주군과 화대군 일부 지역이 과거 길주목 영역이다. 지도에는 산천을 비롯하여 관내의 각社가 표시되어 있고 봉수, 진보 등의 군사적 요소가 상세하다. 해안가에는 城津鎭이 붉은 원으로 강조되었는데 1614년(광해군 6)에 관찰사 崔瓘의 청에 따라 설치된 것이다. 성진진의 바로 앞에 있는 望德은 수려한 경치로 이름났던 곳이다. 또한 서북쪽의 西北鎭은 1673년(현종 14) 관찰사 南九萬의 청에 따라 將軍坡堡, 斜河北堡, 德萬洞堡를 병합시켜 만든 것이다. 북관대로에 위치한 嶺東倉과 臨溟驛 사이에는 營耳毛老라는 지명이 있는데, ''毛老''는 산길에서 돌아 굽어지는 곳을 일컫는 방언으로 한자 표기로는 ''隅''에 해당한다. 읍치의 서북쪽에는 溫井도 보이고 있다.(노혜정)

  • 단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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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천부는 동해에 연해 있는 고을로 위로는 吉州, 아래로는 利原과 접해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복귀면, 하다면, 신만면, 수하면, 북두일면, 남두일면, 광천면, 이중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은 함경남도 단천시와 허천군 일부 지역이과거 단천군 지역이다.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성은 1449년(세종 31)에 축조되었고 이후 1733년(영조 9) 다시 쌓은 것이다. 둘레가 1,945척으로 매우 작은 규모이다. 지도에는 산천과 같은 자연적 요소, 기타 인문 요소들이 표현되어 있을 뿐 관내 행정구역인 社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동쪽 해안가의 胡打里堡는 1745년(영조 21)에 혁파되는데 지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1745년 이전 상황이 지도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산지에 祖龍德, 沙里德, 羊德 등 ''德''으로 끝나는 지명이 많이 표시되어 있다. 德은 산정이 평평한 곳을 일컽는 함경도 지역의 방언이다. 梨洞堡 옆의 金富巳德은 넓은 바위같은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加先銀穴, 蔬德銀穴 등의 은광도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노혜정)

  • 덕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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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부는 함경남도의 해안에 위치한 작은 고을로 남으로는 安邊, 북으로는 文川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덕원군 부내면, 북성면, 적전면, 현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강원도 원산시로 편입되어 있다. 지도에는 고을의 모습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쪽의 東高山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산으로 그 아래쪽에는 萬景菴이 있다. 이 절은 인적이 드문 첩첩산중에 위치하여 당시에는 學僧 몇 명만이 거주할 뿐이었다. 그 위편에 위치한 馬息嶺은 ≪大東輿地圖≫에서 ''馬樹嶺''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고개 위에는 태조 이성계가 말을 달리던 곳이 있다고 한다. 고을 남동쪽의 元山坪은 유명한 明沙十里가 있는 곳으로 길게 나온 連島는 현재의 갈마반도에 해당한다. 이것이 남동쪽의 파도를 막아주어 천혜의 항구를 만들어 준 것이다. 擇里志나 輿地圖書 등의 기록에도 이곳에 각지의 배들이 몰려들어 물자의 집산지였음을 전하고 있다. 1737년(영조 13)에는 이곳에 交濟倉인 元山倉이 설치되어 진휼곡을 비축하였는데, 水運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지도상에는 元倉으로 표기되어 있다. 동쪽 해안에는 1695년(숙종 21) 창건되어 송시열을 배향한 尤齋書院도 표시되어 있다.(노혜정)

  • 마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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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과 단천 사이에 있는 중요한 고개인 마운령을 비롯하여 여러고개들을 그린 지도이다. 해발 416미터의 마운령은 함경산맥 지맥의 분수령을 통과하는 고개로 관북의 북동부 해안지방과 중부 해안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과거로부터 성을 쌓아 외적을 막았던 중요한 관방으로 일명 門峴이라고도 하는데, 당시에는 성이 거의 허물어지고 성문 터만 남아 있었다. 조선전기부터 이곳에 새로이 관문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분분했으나 이 때까지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이곳에 나무를 길러 유사시 군사를 매복시킬 수 있도록 했다. 지도에는 마운령을 비롯하여 長津嶺, 佐驛嶺, 城古介, 松楸嶺, 下田嶺, 凡色嶺, 馬兒峴, 利劍嶺, 金昌嶺, 新洞嶺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지도 여백의 설명문에는 각각의 고갯길을 中路, 中大路, 小路, 細路 등으로 위계를 나누어 구분했다. 이곳은 신라 22대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고 순행한 뒤 그 지역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마운령비가 발견된 곳으로도 유명하다.(노혜정)

  • 마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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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천령은 함경도의 단천과 길주 사이에 위치한 해발 725미터의 고개로 이곳을 기준으로 함경도는 北關과 南關으로 나눠진다. 일명 伊板嶺이라고도 하는데 ''이판''은 여진어로 소를 의미한다. 世宗實錄 地理志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송아지를 팔자 어미 소가 송아지를 찾아 고개를 넘어갔는데, 주인이 그 소를 쫓아간 곳이 길이 되었기 때문에 이판령이라 했다고 한다. 관북대로 가운데 가장 험한 고개로 六鎭 남쪽 제1의 방어선이 된다. 인접한 吉州와 해안의 城津鎭이 짝하여 마천령을 지키는 형세이다. 지도에는 마천령을 비롯하여 茄坡嶺, 板莫嶺, 坡嶺, 招美嶺, 蛇角嶺, 牛指嶺, 沙器嶺, 方阿嶺, 長方嶺 등의 고개와 嶺路가 표시되어 있다. 마천령을 지나는 관북대로에는 嶺東驛, 磨谷驛 등의 역도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각 嶺路의 위계를 구분하고 단천과 길주에서의 거리를 기재하였다. 특히 지도의 하단에는 서쪽 백두대간에서 해안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영로를 9개로 정리하였는데, 가장 서쪽에 위치한 鷹峯嶺을 ''最東''으로 잘못 기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노혜정)

  • 명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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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천부는 함경북도의 해안가 고을로 위로는 鏡城, 아래로는 吉州에 접해 있다. 본래 吉州의 明原驛인데 1469년(예종 원년) 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길주를 吉城縣으로 낮추고 長德山 북쪽 지역을 따로 떼어서 縣을 만든 것이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명천군 하우면, 상우북면, 상우남면, 아간면, 상가면, 하가면, 상고면, 하고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명천군, 화성군, 화대군 지역이다. 해안가 고을이지만 고을 전체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의 長白山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동쪽의 七寶山으로 이어지는데 안쪽의 金藏寺를 감싸듯이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관내의 각 社가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창고는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 지역의 유일한 鎭堡인 在德堡는 1605년(선조 38)에 斜 洞에서 永平山 古城으로 移設한 것이다. 서쪽의 將軍坡는 돌로 쌓은 것으로 길이가 1,965척이었는데 당시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해발 906미터의 칠보산에는 뛰어난 경승을 자랑하는 산인데 金剛窟로도 유명하다. 지도 여백에는 이 칠보산 일대가 군사적 요충지가 되므로 鎭을 설치하기에 합당하다고 쓰여 있다.(노혜정)

  • 무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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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산부는 두만강과 연해 있는 고을로 위로는 회령, 아래로는 갑산과 접해 있다. 세종 때 이곳에 살던 야인을 몰아내고 鎭을 설치했다. 1674년(현종 15)에 僉使鎭을 三峰坪으로 옮기고 1684년(숙종 10)에는 監司 李世華의 청에 의해 비로소 都護府를 두었는데, 富寧의 車踰嶺 以西 지역과 會寧의 蘆田項 以南 지역을 병합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무산군 읍면, 영북면, 풍계면, 동면, 계하면, 연상면, 연사면, 삼사면, 삼장면, 서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무산군을 비롯하여 연사군, 량강도 대홍단군, 백암군, 그리고 삼지연군 일부 지역이 과거 무산부의 영역이다. 지도에는 백두산의 모습이 강조되어 표현되었고 1712년에 세워진 정계비도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1694년(숙종 20)에 府使 李天根이 축조한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상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읍치를 표시하는 茂山이라는 표기도 누락되어 있다. 읍치가 風水의 형국으로는 行舟形에 해당하여, 성안에 우물을 파지 않았기 때문에 부근의 하천물을 식수로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주변 지역의 坊社, 창고, 봉수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동쪽의 豊山鎭은 본래 會寧府의 豊山堡로 1674년(현종 15)에 이곳으로 옮기고 1684년(숙종 10) 무산부에 소속시켰다. 백두산 아래쪽으로는 절경을 자랑하는 三池淵이 보이고 있으며 綠雲山 근처에는 용암이 긴 둑처럼 흘러내린 長坡도 표시되어 있다.(노혜정)

  • 문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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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천군은 함경남도 해안가에 위치한 고을로 남쪽은 德源, 북쪽은 高原, 서쪽은 평안도 陽德縣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문천군 군내면, 도초면, 명효면, 구산면, 운림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강원도 문천시와 천내군로 나뉘어져 있고 남쪽의 일부 지역은 원산시로 편입되었다. 지도는 산천을 비롯하여 창고, 사찰 등의 인문 요소도 기입되어 있다. 무엇보다 고개의 명칭이 매우 자세하다. 읍치의 북쪽에는 翼祖와 貞淑王后의 陵인 淑陵도 표시되어 있다. 동쪽 바다의 四訥島에는 목장이 있었는데 함흥 監牧官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石城이 축조되어 있고 관리하던 牧子가 220명이나 되는 꽤 규모가 큰 목장이었다. 지도상에는 여백의 주기와는 다르게 四栗島로 표기되어 있다. 인근 해안에는 소금을 만들던 鹽場도 보이고 있다. 읍치의 서쪽에는 文浦書院이 그려져 있는데,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宋時烈, 閔鼎重을 배향했던 서원이다.(노혜정)

  • 부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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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령부는 함경북도의 해안 고을로 남쪽은 鏡城, 북쪽은 會寧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부령군 하무산면, 부거면, 삼해면, 연천면, 석막면, 서상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부령군과 청진시 청암구역으로 되어 있다. 이 지역은 지도 여백의 설명문에도 보이듯이, 사방의 산줄기가 모여드는 곳에 위치한 중요한 요충지이다. 관내의 각 社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고 봉수가 비교적 상세하다. 읍치에서 동남쪽의 輸城으로 가는 길목에는 仇正棧道가 표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잔도는 절벽에 길을 내어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남쪽 경성으로 적의 진입을 차단할 수 있는 최고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동쪽 해안의 懷綏驛에는 1428년(세종10)에 설치되었다가 1449년에 폐지된 富居縣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해안가에는 蓴潭, 南池, 東池 등의 석호와 海邊臺와 같은 절경도 표시되어 있다.(노혜정)

  • 북청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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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청부는 동해안에 위치하여 관북대로가 지나는 길목에 있는데 위로는 利原, 아래로는 洪原으로 연결된다. 함경도의 南兵營이 있던 국방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해방 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북청군 노덕면, 양가면, 양천면, 거산면, 신창면, 청해면, 평산면, 속후면, 양화면, 신포면, 후창면, 가회면, 하차서면, 상차서면, 이곡면, 성대면, 덕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남도 신포시, 덕성군, 북성군 일원이다. 읍치에는 방형의 읍성이 그려져 있는데 1517년(중종 12)에 축성된 것이다. 함경도 각 군현의 행정단위인 社가 지도상에는 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서쪽 德城面에는 弘道洞山城과 龍義洞山城이 그려져 있다. 돌로 쌓은 성이지만 당시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梁川面의 해안가에는 土城이 보이고 있는데, 이곳은 과거 肅愼의 都邑으로 추정되던 곳이었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성내에 가옥이 밀집되어 있었고 땅을 갈 때 유물들이 간혹 출토되었다고 한다. 봉수의 표시도 상세한데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많은 7개의 봉수가 그려져 있다. 동쪽 해안가에는 侍中臺도 보이는데, 고려 예종 때의 侍中 尹瓘이 말갈족을 정벌할 때 이곳에 오른 적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노혜정)

  • 삼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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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수부는 함경도 내륙의 고을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다. 동쪽으로는 甲山, 남쪽으로는 咸興, 서쪽으로는 평안도의 古茂昌에 이른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삼수군 삼남면, 읍관면, 별동면, 군인면, 강진면, 자서면, 삼서면, 관흥면 그리고 장진군 군내면, 상남면, 중남면, 구읍면, 신남면북면, 동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량강도 삼수군, 김정숙군이 과거 삼수부 지역이다. 三水라는 지명은 이 지역의 크고 작은 물줄기 세 갈래가 압록강에 합쳐지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1693년(숙종 19)에는 국경 방어를 위해 右營將을 두고 府使가 겸임하였다. 원래 1656년(효종 7)에 축조되어 砲樓까지 갖춰진 방어용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압록강 연안에는 접경지역이라는 지역의 특성으로 인해 봉수, 진보, 파수 등의 군사 시설이 다수 들어서 있다. 1511년(중종 6)에 설치된 乫波知鎭, 1489년(성종 20)에 설치된 仁遮外堡, 1500년(연산군 6)에 설치된 羅暖堡, 小農堡, 舊乫波知堡 등이 포진해 있다. 지도의 이면에는 갑산과 삼수 지역의 鎭堡에 대한 군사 항목을 기재해 놓았다.(노혜정)

  • 삼수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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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수부는 함경도 내륙의 고을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다. 동쪽으로는 甲山, 남쪽으로는 咸興, 서쪽으로는 평안도의 古茂昌에 이른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삼수군 삼남면, 읍관면, 별동면, 군인면, 강진면, 자서면, 삼서면, 관흥면 그리고 장진군 군내면, 상남면, 중남면, 구읍면, 신남면북면, 동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량강도 삼수군, 김정숙군이 과거 삼수부 지역이다. 三水라는 지명은 이 지역의 크고 작은 물줄기 세 갈래가 압록강에 합쳐지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1693년(숙종 19)에는 국경 방어를 위해 右營將을 두고 府使가 겸임하였다. 원래 1656년(효종 7)에 축조되어 砲樓까지 갖춰진 방어용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압록강 연안에는 접경지역이라는 지역의 특성으로 인해 봉수, 진보, 파수 등의 군사 시설이 다수 들어서 있다. 1511년(중종 6)에 설치된 乫波知鎭, 1489년(성종 20)에 설치된 仁遮外堡, 1500년(연산군 6)에 설치된 羅暖堡, 小農堡, 舊乫波知堡 등이 포진해 있다. 지도의 이면에는 갑산과 삼수 지역의 鎭堡에 대한 군사 항목을 기재해 놓았다.(노혜정)

  • 안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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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변부는 철령을 넘어 나타나는 함경도의 첫째 고을로 상당히 넓은 면적에 걸쳐 있었다. 아래로는 강원도 歙谷, 위로는 德源과 맞닿아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안변군 학성면, 안도면, 배화면, 서곡면, 문산면, 위익면, 신모면과 덕원군 풍상면, 풍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강원도 안변군과 고산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에는 원형의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둘레가 10,358尺으로 비교적 큰 규모이다. 고을의 서남쪽에서 산줄기가 크게 갈라지는데 강원도로 경유하여 남쪽으로 가는 백두대간과 한양쪽으로 내려가는 한북정맥으로 대별된다. 지도상에 전자는 '南去大脈'으로 후자는 '漢都大脈'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강원도 흡곡에서 올라오는 대로와 철령을 넘어오는 대로가 이 지역의 간선로인데 철령을 넘어오는 관북대로를 더 강조하였다. 그 옆 분수령을 넘어가는 도로는 三防路라고도 하는데 이 지역의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했다. 동북쪽 奉龍驛 옆에는 翼祖의 능인 智陵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가의 浪城에는 과거 水軍 萬戶가 있었는데 1509년(중종 4)에 혁파되었다. 읍치의 玉洞書院은 1567년(명종 22)에 창건하고 1702년(숙종 28)년에 사액되었다. 함경도 감사로서 이 지역에 儒風을 진작했던 李繼孫을 비롯하여 金尙容, 趙錫胤 등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지도의 여백에는 일종의 斗入地에 해당하는 서쪽 永豊 지역의 지형 지세를 설명하면서 별도로 읍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노혜정)

  • 영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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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永興府는 함경남도 해안에 위치한고을로 위로는 定平, 아래로는 高原과 접하고 있다. 함흥과 더불어 조선의 발상지로 국가적으로 중시되었던 지역이고 또한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영흥군 홍인면, 복흥면, 순녕면, 억기면, 진평면, 고녕면, 호도면, 인흥면, 덕흥면, 장흥면, 횡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금야군과 요덕군으로 나뉘어졌고, 남서쪽 일부 지역은 고원군에 속해 있다. 고을의 진산인 聖歷山이 읍치를 감싸고 있고, 龍興江이 고을의 중심을 통과하여 동해로 흘러들고 있다. 읍치의 남동쪽에는 태조 이성계의 부친 桓祖의 舊邸인 本宮, 태조의 탄생지인 濬源殿 등을 볼 수 있다. 남동쪽 해안의 木柵이 그려져 있는데 지도 여백에 기재된 末鷹島 목장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도의 표기는 ''馬熊島''로 서로 차이가 있다. 영조 때 저술된 輿地圖書에 의하면 당시 이 목장의 牧馬는 33필인데, 면적에 비해 적은 수의 말이 사육되고 있었다. 이 지도에서도 나중에 추가로 다시 그려 넣은 부분이 있는데 票山, 七星山, 天皇山, 平倉 등이 그것이다.(노혜정)

  • 온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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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고을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고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온성군 온성면, 유포면, 영와면, 영충면, 미포면, 훈융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동쪽의 일부 지역을 새별군에 넘겨주고남쪽 종성군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되었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으나 지도상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주변 지역에는 坊面에 해당하는 각 社가 표시되어 있다. 두만강 연안에는 把守와 진보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다. 僉使鎭인 柔遠鎭을 비롯하여 1484년(성종 15)에 설치된 美錢鎭, 1442년(세종 24)에 설치된 永遠鎭, 1523년(중종 18)년에 설치된 黃拓坡堡 등이 국경수비의 전진 기지였음을 알수 있다. 동쪽 해안에는 小草島와 함께 목장이 표기된 또 다른 섬이 그려져 있다. 이 섬은 당시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던 大草島로서 1511년(중종6)에 端川으로 옮겼다가 1665년(현종 6)에 다시 설치된 것이다. 감목관은 府使가 겸하고 있었고 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21리, 雄馬 23, 雌馬 110필이 있었다. 함경도의 다른 목장에 비해서는 사육되던 말이 많은 편이었다.(노혜정)

  • 이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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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利城縣은 함경도의 해안 고을로 북으로는 端川, 남으로는 北靑과 접하고 있다. 利城은 정조 때에 利原으로 개명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서면, 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은 단천군의 서부 지역을 일부 병합하여 이원군으로 되어 있다. 고을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수록된 내용도 비교적 소략하다. 특히 社의 명칭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래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많이 훼손되어 있었는지 지도상에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읍치 남쪽 해안의 南松亭, 東松亭 주변으로는 소나무 숲이 잘 가꾸어진 모습도 볼 수 있는데 당시 6, 7리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그 옆의 해안에는 文星岩이 있는데 겹겹이 쌓여진 바위의 모습이 절경이라 한다. 남쪽 해안의 者外津에는 1742년(영조 18)에 진휼을 목적으로 설치된 交濟倉도 보이고 있다.(노혜정)

  • 정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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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평부는 함경남도의 해안 고을로 북으로는 咸興, 남으로는 永興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정평군 부내면, 주이면, 광덕면, 고산면, 장원면, 문산면, 귀림면, 춘유면, 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남도 정평군과 일부는 함주군에 속해 있다.  국토의 北嶽이면서 고을의 鎭山이 되는 鼻白山이 읍치를 감싸고 있는데, 비백산은 祀典에 中祀로 기재되어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산이다. 관내의 행정구역은 대부분 ''社''로 표기되어 있으나 歸林面만은 ''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에는 원래 둘레 5,935척의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남동쪽 해안가와 서북쪽의 산지에는 長城이 그려져 있는데 고려 때 여진족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라 한다. 동남쪽 犬頭山이 있는 지역은 해안으로 길게 뻗은 串과 같은 곳으로 바다 건너 함흥에 속해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길게 해수가 그려져 있고 ''廣浦''로 표기되어 있는데 지금의 廣湖에 해당한다. 北倉, 烽臺驛 등은 비변사의 지도를 참고하여 다시 그려 넣은 것이다.(노혜정)

  • 종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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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성부는 북쪽 두만강과 연해 있는 고을로 남북으로 길게 동해안까지 뻗어 있다. 鍾城이라는 명칭은 북쪽의 童巾山이 종을 엎어놓은 것과 같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종성군 오촌면, 주을온면, 주북면, 주남면, 어랑면, 용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회령시, 온성군, 새별군으로 나누어져 병합되었다. 고을의 진산은 동남쪽에위치한 小白山으로 봄과 여름에도 눈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읍치에는 세종 때 축조된 읍성이 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대신에 남쪽의 行營에는 원형의 성곽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행영은 咸鏡北道兵馬節度使의 行營으로 세조 때 설치된 것이다. 평시에는 鏡城에 있는 本營에 머무르다 두만강이 얼어붙으면 이곳에서 방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위치상으로도 會寧, 鍾城, 慶源, 穩城 네 고을의 중앙에 해당하여 북방 수비에 좋은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두만강 변에는 국경 방어를 위한 把守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고 防垣堡와 潼關鎭 등의 진보도이곳의 중요한 군사 기지로 나타나 있다.(노혜정)

  • 종성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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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성부는 북쪽 두만강과 연해 있는 고을로 남북으로 길게 동해안까지 뻗어 있다. 鍾城이라는 명칭은 북쪽의 童巾山이 종을 엎어놓은 것과 같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종성군 오촌면, 주을온면, 주북면, 주남면, 어랑면, 용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회령시, 온성군, 새별군으로 나누어져 병합되었다. 고을의 진산은 동남쪽에위치한 小白山으로 봄과 여름에도 눈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읍치에는 세종 때 축조된 읍성이 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대신에 남쪽의 行營에는 원형의 성곽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행영은 咸鏡北道兵馬節度使의 行營으로 세조 때 설치된 것이다. 평시에는 鏡城에 있는 本營에 머무르다 두만강이 얼어붙으면 이곳에서 방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위치상으로도 會寧, 鍾城, 慶源, 穩城 네 고을의 중앙에 해당하여 북방 수비에 좋은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두만강 변에는 국경 방어를 위한 把守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고 防垣堡와 潼關鎭 등의 진보도이곳의 중요한 군사 기지로 나타나 있다.(노혜정)

  • 함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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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일원을 그린 지도로 전체적인 윤곽은 다소 과장되어 표현되었다. 한반도의 북부 지방이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지는 鄭尙驥의 東國地圖 이전의 지도 유형에 해당한다. 백두산 밑에 1712년에 세워진 정계비가 뚜렷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최소한 1712년 이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1757년(영조 33)에 혁파된 鏡城의 甫老知堡가 그려져 있는데 대략 18세기 전반기의 사정을 표현하고 있다. 북쪽이 아닌 북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다. 산지는 봉우리를 연결하여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고 하천은 지류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졌으나 두만강의 유로가 다소 과장되어 있다. 道內의 郡縣은 원, 鎭堡는 직사각형, 察訪驛은 노란 타원 등으로 구분하였고, 감영이 있던 함흥은 붉은 색으로 강조하였다. 함경도는 摩天嶺을 기준으로 北關과 南關으로 나누어지는데 북쪽에는 鏡城에 병영을 두고 남쪽에는 북청에 병영을 두었다. 북관에는 두만강 유역 접경지대 방어를 위해 行營을 별도로 두었다. 홍선의 도로 중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길은 점선으로 표시되었는데, 다른 곳에 비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매우 드물었음을 엿보게 한다. 지도의 여백에는 戶口, 穀總, 軍總, 함흥부 관내 행정구역 등을 기재하였고 지도의 뒷면에도 함경도 내의 관직을 수록하여 지도를 보완해주고 있다.(노혜정)

  • 함경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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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일원을 그린 지도로 전체적인 윤곽은 다소 과장되어 표현되었다. 한반도의 북부 지방이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지는 鄭尙驥의 東國地圖 이전의 지도 유형에 해당한다. 백두산 밑에 1712년에 세워진 정계비가 뚜렷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최소한 1712년 이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1757년(영조 33)에 혁파된 鏡城의 甫老知堡가 그려져 있는데 대략 18세기 전반기의 사정을 표현하고 있다. 북쪽이 아닌 북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다. 산지는 봉우리를 연결하여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고 하천은 지류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졌으나 두만강의 유로가 다소 과장되어 있다. 道內의 郡縣은 원, 鎭堡는 직사각형, 察訪驛은 노란 타원 등으로 구분하였고, 감영이 있던 함흥은 붉은 색으로 강조하였다. 함경도는 摩天嶺을 기준으로 北關과 南關으로 나누어지는데 북쪽에는 鏡城에 병영을 두고 남쪽에는 북청에 병영을 두었다. 북관에는 두만강 유역 접경지대 방어를 위해 行營을 별도로 두었다. 홍선의 도로 중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길은 점선으로 표시되었는데, 다른 곳에 비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매우 드물었음을 엿보게 한다. 지도의 여백에는 戶口, 穀總, 軍總, 함흥부 관내 행정구역 등을 기재하였고 지도의 뒷면에도 함경도 내의 관직을 수록하여 지도를 보완해주고 있다.(노혜정)

  • 함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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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는 함관령을 비롯한 여러 고개들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다. 함관령은 洪原縣과 咸興府 사이에 있는 산줄기를 넘는 큰 고개로 磨天嶺, 磨雲嶺, 그리고 서북쪽의 黃草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의 군사적 요충지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에서 慶興에 이르는 關北大路가 바로 이 고개를 통과한다. 함경도는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내륙보다는 비교적 평탄한 충적지가 펼쳐진 해안을 따라 물자의 교류와 사람들의 왕래가 행해졌다. 이러한 형세로 인해 함경도로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는 북쪽의 六鎭을 거쳐 마천령, 마운령, 함관령 등을 지나 남쪽으로 향하게 된다. 이 경로를 따른다면 함관령은 함경도의 최후 방어선이 된다. 이곳이 뚫리면 鐵嶺까지는 일사천리로 내려갈 수 있고 철령을 넘으면 험준한 곳이 많지 않아 수도 서울도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함흥의 감영과 북청의 병영이 서로 의지하며 이곳을 지키게 했던 것이다. 지도상에는 관북대로가 다른 도로보다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는데, 홍원 방면에는 咸原驛, 함흥 방면에는 德山驛이 표시되어 있다. 함관령 옆의 車踰嶺은 함관령보다 낮아서 본래 행인들의 왕래가 많았으나, 함관령의 관방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조정에서 이곳을 통제하여 왕래를 금지했던 곳이다. 지도에는 도로가 그려져 있으나 여백의 주기에는 지도 제작 당시 폐지된 것으로 쓰여 있다. 이 밖에 古邑乭嶺, 中臺岩嶺, 龍林嶺, 乭長嶺, 松洞嶺, 羅屹乃嶺, 炭峴 등의 고개가 표시되어 있다. 특히 이곳은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조상들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거처했던 本宮을 비롯하여 定和陵, 義陵 등과 같은 태조 조상들의 능도 그려져 있다.(노혜정)

  • 함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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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부는 북쪽으로는 六鎭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바닷가 고을인 정평 영흥 문천 등을 거쳐 철령으로 통하는 요충에 위치하여 행정 군사의 중심지이자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문화적으로도 중시되던 곳이었다.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 주북면, 기곡면, 상기천면, 하기천면, 하조양면, 상조양면, 천원면, 천서면, 주서면, 주지면, 연포면, 삼평면, 운전면, 서호면, 동주동면, 북주동면, 덕천면, 덕산면과 신흥군 동고천면, 원평면, 가평면, 서고천면, 영고면, 하원천면, 상원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함흥시, 신흥군, 영광군, 함주군 지역이다. 읍성은 1453년(단종 원년)에 축성된 것인데 이후에 개축을 계속하여 이 시기에도 문루와 성벽이 선명하게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조선왕조의 발상지답게 태조 이성계와 그의 조상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표시되어 있다. 남문  밖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곳인 本宮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고 동편에는 그 조상의 陵寢도 산줄기를 따라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定和陵은 桓祖와 그의 비인 懿惠王后의 능이고, 義陵은 度祖, 純陵은 度祖의 妃 敬順王后의 능이다. 정화릉 부근의 慶興殿은 태조의 옛 저택이며 定宗과 太宗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雲田社에는 태조가 어릴 때 격구를 했던 擊毬亭도 그려져 있다. 해안의 都連浦에는 목장이 경계선과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이 목장은 1730년(영조 6) 水災로 인해 폐지되었다. 그 옆에는 제단이 표시되었는데 이것은 국초부터 太白星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노혜정)

  • 홍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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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원현은 南關의 중앙에 위치하여 북쪽으로는 北靑, 남쪽으로는 함흥과 접하고 있는 해안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홍원군 주익면, 경포면, 운포면, 용원면, 용천면, 호현면, 희현면, 학천면, 용운면, 보청면, 동퇴조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도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하며 남쪽의 일부는 낙원군으로 편입되어 있다. 비교적 작은 고을로 고을의 모습도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있었으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咸原驛을 통과하여 咸關嶺을 넘는 도로는 이 고을의 대로이고 그 옆 車踰嶺에 이어지는 도로는 소로에 해당한다. 이 두 고개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곳이다. 해안의 穿島에는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어서 파도가 넘나드는데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이 일대 최고로 칭해졌다. 또한 馬養島에는 이름에 걸맞게 목장이 있었는데 文川監牧官에 속해 있었다. 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목장의 둘레가 90리이고 기르던 말이 97필이었다.(노혜정)

  • 회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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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령부는 두만강 밑에서부터 동남쪽으로 길게 늘어져 동해안까지 이르는 고을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시되던 곳이기도 하다. 해방 이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 벽성면, 운두면, 봉의면, 용흥면, 화풍면, 팔을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회령시로 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두만강변의 鰲山인데 읍치를 감싸듯이 그려져 있다. 읍치 서남쪽으로는 1509년(중종 4)에 처음 설치된 甫乙下鎭이 포진해 있고 그 옆에는 雲頭城이 그려져 있다. 운두성은 金나라의 五國城으로 오인되어 五國山城으로도 불렸다. 고을의 북쪽에는 皇帝塚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청나라 穆克登이 조선과의 국경을 정할 때, 이 무덤에서 ''宋皇之墓''라는 글자가 출토되어 이후 皇帝塚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두만강 변에는 파수처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봉수 또한 잘 나타나 있다. 해안가에는 潟湖인 眞珠池도 그려져 있는데 이곳에서 진주가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노혜정)

  • ▶황해도
  • 강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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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康翎縣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 용연면, 봉구면, 흥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황해남도 강령군 동부를 제외한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1666년(현종 7) 치소를 옮기기 전에는 고현면 蛇川에 있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 10리에 떨어진 鳳凰山이다.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북쪽의 우뚝 솟은 鵲山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富民山과 鳳凰山으로 이어져 명당을 형성하였다. 王灘川이 북쪽 鵲山에서 발원하여 남하하여 司倉 앞을 지나 戀君浦를 지나 바다로 흘러간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15리 떨어진 望海菴 부근에 望海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서는 서쪽으로 넓은 바다가 바라다 보인다.  읍치에서 동남쪽으로 45리 지점에 있던 등산곶진은 뒤에 순위도로옮겨졌다. 1704년(숙종 30)에 萬戶로 승격시켰다. 후에 등산곶은 목장으로 바꾸고 순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었다. 지도에서 등산곶은 司僕寺 소관의 牧場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을 따라 食大山, 竪羅山, 九月里, 推峙 봉수대가 배치되어 있었다.(金在完)

  • 곡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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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곡산군 곡산면, 도화면, 서촌면, 운중면, 동촌면, 청계면, 화촌면, 멱미면, 봉명면, 상도면, 하도면, 이녕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곡산군 거의 대부분 지역, 신평군 전 지역, 연산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곡산부는 1782년(정조 6)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91년(정조 15) 다시 승격되었다. 순조 때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에서 남쪽으로 8리 떨어진 南山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文城鎭은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嶺의 아래가 檢岩城이 된다. 762년(신라 경덕왕 21)에 성을 쌓았다. 조선조 중종 때에 萬戶를 설치하고, 1668년(숙종 9)에 僉使로 승격시켰다. 지도에는 衙舍, 客舍, 倉이 표시되어 있다. 옛 文城은 大角山 아래에 있다. 牛嶺路의 요충지가 되어, 검암령성 및 이천과 더불어 신라와 백제 때 북변 요충지이었고, 당시에도 당연히 이곳은 防守의 요충지에 해당하였다.(金在完)

  • 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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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금천군 금천면, 고동면, 산외면, 서북면, 우봉면,웅덕면, 구이면, 좌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금천군 대부분 지역, 봉천군 일부, 평산군 일부, 토산군 서쪽 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1395년(태조 4)에 縣令으로 승격되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이속되었다. 1651년(효종 2)에 江陰縣과 牛峰縣을 합쳐 금천군으로 승격시키고 吾早川의 남쪽에 읍을 세웠다. 1678년(숙종 4) 저탄의 남쪽으로 치소를 옮겼다가 1753년(영조 29)에 다시 오조천의 남쪽으로 옮겼다. 후에 다시 저탄의 남쪽으로 옮겼다. 지도상의 읍치는 오조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옛 江陰은 지도의 아랫쪽 助邑浦 부근에 위치하였다.조읍포는 예성강 조운의 중심지이었다. 이 곳에 위치한 조읍포창은 황주, 서흥, 평산, 봉산, 곡산, 수안, 안악, 재령, 신계, 토산, 우봉, 강음 12읍의 전세를 수납 보관하였다가 서울로 조운하였던 중요한 漕倉이었다. 그러나 1713년(숙종 39)에 폐지하고, 다만 本郡 세곡만 조운하였다. 조읍포는 수운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개성, 배천, 해주, 재령 등 사방으로통하는 육운의 요충지이었다. 읍치 좌측에 ''舊金郊基''가 표시되어 있다. 금교역은 金郊道 찰방역이 평산부 寶山驛으로 옮겨가기 이전 10역을 거느리는 규모가 큰 역이었다.(金在完)

  • 문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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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化縣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황해도 신천군 초리면, 문무면, 용진면, 산천면, 궁흥면, 문화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지금의 황해남도 삼천군 중·북부, 안악군 서부, 신천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문화현의 옛 읍치는 본래 현 읍치에서 북쪽으로 13리 떨어진 삼천군 고현리에 있었으나 역병이 자주 돌아 1520년(중종 15) 건지산 남쪽으로 옮겼다. 문화현의 진산은 고을 북쪽 4리에 있는 乾止山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구월산은 황해도의 명산이다. 구월산은 阿斯達山, 弓忽, 甑山, 三危라고도 불린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을 평양에서 이 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문화현에는 鳳崗書院과 程溪書院이 있다. 前者는 1656년(효종 7)에 세워져 1675년(숙종 1)에 사액을 받았고, 後者는 1670년(현종 11)에 세워져 1708년(숙종 34)에 사액을 받았다. 우측에 보이는 三聖殿은 구월산 성당리에 있다. 곧 환인·환웅·단군의 사당이다. 나라에서 봄가을로 香祝을 내려 보내 제사를 드리며, 또 비가 심한 때와 가물 때 기도하던 곳이다. 부근의 錢山祠에 매년 봄·가을·겨울 10월에 향축을 내려보내 제사를 드렸다. 아래쪽에 唐莊京은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이라고 한다.(金在完)

  • 배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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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배천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연백군 동부지역이었다. 현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해방 전 호동면 지역의 일부를 제외한 배천군 전지역에 해당한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1리에 위치한 雉岳山이다. 북쪽 高正山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天登山을 거쳐 진산 겸 주산인 치악산으로 이어지고, 그 아래 관아가 자리잡고 있다. 명당수가 고을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읍치 남쪽으로 모아진 다음, 서쪽으로 흘러 예성강과 합류하고 있다. 남쪽 玉山이 案山의 역할을 하고 있다. ,碧瀾津 對岸에 위치한 金谷浦는 배천 고을의 세곡을 실어 날랐던곳이다. 부근에 위치한 海倉은 금곡포창이라고 불렸는데, 해주·연안·풍천·신천·장연·문화·강령·옹진·송화·장련·은률 및 본군의 田稅를 거두어 배로 서울까지 운반하였다. 衙舍 좌측에 보이는 서원은 文會書院인데,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불탄 후, 1606년(선조 39)에 重建되었고, 1628년(인조6)에 사액을 받았다. 1680년(숙종6)에 東西祠를 창건하고 1698년(숙종 24)에 거듭 사액하였다. 고을 동쪽 예성강변 錢浦 對岸 견불산기슭에 위치한 江西寺는 중 혜소가 여기 거주하였는데 김부식이 늘 나귀를 타고 방문하였다고 전한다. 지도의 설명란에 보면 배천군은 논이 밭보다 압도적 많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배천군이 평야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金在完)

  • 봉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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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鳳山郡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황해도 사리원시, 봉산군 동선면, 산수면, 구연면, 토성면, 덕재면, 쌍산면, 기천면, 초와면, 서종면, 사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황해북도 사리원시, 봉산군 동부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 재령군 삼강군 서부 일부지역, 은파군 대부분, 린산군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범위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山川條에 이 고을의 鎭山은 서쪽 5리에 위치한 祿科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도에 보이는 읍치는 1523년(중종 18)에 白雲山 아래로 옮겨졌던 곳이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古邑城은 土城이고,좌측에 보이는 唐土城은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리이다. 읍치 서북쪽에 보이는 正方山城은 洞仙嶺 부근에 위치하기 때문에 洞仙關行城 또는 舍人岩城이라고 부른다.영의 길은 좁고 비탈져 말이 같이 걸어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다. 1746년(영조 22)에 성을 쌓아서 동문과 서문을 설치하였다. 정방산성 부근에 보이는 蒜山鎭은 1678년(숙종 4) 옛 棘城鎭의 터에 세워진 진으로서 兵馬同僉節制使가 주재하였다. 고읍성 부근에 위치한 서원은 文井書院인데, 1681년(숙종 7)에 세워져 1703년(숙종 29)에 사액을 받았다. 봉산은 의주대로가 통과하는 고을로 군사적 요충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그 예로  山嶺과 洞仙嶺 부근에 매복처가 있다. 재령강 연안의 栗串津은 봉산군과 신천군의 미곡이 배에 실려 서울로 출발하는 조운선 출발지였다.(金在完)

  • 서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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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서흥군 신막읍, 서흥면, 도면, 세평면, 소사면, 율리면, 목감면, 용평면, 내덕면, 매양면, 구포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북도 서흥군 전체, 인산군 일부 지역, 봉산군  동쪽 부분, 연탄군 일부 지역, 수안군 일부, 린산군 북부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1671년(현종 12)까지 서흥도호부이였던 이곳은  趙大立이 반란을 일으켜 府使 李宇柱를 죽였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1762년(영조 38)에 복구되었다가 1776년(정조 1)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86년(정조 10)에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7리에 위치한 大峴山이다. 지도상에는 大尼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서흥현도 황주목과 마찬가지로 面이 아니라 坊으로 표시되어 있다. 慈悲嶺은  嶺이라고도 하는데 평양에서 서울로 통하는 옛 길이다. 세조 때 호랑이의 피해가 많고 또 중국 사신이 모두 극성길을 경유하여 통행함으로 그 길이 폐지되었다. 지도에는 木柵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좌측 중단의 읍치 우측에 보이는 大峴山城은 실제로 읍치 정북 방향에 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2만 2백 38척, 높이 23척이다. 성안에는 서흥현 및 수안·곡산·신계·우봉·토산·황주·봉산 등 고을의 軍倉이 위치해 있었다.(金在完)

  • 송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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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현의 명칭은 1408년(태종 8)에 고려 때 靑松縣과 嘉禾縣을 합하여 송화현으로 고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송화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 연정면, 연방면, 도원면, 장양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송화군 대부분 지역, 삼천군 남부지역, 황해남도 태탄군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嘉和古縣은 읍치 동쪽 東倉과 南倉 부근에, 靑松古縣은 方竹洞坊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월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간 산줄기가 大藥山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이 고을의 진산인 墨山(대동여지도에는 生王山으로 나옴)에 이르러 명당형국을 만들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서원은 1699년(숙종 25)에 사액을 받은 道東書院이다. 고을 남쪽에 온천이 있는데, 현재도 송화온천으로 이름 나 있다. 읍치 남쪽에 ''城''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 성이 新岾古城이다. 輿地圖書에 따르면 돌과 흙을 섞어 쌓았는데 둘레가 9천 2백 1척이다. 大藥山 기슭에 修證寺, 高井寺가, 小藥山 기슭에 藥寺 등 유명한 사찰이 위치해 있다.(金在完)

  • 수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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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율계면, 대성면, 대오면, 천곡면, 수구면, 도소면, 연암면, 공포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북도 수안군 대부분 지역, 연산군 전 지역, 연탄군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행정구역의 명칭을 面이 아니라 坊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북쪽 4리에 위치한 遼東山이다. 이 산에 위치한 遼東山祠에서 봄·가을로 본 읍에서 제사를 지냈다. 수안군은 예성강과 대동강 지류인 남강의 분수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산지가 많고 들이 적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龍溪書院은 1662년(현종 3)에 세워지고, 1708년(숙종 34)에 사액을 받았다. 名山인 언진산 기슭에는 불각사·영대사·수정사 등 사찰과 암자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文山鎭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防垣嶺 아래에 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성의 길이는 6백 20척이고 성의 좌우에 높은 산이 마주 솟아 있다. 1680년(숙종 6)에 文山·聰明 두 곳의 屯將을 萬戶로 승격시켜 이 곳에 옮겨 설치하였다. 방원령, 명월령, 만령, 이령, 납로리령을 지킨다. 읍치 남쪽에는 位羅鎭이 있었는데, 1680년(숙종 6)에 屯將을 만호로 승격시켰다.(金在完)

  • 신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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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溪縣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황해도 신계군 신계면, 고면, 다율면, 다미면, 마서면, 부여면, 사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신계현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북도 신계군 전지역, 곡산군 일부, 수안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신계현은 원래 고려의 新恩縣이었는데, 1396년(태조 5)에 俠溪縣을 신은현에 예속시켰고, 1445년(세종 27)에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신계현이 되었다. 읍치는 신계군 마산리 일대에 있었다. 협계현의 위치는 지금의 신계군 침교리 일대이고, 신은현은 지금의 신계군 왕당리 일대로 생각된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1리에 위치한 九峯山이다. 大東地志에 "구봉산은 큰 산으로 가득 차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니산의 산줄기가 명당인 읍치를 감싸 안았고, 앞에는 朝水인 楡川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다시 楡川 남쪽에 案山이 읍하고 있는 전형적인 명당형국을 보여 주고 있다. 객사 윗쪽에 보이는 鶴巢峰은 민간에서 전하여 오기를 "옛날에 흰 학이 그 마루턱에 깃들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고 한다. 봉우리 위에는 懸鍾臺(지도에는 鍾臺懸으로 표시되어 있음)가 있고, 臺 아래에 看月岩이 있다. 읍치 동쪽 1리에 위치한 秀林亭은 남쪽으로 유수에 임하고, 앞은 천 길 벼랑이다. 퇴락한 지 오래고 초석만 남아 있다.(金在完)

  • 신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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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 북부면, 가산면, 온천면, 두라면, 용문면, 노월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신천군 서남부, 동부, 북부를 제외한 전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으로 6리 떨어진 花山이다. 鎭山 남쪽의 산줄기가 衙舍와 客舍 등 주요 건물을 포근하게 감싸 안은 명당형국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남쪽에 案山격인 산이 없어서 인공적으로 造山을 만들어 놓았다. 허한 곳을 假山, 숲, 탑 등으로 보충하는 일종의 裨補風水이다. 신천군은 재령강 유역의 재령평야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읍치는 재령강 지류인 西江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고을 남쪽에 위치한 天奉山의 정상에 龍井이 있어, 가물 때면 비를 빈다고 한다. 고을 서남쪽에 위치한 正源書院은 1588년(선조 21)에 세워지고, 1710년(숙종 36)에 사액되었다. 읍치 동쪽에 溫井은 북한에서 이름난 신천 온천이다. 서부면 信城山에는 옛 土城이 위치해 있다. 읍치 동남쪽에 보이는 兄弟澤은 하천 유로의 변경으로 생긴 우각호로 보인다.(金在完)

  • 안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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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안악군 안악면, 용순면, 대원면, 문산면, 안곡면, 서하면, 대행면, 은홍면, 용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은천군 전 지역, 안악군 서부와 남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 서쪽은 북에서 남으로 곧게 내려 뻗은 산줄기가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그 양쪽 산기슭에는 淨土菴, 寶光菴, 隱寂菴, 燃燈寺 등이 위치하고 있다. 남하하던 主脈의 일부가 동쪽으로 꺾이어 고을의 북쪽에 이르러 읍의 鎭山인 楊山이 되었다. 또한 계속 남하한 주맥이 동쪽으로 돌아서 읍치 남쪽에서 안산인 南山이 되고, 마찬가지로 명당수가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읍 앞에서 남쪽으로 꺾여 흐르고 있다. 읍치는 모든 것을 갖춘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양산 남쪽 기슭에 관아, 향교, 사직단, 누각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읍치 동쪽 재령강 연안에 桃串神祠와 省草串神祠가 위치하고 있는데, 모두 고려 때 祀典에 실렸었는데, 지금도 본 군에서 제사지낸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溫井은 조선조 때 洞陰溫泉이라 불리었는데,지금도 銀泉溫泉으로 이름이 나 있다. 그리고 읍치에 보이는 서원은 鷲峯書院으로서 중국의 주 희와 이 이를 배향하였다.(金在完)

  • 연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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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연안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연백군 서부지역에 해당한다. 현 행정구역 상으로는 황해남도 연안군 전체, 청단군 일부 지역, 배천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연안부는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이속되었다. 府의 鎭山은 북쪽 3리에 있는 飛鳳山(일명 鳳勢山이라 함)이다. 지도에 보이는 원형의 읍성은 1555년(명종 10)에 쌓았는데, 1591년(선조 24)에 延安府使 申恪이 修築하였다. 府의 남쪽 3리에 위치한 南大池는 輿地圖書에 따르면 둘레가 20리나 된다. 이 못과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겨울철마다 못의 얼음이 세로 혹은 가로로 갈라지는데 읍 사람들이 용이 갈이를 하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보아서 이듬해의 풍년과 흉년을 미리 점친다고 한다. 조선 태종 때부터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지도에서 향교의 우측에 보이는 서원은 飛鳳서원이다.1596년(선조 29)에 세워졌고, 1706년(숙종 32)에 사액을 받았다. 부의 남쪽에 위치한 羅津浦는 公私 船舶이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서울에 이르는 수상교통의 요지이었다.(金在完)

  • 옹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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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옹진부는 해방 전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 동남면, 북면, 서면, 용천면, 가천면, 백령면, 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현재 황해남도 옹진군 전 지역과 태탄군 일부, 남한의 옹진군 백령면과 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에서 동쪽으로 2리에 위치한 花山으로 바로 동문 밖에 있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돌로 쌓은 성이다. 읍성 외곽에는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안에는 동헌, 객사, 창, 옥 등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읍치 좌측에 所江鎭이 보인다. 본래 수군첨절제사가 있었다. 숙종45년(1719) 도호부 승격와 함께 옹진도호부사가 황해도 수군절도사를 겸직하면서 소강진은 황해수영의 行營이 되었다. 속읍은 해주·풍천·장연·연안·안악·배천·은률·장련·강령 등이었고, 속진은 백령도·초도·등산·용매·허사·오차·조니 등이었다. 본영 및 속읍·속진에 각종 戰船이 108척이 있었다. 소강진에도 옹진부와는 별도로 동헌과 객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行營城이 둘러싸고 있었다.설명란에는 소속과 군종을 달리하는 군사들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전투선 종류에서 天字兵船, 小猛船, 居刀船, 挾船 등 매우 다양함을 보여 주고 있다.(金在完)

  • 은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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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은율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은율면, 남부면, 북부면, 서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은율현은 은율군 남부지역과 송화군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漢川이 구월산에서 발원하여 남하하면서 여러 작은 물을 합치고, 서쪽으로 꺾이고, 다시 한번 꺾이어 북쪽으로 흘러가서 서해에 이른다. 읍성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에서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乾止峯이 있고, 이 곳에는 건지산 봉수대가 있고, 그 남쪽에 건지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九月山의 산허리에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高腰淵이 있는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형상이 가마 같으며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용이 있다 이르며, 가물 때 비를 빌면 응한다고 한다. 구월산을 감싸안은 구월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1만 4천 3백 86척이었다. 성의 모양이 큰 배 같고, 남쪽북쪽에는 길이 없으며 동쪽 서쪽에만 나무다리 길이 있다. 지도에서 보는 같이 성안에는 각 고을 명칭의 창고가 있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서원은 鳳巖書院이다. 1613년(광해군 5)에 士人 鄭希男 등이 현 남쪽 20리 院坪에 창건하였다. 1701년(숙종 27)에 士人 鄭璉 등이 현 위치에 옮겨 세웠다. 김굉필과 이 이를 배향하였다. 읍치에 있는 觀稼樓는 객사 동쪽에 있는데, 1757년(영조 33)에 重修하였다.(金在完)

  • 장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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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련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일도면, 이도면, 북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은율군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황해남도 은율군 장련리 일대이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진 鳳凰山이다. 이 산의 기슭에는 산의 명칭을 딴 봉황사라는 절이 위치하고 있다. 남쪽에 보이는 구월산 중턱에는 지도에는 없지만 石潭이 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神龍이 돌을 파서 못을 만들었다 하는데, 네 모가 방정하고 넓이가 6척이며 물깊이를 알 수 없으며, 가물거나 장마져도 언제나 한결같았다고 한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鳳陽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세워졌고, 이듬해사액을 받았다. 고을 북쪽에 보이는 松串壇은 큰 냇물로서 小祀에 실렸으며, 봄·가을로 香祝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드린다. 그 남쪽에 齋室과 高井寺가 위치하고 있는데, 사당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읍치 북쪽에 大津關이 위치하고 있다. 1523년(중종 18)에 설치하였는데, 본도 사람으로 權管을 임명하고 水軍을 두어서, 장삿배들이 사사로이 중국에 왕래 연락하는 것을 금하였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今卜山烽燧는 남쪽으로 안악군 감적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平安道 三和縣 新寧江에 응한다.(金在完)

  • 장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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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장연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상 황해도 장연군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장연군, 용연군, 태탄군 서부,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 대청면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과 大東地志에는 돌로 쌓은 읍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지도에는 성곽이 없다고 되어 있다. 위에 언급한 문헌들이 衙舍 남쪽의 古邑城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지도 우측 하단에 보이는 고읍성은 고려 때 읍치에 있었던 성이다. 장산곶 부근에 보이는 祭堂(長山串祠)은 祀典에 大川으로 小祀에 실려 있는데,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드렸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龍井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끌어서 논에 물대는데 가물면 비를 빈다. 용정 우측에 보이는 龍岩書院은 1709년(숙종 35)에 세워졌고, 1721년(경종 1)에 사액을 받았다. 몽금도 부근의 金沙寺는 해안 흰 모래가 금과 같다 해서 이름이 붙었다. 부근은 몽금포 해수욕장과 몽금포 타령으로 이름이 나 있다.(金在完)

  • 재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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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북율면, 남율면, 서호면, 삼강면, 청천면, 은룡면, 장수면, 신원면, 상성면, 하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재령군 전체, 신원군 북부, 황해북도 은파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1519년(중종 14)에 長壽山 남쪽 5리에 있던 읍치를 劍山 남쪽 1리 지점으로 옮겼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에서 남쪽으로 1리 떨어진 검산이다. 진산 남쪽 기슭에 衙舍, 客舍, 서쪽에 社稷, 監獄, 鍊堂, 동쪽에 鄕校, 城隍堂, 訓練, 本倉이 배치되어 있다. 지도에서 보이는 산성은 읍치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長壽山城이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762년(신라 경덕왕 21)에 축성된 古山城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개축하였다. 내성은 주위가 4,008步, 외성은 둘레가 5,584步이고, 석벽이 험준하여 나는 새도 넘지 못한다고 한다. 장수산성 남쪽에 위치한 鐵峴鎭에서는 훈련도감에서 別將을 보내 鍊鐵을 본영에 수납케 한다. 鎭軍 250명이 매 인당 철 50근을 모아 본영에 납부하고, 만일 긴급한 일이 있으면 별장이 진군을 거느리고 장수산성에 들어가 지킨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景賢書院은 1655년(효종 6)에 세워지고, 1659년(효종 10)에 사액을 받았다.(金在完)

  • 토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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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兎山縣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황해도 금천군 토산면, 서천면, 합탄면, 외류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북도 토산군 대부분 지역, 강원도 철원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토산군 토산면 월성리 일대에 있었다. 토산현은 고려 현종조에 長湍縣에 속했다가, 후에 옮겨서 開城에 속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감무를 현감으로 하고 황해도에 예속시켰다. 진산은 토산으로 읍명과 일치한다. <大東輿地圖>에서는 북쪽 鶴峯山에서 내려 온 大幹에서 나온 산 가지가 읍치 북쪽의 松耳山에 이르러 멈춘 형국으로 나타나 있다. 산들이 높이 솟아 읍치를 사면으로 둘러싼 형세이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東大川은 東津이라고도 불리는데, 삭령과 통하는 나루터이다. 토산현의 미곡이 동진으로 운반되어 모아진 다음, 선적되어 삭령 구항포와 연천 징파도를 경유하여 서울까지 운반되었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龍馬淵과 龍淵은 하천 유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하천에 의하여 형성된 호수로 농업 관개 용수 공급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읍치 우측에 보이는 三聖臺는 읍치에서 동쪽으로 2리 떨어져 있는데, 절벽 스스로 3개의 臺를 이루었고, 절벽이 강에 임해 있고, 臺 위에 작은 정자가 있었다.(金在完)

  • 평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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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평산군, 남천읍, 평산면, 금암면, 서봉면, 신암면, 인산면, 문무면, 안성면, 고지면, 세곡면, 적암면, 마산면, 용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산군의 대부분 지역, 린산군 대부분 지역, 봉천군 일부지역, 서흥군 일부지역이다.府의 서쪽 60리에 위치한 滅惡山이 이 고을의 진산이다. 지도에는 매우 웅장하게 표현되어 있다. 평산부는 읍치 서쪽에 예성강이 흘러 수운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고 있다. 평산부의 전세곡은 지도상의 금암면 猪灘에서 조운선에 실려 서울로 운반되었다. 지도에서 예성강 서안에 위치한 산성은 太白山城이다. 이 산성은 의주대로변에 위치하여 적을 막을 수 있고, 또한 예성강을 거슬러 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고, 아울러 조운선을 보호할 수 있는 유리한 곳에 입지하고 있다. 762년(신라 경덕왕 21)에 쌓았으며 후에 城隍山城이라 일컬었다. 조선조 영조 때 터를 넓히고 고쳐 쌓았다. 세곡면에 보이는 東陽書院은 1650년(효종 1)에 세워지고, 1687년(숙종 13)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동양서원 부근에 위치한 "溫泉은 돌난간으로 되어 있는 浴室을 갖추고 있는데, 물이 몹시 뜨겁다"고 한다. 고려 문종 이후 여러 왕들이 이 곳으로 행차하여 목욕을 즐겼다고 전한다. 안성면에 보이는  秀館은 중국 사신이 머무르던 곳이다.

  • 풍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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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년(태종 13)에 처음으로 풍천군 지명이 생겼고, 1469년(예종 1)에 중궁의 外祖의 고을이였기 때문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옛 풍천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운유면, 율리면, 상리면, 하리면, 천동면, 진봉면 일대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남도 과일군과 대략 일치한다. 북의 북쪽에 위치한 瑞 峰이 이 고을의 진산 겸 주산이다. 읍성은 둥근 형태로 돌로 쌓았다. 성의 동·서·북쪽 3면으로 또 무너진 성이 있었다. 읍성에 있는 皇華門은 물길로 중국에 조회를 갈 적에 뗏목이 경유하던 곳이므로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이 곳은 중국과 바닷길로 연결되는 교통 요충지로서 관련 고적이 많다. 장연현과 경계에 있는 唐館神壇은 옛날 중국 가는 사신이 배 타던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곳은 해안 방어 상 중요한 요충지이었다. 그래서 해안을 따라 방패선이 정박하는 許沙鎭, 椒島鎭 등과 당시에는 없어진 席島鎭, 業淸江鎭, 貴林串鎭이 위치하였다. 그리고 인조 때 左營이 이 곳에 설치되어 풍천·장연·은률·장련·문화·송화·강령 등을 관할하였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西海神壇은 古立所 臨海峰에 있는데,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드렸던 곳이다.(金在完)

  • 해서일로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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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西一路嶺隘圖>는 <平安一路嶺隘圖>와 함께 두 도만 있고 기타 도에는 없는 지도이다. 그 만큼 한양과 연경을 잇는 도로가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지도는 서울-의주 간 대로(제 1대로)가 통과하는 황해도 북부지역을 나타낸 것이다. 부·목·군·현을 노란색 원으로, 도로변에 있는 鎭을 파란색의 직사각형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正方山城, 長壽山城, 首陽山城을 표시하고, 각 산성에서 정방산성까지 거리, 도로의 險夷정도, 도로의 상태, 도로 주변 토지의 비옥도 등을 붉은 색 도로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성을 방어하는데 약점을 기록하고 있다. 도로가 통과하는 고개가 소로인지 대로인지 그리고 사용 가능한 도로인지 불가능한 도로인지 자세히 기록하고, 주요 고개 가운데 공허하여 우려되는 것은 사찰을 세울 것을 제안하고 있다.(金在完)

  • 해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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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목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해주시와 벽성군을 합친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해주시 동부를 제외한전 지역, 벽성군 전 지역, 강령군 동부, 태탄군 동부, 신천군 남서부, 신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佛足山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牛耳山을 거쳐 읍치 북쪽의 龍首峯에 이르고, 다른 하나는 首陽山(899m)에 이른다. 읍치 북쪽의 산줄기를 실감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읍성은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曲城이 잘 나타나 있다.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축성하고, 1555년(명종 10)과 1591년(선조 24)에 중수하고, 1747년(영조 23)에 개축하였다. 靑丹道는 7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인데, 특이하게 驛衙建物이 읍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읍치 동북쪽에 위치한 首陽山城은 762년(신라 경덕왕 21) 축성하였고, 1676년(숙종 2) 개축하였는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3천 9백 50보이다. 성안에 은적사가 있고, 밖에는 경치 좋은 수양폭포가 있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文憲書院은 1549년(명종 4)에 세워지고, 이듬해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읍치 북쪽 牛耳山에 위치한 牛耳山神祠는 祀典 小祀에 실려 있는데, 봄가을로 향과 축을 내려보내서 제사지낸다. 北嵩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神光寺는 1342년(고려 충헤왕 3)에 원 황제가 사람을 파견하여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명한 사찰이다.(金在完)

  • 황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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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목은 해주목과 함께 목사가 주재하는 황해도의 중요 고을로서 중국과 연결되는 의주대로가 통과하는 곳에 위치한 군사상 요충지이었다. 이는 新增東國輿地勝覽 形勝條에 황주목을 "고을 서북쪽에 대동강이 있고, 동남쪽에 절령이 있으며, 극성이 있는데 모두 나라의 요새지다"라고 표현한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 황주목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송림시, 황주읍, 인교면, 구락면, 도치면, 주남면, 천주면, 흑교면, 청수면, 구성면, 영풍면, 청룡면, 삼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지금의 황해북도 송림시, 황주군, 연탄군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다른 고을처럼 행정구역이 面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고, 坊으로 표시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고을의 鎭山은 동쪽 4리에 있는 碧花山이다. 지도에 보이는 邑城은 石城으로,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안에는 二衙와 客舍 등 관아 건물, 兵營, 中營, 營軍器庫, 營繕庫, 鍊武亭 등 군사시설, 司倉, 氷庫, 연못 3개 등 시설이 위치하고 있었다. 정방산성의 남쪽에 보이는 ?壇은 황해도에 전염병이 많이 돌아 백성들이 많이 죽자, 조정에서 매년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였던 곳이다. 우측 하단에 보이는 정방산성은 1636년(인조 14)에 쌓은 성으로 밖은 평탄하고, 안은 험준하고, 뒤에는 준령이 있고, 앞에는 큰 들을 접하고 있다. 또한 방어를 위한 대흥사와 안국사 절이 위치하고 있다.

  • 황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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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황해도는 현재 북한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북도와 황해남도, 개성직할시 일부, 남한의 백령도 등 서해 4개 섬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대동강 수계와 예성강 수계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표시하여 분수계의 파악이 용이하게 하였다. 황해도의 행정조직은 6府), 2牧(海州牧, 黃州牧), 7郡, 8縣 등 23개 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총괄하는 黃海道監營은 해주에 있었다. 巡營은 해주목, 兵營은 황주목, 水營은 옹진부에 각각 있었다. 지도에는 해주목과 황주목은 읍성으로 둘러싸인 붉은 원으로, 기타 부·군·현은 흰색의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특히 함경도와 경기도의 부·목·군·현은 붉은 색 원으로, 평안도와 강원도의 부·목·군·현은 노란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어 황해도의 군현 파악에 유리하다. 의주대로는 붉은 색의 굵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대로가 지나가는 곳곳에 산성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주요 軍鎭은 주황색으로, 역참은 노란색의 직사각형으로 표시하고 있다. 황해도의 驛站으로는 金郊道(9驛), 麒麟道(12驛), 靑丹道(8驛) 총 29개 역이 있었다.(金在完)

  • 황해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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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황해도는 현재 북한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북도와 황해남도, 개성직할시 일부, 남한의 백령도 등 서해 4개 섬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대동강 수계와 예성강 수계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표시하여 분수계의 파악이 용이하게 하였다. 황해도의 행정조직은 6府), 2牧(海州牧, 黃州牧), 7郡, 8縣 등 23개 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총괄하는 黃海道監營은 해주에 있었다. 巡營은 해주목, 兵營은 황주목, 水營은 옹진부에 각각 있었다. 지도에는 해주목과 황주목은 읍성으로 둘러싸인 붉은 원으로, 기타 부·군·현은 흰색의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특히 함경도와 경기도의 부·목·군·현은 붉은 색 원으로, 평안도와 강원도의 부·목·군·현은 노란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어 황해도의 군현 파악에 유리하다. 의주대로는 붉은 색의 굵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대로가 지나가는 곳곳에 산성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주요 軍鎭은 주황색으로, 역참은 노란색의 직사각형으로 표시하고 있다. 황해도의 驛站으로는 金郊道(9驛), 麒麟道(12驛), 靑丹道(8驛) 총 29개 역이 있었다.(金在完)

  • 가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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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 때에 加平이 되었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에 강원도로부터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1883년(고종 20)에 다시 강원도에 이속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경기도에 이속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가평군의 가평읍, 북면, 상면, 하면, 외서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설악면은 양근땅에 속하므로 제외된다. 가평읍 읍내리가 郡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지도에 나타난 朝宗面은 원래 朝宗縣이 있었던 곳으로 1396년(태조 5)에 최종적으로 加平에 편입되었으며 현재의 가평군 상면, 하면에 해당된다. 조종현의 읍치는 가평군 하면 현리였다.  지도 왼쪽의 강은 북한강이며 昭陽江, 洪川江을 비롯하여 靑平川, 潛谷川, 朝宗川, 五木川, 嘉平川, 桂良川, 巨林川 등의 하천을 상세히 그리고 이름을 붙였다. 북한강을 지도의 왼쪽에 배치한 결과 이 지도는 서쪽이 위가 되게 된다. 산줄기와 물줄기를 邑治를 둘러싸게 그렸으며 풍수사상이 지도제작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邑治의 坐向을 지도안에 기록하였다. 連洞驛(상면 연하리 역말), 甘泉驛, 狄栗院 林子院 등의 역원이 이 지역에 존재하였으며 大路는 서울과 春川, 狼川(강원도 화천군)을 연결하는 길이다. 懸燈寺, 兩道馬寺, 龍泉寺 등의 사찰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으며 花岳山(華岳山)은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북한강의 지류인 朝宗川 근처에 縣倉(하면 현리)이 표시되어 있는데 옛 朝宗縣의 창고이다. 이 밖에 김육을 배향한 潛谷書院이 지도에 나타난다.(이현군)

  • 가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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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군은 일제시대의 박천군 가산면, 용계면, 청룡면, 서면, 양가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운전군의 장수탄강 동북쪽 일대이다. 읍치는 고을의 진산 鳳頭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쌓여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봉두산에는 가산의 옛터임을 표시해주는 古嘉州란 글자와 성곽의 표시가 있으며, 그 옆에는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上菴, 中菴 등의 암자가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 그 아래의 曉星嶺은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곳으로서 사면이 둘러 쌓여 있는 要衝地라고 한다. 하천의 표시에서는 읍치 동남쪽에 있는大定江이 다른 하천에 비해 월등히 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구별하지 않았다. 아래의 여백 주기에 강물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적어 놓았다. 주기 끝 부분에는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남쪽으로 도망갈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건널 수 있어 적의 추격을 뿌릴 칠 수 있었다는 ≪三國史記≫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하지만 이 때 건넌 강이 大定江이라는 기록은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부정되고 있다. 대정강변에 있는 마을들은 이 고을에 속해 있는 땅이며, 古城鎭은 博川에 속해 있는 곳이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논이 밭보다 약간 많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간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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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간성현이 되었으며 고성, 강릉과 통합되고 분리되는 과정을 겪다가 1914년 이후 고성군에 포함되었다. 현재의 강원도 속초시 북쪽 일부(영랑호 부근)와 고성군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고성군 간성읍의 중심지가 과거의 邑治에 해당한다. 북쪽으로 烈山?과 縣內面이 나타나는데 여기서의 縣은 간성이 아니라 과거 이 곳에 있었던 烈山縣을 가리킨다.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의 열산이 烈山 邑治였다.간성의 邑治는 邑城의 형태로 그렸으며 그 안에 客舍, 倉, 衙舍 등의관청과  月樓, 蓮亭 등의 정자를 그렸다. 鄕校는 읍성의 서쪽 지금의 간성읍 교동리에 있었다. 군의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이 막혀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해 있다. 백두대간을 지도에서는 간략하게 일직선의 형태로 표시하면서 험준함을 나타나기 위하여 산들을 중첩하여 그리고 있다. 珍富嶺, 屹里嶺, 石破嶺, 彌恃嶺을 넘어 인제로 통하는 길은 험준하며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高城, 襄陽으로 통하는 길은 평탄하다. 明波驛, 雲根驛, 竹泡驛, 元岩驛, 淸澗驛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자산천, 초계천, 북천, 남천 등의 하천이 서쪽에서 나와 동해로 들어가는데 縣의 남쪽에 南川이 적혀 있다. 해안에는 바다였다가 해수에 의한 퇴적작용으로 潟湖가 된 廣湖, 永郞湖 등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해안이었다는 사실은 松池浦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육지에 형성된 호수에 浦자가 붙어있다. 해안으로는 花津浦 등 포구가 발달하였으며 그 옆으로는 倉庫가 그려져 있다. 해안의 경치가 빼어나 仙遊亭, 淸澗亭 등의 정자가 있었는데 토성면 청간리에 있는 청간정은 關東八景의 하나에 속한다. 禾岩寺(토성면 신평리)는 769년(신라 惠恭王 5)에 세워진 것이며 乾鳳寺(거진읍 냉천리)는 520년(신라 法興王 7)에 세워졌으며 圓角寺, 西鳳寺 등으로 불리다가 1358년(고려 恭愍王 7)에 懶翁和尙이 중수하고 乾鳳寺라 고쳤다.(이현군)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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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개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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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령현은 본래 甘文小國이었다. 개령의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 생긴 것이다. 감문소국의 흔적이 ''甘川''과 ''甘文山'' 등의 하천과 산의 이름에 남아 있다. 개령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개령읍, 남면, 농소면, 감문면 동부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개령은 네 고을의 중심지(상주, 금산, 선산, 성주)와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城隍山이다. 북쪽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성황산에서 멈추고, 읍치를 양팔로 감싸안은 형세로 전형적인 명당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성황산에는 봉수대와 신라 법흥왕 때 阿道가 창건했다는 鷄林寺가 위치하고 있다. 관아 남쪽 감천 변에 자리잡은 獨靑亭과 風詠亭은 절승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이다. 감천 건너편에 있는 德林書院은 1669년(현종 10)에 세워져 1697년(숙종 23)에 사액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김종직, 정 붕, 정경세를 함께 배향하였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감천에 아홉 군데의 보를 막아서 논에 물을 대어서 水利가 많다고 한다.(金在完)

  • 결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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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현은 현재 광천읍 동북쪽(과거에 홍주군 궁경면 일부)과 남쪽 일부(보령현 청소면 일부)를 제외한 전체, 결성면, 은하면, 서부면, 구항면 일대를 포함한다. 읍치는 지금의 결성면 읍내리 부근이었는데, 현재도 결성성곽과 향교 등 옛날 읍치 흔적이 남아 있다. 현 중심지가 남쪽으로 극히 치우쳐 있는데, 이는 방어와 수운 조건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성고읍은 읍치 북쪽 청룡산 고산사 부근, 광천의 상류에 있었다. 북서쪽 靑龍山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진산 枰山 아래에서 穴을 이루었다. 읍성은 돌로 쌓은 성이었다. 본현 서쪽에 위치한 海倉은 石串浦에 있었는데, 석곶포는 결성현 세곡을 싣은 조운선의 출발지이었다. 지도의 오른쪽에 廣川面과 廣川院이 보인다. 新增東國與地勝覽에 따르면 이 지역을 흐르는 하천인 광천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홍주(지금의 홍성) 烏史里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오서산에서 나와 같이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조수의 영향으로 수심이 깊어 지도의 廣川院(현재 광천읍 옹암리 부근)까지 배가 들어 와서 포구가 호황을 누렸다. 이 지역의 ''광천새우젓''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다.(金在完)

  • 강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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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강진군과 완도군 서쪽 섬 지역으로서 읍치는 강진읍 서성리, 동성리, 남성리 일대에 있었다. 강진현은 1417년(태종 17) 道康縣과 耽津縣을 합해 만들어졌는데 탐진현의 치소가 읍치가 되었고 도강현의 치소에는 兵營이 들어섰다. 강진현의 본래 모습은 탐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이 안쪽으로 쑥 들어온 형태이지만 竹島 위쪽 부분에 매우 작게 그려져 있다. 월출산 남쪽의 無爲寺는 신라말 도선이 처음 세웠다고 하며, 읍치 남서쪽의 萬德寺도 신라 때 세운 절로서 지금은 동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白蓮寺로 알려져 있다. 읍치 동북쪽의 兵營은 종2품관인 全羅道兵馬節度使가 파견된 곳으로 지금의 강진읍 병영면에 해당하며, 그 오른쪽의 修仁寺가 있는 산성은고려말 왜구의 침입 때 주변 군현의 사람들이 난리를 피했던 修因山城이다. 지도의 남쪽에는 성이 있었던 加里浦鎭, 馬島眞, 성이 없었던 古今島鎭, 新智島鎭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완도는 신라 때 장보고의 청해진이 세워졌던 곳이고 조선 초에는 완도 밑의 靑山島에도 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금도진 옆의 關王廟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都督으로 파견되었던 陳璘이 세운 것으로 관우, 진린, 鄧子龍 등의 중국인과 이순신이 배향되어 있어 임진왜란의 여파를 짐작하게 한다.(이기봉)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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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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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으로 강화 본섬과 주변의 섬들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城이 위치한 중심지는 지금의 강화읍내가 된다. 강화도는 중심지에 內城이 있고 해안을 따라 外城이 형성된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그 밖에 鼎足山과 文殊山, 喬桐의 華盖山에는 山城이 있었다. 강화도는 남북으로 긴 형태이므로 이 지도에서는 위를 동쪽으로 하여 그리고 있다. 섬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에서 육로만 표시하고 海路는 표시하지 않고 있다. 고려초에 江華라 불리기 시작했으며 1232년(고려 고종 19)에 몽고의 침입으로 이곳으로 遷都함으로써 江都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1627년(인조 5)에 후금의 침입을 피하여 이곳으로 천도하기도 하였다. 이곳에 鎭撫使를 둔 것은 1678년(숙종 4)이후이다. 몽고와 후금의 침입,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구한말 일본의 침입 등 많은 역사적 전란을 겪었던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성을 가지는 지역이다. 동쪽 해안을 따라 外城이 쌓여졌고 山城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성안에는 과거 고려 궁궐(강화읍 관청리)이 있었으며 이 지도에서 통치와 관련된 많은 건물들이 성안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禁衛營, 訓練都監 등이 설치되었으며 해안을 따라 月串僉使鎭, 濟物萬戶鎭, 龍津萬戶鎭, 廣城別將堡, 德津萬戶鎭, 草芝萬戶鎭, 船頭別將堡, 長串別將堡, 井浦別將堡, 寅火萬戶鎭, 鐵串別將堡, 昇天別將堡, 文殊別將鎭, 德浦僉使鎭 등의 鎭堡와 각 진보에 소속된 墩臺가 지도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아울러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진 여러 樓와 倉庫, 水門, 暗門, 烽臺, 烟臺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요한 나루로는 甲串津(강화읍 갑곶리), 廣城津(불은면 덕성리), 寅火津(양사면 인화리), 昇天津(송해면 당산리) 등이 있었다. 위치와 방향에 따라 초지진과 광성진은 通津으로, 인화진은 喬桐으로, 승천진은 豊德(황해도 개평군)으로 연결되는 나루가 된다. 鼎足山城에는 병인양요 때까지 史庫(길상면 온수리)가 있었다. 傳燈寺(眞宗寺)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처음 창건되었으며 고려 충렬왕의 원비가 옥등을 바친 이후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忠烈祠(선원면 선행리)는 仙源 金尙容의 집터에 세워진 사당이다. 摩尼山 정상에는 塹城壇이 있었다.(이현군)

  • 강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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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계부는 일제시대의 강계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강계시, 만포시, 시중군, 장강군, 성간군, 전천군, 룡림군 일대이다. 이 고을의 옛 이름은 禿魯江이었다고 하며, 1361년(고려 공민왕 10)에 萬戶府를 두면서 우리 영토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세조 때 지도의 위쪽에 있는 四郡을 폐하고 주민을 이 고을로 옮기면서 평안도 최북단의 고을이 되었다. 고을 아래쪽을 흐르는 禿魯江은 남쪽에서 발원하여 읍치 앞에서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꿈에도 불구하고 직선으로 그려져 있다. 고을 위쪽에 있는 산줄기도 고을 동쪽에 있는 것이다. 압록강의 방향은 하류를 제외하면 대체로 실제와 비슷하게 표현되었다. 최전방에 있는 고을의 성격에 맞도록 압록강변과 산줄기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는 많은 鎭과 烽燧, 院, 도로의 표시가 간결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읍성과 滿浦鎭이 특별히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지도 오른쪽의 狄踰岺은 남쪽 희천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고, 왼쪽의 麻田嶺과 梨嶺은 四郡 지역으로부터 적이 쳐들어 올 경우에 통과해야 하는 要衝地로서 모두 關門이 설치되어 있다. 압록강에 쓰여있는 八十六把에서 一百八巴까지는 모두 강계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강계 땅에 있는 把守를 순서대로 써놓은 것이다. 한편 만포진 건너편에 표시된 五國城은 金나라(1115-1234)의 초기 도읍지였다고 하며 그 옆에 있다는 황제묘도 함께 그려져 있다. 지금 만포진 반대편의 중국 땅에는 고구려의 수도인 國內城이 있던 곳이다.(이기봉)

  • 갑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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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산부는 함경남도 북부 고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서로는 삼수, 남으로는 단천 북청, 북으로는 혜산진과 접하고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갑산군 장평면, 산남면, 동인면, 보혜면, 운흥면, 진동면 그리고 풍산군 이인면, 웅이면, 천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량강도 갑산군과 운흥군, 혜산시, 보천군, 삼지연군 등에 속해 있다. 지도는 녹색 당채를 사용하여 산지를 채색하였고 산줄기의 연결 관계도 비교적 소상하게 기재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비롯한 하천도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정계비 아래쪽에서 흘러나가는 물줄기를 土門江源이라 하고 두만강과 이어 그렸다. 읍치에서 주변 지역에 이르는 도로망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봉수도 비교적 자세히 표시되었다. 압록강 건너편 중국 지역의 지명도 상세히 기입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 石茸烽臺 부근에는 무쇠를 캐던 水鐵店도 보이고 있다.(노혜정)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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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거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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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부는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군과 일치하였고, 읍치는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있었다. 옛 치소는 지도에 보이는 고현성이 위치한 신현읍 고현리 일대이었다. 거제의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사용되었다. 고려 현종 때 현이 설치되었는데, 1664년(현종 5)에  지도상의 위치로 치소를 옮기고, 1711년(숙종 37)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계룡산이다. 향교 위쪽에 있는 서원은 盤谷書院으로 1704년(숙종 30)에 세워져, 송시열, 김진규, 김창집을 배향하였는데, 사액은 받지 못했다. 읍치 왼쪽에 보이는 岐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석성으로 둘레가 1,002척, 높이가 9척이 되며, 조선 초기에 고려의 왕족을 귀양보냈던 곳이라 한다. 기성 위쪽에 보이는 沙等城은 석성으로 둘레가 1,809척, 높이가 13척이 되며 오래되어 허물어져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기성과 사등성 사이에 위치한 견내량진은 거제에서 고성으로 가는 중요한 나루터이다. 海防을 위하여 해안지역에 영등포진, 옥포진, 조라포진, 지세포진, 율포진이 설치되어 있다.(金在完)

  • 공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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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목은 지금의 공주시, 유구읍, 계룡면, 이인면, 우성면, 탄천면, 반포면, 장기면, 의당면, 정안면, 사곡면, 대전직할시 유성 부근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조선시대의 관아가 자리했던 금강 변의 公山城 부근의 중동 지역일대이었다. 공주목은 18세기 중엽 26개면을 거느리는 大郡이었고, 牧使가 주재하는 충청도의 4목(충주목, 청주목, 홍주목, 공주목) 중의 하나이었다. 공주는 천안에서 차령을 넘어 호남지방으로 가는 도로와 금강이 만나는 수륙교통의 요지로서 선조 31년(1598)에는 충주에서 충청감영이 옮겨 와 더욱 발달하였다. 新增東國與地勝覽의 形勝條에 ''웅천(공주)은 바다에 연하였고, 계룡산은 하늘을 들어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는 ''계룡산이 진산이 되고, 웅진이 襟帶를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공주는 산과 강이 어우러진 고을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 보이는 雙樹山城은 일명 公山城이라고 하는데, 북쪽 2리에 있고, 523년(백제 성왕 1)에 웅진성으로 수리하였던 것이다.  1603년(선조 36)에 수축하였다. 공주지방의 사찰로는 마곡사가 또한 유명하다. 마곡사는 계룡산의 갑사·동학사 등 충남의 70여 개 말사를 거느린 큰 사찰이다. 유구는 차령산맥 산간지역의 중심지로서 鄭鑑錄의 十勝之地 중 한 곳이다.(金在完)

  • 고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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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군은 정읍시 고부면, 영원면, 소성면, 덕천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의 백산면, 고창군의 부안면 북부 일대이며 읍치는고부면 고부리에 있었다. 군은 서쪽으로는 고부천이, 동쪽으로는 정읍천이 남북으로 흐르다 동진강을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며, 지세는 남동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다. 지도 왼쪽 밑에 보이는 富安面은 고부군의 월경지로서 지금의 고창군 부안면에 해당하며 원래는 富安鄕이었다.읍치 동쪽의  忠祠는 1632년(인조 10)에 세워졌고 1657년(효종 8)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임진왜란 때 동래전투에서 순절한 宋象賢,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국한 申浩 및 金俊등이 배향되었다. 읍치는 동학농민전쟁이 처음으로 발생한 곳으로 남쪽으로부터 뻗어 올라온 산줄기의 서북 기슭에 의지한 성곽과 함께 客舍, 衙舍, 寧民堂, 琴鶴樓, 邑倉 등의 주요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읍치가 확대되어 있고, 산줄기와 물줄기를 강조하여 다른 부분은 소략하게 다루고 있다. 기타 다른 지도에 많이 표시되는 역, 원, 절이 하나도 그려져 있지 않는 특징이 있다.(이기봉)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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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강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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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으로 강화 본섬과 주변의 섬들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城이 위치한 중심지는 지금의 강화읍내가 된다. 강화도는 중심지에 內城이 있고 해안을 따라 外城이 형성된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그 밖에 鼎足山과 文殊山, 喬桐의 華盖山에는 山城이 있었다. 강화도는 남북으로 긴 형태이므로 이 지도에서는 위를 동쪽으로 하여 그리고 있다. 섬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에서 육로만 표시하고 海路는 표시하지 않고 있다. 고려초에 江華라 불리기 시작했으며 1232년(고려 고종 19)에 몽고의 침입으로 이곳으로 遷都함으로써 江都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1627년(인조 5)에 후금의 침입을 피하여 이곳으로 천도하기도 하였다. 이곳에 鎭撫使를 둔 것은 1678년(숙종 4)이후이다. 몽고와 후금의 침입,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구한말 일본의 침입 등 많은 역사적 전란을 겪었던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성을 가지는 지역이다. 동쪽 해안을 따라 外城이 쌓여졌고 山城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성안에는 과거 고려 궁궐(강화읍 관청리)이 있었으며 이 지도에서 통치와 관련된 많은 건물들이 성안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禁衛營, 訓練都監 등이 설치되었으며 해안을 따라 月串僉使鎭, 濟物萬戶鎭, 龍津萬戶鎭, 廣城別將堡, 德津萬戶鎭, 草芝萬戶鎭, 船頭別將堡, 長串別將堡, 井浦別將堡, 寅火萬戶鎭, 鐵串別將堡, 昇天別將堡, 文殊別將鎭, 德浦僉使鎭 등의 鎭堡와 각 진보에 소속된 墩臺가 지도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아울러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진 여러 樓와 倉庫, 水門, 暗門, 烽臺, 烟臺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요한 나루로는 甲串津(강화읍 갑곶리), 廣城津(불은면 덕성리), 寅火津(양사면 인화리), 昇天津(송해면 당산리) 등이 있었다. 위치와 방향에 따라 초지진과 광성진은 通津으로, 인화진은 喬桐으로, 승천진은 豊德(황해도 개평군)으로 연결되는 나루가 된다. 鼎足山城에는 병인양요 때까지 史庫(길상면 온수리)가 있었다. 傳燈寺(眞宗寺)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처음 창건되었으며 고려 충렬왕의 원비가 옥등을 바친 이후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忠烈祠(선원면 선행리)는 仙源 金尙容의 집터에 세워진 사당이다. 摩尼山 정상에는 塹城壇이 있었다.(이현군)

  • 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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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현은 일제시대의 삼등현을 제외한 강동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양특별시 승호구역과 강동군 북부 일대이다. 이 고을은 1136년(고려 인종 14) 西京에 속했던 仍乙舍鄕, 班石村, 朴達串村, 馬灘村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고을의 서쪽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대동강 본류이며, 북쪽 오른쪽에서 합류하는 것이 가장 큰 지류인 沸流江이고, 지도 아래쪽 오른쪽에서 합류하는 것이 지금 南江으로 불리는 能城江이다. 읍치는 고을의 진산 大朴山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남쪽으로 水晶川이 흘러 대동강에 합류한다. 대동강변에는 閱波亭 등의 정자와 암석이 있어 뛰어난 경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정천과 대동강이 합류하는 古城은 옛 강동현의 읍성으로서 몽고군에게 쫓긴 거란족 5만여명이 高麗·蒙古·東眞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강동성 싸움(1219)으로 유명하다. 이 때 포로가 된 5만여명 대부분은 몽고로 끌려갔지만 약 700명 정도는 고려에 남겨지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각 고을에 나누어 살게 했는데 그곳을 契丹場(글안장으로 읽는다)으로 불렀다 한다. 한편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읍치 서쪽 3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속설에 檀君墓라 전한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이 북한에서 요즈음 발굴했다는 단군릉이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논은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이기봉)

  • 강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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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穢國의 땅이었으며 639년(신라 선덕여왕 6)에 小京을 삼아 北濱京이라 하였으며 936년(고려 태조 19)에 東原京이라 하였다. 현재의 강원도 강릉시와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군의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도암면, 대화면, 방림면, 홍천군의 내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강릉시 용강동, 교동, 임당동, 명주동 일대가 중심지가 된다. 성곽 안에 客舍, 衙舍, 倉이 있으며 성밖에 鄕校가 있다. 성곽은 현재 남문동 등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이 이 지도의 가운데를 지나며 험준함을 표시하기 위하여 산을 중첩하여 그렸으며 雪岳山에서 이어져 내려왔음을 표시하고 있다. 백두대간은 이 지역의 分水界가 되기도 한다. 府의 앞을 흐르는 하천은 남대천이며 동해로 들어간다. 동해안의 호수(香湖, 鏡湖, 楓湖)는 海水에 의한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潟湖이다. 鏡湖는 鏡浦湖로 그 앞의 정자인 鏡浦臺와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五臺山의 月精寺(평창군 진부면 동산리)는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보았으나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한 노승이 梵戒를 가르쳐주고 舍利를 주면서 봉안할 곳을 찾으라 하니 이곳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월정사 근처의 史庫는 1606년(선조 39)에 세운 것으로 朝鮮王朝實錄과 주요문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일제시대에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지고 건물은 한국전쟁때 불타고 그 터만 남았다. 서원으로는 松潭書院, 五峰書院이 있었다. 도로는 大倉驛, 安仁驛을 통해 남북의 삼척, 양양으로 통하는 길은 편리하였으나, 丘山驛, 橫溪驛, 木界驛, 高端驛, 大和驛, 芳林驛, 雲交驛 등을 거쳐 白頭大幹을 통과하는 길은 험준하였다.(이현군)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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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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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도호부는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가북면, 가조면, 고제면, 남상면(춘전리와 진목리 제외), 남하면, 웅양면, 주상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거창읍 상림리와 중앙리 일대에 있었다. 군 북쪽에 위치한 乾興山이 鎭山이다.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거창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枕流亭은 府 남쪽 瀯川에 위치하고 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浣溪書院은 1664년(현종 5)에 세워져, 1670년(현종 11)에 사액되었고, 金 湜을 배향하였다. 가남면에 위치한 道山書院은 1660년(현종 1)에 세워져, 1663년(현종 3)에 사액되었고, 김굉필, 정여창, 정 온을 배향하였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鄕賢祠에서는 뛰어난 學行으로 추천을 받은 文 緯를 배향하였다. 문 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의병장 김 면과 합세하여 지례에서 왜적을 대파한 공이 있는 사람이다. 가동면에 위치한 見岩寺는 1395년(태조 4)에 조선 태조가 前朝 王氏를 위해서 밭 100結을 내리고, 매년 5월과 10월에 內香을 내려서 水陸齋를 실행하였던 곳이다. 金貴山烽燧는 남쪽으로 합천 所峴烽燧의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巨末訖山烽燧에 전달하였다.(金在完)

  • 남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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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현은 현재 보령시 남포면, 성주면, 미산면, 웅천읍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남포현의 읍치는 지금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와 옥동리 일대이다. 현재도 이 지역에는 남포읍성과 향교골, 읍내등 지명이 남아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形勝條에 남포현을 ''靑淵浦는 바다와 통하고, 玉馬山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본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 九龍山이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 현은 성주산에서 발원하는 웅천천 중상류의 골짜기 평지를 제외하고, 산세가 바닷가까지 이르러 평지가 거의 없다. 읍치의 동쪽 성주면 성주사지에는 국보 8호 백월보광탑비, 보물 19호 9층 석탑 외 3점, 사적 307호가 있다. 성주산 일대에서는 흑색 사암인 ''남포오석''이 또한 산출되어 예로부터 벼루돌로 애용되어 왔다. 輿地圖書 土産條에도 성주산 서쪽에서 나는 벼루돌은 검은색으로 품질이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聖主寺는 나말 여 초 선종 9산 중 하나인 無染(郞慧)의 성주산파의근거지이었다. 지도의 聖住山 부근에 ''최고운찬비(崔孤雲撰碑)''가 크게 그려져 있다. 이 비석은 성주사에 있는 것으로서 최치원이 지은 대낭혜화상(大朗慧和尙)의 塔碑이다. 읍성은 석축으로 되어 있다. 해창은 남포현 세곡이 수납되어 배로 서울로 운송되었던 조운지이었다.(金在完)

  • 광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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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구의 황룡강 서쪽 부분을 제외한 광주광역시 전역과 담양군의 대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충장로, 장동, 금남로 1·2가, 광산동, 궁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1601년(선조 34)에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사망한 高敬命과 아들 因厚를 배향한 褒忠祠, 1604년(선조 37)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을 배향한 義烈祠, 1646년(인조 24)에 名儒 奇大升과 金長生을 배향한 月峯書院이 보이는데 모두 사액서원으로 호남에서 이름난 양반고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포충사만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읍치 밑에 보이는 景烈祠는 고려말 왜적 침입 때 전공을 세웠으며 위화도 회군에서 태조 이성계를 도운 鄭地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읍성 남쪽에는 신라 때는 小祀를, 고려 때는 國祭를, 조선 초에도 無等山神祠를 세워 제사를 지냈던 고을의 鎭山 無等山이 보이고 아래쪽에 신라 경문왕 때 澈鑒禪師 道允이 세웠다는 證心寺가 登心寺로 표시되어 있다. 더 밑 쪽에는 기둥같은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瑞石臺가 그려져 있다. 읍치 서쪽의 景陽驛은 덕기, 가림, 인물, 검부, 창신, 대부 등 여섯 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이기봉)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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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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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운데로 한강과 임진강이 흐른다. 백두대간에서 나온 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 한남정맥이 경기도를 지나며 서쪽은 京畿灣 일대가 된다. 강화만, 남양만, 아산만을 영역속에 포함하고 있다. 한강을기준으로 左道와 右道로 나누어지며 西海와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휴전선 이북의 松都(개성), 豊德, 長湍, 朔寧까지 영역에 포함된다. 이 지도에서 京都는 적색의 원으로 크게 강조하여 표시하고 있으며 각 군현은 황색의 원으로 표시하였다. 경기도와 경계가 되는 다른 도의 군현은 명칭만 적고 있다. 군사 요충지가 되는 鎭은 적색의 사각형으로 표시하여 차별을 두었다. 京都의 都城과 北漢山城, 廣州의 南漢山城, 通津의 文殊山城은 흰색으로 성곽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강줄기를 강조하여 그렸으며 강 사이로 산줄기와 산의 명칭을 적고 있다. 서해의 섬들을 그리고 각 섬의 명칭을 붙여놓았다. 龍津, 禿津, 廣津 등 주요 나루를 한강에 표시하고 健元陵을 비롯한 주요 陵의 위치와 명칭을 표기하였다. 지도의 여백에는 土地와 穀物, 路程의 기준, 驛, 軍兵, 官職, 船舶의 수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현군)

  • 강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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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康翎縣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 용연면, 봉구면, 흥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황해남도 강령군 동부를 제외한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1666년(현종 7) 치소를 옮기기 전에는 고현면 蛇川에 있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 10리에 떨어진 鳳凰山이다.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북쪽의 우뚝 솟은 鵲山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富民山과 鳳凰山으로 이어져 명당을 형성하였다. 王灘川이 북쪽 鵲山에서 발원하여 남하하여 司倉 앞을 지나 戀君浦를 지나 바다로 흘러간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15리 떨어진 望海菴 부근에 望海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서는 서쪽으로 넓은 바다가 바라다 보인다.  읍치에서 동남쪽으로 45리 지점에 있던 등산곶진은 뒤에 순위도로옮겨졌다. 1704년(숙종 30)에 萬戶로 승격시켰다. 후에 등산곶은 목장으로 바꾸고 순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었다. 지도에서 등산곶은 司僕寺 소관의 牧場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을 따라 食大山, 竪羅山, 九月里, 推峙 봉수대가 배치되어 있었다.(金在完)

  •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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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東海와 닿아있다.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동쪽은 9개, 서쪽은 17개, 총 26개의 府·郡·縣이 있으며 監營은 原州에 설치되어 있다. 동해안을 따라 표시된 9개의 군현이 嶺東에 해당한다. 각 군현별 지도에서는 26개 군현외에 울릉도를 따로 그려 강원도 안에 포함하였다. 高城, 通川,  谷, 淮陽, 金城, 金化, 鐵原, 平康, 安峽, 伊川은 군사 분계선 북쪽 지역이며 蔚珍, 平海, 鬱陵島는 현재 경상북도에 속해있다. 해동지도에서는 도별로 色을 달리하여 군현을 표시하는데 강원도는 녹색을 사용하였다. 監營이 있는 원주의 경우 홍색을 사용하고 다른 군현보다 크게 표시하였다. 삼척영장과 월송만호의 鎭營은 붉은 사각형안에 별도로 표시하였다. 이 지도는 강줄기, 산줄기를 중심으로 그렸으며 도로망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으나 주요 驛의 이름은 기록하였다. 강은 흐름이 이어지게 그렸으며 산은 연결하여 그리지는 않았다. 강을 먼저 그리고 그 사이로 산을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동쪽의 강은 동해로, 서쪽의 강은 서해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 지도에서 가장 서쪽의 강은 임진강이며 그 동쪽은 한탄강이 된다. 가장 水系가 길고 여러 하천과 합류되는 것은 북한강으로 소양강과 홍천강의 물을 받아들인다. 가장 남쪽의 강은 남한강이다. 강의 명칭이 현재와 다르며 같은 강이라도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원도의 가장 큰 산줄기는 역시 백두대간이며 분수령에서 漢北正脈이 서남쪽으로 갈라진다. 이 지도에서 백두대간은 북쪽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金剛山을 지나 太白山까지 이어진 것이며, 한북정맥은 북한강 서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로 金城과 金化 사이를 지나는 것이다. 산과 주요 고개(嶺·峙)의 이름을 표시하였다. 금강산을 특히 강조하여 그리고 있으며 山城이 있는 곳은 따로 표시하였다. 동해안에는 海水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석호들을 그렸으며 동해에 많은 섬들을 그렸는데 浦를 바다에 그린 점이 이채롭다. 지도의 여백에는 戶口, 田畓, 軍兵, 官職, 收稅 등의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이현군)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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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경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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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현은 지금의 경산시 경산시내 동부 신천동 등 6개 동을 제외한 전체, 남천면, 압량면 북부, 대구광역시 동구 금호강 북쪽 연안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경산시 경산시내 삼남동과 삼북동 일대에 있었다. 이 일대에는 지금도 동헌 터, 객사 터, 읍성 터등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지도는 좌측이 서쪽, 우측이 동쪽, 위쪽이 남쪽, 아래쪽이 북쪽이다. 산줄기가 경산현 전체를 둘러싸고 있고, 남천 유역에 비교적 큰 들이 발달하였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정방형의 石城으로 둘레는 4천 8백 척이며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을 갖고 있는데, 그 가운데 西門의 門樓를 鎭玉樓라고 불렀다. 玉山 아래쪽에 보이는 孤山書院은 1633년(인조 11)에 세워졌으며, 이 황과 정경세를 모셨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孤山이라는 명칭은  선조 때 현령 윤희렴이 고을 선비들과 함께 이 곳에 서재를 세우고, 이 황에게 이름짓기를 청하여 얻은 것이라고 한다.(金在完)

  • 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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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단양군은 단양읍, 매포읍, 적성면, 단성면, 대강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당시 읍치는 단양읍 하방리에 있었다. 하방리일대가 구단양이고, 충주댐 건설 이후 단양의 행정중심지가 북쪽 도전리 일대로 옮겨 졌는데 그 곳이 신단양이다. 지도에 보이는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도담 등은 모두 단양팔경에 들어 갈 정도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향교 위쪽에 보이는 祭堂은 다자구야 산신당(다자구할미집, 죽령산신묘, 국사당)이다. 1623년(인조 1) 죽령 일대에 도적 떼가 웅거하여 죽령을 넘어 다니는 행인들을 괴롭히므로 관군을 풀어 토벌하는데, 어떤 노파가 나타나 관군의 앞길을 인도하여 도적을 섬멸한 후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죽령 산신 또는 다자구 할머니라 하여 단양, 영춘, 풍기 세 고을 군수가 신당을 짓고 제주가 되어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냈으며, 합군 후로는 용부원리 주민들이 지내게 되었다. 죽령은 충청북도 단양과 경상북도 영주군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158년(신라 아달라 이사금 5)에 이 길을 열었다. 남쪽에 보이는 丹岩書院(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소재)은 1662년(현종 3)에 창건하여,禹 倬과 李 滉을 배향하였으며, 숙종 때 사액되었다.(金在完)

  • 괴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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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괴산군은 현재 괴산읍, 칠성면, 불정면, 소수면, 사리면, 문광면, 감물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괴산군의 읍치는 현재 괴산읍 서부리 일대이었다. 조선시대 객사 터에는 현재 괴산읍사무소, 동헌 터에는 괴산 경찰서가 자리잡고 있다. 동헌 터는 고려 때 一昇寺란 절이 있었다. 즉, 고려시대의 절터에 행정기관을 지은 셈이다. 부근에 괴산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괴산은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한 달천 유역의 좁은 골짜기에 자리잡아 인구가 적었다. 괴산군을 관통해서 흐르는 하천이 달천이다. 물이 많으면 괴산읍 동쪽의 槐江과 梨灘까지 배가 소강하여 이들 나루터에서 어염과 곡물 물물교환되었다. 大東地志 倉庫條에 옛날 괴산읍에서 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지도에 없는 柳倉이 있어서 세곡을 수납하였다가 후에 창고를 없앴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마 달천의 수심이 점차 낮아져서 창고를 폐한 것일 것이다. 현대 1:50,000 지형도에 감물면 五倉里에 上柳倉과 下柳倉의 지명이 보이는 데 이 곳일 것이다. 지도에 보이는 土溪書院은 위치상 花巖書院으로 보인다. 화암서원은 1622년(광해군 14)에 세워졌고, 이 황, 노수신, 김제갑, 유 근을 배향하였다가, 그 후 박세무, 이문건, 허 후, 이신의, 김유형, 박지겸, 허 조 등을 추배하였다.(金在完)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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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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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한성부는 都城과 城底十里로 구성되는데 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한강 이북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의 한 줄기가 북한산으로 이어진다. 서쪽에는 사천, 동쪽에는 중랑천이 흐르는데 도성 내부의 여러 산에서 나온 開川(청계천)이 동쪽으로 모아져 청계천과 합류하여 남쪽의 한강으로 들어가며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 서해로 나간다. 하천은 점선으로 표시하고 덧칠을 하여 나타내었다. 북한산에서 내려온 脈이 白岳(북악산)으로 이어지며 그 앞에 景福宮이 자리하게 된다. 白岳, 仁王山, 駱山, 木覓(남산)을 연결하여 都城을 쌓았다. 이 도성을 이 지도의 가운에 크게 그렸으며 城門의 이름이 자세히 나와있다. 도성이 연결되는 산과 봉우리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인왕산 아래에는 淸風溪, 玉流洞, 弼雲臺를 표시해 두었다. 都城의 서북쪽으로 연결된 성곽은 蕩春臺城(西城)이며 북쪽으로 北漢山城지역을 자세히 그렸다. 북한산에는 주요 봉우리와 성문의 이름, 여러 창고가 잘 나타난다. 北漢山城을 자세히 그리겠다는 의도는 지도의 제목을 北漢山城附라고 한데서도 드러난다. 도성 내부에는 景福宮, 慶熙宮, 昌德宮, 昌慶宮 등의 궁궐과 宗廟, 社稷, 鐘閣이 배치되어 있으며 경복궁 남쪽으로는 漢城府와 행정부의 각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에는 五部制가 실시되었는데 이 지도에서 각 부(東部, 西部, 南部, 北部, 中部)의 위치를 확인할 수있다. 成均館과 함께 中學, 東學, 西學, 南學 등의 교육기관과 軍營, 기타 관청들이 나와있다. 또한 청계천의 교량들이 명칭과 함께 자세히 표시되어있다. 도로망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崇禮門, 昭義門, 敦義門에서 출발한 도로는 한반도 서북쪽으로 향하여 의주까지 이어지는데 이 길은 중국 사신들의 통행로이기도 하며 그 경로상에 慕華館, 弘濟院이 위치하고 있다. 興仁門, 惠化門에서 나온 길은 한반도 동북부로 연결되며 그 경로상에 活人寺(活人署)가 있다. 崇禮門, 光熙門에서 나온 길은 한강을 지나 삼남지방으로 연결된다. 한강에는 여러 津渡, 浦, 西氷庫, 東氷庫 등이 있으며 纛島(뚝섬)과 栗島(여의도와 밤섬)이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先農壇, 關王廟 등의 제단과 箭串橋(살곶이 다리) 동쪽으로 牧場이 지도에 나타난다.(이현군)

  • 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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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현은 일제시대의 강서군 강서면, 동진면, 성암면, 대산면, 쌍룡면, 보림면, 잉차면, 초리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남포직할시 동북쪽이다. 고을의 鎭山 舞鶴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가 읍치를 겹겹이 감싸 안은 형국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客舍와 衙舍를 비롯하여 각종 정자와 鳴鶴池까지 자세히 표시하여 읍치 공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읍치에 있는 서원은 鶴洞書院으로서 벼슬이 大司成에 오른 후 은퇴하여 이 고을에서 살았던 金泮을 배향하여 1686년(숙종 12)에 賜額받았다. 지도에표시된 角墓鄕, 甲岳鄕, 大垢鄕 등의 鄕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西京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고을이 될 당시의 마을 이름이다. 그런데 읍치에 있었던 梨岳鄕만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 아래쪽에는 나라에서 쓸 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벌채를 금한 封山이 네 개나 표시되어 있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서해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밭이 논보다 훨씬 많은 고을임을 알 수 있으며 지도 아래쪽에 흐르는 강은 대동강이다.(이기봉)

  • 강원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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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東海와 닿아있다.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동쪽은 9개, 서쪽은 17개, 총 26개의 府·郡·縣이 있으며 監營은 原州에 설치되어 있다. 동해안을 따라 표시된 9개의 군현이 嶺東에 해당한다. 각 군현별 지도에서는 26개 군현외에 울릉도를 따로 그려 강원도 안에 포함하였다. 高城, 通川,  谷, 淮陽, 金城, 金化, 鐵原, 平康, 安峽, 伊川은 군사 분계선 북쪽 지역이며 蔚珍, 平海, 鬱陵島는 현재 경상북도에 속해있다. 해동지도에서는 도별로 色을 달리하여 군현을 표시하는데 강원도는 녹색을 사용하였다. 監營이 있는 원주의 경우 홍색을 사용하고 다른 군현보다 크게 표시하였다. 삼척영장과 월송만호의 鎭營은 붉은 사각형안에 별도로 표시하였다. 이 지도는 강줄기, 산줄기를 중심으로 그렸으며 도로망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으나 주요 驛의 이름은 기록하였다. 강은 흐름이 이어지게 그렸으며 산은 연결하여 그리지는 않았다. 강을 먼저 그리고 그 사이로 산을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동쪽의 강은 동해로, 서쪽의 강은 서해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 지도에서 가장 서쪽의 강은 임진강이며 그 동쪽은 한탄강이 된다. 가장 水系가 길고 여러 하천과 합류되는 것은 북한강으로 소양강과 홍천강의 물을 받아들인다. 가장 남쪽의 강은 남한강이다. 강의 명칭이 현재와 다르며 같은 강이라도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원도의 가장 큰 산줄기는 역시 백두대간이며 분수령에서 漢北正脈이 서남쪽으로 갈라진다. 이 지도에서 백두대간은 북쪽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金剛山을 지나 太白山까지 이어진 것이며, 한북정맥은 북한강 서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로 金城과 金化 사이를 지나는 것이다. 산과 주요 고개(嶺·峙)의 이름을 표시하였다. 금강산을 특히 강조하여 그리고 있으며 山城이 있는 곳은 따로 표시하였다. 동해안에는 海水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석호들을 그렸으며 동해에 많은 섬들을 그렸는데 浦를 바다에 그린 점이 이채롭다. 지도의 여백에는 戶口, 田畓, 軍兵, 官職, 收稅 등의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이현군)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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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경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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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尙道의 명칭은 경상도의 주요 읍이었던 慶州와 尙州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경상도의 別稱인 ''嶺南''이란 새재(조령)의 남쪽 지방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상도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진군을 제외한 경상북도, 경상남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도를 보면 이 지역은 대체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외곽을 두른 대 분지임을 알 수 있다. 소백산맥은 비교적 연속성이 강한 모습을 보이면서 충청도 및 전라도와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반면에, 동해안에 치우친 태백산맥의 연속성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지도는 경상도의 山系와 水系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잘 나타내고 있고, 아울러 각 군현의 鎭山과 山城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70여 개의 府牧郡縣이 주황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고, 이들을 총괄하는 大邱監營은 좀 더 큰 주황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군사행정조직으로는 左兵營이 울산, 右兵營이 진주에 위치하고, 水營이 동래, 통영(삼도통제영)이 고성에 위치하고 있는데, 모두 파란색 원으로 표시하여 일반 지방 행정조직과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통영과 수영 산하의 소규모 鎭은 직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察訪驛은 노란색 타원형으로, 주요 도로는 붉은 색 선으로 표시하여 경상도의 도로 및 통신망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金在完)

  • 당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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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현은 현재 당진군 당진읍, 고대면, 석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당진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唐津이란 지명은 신라의 삼국통일 후 중국과의 교섭이 잦아지고 당나라 사람들이 귀화·정착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진 읍치는 역천 유역의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의 題詠條 李承召의 詩에 ''平岡斷 路高低''라는 표현이 있다. 번역하면 ''편평한 산등성 끊어진 언덕엔 길도 높고 낮은데''이다. 이 시는 당진현 지역의 구릉성의 지형을 아주 잘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북쪽의 태백산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다시 主山인 高山에서 뻗어내려 射亭, 鄕校, 客舍, 衙舍,  壇을 감싸안은 형국을 보여 주고 있다. 倉庫로 읍내에는 邑倉 東庫와 南庫 및 西庫 각각 3間이 있고, 현 북 5리에 위치한 北倉에는 東庫와 西庫 각각 3間이 채운포 주변에 있고, 현 서 30리 지점의 海倉에는 東庫 6間, 西庫 5間이 있었다. 본 현 서쪽 5리 지점에 상채운포가 보이는데, 이 포구는 당진현의 물자를 이출입하는 곳이었다. 전체적으로 읍성, 봉수, 서원, 절 등이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다.(金在完)

  • 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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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은 지금의 금산군 금산읍, 금성면, 군북면, 제원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과 무주군 부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산읍 아인리 일대였다. 군 서쪽의 여러 계곡에서 발원한 봉황천, 용문천 등의 하천이 모여 군 동쪽의 금강 상류로 흘러 들어간다. 여백 주기의 고적조에 부리폐현이 나오는데 지도에서는 동남쪽의 부북면, 부서면, 부동면, 부남면에 해당한다. 향교 위쪽에 보이는 義 은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 등 700여명이 왜군 수만명과 싸우다 전원이 순국한 후 고경명의 문인들이 시체를 거두어 戰場 남쪽에 장사를지낸 곳이고, 이들을 봄·가을로 제사지내는 從容堂과 高霽峯殉節碑도 보인다. 지금은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사적 10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星谷書院은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參政이라는 벼슬을 받은 공로가 있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게 만든 金侁 등이 배향되었고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았다. 부북면에 보이는 濟原驛은 여백의 주기에도 보이듯이 무주의 所川, 용담의 達溪, 진안의 丹嶺, 고산의 玉包 등 4개역을 관장하는 察訪驛이었으며, 身安寺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오다가 몸을 편히 쉬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절이다.(이기봉)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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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경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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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한성부는 都城과 城底十里로 구성되는데 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한강 이북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의 한 줄기가 북한산으로 이어진다. 서쪽에는 사천, 동쪽에는 중랑천이 흐르는데 도성 내부의 여러 산에서 나온 開川(청계천)이 동쪽으로 모아져 청계천과 합류하여 남쪽의 한강으로 들어가며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 서해로 나간다. 하천은 점선으로 표시하고 덧칠을 하여 나타내었다. 북한산에서 내려온 脈이 白岳(북악산)으로 이어지며 그 앞에 景福宮이 자리하게 된다. 白岳, 仁王山, 駱山, 木覓(남산)을 연결하여 都城을 쌓았다. 이 도성을 이 지도의 가운에 크게 그렸으며 城門의 이름이 자세히 나와있다. 도성이 연결되는 산과 봉우리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인왕산 아래에는 淸風溪, 玉流洞, 弼雲臺를 표시해 두었다. 都城의 서북쪽으로 연결된 성곽은 蕩春臺城(西城)이며 북쪽으로 北漢山城지역을 자세히 그렸다. 북한산에는 주요 봉우리와 성문의 이름, 여러 창고가 잘 나타난다. 北漢山城을 자세히 그리겠다는 의도는 지도의 제목을 北漢山城附라고 한데서도 드러난다. 도성 내부에는 景福宮, 慶熙宮, 昌德宮, 昌慶宮 등의 궁궐과 宗廟, 社稷, 鐘閣이 배치되어 있으며 경복궁 남쪽으로는 漢城府와 행정부의 각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에는 五部制가 실시되었는데 이 지도에서 각 부(東部, 西部, 南部, 北部, 中部)의 위치를 확인할 수있다. 成均館과 함께 中學, 東學, 西學, 南學 등의 교육기관과 軍營, 기타 관청들이 나와있다. 또한 청계천의 교량들이 명칭과 함께 자세히 표시되어있다. 도로망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崇禮門, 昭義門, 敦義門에서 출발한 도로는 한반도 서북쪽으로 향하여 의주까지 이어지는데 이 길은 중국 사신들의 통행로이기도 하며 그 경로상에 慕華館, 弘濟院이 위치하고 있다. 興仁門, 惠化門에서 나온 길은 한반도 동북부로 연결되며 그 경로상에 活人寺(活人署)가 있다. 崇禮門, 光熙門에서 나온 길은 한강을 지나 삼남지방으로 연결된다. 한강에는 여러 津渡, 浦, 西氷庫, 東氷庫 등이 있으며 纛島(뚝섬)과 栗島(여의도와 밤섬)이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先農壇, 關王廟 등의 제단과 箭串橋(살곶이 다리) 동쪽으로 牧場이 지도에 나타난다.(이현군)

  • 개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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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군은 일제시대의 봉동면 남쪽을 제외한 개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개천시 일대이다. 고려 초기에는 여진·거란과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성격이 강한 安水鎭·朝陽鎭으로 편제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 영토가 압록강변에 이르러 이곳이 內地가 됨에 따라 일반 郡縣으로 편제된 고을이다. 지도의 오른쪽에 보이는 강은 청천강이고, 아래쪽에 보이는 강은 대동강이다. 동북쪽으로부터 들어온 산줄기가 고을을 빙 돌아 대동강변을 따라가다 다시 서북쪽으로 꺾이기 때문에 고을의 물이 모두 서북쪽으로 흘러 청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고을의 진산 大林山으로부터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둘러 쌓여 있고, 앞쪽으로는 개천강을 임해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천강의 상류에는 釜淵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는데 매우깊어서 가뭄이 들면 祈雨祭를 지내던 곳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는 대동강가에 절벽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음이 재미있는데 이곳은 銀山에서 대동강을 넘어 개천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지점이다. 기타 乭古介, 者斤古介 등 순 우리말의 모습들이 지도에 많이 들어가 있음이 매우 흥미롭다.(이기봉)

  • 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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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부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영이 있던 해안 고을로 남으로는 明川, 북으로는 富寧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오촌면, 주을온면, 주북면, 주남면, 어랑면, 용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군, 청진시의 일부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지도도 다른 군현의 지도처럼 봉수와 같은 군사적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다. 특히 이 지역의 절경들이 잘 표시된 점이 특징적이다. 윤관 장군이 잠시 머물렀다는 해안가의 元帥臺를 비롯하여 동남쪽 해안에는 長淵과 魚郞武湖(지금의 武溪湖)가 그려져 있다. 주변에는 立岩, 臥岩 등의 기암괴석과 水中臺, 八景臺 등의 절경도 표시되어 있다. 또한 牟德과 中德은 이름에 걸맞게 평평한 모습으로 그려져 이채롭다. 동쪽 해안에 위치한 大良化는 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과거 良川縣이 있었던 터라 한다. 동북쪽에 위치한 輸城은 察訪驛인 輸城驛으로 22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노혜정)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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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경상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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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尙道의 명칭은 경상도의 주요 읍이었던 慶州와 尙州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경상도의 別稱인 ''嶺南''이란 새재(조령)의 남쪽 지방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상도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진군을 제외한 경상북도, 경상남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도를 보면 이 지역은 대체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외곽을 두른 대 분지임을 알 수 있다. 소백산맥은 비교적 연속성이 강한 모습을 보이면서 충청도 및 전라도와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반면에, 동해안에 치우친 태백산맥의 연속성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지도는 경상도의 山系와 水系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잘 나타내고 있고, 아울러 각 군현의 鎭山과 山城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70여 개의 府牧郡縣이 주황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고, 이들을 총괄하는 大邱監營은 좀 더 큰 주황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군사행정조직으로는 左兵營이 울산, 右兵營이 진주에 위치하고, 水營이 동래, 통영(삼도통제영)이 고성에 위치하고 있는데, 모두 파란색 원으로 표시하여 일반 지방 행정조직과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통영과 수영 산하의 소규모 鎭은 직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察訪驛은 노란색 타원형으로, 주요 도로는 붉은 색 선으로 표시하여 경상도의 도로 및 통신망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金在完)

  • 대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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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군은 현재 예산군 대흥면, 광시면, 신양면, 응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대흥면 동서리와 교촌리 일대에 있었다. 그런데 현재 읍치 동쪽의 상당 부분이 예당저수지의 건설로 수몰되어 있는 상태이다. 忠淸道邑誌에서 대흥현의 형승이 ''後背烽燧前帶奈川''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즉, 뒤에는 봉수산이, 앞에는 내천이 감싸고 있다는 것으로 배산임수의 형국 그 자체를 보여준다. 無限川의 지류들이 읍치 앞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 가고 있다. 地圖와 현대 지형도와 방향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地圖에서는 鳳首山城이 읍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실제 지형도에서는 읍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배치구조는 大興郡의 鎭山이 봉수산이므로 鎭山을 중심으로 공간배치를 한다는 원칙에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두 개의 산지가 衙舍와 客舍를 두 겹으로 감싸 안은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보여 주고 있다. 관아 배치를 볼 때 읍치의 명당 입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방향을 왜곡시킨 것으로 보인다. 읍치의 서쪽에 위치한 봉수산(484m)의 임존성은 백제의 부흥군이 웅거하면서 백제를 다시 세우려고 나당연합군에 항전했던 古城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 동쪽에 顯廟胎峯이 보이는데, 1681년(숙종 7)에 父王인 현종의 御胎를 이 곳에 묻고, 군으로 승격시켰다.(金在完)

  • 금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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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현은 남평면, 산포면, 다도면, 봉황면을 제외한 나주시 전체와 광주광역시 황룡강 서쪽, 영암군 금정면, 신북면·시종면 일부, 무안군 삼향면, 신안군의 여러 섬에 해당한다. 읍치는 나주시내 서내동, 남내동 일대이다. 보통 羅州牧으로 지칭되었는데 1733년(영조 9)에 금성현으로 강등된 것이 지도 이름에 그대로 기록된 것이다. 나주는 후삼국시대 고려 왕건의 편을 들어 주목받았고 1018년(현종 9) 牧으로 승격되어 수많은 屬縣을 거느렸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도 艅 縣, 安老縣, 伏龍縣, 潘南縣,壓海縣, 長山縣, 榮山縣 등은 나주 관내에 완전히 편입되어 民戶 2만이 넘는 큰 고을이 되었다. 지도 왼쪽의 많은 섬들과 아래쪽의 삼향면은 나주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읍치 위쪽의 錦城堂은 고을의 鎭山인 錦城山에 1277년(충렬왕 3)부터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조선에서도 名山이라 하여 小祀로 삼았고, 지도 아래쪽의 南海堂은 中祀를 거행했던 곳이다. 읍치 남쪽의 榮江倉은 조선 초기에 조창을 설치하고 倉城을 쌓아 현재의 전라남도 대부분 군현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운송하던 곳이었는데 중종 7년(1512)에 법성포로 옮겼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의 발달과 함께 영산강 수운의 중요한 포구로서 번성했던 곳이다.(이기봉)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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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고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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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현은 지금의 완주군 고산면, 동상면, 경천면, 운주면, 화산면, 비봉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산면 읍내리에 있었다.지도의 가운데를 통과하는 하천은 동진강의 상류 고산천으로서 실제로는 서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며,위쪽의 하천은 금강 지류 논산천의 상류로서 실제로는 서북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읍치가 지도의 아래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雲西面, 雲北面 등의 고산천 상류와 논산천 상류는 雲梯폐현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읍치에는 고을의 主脈 鳳山 밑에 각종 관아시설이 들어서 있는데 鳳山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사방을 감싸고 앞쪽으로는 하천이 흐르는 형태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 지형에서는 鳳山이 읍치로부터 훨씬 서쪽에 있고, 읍치도 하천가에 더 가까워 지도의 표현에서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기타 佛明山 밑의 花巖寺는 여백 주기에도 나와 있듯이  檀木 즉 檀香木이 있어 유명하며, 도로 표시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붉은색, 기타의 도로는 노란색으로 표시하여 구분해 주고 있다.(이기봉)

  • 곡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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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곡산군 곡산면, 도화면, 서촌면, 운중면, 동촌면, 청계면, 화촌면, 멱미면, 봉명면, 상도면, 하도면, 이녕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곡산군 거의 대부분 지역, 신평군 전 지역, 연산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곡산부는 1782년(정조 6)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91년(정조 15) 다시 승격되었다. 순조 때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에서 남쪽으로 8리 떨어진 南山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文城鎭은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嶺의 아래가 檢岩城이 된다. 762년(신라 경덕왕 21)에 성을 쌓았다. 조선조 중종 때에 萬戶를 설치하고, 1668년(숙종 9)에 僉使로 승격시켰다. 지도에는 衙舍, 客舍, 倉이 표시되어 있다. 옛 文城은 大角山 아래에 있다. 牛嶺路의 요충지가 되어, 검암령성 및 이천과 더불어 신라와 백제 때 북변 요충지이었고, 당시에도 당연히 이곳은 防守의 요충지에 해당하였다.(金在完)

  • 경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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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원부는 함경도의 북쪽 접경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서쪽은 穩城, 동쪽은 慶興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면, 안농면, 동원면, 아산면, 용덕면, 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새별군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일부는 은덕군에 편입되어 있다. 지도에는 두만강 이남의 경원 지역과 더불어 厚春部落을 비롯한 강 이북도 그려져 있다. 중국과 접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두만강 연안에는 많은 把守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도에는 ''守''로 표시하였다. 訓戎鎭, 安原堡, 乾元堡, 阿山堡 등은 이 지역 방어를 위한 중요한 군사기지로서 설치된 것이다. 두만강에는 하중도인 古欲耳島가 그려져 있는데 1666년(현종 7)에 물길이 갈라지면서 섬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섬은 두만강에서는 가장 큰 하중도로 남아 있다. 두만강 부근에 풍수적으로 그려진 龍堂에는 古城이 있었으며 태조 이성계의 조상인 穆祖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을의 남쪽에는 羅端山이 두 개나 표기되어 있다. 이는 원래 羅端山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없는 것으로 착각하여 후에 追記한 데서 생긴 오류이다.(노혜정)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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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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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부는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전체, 포항시 죽장면 전지역, 신광면, 기계면, 기북면, 영천시 임고면 일부, 고경면 일부, 북안면 일부, 대창면 대창리, 울산광역시 두동면·두서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경주부의 읍치는 경주시내 동부동 일대이었다. 경주는 평평한 땅에 들어서서 남원의 경우처럼 읍성이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4각형으로 축성되었다. 읍성은 고려시대 처음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시가지 안에 약 50m의 성벽만 남아 있다. 읍성 우측에 신라 마지막 왕인 敬順王陵과 廟影堂이 위치하고 있다. 금강산 남쪽에 위치한 栢栗寺는 528년(신라 법흥왕 15)에 이차돈의 순교를 추모하여 창건했다고 한다. 유물로 石幢과 국보 제 28호의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있다. 그 아래쪽에 634년(신라 선덕여왕 3)에 창건한 분황사와 국보 제 30호의 분황사 석탑이 그려져 있다. 그 우측에 佛國寺와 석굴암, 그리고 祗林寺가 있다. 지림사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창건되었다 한다. 이 절의 대웅전 안에 있는 乾漆菩薩坐像은 보물 제 4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읍성 남쪽에 보이는 반월성은 신라 왕도의 土城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101년(신라 파사왕 22) 2월 이 곳에 흙과 돌을 섞어서 둘레 3,023척의 성을 쌓고, 이 성을 월성 또는 반월성이라고하였다 한다.(金在完)

  • 덕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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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현은 현재 예산군 삽교읍, 덕산면, 고덕면, 봉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덕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부근에 사직동, 향교말, 북문리 등 지명이 남아 있어 이 곳이 옛날 읍의 중심지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形勝條에 ''덕산현은 동쪽으로 큰 들을 끼고, 북쪽에 鶯山을 등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치 서쪽에 伽倻寺라는 절이 보인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없애고 남연군의 묘를 쓴이 곳의 지형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뽑힌다. 읍치 남서쪽에 보이는 덕숭산(495m) 기슭 修德寺의 대웅전은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맞배지붕의 장중한 맛이 있다. 이 건물은 창건 연대가 알려진 목조 건물로는 가장 오랜 것이다. 특이한 점은 客舍가 明堂形局 內에 자리잡은 반면에 衙舍는 동쪽으로 약간 비껴 나 있다. 邑治 북동쪽에 위치한 海倉 건물은 20칸으로 되어 있다. 해창포는 삽교천 변에 위치하여 수운의 편리함이 있어 덕산현에서 나오는 미곡을 실어 내보내는 포구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체적으로 津渡, 寺宇 등 고적 유적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미 경계에 위치한 大峙는 內浦 諸邑의 咽喉로서 전략요충지이었다.(金在完)

  • 김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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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시의 시내, 죽산면, 부량면, 백산면, 용지면, 백구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교동, 옥산동, 요촌동 일대에 있었다. 김제군은 실제로는 산이 거의 없는 광활한 벌판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지도에는 산들이 수없이 연결되어 그려져 있다. 산이 많은 지역에선 작은 뒷동산이나 둔덕에 불과한 지형이 이곳에서는 山·山脈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통해 조선시대 자연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고적조에 보이는 平皐廢縣은 지도의 동북쪽에 해당되는데 김제군의 전체적 모양이 지도와 달리 실제로는 동북쪽에서 서북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라는 사실을 통해 두 개의 고을이 합쳐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도의 남쪽에는 ≪三國史記≫에 330년(訖解王 21)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며,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번 개축된 碧骨堤의 모습이 수문과 둑의 형태로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지도가 그려진 시대에는 여백의 주기 古蹟조에 적혀 있듯이 이미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모두 논으로 바뀐 상태였다. 현재는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직접 가보면 지도에서의 동서방향과는 달리 남북방향으로 둑이 쌓여져 있다.(이기봉)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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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고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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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년(태종 13)에 高峯縣과 德陽縣을 합하여 高陽을 만들고 縣監을 두었으며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일대이다. 고양동이 과거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읍치에 배치된 건물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지도에서 남쪽의 강은 한강이며 孔岩津을 통해 陽川과 통하며 楊州, 坡州, 交河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石峴을 넘어 交河, 坡州를 통해 義州까지 통하는 大路가 邑治를 지나고 있다. 碧蹄驛, 德水院(삼송동), 碧蹄店, 新院店 등의 驛院, 店幕이 도로변에 위치하였음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碧蹄驛에는 驛村(벽제동)이 존재하였음을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남쪽의 城山이라 기록된 것은 幸州山城이 위치한 덕양산으로 1593년(선조 26)에 權慄 將軍이 이곳에 주둔하여 왜병을 크게 무찔렀다. 대첩비와 대첩비각이 있는데 지도에 勝戰碑를 표시해주고 있다. 이 지역은 고려 崔塋將軍의 墓(대자동), 고려 恭讓王의 墓(주교동)를 비롯하여 원당동에 西三陵(昭顯墓, 孝陵, 禧陵), 용두동에 西五陵(昌陵, 敬陵, 翼陵, 明陵, 順懷墓) 등 많은 능묘가 존재하였음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이 밖에 禿山烽燧, 高峯烽燧, 藍浦烽燧 등의 봉수, 堤堰, 저수지(龍淵, 銀池), 書院(文峰書院)등이 있었음이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곽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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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산군은 일제시대의 정주군 관주면, 임포면, 안흥면, 옥천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곽산군 일대이다. 이 고을은 993년(고려 성종 12) 거란족의 1차 침입 때 고려 徐熙(940-998) 장군이 거란의 소손녕과 단판을 벌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개척한 江東六州의 하나이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陵漢山城은 이 때 쌓은 산성이며 당시의 고을 이름인 郭州가 산성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는 客舍와 衙舍 등 간단한 건물만 표시하였지만 다른 고을과의 거리는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읍치동북쪽의 雲興?은 雲興驛으로서 1746년(영조 22)에 읍치를 이곳으로 옮겼다가 1768년(영조 44)에 지도상의 읍치 지역으로 다시 옮겼다. 이것을 통해 이 지도가 1746년 이전 또는 1768년 이후에 작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는 龜城 里는 곽산의 북쪽에 있었던 구성의 越境地로서 염전과 관련되어 설치되었음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지도에 자세히 표시된 烽燧를 통해 국방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밭이 약간 많은 고을이며 능한산성에는 산성의 평상시 관리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寺刹이 3개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경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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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흥부는 두만강 하구 접경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서쪽으로는 경원과 접하고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면, 노서면, 상하면, 웅기면, 신안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선봉군을 비롯하여 은덕군과 나진시에 일부 편입되어 있다. 이 고을은 태조 이성계의 高祖父인 穆祖가 살던 곳으로 지도상에도 赤池 부근에 목조와 왕비의 릉인 德陵과 安陵의 옛 터가 古陵으로 표시되어 있다. 원래 이곳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함흥부로 옮겼던 것이다.度祖가 검은 용을 쏘았다는 赤池는 붉은 색으로 채색되어 있고 翼祖가 여진족의 공격을 피해 들어가 살았다는 赤島도 그려져 있다. 지금은 러시아 쪽 영토로 육지와 이어진 鹿屯島가 섬의 모습으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 아래로 草島가 있는데 당시 穩城에 속해 있었다. 그 전면 해안가는 일제시기 급성장한 지금의 羅津市에 해당한다. 두만강 연안에는 외적 방어를 위한 파수와 진보가 다수 설치되어 있다. 현재 탄광으로 유명한 阿吾地에는 1488년(성종 19)에 설치된 堡가 있었다.(노혜정)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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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고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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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현은 신라 진흥왕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대가야국의 중심지이었다. 고령의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령현은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 인안리 등 3개리를 제외한 개진면 전지역, 우곡면 서부, 쌍림면, 운수면 운산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 지산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 서쪽 美崇山에서 산줄기가 동쪽으로 향해 가다가 鎭山인 耳山에서 멈추고 명당인 읍치를 감싸안고 있다. 또한 명당수인 가야천과 용담천이 읍치 앞에서 합쳐져 合川(지금의 會川)이 되어 東流하여 낙동강 본류로 들어 간다. 披香亭은 읍내에 있는 누각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碧松亭은 B.C.57(신라 박혁거세 1)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신라 말에 중수할 때 최치원이 上梁文과 시를 지었다 하며, 조선 성종 때 김굉필, 정여창이 시를 지어 찬송하였다 한다. 1920년 장마 때 떠내려가는 것을 일부 건져서 현재의 위치(고령군 쌍림면 신촌)에 세웠다고 한다. 미숭산에 있는 盤龍寺는 용이 서리고 앉은 것 같은 지형에 위치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반룡사는 802년(신라 애장왕 3) 해인사보다 먼저 지었다 하며, 신라 말에 보조국사가 중수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사명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후 화재로 1764년(영조 40)에 현감 윤심협이 옮겨 세웠다. 읍치 서쪽 낙동강에 위치한 개산진은 고령에서 현풍으로 가는 주요 나루터로서도 중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령현에서 거둔 세곡이 개산진 부근의 강창에 수납되어 조운선의 발선지로서도 중요하였다. 또한 고령의 중요한 관문포구로서 이 곳에서 어염과 곡물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金在完)

  • 마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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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량진은 현재 서천군 서면 마량리 일대에 있었다. 작은 반도로서 바다쪽으로 돌출하였기 때문에 해상 요충지로서 매우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 진은 비인현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內都屯串에 있었다가 1655년(효종 6)에 藍浦·廣岩으로부터 이 곳으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옛 진은 배를 놓아두는 데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수군첨절제사 한 사람이 주재하고 있었다. 본 진의 임무는 舒川浦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성곽은 없고, 民戶 155호로 충청도의 다른 진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다. 戰船, 防船, 伺候船 각각 1척이 있었다. 지도에서 진의 건물도 官舍와 客舍 외에는 중요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金在完)

  • 남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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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부는 지금의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아영면을 제외한 남원시 전 지역과 장수군의 반암면, 산서면 일대, 임실군의 삼계면, 지사면과 오수면 남쪽부분, 구례군의 산동면과 광의면·용방면 북쪽부분 그리고 곡성군의 고달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당시 읍치는 남원시내 동충동 일대에 있었다. 남원부는 동쪽과 서쪽으로 백두대간과 그 산줄기의 높은 봉우리에 의해 둘러 쌓여 있지만 북쪽 장수군 반암면에서 발원한 요천이 고을 중심부를 관통하며 넓은 평지를만들고 남쪽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郡名에 보이는 ''帶方''이란 명칭은 ≪三國史記≫에는 나오지 않다가 ≪高麗史≫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는 지명으로 이 지도에서는 고을 옛 이름 중 가장 먼저 쓰여 있어 세계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지도에는 ''面''을 ''坊''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전라도 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경우이다. 읍성 안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7인을 배향한 忠烈祠와 1599년(선조 32) 서문밖에 세워졌던 關王廟가 객사, 아사 등과 함께 그려져 있어 임진왜란의 여파를 짐작할 수 있다. 동남쪽 所義坊에는 신라 때 五岳의 하나로 받들어져 中祀를 거행했던 지리산에게 제사지내던 南岳祠가 그려져 있어 산악신앙의 계승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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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고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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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현은 지금의 고창군 고창읍, 고수면, 아산면 일대에 있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고창읍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에는 동남쪽의 높은 산지로부터 발원한 고창천이 서북쪽 곰소만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하지만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향한 고을 모양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그렸기 때문에 읍치가 실제보다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남쪽이 축소되었다. 읍성은동남쪽의 산지를 배경으로 삼아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지금도 사적 145호로 지정되어 그 모양을 거의 완전하게 보전하고 있다. 지도 맨 위쪽의 壺岩은 지금의 아산면 반암리 호암마을 뒤쪽에 있는 높이 약 35m, 둘레 300m의 바위로서 모양이 병을 거꾸로 놓은 것 같다고 하며, 그 아래쪽의 海門은 바닷가임에도 좁은 계곡이 하천을 따라 계속 이어져 밀물 때는 바닷물이 출입하는 곳이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매우 간략하며 여백 주기도 필수적인 사항만 적어 놓았다.(이기봉)

  • 관서일로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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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는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평안도 서북방면의 방어시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그려 놓았다. 우선 지도의 한가운데를 가르는 지금의 강남산맥이 서북방면에서 침입하는 적에 대한 제1차 저지선이 됨을 알 수 있다. 최북단의 강계 위쪽에는 廢四郡 쪽에서 들어오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麻田岺의 관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鎭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지금의 강남산맥 위에서 가장 중요한 要衝地였던 狄踰岺 위에 關門을 설치하여 1차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그 아래쪽으로는 柔院鎭·鳳丹城 등의 방어시설을 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최고의 천연요새라 알려진 영변의 鐵甕城이 나온다. 창성, 벽동, 이산, 위원으로부터 들어온 적을 막기 위해 곳곳에 鎭과 山城을 설치하였으며, 강남산맥 위에도 여러 개의 關門이 있어 1차 저지선이 되고 있다. 산맥 아래쪽으로는 天摩鎭으로부터 委曲鎭까지 여러 개의 鎭과 山城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龜城과 영변의 鐵甕城이 버티고 있다. 서쪽 방면의 의주를 넘어온 적은 白馬山城을 지나 내륙과 해안가를 따라가는 두 길로 갈라진다. 해안가쪽에서는 강남산맥이 곳곳에서 낮아지고 있기 때문에 관문보다는 龍骨城, 西林城, 東林城, 雲暗城,  山城, 凌漢城 등의 산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다. 내륙쪽으로는 植松, 安義 등의 鎭을 설치하여 막고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龜城이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길들은 대개 安州에서 합류되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청천강을 뒤로하고 튼튼한 성곽을 건설하여 渡江한 적을 막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동쪽 함경도의 함흥, 영흥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의 통로에 해당하는 영원, 양덕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다. 기타 압록강을 넘어 온 적의 육로 침입에 대한 방어선을 알려주기 위한 지도이기 때문에 압록강과 서해바다는 생략되어 있다. 뒤쪽의 여백주기에는 산과 강의 흐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싣고 있어 지도의 단점을 보완해주고 있다.(이기봉)

  • 고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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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穢國의 땅이었으며 신라 경덕왕때 고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으로 현재의 북한 강원도 고성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고성읍 구읍리가 邑治에 해당한다. 읍치는 성곽으로 되어 있으며 客舍, 衙舍와 함께 海山亭이 그려져 있다. 성밖 서쪽에 鄕校가 표시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동쪽 지역으로 杆城, 通川과 남북으로 경계를 이루며 東海와 접하는 지역이다. 서쪽에 金剛山을 그렸으며 봉우리들을 중첩하여 많이 그렸다. 백두대간에서 나온 하천이 읍성을 감싸며 바다로 들어가는데 邑治 북쪽의 강은 新溪川이며 남쪽은 南江이다. 교량으로 百川橋가 표시되어 있다.읍성 북쪽으로 三日浦(외금강면 삼일포리)가 해안이 아닌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삼일포는 海水에 의한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潟湖로서 과거의 해안선을 유추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경치가 빼어나 옛날에 네 신선이 여기서 놀며 3일간이나 돌아가지 않았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붙였다고 한다. 養 驛을 지나 통천으로, 溫井岺, 九龍岺을 넘어 淮陽으로, 高岺驛, 炭嶺을 지나  蹄로, 大康驛을 넘어 杆城으로 통한다.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연결된 도로는 평탄하며 大幹을 넘는 서쪽으로의 통로는 험준하다. 新溪寺, 鉢淵寺, 圓通寺, 楡站寺(楡岾寺의 誤記) 등의 사찰이 금강산을 끼고 있었다. 楡岾寺는≪동국여지승람≫에 53佛이 月 國에서 무쇠종을 타고왔으며 9龍이 숨어있는 못을 메우고 이 절을 지어 이들을 모셨다하며 조선 세종이 찾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밖에  庫, 倉이 표시되어 있고 읍성 남쪽에는 帶湖亭이 나타난다.(이현군)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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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고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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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 전체, 통영시 도산면, 광도면, 용남면, 사천시 시천시내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고, 읍치는 고성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서쪽에 위치한 無量山이다. 碧芳山은 날씨가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읍성은 石築으로 둘레가 3,524척, 높이가 15척이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舞妓亭에서 옛날 固州刺史가 기생을 끼고 이 곳에서 歌舞를 즐겼다고 전한다. 옛날 읍치 남쪽에 樂悅亭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大芚面에 위치한 갈천향현사(갈천서원)는 1712년(숙종 38)에 세워져, 이 암, 어득강 등을 나란히 배향하였는데, 사액서원은 아니다. 읍치 서남쪽下里二運面에 위치한 床足岩은 4개의 돌로 된 기둥이 마치 책상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며, 潮水가 이르면 물이 그 아래를 지난다고 한다. 현 북쪽 龍水山의 龍水巖에 샘이 있는데 바닥이 없는가 싶을 정도로 깊고, 가물 때 기우하면 영험이 있다고 한다. 해안에는 海防을 위하여 舊所非浦鎭, 蛇梁鎭, 唐浦鎭, 三千鎭 등이 설치되어 있다.(金在完)

  • 면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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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현은 현재 당진군 합덕읍, 면천면, 신평면, 송악면, 순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와 성하리 일대이었다. 지금도 동문 밖, 서문 밖, 남문 밖 지명이 남아 있다. 진산은 군 북쪽 4리 지점에 있는 蒙山이다. 邑城은 石築으로, 그 안에 두 개의 우물, 4개의 성문이 있었다. 忠淸道邑誌의 形勝條에 ''南控伽倻北環大津''라고 쓰여 있다. 즉, 우리말로 옮기면 ''면천은 남쪽으로 가야산을 끌어당기고, 북쪽으로 大津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主山인 所尾山에서 내려 온 산세가 몇 겹으로 명당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남원천이 명당수이고, 南山이 案山이 된다. 현 동 20리 지점에 남창南倉이 보인다. 창고 앞 나루터를 犯斤乃浦라고 한다. 남창에서 공주와 홍주에서 관할하는 군현의 세미를 수납하였다가 서울로 조운하여 갔었는데, 1478년(성종 9) 봄에 수심이 깊지 않아 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아산의 공세창으로 옮겼다. 현 북 50리 甘泉面에 蒼澤串牧場이 있다. 면천의 북동쪽 해안의 한진(지도상에는 大津)은 과거에 아산만의 큰 포구로서 당진과 면천의 곡물을 서울로 반출하는 데 이용되었다. 지도의 오른쪽에 蒼宅山 烽燧가 보이는데, 이 봉수대는 서쪽으로는 당진현 고산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경기도 양성현의 槐臺吉串의 봉수와 호응한다.(金在完)

  • 동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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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복현은 지금의 화순군 동복면, 이서면, 남면, 북면 일대로 읍치는 동복면 천변리, 독상리에 있었다. 동복천이 동쪽의 높은 봉우리들로부터 흘러내린 작은 하천들을 아우르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 보성강으로 빠져나간다. 동복천 일대는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며 지도에서도 赤璧, 萬瀑臺, 姑蘇臺, 鳳凰臺 등의 기암절벽과 勿染亭, 滄浪亭, 流玉亭 등의 정자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지금은 동복댐이 만들어져 호수가 되었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三韓古城은 지금의 동복면 북쪽 옹성산에 있는 산성으로 사방이 깍아지른 절벽의 천연 요새로 되어 있으며,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까지 석대, 돌기둥 등이 남아 있었다. 읍치 북쪽의 도원서원은 1670년(현종 11)에 만들어지고 1687년(숙종 13)에 사액받았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동쪽의 높은 산줄기와 서쪽의 동복천 물줄기가 실제 지세와 거의 비슷하게 제작되었으며, 현의 진산인 母后山이 동남쪽에 가장 크게 그려져 있고 여백의 주기는 아주 간략하게 처리되었다.(이기봉)

  • 대동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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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제 8책에 실려 있는 대형 필사본 조선전도. 지도의 우측 상단에 大東摠圖라는 지도 이름이 쓰여 있는데, 신 왕조초기에 나타났던 大國 관념이 16,17세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18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의 윤곽은 전체적으로 조선초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백두산을 양편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좌우로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두만강 유로는 극도로 축약되어 있고, 압록강은 하류 지역까지 거의 직선형태의 유로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동람도>적인 전통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의 안쪽으로 묘사되었다. 서울과 감병영, 군현 등은 작은 원 안에, 군사시설인 진보는 하늘색 바탕의 작은 사각형 안에 이름을 적었다. 군현 이름을 기재하는 바탕색을 도별로 달리하여 어느 도의 군현인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군현 이름 옆으로 좌도와 우도가 구별되거나(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 남북도가 구별되어 있다(함경도). 서울과 각 도의 감병영, 통어영은 적색 바탕으로, 통영은 하늘색 바탕으로 강조되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으로 연결되는 x자 형의 대로망이 적색의 굵은 실선으로 표시되었고, 나머지 주요 도시 사이의 도로망은 적색의 가는 실선으로 표시되었다. 서울로 연결되는 서남해상의 해로는 적색 점선으로 표시되었고, 도서에 대한 파악이 상세한 편이다. 산은 예외없이 백두산에서 이어진 줄기로 표현되었다. 백두대간은 봉화의 태백산까지는 선명한 편이지만,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다.  대신 태백산으로부터 경상도 동래를 향해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줄기보다 강조되어 있어서 낙동정맥의 흐름이 마치백두대간의 본류인 듯한 느낌을 준다. 대간과 정간, 정맥들이 모두 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된 것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함경도를 관통하고 있는 장백정간과 서쪽으로 흘러 평안도를 관통하는 청북정맥이다.  이 산줄기들이 유난히 강조되었던 것은 이 라인이 이른바 邊地와 內地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유사시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이다. 18세기 국경지역에서의 野人 문제는 함경도보다는 평안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변지 지역가운데 특히 청북정맥 이북과 압록강 사이에 있는 평안도 변지 지역의 산줄기가 방향이 뒤바뀌어 있는 것, 압록강 너머의 야인 부락이 다수 파악되어 있는 것,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수많은 군사시설이 묘사된 것, 청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세밀히 파악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내륙 곳곳에도 산성이 강조되고 있다.  백두산 주변에는 1712년에 설치된 백두산 정계비와 나무 울타리, 토문강, 분계강 등이 보인다. 토문강원은 두만강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온성부로 합류되는 별개의 물줄기가 분계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측 하단 설명문의 첫머리에는 백두산을 머리로, 제주와 대마를 두 다리로 보는 유기체적 국토관이 소개되었다. 그뒤로 도면상의 子午卯酉 방위가 책판의 크기에 맞추어진 지도와 다르게 되어 있는 경위가 설명되었다. (배우성)

  • 곡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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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성현은 지금의 곡성군 곡성읍, 삼기면, 오곡면, 석곡면, 목사동면, 죽곡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곡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북·동쪽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으며, 남쪽의 大荒川은 지금의 보성강이다. 읍치는 고을 鎭山인動樂山을 맨 뒤로하고 2-3겹의 산줄기가 포근하게 감싼 풍수적 관념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오른쪽의 安文成公影堂은 고려 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했다고 전해지는 安珦의 영정을 모신 곳이고, 아래쪽의 德陽祠는 이 고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고려 태조 때의 開國功臣 申崇謙을 배향한 서원으로 1695년(숙종 21)에 賜額받았다. 지도 아래쪽의 泰安寺는 신라 흥덕왕 때 선종 9山門의 하나인 銅裏山門을 열었던 惠哲에 의해 세워져 대안사라 했다가 919(고려 태조 2)에 廣慈禪師가 태안사로 고쳤다는 절로서 지금도 여러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 대황천 변 절벽 위의 凌波亭은 이 때 이미 황폐해졌음에도 기록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이기봉)

  • 관서일로영애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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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는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평안도 서북방면의 방어시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그려 놓았다. 우선 지도의 한가운데를 가르는 지금의 강남산맥이 서북방면에서 침입하는 적에 대한 제1차 저지선이 됨을 알 수 있다. 최북단의 강계 위쪽에는 廢四郡 쪽에서 들어오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麻田岺의 관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鎭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지금의 강남산맥 위에서 가장 중요한 要衝地였던 狄踰岺 위에 關門을 설치하여 1차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그 아래쪽으로는 柔院鎭·鳳丹城 등의 방어시설을 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최고의 천연요새라 알려진 영변의 鐵甕城이 나온다. 창성, 벽동, 이산, 위원으로부터 들어온 적을 막기 위해 곳곳에 鎭과 山城을 설치하였으며, 강남산맥 위에도 여러 개의 關門이 있어 1차 저지선이 되고 있다. 산맥 아래쪽으로는 天摩鎭으로부터 委曲鎭까지 여러 개의 鎭과 山城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龜城과 영변의 鐵甕城이 버티고 있다. 서쪽 방면의 의주를 넘어온 적은 白馬山城을 지나 내륙과 해안가를 따라가는 두 길로 갈라진다. 해안가쪽에서는 강남산맥이 곳곳에서 낮아지고 있기 때문에 관문보다는 龍骨城, 西林城, 東林城, 雲暗城,  山城, 凌漢城 등의 산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다. 내륙쪽으로는 植松, 安義 등의 鎭을 설치하여 막고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龜城이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길들은 대개 安州에서 합류되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청천강을 뒤로하고 튼튼한 성곽을 건설하여 渡江한 적을 막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동쪽 함경도의 함흥, 영흥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의 통로에 해당하는 영원, 양덕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다. 기타 압록강을 넘어 온 적의 육로 침입에 대한 방어선을 알려주기 위한 지도이기 때문에 압록강과 서해바다는 생략되어 있다. 뒤쪽의 여백주기에는 산과 강의 흐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싣고 있어 지도의 단점을 보완해주고 있다.(이기봉)

  • 고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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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원군은 함경도의 남쪽 해변가 고을로 북쪽은 永興, 남쪽은 文川과 접해 있다. 해방 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군내면, 상산면, 산곡면, 수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영흥군의 남서쪽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함경남도 고원군으로 되어 있다. 읍치를 비롯하여 주변의 각 社, 사찰, 창고, 그리고 도로망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서남쪽  雲嶺 인근에는 古鎭城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大東地志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983년(성종 2)에 성을 쌓고 설치했던 隘守鎭인데, 1360년(공민왕 9)에 폐지되었다. 文川 부근에 있는 龍庫洞에는 龍淵이 그려져 있는데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고을에는 은을 캐던 곳인 銀店도 보이고 있다. 於音乭에는 舊銀店이 每雲洞에는 新銀店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통해 당시 광업의 일단도 엿볼 수 있다.(노혜정)

  • 서북피아양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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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의 제4책에 수록된 대형의 채색지도로 크기는 세로 181, 가로 29cm이다. 우리나라의 북부 지방과 중국의 만주 등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關防地圖다. 지도 제목의 ‘彼我’는 중국 청나라와 조선을 의미한다.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군사지도로 유사한 사본이 현재 여러 본 남아있다. 지도는 白頭山을 중심으로 만주의 흑룡강으로부터 서쪽 山海關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길게 세워진 城柵과 도로를 따라 설치된 驛站,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닌 鎭堡 등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녹색으로 산지를 그렸는데 봉우리를 서로 이어 그려서 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는 대로를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으며 山海關에 이르는 燕行路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던 해로를 솔가지처럼 독특하게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방위의 배치가 독특한데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지 않고 국토의 坐向인 亥坐巳向(북서북-남동남)을 상하의 축으로 삼았다. 만주에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烏喇와 寧古塔이 홍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설명문이 들어갈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설명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 곤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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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양군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 사포면, 곤명면, 하동군 금남면, 진교면 동부지역을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곤양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1419년(세종 1)에 郡에 御胎를 안치하고, 남해군을 합쳐서 곤남군으로 승격하였다. 1437년(세종 19)에 다시 분리하고, 진주 금양부곡(금양면)을 병합시키면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옛 곤남현의 치소는 지도상의 곤명면 금성이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銅谷山이다.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있는 바와 같이 곤양군은 다른 군현과 비교하여 산이 많고 들이 적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石築으로 둘레가 3,765척, 높이가 12척이다. 읍치 좌측에 위치한 辰橋는 理盲寺 못의 용이 이 다리 밑으로 옮겨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多率寺는 503년(신라 지증왕 4)에 인도의 연기조사가 창설하여 영악사라 칭하였는데, 636년(신라 선덕여왕 5)에 다솔사라 고치고,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영봉사라 개칭하였다가, 다시 다솔사라 하였다. 북문 밖에 보이는 곤양향교는 중종 때에 서정리 舊鄕校자리에 세워진 것이다.(金在完)

  • 목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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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木川縣은 지금의 천안시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면, 성남면, 수신면에 해당하고, 邑治는 현재 목천면 西里 일대에 있었다. 목천현은 북쪽으로 흑성산으로 막혀 있고, 남쪽으로 전의와 낮은 산으로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진천 및 청주와 접해 있다. 또한 천안에서 진천과 청주로 통하는 요로에 위치하여 전략상 중요하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진 鵲城山이 鎭山인데, 진산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읍치로 연결되고, 하천이 읍치의 동북쪽과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읍치 앞에 모여 동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하천이 읍치 앞에 넓은 들을 만들었다. 목천현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에 위치하여 양국 간의 전쟁이 치열하였던 곳으로 도처에 작성산성 등 산성이 많이 분포한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道東書院은 賜額書院으로서 銀石山 아래 水石이 맑고, 기묘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鄭 逑가 寓居하였던 곳이다. 또한  鄭 逑와 金馹孫을 配享하였다. 읍치 북쪽에 위례성이 보이는데, 위례성은 그 동안 학자들에 의하여 백제 초기 도읍지로서 부정된 바 있으나 최근에 와서 많은 유물의 발견으로 논의가 다시 일고 있다.(金在完)

  • 만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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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김제시 만경읍, 청하면, 공덕면, 성덕면, 진봉면, 광활면과 군산시 옥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만경읍 만경리에 있었다. 현 전체가 광활한 평지에 있기 때문에 높고 큰 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산들이 봉긋봉긋 연결된 형태로 그려져 있다. 특히 현 서쪽의 進鳳山 ·泥波山·加釵山은 실제 높이가 80m도 안 되는 작은 산임에도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어 지도가 만들어진 18세기경의 산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서쪽의 섬들은 현재의 군산시 고군산군도에 해당되며 경상·전라의 漕運船이 통과하는 해로상의 險路였다. 따라서 지금의 선유도에 설치된 古群山鎭 첨사는 일상적인 해양 경비와 함께 조운선의 안전 운항에 관한 보조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또한 바닷길과 여러 암초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여백 주기에도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 고군산도는 고려 때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남송이 된 후에는 양쯔강 하류 항주와 연결되는 중요한 使臣路의 기착지가 되기도 했다. 입석산 뒤쪽으로 烽燧가 표현되어 있고 도로상의 여러 다리가 자세히 그려져 있는 점도 눈에 띈다.(이기봉)

  • 과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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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서울특별시 한강이남(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동작구, 관악구 일부지역)과 경기도 과천시, 안양시 일대가 과천현의 범위에 소속되었으며 과천시 문원동, 중앙동이 과거의 중심지였다. 冠岳山이 鎭山이며 修理山, 淸溪山과 漢江이 과천현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漢江을 비롯한 여러 하천이 이 지역에 분포하므로 농사에 적합한 지역이 많아  室坪, 僧房坪, 仁德院坪 등이 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縣 앞으로 물길이 빠져나가는 곳에 水口藪가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한강 이남에 위치한 지역이므로 露梁津, 銅雀津, 漢江津과 연계된 형태로 도로가 발달하였으며 서울과 三南으로 연결되는 大路, 衿川, 安山으로 연결되는 길이 지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육로망의 발달과 관계 깊은 여러 고개(峴)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良才驛, 仁德院 등의 역원이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로변에는 新院酒幕, 葛山酒幕 등의 酒幕이 있었음을 지도에서 알 수 있다. 그 밖에 書院, 寺刹 등이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구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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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부는 일제시대의 구성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구성시와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천마군 일대이다. 993년(고려 성종 12)에 서희가 회복한 江東六州의 하나이다. 고을은 크게 두 개의 물줄기에 의해 나누어지는데 동쪽에는 대령강의 지류인 천방강이 있고, 서쪽은 신의주에서 압록강과 합류하는 삼교천의 상류에 해당한다. 청나라와의 국경에 있는 의주·삭주와 경계선을 맞대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지는 고을이다. 의주와의 통로에는 塞墻門을 비롯하여 植松鎭·安義鎭이 포진하고 있으며 삭주와의 통로에도 窟菴山城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읍성 역시 石築의 성곽과 성문, 연못과 샘의 표시가 아주 자세하며 인조 때 설치된 中營도 보이고 있다. 그밖에 이미 頹落한 각종 산성이 모두 수록되어 있고, 烽燧와 要衝地의 표시가 아주 자세한 것도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고을 성격 때문으로 보인다. 여백주기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는  防面은 정주와 곽산을 넘어 있는 이 고을의 越境地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금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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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금성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1914년에 김화군에 포함되었다.현재 대부분이 휴전선 이북으로 북한의 행정구역상 강원도 김화군 동쪽지역과 창도군의 서쪽과 북쪽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邑治 동북쪽의 通口面(창도군)은 通口縣이었으며 縣里가 중심지였다.  城面(창도군)은  城縣이었으며 현재 기성리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두 縣 모두 고려 때에 金城에 속하게 된다. 邑治에 성곽은 없고 다른 郡縣과 마찬가지로 客舍, 衙舍, 倉, 鄕校를 표시하였으며 慶陽樓를 그려 넣었다. 邑治의 북쪽에 있는 慶坡山이 鎭山에 해당한다. 서쪽에서 나와 縣의 앞쪽을 흐르는 하천(南大川)은 金城川으로 북쪽에서 나온 北漢江 상류와 합해진다. 합류되는 지점을 이 지도에서는 錢浦合水라고 적고 있다. 水串橋, 西大橋 등의 교량을 하천에 표시하였으며 邑治 앞의 南大川가에 披襟亭이 있다. 나루로서는 大慶津을 표시하였고 河中島로 보이는 白鷺島가 지도에 나타난다. 서쪽의 북한강 상류에 縣倉, 任倉 등 창고가 표시되어 있는데 縣倉의 縣은 이전의 通口縣을, 任倉의 任은 任南面을 지칭하는 것이다. 縣 동쪽에는 古城이 표시되어 있다. 直木驛을 지나 金化로 통하는 길은 서울과 통하는 大路이며 이 길은 한반도 동북쪽으로 함경도 서수라까지 통하는 길이다. 瑞雲驛을통하는 길은 狼川으로 연결되며 斷髮嶺을 지나는 金剛路가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군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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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위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광현리 제외), 소보면, 효령면(고곡리와 매곡리 제외)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군위읍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馬井山이 이 고을의 鎭山인데, 이 산의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마정산의 봉수는 남쪽으로 朴達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비안현의 肝岾山에 응한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南溪書院은 1627년(인조 5)에 창건되어 류성룡을 모셨는데, 사액을 받지 못하였다. 南面 韓敵山의 祈雨峯에 기우단이 있었다고 전한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선방산 아래에는 지도에는 없지만, 持寶寺가 있었는데, 염색 재료가 없을 때, 이 절 경내에서 황청토를 캐내어 채색에 적당히 썼으므로, 보물로 전하여져서, 보배를 가진 절이라고 명명하였다. 673년(신라 문무왕 13) 의상이 창건하고, 조선 중엽에 개축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는 보물 제 682호 지보사 3층석탑이 있다. 博陀山 밑에 있는 朴達寺는 博陀寺로 불렸는데, 약80년 전에 소실되었고 다만 서북쪽 골짜기에 전에 浮屠가 있었다 한다. 효령면에 보이는 客舍는 군위군에 딸린 효령현 때의 관아 건물로 보인다.(金在完)

  • 문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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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문의현은 현재의 청원군 문의면, 가덕면, 현도면, 부용면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현재 문의면 문산리 일대에 있었다. 그러나 대청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면사무소도 북쪽으로 옮겼다. 진산은 읍치 서쪽 2리에 위치한 養城山이다. 지도에 읍치 아래쪽에 大龍穴이 표시되어  있다. 이 동굴은 통로로 되어 있어서 횃불을 들고, 밧줄을 타고 한참 내려가서 2km쯤 들어가면 굴이 많이 있는데, 다섯 굴은 넉넉히 들어 갈 수 있으나 물이 흘러서 들어가지 못하며, 굴 위에는 산마루로 구멍이 뚫려서 하늘이 내다보인다. 아마 석회암 동굴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문의현에는 서원이 두 개가 있다. 노봉서원은 1615년(광해군 7)에 세워졌고, 1658년(효종 9)에 사액을 받았다. 금암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세워졌고, 같은 해에 사액받았다. 진산인 양성산에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돌로 쌓은 古城이 있었다. 성안에 둥그런 못이 있는데, 큰 못이라 부르며, 둘레가 1백92척 8치이다. 사면에 모두 돌로 쌓아 섬돌이 되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장마나 가뭄에도 물이 마르거나 넘치는 일이 없다 한다. 좌측에 보이는 나루터가 荊角津이다.利遠津이라고도 하는데, 옥천과회덕으로 통한다. 상류쪽의 연산진은 고려 태조가 유금필로 征西大將軍을 삼고, 백제의 연산진을 공격하고 장군 길환을 죽였던 곳이다.(金在完)

  • 무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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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안현은 삼향면, 해제면, 망원면, 운남면, 현경면 일부를 제외한 무안군 전체와 목포시, 함평군의 엄다면, 학교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안읍 성내리에 있었다. 영산강이 南流하다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바다로 들어가며, 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최남단 목포까지 현의 가운데를 관통한다. 읍치 서쪽의 松林書院은 광해군 때 廢母論을 반대하다 무안으로 유배되어 사망한 金權을 배향하고 있으며 1682년(숙종 8)에 사액받았다. 읍치 서남쪽의 僧達山이 고을의 鎭山인데 고려 때 원나라 중 圓明과 그의 제자 500명이 이곳에 와서 도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원명이 머물렀던 절이 산 아래의 法泉寺이다. 그 왼쪽의 胎峯에는 단종의 태가 묻힌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지도 아래쪽의 木浦鎭은 종6품 萬戶가 파견되었으며, 唐串은 충무공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왜군을 물리친 후 비축된 군량미를 나주 高下島에 비치하였다가 1647년(인조 25)에 옮긴 곳이다. 駐龍津에는 조선 초까지 龍津溟所라 하여 고을에서 봄·가을로 제사지내던 곳인데 ≪輿地圖書≫와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광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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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현은 지금의 광양시로서 읍치는 광양읍 읍내리에 있었다.서북쪽에서 흘러온 섬진강이 고을 동쪽을 감싸며 남해로 들어가는 모습이 선명하며, 산지가 대부분이고 큰 평지가 없는 고을의 지형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읍치가 고을의 왼쪽 아래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광양에서 큰 들이 이곳밖에 없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읍치 위쪽에 있는 玉龍寺는 道詵秘記를 지어 우리 나라 풍수지리설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道詵이 마지막으로 수도하다 입적한 절로 알려져 있으며, 1150년(고려 의종 4)에 세운 道詵國師碑가 있었으나 1930년경에 훼손되어 없어졌다 한다. 지도 오른쪽 섬진강변에 蟾津鎭이 보이는데 1705년(숙종 31)에 統制使 吳重周가 군사상의 요충지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설치한 鎭이다. 옛날에는 지역마다 강의 이름을 달리 불렀는데, 현재 통일되어 불리고 있는 섬진강의 이름이 바로 이 蟾津으로부터 나왔다.(이기봉)

  • 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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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금천군 금천면, 고동면, 산외면, 서북면, 우봉면,웅덕면, 구이면, 좌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금천군 대부분 지역, 봉천군 일부, 평산군 일부, 토산군 서쪽 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1395년(태조 4)에 縣令으로 승격되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이속되었다. 1651년(효종 2)에 江陰縣과 牛峰縣을 합쳐 금천군으로 승격시키고 吾早川의 남쪽에 읍을 세웠다. 1678년(숙종 4) 저탄의 남쪽으로 치소를 옮겼다가 1753년(영조 29)에 다시 오조천의 남쪽으로 옮겼다. 후에 다시 저탄의 남쪽으로 옮겼다. 지도상의 읍치는 오조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옛 江陰은 지도의 아랫쪽 助邑浦 부근에 위치하였다.조읍포는 예성강 조운의 중심지이었다. 이 곳에 위치한 조읍포창은 황주, 서흥, 평산, 봉산, 곡산, 수안, 안악, 재령, 신계, 토산, 우봉, 강음 12읍의 전세를 수납 보관하였다가 서울로 조운하였던 중요한 漕倉이었다. 그러나 1713년(숙종 39)에 폐지하고, 다만 本郡 세곡만 조운하였다. 조읍포는 수운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개성, 배천, 해주, 재령 등 사방으로통하는 육운의 요충지이었다. 읍치 좌측에 ''舊金郊基''가 표시되어 있다. 금교역은 金郊道 찰방역이 평산부 寶山驛으로 옮겨가기 이전 10역을 거느리는 규모가 큰 역이었다.(金在完)

  • 길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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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주목은 동해안에 연해 있는 고을로 북으로는 明川, 남으로는 端川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길성면, 웅평면, 동해면, 덕사면, 장백면, 영북면, 양사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길주군과 화대군 일부 지역이 과거 길주목 영역이다. 지도에는 산천을 비롯하여 관내의 각社가 표시되어 있고 봉수, 진보 등의 군사적 요소가 상세하다. 해안가에는 城津鎭이 붉은 원으로 강조되었는데 1614년(광해군 6)에 관찰사 崔瓘의 청에 따라 설치된 것이다. 성진진의 바로 앞에 있는 望德은 수려한 경치로 이름났던 곳이다. 또한 서북쪽의 西北鎭은 1673년(현종 14) 관찰사 南九萬의 청에 따라 將軍坡堡, 斜河北堡, 德萬洞堡를 병합시켜 만든 것이다. 북관대로에 위치한 嶺東倉과 臨溟驛 사이에는 營耳毛老라는 지명이 있는데, ''毛老''는 산길에서 돌아 굽어지는 곳을 일컫는 방언으로 한자 표기로는 ''隅''에 해당한다. 읍치의 서북쪽에는 溫井도 보이고 있다.(노혜정)

  • 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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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금산현으로 개령군의 영현이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산부(지금의 성주)에 이속되었고, 1390년(공양왕 2)에 監務를 두었다. 1398년(정종 1)에 御胎를 묻은 곳이라 해서 군으로 승격시켰다. 금산군은 지금의 김천시 덕곡동을 제외한 김천시내 전체, 대항면, 조마면, 구성면 북부, 봉산면, 어모면, 감문면 서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김천시 김천시내 교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동쪽 1리에 위치한 五波山이다. 지도에는 오파산에서 分岐하는 산줄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 남쪽에 鳶華池와 鳳凰臺가 위치하고 있다. 봉황대는 원래 못가 둑에 있었는데, 낡고 무너져서 못 안에 옮겨 세웠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直指寺는 418년(신라 눌지왕 2) 墨湖子가 창건하였고, 936년(고려 태조 19)에 能如가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 仁守, 明禮가 재건하였다. 이 절에는 국보 제 475호 석조 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다. 신라 때 阿道가 이 곳을 큰 절이 위치할 자리라고 가리켰다 하여 직지사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萬歲樓는 직지사 입구에 위치한 樓閣이다. 직지사 북쪽에 위치한 황악산은 조선 정종 때 御胎를 안치한 곳이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金泉驛은 金泉道의 찰방역으로서 19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金在完)

  • 보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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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현은 현재 보령시 보령시내,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홍성군 광천읍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보령현의 읍치는 현재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이 지역에 보령성곽과 향교말 지명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 形勝條에 ''보령현은 땅이 협소하고 서해가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보령현은 오서산(791m)에서 성주산(680m)·옥마산(602m)을 거쳐 월명산(544m)에 이르는 산지와 해안의 구릉지로 되어 있다. 본 현 동북쪽 4리 지점에 위치한唐山(지도에는 鎭堂山으로 표시되어 있음)이 고을의 진산이다. 지도에서는 祖山의 역할을 하는 白月山에서 산줄기가 주산인 당산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대 지형도에는 진당산이 읍치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도에서는 진산 및 주산으로서 위쪽에 배치함으로써 풍수형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위쪽이 동쪽, 아래쪽이 서쪽, 우측이 남쪽, 좌측이 북쪽으로 알고 지도를 읽어야 한다. 읍성은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보령현의 세곡과 대동미가 지도에 나오는 海倉에서 모아져 경강까지 賃運되었다. 산세는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으나 절, 서원, 역, 원, 창 등이 거의 나와 있지 않다.(金在完)

  • 무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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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현은 고창군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심원면과 아산면의 일부지역으로 읍치는 무장면 성내리, 무장리, 교흥리 일대에 있었다. 무장현은 1417년(태종 17) 읍치 남동쪽의 茂松縣과 서북쪽의 長沙縣을 합쳐 만들어졌으며 새로운 읍치는 두 현의 중간으로 결정되었다. 현의 실제 모양은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비스듬하게 서해를 향하고 있는데 지도에서는 거의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묘사하였다. 따라서 지도의 읍치 동남쪽이 실제로는 바다와접해 있지 않음에도 바다와 접해 있는 것으로, 읍치 동북쪽 부분도 확대·과장되어 그려져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禪雲山은 ≪高麗史≫ 樂志에 나오는 禪雲山曲의 무대이며, 높이는 300-400m에 불과하지만 북쪽 곰소만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어 신령스러운 느낌을 발산하기 때문에 禪雲寺를 비롯한 많은 절들이 곳곳에자리잡고 있다. 읍치 서쪽의 忠賢祠는 1608년(선조 41)에 세워지고 광해군이 친필로 사액한 서원으로 ≪眉岩日記≫로 알려진 柳希春 등이 배향되었다. 기타 읍성과 각종 관아 건물 및 남문밖에 있었던 觀豊亭이 연못과 함께 그려져 있고 烽臺, 靑松驛 등도 보인다.(이기봉)

  • 광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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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0년(고려 태조 23)부터 광주로 불렸으며 현재의 경기도 광주군, 하남시, 성남시, 의왕시, 군포시 일대와 화성군 매송면 일부지역(원리, 송라리, 야목리 등), 안산시 일부지역(일동, 이동, 본오동, 성포동), 서울특별시 송파구, 강동구 일부지역, 남양주시 와부읍 일부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남한산성 안의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가 1917년까지 중심지였다. 이 지도에서 보이는 山城은 南漢山城으로 병자호란때 왕이 피난하였다가 결국은 항복하였다. 門과 將臺, 甕城의 위치를 자세히 그리고 있으며 성곽 안의 건물들과 사찰을 표시하고 있다. 서울의 남동쪽, 한강의 이남에 위치한 곳으로 지도의 위가 서쪽이 되게 그리고 있다. 水運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으므로 松坡津, 三田渡, 廣津, 龍津 등의 나루가 한강변에 발달하였으며 倉庫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가는 大路상에 있는 곳으로 慶安驛, 奉安驛, 良才驛, 樂生驛, 沙平院, 渡迷院, 廣津院 등의 역원이 배치되어 있으며 곳곳에 酒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사찰과 암자를 지도에 자세히 표시하고 있다. 禮賓山아래는 議政府의 柴場이었으며 토산품으로 磁器, 陶器를 들 수 있는데 있는데 司饔院의 分院이 이지역에 있었다.(이현군)

  • 덕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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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천군은 일제시대의 잠도면, 잠상면을 제외한 덕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덕천군 일대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을의 鎭山이 지도의 왼쪽 아래에 보이는 長安山으로 되어 있고, ≪輿地圖書≫에는 고을의 主脈이 읍치 위쪽의 堂山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진산을 읍치에 가까운 산으로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의 한가운데 흐르는 강은 寧遠에서 발원한 대동강의 상류인데 孟山쪽에서 내려오는 맹산강이 금성산성 부근에서 합류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못하다. 지도에는 읍치가 매우 확대·과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舍와 衙舍 등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다. 기타 院과 倉의 표시가 자세하며, 여백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알 수 있고 火田도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김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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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년(고려 현종 9)에 김화로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의 김화군은 1914년에 김화군과 금성군을 합한 것이다. 김화현의 범위 중에서 휴전선 이남은 1952년에 철원군에 편입되었으며 휴전선 이북은 김화군에 편입되어 있는 상태이다. 현재 남한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근남면, 서면과 북한의 강원도 김화군의 서쪽지역인 근동면, 근북면, 원북면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가 중심지가 된다. 읍치에는 客舍, 衙舍, 倉庫, 鄕校가 표시되어 있다. 縣 앞의 하천은 南大川이며 서북쪽으로 가서 한탄강에 합류된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縣을 감싸고 있어 땅이 넓지 못하다. ≪동국여지승람≫에 강희백, 성석인, 이곡 등의 시에서 ''산이 고을을 포위하고 있다,'' ''山川이 답답하게 막혀서 평탄한 땅이 없구나'' 등으로 이 지역을 묘사하고 있다. 남서쪽의 永平에서 登古介를 넘고 生昌驛(김화읍 생창리)을 지나 縣에 연결되는 길은 서울로 통하며 이 길은 동북쪽의 中峴을 넘어 金城으로 이어지는데 함경도 西水羅까지 통하는 한반도 동북방향의 大路이다. 도로가 통과하는 고개를 명칭과 함께 표시하였다. 이 지도에서 특이한 점은 登古介, 可古介, 成造古介, 小古介 등 우리말의 ''고개''를 ''古介''로 쓰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강원도 군현지도에서 볼 수 없는 점이다. 지도의 여백에 이 지역의 길들이 험준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縣의 북쪽에 성곽은 그리지 않고 古山城을 표시하였으며 縣 남쪽에는 柳琳大捷碑가 보인다.忠烈祠, 水泰菴 등의 사당과 사찰이 표시되어 있으며 남쪽에 七臺岩을 그려놓았다.(이현군)

  • 기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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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장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장안읍, 정관면, 철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서쪽에 위치한 炭山이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많은 소 하천들이 발원하여 사방으로 흘러가는 지형으로 산이 많고 들이 적은 군현임을 알 수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읍성은 方形의 石城으로 둘레가 3천 1백 97척이고, 높이가 12척이다. 읍성 우측에 古豆毛浦鎭이 보이는데, 1510년(중종 5)에 이 곳에 석성을 쌓고, 수군만호가 주재하였으나 1592년(선조 25)에 동래로 옮겨갔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長安寺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인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月照大師가 중건했다. 다른 군현지도와 달리 기장현 지도에는 각 도로가 大路·中路·小路·衝路 등으로 나뉘어 표시되어 있다. 또한 面里, 封山, 祈雨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南山烽燧는 남쪽으로는 동래부 干飛烏山烽燧에 응하고, 북쪽으로 阿爾烽燧에 응한다. 읍성 아래쪽에 보이는 鴛鴦臺는 또한 侍郞臺라고 하는데, 1733년(영조 9)에 縣監 權  가 이조참의가 되어 이 곳에 와서 "시랑대" 석자를 새겼다 한다. 옛날부터 영험하다 하여 4월과 10월에 용왕제를 지내며, 날이 가물면 기우제도 지낸다고 한다.(金在完)

  • 보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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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현은 현재 보은군 보은읍, 수한면, 탄부면, 삼승면, 내북면, 산외면, 내속리면, 외속리면, 마로면 등 1읍 8면을 포함하는지역이었다. 보은현은 경상도에 속했다가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현재 보은읍 교사리 부근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蛇山이다. 읍치 동북쪽에 위치한 삼년산성은 史蹟 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년산성은 백제에 대한 신라의 전초기지로 470년(신라 자비왕 13)에 쌓은 古城으로서 성벽의 보존이 양호하여 크지는 않지만 웅장하고 아름답다. 고지도 우측에 속리산 법주사에 대하여 자세히 그려져 있다. 특히 속리산, 대웅전, 오층각, 용화각, 문장대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14)에 義信이 흰 말에 불경을 싣고 이 절을 세웠다. 신라 성덕왕이 중수하고 776년(신라 혜공왕 12)에 眞表가 중창하였으며, 1624년(인조2)에 다시 벽암이 중수하였다. 捌相殿, 磨崖如來倚象, 四天王石燈, 雙獅子石燈, 石蓮池 등의 국보와 石槽, 石橋, 珊瑚殿, 金身丈六像, 同幢, 75자 높이의 미륵불 등으로 유명하다. 특히 팔상전은 신라시대의 목탑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신라와 고려 모두 속리산에서 中祀를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감하여 본 읍으로 하여금 致祭하도록 하였다.(金在完)

  • 무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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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부는 지금의 부남면을 제외한 무주군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주읍 읍내리에 있었다. 무주부는 1391년(공양왕 3)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쳐 만들었고, 1414년(태종 14)에 주계를 治所로 삼았는데 무풍현은 지도 동북쪽 풍서면, 풍동면, 풍남면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도 가운데에는 五大史庫 중의 하나였던 적상산 사고가 적상산성의 天然要塞적 모습과 함께 자세히 그려져 있다. 산성 안에는 왕실의 계보가 안치된 선원각과 왕조실록이 보관된 사고 및 객사가 그려져 있어 史庫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읍치 남쪽에는 加玉洞酒幕이 표시되어 있어 관에서 운영하는 驛院뿐만 아니라 사적으로 운영되어 길손의 편의를 돕던 시설도 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기타 읍내에는 향교·객사·아사뿐만 아니라 1706년(숙종 32)에 세운 喚垂亭 등의 정자와 敎場, 주자영당 등이 그려져 있고, 읍의 진산인 향로봉이 향교 뒤에 그려져 있다.(이기봉)

  • 광주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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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0년(고려 태조 23)부터 광주로 불렸으며 현재의 경기도 광주군, 하남시, 성남시, 의왕시, 군포시 일대와 화성군 매송면 일부지역(원리, 송라리, 야목리 등), 안산시 일부지역(일동, 이동, 본오동, 성포동), 서울특별시 송파구, 강동구 일부지역, 남양주시 와부읍 일부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남한산성 안의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가 1917년까지 중심지였다. 이 지도에서 보이는 山城은 南漢山城으로 병자호란때 왕이 피난하였다가 결국은 항복하였다. 門과 將臺, 甕城의 위치를 자세히 그리고 있으며 성곽 안의 건물들과 사찰을 표시하고 있다. 서울의 남동쪽, 한강의 이남에 위치한 곳으로 지도의 위가 서쪽이 되게 그리고 있다. 水運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으므로 松坡津, 三田渡, 廣津, 龍津 등의 나루가 한강변에 발달하였으며 倉庫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가는 大路상에 있는 곳으로 慶安驛, 奉安驛, 良才驛, 樂生驛, 沙平院, 渡迷院, 廣津院 등의 역원이 배치되어 있으며 곳곳에 酒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사찰과 암자를 지도에 자세히 표시하고 있다. 禮賓山아래는 議政府의 柴場이었으며 토산품으로 磁器, 陶器를 들 수 있는데 있는데 司饔院의 分院이 이지역에 있었다.(이현군)

  • 맹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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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산현은 일제시대의 옥천면, 봉인면, 학천면을 제외한 맹산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맹산군 일대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을의 鎭山이 지도의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頭尾(→無)山으로 되어 있고, ≪輿地圖書≫에는 고을의 主脈이 읍치 위쪽의 秀羅山으로 되어 있는데 나중에 진산을 읍치에 가까운 산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의 오른쪽으로는 白頭大幹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나간다. 頭尾嶺 등은 함경도의 永興 땅으로 넘어가는 요충지로서 지도의 定平界는 잘못 표시된 것이다. 영흥과의 경계 상에 鐵瓮城이 보이고 있는데 그렇게 크지 않은 성이지만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고 항아리와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성은 맹산현의 옛 이름인 鐵瓮縣이 유래된 곳이지만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영흥 관할로 옮겨졌다고 한다. 읍치는 맹산강가에 있으며 ?舍와 衙舍, 倉 등만 간략히 표시되어 있고 관사 앞에는 특별히 大泉이 그려져 있다. 기타 읍치를 제외한 부분이 많이 축소·왜곡되어 있고 여백주기를 보면 논(畓)이 하나도 표시되어 있지 않아 논농사의 한계지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낭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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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川縣이었다가 757년(신라 景德王 16)에 狼川郡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화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에서 사내면(춘천부 땅)을 제외한 상서면, 화천읍, 하남면, 간동면 일대에 해당하며 중심지는 현재의 화천읍내가 된다. 읍치는 성곽은 없고 다른 강원도 군현지도에서처럼 客舍, 衙舍, 倉庫만 표시하고 있다. 鄕校는 邑治의 서쪽 화천읍 하리에 있었다. 읍치의서쪽에 있는 牲山이 鎭山에 해당하며 과거에 山城이 있었다고 한다. 읍치의 약간 북쪽에 있는 新邑里(화천읍 신읍리)는 낭천읍의 읍터가 되었던 적이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붙였다. 현 북쪽에서 흘러온 馬峴川이 縣 서쪽에서 북한강과 합류되는데 북한강 중 狼川縣의 앞쪽은 과거에는 南江으로 불리었다.하남면 위나리에 남강나루가 있었다. 鋤吾之川은 하남면 서오지리라는 지명을 통해 알 수 있으며 母津江은 북한강의 일부분을 지칭하는 것이다. 육로와 수운을 통해 가평을 지나 서울로 연결되며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楊口, 金城과 통한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와 경계가 되는 山의 위치, 명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山陽驛(상서면 산양리), 芳川驛(간동면 방천리), 原川驛(하남면 원천리)이 이곳에 있었다. 邑治 북서쪽의 烽燧山(상서면 봉오리)은 과거에 烽火를 들었던 이유로 산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龍淵, 龍首, 龍岩寺, 龍華山 등 ''龍''字가 들어간 지명이 많은데 崔府(1369-1452)의 詩에 ''산은 龍이 서린 것 같으며 地軸이 깊도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雲峰寺(화천읍 동촌리 운봉동), 龍岩寺(간동면 방천리 절골) 등의 사찰이 과거에 있었는데 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김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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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부는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전체, 창원시 대산면, 부산광역시 강서구 낙동강 西岸, 강동동과 명지동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김해시내 동상동과 서상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으로 3리 떨어진 盆山인데, 이 산의 정상에 土城이 있다. 읍치의 동북쪽에 있는 神魚山이 邑基의 주맥이 된다. 구지봉은 분성산의 줄기로서 산 모양이 거북의 머리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이 산에 김수로왕 탄생과 가야건국설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서려 있다. 읍성은 고려 우왕 때 부사 박위가 쌓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성은 방형의 石築으로 둘레가 4,683척, 높이가 15척이다. 그 주위를 김수로왕 때 쌓았다는 土城이 둘러싸고 있다. 토성 밖에 수로왕릉과 수로왕비 허씨릉이 있는데, 봄과 가을에 그 능에서 제사를 지낸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新山書院은 1576년(선조 9)에 세워져 조식을 主享하고, 신리성을 아울러 從享하였다. 그리고 이 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다. 신산서원 북쪽에 있는 甘露寺는 신어산 동쪽 玉池淵에 임해 있다. 1237년(고려 고종 24)에 海安이 건립하였고, 夢庵이 쓴 記文이 있다.(金在完)

  • 부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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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현은 현재 부여군 부여읍, 초촌면, 규암면, 은산면, 공주군 노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부여현의 읍치는 현재 부여읍 舊衙里, 官北里, 舊校里 일대에 있었다. 본래 百濟의 所夫里郡이었고 사비라고도 불렀다. 백제의 성왕이 웅천(지금의 공주)으로부터 여기에 와서 도읍하였고, 南夫餘라고 이름하였다. 의자왕 때에 신라의 김유신이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군으로 공격하여 멸망당했다. 부여는 538년(백제 성왕 16)부터 660년(백제 의자왕 20)까지 123년 간 백제의 도읍지였다. 현재도 부소산성·낙화암·고란사·궁남지·정림사지 5층석탑 등 옛 백제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부여는 공주와 마찬가지로 금강 남쪽에 자리잡고 있고, 수로로는 白江(기벌포), 육로로는 炭峴을 막으면 방어가 가능한 견고한 요새이었다. 현 북쪽 3리에 위치한 扶蘇山이 진산이다. 부소산에는 백제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 부소산성이 있는데, 일명 半月城이라 부른다. 부소산을 쌓아 안고 두 머리가 백마강에 닿았는데, 그 형상이 반달 같기 때문에 반월성이라 이름한 것이다.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만 3천 6척이니이것이 곧 옛 百濟의 都城이었다.  현북쪽에 落花巖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宮女들이 쏟아져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가서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이름했다. 義烈祠가 현 동쪽 10리에 있는데, 1576년(선조 9)에 세워졌고, 2년 후에 사액을 받았다. 백제 때 충신 成忠, 興首, 階伯을 모신 곳이다.(金在完)

  • 부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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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현은 백산면을 제외한 부안군 전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부안읍 서외리, 동중리 일대에 있었다. 부안현은 1416년(태종 16) 扶寧縣과 保安縣을 합해 만들어졌는데 부령현은 부안 읍치쪽, 보안현은 현 남쪽 입하면, 입상면 일대에 있었다. 현의 서남부는 현재 국립공원인 변산의 우뚝우뚝 솟은 기암절벽 명산들이 잘 그려져 있으며, 신라의 惠丘頭陀가 창건했다는 來蘇寺와 고려 숙종 때 圓鑑國師가 개창했다는 開巖寺 등의 절들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북·서쪽으로는 고부천과 동진강이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낸 저평한 모습이 서남부와 대비되어 이해될 수 있도록 표현되었다. 현의 남쪽에는 종3품 僉使가 파견된 위도진, 종4품 萬戶가 파견된 검모진, 종5품 別將이 파견된 격포진 등이 전선과 함께 표시되어 있고, 月古里烽臺, 界火島烽燧 등이 그려져 있어 군사적 요충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격포진에는 내륙으로 쑥 들어온 천혜의 항구 모습이 잘 그려져 있고 안쪽에는 숙종 때 쌓았던 제방 같은 것이 보인다. 이 곳은 일찍부터 입구에 제방을 쌓아 간척된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이며, 기타 왼쪽 위쪽에 지금은 간척되어 육지가 되어버린 계화도가 보이고 있다.(이기봉)

  • 교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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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해당하는 지역으로 읍내리가 중심지가 된다. 1629년(인조 7)에 府로 승격되었으며 1914년에 강화군에 합하여졌다. 지도에서 邑治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성곽은 1629년(인조 7)에 南陽의 花梁에 있던 水營을 월곶진터(읍내리)로 옮길 때 쌓았다한다. 이 지역은 1633년(인조 11)에 三道統禦使를 두어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의 水軍을 관장하던 곳이다. 지도에 많은 浦, 津이 있으며 관할하던 선박의 수량이 지도 여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지도 안에 水路를 통할 때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船倉 등의 창고가 지도에 나와 있으며 무기를 관리하던 軍器庫가 표시되어 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 修井山, 華盖山에 烽燧가 있었으며 華盖山에는 山城이 있었다. 화개산 남쪽의 華岩寺는 고려 말 牧隱 李穡이 독서하던 곳이라 전해진다. 남쪽의 鷹岩은 지금 상여바위로 불리는 곳이며 그 아래의 松家島는 지금의 석모도이다. 지금의 석모도는 과거에는 두 개의 큰 섬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중 송가도는 북쪽의 섬에 해당한다. 송가도에는 山林과 石材의 채취를 금지하는 禁山이 설치되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지 않은 지역이지만 脈勢를 잡아 산줄기들을 표현하였으며 모두 府의 중심지를 향하게 그렸다.(이현군)

  • 문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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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化縣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황해도 신천군 초리면, 문무면, 용진면, 산천면, 궁흥면, 문화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지금의 황해남도 삼천군 중·북부, 안악군 서부, 신천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문화현의 옛 읍치는 본래 현 읍치에서 북쪽으로 13리 떨어진 삼천군 고현리에 있었으나 역병이 자주 돌아 1520년(중종 15) 건지산 남쪽으로 옮겼다. 문화현의 진산은 고을 북쪽 4리에 있는 乾止山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구월산은 황해도의 명산이다. 구월산은 阿斯達山, 弓忽, 甑山, 三危라고도 불린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을 평양에서 이 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문화현에는 鳳崗書院과 程溪書院이 있다. 前者는 1656년(효종 7)에 세워져 1675년(숙종 1)에 사액을 받았고, 後者는 1670년(현종 11)에 세워져 1708년(숙종 34)에 사액을 받았다. 우측에 보이는 三聖殿은 구월산 성당리에 있다. 곧 환인·환웅·단군의 사당이다. 나라에서 봄가을로 香祝을 내려 보내 제사를 드리며, 또 비가 심한 때와 가물 때 기도하던 곳이다. 부근의 錢山祠에 매년 봄·가을·겨울 10월에 향축을 내려보내 제사를 드렸다. 아래쪽에 唐莊京은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이라고 한다.(金在完)

  • 단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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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천부는 동해에 연해 있는 고을로 위로는 吉州, 아래로는 利原과 접해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복귀면, 하다면, 신만면, 수하면, 북두일면, 남두일면, 광천면, 이중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은 함경남도 단천시와 허천군 일부 지역이과거 단천군 지역이다.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성은 1449년(세종 31)에 축조되었고 이후 1733년(영조 9) 다시 쌓은 것이다. 둘레가 1,945척으로 매우 작은 규모이다. 지도에는 산천과 같은 자연적 요소, 기타 인문 요소들이 표현되어 있을 뿐 관내 행정구역인 社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동쪽 해안가의 胡打里堡는 1745년(영조 21)에 혁파되는데 지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1745년 이전 상황이 지도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산지에 祖龍德, 沙里德, 羊德 등 ''德''으로 끝나는 지명이 많이 표시되어 있다. 德은 산정이 평평한 곳을 일컽는 함경도 지역의 방언이다. 梨洞堡 옆의 金富巳德은 넓은 바위같은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加先銀穴, 蔬德銀穴 등의 은광도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노혜정)

  • 남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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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현은 지금의 창선면을 제외한 남해군 전체에 해당하고, 읍치는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 남변리,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 위쪽이 남쪽, 아래쪽이 북쪽, 우측이 서쪽, 좌측이 동쪽이다. 이 고을의 진산은 서쪽에 위치한 望雲山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따르면 읍성은 1459년(세조 5)에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876척, 높이가 13척이라 한다. 성안에 우물 1개, 샘이 5개가 있는데, 사시사철 마르지 않았다 한다. 1459년(세조 5)에 성을 쌓았다. 아래쪽에 보이는 古縣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石築으로 둘레가 1,740척, 높이가 10척이다. 그 외에 평산포진, 곡포보, 상주포보, 미조항진은 모두 海岸防禦를 위한 鎭이다. 아래쪽에 보이는 忠烈祠는 노량 북쪽 호두산 기슭에 있는 사당이다. 이순신 장군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1632년(인조 10)에 본래 초가를 세웠는데, 1657년(효종 9)에 조정에서 통제사 정 익에게 명하여 크게 사당을 세웠고, 1662년(현종 4)에 충렬사로 사액되었다. 지도 하단의 德申驛은 晋州 召村道의 屬驛이었다.(金在完)

  • 북경궁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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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때의 紫禁城 일대를 그린 지도. 이 지도가 수입된 중국 쪽 지도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인지, 사신의 견문기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지도의 중앙부에 午門, 承天門, 大淸門이 직선상에 있다.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 안쪽으로 자금성의 주요 전각들이 표시되어 있다. 오문 아래 쪽에 있는 承天門은 현재의 天安門이다. 옹정제(1723-1735) 때 이곳을 중건하면서 천안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지도는 옹정제 이전의 청나라 황성이 표현된 것이다. 午門의 아래쪽으로 청나라 때의 궁궐 규모임을 보여주는 大淸門이 표시되어 있다. 오문 안쪽의 太和殿과 中和殿은 국가의 공식 행사가 치러지던 곳이며, 그 위 乾淸宮은 청나라 황제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대청문 아래쪽으로 下馬碑가 있고 그 주변으로 여러 관서 건물들이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이들 관서를 감싸고 있는 성곽은 북경의 內城 중 일부인데, 현재는 내성의 남문인 正陽門을 제외하고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배우성)

  • 영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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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군은 현재의 영광군 전체와 신안군의 임자면·증도면, 무안군의 망운면·운남면과 장성군의 삼계면·삼서면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영광읍 무령리에 있었다. 영광군은 원래 세 개의 현이 합쳐진 것으로 동쪽의 현내면은 고려 때 영광에 속하게 된 森溪廢縣의 땅이고, 읍치 남쪽 동서로 뻗은 하천유역은 신라 碣島縣의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법성진은 영광 굴비로 유명한 곳으로 매년 봄 京外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바다 위에서 조기를 팔고 사던 波市田이 성황을 이뤘던 곳이며,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밀고 들어와 마치 호수와 같다 하여 大西湖라고도 불렸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으며, 전라도 12개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수집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법성창이라는 漕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래쪽의 임자진과 다경포진에는 각각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와 종4품의 萬戶가 파견되었으며, 두 지역 모두 나라에서 말을 키우던 牧場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다경포진 오른쪽에 나주목 소관이었던 목장이 표시되어 있다. 다경포진과 망운면 지역은 영광군의 월경지로서 지금의 무안군 망운면과 운남면에 해당하며 원래는 望雲部曲이 있던 곳이다. 그밖에 서원과 절, 창, 봉수 등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교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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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交河로 이름을 고쳤으며 경기도 파주시내, 파주시 교하면, 탄현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14년에 파주에 합하여졌다. 중심지는 파주시 교하면 교하리, 파주시 금릉동일대이다. 교하현은 원래 탄현면 갈현리에 있었는데 1733년(영조 9)에 長陵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交河縣을 금촌읍 금릉리(현재의 파주시 금릉동)으로 옮겼다가 7년 후 다시 교하면 교하리로 옮기게 된다. 지도 왼쪽의 여러 강들이 모이는 지점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가장 위쪽의 강이 임진강이고, 가운데는 恭陵川(곡릉천), 아래쪽은 한강이다. 임진강 하류에 河中島인 一眉島가 있었던 것이 흥미롭다. 읍치 내부 건물들의 그림은 그리지 않고 건물 이름만 표시한 점이 독특한데 客舍와 司倉 사이에 官坐地라 적고 있다. 新谷書院은 파주시 금릉동에 있는 것으로 1683년(숙종 9)에 세워져 尹宣擧 등을 배향하였다. 邑治 뒤쪽의 烽燧는 黔丹山烽燧이다. 주변의 산은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있으며 山所가 있는 곳은 산줄기를 하나의 독자적 形局이 되게 그렸다.(이현군)

  • 박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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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천군은 일제시대의 박천군 박천읍, 동남면, 덕안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박천군 일대이다. 고을의 동쪽·북쪽의 산줄기로부터 흘러 내려온 작은 물줄기들이 지금의 대령강인 大定江과 합류하여 청천강과 더불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舍·衙舍 등 중요한 건물만 표시하였으며, 그 아래쪽에는 옛 읍성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古城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서북 嘉山쪽으로부터 들어오는 방어상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1741년(영조 17)에 새로 설치한 군사시설로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북방수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烽燧와 고개의 표현이 자세함도 고을의 요충적 성격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성진 왼쪽에 있는 望毛路는 길이 아니라 해안가 절벽바위의 이름이다.(가산군 지도의 望毛老) 기타 교과서에 안주·박천평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넓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고을답게 여백주기를 보면 논이 밭보다 많은 고을임을 알려주고 있다.(이기봉)

  • 덕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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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부는 함경남도의 해안에 위치한 작은 고을로 남으로는 安邊, 북으로는 文川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덕원군 부내면, 북성면, 적전면, 현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강원도 원산시로 편입되어 있다. 지도에는 고을의 모습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쪽의 東高山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산으로 그 아래쪽에는 萬景菴이 있다. 이 절은 인적이 드문 첩첩산중에 위치하여 당시에는 學僧 몇 명만이 거주할 뿐이었다. 그 위편에 위치한 馬息嶺은 ≪大東輿地圖≫에서 ''馬樹嶺''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고개 위에는 태조 이성계가 말을 달리던 곳이 있다고 한다. 고을 남동쪽의 元山坪은 유명한 明沙十里가 있는 곳으로 길게 나온 連島는 현재의 갈마반도에 해당한다. 이것이 남동쪽의 파도를 막아주어 천혜의 항구를 만들어 준 것이다. 擇里志나 輿地圖書 등의 기록에도 이곳에 각지의 배들이 몰려들어 물자의 집산지였음을 전하고 있다. 1737년(영조 13)에는 이곳에 交濟倉인 元山倉이 설치되어 진휼곡을 비축하였는데, 水運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지도상에는 元倉으로 표기되어 있다. 동쪽 해안에는 1695년(숙종 21) 창건되어 송시열을 배향한 尤齋書院도 표시되어 있다.(노혜정)

  • 단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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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세종 때 江城縣과 丹溪縣의 두 명칭을 따서 단성현이라고 하였다. 단성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의 동부, 신등면, 신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읍치는 북쪽에 위치한 來山이다. 단계폐현의 읍치는 동북쪽 단계창 부근이었다. 객사 오른쪽에 보이는 赤壁은 붉은 빛의 바위더미가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것 같아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송시열이 바위 위에 ''赤壁'' 2자를 새겼다. 적벽 상류에 있는백마산성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삼면이 절벽이고, 둘레가 2,795척이다. 그리고 동남쪽 100여 척을 돌로 쌓아 허한 곳을 보완하였다. 文益漸書院은 1401년(태종 1)에 세워져, 문익점과 권 도를 모셔 왔는데, 권 도는 신등면 단계리의 완계서원으로 옮겨 모셨다. 1612년(광해군 4)에 중건되었고, 1787년(정조 11)에 사액되었다. 향교 위쪽에 위치한 斷俗寺는 749년(신라 경덕왕 7)에 대내마 이 준이 벼슬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또는 신충이 764년(신라 경덕왕 22)에 임금을 위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洞口에는 신라 때 최치원이 廣濟岩門이라고 쓴 바위가 있고, 절터에는 보물 제 72호의 단속사지 동삼층석탑과 보물 제 73호의 단속사지 서삼층석탑이 있다.(金在完)

  • 비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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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인현은 현재 서천군 비인면, 서면, 종천면, 판교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비인현의 읍치는 비인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도 읍성의 성곽이 일부 남아 있다. 지도에서 산지가 읍치를 겹겹이 싸고 있고, 산지가 바다에 가까이 면해 있는 것처럼 나타나 있다. 지도에서 위쪽이 동쪽, 아래쪽이 서쪽, 왼쪽이 북쪽, 오른쪽이 남쪽이다. 扶蘇山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月明山(298m)을 이루고, 그 한 줄기가 읍치의 진산 및 주산을 이루었다. 주산에서 명당인 읍치로 내려오는 기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지도상에 보이는 鍾川은 본 읍 남쪽 13리 지점에 있는데, 물 근원이 읍 동북쪽 9리지점에 있는 深洞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도에서도 근원을 강조하기 위하여 深洞이라는 지명을 표시하고 있다. 읍성은 돌로 쌓은 것이다. 지도에는 둥근 성벽, 2개의 성문, 관아 건물이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좌측에 보이는 石塔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 석탑은 5층 석탑으로 보물 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海倉은 長津浦에 위치하는데, 이 곳에서 세곡이 수납되어 경강까지 운반되었다.(金在完)

  • 영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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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군은 지금의 금정면, 신북면·시종면 북쪽을 제외한 영암군 전체와 해남면의 옥천면, 북일면, 북평면, 송지면 그리고 완도군의 보길도 부근 도서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암읍 동무리, 서남리에있었다. 지도에는 서쪽이 위쪽을 향하고 있는데 읍치의 坐向을 고려한 결과로 보이며, 읍치의 성곽이 확대·과장되어 다른 부분은 상당히 축소되어 그려졌다. 신라 때 小祀에 해당되었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山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 월출산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산 안쪽의 道甲寺는 풍수지리설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道詵國師가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했던 절로서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도선국사와 관련된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읍치 위쪽의 곤일면과 곤이면은 고려 때 영암에 완전히 속하게 된 昆湄縣 지역이며, 읍치 왼쪽의 옥천면, 북평면, 송지면은 각각 冷泉部曲, 北平鄕, 松首鄕이 있었던 지역으로 실제로는 해남현의 땅을 넘어 있는 越境地에 해당한다. 기타 於蘭鎭, 梨津鎭 등이 지도의 왼쪽에 보이며, 그 옆으로 보길도 주변의 섬들이 실지보다 작은 형태로 그려져 있다. 갈두진은 이미 폐지되었으나 주기에 그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구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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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례현은 산동면과 광의면·용방면 일부를 제외한 구례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구례읍 봉동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정사각형의 읍성이 선명하고 섬진강 하류 쪽으로는 지도에도 쓰여 있듯이 하동부터 깎아지른 긴 계곡이 30리나 이어져 있어 중요한 要衝地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토지면 송정리에 있는 石柱洞은 고려 말기에 石柱鎭이 설치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았고, 조선 초기에는 황폐해져 있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다시 군사시설을 설치하여 왜군을 방어하였다.지도 오른쪽 위쪽의 華嚴寺는 31본산의 하나로 우리 나라 華嚴宗의 鼻祖로 알려진 義相이 신라 문무왕 때 화엄경 80권을 석판에 새겨 보관하였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화려한 석등과 석탑 등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유명한 사찰이다. 그 아래쪽의 燕谷寺는 신라 때 만들어진 후 고려 초에 번창하여 신라 말, 고려 초의 부도 및 석탑 등의 국보와 보물을 갖고 있는 유명한 절이다. 그밖에 고을 鎭山인 지리산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고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섬진강의 선명한 점이 눈에 띄며, 지도 오른쪽에는 나라에서 쓸 나무를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栗木封山 및 宜松封山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 배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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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배천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연백군 동부지역이었다. 현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해방 전 호동면 지역의 일부를 제외한 배천군 전지역에 해당한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1리에 위치한 雉岳山이다. 북쪽 高正山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天登山을 거쳐 진산 겸 주산인 치악산으로 이어지고, 그 아래 관아가 자리잡고 있다. 명당수가 고을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읍치 남쪽으로 모아진 다음, 서쪽으로 흘러 예성강과 합류하고 있다. 남쪽 玉山이 案山의 역할을 하고 있다. ,碧瀾津 對岸에 위치한 金谷浦는 배천 고을의 세곡을 실어 날랐던곳이다. 부근에 위치한 海倉은 금곡포창이라고 불렸는데, 해주·연안·풍천·신천·장연·문화·강령·옹진·송화·장련·은률 및 본군의 田稅를 거두어 배로 서울까지 운반하였다. 衙舍 좌측에 보이는 서원은 文會書院인데,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불탄 후, 1606년(선조 39)에 重建되었고, 1628년(인조6)에 사액을 받았다. 1680년(숙종6)에 東西祠를 창건하고 1698년(숙종 24)에 거듭 사액하였다. 고을 동쪽 예성강변 錢浦 對岸 견불산기슭에 위치한 江西寺는 중 혜소가 여기 거주하였는데 김부식이 늘 나귀를 타고 방문하였다고 전한다. 지도의 설명란에 보면 배천군은 논이 밭보다 압도적 많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배천군이 평야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金在完)

  • 마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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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과 단천 사이에 있는 중요한 고개인 마운령을 비롯하여 여러고개들을 그린 지도이다. 해발 416미터의 마운령은 함경산맥 지맥의 분수령을 통과하는 고개로 관북의 북동부 해안지방과 중부 해안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과거로부터 성을 쌓아 외적을 막았던 중요한 관방으로 일명 門峴이라고도 하는데, 당시에는 성이 거의 허물어지고 성문 터만 남아 있었다. 조선전기부터 이곳에 새로이 관문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분분했으나 이 때까지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이곳에 나무를 길러 유사시 군사를 매복시킬 수 있도록 했다. 지도에는 마운령을 비롯하여 長津嶺, 佐驛嶺, 城古介, 松楸嶺, 下田嶺, 凡色嶺, 馬兒峴, 利劍嶺, 金昌嶺, 新洞嶺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지도 여백의 설명문에는 각각의 고갯길을 中路, 中大路, 小路, 細路 등으로 위계를 나누어 구분했다. 이곳은 신라 22대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고 순행한 뒤 그 지역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마운령비가 발견된 곳으로도 유명하다.(노혜정)

  • 대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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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는 본래 達句火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大丘로 고쳤다. 고려 때는 京山府(星州)에 붙였었다. 1466년(세조 12)에 이르러서야 都護府로 승격되면서 경주에 있던 경상도 관찰사영이 이 곳으로 옮겨왔다. 이는 대구를 경상도의 중심지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孔子의 이름인 ''丘''자를 고을의 이름으로 쓰는 것은 불가하다가 하여 정조 때부터 ''邱''자로 고쳐 쓰게 되었다. 지도에는 여전히 ''丘''가 사용되고 있다. 大邱府는 북구 중 팔거천 이동지역과 동구지역 일부를 뺀 대구광역시 전체, 달성군  다사읍, 화원읍, 가창면, 옥포면, 하빈면, 청도군 풍각면 대부분, 각북면, 각남면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대구부의 읍치는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일대에 있었다. 대구부는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금호강 유역에 발달한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大邱府城은 1736년(英祖 12)에 축조된 것이고, 좌측에 위치한 達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돌로 쌓은 성으로 옛날에 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치소 일대에는 監營, 客舍, 貳衙, 中營, 鎭營, 鄕校 등이 위치하고 있어 행정중심지를 이룬다. 대구부의 名山으로는 읍치 북쪽에 위치한 八公山을 들수 있다. 신라 때 父岳이라고 일컬었고, 中岳에 비겨, 中祀하였다. 산기슭에는 동화사와 부인사 및 파계사 등 명 사찰이 위치하고 있다. 남쪽에 위치한 表忠祠는 고려 태조 왕 건이 후백제 견훤과 싸워 대패했을 때,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왕건이 삼한을 통일한 후에, 이 곳에 미리사를 지어서 혼령들을 위로하였었는데,  절은 없어지고 탑만 남아 있다.(金在完)

  • 서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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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군은 현재 서산시, 부석면, 인지면, 팔봉면, 지곡면, 성연면, 대산면, 음암면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읍치는 서산시 읍내동과 동문동 일대이었다. 시가지는 읍성에 둘러싸여 있고, 성안에는 蓮池가 있다. 서산현의 지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산세가 읍치를 둘러싸고, 바다가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지도 상에는 팔봉산(361m)이 읍성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실제 지도에서 팔봉산은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팔봉산에서 내려 오는 산줄기가 면밀히 주산인 부춘산(187m)까지 이어져 읍치인 명당을 형성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치 북쪽 20리 성연면에 鳴川倉이 보이는데, 이 곳에서 서산의 조세곡이 모아져 조운되었다. 지도 아래쪽에 안면도가 나타나 있다. 忠淸道邑誌 形勝條에 안면도에 白沙場, 鳳凰臺, 八枝松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쪽의 안면도는 조선 인조 때 운하를 팜으로써 섬이 된 것이다. 지도에 ''泰安掘項''이 이를 입증한다. 조선시대 안면도는 송림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송목은 선박 건조, 궁궐 건축, 장례용으로 사용되었다. 烽燧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主山 烽燧이고, 다른 하나는 島飛山 烽燧이다.(金在完)

  • 옥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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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군은 현재 옥천읍, 동이면, 이원면,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등 1읍 5면을 포함하는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옥천읍 馬城山(409m) 밑의 교동리에 있었다. 옥천읍의 鎭山은 마성산으로, 전하기를 고을 사람들이 馬祖神을 제사지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붙었다고 한다. 금강 상류의 지류들이 군 전체를 원형으로 감싸안고, 또 읍내면 지역도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옥천에는 봉수대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月伊山烽燧으로 동으로 영동현 박달산에 응하고, 북으로 環山烽燧에 응한다. 다른 하나는 環山烽燧로 서로는 懷德縣 鷄足山 烽燧, 남으로 月伊山 燧에 응한다. 지도에서 보이는 가화역 뒤에 있는 산이 三城山인데,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정상 부근에 옛 성터가 남아 있다. 이 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신라 때 국경선이라 하는데 현재 약 1km 쯤이 남아 있다. 읍치 동쪽에 옥천향교가 보이는데, 현재 옥천읍 교동리에 위치하고 있다. 1398년(조선 태조 7)에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다시 지었으며, 1960년도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현재 대성전 이 외에도 향교에 딸린 행랑채와 홍문, 하마비 등이 남아 있다.(金在完)

  • 금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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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구현은 지금의 김제시 금구면, 황산면, 봉남면, 금산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구면 금구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이 위쪽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고을의 진산 鳳頭山이 동쪽에 있어 읍치가 서북쪽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인 듯하다. 지도에서는 鳳頭山이 읍치 남쪽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동쪽에 있으며, 여백 주기에 보면 봉두산은 봉황이날아가는 형세를 하고 있는데 掘禪山에 開同寺를 지으면 봉황이 날아가지 않게 할 수 있다 는 풍수적 해석이 적혀 있다. 지도의 오른쪽에 있는 母岳山은 이 지역에서 명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아래쪽에 있는 金山寺는 599년(백제 법왕 1)에 창건하고 766년(신라 36대 혜공왕 2)에 眞表律師가 중건하여 5교의 하나인 法相宗의 도량이 되었던 곳이다. 후백제 때에는 전주에 도읍한 견훤에 의해 중요한 사찰로서 인정되었으며, 견훤이 넷째 아들 金剛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자 첫째 아들 神劍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가두었던 절로도 유명하다. 지도에서도 모악산 산줄기에 의해 포근히 둘러 쌓여 있는 형태와 정상으로부터 山脈이 이어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어 중요한 사찰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벽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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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동군은 일제시대의 벽동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벽동군 및 자강도 우시군 서쪽 일부이다. 이 고을은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살던 땅이었는데 1357년(공민왕 6)에 여진족을 쫓고 남쪽 고을의 백성을 옮겨 새로 편입하였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 왼쪽의 童巾江은 지금의 충만강으로서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합류된다. 압록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며 북류하는 작은 하천들을 합친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1개의 鎭과 5개의 堡 및 수많은 把守가 그려져 있고, 건너편 청나라 땅의 마을 이름까지 자세히 표시되어 있어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북방 경비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각 봉수의 표시도 자세하고, 다른 봉수와의 호응관계도 잘 기록되어 있다. 읍치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林土鎭이 보이고 있는데 그 북쪽으로는 關門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 위쪽에는 읍치의, 오른쪽에는 벽동 소속 각 鎭堡의 군사적 내용 및 적의 침입로가 자세히 적혀 있다. 기타 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밭농사 지역임을 알 수 있고 火田도 성행하고 있었음도 보인다.(이기봉)

  • 마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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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천령은 함경도의 단천과 길주 사이에 위치한 해발 725미터의 고개로 이곳을 기준으로 함경도는 北關과 南關으로 나눠진다. 일명 伊板嶺이라고도 하는데 ''이판''은 여진어로 소를 의미한다. 世宗實錄 地理志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송아지를 팔자 어미 소가 송아지를 찾아 고개를 넘어갔는데, 주인이 그 소를 쫓아간 곳이 길이 되었기 때문에 이판령이라 했다고 한다. 관북대로 가운데 가장 험한 고개로 六鎭 남쪽 제1의 방어선이 된다. 인접한 吉州와 해안의 城津鎭이 짝하여 마천령을 지키는 형세이다. 지도에는 마천령을 비롯하여 茄坡嶺, 板莫嶺, 坡嶺, 招美嶺, 蛇角嶺, 牛指嶺, 沙器嶺, 方阿嶺, 長方嶺 등의 고개와 嶺路가 표시되어 있다. 마천령을 지나는 관북대로에는 嶺東驛, 磨谷驛 등의 역도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각 嶺路의 위계를 구분하고 단천과 길주에서의 거리를 기재하였다. 특히 지도의 하단에는 서쪽 백두대간에서 해안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영로를 9개로 정리하였는데, 가장 서쪽에 위치한 鷹峯嶺을 ''最東''으로 잘못 기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노혜정)

  • 대구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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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는 본래 達句火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大丘로 고쳤다. 고려 때는 京山府(星州)에 붙였었다. 1466년(세조 12)에 이르러서야 都護府로 승격되면서 경주에 있던 경상도 관찰사영이 이 곳으로 옮겨왔다. 이는 대구를 경상도의 중심지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孔子의 이름인 ''丘''자를 고을의 이름으로 쓰는 것은 불가하다가 하여 정조 때부터 ''邱''자로 고쳐 쓰게 되었다. 지도에는 여전히 ''丘''가 사용되고 있다. 大邱府는 북구 중 팔거천 이동지역과 동구지역 일부를 뺀 대구광역시 전체, 달성군  다사읍, 화원읍, 가창면, 옥포면, 하빈면, 청도군 풍각면 대부분, 각북면, 각남면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대구부의 읍치는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일대에 있었다. 대구부는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금호강 유역에 발달한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大邱府城은 1736년(英祖 12)에 축조된 것이고, 좌측에 위치한 達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돌로 쌓은 성으로 옛날에 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치소 일대에는 監營, 客舍, 貳衙, 中營, 鎭營, 鄕校 등이 위치하고 있어 행정중심지를 이룬다. 대구부의 名山으로는 읍치 북쪽에 위치한 八公山을 들수 있다. 신라 때 父岳이라고 일컬었고, 中岳에 비겨, 中祀하였다. 산기슭에는 동화사와 부인사 및 파계사 등 명 사찰이 위치하고 있다. 남쪽에 위치한 表忠祠는 고려 태조 왕 건이 후백제 견훤과 싸워 대패했을 때,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왕건이 삼한을 통일한 후에, 이 곳에 미리사를 지어서 혼령들을 위로하였었는데,  절은 없어지고 탑만 남아 있다.(金在完)

  • 서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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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군은 현재 서천군 서천읍, 장항읍, 마서면, 문산면, 시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서천군의 읍치는 서천읍 사곡리 일대에 있었다. 멀리 차령산맥의 산줄기가 봉림산과 천방산을 거쳐 고을 북쪽에 위치한 鎭山 겸 主山인 烏石山에 그쳐 명당형국을 이루고 있다. 북동쪽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잘 표현되어 있다. 앞의 板川이 朝水가 되고 印山이 案山이 된다. 서천군 읍성은 돌로 쌓은 石城이었다. 1:50,000지형도에서 확인한 결과, 평지에 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 산에 의지해서 쌓은 성임을 알 수 있었다. 지도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원형의 성곽으로 4개의 대문을 갖고 있고, 성안에 衙舍와 客舍가 입지하고 있다. 아래쪽 서천포에는 서천포영이 있었고, 수군 만호 1명을 두어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우측에 보이는 멋진 다리는 吉山橋이다. 또한 우측에 보이는 建巖書院은 1662년(현종 3)에 세워졌고, 1713년(숙종 39)에 사액을 받았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25리에 위치한 龍堂津은 옛날에는 長岩津이라 불렸는데, 옥구현으로 통하는 나루겸 포구이었다. 민간물자의 유통은 이 포구에서 이루어졌다. 海倉은 서천군 세곡이 배에 실려 출발하는 발진포구이었다.

  • 용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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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현은 지금의 진안군 용담면, 주천면, 동향면, 안천면, 정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용담면 옥거리에 있었다. 금강이 현의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으나 큰 들이 없고 산과 물 사이에 어우러진 골짜기의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져 있다. 용담현에는 금강으로 흘러드는 큰 하천이 세 개 있는데 지도에 보이는 朱子川, 程子川과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輿地圖書≫에 보이는 동면 지역의 顔子川이 그것이다. 또한 읍치 서쪽의 三川書院은 顔子, 程伯子, 程叔子, 朱子와 諸葛亮을 배향한 서원으로 1667년(현종 8)에 세워지고 1679(숙종 5)에 사액받았다. 세 하천이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삼천서원이 17세기 후반에 세워진 사실을 볼 때 16-7세기를 지나며 확고해진 유교적 양반사회의 모습이 지도에도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서남쪽에 있는 馬山은 실제로는 작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산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는데 여백의 사묘조에 보이는 熊津溟所祠의 산천제사와 관련이 있다.(이기봉)

  • 금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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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衿川縣이 되었다. 조선 태종때 果川과 합하여져 衿果縣이 되었다가 분리되었으며 다시 陽川縣과 합하여져서 衿陽縣이 되기도 하였다.이 지도 제작 이후의 정조대에 이르러 始興이 되었다. 한강의 이남에 있으며 안산, 과천, 양천, 인천과 경계를 이루었다. 현재 서울특별시의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금천구, 동작구 일부지역과 경기도 광명시와 안양시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縣의 중심지는 금천구 시흥동이 된다. 三聖山이 鎭山으로 이 산의 三幕寺는 세 명의 대사가 각각 절을 짓고 살았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縣의 북쪽에 한강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지도에서는 아래에 그렸다. 남쪽을 위로 하여 그린 지도이다. 산과 하천, 도로를 중심으로 그렸으며 邑治의 내부와 행정구역명은 지도에는 생략하여 간략하게 작성하였다. 주변의 산들은 모두 邑治를 바라보는 형태를 취하였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현하였으며 水原과 露梁津을 연결하는 大路, 인천, 안산, 과천, 양화진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표시하고 있다. 그 밖에 古城의 터와 陵墓 등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벽동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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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동군은 일제시대의 벽동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벽동군 및 자강도 우시군 서쪽 일부이다. 이 고을은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살던 땅이었는데 1357년(공민왕 6)에 여진족을 쫓고 남쪽 고을의 백성을 옮겨 새로 편입하였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 왼쪽의 童巾江은 지금의 충만강으로서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합류된다. 압록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며 북류하는 작은 하천들을 합친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1개의 鎭과 5개의 堡 및 수많은 把守가 그려져 있고, 건너편 청나라 땅의 마을 이름까지 자세히 표시되어 있어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북방 경비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각 봉수의 표시도 자세하고, 다른 봉수와의 호응관계도 잘 기록되어 있다. 읍치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林土鎭이 보이고 있는데 그 북쪽으로는 關門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 위쪽에는 읍치의, 오른쪽에는 벽동 소속 각 鎭堡의 군사적 내용 및 적의 침입로가 자세히 적혀 있다. 기타 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밭농사 지역임을 알 수 있고 火田도 성행하고 있었음도 보인다.(이기봉)

  • 명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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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천부는 함경북도의 해안가 고을로 위로는 鏡城, 아래로는 吉州에 접해 있다. 본래 吉州의 明原驛인데 1469년(예종 원년) 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길주를 吉城縣으로 낮추고 長德山 북쪽 지역을 따로 떼어서 縣을 만든 것이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명천군 하우면, 상우북면, 상우남면, 아간면, 상가면, 하가면, 상고면, 하고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명천군, 화성군, 화대군 지역이다. 해안가 고을이지만 고을 전체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의 長白山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동쪽의 七寶山으로 이어지는데 안쪽의 金藏寺를 감싸듯이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관내의 각 社가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창고는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 지역의 유일한 鎭堡인 在德堡는 1605년(선조 38)에 斜 洞에서 永平山 古城으로 移設한 것이다. 서쪽의 將軍坡는 돌로 쌓은 것으로 길이가 1,965척이었는데 당시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해발 906미터의 칠보산에는 뛰어난 경승을 자랑하는 산인데 金剛窟로도 유명하다. 지도 여백에는 이 칠보산 일대가 군사적 요충지가 되므로 鎭을 설치하기에 합당하다고 쓰여 있다.(노혜정)

  • 동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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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부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가운데 북구와 강서구를 뺀 나머지 지역과 대략 일치한다. 읍치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일대에 있었다. 산줄기가 북쪽의 鷄鳴山에서 남하하여 蘇山과 鎭山인 輪山을 경유하여 府治 북쪽에서 팔을 벌려 府治를 감싸안고 있으며, 명당수가南流하다가 府의 서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읍치 앞을 지나 수영만으로흘러 들어 가고 있고, 남쪽에 있는 盃山이 案山 역할을 하여 이상적인 명당형국을 이루고 있다. 읍성 안에 위치한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軍民의 영령을 모신 사당이다. 읍치 동북쪽에 위치한 金井山城은 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둘레가 6만 9백 8척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성으로 1703년(숙종 29)에 처음으로 쌓았다가 곧 다시 폐하였고, 그 후 1806년(순조 6)에 부사 오한원이 수축하였다. 금정산 중턱에 위치한 梵魚寺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의상법사가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2년(선조 35)에 중건하고, 1613년(광해군 5)에 다시 중건하였다. 이 절에는 국보 제 3389호인 범어사 삼층석탑이 있다. 釜山鎭에는 水軍僉節制使가, 左水營에는 左道水軍節度使가 주재하였다. 좌측의 古邑城이 옛 동래읍성 터이다. 倭館은 乙亥通和(1599) 후 다시 설치한 것이다. 이 곳에는 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대략 300명의 왜인이 거주하였으나 1678년(숙종 4)에 초량으로 왜관을 옮겼다.(金在完)

  • 서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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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포는 海防의 鎭으로서 현 서천군 장항읍 장암동 일대에 있었다. 後望山에서 내려 오는 산 줄기가 성 안을 둘러싼 형세이다. 둥근 성벽, 두 개의 성문, 관사 및 군기고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배치된 군선軍船으로 戰船 1隻, 兵船 1隻, 伺候船 1隻이 배치되어 있다. 전선과 병선은 전투함에 속하였고, 사후선은 보조선에 속하였다. 卜物庫는 사신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이었다.(金在完)

  • 운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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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봉현은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아영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고 읍치는 운봉읍 동천리, 서천리 일대에 있었다. 서·남쪽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동쪽 남강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水系 상으로는 낙동강 유역권에 속하며, 문화적으로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점이지대적 성격을 보인다. 또한 남원 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동쪽 경상도와도 두터운 산지로 막힌 고원형 지형을 이루고 있어 삼국간 경쟁이 치열했을 때 백제와 신라 사이의 중요한 要衝地였다. 이런 흔적으로 백제와 신라간 중요한 관문이었던 팔량치 등의 險隘를비롯하여 여러 개의 古城터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객사 오른쪽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碑殿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을 기념하는 비석을 보호하는 전각이고 선종 9산의 하나로 828년(흥덕왕 3년) 증각대사에 의해 세워진 실상사가 왼쪽 아랫부분에 보이고 있다. 기타 군사적 요충지임을 보여주는 埋伏處가 표시되어 있으며, 제언이 자세하고 산세가 전반적인 지형을 잘 보여주는 지도라고 할 수 있다.(이기봉)

  • 김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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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김포시내와 김포시 고촌면, 인천광역시 서구 검단동, 백석동, 오류동, 금곡동 일대이다. 김포시 북변동과 걸포동이 군의 중심지에 해당하였다. 지도의 아래쪽은 바다가 아니라 한강이며 서해바다는 지도의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 지도는 남서쪽을 위로하고 북동쪽을 아래로하여 그린 지도이다. 이 지역은 양천, 부평, 통진과 한강에 의해 둘러싸인 곳으로 지도의 오른쪽 위에 표시된 도로는 서울에서 통진을 거쳐 강화로 가는 直路(제 9대로)이다. 章陵(김포시 풍무동)은 조선 仁祖의 생부인 元宗(추존)의 능이다. 원래의 김포고을의 터였는데 읍치를 옮기고 능을 썼다. 장릉 아래쪽의 古縣內面은 이전의 郡 중심지가 이 일대였음을 말해준다. 牛渚書院(김포시 감정동)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趙憲을 추모하여 세운 서원이다.(이현군)

  • 봉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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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鳳山郡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황해도 사리원시, 봉산군 동선면, 산수면, 구연면, 토성면, 덕재면, 쌍산면, 기천면, 초와면, 서종면, 사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황해북도 사리원시, 봉산군 동부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 재령군 삼강군 서부 일부지역, 은파군 대부분, 린산군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범위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山川條에 이 고을의 鎭山은 서쪽 5리에 위치한 祿科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도에 보이는 읍치는 1523년(중종 18)에 白雲山 아래로 옮겨졌던 곳이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古邑城은 土城이고,좌측에 보이는 唐土城은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리이다. 읍치 서북쪽에 보이는 正方山城은 洞仙嶺 부근에 위치하기 때문에 洞仙關行城 또는 舍人岩城이라고 부른다.영의 길은 좁고 비탈져 말이 같이 걸어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다. 1746년(영조 22)에 성을 쌓아서 동문과 서문을 설치하였다. 정방산성 부근에 보이는 蒜山鎭은 1678년(숙종 4) 옛 棘城鎭의 터에 세워진 진으로서 兵馬同僉節制使가 주재하였다. 고읍성 부근에 위치한 서원은 文井書院인데, 1681년(숙종 7)에 세워져 1703년(숙종 29)에 사액을 받았다. 봉산은 의주대로가 통과하는 고을로 군사적 요충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그 예로  山嶺과 洞仙嶺 부근에 매복처가 있다. 재령강 연안의 栗串津은 봉산군과 신천군의 미곡이 배에 실려 서울로 출발하는 조운선 출발지였다.(金在完)

  • 무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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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산부는 두만강과 연해 있는 고을로 위로는 회령, 아래로는 갑산과 접해 있다. 세종 때 이곳에 살던 야인을 몰아내고 鎭을 설치했다. 1674년(현종 15)에 僉使鎭을 三峰坪으로 옮기고 1684년(숙종 10)에는 監司 李世華의 청에 의해 비로소 都護府를 두었는데, 富寧의 車踰嶺 以西 지역과 會寧의 蘆田項 以南 지역을 병합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무산군 읍면, 영북면, 풍계면, 동면, 계하면, 연상면, 연사면, 삼사면, 삼장면, 서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무산군을 비롯하여 연사군, 량강도 대홍단군, 백암군, 그리고 삼지연군 일부 지역이 과거 무산부의 영역이다. 지도에는 백두산의 모습이 강조되어 표현되었고 1712년에 세워진 정계비도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1694년(숙종 20)에 府使 李天根이 축조한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상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읍치를 표시하는 茂山이라는 표기도 누락되어 있다. 읍치가 風水의 형국으로는 行舟形에 해당하여, 성안에 우물을 파지 않았기 때문에 부근의 하천물을 식수로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주변 지역의 坊社, 창고, 봉수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동쪽의 豊山鎭은 본래 會寧府의 豊山堡로 1674년(현종 15)에 이곳으로 옮기고 1684년(숙종 10) 무산부에 소속시켰다. 백두산 아래쪽으로는 절경을 자랑하는 三池淵이 보이고 있으며 綠雲山 근처에는 용암이 긴 둑처럼 흘러내린 長坡도 표시되어 있다.(노혜정)

  • 문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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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 初 冠山을 聞喜郡으로 고치고, 고려 현종 때 이를 다시 聞慶으로 고쳐 현재까지 그 縣의 이름이 내려오고 있다. 문경현은 지금의 문경시 문경읍, 저음리를 제외한 가은읍 전체, 마성면, 농암면, 영신동을 제외한 문경시내 전체, 호계면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읍치는 현 문경시 문경읍 상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主屹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치에 있는 蓮亭은 客舍 남쪽에 있는 작은 연못가에 있는 亭子이다. 曦陽山과 主屹山은 문경의 名山으로 해마다 봄가을로 小祀를 지냈던 곳이다. 가서면에 위치한 선유동은 골이 깊고 수목이 울창하며, 기이한 봉우리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 굽이굽이마다 소와 폭포가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는데, 선유구곡이 유명하다. 희양산 남쪽에 위치한 鳳岩寺는 879년(신라 헌강왕 5)에 智證國師가 처음 세웠는데, 그 후 重修, 火災, 重建을 겪었다. 이 사찰에 있는 보물로 삼층석탑(보물 제 169호), 지증대사 적조탑(137호), 지증대사 적조탑비(138호), 정진대사 원오탑(171호), 정진대사 원오탑비(172호) 등 5점이 있다. 아래에 보이는 姑母城은 돌로 쌓은 성인데, 삼국시대 늙은 할미가 하루 아침에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 오고 있다. 고모성 아래에 보이는 幽谷驛은 찰방역으로서 18개 역을 관할하였다. 지도에는 없지만, 조령성 좌측에 있는 惠國寺는 846년(신라 문성왕 8)에 普照國師가 창건하여 법흥사라 하였는데, 고려 때 혜국사로 고쳤고, 1870년경에 송장, 지성 두 禪師가 重建하였다.(金在完)

  • 석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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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성현은 현재 부여군과 석성면과 논산군 성동면 일대이었다.당시 행정구역은 동쪽으로 임천현, 서쪽으로 노성현, 북쪽으로 부여현, 남쪽으로 은진현과 경계를접하고 있었다. 읍치는 현재 석성면 석성리 일대에 있었는데, 지금도 ''석성읍내'', ''향교골'' 지명이 남아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구관아터는 지금의 석성초등학교 자리이다. 고지도에는 명칭이 나와 있지 않지만 읍치 북쪽에 용머리산(170m)과 국사봉(170m)이 있어 읍치의 진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동쪽에는 태조산-망월산-봉황산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좌청룡의 역할을 하고, 서쪽에는 파진산이 우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남쪽에는 山峙(지형도에는 남산)가 案山의 역할을 하는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나타내고 있다. 석성현 지도는 다른 현의 지도와 달리 堤堰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특히 하천을 따라 나타나는 제언들은 우각호를 저수지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도에서 석성천을 따라 舟橋, 腰光橋, 水湯橋가 놓여 있고, 금강 본류에는 蓬湖津, 鼓岩津, 佛岩津 나루터가 있다. 鼓岩津은 임천의 古多津의 對岸에 있는데, 물살이 빠른 곳으로 임천으로 통하는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석성현의 세곡은 석성천변에 위치한 江倉에 수납된 다음, 저포에서 서울까지 운반되었다.(金在完)

  • 음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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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음성현은 소이면을 제외한 음성읍, 금왕읍, 삼성면, 감곡면, 대소면, 생극면, 맹동면, 원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이었다.음성현은 금강 유역과 남한강 유역의 분수계에 자리한다. 음성현에서 북쪽으로 8리 떨어진 가엽산(709m)이 鎭山이 된다. 이 산의 정상에는 가엽산 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읍치 윗쪽에 위치한 望山은 현대 지형도의 수정산(393m)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산 정상에는 산성터가 남아 있고, 산성의 남쪽에 古邑遺址가 있어 官坪이라 불린다. 수정산 남쪽에 있는 수정사터에서 "新羅景文王五年"이라 적힌 기와를 발견하였다. 관세음보살 입상과 노사나불좌상이 있는데, 좌상은 1968년 윤병준이 발견하여 머리가 잘린 것을 복원하였다. 윗쪽에 보이는 雪城山은 음죽현의 鎭山으로 산성이 있다.(金在完)

  • 낙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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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안군은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 이서면, 별량면과 보성군 벌교읍에 해당하며 읍치는 낙안면 서내리, 남내리, 동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소설 ≪太白山脈≫의 주무대인 벌교를 비롯하여 외서면 등이 보이며, 金錢山에서 발원한 벌교천이 사방의 물을 모아 남동쪽 남해바다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고을의 鎭山인 金錢山 밑에 현재 낙안읍성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사각형의 읍성이 잘 그려져 있는데, 읍치와 진산을 강조하다 보니까 보성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외서면과 金錢山 뒤쪽 부분이거의 생략되어 있다. 남쪽의 古邑面 下道에 있는 伐橋는 지금 보물 30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虹橋로서 1729년(영조 5) 무지개 모양으로 다듬은 돌 셋을 이어 만들었고, 밑에는 용머리 형상을 한 개씩 조각하여 붙여 놓은 다리이다. 기타 草川面에 있는 桐華寺는 大覺國師 義天(1055-1101)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지형이 鳳이 梧桐나무에 많이 깃든다는 梧桐鳳棲形이라 오동나무를 많이 심고 절을 지었다고 한다.(이기봉)

  • 삭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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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주부는 일제시대의 청수읍을 제외한 삭주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삭주군 동쪽과 대관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그렸다. 지금의 강남산맥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위쪽은 대령강의 상류이며, 아래쪽은 압록강의 지류이다. 실제로는 위쪽 부분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읍치 공간을 부각시키기 위해 아래쪽 부분을 더 크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아래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강이 압록강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시설에 대한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압록강변에는 최전방의 방어와 감시를 위한 仇寧鎭과 두 개의 把守 및 봉수의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읍치에는 정사각형의 石城이 있음을 잘 그려 놓았고, 지금의 강남산맥에는 넘어가는 고개와 도로의 표시가 자세하다. 고개를 넘어가는 곳에 小塞墻과 幕嶺鎭·天摩鎭이 설치되어 있고 각 鎭에서 관할하는 창고가 있음도 보인다. 그 위쪽에 보이는 大朔州는 원래의 삭주 읍터로서 지도상의 읍치인 小朔州로 읍치를 옮긴 것은 1430년(세종 12)이다.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대삭주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기록되어 있다. 오른쪽의 여백주기에는 삭주부 읍치와 仇寧鎭의 군인수와 군사시설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되어 있다.(이기봉)

  • 문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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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천군은 함경남도 해안가에 위치한 고을로 남쪽은 德源, 북쪽은 高原, 서쪽은 평안도 陽德縣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문천군 군내면, 도초면, 명효면, 구산면, 운림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강원도 문천시와 천내군로 나뉘어져 있고 남쪽의 일부 지역은 원산시로 편입되었다. 지도는 산천을 비롯하여 창고, 사찰 등의 인문 요소도 기입되어 있다. 무엇보다 고개의 명칭이 매우 자세하다. 읍치의 북쪽에는 翼祖와 貞淑王后의 陵인 淑陵도 표시되어 있다. 동쪽 바다의 四訥島에는 목장이 있었는데 함흥 監牧官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石城이 축조되어 있고 관리하던 牧子가 220명이나 되는 꽤 규모가 큰 목장이었다. 지도상에는 여백의 주기와는 다르게 四栗島로 표기되어 있다. 인근 해안에는 소금을 만들던 鹽場도 보이고 있다. 읍치의 서쪽에는 文浦書院이 그려져 있는데,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宋時烈, 閔鼎重을 배향했던 서원이다.(노혜정)

  • 밀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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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밀양부는 지금의 청도면을제외한 밀양시 전체와 대략 일치하였다. 읍치는 밀양시 밀양시내 내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의 북쪽에 위치한 華岳山이다. 읍성 안에 위치한 嶺南樓는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보물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1365년(고려 공민왕 14)에 창건되었으나 불에 타고 현재의 건물은 조선 헌종 때 지어진 것이다. 남쪽의 栗林은 밀양부 남쪽에 案山이 없어 허하므로 그것을 대신하여 洞藪의 역할을 하게 했던 것으로 일종의 裨補風水의 예이다. 守山津 부근에 보이는 국농소에는 紅蓮이 무성해서 그 향기가 좋다고 한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萬魚寺에는 자연석으로 된 미륵존불과 만어상이라 일컫는 종석 및 보물 제 466호인 만어사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서문 밖에 위치한 서원은 禮林書院으로서 1567년(명종 22)에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리고, 뒤에 상남면에 옮겨진 후 1663년(현종 4)에 사액되었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재악사는 表忠寺(밀양군 단장면 구천리)인데, 이 사찰은 829년(신라 흥덕왕 4)에 황 면이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이다. 이 절에는 국보 제 75호 靑銅含銀香 이란 향로와 보물 제 467호 3층 석탑이 있다. 삼랑진은 나루터일 뿐만 아니라 상·하류를 오가는 배들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대포구이었다.

  • 소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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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근진은 현재 태안군 원북면 소근리 소근진 일대에 있었다. 소근진은 朽斤伊浦라고도 하며 태안 서쪽 30리에 있었다. 지도에서 소근진은 큰 반도로 둘러싸인 작은반도지역에 위치한 원형의 성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소근진성은 둘레가 1천 3백 56척이고, 4개의 성문이 있고, 성안에는 官舍, 影波亭, 軍器庫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지도의 설명란을 보면 民戶가 244戶로 평신진 638戶과 안흥진 533戶보다 훨씬 적다. 설명란에 보이는 卜物船은 사신을 수행하는 화물선을 말한다.(金在完)

  • 임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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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현은 지금의 임실군 임실읍, 성수면, 관촌면, 신덕면, 신평면, 운암면, 강진면, 덕치면, 청웅면, 오수면 북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실읍 성가리 일대에 있었다. 섬진강 줄기가 동북쪽의 진안으로부터 들어와 여러 지류들을 합하며 현 전체를 휘감고 동남쪽 순창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지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읍치는 鎭山인 龍繞山을 비롯한 산줄기와 섬진강 물줄기가 잘 어우러진 풍수상의 명당형국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과장·확대되어 있다. 고적조에나오는 구고폐현은 1394년(태조 3)에 편입된 후 읍치 서쪽에 구고면이란 이름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겨울에는 다리(橋)를 놓고 여름에는 외나무다리( )를 놓았다는 갈담교, 마항교, 오원교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으며 읍 앞쪽의 작은 다리는 廣濟橋이다. 기타 원, 창, 서원, 절 등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남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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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 비봉면 일부지역과 안산시 대부도, 제부도, 옹진군 영흥면(영흥도) 등의 섬들이 포함되는 지역이다. 그 중심지는 화성군 남양면 남양리가 된다. 바다의 섬들은 府의 서쪽에 위치하는데 이 지도의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다. 육지부에 해당하는 지도의 위가 동쪽이 된다. 산줄기와 지도안의 글씨는 府를 중심으로 그려넣었다. 같은 지도안에 다양한 視點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닷가에 海倉이 그려져 있으며 海路와 陸路를 구분하지 않고 적색으로 표시하고 있다. 海路는 全羅道, 瑞山, 海美, 平澤 등과 연결되는데 주로 貢稅를 목적으로 개발된 船路이다. 염불산(봉화산, 서신면 상안리, 전곡리)과 해운산(봉화산, 송산면 독지리, 신천리)에 봉수가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바다를 접하고 있었던 지역이라 군사적 목적에 의해 花梁鎭, 永宗浦營, 安興鎭 등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삭주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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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주부는 일제시대의 청수읍을 제외한 삭주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삭주군 동쪽과 대관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그렸다. 지금의 강남산맥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위쪽은 대령강의 상류이며, 아래쪽은 압록강의 지류이다. 실제로는 위쪽 부분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읍치 공간을 부각시키기 위해 아래쪽 부분을 더 크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아래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강이 압록강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시설에 대한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압록강변에는 최전방의 방어와 감시를 위한 仇寧鎭과 두 개의 把守 및 봉수의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읍치에는 정사각형의 石城이 있음을 잘 그려 놓았고, 지금의 강남산맥에는 넘어가는 고개와 도로의 표시가 자세하다. 고개를 넘어가는 곳에 小塞墻과 幕嶺鎭·天摩鎭이 설치되어 있고 각 鎭에서 관할하는 창고가 있음도 보인다. 그 위쪽에 보이는 大朔州는 원래의 삭주 읍터로서 지도상의 읍치인 小朔州로 읍치를 옮긴 것은 1430년(세종 12)이다.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대삭주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기록되어 있다. 오른쪽의 여백주기에는 삭주부 읍치와 仇寧鎭의 군인수와 군사시설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되어 있다.(이기봉)

  • 부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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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령부는 함경북도의 해안 고을로 남쪽은 鏡城, 북쪽은 會寧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부령군 하무산면, 부거면, 삼해면, 연천면, 석막면, 서상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부령군과 청진시 청암구역으로 되어 있다. 이 지역은 지도 여백의 설명문에도 보이듯이, 사방의 산줄기가 모여드는 곳에 위치한 중요한 요충지이다. 관내의 각 社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고 봉수가 비교적 상세하다. 읍치에서 동남쪽의 輸城으로 가는 길목에는 仇正棧道가 표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잔도는 절벽에 길을 내어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남쪽 경성으로 적의 진입을 차단할 수 있는 최고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동쪽 해안의 懷綏驛에는 1428년(세종10)에 설치되었다가 1449년에 폐지된 富居縣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해안가에는 蓴潭, 南池, 東池 등의 석호와 海邊臺와 같은 절경도 표시되어 있다.(노혜정)

  • 봉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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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라는 지명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명칭이다. 봉화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물야면, 명호면 낙동강 以西地域, 상운면, 춘양면 석현리,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봉화군 봉성리 일대에 있었다. 현 북쪽에 위치한 金輪峰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산세가 태백산에서 서쪽으로 熊踰峴, 文殊山, 光大山을 거쳐 鎭山인 금륜봉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금륜봉의 정기가 곧바로 명당으로 내려오고, 망월봉과 백운봉이 좌우에서 명당을 보호하고 있는 형세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서원은 文岩書院이다. 이 서원은 1616년(광해군 8)에 건립되어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서원 좌측에 보이는 雙松亭은 물야판관 琴衍이 세운 것이다. 뜰에 雙松이 넓게 엉켜 덮고 있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 읍치 아래에 보이는 種善亭은 현 서쪽에 있는데, 主簿 琴應石이 지은 것으로 이 황이 亭號를 지어 걸었다. 태백산 남쪽에 璿源閣·實錄閣·史庫 등 太白山史庫와 그 부속건물이 보인다. 이 곳에 참봉 및 守直軍이 주재하여 史庫를 지켰다. 각화사는 986년(신라 신문왕 6)에 원요국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예종 때 무애국사 계응이 중창하였다.(金在完)

  • 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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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淸水營은 현재 보령시 오천면영보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오천 성곽이 남아 있다. 수영은 보령 읍치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진 해변에 있었다. 1396년(태조 5)에 水軍僉節制使를 두어 보령을 관리하였다. 1421년(세종 3)에 都安撫處置使로 고쳤다가, 1430년(세조 12)에는 수군절도사로 고쳤다. 節度使와 虞侯 각각 1명이 주재하였다. 속읍은 홍주, 태안, 서산, 당진, 면천, 서천, 임천, 한산, 비인, 남포, 보령, 결성, 해미 등 13개 군현이었다. 본 營과 屬邑·屬鎭은 다양한 종류의 戰船 92척을 가지고 있었다. 수영성은 1510년(중종 5)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다. 지도를 보면 석성은 산의 지세를 따라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衙舍, 亞營, 軍餉庫, 軍器庫 등의 군사 관련 시설이 있고, 그 외에 永保亭, 觀德樓,  凌虛閣 등이 있었다. 역시 다른 진과 달리 다양한 배가 주둔하고 있었다. 주력 전투선인 戰船, 龜船, 防船 등과 보조선박인 卜物船과 伺候船 등 각각 1척이 있었고, 특수 용도의 海外搜討船과 亭子船 등이 각각 1척씩 있었다.(金在完)

  • 장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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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현은 지금의 장수군 장수읍, 천천면, 계남면, 장계면, 계북면 일대로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에 있었다. 지도에서는 금강 최 상류 물줄기가 현의 서쪽으로 치우쳐 남북으로 흐르며 동쪽 백두대간으로부터 여러 물들을 합하는 지형적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조선 초에 장수현에 폐합된 장계현은 임현내면, 임남면, 임북면 등의 지역으로 물줄기와 산줄기에 의해 장수 지역과 구분됨이 지도에서 분명히 보이며, 면 이름에서도 옛 장계현의 땅이었음을 남기고 있다. 현 동쪽에 경상도 안음현과의 경계로 표시된 六十峙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간 요해처로서 이후 도적이 많아 행인 60명이 모여야만 안전하게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蒼溪書院은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며 본관이 장수인 황희와 그 아들 황수신, 기타 유호인, 장응두 등을 배향하고 황희의 영정을 안치한 서원이며, 기타 절, 창, 원, 고개, 제언 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여백에는 연혁, 고적, 불우 등이 상세히 적혀 있지만 지도에 다르게 표시된 것이 있어 옛 문헌을 베낀 흔적이 보인다.(이기봉)

  • 남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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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평현은 지금의 나주시 남평읍, 산포면, 봉황면, 다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남평읍 남평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영산강의 지류 지석강이 남북으로 흐르며 고을의 북쪽을 휘감고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가 고을의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이는 남쪽 덕곡면 부근에 있었던 鐵冶縣이 고려시대에 합쳐졌기 때문이다. 읍치의 모습은 풍수적 관념이 전혀 표현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 지역의 지형 자체가 풍수적 형국과는 상당히 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읍치 오른쪽의 서원은 蓬山書院으로서 조광조의 제자이자 선조 때 이조참판과 大司憲에까지 오른 休庵 白仁傑(1497-1579)을 배향하여 1667년(현종 8)에 사액받았다. 기타 사찰의 표시가 잘 되어 있고, 읍치 왼쪽에 군사훈련 때 지휘부로 사용되던 장대가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음이 눈에 띤다. 역원은 이름만이 표시되어 있어 건물과 함께 그려져 있는 다른 지도와 대비된다.(이기봉)

  • 삼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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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등현은 일제시대의 강동군 삼등면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며, 지금은 평양특별시 강동군 남쪽 일대이다. 삼등현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新城·蘿坪·狗牙 세 部曲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고을의 鎭山은 鳳頭山이며, 읍치 공간은 진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풍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을 아래쪽을 흐르는 강은 대동강의 지류인 南江으로서 옛날에는 綾城江(能成江으로도 쓴다)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강가에는 많은 기암절벽이 표시되어 있는데,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黃鶴樓는 아주 오래된 누각으로서 그 이름은 이백의 시 ''三登黃鶴''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지도에는 평안도의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碧雲菴이라는 사찰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논(畓)이 거의 없고 火田이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던 고을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북청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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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청부는 동해안에 위치하여 관북대로가 지나는 길목에 있는데 위로는 利原, 아래로는 洪原으로 연결된다. 함경도의 南兵營이 있던 국방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해방 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북청군 노덕면, 양가면, 양천면, 거산면, 신창면, 청해면, 평산면, 속후면, 양화면, 신포면, 후창면, 가회면, 하차서면, 상차서면, 이곡면, 성대면, 덕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남도 신포시, 덕성군, 북성군 일원이다. 읍치에는 방형의 읍성이 그려져 있는데 1517년(중종 12)에 축성된 것이다. 함경도 각 군현의 행정단위인 社가 지도상에는 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서쪽 德城面에는 弘道洞山城과 龍義洞山城이 그려져 있다. 돌로 쌓은 성이지만 당시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梁川面의 해안가에는 土城이 보이고 있는데, 이곳은 과거 肅愼의 都邑으로 추정되던 곳이었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성내에 가옥이 밀집되어 있었고 땅을 갈 때 유물들이 간혹 출토되었다고 한다. 봉수의 표시도 상세한데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많은 7개의 봉수가 그려져 있다. 동쪽 해안가에는 侍中臺도 보이는데, 고려 예종 때의 侍中 尹瓘이 말갈족을 정벌할 때 이곳에 오른 적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노혜정)

  • 비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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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안은 比屋縣과 安貞縣을 합치면서 앞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비안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구천면(청산리 제외), 안계면, 안평면 삼촌리와 하령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의성군 비안면 동부리와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安定倉 부근이 옛 안정현의 읍치이었는 데, 두 현이 합쳐지면서 현 위치로 읍치를 옮겼다 비안현은 산지가 많은 의성현과는 달리 위천을 따라 비교적 비옥한 평야를 갖고 있다. 읍치 뒤에 있는 山이 城隍山으로서 이 고을의 鎭山이 된다. 앞에는 위천의 지류가 東流하여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衙舍의 오른쪽에 보이는 望北亭은 일명 屛山亭이라고 하는데, 병산 정상에 위치한 비안 박씨의 정자이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龜川鄕賢祠는 參議 朴瑞生 등을 배향한 서원(구산서원)이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玉蓮寺는 514년(신라 법흥왕 1)에 건립되었으며, 당시에는 승려가 300여 명에 달하는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법당 일부인 門小屋만 잔존할 뿐이다. 비안현에 있는 安溪驛과 雙溪驛은 幽谷道에 딸린 驛이었다.(金在完)

  • 신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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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현은 현재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도고면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신창면 읍내리 일대인데 현재 부근에 순천향대학교가 있다. 鎭山은 본 현에서 서쪽 1리 지점에 있는 城山이다. 지도에는 鶴城山으로 표기되어 있고,성벽도 나타나 있다. 성산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명당인 관아 터를 포옹하는 형세로 풍수지리상 명당 형국을 잘 표현하였다. 忠淸道邑誌의 形勝條에 ''小赤壁''이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는 孤山峰 아래 물가가 절벽을 이루면서 긴 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일찌기 현의 서쪽이 삽교천과 접하여 고려 때부터 조운과 수운이 발달하였다. 읍치서쪽 면천현으로 건너가는 頓串津 나루터가 있는데, 나루터로서 기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근에서 산출되는 미곡을 서울로 반출하는 포구로 이용되었다. 衙舍 동쪽에 있는 拱北亭이라는 정자에는 서거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읍치 북쪽에 大堤라는 큰 저수지가 보이는데, 이것은 현재 신창지라고 부르며 농업 관개용으로 이용되고 있다.(金在完)

  • 장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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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장흥군 전체와 보성군의 웅치면, 회천면 그리고 완도군의 동쪽 섬들에 해당하며, 읍치는 장흥읍 남동리, 동동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위쪽의 장서면과 장동면은 長澤폐현의 땅이었고, 오른쪽의 회령면은 會寧폐현의 흔적이다. 고을의 읍치는 원래 遂寧폐현의 자리였으며, 古長興은 天冠山 근처에 있었다. 탐진강이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감아 돌며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제와 비슷하게 잘 그려져 있다. 동북쪽의 물줄기는 섬진강의 지류 보성강의 상류이다. 지도 위쪽의  林寺는 860년(헌안왕 4)에 普照禪師가 세운 절로서 신라 말기 선종 九山門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국보 44호 삼층석탑과 보물 158호 普照禪師彰聖塔碑 등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지도 아래쪽의 천관산은 해안가에 우뚝 솟은 험한 산으로 고을에서는 神祠를 두어 봄·가을로 제사지냈고, 산밑에는 신라 때 만들어진 天冠寺가 보인다. 읍치 오른쪽의 碧沙驛은 9개의 屬驛을 가진 察訪驛이었으며, 지도 아래 해안가에는 정4품 水軍萬戶가 파견된 會寧鎭이 보이고 있다. 기타 7개의 서원과 사당이 표시되어 있어 임란 이후 향촌사회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게 한다.(이기봉)

  •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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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百濟의 南漢山城으로 溫祚王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으로 新羅에 병합되어 漢山州, 南漢山州, 漢州 등으로 불리었다. 현재의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위치한 것으로 지도에 나타난 山城은 1595년(선조 28)에 축조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왕이 피난하였던 곳이다. 성안의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가 광주부의 중심지였다. 한강을 지도의 아래에 두고 그린 결과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 된다. 산줄기 사이로 물줄기를 자세히 그렸는데 산성의 안에까지 물줄기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本城과 함께 甕城, 新城, 將臺, 城門을 자세히 그렸다. 山城 안에는 行宮을 비롯하여 左殿, 社壇, 溫王廟, 鍊兵館, 倉庫, 寺刹 등이 표시되어 있다. 군사 지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地形을 자세히 그리면서 候望處, 斥候處, 埋伏處 등을 지도에 일일이 표시하고있다. 특히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丙子胡陣處, 胡兵埋伏處 등을 따로 표시해 두었다. 육로를 그리면서 고개(峴), 驛, 酒幕 등을 경로상에 표시해 두었다. (이현군)

  • 삼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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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화부는 일제시대의 진남포부와 용강군 삼화면, 금곡면, 토성면, 신녕면, 귀림면, 대대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남포직할시 남서쪽과 온천군 남쪽 일대이다. 대동강의 물줄기가 서해로 들어가는 마지막 입구에 해당하며, 고등학교 지리책에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少雨地로서 천일제염으로 유명한 광량만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고을은 1136년(고려 인종 14) 西京 경내에 있던 金堂, 呼山, 漆井 등 세부곡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1686년(숙종 12)에 防禦營이 이 고을로 옮겨져 여러 고을을 관장하게 되면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동북쪽으로부터 들어온 산줄기 아래에 읍치가 자리잡고 있으며, 읍치에는 ?舍와 衙舍 등만 표시하여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廣梁鎭이 보이고 있는데, 원래는 虎島에 있던 것을 1444년(세종 26)에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관리하였으며, 여백 주기에는 각 병사의 숫자와 성의 크기, 다른 곳과의 거리가 자세히 적혀 있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해안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논(畓)보다는 밭(田)이 훨씬 많은 고을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삼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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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수부는 함경도 내륙의 고을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다. 동쪽으로는 甲山, 남쪽으로는 咸興, 서쪽으로는 평안도의 古茂昌에 이른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삼수군 삼남면, 읍관면, 별동면, 군인면, 강진면, 자서면, 삼서면, 관흥면 그리고 장진군 군내면, 상남면, 중남면, 구읍면, 신남면북면, 동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량강도 삼수군, 김정숙군이 과거 삼수부 지역이다. 三水라는 지명은 이 지역의 크고 작은 물줄기 세 갈래가 압록강에 합쳐지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1693년(숙종 19)에는 국경 방어를 위해 右營將을 두고 府使가 겸임하였다. 원래 1656년(효종 7)에 축조되어 砲樓까지 갖춰진 방어용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압록강 연안에는 접경지역이라는 지역의 특성으로 인해 봉수, 진보, 파수 등의 군사 시설이 다수 들어서 있다. 1511년(중종 6)에 설치된 乫波知鎭, 1489년(성종 20)에 설치된 仁遮外堡, 1500년(연산군 6)에 설치된 羅暖堡, 小農堡, 舊乫波知堡 등이 포진해 있다. 지도의 이면에는 갑산과 삼수 지역의 鎭堡에 대한 군사 항목을 기재해 놓았다.(노혜정)

  • 사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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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정동면, 사남면, 용현면, 사천시내(삼천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사천읍 정의리와 선인리 일대에 있었다. 옛 치소는 정동면 고읍리에 있었는데, 1445년(세종 27)에 지도상의 위치로 옮겼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豆代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고을 명칭의 유래가 된 泗川水가 읍성의 남쪽을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읍성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둘레가 5,015척, 높이가 15척이다. 향교의 위쪽에 보이는 읍치 위쪽의 龜溪書院은 李 楨을 배향한 서원이다. 1611년(광해군 3) 萬竹山에 건립된 사당이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어 龜溪書院이라고 하였다. 그 후 1723년(경종 3)에 金德鍼을 나란히 배향하였다. 구계서원 위쪽에 있는 齋는 본래 李龜岩의 서재로서 靜觀臺라 하였다 하는데, 이 황이 대관이란 詩를 지음으로써 명명되었다고 한다. 근남면에 위치한 歸龍菴은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는데, 1183년(고려 명종 13) 3월에 보림국사가 중창하고 귀룡암이라고 하였다 한다. 東面의 排王寺(설명문의 排房寺)는 고려 현종이 태자였을 때 이 절에서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해안을 따라 읍창, 남창, 해창, 통영창, 우병영창 등이 분포한 것이 특색이다.(金在完)

  • 십삼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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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 입각한 동아시아지도.  중원대륙과 그 주변의 윤곽을 보여줌과 동시에 일종의 역사부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지도 안에는 학문을 연마하는 데 있어서 경학과 역사학의 상호관계를 설명해주는 經史體用, 서적과 도형을 통해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左圖右書의 두 원칙이 적절히 반영되어 있다. 우공의 구주와 역대 왕조의 도읍지는 엷은 적색의 원 안에, 전국시대의 11국은 황색의 작은 원 안에, 명나라때의 행정구역인 13성은 짙은 적색의 큰 원 안에 각각 그려 넣었다.  황하, 양자강을 비롯한 주요 하천이 그려져 있으며, 곤륜산, 태산 등 내오악, 기타 중국 역사상 의미 있다고 생각되던 산들이 표시되어 있다. 13성 표시 아래에는 북경까지의 거리가 명시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는 주요 도시와 함께 능, 누대 등 명승지들이 표시되어 있다. 귀주성에 보이는 灣夷라는 표현, 운남성에 보이는 南灣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오랑캐를 뜻하는 夷는 지리적 구분법이 아니라 문화적 구분법이다.중화국가의 행정체계 내에 있으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중화와 먼 거리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과 중국 산동반도 사이에 유일한섬으로 그려진 田橫島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는 전횡이라는 인물의 설화가 어려 있는 섬이다. 이 지도는 성리학을 받아들여 국시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지식인들이 중화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배우성)

  •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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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는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및 충청남도 금산군에 해당하며, 관찰사 소재지인 감영은 전주에 있었다. 지도에는 전라도에 속한 57개 고을이 표시되어 있으며, 25개의 鎭과 해남군 문내면에 있었던 右水營, 여수시 시내에 있었던 左水營, 강진군 병영면에 있었던 兵營이 보이고 있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靑岩, 景陽, 獒樹, 碧沙는 여러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지도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각 지역의 山城인데 이들 산성은 조선 초까지는 거의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여러 郡縣의 집단적 방어를 위한 거점으로 삼기 위해 대대적으로 修築한 곳이다. 하천은 맨 위쪽에 금강하류, 금강상류가 충청도 부분이 절단된 채 표시되어 있으며,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섬진강 등이 비교적 실제 모양에 맞게 잘 그려져 있다. 산의 표현은 계속적으로 이어진 선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지도 오른쪽의 백두대간으로부터 전지역이 거의 연결된 형태로 그려져 있어 강의 유역권을 이해하는데 편리하게 만들었다. 산의 크기는 높낮이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지역이 평지인지, 산지인지가 잘 구분되지는 않는다. 섬은 크고 중요한 몇 개를 제외하면 섬의 크기와 상관없이 대략적인 위치만을 알 수 있도록 표현하여 섬의 존재유무만을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이기봉)

  • 능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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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주목은 화순군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한천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능주면 관영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영산강 상류 지석천이 남동쪽 여러 물을 받아 능주목 한가운데를 지나 북서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각종 관아뿐만 아니라 映碧亭, 淸興亭, 鳳棲樓 등의 樓亭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읍치 아래쪽의 상동면에는 바위 위에 앉아있는 듯한 松石亭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뛰어난 경치가 있는 고을임을 알 수 있다. 읍치 오른쪽의 서원은 중종 때의 名臣이고 己卯士禍(1519) 때 능주로 귀양와 사약을 받은 조광조를 배향한 竹樹書院으로서 1570년(선조 3)에 賜額되었다. 지도 왼쪽 아래쪽에는 千佛天塔으로 유명한 雲住寺 터가 雲住塔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 때에는 절이 廢寺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쪽의  峯寺는 신라 선종 9山門의 하나인 獅子山派를 개창한 澈鑒禪師 道允의 舍利塔과 塔碑가 있는 곳이다. 기타 이 지역의 특산물인 대나무를 생산하던 竹田이 특별히 두 군데나 표시되어 있음이 독특하고, 읍치 아래쪽의 雲山은 아주 작인 산임에도 불구하고 이 고을의 鎭山으로 되었음이 재미있다.(이기봉)

  • 상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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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군은 일제시대의 중화군 상원면, 수산면, 천곡면, 풍동면, 배화면, (상도면, 하도면)에 해당하며지금은 평양특별시 상원군 일대이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하여 그렸는데 고을의 서쪽에 있는 鎭山 盤龍山의 坐向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을은 동·서·남쪽이 높은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사방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모여 북쪽 能城江에 합해진다. 이 能城江은 현재는 南江으로 불리고 있다. 읍치는 서쪽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이중으로 둘러 쌓인 전형적인 풍수적 형태로 그려져 있어 시각적으로 눈에 쉽게 들어온다. 이 고을은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에게 불려가 반역에 대한 추궁을 당할 때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어 위기를 모면하게 도와준 崔凝(898-932)의 출신지이다. 또한 고려 충렬왕(1274-1308) 때 몽고에 30회나 사신으로 드나들며 원나라 관할하에 있었던 동녕부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이 고을이 황주로부터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되게 만든 趙仁規(1227-1308)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논(畓)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火田도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삼수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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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수부는 함경도 내륙의 고을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다. 동쪽으로는 甲山, 남쪽으로는 咸興, 서쪽으로는 평안도의 古茂昌에 이른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삼수군 삼남면, 읍관면, 별동면, 군인면, 강진면, 자서면, 삼서면, 관흥면 그리고 장진군 군내면, 상남면, 중남면, 구읍면, 신남면북면, 동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량강도 삼수군, 김정숙군이 과거 삼수부 지역이다. 三水라는 지명은 이 지역의 크고 작은 물줄기 세 갈래가 압록강에 합쳐지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1693년(숙종 19)에는 국경 방어를 위해 右營將을 두고 府使가 겸임하였다. 원래 1656년(효종 7)에 축조되어 砲樓까지 갖춰진 방어용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압록강 연안에는 접경지역이라는 지역의 특성으로 인해 봉수, 진보, 파수 등의 군사 시설이 다수 들어서 있다. 1511년(중종 6)에 설치된 乫波知鎭, 1489년(성종 20)에 설치된 仁遮外堡, 1500년(연산군 6)에 설치된 羅暖堡, 小農堡, 舊乫波知堡 등이 포진해 있다. 지도의 이면에는 갑산과 삼수 지역의 鎭堡에 대한 군사 항목을 기재해 놓았다.(노혜정)

  • 산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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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군은 본래 산음현이었는데, 1767년(영조 43)에 7살 된 아이가 아들을 난 것은 떳떳하지 않다 하여 ''음''자를 버리라는 왕명으로 인하여 산청으로 고쳤다. 산음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금서면, 오부면, 차황면, 생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산청읍옥동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내에 있는 造山은 풍수 상 허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산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객사의 서쪽에 있는 換鵝亭은 조선 초기의 산청현감 심 린이 창건하고, 권 반이 환아정이라 명명하였다.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산청초등학교가 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西溪書院은 1606년(선조 39)에 세워져  吳 健을 모셨다. 1677년(숙종 3)에 사액되었다. 王山寺가 위치한 王山의산중턱에 가락국 제 10대 讓王의 능이 있다. 지도의 왕산사의 터에 지은 사당이 王山祠이다. 신라 때 장군 金庾信과 金 孟, 金馹孫을 모셨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읍치남쪽에 위치한 智谷寺에는 고려 예부상서 孫夢周가 지은 慧月과 眞觀의 두 碑가 있다.(金在完)

  • 아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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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현은 현재 아산시 염치읍, 영인면, 음봉면, 인주면, 둔포면을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일대이었다. 남쪽으로 곡교천을 따라 신창현 및 온양현과 경계를, 북쪽으로 郡界川을 경계로 평택현(현재 평택시 팽성시)과 접하고 있었다. 곡교천 연안에는 범람원이 비교적 넓게 펼쳐져 있다. 수많은 산봉우리가 교착하여 대치해 섰고, 두 시냇물이 돌아 흐르는 형세이다. 따라서 적을 방어하기에는 매우 유리한 형세를 갖추고 있다. 본 현 서쪽 10리 지점에 貢稅串倉이 있었다. 공세창은 현재 아산만 방조제 남쪽의 공세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창고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倉庫條에 의하면 옛날에는 창고가 없었는데, 1523년(중종 18)에 비로소 건물을 지으니 무릇 80칸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인근 40여 고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보내던 조운 활동의 요지로서 1523년(중종 18)부터 1762년(영조 38)까지 유지된 이 곳의 조창(공진창)은 전국 9대 조창의 하나였다. 숙종때에는 아산, 전의, 목천, 연기, 청주, 온양 등 6읍의 稅米만 이 창고에 보관되었다. 지도상에 衙舍 동남쪽 방향에 忠武公祠宇가 나타나 있다. 이것은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하여 1706년(숙종 32)에 세워졌고 이듬해에 사액되었다.(金在完)

  • 전라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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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는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및 충청남도 금산군에 해당하며, 관찰사 소재지인 감영은 전주에 있었다. 지도에는 전라도에 속한 57개 고을이 표시되어 있으며, 25개의 鎭과 해남군 문내면에 있었던 右水營, 여수시 시내에 있었던 左水營, 강진군 병영면에 있었던 兵營이 보이고 있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靑岩, 景陽, 獒樹, 碧沙는 여러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지도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각 지역의 山城인데 이들 산성은 조선 초까지는 거의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여러 郡縣의 집단적 방어를 위한 거점으로 삼기 위해 대대적으로 修築한 곳이다. 하천은 맨 위쪽에 금강하류, 금강상류가 충청도 부분이 절단된 채 표시되어 있으며,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섬진강 등이 비교적 실제 모양에 맞게 잘 그려져 있다. 산의 표현은 계속적으로 이어진 선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지도 오른쪽의 백두대간으로부터 전지역이 거의 연결된 형태로 그려져 있어 강의 유역권을 이해하는데 편리하게 만들었다. 산의 크기는 높낮이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지역이 평지인지, 산지인지가 잘 구분되지는 않는다. 섬은 크고 중요한 몇 개를 제외하면 섬의 크기와 상관없이 대략적인 위치만을 알 수 있도록 표현하여 섬의 존재유무만을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이기봉)

  • 담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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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현은 담양군 담양읍, 봉산면, 무정면, 대덕면, 금성면, 용면, 월산면 지역으로서 읍치는 담양읍 객사리, 향교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와 金城山城을 제외하면 산천과 면만을 표시한 매우 간단한 지도로서 구체적인 내용은 여백 주기에서 보완하고 있다. 지도에는 사방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들을 받고, 현 한가운데를 지나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영산강 상류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지도의 오른쪽 위쪽에 있는 金城山城은 원래부터 있던 石城을 임진왜란을 겪고 난 1597년(선조 30)에 개축하고, 1653년(효종 4)에 중수하여 담양, 순창, 옥과, 창평 등을 관할하게 한 성으로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정비된 국방체제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금성산성에는 金城寺가 있어 평상시의 산성관리를 행하게 하였으며, 조선초부터 金城山神祠가 있어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기타 여백 주기의 祠廟조에 있는 義岩書院은 1568년(선조1)부터 1577년(선조 10)까지 10년간의 公的, 私的 사실을 기록한, 조선 최대의 일기인 ≪眉巖日記≫의 저자 柳希春(1513-1577)을 배향한 서원으로 위치는 담양이 아닌 창평면 의항리에 있었다.(이기봉)

  • 서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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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서흥군 신막읍, 서흥면, 도면, 세평면, 소사면, 율리면, 목감면, 용평면, 내덕면, 매양면, 구포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북도 서흥군 전체, 인산군 일부 지역, 봉산군  동쪽 부분, 연탄군 일부 지역, 수안군 일부, 린산군 북부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1671년(현종 12)까지 서흥도호부이였던 이곳은  趙大立이 반란을 일으켜 府使 李宇柱를 죽였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1762년(영조 38)에 복구되었다가 1776년(정조 1)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86년(정조 10)에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7리에 위치한 大峴山이다. 지도상에는 大尼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서흥현도 황주목과 마찬가지로 面이 아니라 坊으로 표시되어 있다. 慈悲嶺은  嶺이라고도 하는데 평양에서 서울로 통하는 옛 길이다. 세조 때 호랑이의 피해가 많고 또 중국 사신이 모두 극성길을 경유하여 통행함으로 그 길이 폐지되었다. 지도에는 木柵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좌측 중단의 읍치 우측에 보이는 大峴山城은 실제로 읍치 정북 방향에 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2만 2백 38척, 높이 23척이다. 성안에는 서흥현 및 수안·곡산·신계·우봉·토산·황주·봉산 등 고을의 軍倉이 위치해 있었다.(金在完)

  • 삼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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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강원도 동해시, 삼척시, 태백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삼척시 중심부가 삼척부가 자리한 지역이다.본래 悉直國이었는데 신라 婆娑王때 항복하였으며 760년(景德王 19)에 三陟郡이 되었다. 현재 북평읍과 묵호읍이 합해져 동해시가 되었고, 황지읍과 장성읍이 합해져 태백시가 되었으며 삼척읍이 삼척시가 되었다. 백두대간(頭陀山, 太白山)의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五十川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太白山의 黃池는 낙동강의 발원처로 알려진 곳이다. 삼척영장이 주재하는 鎭營과 府의 중심지에 성곽이 형성되어 있었다. 平陵驛, 新興驛을 지나 江陵으로, 百復嶺, 竹嶺, 楡嶺을 넘어 정선, 영월로 연결되었으며 史直驛, 交柯驛, 龍化驛, 沃原驛 등을 거쳐 울진과 안동으로통하는 지역이다. 명승지로 이름난 곳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武陵溪(동해시 이도동)이다. 바닷가에는 東樓와 召公臺가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縣倉(원덕읍 옥원리)이 있는데 과거에 竹嶺縣이 이곳에 있었다.(이현군)

  • 삼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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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태종 때 三岐縣과 嘉壽縣을 합쳐서 三嘉縣라고 하면서 치소를 지금의 삼가현 읍치로 옮겼다. 삼기현의 옛 읍치는 지도상 古縣倉 부근이 된다. 삼가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대병면, 삼가면, 쌍백면, 거창군 신원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삼가면 錦里에 있었다.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3,259척, 높이가 9척이었다. 향교 아래에 ''曹南溟胎生處''이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방에서 남명 조식의 위치를 가늠할수 있다. 읍치 북쪽의 龍巖書院은 조 식을 배향한 곳으로 1603년(선조 36)에 세워져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金城山은 삼기고현의 진산이었고, 옛 성터가 남아 있다. 古縣倉 부근에 무학대사의 所生處가 표시되어 있다. 금성산의 우측에 보이는 岳堅山은 사방이 높고 막혀 있어서 산성을 쌓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 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 있는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2,008척인데, 이미 옛날에 폐했다고 한다. 읍치 우측에 위치한 有 驛은 沙斤道의 屬驛이었다.(金在完)

  • 안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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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흥진은 현재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안흥에 있었다. 안흥의 지명은 安興梁에서 유래하였는데, 안흥량은 태안읍에서 서쪽 34리 지점에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태안군 산천조의 기록에 따르면 옛날에는 難行梁이라 불렀는데, 바닷물이 험하여 조운선이 이 곳에 이르러 여러 차례 침몰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흥진은 삼남지방의 세곡을 한성으로 수송하던 조운선의 주요 기항지였으며,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안흥성은 바다에 임한 절벽 위에 쌓은 천연 요새이다. 지도에 나타난 성은 1665년(효종 6)에 士人 金石堅이 청하여 鎭城을 쌓은  것으로 수군첨절제사를 두었다. 지도를 보면 동서남북 4대문이 있고, 관사 1동, 창고 2동, 군기고 2동, 조총고 1동 등 방어시설을 완비한 성임을 알 수 있다. 안흥진성을 중앙에 두고 주변지역에 섬이 둘러싸인 형태의 지도로서 해안에 위치한 진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도와 유사하다. 안흥량은 조류가 빨라 험난했다. 그래서 세곡수송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운하의 건설이 시도된 바 있다. 加積運河가 그것인데, 1134년(고려 인종 12)에 운하건설이 추진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조선 태조 이후 현종 때까지 여러 차례 거론된 바 있다.(金在完)

  • 제주삼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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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목은 지금의 제주시와 북제주군이며 읍치는 제주시 삼도동 일대에 있었다. 대정현은 지금의남제주군 대정읍·안덕면·서귀포시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대정읍 안성리·인성리·보성리 일대에 있었다. 정의현은 남제주군 성산읍·표선면·남원읍·서귀포시 동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표선면 성읍리에 있었다.지도의 아래쪽에는 전라도 남해안의여러 고을, 오른쪽에는 중국 북부해안이 표시되어 있고, 위쪽에는 중국 남부해안 및 현재의 베트남인 安南國과 오끼나와인 琉球國, 일본의 一岐島 등이, 오른쪽에는 일본 본토와 對馬島가 적혀 있다. 지도에서는 고을의 鎭山인 한라산의 白鹿潭이 강조되어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음이 눈에 뜨이고, 거대한 무덤처럼 수없이 솟아있는 寄生火山 오름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들이 해안가로 줄지어 내려가는 모습도 그려져 있는데, 이런 하천은 화산 폭발에 의한 多孔質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乾川이 대부분이다. 한라산을 둘러싸고 一所부터 十所까지 노란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는 곳은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서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가에도 여러 개의 馬場이 보이고 있다. 기타 해안가의 전략적 요충에 수많은 烽臺가 만들어져 해안 감시를 맡게 하였으며 古縣과 각종 마을 이름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이기봉)

  • 덕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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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적도는 원래 南陽 땅이었으나 1486년(성종 17)에 인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진면에 해당한다. 이 지도는 덕적도만 그린 것이 아니라 경기만 일대 전체를 그리고 있다. 육지부와 섬을 함께 그리고 있는데, 육지부의 각 지역은 도별로 색을 달리하여 구분하고 있으며 각 섬들은 행정구역상 어디에 소속된 지역인지 일일이 표시하고 있다. 각 섬들의 형태는 정확하지 않으나 거의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방어적 성격을 지닌 지도이므로 水營, 鎭, 津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서해의 여러 섬들을 중심으로 그린 지도이므로 각 지방과 통하는 水路와 水路상의 거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섬과 섬, 섬과 육지사이의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여백에는 선박의 운행과 관련된 사항이 적혀 있으며 바람과 물때(밀물과 썰물)를 기다리던 곳을 표시하고 있다(三南稅船往來時 暫時碇留待風水處). 또한, 潮水干滿의 차가 큰 서해안이라 조수가 빠져나갈 때는 섬과 섬 사이를 건너다닐 수 있으며 물이 다시 들어올 경우 배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水退則靑泥 行人皆越去 潮進則行舟).(이현군)

  • 선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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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부는 일제시대의 선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선천군의 대부분과 서쪽 일부를 제외한 동림군 일대이다. 이 고을은 993년(고려 성종 12)에 서희가 회복한 江東六州의 하나로서 그 때의 읍치가 지도 왼쪽 東林古城에 宣州로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古邑基에는 ''병자호란 때 불타서 林畔?으로 옮겼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이 때 옮긴 곳이 지도에 보이는 읍치이다. 읍치에는 客舍 등의 건물 이외에 中軍所가 보이고 있는데 병자호란(1636) 직후인 1642년(인조 20)에 설치된 淸北水軍防營으로서 평안도 서북쪽 고을과 鎭堡를 관할하였다. 여백주기에도 防營의 내용이 쓰여 있으며, 이 방영에서 관할하였던 鎭이 다음 페이지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劒山城은 1627년(인조 5)에 처음으로 쌓았다가 1631년(숙종 9)에 임경업이 증축했던 성이다. 그 옆의 淸江鎭은 1678년(숙종 4)에 설치되고 영조 때 종3품의 僉使가 파견되었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방어영에 소속된 배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東林古城은 의주대로상의 요충지로서 조선 초까지 頹落해 있던 성터를 1693년(숙종 19)에 修築하였다.그 왼쪽의 左峴大路라 표시된 곳은 의주대로 최대 요충지로 인정되어 1750년(영조 26)에 성을 쌓고 (西林城)關門을 설치했던 곳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런 요충지로서의 성격에 맞게 고개와 봉수의 표시가 매우 자세하며, 다음 페이지의 여백주기에는 중국과의 국경선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身彌島는 지형의 특성이 잘 그려져 있으며, 點馬營을 통해 목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안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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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변부는 철령을 넘어 나타나는 함경도의 첫째 고을로 상당히 넓은 면적에 걸쳐 있었다. 아래로는 강원도 歙谷, 위로는 德源과 맞닿아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안변군 학성면, 안도면, 배화면, 서곡면, 문산면, 위익면, 신모면과 덕원군 풍상면, 풍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강원도 안변군과 고산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에는 원형의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둘레가 10,358尺으로 비교적 큰 규모이다. 고을의 서남쪽에서 산줄기가 크게 갈라지는데 강원도로 경유하여 남쪽으로 가는 백두대간과 한양쪽으로 내려가는 한북정맥으로 대별된다. 지도상에 전자는 '南去大脈'으로 후자는 '漢都大脈'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강원도 흡곡에서 올라오는 대로와 철령을 넘어오는 대로가 이 지역의 간선로인데 철령을 넘어오는 관북대로를 더 강조하였다. 그 옆 분수령을 넘어가는 도로는 三防路라고도 하는데 이 지역의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했다. 동북쪽 奉龍驛 옆에는 翼祖의 능인 智陵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가의 浪城에는 과거 水軍 萬戶가 있었는데 1509년(중종 4)에 혁파되었다. 읍치의 玉洞書院은 1567년(명종 22)에 창건하고 1702년(숙종 28)년에 사액되었다. 함경도 감사로서 이 지역에 儒風을 진작했던 李繼孫을 비롯하여 金尙容, 趙錫胤 등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지도의 여백에는 일종의 斗入地에 해당하는 서쪽 永豊 지역의 지형 지세를 설명하면서 별도로 읍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노혜정)

  • 상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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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목은 1392년(태조 1)에 경주에서 관찰사영이 옮겨온 후부터 1596년(선조 29) 관찰사영이 대구부로 옮겨질 때까지 경상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인조 때 상주에 左營이 설치되었는데, 屬邑은 상주·개령·금산·지례·함창 등이었다. 상주목은 지금의 상주광역시 전체와 의성군 단밀면과 단북면,문경시 산양면, 영순면 일부, 산북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상주시 가운데 화북면, 화남면, 화서면, 화동면, 모서면, 모동면은 낙동강 수계가 아니라 금강 수계에 속한다. 읍치는 상주시 상주시내 서성동 일대에있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天奉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洛東津은 낙동강의 가항종점으로서 어염선 왕래가 잦았던 浦口이었고, 또한 나루터와 역이 있어서 수륙교통의 요지이었다.읍치 좌측에 보이는 남장사는 832년(신라 흥덕왕 7)에 진감선사가 창건하여 長栢寺라 하였는데, 1186년(고려 명종 16)에 각원대사가 이 자리에 옮겨 짓고 남장사로 고쳤다. 남장사 좌측에 있는 北長寺는 833년(신라 흥덕왕 8)에 진감선사가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24년(인조 2)에 명나라 승려 10여 명이 와서 중창하였고, 그 후에도 몇 번 화재를 입고, 다시 중창된 바 있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龍興寺는 839년(신라 문성왕 1)에 진감국사가 창건하였고, 그 뒤에 여러 번 중수하였는데, 법당의 용틀임이 유명하다. 읍치 서북쪽에 위치한 甄萱山城은 견훤이 가은에서 나서 그 누이와 같이 청화산의 돌을 한 치마씩 주워 다가 하루만에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켜 후백제를 이룩하였다고 전한다. 지금도 흔적이 완연하게 남아 있다.(金在完)

  • 연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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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현은 현재 연기군 동면, 서면, 종촌리와 송담리을 제외한 남면, 북면을 합친 지역이었다. 연기현은 청주목과 공주목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하였다. 읍치는 현재 연기군 읍내리에 있었다. 현 동쪽 1리에 위치한 城山이 鎭山이다. 특이한 점은 客舍와 衙舍가 분리되어 있고, 관아가 鎭山인 城山 서쪽에 배치되어 있는 점이다. 이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主山과 읍치 진산의 불일치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읍치 앞을 흐르는 연기천이 현대 지형도에서는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흐르는데, 지도에서는 반대 방향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모든 하천이 읍치 앞으로 모이는 형세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군현 중심의 지리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읍치의 동쪽 5리에 위치한 東津은 文義·懷仁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다. 연기현의 稅穀이 이 곳 東津에서실려 군산창에 수납되었고,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羅里津은 유성·진잠으로 통하는 나루터로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멀리 제주에서 수운으로 운반된 해산물과 농산물이 교역된 장소이었다. 읍치 동쪽의 봉암에 위치한 鳳岩書院은 1651년(효종 2)에 세워졌고, 1665년(현종 6)에 賜額되었다.(金在完)

  • 제주삼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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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지도보다 산과 하천의 표현이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었음이 눈에 띈다. 白鹿潭은 여전히 부각되어 있으나 가운데의 우뚝 솟아 동서로 걸쳐 있는 한라산의 모습이 강조되고 기타 오름은 작은 크기로 표현되었다. 한라산 산간 중턱에 있는 여러 목장이 울타리가 쳐진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果樹園의 표시도 자세하다. 앞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읍성이 굴곡의 모양까지도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특히 제주 읍성 안에는 여러 관아시설을 상세하게 표현하였다.이런 건물 중 김상헌·송시열을 비롯하여 제주에 귀양왔던 여러 사람을 배향하고 1682년(숙종 8)에 賜額받은 제주 유일의 橘林書院도 보인다. 읍성 위쪽으로는 제주 탐라국의 조상으로 받들어지는 良乙那, 高乙那, 夫乙那가 나왔다는 三姓穴이 毛興穴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 三姓에게 제사지내던 三姓壇의 모습도 보인다. 그 위쪽으로는 한라산의 護國神에게 제사지내던 廣壤壇이 있다. 해안가에는 대규모의병력이 상륙할 수 있는 지점에 성을 쌓아 병졸을 주둔시키던 防護所를 자세히 그렸는데, 제주 읍성 왼쪽의 朝天館은 제주도에서 본토로 떠나는 배들이 출발하던 곳으로서 배의 모습을 그려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기타 烈女門 2개, 孝子門 1개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고 涯月所 위쪽으로는 고려 때 몽고에게 항복하기를 반대하여 끝까지 저항했던 三別抄의 고성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마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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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麻田淺縣이었다가 고려 초에麻田이 되었으며 漣川, 積城, 長湍, 朔寧과 경계를 이루었으며 현재는 경기도 연천군에 포함되어 있다. 임진강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지도에서 大江으로 기록된 것은 臨津江을 의미하며 楡林津, 腐近津 등의 나루가 보인다.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왕징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미산면 마전리가 중심지였다. 비교적 간략하게 그린 지도로 읍치 안에 人家라고 기록한 것이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점이다. 숭의전은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사당이다. 1392년(태조 원년)에 사당을 지어 고려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지도에 표시된 大路는 積城과 漣川을 연결해주던 도로이다. 읍치의 뒤쪽 脈勢를 강조하여 그렸으며 강줄기도 郡전체를 감싸듯이 그렸다. 실제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읍치를 중심으로 재해석하여 표현하고 있다.(이현군)

  • 선천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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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부는 일제시대의 선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선천군의 대부분과 서쪽 일부를 제외한 동림군 일대이다. 이 고을은 993년(고려 성종 12)에 서희가 회복한 江東六州의 하나로서 그 때의 읍치가 지도 왼쪽 東林古城에 宣州로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古邑基에는 ''병자호란 때 불타서 林畔?으로 옮겼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이 때 옮긴 곳이 지도에 보이는 읍치이다. 읍치에는 客舍 등의 건물 이외에 中軍所가 보이고 있는데 병자호란(1636) 직후인 1642년(인조 20)에 설치된 淸北水軍防營으로서 평안도 서북쪽 고을과 鎭堡를 관할하였다. 여백주기에도 防營의 내용이 쓰여 있으며, 이 방영에서 관할하였던 鎭이 다음 페이지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劒山城은 1627년(인조 5)에 처음으로 쌓았다가 1631년(숙종 9)에 임경업이 증축했던 성이다. 그 옆의 淸江鎭은 1678년(숙종 4)에 설치되고 영조 때 종3품의 僉使가 파견되었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방어영에 소속된 배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東林古城은 의주대로상의 요충지로서 조선 초까지 頹落해 있던 성터를 1693년(숙종 19)에 修築하였다.그 왼쪽의 左峴大路라 표시된 곳은 의주대로 최대 요충지로 인정되어 1750년(영조 26)에 성을 쌓고 (西林城)關門을 설치했던 곳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런 요충지로서의 성격에 맞게 고개와 봉수의 표시가 매우 자세하며, 다음 페이지의 여백주기에는 중국과의 국경선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身彌島는 지형의 특성이 잘 그려져 있으며, 點馬營을 통해 목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안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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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안협으로 고쳤으며 1414년(태종 14)에 경기도 삭녕군과 합하여 안삭군이 되었다. 1416년(태종 16)에 안협현이 되었다가 1914년에 伊川에 병합되었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철원군의 북쪽 안협면과 이천군의 남쪽 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도로, 산줄기, 강줄기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그린 지도이다. 철원군 안협면의 읍내리가 邑治가 되며 북쪽의 晩景山이 鎭山에 해당한다. 邑治에 성곽은 없고 客舍, 衙舍, 倉, 鄕校만 표시하였다. 읍치를 중심으로 두 개의 古城과 擧城이 표시되어 있다. 邑治의 서쪽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은 臨津江으로 강을 따라 북쪽의 平康, 伊川과 이어지는 길에는 별로 험준한 嶺隘가 없다. 서쪽으로는 황해도 兎山, 남으로는 경기도 朔寧과 鐵原, 북으로는 伊川이 경계를 이룬다. 적색의 도로상에 고개(峴)를 표시하였으며 지도 아래쪽에 去京路, 鐵原去路 등 서울, 철원과 이어지는 길을 따로 기록하였다. 그 밖에 북쪽에 烽燧臺를 표시하였다.(이현군)

  • 선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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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善山府는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옥성면, 도개면, 무을면, 고야읍, 해평면, 산동면, 장천면, 낙동강 서안 구미시내,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고, 읍치는 선산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선산은 감천과 낙동강 본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였다. 府治의 북쪽에 위치한 飛鳳山이 이 고을의 鎭山겸 主山이다. 읍치에 보이는 河先生遺墟는 河緯地의 遺墟碑를 지칭하는 것이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金烏書院은 본래 1570년(선조 3)에 금오산 아래에 세워져 길 재를 배향하였고, 1575년(선조 8)에 사액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므로, 1609년(광해군 1)에 지도상의 위치(현재의 선산군 선산읍 원동)로 옮겨 세우고 편액을 다시 썼으며, 그 뒤에 김종직 등을 추배하였다. 月岩書院(지도의 우측 상단)은 본래 1630년(인조 8)에 來格廟로 창건되어 김 주를 제사지내다가, 그 후에 하위지, 이맹전을 배향하고 三仁이라 하였고,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리고, 그 후 이 곳에 月岩亭이라는 정자가 세웠졌다. 그 외 茂洞書院과 洛峯書院은 미사액서원이다. 義狗塚은 개가 주인 연향역 아전 김성발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 죽어 이 곳에 묻힌 개무덤이다. 桃李寺는 383년(신라 내물왕 28) 아도화상이 입산하였던 절로서 겨울철에 복숭아와 오얏꽃이 만발하였으므로, 이곳에 절을 세웠다한다. 1977년 4월에 도리사 담장을 수리하던 중 阿道和尙石像이 발견되기도 하였다.(金在完)

  • 연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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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연산현은 현재 논산시 연산면, 두마면, 양촌면 일부, 벌곡면, 부적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연산면 연산리 부근에 있었다. 부근에 ''향교골''의 지명이 남아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形勝條에 ''연산현은 산천이 웅장 수려하다. 땅이 적고 편평하며 넓은 지대가 적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계백이 신라군과 최후의 격전을 벌였던 ''황산벌''은 넓은 들이 아니라 연산이 자리한 연산천 골짜기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황산치가 보이는데 그 부근으로 생각된다. 북쪽에는 유명한 계룡산이 표시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였을 때, 이 계룡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친히 와서 순시하고 길지를 택하여, 대략 그 터를 정하고는 공사를 시작하였다가, 결국 조운의 길이 멀다 하여 이를 중단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곳을 新都라고 부르고 있으며, 당시 구획하였던 개울과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고지도 상에서 읍치 위쪽에 보이는 開泰寺는 고려 태조와 관련이 있다. 개태사는 天護山 북쪽에 있는데, 고려 태조의 眞殿이 있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백제를 정벌하여 큰 승리를 거둔 후 有司에게 명하여 개태사를 창건하게 하였다 한다. 연산의 세곡은 은진의 시진포까지 육로로 운반되어 조운되었다.(金在完)

  • 제주삼현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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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목은 지금의 제주시와 북제주군이며 읍치는 제주시 삼도동 일대에 있었다. 대정현은 지금의남제주군 대정읍·안덕면·서귀포시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대정읍 안성리·인성리·보성리 일대에 있었다. 정의현은 남제주군 성산읍·표선면·남원읍·서귀포시 동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표선면 성읍리에 있었다.지도의 아래쪽에는 전라도 남해안의여러 고을, 오른쪽에는 중국 북부해안이 표시되어 있고, 위쪽에는 중국 남부해안 및 현재의 베트남인 安南國과 오끼나와인 琉球國, 일본의 一岐島 등이, 오른쪽에는 일본 본토와 對馬島가 적혀 있다. 지도에서는 고을의 鎭山인 한라산의 白鹿潭이 강조되어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음이 눈에 뜨이고, 거대한 무덤처럼 수없이 솟아있는 寄生火山 오름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들이 해안가로 줄지어 내려가는 모습도 그려져 있는데, 이런 하천은 화산 폭발에 의한 多孔質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乾川이 대부분이다. 한라산을 둘러싸고 一所부터 十所까지 노란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는 곳은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서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가에도 여러 개의 馬場이 보이고 있다. 기타 해안가의 전략적 요충에 수많은 烽臺가 만들어져 해안 감시를 맡게 하였으며 古縣과 각종 마을 이름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이기봉)

  • 보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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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군은 벌교읍, 웅치면, 회천면을 제외한 보성군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보성읍 보성리 일대에 있었다.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강이 고을의 남쪽 바닷가 근처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 뒤쪽에는 고을의 鎭山인 德山이 그리 높지 않은 산임에도 크게 강조되어 있고 그로부터 뻗어 나온 산들의 이름이 자세하다. 또한 읍치 주변의 물줄기가 실제로는 남북으로 흐름에도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 읍치가 풍수적 명당임을 보여주려 했음을 엿볼 수 있다. 보성군에는 폐현이 2개가 있었는데 읍치 북쪽의 福內面은 福城폐현, 동쪽의 兆內面은 兆陽폐현의 흔적이 면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읍치 왼쪽에는 이 고을 사람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운 安邦俊을 배향한 大溪書院과 이 고을 郡守를 지냈고 정유재란 때 이순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安弘國을 배향한 旌忠祠, 오른쪽 兆內面에는 이 고을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운 朴光前을 배향한 龍山書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 숙종 때 賜額을 받아 17세기말-18세기초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지도에는 세종 때의 名臣 黃喜의 影堂이 있었던 大原寺를 비롯하여 지도 제작 당시에 있었던 절 세 개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성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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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천부는 일제시대의 성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성천군과 회창군 일대이다. 대동강의 지류 沸流江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관통하며  波에서 대동강 본류와 합해진다.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강은 역시 대동강의 지류인 能城江으로서 지금은 南江이라 부른다. 읍치는 비류강가의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衙舍·客舍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명물이며, 운치 있는 이름을 갖고 있는 降仙樓와 訪仙門까지도 특별히 표시하였다. 여백 주기에 강선루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되어 있음도 흥미롭다. 강선루 건너편에는 屹骨山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구려 시조 東明王이 부여로부터 남하하여 힘을 겨루어 굴복시킨 沸流國의 왕 松讓이 쌓은 성이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동명성왕의 근거지인 졸본성이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므로 이 기록은 믿어지지 않고 있다. 이 기록 이외에도 고구려 초기 동명성왕과 관련된 고적이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많이 나온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東倉 부근에표시되어 있는 총 4개의 銀店을 통해 조선 후기에 많이 개발되었다는 은광산의 존재를 지도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사회·경제적 변화의 일면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산과 고개의 표시가 자세한데 고개의 표현에서 古介와 嶺이 섞여 표시되어 있어 양자가 실제에서도 혼용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이 지역은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양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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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楊口郡이었으며 현재의 강원도 양구군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縣의 중심지는 양구읍내의 상리, 중리, 하리 일대가 된다. 邑治에 城郭은 없고 客舍, 衙舍, 倉만 그려져 있다. 鄕校는 양구읍 중리에 있었다. 북쪽의 方山面縣은 원래 方山縣으로 1424년(세종 6)에 회양으로부터 양구에 속하게 되었다. 중심지는 고려때 방산면 고방산리에서 현리로 옮겨졌다. 亥安面縣은 亥安所가 있었던곳으로 역시 1424년(세종 6)에 春川으로부터 양구에 속하게 되었는데 해안면 현리가 과거의 읍치였다. 방산면과 해안면에는 각각 倉庫가 있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縣을 감싸며 縣의 앞을 흐르는 하천은 서천으로 北漢江에 들어간다. 지금은 댐 건설로 인해 파로호가 되어있다. 縣의 鎭山은 飛鳳山으로 과거에는 삼한 때 쌓았다는 山城이 있었다. 南面의 烽臺山에는 烽燧가 있었으나 폐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지도 위쪽으로는 禁山이 표시되어 있다. 道里峙, 廣峙, 鷄山岺을 지나는 세 갈래 길을 통해  蹄와 통하며 含春驛(양구읍 하리)을 지나 淮陽, 狼川과 통하게 되는데 험준한 길이다. 지도 왼쪽 아래의 水仁驛(양구읍 수인리)을 지나는 길은 춘천과 가평을 경유하여 서울로연결되는 길이다. 이 밖에 정자(松岩亭)와 암자(深谷庵)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성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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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목은 고려시대 牧으로서 경상도의 중요 고을이었다. 조선후기 대구가 경상도의 首府로서 성장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대구부보다 郡勢가 강했다. 성주목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전체, 고령군 다산면, 덕곡면, 운수면을 포함하는 지역으로서 현 성주군보다 훨씬 넓었다. 읍치는 성주군 경산리 일대에 있었다. 북쪽에 위치한 印懸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邑城은 옛날에 흙으로 쌓았다가 1520년(중종 15)에 돌로 고쳐 쌓았고, 1591년(선조 24)에 또 고쳐 쌓은 원형의 성이다. 좌측에 보이는 禿用山城은 본래 都山城인데, 옛날 돌로 쌓았는데, 1675년(숙종 1)에 목사 이시현이 고쳐 쌓았다. 남문 밖에 있는 關王廟는 1597년(선조 30) 명나라 장수 茅國器가동문 밖에 세워 관우의 초상을 모셨는데, 1727년(영조 3)에 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성주에는 川谷書院, 柳溪書院, 晴川書院, 德峯書院, 檜淵書院, 玉川書院 등 서원이 많다. 이들 가운데 천곡서원과 회연서원만이 사액서원이다. 천곡서원은 지도상으로 읍치 북쪽 명암방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서원은 1558년(명종 13)에 목사 노경린이 세웠고, 1560년(명종 15)에 목사 황준량이 연봉서원이라 하여 이조년, 이인복, 김굉필을 봉안하였는데, 정 구가 이천 운곡의 뜻을 따서 천곡서원이라 하였고, 선조 때 사액을 받았다. 지도상에 대리방에 위치한 회연서원은 1627년(인조 5)에 세워지고, 정 구와이윤우를 배향하였는데, 1690년(숙종 16)에 사액받았다. 독용산성 좌측에 있는 法水寺에는 3층 석탑과 당간지주가 있다.(金在完)

  • 연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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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현은 현재 괴산군 연풍면, 장연면, 충주시 상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있었다. 읍치는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일대이었다. 연풍은 영하취락이 중요하였다. 계립령은 속칭 마골재 또는 하늘재라고 불린다. 三國史記에 158년(신라 아달라 이사금 3)에 계립령을 처음 열었다는 기록되어 있다. 하늘재는 전략요충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쟁탈전이 발생하였다. 다음 기록은 그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고구려 온달이 말하기를 "계립현과 죽령 이서 지방이 아국에 돌아오지 않으면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늘재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중요한 길이었다. 조선이 개국되고 태종 때 문경새재가 개척되자 하늘재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문경새재는 鳥嶺 또는 草岾라고 부른다. 1708년(숙종 34)에 관문과 산성을 쌓았고, 1752년(영조 28)에 조령관문을 설치하였다. 이유릿재(이화령)을 통과하는 역로는 연풍-괴산-음성-죽산을 거쳐 서울로 통했다. 원래 伊火峴이던 것이 일제시대 초에 梨花嶺으로 바뀌었다. 가파르고 험하여 산짐승의 피해가 많으므로 전에는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 갔다 한다. 지도에서 읍치 좌측에 소옥정 정자가 나타나 있다. 이 정자 부근에는 유명한 소옥정 폭포가 있다. 조령에서 흐르는 물이 이 곳 위아래 龍湫를 이루고 아래 용추에서 폭포를 이룬다.(金在完)

  • 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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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진도군 일대로서 읍치는 진도읍 성내리에 있었다. 읍성위쪽의 고군내면 古城基가 옛 진도의 중심지였고, 지도상의 읍치는 嘉興폐현 자리에 새로 조성한 것이며, 아래쪽 임회면은 臨淮폐현의 흔적이다. 지도 위쪽의 命山面은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일대, 오른쪽의 三寸面은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일대의 越境地이다. 碧波亭은 고려 때 만든 정자로서 진도에서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三枝院으로 건너가는 요충지에 지어졌으며, 그 왼쪽의 綠津은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해남현의 右水營과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읍치 남쪽에는 나라에서 필요한 목재를 조성하기 위해 벌채를 금지한 封山이 4개나 보이고 있다. 지도 서남쪽 끝의 智力山에는 조선 초에 목장이 설치되고 監牧官이 파견되어 진도 내의 南桃浦, 尖察山, 富智山의 屬場을 거느렸으나 감목관은 나중에 해남의 黃原場으로 옮겨갔다. 지도 아래쪽에는 각각 정4품 萬戶가 파견된 金甲鎭과 南桃鎭이 그려져 있고, 그 사이에 沙仇味烟臺, 上堂串烟臺, 屈浦烟臺가 연속적으로 보이고 있는데 1622년(광해군 14) 감시가 어려운 곳에 특별히 설치한 것이다. 읍치에는 鎭山인 望敵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좌우로 감싸고 있고 內南山·外南山이 설정되어 있어 풍수적 관념이 충실하게투영되고 있다.(이기봉)

  • 부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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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일부지역(일부는 김포땅), 경기도 부천시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府의 중심지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이다. 지도의 오른쪽에 ''北''이라는 방위표시가 나와있다. 지도의 아래쪽에 한강이 표시되어 있으며露梁津路, 陽花津路, 孔岩津路등의 도로명이 붙어 있는데 이 길들을 통해 한강으로 연결되지만 한강과 인접한 지역은 부평의 땅이 아니다. 金浦路, 江都路, 安山路, 仁川永宗路를 통해 이 지역이 김포를 거쳐 강화도와 연결되며 인천을 거쳐 영종도까지 연결되고 안산과 인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桂陽山(인천광역시 계양구 방축동, 계산동)이 府의 鎭山으로 이곳에는 삼한 때 쌓았다는 城이 있었다. 府의 앞쪽에 표시된 ''造山''은 계산동의 들판에 풍수적 목적으로 쌓은 것이다.(이현군)

  • 송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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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현의 명칭은 1408년(태종 8)에 고려 때 靑松縣과 嘉禾縣을 합하여 송화현으로 고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송화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 연정면, 연방면, 도원면, 장양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송화군 대부분 지역, 삼천군 남부지역, 황해남도 태탄군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嘉和古縣은 읍치 동쪽 東倉과 南倉 부근에, 靑松古縣은 方竹洞坊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월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간 산줄기가 大藥山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이 고을의 진산인 墨山(대동여지도에는 生王山으로 나옴)에 이르러 명당형국을 만들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서원은 1699년(숙종 25)에 사액을 받은 道東書院이다. 고을 남쪽에 온천이 있는데, 현재도 송화온천으로 이름 나 있다. 읍치 남쪽에 ''城''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 성이 新岾古城이다. 輿地圖書에 따르면 돌과 흙을 섞어 쌓았는데 둘레가 9천 2백 1척이다. 大藥山 기슭에 修證寺, 高井寺가, 小藥山 기슭에 藥寺 등 유명한 사찰이 위치해 있다.(金在完)

  • 양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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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7년(태조 6)에 府로 승격되었으며 1416년(태종 16)에 양양으로 개칭되었다. 현재의 강원도 양양군 일대와 속초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양양읍 군향리가 그 중심지가 된다. 지도 위쪽의 所川面과 道門面이 현재의 속초시에 해당하며 지도 아래쪽의 洞山縣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양양에 포함된 땅으로 양양군 현북면 지역이다. 府의 중심지에는 城郭이 있었으며 오늘날 남문리, 서문리 등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성곽의 서쪽에 위치한 향교는 양양읍 내곡리 향교동에 있었다. 백두대간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쌍천과 남대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靑草湖, 雙湖 등의 潟湖가 발달한 지역으로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위는 설악산 일대이며 五色岺, 朴達岺, 阻枕岺, 九龍岺 등의 고개는 양구, 인제, 춘천과 통하는 통로가 된다. 降仙驛(강현면 강선리), 祥雲驛(손양면 상운리), 連倉驛(양양읍 연창리),  丘驛(현남면 인구리) 등의 역이 있었다. 東海廟(東海神祠, 양양읍 조산리)는 나라에서 봄가을에 香과 祝을 내리어 東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洛山寺(강현면 전진리)를 비롯하여 神興寺, 靈穴寺, 開雲寺, 明珠庵 등의 사찰이 있었다.(이현군)

  • 순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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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부는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부석면, 물야면, 단산면, 봉화군 봉화읍 일부, 봉성면 우곡리, 춘양면 소로리, 법전면 법전리, 소지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읍내리에는 객사 터, 동헌 터, 군기고 터가 남아 있어 이 곳이 옛 치소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읍치에 보이는 白雲洞書院은 1542년(중종 37) 8월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 향의 영정을 이 곳에 모시고, 이듬해 안 보를 배향하여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는데, 1549년(명종 4)에 풍기 군수 이 황이 啓請하여 이듬해 4월에 어필로 소수서원의 편액을 받아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되었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浮石寺는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의상조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절이다. 고려 초에 불타서, 1041년(고려 정종 7)에 원 융이 왕명을 받아 중건하고, 1376년(고려 우왕 2)에 중수하고, 선조 때 보수하였다. 의상조사가 짚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살았다는 仙飛花 나무가 있고, 동쪽에 善妙井, 서쪽에 食沙龍井이 있으며, 국보로 무량수전, 조사당, 소조석가여래좌상, 조사당벽화, 석등 등이 있다.(金在完)

  • 영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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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영동현은 현재의 영동읍, 심천면, 양산면, 학산면, 용화면, 양강면, 용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영동의 진산은 읍치에서 북쪽 1리에 있는 城隍山이다. 지도 상에는 영동읍성이 보이지 않지만 新增東國輿地勝覽 城郭條에는 읍성이 돌로 쌓여졌으며 성안에는 우물이 두 개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輿地圖書에 보면 옛날에는 읍성이 있었으나 당시는 없어졌다고 하였으나 조선 영조 이후는 폐하여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면에 보이는 重華寺는 신라 진평왕 때 義湘祖師가 창건했다 한다. 고려 普覺國尊·登階祖師· 山祖師 등이 낡고 헌 것을 다시 손대서 고쳤으며 1907년 순종 때 白衣禪師가 또 다시 고쳤다. 읍치 서쪽 심천수에 위치한 草江書院은 옛날에 晦谷에 있었는데 1676년(숙종 2)에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로 옮겼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지도에 高塘浦 서쪽에 瀑布가 보인다. 이 폭포는 玉溪瀑布 또는 朴堧瀑布라고 불리는데, 영동에서 대전 쪽으로 4번 국도로 가다 보면 심천면 고당리 2구 옥계동이 있고, 계속 올라가면 月伊山(551m)의 맥이 동쪽으로 뻗어나 서래 마을을 거쳐계곡을 흘러오는 물로, 20m 쯤 되는 절벽 암반 위에서 쏟아 떨어지는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어 양쪽 벼랑바위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金在完)

  • 진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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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산군은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복수면, 추부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진산면 읍내리 일대이다. 남쪽의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물들이 모여 북쪽으로 흘러 나가는데 큰 들이 없는 산골 작은 고을로서, 지도에서도 산줄기와 물줄기를 서로 뒤엉키게 그려내어 산골 고을의 특징을 잘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지도의 가운데에 보이는 하천은 대전광역시 시내 한 복판을 흘러 갑천으로 들어가는 유등천의 상류이다. 읍치 서쪽에는 이 고을 鎭山인 大芚山이 표시되어 있는데 특별히 강조되어 있지는 않고, 실제 높이로는 대둔산보다 더 낮은 읍내 뒷산 五臺山이 우뚝 솟은 봉우리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오른쪽 상단 天庇山 밑에는 태조 이성계의 태를 묻은 곳임이 표시되어 있는데 풍수적으로 산줄기가 겹겹이 중첩된 최고의 명당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입지의 탁월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현재의 위치는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태봉촌 뒷산이다.(이기봉)

  • 삭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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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朔邑과 僧嶺이 합하여 삭녕이 되었다. 현재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 삭녕면,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삭녕면 삭녕리가 중심지가 된다. 邑治에 부속건물은 그리지 않고 邑居라고만 표시하고 있다. 寅目面 僧嶺山 아래 古邑居라고 기록된 곳이 과거의 僧嶺縣 읍치였음을 알 수 있다. 有山城이라고 되어 있어 과거에 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을 점선으로 표시하였는데 지도왼쪽의 大水源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임진강이며 오른쪽의 小水源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驛谷川으로 합류하여 서해로 들어간다. 산줄기는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있다. 하천 사이로 廣華坪 등 농사에 적합한 땅을 표시하였으며 임진강가에 羽化亭이 있다.또한 觀音寺, 龍腹寺 등의 사찰이 표시되어 있다. 京道라고 표시된 길은 長湍의 고랑포를 지나 파주, 고양을 거쳐 서울로 통하는 길이다.(이현군)

  • 수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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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율계면, 대성면, 대오면, 천곡면, 수구면, 도소면, 연암면, 공포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북도 수안군 대부분 지역, 연산군 전 지역, 연탄군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행정구역의 명칭을 面이 아니라 坊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북쪽 4리에 위치한 遼東山이다. 이 산에 위치한 遼東山祠에서 봄·가을로 본 읍에서 제사를 지냈다. 수안군은 예성강과 대동강 지류인 남강의 분수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산지가 많고 들이 적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龍溪書院은 1662년(현종 3)에 세워지고, 1708년(숙종 34)에 사액을 받았다. 名山인 언진산 기슭에는 불각사·영대사·수정사 등 사찰과 암자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文山鎭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防垣嶺 아래에 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성의 길이는 6백 20척이고 성의 좌우에 높은 산이 마주 솟아 있다. 1680년(숙종 6)에 文山·聰明 두 곳의 屯將을 萬戶로 승격시켜 이 곳에 옮겨 설치하였다. 방원령, 명월령, 만령, 이령, 납로리령을 지킨다. 읍치 남쪽에는 位羅鎭이 있었는데, 1680년(숙종 6)에 屯將을 만호로 승격시켰다.(金在完)

  • 영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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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때에 영월로 이름을 고쳤으며 1401년(태종 원년)에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편입되었다. 현재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북면, 서면, 남면, 중동면, 하동면, 상동읍 일부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현재의 영월군에서 수주면과 주천면은 당시에는 원주에 소속된 지역이므로 제외된다. 현재의 영월읍내가 당시의 중심지였으며 지도에 客舍, 衙舍, 倉, 鄕校를 표시하였다. 백두대간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진 산줄기가 府를 감싸고 있다. 산을 중첩하여 산줄기를 표현하였으며 來脈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밝히기 위해 ''斗滿山來'', ''太白山來''를 지도 위에 적어놓았다. 東江과 西江이 邑治 앞에서 만나 남한강이 된다.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았는데 동강가의 錦江亭(영월읍 영흥리)은 1428년(세종 10)에 영월군수 김복항이 절벽 위에 세운 것이다. 서강 앞의 淸 浦(남면 광천리)는 端宗이 유배를 당했던 곳으로 1753년(영조 29)에 碑를 세워 端廟在本府時遺址라고 기록하였다. 莊陵(영월읍 영흥리)은 조선 6대 임금인 端宗의 陵으로 世祖에게 죽임을 당한 후 암장하여 魯山君墓라 칭하다가 1698년(숙종 24)에 단종으로 복위됨에 따라 장릉으로 追封되었다. 그 아래 丁字閣은 忠臣閣으로 安平大君, 趙遂良, 宦官, 侍女들의 위패를 배향하였으며 彰節祠(영월읍 영흥리)는 死六臣을 배향하던 곳이다. 石臺庵, 報德寺 등의 사찰이 표시되어 있는데 보덕사(영월읍 영흥리)는 658년(신라 문무왕 8)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으며 1726년(영조 2)에 보덕사로 이름을 고쳤으며 莊陵의 陵寺가 되었다. 龍井院, 楊淵驛, 延平驛 등의 역원이 표시되어 있으며 강가에 倉庫가 있다. 다른 강원도 지도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社倉이 지도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신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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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령현은 지금의 영천시 신령면, 화산면 북부, 화북면 고현천 以西, 영천시내 매산동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천시 신령면 화성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花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기록에 따르면 "화산은 현 북쪽에 있는데, 청송경계의 普賢山으로부터 내려 와서 현의 主龍이 되었다. 산의 모양이 피는 꽃과 같고, 그 가운데가 매우 넓고, 샘이 솟아 멀리 흘러간다"고 되어 있다. 輿地圖書에는 신령현을 "북쪽으로花山에 거하고, 남쪽으로 龍川으로 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지도에는 읍치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로 잘 나타나 있다. 環碧亭은 客舍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1551년(명종 6)에 縣監 黃俊良이 처음 지었고, 이름을 竹閣이라고 하였다. 그 후 縣監 松爾昌이 重修하고 이름을 環碧亭으로 고쳤고, 宋俊吉이 記를 지어 걸었다. 長水驛은 찰방역으로서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白鶴書院은 縣監 黃俊良이 1678년(숙종 4)에 세워 이 황을 배향하였는데, 사액은 받지 못했다.(金在完)

  • 영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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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영춘현은 단양군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단양군 영춘면 상리 일대이었다. 산간지방이지만 남한강이 관류하여 삼국시대에는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산천조에 읍치 남쪽 3리에 위치한 城山이 鎭山으로 나와 있다. 성산에는 유명한 온달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지도상 읍치 북쪽에 北壁에 표시되어 있다. 太守 李普祥이 벼랑에 "北壁" 두 자를 크게 새기었다. 높이 수십길, 넓이 500여 보 되는 절벽이 강을 끼고 있는데, 봄과 가을에 배를 타고 절벽을 안고 돌면서 바라보는 경치는 선경이라고 한다. 관아에서 南津을 건너면 松坡書院(단양군 영춘면 상리 409번지)이 있다. 1703년(숙종 29)에 창건하여 尹宣擧를 배향하였는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서 헐렸다. 지도에서 읍치 남쪽에 보이는 南窟은 성산굴이라고도 불린다. 현대 지형도에는 온달동굴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일종의 석회암 동굴이다. 하리 남쪽 온달성 아래에 있는 굴로 입구의 높이 3m, 너비 4m 정도이다. 얼음같이 찬 물이 나오는데, 그 깊이가 무릎 위에 올라올 정도이며, 곳에 따라서는 허리 위에 올라오는 곳도 있어 작은 배로 굴 안을 왕래할 수 있다. 읍치의 북쪽과 남쪽에 위치한 北津과 南津은 나루터로서 뿐만 아니라 18세기 조운선의 출발지로서 또는 船商의 어염과 주민의 곡물이 물물교환되던 장소로서 기능하였다.(金在完)

  • 진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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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안현은 지금의 진안군 진안읍, 상전면, 부귀면, 마령면, 성수면, 백운면에 해당하고 읍치는 진안읍 군상리 일대에 있었다. 진안현은 서쪽 전주로부터 熊峙(곰치재) 등의 험한 고개를 오른 후부터 평탄해지는 고원형 지형이고 남서쪽으로는 섬진강, 동북쪽으로는 금강상류 진안천이 마이산을 중심으로 갈라지며 두 지역으로 구분되고 있다. 고적조에 1413년(태종 13)에 來屬한 것으로 나오는 馬靈폐현은 지도 왼쪽 아랫부분의 馬靈面 일대로서 고려시대까지 존재한 두 현의 규모와 경계선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읍치 남쪽에 있는 마이산은 거대한두 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이감을 일으키게 하는 명산이다. 신라 에서도 西多山이라부르며 小祀를 거행했다 하며, 태종이 南行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馬耳山이란 이름을 내렸다 한다. 전체적으로 산줄기와 물줄기의 조합을 통해 지역적 특징을 쉽게 볼 수 있게 했으며, 기타 절, 역, 원 등도 자세히 표시하고 있다.(이기봉)

  • 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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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松岳, 開京. 開州 등으로 불리었으며 1467년(세조 13)에 경기도에 포함되었다. 현재의 북한 개성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동쪽으로 長湍, 남쪽으로 豊德, 서쪽으로 白川, 북쪽으로 金川과 맞닿아 있다. 이 지도에서 ''靑色長湍地'', ''赤色豊德地'', ''黃色金川地'' 등으로 色을 달리하여 주변지역과의 경계를 표시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五部三十五坊制가 실시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도가 한양으로 바뀜에 따라 四部가 되었고 坊의 수도 줄어들게 된다. 이 지역의 聖居山, 天摩山, 松岳山은 임진북예성남정맥의 경로에 포함되며 이 산들에서 시작되는 이 지도의 모든 하천은 결국 서해로 들어가게 된다. 지도에는 沙川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 板門店 근처의 板門橋가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동쪽을 위로하여 그린 지도이다. 지도에는 內城, 外城과 天摩山의 大興山城이 그려져 있으며 중심지는 남쪽의 松岳山 아래 성안이 된다. 성곽에는 성문의 이름이 기록되어있고 성안에는 滿月臺가 보이며 관아건물, 고려 成均館, 觀德亭, 여러 書院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연결되는 城門들과 고개(峴)의 이름이 자세히 나와있으며 善竹橋, 吹笛橋 등의 교량이 경로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과는 大路로 연결되었으며 이 길은 平壤을 지나 義州까지 통하였다. 송악산에 ''水路烟臺'', ''陸路烟臺''로 기록되어 있어 육로와 수로를 통해 봉수가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악산의 국사당봉수가 육로를 통해 온 것이며 성황당봉수가 수로를 통해 온 것이다. 북쪽의 大興山城에는 將臺, 中營 등의 군사시설과 倉庫, 城門의 이름, 여러 사찰들이 그려져있다. 서쪽에는 礪峴鎭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 漕運이 통하였음을 기록해 두었다. 또한 나무를 그리고 ''種樹處''라고 표시해 두었다. 송악의 서쪽에는 무역항이었던 碧瀾渡, 고려 유신이 숨었다는 杜門洞, 高麗太祖顯陵이 나타난다. 송악의 동쪽에는 花潭書院이 보인다.(이현군)

  • 숙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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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천부는 일제시대의 숙천면, 서해면, 검산면, 조망면, 동송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숙천군 일대이다. 고을의 원래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모양인데 위·아래로 긴 직사각형의 지면에 그리다가 보니까 서쪽에 있어야 할 바다가 남동쪽에 있는 모습으로 약간 왜곡되어 표현되었다. 읍치에는 고을의 진산 唐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 위에 土城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城을 밋밋한 선으로 그림으로써 石城과 구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虎田城 역시 토성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옛 읍터였다고 하며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이미 황폐해져 있었다. 읍치 왼쪽에 있는 館舍는 읍치 서쪽 2리에 있었다는 肅寧驛이다. 기타 봉수와 도로의 표현이 자세하며, 여백 주기의 田畓 結數를 통해 해안가에 있으면서도 田이 畓보다 훨씬 많은 곳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영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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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永興府는 함경남도 해안에 위치한고을로 위로는 定平, 아래로는 高原과 접하고 있다. 함흥과 더불어 조선의 발상지로 국가적으로 중시되었던 지역이고 또한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영흥군 홍인면, 복흥면, 순녕면, 억기면, 진평면, 고녕면, 호도면, 인흥면, 덕흥면, 장흥면, 횡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금야군과 요덕군으로 나뉘어졌고, 남서쪽 일부 지역은 고원군에 속해 있다. 고을의 진산인 聖歷山이 읍치를 감싸고 있고, 龍興江이 고을의 중심을 통과하여 동해로 흘러들고 있다. 읍치의 남동쪽에는 태조 이성계의 부친 桓祖의 舊邸인 本宮, 태조의 탄생지인 濬源殿 등을 볼 수 있다. 남동쪽 해안의 木柵이 그려져 있는데 지도 여백에 기재된 末鷹島 목장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도의 표기는 ''馬熊島''로 서로 차이가 있다. 영조 때 저술된 輿地圖書에 의하면 당시 이 목장의 牧馬는 33필인데, 면적에 비해 적은 수의 말이 사육되고 있었다. 이 지도에서도 나중에 추가로 다시 그려 넣은 부분이 있는데 票山, 七星山, 天皇山, 平倉 등이 그것이다.(노혜정)

  • 안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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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부는 지금의 안동시 안동시내, 풍산읍, 길안면, 남선면, 북후면, 서후면, 예안면 남부, 와룡면, 일직면, 임동면, 임하면, 풍천면, 예천군 감천면, 봉화군 봉화읍 남부, 재산면, 소천면, 법전면 일부, 춘양면 남부, 물야면 개단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안동시내 동부동 일대에 있었다. 북쪽 태백산에서 남하하는 산줄기가 읍치 북쪽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낙동강의 근원이라고 일컫는 黃池를 노랗게 표시하여 근원이 깊음을 강조하고 있다. 읍성 안에 위치한 太師廟는 고려 때 공신 金宣平, 權 幸, 張 吉 세 태사의 사당이다.후에 이들 세 명은 각각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읍성 남문 밖 낙동강 가에 위치한 映湖樓는 고려 때 공민왕이 친히 현액을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1488년(성종 19)에 안동부사 김 질이 중수하였는데,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1934년 장마에 떠내려가서 영호루 현판은 안동시청에 보관하고, 전 영호루 맞은 편에 새로 세웠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關王廟는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 장수 설호신이 세운 것이다. 安奇驛은찰방역으로서 10개의 속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屛山書院, 虎溪書院, 三溪書院 등은 모두 사액서원이다.(金在完)

  • 예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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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현은 현재 예산군 예산읍, 대술면, 오가면, 신암면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예산읍 예산리 일대이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본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는 金烏山이다. 예산현은 동쪽으로 삽교천을 경계로 덕산현 및洪州牧(현재 홍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 도고산 등 산 줄기로 아산현과 접하고 있었다. 지도에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삽교천 유역의 옛 명칭은 內浦인데, 擇里志에 가야산 둘레의 十縣을 가리킬 정도로 넓은 지역을 포함하는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예산의 읍치는 무한천으로 유입하는, 지도의 香泉寺에서 발원하는 하천의 좁은 골짜기로 들어 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읍치 북쪽 15리 무한천 변에 浦倉 건물이 보인다. 이 창고를 예산창이라고 부르는데, 13칸 건물로 大同稅를 배에 싣고 떠나는 곳이었다. 지도에서 보이는 무한천은 감조하천으로 바닷물이 역류할 때는 대형선박이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다. 강변에 위치한 무한성은 창고를 지키기 위하여 건설된 것으로 생각된다. 향교에 인접해 있는 서원은 德岑書院인데, 1705년(숙종 31)에 세워졌고, 1714년(숙종 40)에 사액되었다.(金在完)

  • 태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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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현은 지금의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감곡면, 산내면, 산외면, 옹동면, 칠보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태인면 태성리에 있었다. 태인현은 1409년(태종 9) 太山郡과 仁義縣을 합쳐 만들어졌으며, 읍치는 두 고을의 중간에 해당하는 居山驛으로 정해졌다. 지도에서 태산군은 읍치 동쪽의 古縣面으로, 인의현은 읍치 서쪽의 仁義谷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읍치 동남쪽에 있는 武城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賜額받았고 통일신라 때 이곳 태산군의 태수로 부임했던 최치원을 배향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은 사적 16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그 밖의 모충사, 용계서원, 남고서원 등은 모두 1868년 훼철되었다. 지도는 풍수적 사고를 충실히 따르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 읍치가 과장되어 있으며, 산줄기가 백두대간으로부터 이 고을로 들어오는 동쪽 방향이 지도의 위쪽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고을의 실제 지형은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다. 따라서 이 고을 동남쪽 산지에서 발원한 동진강은 서북쪽으로 흘러 김제를 통해 서해로 들어간다. 전라도 대부분의 지도에 수록된 驛院이 여백 주기에만 표시되어 있고 지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이기봉)

  • 송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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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松岳, 開京. 開州 등으로 불리었으며 1467년(세조 13)에 경기도에 포함되었다. 현재의 북한 개성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동쪽으로 長湍, 남쪽으로 豊德, 서쪽으로 白川, 북쪽으로 金川과 맞닿아 있다. 이 지도에서 ''靑色長湍地'', ''赤色豊德地'', ''黃色金川地'' 등으로 色을 달리하여 주변지역과의 경계를 표시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五部三十五坊制가 실시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도가 한양으로 바뀜에 따라 四部가 되었고 坊의 수도 줄어들게 된다. 이 지역의 聖居山, 天摩山, 松岳山은 임진북예성남정맥의 경로에 포함되며 이 산들에서 시작되는 이 지도의 모든 하천은 결국 서해로 들어가게 된다. 지도에는 沙川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 板門店 근처의 板門橋가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동쪽을 위로하여 그린 지도이다. 지도에는 內城, 外城과 天摩山의 大興山城이 그려져 있으며 중심지는 남쪽의 松岳山 아래 성안이 된다. 성곽에는 성문의 이름이 기록되어있고 성안에는 滿月臺가 보이며 관아건물, 고려 成均館, 觀德亭, 여러 書院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연결되는 城門들과 고개(峴)의 이름이 자세히 나와있으며 善竹橋, 吹笛橋 등의 교량이 경로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과는 大路로 연결되었으며 이 길은 平壤을 지나 義州까지 통하였다. 송악산에 ''水路烟臺'', ''陸路烟臺''로 기록되어 있어 육로와 수로를 통해 봉수가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악산의 국사당봉수가 육로를 통해 온 것이며 성황당봉수가 수로를 통해 온 것이다. 북쪽의 大興山城에는 將臺, 中營 등의 군사시설과 倉庫, 城門의 이름, 여러 사찰들이 그려져있다. 서쪽에는 礪峴鎭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 漕運이 통하였음을 기록해 두었다. 또한 나무를 그리고 ''種樹處''라고 표시해 두었다. 송악의 서쪽에는 무역항이었던 碧瀾渡, 고려 유신이 숨었다는 杜門洞, 高麗太祖顯陵이 나타난다. 송악의 동쪽에는 花潭書院이 보인다.(이현군)

  • 순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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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안현은 일제시대의 평원군 순안면, 공평면, 양화면, 자덕면, 용흥면, 동두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북한의 순안비행장으로 알려진 평양특별시 순안구역 일대이다. 평양시내 서쪽에서 대동강과 합류하는 보통강의 상류가 자모산에서 발원하여 사방으로부터 여러 물을 받아 남동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읍치는 산세에 의해 포근히 감싸있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표현되어 있으며, 향교·아사 등만 간단하게 표시하고 있다. 향교 옆에 있는 서원은 星山書院으로서 정몽주(1337-1392) 등을 배향하여 1696년(숙종 22)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조선 초기에는 頹落했던 성을 인조 때 修築한 慈母山城이 보이고 있는데 鎭을 설치하여 성천, 은산, 자산, 순안, 영유 등 다섯 고을을 관장하게 하였다. 성곽과 성문의 표시가 자세하고, 南門 아래쪽으로 外城에 해당하는 牛馬城이 있음을 통해 병자호란 이후 증가된 북방 방비의 일단을 볼 수 있다.  기타 지도의 왼쪽에 보이는 鎭里面은 서해안 바닷가에 있었던 순안현의 월경지이다.(이기봉)

  • 온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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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고을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고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온성군 온성면, 유포면, 영와면, 영충면, 미포면, 훈융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동쪽의 일부 지역을 새별군에 넘겨주고남쪽 종성군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되었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으나 지도상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주변 지역에는 坊面에 해당하는 각 社가 표시되어 있다. 두만강 연안에는 把守와 진보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다. 僉使鎭인 柔遠鎭을 비롯하여 1484년(성종 15)에 설치된 美錢鎭, 1442년(세종 24)에 설치된 永遠鎭, 1523년(중종 18)년에 설치된 黃拓坡堡 등이 국경수비의 전진 기지였음을 알수 있다. 동쪽 해안에는 小草島와 함께 목장이 표기된 또 다른 섬이 그려져 있다. 이 섬은 당시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던 大草島로서 1511년(중종6)에 端川으로 옮겼다가 1665년(현종 6)에 다시 설치된 것이다. 감목관은 府使가 겸하고 있었고 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21리, 雄馬 23, 雌馬 110필이 있었다. 함경도의 다른 목장에 비해서는 사육되던 말이 많은 편이었다.(노혜정)

  • 양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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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군은 지금의 양산시 양산시내, 물금읍, 동면, 상북면, 원동면, 하북면, 부산광역시 북구의 구포동, 강서구 대저동·강동동을 포함하는 지역이고, 읍치는 양산시내 북부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북쪽에 위치한 城隍山이다. 읍성은 현재 북부리산성(史蹟 98號)이라고 하는데 돌로 쌓은 성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松潭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세워져, 1717년(숙종 43)에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찰방 백수희를 배향하였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송담서원의 아래에 보이는 황산역은 영남대로의 요로에 위치한 황산도의 찰방역으로서 16개 역을 관할하였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3대 사찰의 하나인 通度寺는 648년(신라 진덕여왕 2)에 자장법사가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3년(선조 38)에 松雲大師가 재건하였고, 그 후 1641년(인조 19)에 友雲이 중건하였다. 이 사찰에는 銀絲入香爐, 國長生石標, 大雄殿, 3층석탑, 사리탑, 石燈, 石床이 있다. 낙동강 변에 위치한 伽倻津壇은 公州·熊津과 함께 南瀆으로 삼았다고 中祀에 실려 있다. 해마다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상류에서 선박으로 운반된 세곡은 甘同倉(현 부산시 북구 구포동지도의 우측 하단)에 보관되었다가, 다시 통영으로 이송되었다. 호포진은 양산군의 물자를 이출입하는 포구이었다.(金在完)

  • 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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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군은 현재 아산시, 배방면, 송악면, 탕정면을 합친 지역이었다. 온양군의 읍치는 현재 아산시 읍내동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관아 터에 온양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燕山은 읍 북쪽 2리 지점에 있는 이 고을의 鎭山이다. 진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읍치 앞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멀리 우뚝 솟은 설화산이 보이는 전형적인명당 형국을 취하고 있다. 즉, 진산인 燕山이 주산에, 신인천이 명당수에, 설화산이 안산에 대응한다. 온양군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옛 온천은 읍 서쪽 7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온천의 둘레가 1,758척이었고, 內正殿, 外正殿, 湯室 12칸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建置沿革條에 의하면 1442년(세종 24) 임금이 온천에 거둥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온양군 관아 건물은 직산현 관아 건물과 같이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지방관아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8리 지점에 時興驛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역은 찰방역으로서 驛丞 1명이 있었고, 昌德, 日興, 汲泉, 順城, 興世, 長時, 花川驛 등을 관할하였다. 西面 온천에 보이는 건물은 여러 임금이 온천에서 머물고 갔던 溫泉 行宮 建物이다.(金在完)

  • 함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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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다면, 학교면을 제외한 함평군 전 지역과 무안군 해제면, 현경면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평읍 기각리에 있었다. 함평현은 1409년(태종 9) 咸豊縣과 牟平縣이 합해져 만들어졌는데 현 중심의 높은 산지를 중심으로 동쪽의 고막원천 유역은 모평, 서쪽의 함평천 유역은 함풍의 땅이었다. 지도 왼쪽부분의 해제면과 다경면은 함평현의 越境地로서 원래는 해제현과 다경부곡이었고 읍치 왼쪽의 영풍면은 영풍향이 면으로 편제된 곳이다. 지도 왼쪽에는 臨淄鎭이 성곽, 건물, 전선과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종3품인 全羅右道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던 곳으로 黔毛浦,법성포, 다경포, 목포, 於蘭浦,군산포, 南桃浦, 金甲島 등을 관할하였다. 鎭 오른쪽에 해제봉대, 아래쪽에 옹산봉대가 함께 그려져 있어 군사적 부분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는 대체적으로 간결하며 여백의 주기도 중요한 몇 개를 제외하고는 싣지 않고 있다.(이기봉)

  • 수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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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9년(정조 13)에 顯隆園(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로 옮기기로 하고 수원부는 팔달산 아래 현재의 수원시 위치로 옮겼다. 이 지도는 그 이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영역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 지도에서의 수원부는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화성군의 봉담읍, 태안읍, 우정면, 장안면, 팔탄면, 정남면, 향남면, 양감면, 매송면 일부지역과 경기도 오산시, 경기도 평택시의 청북면, 안중면, 오성면, 현덕면, 포승면일대에 해당한다. 당시의 중심지는 화산과 城隍山, 南山으로 둘러싸인 태안읍 송산리, 안녕리 일대가 된다. 지도의 아래 왼쪽은 아산만이 되며 여러 섬들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水運의 발달에 의해 設倉, 陽城倉, 海倉, 雙阜倉 등의 창고가 많이 설치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수원부이지만 그 안에 ''稷山地''(충청남도 천안군),  ''陽城地''(경기도 안성군) 등의 越境地가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읍내를 중심으로 도로망이 표시되어 있으며 興天山(봉화산, 화성군 장안면과 우정면의 경계)의 烽燧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여러 津과 橋梁이 있었음이 나타난다.(이현군)

  • 순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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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군은 일제시대의 순천군 순천읍, 내남면, 신창면과 덕천군 잠상면, 잠도면 그리고 맹산군 옥천면, 학천면, 봉인면에 해당한다. 지금은 평안남도 순천군의 서쪽과 북창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쪽으로 그렸는데 고을 전체가 殷山 땅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둘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은산 땅 서쪽에 있는 읍치 지역의 글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은산 땅 동쪽에 있는 古順川 지역의 글자는 위에서아래로 볼 수 있도록 그려 두 지역을 구별짓고 있다. 고을의 가운데를 흐르는 강은 대동강 본류로서 동북쪽에서 들어와 읍치 동쪽을 거쳐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刀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古順川 지역에는 釜淵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겨울에도 얼지 않으며 흘러나와 3리를 땅 속으로 흐른다''고 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는 유명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기타 창고의 표시가 매우 자세함이 특이하다.(이기봉)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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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언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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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양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울주군 언양읍, 삼남면, 삼동면, 소호리를 제외한 상북면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언양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高 山이다. 고헌산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읍치 뒷산인 화장산에서 멈추었고, 청도의 운문산과 밀양의 취서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서쪽으로 흘러 읍치를 지나가고있다. 그리고 사방의 산들이 읍치를 둘러싸서 분지지형을 이루고 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화장산 중턱에 굴이 있고, 굴 앞에 샘이 있는데, 그 곳에서 샘물이 세차게 뿜어 나온다고 한다. 읍성은 본래 土築이었으나, 1500년(연산군 6)에 이 담이 돌로 고쳐 쌓았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盤龜書院은 1712년(숙종 38)에 고을 선비들이 고려 때 충신 정몽주, 정 구, 이언적이 이 곳에 머문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다. 읍치 왼쪽에 보이는 石南寺는 1560년(명종 15)에 선철대사가 중건한 사찰로서 보물 제 369호 부도가이 곳에 있다. 석남사 아래에 보이는 肝月寺는 현재 절터와 보물 제 370호석조여래좌상만 남아 있다.(金在完)

  • 왜국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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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전기에 제작된 일본지도의 유형을 따르고 있는 일본지도. 지도는 남쪽을 위로 하고 있는데,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일본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향이다. 일왕이 있는 國都와 막부 장군이 있는 江戶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그 밖에는 대강의 행정구역, 후지산을 비롯한 일부의 산과 주변 도서들을 그려 넣었다. 북해도가 蝦 島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으며, 북해도의 맞은편에도 아이누족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蝦地라는 표현이 보인다. 설명문에는 일본이 동서방향으로 육십일 거리, 남북 방향으로 12일거리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國都-大坂-九州-對馬島- 조선에 이르는 노정이 설명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기록된 일본의 里數가 조선의 里數에 비해 1/10의 단위라는 사실이 앞부분에 표시되어 있다. 일본어 발음까지 한글로 병기하려 했다 하나 표시되어 있지 않다. 노정기 중에는 부산포 뿐만 아니라 대마도에서 왕래가 가능한 경상도 남부 해안지역의 해로 사정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설명문의 말미에는 國都, 大坂城 등 일본 주요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붙어 있다. 오사카의 토지 대부분이 막부장군(關白)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지도는 해동제국기의 일본지도 계통, 혹은 그 변형이라고 보기에는 전체적으로 너무나 다른 윤곽을 하고 있다. 지도의 윤곽은 여전히 조선 전기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해동제국기의 일본지도와 많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이는 이 지도의 원본인 필사본 여지도 책자의 일본지도가 해동제국기와는 다른 원도를 바탕으로 하고있었음을 말해준다.(배우성)

  • 해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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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현은 옥천면, 북일면, 북평면, 송지면을 제외한 지금의 해남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해남읍성내리에 있었다. 지도 왼쪽의 황원면은 黃原폐현, 그 위쪽의 산일면과 산이면은 竹山폐현의 흔적이다. 해남현은 원래 지도 아래쪽의 현산면에 있었는데 1412년(태종 12) 玉山폐현의 땅으로 읍치를 옮기었다. 지도 왼쪽의 우수영은 지금의 화원반도 문내면 서상리, 동외리 일대에 있었으며, 正二品 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파견되어 전라도 서쪽 12개의 고을과 18개의 鎭을 관할하던 곳이다. 성 오른쪽엔 忠武公 이순신의 勝捷碑 비각이 표시되어 있고, 우수영과 외부와의 육로 차단 구실을 했던 外城과 轅門도 보인다. 우수영 아래쪽에 보이는 鳴洋은 진도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물살이 빠르고 소리가 커서 ''울돌목''이라 불리며, 충무공 이순신이 12척의 적은 배로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33척의 倭船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우수영 위쪽의 牧場은 黃原場으로서 종6품의 監牧官이 파견되었고 지금의 화원면 청룡리에 있었다. 읍치 남쪽의 館頭烽臺 밑은 제주도를 왕래하던 배들이 정박하던 곳이었다. 읍치는 고을 鎭山인 金剛山으로부터 뻗은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는데 실제 지형도 이와 비슷하다.(이기봉)

  • 수원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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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9년(정조 13)에 顯隆園(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로 옮기기로 하고 수원부는 팔달산 아래 현재의 수원시 위치로 옮겼다. 이 지도는 그 이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영역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 지도에서의 수원부는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화성군의 봉담읍, 태안읍, 우정면, 장안면, 팔탄면, 정남면, 향남면, 양감면, 매송면 일부지역과 경기도 오산시, 경기도 평택시의 청북면, 안중면, 오성면, 현덕면, 포승면일대에 해당한다. 당시의 중심지는 화산과 城隍山, 南山으로 둘러싸인 태안읍 송산리, 안녕리 일대가 된다. 지도의 아래 왼쪽은 아산만이 되며 여러 섬들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水運의 발달에 의해 設倉, 陽城倉, 海倉, 雙阜倉 등의 창고가 많이 설치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수원부이지만 그 안에 ''稷山地''(충청남도 천안군),  ''陽城地''(경기도 안성군) 등의 越境地가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읍내를 중심으로 도로망이 표시되어 있으며 興天山(봉화산, 화성군 장안면과 우정면의 경계)의 烽燧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여러 津과 橋梁이 있었음이 나타난다.(이현군)

  • 신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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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溪縣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황해도 신계군 신계면, 고면, 다율면, 다미면, 마서면, 부여면, 사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신계현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북도 신계군 전지역, 곡산군 일부, 수안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신계현은 원래 고려의 新恩縣이었는데, 1396년(태조 5)에 俠溪縣을 신은현에 예속시켰고, 1445년(세종 27)에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신계현이 되었다. 읍치는 신계군 마산리 일대에 있었다. 협계현의 위치는 지금의 신계군 침교리 일대이고, 신은현은 지금의 신계군 왕당리 일대로 생각된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1리에 위치한 九峯山이다. 大東地志에 "구봉산은 큰 산으로 가득 차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니산의 산줄기가 명당인 읍치를 감싸 안았고, 앞에는 朝水인 楡川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다시 楡川 남쪽에 案山이 읍하고 있는 전형적인 명당형국을 보여 주고 있다. 객사 윗쪽에 보이는 鶴巢峰은 민간에서 전하여 오기를 "옛날에 흰 학이 그 마루턱에 깃들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고 한다. 봉우리 위에는 懸鍾臺(지도에는 鍾臺懸으로 표시되어 있음)가 있고, 臺 아래에 看月岩이 있다. 읍치 동쪽 1리에 위치한 秀林亭은 남쪽으로 유수에 임하고, 앞은 천 길 벼랑이다. 퇴락한 지 오래고 초석만 남아 있다.(金在完)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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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영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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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강구면, 남정면, 달산면, 지품리와 옥류리를 제외한 지품면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덕읍 남석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無芚山이다.읍성의 西門인 淸心樓는 1423년(세종 5)에 知縣 崔 宇가 세웠고, 1457년(세조 3)에 縣令 廉尙恒이 중수했으며, 權 擥이 記를 적었다. 지도에는 없지만, 동문 밖 서쪽 냇가에 위치한 臨鏡臺는 물이 거울과 같이 맑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그 밑에 깊은 沼가 있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서원은 南江書院으로 이언적과 이 황을 배향하였다. 남강서원 남쪽 오십천 가에 浩浩臺가 있는데 경치가 아름답다. 또한 읍치 북쪽 오십천 상류에 위치한 龍湫가있는데 비를 빌면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五十川의 명칭은 縣으로부터 知品院에 이르는 사이에 50개의 건널목이 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읍치 서북쪽에 위치한 知品院은 황장재를 넘어 청송, 진보, 안동으로 가는 사람들의 먹고 자는 편의를 위한 시설이었다. 지품원은 원래 옛 영해부에 딸린 지품부곡이 위치하고 있었다.(金在完)

  • 유구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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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에서 유행하던 여지도 책자의 유구지도를 옮겨 그린 소략한 오키나와 지도. 해동제국기의 유구국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략함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조선후기의 유구 인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지도라 할 수 있다. 國都가 위치한 본 섬 주변으로 부속 도서를 그려 넣은 소략한 윤곽을 하고 있다. 본 섬에는 國都, 寶庫, 國頭城이 강조되어 있다. 국도는 삼산왕 시기를 마무리짓고 통일왕조를 이룩한 중산왕이 있었던 곳이다. 성문을 포함한 왕성의 기초적인 윤곽이 그려져 있는데, 중산왕의 거주 지역과 왕제, 대신들의 거주 지역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음이 이채롭다.  1453년에 구미도에 표류했다가 오키나와 본 섬으로 보내졌던 梁城 등에 따르면, 중산왕이 거주하던 성곽은 석성으로 되어 있었다 한다. 국도 성곽으로부터 900리에 거리에 국고지역의 핵심적인 시설로 寶庫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상선들이 정박했던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해동제국기에서 섬으로 묘사되었던 국고지역은 이 지도에서 본섬의 일부로 그려져 있다 이 지도의 원도가 되었을 유구지도는 유구에 항해한 경험을 가진 일본인에 의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본 섬 주변의 여러 섬들의 지명에는 당시 일본인들의 한자 발음이 반영되어 있다.  栗島(아하시마), 鳥島(도리시마) 등이 그것이다.  지도 상단의 九米島는 화교집단이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었던 곳이다. 그들은 유구가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그 조공무역체제에 들어가게 되면서 유구의 대명 무역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배우성))

  • 화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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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현은 지금의 화순군 화순읍, 동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순읍 교리, 향청리, 광덕리 일대에 있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형의 작은 고을로서 사방의 산에서 쏟아져 내린 물들이 화순천으로 모이고 고을 중심부를 지나 서남쪽 영산강으로 들어간다. 지도에서는 고을 鎭山인 羅漢山이 읍치 북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강조되어 있는 점, 좌우로 겹겹이 뻗어 내린 산줄기, 그 사이사이에서 발원한 물들이 모여 읍치를 빙 돌아 내려가는 모습을 통해 풍수적 명당 관념을 지도로 형상화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지도에서는 외부로부터 이 고을로 脈勢가 이어지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지도 맨 윗부분에 광주의 서석산이 그려져 있고, 읍치가 매우 확대·과장되어 있다.그 밖의 지역은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여백의 주기 부분도 가장 기초적인 내용만 실려있는 아주 간소한 지도이다. 읍치 남쪽 加林驛의 건물과 색이 눈에 띄게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 순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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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창군은 동계면의 일부를 제외한 순창군 전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순창읍 순화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내장산을 비롯한 서쪽의 여러 산에서 발원한 물들이 산줄기 사이사이를 돌아 동쪽 섬진강 본류로 들어가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고, 山川조의 追山에 써 있듯이 지도 맨 위쪽의 回文山으로부터 읍치 북쪽의 鳳棲山까지 산줄기가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이 보인다. 읍치 오른쪽의 적성면은 赤城폐현, 왼쪽의 복흥면은 福興폐현의 흔적이며, 읍치 위쪽의 산성은 軍倉이 있었던 大母山城이다. 읍치오른쪽의 華山書院은 邑誌에는 花山書院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급제하여 벼슬이 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단종 양위 후 벼슬을 버리고 이 고을 순창에 내려와 歸來亭을 짓고 산수를 즐기며 살았다는 신숙주의 동생 申末舟 등이 배향된 서원이다. 읍치 서남쪽의 赤城津은 남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인데, 山川조에 보면 속설에 물이 맑고 깊어 神物이 있다고 하여 비가 오지 않으면 祈雨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전통 민간신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기봉)

  • 신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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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 북부면, 가산면, 온천면, 두라면, 용문면, 노월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신천군 서남부, 동부, 북부를 제외한 전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으로 6리 떨어진 花山이다. 鎭山 남쪽의 산줄기가 衙舍와 客舍 등 주요 건물을 포근하게 감싸 안은 명당형국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남쪽에 案山격인 산이 없어서 인공적으로 造山을 만들어 놓았다. 허한 곳을 假山, 숲, 탑 등으로 보충하는 일종의 裨補風水이다. 신천군은 재령강 유역의 재령평야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읍치는 재령강 지류인 西江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고을 남쪽에 위치한 天奉山의 정상에 龍井이 있어, 가물 때면 비를 빈다고 한다. 고을 서남쪽에 위치한 正源書院은 1588년(선조 21)에 세워지고, 1710년(숙종 36)에 사액되었다. 읍치 동쪽에 溫井은 북한에서 이름난 신천 온천이다. 서부면 信城山에는 옛 土城이 위치해 있다. 읍치 동남쪽에 보이는 兄弟澤은 하천 유로의 변경으로 생긴 우각호로 보인다.(金在完)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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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영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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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남부, 영산면, 계성면, 도천면, 길곡면, 부곡면, 장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靈鷲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서역의 승려 指空이 이 산에서 와서 말하기를, "이 산이 天竺(인도)의 영취산과모양이 같다해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太子山은 신라 태자의 묘가 있다해서 이름지은 것이다. 北嶽祈雨壇은 영취산정상에, 南嶽祈雨壇은 작약산 정상에 있어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 마이면에 있는 硯池는 벼루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으로 연지 가운데 육모정 정자가 있다.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法帥池는 가물 때 호랑이 머리를 담그면 곧 비가 왔다고 한다. 법수지 아래쪽에 보이는 忘憂亭은 낙동강 변에 위치하여 경치가 아름다웠는데, 아깝게도 6·25사변으로 소실되었다. 이 곳에 곽재우 유허비가 있다. 낙동강 변의 임해연진, 멸포진, 송진, 우질포진, 기강진은 모두 영산에서 칠원과 함안으로 통하는 대로에 위치한 나루터 겸 조운선의 발진포구로서 뿐만 아니라 어염과 곡물의교환 장소로 이용되었다. 부곡면의 溫井驛 부근은 현재 유명한 부곡온천이 위치하는 곳이다.(金在完)

  • 은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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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은진현은 현재 강경읍, 연무읍, 은진면, 가야곡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논산시 은진면 연서리 일대에 있었다. 지금도 ''향교골''의 지명이 남아 있다. 이 고을의 진산인 摩耶山은 현 남쪽 24리에 위치해 있다. 은진현보다도 강경포가 더 이름이 나 있다. 강경포는 본래 은진현 금포면에 속하였다.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강경포에는 지명의유래가 되었던 강경산 봉수대, 강창이 자리잡고 있다. 이중환의擇里志의 기록에 의하면 ''은진의 강경 한 마을만은 충청도·전라도의 바다와 육지 사이에 위치하여 금강 남안의 평야 가운데에서 하나의 큰도회를 이룬다''고 하였다. 특히 소금과 새우젓의 거래로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강창은 은진현의 세곡이 수납되어 보관되었던 창고이었다. 강경 상류의 군현에서 세곡을 실고 오는 배는 반드시 강경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다. 지도에서 북쪽 반야산(96m)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가 있다. 관촉사는 968년(고려 광종 19)에 창건되었고, 은진미륵은 36년 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1006년(고려 목종 9)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지도 북쪽 皇華山 서쪽에 市津 나루터가 보인다. 옛 시진현에 있었는데 장삿배가 모이는 곳으로서 돛대가 연접하고 사람들이 빈번히 왕래하며 물화를 매매하기 때문에 시진포라 이름하였다 한다.(金在完)

  • 회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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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인현은 현재 보은군 회북면과 회남면을 포함하는 좁은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인은 보은에 병합되었다. 회인 구읍은 현재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 있었다. 지금도 ''향교말'' 지명이 남아 있다. 산줄기가 읍치를 겹겹히 싸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新增東國與地勝覽 형승조에 ''거듭된 묏부리가 겹겹의 고개 멀리 서로 연했고, 길은 羊의 창자처럼 둘리었으니 馬이 나아가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회인현의 산세를 입증하는 것이다. 회인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 2리에 있는 何磨山이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虎岾山城은 돌로 쌓은 성이었는데, 지금은 없다. 우측에 보이는 麻田庵은 세종대왕이 이 곳 절에 와서 비에 젖은 옷을 빨아 입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암자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玉女峰은 山形이 풍수형국 상 玉女彈琴形이라 한다. 읍치 동쪽에 있는  壇은 못된 돌림병을 퍼뜨리는 惡鬼를 慰撫하고자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사직단은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토지의 神인 社와 곡식의 神인 稷에 대하여 제사지내는 壇이다.(金在完)

  • 순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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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부는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을 제외한 순천시 전체와 여수통합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순천시내 영동, 저전동, 옥천동 일대에 있었다. 순천부는 북쪽의 富有縣, 남쪽의 麗水縣, 突山縣이 고려, 조선초를 거치면서 합속되어 큰 고을이 되었다. 지도에는 全羅左水營과 古突山鎭, 防踏鎭이 城, 船倉, 戰船 등과 더불어 자세히 표시되어 있고, 읍성 안에는 전라도 동남쪽을 관할하던 前營이 그려져 있어 순천부가 전라도 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좌수영 왼쪽에는 忠武公碑閣이, 오른쪽 위쪽에는 李舜臣 등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전사한 충신들을 배향한 忠愍祠가, 읍치 아래쪽에는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張潤을 배향한  忠祠가 표시되어 있어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古突山鎭 옆에 있는 牧場은 曲華場으로서 監牧官이 파견되어 突山島場, 猫島場 등을 함께 관할하였다. 읍치 서북쪽 조계산 밑에 있는 松廣寺는 통도사, 해인사와 더불어 天下三寶의 하나로 유명하며, 보조국사 이후 15국사가 나와 僧寶宗刹이라고도 불리고 지금도 국보 3점을 비롯한 수많은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 그 밑의 仙岩寺는 신라 말기 도선에 의해 창건되고, 1,092년(선종 9) 大覺國師 義天이 중건한 절로서 현재도 수많은 보물이 위치한 유서 깊은 절이다.(이기봉)

  • 안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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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안악군 안악면, 용순면, 대원면, 문산면, 안곡면, 서하면, 대행면, 은홍면, 용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은천군 전 지역, 안악군 서부와 남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 서쪽은 북에서 남으로 곧게 내려 뻗은 산줄기가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그 양쪽 산기슭에는 淨土菴, 寶光菴, 隱寂菴, 燃燈寺 등이 위치하고 있다. 남하하던 主脈의 일부가 동쪽으로 꺾이어 고을의 북쪽에 이르러 읍의 鎭山인 楊山이 되었다. 또한 계속 남하한 주맥이 동쪽으로 돌아서 읍치 남쪽에서 안산인 南山이 되고, 마찬가지로 명당수가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읍 앞에서 남쪽으로 꺾여 흐르고 있다. 읍치는 모든 것을 갖춘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양산 남쪽 기슭에 관아, 향교, 사직단, 누각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읍치 동쪽 재령강 연안에 桃串神祠와 省草串神祠가 위치하고 있는데, 모두 고려 때 祀典에 실렸었는데, 지금도 본 군에서 제사지낸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溫井은 조선조 때 洞陰溫泉이라 불리었는데,지금도 銀泉溫泉으로 이름이 나 있다. 그리고 읍치에 보이는 서원은 鷲峯書院으로서 중국의 주 희와 이 이를 배향하였다.(金在完)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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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영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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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현은 고려 말까지 현이었으나 조선에 들어 와서 영해부에 속하였고, 1683년(숙종 9) 주민들의 진정에 따라 다시 현이 설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석보는 영해부에, 청기는 영양현에 속하게 되었다.영양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영양읍, 수비면, 일월면, 입암면 북부, 청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양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영양군 대부분의 지역은 낙동강의 상류지역에 속하지만 수비면만은 동해로 흘러드는 왕피천의 상류지역에 속한다. 일월산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이 고을의 진산이다. 滄海에 임해 일출과 월출을 굽어 볼 수 있으므로 일월산의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읍치의 主山은 芍藥山이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書院은 英山書院으로 1655년(효종 6)에 세워져 이 황과 김성일을 배향하였고,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衙舍 右側에 보이는 英毅公廟는 영의공 南 敏의사당이다. 1689년(숙종 15)에 창건되었고, 1830년(순조 30)에 鄕祠宇로 승격하였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書院 右側 琵琶潭 위에 있는 삼구정은 門月堂 吳 翁이 창건하였는데, 그 밑에 거북처럼 생긴 세 바위가 있다.(金在完)

  • 이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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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현은 현재 논산시 노성면, 상월면, 광석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논산시 노성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1414년(태종 14)에 石城과 합쳐서 尼城縣이라 일컬었다가 1416년(태종 16)에 다시 쪼개어 현감을 두었다. 1646년(인조 24) 은진, 연산, 이산을 합쳐 하나의 현으로 하고, 恩山이라 명명하였다가 1656년(효종 7)에 각각 복구하였다. 1776년(정조 1)에 이성을 노성으로 고쳤으며, 현재는 노성면이라 불린다. 擇里志에 의하면 이산은 산악에 가깝고 토지가 비옥하다. 이 고을의 진산은 현 북쪽 5리에 있는 魯山으로 일명 城山이라고도 한다. 읍치를 鎭護하는 산성이 바로 魯山城이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노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9백 50척이고, 높이가 8척이다. 노산에 위치한 성산봉수는 남쪽으로 은진현 황화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공주의 월성산에 응한다. 진산 겸 주산인 노성산에서 내려온 지세가 여러 겹으로 명당을 감싸고 있고, 남쪽에도 여러 겹의 산줄기가 감싸고 있다. 지도에 보이는 板峙嶺의 남쪽의 ''平地要害''지역은 敬天村이 되는데 토지는 기름지고 산은 웅대하여 복지라고 한다. 서남 30리에 海倉이 보이는데, 은진 시진포의 북쪽 대안에 해당되며 이 곳에서 이산현의 세곡이 조운되었다.(金在完)

  • 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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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안산시와 시흥시 일대인데 현재의 안산시에서 일동, 이동, 본오동, 성포동 등(廣州 땅)은 제외되며 시흥시 거모동, 군자동, 월곶동, 장곶동, 장현동, 정왕동, 죽률동, 조남동, 목감동, 논곡동, 하상동, 하중동 등이 포함된다. 修理山(경기도 안산시, 안양시, 군포시의 경계에 있는 산)이 郡의 鎭山으로 안산시 수암동이 郡의 중심지였다. 郡의 서쪽이 바다에 해당하며 廣州, 衿川, 果川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이 지도에는 서쪽인 바다가 아래쪽에 위치하며 ''北'', ''南'' 이라는 방위 표시가 지도의 좌우에 나타나고 있다. 舊草芝堡(안산시 초지동)는 바다가에서 외적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으로 水軍萬戶가 있었다. 1656년(효종 7)에 강화로 옮기고 성의 옛터가 남아있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烏耳島(시흥시 정왕동)는 이 지도에서는 섬으로 나타나지만 현재는 육지에서 오이도까지 매립되어 시화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오이도는 시화간척지 공사에서 시화방조제가 출발하는 지점에 해당하기도 하다. 八尾島와 雙島는 현재의 인천광역시에 소속된 섬으로 당시에는 無人島였다. ''無田地'', ''田地'' 등으로 농사에 적합한 토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지도가 정보 제공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안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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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목은 일제시대의 안주군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평안남도 안주시, 문덕군에 해당한다. 平安道의 이름 중 ''平''자는 평양에서, ''安''자는 바로 이 고을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이름난 고을이며, 의주대로 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런 고을의 성격답게 지도의 한 가운데에 웅장한 읍성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 넣었다. 동북쪽으로는 청천강을 해자로 삼아 천연적인 요새를 이루었고 남쪽에는 남문의 甕城을 쌓아서, 동쪽에는 外城을 두름으로써 지형적인 단점을 극복하려 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읍성의 안쪽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영이 이 고을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兵營과 기타 건물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을 북쪽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淸川江이 보이고 있는데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隋煬帝의 별동대 30만 5천명을 궤멸시킨 薩水大捷(612)의 현장이다. 강 가운데에 있는 七佛島는 수나라 병사들이 강을 건너는 중을 보고 따라 건너다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섬이기도 하다. 기타 청천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老江鎭이 보이고 있는데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곳이며, 여백 주기에 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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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영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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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일현은 지금의 포항시 포항시내 북구 남부, 남구, 형산강 이남의 연일읍, 오천읍, 대송면, 동해면 대부분, 대보면의 영일만 연안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포항시 연일읍 생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雲梯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운제산 부근에 위치한 吾魚寺는 신라 진평왕 때에 창건하여 恒沙寺라 하였는데, 문무왕 때에 혜공대사가 吾魚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절 개칭에 관한 재미있는 古事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경내에 자장암, 혜공암, 원효암 등 오어사에 딸린 암자가 위치하고 있다. 운제산 우측에 보이는 大王岩의 바위 틈에 샘물이 솟아나는데, 가뭄에 비를 빌면 곧 비가 내린다고 한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서원은 烏川書院이다. 1588년(선조 21)에 현감 이광악이 세웠고, 1613년(광해군 5)에 사액되었고, 정습명과 정몽주를 배향하였다가,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읍치 우측 하단에 위치한 浦項倉은 1732년(영조 8)에 함경도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資本으로 설치된 倉이며, 別將을 두어서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는 경상도 감사 조현명의 請에 따른 것이다. 扶助里는 형산강을 따라 올라온 魚鹽과 내륙의 穀物이 교환되는 곳이었다.(金在完)

  • 임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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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현은 현재 부여군 임천면, 장암면, 충화면, 세도면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인 聖興山(268m)은 군 북쪽 2리에 위치하고 있다. 성흥산은 백제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는 금강 변  저지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성흥산성은 백제 동성왕(479∼501) 때 쌓은 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한 후 부흥운동의 한 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산 중턱에 위치한 大鳥寺는 초라하지만 12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볼만하다. 남쪽에 위치한 書院은 七山書院인데, 1687년(숙종 13)에 세워졌고, 1697년(숙종 23)에 사액을 받았다. 남쪽 금강 변에 南堂津祠가 보인다. 물이 깊고 출렁거려 무서우므로 장삿배들이 왕래할 때에는 반드시 노래하고 북을 울리며 제사지낸다고 되어 있다. 남당진은 임천현의 세곡을 실은 배가 발진하는 포구로도 이용되었다. 부근에 세곡을 보관하였던 海倉이 위치하고 있었다. 임천현은 바다와 직접 닿아 있지 않았지만 軍船을 보유하고 있었다. 설명란에 보면 防船 2隻, 伺候船 2隻, 卜物船 1隻이 보인다. 임천군은 강경과 마찬가지로 조수의 영향을 받는 곳에 위치하므로 海船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수군이 주둔한 것처럼 보인다.(金在完)

  • 안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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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에서 안성시내와 보개면, 금광면, 서운면, 미양면, 대덕면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안성시 구포동, 명륜동 일대가 그 중심지가 된다. 고려 초에 安城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현재의 안성시는 조선시대의 安城, 陽城, 竹山을 합한 것이다. 이 지도는 주변의 산, 하천, 도로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그렸으며 인문지리적 사항은 鄕校, 衙舍, 客舍와 沙溪書院, 靑龍寺(서운면 청룡리) 등만 표시하고 있다. 縣의 북쪽에 있는 飛鳳山(보개면 불현리, 안성시 실왕동 경계)이 鎭山이며 과거에 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縣의 남쪽에 흐르는 하천은 安城川으로 서쪽으로 흘러 아산만으로 연결된다. 鄕校는 현재의 안성시 명륜동에, 客舍는 구포동에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道路는 주위의 陽城, 稷山, 竹山 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주요한 토산품으로는 磁器, 陶器를 들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시장이 있어 전국의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번성했다고 한다.(이현군)

  • 양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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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현은 일제시대의 양덕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양덕군과 신양군 일대이다. 이 고을은 고려 초부터 여진과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성격의 陽岩鎭, 樹德鎭으로 존재하였다. 이후 국경선이 훨씬 북쪽으로 올라감에 따라 조선 태조 때 두 진을 합하여 세운 고을이다. 지도에도 읍치 왼쪽에 樹德城이, 오른쪽 고읍면에 陽岩城이 표시되어 있어 고을의 역사성을 전해주고 있다. 고을의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이 지나가고 있어 함경도의 高原, 文川, 安邊 등과 연결되는 각종 고개가 산재해 있다. 고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왼쪽은 대동강의 지류 沸流江의 상류이고 오른쪽은 대동강의 지류 南江 곧 能城江의 상류이다. 그런데 읍치를 강조하다 보니까 남강 유역이 지나치게 축소·왜곡되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는 조선 초기에는 고읍면 지역에 있었으나 이후 지도상에 표시된 비류강 유역으로 옮겨진 듯하다. ≪大東輿地圖≫에는 고읍면 지역에 읍치가 있는 것으로표시되어 있어 약간의 혼란이 있었던 듯한데 현재의 북한지도에는 지도상의 읍치가 군중심지로 표시되어 있다. 한편 읍치 오른쪽과 고읍면 위쪽에 각각 溫井과 溫泉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의 북한지도에도 陽德溫泉, 石湯溫泉 등으로 표시되어 있어 그 연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군사적 요충지답게 回岩山城 등의 산성이 나와 있으며, 吳江面에는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兎城鎭이 그려져 있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논은 거의 없으며 火田이 밭의 ⅓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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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영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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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榮川郡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영주시내, 장수면, 문수면, 이산면, 평은면, 봉화군 상운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영주시 영주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鐵呑山이다. 산세가 남향으로 달리는 형세가 마치 달리는 말과 같아서 철탄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여러 겹의 산줄기가 명당인 읍치를 포근히 감싸안은 형국이다. 읍치에 있는 字民樓는 1427년(세종 9)에 郡守 權 詳이 세운 것이고, 雙淸堂은 객사 동쪽에 있는데, 郡守 金世勳이 지은 것이다. 지도에는 없지만, 雙淸堂의 남북에 蓮池가 위치하고 있다. 迎薰亭은 郡守 鄭從韶가 지은 것으로 이 황이 손수 迎薰이라는 글자를 써서 걸었다. 읍치 좌측에 東龜臺, 龜鶴亭이 나타나 있다. 구학정이 있는 서구대는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고, 동쪽에 있는 동구대와 쌍으로 솟아 있고, 그 가운데로 西川이 흘러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龜鶴亭은 1603년(선조 36)에 이조판서 김 륵이 세운 정자이다. 경치가 아름답고 류성룡 등의 詩가 있어서 더욱 유명하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伊山書院은 1558년(명종13)에 군수 안 상이 세워, 이 황을 배향하였고, 1572년(선조 5)에 사액되었다.(金在完)

  • 전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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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전의현은 현재 연기군 전의면과 전동면을 합친 것이었다. 당시 동쪽으로는 목천현 및 청주목과, 북쪽으로는 천안군과, 서쪽으로는 공주목과, 남쪽으로는 연기현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읍치는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다. 전의현은 5개 면으로 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郡勢가 약하였다. 忠淸道邑誌에서는 전의현의 形勝을 ''三峰圍野二水繞城''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의현은 鎭山인 月昭山과 古麗山 및 雲主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두 하천이 동쪽에서 읍치 앞을 지나는 형세이다. 지도에 나타나 있는 수계를 언뜻 보면 하천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사실은 조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마 태백산맥 서사면의 하천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데 이 경우는 逆水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므로 풍수상 고의로 하천의 형태를그렇게 그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남쪽의 연기현은 금강 수운을 이용하여 세곡을 군산창으로 운송하였지만, 전의현은 금강 수계에 있으면서도 아산만 공세창까지 세곡을 육운으로 운반하였다.즉, 금강 수운 영향권과 아산만 육운 영향권의 중간에 위치한 것이다.(金在完)

  • 양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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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 陽根郡이었으며 현재의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서종면, 양서면, 옥천면일대, 광주군 남종면, 가평군 설악면에 해당하며 양근군의 대부분은 砥平과 합하여져 현재는 양평군이 된 지역이다. 현재의 양평군 양평읍이 郡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있으며 지도 왼쪽 아래의 二水頭村(양수면 양수리)은 두 물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두물머리라 불린다. 大灘은 남한강으로 여주 앞을 흐르는 驪江이 이어진 것이다. 지도 왼쪽에서 북으로 연결되는 강은 북한강이 된다. 大路, 中路에 의해 加平, 砥平, 利川 등과 교류하였으며 양근은 서울과 平海를 연결하는 大路상에 위치하였다. 육로와 함께 수운이 통하는 길이라 迷源倉과 같은 창고가 있었다. 강가에 위치하였으므로 觀水亭, 洋洋亭 등 경치가 좋은 곳에 많은 정자가 있었으며 많은 寺刹, 庵子가 산재해 있었음을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농사에 필요한 堤堰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咸公城(옥천면 용천리)은 고려 때 몽고 군사를 피하던 곳이다. 이 지역은 특히 많은 墓가 있다. 산줄기 표현방식에 있어 脈勢를 강조하였으며 穴이 되는 곳은 풍수 개념에서 나온 山圖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도를 그리고 있다.(이현군)

  • 연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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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연안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연백군 서부지역에 해당한다. 현 행정구역 상으로는 황해남도 연안군 전체, 청단군 일부 지역, 배천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연안부는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이속되었다. 府의 鎭山은 북쪽 3리에 있는 飛鳳山(일명 鳳勢山이라 함)이다. 지도에 보이는 원형의 읍성은 1555년(명종 10)에 쌓았는데, 1591년(선조 24)에 延安府使 申恪이 修築하였다. 府의 남쪽 3리에 위치한 南大池는 輿地圖書에 따르면 둘레가 20리나 된다. 이 못과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겨울철마다 못의 얼음이 세로 혹은 가로로 갈라지는데 읍 사람들이 용이 갈이를 하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보아서 이듬해의 풍년과 흉년을 미리 점친다고 한다. 조선 태종 때부터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지도에서 향교의 우측에 보이는 서원은 飛鳳서원이다.1596년(선조 29)에 세워졌고, 1706년(숙종 32)에 사액을 받았다. 부의 남쪽에 위치한 羅津浦는 公私 船舶이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서울에 이르는 수상교통의 요지이었다.(金在完)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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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영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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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永川이라는 명칭은 고려 초 道同과 臨川 두 고을을 합쳐서 永州라고 고친 데에서 연유한다. 영천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영천시내 전지역, 금호읍, 고경면 대부분, 임고면 서부, 자양면 전지역, 청통면, 화산면 남부, 화남면 일부, 화북면 남부와 동부, 대창면 전지역, 북안면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영천시내 창구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母子山이다. 모자산과 보현산에서 발원한 北川과 南川이 읍 앞에서 만나 서쪽으로 흘러 금호강과 합류하고 있다. 읍성 안에 위치한 朝陽閣은 600년 전 曺 郡守가 누각을짓고 명원루라 하여 정몽주의 詩板을 달았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20년 후에 재건하여 서세루라 하였으며, 그 후 조양각이라 칭하였다. 서원으로는 臨皐書院, 立岩書院, 松谷書院, 道岑書院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임고서원은 1533년(명종 8)에 盧 遂, 金應生, 鄭允良 등이 합세하여 사액을 받았으며,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는데, 1602년(선조 35)에 현 양항리로 옮겨졌다. 좌측에 보이는 道岑書院은 1613년(광해군 5)에 세워져, 1678년(숙종 4)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松谷書院은임고서원보다 늦은 1702년(숙종 28)에 세워진 서원이다.(金在完)

  • 정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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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현은 현재 청양군 정산면, 목면, 청남면, 장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정산면 서정리 부근에 있었다. 동헌자리는 현재 정산면 면사무소 자리이고, 부근에 향교골 등 지명이 남아 있다. 정산현은 서쪽으로 험준한 大峙(317m)로 청양현과, 남쪽으로 금강을 사이에 두고 부여현과 접하고 있었다. 鎭山은 읍치에서 북쪽 7리에 위치한 大朴谷山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舍人峰과 칠갑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사인봉, 남쪽의 앵봉산, 동쪽의 성주산, 서쪽의 오동산 등 4산이 명당형국을 에워싼 형세이다. 명당국 내에 명당수가 각각 북쪽에서 흘러 내려 와 읍치 앞에서 만나 남으로 향하는 형국이다. 이 또한 명당형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지도에 읍치 남쪽 금강 변에 江倉과 汪津이 표시되어 있다. 강창은 정산현의 세곡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 보관된 창고이었다. 왕진은 혹은 왕지진이라 불리는데 漕運船이 출발하는 포구이면서 부여로 통하는 도로의 주요 나루터이었다. 서북쪽의 칠갑산에 옛 성의 터가 있는데 慈悲城 또는 兜率城터 이라고 부른다. 읍치의동쪽에 위치한 聖主山은 위치 상으로 볼 때 현대 지형도의 계봉산(210m)인 것으로 생각된다. 계봉산의 정상에는 돌로 쌓은 석성이 있었다고전해진다.(金在完)

  • 양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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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공도면, 원곡면 일대로 지금의 안성시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그 중심지는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이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으며 1914년에 안성군에 합하여진 지역이다. 북쪽을 위로하여 그린 지도이며 간략하게 그렸다. 鎭山인 天德山에서 高城山, 白雲山으로 연결되는 맥이 縣의 동쪽을 감싸고 있는데 脈勢를 강하게 표현하였다. 동쪽의 大川은 禪院川으로 아산만까지 이어지는 하천이다. 지도에 나타나는 無限城은 지금의 白雲山에 있었던 古城이다. 縣 북쪽의 大路는 용인과 안성을 연결하는 길이다. 驛院으로는 加川驛, 禪院, 所草院 등이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지도 아래쪽에 所沙酒幕이 보이고 있다. 그 밖에 吳判書書院, 吳判書墓, 尹判書墓, 崔副學墓 등의 서원, 능묘가 나타나고 지도 아래쪽의 烽臺는 槐台吉串烽燧이다.(이현군)

  • 영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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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변부는 일제시대의 영변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영변군, 구장군, 향산군 일대이다. 영변부는 1429년(세종 11)에 연산과 무산을 합쳐 藥山城에 읍치를 두고都節制使의 本營으로 만들었는데 지도에도 아래쪽에 延山面, 왼쪽에 撫山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도 한가운데에는 읍성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는데 여백 주기에 보이는 鐵瓮城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북방향의 방어에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였다. 읍성 안쪽의 왼쪽에는 고을의 鎭山 藥山이 우뚝 솟아 있고 또 하나의 성이 둘러 쌓여 있는데 여백 주기에 보이는 藥山山城이 이것이다. 이 산은 한국인의 정서를 잘 표현한 素月 김정식(1903-1934)의 시, ''진달래꽃''의 무대로서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에서 약산은 이곳을 가리킨다. 이런 鐵瓮城의 중요성에 따라 읍치 부분이 매우 자세하며 다른 지역에 비해 과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청천강의 본류이며, 왼쪽에 보이는 것이 그 지류 구룡강인데 두 강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빠져나감에도 불구하고 약간 왜곡되어 그려져 있다. 특히 청천강 본류는 실제로는 서북쪽에서 흘러 들어오지만 지도에는 정북방향을 하고 있다. 지도 위쪽 오른쪽에는 수려한 경치로 유명한 妙香山이 표시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때 僧兵을 이끌고 싸웠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도를 닦았던 곳이라고 하며, 고려 광종 때 세웠다는 보현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었다. 기타 그 아래쪽에 있는 魚川驛은 21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며, 그 왼쪽에 보이는 客舍와 衙舍는 天水鎭이 있었던 곳이다.(이기봉)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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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영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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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해부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병곡면, 창수면, 축산면, 영양군 석보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다. 읍치 주변의들을 제외하고는 사방을  산들이 첩첩이 둘러싸고 있다. 읍치 좌측에 두 개의 서원이 보이는 데, 읍치에서 좀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서원이 仁山書院이고, 다른 하나는 丹山書院이다.  인산서원은 1696년(숙종 22)에 창건되어 李徽逸을 배향하였는데, 순조 때 병곡면 인량모개로 옮겼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단산서원은 선조 때 창건되어 禹 倬과 李 穀, 李 穡 父子를 배향하였는데,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蒼水院은 영해에서 영양을 거쳐 안동으로 가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이었다. 옛날에는 이 곳에 영해부에 딸린 倉 部曲이 있었다. 부근에 위치한 小泣嶺과 大泣嶺은 고을에 오는 손님을 맞아들이고, 떠나 보내는 곳으로 되어 있다. 병곡역 우측에 보이는 觀魚臺는 上臺山 밑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래 松川이 흘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金在完)

  • 제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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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제천현은 현 제천시, 백운면, 송학면, 봉양읍, 금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제천시 중앙로 1가 일대이었다. 제천은 해발 250m 내외의 넓은 침식분지에 자리하며, 강원도의 영월과 정선지방의 관문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形勝條에는 "제천은 지세가 가장 높고, 물은 겹겹이요, 산은 중첩되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천의 鎭山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12리 떨어진 龍頭山이다. 관아 북쪽에 의림지가 표시되어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城池條에 의림지는 현 북 10리에 있는데,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고, 관개면적이 심히 넓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때 의림이 적성(단양), 자춘(영춘), 사열이현(청풍), 내제(제천)의 네 고을사람들을 불러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세종 23년(1441)에 충청관찰사 정인지가 고쳐 쌓았고, 또 헐어진 것을 세조 1년(1456)에 다시 쌓았다. 지도에 보이는 제천향교는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金綏田이 창건하였으며, 1907년 7월 12일 李康年이 왜적과 싸울 때 대성전과 재실이 불에 탔다. 관아 좌측에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南塘書院이 있었다. 1570년(선조 3)에 縣監 全弘民이 세워 읍 남쪽 못 옆이 되므로 남당서원이라 하여 퇴계 이 황을 모셨다가, 1831년(순조 31)에 강 유를 배향하였다.(金在完)

  • 양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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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강 남쪽과 한강이북, 한성부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청산면, 양주군, 의정부시, 동두천시(탑동 제외), 구리시, 남양주시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397년(태조 6)에서 1504년(연산군 10)까지는 양주군 주내면 고읍리가 중심지였다가 1511년(중종 6)부터는 주내면 유양리가 중심지가 되었다. 漢城府 동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 지도에서도 왼쪽 아래에 京都를 표시하고 있고 아래쪽에 한강을 그려 놓았다. 전체적으로 脈을 강조하였으며 京都와 邑治 모두 하나의 形局이 되게 표현하였다. 朝鮮 太祖陵인 健元陵을 비롯하여 光陵, 顯陵등 많은 능묘가 표시되어 있다. 漢城의 동대문에서 지방으로 가는 모든 길은 楊州를 지나게 되어 있어 도로망이 복잡하며 곳곳에 驛院이 산재해 있다. 서울에서 경기북부로 이어지는 길(抱川通路, 麻田通路, 坡州通路, 積城通路)과 강원도로 이어지는 길(關東路), 한강의 나루로 이어지는 길이 이 지역을 지나게 된다. 서울과 인접하여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며 峨嵯山과 大伊山의 烽燧는 抱川과 木覓山(서울의 남산)烽燧와 연계된다.(이현군)

  • 영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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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군은 일제시대의 영원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녕원군과 대흥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쪽으로 그렸다. 狼林山에서발원한 대동강이 여러 산줄기 사이의 물을 받아 남서쪽 德川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고려 초에는 국경선에서 가까워 군사적 성격의 鎭으로 존재하다가 조선 초에 郡이 설치되었다. 숙종 이후 寧城鎭을 설치하여 종3품의 僉使를 파견하였는데 지도의 아래쪽에는 寧遠郡 읍치가 표시되어 있고, 중앙부에 寧城鎭이 따로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창고의 표시가 자세한데 각 창고마다 앞쪽에 郡·鎭의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아 군과 진에서 관할하는 창고를 구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고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동쪽으로는 白頭大幹이 지나가는데 함경도 및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대한 설명이 매우 자세하다. 읍치 왼쪽에 보이는 土非脫, 長非脫의 표현은 다른 지도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우리말의 ''비탈길''을 漢字화 한 것으로 여겨진다. 남면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萬陳德에서 ''德''은 함경도 등에서 산을 의미하는 용어로 많이 쓰인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논은 전혀 없고 火田이 상당히 많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요계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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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의 사본.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도면 가득히 명나라 말기의 방어시설과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중국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주변물줄기, 토문강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백두산 주변의 여백에는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칭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에 기록된 백두산 동쪽의 물줄기는 阿也苦江으로 되어 있고,이 물줄기를 토문강으로 보았던 것은 성경지였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 표현된 백두산과 토문강에 관한 인식은 사실상 성경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 조야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전혀 새롭게 인식하거나 또는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요계관방도와 그 사본들에서는 이러한 인식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는 이 지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白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드러내듯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도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이이명의 요계관방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은 이 지도에서 "高麗境"으로 바뀌어 있다.(배우성))

  • 예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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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안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북부, 녹전면, 도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의 북쪽에 위치한 城隍山이다. 寬心樓와 望美樓는 객관 부근에 있는 누각이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易水書院은 1568년(선조 1)에 이 황이 창건하여 禹 倬, 朴忠佐를 배향하였고, 1684년(숙종 10)에 사액되었다. 陶山書院은 1574년(선조 7)에 창건되어 퇴계 이 황을 배향하였고, 그 다음 해에 사액되었는데, "도산서원"의 넉 자는 한 호의 글씨이다. 그 후 퇴계의 제자 조 목을 추배하였다. 뒤에 있는 尙德祠는 보물 제 210호로 지정되었다. 그 외 淸溪書院과 汾江書院은 賜額書院이 아니다.月川書堂은 부용산에 있는데, 조 목이 책을 갈무리하던 장소이다. 낙동강을 따라 수많은 亭子와 臺가 분포하고 있다. 상류로 올라가면서 枕洛亭, 觀水臺, 愛日堂, 雲影臺, 谷口岩, 天淵臺, 葛仙臺, 寒棲樓, 松鶴亭 등이 분포하고 있다. 애일당은 李賢輔가 세워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하였기 때문에 堂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리고 낙동강에는 淵과 潭의 명칭이 많이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곳은 깎아지른 절벽과 깊은 沼를 이루기 때문에 절경을 이룬다. 도산서원의 對岸에 위치한 月瀾寺는 "七臺三曲"의 絶勝이 있고, 이 황이 어릴 때 책을 읽었던 곳이라고 전한다.(金在完)

  • 직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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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현은 현재 천안시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평택시와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직산현도 천안군과 마찬가지로 경양면, 안중면, 연피면, 외야곶면 등 4곳을 월경지로 가지고 있었는데, 그 지역은 현재 평택시지역이다. 읍치는 현재 직산면 군동리와 군서리일대에 있었다. 忠淸道邑誌의 形勝條에 직산현의 형세를 ''北帶漢水東據高丘南望沃澤西阻海''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동쪽에는 비교적 높은 구릉이 있고, 서쪽에는 바다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쪽에 漢水가 있다는 것과 남쪽에 기름진 들이 있다는 것은 현재 지형과 맞지 않는 것 같다. 아마 하남위례성의 지형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직산현의 鎭山은 현에서 서쪽으로 3리 떨어진 蛇山이고, 聖居山이 祖山이 된다. 다른 지역은 읍치 앞에서 하천이 모이는 형국인데, 직산현은 읍치 앞의 하천이 북류하는 형태로 좀 색다르다. 중앙에 보이는 직산현 관아는 현재 지방유형 문화재 41호로 지정되어 있고, 관아문, 내동헌, 외동헌, 내삼문, 외삼문 등 조선조 지방 행정 관청의 건물의 구조배치 등이 완전히 보존되어 있으므로 지방관아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지도에 보이는 天興寺址(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234)에는 幢竿支柱(寶物 99號)가 남아 있는데 1002년(고려 목종 5)에 만들어진 것이다. 성환역은 성환도의 찰방역으로 공주 이북의  11개 역을 관장하였다.(金在完)

  • 양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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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0년(정종 2)에 처음으로 縣을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양지현은 廣州府의 秋溪鄕이었는데 양지현청을 이 지역으로 옮겨오면서 지역의 명칭이 바뀌었으며 지도에 나타나는 ''秋溪古縣''(양지면 추계리)은 그 이전의 중심지를 나타낸 것이다.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원삼면 학일리, 목신리(목악부곡), 백암면 고안리(고안부곡), 백봉리, 안성시 고삼면 일대에 해당하며 그 중심지는 용인시 양지면 양지리가 된다. 定水山(양지면 정수리, 추계리, 양지리 경계)이 이곳의 鎭山이 되며 縣의 북쪽에서 중심지로 뻗어오는 脈勢를 강하게 표현하였다. 지도의 위쪽이 북쪽이 되게 그렸으며 陸路網이 얽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지역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大路에 위치하고 있으며 安城, 竹山, 利川, 昆池岩, 廣州 등을 연결하는 육로의 결절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도에서는 陸路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고개(峴)들이 그 명칭과 함께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이현군)

  • 영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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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유현은 일제시대의 영유면, 노지면, 청산면, 용호면, 해소면, 한천면 일부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평원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그렸는데 고을의 鎭山 尾頭山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쪽의 높은 산지로부터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서해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읍치는 미두산으로부터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여 있고 衙舍와 ?舍뿐만 아니라 두 개의 정자와 연못까지 표시하여 다른 곳에 비해 많이 부각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德池筒은 둘레가 5萬尺을 넘는, 이 고을에서 가장 큰 저수지였는데 1731년(영조 7)에 모두 메워 논으로 만들고 屯田을 설치하여 摠戎廳에서 세금을 걷어 쓰게 하였다. 德池 안에 있는 鎭舍·鎭廳은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던 德池鎭을 의미하는데, 이곳이 논으로 메워진 이후 1748년(영조 23)에 폐지되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鎭里面은 그 옆에 써 있는 ''今屬順安縣''이라는 문구를 통해 원래는 이 고을 땅이었지만 순안의 월경지로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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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于山國으로 511년(신라 지증왕 12)에 異斯夫가 정복하였다. 조선태종 이후 섬을 비우고 강원도 울진현에 붙였다. 1694년(숙종 20)에 三陟僉使로 하여금 울릉도의 경비를 엄하게 하도록 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강원도 平海郡 越松萬戶가 鬱陵島長을 겸하게 하였으며 1884년(고종 21)에 울릉도 개척령을 내렸다. 1906년에 경상남도에 속하였다가 1913년부터 경상북도에 속하게 된다. 현재의 경상북도 울릉군의 울릉도와 독도, 주변의 섬들을 그렸다. 독도는 이 지도에서 于山島로 적혀 있다. 울릉도 가운데에 中峰(성인봉)을 그리고 주변의 봉우리가 모두 중심을 향하게 그린 독특한 형식의 지도이다. 東西南北과 함께 文王八卦方位(巽, 艮, 乾, 艮)에 의해 방향을 표시하였다. 산줄기 사이로 하천을 그리고 大川流出이라고 적고 있다. 해안에는 中峰까지의 거리를 표시하고 있다. 비교적 넓은 땅에는 寬豁이라고 표시해 두었으며 살만한 지역은 可居라고 표시하였다. 해안의 바위에는 立岩刻標라고 적었으며 북쪽의 구멍바위(孔岩)까지 표시하였다. 倭船倉, 待風, 船泊, 家居 등 일본과의 관계, 바람, 선박운행, 거주 가능한 지역 등도 표시되어 있으며 石城門의 터, 石葬(지금도 남아 있는 울릉도의 古墳), 塔, 寺刹 터 등 유적을 표시하고 있다. 해안에는 竹田이 여러 곳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은 간단하게 기록하였는데 나무, 해산물, 동물 등이 주된 내용이다.(이현군)

  • 예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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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현은 지금의 예천군 예천읍, 유천면, 보문면, 용문면, 호명면, 개포면 동부, 유천면, 풍양면 남부, 문경시 산북면 동부, 동로면, 의성군 다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예천읍노상리 일대에 있었다. 鼎山書院은 1612년(광해군 4)에 세워져 이 황, 조 목을 배향하였는데, 1677년(숙종 3)에 정산서원으로 사액되었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읍치 우측 보문면에 보이는 보문사는 667년(신라 문무왕 7)에 의상대사가 세웠으며, 1184년(고려 명종 14)에 보조국사가 중창하였다. 읍치 서남쪽에 보이는 龍頭亭은 臥龍山 頂上에 있는 亭子로 낙동강에 임하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龍門寺는 870년(신라 경문왕 10)에 杜雲이 창건하여 용문사라 하였고, 그 후 고려 초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중수와 중건을 하였다. 헌종 1년(1835) 8월에 타서, 중 역파가 상민, 부열들과 함께 중건하였다.(金在完)

  • 진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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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잠현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유성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진잠현의 읍치는 현재 유성구 교촌동 일대에 있었다. 현재 진잠초등학교가 옛 진잠현 동헌 터이다. 현재도 부근에 진잠향교가 남아 있어 옛 진잠현의 치소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고을의 진산은 현 서쪽 5리에 위치한 産長山(또는 山長山, 258m)이다. 산허리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속담에 전하기를 鷄龍이 바위에서 나왔다 하여 산장산이라 이름했다 한다. 이중환의 擇里志에 진잠현은 동서의 두 산이 남쪽에서 평야를 끼고 돌아 북쪽에 이르러서 합치었고, 또 높게 사방을 산으로 막아 가운데를 둘러쌌고, 평평한 언덕과 산은 길고 구불구불하고, 구봉산(진잠현의 남쪽에 있는 산)과 보문산(진잠현 동남쪽에 있는 산)이 남쪽에 높이 솟아 그 맑고 깨끗한 기상이 거의 한양의 동교보다 낫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진잠현은 논밭은 극히 좋고 넓으나 다만 바다에서 다소 떨어져 서쪽에 있는 강경에서 교역하는 것에 의지한다. 지도에 산장산 산기슭에 鶴雲寺라는 절과 오층석탑이 보인다. 이 절은 읍치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산장산(현 금수산) 기슭에 있었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다. 지도에 보이는 逍遙亭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 쇠퍼니(풀무집) 뒷산에 있었는데, 정자는 없어지고정자 터만 남아 있다.(金在完)

  • 양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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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양천현은 1895년 郡이 되었으며1914년에 김포군에 합쳐졌다가 1977년 강서구, 1978년에 양천구가 신설되면서 서울시의 일부가 되었다. 양천현의 중심지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이다. 양천현은 한강의 남서쪽에 위치한 현으로 한강은 지도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흐르게 된다. 한강이 빠져나가는 방향인 지도의 위쪽은 실제 북서방향이 된다. 孔岩津(강서구 가양동)은 북쪽의 幸州津과 통하며 지도에 표시된 上京大路,  京路는 漢城府와 연결되는 길이다. 그 밖에 衿川, 富平과 통하는 길이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 위쪽으로 뻗어나간 길은 김포, 통진을 거쳐 강화도로 가는 길이 된다. 지도 오른쪽에 길게 표시된 한강에는 長湍의 臨津江, 江華의 甲串津, 黃海道 海路와 통한다는 설명이 적혀있다. 홍색의 ''ㅏ'' 형태로 표시된 것은 開花山 烽燧로 김포의 北城山과 木覓山(서울의 남산)봉수를 연결하는 것이다. 강서구 가양동 234번지에 있는 양천향교는 조선 태종 때 창건된 것으로 서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향교이다. 지도의 오른쪽 아래에  倉山이 있는데 숙종대에 폐지될 때까지 이 지역(염창동)에 소금 창고가 있었는데 이를 따서 산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이현군)

  • 옹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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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옹진부는 해방 전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 동남면, 북면, 서면, 용천면, 가천면, 백령면, 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현재 황해남도 옹진군 전 지역과 태탄군 일부, 남한의 옹진군 백령면과 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에서 동쪽으로 2리에 위치한 花山으로 바로 동문 밖에 있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돌로 쌓은 성이다. 읍성 외곽에는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안에는 동헌, 객사, 창, 옥 등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읍치 좌측에 所江鎭이 보인다. 본래 수군첨절제사가 있었다. 숙종45년(1719) 도호부 승격와 함께 옹진도호부사가 황해도 수군절도사를 겸직하면서 소강진은 황해수영의 行營이 되었다. 속읍은 해주·풍천·장연·연안·안악·배천·은률·장련·강령 등이었고, 속진은 백령도·초도·등산·용매·허사·오차·조니 등이었다. 본영 및 속읍·속진에 각종 戰船이 108척이 있었다. 소강진에도 옹진부와는 별도로 동헌과 객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行營城이 둘러싸고 있었다.설명란에는 소속과 군종을 달리하는 군사들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전투선 종류에서 天字兵船, 小猛船, 居刀船, 挾船 등 매우 다양함을 보여 주고 있다.(金在完)

  • 울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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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상북도 울진군의 북쪽에 해당하는 원남면, 서면, 근남면, 울진읍, 죽변면, 북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현재의 울진군은 울진과 평해를 1914년에 합한 것이며1963년에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옮겨왔다. 중심지는 이 지도에서 邑基로 표시되고 있는데 울진읍 읍내리에 해당하며 객사, 내아, 동헌 등의 건물이 있었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낙동정맥이 縣의 서쪽을 막고 있으며 부구천, 두천천, 남대천, 왕피천이 서쪽 고지대에서 東海로 흘러 들어간다. 縣의 앞쪽을 흐르는 것이 남대천이다. 興富驛을 지나 葛峴을 넘어 三陟으로 향하는 길은 평탄하였으며 鼎峙, 召造院을 지나산맥을 넘어 安東, 英陽으로 통하는 길은 험준하였다. 守山驛, 德新驛은 평해와 통하는 경로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古山城(울진읍 고성리)은 1396년 (태조 5)에 왜구의 침입으로 古邑城이 폐허가 되자 이곳으로 옮겨 성을 쌓고 古山城, 古寺山城, 縣上城으로 이름붙였는데 현재 성은 헐리고 터만 남았다. 鄕校는 1484년(성종 15)에 세워졌는데 1697년(숙종 23)에 이 지도에 나타나는 위치(울진읍 고성리)로 옮겨졌다가 1872년(고종 9)에 울진읍 읍내리로 옮겨지게 된다. 동해안의 竹田(죽변면 죽변리)은 바닷가에 많은 대나무가 있어 竹濱, 竹邊 등으로 불려지던 곳이다. 울진읍 대흥리에 大興寺, 佛影寺가 있었으며 孤山祠宇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聖留窟(근남면 구산리)은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천연동굴로 선유굴, 석류굴, 탱천굴, 성류굴 등으로 불리었으며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때 주민들이 이 굴에 피난했는데, 왜군이 입구를 막아 굶어죽었다고 전해진다.(이현군)

  • 용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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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궁현은 지금의 예천군 용궁면, 개포면 서부, 문경시 영순면 동부, 예천군 지보면, 풍양면 북부, 의성군 인사면 쌍호리·월소리·신수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당시의 읍치는 지금의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일대였다. 1856년(철종 7) 큰 장마로 인하여 낙동강이 범람하여 이 현청이 떠내려가서 이듬해 현청을 읍부리로 옮겼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竺山인데, 신라 때 고을의 명칭이기도 하다. 읍치 아래의 龍飛(飛龍)山城은 돌로 쌓은 성으로 안에 우물 3개, 군창이 있었다 한다. 비룡산성의 남쪽에 위치한 三江書院은 1643년(인조 21)에 창건되어 정몽주, 이 황, 류성룡을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헐렸다. 여기서 三江은 낙동강, 내성천, 금천 세 강이 이 곳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낙동강이 비룡산을 감돌면서 심하게 곡류를 하는데, 지도에는 없지만,부근에 義城浦가 있다. 마치 섬처럼 되어 있어서 조선 때 귀양지로 이용되었다. 낙동강에 위치한 知保津, 三江津, 河豊津 등의 나루터에는 지나가는 손님과 물자를 건네 주는 나룻배가있었고, 또한 낙동강을 거슬러 온 鹽船이 정박하여 주민과 물물교환을 하였다. 지도에 저수지가 많이 표시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金在完)

  • 진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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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진천현은 현재 진천군과 거의 일치하나 현재 진천군은 음성군 사다면의 2개 리와 맹동면 6개 리, 및 대조면 1개 리, 경기도 죽산군의 남면의 2개 리, 청안군의 사면 1개리가 편입된 지역이다.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였다. 지도에서 서쪽에 吉祥山이 있다. 일명 胎靈山이라고 하는데, 현 서쪽 15리에 있고, 寶蓮山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신라 진평왕 때 萬弩郡 太守 金舒玄(김유신의 아버지)의 妻 萬明이 임신하여 20개월만에 아들을 낳아 유신이라 하고 태를 이 산에 묻었다고 한다. 그런고로 길상산이라고 불렀다. 신라 때 길상산에 사당을 짓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1398년(태조 7)에 이를 금지시켰으나, 주민들이 계속 제사를 지내다가 그 뒤 이 곳으로 옮겼다. 지도의 오른쪽 梨谷面에 보이는 書院은 百源書院이다. 1597년(선조 30)에 세워서李鍾學과 그의 5대손 李  와 李 皐, 金德崇을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1669년(현종 10)에 사액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리었다. 초평면 두타산(599m)은 진천의 명산으로 모양이 頭陀처럼 생겼으며, 온 산이 붉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金在完)

  • 여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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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부는 지금의 익산시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과 논산군 연무읍 남쪽부분에 해당하며 읍치는 여산면 여산리에 있었다. 여산부는 조선초에 礪良縣과 朗山縣이 합쳐져 된 고을로서 동남쪽이높고 서북쪽은 금강의 넓은 들과 연결되어 낮다. 지도에서는 동쪽에 있는 고을의 진산 天壺山을 위쪽으로 하였으며, 읍치를 겹겹이 둘러 쌓인 풍수적 모습으로 그렸다. 지도 왼쪽의 강은 금강이고 읍치에서 나온 물이 금강과 만나는 곳이 지금의 강경읍 黃山村이다. 黃山에서는 인조 때 낙향한 沙溪 金長生(1548-1631)이 이황, 이이, 성혼을 향사한 黃山書院과 八卦亭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의 제자 송시열은 西人 계열의 거두가 되었다. 김장생이 추가로 배향된 후 1655년(현종 6)에 竹林書院으로 賜額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송시열도 배향되었다. 黃山은 조선후기에는 강경포와 더불어 금강 연안에서 제일 번성한 포구로도 유명하다. 읍치 왼쪽의 皇華亭은 전라도의 新舊 관찰사들이 교대하던 장소로서 지금의 논산군 연무읍 황화정리이다.(이기봉)

  • 용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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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강현은 일제시대의 용강군 봉산면, 오신면, 지운면, 다미면, 서화면, 용월면, 양곡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남포직할시 남동쪽과 평안남도 온천군 북쪽 일대이다. 고을의 실제 모습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이지만 직사각형의 지면에 그리기 위해 약간 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 烏石山 바로 밑에는 黃龍山城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는데 옛날 黃龍國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의 다른 이름으로 安市城이라는 기록이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나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산성 안에 있는 影殿은 箕子殿으로서 1725년(영조 1)에 賜額받았다. 아사 위쪽에 있는 書院은 鰲山書院으로서 김굉필의 제자로서 유명한 金安國(1478-1543)과 金正國(1485-1541) 형제를 배향하여 1701년(숙종 27)에 賜額받았다. 지도 아래쪽의 急水門은 대동강 물이 급하게 돌아 絶 海로 불렸던 작은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기타 지도 위쪽에 보이는 德島 등의 섬은 그 위치가 三和의 경계를 넘어 서남쪽의 바다에 있는 섬으로서 위치와 거리는 신경 쓰지 않고 이 고을의 땅이라는 사실만 표시하였다.(이기봉)

  • 원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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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문무왕 때 北原小京을 두었다가 940년(고려 태조 23)에 原州牧으로 고쳤다. 1395년(태조 4)에 강원도 監營을 이곳에 두었다. 현재의 강원도 원주시, 영월군의 수주면, 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 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영월군 주천면은 고구려의 酒淵縣이었으며 신라 때는 酒泉縣이었다. 客舍, 倉, 衙舍, 鄕校 등이 표시된 중심지는 현재의 원주시 일산동, 명륜동에 해당한다. 客舍옆에 표시된 營은 강원도 監營을 뜻하며 일산동에 있었다. 동쪽에는 치악산이 있으며 서쪽으로 섬강이 흐른다. 치악산 동쪽의 강은 주천강이 된다. 치악산이 원주의 鎭山이 되며 서쪽으로 禁山이 기록되어 있다. 서쪽의 섬강은 남한강과 합류되는데 이 곳에 興原倉(부론면 흥호리)이 표시되어 있다. 과거 원주, 영월, 평창, 정선, 횡성 등의 세곡을 모았던 곳이다. 주천강가에는 酒泉倉(영월군 주천면)이 보인다. 섬강, 남한강을 끼고 梨湖津, 仰岩津, 江津 등의 나루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변에 太宗臺, 蟾岩, 淸虛樓 등의 명승지가 보인다. 사찰로는  原寺, 法興寺, 上院寺, 兩松寺, 九龍寺가 있다. 치악산 기슭의 원주시 관설동, 판부면 금대리 등에는 많은 산성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도 金臺 옆과  原寺 옆에 城(金臺城,  原山城)이 그려져 있다. 由原驛, 安昌驛을 통해 지평, 횡성과 통하며 新興驛은 평창과 神林驛, 丹丘驛은 제천, 충주와 통하는 경로상에 위치한다. 단구역에는 館이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울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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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부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산시, 울주군 온산읍, 웅상읍, 범서면, 서생면, 온양면, 웅촌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울산시 중구 성남동 일대에 있었다. 含月山에서 고을의 鎭山까지 남쪽으로 내려오는 山勢가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태화강과 동천강 및 울산만이 만나는 지점에 府治가 자리잡고 있다. 향교 좌측에 보이는 太和臺에서 태화강의 지명이 유래되었다. 태화대는 강에 임해서 경치가 아름답다. 읍치 동쪽의 鶴城과 남쪽의 甑城은 임진왜란 때 왜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전쟁터이다. 북쪽에 보이는 萬里城은 關門城과 함께 울산과 경주 경계의 주요 도로에 위치하여 경주를 방어하기 위한 성이었다. 1415년(태종 15)에 좌병영을 경주 동남 20여 리에 설치하였다가, 1417년(태종17)에 계변성으로 옮겨 설치하였고, 1604년(선조 37)에 지도에 보이는 곳으로 옮겼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西生鎭에 처음에는 수군만호를 두었으나, 1592년(선조 25)에 왜인이 쌓은 甑城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鷗江書院은 1678년(숙종 4)에 세워지고,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문수산 서쪽에 위치한 청송사는 지금 밭으로 변하고, 절터만 남아 있고, 보물 382호 청송사지석탑만 지키고 있다. 원적산 아래에 위치한 雲興寺에는 현재 절터와 석탑 3개가 남아 있다.

  • 천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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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군은 지금의 천안시내 전부, 천안시 풍세면, 광덕면 일원이 포함되고, 현재 아산만 부근의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현재 천안시 지역은 바다와 접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는 군의 경계가 좁고 길다랗게 해안까지 두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당시 해안지역에 월경지를 둔 것은 어염의 확보 때문이었다. <大東輿地圖>를 보면 천안의 월경지 3개가 보이는데,  모산은 고려시대 모산부곡(도자기)으로서 조선시대까지 천안군의 월경지이였다. 신정부곡(서 80리)과 돈의향(서 62리)의 설치는 어염 공급의목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읍치는 현재 천안시 대흥동과 오룡동 일대이다. 현재 관아 터는 五龍爭珠形의 황룡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한다. 지도는 명당인 관아를 중심으로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천안의 鎭山은 王子山이다. 新增東國與地勝覽 천안군 산천조에 ''왕자산은 동북으로 십이 리쯤에 있는데 천안의 진산이며 고려 태조가 이 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다고'' 한다. 新增東國與地勝覽 천안부 형승조에 천안을 ''三國中心''으로 기록할 정도로 중요한 요충지이었다. 지도에 보이는 華祝館은 현재 천안시 오룡동 188번지에 있는 行宮 건물로서 인조가 이 괄의 난리를 피하여 이 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金在完)

  • 여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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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기도 여주군에서 강천면(강원도 원주땅), 북내면의 금당천 동쪽 지역, 가남면의 일부지역, 흥천면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과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이 이 당시 여주목에 해당한다. 당시의 중심지는 현재 여주읍의 상리, 하리, 창리 일대가 된다. 하리와 창리 지명의 근원이 되는  下洞과 倉洞이 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관아의 서쪽에 있는 北城山이 鎭山이 되는데 이 지역이 남한강의 남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이곳은 龜尾浦, 梨浦津, 梁化津, 邑津 등의 여러 浦와 津이 교통로로서 발달하고 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에서 大路, 利川路, 京城路로 표시된 길들이 나타나는데 여주에서는 利川과 廣州를 거쳐 서울로 연결된다. 남한강을 끼고 있어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의 八景은 그 각각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婆娑城은 삼국시대에 처음 세워졌던 것으로 1592년(선조 25)에 義嚴이 다시 수축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이 조선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인 英陵과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寧陵이 있는 곳임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이현군)

  • 용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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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천부는 일제시대의 양서면, 양하면, 양광면을 제외한 용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용천군과 동쪽 일부를 제외한 염주군 일대이다. 993년(고려 성종 12)에 서희가 개척한 江東六州의 하나로서 의주와 맞대고 있는 첫 번째 고을이다. 의주대로는 지도 위쪽의 철산계로부터 들어와 의주계로 나아가는데 그 가운데에 있는 良策站은 良策驛이다. 이곳에는 다른 지도에는 ?舍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 客舍로 표시되어 있어 흥미롭다. 읍치에는 石城이 둘러쳐져 있는데 北面險高, 南門險高 등의 天然要塞的 모습이 문장으로까지 쓰여져 있다. 성 안쪽에는 시내와 우물이 있음도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천연요새로서의 읍성조차도 간략하게 처리된 성곽과 성문의 표시를 통해 이미 퇴락해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것에 비해 1624년(인조 2)에 신축되어 1704년(숙종 30)에 완성된 龍骨山城의 웅장한 표현을 통해 병자호란 이후 더욱 강화된 북방수비의 일면을 실감할 수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1678년(숙종 4)에 설치되어 僉使가 파견된 彌串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 경계 내의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청나라 관할 지역까지의 거리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봉수의 표시도 고을의 요충지적 성격 때문에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다른 고을뿐만 아니라 남쪽에 산재하여 있는 여러 섬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싣고 있다.(이기봉)

  • 이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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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利城縣은 함경도의 해안 고을로 북으로는 端川, 남으로는 北靑과 접하고 있다. 利城은 정조 때에 利原으로 개명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서면, 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은 단천군의 서부 지역을 일부 병합하여 이원군으로 되어 있다. 고을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수록된 내용도 비교적 소략하다. 특히 社의 명칭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래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많이 훼손되어 있었는지 지도상에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읍치 남쪽 해안의 南松亭, 東松亭 주변으로는 소나무 숲이 잘 가꾸어진 모습도 볼 수 있는데 당시 6, 7리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그 옆의 해안에는 文星岩이 있는데 겹겹이 쌓여진 바위의 모습이 절경이라 한다. 남쪽 해안의 者外津에는 1742년(영조 18)에 진휼을 목적으로 설치된 交濟倉도 보이고 있다.(노혜정)

  • 웅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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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명이 熊只, 熊口, 熊神, 熊山 등 곰과 관련된 명칭이 많다. 이것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鎭山인 熊山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웅천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 가덕도를 합친 지역이었으며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흔히 진해시가 진해현의 지역으로 알고 있으나, 진해시는 본래 웅천현의 소재지인데, 마산부제 실시 때 웅천을 진해면으로 고쳐서 그대로 시로 변한 것이다. 읍성은 정방형으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석축으로 둘레가 3,514척, 높이가 15척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熊山岩에는 熊山神堂이 있다. 지역 주민들이 매년 4월과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산에서 내려와서, 반드시 쇠북과 북을 치며 잡놀이를 벌이는데, 원근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제사지낸다고 한다. 해안 방어를 위하여 가덕도진, 천성포진, 안골포진, 제포진 등의 鎭과 신문보, 청천보, 풍덕포보 등이 설치되어 있고, 이들 진보에는 첨사와 만호가 주재하고 있었다.(金在完)

  • 천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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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독특한 세계지도. 가면 모양의 중앙대륙(내대륙), 중앙대륙을 감싸고 있는 안쪽의 바다(내해), 안쪽의 바다를 감싸고 있는 바깥쪽의 대륙(외대륙), 외대륙 밖의 바다(외해)가 있고,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곳이 그 바깥 쪽 좌우에 있다.  나라 이름, 산천 이름 등 140여개가 넘는 지명들이 지도 전체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도면에 기록된 지명 대부분은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지명들로 동양 고전 가운데 하나인 산해경에서 확인되는 것들이다. 중앙대륙의 지명은 해내경에서, 내해의 지명들은 해외경에서, 외대륙의 지명들은 대황경에서 각각 확인된다. 중앙대륙의 지명 가운데 조선, 중국, 안남(베트남), 섬라(타이), 유구(오키나와), 일본, 번호12국, 서역제국 정도가 실체가 있거나 있다고 생각되던 나라들이다. 중앙대륙 동쪽 중국의 주변으로 태산, 숭산, 화산, 형산, 항산의 內五嶽이 설정되어 있다. 중앙대륙의 중심에는 내오악 대신 곤륜산이 있다. 곤륜산은 안쪽 바다(내해) 사방의 광승산, 장리산, 여농산, 광야산 등과 함께 外五嶽을 구성한다.  중앙대륙 서쪽 끝에 서역제국과 여러 나라이름들이 보인다.  이 지명들은 한서 서역전을 비롯한 중국 고대의 역사서, 지리서 등에서 확인되는 것들이다. 천하도는 서구식 세계지도가 조선에서 변용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도면이다. 천하도는 중국을 중심에 둔 서구식 세계지도의 한계를 부분적으로 반영하면서도 중앙대륙 안에서 중국의 위치를 주변화함으로써 중화적 지리관을 극복해 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배우성)

  • 연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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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麻田, 朔寧과 합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했던 지역이다.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군남면, 중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중심지는 연천읍 읍내리가 된다. 읍치에는 客舍, 鄕校, 衙舍 등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왼쪽으로 임진강이, 오른쪽으로는 차탄, 한탄강이 표시되어 있으며 袈裟坪, 平野 등 농사에 적합한 땅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紫烟暴(연천읍 고문리)이 있는데 폭포를 山水畵에 가깝게 표현하고 있다. 임진강가에 澄波津을 비롯한 津渡들이 표시되어 있다. 大路, 中路, 小路를 구분하여 표시하고 있는데 大路는 북으로는 철원, 남으로는 양주, 서울과 연결된다. 지형적으로 험준한 곳을 지나는 통로에는 險隘라고 표시되어 있다. 신라 때 창건된 五鳳寺(연천읍 고문리) 등의 절이 표시되어 있다. 臨潼書院은 1710년(숙종 36)에 세워지고 1713년(숙종 39)에 사액되었다.(이현군)

  • 운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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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산군은 일제시대의 운산군에 해당하며 지금도 평안북도 운산군 일대이다. 고을은 청천강의 지류 구룡강의 최 상류로서 지도에는 委曲江, 鷲江으로 되어 있다. 구룡강이 고을 북쪽·서쪽의 물을 받아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북방 방어의 제1차 저지선에 해당하는 지금의 강남산맥이 지나가고 있다. 지도에도 이런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여 車踰嶺 옆에 要衝地라 특별히 적혀 있는 것을 비롯하여 고개와 도로의 표시가 자세하다. 여백주기에 關防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상세히 적혀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도 위쪽에 있는 ?舍는 委曲鎭으로서 그 북쪽 세 고개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병자호란 이후 설치한 것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白碧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여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백주기 밑 부분에는 남쪽으로 定州 경계를 넘어 240리에 古雲山倉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古雲山 지역은 몽고와의 항쟁을 위해 섬으로 피난 갔다가 육지로 나와 첫 번째로 정착했던 곳으로서 월경지 발생의 한 유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火田이 밭의 ½에 육박할 정도로 많이 행하여지는 곳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이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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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이천으로 고쳤으며 1413년(태종 13)에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다. 현재 북한의 강원도 伊川郡은 과거의 이천과 안협을 합한 것이다. 이 지도에서의 伊川은 이천군의 북쪽부분과 판교군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의 여백에 관할 면으로 板橋面이 나타난다. 동쪽은 강원도 平康, 남쪽은 安峽, 서쪽은 황해도 新溪, 북쪽은 함경도 安邊과 경계를 이루며 府의 서쪽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강은 임진강이 된다. 강 안에 高城津, 蛇島가 표시되어 있다. 邑治에는 성곽없이 衙舍, 客舍, 倉을 그렸으며 북쪽의 城山이 鎭山이 되고 鄕校는 약간 떨어져있다. 悅雲亭, 天遊堂, 定齋祠 등의 정자, 사당이 나타난다. 북쪽 陽陰山 근처에 禁山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북쪽으로 溫井이 나타난다. 이 지역의 온천에 조선 世宗이 行宮을 지으라고 명령하고 거둥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高城山 동쪽으로는 鎭基가 표시되어 있다. 驛院으로는 邑治 남쪽의 乾川驛, 서북쪽의 玉谷院이 나타난다.(이현군)

  • 의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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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현은 지금의 의령군 궁유면 서부를 제외한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 일대에 있었다. 蔓芝山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碧溪山을 거쳐 鎭山인 德山까지 내려오고 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정방형의 읍성은  1589년(선조 22)에 知縣 李 가 쌓았는데, 둘레는 1천 5백 70척, 높이가 4척 5촌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德谷書院은 1656년(효종 7)에 세워져, 1660년(현종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이 황을 배향하였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鼎岩은 강 가운데 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솥 위에 겹겹이 쌓인 바위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암진은 의령에서 함안으로 통하는 대로가 통과하는 주요 나루터일 뿐만 아니라 의령과 삼가에서 온 주민들과 낙동강을 거슬러 온 船商들이 곡물과 어염을 교환하는 시장이기도 하였다.(金在完)

  • 청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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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현은 현재 옥천군 청산면과 청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있었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 일대에 있었다. 청산면 교평리에 위치한 청산향교는 1581년(선조 14)에 창건하여 효종(1649-1659)때 교평리로 옮긴 것으로 1777년(정조 1)과 1848년(헌종 14)에 증수한 바 있다. 고지도의 아래쪽에 淸凉寺와 日出庵이 보인다. 현재 옥천군 청산면 삼방리 장노골 앞 千金山 골짜기 2km를 올라가면 좀 넓게 벌어진 분지 같은 곳에 1,000여 평 되는 논과 밭이 있는데, 이 곳에 300여 평의 절터가 남아 있다. 이 절터가 지도에 보이는 청량사가 있었던 곳이다. 輿地圖書는 일출암 절터(장노골 千金山)에 대해서 "일출암은 천둔산에 있고 동쪽에 송내가 있는데 가뭄을 만나면 기우제를 지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청량사와 일출암은 절터만 남아 있다. 지도에서 관아 좌측에 있는 서원이 德峰書院이다. 덕봉서원은 현재 옥천군 청산면 하서리 서원동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창건되어  趙憲과 宋時烈의 位牌를 봉안하였으나 편액은 하사를 받지 못하였다. 그 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모두 헐렸다.(金在完)

  • 영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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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의 일부에 해당하는 영종도이다. 현재 인천국제공항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인천부에 소속되어 있다가 1653년(효종 4)에 南陽의 永宗浦鎭을 이곳으로 옮겨온 이후 永宗鎭이 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水軍僉節制使가 배치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鎭이 폐지되었으며 그후 부천군,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인천광역시에 포함되었다. 지도에 표시된 衙舍와 客舍가 있던 鎭의 중심지는 중산동의 구읍동이다. 이 지도에서는 영종도와 함께 무의도, 왕산, 삼목도 등의 섬을 함께 그렸다. 섬과 섬 사이가 마치 육지처럼 보이도록 그린 것은 지도안의 설명 ''潮退成陸'' 즉, 썰물이 될 때는 연계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섬지역이므로 주변지역과 水路를 통해 연결됨을 기록하고 있으며 月尾島에는 幸宮(行宮의 오기)이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지도의 여백에는 주변 지역과의 거리와 경로 등을 기록하였다. 또한, 古牧倉이 지도에 나타나고 無衣島에는 牧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목도, 신불도에는 ''人居''라고 기록하여 무인도가 아님을 표시하고 있다. 서해안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禁山제도를 실시하여 산림과 석재 채취를 금지하였음을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이현군)

  • 위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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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은 일제시대의 위원군에 해당하며 지금도 자강도 위원군 일대이다. 원래는 都乙漢堡였는데 다른 곳과 격리되어 있어 갑작스런 침입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443년(세종 25)에 理山(후에 楚山)과 江界의 땅을 나누어 새로 설치한 고을이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그렸다. 고을 한가운데를 위원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합류한다. 지도 왼쪽의 禿魯江은 지금의 장자강으로서 강계에서 흘러와 압록강에 합류한다. 압록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성곽이 있는 2개의 堡와 성곽이 없는 吾老梁鎭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把守와 봉수의 표시가 자세하다. 강 건너편에는 청나라의 마을 이름도 적혀 있다. 오른쪽 여백주기에는 읍치 및 鎭堡의 군사적 내용과 적의 침입 시 통과할 경로에 대해 자세히 적어놓고 있다. 읍치 위쪽으로는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어 안쪽은 평평하고, 바깥쪽은 험한 마을이 두 곳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大興寺와 興福寺 등의 절을 세웠다고 쓰여 있는데 위급할 때 군사적 용도로 쓰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 왼쪽으로도 ''이 들에는 만명의 군사도 수용할 수 있으며, 강계로 가는 직로''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군사적 要衝地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등 군사적 내용이 매우 자세히 표현된 지도이다.(이기봉)

  • 인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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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때 인제로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현재의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서화면, 북면, 남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현재의 인제군에서 상남면, 기린면(춘천부 소속)은 제외된다. 인제읍이 과거의 중심지가 된다. 이 곳 읍치는 邑城없이 客舍, 衙舍, 倉庫만 그려져 있으며 鄕校는 인제읍 상동리에 있었다. 縣의 바로 뒤 伏龍山이 鎭山에 해당한다. 서화면은 과거 瑞和縣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 세종 때부터 인제현에 속하게 되었으며 서화리가 과거의 읍치에 해당하였다. 이 지도에서도 瑞和縣이 표시되어 있다. 縣의 동쪽은 백두대간이 되고 백두대간에서 나온 산줄기들이 縣을 둘러싸고 있어 험준하며 산줄기 사이로 하천이 흘러나와 縣의 앞쪽에서 합하여져 合江이 된다. 북쪽의 소양강과 남쪽의 내린천이 합하여진 것인데 合江가에 合江亭이 표시되어 있다. 이 강은 서쪽으로 흘러 북한강과 합류된다. 지금은 댐으로 인하여 소양호가 되어 있다. 하천을 따라 津과 倉庫들을 표시해주고 있다. 지도에서 산들을 중첩하여 표현함으로 험준함을 표현하였으며 교통의 통로가 되는 고개(嶺·峴·峙)들은 명칭과 함께 표시해 두었다. 嵐校驛, 富林驛이 高城, 杆城으로 가는 도로 위에 있었다. 행정구역상의 面과 마을(村)의 위치와 명칭을 기록하였으며 深源寺, 大勝庵 등의 사찰을 그림과 함께 표시해 주고 있다. 길이 험준하여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쉽지 않았으며 많은 눈과 적은 인구로 유명하였던 지역이다.(이현군)

  • 의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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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가음면, 금성면, 단촌면, 봉양면, 사곡면, 안평면, 점곡면, 춘산면, 신평면 광산천 유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고, 읍치는 의성읍 도동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 보이는 烏川忠烈祠는 김홍술이 고려 태조와 비슷하여 후백제 견훤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고사와 관련 깊은 사당이다. 읍치 아래쪽에 古召文國과 관련되어 있는 유적이 보인다. 경덕왕릉은 많은 여러 무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인데, 소문국의 경덕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문국의 옛 터로 알려진 이 곳에서는 지금도 주춧돌과 매장품이 발견되고 있다. 부근의 御井과 飛鳳山 줄기의 노적봉, 금학산의 古山城 모두 소문국과 관련있는 유적이다. 경덕왕릉 부근에 보이는 鶴山書院은 현령 이광조가 1698년(숙종 24)에탑리리의 금성산 밑에 창건하여 사육신 등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氷山面에는 유명한 氷穴이 있다. 바위 밑에 굴이 있는데, 立夏 뒤에 얼음이 비로소 얼기 시작하여 삼복 때에는 얼음이 굳어지고, 흙비가 오면 얼음이 녹으며, 봄, 가을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고, 겨울에는 봄같이 따뜻하다고 한다. 부근에 위치한 氷溪書院은 1556년(명종 11)에 건립되고, 1576년(선조 9)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金在完)

  • 청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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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청안현은 현재 괴산군 증평읍, 청안면, 도안면, 청원군 북이면과 오창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청안현의 읍치는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일대이다. 현 청안지서가 청안현의 동헌터이고, 현 청안초등학교가 객사 터이다. 객사터의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는 고려 성종 때 백성들이 본 城主의 덕을 기리어 이 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나무는 천연 기념물 제 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1402년(태종 5)에 淸塘과 道安의 두 고을이 좁고 백성이 적으므로 합하여 청안으로 고쳤다. 청안현은 6개 면을 거느린 작은 현이었다. 청안현은 미호천 상류의 저지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동쪽의 일부는 달천 상류지역에 속한다. 지도에서 읍치 남쪽에 龜石山이 보인다. 이 산은 일명 좌구산이라고 부른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이 고을을 세울 적에 離山이 높은 것을 꺼려서 이 절을 세우고, 水族의 신인 거북의 이름을 따서 구석이라고 했는데, 이 사실은 曹 會의 記에 실려 있다. 고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書院은 金塘書院이다. 1789년(정조 13)에 창건하여 延嗣宗, 延忠秀, 延世鴻, 延最積을 배향하였는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서 헐리었다.(金在完)

  • 영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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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4년(태조 3)에 영평으로 고쳐 불리게 되었으며 1914년에 포천군에 병합된 지역이다. 현재의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 일대에 해당하며 그 중심지는 포천군 영중면 영평리가 된다. 읍치의 앞을 흐르는 강은 영평천이며 지도 왼쪽의 강은 한탄강이 된다. 이 두 강은 임진강과 합류된다. 주변의 산들을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있으며 읍치 뒤쪽의 산줄기의 脈勢를 특히 강조하고 있어 풍수 관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작성된 지도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에 속하면서 강원도와 인접한 지역이라 漣川, 楊州, 抱川, 加平, 鐵原, 金化로 연결되는 도로가 지도에 자세히 나와 있다. 驛院으로는 梁文驛이 영중면 양문리에 있었는데 平丘道察訪에 딸린 驛이다. 읍치의 뒷산에는 古城이 표시되어 있고 읍치의 서쪽에는 金水亭(창수면 오가리)이 표시되어 있다. 金水亭은 永平八景의 하나이다. 蒼玉屛(창수면 오가리)은 永平川가의 벼랑으로 푸른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있어 생긴 이름이며 永平八景의 하나이다. 맞은 편에 玉屛書院(창수면 주원리)이 있었는데 1658년(효종 9)에 창건하였다. 朴思庵은 思庵 朴淳을 지칭하는 것이다.(이현군)

  • 위원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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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은 일제시대의 위원군에 해당하며 지금도 자강도 위원군 일대이다. 원래는 都乙漢堡였는데 다른 곳과 격리되어 있어 갑작스런 침입에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443년(세종 25)에 理山(후에 楚山)과 江界의 땅을 나누어 새로 설치한 고을이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그렸다. 고을 한가운데를 위원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합류한다. 지도 왼쪽의 禿魯江은 지금의 장자강으로서 강계에서 흘러와 압록강에 합류한다. 압록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성곽이 있는 2개의 堡와 성곽이 없는 吾老梁鎭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把守와 봉수의 표시가 자세하다. 강 건너편에는 청나라의 마을 이름도 적혀 있다. 오른쪽 여백주기에는 읍치 및 鎭堡의 군사적 내용과 적의 침입 시 통과할 경로에 대해 자세히 적어놓고 있다. 읍치 위쪽으로는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어 안쪽은 평평하고, 바깥쪽은 험한 마을이 두 곳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大興寺와 興福寺 등의 절을 세웠다고 쓰여 있는데 위급할 때 군사적 용도로 쓰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 왼쪽으로도 ''이 들에는 만명의 군사도 수용할 수 있으며, 강계로 가는 직로''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군사적 要衝地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등 군사적 내용이 매우 자세히 표현된 지도이다.(이기봉)

  • 정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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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정선현으로 고쳤으며 현재의 강원도 정선군에서 임계면(강릉 땅), 신동읍(평창 땅)을 제외한 북면, 정선읍, 동면, 남면, 사북읍, 고한읍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정선읍 봉양리가 邑治이다.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강릉, 삼척과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평창, 영월과 맞닿아있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사이로 조양강이 심하게 곡류하여 縣의 앞쪽을지나며 南流하여 영월의 동강과 만난다. 縣 북쪽의 飛龍山(飛鳳山)이 鎭山이 된다. 邑治에는 客舍, 衙舍, 倉, 鄕校 등이 그려져 있으며 조양강변에 好善驛과 倚風亭이 있으며 縣의 동쪽으로 河中島가 표시되어 있다. 조양강에는 北津(북평면 북평리) 등의 여러 나루가 있었다.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지도 북쪽의 餘粮驛근처 북면 여량리에는 아우라지 나루가 있어 정선아리랑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조양강과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동대천 사이에 瓦坪(정선읍 신월리)이 있는데 과거 이곳에서 기와를 구워냈다고 전한다. 와평 동남쪽에는 沒雲倉(동면 몰운리)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龍湫, 龍岩淵 등이 江과 연결되어 표시되어 있다. 적색의 도로 중에서 碧呑驛(정선읍 용탄리), 伽俚王山, 碧波嶺(정선읍 회동리)을 지나는 길과 餘粮驛(북면 여량리)을 지나는 길은 강릉으로 연결되며 行邁院(정선읍 용탄리)과 星摩嶺(정선읍 용탄리)을 지나는 길은 평창군과 연결된다.(이현군)

  • 의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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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흥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산성면, 의흥면, 부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龍頭山(지도의 좌측 중단)이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華山城은 兵使 尹 淑이 1709년(숙종 35)에 쌓다가 중단된 성인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9천3백여 보이다. 성안에 군수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건물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화산 기슭에 굴이 있는데, 늘 찬바람이 나오는데, 몹시 차서 초여름에도 얼음이 언다고 한다. 읍치 위쪽에 麟角寺가 보인다. 인각사는 절벽에서 기린이 놀다가 뿔이 빠져서 인각사라 하였다하며, 신라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때 一然이 이 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고 전한다. 1699년(숙종 25)에 縣監 朴聖漢이 증축하였다. 이 곳에는 보물 제 428호인 普覺國師碑가 있다. 인각사 앞에 鶴巢臺가 있다. 軍威郡誌에 따르면 푸른 바위가 마치 병풍과 같아 높이가 40길이 된다. 앞에 맑은 못이 있고, 그 아래에 큰 돌이 수중에 우뚝 솟았는데, 높이가 10여 척, 넓이가 7, 8척이다. 그 옆에 鶴巢菴이 있다. 옛날 쌍학이 바위 위 소나무에 깃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699년(숙종 25)에 현감 박성한이 石臺를 증축하고 이름을 학소암이라 하였다.(金在完)

  • 청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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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현은 현재 청양군 청양읍, 운곡면, 남양면, 대치면, 비봉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읍치는 청양읍 읍내리 일대에있었다. 東國與地勝覽 靑陽縣 形勝條에 ''삼면이 준령이고, 서쪽은 약간 평평하다. 산이 많고 들이 적어 지세가 골짜기에 가깝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청양은 작천 상류의 산간지대에 자리잡은 분지에 해당한다. 진산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牛山 일명 騎龍山이다. 진산은 옛날에 전국 및 도성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을 그곳을 鎭護하는 주산으로 생각하고 제사지내는 산이다. 지도에는 사獅子山이 祖山이고, 조산에서 지맥이 文博山을 지나 主山인 우산으로 이어지고, 그 밑에 명당인 읍치가 자리잡고 있다.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이루고 있다. 金井驛은 찰방역으로서 屬驛이 8개이었다. 읍치 북쪽에 牛山城이 있는데, 돌로 쌓은 성이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칠갑산(七甲山)(561m)은 名山으로서 유명한 장곡사가 있다. 장곡사에는 국보 58호 철조약사여래좌상과 보물 162호 상대웅전 외 3종이 있다.(金在完)

  • 옥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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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과현은 곡성군 옥과면, 입면, 겸면, 오산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읍치는 옥과면 옥과리 일대에 있었다. 옥과천이 사방의 산에서 물을 받아 현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동북쪽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간략하게 그려져 있는데, 실제 고을의 형태가 사각형 모양이 아님에도 전체적인 안정감을 위해 네모난 형태로 그린 듯하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雪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가 포근히 감싸안은 풍수적 명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여백 주기의 佛宇조에는 여러 개의 절이 표시되어 있음에도 觀音寺 하나만 표시되어 있고, 역은 표시하였지만 원은 표시하지 않는 등 매우 간략한 지도이다. 기타 관음사 위쪽에 깊고 험한 埋伏處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은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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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산현은 일제시대의 순천군 은산면, 선소면, 북창면과 개천군의 봉동면 남쪽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순천시 동쪽 일대이다. 대동강이 고을의 동북쪽으로부터 들어와 서쪽을 휘감고 남동쪽으로 빠져나간다. 고을의 한가운데에는 長善江이 동쪽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읍치 북쪽을 감싸고 대동강에 합류하는데 이 강에 의해 고을의 산줄기가 남북으로 갈라진다. 고을의 鎭山은 鎭江山인데 읍치로부터 강을 건너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읍치는 장선강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둘레에는 토성이 둘러쳐져 있는데 지도에도 밋밋한 선으로 표시하여 石城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阿灘窟이 표시되어 있는데 崇化山 석벽에 있는 굴로서 굴 안에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이 고을도 부근 고을과 마찬가지로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이기봉)

  • 정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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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평부는 함경남도의 해안 고을로 북으로는 咸興, 남으로는 永興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정평군 부내면, 주이면, 광덕면, 고산면, 장원면, 문산면, 귀림면, 춘유면, 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남도 정평군과 일부는 함주군에 속해 있다.  국토의 北嶽이면서 고을의 鎭山이 되는 鼻白山이 읍치를 감싸고 있는데, 비백산은 祀典에 中祀로 기재되어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산이다. 관내의 행정구역은 대부분 ''社''로 표기되어 있으나 歸林面만은 ''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에는 원래 둘레 5,935척의 읍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남동쪽 해안가와 서북쪽의 산지에는 長城이 그려져 있는데 고려 때 여진족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라 한다. 동남쪽 犬頭山이 있는 지역은 해안으로 길게 뻗은 串과 같은 곳으로 바다 건너 함흥에 속해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길게 해수가 그려져 있고 ''廣浦''로 표기되어 있는데 지금의 廣湖에 해당한다. 北倉, 烽臺驛 등은 비변사의 지도를 참고하여 다시 그려 넣은 것이다.(노혜정)

  • 인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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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동부는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洛東江 以東, 구미시 오태동, 칠곡군, 기산면 서부, 석적면, 북삼면, 약목면, 기산면, 왜관읍 아곡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읍치는 구미시 인의동 일대이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留鶴山이고, 主山은 玉山이다. 인동부는 특이하게도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행정구역이 분리되어 있다. 선산부 경계에 위치한 金烏山은 佛家에서는 南崇山이라고 하는데 이는 海州의 北崇山과 상대하여 부른 것이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天生山은 사면에 석벽이 깎아 세운 듯하고, 마치 하늘이 만든 것 같다해서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못 4개가 있다. 이 산을 의지하여 쌓은 성이 天生山城이다. 이 성은 본래 신라의 옛 성이었는데,1601년(선조 34)에 郭再祐가 外城을쌓았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는 3천 6백 12척이다. 낙동강 西岸에 위치한 吳山書院은 1574년(선조7)에 세워져 1609년(광해군 1)에 사액을 받았고, 길재를 배향하였다. 낙동강 東岸에 위치한 洛東書院(東洛書院의 오기)은 1654년(효종 5)에 세워져 1676년(숙종 2)에 사액을 받았고, 張顯光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으나, 1904년에 장현광을 위한 影堂이 건립되었다.(金在完)

  • 청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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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목은 여러 차례 일시 강등되기도 했으나 충주·공주와 함께 목사가 주재했고, 1402년(태종 2)에 설치되었던 忠淸兵營은 1416년(태종 16)에 충남 해미로 옮겨갔다가 1651년(효종 2)에 다시 돌아 왔다. 또한 鎭管으로서 2군(천안, 옥천), 10현(직산,목천,문의,회인,청안,진천,보은,영동,황간,청산)을 거느리고 있었다. 청주목은 현재 청주시, 내수읍, 오창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북이면, 북일면, 낭성면, 미원면, 남이면, 천안시 수신면 그리고 괴산군 청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대성동, 수동 부근이었다. 청주목의 진산은 읍치 동 1리에 위치한 당이산(唐羨山, 壯岩山, 臥牛山의 별칭이 있음)이다. 청주 읍성은 우암산(지도에는 臥牛山,338m) 아래, 無心川 동쪽 연안의 저지대에 남북방향으로 긴 장방형의 성곽으로 축성되었다.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4개의 성문을 갖고 있고, 성안에는 兵營, 本官, 客舍 건물이 있고, 성 밖에는 鄕校와 中營이 위치하고 있다. 충청도 군현에서 장방형의 성곽을 가진 군현은 淸州牧과 忠淸水營뿐이다. 지도에서 읍치 서북쪽에 鳳林藪가 보인다. 청주의 지형이 북쪽이 허하므로 이 곳에 숲을 조성한 곳으로 수 백년 된 나무가 5리에 뻗어 있다. 일종의 裨補風水의 예로 볼 수 있다.(金在完)

  • 옥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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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구현은 지금의 군산시 시내와 옥구읍, 옥서면, 옥산면, 회현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옥구읍 상평리에 있었다. 고을의 북쪽은 금강하구이고 서쪽은 황해, 남쪽은 만경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고을의 산들은 높아야 120m밖에 안 되는 낮은 산들임에도 굵고 웅장하게 표현하여 고을의 위엄을 높여주고 있으며, 특히 읍치 뒤쪽의 산과 그로부터 뻗어 내린 산세는 더욱 웅장하게 표현하여 읍치 공간을 부각시키고 있다. 지도 위쪽에는 群山鎭이 보이는데 원래 만경현의 古群山群島에 있던 것을 해적의 침입 때문에 옮긴 것으로 처음에는 水軍萬戶가 파견되다가 1700년(숙종 26) 종3품관인水軍僉節制使로 승격되었다. 군산진 옆의 七邑海倉은 원래 용안현 得成倉에서 관할하던 고을 중 옥구, 전주, 태인, 금구, 임실, 진안, 장수 등의 7개 고을 조세를 모아 서울 京倉으로 보내던 漕倉이었다. 그 옆의 雪林山 아래 隱寂菴 부근은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협공할 때 황해를 건너온 소정방 부대 12만명이 정박했던 곳으로 전해진다.(이기봉)

  • 은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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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은율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은율면, 남부면, 북부면, 서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은율현은 은율군 남부지역과 송화군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漢川이 구월산에서 발원하여 남하하면서 여러 작은 물을 합치고, 서쪽으로 꺾이고, 다시 한번 꺾이어 북쪽으로 흘러가서 서해에 이른다. 읍성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에서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乾止峯이 있고, 이 곳에는 건지산 봉수대가 있고, 그 남쪽에 건지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九月山의 산허리에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高腰淵이 있는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형상이 가마 같으며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용이 있다 이르며, 가물 때 비를 빌면 응한다고 한다. 구월산을 감싸안은 구월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1만 4천 3백 86척이었다. 성의 모양이 큰 배 같고, 남쪽북쪽에는 길이 없으며 동쪽 서쪽에만 나무다리 길이 있다. 지도에서 보는 같이 성안에는 각 고을 명칭의 창고가 있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서원은 鳳巖書院이다. 1613년(광해군 5)에 士人 鄭希男 등이 현 남쪽 20리 院坪에 창건하였다. 1701년(숙종 27)에 士人 鄭璉 등이 현 위치에 옮겨 세웠다. 김굉필과 이 이를 배향하였다. 읍치에 있는 觀稼樓는 객사 동쪽에 있는데, 1757년(영조 33)에 重修하였다.(金在完)

  • 조선여진분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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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과 청 사이의 국경지대를 그린 지도.  북으로 흑룡강, 동쪽으로 연해주 일대, 남으로는 조선 국경, 서로는 장성까지를 그렸다. 의주의 건너편으로 조선 사신들이 출입하던 책문이 보인다. 지도를 그린 대부분의 자료들은 성경지의 지도, 요계관방도의 지도 등 중국측의 자료들이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평안도의 군현은 적색 사각형 안에, 함경도는 황색 사각형 안에 그려넣었다.  백두산은 독립된 산으로 표현되지 않고 의무려산에서 시작되는 한 줄기처럼 묘사되어 있다. 중국의 동북지방으로는 청이 몽고를 의식해 쌓아놓은 나무 울타리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조선은 청이 오랑캐라는 이유 때문에 필연적으로 멸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고, 그 경우 청은 그들의 본거지인 영고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지도는 이러한 조선측의 전형적인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북경 쪽에서 시작되어 船廠 烏喇를 지나 寧古塔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유일하게 그려진 것은 조선이 이 경로를 청이 퇴각할 것을 가상하고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에 대한 설명은 중국측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이다.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부르고 있으나, 실제 이 강을 토문강으로 적은 것은 성경지였다. 이러한 오류는 <요계관방도>에서도 발견된다. 토문과 관련해서는 정계비 건립 이후 심화된 인식이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국경 밖에 있는 高麗境, 先春嶺의 위치는 고토의식의 심화를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배우성)

  • 자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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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인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자인면, 용성면, 경산시 경산시내 동남부, 진량읍 동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 일대에 있었다. 到天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치에 보이는 樂山樓는 1700년(숙종 26)에 縣監 全命三이 세워, 樂山樂水의 글자를 따서 요산루라고 하였다. 1767년(영조 43)에 進士 鄭忠彬이 쓴 記가 있었다. 1871년(고종 8)에 縣監 柳道奭이 재건하였는데, 1912년에 헐렸다. 향교 우측에 보이는 大興寺는 신라 때 창건되어 원통암이라 불렸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고, 인조 때 암자와 동서 요사를 다시 세웠으며, 현종 때 법당과 종각을 세우고 대흥사라 고쳤다. 근처에서 가장 큰 절로 유명했는데, 120여 년 전에 폐사가 되었다. 대흥사 아래쪽에 보이는 盤龍寺는 1303년(고려 충렬왕 29)에 창건되었는데 1641년(인조 19)에 戒云과 明彦이 중건하였다. 반룡사 좌측에 보이는 觀瀾書院은 1659년(효종 10)에 세워져, 선조 때  李承曾을 모시려다, 경주에 사는 여강 이씨들의 반대로 이언적을 배향하였다. 관란서원 좌측에 孝子徐濂旌門이 보인다. 효자 서 렴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죽자 손가락 하나를 자르고, 어머니가 죽자 다시 손가락 하나를 자르고, 초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른 것을 기리기 위해 旌門을 세운 것이다.(金在完)

  • 청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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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청풍부는 현재 제천시 청풍면, 수산면, 한수면, 금성면, 덕산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청풍은 크기가 작은 현에 불과하지만 도호부가 있었다. 이유는 현종 1년(1660) 중궁전하 김씨(명성왕후)의 貫鄕이기 때문에 현에서 도호부로승격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읍치는 청풍면 읍리였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물에 잠겨 버렸다. 수몰지역의 누각·향교·고가 등은 충주호반의 勿台里로 옮겨졌다. 청풍부남쪽에 위치한 飛鳳山이 고을의 진산이다. 읍치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茂巖山(지형도에서는 望月山으로 나옴)에 창고 터가 있는데, 고려 때 이 곳에서 경상도 田賦를 조운했다고 전해진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北津은 청풍에서 제천 방면으로 갈 때 건너는 나루터로서 청풍과 제천에서 이출입하는 물자는 모두 북진을 경유하였다. 古地圖 左側에 보이는 황강역은 역과나루터를 겸하고 있는 수륙교통의 요지이었다. 官衙의 강 건너편에 있는 병풍바위는 병풍처럼 생긴 바위로 바람굴, 물굴, 부엉이굴 등이 있어서 더욱 유명하다. 황강역 우측에 보이는 서원이 황강서원이다. 1726년(영조 2)에 창건하여 다음 해에 사액을 받았고,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 윤봉구, 권 욱을 배향하였는데,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리었다. 서쪽에 보이는 惶恐灘은 서창 북쪽에 있는 여울로 이 곳은 큰 물결이 쏜살같은데, 아래여울을 지나면 龍湫를 이루는데,  물밑에는 반석이 깔려 있고,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金在完)

  • 용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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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안현은 지금의 익산시 용안면과 용동면에 있었던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용안면 교동리에 있었다. 용안현은 원래 함열현에 딸린 道乃山銀所였는데 1321년(고려 충숙왕 8) 이 고장 사람 伯顔夫介가 원나라에 공이 있어 현으로 승격되고, 1391년(고려 공양왕 3) 지금의 용동면에 있었던 전주의 屬縣 豊儲縣을 합해 만들어진 특이한 역사를 가진 고을이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남동쪽으로는 금마면 미륵산에서 발원한 부곡천이 흐르는데, 이 부곡천변과 읍치 오른쪽 하천변은 밀물 때면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갈대가 무성했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海倉이 있는 곳은 조선 초에 得成倉(그 이전에는 德成倉이라 불렀음)이 있었던 곳으로 물길이 막혀 함열현으로 옮겼다가 1482년(성종 13)에 다시 옮겼다. 이후 8개 고을은 맞은편 함열의 聖堂倉에서, 7개 고을은 옥구의 군산창에서 맡게 하고 나머지 용안, 임피, 김제, 만경, 여산, 금산, 무주 등의 조세를 받아 서울로 옮기던 漕倉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용안면 난포리이다.(이기봉)

  • 의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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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부는 일제시대의 의주군과 삭주군 청수읍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의주군, 피현군, 천마군 서북쪽, 삭주군 청수 서남쪽 일대이다. 의주부는 청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첫 번째 고을이다. 따라서 압록강변에는 수많은 鎭堡와 烽燧가 자세히 그려져 있고 반대편의 청나라 지역까지도 표시하였다. 다음 페이지의 여백주기에는 각 鎭堡와 의주 읍치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적혀 있다. 청나라를 ''賊''으로 간주하고 이들이 쳐들어 올 경우에 만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조선 영내까지 취할 수 있는 여러 경로를 아주 자세히 적어놓았다. 읍성 아래쪽에는 고려 때 강감찬에 의해 만들어지고 1646년(인조 24)에 임경업에 의해 修築된 白馬山城이 보인다. 압록강에는 고려말 이성계에 의한 요동정벌군의 回軍으로 유명한 威化島를 비롯하여 여러 섬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청나라와 조선의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오갔던 渡船路도 그려져 있다. 읍성의 압록강 반대편 청나라 땅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중국 사이의 公·私貿易을 의미하는 柵門後市가 열렸던 곳이다. 압록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의 楊下鎭에는 청나라 사람의 집(胡家)이 즐비하다는 표현이 있어 재미있는데, 여백주기 楊下鎭 부분의 ''漁店이 즐비하다''는 기록과 관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타 백마산성 옆에 그려져 있는 國內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 이후 여러 기록에 계속 기록되어 오던 것이 지도에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國內城이 중국의 吉林省 集安市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이기봉)

  • 조선여진분계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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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과 청 사이의 국경지대를 그린 지도.  북으로 흑룡강, 동쪽으로 연해주 일대, 남으로는 조선 국경, 서로는 장성까지를 그렸다. 의주의 건너편으로 조선 사신들이 출입하던 책문이 보인다. 지도를 그린 대부분의 자료들은 성경지의 지도, 요계관방도의 지도 등 중국측의 자료들이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평안도의 군현은 적색 사각형 안에, 함경도는 황색 사각형 안에 그려넣었다.  백두산은 독립된 산으로 표현되지 않고 의무려산에서 시작되는 한 줄기처럼 묘사되어 있다. 중국의 동북지방으로는 청이 몽고를 의식해 쌓아놓은 나무 울타리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조선은 청이 오랑캐라는 이유 때문에 필연적으로 멸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고, 그 경우 청은 그들의 본거지인 영고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지도는 이러한 조선측의 전형적인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북경 쪽에서 시작되어 船廠 烏喇를 지나 寧古塔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유일하게 그려진 것은 조선이 이 경로를 청이 퇴각할 것을 가상하고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에 대한 설명은 중국측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이다.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백두산에서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 부르고 있으나, 실제 이 강을 토문강으로 적은 것은 성경지였다. 이러한 오류는 <요계관방도>에서도 발견된다. 토문과 관련해서는 정계비 건립 이후 심화된 인식이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국경 밖에 있는 高麗境, 先春嶺의 위치는 고토의식의 심화를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배우성)

  • 장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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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읍, 장기면, 대보면 동부, 동해면 상정리·중산리·공당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장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치소의 서쪽에 위치한 巨山이다. 읍성은 평지가 아니라 산에 의지해서 쌓은 石城으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둘레는 2천 9백 80척이다. 읍성 안의 紫鳳山 부근에 紫鳳亭과 浴日堂은 1481년(성종 12)에 현감 최영이 지은 것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소봉대는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는데, 한쪽은 육지에 연하여 있고, 삼면은 바다에 둘러싸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신라의 어느 왕자가 이 곳 경치에 취해서 3일 동안 놀았다 한다. 북쪽에 위치한 冬背串牧場은 신라 때부터 말을 키웠던 유서 깊은 牧場이다. 磊城烽燧는 북으로 鉢山烽燧에 응하고, 남으로 福吉烽燧에 응한다. 毛伊山에 있는 毛伊峴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이 재를 넘었다 해서, 혹은 고개 모양이 오소리가 잠자는 형국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뇌성봉수가 있는 뇌성산에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 石城이 있고, 이 산에서 나는 磊綠, 人蔘, 紫芝, 蜈蚣, 蜂蜜, 雉獺, 銅鐵의 7寶 등을 나라에 진상하였으므로, 장기현감을 칠보현감이라 부르기도 한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獨山은 거북이 엎드린 것처럼 생겼는데, 林再華가 늘 놀았다 하며, 현재 그의 유허비가 있다.(金在完)

  • 충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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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충주목은 목사의 주재지로서 현 충주시, 주덕읍, 이류면, 신니면, 가금면, 앙성면, 금가면, 동량면, 노은면, 산척면, 엄정면, 소대면, 살미면, 괴산군 불정면 3개리, 괴산군 감물면, 제천시 덕산면을 포함하는 큰 읍이었다. 18세기 중엽 당시에도 충주목은 42개 면을 거느리는 大郡이었다. 충주는 임진왜란 이후 공주로 옮겨가지 전까지 충청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읍치는 현재 충주시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지금도 이 곳에는 ''객사 터'', ''경영루 터'', ''성문 터'', ''습사장'', ''감옥 터'', ''동헌 터'' 등 지명이 남아 있어 과거의 읍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지도에 보이는 원형의 충주읍성은 충렬왕 3년(1277) 충주성을 개축할 당시 礎石에다 연꽃을 화려하게 놓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읍성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지도에 보이는 가흥창은 조선 세조 때 덕흥창(금천면 창동 소재)에서 옮겨 온 창고이다. 중종 16년(1512) 때 70칸 규모의 倉庫를 축조하였고, 그 후 현종 10년(1669)에 49칸을 증축하였다. 이 가흥창에서 관리하는 세곡 수납 관할 구역은 충청도의 14개 읍, 경상도 12 개읍에 달하였다. 충주에는 左水站 소속의 漕運船 15隻이 배치되어 있었다. 충주목 관하의 주요 창고로는 東倉, 北倉, 南倉, 社倉, 金遷倉이 있었고, 주요 서원으로는 八峯書院, 樓岩書院이 있었다.(金在完)

  • 용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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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년(태종 13)에 龍駒縣과 處仁縣(본래 수원부 처인부곡, 남사면 아곡리)을 합하여 용인이 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모현면, 수지읍, 기흥읍, 이동면, 포곡면, 남사면일대이며 중심지는 구성면 언남리, 마북리가 된다. 지도 위쪽에 ''北''이라는 방위표시가 있다. 용인현은 法華山, 香水山, 石城山( 盖山)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이 산들은 漢南正脈과 연결된다. 縣의 북쪽에 있는 ''鄭圃隱墓''는 포은 정몽주의 묘이며 忠烈書院(모현면 능원리)은 1576년(선조 9)에 세워져 사액한 곳으로 정몽주를 모시었다. 縣 서쪽의 深谷書院(수지읍 상현리)은 1605년(효종 원년)에 세워져 사액한 곳으로 정암 조광조를 제사지냈으며 그 옆에는 趙淨庵墓가 있다. 여백의 설명에만 나타나는 處仁城(남사면 아곡리, 북리, 완장리 경계)은 1232년(고려 고종 19)에 僧將 金允侯가 몽고 장수 살례탑을 쏘아 죽인 곳이다. 驛으로는 駒興驛과 金嶺驛이 나타나는데 陽智와 연결된다.(이현군)

  • 의주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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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부는 일제시대의 의주군과 삭주군 청수읍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의주군, 피현군, 천마군 서북쪽, 삭주군 청수 서남쪽 일대이다. 의주부는 청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첫 번째 고을이다. 따라서 압록강변에는 수많은 鎭堡와 烽燧가 자세히 그려져 있고 반대편의 청나라 지역까지도 표시하였다. 다음 페이지의 여백주기에는 각 鎭堡와 의주 읍치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적혀 있다. 청나라를 ''賊''으로 간주하고 이들이 쳐들어 올 경우에 만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조선 영내까지 취할 수 있는 여러 경로를 아주 자세히 적어놓았다. 읍성 아래쪽에는 고려 때 강감찬에 의해 만들어지고 1646년(인조 24)에 임경업에 의해 修築된 白馬山城이 보인다. 압록강에는 고려말 이성계에 의한 요동정벌군의 回軍으로 유명한 威化島를 비롯하여 여러 섬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청나라와 조선의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오갔던 渡船路도 그려져 있다. 읍성의 압록강 반대편 청나라 땅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중국 사이의 公·私貿易을 의미하는 柵門後市가 열렸던 곳이다. 압록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의 楊下鎭에는 청나라 사람의 집(胡家)이 즐비하다는 표현이 있어 재미있는데, 여백주기 楊下鎭 부분의 ''漁店이 즐비하다''는 기록과 관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타 백마산성 옆에 그려져 있는 國內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 이후 여러 기록에 계속 기록되어 오던 것이 지도에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國內城이 중국의 吉林省 集安市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이기봉)

  • 종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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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성부는 북쪽 두만강과 연해 있는 고을로 남북으로 길게 동해안까지 뻗어 있다. 鍾城이라는 명칭은 북쪽의 童巾山이 종을 엎어놓은 것과 같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종성군 오촌면, 주을온면, 주북면, 주남면, 어랑면, 용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회령시, 온성군, 새별군으로 나누어져 병합되었다. 고을의 진산은 동남쪽에위치한 小白山으로 봄과 여름에도 눈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읍치에는 세종 때 축조된 읍성이 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대신에 남쪽의 行營에는 원형의 성곽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행영은 咸鏡北道兵馬節度使의 行營으로 세조 때 설치된 것이다. 평시에는 鏡城에 있는 本營에 머무르다 두만강이 얼어붙으면 이곳에서 방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위치상으로도 會寧, 鍾城, 慶源, 穩城 네 고을의 중앙에 해당하여 북방 수비에 좋은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두만강 변에는 국경 방어를 위한 把守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고 防垣堡와 潼關鎭 등의 진보도이곳의 중요한 군사 기지로 나타나 있다.(노혜정)

  • 조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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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鳥嶺山城은 임진왜란 후 1708년(숙종 34)에 쌓았는데, 남북이 8리이며 둘레가 1만 8천 59보이다. 성이 세 곳에 있는데, 첫째는 고개 위에 있는 지도에 보이는 鳥嶺關이고, 둘째는 東城門이고, 셋째는 초곡에 위치한 主西關이다. 또한 北暗門, 東暗門 등 暗門이 있다. 지도 여백의 설명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 주변의 名山인 主訖山, 曦陽山, 獐山, 冠方山 등에는 제단이 있어서 해마다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조령성 부근 사찰 5개와 승려수를 기록하고 있다. 사찰의 승려들은 유사시에 조령성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東倉은 문경·함창·예천·용궁·상주 5읍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이다. 지도에 보이는 交龜亭은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를 맞아 관인을 넘겨주는 곳으로, 성종 때 현감 신승명이 세웠는데, 김종직이 시를 지어 칭송하였다 한다. 교구정 부근에 보이는 龍湫에서 옛날 용이 승천했다고 전하며 기우제를 지낸다. 惠國寺는 846년(신라 문성왕 8)에 보조국사가 창건하여 법흥사라 하였는데, 고려 때 혜국사로 고쳤다. 다른 군현지도와 달리 초록색으로 아름답게 산을 표시하였다.산들이 조령성을 진호하는 형국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의 영향 때문이다. 도로는 붉은 실선으로 표시하였고, 건물은 회색과 붉은 색을 적절히 사용하여 한 눈에 파악 가능하다. 그리고 설명문의 내용도 다른 군현 지도에 비해서 무척 자세한 편이다.(金在完)

  • 충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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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충청도는 현재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옛 평택현은 현재 경기도에 속하였고 당시에는 충청도에 속하였고, 금산군은 현재 충남에 속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라도에 속하였다. 당시의 충청도는 현재 충남과 충북을 합친 면적보다 약간 좁았다. 산줄기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고, 아울러 각 군현의 진산도 잘 나타나 있다. 한강 수계와 금강 수계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표시되어 있어 분수계의 파악이 용이하다. 18세기 중엽 충청도의 행정조직은 1府(淸風府), 4牧(忠州牧, 淸州牧, 洪州牧, 公州牧), 10郡, 39縣 등 54 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총괄하는 忠淸道監營은 公山(현 공주)에 있었다. 지도에서 監營은 붉은 원으로, 부·목·군·현은 분홍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행정조직과는 별도로 독립적인 군사조직이 있었다. 충청도에는 서천포, 마량진, 안흥진, 소근진, 평신진 5개의 鎭이 있었고, 이들을 지휘총괄하는 충청도 수영(보령현)이 있었는데, 이들 조직은 海岸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巡營은 공주목, 병영은 청주목에 있었다. 討捕營으로 前營(洪州), 右營(海美), 中營(淸州), 左營(公州), 後營(忠州)이 있었다. 지도에서 병영, 수영, 진 등 군주둔지는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충청도의 驛站으로는 利仁道(10驛), 金井道(17驛), 栗峯道(17驛), 連源道(15驛), 成歡道(12驛) 총 71개 역이 있었고, 찰방역은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金在完)

  • 음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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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일부지역에 해당한다.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陰竹郡이 폐하여졌다. 縣의 중심지는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에 해당한다.지도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天民川은 지금의 청미천으로 남한강에 합류되며 縣의 앞쪽에 흐르는 작은 하천은 설성천이다. 이 지역은 남한강 일대의 교통의 중심지로 서울에서 鳥嶺을 통해 嶺南地方으로 가는 大路가 거치는 곳이며 여주와 죽산, 이천과도 大路로 연결됨을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경기도의 다른 지도에 비해 縣의 내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縣이란 표시만 해 두었다. 縣의 서쪽 雪城山에 산성 표시가 되어 있는데 신라 17대 내물왕이 왜구의 난을 피해 이곳에 와서 성을 쌓았다고 한다.(이현군)

  • 이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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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부는 일제시대의 초산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초산군, 고풍군, 송원군 일대이다.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거주하던 豆木里였다고 하며, 공민왕 때부터 사람들이 점차 불어나 1401년(태종 2)에 새롭게 고을을 설치한 곳이다.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童巾江은 지금의 충만강이다. 이 고을 남·동쪽에 있는 높은 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압록강에 합류한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山羊會鎭·阿耳鎭의 要塞的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으며, 여러 개의 把守 및 烽燧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에는 북방 방어의 제1차 관문에 해당하는 지금의 강남산맥 여러 고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고개마다 사람과 말이 모두 통과할 수 있는지, 단지 사람만 걸어 넘어갈 수 있는지를 적어놓았다. 고개 아래쪽으로는 車嶺鎭과 牛峴鎭이 설치되어 있어 군사적 要衝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압록강변으로부터 이곳까지 이르는 길목의 고개들도 그 내용이 자세하여 지도제작에서 군사적 내용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한복판에는 옛 理山터가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여백주기에는 압록강변에 있는 읍성 및 2개의 鎭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적의 침입 시 통과할 수 있는 경로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이기봉)

  • 종성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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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성부는 북쪽 두만강과 연해 있는 고을로 남북으로 길게 동해안까지 뻗어 있다. 鍾城이라는 명칭은 북쪽의 童巾山이 종을 엎어놓은 것과 같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종성군 오촌면, 주을온면, 주북면, 주남면, 어랑면, 용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회령시, 온성군, 새별군으로 나누어져 병합되었다. 고을의 진산은 동남쪽에위치한 小白山으로 봄과 여름에도 눈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읍치에는 세종 때 축조된 읍성이 있지만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대신에 남쪽의 行營에는 원형의 성곽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행영은 咸鏡北道兵馬節度使의 行營으로 세조 때 설치된 것이다. 평시에는 鏡城에 있는 本營에 머무르다 두만강이 얼어붙으면 이곳에서 방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위치상으로도 會寧, 鍾城, 慶源, 穩城 네 고을의 중앙에 해당하여 북방 수비에 좋은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두만강 변에는 국경 방어를 위한 把守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고 防垣堡와 潼關鎭 등의 진보도이곳의 중요한 군사 기지로 나타나 있다.(노혜정)

  • 조령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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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는 조령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태백산, 서쪽으로 속리산, 남쪽으로 황령산, 북으로 충주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주요 산과 고개를 그려 넣으면서 관문을 만들만한 곳과 적을 끊고 막을 만한 곳을 아울러 써놓았다. 그리고 조령 부근의 산성, 사찰, 창고를 자세히 그리고 있는데, 유사시 외적을 막기 위하여 꼭 필요한 방어시설이다. 그리고 도로를 강조하여 붉은 색 실선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조령에 위치한 동문, 초곡창, 중성, 동화원의 위치를 붉은 색 건물 모양으로 그려서 강조하고 있다. 설명문에는 조령의 위치, 사방의 경계, 각 군현까지 거리, 倉庫까지 거리를 자세히 적어 놓고 있다.(金在完)

  • 충청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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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충청도는 현재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옛 평택현은 현재 경기도에 속하였고 당시에는 충청도에 속하였고, 금산군은 현재 충남에 속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라도에 속하였다. 당시의 충청도는 현재 충남과 충북을 합친 면적보다 약간 좁았다. 산줄기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고, 아울러 각 군현의 진산도 잘 나타나 있다. 한강 수계와 금강 수계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표시되어 있어 분수계의 파악이 용이하다. 18세기 중엽 충청도의 행정조직은 1府(淸風府), 4牧(忠州牧, 淸州牧, 洪州牧, 公州牧), 10郡, 39縣 등 54 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총괄하는 忠淸道監營은 公山(현 공주)에 있었다. 지도에서 監營은 붉은 원으로, 부·목·군·현은 분홍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행정조직과는 별도로 독립적인 군사조직이 있었다. 충청도에는 서천포, 마량진, 안흥진, 소근진, 평신진 5개의 鎭이 있었고, 이들을 지휘총괄하는 충청도 수영(보령현)이 있었는데, 이들 조직은 海岸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巡營은 공주목, 병영은 청주목에 있었다. 討捕營으로 前營(洪州), 右營(海美), 中營(淸州), 左營(公州), 後營(忠州)이 있었다. 지도에서 병영, 수영, 진 등 군주둔지는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충청도의 驛站으로는 利仁道(10驛), 金井道(17驛), 栗峯道(17驛), 連源道(15驛), 成歡道(12驛) 총 71개 역이 있었고, 찰방역은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金在完)

  • 이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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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이천시에서 설성면과 장호원읍, 율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한다. 부의 중심지는 지금의 이천시내 창전동이다. 창전동은 이 지도에 나타나는 司倉의 존재로 인해 생긴 동명이다. 南川, 南買, 黃武 등으로 불리던 이 지역의 지명이 利川이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에 이 지방의 徐穆이 인도하여 이 지도에서의 福河大川(지금의 복하천)을 건넜기 때문이다. 이 때에 占을 쳤는데 周易에서 ''利涉大川(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이라는 占辭를 얻었기 때문에 利川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福河(大)川은 남한강의 한 지류에 해당하며 과거 南川으로 불리웠다. 利川이 한동안 南川으로 불리웠던 것은 이 복하천으로 인해서이다. 梨樹川은 지금의 신둔천에  해당한다. 지도 북쪽에 나타나는 大路는 廣州를 거쳐 서울까지 연결되는 길이며 남쪽으로는 陰竹으로 연결된다. 지도에 나타난 서원은 설봉서원(관고리)으로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으며 古城으로 표시된 것은 설봉산에 있었던 것으로 신라 때 쌓았던 것이다. 安興堤堰은 현재의 안흥동에 있던 것으로 安平大君이 영릉에 참배하고 이천에 이르러 농사에 필요한 물이 부족함을 보고 팠다고 전해진다. 이 지도의 표현양식은 山圖와 유사하여 풍수적 관념이 지도제작에 반영되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이현군)

  • 이산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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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부는 일제시대의 초산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초산군, 고풍군, 송원군 일대이다. 고려말까지 여진족이 거주하던 豆木里였다고 하며, 공민왕 때부터 사람들이 점차 불어나 1401년(태종 2)에 새롭게 고을을 설치한 곳이다.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童巾江은 지금의 충만강이다. 이 고을 남·동쪽에 있는 높은 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압록강에 합류한다. 압록강변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山羊會鎭·阿耳鎭의 要塞的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으며, 여러 개의 把守 및 烽燧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에는 북방 방어의 제1차 관문에 해당하는 지금의 강남산맥 여러 고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고개마다 사람과 말이 모두 통과할 수 있는지, 단지 사람만 걸어 넘어갈 수 있는지를 적어놓았다. 고개 아래쪽으로는 車嶺鎭과 牛峴鎭이 설치되어 있어 군사적 要衝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압록강변으로부터 이곳까지 이르는 길목의 고개들도 그 내용이 자세하여 지도제작에서 군사적 내용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한복판에는 옛 理山터가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여백주기에는 압록강변에 있는 읍성 및 2개의 鎭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적의 침입 시 통과할 수 있는 경로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이기봉)

  • 철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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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鐵圓郡으로 弓裔가 이 곳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泰封이라 칭하였다. 1434년(세종 16)에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되었다. 현재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어운면, 묘장면, 북면과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일부지역은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동쪽의 대교천은 합하여 한탄강이 되고 서쪽의 하천은 역곡천으로 들어간다. 邑治 북쪽의 땅은 평야가 넓어 楓川原으로 불리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平原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 궁예가 泰封을 세우면서 도읍을 정하였는데 지도에 弓王古都라 적혀 있다. 弓王은 궁예를 지칭하는 것이다. 弓裔城은 현재 비무장지대 북쪽지역에 있으며 外城과 內城으로 되어 있었다. 지도에서는 근처에 船倉이 표시되어 있다. 邑治에는 성곽없이 客舍, 衙舍, 倉, 鄕校가 표시되어 있다. 去北路, 京路, 去安峽路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과 한반도 북부지역을 잇는 교통상의 요지가 된다. 漣川을 통해 서울로 가는 방법과 永平을 거쳐 서울로 가는 방법이 있었는데 永平으로 가는 길목에 豊田驛(갈말읍 군탄리)이 있었다. 積石寺, 源深寺 등의 사찰과 祠宇가 그림과 함께 표시되었으며 割眉山과 所伊山에는 적색으로 烽燧를 표시하였다. 동쪽의 대교천, 한탄강 부근에는 명승지가 많았는데 지도에서는 北寬亭, 孤石亭, 三釜淵이 표시되어 있다. 孤石亭(동송읍 장흥리)은 신라 진평왕, 고려 충숙왕이 이곳에서 놀았다고 전해지며 임꺽정이 이곳에 숨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三釜淵(갈말읍 신철원리)은 沼가 세 개가 있는데 모두 솥처럼 생겼다하여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탄강에는 險屹津, 道德津 등의 나루와 倉이 표시되어 있다.(이현군)

  • 지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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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知禮縣의 縣名은 신라의 知品川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때 縣名은 지례현을 흐르는 하천이름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례현은 지금의 김천시 지례면, 부항면, 구성면 서쪽, 대덕면을 포함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방향은 좌측이 동쪽, 우측이 서쪽, 위쪽이 남쪽, 아래쪽이 북쪽이다. 이 지역은 감천의 상류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산지가 많고, 좁은 골짜기에 읍이 형성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지례현 지도가 다른 군현지도와 다른 점은 곳곳에"村''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는 점이다. 衙舍 좌측에 보이는 鑑湖亭은 1690년(숙종 16)에 현감 조인상이 못을 파고, 蓮을 심고 정자를 세웠는데, 1755년(영조 31)에 홍수로 인하여 허물어졌으므로, 1760년(영조 36)에 현감 이 창원이 다시 짓고 못 가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지례현에는 장곡역과 작내역 두 개가 있었다. 장곡역은 남으로 거창 성기역과 연결되고, 북으로 작내역과 연결된다.(金在完)

  • 태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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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군은 현재 태안군 태안읍, 남면, 이원면, 원북면, 소원면, 근흥면, 서산시 팔봉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태안읍 동문리와 남문리 일대에 있었고, 현재 읍사무소가 동헌자리이다. 태안군은 당진과 마찬가지로일찍부터 중국과 교류가 잦았다. 한편  ''왜구의 왕래 요충지''로서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왜구의 노략질로 시달리기도 했다. 태안의 鎭山은 정북쪽에 위치한 白華山(284m)이다. 주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읍치를 두 겹으로 감싸 안은 형국이고, 남쪽에는 案山인 南山이 있다. 읍성은 돌로 쌓은 성이다. 읍치의 남쪽에 위치한 憬夷亭은 조선 정종 때 건립한 것으로 중국 사신이 안흥으로 들어 올 때 경유·휴식하는 한편 防禦使가 군사업무를 보던 곳이다. 關隘로서는 白華山 舊山城이 있다. 縣北 7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세는 4면이 절벽으로 사람이 발을 디딜 수 없는 천혜의 요새이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북면목장(현재 태안군 이원면 청산리 부근)은 암말 21필, 수말 31필이 分養되었고, 해마다 말 두 필을 4월에 상납하였다. 백화산 정상에 있는 봉수는 동쪽으로는 서산현의 北山과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역시 서산현의 都飛山과 호응한다.(金在完)

  • 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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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군은 지금의 익산시 금마면, 삼기면, 춘포면, 왕궁면의 일부와 익산시내 팔봉동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마면 동고도리에 있었다. 고을의 산세는 미륵산과 용화산을 제외하면 야트막한 언덕 정도에 불과함에도 산세가 이어지며 강조되어 있어 山脈의 흐름을 중요시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彌勒山의 箕準古城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 準王이 衛滿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배를 타고 들어와 성을 쌓고 馬韓을 세운 곳으로 전해진다. 미륵산 앞쪽의 彌力面에는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지가 있는 곳이지만 지도에서는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왼쪽 五金山에 있는 성은 고구려 유민 劒牟岑이 安勝을 君으로 삼아 신라문무왕으로부터 報德王란 칭호를 얻어낸 후 고구려 부흥운동을 하던 곳으로서 일반적으로 報德城으로 불린다. 또 읍치 아래쪽의 王宮塔은 현재 보물 4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5층석탑으로서 부여의 정림사지 5층석탑을 모방하여 고려시대의 지방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소재로서 등장하고 있다. 기타 미륵산 아래쪽의 華山書院은 김장생과 송시열을 배향하여 현종 때 사액받았으며, 그 왼쪽의 南村書院은 고려 공민왕 때의 충신이며 이 고을 사람인 李公遂 등을 배향했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다.(이기봉)

  • 자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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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부는 일제시대의 순천군 자산면, 사인면, 후탄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평성시 일대이다. 지도는 서쪽을 위쪽으로 그렸는데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읍치와 慈母城을 지면의 긴 쪽에 배치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을의 전반적인 지세는 서·남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데 여러 산줄기에서 발원한 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대동강에 합류한다. 읍치는 지도 오른쪽 중간에 보이는 고을의 主脈 黃龍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오다 솟아난 文興山·龍興山 아래에 있으며, 이중의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인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위쪽에는 조선 초기에는 頹落했던 성을 인조 때 修築한 慈母城이 보이고 있는데 鎭을 설치하여 성천, 은산, 자산, 순안, 영유 등 다섯 고을을 관장하게 하였다. 성곽과 성문이 자세히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성안에는 관아 건물과 여러 고을의 창고 그리고 여백 주기에 보이는 많은 연못의 일부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南門 아래쪽에 보이는 牛馬城은 慈母城의 外城에 해당되는데 병자호란 이후 증가된 북방 방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춘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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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貊國이 있었던 곳으로 府의 북쪽에 古貊都라고 표시되어 있다.942년(고려 태조 23)에 春州로 고쳤으며 1413년(태종 13)에 춘천군으로 고쳤다가 1415년(태종 15)에 도호부가 되었다. 1888년(고종 23)부터 1895년(고종 32)까지 경기도에 속했던 적이 있다. 현재의 강원도 춘천시, 인제군의 상남면, 기린면과 화천군 사내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춘천시내가 당시의 중심지가 된다. 鳳儀山이 鎭山이며 중심지에는 客舍, 衙舍, 鄕校, 倉, 聞韶閣이 있다. 聞韶閣(춘천시 요선동)은 1646년(인조 24)에 세운 정각으로 현재 門樓인 朝陽樓만 남아 우두동에 옮겨져 있다. 큰 두 개의 강이 府의 서쪽에서 만난다. 동쪽은 소양강, 서쪽은 북한강이 되는데 지금은 소양댐, 춘천댐, 의암댐 등의 댐 건설로 호수가 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 소양강을 끼고 原河津, 大同津 등의 나루가 표시되어 있으며 북한강은 범위에 따라 母津江, 吾梅江, 新淵江 등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강을 끼고 北社倉, 南社倉,   倉, 史呑外倉이 표시되어 있다. 춘천부의 기린면(인제군 상남면, 기림면)은 고려때에는 기린현이었으며 사탄면(화천군 사내면)은 원래 史呑鄕이었던 곳이다. 府 남쪽에 명승지로 武陵溪가 보인다. 原昌驛은 홍천과, 保安驛은 양구와, 仁嵐驛은 낭천과 연결되는 도로상에 표시되어 있다. 도로상의 고개 명칭에 있어 岺, 峴, 峙와 함께 다른 강원도 군현지도에서 자주 나타나지 않는 ''遷''이 사용되고 있다. 三岳寺(서면 덕두원리)가 자리한 三岳山에는 과거 맥국시대에 쌓은 山城이 있었다고 전한다. 淸平寺(북산면 청평리)는 973년(고려 光宗 24)에 禪師 玄承이 창건하였으며 1550년(명종 5)에 수리하고 청평사로 이름을 고쳤다. 極樂殿과 남쪽 정문(回轉門)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壯節公墓(서면 방동리)는 처음 이름은 能山으로 견훤과 싸울 때 위급한 고려 태조 왕건을 구하고 죽은 申崇謙(? - 927)의 묘이다. 그의 시호가 壯節이다.(이현군)

  • 진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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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眞寶는 신라 경덕왕 때 등장한 현의 오랜 명칭이다. 조선 세종 때 靑鳧에 합쳐져 靑寶郡(진보와 청송을 합친 것)이라 불렸다가 얼마 안 있어 이를 폐지하고 진보로 고쳤다. 진보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파천면 북부, 영양군 입암면 남부, 석보면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 보이는 선은 옛 土城의 흔적이다. 읍치에 위치한 飛鳳山은 봉황이 날아가는 형국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 아래 水淨菴은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정암의 아래쪽에 보이는 退溪先塋은 현재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甘南墓 또는 호장공 묘라고 불리는 이 황의 6대조 묘이다. 金鷄抱卵穴이라 하여 명당으로 손꼽힌다. 이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도에도 전형적인 명당형국을 잘 보여주고 있다. 玉流亭 위쪽에 위치한 石璧은 성을 쌓을 만한 곳으로 인정되었으나 실제로 성을 쌓지는 않았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南角山烽燧는 동쪽으로는 寧海府의 廣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安東府 臨河縣의 藥山에 응한다. 角山驛은 安奇道察訪驛의 屬驛으로 동쪽으로 寧陽驛과 연결된다.(金在完)

  • 평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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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진은 현재 서산시 대산읍 전지역과 지곡면 북부 일부지역을 포함한다. 옛날 助立部曲이었는데, 지금은 대산곶이다. 서산읍에서 북쪽으로 60리에 있는데, 이 곳에 波知浦萬戶를 이속시켰다가 僉使로 승격시켰다. 1794년(정조 18)에 독립된 진으로 만들었고 水軍僉節制使兼摠理屯牙兵把摠 1명을 두었다. 목장이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1794년(정조 18)에 없애고 이어 첨사를 減하여 監牧官을 겸하게하였다. 평신진은 안흥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작고 병력이 적다. 그리고 성곽이 없고, 다만 官舍를 방형의 벽으로 둘러쌌다. 주기란에 보면 다양한 軍船이 나오고 있다. 조선후기 군선은 그 船種이 戰船·龜船·防船·兵船·伺候船·  船·汲水船·挾船·追捕船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평신진에 배치된 배는 방선, 병선, 사후선이다. 방선은 전선 대신에 쓰여지는 조선후기에 새로 등장한 중형 전투선이며, 병선도 조선 후기에 새로이 사용되기 시작한 소형 무장선이고, 사후선은 임진왜란에서도 쓰여진 비무장 보조정이다.(金在完)

  • 인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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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인천광역시의 서구, 부평구, 계양구를 제외한 동구, 남구, 중구, 연수구, 남동구 일대와 시흥시 일부지역에 해당한다. 조선 태종때 처음으로 仁川郡이 되었다가 세조때 都護府로 승격되었는데 그 중심지는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으로 현재 문학 초등학교 자리가 인천도호부의 터가 된다. 鎭山은 동쪽에 있는 蘇來山이며 서해와 맞닿은 지역으로 산줄기의 방향을 바다를 마주보게 겹겹이 그리고 있다. 서쪽인 바다를 지도의 오른쪽에 그리고 있으며 남쪽이 위가 되게 그리고 있다. 文鶴山城(남구 문학동)은 백제 시조 온조왕의 형 沸流의 도읍터이며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무찔렀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 지도에서는 문학산성이 바다와 잇닿아 있지만 현재는 이 곳이 매립되어 연수구 일대가 된다. 인천광역시 중구, 연수구, 동구 일대의 많은 땅이 매립되어 형성된 땅임을 이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府의 중심지에서 고개를 통하는 여러 길들이 표시되어 있으며 重林驛, 慶信驛, 濟物院등의 역원이 표시되어 있다. 濟物津頭 앞의 얼미도(월미도의 오기)에는 왕의 임시 거처인 行宮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밖에 서해의 여러 섬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 중 無衣島, 龍流島 등에는 牧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현군)

  • 장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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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련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일도면, 이도면, 북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은율군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황해남도 은율군 장련리 일대이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진 鳳凰山이다. 이 산의 기슭에는 산의 명칭을 딴 봉황사라는 절이 위치하고 있다. 남쪽에 보이는 구월산 중턱에는 지도에는 없지만 石潭이 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神龍이 돌을 파서 못을 만들었다 하는데, 네 모가 방정하고 넓이가 6척이며 물깊이를 알 수 없으며, 가물거나 장마져도 언제나 한결같았다고 한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鳳陽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세워졌고, 이듬해사액을 받았다. 고을 북쪽에 보이는 松串壇은 큰 냇물로서 小祀에 실렸으며, 봄·가을로 香祝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드린다. 그 남쪽에 齋室과 高井寺가 위치하고 있는데, 사당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읍치 북쪽에 大津關이 위치하고 있다. 1523년(중종 18)에 설치하였는데, 본도 사람으로 權管을 임명하고 水軍을 두어서, 장삿배들이 사사로이 중국에 왕래 연락하는 것을 금하였다. 읍치 북쪽에 보이는 今卜山烽燧는 남쪽으로 안악군 감적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平安道 三和縣 新寧江에 응한다.(金在完)

  • 통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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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년(태종 13)에 통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군사분계선 이북의 강원도 통천군에서 남쪽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동쪽지역이며 남쪽으로는 高城, 북쪽으로  谷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바다이다. 백두대간은 산을 중첩하여 넓게 그림으로써 험준함을 나타냈으며  谷과의 경계가 되는 산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함으로써 경계를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읍치에는 성곽이 과거에 있었으나 표시되지 않았고 客舍, 倉, 衙舍, 鄕校가 그려져 있다. 북쪽바다가에 叢石亭을 그리고 그 옆에 뾰족하게 솟은 바위들을 산수화에서처럼 그리고 있다. 門岩도 같은 형식으로 그렸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읍치 남쪽에 巨豊驛이 있다. 楸池岺,  岺을 넘어 淮陽으로 연결되는 길은 大路에 해당하며 大幹을 넘기에 험준하다. 반면, 登路驛, 朝 驛을 지나 高城으로 가는 해안의 남북통로는 평탄한 편이다. 楸池岺으로 가는 길에는 中臺?이, 고성으로 통하는 朝 驛에도 ?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남쪽 고성으로 통하는 곳에 瓮遷이 그려져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돌산이 바다로 들어가는 형태이며 좁아서 말이 쌍으로 지나지 못한다고 한다. 옛날 倭寇가 여기까지 왔는데 官軍이 쳐서 모두 바다에 빠뜨렸다고 한다. 사찰로는 雙鶴菴, 觀音寺, 龍貢寺, 明道庵이 있으며 縣倉이외에남쪽 해안에 外倉이 있고 읍치 앞의 하천에는 樓橋가 그려져 있다. 남쪽에 萬里城이 적혀 있어 과거에 城이 있었음을 지시해 준다.(이현군)

  • 진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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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목은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전체, 산청군 삼장면, 시천면, 단성면 남사천 이서지역, 하동군 옥종면, 북천면 일부, 사천시 축동면, 삼천포시 일부, 고성군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 남해군 창선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진주시내 남성동과 본성동 일대에 있었다. 우뚝 솟은 集賢山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鎭山인 飛鳳山에서 멈추고, 그 아래 명당을 만들고, 양 팔 모양의 산줄기로 명당을 감싸안은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아래 명당수인 남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비봉산 아래 읍치에는 本州, 객사, 진영,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大寺池는 남강과 함께 矗石城의 垓字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도에 보이는 성은 矗石城인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石築으로 둘레가 4,359척, 높이가 15척, 샘과 우물이 각각 3개, 軍倉이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 남쪽에 있는 누각이 유명한 촉석루이다. 성안에 있는 忠愍祠는 1652년(효종 3)에 사당을 세워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김시민 등을 배향하였던 서원으로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義岩은 임진왜란 때 義妓 논개가 진주성 함락의 애통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여 왜장을 껴안고 이 바위에서 남강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바위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찰방은 소촌도의 찰방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속역이 14개이다.(金在完)

  • 평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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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평택현은 현재의 평택시 팽성읍을 포함하는 좁은 지역이었다.읍치는 현재 팽성읍 객사리 및 안정리 부근에 있었다. 관아 터는 현재 팽성초등학교 자리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평택현은 1505년(연산군 11)에 경기도로 이속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전대로 환원하게 하였다. 왜구로 인한 피해 때문에 1596년(선조 29)에 직산에 예속시켰다가 1610년(광해군 2)에 다시 복귀시켰다. 평택현의 지형은 산이 낮고 들이 평평하고, 다른 군현에 비하여 크기가 작다. 지도에서 낮은 산줄기들이 흩어져 분포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위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鎭山은 본 읍 북쪽 1리 지점에 있는 城山(지형도에는 부용산으로 나와 있음, 34m)이다. 이 곳에는 옛 성터가 남아 있다. 서쪽 안성천 변에 위치한 褒義洞書院은 1661년(현종 2)에 세워졌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서원이다. 홍익한, 오달재, 윤집의 3학사를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렸다. 북쪽에 위치한 軍勿津(현재 군문포)은 양성과 진위로 통하는 나루터 겸 포구로서 이 곳에서 어염과 곡물의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읍치 서쪽에 작은 성이 보이는데 이것이 農城이다. 서정자 동북쪽에 있는 옛 성으로 동그란 야산 꼭대기에 성이 둘러 있는데 농성이라고 부른다. 1981년 7월 지방문화재 제 103호로 지정되었다.(金在完)

  • 임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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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피현은 지금의 군산시 임피면, 대야면, 개정면, 성산면, 나포면, 서수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피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남쪽에는 동진강이, 북쪽에는 금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가며, 전주에서 군산까지 허허벌판을 달리다 이곳에서 200m이상의 산지가 등장한다. 지도에는 동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고을 곳곳으로 이어져 있으며, 읍치는 북쪽에 우뚝 솟은 鷲城山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사방으로 포근히 감싸안고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이 쉽게 이해된다. 읍성은 조선 초에 최윤덕이 전라도 巡問使가 되어 지역을 순시하다가 주현의 장정 16,900여명을 동원하여 만든 성으로 성안에물과 샘이 많아 요해처의 방비시설로 삼았다 한다. 읍치 남쪽의 鳳岩書院은 김장생의 아들이고 임피 현감을 지낸 金集 등을 배향하여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기타 읍치 아래의 남이면에는 바닷가에 솟아난 두 개의 큰 바위가 立石으로 표시되어 있어 어떤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이기봉)

  • 장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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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장연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상 황해도 장연군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장연군, 용연군, 태탄군 서부,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 대청면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과 大東地志에는 돌로 쌓은 읍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지도에는 성곽이 없다고 되어 있다. 위에 언급한 문헌들이 衙舍 남쪽의 古邑城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지도 우측 하단에 보이는 고읍성은 고려 때 읍치에 있었던 성이다. 장산곶 부근에 보이는 祭堂(長山串祠)은 祀典에 大川으로 小祀에 실려 있는데,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드렸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龍井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끌어서 논에 물대는데 가물면 비를 빈다. 용정 우측에 보이는 龍岩書院은 1709년(숙종 35)에 세워졌고, 1721년(경종 1)에 사액을 받았다. 몽금도 부근의 金沙寺는 해안 흰 모래가 금과 같다 해서 이름이 붙었다. 부근은 몽금포 해수욕장과 몽금포 타령으로 이름이 나 있다.(金在完)

  • 평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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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년(고려 현종 9)에 평강으로 고쳤으며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현재의 북한 강원도 평강군과 세포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중에서 평강군의 남쪽 일부(철원땅)와 세포군의 북쪽일부(고산 땅)는 제외된다. 邑治는 성곽없이 客舍, 衙舍, 倉, 鄕校를 표시하였다. 서쪽으로 四寬亭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禁山이 표시되어 있고 남쪽으로 풍수 개념에서 나온 案山이 기록되어 있다. 玉洞驛院은 伊川, 林丹驛은 淮陽, 裁松院은 鐵原, 赤 院은 金化와 金城으로 통하는 경로상에 표시되어 있으며 金城去路, 三防路(安邊방향)를 따로 기록하고 있다. 북쪽에 分水嶺과 天岺이 표시되어 있는데 分水嶺은 백두대간이 南向하는 가운데 한북정맥이 서쪽으로 갈라져 나오는 지점에 해당한다. 물이 나누어진다는 의미의 分水嶺에서 실제로 임진강, 한탄강, 북한강 水系와 동해로 들어가는 하천이 크게 나누어진다.  箭川烽臺, 松古介烽, 土氷烽 등의 봉수가 표시되어 있는데, 淮陽의 雙嶺에서 남쪽으로 이 세 봉수를 거쳐 서쪽의 鐵原 所伊山봉수로 연결된다. 이 밖에 縣의 동북방향으로 社倉이 보인다.(이현군)

  • 진주목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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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목은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전체, 산청군 삼장면, 시천면, 단성면 남사천 이서지역, 하동군 옥종면, 북천면 일부, 사천시 축동면, 삼천포시 일부, 고성군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 남해군 창선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진주시내 남성동과 본성동 일대에 있었다. 우뚝 솟은 集賢山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鎭山인 飛鳳山에서 멈추고, 그 아래 명당을 만들고, 양 팔 모양의 산줄기로 명당을 감싸안은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아래 명당수인 남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비봉산 아래 읍치에는 本州, 객사, 진영,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大寺池는 남강과 함께 矗石城의 垓字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도에 보이는 성은 矗石城인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石築으로 둘레가 4,359척, 높이가 15척, 샘과 우물이 각각 3개, 軍倉이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 남쪽에 있는 누각이 유명한 촉석루이다. 성안에 있는 忠愍祠는 1652년(효종 3)에 사당을 세워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김시민 등을 배향하였던 서원으로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義岩은 임진왜란 때 義妓 논개가 진주성 함락의 애통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여 왜장을 껴안고 이 바위에서 남강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바위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찰방은 소촌도의 찰방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속역이 14개이다.(金在完)

  • 한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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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군은 현재 서천군 한산면, 마산면, 기산면, 화양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한산군의 읍치는 현재 한산면 虎岩里 일대에있었다. 현재 읍치 북쪽에 위치한 건지산성이 사적 60호로 지정되어 있다. 교촌, 읍내, 성외리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이 읍치이었음을 알게 해주고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形勝條에서 ''한산군은 산이 기이하고 물이 곱고, 麒麟峰은 북쪽에 鎭山이 되어 있고, 熊浦는 그 남쪽을 들러 흐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麒麟山, 鷲峰山, 鷄岾山 등의 산은 상서로운 동물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풍수형국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산군의 진산은 군 서쪽 1리에 위치한 乾至山 혹은 乾止山이다. 건지산성은 건지산에 의지하여 쌓은 산성이었다. 흙으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3천 61척이었다. 성 안에 일곱 개의 우물과 한 개의 못이 있으며 軍倉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산군은 산성과 별도로 돌로 쌓은 읍성을 갖고 있었다. 현재도 읍성 일부가 남아 있다.(金在完)

  • 장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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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장단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장단면, 진동면과 연천군 장남면, 북한의 장단군 진서면, 장도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가 그 중심지가 된다. 장단면, 진동면은 임진현에 속하였다가 1457년(세조 3)에 장단에 편입되었고 진서면은 1418년(태종18)에 송림현에서 임강현으로 되었다가 1458년(세조 4)에 장단에 편입되었다. 지도에 나타난 板積橋 바로 가까이에 현재 판문점이 있다. 휴전선 이남과 이북에 걸쳐 있으며 임진강 북쪽에 해당한다. 이 지도에서는 종이에 맞추기 위하여 임진강의 流路를 왜곡하여 그렸다. 지도의 오른쪽의  三味(大)川은 임진강의 한 지류로 지금 사미천이라 불리는 것이다. 임진강가에 古浪浦, 楮浦 등의 포구가 발달하였으며 정자(退北亭)가 있었다. 임진강변에는 司僕倉, 北倉, 亭子浦倉 등의 창고가 있었다. 臨江書院은 1680년(숙종 6)에 세워졌으며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이 지역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장남면 고랑포리)을 비롯하여 고려 肅宗陵, 고려 明宗陵 등의 왕릉과 무덤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華藏寺는 서역에서 元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指空이 세운 절이다. 長湍의 도로는 북으로는 개성과 연결되며 남으로는 임진강을 건너 파주, 고양을 거쳐 서울로 연결되었다.(이현군)

  • 재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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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북율면, 남율면, 서호면, 삼강면, 청천면, 은룡면, 장수면, 신원면, 상성면, 하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재령군 전체, 신원군 북부, 황해북도 은파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1519년(중종 14)에 長壽山 남쪽 5리에 있던 읍치를 劍山 남쪽 1리 지점으로 옮겼다. 이 고을의 진산은 읍치에서 남쪽으로 1리 떨어진 검산이다. 진산 남쪽 기슭에 衙舍, 客舍, 서쪽에 社稷, 監獄, 鍊堂, 동쪽에 鄕校, 城隍堂, 訓練, 本倉이 배치되어 있다. 지도에서 보이는 산성은 읍치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長壽山城이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762년(신라 경덕왕 21)에 축성된 古山城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개축하였다. 내성은 주위가 4,008步, 외성은 둘레가 5,584步이고, 석벽이 험준하여 나는 새도 넘지 못한다고 한다. 장수산성 남쪽에 위치한 鐵峴鎭에서는 훈련도감에서 別將을 보내 鍊鐵을 본영에 수납케 한다. 鎭軍 250명이 매 인당 철 50근을 모아 본영에 납부하고, 만일 긴급한 일이 있으면 별장이 진군을 거느리고 장수산성에 들어가 지킨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景賢書院은 1655년(효종 6)에 세워지고, 1659년(효종 10)에 사액을 받았다.(金在完)

  • 평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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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때에 평창으로 고쳤으며 현재의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평창읍내의 상리, 중리, 하리 일대가 과거의 중심지이다. 현재 평창군에서 평창읍과 미탄면을 제외한 지역은 과거에는 강릉에 속해 있었다.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그린지도이다. 다른 강원도 군현지도에서와 같이 邑治에는 客舍, 倉, 衙舍, 鄕校가 그려져있다. 지도에 南大川으로 표시되어 邑治를 휘감아 흐르는 강은 평창강이며 동쪽의 강은 동강으로 영월로 들어간다. 邑治 북쪽의 注橋는 현재에도 주진교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옆에 津으로 표시된 것은 注津으로 현재의 동리 명칭(평창읍 주진리)의 근원이 된다. 또한, 평창강 남쪽에는 摩池津(평창읍 마지리)이 표시되어 있다. 동강변에는 東倉(정선군 신동읍 고성리)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중 동쪽의 味呑峙, 平安驛(미탄면 평안리), 星摩嶺을 지나는 길은 정선과 통하는 大路이며 평창읍 주진리 북쪽의 利峙는 큰 배나무가 있어 뱃재로 불렸다고 하며 강릉으로 연결되었다. 남쪽의 藥水驛(평창읍 약수리)을 지나는 길은 원주와 연결된다.(이현군)

  • 진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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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현은 1018년(고려 현종 9)에 진주에 예속되었고, 조선 태종 때 현감을 두었다. 그러나 1570년(선조 3)과 이듬해에는 함안과 합쳤다가 1617년(광해군 9)에 다시 두었다. 1627년(인조 5)에는 창원에, 1629년(인조 7)에는 또 함안에 합쳤다가 1639년(인조 17)에는 다시 두었다. 이와 같이 다른 군현에 종종 흡수된 이유는 진해현이 주위의 다른 군현에 비해 면적과 인구가 적어 郡勢가 약하였기 때문이다. 진해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마산시 진동면 진동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위치한 鷲山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진해읍성은 石築으로 둘레가 446척, 높이가 9척이다. 이 지도에서는 드물게 향교를 文廟로 표시하고 있다.(金在完)

  • 해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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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현은 현재 서산시 해미면, 운산면, 고북면, 당진군 정미면과 대호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부근에 있었다. 지도에 보이는 해미읍성(史蹟116號)은 1491년(성종 22)에 축성된 성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읍성은 옹성(甕城)(큰 성문밖의 작은 성문)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으며 성밖은 탱자나무 숲(枳林)으로 둘러 있다고 한다. 1402년(태종 2)부터 1651년(효종 2)까지 충청병사가 주재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많은 신도가 이 곳에서 순교하여 천주교의 성지가 되었다. 이 읍성은 1973년까지도 160여 채의 민가와 함께 학교와 관공서가 있다가 모두 철거되어 넓은 성안이 거의 비어 있다. 그러나 성벽과 문루의 보존·복원이 양호하여 우리나라 읍성의 표본으로 꼽힌다. 이 지도는 다른 지도와 달리 위쪽이 동쪽, 좌측이 북쪽, 우측이 오른쪽이다. 이와 같은 방향을 무시한 것은 문수산과 석문동의 지세가 읍치까지 내려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左營建物이다. 인조 때에 온양에 세웠다가 1712년(숙종 38)에 본 현으로 옮겼다. 左營將은 본 현감이 겸하였다. 속읍은 13개이었다.(金在完)

  • 장단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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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이 장단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장단면, 진동면과 연천군 장남면, 북한의 장단군 진서면, 장도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가 그 중심지가 된다. 장단면, 진동면은 임진현에 속하였다가 1457년(세조 3)에 장단에 편입되었고 진서면은 1418년(태종18)에 송림현에서 임강현으로 되었다가 1458년(세조 4)에 장단에 편입되었다. 지도에 나타난 板積橋 바로 가까이에 현재 판문점이 있다. 휴전선 이남과 이북에 걸쳐 있으며 임진강 북쪽에 해당한다. 이 지도에서는 종이에 맞추기 위하여 임진강의 流路를 왜곡하여 그렸다. 지도의 오른쪽의  三味(大)川은 임진강의 한 지류로 지금 사미천이라 불리는 것이다. 임진강가에 古浪浦, 楮浦 등의 포구가 발달하였으며 정자(退北亭)가 있었다. 임진강변에는 司僕倉, 北倉, 亭子浦倉 등의 창고가 있었다. 臨江書院은 1680년(숙종 6)에 세워졌으며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이 지역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장남면 고랑포리)을 비롯하여 고려 肅宗陵, 고려 明宗陵 등의 왕릉과 무덤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華藏寺는 서역에서 元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指空이 세운 절이다. 長湍의 도로는 북으로는 개성과 연결되며 남으로는 임진강을 건너 파주, 고양을 거쳐 서울로 연결되었다.(이현군)

  • 정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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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목은 일제시대의 옥천면, 관주면, 임포면, 안흥면을 제외한 정주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정주군과 운전군 서남쪽 일대이다. 지도의 한가운데 보이는 읍성은 1714년(숙종 40)에 石築으로 쌓은 성으로서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북방 경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읍성은 동·서·남·북문을 비롯한 성곽의 표시가 자세할 뿐만 아니라 성안의 각종 관아 건물도 다른 고을보다는 많이 그려 넣어 군사상 중요한 지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읍치 서남쪽의 고읍면은 옛 정주의 중심지였는데 1466년(세조 12)에 隨川郡을 합치면서 수천군 新安驛으로 읍치를 옮겼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把撥은 求井星站으로서 1597년(선조 20)부터 변방으로 가는 공문서의 빠른 전달을 꾀하려고 만든 파발의 하나이다. 파발에는 騎撥과 步撥 2가지가 있었으며 기발은 25리마다, 보발은 30리마다 1站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해안가 섬에는 無人島와 有人島를 구별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戶數도 자세히 기록하였다. 기타 지도 아래쪽에는 말을 기르던 목장이 표시되어 있고, 여백주기를 보면 논밭의 비율이 거의 비슷한 고을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평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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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평해가 되었으며 1914년에 울진군에 편입되었다. 이 지도에서는 강원도에 속하나 1963년부터 경상북도에 속하게 된다. 현재의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남쪽에 해당하는 평해읍, 후포면, 온정면, 기성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울진군 평해읍 평해리가 중심지가 된다. 서쪽으로는 낙동정맥에 가로막혀 있고 황보천과 남대천이 흘러 東海로 들어간다. 鳥峴, 珠嶺 등의 고개를 넘어 서쪽의 寧越, 英陽으로 향하는 길은 험준하지만, 남으로 寧海, 북으로 蔚珍으로 통하는 大路는 평탄하다. 조선후기 서울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9대로 중에서 서울과 平海를 연결하는 길이 제 3大路에 해당하였다. 新立驛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邑治에는 邑城이 쌓여졌고 그 안에 客舍, 衙舍, 倉, 淸香亭 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읍성의 서쪽으로 鄕校가 그려져 있다. 越松浦(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는 石城이 있었는데, 이 城은 1555년(명종 10)에 쌓았으며 水軍萬戶를 두어 해적을 막았다. 松田은 소나무 숲이 조성된 곳으로 평해읍 월송리에 해당한다. 望洋亭은 현재는 근남면 산포리에 있는데 이곳은 옛 울진현의 땅에 해당한다. 이 지도(평해군 지도)에 망양정이 나타나는 것은 본래 망양정이 평해군의 땅인 기성면 망양리 바닷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숙종이 관동 팔경 중 으뜸이라 하여 ''關東第一樓''라는 御筆 편액을 내렸으며 松江 鄭澈, 梅月堂 金時習이 시를 지어 경치를 찬양하였다. 1883년(고종 19)에 근남면으로 그 위치를 옮겼다. 지도에서 溫井(온정면 온정리)으로 표시된 것은 현재 백암온천으로 개발되어 휴양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이현군)

  • 창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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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고암면, 대지면,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와 말흘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지도상으로 위쪽에 있는 火旺山이다. 화왕은 통일신라시대 창녕의 명칭이었다. 즉, 진산의 명칭을 고을의 이름으로 사용한 예이다. 지도에서 방향은 위쪽이 동쪽, 아래쪽이 서쪽, 우측이 남쪽, 좌측이 북쪽이다. 읍치 동쪽에 비슬산, 화왕산, 구룡산, 영취산 등 웅장한 산들이 외곽을 두르고, 그 안 쪽에 낮은 산들이 다시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산 기슭 곳곳에 절과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 구룡산 밑 觀龍寺에는 보물 제 212호 대웅전과 보물 제 146호 약사전이 있다. 비슬산 밑에 있는 龍興寺는 覺了庵이라고도 하는데, 曺關文이 영조의 11女 和寧翁主의 願刹로 지었다 한다. 객사 위에 있는 道成菴은 신라말에 창건된 유서 깊은 암자이다. 도성암 좌측에 보이는 冠山書院은 1620년(광해군 12)에 세워져 1711년(숙종 37)에 사액되었고, 정 구를 배향하였다. 관산서원 좌측에 보이는 燕岩書院은 李承彦, 李長坤, 成安義를 배향하였는데, 사액은 받지 못했다.(金在完)

  • 홍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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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현은 현재 부여군 홍산면, 외산면, 내산면, 옥산면, 구룡면, 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와 부근의 면들은 금강의 지류 금천 상류 산간지대에 위치하지만, 북쪽의 외북면과 내북면은 웅천 수계의 상류에 속해 수계를 달리한다. 이 고을의 진산은 본 읍 서쪽에 위치한 飛鴻山이다. 본현의 형국이 나는 기러기의 형세가 있다하여 地官이 비홍이라는 이름을 부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主山과 鎭山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도의 위쪽에 星台山, 崇角山, 望心山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그 곳에서 산줄기가 남하하여 荒次山과 月明山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풍수상 주산은 월명산으로 볼 수 있다. 홍산현 지도에는 다른 지방의 지도와 달리 암자와 사원이 많이 나타나 있다. 新庵, 金池庵, 高德庵, 天寶庵, 周浦庵, 栖雲庵 등 6개와 彰烈祠가 분포한다. 彰烈祠는 1717년(숙종 43)에 세워졌고, 1721년(경종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大東地志의 典故에 따르면 1376년(고려 우 왕 2) 判三司 崔 瑩 등이 군사를 이끌고, 홍산에 이르렀는데, 이미 왜가 險隘를 점거하고 있었다. 최영이 몸소 병졸을 이끌고 힘써 싸워 왜를 대패시키고, 거의 다 죽였다. 북쪽의 무량사에는 국보 233호 석등, 보물185호 5층 석탑 외 2점, 보물 356호극락전 등이 있다.(金在完)

  • 장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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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부는 삼계면, 삼서면, 동화면을 제외한 장성군의 지역으로서 읍치는 장성읍 성산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전라도의 다른 지도와 달리 읍치를 특별히 강조하지도 않고 풍수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은 점이 독특하다. 지도 왼쪽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大蘆嶺, 小蘆嶺은 전라도 남과 북을 잇는 가장 중요한 要衝地이다. 그 옆에 있는 笠岩山城은 조선 초까지는 석성터만 남아 있던 곳인데 임진왜란을 겪은 후 1597년(선조 30)에 대대적으로 修築한 곳으로, 지도에서도 특별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어 임진왜란 이후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장성부는 조선 초까지도 長城縣과 珍原縣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두 고을이 衰殘하자 합쳐서 하나로 만들고, 유사시 장성, 광주, 나주, 고창, 정읍, 태인을 관할하던 입암산성의 수성장을 이 고을 수령이 겸하게 됨에 따라 1655년(효종 6)에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장성에는많은 서원이 있었는데 乙巳士禍(1545) 후 고향 장성에 돌아와 성리학을 연구한 金麟厚를 배향하여 현종 때 사액받은 筆岩書院만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았다.(이기봉)

  • 중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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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부는 일제시대의 중화군 중화면, 동두면, 간동면, 신흥면, 양정면, 해압면, 당정면, 고생량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양특별시 중화군과 강남군 일대에 해당한다.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하게 그렸는데 고을의 모습이 실제로는 동서로 길게 누워 있어 위·아래로 긴 직사각형의 지도 모양에 맞추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읍치는 웅장하게 표현된 고을의 진산 淸凉山 아래에 아사와 향교만으로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도로의 표시에서는 義州大路를 굵은 선으로 표시하여 다른 도로와 구분하여 주고 있다. 黃州境으로부터 의주대로가 들어오는 입구인 駒峴은 평안도 관찰사가 교대하는 장소였다고 하며, 지도에 嶺, 峴, 古介가섞여 사용되고 있음을 통해 당시에도 고개를 다양하게 부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묘라 전하는 곳이 지도 위쪽에 표시되어 있음이 보이는데 그 진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기타 봉수의 표시가 자세하여 지도의 군사적 성격이 강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고을동남쪽에 있었던 城山堡가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이기봉)

  • 함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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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일원을 그린 지도로 전체적인 윤곽은 다소 과장되어 표현되었다. 한반도의 북부 지방이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지는 鄭尙驥의 東國地圖 이전의 지도 유형에 해당한다. 백두산 밑에 1712년에 세워진 정계비가 뚜렷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최소한 1712년 이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1757년(영조 33)에 혁파된 鏡城의 甫老知堡가 그려져 있는데 대략 18세기 전반기의 사정을 표현하고 있다. 북쪽이 아닌 북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다. 산지는 봉우리를 연결하여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고 하천은 지류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졌으나 두만강의 유로가 다소 과장되어 있다. 道內의 郡縣은 원, 鎭堡는 직사각형, 察訪驛은 노란 타원 등으로 구분하였고, 감영이 있던 함흥은 붉은 색으로 강조하였다. 함경도는 摩天嶺을 기준으로 北關과 南關으로 나누어지는데 북쪽에는 鏡城에 병영을 두고 남쪽에는 북청에 병영을 두었다. 북관에는 두만강 유역 접경지대 방어를 위해 行營을 별도로 두었다. 홍선의 도로 중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길은 점선으로 표시되었는데, 다른 곳에 비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매우 드물었음을 엿보게 한다. 지도의 여백에는 戶口, 穀總, 軍總, 함흥부 관내 행정구역 등을 기재하였고 지도의 뒷면에도 함경도 내의 관직을 수록하여 지도를 보완해주고 있다.(노혜정)

  • 창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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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부는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 마산시내, 내서읍, 창원시 창원시내, 동읍, 북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창원시 창원시내 서상동 일대에 있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읍성은 石築으로 둘레가 2,004척이다. 읍치 동남쪽에 보이는 自如?은 찰방역으로서 속역 14개를 거느리고 있었다. 자여관 좌측에 보이는 鳳林寺는 봉림산에 있는데, 新羅 執事侍郞 崔仁滾이 쓴 僧眞鏡塔碑가 있다. 향교 아래에 보이는 舊兵營은 고려 원종 때 원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이 곳에 征東行營을 두어 元帥  都가 몽골병 4,500명을 이끌고 주둔하였던 터라고 한다. 구병영 좌측에 있는 書院은 檜原書院으로 1634년(인조 12)에 정 구를 모시고, 뒤에 허 목을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孤雲臺는 崔致遠이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서원 아래에 보이는 月影臺는 최치원이 노닐던 곳으로, ''월영대''라고 손수 楷書로 써서 돌에 새긴 비가 있다.(金在完)

  • 홍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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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목은 홍성군 흥성읍, 홍북면, 홍동면, 금마면, 장곡면, 청양군 비봉면 일부를 포함하는 큰고을이었다. 읍치는 홍성읍 대교리와 오관리 부근에 있었다. 홍주목은 18세기 중엽 27개면을 거느리는 大郡으로 목사가 주재하고 있었다. 本 州 서쪽 3리 지점에 위치한白月山이 鎭山이다. 지도에는 고을의 진산 白月山을 중심으로 모든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즉, 지도는 위쪽을 북쪽으로 보고 지도를 그린 것이 아니라 고을의 진산을 중심으로그린 것이다. 白月山을 중심으로 명당을 감싼 좌청룡과 우백호가 잘 나타나 있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 읍성의 일부와 성문인 조양문이 보존되어 있다. 성안에 前營將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전영은 인조 때 세워진 것으로 屬邑은 홍주, 서천, 임천, 보령, 한산, 청양, 정산, 홍산, 비인, 남포이었다. 魯恩書院은 1676년(숙종 2)에 세워졌고, 1692년(숙종 18)에 사액을 받았다. 다른 지방의 지도와 달리 소규모의 저수지가 많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金在完)

  • 적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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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적성현이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 연천군에 흡수되었다가 1945년에 대부분의 지역이 파주군에 편입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과 연천군 백학면, 장남면 일부, 양주군 남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중심지는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가 된다. 감악산 북쪽과 임진강 유역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 지도의 아래쪽에 있는 頭只江은 임진강이다. 頭只江(임진강)에서 갈라진 三伊川은 연천군 백학면과 장남면의 경계가 되는 사미천(삼미천, 새미내)이다. 新津江(神智개, 新津浦)은 감악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임진강과 합류되는데 신지개는 적성면 구읍리의 북동쪽에 해당한다. 임진강이 아래에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縣의 북쪽에 위치한다. 감악산이 있는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 된다. 임진강가에 있어 농사에 적합한 지역이라 坪이라고 기록된 곳이 보인다. 읍치 안의 건물들을 자세히 그렸으며 紺岳山祭壇을 비롯하여 城隍壇,  祭壇, 社稷(壇) 등의 제단을 그림과 함께 표시하고 있다. 紺岳山은 서울의 三角山(북한산)을 뒷받침하여 서울의 땅기운을 북돋아준다하여 신성시되는 산으로 지금도 많은 굿이 벌어지고 있다. 이 지도에서의 산줄기는 脈을 강하게 표현하여 그렸으며 풍수 관념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가 지나가는 고개(峴)가 자세히 나와있으며 湘水驛, 丹棗驛 등의 驛이 함께 표시되어 있다. 그 밖에  芳寺, 鳳岩寺등의 사찰이 나와있다.(이현군)

  • 증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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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현은 일제시대의 강서군 증산면, 적송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며, 지금은 평안남도 증산군 북쪽 일대이다. 이 고을은 원래 江西縣의 甑山鄕이었는데 1394년(태조 3)에 현으로 승격되었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바닷가에 가까워 작은 하천밖에 발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고을의 鎭山은 國嶺山이며 이곳에서 나온 산줄기가 읍치 공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읍치에도 衙舍와 ?舍 등 아주 간단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는 등 전체적으로 아주 소략한 지도이다. 지도의 왼쪽 아래에 표시되어 있는 禿串筒과 黃筒은 ≪輿地圖書≫에 의하면 각각 주위가 7千尺, 2千尺쯤 되는 저수지이며, 이 주변에서는 논농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백 주기를 보면 해안가임에도 불구하고 논보다 밭이 훨씬 많은 곳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함경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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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일원을 그린 지도로 전체적인 윤곽은 다소 과장되어 표현되었다. 한반도의 북부 지방이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지는 鄭尙驥의 東國地圖 이전의 지도 유형에 해당한다. 백두산 밑에 1712년에 세워진 정계비가 뚜렷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최소한 1712년 이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1757년(영조 33)에 혁파된 鏡城의 甫老知堡가 그려져 있는데 대략 18세기 전반기의 사정을 표현하고 있다. 북쪽이 아닌 북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다. 산지는 봉우리를 연결하여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고 하천은 지류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졌으나 두만강의 유로가 다소 과장되어 있다. 道內의 郡縣은 원, 鎭堡는 직사각형, 察訪驛은 노란 타원 등으로 구분하였고, 감영이 있던 함흥은 붉은 색으로 강조하였다. 함경도는 摩天嶺을 기준으로 北關과 南關으로 나누어지는데 북쪽에는 鏡城에 병영을 두고 남쪽에는 북청에 병영을 두었다. 북관에는 두만강 유역 접경지대 방어를 위해 行營을 별도로 두었다. 홍선의 도로 중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길은 점선으로 표시되었는데, 다른 곳에 비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매우 드물었음을 엿보게 한다. 지도의 여백에는 戶口, 穀總, 軍總, 함흥부 관내 행정구역 등을 기재하였고 지도의 뒷면에도 함경도 내의 관직을 수록하여 지도를 보완해주고 있다.(노혜정)

  • 청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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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도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화양읍, 매전면, 이서면, 운문면, 금천면, 각남면 동부,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와 서상리 일대에 있었다. 청도군의 옛 중심지는 현 청도읍이 아니라 화양읍이다. 현 청도읍은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청도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이다. 華岳山에서내려오는 산줄기가 鎭山인 鰲山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고, 여러 갈래의 산줄기가 명당인 읍치를 감싸고있다. 또한 明堂水가 고을의 남쪽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감싸 돌아 다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오산 좌측에 위치한 高沙洞은 하늘에서 장차 바람이나 비가 오려면 먼저 알려서 운다고 한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1591년(선조 24)에 쌓은 성인데, 지금은 거의 다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아래에 보이는 省峴道는 察訪驛으로서 16개의 屬驛을 관할하였다. 읍성의 우측에 보이는 紫溪書院은 1578년(선조 11)에 건립되었고, 1661년(현종 2)에 사액되었다.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를 배향하였다. 상동면과 중동면 지역에 보이는 立岩, 孔岩, 落花岩 등은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金在完)

  • 황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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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황간현은 현재 영동군 황간면, 상촌면, 매곡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영동군 추풍령면은 본래 김천현의 황금소면인데, 190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황간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읍치는 현재 황강면 남성리 지역에 있었다. 황간향교는 본래 1394년(태조 3)에 현의 뒷산에 창건하였던 것인데, 1666년(현종 7)에 옛 향교 서쪽 2리인 토성 안으로 옮겨 세웠으며, 1752년(영조 28)에 보수하였고, 또 1901년에도 낡은 곳을  고쳤다. 향교 옆 절벽 위에 자리한 鶴駕樓는 지방유형문화재 제 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태조 초년에 縣監 河 澹이 세웠으며, 남 공이 편액을 걸고, 이남이 記文을 썼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때 縣監 孫蓄, 具長源이 이어 증수를 했다. 1716년(숙종 42) 현감 黃鍍가 기와를 보수하였고, 1808년(순조 8)에 縣監 李運永이, 그리고 1930년 郡守 金錫泳이 각각 증수하였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寒泉書院은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 冷泉에있고, 숙종 때 건립하여 영조 때 사액을 받았다. 지금은 없어졌고, 모셨던 선현은 宋時烈 한 분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松溪書院은 1570년(선조 3) 지방 유림들이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金在完)

  • 전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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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부는 지금의 전주시와 완주군의 봉동읍, 삼례읍, 이서면, 구이면, 상관면, 소양면 그리고 익산시 시내와 오산면을 포괄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전주시 중동, 경원동, 풍남동 일대에 있었다. 전주는 전라도 관찰사가 주재하던 監營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 읍성은 동학농민 전쟁 때 격전지로서 잘 알려져 있으며, 일제에 의해 1907년 모두 헐리고 지금은 남문인  南門만이 남아 있다. 읍성 안쪽의 眞殿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라 하여 이성계의 御容을 奉安한 곳으로 1422년(세종 4)에 慶基殿으로 고쳐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읍성 위쪽의 건지산은 실제로는 매우낮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고을의 鎭山이기 때문에 지도에서도 강조되어 그려져 있으며, 건지산 왼쪽의 德津堤는 전주의 지세가 북쪽이 공허하여 氣脈이 흘러나간다는 설에 의해 건지산과 가련산 사이에 인공적으로 둑을 세워 만든 호수로서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오른쪽의 威鳳山城은 1675년(숙종 1)에 성을 쌓고 行宮을 설치했던 곳으로 지도에서는 이 행궁이 別殿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察訪이 파견되어 12개의 屬驛을 거느린 參禮驛이 지도 위쪽에 館舍와 함께 표시되어 있고, 후백제의 수도였음을 알려주는 甄萱古城이 읍치 아래쪽에 보인다. 전주의 옛 이름이 비롯된 完山이 읍성 아래쪽에 거대한 바위 모양으로 그려져 있고, 그 아래쪽의 胎峯은 조선의 8대 임금 睿宗의 태가 묻힌 곳으로 겹겹이 쌓인 산줄기의 모습으로 표시되어 있다. 기타 西一道面, 南一道面, 南二道面 지역은 옛 沃野縣 지역으로서 지금의 익산시내 남쪽과 오산면 일대에 있었던 월경지이며, 利西面, 利北面, 利東面은 옛 利城縣 자리로서 지금의 김제시 청하면 부근에 있었던 월경지이다.(이기봉)

  • 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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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성부는 일제시대의 창성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창성군, 동창군 일대이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쪽으로 그렸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지금의 강남산맥이 지나간다.위쪽에는 대령강의 상류 창성강이작은 물줄기를 모아 서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압록강이 작은 지류들을 합류시키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압록강변에는 총 6개의 鎭·堡와 여러 개의 把守가 보이고 있어 국경선의 긴장감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읍성은 성문과 성곽의 굴곡까지 자세히 표시하여 그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금의 강남산맥에는 세 개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어 要衝地임을 알 수 있다. 緩項岺을 넘으면 恃寨鎭이 설치되어 있고, 小防墻嶺쪽으로는  昌城이 있다. 그 위쪽으로는  蛾山城이 보이고 있는 등 군사시설에 대한 표시가 매우 자세하다. 기타 倉庫, 烽燧, 院과 도로의 표시가 자세하며,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사찰도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읍치를 비롯하여 각 鎭堡의 군사적 내용과 유사시 적의 침입 경로에 대한 사항이 자세히 적혀 있다.(이기봉)

  • 함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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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는 함관령을 비롯한 여러 고개들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다. 함관령은 洪原縣과 咸興府 사이에 있는 산줄기를 넘는 큰 고개로 磨天嶺, 磨雲嶺, 그리고 서북쪽의 黃草嶺 등과 더불어 함경도의 군사적 요충지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에서 慶興에 이르는 關北大路가 바로 이 고개를 통과한다. 함경도는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내륙보다는 비교적 평탄한 충적지가 펼쳐진 해안을 따라 물자의 교류와 사람들의 왕래가 행해졌다. 이러한 형세로 인해 함경도로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는 북쪽의 六鎭을 거쳐 마천령, 마운령, 함관령 등을 지나 남쪽으로 향하게 된다. 이 경로를 따른다면 함관령은 함경도의 최후 방어선이 된다. 이곳이 뚫리면 鐵嶺까지는 일사천리로 내려갈 수 있고 철령을 넘으면 험준한 곳이 많지 않아 수도 서울도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함흥의 감영과 북청의 병영이 서로 의지하며 이곳을 지키게 했던 것이다. 지도상에는 관북대로가 다른 도로보다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는데, 홍원 방면에는 咸原驛, 함흥 방면에는 德山驛이 표시되어 있다. 함관령 옆의 車踰嶺은 함관령보다 낮아서 본래 행인들의 왕래가 많았으나, 함관령의 관방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조정에서 이곳을 통제하여 왕래를 금지했던 곳이다. 지도에는 도로가 그려져 있으나 여백의 주기에는 지도 제작 당시 폐지된 것으로 쓰여 있다. 이 밖에 古邑乭嶺, 中臺岩嶺, 龍林嶺, 乭長嶺, 松洞嶺, 羅屹乃嶺, 炭峴 등의 고개가 표시되어 있다. 특히 이곳은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조상들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거처했던 本宮을 비롯하여 定和陵, 義陵 등과 같은 태조 조상들의 능도 그려져 있다.(노혜정)

  • 청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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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송부의 府名은 靑寶郡과 松生縣을 합치면서 첫머리를 따서 이루어진 것이다. 청송부는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부동면, 안덕면, 현서면, 현동면, 현서면, 부동면, 부남면, 파천면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청송읍 월막리 일대에 있었다. 府의 북쪽에 우뚝 솟은 산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치에 있는 讚慶樓는 沈洪孚의 齋室이다. 이 누각에는 우암 송시열의 記가 기록되어 있고, 安平大君 瑢의 扁額이 걸려 있다. 1792년(정조 16)에 府使 韓光近이 증수하였다. 찬경루 우측에 龍纏巖이 보인다. 그 밑에 깊은 沼가 있는데, 그 소에 살던 용이 이 바위를 감고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바위 위에 望美亭이라는 정자가 위치하고 있었다. 부남면에위치한 屛岩書院은 1702년(숙종 28)에 세워져, 이 이와 김장생을 배향하였고, 1702년(숙종 28)에 사액되었다. 현내면에 위치한 松鶴書院은 숙종 1년(1675)에 세워졌으나 사액받지 못하였다. 읍치 동쪽 周房山(현 주왕산)에 위치한 大典寺는 주왕의 아들 대전이가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대전사 좌측에 보이는 松生古縣은 송생현이 조선 세종 때 靑鳧縣과 합치기 전 읍치로서 지금의 청송읍 송생리와 부동면 및 부남면에 해당한다. 송학서원위쪽에 보이는 風樹堂에서 조선 선조 때 선비 趙遵道가 짓고 글을 가르쳤다 하는데 현재는 밭으로 변해 있다.(金在完)

  • 황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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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때의 수도 북경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 궁궐을 둘러싸는 내성과 외성, 으로 이루어진 북경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지도가 수입된 중국 쪽 지도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인지, 사신의 견문기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지도의 중앙부에 그려진 높은 담벼락은 내성이다. 명나라 태조가 건립한 성곽이다. 태조는 공사가 완료되자 남경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뒤 성(내성) 밖으로 민가가 늘어나면서 이곳을 모두 둘러쌀 수 있는 성곽이 필요해졌고, 그 결과 새로운 성벽이 축조되었다. 이 성벽을 외성(=나성)이라고 하는데, 지도의 아래 쪽에 내성의 남문인 正陽門 밖으로 그려진 성곽이 그것이다.  현재는 대부분의 내성과 외성이 철거된 상태이며, 유일하게 정양문 만이 남아 있다. 내성의 안쪽으로는 자금성(황성)을 둘러싼 또하나의 담장이 보이고, 그 밖으로 수많은 관청과 도읍지의 주요 시설물들이 보인다. 정양문 위쪽으로 명나라 때의 대문임을 알려주는 大明門이 있다.(배우성)

  • 정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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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현은 지금의 정읍시 시내와 북면, 입암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연지동, 미창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아래쪽 하천은 현재의 정읍천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동진강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지도는 서쪽이 아래쪽, 동쪽이 위쪽을 향하고 있는데 고을의 주산인 鷹山이 읍치의 동쪽에 있어 읍치의 坐向을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蘆嶺은 옛날부터 전라도 남북을 잇는 중요한 要衝地였는데 고개 위쪽의 笠巖山城은 노령의 방어와 관련된 산성이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가을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의 모습이 수많은 바위가 솟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안쪽에는 지금은 내장사라 불리는 靈隱寺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의 考巖書院은 西人의 거두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 제주로 귀양갔다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사망하였기 때문에 1695년(숙종 21)송시열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같은 해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忠烈祠는1689년(숙종 15)에 세워지고 충무공 이순신 등을 배향했다.(이기봉)

  • 철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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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산부는 일제시대의 철산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북도 철산군, 동림군 서쪽 일부, 염주군 동쪽 일부 일대이다. 993년(고려 성종 12)에 서희가 개척한 江東六州의 하나로서 당시의 읍치는 西林城에 있었다. 이 고을 역시 의주대로상의 요충지로서 지도에는 각종 關防施設이 잘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雲暗山城은 1631년(인조 9)에 쌓았으며, 1684년(숙종 10)에 石城으로 개축하여 요새로 삼은 곳이다. 그 아래쪽에는 산성에서 강 입구까지 이르는 길이 300보임을 기록하여 중요한 곳임을 실감할 수 있게 했다. 지도 오른쪽 위의 佐峴에서 시작되는 의주대로는 車輦驛(?)을 지나 西林城을 통해 의주로 향한다. 1747년(영조 23)에 의주대로상의 서림성 옛 터에도 石城을 쌓고 僉使를 파견하여 鎭을 설치하였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 아래쪽에는 宣沙浦鎭과 이 鎭에 소속된 배의 종류가 자세히 쓰여져 있다. 읍치 아래쪽의 架山古城은 조선 태종 때 성을 쌓아 읍치로 삼았던 곳인데 고을 사람들이 너무 높고 험하여 꺼렸기 때문에 세조 때 평지로 옮겼다고 한다. 이 외에도 요충지답게 고개와 봉수의 표시가 매우 자세함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고을에는 지도 아래쪽의  島와 그 조금 위쪽에 표시된 場內에 목장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말들을 가두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土城이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함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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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부는 북쪽으로는 六鎭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바닷가 고을인 정평 영흥 문천 등을 거쳐 철령으로 통하는 요충에 위치하여 행정 군사의 중심지이자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문화적으로도 중시되던 곳이었다.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 주북면, 기곡면, 상기천면, 하기천면, 하조양면, 상조양면, 천원면, 천서면, 주서면, 주지면, 연포면, 삼평면, 운전면, 서호면, 동주동면, 북주동면, 덕천면, 덕산면과 신흥군 동고천면, 원평면, 가평면, 서고천면, 영고면, 하원천면, 상원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함흥시, 신흥군, 영광군, 함주군 지역이다. 읍성은 1453년(단종 원년)에 축성된 것인데 이후에 개축을 계속하여 이 시기에도 문루와 성벽이 선명하게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조선왕조의 발상지답게 태조 이성계와 그의 조상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표시되어 있다. 남문  밖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곳인 本宮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고 동편에는 그 조상의 陵寢도 산줄기를 따라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定和陵은 桓祖와 그의 비인 懿惠王后의 능이고, 義陵은 度祖, 純陵은 度祖의 妃 敬順王后의 능이다. 정화릉 부근의 慶興殿은 태조의 옛 저택이며 定宗과 太宗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雲田社에는 태조가 어릴 때 격구를 했던 擊毬亭도 그려져 있다. 해안의 都連浦에는 목장이 경계선과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이 목장은 1730년(영조 6) 水災로 인해 폐지되었다. 그 옆에는 제단이 표시되었는데 이것은 국초부터 太白星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노혜정)

  • 청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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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하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과 송라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청하면 덕성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呼鶴山이 고을의 鎭山이다.읍성은 1427년(세종 9)에 縣監 閔 寅의 청에 따라 안동, 봉화, 풍기, 영천 등지의 장정들을 모아서 돌로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읍치 북쪽의 松羅?은 7개의 屬驛을 거느린 송라찰방역의 관아 건물이다. 송라관 위쪽에 보이는 鶴山書院은 1692년(숙종 18)에 세워서 李彦適을 봉안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학산서원 좌측에 위치한 寶鏡寺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절이다. 745년(신라 경덕왕 4)에 南岳門人 哲敏이 중수하였으며, 1023년(고려 현종 14)에 金堂塔을 세웠고, 1221년(고려 고종 8)에 圓眞國師가 사리탑과 사적비를 세웠다. 현재 원진국사비는 보물 제 251호 지정되어 있다. 보경사 왼쪽에 보이는 神龜山에 세 마리의 용이 웅덩이에 있는데 가뭄에 비를 빌면 응했다고 한다. 신귀산 좌측에 보이는 龍湫는 폭포가 내리질러서 깊은 못를 이루었는데, 그 속에 용이 산다 하며,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해안 가에 보이는 釣鏡臺에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앞에 있는 동해 바다가 거울같이 비춰 주므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金在完)

  • 회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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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회덕현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와 유성구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었다. 회덕현의 읍치는 경부고속도로변의 대덕구 읍내동에 있었다. 회덕현은 갑천 유역의 화강암지대의 거대한 침식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을의 진산은 현 동쪽 3리에 위치한 鷄足山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산은 봉우리가 특이하게 뛰어나고, 날이 가물 때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지도에 보이는 계족산 봉수대는 동쪽으로는 옥천군 環山 봉수대와 서로 응하고, 북쪽으로는 문의현 所伊山 봉수대와 응한다. 崇賢書院은 1609년(광해군 1)에 중건하였고, 그 해에 사액을 받았다. 진산 계족산에서 내려 온 산줄기가 명당인 관사에서 穴을 이루고 있으나 남쪽에 案山이 없어서 일부러 造山을 만들어 허한 것을 보충하였다. 擇里志에 따르면 주민들의 속담에 一 유성 二 경천 三 이인 四 유구라고 하는데 회덕현의 유성이 부근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의미이다.(金在完)

  • 죽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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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일죽면, 죽산면, 용인시 백암면, 원삼면 일부지역이 이 지도의 범위에 해당하며 중심지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이다. 1434년(세종 16)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으며 1914년에 용인군과 안성군에 편입되었다.縣의 앞쪽을 흐르는 竹山川이 天民川(지금의 청미천)과 만나 驪州를 지나 남한강으로 들어가며 縣의 중심지는 죽산천과 飛鳳山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도에서는 다른 경기도 지도에서 잘 표시되지 않고 있는 풍수 개념인 ''案山''을 표시하고 있다. 비봉산 북쪽의 鼎陪山에는 석굴이 있고 그 안에 흰 뱀이 있어 비가 많이오면 청미천으로 내려와 사람을 해친다는 내용이 지도의 주기에 나타나고 있다. 서울, 안성, 광혜원, 돌원(乭院)등으로 향하는 大路와 陰竹, 利川, 水原 등으로 향하는 中路가 자세히 표현되어 있으며 각각의 길이 지나는 고개(峴)의 명칭을 표시하고 있다. 지도 위쪽에 적색으로 표시된 봉수는 巾之山에 있는 것으로 지도 아래에 보이는 충주 望夷山烽臺에서 와서 용인 石城山으로 이어진다. 古山城은 竹州古城으로 1226년(고려 高宗 13)에 竹州防護別監 宋文胄가 몽고와 싸워 이겼던 곳으로 죽산면 매산리에 위치한다. 七長寺는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 아래에 있는 것으로 고려 말에 倭寇를 피하여 충주 開天寺로부터 이곳으로 史籍을 옮겨 보관하였다. 그 밖에 五層石塔, 彌勒 등의 불교 관련 유적이 표시되어 있으며 天朝副摠兵吳惟忠仁勇淸德碑가 표시되어 있는데 吳惟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싸웠던 명나라 장군이다.(이현군)

  • 태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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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천현은 일제시대의 태천군에 해당하며 지금도 평안북도 태천군 일대이다. 龜城, 朔州, 昌城으로부터 들어온 세 물줄기가 읍치 앞쪽에서 모여 串赤江을 이루고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이 串赤江은 바다 입구에서 청천강과 만나는 대령강의 상류로서 당시에는 大定江으로 불렸다. 강의 하류 쪽에 세 개의 근원과 대정강에 합류하는 내용을 적어놓아 지도 이용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오른쪽 여백주기에는 읍치 5리 거리에 內江 檢岩灘이 있으며 물이 불으면 배로 건넌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읍치는 朔州로부터 들어온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여 있으며 주변 고을까지의 거리가 자세히 적혀 있다. 고을의 主脈이 읍치 서쪽에 있는 烏山으로 나오는데 그 위치가 독특하여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오산 위쪽에 있는 籠吾里山城은 ≪輿地圖書≫에 의하면 여진 장수 莫德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성벽의 돌 위에 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타 여백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었던 바로 동쪽의 雲山 고을과는 달리 논도 상당수 존재함을 알 수 있다.(이기봉)

  • 홍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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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원현은 南關의 중앙에 위치하여 북쪽으로는 北靑, 남쪽으로는 함흥과 접하고 있는 해안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홍원군 주익면, 경포면, 운포면, 용원면, 용천면, 호현면, 희현면, 학천면, 용운면, 보청면, 동퇴조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도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하며 남쪽의 일부는 낙원군으로 편입되어 있다. 비교적 작은 고을로 고을의 모습도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있었으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咸原驛을 통과하여 咸關嶺을 넘는 도로는 이 고을의 대로이고 그 옆 車踰嶺에 이어지는 도로는 소로에 해당한다. 이 두 고개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곳이다. 해안의 穿島에는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어서 파도가 넘나드는데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이 일대 최고로 칭해졌다. 또한 馬養島에는 이름에 걸맞게 목장이 있었는데 文川監牧官에 속해 있었다. 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목장의 둘레가 90리이고 기르던 말이 97필이었다.(노혜정)

  • 초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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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계군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대양면 백암리·오산리, 덕곡면, 율곡면 동부, 적중면, 쌍책면, 청덕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청계산이다. 지도에는 汎峯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초계현은 초계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초계분지는 동서방향의 길이가 약 6km, 남북방향의 너비가 약 3km에 달한다. 輿地圖書의 形勝條에서 초계군을 ''四山八水''라고 묘사하고 있다. 즉,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여덟 갈래의 물이 마을을 감싸안으면서 흐른다"고 한 것으로, 분지지형을 묘사한 것이다. 읍치 동쪽 낙동강 변에 위치한 甘勿倉津은 창녕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면서 초계군과 합천군의 稅穀을 실어내는 포구였다. 또한 이 곳에서 주민들의 곡물과 어염이 거래되었다. 읍치 북동쪽 덕곡면에 위치한 巢鶴寺는 소학산 중턱에 있었는데, 승려들이 중방면 留鶴寺로 옮겨 가면서 폐사되었다. 서원으로는 淸溪書院과 松原書院이 있으나 사액받지 못한 서원으로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司倉 부근에 있는 新淵은 무릉 못이라고 불리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그 좌측에 보이는 鳳栖菴도 지금은 없어지고, 암자터만 남아 있다. 1940년 경 이 곳에서 쇠부처가 발견되었다 한다.(金在完)

  • 지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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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砥峴縣으로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단월면, 양동면, 용문면, 청운면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며 陽根과 합해져 지금은 양평군에 포함되어있다. 현재의 양평군 지제면 지평리가 縣의 중심지였다. 읍치를 주위의 산들이 편안하게 둘러싼 형태로 산줄기를 표현하였으며 건물들도 읍치를 향하게 그리고 있다. 남한강으로 흐르는 이 지역의 하천들이 남한강과 합류되는 지점은 水破라고 적어놓고 있다. 서울에서 平海로 가는 大路상에 위치하며 陽根과 洪川 사이에 해당한다. 육로가 지나가는 주요한 고개(峴·峙)를 지도에 자세히 표시하고 있으며 田谷驛, 白冬驛, 之德院 등의 역원이 존재하였다. 縣의 북쪽으로는 倉이 있다. 雲溪書院(용문면 덕촌리)은 1594년(선조 27)에 창건하여 1714년(숙종 40)에 사액하였으며 趙晟과 趙昱을 제사지냈다. 이 밖에 齋宮, 농사와 관련된 堤堰, 많은 사찰과 암자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의 토산품으로 磁器와 陶器가 지도의 여백에 기록되어 있다.(이현군)

  • 토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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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兎山縣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황해도 금천군 토산면, 서천면, 합탄면, 외류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북도 토산군 대부분 지역, 강원도 철원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토산군 토산면 월성리 일대에 있었다. 토산현은 고려 현종조에 長湍縣에 속했다가, 후에 옮겨서 開城에 속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감무를 현감으로 하고 황해도에 예속시켰다. 진산은 토산으로 읍명과 일치한다. <大東輿地圖>에서는 북쪽 鶴峯山에서 내려 온 大幹에서 나온 산 가지가 읍치 북쪽의 松耳山에 이르러 멈춘 형국으로 나타나 있다. 산들이 높이 솟아 읍치를 사면으로 둘러싼 형세이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東大川은 東津이라고도 불리는데, 삭령과 통하는 나루터이다. 토산현의 미곡이 동진으로 운반되어 모아진 다음, 선적되어 삭령 구항포와 연천 징파도를 경유하여 서울까지 운반되었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龍馬淵과 龍淵은 하천 유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하천에 의하여 형성된 호수로 농업 관개 용수 공급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읍치 우측에 보이는 三聖臺는 읍치에서 동쪽으로 2리 떨어져 있는데, 절벽 스스로 3개의 臺를 이루었고, 절벽이 강에 임해 있고, 臺 위에 작은 정자가 있었다.(金在完)

  • 홍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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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년(고려 현종 9)에 홍천으로 이름을 고쳤다. 현재의 강원도 홍천군에서 내면(강릉 땅)을 제외한 홍천읍, 서면, 북방면, 남면, 동면, 화촌면, 두촌면, 내촌면, 서석면 일대의 지역으로 麟蹄, 春川, 橫城, 砥平과 접하고 있다. 홍천읍내가 邑治에 해당하였다. 客舍, 衙舍, 倉, 鄕校가 邑治에 표시되어 있다. 장남천, 내촌천 등의 물을 모아 홍천강이 縣의 중심부를흐르고 있다. 홍천강은 西流하여 북한강과 합하게 된다. 홍천강가(홍천읍 갈마곡리)에 泛波亭, 觀水堂이 그려져 있다. 縣倉 이외에도 강을 끼고 東倉, 西倉이 있었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었고 경로상의 고개 이름을 적었다. 邑治를 기준으로 泉甘驛(두촌면 역내리)을 지나는 길은  蹄로 통하며 蓮峰驛(홍천읍 연봉리), 陽德院(남면 양덕원리)을 지나는 길은 砥平을 거쳐 서울로 통한다. 위의 역원을 지나 인제, 홍천, 지평과 통하는 이 길은 大路에 속한다. 사찰로는 龍水庵, 成佛庵, 水墮寺 등이 그려져 있다. 공작산 아래 있는 절인 水墮寺(동면 덕치리)에는 1364년에 만든 鐘과 石塔이 있으며 月印釋譜의 원본 일부가 있다고 한다.(이현군)

  • 칠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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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곡부는 본래 星州 屬縣 八 縣이었다. 1640년(인조 18)에 架山山城을 쌓았는데, 읍치와의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칠곡도호부를 두었다. 칠곡부는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동명면, 지천면, 가산면 동부, 대구광역시 대구 시내 팔거천 이서의 북구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대구 시내 북구 읍내동에 있었다. 읍치가 산성 안에 위치한 점이 특이하다. 架山城은 1640년(인조 18)에 관찰사 이명웅이 쌓은 성이다. 1700년(숙종 26) 관찰사 이세재가 돌로 외성을 쌓고, 동·서·암문과 성문을 내고 성문의 樓額에 ''嶺南 第一關防''이라는 현액을 걸었다. 그 후 1741년(영조 17)에 관찰사 정익하가 문루를 세웠다. 내성에는 동·서·남·북의 4砲樓와 將臺, 鎭南樓가 있었고, 외성에는 南門樓와 雲帥軒이 있었다. 성안에보이는 가산암은 깎아지른 듯이 우뚝 서 있는데, 위에는 천여 명이 앉을 수 있으며,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한다. 道村面에 있는 書院(泗陽書院)은 본래 1651년(효종 2)에 문주면(현 대구시 북구)에 세워져 정 구를 主享하고, 이윤우를 從享하였는데, 1694년(숙종 20)에 지도상의 위치(칠곡군 지관읍 신리)이 곳으로 옮기어 이원정을 추배하였다. 지도 아래 하북면에위치한 松林寺는 신라 내물왕 때 세운 절로, 5층탑이 있는데, 1958년 수리할 때에 사리와 유물이 나와 국보 189호로 지정되었다.(金在完)

  • 진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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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8년(조선 태조 7)에 충청도에서경기도로 이속되었으며 경기도 평택시 시내와 진위면, 팽성읍, 고덕면, 서탄면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현재 평택시에서 청북면, 안중면, 오성면, 현덕면, 포승면 일대는 제외된다.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가 縣의 중심지가 된다. 지도에 표시된 鄕校는 봉남리 267번지에 해당한다. 邑治(城隍堂, 客舍, 衙舍, 社壇, 鄕校)와 도로, 하천, 산 정도만 표시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은 지도에 자세하게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에서 桂陽海口(계양은 지금의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이다)로 표시된 곳은 아산만과 연결되는 곳이다. 海口 부근에 海倉이 있는데 배를 이용하여 稅穀을 실어 나르기 위한 저장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振威縣은 서울에서 統營 및 忠淸水營으로 가는 大路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평택, 양성, 용인, 수원 등과 교류가 잦은 지역이다. 지도에는 각 도로를 표시하면서 각 도로가 통과하는 고개(峴)들의 이름을 적고 있다. 이와 함께 도로변에 위치한 葛院酒幕, 靑好酒幕 등의 주막을 표시해 주고 있다.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長好驛(진위면 봉남리) 등의 역원이 여백에 기록되어 있다.(이현군)

  • 평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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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평산군, 남천읍, 평산면, 금암면, 서봉면, 신암면, 인산면, 문무면, 안성면, 고지면, 세곡면, 적암면, 마산면, 용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산군의 대부분 지역, 린산군 대부분 지역, 봉천군 일부지역, 서흥군 일부지역이다.府의 서쪽 60리에 위치한 滅惡山이 이 고을의 진산이다. 지도에는 매우 웅장하게 표현되어 있다. 평산부는 읍치 서쪽에 예성강이 흘러 수운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고 있다. 평산부의 전세곡은 지도상의 금암면 猪灘에서 조운선에 실려 서울로 운반되었다. 지도에서 예성강 서안에 위치한 산성은 太白山城이다. 이 산성은 의주대로변에 위치하여 적을 막을 수 있고, 또한 예성강을 거슬러 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고, 아울러 조운선을 보호할 수 있는 유리한 곳에 입지하고 있다. 762년(신라 경덕왕 21)에 쌓았으며 후에 城隍山城이라 일컬었다. 조선조 영조 때 터를 넓히고 고쳐 쌓았다. 세곡면에 보이는 東陽書院은 1650년(효종 1)에 세워지고, 1687년(숙종 13)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동양서원 부근에 위치한 "溫泉은 돌난간으로 되어 있는 浴室을 갖추고 있는데, 물이 몹시 뜨겁다"고 한다. 고려 문종 이후 여러 왕들이 이 곳으로 행차하여 목욕을 즐겼다고 전한다. 안성면에 보이는  秀館은 중국 사신이 머무르던 곳이다.

  • 회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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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령부는 두만강 밑에서부터 동남쪽으로 길게 늘어져 동해안까지 이르는 고을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시되던 곳이기도 하다. 해방 이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 벽성면, 운두면, 봉의면, 용흥면, 화풍면, 팔을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회령시로 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두만강변의 鰲山인데 읍치를 감싸듯이 그려져 있다. 읍치 서남쪽으로는 1509년(중종 4)에 처음 설치된 甫乙下鎭이 포진해 있고 그 옆에는 雲頭城이 그려져 있다. 운두성은 金나라의 五國城으로 오인되어 五國山城으로도 불렸다. 고을의 북쪽에는 皇帝塚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청나라 穆克登이 조선과의 국경을 정할 때, 이 무덤에서 ''宋皇之墓''라는 글자가 출토되어 이후 皇帝塚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두만강 변에는 파수처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봉수 또한 잘 나타나 있다. 해안가에는 潟湖인 眞珠池도 그려져 있는데 이곳에서 진주가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노혜정)

  • 칠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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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원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칠북면, 칠서면, 마산시 구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칠원면 구성리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 위치한 靑龍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성은 둥근 형태의 돌로 쌓은 성이다. 성 안에 보이는 擇勝亭은 客館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감 이 숙규가 세운 것이다. 상리면에 보이는 書院은 德淵書院인데,  周世鵬을 배향하였고,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었다. 부근 계내리에 주세붕묘가, 무릉리에 주세붕영당이 있다. 서면에 보이는 景釀臺는 우질포 서안 용주암 동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불쑥 솟은 가운데 꼭대기가 평탄하여 손바닥 같아 1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옛날에 그 위에정자가 있었으며, 역대 지방관들이 巫祭를 지냈다고 한다. 昌仁驛과靈浦驛은 모두 自如道의 屬驛이다. 龜山鎭은 칠원현의 월경지에 있는 鎭으로 첨사가 주재하였다. 칠원이 내륙에 위치한 군현으로 어염의 확보를 위해 해안지역에 월경지를 소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安谷山烽燧는 남쪽으로 창원부의 성황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영산현 봉산에 응한다.(金在完)

  • 창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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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평현은 지금의 담양군 수북면, 고서면, 창평면, 남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창평면창평리에 있었다. 현의 북쪽으로 영산강이 흐르고 그 지류 증암천이 남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모습과 왼쪽 아래쪽의 무등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가 잘 그려져 있다. 지도 위쪽의 장북면과 장남면은 長平部曲의 자리로서 지금의 담양군 수북면 일대이고, 甲鄕面은 甲鄕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대전면 갑향리 일대로서 모두 창평의 越境地에 해당한다. 읍치 북쪽의 書院은 松江書院으로서 선조 때 서인의 거두였고, 關東別曲, 思美人曲 등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 宋江 鄭澈(1536-1593)을 배향하여 1706년(숙종 32)에 賜額받았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건축미를 잘 보여주고 있어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瀟 亭과 息泳亭의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평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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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는 지금의 평양특별시·남포직할시·평안남도·평안북도·랑림군을 제외한 자강도·량강도 김형직군에 해당한다. 平安道의 이름은 平壤과 安州를 합해서 만든 것이다. 평안도에는 총 42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지도에서는 원 안에 표시하였다. 기타 우예, 자성, 여연, 무창 등의 폐사군도 관장하였다. 관찰사 소재지인 監營은 평양에 있었으며 兵營은 안주에 있었다. 지도에서 직사각형 안에 표시된 것은 鎭堡로서 청나라와의 국경선에 해당하는 압록강변과 단종과 세조 때 四郡이 혁파된 후 최북단의 경계를 맡았던 강계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 또한 압록강을 넘은 적에 대한 1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던 지금의 강남산맥 아래·위쪽과 해안가에도 설치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해안가 쪽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대대적으로 修築된 산성의 모습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어 청나라에 대한 위기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최고의 천연요새로 알려진 영변의 鐵甕城도 보이고 있다. 타원형의 노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평안도 북쪽으로는 압록강이, 가운데에는 청천강이, 대동강이 흐르고 있다. 서해에는 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크기는 고려하지 않았으며,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도록 그렸다. 한편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청나라 땅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산줄기와 강줄기 및 마을 이름을 적어 놓았다. 이것은 청나라 땅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청나라의 침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의주로부터 압록강을 넘어 표시된 붉은 선의 도로는 使臣이 오고가던 使臣路이다.(이기봉)

  • 회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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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회양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고, 세조 때에 鎭을 두어 북방경비의 요충지로 삼았다. 현재 북한의 강원도 금강군, 회양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는회양군의 회양읍내리가 된다. 新津江이 邑治 서쪽을 지나는데, 남쪽으로 蓮松浦가 표시되어 있다.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이 되는데 이 지역에 대해 ≪동국여지승람≫에서 ''겹친 언덕, 중복된 재가 그윽하게 깊고, 매우 험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지도에서도 여러 고개(岺)가 등장하고 있으며 육로망은 이곳들을 지나게 된다. 동남쪽에 금강산이 나타나는데 산수화 기법으로 봉우리들을 그렸다. 금강산을 끼고 正陽寺, 表訓寺, 摩阿衍, 長安寺 등의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금강산 서쪽의 斷髮岺은 俗人이 이 재(嶺)를 올라 금강산을 본 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한다하여 붙인 이름으로 전한다. 表訓寺는 신라의 승려 能仁, 神林, 表訓 등이 이 절을 처음 지었으며 명나라 황제가 돈과 명주를 시주하였다고 한다. 長安寺는 法堂, 佛殿, 佛像을 모두 중국 기술자가 제작하였으며 신라 법흥왕 때 처음으로 세웠다. 회양부에 속하는 和川, 嵐谷, 水入, 文登, 長楊面은 과거에 縣이 있던 곳으로 이 지도에서 각각 창고가 설치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읍치 북쪽 義?岺이 鎭山이며 금강산 남쪽으로 黃腸禁山이 표시되어 있다. 邑治는 성곽 없이 客舍, 衙舍, 倉, 鄕校를 표시하였다. 서북쪽의 鐵嶺은 한반도 동북 방향의 중요한 통로가 되는 곳으로 大路가 지나는 길목이다. 1222년(고려 고종 9)에 이곳에 능선을 따라 城을 쌓고 관문을 만들었다. 육로상에 銀溪驛, 新安驛이 표시되었고 邑治 서쪽으로 네 개의 烽燧가 연이어 나타난다.(이현군)

  •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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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統營의 본래 명칭은 右水營兼三道統制營이다. 조선 초에 우수영을 거제의 오아포에 두었다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에 처음으로 통제사를 두어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관장하게 하고 이순신을 통제사로 삼았다. 1602년(선조 35)에는 통제영을 고성현의 頭龍浦로 옮겼다. 두룡포가 바로 오늘의 통영이다. 통영은 지금의 통영시 통영시내, 산양읍, 한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통영시내 북신동, 문화동, 태평동, 정량동, 명정동에 걸쳐 있었다. 지도에 보이는 통영 읍성은 1678년(숙종 4)에 통제사 尹天賚가 쌓았던 것으로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 13,830척, 높이 9척이며, 동에는 春主門, 서에는 金肅門, 남에는 淸南樓, 북에는 北樓가 있었다. 지금은 모두 헐어지고 없다. 읍성에 있는 洗兵?은 통제사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1604년(선조 37)에 통제사 이경준이 이순신 장군의 전승을기념하기 위해 창건하고, 두 보의 시 구절을 따서 이름을 세병관이라 하였다. 거제현에 있었던 통제영을 이 곳으로 옮기고 본영으로 썼으며, 이 때 이름도 통영이라 하였다. 1645년(인조 22)에 통제사 김응해가 다시 크게 고쳤다. 현재 보물 제 2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문 밖에 있는 건물이 충렬사이다.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606년(선조 39)에 통제사 이운룡이 나라의 명을 받들어 세웠다. 통영을 중심으로 거리에 따라 郡縣과 鎭營을 배치하고 있는 점이 현대 정거방위도법의 지도를 연상시킨다. 섬의 형태도 실제 항해할 때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섬의 형태로 그리고 있다.(金在完)

  • 통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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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고 1694년(숙종 20)에 부로 승격하였다. 1914년에 김포군에 합쳐졌으며 지금은 김포시에 포함되어 있다.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 대곶면, 양촌면, 월곶면, 하성면 일대이다. 중심지는 김포시 월곶면 군하리로 通津府의 터는 지금 월곶면 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지도의 위쪽은 한강이 임진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나가게 되는 곳으로 지도에 阻江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祖江의 誤記이다. 한강의 근원이 된다하여 祖江이라 부르는 곳이다. 지도의 왼쪽은 강화도와 통진 사이를 흐르는 바다이며 甲串(大)津을 통해 통진에서 강화도로 연결되었다. 지금은 강화대교가 과거 갑곶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文殊山城은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의 산성으로 고려 때 몽고군과 전투를 하였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프랑스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이현군)

  • 평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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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부는 일제시대의 평양부, 대동군 전체와 강서군 북쪽, 평원군 남쪽 등 서해안까지 뻗어 있는 큰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평양특별시 부근에 해당한다. 평양은 평안도 관찰사 소재지였으며 고조선시대부터 각종 역사적 사건이 응집되어 있는 현장이었다. 邑城의 표시가 두드러진데 한가운데에 內城이, 서북쪽으로는 1714년(숙종 40)에 쌓은 北城이 있으며 성곽과 문의 표시가 자세하다. 내성 남쪽으로는 箕子朝鮮 때 쌓았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축성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外城이 표시되어 있다. 성곽이 이미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그 자취와 성문만을 표시하고 있다. 외성 안쪽에는 箕子井과 기자조선 때의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井田이 표시되어 있지만 이것 또한 많은 논란의 와중에 있다. 내성의 안쪽에는 箕子를 제사지내던 崇仁殿과 檀君을 제사지내던 檀君殿(숭령전)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어 조선시대 역사관의 이중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내성 북쪽에는 箕子墓의 표시도 보인다. 北城 안쪽에 있는 기린굴과 그 오른쪽에 있는 文武井, 아래쪽에 있는 朝天石은 고구려의 시조 東明王과 관련된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인데 고구려의 초기 근거지가 평양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되고 있지는 않다. 기린굴 오른쪽에는 고구려 때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는 英明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때禪敎兩宗 36본산의 하나였다. 그 옆에는 고구려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석탑으로 알려져 있는 八角五層石塔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동북쪽에 보이는 長安城은 고구려의 평원왕(559-590) 때 安鶴宮을 건설하여 잠시 宮城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한편 남북 분단 이후 망향의 설움을 노래한 가요를 통해 우리의 귀에 익숙한 모란봉(牧丹峰)·乙密臺·錦繡山·浮碧樓 등이 北城 부근에 표시되어 있어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성곽의 남쪽으로는 우리 나라 역사 속에서 浿水 또는 浿江으로 등장하는 대동강의 모습이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대동강 하류에는 이 고을에 유일하게 있었던 保山鎭이 석축의 성곽과 천연 요새의 모습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횡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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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橫川縣으로 1414년(태종 14)에 洪川과 발음이 비슷하다하여 횡성으로 고쳤다. 현재의 강원도 횡성군에서 서원면과 강림면(원주 땅)을 제외한 청일면, 갑천면, 둔내면, 안흥면, 우천면, 횡성읍, 공근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그 중심지는 횡성읍내가 된다. 客舍, 衙舍, 倉庫, 鄕校를 표시하였다. 지도에서 前川, 北川이 縣 앞에서 만나는데 北川은 지금의 蟾江 상류에 해당한다. 서쪽 屯內面의 강은 주천강이다.縣 북쪽의 泰 山은 옛날 辰韓의 泰 王이 신라 시조 박혁거세에 쫓기어 이곳에 머물면서 군사를 훈련하였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 때 갑옷을 냇물에 씻었는데 이를 따서 이 지역이 횡성의 甲川面이 되었다 한다. 奉福寺(갑천면 신대리)는 1420년(신라 진흥왕 23)에 세운 절이며 이외에 南山寺(우천면 남산리)가 지도에 보인다. 寒江臺(寒岡臺, 횡성읍 반곡리)는 섬강가에 있는 반석으로 寒岡 鄭逑(1543-1620)가 은거하며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주천강가에 楡谷倉, 현 북쪽 北川(섬강)가에 外倉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하였으며 경로상의 고개(峙·峴)의 명칭을 기록하였다. 葛豊驛(횡성읍 갈풍리)을 통하는 길은 原州, 砥平을 거쳐 서울로 이어지고 蒼峯驛(공근면 창봉리)은 洪川과 연결되는 길에 있으며 烏原驛, 安興驛(안흥면 안흥리)은 강릉과 통하는 길에 있다.(이현군)

  • 풍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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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기현의 명칭은 조선 초에 基川縣에서 ''基''자를, 殷豊縣에서 ''豊''자를 따서 지어진 것이다. 풍기현은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상리면, 하리면, 봉현면, 안정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풍기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 금계리에 있었던 풍기향교는 1542년(중종 37)에 군수 주세붕이 지도상의 위치(현재 영주시 풍기읍 교촌리)로 옮겼는데, 1692년(숙종 18)에 다시 옛터로 옮겼다가, 1735년(영조 11)에 또 다시 교촌리로 옮겼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愚谷書院은 1708년(숙종 34)에 창건되어, 류운룡, 황 섬, 이 준, 김광엽을 배향하였는데,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향교 우측에 보이는 郁陽書院은 1662년(현종 3)에 창건되어 이 황과 황준량을 배향하였는데 1869년(고종 6)에 헐렸다. 昌樂驛은 찰방역으로 속역 9개를 거느리고 있었다. 지도의 좌측 상단에 보이는 옛 은풍현의 鳴鳳山에는 조선 문종대왕의 胎가 묻혀 있다. 지도의 상단에 보이는 竹嶺은 영남에서 호서로 통하는 대로가 통하는 고개로 158년(신라 아달라왕 5)에 처음으로 길이 열렸다.(金在完)

  • 파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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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는 坡平縣과 瑞原縣을 합한 것으로 현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문산읍, 월롱면, 조리면, 법원읍, 파주읍, 파평면 일대에 해당하며 그 중심지는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이다.임진강의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臨津渡를 비롯한 나루터가 발달하였고 임진강을 따라 花石亭(파평면 율곡리) 등 亭子들이 연이어 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읍치 안의 건물들을 상세히 그렸으며 다른 경기도 군현지도에 잘 나타나지 않는 軍器(庫)가 이 지도에는 등장하고 있다. 지도에 나타난 坡山書院(파평면 눌로리)은 1568년(선조 원년)에 세워져 1650년(효종 원년)에 사액된 것으로 聽松 成守琛과 그의 아들 牛溪 成渾 등을 배향하였다. 파주읍 향양리에 성혼의 墓가 있는데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紫雲書院(법원읍 동문리)은 1615년(광해군 7)에 창건하여 栗谷 李珥를 배향하였으며 주위에 이율곡 묘와 신사임당 묘가 있다. 長陵(이 지도에서는 문산읍 운천리에 해당하며 현재는 탄현면 갈현리로 이장된 상태)은 조선 인조와 인열왕후 청주 한씨의 능이며 恭陵(조리면 장곡리)은 조선 예종의 계비 장순왕후의 능이며 順陵(조리면 봉일천리)은 성종의 비 공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이 밖에 恭肅公墓, 孝章墓 등이 있다.(이현군)

  • 평양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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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부는 일제시대의 평양부, 대동군 전체와 강서군 북쪽, 평원군 남쪽 등 서해안까지 뻗어 있는 큰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평양특별시 부근에 해당한다. 평양은 평안도 관찰사 소재지였으며 고조선시대부터 각종 역사적 사건이 응집되어 있는 현장이었다. 邑城의 표시가 두드러진데 한가운데에 內城이, 서북쪽으로는 1714년(숙종 40)에 쌓은 北城이 있으며 성곽과 문의 표시가 자세하다. 내성 남쪽으로는 箕子朝鮮 때 쌓았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축성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外城이 표시되어 있다. 성곽이 이미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그 자취와 성문만을 표시하고 있다. 외성 안쪽에는 箕子井과 기자조선 때의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井田이 표시되어 있지만 이것 또한 많은 논란의 와중에 있다. 내성의 안쪽에는 箕子를 제사지내던 崇仁殿과 檀君을 제사지내던 檀君殿(숭령전)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어 조선시대 역사관의 이중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내성 북쪽에는 箕子墓의 표시도 보인다. 北城 안쪽에 있는 기린굴과 그 오른쪽에 있는 文武井, 아래쪽에 있는 朝天石은 고구려의 시조 東明王과 관련된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인데 고구려의 초기 근거지가 평양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되고 있지는 않다. 기린굴 오른쪽에는 고구려 때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는 英明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때禪敎兩宗 36본산의 하나였다. 그 옆에는 고구려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석탑으로 알려져 있는 八角五層石塔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동북쪽에 보이는 長安城은 고구려의 평원왕(559-590) 때 安鶴宮을 건설하여 잠시 宮城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한편 남북 분단 이후 망향의 설움을 노래한 가요를 통해 우리의 귀에 익숙한 모란봉(牧丹峰)·乙密臺·錦繡山·浮碧樓 등이 北城 부근에 표시되어 있어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성곽의 남쪽으로는 우리 나라 역사 속에서 浿水 또는 浿江으로 등장하는 대동강의 모습이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대동강 하류에는 이 고을에 유일하게 있었던 保山鎭이 석축의 성곽과 천연 요새의 모습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흡곡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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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때에 흡곡으로 바뀌었으며 통천에 병합과 분리과정을 겪다가 1914년에 통천에 병합되어 지금에 이른다. 동쪽으로는 東海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安邊, 淮陽, 남쪽으로는 通川과 경계를 이룬다. 현재 북한 강원도 통천군의 북쪽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비교적 작은 縣으로 이 지도 역시 간략하게 그렸다. 邑治에는 성곽이 있었으나 표시하지 않았고 客舍, 衙舍, 倉을 그렸으며 동쪽으로 鄕校가 있는데 邑治와 鄕校를 별개의 形局처럼 보이게 묘사하였다. 향교 뒤에 표시된 博山이 鎭山이다. 읍치 북쪽에 侍中臺가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긴 멧부리가 뻗어나가다가 동으로 서렸는데 3면이 모두 큰 호수이다. 밖으로 큰 바다가 둘렀으며 작은 섬이 바다 가운데 들어선 것이 일곱이 있다. 경치가 鏡浦臺에 뒤지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는 바다 가운데 栗島를 표시하였으며 서쪽으로는 長在湖를 그렸다. 적색의 도로에 大路, 小路 표시를 해 두었다. 읍치 남쪽에 貞德驛이 있었다. 지도에서 馬峴峙는 안변으로, 文峙峴는 통천으로 통하는 길목이다. 하나의 고개이름에 峴과 峙를 동시에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남쪽 해안에 봉수터로 舊烽臺가 표시되어 있으며 사찰로는 華藏菴이 있었다.(이현군)

  • 하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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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부는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악양면, 화개면, 적량면, 횡천면, 북천면 방화리·사평리, 양보면, 고전면, 진교면 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읍치는 하동읍 두곡리 일대에있었다. 옛 치소는 양경산 밑의 구읍성 자리이었는데, 1461년(세조 7)에 지도상의 위치로 옮겼다. 舊邑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1417년(태종 17)에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1,019척, 높이가 13척이었는데, 모두 퇴락하였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書院(永溪書院)은 1698년(숙종 24)에 鄕人들이 정여창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중국의 명승지인 岳陽縣을 본따서 악양면으로 하였고, 악양산 정상에 악양루 누각을 지었다. 그리고 중국 악양현의 ''瀟湘八景''의 뜻을 따서 절승지에 그 이름을 땄다. 세상에 전하기를 鳳凰臺, 姑蘇城, 寒山寺遺址, 洞庭瀟湘, 君山平沙은 대개 악양이 신라 소다사현 때 호칭이라고 한다. 화개면에 위치한 雙溪寺는 840년(신라 문성왕 2)에 眞鑑禪師 慧昭가 짓고 옥천사라 하였는데, 정강왕이 쌍계사라 고쳐 불렀다. 경내에는 석조여래좌상, 국보 제 47호의 진감선사공탑비, 보물 제 380호의 쌍계사부도, 쌍계사 팔상전 등이 있다. 절 입구 바위에 새겨진 ''雙溪石門''의 4자는 최치원의 글씨로 유명하다. 쌍계사 좌측에 위치한 七佛菴은 가락국 수로왕의 아들 7형제가 이 곳에서 수도하여 성불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암자이다.(金在完)

  • 포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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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에 抱州라 불렀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현재의 포천군은 조선시대 경기도 永平縣, 강원도 鐵原府의 일부와 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 지도에서의 포천현은현재의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군내면, 내촌면, 신북면, 포천읍, 소흘읍, 화현면 일대에 해당하며 당시의 중심지는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鄕校, 衙舍, 客舍)이다. 漢北正脈의 한 줄기가 이어지는 지역으로 高橋川(포천천, 한내, 남대천)이 남에서 북으로 흘러 縣을 통과하여 영평천으로 이어져 한탄강과 합류하여 임진강으로 연결된다. 이 하천과 평행하게 그려진 도로는 永平縣 만세교로 연결되는 北關大路이다. 安奇驛, 碧呑石院 등의 역원이 있으며 安奇驛이 있는 곳에는 驛村이 형성되어 있었음이 지도에 나타난다. 禿峴과 仍邑峴에는 烽臺가 있었는데 영평현과 양주를 연결하는 봉수에 해당된다. 읍치의 북쪽에 있는 半月山(청성산, 성산)에는 산성이 있었다. 이 산은 포천의 鎭山이 된다. 龍淵書院(신북면 신평리)은 1691년(숙종 17)에 세워졌으며 李德馨과 趙絅을 배향하였다.(이현군)

  • 폐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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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사군은 일제시대의 자성군과 후창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자성군, 중강군, 화평군과 량강도 김형직군 일대이다. 四郡의 설치는 1416년(태종 16)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閭延郡을 설치하여 咸吉道로부터 평안도로 이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433년(세종 15)에 慈城郡을, 1440년(세종 22)에 茂昌縣을, 1443년(세종 25) 虞芮郡을 설치하면서 四郡의 설치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땅을 잃어버린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유지·확보가 어려워지자 145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 3군을 폐지하고 주민을 강계·구성 2부로 옮겼다. 또한 1459년(세조 5)에는 자성군마저 폐지하여 주민을 강계로 옮긴 후 廢四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군현 新設 논의가 계속되다가 새로 들어가 사는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1869년(고종 6)에 자성군·후창군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지도에는 폐사군의 위치와 이곳을 관할하던 강계부 및관할 鎭의 표시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폐사군과 강계부의 경계에는 麻田岺·梨岺에 관문이 설치되어 있어 최전방의 防禦處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압록강변에는 폐사군 지역에 있는 강계 관할의 把守가 一巴부터 八十五巴까지 적혀 있으며, 鎭堡 역시 직책까지 포함되어 적혀 있다. 무창 왼쪽으로부터 강계부에 이르는  도로에도 많은 把守와 고개가 자세히 적혀 있어 주요 통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위·아래의 여백주기에는 폐사군으로부터 강계까지 이르는 경로와 곳곳에 설치된 把守의 내용이 적혀있다. 또한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강계 영역 내에 있는 鎭의 군사적 내용 및 적의 침입 시 거쳐가는 통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지도 위쪽 오른쪽에 백두산이 天池와 함께 표시되어 있음이 이채롭다.(이기봉)

  • 하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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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양읍은 지금의 경상북도 하양읍, 진량읍 북부, 대구광역시 동구 일부, 경산시 와촌면 동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경산시 하양읍 금락동 일대에 있었다. 향교 위쪽에 보이는 無落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대구 경계에 보이는 醮禮山은 고려 태조가 桐藪에서 甄萱을 치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한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琴湖書院은 1684년(숙종 10)에 서사등에 세워, 고려 공양왕 때의 좌의정 許 稠를 모시었는데, 1790년(정조 14)에 사액되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고 다만 琴湖書院有墟碑만 남아 있다. 1608년(선조 41) 지도상의 치소로 옮기기 전의 舊邑(현 하양읍 한사동)은 지도상에 향교가 위치한 곳이다. 지도상에는 없고, 설명문에만 보이는 環城寺는 835년(신라 흥덕왕 10) 心志 또는 문무왕 때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환성사 대웅전은 보물 제 562호로 지정되어 있다. 匙山烽燧는 동쪽으로는 영천군 성황당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경산현 성산에 응한다.(金在完)

  • 풍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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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개풍군 일대이며 府의 중심지는 황해도 개풍군 대성면 풍덕리이다. 지도에 하천으로 그려진 것은 東江으로 개성부의 天磨山, 聖居山, 松岳山의 물이 모인 沙川을 받아서 하류로 흘러 임진강과 만나 바다로 가게 된다. 따라서 이 강은 임진강의 한 지류가 된다. 이 지역은 長湍, 通津, 開城府와 맞닿아 있으며 휴전선 이북에 해당한다. 이 지도는 북쪽이 위가 되게 그려져 있으며 행정구역의 面, 洞은 생략되고 산과 강줄기, 도로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그리고 있다. 이 곳의 산들은 임진북예성남정맥이 개성의 송악산을 거쳐 바다로 나가는 곳에 위치하며 지도의 모든 산들을 바다로 향하게 그렸다. 군현지도의 경우 산들은 감싸안듯이 관아를 향하게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독특한 표현양식이라 할 수 있다. 지도 아래쪽은 김포시, 강화군과 이 지역 사이를 흘러 서해로 향하는 한강과 임진강의 하류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祖江은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이 되고 두 강의 근원이 되므로 생긴 지명이다. 바다와 연해 있기 때문에 남쪽에 여러 浦, 津, 渡가 발달하였다. 이중  昇天津은 강화도와 연결되는 곳이며 祖江津은 통진과 연결되는 곳이다. 지도 위쪽의 德積山 烽燧는 交河縣 黔丹山, 開城府 松岳山과 연결되는 봉수이다. 이 밖에  齊陵, 厚陵 등의陵을 표시하고 있다. 여러 驛院이 존재했던 사실을 여백에 기록하고 있으나, 지도에서는 도로만 표시하고 있다.(이현군)

  • 폐사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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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사군은 일제시대의 자성군과 후창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자성군, 중강군, 화평군과 량강도 김형직군 일대이다. 四郡의 설치는 1416년(태종 16)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閭延郡을 설치하여 咸吉道로부터 평안도로 이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433년(세종 15)에 慈城郡을, 1440년(세종 22)에 茂昌縣을, 1443년(세종 25) 虞芮郡을 설치하면서 四郡의 설치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땅을 잃어버린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유지·확보가 어려워지자 145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 3군을 폐지하고 주민을 강계·구성 2부로 옮겼다. 또한 1459년(세조 5)에는 자성군마저 폐지하여 주민을 강계로 옮긴 후 廢四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군현 新設 논의가 계속되다가 새로 들어가 사는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1869년(고종 6)에 자성군·후창군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지도에는 폐사군의 위치와 이곳을 관할하던 강계부 및관할 鎭의 표시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폐사군과 강계부의 경계에는 麻田岺·梨岺에 관문이 설치되어 있어 최전방의 防禦處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압록강변에는 폐사군 지역에 있는 강계 관할의 把守가 一巴부터 八十五巴까지 적혀 있으며, 鎭堡 역시 직책까지 포함되어 적혀 있다. 무창 왼쪽으로부터 강계부에 이르는  도로에도 많은 把守와 고개가 자세히 적혀 있어 주요 통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위·아래의 여백주기에는 폐사군으로부터 강계까지 이르는 경로와 곳곳에 설치된 把守의 내용이 적혀있다. 또한 왼쪽의 여백주기에는 강계 영역 내에 있는 鎭의 군사적 내용 및 적의 침입 시 거쳐가는 통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지도 위쪽 오른쪽에 백두산이 天池와 함께 표시되어 있음이 이채롭다.(이기봉)

  • 함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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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함안면, 여항면, 군북면, 법수면, 대산면, 산인면,마산시 진전면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서남쪽에 위치한 여항산이 고을의 鎭山이고, 飛鳳山이 主山이다. 대략 지도의 방향은 위쪽이 남쪽, 아래쪽이 북쪽, 우측이 서쪽, 좌측이 동쪽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읍성은 石築으로 둘레가 7,003척, 높이가 13척이다. 남문 밖에 위치한 德岩書院은 1634년(인조 12)에 조 순, 박한주, 조종도를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동문 밖에 있는 道林書院은 1702년(숙종 28)에 정 구를 배향하였고, 그 아래에 위치한 松亭書院은 1721년(경종 1)에 조임도를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西山書院은 1646년(인조 24)에 세워져, 1663년(현종 4)에 사액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조 려, 원 호, 김시습, 이맹전, 성담수, 남효온 등 생육신을 배향하였다. 남문 밖에 보이는 咸州古基는 옛 아라가야국의 도읍지이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이 곳에 가야고성의 옛 터가 있고, 백사리에 옛날 국가 유적이 있고, 야산에 고분 40여기가 있는데, 가야 때 임금을 장사지냈다고 한다. 춘곡역과 파수역 모두 自如道 찰방역에 속하는 속역이었다.(金在完)

  • 함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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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열현은 지금의 익산시 함열읍, 황등면, 함라면, 웅포면, 성당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라면 함열리에 있었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금강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나가는데, 지도의 위쪽에 표현된 白馬江은 금강 중 부여에서 시작되는 부분을 일컫는데 함열현이 시작되는 곳이 하류인 것 같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咸羅山 밑에 있으며 읍치 오른쪽의 龍山古城은 세종 때 현을 옮기기 위해 쌓았지만 결국은 읍치를 옮기지 못한 곳이다. 고을의 전체적인 형세는 서쪽이 높고동남쪽이 낮은데, 읍치 오른쪽의 산들이 약간 과장되어 표현되어 있다.지도 위쪽의 聖堂倉은 지금의 용안면 난포리에 있었던 得城倉이 수로가 막혀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세종 때 海倉이 있는 皮浦로 옮겼다가 1487년(성종 18)에 옮겨 남원, 운봉, 진산, 금산, 용담, 고산, 익산, 함열 등 8읍의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던 漕倉이 있었다. 기타 금강가에는 한산으로 넘어가던 熊浦, 임천으로 넘어가던 南塘津 등이 자세하다.(이기봉)

  • 풍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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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년(태종 13)에 처음으로 풍천군 지명이 생겼고, 1469년(예종 1)에 중궁의 外祖의 고을이였기 때문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옛 풍천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운유면, 율리면, 상리면, 하리면, 천동면, 진봉면 일대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남도 과일군과 대략 일치한다. 북의 북쪽에 위치한 瑞 峰이 이 고을의 진산 겸 주산이다. 읍성은 둥근 형태로 돌로 쌓았다. 성의 동·서·북쪽 3면으로 또 무너진 성이 있었다. 읍성에 있는 皇華門은 물길로 중국에 조회를 갈 적에 뗏목이 경유하던 곳이므로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이 곳은 중국과 바닷길로 연결되는 교통 요충지로서 관련 고적이 많다. 장연현과 경계에 있는 唐館神壇은 옛날 중국 가는 사신이 배 타던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곳은 해안 방어 상 중요한 요충지이었다. 그래서 해안을 따라 방패선이 정박하는 許沙鎭, 椒島鎭 등과 당시에는 없어진 席島鎭, 業淸江鎭, 貴林串鎭이 위치하였다. 그리고 인조 때 左營이 이 곳에 설치되어 풍천·장연·은률·장련·문화·송화·강령 등을 관할하였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西海神壇은 古立所 臨海峰에 있는데,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드렸던 곳이다.(金在完)

  • 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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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군은 1729년(영조 5)에 府로 승격되고, 1788년(정조 12)에 도로 郡으로 강등되기까지 함양부이었다. 함양군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전면, 병곡면, 수동면, 유림면, 지곡면, 휴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함양읍상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함양군은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고을 북쪽에 위치한 白巖山이 鎭山이다. 지도에 栢淵書院,  洲書院,  溪書院이 나타나 있는데, 당주서원과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고, 백연서원은 사액을 받지 못한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1552(명종 7)에 세워져 정여창, 강 익, 정 온, 유호인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당주서원은 1581년(선조 14)에 세워져 1660년(현종 1)에 사액되었다. 백연서원은 1670년(현종 11)에 세워져 최치원과 김종직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君子寺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다. 세간에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진평왕이 어렸을 때 그 숙부 진지왕을 피하여 이 곳에서 살다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읍치 북쪽 백전면에 위치한 靈隱寺는 절터만 있고, 부근에 영은사 부도가 남아 있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사근역은 찰방역으로서 속역 14개를 거느리고 있었다.(金在完)

  • 흥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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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덕현은 지금의 고창군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과 부안면 남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흥덕면 흥덕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뒤쪽의 培風峴은 이름에서도 山이 아니라 峴으로 표현되어 있듯이 108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임에도 고을의 主脈이 되고 있으며 이 산으로부터 뻗어 나온 산줄기가 읍치를 포근히 감싸고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있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培風峴의 산줄기가 부안의 변산에서 온 것으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인데, 백두대간으로부터 시작된 산맥의 흐름에서 보면 지도 아래쪽의 半登山으로부터 와야 한다. 지도의 위쪽에 있는 沙津浦는 곰소만의 안쪽으로, 밀물 때면 바닷물이 쑥 들어와 호수처럼 만들어져 배를 대기에 알맞은 곳이며 ≪擇里志≫에도 장삿배가 모여 상업이 번창한 곳으로 나온다. 기타 고창현의 지도에도 나오는 壺岩이 지도 왼쪽에 표시되어 있음이 보이고,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확충된 수리시설의 모습을 보여주는 生斤堤, 蓬池堤, 新池堤 등의 제언이 그려져 있는데 이 중 生斤堤는 성내면 덕산리에 아직도 남아 있어 이 시기 수리시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이기봉)

  • 함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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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종부는 일제시대의 강서군 함종면, 신정면, 수산면 서쪽에 해당하며 지금은 평안남도 증산군 남쪽 일대이다. 작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1721년(경종 1)에 경종 宣懿王后 魚氏의 貫鄕이라 하여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동쪽의 높은 산지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가 남북을 감싸며 작은 하천을 만들었고, 서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북쪽의 牙善山이며 읍치에는 客舍와 衙舍, 邑倉 등 가장 중요한 건물만 묘사하였다. 또한 사방 경계의 세 고을과 바다까지의 거리가 자세히 적혀 있다. 海倉 옆에 있는 鳳頭山은 바다를 베고 우뚝 솟아 마치 봉황이 높이 나는 모양을 하고 있어 고을에서 풍경이 제일 좋다고 한다. 기타 여백 주기를 보면 논밭이 거의 비슷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아래쪽의 花山面과 中里面은 후에 다시 첨가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 함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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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창현은 본래 古寧伽倻國이었다. 함창의 지명은 고려 초 古寧에서 咸寧으로, 다시 咸寧에서 咸昌으로 고친 데에서 유래한다. 함창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이안면, 공검면, 문경시 가은읍 일부, 영순면 일부,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상주시 함창읍 구향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현의 서쪽에 위치한 宰岳山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恭儉池(공갈못)는 고려 명종 때 司錄 최정분이 옛 터대로 다시 수축하였다. 공검지는 근래까지 쓰다가 상류에 규모가 큰 오태지를 조성한 후 매립하였다. 읍치에는 東池와 西池, 그리고 觀南池와 井花池가 위치하고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가야왕이 정화지에 행차하여 놀았다고 한다. 읍치에는 객관의 門樓인 明隱樓, 友蓮亭, 先月亭, 閱武亭 등 누각과 정자가 집중 분포하고 있다. 동면에 위치한 鳳凰臺는 바위가 첩첩히 얹히어 솟았는데, "鳳凰臺" 석자가 새겨져 있다. 남면 五峯山 자락의 서원은 臨湖書院인데, 1692년(숙종 18)에 세워졌고, 洪貴達, 表沿沫, 蔡 壽 등을 배향하였다. 지도 위쪽 七峯山 아래에 위치한 黃嶺寺는 함창현의 월경지에 위치한 절로서 현재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에 위치하고 있다.(金在完)

  • 흥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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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양현은 지금의 고흥군 일대로서 읍치는 고흥읍 옥하리, 행정리, 서문리 일대에 있었다. 흥양현은 원래 장흥부에 딸린 高伊部曲이었는데 충렬왕 11년 고을 아전 柳庇가 통역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이 있어 高興으로 이름을 고쳐 현으로 승격된 후 세종 때 장흥부의 南陽縣과 합쳐 興陽이 된특이한 고을이다. 비록 部曲에서 출발했지만 대강면으로 표시된 泰江폐현, 남양면으로 표시된 南陽폐현, 두원면으로 표시된 荳原폐현, 도양면으로 표시된 道陽폐현, 포두면 자리에 있었던 豊安폐현, 도화면으로 표시된 道化폐현 등을 거느린 큰 고을이 되었다. 이 중 도양, 풍안, 도화폐현은 모두 부곡이었다가 고려 때 현으로 승격된 후 합쳐진 곳이다. 읍치 왼쪽의 도양면에는 牧場이 설치되어 있는데 監牧官이 파견되어 小鹿島, 折 島, 示山島, 羅老島 등에 설치된 목장을 관할하였다. 지도에는 읍치뿐만 아니라 呂島鎭, 鹿島鎭, 鉢浦鎭, 蛇渡鎭 등 4개의 鎭이 성곽, 船倉과 함께 표시되어 있고, 5개의 봉수 역시 정확히 표현되어 있어 海防에서 중요한 고을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녹도진 옆에 있는 雙忠祠는 임진왜란 직전 남해에 침입했던倭寇를 추격 물리치다가 사망한 李大源(1566-1587)을 배향한 서원으로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게 한다.(이기봉)

  • 해서일로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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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西一路嶺隘圖>는 <平安一路嶺隘圖>와 함께 두 도만 있고 기타 도에는 없는 지도이다. 그 만큼 한양과 연경을 잇는 도로가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지도는 서울-의주 간 대로(제 1대로)가 통과하는 황해도 북부지역을 나타낸 것이다. 부·목·군·현을 노란색 원으로, 도로변에 있는 鎭을 파란색의 직사각형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正方山城, 長壽山城, 首陽山城을 표시하고, 각 산성에서 정방산성까지 거리, 도로의 險夷정도, 도로의 상태, 도로 주변 토지의 비옥도 등을 붉은 색 도로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성을 방어하는데 약점을 기록하고 있다. 도로가 통과하는 고개가 소로인지 대로인지 그리고 사용 가능한 도로인지 불가능한 도로인지 자세히 기록하고, 주요 고개 가운데 공허하여 우려되는 것은 사찰을 세울 것을 제안하고 있다.(金在完)

  • 합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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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군의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율곡면 서부, 대양면(백암리와 오산리 제외), 용주면, 봉산면, 묘산면, 야로면, 가야면 대부분, 의령군 궁류면 서부, 봉수면 청계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합천읍 합천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바로 위쪽에 보이는 華岩書院은 朴紹가 김굉필과 만나 강론하였던 곳이다. 후학들이 서원을 세워, 1727년(영조 3)에 사액받았다. 伊淵書院은 김굉필이 남교동에 있으면서 정여창과 서로 만나 강론한 곳이다. 부근에 암석이 있는데, 志同巖이라고 부른다. 후학들이 추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나란히 그들을 배향하였다. 1660년(현종 1)에 사액받았다. 海印寺는 31본산의 하나로 802년(신라 애장왕 3)에 順應·利貞 두 대사가 세운 절로 禪敎兩宗의 본산으로 되어 있다. 고려 현종 이후 7번의 큰 불이 났으나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대장경각은 온전하였으며, 딸린 암자가 12개이고, 국보로 대장경판(국보 32호), 대장경판고(국보 52호), 고려판각(국보 206호), 원경왕사비(보물 128호)가 있다. 원당암은 해인사가 창건될 때 같이 세워졌다 하며, 신라 애장왕이 해인사를 지을 때 이 곳에서 공사 감독을 하였다 한다. 이 암자에는 보물 518호로 지정된 원당암다층석탑이 있다. 객사 맞은 편에 있는 澄心樓, 涵碧樓, 湖然亭 모두 황강변에 위치한 수려한 누각과 정자이다.(金在完)

  • 해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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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목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도 해주시와 벽성군을 합친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남도 해주시 동부를 제외한전 지역, 벽성군 전 지역, 강령군 동부, 태탄군 동부, 신천군 남서부, 신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佛足山에서 남하한 산줄기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牛耳山을 거쳐 읍치 북쪽의 龍首峯에 이르고, 다른 하나는 首陽山(899m)에 이른다. 읍치 북쪽의 산줄기를 실감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읍성은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曲城이 잘 나타나 있다.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축성하고, 1555년(명종 10)과 1591년(선조 24)에 중수하고, 1747년(영조 23)에 개축하였다. 靑丹道는 7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인데, 특이하게 驛衙建物이 읍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읍치 동북쪽에 위치한 首陽山城은 762년(신라 경덕왕 21) 축성하였고, 1676년(숙종 2) 개축하였는데, 大東地志에 따르면 둘레가 3천 9백 50보이다. 성안에 은적사가 있고, 밖에는 경치 좋은 수양폭포가 있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文憲書院은 1549년(명종 4)에 세워지고, 이듬해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읍치 북쪽 牛耳山에 위치한 牛耳山神祠는 祀典 小祀에 실려 있는데, 봄가을로 향과 축을 내려보내서 제사지낸다. 北嵩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神光寺는 1342년(고려 충헤왕 3)에 원 황제가 사람을 파견하여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명한 사찰이다.(金在完)

  • 현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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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풍현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일부, 동군 우곡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 달성군 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東道(道東의 오기)書院은 1605년(선조 38)에 창건되었는데, 김굉필을 봉안하였다.2년 후에 사액받았으며, 1677년(숙종 3)에 정 구가 配享되었고, 또 1694년(숙종 20)에 곽승화, 원 개, 배 신, 곽 율이 추배되었다. 그 아래 松潭書院은 1664년(숙종 5)에 창건되었고, 박성을 봉안하였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禮淵書院은 숙종 15년(1674)에 세워져 곽 준, 곽재우를 배향하였는데, 3년 후 사액받았다. 비슬산은 현풍의 名山이다. 비슬산 서남 기슭에 자리잡은 유가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1699년(숙종 25)에 淸心과 道瓊이 중창한 바 있고, 1776년(영조 52)에 密雲이 다섯 번째 중창하였다. 비슬산 기슭에는 유가사 외에도 道成菴과 消災寺가 위치하고 있다.  소재사는 1701년(숙종 27)에 청심이 창건하였고, 1841년(헌종 7)에 완산이 중창한 절이다.(金在完)

  • 황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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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목은 해주목과 함께 목사가 주재하는 황해도의 중요 고을로서 중국과 연결되는 의주대로가 통과하는 곳에 위치한 군사상 요충지이었다. 이는 新增東國輿地勝覽 形勝條에 황주목을 "고을 서북쪽에 대동강이 있고, 동남쪽에 절령이 있으며, 극성이 있는데 모두 나라의 요새지다"라고 표현한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 황주목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송림시, 황주읍, 인교면, 구락면, 도치면, 주남면, 천주면, 흑교면, 청수면, 구성면, 영풍면, 청룡면, 삼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지금의 황해북도 송림시, 황주군, 연탄군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다른 고을처럼 행정구역이 面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고, 坊으로 표시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고을의 鎭山은 동쪽 4리에 있는 碧花山이다. 지도에 보이는 邑城은 石城으로,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안에는 二衙와 客舍 등 관아 건물, 兵營, 中營, 營軍器庫, 營繕庫, 鍊武亭 등 군사시설, 司倉, 氷庫, 연못 3개 등 시설이 위치하고 있었다. 정방산성의 남쪽에 보이는 ?壇은 황해도에 전염병이 많이 돌아 백성들이 많이 죽자, 조정에서 매년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였던 곳이다. 우측 하단에 보이는 정방산성은 1636년(인조 14)에 쌓은 성으로 밖은 평탄하고, 안은 험준하고, 뒤에는 준령이 있고, 앞에는 큰 들을 접하고 있다. 또한 방어를 위한 대흥사와 안국사 절이 위치하고 있다.

  • 흥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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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해군은 지금의 포항시 북구 북부, 흥해읍, 연일읍의 형산강 이북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포항시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鎭山은 우측 하단에 그려진 禱陰山이다. 산줄기가 鎭山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가서 臨虛臺에 그치어 읍치의 명당형국을 형성하였다. 飛鶴山과 禱陰山에서 발원한 하천이 東流하여 곡강서원에서 합류하여 동해로 빠져나가면서 읍치 주변에 좁은 들을 형성하였다. 원형의 읍성은 1011년(고려 현종 2)에 성을 쌓아서 왜적의 침입을 막게 하였는데, 우왕 때 돌로 고쳐 쌓았다. 1914년 후에 모두 없어졌다. 성안에 있는 望宸樓는 1546년(중종1)에 城堞을 의지하여 누각을 세우고 망신루라 하였는데, 1785년(정조 9)에 중수하였다. 읍성 위쪽에 보이는 서원은 曲江書院이다. 1612년(광해군 4)에 창건하여 李彦迪을 봉안하고, 뒤에  趙 絅을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도음산 부근에 위치한 泉谷寺에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靈泉이 있는데, 신라 선덕여왕이 이 물에 목욕하고 피부병이 완치되었으므로, 자장율사를 시켜서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6·25사변 때 절이 소실되었다.(金在完)

  • 황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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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황해도는 현재 북한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북도와 황해남도, 개성직할시 일부, 남한의 백령도 등 서해 4개 섬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대동강 수계와 예성강 수계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표시하여 분수계의 파악이 용이하게 하였다. 황해도의 행정조직은 6府), 2牧(海州牧, 黃州牧), 7郡, 8縣 등 23개 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총괄하는 黃海道監營은 해주에 있었다. 巡營은 해주목, 兵營은 황주목, 水營은 옹진부에 각각 있었다. 지도에는 해주목과 황주목은 읍성으로 둘러싸인 붉은 원으로, 기타 부·군·현은 흰색의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특히 함경도와 경기도의 부·목·군·현은 붉은 색 원으로, 평안도와 강원도의 부·목·군·현은 노란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어 황해도의 군현 파악에 유리하다. 의주대로는 붉은 색의 굵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대로가 지나가는 곳곳에 산성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주요 軍鎭은 주황색으로, 역참은 노란색의 직사각형으로 표시하고 있다. 황해도의 驛站으로는 金郊道(9驛), 麒麟道(12驛), 靑丹道(8驛) 총 29개 역이 있었다.(金在完)

  • 황해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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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황해도는 현재 북한 행정구역상으로 황해북도와 황해남도, 개성직할시 일부, 남한의 백령도 등 서해 4개 섬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대동강 수계와 예성강 수계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표시하여 분수계의 파악이 용이하게 하였다. 황해도의 행정조직은 6府), 2牧(海州牧, 黃州牧), 7郡, 8縣 등 23개 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총괄하는 黃海道監營은 해주에 있었다. 巡營은 해주목, 兵營은 황주목, 水營은 옹진부에 각각 있었다. 지도에는 해주목과 황주목은 읍성으로 둘러싸인 붉은 원으로, 기타 부·군·현은 흰색의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특히 함경도와 경기도의 부·목·군·현은 붉은 색 원으로, 평안도와 강원도의 부·목·군·현은 노란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어 황해도의 군현 파악에 유리하다. 의주대로는 붉은 색의 굵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대로가 지나가는 곳곳에 산성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주요 軍鎭은 주황색으로, 역참은 노란색의 직사각형으로 표시하고 있다. 황해도의 驛站으로는 金郊道(9驛), 麒麟道(12驛), 靑丹道(8驛) 총 29개 역이 있었다.(金在完)

  • 희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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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천군은 일제시대의 희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자강도 희천시, 동신군 일대이다. 청천강의 최 상류가 동북쪽에서 여러 물줄기를 받아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고을의 동북쪽이 많이 축소·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의 위쪽에 있는 白山인데 산허리부터 꼭대기까지 모두 흰 돌로 되어 있는 실제 모습을 지도에서도 표현하였다. 읍치는 진산으로부터 뻗어내려 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둘러 쌓여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土築의 성곽이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어 읍성이 이미 퇴락해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평안도 지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書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김굉필, 조광조를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사액받은 衆賢書院이다. 지도의 위쪽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狄踰岺과 적의 방어를 위한 關門은 당시 조선 최북단 고을 중의 하나인 江界로 넘어가는 요충지이다. 그 아래쪽에 客舍와 衙舍가 있는 곳은 柔院鎭으로서 1623년(인조 1)에 설치되었다. 그 밑으로 狄踰驛, 長洞驛 등이 보이고 있으며, 여백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으로, 화전도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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