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의 하나로서 강원도가 그려져 있다. 동해안의 해안선만을 기준으로 볼 때 본 지도는 수정본 계통의 지도 중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이 주도가 되어 만든 계통, 정후조(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과 유사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다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서로 참고했다고는 볼 수 있지만 완전한 필사 관계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반군현은 노란색의 원으로 표현했는데, 감영이 있던 원주는 색은 같지만 주황색의 둘레를 친 약간 큰 원으로 그려져 있다.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찰방역은 노란색 작은 원으로 표현하였지만 淮陽의 銀溪察訪이 파견되어 있던 金化의 生昌(驛)과 原州의 찰방역인 保安(驛)에는 기호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군현을 비롯하여 중요 지점에 十을 비롯하여 세로로 그어진 선의 수가 다른 문자가 자주 적혀 있다. 十은 십리, 卄은 이십리와 같이 세로가 늘어날 수록 십리 단위의 증가를 의미하며, 도로로 연결된 앞뒤 지점 사이의 거리다. 川·山·峙와 같이 지명의 종류를 알 수 있는 한자가 없는 2자짜리 지명이 여러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대부분 驛이다. 강원도 삼척에 설치되어 있던 鎭營은 노란색의 작은 사각형으로, 平海의 越松(浦鎭)은 노란색의 작은 원으로 구별되어 있다. 古城과 古地名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어 역사지명의 수록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다른 군현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 군현 사이의 경계가 들쭉날쭉한 犬牙相入地의 땅에는 해당 군현의 명칭 2자 중 1자를 써넣어 구분해 주었다. 예를 들어 春川은 ‘春’, 麟蹄는 ‘蹄’, 江陵은 ‘江’, 原州는 ‘原’, 三陟은 ‘陟’ 등으로 표시해 주었다. (이기봉)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의 하나로서 경기도와 충청도가 함께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 京圻湖西란 지도 이름이 적혀 있다. 1789년(정조 13)에 華城으로 개명되는 경기도의 水原, 1800년(정조 24)에 魯城으로 개명되는 충청도의 尼城이 개명 이후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22년(순조 23)에 혁파되어 개성에 합쳐지는 경기도의 豊德이 표시되어 있다. 정상기의 발문에 경기도와 충청도가 작아 함께 그린다는 언급과 일치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르다. 일반인들도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충청도 水營의 興陽串이 원본 계통에서는 섬으로 표시되었지만 본 지도에는 사실에 맞게 串(현대의 半島)으로 그려졌다. 둘째, 충청도의 안면도가 원본 계통에서는 串으로 표현되었지만 본 지도에는 사실에 맞게 섬으로 되어 있다. 안면도는 조선초기에는 곶이었지만 중기에 선박의 운항을 위한 수로를 중간에 만들면서 섬으로 변하였다. 셋째, 충청도의 해미 서남쪽에 표시된 串은 원본 계통에는 없던 것으로 실제로는 북쪽 安國山쪽에 붙어 있어야 한다. 셋째의 오류는 본 지도의 계통뿐만 아니라 1770년(영조 46) 신경준이 주도가 되어 만든 계통과 정후조(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세 개의 수정본 계통은 상호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일반군현은 노란색 큰 원으로, 수영과 병영이 설치된 곳은 노란색 큰 사각형으로, 군사기지인 진보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찰방역은 노란색 작은 원으로 구별되어 있다. 다만 기호의 사용에서 일괄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서 이용해야 한다. 군현을 비롯하여 중요 지점에 十을 비롯하여 세로로 그어진 선의 수가 다른 문자가 자주 적혀 있다. 十은 십리, 卄은 이십리와 같이 세로의 선이 늘어날 수록 십리 단위의 증가를 의미한다. 도로로 연결된 앞뒤 지점 사이의 거리를 의미한다. (이기봉)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의 하나로서 경상도가 그려져 있다. 지도첩 전체적으로 1800년대 초반까지의 지명 변화가 반영되어 있지만 경상도만은 그렇지 못하다. 1767년(영조 43)에 山淸과 安義로 변경되는 山陰과 安陰이 변경되기 이전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 지도와 같은 계통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의 〈팔로총도〉 (古枚915.51-p186)가 산음과 안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원본의 것을 그대로 필사하면서 지명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반군현은 노란색 큰 원으로, 수영과 병영이 설치된 곳은 노란색 큰 사각형으로, 군사기지인 진보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관장하던 찰방역은 노란색 작은 원으로 구별되어 있다. 감영이 일반군현과 다른 기호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으나 본 지도에는 경상도의 감영인 대구를 일반군현보다 약간 크게 표현하였을 뿐이다. 진보와 군현의 경우 읍성이 있는 곳은 성곽 표시를 하여 구분해 주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나서 숙종과 영조 때 대대적으로 수축되거나 신축된 대형산성을 성곽 표시와 함께 노란색으로 구분해 주었다. 또한 古城은 2중의 원으로 표시되어 있고, 고지명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지도의 오른쪽 아래에는 경상도의 연혁이 초서체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위쪽에는 군현·찰방역·군사기지 등에 파견된 지방관의 종류와 숫자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도 여러 곳에서 첨가하거나 교정한 흔적이 많이 보이며, 古城이나 古地名 등은 〈팔로총도〉에는 없던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팔로총도〉 나 같은 계통의 필사본을 필사하면서 수요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첨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기봉)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의 하나로서 전라도가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 湖南이란 지도 이름이 적혀 있다. 일반군현은 노란색 큰 원으로, 수영과 병영이 설치된 곳은 노란색 큰 사각형으로, 군사기지인 진보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관장하던 찰방역및 종6품의 監牧官이 파견된 牧所는 노란색 작은 원으로 구별되어 있다. 감영이 일반군현과 다른 기호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으나 본 지도에는 전라도의 감영인 전주가 일반군현보다 조금 크게 표현되었을 뿐이다. 진보와 군현의 경우 읍성이 있는 곳은 성곽 표시를 하여 구분해 주었다. 군현을 비롯하여 중요 지점에 十을 비롯하여 세로로 그어진 선의 수가 다른 문자가 자주 적혀 있다. 十은 십리, 卄은 이십리와 같이 세로의 선이 늘어날 수록 십리 단위의 증가를 의미하며, 도로로 연결된 앞뒤 지점 사이의 거리다. 원본 계통에서 큰 섬으로 그려졌던 順天 남쪽 左水營 서남쪽의 白也串이 본 지도에서는 串(현대의 半島)으로 교정되어 있고, 작은 白也島가 추가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지리지나 그림지도 계통에는 백야곶과 백야도의 정보가 본 지도처럼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며, 현대 지도의 입장에서 보아도 사실에 가깝다. 이외의 수정본 계통에서도 이 오류가 사실에 가깝게 수정되는데, 본 지도와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는 것은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지도 계통이다. 정후조의 〈해주신본〉 계통도 백야곶이 곶으로, 백야도가 작은 섬으로 그려지지만 백야도의 위치가 사실과 많이 어긋나 있다. 제주도의 旌義 서쪽에 호수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원본 계통과 거의 유사한 것이다. 이곳에 이 정도의 크기로 그려질 수 있는 호수는 없는데, 다른 수정본 계통에서 호수나 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서남쪽 바다에는 大黑山·紅衣(현재의 홍도)·可佳(현재의 소흑산도) 등의 섬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可佳(島)를 제외하면 실제보다 훨씬 남쪽에 그려져 있다. 수정본 계통 중 이들 섬의 위치가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은 1770년에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지도 계통이다. (이기봉)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의 하나로서 평안도가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 關西라는 지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1776년(영조 52)에 理山이 楚山으로 바뀌는데, 본 지도에는 초산으로 기록되어 있어 1776년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군현은 노란색의 큰 원으로 그렸으며, 감영이 있던 平壤은 색은 같지만 주황색의 둘레를 쳤고, 병영이 설치되어 있던 安州는 노란색 큰 사각형으로 구분해 주었다. 군사기지인 鎭堡는 노란색 작은 원으로 그렸는데, 압록강변에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江界에서 熙川을 잇는 남북 직선 통로, 청천강과 압록강 유역의 가운데인 현재의 적유령 산맥 안팎, 서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정상기의 《동국지도》 필사본은 원본 계통과 4개의 수정본 계통으로 나누어져 지속적인 필사와 수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5개의 계통은 수록된 내용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초보자도 가장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평안도 최북단의 압록강 유로다. 이 부분을 중심으로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정상기의 《동국지도》 계통을 비교하면 전반적인 변화 양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상기의 발문에는 평안도의 동북쪽이 너무 넓어 함경남도의 삼수 서쪽에 붙인다고 되어 있지만 본 지도는 그것을 따르지 않고 평안도 전체를 한 도폭에 그렸다. 그러다 보니 본 지도첩에서 평안도의 지도가 가장 크게 되었다. 군현을 비롯하여 중요 지점에 十을 비롯하여 세로로 그어진 선의 수가 다른 문자가 자주 적혀 있다. 十은 십리, 卄은 이십리와 같이 세로의 선이 늘어날 수록 십리 단위의 증가를 의미하며, 도로로 연결된 앞뒤 지점 사이의 거리다. (이기봉)
東域圖 표지입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의 하나로서 함경남도가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도 咸鏡南道라는 지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과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상당 부분 잘린 채 표구되어 있다. 함경도 전체를 그린 것을 둘로 나누어 표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함경북도 지도의 경계선과 비교해 보면 원래부터 함경남도만 그린 지도였음을 알 수 있다. 1800년(정조 24)에 利原으로 개명되는 利城이 개명 이후의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87년(정조 11)에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別害鎭으로 옮긴 長津의 위치가 옛날의 長津柵이 있던 곳에 그대로 표시되어 있어 시대적 변화를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에 비해 현재까지 알려진 수정본 계통 4개는 내용적으로 훨씬 많은 지명이 수록되어 있고 수정된 부분도 많다. 이런 변화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부분 중의 하나가 현재의 영흥만에 있는 호도반도 부분이다. 본 지도에는 高原 동쪽에 표시된 馬熊(島) 부분으로 원본 계통과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수정본 계통에는 육지와 연결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본 지도 계통과 초기 수정본 계통 및 정후조의 〈해주신본〉 계통에서는 이 섬이 육지와 연결되지 않은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부분에서 김정호의 《청구도》는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수정본 계통과 연결되며,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서 말응도가 다시 섬으로 표현된다. (이기봉)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의 하나로서 함경북도가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도 咸鏡北道라는 지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과 현재 天池라 불리는 大池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백두산정계비가 ‘立碑’라는 문구로 적혀 있다. 정계비에 동쪽의 경계는 土門江으로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본 지도에는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 끝에 ‘土門江伏流(토문강이 땅 속으로 흐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에 비해 현재까지 알려진 수정본 계통 4개는 내용적으로 훨씬 많은 정보가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정된 부분도 많다. 이런 변화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부분 중의 하나가 明川 동쪽의 해안선이다. 이 부분의 실제 해안선은 남북으로 거의 직선의 형태인데, 원본 계통과 수정본 계통에서 모두 동쪽으로 툭 튀어져 나간 모양으로 그렸으며,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원본 계통에서는 본 지도의 명천 동남쪽에 표시된 馬乳山을 정 동쪽에 표시하였다. 마유산의 실제 위치는 본 지도의 표시가 사실에 가깝기 때문에 원본 계통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초기 수정본 계통(본 사이트의 《팔도분도》(고915.1-p.173)가 대표적) 과 본 지도 계통에서는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마유산의 위치를 실제에 가깝게 명천 동남쪽에 표시함으로써 원본 계통의 오류를 수정하고 있다. 그러나 마유산 동쪽 乫亇山의 위치를 잘못 표시함으로써 또 다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갈마산은 실제로는 마유산과 동일 방향에 더 멀리 있는데도 불구하고 동쪽에 그리면서 해안선이 바다쪽으로 툭 튀어져 나가게 되었다. 정후조의 〈해주신본〉 계통으로 알려진 지도(본 사이트의 《조선팔도지도》(고4709-54)가 대표적)에서는 이 부분이 약간 다르지만 전반적인 경향성은 본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지도 계통(본 사이트의 《조선팔도지도》(고병915.51-J773)이 대표적)에서는 갈마산을 명천의 정 동쪽에 배치함으로써 이 부분의 해안선이 바다쪽으로 더 튀어나간 모습을 하게 되었다. 김정호의 《청구도》에서는 신경준 주도로 만들어진 계통과 동일하며,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서 현재의 해안선과 비슷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마유산과 같은 방향이면서 더 멀리 해안가에 있던 갈마산의 위치를 내륙에 잘못 표시하였다. (이기봉)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의 하나로서 황해도가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 海西라는 지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일반군현은 노란색의 원으로 표현했는데, 감영이 있던 해주는 색은 같지만 주황색의 둘레를 친 약간 큰 원으로 그려져 있다. 瓮津의 수영은 노란색 큰 사각형으로 표시하여 구분해 주었지만 병영이 있던 黃州는 특별히 구분해 주지 않았다. 군사기지인 진보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찰방역은 노란색 작은 원으로 표시하였다. 그러나 황해도의 찰방역인 靑丹·金郊·麒麟 중에서 기린역에는 노란색이 칠해져 있지 않은 미완성적인 측면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나서 숙종과 영조 때 대대적으로 수축되거나 신축된 대형산성을 성곽 표시와 함께 노란색으로 구분해 주었다. 지도 곳곳에는 수정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며, 글씨체와 글자 크기가 달라 이용자가 가필해 넣었음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왼쪽 위의 바다 부분에 군현과 군사기지 등에 파견된 지방관의 종류와 인원수가 적혀 있는데, 이 역시 글씨체가 지명과 달라 후대에 이용자가 필요에 따라 첨가해 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기봉)
東域圖 뒷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