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유형별,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지도

朝鮮地圖 조선지도

  • 편저자 : [作者未詳]
  • 청구기호 : 奎16030-v.1-7
  • 간행연도 : [刊年未詳]
  • 책권수 : 7帖, 彩色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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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
  • 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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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성군은 고성군 간성읍·현내면·거진읍·죽왕면·토성면과 속초시의 영랑호 주변에 해당된다. 읍치는 간성읍 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남 방향에 있는 麻耆山이다. 面의 명칭 중 縣內面이 읍치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음이 눈에 띈다. 이것은 이곳에 烈山縣이 있었기 때문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간성군의 성씨 부분에는 열산현에도 독자적인 여러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비록 간성군에 통폐합되었을 지라도 상당한 독자성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도가 작성될 당시에도 縣內面이라는 명칭이 존재하는 것을 통해 볼 때, 열산현의 역사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에는 ‘古烈山’이라고 적혀 있다. 읍치를 포함하고 있었던 面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간성군 중심지에 있었다는 뜻으로 郡內面이라고 불렀다. 해안가에는 많은 潟湖가 보이고 있다. 潟湖란 급경사의 하천에서 운반된 토사가 바닷물의 힘에 밀려 쌓이면서 만들어진 호수를 의미한다. 석호 중 맨 위쪽의 抱津湖는 花津湖에 대한 誤記이다. 이외에도 명칭의 誤記가 더 보이고 있다. 맨 위쪽의 하천인 湖波川은 明波川의, 아래쪽 왼쪽의 彌時波는 彌時岺의 誤記이다. 이밖에 해안가에 표시된 섬(島)은 다른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보다 훨씬 크게 과장되어 있다.(이기봉)

  •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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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부는 강원도 강릉시 전체, 평창읍·미탄면을 제외한 평창군, 정선군의 임계면, 홍천군의 내면, 묵호항을 포함한 동해시의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강릉 시내 성내동과 용강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방향에 표시된 大關岺이다. 2장에 그려야 할 정도로 고을의 규모가 매우 크다. 첫째, 신라 九州의 하나인 溟州였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州·小京은 일반적으로 郡縣보다 영역이 넓었다. 둘째, 고려시대에 지방관이 파견된 主縣으로서 많은 屬縣을 거느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현 중 상당수가 지방관이 파견됨으로써 독립했지만, 連谷縣과 羽溪縣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를 지나면서 두 속현의 독자성은 사라지게 되고, 완전히 강릉의 영역으로 변모한다. 지도에는 이 두 현의 흔적이 동해안의 북쪽에 連谷面으로, 남쪽에 羽溪面으로 남아 있다. 현재 태백산맥이라 부르는 白頭大幹이 양양계로부터 五臺山으로 들어와 대관령을 지나고, 남쪽의 삼척계로 빠져나간다. 백두대간 서쪽의 하천은 모두 한강 유역에 해당된다. 內面 지역에 있는 하천은 모두 내린천으로서, 홍천강에 합류한 후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蓬坪面·芳林面에 있는 하천은 평창강의 상류로서, 평창읍을 지나 영월읍 서쪽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珍富面·道岩面에 있는 하천은 조양강의 상류로서, 정선읍을 지나 영월읍 동쪽에서 남한강이 된다. 이 지도는 몇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왼쪽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芳林面이라는 명칭은 기록에서 찾을 수 없으며, 大和面이라고 해야 한다. 둘째, 巨門面은 珍富面의 1개 里에 불과했다. 셋째, 臨溪面은 더 오른쪽의 素來洞 지역에 위치시켜야 한다. 또한 이 부분의 하천은 三陟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까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 오류는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오류가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넷째, 구정면이 끝나는 부분(丘井終面)은 高丹驛 부분이고, 고단역 역시 더 남쪽으로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동해안에는 작은 하천과 潟湖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백두대간 위의 五臺山은 특별히 강조되어 표시되지 않았으며, 그 아래쪽에는 5대 史庫 중의 하나인 오대산사고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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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군은 일제시대의 고성군 고성면·외금강면·서면·수동면과 장전읍의 성북리 일부에 해당된다.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고성읍(장전항) 남쪽의 강원도 고성군이다. 읍치는 고성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방향에 표시된 全城山이다. 지도 왼쪽에 金剛山을 다른 산보다 조금 크게, 그리고 흰색으로 강조하여 표시하였다. 그러나 금강산의 위치가 지도보다는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며, 읍치를 기준으로 정 서쪽에 있어야 한다.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하천의 표시에서도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 첫째, 溫井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더 작아야 한다. 둘째, 南江 중 아래쪽의 揷峙에서 북류하는 부분은 1/3 정도로 작게 표시해야 한다. 셋째, 狗岺에서 남류하는 부분은 3-4배에 이를 정도로 길게 그려야 한다. 금강산에 표시된 圓通은 圓通寺를 의미하며, 新溪寺·鉢淵寺 등과 더불어 유명한 古刹이다. 이러한 사찰이 입지한 지역을 보통 外金剛이라고 하며, 바닷가에 수려한 경치가 펼쳐지는 지역을 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듯이 海金剛이라고 한다. 해금강에는 關東八景의 하나인 三日浦와 七星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七星峯이 특별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삼일포 오른쪽의 섬 모양은 실제의 지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실재로 읍치 부근은 서쪽의 급경사 하천으로부터 공급된 모래에 의해 유로가 복잡한 형태로 되어 있다. 읍치 부근도 실재로는 거의 섬에 가깝다. 그 오른쪽에 있는 섬은 여러 가지 모양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松島로 추정되며, 실제보다 훨씬 확대되어 그려져 있다. 해안가 아래쪽의 ‘鳴沙’는 ‘우는 모래’란 뜻으로, 이곳에 발달한 모래언덕(砂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이 모래언덕에서 모래들의 이동이 자주 일어난다. 이 지도에는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자성을 완전히 잃고, 이 고을로 속하게 된 廢縣의 흔적도 표시되어 있다. 위쪽에 표시된 古豢徦는 환가현의, 아래쪽에 표시된 安昌面은 안창현의 흔적이다. 기타 읍치 왼쪽 방향에 표시된 溫井은 현재도 外金剛溫泉으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이기봉)

  • 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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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현은 일제시대의 김화군 원동면·원남면·원북면·금성면·창도면·통구면에 해당되며, 현재의 북한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김화군과 창도군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김화군 김화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慶坡山이다. 북쪽의 淮陽界로부터 들어와 남쪽의 狼川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북한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連松浦·菩提灘으로 표시되어 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한자 표기로서 꼭 포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물가’라는 뜻을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灘’은 우리말 ‘여울’에 대한 한자 표기로서, 경사가 급해져 물살이 빨라지는 하천 구간을 의미한다. 이런 곳은 물의 깊이가 얕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浦와 灘은 보통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동쪽에서 흘러와 북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금성천이라고 부른다. 지도에는 南大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조선시대에 이러한 명칭은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았다. 하천의 명칭 부여가 읍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며, 일제시대에는 이런 명칭의 하천 중 상당수를 고유한 지역명칭으로 바꾸었다. 面의 이름 중 방향과 관계없는 것이 2개가 나오고 있다. 북쪽의 歧城面은 옛 歧城縣의 명칭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동쪽의 通津縣은 옛 通溝縣의 이름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通溝面의 誤記이다. 그 왼쪽의 任南面에서 ‘任’은 ‘任內’라는 뜻에서 온 것이다. 통구현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으로 적혀 있는데, 이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곳을 보통 ‘任內’라고 하였다. 任南面은 ‘任內인 통구현의 남쪽에 있는 面’이라는 뜻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封山은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을 지칭한다.(이기봉)

  • 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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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화현은 일제시대의 강원도 김화군 김화읍·서면·근남면·근동면·근북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휴전선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남한 부분은 철원읍에, 북한 부분은 김화군에 속해 있다. 읍치는 남한의 김화읍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방향에 있는 五申山(1,062m)이다. 본 지도에 나타나 있는 하천은 한탄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강원도의 다른 지도에 비해 이 지도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하천에 대한 명칭의 기록이 아주 자세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輿地圖書≫의 각 邑誌 중 金化 부분이 하천에 대해 특별히 상세하게 기록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도에 나오는 모든 하천의 명칭은 ≪輿地圖書≫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지도 작성자가 그 기록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읍치왼쪽에 있는 忠烈祠는 병자호란 때 平壤監司로서 이 고을에서 전사한 洪命耉를 배향하여 세운 것이다. 읍치 왼쪽 바로 아래의 붉은색 작은 원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리하던 銀溪驛을 표시한 것이다. 察訪驛에 대한 이와 같은 표시는 이 지도책의 모든 곳에서 적용되고 있다. 강원도의 다른 고을 지도에 비해 마을(里)의 이름이 매우 적게 표시되어 있다. 二東面에 기록된 水治里는 水泰里의 誤記로 생각된다.(이기봉)

  • 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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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천현은 사내면을 제외한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에 해당된다. 낭천현의 명칭은 고종 32년(1895)에 화천군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읍치는 화천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서쪽 1리에 있었다’는 狌山인데, 고구려 때 이 고을의 명칭이었던 狌川郡과 관련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아래쪽의 株山은 狌山(또는 牲山)의 誤記로 생각된다. 金化界로부터 들어와 읍치 남쪽을 지나고, 春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북한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錢浦·西湖浦·大梨津으로 쓰여 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津’은 우리말 ‘나루’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浦와 津은 단순히 浦口와 나루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지도에는 面의 표시에서 몇 개의 오류가 발생되고 있다. 첫째, 읍치 서북방면에 있는 西上面은 上西面의 誤記이다. 둘째, 읍치 왼쪽에 있는 上北面이라는 명칭은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기록에는 北面이 등장하며, 위치도 縣內面 북쪽에 있어야 한다. 셋째, 읍치 동북방향의 孫內面이란 명칭도 기록에서 찾을 수가 없다. 지도 작성자가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대부분 수정되어 있다. 지도에는 封山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을 지칭한다. 기타 필사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도 몇 개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것은 居禮里이며, 그 오른쪽에 있는 것은 羅松山이다. 동면 위쪽에 있는 것은 法興山이며, 현내면 왼쪽에 있는 것은 龍神山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것은 俗字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읽기 어려운 것으로 北坪이다.(이기봉)

  • 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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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부는 삼척시·태백시 전체, 평릉동을 포함한 남쪽의 동해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삼척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葛夜山이다. 지도 왼쪽 중간 부분에 太白山(1,567m)이 보이고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지도에는 穿川)이다.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임계천의 상류로서, 정선읍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동북쪽으로 흘러 읍치 부근에서 바다와 만나는 하천은 五十川이다. 지도에는 五等川이라고 적혀 있으며, 五十川은 울진과의 경계선에 표시되어 있다. 오등천은 지지와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명칭으로서, 오십천을 잘못 비정하면서 만들어진 오류라고 생각된다. 태백산 오른쪽에 표시된 黃池는 실제 크기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다. 낙동강의 根源으로 인정되어, 특별히 강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을 전체의 모습이 대략 비슷하게 그려져 있지만, 오십천이 더 북쪽 방향으로 기울어져야 한다. 이에 따라 실제와는 반대로 남북보다는 동서의 폭이 더 넓게 되었다. 읍치 왼쪽에는 關東八景의 하나인 竹西樓가 보이고 있으나, 오른쪽 방향에 있었던 三陟(浦)鎭의 모습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여러 기록과 지도를 통해 볼 때, 삼척(포)진이 이 시기에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표시하지 않은 것은 지도 작성자가 실수로 빼먹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실수는 交柯驛 부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역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지도책에서 이러한 驛은 일괄적으로 붉은색 작은 원을 표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지도에서는 그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통해 볼 때 지도 작성자의 실수라고 생각된다. 읍치 오른쪽 바닷가에 있는 섬은 거의 암초 정도에 불과함에도 너무 크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안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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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동면,·서면에 해당되며, 지금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철원군 철원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萬景山이다. 고을 왼쪽에 보이는 하천은 임진강 본류의 중류 정도에 해당되며, 지도에는 猪仇灘으로 적혀 있다. 읍치 위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평안천으로, 지도에는 定山灘으로 기록되어 있다. ‘灘’이란 우리말 ‘여울’을 한자로 기록한 것으로서, 경사가 급해지면서 물살이 빠른 구간을 의미한다. 이런 곳에는 하천의 깊이가 보통 얕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따라서 하천에서 灘(여울)에 대한 파악은 아주 자세한 편이며,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읍치 왼쪽 위에 표시된 古城은 초선초기를 대표하는 ≪新增東國輿地勝覽≫과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輿地圖書≫ 地誌 내용에서 찾을 수가 없으며, 단지 萬景山古城과 南山城만이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輿地圖書≫와 ≪海東地圖≫ 안협현의 지도에는 두 山城 이외에 읍치 서쪽에 ‘擧城’이 더 표시되어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는 이 세 개의 山城이 모두 표시되어 있다. 기타 面과 중요 마을(里)를 표시한 것은 강원도의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이다.(이기봉)

  • 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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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구현은 수입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강원도 양구군에 해당되며, 이 범위는 현재 휴전선 이남의 양구군과 거의 비슷하다. 읍치는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飛鳳山이었다. 이 지도는 실제와 비교했을 때 몇 가지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北面에 있는 하천은 회양계로부터 文登峴·梨嶺 두 방면으로 들어와야 한다. 둘째, 왼쪽 위의 天尾山은 放散面이란 글씨 바로 위의 산으로 표시되어야 한다. 셋째, 천미산 밑의 淮陽界로부터 양구를 관통하여 狼川界로 들어가는 하천은 없다. 이와 같은 오류는 지명의 위치를 잘못 표시하게 만들기도 했다. 方山面은 北面의 위치로 와야 하며, 北面은 松峴 밑으로 와야 한다. 軍糧洞은 북면의 중심 마을로서, 역시 위치가 송현 밑으로 옮겨야 한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는 대부분 답습되고 있다. 일부의 교정이 있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실제와 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있다. 아래쪽에 南江으로 표시한 것은 소양강을 의미하며, 그 남쪽의 水內村은 현재 인제군 남면의 하수내리·상수내리를 의미한다. 원래 양구에 속했는데, 근래 들어서 인제로 편입되었다. 方山面이란 명칭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으로 적혀 있는 方山縣으로부터 온 것이다. 속현으로 적혀 있다는 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른쪽의 亥安面은 고려시대에 亥安所가 있던 곳이다. 원래 고려시대 때 이 지역의 主縣이었던 춘천에 속해 있었으나, 세종 6년(1424)에 이 고을로 이관되었다. 현재도 양구군 해안면으로 편재되어 있으며,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盆地를 이루고 있다. 沙台洞封山은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을 지칭한다.(이기봉)

  •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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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부는 강원도 양양군과 영랑호 주변을 제외한 속초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위쪽 방향에 있는 雪岳山이다. 설악산은 현재 남한에서 가장 화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국립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도 제작 당시에는 金剛山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지도에서 금강산이 특별히 부각되어 그려져 있었음에 반해, 이 지도에서 설악산은 아주 평범하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지도 아래쪽의 漢川은 현재 남대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漢川’은 우리말에서 크다는 뜻의 ‘한’과 하천을 뜻하는 ‘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기 때문에 ‘大川’과 서로 통용되어 사용된다. 이 고을은 북쪽보다 남쪽의 동서 폭이 더 넓은데, 이 지도에서는 남북이 거의 같게 표시되어 있다. 한천에서 西面 쪽으로 갈라져 나간 지류는 실재로는 九龍岺 부근까지 뻗어있어야 함에도, 아주 짧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시된 이유는 발원지가 오대산 하나로밖에 되어 있지 않는 地誌의 내용을 지도에 그대로 반영하려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동해안에는 靑草湖·雙湖·麻浦 등의 潟湖가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쌍호는 현재 메워져 사라졌으며, 麻浦는 현남면에 포매호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지도 아래쪽에 縣北面·縣南面이란 지명도 눈에 띈다. 이곳에 이런 지명이 남게 된 것은 조선초기까지도 洞山縣이 이 고을의 屬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속현으로 존재했다는 것은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이 고을의 面里 체계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그렇더라도 현남면·현북면이란 명칭을 남기게 된 것은 그만큼 역사적 관성이 컸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읍치에 적혀 있는 驛은 ‘동쪽 5리에 있었다’는 連倉驛으로서,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러한 역은 이 지도책에서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지도에서는 그것이 적용되고 있지 못하다. 조선전기에는 읍치 아래쪽의 祥雲(驛)에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다. 신라의 義湘(625-702)이 만들었다는 洛山寺를 비롯한 사찰의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 낙산사 오른쪽의 義均臺는 義相臺의 誤記로 보인다. 기타 읍치 오른쪽에는 東海神에게 제사지내던 東海廟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하다. 이 동해묘는 中祀로 인정받을 정도로 중요한 제사처였으며, 다른 지도에서는 대부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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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부는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강원도 영월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월읍 영흥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으로 표시된 鉢山이다. 현재 읍치를 중심으로 왼쪽의 하천을 西江, 오른쪽을 東江이라고 부르고 있다. 두 하천이 합류하여 남한강 본류가 되며, 지도에는 錦障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명칭이 단일화되기 이전까지는 본류라 할지라도 다양한 명칭을로 불려졌다. 특히 크게는 고을마다, 작게는 마을마다 고유한 명칭을 붙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남한강에도 수백 개의 이름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동쪽에서 남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옥동천으로 부르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서 바로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석항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평창방면에서 흘러들어옴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또한 梨木里 역시 그 아래쪽 하천가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한다. 읍치 왼쪽에 있는 莊陵은 작은 아버지인 세조에 의해 즉위 4년 만에 쫓겨난 단종(1441-1457)의 묘이다. 그 왼쪽에 있는 淸冷浦는 단종이 유배당했다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유배지로서는 아주 적당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청량포나 그 위쪽의 北浦는 단순히 浦口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한자 표기로서, ‘물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浦자가 있다고 해서 모두 浦口였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물가에 있는 포구일 수도 있고, 단순히 물가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될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명칭은 대부분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위쪽의 章節祠는 단종에 대한 충신으로 이름난 死六臣과 生六臣 및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준 영월 戶長 엄흥도 등을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졌다. 읍치 오른쪽 위쪽에 있는 黃場은 黃腸의 誤記이며,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배양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伐木을 금했던 황장봉산을 의미한다. 고을 전체의 모습은 일부 단순화되기는 했지만 실제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남동쪽이 실제와 많이 다르게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이 경상도의 순흥·영천·안동·봉화 등과 복잡한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이기봉)

  •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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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는 현재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편재되어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강원도의 울진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나 세종 이후 중앙의 통제가 어려운 流民들의 피난처라고 인식하여, 주민을 살지 못하게 하는 空島政策을 폈다.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공도정책을 포기하였으며, 공식적으로 이주민의 정착을 장려하였다. 지도에 ‘基址’·‘石葬’ 등으로 적혀 있는 것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可居’는 ‘거주 할만하다’는 뜻으로서, 만약 사람들을 살게 한다면 거주시키기에 적당한 곳이라는 의미로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숙종 19년(1693)에는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갔던 동래의 水軍 安龍福이 일본 어부에게 납치되어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이후 숙종 23년(1697)에 일본이 쓰시마주를 통하여 울릉도의 조선 영토권을 인정하고,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킨다는 것을 통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刻石立標·刻板立標는 이 때 세운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竹田(대나무밭)은 울릉도의 특산물을 적어놓은 것으로서, 이 섬이 해류의 영향을 받아 난대림을 형성하는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섬 오른쪽 아래의 船泊이라 적혀 있는 부분은 현재 울릉군의 군청소재지가 자리 잡고 있는 도동항 부근으로 추정된다. 섬의 전체적인 모양은 대부분이 실제와 상당히 다르게 그려져 있지만, 中峰으로 표시된 성인봉(983.6m)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간 하천의 모습은 실제에 가깝다. 기타 주변의 섬에 대한 표시도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재로는 대부분이 돌섬 정도에 불과하다.다만 울릉도 동쪽에 '于山'이라 기록된 섬은 현재의 독도를 가리킨다.(이기봉)

  • 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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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현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근남면·원남면·서면·죽변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울진읍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 방향에 있는 安逸王山이다. 이 지도는 몇 가지 점에서 실제와 다른 측면이 발견되고 있다. 첫째, 북쪽에 있는 鼎峙山 위쪽의 하천은 지금의 가곡천으로 모두 삼척의 영역에 있었지만 일부가 울진에 속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둘째, 서쪽의 낙동강 수계가 일부 속해 있으며, 안동계가 서쪽의 절반 정도에 해당됨에도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셋째, 아래쪽 吉谷으로 뻗은 하천은 지금의 왕피천으로서 영양계 방향에서 흘러 들어옴에도 마치 울진-영양 경계선이 分水界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넷째, 아래쪽의 金莊山과 바로 위쪽의 하천은 서남쪽으로 훨씬 내려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오류가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두 지도 사이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해안가에는 동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竹邊串이 표시되어 있다. ‘串’이란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육지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밖에 고을 서쪽에 표시된 封山은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했던 黃腸封山이다.(이기봉)

  •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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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목은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의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과 북내면의 동쪽에 해당되는 아주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원주 시내 일산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 방향에 있는 雉岳山(1,288m)이었다. 이 고을의 규모가 이렇게 큰 것은 첫째, 신라 때 5小京의 하나인 北原京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小京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다른 郡縣보다 더 컸다. 둘째, 고려시대에 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지도 오른쪽의 酒泉이라 표시된 곳에 있었던 酒泉縣이 屬縣으로 나온다. 이것은 아직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주천현은 독자성을 잃고 원주목에 완전히 편입되게 된다.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자성을 잃은 部曲·所도 각각 2·3개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의 표시가 이중의 사각형 안에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것은 이 지도책에서 종2품의 관찰사가 파견된 지역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던 방식이다. 성곽이 있는 경우는 성곽표시를 하였지만, 이 고을에는 없었기 때문에 사각형 모양만 그렸다. 그 아래쪽에는 丹丘驛이 붉은색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이 지도책에서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린 경우에 적용되던 방식이다. 하천의 표시가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다. 남한강 본류는 지도 왼쪽 아래쪽의 서남쪽에서 들어와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읍치 방향에서 나가는 하천은 현재 섬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도에는 남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蟾岩江으로 기록되어 있다. 섬강은 橫城 동북쪽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실재로는 횡성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함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지도 왼쪽의 金堂川은 현재 곡수천으로도 불리고 있으며, 현재는 여주에 속해 있다. 지도 오른쪽의 加田川·古孫津·公龍灘은 현재 주천강으로, 그 오른쪽의 沙川은 평창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진행되면서 주천·평창 등의 지역 이름이 그대로 하천의 명칭에 반영되었고, 옛날 이름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두 하천이 합류하여 西江이 되고, 영월읍 부근에서 남한강 본류와 합류한다. 왼쪽의 남한강 본류 곁에 있는 興原倉은 고려 때 12漕倉의 하나였으며,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원주·영월·평창·정선·횡성의 田稅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水站이 설치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수참이 폐지되고, 단지 원주의 大同米와 田稅만을 모아 운반하던 곳으로 변했다. 현재의 위치는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이며, 조선후기에 번성했던 浦口 중의 하나였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일부의 오류가 있지만 고을의 모습이 대략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이기봉)

  •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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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안협면·서면·동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강원도 이천군에 해당되며, 지금의 북한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이천군·판교군·법동군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이천군 이천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2리에 있었다’는 城山이었다. 읍치 오른쪽을 흐르는 하천은 발원지가 함경도의 안변(지금은 강원도 법동군)인 임진강 본류이며, 安峽界 방면으로 빠져나간다. 맨 위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고미탄천의 최상류인데, 평강을 거쳐 읍치 위쪽의 蛇島 부근에서 합류한다. 읍치 아래쪽에서 深洞里 방면으로도 임진강의 지류가 뻗어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 이 고을의 경계를 넘어가는 그러한 지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輿地圖書≫·≪海東地圖≫의 안협현 지도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지 있다. 읍치 위쪽 방향에 있는 內山面도 山內面의 誤記이다. 가장 위쪽에 표시된 十未呑面이란 명칭도 기록이나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명칭이다. ≪輿地圖書≫의 안협현 지도에 ‘古味呑’이 2개 적혀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마을(里) 이름이 유난히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지도 중간 부분에는 안변과의 경계선에 防墻峙가 보이고 있는데, 철령·분수령과 함께 함경도로 넘어가는 중요한 요해처로 여겨졌다. 이곳에는 일반적으로 關門(城)이라 불리는 防墻이 설치되어 있었다. 谷山界 아래쪽에는 新溪界라고 표시해야 함에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지도 동북쪽 끝에는 ‘陽界’라고만 적혀 있는데, 원래는 安邊界라고 적혀 있어야 한다. 지도 작성자가 뭔가 잘못 쓴 것을 인식한 후 그대로 놔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타 북창 오른쪽으로 封山이 보이고 있는데,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이다.(이기봉)

  • 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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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제현은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강원도 인제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인제읍 상동리·합강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2리에 있었다’는 伏龍山이다. 이 지도의 명칭으로 사용된 獜蹄에서의 ‘獜’은 ‘麟’의 속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고을의 정확한 한자 명칭은 麟蹄이다. 북쪽에서 흘러와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북한강의 지류인 소양강이다. 지도에는 伊布川·磊灘·彌勒川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시행되기 전까지는 동일한 하천이라도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다. 읍치 동남쪽에서 소양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요즘 리프팅으로 각광받고 있는 내린천이다. 다만 하천의 표시에서 일부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인제 서쪽에서 소양강 본류가 北流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인제읍에서 거의 西流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소양강 상류의 양구로부터 臺岩山 근처로 들어오는 하천이 굵게 표시되어 있어, 마치 본류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실재로는 인제의 북쪽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더 큰 본류이다. 셋째, 내린천 본류가 마치 정남에서 오는 것 같이 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동남 방향에서 흘러 들어온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둘째 오류는 시정되어 있지만 첫째와 셋째 오류는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내린천에 있는 古耳屯古縣은 地誌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海東地圖≫인제현 지도에는 耳屯古官基로 나오며, 현재의 기린면 귀둔리를 지칭한다. ‘귀둔’에서 ‘귀’는 뜻을 따고, ‘屯’은 음을 딴 것이다. 추동리와 이탄리(귀둔리)도 같은 수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지도 위쪽의 瑞和面 지역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인 瑞和縣으로 기록된 곳이다. 屬縣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직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같은 책의 古蹟조에 기록될 경우 이미 독자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고을 동쪽으로는 현재 태백산맥으로 불리는 백두대간이 북에서 남으로 지나간다. 이 백두대간 위에 雪岳山(1,707.9m)이 표시되어 있지만, 특별히 강조되어 있지는 않다. 일반인들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五色岺·彌時岺·珍富岺 등이 남북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封山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을 의미한다. 읍치 오른쪽의 反昌遷과 왼쪽의 九壯遷에서 ‘遷’은 벼랑길을 의미한다. 기타 중요한 마을(里나 村)의 표시도 아주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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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군은 지금의 신동읍과 임계면을 제외한 정선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정선읍 봉양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飛鳳山이다. 지도에 보이는 하천은 현재 영월에서는 동강이라고 부르며, 이곳에서는 조양강이라고 한다. 지도에는 下爾江·桐江·寅灘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상류 쪽에는 餘粮驛이 표시되어 있는데, 餘粮은 우리말 ‘아우라지’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이곳은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이 처음으로 유래된 ‘아우라지나루’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왼쪽의 花遷은 우리말 ‘꽃벼루’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여기서 ‘遷’, 즉 ‘벼루’는 절벽에 만들어져 있는 벼랑길을 의미한다. 읍치 오른쪽의 古山城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城隍祠가 있었던 곳으로 나온다. 반면에 18세기 중반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輿地圖書≫에는 城隍壇이 동쪽 1리에 있다고 나와 옮겨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石穴避亂處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벽 위에 있는 동굴로서, 倭를 피해 백성뿐 아니라 관청의 문서까지 피난했던 곳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때의 倭는 麗末鮮初에 극성을 부렸던 倭寇로 생각된다. 읍치 오른쪽 방향에는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배양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伐木을 금했던 黃腸封山도 보이고 있다. 이 지도에는 面이 단지 南面과 西面 밖에 표시되어 있지 않아 혼란을 주고 있다. 실재로는 郡內面·西面·東面·南面·北面 등 5개가 있었다. 또한 고을 전체의 모습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고을 동북쪽은 素來洞(川)과 竹峴川이 갈라지기 훨씬 이전에 강릉과의 경계가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같은 책의 강릉 지도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며,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丹林里로 향한 물줄기도 실재로는 省石村 부근에서 加里王山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이기봉)

  • 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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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부는 강원도 철원군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어운면·북면·묘장면과 포천군의 관인면 및 연천군의 신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철원읍 관전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40리에 있었다’는 高岩山이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이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의 본류이며, 지도에는 亭子淵·砌川·串津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 역시 임진강의 지류인 역곡천이며, 지도에는 馬龍淵으로 표시되어 있다. 모두 용암이 흘러간 자리에 만들어진 하천으로서, 양면이 거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절벽 위쪽으로는 지도 위의 裁松坪·大也坪이라는 명칭이 알려주듯이, 용암대지로 불리는 평지가 넓게 발달해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三釜淵이 표시되어 있다. 절벽의 지형이 많기 때문에 瀑布가 많고, 그런 폭포 아래에는 깊은 못이 형성된다. 삼부연에도 높은 폭포가 형성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 왼쪽 방면에 있는 孤石亭은 한탄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옆에 지어진 정자이다. 조선 중기의 義賊 임꺽정(?-1562)이 숨어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그 위쪽에 표시된 高石亭은 高石城의 誤記로 생각된다. 이 지역은 弓裔(?-918)가 摩震·泰封이란 국호를 사용하면서 904년부터 918년까지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 흔적이 이 지도에도 읍치 위쪽의 弓裔古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郁’은 ‘都’에 대한 誤記로 생각된다. 궁예고도는 둘레 14,421尺(약 4,326m)의 外城과 둘레 1,905尺(약 572m)의 內城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며,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그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휴전선의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가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거의 어렵다. 面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마을(洞이나 里)도 자세하게 적혀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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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부는 춘천시 전체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춘천 시내 요선동 일대이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鳳儀山(또는 鳳山)이다. 이 고을이 크게 된 이유는 신라 때 9주의 하나인 朔州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이었기 때문이다. 지도 오른쪽에 越境地로 표시된 麒麟面(지도에는 속자로 표시되어 있음)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고을의 屬縣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는 지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에 해당된다. 고을 서북쪽의 內面과 史呑面 지역은 史呑鄕이 있었던 지역이며, 현재는 화천군 사내면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 위쪽 방향에 표시된 楡谷에는 楡谷部曲이, 그 왼쪽의 枝內山 부근에는 枝內村所가 있었다. 위쪽의 狼川界로부터 들어와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북한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毋津江·孔之川·西土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전통시대에는 하천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음을 알려준다. 楊口界로부터 들어와 읍치 북쪽에서 북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은 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昭陽江이다. 이곳에는 조선전기에 소양강창이라는 水站이 설치되어,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현재의 화천)의 田稅를 한양으로 운반하였다. 조선후기에 대동미와 전세의 운반이 각 고을의 책임으로 돌아가면서 춘천의 것만 운반하도록 축소되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保安驛은 조선초기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29개의 屬驛을 거느렸지만,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원주의 丹丘驛으로 찰방이 옮겨간 상태였다. 面과 주요 마을(里·洞·谷)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소양강 위쪽의 機落遷에서 ‘遷’은 벼랑길을 의미한다.(이기봉)

  • 통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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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군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고저읍·벽양면,·임남면과 장전항 북쪽의 장전읍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과 고성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통천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登禾山이다. 이 고을은 18세기 후반의 상황을 보여주는 ≪戶口總數≫에 1,420호로 나올 정도로 작은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에는 臨道縣·碧山縣·雲岩縣 등 3개가 이 지역에 더 있었다. 모든 지역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 지역에서만큼은 고대로 갈수록 縣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다고 할 수 있다. 지도에도 이들 廢縣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2개는 面의 명칭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고을 서쪽으로는 지금 태백산맥이라 부르는 白頭大幹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나간다. 이 고을의 바닷가는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叢石亭은 돌기둥처럼 솟아난 해안가 절벽 위에 만들어진 정자로서, 關東八景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쪽의 卵島는 한쪽만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새들이 많은 알(卵)을 낳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크게 묘사되어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것은 松(島)·沙(島)·荒(島)이며, 이 섬들 역시 실제 크기보다 훨씬 크게 묘사되어 있다. 섬의 크기가 잘못 표시된 것은 이 책의 다른 지도에서도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크기에 대한 정보가 부정확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기타 아래쪽에 표시된 瓮遷에서 ‘遷’은 벼랑길을 의미하며, 이곳은 말이 쌍으로 서서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았다고 한다.(이기봉)

  •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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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강현은 일제시대의 평강군에 해당되며, 지금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이다. 읍치는 평강군 평강읍에 있었다. 하천이 매우 복잡하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 방향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의 최상류로서, 지도에는 箭川·末訖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바로 위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평안천이며, 지도에는 赤岩川·城洞水로 나온다. 가장 위쪽의 하천 역시 임진강의 지류인 미탄천이며, 북쪽으로 흘러 안변계로 들어가는 하천은 남대천이다. 이곳에는 分水岺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명은 하천의 分水界 역할을 하는 곳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다. 이곳은 鐵岺과 더불어 함경도로 통하는 요지에 해당되기 때문에 세 개의 關門을 설치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는 추가령구조곡이 지나가는 곳으로서, 서울-원산 사이의 철도가 건설된 곳이기도 하다. 남쪽으로 내려오던 白頭大幹이 이곳에서 북쪽으로 향해 올라가다가 다시 남쪽으로 뻗어나간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백두산의 脈勢가 이곳에 이르러 나누어지고, 두 개의 지맥(支)이 된다.’라고 적혀 있어, 조선초기에도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줄기가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이루어진 것은 주로 미탄천에 자리 잡았던 많은 所가 이 고을의 소속으로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新村所(북쪽 59리)·史丁所(북쪽 60리)·楡林所(북쪽 90리)로 나온다. 面과 중요 마을(里)이 자세한 것은 강원도의 다른 지도와 비슷하며, 중간 왼쪽의 社倉面은 社倉의 誤記로 생각된다. 필사본 지도이게 때문에 일반인들이 알아보기 어려운 俗字도 보이고 있다. 사창면 오른쪽의 芦洞에서 ‘芦’는 ‘蘆’의 속자이며, 北倉 밑에 있는 것은 戱靈山이다. 기타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가 잘못된 것이 보이고 있다. 서쪽에 漣川界라고 쓰여 있는 것은 安峽界로 바꾸어야 한다.(이기봉)

  • 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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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군은 평창군 평창읍·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현재의 평창군은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이 강릉의 땅이었다. 읍치는 평창읍 중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魯山城의 ‘魯山’이었다. 江陵界에서 들어와 原州界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평창강이다. 지도에는 여러 개의 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나루를 지칭함과 동시에 하천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평창강은 이 부근에서 심한 嵌入曲流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지도에서처럼 읍치 서북쪽이 아니라 거의 정 북쪽에서 들어온다. 아래쪽의 하천 역시 남한강의 지류인 동강이다. 旌善界에서 들어와 寧越界로 빠져나가는데, 東面에서 나오는 물줄기는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이 물줄기는 실재로 寧越界로 바로 들어가 영월읍 동쪽에서 동강과 합류한다. 東面의 방향도 지도에서처럼 읍치 남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정확히 동남쪽 방향에 있다. 동면에 있는 所洞은 현재 신동읍 덕천리에, 鳥洞里 역시 신동읍 조동리에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오류는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똑같이 범해지고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면처럼 다른 고을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행정경계를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犬牙相入地’라고 불렀다. 즉, 개의 이빨이 다물어졌을 때 서로 사이사이에 끼어들어가는 것과 같은 땅이라는 뜻이다. 이밖에도 몇 개의 오류가 더 발견된다. 첫째, 平安驛 왼쪽에 있는 栗峙(밤재) 역시 寧越界라는 글씨 쪽에 가까워야 한다. 둘째, 麻池里는 평창강이 原州界로 빠져나가는 위치에 가까워야 한다. 셋째, 味呑面이 2개 적혀 있는데, 왼쪽의 것은 味呑峙(또는 岺)로 바뀌어야 한다. 이러한 오류들은 이 지도가 편집되면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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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해군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후포면·온정면·기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평해읍 평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釜谷山이었다. 고을의 모습은 남북이 동서의 폭보다 실재로는 넓은데, 지도에는 반대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북쪽 울진과의 경계선이 동북 방향으로 더 올라가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천의 명칭 표기에서도 약간 의아스러운 점이 발견된다. 읍치 위쪽의 작은 하천 명칭은 적어 넣었음에도, 가장 큰 읍치 아래쪽의 南大川은 표시하지 않았다. 가장 위쪽에 있는 明正川도 正明川의 誤記이다. 읍치 바로 위쪽의 다이아몬드 모양은 이 책에서 일관되게 鎭堡를 표시하는 기호이다. 이곳에는 강원도의 동해안에서 보기 드물게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越松(浦)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 조선초기에는 동해안에 水軍이 파견된 많은 鎭堡가 있었지만, 倭寇의 침입이 거의 없어지면서 대부분 혁파되었다. 월송(포)진에도 조선초기에는 水軍萬戶가 파견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육군 위주인 병마만호로 바뀐 것이다. 지도 위쪽의 望洋亭과 월송(포)진에 있었던 越松亭은 關東八景의 하나로 유명했던 정자이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書院은 鳴溪書院이다. 선조 때의 관리이자 학자로 알려진 黃應淸·黃汝一 등을 배향하여 현종 12년(1671)에 세워졌으나,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 기타 고을 왼쪽에는 현재도 백암온천으로 개발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溫井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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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현은 지금의 내면을 제외한 강원도 홍천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홍천읍 희망리·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에 1리에 있었다’는 石花山이다. 읍치 남쪽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현재 홍천강으로 불리운다. 읍치 오른쪽에는 三汀이 표시되어 있다. 두 물이 합하여 삼각형 모양의 모래섬(汀)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하천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현재 홍천강에는 배가 거의 다니고 있지 않지만, 일제시대까지는 홍천읍 근처까지 水運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을 전체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총 10개의 面이 표시되어 있다. 현재 9개의 읍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거의 비슷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면과 함께 표시된 里는 대부분 地誌에서 찾을 수 있는 마을들로, 아마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는 일부 오류도 발견되고 있다. 西倉이란 명칭이 2개나 적혀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동쪽에 있는 것은 北倉이라고 표시해야 한다. 그리고 필사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도 보이고 있다. 읍치 왼쪽 아래의 釰倚山面에서의 ‘釰’은 ‘劒’자 대신에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일’이 아니라 ‘검’으로 읽어야 한다. 그 오른쪽의 面 이름은 永歸美面이다. 이밖에 인문정보로는 驛院과 寺刹의 표시가 자세한 지도이다.(이기봉)

  • 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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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양부는 일제시대의 강원도 회양군 전체와 양구군 수입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회양군·금강군·창도군·세포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회양군 회양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1리에 있었다’는 義舘嶺이었다. 지도에 보이는 하천은 북한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북쪽으로는 함경도의 안변과 접해 있는데, 이곳에는 함경도로 통하는 최대 요해처인 鐵嶺(685m)이 있다. 지도에는 鐵岺烽으로만 표시되어 있지만, 이곳에는 원래 關門城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關北(함경도)·關東(강원도)이란 명칭이 나왔다는 說도 있다. 철령에서 동남쪽으로 현재 태백산맥이라고 불리는 白頭大幹이 지나간다. 지도 중간 오른쪽에는 金剛山이 金岡山이라고 적혀 있으며, 흰색과 크기로서 다른 산들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 아래쪽에는 금강산의 유명한 古刹인 正陽寺와 長安寺도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은 현재 內金剛이라 불리고 있다. 이 고을은 넓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2장에 그려질 정도로 규모가 굉장히 컸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屬縣 부분에는 和川縣·嵐谷縣·水入縣·長楊縣 등이 적혀 있다. 屬縣으로 적혀 있다는 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유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이 속현들의 독자성은 거의 사라지지만, 화천현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개의 이름이 모두 면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각 속현들의 역사성이 그만큼 뿌리가 깊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도 아래쪽의 百入面은 다른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보았을 때 水入面의 誤記이다. 또한 지도 제작 당시에 있었던 府內面·初北面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府內·初北里·初北 등의 지명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面을 생략하여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읍치 오른쪽 방향의 天老只面은 여러 가지 지도와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명칭으로서, 夫老只岺에 대한 誤記로 생략된다. ≪해동지도≫의 회양부 지도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모두 夫老只岺으로 나온다. 이 지역에는 7개의 面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는 8개의 면으로 재편된다. 작은 고을의 경우 조선시대의 面이 일제시대의 그것에 비해 1/3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면이 상당히 크게 편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고을에 屬縣(4개)이나 廢縣(2개)이 많았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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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현은 지금의 서원면과 강림면을 제외한 횡성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횡성읍 읍상리·읍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2리에 있었다’는 馬山이었다. 읍치를 지나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여주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섬강의 상류이다. 고을 동쪽에 있는 하천은 주천강의 상류로서, 영월읍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섬강의 경우 지도에는 많은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隅川面으로 가는 물줄기는 읍치 남쪽에서 갈라지는 것이 맞지만, 甲川面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합류되지는 않는다. 후자는 섬강의 본류로서 읍치 북쪽과 서쪽을 지나와야 한다. 이렇게 보면 갑천면 북쪽에 있는 鴻豆山과 鼎金山도 檜峴 부근에 기록되어야 한다. 정금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도 서쪽의 北倉 아래쪽으로 흘러와 갑천면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류해야 한다. 이와 같은 심각한 오류는 面里의 표시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井谷面의 경우 안흥역 부근에 있어야 하며, 晴日面도 갑천면 북쪽에 있어야 한다. 지도 위쪽에 있는 栗實里는 粟實里의 誤記이며, ‘속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우리말 ‘속실’의 발음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속실리는 청일면에 속해 있었으며, 지도에서처럼 홍천으로 내려가는 물줄기가 아니라 그 남쪽에 있었다. 읍치 위쪽의 松原面은 公根面의 誤記로 보이며, 읍치 오른쪽의 水南面은 隅川面의 1개 마을에 불과한 것을 面으로 착각한 것이다.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횡성 지도에서는 비록 회화식으로 표현했지만 이와 같은 심각한 오류는 발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이 지도책이 근본적으로 지방에서 그려 보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여러 읍지를 종합해서 그렸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지와 같은 정보를 중심으로 편집에 의존할 경우 중요한 위치와 거리를 몇 개만 잘못 표시해도 다른 것은 자동적으로 잘못되기 때문이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 대부분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이 역시 김정호가 다른 지도보다도 이 책의 지도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흡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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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곡현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답전면과 고저읍 북쪽 일부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의 장대리·송전리·거성리·노상리·보탄리이다. 읍치는 지금의 통천군 송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朴山이다. 이 고을에는 18세기 말의 상황을 보여주는 ≪戶口總數≫에 609호가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 정도의 규모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일제시대의 면 1개보다 조금 큰 정도에 불과하다. 강원도에서 가장 컸던 원주가 같은 책에 8,795호인 것과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의 행정단위가 호구의 수에서 획일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面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縣內面을 포함하면 총 3개가 있었다. 일제시대의 1개면보다 조금 큰 지역에 3개가 있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상당히 작았음을 알 수 있다. 면의 이름 중 踏日面은 踏田面의 誤記이다. 읍치 왼쪽의 侍中臺에 있는 호수는 지도에서처럼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 쪽으로 물길이 열러 있으며, 潟湖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중대는 호숫가의 경치 좋은 절벽을 의미한다. 기타 이 고을에도 작고 경치 좋은 섬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남쪽의 통천 지도와 달리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이기봉)

  • ▶경기도
  •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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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강화군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강화읍 관청리 일대에 있었다. 주도인 강화도 및 33개의 작은 섬으로 되어 있다. 본래 고구려 穴口郡인데 일명 甲比古次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해구로 고치고 원성왕이 혈구진을 두었다. 고려초에 강화로 고쳐서 현이 되고 1018년(현종 9)에 현령을 두었다가 1232년(고종 19)에 몽고군 칩입으로 왕이 이곳에 천도함을 계기고 군으로 승격하였고, 호를 江都라 하였다. 1270년(원종 11) 환도한 뒤 충렬왕 때에는 인천에 병합하였다가 곧 복구하였다. 고려시대 이래로 강화도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큰 비중을 가진 지역이었다.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여기에서 대장경, 청자상감을 완성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왕자와 그 권솔이 모두 이곳에 피난하였다. 대원군정권은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를 겪고 강화도에 砲軍과 砲臺를 설치하고 이를 유지할 군량을 확보해 새롭게 방어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그밖에도 강화도는 한말 일본 등의 침략 등 역사적 사건과 큰 관련이 있다. 구한말 섬 연안에 72개의 포대가 있었고, 병인양요 때까지는 史庫가 있었다. 읍치는 長令面에 있으며 현재는 府內面이다. 진산은 高麗山이다. 읍치를 지나는 大路는 동쪽으로 甲串으로, 남쪽으로는 德津과 草芝를 지나 바다로 연결된다. 강화 근해에는 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강화 연안에 포구와 곶이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강화가 군사요충지인 만큼 봉화와 산성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 중에서 남부에 鼎足山城은 1660년(현종 1)에 摩尼山의 사고를 이곳으로 옮겨서 실록을 비장하였던 곳으로 사고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 산성은 초지진과 가까워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史庫藏本을 탈취해 갔으며, 현재 이것은 프랑스 파리에 있다. 또 이 산에는 유명한 傳燈寺가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남부에 摩尼山이 있는데 현재 마니산 山上에는 단군의 제천지로 알려진 塹星壇이 있다. 지금은 여러 번의 修築으로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우나 중요한 단군의 유적이다. 강화도에 사우·영당·능원·사찰·암자·교량·봉수 등이 많이 있으나 이 지도에는 파악되어 있지 않다. (김지영)

  •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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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서북부에 위치한 개성은 고려의 서울로 일명 松嶽, 松都, 開京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왕경을 정하고, 1394년(조선 태조 3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년)에는 개성부가 되고 1906년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는 다시 송도면 전부와 청교면 내의 덕암리 등을 떼어서 개성부를 세웠고 부외의 땅으로 개풍군을 신설하였다. 현재 개성직할시의 행정 중심지이며, 개성시, 개풍군, 장풍군 등을 관장한다. 왼쪽에 보이는 강이 예성강이고, 오른쪽으로 임진강과 한강과 만나 강화도 쪽으로 빠져나간다. 鎭山은 松岳山이며, 송악산을 중심으로 성곽이 그려져 있다. 성곽을 중심으로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의 왕궁터인 滿月臺(고적 15호)가 표시되어 있다. 만월대는 규모가 크고, 높은 지대를 이용한 것이 특색이다. 여러 문을 거쳐 正殿이 있었으며, 고려 말기쯤 불에 타버렸다고 알려진다. 고려의 충신 鄭夢周(1337~1392)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음을 당했던 돌다리인 善竹橋(국보 154호)가 표시되어있다. 성곽 바깥쪽으로는 중요한 산천명이 주로 표시되어 있다. 성곽의 북쪽에 靑石洞은 유사시 서북지역으로부터 대대적인 외침이 발생할 경우 적이 서울로 진입하려 할 때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곳으로 일찍부터 그 군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었던 곳이다. 개성 북방에 있는 大興山城은 원래 고려시대의 피난성 이었으나, 조선 숙종 때(1675~1720)에 개축되었다. 산성은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중앙부에는 골짜기가 흘러 절경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문인·묵객이 많이 모여들었다. 서쪽으로 利示浦, 錢浦가 있으며 전포 아래쪽에 고려 때 가장 번창한 항구였던 碧瀾渡 등 포구가 표시되어있다. (김지영)

  • 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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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고양시 고양동에 위치해 있다. 읍치 남쪽에 있는 벽제역은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이 역에서 유숙하였던 역이다. 이 지역의 하천은 벽제천이 흘러드는 곡릉천으로 교하를 지나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벽제역 주변으로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고양은 수도 한양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무덤이 많다. 지도에는 오릉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예종의 무덤인 창릉과 홍릉, 경릉, 익릉, 숙종의 무덤인 명릉을 뜻한다. 이 밖에도 고려 공양왕의 무덤과 월산대군묘, 태릉, 효릉, 회릉의 서삼능이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아래쪽의 하천은 창릉천으로 한강으로 흐른다. 이 강구에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행주산성 위치하고 있다. 군사적인 측면으로 봉수가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高峯烽을 시작으로 鹽浦烽으로 이어져오는 봉수는 교하에서 이어져오는 봉수신호가 이곳을 지나 서울의 무악봉수로 연결하게 되어 있다. 書院은 閔純(1520-1591), 南孝溫(1454-1492) 등을 배향하여 1709년(숙종 35)에 賜額받은 文峯書院으로 추정된다. 고양 이외에 수도 한양의 면과 지도가 표시되어 있으며 양천의 공암진이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인접 지역의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김지영)

  • 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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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서초구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읍치 남쪽으로 仁德川이 흐른다. 읍치의 북서쪽에 위치한 관악산이 진산이다. 변계량의 시에 산은 관악과 연하고, 물은 청계로 내려간다는 것으로 과천의 형국을 표현하였다. 동쪽에 보이는 良才는 驛으로 12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북쪽에 露梁은 한강 하류의 나루로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는 노량진이고, 銅雀 역시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는 나루였다. 이 지역에는 愍節書院(숙종때 세워진 서원으로 死六臣이라 칭하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가 누명을 벗고 벼슬과 시호를 받음),  鷺江書院, 四忠書院 등 다수의 서원이 있다. (김지영)

  •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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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부는 지금의 남종면을 제외한 광주군 전체와 남양주시 와부면·조안면, 성남시, 하남시, 서울특별시 강남의 경부고속도로 동쪽, 의왕시, 안산시 성포동 동남쪽, 화성군 매송면의 서쪽에 해당한다.  읍치는 원래 하남시의 교산동 일대에 있었는데 1626년(인조 4)에 광주군 중부면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1917년에 광주면 경안리로 치소가 옮겨졌다. 원래의 읍치는 남한산성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에는 경안에 읍치가 있다. 한강이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古浪이 지금의 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한강의 지류인 炭川, 穿呼川, 小川이 파악되어 있으며, 강변에는 다수의 나루와 누대가 표시되어 있다. 북쪽에 위치한 서원은 龜岩書院이며, 서쪽에 보이는 서원은 秀谷書院이다. 이 지역에는 성종의 능인 宣陵, 중종의 능인 靖陵을 비롯한 왕릉과 신하들의 묘소가 많이 분포하고 있으나 지도에는 태종의 능인 獻陵만이 파악되어 있다. 또한 奉安驛, 德豊驛, 板橋驛, 楸峴驛 등 많은 역이 표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慶安지역에 慶安驛은 지금 광주읍이 있는 곳으로서 7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김지영)

  • 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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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섬)이다. 고구려 高木根縣인데 일명 戴雲島, 高林, 達乙新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교동으로 고쳐 해구군(강화군) 영현이 되었다. 1629년(인조 7)에 부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에 강화로 편입되었다가 곧 복구하여 군이 되어서 인천부의 관할이 되었고, 1914에 군을 폐하고 강화군에 합쳤다. 교동은 서울로 통하는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京畿水營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三道統禦營으로서 본영을 이곳에 두었다.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남쪽의 宋家島, 席毛老道는 지금의 석모도로 예전에는 두 개의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강화도 소속 屬島들이 표시되어 있다. 교동 내에는 面과 봉화의 명칭이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 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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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는 본래 고구려의 泉井口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교하로 고쳤다.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내, 파주시 교하면, 탄현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14년에 파주에 합하여졌다. 읍치는 원래 탄현면 갈현리에 있었는데 1733년(영조 9)에 長陵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交河縣을 금촌읍 금릉리(현재의 파주시 금릉동)로 옮겼다가 후에 다시 長命山 동쪽의 교하면 교하리로 옮기게 된다. 교하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역으로서 해방의 요충지 가운데 하나였다. 임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深岳과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洛河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이 곡릉천이고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 學堂浦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뒤로 長命山을, 앞으로는 곡릉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세에 있다. 長陵은 仁祖大王(1595~1649)의 능이며, 仁烈王后 한씨를 합장하였다. 능이 처음에는 파주에 있었으나, 영조 7년(1731)에 이곳으로 옮겼다. 행정구역인 面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강변에는 포구가 있으나 자세하지 않다. (김지영)

  • 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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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서울특별시의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금천구, 동작구 일부지역과 경기도 광명시와 안양시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한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산, 과천, 양천, 인천과 경계를 이룬다. 읍치는 금천구 시흥동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 三聖山이 鎭山이다. 읍치를 지나는 대로는 내륙으로 안산과 과천으로 연결되고, 한강을 넘나드는 해로로 楊花津이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역과 교량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으로 盤遊驛, 남쪽으로 安陽驛이 표시되어 있고,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주변에 岐灘橋가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 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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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군은 지금의 김포군 김포읍, 고촌면, 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김포읍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김포는 옛 김포현과 양천군을 합친 것으로, 본래 고구려의 黔浦縣이며, 신라 경덕왕 때 김포로 고쳤다. 동쪽으로 陽川, 남쪽으로 富平, 서쪽으로 바다, 북쪽으로 通津과 경계를 두고 있다. 지도에 나타난 읍치는 郡內面에 北邊里에 있다. 남쪽에 章陵은 元宗(인조의 생부로 추존)과 부인 仁獻王后의 능이다. 추존하기 이전에는 興慶園이라고 했는데 1632년 장릉으로 고쳤다. 동쪽의 한강에 섬들을 표시하였으며 내부에 봉화들이 나타난다. 서쪽의 歌絃山을 제외한 다른 산들은 자세하지 않다. (김지영)

  • 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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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은 광주, 수원과 경계를 이룬 지역으로, 화성군 남양면, 비봉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과 안산시의 대부도와 영흥도 일대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는 인천의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는데 화성군 남양면 신외리, 장전리, 문호리 일대이다. 읍치는 남양면 남양리에 있었으며 동쪽의 飛鳳山이 鎭山이다. 읍치 남쪽을 흐르는 鼠尾川은 지금의 남양천이고 남양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지도에는 면과 산의 명칭과, 봉수, 누대, 해창, 역원 등이 파악되어 있다. 서쪽 해안가의 花梁鎭은 左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던 곳이며, 아래쪽의 永宗은 永宗浦營이 있던 곳으로 水軍萬戶가 있었다. 서쪽으로는 대부를 비롯하여 영흥, 탄모노, 독갑, 선협, 승황, 선감미, 울청, 소이작, 대이작 등 다수의 섬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은 시화간척지 공사로 섬들이 육지로 변모되었다. (김지영)

  • 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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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전은 연천군 미산면과 왕징면, 군남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는 미산면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작은 고을이지만 산천명이 비교적 상세하다. 북쪽에 橫江이 표시되어 있고 삭녕도의 하류인 澄波渡 및 棆淵渡, 강변에 腐淵津이 표기되어 있다. 이 곳은 작은 현이었으나 1451년(문종 2)에 군으로 승격하게 되는데 그것은 崇義殿 때문이었다. 숭의전은 왕씨의 제사가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다. 숭의전은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가 1392년(태조 1)에 사당을 만들어 고려 태조를 비롯한 8명의 임금을 配享하였다. 1425년(세종 7)에는 고려의 태조, 현종, 문종, 원종만 제사지내도록 했으며, 이후에 정몽주를 비롯한 16명의 고려 충신들을 함께 배향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3년에 미산면 아미리에 복구하여 사적 제223호로 지정하였다. (김지영)

  • 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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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일부지역, 경기도 부천시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평의 읍치는 현재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에 있다. 읍치를 지나는 대로는 陽川과 仁川으로 통해있다. 진산은 북쪽에 桂陽山인데 일명 安南山이라고도 한다. 읍치 주변에 한강의 줄기들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形勝편에 고려 고종 때의 문장가였던 이규보(1168~2141)의 望海誌에 <삼면이 모두 물이다>하여 부천의 형승을 표현하였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보이는데 지금은 모두 간척되어 육지가 되어 있다. 중요한 面과 山의 명칭이 주기되어 있고 봉수도 보인다. 그러나 역원·불우·사묘는 주기되어 있지 않다. (김지영)

  • 삭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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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녕은 경기도 연천군 삭녕면. 서남면, 중면, 왕징면 북쪽 일부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북한의 철원군 일대이다. 서북쪽은 황해도와 동북쪽은 강원도와 접해 있다. 다른 지도와 달리 산줄기를 자세하게 표현하였다. 읍치는 북으로 城山과 남으로 임진강 합류지점인 羽化津 사이에 나타나있다. 孫廳灘은 강원도 철원군 고암산에서 나와서 군의 옛 승령현 서쪽을 지나 여울이 되었다. 읍치로 산줄기가 향해있으며 강줄기가 둥글게 흘러드는 형국을 보인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방위별로 북동쪽에 철원, 북서쪽에 안성, 남쪽에 장단으로 이어진다. (김지영)

  •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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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남서부에 위치한 수원은 본래 고구려의 買忽郡이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도호부, 세종 때에 진을 설치하여 판관을 배치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顯隆園(사도세자의 묘)을 수원부로 옮기기로 하고 수원의 읍치는 팔달산 아래 현재의 수원시 위치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군이 되었으며 1949년 수원읍을 분리하여 시로 승격하고 나머지 땅은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1967년 경기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이 지도에 나타난 수원은 현재 수원의 영역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수원부는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화성군의 매송면, 봉담면, 태안읍, 장안면, 팔탄면, 우정면, 향남면, 정남면, 양감면 일부지역과 경기도 오산시, 경기도 평택시의 청북면, 안중면, 오성면, 현덕면, 포승면 일대에 해당한다. 서쪽에 보이는 풍는 현재의 대부도로 육지와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지도의 아래 왼쪽은 아산만이다. 지도에는 水運의 발달에 의해 設倉, 海倉, 浦口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화성군 남양면 일대, 평택시 오성면 일대에ꡐ稷山地ꡑ(충청남도 천안군), 화성군 우정면 일대에ꡐ陽城地ꡑ(경기도 안성군) 의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 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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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안산시와 시흥시 일대이다. 현재의 안산시에서 일동, 이동, 본오동, 성포동 등(廣州 땅)은 제외되며 시흥시 거모동, 군자동, 월곶동, 장곶동, 장현동, 정왕동, 죽률동, 조남동, 목감동, 논곡동, 하상동, 하중동 등이 포함된다. 읍치는 지금의 안산시 수암동 일대로, 동쪽에 橋獐鳴峴, 북쪽으로 麻河山, 王兒峴, 서쪽으로 君子山등 주변에 산이 자세하다. 진산은 경기도 안산시, 안양시, 군포시의 경계에 있는 修理山이나 표시되지 않았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廣州, 衿川을 지나고 있으며 서쪽에 石谷驛이 있다. 서남쪽으로 舊草芝(안산시 초지동)는 바닷가에서 외적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으로 범리면에 水軍萬戶가 있었다. 1656년(효종 7)에 강화로 옮겼는데 성의 옛터가 남아있다. 바다에 衣耳(島), 乭注(島), 雙(島), 召勿(島)부속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현재는 주변 섬들이 시화간척사업으로 매립되었다.(김지영)

  •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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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군은 지금의 안성군 안성읍, 보개면, 금광면, 미양면, 대덕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안성읍 구포리와 명륜리 일대에 있었다. 鎭山은 飛鳳山이며 옛 성터가 남아있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북으로 양지, 서로 양성과 직산, 남으로 진천으로 통한다. 동북쪽의 하천이 한천이고 읍치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이 안성천으로 서남쪽으로 흘러 평택시를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大平은 미양면 정동리 부근으로 현재 목장이 들어서 있다. 읍치 남쪽으로 보이는 서원은 안성읍 도기리에 있는 沙溪書院으로 金長生(1548~1631)을 배향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毁撤되었다. 남쪽 진천과 경계를 이루는 瑞雲山에는 서운고성이 남아 있으며, 대웅전이 각각 보물로 지정된 靑龍寺와 石南寺가 있다. 지도에는 석남사만이 그려져 있다. (김지영)

  • 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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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군은 지금의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과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 표현된 읍치는 지금의 양평읍 양근리 일대로 1747년(영조 23)에 葛山으로 읍치를 옮겼다. 지도에는 하천의 이름이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되어 있다. 지류의 이름도 표시되어 있다. 서북쪽으로 흐르는 강이 북한강이며 남서쪽의 흐르는 大灘이 지금의 남한강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幷灘은 龍津의 물이 합류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의 양수리이다. 龍津은 나루 위에 여울이 있어 가물면 걸어서 건너는데 서울로 가는 길로 통하는 要害地였다. 하천 주위에는 누대와 역원이 많았으나 지도에는 파악되어 있지 않다. 읍치 위쪽으로는 咸公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려 몽고 침입 때 고을 사람들이 피난했던 곳이라고 한다. 幷灘 아래쪽은 광주군 남종면 일대로 지도에 표시된 分院里는 병탄의 위치에 있다. (김지영)

  •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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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은 안성군 양성면, 원곡면, 공도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성면 동항리에 있었다. 진산은 읍치 서쪽의 天德山이다. 읍치 동쪽에서 흘러오는 禪院川은 지금의 한천으로 안성을 지나는 안성천과 합류한다. 읍치 남쪽으로 無根城, 서쪽으로 加川驛, 南倉, 平橋 등이 파악되어 있고, 산과 면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곳의 서원으로는 덕산면에 있는 德峯書院이 있으나 파악되어 있지 않다. 양성에는 당시 수원땅에 있었던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다. 栗北面, 甘味洞面, 外良面은 모두 당시의 수원 땅에 있었다. 율북면은 평택시 청북면의 율북리 일대에 있었고, 감미동면도 같은 면의 고잔리와 삼계리 일대에 있었다. 외량면은 평택시 포승면의 내기리·운정리·방림리 일대에 있었다. 율북면에는 海倉이 표시되어 있고, 외량면에는 괴태곶과 봉수가 그려져 있는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지영)

  • 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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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현은 지금의 용인시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군의 고삼면, 일죽면의 능국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양지면 양지리에 있으며 북쪽의 定水山이 鎭山이다. 양지현은 수원에 있던 陽良部曲을 조선 1400년(정종 2)에 승격시켜 縣으로 만들었다. 지도에는 古陽智로 표기되었는데 지금은 안성군 고삼면 지역이다. 태종 13년(1413)에 朴谷, 高安, 蹄村, 木岳 등 죽산에 속했던 4개의 部曲을 떼어서 양지에 속하게 하고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이런 내력으로 죽산 오른편으로 길게 그려진 지역에 박곡면, 고안면, 제촌면이 있다. 이 때 읍치를 광주의 秋溪鄕으로 옮겼으며 지도에는 秋溪古縣이다. 읍치 남쪽을 지나는 하천은 용인과 광주를 지나 한강 본류로 들어가는 경안천의 상류이며, 왼쪽 아래쪽의 하천은 안성천으로서 양성, 진위를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김지영)

  • 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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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양천현은 1895년 郡이 되었으며1914년에 김포군에 합쳐졌다가 1977년 강서구, 1978년에 양천구가 신설되면서 서울시의 일부가 되었다. 읍치는 加背面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강서구청의 위치이다. 진산은 成山이다. 위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孔岩은 한강의 북쪽을 왕래하는 나루이다. 읍치를 통과하는 대로는 김포와 부평으로 통하고 있다. 開花山 봉수는 김포의 북성산과 서울의 목멱산 봉수를 연결한다. 塩倉은 지금의 염창동 일대에 있었던 소금창고로 숙종대에 폐지되었다.(김지영)

  •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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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목은 지금의 강천면과 북내면 일부를 제외한 여주군과 양평군의 개군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여주읍 여주 군청 주변에 있었다. 서쪽의 北城山이 鎭山으로 옛 성터가 남아있다. 여주는 예종 때 세종대왕의 무덤인 英陵을 광주 서쪽 大母山에서 여주의 北城山에 옮기면서 金沙面에 중심을 두고 있던 川寧縣을 합해 牧으로 승격된 곳이다. 介軍山面의 婆沙城은 본래 婆娑城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에 축성되었으며 왜란 때의 전장이었다. 金沙面에 沂川書院은 1625년(인조 3)에 賜額받았으며 김안국, 이언적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원주와 이천으로 통해있다. 읍치 위쪽을 지나는 하천이 남한강이며, 원주의 경계를 흐르는 金唐川은 지금의 섬강으로 읍치의 동쪽에서 합류한다. 강변에는 梨浦津, 陽花津, 魚梁津 등 나루가 파악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읍치 동쪽의 淸心樓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臨長江(지금의 섬강)을 굽어보며, 남쪽 건너편에는 雉岳의 광야가 넓게 보이고, 북쪽의 石壁의 그림자가 강 가운데를 비춘다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짐작하게 한다. 읍치의 서쪽으로 세종과 昭憲王后의 능인 英陵, 그리고 효종과 仁宣王后의 능인 寧陵이 있다. 1473년(성종 4)에 報恩寺로 개칭되는 神勒寺는 남한강 동쪽 기슭 鳳尾山에 있다. 이곳은 英陵을 옮기면서 크게 늘려던 절로서 다층석탑(보물 225호) 외에 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 (김지영)

  • 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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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현은 지금의 양지면, 원삼면, 백암면을 제외한 용인시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구성면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용인은 조선 초에 龍駒과 處仁을 합하여 만들어진 고을이다. 지도에 표시된 읍치는 용구의 터이고, 지도 아래쪽의 古縣이 옛 처인의 터이다. 읍치 주변으로 사창이 파악되어 있다. 광주를 지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경안천 상류가 오른쪽으로 보이고, 왼쪽 위의 하천은 성남을 지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탄천의 상류이다. 葛川이라 표시된 하천은 수원을 지나는 신갈천이며, 남쪽을 지나는 하천은  평택을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가는 진위천의 상류이다. 북쪽에 위치한 忠烈祠는 1576년(선조 9)에 세워지고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은 지금의 忠烈書院으로 고려 때의 충신인 정몽주(1337~1392)를 모시는 사당이다. 오른편으로 정몽주의 묘가 있으며 현재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서원은 수지읍 상현리에 위치한 深谷書院으로 조광조(1482~1519)를 배향하여 1650년(효종 1)에 사액받은 書院이다. 이 외에도 사창과 봉수가 파악되어 있다. (김지영)

  • 음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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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음죽현은 지금의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  충청북도 음성군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장호원읍 선읍리에 있었다. 읍치 서쪽의 雪城山은 城山이라고도 하며 성지가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북으로 이천, 동으로 여주, 남으로 충주로 향한다. 이 지역은 경기 남부와 충청 북부 지역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 조선 후기와 일제 초기까지 안성과 함께 가장 번성했던 장호원장이 있었다. 읍치의 아래쪽을 흐르는 하천은 天民川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지금의 청미천이다. 현재 청미천 위에는 長海院橋가 있는데 이곳이 지금의 장호원으로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청미천에 있는 無極驛은 현재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에 있다. (김지영)

  •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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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은 동으로 여주, 북으로 광주, 서로 양지와 죽산, 남으로 음죽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도에 나타난 지역은 이천시, 부발읍, 대월면, 모가면, 호법면, 마장면, 신둔면, 백사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이천시 창전동 일대에 있었다. 鎭山은 읍치 서쪽의 雪峯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인 梨樹川은 광주에서 흘러나와 읍치 동쪽을 흐르는 福河川에 합류하여 梨浦津으로 흘러간다. 복하천은 이천의 남서쪽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의 여주 경계를 지나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광주와 여주로 통해있으며 동쪽으로 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에는 高尺站, 素沙站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천은 지금도 도자기로 유명한데 이천의 토산은 호법리에서 나오는 白玉과 陶器가 있었다. (김지영)

  •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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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은 경기도 강화만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이다. 매소홀의 위치는 지금의 남구 관교동, 문학동 일대이다. 1413년(태종 13)에 인천이라고 칭하였다가 1461년(세조 7)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이 때까지 제물포라는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인천이 지형상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무역의 거점으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 일찍부터 외국세력에 의하여 주목을 받아왔다. 1875년(고종 12)의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인천의 문호가 개방되고, 뒤이어 일어난 제물포조약의 결과 1883년(고종 20)에는 인천항이 개항되었다. 개항 후에는 거류조약서가 조인되어 1888년(고종 25)까지에는 청, 일 및 구미의 거류지가 마련되었다. 청일, 노일전쟁을 통한 일본의 중요한 군사기지가 되었다. 1894년(고종 31) 한일 양국간에 잠정합동조약이 체결되어 경인철도가 신설되었다. 인천은 동쪽으로 금천, 남쪽으로 안산, 북쪽으로는 부평과 접하고 있으며 읍치는 매소홀의 위치에 있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시청의 위치는 남동구 구월동에 있다. 진산은 읍치의 동북쪽의 蘇來山이다. 읍치로부터 금천, 부평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서쪽으로는 인천 국제공항이 자리한 영종도, 경기의 다른 거점이 되었던 덕적도 등 여러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舊濟面 부근은 강화도 조약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지금의 인천항이 된 지역이다. 인천의 남쪽 경계가 되는 浦五川은 지금 서울과 인천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소래포구 부근이다. 읍치 동쪽에 있는 서원은 鶴山書院으로 이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던 李端相(?-1669) 부자를 배향하여 1702년(숙종 28)에 세워졌다. 지도의 남동쪽 바다 넘어 인천의 월경지인  梨浦面이 있다. 이포면은 원래 梨浦部曲이었으며, 지금의 화성군 남양면 문호리와 비봉면 유포리 일대에 있었다. (김지영)

  • 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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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장단은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장단면, 진동면과 연천군 장남면, 북한의 장단군 진서면, 장도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휴전선 이남과 이북에 걸쳐 있어 일부는 남한에 들어와 있고, 장풍군은 북한 쪽에 속한다. 읍치는 백학산 주변에 표시되어 있다. 장단의 치소는 1459년(세조 5)에 桃源으로 옮겨졌다가, 1469년(예종 1)에 옛날 임진땅으로 옮겼다. 이 지도에 표시된 읍치의 위치는 임진강 유역에 표시되어 있고, 桃源에는 古邑을 표기된 것으로 보아 1469년 이후에 제작된 지도로 볼 수 있다. 도로는 북으로는 朔寧과 연결되며 동으로 임진강을 건너 파주로, 서로는 개성과 연결되었다. 이 지역은 산천이 잘 발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망해산은 고읍의 진산이며, 白鶴山은 예전에 白岳山이다. 백악산은 고려가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의 가치가 떨어지자 풍수도참설에 따라 개성 근방의 명당터에 세 궁궐을 지었다. 이것을 고려 3요소(三蘇)라 하며 좌소가 바로 白岳山이며, 개풍군 대성면에 있는 白馬山이 우소, 황해도 신계군의 箕達山이 북소이다. 북동쪽에서 흘러오는 沙彌川과 북서쪽에서 흘러오는 沙川이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현재 사천으로 합류하는 板積川 주위에 판문점이 위치하고 있다. 임진강가에는 北倉, 海倉 등 포구를 비롯하여 津, 浦, 站을 볼 수 있다. 특히 장단부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부의 바로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英陵(고려 숙종릉), 智陵(고려 명종릉), 敬順王陵등 王陵과 신하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지도에는 蘿陵만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 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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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과 양주군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해당한다. 읍치는 적성면 구읍리에 있었다. 양주로부터 이어져오는 간성령의 맥이 감악 자락으로 이어져 읍치를 둘러싸고 있어 명당적인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고려 林椿이 감악산을 춤추는 봉새로 표현하기도 했을 만큼 경치가 수려함을 알 수 있다. 임진강 유역의 포구와 나루터가 파악되어 있다. 현의 서쪽에 단조역이 있으나 남쪽으로 상수역만 파악되어 있다. (김지영)

  • 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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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은 안성시의 죽산면, 일죽면, 삼죽면과 용인시 백암면, 원삼면의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서북쪽에서 발원한 청미천과 죽산천이 서남쪽에서 만난다. 청미천은 당시 天民川으로 巾之山, 鼎倍山에서 발원하여 驪州 驪江으로 들어간다. 읍치 북쪽의 鼎倍山은 한 봉우리가 우뚝솟아 돌을 이고 있는데, 돌 구멍에 흰뱀이 있어 매년 홍수가 날때마다 천민천에 내려와 사람과 가축의 우환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남쪽에 七賢山에 있는 七長寺는 혜소국사가 홍제관을 세우고 일곱악인을 교화하였다하여 이름지어 1308년(충렬왕 43)에 창건한 절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에 있던 開天寺에 있는 史籍이 위험해지자 이곳으로 옮겨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절반이 파괴되어 여러 번 중건되어 지금에 이른다. 지도에는 파악되어 있지 않으나 이 밖에도 서북쪽에 九峯山에 飛足寺, 飛鳳山에 長光寺, 智通寺 등이 있었다. 읍치 동쪽으로 천해의 要塞地로 알려진 竹州山城등이 있다. (김지영)

  •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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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은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의 옛 이름이다. 지도에 나타난 지역은 양평군 지제면, 양동면, 청운면, 단월면, 용문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지제면 지평리에 있었다. 읍치의 위쪽으로 흐르는 月谷川이 지금의 흑천으로 양평을 지나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여주, 원주, 이천으로 통해있으며, 역과 사창들이 파악되어 있다. 서북쪽에 있는 龍門山은 현재 국민관광단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천연기념물 303호로 지정된 은행나무로 유명한 龍門寺 등 많은 사찰이 입지해 있다. 서쪽에 있는 서원은 雲溪書院으로 1714년(숙종 40)에 賜額받았으며, 용문산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길러낸 趙昱(1498~1557)과 그의 형 趙晟(1492~1555)을 배향하였다. (김지영)

  • 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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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는 평택시 진위면, 서타면, 고덕면, 평택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진위면에 있었다. 고을 동쪽의 釜山이 鎭山이며 지도에는 파악되어 있지 않으나 고성이 있으며 산과 내 사이에 향교가 있다. 주변지과 연계되는 산으로, 북쪽으로는 舞鳳山이 수원과 걸쳐있고, 동쪽으로 天德山이 진위와 양지에 걸쳐있다. 양지와 경계를 가르는 天德山 아래쪽은 안성군의 원곡면으로 진위쪽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는 입지이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북으로 수원, 동으로 양지와 통하고 있다. 서쪽의 奈川은 수원에서 내려오는 수원천으로 수원과 경계를 가르고 있다. 읍치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이 용인에서 흘러오는 진위천이고, 수원천 사이의 하천이 오산천이다. 이들 하천은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진위는 지역이 좁고, 내부의 행정구역명과 산이름을 제외하고 소략하다. (김지영)

  • 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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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은 지금의 김포군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월곶면 고막리, 군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동쪽과 북쪽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바다로 통하는 곳이고, 서쪽은 강화도 사이에 鹽河가 흐른다. 고을의 북쪽에 祖江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한강 하류지역을 祖江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해로로 연결되는 강화와 인접하고 있으며  서울까지 가는 길목에 있으므로 수군방어의 요지였다. 따라서 산성과 봉수가 다수 분포되어 있다. 포구곶면에 있는 文殊山城(사적 제139호)은 1694년(숙종 20)에 축성된 조선시대 석축산성으로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 군과의 격전지였다. 이 지역은 강화도로 건너가는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인 갑곶진을 방어할 수 있는 장소이다. 지금은 해안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문수산 등성이를 연결한 성곽이 남아 있다. 남쪽에 守安古城에는 수안성산봉수 자리가 표시되어 있으며 古童城山에는 동성산고성이 있으나 지금은 절반만이 남아있다. 서남쪽의 德浦에는 水軍僉節制使가 있었다. (김지영)

  •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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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파주군은 파주읍 동북쪽에 위치한 坡平과 교하현의 속현인 瑞原, 양현을 합한 것이다.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다. 진산은 城山이다. 서쪽에 표시된 봉수는 大山烽燧로 북쪽에 장단의 도라산을, 남쪽으로 고양군 소질달산에 응한다. 남쪽에 표시된 역은 馬山驛이다. 북서쪽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지류들이 읍치를 감싸는 형국을 보인다. 落河는 임진강 하류이다. 읍치 북쬭의 목령동에서 발원한 梨川과 양주 고령산에서 발원한 廣灘은 장보포로 들어간다. 지금은 동쪽에서 문산천이 임진강으로 합류한다. 이 지역의 다른 군현지도에는 임진강 주변에 율곡 이이(1536~1584)가 어렸을 때 공부했던 곳 중의 하나인 花石亭, 황희 정승(1363~1452)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정자를 세우고 남은 여생을 보낸 곳인 伴鷗亭 등 다수의 정자가 파악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는 정자가 파악되어 있지 않다. 탄현면의 恭陵과 順陵은 각각 장순왕후와 공혜왕후의 릉이다. 이외에 파주에는 인조의 무덤인 長陵, 이율곡묘 등이 있으나 그려져 있지 않다. (김지영)

  • 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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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덕부는 지금의 개성직할시 판문군과 개풍군 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中面에 있으며, 지금의 황해도 개풍군 대성면 풍덕리이다. 동으로는 長湍과 坡州와 접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開城과 닿아있고, 남으로는 강화도와 통진을 마주하고 있다. 고을 아래쪽으로 흐르는 강이 한강이고, 동쪽으로 沙川이 흘러 東江을 이루어 임진강과 만난다. 祖江은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지점으로 옛날 통진과 마주하고 있는 한강 하구를 부르는 명칭으로 한강변에 표시되어 있다. 한강 건너 강화의 昇天浦는 고려 때 이후 강화도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터였다. 지도에 태조 神懿王后의 능인 齊陵, 조선 2대왕 定宗의 무덤인 厚陵 등 능원과 사창이 표시되어 있으며, 남으로 白馬山城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행정구역의 面이 세부적으로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주변 경계지역의 산을 포함하여 내부에 산의 명칭과 위치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 ▶경상도
  • 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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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弁辰의 甘文小國으로 경덕왕이 지금 이름인 개령으로 개칭하였다. 개령은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아포면, 감문면, 농소면, 남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개령은 율곡천과 鴨川(현 연봉천)이 읍치 남단을 흐르는 甘川에 합쳐져 선산을 지나 낙동강에 유입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감천에 아홉 군데의 보를 막아서 논에 물을 대어 水利가 가장 많다고 한다.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甘文山(일명 城隍山)이며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아래에 신라 법흥왕 때 阿道가 창건했다는 鷄林寺가 있었다. 감천변에 위치한 서원은 德林書院으로 1669년(현종 10)에 세워져 金宗直, 鄭鵬, 鄭經世를 배향하고 1697년(숙종 23)에 사액되었다. 농소면에 있는 高方寺는 현판 기문에 418년 아도화상이 直指寺와 함께 창건했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金烏山(976m)옆에 있는 扶桑驛은 북쪽에 있는 楊川驛, 성주의 踏溪驛과 연결되어 있는 역이다. (민경이)

  • 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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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법흥왕 때에 周奴國으로 伽倻國에 예속되었다. 가야국이 멸망한 후 문무왕이 裳州郡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인 거제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에 거제군이 되어 1909년(융희 3)에 府郡廢合時 통영군에 속하였다가 다시 거제군으로 되어 오늘에 이른다. 거제는 우리나라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인 거제도와 그 주변 섬들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거제시 거제면, 둔덕면, 사등면, 연초면, 하청면, 장목면, 일운면, 신현읍, 동부면, 남부면 등 거제시 전체에 해당되며,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있는 鷄龍山(554m)이 鎭山이며, 최남단에 있는 加羅山(585m)에는 목장이 있으며 일본 대마도를 바라보는 곳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서원은 盤谷書院으로 1704년(숙종 30)에 세워져 宋時烈(1607~1689), 金鎭圭(658~1716), 金昌集(1648~1722)을 배향하였으나 사액되지 못했다. 거제는 지리적인 위치상 왜구의 침략이 빈번하여 방어를 위한 성곽의 축조가 활발한 지역 중의 하나이다. 읍치 북쪽에 있는 古縣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石築으로 그 둘레가 2천 5백 11尺 6寸이다. 玉浦鎭은 1488년(성종 19)에 성곽을 쌓았고 그 둘레가 1천 74척이며 우물 하나와 池 하나가 있었다. 知森島 아래에 있는 知世浦鎭은 임진왜란 후 邊浦에 있다가 후에 다시 지금의 鎭으로 옮겼고 그 둘레가 1천 6백 5尺이었다. 가라산 왼쪽에 있는 栗浦堡는 1664년(현종 5)년에 고성의 右水營 옛 터 남쪽에 있었는데 1677년(숙종 13)에 지금의 위치에 옮겼다. 그 외 永登浦鎭, 長木浦鎭, 助羅浦鎭, 所非浦堡 등 모두 해안방어를 위한 진보들이며, 그 성곽의 크기는 내륙에 있는 성곽의 크기보다 상대적으로 적다. (민경이)

  •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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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居烈郡이라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 때 처음으로 지금의 이름인 거창으로 개칭하였다. 거창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주상면, 웅양면, 남하면, 남상면, 고제면, 가조면, 가북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 일대에 있었다. 거창은 황강의 상류지역에 위치하고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침식분지 안에 형성된 대표적인 지역이다. 황강과 위천이 만나는 거창분지 중심에 읍치가 있고, 가조천이 흐르는 가조분지 중심에 古加祚가 있다. 거창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乾興山이며, 三峯山(1254m)은 전라북도 무주와 경계가 되는 산이다. 고제면에 있는 浣溪書院은 1664년(현종 5)에 세워져 金湜을 배향하였으며 1670년(현종 11)에 사액되었다. 紺岳山(951m) 아래에 있는 演水寺는 802년(신라 애장왕 3)에 감악조사가 세웠고, 사찰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바위구멍에서 샘물이 나오는데 신라 헌강왕이 중풍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巨末屹烽 옆에 있는 省草驛은 星奇驛, 茂村驛 그리고 지례의 頭谷驛과 연계되고, 거말흘봉은 남쪽에 있는 金龜山烽과 지례의 龜城山에 응한다. (민경이)

  • 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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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압량산국(押梁山國)으로, 일명 押督이라고도 했다. 신라 경덕왕 때 獐山이라 칭하고, 충선왕 때 경산으로 개명하였다. 1391년(공양왕 3)에 왕비 순비 노씨의 고향이라 하여 慶山郡으로 승격하였다. 그 후 조선 태조 때 도로 현으로 내려갔다가 대구부 속현이었던 河陽과 안동부의 속현이었던 慈仁이 각각 1607년(선조 40)과 1637년(인조 15)에 복귀되고 1895년(고종 32)에 경산, 하양, 자인을 합하여 郡으로 승격하였다. 경산군은 현재 경산시 동부 자인면을 제외한 압량면 남천면, 남산면, 대구광역시 동구 남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경산군은 孤山, 城山, 金城山(428m) 등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금호강과 그 지류인 南川이 흐르고 있다. 읍치는 남천의 동쪽에 있는 邑內面으로 현재 경산시 삼남동, 서상동, 상방동 일대에 해당된다. 경산군을 지나는 도로는 押梁驛을 중심으로 주변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압량역은 옛 압독국 터로 동쪽으로 慈仁山驛, 서쪽으로는 대구 凡於驛, 남쪽으로는 청도 省峴驛, 북쪽으로는 하양 華陽驛과 이어진다. 읍치의 북측에 위치한 城山烽燧는 북쪽의 대구 法伊山烽燧와 하양군 匙山烽燧에 전달하여 준다. (민경이)

  •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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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는 신라의 옛 서울로 신라의 유적이 풍부하기로 이름이 높다. 영일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兄山江 상류에 펼쳐진 평야를 중심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성곽을 이룬 지형이다. 고려 태조 때 경주라는 명칭이 최초로 사용되었고, 성종 때 東京이라 하여 開京(개성)·西京(평양)과 함께 三京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경주는 지금의 경주시 전체, 포항시 죽장면, 신광면, 기계면, 기북면, 울산광역시 두서면 지역과 영천시 임고면, 고경면, 북안면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경주시내 동부리에 있었다. 경주의 鎭山은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읍치 동쪽에 있는 明活山 부근 나지막한 狼山(100m)이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吐含山(745m)은 신라 때 東嶽이라 하였고 中祀를 거행하였으며, 서쪽의 仙桃山(380m)은 西嶽(혹은 西述, 西兄, 西鳶), 남쪽의 含月山은 南嶽, 북쪽의 金剛山은 北嶽이라 각각 일컬었다. 남쪽의 金鰲山(466m)은 南山이라고도 하는데 그 빼어난 자연경관은 唐나라의 顧雲이 崔致遠에게 지어준 시에 잘 나타난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斷石山(827m)은 月生山이라고도 하며, 속설에 신라의 金庾信(595-673)장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新劍을 얻어 이 곳에서 검술을 수련하느라 칼로 벤 큰 돌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져 있다고 한다. 읍치 아래에 있는 月城 (혹은 半月城, 新月城, 在城)은 생긴 모양이 초생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大東地志≫에 의하면 101년(신라 婆娑王 22년)에 궁성으로 축성하여 935년(신라 경순왕 9)까지 약 900년간 신라를 다스리던 宮城이었다. 울산 경계에 접하고 있는 鵄述岺은 신라 때 朴堤上이 倭國에서 피살되어 그의 아내가 이 재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울다가 죽었다고 한다. 茵薄山은 속설에 김유신이 寶劍을 휴대하고 깊은 동굴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告由하여 병법을 기도하던 곳이다. (민경이)

  • 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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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大伽耶國 땅으로 시조 伊珍阿豉王에서 16대 道設智王까지 520년간을 지냈다. 신라 진흥왕이 이를 멸하고 대가야군이라 하였고,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인 고령으로 고쳤다. 고령은 현재의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개진면, 쌍림면, 운수면 일부, 우곡면 서부지역 일대에 해당되며, 읍치는 고령군 고령읍 쾌빈리와 헌문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 보이는 고령의 하천은 성주에서 흘러나오는 대가천이 읍치가 있는 곳에서 합천에서 들어오는 가야천과 합친 다음 大盤川(현 會川)이 되고 계속 흘러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대가야가 자리했던 고령은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이고, 낙동강이 좁은 골짜기를 통해 이어진 천연의 요새지역이다. 鎭山은 美崇山(733m)에서 이어지는 나지막한 九耳山이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미숭산 아래에는 盤龍寺가 있는데 용이 서리고 앉은 것과 같은 지형에 위치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반룡사는 802년(신라 애장왕 3)에 해인사보다 먼저 지어졌다하며 신라 말 보조국사가 중수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사명대사가 중건하였다. 읍치 아래에 보이는 安林驛은 성주의 戊溪驛과 安彦驛, 합천의 金陽驛, 초계의 八鎭驛과 연결되는 역이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望山熢은 미숭산, 성주의 伊夫老山에 응한다. (민경이)

  •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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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小伽耶國이었는데 신라가 차지한 뒤 古自郡을 두었고 경덕왕 때 지금 이름인 고성으로 고치었다. 고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 전체, 통영시 도산면, 광도면, 용남면, 사천시 시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고성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 보듯이 경상남도 남해안의 중앙에 자리한 지역으로 섬들이 많아 현재의 해안선과 그 구분이 정확하지 않다. 고성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旡量山(无量山의 오기, 581m)이며, 북쪽에 있는 舞妓山은 固州刺史가 기생을 데리고 여기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춘원면에 있는 統營은 임진왜란 1604년(선조 37)부터 1896년(고종 33)까지 293년 동안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관할하던 右水營兼三道水軍統制營이었고, 李舜臣(1545~1598)이 3도의 舟師(수군)를 관장하는 統制使였다. 후에 통영과 충무라는 지명이 여기서 유래 되었다. 통영의 아래에 있는 彌勒島에는 春元浦와 彌勒山烽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해면매립에 의해 시가지가 확장되었다. 최남단에 있는 欲知島와 蓮華島는 그 둘레가 각각 65리, 53리로 일본 고기배가 상시로 왕래하는 곳이었다. 진주 경계에 접하여 있는 床足岩은 돌기둥 네 개가  평상 같은 바위를 받치고 있어서 조수가 밀려 와도 물은 그 밑을 지나간다고 한다. 남해 경계에 접하여 있는 蛇梁島鎭은 그 營이 石城으로 둘레 1천 2백 51척, 높이가 13척이며 水軍萬戶가 1명이 있었다. 그 외 唐浦鎭, 三千浦堡, 春元浦堡, 堀浦津, 丘墟浦 등 수개의 鎭堡와 浦口들이 해안가를 따라 늘어서 있다. (민경이)

  • 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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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昆明縣이며, 신라 때 칭호는 자세하지 않다. 1419년(세종 1)에 南海縣에 합하여 昆南郡으로 승격하였으나 1437년(세종 19)에 다시 남해현을 두고 진주의 金陽部谷을 합쳐서 지금 이름인 곤양으로 고쳤다. 곤양은 지금의 사천시 곤양면, 서포면, 곤명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곤양은 진주만에서 내륙 깊숙이 들어간 사천만 서안에 위치하고 있어 사천만으로 유입되는 곤양천과 무고천이 흐른다. 곤양의 최남단에 있는 露梁院은 노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남해와 가깝게 있으며, 현재는 남해대교가 개통되어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량해협은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李舜臣(1545~1598)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읍치 북쪽에 있는 銅谷山이 鎭山이며, 하동 경계에 접하여 있는 金鰲山(849m)은 甁要山이라고도 한다. 곤명면에 흐르는 金城江(현 덕천강)에는 幷橋가 보이는데 현재의 금성교이다. 良浦驛은 남해의 德新驛, 북쪽에 있는 浣沙驛과 연결되어 지나가는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민경이)

  • 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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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奴同覓縣으로 경덕왕 때에 군위로 고치어 嵩善郡(현 선산군)의 領縣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郡으로 되었다. 군위군은 현재 군위군 군위읍, 효령면, 소본면 일대에 해당되고, 읍치는 군위읍 동부리 지역에 있었다. 지도에서 보듯이 북쪽 비안의 渭川이 이어져 羊腸처럼 읍치를 휘감아 흐르다가 중리면과 성동면 지역에서 분리된다. 幷川은 의흥현의 남천과 부계현의 남천이 합쳐서 하나의 개울이 되어 붙은 지명이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馬井山(402m)이 鎭山이며 마정산 봉수가 있다. 마정산 봉수는 읍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박달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비안군 간점산 봉수에 응한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기우봉은 옛 祈雨壇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서원(南溪書院)은 ≪輿地圖書≫에 의하면 1627년(인조 5)년에 창건되어 문충공 유성룡(1542~1607)을 모시었으나 사액 받지는 못하였다. 효령면에 위치하고 있는 召溪驛은 의흥군의 牛谷驛, 선산군의 上林驛, 신령군의 長水驛, 비안군의 雙溪驛과 연결된다. (민경이)

  • 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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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甲火良谷縣인데 경덕왕이 기장으로 고쳐서 동래의 領縣을 삼았다가 후에 梁州(梁山)로 이속하였다. 1018년(현종 9)에 蔚山에 예속되었다가 후에 監務를 두었다. 1599년(선조 32)에 동래로 들어갔다가 1617년(광해군 9)에는 다시 縣을 만들었고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여 동래부에 속했으며, 1914년에는 동래군으로 병합되었다. 기장은 현재의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일광면, 정관면, 철마면, 장안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있는 炭山이 鎭山이다. 동해에 접하여 있는 碁浦는 검정 바둑돌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울산 경계에 접하여 있는 佛光山은 사시사철 경치가 좋은 곳이며 그 아래에 있는 長安寺는 673년(신라 문무왕 13)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쌍계사라 하다가 809년(신라 애장왕)에 장안사라 고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가 몇 차례 다시 중건되었다. 읍치 아래에 있는 南山烽은 동래의 干飛烏山에 응하고 울산의 林郞浦에 응한다. (민경이)

  • 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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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桐岑이었는데 경덕왕 때 김산이라 고쳤다. 김산은 현재의 김천시 김천시내, 대항면, 조마면, 구성면 일부, 대항면, 봉상면, 어모면, 감문면 서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김천시 김천시내 교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를 감싸고 흐르는 直旨川은 소백산맥의 秋風嶺 골짜기에서 흘러내려 甘川으로 유입된다. 감천은 가야산맥의 牛頭嶺(587m)에서 북동쪽으로 흘러 선산에서 낙동강과 만난다. 읍치의 북동쪽에 있는 추풍령은 한성과 영남을 잇는 嶺南路가 통과 했고, 오늘날에는 경부선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한다.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五波山이며, 충청북도 황간 경계에 접한 黃岳山(1111m) 아래에는 공정왕 때 御胎를 안치한 태실이 있던 곳이다. 황악산 아래에 있는 直指寺는 418년(신라 눌지왕 2)에 黑湖가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0년(광해군 2)에 仁守, 明禮가 재건하였다. 이 곳에는 고려 林民庇가 지은 大藏堂 기문이 있다. 선산 경계에 접하여 있는 俗門山城은≪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그 둘레가 2천 4백 50자, 높이가 7자인 石城으로 그 안에 샘 2, 못 2, 군사 창고 1개가 있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金泉驛은 소속된 20개의 역을 관리하는 察訪道이다. (민경이)

  •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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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가야국 땅인데 구해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하여 그 후 신라의 金官郡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년 지금 이름으로 金海府가 되었다가 조선 태종 때 다시 도호부로 고쳤고,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김해는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 전체, 창원시 대산면, 부산광역시 강서구 낙도안 西岸, 강동동과 명지동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고, 읍치는 김해시내 동상동과 서상동 일대에 있었다. 김해는 낙동강이 북쪽과 동쪽을 감싸 흐르면서 웅천 그리고 동래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安崇善의 기문에 김해의 형상을 “산천이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인물이 번성하였다. 세 갈래 물이 빙 둘렀고 일곱점 산이 얼기설기하다”라고 표현하였다. 김해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分山(또는 分城山, 310m)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龜旨峯은 신라 유리왕 19년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상자가 내려오고 그 알 속에서 수로왕을 비롯한 6가야의 시조 왕들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현재 김해시내에 수로왕릉과 그 왕비인 허왕후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있다. 고을 남쪽에 있는 德島는 강 중앙에 있으며, 鳴旨島는 鷲島와 2백보쯤 떨어져 있고 둘레는 7백리로 큰 비나 가뭄 그리고 바람이 불려하면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읍치 동쪽에 있는 서원은 新山書院으로 1576년(선조 9)에 세워져 曹植을 주향(主享)하고 申李誠을 從享하였으며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다. (민경이)

  •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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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는 693년(효소왕 2)에 轉也山郡을 두어 君主가 다스려 왔으며 그 후 경덕왕 때에 남해라 개칭하였다. 남해는 南海島와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우리나라의 네 번째로 큰 섬인 남해도는 노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육지와 떨어져 있어 접근이 어려웠으나 현재는 남해고속도로와 남해대교가 개통된 이후 외부와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그리고 金萬重(1637~1692)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구운몽≫을 쓴 곳이기도 하다. 읍치 북쪽에 있는 露粱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최후의 대승을 거둔 해전으로 유명한 곳이며, 그 아래에 보이는 忠烈祠는 1633년에 세운 사당으로 이순신을 배향하고, 1663년(현종 4)에 사액되었다. 지금의 남해군은 남해군 창선면을 제외한 남해읍, 이동면, 삼동면, 남면, 서면, 고현면, 설천면 등 남해군 전체에 해당되며, 읍치는 남해읍 남변리에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있는 望雲山 (786m)이 鎭山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남해도는 성곽의 터가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 읍치 북쪽에 있는 古城 (또는 古縣山城)과 官堂城은≪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石築으로 그 둘레가 각각 1천 7백 40척과 7백 20척이다. 그 외 바다에 접하여 있는 平山浦鎭, 彌助項鎭 등은 모두 海岸防禦를 위한 鎭들이다. (민경이)

  • 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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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는 丹溪·江城 두 縣을 합한 이름이다. 강성현은 원래 신라의 闕支縣인데 경덕왕 때 闕城郡으로 고쳤다. 단계현은 본래 신라의 赤村縣인데 경덕왕 때 丹邑으로 고쳐서, 궐성군 領縣이 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 단계·강성을 합하여 지금의 이름인 단성으로 고쳤다. 단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신안면, 생비량면, 신등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산청군 단성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단성면의 사월리는 文益漸이 그의 장인 鄭天益과 더불어 元에서 들여온 목화 종자를 심어 목화재배와 면직에 성공한 곳이다. 단성은 소백산맥에서 발원하는 남강의 본류인 경호강과 그 지류인 양천강과 단계천이 흘러서 진주의 진양호로 유입된다. 읍치 북쪽에 있는 來山이 鎭山이며, 白馬山 아래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尺旨山에서는 철이 산출되고, 芚鐵山(811m)은 산청 경계에 있다. 옛 단계현에 丹溪倉이 보이며, 읍치 오른쪽에는 新安津이 있다. (민경이)

  •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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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는 본래 신라의 達勾火縣 또는 達弗城인데 경덕왕이 大丘로 고치었다. 1419년(세종 1)에 大邱郡으로 되어 1466년(세조 12)에 도호부로 승격되고 1601년(선조 34)에는 경상도 감영이 대구부에 이전 설치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道가 폐지되고 전국23부 실시에 따라 대구부 관할의 대구군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에는 다시 부제를 실시했으나 대구면을 중심으로 시가지 일대만 대구부로 독립하였고 그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으로 되었다. 대구는 지도에서 보듯이 連龜山을 鎭山으로 하여 내부에 낙동강과 금호강이 흘러 땅의 형세가 평탄하고 넓다. 대구는 현재 대구광역시의 북구를 제외한 전체와 달성군의 하빈면, 다사읍, 화원읍, 옥포면, 논공읍, 청도군의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 일부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로 일대이다. 읍치의 서쪽에 보이는 達城은≪新增東國輿地勝覽≫기록에 의하면 석축으로 쌓았고 둘레 9백 44척, 높이는 4척이며 우물3, 연못2, 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달성 우측에 있는 硏經書院은 1564년(명종 19)에 건립하고 1690년(현종 16)에 사액 받은 서원이다. 그밖에 역원에는 凡於驛, 琴川驛, 舌火驛, 幽山驛, 梧桐院이 보이며 창고는 남창, 강창, 풍창, 해창 등이 산재하여 있다. 사찰에는 고려의 김황원(金黃元)의 기문이 있는 地藏寺를 비롯하여 용천사, 용연사, 임수사, 향림사, 추덕사 등이 분포하고 있다. (민경이)

  • 동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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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 나라를 이루어 萇山國 또는 居漆山郡이라 불렀고, 756년(겅덕왕 15)에 지금의 이름인 동래라 고치었다.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부산시에 속하였다가 1914년 부·군 폐합 때에 釜山府를 제외한 부분과 기장군을 합하여 동래군이라 개칭하고 군수를 두었다. 동래는 현재의 부산광역시 북구와 강서구를 뺀 나머지 지역 일대에 해당되며, 읍치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일대에 있었다. 동래에는 수영강이 유입된다. 동래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輪山이다. 읍치 아래에 釜山浦鎭에는 左道水軍僉節制使가 있어 豆毛浦, 多大浦 등 8개의 浦를 관할하였다. 두모포 부근 倭館에는 상주하던 倭戶가 있는데 1510년(중종 5)에 첨절제사 李友曾이 매질을 가해 분노한 왜호가 난을 일으켜 토벌 이후로 조정에서는 왜호 두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해 경계에 접하여 있는 金井山(801m)은 산마루에 3丈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둘레 10여 尺, 깊이 7寸되는 우물이 있다고 한다. 그 우물에는 금빛 물고기 한 마리가 5색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하여 금정산이라 이름을 붙였고 그곳에 절을 지어 凡魚寺라 하였다. 범어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의상법사가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2년(선조 35)에 중건하고 1613년(광해군 5)에 다시 중건하였다. 이 절에는 국보 제 3389호인 범어사 삼층석탑이 있다. 남쪽에 있는 絶影島에는 목장이 있는데 견훤이 절영도産 말 1필을 고려 태조에게 헌납하였다가 뒤에 절영도 명마가 들어오면 백제가 망한다 라는 讖言을 듣고 후회하여 되돌려 달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읍치 왼쪽에 있는 溫井은 병을 지닌 사람이 목욕만 하면 낫는다하여 신라왕이 여러 차례 왔다고 한다. (민경이)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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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은 신라 초에 冠文縣이라 하였는데 일명 冠縣 또는 高思曷伊城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 때 冠山縣이라 개명하였고, 고려 초기에 聞喜郡으로 하였다. 1018년(현종 9)에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지금 이름인 문경으로 고쳤다. 문경은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마성면, 가은읍, 농암면, 호계면, 문경시내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으며, 읍치는 문경시 문경읍 하리 일대에 있었다. 문경은 소백산맥의 鳥嶺(또는 새재, 642m) 남쪽에, 그리고 영강과 조령천 유역에 위치하여 교통 및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申砬(1546~1592)은 潁江峽谷과 조령에서 왜적을 막아내려 하지 않고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으로 물리치려다 참패했다. 임진왜란 후 간선도로가 추풍령으로 옮겨짐에 따라 조령의 중요성은 줄어들었지만 鷄立山(또는 하늘재)을 넘어서면 충주와 연결되어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연결시키고 남한강과 닿게 되는 통로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조령 아래에 있는 伊火嶺도 민간에서 많이 이용하던 고개였다. 鳥嶺山城은 1708년(숙종 34)에 쌓아 현재의 제1관문(주흘관)·제2관문(조곡관)·제3관문(조령관) 세 곳에 성이 있고 남북이 8리이며 둘레가 1만 8천 5백 9步로 조령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영강과 조령천 강변에 있는 姑母城과 姑父城 또한 신라 때 방어를 하던 곳이다. 가은면에 있는 加恩古縣城(또는 甄萱山城)은 둘레 5백 65척尺으로 견훤이 가은현 사람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主屹山(1106m)이다. 고현면에 있는 虎溪는 본래 신라의 虎側縣으로 拜山城이라고도 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문경에 내속되었다. 曦陽山 아래에 있는 鳳岩寺는 879년(신라 헌강왕 5)에 지증국사가 처음 세워 여러 차례 重修를 거쳤고 삼층석탑(보물 제169호) 등 9점의 보물이 있다. 호남면에 있는 幽谷驛은 察訪驛으로 18개 역을 관할하였다. (민경이)

  •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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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은 삼한시대 弁韓의 땅으로 伽倻國에 들어갔다. 신라 법흥왕 때는 推火郡으로 경덕왕 때 密城郡으로 고치고, 고려 성종 때는 密州로 고쳤다. 지금 이름인 밀양이 된 것은 조선 태조 때이며,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밀양은 현재의 밀양시 청도면을 제외한 전체지역 즉 밀양시내, 부북면, 상동면, 상남면, 하남읍, 초동, 무안면, 산내면, 산외면, 단장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밀양시 내동 일대에 있었다. 밀양은 낙동강 유역에 속하여 그 지류인 밀양천과 단장천이 유입된다. 밀양천은 경남과 경북의 도계 경계를 넘어 청도지방에서 흘러나온다. 하천유역에는 밀양평야, 하남평야, 남지평야 등의 충적 평야가 펼쳐져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權擥의 기문에 밀양을 “먼 봉우리는 하늘에 떠 있고, 긴 강은 뉘어 놓은 듯하다” 하여 수려한 자연환경을 칭송하였다. 읍치 북쪽에 있는 屯德山(932m)은 華嶽山이라고도 하며, 밀양의 鎭山이다. 읍치 서쪽에 있는 龜靈山에는 고려 인종의 胎가 있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읍치 남쪽에 있는 嶺南樓는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의 하나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누각이다. 守山津 부근 國農所에는 紅蓮이 무성해서 그 향기가 좋다고 한다. 穿火峴자락에 있는 石骨寺는 신라 備虛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임진왜란 때 삼랑진 작원관 전투에서 패퇴한 朴晋과 孫起陽 등이 왜적과의 항전을 도모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민경이)

  •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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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유역에 속한 일부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졌다. 최고봉인 태백산(1568m)을 비롯하여 문수산(1206m), 풍락산, 태자산 그리고 봉화의 鎭山인 금륜산이 있다. 읍치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新羅峴은 전하여 내려오기를 신라왕의 태자가 奈靈郡(영주)에서 놀다가 郡吏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고을사람을 부끄러워해 이곳에 머물렀다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봉화에 흐르는 매천과 도미천은 태백산의 황지에서 나온다. 봉화는 본래 고구려 古斯馬縣의 땅으로 신라 경덕왕이 玉馬라 하였고 고려 때 봉화로 개칭하였다. 1458년(세조 3)에 순흥의 문수산 이동의 땅을 합하고 1895(고종 32)에 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봉화는 지금의 봉화군 봉성면, 명호면, 물야면 지역과 상운면, 춘양면 일부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지역에 있었다. 읍치가 봉화의 서쪽에 치우쳐 있어 영주와 가깝다. 지도에서 보듯이 안동 춘양면에 접해있는 覺華寺는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원효대사가 건립한 사찰로 1101년(고려 숙종 6)에 무애국사가 중건한바 있고 1777년(정조 1)에 다시 중건하여 당시 국내 3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혔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각화사에는 璿源閣, 實錄閣, 史庫가 있고 곁에 叅奉 2명과 守護軍 25명이 있었다 한다. 안동에 접하여 있는 洪濟庵은 그 건립이 분명하지 않고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다. 그 후 1581년(선조 14)년에 사명대사가 홍제암 뒷산에 있는 도솔암에서 수도하여 그 때 이절을 중수하고 익호를 따서 홍제사라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읍치 남쪽에 있는 道深驛은 末屯이라고도 하며 원래 읍치 북쪽에 있었는데 太白山祭를 폐지한 뒤로 이곳에 옮겨져 영주의 昌保驛, 순흥의 昌樂驛, 안동의 瓮泉驛, 예안의 宣安驛과 연계되어 있다. 봉수는 읍치 동쪽에 있는 용참산봉과 망일산봉이 보인다. (민경이)

  • 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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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안은≪新增東國輿地勝覽≫에<雙溪帶繞疊嶂屛廻>라 하여 鄭宗周의 시에 “쌍계는 얇은 비단 띠처럼 돌았고, 겹친 봉우리는 무늬 있는 비단병풍처럼 둘렸도다” 라 하였다. 지도에서 보듯이 산봉우리와 낙동강의 지류가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각각 비단 띠와 병풍으로 표현할 정도로 배산임수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하고 있다. 비안군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지방의 옛 이름으로 比屋·安貞 두 현을 합한 이름이다. 비안현은 본래 신라 阿火屋縣, 안정현은 신라 阿尸兮縣인데 경덕왕이 각각 비옥, 安賢으로 고치고 그 후 두 현을 합하여 1423년(세종 5)에 비안으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에는 郡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에 의성군에 합쳐졌다. 비안군은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 구천면, 단밀면, 단북면, 안계면, 다인면 그리고 신평면, 안평면 일부와 예천군 풍천면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 동부리 일대 지역이며, 동부리는 서부리와 총칭하여 비안 혹은 읍내라 부르기도 한다. 비안의 읍치를 감싸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다. 읍치 북쪽에 있는 城隍山이 鎭山이며, 왼쪽에 龜川書院이 위치하여 있다. 구천서원은 1721년(경종 1)에 세워진 것으로 朴瑞生, 朴宜中외 4인의 선현을 모시고 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구천서원 六先生埋版所라는 작은 비석만이 남아있다. 정서면에 위치한 安溪驛과 신동면에 위치한 雙溪驛은 幽谷道에 딸린 역이다. (민경이)

  • 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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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史勿縣이었는데 경덕왕이 泗水로 고쳤다. 1011년(현종 2)에 泗州로 개칭하고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이름인 사천으로 개명하였다. 1415년(태종 15)에 泗川鎭을 두었으나 1468년(세조 14)에 鎭이 없어지고 1895년(고종 32)에 전국 23부제에 따라 곤양군을 합하여 사천군이 되었다. 사천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정동면, 사남면, 용현면 지역과 사천시내(삼천포)일부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사천시 사천읍 정의리 일대에 있었다. 사천은 진주만에서 내륙 깊숙이 들어간 사천만 동안에 위치하고 있어 사천만으로 유입되는 사천강과 죽천천 그리고 백천천이 흐른다. 사천만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이곳으로 침입한 일본수군과의 해전에서 거북선을 처음 실전에 투입해 승리를 거둔 곳이기도 하다. 사천의 鎭山은 읍치 동쪽에 있는 豆伐山이다. 현재 臥龍山(799m)에서 흘러내리는 백천천 곡구에 형성된 扇狀地(하천 谷口에 부채꼴 모양의 사력퇴적지형)는 ‘사천선상지’로 지리학계에 널리 소개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상지 중의 하나이며, 지도를 통해 볼 때 선상지 형성에 알맞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북쪽에 있는 서원은 龜溪書院으로 李滉, 李楨을 배향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 萬竹山에 건립된 사당이 1676년(숙종 2)에 사액된 후 龜溪書院이라 하였다. 두벌산 아래에 있는 批王寺는 고려 현종이 태자였을 때 이 절에서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천만에는 猪島, 勒島, 深水島 등 작은 섬들이 늘어서 있다. (민경이)

  • 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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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知品川縣이며 경덕왕 때 山陰으로 고치고, 1767년(영조 43)에 지금의 이름인 산청으로 고쳤다. 그 후 1914년에 단성군과 합하여 산청군이 되는데 본 지도는 단성과 병합되기 전 山陰의 지도이다. 산청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오부면, 생초면, 차황면, 금서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산청군 산청읍 한동과 지리 일대에 있었다. 산청에 흐르는 하천은 남강과 그 지류인 경호강이다. 읍치 동쪽에 있는 東山이 鎭山이며. 삼가 경계에 접하여 있는 黃梅山(1103m)은 정상이 활짝 핀 매화꽃잎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 바로 아래에 있는 古山城은 石築으로 그 둘레가 1천 3백 33척이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읍치 위쪽에 있는 서원은 西溪書院으로 1606년(선조 39)에 세워 吳健을 배향했고 1677년(숙종 3)에 사액되었다. 읍치 왼쪽에 있는 王山寺는 신라 때 장군 金庾信, 金孟, 金馹孫을 모셨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棆山 아래 知谷寺에는 고려 예부상서 孫夢周가 지은 慧月, 眞觀의 두 碑가 있다. (민경이)

  •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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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가는 三岐·嘉樹 두 현을 합한 이름이다. 삼기현과 가수현은 본래 신라의 三支縣(麻杖)과 加主火縣인데 경덕왕 때 각각 삼기와 가수로 고쳤다. 조선 태종 때 두 현을 합하여 지금의 이름인 삼가로 개명하였으나 1914년에 거창과 합천에 지역을 나누어 편입시키고 없어졌다. 삼가는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쌍백면, 가회면, 대병면, 봉산면 지역과 거창군 신원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합천군 삼가면 금리에 있었다. 삼가는 남강의 지류인 양천강 유역에 읍치가 있고, 모태면(현 봉산면)과 고현면(현 대병면) 그리고 대평면(현 대병면)에는 황강의 지류인 사천천, 유전천, 하금천이 흐른다. 삼가의 古三岐縣의 터는 金城山烽 부근에 있고, 古嘉樹 터는 阿斗峴 아래에 있다. 황강변에 있는 서원은 龍巖書院으로 1603년(선조 36)에 세워져 曹植을 배향하며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다. 읍치 동쪽에 있는 有獜驛은 의령의 指南驛, 단성의 新安驛, 진주의 安磵驛, 합천의 勸賓驛과 연결되는 沙斤道의 屬驛이었다. (민경이)

  •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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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沙伐國 또는 沙佛國이라 하였으며, 경덕왕 때 지금 이름인 상주로 고쳤다. 983년(성종 2)에 尙州牧이 되어 1392년(태조 1)에 경주의 관찰사영이 옮겨와서 1596년(선조 29)에 관찰사영이 대구로 옮겨갈 때까지 경상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성으로 가는 嶺南路가 통과하고 세곡 수송에 중요한 낙동강이 가깝게 있어 지리적으로 교통·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상주는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광역시 전체와 의성군의 단밀면, 단북면, 문경시의 산양면, 영순면 일부, 산북면 일대를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고, 읍치는 상주광역시 상주시내 성하리와 성동동 일대에 있었다. 상주는 읍치 주변에 흐르는 병성천과 단북면에 흐르는 渭水(현 위천)가 본류인 낙동강에 유입되어 하류에는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졌다. 지도에서 보듯이 상주에는 영남로상에 위치한 洛陽驛을 비롯하여 洛陽洞, 洛平驛, 洛東村, 洛東里, 洛西里 등 낙동강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상주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天峯山이며, 청주 경계에 접한 俗離山(1058m)과 청산 경계에 접하여 있는 八音山(762m)이 서쪽 경계가 된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甄萱城은 견훤이 가은에서 나서 그 누이와 같이 청화산의 돌을 한 치마씩 주어다가 하루만에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켜 후백제를 이룩하였다고 전한다. 상주에는 道南書院, 玉洞書院, 興巖書院 등 많은 서원들이 있는데 위의 서원들은 모두 사액된 서원들이다. 도남서원은 1606년(선조 39)에 세워서 鄭夢周, 金宏弼 외 3인을 배향하였으며 1677년(숙종 3)에 사액되었다. 玉洞書院은 1568년(선조 1)에 세우고 黃喜, 全湜을 배향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에 사액되었다. 상주에는 단밀창, 공성창, 중모창, 산양창, 화령창, 청리창, 외서창 등 큰 고을 만큼이나 많은 창고들이 분포되어 있다. (민경이)

  • 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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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一善郡이었는데 경덕왕 때 嵩善郡으로 고쳤고 조선 태종 때에 지금의 이름인 선산군으로 고쳤다. 선산은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옥성면, 고아읍, 무을면, 해평면, 산동면, 도개면, 장천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와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선산은 낙동강이 중앙부를 관류하고 읍치 남부에 그 지류인 甘川이 흐른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飛鳳山이다. 지도 남단에 있는 金烏山(976m)은 고려 때 海州의 북숭산과 짝을 이룬 南嵩山으로 서쪽의 개령, 동쪽의 인동과 경계를 이루며 고려의 吉再가 이 산 밑에서 살았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금오산성은 산세가 험준한 곳에 있는 옛 石城으로 고려 말 선산, 인동, 개령, 성주의 백성들이 왜구를 피하여 여기에 들어와 살았고, 조선에 와서 개축하여 그 둘레가 7천 6백 44尺에 높이가 6백 6십 1步로 절벽을 따라서 성이 된 것이 거의 절반이나 된다. 성안에는 폭포 우물이 8개, 못이 7개 있다. 금오산성 북쪽에 있는 冶隱廟는 1609년(광해군 1)에 지금의 이름으로 되어 吉再, 金宗直 외 3인을 배향하였다. 해평면에 있는 서원은 洛峰書院으로 1646년(인조 24)에 세워져 金淑滋, 金就成 외 3인을 배향하였으며, 1787년(정조 11)에 사액되었다. 상주 경계에 접하여 있는 水多寺는≪水多山略誌≫에 의하면 830년(신라 흥덕왕 5)에 진감국사가 蓮岳山에 蓮花寺라 하여 절을 지어서 1573년(선조 5)에 다시 사명대사가 중건하여 수다사라 개칭하였는데 1705년(숙종 30)에 화재로 인하여 일부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낙동강 강변을 따라 義狗塚과 義牛塚이 보이는데 이는 각각 화재와 호랑이로부터 주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黃狗의 무덤과 소의 무덤이다. 산내면에 있는 月波亭은 고을의 원인 李文挺이 처음 정자를 지어서 월파라 불렀다가 허물어진 것을 崔關이 漢城宮을 지은 도편수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였다. 월파정은 그 절경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지나가는 길손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민경이)

  • 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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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六伽倻의 하나인 星山伽倻였는데 신라가 이를 정벌하고, 충렬왕 때 지금 이름인 성주로 고쳤다. 성주는 가야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지역으로 서쪽은 伽倻山(1430m)·禿用山(956m) 등 높은 산지가 있고, 동쪽은 낙동강이 흘러 西高東低의 지형을 보여준다. 낙동강 지류인 백천이 읍치를 감싸 흐르고, 대가천이 고령을 경유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성주는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전체, 고령군의 다사면, 덕곡면, 운수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있는 印懸山이 고을의 鎭山이며, 修道山(1317m)은 知禮와 居昌 두 고을의 경계가 되고 있다. 독용산에 있는 禿用山城은 ≪大東地志≫에 의하면 본래 都山城으로 1675년(숙종 1)에 개축한 石城이다. 그 둘레가 4천 5백 81步로 砲壘 4개, 溪 3개, 泉 2개가 있는 甕城으로 평탄하고 험함이 서로 반반이다. 독용산성 아래에는 회연서원과 덕봉서원이 보인다. 檜淵書院은 1627년(인조 5)에 세워져 鄭逑, 李潤雨를 배향하고 1690년(숙종 16)에 사액되었다. 성주에는 達倉, 南倉, 泉倉, 老多倉, 加倉 등 많은 창고가 분포 되어 있다. (민경이)

  • 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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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의 지도는 남북의 길이는 짧고 동서로 길게 뻗어있어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 소백산(1440m), 죽령(697m), 비봉산, 관적령, 마아령, 백병산, 문수산이 병풍처럼 동서로 펼쳐져 순흥을 감싸고 내부에는 내성천의 지류인 서천이 흐른다. 영주의 지곡, 답곡, 소천의 飛地도 보인다. 본래 고구려의 及伐山郡인데 신라 경덕왕 때 岌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충목왕 때 순흥으로 개칭되어 부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되었으나 1457년(세조 3)에는 풍기군에 속하여 부를 폐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23부제 실시에 따라 郡이 되었고 1914년에는 군을 폐하고 화천면·수민단면·수식면은 봉화에 속하고 그 나머지는 영주로 편입되었다. 순흥은 지금의 영주군 단산면, 순흥면, 부석면 지역과 풍기읍과 안정면의 일부지역 그리고 봉화군의 봉화읍, 물야면, 법전면, 봉성면의 일부지역이 포함되는 지역이며, 읍치는 영주군 순흥면의 읍내리 지역에 있었다. 지도에는 없지만 내죽면에 紹修書院은 1542년(중종 37)에 愼齋 周世鵬(495-1554)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처음에 백운동서원으로 출발한 이 서원은 1550년(명종 5)에 서적·노비·농토와 ‘소수서원’이란 額書를 하사받아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다. 창락면에 있는 昌樂驛은 내죽면에 있는 竹洞驛과 안동의 幽洞驛, 충청도 단양의 長林驛과 연계된다. 죽령봉은 풍기의 望前山에 응하고 충청도 단양의 金伊山에 응한다. (민경이)

  • 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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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史丁火縣인데 경덕왕 때 신령으로 고쳐 臨皐郡(永川郡)의 領縣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 경주에 속하였다가 조선 때 현감을 두어 소재를 장수역(長壽驛)으로 옮겼다. 중종 때에는 영천군에 속하였으며 북면 신촌리의 땅은 의성에, 梨阜縣의 땅은 의흥에 속했다가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영천군에 병합되었다. 신령은 지금의 영천시 신령면, 화산면, 지곡면, 경산시 와촌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천시 신령면 화성리에 있었다. 신령은 琴湖江유역에 있는 지역으로 읍치 서쪽에 있는 하천이 西川이며 고현면과 신촌면에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금호강 지류인 신령천과 고현천이 된다. 신령의 鎭山은 청송의 普賢山(1124m)에서 이어지는 花山이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신령은 “북쪽으로 花山에 거하고, 남쪽으로 龍川으로 둘렀다”라고 하여 그 입지가 전형적인 배산임수이다. 읍치 부근에 있는 長壽驛은 察訪道로 주변 14개의 屬驛을 두었다. 하양에 접하고 있는 龜川祠는 1686년(숙종 12)에 창건하여 權應銖를 배향하고 사액되지는 못하였다. 읍치 동쪽에 있는 尙德祠는 1705년(숙종 31)에 창건하여 현감 尹明運을 배향했다. (민경이)

  •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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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古昌寧國이었는데 신라 때 古陀耶郡으로 되었다가 경덕왕 때 古昌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때 후백제 왕 견훤과 싸울 때 도운 공이 있어 府로 승격되었고 현종 때 안동부(安東俯)로 고쳤다. 신종 때는 東京(경주)의 야별초 반란 시 진압의 공이 커서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776년(영조 52)에 道縣의 逆變으로 縣으로 강등했다가 1785년(정조 9)에 다시 부로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郡이 되었고 1914년에 禮安郡을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안동은 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서후면, 북후면, 임하면, 임동면, 풍산읍, 풍천면, 남선면, 남후면, 길안면 지역과 예천군 감천면의 일부지역 그리고 봉화군 법전면, 춘양면, 재산면, 소천면 일부지역을 포함하고, 읍치는 안동시 동부동에 있었다. 지도에서 보듯이 안동지역 중앙부에 금띠를 두른 듯한 큰 하천은 낙동강이며 읍치가 있는 현재 안동시 동부동 일대에서 반변천이 되어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특히 풍서면(현 풍천면)에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同族村인 河回 마을과 屛山書院이 있는데 그 곳의 주변 자연환경은 뛰어나다. 屛山書院은 1613년(광해군 5)에 愚伏 鄭經世(1563-1633) 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西厓 柳成龍(1542-160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1863년(철종 14)에 사액되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도 철거되지 않은 47개의 서원중의 하나이다. 임북면에 있는 虎溪書院은 1575년(선조 8)에 지방 유림이 건립하여 退溪 李愰을 주향하고 1625년(광해군 12)에 鶴峰 金誠一(1538-1593)과 西厓 柳成龍을 배향하였다. 원래 廬江書院으로 불리다가 1676년(숙종 2)에 사액 당시 호계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임남면에 있는 黙溪書院은 1687년 (숙종 13)에 창건하고 金係行(1431-1517)과 玉沽(1382-1436), 金通을 봉향하고 있다. 그 외 청성서원, 도연서원 등이 있다. 안동에 분포되어 있는 봉수는 봉지산봉, 신석산봉수, 약산봉수, 소산봉수, 당북산봉수 등이 있으며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는 안교역, 운산역, 유동역이 보인다. (민경이)

  • 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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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馬利縣인데 경덕왕 때 利安縣이라 고치고, 공양양 때 본래 신라 南內縣인 感陰에 이속시켰다. 조선 태종 때 安陰이라 고치고 1767년(영조 43)에 지금의 이름인 안의가 되었다. 안의는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서상면, 서하면 지역과 거창군 위천면, 마리면, 북상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와 교북리 일대에 있었다. 안의에 흐르는 하천은 크게 花林川과 尋眞川이 있는 황강과 猿鶴川이 흐르는 남강의 수계로 나눌 수 있다. 안의의 鎭山은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읍치 서쪽에 있는 城山이며, 원학동에 있는 金猿山(1352m)은 금빛 원숭이를 이 산에 있는 猿岩이라는 바위에 가두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심진천과 黃石山(1190m) 사이에 있는 龍湫에는 주변 절경이 아름다운 계곡과 폭포가 있다. 고현면에 있는 서원은 嶧川書院으로 1634년(인조 12)에 세워져 鄭惟明을 배향하고 1691년(숙종 17)에는 林待蕃을 함께 배향하였다. 덕유산 아래에 있는 靈覺寺는 877년(신라 헌강왕 3)에 深光大師가 창건한 이후로 몇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으며, 13개의 소속암자가 있어 海印寺에 버금가는 큰 규모의 사찰이라고 전한다. 西上面에 접한 六十峴은 전라도로 넘어가는 주요한 고개이다. (민경이)

  •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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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문무왕 때 上州·下州를 개편하여 歃良州로 개칭하였고 고려 태조 때에는 梁州라 하였다. 지금의 이름으로 된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양산은 현재의 양산시 양산시내, 상북면, 하북면 물금읍, 원동면, 동면, 부산광역시 북구의 구포동, 강서구 대정동 강동동을 포함하는 지역이고, 읍치는 양산시내 중부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 보듯이 양산은 낙동강을 경계로 김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다른 면은 밀양과 울산 그리고 동래와 접하여 있다. 지형적으로 양산은 읍치 옆을 흐르는 양산천을 중심으로 서면과 동면으로 구분하였고 다시 서면의 북쪽을 북면으로 하여 행정면을 나누었다. 양산천은 언양(현 밀양)에 있는 鷲栖山(1059m)에서 발원하여 원효산(922m)을 거쳐 하동면에 있는 金井山(802m)에 이르는 직선상의 하천이다. 읍치 북쪽에 있는 城隍山이 밀양의 鎭山이다. 大儲島에 있는 七点山은 일곱 봉우리의 산이 점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며, 駕洛國 때 旵始仙人이 놀던 곳이라 전해온다. 언양 경계에 있는 通度寺는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석가의 袈裟와 사리를 가져와 창건한 사찰이며, 합천의 해인사 및 승주의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로 꼽힌다. 읍치 서쪽에 있는 松潭書院은 1696(숙종 22)에 세워져 1717년(숙종 43)에 사액 받은 서원으로 察訪 白受繪를 배향하였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민경이)

  • 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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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居火縣인데 경덕왕 때 獻陽縣으로 고쳐서 良州郡(梁山郡) 領縣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蔚州(울산)에 속했고, 1131년(인종 9)에 監務를 둔 후 언양현으로 고쳤다. 1599년(선조 32)에 울산으로 들어갔다가 1612년(광해군 4)에 다시 현(縣)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군을 없애고 울산에 합하였다. 언양은 지금의 울주군 언양읍, 상북면, 상남면, 삼동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언양읍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언양은 태화강 중상류의 침식분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도에 보이는 하천이 태화강과 그 지류인 보은천이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읍치 북쪽에 있는 高獻山(1033m)이 鎭山이며 남면에 있는 鷲栖山은 大石山이라고도 한다. 삼남면에 있는 鼎足山(700m)은 산위에 바위들이 숱밭처럼 솟아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서원은 盤龜書院으로 1712년(숙종 38)에 고을 선비들이 고려 때 충신 정몽주, 정구, 이언적이 이곳에 머문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것이다. 읍치 왼쪽에 보이는 石南寺는 1560년(명종 15)에 선철선사가 중건하였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민경이)

  • 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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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은 고구려의 也尸忽군으로 신라 때에는 野城郡이라 하였고, 고려 초에 영덕으로 개칭하였다. 현종 때에는 禮州(영해)에 속하였으며 고려 말에 현이 되었고, 1415년(태종 15)에 지현사(知縣事)를 두었다. 갑오경장 때에 군으로 되었고 1914년에 영해를 합하여 오늘에 이른다. 영덕은 松羅海(동해) 사면을 따라 있는 지역으로 지금의 영덕군 영덕읍, 강구면, 남정면, 달산면, 지품면 지역이 해당되며, 읍치는 영덕군 영덕읍 화개리 지역에 있었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이 현재의 五十川이며 다시 소서천과 대서천으로 분기된다. 오십천은 전형적인 감입곡류하천으로 중상류의 골짜기가 좁고 깊어서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북서쪽에 있는 知品院까지 50개의 나루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 북쪽에 있는 無芚山(無英山으로 오기)은 영덕의 鎭山으로 花林山에서 내려온다. 대둔산 부근 氷穴에는 여름에도 얼음이 있다고 한다. 위방산 아래 古城은 토성으로 둘레가 3천 3백척이었으나 지금은 없다. 읍치 동쪽에 있는 서원은 南江書院으로 이언적과 이황을 배향하였다. (민경이)

  • 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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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西火縣인데 경덕왕 때 尙藥縣으로 고쳐서 密城郡에 소속되었다. 고려 초에 영산현으로 고쳤고, 1274년(원종 15)에는 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초에는 縣監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 길곡면 사촌리는 함안군에 이관하고 나머지는 창령군에 합쳤다. 영산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령군 영산면, 계성면, 초천면, 길곡면, 부곡면, 장마면 지역과 남지읍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에 있었다. 영산은 낙동강 연안 자연제방에 위치하여 있으며 그 지류인 桂城川이 흐른다. 영산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靈鷲山(737m)으로 西域의 중 指空이 와서 말하기를 이 산이 天竺(인도)의 영취산과 모양이 같다하여 이름 지은 것이다. 읍치 북쪽에 옛 영산인 桂城의 古邑도 보이며, 德岩山 아래에는 溫井驛이 있는데 이곳에 溫井이 있었다. 온정은 현재 부곡면 거문리 일대로 1973년에 온천이 발견된 이후 부곡온천 등 온천취락으로 성장한 곳이다. 읍치 서쪽에 있는 餘通烽은 남쪽의 峯山에 응하고 창령의 合山에 응한다. (민경이)

  • 영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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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古陰縣이었으며 후에 영양 또는 延陽으로 개칭하여 군이 되었고, 고려에 와서 1018년(현종 9)에 禮州(寧海)에 속하였다가 1413년(태종 13)에 복구하였다. 1677년(속종 3)에는 남면·동면·덕봉·수비를 떼어 眞寶에, 청기·석보는 영해에 합하였다가 1683년(숙종 9) 다시 현을 두게 되자 청기는 돌아왔으나 석보는 영해에 소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郡으로 승격하여 1914년 진보군의 동면·북면을 흡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영양은 지금의 영양군 영양읍, 입암면, 석보면, 청기면, 일월면, 수비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양읍 서부리 지역에 있었다. 읍치를 감싸 안고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로 현재의 半邊川과 東川이 되며, 일월면 가곡리에 흐르는 將軍川은 아직까지 그 지명이 남아 있다. 영양을 흐르는 반변천은 전형적인 감입곡류하천으로 곳곳에 유로변동에 의한 舊河道를 남겨 장엄한 절벽과 牛角湖 등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펼쳐진다. 일월산(1218m)은 영양의 鎭山이며 읍치에서 가깝게 있는 芍藥山이 主山이다. 일월산은 滄海에 임해 일출과 월출을 굽어 볼 수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에서 울진으로 통하는 도로에 首北倉이 있고, 예안과 통하는 도로에 옛 청기 터와 靑杞倉이 있다. (민경이)

  • 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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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때의 斤烏支縣으로 경덕왕 때 臨汀縣이라 개칭하였고 의창군의 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때부터 迎日縣(또는 延日縣)이라 불렀으며 1018년(현종 9) 경주에 속하였고, 1390년(공양왕 2) 監務를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였고, 1914년에는 청하·장기·흥해의 3군을 합하였다. 영일은 지금의 포항시 북구 남부, 남구 일부분 지역, 포항시 연일읍, 오천읍, 대보면 지역과 영일만에 접하고 있는 동해면 입암리, 마산리, 발산리 일부지역을 포함하며, 읍치는 포항시 연일읍 생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은 형산강이다. 영일만에 접하고 있는 포항은 현재 동해안의 큰 항구도시로 성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읍치의 북쪽에 鎭山이 위치하는데 영일의 경우는 읍치 남쪽에 있는 雲梯山이 鎭山이다. 佛峴 아래에 있는 注津에서는 겨울 靑魚가 맨 먼저 잡히는 곳으로 청어 잡히는 것이 많고 적음으로 그 해의 풍흉을 짐작했다고 한다. 영일만 한가운데 있는 竹島는 대밭이 있었으나 현재는 간척 사업으로 매워진 상태이다. (민경이)

  •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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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영천은 切也火郡으로 경덕왕 때 臨皐라 하였고, 고려 초에 道同·臨川의 2현을 합하여 永州로 고쳤다. 현종 때는 경주에 속하였다가 명종 때 현이 되었다가 뒤에 州가 되었다. 1413년 (태종 13)에 영천군이 되어 내려오다가 1914년 新寧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영천은 지금의 영천시 시내 전체, 금호읍, 청통면, 임고면, 화북면, 화남면, 화산면, 대창면, 자양면 지역과, 북안면 일부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천시 시내 창구동 일대에 있었다. 영천은 풍수적으로 飛鳳形으로 날아가는 봉황의 모습이며, 徐居正의 시에 二水三山이라 하여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二水는 금호강의 지류인 北川과 南川이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북천은 현재의 신령천과 고현천이며, 남천은 현재의 자호천과 임고천, 고촌천이다. 三山은 광의적으로 영천의 鎭山인 子母山(또는 보현산, 1124m), 신령에 있는 八公山(1192m), 採藥山이라는 설과 협의적으로 마현산, 竹防山(또는 유봉산, 241m), 鵲山이라는 설이 있다. 아천면에 있는 서원은 臨皐書院으로 고려말 鄭夢周(1337-1392)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에 浮來山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에 중건되었다. 1643년(인조 21)년에 張顯光, 皇甫仁을 추향하였으나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구리내면에 있는 立岩書院은 張顯光을 배향하고 鄭四震 외 3인을 모셨다. 영천에는 수십 개의 堤堰이 있는데 그 중 凡魚川 부근에 菁川堤는 그 규모가 둘레 5,882척이며 수심이 16척이다. (민경이)

  •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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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영천은 切也火郡으로 경덕왕 때 臨皐라 하였고, 고려 초에 道同·臨川의 2현을 합하여 永州로 고쳤다. 현종 때는 경주에 속하였다가 명종 때 현이 되었다가 뒤에 州가 되었다. 1413년 (태종 13)에 영천군이 되어 내려오다가 1914년 新寧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영천은 지금의 영천시 시내 전체, 금호읍, 청통면, 임고면, 화북면, 화남면, 화산면, 대창면, 자양면 지역과, 북안면 일부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천시 시내 창구동 일대에 있었다. 영천은 풍수적으로 飛鳳形으로 날아가는 봉황의 모습이며, 徐居正의 시에 二水三山이라 하여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二水는 금호강의 지류인 北川과 南川이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북천은 현재의 신령천과 고현천이며, 남천은 현재의 자호천과 임고천, 고촌천이다. 三山은 광의적으로 영천의 鎭山인 子母山(또는 보현산, 1124m), 신령에 있는 八公山(1192m), 採藥山이라는 설과 협의적으로 마현산, 竹防山(또는 유봉산, 241m), 鵲山이라는 설이 있다. 아천면에 있는 서원은 臨皐書院으로 고려말 鄭夢周(1337-1392)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에 浮來山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에 중건되었다. 1643년(인조 21)년에 張顯光, 皇甫仁을 추향하였으나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구리내면에 있는 立岩書院은 張顯光을 배향하고 鄭四震 외 3인을 모셨다. 영천에는 수십 개의 堤堰이 있는데 그 중 凡魚川 부근에 菁川堤는 그 규모가 둘레 5,882척이며 수심이 16척이다. (민경이)

  • 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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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于尸郡이었는데 지명이 有隣, 禮州로 개명되고 1310년(충선왕 2)에 汰諸牧을 고쳐 지금 이름인 영해로 하였다. 1397년(태조 6)에 처음으로 鎭을 두고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었다. 영해는 현재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축산면, 병곡면, 창수면 지역과 영양군 석보면 일부 지역이 포함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영해는 해풍을 막아주는 구릉성 산지를 등지고 송천천 하류의 비교적 넓은 영해평야를 끼고 있다. 영해는 일찍부터 士族의 同族村들이 형성되어 小安東이라 불리웠고, 안동지방으로 魚鹽을 공급하는 거점 구실도 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騰雲山(767m)이며, 서쪽에 있는 西泣嶺은 고을의 餞送, 迎接을 하는 곳이었다. 영덕 경계에 접하여 있는 南眠峴은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하여 오다가 말 위에서 잠들었는데 성이 黃이라는 아전이 술을 올리어 잠이 깨어 마시고 그 산을 眠峴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丑山島는 바다 가운데 있는데 그 형상이 牛와 같아서 축산이라 이름 붙였고, 箭竹이 생산된다. 읍치 아래에 있는 大小山烽은 서쪽의 廣山에 응하고 영덕의 別畔山, 강원도 평해의 厚里山에 응한다. 영해에 분포하고 역원(驛院)으로는 석보면에 寧陽驛과 廣濟院 그리고 읍치 북쪽에 있는 柄谷驛, 서읍령 위에 있는 蒼水院이 있다. (민경이)

  • 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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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안은 지금의 안동에 속하는 지역으로 지도에서 보듯이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 하류에 자리잡고 있고, 읍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용두산을 비롯하여 요성산, 영지산, 그리고 박달산, 어름산, 천등산, 비암 등 주변에 낮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鼻岩은≪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높이가 10장(丈)이고 그 위에 50~60명이 앉을 만하며, 고을사람들이 遊賞하는 곳이라 한다. 예안은 본래 고구려의 買谷縣인데 신라 때에 善谷으로 고쳐서 奈靈郡의 領縣이 되었다. 고려 태조 때에 城主 李能宣이 귀순하여 예안으로 개명하고 郡으로 승격하였다. 1018년(공민왕 2)에는 吉州(안동)에 속하였다가 우왕 때 군으로 독립, 이어 州로 되었으며 1390년(공민왕 2)에는 현으로 하여 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현감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에 승격하여 郡이 되었으나, 1914년에 군을 폐하고 안동에 합쳤다. 예안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녹전면, 도산면 일대에 해당되며, 읍치는 안동군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안동을 비롯하여 예안은 조선시대 이후 퇴계 이황의 주자학의 전통을 이은 고장으로 읍치 동쪽에는 많은 서원들이 있다. 그 중 안동면에 있는 陶山書院은 1574년(선조 7)에 건립되어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인 1575년(선조 8)에 石峰 韓濩(1543-1605)가 쓴 편액을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다. 1615년(광해군 7)에 이황의 제자인 월천 趙穆(1524-1606)선생을 從享하였다. 그 외 淸溪書院과 汾江書院은 사액되지 못하였다. 녹전산 봉수는 안동의 개목산에 응하고 봉화의 용점산에 응한다. (민경이)

  • 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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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을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다. 예천은 지금의 내성천을 중심으로 그 지류인 한천유역에 위치하여 있다. 예천은 신라 때 水酒縣이라 칭하고 경덕왕 때에는 예천군으로, 고려에 와서 肅州라 개칭하였다. 명종 때에는 基陽으로 고쳤고, 조선 태종 때에는 甫州郡이라 하다가 예천으로 고치고, 1914년에 용궁군과 풍기군의 일부를 합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예천은 지금의 예천군 예천읍, 보문면, 호명면, 유천면, 감천면, 용문면 지역 그리고 개포면 일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며, 읍치는 예천군 예천읍 노상리에 있었다.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덕봉산(374m)이며, 서암산, 비봉산, 용문산, 보문산, 정개산 등 낮은 산지들이 분포하고 있다. 덕봉산은 黑鷹山이라고도 하는데 사나운 검은 매가 나래를 펴고 내려앉으려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 산 위에는 흑응성(또는 봉덕산성)이 있는데 흑응성은 표고 100m의 土石이 혼합하여 축성된 것으로 내성과 익성으로 되어 있다. 龍門山은≪新增東國輿地勝覽≫의하면 신라 때의 고승 杜雲이 이곳에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을 나가는 길에 두운의 이름을 듣고 찾아가려고 용문산 洞口에 들어서니 홀연히 용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용문산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정개산 아래에 있는 서원(鼎山書院)은 1612년(광해군 4)에 건립하여 李愰, 趙穆을 배향하였다. 1677년(숙종 3)에 사액되었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현내면에 있는 多仁은 용궁 동남쪽 경계에 있으며 본래 신라의 達己로 多己라고도 하였으며 예천의 고읍(古邑)이다. (민경이)

  • 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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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竺山인데 995년(고려 성종 14)에 龍州가 되었고 1005년(목종 8)에 郡으로 강등되었다. 1012년(현종 4)에 지금 이름인 용궁으로 고쳤다. 용궁은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개포면 서부, 풍양면 북부, 지보면 지역과 문경시 영순면 동부지역, 의성군 안사면 북부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 읍치가 향석리에 있었으나 1895년(철종 9)에 큰 장마로 인하여 낙동강이 범람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북하면에 흐르는 省火川(현 금천)과 읍치 남부를 곡류하는 沙川(현 내성천)이 본류인 낙동강에 유입된다. 용궁면에 흐르는 내성천은 특히 自由曲流河川이라 심하게 굴곡하여 흘러서 ‘회룡포’와 같은 특이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나타난다. 지도에서 보면 ‘회룡포’는 太恒山 부근에 해당되며, 마치 육지에 떠있는 섬과 같아 조선시대에 주로 유배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竺山이다. 북상면에 위치하여 있는 忠孝祠는 1704년(숙종 30)에 창건하여 潘沖 등을 배향하였으며, 지도에 보이는 서원은 箕川書院으로 1665년(현종 6)에 창건하여 文瑾, 文瓘 등을 배향하였으나 사액되지는 않았다. 羅浮山 아래에 있는 知保驛은 읍치 동쪽에 있는 大隱驛, 비안의 安溪驛, 예천의 水山驛과 通明驛, 안동의 安郊驛과 연결되어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한다. (민경이)

  •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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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屈阿火村으로 경덕왕 대 河曲이라 개명하였다. 고려 태조 때에 東津·虞風 2현을 합하여 興麗府로 승격되고 후에 恭化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蔚州로 되어 지사를 두었다. 1397년(태조 6)에는 鎭을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는 진을 파하고 울산군으로 고쳤다. 1537년(세종 19) 도호부로 승격시켰으나 이 해에 군으로 다시 고치고 1599년(선조 32)에 부로 승격했다가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되었다. 울산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전체, 울주군 청량면, 완양면, 범서면, 두동면, 두서면, 완산읍, 서생면, 웅촌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며, 읍치는 울산광역시내 북정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 남쪽에 흐르는 하천은 太和江이며 左兵營 동쪽을 지나는 語連川은 현재 태화강의 지류인 동천강이다. 울산만은 6km 정도 大峴面(현 울산광시 남구일대)쪽으로 뻗어 들어간 비교적 큰 만으로 수심이 깊다. 울산은 역사적으로도 국방상 중요한 지역으로 신라시대에 경주의 동남쪽 관문 구실을 하였고,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범이 극심해 읍성이 텅 비기도 했다. 또 정유재란 때 왜군의 보루로 이용되기도 했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울산만 경계 川內烽 부근에는 方魚津이 있는데 방어가 많이 잡힌다는 데서 그 지명이 유래되었으며 목장이 있었다. 읍치 동쪽에 있는 서원은 鷗江書院으로 1678년(숙종 4)에 세워지고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읍치 동쪽에 있는 屈火驛은 옛날 河曲縣의 옛터로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민경이)

  • 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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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熊只縣인데 경덕왕 때 熊神으로 개명하였다. 그 후 義安郡(창원군)의 領縣이 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金州(金海)에 속하였다. 조선 세종 때에 僉節制使를 두었다가 도호부로 승격한 후 다시 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군을 폐하고 창원에 병합, 웅천면이 되었다. 웅천은 현재의 경상남도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 가덕도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있는 熊山이 웅천의 鎭山이다. 지도에서 보듯이 작은 섬들과 포구들이 많고 해안방어를 위한 鎭堡들이 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天城浦鎭은 1534년(중종 29)에 설치한 鎭으로 1592년(선조 25)후에는 安骨浦鎭으로 옮겼고 1656년(효종 7)에 옛터로 다시 옮겼다. 안골포진은 성의 둘레가 1천 7백 14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었다. 薺浦鎭은 성의 둘레가 4천 13척이고 우물이 둘이 있었다. 그 외 新門堡, 晴川堡, 豊德浦堡가 보인다. (민경이)

  • 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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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獐含縣으로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인 의령으로 고쳤다. 의령은 지금의 의령군 의령읍, 가례면, 칠곡면, 정곡면, 지정면, 유곡면, 부림면, 대의면, 낙서면, 용덕면, 봉수면, 화정면, 궁유면 일부를 포함하는 의령군 지역 대부분이며, 읍치는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일대에 있었다. 의령은 남강이 동남부를 감싸 듯 흐르다가 洛西面 부근에서 본류인 낙동강을 만나 합류한다. 의령의 鎭山은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읍치 북쪽 德谷面 부근에 있는 德山이다. 誾窟山 옆에 보이는 菩提寺는≪忘憂集≫에 忘憂 郭再祐(1552-1617)가 젊었을 때 보제사에서 수천권의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보리사에서 쌀 씻은 물이 10리나 될 정도로 많은 승려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남강 강변 읍치 동쪽에 있는 鼎岩津은 임진왜란 시 왜장 안국사의 중 혜경과의 격전에서 곽재우가 승전하였던 곳이며, 진주, 함안 등 경상우도로 통하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나루터이다. 鼎岩(솥바위)이라는 지명은 남강 물속에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솥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芝山面에 있는 朴津은 한국전쟁 시 국국 및 유엔군과 인민군이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던 나루터이다. (민경이)

  • 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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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召文國인데 신라 경덕왕 때 聞韶郡이라 개칭하였다. 고려 초에 의성으로 고치고 부로 승격하였으며, 현종 때 안동부에 예속시켰다. 1143년(인종 21)에는 현령을 두었으나, 1199년(신종 2)에는 감무를 두어 강등하였다가 충렬왕 때 대구부에 병합하였다. 다시 復縣되어 현령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에 郡이 되었다. 의성은 지금의 의성군 의성읍, 안사면, 안평면, 봉양면, 금성면, 단촌면, 점곡면, 옥산면, 사곡면, 춘산면, 가음면 일대 지역이며, 읍치는 의성읍 도동리 지역에 있었다. 옛부터 의성군의 주민은 검소·솔직함을 숭상하고 순박하며 蠶桑에 힘썼다고 한다. 옥산면에 있는 黃山에는 뽕나무가 많이 있어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두 이에 의지해서 누에를 길렀다고 한다. 그리고≪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李潑의 시에 깨끗한 산천은 백리요, 태평한 烟火는 千家라 하여 자연이 깨끗하고 평온한 고장임을 알 수 있다. 읍치를 휘돌아 흐르는 長川의 근원은 茅峴에서 나오며, 가음면에 흐르는 下川의 근원은 氷山에서 나온다. 빙산에는 높이가 3척, 넓이가 4척 8촌, 옆으로 길이가 5척 1촌 되는 큰 돌구멍(石穴)인 風穴과, 여름에 어름이 얼고, 봄·가을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봄과 같이 따뜻한 기운이 있는 氷穴이 있다고 한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빙산 부근에 氷溪書院이 있다. 빙계서원은 1556년(명종 11)에 건립한 서원으로 1576년(선조 9)에 사액되었다. 그 외 지도에는 읍치 서쪽 도동산 부근에 鶴山書院과 藏臺書院이 위치하고 있다. 점곡면에 위치하고 있는 孤雲寺는 681년(신문 1)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식량비축 및 부상병을 살펴 호국불교의 꽃을 피웠던 곳이며, 함흥대사, 수월선사 등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거쳐간 사찰이기도 하다. 현재 보물 제246호인 석조석가여래좌상과 지방유형문화재 제151호인 가운루 등 27동의 건물이 보존되고 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하여 있는 鐵破驛은 남쪽에 있는 靑路驛, 안동의 雲山驛과 연계되어 있고, 청로역은 의흥의 牛谷驛과 연계되어 있다. 읍치 동쪽에 있는 古城烽은 남쪽의 大也烽에 응하고 북쪽의 鶴卯山 烽燧에 응한다.  (민경이)

  • 의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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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흥은 지금의 군위군에 속해있는 지역으로 팔공산(1193m)과 방가산(756m)을 경계로 대구와 신령(현 永川)이 접해있으며 낙동강의 주요 지류인 渭川과 南川의 중류에 자리하여 지도에서 보듯이 대부분 낮은 산지와 구릉지로 이루어졌다. 본래 고려 의흥군으로 1018년(현종 9)에는 안동부에 속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감무를 두고 선주(善州)내의 악계현(嶽溪縣)으로 예속하였다. 후에 의성에 속하였다가 1413년(태종 13)에는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승격하여 군이 되었고 1914년에 군위군으로 합하였다. 의흥은 지금의 군위군 의흥면, 산성면, 우보면, 부계면 일대에 해당되며, 읍치는 군위군 의흥면 읍내리에 있었다. 읍내리는 현재 갑령(230m)을 넘어 영천으로 통하는 의성~영천간 도로가 통과하기도 한다. 읍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龍頭山을 鎭山으로 하여 선암산, 국통산, 화산이 동서쪽에 분포하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화산 기슭에 있는 風穴은 넓이가 3척 2촌이고 길이가 2척 8촌으로 찬바람이 나와 초여름에도 얼음이 얼었다 한다. 獜角寺는 석벽이 깍아 선듯한데 속담에 전하기를 옛날 麒麟이 이 석벽에 뿔을 걸쳤다 해서 이름 지었다 한다. 읍치 남쪽에 있는 繩木熢은 의성의 영니산에 응하고 남쪽의 토현에 응한다. 吐峴烽은 승목산과 군위의 박달산에 응한다. 우곡역은 신령의 장수역, 군위의 소계역, 의성의 청로역과 연계되어 있으며 의흥을 지나는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한다. (민경이)

  • 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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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斯同火縣인데 후에 壽同縣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인동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때 경산부에 속하였는데 1363년(공민왕 12)에 監務를 두었고 若木縣에 예속하였다. 1604년(선조 37)에는 부로 승격하였다가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된 후 1914년에 칠곡으로 병합하였다. 인동은 지금의 구미시 전체와, 칠곡군 북삼면, 약목면, 석적면 그리고 가산면 일부 지역이며, 읍치는 구미시 인의동 지역에 있었다. 지도에서 보듯이 인동은 산지와 낙동강의 하계망을 따라 행정구역이 잘 분리되어 있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天生山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과 ≪大東地志≫의 기록에 본래 신라의 옛 성으로 1601년(선조 34)에 郭再祐가 외성을 쌓았고, 둘레는 3천 6백 12척이다. 사면에는 석벽을 깍아 세워 그 높이가 하늘을 꿰뚫고 성안에는 네 개의 못이 있었다고 한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한 吳山書院과 동쪽에 위치한 서원(東洛書院)은 각각 금오산(977m)과 천생산(407m)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여 위치하고 있다. 오산서원은 冶隱 吉再(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1574년(선조 7)에 창건하여 1609년(광해군 1)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東洛書院은 旅軒 張顯光(1554~163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65년(효종 6) 제자들이 건립한 건물이다. 1676년(숙종 2)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2년 사당을, 1971년에는 부속건물도 복구하였다. (민경이)

  • 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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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奴斯火縣(일명 其火)인데 경덕왕 때 자인으로 고쳐서 獐山郡(慶山郡)의 領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郡으로 승격하고 1914년 경산·하양(河陽)과 합하였다. 자인은 현재의 경산시 자인면, 용성면, 남산면, 압량면 지역과 진양읍 일부 지역, 자인면 경계에 접하여 있는 경산시내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며, 읍치는 자인면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자인을 흐르는 하천은 금호강 지류인 오목천이다. 자인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到天山이며, 영천의 경계에 접하고 있는 九龍山(675m)은 9마리의 용이 승천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룡산 아래 있는 盤龍寺는 1303년(고려 충렬왕 29)에 창건되었는데 1641년(인조 19)에 戒云과 明彦이 중건하였다. 觀瀾川 아래에 있는 서원은 觀瀾書院으로 1659년(효종 10)에 세워져 선조 때 李承會를 모시려다 경주에 사는 여강 이씨들의 반대로 李彦迪을 배향하였다. (민경이)

  • 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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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只沓縣으로 경덕왕 때 鬐立縣이라 하였고, 의창군의 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때 지금 이름인 長鬐가 되었다. 장기는 지금의 포항시 장기면, 구룡포읍, 동해면의 상정리, 중산리, 공당리 지역과 경주시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 지역을 포함하며 장기반도 정상부분인 부산면(현 포항시 동해면과 대보면 일대)은 영일 땅으로 제외된다. 읍치는 포항시 장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고, 읍치 남단에 흐르는 하천은 장기천이다. 장기반도는 크지 않지만 한반도의 모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 중의 하나이며, 호랑이 꼬리라 하여 虎尾串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甑山 부근에 巨山이 장기의 鎭山이다. 북쪽에 있는 목장은 冬背乙牧場으로 신라 때부터 말을 키웠던 유서 깊은 목장으로 울산에 속하였다. 목장 아래 뇌성산(212m) 봉수는 연일의 사화랑산 봉수에 응하고 남으로 복길 봉수에 응한다. 복길 봉수는 경주의 禿山에 응하고 북쪽의 뇌성산 봉수에 응한다. (민경이)

  • 지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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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知品川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인 지례로 고쳤다. 지례는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대덕면, 부항면, 구성면 서부지역, 증산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지례면 교리 일대에 있었다. 지례는 甘川의 상류지역에 위치하여 그 지류가 흐르고, 감천은 金山(현 김천)과 善山을 관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거창 경계에 접하여 있는 감천 최상류의 牛頭峙는 금산과 거창을 이어주는 가야산맥의 주요 고개였다. 지례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龜山으로 그리 높지 않다. 大德山(1290m)은 전라북도 무주와 경상남도 거창을 분리하는 산으로 다락산 또는 다악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도에는 옛 터인 月利部曲과 두의곡역 부근에 속현이었던 頭衣谷部谷도 보이며, 곳곳에 ‘촌’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읍치 북쪽에 있는 龜山烽은 거창의 梁末峙, 금산의 高城山에 응한다. 지례에는 頭衣谷驛과 作乃驛이 있는데 작내역은 금산의 금산역과 연결된다. (민경이)

  •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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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漆巴火縣인데 경덕왕 때 진보현으로 고쳐서 聞韶郡(의성군) 領縣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禮州(영해)의 속현이 되었고 그 후 한때 왜구 침입으로 空地가 되었으나 세종이 靑鳧縣(청송현)과 합하여 靑寶郡이 되었다가 진보현으로 고쳐 다시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군을 폐하고 동면 및 북면은 영양군에 흡수하고 그 나머지는 청송군에 병합되었다. 진보는 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파천면 지역과 영양군 석보면, 입암면 일부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에 있었다. 진보에 흐르고 있는 神漢川과 虎鳴川은 현재의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과 용전천이다. 읍치 남쪽에 있는 南角山이 진보의 鎭山으로 일반적으로 진산이 읍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飛鳳山은 봉황이 날아가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법산봉수는 원래 남각산에 있었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1500년(연산군 6)에 이곳으로 옮겨와 영해의 廣山에 응하고 안동의 藥山에 응한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각산역은 安奇道 察訪驛의 屬驛으로 영덕의 朱同驛, 영해의 寧陽驛, 안동의 琴召驛, 청송의 靑雲驛과 연결된다. (민경이)

  •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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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삼한 때 弁韓의 땅이었는데 백제가 이곳을 차지하여 居列城(居陀城)이라 하였다. 경덕왕 때 康州라 개칭하고 995년(성종 14)에 지금의 이름인 진주라 하였다. 진주는 대부분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 중류 유역에 위치하고 있어, 그 지류인 경호강과 덕천강 그리고 영천강이 진주를 관류하여 남강으로 유입된다. 진주는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내 전체, 산청군의 시천면, 삼장면, 단성면 일부, 하동군의 옥종면, 청암면, 북천면 일부, 사천시의 축동면, 삼천포시 일부, 고성군의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 남해군의 창선면 등이 포함되는 큰 고을이었고, 읍치는 진주시내 중성동과 동성동 일대에 있었다. 진주는 1012년(현종 3)에 牧이 되어 전국 8목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시 牧使 金時敏과 의병장 金千鎰의 지휘 아래 왜적과 격렬한 격전이 있었던 지역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다. 읍치 옆에 鎭營과 兵營이 보이며, 우병영은 창원에서 설치하여 1603년(선조 36)에 矗石城으로 옮겨왔다. 촉석성은 남강 북안의 낮은 언덕에 쌓은 읍성으로≪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그 둘레가 4천 3백 59척, 높이는 15척인 石築으로, 성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셋이 있고 군창이 있었다고 한다. 지도에는 없지만 촉석성 남쪽에 있는 누각이 矗石樓로 의기 論介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진주의 읍치는 북쪽에 있는 飛鳳山을 鎭山으로 하여 남쪽에 남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보여준다. 단곡면에 있는 斷谷寺는 골 입구에 崔致遠이 쓴 ‘廣濟岩門’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고,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 아래에 있는 香積寺는 聖母廟의 香火를 위해서 세운 것이다. 靑岩山 아래 있는 德川書院은 1576년(선조 9)에 세워져 曹植, 崔永慶을 배향하며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다. 읍치에서 함안으로 가는 도로상에 있는 召村驛은 察訪道로 15개의 屬驛이 있었다. (민경이)

  • 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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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려 鎭海縣인데, 1018년(현종 9)년에 진주에 예속시켰고, 조선 태종 때 현감을 두었다. 1570년(선조 3)에 함안에 합쳤다가 1617년(광해군 9)에는 다시 두었다. 1627년(인조 5)에는 창원에, 1629년(인조 7)에는 다시 함안에 합쳤다가 1639년(인조 17)에 다시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 일대는 熊川 땅이었고 진해는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마산시 진동면 진동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동쪽에 있는 鷲山이 鎭山이며, 餘航山(744m)은 함안에 있다. 남쪽 바다에는 几矣島와 大酒島 그리고 小酒島가 보이는데, 대주도와 소주도 두 섬 사이가 20步로 조수가 물러가면 육지와 연결된다고 한다. 읍치 왼쪽에 있는 常令驛은 고성의 背屯驛, 진주의 召村驛, 함안의 巴水驛과 연계되며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했다. (민경이)

  • 창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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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比自火郡(比斯伐)인데 경덕왕 때 火王郡으로 고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창령군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密城郡(밀양군)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 1631년(인조 9)에 靈山郡으로 편입되었다가 1637년(인조 15)에 복구하여 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고 1914년 영산군을 합하여 현재에 이른다. 창령은 신라 진흥왕(진흥황 16)이 比斯伐伽倻를 정복하고 진흥왕 척경비를 세워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 창령은 현재의 창령군 창령읍, 고암면, 대합면, 유어면, 대지면, 이방면, 성산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창령읍 교리와 하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왼쪽의 큰 하천은 낙동강이며 그 지류인 토평천이 흐른다. 읍치 북쪽에 있는 火王山이 창령의 鎭山이다. 毖瑟山 아래에 있는 燕岩書院은 李承彦, 李長坤, 成安義를 배양하였는데 사액 되지 못하였고, 勿瑟川 강변에 있는 勿溪書院도 成公國 외 7인의 賢人을 배향하였으나 사액 되지 못하였다. (민경이)

  • 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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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屈自郡과 骨浦縣의 땅인데 경덕왕 때 義安郡과 合浦縣으로 고쳐 합포현을 의안군의 領縣으로 만들었다. 1282년(충렬왕 8)에 의안을 義昌으로, 합포를 會原으로 고쳤고, 조선 태조 때 두 현을 합쳐 창원으로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고 1914년 熊川郡을 병합하여 현재에 이른다. 창원은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 마산시내, 내서읍, 창원시 창원시내, 동읍, 북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창원시 창원시내 서상동 일대에 있었다. 창원은 낙동강 남안의 북동부지역 그리고 마산만 연안에 접하여 있다. 마산만은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진해만에서 육지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러한 자연적 배경으로 會原書院 옆에 보이는 漕倉이 설치될 수 있고, 충렬왕 때는 몽고군이 일본원정을 시도할 때 合浦를 전초기지로 이용하기도 했다. 읍치의 북쪽에 있는 檐山이 鎭山이며, 서쪽에 있는 豆尺山 봉우리에는 孤雲臺가 있어 그 경관이 아름답다고 한다. 청룡산 아래에 있는 우도 右道兵馬節度使營은≪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裴克廉이 石城으로 쌓은 關防으로 그 둘레가 4천 2백 91척, 높이는 15척이고 영 안에는 우물 다섯개가 있었다. 고려 때 東行省을 치던 옛터이다. 읍치 동쪽에 있는 自如驛은 察訪道로 서쪽에 있는 安民驛과, 불모산 옆에 있는 近珠驛 등 주변 14개 역을 관할한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盤倉은 관찰사 趙㘙의 啓請으로 설치하여 창원·김해·함안 등 인근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서울까지 조운했다. (민경이)

  •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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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伊西小國으로 신라 유리왕이 이를 쳐서 빼앗고, 후에 仇刀城의 경내 率伊山·驚山·烏刀山 등 3성을 합하여 大城郡을 두었다. 고려 초에 3성을 합하여 군을 설치하고 청도라 하였다가 밀성에 속하였다. 1366년(공민왕 15)에는 다시 군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청도는 현재의 밀양시 청도면, 청도군 청도읍, 화양읍, 금천면, 매전면, 이서면, 운문면 지역과 각남면의 구곡리, 칠성리, 화리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밀양시 청도면 구기리 일대에 있었다. 청도는 밀양강 최상류지역으로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으며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졌다. 청도내에 흐르는 하천은 서쪽의 산지에서 동창천과 청도천이 흘러나오며, 이들 하천은 동쪽의 산지에서 흘러나오는 단장천과 합쳐져 밀양강에 유입된다. 청도의 鎭山은 읍치 남쪽에 있는 高鰲山이며, 대구 경계에 접하고 있는 八助嶺은 조선시대 嶺南路가 통과하던 고개이고, 省峴에는 현재 경부선철도의 성현터널이 뚫려 있다. 경주 경계에 접하여 있는 雲門山(1188m) 아래에는 雲門寺가 있는데 이 사찰은 600년(신라 진평왕 22)에 원광국사가 중건한 것으로 一然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고 전한다. 밀양 경계에 인접하여 있는 蜂岩巨淵과 虎距山 부근에 있는 李木淵에는 각각 龍壇과 神物이 있어서 가뭄 시에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상북면에 있는 서원은 紫溪書院으로 1578년(선조 11)에 건립되었고 1661년(현종 2)에 사액되었다. 金克一, 金馹孫, 金大有를 배향하였다. 청도는 하천변 곳곳에 폭포와 기이한 절벽들이 많아 수려한 경관이 펼쳐져 있는데 대표적으로 孔岩, 仙岩, 落花岩)의 경관이 뛰어나다. (민경이)

  • 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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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고려의 靑己縣으로 신라가 후에 積善으로 고치고 야성군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초에는 鳧伊로 후에 雲鳳으로 개명하였고 세종 때에 靑鳧로 고쳐 禮州(영해)에 속하였다. 1394년(태조 3)에 진보현을 합하고 1419년(세종 1)에 청보군으로 승격되었다가 후에 진보를 분리하여 현감을 두었고 세종 때에 松生縣을 합쳐서 청송으로 고쳤다. 세조 때에 도호부로 승격, 그 후 변천을 거쳐 1895년에 군이 되고 1914년에 진보군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청송은 지금의 청송군 청송읍, 부동면, 부남면, 현동면, 현서면, 안덕면 지역과 파천면 일부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송읍 월막리에 있었다. 청송에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半邊川 지류인 용전천과 길안천이다. 읍치의 북쪽에 있는 放光山이 鎭山이며, 영덕에 접하고 있는 周方山( 721m)이 현재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周王山이다. 주왕산은 경상누층군의 역암·응회암·유문암 등으로 이루어져서 산과 계곡의 암석경관이 특출하다. 삼자산 아래 용전천이 곡류하는 곳에 있는 屛岩書院은 1702년(숙종 28)에 지방 유림들이 건립하여 栗谷 李珥( 1536-1584), 沙溪 金長生(1548-1631)를 배향하고 그 해 사액되었다.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읍치 아래 청운역은 부남면에 있는 문거역, 부동면에 있는 이전평역, 안동의 琴召驛, 진보의 角山驛과 연결되어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였다.(민경이)

  •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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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阿兮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海阿로 고쳐서 有隣郡의 領縣을 삼았다. 고려 초에 청하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는 경주에 속하고 조선 태조 때에 監務를 두었다가 후에 縣監으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되고 1914년 영일군에 병합되었다. 청하는 松羅海 경계에 지금의 포항시 청하면, 송라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하면 덕성리에 있었다. 읍치를 감싸고 흐르는 하천은 청하천과 서정천이다. 일반적으로 읍치의 북쪽에 진산이 있는 것과는 다르게 청하의 진산은 읍치의 서쪽에 있는 呼鶴山이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神龜山에는 세마리 용이 웅덩이에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효능이 있다고 한다. 신영산 부근에 있는 內延山(930m)은 三動石이라고 하는 대·중·소 세 개의 바위가 솥발처럼 벌려 있는데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신라 진평왕이 견훤의 난을 이 산에서 피하기도 했다. 내연산 아래 寶鏡寺는 745년(신라 경덕왕 4)에 南岳門人 哲敏이 중수하였으며 1023년(고려 헌종 14)에 금당탑을 세웠고, 1221년(고려 고종 8)에 圓眞國師가 사리탑과 사적비를 세웠다. 지도에서 보듯이 海邊에 고송라포, 이기포, 허혈포의 3개의 浦가 있는데 그 중 虛穴浦는 돌에 빈 구멍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리산 봉수 왼쪽에 보이는 서원은 鶴山書院으로 1692년(숙종 18)에 세워서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민경이)

  • 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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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백제의 初八兮縣으로 경덕왕 때 八溪로 고쳐 江陽郡(합천군)의 領縣이 되었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인 초계로 고치고 1914년에 합천군으로 병합되었다. 초계는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 적중면, 쌍책면, 청덕면, 덕곡면 지역과 대양면 일부, 율곡면 일부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합천군 초계면 초계리 일대에 있었다. 초계는 황강의 하류유역에 위치하여 그 지류인 사하천이 관류한다. 초계의 鎭山은 북쪽에 있는 淸溪山이다. 읍치의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松原書院과 淸溪書院이 있으나 모두 사액되지 못한 서원이다. 황강변을 따라 三鶴津, 甘勿津, 仰津이 줄지어 있는데 특히 감물진은 창령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면서 초계와 합천의 稅穀을 실어내는 포구였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주민들의 곡물과 어염이 거래되었다. 읍치의 북동쪽에 있는 巢鶴山 중턱에는 巢鶴寺가 있었는데 승려들이 彌陀山(662m)에 있는 留鶴寺로 옮겨가면서 폐사되었다. (민경이)

  • 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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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八居里縣 혹은 仁里라고도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八里로 고쳐서 壽昌郡에 예속하였다. 고려 초 팔거현이라 고치고 현종 때 경산부에 속하였다가 1640년(인조 18)에 칠곡이라 고쳐서 도호부가 되었다. 칠곡부는 현재의 칠곡군 기산면, 가산면, 동명면, 왜관읍, 지천면 등 칠곡군 대부분에 해당되며, 읍치는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에 있었다. 칠곡에 흐르는 하천은 금호강의 지류인 팔거천과 이언천이다. 칠곡의 가산산성은≪輿地圖書≫와≪大東地志≫에 의하면 八公山(1193m)의 서쪽 지형적 특성을 이용하여 쌓은 石城으로 내성, 외성, 중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내성은 1640년(인조 18)에 쌓아 그 둘레는 4,710보步이며 우물이 21개가 있고, 동·서·북의 3개의 성문과 8개의 暗門이 있다. 외성은 1700년(숙종 26)에 축성하였으며 그 둘레는 3,754步이다. 중성은 1741년(영조 17)에 축성하였고 그 둘레는 602步이며 1개의 성문이 있다. 성안에 客舍·人和館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군기고 ·보루·砲樓·將臺 등이 설치된 점으로 보아 행정적 목적보다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상지면에 위치한 高平驛은 대구 凡於驛과 인동군 楊院驛과 연결된 역원이었다. 도촌면에 위치하고 있는 서원(泗陽書院)은 본래 1651년(효종 2)에 문주면(현 대구시 북구)에 세워진 것으로 鄭逑를 主享하고, 李潤雨를 從享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도촌면(칠곡군 지관읍 신리)으로 옮기어 이원경선생도 추배하였다. 그 당시에는 廟宇와 講堂, 貶遇齋, 訂頑齋, 鳳下門, 養賢廳廚庫등이 있었으나 고종5년(1868)에 대원군의 書院撤廢令에 의하여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講堂인 景晦堂이 남아있다. 그밖에 창고로 북창, 남창, 승창, 팔거창, 강창이 분포되어 있다. (민경이)

  • 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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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초의 漆吐縣을 경덕왕 때 漆隄로 고쳐서 義安郡 領縣이 되었다. 고려 때 칠원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金州(金海)에 예속, 1390년(공양왕 2)에 監務를 두었다. 1592년(선조 25)에 昌原에 예속시켰다가 1627년(광해군 9)에 다시 현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었다가 폐하고 咸安에 병합시켰다. 칠원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칠북면, 칠서면, 마산시 구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칠원면 구성리에 있었다. 칠원에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西川(현 광노천)이다. 칠원의 鎭山은 읍치 동쪽에 있는 靑龍山이며, 남쪽에 떨어진 귀산면은 예전 칠원의 속현인 龜山縣으로 淸凉山이 鎭山이었다. 귀산면에 있는 龜山浦鎭은 750년(경덕 9)에 鎭을 설치하였고 첨사를 두었다. 芳叱浦 서쪽 벼랑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景漢臺로 정상에 손바닥 같이 앉을 만한 평탄한 곳이 있어 고려 李仁老(1152~1220)가 여기서 놀이하였다 한다. (민경이)

  • 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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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기는 죽령(697m)밑의 넓은 침식분지에 발달한 嶺下聚落으로 산천이 수려하고 ≪鄭鑑錄≫을 신봉하는 평안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죽령은 신라 아달라왕 5년에 처음 길이 열리고 순흥에 속하였다. 풍기 내부에는 현재 내성천 지류인 남원천이 흐른다. 풍기는 신라 때의 基木鎭인데 고려 초에 基州라 개칭하였다가 1413년(태종13)에는 基川으로 개칭하였다. 문종 때 殷豊縣을 병합하여 풍기라 하고 郡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 영주군에 병합하였다. 풍기는 지금의 영주군 풍기읍, 안정면, 봉현면 지역 그리고 예천군의 상리면, 하리면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읍치는 영주군 풍기면의 성내리 지역에 있었다. 읍치 동쪽에 있는 郁陽書院은 1662년(현종 3)에 창건되어 李滉과 黃俊良을 배양하였는데 서원 철폐령에 따라 1869년(고종 6)에 헐렸다. 상리면 순흥에 접하여 있는 명봉산에는 조선 문종왕의 胎가 있었다. 읍치 아래에 있는 망전산 봉수는 영주의 城內山, 순흥의 竹嶺山에 응한다. (민경이)

  • 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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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초에 韓多沙郡인데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인 하동으로 개칭하였다. 지도에서 보듯이 하동은 동서로 좁고 남북이 길며 섬진강을 경계로 하여 서쪽의 광양과 구분된다. 섬진강 동안에 자리 잡은 하동은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악양면, 화개면, 적량면, 회천면, 양보면, 고전면 지역과 북천 일부지역, 진교면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하동읍 두곡리와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는 원래 陽慶山을 鎭山으로 하여 그 아래에 있었으나 ≪輿地圖書≫에 의하면 1703년(숙종 29)에 섬진강변 진번면 두곡리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섬진강으로 유입되는 橫川(현 횡천강)은 내횡면과 외횡면으로 분리되는 행정경계 기준이며, 그 근원은 진주에 있는 지리산에서 나온다. 岳陽面의 ‘악양’이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사용된 지명으로, 중국 뚱띵호와 양쯔강이 만나는 곳인 岳陽에서 유래되었다. 화개면에 있는 雙溪寺는 840년(신라 문성왕 2)에 眞鑑禪師 慧昭가 짓고 옥천사라 하였는데 887년(정강왕 2)에 쌍계사라 고쳤으며, 절 입구 바위에 새겨진 ‘雙溪石門’의 4자는 고운 崔致遠이 썼다고 한다. 쌍계사 위쪽에 있는 神凝寺는 들어가는 洞口 바위에 ‘三神洞’이라고 씌어져 있는데 三神은 神凝寺, 義神寺, 靈神寺를 말한다. 함양 경계에 접하여 있는 七佛菴은 가락국 수로왕의 아들 7형제가 이곳에서 수도하여 성불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민경이)

  • 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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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양은 995년(고려 성종 14)에 河州로 하여 刺史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에 하양으로 고쳐 경주에 속한 후에 監務를 두었다.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속하였다가 1607년(선조 40)에 縣으로 되고 1895년(고종 32)에 승격하여 군이 되었고, 1914년에 경산군으로 병합되었다. 하양은 琴湖江 연변인 현재의 경산시 하양읍 지역과 진양읍 북동부 일부지역, 와촌면 남부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금호강변 일부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하양읍 금락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있는 無落山(현 무학산 574m)이 鎭山이며, 醮禮山(653m)은 고려 태조가 桐藪에서 견훤을 치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호강변에 위치한 琴湖書院은 1684년(숙종 10)에 창건하여 許稠(1369-1439)를 배향하였으며 1724년(경종 4)에 사이동(현 서사동)으로 이건하였다. 1790년(정조 11)에 사액 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읍치 아래에 있는 匙山烽은 영천의 城隍堂에 응하고 경산의 城山에 응한다. (민경이)

  • 함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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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阿尸良國 또는 阿羅伽倻라 하였는데 신라 법흥왕이 이를 멸하여 군을 두었다. 경덕왕 때 지금 명칭인 함안으로 고치고 고려 성종 때 咸州刺史를 두었고 현종 때는 다시 함안으로 고쳐 金州에 예속시키고 명종 때에 監務를 두었다. 1373년(공민왕 22)에 郡이 되어 1506년(연산군 12)에 도호부로 승격하였고 1606(광무 10)에 칠원군을 편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지도에서 보듯이 함안은 南江을 경계로 북쪽의 의령과 나뉘어 지며, 남강으로 유입되는 함안천과 석교천이 흐른다. 함안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함안면, 여항면, 군부면, 법수면, 대산면, 산인면, 마산시 진전면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함안군 함양면 鳳城里 일대에 있었다. 城山(139m) 바로 아래 있는 말산리는 6가야의 하나인 阿羅伽倻가 자리했던 곳으로 그 주변에 당시의 큰 고분들이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鎭山이 읍치 북쪽에 있는 것과 달리 함안의 진산은 남쪽에 있는 餘航山(744m)이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道林書院은 1702년(숙종 28)에 세워져 鄭逑를 배향하였고, 왼쪽에 있는 西山書院은 1646년(인조 24)에 세워져 金時習 등 生六臣 5인을 배향하고, 1663년(현종 4)에 사액 되었다. 巴水驛과 春谷驛은 모두 自如道 察訪驛에 속하는 屬驛이었다. (민경이)

  •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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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때 涑含郡 또는 含郡이라 하였는데 경덕왕 때 天嶺郡으로 개칭하고 1012년(현종 3)에 지금의 이름인 함양으로 개칭하였다. 함양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읍, 수동면, 휴천면, 마천면, 백전면, 병곡면, 유림면, 지곡면 지역이 해당되며, 읍치는 함양군 함양읍 상리 일대에 있었다. 함양은 智異山(1915m)의 天王峯과 安義의 德裕山(1507m) 사이의 경호강 상류에 자리하여 읍치 쪽에서 흐르는 渭水(현 위천)와 유포면 쪽에 흐르는 臨川(현 임천강)이 경호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쪽에 있는 서원은 溏洲書院으로 1581년(선조 14)에 세워져 1660년(현종 1)에 사액되었고, 왼쪽에 있는 서원은 栢淵書院으로 1670년(현종 11)에 세워져 최치원, 김종직을 배향하였으나 사액되지는 않았다. 白雲山(1279m) 아래 靈隱寺와 智異山(1915m)에 있는 君子寺, 安國寺, 文殊寺, 吾道山에 있는 登龜寺 등은 모두 그 터만 남았거나 없어졌다. 군자사에는 진평왕이 어려을때 그 숙부 진지왕을 피하여 이곳에서 살다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沙斤驛은 察訪道로 14개의 屬驛이 있었다. (민경이)

  • 함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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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古寧伽倻國인데 신라가 古冬攬郡(古陵郡)을 삼았다가 경덕왕 때 古寧郡으로 고쳤다. 1018년(현종 9)에 상주에 속했다가 후에 지금 이름인 함창으로 고쳤다. 함창은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이안면, 공검면, 은척면 일부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상주시 함창읍 오사리와 오동리 일대에 있었다. 함창에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 지류인 영강과 이안천이 읍치를 사이에 두고 흐른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宰岳山이며, 동쪽에 있는 孤山은 큰 들 가운데에 있어 섬과 같이 보인다. 지도에서 보듯이 다른 곳에 비하여 池가 많은데 물이 풍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읍치 서쪽에 있는 南池는 고을의 객관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 둘레에 있는 못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남면에 있는 恭儉池(공갈못)는 洪貴達 기문에 陂澤이 많기로는 남방의 제일이요, 그 크기로는 공검지에 비길 만한 것이 없다 하였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큰 비에도 넘치지 않았다 한다. ‘공갈’이란 지명은 둑을 쌓을 때 ‘공갈’이라는 아이을 묻었다는 埋兒說話에 의하여 붙여진 공검지의 또 다른 이름이며, 공검지는 근래까지 쓰다가 상류에 오태지를 조성한 후 매립하였다. 읍치 남쪽에 있는 城山烽은 상주의 所山, 문경의 禪岩山에 응한다. (민경이)

  • 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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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초기의 大良州郡 또는 大耶郡이었는데 경덕왕 때 江陽郡이라 개칭하였다.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이름인 합천으로 하였다. 합천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의 합천읍, 율곡면 일부, 대양면 대부분, 용주면, 봉산면, 묘사면, 야로면, 가야면 지역과 의령군의 궁류면 일부, 봉수면 청계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일대에 있었다. 합천은 크게 황강과 회천 하류에 위치하여 있지만 황강은 남강과는 달리 하류에서도 골짜기가 좁고 충적지의 발달이 제한적이다. 합천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北山이다. 편마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伽倻山(1430m)은 일명 牛頭山이라고도 하며 서쪽으로 뻗어서 月留峯이 된다. 가야산 아래에 있는 海印寺는 802년(신라 애장왕 3)에 順應, 利貞이 세운 사찰로 禪敎兩宗의 본산이다. 여기에는 팔만대장경판 등 다수의 국보와 보물이 보관되어 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屯德灘은 독상면에 있는 父子淵의 하류에 있으며, 부자연은 오랜 신라 長城 역사 끝에 돌아온 군졸이 아버지와 못 위에서 만나 서로 붙들고 울다가 함께 빠져 죽었다는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숭산면에 있는 서원은 伊淵書院으로 김굉필이 남교동에 있으면서 鄭汝昌과 서로 만나 강론한 곳으로 1660년(현종 1)에 사액되었다. 여기에는 志同巖이라는 암석이 있다. (민경이)

  • 해제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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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없음(...)

  • 현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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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推良火縣(三良火縣)인데 경덕왕이 玄驍로 고쳐 火王郡(창령군)의 領縣을 삼았다. 고려 초에 玄風(玄豊)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密城으로 속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監務를 두었고 밀성군의 仇知山部曲을 이에 병합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창령으로 들어갔다가 복구하여 군이 되었고, 1941년에는 달성군에 병합하였다. 현풍은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지역과  논공면의 본리리, 남리, 북리를 제외한 낙동강변에 접한 일부 지역이 포함되며, 읍치는 현풍면 부리 일대에 있었다. 현풍 왼쪽에 흐르는 하천은 洛東江이며 그 지류인 車川과 玄風川이 흐른다. 대구 경계에 접하여 있는 毘瑟山( 1084m)은 현풍의 名山으로, ‘비슬’이란 인도의 梵語 발음을 그대로 표기한 것으로 신라 때 인도 스님들이 이 산을 구경한 후에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읍치 아래 우만면에 있는 서원은 禮淵書院으로 1674년(현종 15)에 세워져 郭䞭(?~1594), 郭再祐(1552~1617)를 배향하였고 1677년(숙종 3)에 사액 되었다. 석성산 아래 낙동강변에 있는 松潭書院은 1664년(숙종 5)에 창건되어 朴惺을 배향하였는데 사액되지는 못했다. 읍치 아래에 있는 淸白祠는 郭之雲을 배양하였으나 사액 되지 않았고, 비슬산 아래에 있는 瑜加寺는 827년(신라 흥덕왕 2)에 도성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민경이)

  • 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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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退火郡인데 경덕왕 때 義昌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흥해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경주에 속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 1377년(공민왕 16)에는 知郡事로 승격하였다. 1914년에 영일군에 병합되었다. 흥해는 지금의 포항시 흥해읍, 북구의 형산강 이북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흥해읍 성내리에 있었다. 읍치를 감싸고 있는 하천은 지금의 곡강천과 그 지류인 초곡천이다. 曲江의 근원은 경주 神光縣 馬北山에서 나왔으며, 북으로 흘러 고을 북쪽을 지나고 동으로 흘러 孤靈山 아래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鎭山이 읍의 북쪽에 있는 것과는 달리 흥해는 읍치 남쪽에 있는 禱陰山이 진산이다. 도음산 아래 泉谷寺에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靈泉이 있는데 신라 선덕여왕이 이 물에 목욕하고 피부병이 완치되어 자장율사를 시켜서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6·25 사변 때 절이 소실되었다. 松羅海(동해) 경계에 있는 知乙山烽은 북쪽의 烏山烽, 영일의 東乙背串에 응한다. (민경이)

  • ▶충청도
  •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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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현은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서부면·구항면·은하면 전체, 광천읍의 광천리·담산리·가정리·내죽리·소암리·대평리·운용리·월림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결성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7리에 있었다’는 枰山이다. 고을의 왼쪽은 안면도와의 사이에 있는 천수만이며, 아래쪽은 바닷물이 읍치 동쪽까지 깊숙이 들어온 모산만이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도 臥龍川이라고 부른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현재도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廣川面이 보이고 있는데, 조선후기에 浦口로서 번성했던 곳이다. 현재의 보령시 천북면 아래쪽에 육지 쪽으로 깊이 들어온 바닷물 때문에 하천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배들이 들어올 수 있었다. 현재도 옛 포구의 전통이 남아 있어, 독특한 젓갈로서 유명하다. 읍치 아래쪽의 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보내기 위해 보관하던 海倉이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東庫·西庫가 각각 五間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왼쪽의 船泊處는 일반 선박이 정박하는 곳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곳에는 결성현 관할의 防船·兵船·伺候船이 각각 1척씩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밖에도 軍器庫와 什物庫도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의 서부면 판교리 수용동에 있었다.(이기봉)

  •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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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목은 충청남도 공주시 전체, 연기군의 금남면과 종촌리·송담리를 포함한 남면의 서남쪽,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복룡동·상대동을 포함한 북쪽과 도룡동·덕진동을 포함한 서쪽 지역, 서구에서 복수동을 포함한 북쪽과 갑천 서쪽 지역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공주시내 반죽동 일대에 있었다. 공주가 이렇게 큰 고을이 된 것은 고려시대 때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主縣이었기 때문이다. 主縣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많은 屬縣(縣·鄕·部曲·所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중 麗末鮮初를 지나면서도 독립하지 못한 속현들은 대부분 독자성을 상실하고, 주현의 영역이 되었다. 儒城縣은 조선 초까지도 독자적인 屬縣으로 존재했는데, 지도 오른쪽에 儒城倉이 있는 곳의 縣內面이란 명칭을 통해 그런 역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왼쪽 위에 古新豊이라 적혀 있는 곳이 옛 新風縣의 지역이었으며, 面 이름의 첫 글자에 ‘新’이란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美花部曲도 현내면 동남쪽에 보이고 있다. 선조 31년(1599)에 충청도 監營을 충주에서 이 고을로 옮겨 왔다. 지도에 읍치가 붉은 색의 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감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책 내의 다른 고을의 지도는 읍치를 붉은 색의 원으로 표시하였다. 읍치 바로 북쪽에는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公山城이 雙樹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조가 ‘이괄의 난’(1624) 때 피난하였다가 ‘雙樹石築’이란 이름을 붙이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9개의 屬驛을 거느린 利仁驛은 붉은 색의 원으로 표시하여 다른 역과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금강은 오른쪽(동쪽)에 懷德界라고 쓰인 부분으로 들어와 읍치 북쪽을 돌아 왼쪽(서쪽)으로 빠져나간다. 금강에는 津(나루)과 灘(여울)이 여러 개 기록되어 있는데,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熊津은 신라 때는 西瀆으로, 조선에서는 南瀆으로 여겨졌다. 祀典에 中祀로 기록되었으며, 봄·가을에 香과 祝文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오른쪽의 鷄龍山은 신라에서는 西岳으로 여겨 中祀를, 조선에서는 小祀를 거행하였다. 기타 지도 위쪽에는 후에 車嶺山脈의 명칭이 유래된 車嶺이 보이고 있다. 서울-제주 사이의 大路가 오가는 길목이다.(이기봉)

  • 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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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군은 충청북도 괴산군의 괴산읍·소수면·사리면·문광면·칠성면 전체, 감물면의 오창리, 불정면의 신흥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오른쪽을 흐르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으로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간다. 읍치 위·아래에 보이는 南川·北川이란 명칭은 전국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읍치를 고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읍치를 기점으로 명칭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面의 이름에도 이와 같은 방식이 많이 나타난다. 이 지도에도 東西南北이 面의 명칭에 나타나고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보는 사고를 잘 보여주고 있다. 面은 조선 중기에 인위적으로 만든 행정단위이기 때문에 고유한 지명보다는 동서남북과 같은 관념적인 명칭을 붙인 경우가 많았다. 西面 지역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보강천의 상류에 해당된다. 달천 가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빈번하게 이용된 槐津이 표시되어 있다. ‘津’은 나루임과 동시에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괴진이라 부른 것은 아니다. 槐津은 우리말 ‘느티울나루’에 대한 한자 표기였을 뿐이다. 일제시대 이후 마을단위 이하에서도 한자표기가 공식적인 행정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말 명칭보다는 한자 명칭의 사용빈도가 높아지면서 우리말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경우가 빈번하게 되었다. 괴진 아래의 花岩書院은 李滉(1501-1570)·盧守愼(1515-1590) 등을 배향하여 광해군 14년(1622)에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이기봉)

  • 남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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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현은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웅천읍·주산면·미산면·성주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남포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九龍山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현재 웅천으로 부르는 大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우리말 ‘한내’에 대한 한자 표시이다. 이 명칭은 해당 고을에서 가장 크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서 자주 사용되는 하천의 이름이다. 읍치 오른쪽에는 橫川所가 특별하게 표시되어 있다. 所 역시 鄕·部曲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까지는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다가, 조선 초에 오면서 독자성을 상실하고 面里體系로 개편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가 18세기까지 전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역사성이 깊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오른쪽 아래의 深田面도 樸坪所가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는 孤雲碑가 표시되어 있다. 孤雲은 신라말기의 유명한 학자였던 崔致遠(857-?)의 호이다. 그리고 孤雲碑란 최치원이 지은 郎惠和尙白月寶光塔碑를 의미한다. 이 탑은 聖住寺趾에 있으며, 현재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주사는 신라 흥덕왕 2년(827)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禪宗九山의 하나였다. 현재 성주면 성주리에 있었다. 기타 해안가에 있는 섬의 경우 거리와 크기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그려져 있기 때문에 이 지도의 내용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이기봉)

  • 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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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산현은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광석면·상월면 전체, 부여군 초촌면의 진호리·송정리·소사리·산직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노성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었던 魯城山(또는 魯山)이다. 니산현은 정조(1776-1880) 초에 魯城으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에, 고을 이름을 통해 古地圖의 연대를 파악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지도 위쪽의 木谷面은 禾谷面이 잘못 기록된 것이다. 아울러 일반인이 알아보기 어려운 俗字도 몇 개 보이고 있다. 지도 왼쪽 위의 ‘○坪’은 ‘乾坪’이며, 아래쪽의 ‘○石面’은 ‘廣石面’이다. 지도에는 지명이 모두 한자로 표시되어 있지만 당시에도 현재의 한자음으로 읽었다고 볼 수는 없다. 확인되는 몇 가지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水湯川에서의 ‘水湯’이란 우리말 ‘말구렁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石橋川에서의 ‘石橋’는 ‘섶다리’ 또는 ‘삽다리’의, ‘草浦’는 ‘풋개’의, ‘論山 ’은 ‘논미’ 또는 ‘놀미’의 한자 표기이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 때로는 한자의 음을, 때로는 뜻을 따서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草浦의 경우 포구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이었으며, 부근에 입지한 마을 이름이기도 했다. 기타 읍치에 있는 闕里祠는 숙종 12년(1686)에 공자의 影幀을 봉안하여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지내던 곳이다.(이기봉)

  • 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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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양군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대강면·단성면·적성면·매포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단성면 하방리 일대에 있었는데, 충주댐의 건설로 대부분 충주호에 수몰되었다. 읍치 위쪽을 오른쪽(동쪽)에서 왼쪽(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남한강이다. 대체적으로 고을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일부 잘못된 곳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지도 아래쪽의 昌樂面이 있는 곳이다. 창락면은 실재로 순흥의 월경지였는데, 지도에는 마치 단양의 땅인 것처럼 표시하였다. 또한 이곳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창락역이 있던 곳으로, 그 위치는 읍치에서 南面으로 향하는 도로의 연장선상에 있어야 한다. 이곳에는 경상도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고개 중의 하나인 竹嶺이 있었음에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읍치 오른쪽의 長松驛도 실재로는 長林驛의 誤記이다. 이 밖에도 남한강 변이나 강 가운데에 있는 龜潭(峰)과 島潭(三峰)의 위치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다. 구담의 경우 玉筍(峰) 바로 옆에 있어야 한다. 기록에 異稱으로 나오는 上津과 馬津도 다른 것처럼 표시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이 지도의 작성자가 현지인이 아니거나 현지인이더라도 일부 왜곡된 정보에 바탕을 두고 그렸음을 알려준다. 어쩌면 지도 작성자가 순흥이 폐현되었을 때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렸을 가능성도 있다. 이 때 순흥 땅의 일부가 단양으로 들어왔는데, 그곳이 창락면인지는 기록에서 찾을 수가 없다. 순흥은 세조 3년(1458)에 페현되었다가 숙종 9년(1683)에 다시 설치된다. 읍치 위쪽에 있는 丹岩書院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에 능통했던 李混(1252-1312)과 禹倬(1263-1343)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세워지고, 숙종 38년(1712)에 사액 받았다.(이기봉)

  • 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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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현은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고대면·석문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당진읍 읍내리에 있었다. 이 지역은 육지와 바다가 들쭉날쭉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실제 조사를 행하지 않으면 지도로 표현하기가 어려우며, 이 지도에도 큰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읍치 왼쪽에서 북류하는 하천과 바다와 만나는 부분이 沔川과의 경계선이다. 따라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간 外孟面 지역은 잘못된 것이다. 실재로 외맹면은 지도에서 高山面과 外孟面 사이에 있어야 한다. 熊浦(곰개) 역시 외맹면의 끝인 현재의 석문면 통정리와 내맹면의 시작인 삼봉리 사이에 있다. 이곳은 여러 기록에 孟串이라고 나온다. 읍치에서 볼 때 먼 곳을 內孟으로, 가까운 곳을 外孟으로 이름 지은 것을 통해 볼 때 읍치가 아닌 다른 기준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外孟面의 위치는 비록 회화식 지도이지만, ≪海東地圖≫에는 대체적으로 적합하게 표시되어 있다. ≪廣輿圖≫에서는 內孟面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본 지도와 똑같이 외맹면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내맹면과 외맹면의 위치 문제는 당시의 지도 작성자에게 상당한 혼란을 일으키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아울러 본 지도와 김정호 지도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두 지도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읍치 왼쪽의 彩雲浦는 浦口라기보다는 하천의 명칭으로, 현재 당진읍 우두리 일대를 가리킨다. 기타 지도 위쪽의 長古項은 우리말 ‘장고목’, 橋路里의 橋路는 우리말 ‘다리길’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이기봉)

  • 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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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군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신양면·광시면·응봉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대흥면 동서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任存古城이 있었던 鳳首山이다. 조선초기에는 縣이었는데, 숙종 7년(1681)에 현종의 御胎을 읍치 동남쪽에 있는 朴山에 묻고 郡으로 승격시켰다. 임존고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 福信·黑齒常之 등이 부흥운동을 이끌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지형적으로 보아 2개의 잘못이 눈에 띄고 있다. 첫째, 外北面이 삽교천 너머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삽교천 동쪽에 있었다. 둘째, 지도 오른쪽의 胎峰에 있는 하천이 실재로는 禮山界 북쪽으로부터 흘러들어옴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두 번째의 오류는 같은 책의 예산지도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첫 번째의 오류는 김정호의 지도에서 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 아래쪽의 驛(光時)이라 쓰인 곳으로부터 위쪽의 望山 부근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삽교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무한천의 본류이며, 오른쪽이 그 지류인 신양천이다. 하천 변에는 竹遷川·達川·渿川 등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일제초기에 하천 명치의 통일화 작업 속에서 사라진 이름들이다. 近東面 오른쪽의 擊壤面도 擊壤川의 誤記이다.(이기봉)

  • 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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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현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삽교읍·봉산면·고덕면, 당진군 합덕면의 합덕리·점원리·신흥리에 해당되며, 읍치는 덕산면 읍내리에 있었다. 고려시대까지 이 지역에는 德風縣과 伊山縣이 있었다. 태종 5년(1405)에 두 고을을 합하고, 각각 한 자씩 따다가 德山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縣內面이 이산현의, 古縣面이 덕풍현의 중심이었다.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木發面이 표시되어 있는데, 지도 작성자가 어떤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현내면의 위치도 읍치 부근으로 조정되어야 하며, 羅朴所面도 修德山 남쪽으로 흐르는 水系와 함께 표시되어야 한다. 非方串面이 있는 곳에 왼쪽에서 북류하는 하천은 삽교천이고, 오른쪽에서 북류하는 하천은 무한천이다. 비방곶면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는데, 삽교천 북쪽에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그곳에 있는 창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보관하던 海倉이다. 그리고 읍치 서쪽의 산줄기와 남북의 산줄기를 거의 같게 표시했지만, 그 높낮이가 전혀 다르다. 읍치 서쪽은 약 400m 이상이 많고, 남북은 거의 野山에 불과하다. 揷橋는 우리말 ‘삽다리’에 대한, 大峙는 우리말 ‘한치’에 대한 한자식 표기이다. 기타 修德寺와 같은 유서 깊은 사찰이 지도 제작 당시에 존재했음에도 표시되지 않았음이 의아하다.(이기봉)

  • 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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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군은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송악면·순성면 전체, 부장리·신촌리·강문리를 제외한 우강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면천면 성상리에 있었다. 이 지도에는 크게 2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첫째, 오른쪽 위에 표시된 縣內面·新北面이 마치 이 고을의 지역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 두 지역은 실재로는 홍주에 소속되어 있었다. 둘째, 오른쪽의 泛川面이 마치 월경지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은 월경지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영역적인 측면에서 보아 연결되어 있다. 18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輿地圖書≫·≪海東地圖≫·≪廣輿圖≫ 등에는 모두 월경지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 뿐만 아니라 地誌에서 월경지라는 사실을 언급한 경우도 찾을 수 없다. 다만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월경지로 표시하고 있어, 이 지도와의 연관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서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같은 책의 다른 지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堤堰이 세 개나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선후기에는 곳곳에서 堤堰이 건설되었으며, 地誌에서도 중요한 항목으로 취급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이 이 지도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제언의 크기는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크지 않으며, 그 크기는 가장 큰 것이 둘레 2,700尺(약 800m) 정도에 불과했다. 北倉과 南倉은 한양으로 옮겨가는 田稅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두 곳으로 분산시킴으로써 고을 내 육지에서의 운송거리를 최소화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北倉 아래쪽의 船泊處는 민간의 배가 정박하던 곳이 아니다. 이 고을 관할의 戰船이 정박하던 곳이며, 防船·兵船·伺候船이 각각 1척씩 배치되어 있었다.(이기봉)

  • 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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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천현은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성남면·병천면·동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목천면 동리·서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의 鵲城山이었다. 하천과 산줄기 및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이 실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주변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이 미호천의 지류인 병천천의 상류인데, 지도에는 方山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에는 山方川이라고 나오고 있어, 지도 작성자가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幷川은 우리말 ‘아우내’에 대한 한자 표기인데,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다. 지도 위의 近東面이 현재의 병천면 지역이며, 1919년의 삼일운동 때 柳寬順(1904-1920) 등이 만세를 불렀던 ‘아우내장터 또는 아오내, 아내’로 잘 알려져 있다. 黑聖山 밑의 읍치 지역에는 현재 독립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고개 이름은 우리말에 대한 한자 표기방식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지도 왼쪽의 ‘大峙’는 우리말 ‘한치고개’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크다’는 뜻의 순우리말 ‘한’을 한자의 ‘大’로 바꾼 것으로, 이런 경우는 많은 곳에서 찾을 수 있다. ‘道里峙’는 ‘回峙’라고도 적는데, 고개가 휘돌아 감아 넘어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道里’는 순우리말을 한자의 음으로 표시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에 표시된 道東書院은 성리학을 만든 朱子와 戊午士禍(1498) 때 신진세력으로 처형당한 金馹孫(1464-1498) 등을 배향하여 인조 3년(1625)에 세워지고, 숙종 2년(1676)에 賜額 받았다. 현재의 병천면 도원리 서원말에 있었다. 지도 위쪽에는 조선시대까지 백제의 수도로 알려진 慰禮城이 표시되어 있지만,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이 밖에 新道里와 柳光村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앞의 것은 신선들이 와서 놀았다는 큰 바위 밑의 찬 샘으로 알려졌던 곳이며, 뒤의 것은 사기를 굽던 마을이었다.(이기봉)

  •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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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현은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부용면 전체, 마구리·마동리·묘암리·염치리를 제외한 문의면, 인차리·청룡리를 포함한 서남쪽의 가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대청호에 의해 수몰되었다. 淸州界로부터 들어와 公州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금강의 본류이다. 이 지도에는 금강이란 명칭이 보이고 있지 않은데, 荊角津·新灘 등의 나루와 여울 이름이 그대로 하천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錦江’이란 명칭은 일제시대 이전에는 보통 공주 부근의 금강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형각진과 신탄은 懷德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여울과 나루가 한쪽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강 양안과 그 사이 모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新灘 남쪽의 회덕부분은 현재 신탄진 시가지가 펼쳐져 있는데, 일제시대 이후 철도역이 이곳에 설치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도 왼쪽에는 2개의 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오른쪽의 것이 魯峯書院이다. 宋麟壽(1487-1547)를 배향하여 광해군 7년(1615)에 세워지고, 효종 9년(1658)에 賜額 받았다. 이후 宋時烈(1607-1689) 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왼쪽의 것은 黔潭書院으로 숙종 21년(1695)에 宋俊吉(1606-1672)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그 해에 賜額 받았다. 이 두 서원에 세워진 인물들은 모두 문의 바로 남쪽에 世居하던 恩津 宋氏이며, 조선후기에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西人 老論派의 흐름을 대표하고 있다.(이기봉)

  • 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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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현은 충청남도 보령시 시내·주교면·주포면·청라면·청소면 전체, 섬을 제외한 오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주포면 보령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唐山이다. 지도 왼쪽에는 충청도 水軍節度使營이 水營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수군절도사에는 정3품의 堂上官이 임명되었다. 현재의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으며, 위쪽으로 깊숙한 만이 형성되어 있다. 만의 입구는 마치 門처럼 보인다고 해서 海門이란 명칭이 붙어 있다. 성곽의 상당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水營 위쪽의 雙鰲島는 그 크기가 작은 돌섬에 불과함에도 표시되어 있다. 寒山寺는 현재의 천북면 하만리의 주강동 마을에 있었는데, 마치 바다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 두 곳은 水營을 다녀간 많은 墨客들의 시에도 등장할 만큼 경치가 뛰어난 곳이라 특별히 표시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도 동일하게 표시되어 있어,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쪽의 松島는 우리말의 ‘솔섬’을, 竹島는 ‘대섬’을 한자로 표시한 것이다. 송도는 간척되어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옛 대천시의 명칭이 유래된 大川(한내)이 보이고 있다. 대천의 상류에는 玉溪·檜川 등의 명칭도 보이고 있는데, 일제초기 하천 명칭의 단일화과정에서 모두 사라졌다. 읍치 아래쪽의 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나르기 위해 보관하던 海倉이다. 면의 이름이 고유명을 지니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이 중 金神面의 경우 옛 金神部曲의 명칭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이기봉)

  •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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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현은 보은군에서 회북면·회남면, 대안리 북쪽을 제외한 내북면의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보은읍 삼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동쪽 경상도와의 경계에 있는 俗離山이다. 속리산은 이 고을의 모든 산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며,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내려오다 한남정맥·금북정맥으로 분리되어 북쪽으로 올라가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 때에는 俗離岳으로 불리며 中祀를 올렸으며, 조선 초에도 大自在天王祠를 설치하여 매년 10월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속리산의 위상이 고려되어, ≪東國與地勝覽≫을 편집할 때 鎭山으로 정하여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고을의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이며, 서북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후자의 지역에는 원래 林堰部曲이 있었으며, 조선 초까지도 독자적인 성씨와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의 보은군 내속리면과 산외면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 오른쪽 아래에 있는 書院은 象賢書院이다. 己卯士禍(1519) 때 귀향 갔다가 죽은 金淨(1486-1520) 등을 배향하여 명종 4년(1549)에 세워지고, 광해군 2년(1610)에 賜額 받았다. 현재의 외속리면 서원리 서원말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面의 크기는 고을마다 편차가 있었는데, 이 고을의 경우 현재의 面 규모와 비슷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일제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에서도 읍치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 1개의 면으로 편제되었다.(이기봉)

  •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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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현은 부여군 부여읍·규암면·은산면과 추양리·초평리를 포함한 조촌면의 서북쪽에 해당되며, 읍치는 부여읍 구아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扶蘇山이다. 부소산에는 山城이 있었는데, 특별히 표시되어 있지는 않다. 公州界로부터 들어온 금강이 읍치 서쪽을 돌아 林川界 방향으로 빠져나가는데, 지도에는 白馬江이라고 적혀 있다. 錦江은 보통 공주 부근에서 사용되었으며, 부여에서는 백마강이라고 불렀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진행되면서 금강으로 확정되었고, 이후로 백마강이란 호칭은 공식적인 하천 명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부여는 백제의 성왕 16년(538)부터 멸망하는 의자왕 20년(660)까지 수도로서 기능했던 곳이다. 지도에도 이 때의 흔적이 몇 개 표시되어 있다. 落花岩은 백제가 멸망하자 수많은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금강 변의 절벽이다. 이 지도의 작성자도 이러한 낙화암을 부여를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로서 인식한 것으로 생각된다. 釣龍臺는 백제를 멸망시킨 唐나라 蘇定方의 설화가 얽혀 있는 곳으로서, 부소산성 북쪽의 금강 가운데에 있는 바위이다. 지도에는 賜額 받은 곳이 2개나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의 白江書院은 浮山書院이라고도 한다. 金集(1574-1656)과 李敬輿(1585-1657)를 배향하여 숙종 45년(1719)에 세워졌고, 그 해에 바로 賜額 받았다. 읍치 오른쪽의 義烈祠는 백제의 충신으로 알려진 成忠과 興首·階伯 등을 배향하여 선조 9년(1576)에 세워지고, 같은 왕 11년(1578)에 賜額 받았다. 기타 지도 왼쪽에 海倉이 보이고 있는데, 田稅와 大同米를 저장했다가 수도 한양으로 옮겨갔던 곳이다. 해창은 바닷배가 닿는 곳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 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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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인현은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서면·판교면·종천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비인면 성내리에 있었다. 지도 왼쪽에 다이아몬드 모양의 馬梁이 표시되어 있는데,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馬梁鎭이다. 원래 남포현의 廣岩에 있었는데, 戰船의 정박이 어려워져 효종 3년(1652)에 옮겨 왔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마량이 아니었으며, 鎭이 옮겨오면서 명칭도 그대로 따라온 것이다. 읍치 아래쪽의 海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했다가 한양으로 옮겨가는 곳이다. 조선초기에는 漕倉에 여러 고을의 租稅를 모아 한꺼번에 한양으로 옮겼다. 조선후기에는 漕倉의 기능을 대폭 축소하고, 해안가를 끼고 있는 고을의 경우 자체적으로 해창을 설치하여 운송하도록 하였다. 바닷가에 있는 섬의 경우 거리와 방향, 규모 등을 정확하게 그려 넣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矛島(띄섬)의 경우 烟島보다 해안가에서 훨씬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규모도 훨씬 작다. 아마 이 지도의 작성자는 섬의 규모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해안으로부터의 거리 정보 역시 거의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阿尾島는 河尾島의 誤記로서 우리말 ‘할미섬’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茅島보다도 훨씬 작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 밖에 아래쪽의 鍾川은 우리말 ‘북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이기봉)

  • 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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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군은 충청남도 서산시 시내·대산면·지곡면·성연면·팔봉면·인지면·부석면·음암면, 태안군 고남면과 북쪽 일부를 제외한 안면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서산시 시내 읍내동에 있었다. 읍치 아래쪽에 海美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해미의 지도에서 설명한 것처럼 잘못되어 있는 부분이다. 창고가 위와 아래에 2개 보이고 있는데, 모두 海運을 통해 한양으로 옮겨갈 田稅와 大同米를 집적하여 보관하던 곳이다. 남북에 2개를 설치함으로써 고을 내에서의 운송 거리를 최소화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쪽 창고 옆에는 船所가 보이고 있는데, 이 고을에서 관할하던 戰船을 정박시키던 곳이다. 이곳에는 軍器庫와 什物庫 등도 함께 설비되어 있었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남색의 다이아몬드는 이 책의 모든 지도에서 공통적으로 鎭堡를 표시하던 기호였다. 이곳에는 平薪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으며, 5척의 戰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安眠島가 그려져 있는데, 지도에는 安眠串으로 표시되어 있다. ‘곶’이란 섬이 아니면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간 육지를 의미한다. 인조(1623-1648) 때 충청감사 金瑬(1571-1648)가 漕運의 편리를 위해 현재의 안면교 부근을 굴착하여 곶이 아니라 섬으로 변모시켰다. 안면도의 모습은 복잡한 해안가가 개간되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面의 이름 중 地谷縣→地谷面·禾邊所→禾邊面·仁政部曲→仁政面·聖淵部曲→聖淵面 등이 과거의 명칭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기타 大山面에는 助立部曲이 있었으며, 안면도에는 安眠所가 있었다.(이기봉)

  • 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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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군은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마서면·장항읍·시초면·문산면과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의 개야도리·연도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서천읍 군사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에 표시된 烏石山이다. 원래의 읍성은 읍치 아래쪽 靈鷲山(지금의 남산)의 山城에 있었는데, 세종 때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지도 아래쪽이 금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이며, 조선시대에는 鎭浦라고 불렀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이 直川(곧은내)인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吉山浦라고 나온다. 읍치 아래쪽에는 동서가 작은 하천으로 연결된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輿地圖書≫·≪東輿圖≫, 1872년에 제작된 ≪서천군지도≫에도 모두 같은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현재의 마서면과 서천읍 사이로서,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바닷물이 넘나드는 갯벌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모두 간척되어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는 푸른색 다이아몬드 모양이 표시되어 있는데, 같은 지도책의 모든 지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鎭堡에 대한 표현 양식이다. 이곳에는 舒川浦鎭이 설치되고, 정4품의 水軍萬戶가 파견되어 있었다. 그 오른쪽에는 戰船廠이 표시되어 있는데, 戰船·防船·兵船이 각각 1·2·1척씩 배치되어 있었다. 이 중 戰船은 서천포진에서, 나머지는 서천군에서 관할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천포진에는 현재 장항항(長項航)이 들어서 있는데, 읍치 왼쪽에 보이는 장항면(獐項面)과는 한자음이 같지만 실재로는 관계가 없다. 西部面에 있는 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던 海倉이다. 이 밖에 바다에 있는 섬의 방향과 거리 및 규모가 실제의 내용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이기봉)

  • 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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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성현은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과 부여읍의 현북리 및 초촌면의 연화리, 논산시 성동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석성면 석성리에 있었다. 금강과 그 지류에 대한 표시가 애매하다. 금강 본류는 北面 방향에서 들어와 佛岩山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불암산 오른쪽은 현재 논산천으로, 읍치 아래쪽은 석성천으로 불리는 금강의 지류에 불과하다. 猪浦와 浪淸浦는 단순히 浦口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하천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석성현은 지도 위쪽에 太祖峰으로 표시된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반영되어 산지 표시가 거의 없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왼쪽의 書院은 ≪輿地圖書≫에도 특별한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尹文擧(1606-1672)를 배향하였으나 賜額 받지 못했으며, 院生이 15인이라고만 나온다. 석성은 현재의 2개면 정도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음에도 총 8개의 面이 등장한다. 따라서 현재의 1개면에 4개의 면 정도가 있었던 것이 되어 面의 규모가 매우 작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面의 설정에 전국 일률적인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고을마다 다양한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고을은 현재의 1개면에 해당되는 규모로 面을 설정한 곳도 있다. 기타 지도 위쪽의 炭洞은 우리말 ‘숯골’의 한자 표기이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에는 마을 이름의 표기와 실질적인 발음이 다른 경우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 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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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현은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도고면 전체, 선장면의 장관리·신성리·군덕리·신동리·죽산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신창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1리에 있었다’는 城山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이 삽교천이며, 위쪽의 하천이 곡교천이다. 곡교천의 경우 마치 車峴 부근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천안에서 발원하여 온양을 거쳐 들어온다. 두 하천은 삽교호에서 만나 아산만의 서해로 빠져나간다. 경계의 표시도 일부 잘못이 보이고 있다. 왼쪽의 天安界가 삽교천 쪽으로 표시되어야 하며, 沔川界라 쓰여 있는 부분도 天安界로 바뀌는 것이 합당하다. 두 지역 모두 천안의 越境地가 있었던 지역이다. 大西面에 있는 倉은 海倉으로서,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아 보관했다가 한양으로 운반하는 곳이다. 조선전기에는 漕倉(이 지역은 貢稅串倉)에 모든 고을의 租稅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조선후기에는 해안가 고을의 경우 해창을 설치하여 독자적으로 운반하게 했다. 조창은 해안가를 끼고 있지 않은 고을의 것만 운반하게 되어, 조선전기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書院은 道德山書院이다. 이 서원은 趙翼(1579-1655) 등을 배향하여 현종 11년(1671)에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현재의 도고면 도산리에 있었다. 이 밖에 서원 왼쪽에 있는 大峙는 우리말 ‘한티’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크다’는 뜻의 ‘한’을 한자 ‘大’로 표시하는 경우는 전국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이기봉)

  • 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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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군은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음봉면, 서원리를 제외한 염치읍, 금성리·해암리를 제외한 인주면, 송용리·관대리 북쪽의 둔포면, 선장면의 신문리, 당진군 우강면의 신촌리·부장리·강문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인면 아산리에 있었다. 고을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은 안성천이며, 아래쪽이 곡교천·삽교천이다. 세 하천이 아산만에서 합류하여 水源界 방향에 있는 서해로 빠져나간다. 현재 안성천에는 아산만방조제가, 삽교천에는 삽교천방조제가 만들어져 있다. 안성천 변에는 몇 개의 浦가 보이고 있는데, 단순히 배가 들어오는 浦口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市浦가 있는 곳의 하천은 현재의 군계천으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후기에 이 지역에서 가장 번성했던 屯浦가 있었다. 지도에는 2개의 倉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천안의 頓義面에 있는 倉은 천안의 海倉으로서, 그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보관하던 창고이다. 천안이 내륙에 있지만 월경지인 돈의면이 해안가에 있기 때문에 설치한 것이다. 一西面 옆에 있는 倉은 漕倉의 하나인 貢稅(串)倉이다. 조창이란 주변 고을의 稅米를 모아 서울로 운반하던 창고를 의미한다. 조선전기에는 현재의 충청남도 대부분의 세미를 이곳에서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해안가를 끼고 있는 고을은 자체적으로 운반하게 했으며, 내륙에 있는 고을의 것만 한양으로 운반하면서 조창의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다. 貢稅(串)倉은 인주면 공세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성곽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천안의 毛山面이 월경지의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원래 毛山鄕이 있었던 곳인데, 고려시대 때 主縣이었던 천안의 屬縣이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書院은 仁山書院으로서, 광해군 2년(1610)에 세워졌다. 金宏弼(1454-1504)·李滉 (1501-1570)·李之菡((1517-1578) 등을 배향하였다. 기타 아래쪽의 曲橋는 우리말 ‘굽은다리’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이기봉)

  •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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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현은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동면 전체, 남면의 방축리·양화리를 포함한 북쪽, 평동을 제외한 조치원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남면 연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동쪽 1리에 있었다’는 城山이다. 읍치가 고을의 남쪽에 치우쳐져 있음에도 중앙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읍치는 南面 부근에 표시하는 것이 올바르다. 지도에는 하천의 본류와 지류가 거의 구별되지 않게 표현되어 있다. 東面이라 쓰여 있는 곳으로 들어와 金沙驛 부근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금강의 본류이다. 淸州界로부터 들어와 읍치 동쪽에서 남쪽으로 꺾여 금강으로 합류하는 것이 미호천이다. 全義界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미호천에 합류하는 것이 조천천이다. 하천의 규모는 ‘금강>미호천>조천천’의 순서임에도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지 않다. 東津은 단순히 ‘나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위치가 실제와 다르게 표시되어 있는데, ‘東津은 읍치 동쪽 5리에 있다’는 기록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東津과 龍塘은 거의 같은 위치에 있었다. 龍塘은 연못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연못처럼 물이 잔잔한 구간의 하천을 가리킨다. 그 위치도 금강 본류가 아니고, 미호천이 금강으로 합류되는 곳보다 약간 상류에 있었다. 이런 곳에는 보통 나루가 설치되는데, 東津이 이곳에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현재의 위치는 연기군 동면 용호리 일대이다. 이 밖에도 北一面이 마치 조천천 동쪽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오류이다. 실재로 조천천 동쪽은 모두 청주의 땅이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도 같은 오류가 발생하고 있어,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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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현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두마면·부적면·벌곡면 전체, 남산리·모촌리를 포함한 북쪽의 양촌면에 해당된다. 역사적 흔적이 매우 많은 고을이다. 읍치 오른쪽의 黃岺 밑은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 階伯의 5천 결사대가 김유신의 5만 군대를 맞아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이다. 읍치 위쪽의 開太峙 밑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격파한 후 삼한을 통일한 것은 하늘이 도와준 것이라며 세운 開泰寺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조선 초기까지도 왕건의 초상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위쪽의 豆磨面이 있는 지역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최초로 천도를 단행하려고 했던 곳이다. 실재로 궁궐 신축공사까지 시작했다가 한양으로 수도가 정해지면서 공사를 정지했다. 이곳은 이후 新都안이라고 불리며, 조선 멸망 후 새 왕조가 들어설 수 있는 지역이라는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도에는 書院이 네 개나 보이고 있는데, 주변의 다른 고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은 이곳이 西人 老論의 거두였던 宋時烈(1607-1689)의 스승 金長生(1548-1631)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遯岩書院은 김장생을 배향하여 인조 12년(1634)에 세워지고, 효종 9년(1658)에 賜額 받았다. 이외에도 김장생의 아들 金集(1574-1656)과 宋俊吉(1606-1672), 송시열 등을 추가로 배향하여 조선후기 내내 최고의 정치세력이었던 서인 노론파의 본거지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강경 부근에서 금강과 합류하는 논산천 상류이며, 오른쪽의 하천은 대전을 지나 금강으로 합류하는 갑천의 상류이다.(이기봉)

  • 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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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현은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장연면과 충주시 상모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연풍면 삼풍리 일대에 있었다. 연풍현에는 조선후기에 5개의 面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읍치에 있었던 縣內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연풍현은 태조 3년(1394)에 원래 長延縣과 長豊縣을 합쳐 하나의 고을로 만들고, 태종 3년(1403)에 두 고을의 이름 중 한 자씩 따서 이름을 만들었다. 장연현은 縣內面이, 장풍현은 長豊面이 있던 곳에 있었다. 水回面이 있던 곳은 원래 충주 소속의 水回村이었는데, 성종 7년(1476)에 이 고을에 합쳐졌다. 이 지도에는 고개에 대한 표시가 자세하다. 특히 오른쪽 위부터 鷄立山·鳥嶺·伊火峴 등 경상도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가 세 곳이나 있었다. 이들 고개의 한글 지명은 각각 하늘재·새재·이유릿재이며, 지도 제작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주로 한글 지명으로 불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립산 밑은 현재 충주시 상모면의 미륵사지가 있는 곳이다. 이곳의 물은 수회면이 아니라 북쪽의 남한강(현재의 제천시 한수면)으로 바로 들어감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계립산 위에 표시된 溫井은 현재 수안보온천으로 개발되어 있다. 鳥嶺에는 關門의 표시를 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였으며, 약간 서북쪽에는 小鳥嶺(작은 새재)이 있다. 의아스러운 것은 安保驛에서 조령으로 넘어가는 길이 한양-동래를 잇는 대로임에도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지도에는 2개의 마을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丈岩은 바위의 이름이 아니라 집집마다 바위로 담을 쌓아 붙여진 담바위 또는 墻岩에 대한 다른 표기이다. 五律洞은 勉義面에 있었던 五佳洞의 誤記로 보인다. 둘 다 이 고을에서는 가장 유명했던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渴馬峴→갈마고개, 楡峴→느릅재, 牛峴→쇠재, 周峙→지름티·기름재 등은 한자 표기와 한글 이름의 다양한 연관관계를 알 수 있게 한다.(이기봉)

  • 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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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현은 충청북동 영동군 영동읍·용산면·심천면·양강면 전체와 여의리를 제외한 용화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城隍山이다. 摩尼山 근처에서 들어와 沃川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금강의 본류이다. 尙州와 黃澗으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이 금강의 지류인 초강천이다. 지도에는 松川·高唐江·赤騰津 등의 하천 명칭이 쓰여 있는데,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이 단일화되면서 모두 공식적으로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초강천의 경우 금강 본류와 초강천이 만나는 부근의 마을인 초강리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高唐江 부근은 세종 때의 樂師로 유명한 朴壖(박연, 1378-1458)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박연의 묘소도 있으며, 오른쪽의 書院이 그를 배향하여 세워진 草江書院이다. 이 서원에는 이외에도 西人 老論 계열의 宋時烈(1607-1689) 등도 추가로 배향되었다. 그 아래쪽의 觀魚臺는 강가 양쪽에 솟아있는 절벽으로서, 臺는 樓臺뿐만 아니라 촛대처럼 생긴 지형에도 사용됨을 알 수 있다. 臺岩의 경우도 지형의 모습이 솟아오른 촛대처럼 생겨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와 같은 특수한 모습의 지형이 지도 작성자에게도 고을을 상징하는 중요한 지표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 龍化倉이 있는 지역은 현재의 용화면이 있는 곳으로, 지형적으로는 무주와의 연결관계가 훨씬 쉬움에도 영동의 땅으로 되어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 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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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현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가곡면·어상천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위쪽을 오른쪽(동)에서 왼쪽(서)으로 흐르는 하천이 남한강이다. 여러 기록과 배치되는 측면이 몇 개 보이고 있다. 지도 위쪽의 東衣面은 車衣面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어,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쪽의 枝谷面·榮踏谷도 지도 작성자가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생각된다. 두 지역 모두 榮川의 越境地였다. ‘榮踏谷’은 ‘영천의 踏谷’이란 뜻임에도 하나의 지명인 것처럼 표시하였다. 읍치 위쪽의 赤壁 역시 보통 北壁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오류는 지도 작성자가 현지인이 아니거나, 일부 잘못된 정보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초까지도 於上川縣이 영춘현의 屬縣으로 존재하며, 독자적인 관사와 군창을 갖고 있었다. 지도에 魚上川面이라고 표시된 지역에 해당되는데, 이곳은 지형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독자적인 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읍치 왼쪽의 松波書院은 尹宣擧(1610-1669)를 배향하여 숙종 29년(1703)에 세워졌으나, 賜額 받지는 못했다.(이기봉)

  •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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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현은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대술면·오가면 전체, 신택리·신종리·하평리를 제외한 신암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예산읍 예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金烏山이었다. 맨 왼쪽의 하천이 아산만으로 빠져나가는 삽교천 본류이며, 읍치 바로 왼쪽의 것이 그 지류인 무한천이다. 無限川은 無限山城 때문에 만들어진 명칭이다. 산성은 읍치 북쪽에 있었는데, 현재의 예산읍 산성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오류도 일부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述谷面에 표시된 하천이다. 이 하천은 실재로는 大興界 방면의 남쪽으로 흘러, 신양면을 거쳐 다시 북상한다. 이후 대흥면을 거쳐 예산읍내로 들어오게 되는데,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오류를 통해 이 지도의 작성자가 지방에서 올라온 자료를 토대로 그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書院은 德岑書院이다. 이 고을이 고향이며, 조선 4대 書道家로 알려진 金絿(1488-1533)를 배향하여 숙종 31년(1705)에 세워지고, 같은 왕 40년(1714)년에 賜額 받았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浦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옮겨가기 전에 모아 두던 海倉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稅米를 漕倉에 모아 한꺼번에 운반했으나, 조선후기에는 해안가 고을의 경우 해창을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기타 豆村面은 秋史體로 알려진 金正喜(1786-1856)의 고향이며, 현재도 신암면 오산리에 추사고택이 남아 있다.(이기봉)

  •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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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군은 청산면·청성면을 제외한 옥천군 전체, 영동면의 양산면·학산면과 용화면의 여의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옥천읍 삼양리·상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馬城山이었다. 조선 초까지도 이 지역에는 利山縣·安邑縣·陽山縣이 屬縣으로 존재했다. 이 후 세 개의 속현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옥천군의 面으로 재편되면서 독자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과거의 역사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데, 지도에는 창고의 이름에 분명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利’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이산현의, ‘安’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안읍현의, ‘陽’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양산현의 지역이었다. 지도 가운데의 赤登津에서 읍치 위쪽의 環山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금강의 본류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현재의 서화천이며, 지도에도 西華水라고 적혀 있다. 금강 본류에는 灘(여울)과 津(나루)이 몇 개 보이는데, 해당 구간의 하천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 과정에서 금강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1960-70년대 이후의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점점 우리말 명칭은 사라지고 있다. 지도에는 위치가 잘못된 경우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을의 진산인 馬城山으로, 서화천의 동쪽과 읍치 바로 위쪽의 산줄기에 있다.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表忠祠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유명했으며, 금산 전투에서 700 의병과 함께 전사한 趙憲(1544-1592) 등을 배향하여 선조 41년(1608)에 세워졌다. 다음 해인 광해군 1년(1609)에 사액 받았으며, 이후 宋俊吉(1606-1672)·宋時烈(1607-1689) 등 西人 老論派의 인물들이 추가로 배향되었다.(이기봉)

  • 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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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군은 아산시 시내·송악면·배방면·탕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읍내동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燕山이다. 고을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은 삽교호로 흘러들어가는 곡교천이며,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그 지류인 온양천이다. 읍치 왼쪽에는 이 고을을 대표할 수 있는 溫宮이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명칭이 고대에는 湯井郡, 고려시대에는 溫水郡 등으로 불렸는데, 모두 溫泉과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溫宮은 溫泉行宮의 줄임말이며, 行宮이란 임금이 잠시 머무는 곳에 지어진 宮이다. 이곳에는 조선의 태조·세종·세조를 비롯하여 많은 임금이 다녀갔으며, 그 때마다 머물렀던 곳이 바로 이 온궁이다. 현재도 온양온천으로 개발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현재의 아산시내는 바로 이 온양온천 때문에 성장한 것이며, 과거의 읍치는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 아래쪽의 時興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었으며, 7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도에는 명칭이 잘못 기록된 것도 보인다. 읍치 위쪽의 住文川의 ‘住文’은 기록에 계속적으로 ‘佳文’이라 나오는데, 지도 작성자가 글자의 유사점 때문에 오류를 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위에 大坪이라 쓰여 있는 부분은 하천이 만나는 큰 평지로서, 이런 곳은 주로 일제시대 이후에 개발되었다. 기타 廣峴은 우리말 ‘넙티’에 대한, 角吃峙는 우리말 ‘갈재’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이와 같은 것을 통해 당시에 우리말에 대해 어떻게 한자로 표현했는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이기봉)

  • 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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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진현은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채운면·가야곡면 전체, 황산리를 제외한 강경읍, 부창동·덕지동을 제외한 논산읍, 양촌면의 석서리·중산리, 연무읍의 금곡리·죽평리·소용리를 포함한 동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은진면 연서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남쪽에 있는 摩耶山이다. 이 지역에는 원래 德恩郡과 市津縣이 있었다. 태조 6년(1397)에 德恩監務를 설치하여 두 고을을 합하였고, 세종 1년(1419)에 두 고을의 이름 중 한자씩 따서 恩津縣을 만들었다. 시진현의 중심지는 읍치 서쪽 10리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의 논산읍 등화동 일대라고 한다. 덕은현의 중심지는 읍치 동남 12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가야곡면 육곡리 근처로 추정된다. 彩雲面이 있는 곳은 옛 彩雲鄕이 있던 곳이다. 이 세 지역은 ≪東國與地勝覽≫이 만들어질 시기에도 독자적인 성씨를 갖고 있었다. 금강의 본류는 林川界에서 들어와 龍安界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이 지역에는 조선후기에 금강에서 가장 번영했던 포구가 있었던 곳이다. 왼쪽의 江景은 전국 3대 포구의 하나였을 정도였으며, 위쪽의 花之山面이라 쓰여 있는 곳도 역시 번창한 포구였다. 원래는 皇華山 밑에 있었던 市津이 번성했는데, 홍수로 수로가 바뀌면서 논산시 시내쪽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포구로서 발달한 장소는 허허 벌판의 강변에 낮은 산이 있는 곳이며, 海運-水運·陸運의 교차점이다. 강경 황산포는 西人 老論의 巨頭였던 宋時烈(1607-1689)의 스승 金長生(1548-1631)이 제자들을 길러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도에 표시된 창고는 모두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전에 보관하던 海倉이다. 이 밖에 ‘은진 미륵불’로 유명한 觀燭寺가 지도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에 있는 ‘彌勒’이란 표시가 ‘은진 미륵불’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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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현은 충청북도 음성군 읍성읍과 원남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迦葉山(709.9m)이다. 이 迦葉山의 한자 발음은 ‘가엽산’이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아 ‘가섭산’으로 읽어야 한다. 고을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으로 들어가는 음성천이다. 아래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으로 들어가는 초평천의 상류이다. 전자의 읍치 부분은 원래 음성현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후자는 기록에 ‘남쪽 20리에 있었다’는 巴川部曲의 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은 ‘甫川里’로 불리고 있는데, ‘巴川(파천)’과 ‘甫川(보천)’은 같은 발음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보인다. 우리말로는 ‘보내’이다. 이곳에는 浦火里가 표시되어 있는데, ‘巴川’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보인다. 파천부곡은 조선 초까지도 蔡·敬·尹 등의 성씨를 갖고 있을 정도로 독자성이 상당히 강했다. 왼쪽 위의 沙亭 부근은 남한강의 지류인 청미천으로 들어가는 응천의 상류이다. 여기서 沙亭은 정자의 이름이 아니라 이 지역에 있었던 마을의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모래물’이라고 부르며, ‘沙丁’ 또는 ‘沙井’으로도 쓴다. 이곳은 ‘서쪽 15리에 있었다’는 金村部曲의 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작성자가 읍치 외의 지역에 ‘面’이 설치되었음에도 마을의 이름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단위로 작용하던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지도에 나오는 우리말과 한자표기의 예를 더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炭峴은 현재 ‘숫고개’로 불리고 있으며, 草川은 우리말의 ‘풋내’ 또는 ‘풀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이와 같은 지명은 음보다는 뜻을 따서 붙인 것이다. 반면에 ‘行峙’는 우리말의 ‘향티’ 또는 ‘행티’를 한자로 표시한 것으로서 뜻보다는 음을 따서 붙인 경우이다. 이 지도에서는 찾기 어려우나 음과 뜻을 동시에 따서 붙인 한자 표기도 다수 발견된다. 이 밖에 다른 기록을 보면 음성현에 遠西面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이기봉)

  • 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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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군은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세도면·장암면·충화면·양화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聖興山이다. 금강의 본류가 石城界 쪽으로부터 咸悅界 방향으로 빠져 나간다. 금강 하류 쪽에는 南津과 菁浦津이 보이는데, 나루임과 동시에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津(나루)은 강 한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배로 건너는 강 양쪽 모두를 가리켰다. 따라서 강 건너에 쓰여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 반대편의 명칭도 같았다. 菁浦는 우리말 ‘무개’를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무우’ 菁과 ‘개(물가)’ 浦의 뜻을 따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위쪽의 場岩은 우리말 ‘맛바위’에 대한 한자 표기인데, 왜 이렇게 표기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지도 아래쪽에는 書院이 하나 보이고 있는데, 七山書院을 가리킨다. 이 서원은 兪棨를 배향하여 숙종 13년(1687)에 세워지고, 같은 왕 23년(1697)에 사액 받았다. 그 옆에 있는 海倉은 임천군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던 창고로서, 이곳부터 海運을 통해 직접 한양으로 나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밖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도 보이고 있다. ‘東○面’·‘西○面’에서의 ‘○’는 ‘邊’의, ‘○止山’에서의 ‘○’는 ‘乾’의 속자이다. ‘㐓化面’에서의 ‘㐓’은 우리말 ‘갈’을 표기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낸 글자이다.(이기봉)

  • 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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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의현은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전동면과 소정면의 대곡리·고등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북쪽 5리에 있었다’는 甑山이다. 지도 왼쪽의 北面과 大西面에 있는 하천은 아산만의 삽교호로 흘러들어가는 곡교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읍내를 흐르는 하천은 미호천의 지류인 조천천이다. 지도에는 일부 오류가 보이고 있다. 조천천은 고을의 동쪽으로 흘러나가 청주와의 경계선을 이루며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지 않고, 마치 남쪽으로 직접 빠져 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雲住山을 청주와의 경계선에 있는 것처럼 표시한 것도 오류이다. 실재로는 읍치와 청주와의 경계선 중간 지점에 운주산이 있다. 다음으로 지도 왼쪽의 淸州界라고 쓰인 부분도 오류이다. 이곳에는 청주의 월경지인 德坪面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실재로는 공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았다. 마지막의 오류는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南面 아래의 松峴은 우리말 ‘솔티고개’에 대한 한자식 표기이다.(이기봉)

  • 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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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현은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목면·청남면 전체, 구룡리를 제외한 장평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정산면 서정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大朴山이다. 지도에는 상당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첫째, 공주·부여 등과의 경계는 산줄기가 아니라 물줄기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부여와의 경계는 定惠寺·直峴(질고개) 너머에 있는 금강의 지류인 금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공주와의 경계는 松峴(솔치고개) 오른쪽부터는 하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公西院은 현재의 송암리 하천가에 있었다. 둘째, 읍치 북쪽의 皮峴面은 읍치 서남쪽의 赤谷面 방향에 있다. 후대에는 冠峴面이라고도 불렸는데, ‘가죽(皮)’과 ‘갓(冠)’이 비슷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셋째, 읍치 왼쪽의 所火面은 ‘仍火面’의 誤記이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셋째의 오류는 시정되었지만 첫째와 둘째의 오류는 그대로 반복되고 있어,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읍치 동남쪽에는 금강의 본류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泮灘(여울)과 汪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 이 구간에 해당되는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왕진 왼쪽의 江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수집하여 보관하던 창고이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獐項峙는 우리말 ‘노루목고개’에 대한 한자 표기로서, 전국적으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지명 중의 하나이다.(이기봉)

  • 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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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현은 제천시 시내·봉학면·봉양읍·백운면 전체, 금성면의 월림리·동막리·대장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제천시 시내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龍頭山이다. 지도에는 義林池가 매우 강조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일반적인 堤堰에 비해 엄청나게 큰 인공저수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형 저수지였던 김제의 벽골제나 밀양의 수산제가 조선시대에 모두 메워져 사라진 반면에 의림지는 지속적으로 수축되어 사용되었다. 벽골제와 수산제가 평지에 만들어진 반면에 의림지는 협곡 사이에 높은 제방을 쌓았기 때문이다. 지도에는 일부 잘못 표시된 경우도 눈에 뜨인다. 丹陽界 근처에 있는 九曲川은 高橋川 근처로 바뀌어야 한다. 近左面 역시 같은 정도만큼 그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지도 왼쪽에는 古堤川이 표시되어 있어, 어느 시기엔가 읍치가 옮겨갔음을 알 수 있게 한다. 面의 이름 중 縣左面·縣右面의 경우 지도를 보는 입장이 아니라 북쪽의 용두산에서 읍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근좌면과 근우면은 官行路를 기준으로 좌우의 명칭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이기봉)

  • 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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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현은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면·성환읍·성거읍·입장면 전체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의 도두리·신대리·노양리·본정리, 오성면의 당거리·창내리·교포리, 안중면의 안중리 일대, 포승면의 만호리·희곡리·신영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직산면 군서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蛇山이다. 지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越境地이다. 이 중 慶陽面 지역은 원래 경양현이 있던 곳으로, 조선초기까지도 독자적인 성씨가 존재했다. 경양현은 고려시대 때 河陽倉이었으며, 令을 두어 鹽場官을 겸임하게 했다고 한다. 후에 현으로 승격되었으며, 태조 5년(1396)에 직산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의 1개 면도 되지 않는 지역(팽성읍 도두리 일대)이 현으로 승격된 것을 통해 볼 때 고려시대 때 상업이 생각보다도 훨씬 발전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지역은 현재 아산만에 해당되며, 경양면 아래쪽의 하천에는 조선후기 내내 이곳에서 가장 번성했던 屯浦가 있었다. 고을 내부를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은 안성천의 지류인 성환천과 입장천이다. 읍치 위쪽에는 붉은 색의 작은 원이 표시되어 있다.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成歡驛으로 11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도 아래쪽에는 백제의 시조 溫祚王이 처음으로 도읍했던 곳으로 史書에 나오는 慰禮古城이 표시되어 있다. 현재는 학계에서 부정되고 있으며, 위례성은 한강변의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밖에 성환역 위에 大坪이라 표시된 지역은 광활한 평지가 펼쳐지는 곳으로서, 조선시대까지는 대부분 개간되지 않은 곳이었다.(이기봉)

  • 진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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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잠현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계산동·학하동을 포함한 남쪽(옛 진잠면), 서구의 도안동·관저동을 포함한 남쪽(옛 기성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유성구 원내동·교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5리에 있었다’는 産長山이다.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갑천이다. 상류와 하류를 구별할 수 없도록 그렸다. 下南面 방향이 상류이고, 북면 방향이 하류이다. 鷄龍山은 이 고을에 속한 것이 아님에도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 이르는 중요 산줄기가 계룡산으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왼쪽의 鷄龍川 상류는 태조 이성계가 개성으로부터 천도를 단행하려고 궁궐 공사까지 시작했던 新都안이다. 오른쪽에는 洞의 이름으로 유일하게 龍胎洞이 표시되어 있다. 용이 올라가는 것을 애를 밴 부인이 보았기 때문에, 용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마을이다. 이러한 전설이 당시에 중요하게 인식된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의 위치는 서구 산직동 용태울이다. 이 밖에 백제 시대부터 특별한 변화 없이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고을이기 때문에, 고대의 縣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지역이기도 하다.(이기봉)

  • 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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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천현은 충청북도 진천군 대부분에 해당되며,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교성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의 최상류이다. 지도에는 牛川·加里川·注川·牛潭·泮灘·台山川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같은 하천이라도 구간마다 다르게 불렸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潭은 물이 잔잔하여 마치 호수와 같은 부분에, 灘(여울)은 물살이 빠른 구간에 주로 붙여졌다. 지도는 실제의 고을 모습과 거의 흡사하게 그렸다. 특히 북쪽의 경우 같은 책에 있는 충주 지도에서는 내용이 왜곡되어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러한 왜곡이 시정되어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이 지도가 아니라 왜곡된 충주 지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일부 面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利谷面과 栢谷面은 위치가 바뀌어야 실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万升面(만승면)의 경우도 광혜원 쪽으로 더 올라가 있어야 현실에 가깝니다. 廣惠院은 新舊의 충청도 관찰사가 印을 교환하며,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 진천에는 賜額書院이 2개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만승면 왼쪽에 百源書院만 표시되어 있다. 이 서원은 고려말의 충신인 李穡(1328-1396)의 아들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살해된 李鍾學(1361-1392) 등을 배향하여 선조 30년(1597)에 세워지고, 현종 10년(1669)에 賜額 받았다. 일반인이 잘 알 수 없는 한자의 속자도 보이고 있다. 伏岺 오른쪽의 지명은 實安里로서, 지도에 쓰여진 한자는 ‘實’의 속자이다. 읍치 왼쪽에는 乺山이 보이고 있는데, ‘乺’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었던 한자이다. 지도에 쓰여진 한자지명을 그대로 읽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梨峙는 우리말 ‘배티’ 또는 ‘배티고개’에 대한 한자 표기이며, 泮灘은 우리말 ‘반여울’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이기봉)

  • 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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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군은 충청남도 천안시 시내·풍세면·광덕면, 송용리·관대리를 포함한 아산시 둔포면의 남쪽, 인주면의 금성리·해암리, 선장면의 가산리·대흥리·홍곶리 일대, 같은 면의 돈포리·대정리·신덕리, 예산군 신암면의 신종리·하평리·신택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천안시 시내 오룡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王字山이다. 고려시대의 행정단위는 所·處·莊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통일신라 때부터 전해지던 것인데, 이 고을은 특이하게도 고려 초(930)에 새로 신설되었다. 이것은 고려의 태조인 王建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읍치 오른쪽의 王字山이 고을 신설의 근거로서 작용하였다. 후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을 때, 왕건 휘하의 尹繼芳이란 인물이 풍수설에 입각하여 五龍爭珠型의 땅이라고 아뢰었다고 한다. 왕건은 그의 말을 믿고 王字城을 만들었으며, 주변 고을의 일부를 떼어서 새로 천안부를 설치하였다. 조선초기까지도 왕자산 밑에 高麗 太祖廟가 있었다고 하며, 수령이 거주하던 內衙가 오룡쟁주의 핵심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이 고을은 고려시대 내내 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립하지 못한 속현들은 모두 천안군의 땅으로 변했다. 아래쪽의 古豊歲(풍세현), 毛山面(모산부곡)·新宗面(신종부곡)·德興面(덕흥부곡)·頓義面(돈의향) 등의 越境地는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천안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고을의 내부를 관통하는 하천은 돈의면의 삽교호로 들어가는 곡교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지도에는 잘못 표시된 곳도 눈에 띈다. 청주의 월경지였던 德坪(面)이 마치 이 고을 안쪽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全義의 경계와 붙어 있었다. 다만 같은 책의 전의나 공주 지도에 덕평이 마치 공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던 것처럼 표시된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도에는 사찰도 많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아래쪽의 光德寺는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며,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도 번성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현재도 보물 390호 고려사경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기타 아래쪽에는 한양-제주 大路 위에 있으며, 공주로 통하는 중요 고개인 車嶺도 보이고 있다. 차령산맥의 이름이 유래된 곳이기도 하다.(이기봉)

  •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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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현은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청성면, 아곡리·대안리를 포함한 보은군 내북면의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백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남쪽)의 已城山인데,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에는 ‘(읍치) 서쪽 8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특히 ≪輿地圖書≫에는 이성산이 보은의 俗離山으로부터 맥이 왔다고 되어 있어 기록의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인데, 지도에는 龍川과 南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통일화 작업 이전에는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흔적 중의 하나이다. 아울러 南川이란 명칭은 많은 고을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명칭을 붙이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도 위쪽에는 보은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다. 현재 보은군 내북면 북쪽 부분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酒城部曲이 조선 초까지도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다가, 이후 면리제의 실시 속에서 독자성을 완전히 상실한 곳이다. 청산현은 원래 상주의 속현이었는데, 공양왕 2년(1390)에 監務를 설치하면서 독립적인 고을이 되었다. 이 때 같은 상주의 속현이었던 주성부곡이 청산의 속현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곳은 실재로는 남쪽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이 서북쪽으로 흘러나가는 작은 분지의 형태로 존재한다. 지도에는 하천이 마치 동서로 관통하는 것처럼 왜곡되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왜곡은 ≪大東輿地圖≫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당시의 정보가 지도처럼 알려진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 청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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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안현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증평읍·도안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안면 읍내리에 있었다. 청안현은 태종 5년(1405)에 淸塘縣과 道安縣을 합치고, 글자 한자씩을 따서 고을의 이름을 만들었다. 지도에는 크게 2개의 하천 유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를 지나는 것은 금강의 지류인 보강천의 상류이고, 오른쪽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으로 흘러들어가는 괴곡천이다. 후자의 지역은 고을 동쪽 12리에 있었다는 난곡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지도는 현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몇 군데 잘못된 부분이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曾子川이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여러 지지를 종합해 보건데, 南面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즉 읍내면 남쪽에 남면이 표시되어야 하며, 증자천은 서면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흘러나가야 한다. 서면과 근서면도 바로 두 물이 합류되는 지점에 표시되어야 한다. 아울러 北面의 경우도 잘못 표시되어 있다. 현재의 지도 입장에서 보았을 때 증평읍이 있는 지역이 이 지도에는 모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북면은 실재로 서면과 근서면이 있는 곳에 표시되어야 올바르다. 이 북면에는 과거에 도안현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현재의 도안면 지역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도 역시 편집된 것이며, 편집자가 남면과 같은 일부의 정보를 누락시켰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아울러 하나의 정보가 누락되면 다른 정보의 표현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면에 있는 敬天廟는 신라 敬順王의 畵像이 奉安되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외에 曾子川·顔子山 등의 명칭을 통해 당시의 지배층이 유교의 교리에 얼마나 충실하려 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이기봉)

  • 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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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현은 청양군 청양읍·운곡면·대치면 전체, 비봉면의 신원리·녹평리·장재리·관산리·사점리·중목리, 남양면의 봉암리·신왕리·백금리·매곡리·온암리·온직리·금정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양읍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牛山이다. 읍치 위쪽의 하천은 아산만의 삽교호로 흘러들어가는 무한천의 상류이다. 읍치 부분의 하천은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금천이다. 금천 위에는 西川·於項川·鵲川·泗灘 등의 명칭이 있는데, 灘(여울)의 경우도 하천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시행되기 전까지는 같은 하천이라도 구간마다 다른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西川은 읍치를 중심으로 설정된 명칭이며, 나머지는 고유지명을 따서 붙였다. 이중 鵲川은 우리말 ‘가지내 또는 까치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며, 작천과 사탄은 지도에서와 달리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읍치 아래쪽에는 舊金井驛이 표시되어 있는데, 원래 종6품의 丞이 파견되어 8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丞은 후에 察訪으로 명칭이 바뀌며, 금정역은 홍주의 龍谷으로 옮겨간다. 읍치 동남쪽으로는 대중가요 ‘칠갑산’으로 유명해진 七甲山(560m)이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長谷寺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보 58호 철조약사여래좌상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기타 읍치 오른쪽에는 유일하게 洞의 명칭이 水石洞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우리말 ‘물바위골’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물 가운데에 아름다운 바위가 있어 명명된 것이라고 하며, 특이한 지형이 중요하게 인식되어 표시된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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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목은 문의면·부용면·현도면과 시동리 서남쪽의 가덕면을 제외한 청주시 전체, 괴산군 청천면, 천안시 수신면, 연기군 소정면의 소정리·운당리, 추동·주산동을 포함한 대전광역시 동구의 동북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북문로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동쪽 1리에 있었다’는 唐羨山이다. 청주가 이렇게 크게 된 이유는 고려시대에 지방관이 파견된 主縣으로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많은 屬縣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현으로는 縣·部曲·鄕·所 등이 있었으며, 이 중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립하지 못한 곳은 모두 청주의 땅으로 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도 지도 오른쪽에 靑川面·松里面에 있었던 청천현과 아래쪽에 越境地로 나오는 周岸面에 있었던 주안향은 독자성이 강한 屬縣으로 존재했다. 이외에도 왼쪽에 越境地로 표시된 德坪面의 지역은 덕평향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이며, 오른쪽의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의 상류이다. 해미현에 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을 효종 2년(1651)에 이 고을로 옮겨 왔는데, 읍치 위쪽에 표시된 兵營이 그것이다. 병영 왼쪽에는 北藪가 표시되어 있다. 미호천의 지류인 鵲川이 자주 범람하기 때문에 만든 인공적인 숲이다. 병영 위쪽에는 붉은 색의 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16개의 屬驛을 거느린 栗峰驛이다. 그 오른쪽에는 고위평탄면에 만들어져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되었던 山黨山城(현재는 상당산성으로 부름)도 보이고 있다. 서원도 큰 고을답게 5개나 보이고 있다. 이 고을에는 실재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서원이 세워져 있었는데, 賜額書院만 표시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 寺刹도 서원 못지않게 많이 표시되어 있어, 崇儒抑佛 정책 속에서도 민간에서의 불교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이기봉)

  • 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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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풍군은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수산면 전체, 송계리 일대를 제외한 한수면, 양리·위림리를 포함한 금성면의 남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충추호에 의해 수몰되어 버렸다. 조선후기에 있었던 面 중 邑內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遠西面의 경우 黃江驛이 있는 곳이 중심지였다. 하천의 본류와 지류가 구별되지 않게 그려져 있다. 近南面 부근으로 들어온 남한강이 읍치 북쪽을 돌아 황강역 부근으로 빠져 나간다. 남한강 변에는 비단을 수놓은 듯한 절벽인 錦屛山, 좁은 낭떠러지길인 嚴城遷, 이름도 으스스한 惶恐灘 등 중요 지점의 지형적 특징이 주로 표시되어 있다. 惶恐灘의 경우 남한강 뱃길에서 가장 위험한 여울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황강역 부근은 조선후기와 일제초기에 크게 번성한 浦口 중의 하나였다. 그 옆의 書院은 黃江書院으로서 權尙夏(1641-1721) 등을 배향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사액 받았다. 이곳은 실재로 권상하가 거주하던 곳이었으며, ≪擇里志≫에도 나오는 유명한 양반촌이었다. 반면에 인조 17년(1629)에 세워지고, 현종 13년(1672)에 賜額 받은 鳳剛書院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밖에 衣峙는 우리말 ‘오티’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이기봉)

  •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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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목은 상모면을 제외한 충주시 전체,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음성군 전체, 괴산군 감물면과 불정면, 제천시 덕산면 전체와 한수면의 송계리 일대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충주 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있는 大林山이다. 우선 하천의 모습이 지류와 본류의 구별을 어렵게 할 정도로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의 淸風界로부터 들어와 月川 위를 지나고, 北倉→薔薇山→赤岩을 거쳐 북쪽으로 꺾여지는 것이 남한강 본류이다. 達川은 지도에서의 표현과 달리 실재로는 괴산 방향에서 甘勿面이라 쓰인 곳으로 들어오는 것이 본류이며, 金遷面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天民川(현재는 淸美川으로 부른다)은 長海院(현재는 長湖院으로 부른다)을 거쳐 赤岩 왼쪽에서 남한강에 합류된다. 고을이 큰 만큼 지도 작성자는 여러 곳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面의 명칭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 德山面 옆의 水村面은 덕산면의 里에 불과한 것을 面으로 잘못 적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沙乙面은 乷未面 또는 沙乙未面인데, ‘未’자를 빼먹었다. 면의 위치도 틀린 것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지도 왼쪽에 있는 면의 위치이다. 실재로 木川이나 安城과 접해 있는 곳이 없는데도, 지도에는 마치 두 고을과 접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아마 목천과 안성, 특히 안성까지의 경계선에 대한 기록이 이러한 결과를 낳게 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에 따라 沙多面과 川歧音面이 진천과 안성 사이의 깊숙한 곳으로 표시하게 되었다. 이 두 면은 실재로는 廣惠院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大鳥谷面의 경우도 孟洞面보다 북쪽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오류들은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지역은 모두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의 상류에 해당된다. 조선후기 내내 남한강에서 가장 번영한 浦口였던 지도 위쪽의 木溪가 남한강 변이 아니라 내륙으로 들어가 있는 것도 오류라고 볼 수 있다. 面 이외의 인문정보의 수록도 倉庫를 제외하면 일정한 규칙이 없다. 역의 경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었던 連原驛이 없는 반면에 丹月驛만 표시되어 있다. 賜額 받은 서원과 祠가 각각 3·1개 있었음에도 서원 1개만 기록하였다.(이기봉)

  •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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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군은 안면도의 대부분을 제외한 충청남도 태안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태안읍 남문리 일대에 있었다. 18세기 중후반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海東地圖≫·≪廣輿圖≫ 안의 태안지도에 비해 실제의 모습을 왜곡되게 그리고 있다. 첫째, 읍치 남쪽에 표시된 白華山은 실재로는 읍치 북쪽에 있다. 둘째, 읍치 서남쪽의 近西面이 표시된 곳은 실재로 없으며, 근서면은 안흥 방면에 있어야 한다. 셋째, 北一道面과 北二道面이 표시된 곳은 실재로는 두 개로 갈라져 있어야 하는데, 하나로 표시되어 있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2개의 지도는 실제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그런데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어, 두 지도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왼쪽의 섬들은 크기가 별로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려졌다. 예를 들어 新鎭島가 馬島보다 훨씬 큼에도 작게 그려져 있다. 波濤只島의 경우 그 오른쪽의 大小山에 거의 붙어 있어야 한다. 현재는 이 섬과 육지 사이가 간척되어 섬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진 상태다. 안면도의 모습은 서산 지도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왼쪽의 바닷가에는 2개의 남색 다이아몬드가 표시되어 있다. 이 책의 모든 지도에서 鎭堡에 대한 표시로서 사용하는 것으로, 所斤鎭과 安興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모두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으며, 각각 소원면 소근리와 근흥면 정죽리에 있었다. 안흥진이 있는 곳은 경상·전라·충청도의 漕運船이 자주 난파되던 곳으로 유명하다. 신진도와의 사이가 좁고, 밀물 시 바닷물이 밀려들어가는 만이 많기 때문에 물살이 빠른 곳이다. 이런 곳이기 때문에 원래 難行梁이라 불렀는데, 이름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安興梁으로 바꾸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지역 때문에 고려와 조선에서 서산과의 경계선에 運河를 뚫으려는 시도가 일어나기도 했다.(이기봉)

  •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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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현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서 도두리·신대리·노양리·본정리를 제외한 지역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지도 위쪽의 小北面 지역은 현재 정확하게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평택시 오성면 안화리·신리·교포리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원래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水泥가 陸地를 생성하여 사람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67호가 거주했던 것으로 나와 있으며,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이라 땅을 파서 물을 저장했다가 마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은 현재 아산만방조제의 건설로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 대부분이 개간되었다. 읍치는 팽성읍 객사리에 있었으며, 조선시대까지는 충청도에 속했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시 진위군과 합쳐지면서 경기도로 옮겨졌다. 지도에는 縣內面과 西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현재 1개 읍에 불과한 지역에 6개의 면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면리제가 전국적으로 시행되기는 했지만, 면의 크기나 인구수에 대한 전국 일률적인 기준은 없었다. 어떤 고을에는 현재의 1개 면 크기에 준하게 설정된 경우도 자주 보인다. 읍치 위쪽의 하천이 안성천 본류이며, 慶陽 방면의 아산만을 지나 서해로 빠져나간다. 안성천의 상류가 마치 고을 동쪽에서 끝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그렇지 않다. 소북면에서 안성천과 합류하는 하천이 진위천이다. 읍치 아래쪽의 濁川은 현재 군계천으로 불리고 있으며, 조선후기에 이 지역에서 가장 번성했던 屯浦가 있는 곳이다. 읍치 왼쪽에 표시된 書院은 褒義祠로서 현종 2년(1661)에 세워지고, 숙종 30년(1704)에 賜額 받았다. 병자호란(1636) 때 斥和論을 주장하여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洪翼漢(1586-1637)·尹集(1606-1637)·吳達濟(1609-1637)가 배향되어 있다. 기타 읍치 뒤쪽의 城山은 해발 34.8m에 불과한 부용산이다. 고을 전체가 평지에 입지해 있기 때문에 언덕에 불과한 곳이 중요한 山으로 인식되고 있다.(이기봉)

  • 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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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군은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화양면·기산면·마산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한산면 지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1리에 있었다’는 乾至山이다. 읍치까지 이어진 산줄기가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음에도 지도에는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朽浦와 아래쪽의 瓦草浦는 모두 浦口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하천의 명칭을 가리킨다. 전자는 우리말 ‘후개’에 대한, 후자의 瓦草는 우리말 ‘지새울’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후자의 경우 ‘지새울’을 ‘기와풀’과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쪽의 海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여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 읍치 오른쪽의 서원은 文獻書院이다. 李穀(1298)·李穡(1328-1396)·李鍾學(1361-1392)·李塏(?-1456)·李耔(1480-1533) 등을 배향하여 선조 7년(1574)에 세워지고, 광해군 9년(1611)에 賜額 받았다. 이곡은 이 고을 출신으로 원나라의 制科에 둘째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다. 이색은 이곡의 아들이고, 이종학은 이색의 아들이다. 2명 모두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하다 피살당했다. 나머지 2명도 모두 韓山을 본관으로 하는 이곡의 자손들로 조선에서 출세한 인물들이다. 고려에서 출세한 가문이 조선의 개국에 반대했음에도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곡 이후 이들이 출신지를 떠나 있었음에도 이 고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서원에 배향되었음을 통해, 조선 중기 이후의 상황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이기봉)

  • 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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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현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가좌리·소중리·상성리·거성리·원대리를 제외한 운산면, 당진군 정미면·대호지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해미면 읍내리에 있었다. 원래 고려시대까지 이 지역에는 貞海縣과 餘美縣 2개가 있었다. 태종 7년(1407)에 두 고을을 합해 하나로 만들고, 각 고을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다가 海美縣을 만들었다. 여미현의 중심지가 지도에 古餘美로 표시되어 있다. 정해현의 경우 원래 읍치 왼쪽에 표시된 夢熊驛(또는 鄕)이었다. 이곳의 胥吏가 고려 태조 때 큰 功이 있다고 해서 大匡의 작호를 내리고, 고구현의 땅 일부를 분할하여 현으로 만들었다. 이 지도에는 큰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읍치 왼쪽에 표시된 西面은 위쪽의 唐津界에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이곳은 현재 당진군 대호지면의 북쪽 부분인데, 서면에 있는 桃李島·赤鮑里·海倉·助今浦도 모두 잘못 표시되어 있다. ≪輿地圖書≫에 나오는 지도나 ≪海東地圖≫ 등에는 모두 西面의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다. 다만 회화식 지도이기 때문에 마치 이 지도에서의 위치와 비슷하게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지도의 작성자는 이러한 부분에 대한 오해와 지지를 참고하여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류가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어,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되어야 할 것은 西面이 거의 읍치의 정북쪽에 있으면서도 ‘西’라는 방향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도나 지지에 기록된 동서남북의 방위가 꼭 같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또한 위쪽의 一道面과 二道面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표시된 것도 오류로서, 실재로는 연결되어 있었다. 김정호의 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가 수정되어 있지만, 서면이 위치해 있지 않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면적이 상당히 작게 그려져 있다. 이보다는 작지만 읍치를 포함한 동쪽에 있었던 東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도 눈에 띈다. 기타 廉率面 지역은 원래 廉率部曲이 있던 곳이다.(이기봉)

  • 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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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현은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옥산면·남면·내산면·외산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홍산면 남촌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飛鴻山이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현재도 지도에 표시된 것과 같은 金川이라 부르고 있으며, 우리말 ‘쇠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동쪽으로 흘러 금강과 만난다. 그 오른쪽에 표시된 海岸川은 海岸面에 대한 誤記이다. 아울러 上東은 上東面을 의미하며, 下東面은 누락되었다. 外北面에 있는 하천은 남포를 거쳐 바로 바다로 빠져나가는 웅천의 상류로서, ‘북쪽 41리에 있었다’는 非刀所 지역으로 추정된다. 臨水臺는 하천가에 절벽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현재 외산면 만수리에 있다. 읍치 오른쪽의 彰烈祠는 병자호란(1636) 때 斥和論을 주장하였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洪翼漢(1586-1637)·尹集(1606-1637)·吳達濟(1609-1637) 三學士를 배향하여 숙종 43년(1717)에 세워지고, 경종 1년(1721)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 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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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목은 충청남도 홍성읍·고북면·갈산면·홍북면·금마면·홍동면·장곡면 전체와 광천읍의 벽계리·상정리·신진리·마현리, 보령시 천북면과 오천면의 도서지역, 청양군 화성면 전체와 남양면의 구룡리·용마리·대봉리·용두리·흥산리, 당진군의 거산리를 제외한 신평면과 합덕리·점원리·신흥리를 제외한 합덕읍,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홍성읍 오관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의 月山이다. 홍주목이 이렇게 크게 된 이유는 고려시대 때 많은 屬縣을 거느린 州縣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 맨 위쪽의 縣內面이라 표시된 곳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유일하게 나오는 屬縣인 新平縣 지역이었다. 이곳에 있는 北面은 新北面의 誤記이며, 新南面의 ‘新’은 신평현의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신남면의 위치가 너무 남쪽으로 내려와 있으며, 合北面과는 서로 붙어 있지 않았다. 合北面과 合南面은 원래 合德縣의 지역이었으며, 면 이름 앞의 ‘合’은 그 흔적을 보여준다. 이곳은 원래 部曲이었는데, 고려 충렬왕 24년(1276)에 이 지역 출신인 黃石良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은총을 받은 일이 있어 縣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읍치 왼쪽의 高北面·高南面은 高丘縣, 그 아래쪽의 用川面은 龍泉部曲의 지역이었다. 용천면 왼쪽의 古縣은 興陽縣이 있던 지역었음을 의미한다. 그 오른쪽의 躬耕面은 躬耕部曲의, 위쪽에 월경지로 남아 있는 雲川面은 雲川鄕의 지역이었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古呂陽은 呂陽縣의, 興口香面은 興古鄕의, 化城面은 化城部曲의 땅이었다. 합덕면에 있는 合德池는 둘레 11,829尺(약 3,552m)의 크기로서, 조선시대 만들어진 堤堰으로서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지금은 모두 메워져 논으로 개간되어 있다. 지도 왼쪽에는 섬이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安眠島의 경우 홍주 소속의 땅과 그 경계되는 지역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즉, 안면도 전체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니다. 기타 書院이 2개 보이고 있는데, 읍치 오른쪽의 서원이 魯恩書院이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朴彭年과 成三問 등의 死六臣을 배향하여 숙종 2년(1676)에 세워지고, 같은 왕 38년(1712)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 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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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간현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매곡면·상촌면 전체와 추풍령면의 계룡리,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의 대부분에 해당되며, 읍치는 황간면 남성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금강의 지류인 초강천이다. 초강천 유역 중 추풍령 서북쪽이 경상도 金山(현재의 김천시 일대)의 黃金所面에 해당됨에도, 지도에는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황금소면에는 고려시대까지 金山의 속현으로 黃金所가 있었으며, 여말선초를 지나며 독자성을 상실하고 面으로 편재되었다. 반면에 지도 위에 나타난 外南面 지역은 현재의 김천시 봉산면 지역으로서, 충청도에 속해 있으면서도 낙동강 수계에 있었다. 이 지역에는 원래 金化部曲이 있었는데, 고려 공양왕 2년(1391)부터 황간의 屬縣으로 존재하다가 그대로 面으로 편재된 지역이다. 지도에는 2개의 서원을 이름까지 정확하게 써 넣었다. 위쪽의 寒泉書院은 西人 老論派의 거두였던 宋時烈(1607-1689)만을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지고, 영조 2년(1726)에 賜額 받았다고 한다. 아래쪽의 松溪書院은 戊午士禍(1498) 때 관련되어 유배되었던 曹偉(1454-1503) 등을 배향하여 현종 7년(1565)에 세워졌지만, 사액 받지는 못하였다. 기타 지도에는 2개의 里가 표시되어 있는데, 긴 계곡의 뛰어난 경치가 있는 곳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金溪里의 위치는 잘못되어 있는데, 梨峴 근처에 있어야 맞는다.(이기봉)

  • 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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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덕현은 대전직할시 동구의 대성동을 포함한 북쪽과 신상동을 포함한 남쪽 그리고 직동과 효평동, 대덕구 전체, 유성구의 용산동·방현동·관평동·탑림동·전민동·문지동·원촌동에 해당된다. 읍치는 동구 읍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鷄足山이다. 淸州周岸界로부터 들어와 公州界로 흘러나가는 것이 금강의 본류이다. 읍치 왼쪽에는 현재의 이름과 같은 甲川이 표시되어 있다. 외남면으로부터 흘러오는 하천은 갑천의 지류인 대천이다. 금강 본류 아래쪽에 표시된 美湖는 진짜 호수가 아니라, 금강의 이 부분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지역에는 보통 나루가 설치되는데, 荊角津은 바로 이 미호에 있던 나루로 추정된다. 현재 대덕구 미호리 일대에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청주의 周岸面은 고려시대까지 독자적인 행정단위인 周岸鄕의 지역이었다. 청주의 속현으로 존재하다가 여말선초의 과정을 지나며, 독자성을 잃고 청주의 일개 面으로 재편되었다. 청주와 지역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越境地이기도 하다. 작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書院이 세 개나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가장 왼쪽의 서원은 崇賢書院인데, 鄭光弼(1462-1538)을 배향하여 광해군 1년(1609)에 세워지고 그 해에 賜額 받았다. 이곳에는 이후에도 金長生(1548-1631)·宋俊吉(1606-1672)·宋時烈(1607-1689) 등이 추가로 配享되었는데, 조선후기 내내 권력을 잡았던 西人 老論의 인맥들이었다. 이 고을은 조선시대 내내 恩津 宋氏가 대대로 살았던 지역이기도 하다.(이기봉)

  • 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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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인군은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회남면 전체, 내북면의 염둔리·법주리·용수리·신궁리, 수한면의 차정리, 청원군 문의면의 마구리·마동리·묘암리·염치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회북면 중앙리와 부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읍치 서쪽 2리에 있는 何磨山으로 나온다. 이 지도에는 阿摩山으로 표시되어 있어, 지명의 표기가 시대나 표기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未訖灘’의 경우도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末訖灘’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면 왼쪽의 ‘芦岺’은 ‘호령’으로 읽으면 안 된다. ‘芦’는 필사본의 경우 ‘蘆’의 속자로서 사용되기 때문에 ‘노령’으로 읽어야 한다. 현재는 ‘갈티’ 또는 ‘갈키고개’로 부르고 있으며, 한자로는 ‘葛峙’로 적는 경우가 많다. 고을 한 가운데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회인천이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금강의 본류는 江外面을 휘돌아 서남쪽으로 빠져 나가고 있다. 현재는 이 지역 대부분이 대청호에 수몰되어 있다. 기타 구룡산과 노성산 사이에 있는 東面의 경계는 실재로는 오른쪽 산줄기 너머에 있다. 현재의 보은군 내북면의 염둔리·법주리·용수리·신궁리와 수한면의 차정리가 그것이다. 세금을 납부하던 人의 파악이 중요하던 시기에 이 고을의 사람들이 산을 넘어가 마을(村)을 개척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평안도
  • 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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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박천군 가산면·용계면·청룡면·서면·양가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대부분이 평안남도 운전군에 속해 있다. 읍치는 운전군 가산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鳳(頭)山(394m)이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대령강 본류이며, 왼쪽의 하천은 장수탄강이다. 두 하천은 고을 남쪽에서 합류하여 바로 바다로 들어간다. 하천의 상류 부분을 너무 가늘게 표시하여, 마치 그곳이 발원지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지도에 표시된 두 하천 구간은 실재로는 하류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靑龍山도 2개나 적혀 있는데, 위쪽의 靑龍山은 靑劒山의 誤記이다. 산줄기의 표현이 회화식 지도에서 읍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環抱型으로 그리는 방식을 답습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를 이중으로 감싸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는 점, 읍치 북쪽 1리에 있다고 기록된 鳳(頭)山이 상대적으로 멀게 표시된 점 등이 바로 회화식 지도와 비슷한 부분이다. 아래쪽의 靑龍山도 鳳(頭)山의 북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는 동쪽에 위치한다. 面의 이름이 잘못 기재된 경우도 발견된다. 왼쪽 위의 西江面은 西北面의 誤記이며, 郡內面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車岺 역시 地誌에는 車踰嶺으로 나오고 있어, 역시 鳳頭山을 鳳山으로 표기한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밖에 읍치 왼쪽에는 廣林山이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俗字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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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에서 표현한 지역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강계군·자성군·후창군에 해당된다. 현재는 자강도 강계시·시중군·만포시·성간군·자성군·중강군·화평군과 량강도 김형직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강계의 읍치는 강계시 남문동·동문동·북문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처음으로 萬戶를 두면서 공식적으로 고려의 땅이 되었다. 북쪽으로는 세종 때 이곳에 살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설치한 閭延·慈城·茂昌·虞芮의 四郡이 있었던 지역이다. 지도에는 ‘古○○’의 형태로 중심지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으며, 古慈城은 좀이 먹은 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보이고 있지 않다. 四郡은 여진족의 침입과 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단종 3년(1455)과 세조 5년(1459)에 차례대로 폐지되며, 고종 6년(1869)에 와서야 정식으로 고을이 설치된다. 四郡이 폐지된 후 이 지역은 보통 廢四郡이라 불리게 되었다. 강계와 폐사군의 경계선이 지도에는 압록강 변의 麻田川으로부터 읍치 동남쪽의 葱田岺까지 적황색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폐사군 지역에는 山川과 과거 四郡의 중심지 등만이 간단하게 묘사되어 있다. 폐사군 지역의 모양이 실제의 모양과 상당히 다르게 그려져 있다. 古虞芮와 中江川 부분이 실제와 다르게 서북쪽으로 튀어나가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 역시 동일하게 그려져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에 鄭尙驥(1678-1752)가 만든 ≪東國地圖≫ 계통의 지도들은 이 부분이 실제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또한 이런 계통의 사본들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김정호는 본 지도 계통의 것과 동일하게 그리고 있다. 압록강 변에는 滿浦鎭을 포함하여 3개의 鎭堡가 보이고 있으며, 내륙 쪽의 禿魯江 유역에도 鎭堡와 關門城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조선 정북 방향의 최전방임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四郡 지역의 압록강 건너편에는 많은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적의 예상 침입로이다. 다만 강계의 영역에서는 압록강 건너편에 지명이 하나도 보이고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 만포 맞은편에는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던 國內城이 있으며, 현재는 集安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의 地誌에는 이곳이 금나라의 도읍지였다고만 기록되고 있어, 고구려의 國內城 위치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國內城의 경우 義州에 있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으며, 평양을 중심으로 고구려 초기의 유적들이 분포한 것처럼 보는 것이 조선시대 기록의 대세이다. 지도에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俗字도 많이 보이고 있다. 만포진 아래쪽에는 夞怪面이 보이고 있는데, ‘夞’은 한자에는 없는 ‘욋’이라는 발음을 기록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만든 글자이다. 그 아래쪽에는 時時川·時時川面이 표시되어 있다. 時 다음의 표시는 같은 자가 반복될 경우에 사용한다. 그 아래쪽에는 ‘芦洞津’도 표시되어 있다. ‘芦’는 필사본에서 ‘蘆’의 속자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호’가 아니라 ‘노’로 읽어야 한다. 읍치 위쪽 봉수 명칭의 두 번째 글자는 ‘實’에 대한 속자이다.(이기봉)

  • 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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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현은 삼등면과 강동면의 동쪽 일부를 제외한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동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양시 삼석구역·승호구역의 동쪽과 강동군의 서쪽에 걸쳐 있다. 읍치는 강동군 강동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大朴山이다. 이 고을은 고려 인종 14년(1136)에 仍乙舍鄕·班石村·朴達串村·馬灘村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대동강 본류인데, 지도에는 錢浦라고 되어 있다. 대동강으로 흘러드는 각 지류의 명칭이 자세히 적혀 있다. 아래쪽의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로, 현재는 남강이라 불리고 있다. 역사기록에는 能成江·能城江·綾城江으로 나오는데, 지도에는 能將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명칭은 각종 地誌에서 찾을 수 없으며, 김정호의 ≪大東地志≫에는 능장천 대신에 能將山이 보이고 있다. 읍치 왼쪽의 古邑面은 강동의 구읍치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土築의 성곽이 있었다고 하며, 둘레 5,759척(약 1,728m)의 중형 정도였다. 이곳은 몽고군에게 쫓긴 거란족 5만여명이 高麗·몽골·東眞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강동성 싸움(1219)으로 유명하다. 이 때가 고려와 몽골의 첫 교류이며, 이후 얼마 안 있어 몽골의 대대적인 침입이 시작된다. 이 성곽은 강변의 절벽을 배경삼아 만들어졌는데, 지도상의 읍치로 옮긴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이기봉)

  • 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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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동진면·성암면·대산면·쌍룡면·보림면·잉차면·초리면 전체와 수산면 서쪽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는 남포시 강서구역·대안구역과 증산군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강서구역 덕흥동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舞鶴山(347m)이다. 이 고을은 인종 14년(1136)에 西京 경내의 梨岳·大垢·甲岳·角墓·禿村·甑山 등의 鄕을 합해 만들어졌다. 이 중 증산은 태조 3년(1394)에 독립적은 고을로 떨어져 나갔다. 오른쪽에 보이는 큰 하천이 대동강 본류이며, 읍치를 통해 합류하는 것은 봉상강이다. 위쪽의 閑龍面 지역은 수계가 다르다. 지도에는 일부 잘못 필사된 글씨가 보이고 있다. 고을 위쪽의 永川里는 水川面에 대한 誤記이다. 왼쪽의 席匹面은 席匠面에 대한 잘못된 기록이다. 이와 같은 오류는 글자가 유사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지도 작성자가 地誌를 근거로 만들면서 생긴 오류라고 생각된다. 읍치 왼쪽의 書院은 鶴洞書院이다. 은퇴하고 이 고을에 내려와 살았던 金泮을 배향하여 숙종 10년(1684)에 세워지고, 같은 왕 12년(1686)에 賜額 받았다. 조선후기에는 평안도 사람이 높은 벼슬에 진출한다는 것이 어려웠지만, 조선전기에는 달랐다. 김반은 정종 1년(1399)에 과거에 급제한 조선초기의 인물이다. 기타 읍치 부근은 고구려의 중기 경에 만들어진 돌방무덤(石室墳)이 많이 발견되는 지역이기도 하다.(이기봉)

  • 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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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개천군 중 봉동면의 남쪽 부분을 제외한 지역과 순천군 내남면에 해당되며, 현재도 개천시와 순천시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개천시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大林山이다. 읍치 위쪽에는 청천강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가는데, 지도에는 花川江·犇灘이라고 적혀 있다. 灘(여울)이란 경사가 심하고 물살이 빠른 하천 구간을 의미하며,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지도 아래쪽에는 대동강이 동쪽에서 들어와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읍치 바로 아래쪽을 흘러 나가는 하천은 南川이라고 불렀으며, 현재는 개천강이라 한다. 남천 상류에는 小等淵·釜淵 등이 표시되어 있다. 부연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으며, 祈雨祭를 지내던’ 곳으로 지지에 기록되고 있다. 기우제는 물이 풍부한 곳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런 대표적인 곳이 바로 연못이었다. 지도 아래쪽에는 다이아몬드 모양과 金城鎭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지도책에서는 군사기지인 鎭堡를 일률적으로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시하였다. 金城鎭에는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되었다. 지지에는 金城鎭과 金城堡라는 명칭이 혼재되어 나오는데, 종9품의 별장이 파견된 경우라면 금성보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面의 명칭에서 일부 오류가 발견된다. 첫째, 읍치 지역에 있었던 郡內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둘째, 中西面이 2개 기록되어 있는데, 오른쪽 아래의 것은 中南面이라고 표시해야 한다. 셋째, 내남면 오른쪽의 粘石面이라는 명칭은 지지에서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명칭 기재의 오류는 이 지도가 지방에서 제작되었다기보다는 중앙에서 여러 지도와 지지 등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기타 고을 전체의 모습이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나, 동쪽으로 튀어나간 북면과 외동면 지역은 약간의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이기봉)

  • 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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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산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안흥면·옥천면 전체와 일포면의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북도 곽산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곽산군 통경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凌山城이 있는 凌漢山이었다. 지도에는 地靈山에서 鐵馬川까지 이어진 하천이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이 하천은 철마천과 합류되지 않은 상태로 남쪽으로 계속 흘러가 바로 바다로 들어가야 한다. ≪海東地圖≫의 곽산군 지도에는 이와 같은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는데, 김정호의 ≪大東輿地圖≫는 잘못된 내용을 따르고 있다. 조선중기에 읍치는 古邑面 지역에 있었으며, 영조 22년(1746)에 지도 위의 위치로 옮긴다. 그러다가 같은 왕 44년(1768)에 현재의 곽산읍인 옛 읍치 지역으로 다시 옮겨간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는 최소한 영조 22년(1746)과 44년(1768) 사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海東地圖≫의 郭山郡 지도에는 영조 22년(1746) 이전 또는 44년(1768) 이후의 읍치가 표시되어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는 읍치의 위치도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능산성은 능한산성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 이 산성은 둘레 6,913尺(약 2,074m)이며, 험한 산지를 이용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요새로 인식되었다. 아래쪽 해안가에는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된 任海鎭도 보이고 있다. 이 지도책에서는 군사기지인 鎭堡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통일시켜 표시하였다. 이곳에는 水軍과 戰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섬은 실제 크기보다 너무 크게 표시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구성의 월경지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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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구성군 전체와 정주군 임포면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구성시 전체와 천마군의 동남쪽 절반 및 선천군의 동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구성시 성안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서북쪽 10리에 있었다’는 甫十山이었다. 지도 아래쪽에는 본 고을의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으며, 현재의 위치는 곽산군 염호리·원포리 일대이다. 이곳은 龜城鹽里面(또는 坊)이라고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지도에는 龍城里面이라고 적혀 있다. 지도 작성자가 龜城을 龍城으로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鹽里에서의 鹽도 생략해 버린 것으로 짐작된다. 지도에는 크게 세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를 지나 동쪽으로 나가는 하천은 대령강의 지류인 천방강인데, 지도에는 옛 명칭인 皇華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압록강의 지류인 삼교천이며,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동래강의 최상류이다. 고을 서쪽은 압록강변의 의주와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즉, 압록강을 건너온 적에 대한 2차 저지선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의주와의 경계에 좁은 골짜기를 막은 關門이 塞垣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오른쪽에는 정4품의 만호가 파견된 植松鎭이, 더 오른쪽에는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安義鎭도 보이고 있다. 지도 작성 시에는 거의 폐허상태인 片月城·泥城·靑龍山城 등도 그려 넣어 군사적 측면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 고개에 대한 표시가 특히 자세한 것도 군사적 배려였다고 생각된다. 위쪽의 八營岺과 왼쪽의 鎭營 등이 어려운 속자로 쓰여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 표시된 天釰山에서의 ‘釰’은 지명에서 보통 ‘劒’을 대신하여 사용되기 때문에, ‘일’이 아니라 ‘검’으로 읽어야 한다. 기타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표시에서 전혀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는 嘉山界가 표시되어 있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이기봉)

  • 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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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천군은 잠도면과 잠상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덕천군과 영원군의 태극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대부분이 평안남도 덕천시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덕천시 승리동·서문동·창말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의 長安山이다. 대동강 본류가 寧遠界에서 들어와 읍치 남쪽을 지나 順川界로 빠져나간다. 지도에는 대동강이 凝江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孟山界로부터 흘러들어오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맹산강이다. 지도에는 邈江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기록에는 瘼灘으로도 나온다. 지도 오른쪽의 金城山 위에는 성곽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 태조 때 石築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삼면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천연의 요새였다고 한다. 둘레는 3,125尺(약 937m)으로 그리 크지 않은 성곽이지만, 조선 초에는 거의 최전방에 해당되었던 이 지역의 방어를 위해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 지도 왼쪽 위의 蘇民은 蘇民(站)을 의미하며, 그 오른쪽의 㐙峴에서의 ‘㐙’은 한자에는 없는 ‘둘’이라는 음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낸 글자이다. 기타 고을 전체의 모습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으며, 인문적 정보로는 面·倉·寺刹·烽燧 등만 기록하고 있다.(이기봉)

  • 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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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산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맹산군 맹산면·원남면·동면·지덕면·애전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맹산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맹산군 맹산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 방향에 있는 豆無山(지도에는 豆毛岺)이다. 읍치를 돌아 서북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덕천 동북쪽에서 대동강과 합류하는 맹산강이며, 아래쪽에 조금 보이는 것은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고을의 동쪽으로는 현재 낭림산맥으로 불리는 白頭大幹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나가며, 그 너머는 함경도이다. 지도에는 고을의 동쪽이 咸興界로 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永興界라고 적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이 지도가 중앙에서 편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읍치 오른쪽의 鐵瓮城은 1,085m 높이의 철옹산 정상 부근에 있었다. 둘레가 650尺(약 195m) 정도로 작지만, 사면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항아리 모양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이웃한 함흥과 정평 부근이 최전방의 역할을 하였던 고려 초중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철옹성을 경계로 서쪽의 대동강과 동쪽의 용흥강이 나누어지는데, 맹산현 쪽으로 파고들어온 부분이 실제보다 남북의 폭이 훨씬 크게 표시되어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되고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에는 邑內面·南面·北面·元塞面 등 4개의 面이 기록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는 5개의 면으로 개편된다. 작은 고을의 경우 일제시대 1개 면의 ⅓ 수준에 해당되는 것도 많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面의 운용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되며, 倉庫가 面의 수보다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다른 지도에서 보기 힘든 里가 여러 개 적혀 있는데, 여러 地誌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마을이다. 김정호의 ≪大東地志≫에는 邑內·艾日·德川·池城·內南·外南의 6개 坊面으로 나온다.(이기봉)

  • 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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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동남면·덕안면에 해당되며, 지금도 일부를 제외한 평안북도 박천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박천군 중남리·덕삼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동쪽 3리에 있었다’는 臥龍山이다. 鳳麟山(217m)이 최고봉일 만큼 산지가 거의 없는 지역이며, 남서쪽의 경우에는 거의 평지에 가깝다. 산줄기의 이어짐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거의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이 지역의 지형에 대한 오해를 하기 쉽게 되어 있다. 하천에 대한 표현도 이 지도만을 놓고 볼 때 많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청천강 본류의 하류부분이며, 왼쪽의 하천은 현재 대령강으로 부르는 大定江 본류이다. 이러한 대하천을 읍치를 흐르는 조그마한 하천과 거의 같은 굵기로 표시함으로써,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두 하천이 태천과 영변 방향에서 흘러 들어온다는 측면도 너무 약하게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南面이 2개나 적혀 있는데, 아래쪽에는 德安面이 있는 곳이다. 기타 天燈山·深牙烽은 잘 쓰이지 않는 俗字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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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동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벽동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북도 벽동군과 자강도 우시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는 벽동군 동주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의 九峯山이었다. 고려 공민왕 6년(1357)에 林土와 碧團에 살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남쪽의 민호를 옮겨 설치한 고을이다. 이 시기 이전까지는 고려의 영향력이 이 고을 서쪽에 있었던 삭주까지만 미치고 있었다. 碧潼이란 이름은 碧團과 陰潼(옛 林土)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북쪽으로는 압록강 본류가 보이고 있으며, 理山과의 경계선에 있는 충만강과 읍치 아래쪽의 東川·西川 등의 지류가 흘러들어가고 있다. 압록강 변에는 邑城 이외에 廣坪堡로부터 小吉號里堡까지 총 7개의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방어 시설은 강을 넘어온 적에 대한 1차 저지선 역할을 하였다. 이 중 邑城과 碧團鎭에는 각각 둘레 8,045尺(약 2,415m)·13,032尺(약 3,910m)의 대형 石城이 있었으며, 나머지 지역에는 둘레 100m 정도의 작은 石城이 있었다. 압록강 건너편의 지명은 대부분 적의 예상 침입로이다. 남쪽으로는 隘口라는 지명과 함께 표시된 關門城과 林土鎭이 보이고 있다. 이들 군사시설은 협곡 등에 만들어져 있어 적은 군사로도 대규모의 적을 막을 수 있었으며, 1차 저지선을 뚫고 들어온 적에 대한 2차 저지선 역할을 하였다. 面의 이름과 위치는 대체적으로 상세하게 되어 있지만, 邑內面·西上面 등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오농괴면에서의 ‘괴’에 해당되는 글자는 ‘怪’의 속자이다. 이밖에 鎭堡의 이름은 대부분 여진족의 말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며, 烽燧와 倉庫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 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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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주부는 청수읍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삭주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삭주군의 동쪽과 대관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삭주군 삭주읍에 있었다. 고을의 서북쪽에 압록강 본류가 있으며,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진다. 서북쪽은 압록강의 지류인 三支川 유역이고, 남동쪽은 대령강의 지류인 兄弟江 유역이다. 후자 부분에는 大朔州라는 지명이 보이고 있는데, 세조 12년(1466)까지 읍치로서 기능하던 곳이다. 본 지도 위의 읍치는 원래 小朔州라고 불리던 곳이다. 이와 같은 읍치의 이동은 조선의 국경 방어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압록강 변에는 강을 건너 쳐들어오는 적에 대한 1차 방어선의 역할을 하였던 仇寧鎭이 보이고 있다. 압록강 건너편에 빼곡히 적혀 있는 지명은 적의 예상 침입로이다. 창성천 유역으로 넘어가는 지역에는 2차 방어선 역할을 하던 군사기지가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다. 우선 고개나 협곡에 설치된 關門城이 여러 개 보이고 있는데, 지형적 조건 때문에 대규모의 적이라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지역이다. 고개 남쪽에는 幕岺鎭과 天馬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각각 인조 25년(1647)과 효종 4년(1653)에 처음 설치한 것으로서, 병자호란(1636) 이후 강화된 북방 경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천마진 오른쪽에는 屯田에 설치된 天馬屯倉도 보이고 있다. 현재 新溫溫泉으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는 溫井도 표시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자주 생략되거나 誤記가 발생하는 面의 이름과 위치가 거의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밖에 필사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어려운 俗字도 일부 보이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隱仙臺로, 大朔州 아래쪽에는 小八營·大八營으로 읽어야 한다. 현재 구령진 바로 동북쪽에는 수풍댐이 건설되어 있다.(이기봉)

  • 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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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등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동군의 삼등면 전체와 강동면의 동쪽 일부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며, 현재는 평양시 강동군 중간 부분에 걸쳐 있다. 읍치는 강동군 삼등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있는 鳳頭山(381m)이다. 본 고을은 고려 인종 14년(1136)에 新城·蘿坪·狗牙 세 部曲을 합해 만들어졌다. 楓岑面 쪽에서 들어와 읍치 남쪽을 지나 乾達山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기록에는 能成江·能城江·綾城江 등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본 지도에는 熊川江이라고 되어 있다. 위쪽의 水晶川은 강동현의 읍치를 지나 대동강 본류로 흘러 들어간다. 晶湖面·楓岑面의 위치가 잘못 그려져 있다. 정호면은 수정천 유역에, 풍잠면은 架山 부근에 입지해 있어야 한다. ≪輿地圖書≫의 삼등지도에도 비슷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는데, 읍치의 정보를 담기 위해 확대·과장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도의 작성자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짐작된다. 웅천강 역시 그 방향이 조금 잘못되어 있다. 유입지와 유출지가 거의 정동-정서의 방향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동북에서 흘러와 서북으로 나가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전자의 오류는 수정되었으나, 후자의 오류는 그대로 답습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면의 이름이 晶湖面·楓岑面·靈岩面만 나오고 있다. 그런데 ≪輿地圖書≫와 ≪戶口總數≫에는 晶湖坊·楓岑坊·靈峀坊·朝陽坊이, 김정호의 ≪東輿圖≫에는 晶湖·楓岑·靈峀이 나오고 있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靈岩面에서 ‘岩’은 ‘峀’의 誤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다른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읍치를 포함하는 조양면의 이름을 표시하지 않았다. 김정호의 ≪大東地志≫에는 朝陽坊 대신에 邑內坊이 나온다. ≪廣輿圖≫와 ≪海東地圖≫의 三登縣 지도에는 西(境)面·倉(洞)面·古丁(洞)面이 기재되어 있어, 위에서 제시한 자료와는 전혀 다른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廣輿圖≫·≪海東地圖≫와 위의 자료들은 상호 다른 자료를 기반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후자의 지도가 더 앞선 시기의 자료를 바탕으로 했을 가능성도 있다.(이기봉)

  • 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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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화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진남포부와 용강군 삼화면·금곡면·신녕면·귀성면·대대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평안남도 온천군의 남쪽 절반, 남포시 와우도구역 전체와 항구구역·용강군의 일부에 걸쳐 있으며, 읍치는 용강군 삼화리에 있었다. 이 고을은 고려 인종 14년(1136)에 西京 관할의 金堂·呼山·漆井 세 部曲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지도에 보이는 金堂面·大代面(呼山의 異稱)은 이러한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漆井은 용강의 땅으로 다시 옮겨갔다고 한다. 이 고을의 남쪽은 대동강과 바다가 만나는 마지막 지점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미 潮水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강으로서의 생명력은 거의 끝난 상태이다. 지도는 해안선의 복잡한 모습을 실제처럼 잘 반영하고 있다. 현재는 많은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이러한 복잡한 해안선의 상당부분이 단순화되어 버렸다. 과거에는 복잡한 해안선과 넓은 갯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少雨地라는 특성을 이용해 鹽田이 발달했던 지역으로 유명했다. 지도 왼쪽에 표시된 廣梁(鎭)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는데, 그 오른쪽의 灣을 현재는 광량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광량만이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염전지대였다. 지도 오른쪽의 海倉이 있는 곳이 후에 남포항으로 개발된 지역이다. 그 아래쪽에 있는 섬들은 현재 모두 육지로 변모되어 버렸다. 바닷가에 있는 섬은 크기나 위치 등에서 실제와는 다른 측면이 많다. 德(島)의 경우 大吹螺(島)보다 훨씬 서쪽에 있음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席(島)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섬일 뿐만 아니라 덕도의 몇 십 배에 이른다. 그리고 육지에 비해 섬의 면적이 전반적으로 크게 표현되어 있다. 이 지도가 거리와 면적 등의 정확성을 목표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섬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표현이 많다는 것은 섬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종 지지에는 섬의 크기와 거리가 기록되지 않은 것이 많은데, 그러한 영향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이기봉)

  • 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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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수산면·천곡면·풍동면과 간동면의 동남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양시 상원군으로 바뀌었다. 읍치는 상원군 대천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의 盤龍山이다. 遂安界로부터 平壤界로 흘러가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며, 과거의 기록에는 보통 能成江으로 나온다. 於汀灘에서의 ‘灘(여울)’은 경사가 급해지면서 물살이 센 부분을 일컫는다. 이런 지역에는 하천의 깊이도 얕아져서 도보로 건널 수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또한 단순히 여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文浦川은 현재 상원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다고 하여 東川이라 기록되었다. 그러나 ≪輿地圖書≫에는 文浦川으로 나오며, 동천에서 명칭이 바뀌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龍頭浦란 명칭은 18세기까지의 대표적인 地誌書인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이다. 이것을 통해 이 지도가 다른 地誌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용두포는 김정호의 ≪大東地志≫와 ≪東輿圖≫에는 기록되어 있다. ‘浦’는 浦口를 의미할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물가를 지칭하는 ‘개’를 한자로 표현한 경우도 있다. 또한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지도 오른쪽의 培化面에 있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황주강의 최상류이다. 도로는 중화방면에서 읍치까지만 표시되어 있어, 사방으로 뻗어나간 도로의 양상이 파악되고 있지 않다. 다만 고개를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기 때문에, 도로의 표시가 없더라도 이곳으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을과 하천의 전반적인 모습은 현대의 지도와 비교해 보아도 크게 잘못된 점이 없을 정도로 잘 그려져 있다.(이기봉)

  • 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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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선천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선천군과 동림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는 선천군 선천읍에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읍치가 古府面에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함락된 후 지도 위의 읍치로 옮겼다. 고을 왼쪽에는 掘江이 표시되어 있는데, 중상류 부분은 淸江이라고 불렸다. 오른쪽에는 鐵馬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東路江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다. 본 고을은 한양-의주를 잇는 대로 위의 요충으로서, 중요한 관방처가 산재해 있다. 철산과의 경계 가까이에 있는 東林城은 고려시대 때의 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둘레 17,562尺(약 5,269m)의 대형 산성으로, 土築과 石築이 반반으로 되어 있었다. 철산과의 경계선에는 영조 45년(1769)에 2,300餘步(약 4,140m)의 左峴關門이 축조되었지만,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 關門은 아주 중요한 요해처로 인식되었음에도 표시되지 않은 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는 관문이 설치되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동림성 오른쪽에는 釰山城이 표시되어 있다. ‘釰’은 ‘劒’자를 대신해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일’이 아니라 ‘검’으로 읽어야 한다. 丁卯胡亂이 일어나던 인조 5년(1627)에 둘레 1,250步(약 2,250m)의 크기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당시 후금과의 긴장관계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두 산성에는 조선후기에 모두 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도 왼쪽 아래에는 待變倉·待變亭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오른쪽의 船所峴이라는 지명이 알려주고 있듯이, 戰船을 정박시키고 관리하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船所라고 표시하며, 가끔 禦變亭이라고도 한다. 지도 아래쪽에는 수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身彌島는 평안도에서 가장 큰 섬 중의 하나이며,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듯이 牧場이 설치되어 있었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이 목장에는 암말 255필, 수말 249필이 있었다고 한다. 面 중에서 읍치 주변에 있엇던 邑內面·新府面, 고을 북쪽에 있었던 普光面이 생략되어 있다. 기타 읍치 오른쪽 아래에는 芦山·灵山이 보이고 있는데, 각각 蘆山·靈山의 속자로서 표시된 것이다.(이기봉)

  • 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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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성천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평안남도 성천군과 회창군 일대이다. 읍치는 성천군 성천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釰鶴山이다. 釰鶴山의 ‘釰’은 우리나라에서 ‘劒’을 대신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에, 음이 ‘일’이지만 ‘검’으로 읽어야 한다. 위쪽의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이다. 상류·하류의 구분이 어렵게 되어 있는데, 陽德界로부터 들어와 慈山界로 빠져나간다. 慈山界 부근에 서북쪽으로부터 들어와 비류강을 합류시켜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대동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비류강이 佛流江으로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기록에 沸流江으로 나와 지도 작성자의 誤記라고 생각된다. 비류강이라는 명칭은 고구려의 시조 東明王이 北夫餘로부터 내려와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하천의 명칭과 동일하다. 조선초기의 ≪新增東國輿地勝覽≫과 조선후기의 ≪輿地圖書≫에 기록된 성천도호부의 地誌에는 모두 동명왕의 설화와 비류강을 연결시키고 있다. 읍치 위쪽의 屹骨山에는 산성이 있는데, 동명왕 때 항복한 松讓王이 쌓은 것이라는 설화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동명왕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은 만주지역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되고 있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기록에는 대부분 能成江·能城江·綾城江 등으로 나온다. 이 부분은 실제와 너무 다르게 그려져 있다. 大谷面·崇仁面을 흐르는 하천은 실재로는 遂安과 谷山의 경계 부근에서 남강에 합류한다.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에 나오는 성천의 지도는 비록 회화식 지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보았을 때 이 지도는 앞의 두 지도와는 다른 계통의 자료를 인용했거나, 지도 작성자가 오류를 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는 이 지도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인면에는 箕子影殿이 표시되어 있다. 箕子를 배향하여 숙종 22년(1696)에 세워진 것인데, 이 지역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중심지역 중의 하나였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小中華라는 인식 속에서 箕子朝鮮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조선후기의 사회적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기타 청에서의 은본위제 실시 이후 은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銀鑛, 즉 銀店이 2군데나 보이고 있다.(이기봉)

  • 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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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서해면·검산면·조망면·동송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숙천군의 대부분에 걸쳐 있다. 읍치는 숙천군 숙천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堂山이다. 고을의 전체적인 모습은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 책의 지도 대부분이 산줄기를 강조하여 그리고 있지만, 산의 높낮이는 거의 고려되고 있지 못하다. 이 고을은 동-북쪽이 300-500m의 높은 산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서쪽은 거의 야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줄기가 서쪽의 바닷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조선후기의 지도에서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 전 국토가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된 山脈에 의해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음을 알려준다. 읍치 오른쪽 아래에는 虎田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둘레 9,710尺(약 2,913m)의 土城이었다. 읍치에도 둘레 4,050尺(약 1,512m)의 토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邑城은 고려 태조 11년(928)에 通德鎭을 설치하면서 鎭國城을 옮겨 쌓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서쪽 30리의 바닷가에 길이가 18,817尺(약 5,645m)의 古行城이 있다고 지지에 나오지만, 역시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이와 같은 성곽들은 徐熙(940-998)가 고려 성종 12년(993)에 거란과의 담판으로 江東六州, 즉 지금의 평안북도 서쪽 지방을 얻기까지 이 고을이 최전방으로서 기능했을 때의 흔적으로 생각된다. 지도 왼쪽 위의 波浪亭은 서해가 조망되는 滄浪臺라는 절벽 위에 만들어진 정자로 생각되며, 滄浪亭의 誤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오른쪽에 표시된 海倉은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는 창랑대 근처 있었던 것으로 그려져 있다. 기타 지도 왼쪽의 高田面은 高里面의 誤記이다.(이기봉)

  • 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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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안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공덕면·양화면·동암면과 한천면의 지례리 일대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평원군·평성시와 평양시 순안구역에 걸쳐 있다. 읍치는 평양시 순안구역의 역전동·남산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 한가운데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평양시내 서쪽에서 대동강과 합류하는 보통강의 상류이다. ≪輿地圖書≫ 순안 부분에는 보통강 상류 중 가장 근본이 되는 하천이 岩赤川으로 나오며, 나머지의 하천들은 모두 이 암적천에 합류하는 것으로 나온다. 읍치 아래쪽의 ‘禿手老’는 ‘禿毛老’에 대한 誤記이다. ‘毛老’는 벼랑을 돌아가는 ‘모퉁이길’이라는 뜻으로서, 한자의 뜻을 위주로 할 경우에는 ‘隅’로 표시한다. 실재로 ≪海東地圖≫ 내의 순안현 지도에는 禿毛老가 禿隅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에는 영유현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이 고을의 越境地가 보이고 있다. 정확한 위치는 일제시대의 평원군 한천면의 智禮里 일대에 있었으며, 그 발생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이곳에 표시된 海倉은 이 고을의 租稅를 필요한 지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저장하던 창고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실제의 모습을 거의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다만 동쪽과 북쪽의 산지가 다른 지역보다 높다는 사실은 이 지도에는 반영되고 있지 못하다.(이기봉)

  •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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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선소면의 서남 일부·신창면 대부분과 덕천군 잠상면·잠도면, 그리고 맹산군 옥천면·학천면·봉인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평안남도 순천시 일부와 은산군 일부 및 북창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순천시 순천동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4리에 있었다’는 刀山이다. 지도에 나타나 있는 하천은 대동강 본류이며, 고을은 은산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대동강 상류 부분에는 三月江이, 하류 부분에는 靜戎江이라 쓰여 있다. 이것을 통해 전통시대의 경우 하천의 구간마다 명칭을 다르게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 초기에 하천 관리의 통일화를 위해 명칭 자체도 본류·지류로 나누어 단일화하면서 이와 같은 현상은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靜戎江에서의 ‘靜戎’은 고려 초기까지 부르던 이 고을의 명칭이다. 오른쪽 아래의 陽川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은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의 상류이다. 고을의 읍치는 원래 동쪽의 龍島面에 있었다고 한다. 옛 읍치에 災害가 많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성종 7년(1476)에 개천·자산·은산 등의 땅을 일부씩 떼어서 이 고을의 땅으로 만들고, 지도상의 위치로 읍치를 옮겼다고 한다. 용도면 오른쪽의 龍淵鎭은 龍淵堡가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곳에는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곳에 둘레 400尺(약 120m)의 龍淵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그 오른쪽의 龍島와 함께 地誌에 자주 기록되고 있다. 기타 다른 것은 모두 面으로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蚕舍坊만 坊으로 기록했음이 눈에 띈다. 평안도에서는 坊이라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지도 책에는 대부분 面으로 기록하였다. 지도 작성자가 편집하면서 面으로 통일하려고 애썼던 일면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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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목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안주군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으며, 현재는 평안남도 안주시와 문덕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는 안주시 등방산동·남천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加豆山이다. 이 고을에는 둘레  3,043步(약 5,500m)의 內城과 둘레 410步(약 700m)의 新城, 둘레 약 1,008步(약 1,800m)의 外城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도에서 성곽을 정사각형으로 표시한 것은 이 책에서 일률적으로 사용했던 방식이며, 실제의 모습과는 관계가 없다. 성곽 안이 남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은 이 곳에 平安道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곽 아래쪽에 土城이란 글자는 外城이 土築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기록된 것이며, 내성과 신성은 石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읍치 위쪽으로는 淸川江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강은 薩水라고도 하며, 고구려의 乙支文德이 隋의 30만 5천 병력을 물리쳤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와 같은 역사 때문에 을지문덕을 배향하여 세운 淸川祠도 이곳에 있었다. 청천강 가운데는 위로부터 無骨(島)와 七佛(島) 등도 보이고 있다. 칠불도는 수나라 병사들이 일곱 명의 승려가 이 지역을 배도 안타고 건너는 것을 보고 따라 건너다 빠져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섬이기도 하다. 百祥樓는 청천강변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將臺로서, 성 안과 밖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오른쪽 아래의 하천은 대동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지도 왼쪽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던 老江鎭이 표시되어 있다. 이 책의 모든 지도에서는 군사기지인 鎭·堡를 이 지도에서처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시하였다. 그 오른쪽은 西海인데, 定州界가 너무 서쪽까지 표시되어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이기봉)

  • 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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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양덕군 전체와 성천군 대구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양덕군·신양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양덕군 동양리·상성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25리에 있었다’는 隱于山이다. 이 고을은 태조 5년(1396)에 陽岩鎭과 樹德鎭을 합해 만들어졌으며, 각각 한자씩 따다가 陽德이라고 명명했다. 지도에는 이 고을이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읍치 지역의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의 최상류이며, 왼쪽의 지역은 역시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의 최상류이다. 후자의 지역에는 수덕진이 있었으며, 아래쪽에 ‘古邑’이라 적혀 있는 부분이 그 중심지였다. 고읍 위쪽의 永德山城의 ‘永’은 ‘樹’ 또는 ‘水’의 誤記이다. ≪廣輿圖≫·≪海東地圖≫의 양덕현 지도에는 읍치가 이 지도 위의 古邑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輿地圖書≫·≪戶口總數≫와 김정호의 ≪大東地志≫·≪東輿圖≫ 등에는 이 지도와 읍치의 위치가 같다. 이것을 볼 때 ≪廣輿圖≫·≪海東地圖≫의 읍치가 잘못되었던지, 아니면 읍치가 옮기기 전의 자료를 참고했던지 둘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다만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읍치가 본 지도상의 위치와 같게 기록되어 있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지도 위쪽에는 다이아몬드 모양과 兎城이란 명칭이 적혀 있다. 이 지도책에서는 군사기지인 鎭堡를 모두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그렸다. 토성진은 숙종 3년(1677)에 설치하였으며, 같은 왕 6년(1680)부터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를 파견하였다. 동쪽의 백두대간을 넘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에는 2개의 溫井도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도 오른쪽의 것은 석탕온천으로, 왼쪽의 것은 양덕온천으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기타 고을과 하천 등의 모습이 대략 실제와 비슷하지만, 비류강 상류지역의 동서 폭이 조금 넓게 되어 있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이기봉)

  • 영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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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변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영변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북도 녕변군·구장군·향산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는 녕변군 녕변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藥山이다. 지도에는 藥山이 樂山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이 고을은 세종 11년(1429)에 延山과 撫山을 합해 만들어졌다. 지도 아래쪽에 延山面이, 왼쪽에는 古撫州와 撫山面이 표시되어 있다.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청천강 본류이며,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하천은 구룡강이다. 청천강에는 月臨江·花川江 등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읍치의 경우 다른 지도에는 붉은색의 원으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 지도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성곽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영변의 읍성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영변의 읍성은 鐵甕城으로 이름 붙여질 정도로 難攻不落의 성곽으로 잘 알려져 있다. 外城·新城·藥山城·北城 등 4중의 성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병자호란(1636) 때 후금의 포위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곳이다. 지도 위쪽에는 魚川道가 표시되어 있는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역으로서 21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道’라는 명칭은 察訪이 파견된 驛에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지도책에는 찰방역의 경우만 붉은색 원으로 표시하였다. 다만 같은 표시의 읍치와 구별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작게 표시하고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妙香山(1,909m)이 표시되어 있다. 매우 유명한 산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하게 취급되지 않고 있다.(이기봉)

  •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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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군은 태극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영원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영원군과 대흥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는 영원군 영원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古邑 왼쪽에 있는 快山이다. 중종 20년(1525)에 古邑 부분에서 지도 위의 위치로 읍치를 옮겼다가, 숙종 16년(1690)에 다시 古城 부분으로 옮긴다. 그러다가 영조 25년(1749)에 지도 위의 위치로 읍치를 다시 옮긴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는 영조 25년(1749)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도에서 보이는 하천은 대동강 본류의 최상류에 해당되는데, 지도에는 黑淵江·九淵江 등의 명칭이 보이고 있다. ‘淵’이란 진짜 연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천 구간에서 연못처럼 깊고 잔잔한 부분을 지칭한다. 이것은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일제초기에 본류 명칭이 단일화되기 이전까지 다양한 하천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 고을 동쪽으로는 현재의 낭림산맥인 白頭大幹이 북에서 남으로 지나간다. 동쪽에만 경계 고을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함경도의 함흥·정평과 접해 있었다. 지도 가운데 약간 오른쪽에 다이아몬드 모양과 함께 寧城鎭이 표시되어 있다. 위치로 보아 함경도 방면에서 西進하는 적을 방어하던 곳으로 생각된다. 이 鎭은 인조 19년(1641)에 종9품의 별장을 파견하여 설치하였으며, 숙종 7년(1681)에 종3품의 僉使鎭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혁파하였다가 관방의 요새라고 하여 獨鎭僉使로 승격시켰다. 지도에는 鎭倉이 2군데 보이고 있는데, 영성진의 屯田에 설치된 창고이다. 이곳이 獨鎭으로 승격된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도 위쪽에는 현재 狼林山脈 이름의 근원이 된 樂林山(2,186m)이 보이고 있다. 面과 倉庫의 표시가 가장 자세하며, 창고와 면의 이름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洞이란 지명도 표시되어 있다. 함경도나 평안도의 지도에서 ‘洞’은 깊은 골짜기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곳에 자리 잡은 마을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이기봉)

  • 영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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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유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면·노지면·청산면·용호면·해소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원군과 숙천군의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평원군 평원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米豆山이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 개의 큰 못이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나오는 것으로서, 조선후기에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德池筒은 조선에서 볼 때 둘레 53,400尺(약 16,020m)에 이르는 초대형 못이었다. 元堂筒과 乫院(筒) 역시 둘레가 각각 7,840尺(약 2,352m)·11,050尺(약 3,315m)에 해당되어,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다. 덕지통은 영조 7년(1731)에 논으로 개조되고, 摠戎廳의 屯田으로 변한다. 원당통 역시 같은 해에 논으로 개조되고, 監營의 贍學庫 屯田으로 변한다. 이 지도는 屯田으로 변하기 이전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읍치 오른쪽의 臥龍祠는 중국의 諸葛亮을 배향하여 선조 36년(1603)에 세워지고, 현종 9년(1668)에 諸葛亮의 號인 ‘臥龍’이란 이름으로 賜額 받았다. 이후 영조 26년(1750)에 ‘三忠祠’란 이름으로 다시 賜額 받는데, 이 지도는 그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덕지통 위쪽의 通海鎭은 ≪輿地圖書≫영유현에 나오는 德池鎭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통해진에서의 ‘통해’는 덕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폐현의 이름인데, 그것이 원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덕지진은 영조 24년(1748)에 혁파된다. 위쪽의 唐子浦 밑에 표시된 다이아몬드 모양은 이 지도책에서 일관되게 鎭堡를 의미한다. 그러나 당자포진을 기록에서 찾을 수가 없으며, 아마 덕지진의 것을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밖에 왼쪽에는 순안의 월경지도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용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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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강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지운면·다미면·오신면·양곡면·용월면·서화면·해운면과 강서군 함종면 일부에 해당된다. 현재는 남포직할시 항구구역·대안구역·룡강군과 평안남도 온천군 북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남포직할시 룡강군 옥도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烏石山이다. 고을의 모습이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실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서북쪽은 서해와 맞닿아 있으며, 동남쪽은 대동강과 재령강이 만나는 부분이다. 지도의 동남쪽에는 急水門이라는 지명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실제의 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동강과 재령강이 만나 바다로 통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의 물살이 지형과 潮水의 영향으로 급하게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읍치 위쪽의 黃龍山城은 둘레 12,580尺(약 3,774m)에 이르는 대형산성이며,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난공불락의 성곽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조선시대의 地誌에서는 고구려 초기의 황룡국이나, 당 태종이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安市城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이 고을 이외에도 조선시대의 地誌에는 고구려 후기의 수도였던 평양을 중심으로 주변 고을에 고구려 초기의 유적이나 신화·전설 등을 싣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현재 대부분 부정되고 있으며, 安市城 역시 만주의 랴오닝성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 지역에서는 고구려 초기의 것은 아니지만, 벽화 등으로 채색된 고구려의 대형 돌방무덤(石室墳)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지도의 왼쪽에는 이 고을의 옛 邑治가 古邑으로 표시되어 있다. 다만 언제 지도상의 읍치 지역으로 옮겨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그 왼쪽에 표시된 溫井은 地誌에는 따뜻하고, 소금의 맛이 난다고 되어 있다. 현재도 평남온천으로 개발되어 이용되고 있다. 기타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眞(島)에 鹽盆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초기에도 이 지역에서 소금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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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양서면·양하면·양광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되며, 현재는 용천군·염주군·피현군·신도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피현군 성동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龍骨山城이 있는 龍骨山(477m)이었다. 고을의 서쪽은 압록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의 땅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던 고을이다. 읍치 오른쪽의 龍骨山城은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만든 성곽이며, 石築의 內城과 外城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조 2년(1624)에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숙종 18년(1692)과 같은 왕 30년(1704)에 지속적으로 수축하여 완성하였다. 병자호란(1636)을 전후로 하여 청나라와의 대치상태가 만들어낸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읍치에도 둘레 13,308尺의 석축 성곽이 있었지만, 지도 제작 당시에는 이미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다. 철산과의 경계선에 표시된 西林城은 실재로는 철산 땅 안에 있었다. 지도 왼쪽에는 彌串(鎭)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다. 두만강-압록강을 따라 설치된 수많은 鎭堡 중 가장 서쪽 끝에 있었던 군사시설이다. 숙종 4년(1678)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다. 고을 남쪽에는 수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薪(島)가 가장 큰 섬인데,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그 위치는 훨씬 압록강 하구 쪽으로 가까이 가 있어야 하며, 홍수 때마다 섬의 크기가 달라지기도 했다. 더 오른쪽에 크게 표시된 大烟筒(島)·小烟筒(島) 등의 크기는 실제보다 훨씬 크게 표시되었으며, 위치 또한 해안가에 더 가깝게 있어야 한다. 섬에 대한 표시가 이 지도 뿐만 아니라 다른 지도에서도 가장 부정확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섬에 대한 정보가 위치나 크기까지 자세하지 않았던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이기봉)

  • 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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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산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운산군에 해당되며, 현재도 평안북도 운산군으로 존재한다. 읍치는 운산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위에 표시된 白碧山이다. 읍치 왼쪽을 흐르는 하천은 청천강의 지류인 구룡강의 상류이다. 지도에는 이 하천의 명칭을 麻田灘이라고 표시하고 있는데, 구룡강을 이 지역에서 부르던 이름이다. 읍치 바로 위쪽을 흐르는 하천의 크기가 실제보다 작게 그려지면서, 고을 전체의 모습이 일부 왜곡되어 있다. 이 하천은 2배 정도 더 크게 그려져야 하며, 그렇게 되면 고을 서쪽의 경계도 남북으로 거의 일직선의 모양을 하게 된다. 지도 아래쪽에는 이 고을의 越境地인 古雲山面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의 위치는 평안남도 운전군 운하리 일대이다. 이 고을은 몽골의 침입을 피해 고려 고종 18년(1231)에 섬으로 피난했으며, 원종 2년(1261)에 육지로 나왔다. 이 때 이 고을 사람들이 잠시 머물며 살았던 지역이 그대로 운산 소속으로 되었고, 이런 이유로 古雲山面이란 명칭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실재로는 지도에서 표시된 것보다 더 동남쪽에 있어야 한다. 고을 북쪽에 있는 牛峴·車岺·呼片岺·月隱乃岺 등은 압록강변의 理山과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였다. 또한 압록강 변의 군사기지를 넘어 온 적을 막아낼 수 있는 2차 저지선 역할도 하였다. 이와 같은 중요성 때문에 중요 지점에는 關門을 만들어 통제하였으며,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다. 고개 남쪽에는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던 委曲鎭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지도에는 委曲倉이 2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委曲鎭의 屯田에 있었던 창고이기 때문이다. 委曲이란 명칭이 붙지 않은 창고는 운산군에서 관리하던 것이다. 지도 위쪽의 古延州는 撫山과 합쳐져 영변 고을이 된 延山 지역이다. 세조 때 연산의 일부를 운산 소속으로 바꾸었다. 이 때 延州 시절의 읍치도 함께 운산 지역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표시된 것이다. 읍치 바로 위쪽에는 衛滿洞의 명칭이 적혀 있다. 燕나라 유민으로 기원전 194년에 古朝鮮의 準王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에 오른 衛滿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기타 이 고을의 地誌에 등장하는 溫井과 藥水도 표시되어 있으며, 위만동 왼쪽에는 우리말 ‘고개’의 음을 한자로 표시한 ‘古介’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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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위원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자강도 위원군 전체와 초산군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위원군 고성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古邑 ‘북쪽 4리에 있었다’는 北山이다. 이 고을은 원래 서쪽의 理山과 동쪽의 江界에 합쳐져 있었다. 세종 25년(1443)에 두 고을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방어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여, 새로 이 고을을 설치하였다. 조선중기까지는 읍치가 古邑 지역에 있었으며, 영조 19년(1743)에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따라서 이 지도는 최소한 영조 19년(1743)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을 서북쪽에 압록강이 있으며, 小檜洞 위쪽에서 들어와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江界와의 경계선에서는 禿老江이, 읍치 방향에서는 渭水(현재는 위원강)가 합류한다. 고을 전체의 모습이 일부 왜곡되게 표현되어 있다. 실재로 고을 서남쪽 理山과의 경계는 서북-동남 방향으로 거의 일직선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오류는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압록강 변에는 3개의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지도에는 일부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가운데에 있는 南坡에는 鎭堡가 설치된 기록이나 지도를 찾을 수가  없으며, 오히려 아래쪽의 乫軒洞에 오래전부터 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直洞(堡)의 경우 嗭洞堡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밖의 인문정보로는 面·倉庫·烽燧·驛站의 표시가 아주 자세하며,  洞도 일부 표시되어 있다. 여기서 洞은 보통 깊은 골짜기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며, 종종 그런 곳에 자리잡은 마을을 지칭하고도 한다.(이기봉)

  • 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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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산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면·북창면 전체와 신창면 남쪽, 선소면의 일부, 개천군 봉동면의 남쪽에 해당된다. 현재는 평안남도 은산군과 개천군 일부에 걸쳐 있으며, 읍치는 은산군 은산읍에 있었다. 읍치 왼쪽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대동강 본류이다. 慈山界 부근에 禹家淵이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실제 연못이 아니라 연못처럼 잔잔한 하천구간을 의미한다. 이 지역에서는 대동강을 부르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위쪽을 흐르는 하천은 錦溪·東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東川이란 이름은 읍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실재로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읍치 바로 동쪽, 즉 본 지도에서는 錦溪라 적혀 있는 부분을 지칭한다. 본 지도에서는 몇 개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대동강 본류 서쪽에는 ‘价川界’가 2개 적혀 있는데, 아래의 것은 順川界로 바뀌어야 한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龍化里도 龍化面으로 바뀌어야 하며, 馬山坊은 유일하게 面이 아니라 坊으로 적혀 있다. 평안도와 황해도에는 面을 坊이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仙院面 서쪽, 대동강 동쪽 지역은 이 고을의 땅이 아니라 順川에 속해 있었다. 기타 청나라에서 은본위제의 실시 이후 은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銀鑛, 즉 銀店도 한 개 보이고 있다.(이기봉)

  • 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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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의주군과 용천군의 양하면·양서면·양광면 및 삭주군의 청수읍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현재는 신의주시·의주군 전체와 용천군·피현군·천마군·삭주군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의주군 의주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있는 松山이었다. 이 고을은 고려 예종 12년(1117)에 金에게 쫓긴 遼 세력의 일부가 항복해 오자 처음으로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임진왜란(1592) 때에는 倭軍에 쫓긴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가지 않고 끝까지 버틴 고을이기도 하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과 접경을 이룬 지역이기 때문에 군사시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첫째, 邑城은 둘레 27,531尺(약 8,259m)의 초대형 석축 성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도에는 정사각형의 성곽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의 모습이 아니며, 이 지도책에서 읍치이면서 중요 군사 요충지를 표시하는 일반적인 범례에 따랐을 분이다. 둘째, 압록강 변에는 동북쪽 끝의 淸城鎭으로부터 서남쪽 끝의 楊下鎭까지 총 7개의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鎭堡는 군사주둔 시설로서 압록강을 건너오는 적에 대한 1차 방어시설의 역할을 하였다. 압록강 건너편에 적혀 있는 지명은 대부분 적의 예상 침입로를 의미한다. 셋째, 압록강 변의 1차 저지선을 뚫고 침입하는 적에 대한 2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던 關門城이 고을 동쪽에 大城岺·棘城·塞垣 등으로 포진해 있다. 關門城은 고개나 협곡과 같은 좁은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 횡으로 쌓은 성을 의미한다. 대규모의 적일 지라도 이런 지형에서는 일렬로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적은 군사로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지역이다. 넷째, 읍치 아래쪽의 白馬山城은 인조 24년(1646) 林慶業(1594-1646)이 둘레 2,600步(약 4,680m)의 대형으로 개축한 성곽이다. 원래는 姜邯贊(948-1031)이 처음으로 쌓았다고 하며, 병자호란(1636) 때는 임경업이 주둔하며 청나라에 맞섰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 때 청나라는 백마산성을 공격하지 않고 우회하여 바로 한양을 점령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압록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에는 大總江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보통 압록강은 강 전체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의주 읍성 부근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전통시대에는 압록강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하구 부분은 대총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면서, 압록강 본류에 존재했던 다양한 명칭은 공식적인 부분에서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압록강으로 유입되는 지류 중 가장 큰 古津江은 현재 三橋川으로 불리고 있다. 압록강에는 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동북쪽의 고지대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물이 평지와 바다를 만나면서 급격히 운반력을 잃게 되고, 많은 부유물질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섬들이다. 아래쪽에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군으로 나갔다가 回軍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된 威化(島)가 보이고 있다. 읍성 왼쪽에는 임진왜란(1592) 때부터 1600년대 중반까지 開市라는 청과의 공무역이 행해지던 中江(島)도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1600년대 후반에 灣商(의주 상인)과 松商(개성 상인) 등의 私商이 무역을 하던 後市도 설치되었다. 중강후시의 폐단이 심해지자 숙종 26년(1700)에 공식적으로 폐지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청나라 땅이었던 만주의 柵門에서 무역이 이루어지게 되어 柵門後市라고 일컬었다. 이밖의 인문정보로는 烽燧·面·倉庫·驛站 등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이기봉)

  •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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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초산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자강도 초산군·고풍군·송원군과 우시군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초산군 초산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중간의 오른쪽에 적혀 있는 崇積山(1,994m)이었다. 이 고을의 명칭은 정조 1년(1777)에 楚山으로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 지도는 그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민왕 6년에 서쪽으로 이웃한 벽동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낸 후, 이 지역에 고려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태종 2년(1402)에 동쪽으로 이웃한 위원 지역을 포함하여 처음으로 고을이 설치되었다. 압록강이 서북쪽에 표시되어 있으며, 현재 충만강이라고 부르는 童巾江 등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만주 방면에서 흘러드는 하천은 현재의 渾江으로서, 역사 기록에는 주로 婆猪江으로 나온다. 압록강 변에는 邑城을 비롯하여 山羊會堡·阿耳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둘 다 여진족 언어의 지명을 음만 따서 한자로 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압록강 변에는 현재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把守 역시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의 강남산맥에 해당되는 남쪽의 중요 고개에는 종3품의 兵馬同僉節制使가 파견된 牛峴鎭과 車岺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모두 영조 10년(1734)에 설치되었으며, 병자호란(1636) 이후 꾸준히 강화된 북방 경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두 鎭에는 二重의 關門城이 축조되어 있었음이 이 지도를 통해 확인된다. 關門城은 협곡이나 고개 등에 횡으로 성곽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적은 군사로도 대규모의 적군을 방어할 수 있는 요지이다. 지도 중간 왼쪽 부분에 古邑驛이 보이고 있는데, 세종 때 지도 위의 위치로 옮기기 이전까지 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필사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俗字도 자주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의 巨雙岺·多樂岺·眞等岺과 지도 왼쪽 아래의 別桑倉 등이다. 기타 지도 중간 왼쪽 정도에 陽化德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여기서 ‘德’이란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산지 중의 한 종류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어미이다.(이기봉)

  •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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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사인면·후탄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평안남도 평성시와 순천시 일부에 걸쳐 있으며, 읍치는 평성시 자산리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하천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은 江·川·浦·津·灘·湖·淵 등이 있는데, 본 지도에는 川·灘·淵 등이 나온다. 하천에서 灘(여울)은 물살이 빠르고 얕은 구간을, 淵은 호수처럼 잔잔한 모습을 띄는 구간을 말한다. 灘과 淵은 일반적으로 하천에서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많다. 읍치 오른쪽에 적혀 있는 牛家淵도 이런 예에 속하는 것으로, 현재 이곳은 대동강 본류에 해당된다. 대동강 본류는 順川界 아래쪽의 동쪽에서 들어와, 우가연을 지나 江東界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고을 서쪽으로는 慈母山(559m)을 최고봉으로 하여, 300m 이상의 봉우리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곳에는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둘레 12,733尺(약 3,820m)의 대형 石城인 慈母山城이 있었다. 병자호란(1636)을 통해 대형산성의 중요성이 고려되었으며, 21년(1643)에는 이 고을의 읍치를 자모산성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두 번에 걸쳐 읍치가 양쪽을 오가다가 숙종 44년(1718) 이후로는 지도상의 읍치 지역으로 완전히 옮겨왔다. 작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都護府라는 높은 격의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자모산성에 읍치를 옮겼을 때,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 표시된 牛馬城은 자모산성의 외성에 해당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石城이다. 기타 필사본이기 때문에 龍谷面·黃龍山에서의 ‘龍’자는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俗子로 적혀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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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목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정주군 정주읍·남서면·덕언면·갈산면·고안면·고덕면·대전면·마산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평안남도 정주군 전체와 운전군의 서남쪽 절반에 걸쳐 있다. 읍치는 정주군 정주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오른쪽의 馬山이었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장수탄강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지도에는 加林川이라고 적혀 있다. 읍치를 돌아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 살천으로 불리고 있으며, 지도에는 大雄川·㺚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다양한 하천 명칭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지도 맨 오른쪽 七嶽烽 부근은 청천강·대령강 등의 대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굵게 표시된 하천의 모습이 실제와 매우 유사하다. 지도에는 수많은 面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몇 가지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첫째, 지도 아래쪽의 古雲山面이 마치 이 고을의 땅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雲山郡의 越境地였다. 둘째, 그 옆의 屯田面은 雲田面의, 위쪽의 德建面은 德達面의 誤記이다. 셋째, 伊彦面·西部面·古邑面·葛池面 등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고읍면은 고을의 진산인 馬山 부근에 있었으며, 고려시대까지 읍치가 있었던 지역이다. 읍치 왼쪽의 古城內는 둘레 31,709尺(약 9,513m)의 外城과 둘레 9,118尺(약 2,735m)의 초대형 토성이었지만,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미 폐허가 된 상태였다. 이 성곽은 한양-의주 大路 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부터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섬의 표시는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로 크기와 위치에서 부정확성이 보이고 있다. 기타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는데, 현재는 이후의 간척사업에 의해 상당히 단순화되어 있다.(이기봉)

  • 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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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동두면·간동면·신흥면·양정면·해압면·당정면·고생량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양시 강남군과 중화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중화군 중화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淸凉寺가 표시되어 있는 淸涼山이었다. 이 고을은 조선 초기에 郡이었지만, 郡人 林仲梁이 임진왜란 때 왜군에 항거하였기 때문에 선조 25년(1592)에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고을 전체의 모양은 대체적으로 합당하게 그려져 있지만, 남북의 폭이 조금 넓게 그려져 있는 단점이 있다. 지도 왼쪽에 대동강 본류가 표시되어 있으며, 읍치 위쪽의 하천이 지금의 곤양강이다. 고을 동쪽의 하천은 황주강의 최상류에 해당되며, 이곳에는 원래 松峴縣이 있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송현폐현이 ‘서쪽 30리에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輿地圖書≫에서는 ‘동쪽 30리에 있다’라고 수정되어 있다. 읍치 왼쪽에 있는 唐村面도 고려시대에는 唐岳이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지만,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이 고을의 直村으로 변했다. 왼쪽의 古邑面은 옛 邑治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언제 지도 위의 읍치로 옮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왼쪽에는 海倉이 보이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이 지역이 바다와 관련되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실재로도 이 지역은 潮水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그 영향으로 海倉이란 명칭이 나타난 것으로 짐작된다. 지도 오른쪽에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표시와 城山이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다이아몬드 모양은 鎭堡를 표시하는 범례였으며, 이곳에는 종9품의 별장이 파견된 城山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읍치 오른쪽 아래의 驛은 生陽驛이며, 그 왼쪽의 狗峴은 평안도 新舊의 觀察使가 교대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기타 도로는 한양-의주의 대로만 표시하였으며, 사찰·봉수·면 등의 정보만 간단하게 싣고 있다.(이기봉)

  • 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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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과 적송면 남쪽 일부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현재는 평안남도 증산군의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증산군 증산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國靈川이 발원하는 國靈山이었다. 이 고을은 원래 강서현의 甑山鄕이었는데, 태조 3년(1394)에 현으로 승격되면서 독립하였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項頭面에 보이는 연못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증산현 산천조에는 현 남쪽 15리에 둘레 7,300尺(약 2,190m)의 黃筒池와 둘레 2,034尺(약 610m)의 禿串筒池가 있었다고 나온다. ≪輿地圖書≫ 증산 산천조에도 남쪽 15리에 黃筒·禿串筒이, 남쪽 3리에 上佐筒이 있었다고 나온다. 특히 후자의 기록에는 堤(둑)의 길이와 堰內의 長廣 길이, 植木한 株數 및 民畓에 蒙利한다는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 연못은 논(畓)의 灌漑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이러한 관개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이 고을은 일제시대 이후의 1개면 정도에 불과한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5개의 面이나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面里制를 시행했지만, 面의 규모에 대한 일률적인 기준을 마련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고을처럼 작은 경우 면의 크기는 대체로 작게 설정되는데, 이 지도를 통해서도 그런 측면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지도 왼쪽의 서해에 그려져 있는 松島와 薪島는 크기가 실제에 비해 너무 크게 그려져 있다. 섬에 대한 이와 같은 왜곡은 이 지도책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섬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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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성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창성군 전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북도 창성군과 동창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창성군 봉천리 압록강 변에 있었는데, 현재는 수풍호에 잠겨 버렸다. 이 고을은 태종 2년(1402)에 昌州와 泥城을 합해 형성되었으며, 각각 한 자씩 따서 昌城이란 명칭이 만들어졌다. 지도에는 고을이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왼쪽이 압록강의 지류인 오주천(지도에는 昌州川)이고 오른쪽이 대령강의 상류인 창성강(지도에는 恃寨川)이다. 압록강 변에는 邑城 이외에 大吉號里堡에서 甲岩堡까지 작은 城郭을 갖고 있는 총 6개의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현재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把守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압록강 변의 이러한 군사시설은 강을 넘어오는 적에 대한 1차 저지선의 역할을 하였다. 맞은 편 만주 지역에 기록된 지명은 대부분 적의 예상 침입로를 의미한다. 동남쪽의 내륙방향으로는 隘口·自作岺·小坊墻·緩項岺 등의 명칭 곁에 關門城이 표시되어 있다. 隘口란 좁은 협곡이나 고개와 같은 곳을 의미하며, 이런 곳에 횡적인 關門城을 만들면 적은 군사로도 대군을 막아낼 수 있다. 애구가 표시되어 있는 곳의 지명은 自潺隘口였다. 완항령 오른쪽의 恃寨는 종3품의 兵馬同僉節制使가 파견된 시채진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붉은색 원은 이 지도책에서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屬驛을 관리하던 驛에 대한 일률적인 표기이다. 시채진에 察訪驛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을 통해 볼 때 지도 작성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생각된다. 鎭堡의 경우는 압록강 변에 보이는 것과 같이 모두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처리하였다. 面의 이름 중 甲子面은 田子面의 誤記이며, 府內面과 上倉面은 빠져 있다. 기타의 인문정보로는 烽燧와 倉庫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 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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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산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철산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철산군 전체와 염주군·동림군에 일부 걸쳐 있다. 읍치는 동림군 동림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의 熊骨山이었다. 원래의 읍치는 현재의 철산읍인 지도 가운데의 古邑에 있었으나, 영조 27년(1751)에 車輦驛이 있었던 지도 위의 읍치로 옮겼다. 같은 왕 45년(1769)에 다시 古邑으로 읍치를 옮겼기 때문에, 이 지도는 1751년-1769년 사이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海東地圖≫의 철산부 지도는 古邑 지역에 읍치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西林山城은 2,485步(약 4,473m)에 이르는 대형의 石築 성곽이었으며, 한양-의주 대로 위에서 가장 중요한 요해처 중의 하나였다. 영조 23년(1747)에 개축하여 다음 해에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를 파견하였고, 같은 왕 27년(1751)에 獨鎭이 되었다. 鐵州란 명칭을 가지고 있었던 고려시대에는 읍치로서 기능하던 곳이다. ≪海東地圖≫의 철산부 지도에는 石築으로 수축되기 이전의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의 古城面에는 태종 때 산성을 쌓아 읍치로 삼았던 古城이 있었다. 세조 때 높고 험하여 고을 사람들이 꺼리기 때문에 古邑 지역으로 읍치를 옮겼다고 한다. 고을 아래쪽의 熊骨城은 雲暗山城이라고 하며, 그 오른쪽의 左峴城은 영조 45년(1769)에 2,300餘步(약 4,140m)의 규모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던 淸江鎭과 宣沙鎭이 표시되어 있다. 선사진의 첨사는 椵島에 설치된 牧場의 監牧官을 겸하고 있었다. 가도에는 244필 정도의 말이 길러지고 있었다고 한다. 섬의 위치는 대체적으로 잘 표시되어 있지만, 크기의 표시에서는 실제와 많은 편차를 보이고 있다. 선사진 위쪽의 土城은 말의 관리를 위해 목장에 주로 설치된 牧場城으로 추정된다. 선사진 아래쪽의 待變亭은 전선을 정박·관리하던 곳으로서 일반적으로 船所라고 하며, 禦變亭으로 표시할 경우도 있다. 기타 서림산성 오른쪽의 駐蹕石은 임진왜란(1592) 때 선조가 피난하며 잠시 머물렀던 장소이다.(이기봉)

  • 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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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천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태천군에 해당되며, 현재도 평안남도 태천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태천군 태천읍에 있었다. 하천은 상·하류의 구분이 어렵게 그려져 있다. 朔州界로부터 들어와서, 읍치 동쪽을 지나 嘉山界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대령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院灘·串赤江으로 적혀 있는데, 해당 구간의 대령강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昌城界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은 창성강으로, 龜山界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은 천방강으로 부르고 있다. 龜山界는 龜城界에 대한 誤記이다. 북쪽과 동북쪽의 산지는 700m 안팎으로 높으며, 남쪽과 서남쪽은 상대적으로 평야지대에 해당된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높낮이가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산줄기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읍치 왼쪽의 書院은 遯菴書院이다. 鮮于浹(1588-1653)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 받지는 못하였다. 遯菴書院에서의 ‘遯菴’은 선우협의 號이며, 이 고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원이 세워진 것이다. 이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중 ‘定州界’ 부분이 잘못되어 있다. 이 고을과 정주는 극히 짧은 구간만 경계선을 공유하고 있을 뿐인데, 이 지도에는 매우 긴 구간으로 오해할 수 있도록 표시되어 있다. 지도 작성자도 定州와 嘉山의 경계를 분명히 표시하지 않음으로써,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음을 감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는 이와 같은 오류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에는 邑內面과 長林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지도책에서 읍내면은 대부분 생략되는 경향이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장림면을 생략한 것은 지도 작성자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이 고을에는 총 6개의 면이 있었는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9개의 면으로 증가한다. 보통 조선시대의 면은 일제시대의 면보다 작거나 같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게 더 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조선에서 面里制를 전국적으로 시행했지만, 그 구체적인 설정은 각 고을의 자율에 맡겼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이기봉)

  •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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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평양부·대동군과 강서군의 적송면·성대면·반석면, 평원군의 덕산면·한천면에 해당되는 매우 큰 고을이었다. 현재는 평양시 각 구역과 평안남도 대동군, 증산군 북쪽 일부, 평원군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평양시 중구역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平壤城 북쪽에 약간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는 錦繡山이다. 평안도 관찰사가 파견된 監營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성곽은 內城과 北城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여기에 中城이, 고구려시대에는 外城까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외성 지역에는 격자형 도시계획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箕子井田의 흔적으로 보았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고구려의 도시유적으로 밝혀진 바 있다. 지도에 보이는 정사각형 모양의 성곽은 실제와는 전혀 다르며, 이 지도책 전체가 읍성을 사각형으로 표시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평양은 고조선의 王儉城과 고구려의 長安城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역사성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 箕子墓는 ‘周의 武王이 殷을 멸망시키고 기자를 석방하니,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 이에 무왕이 朝鮮侯로 封했다.’라는 중국측 기록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箕子東來說 자체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으며, 기자가 고조선으로 왔더라도 ‘과연 이곳이었겠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 상태다. 다만 小中華 의식을 강하게 가졌던 조선에서는 箕子朝鮮을 실체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그 영향이 이 지도에도 반영된 것이다. 평양에는 檀君殿도 설치되어 있었으며, 주기적으로 제사를 시행하고 있었다. 성곽 아래쪽의 朝天石은 고구려의 시조인 東明王과 관련된 유적이다. ‘동명왕이 여기서 말을 타고 朝天의 행위를 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기는 하지만, 과연 동명왕 시절에 이곳이 고구려의 중심지였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부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내성을 비롯한 만주지역이 초기 고구려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된 기록이나 설화의 무대가 대부분 평양을 중심으로 비정되고 있었다. 대동강 남쪽에는 東明墓도 표시되어 있다. 성곽 아래쪽의 大同江 本流에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綾羅(島)를 비롯하여 수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가장 하류 쪽에 집 모양이 있는 섬은 伊老島로서, 保山堡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의 모양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곳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大同江이란 명칭은 평양성의 東門인 大同門의 명칭과 관련이 있으며, 대동강이 본류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실재로는 대동문 앞쪽 구간만을 지칭하는 경우도 많다. 대동문 안쪽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11개의 屬驛을 거느린 大同驛이 있었으나,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평양성 왼쪽의 하천은 지도에는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지만, 대동강의 지류인 普通江이다. 능라도 옆에 쓰인 長林은 실재로 하천 변에 수 킬로미터에 걸쳐 있었던 숲의 이름이다. 평양부는 고려시대에 西京으로서 기능했기 때문에 굉장히 큰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도 왼쪽 위에는 평양부의 땅이 서쪽 바닷가에까지 걸쳐 있었던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이 지역은 현재 증산군 적송면과 평원군 한천면 지역으로서, 평양부로부터는 매우 먼 거리에 있었다. 이 지도에는 烽燧와 도로가 눈에 가장 잘 띄게 표시되어 있으며, 面에 대한 정보도 자세한 편이다. 이밖에 사찰·서원·창고 등의 정보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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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종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신정면과 수산면의 서쪽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증산군 남쪽과 남포시 강서구역 서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증산군 함종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동쪽 2리에 있었다’는 牙善山이었다.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善山은 진산인 아선산의 誤記로 생각되며, ‘아선’이란 명칭은 고구려 때의 이 지역 이름인 牙善城과 동일하다. 작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都護府’라는 높은 격의 고을 이름을 갖고 있다. 경종 1년(1721)에 宣懿王后 魚氏의 본관이라 하여, 縣에서 도호부로 승격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고을 명칭의 높낮이가 면적이나 인구 등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측면도 고려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고을 전체적인 모습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으며, 동쪽에는 隱龍山(356m) 등을 비롯하여 약 300m 정도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지도 왼쪽에 있는 二岳島는 실재로는 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육지와 연결된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실제를 왜곡했다기보다는 썰물 때 육지와 연결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다른 지도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바와 마찬가지로 섬의 크기가 육지에 비해 너무 크게 표시되어 있다. 조선에서만 사용되던 음을 사용하는 한자도 보이고 있다. 釰岩山의 ‘釰’은 ‘劒’에 대한 다른 한자로 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 지도에서도 ‘일’이 아니라 ‘검’으로 읽어야 한다. 기타 후대의 2개면 정도에 해당되는 넓이에 11개의 面이 기록되어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이 고을처럼 작은 경우에는 面의 크기 역시 작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큰 고을의 경우는 후대의 面 규모와 거의 같은 경우도 자주 나타난다. 面里制가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지만, 면적이나 인구의 크기는 고을 자체적인 판단에 맡겼기 때문이다.(이기봉)

  • 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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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희천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자강도 희천시·동신군 전체와 송원군 동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희천시 역전동·남천동·서문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청천강의 최상류에 해당되며, 지도에는 月林江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龍釜淵·宋串之浦 등도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읍치를 중심으로 서쪽의 하천을 西川이라고 부른 것처럼, 읍치 동쪽의 청천강 부분을 東川이라고도 불렀다. 고을의 북·동·남의 방향으로는 1,000-2,000m에 이르는 높은 산줄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서남 방향으로만 낮은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지도에는 산줄기만을 중요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높낮이는 반영되고 있지 못하다. 다만 지도 위쪽의 白山(1,875m)만은 명칭에 걸맞게 흰색과 웅장한 모습을 통해 특별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백산이 이렇게 표현된 것은 허리부터 꼭대기까지 흰 돌로 이루어졌다는 地誌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을 동북쪽에는 후대 낭림산맥 명칭의 기원이 된 樂林山(2,184m)도 보이고 있다. 이 고을은 세종 때 개척된 四郡이 폐지되면서 최전방 역할을 하였던 江界와 북쪽으로 접하고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백산 오른쪽의 狄踰岺(936m)은 이 고을과 강계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개였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중요성이 반영되어, 이곳을 지나가는 도로만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오른쪽 아래에는 인조 1년(1623)에 처음 설치되고, 숙종 1년(1675)에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柔院鎭이 표시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 비해 눈에 띄는 것은 店이 자세히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며, 店은 站을 의미한다. 이 지도에는 오류인 부분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첫째, 지도 가운데에 표시된 論竹店은 福竹店의 誤記이다. 둘째, 읍치 서남쪽의 雲山界 부분에는 寧邊界가 적혀 있어야 한다. 운산계는 더 위쪽에 있는 丘引岺 왼쪽에 적혀 있어야 합당하다. 셋째, 이 고을과 价川은 서로 접한 지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도 아래쪽에 价川界라고 표시되어 있다. 德川界로 바꾸어야 합리적이다. 이와 같은 오류는 이 지도가 편집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 ▶함경도
  • 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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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산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혜산군·갑산군과 풍산군의 풍산면·웅이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량강도의 보천군·혜산시·운흥군·갑산군·풍서군 전체와 삼지연군·삼수군·김형권군의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갑산군 갑산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天鳳山(1,406m)이다. 고을 전체의 모습과 산줄기·물줄기가 거의 실제와 가깝게 그려져 있다. 위쪽의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압록강 본류이다. 남쪽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지나 압록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허천강이다. 허천강 지류 중 아래쪽의 오른쪽에 북청계라 표시된 하천의 발원지는 실재로는 그 왼쪽 방향의 太白山 부근이 되어야 한다. 이 점은 이미 같은 책의 북청 지도 해제에서 다루었다. 아래쪽 왼쪽 방향에 있는 北靑界는 咸興界라고 써야 옳다. 여러 地誌와 地圖를 참고하여 볼 때 다이아몬드 모양의 鎭堡와 社의 표시에 일부 오류가 보이고 있다. 첫째, 惠山鎭의 위치가 잘못 되어 있다. 실재로는 그 왼쪽 방향에 塔洞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 있었다. 둘째, 탑동이라는 명칭을 가진 鎭堡는 없었다. 셋째, 그 아래쪽 방향에 표시된 雲寵은 雲寵堡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부분에 다이아몬드 모양이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넷째, 그 아래쪽의 仁同은 同仁에 대한 誤記이다. 다섯째, 鎭東社와 함께 표시된 다이아몬드 모양을 없애고 집을 그려 넣어야 실제와 부합된다. 여기서 집 모양은 창고를 의미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들이 모두 교정되어 있다. 지도 왼쪽 아래 방향에는 香川이라고 적었다가 ‘川’자를 지운 흔적도 보이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갑산도호부 부분에 香川은 등장하지 않으며, 香洞만이 보이고 있다. 이 지도의 작성자가 이와 같은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川’자를 썼다가 지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이기봉)

  • 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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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경성군·청진부 전체와 명천군의 서면·동면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경성군·어랑군 전체와 청진시 서쪽 및 화성군 동쪽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경성군 경성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祖白山이다. 읍치가 파란색 정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이곳에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함경도는 최전방임과 동시에 면적이 넓어서 남병영·북병영 2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북쪽으로 통하는 도로변에는 輸城驛이 표시되어 있다. 붉은색의 원은 이 지도책에서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驛에 대한 일괄적인 표현 방식이다. 이런 驛을 道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輸城道로 표기된 경우도 많다. 고을의 모습이 실제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지도 위쪽의 ‘鏡城虛修羅峴’ 위쪽의 물줄기 부분이 이 고을의 소속으로 표시되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경성도호부 산천 부분에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는 虛修羅川의 기록에 근거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輿地圖書≫ 경성도호부읍지에는 허수라천이 등장하지 않으며, 김정호의 ≪大東輿地圖≫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이 고을의 땅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왼쪽 방향에 있는 長白山은 ‘5월이 되어야 눈이 녹고, 7월이 되면 다시 눈이 쌓인다’는 地誌의 기록을 반영하여 크고 희게 그려 넣었다. 이 장백산의 위치가 같은 책의 길주와 명천의 지도에는 세 고을의 경계선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거의 세 고을의 경계선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海東地圖≫ 경성부의 지도에서는 장백산 부분이 길고 희게 표시되어 있다. 장백산의 규모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안가 역시 현재와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지도 아래쪽에 보이는 束蓮塘(東蓮塘의 誤記)과 武溪湖가 잘못 표시되어 있다. ≪輿地圖書≫ 경성부읍지에 무계호는 남쪽 120리에, 그 위쪽에 표시된 江陵山은 남쪽 130리에 있다고 나온다. 따라서 이 지도와 지지의 기록과는 서로 어긋나고 있다. 단 같은 책의 경성부지도에는 이 지도와 동일하게 무계호를 표시하고 있어,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두 호수의 위치가 실제에 맞게 교정되어 있다. 북에서 남으로 뻗은 산줄기의 동쪽에 푸른색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총 6개의 鎭堡가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두만강과 현재의 함경산맥을 넘어온 적에 대한 2차 방어선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 동북쪽으로 富寧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는 사실이 적혀 있지 않고 있다.(이기봉)

  • 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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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원부는 일제시대의 용덕면·유신면의 동쪽 일부를 제외한 경원군과 온성군의 훈융면, 경흥군 웅기읍·나진부의 일부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의 서쪽 일부를 제외한 새별군과 은덕군 서북부, 나진시 동북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함경북도 새별군 성내리에 있었다. 고을 전체의 모습과 두만강의 곡류 부분은 실제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海津社는 현재의 라진시 동쪽 일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이 지도에는 해진사까지 경원부의 땅이 좁게나마 계속 이어진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해진사는 온성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로 보아야 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는 越境地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 방향에 있는 甑山의 경우 같은 지도책의 종성 지도에는 위치가 잘못 표시되어 있었는데, 이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도 위치가 잘못 표시된 지명이 일부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 방향에 있은 安原川은 農圃川으로 바뀌어야 하며, 안원천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安原堡 아래쪽 하천에 기입되어 있어야 한다. 안원사 오른쪽의 龍堂은 두만강에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豆滿江神祠이다. 조선에서는 이곳을 北瀆으로 지정하였으며, 祀典에 中祀로 기록하였다.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시된 鎭堡가 네 곳이나 보이는 등 국경으로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지도이다. 두만강 변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古乾原社·古阿山社 등의 이름을 통해 鎭堡가 두만강 변으로 전진 배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이기봉)

  • 경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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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흥부는 일제시대의 웅기읍을 제외한 경흥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은덕군의 동쪽 부분과 라선시의 동쪽 부분에 걸쳐 있다. 읍치는 은덕군 사회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에는 읍치의 위치가 다른데, 순조 33년(1833)에 이 지도 위의 撫夷鎭 지역으로 읍치를 옮겼기 때문이다. 두만강과 바닷가의 굴곡 모습은 ≪海東地圖≫의 경흥부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 아래쪽의 鯉遊池나 지도 아래쪽의 烏碣石은 ≪海東地圖≫의 경흥부 지도나 ≪新增東國輿地勝覽≫·≪輿地圖書≫ 등의 地誌 부분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이다.  이 지명은 ≪輿地圖書≫에 함께 수록된 慶興府地圖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 보았을 때 이 지도는 여러 가지 地圖와 地誌를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지도와 지지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상호 보완하는 작업이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앞의 두 지도에는 읍치 왼쪽 방향의 農耕川이 온성과의 경계선을 발원지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서≫에는 농경천이 읍치 왼쪽 아래 방향에 있는 松眞山의 서쪽에서 발원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을 통해 농경천이 온성쪽에서 발원하여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교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안가에 있는 섬은 이 책의 다른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와 크기가 너무 다르다. 이것은 섬의 크기에 대한 정보가 地誌에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위치 역시 틀린 부분이 발견되고 있지만, 대략적인 방향이나 거리 등은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두만강과 해안가의 굴곡이 매우 단순해지고 있다.(이기봉)

  • 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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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원군은 운곡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고원군에 해당되며, 지금도 일부를 제외한 함경남도 고원군이다. 읍치는 고원군 고원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10리에 있었다’는 椵山이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모습이 실제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을 현재 덕지강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도에는 德之灘·神堂淵·長湖浦라고 적혀 있다. 灘은 급경사로 물살이 빠른 곳을 가리키는 우리말 ‘여울’에 해당되며, 淵은 연못처럼 잔잔한 부분을 의미하는 우리말 ‘못 또는 쏘’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浦는 ‘물가’를 가리키는 우리말 ‘개’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浦口를 의미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전통시대에 이 세 개의 문자는 모두 하천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사용되었다. 아래쪽의 하천은 전탄강의 지류로서, 역시 仇寧浦·龍窖淵으로 적혀 있다. 지도에 자주 보이는 社는 함경도 지방에서 面이란 용어 대신에 사용되던 것이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주로 坊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밖의 인문정보로는 倉庫·驛站·道路 등만 간략히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아래에는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도 보이고 있는데 載靈山이다.(이기봉)

  • 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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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주목은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길주군·학성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길주군·김책시와 화대군의 서쪽 일부이다. 읍치는 길주군 길주읍에 있었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실제와 거의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 나오는 길주 지역의 지도도 이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안에 표시되어 있는 지명 역시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비슷하다. 읍치 왼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浮端川이 현재의 남대천이다. 지도에는 洞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대부분 각종 地誌에서 하천의 발원지나 봉수의 위치 등에 나오는 지명들이다. 파란색 다이아몬드 모양은 이 지도책에서 일률적으로 鎭堡를 표시하던 방식이다. 읍치 위쪽 방향에는 西北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원래 종9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堡였지만, 현종 14년(1673)에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鎭으로 승격되었다. 왼쪽 아래 방향에는 임진왜란 이후인 광해군 6년(1614)에 새로 설치되었으며, 일제시대에 성진시(현재는 김책시)의 중심이 되었던 城津鎭이 표시되어 있다. 성진진 오른쪽 위쪽에는 함경도에서 드물게 書院이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 서원은 溟川書院으로서, 趙憲(1544-1592)을 배향하여 현종 11년(1670)에 세워지고 숙종 22년(1696)에 賜額 받았다. 이 밖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나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한자를 위쪽으로부터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㐚足嶺(올족령)·致灵(→靈)洞·德万(→萬)洞·芦(→蘆)洞·雙浦岺 등이다.(이기봉)

  • 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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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천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단천군과 풍산군의 천남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함경남도 단천시·허천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단천시 내문동·금봉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23리에 있었다’는 道德山이다. 읍치 오른쪽 길주 방향에 胡打里가 보이고 있는데, 이곳에는 경종 3년(1723)에 堡가 설치되었다. 이후 영조 21년(1745)에 혁파되면서, 그 북쪽 방향의 梨洞鎭에 합해졌다. 이 지도에는 호타리보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최소한 영조 21년(1745)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海東地圖≫의 端川郡 지도에는 호타리보가 표시되어 있어, 이 지도보다 앞선 시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하천과 산지 및 津 등의 지명이 다른 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세한 편이다. ≪輿地圖書≫ 端川府誌에 이러한 자료가 같은 책의 다른 읍지에 비해 상세한 것과 관련이 있는듯하다. 고을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실제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도 내용적인 일부의 교정을 제외하면 이 고을 부근의 경우 이 지도를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비슷하다. 도로의 경우 한양-경흥 사이의 대로만 표시하여 놓았다. 단천에서 길주로 넘어가는 도로 중 최고의 요해처로는 호타리 위쪽의 磨天岺이었음에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 지도에는 ‘○○德’이라는 지명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德’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지도에서 자주 나오는 것으로서, 산지의 일종을 가리키는 어미로 사용되었다. 지도 작성자의 誤記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지도 위쪽에 있는 五足乙은 五乙足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지도 가운데 부분에 보이는 銀店은 조선후기에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개발된 銀鑛山을 의미한다. 조선에서 은광산의 개발은 청나라에서 銀本位制가 실시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이기봉)

  • 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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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부는 일제시대의 문천군 덕원면과 성북면, 원산시에 해당된다.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와 문천시의 남서쪽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원산시 세길리 일대에 있었다. 산줄기와 강줄기가 실제의 고을 모습과 대략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連島 부분과 섬의 표시가 실제와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연도 부분은 현재의 갈마반도로서, 북쪽으로 튀어 올라가 있다.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덕원부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음에도, 이 지도에 반영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는 연도가 아예 섬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오른쪽의 竹島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부 동쪽 15리’에, ≪輿地圖書≫에는 ‘부 동쪽 50리’에 있다고 나온다. 連島가 ‘부 동쪽 30리’에 있었던 사실과 대조해 보면, 이 지도는 후자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죽도에는 고려시대 때 몽골이 침입하자 定州(조선시대의 定平) 이남 12개 城의 사람들이 피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섬인데, 현재의 어느 섬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다만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섬은 현재의 麗島이며, 이 섬은 ≪輿地圖書≫에 ‘부 동쪽 50리’에 있다고 나온다. 여도가 죽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海東地圖≫에는 女島와 竹島가 동시에 표시되어 있어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竹島를 상대적으로 매우 크게 표시하였으며, 連島 북쪽에 그려 넣었다. 김정호 역시 죽도의 정확한 위치를 알았던 것이 아님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몽골 침입 시 12개 고을 주민이 피난했다는 기록을 통해 상당히 큰 섬이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섬의 크기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내용이 지도에 표현된 것은 실재로 섬의 크기에 대한 地誌的 정보가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연도 왼쪽의 交濟倉은 흉년이 들었을 때 이 지역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설치한 倉庫이다. 이 창고에 저장된 곡식의 상당 부분이 남쪽으로부터 운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조선후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포구 중의 하나였던 元山浦이기도 하다. 기타 읍치 왼쪽 방향에 있는 馬恩嶺은 馬息嶺에 대한 誤記이다.(이기봉)

  • 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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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천부는 동면과 서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명천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명천군·화성군·화대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 화성군 하우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의 永平山이다. 이 지도는 고을 전체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읍치의 위치가 잘못 표시되어 있다. ≪輿地圖書≫의 明川府邑誌에 읍치로부터 동쪽의 鏡城界까지가 6리인 반면, 서쪽의 吉州界까지는 45리로 나와 있다. 이것은 현재의 지도에서 파악해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지도에는 읍치가 지나치게 경성과 길주의 중간쯤에 표시되어 있다. 둘째, 읍치 왼쪽에 기록된 汚禾川의 발원지가 너무 서북쪽으로 멀리 표시되어 있다. 실재로는 읍치에서 남쪽 바다까지의 거리가 읍치에서 오화천 발원지까지의 거리보다 1.5배 이상 멀다. 이와 같은 오류는 이 지도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서쪽에 있었던 吉州 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오류 발생의 근본 원인은 오화천의 발원지인 長白山의 잘못된 위치 비정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첫째와 둘째의 오류는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거의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셋째, 읍치 남쪽 부분은 이 지도와 반대로 동서보다는 남북의 폭이 더 넓다. 이 오류는 地誌書에서 방향에 대한 애매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黃津의 경우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쪽 65리에 있다고 나오며, ≪輿地圖書≫에는 동남쪽 65리로 되어 있다. 이 지도의 작성자는 후자를 취하면서도 남쪽 65리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황진의 실제 위치는 동해와 길주-경성의 경계가 만나는 지점에 있으며, 이것은 전자의 기록과 부합한다. 이 지점에 있다고 지도에 표시된 加乙亇山의 경우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모두에 동남쪽 173리에 있다고 나온다. 바다(海)까지의 거리의 경우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남쪽 170리에, ≪輿地圖書≫에는 남쪽 120리로 되어 있다. 실재로 명천은 남쪽과 동쪽이 바다로 되어 있으며, 읍치로부터 가장 먼 지점은 동남쪽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바닷가까지의 거리는 가장 먼 동남쪽을, ≪여지도서≫는 정 남쪽을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가을마산이 읍치에서 동남쪽으로 가장 먼 바닷가에 있었던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지도에 나오는 가을마산의 위치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황진의 위치가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져 있으며, 동서보다는 남북의 폭이 더 넓게 그려져 있다. 이 지도에는 서북쪽에 표시된 下古社, 읍치 오른쪽의 上汚禾社 등의 위치 표시가 100% 잘못되어 있다. 하고사의 실제 위치는 동쪽의 상고사 남쪽에 있었으며, 상오화사 역시 읍치의 서북쪽에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잘못된 위치는 ≪여지도서≫의 위치 기록과 합치되고 있어 흥미롭다. 다만 같은 책에 다른 社의 위치도 대부분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되어 있어, 지도 작성자가 다른 자료를 첨가해서 검토했을 가능성이 있다.(이기봉)

  •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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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산부는 일제시대의 무산군과 부령군의 삼해면 일부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무산군·연사군, 라진시의 삼해리·노창리, 량강도의 대흥단군·백암군 전체와 삼지연군 동쪽에 걸쳐 있다. 읍치는 무산군 무산읍에 있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특별히 강조된 白頭山의 모습이다. 白頭란 명칭은 정상 부근에는 거의 일년 내내 눈에 덮여 있어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특징을 부각시켜, 백두산의 표현에 청색 이외에 흰색도 많이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의 地圖나 地誌에는 대부분 大澤이라 기록된 현재의 天池가 파도치는 물결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조선초기부터 바다를 표시할 때 자주 사용되던 방식이다. 天池를 마치 바다처럼 표현함으로써, 신성한 성격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했던 의도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지도를 포함하여 조선후기의 지도에서는 백두산을 특별히 강조하여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백두산이 한반도의 祖宗山이란 인식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두산 아래에는 白頭山定界碑가 壬辰定界碑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 碑가 숙종 38년(1712)인 壬辰年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 오른쪽의 ‘水伏流’는 물이 지표가 아닌 지하로 흐른다는 뜻으로서, 청과의 국경선 확정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다. 이 지도에서도 확인되고 있듯이 土門江·豆滿江의 물은 백두산의 天池에서 발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치 천지 부근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이해하기 위해 ‘水伏流’란 표현을 쓴 것이다. 이 水伏流가 과연 어디로 흐르느냐에 따라 청과 조선의 경계선이 달라지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졌다. 백두산정계비에는 ‘東爲土門’ 즉, ‘동쪽은 土門江을 경계로 삼는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 토문강이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청과 조선의 첨예한 문제였다. 후에 조선에서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뜻의 乾川이 표시된 土門江으로, 청에서는 豆滿江으로 이해하였다. 이 지도에서는 ‘壬辰分界時以此稱分界江上流’ 즉, ‘임진년에 경계를 정할 때 이것을 분계강 상류로 칭했다’라는 문구를 현재의 豆滿江 발원지 밑에 적어 놓았다. 다만 分界江上流란 문구를 토문강 아래쪽의 木柵 부근에도 적어놓아 약간 애매하게 표시하였다. 이 木柵은 당시의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두만강을 분계강 상류로 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 지도에서 石堆와 乾川을 토문강 상류로 보았던 것과 달리 두만강 상류 부분으로 처리하였으며,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에 만들어진 木柵도 두만강 상류 부분에만 표시하였다. 백두산정계비에 나오는 ‘東爲土門’이란 표현의 해석에서 조선에 유리한 것은 김정호의 ≪大東輿地圖≫보다는 이 지도이다. ≪海東地圖≫ 茂山府 지도에서는 토문강이 마치 천지에서 직접 발원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으며, 木柵의 표시는 이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長白山 역시 5월에 눈이 녹고 7월에 다시 쌓인다는 기록이 있는 산이다. 이 지도에서는 이런 기록과 부합되게 흰색으로, 크게 그려놓았다. 여기서 크게 그렸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라 연속된 봉우리의 합으로 장백산을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 때문에 明川界·吉州界·鏡城界의 표시에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부근의 두만강은 이 지도에서 표현된 것보다도 曲流가 특히 심한 구간이다. 이 중 茂溪 부분은 곡류 부분이 지나치게 크게 표시되어 있다. 이 점은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무산부 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보다 완화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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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천군은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읍·운림면·천내읍·명귀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문천시·천내군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문천시 교성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 방향에 있는 盤龍山이다. 고을 위쪽의 하천은 현재 전탄강이라고 부르는데, 지도에는 配岐川·箭灘이라고 적혀 있다. 地誌에는 배기천은 서쪽 57리에 있으며, 전탄은 북쪽 33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동일한 하천이라고 할지라도, 구간마다 고유한 명칭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제초기에 하천의 종합적 관리를 위해 하천 명칭을 단일화시키면서, 다양한 명칭이 사라지게 되었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모습은 실제 모습과 대체적으로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 위쪽 방향의 內訥(島)는 四訥島의 誤記이다. 이곳에 쓰여 있는 ‘羊羔所牧’이란 문장을 통해 조선시대에 말(馬) 이외에도 다른 가축을 방목하던 목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羊羔’는 국가에서 제사용 목적으로 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輿地圖書≫ 문천군의 地誌 부분에는 이곳에 말(馬)만 키웠던 것으로 나오며, ‘羊羔所牧’이란 부분은 지도에 사눌도 아래쪽의 馬祭島에 나온다. 그런데 조금 앞선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海東地圖≫ 문천군의 지도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咸鏡道全道≫ 문천군 지도와 김정호의 ≪東輿圖≫에는 반영되어 있다. 사눌도 왼쪽의 淑陵은 이성계의 曾祖父인 翼祖  李行里와 그의 부인인 貞淑王后 崔氏의 무덤이다. 기타 지도 왼쪽 아래쪽에 있는 芦峴·芦洞岺에서의 ‘芦’는 ‘蘆’의 속자이다.(이기봉)

  • 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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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령부는 관해면과 삼해면 일부를 제외한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부령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청진시 동부와 부령군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부령군 부령읍 일대에 있었다. 고을 전체의 모습이 실제와 거의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동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을 현재 수성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수성천이 흐르는 모습도 현재의 지도에서 보는 것과 거의 같다. 이 하천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 현재 청진시의 핵심지역에 해당된다. 해안가에는 浦·串·潭 등의 모습이 아주 자세한데, 모두 ≪輿地圖書≫의 富寧府邑誌에 나오는 지명들이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는 이것들이 대부분 해안가에서 떨어진 곳에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의 내용이 실제와 더 부합된다. 지도 오른쪽의 懷綏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지도책에서는 이러한 역의 경우 읍치보다는 조금 작지만 붉은색의 원으로 표시하는데,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 그 오른쪽에 있는 富居古縣은 세종 16년(1434)에 寧北鎭과 합해지면서 혁파된 고을이다. 읍치 위쪽으로 보이는 廢茂山과 上茂山社·下茂山社는 이 고을 서쪽에 있었던 茂山과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국경이 서북쪽으로 확장되면서, 폐무산에 있었던 茂山堡가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 무산보가 후에 무산부가 되지만, 그 흔적이 이 고을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밖에  함경도의 다른 고을 지도에 비해 洞·里가 많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이기봉)

  • 북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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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청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북청군과 풍산군 안수면·안산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함경남도 북청군·신포시·덕성군과 량강도 김형권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북청군 북청읍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連德山이다. 읍치가 파란색 정사각형으로 표시된 이유는 咸鏡南道兵馬節制使가 파견된 南兵營이 있었기 때문이다. 읍치 아래쪽 바닷가의 해안선이 복잡하게 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 潟湖로 보이는 호수나 灣이 많았기 때문이다. 호수의 경우 지도에서처럼 바다로 확 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는 입구가 거의 막혀 있는 상태였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는 실제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부분은 북쪽 지역에 해당된다. 첫째, 端川界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이 상당히 굵게 표시되어 있어 상류가 훨씬 멀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실재로는 단천과의 경계선에서 발원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극히 짧은 구간만 단천으로부터 들어온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는 단천과의 경계선에서 하천이 발원하는 것으로 교정되어 있다. 둘째, 原致岺(厚致岺의 誤記임) 북쪽의 하천이 실제보다 훨씬 작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의 풍산군 안수면과 안산면에 해당되는 지역으로서, 현재는 대부분이 량강도 김형권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이곳에 있는 黃水川은 현재 압록강의 지류인 허천강의 상류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하천의 서남쪽 발원지는 지도에서와 달리 갑산·함흥·북청의 경계선에서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황수천에 대한 이와 같은 오류는 南大川과 황수천의 발원지인 香山(기록에는 香嶺·香洞 등으로 나옴)의 위치가 잘못 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 발생 원인은 향령이 ‘부 북쪽 130리에’, 후치령이 ‘부 북쪽 100리에’ 있다는 ≪輿地圖書≫ 북청부 산천조의 기록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地誌에서는 방향을 주로 東西南北으로만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의 북청부 기록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北’이라는 방향 표시가 ‘北西·北·北東’ 어디든 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향산 또는 향령은 실재로는 ‘부 북서쪽 130리에 있다’라고 표시해야 올바르다. ≪海東地圖≫의 북청부 지도에서는 더 심하게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는 이 부분이 일부 교정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문제점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이기봉)

  • 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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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수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삼수군과 장진군의 북면·동문면·동하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량강도의 삼수군·김정숙군과 자강도 랑림군 전체, 함경남도 부전군 북쪽 절반에 걸쳐 있다. 읍치는 량강도 삼수군 삼수읍에 있었다. 고을 북쪽에서 甲山界로부터 廢四郡界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압록강 본류이다. 읍치 오른쪽을 흘러 압록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삼수천이다. 아래쪽의 함흥계로부터 발원하는 하천은 오른쪽은 부전강, 왼쪽은 장진강이다. 江口堡 이남의 부전강과 장진강 상류에는 정조 11년(1787)에 長津府가 설치되기 때문에, 이 지도는 최소한 그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하천의 길이 부분에서 2가지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첫째, 읍치 오른쪽을 흐르는 삼수천이 실제보다 2배 이상 길게 표시되어 있다. 둘째, 瓮洞烽에서 장진강에 합류하는 하천 역시 실제보다 2배 이상 길게 표시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이 부분의 고을 모습이 실제와 많이 다르게 되었으며, 두 하천의 길이를 1/2로 축소하면 실제와 부합한다. 그 이외의 부분은 실제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내부적으로 약간씩의 교정은 이루어지고 있다. 압록강 변에 4개, 장진강 변에 6개의 鎭堡가 설치되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고종 6년(1869) 폐사군 지역에 정식으로 고을이 설치되기 이전까지는 이 고을의 압록강 부분과 장진강이 최전방으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기타 지도 위쪽에 있는 舊乫坡知社 왼쪽의 하천도 지나치게 길게 그려져 있다.(이기봉)

  • 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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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변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안변군과 문천군의 풍상면·풍하면, 그리고 강원도 통천군의 흡곡면·학일면에 해당된다. 지금은 강원도 안변군·고산군·법동군과 통천군의 시중대 위쪽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안변군 안변읍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 위쪽에 표시된 鶴城山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최상류이며, 읍치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 남대천이라고 부른다. 전자의 유역에는 조선초기까지도 永豊縣이 이 고을의 屬縣으로 존재했었다. 이 지역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져 있지만, 읍치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크게 그려져 있다. 읍치 지역은 실재로는 이 지역에 비해 동서의 폭은 약 2배, 면적은 3배에 가깝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실제에 가깝게 조정되어 있다. 두 유역 사이를 남북으로 가르는 부분의 길이도 상대적으로 너무 길게 그려져 있다. 실제와 부합하려면 지도상의 길이보다 약 1/3 수준으로 축소되어야 한다. 이 부분은 김정호의 지도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명칭의 기록에도 일부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지도 오른쪽에 표시된 鶴湖社는 鶴浦社의 잘못이며, 그 아래쪽의 市川도 沛川의 誤記이다. 이 밖에 이 고을에 흡수된 과거의 廢縣이 지도에는 ‘○○古縣’ 또는 ‘古○○’로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영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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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흥부는 일제시대의 영흥군 전체와 고원군의 운곡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남도 요덕군·금야군과 고원군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금야군 금야읍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있는 聖歷山이다. 이 지도 역시 바로 북쪽에 있었던 정평 지도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지도 왼쪽 위의 香爐峯으로부터 오른쪽의 可豆乧岺 근처까지는 거의 남북으로 표시되어야 한다. 읍치 왼쪽 위에 있는 沸流水는 香爐峯 근처에서 발원하여 거의 정남으로 내려오는데, 앞의 오류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도 다르게 반영되어 있다. 또한 香爐峯으로부터 바로 왼쪽의 馬踰岺까지는 향로봉-가두둘령 정도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이로 인해 2가지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첫째, 마유령부터 艾田峴(艾用峴은 誤記임)까지의 산줄기가 거의 남북 방향임에도 서남 방향으로 표시되어 있다. 둘째, 龍興江 네 개의 근원 중의 하나가 마유령에서 발원한다는 기록과 부합하게 그리기 위해 향로봉 근처에서 발원하는 비류수의 근원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두 번째 오류는 ≪海東地圖≫의 영흥부 지도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상호 연관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읍치 오른쪽에 安佛寺가 守佛寺로 기록되는 등의 오류도 발견되고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가 일부 시정되어 있지만, 대체적으로 답습되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아래쪽 방향에 있는 璿源殿과 本宮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으로서, 그의 초상화가 奉安되어 있었다. 기타 지도 오른쪽 아래의 馬鷹은 현재의 호도반도로서, 옛 원산만(지금은 금야만이라고 부른다)을 감싸고 있는 부분이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이곳을 末應으로 표시하고 섬으로 처리하였다.(이기봉)

  • 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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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성부는 훈융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온성군, 경원군의 용덕면·유신면의 일부와 경흥군의 나진 일대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온성군 동북부와 새별군·은덕군·나진시에 일부씩 걸쳐 있다. 읍치는 온성군 온성읍 일대에 있었다. 서쪽에서 읍치까지의 두만강 부분은 ≪海東地圖≫의 온성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지도에서 실제와 가장 다른 부분은 읍치 동북쪽에 錢江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실제보다 훨씬 동북쪽으로 튀어나가 있으며, ≪海東地圖≫의 온성부 지도와도 다르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상당히 시정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으로는 이 고을의 월경지가 북남으로 길게 늘어져 있음이 보인다. 이 부분도 실제와 대체로 부합하고 있다. 아래쪽에는 大島·小島가 표시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기록과 지도에는 모두 大草島·小草島로 나온다. 다만 ≪輿地圖書≫에 수록된 穩城府地圖에서 大島·小島란 명칭이 보이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만주지역으로부터 豆滿江으로 흘러 들어오는 分界江은 현재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연변의 해란강이다. 앞에서 지적한 부분만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고을의 실제 모습과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이 고을 부분은 일부의 교정을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 베낀듯할 정도로 비슷하다.(이기봉)

  •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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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현은 일제시대의 이원군에 해당되며, 지금도 함경남도 리원군 일대이다. 이성현은 정조 24년(1800)에 利原縣으로 이름을 바꾼다. 따라서 이 지도는 아무리 늦어도 1800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줄기의 모습은 실제와 거의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多寶社에 있는 하천은 길이가 다른 2개의 하천과 비슷함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섬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에 기록되지 않은 川椒(島)가 나온다. 이 섬은 김정호의 ≪東輿圖≫에는 위치가 交濟倉 아래쪽으로 바뀌어 표시되어 있으며, 김정호의 ≪大東地志≫에 ‘남쪽 30리’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이성현 지도에도 이 섬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와 김정호의 ≪東輿圖≫는 ≪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輿地圖書≫ 이외의 자료도 참고하여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 아래쪽에 있는 層岩 역시 앞에서 언급한 자료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는 섬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해안가 육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해안가의 호수 역시 실제보다 훨씬 크게 표시되어 있는 단점이 있다.(이기봉)

  • 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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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평부는 선덕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정평군이며, 지금은 함경남도 정평군·함주군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정평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鼻白山이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하천은 현재 금진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도에는 金伊江이라고 적혀 있다. 이 하천이 많은 부분에서 다르게 그려져 있어, 고을 전체의 모습이 왜곡되어 있다. 이 하천은 上釰山에서 지도 중간의 아래 부분에 있는 成佛寺까지 거의 정남 방향으로 흐른다. 따라서 지도 왼쪽 아래의 영흥계로부터 성불사가 있는 곳까지의 경계는 거의 남북방향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지도 중간부분의 獐項 부근으로부터 왼쪽의 香爐峯으로 뻗은 하천도 지나치게 길게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 보면 1/5 정도로 축소하는 것이 실제와 부합한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고을의 남북이 동서의 폭보다 실재로는 2배 이상이 됨에도 불구하고, 1/2 정도밖에 안 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정평부 지도에서도 남북보다는 동서가 더 길게 표시되어 있다. 이 두 지도는 전형적인 회화식 군현지도로서, 거리나 면적보다는 주변의 지형·지세에 대한 관념적 표현을 중요하게 여겼던 지도이다. 그러나 이 지도는 관념적 표현보다는 정확성을 중요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앞의 두 지도에서 나타났던 오류가 상당히 반복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가 여러 地誌 자료와 함께 앞의 두 지도와 같은 회화식 군현지도도 참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일부 오류가 교정되고 있지만, 남북보다는 동서의 폭이 더 긴 부분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읍치 부근의 하천은 앞의 오류 때문에 상대적으로 짧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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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성부는 일제시대의 종성군과 경흥군의 풍해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온성군·새별군·회령군·은덕군·라진시에 일부씩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온성군 종성로동자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 아래 방향에 있는 小白山이다. 읍치 왼쪽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두만강이다. 이곳에는 防垣堡와 潼關鎭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도에는 동관진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동관진은 豆滿江이란 글씨의 맞은편에 있었으며, 潼關社 역시 비슷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童巾山 역시 동관진 동쪽에 있어야 한다. 읍치 역시 바로 아래쪽 하천의 남쪽 부분에 있어야 하며, 그 오른쪽의 甑山도 온성과의 경계선에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이 지도보다 약간 빠른 것으로 추정되는 ≪海東地圖≫의 종성부 지도는 비록 회화식이지만 위와 같은 오류들이 발생하고 있지 않다. 또한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이러한 오류들이 교정되어 있다. 지도 중간에 있는 하천은 현재 五龍川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도에는 涪溪라고 적혀 있다. 이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 현재의 경성군 남쪽에서 두만강에 합류된다. 이곳에 있는 北行營은 현재의 회령시 행영리에 있었으며, 咸鏡北道兵馬節制使가 파견된 곳이다. 그 오른쪽에 있는 皮德에서 ‘德’은 평안도·함경도 지역에서 산지의 한 종류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어미로서 많이 사용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造山寺는 海津이란 용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동해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지도에는 해진이 있는 곳이 마치 하천처럼 표시되어 있어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그 아래쪽에 있는 푸른색의 타원 모양은 바다에 있는 椒(島)이다. 고을 전체의 모습은 실제와 거의 흡사하며, 산줄기와 물줄기 역시 큰 오류가 없게 표현되어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인문적 내용의 교정이 일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고을의 전체적인 모습은 이 지도와 거의 비슷하게 그리고 있다.(이기봉)

  • 함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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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부는 일제시대의 함흥부·흥남부·함주군·신흥군과 장진군의 남쪽 절반, 정평군의 선덕면, 흥원군의 삼호면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남도 함흥시·영광군·신흥군·락원군·장진군, 부전군의 남쪽, 함주군의 동쪽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함흥시 성천강구역 남문1동·남문2동·동문동·서문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바로 위쪽의 城串山이다. 지도 왼쪽 위의 장진 지역에는 현종 8년(1667)에 堡가 설치되었다가, 정조 9년(1785)에 鎭으로 승격된다. 같은 왕 11년(1787)에는 府로 승격되면서 독자적인 고을이 된다. 長津에 표시된 다이아몬드 모양은 이 지도책에서 일괄적으로 鎭堡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지도는 최소한 1787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도 중간 왼쪽에는 中嶺堡가 있으며, 오른쪽 중간의 赴戰嶺 아래에 있는 다이아몬드 모양은 赴戰嶺堡이다. 둘 다 병자호란(1636) 이후 강화된 북쪽 방어의 일환으로 숙종 28년(1702)에 세워진다. 읍치는 붉은색이 칠해진 정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책에서는 관찰사가 파견된 監營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시하였다. 그 아래쪽에 노란색 원과 牧場이란 글씨가 보이고 있다. 이 지도책에서 종6품의 監牧官이 파견된 牧場을 일괄적으로 표시하던 방식이다. 이곳은 都連浦牧場을 의미하는데, 이 목장은 이미 영조 5년(1729)에 폐지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함흥부 지도에는 계속적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도 폐지된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표시된 것은 아마 앞의 자료들을 참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輿地圖書≫의 地誌 부분에는 폐지된 사항이 자세히 적혀 있다. 목장 아래쪽에 都運浦는 都連浦의 誤記이며, 그 위치도 잘못되어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에는 이와 같은 오류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며, 단지 牧場을 旧牧場이라고 교정해 놓았다. 이 지도에 표시된 그 밖의 인문정보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 다른 지방의 坊面에 해당되는 社와 倉庫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둘째,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祖上 무덤이 陵으로 표시되어 있다. 셋째,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머물렀던 곳을 本宮 등으로 표시하였다. 넷째, 驛站·烽燧·道路 등의 군사 시설이 자세하게 표시되었다.(이기봉)

  • 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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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원현은 함호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홍원군 홍원읍 일대에 있었다. ≪輿地圖書≫의 홍워현읍지에는 읍치 왼쪽의 하천이 西大川으로, 오른쪽의 하천은 東大川으로 나온다. 전반적으로 고을의 모습이 실제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약간 과장된 측면도 보이고 있다. 첫째, 주위가 6-7里에 이른다는 飜浦가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다. 둘째, 幅圓이 90里로 나오는 馬養島 역시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다. 김종호의 ≪東輿圖≫에서는 첫 번째 부분은 상당히 교정되어 있지만, 두 번째 부분은 거의 그대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 위에 있는 咸關岺과 大門峴은 이 지역에서 중요한 요해처로 여겨졌다. 기타 일반인들이 알아보기 힘든 속자도 몇 개 보이고 있다. 위쪽의 靈奇峯에서의 ‘靈’과 廣興寺에서의 ‘興’은 필사본에서는 지도 위의 속자처럼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읍치 위쪽 방향으로 臥龍山이, 왼쪽 방향으로 富民社·蘆洞社 등도 어려운 속자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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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령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회령군과 부령군의 관해면에 해당된다. 지금은 서쪽과 동쪽의 일부를 제외한 회령시와 나진시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회령시 남문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鰲山이다. 두만강의 곡류 방향이나 고을 전체의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약간의 단점이 있다면, 아래쪽의 高浪歧川이 동북쪽의 종성 방향에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그런 사실이 地誌에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회령부 지도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 이 고을의 산줄기와 물줄기는 이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내부에 표시된 지명에서만 일부 교정되어 있을 뿐이다. 고랑기천에 紫淵과 眞珠池로 추정되는 그 옆의 섬 모양의 표현이 재미있다. 분명하게 淵이나 池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섬처럼 표시한 예는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호수로 교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곳은 地誌의 기록을 참고해 보았을 때, 독자적인 호수는 아니다. 단지 고랑기천의 일 부분 중 淵이나 池로 표현될 수 있을 정도로 잔잔하고 깊은 구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도에는 일반인들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와 誤字도 몇 개 보이고 있다. 지도 왼쪽에 표시된 芦田項에서의 ‘芦’는 ‘蘆’의 속자이다. 읍치 아래쪽 방향에 있는 幹木河는 斡木河의 誤字이다. 그 아래쪽 방향의 灵通山·灵山社에서의 ‘灵’은 ‘靈’의 俗字이다.(이기봉)

  • ▶황해도
  •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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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령현은 황해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甕津, 아래로는 海州로 이어진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용연면·봉구면·흥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황해남도 강령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일찍이 1428년(세종 10년)에 永康과 白翎을 합하여 康翎縣으로 삼았다. 읍치 동쪽에 古縣面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동쪽의 鳳凰山이다. 고을 남쪽의 登山串은 지금의 강령반도에 해당한다. 넓은 백사장이 발달해 있어서 고려 때 辛禑가 요동을 치러 갈 때 이곳에서 사냥하였다고 한다. 지도제작의 당시에는 사복시 소속의 목장과 둔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 이곳에는 登山串鎭이라는 수군 萬戶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인근의 巡威島로 옮겼다.(오상학)

  • 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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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은 황해도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고을로 동으로는 강원도 伊川, 북으로는 평안도 陽德, 동북쪽으로는 함경도의 安邊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곡산군 곡산면·도화면·서촌면·운중면·동촌면·청계면·화촌면·멱미면·봉명면·상도면·하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세림리와 사현리 및 도전리 일부를 제외한 곡산군 전지역, 신평군 지역에 해당한다. 본래 고구려 十谷城이었는데 조선 태조 때 神德王后 康氏의 고향이어서 谷山으로 개명하고 府로 승격시켰다. 대동강의 지류인 能成江이 고을을 휘돌아 나가면서 평양까지 이어진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수안·신계·토산과 더불어 만첩 산중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고 백성이 어리석으며, 골짜기가 깊숙하여 도둑이 많은 까닭에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와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적다고 한다. 읍치 북쪽 대로변에 위치한 文城은 中宗 때 萬戶를 설치하고 숙종 때 僉使로 승격되었던 文城鎭인데, 마름모꼴의 기호로 표시되어 있다. 원래는 그 아래쪽에 舊文城이라 표시된 곳에 있었다.(오상학)

  • 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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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군은 개성에서 황주에 이르는 海西 直路에 위치한 고을로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금천군 금천면·고동면·산외면·서북면·우봉면·웅덕면·구이면·좌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강북리·강남리·양합리·용성리를 제외한 금천군 전체, 봉천군 신명리·황룡리·도산리·백석리·연홍리·능촌리, 평산군 예성리와 기탄리, 토산군 서쪽 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금천군은 군명이 자주 바뀌고, 읍치의 이동도 많았던 고을이다. 원래 牛峰縣이었는데 1651년(효종 2)에 江陰縣을 병합하여 金川郡으로 승격시키고 읍치는 吾早川의 남쪽에 두었다. 이후 1678년(숙종 4)에 읍치를 猪灘의 남쪽으로 옮겼다가 1753년(영조 29)에 읍내의 水土가 나쁘다 하여 다시 오조천의 남쪽으로 옮겼다. 후에 다시 저탄의 남쪽으로 옮겼는데 지도에도 과거의 牛峰과 江陰의 치소가 각각 古江陰, 古牛峰 등으로 표기되어 있고, 구읍치가 屈押里에 古邑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개성에 이르는 남북 직로상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지만 다른 지방에서 흘러와 사는 사족이 조금 있는 편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瘴氣가 있었는데 근래에는 더욱 심해 살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 평하였다. 古江陰 지역의 강가에는 助浦가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유명한 助浦倉(혹은 助邑浦倉)이 있었는데, 황주·서흥·평산·봉산·곡산·수안·안악·재령·신계·토산·우봉·강음 12읍의 전세를 수납 보관하였다가 서울로 漕運하였던 중요한 漕倉이었다.(오상학)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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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현은 황해도 서쪽 구월산 아래에 위치한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문무면·용진면·산천면·궁흥면·문화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삼천군 중·북부, 안악군 서부, 신천군 건산리·용산리·화산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황해남도 신천군 건지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금의 삼천군 고현리에 있었으나 癘疫이 자주 돌자 1520년(중종 15)에 乾支山 남쪽으로 옮겼다. 고을의 鎭山은 건지산으로 지도에서도 읍치의 뒤편에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각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고을의 북쪽에는 이 지역 최고의 관방인 九月山城이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석성으로 조선시대에 수축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의 둘레가 4백보이며 형태가 큰 배와 같았고, 남북으로는 통행로가 없으며 동서로 다만 구름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지형은 성 서쪽의 양편이 깎아세운 듯이 우뚝 솟아 마치 문의 모양 같은 산이 있고, 모든 골짜기에서 나오는 물이 문 밖으로 흘러나가서 폭포가 되는, 실로 천연의 요새지였다. 守城將은 은율현감이 겸임하고, 별장 1인을 두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두 개의 서원은 鳳崗書院과 程溪書院이다. 前者는 1656년(효종 7)에 세워져 1675년(숙종 1)에 사액되었고, 後者는 1670년(현종 11)에 세워져 1708년(숙종 34)에 사액되었다.(오상학)

  • 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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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와 인접한 고을로 동쪽으로는 예성강에 연해 있고 남쪽은 바다와 접해 있다. 고려시대에는 경기도 소속이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연백군 동부지역이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역구도·추정리·수원리를 제외한 배천군 전지역에 해당한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1리에 위치한 雉岳山으로 최고봉은 望德峰이다. 인근의 平山과 더불어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살만한 곳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바다와 접해 있어서 배를 이용한 장사로 이익을 얻는다고 했다. 배천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있는 온천의 뜨거운 물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서울과 의주를 연결하는 義州路가 지나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예성강 하구에는 碧瀾渡가 있었고, 金谷浦에 있었던 金谷倉은 해주를 위시하여 12읍의 稅穀을 모아 京江으로 보내던 조창이었다. 고을 서쪽의 江西寺는 見佛寺라고도 하는데 僧 惠素가 거주하면서 金富軾과 친분을 유지했던 곳이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서원은 文會書院인데,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불탄 후, 1606년(선조 39)에 重建되고, 1628년(인조 6)에 사액되었다. 이이·성혼·조헌 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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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은 개성에서 황주로 연결되는 해주 직로상에 위치한 고을로 군사적 요충 지역이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사리원시, 봉산군 동선면·산수면·구연면·토성면·덕재면·쌍산면·기천면·초와면·서종면·사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봉산군 동부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 재령군 삼강군 서부 일부지역, 구연리와 옥현리를 제외한 은파군 전지역, 린산군 석교리와 석연리 지역을 포함한다. 읍치는 봉산군 구읍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남쪽의 土城面에 있었는데 1523년(중종 18) 전염병이 많이 돌자 이곳으로 옮겼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각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봉산은 의주대로가 통과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여러 관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서북쪽에는 棘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과거 棘城鎭이 있었다. 자비령 맥이 10리쯤 내려오다 다시 끊어져 평평한 둔덕이 되었고 둔덕이 끝나면서 평야가 되었는데 이것이 극성의 들판이다. 고려 때 몽골의 군사가 이 길을 통해 들어왔고, 인조 때 청나라 군사도 이를 통해 들어왔다. 강 하류에는 조수가 통하며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만약 자비령에서 긴성을 쌓아 극성 강 언덕까지 연결한다면 남북을 가로막을 수 있는데 조선후기 숙종 때 부근에 蒜山鎭을 설치하였다. 읍치 남쪽의 別館은 민폐를 막고 고을의 水口를 關鎖하기 위해 郡守 具鼎煥에 의해 세워졌다.(오상학)

  • 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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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 직로가 경유하는 길목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鳳山, 아래로는 平山과 연결된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서흥군 신막읍·서흥면·도면·세평면·소사면·율리면·목감면·용평면·내덕면·매양면·구포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양암리를 제외한 서흥군 전체, 린산군 상하리·다전리·석연리·석교리 지역, 봉산군 동쪽 부분, 연탄군 풍답리·신흥리·송죽리·장운리·성매리·두무리·문화리 지역, 수안군 상덕리 남동부, 린산군 북부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서흥군 고성리 일대에 있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각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이 고을은 황해도 제1방어선에 위치해 있어서 산성과 진영이 여럿 있었다. 九井面의 善積鎭은 원래 만호진이었는데 1683년(숙종 9)에 新塘鎭을 합하여 첨사로 승격시켜 성현·독치·건은령·동현·자은령 등을 防守했다. 木甘面의 所已鎭은 1680년(숙종 6)에 소이·범한 두 屯을 합하여 진을 설치하고 屯將을 萬戶로 승격시켜 자비령, 여계령 등을 방어케 하였다. 大峴山城은 석성으로 둘레가 20,238척이나 되는 큰 산성이었다. 읍치의 북쪽과 남쪽에는 守禦屯, 每馬峙屯도 보인다. 所沙面에는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社倉이 그려져 있다.(오상학)

  • 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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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豊川, 서로는 長淵과 연결된다. 송화현의 명칭은 조선조 1408년(태종 8)에 고려 때의 靑松縣과 嘉禾縣을 합하여 송화현으로 고친 것에서 유래한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연정면·연방면·도원면·장양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원당리와 명례리 일부를 제외한 송화군 전지역, 삼천군 남부지역, 황해남도 태탄군 공세리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도에 東倉이 있는 곳이 嘉禾縣이 있던 곳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墨山이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서원은 道東書院이다. 1605년(선조 38) 지방유림의 공의로 중국의 朱子와 趙光祖·李滉·李珥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9년(숙종 25) ꡐ道東ꡑ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옆에 온천이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의 송화온천에 해당한다.(오상학)

  • 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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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군은 谷山과 더불어 황해도의 북동쪽 궁벽진 곳에 위치해 있는 고을이다. 예성강과 대동강 지류인 남강의 분수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산지가 많고 들이 적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율계면·대성면·대오면·천곡면·수구면·도소면·연암면·공포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수안군에서 산북리·주영리·석교리·평원리 동부·상덕리 남부를 제외한 전체, 연산군에서 대군리 동부를 제외한 전지역, 연탄군 신금리와 오봉리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곡산·신계·토산과 더불어 만첩 산중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고 백성이 어리석으며, 골짜기가 깊숙하여 도둑이 많은 까닭에 옛부터 문학하는 선비와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적다고 한다. 이 고을은 군사적으로 중요하여 군영이 설치되어 있다. 동남쪽 城洞面 근처의 位羅鎭은 1680년(숙종 6)에 기존의 屯將을 萬戶로 승격시킨 것이다. 防垣嶺에 있는 文山鎭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防垣嶺 아래에 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성의 길이는 6백 20척이고 성의 좌우에 높은 산이 마주 솟아 있다. 1680년(숙종 6)에 文山·聰明 두 곳의 屯將을 萬戶로 승격시켜 이 곳에 옮겨 설치하였다. 향교 옆의 龍溪書院은 1662년(현종 3)에 세워져 1708년(숙종 34)에 사액된 서원으로 안향의 문인인 李連松, 姜栢年 등을 배향하였다. 고을 서쪽에는 은을 생산하던 銀店도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신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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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성강 유역 중에서도 상류쪽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遂安·谷山, 아래로는 平山에 이어진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신계군 신계면·고면·다율면·다미면·마서면·부여면·사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신계군 전지역, 곡산군 세림리와 사현리, 수안군 산북리·주영리·석교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원래 고려의 新恩縣이었는데, 조선 1396년(태조 5년)에 俠溪縣을 신은현에 예속시키고, 1445년(세종 27)에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신계현이라 하였다. 지도에도 고을의 남쪽에 古新恩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수안·곡산·토산과 더불어 만첩 산중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고 백성이 어리석으며, 골짜기가 깊숙하여 도둑이 많은 까닭에 옛부터 문학하는 선비와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적다고 한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편에 있는 九峰山이다. 동북쪽의 箕達山에는 고려 제19대 명종 당시에 구축한 三蘇 중 하나인 北蘇宮址가 남아 있다. 한때 고려가 이 곳으로 천도하려 했다고 전한다. 읍치 남쪽의 蘆淵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다. 고을 남쪽에 표시된 역은 所坪驛이다.(오상학)

  • 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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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군은 황해도의 서부 지역에 위치한 고을로 文化와 載寧 사이에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북부면·가산면·온천면·두라면·용문면·노월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신천군 서남부(도락리·이목리·지남리·냉정리), 동부(건산리·용산리·화산리), 북부(마명리·오국리·덕성리)를 제외한 전지역에 해당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지명에도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는데 남쪽에 水鐵院이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花山이다. 읍치 서남쪽에 있는 天峯山에는 산위에 龍井이 있는데, 가물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다. 서남쪽 望日山 부근에 있는 서원은 1588년(선조 21) 건립되고 1710년(숙종 36)에 사액된 正源書院이다. 朱子·趙光祖·李滉·李珥 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안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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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군은 황해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북쪽은 대동강, 동쪽은 재령강과 접하고 있다. 재령평야의 서쪽 지역에 위치하여 다른 고을에 비해 제법 넓은 뜰이 펼쳐져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안악군 안악면·용순면·대원면·문산면·안곡면·서하면·대행면·은홍면·용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은천군 전지역, 안악군 서부와 남부를 제외한 지역을 포함한다. 황해도의 中營이 설치되었던 고을로 안악, 신천, 재령 등을 관할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楊山이다. 해안과 가까워 봉수도 여럿 설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북쪽 涉河面에는 冷井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椒井이라고도 하는데 맛이 시지만 병자들에게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屹紅面에는 溫井이 그려져 있는데 痼疾이 있는 사람에 효력이 있다고 한다. 동쪽의 艾津은 봉산으로 통하는 지름길로 이용되었다.(오상학)

  • 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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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부는 황해도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경기도의 강화, 교동 해역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연백군 서부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연안군 전체, 청단군 흥상리·청정리·심평리 일대, 배천군 수원리·추정리·역구도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으로 일명 鳳勢山이라고도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해주의 동쪽이며 후서강의 서쪽이고 보련강 하류의 북쪽이다. 큰 산과 넓은 물, 넓은 들과 긴 냇물이 여기에 모였고, 또 조수가 통해 널따랗고 명랑한 것이 중국 江淮의 풍경과 같다. 가장 살만한 곳이며 한양에서 내려와 사는 사족이 많은데 다만 땅이 메마르고 가물기 쉬워 면화 재배에는 적당하지 않다. 따라서 주민들은 배로 강과 바다에 나가 통상하기를 좋아하는데 동으로는 두 도와 통하고 남으로는 호남 호서에 통하므로 산물을 무역해서 항상 많은 이익을 얻는다’고 기술되어 있다. 남쪽의 羅津이 이 지역 수상교통의 요지로 公私 선박이 이곳을 경유하여 지난다. 읍치 아래쪽의 南大池는 일명 臥龍池라고도 하는데, 겨울철에 얼음이 갈라지는 것으로 다음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오상학)

  • 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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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진부는 황해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해안 방어의 요충지였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동남면·북면·서면·용천면·가천면·백령면·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태탄군 은동리를 제외한 옹진군 전지역과 태탄군 옥암리, 남한의 옹진군 백령면과 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도에는 군사 요충지답게 水軍節度使가 관장하는 水營이 정방형으로 부각되어 표시되어 있다. 원래 현령이 다스리다가 1718년(숙종 44)에 所江鎭을 병합하여 水營으로 승격하고 水軍節度使를 두어 옹진도호부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또한 소강진에 영을 설치하여 行營이라 칭하고 옹진은 本營이라 하였는데 所江船所로 표기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의 花山이다. 북쪽 해안의 西京浦는 鹽釜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오상학)

  • 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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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율현은 황해도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은율면·남부면·북부면·서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은율군 남부지역과 송화군 원당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을의 풍속이 소금과 쇠로 생리를 삼는다고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땅이 아주 기름져 논에 1말 종자를 뿌려 때로는 수백 말을 수확하고 적더라도 100말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고을 중앙을 흐르는 하천인 漢川이 고을의 명당수가 되는데 1871년 ≪海西邑誌≫에 의하면, 이 하천변으로 많은 논들이 있는데 모래를 파서 도랑을 만들어 관개를 한다고 한다. 읍치 동쪽에 四仙臺가 표시되어 있는데, 桓仁(桓因)·桓雄·檀君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서원은 鳳巖書院이다. 1613년(광해군 5)에 士人 鄭希男 등이 현 남쪽 20리 院坪에 창건하였다. 1701년(숙종 27)에 士人 鄭璉 등이 현 위치에 옮겨 세웠고, 김굉필과 이이를 배향하였다. 동쪽의 九月山에는 산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지역의 대표적인 城池로서 성 주위가 14,386척이고 높이가 15척이다. 산성의 모습이 큰 배와 같고, 길이 동서로만 나 있는데 험준한 棧道로 이루어져 있다.(오상학)

  • 장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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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련현은 황해도의 서북쪽 대동강 하구에 연해 있는 작은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일도면·이도면·북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은율군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편의 鳳凰山인데 날이 가물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고을 서쪽에 있는 楓串古縣은 과거 連豊縣이 있던 곳이다. 읍치 동북쪽의 大津浦는 평안도 三和로 가는 포구였는데, 1523년(중종 18)에 關을 설치하여 장삿배들이 몰래 중국과 통하는 것을 금하였다. 읍치 아래에는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고을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鳳陽書院이다. 이 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세워졌고, 이듬해 賜額되었는데 朴世采를 배향하였다. 대원군 집정기의 서원 철폐 때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오상학)

  • 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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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현은 황해도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해서정맥의 산줄기가 장산곶까지 뻗어 있는 지역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장연군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장연군·룡연군·태탄군 서부,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장산곶으로 널리 알려진 고을인데, 장산곶은 서해안 뱃길 가운데 가장 험한 곳으로 유명하다. 장산곶에는 고려 때부터 호남의 변산과 호서의 안면도와 함께 소나무를 가꾸어 궁전을 짓고 배를 건조하는 재목으로 사용했다. 장산곶 부근에 보이는 祭堂(長山串祠)은 祀典에 大川으로 小祀에 실려 있는데,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장산곶 위쪽 白沙汀에는 金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바닷가 20리가 모두 모래 언덕이다. 모래가 아주 잘아 금빛 같으며 햇빛에 비치어 반짝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모래가 쌓여 산봉우리처럼 된다. 모래 위의 절은 웅장하고 화려한데 모래에 묻히지 않는다고 한다. 읍치 서쪽의 汪濟屯은 민간에서 전하기를 삼한시대 때 왕이 피난하여 강을 건넜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御營廳에서 屯을 설치한 곳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龍井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끌어서 논에 물대는데 가물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지도에는 둥그렇게 부각시켜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읍치 서쪽에 표시된 龍穴은 큰 동굴이다. 고을 서쪽의 助泥鎭은 숙종 때 설치된 수군 萬戶鎭이고 白翎島鎭은 광해군 때 설치된 수군 僉使鎭이었다.(오상학)

  • 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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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군은 재령강 유역에 발달한 재령평야의 중심에 위치하여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대표적인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율면·남율면·서호면·삼강면·청천면·은룡면·장수면·신원면·상성면·하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황해남도 재령군 전체, 신원군 북부, 황해북도 은파군 용연리·옥현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각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남쪽의 鐵峴山은 철을 생산하던 대표적인 곳이다. 옛 읍치는 長壽山 남쪽에 있었는데 1519년(중종 14) 지금의 劍山 아래로 옮겨왔다. 지도에도 古邑이라 표기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떨어진 長壽山城은 ≪大東地志≫에 의하면 762년(신라 경덕왕 21)에 축성된 古山城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개축하였는데 내성은 주위가 4,008步, 외성은 둘레가 5,584步이고, 석벽이 험준하여 나는 새도 넘지 못한다고 한다. 이 고을은 屯田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동쪽의 月灘屯, 箭灘屯, 남쪽의 葛山屯 등이 보인다. 고을의 북쪽 재령강변에 있는 宮農庄은 강변에 형성된 갯벌을 궁방에서 간척한 토지로 보인다. 읍치 남쪽의 서원은 景賢書院으로 1655년(효종 6)에 세워져 1695년(숙종 21)에 사액되었으며 朱子와 李珥를 배향하였다.(오상학)

  • 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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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산현은 황해도의 동쪽 구석에 위치한 고을로 동으로 경기도의 朔寧과 접해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금천군 토산면·서천면·합탄면·외류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토산군 송세리·백화리·송천리·석봉리·문성리·미당리를 제외한 토산군 전지역, 강원도 철원군 부압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토산현의 서쪽은 예성강의 지류인 구연강 상류지역에, 동쪽은 임진강의 지류인 萬東江 유역에 걸쳐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수안·신계·곡산과 더불어 만첩 산중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고 백성이 어리석으며, 골짜기가 깊숙하여 도둑이 많은 까닭에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와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적다고 한다. 고을의 진산은 북쪽에 있는 兎山인데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 서쪽의 外縣面에는 龍巖이 있다. 일설에는 용의 두 뿔이 있었는데 倭賊이 하나를 훼손시켰다고 전해진다. 읍치 동남쪽의 龍淵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오상학)

  •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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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부는 개성에서 황주로 이어지는 해주 직로상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瑞興, 남으로는 金川과 연결된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산군 남천읍·평산면·금암면·서봉면·신암면·인산면·문무면·안성면·고지면·세곡면·적암면·마산면·용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기탄리와 예성리를 제외한 평산군의 전지역, 상하리·다전리·석교리·석연리를 제외한 린산군 전지역, 봉천군 동부를 제외한 전지역, 서흥군 양암리, 금천군 용성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황해 一道의 祖宗이 되는 滅惡山이 포진해 있어서 평지보다는 산지가 많은 고을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개성에 이르는 남북 직로상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지만 다른 지방에서 흘러와 사는 사족이 조금 있는 편이다. 서쪽 면악산 아래에는 들판이 제법 넓게 펼쳐졌고, 땅 또한 기름진 까닭에 부유한 마을의 많고 높은 벼슬을 한 사람도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고을을 鎭護하는 鎭山은 멸악산이다. 서남쪽에 있는 牧丹山은 首陽山 孤竹의 옛터로 알려져 있다. 평산은 황해도에서는 비교적 큰 고을에 해당하여 찰방역이 두 개나 있었다. 지도에 붉은 점으로 표시된 金郊와 麒麟이 그것이다. 금교역은 원래 강음현에 있던 것을 옮긴 것으로 8개의 속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기린역은 11개의 속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고을의 서원으로는 東陽書院과 九峯書院이 있었다. 동양서원은 月峯山 근처에 있는 것으로, 1650년(효종 1)에 세워져 1687년(숙종 13)에 사액되었고, 구봉서원은 1696년(숙종 22)에 건립되어 이듬해에 사액되었다.(오상학)

  • 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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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천부는 황해도의 동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은율과 더불어 땅이 비옥하고 바다를 끼고 있어서 어염의 이익도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땅이 아주 기름져 논에 1말 종자를 뿌려 때로는 수백 말을 수확하고 적더라도 100말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운유면·율리면·상리면·하리면·천동면·진봉면 일대였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과일군과 대략 일치한다. 인조 때 左營이 이 곳에 설치되어 풍천·장연·은률·장련·문화·송화·강령 등을 관할하였다. 고을 남쪽의 廣石山은 중국 사신들이 바다를 건너 왕래했던 길인데 唐館의 옛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邑治 서쪽 바닷가에는 西海의 神에게 봄·가을로 제사지내는 西海神壇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인해 수군 진영이 설치되었다. 椒島에는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고 북쪽의 許沙鎭은 남쪽 業淸江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水軍萬戶가 배치되었다.(오상학)

  •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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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목은 황해도의 감영이 있던 큰 고을로 해안에 연해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해주시와 벽성군을 합친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해주시 동부를 제외한 전 지역, 벽성군 전 지역, 강령군 동부, 태탄군 동부, 신천군 남서부, 신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지도는 읍성이 축조된 읍치를 확대하여 부각시키고 주변 지역은 상대적으로 축소하여 그렸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의 龍首山이다. 장방형의 읍성은 1391년 고려 공양왕 때 축조된 것인데, 1555년(명종 10)과 1591년(선조 24)에 중수하고 1747년(영조 23)에 개축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바닷물이 두 산 사이로 살며시 들어와 바로 앞산 뒤를 돌면서 괴어 하나의 큰 호수를 이루는데, 지방사람들은 이를 洞庭湖라 하는데 제법 유람할 풍치가 있다고 한다. 율곡 이이가 이곳 감사로 왔다가 石潭泉石을 발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후 여기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니 서울과 지방에서 선비가 많이 따랐는데, 文章禮義와 과거에 합격한 것이 전도에서 으뜸이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서원은 文憲書院이다. 명종 때 세운 서원으로 崔沖(984-1068년)을 배향하였다. 文山 남쪽에 위치한 神光寺는 1342년(고려 충헤왕 3)에 원 황제가 사람을 파견하여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명한 사찰이다. 고을 동쪽의 靑丹驛은 7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서쪽 해안의 西別倉은 長山串 이북의 여러 고을의 전세를 서울로 운반했던 漕倉이었다.(오상학)

  • 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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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목은 황해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여 평안도와 접한 고을이다.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대로에 위치한 군사 요충지여서 1593년(선조 26)에 병마절도사영을 설치하였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송림시, 황주군 황주읍·인교면·구락면·도치면·주남면·천주면·흑교면·청수면·구성면·영풍면·청룡면·삼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송림시·황주군·연탄군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절령 북쪽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평안도 중화부와 접하고 있다. 예전에는 북쪽으로 통하는 큰길이 자비령을 지나갔으나, 고려 말부터 慈悲嶺 길을 없애고 수목을 가꾸어 막아 버렸다. 지도에도 자비령으로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碧花山이다. 병영이 있던 읍치는 정방형으로 강조되어 있다. 읍치에는 병마절도사 외에도 中軍인 兵馬虞侯가 주재해 있었다. 고을 남쪽의 正方山城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관방으로 1636년(인조 14)에 쌓은 것이다. 동으로는 銅仙關, 서로는 棘城과 이어져 하나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읍치에 표시된 서원은 1588년(선조 21)에 세워져 1721년(경종 1)에 사액된 白鹿洞書院으로 보이는데, 朱子와 김광필·이이 등을 배향했다.(오상학)

  • 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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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산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혜산군·갑산군과 풍산군의 풍산면·웅이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량강도의 보천군·혜산시·운흥군·갑산군·풍서군 전체와 삼지연군·삼수군·김형권군의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갑산군 갑산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天鳳山(1,406m)이다. 고을 전체의 모습과 산줄기·물줄기가 거의 실제와 가깝게 그려져 있다. 위쪽의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압록강 본류이다. 남쪽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지나 압록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허천강이다. 허천강 지류 중 아래쪽의 오른쪽에 북청계라 표시된 하천의 발원지는 실재로는 그 왼쪽 방향의 太白山 부근이 되어야 한다. 이 점은 이미 같은 책의 북청 지도 해제에서 다루었다. 아래쪽 왼쪽 방향에 있는 北靑界는 咸興界라고 써야 옳다. 여러 地誌와 地圖를 참고하여 볼 때 다이아몬드 모양의 鎭堡와 社의 표시에 일부 오류가 보이고 있다. 첫째, 惠山鎭의 위치가 잘못 되어 있다. 실재로는 그 왼쪽 방향에 塔洞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 있었다. 둘째, 탑동이라는 명칭을 가진 鎭堡는 없었다. 셋째, 그 아래쪽 방향에 표시된 雲寵은 雲寵堡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부분에 다이아몬드 모양이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넷째, 그 아래쪽의 仁同은 同仁에 대한 誤記이다. 다섯째, 鎭東社와 함께 표시된 다이아몬드 모양을 없애고 집을 그려 넣어야 실제와 부합된다. 여기서 집 모양은 창고를 의미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들이 모두 교정되어 있다. 지도 왼쪽 아래 방향에는 香川이라고 적었다가 ‘川’자를 지운 흔적도 보이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갑산도호부 부분에 香川은 등장하지 않으며, 香洞만이 보이고 있다. 이 지도의 작성자가 이와 같은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川’자를 썼다가 지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이기봉)

  • 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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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박천군 가산면·용계면·청룡면·서면·양가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대부분이 평안남도 운전군에 속해 있다. 읍치는 운전군 가산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鳳(頭)山(394m)이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대령강 본류이며, 왼쪽의 하천은 장수탄강이다. 두 하천은 고을 남쪽에서 합류하여 바로 바다로 들어간다. 하천의 상류 부분을 너무 가늘게 표시하여, 마치 그곳이 발원지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지도에 표시된 두 하천 구간은 실재로는 하류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靑龍山도 2개나 적혀 있는데, 위쪽의 靑龍山은 靑劒山의 誤記이다. 산줄기의 표현이 회화식 지도에서 읍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環抱型으로 그리는 방식을 답습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를 이중으로 감싸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는 점, 읍치 북쪽 1리에 있다고 기록된 鳳(頭)山이 상대적으로 멀게 표시된 점 등이 바로 회화식 지도와 비슷한 부분이다. 아래쪽의 靑龍山도 鳳(頭)山의 북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는 동쪽에 위치한다. 面의 이름이 잘못 기재된 경우도 발견된다. 왼쪽 위의 西江面은 西北面의 誤記이며, 郡內面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車岺 역시 地誌에는 車踰嶺으로 나오고 있어, 역시 鳳頭山을 鳳山으로 표기한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밖에 읍치 왼쪽에는 廣林山이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俗字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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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성군은 고성군 간성읍·현내면·거진읍·죽왕면·토성면과 속초시의 영랑호 주변에 해당된다. 읍치는 간성읍 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남 방향에 있는 麻耆山이다. 面의 명칭 중 縣內面이 읍치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음이 눈에 띈다. 이것은 이곳에 烈山縣이 있었기 때문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간성군의 성씨 부분에는 열산현에도 독자적인 여러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비록 간성군에 통폐합되었을 지라도 상당한 독자성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도가 작성될 당시에도 縣內面이라는 명칭이 존재하는 것을 통해 볼 때, 열산현의 역사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에는 ‘古烈山’이라고 적혀 있다. 읍치를 포함하고 있었던 面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간성군 중심지에 있었다는 뜻으로 郡內面이라고 불렀다. 해안가에는 많은 潟湖가 보이고 있다. 潟湖란 급경사의 하천에서 운반된 토사가 바닷물의 힘에 밀려 쌓이면서 만들어진 호수를 의미한다. 석호 중 맨 위쪽의 抱津湖는 花津湖에 대한 誤記이다. 이외에도 명칭의 誤記가 더 보이고 있다. 맨 위쪽의 하천인 湖波川은 明波川의, 아래쪽 왼쪽의 彌時波는 彌時岺의 誤記이다. 이밖에 해안가에 표시된 섬(島)은 다른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보다 훨씬 크게 과장되어 있다.(이기봉)

  •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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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령현은 황해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甕津, 아래로는 海州로 이어진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용연면·봉구면·흥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황해남도 강령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일찍이 1428년(세종 10년)에 永康과 白翎을 합하여 康翎縣으로 삼았다. 읍치 동쪽에 古縣面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동쪽의 鳳凰山이다. 고을 남쪽의 登山串은 지금의 강령반도에 해당한다. 넓은 백사장이 발달해 있어서 고려 때 辛禑가 요동을 치러 갈 때 이곳에서 사냥하였다고 한다. 지도제작의 당시에는 사복시 소속의 목장과 둔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 이곳에는 登山串鎭이라는 수군 萬戶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인근의 巡威島로 옮겼다.(오상학)

  •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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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강화군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강화읍 관청리 일대에 있었다. 주도인 강화도 및 33개의 작은 섬으로 되어 있다. 본래 고구려 穴口郡인데 일명 甲比古次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해구로 고치고 원성왕이 혈구진을 두었다. 고려초에 강화로 고쳐서 현이 되고 1018년(현종 9)에 현령을 두었다가 1232년(고종 19)에 몽고군 칩입으로 왕이 이곳에 천도함을 계기고 군으로 승격하였고, 호를 江都라 하였다. 1270년(원종 11) 환도한 뒤 충렬왕 때에는 인천에 병합하였다가 곧 복구하였다. 고려시대 이래로 강화도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큰 비중을 가진 지역이었다.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여기에서 대장경, 청자상감을 완성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왕자와 그 권솔이 모두 이곳에 피난하였다. 대원군정권은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를 겪고 강화도에 砲軍과 砲臺를 설치하고 이를 유지할 군량을 확보해 새롭게 방어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그밖에도 강화도는 한말 일본 등의 침략 등 역사적 사건과 큰 관련이 있다. 구한말 섬 연안에 72개의 포대가 있었고, 병인양요 때까지는 史庫가 있었다. 읍치는 長令面에 있으며 현재는 府內面이다. 진산은 高麗山이다. 읍치를 지나는 大路는 동쪽으로 甲串으로, 남쪽으로는 德津과 草芝를 지나 바다로 연결된다. 강화 근해에는 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강화 연안에 포구와 곶이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강화가 군사요충지인 만큼 봉화와 산성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 중에서 남부에 鼎足山城은 1660년(현종 1)에 摩尼山의 사고를 이곳으로 옮겨서 실록을 비장하였던 곳으로 사고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 산성은 초지진과 가까워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史庫藏本을 탈취해 갔으며, 현재 이것은 프랑스 파리에 있다. 또 이 산에는 유명한 傳燈寺가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남부에 摩尼山이 있는데 현재 마니산 山上에는 단군의 제천지로 알려진 塹星壇이 있다. 지금은 여러 번의 修築으로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우나 중요한 단군의 유적이다. 강화도에 사우·영당·능원·사찰·암자·교량·봉수 등이 많이 있으나 이 지도에는 파악되어 있지 않다. (김지영)

  •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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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현은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서부면·구항면·은하면 전체, 광천읍의 광천리·담산리·가정리·내죽리·소암리·대평리·운용리·월림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결성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7리에 있었다’는 枰山이다. 고을의 왼쪽은 안면도와의 사이에 있는 천수만이며, 아래쪽은 바닷물이 읍치 동쪽까지 깊숙이 들어온 모산만이다. 위쪽의 하천은 현재도 臥龍川이라고 부른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현재도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廣川面이 보이고 있는데, 조선후기에 浦口로서 번성했던 곳이다. 현재의 보령시 천북면 아래쪽에 육지 쪽으로 깊이 들어온 바닷물 때문에 하천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배들이 들어올 수 있었다. 현재도 옛 포구의 전통이 남아 있어, 독특한 젓갈로서 유명하다. 읍치 아래쪽의 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보내기 위해 보관하던 海倉이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東庫·西庫가 각각 五間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왼쪽의 船泊處는 일반 선박이 정박하는 곳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곳에는 결성현 관할의 防船·兵船·伺候船이 각각 1척씩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밖에도 軍器庫와 什物庫도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의 서부면 판교리 수용동에 있었다.(이기봉)

  • 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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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弁辰의 甘文小國으로 경덕왕이 지금 이름인 개령으로 개칭하였다. 개령은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아포면, 감문면, 농소면, 남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개령은 율곡천과 鴨川(현 연봉천)이 읍치 남단을 흐르는 甘川에 합쳐져 선산을 지나 낙동강에 유입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감천에 아홉 군데의 보를 막아서 논에 물을 대어 水利가 가장 많다고 한다.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甘文山(일명 城隍山)이며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아래에 신라 법흥왕 때 阿道가 창건했다는 鷄林寺가 있었다. 감천변에 위치한 서원은 德林書院으로 1669년(현종 10)에 세워져 金宗直, 鄭鵬, 鄭經世를 배향하고 1697년(숙종 23)에 사액되었다. 농소면에 있는 高方寺는 현판 기문에 418년 아도화상이 直指寺와 함께 창건했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金烏山(976m)옆에 있는 扶桑驛은 북쪽에 있는 楊川驛, 성주의 踏溪驛과 연결되어 있는 역이다. (민경이)

  • 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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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경성군·청진부 전체와 명천군의 서면·동면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경성군·어랑군 전체와 청진시 서쪽 및 화성군 동쪽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경성군 경성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祖白山이다. 읍치가 파란색 정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이곳에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함경도는 최전방임과 동시에 면적이 넓어서 남병영·북병영 2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북쪽으로 통하는 도로변에는 輸城驛이 표시되어 있다. 붉은색의 원은 이 지도책에서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驛에 대한 일괄적인 표현 방식이다. 이런 驛을 道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輸城道로 표기된 경우도 많다. 고을의 모습이 실제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지도 위쪽의 ‘鏡城虛修羅峴’ 위쪽의 물줄기 부분이 이 고을의 소속으로 표시되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경성도호부 산천 부분에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는 虛修羅川의 기록에 근거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輿地圖書≫ 경성도호부읍지에는 허수라천이 등장하지 않으며, 김정호의 ≪大東輿地圖≫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이 고을의 땅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왼쪽 방향에 있는 長白山은 ‘5월이 되어야 눈이 녹고, 7월이 되면 다시 눈이 쌓인다’는 地誌의 기록을 반영하여 크고 희게 그려 넣었다. 이 장백산의 위치가 같은 책의 길주와 명천의 지도에는 세 고을의 경계선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거의 세 고을의 경계선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海東地圖≫ 경성부의 지도에서는 장백산 부분이 길고 희게 표시되어 있다. 장백산의 규모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안가 역시 현재와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지도 아래쪽에 보이는 束蓮塘(東蓮塘의 誤記)과 武溪湖가 잘못 표시되어 있다. ≪輿地圖書≫ 경성부읍지에 무계호는 남쪽 120리에, 그 위쪽에 표시된 江陵山은 남쪽 130리에 있다고 나온다. 따라서 이 지도와 지지의 기록과는 서로 어긋나고 있다. 단 같은 책의 경성부지도에는 이 지도와 동일하게 무계호를 표시하고 있어,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두 호수의 위치가 실제에 맞게 교정되어 있다. 북에서 남으로 뻗은 산줄기의 동쪽에 푸른색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총 6개의 鎭堡가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두만강과 현재의 함경산맥을 넘어온 적에 대한 2차 방어선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 동북쪽으로 富寧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는 사실이 적혀 있지 않고 있다.(이기봉)

  • 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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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도에서 표현한 지역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강계군·자성군·후창군에 해당된다. 현재는 자강도 강계시·시중군·만포시·성간군·자성군·중강군·화평군과 량강도 김형직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강계의 읍치는 강계시 남문동·동문동·북문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처음으로 萬戶를 두면서 공식적으로 고려의 땅이 되었다. 북쪽으로는 세종 때 이곳에 살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설치한 閭延·慈城·茂昌·虞芮의 四郡이 있었던 지역이다. 지도에는 ‘古○○’의 형태로 중심지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으며, 古慈城은 좀이 먹은 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보이고 있지 않다. 四郡은 여진족의 침입과 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단종 3년(1455)과 세조 5년(1459)에 차례대로 폐지되며, 고종 6년(1869)에 와서야 정식으로 고을이 설치된다. 四郡이 폐지된 후 이 지역은 보통 廢四郡이라 불리게 되었다. 강계와 폐사군의 경계선이 지도에는 압록강 변의 麻田川으로부터 읍치 동남쪽의 葱田岺까지 적황색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폐사군 지역에는 山川과 과거 四郡의 중심지 등만이 간단하게 묘사되어 있다. 폐사군 지역의 모양이 실제의 모양과 상당히 다르게 그려져 있다. 古虞芮와 中江川 부분이 실제와 다르게 서북쪽으로 튀어나가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 역시 동일하게 그려져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에 鄭尙驥(1678-1752)가 만든 ≪東國地圖≫ 계통의 지도들은 이 부분이 실제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또한 이런 계통의 사본들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김정호는 본 지도 계통의 것과 동일하게 그리고 있다. 압록강 변에는 滿浦鎭을 포함하여 3개의 鎭堡가 보이고 있으며, 내륙 쪽의 禿魯江 유역에도 鎭堡와 關門城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조선 정북 방향의 최전방임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四郡 지역의 압록강 건너편에는 많은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적의 예상 침입로이다. 다만 강계의 영역에서는 압록강 건너편에 지명이 하나도 보이고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 만포 맞은편에는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던 國內城이 있으며, 현재는 集安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의 地誌에는 이곳이 금나라의 도읍지였다고만 기록되고 있어, 고구려의 國內城 위치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國內城의 경우 義州에 있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으며, 평양을 중심으로 고구려 초기의 유적들이 분포한 것처럼 보는 것이 조선시대 기록의 대세이다. 지도에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俗字도 많이 보이고 있다. 만포진 아래쪽에는 夞怪面이 보이고 있는데, ‘夞’은 한자에는 없는 ‘욋’이라는 발음을 기록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만든 글자이다. 그 아래쪽에는 時時川·時時川面이 표시되어 있다. 時 다음의 표시는 같은 자가 반복될 경우에 사용한다. 그 아래쪽에는 ‘芦洞津’도 표시되어 있다. ‘芦’는 필사본에서 ‘蘆’의 속자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호’가 아니라 ‘노’로 읽어야 한다. 읍치 위쪽 봉수 명칭의 두 번째 글자는 ‘實’에 대한 속자이다.(이기봉)

  •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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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부는 강원도 강릉시 전체, 평창읍·미탄면을 제외한 평창군, 정선군의 임계면, 홍천군의 내면, 묵호항을 포함한 동해시의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강릉 시내 성내동과 용강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방향에 표시된 大關岺이다. 2장에 그려야 할 정도로 고을의 규모가 매우 크다. 첫째, 신라 九州의 하나인 溟州였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州·小京은 일반적으로 郡縣보다 영역이 넓었다. 둘째, 고려시대에 지방관이 파견된 主縣으로서 많은 屬縣을 거느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현 중 상당수가 지방관이 파견됨으로써 독립했지만, 連谷縣과 羽溪縣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를 지나면서 두 속현의 독자성은 사라지게 되고, 완전히 강릉의 영역으로 변모한다. 지도에는 이 두 현의 흔적이 동해안의 북쪽에 連谷面으로, 남쪽에 羽溪面으로 남아 있다. 현재 태백산맥이라 부르는 白頭大幹이 양양계로부터 五臺山으로 들어와 대관령을 지나고, 남쪽의 삼척계로 빠져나간다. 백두대간 서쪽의 하천은 모두 한강 유역에 해당된다. 內面 지역에 있는 하천은 모두 내린천으로서, 홍천강에 합류한 후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蓬坪面·芳林面에 있는 하천은 평창강의 상류로서, 평창읍을 지나 영월읍 서쪽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珍富面·道岩面에 있는 하천은 조양강의 상류로서, 정선읍을 지나 영월읍 동쪽에서 남한강이 된다. 이 지도는 몇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왼쪽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芳林面이라는 명칭은 기록에서 찾을 수 없으며, 大和面이라고 해야 한다. 둘째, 巨門面은 珍富面의 1개 里에 불과했다. 셋째, 臨溪面은 더 오른쪽의 素來洞 지역에 위치시켜야 한다. 또한 이 부분의 하천은 三陟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까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 오류는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오류가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넷째, 구정면이 끝나는 부분(丘井終面)은 高丹驛 부분이고, 고단역 역시 더 남쪽으로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동해안에는 작은 하천과 潟湖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백두대간 위의 五臺山은 특별히 강조되어 표시되지 않았으며, 그 아래쪽에는 5대 史庫 중의 하나인 오대산사고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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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은 황해도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고을로 동으로는 강원도 伊川, 북으로는 평안도 陽德, 동북쪽으로는 함경도의 安邊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곡산군 곡산면·도화면·서촌면·운중면·동촌면·청계면·화촌면·멱미면·봉명면·상도면·하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세림리와 사현리 및 도전리 일부를 제외한 곡산군 전지역, 신평군 지역에 해당한다. 본래 고구려 十谷城이었는데 조선 태조 때 神德王后 康氏의 고향이어서 谷山으로 개명하고 府로 승격시켰다. 대동강의 지류인 能成江이 고을을 휘돌아 나가면서 평양까지 이어진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수안·신계·토산과 더불어 만첩 산중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고 백성이 어리석으며, 골짜기가 깊숙하여 도둑이 많은 까닭에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와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적다고 한다. 읍치 북쪽 대로변에 위치한 文城은 中宗 때 萬戶를 설치하고 숙종 때 僉使로 승격되었던 文城鎭인데, 마름모꼴의 기호로 표시되어 있다. 원래는 그 아래쪽에 舊文城이라 표시된 곳에 있었다.(오상학)

  •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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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서북부에 위치한 개성은 고려의 서울로 일명 松嶽, 松都, 開京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왕경을 정하고, 1394년(조선 태조 3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년)에는 개성부가 되고 1906년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는 다시 송도면 전부와 청교면 내의 덕암리 등을 떼어서 개성부를 세웠고 부외의 땅으로 개풍군을 신설하였다. 현재 개성직할시의 행정 중심지이며, 개성시, 개풍군, 장풍군 등을 관장한다. 왼쪽에 보이는 강이 예성강이고, 오른쪽으로 임진강과 한강과 만나 강화도 쪽으로 빠져나간다. 鎭山은 松岳山이며, 송악산을 중심으로 성곽이 그려져 있다. 성곽을 중심으로 도로가 표시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의 왕궁터인 滿月臺(고적 15호)가 표시되어 있다. 만월대는 규모가 크고, 높은 지대를 이용한 것이 특색이다. 여러 문을 거쳐 正殿이 있었으며, 고려 말기쯤 불에 타버렸다고 알려진다. 고려의 충신 鄭夢周(1337~1392)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음을 당했던 돌다리인 善竹橋(국보 154호)가 표시되어있다. 성곽 바깥쪽으로는 중요한 산천명이 주로 표시되어 있다. 성곽의 북쪽에 靑石洞은 유사시 서북지역으로부터 대대적인 외침이 발생할 경우 적이 서울로 진입하려 할 때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곳으로 일찍부터 그 군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었던 곳이다. 개성 북방에 있는 大興山城은 원래 고려시대의 피난성 이었으나, 조선 숙종 때(1675~1720)에 개축되었다. 산성은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중앙부에는 골짜기가 흘러 절경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문인·묵객이 많이 모여들었다. 서쪽으로 利示浦, 錢浦가 있으며 전포 아래쪽에 고려 때 가장 번창한 항구였던 碧瀾渡 등 포구가 표시되어있다. (김지영)

  •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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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목은 충청남도 공주시 전체, 연기군의 금남면과 종촌리·송담리를 포함한 남면의 서남쪽,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복룡동·상대동을 포함한 북쪽과 도룡동·덕진동을 포함한 서쪽 지역, 서구에서 복수동을 포함한 북쪽과 갑천 서쪽 지역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공주시내 반죽동 일대에 있었다. 공주가 이렇게 큰 고을이 된 것은 고려시대 때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主縣이었기 때문이다. 主縣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많은 屬縣(縣·鄕·部曲·所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중 麗末鮮初를 지나면서도 독립하지 못한 속현들은 대부분 독자성을 상실하고, 주현의 영역이 되었다. 儒城縣은 조선 초까지도 독자적인 屬縣으로 존재했는데, 지도 오른쪽에 儒城倉이 있는 곳의 縣內面이란 명칭을 통해 그런 역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왼쪽 위에 古新豊이라 적혀 있는 곳이 옛 新風縣의 지역이었으며, 面 이름의 첫 글자에 ‘新’이란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美花部曲도 현내면 동남쪽에 보이고 있다. 선조 31년(1599)에 충청도 監營을 충주에서 이 고을로 옮겨 왔다. 지도에 읍치가 붉은 색의 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감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책 내의 다른 고을의 지도는 읍치를 붉은 색의 원으로 표시하였다. 읍치 바로 북쪽에는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公山城이 雙樹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조가 ‘이괄의 난’(1624) 때 피난하였다가 ‘雙樹石築’이란 이름을 붙이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9개의 屬驛을 거느린 利仁驛은 붉은 색의 원으로 표시하여 다른 역과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금강은 오른쪽(동쪽)에 懷德界라고 쓰인 부분으로 들어와 읍치 북쪽을 돌아 왼쪽(서쪽)으로 빠져나간다. 금강에는 津(나루)과 灘(여울)이 여러 개 기록되어 있는데,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熊津은 신라 때는 西瀆으로, 조선에서는 南瀆으로 여겨졌다. 祀典에 中祀로 기록되었으며, 봄·가을에 香과 祝文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오른쪽의 鷄龍山은 신라에서는 西岳으로 여겨 中祀를, 조선에서는 小祀를 거행하였다. 기타 지도 위쪽에는 후에 車嶺山脈의 명칭이 유래된 車嶺이 보이고 있다. 서울-제주 사이의 大路가 오가는 길목이다.(이기봉)

  • 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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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법흥왕 때에 周奴國으로 伽倻國에 예속되었다. 가야국이 멸망한 후 문무왕이 裳州郡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인 거제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에 거제군이 되어 1909년(융희 3)에 府郡廢合時 통영군에 속하였다가 다시 거제군으로 되어 오늘에 이른다. 거제는 우리나라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인 거제도와 그 주변 섬들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거제시 거제면, 둔덕면, 사등면, 연초면, 하청면, 장목면, 일운면, 신현읍, 동부면, 남부면 등 거제시 전체에 해당되며,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있는 鷄龍山(554m)이 鎭山이며, 최남단에 있는 加羅山(585m)에는 목장이 있으며 일본 대마도를 바라보는 곳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서원은 盤谷書院으로 1704년(숙종 30)에 세워져 宋時烈(1607~1689), 金鎭圭(658~1716), 金昌集(1648~1722)을 배향하였으나 사액되지 못했다. 거제는 지리적인 위치상 왜구의 침략이 빈번하여 방어를 위한 성곽의 축조가 활발한 지역 중의 하나이다. 읍치 북쪽에 있는 古縣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石築으로 그 둘레가 2천 5백 11尺 6寸이다. 玉浦鎭은 1488년(성종 19)에 성곽을 쌓았고 그 둘레가 1천 74척이며 우물 하나와 池 하나가 있었다. 知森島 아래에 있는 知世浦鎭은 임진왜란 후 邊浦에 있다가 후에 다시 지금의 鎭으로 옮겼고 그 둘레가 1천 6백 5尺이었다. 가라산 왼쪽에 있는 栗浦堡는 1664년(현종 5)년에 고성의 右水營 옛 터 남쪽에 있었는데 1677년(숙종 13)에 지금의 위치에 옮겼다. 그 외 永登浦鎭, 長木浦鎭, 助羅浦鎭, 所非浦堡 등 모두 해안방어를 위한 진보들이며, 그 성곽의 크기는 내륙에 있는 성곽의 크기보다 상대적으로 적다. (민경이)

  • 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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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원부는 일제시대의 용덕면·유신면의 동쪽 일부를 제외한 경원군과 온성군의 훈융면, 경흥군 웅기읍·나진부의 일부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의 서쪽 일부를 제외한 새별군과 은덕군 서북부, 나진시 동북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함경북도 새별군 성내리에 있었다. 고을 전체의 모습과 두만강의 곡류 부분은 실제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海津社는 현재의 라진시 동쪽 일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이 지도에는 해진사까지 경원부의 땅이 좁게나마 계속 이어진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해진사는 온성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로 보아야 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는 越境地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 방향에 있는 甑山의 경우 같은 지도책의 종성 지도에는 위치가 잘못 표시되어 있었는데, 이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도 위치가 잘못 표시된 지명이 일부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 방향에 있은 安原川은 農圃川으로 바뀌어야 하며, 안원천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安原堡 아래쪽 하천에 기입되어 있어야 한다. 안원사 오른쪽의 龍堂은 두만강에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豆滿江神祠이다. 조선에서는 이곳을 北瀆으로 지정하였으며, 祀典에 中祀로 기록하였다.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시된 鎭堡가 네 곳이나 보이는 등 국경으로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지도이다. 두만강 변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古乾原社·古阿山社 등의 이름을 통해 鎭堡가 두만강 변으로 전진 배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이기봉)

  • 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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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현은 삼등면과 강동면의 동쪽 일부를 제외한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동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양시 삼석구역·승호구역의 동쪽과 강동군의 서쪽에 걸쳐 있다. 읍치는 강동군 강동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大朴山이다. 이 고을은 고려 인종 14년(1136)에 仍乙舍鄕·班石村·朴達串村·馬灘村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대동강 본류인데, 지도에는 錢浦라고 되어 있다. 대동강으로 흘러드는 각 지류의 명칭이 자세히 적혀 있다. 아래쪽의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로, 현재는 남강이라 불리고 있다. 역사기록에는 能成江·能城江·綾城江으로 나오는데, 지도에는 能將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명칭은 각종 地誌에서 찾을 수 없으며, 김정호의 ≪大東地志≫에는 능장천 대신에 能將山이 보이고 있다. 읍치 왼쪽의 古邑面은 강동의 구읍치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土築의 성곽이 있었다고 하며, 둘레 5,759척(약 1,728m)의 중형 정도였다. 이곳은 몽고군에게 쫓긴 거란족 5만여명이 高麗·몽골·東眞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강동성 싸움(1219)으로 유명하다. 이 때가 고려와 몽골의 첫 교류이며, 이후 얼마 안 있어 몽골의 대대적인 침입이 시작된다. 이 성곽은 강변의 절벽을 배경삼아 만들어졌는데, 지도상의 읍치로 옮긴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이기봉)

  •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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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군은 일제시대의 고성군 고성면·외금강면·서면·수동면과 장전읍의 성북리 일부에 해당된다.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고성읍(장전항) 남쪽의 강원도 고성군이다. 읍치는 고성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방향에 표시된 全城山이다. 지도 왼쪽에 金剛山을 다른 산보다 조금 크게, 그리고 흰색으로 강조하여 표시하였다. 그러나 금강산의 위치가 지도보다는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며, 읍치를 기준으로 정 서쪽에 있어야 한다.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하천의 표시에서도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 첫째, 溫井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더 작아야 한다. 둘째, 南江 중 아래쪽의 揷峙에서 북류하는 부분은 1/3 정도로 작게 표시해야 한다. 셋째, 狗岺에서 남류하는 부분은 3-4배에 이를 정도로 길게 그려야 한다. 금강산에 표시된 圓通은 圓通寺를 의미하며, 新溪寺·鉢淵寺 등과 더불어 유명한 古刹이다. 이러한 사찰이 입지한 지역을 보통 外金剛이라고 하며, 바닷가에 수려한 경치가 펼쳐지는 지역을 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듯이 海金剛이라고 한다. 해금강에는 關東八景의 하나인 三日浦와 七星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七星峯이 특별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삼일포 오른쪽의 섬 모양은 실제의 지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실재로 읍치 부근은 서쪽의 급경사 하천으로부터 공급된 모래에 의해 유로가 복잡한 형태로 되어 있다. 읍치 부근도 실재로는 거의 섬에 가깝다. 그 오른쪽에 있는 섬은 여러 가지 모양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松島로 추정되며, 실제보다 훨씬 확대되어 그려져 있다. 해안가 아래쪽의 ‘鳴沙’는 ‘우는 모래’란 뜻으로, 이곳에 발달한 모래언덕(砂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이 모래언덕에서 모래들의 이동이 자주 일어난다. 이 지도에는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자성을 완전히 잃고, 이 고을로 속하게 된 廢縣의 흔적도 표시되어 있다. 위쪽에 표시된 古豢徦는 환가현의, 아래쪽에 표시된 安昌面은 안창현의 흔적이다. 기타 읍치 왼쪽 방향에 표시된 溫井은 현재도 外金剛溫泉으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이기봉)

  • 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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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군은 개성에서 황주에 이르는 海西 直路에 위치한 고을로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금천군 금천면·고동면·산외면·서북면·우봉면·웅덕면·구이면·좌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강북리·강남리·양합리·용성리를 제외한 금천군 전체, 봉천군 신명리·황룡리·도산리·백석리·연홍리·능촌리, 평산군 예성리와 기탄리, 토산군 서쪽 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금천군은 군명이 자주 바뀌고, 읍치의 이동도 많았던 고을이다. 원래 牛峰縣이었는데 1651년(효종 2)에 江陰縣을 병합하여 金川郡으로 승격시키고 읍치는 吾早川의 남쪽에 두었다. 이후 1678년(숙종 4)에 읍치를 猪灘의 남쪽으로 옮겼다가 1753년(영조 29)에 읍내의 水土가 나쁘다 하여 다시 오조천의 남쪽으로 옮겼다. 후에 다시 저탄의 남쪽으로 옮겼는데 지도에도 과거의 牛峰과 江陰의 치소가 각각 古江陰, 古牛峰 등으로 표기되어 있고, 구읍치가 屈押里에 古邑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개성에 이르는 남북 직로상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지만 다른 지방에서 흘러와 사는 사족이 조금 있는 편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瘴氣가 있었는데 근래에는 더욱 심해 살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 평하였다. 古江陰 지역의 강가에는 助浦가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유명한 助浦倉(혹은 助邑浦倉)이 있었는데, 황주·서흥·평산·봉산·곡산·수안·안악·재령·신계·토산·우봉·강음 12읍의 전세를 수납 보관하였다가 서울로 漕運하였던 중요한 漕倉이었다.(오상학)

  • 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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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치는 고양시 고양동에 위치해 있다. 읍치 남쪽에 있는 벽제역은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이 역에서 유숙하였던 역이다. 이 지역의 하천은 벽제천이 흘러드는 곡릉천으로 교하를 지나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벽제역 주변으로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고양은 수도 한양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무덤이 많다. 지도에는 오릉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예종의 무덤인 창릉과 홍릉, 경릉, 익릉, 숙종의 무덤인 명릉을 뜻한다. 이 밖에도 고려 공양왕의 무덤과 월산대군묘, 태릉, 효릉, 회릉의 서삼능이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아래쪽의 하천은 창릉천으로 한강으로 흐른다. 이 강구에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행주산성 위치하고 있다. 군사적인 측면으로 봉수가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高峯烽을 시작으로 鹽浦烽으로 이어져오는 봉수는 교하에서 이어져오는 봉수신호가 이곳을 지나 서울의 무악봉수로 연결하게 되어 있다. 書院은 閔純(1520-1591), 南孝溫(1454-1492) 등을 배향하여 1709년(숙종 35)에 賜額받은 文峯書院으로 추정된다. 고양 이외에 수도 한양의 면과 지도가 표시되어 있으며 양천의 공암진이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인접 지역의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김지영)

  • 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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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군은 충청북도 괴산군의 괴산읍·소수면·사리면·문광면·칠성면 전체, 감물면의 오창리, 불정면의 신흥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오른쪽을 흐르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으로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간다. 읍치 위·아래에 보이는 南川·北川이란 명칭은 전국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읍치를 고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읍치를 기점으로 명칭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面의 이름에도 이와 같은 방식이 많이 나타난다. 이 지도에도 東西南北이 面의 명칭에 나타나고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보는 사고를 잘 보여주고 있다. 面은 조선 중기에 인위적으로 만든 행정단위이기 때문에 고유한 지명보다는 동서남북과 같은 관념적인 명칭을 붙인 경우가 많았다. 西面 지역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보강천의 상류에 해당된다. 달천 가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빈번하게 이용된 槐津이 표시되어 있다. ‘津’은 나루임과 동시에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괴진이라 부른 것은 아니다. 槐津은 우리말 ‘느티울나루’에 대한 한자 표기였을 뿐이다. 일제시대 이후 마을단위 이하에서도 한자표기가 공식적인 행정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말 명칭보다는 한자 명칭의 사용빈도가 높아지면서 우리말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경우가 빈번하게 되었다. 괴진 아래의 花岩書院은 李滉(1501-1570)·盧守愼(1515-1590) 등을 배향하여 광해군 14년(1622)에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이기봉)

  •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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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居烈郡이라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 때 처음으로 지금의 이름인 거창으로 개칭하였다. 거창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주상면, 웅양면, 남하면, 남상면, 고제면, 가조면, 가북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 일대에 있었다. 거창은 황강의 상류지역에 위치하고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침식분지 안에 형성된 대표적인 지역이다. 황강과 위천이 만나는 거창분지 중심에 읍치가 있고, 가조천이 흐르는 가조분지 중심에 古加祚가 있다. 거창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乾興山이며, 三峯山(1254m)은 전라북도 무주와 경계가 되는 산이다. 고제면에 있는 浣溪書院은 1664년(현종 5)에 세워져 金湜을 배향하였으며 1670년(현종 11)에 사액되었다. 紺岳山(951m) 아래에 있는 演水寺는 802년(신라 애장왕 3)에 감악조사가 세웠고, 사찰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바위구멍에서 샘물이 나오는데 신라 헌강왕이 중풍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巨末屹烽 옆에 있는 省草驛은 星奇驛, 茂村驛 그리고 지례의 頭谷驛과 연계되고, 거말흘봉은 남쪽에 있는 金龜山烽과 지례의 龜城山에 응한다. (민경이)

  • 경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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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흥부는 일제시대의 웅기읍을 제외한 경흥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은덕군의 동쪽 부분과 라선시의 동쪽 부분에 걸쳐 있다. 읍치는 은덕군 사회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에는 읍치의 위치가 다른데, 순조 33년(1833)에 이 지도 위의 撫夷鎭 지역으로 읍치를 옮겼기 때문이다. 두만강과 바닷가의 굴곡 모습은 ≪海東地圖≫의 경흥부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읍치 아래쪽의 鯉遊池나 지도 아래쪽의 烏碣石은 ≪海東地圖≫의 경흥부 지도나 ≪新增東國輿地勝覽≫·≪輿地圖書≫ 등의 地誌 부분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이다.  이 지명은 ≪輿地圖書≫에 함께 수록된 慶興府地圖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 보았을 때 이 지도는 여러 가지 地圖와 地誌를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지도와 지지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상호 보완하는 작업이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앞의 두 지도에는 읍치 왼쪽 방향의 農耕川이 온성과의 경계선을 발원지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서≫에는 농경천이 읍치 왼쪽 아래 방향에 있는 松眞山의 서쪽에서 발원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을 통해 농경천이 온성쪽에서 발원하여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교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안가에 있는 섬은 이 책의 다른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와 크기가 너무 다르다. 이것은 섬의 크기에 대한 정보가 地誌에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위치 역시 틀린 부분이 발견되고 있지만, 대략적인 방향이나 거리 등은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두만강과 해안가의 굴곡이 매우 단순해지고 있다.(이기봉)

  • 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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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동진면·성암면·대산면·쌍룡면·보림면·잉차면·초리면 전체와 수산면 서쪽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는 남포시 강서구역·대안구역과 증산군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강서구역 덕흥동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舞鶴山(347m)이다. 이 고을은 인종 14년(1136)에 西京 경내의 梨岳·大垢·甲岳·角墓·禿村·甑山 등의 鄕을 합해 만들어졌다. 이 중 증산은 태조 3년(1394)에 독립적은 고을로 떨어져 나갔다. 오른쪽에 보이는 큰 하천이 대동강 본류이며, 읍치를 통해 합류하는 것은 봉상강이다. 위쪽의 閑龍面 지역은 수계가 다르다. 지도에는 일부 잘못 필사된 글씨가 보이고 있다. 고을 위쪽의 永川里는 水川面에 대한 誤記이다. 왼쪽의 席匹面은 席匠面에 대한 잘못된 기록이다. 이와 같은 오류는 글자가 유사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지도 작성자가 地誌를 근거로 만들면서 생긴 오류라고 생각된다. 읍치 왼쪽의 書院은 鶴洞書院이다. 은퇴하고 이 고을에 내려와 살았던 金泮을 배향하여 숙종 10년(1684)에 세워지고, 같은 왕 12년(1686)에 賜額 받았다. 조선후기에는 평안도 사람이 높은 벼슬에 진출한다는 것이 어려웠지만, 조선전기에는 달랐다. 김반은 정종 1년(1399)에 과거에 급제한 조선초기의 인물이다. 기타 읍치 부근은 고구려의 중기 경에 만들어진 돌방무덤(石室墳)이 많이 발견되는 지역이기도 하다.(이기봉)

  • 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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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현은 일제시대의 김화군 원동면·원남면·원북면·금성면·창도면·통구면에 해당되며, 현재의 북한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김화군과 창도군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김화군 김화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慶坡山이다. 북쪽의 淮陽界로부터 들어와 남쪽의 狼川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북한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連松浦·菩提灘으로 표시되어 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한자 표기로서 꼭 포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물가’라는 뜻을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灘’은 우리말 ‘여울’에 대한 한자 표기로서, 경사가 급해져 물살이 빨라지는 하천 구간을 의미한다. 이런 곳은 물의 깊이가 얕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浦와 灘은 보통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동쪽에서 흘러와 북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금성천이라고 부른다. 지도에는 南大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조선시대에 이러한 명칭은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았다. 하천의 명칭 부여가 읍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며, 일제시대에는 이런 명칭의 하천 중 상당수를 고유한 지역명칭으로 바꾸었다. 面의 이름 중 방향과 관계없는 것이 2개가 나오고 있다. 북쪽의 歧城面은 옛 歧城縣의 명칭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동쪽의 通津縣은 옛 通溝縣의 이름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通溝面의 誤記이다. 그 왼쪽의 任南面에서 ‘任’은 ‘任內’라는 뜻에서 온 것이다. 통구현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으로 적혀 있는데, 이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곳을 보통 ‘任內’라고 하였다. 任南面은 ‘任內인 통구현의 남쪽에 있는 面’이라는 뜻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封山은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을 지칭한다.(이기봉)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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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현은 황해도 서쪽 구월산 아래에 위치한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문무면·용진면·산천면·궁흥면·문화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삼천군 중·북부, 안악군 서부, 신천군 건산리·용산리·화산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황해남도 신천군 건지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금의 삼천군 고현리에 있었으나 癘疫이 자주 돌자 1520년(중종 15)에 乾支山 남쪽으로 옮겼다. 고을의 鎭山은 건지산으로 지도에서도 읍치의 뒤편에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각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고을의 북쪽에는 이 지역 최고의 관방인 九月山城이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석성으로 조선시대에 수축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의 둘레가 4백보이며 형태가 큰 배와 같았고, 남북으로는 통행로가 없으며 동서로 다만 구름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지형은 성 서쪽의 양편이 깎아세운 듯이 우뚝 솟아 마치 문의 모양 같은 산이 있고, 모든 골짜기에서 나오는 물이 문 밖으로 흘러나가서 폭포가 되는, 실로 천연의 요새지였다. 守城將은 은율현감이 겸임하고, 별장 1인을 두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두 개의 서원은 鳳崗書院과 程溪書院이다. 前者는 1656년(효종 7)에 세워져 1675년(숙종 1)에 사액되었고, 後者는 1670년(현종 11)에 세워져 1708년(숙종 34)에 사액되었다.(오상학)

  • 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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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서초구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읍치 남쪽으로 仁德川이 흐른다. 읍치의 북서쪽에 위치한 관악산이 진산이다. 변계량의 시에 산은 관악과 연하고, 물은 청계로 내려간다는 것으로 과천의 형국을 표현하였다. 동쪽에 보이는 良才는 驛으로 12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북쪽에 露梁은 한강 하류의 나루로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는 노량진이고, 銅雀 역시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는 나루였다. 이 지역에는 愍節書院(숙종때 세워진 서원으로 死六臣이라 칭하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가 누명을 벗고 벼슬과 시호를 받음),  鷺江書院, 四忠書院 등 다수의 서원이 있다. (김지영)

  • 남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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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현은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웅천읍·주산면·미산면·성주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남포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九龍山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현재 웅천으로 부르는 大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우리말 ‘한내’에 대한 한자 표시이다. 이 명칭은 해당 고을에서 가장 크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서 자주 사용되는 하천의 이름이다. 읍치 오른쪽에는 橫川所가 특별하게 표시되어 있다. 所 역시 鄕·部曲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까지는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다가, 조선 초에 오면서 독자성을 상실하고 面里體系로 개편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가 18세기까지 전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역사성이 깊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오른쪽 아래의 深田面도 樸坪所가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는 孤雲碑가 표시되어 있다. 孤雲은 신라말기의 유명한 학자였던 崔致遠(857-?)의 호이다. 그리고 孤雲碑란 최치원이 지은 郎惠和尙白月寶光塔碑를 의미한다. 이 탑은 聖住寺趾에 있으며, 현재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주사는 신라 흥덕왕 2년(827)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禪宗九山의 하나였다. 현재 성주면 성주리에 있었다. 기타 해안가에 있는 섬의 경우 거리와 크기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그려져 있기 때문에 이 지도의 내용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이기봉)

  • 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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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압량산국(押梁山國)으로, 일명 押督이라고도 했다. 신라 경덕왕 때 獐山이라 칭하고, 충선왕 때 경산으로 개명하였다. 1391년(공양왕 3)에 왕비 순비 노씨의 고향이라 하여 慶山郡으로 승격하였다. 그 후 조선 태조 때 도로 현으로 내려갔다가 대구부 속현이었던 河陽과 안동부의 속현이었던 慈仁이 각각 1607년(선조 40)과 1637년(인조 15)에 복귀되고 1895년(고종 32)에 경산, 하양, 자인을 합하여 郡으로 승격하였다. 경산군은 현재 경산시 동부 자인면을 제외한 압량면 남천면, 남산면, 대구광역시 동구 남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경산군은 孤山, 城山, 金城山(428m) 등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금호강과 그 지류인 南川이 흐르고 있다. 읍치는 남천의 동쪽에 있는 邑內面으로 현재 경산시 삼남동, 서상동, 상방동 일대에 해당된다. 경산군을 지나는 도로는 押梁驛을 중심으로 주변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압량역은 옛 압독국 터로 동쪽으로 慈仁山驛, 서쪽으로는 대구 凡於驛, 남쪽으로는 청도 省峴驛, 북쪽으로는 하양 華陽驛과 이어진다. 읍치의 북측에 위치한 城山烽燧는 북쪽의 대구 法伊山烽燧와 하양군 匙山烽燧에 전달하여 준다. (민경이)

  • 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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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원군은 운곡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고원군에 해당되며, 지금도 일부를 제외한 함경남도 고원군이다. 읍치는 고원군 고원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10리에 있었다’는 椵山이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모습이 실제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을 현재 덕지강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도에는 德之灘·神堂淵·長湖浦라고 적혀 있다. 灘은 급경사로 물살이 빠른 곳을 가리키는 우리말 ‘여울’에 해당되며, 淵은 연못처럼 잔잔한 부분을 의미하는 우리말 ‘못 또는 쏘’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浦는 ‘물가’를 가리키는 우리말 ‘개’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浦口를 의미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전통시대에 이 세 개의 문자는 모두 하천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사용되었다. 아래쪽의 하천은 전탄강의 지류로서, 역시 仇寧浦·龍窖淵으로 적혀 있다. 지도에 자주 보이는 社는 함경도 지방에서 面이란 용어 대신에 사용되던 것이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주로 坊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밖의 인문정보로는 倉庫·驛站·道路 등만 간략히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 아래에는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도 보이고 있는데 載靈山이다.(이기봉)

  • 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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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개천군 중 봉동면의 남쪽 부분을 제외한 지역과 순천군 내남면에 해당되며, 현재도 개천시와 순천시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개천시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大林山이다. 읍치 위쪽에는 청천강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가는데, 지도에는 花川江·犇灘이라고 적혀 있다. 灘(여울)이란 경사가 심하고 물살이 빠른 하천 구간을 의미하며,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지도 아래쪽에는 대동강이 동쪽에서 들어와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읍치 바로 아래쪽을 흘러 나가는 하천은 南川이라고 불렀으며, 현재는 개천강이라 한다. 남천 상류에는 小等淵·釜淵 등이 표시되어 있다. 부연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으며, 祈雨祭를 지내던’ 곳으로 지지에 기록되고 있다. 기우제는 물이 풍부한 곳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런 대표적인 곳이 바로 연못이었다. 지도 아래쪽에는 다이아몬드 모양과 金城鎭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지도책에서는 군사기지인 鎭堡를 일률적으로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시하였다. 金城鎭에는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되었다. 지지에는 金城鎭과 金城堡라는 명칭이 혼재되어 나오는데, 종9품의 별장이 파견된 경우라면 금성보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面의 명칭에서 일부 오류가 발견된다. 첫째, 읍치 지역에 있었던 郡內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둘째, 中西面이 2개 기록되어 있는데, 오른쪽 아래의 것은 中南面이라고 표시해야 한다. 셋째, 내남면 오른쪽의 粘石面이라는 명칭은 지지에서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명칭 기재의 오류는 이 지도가 지방에서 제작되었다기보다는 중앙에서 여러 지도와 지지 등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기타 고을 전체의 모습이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나, 동쪽으로 튀어나간 북면과 외동면 지역은 약간의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이기봉)

  • 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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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화현은 일제시대의 강원도 김화군 김화읍·서면·근남면·근동면·근북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휴전선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남한 부분은 철원읍에, 북한 부분은 김화군에 속해 있다. 읍치는 남한의 김화읍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방향에 있는 五申山(1,062m)이다. 본 지도에 나타나 있는 하천은 한탄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강원도의 다른 지도에 비해 이 지도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하천에 대한 명칭의 기록이 아주 자세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輿地圖書≫의 각 邑誌 중 金化 부분이 하천에 대해 특별히 상세하게 기록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도에 나오는 모든 하천의 명칭은 ≪輿地圖書≫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지도 작성자가 그 기록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읍치왼쪽에 있는 忠烈祠는 병자호란 때 平壤監司로서 이 고을에서 전사한 洪命耉를 배향하여 세운 것이다. 읍치 왼쪽 바로 아래의 붉은색 작은 원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리하던 銀溪驛을 표시한 것이다. 察訪驛에 대한 이와 같은 표시는 이 지도책의 모든 곳에서 적용되고 있다. 강원도의 다른 고을 지도에 비해 마을(里)의 이름이 매우 적게 표시되어 있다. 二東面에 기록된 水治里는 水泰里의 誤記로 생각된다.(이기봉)

  • 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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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와 인접한 고을로 동쪽으로는 예성강에 연해 있고 남쪽은 바다와 접해 있다. 고려시대에는 경기도 소속이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연백군 동부지역이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역구도·추정리·수원리를 제외한 배천군 전지역에 해당한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1리에 위치한 雉岳山으로 최고봉은 望德峰이다. 인근의 平山과 더불어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살만한 곳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바다와 접해 있어서 배를 이용한 장사로 이익을 얻는다고 했다. 배천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있는 온천의 뜨거운 물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서울과 의주를 연결하는 義州路가 지나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예성강 하구에는 碧瀾渡가 있었고, 金谷浦에 있었던 金谷倉은 해주를 위시하여 12읍의 稅穀을 모아 京江으로 보내던 조창이었다. 고을 서쪽의 江西寺는 見佛寺라고도 하는데 僧 惠素가 거주하면서 金富軾과 친분을 유지했던 곳이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서원은 文會書院인데,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불탄 후, 1606년(선조 39)에 重建되고, 1628년(인조 6)에 사액되었다. 이이·성혼·조헌 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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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부는 지금의 남종면을 제외한 광주군 전체와 남양주시 와부면·조안면, 성남시, 하남시, 서울특별시 강남의 경부고속도로 동쪽, 의왕시, 안산시 성포동 동남쪽, 화성군 매송면의 서쪽에 해당한다.  읍치는 원래 하남시의 교산동 일대에 있었는데 1626년(인조 4)에 광주군 중부면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1917년에 광주면 경안리로 치소가 옮겨졌다. 원래의 읍치는 남한산성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에는 경안에 읍치가 있다. 한강이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古浪이 지금의 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한강의 지류인 炭川, 穿呼川, 小川이 파악되어 있으며, 강변에는 다수의 나루와 누대가 표시되어 있다. 북쪽에 위치한 서원은 龜岩書院이며, 서쪽에 보이는 서원은 秀谷書院이다. 이 지역에는 성종의 능인 宣陵, 중종의 능인 靖陵을 비롯한 왕릉과 신하들의 묘소가 많이 분포하고 있으나 지도에는 태종의 능인 獻陵만이 파악되어 있다. 또한 奉安驛, 德豊驛, 板橋驛, 楸峴驛 등 많은 역이 표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慶安지역에 慶安驛은 지금 광주읍이 있는 곳으로서 7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김지영)

  • 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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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산현은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광석면·상월면 전체, 부여군 초촌면의 진호리·송정리·소사리·산직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노성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었던 魯城山(또는 魯山)이다. 니산현은 정조(1776-1880) 초에 魯城으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에, 고을 이름을 통해 古地圖의 연대를 파악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지도 위쪽의 木谷面은 禾谷面이 잘못 기록된 것이다. 아울러 일반인이 알아보기 어려운 俗字도 몇 개 보이고 있다. 지도 왼쪽 위의 ‘○坪’은 ‘乾坪’이며, 아래쪽의 ‘○石面’은 ‘廣石面’이다. 지도에는 지명이 모두 한자로 표시되어 있지만 당시에도 현재의 한자음으로 읽었다고 볼 수는 없다. 확인되는 몇 가지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水湯川에서의 ‘水湯’이란 우리말 ‘말구렁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石橋川에서의 ‘石橋’는 ‘섶다리’ 또는 ‘삽다리’의, ‘草浦’는 ‘풋개’의, ‘論山 ’은 ‘논미’ 또는 ‘놀미’의 한자 표기이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 때로는 한자의 음을, 때로는 뜻을 따서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草浦의 경우 포구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이었으며, 부근에 입지한 마을 이름이기도 했다. 기타 읍치에 있는 闕里祠는 숙종 12년(1686)에 공자의 影幀을 봉안하여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지내던 곳이다.(이기봉)

  •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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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는 신라의 옛 서울로 신라의 유적이 풍부하기로 이름이 높다. 영일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兄山江 상류에 펼쳐진 평야를 중심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성곽을 이룬 지형이다. 고려 태조 때 경주라는 명칭이 최초로 사용되었고, 성종 때 東京이라 하여 開京(개성)·西京(평양)과 함께 三京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경주는 지금의 경주시 전체, 포항시 죽장면, 신광면, 기계면, 기북면, 울산광역시 두서면 지역과 영천시 임고면, 고경면, 북안면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경주시내 동부리에 있었다. 경주의 鎭山은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읍치 동쪽에 있는 明活山 부근 나지막한 狼山(100m)이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吐含山(745m)은 신라 때 東嶽이라 하였고 中祀를 거행하였으며, 서쪽의 仙桃山(380m)은 西嶽(혹은 西述, 西兄, 西鳶), 남쪽의 含月山은 南嶽, 북쪽의 金剛山은 北嶽이라 각각 일컬었다. 남쪽의 金鰲山(466m)은 南山이라고도 하는데 그 빼어난 자연경관은 唐나라의 顧雲이 崔致遠에게 지어준 시에 잘 나타난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斷石山(827m)은 月生山이라고도 하며, 속설에 신라의 金庾信(595-673)장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新劍을 얻어 이 곳에서 검술을 수련하느라 칼로 벤 큰 돌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져 있다고 한다. 읍치 아래에 있는 月城 (혹은 半月城, 新月城, 在城)은 생긴 모양이 초생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大東地志≫에 의하면 101년(신라 婆娑王 22년)에 궁성으로 축성하여 935년(신라 경순왕 9)까지 약 900년간 신라를 다스리던 宮城이었다. 울산 경계에 접하고 있는 鵄述岺은 신라 때 朴堤上이 倭國에서 피살되어 그의 아내가 이 재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울다가 죽었다고 한다. 茵薄山은 속설에 김유신이 寶劍을 휴대하고 깊은 동굴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告由하여 병법을 기도하던 곳이다. (민경이)

  • 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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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주목은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길주군·학성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길주군·김책시와 화대군의 서쪽 일부이다. 읍치는 길주군 길주읍에 있었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실제와 거의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 나오는 길주 지역의 지도도 이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안에 표시되어 있는 지명 역시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비슷하다. 읍치 왼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浮端川이 현재의 남대천이다. 지도에는 洞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대부분 각종 地誌에서 하천의 발원지나 봉수의 위치 등에 나오는 지명들이다. 파란색 다이아몬드 모양은 이 지도책에서 일률적으로 鎭堡를 표시하던 방식이다. 읍치 위쪽 방향에는 西北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원래 종9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堡였지만, 현종 14년(1673)에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鎭으로 승격되었다. 왼쪽 아래 방향에는 임진왜란 이후인 광해군 6년(1614)에 새로 설치되었으며, 일제시대에 성진시(현재는 김책시)의 중심이 되었던 城津鎭이 표시되어 있다. 성진진 오른쪽 위쪽에는 함경도에서 드물게 書院이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 서원은 溟川書院으로서, 趙憲(1544-1592)을 배향하여 현종 11년(1670)에 세워지고 숙종 22년(1696)에 賜額 받았다. 이 밖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나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한자를 위쪽으로부터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㐚足嶺(올족령)·致灵(→靈)洞·德万(→萬)洞·芦(→蘆)洞·雙浦岺 등이다.(이기봉)

  • 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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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산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안흥면·옥천면 전체와 일포면의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북도 곽산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곽산군 통경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凌山城이 있는 凌漢山이었다. 지도에는 地靈山에서 鐵馬川까지 이어진 하천이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이 하천은 철마천과 합류되지 않은 상태로 남쪽으로 계속 흘러가 바로 바다로 들어가야 한다. ≪海東地圖≫의 곽산군 지도에는 이와 같은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는데, 김정호의 ≪大東輿地圖≫는 잘못된 내용을 따르고 있다. 조선중기에 읍치는 古邑面 지역에 있었으며, 영조 22년(1746)에 지도 위의 위치로 옮긴다. 그러다가 같은 왕 44년(1768)에 현재의 곽산읍인 옛 읍치 지역으로 다시 옮겨간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는 최소한 영조 22년(1746)과 44년(1768) 사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海東地圖≫의 郭山郡 지도에는 영조 22년(1746) 이전 또는 44년(1768) 이후의 읍치가 표시되어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는 읍치의 위치도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능산성은 능한산성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 이 산성은 둘레 6,913尺(약 2,074m)이며, 험한 산지를 이용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요새로 인식되었다. 아래쪽 해안가에는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된 任海鎭도 보이고 있다. 이 지도책에서는 군사기지인 鎭堡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통일시켜 표시하였다. 이곳에는 水軍과 戰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섬은 실제 크기보다 너무 크게 표시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구성의 월경지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 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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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천현은 사내면을 제외한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에 해당된다. 낭천현의 명칭은 고종 32년(1895)에 화천군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읍치는 화천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서쪽 1리에 있었다’는 狌山인데, 고구려 때 이 고을의 명칭이었던 狌川郡과 관련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아래쪽의 株山은 狌山(또는 牲山)의 誤記로 생각된다. 金化界로부터 들어와 읍치 남쪽을 지나고, 春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북한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錢浦·西湖浦·大梨津으로 쓰여 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津’은 우리말 ‘나루’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浦와 津은 단순히 浦口와 나루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지도에는 面의 표시에서 몇 개의 오류가 발생되고 있다. 첫째, 읍치 서북방면에 있는 西上面은 上西面의 誤記이다. 둘째, 읍치 왼쪽에 있는 上北面이라는 명칭은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기록에는 北面이 등장하며, 위치도 縣內面 북쪽에 있어야 한다. 셋째, 읍치 동북방향의 孫內面이란 명칭도 기록에서 찾을 수가 없다. 지도 작성자가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대부분 수정되어 있다. 지도에는 封山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을 지칭한다. 기타 필사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도 몇 개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것은 居禮里이며, 그 오른쪽에 있는 것은 羅松山이다. 동면 위쪽에 있는 것은 法興山이며, 현내면 왼쪽에 있는 것은 龍神山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것은 俗字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읽기 어려운 것으로 北坪이다.(이기봉)

  • 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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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은 개성에서 황주로 연결되는 해주 직로상에 위치한 고을로 군사적 요충 지역이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사리원시, 봉산군 동선면·산수면·구연면·토성면·덕재면·쌍산면·기천면·초와면·서종면·사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봉산군 동부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 재령군 삼강군 서부 일부지역, 구연리와 옥현리를 제외한 은파군 전지역, 린산군 석교리와 석연리 지역을 포함한다. 읍치는 봉산군 구읍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남쪽의 土城面에 있었는데 1523년(중종 18) 전염병이 많이 돌자 이곳으로 옮겼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각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봉산은 의주대로가 통과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여러 관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서북쪽에는 棘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과거 棘城鎭이 있었다. 자비령 맥이 10리쯤 내려오다 다시 끊어져 평평한 둔덕이 되었고 둔덕이 끝나면서 평야가 되었는데 이것이 극성의 들판이다. 고려 때 몽골의 군사가 이 길을 통해 들어왔고, 인조 때 청나라 군사도 이를 통해 들어왔다. 강 하류에는 조수가 통하며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만약 자비령에서 긴성을 쌓아 극성 강 언덕까지 연결한다면 남북을 가로막을 수 있는데 조선후기 숙종 때 부근에 蒜山鎭을 설치하였다. 읍치 남쪽의 別館은 민폐를 막고 고을의 水口를 關鎖하기 위해 郡守 具鼎煥에 의해 세워졌다.(오상학)

  • 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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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섬)이다. 고구려 高木根縣인데 일명 戴雲島, 高林, 達乙新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교동으로 고쳐 해구군(강화군) 영현이 되었다. 1629년(인조 7)에 부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에 강화로 편입되었다가 곧 복구하여 군이 되어서 인천부의 관할이 되었고, 1914에 군을 폐하고 강화군에 합쳤다. 교동은 서울로 통하는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京畿水營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三道統禦營으로서 본영을 이곳에 두었다.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남쪽의 宋家島, 席毛老道는 지금의 석모도로 예전에는 두 개의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강화도 소속 屬島들이 표시되어 있다. 교동 내에는 面과 봉화의 명칭이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 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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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양군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대강면·단성면·적성면·매포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단성면 하방리 일대에 있었는데, 충주댐의 건설로 대부분 충주호에 수몰되었다. 읍치 위쪽을 오른쪽(동쪽)에서 왼쪽(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남한강이다. 대체적으로 고을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일부 잘못된 곳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지도 아래쪽의 昌樂面이 있는 곳이다. 창락면은 실재로 순흥의 월경지였는데, 지도에는 마치 단양의 땅인 것처럼 표시하였다. 또한 이곳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창락역이 있던 곳으로, 그 위치는 읍치에서 南面으로 향하는 도로의 연장선상에 있어야 한다. 이곳에는 경상도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고개 중의 하나인 竹嶺이 있었음에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읍치 오른쪽의 長松驛도 실재로는 長林驛의 誤記이다. 이 밖에도 남한강 변이나 강 가운데에 있는 龜潭(峰)과 島潭(三峰)의 위치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다. 구담의 경우 玉筍(峰) 바로 옆에 있어야 한다. 기록에 異稱으로 나오는 上津과 馬津도 다른 것처럼 표시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이 지도의 작성자가 현지인이 아니거나 현지인이더라도 일부 왜곡된 정보에 바탕을 두고 그렸음을 알려준다. 어쩌면 지도 작성자가 순흥이 폐현되었을 때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렸을 가능성도 있다. 이 때 순흥 땅의 일부가 단양으로 들어왔는데, 그곳이 창락면인지는 기록에서 찾을 수가 없다. 순흥은 세조 3년(1458)에 페현되었다가 숙종 9년(1683)에 다시 설치된다. 읍치 위쪽에 있는 丹岩書院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에 능통했던 李混(1252-1312)과 禹倬(1263-1343)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세워지고, 숙종 38년(1712)에 사액 받았다.(이기봉)

  • 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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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大伽耶國 땅으로 시조 伊珍阿豉王에서 16대 道設智王까지 520년간을 지냈다. 신라 진흥왕이 이를 멸하고 대가야군이라 하였고,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인 고령으로 고쳤다. 고령은 현재의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개진면, 쌍림면, 운수면 일부, 우곡면 서부지역 일대에 해당되며, 읍치는 고령군 고령읍 쾌빈리와 헌문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 보이는 고령의 하천은 성주에서 흘러나오는 대가천이 읍치가 있는 곳에서 합천에서 들어오는 가야천과 합친 다음 大盤川(현 會川)이 되고 계속 흘러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대가야가 자리했던 고령은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이고, 낙동강이 좁은 골짜기를 통해 이어진 천연의 요새지역이다. 鎭山은 美崇山(733m)에서 이어지는 나지막한 九耳山이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미숭산 아래에는 盤龍寺가 있는데 용이 서리고 앉은 것과 같은 지형에 위치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반룡사는 802년(신라 애장왕 3)에 해인사보다 먼저 지어졌다하며 신라 말 보조국사가 중수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사명대사가 중건하였다. 읍치 아래에 보이는 安林驛은 성주의 戊溪驛과 安彦驛, 합천의 金陽驛, 초계의 八鎭驛과 연결되는 역이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望山熢은 미숭산, 성주의 伊夫老山에 응한다. (민경이)

  • 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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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천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단천군과 풍산군의 천남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함경남도 단천시·허천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단천시 내문동·금봉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23리에 있었다’는 道德山이다. 읍치 오른쪽 길주 방향에 胡打里가 보이고 있는데, 이곳에는 경종 3년(1723)에 堡가 설치되었다. 이후 영조 21년(1745)에 혁파되면서, 그 북쪽 방향의 梨洞鎭에 합해졌다. 이 지도에는 호타리보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최소한 영조 21년(1745)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海東地圖≫의 端川郡 지도에는 호타리보가 표시되어 있어, 이 지도보다 앞선 시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하천과 산지 및 津 등의 지명이 다른 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세한 편이다. ≪輿地圖書≫ 端川府誌에 이러한 자료가 같은 책의 다른 읍지에 비해 상세한 것과 관련이 있는듯하다. 고을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실제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도 내용적인 일부의 교정을 제외하면 이 고을 부근의 경우 이 지도를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비슷하다. 도로의 경우 한양-경흥 사이의 대로만 표시하여 놓았다. 단천에서 길주로 넘어가는 도로 중 최고의 요해처로는 호타리 위쪽의 磨天岺이었음에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 지도에는 ‘○○德’이라는 지명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德’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지도에서 자주 나오는 것으로서, 산지의 일종을 가리키는 어미로 사용되었다. 지도 작성자의 誤記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지도 위쪽에 있는 五足乙은 五乙足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지도 가운데 부분에 보이는 銀店은 조선후기에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개발된 銀鑛山을 의미한다. 조선에서 은광산의 개발은 청나라에서 銀本位制가 실시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이기봉)

  •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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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구성군 전체와 정주군 임포면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구성시 전체와 천마군의 동남쪽 절반 및 선천군의 동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구성시 성안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서북쪽 10리에 있었다’는 甫十山이었다. 지도 아래쪽에는 본 고을의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으며, 현재의 위치는 곽산군 염호리·원포리 일대이다. 이곳은 龜城鹽里面(또는 坊)이라고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지도에는 龍城里面이라고 적혀 있다. 지도 작성자가 龜城을 龍城으로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鹽里에서의 鹽도 생략해 버린 것으로 짐작된다. 지도에는 크게 세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를 지나 동쪽으로 나가는 하천은 대령강의 지류인 천방강인데, 지도에는 옛 명칭인 皇華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압록강의 지류인 삼교천이며, 남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동래강의 최상류이다. 고을 서쪽은 압록강변의 의주와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즉, 압록강을 건너온 적에 대한 2차 저지선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의주와의 경계에 좁은 골짜기를 막은 關門이 塞垣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오른쪽에는 정4품의 만호가 파견된 植松鎭이, 더 오른쪽에는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安義鎭도 보이고 있다. 지도 작성 시에는 거의 폐허상태인 片月城·泥城·靑龍山城 등도 그려 넣어 군사적 측면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 고개에 대한 표시가 특히 자세한 것도 군사적 배려였다고 생각된다. 위쪽의 八營岺과 왼쪽의 鎭營 등이 어려운 속자로 쓰여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 표시된 天釰山에서의 ‘釰’은 지명에서 보통 ‘劒’을 대신하여 사용되기 때문에, ‘일’이 아니라 ‘검’으로 읽어야 한다. 기타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표시에서 전혀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는 嘉山界가 표시되어 있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이기봉)

  • 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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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부는 삼척시·태백시 전체, 평릉동을 포함한 남쪽의 동해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삼척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葛夜山이다. 지도 왼쪽 중간 부분에 太白山(1,567m)이 보이고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지도에는 穿川)이다.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임계천의 상류로서, 정선읍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동북쪽으로 흘러 읍치 부근에서 바다와 만나는 하천은 五十川이다. 지도에는 五等川이라고 적혀 있으며, 五十川은 울진과의 경계선에 표시되어 있다. 오등천은 지지와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명칭으로서, 오십천을 잘못 비정하면서 만들어진 오류라고 생각된다. 태백산 오른쪽에 표시된 黃池는 실제 크기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다. 낙동강의 根源으로 인정되어, 특별히 강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을 전체의 모습이 대략 비슷하게 그려져 있지만, 오십천이 더 북쪽 방향으로 기울어져야 한다. 이에 따라 실제와는 반대로 남북보다는 동서의 폭이 더 넓게 되었다. 읍치 왼쪽에는 關東八景의 하나인 竹西樓가 보이고 있으나, 오른쪽 방향에 있었던 三陟(浦)鎭의 모습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여러 기록과 지도를 통해 볼 때, 삼척(포)진이 이 시기에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표시하지 않은 것은 지도 작성자가 실수로 빼먹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실수는 交柯驛 부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역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지도책에서 이러한 驛은 일괄적으로 붉은색 작은 원을 표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지도에서는 그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통해 볼 때 지도 작성자의 실수라고 생각된다. 읍치 오른쪽 바닷가에 있는 섬은 거의 암초 정도에 불과함에도 너무 크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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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 직로가 경유하는 길목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鳳山, 아래로는 平山과 연결된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서흥군 신막읍·서흥면·도면·세평면·소사면·율리면·목감면·용평면·내덕면·매양면·구포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양암리를 제외한 서흥군 전체, 린산군 상하리·다전리·석연리·석교리 지역, 봉산군 동쪽 부분, 연탄군 풍답리·신흥리·송죽리·장운리·성매리·두무리·문화리 지역, 수안군 상덕리 남동부, 린산군 북부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서흥군 고성리 일대에 있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각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이 고을은 황해도 제1방어선에 위치해 있어서 산성과 진영이 여럿 있었다. 九井面의 善積鎭은 원래 만호진이었는데 1683년(숙종 9)에 新塘鎭을 합하여 첨사로 승격시켜 성현·독치·건은령·동현·자은령 등을 防守했다. 木甘面의 所已鎭은 1680년(숙종 6)에 소이·범한 두 屯을 합하여 진을 설치하고 屯將을 萬戶로 승격시켜 자비령, 여계령 등을 방어케 하였다. 大峴山城은 석성으로 둘레가 20,238척이나 되는 큰 산성이었다. 읍치의 북쪽과 남쪽에는 守禦屯, 每馬峙屯도 보인다. 所沙面에는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社倉이 그려져 있다.(오상학)

  • 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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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는 본래 고구려의 泉井口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교하로 고쳤다.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내, 파주시 교하면, 탄현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14년에 파주에 합하여졌다. 읍치는 원래 탄현면 갈현리에 있었는데 1733년(영조 9)에 長陵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交河縣을 금촌읍 금릉리(현재의 파주시 금릉동)로 옮겼다가 후에 다시 長命山 동쪽의 교하면 교하리로 옮기게 된다. 교하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역으로서 해방의 요충지 가운데 하나였다. 임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深岳과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洛河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이 곡릉천이고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 學堂浦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뒤로 長命山을, 앞으로는 곡릉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세에 있다. 長陵은 仁祖大王(1595~1649)의 능이며, 仁烈王后 한씨를 합장하였다. 능이 처음에는 파주에 있었으나, 영조 7년(1731)에 이곳으로 옮겼다. 행정구역인 面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강변에는 포구가 있으나 자세하지 않다. (김지영)

  • 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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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현은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고대면·석문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당진읍 읍내리에 있었다. 이 지역은 육지와 바다가 들쭉날쭉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실제 조사를 행하지 않으면 지도로 표현하기가 어려우며, 이 지도에도 큰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읍치 왼쪽에서 북류하는 하천과 바다와 만나는 부분이 沔川과의 경계선이다. 따라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간 外孟面 지역은 잘못된 것이다. 실재로 외맹면은 지도에서 高山面과 外孟面 사이에 있어야 한다. 熊浦(곰개) 역시 외맹면의 끝인 현재의 석문면 통정리와 내맹면의 시작인 삼봉리 사이에 있다. 이곳은 여러 기록에 孟串이라고 나온다. 읍치에서 볼 때 먼 곳을 內孟으로, 가까운 곳을 外孟으로 이름 지은 것을 통해 볼 때 읍치가 아닌 다른 기준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外孟面의 위치는 비록 회화식 지도이지만, ≪海東地圖≫에는 대체적으로 적합하게 표시되어 있다. ≪廣輿圖≫에서는 內孟面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본 지도와 똑같이 외맹면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내맹면과 외맹면의 위치 문제는 당시의 지도 작성자에게 상당한 혼란을 일으키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아울러 본 지도와 김정호 지도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두 지도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읍치 왼쪽의 彩雲浦는 浦口라기보다는 하천의 명칭으로, 현재 당진읍 우두리 일대를 가리킨다. 기타 지도 위쪽의 長古項은 우리말 ‘장고목’, 橋路里의 橋路는 우리말 ‘다리길’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이기봉)

  •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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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小伽耶國이었는데 신라가 차지한 뒤 古自郡을 두었고 경덕왕 때 지금 이름인 고성으로 고치었다. 고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 전체, 통영시 도산면, 광도면, 용남면, 사천시 시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고성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 보듯이 경상남도 남해안의 중앙에 자리한 지역으로 섬들이 많아 현재의 해안선과 그 구분이 정확하지 않다. 고성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旡量山(无量山의 오기, 581m)이며, 북쪽에 있는 舞妓山은 固州刺史가 기생을 데리고 여기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춘원면에 있는 統營은 임진왜란 1604년(선조 37)부터 1896년(고종 33)까지 293년 동안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관할하던 右水營兼三道水軍統制營이었고, 李舜臣(1545~1598)이 3도의 舟師(수군)를 관장하는 統制使였다. 후에 통영과 충무라는 지명이 여기서 유래 되었다. 통영의 아래에 있는 彌勒島에는 春元浦와 彌勒山烽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해면매립에 의해 시가지가 확장되었다. 최남단에 있는 欲知島와 蓮華島는 그 둘레가 각각 65리, 53리로 일본 고기배가 상시로 왕래하는 곳이었다. 진주 경계에 접하여 있는 床足岩은 돌기둥 네 개가  평상 같은 바위를 받치고 있어서 조수가 밀려 와도 물은 그 밑을 지나간다고 한다. 남해 경계에 접하여 있는 蛇梁島鎭은 그 營이 石城으로 둘레 1천 2백 51척, 높이가 13척이며 水軍萬戶가 1명이 있었다. 그 외 唐浦鎭, 三千浦堡, 春元浦堡, 堀浦津, 丘墟浦 등 수개의 鎭堡와 浦口들이 해안가를 따라 늘어서 있다. (민경이)

  • 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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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부는 일제시대의 문천군 덕원면과 성북면, 원산시에 해당된다.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와 문천시의 남서쪽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원산시 세길리 일대에 있었다. 산줄기와 강줄기가 실제의 고을 모습과 대략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連島 부분과 섬의 표시가 실제와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연도 부분은 현재의 갈마반도로서, 북쪽으로 튀어 올라가 있다.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덕원부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음에도, 이 지도에 반영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는 연도가 아예 섬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오른쪽의 竹島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부 동쪽 15리’에, ≪輿地圖書≫에는 ‘부 동쪽 50리’에 있다고 나온다. 連島가 ‘부 동쪽 30리’에 있었던 사실과 대조해 보면, 이 지도는 후자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죽도에는 고려시대 때 몽골이 침입하자 定州(조선시대의 定平) 이남 12개 城의 사람들이 피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섬인데, 현재의 어느 섬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다만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섬은 현재의 麗島이며, 이 섬은 ≪輿地圖書≫에 ‘부 동쪽 50리’에 있다고 나온다. 여도가 죽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海東地圖≫에는 女島와 竹島가 동시에 표시되어 있어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竹島를 상대적으로 매우 크게 표시하였으며, 連島 북쪽에 그려 넣었다. 김정호 역시 죽도의 정확한 위치를 알았던 것이 아님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몽골 침입 시 12개 고을 주민이 피난했다는 기록을 통해 상당히 큰 섬이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섬의 크기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내용이 지도에 표현된 것은 실재로 섬의 크기에 대한 地誌的 정보가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연도 왼쪽의 交濟倉은 흉년이 들었을 때 이 지역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설치한 倉庫이다. 이 창고에 저장된 곡식의 상당 부분이 남쪽으로부터 운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조선후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포구 중의 하나였던 元山浦이기도 하다. 기타 읍치 왼쪽 방향에 있는 馬恩嶺은 馬息嶺에 대한 誤記이다.(이기봉)

  • 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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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천군은 잠도면과 잠상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덕천군과 영원군의 태극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대부분이 평안남도 덕천시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덕천시 승리동·서문동·창말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의 長安山이다. 대동강 본류가 寧遠界에서 들어와 읍치 남쪽을 지나 順川界로 빠져나간다. 지도에는 대동강이 凝江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孟山界로부터 흘러들어오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맹산강이다. 지도에는 邈江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기록에는 瘼灘으로도 나온다. 지도 오른쪽의 金城山 위에는 성곽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 태조 때 石築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삼면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천연의 요새였다고 한다. 둘레는 3,125尺(약 937m)으로 그리 크지 않은 성곽이지만, 조선 초에는 거의 최전방에 해당되었던 이 지역의 방어를 위해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 지도 왼쪽 위의 蘇民은 蘇民(站)을 의미하며, 그 오른쪽의 㐙峴에서의 ‘㐙’은 한자에는 없는 ‘둘’이라는 음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낸 글자이다. 기타 고을 전체의 모습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으며, 인문적 정보로는 面·倉·寺刹·烽燧 등만 기록하고 있다.(이기봉)

  • 안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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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동면,·서면에 해당되며, 지금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철원군 철원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萬景山이다. 고을 왼쪽에 보이는 하천은 임진강 본류의 중류 정도에 해당되며, 지도에는 猪仇灘으로 적혀 있다. 읍치 위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평안천으로, 지도에는 定山灘으로 기록되어 있다. ‘灘’이란 우리말 ‘여울’을 한자로 기록한 것으로서, 경사가 급해지면서 물살이 빠른 구간을 의미한다. 이런 곳에는 하천의 깊이가 보통 얕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따라서 하천에서 灘(여울)에 대한 파악은 아주 자세한 편이며,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읍치 왼쪽 위에 표시된 古城은 초선초기를 대표하는 ≪新增東國輿地勝覽≫과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輿地圖書≫ 地誌 내용에서 찾을 수가 없으며, 단지 萬景山古城과 南山城만이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輿地圖書≫와 ≪海東地圖≫ 안협현의 지도에는 두 山城 이외에 읍치 서쪽에 ‘擧城’이 더 표시되어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는 이 세 개의 山城이 모두 표시되어 있다. 기타 面과 중요 마을(里)를 표시한 것은 강원도의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이다.(이기봉)

  • 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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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豊川, 서로는 長淵과 연결된다. 송화현의 명칭은 조선조 1408년(태종 8)에 고려 때의 靑松縣과 嘉禾縣을 합하여 송화현으로 고친 것에서 유래한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연정면·연방면·도원면·장양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원당리와 명례리 일부를 제외한 송화군 전지역, 삼천군 남부지역, 황해남도 태탄군 공세리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도에 東倉이 있는 곳이 嘉禾縣이 있던 곳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墨山이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서원은 道東書院이다. 1605년(선조 38) 지방유림의 공의로 중국의 朱子와 趙光祖·李滉·李珥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9년(숙종 25) ꡐ道東ꡑ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옆에 온천이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의 송화온천에 해당한다.(오상학)

  • 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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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서울특별시의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금천구, 동작구 일부지역과 경기도 광명시와 안양시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한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산, 과천, 양천, 인천과 경계를 이룬다. 읍치는 금천구 시흥동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 三聖山이 鎭山이다. 읍치를 지나는 대로는 내륙으로 안산과 과천으로 연결되고, 한강을 넘나드는 해로로 楊花津이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역과 교량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으로 盤遊驛, 남쪽으로 安陽驛이 표시되어 있고,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주변에 岐灘橋가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 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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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군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신양면·광시면·응봉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대흥면 동서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任存古城이 있었던 鳳首山이다. 조선초기에는 縣이었는데, 숙종 7년(1681)에 현종의 御胎을 읍치 동남쪽에 있는 朴山에 묻고 郡으로 승격시켰다. 임존고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 福信·黑齒常之 등이 부흥운동을 이끌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지형적으로 보아 2개의 잘못이 눈에 띄고 있다. 첫째, 外北面이 삽교천 너머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삽교천 동쪽에 있었다. 둘째, 지도 오른쪽의 胎峰에 있는 하천이 실재로는 禮山界 북쪽으로부터 흘러들어옴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두 번째의 오류는 같은 책의 예산지도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첫 번째의 오류는 김정호의 지도에서 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 아래쪽의 驛(光時)이라 쓰인 곳으로부터 위쪽의 望山 부근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삽교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무한천의 본류이며, 오른쪽이 그 지류인 신양천이다. 하천 변에는 竹遷川·達川·渿川 등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일제초기에 하천 명치의 통일화 작업 속에서 사라진 이름들이다. 近東面 오른쪽의 擊壤面도 擊壤川의 誤記이다.(이기봉)

  • 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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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昆明縣이며, 신라 때 칭호는 자세하지 않다. 1419년(세종 1)에 南海縣에 합하여 昆南郡으로 승격하였으나 1437년(세종 19)에 다시 남해현을 두고 진주의 金陽部谷을 합쳐서 지금 이름인 곤양으로 고쳤다. 곤양은 지금의 사천시 곤양면, 서포면, 곤명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곤양은 진주만에서 내륙 깊숙이 들어간 사천만 서안에 위치하고 있어 사천만으로 유입되는 곤양천과 무고천이 흐른다. 곤양의 최남단에 있는 露梁院은 노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남해와 가깝게 있으며, 현재는 남해대교가 개통되어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량해협은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李舜臣(1545~1598)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읍치 북쪽에 있는 銅谷山이 鎭山이며, 하동 경계에 접하여 있는 金鰲山(849m)은 甁要山이라고도 한다. 곤명면에 흐르는 金城江(현 덕천강)에는 幷橋가 보이는데 현재의 금성교이다. 良浦驛은 남해의 德新驛, 북쪽에 있는 浣沙驛과 연결되어 지나가는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민경이)

  • 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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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천부는 동면과 서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명천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명천군·화성군·화대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 화성군 하우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의 永平山이다. 이 지도는 고을 전체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읍치의 위치가 잘못 표시되어 있다. ≪輿地圖書≫의 明川府邑誌에 읍치로부터 동쪽의 鏡城界까지가 6리인 반면, 서쪽의 吉州界까지는 45리로 나와 있다. 이것은 현재의 지도에서 파악해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지도에는 읍치가 지나치게 경성과 길주의 중간쯤에 표시되어 있다. 둘째, 읍치 왼쪽에 기록된 汚禾川의 발원지가 너무 서북쪽으로 멀리 표시되어 있다. 실재로는 읍치에서 남쪽 바다까지의 거리가 읍치에서 오화천 발원지까지의 거리보다 1.5배 이상 멀다. 이와 같은 오류는 이 지도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서쪽에 있었던 吉州 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오류 발생의 근본 원인은 오화천의 발원지인 長白山의 잘못된 위치 비정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첫째와 둘째의 오류는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거의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셋째, 읍치 남쪽 부분은 이 지도와 반대로 동서보다는 남북의 폭이 더 넓다. 이 오류는 地誌書에서 방향에 대한 애매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黃津의 경우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쪽 65리에 있다고 나오며, ≪輿地圖書≫에는 동남쪽 65리로 되어 있다. 이 지도의 작성자는 후자를 취하면서도 남쪽 65리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황진의 실제 위치는 동해와 길주-경성의 경계가 만나는 지점에 있으며, 이것은 전자의 기록과 부합한다. 이 지점에 있다고 지도에 표시된 加乙亇山의 경우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모두에 동남쪽 173리에 있다고 나온다. 바다(海)까지의 거리의 경우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남쪽 170리에, ≪輿地圖書≫에는 남쪽 120리로 되어 있다. 실재로 명천은 남쪽과 동쪽이 바다로 되어 있으며, 읍치로부터 가장 먼 지점은 동남쪽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바닷가까지의 거리는 가장 먼 동남쪽을, ≪여지도서≫는 정 남쪽을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가을마산이 읍치에서 동남쪽으로 가장 먼 바닷가에 있었던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지도에 나오는 가을마산의 위치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황진의 위치가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져 있으며, 동서보다는 남북의 폭이 더 넓게 그려져 있다. 이 지도에는 서북쪽에 표시된 下古社, 읍치 오른쪽의 上汚禾社 등의 위치 표시가 100% 잘못되어 있다. 하고사의 실제 위치는 동쪽의 상고사 남쪽에 있었으며, 상오화사 역시 읍치의 서북쪽에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잘못된 위치는 ≪여지도서≫의 위치 기록과 합치되고 있어 흥미롭다. 다만 같은 책에 다른 社의 위치도 대부분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되어 있어, 지도 작성자가 다른 자료를 첨가해서 검토했을 가능성이 있다.(이기봉)

  • 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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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산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맹산군 맹산면·원남면·동면·지덕면·애전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맹산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맹산군 맹산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 방향에 있는 豆無山(지도에는 豆毛岺)이다. 읍치를 돌아 서북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덕천 동북쪽에서 대동강과 합류하는 맹산강이며, 아래쪽에 조금 보이는 것은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고을의 동쪽으로는 현재 낭림산맥으로 불리는 白頭大幹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나가며, 그 너머는 함경도이다. 지도에는 고을의 동쪽이 咸興界로 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永興界라고 적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이 지도가 중앙에서 편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읍치 오른쪽의 鐵瓮城은 1,085m 높이의 철옹산 정상 부근에 있었다. 둘레가 650尺(약 195m) 정도로 작지만, 사면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항아리 모양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이웃한 함흥과 정평 부근이 최전방의 역할을 하였던 고려 초중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철옹성을 경계로 서쪽의 대동강과 동쪽의 용흥강이 나누어지는데, 맹산현 쪽으로 파고들어온 부분이 실제보다 남북의 폭이 훨씬 크게 표시되어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되고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에는 邑內面·南面·北面·元塞面 등 4개의 面이 기록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는 5개의 면으로 개편된다. 작은 고을의 경우 일제시대 1개 면의 ⅓ 수준에 해당되는 것도 많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面의 운용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되며, 倉庫가 面의 수보다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다른 지도에서 보기 힘든 里가 여러 개 적혀 있는데, 여러 地誌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마을이다. 김정호의 ≪大東地志≫에는 邑內·艾日·德川·池城·內南·外南의 6개 坊面으로 나온다.(이기봉)

  • 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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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구현은 수입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강원도 양구군에 해당되며, 이 범위는 현재 휴전선 이남의 양구군과 거의 비슷하다. 읍치는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飛鳳山이었다. 이 지도는 실제와 비교했을 때 몇 가지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北面에 있는 하천은 회양계로부터 文登峴·梨嶺 두 방면으로 들어와야 한다. 둘째, 왼쪽 위의 天尾山은 放散面이란 글씨 바로 위의 산으로 표시되어야 한다. 셋째, 천미산 밑의 淮陽界로부터 양구를 관통하여 狼川界로 들어가는 하천은 없다. 이와 같은 오류는 지명의 위치를 잘못 표시하게 만들기도 했다. 方山面은 北面의 위치로 와야 하며, 北面은 松峴 밑으로 와야 한다. 軍糧洞은 북면의 중심 마을로서, 역시 위치가 송현 밑으로 옮겨야 한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는 대부분 답습되고 있다. 일부의 교정이 있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실제와 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있다. 아래쪽에 南江으로 표시한 것은 소양강을 의미하며, 그 남쪽의 水內村은 현재 인제군 남면의 하수내리·상수내리를 의미한다. 원래 양구에 속했는데, 근래 들어서 인제로 편입되었다. 方山面이란 명칭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으로 적혀 있는 方山縣으로부터 온 것이다. 속현으로 적혀 있다는 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른쪽의 亥安面은 고려시대에 亥安所가 있던 곳이다. 원래 고려시대 때 이 지역의 主縣이었던 춘천에 속해 있었으나, 세종 6년(1424)에 이 고을로 이관되었다. 현재도 양구군 해안면으로 편재되어 있으며,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盆地를 이루고 있다. 沙台洞封山은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을 지칭한다.(이기봉)

  • 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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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군은 谷山과 더불어 황해도의 북동쪽 궁벽진 곳에 위치해 있는 고을이다. 예성강과 대동강 지류인 남강의 분수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산지가 많고 들이 적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율계면·대성면·대오면·천곡면·수구면·도소면·연암면·공포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수안군에서 산북리·주영리·석교리·평원리 동부·상덕리 남부를 제외한 전체, 연산군에서 대군리 동부를 제외한 전지역, 연탄군 신금리와 오봉리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곡산·신계·토산과 더불어 만첩 산중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고 백성이 어리석으며, 골짜기가 깊숙하여 도둑이 많은 까닭에 옛부터 문학하는 선비와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적다고 한다. 이 고을은 군사적으로 중요하여 군영이 설치되어 있다. 동남쪽 城洞面 근처의 位羅鎭은 1680년(숙종 6)에 기존의 屯將을 萬戶로 승격시킨 것이다. 防垣嶺에 있는 文山鎭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防垣嶺 아래에 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성의 길이는 6백 20척이고 성의 좌우에 높은 산이 마주 솟아 있다. 1680년(숙종 6)에 文山·聰明 두 곳의 屯將을 萬戶로 승격시켜 이 곳에 옮겨 설치하였다. 향교 옆의 龍溪書院은 1662년(현종 3)에 세워져 1708년(숙종 34)에 사액된 서원으로 안향의 문인인 李連松, 姜栢年 등을 배향하였다. 고을 서쪽에는 은을 생산하던 銀店도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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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군은 지금의 김포군 김포읍, 고촌면, 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김포읍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김포는 옛 김포현과 양천군을 합친 것으로, 본래 고구려의 黔浦縣이며, 신라 경덕왕 때 김포로 고쳤다. 동쪽으로 陽川, 남쪽으로 富平, 서쪽으로 바다, 북쪽으로 通津과 경계를 두고 있다. 지도에 나타난 읍치는 郡內面에 北邊里에 있다. 남쪽에 章陵은 元宗(인조의 생부로 추존)과 부인 仁獻王后의 능이다. 추존하기 이전에는 興慶園이라고 했는데 1632년 장릉으로 고쳤다. 동쪽의 한강에 섬들을 표시하였으며 내부에 봉화들이 나타난다. 서쪽의 歌絃山을 제외한 다른 산들은 자세하지 않다. (김지영)

  • 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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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현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삽교읍·봉산면·고덕면, 당진군 합덕면의 합덕리·점원리·신흥리에 해당되며, 읍치는 덕산면 읍내리에 있었다. 고려시대까지 이 지역에는 德風縣과 伊山縣이 있었다. 태종 5년(1405)에 두 고을을 합하고, 각각 한 자씩 따다가 德山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縣內面이 이산현의, 古縣面이 덕풍현의 중심이었다.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木發面이 표시되어 있는데, 지도 작성자가 어떤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현내면의 위치도 읍치 부근으로 조정되어야 하며, 羅朴所面도 修德山 남쪽으로 흐르는 水系와 함께 표시되어야 한다. 非方串面이 있는 곳에 왼쪽에서 북류하는 하천은 삽교천이고, 오른쪽에서 북류하는 하천은 무한천이다. 비방곶면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는데, 삽교천 북쪽에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그곳에 있는 창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보관하던 海倉이다. 그리고 읍치 서쪽의 산줄기와 남북의 산줄기를 거의 같게 표시했지만, 그 높낮이가 전혀 다르다. 읍치 서쪽은 약 400m 이상이 많고, 남북은 거의 野山에 불과하다. 揷橋는 우리말 ‘삽다리’에 대한, 大峙는 우리말 ‘한치’에 대한 한자식 표기이다. 기타 修德寺와 같은 유서 깊은 사찰이 지도 제작 당시에 존재했음에도 표시되지 않았음이 의아하다.(이기봉)

  • 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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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奴同覓縣으로 경덕왕 때에 군위로 고치어 嵩善郡(현 선산군)의 領縣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郡으로 되었다. 군위군은 현재 군위군 군위읍, 효령면, 소본면 일대에 해당되고, 읍치는 군위읍 동부리 지역에 있었다. 지도에서 보듯이 북쪽 비안의 渭川이 이어져 羊腸처럼 읍치를 휘감아 흐르다가 중리면과 성동면 지역에서 분리된다. 幷川은 의흥현의 남천과 부계현의 남천이 합쳐서 하나의 개울이 되어 붙은 지명이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馬井山(402m)이 鎭山이며 마정산 봉수가 있다. 마정산 봉수는 읍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박달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비안군 간점산 봉수에 응한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기우봉은 옛 祈雨壇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읍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서원(南溪書院)은 ≪輿地圖書≫에 의하면 1627년(인조 5)년에 창건되어 문충공 유성룡(1542~1607)을 모시었으나 사액 받지는 못하였다. 효령면에 위치하고 있는 召溪驛은 의흥군의 牛谷驛, 선산군의 上林驛, 신령군의 長水驛, 비안군의 雙溪驛과 연결된다. (민경이)

  •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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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산부는 일제시대의 무산군과 부령군의 삼해면 일부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무산군·연사군, 라진시의 삼해리·노창리, 량강도의 대흥단군·백암군 전체와 삼지연군 동쪽에 걸쳐 있다. 읍치는 무산군 무산읍에 있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특별히 강조된 白頭山의 모습이다. 白頭란 명칭은 정상 부근에는 거의 일년 내내 눈에 덮여 있어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특징을 부각시켜, 백두산의 표현에 청색 이외에 흰색도 많이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의 地圖나 地誌에는 대부분 大澤이라 기록된 현재의 天池가 파도치는 물결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조선초기부터 바다를 표시할 때 자주 사용되던 방식이다. 天池를 마치 바다처럼 표현함으로써, 신성한 성격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했던 의도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지도를 포함하여 조선후기의 지도에서는 백두산을 특별히 강조하여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백두산이 한반도의 祖宗山이란 인식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두산 아래에는 白頭山定界碑가 壬辰定界碑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 碑가 숙종 38년(1712)인 壬辰年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 오른쪽의 ‘水伏流’는 물이 지표가 아닌 지하로 흐른다는 뜻으로서, 청과의 국경선 확정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다. 이 지도에서도 확인되고 있듯이 土門江·豆滿江의 물은 백두산의 天池에서 발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치 천지 부근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이해하기 위해 ‘水伏流’란 표현을 쓴 것이다. 이 水伏流가 과연 어디로 흐르느냐에 따라 청과 조선의 경계선이 달라지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졌다. 백두산정계비에는 ‘東爲土門’ 즉, ‘동쪽은 土門江을 경계로 삼는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 토문강이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청과 조선의 첨예한 문제였다. 후에 조선에서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뜻의 乾川이 표시된 土門江으로, 청에서는 豆滿江으로 이해하였다. 이 지도에서는 ‘壬辰分界時以此稱分界江上流’ 즉, ‘임진년에 경계를 정할 때 이것을 분계강 상류로 칭했다’라는 문구를 현재의 豆滿江 발원지 밑에 적어 놓았다. 다만 分界江上流란 문구를 토문강 아래쪽의 木柵 부근에도 적어놓아 약간 애매하게 표시하였다. 이 木柵은 당시의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두만강을 분계강 상류로 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 지도에서 石堆와 乾川을 토문강 상류로 보았던 것과 달리 두만강 상류 부분으로 처리하였으며,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에 만들어진 木柵도 두만강 상류 부분에만 표시하였다. 백두산정계비에 나오는 ‘東爲土門’이란 표현의 해석에서 조선에 유리한 것은 김정호의 ≪大東輿地圖≫보다는 이 지도이다. ≪海東地圖≫ 茂山府 지도에서는 토문강이 마치 천지에서 직접 발원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으며, 木柵의 표시는 이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長白山 역시 5월에 눈이 녹고 7월에 다시 쌓인다는 기록이 있는 산이다. 이 지도에서는 이런 기록과 부합되게 흰색으로, 크게 그려놓았다. 여기서 크게 그렸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라 연속된 봉우리의 합으로 장백산을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 때문에 明川界·吉州界·鏡城界의 표시에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부근의 두만강은 이 지도에서 표현된 것보다도 曲流가 특히 심한 구간이다. 이 중 茂溪 부분은 곡류 부분이 지나치게 크게 표시되어 있다. 이 점은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무산부 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보다 완화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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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동남면·덕안면에 해당되며, 지금도 일부를 제외한 평안북도 박천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박천군 중남리·덕삼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동쪽 3리에 있었다’는 臥龍山이다. 鳳麟山(217m)이 최고봉일 만큼 산지가 거의 없는 지역이며, 남서쪽의 경우에는 거의 평지에 가깝다. 산줄기의 이어짐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거의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이 지역의 지형에 대한 오해를 하기 쉽게 되어 있다. 하천에 대한 표현도 이 지도만을 놓고 볼 때 많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오른쪽의 하천이 청천강 본류의 하류부분이며, 왼쪽의 하천은 현재 대령강으로 부르는 大定江 본류이다. 이러한 대하천을 읍치를 흐르는 조그마한 하천과 거의 같은 굵기로 표시함으로써,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두 하천이 태천과 영변 방향에서 흘러 들어온다는 측면도 너무 약하게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南面이 2개나 적혀 있는데, 아래쪽에는 德安面이 있는 곳이다. 기타 天燈山·深牙烽은 잘 쓰이지 않는 俗字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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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부는 강원도 양양군과 영랑호 주변을 제외한 속초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위쪽 방향에 있는 雪岳山이다. 설악산은 현재 남한에서 가장 화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국립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도 제작 당시에는 金剛山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지도에서 금강산이 특별히 부각되어 그려져 있었음에 반해, 이 지도에서 설악산은 아주 평범하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지도 아래쪽의 漢川은 현재 남대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漢川’은 우리말에서 크다는 뜻의 ‘한’과 하천을 뜻하는 ‘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기 때문에 ‘大川’과 서로 통용되어 사용된다. 이 고을은 북쪽보다 남쪽의 동서 폭이 더 넓은데, 이 지도에서는 남북이 거의 같게 표시되어 있다. 한천에서 西面 쪽으로 갈라져 나간 지류는 실재로는 九龍岺 부근까지 뻗어있어야 함에도, 아주 짧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시된 이유는 발원지가 오대산 하나로밖에 되어 있지 않는 地誌의 내용을 지도에 그대로 반영하려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동해안에는 靑草湖·雙湖·麻浦 등의 潟湖가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쌍호는 현재 메워져 사라졌으며, 麻浦는 현남면에 포매호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지도 아래쪽에 縣北面·縣南面이란 지명도 눈에 띈다. 이곳에 이런 지명이 남게 된 것은 조선초기까지도 洞山縣이 이 고을의 屬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속현으로 존재했다는 것은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이 고을의 面里 체계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그렇더라도 현남면·현북면이란 명칭을 남기게 된 것은 그만큼 역사적 관성이 컸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읍치에 적혀 있는 驛은 ‘동쪽 5리에 있었다’는 連倉驛으로서,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러한 역은 이 지도책에서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지도에서는 그것이 적용되고 있지 못하다. 조선전기에는 읍치 아래쪽의 祥雲(驛)에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다. 신라의 義湘(625-702)이 만들었다는 洛山寺를 비롯한 사찰의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 낙산사 오른쪽의 義均臺는 義相臺의 誤記로 보인다. 기타 읍치 오른쪽에는 東海神에게 제사지내던 東海廟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하다. 이 동해묘는 中祀로 인정받을 정도로 중요한 제사처였으며, 다른 지도에서는 대부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신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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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성강 유역 중에서도 상류쪽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遂安·谷山, 아래로는 平山에 이어진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신계군 신계면·고면·다율면·다미면·마서면·부여면·사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신계군 전지역, 곡산군 세림리와 사현리, 수안군 산북리·주영리·석교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원래 고려의 新恩縣이었는데, 조선 1396년(태조 5년)에 俠溪縣을 신은현에 예속시키고, 1445년(세종 27)에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신계현이라 하였다. 지도에도 고을의 남쪽에 古新恩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수안·곡산·토산과 더불어 만첩 산중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고 백성이 어리석으며, 골짜기가 깊숙하여 도둑이 많은 까닭에 옛부터 문학하는 선비와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적다고 한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편에 있는 九峰山이다. 동북쪽의 箕達山에는 고려 제19대 명종 당시에 구축한 三蘇 중 하나인 北蘇宮址가 남아 있다. 한때 고려가 이 곳으로 천도하려 했다고 전한다. 읍치 남쪽의 蘆淵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다. 고을 남쪽에 표시된 역은 所坪驛이다.(오상학)

  • 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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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은 광주, 수원과 경계를 이룬 지역으로, 화성군 남양면, 비봉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과 안산시의 대부도와 영흥도 일대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는 인천의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는데 화성군 남양면 신외리, 장전리, 문호리 일대이다. 읍치는 남양면 남양리에 있었으며 동쪽의 飛鳳山이 鎭山이다. 읍치 남쪽을 흐르는 鼠尾川은 지금의 남양천이고 남양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지도에는 면과 산의 명칭과, 봉수, 누대, 해창, 역원 등이 파악되어 있다. 서쪽 해안가의 花梁鎭은 左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던 곳이며, 아래쪽의 永宗은 永宗浦營이 있던 곳으로 水軍萬戶가 있었다. 서쪽으로는 대부를 비롯하여 영흥, 탄모노, 독갑, 선협, 승황, 선감미, 울청, 소이작, 대이작 등 다수의 섬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은 시화간척지 공사로 섬들이 육지로 변모되었다. (김지영)

  • 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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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군은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송악면·순성면 전체, 부장리·신촌리·강문리를 제외한 우강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면천면 성상리에 있었다. 이 지도에는 크게 2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첫째, 오른쪽 위에 표시된 縣內面·新北面이 마치 이 고을의 지역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 두 지역은 실재로는 홍주에 소속되어 있었다. 둘째, 오른쪽의 泛川面이 마치 월경지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은 월경지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영역적인 측면에서 보아 연결되어 있다. 18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輿地圖書≫·≪海東地圖≫·≪廣輿圖≫ 등에는 모두 월경지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 뿐만 아니라 地誌에서 월경지라는 사실을 언급한 경우도 찾을 수 없다. 다만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월경지로 표시하고 있어, 이 지도와의 연관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서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같은 책의 다른 지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堤堰이 세 개나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선후기에는 곳곳에서 堤堰이 건설되었으며, 地誌에서도 중요한 항목으로 취급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이 이 지도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제언의 크기는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크지 않으며, 그 크기는 가장 큰 것이 둘레 2,700尺(약 800m) 정도에 불과했다. 北倉과 南倉은 한양으로 옮겨가는 田稅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두 곳으로 분산시킴으로써 고을 내 육지에서의 운송거리를 최소화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北倉 아래쪽의 船泊處는 민간의 배가 정박하던 곳이 아니다. 이 고을 관할의 戰船이 정박하던 곳이며, 防船·兵船·伺候船이 각각 1척씩 배치되어 있었다.(이기봉)

  • 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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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甲火良谷縣인데 경덕왕이 기장으로 고쳐서 동래의 領縣을 삼았다가 후에 梁州(梁山)로 이속하였다. 1018년(현종 9)에 蔚山에 예속되었다가 후에 監務를 두었다. 1599년(선조 32)에 동래로 들어갔다가 1617년(광해군 9)에는 다시 縣을 만들었고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여 동래부에 속했으며, 1914년에는 동래군으로 병합되었다. 기장은 현재의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일광면, 정관면, 철마면, 장안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있는 炭山이 鎭山이다. 동해에 접하여 있는 碁浦는 검정 바둑돌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울산 경계에 접하여 있는 佛光山은 사시사철 경치가 좋은 곳이며 그 아래에 있는 長安寺는 673년(신라 문무왕 13)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쌍계사라 하다가 809년(신라 애장왕)에 장안사라 고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가 몇 차례 다시 중건되었다. 읍치 아래에 있는 南山烽은 동래의 干飛烏山에 응하고 울산의 林郞浦에 응한다. (민경이)

  •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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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천군은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읍·운림면·천내읍·명귀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문천시·천내군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문천시 교성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 방향에 있는 盤龍山이다. 고을 위쪽의 하천은 현재 전탄강이라고 부르는데, 지도에는 配岐川·箭灘이라고 적혀 있다. 地誌에는 배기천은 서쪽 57리에 있으며, 전탄은 북쪽 33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동일한 하천이라고 할지라도, 구간마다 고유한 명칭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제초기에 하천의 종합적 관리를 위해 하천 명칭을 단일화시키면서, 다양한 명칭이 사라지게 되었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모습은 실제 모습과 대체적으로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 위쪽 방향의 內訥(島)는 四訥島의 誤記이다. 이곳에 쓰여 있는 ‘羊羔所牧’이란 문장을 통해 조선시대에 말(馬) 이외에도 다른 가축을 방목하던 목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羊羔’는 국가에서 제사용 목적으로 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輿地圖書≫ 문천군의 地誌 부분에는 이곳에 말(馬)만 키웠던 것으로 나오며, ‘羊羔所牧’이란 부분은 지도에 사눌도 아래쪽의 馬祭島에 나온다. 그런데 조금 앞선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海東地圖≫ 문천군의 지도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咸鏡道全道≫ 문천군 지도와 김정호의 ≪東輿圖≫에는 반영되어 있다. 사눌도 왼쪽의 淑陵은 이성계의 曾祖父인 翼祖  李行里와 그의 부인인 貞淑王后 崔氏의 무덤이다. 기타 지도 왼쪽 아래쪽에 있는 芦峴·芦洞岺에서의 ‘芦’는 ‘蘆’의 속자이다.(이기봉)

  • 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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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동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벽동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북도 벽동군과 자강도 우시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는 벽동군 동주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의 九峯山이었다. 고려 공민왕 6년(1357)에 林土와 碧團에 살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남쪽의 민호를 옮겨 설치한 고을이다. 이 시기 이전까지는 고려의 영향력이 이 고을 서쪽에 있었던 삭주까지만 미치고 있었다. 碧潼이란 이름은 碧團과 陰潼(옛 林土)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북쪽으로는 압록강 본류가 보이고 있으며, 理山과의 경계선에 있는 충만강과 읍치 아래쪽의 東川·西川 등의 지류가 흘러들어가고 있다. 압록강 변에는 邑城 이외에 廣坪堡로부터 小吉號里堡까지 총 7개의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방어 시설은 강을 넘어온 적에 대한 1차 저지선 역할을 하였다. 이 중 邑城과 碧團鎭에는 각각 둘레 8,045尺(약 2,415m)·13,032尺(약 3,910m)의 대형 石城이 있었으며, 나머지 지역에는 둘레 100m 정도의 작은 石城이 있었다. 압록강 건너편의 지명은 대부분 적의 예상 침입로이다. 남쪽으로는 隘口라는 지명과 함께 표시된 關門城과 林土鎭이 보이고 있다. 이들 군사시설은 협곡 등에 만들어져 있어 적은 군사로도 대규모의 적을 막을 수 있었으며, 1차 저지선을 뚫고 들어온 적에 대한 2차 저지선 역할을 하였다. 面의 이름과 위치는 대체적으로 상세하게 되어 있지만, 邑內面·西上面 등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오농괴면에서의 ‘괴’에 해당되는 글자는 ‘怪’의 속자이다. 이밖에 鎭堡의 이름은 대부분 여진족의 말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며, 烽燧와 倉庫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 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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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부는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강원도 영월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월읍 영흥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으로 표시된 鉢山이다. 현재 읍치를 중심으로 왼쪽의 하천을 西江, 오른쪽을 東江이라고 부르고 있다. 두 하천이 합류하여 남한강 본류가 되며, 지도에는 錦障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명칭이 단일화되기 이전까지는 본류라 할지라도 다양한 명칭을로 불려졌다. 특히 크게는 고을마다, 작게는 마을마다 고유한 명칭을 붙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남한강에도 수백 개의 이름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동쪽에서 남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옥동천으로 부르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서 바로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석항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평창방면에서 흘러들어옴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또한 梨木里 역시 그 아래쪽 하천가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한다. 읍치 왼쪽에 있는 莊陵은 작은 아버지인 세조에 의해 즉위 4년 만에 쫓겨난 단종(1441-1457)의 묘이다. 그 왼쪽에 있는 淸冷浦는 단종이 유배당했다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유배지로서는 아주 적당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청량포나 그 위쪽의 北浦는 단순히 浦口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한자 표기로서, ‘물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浦자가 있다고 해서 모두 浦口였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물가에 있는 포구일 수도 있고, 단순히 물가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될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명칭은 대부분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위쪽의 章節祠는 단종에 대한 충신으로 이름난 死六臣과 生六臣 및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준 영월 戶長 엄흥도 등을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졌다. 읍치 오른쪽 위쪽에 있는 黃場은 黃腸의 誤記이며,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배양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伐木을 금했던 황장봉산을 의미한다. 고을 전체의 모습은 일부 단순화되기는 했지만 실제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남동쪽이 실제와 많이 다르게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이 경상도의 순흥·영천·안동·봉화 등과 복잡한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이기봉)

  • 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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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군은 황해도의 서부 지역에 위치한 고을로 文化와 載寧 사이에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북부면·가산면·온천면·두라면·용문면·노월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신천군 서남부(도락리·이목리·지남리·냉정리), 동부(건산리·용산리·화산리), 북부(마명리·오국리·덕성리)를 제외한 전지역에 해당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지명에도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는데 남쪽에 水鐵院이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花山이다. 읍치 서남쪽에 있는 天峯山에는 산위에 龍井이 있는데, 가물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다. 서남쪽 望日山 부근에 있는 서원은 1588년(선조 21) 건립되고 1710년(숙종 36)에 사액된 正源書院이다. 朱子·趙光祖·李滉·李珥 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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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전은 연천군 미산면과 왕징면, 군남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는 미산면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작은 고을이지만 산천명이 비교적 상세하다. 북쪽에 橫江이 표시되어 있고 삭녕도의 하류인 澄波渡 및 棆淵渡, 강변에 腐淵津이 표기되어 있다. 이 곳은 작은 현이었으나 1451년(문종 2)에 군으로 승격하게 되는데 그것은 崇義殿 때문이었다. 숭의전은 왕씨의 제사가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다. 숭의전은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가 1392년(태조 1)에 사당을 만들어 고려 태조를 비롯한 8명의 임금을 配享하였다. 1425년(세종 7)에는 고려의 태조, 현종, 문종, 원종만 제사지내도록 했으며, 이후에 정몽주를 비롯한 16명의 고려 충신들을 함께 배향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3년에 미산면 아미리에 복구하여 사적 제223호로 지정하였다. (김지영)

  • 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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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천현은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성남면·병천면·동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목천면 동리·서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의 鵲城山이었다. 하천과 산줄기 및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이 실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주변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이 미호천의 지류인 병천천의 상류인데, 지도에는 方山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에는 山方川이라고 나오고 있어, 지도 작성자가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幷川은 우리말 ‘아우내’에 대한 한자 표기인데,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다. 지도 위의 近東面이 현재의 병천면 지역이며, 1919년의 삼일운동 때 柳寬順(1904-1920) 등이 만세를 불렀던 ‘아우내장터 또는 아오내, 아내’로 잘 알려져 있다. 黑聖山 밑의 읍치 지역에는 현재 독립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고개 이름은 우리말에 대한 한자 표기방식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지도 왼쪽의 ‘大峙’는 우리말 ‘한치고개’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크다’는 뜻의 순우리말 ‘한’을 한자의 ‘大’로 바꾼 것으로, 이런 경우는 많은 곳에서 찾을 수 있다. ‘道里峙’는 ‘回峙’라고도 적는데, 고개가 휘돌아 감아 넘어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道里’는 순우리말을 한자의 음으로 표시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에 표시된 道東書院은 성리학을 만든 朱子와 戊午士禍(1498) 때 신진세력으로 처형당한 金馹孫(1464-1498) 등을 배향하여 인조 3년(1625)에 세워지고, 숙종 2년(1676)에 賜額 받았다. 현재의 병천면 도원리 서원말에 있었다. 지도 위쪽에는 조선시대까지 백제의 수도로 알려진 慰禮城이 표시되어 있지만,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이 밖에 新道里와 柳光村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앞의 것은 신선들이 와서 놀았다는 큰 바위 밑의 찬 샘으로 알려졌던 곳이며, 뒤의 것은 사기를 굽던 마을이었다.(이기봉)

  • 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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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桐岑이었는데 경덕왕 때 김산이라 고쳤다. 김산은 현재의 김천시 김천시내, 대항면, 조마면, 구성면 일부, 대항면, 봉상면, 어모면, 감문면 서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김천시 김천시내 교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를 감싸고 흐르는 直旨川은 소백산맥의 秋風嶺 골짜기에서 흘러내려 甘川으로 유입된다. 감천은 가야산맥의 牛頭嶺(587m)에서 북동쪽으로 흘러 선산에서 낙동강과 만난다. 읍치의 북동쪽에 있는 추풍령은 한성과 영남을 잇는 嶺南路가 통과 했고, 오늘날에는 경부선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한다.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五波山이며, 충청북도 황간 경계에 접한 黃岳山(1111m) 아래에는 공정왕 때 御胎를 안치한 태실이 있던 곳이다. 황악산 아래에 있는 直指寺는 418년(신라 눌지왕 2)에 黑湖가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0년(광해군 2)에 仁守, 明禮가 재건하였다. 이 곳에는 고려 林民庇가 지은 大藏堂 기문이 있다. 선산 경계에 접하여 있는 俗門山城은≪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그 둘레가 2천 4백 50자, 높이가 7자인 石城으로 그 안에 샘 2, 못 2, 군사 창고 1개가 있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金泉驛은 소속된 20개의 역을 관리하는 察訪道이다. (민경이)

  • 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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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령부는 관해면과 삼해면 일부를 제외한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부령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청진시 동부와 부령군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부령군 부령읍 일대에 있었다. 고을 전체의 모습이 실제와 거의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동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을 현재 수성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수성천이 흐르는 모습도 현재의 지도에서 보는 것과 거의 같다. 이 하천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 현재 청진시의 핵심지역에 해당된다. 해안가에는 浦·串·潭 등의 모습이 아주 자세한데, 모두 ≪輿地圖書≫의 富寧府邑誌에 나오는 지명들이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는 이것들이 대부분 해안가에서 떨어진 곳에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의 내용이 실제와 더 부합된다. 지도 오른쪽의 懷綏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지도책에서는 이러한 역의 경우 읍치보다는 조금 작지만 붉은색의 원으로 표시하는데,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 그 오른쪽에 있는 富居古縣은 세종 16년(1434)에 寧北鎭과 합해지면서 혁파된 고을이다. 읍치 위쪽으로 보이는 廢茂山과 上茂山社·下茂山社는 이 고을 서쪽에 있었던 茂山과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국경이 서북쪽으로 확장되면서, 폐무산에 있었던 茂山堡가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 무산보가 후에 무산부가 되지만, 그 흔적이 이 고을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밖에  함경도의 다른 고을 지도에 비해 洞·里가 많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이기봉)

  • 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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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주부는 청수읍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삭주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삭주군의 동쪽과 대관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삭주군 삭주읍에 있었다. 고을의 서북쪽에 압록강 본류가 있으며,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진다. 서북쪽은 압록강의 지류인 三支川 유역이고, 남동쪽은 대령강의 지류인 兄弟江 유역이다. 후자 부분에는 大朔州라는 지명이 보이고 있는데, 세조 12년(1466)까지 읍치로서 기능하던 곳이다. 본 지도 위의 읍치는 원래 小朔州라고 불리던 곳이다. 이와 같은 읍치의 이동은 조선의 국경 방어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압록강 변에는 강을 건너 쳐들어오는 적에 대한 1차 방어선의 역할을 하였던 仇寧鎭이 보이고 있다. 압록강 건너편에 빼곡히 적혀 있는 지명은 적의 예상 침입로이다. 창성천 유역으로 넘어가는 지역에는 2차 방어선 역할을 하던 군사기지가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다. 우선 고개나 협곡에 설치된 關門城이 여러 개 보이고 있는데, 지형적 조건 때문에 대규모의 적이라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지역이다. 고개 남쪽에는 幕岺鎭과 天馬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각각 인조 25년(1647)과 효종 4년(1653)에 처음 설치한 것으로서, 병자호란(1636) 이후 강화된 북방 경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천마진 오른쪽에는 屯田에 설치된 天馬屯倉도 보이고 있다. 현재 新溫溫泉으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는 溫井도 표시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는 자주 생략되거나 誤記가 발생하는 面의 이름과 위치가 거의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밖에 필사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어려운 俗字도 일부 보이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隱仙臺로, 大朔州 아래쪽에는 小八營·大八營으로 읽어야 한다. 현재 구령진 바로 동북쪽에는 수풍댐이 건설되어 있다.(이기봉)

  •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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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는 현재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편재되어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강원도의 울진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나 세종 이후 중앙의 통제가 어려운 流民들의 피난처라고 인식하여, 주민을 살지 못하게 하는 空島政策을 폈다.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공도정책을 포기하였으며, 공식적으로 이주민의 정착을 장려하였다. 지도에 ‘基址’·‘石葬’ 등으로 적혀 있는 것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可居’는 ‘거주 할만하다’는 뜻으로서, 만약 사람들을 살게 한다면 거주시키기에 적당한 곳이라는 의미로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숙종 19년(1693)에는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갔던 동래의 水軍 安龍福이 일본 어부에게 납치되어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이후 숙종 23년(1697)에 일본이 쓰시마주를 통하여 울릉도의 조선 영토권을 인정하고,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킨다는 것을 통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刻石立標·刻板立標는 이 때 세운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竹田(대나무밭)은 울릉도의 특산물을 적어놓은 것으로서, 이 섬이 해류의 영향을 받아 난대림을 형성하는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섬 오른쪽 아래의 船泊이라 적혀 있는 부분은 현재 울릉군의 군청소재지가 자리 잡고 있는 도동항 부근으로 추정된다. 섬의 전체적인 모양은 대부분이 실제와 상당히 다르게 그려져 있지만, 中峰으로 표시된 성인봉(983.6m)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간 하천의 모습은 실제에 가깝다. 기타 주변의 섬에 대한 표시도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재로는 대부분이 돌섬 정도에 불과하다.다만 울릉도 동쪽에 '于山'이라 기록된 섬은 현재의 독도를 가리킨다.(이기봉)

  • 안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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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군은 황해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북쪽은 대동강, 동쪽은 재령강과 접하고 있다. 재령평야의 서쪽 지역에 위치하여 다른 고을에 비해 제법 넓은 뜰이 펼쳐져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안악군 안악면·용순면·대원면·문산면·안곡면·서하면·대행면·은홍면·용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은천군 전지역, 안악군 서부와 남부를 제외한 지역을 포함한다. 황해도의 中營이 설치되었던 고을로 안악, 신천, 재령 등을 관할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楊山이다. 해안과 가까워 봉수도 여럿 설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북쪽 涉河面에는 冷井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椒井이라고도 하는데 맛이 시지만 병자들에게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屹紅面에는 溫井이 그려져 있는데 痼疾이 있는 사람에 효력이 있다고 한다. 동쪽의 艾津은 봉산으로 통하는 지름길로 이용되었다.(오상학)

  • 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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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양구, 서구 일부지역, 경기도 부천시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평의 읍치는 현재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에 있다. 읍치를 지나는 대로는 陽川과 仁川으로 통해있다. 진산은 북쪽에 桂陽山인데 일명 安南山이라고도 한다. 읍치 주변에 한강의 줄기들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形勝편에 고려 고종 때의 문장가였던 이규보(1168~2141)의 望海誌에 <삼면이 모두 물이다>하여 부천의 형승을 표현하였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보이는데 지금은 모두 간척되어 육지가 되어 있다. 중요한 面과 山의 명칭이 주기되어 있고 봉수도 보인다. 그러나 역원·불우·사묘는 주기되어 있지 않다. (김지영)

  •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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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현은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부용면 전체, 마구리·마동리·묘암리·염치리를 제외한 문의면, 인차리·청룡리를 포함한 서남쪽의 가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대청호에 의해 수몰되었다. 淸州界로부터 들어와 公州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금강의 본류이다. 이 지도에는 금강이란 명칭이 보이고 있지 않은데, 荊角津·新灘 등의 나루와 여울 이름이 그대로 하천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錦江’이란 명칭은 일제시대 이전에는 보통 공주 부근의 금강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형각진과 신탄은 懷德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여울과 나루가 한쪽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강 양안과 그 사이 모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新灘 남쪽의 회덕부분은 현재 신탄진 시가지가 펼쳐져 있는데, 일제시대 이후 철도역이 이곳에 설치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도 왼쪽에는 2개의 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오른쪽의 것이 魯峯書院이다. 宋麟壽(1487-1547)를 배향하여 광해군 7년(1615)에 세워지고, 효종 9년(1658)에 賜額 받았다. 이후 宋時烈(1607-1689) 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왼쪽의 것은 黔潭書院으로 숙종 21년(1695)에 宋俊吉(1606-1672)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그 해에 賜額 받았다. 이 두 서원에 세워진 인물들은 모두 문의 바로 남쪽에 世居하던 恩津 宋氏이며, 조선후기에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西人 老論派의 흐름을 대표하고 있다.(이기봉)

  •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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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가야국 땅인데 구해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하여 그 후 신라의 金官郡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년 지금 이름으로 金海府가 되었다가 조선 태종 때 다시 도호부로 고쳤고,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김해는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 전체, 창원시 대산면, 부산광역시 강서구 낙도안 西岸, 강동동과 명지동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고, 읍치는 김해시내 동상동과 서상동 일대에 있었다. 김해는 낙동강이 북쪽과 동쪽을 감싸 흐르면서 웅천 그리고 동래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安崇善의 기문에 김해의 형상을 “산천이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인물이 번성하였다. 세 갈래 물이 빙 둘렀고 일곱점 산이 얼기설기하다”라고 표현하였다. 김해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分山(또는 分城山, 310m)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龜旨峯은 신라 유리왕 19년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상자가 내려오고 그 알 속에서 수로왕을 비롯한 6가야의 시조 왕들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현재 김해시내에 수로왕릉과 그 왕비인 허왕후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있다. 고을 남쪽에 있는 德島는 강 중앙에 있으며, 鳴旨島는 鷲島와 2백보쯤 떨어져 있고 둘레는 7백리로 큰 비나 가뭄 그리고 바람이 불려하면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읍치 동쪽에 있는 서원은 新山書院으로 1576년(선조 9)에 세워져 曹植을 주향(主享)하고 申李誠을 從享하였으며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다. (민경이)

  • 북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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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청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북청군과 풍산군 안수면·안산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함경남도 북청군·신포시·덕성군과 량강도 김형권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북청군 북청읍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連德山이다. 읍치가 파란색 정사각형으로 표시된 이유는 咸鏡南道兵馬節制使가 파견된 南兵營이 있었기 때문이다. 읍치 아래쪽 바닷가의 해안선이 복잡하게 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 潟湖로 보이는 호수나 灣이 많았기 때문이다. 호수의 경우 지도에서처럼 바다로 확 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는 입구가 거의 막혀 있는 상태였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는 실제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부분은 북쪽 지역에 해당된다. 첫째, 端川界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이 상당히 굵게 표시되어 있어 상류가 훨씬 멀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실재로는 단천과의 경계선에서 발원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극히 짧은 구간만 단천으로부터 들어온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는 단천과의 경계선에서 하천이 발원하는 것으로 교정되어 있다. 둘째, 原致岺(厚致岺의 誤記임) 북쪽의 하천이 실제보다 훨씬 작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의 풍산군 안수면과 안산면에 해당되는 지역으로서, 현재는 대부분이 량강도 김형권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이곳에 있는 黃水川은 현재 압록강의 지류인 허천강의 상류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하천의 서남쪽 발원지는 지도에서와 달리 갑산·함흥·북청의 경계선에서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황수천에 대한 이와 같은 오류는 南大川과 황수천의 발원지인 香山(기록에는 香嶺·香洞 등으로 나옴)의 위치가 잘못 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 발생 원인은 향령이 ‘부 북쪽 130리에’, 후치령이 ‘부 북쪽 100리에’ 있다는 ≪輿地圖書≫ 북청부 산천조의 기록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地誌에서는 방향을 주로 東西南北으로만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의 북청부 기록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北’이라는 방향 표시가 ‘北西·北·北東’ 어디든 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향산 또는 향령은 실재로는 ‘부 북서쪽 130리에 있다’라고 표시해야 올바르다. ≪海東地圖≫의 북청부 지도에서는 더 심하게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는 이 부분이 일부 교정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문제점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이기봉)

  • 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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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등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동군의 삼등면 전체와 강동면의 동쪽 일부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며, 현재는 평양시 강동군 중간 부분에 걸쳐 있다. 읍치는 강동군 삼등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있는 鳳頭山(381m)이다. 본 고을은 고려 인종 14년(1136)에 新城·蘿坪·狗牙 세 部曲을 합해 만들어졌다. 楓岑面 쪽에서 들어와 읍치 남쪽을 지나 乾達山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기록에는 能成江·能城江·綾城江 등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본 지도에는 熊川江이라고 되어 있다. 위쪽의 水晶川은 강동현의 읍치를 지나 대동강 본류로 흘러 들어간다. 晶湖面·楓岑面의 위치가 잘못 그려져 있다. 정호면은 수정천 유역에, 풍잠면은 架山 부근에 입지해 있어야 한다. ≪輿地圖書≫의 삼등지도에도 비슷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는데, 읍치의 정보를 담기 위해 확대·과장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도의 작성자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짐작된다. 웅천강 역시 그 방향이 조금 잘못되어 있다. 유입지와 유출지가 거의 정동-정서의 방향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동북에서 흘러와 서북으로 나가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전자의 오류는 수정되었으나, 후자의 오류는 그대로 답습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면의 이름이 晶湖面·楓岑面·靈岩面만 나오고 있다. 그런데 ≪輿地圖書≫와 ≪戶口總數≫에는 晶湖坊·楓岑坊·靈峀坊·朝陽坊이, 김정호의 ≪東輿圖≫에는 晶湖·楓岑·靈峀이 나오고 있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靈岩面에서 ‘岩’은 ‘峀’의 誤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다른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읍치를 포함하는 조양면의 이름을 표시하지 않았다. 김정호의 ≪大東地志≫에는 朝陽坊 대신에 邑內坊이 나온다. ≪廣輿圖≫와 ≪海東地圖≫의 三登縣 지도에는 西(境)面·倉(洞)面·古丁(洞)面이 기재되어 있어, 위에서 제시한 자료와는 전혀 다른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廣輿圖≫·≪海東地圖≫와 위의 자료들은 상호 다른 자료를 기반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후자의 지도가 더 앞선 시기의 자료를 바탕으로 했을 가능성도 있다.(이기봉)

  • 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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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현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근남면·원남면·서면·죽변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울진읍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 방향에 있는 安逸王山이다. 이 지도는 몇 가지 점에서 실제와 다른 측면이 발견되고 있다. 첫째, 북쪽에 있는 鼎峙山 위쪽의 하천은 지금의 가곡천으로 모두 삼척의 영역에 있었지만 일부가 울진에 속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둘째, 서쪽의 낙동강 수계가 일부 속해 있으며, 안동계가 서쪽의 절반 정도에 해당됨에도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셋째, 아래쪽 吉谷으로 뻗은 하천은 지금의 왕피천으로서 영양계 방향에서 흘러 들어옴에도 마치 울진-영양 경계선이 分水界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넷째, 아래쪽의 金莊山과 바로 위쪽의 하천은 서남쪽으로 훨씬 내려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오류가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두 지도 사이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해안가에는 동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竹邊串이 표시되어 있다. ‘串’이란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육지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밖에 고을 서쪽에 표시된 封山은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했던 黃腸封山이다.(이기봉)

  • 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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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부는 황해도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경기도의 강화, 교동 해역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연백군 서부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연안군 전체, 청단군 흥상리·청정리·심평리 일대, 배천군 수원리·추정리·역구도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으로 일명 鳳勢山이라고도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해주의 동쪽이며 후서강의 서쪽이고 보련강 하류의 북쪽이다. 큰 산과 넓은 물, 넓은 들과 긴 냇물이 여기에 모였고, 또 조수가 통해 널따랗고 명랑한 것이 중국 江淮의 풍경과 같다. 가장 살만한 곳이며 한양에서 내려와 사는 사족이 많은데 다만 땅이 메마르고 가물기 쉬워 면화 재배에는 적당하지 않다. 따라서 주민들은 배로 강과 바다에 나가 통상하기를 좋아하는데 동으로는 두 도와 통하고 남으로는 호남 호서에 통하므로 산물을 무역해서 항상 많은 이익을 얻는다’고 기술되어 있다. 남쪽의 羅津이 이 지역 수상교통의 요지로 公私 선박이 이곳을 경유하여 지난다. 읍치 아래쪽의 南大池는 일명 臥龍池라고도 하는데, 겨울철에 얼음이 갈라지는 것으로 다음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오상학)

  • 삭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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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녕은 경기도 연천군 삭녕면. 서남면, 중면, 왕징면 북쪽 일부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북한의 철원군 일대이다. 서북쪽은 황해도와 동북쪽은 강원도와 접해 있다. 다른 지도와 달리 산줄기를 자세하게 표현하였다. 읍치는 북으로 城山과 남으로 임진강 합류지점인 羽化津 사이에 나타나있다. 孫廳灘은 강원도 철원군 고암산에서 나와서 군의 옛 승령현 서쪽을 지나 여울이 되었다. 읍치로 산줄기가 향해있으며 강줄기가 둥글게 흘러드는 형국을 보인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방위별로 북동쪽에 철원, 북서쪽에 안성, 남쪽에 장단으로 이어진다. (김지영)

  • 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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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현은 충청남도 보령시 시내·주교면·주포면·청라면·청소면 전체, 섬을 제외한 오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주포면 보령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唐山이다. 지도 왼쪽에는 충청도 水軍節度使營이 水營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수군절도사에는 정3품의 堂上官이 임명되었다. 현재의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으며, 위쪽으로 깊숙한 만이 형성되어 있다. 만의 입구는 마치 門처럼 보인다고 해서 海門이란 명칭이 붙어 있다. 성곽의 상당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水營 위쪽의 雙鰲島는 그 크기가 작은 돌섬에 불과함에도 표시되어 있다. 寒山寺는 현재의 천북면 하만리의 주강동 마을에 있었는데, 마치 바다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 두 곳은 水營을 다녀간 많은 墨客들의 시에도 등장할 만큼 경치가 뛰어난 곳이라 특별히 표시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도 동일하게 표시되어 있어,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쪽의 松島는 우리말의 ‘솔섬’을, 竹島는 ‘대섬’을 한자로 표시한 것이다. 송도는 간척되어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옛 대천시의 명칭이 유래된 大川(한내)이 보이고 있다. 대천의 상류에는 玉溪·檜川 등의 명칭도 보이고 있는데, 일제초기 하천 명칭의 단일화과정에서 모두 사라졌다. 읍치 아래쪽의 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나르기 위해 보관하던 海倉이다. 면의 이름이 고유명을 지니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이 중 金神面의 경우 옛 金神部曲의 명칭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이기봉)

  •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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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는 693년(효소왕 2)에 轉也山郡을 두어 君主가 다스려 왔으며 그 후 경덕왕 때에 남해라 개칭하였다. 남해는 南海島와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우리나라의 네 번째로 큰 섬인 남해도는 노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육지와 떨어져 있어 접근이 어려웠으나 현재는 남해고속도로와 남해대교가 개통된 이후 외부와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그리고 金萬重(1637~1692)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구운몽≫을 쓴 곳이기도 하다. 읍치 북쪽에 있는 露粱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최후의 대승을 거둔 해전으로 유명한 곳이며, 그 아래에 보이는 忠烈祠는 1633년에 세운 사당으로 이순신을 배향하고, 1663년(현종 4)에 사액되었다. 지금의 남해군은 남해군 창선면을 제외한 남해읍, 이동면, 삼동면, 남면, 서면, 고현면, 설천면 등 남해군 전체에 해당되며, 읍치는 남해읍 남변리에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있는 望雲山 (786m)이 鎭山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남해도는 성곽의 터가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 읍치 북쪽에 있는 古城 (또는 古縣山城)과 官堂城은≪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石築으로 그 둘레가 각각 1천 7백 40척과 7백 20척이다. 그 외 바다에 접하여 있는 平山浦鎭, 彌助項鎭 등은 모두 海岸防禦를 위한 鎭들이다. (민경이)

  • 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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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수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삼수군과 장진군의 북면·동문면·동하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량강도의 삼수군·김정숙군과 자강도 랑림군 전체, 함경남도 부전군 북쪽 절반에 걸쳐 있다. 읍치는 량강도 삼수군 삼수읍에 있었다. 고을 북쪽에서 甲山界로부터 廢四郡界로 흘러나가는 하천이 압록강 본류이다. 읍치 오른쪽을 흘러 압록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삼수천이다. 아래쪽의 함흥계로부터 발원하는 하천은 오른쪽은 부전강, 왼쪽은 장진강이다. 江口堡 이남의 부전강과 장진강 상류에는 정조 11년(1787)에 長津府가 설치되기 때문에, 이 지도는 최소한 그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하천의 길이 부분에서 2가지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첫째, 읍치 오른쪽을 흐르는 삼수천이 실제보다 2배 이상 길게 표시되어 있다. 둘째, 瓮洞烽에서 장진강에 합류하는 하천 역시 실제보다 2배 이상 길게 표시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이 부분의 고을 모습이 실제와 많이 다르게 되었으며, 두 하천의 길이를 1/2로 축소하면 실제와 부합한다. 그 이외의 부분은 실제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내부적으로 약간씩의 교정은 이루어지고 있다. 압록강 변에 4개, 장진강 변에 6개의 鎭堡가 설치되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고종 6년(1869) 폐사군 지역에 정식으로 고을이 설치되기 이전까지는 이 고을의 압록강 부분과 장진강이 최전방으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기타 지도 위쪽에 있는 舊乫坡知社 왼쪽의 하천도 지나치게 길게 그려져 있다.(이기봉)

  • 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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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화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진남포부와 용강군 삼화면·금곡면·신녕면·귀성면·대대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평안남도 온천군의 남쪽 절반, 남포시 와우도구역 전체와 항구구역·용강군의 일부에 걸쳐 있으며, 읍치는 용강군 삼화리에 있었다. 이 고을은 고려 인종 14년(1136)에 西京 관할의 金堂·呼山·漆井 세 部曲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지도에 보이는 金堂面·大代面(呼山의 異稱)은 이러한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漆井은 용강의 땅으로 다시 옮겨갔다고 한다. 이 고을의 남쪽은 대동강과 바다가 만나는 마지막 지점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미 潮水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강으로서의 생명력은 거의 끝난 상태이다. 지도는 해안선의 복잡한 모습을 실제처럼 잘 반영하고 있다. 현재는 많은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이러한 복잡한 해안선의 상당부분이 단순화되어 버렸다. 과거에는 복잡한 해안선과 넓은 갯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少雨地라는 특성을 이용해 鹽田이 발달했던 지역으로 유명했다. 지도 왼쪽에 표시된 廣梁(鎭)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는데, 그 오른쪽의 灣을 현재는 광량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광량만이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염전지대였다. 지도 오른쪽의 海倉이 있는 곳이 후에 남포항으로 개발된 지역이다. 그 아래쪽에 있는 섬들은 현재 모두 육지로 변모되어 버렸다. 바닷가에 있는 섬은 크기나 위치 등에서 실제와는 다른 측면이 많다. 德(島)의 경우 大吹螺(島)보다 훨씬 서쪽에 있음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席(島)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섬일 뿐만 아니라 덕도의 몇 십 배에 이른다. 그리고 육지에 비해 섬의 면적이 전반적으로 크게 표현되어 있다. 이 지도가 거리와 면적 등의 정확성을 목표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섬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표현이 많다는 것은 섬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종 지지에는 섬의 크기와 거리가 기록되지 않은 것이 많은데, 그러한 영향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이기봉)

  •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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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목은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의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과 북내면의 동쪽에 해당되는 아주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원주 시내 일산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 방향에 있는 雉岳山(1,288m)이었다. 이 고을의 규모가 이렇게 큰 것은 첫째, 신라 때 5小京의 하나인 北原京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小京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다른 郡縣보다 더 컸다. 둘째, 고려시대에 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지도 오른쪽의 酒泉이라 표시된 곳에 있었던 酒泉縣이 屬縣으로 나온다. 이것은 아직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주천현은 독자성을 잃고 원주목에 완전히 편입되게 된다.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자성을 잃은 部曲·所도 각각 2·3개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의 표시가 이중의 사각형 안에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것은 이 지도책에서 종2품의 관찰사가 파견된 지역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던 방식이다. 성곽이 있는 경우는 성곽표시를 하였지만, 이 고을에는 없었기 때문에 사각형 모양만 그렸다. 그 아래쪽에는 丹丘驛이 붉은색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이 지도책에서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린 경우에 적용되던 방식이다. 하천의 표시가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다. 남한강 본류는 지도 왼쪽 아래쪽의 서남쪽에서 들어와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읍치 방향에서 나가는 하천은 현재 섬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도에는 남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蟾岩江으로 기록되어 있다. 섬강은 橫城 동북쪽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실재로는 횡성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함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지도 왼쪽의 金堂川은 현재 곡수천으로도 불리고 있으며, 현재는 여주에 속해 있다. 지도 오른쪽의 加田川·古孫津·公龍灘은 현재 주천강으로, 그 오른쪽의 沙川은 평창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진행되면서 주천·평창 등의 지역 이름이 그대로 하천의 명칭에 반영되었고, 옛날 이름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두 하천이 합류하여 西江이 되고, 영월읍 부근에서 남한강 본류와 합류한다. 왼쪽의 남한강 본류 곁에 있는 興原倉은 고려 때 12漕倉의 하나였으며,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원주·영월·평창·정선·횡성의 田稅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水站이 설치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수참이 폐지되고, 단지 원주의 大同米와 田稅만을 모아 운반하던 곳으로 변했다. 현재의 위치는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이며, 조선후기에 번성했던 浦口 중의 하나였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일부의 오류가 있지만 고을의 모습이 대략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이기봉)

  • 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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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진부는 황해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해안 방어의 요충지였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동남면·북면·서면·용천면·가천면·백령면·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태탄군 은동리를 제외한 옹진군 전지역과 태탄군 옥암리, 남한의 옹진군 백령면과 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도에는 군사 요충지답게 水軍節度使가 관장하는 水營이 정방형으로 부각되어 표시되어 있다. 원래 현령이 다스리다가 1718년(숙종 44)에 所江鎭을 병합하여 水營으로 승격하고 水軍節度使를 두어 옹진도호부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또한 소강진에 영을 설치하여 行營이라 칭하고 옹진은 本營이라 하였는데 所江船所로 표기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의 花山이다. 북쪽 해안의 西京浦는 鹽釜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오상학)

  •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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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남서부에 위치한 수원은 본래 고구려의 買忽郡이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도호부, 세종 때에 진을 설치하여 판관을 배치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顯隆園(사도세자의 묘)을 수원부로 옮기기로 하고 수원의 읍치는 팔달산 아래 현재의 수원시 위치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군이 되었으며 1949년 수원읍을 분리하여 시로 승격하고 나머지 땅은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1967년 경기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이 지도에 나타난 수원은 현재 수원의 영역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수원부는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화성군의 매송면, 봉담면, 태안읍, 장안면, 팔탄면, 우정면, 향남면, 정남면, 양감면 일부지역과 경기도 오산시, 경기도 평택시의 청북면, 안중면, 오성면, 현덕면, 포승면 일대에 해당한다. 서쪽에 보이는 풍는 현재의 대부도로 육지와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지도의 아래 왼쪽은 아산만이다. 지도에는 水運의 발달에 의해 設倉, 海倉, 浦口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화성군 남양면 일대, 평택시 오성면 일대에ꡐ稷山地ꡑ(충청남도 천안군), 화성군 우정면 일대에ꡐ陽城地ꡑ(경기도 안성군) 의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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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현은 보은군에서 회북면·회남면, 대안리 북쪽을 제외한 내북면의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보은읍 삼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동쪽 경상도와의 경계에 있는 俗離山이다. 속리산은 이 고을의 모든 산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며,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내려오다 한남정맥·금북정맥으로 분리되어 북쪽으로 올라가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 때에는 俗離岳으로 불리며 中祀를 올렸으며, 조선 초에도 大自在天王祠를 설치하여 매년 10월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속리산의 위상이 고려되어, ≪東國與地勝覽≫을 편집할 때 鎭山으로 정하여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고을의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이며, 서북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후자의 지역에는 원래 林堰部曲이 있었으며, 조선 초까지도 독자적인 성씨와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의 보은군 내속리면과 산외면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 오른쪽 아래에 있는 書院은 象賢書院이다. 己卯士禍(1519) 때 귀향 갔다가 죽은 金淨(1486-1520) 등을 배향하여 명종 4년(1549)에 세워지고, 광해군 2년(1610)에 賜額 받았다. 현재의 외속리면 서원리 서원말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面의 크기는 고을마다 편차가 있었는데, 이 고을의 경우 현재의 面 규모와 비슷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일제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에서도 읍치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 1개의 면으로 편제되었다.(이기봉)

  • 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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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는 丹溪·江城 두 縣을 합한 이름이다. 강성현은 원래 신라의 闕支縣인데 경덕왕 때 闕城郡으로 고쳤다. 단계현은 본래 신라의 赤村縣인데 경덕왕 때 丹邑으로 고쳐서, 궐성군 領縣이 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 단계·강성을 합하여 지금의 이름인 단성으로 고쳤다. 단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신안면, 생비량면, 신등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산청군 단성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단성면의 사월리는 文益漸이 그의 장인 鄭天益과 더불어 元에서 들여온 목화 종자를 심어 목화재배와 면직에 성공한 곳이다. 단성은 소백산맥에서 발원하는 남강의 본류인 경호강과 그 지류인 양천강과 단계천이 흘러서 진주의 진양호로 유입된다. 읍치 북쪽에 있는 來山이 鎭山이며, 白馬山 아래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尺旨山에서는 철이 산출되고, 芚鐵山(811m)은 산청 경계에 있다. 옛 단계현에 丹溪倉이 보이며, 읍치 오른쪽에는 新安津이 있다. (민경이)

  • 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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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변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안변군과 문천군의 풍상면·풍하면, 그리고 강원도 통천군의 흡곡면·학일면에 해당된다. 지금은 강원도 안변군·고산군·법동군과 통천군의 시중대 위쪽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안변군 안변읍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 위쪽에 표시된 鶴城山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최상류이며, 읍치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 남대천이라고 부른다. 전자의 유역에는 조선초기까지도 永豊縣이 이 고을의 屬縣으로 존재했었다. 이 지역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져 있지만, 읍치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크게 그려져 있다. 읍치 지역은 실재로는 이 지역에 비해 동서의 폭은 약 2배, 면적은 3배에 가깝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실제에 가깝게 조정되어 있다. 두 유역 사이를 남북으로 가르는 부분의 길이도 상대적으로 너무 길게 그려져 있다. 실제와 부합하려면 지도상의 길이보다 약 1/3 수준으로 축소되어야 한다. 이 부분은 김정호의 지도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명칭의 기록에도 일부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지도 오른쪽에 표시된 鶴湖社는 鶴浦社의 잘못이며, 그 아래쪽의 市川도 沛川의 誤記이다. 이 밖에 이 고을에 흡수된 과거의 廢縣이 지도에는 ‘○○古縣’ 또는 ‘古○○’로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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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수산면·천곡면·풍동면과 간동면의 동남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양시 상원군으로 바뀌었다. 읍치는 상원군 대천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의 盤龍山이다. 遂安界로부터 平壤界로 흘러가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며, 과거의 기록에는 보통 能成江으로 나온다. 於汀灘에서의 ‘灘(여울)’은 경사가 급해지면서 물살이 센 부분을 일컫는다. 이런 지역에는 하천의 깊이도 얕아져서 도보로 건널 수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또한 단순히 여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오른쪽의 文浦川은 현재 상원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다고 하여 東川이라 기록되었다. 그러나 ≪輿地圖書≫에는 文浦川으로 나오며, 동천에서 명칭이 바뀌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龍頭浦란 명칭은 18세기까지의 대표적인 地誌書인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이다. 이것을 통해 이 지도가 다른 地誌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용두포는 김정호의 ≪大東地志≫와 ≪東輿圖≫에는 기록되어 있다. ‘浦’는 浦口를 의미할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물가를 지칭하는 ‘개’를 한자로 표현한 경우도 있다. 또한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지도 오른쪽의 培化面에 있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황주강의 최상류이다. 도로는 중화방면에서 읍치까지만 표시되어 있어, 사방으로 뻗어나간 도로의 양상이 파악되고 있지 않다. 다만 고개를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기 때문에, 도로의 표시가 없더라도 이곳으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을과 하천의 전반적인 모습은 현대의 지도와 비교해 보아도 크게 잘못된 점이 없을 정도로 잘 그려져 있다.(이기봉)

  •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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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안협면·서면·동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강원도 이천군에 해당되며, 지금의 북한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이천군·판교군·법동군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이천군 이천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2리에 있었다’는 城山이었다. 읍치 오른쪽을 흐르는 하천은 발원지가 함경도의 안변(지금은 강원도 법동군)인 임진강 본류이며, 安峽界 방면으로 빠져나간다. 맨 위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고미탄천의 최상류인데, 평강을 거쳐 읍치 위쪽의 蛇島 부근에서 합류한다. 읍치 아래쪽에서 深洞里 방면으로도 임진강의 지류가 뻗어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 이 고을의 경계를 넘어가는 그러한 지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輿地圖書≫·≪海東地圖≫의 안협현 지도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지 있다. 읍치 위쪽 방향에 있는 內山面도 山內面의 誤記이다. 가장 위쪽에 표시된 十未呑面이란 명칭도 기록이나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명칭이다. ≪輿地圖書≫의 안협현 지도에 ‘古味呑’이 2개 적혀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마을(里) 이름이 유난히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지도 중간 부분에는 안변과의 경계선에 防墻峙가 보이고 있는데, 철령·분수령과 함께 함경도로 넘어가는 중요한 요해처로 여겨졌다. 이곳에는 일반적으로 關門(城)이라 불리는 防墻이 설치되어 있었다. 谷山界 아래쪽에는 新溪界라고 표시해야 함에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지도 동북쪽 끝에는 ‘陽界’라고만 적혀 있는데, 원래는 安邊界라고 적혀 있어야 한다. 지도 작성자가 뭔가 잘못 쓴 것을 인식한 후 그대로 놔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타 북창 오른쪽으로 封山이 보이고 있는데,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이다.(이기봉)

  • 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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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율현은 황해도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은율면·남부면·북부면·서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은율군 남부지역과 송화군 원당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을의 풍속이 소금과 쇠로 생리를 삼는다고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땅이 아주 기름져 논에 1말 종자를 뿌려 때로는 수백 말을 수확하고 적더라도 100말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고을 중앙을 흐르는 하천인 漢川이 고을의 명당수가 되는데 1871년 ≪海西邑誌≫에 의하면, 이 하천변으로 많은 논들이 있는데 모래를 파서 도랑을 만들어 관개를 한다고 한다. 읍치 동쪽에 四仙臺가 표시되어 있는데, 桓仁(桓因)·桓雄·檀君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읍치 동쪽에 위치한 서원은 鳳巖書院이다. 1613년(광해군 5)에 士人 鄭希男 등이 현 남쪽 20리 院坪에 창건하였다. 1701년(숙종 27)에 士人 鄭璉 등이 현 위치에 옮겨 세웠고, 김굉필과 이이를 배향하였다. 동쪽의 九月山에는 산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지역의 대표적인 城池로서 성 주위가 14,386척이고 높이가 15척이다. 산성의 모습이 큰 배와 같고, 길이 동서로만 나 있는데 험준한 棧道로 이루어져 있다.(오상학)

  • 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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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안산시와 시흥시 일대이다. 현재의 안산시에서 일동, 이동, 본오동, 성포동 등(廣州 땅)은 제외되며 시흥시 거모동, 군자동, 월곶동, 장곶동, 장현동, 정왕동, 죽률동, 조남동, 목감동, 논곡동, 하상동, 하중동 등이 포함된다. 읍치는 지금의 안산시 수암동 일대로, 동쪽에 橋獐鳴峴, 북쪽으로 麻河山, 王兒峴, 서쪽으로 君子山등 주변에 산이 자세하다. 진산은 경기도 안산시, 안양시, 군포시의 경계에 있는 修理山이나 표시되지 않았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廣州, 衿川을 지나고 있으며 서쪽에 石谷驛이 있다. 서남쪽으로 舊草芝(안산시 초지동)는 바닷가에서 외적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으로 범리면에 水軍萬戶가 있었다. 1656년(효종 7)에 강화로 옮겼는데 성의 옛터가 남아있다. 바다에 衣耳(島), 乭注(島), 雙(島), 召勿(島)부속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현재는 주변 섬들이 시화간척사업으로 매립되었다.(김지영)

  •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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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현은 부여군 부여읍·규암면·은산면과 추양리·초평리를 포함한 조촌면의 서북쪽에 해당되며, 읍치는 부여읍 구아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扶蘇山이다. 부소산에는 山城이 있었는데, 특별히 표시되어 있지는 않다. 公州界로부터 들어온 금강이 읍치 서쪽을 돌아 林川界 방향으로 빠져나가는데, 지도에는 白馬江이라고 적혀 있다. 錦江은 보통 공주 부근에서 사용되었으며, 부여에서는 백마강이라고 불렀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진행되면서 금강으로 확정되었고, 이후로 백마강이란 호칭은 공식적인 하천 명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부여는 백제의 성왕 16년(538)부터 멸망하는 의자왕 20년(660)까지 수도로서 기능했던 곳이다. 지도에도 이 때의 흔적이 몇 개 표시되어 있다. 落花岩은 백제가 멸망하자 수많은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금강 변의 절벽이다. 이 지도의 작성자도 이러한 낙화암을 부여를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로서 인식한 것으로 생각된다. 釣龍臺는 백제를 멸망시킨 唐나라 蘇定方의 설화가 얽혀 있는 곳으로서, 부소산성 북쪽의 금강 가운데에 있는 바위이다. 지도에는 賜額 받은 곳이 2개나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의 白江書院은 浮山書院이라고도 한다. 金集(1574-1656)과 李敬輿(1585-1657)를 배향하여 숙종 45년(1719)에 세워졌고, 그 해에 바로 賜額 받았다. 읍치 오른쪽의 義烈祠는 백제의 충신으로 알려진 成忠과 興首·階伯 등을 배향하여 선조 9년(1576)에 세워지고, 같은 왕 11년(1578)에 賜額 받았다. 기타 지도 왼쪽에 海倉이 보이고 있는데, 田稅와 大同米를 저장했다가 수도 한양으로 옮겨갔던 곳이다. 해창은 바닷배가 닿는 곳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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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는 본래 신라의 達勾火縣 또는 達弗城인데 경덕왕이 大丘로 고치었다. 1419년(세종 1)에 大邱郡으로 되어 1466년(세조 12)에 도호부로 승격되고 1601년(선조 34)에는 경상도 감영이 대구부에 이전 설치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道가 폐지되고 전국23부 실시에 따라 대구부 관할의 대구군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에는 다시 부제를 실시했으나 대구면을 중심으로 시가지 일대만 대구부로 독립하였고 그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으로 되었다. 대구는 지도에서 보듯이 連龜山을 鎭山으로 하여 내부에 낙동강과 금호강이 흘러 땅의 형세가 평탄하고 넓다. 대구는 현재 대구광역시의 북구를 제외한 전체와 달성군의 하빈면, 다사읍, 화원읍, 옥포면, 논공읍, 청도군의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 일부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로 일대이다. 읍치의 서쪽에 보이는 達城은≪新增東國輿地勝覽≫기록에 의하면 석축으로 쌓았고 둘레 9백 44척, 높이는 4척이며 우물3, 연못2, 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달성 우측에 있는 硏經書院은 1564년(명종 19)에 건립하고 1690년(현종 16)에 사액 받은 서원이다. 그밖에 역원에는 凡於驛, 琴川驛, 舌火驛, 幽山驛, 梧桐院이 보이며 창고는 남창, 강창, 풍창, 해창 등이 산재하여 있다. 사찰에는 고려의 김황원(金黃元)의 기문이 있는 地藏寺를 비롯하여 용천사, 용연사, 임수사, 향림사, 추덕사 등이 분포하고 있다. (민경이)

  • 영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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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흥부는 일제시대의 영흥군 전체와 고원군의 운곡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남도 요덕군·금야군과 고원군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금야군 금야읍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있는 聖歷山이다. 이 지도 역시 바로 북쪽에 있었던 정평 지도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지도 왼쪽 위의 香爐峯으로부터 오른쪽의 可豆乧岺 근처까지는 거의 남북으로 표시되어야 한다. 읍치 왼쪽 위에 있는 沸流水는 香爐峯 근처에서 발원하여 거의 정남으로 내려오는데, 앞의 오류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도 다르게 반영되어 있다. 또한 香爐峯으로부터 바로 왼쪽의 馬踰岺까지는 향로봉-가두둘령 정도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이로 인해 2가지의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첫째, 마유령부터 艾田峴(艾用峴은 誤記임)까지의 산줄기가 거의 남북 방향임에도 서남 방향으로 표시되어 있다. 둘째, 龍興江 네 개의 근원 중의 하나가 마유령에서 발원한다는 기록과 부합하게 그리기 위해 향로봉 근처에서 발원하는 비류수의 근원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두 번째 오류는 ≪海東地圖≫의 영흥부 지도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상호 연관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읍치 오른쪽에 安佛寺가 守佛寺로 기록되는 등의 오류도 발견되고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가 일부 시정되어 있지만, 대체적으로 답습되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아래쪽 방향에 있는 璿源殿과 本宮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으로서, 그의 초상화가 奉安되어 있었다. 기타 지도 오른쪽 아래의 馬鷹은 현재의 호도반도로서, 옛 원산만(지금은 금야만이라고 부른다)을 감싸고 있는 부분이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이곳을 末應으로 표시하고 섬으로 처리하였다.(이기봉)

  • 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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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선천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선천군과 동림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는 선천군 선천읍에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읍치가 古府面에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함락된 후 지도 위의 읍치로 옮겼다. 고을 왼쪽에는 掘江이 표시되어 있는데, 중상류 부분은 淸江이라고 불렸다. 오른쪽에는 鐵馬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東路江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다. 본 고을은 한양-의주를 잇는 대로 위의 요충으로서, 중요한 관방처가 산재해 있다. 철산과의 경계 가까이에 있는 東林城은 고려시대 때의 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둘레 17,562尺(약 5,269m)의 대형 산성으로, 土築과 石築이 반반으로 되어 있었다. 철산과의 경계선에는 영조 45년(1769)에 2,300餘步(약 4,140m)의 左峴關門이 축조되었지만,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 關門은 아주 중요한 요해처로 인식되었음에도 표시되지 않은 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는 관문이 설치되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동림성 오른쪽에는 釰山城이 표시되어 있다. ‘釰’은 ‘劒’자를 대신해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일’이 아니라 ‘검’으로 읽어야 한다. 丁卯胡亂이 일어나던 인조 5년(1627)에 둘레 1,250步(약 2,250m)의 크기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당시 후금과의 긴장관계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두 산성에는 조선후기에 모두 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도 왼쪽 아래에는 待變倉·待變亭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오른쪽의 船所峴이라는 지명이 알려주고 있듯이, 戰船을 정박시키고 관리하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船所라고 표시하며, 가끔 禦變亭이라고도 한다. 지도 아래쪽에는 수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身彌島는 평안도에서 가장 큰 섬 중의 하나이며,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듯이 牧場이 설치되어 있었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이 목장에는 암말 255필, 수말 249필이 있었다고 한다. 面 중에서 읍치 주변에 있엇던 邑內面·新府面, 고을 북쪽에 있었던 普光面이 생략되어 있다. 기타 읍치 오른쪽 아래에는 芦山·灵山이 보이고 있는데, 각각 蘆山·靈山의 속자로서 표시된 것이다.(이기봉)

  • 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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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제현은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강원도 인제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인제읍 상동리·합강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2리에 있었다’는 伏龍山이다. 이 지도의 명칭으로 사용된 獜蹄에서의 ‘獜’은 ‘麟’의 속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고을의 정확한 한자 명칭은 麟蹄이다. 북쪽에서 흘러와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북한강의 지류인 소양강이다. 지도에는 伊布川·磊灘·彌勒川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시행되기 전까지는 동일한 하천이라도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다. 읍치 동남쪽에서 소양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요즘 리프팅으로 각광받고 있는 내린천이다. 다만 하천의 표시에서 일부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인제 서쪽에서 소양강 본류가 北流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인제읍에서 거의 西流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소양강 상류의 양구로부터 臺岩山 근처로 들어오는 하천이 굵게 표시되어 있어, 마치 본류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실재로는 인제의 북쪽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더 큰 본류이다. 셋째, 내린천 본류가 마치 정남에서 오는 것 같이 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동남 방향에서 흘러 들어온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둘째 오류는 시정되어 있지만 첫째와 셋째 오류는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내린천에 있는 古耳屯古縣은 地誌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海東地圖≫인제현 지도에는 耳屯古官基로 나오며, 현재의 기린면 귀둔리를 지칭한다. ‘귀둔’에서 ‘귀’는 뜻을 따고, ‘屯’은 음을 딴 것이다. 추동리와 이탄리(귀둔리)도 같은 수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지도 위쪽의 瑞和面 지역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인 瑞和縣으로 기록된 곳이다. 屬縣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직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같은 책의 古蹟조에 기록될 경우 이미 독자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고을 동쪽으로는 현재 태백산맥으로 불리는 백두대간이 북에서 남으로 지나간다. 이 백두대간 위에 雪岳山(1,707.9m)이 표시되어 있지만, 특별히 강조되어 있지는 않다. 일반인들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五色岺·彌時岺·珍富岺 등이 남북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封山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을 의미한다. 읍치 오른쪽의 反昌遷과 왼쪽의 九壯遷에서 ‘遷’은 벼랑길을 의미한다. 기타 중요한 마을(里나 村)의 표시도 아주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 장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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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련현은 황해도의 서북쪽 대동강 하구에 연해 있는 작은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일도면·이도면·북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은율군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편의 鳳凰山인데 날이 가물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고을 서쪽에 있는 楓串古縣은 과거 連豊縣이 있던 곳이다. 읍치 동북쪽의 大津浦는 평안도 三和로 가는 포구였는데, 1523년(중종 18)에 關을 설치하여 장삿배들이 몰래 중국과 통하는 것을 금하였다. 읍치 아래에는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고을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鳳陽書院이다. 이 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세워졌고, 이듬해 賜額되었는데 朴世采를 배향하였다. 대원군 집정기의 서원 철폐 때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오상학)

  •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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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군은 지금의 안성군 안성읍, 보개면, 금광면, 미양면, 대덕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안성읍 구포리와 명륜리 일대에 있었다. 鎭山은 飛鳳山이며 옛 성터가 남아있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북으로 양지, 서로 양성과 직산, 남으로 진천으로 통한다. 동북쪽의 하천이 한천이고 읍치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이 안성천으로 서남쪽으로 흘러 평택시를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大平은 미양면 정동리 부근으로 현재 목장이 들어서 있다. 읍치 남쪽으로 보이는 서원은 안성읍 도기리에 있는 沙溪書院으로 金長生(1548~1631)을 배향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毁撤되었다. 남쪽 진천과 경계를 이루는 瑞雲山에는 서운고성이 남아 있으며, 대웅전이 각각 보물로 지정된 靑龍寺와 石南寺가 있다. 지도에는 석남사만이 그려져 있다. (김지영)

  • 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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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인현은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서면·판교면·종천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비인면 성내리에 있었다. 지도 왼쪽에 다이아몬드 모양의 馬梁이 표시되어 있는데,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馬梁鎭이다. 원래 남포현의 廣岩에 있었는데, 戰船의 정박이 어려워져 효종 3년(1652)에 옮겨 왔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마량이 아니었으며, 鎭이 옮겨오면서 명칭도 그대로 따라온 것이다. 읍치 아래쪽의 海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했다가 한양으로 옮겨가는 곳이다. 조선초기에는 漕倉에 여러 고을의 租稅를 모아 한꺼번에 한양으로 옮겼다. 조선후기에는 漕倉의 기능을 대폭 축소하고, 해안가를 끼고 있는 고을의 경우 자체적으로 해창을 설치하여 운송하도록 하였다. 바닷가에 있는 섬의 경우 거리와 방향, 규모 등을 정확하게 그려 넣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矛島(띄섬)의 경우 烟島보다 해안가에서 훨씬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규모도 훨씬 작다. 아마 이 지도의 작성자는 섬의 규모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해안으로부터의 거리 정보 역시 거의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阿尾島는 河尾島의 誤記로서 우리말 ‘할미섬’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茅島보다도 훨씬 작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 밖에 아래쪽의 鍾川은 우리말 ‘북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이기봉)

  • 동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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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 나라를 이루어 萇山國 또는 居漆山郡이라 불렀고, 756년(겅덕왕 15)에 지금의 이름인 동래라 고치었다.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부산시에 속하였다가 1914년 부·군 폐합 때에 釜山府를 제외한 부분과 기장군을 합하여 동래군이라 개칭하고 군수를 두었다. 동래는 현재의 부산광역시 북구와 강서구를 뺀 나머지 지역 일대에 해당되며, 읍치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일대에 있었다. 동래에는 수영강이 유입된다. 동래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輪山이다. 읍치 아래에 釜山浦鎭에는 左道水軍僉節制使가 있어 豆毛浦, 多大浦 등 8개의 浦를 관할하였다. 두모포 부근 倭館에는 상주하던 倭戶가 있는데 1510년(중종 5)에 첨절제사 李友曾이 매질을 가해 분노한 왜호가 난을 일으켜 토벌 이후로 조정에서는 왜호 두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해 경계에 접하여 있는 金井山(801m)은 산마루에 3丈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둘레 10여 尺, 깊이 7寸되는 우물이 있다고 한다. 그 우물에는 금빛 물고기 한 마리가 5색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하여 금정산이라 이름을 붙였고 그곳에 절을 지어 凡魚寺라 하였다. 범어사는 678년(신라 문무왕 18)에 의상법사가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2년(선조 35)에 중건하고 1613년(광해군 5)에 다시 중건하였다. 이 절에는 국보 제 3389호인 범어사 삼층석탑이 있다. 남쪽에 있는 絶影島에는 목장이 있는데 견훤이 절영도産 말 1필을 고려 태조에게 헌납하였다가 뒤에 절영도 명마가 들어오면 백제가 망한다 라는 讖言을 듣고 후회하여 되돌려 달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읍치 왼쪽에 있는 溫井은 병을 지닌 사람이 목욕만 하면 낫는다하여 신라왕이 여러 차례 왔다고 한다. (민경이)

  • 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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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성부는 훈융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온성군, 경원군의 용덕면·유신면의 일부와 경흥군의 나진 일대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온성군 동북부와 새별군·은덕군·나진시에 일부씩 걸쳐 있다. 읍치는 온성군 온성읍 일대에 있었다. 서쪽에서 읍치까지의 두만강 부분은 ≪海東地圖≫의 온성부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지도에서 실제와 가장 다른 부분은 읍치 동북쪽에 錢江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실제보다 훨씬 동북쪽으로 튀어나가 있으며, ≪海東地圖≫의 온성부 지도와도 다르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상당히 시정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으로는 이 고을의 월경지가 북남으로 길게 늘어져 있음이 보인다. 이 부분도 실제와 대체로 부합하고 있다. 아래쪽에는 大島·小島가 표시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기록과 지도에는 모두 大草島·小草島로 나온다. 다만 ≪輿地圖書≫에 수록된 穩城府地圖에서 大島·小島란 명칭이 보이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만주지역으로부터 豆滿江으로 흘러 들어오는 分界江은 현재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연변의 해란강이다. 앞에서 지적한 부분만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고을의 실제 모습과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이 고을 부분은 일부의 교정을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 베낀듯할 정도로 비슷하다.(이기봉)

  • 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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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성천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평안남도 성천군과 회창군 일대이다. 읍치는 성천군 성천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釰鶴山이다. 釰鶴山의 ‘釰’은 우리나라에서 ‘劒’을 대신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에, 음이 ‘일’이지만 ‘검’으로 읽어야 한다. 위쪽의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이다. 상류·하류의 구분이 어렵게 되어 있는데, 陽德界로부터 들어와 慈山界로 빠져나간다. 慈山界 부근에 서북쪽으로부터 들어와 비류강을 합류시켜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대동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비류강이 佛流江으로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기록에 沸流江으로 나와 지도 작성자의 誤記라고 생각된다. 비류강이라는 명칭은 고구려의 시조 東明王이 北夫餘로부터 내려와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하천의 명칭과 동일하다. 조선초기의 ≪新增東國輿地勝覽≫과 조선후기의 ≪輿地圖書≫에 기록된 성천도호부의 地誌에는 모두 동명왕의 설화와 비류강을 연결시키고 있다. 읍치 위쪽의 屹骨山에는 산성이 있는데, 동명왕 때 항복한 松讓王이 쌓은 것이라는 설화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동명왕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은 만주지역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되고 있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현재의 남강이다. 기록에는 대부분 能成江·能城江·綾城江 등으로 나온다. 이 부분은 실제와 너무 다르게 그려져 있다. 大谷面·崇仁面을 흐르는 하천은 실재로는 遂安과 谷山의 경계 부근에서 남강에 합류한다.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에 나오는 성천의 지도는 비록 회화식 지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보았을 때 이 지도는 앞의 두 지도와는 다른 계통의 자료를 인용했거나, 지도 작성자가 오류를 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는 이 지도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인면에는 箕子影殿이 표시되어 있다. 箕子를 배향하여 숙종 22년(1696)에 세워진 것인데, 이 지역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중심지역 중의 하나였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小中華라는 인식 속에서 箕子朝鮮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조선후기의 사회적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기타 청에서의 은본위제 실시 이후 은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銀鑛, 즉 銀店이 2군데나 보이고 있다.(이기봉)

  •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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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군은 지금의 신동읍과 임계면을 제외한 정선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정선읍 봉양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飛鳳山이다. 지도에 보이는 하천은 현재 영월에서는 동강이라고 부르며, 이곳에서는 조양강이라고 한다. 지도에는 下爾江·桐江·寅灘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상류 쪽에는 餘粮驛이 표시되어 있는데, 餘粮은 우리말 ‘아우라지’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이곳은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이 처음으로 유래된 ‘아우라지나루’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왼쪽의 花遷은 우리말 ‘꽃벼루’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여기서 ‘遷’, 즉 ‘벼루’는 절벽에 만들어져 있는 벼랑길을 의미한다. 읍치 오른쪽의 古山城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城隍祠가 있었던 곳으로 나온다. 반면에 18세기 중반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輿地圖書≫에는 城隍壇이 동쪽 1리에 있다고 나와 옮겨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石穴避亂處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벽 위에 있는 동굴로서, 倭를 피해 백성뿐 아니라 관청의 문서까지 피난했던 곳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때의 倭는 麗末鮮初에 극성을 부렸던 倭寇로 생각된다. 읍치 오른쪽 방향에는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배양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伐木을 금했던 黃腸封山도 보이고 있다. 이 지도에는 面이 단지 南面과 西面 밖에 표시되어 있지 않아 혼란을 주고 있다. 실재로는 郡內面·西面·東面·南面·北面 등 5개가 있었다. 또한 고을 전체의 모습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고을 동북쪽은 素來洞(川)과 竹峴川이 갈라지기 훨씬 이전에 강릉과의 경계가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같은 책의 강릉 지도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며,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丹林里로 향한 물줄기도 실재로는 省石村 부근에서 加里王山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이기봉)

  • 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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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현은 황해도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해서정맥의 산줄기가 장산곶까지 뻗어 있는 지역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장연군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장연군·룡연군·태탄군 서부,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장산곶으로 널리 알려진 고을인데, 장산곶은 서해안 뱃길 가운데 가장 험한 곳으로 유명하다. 장산곶에는 고려 때부터 호남의 변산과 호서의 안면도와 함께 소나무를 가꾸어 궁전을 짓고 배를 건조하는 재목으로 사용했다. 장산곶 부근에 보이는 祭堂(長山串祠)은 祀典에 大川으로 小祀에 실려 있는데,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장산곶 위쪽 白沙汀에는 金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바닷가 20리가 모두 모래 언덕이다. 모래가 아주 잘아 금빛 같으며 햇빛에 비치어 반짝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모래가 쌓여 산봉우리처럼 된다. 모래 위의 절은 웅장하고 화려한데 모래에 묻히지 않는다고 한다. 읍치 서쪽의 汪濟屯은 민간에서 전하기를 삼한시대 때 왕이 피난하여 강을 건넜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御營廳에서 屯을 설치한 곳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龍井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끌어서 논에 물대는데 가물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지도에는 둥그렇게 부각시켜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읍치 서쪽에 표시된 龍穴은 큰 동굴이다. 고을 서쪽의 助泥鎭은 숙종 때 설치된 수군 萬戶鎭이고 白翎島鎭은 광해군 때 설치된 수군 僉使鎭이었다.(오상학)

  • 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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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군은 지금의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서종면, 옥천면과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 표현된 읍치는 지금의 양평읍 양근리 일대로 1747년(영조 23)에 葛山으로 읍치를 옮겼다. 지도에는 하천의 이름이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되어 있다. 지류의 이름도 표시되어 있다. 서북쪽으로 흐르는 강이 북한강이며 남서쪽의 흐르는 大灘이 지금의 남한강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幷灘은 龍津의 물이 합류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의 양수리이다. 龍津은 나루 위에 여울이 있어 가물면 걸어서 건너는데 서울로 가는 길로 통하는 要害地였다. 하천 주위에는 누대와 역원이 많았으나 지도에는 파악되어 있지 않다. 읍치 위쪽으로는 咸公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려 몽고 침입 때 고을 사람들이 피난했던 곳이라고 한다. 幷灘 아래쪽은 광주군 남종면 일대로 지도에 표시된 分院里는 병탄의 위치에 있다. (김지영)

  • 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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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군은 충청남도 서산시 시내·대산면·지곡면·성연면·팔봉면·인지면·부석면·음암면, 태안군 고남면과 북쪽 일부를 제외한 안면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서산시 시내 읍내동에 있었다. 읍치 아래쪽에 海美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해미의 지도에서 설명한 것처럼 잘못되어 있는 부분이다. 창고가 위와 아래에 2개 보이고 있는데, 모두 海運을 통해 한양으로 옮겨갈 田稅와 大同米를 집적하여 보관하던 곳이다. 남북에 2개를 설치함으로써 고을 내에서의 운송 거리를 최소화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쪽 창고 옆에는 船所가 보이고 있는데, 이 고을에서 관할하던 戰船을 정박시키던 곳이다. 이곳에는 軍器庫와 什物庫 등도 함께 설비되어 있었다. 지도 위쪽에 그려진 남색의 다이아몬드는 이 책의 모든 지도에서 공통적으로 鎭堡를 표시하던 기호였다. 이곳에는 平薪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으며, 5척의 戰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安眠島가 그려져 있는데, 지도에는 安眠串으로 표시되어 있다. ‘곶’이란 섬이 아니면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간 육지를 의미한다. 인조(1623-1648) 때 충청감사 金瑬(1571-1648)가 漕運의 편리를 위해 현재의 안면교 부근을 굴착하여 곶이 아니라 섬으로 변모시켰다. 안면도의 모습은 복잡한 해안가가 개간되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面의 이름 중 地谷縣→地谷面·禾邊所→禾邊面·仁政部曲→仁政面·聖淵部曲→聖淵面 등이 과거의 명칭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기타 大山面에는 助立部曲이 있었으며, 안면도에는 安眠所가 있었다.(이기봉)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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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은 신라 초에 冠文縣이라 하였는데 일명 冠縣 또는 高思曷伊城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 때 冠山縣이라 개명하였고, 고려 초기에 聞喜郡으로 하였다. 1018년(현종 9)에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지금 이름인 문경으로 고쳤다. 문경은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마성면, 가은읍, 농암면, 호계면, 문경시내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으며, 읍치는 문경시 문경읍 하리 일대에 있었다. 문경은 소백산맥의 鳥嶺(또는 새재, 642m) 남쪽에, 그리고 영강과 조령천 유역에 위치하여 교통 및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申砬(1546~1592)은 潁江峽谷과 조령에서 왜적을 막아내려 하지 않고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으로 물리치려다 참패했다. 임진왜란 후 간선도로가 추풍령으로 옮겨짐에 따라 조령의 중요성은 줄어들었지만 鷄立山(또는 하늘재)을 넘어서면 충주와 연결되어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연결시키고 남한강과 닿게 되는 통로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조령 아래에 있는 伊火嶺도 민간에서 많이 이용하던 고개였다. 鳥嶺山城은 1708년(숙종 34)에 쌓아 현재의 제1관문(주흘관)·제2관문(조곡관)·제3관문(조령관) 세 곳에 성이 있고 남북이 8리이며 둘레가 1만 8천 5백 9步로 조령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영강과 조령천 강변에 있는 姑母城과 姑父城 또한 신라 때 방어를 하던 곳이다. 가은면에 있는 加恩古縣城(또는 甄萱山城)은 둘레 5백 65척尺으로 견훤이 가은현 사람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主屹山(1106m)이다. 고현면에 있는 虎溪는 본래 신라의 虎側縣으로 拜山城이라고도 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문경에 내속되었다. 曦陽山 아래에 있는 鳳岩寺는 879년(신라 헌강왕 5)에 지증국사가 처음 세워 여러 차례 重修를 거쳤고 삼층석탑(보물 제169호) 등 9점의 보물이 있다. 호남면에 있는 幽谷驛은 察訪驛으로 18개 역을 관할하였다. (민경이)

  •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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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현은 일제시대의 이원군에 해당되며, 지금도 함경남도 리원군 일대이다. 이성현은 정조 24년(1800)에 利原縣으로 이름을 바꾼다. 따라서 이 지도는 아무리 늦어도 1800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줄기의 모습은 실제와 거의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多寶社에 있는 하천은 길이가 다른 2개의 하천과 비슷함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섬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에 기록되지 않은 川椒(島)가 나온다. 이 섬은 김정호의 ≪東輿圖≫에는 위치가 交濟倉 아래쪽으로 바뀌어 표시되어 있으며, 김정호의 ≪大東地志≫에 ‘남쪽 30리’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이성현 지도에도 이 섬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와 김정호의 ≪東輿圖≫는 ≪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輿地圖書≫ 이외의 자료도 참고하여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 아래쪽에 있는 層岩 역시 앞에서 언급한 자료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는 섬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해안가 육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해안가의 호수 역시 실제보다 훨씬 크게 표시되어 있는 단점이 있다.(이기봉)

  • 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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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서해면·검산면·조망면·동송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숙천군의 대부분에 걸쳐 있다. 읍치는 숙천군 숙천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堂山이다. 고을의 전체적인 모습은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 책의 지도 대부분이 산줄기를 강조하여 그리고 있지만, 산의 높낮이는 거의 고려되고 있지 못하다. 이 고을은 동-북쪽이 300-500m의 높은 산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서쪽은 거의 야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줄기가 서쪽의 바닷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조선후기의 지도에서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 전 국토가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된 山脈에 의해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음을 알려준다. 읍치 오른쪽 아래에는 虎田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둘레 9,710尺(약 2,913m)의 土城이었다. 읍치에도 둘레 4,050尺(약 1,512m)의 토성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邑城은 고려 태조 11년(928)에 通德鎭을 설치하면서 鎭國城을 옮겨 쌓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서쪽 30리의 바닷가에 길이가 18,817尺(약 5,645m)의 古行城이 있다고 지지에 나오지만, 역시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이와 같은 성곽들은 徐熙(940-998)가 고려 성종 12년(993)에 거란과의 담판으로 江東六州, 즉 지금의 평안북도 서쪽 지방을 얻기까지 이 고을이 최전방으로서 기능했을 때의 흔적으로 생각된다. 지도 왼쪽 위의 波浪亭은 서해가 조망되는 滄浪臺라는 절벽 위에 만들어진 정자로 생각되며, 滄浪亭의 誤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오른쪽에 표시된 海倉은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는 창랑대 근처 있었던 것으로 그려져 있다. 기타 지도 왼쪽의 高田面은 高里面의 誤記이다.(이기봉)

  • 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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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부는 강원도 철원군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어운면·북면·묘장면과 포천군의 관인면 및 연천군의 신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철원읍 관전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40리에 있었다’는 高岩山이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이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의 본류이며, 지도에는 亭子淵·砌川·串津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 역시 임진강의 지류인 역곡천이며, 지도에는 馬龍淵으로 표시되어 있다. 모두 용암이 흘러간 자리에 만들어진 하천으로서, 양면이 거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절벽 위쪽으로는 지도 위의 裁松坪·大也坪이라는 명칭이 알려주듯이, 용암대지로 불리는 평지가 넓게 발달해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三釜淵이 표시되어 있다. 절벽의 지형이 많기 때문에 瀑布가 많고, 그런 폭포 아래에는 깊은 못이 형성된다. 삼부연에도 높은 폭포가 형성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 왼쪽 방면에 있는 孤石亭은 한탄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옆에 지어진 정자이다. 조선 중기의 義賊 임꺽정(?-1562)이 숨어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그 위쪽에 표시된 高石亭은 高石城의 誤記로 생각된다. 이 지역은 弓裔(?-918)가 摩震·泰封이란 국호를 사용하면서 904년부터 918년까지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 흔적이 이 지도에도 읍치 위쪽의 弓裔古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郁’은 ‘都’에 대한 誤記로 생각된다. 궁예고도는 둘레 14,421尺(약 4,326m)의 外城과 둘레 1,905尺(약 572m)의 內城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며,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그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휴전선의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가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거의 어렵다. 面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마을(洞이나 里)도 자세하게 적혀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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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군은 재령강 유역에 발달한 재령평야의 중심에 위치하여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대표적인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율면·남율면·서호면·삼강면·청천면·은룡면·장수면·신원면·상성면·하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황해남도 재령군 전체, 신원군 북부, 황해북도 은파군 용연리·옥현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땅이 아주 기름져서 오곡과 면화를 가꾸기에 알맞으며, 납과 쇠를 산출하는 산이 각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남쪽의 鐵峴山은 철을 생산하던 대표적인 곳이다. 옛 읍치는 長壽山 남쪽에 있었는데 1519년(중종 14) 지금의 劍山 아래로 옮겨왔다. 지도에도 古邑이라 표기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떨어진 長壽山城은 ≪大東地志≫에 의하면 762년(신라 경덕왕 21)에 축성된 古山城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개축하였는데 내성은 주위가 4,008步, 외성은 둘레가 5,584步이고, 석벽이 험준하여 나는 새도 넘지 못한다고 한다. 이 고을은 屯田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동쪽의 月灘屯, 箭灘屯, 남쪽의 葛山屯 등이 보인다. 고을의 북쪽 재령강변에 있는 宮農庄은 강변에 형성된 갯벌을 궁방에서 간척한 토지로 보인다. 읍치 남쪽의 서원은 景賢書院으로 1655년(효종 6)에 세워져 1695년(숙종 21)에 사액되었으며 朱子와 李珥를 배향하였다.(오상학)

  •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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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은 안성군 양성면, 원곡면, 공도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성면 동항리에 있었다. 진산은 읍치 서쪽의 天德山이다. 읍치 동쪽에서 흘러오는 禪院川은 지금의 한천으로 안성을 지나는 안성천과 합류한다. 읍치 남쪽으로 無根城, 서쪽으로 加川驛, 南倉, 平橋 등이 파악되어 있고, 산과 면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곳의 서원으로는 덕산면에 있는 德峯書院이 있으나 파악되어 있지 않다. 양성에는 당시 수원땅에 있었던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다. 栗北面, 甘味洞面, 外良面은 모두 당시의 수원 땅에 있었다. 율북면은 평택시 청북면의 율북리 일대에 있었고, 감미동면도 같은 면의 고잔리와 삼계리 일대에 있었다. 외량면은 평택시 포승면의 내기리·운정리·방림리 일대에 있었다. 율북면에는 海倉이 표시되어 있고, 외량면에는 괴태곶과 봉수가 그려져 있는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지영)

  • 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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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군은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마서면·장항읍·시초면·문산면과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의 개야도리·연도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서천읍 군사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에 표시된 烏石山이다. 원래의 읍성은 읍치 아래쪽 靈鷲山(지금의 남산)의 山城에 있었는데, 세종 때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지도 아래쪽이 금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이며, 조선시대에는 鎭浦라고 불렀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이 直川(곧은내)인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吉山浦라고 나온다. 읍치 아래쪽에는 동서가 작은 하천으로 연결된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輿地圖書≫·≪東輿圖≫, 1872년에 제작된 ≪서천군지도≫에도 모두 같은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현재의 마서면과 서천읍 사이로서,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바닷물이 넘나드는 갯벌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모두 간척되어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는 푸른색 다이아몬드 모양이 표시되어 있는데, 같은 지도책의 모든 지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鎭堡에 대한 표현 양식이다. 이곳에는 舒川浦鎭이 설치되고, 정4품의 水軍萬戶가 파견되어 있었다. 그 오른쪽에는 戰船廠이 표시되어 있는데, 戰船·防船·兵船이 각각 1·2·1척씩 배치되어 있었다. 이 중 戰船은 서천포진에서, 나머지는 서천군에서 관할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천포진에는 현재 장항항(長項航)이 들어서 있는데, 읍치 왼쪽에 보이는 장항면(獐項面)과는 한자음이 같지만 실재로는 관계가 없다. 西部面에 있는 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던 海倉이다. 이 밖에 바다에 있는 섬의 방향과 거리 및 규모가 실제의 내용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이기봉)

  •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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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은 삼한시대 弁韓의 땅으로 伽倻國에 들어갔다. 신라 법흥왕 때는 推火郡으로 경덕왕 때 密城郡으로 고치고, 고려 성종 때는 密州로 고쳤다. 지금 이름인 밀양이 된 것은 조선 태조 때이며,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밀양은 현재의 밀양시 청도면을 제외한 전체지역 즉 밀양시내, 부북면, 상동면, 상남면, 하남읍, 초동, 무안면, 산내면, 산외면, 단장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밀양시 내동 일대에 있었다. 밀양은 낙동강 유역에 속하여 그 지류인 밀양천과 단장천이 유입된다. 밀양천은 경남과 경북의 도계 경계를 넘어 청도지방에서 흘러나온다. 하천유역에는 밀양평야, 하남평야, 남지평야 등의 충적 평야가 펼쳐져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權擥의 기문에 밀양을 “먼 봉우리는 하늘에 떠 있고, 긴 강은 뉘어 놓은 듯하다” 하여 수려한 자연환경을 칭송하였다. 읍치 북쪽에 있는 屯德山(932m)은 華嶽山이라고도 하며, 밀양의 鎭山이다. 읍치 서쪽에 있는 龜靈山에는 고려 인종의 胎가 있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읍치 남쪽에 있는 嶺南樓는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의 하나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누각이다. 守山津 부근 國農所에는 紅蓮이 무성해서 그 향기가 좋다고 한다. 穿火峴자락에 있는 石骨寺는 신라 備虛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임진왜란 때 삼랑진 작원관 전투에서 패퇴한 朴晋과 孫起陽 등이 왜적과의 항전을 도모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민경이)

  • 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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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평부는 선덕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정평군이며, 지금은 함경남도 정평군·함주군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정평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鼻白山이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하천은 현재 금진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도에는 金伊江이라고 적혀 있다. 이 하천이 많은 부분에서 다르게 그려져 있어, 고을 전체의 모습이 왜곡되어 있다. 이 하천은 上釰山에서 지도 중간의 아래 부분에 있는 成佛寺까지 거의 정남 방향으로 흐른다. 따라서 지도 왼쪽 아래의 영흥계로부터 성불사가 있는 곳까지의 경계는 거의 남북방향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지도 중간부분의 獐項 부근으로부터 왼쪽의 香爐峯으로 뻗은 하천도 지나치게 길게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 보면 1/5 정도로 축소하는 것이 실제와 부합한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고을의 남북이 동서의 폭보다 실재로는 2배 이상이 됨에도 불구하고, 1/2 정도밖에 안 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정평부 지도에서도 남북보다는 동서가 더 길게 표시되어 있다. 이 두 지도는 전형적인 회화식 군현지도로서, 거리나 면적보다는 주변의 지형·지세에 대한 관념적 표현을 중요하게 여겼던 지도이다. 그러나 이 지도는 관념적 표현보다는 정확성을 중요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앞의 두 지도에서 나타났던 오류가 상당히 반복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가 여러 地誌 자료와 함께 앞의 두 지도와 같은 회화식 군현지도도 참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일부 오류가 교정되고 있지만, 남북보다는 동서의 폭이 더 긴 부분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읍치 부근의 하천은 앞의 오류 때문에 상대적으로 짧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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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안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공덕면·양화면·동암면과 한천면의 지례리 일대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평원군·평성시와 평양시 순안구역에 걸쳐 있다. 읍치는 평양시 순안구역의 역전동·남산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 한가운데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평양시내 서쪽에서 대동강과 합류하는 보통강의 상류이다. ≪輿地圖書≫ 순안 부분에는 보통강 상류 중 가장 근본이 되는 하천이 岩赤川으로 나오며, 나머지의 하천들은 모두 이 암적천에 합류하는 것으로 나온다. 읍치 아래쪽의 ‘禿手老’는 ‘禿毛老’에 대한 誤記이다. ‘毛老’는 벼랑을 돌아가는 ‘모퉁이길’이라는 뜻으로서, 한자의 뜻을 위주로 할 경우에는 ‘隅’로 표시한다. 실재로 ≪海東地圖≫ 내의 순안현 지도에는 禿毛老가 禿隅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에는 영유현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이 고을의 越境地가 보이고 있다. 정확한 위치는 일제시대의 평원군 한천면의 智禮里 일대에 있었으며, 그 발생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이곳에 표시된 海倉은 이 고을의 租稅를 필요한 지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저장하던 창고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실제의 모습을 거의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다만 동쪽과 북쪽의 산지가 다른 지역보다 높다는 사실은 이 지도에는 반영되고 있지 못하다.(이기봉)

  •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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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부는 춘천시 전체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춘천 시내 요선동 일대이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鳳儀山(또는 鳳山)이다. 이 고을이 크게 된 이유는 신라 때 9주의 하나인 朔州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이었기 때문이다. 지도 오른쪽에 越境地로 표시된 麒麟面(지도에는 속자로 표시되어 있음)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고을의 屬縣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는 지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에 해당된다. 고을 서북쪽의 內面과 史呑面 지역은 史呑鄕이 있었던 지역이며, 현재는 화천군 사내면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 위쪽 방향에 표시된 楡谷에는 楡谷部曲이, 그 왼쪽의 枝內山 부근에는 枝內村所가 있었다. 위쪽의 狼川界로부터 들어와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북한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毋津江·孔之川·西土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전통시대에는 하천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음을 알려준다. 楊口界로부터 들어와 읍치 북쪽에서 북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은 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昭陽江이다. 이곳에는 조선전기에 소양강창이라는 水站이 설치되어,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현재의 화천)의 田稅를 한양으로 운반하였다. 조선후기에 대동미와 전세의 운반이 각 고을의 책임으로 돌아가면서 춘천의 것만 운반하도록 축소되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保安驛은 조선초기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29개의 屬驛을 거느렸지만,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원주의 丹丘驛으로 찰방이 옮겨간 상태였다. 面과 주요 마을(里·洞·谷)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소양강 위쪽의 機落遷에서 ‘遷’은 벼랑길을 의미한다.(이기봉)

  • 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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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산현은 황해도의 동쪽 구석에 위치한 고을로 동으로 경기도의 朔寧과 접해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금천군 토산면·서천면·합탄면·외류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토산군 송세리·백화리·송천리·석봉리·문성리·미당리를 제외한 토산군 전지역, 강원도 철원군 부압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토산현의 서쪽은 예성강의 지류인 구연강 상류지역에, 동쪽은 임진강의 지류인 萬東江 유역에 걸쳐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수안·신계·곡산과 더불어 만첩 산중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고 백성이 어리석으며, 골짜기가 깊숙하여 도둑이 많은 까닭에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와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적다고 한다. 고을의 진산은 북쪽에 있는 兎山인데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 서쪽의 外縣面에는 龍巖이 있다. 일설에는 용의 두 뿔이 있었는데 倭賊이 하나를 훼손시켰다고 전해진다. 읍치 동남쪽의 龍淵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오상학)

  • 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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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현은 지금의 용인시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군의 고삼면, 일죽면의 능국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양지면 양지리에 있으며 북쪽의 定水山이 鎭山이다. 양지현은 수원에 있던 陽良部曲을 조선 1400년(정종 2)에 승격시켜 縣으로 만들었다. 지도에는 古陽智로 표기되었는데 지금은 안성군 고삼면 지역이다. 태종 13년(1413)에 朴谷, 高安, 蹄村, 木岳 등 죽산에 속했던 4개의 部曲을 떼어서 양지에 속하게 하고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이런 내력으로 죽산 오른편으로 길게 그려진 지역에 박곡면, 고안면, 제촌면이 있다. 이 때 읍치를 광주의 秋溪鄕으로 옮겼으며 지도에는 秋溪古縣이다. 읍치 남쪽을 지나는 하천은 용인과 광주를 지나 한강 본류로 들어가는 경안천의 상류이며, 왼쪽 아래쪽의 하천은 안성천으로서 양성, 진위를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김지영)

  • 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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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성현은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과 부여읍의 현북리 및 초촌면의 연화리, 논산시 성동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석성면 석성리에 있었다. 금강과 그 지류에 대한 표시가 애매하다. 금강 본류는 北面 방향에서 들어와 佛岩山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불암산 오른쪽은 현재 논산천으로, 읍치 아래쪽은 석성천으로 불리는 금강의 지류에 불과하다. 猪浦와 浪淸浦는 단순히 浦口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하천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석성현은 지도 위쪽에 太祖峰으로 표시된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반영되어 산지 표시가 거의 없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왼쪽의 書院은 ≪輿地圖書≫에도 특별한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尹文擧(1606-1672)를 배향하였으나 賜額 받지 못했으며, 院生이 15인이라고만 나온다. 석성은 현재의 2개면 정도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음에도 총 8개의 面이 등장한다. 따라서 현재의 1개면에 4개의 면 정도가 있었던 것이 되어 面의 규모가 매우 작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面의 설정에 전국 일률적인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고을마다 다양한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고을은 현재의 1개면에 해당되는 규모로 面을 설정한 곳도 있다. 기타 지도 위쪽의 炭洞은 우리말 ‘숯골’의 한자 표기이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에는 마을 이름의 표기와 실질적인 발음이 다른 경우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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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유역에 속한 일부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졌다. 최고봉인 태백산(1568m)을 비롯하여 문수산(1206m), 풍락산, 태자산 그리고 봉화의 鎭山인 금륜산이 있다. 읍치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新羅峴은 전하여 내려오기를 신라왕의 태자가 奈靈郡(영주)에서 놀다가 郡吏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고을사람을 부끄러워해 이곳에 머물렀다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봉화에 흐르는 매천과 도미천은 태백산의 황지에서 나온다. 봉화는 본래 고구려 古斯馬縣의 땅으로 신라 경덕왕이 玉馬라 하였고 고려 때 봉화로 개칭하였다. 1458년(세조 3)에 순흥의 문수산 이동의 땅을 합하고 1895(고종 32)에 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봉화는 지금의 봉화군 봉성면, 명호면, 물야면 지역과 상운면, 춘양면 일부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지역에 있었다. 읍치가 봉화의 서쪽에 치우쳐 있어 영주와 가깝다. 지도에서 보듯이 안동 춘양면에 접해있는 覺華寺는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원효대사가 건립한 사찰로 1101년(고려 숙종 6)에 무애국사가 중건한바 있고 1777년(정조 1)에 다시 중건하여 당시 국내 3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혔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각화사에는 璿源閣, 實錄閣, 史庫가 있고 곁에 叅奉 2명과 守護軍 25명이 있었다 한다. 안동에 접하여 있는 洪濟庵은 그 건립이 분명하지 않고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다. 그 후 1581년(선조 14)년에 사명대사가 홍제암 뒷산에 있는 도솔암에서 수도하여 그 때 이절을 중수하고 익호를 따서 홍제사라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읍치 남쪽에 있는 道深驛은 末屯이라고도 하며 원래 읍치 북쪽에 있었는데 太白山祭를 폐지한 뒤로 이곳에 옮겨져 영주의 昌保驛, 순흥의 昌樂驛, 안동의 瓮泉驛, 예안의 宣安驛과 연계되어 있다. 봉수는 읍치 동쪽에 있는 용참산봉과 망일산봉이 보인다. (민경이)

  • 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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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성부는 일제시대의 종성군과 경흥군의 풍해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온성군·새별군·회령군·은덕군·라진시에 일부씩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온성군 종성로동자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 아래 방향에 있는 小白山이다. 읍치 왼쪽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두만강이다. 이곳에는 防垣堡와 潼關鎭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도에는 동관진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동관진은 豆滿江이란 글씨의 맞은편에 있었으며, 潼關社 역시 비슷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童巾山 역시 동관진 동쪽에 있어야 한다. 읍치 역시 바로 아래쪽 하천의 남쪽 부분에 있어야 하며, 그 오른쪽의 甑山도 온성과의 경계선에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이 지도보다 약간 빠른 것으로 추정되는 ≪海東地圖≫의 종성부 지도는 비록 회화식이지만 위와 같은 오류들이 발생하고 있지 않다. 또한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이러한 오류들이 교정되어 있다. 지도 중간에 있는 하천은 현재 五龍川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도에는 涪溪라고 적혀 있다. 이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 현재의 경성군 남쪽에서 두만강에 합류된다. 이곳에 있는 北行營은 현재의 회령시 행영리에 있었으며, 咸鏡北道兵馬節制使가 파견된 곳이다. 그 오른쪽에 있는 皮德에서 ‘德’은 평안도·함경도 지역에서 산지의 한 종류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어미로서 많이 사용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造山寺는 海津이란 용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동해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지도에는 해진이 있는 곳이 마치 하천처럼 표시되어 있어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그 아래쪽에 있는 푸른색의 타원 모양은 바다에 있는 椒(島)이다. 고을 전체의 모습은 실제와 거의 흡사하며, 산줄기와 물줄기 역시 큰 오류가 없게 표현되어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인문적 내용의 교정이 일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고을의 전체적인 모습은 이 지도와 거의 비슷하게 그리고 있다.(이기봉)

  •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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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선소면의 서남 일부·신창면 대부분과 덕천군 잠상면·잠도면, 그리고 맹산군 옥천면·학천면·봉인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평안남도 순천시 일부와 은산군 일부 및 북창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순천시 순천동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4리에 있었다’는 刀山이다. 지도에 나타나 있는 하천은 대동강 본류이며, 고을은 은산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대동강 상류 부분에는 三月江이, 하류 부분에는 靜戎江이라 쓰여 있다. 이것을 통해 전통시대의 경우 하천의 구간마다 명칭을 다르게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 초기에 하천 관리의 통일화를 위해 명칭 자체도 본류·지류로 나누어 단일화하면서 이와 같은 현상은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靜戎江에서의 ‘靜戎’은 고려 초기까지 부르던 이 고을의 명칭이다. 오른쪽 아래의 陽川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은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의 상류이다. 고을의 읍치는 원래 동쪽의 龍島面에 있었다고 한다. 옛 읍치에 災害가 많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성종 7년(1476)에 개천·자산·은산 등의 땅을 일부씩 떼어서 이 고을의 땅으로 만들고, 지도상의 위치로 읍치를 옮겼다고 한다. 용도면 오른쪽의 龍淵鎭은 龍淵堡가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곳에는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곳에 둘레 400尺(약 120m)의 龍淵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그 오른쪽의 龍島와 함께 地誌에 자주 기록되고 있다. 기타 다른 것은 모두 面으로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蚕舍坊만 坊으로 기록했음이 눈에 띈다. 평안도에서는 坊이라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지도 책에는 대부분 面으로 기록하였다. 지도 작성자가 편집하면서 面으로 통일하려고 애썼던 일면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통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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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군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고저읍·벽양면,·임남면과 장전항 북쪽의 장전읍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과 고성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통천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登禾山이다. 이 고을은 18세기 후반의 상황을 보여주는 ≪戶口總數≫에 1,420호로 나올 정도로 작은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에는 臨道縣·碧山縣·雲岩縣 등 3개가 이 지역에 더 있었다. 모든 지역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 지역에서만큼은 고대로 갈수록 縣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다고 할 수 있다. 지도에도 이들 廢縣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2개는 面의 명칭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고을 서쪽으로는 지금 태백산맥이라 부르는 白頭大幹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나간다. 이 고을의 바닷가는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叢石亭은 돌기둥처럼 솟아난 해안가 절벽 위에 만들어진 정자로서, 關東八景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쪽의 卵島는 한쪽만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새들이 많은 알(卵)을 낳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크게 묘사되어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것은 松(島)·沙(島)·荒(島)이며, 이 섬들 역시 실제 크기보다 훨씬 크게 묘사되어 있다. 섬의 크기가 잘못 표시된 것은 이 책의 다른 지도에서도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크기에 대한 정보가 부정확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기타 아래쪽에 표시된 瓮遷에서 ‘遷’은 벼랑길을 의미하며, 이곳은 말이 쌍으로 서서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았다고 한다.(이기봉)

  •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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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부는 개성에서 황주로 이어지는 해주 직로상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瑞興, 남으로는 金川과 연결된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산군 남천읍·평산면·금암면·서봉면·신암면·인산면·문무면·안성면·고지면·세곡면·적암면·마산면·용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기탄리와 예성리를 제외한 평산군의 전지역, 상하리·다전리·석교리·석연리를 제외한 린산군 전지역, 봉천군 동부를 제외한 전지역, 서흥군 양암리, 금천군 용성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황해 一道의 祖宗이 되는 滅惡山이 포진해 있어서 평지보다는 산지가 많은 고을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개성에 이르는 남북 직로상에 위치하여 지세가 험하지만 다른 지방에서 흘러와 사는 사족이 조금 있는 편이다. 서쪽 면악산 아래에는 들판이 제법 넓게 펼쳐졌고, 땅 또한 기름진 까닭에 부유한 마을의 많고 높은 벼슬을 한 사람도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고을을 鎭護하는 鎭山은 멸악산이다. 서남쪽에 있는 牧丹山은 首陽山 孤竹의 옛터로 알려져 있다. 평산은 황해도에서는 비교적 큰 고을에 해당하여 찰방역이 두 개나 있었다. 지도에 붉은 점으로 표시된 金郊와 麒麟이 그것이다. 금교역은 원래 강음현에 있던 것을 옮긴 것으로 8개의 속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기린역은 11개의 속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고을의 서원으로는 東陽書院과 九峯書院이 있었다. 동양서원은 月峯山 근처에 있는 것으로, 1650년(효종 1)에 세워져 1687년(숙종 13)에 사액되었고, 구봉서원은 1696년(숙종 22)에 건립되어 이듬해에 사액되었다.(오상학)

  • 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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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양천현은 1895년 郡이 되었으며1914년에 김포군에 합쳐졌다가 1977년 강서구, 1978년에 양천구가 신설되면서 서울시의 일부가 되었다. 읍치는 加背面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강서구청의 위치이다. 진산은 成山이다. 위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孔岩은 한강의 북쪽을 왕래하는 나루이다. 읍치를 통과하는 대로는 김포와 부평으로 통하고 있다. 開花山 봉수는 김포의 북성산과 서울의 목멱산 봉수를 연결한다. 塩倉은 지금의 염창동 일대에 있었던 소금창고로 숙종대에 폐지되었다.(김지영)

  • 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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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현은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도고면 전체, 선장면의 장관리·신성리·군덕리·신동리·죽산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신창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1리에 있었다’는 城山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이 삽교천이며, 위쪽의 하천이 곡교천이다. 곡교천의 경우 마치 車峴 부근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천안에서 발원하여 온양을 거쳐 들어온다. 두 하천은 삽교호에서 만나 아산만의 서해로 빠져나간다. 경계의 표시도 일부 잘못이 보이고 있다. 왼쪽의 天安界가 삽교천 쪽으로 표시되어야 하며, 沔川界라 쓰여 있는 부분도 天安界로 바뀌는 것이 합당하다. 두 지역 모두 천안의 越境地가 있었던 지역이다. 大西面에 있는 倉은 海倉으로서,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아 보관했다가 한양으로 운반하는 곳이다. 조선전기에는 漕倉(이 지역은 貢稅串倉)에 모든 고을의 租稅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지만, 조선후기에는 해안가 고을의 경우 해창을 설치하여 독자적으로 운반하게 했다. 조창은 해안가를 끼고 있지 않은 고을의 것만 운반하게 되어, 조선전기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書院은 道德山書院이다. 이 서원은 趙翼(1579-1655) 등을 배향하여 현종 11년(1671)에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현재의 도고면 도산리에 있었다. 이 밖에 서원 왼쪽에 있는 大峙는 우리말 ‘한티’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크다’는 뜻의 ‘한’을 한자 ‘大’로 표시하는 경우는 전국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이기봉)

  • 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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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안은≪新增東國輿地勝覽≫에<雙溪帶繞疊嶂屛廻>라 하여 鄭宗周의 시에 “쌍계는 얇은 비단 띠처럼 돌았고, 겹친 봉우리는 무늬 있는 비단병풍처럼 둘렸도다” 라 하였다. 지도에서 보듯이 산봉우리와 낙동강의 지류가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각각 비단 띠와 병풍으로 표현할 정도로 배산임수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하고 있다. 비안군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지방의 옛 이름으로 比屋·安貞 두 현을 합한 이름이다. 비안현은 본래 신라 阿火屋縣, 안정현은 신라 阿尸兮縣인데 경덕왕이 각각 비옥, 安賢으로 고치고 그 후 두 현을 합하여 1423년(세종 5)에 비안으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에는 郡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에 의성군에 합쳐졌다. 비안군은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 구천면, 단밀면, 단북면, 안계면, 다인면 그리고 신평면, 안평면 일부와 예천군 풍천면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 동부리 일대 지역이며, 동부리는 서부리와 총칭하여 비안 혹은 읍내라 부르기도 한다. 비안의 읍치를 감싸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다. 읍치 북쪽에 있는 城隍山이 鎭山이며, 왼쪽에 龜川書院이 위치하여 있다. 구천서원은 1721년(경종 1)에 세워진 것으로 朴瑞生, 朴宜中외 4인의 선현을 모시고 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구천서원 六先生埋版所라는 작은 비석만이 남아있다. 정서면에 위치한 安溪驛과 신동면에 위치한 雙溪驛은 幽谷道에 딸린 역이다. (민경이)

  • 함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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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부는 일제시대의 함흥부·흥남부·함주군·신흥군과 장진군의 남쪽 절반, 정평군의 선덕면, 흥원군의 삼호면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남도 함흥시·영광군·신흥군·락원군·장진군, 부전군의 남쪽, 함주군의 동쪽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함흥시 성천강구역 남문1동·남문2동·동문동·서문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바로 위쪽의 城串山이다. 지도 왼쪽 위의 장진 지역에는 현종 8년(1667)에 堡가 설치되었다가, 정조 9년(1785)에 鎭으로 승격된다. 같은 왕 11년(1787)에는 府로 승격되면서 독자적인 고을이 된다. 長津에 표시된 다이아몬드 모양은 이 지도책에서 일괄적으로 鎭堡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지도는 최소한 1787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도 중간 왼쪽에는 中嶺堡가 있으며, 오른쪽 중간의 赴戰嶺 아래에 있는 다이아몬드 모양은 赴戰嶺堡이다. 둘 다 병자호란(1636) 이후 강화된 북쪽 방어의 일환으로 숙종 28년(1702)에 세워진다. 읍치는 붉은색이 칠해진 정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책에서는 관찰사가 파견된 監營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시하였다. 그 아래쪽에 노란색 원과 牧場이란 글씨가 보이고 있다. 이 지도책에서 종6품의 監牧官이 파견된 牧場을 일괄적으로 표시하던 방식이다. 이곳은 都連浦牧場을 의미하는데, 이 목장은 이미 영조 5년(1729)에 폐지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함흥부 지도에는 계속적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도 폐지된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표시된 것은 아마 앞의 자료들을 참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輿地圖書≫의 地誌 부분에는 폐지된 사항이 자세히 적혀 있다. 목장 아래쪽에 都運浦는 都連浦의 誤記이며, 그 위치도 잘못되어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에는 이와 같은 오류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며, 단지 牧場을 旧牧場이라고 교정해 놓았다. 이 지도에 표시된 그 밖의 인문정보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 다른 지방의 坊面에 해당되는 社와 倉庫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둘째,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祖上 무덤이 陵으로 표시되어 있다. 셋째,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머물렀던 곳을 本宮 등으로 표시하였다. 넷째, 驛站·烽燧·道路 등의 군사 시설이 자세하게 표시되었다.(이기봉)

  • 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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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목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안주군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으며, 현재는 평안남도 안주시와 문덕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는 안주시 등방산동·남천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加豆山이다. 이 고을에는 둘레  3,043步(약 5,500m)의 內城과 둘레 410步(약 700m)의 新城, 둘레 약 1,008步(약 1,800m)의 外城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도에서 성곽을 정사각형으로 표시한 것은 이 책에서 일률적으로 사용했던 방식이며, 실제의 모습과는 관계가 없다. 성곽 안이 남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은 이 곳에 平安道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곽 아래쪽에 土城이란 글자는 外城이 土築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기록된 것이며, 내성과 신성은 石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읍치 위쪽으로는 淸川江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강은 薩水라고도 하며, 고구려의 乙支文德이 隋의 30만 5천 병력을 물리쳤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와 같은 역사 때문에 을지문덕을 배향하여 세운 淸川祠도 이곳에 있었다. 청천강 가운데는 위로부터 無骨(島)와 七佛(島) 등도 보이고 있다. 칠불도는 수나라 병사들이 일곱 명의 승려가 이 지역을 배도 안타고 건너는 것을 보고 따라 건너다 빠져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섬이기도 하다. 百祥樓는 청천강변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將臺로서, 성 안과 밖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오른쪽 아래의 하천은 대동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지도 왼쪽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던 老江鎭이 표시되어 있다. 이 책의 모든 지도에서는 군사기지인 鎭·堡를 이 지도에서처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시하였다. 그 오른쪽은 西海인데, 定州界가 너무 서쪽까지 표시되어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이기봉)

  •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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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강현은 일제시대의 평강군에 해당되며, 지금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이다. 읍치는 평강군 평강읍에 있었다. 하천이 매우 복잡하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 방향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의 최상류로서, 지도에는 箭川·末訖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바로 위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평안천이며, 지도에는 赤岩川·城洞水로 나온다. 가장 위쪽의 하천 역시 임진강의 지류인 미탄천이며, 북쪽으로 흘러 안변계로 들어가는 하천은 남대천이다. 이곳에는 分水岺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명은 하천의 分水界 역할을 하는 곳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다. 이곳은 鐵岺과 더불어 함경도로 통하는 요지에 해당되기 때문에 세 개의 關門을 설치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는 추가령구조곡이 지나가는 곳으로서, 서울-원산 사이의 철도가 건설된 곳이기도 하다. 남쪽으로 내려오던 白頭大幹이 이곳에서 북쪽으로 향해 올라가다가 다시 남쪽으로 뻗어나간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백두산의 脈勢가 이곳에 이르러 나누어지고, 두 개의 지맥(支)이 된다.’라고 적혀 있어, 조선초기에도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줄기가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이루어진 것은 주로 미탄천에 자리 잡았던 많은 所가 이 고을의 소속으로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新村所(북쪽 59리)·史丁所(북쪽 60리)·楡林所(북쪽 90리)로 나온다. 面과 중요 마을(里)이 자세한 것은 강원도의 다른 지도와 비슷하며, 중간 왼쪽의 社倉面은 社倉의 誤記로 생각된다. 필사본 지도이게 때문에 일반인들이 알아보기 어려운 俗字도 보이고 있다. 사창면 오른쪽의 芦洞에서 ‘芦’는 ‘蘆’의 속자이며, 北倉 밑에 있는 것은 戱靈山이다. 기타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가 잘못된 것이 보이고 있다. 서쪽에 漣川界라고 쓰여 있는 것은 安峽界로 바꾸어야 한다.(이기봉)

  • 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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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천부는 황해도의 동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은율과 더불어 땅이 비옥하고 바다를 끼고 있어서 어염의 이익도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땅이 아주 기름져 논에 1말 종자를 뿌려 때로는 수백 말을 수확하고 적더라도 100말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운유면·율리면·상리면·하리면·천동면·진봉면 일대였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과일군과 대략 일치한다. 인조 때 左營이 이 곳에 설치되어 풍천·장연·은률·장련·문화·송화·강령 등을 관할하였다. 고을 남쪽의 廣石山은 중국 사신들이 바다를 건너 왕래했던 길인데 唐館의 옛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邑治 서쪽 바닷가에는 西海의 神에게 봄·가을로 제사지내는 西海神壇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인해 수군 진영이 설치되었다. 椒島에는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고 북쪽의 許沙鎭은 남쪽 業淸江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水軍萬戶가 배치되었다.(오상학)

  •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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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목은 지금의 강천면과 북내면 일부를 제외한 여주군과 양평군의 개군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여주읍 여주 군청 주변에 있었다. 서쪽의 北城山이 鎭山으로 옛 성터가 남아있다. 여주는 예종 때 세종대왕의 무덤인 英陵을 광주 서쪽 大母山에서 여주의 北城山에 옮기면서 金沙面에 중심을 두고 있던 川寧縣을 합해 牧으로 승격된 곳이다. 介軍山面의 婆沙城은 본래 婆娑城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에 축성되었으며 왜란 때의 전장이었다. 金沙面에 沂川書院은 1625년(인조 3)에 賜額받았으며 김안국, 이언적 등을 배향하였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원주와 이천으로 통해있다. 읍치 위쪽을 지나는 하천이 남한강이며, 원주의 경계를 흐르는 金唐川은 지금의 섬강으로 읍치의 동쪽에서 합류한다. 강변에는 梨浦津, 陽花津, 魚梁津 등 나루가 파악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읍치 동쪽의 淸心樓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臨長江(지금의 섬강)을 굽어보며, 남쪽 건너편에는 雉岳의 광야가 넓게 보이고, 북쪽의 石壁의 그림자가 강 가운데를 비춘다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짐작하게 한다. 읍치의 서쪽으로 세종과 昭憲王后의 능인 英陵, 그리고 효종과 仁宣王后의 능인 寧陵이 있다. 1473년(성종 4)에 報恩寺로 개칭되는 神勒寺는 남한강 동쪽 기슭 鳳尾山에 있다. 이곳은 英陵을 옮기면서 크게 늘려던 절로서 다층석탑(보물 225호) 외에 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 (김지영)

  • 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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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군은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음봉면, 서원리를 제외한 염치읍, 금성리·해암리를 제외한 인주면, 송용리·관대리 북쪽의 둔포면, 선장면의 신문리, 당진군 우강면의 신촌리·부장리·강문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인면 아산리에 있었다. 고을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은 안성천이며, 아래쪽이 곡교천·삽교천이다. 세 하천이 아산만에서 합류하여 水源界 방향에 있는 서해로 빠져나간다. 현재 안성천에는 아산만방조제가, 삽교천에는 삽교천방조제가 만들어져 있다. 안성천 변에는 몇 개의 浦가 보이고 있는데, 단순히 배가 들어오는 浦口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市浦가 있는 곳의 하천은 현재의 군계천으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후기에 이 지역에서 가장 번성했던 屯浦가 있었다. 지도에는 2개의 倉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천안의 頓義面에 있는 倉은 천안의 海倉으로서, 그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보관하던 창고이다. 천안이 내륙에 있지만 월경지인 돈의면이 해안가에 있기 때문에 설치한 것이다. 一西面 옆에 있는 倉은 漕倉의 하나인 貢稅(串)倉이다. 조창이란 주변 고을의 稅米를 모아 서울로 운반하던 창고를 의미한다. 조선전기에는 현재의 충청남도 대부분의 세미를 이곳에서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해안가를 끼고 있는 고을은 자체적으로 운반하게 했으며, 내륙에 있는 고을의 것만 한양으로 운반하면서 조창의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다. 貢稅(串)倉은 인주면 공세리에 있었으며, 현재도 성곽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천안의 毛山面이 월경지의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원래 毛山鄕이 있었던 곳인데, 고려시대 때 主縣이었던 천안의 屬縣이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書院은 仁山書院으로서, 광해군 2년(1610)에 세워졌다. 金宏弼(1454-1504)·李滉 (1501-1570)·李之菡((1517-1578) 등을 배향하였다. 기타 아래쪽의 曲橋는 우리말 ‘굽은다리’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이기봉)

  • 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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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史勿縣이었는데 경덕왕이 泗水로 고쳤다. 1011년(현종 2)에 泗州로 개칭하고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이름인 사천으로 개명하였다. 1415년(태종 15)에 泗川鎭을 두었으나 1468년(세조 14)에 鎭이 없어지고 1895년(고종 32)에 전국 23부제에 따라 곤양군을 합하여 사천군이 되었다. 사천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정동면, 사남면, 용현면 지역과 사천시내(삼천포)일부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사천시 사천읍 정의리 일대에 있었다. 사천은 진주만에서 내륙 깊숙이 들어간 사천만 동안에 위치하고 있어 사천만으로 유입되는 사천강과 죽천천 그리고 백천천이 흐른다. 사천만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이곳으로 침입한 일본수군과의 해전에서 거북선을 처음 실전에 투입해 승리를 거둔 곳이기도 하다. 사천의 鎭山은 읍치 동쪽에 있는 豆伐山이다. 현재 臥龍山(799m)에서 흘러내리는 백천천 곡구에 형성된 扇狀地(하천 谷口에 부채꼴 모양의 사력퇴적지형)는 ‘사천선상지’로 지리학계에 널리 소개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상지 중의 하나이며, 지도를 통해 볼 때 선상지 형성에 알맞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북쪽에 있는 서원은 龜溪書院으로 李滉, 李楨을 배향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 萬竹山에 건립된 사당이 1676년(숙종 2)에 사액된 후 龜溪書院이라 하였다. 두벌산 아래에 있는 批王寺는 고려 현종이 태자였을 때 이 절에서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천만에는 猪島, 勒島, 深水島 등 작은 섬들이 늘어서 있다. (민경이)

  • 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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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원현은 함호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홍원군 홍원읍 일대에 있었다. ≪輿地圖書≫의 홍워현읍지에는 읍치 왼쪽의 하천이 西大川으로, 오른쪽의 하천은 東大川으로 나온다. 전반적으로 고을의 모습이 실제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약간 과장된 측면도 보이고 있다. 첫째, 주위가 6-7里에 이른다는 飜浦가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다. 둘째, 幅圓이 90里로 나오는 馬養島 역시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다. 김종호의 ≪東輿圖≫에서는 첫 번째 부분은 상당히 교정되어 있지만, 두 번째 부분은 거의 그대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 위에 있는 咸關岺과 大門峴은 이 지역에서 중요한 요해처로 여겨졌다. 기타 일반인들이 알아보기 힘든 속자도 몇 개 보이고 있다. 위쪽의 靈奇峯에서의 ‘靈’과 廣興寺에서의 ‘興’은 필사본에서는 지도 위의 속자처럼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읍치 위쪽 방향으로 臥龍山이, 왼쪽 방향으로 富民社·蘆洞社 등도 어려운 속자로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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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양덕군 전체와 성천군 대구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양덕군·신양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양덕군 동양리·상성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25리에 있었다’는 隱于山이다. 이 고을은 태조 5년(1396)에 陽岩鎭과 樹德鎭을 합해 만들어졌으며, 각각 한자씩 따다가 陽德이라고 명명했다. 지도에는 이 고을이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읍치 지역의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의 최상류이며, 왼쪽의 지역은 역시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의 최상류이다. 후자의 지역에는 수덕진이 있었으며, 아래쪽에 ‘古邑’이라 적혀 있는 부분이 그 중심지였다. 고읍 위쪽의 永德山城의 ‘永’은 ‘樹’ 또는 ‘水’의 誤記이다. ≪廣輿圖≫·≪海東地圖≫의 양덕현 지도에는 읍치가 이 지도 위의 古邑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輿地圖書≫·≪戶口總數≫와 김정호의 ≪大東地志≫·≪東輿圖≫ 등에는 이 지도와 읍치의 위치가 같다. 이것을 볼 때 ≪廣輿圖≫·≪海東地圖≫의 읍치가 잘못되었던지, 아니면 읍치가 옮기기 전의 자료를 참고했던지 둘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다만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읍치가 본 지도상의 위치와 같게 기록되어 있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지도 위쪽에는 다이아몬드 모양과 兎城이란 명칭이 적혀 있다. 이 지도책에서는 군사기지인 鎭堡를 모두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그렸다. 토성진은 숙종 3년(1677)에 설치하였으며, 같은 왕 6년(1680)부터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를 파견하였다. 동쪽의 백두대간을 넘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에는 2개의 溫井도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도 오른쪽의 것은 석탕온천으로, 왼쪽의 것은 양덕온천으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기타 고을과 하천 등의 모습이 대략 실제와 비슷하지만, 비류강 상류지역의 동서 폭이 조금 넓게 되어 있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이기봉)

  • 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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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군은 평창군 평창읍·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현재의 평창군은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이 강릉의 땅이었다. 읍치는 평창읍 중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魯山城의 ‘魯山’이었다. 江陵界에서 들어와 原州界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평창강이다. 지도에는 여러 개의 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나루를 지칭함과 동시에 하천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평창강은 이 부근에서 심한 嵌入曲流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지도에서처럼 읍치 서북쪽이 아니라 거의 정 북쪽에서 들어온다. 아래쪽의 하천 역시 남한강의 지류인 동강이다. 旌善界에서 들어와 寧越界로 빠져나가는데, 東面에서 나오는 물줄기는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이 물줄기는 실재로 寧越界로 바로 들어가 영월읍 동쪽에서 동강과 합류한다. 東面의 방향도 지도에서처럼 읍치 남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정확히 동남쪽 방향에 있다. 동면에 있는 所洞은 현재 신동읍 덕천리에, 鳥洞里 역시 신동읍 조동리에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오류는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똑같이 범해지고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면처럼 다른 고을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행정경계를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犬牙相入地’라고 불렀다. 즉, 개의 이빨이 다물어졌을 때 서로 사이사이에 끼어들어가는 것과 같은 땅이라는 뜻이다. 이밖에도 몇 개의 오류가 더 발견된다. 첫째, 平安驛 왼쪽에 있는 栗峙(밤재) 역시 寧越界라는 글씨 쪽에 가까워야 한다. 둘째, 麻池里는 평창강이 原州界로 빠져나가는 위치에 가까워야 한다. 셋째, 味呑面이 2개 적혀 있는데, 왼쪽의 것은 味呑峙(또는 岺)로 바뀌어야 한다. 이러한 오류들은 이 지도가 편집되면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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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목은 황해도의 감영이 있던 큰 고을로 해안에 연해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해주시와 벽성군을 합친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해주시 동부를 제외한 전 지역, 벽성군 전 지역, 강령군 동부, 태탄군 동부, 신천군 남서부, 신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지도는 읍성이 축조된 읍치를 확대하여 부각시키고 주변 지역은 상대적으로 축소하여 그렸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의 龍首山이다. 장방형의 읍성은 1391년 고려 공양왕 때 축조된 것인데, 1555년(명종 10)과 1591년(선조 24)에 중수하고 1747년(영조 23)에 개축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바닷물이 두 산 사이로 살며시 들어와 바로 앞산 뒤를 돌면서 괴어 하나의 큰 호수를 이루는데, 지방사람들은 이를 洞庭湖라 하는데 제법 유람할 풍치가 있다고 한다. 율곡 이이가 이곳 감사로 왔다가 石潭泉石을 발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후 여기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니 서울과 지방에서 선비가 많이 따랐는데, 文章禮義와 과거에 합격한 것이 전도에서 으뜸이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서원은 文憲書院이다. 명종 때 세운 서원으로 崔沖(984-1068년)을 배향하였다. 文山 남쪽에 위치한 神光寺는 1342년(고려 충헤왕 3)에 원 황제가 사람을 파견하여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명한 사찰이다. 고을 동쪽의 靑丹驛은 7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서쪽 해안의 西別倉은 長山串 이북의 여러 고을의 전세를 서울로 운반했던 漕倉이었다.(오상학)

  • 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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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현은 지금의 양지면, 원삼면, 백암면을 제외한 용인시 전체에 해당하며 읍치는 구성면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용인은 조선 초에 龍駒과 處仁을 합하여 만들어진 고을이다. 지도에 표시된 읍치는 용구의 터이고, 지도 아래쪽의 古縣이 옛 처인의 터이다. 읍치 주변으로 사창이 파악되어 있다. 광주를 지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경안천 상류가 오른쪽으로 보이고, 왼쪽 위의 하천은 성남을 지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탄천의 상류이다. 葛川이라 표시된 하천은 수원을 지나는 신갈천이며, 남쪽을 지나는 하천은  평택을 지나 아산만으로 들어가는 진위천의 상류이다. 북쪽에 위치한 忠烈祠는 1576년(선조 9)에 세워지고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은 지금의 忠烈書院으로 고려 때의 충신인 정몽주(1337~1392)를 모시는 사당이다. 오른편으로 정몽주의 묘가 있으며 현재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서원은 수지읍 상현리에 위치한 深谷書院으로 조광조(1482~1519)를 배향하여 1650년(효종 1)에 사액받은 書院이다. 이 외에도 사창과 봉수가 파악되어 있다. (김지영)

  •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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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현은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동면 전체, 남면의 방축리·양화리를 포함한 북쪽, 평동을 제외한 조치원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남면 연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동쪽 1리에 있었다’는 城山이다. 읍치가 고을의 남쪽에 치우쳐져 있음에도 중앙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읍치는 南面 부근에 표시하는 것이 올바르다. 지도에는 하천의 본류와 지류가 거의 구별되지 않게 표현되어 있다. 東面이라 쓰여 있는 곳으로 들어와 金沙驛 부근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금강의 본류이다. 淸州界로부터 들어와 읍치 동쪽에서 남쪽으로 꺾여 금강으로 합류하는 것이 미호천이다. 全義界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미호천에 합류하는 것이 조천천이다. 하천의 규모는 ‘금강>미호천>조천천’의 순서임에도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지 않다. 東津은 단순히 ‘나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위치가 실제와 다르게 표시되어 있는데, ‘東津은 읍치 동쪽 5리에 있다’는 기록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東津과 龍塘은 거의 같은 위치에 있었다. 龍塘은 연못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연못처럼 물이 잔잔한 구간의 하천을 가리킨다. 그 위치도 금강 본류가 아니고, 미호천이 금강으로 합류되는 곳보다 약간 상류에 있었다. 이런 곳에는 보통 나루가 설치되는데, 東津이 이곳에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현재의 위치는 연기군 동면 용호리 일대이다. 이 밖에도 北一面이 마치 조천천 동쪽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오류이다. 실재로 조천천 동쪽은 모두 청주의 땅이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도 같은 오류가 발생하고 있어,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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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知品川縣이며 경덕왕 때 山陰으로 고치고, 1767년(영조 43)에 지금의 이름인 산청으로 고쳤다. 그 후 1914년에 단성군과 합하여 산청군이 되는데 본 지도는 단성과 병합되기 전 山陰의 지도이다. 산청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오부면, 생초면, 차황면, 금서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산청군 산청읍 한동과 지리 일대에 있었다. 산청에 흐르는 하천은 남강과 그 지류인 경호강이다. 읍치 동쪽에 있는 東山이 鎭山이며. 삼가 경계에 접하여 있는 黃梅山(1103m)은 정상이 활짝 핀 매화꽃잎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 바로 아래에 있는 古山城은 石築으로 그 둘레가 1천 3백 33척이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읍치 위쪽에 있는 서원은 西溪書院으로 1606년(선조 39)에 세워 吳健을 배향했고 1677년(숙종 3)에 사액되었다. 읍치 왼쪽에 있는 王山寺는 신라 때 장군 金庾信, 金孟, 金馹孫을 모셨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棆山 아래 知谷寺에는 고려 예부상서 孫夢周가 지은 慧月, 眞觀의 두 碑가 있다. (민경이)

  • 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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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령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회령군과 부령군의 관해면에 해당된다. 지금은 서쪽과 동쪽의 일부를 제외한 회령시와 나진시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회령시 남문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鰲山이다. 두만강의 곡류 방향이나 고을 전체의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약간의 단점이 있다면, 아래쪽의 高浪歧川이 동북쪽의 종성 방향에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그런 사실이 地誌에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회령부 지도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 이 고을의 산줄기와 물줄기는 이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내부에 표시된 지명에서만 일부 교정되어 있을 뿐이다. 고랑기천에 紫淵과 眞珠池로 추정되는 그 옆의 섬 모양의 표현이 재미있다. 분명하게 淵이나 池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섬처럼 표시한 예는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호수로 교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곳은 地誌의 기록을 참고해 보았을 때, 독자적인 호수는 아니다. 단지 고랑기천의 일 부분 중 淵이나 池로 표현될 수 있을 정도로 잔잔하고 깊은 구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도에는 일반인들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와 誤字도 몇 개 보이고 있다. 지도 왼쪽에 표시된 芦田項에서의 ‘芦’는 ‘蘆’의 속자이다. 읍치 아래쪽 방향에 있는 幹木河는 斡木河의 誤字이다. 그 아래쪽 방향의 灵通山·灵山社에서의 ‘灵’은 ‘靈’의 俗字이다.(이기봉)

  • 영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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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변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영변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북도 녕변군·구장군·향산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는 녕변군 녕변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藥山이다. 지도에는 藥山이 樂山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이 고을은 세종 11년(1429)에 延山과 撫山을 합해 만들어졌다. 지도 아래쪽에 延山面이, 왼쪽에는 古撫州와 撫山面이 표시되어 있다.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청천강 본류이며,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하천은 구룡강이다. 청천강에는 月臨江·花川江 등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읍치의 경우 다른 지도에는 붉은색의 원으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 지도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성곽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영변의 읍성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영변의 읍성은 鐵甕城으로 이름 붙여질 정도로 難攻不落의 성곽으로 잘 알려져 있다. 外城·新城·藥山城·北城 등 4중의 성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병자호란(1636) 때 후금의 포위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곳이다. 지도 위쪽에는 魚川道가 표시되어 있는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역으로서 21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道’라는 명칭은 察訪이 파견된 驛에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지도책에는 찰방역의 경우만 붉은색 원으로 표시하였다. 다만 같은 표시의 읍치와 구별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작게 표시하고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妙香山(1,909m)이 표시되어 있다. 매우 유명한 산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하게 취급되지 않고 있다.(이기봉)

  • 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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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해군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후포면·온정면·기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평해읍 평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釜谷山이었다. 고을의 모습은 남북이 동서의 폭보다 실재로는 넓은데, 지도에는 반대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북쪽 울진과의 경계선이 동북 방향으로 더 올라가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천의 명칭 표기에서도 약간 의아스러운 점이 발견된다. 읍치 위쪽의 작은 하천 명칭은 적어 넣었음에도, 가장 큰 읍치 아래쪽의 南大川은 표시하지 않았다. 가장 위쪽에 있는 明正川도 正明川의 誤記이다. 읍치 바로 위쪽의 다이아몬드 모양은 이 책에서 일관되게 鎭堡를 표시하는 기호이다. 이곳에는 강원도의 동해안에서 보기 드물게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越松(浦)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 조선초기에는 동해안에 水軍이 파견된 많은 鎭堡가 있었지만, 倭寇의 침입이 거의 없어지면서 대부분 혁파되었다. 월송(포)진에도 조선초기에는 水軍萬戶가 파견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육군 위주인 병마만호로 바뀐 것이다. 지도 위쪽의 望洋亭과 월송(포)진에 있었던 越松亭은 關東八景의 하나로 유명했던 정자이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書院은 鳴溪書院이다. 선조 때의 관리이자 학자로 알려진 黃應淸·黃汝一 등을 배향하여 현종 12년(1671)에 세워졌으나,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 기타 고을 왼쪽에는 현재도 백암온천으로 개발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溫井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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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목은 황해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여 평안도와 접한 고을이다.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대로에 위치한 군사 요충지여서 1593년(선조 26)에 병마절도사영을 설치하였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송림시, 황주군 황주읍·인교면·구락면·도치면·주남면·천주면·흑교면·청수면·구성면·영풍면·청룡면·삼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송림시·황주군·연탄군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절령 북쪽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평안도 중화부와 접하고 있다. 예전에는 북쪽으로 통하는 큰길이 자비령을 지나갔으나, 고려 말부터 慈悲嶺 길을 없애고 수목을 가꾸어 막아 버렸다. 지도에도 자비령으로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碧花山이다. 병영이 있던 읍치는 정방형으로 강조되어 있다. 읍치에는 병마절도사 외에도 中軍인 兵馬虞侯가 주재해 있었다. 고을 남쪽의 正方山城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관방으로 1636년(인조 14)에 쌓은 것이다. 동으로는 銅仙關, 서로는 棘城과 이어져 하나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읍치에 표시된 서원은 1588년(선조 21)에 세워져 1721년(경종 1)에 사액된 白鹿洞書院으로 보이는데, 朱子와 김광필·이이 등을 배향했다.(오상학)

  • 음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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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음죽현은 지금의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  충청북도 음성군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장호원읍 선읍리에 있었다. 읍치 서쪽의 雪城山은 城山이라고도 하며 성지가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북으로 이천, 동으로 여주, 남으로 충주로 향한다. 이 지역은 경기 남부와 충청 북부 지역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 조선 후기와 일제 초기까지 안성과 함께 가장 번성했던 장호원장이 있었다. 읍치의 아래쪽을 흐르는 하천은 天民川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지금의 청미천이다. 현재 청미천 위에는 長海院橋가 있는데 이곳이 지금의 장호원으로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청미천에 있는 無極驛은 현재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에 있다. (김지영)

  • 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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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현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두마면·부적면·벌곡면 전체, 남산리·모촌리를 포함한 북쪽의 양촌면에 해당된다. 역사적 흔적이 매우 많은 고을이다. 읍치 오른쪽의 黃岺 밑은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 階伯의 5천 결사대가 김유신의 5만 군대를 맞아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이다. 읍치 위쪽의 開太峙 밑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격파한 후 삼한을 통일한 것은 하늘이 도와준 것이라며 세운 開泰寺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조선 초기까지도 왕건의 초상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위쪽의 豆磨面이 있는 지역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최초로 천도를 단행하려고 했던 곳이다. 실재로 궁궐 신축공사까지 시작했다가 한양으로 수도가 정해지면서 공사를 정지했다. 이곳은 이후 新都안이라고 불리며, 조선 멸망 후 새 왕조가 들어설 수 있는 지역이라는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도에는 書院이 네 개나 보이고 있는데, 주변의 다른 고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은 이곳이 西人 老論의 거두였던 宋時烈(1607-1689)의 스승 金長生(1548-1631)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遯岩書院은 김장생을 배향하여 인조 12년(1634)에 세워지고, 효종 9년(1658)에 賜額 받았다. 이외에도 김장생의 아들 金集(1574-1656)과 宋俊吉(1606-1672), 송시열 등을 추가로 배향하여 조선후기 내내 최고의 정치세력이었던 서인 노론파의 본거지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강경 부근에서 금강과 합류하는 논산천 상류이며, 오른쪽의 하천은 대전을 지나 금강으로 합류하는 갑천의 상류이다.(이기봉)

  •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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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가는 三岐·嘉樹 두 현을 합한 이름이다. 삼기현과 가수현은 본래 신라의 三支縣(麻杖)과 加主火縣인데 경덕왕 때 각각 삼기와 가수로 고쳤다. 조선 태종 때 두 현을 합하여 지금의 이름인 삼가로 개명하였으나 1914년에 거창과 합천에 지역을 나누어 편입시키고 없어졌다. 삼가는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쌍백면, 가회면, 대병면, 봉산면 지역과 거창군 신원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합천군 삼가면 금리에 있었다. 삼가는 남강의 지류인 양천강 유역에 읍치가 있고, 모태면(현 봉산면)과 고현면(현 대병면) 그리고 대평면(현 대병면)에는 황강의 지류인 사천천, 유전천, 하금천이 흐른다. 삼가의 古三岐縣의 터는 金城山烽 부근에 있고, 古嘉樹 터는 阿斗峴 아래에 있다. 황강변에 있는 서원은 龍巖書院으로 1603년(선조 36)에 세워져 曹植을 배향하며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다. 읍치 동쪽에 있는 有獜驛은 의령의 指南驛, 단성의 新安驛, 진주의 安磵驛, 합천의 勸賓驛과 연결되는 沙斤道의 屬驛이었다. (민경이)

  •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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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군은 태극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영원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영원군과 대흥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는 영원군 영원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古邑 왼쪽에 있는 快山이다. 중종 20년(1525)에 古邑 부분에서 지도 위의 위치로 읍치를 옮겼다가, 숙종 16년(1690)에 다시 古城 부분으로 옮긴다. 그러다가 영조 25년(1749)에 지도 위의 위치로 읍치를 다시 옮긴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는 영조 25년(1749)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도에서 보이는 하천은 대동강 본류의 최상류에 해당되는데, 지도에는 黑淵江·九淵江 등의 명칭이 보이고 있다. ‘淵’이란 진짜 연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천 구간에서 연못처럼 깊고 잔잔한 부분을 지칭한다. 이것은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일제초기에 본류 명칭이 단일화되기 이전까지 다양한 하천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 고을 동쪽으로는 현재의 낭림산맥인 白頭大幹이 북에서 남으로 지나간다. 동쪽에만 경계 고을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함경도의 함흥·정평과 접해 있었다. 지도 가운데 약간 오른쪽에 다이아몬드 모양과 함께 寧城鎭이 표시되어 있다. 위치로 보아 함경도 방면에서 西進하는 적을 방어하던 곳으로 생각된다. 이 鎭은 인조 19년(1641)에 종9품의 별장을 파견하여 설치하였으며, 숙종 7년(1681)에 종3품의 僉使鎭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혁파하였다가 관방의 요새라고 하여 獨鎭僉使로 승격시켰다. 지도에는 鎭倉이 2군데 보이고 있는데, 영성진의 屯田에 설치된 창고이다. 이곳이 獨鎭으로 승격된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도 위쪽에는 현재 狼林山脈 이름의 근원이 된 樂林山(2,186m)이 보이고 있다. 面과 倉庫의 표시가 가장 자세하며, 창고와 면의 이름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洞이란 지명도 표시되어 있다. 함경도나 평안도의 지도에서 ‘洞’은 깊은 골짜기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곳에 자리 잡은 마을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이기봉)

  •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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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현은 지금의 내면을 제외한 강원도 홍천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홍천읍 희망리·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에 1리에 있었다’는 石花山이다. 읍치 남쪽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현재 홍천강으로 불리운다. 읍치 오른쪽에는 三汀이 표시되어 있다. 두 물이 합하여 삼각형 모양의 모래섬(汀)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하천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현재 홍천강에는 배가 거의 다니고 있지 않지만, 일제시대까지는 홍천읍 근처까지 水運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을 전체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총 10개의 面이 표시되어 있다. 현재 9개의 읍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거의 비슷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면과 함께 표시된 里는 대부분 地誌에서 찾을 수 있는 마을들로, 아마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는 일부 오류도 발견되고 있다. 西倉이란 명칭이 2개나 적혀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동쪽에 있는 것은 北倉이라고 표시해야 한다. 그리고 필사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도 보이고 있다. 읍치 왼쪽 아래의 釰倚山面에서의 ‘釰’은 ‘劒’자 대신에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일’이 아니라 ‘검’으로 읽어야 한다. 그 오른쪽의 面 이름은 永歸美面이다. 이밖에 인문정보로는 驛院과 寺刹의 표시가 자세한 지도이다.(이기봉)

  •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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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은 동으로 여주, 북으로 광주, 서로 양지와 죽산, 남으로 음죽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도에 나타난 지역은 이천시, 부발읍, 대월면, 모가면, 호법면, 마장면, 신둔면, 백사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이천시 창전동 일대에 있었다. 鎭山은 읍치 서쪽의 雪峯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인 梨樹川은 광주에서 흘러나와 읍치 동쪽을 흐르는 福河川에 합류하여 梨浦津으로 흘러간다. 복하천은 이천의 남서쪽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의 여주 경계를 지나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광주와 여주로 통해있으며 동쪽으로 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에는 高尺站, 素沙站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천은 지금도 도자기로 유명한데 이천의 토산은 호법리에서 나오는 白玉과 陶器가 있었다. (김지영)

  • 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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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현은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장연면과 충주시 상모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연풍면 삼풍리 일대에 있었다. 연풍현에는 조선후기에 5개의 面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읍치에 있었던 縣內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연풍현은 태조 3년(1394)에 원래 長延縣과 長豊縣을 합쳐 하나의 고을로 만들고, 태종 3년(1403)에 두 고을의 이름 중 한 자씩 따서 이름을 만들었다. 장연현은 縣內面이, 장풍현은 長豊面이 있던 곳에 있었다. 水回面이 있던 곳은 원래 충주 소속의 水回村이었는데, 성종 7년(1476)에 이 고을에 합쳐졌다. 이 지도에는 고개에 대한 표시가 자세하다. 특히 오른쪽 위부터 鷄立山·鳥嶺·伊火峴 등 경상도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가 세 곳이나 있었다. 이들 고개의 한글 지명은 각각 하늘재·새재·이유릿재이며, 지도 제작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주로 한글 지명으로 불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립산 밑은 현재 충주시 상모면의 미륵사지가 있는 곳이다. 이곳의 물은 수회면이 아니라 북쪽의 남한강(현재의 제천시 한수면)으로 바로 들어감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계립산 위에 표시된 溫井은 현재 수안보온천으로 개발되어 있다. 鳥嶺에는 關門의 표시를 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였으며, 약간 서북쪽에는 小鳥嶺(작은 새재)이 있다. 의아스러운 것은 安保驛에서 조령으로 넘어가는 길이 한양-동래를 잇는 대로임에도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지도에는 2개의 마을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丈岩은 바위의 이름이 아니라 집집마다 바위로 담을 쌓아 붙여진 담바위 또는 墻岩에 대한 다른 표기이다. 五律洞은 勉義面에 있었던 五佳洞의 誤記로 보인다. 둘 다 이 고을에서는 가장 유명했던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渴馬峴→갈마고개, 楡峴→느릅재, 牛峴→쇠재, 周峙→지름티·기름재 등은 한자 표기와 한글 이름의 다양한 연관관계를 알 수 있게 한다.(이기봉)

  •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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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沙伐國 또는 沙佛國이라 하였으며, 경덕왕 때 지금 이름인 상주로 고쳤다. 983년(성종 2)에 尙州牧이 되어 1392년(태조 1)에 경주의 관찰사영이 옮겨와서 1596년(선조 29)에 관찰사영이 대구로 옮겨갈 때까지 경상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성으로 가는 嶺南路가 통과하고 세곡 수송에 중요한 낙동강이 가깝게 있어 지리적으로 교통·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상주는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광역시 전체와 의성군의 단밀면, 단북면, 문경시의 산양면, 영순면 일부, 산북면 일대를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고, 읍치는 상주광역시 상주시내 성하리와 성동동 일대에 있었다. 상주는 읍치 주변에 흐르는 병성천과 단북면에 흐르는 渭水(현 위천)가 본류인 낙동강에 유입되어 하류에는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졌다. 지도에서 보듯이 상주에는 영남로상에 위치한 洛陽驛을 비롯하여 洛陽洞, 洛平驛, 洛東村, 洛東里, 洛西里 등 낙동강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상주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天峯山이며, 청주 경계에 접한 俗離山(1058m)과 청산 경계에 접하여 있는 八音山(762m)이 서쪽 경계가 된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甄萱城은 견훤이 가은에서 나서 그 누이와 같이 청화산의 돌을 한 치마씩 주어다가 하루만에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켜 후백제를 이룩하였다고 전한다. 상주에는 道南書院, 玉洞書院, 興巖書院 등 많은 서원들이 있는데 위의 서원들은 모두 사액된 서원들이다. 도남서원은 1606년(선조 39)에 세워서 鄭夢周, 金宏弼 외 3인을 배향하였으며 1677년(숙종 3)에 사액되었다. 玉洞書院은 1568년(선조 1)에 세우고 黃喜, 全湜을 배향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에 사액되었다. 상주에는 단밀창, 공성창, 중모창, 산양창, 화령창, 청리창, 외서창 등 큰 고을 만큼이나 많은 창고들이 분포되어 있다. (민경이)

  • 영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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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유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면·노지면·청산면·용호면·해소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원군과 숙천군의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평원군 평원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米豆山이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 개의 큰 못이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나오는 것으로서, 조선후기에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德池筒은 조선에서 볼 때 둘레 53,400尺(약 16,020m)에 이르는 초대형 못이었다. 元堂筒과 乫院(筒) 역시 둘레가 각각 7,840尺(약 2,352m)·11,050尺(약 3,315m)에 해당되어,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다. 덕지통은 영조 7년(1731)에 논으로 개조되고, 摠戎廳의 屯田으로 변한다. 원당통 역시 같은 해에 논으로 개조되고, 監營의 贍學庫 屯田으로 변한다. 이 지도는 屯田으로 변하기 이전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읍치 오른쪽의 臥龍祠는 중국의 諸葛亮을 배향하여 선조 36년(1603)에 세워지고, 현종 9년(1668)에 諸葛亮의 號인 ‘臥龍’이란 이름으로 賜額 받았다. 이후 영조 26년(1750)에 ‘三忠祠’란 이름으로 다시 賜額 받는데, 이 지도는 그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덕지통 위쪽의 通海鎭은 ≪輿地圖書≫영유현에 나오는 德池鎭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통해진에서의 ‘통해’는 덕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폐현의 이름인데, 그것이 원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덕지진은 영조 24년(1748)에 혁파된다. 위쪽의 唐子浦 밑에 표시된 다이아몬드 모양은 이 지도책에서 일관되게 鎭堡를 의미한다. 그러나 당자포진을 기록에서 찾을 수가 없으며, 아마 덕지진의 것을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밖에 왼쪽에는 순안의 월경지도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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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양부는 일제시대의 강원도 회양군 전체와 양구군 수입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회양군·금강군·창도군·세포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회양군 회양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1리에 있었다’는 義舘嶺이었다. 지도에 보이는 하천은 북한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북쪽으로는 함경도의 안변과 접해 있는데, 이곳에는 함경도로 통하는 최대 요해처인 鐵嶺(685m)이 있다. 지도에는 鐵岺烽으로만 표시되어 있지만, 이곳에는 원래 關門城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關北(함경도)·關東(강원도)이란 명칭이 나왔다는 說도 있다. 철령에서 동남쪽으로 현재 태백산맥이라고 불리는 白頭大幹이 지나간다. 지도 중간 오른쪽에는 金剛山이 金岡山이라고 적혀 있으며, 흰색과 크기로서 다른 산들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 아래쪽에는 금강산의 유명한 古刹인 正陽寺와 長安寺도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은 현재 內金剛이라 불리고 있다. 이 고을은 넓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2장에 그려질 정도로 규모가 굉장히 컸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屬縣 부분에는 和川縣·嵐谷縣·水入縣·長楊縣 등이 적혀 있다. 屬縣으로 적혀 있다는 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유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이 속현들의 독자성은 거의 사라지지만, 화천현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개의 이름이 모두 면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각 속현들의 역사성이 그만큼 뿌리가 깊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도 아래쪽의 百入面은 다른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보았을 때 水入面의 誤記이다. 또한 지도 제작 당시에 있었던 府內面·初北面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府內·初北里·初北 등의 지명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面을 생략하여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읍치 오른쪽 방향의 天老只面은 여러 가지 지도와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명칭으로서, 夫老只岺에 대한 誤記로 생략된다. ≪해동지도≫의 회양부 지도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모두 夫老只岺으로 나온다. 이 지역에는 7개의 面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는 8개의 면으로 재편된다. 작은 고을의 경우 조선시대의 面이 일제시대의 그것에 비해 1/3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면이 상당히 크게 편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고을에 屬縣(4개)이나 廢縣(2개)이 많았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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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은 경기도 강화만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이다. 매소홀의 위치는 지금의 남구 관교동, 문학동 일대이다. 1413년(태종 13)에 인천이라고 칭하였다가 1461년(세조 7)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이 때까지 제물포라는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인천이 지형상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무역의 거점으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 일찍부터 외국세력에 의하여 주목을 받아왔다. 1875년(고종 12)의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인천의 문호가 개방되고, 뒤이어 일어난 제물포조약의 결과 1883년(고종 20)에는 인천항이 개항되었다. 개항 후에는 거류조약서가 조인되어 1888년(고종 25)까지에는 청, 일 및 구미의 거류지가 마련되었다. 청일, 노일전쟁을 통한 일본의 중요한 군사기지가 되었다. 1894년(고종 31) 한일 양국간에 잠정합동조약이 체결되어 경인철도가 신설되었다. 인천은 동쪽으로 금천, 남쪽으로 안산, 북쪽으로는 부평과 접하고 있으며 읍치는 매소홀의 위치에 있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시청의 위치는 남동구 구월동에 있다. 진산은 읍치의 동북쪽의 蘇來山이다. 읍치로부터 금천, 부평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서쪽으로는 인천 국제공항이 자리한 영종도, 경기의 다른 거점이 되었던 덕적도 등 여러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舊濟面 부근은 강화도 조약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지금의 인천항이 된 지역이다. 인천의 남쪽 경계가 되는 浦五川은 지금 서울과 인천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소래포구 부근이다. 읍치 동쪽에 있는 서원은 鶴山書院으로 이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던 李端相(?-1669) 부자를 배향하여 1702년(숙종 28)에 세워졌다. 지도의 남동쪽 바다 넘어 인천의 월경지인  梨浦面이 있다. 이포면은 원래 梨浦部曲이었으며, 지금의 화성군 남양면 문호리와 비봉면 유포리 일대에 있었다. (김지영)

  • 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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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현은 충청북동 영동군 영동읍·용산면·심천면·양강면 전체와 여의리를 제외한 용화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城隍山이다. 摩尼山 근처에서 들어와 沃川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금강의 본류이다. 尙州와 黃澗으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이 금강의 지류인 초강천이다. 지도에는 松川·高唐江·赤騰津 등의 하천 명칭이 쓰여 있는데,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이 단일화되면서 모두 공식적으로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초강천의 경우 금강 본류와 초강천이 만나는 부근의 마을인 초강리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高唐江 부근은 세종 때의 樂師로 유명한 朴壖(박연, 1378-1458)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박연의 묘소도 있으며, 오른쪽의 書院이 그를 배향하여 세워진 草江書院이다. 이 서원에는 이외에도 西人 老論 계열의 宋時烈(1607-1689) 등도 추가로 배향되었다. 그 아래쪽의 觀魚臺는 강가 양쪽에 솟아있는 절벽으로서, 臺는 樓臺뿐만 아니라 촛대처럼 생긴 지형에도 사용됨을 알 수 있다. 臺岩의 경우도 지형의 모습이 솟아오른 촛대처럼 생겨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와 같은 특수한 모습의 지형이 지도 작성자에게도 고을을 상징하는 중요한 지표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 龍化倉이 있는 지역은 현재의 용화면이 있는 곳으로, 지형적으로는 무주와의 연결관계가 훨씬 쉬움에도 영동의 땅으로 되어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 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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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一善郡이었는데 경덕왕 때 嵩善郡으로 고쳤고 조선 태종 때에 지금의 이름인 선산군으로 고쳤다. 선산은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옥성면, 고아읍, 무을면, 해평면, 산동면, 도개면, 장천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와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선산은 낙동강이 중앙부를 관류하고 읍치 남부에 그 지류인 甘川이 흐른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飛鳳山이다. 지도 남단에 있는 金烏山(976m)은 고려 때 海州의 북숭산과 짝을 이룬 南嵩山으로 서쪽의 개령, 동쪽의 인동과 경계를 이루며 고려의 吉再가 이 산 밑에서 살았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금오산성은 산세가 험준한 곳에 있는 옛 石城으로 고려 말 선산, 인동, 개령, 성주의 백성들이 왜구를 피하여 여기에 들어와 살았고, 조선에 와서 개축하여 그 둘레가 7천 6백 44尺에 높이가 6백 6십 1步로 절벽을 따라서 성이 된 것이 거의 절반이나 된다. 성안에는 폭포 우물이 8개, 못이 7개 있다. 금오산성 북쪽에 있는 冶隱廟는 1609년(광해군 1)에 지금의 이름으로 되어 吉再, 金宗直 외 3인을 배향하였다. 해평면에 있는 서원은 洛峰書院으로 1646년(인조 24)에 세워져 金淑滋, 金就成 외 3인을 배향하였으며, 1787년(정조 11)에 사액되었다. 상주 경계에 접하여 있는 水多寺는≪水多山略誌≫에 의하면 830년(신라 흥덕왕 5)에 진감국사가 蓮岳山에 蓮花寺라 하여 절을 지어서 1573년(선조 5)에 다시 사명대사가 중건하여 수다사라 개칭하였는데 1705년(숙종 30)에 화재로 인하여 일부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낙동강 강변을 따라 義狗塚과 義牛塚이 보이는데 이는 각각 화재와 호랑이로부터 주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黃狗의 무덤과 소의 무덤이다. 산내면에 있는 月波亭은 고을의 원인 李文挺이 처음 정자를 지어서 월파라 불렀다가 허물어진 것을 崔關이 漢城宮을 지은 도편수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였다. 월파정은 그 절경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지나가는 길손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민경이)

  • 용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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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강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지운면·다미면·오신면·양곡면·용월면·서화면·해운면과 강서군 함종면 일부에 해당된다. 현재는 남포직할시 항구구역·대안구역·룡강군과 평안남도 온천군 북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남포직할시 룡강군 옥도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烏石山이다. 고을의 모습이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실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서북쪽은 서해와 맞닿아 있으며, 동남쪽은 대동강과 재령강이 만나는 부분이다. 지도의 동남쪽에는 急水門이라는 지명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실제의 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동강과 재령강이 만나 바다로 통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의 물살이 지형과 潮水의 영향으로 급하게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읍치 위쪽의 黃龍山城은 둘레 12,580尺(약 3,774m)에 이르는 대형산성이며,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난공불락의 성곽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조선시대의 地誌에서는 고구려 초기의 황룡국이나, 당 태종이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安市城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이 고을 이외에도 조선시대의 地誌에는 고구려 후기의 수도였던 평양을 중심으로 주변 고을에 고구려 초기의 유적이나 신화·전설 등을 싣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현재 대부분 부정되고 있으며, 安市城 역시 만주의 랴오닝성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 지역에서는 고구려 초기의 것은 아니지만, 벽화 등으로 채색된 고구려의 대형 돌방무덤(石室墳)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지도의 왼쪽에는 이 고을의 옛 邑治가 古邑으로 표시되어 있다. 다만 언제 지도상의 읍치 지역으로 옮겨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그 왼쪽에 표시된 溫井은 地誌에는 따뜻하고, 소금의 맛이 난다고 되어 있다. 현재도 평남온천으로 개발되어 이용되고 있다. 기타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眞(島)에 鹽盆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초기에도 이 지역에서 소금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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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현은 지금의 서원면과 강림면을 제외한 횡성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횡성읍 읍상리·읍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2리에 있었다’는 馬山이었다. 읍치를 지나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여주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섬강의 상류이다. 고을 동쪽에 있는 하천은 주천강의 상류로서, 영월읍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섬강의 경우 지도에는 많은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隅川面으로 가는 물줄기는 읍치 남쪽에서 갈라지는 것이 맞지만, 甲川面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합류되지는 않는다. 후자는 섬강의 본류로서 읍치 북쪽과 서쪽을 지나와야 한다. 이렇게 보면 갑천면 북쪽에 있는 鴻豆山과 鼎金山도 檜峴 부근에 기록되어야 한다. 정금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도 서쪽의 北倉 아래쪽으로 흘러와 갑천면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류해야 한다. 이와 같은 심각한 오류는 面里의 표시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井谷面의 경우 안흥역 부근에 있어야 하며, 晴日面도 갑천면 북쪽에 있어야 한다. 지도 위쪽에 있는 栗實里는 粟實里의 誤記이며, ‘속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우리말 ‘속실’의 발음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속실리는 청일면에 속해 있었으며, 지도에서처럼 홍천으로 내려가는 물줄기가 아니라 그 남쪽에 있었다. 읍치 위쪽의 松原面은 公根面의 誤記로 보이며, 읍치 오른쪽의 水南面은 隅川面의 1개 마을에 불과한 것을 面으로 착각한 것이다.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횡성 지도에서는 비록 회화식으로 표현했지만 이와 같은 심각한 오류는 발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이 지도책이 근본적으로 지방에서 그려 보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여러 읍지를 종합해서 그렸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지와 같은 정보를 중심으로 편집에 의존할 경우 중요한 위치와 거리를 몇 개만 잘못 표시해도 다른 것은 자동적으로 잘못되기 때문이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 대부분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이 역시 김정호가 다른 지도보다도 이 책의 지도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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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장단은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장단면, 진동면과 연천군 장남면, 북한의 장단군 진서면, 장도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휴전선 이남과 이북에 걸쳐 있어 일부는 남한에 들어와 있고, 장풍군은 북한 쪽에 속한다. 읍치는 백학산 주변에 표시되어 있다. 장단의 치소는 1459년(세조 5)에 桃源으로 옮겨졌다가, 1469년(예종 1)에 옛날 임진땅으로 옮겼다. 이 지도에 표시된 읍치의 위치는 임진강 유역에 표시되어 있고, 桃源에는 古邑을 표기된 것으로 보아 1469년 이후에 제작된 지도로 볼 수 있다. 도로는 북으로는 朔寧과 연결되며 동으로 임진강을 건너 파주로, 서로는 개성과 연결되었다. 이 지역은 산천이 잘 발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망해산은 고읍의 진산이며, 白鶴山은 예전에 白岳山이다. 백악산은 고려가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의 가치가 떨어지자 풍수도참설에 따라 개성 근방의 명당터에 세 궁궐을 지었다. 이것을 고려 3요소(三蘇)라 하며 좌소가 바로 白岳山이며, 개풍군 대성면에 있는 白馬山이 우소, 황해도 신계군의 箕達山이 북소이다. 북동쪽에서 흘러오는 沙彌川과 북서쪽에서 흘러오는 沙川이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현재 사천으로 합류하는 板積川 주위에 판문점이 위치하고 있다. 임진강가에는 北倉, 海倉 등 포구를 비롯하여 津, 浦, 站을 볼 수 있다. 특히 장단부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부의 바로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英陵(고려 숙종릉), 智陵(고려 명종릉), 敬順王陵등 王陵과 신하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지도에는 蘿陵만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 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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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현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가곡면·어상천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위쪽을 오른쪽(동)에서 왼쪽(서)으로 흐르는 하천이 남한강이다. 여러 기록과 배치되는 측면이 몇 개 보이고 있다. 지도 위쪽의 東衣面은 車衣面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어,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쪽의 枝谷面·榮踏谷도 지도 작성자가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생각된다. 두 지역 모두 榮川의 越境地였다. ‘榮踏谷’은 ‘영천의 踏谷’이란 뜻임에도 하나의 지명인 것처럼 표시하였다. 읍치 위쪽의 赤壁 역시 보통 北壁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오류는 지도 작성자가 현지인이 아니거나, 일부 잘못된 정보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초까지도 於上川縣이 영춘현의 屬縣으로 존재하며, 독자적인 관사와 군창을 갖고 있었다. 지도에 魚上川面이라고 표시된 지역에 해당되는데, 이곳은 지형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독자적인 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읍치 왼쪽의 松波書院은 尹宣擧(1610-1669)를 배향하여 숙종 29년(1703)에 세워졌으나, 賜額 받지는 못했다.(이기봉)

  • 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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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六伽倻의 하나인 星山伽倻였는데 신라가 이를 정벌하고, 충렬왕 때 지금 이름인 성주로 고쳤다. 성주는 가야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지역으로 서쪽은 伽倻山(1430m)·禿用山(956m) 등 높은 산지가 있고, 동쪽은 낙동강이 흘러 西高東低의 지형을 보여준다. 낙동강 지류인 백천이 읍치를 감싸 흐르고, 대가천이 고령을 경유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성주는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전체, 고령군의 다사면, 덕곡면, 운수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있는 印懸山이 고을의 鎭山이며, 修道山(1317m)은 知禮와 居昌 두 고을의 경계가 되고 있다. 독용산에 있는 禿用山城은 ≪大東地志≫에 의하면 본래 都山城으로 1675년(숙종 1)에 개축한 石城이다. 그 둘레가 4천 5백 81步로 砲壘 4개, 溪 3개, 泉 2개가 있는 甕城으로 평탄하고 험함이 서로 반반이다. 독용산성 아래에는 회연서원과 덕봉서원이 보인다. 檜淵書院은 1627년(인조 5)에 세워져 鄭逑, 李潤雨를 배향하고 1690년(숙종 16)에 사액되었다. 성주에는 達倉, 南倉, 泉倉, 老多倉, 加倉 등 많은 창고가 분포 되어 있다. (민경이)

  • 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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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양서면·양하면·양광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되며, 현재는 용천군·염주군·피현군·신도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피현군 성동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龍骨山城이 있는 龍骨山(477m)이었다. 고을의 서쪽은 압록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의 땅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던 고을이다. 읍치 오른쪽의 龍骨山城은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만든 성곽이며, 石築의 內城과 外城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조 2년(1624)에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숙종 18년(1692)과 같은 왕 30년(1704)에 지속적으로 수축하여 완성하였다. 병자호란(1636)을 전후로 하여 청나라와의 대치상태가 만들어낸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읍치에도 둘레 13,308尺의 석축 성곽이 있었지만, 지도 제작 당시에는 이미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다. 철산과의 경계선에 표시된 西林城은 실재로는 철산 땅 안에 있었다. 지도 왼쪽에는 彌串(鎭)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다. 두만강-압록강을 따라 설치된 수많은 鎭堡 중 가장 서쪽 끝에 있었던 군사시설이다. 숙종 4년(1678)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다. 고을 남쪽에는 수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薪(島)가 가장 큰 섬인데,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그 위치는 훨씬 압록강 하구 쪽으로 가까이 가 있어야 하며, 홍수 때마다 섬의 크기가 달라지기도 했다. 더 오른쪽에 크게 표시된 大烟筒(島)·小烟筒(島) 등의 크기는 실제보다 훨씬 크게 표시되었으며, 위치 또한 해안가에 더 가깝게 있어야 한다. 섬에 대한 표시가 이 지도 뿐만 아니라 다른 지도에서도 가장 부정확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섬에 대한 정보가 위치나 크기까지 자세하지 않았던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이기봉)

  • 흡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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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곡현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답전면과 고저읍 북쪽 일부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의 장대리·송전리·거성리·노상리·보탄리이다. 읍치는 지금의 통천군 송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朴山이다. 이 고을에는 18세기 말의 상황을 보여주는 ≪戶口總數≫에 609호가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 정도의 규모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일제시대의 면 1개보다 조금 큰 정도에 불과하다. 강원도에서 가장 컸던 원주가 같은 책에 8,795호인 것과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의 행정단위가 호구의 수에서 획일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面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縣內面을 포함하면 총 3개가 있었다. 일제시대의 1개면보다 조금 큰 지역에 3개가 있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상당히 작았음을 알 수 있다. 면의 이름 중 踏日面은 踏田面의 誤記이다. 읍치 왼쪽의 侍中臺에 있는 호수는 지도에서처럼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 쪽으로 물길이 열러 있으며, 潟湖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중대는 호숫가의 경치 좋은 절벽을 의미한다. 기타 이 고을에도 작고 경치 좋은 섬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남쪽의 통천 지도와 달리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이기봉)

  • 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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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과 양주군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해당한다. 읍치는 적성면 구읍리에 있었다. 양주로부터 이어져오는 간성령의 맥이 감악 자락으로 이어져 읍치를 둘러싸고 있어 명당적인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고려 林椿이 감악산을 춤추는 봉새로 표현하기도 했을 만큼 경치가 수려함을 알 수 있다. 임진강 유역의 포구와 나루터가 파악되어 있다. 현의 서쪽에 단조역이 있으나 남쪽으로 상수역만 파악되어 있다. (김지영)

  •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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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현은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대술면·오가면 전체, 신택리·신종리·하평리를 제외한 신암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예산읍 예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金烏山이었다. 맨 왼쪽의 하천이 아산만으로 빠져나가는 삽교천 본류이며, 읍치 바로 왼쪽의 것이 그 지류인 무한천이다. 無限川은 無限山城 때문에 만들어진 명칭이다. 산성은 읍치 북쪽에 있었는데, 현재의 예산읍 산성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오류도 일부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述谷面에 표시된 하천이다. 이 하천은 실재로는 大興界 방면의 남쪽으로 흘러, 신양면을 거쳐 다시 북상한다. 이후 대흥면을 거쳐 예산읍내로 들어오게 되는데,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오류를 통해 이 지도의 작성자가 지방에서 올라온 자료를 토대로 그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書院은 德岑書院이다. 이 고을이 고향이며, 조선 4대 書道家로 알려진 金絿(1488-1533)를 배향하여 숙종 31년(1705)에 세워지고, 같은 왕 40년(1714)년에 賜額 받았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浦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옮겨가기 전에 모아 두던 海倉이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稅米를 漕倉에 모아 한꺼번에 운반했으나, 조선후기에는 해안가 고을의 경우 해창을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기타 豆村面은 秋史體로 알려진 金正喜(1786-1856)의 고향이며, 현재도 신암면 오산리에 추사고택이 남아 있다.(이기봉)

  • 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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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의 지도는 남북의 길이는 짧고 동서로 길게 뻗어있어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 소백산(1440m), 죽령(697m), 비봉산, 관적령, 마아령, 백병산, 문수산이 병풍처럼 동서로 펼쳐져 순흥을 감싸고 내부에는 내성천의 지류인 서천이 흐른다. 영주의 지곡, 답곡, 소천의 飛地도 보인다. 본래 고구려의 及伐山郡인데 신라 경덕왕 때 岌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충목왕 때 순흥으로 개칭되어 부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되었으나 1457년(세조 3)에는 풍기군에 속하여 부를 폐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23부제 실시에 따라 郡이 되었고 1914년에는 군을 폐하고 화천면·수민단면·수식면은 봉화에 속하고 그 나머지는 영주로 편입되었다. 순흥은 지금의 영주군 단산면, 순흥면, 부석면 지역과 풍기읍과 안정면의 일부지역 그리고 봉화군의 봉화읍, 물야면, 법전면, 봉성면의 일부지역이 포함되는 지역이며, 읍치는 영주군 순흥면의 읍내리 지역에 있었다. 지도에는 없지만 내죽면에 紹修書院은 1542년(중종 37)에 愼齋 周世鵬(495-1554)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처음에 백운동서원으로 출발한 이 서원은 1550년(명종 5)에 서적·노비·농토와 ‘소수서원’이란 額書를 하사받아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다. 창락면에 있는 昌樂驛은 내죽면에 있는 竹洞驛과 안동의 幽洞驛, 충청도 단양의 長林驛과 연계된다. 죽령봉은 풍기의 望前山에 응하고 충청도 단양의 金伊山에 응한다. (민경이)

  • 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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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산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운산군에 해당되며, 현재도 평안북도 운산군으로 존재한다. 읍치는 운산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위에 표시된 白碧山이다. 읍치 왼쪽을 흐르는 하천은 청천강의 지류인 구룡강의 상류이다. 지도에는 이 하천의 명칭을 麻田灘이라고 표시하고 있는데, 구룡강을 이 지역에서 부르던 이름이다. 읍치 바로 위쪽을 흐르는 하천의 크기가 실제보다 작게 그려지면서, 고을 전체의 모습이 일부 왜곡되어 있다. 이 하천은 2배 정도 더 크게 그려져야 하며, 그렇게 되면 고을 서쪽의 경계도 남북으로 거의 일직선의 모양을 하게 된다. 지도 아래쪽에는 이 고을의 越境地인 古雲山面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의 위치는 평안남도 운전군 운하리 일대이다. 이 고을은 몽골의 침입을 피해 고려 고종 18년(1231)에 섬으로 피난했으며, 원종 2년(1261)에 육지로 나왔다. 이 때 이 고을 사람들이 잠시 머물며 살았던 지역이 그대로 운산 소속으로 되었고, 이런 이유로 古雲山面이란 명칭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실재로는 지도에서 표시된 것보다 더 동남쪽에 있어야 한다. 고을 북쪽에 있는 牛峴·車岺·呼片岺·月隱乃岺 등은 압록강변의 理山과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였다. 또한 압록강 변의 군사기지를 넘어 온 적을 막아낼 수 있는 2차 저지선 역할도 하였다. 이와 같은 중요성 때문에 중요 지점에는 關門을 만들어 통제하였으며,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다. 고개 남쪽에는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던 委曲鎭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지도에는 委曲倉이 2개나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委曲鎭의 屯田에 있었던 창고이기 때문이다. 委曲이란 명칭이 붙지 않은 창고는 운산군에서 관리하던 것이다. 지도 위쪽의 古延州는 撫山과 합쳐져 영변 고을이 된 延山 지역이다. 세조 때 연산의 일부를 운산 소속으로 바꾸었다. 이 때 延州 시절의 읍치도 함께 운산 지역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표시된 것이다. 읍치 바로 위쪽에는 衛滿洞의 명칭이 적혀 있다. 燕나라 유민으로 기원전 194년에 古朝鮮의 準王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에 오른 衛滿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기타 이 고을의 地誌에 등장하는 溫井과 藥水도 표시되어 있으며, 위만동 왼쪽에는 우리말 ‘고개’의 음을 한자로 표시한 ‘古介’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 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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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은 안성시의 죽산면, 일죽면, 삼죽면과 용인시 백암면, 원삼면의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서북쪽에서 발원한 청미천과 죽산천이 서남쪽에서 만난다. 청미천은 당시 天民川으로 巾之山, 鼎倍山에서 발원하여 驪州 驪江으로 들어간다. 읍치 북쪽의 鼎倍山은 한 봉우리가 우뚝솟아 돌을 이고 있는데, 돌 구멍에 흰뱀이 있어 매년 홍수가 날때마다 천민천에 내려와 사람과 가축의 우환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남쪽에 七賢山에 있는 七長寺는 혜소국사가 홍제관을 세우고 일곱악인을 교화하였다하여 이름지어 1308년(충렬왕 43)에 창건한 절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에 있던 開天寺에 있는 史籍이 위험해지자 이곳으로 옮겨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절반이 파괴되어 여러 번 중건되어 지금에 이른다. 지도에는 파악되어 있지 않으나 이 밖에도 서북쪽에 九峯山에 飛足寺, 飛鳳山에 長光寺, 智通寺 등이 있었다. 읍치 동쪽으로 천해의 要塞地로 알려진 竹州山城등이 있다. (김지영)

  •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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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군은 청산면·청성면을 제외한 옥천군 전체, 영동면의 양산면·학산면과 용화면의 여의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옥천읍 삼양리·상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馬城山이었다. 조선 초까지도 이 지역에는 利山縣·安邑縣·陽山縣이 屬縣으로 존재했다. 이 후 세 개의 속현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옥천군의 面으로 재편되면서 독자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과거의 역사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데, 지도에는 창고의 이름에 분명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利’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이산현의, ‘安’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안읍현의, ‘陽’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양산현의 지역이었다. 지도 가운데의 赤登津에서 읍치 위쪽의 環山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금강의 본류이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현재의 서화천이며, 지도에도 西華水라고 적혀 있다. 금강 본류에는 灘(여울)과 津(나루)이 몇 개 보이는데, 해당 구간의 하천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 과정에서 금강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1960-70년대 이후의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점점 우리말 명칭은 사라지고 있다. 지도에는 위치가 잘못된 경우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을의 진산인 馬城山으로, 서화천의 동쪽과 읍치 바로 위쪽의 산줄기에 있다.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表忠祠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유명했으며, 금산 전투에서 700 의병과 함께 전사한 趙憲(1544-1592) 등을 배향하여 선조 41년(1608)에 세워졌다. 다음 해인 광해군 1년(1609)에 사액 받았으며, 이후 宋俊吉(1606-1672)·宋時烈(1607-1689) 등 西人 老論派의 인물들이 추가로 배향되었다.(이기봉)

  • 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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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史丁火縣인데 경덕왕 때 신령으로 고쳐 臨皐郡(永川郡)의 領縣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 경주에 속하였다가 조선 때 현감을 두어 소재를 장수역(長壽驛)으로 옮겼다. 중종 때에는 영천군에 속하였으며 북면 신촌리의 땅은 의성에, 梨阜縣의 땅은 의흥에 속했다가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영천군에 병합되었다. 신령은 지금의 영천시 신령면, 화산면, 지곡면, 경산시 와촌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천시 신령면 화성리에 있었다. 신령은 琴湖江유역에 있는 지역으로 읍치 서쪽에 있는 하천이 西川이며 고현면과 신촌면에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금호강 지류인 신령천과 고현천이 된다. 신령의 鎭山은 청송의 普賢山(1124m)에서 이어지는 花山이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신령은 “북쪽으로 花山에 거하고, 남쪽으로 龍川으로 둘렀다”라고 하여 그 입지가 전형적인 배산임수이다. 읍치 부근에 있는 長壽驛은 察訪道로 주변 14개의 屬驛을 두었다. 하양에 접하고 있는 龜川祠는 1686년(숙종 12)에 창건하여 權應銖를 배향하고 사액되지는 못하였다. 읍치 동쪽에 있는 尙德祠는 1705년(숙종 31)에 창건하여 현감 尹明運을 배향했다. (민경이)

  •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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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위원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자강도 위원군 전체와 초산군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위원군 고성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古邑 ‘북쪽 4리에 있었다’는 北山이다. 이 고을은 원래 서쪽의 理山과 동쪽의 江界에 합쳐져 있었다. 세종 25년(1443)에 두 고을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방어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여, 새로 이 고을을 설치하였다. 조선중기까지는 읍치가 古邑 지역에 있었으며, 영조 19년(1743)에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따라서 이 지도는 최소한 영조 19년(1743)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을 서북쪽에 압록강이 있으며, 小檜洞 위쪽에서 들어와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江界와의 경계선에서는 禿老江이, 읍치 방향에서는 渭水(현재는 위원강)가 합류한다. 고을 전체의 모습이 일부 왜곡되게 표현되어 있다. 실재로 고을 서남쪽 理山과의 경계는 서북-동남 방향으로 거의 일직선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오류는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압록강 변에는 3개의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지도에는 일부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가운데에 있는 南坡에는 鎭堡가 설치된 기록이나 지도를 찾을 수가  없으며, 오히려 아래쪽의 乫軒洞에 오래전부터 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直洞(堡)의 경우 嗭洞堡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밖의 인문정보로는 面·倉庫·烽燧·驛站의 표시가 아주 자세하며,  洞도 일부 표시되어 있다. 여기서 洞은 보통 깊은 골짜기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며, 종종 그런 곳에 자리잡은 마을을 지칭하고도 한다.(이기봉)

  •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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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은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의 옛 이름이다. 지도에 나타난 지역은 양평군 지제면, 양동면, 청운면, 단월면, 용문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지제면 지평리에 있었다. 읍치의 위쪽으로 흐르는 月谷川이 지금의 흑천으로 양평을 지나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여주, 원주, 이천으로 통해있으며, 역과 사창들이 파악되어 있다. 서북쪽에 있는 龍門山은 현재 국민관광단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천연기념물 303호로 지정된 은행나무로 유명한 龍門寺 등 많은 사찰이 입지해 있다. 서쪽에 있는 서원은 雲溪書院으로 1714년(숙종 40)에 賜額받았으며, 용문산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길러낸 趙昱(1498~1557)과 그의 형 趙晟(1492~1555)을 배향하였다. (김지영)

  • 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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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군은 아산시 시내·송악면·배방면·탕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읍내동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燕山이다. 고을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은 삽교호로 흘러들어가는 곡교천이며,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그 지류인 온양천이다. 읍치 왼쪽에는 이 고을을 대표할 수 있는 溫宮이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명칭이 고대에는 湯井郡, 고려시대에는 溫水郡 등으로 불렸는데, 모두 溫泉과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溫宮은 溫泉行宮의 줄임말이며, 行宮이란 임금이 잠시 머무는 곳에 지어진 宮이다. 이곳에는 조선의 태조·세종·세조를 비롯하여 많은 임금이 다녀갔으며, 그 때마다 머물렀던 곳이 바로 이 온궁이다. 현재도 온양온천으로 개발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현재의 아산시내는 바로 이 온양온천 때문에 성장한 것이며, 과거의 읍치는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 아래쪽의 時興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었으며, 7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도에는 명칭이 잘못 기록된 것도 보인다. 읍치 위쪽의 住文川의 ‘住文’은 기록에 계속적으로 ‘佳文’이라 나오는데, 지도 작성자가 글자의 유사점 때문에 오류를 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위에 大坪이라 쓰여 있는 부분은 하천이 만나는 큰 평지로서, 이런 곳은 주로 일제시대 이후에 개발되었다. 기타 廣峴은 우리말 ‘넙티’에 대한, 角吃峙는 우리말 ‘갈재’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이와 같은 것을 통해 당시에 우리말에 대해 어떻게 한자로 표현했는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이기봉)

  •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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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古昌寧國이었는데 신라 때 古陀耶郡으로 되었다가 경덕왕 때 古昌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때 후백제 왕 견훤과 싸울 때 도운 공이 있어 府로 승격되었고 현종 때 안동부(安東俯)로 고쳤다. 신종 때는 東京(경주)의 야별초 반란 시 진압의 공이 커서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776년(영조 52)에 道縣의 逆變으로 縣으로 강등했다가 1785년(정조 9)에 다시 부로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郡이 되었고 1914년에 禮安郡을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안동은 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서후면, 북후면, 임하면, 임동면, 풍산읍, 풍천면, 남선면, 남후면, 길안면 지역과 예천군 감천면의 일부지역 그리고 봉화군 법전면, 춘양면, 재산면, 소천면 일부지역을 포함하고, 읍치는 안동시 동부동에 있었다. 지도에서 보듯이 안동지역 중앙부에 금띠를 두른 듯한 큰 하천은 낙동강이며 읍치가 있는 현재 안동시 동부동 일대에서 반변천이 되어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특히 풍서면(현 풍천면)에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同族村인 河回 마을과 屛山書院이 있는데 그 곳의 주변 자연환경은 뛰어나다. 屛山書院은 1613년(광해군 5)에 愚伏 鄭經世(1563-1633) 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西厓 柳成龍(1542-160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1863년(철종 14)에 사액되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도 철거되지 않은 47개의 서원중의 하나이다. 임북면에 있는 虎溪書院은 1575년(선조 8)에 지방 유림이 건립하여 退溪 李愰을 주향하고 1625년(광해군 12)에 鶴峰 金誠一(1538-1593)과 西厓 柳成龍을 배향하였다. 원래 廬江書院으로 불리다가 1676년(숙종 2)에 사액 당시 호계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임남면에 있는 黙溪書院은 1687년 (숙종 13)에 창건하고 金係行(1431-1517)과 玉沽(1382-1436), 金通을 봉향하고 있다. 그 외 청성서원, 도연서원 등이 있다. 안동에 분포되어 있는 봉수는 봉지산봉, 신석산봉수, 약산봉수, 소산봉수, 당북산봉수 등이 있으며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는 안교역, 운산역, 유동역이 보인다. (민경이)

  • 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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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산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면·북창면 전체와 신창면 남쪽, 선소면의 일부, 개천군 봉동면의 남쪽에 해당된다. 현재는 평안남도 은산군과 개천군 일부에 걸쳐 있으며, 읍치는 은산군 은산읍에 있었다. 읍치 왼쪽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대동강 본류이다. 慈山界 부근에 禹家淵이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실제 연못이 아니라 연못처럼 잔잔한 하천구간을 의미한다. 이 지역에서는 대동강을 부르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위쪽을 흐르는 하천은 錦溪·東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東川이란 이름은 읍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실재로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읍치 바로 동쪽, 즉 본 지도에서는 錦溪라 적혀 있는 부분을 지칭한다. 본 지도에서는 몇 개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대동강 본류 서쪽에는 ‘价川界’가 2개 적혀 있는데, 아래의 것은 順川界로 바뀌어야 한다. 지도 오른쪽 아래의 龍化里도 龍化面으로 바뀌어야 하며, 馬山坊은 유일하게 面이 아니라 坊으로 적혀 있다. 평안도와 황해도에는 面을 坊이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仙院面 서쪽, 대동강 동쪽 지역은 이 고을의 땅이 아니라 順川에 속해 있었다. 기타 청나라에서 은본위제의 실시 이후 은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銀鑛, 즉 銀店도 한 개 보이고 있다.(이기봉)

  • 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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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는 평택시 진위면, 서타면, 고덕면, 평택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진위면에 있었다. 고을 동쪽의 釜山이 鎭山이며 지도에는 파악되어 있지 않으나 고성이 있으며 산과 내 사이에 향교가 있다. 주변지과 연계되는 산으로, 북쪽으로는 舞鳳山이 수원과 걸쳐있고, 동쪽으로 天德山이 진위와 양지에 걸쳐있다. 양지와 경계를 가르는 天德山 아래쪽은 안성군의 원곡면으로 진위쪽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는 입지이다. 읍치를 지나는 도로는 북으로 수원, 동으로 양지와 통하고 있다. 서쪽의 奈川은 수원에서 내려오는 수원천으로 수원과 경계를 가르고 있다. 읍치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이 용인에서 흘러오는 진위천이고, 수원천 사이의 하천이 오산천이다. 이들 하천은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진위는 지역이 좁고, 내부의 행정구역명과 산이름을 제외하고 소략하다. (김지영)

  • 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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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진현은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채운면·가야곡면 전체, 황산리를 제외한 강경읍, 부창동·덕지동을 제외한 논산읍, 양촌면의 석서리·중산리, 연무읍의 금곡리·죽평리·소용리를 포함한 동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은진면 연서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남쪽에 있는 摩耶山이다. 이 지역에는 원래 德恩郡과 市津縣이 있었다. 태조 6년(1397)에 德恩監務를 설치하여 두 고을을 합하였고, 세종 1년(1419)에 두 고을의 이름 중 한자씩 따서 恩津縣을 만들었다. 시진현의 중심지는 읍치 서쪽 10리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의 논산읍 등화동 일대라고 한다. 덕은현의 중심지는 읍치 동남 12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가야곡면 육곡리 근처로 추정된다. 彩雲面이 있는 곳은 옛 彩雲鄕이 있던 곳이다. 이 세 지역은 ≪東國與地勝覽≫이 만들어질 시기에도 독자적인 성씨를 갖고 있었다. 금강의 본류는 林川界에서 들어와 龍安界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이 지역에는 조선후기에 금강에서 가장 번영했던 포구가 있었던 곳이다. 왼쪽의 江景은 전국 3대 포구의 하나였을 정도였으며, 위쪽의 花之山面이라 쓰여 있는 곳도 역시 번창한 포구였다. 원래는 皇華山 밑에 있었던 市津이 번성했는데, 홍수로 수로가 바뀌면서 논산시 시내쪽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포구로서 발달한 장소는 허허 벌판의 강변에 낮은 산이 있는 곳이며, 海運-水運·陸運의 교차점이다. 강경 황산포는 西人 老論의 巨頭였던 宋時烈(1607-1689)의 스승 金長生(1548-1631)이 제자들을 길러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도에 표시된 창고는 모두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전에 보관하던 海倉이다. 이 밖에 ‘은진 미륵불’로 유명한 觀燭寺가 지도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에 있는 ‘彌勒’이란 표시가 ‘은진 미륵불’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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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馬利縣인데 경덕왕 때 利安縣이라 고치고, 공양양 때 본래 신라 南內縣인 感陰에 이속시켰다. 조선 태종 때 安陰이라 고치고 1767년(영조 43)에 지금의 이름인 안의가 되었다. 안의는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서상면, 서하면 지역과 거창군 위천면, 마리면, 북상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와 교북리 일대에 있었다. 안의에 흐르는 하천은 크게 花林川과 尋眞川이 있는 황강과 猿鶴川이 흐르는 남강의 수계로 나눌 수 있다. 안의의 鎭山은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읍치 서쪽에 있는 城山이며, 원학동에 있는 金猿山(1352m)은 금빛 원숭이를 이 산에 있는 猿岩이라는 바위에 가두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심진천과 黃石山(1190m) 사이에 있는 龍湫에는 주변 절경이 아름다운 계곡과 폭포가 있다. 고현면에 있는 서원은 嶧川書院으로 1634년(인조 12)에 세워져 鄭惟明을 배향하고 1691년(숙종 17)에는 林待蕃을 함께 배향하였다. 덕유산 아래에 있는 靈覺寺는 877년(신라 헌강왕 3)에 深光大師가 창건한 이후로 몇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으며, 13개의 소속암자가 있어 海印寺에 버금가는 큰 규모의 사찰이라고 전한다. 西上面에 접한 六十峴은 전라도로 넘어가는 주요한 고개이다. (민경이)

  • 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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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의주군과 용천군의 양하면·양서면·양광면 및 삭주군의 청수읍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현재는 신의주시·의주군 전체와 용천군·피현군·천마군·삭주군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의주군 의주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있는 松山이었다. 이 고을은 고려 예종 12년(1117)에 金에게 쫓긴 遼 세력의 일부가 항복해 오자 처음으로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임진왜란(1592) 때에는 倭軍에 쫓긴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가지 않고 끝까지 버틴 고을이기도 하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과 접경을 이룬 지역이기 때문에 군사시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첫째, 邑城은 둘레 27,531尺(약 8,259m)의 초대형 석축 성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도에는 정사각형의 성곽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의 모습이 아니며, 이 지도책에서 읍치이면서 중요 군사 요충지를 표시하는 일반적인 범례에 따랐을 분이다. 둘째, 압록강 변에는 동북쪽 끝의 淸城鎭으로부터 서남쪽 끝의 楊下鎭까지 총 7개의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鎭堡는 군사주둔 시설로서 압록강을 건너오는 적에 대한 1차 방어시설의 역할을 하였다. 압록강 건너편에 적혀 있는 지명은 대부분 적의 예상 침입로를 의미한다. 셋째, 압록강 변의 1차 저지선을 뚫고 침입하는 적에 대한 2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던 關門城이 고을 동쪽에 大城岺·棘城·塞垣 등으로 포진해 있다. 關門城은 고개나 협곡과 같은 좁은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 횡으로 쌓은 성을 의미한다. 대규모의 적일 지라도 이런 지형에서는 일렬로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적은 군사로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지역이다. 넷째, 읍치 아래쪽의 白馬山城은 인조 24년(1646) 林慶業(1594-1646)이 둘레 2,600步(약 4,680m)의 대형으로 개축한 성곽이다. 원래는 姜邯贊(948-1031)이 처음으로 쌓았다고 하며, 병자호란(1636) 때는 임경업이 주둔하며 청나라에 맞섰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 때 청나라는 백마산성을 공격하지 않고 우회하여 바로 한양을 점령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압록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에는 大總江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보통 압록강은 강 전체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의주 읍성 부근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전통시대에는 압록강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하구 부분은 대총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면서, 압록강 본류에 존재했던 다양한 명칭은 공식적인 부분에서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압록강으로 유입되는 지류 중 가장 큰 古津江은 현재 三橋川으로 불리고 있다. 압록강에는 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동북쪽의 고지대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물이 평지와 바다를 만나면서 급격히 운반력을 잃게 되고, 많은 부유물질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섬들이다. 아래쪽에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군으로 나갔다가 回軍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된 威化(島)가 보이고 있다. 읍성 왼쪽에는 임진왜란(1592) 때부터 1600년대 중반까지 開市라는 청과의 공무역이 행해지던 中江(島)도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1600년대 후반에 灣商(의주 상인)과 松商(개성 상인) 등의 私商이 무역을 하던 後市도 설치되었다. 중강후시의 폐단이 심해지자 숙종 26년(1700)에 공식적으로 폐지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청나라 땅이었던 만주의 柵門에서 무역이 이루어지게 되어 柵門後市라고 일컬었다. 이밖의 인문정보로는 烽燧·面·倉庫·驛站 등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이기봉)

  • 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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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은 지금의 김포군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월곶면 고막리, 군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동쪽과 북쪽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바다로 통하는 곳이고, 서쪽은 강화도 사이에 鹽河가 흐른다. 고을의 북쪽에 祖江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한강 하류지역을 祖江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해로로 연결되는 강화와 인접하고 있으며  서울까지 가는 길목에 있으므로 수군방어의 요지였다. 따라서 산성과 봉수가 다수 분포되어 있다. 포구곶면에 있는 文殊山城(사적 제139호)은 1694년(숙종 20)에 축성된 조선시대 석축산성으로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 군과의 격전지였다. 이 지역은 강화도로 건너가는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인 갑곶진을 방어할 수 있는 장소이다. 지금은 해안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문수산 등성이를 연결한 성곽이 남아 있다. 남쪽에 守安古城에는 수안성산봉수 자리가 표시되어 있으며 古童城山에는 동성산고성이 있으나 지금은 절반만이 남아있다. 서남쪽의 德浦에는 水軍僉節制使가 있었다. (김지영)

  •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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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현은 충청북도 음성군 읍성읍과 원남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迦葉山(709.9m)이다. 이 迦葉山의 한자 발음은 ‘가엽산’이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아 ‘가섭산’으로 읽어야 한다. 고을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으로 들어가는 음성천이다. 아래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으로 들어가는 초평천의 상류이다. 전자의 읍치 부분은 원래 음성현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후자는 기록에 ‘남쪽 20리에 있었다’는 巴川部曲의 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은 ‘甫川里’로 불리고 있는데, ‘巴川(파천)’과 ‘甫川(보천)’은 같은 발음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보인다. 우리말로는 ‘보내’이다. 이곳에는 浦火里가 표시되어 있는데, ‘巴川’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보인다. 파천부곡은 조선 초까지도 蔡·敬·尹 등의 성씨를 갖고 있을 정도로 독자성이 상당히 강했다. 왼쪽 위의 沙亭 부근은 남한강의 지류인 청미천으로 들어가는 응천의 상류이다. 여기서 沙亭은 정자의 이름이 아니라 이 지역에 있었던 마을의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모래물’이라고 부르며, ‘沙丁’ 또는 ‘沙井’으로도 쓴다. 이곳은 ‘서쪽 15리에 있었다’는 金村部曲의 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작성자가 읍치 외의 지역에 ‘面’이 설치되었음에도 마을의 이름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단위로 작용하던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지도에 나오는 우리말과 한자표기의 예를 더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炭峴은 현재 ‘숫고개’로 불리고 있으며, 草川은 우리말의 ‘풋내’ 또는 ‘풀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이와 같은 지명은 음보다는 뜻을 따서 붙인 것이다. 반면에 ‘行峙’는 우리말의 ‘향티’ 또는 ‘행티’를 한자로 표시한 것으로서 뜻보다는 음을 따서 붙인 경우이다. 이 지도에서는 찾기 어려우나 음과 뜻을 동시에 따서 붙인 한자 표기도 다수 발견된다. 이 밖에 다른 기록을 보면 음성현에 遠西面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이기봉)

  •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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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문무왕 때 上州·下州를 개편하여 歃良州로 개칭하였고 고려 태조 때에는 梁州라 하였다. 지금의 이름으로 된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양산은 현재의 양산시 양산시내, 상북면, 하북면 물금읍, 원동면, 동면, 부산광역시 북구의 구포동, 강서구 대정동 강동동을 포함하는 지역이고, 읍치는 양산시내 중부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 보듯이 양산은 낙동강을 경계로 김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다른 면은 밀양과 울산 그리고 동래와 접하여 있다. 지형적으로 양산은 읍치 옆을 흐르는 양산천을 중심으로 서면과 동면으로 구분하였고 다시 서면의 북쪽을 북면으로 하여 행정면을 나누었다. 양산천은 언양(현 밀양)에 있는 鷲栖山(1059m)에서 발원하여 원효산(922m)을 거쳐 하동면에 있는 金井山(802m)에 이르는 직선상의 하천이다. 읍치 북쪽에 있는 城隍山이 밀양의 鎭山이다. 大儲島에 있는 七点山은 일곱 봉우리의 산이 점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며, 駕洛國 때 旵始仙人이 놀던 곳이라 전해온다. 언양 경계에 있는 通度寺는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석가의 袈裟와 사리를 가져와 창건한 사찰이며, 합천의 해인사 및 승주의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로 꼽힌다. 읍치 서쪽에 있는 松潭書院은 1696(숙종 22)에 세워져 1717년(숙종 43)에 사액 받은 서원으로 察訪 白受繪를 배향하였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민경이)

  •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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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초산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자강도 초산군·고풍군·송원군과 우시군의 서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초산군 초산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중간의 오른쪽에 적혀 있는 崇積山(1,994m)이었다. 이 고을의 명칭은 정조 1년(1777)에 楚山으로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 지도는 그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민왕 6년에 서쪽으로 이웃한 벽동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낸 후, 이 지역에 고려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태종 2년(1402)에 동쪽으로 이웃한 위원 지역을 포함하여 처음으로 고을이 설치되었다. 압록강이 서북쪽에 표시되어 있으며, 현재 충만강이라고 부르는 童巾江 등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만주 방면에서 흘러드는 하천은 현재의 渾江으로서, 역사 기록에는 주로 婆猪江으로 나온다. 압록강 변에는 邑城을 비롯하여 山羊會堡·阿耳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둘 다 여진족 언어의 지명을 음만 따서 한자로 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압록강 변에는 현재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把守 역시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의 강남산맥에 해당되는 남쪽의 중요 고개에는 종3품의 兵馬同僉節制使가 파견된 牛峴鎭과 車岺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모두 영조 10년(1734)에 설치되었으며, 병자호란(1636) 이후 꾸준히 강화된 북방 경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두 鎭에는 二重의 關門城이 축조되어 있었음이 이 지도를 통해 확인된다. 關門城은 협곡이나 고개 등에 횡으로 성곽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적은 군사로도 대규모의 적군을 방어할 수 있는 요지이다. 지도 중간 왼쪽 부분에 古邑驛이 보이고 있는데, 세종 때 지도 위의 위치로 옮기기 이전까지 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필사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俗字도 자주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의 巨雙岺·多樂岺·眞等岺과 지도 왼쪽 아래의 別桑倉 등이다. 기타 지도 중간 왼쪽 정도에 陽化德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여기서 ‘德’이란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산지 중의 한 종류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어미이다.(이기봉)

  •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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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파주군은 파주읍 동북쪽에 위치한 坡平과 교하현의 속현인 瑞原, 양현을 합한 것이다.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다. 진산은 城山이다. 서쪽에 표시된 봉수는 大山烽燧로 북쪽에 장단의 도라산을, 남쪽으로 고양군 소질달산에 응한다. 남쪽에 표시된 역은 馬山驛이다. 북서쪽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지류들이 읍치를 감싸는 형국을 보인다. 落河는 임진강 하류이다. 읍치 북쬭의 목령동에서 발원한 梨川과 양주 고령산에서 발원한 廣灘은 장보포로 들어간다. 지금은 동쪽에서 문산천이 임진강으로 합류한다. 이 지역의 다른 군현지도에는 임진강 주변에 율곡 이이(1536~1584)가 어렸을 때 공부했던 곳 중의 하나인 花石亭, 황희 정승(1363~1452)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정자를 세우고 남은 여생을 보낸 곳인 伴鷗亭 등 다수의 정자가 파악되어 있으나 이 지도에는 정자가 파악되어 있지 않다. 탄현면의 恭陵과 順陵은 각각 장순왕후와 공혜왕후의 릉이다. 이외에 파주에는 인조의 무덤인 長陵, 이율곡묘 등이 있으나 그려져 있지 않다. (김지영)

  • 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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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군은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세도면·장암면·충화면·양화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聖興山이다. 금강의 본류가 石城界 쪽으로부터 咸悅界 방향으로 빠져 나간다. 금강 하류 쪽에는 南津과 菁浦津이 보이는데, 나루임과 동시에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津(나루)은 강 한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배로 건너는 강 양쪽 모두를 가리켰다. 따라서 강 건너에 쓰여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 반대편의 명칭도 같았다. 菁浦는 우리말 ‘무개’를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무우’ 菁과 ‘개(물가)’ 浦의 뜻을 따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위쪽의 場岩은 우리말 ‘맛바위’에 대한 한자 표기인데, 왜 이렇게 표기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지도 아래쪽에는 書院이 하나 보이고 있는데, 七山書院을 가리킨다. 이 서원은 兪棨를 배향하여 숙종 13년(1687)에 세워지고, 같은 왕 23년(1697)에 사액 받았다. 그 옆에 있는 海倉은 임천군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던 창고로서, 이곳부터 海運을 통해 직접 한양으로 나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밖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도 보이고 있다. ‘東○面’·‘西○面’에서의 ‘○’는 ‘邊’의, ‘○止山’에서의 ‘○’는 ‘乾’의 속자이다. ‘㐓化面’에서의 ‘㐓’은 우리말 ‘갈’을 표기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낸 글자이다.(이기봉)

  • 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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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居火縣인데 경덕왕 때 獻陽縣으로 고쳐서 良州郡(梁山郡) 領縣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蔚州(울산)에 속했고, 1131년(인종 9)에 監務를 둔 후 언양현으로 고쳤다. 1599년(선조 32)에 울산으로 들어갔다가 1612년(광해군 4)에 다시 현(縣)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군을 없애고 울산에 합하였다. 언양은 지금의 울주군 언양읍, 상북면, 상남면, 삼동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언양읍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언양은 태화강 중상류의 침식분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도에 보이는 하천이 태화강과 그 지류인 보은천이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읍치 북쪽에 있는 高獻山(1033m)이 鎭山이며 남면에 있는 鷲栖山은 大石山이라고도 한다. 삼남면에 있는 鼎足山(700m)은 산위에 바위들이 숱밭처럼 솟아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서원은 盤龜書院으로 1712년(숙종 38)에 고을 선비들이 고려 때 충신 정몽주, 정구, 이언적이 이곳에 머문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것이다. 읍치 왼쪽에 보이는 石南寺는 1560년(명종 15)에 선철선사가 중건하였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민경이)

  •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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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사인면·후탄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평안남도 평성시와 순천시 일부에 걸쳐 있으며, 읍치는 평성시 자산리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하천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은 江·川·浦·津·灘·湖·淵 등이 있는데, 본 지도에는 川·灘·淵 등이 나온다. 하천에서 灘(여울)은 물살이 빠르고 얕은 구간을, 淵은 호수처럼 잔잔한 모습을 띄는 구간을 말한다. 灘과 淵은 일반적으로 하천에서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많다. 읍치 오른쪽에 적혀 있는 牛家淵도 이런 예에 속하는 것으로, 현재 이곳은 대동강 본류에 해당된다. 대동강 본류는 順川界 아래쪽의 동쪽에서 들어와, 우가연을 지나 江東界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고을 서쪽으로는 慈母山(559m)을 최고봉으로 하여, 300m 이상의 봉우리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곳에는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둘레 12,733尺(약 3,820m)의 대형 石城인 慈母山城이 있었다. 병자호란(1636)을 통해 대형산성의 중요성이 고려되었으며, 21년(1643)에는 이 고을의 읍치를 자모산성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두 번에 걸쳐 읍치가 양쪽을 오가다가 숙종 44년(1718) 이후로는 지도상의 읍치 지역으로 완전히 옮겨왔다. 작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都護府라는 높은 격의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자모산성에 읍치를 옮겼을 때,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 표시된 牛馬城은 자모산성의 외성에 해당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石城이다. 기타 필사본이기 때문에 龍谷面·黃龍山에서의 ‘龍’자는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俗子로 적혀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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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덕부는 지금의 개성직할시 판문군과 개풍군 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中面에 있으며, 지금의 황해도 개풍군 대성면 풍덕리이다. 동으로는 長湍과 坡州와 접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開城과 닿아있고, 남으로는 강화도와 통진을 마주하고 있다. 고을 아래쪽으로 흐르는 강이 한강이고, 동쪽으로 沙川이 흘러 東江을 이루어 임진강과 만난다. 祖江은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지점으로 옛날 통진과 마주하고 있는 한강 하구를 부르는 명칭으로 한강변에 표시되어 있다. 한강 건너 강화의 昇天浦는 고려 때 이후 강화도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터였다. 지도에 태조 神懿王后의 능인 齊陵, 조선 2대왕 定宗의 무덤인 厚陵 등 능원과 사창이 표시되어 있으며, 남으로 白馬山城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행정구역의 面이 세부적으로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주변 경계지역의 산을 포함하여 내부에 산의 명칭과 위치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 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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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의현은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전동면과 소정면의 대곡리·고등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북쪽 5리에 있었다’는 甑山이다. 지도 왼쪽의 北面과 大西面에 있는 하천은 아산만의 삽교호로 흘러들어가는 곡교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읍내를 흐르는 하천은 미호천의 지류인 조천천이다. 지도에는 일부 오류가 보이고 있다. 조천천은 고을의 동쪽으로 흘러나가 청주와의 경계선을 이루며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지 않고, 마치 남쪽으로 직접 빠져 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雲住山을 청주와의 경계선에 있는 것처럼 표시한 것도 오류이다. 실재로는 읍치와 청주와의 경계선 중간 지점에 운주산이 있다. 다음으로 지도 왼쪽의 淸州界라고 쓰인 부분도 오류이다. 이곳에는 청주의 월경지인 德坪面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실재로는 공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았다. 마지막의 오류는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南面 아래의 松峴은 우리말 ‘솔티고개’에 대한 한자식 표기이다.(이기봉)

  • 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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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은 고구려의 也尸忽군으로 신라 때에는 野城郡이라 하였고, 고려 초에 영덕으로 개칭하였다. 현종 때에는 禮州(영해)에 속하였으며 고려 말에 현이 되었고, 1415년(태종 15)에 지현사(知縣事)를 두었다. 갑오경장 때에 군으로 되었고 1914년에 영해를 합하여 오늘에 이른다. 영덕은 松羅海(동해) 사면을 따라 있는 지역으로 지금의 영덕군 영덕읍, 강구면, 남정면, 달산면, 지품면 지역이 해당되며, 읍치는 영덕군 영덕읍 화개리 지역에 있었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이 현재의 五十川이며 다시 소서천과 대서천으로 분기된다. 오십천은 전형적인 감입곡류하천으로 중상류의 골짜기가 좁고 깊어서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북서쪽에 있는 知品院까지 50개의 나루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 북쪽에 있는 無芚山(無英山으로 오기)은 영덕의 鎭山으로 花林山에서 내려온다. 대둔산 부근 氷穴에는 여름에도 얼음이 있다고 한다. 위방산 아래 古城은 토성으로 둘레가 3천 3백척이었으나 지금은 없다. 읍치 동쪽에 있는 서원은 南江書院으로 이언적과 이황을 배향하였다. (민경이)

  • 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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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목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정주군 정주읍·남서면·덕언면·갈산면·고안면·고덕면·대전면·마산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평안남도 정주군 전체와 운전군의 서남쪽 절반에 걸쳐 있다. 읍치는 정주군 정주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오른쪽의 馬山이었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장수탄강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지도에는 加林川이라고 적혀 있다. 읍치를 돌아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 살천으로 불리고 있으며, 지도에는 大雄川·㺚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다양한 하천 명칭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지도 맨 오른쪽 七嶽烽 부근은 청천강·대령강 등의 대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굵게 표시된 하천의 모습이 실제와 매우 유사하다. 지도에는 수많은 面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몇 가지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첫째, 지도 아래쪽의 古雲山面이 마치 이 고을의 땅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雲山郡의 越境地였다. 둘째, 그 옆의 屯田面은 雲田面의, 위쪽의 德建面은 德達面의 誤記이다. 셋째, 伊彦面·西部面·古邑面·葛池面 등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고읍면은 고을의 진산인 馬山 부근에 있었으며, 고려시대까지 읍치가 있었던 지역이다. 읍치 왼쪽의 古城內는 둘레 31,709尺(약 9,513m)의 外城과 둘레 9,118尺(약 2,735m)의 초대형 토성이었지만,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미 폐허가 된 상태였다. 이 성곽은 한양-의주 大路 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부터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섬의 표시는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로 크기와 위치에서 부정확성이 보이고 있다. 기타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는데, 현재는 이후의 간척사업에 의해 상당히 단순화되어 있다.(이기봉)

  • 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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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현은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목면·청남면 전체, 구룡리를 제외한 장평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정산면 서정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大朴山이다. 지도에는 상당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첫째, 공주·부여 등과의 경계는 산줄기가 아니라 물줄기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부여와의 경계는 定惠寺·直峴(질고개) 너머에 있는 금강의 지류인 금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공주와의 경계는 松峴(솔치고개) 오른쪽부터는 하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公西院은 현재의 송암리 하천가에 있었다. 둘째, 읍치 북쪽의 皮峴面은 읍치 서남쪽의 赤谷面 방향에 있다. 후대에는 冠峴面이라고도 불렸는데, ‘가죽(皮)’과 ‘갓(冠)’이 비슷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셋째, 읍치 왼쪽의 所火面은 ‘仍火面’의 誤記이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셋째의 오류는 시정되었지만 첫째와 둘째의 오류는 그대로 반복되고 있어,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읍치 동남쪽에는 금강의 본류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泮灘(여울)과 汪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 이 구간에 해당되는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왕진 왼쪽의 江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수집하여 보관하던 창고이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獐項峙는 우리말 ‘노루목고개’에 대한 한자 표기로서, 전국적으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지명 중의 하나이다.(이기봉)

  • 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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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西火縣인데 경덕왕 때 尙藥縣으로 고쳐서 密城郡에 소속되었다. 고려 초에 영산현으로 고쳤고, 1274년(원종 15)에는 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초에는 縣監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 길곡면 사촌리는 함안군에 이관하고 나머지는 창령군에 합쳤다. 영산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령군 영산면, 계성면, 초천면, 길곡면, 부곡면, 장마면 지역과 남지읍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에 있었다. 영산은 낙동강 연안 자연제방에 위치하여 있으며 그 지류인 桂城川이 흐른다. 영산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靈鷲山(737m)으로 西域의 중 指空이 와서 말하기를 이 산이 天竺(인도)의 영취산과 모양이 같다하여 이름 지은 것이다. 읍치 북쪽에 옛 영산인 桂城의 古邑도 보이며, 德岩山 아래에는 溫井驛이 있는데 이곳에 溫井이 있었다. 온정은 현재 부곡면 거문리 일대로 1973년에 온천이 발견된 이후 부곡온천 등 온천취락으로 성장한 곳이다. 읍치 서쪽에 있는 餘通烽은 남쪽의 峯山에 응하고 창령의 合山에 응한다. (민경이)

  • 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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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동두면·간동면·신흥면·양정면·해압면·당정면·고생량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양시 강남군과 중화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중화군 중화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淸凉寺가 표시되어 있는 淸涼山이었다. 이 고을은 조선 초기에 郡이었지만, 郡人 林仲梁이 임진왜란 때 왜군에 항거하였기 때문에 선조 25년(1592)에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고을 전체의 모양은 대체적으로 합당하게 그려져 있지만, 남북의 폭이 조금 넓게 그려져 있는 단점이 있다. 지도 왼쪽에 대동강 본류가 표시되어 있으며, 읍치 위쪽의 하천이 지금의 곤양강이다. 고을 동쪽의 하천은 황주강의 최상류에 해당되며, 이곳에는 원래 松峴縣이 있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송현폐현이 ‘서쪽 30리에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輿地圖書≫에서는 ‘동쪽 30리에 있다’라고 수정되어 있다. 읍치 왼쪽에 있는 唐村面도 고려시대에는 唐岳이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지만,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이 고을의 直村으로 변했다. 왼쪽의 古邑面은 옛 邑治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언제 지도 위의 읍치로 옮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왼쪽에는 海倉이 보이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이 지역이 바다와 관련되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실재로도 이 지역은 潮水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그 영향으로 海倉이란 명칭이 나타난 것으로 짐작된다. 지도 오른쪽에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표시와 城山이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다이아몬드 모양은 鎭堡를 표시하는 범례였으며, 이곳에는 종9품의 별장이 파견된 城山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읍치 오른쪽 아래의 驛은 生陽驛이며, 그 왼쪽의 狗峴은 평안도 新舊의 觀察使가 교대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기타 도로는 한양-의주의 대로만 표시하였으며, 사찰·봉수·면 등의 정보만 간단하게 싣고 있다.(이기봉)

  • 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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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현은 제천시 시내·봉학면·봉양읍·백운면 전체, 금성면의 월림리·동막리·대장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제천시 시내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龍頭山이다. 지도에는 義林池가 매우 강조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일반적인 堤堰에 비해 엄청나게 큰 인공저수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형 저수지였던 김제의 벽골제나 밀양의 수산제가 조선시대에 모두 메워져 사라진 반면에 의림지는 지속적으로 수축되어 사용되었다. 벽골제와 수산제가 평지에 만들어진 반면에 의림지는 협곡 사이에 높은 제방을 쌓았기 때문이다. 지도에는 일부 잘못 표시된 경우도 눈에 뜨인다. 丹陽界 근처에 있는 九曲川은 高橋川 근처로 바뀌어야 한다. 近左面 역시 같은 정도만큼 그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지도 왼쪽에는 古堤川이 표시되어 있어, 어느 시기엔가 읍치가 옮겨갔음을 알 수 있게 한다. 面의 이름 중 縣左面·縣右面의 경우 지도를 보는 입장이 아니라 북쪽의 용두산에서 읍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근좌면과 근우면은 官行路를 기준으로 좌우의 명칭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이기봉)

  • 영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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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古陰縣이었으며 후에 영양 또는 延陽으로 개칭하여 군이 되었고, 고려에 와서 1018년(현종 9)에 禮州(寧海)에 속하였다가 1413년(태종 13)에 복구하였다. 1677년(속종 3)에는 남면·동면·덕봉·수비를 떼어 眞寶에, 청기·석보는 영해에 합하였다가 1683년(숙종 9) 다시 현을 두게 되자 청기는 돌아왔으나 석보는 영해에 소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郡으로 승격하여 1914년 진보군의 동면·북면을 흡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영양은 지금의 영양군 영양읍, 입암면, 석보면, 청기면, 일월면, 수비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양읍 서부리 지역에 있었다. 읍치를 감싸 안고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로 현재의 半邊川과 東川이 되며, 일월면 가곡리에 흐르는 將軍川은 아직까지 그 지명이 남아 있다. 영양을 흐르는 반변천은 전형적인 감입곡류하천으로 곳곳에 유로변동에 의한 舊河道를 남겨 장엄한 절벽과 牛角湖 등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펼쳐진다. 일월산(1218m)은 영양의 鎭山이며 읍치에서 가깝게 있는 芍藥山이 主山이다. 일월산은 滄海에 임해 일출과 월출을 굽어 볼 수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에서 울진으로 통하는 도로에 首北倉이 있고, 예안과 통하는 도로에 옛 청기 터와 靑杞倉이 있다. (민경이)

  • 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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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과 적송면 남쪽 일부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현재는 평안남도 증산군의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증산군 증산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國靈川이 발원하는 國靈山이었다. 이 고을은 원래 강서현의 甑山鄕이었는데, 태조 3년(1394)에 현으로 승격되면서 독립하였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項頭面에 보이는 연못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증산현 산천조에는 현 남쪽 15리에 둘레 7,300尺(약 2,190m)의 黃筒池와 둘레 2,034尺(약 610m)의 禿串筒池가 있었다고 나온다. ≪輿地圖書≫ 증산 산천조에도 남쪽 15리에 黃筒·禿串筒이, 남쪽 3리에 上佐筒이 있었다고 나온다. 특히 후자의 기록에는 堤(둑)의 길이와 堰內의 長廣 길이, 植木한 株數 및 民畓에 蒙利한다는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 연못은 논(畓)의 灌漑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이러한 관개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이 고을은 일제시대 이후의 1개면 정도에 불과한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5개의 面이나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面里制를 시행했지만, 面의 규모에 대한 일률적인 기준을 마련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고을처럼 작은 경우 면의 크기는 대체로 작게 설정되는데, 이 지도를 통해서도 그런 측면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지도 왼쪽의 서해에 그려져 있는 松島와 薪島는 크기가 실제에 비해 너무 크게 그려져 있다. 섬에 대한 이와 같은 왜곡은 이 지도책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섬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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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현은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면·성환읍·성거읍·입장면 전체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의 도두리·신대리·노양리·본정리, 오성면의 당거리·창내리·교포리, 안중면의 안중리 일대, 포승면의 만호리·희곡리·신영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직산면 군서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蛇山이다. 지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越境地이다. 이 중 慶陽面 지역은 원래 경양현이 있던 곳으로, 조선초기까지도 독자적인 성씨가 존재했다. 경양현은 고려시대 때 河陽倉이었으며, 令을 두어 鹽場官을 겸임하게 했다고 한다. 후에 현으로 승격되었으며, 태조 5년(1396)에 직산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의 1개 면도 되지 않는 지역(팽성읍 도두리 일대)이 현으로 승격된 것을 통해 볼 때 고려시대 때 상업이 생각보다도 훨씬 발전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지역은 현재 아산만에 해당되며, 경양면 아래쪽의 하천에는 조선후기 내내 이곳에서 가장 번성했던 屯浦가 있었다. 고을 내부를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은 안성천의 지류인 성환천과 입장천이다. 읍치 위쪽에는 붉은 색의 작은 원이 표시되어 있다.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成歡驛으로 11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도 아래쪽에는 백제의 시조 溫祚王이 처음으로 도읍했던 곳으로 史書에 나오는 慰禮古城이 표시되어 있다. 현재는 학계에서 부정되고 있으며, 위례성은 한강변의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밖에 성환역 위에 大坪이라 표시된 지역은 광활한 평지가 펼쳐지는 곳으로서, 조선시대까지는 대부분 개간되지 않은 곳이었다.(이기봉)

  • 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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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때의 斤烏支縣으로 경덕왕 때 臨汀縣이라 개칭하였고 의창군의 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때부터 迎日縣(또는 延日縣)이라 불렀으며 1018년(현종 9) 경주에 속하였고, 1390년(공양왕 2) 監務를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였고, 1914년에는 청하·장기·흥해의 3군을 합하였다. 영일은 지금의 포항시 북구 남부, 남구 일부분 지역, 포항시 연일읍, 오천읍, 대보면 지역과 영일만에 접하고 있는 동해면 입암리, 마산리, 발산리 일부지역을 포함하며, 읍치는 포항시 연일읍 생지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은 형산강이다. 영일만에 접하고 있는 포항은 현재 동해안의 큰 항구도시로 성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읍치의 북쪽에 鎭山이 위치하는데 영일의 경우는 읍치 남쪽에 있는 雲梯山이 鎭山이다. 佛峴 아래에 있는 注津에서는 겨울 靑魚가 맨 먼저 잡히는 곳으로 청어 잡히는 것이 많고 적음으로 그 해의 풍흉을 짐작했다고 한다. 영일만 한가운데 있는 竹島는 대밭이 있었으나 현재는 간척 사업으로 매워진 상태이다. (민경이)

  • 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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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성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창성군 전체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북도 창성군과 동창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창성군 봉천리 압록강 변에 있었는데, 현재는 수풍호에 잠겨 버렸다. 이 고을은 태종 2년(1402)에 昌州와 泥城을 합해 형성되었으며, 각각 한 자씩 따서 昌城이란 명칭이 만들어졌다. 지도에는 고을이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왼쪽이 압록강의 지류인 오주천(지도에는 昌州川)이고 오른쪽이 대령강의 상류인 창성강(지도에는 恃寨川)이다. 압록강 변에는 邑城 이외에 大吉號里堡에서 甲岩堡까지 작은 城郭을 갖고 있는 총 6개의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현재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把守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압록강 변의 이러한 군사시설은 강을 넘어오는 적에 대한 1차 저지선의 역할을 하였다. 맞은 편 만주 지역에 기록된 지명은 대부분 적의 예상 침입로를 의미한다. 동남쪽의 내륙방향으로는 隘口·自作岺·小坊墻·緩項岺 등의 명칭 곁에 關門城이 표시되어 있다. 隘口란 좁은 협곡이나 고개와 같은 곳을 의미하며, 이런 곳에 횡적인 關門城을 만들면 적은 군사로도 대군을 막아낼 수 있다. 애구가 표시되어 있는 곳의 지명은 自潺隘口였다. 완항령 오른쪽의 恃寨는 종3품의 兵馬同僉節制使가 파견된 시채진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붉은색 원은 이 지도책에서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屬驛을 관리하던 驛에 대한 일률적인 표기이다. 시채진에 察訪驛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을 통해 볼 때 지도 작성자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생각된다. 鎭堡의 경우는 압록강 변에 보이는 것과 같이 모두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처리하였다. 面의 이름 중 甲子面은 田子面의 誤記이며, 府內面과 上倉面은 빠져 있다. 기타의 인문정보로는 烽燧와 倉庫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 진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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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잠현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계산동·학하동을 포함한 남쪽(옛 진잠면), 서구의 도안동·관저동을 포함한 남쪽(옛 기성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유성구 원내동·교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5리에 있었다’는 産長山이다.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갑천이다. 상류와 하류를 구별할 수 없도록 그렸다. 下南面 방향이 상류이고, 북면 방향이 하류이다. 鷄龍山은 이 고을에 속한 것이 아님에도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 이르는 중요 산줄기가 계룡산으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왼쪽의 鷄龍川 상류는 태조 이성계가 개성으로부터 천도를 단행하려고 궁궐 공사까지 시작했던 新都안이다. 오른쪽에는 洞의 이름으로 유일하게 龍胎洞이 표시되어 있다. 용이 올라가는 것을 애를 밴 부인이 보았기 때문에, 용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마을이다. 이러한 전설이 당시에 중요하게 인식된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의 위치는 서구 산직동 용태울이다. 이 밖에 백제 시대부터 특별한 변화 없이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고을이기 때문에, 고대의 縣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지역이기도 하다.(이기봉)

  •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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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영천은 切也火郡으로 경덕왕 때 臨皐라 하였고, 고려 초에 道同·臨川의 2현을 합하여 永州로 고쳤다. 현종 때는 경주에 속하였다가 명종 때 현이 되었다가 뒤에 州가 되었다. 1413년 (태종 13)에 영천군이 되어 내려오다가 1914년 新寧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영천은 지금의 영천시 시내 전체, 금호읍, 청통면, 임고면, 화북면, 화남면, 화산면, 대창면, 자양면 지역과, 북안면 일부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천시 시내 창구동 일대에 있었다. 영천은 풍수적으로 飛鳳形으로 날아가는 봉황의 모습이며, 徐居正의 시에 二水三山이라 하여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二水는 금호강의 지류인 北川과 南川이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북천은 현재의 신령천과 고현천이며, 남천은 현재의 자호천과 임고천, 고촌천이다. 三山은 광의적으로 영천의 鎭山인 子母山(또는 보현산, 1124m), 신령에 있는 八公山(1192m), 採藥山이라는 설과 협의적으로 마현산, 竹防山(또는 유봉산, 241m), 鵲山이라는 설이 있다. 아천면에 있는 서원은 臨皐書院으로 고려말 鄭夢周(1337-1392)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에 浮來山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에 중건되었다. 1643년(인조 21)년에 張顯光, 皇甫仁을 추향하였으나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구리내면에 있는 立岩書院은 張顯光을 배향하고 鄭四震 외 3인을 모셨다. 영천에는 수십 개의 堤堰이 있는데 그 중 凡魚川 부근에 菁川堤는 그 규모가 둘레 5,882척이며 수심이 16척이다. (민경이)

  • 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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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산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철산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철산군 전체와 염주군·동림군에 일부 걸쳐 있다. 읍치는 동림군 동림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의 熊骨山이었다. 원래의 읍치는 현재의 철산읍인 지도 가운데의 古邑에 있었으나, 영조 27년(1751)에 車輦驛이 있었던 지도 위의 읍치로 옮겼다. 같은 왕 45년(1769)에 다시 古邑으로 읍치를 옮겼기 때문에, 이 지도는 1751년-1769년 사이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海東地圖≫의 철산부 지도는 古邑 지역에 읍치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西林山城은 2,485步(약 4,473m)에 이르는 대형의 石築 성곽이었으며, 한양-의주 대로 위에서 가장 중요한 요해처 중의 하나였다. 영조 23년(1747)에 개축하여 다음 해에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를 파견하였고, 같은 왕 27년(1751)에 獨鎭이 되었다. 鐵州란 명칭을 가지고 있었던 고려시대에는 읍치로서 기능하던 곳이다. ≪海東地圖≫의 철산부 지도에는 石築으로 수축되기 이전의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의 古城面에는 태종 때 산성을 쌓아 읍치로 삼았던 古城이 있었다. 세조 때 높고 험하여 고을 사람들이 꺼리기 때문에 古邑 지역으로 읍치를 옮겼다고 한다. 고을 아래쪽의 熊骨城은 雲暗山城이라고 하며, 그 오른쪽의 左峴城은 영조 45년(1769)에 2,300餘步(약 4,140m)의 규모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던 淸江鎭과 宣沙鎭이 표시되어 있다. 선사진의 첨사는 椵島에 설치된 牧場의 監牧官을 겸하고 있었다. 가도에는 244필 정도의 말이 길러지고 있었다고 한다. 섬의 위치는 대체적으로 잘 표시되어 있지만, 크기의 표시에서는 실제와 많은 편차를 보이고 있다. 선사진 위쪽의 土城은 말의 관리를 위해 목장에 주로 설치된 牧場城으로 추정된다. 선사진 아래쪽의 待變亭은 전선을 정박·관리하던 곳으로서 일반적으로 船所라고 하며, 禦變亭으로 표시할 경우도 있다. 기타 서림산성 오른쪽의 駐蹕石은 임진왜란(1592) 때 선조가 피난하며 잠시 머물렀던 장소이다.(이기봉)

  • 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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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천현은 충청북도 진천군 대부분에 해당되며,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교성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의 최상류이다. 지도에는 牛川·加里川·注川·牛潭·泮灘·台山川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같은 하천이라도 구간마다 다르게 불렸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潭은 물이 잔잔하여 마치 호수와 같은 부분에, 灘(여울)은 물살이 빠른 구간에 주로 붙여졌다. 지도는 실제의 고을 모습과 거의 흡사하게 그렸다. 특히 북쪽의 경우 같은 책에 있는 충주 지도에서는 내용이 왜곡되어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러한 왜곡이 시정되어 있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이 지도가 아니라 왜곡된 충주 지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일부 面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利谷面과 栢谷面은 위치가 바뀌어야 실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万升面(만승면)의 경우도 광혜원 쪽으로 더 올라가 있어야 현실에 가깝니다. 廣惠院은 新舊의 충청도 관찰사가 印을 교환하며,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 진천에는 賜額書院이 2개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만승면 왼쪽에 百源書院만 표시되어 있다. 이 서원은 고려말의 충신인 李穡(1328-1396)의 아들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살해된 李鍾學(1361-1392) 등을 배향하여 선조 30년(1597)에 세워지고, 현종 10년(1669)에 賜額 받았다. 일반인이 잘 알 수 없는 한자의 속자도 보이고 있다. 伏岺 오른쪽의 지명은 實安里로서, 지도에 쓰여진 한자는 ‘實’의 속자이다. 읍치 왼쪽에는 乺山이 보이고 있는데, ‘乺’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었던 한자이다. 지도에 쓰여진 한자지명을 그대로 읽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梨峙는 우리말 ‘배티’ 또는 ‘배티고개’에 대한 한자 표기이며, 泮灘은 우리말 ‘반여울’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이기봉)

  •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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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영천은 切也火郡으로 경덕왕 때 臨皐라 하였고, 고려 초에 道同·臨川의 2현을 합하여 永州로 고쳤다. 현종 때는 경주에 속하였다가 명종 때 현이 되었다가 뒤에 州가 되었다. 1413년 (태종 13)에 영천군이 되어 내려오다가 1914년 新寧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영천은 지금의 영천시 시내 전체, 금호읍, 청통면, 임고면, 화북면, 화남면, 화산면, 대창면, 자양면 지역과, 북안면 일부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천시 시내 창구동 일대에 있었다. 영천은 풍수적으로 飛鳳形으로 날아가는 봉황의 모습이며, 徐居正의 시에 二水三山이라 하여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二水는 금호강의 지류인 北川과 南川이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북천은 현재의 신령천과 고현천이며, 남천은 현재의 자호천과 임고천, 고촌천이다. 三山은 광의적으로 영천의 鎭山인 子母山(또는 보현산, 1124m), 신령에 있는 八公山(1192m), 採藥山이라는 설과 협의적으로 마현산, 竹防山(또는 유봉산, 241m), 鵲山이라는 설이 있다. 아천면에 있는 서원은 臨皐書院으로 고려말 鄭夢周(1337-1392)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에 浮來山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에 중건되었다. 1643년(인조 21)년에 張顯光, 皇甫仁을 추향하였으나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구리내면에 있는 立岩書院은 張顯光을 배향하고 鄭四震 외 3인을 모셨다. 영천에는 수십 개의 堤堰이 있는데 그 중 凡魚川 부근에 菁川堤는 그 규모가 둘레 5,882척이며 수심이 16척이다. (민경이)

  • 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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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천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태천군에 해당되며, 현재도 평안남도 태천군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는 태천군 태천읍에 있었다. 하천은 상·하류의 구분이 어렵게 그려져 있다. 朔州界로부터 들어와서, 읍치 동쪽을 지나 嘉山界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대령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院灘·串赤江으로 적혀 있는데, 해당 구간의 대령강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昌城界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은 창성강으로, 龜山界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은 천방강으로 부르고 있다. 龜山界는 龜城界에 대한 誤記이다. 북쪽과 동북쪽의 산지는 700m 안팎으로 높으며, 남쪽과 서남쪽은 상대적으로 평야지대에 해당된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높낮이가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산줄기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읍치 왼쪽의 書院은 遯菴書院이다. 鮮于浹(1588-1653)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 받지는 못하였다. 遯菴書院에서의 ‘遯菴’은 선우협의 號이며, 이 고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원이 세워진 것이다. 이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중 ‘定州界’ 부분이 잘못되어 있다. 이 고을과 정주는 극히 짧은 구간만 경계선을 공유하고 있을 뿐인데, 이 지도에는 매우 긴 구간으로 오해할 수 있도록 표시되어 있다. 지도 작성자도 定州와 嘉山의 경계를 분명히 표시하지 않음으로써,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음을 감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는 이와 같은 오류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에는 邑內面과 長林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지도책에서 읍내면은 대부분 생략되는 경향이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장림면을 생략한 것은 지도 작성자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이 고을에는 총 6개의 면이 있었는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9개의 면으로 증가한다. 보통 조선시대의 면은 일제시대의 면보다 작거나 같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게 더 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조선에서 面里制를 전국적으로 시행했지만, 그 구체적인 설정은 각 고을의 자율에 맡겼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이기봉)

  • 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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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군은 충청남도 천안시 시내·풍세면·광덕면, 송용리·관대리를 포함한 아산시 둔포면의 남쪽, 인주면의 금성리·해암리, 선장면의 가산리·대흥리·홍곶리 일대, 같은 면의 돈포리·대정리·신덕리, 예산군 신암면의 신종리·하평리·신택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천안시 시내 오룡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王字山이다. 고려시대의 행정단위는 所·處·莊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통일신라 때부터 전해지던 것인데, 이 고을은 특이하게도 고려 초(930)에 새로 신설되었다. 이것은 고려의 태조인 王建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읍치 오른쪽의 王字山이 고을 신설의 근거로서 작용하였다. 후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을 때, 왕건 휘하의 尹繼芳이란 인물이 풍수설에 입각하여 五龍爭珠型의 땅이라고 아뢰었다고 한다. 왕건은 그의 말을 믿고 王字城을 만들었으며, 주변 고을의 일부를 떼어서 새로 천안부를 설치하였다. 조선초기까지도 왕자산 밑에 高麗 太祖廟가 있었다고 하며, 수령이 거주하던 內衙가 오룡쟁주의 핵심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이 고을은 고려시대 내내 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립하지 못한 속현들은 모두 천안군의 땅으로 변했다. 아래쪽의 古豊歲(풍세현), 毛山面(모산부곡)·新宗面(신종부곡)·德興面(덕흥부곡)·頓義面(돈의향) 등의 越境地는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천안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고을의 내부를 관통하는 하천은 돈의면의 삽교호로 들어가는 곡교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지도에는 잘못 표시된 곳도 눈에 띈다. 청주의 월경지였던 德坪(面)이 마치 이 고을 안쪽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全義의 경계와 붙어 있었다. 다만 같은 책의 전의나 공주 지도에 덕평이 마치 공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던 것처럼 표시된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도에는 사찰도 많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아래쪽의 光德寺는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며,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도 번성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현재도 보물 390호 고려사경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기타 아래쪽에는 한양-제주 大路 위에 있으며, 공주로 통하는 중요 고개인 車嶺도 보이고 있다. 차령산맥의 이름이 유래된 곳이기도 하다.(이기봉)

  • 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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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구려의 于尸郡이었는데 지명이 有隣, 禮州로 개명되고 1310년(충선왕 2)에 汰諸牧을 고쳐 지금 이름인 영해로 하였다. 1397년(태조 6)에 처음으로 鎭을 두고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가 되었다. 영해는 현재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축산면, 병곡면, 창수면 지역과 영양군 석보면 일부 지역이 포함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영해는 해풍을 막아주는 구릉성 산지를 등지고 송천천 하류의 비교적 넓은 영해평야를 끼고 있다. 영해는 일찍부터 士族의 同族村들이 형성되어 小安東이라 불리웠고, 안동지방으로 魚鹽을 공급하는 거점 구실도 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騰雲山(767m)이며, 서쪽에 있는 西泣嶺은 고을의 餞送, 迎接을 하는 곳이었다. 영덕 경계에 접하여 있는 南眠峴은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하여 오다가 말 위에서 잠들었는데 성이 黃이라는 아전이 술을 올리어 잠이 깨어 마시고 그 산을 眠峴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丑山島는 바다 가운데 있는데 그 형상이 牛와 같아서 축산이라 이름 붙였고, 箭竹이 생산된다. 읍치 아래에 있는 大小山烽은 서쪽의 廣山에 응하고 영덕의 別畔山, 강원도 평해의 厚里山에 응한다. 영해에 분포하고 역원(驛院)으로는 석보면에 寧陽驛과 廣濟院 그리고 읍치 북쪽에 있는 柄谷驛, 서읍령 위에 있는 蒼水院이 있다. (민경이)

  •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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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평양부·대동군과 강서군의 적송면·성대면·반석면, 평원군의 덕산면·한천면에 해당되는 매우 큰 고을이었다. 현재는 평양시 각 구역과 평안남도 대동군, 증산군 북쪽 일부, 평원군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평양시 중구역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平壤城 북쪽에 약간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는 錦繡山이다. 평안도 관찰사가 파견된 監營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성곽은 內城과 北城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여기에 中城이, 고구려시대에는 外城까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외성 지역에는 격자형 도시계획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箕子井田의 흔적으로 보았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고구려의 도시유적으로 밝혀진 바 있다. 지도에 보이는 정사각형 모양의 성곽은 실제와는 전혀 다르며, 이 지도책 전체가 읍성을 사각형으로 표시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평양은 고조선의 王儉城과 고구려의 長安城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역사성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 箕子墓는 ‘周의 武王이 殷을 멸망시키고 기자를 석방하니,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 이에 무왕이 朝鮮侯로 封했다.’라는 중국측 기록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箕子東來說 자체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으며, 기자가 고조선으로 왔더라도 ‘과연 이곳이었겠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 상태다. 다만 小中華 의식을 강하게 가졌던 조선에서는 箕子朝鮮을 실체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그 영향이 이 지도에도 반영된 것이다. 평양에는 檀君殿도 설치되어 있었으며, 주기적으로 제사를 시행하고 있었다. 성곽 아래쪽의 朝天石은 고구려의 시조인 東明王과 관련된 유적이다. ‘동명왕이 여기서 말을 타고 朝天의 행위를 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기는 하지만, 과연 동명왕 시절에 이곳이 고구려의 중심지였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부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내성을 비롯한 만주지역이 초기 고구려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된 기록이나 설화의 무대가 대부분 평양을 중심으로 비정되고 있었다. 대동강 남쪽에는 東明墓도 표시되어 있다. 성곽 아래쪽의 大同江 本流에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綾羅(島)를 비롯하여 수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가장 하류 쪽에 집 모양이 있는 섬은 伊老島로서, 保山堡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의 모양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곳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지만,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大同江이란 명칭은 평양성의 東門인 大同門의 명칭과 관련이 있으며, 대동강이 본류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실재로는 대동문 앞쪽 구간만을 지칭하는 경우도 많다. 대동문 안쪽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11개의 屬驛을 거느린 大同驛이 있었으나,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평양성 왼쪽의 하천은 지도에는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지만, 대동강의 지류인 普通江이다. 능라도 옆에 쓰인 長林은 실재로 하천 변에 수 킬로미터에 걸쳐 있었던 숲의 이름이다. 평양부는 고려시대에 西京으로서 기능했기 때문에 굉장히 큰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도 왼쪽 위에는 평양부의 땅이 서쪽 바닷가에까지 걸쳐 있었던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이 지역은 현재 증산군 적송면과 평원군 한천면 지역으로서, 평양부로부터는 매우 먼 거리에 있었다. 이 지도에는 烽燧와 도로가 눈에 가장 잘 띄게 표시되어 있으며, 面에 대한 정보도 자세한 편이다. 이밖에 사찰·서원·창고 등의 정보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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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현은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청성면, 아곡리·대안리를 포함한 보은군 내북면의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백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남쪽)의 已城山인데,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에는 ‘(읍치) 서쪽 8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특히 ≪輿地圖書≫에는 이성산이 보은의 俗離山으로부터 맥이 왔다고 되어 있어 기록의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인데, 지도에는 龍川과 南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통일화 작업 이전에는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흔적 중의 하나이다. 아울러 南川이란 명칭은 많은 고을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명칭을 붙이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도 위쪽에는 보은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다. 현재 보은군 내북면 북쪽 부분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酒城部曲이 조선 초까지도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다가, 이후 면리제의 실시 속에서 독자성을 완전히 상실한 곳이다. 청산현은 원래 상주의 속현이었는데, 공양왕 2년(1390)에 監務를 설치하면서 독립적인 고을이 되었다. 이 때 같은 상주의 속현이었던 주성부곡이 청산의 속현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곳은 실재로는 남쪽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이 서북쪽으로 흘러나가는 작은 분지의 형태로 존재한다. 지도에는 하천이 마치 동서로 관통하는 것처럼 왜곡되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왜곡은 ≪大東輿地圖≫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당시의 정보가 지도처럼 알려진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 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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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안은 지금의 안동에 속하는 지역으로 지도에서 보듯이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 하류에 자리잡고 있고, 읍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용두산을 비롯하여 요성산, 영지산, 그리고 박달산, 어름산, 천등산, 비암 등 주변에 낮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鼻岩은≪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높이가 10장(丈)이고 그 위에 50~60명이 앉을 만하며, 고을사람들이 遊賞하는 곳이라 한다. 예안은 본래 고구려의 買谷縣인데 신라 때에 善谷으로 고쳐서 奈靈郡의 領縣이 되었다. 고려 태조 때에 城主 李能宣이 귀순하여 예안으로 개명하고 郡으로 승격하였다. 1018년(공민왕 2)에는 吉州(안동)에 속하였다가 우왕 때 군으로 독립, 이어 州로 되었으며 1390년(공민왕 2)에는 현으로 하여 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현감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에 승격하여 郡이 되었으나, 1914년에 군을 폐하고 안동에 합쳤다. 예안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녹전면, 도산면 일대에 해당되며, 읍치는 안동군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안동을 비롯하여 예안은 조선시대 이후 퇴계 이황의 주자학의 전통을 이은 고장으로 읍치 동쪽에는 많은 서원들이 있다. 그 중 안동면에 있는 陶山書院은 1574년(선조 7)에 건립되어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인 1575년(선조 8)에 石峰 韓濩(1543-1605)가 쓴 편액을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다. 1615년(광해군 7)에 이황의 제자인 월천 趙穆(1524-1606)선생을 從享하였다. 그 외 淸溪書院과 汾江書院은 사액되지 못하였다. 녹전산 봉수는 안동의 개목산에 응하고 봉화의 용점산에 응한다. (민경이)

  • 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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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종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신정면과 수산면의 서쪽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는 평안남도 증산군 남쪽과 남포시 강서구역 서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증산군 함종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동쪽 2리에 있었다’는 牙善山이었다.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善山은 진산인 아선산의 誤記로 생각되며, ‘아선’이란 명칭은 고구려 때의 이 지역 이름인 牙善城과 동일하다. 작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都護府’라는 높은 격의 고을 이름을 갖고 있다. 경종 1년(1721)에 宣懿王后 魚氏의 본관이라 하여, 縣에서 도호부로 승격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고을 명칭의 높낮이가 면적이나 인구 등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측면도 고려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고을 전체적인 모습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으며, 동쪽에는 隱龍山(356m) 등을 비롯하여 약 300m 정도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지도 왼쪽에 있는 二岳島는 실재로는 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육지와 연결된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실제를 왜곡했다기보다는 썰물 때 육지와 연결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다른 지도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바와 마찬가지로 섬의 크기가 육지에 비해 너무 크게 표시되어 있다. 조선에서만 사용되던 음을 사용하는 한자도 보이고 있다. 釰岩山의 ‘釰’은 ‘劒’에 대한 다른 한자로 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 지도에서도 ‘일’이 아니라 ‘검’으로 읽어야 한다. 기타 후대의 2개면 정도에 해당되는 넓이에 11개의 面이 기록되어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이 고을처럼 작은 경우에는 面의 크기 역시 작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큰 고을의 경우는 후대의 面 규모와 거의 같은 경우도 자주 나타난다. 面里制가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지만, 면적이나 인구의 크기는 고을 자체적인 판단에 맡겼기 때문이다.(이기봉)

  • 청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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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안현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증평읍·도안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안면 읍내리에 있었다. 청안현은 태종 5년(1405)에 淸塘縣과 道安縣을 합치고, 글자 한자씩을 따서 고을의 이름을 만들었다. 지도에는 크게 2개의 하천 유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를 지나는 것은 금강의 지류인 보강천의 상류이고, 오른쪽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으로 흘러들어가는 괴곡천이다. 후자의 지역은 고을 동쪽 12리에 있었다는 난곡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지도는 현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몇 군데 잘못된 부분이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曾子川이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여러 지지를 종합해 보건데, 南面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즉 읍내면 남쪽에 남면이 표시되어야 하며, 증자천은 서면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흘러나가야 한다. 서면과 근서면도 바로 두 물이 합류되는 지점에 표시되어야 한다. 아울러 北面의 경우도 잘못 표시되어 있다. 현재의 지도 입장에서 보았을 때 증평읍이 있는 지역이 이 지도에는 모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북면은 실재로 서면과 근서면이 있는 곳에 표시되어야 올바르다. 이 북면에는 과거에 도안현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현재의 도안면 지역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도 역시 편집된 것이며, 편집자가 남면과 같은 일부의 정보를 누락시켰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아울러 하나의 정보가 누락되면 다른 정보의 표현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면에 있는 敬天廟는 신라 敬順王의 畵像이 奉安되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외에 曾子川·顔子山 등의 명칭을 통해 당시의 지배층이 유교의 교리에 얼마나 충실하려 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이기봉)

  • 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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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을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다. 예천은 지금의 내성천을 중심으로 그 지류인 한천유역에 위치하여 있다. 예천은 신라 때 水酒縣이라 칭하고 경덕왕 때에는 예천군으로, 고려에 와서 肅州라 개칭하였다. 명종 때에는 基陽으로 고쳤고, 조선 태종 때에는 甫州郡이라 하다가 예천으로 고치고, 1914년에 용궁군과 풍기군의 일부를 합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예천은 지금의 예천군 예천읍, 보문면, 호명면, 유천면, 감천면, 용문면 지역 그리고 개포면 일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며, 읍치는 예천군 예천읍 노상리에 있었다.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덕봉산(374m)이며, 서암산, 비봉산, 용문산, 보문산, 정개산 등 낮은 산지들이 분포하고 있다. 덕봉산은 黑鷹山이라고도 하는데 사나운 검은 매가 나래를 펴고 내려앉으려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 산 위에는 흑응성(또는 봉덕산성)이 있는데 흑응성은 표고 100m의 土石이 혼합하여 축성된 것으로 내성과 익성으로 되어 있다. 龍門山은≪新增東國輿地勝覽≫의하면 신라 때의 고승 杜雲이 이곳에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을 나가는 길에 두운의 이름을 듣고 찾아가려고 용문산 洞口에 들어서니 홀연히 용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용문산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정개산 아래에 있는 서원(鼎山書院)은 1612년(광해군 4)에 건립하여 李愰, 趙穆을 배향하였다. 1677년(숙종 3)에 사액되었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현내면에 있는 多仁은 용궁 동남쪽 경계에 있으며 본래 신라의 達己로 多己라고도 하였으며 예천의 고읍(古邑)이다. (민경이)

  • 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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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희천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자강도 희천시·동신군 전체와 송원군 동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희천시 역전동·남천동·서문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청천강의 최상류에 해당되며, 지도에는 月林江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龍釜淵·宋串之浦 등도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읍치를 중심으로 서쪽의 하천을 西川이라고 부른 것처럼, 읍치 동쪽의 청천강 부분을 東川이라고도 불렀다. 고을의 북·동·남의 방향으로는 1,000-2,000m에 이르는 높은 산줄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서남 방향으로만 낮은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지도에는 산줄기만을 중요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높낮이는 반영되고 있지 못하다. 다만 지도 위쪽의 白山(1,875m)만은 명칭에 걸맞게 흰색과 웅장한 모습을 통해 특별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백산이 이렇게 표현된 것은 허리부터 꼭대기까지 흰 돌로 이루어졌다는 地誌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을 동북쪽에는 후대 낭림산맥 명칭의 기원이 된 樂林山(2,184m)도 보이고 있다. 이 고을은 세종 때 개척된 四郡이 폐지되면서 최전방 역할을 하였던 江界와 북쪽으로 접하고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백산 오른쪽의 狄踰岺(936m)은 이 고을과 강계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개였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중요성이 반영되어, 이곳을 지나가는 도로만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오른쪽 아래에는 인조 1년(1623)에 처음 설치되고, 숙종 1년(1675)에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柔院鎭이 표시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 비해 눈에 띄는 것은 店이 자세히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며, 店은 站을 의미한다. 이 지도에는 오류인 부분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첫째, 지도 가운데에 표시된 論竹店은 福竹店의 誤記이다. 둘째, 읍치 서남쪽의 雲山界 부분에는 寧邊界가 적혀 있어야 한다. 운산계는 더 위쪽에 있는 丘引岺 왼쪽에 적혀 있어야 합당하다. 셋째, 이 고을과 价川은 서로 접한 지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도 아래쪽에 价川界라고 표시되어 있다. 德川界로 바꾸어야 합리적이다. 이와 같은 오류는 이 지도가 편집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 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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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현은 청양군 청양읍·운곡면·대치면 전체, 비봉면의 신원리·녹평리·장재리·관산리·사점리·중목리, 남양면의 봉암리·신왕리·백금리·매곡리·온암리·온직리·금정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양읍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牛山이다. 읍치 위쪽의 하천은 아산만의 삽교호로 흘러들어가는 무한천의 상류이다. 읍치 부분의 하천은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금천이다. 금천 위에는 西川·於項川·鵲川·泗灘 등의 명칭이 있는데, 灘(여울)의 경우도 하천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시행되기 전까지는 같은 하천이라도 구간마다 다른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西川은 읍치를 중심으로 설정된 명칭이며, 나머지는 고유지명을 따서 붙였다. 이중 鵲川은 우리말 ‘가지내 또는 까치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며, 작천과 사탄은 지도에서와 달리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읍치 아래쪽에는 舊金井驛이 표시되어 있는데, 원래 종6품의 丞이 파견되어 8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丞은 후에 察訪으로 명칭이 바뀌며, 금정역은 홍주의 龍谷으로 옮겨간다. 읍치 동남쪽으로는 대중가요 ‘칠갑산’으로 유명해진 七甲山(560m)이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長谷寺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보 58호 철조약사여래좌상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기타 읍치 오른쪽에는 유일하게 洞의 명칭이 水石洞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우리말 ‘물바위골’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물 가운데에 아름다운 바위가 있어 명명된 것이라고 하며, 특이한 지형이 중요하게 인식되어 표시된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 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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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竺山인데 995년(고려 성종 14)에 龍州가 되었고 1005년(목종 8)에 郡으로 강등되었다. 1012년(현종 4)에 지금 이름인 용궁으로 고쳤다. 용궁은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개포면 서부, 풍양면 북부, 지보면 지역과 문경시 영순면 동부지역, 의성군 안사면 북부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 읍치가 향석리에 있었으나 1895년(철종 9)에 큰 장마로 인하여 낙동강이 범람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북하면에 흐르는 省火川(현 금천)과 읍치 남부를 곡류하는 沙川(현 내성천)이 본류인 낙동강에 유입된다. 용궁면에 흐르는 내성천은 특히 自由曲流河川이라 심하게 굴곡하여 흘러서 ‘회룡포’와 같은 특이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나타난다. 지도에서 보면 ‘회룡포’는 太恒山 부근에 해당되며, 마치 육지에 떠있는 섬과 같아 조선시대에 주로 유배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竺山이다. 북상면에 위치하여 있는 忠孝祠는 1704년(숙종 30)에 창건하여 潘沖 등을 배향하였으며, 지도에 보이는 서원은 箕川書院으로 1665년(현종 6)에 창건하여 文瑾, 文瓘 등을 배향하였으나 사액되지는 않았다. 羅浮山 아래에 있는 知保驛은 읍치 동쪽에 있는 大隱驛, 비안의 安溪驛, 예천의 水山驛과 通明驛, 안동의 安郊驛과 연결되어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한다. (민경이)

  •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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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목은 문의면·부용면·현도면과 시동리 서남쪽의 가덕면을 제외한 청주시 전체, 괴산군 청천면, 천안시 수신면, 연기군 소정면의 소정리·운당리, 추동·주산동을 포함한 대전광역시 동구의 동북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북문로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동쪽 1리에 있었다’는 唐羨山이다. 청주가 이렇게 크게 된 이유는 고려시대에 지방관이 파견된 主縣으로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많은 屬縣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현으로는 縣·部曲·鄕·所 등이 있었으며, 이 중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립하지 못한 곳은 모두 청주의 땅으로 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도 지도 오른쪽에 靑川面·松里面에 있었던 청천현과 아래쪽에 越境地로 나오는 周岸面에 있었던 주안향은 독자성이 강한 屬縣으로 존재했다. 이외에도 왼쪽에 越境地로 표시된 德坪面의 지역은 덕평향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이며, 오른쪽의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의 상류이다. 해미현에 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을 효종 2년(1651)에 이 고을로 옮겨 왔는데, 읍치 위쪽에 표시된 兵營이 그것이다. 병영 왼쪽에는 北藪가 표시되어 있다. 미호천의 지류인 鵲川이 자주 범람하기 때문에 만든 인공적인 숲이다. 병영 위쪽에는 붉은 색의 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16개의 屬驛을 거느린 栗峰驛이다. 그 오른쪽에는 고위평탄면에 만들어져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되었던 山黨山城(현재는 상당산성으로 부름)도 보이고 있다. 서원도 큰 고을답게 5개나 보이고 있다. 이 고을에는 실재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서원이 세워져 있었는데, 賜額書院만 표시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 寺刹도 서원 못지않게 많이 표시되어 있어, 崇儒抑佛 정책 속에서도 민간에서의 불교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이기봉)

  •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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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屈阿火村으로 경덕왕 대 河曲이라 개명하였다. 고려 태조 때에 東津·虞風 2현을 합하여 興麗府로 승격되고 후에 恭化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蔚州로 되어 지사를 두었다. 1397년(태조 6)에는 鎭을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는 진을 파하고 울산군으로 고쳤다. 1537년(세종 19) 도호부로 승격시켰으나 이 해에 군으로 다시 고치고 1599년(선조 32)에 부로 승격했다가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되었다. 울산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전체, 울주군 청량면, 완양면, 범서면, 두동면, 두서면, 완산읍, 서생면, 웅촌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며, 읍치는 울산광역시내 북정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 남쪽에 흐르는 하천은 太和江이며 左兵營 동쪽을 지나는 語連川은 현재 태화강의 지류인 동천강이다. 울산만은 6km 정도 大峴面(현 울산광시 남구일대)쪽으로 뻗어 들어간 비교적 큰 만으로 수심이 깊다. 울산은 역사적으로도 국방상 중요한 지역으로 신라시대에 경주의 동남쪽 관문 구실을 하였고,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범이 극심해 읍성이 텅 비기도 했다. 또 정유재란 때 왜군의 보루로 이용되기도 했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울산만 경계 川內烽 부근에는 方魚津이 있는데 방어가 많이 잡힌다는 데서 그 지명이 유래되었으며 목장이 있었다. 읍치 동쪽에 있는 서원은 鷗江書院으로 1678년(숙종 4)에 세워지고 1694년(숙종 20)에 사액되었다. 읍치 동쪽에 있는 屈火驛은 옛날 河曲縣의 옛터로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민경이)

  • 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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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풍군은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수산면 전체, 송계리 일대를 제외한 한수면, 양리·위림리를 포함한 금성면의 남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충추호에 의해 수몰되어 버렸다. 조선후기에 있었던 面 중 邑內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遠西面의 경우 黃江驛이 있는 곳이 중심지였다. 하천의 본류와 지류가 구별되지 않게 그려져 있다. 近南面 부근으로 들어온 남한강이 읍치 북쪽을 돌아 황강역 부근으로 빠져 나간다. 남한강 변에는 비단을 수놓은 듯한 절벽인 錦屛山, 좁은 낭떠러지길인 嚴城遷, 이름도 으스스한 惶恐灘 등 중요 지점의 지형적 특징이 주로 표시되어 있다. 惶恐灘의 경우 남한강 뱃길에서 가장 위험한 여울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황강역 부근은 조선후기와 일제초기에 크게 번성한 浦口 중의 하나였다. 그 옆의 書院은 黃江書院으로서 權尙夏(1641-1721) 등을 배향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사액 받았다. 이곳은 실재로 권상하가 거주하던 곳이었으며, ≪擇里志≫에도 나오는 유명한 양반촌이었다. 반면에 인조 17년(1629)에 세워지고, 현종 13년(1672)에 賜額 받은 鳳剛書院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밖에 衣峙는 우리말 ‘오티’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이기봉)

  • 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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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熊只縣인데 경덕왕 때 熊神으로 개명하였다. 그 후 義安郡(창원군)의 領縣이 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金州(金海)에 속하였다. 조선 세종 때에 僉節制使를 두었다가 도호부로 승격한 후 다시 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군을 폐하고 창원에 병합, 웅천면이 되었다. 웅천은 현재의 경상남도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 가덕도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 북쪽에 있는 熊山이 웅천의 鎭山이다. 지도에서 보듯이 작은 섬들과 포구들이 많고 해안방어를 위한 鎭堡들이 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天城浦鎭은 1534년(중종 29)에 설치한 鎭으로 1592년(선조 25)후에는 安骨浦鎭으로 옮겼고 1656년(효종 7)에 옛터로 다시 옮겼다. 안골포진은 성의 둘레가 1천 7백 14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었다. 薺浦鎭은 성의 둘레가 4천 13척이고 우물이 둘이 있었다. 그 외 新門堡, 晴川堡, 豊德浦堡가 보인다. (민경이)

  •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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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목은 상모면을 제외한 충주시 전체,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음성군 전체, 괴산군 감물면과 불정면, 제천시 덕산면 전체와 한수면의 송계리 일대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충주 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있는 大林山이다. 우선 하천의 모습이 지류와 본류의 구별을 어렵게 할 정도로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의 淸風界로부터 들어와 月川 위를 지나고, 北倉→薔薇山→赤岩을 거쳐 북쪽으로 꺾여지는 것이 남한강 본류이다. 達川은 지도에서의 표현과 달리 실재로는 괴산 방향에서 甘勿面이라 쓰인 곳으로 들어오는 것이 본류이며, 金遷面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天民川(현재는 淸美川으로 부른다)은 長海院(현재는 長湖院으로 부른다)을 거쳐 赤岩 왼쪽에서 남한강에 합류된다. 고을이 큰 만큼 지도 작성자는 여러 곳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面의 명칭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 德山面 옆의 水村面은 덕산면의 里에 불과한 것을 面으로 잘못 적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沙乙面은 乷未面 또는 沙乙未面인데, ‘未’자를 빼먹었다. 면의 위치도 틀린 것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지도 왼쪽에 있는 면의 위치이다. 실재로 木川이나 安城과 접해 있는 곳이 없는데도, 지도에는 마치 두 고을과 접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아마 목천과 안성, 특히 안성까지의 경계선에 대한 기록이 이러한 결과를 낳게 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에 따라 沙多面과 川歧音面이 진천과 안성 사이의 깊숙한 곳으로 표시하게 되었다. 이 두 면은 실재로는 廣惠院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大鳥谷面의 경우도 孟洞面보다 북쪽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오류들은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어 상호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지역은 모두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의 상류에 해당된다. 조선후기 내내 남한강에서 가장 번영한 浦口였던 지도 위쪽의 木溪가 남한강 변이 아니라 내륙으로 들어가 있는 것도 오류라고 볼 수 있다. 面 이외의 인문정보의 수록도 倉庫를 제외하면 일정한 규칙이 없다. 역의 경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었던 連原驛이 없는 반면에 丹月驛만 표시되어 있다. 賜額 받은 서원과 祠가 각각 3·1개 있었음에도 서원 1개만 기록하였다.(이기봉)

  • 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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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獐含縣으로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인 의령으로 고쳤다. 의령은 지금의 의령군 의령읍, 가례면, 칠곡면, 정곡면, 지정면, 유곡면, 부림면, 대의면, 낙서면, 용덕면, 봉수면, 화정면, 궁유면 일부를 포함하는 의령군 지역 대부분이며, 읍치는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일대에 있었다. 의령은 남강이 동남부를 감싸 듯 흐르다가 洛西面 부근에서 본류인 낙동강을 만나 합류한다. 의령의 鎭山은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읍치 북쪽 德谷面 부근에 있는 德山이다. 誾窟山 옆에 보이는 菩提寺는≪忘憂集≫에 忘憂 郭再祐(1552-1617)가 젊었을 때 보제사에서 수천권의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보리사에서 쌀 씻은 물이 10리나 될 정도로 많은 승려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남강 강변 읍치 동쪽에 있는 鼎岩津은 임진왜란 시 왜장 안국사의 중 혜경과의 격전에서 곽재우가 승전하였던 곳이며, 진주, 함안 등 경상우도로 통하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나루터이다. 鼎岩(솥바위)이라는 지명은 남강 물속에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솥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芝山面에 있는 朴津은 한국전쟁 시 국국 및 유엔군과 인민군이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던 나루터이다. (민경이)

  •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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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군은 안면도의 대부분을 제외한 충청남도 태안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태안읍 남문리 일대에 있었다. 18세기 중후반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海東地圖≫·≪廣輿圖≫ 안의 태안지도에 비해 실제의 모습을 왜곡되게 그리고 있다. 첫째, 읍치 남쪽에 표시된 白華山은 실재로는 읍치 북쪽에 있다. 둘째, 읍치 서남쪽의 近西面이 표시된 곳은 실재로 없으며, 근서면은 안흥 방면에 있어야 한다. 셋째, 北一道面과 北二道面이 표시된 곳은 실재로는 두 개로 갈라져 있어야 하는데, 하나로 표시되어 있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2개의 지도는 실제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그런데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어, 두 지도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왼쪽의 섬들은 크기가 별로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려졌다. 예를 들어 新鎭島가 馬島보다 훨씬 큼에도 작게 그려져 있다. 波濤只島의 경우 그 오른쪽의 大小山에 거의 붙어 있어야 한다. 현재는 이 섬과 육지 사이가 간척되어 섬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진 상태다. 안면도의 모습은 서산 지도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왼쪽의 바닷가에는 2개의 남색 다이아몬드가 표시되어 있다. 이 책의 모든 지도에서 鎭堡에 대한 표시로서 사용하는 것으로, 所斤鎭과 安興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모두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으며, 각각 소원면 소근리와 근흥면 정죽리에 있었다. 안흥진이 있는 곳은 경상·전라·충청도의 漕運船이 자주 난파되던 곳으로 유명하다. 신진도와의 사이가 좁고, 밀물 시 바닷물이 밀려들어가는 만이 많기 때문에 물살이 빠른 곳이다. 이런 곳이기 때문에 원래 難行梁이라 불렀는데, 이름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安興梁으로 바꾸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지역 때문에 고려와 조선에서 서산과의 경계선에 運河를 뚫으려는 시도가 일어나기도 했다.(이기봉)

  • 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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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召文國인데 신라 경덕왕 때 聞韶郡이라 개칭하였다. 고려 초에 의성으로 고치고 부로 승격하였으며, 현종 때 안동부에 예속시켰다. 1143년(인종 21)에는 현령을 두었으나, 1199년(신종 2)에는 감무를 두어 강등하였다가 충렬왕 때 대구부에 병합하였다. 다시 復縣되어 현령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에 郡이 되었다. 의성은 지금의 의성군 의성읍, 안사면, 안평면, 봉양면, 금성면, 단촌면, 점곡면, 옥산면, 사곡면, 춘산면, 가음면 일대 지역이며, 읍치는 의성읍 도동리 지역에 있었다. 옛부터 의성군의 주민은 검소·솔직함을 숭상하고 순박하며 蠶桑에 힘썼다고 한다. 옥산면에 있는 黃山에는 뽕나무가 많이 있어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두 이에 의지해서 누에를 길렀다고 한다. 그리고≪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李潑의 시에 깨끗한 산천은 백리요, 태평한 烟火는 千家라 하여 자연이 깨끗하고 평온한 고장임을 알 수 있다. 읍치를 휘돌아 흐르는 長川의 근원은 茅峴에서 나오며, 가음면에 흐르는 下川의 근원은 氷山에서 나온다. 빙산에는 높이가 3척, 넓이가 4척 8촌, 옆으로 길이가 5척 1촌 되는 큰 돌구멍(石穴)인 風穴과, 여름에 어름이 얼고, 봄·가을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봄과 같이 따뜻한 기운이 있는 氷穴이 있다고 한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빙산 부근에 氷溪書院이 있다. 빙계서원은 1556년(명종 11)에 건립한 서원으로 1576년(선조 9)에 사액되었다. 그 외 지도에는 읍치 서쪽 도동산 부근에 鶴山書院과 藏臺書院이 위치하고 있다. 점곡면에 위치하고 있는 孤雲寺는 681년(신문 1)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식량비축 및 부상병을 살펴 호국불교의 꽃을 피웠던 곳이며, 함흥대사, 수월선사 등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거쳐간 사찰이기도 하다. 현재 보물 제246호인 석조석가여래좌상과 지방유형문화재 제151호인 가운루 등 27동의 건물이 보존되고 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하여 있는 鐵破驛은 남쪽에 있는 靑路驛, 안동의 雲山驛과 연계되어 있고, 청로역은 의흥의 牛谷驛과 연계되어 있다. 읍치 동쪽에 있는 古城烽은 남쪽의 大也烽에 응하고 북쪽의 鶴卯山 烽燧에 응한다.  (민경이)

  •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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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현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서 도두리·신대리·노양리·본정리를 제외한 지역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지도 위쪽의 小北面 지역은 현재 정확하게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평택시 오성면 안화리·신리·교포리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원래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水泥가 陸地를 생성하여 사람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67호가 거주했던 것으로 나와 있으며,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이라 땅을 파서 물을 저장했다가 마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은 현재 아산만방조제의 건설로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 대부분이 개간되었다. 읍치는 팽성읍 객사리에 있었으며, 조선시대까지는 충청도에 속했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시 진위군과 합쳐지면서 경기도로 옮겨졌다. 지도에는 縣內面과 西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현재 1개 읍에 불과한 지역에 6개의 면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면리제가 전국적으로 시행되기는 했지만, 면의 크기나 인구수에 대한 전국 일률적인 기준은 없었다. 어떤 고을에는 현재의 1개 면 크기에 준하게 설정된 경우도 자주 보인다. 읍치 위쪽의 하천이 안성천 본류이며, 慶陽 방면의 아산만을 지나 서해로 빠져나간다. 안성천의 상류가 마치 고을 동쪽에서 끝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그렇지 않다. 소북면에서 안성천과 합류하는 하천이 진위천이다. 읍치 아래쪽의 濁川은 현재 군계천으로 불리고 있으며, 조선후기에 이 지역에서 가장 번성했던 屯浦가 있는 곳이다. 읍치 왼쪽에 표시된 書院은 褒義祠로서 현종 2년(1661)에 세워지고, 숙종 30년(1704)에 賜額 받았다. 병자호란(1636) 때 斥和論을 주장하여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洪翼漢(1586-1637)·尹集(1606-1637)·吳達濟(1609-1637)가 배향되어 있다. 기타 읍치 뒤쪽의 城山은 해발 34.8m에 불과한 부용산이다. 고을 전체가 평지에 입지해 있기 때문에 언덕에 불과한 곳이 중요한 山으로 인식되고 있다.(이기봉)

  • 의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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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흥은 지금의 군위군에 속해있는 지역으로 팔공산(1193m)과 방가산(756m)을 경계로 대구와 신령(현 永川)이 접해있으며 낙동강의 주요 지류인 渭川과 南川의 중류에 자리하여 지도에서 보듯이 대부분 낮은 산지와 구릉지로 이루어졌다. 본래 고려 의흥군으로 1018년(현종 9)에는 안동부에 속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감무를 두고 선주(善州)내의 악계현(嶽溪縣)으로 예속하였다. 후에 의성에 속하였다가 1413년(태종 13)에는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승격하여 군이 되었고 1914년에 군위군으로 합하였다. 의흥은 지금의 군위군 의흥면, 산성면, 우보면, 부계면 일대에 해당되며, 읍치는 군위군 의흥면 읍내리에 있었다. 읍내리는 현재 갑령(230m)을 넘어 영천으로 통하는 의성~영천간 도로가 통과하기도 한다. 읍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龍頭山을 鎭山으로 하여 선암산, 국통산, 화산이 동서쪽에 분포하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화산 기슭에 있는 風穴은 넓이가 3척 2촌이고 길이가 2척 8촌으로 찬바람이 나와 초여름에도 얼음이 얼었다 한다. 獜角寺는 석벽이 깍아 선듯한데 속담에 전하기를 옛날 麒麟이 이 석벽에 뿔을 걸쳤다 해서 이름 지었다 한다. 읍치 남쪽에 있는 繩木熢은 의성의 영니산에 응하고 남쪽의 토현에 응한다. 吐峴烽은 승목산과 군위의 박달산에 응한다. 우곡역은 신령의 장수역, 군위의 소계역, 의성의 청로역과 연계되어 있으며 의흥을 지나는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한다. (민경이)

  • 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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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군은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화양면·기산면·마산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한산면 지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1리에 있었다’는 乾至山이다. 읍치까지 이어진 산줄기가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음에도 지도에는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朽浦와 아래쪽의 瓦草浦는 모두 浦口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하천의 명칭을 가리킨다. 전자는 우리말 ‘후개’에 대한, 후자의 瓦草는 우리말 ‘지새울’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후자의 경우 ‘지새울’을 ‘기와풀’과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쪽의 海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여 한양으로 나르던 창고이다. 읍치 오른쪽의 서원은 文獻書院이다. 李穀(1298)·李穡(1328-1396)·李鍾學(1361-1392)·李塏(?-1456)·李耔(1480-1533) 등을 배향하여 선조 7년(1574)에 세워지고, 광해군 9년(1611)에 賜額 받았다. 이곡은 이 고을 출신으로 원나라의 制科에 둘째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다. 이색은 이곡의 아들이고, 이종학은 이색의 아들이다. 2명 모두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하다 피살당했다. 나머지 2명도 모두 韓山을 본관으로 하는 이곡의 자손들로 조선에서 출세한 인물들이다. 고려에서 출세한 가문이 조선의 개국에 반대했음에도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곡 이후 이들이 출신지를 떠나 있었음에도 이 고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서원에 배향되었음을 통해, 조선 중기 이후의 상황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이기봉)

  • 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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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斯同火縣인데 후에 壽同縣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인동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때 경산부에 속하였는데 1363년(공민왕 12)에 監務를 두었고 若木縣에 예속하였다. 1604년(선조 37)에는 부로 승격하였다가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된 후 1914년에 칠곡으로 병합하였다. 인동은 지금의 구미시 전체와, 칠곡군 북삼면, 약목면, 석적면 그리고 가산면 일부 지역이며, 읍치는 구미시 인의동 지역에 있었다. 지도에서 보듯이 인동은 산지와 낙동강의 하계망을 따라 행정구역이 잘 분리되어 있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天生山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과 ≪大東地志≫의 기록에 본래 신라의 옛 성으로 1601년(선조 34)에 郭再祐가 외성을 쌓았고, 둘레는 3천 6백 12척이다. 사면에는 석벽을 깍아 세워 그 높이가 하늘을 꿰뚫고 성안에는 네 개의 못이 있었다고 한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한 吳山書院과 동쪽에 위치한 서원(東洛書院)은 각각 금오산(977m)과 천생산(407m)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여 위치하고 있다. 오산서원은 冶隱 吉再(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1574년(선조 7)에 창건하여 1609년(광해군 1)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東洛書院은 旅軒 張顯光(1554~163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65년(효종 6) 제자들이 건립한 건물이다. 1676년(숙종 2)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2년 사당을, 1971년에는 부속건물도 복구하였다. (민경이)

  • 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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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현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가좌리·소중리·상성리·거성리·원대리를 제외한 운산면, 당진군 정미면·대호지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해미면 읍내리에 있었다. 원래 고려시대까지 이 지역에는 貞海縣과 餘美縣 2개가 있었다. 태종 7년(1407)에 두 고을을 합해 하나로 만들고, 각 고을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다가 海美縣을 만들었다. 여미현의 중심지가 지도에 古餘美로 표시되어 있다. 정해현의 경우 원래 읍치 왼쪽에 표시된 夢熊驛(또는 鄕)이었다. 이곳의 胥吏가 고려 태조 때 큰 功이 있다고 해서 大匡의 작호를 내리고, 고구현의 땅 일부를 분할하여 현으로 만들었다. 이 지도에는 큰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읍치 왼쪽에 표시된 西面은 위쪽의 唐津界에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이곳은 현재 당진군 대호지면의 북쪽 부분인데, 서면에 있는 桃李島·赤鮑里·海倉·助今浦도 모두 잘못 표시되어 있다. ≪輿地圖書≫에 나오는 지도나 ≪海東地圖≫ 등에는 모두 西面의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다. 다만 회화식 지도이기 때문에 마치 이 지도에서의 위치와 비슷하게 오해할 수 있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지도의 작성자는 이러한 부분에 대한 오해와 지지를 참고하여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류가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어, 이 지도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되어야 할 것은 西面이 거의 읍치의 정북쪽에 있으면서도 ‘西’라는 방향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도나 지지에 기록된 동서남북의 방위가 꼭 같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또한 위쪽의 一道面과 二道面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표시된 것도 오류로서, 실재로는 연결되어 있었다. 김정호의 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가 수정되어 있지만, 서면이 위치해 있지 않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면적이 상당히 작게 그려져 있다. 이보다는 작지만 읍치를 포함한 동쪽에 있었던 東面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도 눈에 띈다. 기타 廉率面 지역은 원래 廉率部曲이 있던 곳이다.(이기봉)

  • 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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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奴斯火縣(일명 其火)인데 경덕왕 때 자인으로 고쳐서 獐山郡(慶山郡)의 領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郡으로 승격하고 1914년 경산·하양(河陽)과 합하였다. 자인은 현재의 경산시 자인면, 용성면, 남산면, 압량면 지역과 진양읍 일부 지역, 자인면 경계에 접하여 있는 경산시내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며, 읍치는 자인면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자인을 흐르는 하천은 금호강 지류인 오목천이다. 자인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到天山이며, 영천의 경계에 접하고 있는 九龍山(675m)은 9마리의 용이 승천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룡산 아래 있는 盤龍寺는 1303년(고려 충렬왕 29)에 창건되었는데 1641년(인조 19)에 戒云과 明彦이 중건하였다. 觀瀾川 아래에 있는 서원은 觀瀾書院으로 1659년(효종 10)에 세워져 선조 때 李承會를 모시려다 경주에 사는 여강 이씨들의 반대로 李彦迪을 배향하였다. (민경이)

  • 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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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현은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옥산면·남면·내산면·외산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홍산면 남촌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飛鴻山이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현재도 지도에 표시된 것과 같은 金川이라 부르고 있으며, 우리말 ‘쇠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동쪽으로 흘러 금강과 만난다. 그 오른쪽에 표시된 海岸川은 海岸面에 대한 誤記이다. 아울러 上東은 上東面을 의미하며, 下東面은 누락되었다. 外北面에 있는 하천은 남포를 거쳐 바로 바다로 빠져나가는 웅천의 상류로서, ‘북쪽 41리에 있었다’는 非刀所 지역으로 추정된다. 臨水臺는 하천가에 절벽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현재 외산면 만수리에 있다. 읍치 오른쪽의 彰烈祠는 병자호란(1636) 때 斥和論을 주장하였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洪翼漢(1586-1637)·尹集(1606-1637)·吳達濟(1609-1637) 三學士를 배향하여 숙종 43년(1717)에 세워지고, 경종 1년(1721)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 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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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只沓縣으로 경덕왕 때 鬐立縣이라 하였고, 의창군의 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때 지금 이름인 長鬐가 되었다. 장기는 지금의 포항시 장기면, 구룡포읍, 동해면의 상정리, 중산리, 공당리 지역과 경주시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 지역을 포함하며 장기반도 정상부분인 부산면(현 포항시 동해면과 대보면 일대)은 영일 땅으로 제외된다. 읍치는 포항시 장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고, 읍치 남단에 흐르는 하천은 장기천이다. 장기반도는 크지 않지만 한반도의 모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 중의 하나이며, 호랑이 꼬리라 하여 虎尾串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甑山 부근에 巨山이 장기의 鎭山이다. 북쪽에 있는 목장은 冬背乙牧場으로 신라 때부터 말을 키웠던 유서 깊은 목장으로 울산에 속하였다. 목장 아래 뇌성산(212m) 봉수는 연일의 사화랑산 봉수에 응하고 남으로 복길 봉수에 응한다. 복길 봉수는 경주의 禿山에 응하고 북쪽의 뇌성산 봉수에 응한다. (민경이)

  • 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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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목은 충청남도 홍성읍·고북면·갈산면·홍북면·금마면·홍동면·장곡면 전체와 광천읍의 벽계리·상정리·신진리·마현리, 보령시 천북면과 오천면의 도서지역, 청양군 화성면 전체와 남양면의 구룡리·용마리·대봉리·용두리·흥산리, 당진군의 거산리를 제외한 신평면과 합덕리·점원리·신흥리를 제외한 합덕읍,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홍성읍 오관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의 月山이다. 홍주목이 이렇게 크게 된 이유는 고려시대 때 많은 屬縣을 거느린 州縣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 맨 위쪽의 縣內面이라 표시된 곳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유일하게 나오는 屬縣인 新平縣 지역이었다. 이곳에 있는 北面은 新北面의 誤記이며, 新南面의 ‘新’은 신평현의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신남면의 위치가 너무 남쪽으로 내려와 있으며, 合北面과는 서로 붙어 있지 않았다. 合北面과 合南面은 원래 合德縣의 지역이었으며, 면 이름 앞의 ‘合’은 그 흔적을 보여준다. 이곳은 원래 部曲이었는데, 고려 충렬왕 24년(1276)에 이 지역 출신인 黃石良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은총을 받은 일이 있어 縣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읍치 왼쪽의 高北面·高南面은 高丘縣, 그 아래쪽의 用川面은 龍泉部曲의 지역이었다. 용천면 왼쪽의 古縣은 興陽縣이 있던 지역었음을 의미한다. 그 오른쪽의 躬耕面은 躬耕部曲의, 위쪽에 월경지로 남아 있는 雲川面은 雲川鄕의 지역이었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古呂陽은 呂陽縣의, 興口香面은 興古鄕의, 化城面은 化城部曲의 땅이었다. 합덕면에 있는 合德池는 둘레 11,829尺(약 3,552m)의 크기로서, 조선시대 만들어진 堤堰으로서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지금은 모두 메워져 논으로 개간되어 있다. 지도 왼쪽에는 섬이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安眠島의 경우 홍주 소속의 땅과 그 경계되는 지역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즉, 안면도 전체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니다. 기타 書院이 2개 보이고 있는데, 읍치 오른쪽의 서원이 魯恩書院이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朴彭年과 成三問 등의 死六臣을 배향하여 숙종 2년(1676)에 세워지고, 같은 왕 38년(1712)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 지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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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知品川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인 지례로 고쳤다. 지례는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대덕면, 부항면, 구성면 서부지역, 증산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지례면 교리 일대에 있었다. 지례는 甘川의 상류지역에 위치하여 그 지류가 흐르고, 감천은 金山(현 김천)과 善山을 관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거창 경계에 접하여 있는 감천 최상류의 牛頭峙는 금산과 거창을 이어주는 가야산맥의 주요 고개였다. 지례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龜山으로 그리 높지 않다. 大德山(1290m)은 전라북도 무주와 경상남도 거창을 분리하는 산으로 다락산 또는 다악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도에는 옛 터인 月利部曲과 두의곡역 부근에 속현이었던 頭衣谷部谷도 보이며, 곳곳에 ‘촌’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읍치 북쪽에 있는 龜山烽은 거창의 梁末峙, 금산의 高城山에 응한다. 지례에는 頭衣谷驛과 作乃驛이 있는데 작내역은 금산의 금산역과 연결된다. (민경이)

  • 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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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간현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매곡면·상촌면 전체와 추풍령면의 계룡리,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의 대부분에 해당되며, 읍치는 황간면 남성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금강의 지류인 초강천이다. 초강천 유역 중 추풍령 서북쪽이 경상도 金山(현재의 김천시 일대)의 黃金所面에 해당됨에도, 지도에는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황금소면에는 고려시대까지 金山의 속현으로 黃金所가 있었으며, 여말선초를 지나며 독자성을 상실하고 面으로 편재되었다. 반면에 지도 위에 나타난 外南面 지역은 현재의 김천시 봉산면 지역으로서, 충청도에 속해 있으면서도 낙동강 수계에 있었다. 이 지역에는 원래 金化部曲이 있었는데, 고려 공양왕 2년(1391)부터 황간의 屬縣으로 존재하다가 그대로 面으로 편재된 지역이다. 지도에는 2개의 서원을 이름까지 정확하게 써 넣었다. 위쪽의 寒泉書院은 西人 老論派의 거두였던 宋時烈(1607-1689)만을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지고, 영조 2년(1726)에 賜額 받았다고 한다. 아래쪽의 松溪書院은 戊午士禍(1498) 때 관련되어 유배되었던 曹偉(1454-1503) 등을 배향하여 현종 7년(1565)에 세워졌지만, 사액 받지는 못하였다. 기타 지도에는 2개의 里가 표시되어 있는데, 긴 계곡의 뛰어난 경치가 있는 곳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金溪里의 위치는 잘못되어 있는데, 梨峴 근처에 있어야 맞는다.(이기봉)

  •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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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漆巴火縣인데 경덕왕 때 진보현으로 고쳐서 聞韶郡(의성군) 領縣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禮州(영해)의 속현이 되었고 그 후 한때 왜구 침입으로 空地가 되었으나 세종이 靑鳧縣(청송현)과 합하여 靑寶郡이 되었다가 진보현으로 고쳐 다시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군을 폐하고 동면 및 북면은 영양군에 흡수하고 그 나머지는 청송군에 병합되었다. 진보는 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파천면 지역과 영양군 석보면, 입암면 일부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에 있었다. 진보에 흐르고 있는 神漢川과 虎鳴川은 현재의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과 용전천이다. 읍치 남쪽에 있는 南角山이 진보의 鎭山으로 일반적으로 진산이 읍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飛鳳山은 봉황이 날아가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법산봉수는 원래 남각산에 있었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1500년(연산군 6)에 이곳으로 옮겨와 영해의 廣山에 응하고 안동의 藥山에 응한다. 읍치 동쪽에 보이는 각산역은 安奇道 察訪驛의 屬驛으로 영덕의 朱同驛, 영해의 寧陽驛, 안동의 琴召驛, 청송의 靑雲驛과 연결된다. (민경이)

  • 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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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덕현은 대전직할시 동구의 대성동을 포함한 북쪽과 신상동을 포함한 남쪽 그리고 직동과 효평동, 대덕구 전체, 유성구의 용산동·방현동·관평동·탑림동·전민동·문지동·원촌동에 해당된다. 읍치는 동구 읍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鷄足山이다. 淸州周岸界로부터 들어와 公州界로 흘러나가는 것이 금강의 본류이다. 읍치 왼쪽에는 현재의 이름과 같은 甲川이 표시되어 있다. 외남면으로부터 흘러오는 하천은 갑천의 지류인 대천이다. 금강 본류 아래쪽에 표시된 美湖는 진짜 호수가 아니라, 금강의 이 부분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지역에는 보통 나루가 설치되는데, 荊角津은 바로 이 미호에 있던 나루로 추정된다. 현재 대덕구 미호리 일대에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청주의 周岸面은 고려시대까지 독자적인 행정단위인 周岸鄕의 지역이었다. 청주의 속현으로 존재하다가 여말선초의 과정을 지나며, 독자성을 잃고 청주의 일개 面으로 재편되었다. 청주와 지역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越境地이기도 하다. 작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書院이 세 개나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가장 왼쪽의 서원은 崇賢書院인데, 鄭光弼(1462-1538)을 배향하여 광해군 1년(1609)에 세워지고 그 해에 賜額 받았다. 이곳에는 이후에도 金長生(1548-1631)·宋俊吉(1606-1672)·宋時烈(1607-1689) 등이 추가로 配享되었는데, 조선후기 내내 권력을 잡았던 西人 老論의 인맥들이었다. 이 고을은 조선시대 내내 恩津 宋氏가 대대로 살았던 지역이기도 하다.(이기봉)

  •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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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삼한 때 弁韓의 땅이었는데 백제가 이곳을 차지하여 居列城(居陀城)이라 하였다. 경덕왕 때 康州라 개칭하고 995년(성종 14)에 지금의 이름인 진주라 하였다. 진주는 대부분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 중류 유역에 위치하고 있어, 그 지류인 경호강과 덕천강 그리고 영천강이 진주를 관류하여 남강으로 유입된다. 진주는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내 전체, 산청군의 시천면, 삼장면, 단성면 일부, 하동군의 옥종면, 청암면, 북천면 일부, 사천시의 축동면, 삼천포시 일부, 고성군의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 남해군의 창선면 등이 포함되는 큰 고을이었고, 읍치는 진주시내 중성동과 동성동 일대에 있었다. 진주는 1012년(현종 3)에 牧이 되어 전국 8목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시 牧使 金時敏과 의병장 金千鎰의 지휘 아래 왜적과 격렬한 격전이 있었던 지역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다. 읍치 옆에 鎭營과 兵營이 보이며, 우병영은 창원에서 설치하여 1603년(선조 36)에 矗石城으로 옮겨왔다. 촉석성은 남강 북안의 낮은 언덕에 쌓은 읍성으로≪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그 둘레가 4천 3백 59척, 높이는 15척인 石築으로, 성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셋이 있고 군창이 있었다고 한다. 지도에는 없지만 촉석성 남쪽에 있는 누각이 矗石樓로 의기 論介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진주의 읍치는 북쪽에 있는 飛鳳山을 鎭山으로 하여 남쪽에 남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보여준다. 단곡면에 있는 斷谷寺는 골 입구에 崔致遠이 쓴 ‘廣濟岩門’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고,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 아래에 있는 香積寺는 聖母廟의 香火를 위해서 세운 것이다. 靑岩山 아래 있는 德川書院은 1576년(선조 9)에 세워져 曹植, 崔永慶을 배향하며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다. 읍치에서 함안으로 가는 도로상에 있는 召村驛은 察訪道로 15개의 屬驛이 있었다. (민경이)

  • 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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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인군은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회남면 전체, 내북면의 염둔리·법주리·용수리·신궁리, 수한면의 차정리, 청원군 문의면의 마구리·마동리·묘암리·염치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회북면 중앙리와 부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읍치 서쪽 2리에 있는 何磨山으로 나온다. 이 지도에는 阿摩山으로 표시되어 있어, 지명의 표기가 시대나 표기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未訖灘’의 경우도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末訖灘’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면 왼쪽의 ‘芦岺’은 ‘호령’으로 읽으면 안 된다. ‘芦’는 필사본의 경우 ‘蘆’의 속자로서 사용되기 때문에 ‘노령’으로 읽어야 한다. 현재는 ‘갈티’ 또는 ‘갈키고개’로 부르고 있으며, 한자로는 ‘葛峙’로 적는 경우가 많다. 고을 한 가운데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회인천이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금강의 본류는 江外面을 휘돌아 서남쪽으로 빠져 나가고 있다. 현재는 이 지역 대부분이 대청호에 수몰되어 있다. 기타 구룡산과 노성산 사이에 있는 東面의 경계는 실재로는 오른쪽 산줄기 너머에 있다. 현재의 보은군 내북면의 염둔리·법주리·용수리·신궁리와 수한면의 차정리가 그것이다. 세금을 납부하던 人의 파악이 중요하던 시기에 이 고을의 사람들이 산을 넘어가 마을(村)을 개척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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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고려 鎭海縣인데, 1018년(현종 9)년에 진주에 예속시켰고, 조선 태종 때 현감을 두었다. 1570년(선조 3)에 함안에 합쳤다가 1617년(광해군 9)에는 다시 두었다. 1627년(인조 5)에는 창원에, 1629년(인조 7)에는 다시 함안에 합쳤다가 1639년(인조 17)에 다시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 일대는 熊川 땅이었고 진해는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마산시 진동면 진동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동쪽에 있는 鷲山이 鎭山이며, 餘航山(744m)은 함안에 있다. 남쪽 바다에는 几矣島와 大酒島 그리고 小酒島가 보이는데, 대주도와 소주도 두 섬 사이가 20步로 조수가 물러가면 육지와 연결된다고 한다. 읍치 왼쪽에 있는 常令驛은 고성의 背屯驛, 진주의 召村驛, 함안의 巴水驛과 연계되며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했다. (민경이)

  • 창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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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比自火郡(比斯伐)인데 경덕왕 때 火王郡으로 고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창령군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密城郡(밀양군)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 1631년(인조 9)에 靈山郡으로 편입되었다가 1637년(인조 15)에 복구하여 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고 1914년 영산군을 합하여 현재에 이른다. 창령은 신라 진흥왕(진흥황 16)이 比斯伐伽倻를 정복하고 진흥왕 척경비를 세워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 창령은 현재의 창령군 창령읍, 고암면, 대합면, 유어면, 대지면, 이방면, 성산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창령읍 교리와 하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왼쪽의 큰 하천은 낙동강이며 그 지류인 토평천이 흐른다. 읍치 북쪽에 있는 火王山이 창령의 鎭山이다. 毖瑟山 아래에 있는 燕岩書院은 李承彦, 李長坤, 成安義를 배양하였는데 사액 되지 못하였고, 勿瑟川 강변에 있는 勿溪書院도 成公國 외 7인의 賢人을 배향하였으나 사액 되지 못하였다. (민경이)

  • 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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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屈自郡과 骨浦縣의 땅인데 경덕왕 때 義安郡과 合浦縣으로 고쳐 합포현을 의안군의 領縣으로 만들었다. 1282년(충렬왕 8)에 의안을 義昌으로, 합포를 會原으로 고쳤고, 조선 태조 때 두 현을 합쳐 창원으로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고 1914년 熊川郡을 병합하여 현재에 이른다. 창원은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 마산시내, 내서읍, 창원시 창원시내, 동읍, 북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창원시 창원시내 서상동 일대에 있었다. 창원은 낙동강 남안의 북동부지역 그리고 마산만 연안에 접하여 있다. 마산만은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진해만에서 육지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러한 자연적 배경으로 會原書院 옆에 보이는 漕倉이 설치될 수 있고, 충렬왕 때는 몽고군이 일본원정을 시도할 때 合浦를 전초기지로 이용하기도 했다. 읍치의 북쪽에 있는 檐山이 鎭山이며, 서쪽에 있는 豆尺山 봉우리에는 孤雲臺가 있어 그 경관이 아름답다고 한다. 청룡산 아래에 있는 우도 右道兵馬節度使營은≪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裴克廉이 石城으로 쌓은 關防으로 그 둘레가 4천 2백 91척, 높이는 15척이고 영 안에는 우물 다섯개가 있었다. 고려 때 東行省을 치던 옛터이다. 읍치 동쪽에 있는 自如驛은 察訪道로 서쪽에 있는 安民驛과, 불모산 옆에 있는 近珠驛 등 주변 14개 역을 관할한다. 읍치 남쪽에 보이는 盤倉은 관찰사 趙㘙의 啓請으로 설치하여 창원·김해·함안 등 인근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서울까지 조운했다. (민경이)

  •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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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伊西小國으로 신라 유리왕이 이를 쳐서 빼앗고, 후에 仇刀城의 경내 率伊山·驚山·烏刀山 등 3성을 합하여 大城郡을 두었다. 고려 초에 3성을 합하여 군을 설치하고 청도라 하였다가 밀성에 속하였다. 1366년(공민왕 15)에는 다시 군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청도는 현재의 밀양시 청도면, 청도군 청도읍, 화양읍, 금천면, 매전면, 이서면, 운문면 지역과 각남면의 구곡리, 칠성리, 화리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밀양시 청도면 구기리 일대에 있었다. 청도는 밀양강 최상류지역으로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으며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졌다. 청도내에 흐르는 하천은 서쪽의 산지에서 동창천과 청도천이 흘러나오며, 이들 하천은 동쪽의 산지에서 흘러나오는 단장천과 합쳐져 밀양강에 유입된다. 청도의 鎭山은 읍치 남쪽에 있는 高鰲山이며, 대구 경계에 접하고 있는 八助嶺은 조선시대 嶺南路가 통과하던 고개이고, 省峴에는 현재 경부선철도의 성현터널이 뚫려 있다. 경주 경계에 접하여 있는 雲門山(1188m) 아래에는 雲門寺가 있는데 이 사찰은 600년(신라 진평왕 22)에 원광국사가 중건한 것으로 一然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고 전한다. 밀양 경계에 인접하여 있는 蜂岩巨淵과 虎距山 부근에 있는 李木淵에는 각각 龍壇과 神物이 있어서 가뭄 시에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상북면에 있는 서원은 紫溪書院으로 1578년(선조 11)에 건립되었고 1661년(현종 2)에 사액되었다. 金克一, 金馹孫, 金大有를 배향하였다. 청도는 하천변 곳곳에 폭포와 기이한 절벽들이 많아 수려한 경관이 펼쳐져 있는데 대표적으로 孔岩, 仙岩, 落花岩)의 경관이 뛰어나다. (민경이)

  • 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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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고려의 靑己縣으로 신라가 후에 積善으로 고치고 야성군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초에는 鳧伊로 후에 雲鳳으로 개명하였고 세종 때에 靑鳧로 고쳐 禮州(영해)에 속하였다. 1394년(태조 3)에 진보현을 합하고 1419년(세종 1)에 청보군으로 승격되었다가 후에 진보를 분리하여 현감을 두었고 세종 때에 松生縣을 합쳐서 청송으로 고쳤다. 세조 때에 도호부로 승격, 그 후 변천을 거쳐 1895년에 군이 되고 1914년에 진보군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청송은 지금의 청송군 청송읍, 부동면, 부남면, 현동면, 현서면, 안덕면 지역과 파천면 일부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송읍 월막리에 있었다. 청송에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半邊川 지류인 용전천과 길안천이다. 읍치의 북쪽에 있는 放光山이 鎭山이며, 영덕에 접하고 있는 周方山( 721m)이 현재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周王山이다. 주왕산은 경상누층군의 역암·응회암·유문암 등으로 이루어져서 산과 계곡의 암석경관이 특출하다. 삼자산 아래 용전천이 곡류하는 곳에 있는 屛岩書院은 1702년(숙종 28)에 지방 유림들이 건립하여 栗谷 李珥( 1536-1584), 沙溪 金長生(1548-1631)를 배향하고 그 해 사액되었다.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읍치 아래 청운역은 부남면에 있는 문거역, 부동면에 있는 이전평역, 안동의 琴召驛, 진보의 角山驛과 연결되어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였다.(민경이)

  •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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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阿兮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海阿로 고쳐서 有隣郡의 領縣을 삼았다. 고려 초에 청하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는 경주에 속하고 조선 태조 때에 監務를 두었다가 후에 縣監으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되고 1914년 영일군에 병합되었다. 청하는 松羅海 경계에 지금의 포항시 청하면, 송라면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하면 덕성리에 있었다. 읍치를 감싸고 흐르는 하천은 청하천과 서정천이다. 일반적으로 읍치의 북쪽에 진산이 있는 것과는 다르게 청하의 진산은 읍치의 서쪽에 있는 呼鶴山이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神龜山에는 세마리 용이 웅덩이에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효능이 있다고 한다. 신영산 부근에 있는 內延山(930m)은 三動石이라고 하는 대·중·소 세 개의 바위가 솥발처럼 벌려 있는데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신라 진평왕이 견훤의 난을 이 산에서 피하기도 했다. 내연산 아래 寶鏡寺는 745년(신라 경덕왕 4)에 南岳門人 哲敏이 중수하였으며 1023년(고려 헌종 14)에 금당탑을 세웠고, 1221년(고려 고종 8)에 圓眞國師가 사리탑과 사적비를 세웠다. 지도에서 보듯이 海邊에 고송라포, 이기포, 허혈포의 3개의 浦가 있는데 그 중 虛穴浦는 돌에 빈 구멍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리산 봉수 왼쪽에 보이는 서원은 鶴山書院으로 1692년(숙종 18)에 세워서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민경이)

  • 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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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백제의 初八兮縣으로 경덕왕 때 八溪로 고쳐 江陽郡(합천군)의 領縣이 되었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인 초계로 고치고 1914년에 합천군으로 병합되었다. 초계는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 적중면, 쌍책면, 청덕면, 덕곡면 지역과 대양면 일부, 율곡면 일부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합천군 초계면 초계리 일대에 있었다. 초계는 황강의 하류유역에 위치하여 그 지류인 사하천이 관류한다. 초계의 鎭山은 북쪽에 있는 淸溪山이다. 읍치의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松原書院과 淸溪書院이 있으나 모두 사액되지 못한 서원이다. 황강변을 따라 三鶴津, 甘勿津, 仰津이 줄지어 있는데 특히 감물진은 창령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면서 초계와 합천의 稅穀을 실어내는 포구였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주민들의 곡물과 어염이 거래되었다. 읍치의 북동쪽에 있는 巢鶴山 중턱에는 巢鶴寺가 있었는데 승려들이 彌陀山(662m)에 있는 留鶴寺로 옮겨가면서 폐사되었다. (민경이)

  • 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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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八居里縣 혹은 仁里라고도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八里로 고쳐서 壽昌郡에 예속하였다. 고려 초 팔거현이라 고치고 현종 때 경산부에 속하였다가 1640년(인조 18)에 칠곡이라 고쳐서 도호부가 되었다. 칠곡부는 현재의 칠곡군 기산면, 가산면, 동명면, 왜관읍, 지천면 등 칠곡군 대부분에 해당되며, 읍치는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에 있었다. 칠곡에 흐르는 하천은 금호강의 지류인 팔거천과 이언천이다. 칠곡의 가산산성은≪輿地圖書≫와≪大東地志≫에 의하면 八公山(1193m)의 서쪽 지형적 특성을 이용하여 쌓은 石城으로 내성, 외성, 중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내성은 1640년(인조 18)에 쌓아 그 둘레는 4,710보步이며 우물이 21개가 있고, 동·서·북의 3개의 성문과 8개의 暗門이 있다. 외성은 1700년(숙종 26)에 축성하였으며 그 둘레는 3,754步이다. 중성은 1741년(영조 17)에 축성하였고 그 둘레는 602步이며 1개의 성문이 있다. 성안에 客舍·人和館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군기고 ·보루·砲樓·將臺 등이 설치된 점으로 보아 행정적 목적보다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상지면에 위치한 高平驛은 대구 凡於驛과 인동군 楊院驛과 연결된 역원이었다. 도촌면에 위치하고 있는 서원(泗陽書院)은 본래 1651년(효종 2)에 문주면(현 대구시 북구)에 세워진 것으로 鄭逑를 主享하고, 李潤雨를 從享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도촌면(칠곡군 지관읍 신리)으로 옮기어 이원경선생도 추배하였다. 그 당시에는 廟宇와 講堂, 貶遇齋, 訂頑齋, 鳳下門, 養賢廳廚庫등이 있었으나 고종5년(1868)에 대원군의 書院撤廢令에 의하여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講堂인 景晦堂이 남아있다. 그밖에 창고로 북창, 남창, 승창, 팔거창, 강창이 분포되어 있다. (민경이)

  • 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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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초의 漆吐縣을 경덕왕 때 漆隄로 고쳐서 義安郡 領縣이 되었다. 고려 때 칠원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金州(金海)에 예속, 1390년(공양왕 2)에 監務를 두었다. 1592년(선조 25)에 昌原에 예속시켰다가 1627년(광해군 9)에 다시 현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었다가 폐하고 咸安에 병합시켰다. 칠원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칠북면, 칠서면, 마산시 구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칠원면 구성리에 있었다. 칠원에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西川(현 광노천)이다. 칠원의 鎭山은 읍치 동쪽에 있는 靑龍山이며, 남쪽에 떨어진 귀산면은 예전 칠원의 속현인 龜山縣으로 淸凉山이 鎭山이었다. 귀산면에 있는 龜山浦鎭은 750년(경덕 9)에 鎭을 설치하였고 첨사를 두었다. 芳叱浦 서쪽 벼랑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景漢臺로 정상에 손바닥 같이 앉을 만한 평탄한 곳이 있어 고려 李仁老(1152~1220)가 여기서 놀이하였다 한다. (민경이)

  • 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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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기는 죽령(697m)밑의 넓은 침식분지에 발달한 嶺下聚落으로 산천이 수려하고 ≪鄭鑑錄≫을 신봉하는 평안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죽령은 신라 아달라왕 5년에 처음 길이 열리고 순흥에 속하였다. 풍기 내부에는 현재 내성천 지류인 남원천이 흐른다. 풍기는 신라 때의 基木鎭인데 고려 초에 基州라 개칭하였다가 1413년(태종13)에는 基川으로 개칭하였다. 문종 때 殷豊縣을 병합하여 풍기라 하고 郡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 영주군에 병합하였다. 풍기는 지금의 영주군 풍기읍, 안정면, 봉현면 지역 그리고 예천군의 상리면, 하리면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읍치는 영주군 풍기면의 성내리 지역에 있었다. 읍치 동쪽에 있는 郁陽書院은 1662년(현종 3)에 창건되어 李滉과 黃俊良을 배양하였는데 서원 철폐령에 따라 1869년(고종 6)에 헐렸다. 상리면 순흥에 접하여 있는 명봉산에는 조선 문종왕의 胎가 있었다. 읍치 아래에 있는 망전산 봉수는 영주의 城內山, 순흥의 竹嶺山에 응한다. (민경이)

  • 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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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초에 韓多沙郡인데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인 하동으로 개칭하였다. 지도에서 보듯이 하동은 동서로 좁고 남북이 길며 섬진강을 경계로 하여 서쪽의 광양과 구분된다. 섬진강 동안에 자리 잡은 하동은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악양면, 화개면, 적량면, 회천면, 양보면, 고전면 지역과 북천 일부지역, 진교면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하동읍 두곡리와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는 원래 陽慶山을 鎭山으로 하여 그 아래에 있었으나 ≪輿地圖書≫에 의하면 1703년(숙종 29)에 섬진강변 진번면 두곡리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섬진강으로 유입되는 橫川(현 횡천강)은 내횡면과 외횡면으로 분리되는 행정경계 기준이며, 그 근원은 진주에 있는 지리산에서 나온다. 岳陽面의 ‘악양’이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사용된 지명으로, 중국 뚱띵호와 양쯔강이 만나는 곳인 岳陽에서 유래되었다. 화개면에 있는 雙溪寺는 840년(신라 문성왕 2)에 眞鑑禪師 慧昭가 짓고 옥천사라 하였는데 887년(정강왕 2)에 쌍계사라 고쳤으며, 절 입구 바위에 새겨진 ‘雙溪石門’의 4자는 고운 崔致遠이 썼다고 한다. 쌍계사 위쪽에 있는 神凝寺는 들어가는 洞口 바위에 ‘三神洞’이라고 씌어져 있는데 三神은 神凝寺, 義神寺, 靈神寺를 말한다. 함양 경계에 접하여 있는 七佛菴은 가락국 수로왕의 아들 7형제가 이곳에서 수도하여 성불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민경이)

  • 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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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양은 995년(고려 성종 14)에 河州로 하여 刺史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에 하양으로 고쳐 경주에 속한 후에 監務를 두었다.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속하였다가 1607년(선조 40)에 縣으로 되고 1895년(고종 32)에 승격하여 군이 되었고, 1914년에 경산군으로 병합되었다. 하양은 琴湖江 연변인 현재의 경산시 하양읍 지역과 진양읍 북동부 일부지역, 와촌면 남부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금호강변 일부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하양읍 금락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 서쪽에 있는 無落山(현 무학산 574m)이 鎭山이며, 醮禮山(653m)은 고려 태조가 桐藪에서 견훤을 치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호강변에 위치한 琴湖書院은 1684년(숙종 10)에 창건하여 許稠(1369-1439)를 배향하였으며 1724년(경종 4)에 사이동(현 서사동)으로 이건하였다. 1790년(정조 11)에 사액 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읍치 아래에 있는 匙山烽은 영천의 城隍堂에 응하고 경산의 城山에 응한다. (민경이)

  • 함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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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阿尸良國 또는 阿羅伽倻라 하였는데 신라 법흥왕이 이를 멸하여 군을 두었다. 경덕왕 때 지금 명칭인 함안으로 고치고 고려 성종 때 咸州刺史를 두었고 현종 때는 다시 함안으로 고쳐 金州에 예속시키고 명종 때에 監務를 두었다. 1373년(공민왕 22)에 郡이 되어 1506년(연산군 12)에 도호부로 승격하였고 1606(광무 10)에 칠원군을 편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지도에서 보듯이 함안은 南江을 경계로 북쪽의 의령과 나뉘어 지며, 남강으로 유입되는 함안천과 석교천이 흐른다. 함안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함안면, 여항면, 군부면, 법수면, 대산면, 산인면, 마산시 진전면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함안군 함양면 鳳城里 일대에 있었다. 城山(139m) 바로 아래 있는 말산리는 6가야의 하나인 阿羅伽倻가 자리했던 곳으로 그 주변에 당시의 큰 고분들이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鎭山이 읍치 북쪽에 있는 것과 달리 함안의 진산은 남쪽에 있는 餘航山(744m)이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道林書院은 1702년(숙종 28)에 세워져 鄭逑를 배향하였고, 왼쪽에 있는 西山書院은 1646년(인조 24)에 세워져 金時習 등 生六臣 5인을 배향하고, 1663년(현종 4)에 사액 되었다. 巴水驛과 春谷驛은 모두 自如道 察訪驛에 속하는 屬驛이었다. (민경이)

  •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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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때 涑含郡 또는 含郡이라 하였는데 경덕왕 때 天嶺郡으로 개칭하고 1012년(현종 3)에 지금의 이름인 함양으로 개칭하였다. 함양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읍, 수동면, 휴천면, 마천면, 백전면, 병곡면, 유림면, 지곡면 지역이 해당되며, 읍치는 함양군 함양읍 상리 일대에 있었다. 함양은 智異山(1915m)의 天王峯과 安義의 德裕山(1507m) 사이의 경호강 상류에 자리하여 읍치 쪽에서 흐르는 渭水(현 위천)와 유포면 쪽에 흐르는 臨川(현 임천강)이 경호강으로 유입된다. 읍치 동쪽에 있는 서원은 溏洲書院으로 1581년(선조 14)에 세워져 1660년(현종 1)에 사액되었고, 왼쪽에 있는 서원은 栢淵書院으로 1670년(현종 11)에 세워져 최치원, 김종직을 배향하였으나 사액되지는 않았다. 白雲山(1279m) 아래 靈隱寺와 智異山(1915m)에 있는 君子寺, 安國寺, 文殊寺, 吾道山에 있는 登龜寺 등은 모두 그 터만 남았거나 없어졌다. 군자사에는 진평왕이 어려을때 그 숙부 진지왕을 피하여 이곳에서 살다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沙斤驛은 察訪道로 14개의 屬驛이 있었다. (민경이)

  • 함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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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古寧伽倻國인데 신라가 古冬攬郡(古陵郡)을 삼았다가 경덕왕 때 古寧郡으로 고쳤다. 1018년(현종 9)에 상주에 속했다가 후에 지금 이름인 함창으로 고쳤다. 함창은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이안면, 공검면, 은척면 일부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상주시 함창읍 오사리와 오동리 일대에 있었다. 함창에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 지류인 영강과 이안천이 읍치를 사이에 두고 흐른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宰岳山이며, 동쪽에 있는 孤山은 큰 들 가운데에 있어 섬과 같이 보인다. 지도에서 보듯이 다른 곳에 비하여 池가 많은데 물이 풍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읍치 서쪽에 있는 南池는 고을의 객관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 둘레에 있는 못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남면에 있는 恭儉池(공갈못)는 洪貴達 기문에 陂澤이 많기로는 남방의 제일이요, 그 크기로는 공검지에 비길 만한 것이 없다 하였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큰 비에도 넘치지 않았다 한다. ‘공갈’이란 지명은 둑을 쌓을 때 ‘공갈’이라는 아이을 묻었다는 埋兒說話에 의하여 붙여진 공검지의 또 다른 이름이며, 공검지는 근래까지 쓰다가 상류에 오태지를 조성한 후 매립하였다. 읍치 남쪽에 있는 城山烽은 상주의 所山, 문경의 禪岩山에 응한다. (민경이)

  • 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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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 초기의 大良州郡 또는 大耶郡이었는데 경덕왕 때 江陽郡이라 개칭하였다.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이름인 합천으로 하였다. 합천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의 합천읍, 율곡면 일부, 대양면 대부분, 용주면, 봉산면, 묘사면, 야로면, 가야면 지역과 의령군의 궁류면 일부, 봉수면 청계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일대에 있었다. 합천은 크게 황강과 회천 하류에 위치하여 있지만 황강은 남강과는 달리 하류에서도 골짜기가 좁고 충적지의 발달이 제한적이다. 합천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北山이다. 편마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伽倻山(1430m)은 일명 牛頭山이라고도 하며 서쪽으로 뻗어서 月留峯이 된다. 가야산 아래에 있는 海印寺는 802년(신라 애장왕 3)에 順應, 利貞이 세운 사찰로 禪敎兩宗의 본산이다. 여기에는 팔만대장경판 등 다수의 국보와 보물이 보관되어 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屯德灘은 독상면에 있는 父子淵의 하류에 있으며, 부자연은 오랜 신라 長城 역사 끝에 돌아온 군졸이 아버지와 못 위에서 만나 서로 붙들고 울다가 함께 빠져 죽었다는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숭산면에 있는 서원은 伊淵書院으로 김굉필이 남교동에 있으면서 鄭汝昌과 서로 만나 강론한 곳으로 1660년(현종 1)에 사액되었다. 여기에는 志同巖이라는 암석이 있다. (민경이)

  • 해제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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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없음(...)

  • 현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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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推良火縣(三良火縣)인데 경덕왕이 玄驍로 고쳐 火王郡(창령군)의 領縣을 삼았다. 고려 초에 玄風(玄豊)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密城으로 속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監務를 두었고 밀성군의 仇知山部曲을 이에 병합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창령으로 들어갔다가 복구하여 군이 되었고, 1941년에는 달성군에 병합하였다. 현풍은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지역과  논공면의 본리리, 남리, 북리를 제외한 낙동강변에 접한 일부 지역이 포함되며, 읍치는 현풍면 부리 일대에 있었다. 현풍 왼쪽에 흐르는 하천은 洛東江이며 그 지류인 車川과 玄風川이 흐른다. 대구 경계에 접하여 있는 毘瑟山( 1084m)은 현풍의 名山으로, ‘비슬’이란 인도의 梵語 발음을 그대로 표기한 것으로 신라 때 인도 스님들이 이 산을 구경한 후에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읍치 아래 우만면에 있는 서원은 禮淵書院으로 1674년(현종 15)에 세워져 郭䞭(?~1594), 郭再祐(1552~1617)를 배향하였고 1677년(숙종 3)에 사액 되었다. 석성산 아래 낙동강변에 있는 松潭書院은 1664년(숙종 5)에 창건되어 朴惺을 배향하였는데 사액되지는 못했다. 읍치 아래에 있는 淸白祠는 郭之雲을 배양하였으나 사액 되지 않았고, 비슬산 아래에 있는 瑜加寺는 827년(신라 흥덕왕 2)에 도성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민경이)

  • 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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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신라의 退火郡인데 경덕왕 때 義昌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흥해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경주에 속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 1377년(공민왕 16)에는 知郡事로 승격하였다. 1914년에 영일군에 병합되었다. 흥해는 지금의 포항시 흥해읍, 북구의 형산강 이북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흥해읍 성내리에 있었다. 읍치를 감싸고 있는 하천은 지금의 곡강천과 그 지류인 초곡천이다. 曲江의 근원은 경주 神光縣 馬北山에서 나왔으며, 북으로 흘러 고을 북쪽을 지나고 동으로 흘러 孤靈山 아래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鎭山이 읍의 북쪽에 있는 것과는 달리 흥해는 읍치 남쪽에 있는 禱陰山이 진산이다. 도음산 아래 泉谷寺에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靈泉이 있는데 신라 선덕여왕이 이 물에 목욕하고 피부병이 완치되어 자장율사를 시켜서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6·25 사변 때 절이 소실되었다. 松羅海(동해) 경계에 있는 知乙山烽은 북쪽의 烏山烽, 영일의 東乙背串에 응한다. (민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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