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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치(禮治) 구현을 위한 조선의 의례서, 『국조오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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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국조오례의

 

 

 

[중학교 국사]

. 조선의 성립과 발전 > 1. 조선의 성립

 

[고등학교 국사]

.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1] 민족 문화의 융성 > 윤리, 의례서와 법전의 편찬


 

 

국조오례의서문중에

우리 세종장헌대왕에 이르러서는 문치(文治)가 태평에 도달하여, 마침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이에 예조판서 허조(許稠)에게 명하여 여러 제사의 차례 및 길례 의식을 상세히 정하도록 하고, 또 집현전 유신들에게 명하여 오례 의식을 상세히 정하도록 하셨다. 모두 두우(杜佑)통전을 모방하고, 여러 서적에서 채집하였으며, 중국 조정의 제사직장, 홍무예제와 우리나라의 고금상정례등을 겸용하여 참작해서 빼고 더하였다. 임금께 재가를 받았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빈천(賓天)이 닥쳤으니, 애통하도다.

    

及我世宗莊憲大王 文致太平 適當千一之期 乃命禮曹判書臣許稠 詳定諸祀序例及吉禮儀 又命集賢殿儒臣 詳定五禮儀 悉倣杜氏 通典 旁采羣書 兼用中朝 諸司職掌 洪武禮制 東國 今古詳定禮 等書 參酌損益 裁自聖心 未及施用 而賓天斯迫 嗚呼痛哉

    

생각건대, 우리 세조혜장대왕께서는 집안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시고 법을 세우고 기강을 펴서 빛나도록 새롭게 하셨는데, 오히려 조문이 많고 번거로워 앞뒤가 어그러질까 염려하여 대번에 법으로 삼지 못하셨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경국대전을 나누어 편찬하게 하시고, 또 세종조에 제정했던 오례의에 의거하면서 옛것과 지금의 것에 상고하고 검증하게 하셨다. 예제를 시행하기에 무방하기를 기약하며 이름 하여 오례의라 하고 예전의 끝에 붙이셨다.

    

惟我世祖惠莊大王 化家爲國 立經陳紀 煥然一新 猶慮條章浩繁 前後乖舛 未敢據以爲法 爰命朝臣 分撰 經國大典 且依世宗朝所定五禮儀 考古證今 斯可以施於事而無妨 名曰五禮儀 附于禮典之末

    

삼가 살펴보건대, 예를 기록한 것이 삼천 삼백 가지의 글이 있으나 그 요점은 길····가례라는 다섯 가지에 불과하다. 제사가 있어 길례가 있고, 죽음과 장례가 있어 흉례가 있으며, 외적에 대한 대비와 방어로 인해 군례가 있고, 이웃 나라간의 교제와 관혼의 귀중함으로 인해 빈례와 가례가 있다. 예가 이 다섯 가지를 갖추면 인륜의 처음과 끝이 여기에 구비되어 있으니 천하국가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이것을 버리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 이 책은 곧 역대 여러 성인들이 헤아린 공으로 인해 지극히 정밀하다. 때문에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사서인에 이르기까지 각기 정해진 예법이 있으므로 서로 분수에 맞지 않는 예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 하늘이 정하고 땅이 받드는 영원히 변치 않을 이치와 자세하고 소소한 예법까지 분명히 드러나 어지럽지 않으니 이는 실로 우리나라의 만세의 법전이다.

    

臣竊觀 記禮者有三千三百之文 然其要則不過曰吉凶軍賓嘉五者而已 由祭祀有吉之禮 由死喪有凶之禮 由備禦有軍之禮 由交際冠婚之重 有賓與嘉之禮 禮備乎五者 而人道之始終具焉 欲爲天下國家者 舍是無以爲也 今是書更歷數聖人揣摩之功 極其精密 上自朝廷 下至士庶 各有定禮 不相踰越 天經地緯 曲禮小節 粲然不紊 實吾東方萬世之令典也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序

    

국조오례의를 올리는 전문중에

[주상 전하께서는] 백성을 다스림에는 예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정해진 제도가 중도에 합치되도록 힘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악의 질서가 서니 하늘과 땅이 각기 마땅함을 얻고 백성들의 교화는 파발마보다 신속하며 사람과 신이 화합하고 상하가 협동하게 되었습니다.

    

爲治民 莫善於禮 而定制務合乎中 禮樂明 而天地官 化民速於置郵 神人和 而上下恊

국조오례의』 「進國朝五禮儀箋

 



 

국조오례의는 조선의 국가 의례(儀禮)를 전통적인 의례분류체계인 오례(五禮)를 따라 제정하고 그 예식의 내용과 절차를 정리한 국가의례서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이념을 기반으로 통치 체제와 국가 의례를 정비해나갔는데 국조오례의는 그 노력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때문에 국조오례의를 통해 조선왕조가 추구했던 이념과 사회 질서를 짐작해볼 수 있다.

    

국조오례의서문에도 보이듯 조선의 국가 의례를 오례를 바탕으로 정비하기 시작한 때는 세종대부터였다. 세종이 허조와 집현전의 유신 등에게 오례 의식을 마련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세종대에 집현전이 설치되고 집현전의 학사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예제를 정비하기 위해 중국의 옛 제도인 고제(古制)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세종대 의례정비의 동력이 되었다. 집현전은 예조(禮曹) 그리고 태종대부터 예제 마련을 위해 설치되어 활동하고 있었던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와 더불어 예제 정비의 핵심 기관이 된다.

집현전-의례상정소-예조를 중심으로 진행된 오례 정비는 유교 이념에 따른 올바른 예제를 마련하기 위한 많은 예악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동시대의 제도[時王之制]이면서 중국 지방에서 행하는 의례를 정리한 명나라의 홍무예제를 바탕으로 마련된 예제를 비판하고 수정하는 문제, 예에 걸맞은 음악을 정비하는 문제, 황제만이 지낼 수 있는 제천(祭天)을 폐지하는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제후국으로서의 분의에 합치되고, 고제(古制)와 시왕지제(時王之制)를 참고한 조선의 의례를 확립해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1450(세종 32) 세종의 훙거로 인해 따로 편찬되지 못하고 세종실록부록에 오례로 실리게 된다.

오례의 편찬 작업은 세조대에 이르러 재개된다. 세조는 세종실록』「오례를 바탕으로 고금의 제도를 참작하여 편찬할 것을 지시하고 독립된 의례서가 아닌 경국대전』「예전의 끝에 붙이도록 하였다. 세조대의 예제 정비는 제천 의식인 환구제(圜丘祭)를 부활시키거나 천자국 제도와 비슷한 산천 제사를 논의하는 등 세종실록』「오례와는 차이를 보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사육신 사건으로 인한 집현전 혁파와 세조의 훙거로 인해 오례의 편찬은 또 다시 중단된다.

성종대에 이르러 오례의 편찬 작업이 다시 시작되고 오랜 노력의 결실로 1474(성종 5) 국조오례의가 총 86책으로 완성된다. 이때 의례에 사용되는 의복과 악기 등에 대한 도설, 의례 참석자들이 서야할 위치를 설명해주는 배반도(排班圖) 등이 실린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도 짝으로 편찬된다. 이로써 법전인 경국대전과 더불어 조선이 지향하는 이념과 질서를 구현할 의례서가 완성된 것이다. 이후 국조오례의는 오랫동안 조선의 기본적인 의례서로 활용되었다.

    

그렇다면 국조오례의는 어떤 구성으로 편찬되었을까? 책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오례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오례란, 국가에서 행하는 다섯 가지 의례로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를 말한다.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주례(周禮)에서는 길례로써 나라의 귀신을 제사하고, 흉례로써 나라의 근심을 슬퍼하고, 빈례로써 다른 나라들과 친하고, 군례로써 나라들과 화합하며, 가례로써 만백성을 친애한다.[以吉禮事邦國之鬼神示, 以凶禮哀邦國之憂, 以賓禮親邦國, 以軍禮同邦國, 以嘉禮親萬民.]”라고 하여 오례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길례는 천신(天神)과 지기(地祇) 그리고 인귀(人鬼) 등에게 지내는 제사의례를 말한다. 국조오례의』「길례를 보면 땅과 곡식의 신인 사직(社稷)에 대한 제사, 조선 국왕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놓은 종묘에 대한 제사, 산천과 강에 대한 제사, 공자에 대한 제사, 역대 왕조의 시조에 대한 제사 등 총 56종의 의주가 마련되어 있다. 길례에는 문묘와 종묘, 사직단 등 국가의 정체성을 보여주거나 국가를 상징하는 것들에 대한 제사가 포함되어 매우 중시되었다. 또한 길례의 제사는 그 중요도에 따라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등급이 나뉘어 관리되었다.

가례는 혼례, 관례, 책봉, 연향, 과거시험 등의 의례이다. 국조오례의』「가례에는 왕실 혼례, 왕비·왕세자 등의 책봉의식, 여러 과거 시험을 실시하는 절차,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식, 동지와 정월 등에 여러 백관들이 하례(賀禮)하는 의식, 조참(朝參)이나 상참(常參)과 같은 조회(朝會) 의식 그리고 서울과 지방에서 노인을 공경하는 뜻으로 여는 양로연(養老宴), 지방에서 지방관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윤리규범을 익히며 함께 술을 마시는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절차 등 총 50종의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가례는 만민을 친하게 하는 의례라는 주례의 설명처럼 국조오례의』「가례에는 임금이 신하와 백성을 만나고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빈례는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외국 사절을 맞이하는 의례이다. 국조오례의』「빈례를 보면 명나라 사신에게 연회를 베푸는 의식, ()나 류구(流球), 여진(女眞)에게 국서와 폐백을 받는 의식 절차 등 총 6종의 의주가 포함되어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주체와 대상의 격에 따라 예제의 절차나 규모가 차별화되었는데, 이를 통해 명나라와 맺고 있는 사대관계나 왜 등과 맺고 있는 교린관계와 같은 외교 질서가 빈례 속에서 구현하였다.

군례는 서문에 외적에 대한 대비와 방어를 위해 두었다고 쓰여 있듯이 군대 훈련, 활쏘기와 관련된 의례, 승전(勝戰)과 관련한 의례들이 포함되어 있다. 국조오례의』「군례를 보면 군을 두 부대로 나누고 진법에 따라 움직여 전투를 벌이도록 하고 이를 국왕이 관람하는 의례인 대열(大閱), 국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냥을 핵심 내용으로 하여 군대를 훈련하는 제도이자 의례인 강무(講武), 임금과 신하가 모여 활쏘기를 통해 예악을 익히고 덕()을 살펴보는 대사례(大射禮) 등 총 7종의 의식이 있다. 일식(日蝕)이 일어났을 때 이를 구하거나 악귀를 쫓아내는 의식 또한 군례에 포함되어 있다.

흉례는 국왕이나 왕실의 상을 당했을 때 이를 슬퍼하는 상례(喪禮)인데, 망자에 대한 살아있는 자들의 슬픔을 법도에 맞게 표출하도록 하는 의례이다. 국조오례의』「흉례에 실린 의주는 총 91종으로 대부분 왕실의 상례이고 대부(大夫(서인(庶人)의 상례 의주 1종이 포함되어있다. 대표적인 흉례인 국왕의 국상의 경우 대체로 3년 동안 때마다 행해야 할 의식이 약 60여종에 달하는데 각 의식의 절차가 상세히 실려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새로운 왕의 즉위식이 흉례, 그 중에서도 국상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진행되는 국상은 선왕을 추모하고 선왕의 시대를 정리하는 동시에 사왕(嗣王)이 상주로서 선왕의 상례를 거행하면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보여주며 다음 시대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선의 국가 의례 정비는 국조오례의이후로도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인 영조대에 변화가 있거나 새롭게 추가된 전례를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그 결과 국조속오례의와 이를 보완하는 국조속오례의보, 국조속오례의서례가 편찬된다. 정조대에는 국조오례의부터 영조대 편찬된 국가 의례서를 종합한 국조오례통편이 만들어진다. 조선은 끊임없이 국가 의례를 정비하고 어떤 예가 올바른 예인지 고민했다.

    

조선시대의 예는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예는 종종 단순한 예의범절 혹은 허례허식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정치와 학문을 하는 이들에게 예란 인간과 자연의 보편 원리인 리()가 사회 질서로 표현된 것이었다. 즉 조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사회 질서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의례 속에 특정한 행위와 도구, 참석자들의 위치 등으로 상징화 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사람들을 이러한 의례에 반복적으로 참여하게 함으로써 삼강오륜(三綱五倫)과 같은 유교적인 윤리규범을 익히게 하고 마음으로부터의 변화를 일으켜 그들을 교화하고 유교적인 사회를 만들어나가고자 하였다. 또한 예제는 단순히 상하의 신분과 귀천을 구별하고 이를 확인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상호간에 어떤 올바른 태도와 도덕적인 감정을 지녀야 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조선시대 예가 가지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국조오례의의 의의를 생각해볼 수 있다. 국조오례의를 올리는 전문백성을 다스림에는 예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공자(孔子)의 말처럼 유교에서 백성을 예()로써 다스리는 예치(禮治)는 형벌이나 법으로써 다스리는 법치(法治)보다 보다 높은 차원이자 이상적인 통치 방법으로 여겨졌다. 예치(禮治)의 모습을 갖추고 왕조의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드러내고자 국왕과 왕실, 조정은 예를 수행하는 모범이자 중심이 되어야 했는데 국조오례의는 이를 실현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범직, 1991, 韓國中世禮思想硏究, 일조각

한형주, 2004, 15세기 祀典體制의 성립과 그 추이」 『역사교육89

김문식, 2009, 조선시대 國家典禮書의 편찬 양상」 『장서각21

김해영, 2009, 조선 초기 禮制 연구와 國朝五禮儀의 편찬」 『조선시대사학보55

지두환 외, 2015, 조선의 국가의례, 오례, 국립고궁박물관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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