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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두고 벌어진 소송, 산송(山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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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尙龜上(山訟)

 

 

 

[고등학교 국사]

.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2]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백성 유학 채주헌(蔡周憲)

삼가 아룁니다. 저의 여러대 선조들 무덤은 제가 사는 마을 검호(儉湖) 뒤 비석이 있는 산기슭에 있어 지키고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것이 이미 수백 년입니다. 애초에 타인이 점유하려는 폐단이 없었습니다. 뜻밖에 그저께 밤 누구인지 모르는 놈이 중요한 곳에 몰래 투장을 하였습니다. 그곳은 주산과 가깝기가 10걸음 되는 가까운 곳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과도 안산(案山)도 되고 주맥(主脈)도 되는 곳이며 돌을 던지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입니다. 저 사람의 무덤이 저의 거처를 핍박함이 이와 같습니다. 국법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진실로 하루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이 이미 형세를 숨겨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으니 형세가 먼저 무덤을 파내고 무덤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리려고 합니다. 관가의 허락 없이 함부로 행하면 법을 어길까 두려워 감히 이렇게 호소합니다.

    

化民幼學蔡周憲等

右謹言伏以 民之屢代先塋 在於儉湖上所居村後碑石山麓而守護禁養 已至數百餘年 初無他人窺占之弊矣 不意再昨夜不知何許漢偸埋於要害之地 而距先塋爲單主龍數十歩壓逼處也 距生居或爲對冲 或爲主脉 亦不過投石之近也 壓人之先塋逼人之生居則如此 蔑法之漢 誠不可一日容貸矣 彼旣潜形匿 跡捜覔不得則 勢將爲先置堗以待塚主之現發 而不由於官 家私自擅行 恐渉違例玆敢仰籲伏乞

蔡周憲等等狀(240683)

    

반가(潘哥)가 저희 조상 무덤에 투장한 후 치욕이 백골이 된 조상에게 미치고 불행이 산 사람의 명에 미쳐서 늙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죽고 병든 자가 대부분이니 어찌 조상에게 죄인이 아니겠으며 사또의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산 아래 사는 자손들이 조상의 무덤 근처에 연속하여 무덤을 쓰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 화가 산 사람의 목숨에 미칠까 두려워해서입니다. 저 반가(潘哥)는 한가(漢家)의 골육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산 사람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자신의 부귀영화만을 탐합니다. 성주께서 판결을 내려 감옥에 갇혀도 파내지 아니하고 관에 무덤을 파내겠다는 다짐을 내고서도 지키지 아니하니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참을 수 있겠습니까.

    

大抵 潘哥一自偸葬於民之先墳腦頭生居案對之後 辱及於旣骨之先 禍延於生人之命 老少長幼化夭病痼 幾入於網打之中 則豈不爲先祖之罪人 又不爲閤下之罪人乎 山下子孫不得繼葬於先墳前後左右者 專畏禍中於生人之命矣 惟彼潘哥不顧韓家之骨肉 不恤居人之利害 只貪渠之求蔭榮貴 城主公決之下在囚而不掘 納侤而不掘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蔡尙龜上書(山訟)(240697)



 

 

 

오늘날 대한민국은 고소공화국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고소가 잦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과 비슷하게 소송이 많이 벌어졌다. 위의 등장(等狀)이라고 하는 문서를 작성해 관에 제출하는 것으로 소송이 시작되었다. 조선시대의 소송은 대부분 노비, 토지, 그리고 산을 놓고 벌어졌다. 이 가운데 산을 놓고 소송이 벌어진 소송을 일반적으로 산송(山訟)이라고 부른다. 조선 전기에는 노비를 두고 분쟁이 많이 벌어졌으나, 조선후기에는 산송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조선시대 산 자체에 대한 개인 소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산은 국왕의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지를 중심으로 그 근처 일정 구역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산송은 조상의 묘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진행되었다.

    

산송은 왜 발생했을까 

산송은 특히 조선후기에 많이 벌어지는데 그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조선후기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며 조상의 묏자리가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조상의 묏자리를 잘 써야 효도를 다하는 것이고, 또 후손들도 번창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묘지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러나 풍수 지리적으로 좋은 묏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너도나도 좋은 산을 찾아 나선 것이다. 당연히 묏자리를 두고 송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산림이용 독점권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맹자의 산림천택 여민공지’(山林川澤 與民共之 : , , , 못 등의 이익을 백성들과 함께 사용한다)의 이념에 따라 조선시대 산이라는 것은 누구나 이용 가능했다. 그러나 조상 무덤 근처의 땅은 그 후손들에게 소유권을 인정해주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종친은 1품이 4면 각 100, 2품은 90, 3품은 80, 4품은 70, 5품은 60, 6품은 50보로 그 범위를 제한했고, 문무관은 10보씩 줄이고 7품 이하 생원 진사 및 음직 자녀들은 6품과 같은 보수(步數) 이내의 땅의 소유권을 받았다. 그 범위 내의 경작과 방목(放牧)을 금지했다. 즉 묘를 중심으로 일정 범위 내의 땅에는 다른 사람이 묘를 써서도 안 되고 나무를 함부로 베는 것도 금지된 것이다. 산이 주는 경제적 혜택은 대단했다. 우선 추운 겨울철 땔감을 조달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며, 각종 건축 공사의 재료이기도 했다. 또한 부족한 농토를 보완하기 위해 임야를 불태워 그곳을 농지로 변경하는 것도 모두 산에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혜택이었다.

    

산송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

조선시대 산송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그러나 투장(偸葬)이라는 것이 조선시대 벌어진 산송의 대표적인 형태였다. 투장이라는 것은 이미 누군가의 묘역이 형성되어 개인이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산에 밤에 몰래 가서 장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 투장은 조선시대 벌어진 산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누군가의 투장을 발견하면 일단 관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비록 불법적인 방식으로 투장했다 하더라도 마음대로 그 무덤을 관의 허락 없이 파헤치는 것 역시 불법이었다.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관아에 소송을 제기하면 일단 송사가 시작된다. 조선시대 수령은 소송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미덕이라 믿었고 소송에 대한 판결 역시 신속하게 판결하려 했다. 또 조선시대 통치는 인정과 덕치를 기본으로 하고 형벌은 보조수단이란 의식이 강하였기 때문에 송사에 대해 강력한 형벌을 시행하지는 않았다. 관은 사건의 정세를 파악하고 투장자에게 무덤을 파내라고 지시를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투장자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무덤을 파내는 것을 미루게 된다. 관아의 판결은 강제성이 없었다. 관아의 판결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형벌을 받는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농번기가 찾아오면 관에서는 송사를 받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농사일이 바쁜 춘분에서 추분까지는 농사에 집중해야할 시기라 판단해 관에서 송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덤을 파내야 하는 기간은 1년 중에 2, 10, 113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설령 그 기간 수령이 임기가 끝나 바뀌기라도 하면 신임 수령과 또 다시 송사가 진행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분쟁이 수십 년간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산송의 대상

조선후기 산송 당사자들은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었을까. 우선 소송에는 소송을 제기한 정소자(呈訴者), 소송을 당한 피소자(被訴者)가 존재한다. 우선 정소자의 비중은 양반층이 매우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 연구에 다르면 정소자의 90% 이상이 양반이라고 한다. 산송의 일반적인 형태를 생각해 본다면 정소자는 이미 묘지를 바탕으로 산의 소유권을 확보하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양반들이 대부분 정소자라는 말은 곧 이미 그들이 좋은 산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누가 양반들의 분산을 침범하고 그들의 권위에 도전을 했을까? 피소자의 비중은 양반층과 비양반층의 비율이 비슷하다. 양반층 내에는 친족간의 분쟁이 그 비중이 높았다. 반면 비양반층 가운데는 중인 및 향리층의 비중이 높았고 낮은 비중이지만 양인층, 천인층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족층의 분산에 대한 도전이 사족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비양반층에게서도 보이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 사족층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사회갈등 현상임을 의미한다.

조선후기 산송 피소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비양반층이라는 점은 그들에게도 유교문화가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양반층에 비해 경제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조상을 위해 길지를 택하고 격식을 갖춰 장례를 치를 여유가 부족했다. 현실적으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바로 양반들이 이미 선점해놓은 분산에 몰래 투장을 하는 것이었다. 일단 투장을 성공하기만 한다면 다시 파내지 않거나 오랜 기간 소송이 지속된다는 기존 사례를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산송의 등장이 갖는 의미

산송은 조선후기에 급격히 증가했다. 조상의 무덤을 길지에 쓰고 관리하는 것은 모두 유교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를 조선전기까지는 양반들만이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비양반층에서도 산송이 일어났다는 것은 조선후기 유교이념이 더 이상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또 다른 의미는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권력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향촌사회라 하면 서울이 아닌 지방을 이야기 한다. 조선 개국 후 사림이라는 집단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기반을 지방 즉 향촌사회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독서를 하며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향리세력과 상대하며 점차 지방에서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갔다. 관직을 하지 않고 지방에서 글 읽던 자들을 일반적으로 재지사족이라 하고 그들을 양반이라 지칭했다. 그들은 수령을 보조하며 향약향규향안과 같은 조직을 통해 향촌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사족의 향촌지배에는 큰 변화가 생겨난다. 중앙 정부에서 사족들을 매개로 지방을 간접 지배하던 방식에서 수령을 통한 직접지배로 그 큰 틀을 바꾸게 된 것이다. 수령의 권한을 강화되었고 지방의 사족들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로 신분질서가 혼란해지며 비양반계층들도 양반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 양반은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전기와 같은 강고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조선후기 산송은 이와 같은 현상을 반영해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 사족층의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 성장한 중인, 양인들이 양반의 권위와 재산에 정면으로 대립하였고 그것이 분산을 침해하는 형태로 구체화 된 것이다.

 

 

 

김경숙, 2002,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김경숙, 2012, 조선의 묘지 소송, 문학동네

이   화, 2013, 조선시대 산송자료와 산도를 통해 본 풍수윤용의 실제, 민속원

김성갑 외, 2017, 소송과 분쟁으로 보는 조선사회, 새물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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