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교과 연동 자료

이전

출사와 은일의 갈림 길에서, 목은고(牧隱藁)』

 

 

 

 

교과서 찾아보기

 

사료 원문과 번역

 

학습내용

 

참고문헌

 


 

『목은고

 

 

 

[중학교 국사]

Ⅳ. 고려의 성립과 발전 > 3. 몽골과의 전쟁과 자주성의 회복

[고등학교 국사]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2. 중세의 정치 > [6]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삼한의 학문은 그 기품이 있어 예로부터 선비가 많다고 칭해졌다. 그리하여 풍도가 높고 명성이 비할 바가 없어 시대마다 인재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자를 자신의 호로 삼는 이는 드물었으니,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뜻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것[:필자]을 칭하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아니면 숨어서 살며 벼슬하지 않는 것이 그 일상이었기 때문에 이로써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일까? 어찌하여 이와 같이 그것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일까? 최근에 계림의 최졸옹[최해 : 필자(이하 동일)]이 스스로 농은(農隱)이라 하였고, 성산의 이시중[이인복]이 스스로 초은(樵隱)이라 일컬었으며 담양의 전정당[전녹생]이 스스로 야은이라 일컬었으니 나는 곧 목()자에 숨기게 되었다. 지금 시중[이인복]의 친척이 되는 자안[이숭인] 또한 함께 하게 되었으니, 대개 도()자에 자신을 숨기었다.

    

三韓儒雅 古稱多士 高風絶響 代不乏人 鮮有以隱自號者 出而仕其志也 是以羞稱之耶 隱而居其常也 是以不自表耶 何其無聞之若是耶 近世雞林崔拙翁自號曰農隱 星山李侍中自號日樵隱 潭陽田政堂自號曰野隱 予則隱於牧 今又得侍中族子子安氏焉 蓋陶乎隱者也

    

牧隱文藁4 陶隱齋記

    

 

 

 

 

 

전통사회의 대다수의 선비들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습득한 바를 행하여 국가운영에 도움이 되는 관료가 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여겼다. 하지만 관료가 되는 것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것이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학문을 수양하고 관직에 나아가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것이 도()를 실현하는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방법이지만, ()를 지키는 것도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던 것이다.

공자는 선비가 자신이 습득한 것을 세상에 구현하는 행위는 적합한 때가 있으니 만약 자신이 어진 임금을 만나 도가 행해지는 시대에 있다면 출사하여 자신의 뜻을 펼쳐야 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다면 그 속에 들어가 자신과 자신이 습득한 도를 더럽히는 것 보다 초야에 묻혀 살면서 자신이 구현해야 할 바를 익히고 도를 지키는 삶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論語集註』 「泰伯)고 하였다. 어지러운 세상(亂邦)이란 위태로운 것은 아니지만 형정과 기강이 문란한(論語集註』 「泰伯) 사회라 한다. 따라서 어지러운 세상에 있는 이들은 자신의 출처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있었는데, 도를 지킨다는 관점에서 출사(出仕)’은일(隱逸)’은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부터 자신의 호()()’자를 쓰는 이들이 등장하였다. 농은(農隱) 최해, 초은(樵隱) 이인복, 야은(野隱) 전녹생, 포은(圃隱) 정몽주, 도은(陶隱) 이숭인 외에도 사은(思隱) 문익점, 어은(漁隱) 염흥방, 야은(冶隱) 길재 등등이 있다. 이색은 여러 자연의 삶 가운데 자신을 숨길 글자로 가축을 친다는 뜻의 목()자를 선택하였다.

자호를 사용한 것과는 다르게 이들 대부분은 고려 후기의 주요한 정치가이다. 다만 출사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출사의 뜻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는 국왕의 임명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고, 반대로 국왕의 임명에 불응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출사 여부와 별개로 당대에 대한 시선을 자호에 담아 표출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이들의 당대에 대한 시선과 출처에 대한 생각은 무엇일까? 고려후기 고위 관료군으로 출사여부가 명확하게 파악되고, 풍부한 시문을 많이 남겼던 목은 이색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이색은 1353(공민왕 2)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이듬해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응시하여 높은 등수로 합격하였다. 이에 따라 이색은 원과 고려에서 모두 관직을 받았는데, 이색은 고려로 돌아와 공민왕에게 신임을 얻으며 요직에 등용되었다. 1367(공민왕 16) 5월 공민왕은 성균관 중영을 명령하며 유학교육 진흥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이색은 대사성직을 맡아 이를 책임지게 되었다. 성균관의 생원을 증치하고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을 교관으로 선발하였으며 이색 본인도 명륜당에서 직접 강의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이는 고려사를 찬술한 이들도 정주성리학이 비로소 흥하였다[程朱性理之學始興]’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시기는 신돈집권기였다. 당시 공민왕은 세신대족, 초야신진, 유생들과 같은 기존 정치세력을 불신하며 세상을 떠나 홀로선 사람[離世獨立之人]’을 등용하여 개혁을 진행하였다. 그 인물로 신돈이 선택되었고, 그는 특히나 좌주-문생 및 동년관계로 관료사회의 안팎에서 영향력을 갖는 유학자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특히 이색의 좌주인 이제현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이제현은 당대 저명한 학자 관료로서 고시관을 다수 역임하였기 때문에 휘하에 많은 문생이 있었는데, 신돈은 이들의 모습을 나라의 도적으로 비유하면서 이제현을 직접 거명할 정도였다. 더욱이 신돈은 기존 관료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등용되어 순식간에 요직을 겸하면서 국정개혁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유학자들과 관료사회 내부에서도 신돈을 중심으로 하는 공민왕의 개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이색은 이에 대한 어떠한 문제제기 없이 공민왕의 정치에 협력하였다. 더욱이 자신을 중용한 공민왕에 대한 충절을 이후에도 종종 시로 표현한 사실로 보아, 그 시대가 결코 부정적으로 인식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면서 세신거족초야신진유생을 비판하였지만, 이것은 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폐쇄성 혹은 독점성을 비판한 것이지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이들의 관료진입을 막은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공민왕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학문의 진흥과 인재육성에 공을 들였기 때문에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이러한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이색에게 매우 자부심을 가질 만 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1371(공민왕 20) 모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르면서 이색의 은거기가 시작되었다. 공민왕은 이듬해 바로 그를 기복시키지만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삼년상을 마쳤는데, 이후 공민왕 시해와 1375(우왕 1) 북원외교 재개에 반대한 이들이 축출되는 과정을 겪으며 은거의 시기가 길어졌다. 당시 축출된 이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생이자 성균관에서 함께 진강하였던 이들이었다. 이듬해 정몽주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이 해배되거나 종편이 허락되기는 하였으나, 국정에서는 이전과 같은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이색은 1379(우왕 5) 5월 국왕의 사부가 되었고, 10월에는 종2품의 정당문학으로 복직을 하였다. 8년만의 복직이었다.

이색은 1377(우왕 3) 공민왕을 기리기 위해 광통보제선사비를 세울 때 비문작성을 맡은 일을 계기로 1379(우왕 5) 우왕의 사부가 되었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하였다.(시고16 <明日當進講書筵 追念先王寵幸之恩 不勝感激 吟成一首>) 또한, ‘하늘을 대신해 순순히 계도하련다[願天啓迪代諄諄]’(시고16 <明日當進講書筵 追念先王寵幸之恩 不勝感激 吟成一首>)라고 포부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적 군주론을 강의하고자 하였던 이색의 포부와 달리 우왕과의 서연은 다양한 이유들로 자주 철강 되었다. 당시 이색은 우왕에게 논어태백편을 진강하면서 도()를 지키는 것에 대한 고민(시고16 <進講篤信好學 守死善道八字>)과 녹봉을 구하는 자신의 처지를 자책(시고16 <進講三年學 不志於穀 不易得也一章>)하면서 자신의 학문이 여전히 부족함을 토로하였다. 이때의 관직생활은 1380(우왕 6)에 끝이 났다. 이에 대해 이색은 자신을 세상에 시기 받고 은퇴한 나그네[簑笠有客遭疑猜]’(시고26 <有感>)라 표현하고 있어, 원치 않는 상황으로 인해 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색은 당시 현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82(우왕 8)의 시에서는 간사한 계책을 하늘이 간혹 돕고 / 충신의 말이 때때로 용납되지 못하며 / 나라 위급한데 사당(私黨)이 기승을 부리고 / 임금이 허약한상황(시고32 <讀史>)이라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1380(우왕 6)을 전후로 이인임에 의해 지윤, 양백연, 목인길, 경복흥 등이 제거되고, 이색 자신 또한 무언가의 이유로 정당문학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후 이인임이 권력을 장악하여 정국을 주도하면서 국왕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던 시기에 대한 단상이었다. 이에 이색은 1382(우왕 8) 한양천도를 단행하고자 한양에 나아가 있던 우왕을 직접 찾아갔다. 이러한 자신의 행보가 개인의 영달을 위한 아첨으로 비춰질까 걱정하기도 하였지만(시고33 <赴闕庭 起居而歸>), 군주를 도와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한다면 못할 바 없다[得見吾民無凍者 五更待漏亦何難]는 마음을 피력하며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였다(시고33 <紀事>). 이후 같은 해 11월에 판삼사사에 복직하였으나 당시 심해진 지병으로 업무수행의 어려움을 토로하다가 이듬해 3월 사직하게 된다. 이후 부친 이곡의 뜻을 이어 신륵사 대장불사 사업에 전념하였고, 공민왕을 기리는 뜻을 더하여 국가적인 사업으로 승격된 것을 잘 마친 후인 1383(우왕 9) 다시 판삼사사에 복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7월에 다시 치사하고 한산부원군에 봉해졌는데, 1386(우왕 12)에는 현직이 아닌 한산부원군으로서 고시관인 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우왕대에는 공민왕대와 달리 시부(詩賦)로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때 이색은 책문을 시험 과목에 다시 포함시켜 시무에 대한 능력을 평가하였고, 과거의 규정을 강화하여 엄정하게 처리하였다. 당시 동지공거였던 염흥방이 조민수 아들에 대한 합격 청탁을 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았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후 1388(우왕 14) 우왕에 의해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등 정권을 장악했던 이들이 축출된 후에 재차 판삼사사로 복직되었고, 이후에는 국정운영을 담당하는 고위 관료이자 조선 건국에 반대하는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우왕대의 출사는 관료로서 공백기를 타개하고자 하였던 이색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흔히 어지러운 세상이라 인식하면서도 출사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판단한다.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無道則隱]’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우왕대 출사 의지를 보였던 이색은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우왕대 정치 상황은 소수 권신이 권력을 장악한 시기로 파악된다. 1375(우왕 1) 북원외교 재개로 정국의 소란을 겪은 이후 이인임에 의한 정치적 숙청이 진행되었고, 이후로도 공민왕대 시작된 여러 정치개혁의 흐름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이색은 우왕대 여러 정치적 사안에 대해 다소 관조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공민왕대 삼년상을 마친 후에도 한산군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종으로 일컬어졌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음에도, 1375(우왕 1) 북원외교를 반대하며 축출되던 유신들을 위해 적극적인 구명을 하지도 않았고, 최영의 우왕 유모 축출, 이인임의 권력 장악과 같은 일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이거나 진보적인 비판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신돈집권기 성리학 중흥에 참여하고, 국왕의 사부가 되어 논어』 「태백편을 강의하며 성인군주가 되도록 계도하고자 한 것, 지공거가 되어 과거의 엄정성을 높이고 시부(詩賦)로 인재를 선발하던 방식에서 종장에 책문을 시험하게 하여 성리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시무에 능한 인재를 뽑고자 한 노력은 당시 그의 처지에서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이색은 공민왕대 이미 고위 관료군이 되어 현직에 있지 않는 동안에도 한산군한산부원군으로서 이따금 도당에 출입하며 소극적이긴 하지만 국정운영과 무관치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때문에 완전한 은일의 삶을 선택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 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자호에 담되, 성리학 증진과 이를 바탕으로 한 인재육성이라는 가치에 비교적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는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김인호, 2006, 이색의 자아의식과 심리적 갈등 우왕 5년기를 중심으로 -」 『역사와 현실62.

도현철, 2011, 목은 이색의 정치사상 연구, 혜안.

이익주, 2013, 이색의 삶과 생각, 일조각.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