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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향약의학의 정신을 계승한 의서, 『동의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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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동의보감

 

 

 

[중학교 국사]

Ⅵ. 조선사회의 변동 → 1. 붕당 정치와 탕평책 → [3] 실학자들은 어떤 사회를 추구하였는가?

 

[고등학교 국사]

Ⅵ. 민족 문화의 발달 → 4. 근대 태동기의 문화 → [3] 과학 기술의 발달


 

 

우리 선종대왕은 몸을 다스리는 법도를 대중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으로 확장시켜 의학에 마음을 두시고 백성의 병을 걱정하셨습니다. 병신년(1596년)에 궁중 의사 허준을 불러 하교(下敎)하시기를, "근래에 중국의 의서를 보니 모두 조잡한 것을 초록하고 모은 것이어서 별로 볼만한 것이 없으니 마땅히 여러 의서들을 모아 책을 편찬해야겠다. 또 사람의 질병은 모두 양생을 잘 조절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것이니 수양이 가장 우선이고 약물치료는 그 다음이다. 여러 의서들은 번다하니 요점을 가리는데 힘쓰라.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향약(鄕藥)이 많이 생산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마땅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병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我宣宗大王, 以理身之法, 推濟衆之仁, 留心醫學, 軫念民瘼. 嘗於丙申年間, 召太醫臣許浚敎曰, 近見中朝方書, 皆是抄集庸瑣, 不足觀爾, 宜裒聚諸方, 輯成一書. 且人之疾病, 皆生於不善調攝, 修養爲先, 藥石次之. 諸方浩繁, 務擇其要. 窮村僻巷無醫藥, 而夭折者多. 我國鄕藥多産, 而人不能知爾, 宜分類並書鄕名, 使民易知.


『동의보감』 「서문」



또 중국의 약과 우리나라의 약을 기록했는데 우리나라 약의 경우에는 우리말 이름과 산지, 채취시기, 말리고 다듬는 방법을 기재하였으니 갖추어 쓰기에 편리하고, 멀리서 구하거나 얻기 어려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왕절재(王節齋)가, "동원(東垣)은 중국 북쪽지역의 의사인데, 나겸보(羅謙甫)가 그 법을 전수받아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지역에까지 명성이 알려졌다. 단계(丹溪)는 중국 남쪽지역의 의사인데, 유종후(劉宗厚)가 그 학문을 이어받아 섬서(陝西) 지역에까지 명성을 떨쳤다"라고 하였으니, 의학에서 남북(南北)의 명칭이 있어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동방에 치우쳐 있으나 의약(醫藥)의 도는 면면히 이어졌으니 우리나라의 의학도 동의(東醫)라고 할 만합니다. 거울은 만물을 밝게 비추어 그 형체를 놓치지 아니합니다. 이 때문에 원대(元代)에 나겸보가 『위생보감(衛生寶鑑)』을 짓고, 명대(明代)에 공신(龔信)이 『고금의감(古今醫鑑)』을 짓고 모두 감(鑑)으로 이름을 삼았으니 그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책을 펼쳐 한 번 보면 병의 길흉(吉凶)과 경중(輕重)이 맑은 거울처럼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침내 『동의보감』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고인이 남긴 뜻을 흠모하기 때문입니다.

 

且書唐藥鄕藥, 鄕藥則書鄕名與産地及採取時月, 陰陽乾正之法, 可易備用而無遠求難得之弊矣. 王節齋有言曰, 東垣, 北醫也, 羅謙甫傳其法, 以聞於江淅. 丹溪, 南醫也. 劉從厚世其學, 以鳴於陝西云, 則醫有南北之名尙矣. 我國僻在東方, 醫藥之道不絶如線, 則我國之醫亦可謂之東醫也. 鑑者, 明照萬物, 莫逃其形. 是以元時羅謙甫有衛生寶鑑, 本朝龔信有古今醫鑑, 皆以鑑爲名, 意存乎此也. 今是書披卷一覽, 吉凶輕重, 皎如明鏡. 故遂以東醫寶鑑名之者, 慕古人之遺意云.


『동의보감』 「집례」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왕실의 주치의였던 허준(1539-1615)이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서적을 집대성하여 저술한 한의학 전문 서적이다. 1597년(선조 30) 작업에 착수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완성하였고, 1613년(광해군 5)에 총 25권으로 간행하였다. 이정구(李延龜)가 쓴 서문에 따르면, 선조는 허준에게 새로운 의학서의 편찬을 지시하면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번다하고 조잡한 중국 의학서들을 간결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것, 둘째는 치료보다 예방에 치중할 것, 그리고 셋째는 일반 백성들도 볼 수 있도록 쉽게 써줄 것 등이었다. 요컨대, 기존의 의학적 전통을 집대성하고 양생술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을 조선의 백성들이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근거하여 『동의보감』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체계적인 항목 선정과 논리 전개이다. 『동의보감』은 몸의 내부를 구성하는 오장육부 등의 구조와 질환을 다룬 「내경편(內景篇)」, 머리, 눈, 코를 비롯하며 피부, 뼈, 항문, 손발 등 몸 바깥 부위의 구조와 질환을 다룬 「외형편(外形篇)」, 각종 질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법을 집중적으로 설명한 「잡병편(雜病篇)」, 한약의 효능과 사용법을 담은 「탕액편(湯液篇)」, 침과 뜸에 대한 내용을 담은 「침구편(鍼灸篇)」의 다섯 편으로 되어 있다. 『동의보감』은 이러한 목차를 통해서 의사는 반드시 인체 내부와 외부를 먼저 파악하여야 하고, 질병이 발생한 다음에는 그 원인과 증상을 잘 파악하고 나서 치료에 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의보감』은 다양한 방식으로 검색이 가능하도록 배열했다. 즉, 질병을 통해 처방을 알 수도 있고, 처방을 통해 병증을 알 수도 있는 방식을 취하여 사람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구성과 분류 체계는 『동의보감』이 지닌 독창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또 『동의보감』은 양생의 철학을 바탕으로 의학에서 예방의 중요성을 전면적으로 인식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양생론에서는 인간의 질병이 단지 신체적 원인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신적, 심리적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본다. 특히 가장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는 「내경편」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이 자연과 사회와의 조화 속에서 결정된다는 인체관이 담겨 있고, 세부 항목인 ‘신형(身形)’에서는 인간의 탄생과 삶의 과정, 그리고 병 없이 오래 사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양생법에는 호흡법의 일종인 태식법(胎息法)과 체조의 일종인 도인법(導引法), 그리고 단(丹)을 기르는 단전수련법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전문적인 양생법 외에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양생법도 제시하였다. 봄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고, 여름과 가을에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며, 겨울에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야 한다. 겨울에는 머리를 차게 하고 봄과 가을에는 머리와 발을 모두 차게 해야 한다는 내용들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전통 의학, 즉 향약(鄕藥) 의학의 정신을 계승한 의서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향약의서’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중심으로 처방을 구성하여 치료하는 방법을 기술한 의서를 의미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향약의서들로는 13세기 초에 저술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1399년의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1433년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향약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15세기의 『향약집성방』은 조선 땅에서 생산되지 않는 약재는 모두 생략한 채 국내산 약재 703종의 향약만을 이용해 처방을 구성하였다. 이는 주변에 늘상 있는 약재를 쉽게 구해서 병을 쉽게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 『향약집성방』은 고려시대까지의 고유 의학 서적뿐 아니라 중국 의서들까지도 총망라하여 향약만으로 구성할 수 있는 처방을 모두 모아놓은 의서였다. 이로 보아 당시의 향약의학은 우리 고유 의학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과 동시에 중국 의학과의 교류를 통해 더욱 풍부한 활용법을 계발하면서 발전해 나갔고, 이는 16세기 『동의보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허준이 직접 쓴 『동의보감』 「집례」에는 책 제목에 담긴 뜻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금·원나라의 저명한 의사들 중 이동원(李東垣)은 중국 북쪽 지역의 의사[北醫]로, 주단계(朱丹溪)는 중국 남쪽 지역의 의사[南醫]로 일컫는데, 전자는 강소와 절강지역을 아우르고, 후자는 섬서지역을 포괄한다. 허준은 말한다. “의학에서 남북의 명칭이 있어 온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동방에 치우쳐 있으나 의약(醫藥)의 도는 면면히 이어졌으니 우리나라의 의학도 동의(東醫)라고 할 만합니다.” 당시 천하의 중심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세계’ 그 자체였다. 중국의 북쪽과 남쪽은 도저히 같은 나라라고 하기엔 기후와 음식이 너무 달랐다. 당연히 체질과 질병 및 치료법도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북의와 남의의 전통은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동의’란 중국 남쪽과 북쪽의 의학 전통에 비견될 만한 동쪽의 의학 전통 즉, 조선의 의학 전통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허준은 기존 의서들에 실린 약재들이 번다하여 사람들이 활용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중국의 약과 우리나라 약을 기록하되, 향약은 우리말 이름과 산지, 채취시기, 말리고 다듬는 방법을 기재하였으니 갖추어 쓰기에 편리하고, 멀리서 구하거나 얻기 어려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향약집성방』과 마찬가지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들로 간편하게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국내산 약재에는 한자와 함께 한글 이름을 기재함으로써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각 편의 말미에 한 가지 약재만으로도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단방(單方)을 기록하였는데, 콩나물, 도라지, 파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물을 활용하여 약재로 쓸 수 있게 하였다. 이는 가난한 백성들도 값싸고 간편하게 치료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전통 향약의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동의보감』은 국왕의 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어진 정치를 실천하고자 했던 국왕의 노력이 담겨 있다. 허준이 선조로부터 처음 명을 받은 1596년(선조 29)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전란의 시점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전후로 함경도·평안도 등 북쪽 지역에서부터 충청·경상·전라, 그리고 서울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에 걸쳐 역병이 창궐하였다. 여기에 이상기후로 인한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은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 의료 대책이 시급했고, 이에 선조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의서를 편찬하도록 한 것이다. 즉 서문에 나타나듯, 선조는 대중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으로 의학을 중시하고 백성의 병을 걱정하여 『동의보감』의 편찬을 명한 것이다.


『동의보감』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의학 연구와 환자 치료에 유용하게 활용되어 왔다. 중국 명나라는 『동의보감』이 인쇄되자마자 사신을 보내 한 질을 구해 갔으나,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민간에 보급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되었을 때, 중국 의사들은 이 책의 보급을 간절히 바란다는 뜻을 조정에 여러 번 건의하였다. 이에 1766년 청나라 고종은 『동의보감』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후 전국 각지에 보급시켰고, 이후 현재까지 30여 차례 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1663년에 사신이 와서 이 책을 구해갔으며, 1724년에 일본의 경도서림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일본인 의사 ‘후지하라’는 서문에서 “이 책은 이론이 정밀하고 오류가 없어 생명을 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책으로, 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극찬하였다. 러시아에서 간행된 의학대백과사전에는 『동의보감』이 동양에서 간행된 3대 의학백과사전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

 

 

 

김호, 2000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일지사

고미숙, 2012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북드라망

김주영 편저, 1999 『허준의 동의보감 25권의 비밀』, 미래M&B

김남일 외, 2016 『동의보감의 지식 체계와 동아시아 의과학』,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는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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