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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역사의 정통을 세우다 『동사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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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중학교 국사]

Ⅵ. 조선사회의 변동 → 1. 붕당 정치와 탕평책 → [3] 실학자들은 어떤 사회를 추구하였는가?

 

[고등학교 국사]

Ⅵ. 민족 문화의 발달 → 4. 근대 태동기의 문화 → [2] 실학의 발달

 

 

 

동방의 역사 또한 갖추어 있다. 기전체로는 김문열(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정문성(정인지)의 《고려사》가 있고, 편년체로는 서사가(서거정)와 최금남(최보)이 하교를 받들어 지은 《동국통감》이 있다. 이를 따라서 유계의 《여사제강》과 임상덕의 《동사회강》이 있으며, 초절(抄節)한 것으로는 권근의 《동국사략》과 오운의 《동사찬요》 등의 책이 있어 빈빈하게 성하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소략하면서 사실과 틀리고, 《고려사》는 번잡하면서 요점이 적고, 《동국통감》은 의례(義例)가 어그러짐이 많고, 《여사제강》과 《동사회강》은 필법이 혹 어그러진 것이 있다. 오류로 인하여 오류를 답습하고 잘못으로 잘못 전한 것에 이르러서는 여러 역사서가 비슷하다. 내가 그것을 읽고는 개연히 바로잡을 뜻이 있어, 동국의 역사 및 중국의 역사에서 동국의 일에 언급한 것을 널리 가져다가 산절(刪節)하여 책을 만들되, 일체 자양(紫陽)이 이루어 놓은 법[주희의 강목법]을 따라 개인의 방의 상자에 잘 간직해 두고 고열(考閱)하는 자료로 삼고자 한 것뿐이요, 감히 찬술로 자처한 것은 아니다.


대저 역사가의 큰 법은 통계(統系)를 밝히고, 찬역(簒逆)을 엄히 하고, 시비를 바로잡고, 충절(忠節)을 포양하고, 전장(典章)을 자세히 해야 한다. 그런데 여러 역사책이 여기에 실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으므로 약간 손질을 가하고, 오류가 심한 것에 있어서는 별도로 부록(附錄) 2권을 만들어 아래에 붙여 놓았다. 책이 이루어진 지 20여 년이 되도록 정서하지 못하였더니, 병신년(1776, 영조 52) 겨울에 호남의 수령으로 나가서, 공무를 보는 여가에 비로소 1본을 쓰고, 이어서 그 사유를 적어 가숙(家塾)의 자제에게 준다.

 

東方史亦備矣. 紀傳則有金文烈, 鄭文成之三國高麗史, 編年則徐四佳, 崔錦南奉敎撰通鑑. 因是而兪氏提綱, 林氏會綱作焉, 抄節則有權氏史畧, 吳氏撰要等書, 彬彬然盛矣. 然而三國史踈畧而爽實, 高麗史繁冗而寡要, 通鑑義例多舛, 提綱綱筆法或乖. 至於因謬襲誤, 以訛傳訛, 諸書等爾. 鼎福讀之慨然, 遂有刊正之意, 博取東史及中史之有及于東事者, 一遵紫陽成法, 彙成一帙, 以爲私室巾衍之藏, 資其考閱而已, 非敢以撰述自居也. 大抵史家大法, 明統系也, 嚴簒賊也, 褒忠節也, 正是非也, 詳典章也. 諸史於此, 實多可議, 故一皆釐正, 而至若訛謬之甚者, 別爲附錄二卷, 系之于下. 書成二十餘年, 久未繕寫, 丙申冬, 承乏湖邑, 簿領之暇, 書一本, 因述其由, 用授家塾子弟.


『동사강목』 「서」

 

 

정통(正統)은 단군⋅기자⋅마한⋅신라 문무왕【9년 이후】⋅고려 태조【19년 이후】를 말한다.【신라는 고구려에 대해 나라를 합병한 예를 썼으므로 통일한 이듬해에 정통을 이었다. 고려는 견훤에게 도적을 평정한 예를 썼으므로 통합한 해에 정통을 이었다】 무통(無統)은 삼국이 병립한 때를 말한다. 【옛 역사서에는 백제가 의자왕에서 그쳤으나, 의자왕 뒤에 왕자 풍이 3년 동안 즉위하였으므로 이제 풍으로 대를 이었다】

 

正統, 謂檀⋅箕⋅馬韓⋅新羅文武王【九年以後】⋅高麗太祖【十九年以後】.【新羅之於高句麗, 用幷國之例, 故繼正統, 於混一之明年. 高麗之於甄萱, 用平賊之例, 故繼統於統合之年.】 無統, 謂三國幷立之時.【舊史, 百濟止於義慈, 義慈後王子豊立三年, 故今以豊繼世.】


『동사강목』 「범례」 통계

 

 

 

『동사강목』은 안정복(安鼎福, 1721~1791)이 1778년(정조 2)에 완성한 조선 후기 대표적인 역사서로 본편 17권, 부록 3권 총 20권 20책으로 이루어져있다. ‘동사(東史)’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조선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책에서는 고조선에서 고려 공양왕까지 다루고 있다. ‘강목(綱目)’은 강목체(綱目體)의 역사 서술 방식으로, 전체적으로는 시간 순서로 기술한 편년체이지만 역사가의 판단에 따라 중요한 항목은 ‘강’, 세부내용은 ‘목’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안(按)’을 붙여 자신의 견해를 기술함으로써 역사가의 평가를 강조하였다. 이는 주희(朱熹)가 유교적 포폄(褒貶) 원칙에 따라 정통과 비정통을 구분하고, 옳고 그름[是非]를 분별하여 저술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따른 것이었다. 안정복은 현존하는 역사서에는 삼국시대 이전 기록은 부실하고 오류도 많으며, 교훈이 되는 역사서술이 없고, 수 천 년이 넘는 동방 역사에서 제대로 된 강목체 역사서술이 한 권도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서론에서는 이와 같은 기존 역사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 책을 편찬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동사강목』의 특징 중 하나는 정통국가 및 정통군주와 그 이외를 구별하여 서술함으로써 우리 역사상 정통의 계보를 확립했다는 것이다. 정통론은 한 시대에 두 개 이상의 왕조가 같이 있다 하더라도 오직 천하에는 하나의 정통만이 있다고 하는 전국시대 ‘춘추대일통(春秋大一統)’과 왕조 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오행설(五行說) 사상을 기원으로 한다. 정통론은 중국 한족(漢族) 왕조를 천명(天命)에 의해 세워진 정통 왕조로 합리화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중국 송(宋)나라 때 주희에 의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주희는 세계를 중화[華]와 오랑캐[夷]로 구분하면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강하게 드러냈다. 이때 정통론은 복잡한 중국의 역사를 중국 정통의 역사와 오랑캐의 역사로 구분하는 역할을 하였다. 즉, 중국에 여러 개의 왕조가 대치했을 때 어느 것을 정통으로 보는가의 문제였고, 정통은 철저하게 성리학적 기준에 입각하여 설정되어 정치적인 통일보다 유교적 문화의 선진·낙후 여부가 정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당시 송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으므로, 송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려는 명분으로도 작용하였다. 그래서 정통론에는 기본적으로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 세계관이 내재된 것이기도 하다. 


정통론은 조선 후기 역사학의 특징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조선 후기 역사학에서 정통론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것은 17세기 중엽 홍여하(洪汝河, 1621~1678)의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이었는데, 여기서 홍여하는 기자-마한-신라를 정통으로 하는 체계를 확립하였다. 또한 18세기 초엽에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은 『동사회강(東史會綱)』에서 삼국 무통-통일신라-통일 고려로 체계화하기도 하였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정통국가를 단군-기자-마한-통일신라-통일 이후의 고려로 보고 동국의 역사를 체계화하였다. 이 계보에서 알 수 있듯이 안정복은 단군(檀君) 조선을 정통의 첫머리에 두었고, 중화의 문화를 직접 전달한 기자(箕子)를 강조하였다. 또한 고조선의 위만(衛滿)은 왕위를 찬탈한 찬적(簒賊)이기 때문에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기자의 후손인 기준이 마한으로 남하하였기에 마한을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마한정통론] 마한이 멸망한 뒤의 삼국시대는 서로 균등하였던 현실을 고려하여 정통국가가 없는 무통(無統)의 시대로 보았다. 백제 의자왕 이후 풍의 3년 동안의 기년체계를 기술함으로써 백제의 멸망연도를 기존보다 3년 이후로 본 점 또한 기존의 역사서와는 차별되는 점이었다. 이러한 정통론에 입각하여 정통국가와 비정통 국가를 구별하여 여러 표기에서도 차별을 두었다. 예를 들면 정통의 임금은 왕(王), 정당성이 없는 임금은 모국왕(某國王), 가야의 김수로와 같은 소국(小國)의 임금은 모국군(某國君), 도적은 그냥 모(某)라고 썼으며, 여왕을 여주(女主)로, 왕위에서 쫓겨난 왕은 폐왕(廢王)으로 구분하였다.


『동사강목』의 또 다른 특징은 역사 서술에서 절의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며 표창하였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거나 역적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역사가는 ‘찬역(簒逆)을 엄히 하고, 시비를 바로잡고, 충절(忠節)을 포양해야 한다.’는 서문의 서술 원칙이 그대로 역사기술에 적용된 것이다. 그 예로 위만조선에서 한의 침략에 끝까지 항쟁한 성기(成己)와 백제의 계백(階伯) 및 끝까지 목숨을 바치며 신라군에 항쟁한 백제 옹산성 군사들의 충절을 높게 찬양했고, 신라에서 고려로 벼슬을 한 최언위(崔彦撝)의 죽음에 대한 기사에서는 그의 관직을 기록하지 않고 낮게 평가했으며, 마음대로 정권을 휘두른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남건(南建), 고려의 정중부(鄭仲夫)·최충헌(崔忠獻)은 스스로 높은 관직을 차지했다고 기술함으로써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동사강목』은 고증이 뛰어난 역사서로 손꼽힌다. 이 책은 『삼국사기』, 『고려사』, 『해동제국기』등 43종과 『사기』, 『한서』를 비롯한 중국서적 17종 등 광범위한 문헌들을 참고하여 비교· 검토하는 고증학적 연구방법을 사용하였다. 특히 지명의 고증에 관심을 기울여 고조선·고구려·발해 등 고대 북방 지명들에 대해서 치밀하게 고증하였고, 삼국의 역사를 다루면서 다양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전거를 엄선하여 기왕의 역사서들의 오류를 시정하기도 하였다. 책의 서두에는 각 국가의 계통도를 도표로 표현하였고, 그 뒤에 주요 국가의 강역을 지도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독창적인 역사 서술 방식이었다.


조선후기는 실학의 발달과 함께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확대되는 시대로 파악된다. 『동사강목』은 국학연구가 확대되는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역사서로 그 의의가 중요시되었다. 실학사상의 관점 하에서 『동사강목』의 정통론은 소속 왕조에 대한 의리를 주장했던 주자학적인 명분론과 달리, 한국사도 중국사만큼 역사가 유구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원래 중국의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정통론을 ‘우리역사’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중화주의를 탈피하여 중국과 대등한 역사발전을 내세운 자주성을 지니고, 민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높이는데 이바지한 역사관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또한 『동사강목』은 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치밀하게 고증하고, 지리적 측면과 제도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실학의 새로운 역사학 방법론을 반영한 역사서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한편, 『동사강목』을 조선후기 화이론에 입각한 ‘조선중화사상’의 틀 속에서 설명하는 관점도 있다. 동아시아 중화질서를 인정하는 전제에서 수립되고 지속되었던 조선사회는 두 차례 호란과 뒤이은 명청교체를 겪으면서 중화와 이적이 역전되는 충격적인 현실을 설명하고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중화의 여러 요소(지역, 종족, 문화) 중 문화적 요소를 화이 분별의 주된 기준으로 간주하면서 유교 문화를 잘 구현한 곳이면 어디든 중화이며, 따라서 유교문화를 잘 지켜나가는 조선 역시 중화라는 이른 바 ‘조선중화사상’이 형성되었다. 본래 정통론은 중국적 중화의식의 소산이며, 소속왕조에 대한 의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동사강목』에서 보이는 정통론 또한 이 연장선에서 조선이 중화문화의 적통 계승자라는 인식에 입각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중화문명을 전수해준 기자의 계보를 찾기 위한 노력이 마한 정통론으로 이론화되었다고 보는 연구도 있다. 이처럼 강화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통 왕조의 계보를 세우고, 유교적 기준에 따라 국왕의 치적과 신하의 충절을 평가했다는 점에서 성리학 이념과 중화주의의 영향을 받은 역사서로 평가하기도 한다.

 

 

 

강세구, 1994 『東史綱目硏究』, 민족문화사

허태용, 2009 『조선후기 중화론과 역사인식』, 아카넷

이강한 외, 2015 『실학시대의 역사학 연구』, 사람의 무늬

김남일, 2011 「『동사강목』의 편찬배경과 강목체 기년」, 『한국사학사학보』24, 한국사학사학회

김경태, 2018 「이익과 안정복의 東國正統論 재검토」, 『한국사학보』70, 고려사학회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는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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