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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연기』, 세상의 중심에 질문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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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담헌연기

 

 

 

[중학교 국사]

. 조선사회의 변동 > 1. 붕당정치와 탕평책

 

[고등학교 국사]

.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근대 태동기의 정치 > [5] 대외 관계의 변화


 

 

[유포문답]

(홍대용이 서양인 선교사들을 보려고 청하자) 문지기가 대답하였다.

대인들이 이미 보고 싶어 하지 않으니 우리는 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홍대용이 종이에 다음과 같이 써서 전달하였다.

두 번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오니,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하여 부끄럽고 송구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에 삼가 물러나서 다시는 감히 찾아오지 않겠으니, 양해와 용서를 바랍니다.”

(잠시 후) 문지기가 찾아와서

대인들께서 만나보시겠다고 합니다.”

(홍대용과 서양인 선교사들이 함께 자리하였다.) 할러슈타인(중국명 유송령)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무엇을 알고자 하십니까?”

여러분들께서 오성(=토성)의 위치를 관측하는 법과 운행을 계산하는 법을 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劉鮑問答

門者言大人旣不欲見 吾不可再言

遂以小紙書曰 再進請敎 未蒙引接 未知獲戾 不勝愧悚 謹此告辭 不敢再溷門屛 幸諒恕之

門者卽出言大人請見

答曰 不知尊駕欲知何端

余曰 竊聞僉位兼尙測候五星經緯推步之法 願問是法來

담헌연기』 「유포문답

 

[의산문답]

(실옹의 말) 중국은 서양에 대해서 경도(經度)의 차이가 180도에 이르는데, 중국 사람은 중국을 중심으로 삼고 서양을 대척점으로 삼으며, 서양 사람은 서양을 중심으로 삼고 중국을 대척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늘 아래 땅 위에 사는 사람이라면 사는 지역과 상관없이 모두 같으니, 땅을 구()라고 하는 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구를 우주에 비교한다면 미세한 티끌만큼도 안 되며, 저 중국을 지구에 비교한다면 십 수 분의 1밖에 안 된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는가? 중국이나 오랑캐나 한 가지다.

 

[毉山問答]

且中國之於西洋 經度之差 至于一百八十 中國之人 以中國爲正界 以西洋爲倒界 西洋之人 以西洋爲正界 以中國爲倒界

其實戴天履地 隨界皆然 地球之說 更無餘疑

夫地界之於太虛 不啻微塵爾 中國之於地界 十數分之一爾

自天視之 豈有內外之分哉 華夷一也

담헌서』 4의산문답


 

 

 

 

조선인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어디였는가 

우리들은 모두 태양계의 중심은 태양이고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구는 동그란 공과 같은 모양으로 생겼으며, 지구의 한가운데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지구가 동그란 공의 모양이 아니라 평평한 사각형 위에 떠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세상에도 중심이 있다고 이해하였다.

 

 

조선인들이 상상한 지구의 모습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모양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조선 초 제작된 세계지도

      

 

왼쪽 그림을 보면 하늘은 동그란 모양이고, 땅은 네모난 모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의 그림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것으로, 조선 초 만들어진 세계지도이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각형 안에 전 세계가 들어가 있고, 우리나라는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세계의 중심에는 중국이 위치해 있으며 왼쪽에는 유럽과 아프리카가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은 나라를 세우는 순간부터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조선 초에는 명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를 천조국으로 여겼고, 매년 명 황제의 생일, 동짓날, 구정 등에 맞춰서 사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들고 찾아가 조공을 바쳤다. 그리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명에 새로운 왕의 즉위 사실을 알리는데, 그러면 명에서는 죽은 왕에 대한 애도와 함께 새로운 왕에 대한 임명장을 내려주었다.

 

지구는 둥글다!

15세기가 되면 동양과 서양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명나라의 환관이었던 정화는 7차례에 걸쳐 서쪽으로 항해에 나섰다. 그 결과 아프리카의 동해안에 이르게 되었고 명나라의 위세를 보다 먼 곳까지 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서양에서도 대항해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에스파냐에서 출발하여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497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양을 개척하고, 1522년에는 마젤란이 세계 일주에 성공하게 된다. 세계 일주의 성공은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었다.

서양인들은 곧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물산도 풍부하고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교역의 대상으로 삼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선교사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불모의 지대였던 중국을 교화시키고자 많은 노력들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중국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서양의 기술로 만들어진 여러 과학 기구들이나 세계 지도들을 바쳤고, 서양의 천문학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달력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들은 중국의 공식 천문학 기구였던 흠천감의 책임자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선교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고 매년 중국을 방문하였던 조선인 사신들에 의해 서양 학문이 조선 사회로 전달되기 시작하였다.

 

홍대용, 서양인 선교사를 대면하다

서양 선교사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 교리를 동양에 전파하기 위해 한문으로 다양한 저술들을 제작하였다. 그렇게 제작된 서양 서적들은 조선 사신을 통해 조선에 전달되었고, 조선의 학계를 자극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서양의 학문을 탐구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관상감의 달력 제작자들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달력 제작을 책임지게 되자 조선에서 만든 달력이 중국과 차이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서양의 학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남인계 인물들이었는데 18세기에 이르러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었다. 정치적 소외감을 극복하기 위해 이들은 다양한 학문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는데 서학까지 그 손길이 미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노론계의 젊은 세대들이 서양의 학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들은, 자신들의 인맥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중국행 사신단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머무르고 있던 서양인 선교사들과 만나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고,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런 일련의 지식인들을 북학파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홍대용은 북학파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앞서 소개하였던 사료 중 첫 번째 유포문답은 홍대용이 서양인 선교사와 만나 대화한 기록이다. 홍대용은 몇 차례에 걸쳐 서양인 선교사와의 만나고자 하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만남이 성사되지 않았다. 또 기록을 살펴보면 서양인 선교사들은 홍대용과의 만남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홍대용은 집요하리만치 만남을 시도하여 결국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서양인 선교사들이 홍대용에게 찾아온 용건을 묻자, 홍대용은 서양의 학문을 배우고자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홍대용이 배우고자 하였던 서양의 학문은 바로 서양의 자연과학이었다. 사실 조선사회에서 자연과학은 주류적인 학문이 아니었다. 천문을 관측하고 여러 도구들을 제작하는 것은 중인들의 일이었고, 양반들은 철학적인 사색에 힘쓰는 것을 자신들의 책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홍대용은 젊은 시절부터 자연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하였다.

 

홍대용이 바라본 세계

서양인 선교사들과의 만남, 그리고 서양 학문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몇 가지 글들을 통해 발표되었다. 특히 주해수용이라는 글에서는 서양의 기하학을 수용하는 한편, 이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측량술과 의기에 대한 내용을 강조하였다. 즉 서양 과학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였던 개혁가로서의 측면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홍대용에게서 더 중요한 것은 세계관의 변화이다. 의산문답은 홍대용이 남긴 철학적 저작이지만 그 안에는 홍대용이 수용하였던 자연과학의 정수가 담겨져 있다. 앞서 제시하였던 사료를 살펴보면 홍대용은 지구가 둥근 공의 형태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중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삼지만, 서양은 서양을 중심으로 삼는다면서 세상의 어느 곳도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중국도 지구의 일부분이며, 지구도 우주의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중국이나 오랑캐나 모두 높은 차원에서 본다면 똑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홍대용의 이러한 세계관을 통해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문물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유봉학, 1982, 「北學思想形成과 그 性格-湛軒 洪大容燕巖 朴趾源을 중심으로-」 『韓國史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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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호, 2001, 서양 기하학의 조선 전래와 홍대용의 주해수용 『역사학보』 170

임종태, 2005, 무한우주의 우화 홍대용의 과학과 문명론 『역사비평』 71

노용필, 2006, 조선인 홍대용과 서양인 천주교신부의 상호 인식 -유포문답(劉鮑問答)의 분석

          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27

박희병, 2013, 『범애와 평등』, 돌베개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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